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함흥"을(를) 전체 찾아보기

함흥


역링크만 찾기
검색 결과 문맥 보기
대소문자 구별
  • 정칠성 . . . . 7회 일치
         [[10월 6일]] [[박원희]]와 함께 [[근우회]] 조사위원 겸 전권위원에 임명되어 [[경성]]에서 [[함흥]]으로 파견되었다. 바로 [[근우회]] 함흥지회를 개설하고, 함경도지역 조사 후 [[10월 6일]] [[함흥]] 오로리의 오로여자상조회(五老女子相助會)에서의 강연을 계획하였으나 함흥경찰에 의해 체포, 강연회 자체가 무산되고 되돌아왔다. 정칠성과 박원희가 경성으로 되돌아간 뒤 [[함흥여자청년회]]와 함흥기독청년회 주최, [[동아일보]], [[조선일보]] 후원 하에 부인문제대강연회가 열리자 연사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경찰의 방해로 집회가 무산되자 오히려 사회단체의 집회를 방해한다 하여 지식인층의 반발을 불러오게 됐다. [[10월 16일]] 근우회 집행위원으로 대구에 다녀온 뒤 다시 함흥으로 가서 근우회 함경남도 지부 조직에 착수하였다.
  • 장익 (1933년) . . . . 3회 일치
         | 교구 = [[천주교 춘천교구|천주교 춘천교구장]](1994년-2010년)<br>[[천주교 함흥교구]]장 서리(2005년-2010년)|
         '''장익'''(張益, [[1933년]] [[11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이자 시민사회단체인이다. [[로마 가톨릭교회]] [[주교]]이며, 세례명은 십자가의 요한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비서신부 등을 거쳐 [[천주교 춘천교구]]장과 [[천주교 함흥교구]]장 [[서리]] 그리고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제4대 [[부통령]]을 지낸 운석 [[장면]](張勉)의 넷째 아들이다. 본관은 [[인동 장씨|인동]]이다.
         |직책=[[천주교 춘천교구|천주교 춘천교구장]] 겸 함흥교구장 서리
  • 허정숙 . . . . 2회 일치
         몰락 양반가 출신이었지만 할아버지 허추(許抽)의 대에 다시 집안을 일으켜세웠다. 자수성가했던 할아버지 허추는 조선 말에 관직에 올라 [[대한제국]] 시절에는 [[경원군 (함경북도)|경원]][[부사]]와 [[한성부]][[경무관]]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허헌]]은 15세에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으나 집안은 유복하였다. 외할아버지인 정종언은 지주로, 외가인 경주 정씨 역시 [[함흥군]]의 갑부 집안이었다.
         그는 [[1920년]]대~[[1930년]]대 당시 웬만한 집에서는 아들들도 학교를 보내지 못하는 현재의 조선에서 여자의 몸으로 학교를 다닌 것은 무한한 영광이니 배운 것을 만족하지 말고, 배운 대로 실천 할 것,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다른 불쌍한 여자들의 눈과 귀를 깨우치게 할 것이 바로 배운 여자, 인간으로써의 의무이자 도리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1930년]]의 [[브나로드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고, [[명천군]]과 [[단천군]], [[함흥부]]내의 농촌 야학당에 나가 농민들에게 글과 숫자를 가르치는 한편 여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농촌 부녀들에게 말과 글, 숫자,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 김취경전 . . . . 1회 일치
         방황하던 취경은 어느 수수께끼의 백발노인의 인도를 받아, [[흉가]]에 갔는데 그곳에서 괴물을 물리치고 미인 목소저를 구해준다. 목소저는 백제국 태부상서의 딸이었다. 취경은 목소저에게 의지하여 병서와 무술을 공부하게 된다. 한편 집을 나온 선애와 설애는 [[남장]]을 하고 다니다가 함흥부의 소년 양화춘과 의형제를 맺고, 함께 오빠 취경을 찾아다니다 취경과 재회한다.
  • 한징 . . . . 1회 일치
         '''한징'''(韓澄, [[1886년]] - [[1944년]])은 [[한글]]학자이다. 호는 효창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부터 10년간 <[[시대일보 (1924년)|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일보]]> 등의 기자를 지냈다. [[1930년]] [[이윤재]]와 함께 [[조선어학회]] 사전을 편찬하는 데 힘썼으며 이어 [[표준말]] 사정위원이 되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관련되어 옥살이를 하던 중 [[1944년]] 함흥 감옥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 현진건 . . . . 1회 일치
         숙부 '''[[현영운|영운]](映運)'''은 아내 [[배정자|분남]](粉男)이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된 것을 계기로 크게 출세하여, 장관급인 대한 제국 군령부 참장, 주일특명전권공사, 원수부 검사총장, 참모부 제1국장, 농상공부 협판 등의 고위직을 거친 구한말의 전형적인 친일관료였다. 이러한 그의 벼락출세가 영운의 형제들의 관직 진출에 음으로 양으로 크게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친 '''경운'''은 지위가 정3품 통정대부까지 올랐고 의정부 외부의 통신원 국장과 전보사장을 거쳐 [[1895년]] 대구부 전보사의 주사로 취임하기도 했다.<ref>당시 전보사는 농상공부대신의 관리를 받으며 전보에 관한 사무를 수행하였으며, 1등사와 2등사로 구분되었다. 한성(서울)과 인천, 원산, 부산, 의주, 경성, 함흥, 회령이 1등사에 속했고 대구는 2등사였다. 통신원 국장이란 직책은 수준은 미비할 망정 국가의 전신, 전화, 전기는 물론 우편과 운송 분야와 관련한 시설과 제도를 관리하는 자리였기에 아무나 역임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33~3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숙부 '''철운'''은 안동관찰부 주사 겸 용궁군수를 지냈다. 숙부 '''양운'''은 관립영어학교 출신으로 궁내부 예식원주사에 태복시 기사 등을 지내고 [[원산]]과 [[동래]]에서 영어교사로 일했으며 [[대한체육회]] 창설 멤버로 알려져 있다. 숙부 '''붕운'''은 태복시 주사를 지냈다.
12944의 페이지중에 6개가 발견되었습니다 (5000개의 페이지가 검색됨)

여기을 눌러 제목 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