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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벌
         [[1544년]] 정월 다시 [[의정부]][[좌참찬]]에 임명되었다. 중종이 죽자 그해 [[11월]] [[빈전도감]](殯殿都監)에 참여하였다. [[1545년]](인종 2) [[5월]] [[의정부]][[우찬성]]이 되었으며 [[우찬성]]으로 [[의금부]][[판사]]를 겸하였고,[[인종]]이 후사 없이 병으로 갑자기 죽자, [[7월]]에는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어린 왕 [[명종]]을 대신하여 [[7월]] [[원상]](院相)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때 [[윤인경]] 등이 [[충순당]](忠順堂)에 입대(入對)할 적에 '[[이언적]]과 권벌 등이 [[문정왕후|대왕 대비]]([[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는 일을 막으려 한다.'는 말을 몰래 퍼뜨려 그를 모함하였다.
  • 권양숙
         노무현과는 1973년 결혼하였으며 남편의 [[사법시험]] 준비를 뒷바라지했다. 노무현은 권양숙의 도움을 받고 1975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76년 [[사법연수원]] 시절 꽤 준수한 성적[* 여기서 '꽤 준수한'이라는 말은 노무현 자신이 한 말이다. 하지만 당시 사법연수원에서 [[판사]] 임용을 받기 위해서는 손가락 안에 드는 성적을 받았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법연수원 성적 순서대로 판사가 뽑혀나가고, 그 다음으로 [[검사]]가 뽑혀나간다. 일단 당시에는 사법시험 선발 인원 자체가 60명 내외로 극히 적었기 때문에(실제로 15기 시험에서 전체적으로는 상당히 높은 성적을 받았으나, 15기의 선발인원이 평년에 비해 다소 적어 낙방하기도 했다.) 사법시험 합격 자체가 [[먼치킨]]으로 취급받던 시절이었다. 노무현이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보기 위해(...)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으로 와서 변호사 개업을 했을 때도 그 자신을 포함해서 [[부산직할시]] 내 전체 변호사가 3명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을 올린 덕에 1977년, 1978년 두 해에 걸쳐 대전지방법원 판사를 역임할 수 있었다.
  • 김기현(정치인)
         ||<bgcolor=#C9151E> '''{{{#FFFFFF 약력}}}''' ||<(> 제25회 사법고시 합격[br][[부산지방법원]] 울산지원 판사[br][[울산광역시]] 고문변호사[br]울산 YMCA 이사장[br]제17~19대 국회의원(울산 남구 을)[br][[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br][[새누리당]] 정책위의장[br]제6대 [[울산광역시장]] ||
         [[부산동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사]]를 역임하였다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그리고 울산 YMCA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 김동성 (1971년)
         * [[2000년]] ~ [[2001년]], [[인천지방법원]] [[판사]]
         [[분류:197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판사]][[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분류:한영중학교 동문]][[분류:서울사근초등학교 동문]][[분류:성동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순천 김씨]]
  • 김용철(1924)
         이후 [[판사]]로 근무하였다. 1981년부터 1986년까지 [[법원행정처]]장을 지냈다. 1986년 [[유태흥]]의 뒤를 이어 [[대법원장]]이 되었다. 1988년 6월 15일 대법원장 퇴진을 촉구하는 소장 법관들의 서명으로 전개된 제2차 [[사법 파동]]에 직면하게 되면서 사임하였다.
  • 김을동
         2016년 2월 [[새누리당]] 의원들과의 회의에서 '''"여자가 똑똑해 보이면 밉상이다."'''라는 성차별적인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여당의 최고위원이고, 며느리는 알다시피 '''[[판사]]'''다. ---아침에 며느리랑 싸우고 왔나---
  • 김응수(배우)
          * [[2012년]] [[부러진 화살]] - 박봉주 __[[판사]]__ 역
  • 김장생
         [[1566년]](명종 21년) 김장생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조대건]](曺大乾)의 딸 창녕조씨(昌寧曺氏)와 결혼했다. 장인(丈人) [[조대건]]은 [[중추부]][[판사]]를 지낸 [[조광원]](曺光遠)의 아들로, [[경기도]] [[삭녕군|삭령군수]](朔寧郡守)를 지낼 때 선정을 베풀어 승진하였다. 창녕조씨 부인에게서 김은(金隱), [[김집 (1574년)|김집]](金集), [[김반]](金槃) 등을 두었는데 [[김집 (1574년)|신독재 김집]]은 김장생의 사상, 학문적 계승자였고, 허주 [[김반]]은 [[인경왕후]]의 증조부이자, [[서인]]당의 책사 광남 [[김익훈]],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익겸]]의 할아버지였고, 광성부원군 [[김만기]]와 유명한 국문소설가 서포 [[김만중]]의 할아버지였다. 후처인 김씨에게서는 김영(金榮), 김경(金檠), 김고(金杲), 김구(金榘), 김규(金槼), 김비(金棐) 등을 두었다.
          | 출판사 = 휴머니스트
          | 출판사 = 청년사
          | 출판사 = 매일경제신문사
  • 김장섭
         [[일제강점기]]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인 1940년 [[조선총독부]]의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판사]]를 역임하였다.
  • 나경원
         |직업 = 법조인([[판사]] → [[변호사]])
         1963년 12월 6일 [[홍신학원 (서울)|홍신학원]]의 설립자이자 이사장인 [[황창규 (기업인)]]의 2녀 중 장녀로 서울 동작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ref name="나경원1">{{뉴스 인용|제목=나경원… 그녀는 누구인가?|url=http://junggu.newsk.com/bbs/bbs.asp?exe=view&group_name=124§ion=1&category=0&idx_num=6768&page=1&search_category=&search_word=&order_c=bd_idx_num&order_da=desc|출판사=중구신문|저자=유인숙|날짜=2008-04-10}}</ref> 본관은 [[나주 정씨|나주]]이며, 할아버지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출신이다.
         시절 아동극 연출 지도 교사로 온 배우 [[서인석 (1949년)|서인석]]에게 오디션을 통해 발탁되어 연극부 활동을 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이색취미 '별난 의원들'|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1&aid=0000078157|출판사=문화일보|저자1=강연곤|저자2=박수균|날짜=2004-08-07}}</ref> 졸업한 후 시절에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전체 557명 중에 1등을 차지할 정도로 3년 내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ref>{{뉴스 인용|제목=비즈니스앤 '강인선 Live', "나경원, 미모보다는 따뜻함으로~"|url=http://ent.jknews.co.kr/article/news/20080914/0594080.htm|출판사=한국재경신문|저자=디지털뉴스부|날짜=2008-09-14}}{{깨진 링크|url=http://ent.jknews.co.kr/article/news/20080914/0594080.htm }}</ref> 그 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하였으며<ref name="나경원2">{{뉴스 인용|제목=인터넷언론 신문법 등 관계법 적용해야|url=http://www.ysinews.com/ArticleView.asp?intNum=13529&ASection=001001|출판사=여수인터넷뉴스|저자=정차모|날짜=2008-08-23}}</ref>, 30세가 되던 1992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ref name="나경원선대위특보">{{뉴스 인용|제목=30代 女판사 한나라당 입당…나경원씨 선대위 특보로|url=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cateid=1020&newsid=20020922070557273&p=donga|출판사=동아일보|저자1=김승련|저자2=이정은|날짜=2002-09-22|확인날짜=2008-10-21|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913055731/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cateid=1020&newsid=20020922070557273&p=donga|보존날짜=2014-09-13|깨진링크=예}}</ref>같은 학교 동기인 [[김재호 (법조인)|김재호]]와 [[이혼]]하였고, 1조카 1조카를 두었으며, 여자조카은 [[다운증후군]]이 있다.<ref>{{뉴스 인용|제목=[피플] '여대생들이 닮고 싶은 여성 정치인' 나경원 의원|url=http://sports.hankooki.com/lpage/people/201010/sp20101029171024106610.htm#|출판사=스포츠한국|날짜=2010년 10월 29일}}</ref><ref>{{뉴스 인용|제목=부부 법조인 라이벌? 동반자?|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1&aid=0000142253|출판사=문화일보|날짜=2006년 3월 11일}}</ref><ref name="장애아이WeCan">{{뉴스 인용|제목=장애아를 위한 모임 'We Can'창립총회|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9&aid=0000381320|출판사=매일경제|날짜=2004년 7월 18일}}</ref>
         === 판사 활동 ===
         [[사법연수원]] 24기<ref name="나경원2"/> 를 10위권 이내의 성적으로 수료하고<ref>{{뉴스 인용|제목=법복 벗고 대선 맞수로!|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0557|출판사=한겨레21|저자=안수찬|날짜=2002-11-29}}</ref> 1995년 부산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되어 4년간 근무하였다.<ref name="나경원선대위특보"/> 이후, 1999년 인천지방법원, 2002년 2월 서울행정법원까지 총 7년 6개월간 판사로 재직하였다.<ref name="나경원1" /><ref>{{뉴스 인용|제목=[명사들의 사진첩]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url=http://weekly.hankooki.com/lpage/politic/200801/wk2008012914045137050.htm|출판사=주간한국|저자=박종진|날짜=2008-01-29}}</ref>
         2002년, [[200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제16대 대선]] 기간, [[이회창]]의 요청에 따라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정치에 입문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여성판사판사를 그만두고 정치권에 뛰어든 것은 [[추미애]] 이후 두 번째다.<ref>{{뉴스 인용|제목=나경원판사 한나라 입당 사표|url=http://www4.hankooki.com/sed_news/200209/e200209231708153G510.htm|출판사=서울경제|저자=한동수|날짜=2002-09-23}}{{깨진 링크|url=http://www4.hankooki.com/sed_news/200209/e200209231708153G510.htm }}</ref> 나경원은 ‘소신 판결을 해온 이회창 후보를 법관시절부터 존경해 왔다’고 밝혔다.<ref name="나경원3">{{뉴스 인용|제목=대선 후 갈린 두 전직판사의 '명암'|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0024204|출판사=오마이뉴스|날짜=2003-02-12}}</ref>
         ‘정치인 나경원’은 2003년 7월 10일 한나라당 운영위원으로 선출되면서 다시 정치계에 등장했다.<ref>{{뉴스 인용|제목=역풍 휘말린 최병렬·홍사덕 체제|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2&aid=0000024040|출판사=경향신문|저자=김근철|날짜=2003-07-10}}</ref> 이후 한나라당에서 활동하며 12월 29일에는 [[대한민국 제17대 총선|17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심사위원으로 임명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한나라 공천심사위원장 김문수|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1&aid=0000015348|출판사=서울경제신문|날짜=2003-12-29}}</ref> 2004년 3월 30일, 비례대표 11번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들어<ref>{{뉴스 인용|제목=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 44명 확정|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392821|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김진형|날짜=2004-03-30}}</ref>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교수출신 당선자들과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정책을 공부하며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나갔다.<ref>{{뉴스 인용|제목=17대 초선의원은 '공부중'|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5&aid=0000703614|출판사=한국경제|저자1=박해영|저자2=양준영|저자3=최명진|날짜=2004-04-25}}</ref> 당선자 연찬회에서는 “감동을 주는 정치를 하겠습니다”라고 포부를 밝였다.<ref>{{뉴스 인용|제목="룸살롱 안가겠다" 당선자들 이색 '나의 다짐'|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236491|출판사=동아일보|저자=박민혁|날짜=2004-05-01}}</ref> 5월 12일에는 중도개혁보수를 지향하는 초재선의원의 모임인 ‘푸른정책연구모임’의 발족과 동시에 참여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한나라당 초재선 의원 12명, 중도보수지향 '푸른모임' 발족|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238557|출판사=동아일보|저자=박민혁|날짜=2004-05-12}}</ref> 당초 문화관광위원회에 지원<ref>{{뉴스 인용|제목=상임委 지원, 전문성 보다 지역구 챙기기|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8&aid=0000236322|출판사=한국일보|저자1=최문선|저자2=박상준|날짜=2004-06-01}}</ref> 했지만 정무위에 배정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운영위원장 천정배, 법사위원장 최연희 의원 당선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0047685|출판사=오마이뉴스|저자1=이한기|저자2=최경준|날짜=2004-07-06}}</ref>
         나경원 의원은 조카이 다운증후군을 앓는다는 이유로 차별을 당한 경험을 살려 국회의원과 장애아동 부모 및 전문가 등이 의견을 나누는 연구모임 ''장애 아이, We Can''을 만들어 회장을 맡기도 했고,<ref>{{뉴스 인용|제목=장애인 차별해소 몸소실천 女정치인|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6&aid=0000140881|출판사=해럴드경제|저자=이완수|날짜=2004-07-02}}</ref> 한나라당 장애인복지특위 위원장을 역임<ref>{{뉴스 인용|제목=한, 공동대변인에 임태희 의원(종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717329|출판사=연합뉴스|저자=김병수|날짜=2004-07-29}}</ref>하며, 장애인 처우 개선을 포함한 복지·인권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ref>{{뉴스 인용|제목 = 나경원, 장애 남학생 알몸 목욕봉사 논란(종합)|url =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930444|출판사 = 노컷뉴스|날짜 = 2011-09-28}}</ref><ref>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0042710580371774&outlink=1, 머니투데이</ref> 나 의원은 17,18대 국회의원 임기 동안 성년이 된 장애인이 부모가 없더라도 후견인의 도움을 받아 재산을 관리하고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게 하는 내용의 ‘장애성년 후견법안’<ref>http://likms.assembly.go.kr/bill/jsp/BillDetail.jsp?bill_id=PRC_U0O9X1X0Y2L7C1V0Q3X7E5X4O8E0Z2, 국회 의안정보시스템</ref> 1건과 각기 다른 내용의‘특수교육진흥법 일부개정안’4건<ref>특수교육 1 http://likms.assembly.go.kr/bill/jsp/BillDetail.jsp?bill_id=030734, 특수교육 2 http://likms.assembly.go.kr/bill/jsp/BillDetail.jsp?bill_id=031572, 특수교육 3 http://likms.assembly.go.kr/bill/jsp/BillDetail.jsp?bill_id=031715, 특수교육 4 http://likms.assembly.go.kr/bill/jsp/BillDetail.jsp?bill_id=038620, 이상 국회 의안정보시스템</ref>을 대표발의해, 5건 모두 대체입법으로 통과시켰다. 이 외에도 10건의 장애인 관련 및 특수교육 관련 법안을 공동발의한 바 있다.
         <ref>{{뉴스 인용|제목=[특집]누가 누가 잘했나|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3&aid=0000005336|출판사=위클리경향|저자=윤호우|날짜=2004-12-13}}</ref>
         <ref>{{뉴스 인용|제목=한나라 '당 쇄신' 착수…조직정비 단행·연금법 당론 확정|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4&aid=0000158836|출판사=파이낸셜뉴스|저자=김영래|날짜=2005-01-20}}</ref> 이후 나경원은 한나라당의 공보부 대표로 활동하며, 한나라당의 사학법 통과에 반발하거나<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0&aid=0000006562 한나라당 불참 속 사학법 개정안 통과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검찰의 X파일 수사가 공정하게 진행되었다는 당의 입장을 발표<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12141831421&code=910402 경향닷컴 | Kyunghyang.com<!-- 봇이 따온 제목 -->]</ref> 하기도 했다. 또 나경원은 출자총액제한제 법안 폐지를 골자로 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발의하기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5&aid=0000792164 野의원 13명,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 국회 제출],2005-04-03</ref>
         그 후 나경원은 오세훈 후보 서울시장 캠프에 합류하였고<ref>{{뉴스 인용|제목=오세훈, 선거캠프 구성 돌입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4&aid=0000222691|출판사=파이낸셜 뉴스|저자=안만호|날짜=2006-05-01}}</ref>, 이 후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전여옥]]에 이어 나경원을 유기준과 함께 한나라당 공동대변인으로 임명했다.<ref>{{뉴스 인용|제목=[프로필]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7/18/2006071870108.html|출판사=연합뉴스(조선일보)|날짜=2006-07-18}}{{깨진 링크|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7/18/2006071870108.html }}</ref><ref>[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607/h2006071820004221060.htm 한국일보 : 한나라 주류체제 강화 인사<!--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607/h2006071820004221060.htm }}</ref> 나경원은 당대변인으로서 일하며 김병준 교육부총리 논문 이중보고를 비난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조카의 바다이야기 판매회사 근무와 관련한 의혹제기를 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8222151211&code=910203 경향닷컴 | Kyunghyang.com<!-- 봇이 따온 제목 -->]</ref> 또 전효숙 헌법재판관의 헌법재판소 소장 임명과 관련해 절차와 인물을 들어 반대한다는 당의 입장을 전하기도 했고<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9201831141&code=910402 경향닷컴 | Kyunghyang.com<!-- 봇이 따온 제목 -->]</ref>, 노무현 대통령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관련된 언급과 관련 "노무현 대통령은 입만 열면 설화를 일으키는 개구즉화"라는 당을 대변하는 논평을 남기기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search/search.nhn?query=%B3%AA%B0%E6%BF%F8&st=news.all&q_enc=EUC-KR&r_enc=UTF-8&r_format=xml&rp=none&sm=all.basic&ic=all&so=datetime.dsc&rcnews=exist:032:020:023:028:&rcsection=exist:&stDate=range:20060101:20070101&detail=0&pd=4&start=21&display=20&startDate=2006-01-01&endDate=2007-01-01&page=1 나경원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news.naver.com/main/search/search.nhn?query=%B3%AA%B0%E6%BF%F8&st=news.all&q_enc=EUC-KR&r_enc=UTF-8&r_format=xml&rp=none&sm=all.basic&ic=all&so=datetime.dsc&rcnews=exist:032:020:023:028:&rcsection=exist:&stDate=range:20060101:20070101&detail=0&pd=4&start=21&display=20&startDate=2006-01-01&endDate=2007-01-01&page=1 }}</ref>
         2008년 3월,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1년 8개월 동안 맡아왔던 대변인 자리에서 물러나고<ref>{{뉴스 인용|제목=한나라 '입' 나경원, 대변인 사퇴 의사|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322.html|출판사=조선일보|저자=조선닷컴|날짜=2008-03-16}}</ref> 이어 [[서울특별시]] [[중구 (서울특별시)|중구]]에 공천을 받아 앵커 출신 [[신은경 (아나운서)|신은경]]과 대결을 펼쳐<ref>{{뉴스 인용|제목=나경원, 신은경 압도…서울 강북동(東) '예측불허'|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3/2008040301459.html|출판사=조선일보|저자=홍영림|날짜=2008-04-03}}</ref> 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나경원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국회의원이었던 2008년부터 스페셜올림픽 유치를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ref>{{뉴스 인용|제목=“‘지적장애인’ 사회적 인식·처우 개선되는 발판 되길”|url=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10901073627109002|출판사=문화일보|날짜=2013-01-09}}</ref> 스페셜올림픽의 유치와 준비를 위해 자신이 가진 정치적 자산들과 인맥을 모두 활용하는 한편, 정부 관계자와 의원들을 설득해 대회 유치를 결의했다.<ref>{{뉴스 인용|제목="스페셜올림픽, '장애인도 같은 사회구성원' 인식 갖는 계기"|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2/28/2012122802325.html?Dep0=twitter&d=2012122802325|출판사=조선닷컴|날짜=2012-12-29}}</ref> 2010년 9월 15일, 대회의 평창 유치를 발표할 때에는 전설적인 체조스타이자 스페셜올림픽 이사회 부의장인 나디아 코마네치의 선언문 발표에 이어 아놀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성화를 전달받았고,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평창 스페셜올림픽 참석의 뜻을 밝혔다. 대회를 100일 앞둔 2012년 10월 21일에는 걷기대회와 전광판 제막 행사를 여는 등 스페셜올림픽의 성공과 홍보를 위해 노력했다. 걷기대회는 강원도 대관령 일대와 청계천에서 진행됐으며, 특히 ‘청계천 걷기대회’는 ‘피겨여왕’ 김연아를 비롯해 ‘마라톤영웅’ 황영조, 양준혁 SBS 해설위원, 심권호 LH스포츠단 레슬링 코치 등 스포츠 스타와 남경주 뮤지컬 배우 등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ref>{{뉴스 인용|제목=김연아·황영조·양준혁, 평창스페셜올림픽 성공기원 걷기대회 참가|url=http://www.mydaily.co.kr/new_yk/html/read.php?newsid=201210181135212272|출판사=마이데일리|날짜=2012-10-18}}</ref>
         대회에 앞서 세계 각국에서 온 선수단이 다양한 문화체험을 통해서 국내 적응을 돕고자 ‘호스트 타운 프로그램’을 실시하기도 했고, 지적장애인과 비장애인 스타들이 함께하는 통합스포츠 프로그램 등의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을 시행하였다. 더하여 스페셜 올림픽 개최 사상 처음으로 지적장애인들의 권리 보호를 위한 국제 정상회담인 ‘글로벌 개발 서밋’과 ‘세계 청소년 회담’ 등의 국제회의도 열었으며, 특히 개발 서밋에서는 세계 지적 장애인들의 권익 보호와 이를 위해 국제사회의 협력을 촉구하는 ‘평창선언’을 채택했다.<ref>{{뉴스 인용|제목=평창스페셜올림픽 '평창선언' 주목|url=http://www.nocutnews.co.kr/news/4304750|출판사=노컷뉴스|날짜=2013-01-30}}</ref>
         이러한 노력에 이어 ‘Together We Can’이라는 슬로건 아래 진행된 평창 스페셜 올림픽은 전 세계 106개국 3,000 여명의 선수단이 참가해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됐다. 흥행 면에서도 7일 동안 진행된 8개 종목의 경기에 하루 평균 3만명, 총 2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최다 관중 동원을 기록했다. 국제스페셜올림픽위원회 전략기획수석 피터 월러는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을 일컬어 “모든 부문에서 역대 최고의 대회로 기획, 조정, 무대 준비, 홍보가 모범적이었다.”고 평가했다.<ref>{{뉴스 인용|제목=평창스페셜올림픽 폐막…성공적 평가 등 주간 뉴스|url=http://www.ablenews.co.kr/News/NewsContent.aspx?CategoryCode=0048&NewsCode=004820130214181516557364|출판사=에이블뉴스|날짜=2013-02-13}}</ref>
         실제 대회 이전 0%에 가까웠던 지적장애인과 스페셜올림픽에 대한 인지도가 71%(’13. 2. 2., 미디어리서치, 전국 1,000명)까지 상승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2013년 스포츠계 10대 뉴스...문체부 선정|url=http://www.moneyweek.co.kr/news/mwView.php?type=1&no=2013121400218034034&outlink=1|출판사=머니위크|날짜=2013-12-14}}</ref>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의 성공은 지적장애인 선수들과 비장애인들이 모두 하나가 되는 행사라는 평가와 함께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의 초석을 다진 대회로 평가됐다.<ref>{{뉴스 인용|제목=[강원포럼]평창올림픽 초석 다진 스페셜올림픽|url=http://www.kwnews.co.kr/nview.asp?s=1101&aid=213022000016|출판사=강원일보|날짜=2013-02-21}}</ref>
         한편 나경원은 SOK(스페셜올림픽코리아)의 회장으로서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 발달장애인들에 대한 인식 제고를 위해 노력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걸으며 서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투게더 위 워크(Together We Walk)’ 행사를 지난 2012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으며<ref>{{뉴스 인용|제목=장애인과 함께 걷기…16일 제3회 ‘투게더 위 워크’ 개최|url=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8836375&code=61161111&cp=nv|출판사=국민일보|날짜=2014-11-07}}</ref>, 2014년 10월에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장애인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슈퍼블루' 캠페인의 선포식을 갖고<ref>{{뉴스 인용|제목=롯데그룹, 장애인 지원 '슈퍼블루 캠페인' 선포|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7202886|출판사=연합뉴스|날짜=2014-10-23}}</ref>, 이어 2014년 12월에는 소외된 계층인 장애인들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개선 홍보를 위한 ‘2014년 슈퍼블루 캠페인 가두홍보’ 행사를 명동입구에서 진행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나경원 스페셜올림픽 회장, 20일 장애인 자립 응원행사 벌여|url=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41220_0013369865&cID=10501&pID=10500|출판사=뉴시스|날짜=2014-12-20}}</ref> 2015년 10월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달리는 슈퍼블루 마라톤 대회를 열었고, 이를 발달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서로에 대한 편견이 없어질 때까지 매년 개최할 예정이다.<ref>{{뉴스 인용|제목=장애인·비장애인 함께한 ‘제1회 슈퍼블루마라톤’ 성료|url=http://www.ablenews.co.kr/News/NewsContent.aspx?CategoryCode=0034&NewsCode=003120151027105819633124|출판사=에이블뉴스|날짜=2015-10-27}}</ref>
         |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8/11/0200000000AKR20150811067400062.HTML?input=1195m|출판사=연합뉴스|날짜=2015-08-11}}</ref>
         지난 2015년 7월에는 SOK(스페셜올림픽 코리아)의 회장이자 국제스페셜올림픽위원회의 이사로서 한국 선수단을 이끌고 2015 LA 스페셜올림픽에 참가해 12개 종목에 출전해 금메달 35개 은메달21개 동메달 25개로 총 81개의 메달을 따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LA 스페셜 올림픽 화려한 폐막..한국 81개 매달|url=http://www.radiokorea.com/news/article.php?uid=184342|출판사=RK Media|날짜=2015-08-03}}</ref><ref>{{뉴스 인용|제목=김연아, 스페셜올림픽 개막식 참석 ‘韓 선수단과 함께’|url=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447&aid=0000062396|출판사=뉴스엔|날짜=2015-07-27}}</ref>
         2015년 2월,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이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에 선출됐다. 국회 외통위원장에 여성 의원이 선출된 것은 헌정사상 처음이다. 국회는 26일 본회의에서 보궐선거를 진행해 208표 중 176표를 얻은 나경원 의원을 새로운 국회 외통위원장에 선출했다고 밝혔다.<ref>{{뉴스 인용|제목=국회 외통위원장에 나경원, 여성의원 선출 헌정사상 최초…176표 ‘압도적’|url=http://news.donga.com/3/all/20150226/69821877/2|출판사=동아닷컴|날짜=2015-02-26}}</ref>
  • 나길조
         이후 1947년 제1회 조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주요 지방검찰청에서 [[검사(법조인)|검사]]로 근무하다가 청주지방검찰청, 전주지방검찰청, 부산지방검찰청 등에서 지방검사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대검찰청]] 검사, 광주고등검찰청장, [[대법원]] [[판사]] 등을 지냈다. [[10.26 사건]] 이후 [[김재규]] 등에 대한 재판을 담당할 때 피고 김재규 등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 나석호
         '''나석호'''(羅碩昊, 1934년 7월 12일 ~ 2011년 10월 31일)는 대한민국의 [[판사]] 출신 정치인으로 제8·11·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본관은 [[금성 라씨|금성]]이며, [[광주광역시]] 출신이다.
         * 서울고등법원 판사
         [[분류:1934년 태어남]][[분류:2011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제8대 국회의원]][[분류:대한민국의 제11대 국회의원]][[분류:대한민국의 제12대 국회의원]][[분류:금성 라씨]][[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판사]]
  • 민유숙
         |경력 =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직업 = [[판사]]
         2007년 2월 13일 서울서부지방법원 부장판사로서 여성 최초로 영장전담 판사가 되었다. 2009년 10월 12일 1980년대 신군부에 비판적인 성향을 가진 교사ㆍ공무원 등이 반국가 단체를 결성했다는 이른바 [[아람회 사건]] 피해자들에 대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3부 부장판사에 있을 때 박모(54)씨 등 7명과 그 가족 등 3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는 184억여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지만 서울고등법원에서 배상액 24억5천만원으로 대폭 감액된 것에 이어서 대법원에서 시효를 이유로 무효화됐다. 2013년 5월 7일 서울고등법원 형사합의12부 심리로 열린 최동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편집위원장의 항소심 공판에서 민유숙 부장판사는 피고인측 방청객이었던 윤기하 국가보안법피해자모임 회장과 김규철 서울범민련 고문 등에게 발언 기회를 제공하여 이들로부터 “(피고인은) 나라를 위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한 게 아니냐.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남북통일을 위해 화합·단결로 가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에 대해 북한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자 민유숙은 “방청석에 있는 분들은 보통 피고인을 쳐다보는데 그날은 절 계속 쳐다보고 손을 들려고 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분들이 있어서 말을 해 보라고 했다”고 했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51001070127255002]</ref>
         2017년 11월 28일에 [[김명수 (법조인)|김명수]] 대법원장이 민유숙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안철상과 함께 박보영 대법관 후임으로 지명하여 문재인 대통령에게 임명제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국회에서 열린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광주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할 때 변호사의 청탁을 받고 2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교통사고 가해자를 보석으로 풀어줬다는 의혹에 대해 "기억에 없습니다"라고 답변했지만 광주지법에서 민유숙의 선임판사로 함께 근무한 방희선 변호사(62·사법연수원 13기)가 ‘[[주광덕]] 의원의 의혹 제기는 사실’이라고 하면서 당시 자신이 해당 사건의 담당 판사였는데 개인 사정으로 법원을 잠시 비운 사이에 민유숙이 사건을 맡았다고 하면서“민유숙 후보자가 청탁을 받고 보석을 결정한 사실은 분명하다고 했다.<ref>[http://news.hankyung.com/article/2017122166291]</ref> 민유숙의 남편인 [[문병호]] [[국민의 당]] 전 의원의 친구라고 주장하는 [[이종걸]] 의원이 인사청문회 하루 전에 "(민 후보자가) 호남 출신이고. 그 나이에는 자원이 없어요, 대법관 자원이..." 라고 하면서 후보자에 대한 재판 의혹을 덮어달라는 말을 했다고 증인으로 나온 방희선 변호사가 말했다.<ref>[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2/21/2017122190119.html]</ref> 또한 교통법규 위반 22차례, 차량 압류 4차례 등으로 인해 준법정신이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배우자가 운전을 한 것이라고 했다. 인사청문특별위원회는 12월 21일 전체회의를 열어 "후보자는 약 28년 동안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재판 업무를 통해 법 이론과 실무에 전문성과 경험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대법관으로서의 능력이 인정된다"고 하면서 보고서를 채택했다.
         * 1989.02 인천지방법원 판사
         * 1990.08 서울가정법원 판사
         * 1993.02 광주지방법원 판사
         * 1996.02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 2001 서울고등법원 판사
         * 2007.02 서울서부지방법원 부장판사
         * 2009.02 ~ 2011.02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
         * 2011.02 ~ 2013.02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
         * 2013.02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2015.02 ~ 2016.02 서울가정법원 수석부장판사 직무대리
         * 2016.02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박진희(1978)
         2014년 5월 '''5살 연하'''의 [[김앤장]] 소속 [[변호사]]와 결혼했으며, [[속도위반#s-2|6개월 만에 딸을 낳았다.]] 남편은 결혼 후 [[판사]]로 전직하였고, [[순천시]]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순천으로 이사갔다고 한다.
  • 배기원
         [[1965년]] [[영남대학교]] 재학 중 고등고시 사법과에 수석합격했다. [[판사]]로 임관하여 1988년까지 재직했다.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복을 벗고 고향인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0년]] 최종영 [[대법원장]]에 의해 대법관으로 지명되어 [[2005년]]까지 대법관으로 있었다.
  • 손지열
         | 직업 = [[판사]]
         * 1997년 2월 ~ 1999년 : 서울지방법원 형사수석부장판사.
         * 1992년 8월 ~ 1999년 :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1985년 9월 ~ 1986년 :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 1982년 3월 ~ 1984년 : 서울고등법원 판사.
         * 1974년 2월 ~ 1980년 :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 신응희
         [[1894년]](고종 30년) [[7월]] 사면을 받고 귀국, [[박영효]]의 심복으로 활동했으며 [[1895년]] [[박영효]], [[유혁로]] 등과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했다가 [[유길준]]의 밀고로 폭로되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을사 보호 조약]] 이후 사면받고 귀국, [[중추원]]부찬의, [[1908년]](융희 2년) [[전라남도]][[관찰사]], 겸임 [[전라남도]][[재판소]] [[판사]]를 지냈으며, [[1910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전라북도]][[도지사|도장관]], [[1919년]] [[전라북도|전북]][[도지사]]를 역임했다.
         |출판사=돌베개
         [[1908년]](융희 2) [[1월]]에는 그의 친구인 [[특진관]] [[장박]](張博)이 [[평리원]]판사(平理院判事) [[박만서]](朴晩緖)에게 신응희를 위해서 사퇴하라고 압력을 넣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정미 7조약 이후 그는 [[내무부]]대신 [[송병준]](宋秉畯) 등의 추천과 통감부의 비호를 받아 [[1908년]] [[2월 19일]] [[전라남도]][[관찰사]] [[칙임관]] 3등(勅任官三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라남도|전남]][[관찰사]]직을 여러번 사양했다. 총리대신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여러번 권하였으나 그는 마다하였다.<ref>"신씨강직", 대한매일신보 1908년 2월 19일자 2면, 잡보외방통신</ref> 결국 그해 [[6월 11일]] [[전라남도]] [[관찰사]](全羅南道觀察使) [[칙임관]]3등에 재임명되자 취임하였다. [[1908년]] [[6월 25일]] 겸임[[전라남도]][[재판소]][[판사]](兼任全羅南道裁判所判事)를 겸임하였다.
         |출판사=돌베개
         |출판사=돌베개
         |출판사=돌베개
  • 신정아(큐레이터)
         2012년 6월 [[미국]] [[코네티컷]] 주 지방법원은 예일대의 약식 재판[* [[미국]]은 민사도 배심원 재판을 하지만, 대부분의 재판이 사법 거래와 약식 재판으로 대충 끝난다. 미드 [[슈트]]를 봐도 "심리까지 가게 되면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다"며 모든 재판을 사법 거래로 간단하게 처리한다. 미국에서 약식 재판은 원고와 피고가 주장하는 팩트에 분쟁이 없을 때, 분쟁이 없는 사실에 어떤 법을 적용할지 판사에게 결정해 달라고 청원하는 것이다. 미국 민사 소송에서 거의 모든 피고가 “원고의 주장이 근거가 없으니 굳이 배심원 재판까지 가지 말고, 판사가 직접 판단해 기각시켜 달라”며 약식 재판을 요청한다.] 요청을 받아들여 배심원 재판을 생략하고, 판사 터커 멜란컨이 "예일대 측이 고의로 신씨의 학위를 잘못 확인해줬다고 볼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동국대가 제기한 [[명예훼손]] 및 부주의 주장에 대해 소송 기각하였다. 즉, 학위 확인 잘못은 단순 실수이기 때문에 재판 대상이 안 된다고 본 것이다.
         2014년 12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20부(안승호 부장판사)는 예일대의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결국 동국대는 소송에 진 것만으로도 억울한데 상대방 소송비용까지 물어줘야 했다. 당시 한국 인터넷 여론은 동정 일색이였고, 후폭풍으로 해당 사건에 대한 조사를 공약으로 내세운 보광스님이 2015년 6월 11일 동국대 18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즉, 한국식 법감정으로 세계 최고의 법률가를 배출하는 예일대를 상대로, 예일대의 소재지인 코네티컷에서[* 미국은 해당 지역 사람만 해당지역 [[판사]]가 될 수 있다. 다른 지역과 인사이동도 없고, 일 잘한다고 고등법원으로 승진하는 것도 없다. 즉 코네티컷 사람만 코네티컷 법원에서 근무할 수 있는데, 코네티컷에 있는 세계 최고의 [[법대]]가 어디게?] 소송을 걸었으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 여기에 더하여 예일대가 1심 소송이 걸린 후 재판 화의조정에서 화의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예일대 측이 오류를 발견한 즉시 사과하였고, 진실을 알면서 회피했다는 “악의”가 없었다는 근거가 되었다.
         소설가로서 공지영의 안목을 믿는다면, 신정아의 글을 출판사에서 고용한 [[고스트 라이터]]가 많은 부분을 읽을 만한 글로 [[윤문]]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거친 결과물이라 짐작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 오경석
         |출판사=삼문
         [[1877년]] [[8월]] 그동안의 외교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주변의 반대 없이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여 [[돈녕부]][[판사]]가 되었다가, [[8월 14일]] [[중추부]][[지사]]로 임명되었으나 [[9월 10일]] 신병을 이유로 체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면직되었다. [[11월 11일]] [[사역원]]에서 《통문관지속편(通文館誌續編)》을 영인할 때 감인(監印)에 참여한 공로로 1자급 특진하였다. [[12월]]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 [[중추부]][[지사]]에 임명되었다.
  • 유승민(정치인)
          * 아버지는 [[판사]] 출신으로 제13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유수호(정치인)|유수호]] 의원이다. 2015년 11월 7일 아버지 [[유수호(정치인)|유수호]] 의원의 사망 때 상주를 지내며 정계 각종 인사들을 맞았다.
  • 윤유선
         ||<#FFB6C1> '''{{{#ffffff 가족}}}''' ||<(> 예비배우자[[이영학(판사)|이영학]][* 2020년에 결혼][br]슬하 1남 1녀[br]당조카 [[이혜원]], [[조윤희 (배우)]] ||
          * 남편 이성호는 [[판사]]이다. 2013년 [[조현오]] 전 [[경찰청장]]에 대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2355406|징역형을 언도하면서 법정에서 그 즉시 구속을 명령해 화제가 되었다.]][* 보통 불구속상태에 있던 피고인이 1심에서 실형선고를 받더라도 혐의가 중하거나 구속사유에 특별히 해당하지 않는한 형사법상의 대전제인 불구속수사의 원칙을 준수하기 위해서라도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한 명분으로 형을 언도받은 당일에 피고인의 강제적인 구속은 하지 않는것이 관례다.] 또한 2018년에는 [[어금니 아빠 살인사건]]의 [[이영학]]에게 사형을 선고하여 다시 한 번 화제가 되었다.
  • 윤유후
         * 할아버지 : 윤탕로(尹湯老, [[1466년]] ~ [[1508년]]), [[정국공신]] [[중추부]][[판사]] 봉 파천군(坡川君)
  • 이상경(1945)
         1971년부터 1974년까지 [[대한민국 육군]] [[군법무관]]으로 병역의무를 이수하였다. 이후 [[판사]]로 근무하였으며, 2004년까지 [[부산고등법원]] 법원장 등을 지냈다.
  • 이우정(1880)
         '''이우정'''(李愚正, [[1880년]] ~ ?)은 [[일제 강점기]]때의 [[판사]]이다.
         법관양성소 졸업 후인 1909년 2월 대구공소원 서기로 임용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대구지방재판소 안동구재판소 판사로 승진했다.
         1912년 4월부터 관제개편으로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판사로 재직했고, 8월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안동지청 판사로 재직하던 1919년 3월 [[안동군]] [[일직면]]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한 [[이구덕]](李九德)에게 보안법 위반을 적용해 [[태형]](笞刑) 90대를 선고했고, 이해 6월에는 3·1운동 당시 경상북도 [[안동군]] [[임동면]] 시장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한 [[김은수]](金銀守)에게 보안법 위반을 적용해 징역 2년을 선고했다.
  • 이정미 (법조인)
         [[판사]]를 거쳐 2011년 제5대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 재판관에 임용되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으로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제18대 대통령]] 박근혜의 [[파면 (징계)|파면]]을 선고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재임 기간 동안 두 번의 권한대행을 맡았다.
         1985년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고,<ref>{{뉴스 인용|url=http://www.g-enews.com/view.php?ud=201607281159293031384_1|제목=[인물연구] 김영란법 합헌 헌재판결 헌법재판소 이정미 재판관은 누구? 마산여고 고려대학교 법대 졸업 부산고법 부장판사|뉴스=글로벌이코노믹|확인날짜=2017-03-18}}</ref> 같은 해 26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8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된 후 인천지방법원 판사, 수원지방법원 판사, 서울가정법원 판사, 서울지방법원 판사,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 판사, 서울고등법원 판사, 울산지방법원 부장판사,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서부지방법원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 등을 역임했다.<ref name="김민"/>
         2011년 3월,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재직 중 대법원장 이용훈의 지명으로 이공현 재판관의 후임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되었다. 역대 최연소 헌법재판관, 두 번째 여성 헌법재판관, 두 번째 비(非) [[서울대학교]] 출신 여성 헌법재판관이었다.<ref name="정수">정수정. [https://www.lawtimes.co.kr/Legal-News/Legal-News-View?serial=58174 (법조라운지)취임 100일 맞은 이정미 헌법재판관]. 2011년 7월 4일.</ref>
         * 1987년 ~ 1991년: 대전지방법원 판사
         * 1991년 ~ 1992년: 인천지방법원 판사
         * 1992년 ~ 1994년: 수원지방법원 판사
         * 1994년 ~ 1996년: 서울가정법원 판사
         * 1996년 ~ 1998년: 서울지방법원 판사
         * 1998년 ~ 1999년: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 판사
         * 1999년 ~ 2002년: 서울고등법원 판사
         * 2002년 ~ 2004년: 울산지방법원 부장판사
         * 2007년 ~ 2009년: 서울서부지방법원 부장판사
         * 2009년 ~ 2010년: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
         * 2010년: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
         * 2010년 ~ 2011년: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
         [[분류:196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울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마산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판사]]
  • 이주영(1951)
         ||<bgcolor=#C9151E> '''{{{#FFFFFF 경력}}}''' ||<(> 제20회 사법고시 합격[br][[대법원]] 재판연구관[br][[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br][[제16대 국회의원]](경남 창원 을)[br][[경상남도]] 정무부지사[br]제17·18대 국회의원(경남 마산 갑)[br][[한나라당]] 정책위의장[br]한나라당 경남도당 위원장[br][[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br][[새누리당]] 정책위의장[br]제19·20대 국회의원(경남 창원마산합포)[br][[여의도연구원]] 원장[br]제17대 [[해양수산부장관]][br]국회 헌법개정특위 위원장[br]20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 ||
         1951년 9월 30일 출생. 옛 [[창원시|마산합포구]] 출신.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KS라인--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서울고등법원]] [[판사]],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까지 지낸 후 [[변호사]]가 되었다. 이 동네 정치인치고는 드물게 [[마산고등학교]]나 [[마산용마고등학교|마산상업고등학교]] 출신이 아니다.
         이때부터 시작된 특이한 인연이 있는데 판사 시절 1984년 청주지방법원 형사단독재판장으로 있을 당시 공판검사가 초임 홍판표 검사였다. 그때 이주영은 성명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마침 홍판표 검사 이름 가운데 한자가 ‘판단할 판(判)’인데 칼도변이 들어간다. 이름 한자에 칼이 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고, 판표라는 발음도 어려워 내가 ‘판’을 ‘준’으로 바꾸라고 권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개명이 어려웠는데 이주영이 법원장에게 부탁해 개명 허가를 얻어주어 홍판표가 [[홍준표]]가 되었다고 한다. [[http://v.media.daum.net/v/20170418175909554|이주영 전 장관 "팽목항 200일, 죄인 된 심정으로 임했다"]]
  • 추미애
         ||<#1870B9> '''{{{#FFFFFF 약력}}}''' ||<(> 제24회 [[사법시험]] 합격[br][[춘천지방법원]] [[판사]][br][[광주고등법원]] 판사[br][[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br][[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방문교수[br][[민주통합당]] [[최고위원]][br][[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
          * 최초의 여성 판사 출신 국회의원
          * 최초의 판사 출신 [[야당]] 국회의원
         정계에 입문하기 전에는 법원에서 10여년 간 판사로 일했고,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 당시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으로 야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의 총재였다.]에 의해 스카웃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현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 지역구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을]]이다.
         정계 입문 전에는 [[춘천지방법원]], [[인천지방법원]], 전주지방법원, [[광주고등법원]] 등에서 판사로서 일했다. 판사 시절 추미애는 ‘까칠한 여성 판사’로 통했다고 한다. 당시는 [[군사정권|군부 독재 정권]] 시기였는데, 수사 당국이 공안 정국을 등에 업고 구속영장을 남발할 때 ‘법적’으로 용납이 안 되면 기각하기 일쑤였다.
         한 번은 구속영장이 기각됐다며 경찰서장이 한밤 중에 추미애 당시 판사에게 전화를 걸어와 “내일 다시 신청할 테니 꼭 발부해달라”며 신경질을 낸 일이 있었다. 추미애가 “영장청구권자는 검사인데 서장께서 왜 직접 전화를 하는가? 판사가 한 번 결정해 외부로 나간 일은 번복할 수 없다”라고 응수했는데, 다음 날 법원장이 불러 “아버지 같은 경찰서장에게 도대체 뭐라 했길래 서장이 그리 화가 난 것이냐”라며 질책했다. 추미애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검찰 쪽으로 문제 제기를 했고 결국 경찰서장이 찾아와 사과를 하는 선에서 마무리가 됐다. 나이 어린 초임 판사에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만만하게 보던 주위 사람들에게 추미애는 그렇게 ‘껄끄러운 여판사’로 각인되기 시작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308&aid=0000021230|#]]
         관련하여 판사 재직 시절 이런 일도 있었다. 1985년 봄, 당시 [[전두환]] 정권은 공안 통치를 위해, 오늘날에는 명작으로 평가 받는 <[[난쏘공|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 100권이 넘는 책을 불온서적이라는 딱지를 붙여가며 압수수색하였다. 전국 검찰에선 일제히 영장을 청구했고, 전국 법원은 예외 없이 영장을 발부했다.
         그때 춘천지방법원에서 초임 판사로 일하던 추미애에게도 영장이 청구되었다. [[춘천]]의 가장 큰 서점을 상대로 불온 서적을 압수수색하고자 하니 허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추미애는 부당한 청구라며 영장을 기각하였다. 전국에서 유일한 영장 기각이었다. 이후 법원장은 추미애를 호출해서 “당신, [[김대중]] 정치 운동하는 판사냐?”며 비아냥대듯 야단쳤다고 한다.
         판사 생활 10년 차이던 1995년, 추미애는 법원에 사표를 내고, 정계에 입문하여 이후의 삶은 [[정치인]]으로서 살아가게 되는데, 정치인이 된 이후의 생애는 아래 '정계 활동' 문단에서 서술한다.
          * [[1985년]] [[춘천지방법원]] [[판사]]
          * [[1989년]] [[인천지방법원]] 판사
          * [[1993년]] 전주지방법원 판사
          * [[1995년]] [[광주고등법원]] 판사
          * [[1996년]] [[제15대 총선]] 당선 (판사 출신의 최초 여성 국회의원)
  • 흥인군
         [[1864년]](고종 1) [[1월]] [[영희전]] 제조가 되고 3일 뒤 [[사도시]] 제조를 겸임하였으며, [[2월]] [[종묘서]] 제조, [[3월]] [[상의원]] 제조에 임명되었다. [[1865년]](고종 2) [[4월]] [[경복궁]] 중건 때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맡아보았으나,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에 반대하여 반목했다. 그해 [[9월]] [[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 [[호위대장]] 등을 역임했다. [[1866년]]에는 익총의 옥책문 옥보 전문 제술관(玉寶篆文書寫官)이 되고, 같은 해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때 [[가례도감]] 당상이 되었다. 그해 [[의금부]]판사가 되었다.
         그는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을 발행하자 "일문전(一文錢)이 어찌 백문전(百文錢)으로 쓰이겠는가? 다만, 일문의 가치로만 쓰일 뿐이다"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물건값을 치를 때 당백전을 일전으로 계산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환전하는 과정에서 이익을 얻은 상인이 많았다 한다. [[1872년]] [[경복궁 중건]] 공사가 끝나자 [[돈령부]]판사로 전직되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이 섭정이 되자, 동생의 권력을 빙자하여 뇌물을 받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그를 경멸했고, 의정부와 육조에 흥인군에게는 어떠한 우대나 혜택도 해주지 말라고 비밀리에 지시하였다.
         이때 난병이 흥인군 저택 을 포위하자 이최응은 담장을 넘으려다 떨어져 고환이 터져 결국 사망한다.<ref>노용필, 《개화기 서울사람들:우리 역사속의 사람들 2》 (어진이, 2004) 97 페이지</ref> 6월 9일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그는 밤새 잠을 못 자고, 6월 10일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러나 집 밖에서 별안간 떠들썩하는 바람에 급히 일어나 뒷담을 뛰어 넘으려 하였다.<ref name="yiyi">이현희, 《한국의 역사 16권. 개혁·개방과 외세의 침투》(청아출판사, 2014)</ref> 담에서 떨어진 그는 고환이 터져 신음하다가 난병의 창에 찔렸다.<ref name="yiyi"/> 그는 대원군의 형으로써 민씨 일파를 도와주었다고 하여 대원군이 일으킨 난병에게 무참하게 참살당하였다.<ref name="yiyi"/>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그가 난병을 피해 도망쳐 담을 넘다가 고환이 터져 죽었다 하였고, 이는 [[유주현]]의 [[대원군]] 등의 작품에 인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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