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친박연대"을(를) 전체 찾아보기

친박연대


역링크만 찾기
검색 결과 문맥 보기
대소문자 구별
  • 박근혜 . . . . 7회 일치
         === 친박연대 창당 ===
         대한민국 정당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개인의 이름을 정당명으로 사용한 정당이 [[친박연대]]이다. 박근혜라는 개인의 이름을 정당명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개인의 이름을 정당명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시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급기야 [[서청원]], [[홍사덕]] 등의 주도로 공천에서 탈락한 박근혜계 정치인들이 대거 탈당하여 친박연대를 창당하고, 다른 정치인들은 친박무소속연대를 결성하였다. 박근혜는 이들과 행보를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공천 결과에 대해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강도 높은 비판과 함께 "살아서 돌아오라"는 발언을 통해 간접적인 지원을 하였다.
         박근혜는 한나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다시 당선되었고, 이재오, 이방호는 낙선하였으며, [[친박연대]]는 지역구 6석, 전국구 8석이라는 예상 외의 높은 지지율을 달성하였다. 친박 무소속 연대도 총 12명이 당선되었다. 이후에도 박근혜는 꾸준히 친박연대 및 무소속 친박 당선자들의 복당을 요구하였다. 친박 측과 앙금이 남아있던 [[강재섭]] 대표의 임기가 종료되고 [[박희태]] 전 의원이 대표로 부임한 뒤 마침내 친박무소속연대 소속 의원과 친박연대의 지역구 의원 전원이 한나라당으로 복당하여 한나라당 내 친박의원 의석수는 6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친박연대의 비례대표 의원 5명은 당명 개정, 독자 활동을 꾸준히 하였고 [[양정례]], [[서청원]], [[김노식]]은 당선무효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어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 김을동 . . . . 5회 일치
         2008년에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친박연대에 입당,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의 비례대표로 공천을 받아 당선되어 [[대한민국]] 최초의 부녀 국회의원이 됐다.[* [[박근혜]]의 경우에는 아버지 [[박정희]]가 국회의원을 역임하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을 지냈다.] 친박연대가 한나라당에 통합되면서 한나라당에 자연히 재입당했고, [[새누리당]]에서 활동하면서 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2012년 6월부터 2014년 8월까지 [[한국여자야구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현직 국회의원의 체육단체장 겸직 금지 권고에 따라 사임했다.]
         다른 [[김좌진]] 장군의 후손들(예로 이복남매)과도 정치적인 이념에서 대립을 보였다. 국정화 문제도 찬성을 하는 쪽으로 나섰으며, 친박연대로서 [[박근혜]]를 지지하고 있는 쪽이기도 했다.[* 중요하고도 아이러니한 것이 김을동 의원의 아버지인 [[김두한]]은 박정희 정권 때 고문을 당했었고, 그 후유증으로 1972년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박용직|너의 아버님이신 김두한 대장은 박정희 정권의 고문에 비명에 가셨다..]]-- 심지어 당시 김두한을 알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54세로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김두한의 후계자, 조일환) 허나, 일본의 고문도 잘 견뎌냈던 김두한조차도 박정희 정권 내의 고문에 의해 이가 다 빠지고 폐인이 되어 버렸다고 했을 정도였기 때문. 야인시대에서도 그 인터뷰를 참고해서 김두한이 박정희 정권 내에서 고문을 당해 이가 다 빠졌다는 설정이 추가되었다. 사실 김을동도 정치입문 초기에는 민주당 쪽으로 출마하기는 했다.]
         || 2008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 || '''2,258,750 (13.18%)''' || '''당선''' || 비례대표 5번 ||
  • 조원진 . . . . 3회 일치
         2008년에 열린 제18대 총선 당시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 소속으로 [[달서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한 유재한을 꺾고 당선된 후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사실 달서구 지역은 그가 두 번 출마했던 북구도 아니었고, 정치 경력도 상대인 유재한이 주택금융공사 사장 출신인 반면에 두 차례의 국회의원 출마와 중국에서의 소규모 기업 경영이 경력의 전부였다. 더군다나 친박연대에서 해당 지역에 송영선 출마를 검토하는 바람에[* 송영선은 비례대표로 옮겨가 당선되었고, 이후 남양주시 갑으로 옮겨서 현직 당협위원장인 심장수의 지역구를 빼앗아 논란이 있었다. 알다시피 송영선은 이후 비리로 당에서 제명되었다.] 실제 출마 여부도 선거 등록 당일에서야 결정되는 등,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처럼 보였는데도 이 당시 선거에서 불었던 친박 바람에 힘입어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때 이후로 3선 의원이 되는 동안 내내 쭉 [[친박]]계 세력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 2008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br](대구 달서구 병) ||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 || '''26,357 (49.23%)''' || '''당선 (1위)''' || [* 2008년 [[한나라당]] 복당] ||
  • 김종호(1935) . . . . 2회 일치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 후보로 충청북도 진천군-음성군-괴산군-[[증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2008년)|통합민주당]] [[김종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 진천군-음성군-괴산군-[[증평군]]) ||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 || 21,015표(25.25%) || 낙선 || ||
  • 김영환(1955) . . . . 1회 일치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0년에 재산신고를 -8.2억으로 해서 보유재산 국회 최하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다만 부채액이 많아서 -8.2억인 것이고, 이후 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부동산을 공시지가가 아닌 실거래가로 신고해서 1억원 정도로 신고했다. ~~그리고 2018년 지방선거를 거하게 망해서 수십억대의 부채가 추가~~][* 2008년 기준으로 최하위는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로, 대선자금을 선관위에서 환급받기 이전이어서 -120억원을 신고했다. 이후 선거비용을 환급받으면서 30억대로 재산이 다시 늘어났다. 2009년에는 서청원 친박연대 대표가 1억 438만원, 2010년에 김영환 의원이 -8억원, 2011년에 자유선진당 김창수 의원이 1억 500만원을 기록하여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후 [[4대강 정비 사업]]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지식경제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2238의 페이지중에 5개가 발견되었습니다 (5000개의 페이지가 검색됨)

여기을 눌러 제목 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