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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수 (1728년)
         |직책 = 조선국 [[기로소]] 봉조
         [[1750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고 [[1766년]] [[음서]]로 출사여 [[세손]]이던 [[조선 정조|정조]]를 보필였다. [[1768년]] 과거에 급제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과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1795년]]에 [[치사]]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세손 시절의 [[조선 정조|정조]]의 스승으로 당론에 반여 [[조선 정조|세손]]을 옹호였으며, 그 뒤 [[조선 정조|정조]] 즉위 후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에 이르렀다. [[조선 정조|정조]]에게 도의정치를 역설며 임금이면서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스승이 될 것을 건의였다.
         당색은 [[노론]]이었으며 [[노론]] [[벽파]]의 강경파였던 선조들과는 노선을 달리여 당숙 [[김치인]]과 함께 [[노론]]온건파에 가담였다. [[세손]] 시절의 [[조선 정조|정조]]의 사부이기도 했다. 대의명분에 입각한 군사부일체론을 주창였다. 뒤에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의 부주석인 [[김규식]]의 종고조부이기도 다.
         그는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형 [[김종후]]는 산림의 대학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의 가계는 [[노론]] 벽파였고 재종조부 [[김상로]]는 [[노론]][[벽파]]의 거두로서 [[사도세자]]의 정적이자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선 인물로 단죄되었으나, 그의 당숙 [[김치인]]과 그는 노론 청명당으로 전향였으므로 [[조선 정조|정조]] 즉위 후 벽파는 몰락였으나 그의 가족들은 화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1750년]]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생원과 진사가 되고 곧 음서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성균관]]에서 수학던 중 [[1766년]](영조 42) [[11월]] [[영조]]가 친히 낸 과차에 수석여 바로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그해 [[음서 제도|음서]]로 출사여 [[세손궁]]에 보직되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다.
         그 뒤 [[세손]]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거쳐 [[1768년]](영조 44년) [[군수]](郡守)로 재직 중 그 해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여 다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보직되었다. 이때 [[세손]]사부가 되어 [[세손]]이었던 [[조선 정조|정조]]를 가르치기도 했다.
         김종수는 [[정조]]가 왕세손일 때부터 정조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스승이었다. 그는 정조에게 2년 정도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의 본질을 가르쳤다.<ref name="parks191">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1) 191페이지</ref> 김종수는 군주가 학문을 이끌어 요순시대의 이상을 실현한 것처럼, 군주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며 군주 스스로 학문과 군사 다방면에서 뛰어난 존재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또한 세손에게 만인을 포용는 어버이가 되어야 며, 항상 높고 숭고한 뜻을 지니고 이것을 이룩는데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김종수는 세손에게 임금이면서 스승이면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그는 또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견해는 잘못이고, 학자의 해석에 따라 뜻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허목]]과 [[윤휴]]를 비난면서도, 원시유학의 가치를 설명였다. 정조 역시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을 동시에 바른 학문인 정학으로 받아들였다.
         그 뒤 [[예조]][[정랑]], [[홍문관]]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세손시강원]]필선(弼善)으로 다시 세손을 성실히 보좌였다.<ref name="nate01">[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8604 김종수:네이트 한국학]{{깨진 링크|url=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8604 }}</ref> 이때 외척의 정치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뒷날 정치의 제1의리로 삼은 정조의 지극한 신임을 받았다.<ref name="nate01"/> 그해 [[4월]] [[사간원]]정언, [[5월]] [[홍문관]]부수찬을 지냈다. 그해 [[6월]] 필선, 겸 사서, [[12월]] 부교리를 지냈다.
         그는 세손이 사소한 것까지 살펴보는 꼼꼼한 성격인 것과 [[홍국영]]이 세손의 신변을 보호면서 뒤처리를 는 것을 살펴보았다. [[1781년]]에는 세손에게 사소한 것에 집착다가 큰 일을 그르칠 수 있다며 조언기도 했다.
         김종수는 노론 온건파였던 김재로나, 벽파였던 김상로 등 친척들과는 당론을 달리했다. 그의 종조부 김재로는 노론 온건파로서 영조 초반에 탕평당의 기둥으로 활약했다.<ref name="parks194">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1) 194페이지</ref> 역시 종조부인 김약로, 김상로는 왕실외척이 주도는 탕평당의 맹장으로 활약했다.<ref name="parks194"/> 특히 종조부 김상로는 노론 홍계희, 소론 정우량과 함께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역적으로 단죄되었다.<ref name="parks195">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1) 195페이지</ref> 그러나 김종수는 외척의 정치 관여는 부패와 비리를 낳을 뿐이라며 이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
         반면 김종수의 종백부이자 김재로의 아들 김치인은 조카 김종수와 마찬가지로 탕평당 소속 부친의 정치노선에서 벗어났다. 즉 외척이 주도는 탕평당에 대항한 청명당의 지도자로 변신한 것이었다.<ref name="parks195"/>
         정조를 공격한 김귀주, 정조를 보호한 홍국영과 모두 친밀했으면서도, 그들의 정치적 몰락을 재촉는 공격을 주도기도 했다.<ref name="parks195"/> 오로지 군주의 안위를 생각여, 친지라 해도 문제가 있는 자는 고변여 제거겠다는 [[김석주]]를 본받겠다고 공언한 바도 있다.<ref name="parks195"/> 이러한 그의 소신은 [[노론]] 당내에서도 엄청난 적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김종수는 군주는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학문적 스승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가르쳤다.<ref name="karkso">[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702021002 <nowiki>[</nowiki>선택! 역사를 갈랐다<nowiki>]</nowiki> (18)조선 정조의 두 재상 김종수·채제공 ‘살벌한 대립’] 서울신문 2012.07.02.</ref> 이는 군주나 스승 가운데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그 둘을 겸함으로써 이른바 군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김종수는 통치자가 바른 학문을 안다는 것은, 군주 자신이 진정으로 학문을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가능다고 교육했다.<ref name="parks191"/> 즉 이상적 시대인 [[]], [[은]], [[주]] 삼대 시절에는 군주가 학문을 이끌었고, 그 이후 시기부터는 신들이 학문을 이끌었지만, 탕평이 표방된 지금의 시대는 새로운 사회로서의 개혁을 표방고 있으므로 삼대 시절처럼 다시금 군주가 학문 정치를 이끌 수 있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었다.<ref name="parks191"/> 곧, '임금은 통치자이면서 스승'이라는 것이다.<ref name="parks191"/> 그는 군사부(君師父)라 여 통치자는 통치자이면서 스승의 역할도 겸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고, 어린 세손에게 만개의 천을 비추는 밝은 일월처럼 될 것을 강조였다.
         이 임무를 스스로 맡아서 실천에 옮길 때, 임금은 임금으로서, 개인으로서도 큰 뜻을 달성할 수 있다고 건의였다.<ref name="parks191"/> 또한 그는 군주는 만인을 감싸안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이 건의는 후일 정조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정조는 그의 기대에 부응였다. 결국 후일 모든 신들이 [[조선 정조|정조]]야말로 군주이면서 동시에 스승이기도 한 위대한 성인이라고 추모할 정도로 효과가 나타났다.<ref name="parks191"/> 김종수의 존재는 본인 사후 정조의 치적을 방해한 역적이라는 평가와 노론 당내에서도 당론을 어기고 홀로 튀는 인물로 몰려 [[조선]] 멸망때까지 비판 일색이었지만, 정조에 대한 그의 구상, 이미지메이킹은 그의 사후에도 성공적으로 확립되었다.
         자신의 이론대로 김종수는 [[노론]] [[벽파]] 외에도 [[노론]] [[시파]]들 조차도 불경한 뜻을 품은 자들이라며 공박했고,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는 영남 남인들과 [[소론]] [[시파]]에 대해서도 역적이라며 줄기차게 공격했다. 그는 정조가 즉위기 전, [[노론]]에서 당론으로 세손을 제거려 할 때 소수의 [[노론]]내 인사들과 이를 극력 반대했으며, [[이천보]], [[유척기]] 등 소수의 인사들과 함께 [[소론]] 등과도 손을 잡고 세손을 지지였다. 그의 진정성은 세손을 감화시켰다.
         [[임오화변]]을 계기로 [[노론]]은 [[사도세자]]의 후손을 인정할 수 없다는 당론을 세웠지만 김종수는 이를 거부고 세손은 영조의 적손이니 정통 후계자라는 견해를 고수였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억울게 죽었다는 유언호 등 노론 시파의 의견에도 동조지 않았다. 이에 따라 노론 벽파나 외척당, 시파와는 별개의 정파인 노론 청명파에 가담였다.
         [[1769년]] [[3월]] [[홍문관]]부교리, [[세손시강원]]필선, [[6월]] [[홍문관]]교리(校理)를 거쳐 응교가 되었다. [[12월]] 장연 현감(長淵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왕의 특별 배려로 다시 [[홍문관]]수찬으로 직책이 바뀌었다. 이어 [[경연]]시강관을 겸였으며 그 뒤 다시 [[홍문관]]교리로 임명되었으나 [[1772년]] 당폐(黨弊)를 일으킨 죄로 탄핵을 받고 [[조선 영조|영조]]의해에 유배되었다.
         1772년 청명(淸名, 청렴함과 명예)을 존중고 공론을 회복해 사림 정치의 이상을 이루려는 [[노론]]내 청명류(淸名流)의 정치적 결사체가 드러날 때, 당파를 없애려는 영조는 이들이 오히려 당론을 조장한다고 보고 그 지도자인 조정(趙晸), 김치인(金致仁), 정존겸(鄭存謙), 이명식(李命植) 등을 유배보냈고, 이때 김종수 역시 청명류의 지도자로 지목되어의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방면되었다.
         [[1776년]], 유배된 지 4년 만에 영조의 죽음으로 [[행장]]찬집당상(行狀纂輯堂上)이 되었고, [[조선 정조|정조]]가 그를 특별히 요직에 발탁였다. 조정에 돌아온 그는 [[세손]]의 즉위를 반대한 [[홍인한]], 음모를 꾸민 [[정후겸]], [[김귀주]] 등을 복주할 것을 상소였다. 그는 [[노론]] 내에서도 [[노론]] [[벽파]] 인사들을 왕의 자리를 택군려 한 대역죄인들이라 성토고 이들을 처치할 것을 상주했다. 김종수는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도 [[홍인한]], [[정후겸]], [[문성국]]과 한패라며 법으로 처단할 것을 건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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