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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진이
         그녀는 [[1839년]] [[12월 29일]]에 [[순교]]한 [[한영이]] 막달레나의 딸이다.
         권진이는 [[한양]]의 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권씨|권]] [[진사 (칭호)|진사]]라고 불리던 사람이었는데, 그의 임종 때의 유언에 따라, 권진이와 모친 [[한영이]]는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권진이는 12~13세 경에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너무나도 가난하여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였고, 집도 없었기에, 그녀는 친척 [[정하상]]의 집에서 얹혀살았다.
         [[중국인|청국인]] [[사제]]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권진이는 그의 식복사 즉 [[성직자]]를 시중드는 사람으로 일했다. 권진이는 유방제 [[사제|신부]]에게 [[처녀]]로 살기를 원한다고 말했고, 유방제 신부는 그녀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어 주어, 그녀는 처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제 신부와 권진이 사이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아서 [[교회]]에 해를 입혔다. 그러므로, [[프랑스인]] [[사제]] [[모방 베드로|모방]] 신부는 입국 하자 곧 유방제 신부를 [[청나라]]로 돌려보냈고, 모방 신부는 권진이를 곁에 불러 권진이가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하도록 격려하였다. 그 덕에 몇 달 동안 교우들을 불안케 하던 소문이 가라앉았다. 권진이는 어떻게 자신의 행동이 행동이 부지불식간에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는지를 깨달았고, 회개하며 속죄의 뜻으로 스스로 [[하느님]]을 위해서 [[순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권진이는 어머니 [[한영이]]에게 돌아가 함께 살게된 [[이경이]]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고, 배교자 [[김여상]]의 밀고로 [[7월 17일]]에 권진이는 그녀의 어머니 [[한영이]]와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 두 명의 여성은 따로 포졸들의 감시 하에 [[사관청]]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평소 그들의 미모를 탐내던 [[김여상]]이 그들을 납치하려 하자 그들을 동정한 몇몇 포졸들의 도움으로 그들은 탈출하였고 [[한양]]에 있는 한 교우의 집에 숨었다. 그러나 먼저 체포된 한 하녀가 포졸들에게 그 두 아가타가 숨은 곳을 말하였고 그들은 다시 체포되었다. 아무리 많은 혹독한 [[고문]]도 그 두 아가타의 신앙을 꺾을 수 없었다.
         권진이는 감옥에서 어머니 한영이를 만났고, [[천국]]의 영원한 행복을 희망하는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권진이는 그녀의 한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열렬한 애정과 귀의로 가득차 있었다. 그 젊은 [[조선]] 여성은 [[하느님]]에게 [[예수]]의 수난과 죽음 때의 [[마리아 막달레나]] 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았고 더 좋은 향기를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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