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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동우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 - [[단국대학교|단국대]]를 졸업하고 [[1998년]]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당시 삼성의 외야에는 [[최익성]], [[신동주(야구)|신동주]], [[양준혁]]이 주전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전년도 맹활약했던 최익성-신동주 우타 외야 라인에 부진 및 부상이 닥치자 데뷔 첫 해 주전 자리를 꿰차며 맹활약했다. 그 해 신인왕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고졸로 12승을 거둔데다 우승 프리미엄까지 누린 당시 [[현대 유니콘스]]의 고졸 신인 [[김수경(투수)|김수경]]에게 신인왕 자리를 내줬다. 또한 그 해 개최된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야구|방콕 아시안게임 대표팀]] 엔트리에 선발되어 있었다. 삼성의 연고지인 [[대구광역시]] 토박이인지라 프랜차이즈성도 탁월하여 향후 삼성의 주전 [[외야수]]가 될 것으로 기대받으며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 [[10월 16일]] 벌어진 사건으로 인하여 강동우의 지독한 불운이 시작되었다.'''
         여러 팀을 전전하는 [[저니맨]]이었다. 은근히 1990년대 중후반에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약했던 저니맨들이 많다. 그의 전임 1번타자였던 [[최익성]]과 [[이동수(야구선수)|이동수]], [[신동주(야구)|신동주]] 등.
  • 김인철
         || || → || '''김인철(1990~1994)''' || → || [[최익성]](1995) ||
  • 류명선(야구선수)
         || 김순철(1985) || → || '''류명선(1989~1995)''' || → || [[최익성]](1996~1998) ||
  • 민경수 (1981년)
         '''민경수'''(閔庚樹<ref>한국야구위원회, 2010 가이드북</ref>, [[1981년]] [[5월 19일]] ~ )은 [[KBO 리그]] 전 [[SK 와이번스]]의 [[투수]]이다. [[2011년]] [[11월 25일]] [[서승화]], [[지승환]]과 함께 [[LG 트윈스]]로부터 방출당한다. 이후 [[최익성]]이 운영하는 저니맨 야구 육성 사관학교를 거치고 [[SK 와이번스]]에 이적했으나 다시 방출된다.
  • 신동주(야구)
         ||<:> [[최익성]](2004) || → ||<:> '''신동주(2005)''' || → ||<:> 최용호(2005~2006) ||
         1991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1992년에 데뷔했으며, [[백인천]] 감독의 휘하에 삼성의 중심 타선으로 자리잡았다. 롯데의 [[8888577]]의 암흑기였던 [[백인천]]이었으나 젊은 시절의 [[백인천]]은 1990년 LG의 우승을 이끌었는데다 삼성 감독으로서 [[최익성]], 신동주, [[이승엽]]의 타격 실력을 대폭 향상시킨 장본인이다. 1997년에는 도루 2개가 모자라 20-20을 달성하지 못했으나 21홈런에 .326에 .581의 장타율로 타율-장타율에서 [[이종범]]과 맞먹는 스탯을 자랑했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해였다. 이 해 외야 부문 [[KBO 골든글러브]]는 [[양준혁]], [[박재홍(야구)|박재홍]], [[이병규]]가 탔는데, [[양준혁]], 박재홍이야 압도적인 실력이니 그렇다 쳐도 [[이병규]]와 비교해서는 타율, 홈런 등에서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했음에도 골든글러브에서 떨어지며 결국 골든글러브는 인기투표임을 인증했다. ~~[[이병규]]도 2011년에 똑같이 당한 게 함정~~~~이병규는 그 해 신인왕인데 신인한테 인기에서 밀렸다고?~~] 게다가 그해 준플레이오프에서는 2개의 홈런을 쏘아올렸는데 1차전 전주경기에서는 결승홈런이었고 2차전 대구에서도 0:3에서 추격하는 홈런을 올렸다.[* 물론 그 준플레이오프는 선수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김상엽]]에게 mvp가 돌아갔다.] 1999년에는 .278 22홈런 26도루로 20-20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이 때 [[KBO 리그]] 역사상 전후무후한 기록을 세웠는데 이것은 1이닝 3도루이다.
  • 이동수(야구선수)
         저니맨이긴 하지만 처음 입단한 삼성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 뛰었다. 신인왕을 차지한 이후부터가 문제. 위에 서술된 대로 수비와 선구안에서 약점을 드러내며 6년차였던 1997년 시즌 도중에 트레이드됐고 그 이후에는 여러 팀을 다녔기 때문에 외야수였던 [[최익성]]이나 [[동봉철]] 못지 않게 [[저니맨]]으로 살아야 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삼성의 미래를 짊어질 오른손 거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승엽]]이라는 역대급 슬러거가 등장하면서 묻혀 버린 감도 없지 않아 있다. 다만 입단 당시의 이동수는 1992년부터 1994년도까지의 경우 1군 전력감이 아니었고 1995년에 신인왕을 차지했으므로 어폐가 좀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사실 1996년 시즌에서의 부진은 자신의 은사인 김충 2군 감독의 해임도 있지만 심리적인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 크기 때문에 만약 그가 조금만 더 노력했었더라면 완벽한 선수가 되었을거고 팀을 이끌었을 선수 중 한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신인왕은 본인이 차지하고도 정작 프랜차이즈 스타로서의 영광은 다른 여러 선수들에게 돌아가 버렸다. [[김재걸]], [[김종훈(1972)|김종훈]], [[김한수]], [[박한이]], [[배영수]], [[양준혁]], [[이승엽]], [[임창용]], [[전병호]], [[진갑용]] 등등[* 다만 이들 중, [[양준혁]]의 경우 삼성에 오래 있긴 했지만 두번이나 이적한 적이 있고, [[임창용]]은 4년간이나 뛰던 해태와 트레이드로 들어왔고, [[진갑용]]은 두산에서 트레이드하여 영입하였다. [[박한이]]는 2001년에 데뷔했고, [[배영수]]는 2015년에 한화로 이적했기에 좀 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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