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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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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탐라국 여왕 . . . . 18회 일치
         [[최영]] 장군과 얽혀서 전해지는 전설상의 인물이며, 영도 아씨당에서 숭배되는 신령이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말기에 [[탐라국]](지금의 [[제주도]])를 지배한 [[여왕]]이다.
          * 탐라국 여왕과 최영의 대결은, 실제 역사에서 최영이 고려말에 제주도에서 진압한 [[목호의 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기록을 보면 실제로 제주도에는 탱자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목사 조정철이 1812년 선조에게 본도의 성터에 해자를 파고 탱자나무로 둘러쌋으므로, 고려 때부터 탱자성(枳城)이라 불렸는데, 근래에 성곽이 붕괴되고 탱자나무를 구경할 수 없게 되었다고 보고한다. 1749년 비변사 등록에 보면, 강화유수 원경하가 영조에게 강화도에 탱자나무를 심자면서, "고려의 최영이 탐라국을 격파하지 못한 것은 그 가려진 지책(枳柵,탱자나무 목책) 때문이었다"고 한다.
         충남 홍성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탐라국 여왕은 탐라국에서 최영 장군과 싸운다. 탐라국 여왕은 중국 여자로 키가 팔 척이며, 힘이 장사이며, [[탱자]]나무 숲을 성처럼 두른 탱자성에 살고 있었다. 최영 장군이 탐라국을 정벌하러 왔을 때, 과연 탱자나무 숲이 성과 같아서 공격할 수 없었다.
         최영이 고민을 하였는데 꿈에 신령이 나타나, 억새풀 씨를 따서 연에 매달아 탱자성에 뿌려, 다음해 억새풀이 무성하게 되면 가을에 불을 질러 공격하라고 일러주었다. 또 쳐들어갈 때는 몸에 구리판을 두르고 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영은 신령이 일러준 대로 하여, 가을에 탱자나무 숲을 모두 불태우고 공격에 나섯다. 최영은 탐라국 여왕과 대결을 벌였는데, 여왕은 괴력을 가지고 있어 쉽게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최영이 목까지 구리갑옷으로 둘둘 말고 있어 여왕도 최영을 죽일 수 없었고, 마침내 여왕이 지쳤을 때 최영은 목을 쳐서 이겼다.
         충남 홍성 전설과는 달리 부산 영도 아씨당 전설에서는 여왕이 죽지 않고 최영에게 항복하였으며, 탐라국에서 머물 때 최영의 [[첩]]이 되었다. 그런데 최영은 신돈의 음해에 빠져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여왕은 영도로 최영을 찾아갔으나 최영이 영도로 갔다는 것은 풍문에 불과하여 만나지 못했다.
         결국 여왕은 적막한 땅에서 홀로 지내다가 죽어서 혼령이 됐으며, 최영을 만나지 못하고 죽은 한 때문에 영도 목마장의 말을 죽이게 되었다. 영도 목마장에서는 멀쩡하던 말이 영도를 떠나면 나자빠져 죽게 된 것이다.
  • 최영미 (시인) . . . . 17회 일치
         | 이름 = 최영
         '''최영미'''([[1961년]] [[9월 25일]] ~ )는 [[대한민국]]의 [[시인]]이며 [[소설가]]이다.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섬세하면서 대담한 언어,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직시하는 신선한 [[리얼리즘]]으로 한국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문학평론가 최원식에 따르면 "최영미는 첫 시집이 너무 성공한 탓에 문학 외적인 풍문에 휩싸여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불행한 시인이다”. 1992년 등단 이후 시와 소설, 에세이를 넘나들며 5권의 시집을 펴내고,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 《청동정원》을 출간하고 미술과 축구에 대한 산문을 많이 썼지만, 한국에서 그녀는 여전히 시인으로 더 알려져 있다.
         [[서울대학교]] 2학년이던 1981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내 시위에 가담하여 [[서울관악경찰서|관악경찰서]]에서 구류 10일을 살고 1년간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대학졸업 후에 반독재 투쟁을 위해 만들어진 비합법 조직 '제헌의회그룹'의 사회주의 원전 번역팀에 들어가 [[카를 마르크스]]와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의 저작물을 공동번역했다. 십 여명이 번역과 교열작업에 매달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해방 이후 최초로 현대 한국어로 옮긴 《자본 1》이 1987년 이론과실천사에서 김영민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역자로 내세워 출판되었고, 출판사 대표는 사회주의 원전을 출판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1980년대 말 [[소련|소비에트 정권]]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몰락을 경험하면서 최영미는 거대 담론과 이데올로기에 회의를 품게 되었고, 자신의 안과 밖에서 진행되는 심각한 변화를 글로 표현하려 노력하며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최영미는 인간의 조건을 풍자적인 언어로 파헤친 시집 《돼지들에게》로 2006년 [[이수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수문학상 심사위원 유종호교수는 “최영미 시집은 한국사회의 위선과 허위, 안일의 급소를 예리하게 찌르며 다시 한번 시대의 양심으로서 시인의 존재이유를 구현한다”라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돼지들에게》의 추천사에서 [[신경림]] 시인은 "진실을 추구하는 치열한 정신 없이는 이와 같은 시는 불가능할 것이다. 자칫 관념적 교훈적으로 될 수도 있는 알레고리적 방법이 시에 활기와 재미를 더해주는 점도 주목을 끈다”라고 썼으며 "시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진정성과 언어의 조탁이 돋보인다”라며 심사평을 전했다.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은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2013년 상반기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었다
         구겐하임상(Guggenheim fellowship) 수상자인 시인 제임스 킴브렐(James Kimbrell)과 유정열이 공동 번역한 3인 시집 《현대한국의 세 시인:이상, 함동선, 최영미》(''Three Poets of Modern Korea: Yi Sang, Hahm Dong-seon and Choi Young-mi> (2002,Sarabande books'')는 2004년 미국번역문학가협회상(ALTA Awards:American Literary Translators Association)의 최종 후보로 지명되었다.
         최영미의 시는 관습과 예의를 따지는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험스런 모험을 느끼게 한다. 그녀의 스타일은 바로 그녀의 독립성이다. 그녀의 시는 삶으로 쓴 시들이다
         미국의 계관 시인이자 [[버클리 대학]] 교수인 로버트 하스(Robert Hass)는 2009년 버클리에서 열린 시 낭송회 런치 포임(lunch poem)에서 " 최영미의 시는 추상표현주의 회화같다."라고 평했다. 2005년 일본의 청수사(靑樹社)에서 출간된 최영미의 시선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문화면 머릿기사로 다루며 《아사히신문》은 "다의성(多意性)이 풍부한 명석한 언어"라며 "시에 의해서 잉태된 언어를 이만큼 신중하게, 고독하게 기르고 있는 시인이 가장 이웃한 나라에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랍다" 라는 사사키 미키로 시인의 평을 실었다.
         최영미는 삶과 여행, 그리고 예술에 관한 산문집 『《시대의 우울: 최영미의 유럽일기》,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를 출간했으며, ''Francis Bacon in Conversation with Michel Archimbaud''를 한국어로 번역해 《화가의 잔인한 손: 프란시스 베이컨과의 대화》(1998,도서출판 강)이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인하대학교]]와 [[강원대학교]]에서 시 창작을 가르쳤으며, 지학사 고등검정교과서 문학(2014년)에 최영미의 시 〈선운사에서〉가, 창비사 고등인정지도서 문학(2012년)에 〈지하철에서 2〉가, 학연사 고등검정지도서 작문에 (2012년) 산문집 《시대의 우울》, 〈쾰른〉편이 수록되었다.
         세 명의 한국 작곡가- 이건용, 김대성 그리고 안치환이 최영미의 시를 노래로 만들었다. [[서울오페라단]] 단장인 이건용이 작곡하고 전경옥이 노래한 아트 팝 겸 클래식 음반 《혼자사랑》 (1998년)에 최영미의 시 4편을 노랫말로 삼은 〈선운사에서〉,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슬픈 카페의 노래〉, 〈북한산에 첫눈 오는 날〉의 4곡이 포함되었다. 무형문화재인 국악인 강권순의 창작 가곡집 《첫마음》(2007년)에 김대성이 작곡한 노래 '선운사에서'가 수록되었고, 안치환의 10집 앨범인 《오늘이 좋다》(2010년)에 안치환이 작곡하고 부른 노래 〈선운사에서〉가 실렸다.
         최영미는 2011년 [[국회도서관]] 홍보 대사로 위촉되었고,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대한축구협회 축구사랑나눔재단 이사로 활동했다. 열렬한 축구팬인 그녀는 2006년 ''Die Tageszeitung''에서 발행한 독일월드컵 특집호 ''Taz journal Mai 2006''에 한국 축구에 대한 글을 기고했고, 2011년 축구 에세이 《공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출간했다.
         * 사가와 아키 "글로벌 시대의 세련된 지성" --2009년, 최영미 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의 해설
  • 최영이 (종교인) . . . . 11회 일치
         |이름 = 최영이 아가타
         '''최영이'''(崔榮伊, [[1818년]] ~ [[1840년]] [[2월 1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바르바라'''(Barbara)이다.
         최영이는 [[한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본받아 매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살았다. 그녀의 부모가 그녀의 혼담을 정할 때,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배우자는 매우 독실한 교우여야 하지만, [[양반]]이나 부자는 싫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20세의 나이에 44세의 늙은 홀아비인 [[조신철 카롤로]]와 결혼했다. 이듬해에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그 부부는 서로를 격려하며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영이는 남편과 함께 피신했지만, [[6월]]에 그녀의 친정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녀는 체포될 때,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감옥에 들어갔다. 그러나 감옥은 혼탁한 공기에 어둡고 음식도 부족했으므로, 유아가 지내기에는 매우 어려운 곳이었다. 또한 그녀는 아들 때문에 확고한 신앙이 흔들릴 수 있음을 염려하였으므로, 최영이는 아들을 밖의 한 친척에게 맡겼다.
         포장은 그녀가 배교하고 동료 [[천주교]]인들과 그녀의 집에서 발견된 [[종교]] 물품들의 주인의 이름을 대라고 강요하였다. 최영이는 배교치 않았고, 교우들과 알고 지내기에 자신은 너무 젊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녀는 2 차례의 [[주뢰형]]을 260 여대의 [[태형]]을 받았다. 그녀는 [[형조]]에서도 3 차례의 [[형벌]]과 [[고문]]을 견뎌내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1840년]] [[2월 1일]], 최영이는 [[한양]] 근교의 [[당고개역|당고개]]로 압송되어 [[이문우 요한]]과 [[홍영주 바오로]]와 함께 [[참수형]]을 받았다. 그렇게 그녀가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23세였다. 그 전날에는 최영이의 어머니가 처형 받아 순교하였는데, 모녀가 같이 순교하지 못한 까닭은 당시 [[조선]]의 [[형법]]에 따르면 친족을 같은 날에 처형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영이 바르바라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3510&keyword=%C3%D6%BF%B5%C0%CC&gubun=01 가톨릭 사전: 최영이]
         * [http://english.cbck.or.kr/Saints103/345 Catholic Bishop's Conference Of Korea. 103 Martryr Saints: 최영이 바르바라 Barbara Choe Yong-i]
  • 이민호(1987) . . . . 5회 일치
         그 후 [[송지나]] 작가의 [[신의(드라마)|신의]]에 출연하여 깊은 눈빛과 절도 있는 액션 연기로 신의있는 젊은 [[최영]]의 모습을 표현해 2012 SBS 연기대상 미니시리즈 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10대 스타상 등을 수상했다. 극이 진행될수록 이민호가 맡은 [[최영]] 캐릭터만 남았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점점 캐릭터와 밀착되는 모습을 보였고 [[송지나]] 작가도 이민호는 [[최영]] 그 자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http://view.heraldcorp.com/view.php?ud=20121021000320|기사]].]
         || 2012년 || [[신의(드라마)|신의]] || [[최영(신의)|최영]] || ||
  • 정형돈 . . . . 5회 일치
         * [[SBS]] 《배기완 최영아 조형기의 좋은아침 3712회 (9월 5일) : 제38회 한국방송대상 현장》
         * [[SBS]] 《배기완 최영아 조형기의 좋은아침 3725회 (9월 26일) : 인터뷰》
         * [[SBS]] 《배기완 최영아 조형기의 좋은아침 3740회 (10월 17일) : 인터뷰》<ref>{{뉴스 인용|제목=정형돈 졸업사진 '이목구비 또렷한 날씬한 훈남'|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8&aid=0002634347|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유재은 기자|날짜=2011-10-17}}</ref>
         * [[SBS]] 《배기완 최영아 조형기의 좋은아침 3769회 (11월 28일) : 인터뷰》
         * [[SBS]] 《배기완 최영아 조형기의 좋은아침 3836회 (3월 5일) : 인터뷰》
  • 박진성(시인) . . . . 4회 일치
         페이스북과 블로그, 자신이 활동 중인 [[웃긴대학]]에 [[고은(시인)|고En]] 시인의 성폭력에 대해 증언하며 [[최영미]] 시인을 응원했다.
         >고백합니다. 밉보일까 봐 당시 동석했던 여성분들께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저는 범죄 현장에 있었습니다 저 역시 방관자였음을 시인합니다. 용서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고En 시인의 시를 보고, 고En 시인의 ‘기록된’ 행적만 보고, 고En 시인처럼 되고자 했던 저 자신을 먼저 반성합니다. 최영미 시인을 응원합니다. 제가 보고 듣고 겪은 바로는 최영미 시인의 증언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이에 [[최영미]] 시인이 박진성 시인에게
  • 최영철 (기자) . . . . 4회 일치
         |이름 = 최영
         |웹사이트 = {{트위터|kbschoi|최영철}}
         '''최영철'''([[1974년]] [[3월 17일]] ~ )은 [[대한민국]]의 [[한국방송공사|KBS]] 소속 [[기자 (직업)|기자]]다. [[서울특별시]] 출신이다.
         * {{트위터|kbschoi|최영철}}
  • 김희애 . . . . 2회 일치
          * [[미세스 캅]](2015, [[SBS]])/[[최영진(미세스 캅)|최영진]]
  • 이성계 . . . . 2회 일치
         한국사의 명장 반열에 반드시 낄 정도로 군사적인 역량과 개인의 무용이 후덜덜했던 인물로, 이러한 업적을 통해 정계의 거물로 성장하였고, 그 후 명과의 외교 마찰로 인해 우왕과 최영이 요동 정벌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하였으나 묵살당하자 최영이 우왕을 달래느라 정벌군을 직접 이끌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해 국경지대의 하중도(河中島)인 '위화도'에서 군대를 물려 쿠데타를 단행해 최고 권력을 거머쥐게 된다. 그 후 정몽주 등의 저항을 뿌리치고 마침내 조선을 건국한다.
  • 이호재(연극배우) . . . . 2회 일치
          * 1993년 MBC 《[[제3공화국(드라마)|제3공화국]]》 ... [[최영희(1926)|최영희]] 역
  • 조진호 (축구인) . . . . 2회 일치
         |전임자 = [[최영준 (1965년)|최영준]]
  • 최재희 . . . . 2회 일치
         | 가족 = [[최원정]](누나), [[최영철 (기자)|최영철]](자형)
  • 최준석 . . . . 2회 일치
         감독만이 아니라 팀으로서도 이 정도로 답이 없을 줄은 몰랐는지 2018년 1월 23일 롯데가 최준석을 '''무상 트레이드'''[* 대표적인 사례로는 FA 계약에 실패 후 보상권리 포기로 SK와 계약한 투수코치 [[최영필]]이 있다. 이 방법으로 은퇴 위기에 있었던 최영필은 2017년 KIA 타이거즈에서 은퇴할 때까지 6년이나 선수생활을 연장할 수 있었다.]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76&aid=0003205939|해당기사]]
  • 최호중 . . . . 2회 일치
         |후임자 = [[최영철 (1935년)|최영철]]
  • 경산시 . . . . 1회 일치
         * [[최영조]] - 현직 경산시장
  • 김정난 . . . . 1회 일치
         || 2004년 || KBS1 || [[금쪽같은 내 새끼]] || 최영란 || ||
  • 남명렬 . . . . 1회 일치
         * [[2015년]]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 |SBS]] 월화드라마 《[[상류사회 (드라마)|상류사회]]》 - 최영호 역
  • 디도(성우) . . . . 1회 일치
          * [[가면라이더 W]] - [[마쿠라 슌|박지만]], [[산타클로스#s-3.4|산타]], [[아이스에이지 도펀트|최영준]], [[올드 도펀트|조로술사]], [[버드 도펀트|유성]]
  • 박용우(배우) . . . . 1회 일치
          * 크리스탈 (SBS, 1999) - 최영후 역
  • 박정철(배우) . . . . 1회 일치
          * 2001년 MBC [[호텔리어#s-2|호텔리어]] - 최영
  • 서지석(배우) . . . . 1회 일치
          * 미스터 굿바이 (2006) - 최영인 (이보영) 전 애인 역
  • 오태곤 . . . . 1회 일치
         [[2014년]] [[KIA 타이거즈]] [[최영필]]을 상대로 자신의 프로 데뷔 첫 홈런을 뽑아냈다. [[2015년]] [[5월 23일]] [[사직야구장|사직]] [[LG 트윈스|LG]]전에서 3연타석 홈런을 쳐 낼 정도로 장타력을 지닌 선수였다. [[2017년]] [[4월 8일]] [[LG 트윈스]]의 [[진해수]]를 상대로 9회말에 끝내기 홈런을 쳐 낼 정도로 [[LG 트윈스]]를 상대로 찬스에서 강한 면모를 보여 [[LG 트윈스]] 팬들에게 비난을 살 정도였고, 미래를 기대하게 만들었으나 한 달도 못 가 [[kt 위즈]]로 트레이드되었다.
  • 유동근(배우) . . . . 1회 일치
          * KBS <정도전>(2014): 이성계 역. 위화도 회군에서 최영에 승리.
  • 이열희 (1924년) . . . . 1회 일치
         [[1954년]] 군의관으로 재직 중 최영보 중령(국군제1병원 외과부장겸 수련부장), 오상근 대위(국군제1병원 정형외과 과장), 허경발 대위(주한미군의무관실 연락장교) 등의 주선과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 [[한국]]의 치과 군의관 신분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의 [[성형외과]] 수련 과정을 이수하고 귀국하였다.
  • 이인민 . . . . 1회 일치
         공민왕 9년(1360년) 문과에 급제, 우왕 9년(1383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관장하고 문하평리 겸 대제학(門下評理兼大提學)에 올랐다. 1388년 최영(崔瑩)ㆍ이성계(李成桂)에 의해 형 [[이인임]](李仁任)이 숙청당하자 이에 연좌되어 유배되었다가 1388년 공양왕의 즉위 이후 석방되어 관작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2년(1390년) 윤이(尹彛)ㆍ이초(李初)의 옥사(獄事)에 관련, 청주옥(淸州獄)에 갇혔다가 이듬해 국대비 왕씨(國大妃 王氏)의 생일에 사면령이 내려져 특사, 풀려났다. 그 뒤 경외종사관(京外從使官)이 되었다가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를 지냈다.
  • 정링컨 . . . . 1회 일치
         * [[SBS]] 《배기완 최영아 조형기의 [[좋은아침]]》
  • 최성원(가수) . . . . 1회 일치
         || '''가족''' || 아버지 최영섭[*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작곡가 겸 지휘자, 한국가곡작곡가협회 부회장 겸 Seoul Green Orchestra 상임지휘자.], 아들 최지훈[* 싱어송라이터 겸 기타리스트.], 딸 최선영[* 스케이팅 코치, 전 스케이트선수.] ||
  • 최창흡 . . . . 1회 일치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최창현 요한]]의 이복 동생이며 [[1839년]]의 [[기해박해]]로 인해 [[1840년]]에 순교한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의 남편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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