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해남"에 대한 역링크 찾기

해남의 역링크


역링크만 찾기
검색 결과 문맥 보기
대소문자 구별
  • 윤선도
         |사망지= [[조선]] [[전라남도]] [[해남군]] 에서 노환으로 사망(병사)
         '''윤선도'''(尹善道, [[1587년]] [[7월 27일]]([[음력 6월 22일]]) ~ [[1671년]] [[7월 16일]]([[음력 6월 11일]]))는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시인·문신·작가·정치인이자 음악가이다. 본관은 [[해남 윤씨|해남]], 자는 약이(約而)<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front/dirservice/ppl/viewDocumentPpl.jsp?pLevel2Name=&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b_A1587_1_0008531&pPplCount=&pOrderByType=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깨진 링크|url=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2Ffront%2Fdirservice%2Fppl%2FviewDocumentPpl.jsp%3FpLevel2Name%3D&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b_A1587_1_0008531&pPplCount=&pOrderByType= }}</ref> 이고,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윤유심(尹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이다. 화가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5대조부이다.
         고산 윤선도는 [[1587년]] [[7월 27일]]([[음력 6월 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 [[삼각산]] 근처(후일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생부인 예빈시직장 [[윤유심]](尹唯深)과 생모 순흥 안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8세 때인 [[1594년]](선조 27년)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가 되어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내려가 [[해남 윤씨]]의 대종(大宗)을 잇는다. 윤유기는 어초은 윤효정의 4대 종손이었으나 늦도록 아들이 없었다.<ref name="daum01">[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2091a daum:윤선도]</ref> 생부 윤유심은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지만, 양아버지 윤유기는 관찰사(觀察使, 종2품)에 이르렀다. 생모 안씨는 [[안현]](安玹)의 손녀이다.
         그의 고조부 어초은 윤효정(尹孝貞<ref>사후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ref>)이 [[전라남도]] [[해남군]]의 거족이던 해남 정씨의 딸과 결혼하여 해남군에 정착하게 되었다. 윤효정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윤구(尹衢)는 정암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명현(己卯名賢)이었다.<ref name="haenan00">[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27095 해남 윤씨가 중흥조 윤효정 우슬재 넘어 해남으로 입향] 오마이뉴스 2006년 04월 28일자</ref> 증조부 윤구는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로 재직 중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라 하여 화를 당했으나 곧 풀려났고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거했다.
         [[1619년]] [[5월]] 양아버지 [[윤유기]](尹惟幾)의 상을 당하여 특별히 풀려나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유배지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1623년]] [[인조 반정]]이 일어나자 풀려났다.<ref name="youn2007"/> 그러나 그는 인조반정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1623년 3월도사에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군|해남]]으로 내려갔다. 이후로 그는 [[남인]]으로 전향하여 남인으로 생활한다.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윤선도는 8년 만에 귀양에서 풀려 나서 한성으로 돌아왔다. 이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승의랑]] [[도사]](都事)·[[병조]] [[정랑]] 등의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는 고향인 [[전라남도]] [[해남군|해남]]으로 내려갔다. 이후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해 6월 [[도사]] [[승의랑]]에서 [[봉직랑]]으로 승진하였다.
         [[1628년]](인조 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초시(初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고향인 [[해남]]에서 조용히 지내던 중 1628년(인조 6년) [[3월]]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특별 추천으로 [[왕자사부]](王子師父)의 한 사람이 되어 봉림(鳳林)·인평(麟坪) 두 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조선 인조|인조]]의 신임을 얻어 [[호조]][[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역임했다.<ref>봉림대군이 효종이다.</ref> 이때 [[세자시강원]]에서 [[송시열]]을 만난다. [[세자시강원]]에 있을 때 학범(學範)을 엄하게 세워 교훈하되 '소학(小學)'으로서 근본을 삼았으며, 학문을 강론할 때마다 반드시 옛 공자의 득실과 선악을 인용하여 되풀이해서 극진히 하니, 상(인조)이 더욱 어질 게 여겼으며 공자도 또한 더욱 삼가서 존경하고 예우하였다. 이때 그는 역시 대군사부로 보임된 [[송시열]]을 만나게 되는데 후일의 정적이 된다.
         [[1629년]](인조 7년)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고 다시 [[세자시강원]]문학에 임명되어 계속 왕자들을 보도하고 [[소현세자]]에게도 강론하였다. 이때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견제하던 [[소현세자]]측 사람이 유언비어를 내 "선도가 몰래 모략을 꾸미니 앞으로 세자에게 이롭지 못하리라."하자 그는 즉시 벼슬을 내놓았다. 그러나 [[조선 인조|인조]]가 사람을 보내 그를 달래어 다시 데려왔다. 5년간 한양에서 [[대군사부]]로 있었으나,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며 벼슬하는 것이 어울리는 것이 맞지 않았던 그는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해남군]]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조선 인조|인조]]의 거듭된 청으로 다시 올라와 왕자사부로 [[봉림대군]], [[인평대군]]에게 글과 학문을 가르쳤다.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사부(師傅)와 겸임하여 [[공조]][[좌랑]], [[형조]][[정랑]], [[한성부]][[서윤]] 등을 겸임하였다. 그해 [[12월 27일]] 행[[공조]][[좌랑]]으로 전임되었다.
         [[1631년]] [[6월]] [[호조]][[정랑]]에 임명되고 [[총융청]]랑(摠戎廳郞)을 겸하였으나 그해 [[9월]]에 호조정랑을 사직하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11월]]에 형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그 뒤 [[성균관]] [[사예]]를 거쳐 [[1632년]] [[1월]] 오랫동안 왕자의 사부로 있었다 하여 특별히 호조 정랑(戶曺正郞)으로 제수받고 [[사부]](師傅)도 겸임하였으며, 그해 [[2월]] [[사복시]] 첨정(司僕侍僉正)으로 승진했다가 지평 지덕해(池德海), 장령 고부천(高傅川)이 그를 파직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그들이 사직서를 냈다. [[1632년]] [[3월]]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이 되었다. 그해 [[11월]]에 병으로 한성부서윤직을 사퇴하고, 겸임하던 [[왕자사부]]직도 모두 사임하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1633년]](인조 11) 행[[세자시강원]]문학(行世子侍講院文學)이 되어 [[소현세자]]를 보도하였다. 그해 예조정랑, 사헌부지평 등을 지내고 7월 관서경시관(關西京試官), [[9월 19일]] [[통훈대부]] 행[[세자시강원]]문학 겸 [[춘추관]][[기주관]](行世子侍講院文學 兼 春秋館記注官)이 되어 [[소현세자]]를 보도하였다. 그해 10월 증광 향해 별시(增廣鄕解別試)에 급제하여<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633_005672&choiceGanada=%EC%95%84&choiceOrderNum=1601|1700&classCode=MN&isEQ=true&kristalSearchArea=B 윤선도-과거 및 취재] {{웨이백|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633_005672&choiceGanada=%EC%95%84&choiceOrderNum=1601%7C1700&classCode=MN&isEQ=true&kristalSearchArea=B |date=20160629120214 }}, 《한국 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ref> 예조정랑(禮曺正郞)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 [[강석기]](姜碩期)의 반대로 사직서를 내고 고향 해남으로 내려갔으나 왕의 부름을 받고 귀경, 바로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서인]] 측으로부터 너무 빨리 고위직으로 승진했다며 이의를 제기하여, [[1634년]] [[성주군|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나갔다.
         [[1634년]] 해남을 방문한 승려 침굉 현변(枕肱 懸辯)을 만나게 된다. 19세의 승려 침굉은 송계당을 따라 복현에 나들이갔다가, 관청 객사의 상량문 문제로 윤선도를 만나게 된다. 이 당시 윤선도는 고향인 [[해남]]에 내려와 있었고, 둘째 아들을 잃었던 때였다.<ref name="bool086">임기중, 《불교 가사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01) 86페이지</ref> 침굉은 윤선도의 일찍죽은 둘째 아들과 외모 등 여러 점에서 흡사했으므로, 윤선도는 그에게 자신의 옆에 머물러주기를 간청하였다.<ref name="bool086"/> 후에 윤선도가 [[광양]]에 유배되었을 때, 침굉이 그곳에 가<ref name="bool086"/> 창랑가(滄浪歌)를 부르면서 그를 위로해주었다고 한다.<ref name="bool087">임기중, 《불교 가사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01) 87페이지</ref>
         [[1652년]](효종 3년) [[1월 23일]] 통훈대부 행[[성균관]][[사예]](通訓大夫行成均館司藝)가 되어 부임하였으며, 그해 3월에 사직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3월 27일]] 특명으로 [[통정대부]] [[동부승지]]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에 제수되자 두 번씩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효종이 반려하였다. 그러나 4월 초 정언(正言) 이만웅(李萬雄)이 탄핵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사직소(辭職疏)를 올려 허락을 받았다. 바로 하직인사 후, 고향인 [[해남]]으로 내려 가려다가 효종의 만류로 고산(孤山)에 머물렀다. [[1652년]](효종 3년) [[4월 5]]에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의흥위]]부사직(行義興衛副司直)에 임명되었다가 [[4월 9일]] 동반직인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으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커지자 [[조선 효종|효종]]은 [[원두표]]를 위로하여 돌려보낸 뒤 윤선도의 고신을 거두었다. 그해 11월 삭탈관직하고 도성에서 추방되었다.<ref>효종실록 9권, 효종 3년(1652 임진 / 청 순치(順治) 9년) 11월 12일(경진) 1번째기사 "대사간 목행선 등과 의논하여 윤선도를 삭탈 관작하여 문외 출송시키다"</ref> 문외 출송(門外黜送) 조치 이후 [[한성부|한성]]을 떠나 고향 [[해남]]에 내려와 한동안 외부출입을 자제하고 은거생활을 하였다.
         [[1654년]](효종 5년) 부인 [[남원 윤씨]]가 죽자 [[전라남도]] [[해남군]] 수정동 야산에 장사지냈다. 그 뒤 윤선도가 죽고 장사지낼 때에 이르러 고향인 문소에 옮겨 합장하였다. [[1655년]](효종 6년) [[3월 14일]]에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그는 <시폐사조소 時弊四條疏>를 올려, 당시 조정에서 시행하려던 섬 주민들을 몰아내고 어부들을 [[강화도]]로 이주시키는 일 등의 부당함을 말하여 중지시켰다. [[1656년]] 상소를 올려 [[서인]]이 조정을 장악한 것을 규탄, 조선이 왕의 나라인지 신하의 나라인가를 묻고 왕권을 강화할 것을 상소하였다.
         [[1667년]] [[6월 8일]](음력 윤4월 17일)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윤선도의 석방을 논의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해 [[7월 1일]]([[음력 5월 11일]]) 유학 [[이석복]](李碩馥) 등이 윤선도의 사면, 석방을 상하였다. 고민하던 [[조선 현종|현종]]은 그해 [[9월 8일]]([[음력 7월 21일]]) 윤선도를 석방하라는 명을 내렸다. [[8월]]에 [[해남군|해남]]으로 돌아와서 있다가 [[9월]]에는 으로 들어갔다. [[1668년]] 무민당(無憫堂) 동쪽 시냇가에 작은 집을 짓고 곡수(曲水)라고 명명하였다.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 7월 16일(현종 12년 [[음력 6월 11일]])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사망하였다.<ref name="youn2007"/> 사망 당시 향년 85세였다. 서인들은 현종실록에서 그의 졸기를 뺐고, 현종개수실록에 그의 졸기를 실었지만 '윤선도가 죽었다' 라는 몇 글자만 실어놓았다. 그해 [[9월 22일]] [[해남군]]아래([[해남군]]의 경계 지점)에 안장하였다.
         그가 나고 자란 녹우당은 후일의 [[해남 윤씨]]의 어초은공파(연동파)의 종가로, 고조부 윤효정(1476 ~ 1543)이 [[해남군]] 에 살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효종은 어린 시절 사부였던 윤선도를 위해 선물로 수원에 집을 지어주었다. 그는 효종이 선물한 경기도 수원집을 영원히 기념하고자 해상으로 일일이 운송하여 [[해남군|해남]]으로 이전하여 이어서 건축, 사랑채로 삼고 [[녹우당]](綠雨堂)이란 이름을 붙였다. 은행나무가 녹우당을 상징하고 뒷산에는 [[비자나무]]숲(천년 기념물 제 241호)이 근처에 있다.
         그의 후손 중 [[일제 강점기]]인 [[1926년]]부터 [[1943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윤정현이 전남 해남해남읍에 소유한 토지 39필지(9만4천여m<sup>2</sup>)에 대해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고 2009년 10월 19일 밝혔다.<ref name="chini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19/2009101900886.html 고산 윤선도 사적 일부 친일재산 귀속]{{깨진 링크|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19/2009101900886.html }} 조선일보 2009.10.19</ref>
         이 중 1개 필지는 해남읍 연동리에서 사적으로 지정된 윤선도의 옛집 ’녹우당’ 안의 잔디밭이라고 조사위 관계자는 전했다.<ref name="chinil"/> 당시 토지 소유주인 윤정현의 손자(75)는 “해당 토지는 조부가 자비로 마련한 것이라 친일 재산이 아니다”고 주장했으나, 조사위는 토지의 취득 시기가 당사자의 중추원 참의 재직 시절과 일치한다는 이유로 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ref name="chinil"/>
         * [[정약용|다산 정약용]] 역시 그의 후손으로, 외5대손이 된다. 윤선도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의 외손자가 [[정약용]]으로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윤두서의 딸 해남 윤씨와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니 [[정약용]]은 [[윤두서]]의 딸 소생 넷째 아들이었다.
11830의 페이지중에 1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을 눌러 제목 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