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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면
         [[1471년]](성종 2년) 윤 9월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추록되었다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홍귀달(洪貴達)·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최한정(崔漢禎)의 반대로 추탈되었다. [[숭록대부]] [[좌찬성]] 겸 [[이조 판서]](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吏曹判書) 행 [[가선대부]] [[관찰사]] 겸 [[함흥]][[부윤]](行嘉善大夫咸吉道觀察使兼咸興府尹)에 [[추증]]되었다가 [[조선 중종|중종]] 때 다시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추증]]되었다.
  • 신응희
         [[함경남도|함경남도 장관]] 재직 시 [[일본]]과 [[미국]]의 어업 도구와 그물 등을 들이고 양식업을 독려하여, 함경남도 일대의 어업 생산량을 늘렸다. 특히 [[조선총독부]]의 평에 의하면 "[[전라북도]] 서호진(西湖津) 이북의 어업이 舊來의 면모를 일신하여 융성해지고 관내의 저금 액수가 장관의 독려로 이상 증대를 초래한 치적이 있다고 평가됨"이라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측의 인사자료에 의하면 한 도의 장관으로서 백성들에게 털끝만한 위엄이라도 실추하지 않는 것만을 염려하며, 부하가 직무를 행할 때 큰 일 작은 일을 불문하고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다. 한편 그의 일본인 부인 신매자(申梅子)가 [[3.1 운동]] 전후하여 한때 [[대한애국부인회]]에 관여하여 부인회 함흥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20년]] [[함흥]] 육군 군용지 비용을 기부하고 목배 1조를 선물로 받았다.
  • 정칠성
         [[10월 6일]] [[박원희]]와 함께 [[근우회]] 조사위원 겸 전권위원에 임명되어 [[경성]]에서 [[함흥]]으로 파견되었다. 바로 [[근우회]] 함흥지회를 개설하고, 함경도지역 조사 후 [[10월 6일]] [[함흥]] 오로리의 오로여자상조회(五老女子相助會)에서의 강연을 계획하였으나 함흥경찰에 의해 체포, 강연회 자체가 무산되고 되돌아왔다. 정칠성과 박원희가 경성으로 되돌아간 뒤 [[함흥여자청년회]]와 함흥기독청년회 주최, [[동아일보]], [[조선일보]] 후원 하에 부인문제대강연회가 열리자 연사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경찰의 방해로 집회가 무산되자 오히려 사회단체의 집회를 방해한다 하여 지식인층의 반발을 불러오게 됐다. [[10월 16일]] 근우회 집행위원으로 대구에 다녀온 뒤 다시 함흥으로 가서 근우회 함경남도 지부 조직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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