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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원 (1893년 9월)

{{군인 정보
| 이름 = 김석원
| 현지어표기 = 金錫源
| 그림 =
출생일 = {{출생일
1893|9|29}}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78|8|6|1893|9|29}}
설명 = 1955년 [[성남중학교 (서울)
서울 성남중학교]] 교장 시절
| 출생지 = 조선 서울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본관 = [[경주 김씨
경주]]
| 복무 = 일본제국 육군<br/>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15년~1945년(일본제국 육군) <br/> 1948년~1949년(대한민국 육군) <br/> 1950년~1956년(대한민국 육군)
최종 계급 = [[일본제국 육군]] [[대령
대좌]] <br/> 대한민국 육군 소장
| 별명= 호(號)는 옥전(沃田)
| 자녀 = 슬하 3남
| 주요 참전 전투/전쟁=만주 사변<br/>중일 전쟁<br/>한국 전쟁
| 서훈 내역= 일본 훈5등 서보장<br/>일본 공3급 금치훈장<br/>대한민국 화랑무공훈장<br/>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기타 이력= 서울 성남중학교 교장 <br /> 제5대 민의원(국회의원)<br/>원석학원 이사장 <br /> 동국대학교 행정학과 초빙교수 <br /> 인하대학교 행정학과 초빙교수 <br/> [[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
민주당]] 국제외교행정특보위원
}}
김석원(金錫源, <small>일본식 이름:</small> 金山錫源(가네야마 샤쿠겐), 1893년 9월 29일 ~ 1978년 8월 6일)은 일본군 장교를 지낸 대한민국 국군육군 군인이다.

생애

서울 출생이다. 1909년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일본 육사를 제27기로 졸업하고 1917년에는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 중대장으로 화려한 전과를 기록했고, 1937년 중일 전쟁 때는 대대장으로 출전했다. 일본군에서 제대할 때까지 별은 달지 못했으며, 최종 계급은 일본군 대좌(대령)였으므로 중장이었던 홍사익에 이어 일본군에 복무한 조선인 중 최고위급 인물이다.

김석원은 일본군 장교로 근무한 정도를 지나 침략 전쟁에 일선 지휘관으로 적극 뛰어들어서 훈장을 받았고, 특히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들과 직접 전투를 벌인 인물로 잘 알려져 있으나 그가 세운 대부분의 전공은 중국군을 상대로 한 것이다. 김석원은 2개 중대의 병력으로 1개 사단의 중국군을 쫓아버리는<ref>{{서적 인용
|저자=박경석
|제목=육군종합학교
|날짜=1990-06-15
|출판사=서문당
|출판위치=서울 }}</ref> 등 눈에 뜨이는 전공을 올려 〈김부대장 분전기〉, 〈김석원 부대 격전기〉, 〈전진여담(戰塵餘談)〉 등의 기사가 언론을 통해 소개됐다.<ref>{{서적 인용
|저자=반민족문제연구소
|제목=친일파 99인 2
|날짜=1993-03-01
|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서울
id={{ISBN
978-89-7199-012-4}}
|장=정훈 : 동포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보도통제의 첨병 (박준성)}}</ref>

그리고 실제로 위에서 거론한 <김 부대의 분전기(金 部隊의 奮戰記, 매일신보, 1938년 03월 11일 3면 1단)>, <전진여담(매일신보, 1939년 03월 29일 3면 3단)><ref>金錫源少佐의 戰塵餘談① 戰苦闘廿一個月 炎熱百廿度를 征服·東西馳驅 武勳을 말하는 感狀과 表彰狀 / 每日申報 1939년 03월 28일 03면 01단<br>金錫源少佐의 戰塵餘談② 秋霜가튼 前進令 名部隊長大喝一聲에 諸將兵·飢渴을 克服하며 舊戰 / 每日申報 1939년 03월 29일 03면 01단<br>
金錫源小佐의 戰塵餘談③ 雪岳下의 大殱滅戰 洪原高地와 東原高地서 奮鬪 殊勳·三千大敵擊退 / 每日申報 1939년 03월 30일 03면 05단</ref> 등은 모두 만주에서의 독립군 토벌이 아닌 중국 북부 전선에서의 국민당군과의 싸움에서 올린 전공을 다룬 것이다. 태평양 전쟁 때는 학병으로 참전할 것을 권유하는 강연회에 등과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 당시에는 대좌 계급으로 평양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광복 후 바로 상경하여 이응준이 위원장을 맡은 조선임시군사위원회에 참가했다. 이 조직은 일본 육사 출신의 장교 모임인 계림회가 주도하여 조직한 군사 단체였다. 그는 대한민국 국군 대령으로 임관하여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 인사가 국군의 중추를 형성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1949년 10월 한국군이 북한 상인과 북한산 북어를 밀무역하여 이익을 챙긴 이른바 '북어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두고 국방부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장군을 거론하였다가 강제 예편 당하였다. 이듬해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사단장으로 현역 복귀하여 조선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브루스 커밍스 박사는 그가 김일성의 아내 김혜순의 죽음과 상관이 있다는 루머가 있다고 말했다.<ref>이승만·김일성 모두 ‘침공’ 추진…북, 중·소 설득해 선공, 한겨레신문</ref> 그러나 이는 아무 근거없는 낭설에 불과하며, 저명한 학자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일본 관동군 노조에 쇼도쿠(野副昌德) 소장이 이끈 노조에(野副) 토벌대 산하 나가시마(長島玉次郞) 공작대가 동북항일연군 토벌 작전 중 1940년 4월에 제2방면군장(第二方面軍長) 김일성의 처라는 김혜순(金惠順)을 체포하였다. 19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가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金惠順)에 대해 보도했는데, 김혜순이 전향하여 항일연군 귀순을 위한 선무 공작 제1선에 나섰다고 하였다.<ref> 金日成의 愛妻가 귀순 선무공작 제1선에 - 소설같은 전향의 경위 조선일보 1940년 07월 05일 석간 2면</ref>이 1970년 일본에서 나가시마 다마지로(長島玉次郞)를 직접 만나 당시 일에 대해 증언을 들은 바로는 김혜순은 나가시마의 집에서 같이 머물며 그 부인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ref>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317~318]</ref><ref>진위 김일성 열전(41) 동북 항일 연군 내의 2대 김일성|2대 김일성의 입만과 군사 활동 중앙일보 1974년07월18일<br>
진위 김일성 열전 (42) 항일연군의 최후|이명영(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20 종합 3면<br>
진위 김일성 열전 (43)2대 김일성의 정체(상)|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23 종합 3면<br>
진위 김일성 열전 (44)2대 김일성의 정체(하)|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25<br> 진위 김일성 열전 (45) 입소 이후의 2대 김일성 중앙일보 1974-07-29</ref> 탈북한 장해성 국제펜 망명북한펜센터 이사장이 북한에 있을 때 김정숙 이전 빨치산 시절을 1980년대 중반에 만나서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한 글을 보면<ref>장해성, 인간의 운명 : (김일성의 여자, 김정숙 그리고 김혜순의 이야기) NK-PEN 2014-06-28</ref><ref>[생생토크 평양수다 北, 크리스마스 어떻게 보내나?] TV조선 2013. 12. 25</ref> 그녀는 당시까지 북한에 생존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므로 김석원보다 더 오래 살았다. 더구나 김석원이 김혜순을 만날 일도 전혀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커밍스의 주장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재미 언론인이었던 문명자(1930 ~ 2008)가 북한 김일성 사망 직후인 1994년 7월 25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김일성과 같이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박정숙(78세)과 김혜순(77세)을 인터뷰 했는데<ref name="moonmj">문명자(1930 ~ 2008), 《항일무장투쟁 여전사 박정숙, 김혜순 인터뷰 : 나의 사령관 김일성 장군》 월간 말 1994년도 9월호(통권 99호), 1994.9, pp.46-48</ref>, 두 사람 모두에 나왔던 사람들과 이름이나 나이가 일치하므로 같은 사람들이다.

북한에서는 한국 전쟁의 발발 원인을 미군 주도의 북침으로 보고 있으며, 이때 북침 계획 과정에 참가한 대한민국 국군 측 인물로 김석원을 언급하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조선전쟁발발 50년에 즈음한 비망록/조선정부
|출판사=조선중앙통신
|날짜=2000-05-31
}}</ref> 또한 김일성의 항일 투쟁 경력과 대한민국 국군 장성을 지낸 김석원의 독립 운동 탄압 경력을 종종 대비시키고 있는데, 보천보 사건 이후 김석원이 김일성 부대 토벌에 나서면서 함흥에서 혈서로 쓴 "무운장구"라는 깃발을 들고 성대한 장행식을 가졌다가 결국 패퇴했다는 등의 일화가 인용된다.<ref>{{뉴스 인용
|제목=오늘도 울려오는 원쑤격멸의 총성 - 간삼봉전투승리 70돐을 맞으며
|출판사=로동신문
|날짜=2007-06-29
}}</ref> 그러나 당시 복무 기록 등에는 김석원이 함흥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북한 측이 일본군 74연대와 김일성 부대 사이의 "간삼봉 전투"가 있었다고 하는 날짜(1937년 6월 30일) 직후인 1936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는 "78연대 소속 대대장인 김석원 소좌"가 탑골공원에서 시국강연회를 했음을 보도하고 있다. 일본어 버전 역시 간삼봉에 김석원이 참가했다는 주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실제 간삼봉 전투가 일부 일본군 파견대와 김일성 부대 사이의 소소한 총격전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소위 간삼봉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 부대와 맞붙었던 일본군을 실제로 지휘한 사람은 서울 용산연대(20사단 78연대)의 김석원이 아니라, 그와 일본 육사 동기로 당시 함흥연대(19사단 74연대) 소속이었던 김인욱(金仁旭, 1892- ?) 소좌였다.<ref>김인욱(金仁旭, 1892- ?) 조선인사흥신록, 한국사데이타베이스</ref> 이는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확인이 되며,<ref>王公族附武官 李王垠 附屬步兵 少佐 金仁旭 補 步兵第七十四聯隊附 (咸興) 동아일보 1935-08-02 조간 1면 13단<br>
金仁旭少佐 驍勇은 聯隊의 誇이다 : 新乫坡對岸의 討匪壯烈戰과 咸興聯隊當局者談 {{웨이백|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70703y00_02.pdf |date=20170406202150 }}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07월 03일 면수:06 단수:15<br>
今日 卒業한 日本士官學校 第27期 매일신보(每日申報) 1915.6.18</ref> 여러 사람들의 연구에 의해서도 잘 밝혀져 있다.<ref>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261~264</ref><ref>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平壤,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 p.240 (부록 p.40)에 혜산사건 판결서 (惠山事件 判決書)를 번역 소개하면서 6사장 김일성 부대가 함흥 74연대 육군 소좌(少佐) 김인욱(金仁旭) 부대와 교전한 것으로 밝힘.</ref>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1916-1974)은 처남의 장인이 김인욱이라 당시 일에 대해서 김인욱 본인의 말을 정확히 전해 들었던 사람이다. 해방 직후 평양에 있을 때 김일성과 몇 차례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 김일성이 김인욱 아닌 김석원이 당사자인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듣고,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ref>오영진(吳泳鎭, 1916-1974), 『蘇軍政下의 北韓 - 하나의 證言 -』, 서울, 중앙문화사(中央文化社), 1952. 06. 10.
(서울, 국토통일원, 1983, 재발간) 재간본 pp.90~91, pp.98~100</ref> 북한 측이 김인욱 아닌 김석원을 자꾸 거론하는 것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과 간삼봉 전투 당사자인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 가짜라는 증거일 뿐이다.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은 같은 이름을 쓰며 자신이 6사장인양 행동하여 그 공을 가로챘다. 오영진에 의하면 당시 6사장 김일성은 김인욱을 직접 만나 담판을 벌인 적도 있기 때문에 김석원으로 이름을 잘못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김인욱은 평안남도 용강군(平安南道 龍岡郡) 출신으로 해방 전 예편하고, 고향에서 살다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끌려간 후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 김석원은 해방 전에는 북한 김일성이나 그 처라는 김혜순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고, 6.25 때 남침한 그의 군대와 맞서 전투를 벌인게 전부이다.

1956년 예편한 뒤 이후 동업자와 함께 설립한 성남고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도 역임했다. 김석원 생존 중에 성남고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가 2003년 친일파 논란과 관련된 항의<ref>{{뉴스 인용
|저자=방학진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85865
|제목="일본군 출신 김석원 동상 철거하라" - 민족문제연구소, 성남중고 설립자 동상 철거요구
|출판사=오마이뉴스
|날짜=2002-08-28
|확인날짜=2008-07-04
}}</ref> 를 받고 철거된 일화가 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 중위로 참전했다가 필리핀에서 전사한 그의 차남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저서로 회고록인 《노병의 한(恨)》(1977)을 남겼다. 회고록에서 김석원은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어떤 경우는 무지했던 탓으로 또 어떤 경우는 올바른 인생관과 올바른 세계관을 못 가졌던 탓으로 그동안 내가 저지른 잘못은 많다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유야 어쨌든 일제 식민지 시대에 오래토록 일본군인 노릇을 했다는 것은 나의 생애 중에서 가장 큰 불명예라 생각되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각주

<references/>

참고 자료

* {{서적 인용
|저자=반민족문제연구소
|제목=친일파 99인 2
|날짜=1993-03-01
|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서울
id={{ISBN
978-89-7199-012-4}}
|장=김석원 :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 가네야마 대좌 (임중)}}
* {{헌정회|660|김석원}}
* 大韓民國 國軍 Noblesse oblige

외부 링크


{{전임후임 국회의원
|전임자 = (영등포구 갑)<br />(영등포구 을)
|후임자 = (영등포구 갑)한통숙<br />(영등포구 을)
|대수 = 5
직책 = [[서울 영등포구의 국회의원
국회의원(서울 영등포구 을)]]
|임기 =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소속정당 = 무소속
|같은 지역구 의원 = (영등포구 갑)
}}
{{한국 전쟁 지휘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