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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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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남선 . . . . 24회 일치
         |이름=최남선
         '''최남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 문학가이자 [[대한민국]]의 [[사회 운동|문화운동가]]이다. 본관은 [[동주 최씨|동주]](東州)이다.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설립, 주간잡지 《동명(東明)》을 발행하였고 1924년 《[[시대일보]] (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자금과 총독부의 압력 등으로 폐간, 1925년 [[동아일보]]의 객원과 [[조선일보]] 객원 논설위원을 지냈다. 1927년 총독부의 연구비와 생계 지원 유혹으로 [[조선사편수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친일 성향으로 전향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친일 행적은 적극적인 친일이 아니라는 반론이 1950년대에 [[장준하]] 등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ref name="changs">[[장준하]], 「육당 최남선 선생을 애도함」, 『[[사상계]]』 53호, [[사상계사]], 1957.12.</ref>
         육당 최남선은 [[관상감]] 기사로 근무하면서 [[한약방]]을 경영했던 아버지 최헌규(崔獻圭)와 어머니 진주 강씨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명문이었고 아버지 최헌규는 하급 관리였으므로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으며, 1901년 3살 연상의 부인 연주 현씨(玄氏)와 결혼했다. 스스로 독학으로 한글을 깨쳐 1901년(광무 5)부터 《황성신문》에 글을 투고하기도 했다.
         1907년 5월, 귀국한 뒤 한민족의 시대적 각성을 위한 신문화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인쇄 시설을 구입하여 1907년 11월 [[이광수]] 등과 함께 잡지 [[소년]]지를 창간한다. 소년지에서 그는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였고, 이광수는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대중의 인기를 모았다. 최남선과 이광수가 발행한 잡지 《소년》지는 근대적 종합잡지의 대표적인 잡지이며 어린이, 소년을 대상으로 한 잡지 중 초기작의 하나이기도 하다. 후일 그가 소년 잡지를 창간한 11월 1일이 잡지의 날로 정해지기도 했다.
         최남선은 인쇄시설을 추가로 구비하여 1908년 [[신문관]](新文館)을 창설하였다. 처음 건물과 비용이 넉넉하지 않아 자택에 [[신문관]]을 설립하고 인쇄와 출판을 겸하였으며 후일 사세를 확장하여 [[경성]]시내로 사무실을 옮겼다. 여기서 그는 《대한역사》, 《대한지지》 《외국지지》 등 중요한 책을 출판하였으며, 새 시대의 주인공을 위하여 1908년 최초의 종합 잡지인 《[[소년 (잡지)|소년]]》을 발행하였다. 그는 이 잡지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최초의 신체시를 발표하였으며, 1909년에는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청년 학우회'를 결성하였다. 1910년 3월에는 도산 [[안창호]]와 함께 청년학우회 평사원 겸 변론과장을 지내면서 청년학우회의 노래를 짓는 등 청소년 지도 운동에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체포되어 2년 8개월형을 받아 복역한 뒤 1921년 10월 18일에 가출옥하였다. 그 뒤 변절하였다는 설이 있다. 가출옥 사유는 “청년들을 규합하는 데 대단히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었다. 총독부는 [[조선은행]] 총재 미노베(美濃部俊吉)에게 잡지 《[[동명]]》의 발행 자금을 지원토록 주선하였으며, 그 이유를 최남선의 출판물이 “조선의 사상계의 악화를 구하고, 또 [[진학문]](秦學文)·[[이광수]] 등의 생계비 출처로 삼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장준하]]는 [[사상계]]지 1957년 12월호에 <육당 최남선 선생을 애도함>에서 그의 친일 협력이 본심은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한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요, 항간에 떠도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과는 전면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ref name="changs"/>'라는 것이다. 그의 협력은 어쩔수 없는 것으로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ref name="changs"/>'라는 것이며, 그가 악의를 품고 친일을 했다는 주장에 대해 [[장준하]]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이라며 일축하였다.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는 1943년 11월 24일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전문·대학생들에게 학병에 지원하라는 강연을 했다.<ref name="daedams">[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3/03/2007030300046.html “화랑 사상 지금 부활해도 좋을듯…”] 조선일보 2007.03.03</ref> 당시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 ‘조선화보’(1944년 1월호)에서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사회로 진행된 육당과 춘원의 대담 내용이 기록되었다. 이 대담에서 춘원은 강연회에 대해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라며 “그때의 압권은 최(남선) 선생님의 강연이 아니었을까요”라고 말했다. 육당은 “적어도 천오백 명은 모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며 “일찍이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요”라고 화답했다.<ref name="daedams"/>
         최남선은 “어떤 학자는 ‘(일본)무사도의 연원은 신라의 화랑이 그 토대였다’라는 것을 생각할 정도”라며 한일 양국 공통의 상무(尙武) 정신을 역설했고, 이에 [[이광수]]는 “저 ‘화랑’의 사상이란 오늘날 막 바로 부활시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며 동조했다.<ref name="daedams"/>
         *그의 동생 [[최두선]]이 [[민주당 (1955년)|민주당]]에서 활동하였으므로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에서는 최남선이 친일파라고 공격했다.
         *사후 [[장준하]] 등은 추도사를 통해 그가 자의에 의해 친일하지 않았다며 그를 '우리의가장 친근한 벗이요 경애하는 스승'이라며 그의 업적을 치하하였다. [[장준하]]는 그가 죽자 장례식과 빈소를 방문하였고, [[사상계]]지 1957년 12월호에 <육당 최남선 선생을 애도함>이라는 추도사를 실어 그의 업적과 공적을 추모하였다.
         *[[1973년]] [[고려대학교]] 아시아 문제 연구소에서 《육당최남선전집》을 편찬, 1975년 15권으로 정리 발간되었다.
         최남선은 그는 평생 고전 정리와 주석에 관계된 것 등 다방면에 걸쳐서 국사와 고전 서적의 간행, 복원, 한글 번역 작업을 하였다. 한국 최초의 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창작하는 등 개화기 신문화 운동의 선구자였다. 시조 부흥 운동을 지도하여 최초의 시조 시화집 《백팔번뇌》를 출판하기도 하는 등 신문화와 전통 문화의 과도기를 살았던 인물로서 한국의 신문화 운동에 남긴 업적은 매우 크게 평가되고 있다.
         |장=최남선 :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서 기초자 (박성수)
         또한 최남선의 [[단군론]]은 1926년 3월 3일부터 1926년 7월 25일까지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에 연재된 글인데 특유의 논법에 의거 ‘[[단군론]]’을 내세워 일본인 중심의 [[식민사관]]에 맞서기도 하였다.<ref>「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 단군론의 문헌검색, 김성호 저, 푸른숲(2000년, 43~51p)</ref>
         == 최남선을 연기한 배우들 ==
         {{위키자료집|글쓴이:최남선|최남선}}
         * [http://www.minjok.or.kr/board/downadd.asp?wp_id=239 (hwp) 최남선, 「만주 건국의 역사적 유래」, 1943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행적자료]
         * [http://www.pcic.go.kr:8088/pcic/truthBoard.do?action=view&boardId=bansung&main=truth&sub=bansung&pageIndex=1&searchKey=&searchValue=&articleId=11 최남선, 「자열서(自列書)」, 1949]
  • 홍명희 . . . . 7회 일치
         [[한국]]의 [[소설가]],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 월북 [[북한]] 정치인. 호는 벽초(碧初)[* 뜻은 "[[에스페란토|푸른빛(碧)의 말]]을 처음으로(初) 배운 [[한국인]]". 에스페란토을 상징하는 색이 초록색이라 그렇다.]이다. 춘원 [[이광수(소설가)|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조선]] 3대 [[천재]]'''로 알려진[* 참고로 말하는데, 이 3대 천재라는 것은 대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홍명회, 이광수, 최남선은 같은 시기에 동경유학을 하였고, 양건식과 신형철들이 이들을 동경삼재라고 불렀다.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중에서 유능한 인재들이란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들이 귀국하면서, 잡지 소년에 함께 글을 기고하면서 동경삼재라는 이름은 (일제시대하) 조선삼재로 변했다. 이들은 모두 문인으로, 문학계에서 칭찬 삼아서 붙여준 별명이었던 것 같다. 다만 명칭이 이런 식이라서 그럼 왜 세종대왕이나 정약용 대신에 이런 인물들이 있느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여담]]으로 이 3대천재 드립은 전부 다 홍명희 관련으로 나왔다. 현대에 이 언급을 한 것도 홍명희 평전이었고, 조선삼재 이야기도 홍명희와 [[현상윤]]이 나눈 1940년대 인터뷰에서 나왔다.] 인물로 실제로 이 셋은 죽마고우였으나 앞의 둘은 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데 비해서 홍명희는 변절하지 않지만 월북하여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와 친교를 유지했고, 훗날 [[한국전쟁]] 당시 춘원이 납북되자 그의 신변을 보호했으며 그가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병원으로 이송까지 할 정도로 막역했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친한 만큼 매섭게 이광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야사에서는 이광수가 친일파로 변절하자 홍명희는 이광수의 집 대문 앞에 음식상을 차리곤 곡을 하기 시작했다. 놀란 이광수가 나와서 연유를 묻자 홍명희는 "내 친구 춘원(이광수의 호)이 그만 죽고 말아서 이렇게 곡을 하며 슬퍼하고 있소."라고 대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비슷한 이야기가 꽤 많다. [[최남선]]과 [[정인보]], 최남선과 정인보의 스승인 승려 석전 박한영 간에도 있다. 최남선이 변절한 뒤 정인보(또는 스승 박한영)를 만나자 "나에게 최남선은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오."하고 헤어졌다는 야사.]
         [[한용운]]과도 사이가 돈독하여 이광수, 최린, 최남선 등의 창씨개명 소식을 듣자 한용운을 찾아가 "여보게, 만해. 이런 개같은 놈들을 봤는가?"하고 울분을 토했다. 이에 한용운은 "이보게, 벽초. 그놈들은 개같은 놈들이 아닐세."라고 대답했고 무슨 소리냐고 따져묻는 홍명희에게 "개는 절대 주인을 배신하지 않으니 '''저놈들은 개만도 못한 놈들이 아닌가? 개가 자네 말을 들었으면 무척이나 섭섭해했을 걸세."'''라고 했다. 이에 벽초도 수긍하고 '''개에게''' 사과를 읊조렸다고.
  • 최두선 . . . . 5회 일치
         |친인척= [[최남선]](형)
         본관은 [[동주 최씨|동주]]. 호(號)는 각천(覺泉)이다. [[한성부]] 출생이고 한때 [[철원군 (남)|강원도 철원]]과 [[창원시|경상남도 창원]]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제8대 [[대한민국의 총리|국무총리]]를 지냈으며 [[유엔]]총회 한국대표,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육당 최남선]]의 동생이다.
         그 뒤 형 [[최남선]] 등이 일제 강점기 후반 친일행위를 했다고 비판, 매도되었으나 다행히도 그는 형 [[최남선]]에게 연좌되지는 않았다. 또한 그에 대한 부당한 비판을 우려한 [[김성수 (1891년)|김성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이 그를 각별히 신경쓰고 배려하였다.
         * [[최남선]]
  • 현진건 . . . . 5회 일치
         [[1922년]] 9월에 현진건은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ref>1년에 걸치는 「조선일보」 근무에 대해서 현진건은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이유로는 초기 「조선일보」가 보여준 노골적인 친일신문 표방 태도, 친일 색채가 농후한 발행 주체들이나 수시로 뒤바뀌는 발행인으로 인해 현진건 자신의 소신을 펼치기 곤란했던 점이 지적되고 있는데, 당시 「조선일보」의 친일 분위기에 대해 현진건의 문우였던 박종화는 "월남 이상재 선생 사장과 신석우 부사장, 민세 안재홍 편집국장 등이 취임하기 전의 초기 「조선일보」에는 양심있는 사람으로는 오래 거접(居接)할 것이 아니었다"(박종화, 「빙허 현진건 군(君)」, 『신천지』 1954.10. p.139~140)고 하였으며, 자전적 성격을 띠고 있는 현진건의 「지새는 안개」에는 「조선일보」를 빗대어 아예 "썩은내, 더러운내, 곰팡내, 음탕한내가 감도는 분위기", "도야지(돼지) 우리"로까지 표현하고 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135~136.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최남선]](崔南善)이 만든 동명사(東明社)에 들어간다. 그 다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창간 당시부터 민족적 색채가 농후했고, 역사지향적 성격을 추구하며 「조선통속역사강화」(최남선 저) · 「조선과거의 혁명운동」(문일평 저) 등 유독 국학(國學) 관련 논문이 자주 연재되었던 「동명」에서의 경험은 훗날 「고도순례 경주」, 「단군성적 순례」 등의 민족의식이 농후한 작품을 쓰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9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그리고 11월 13일에 그의 첫 창작집 『타락자』가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발간된다.
         [[1923년]] 2월부터 10월까지 현진건은 『개벽』에 중편 「지새는 안개」를 발표하고, 9월에는 그의 동인지 『백조』에 단편 「할머니의 죽음」을 발표하였다. 「지새는 안개」는 당시의 문인 [[염상섭]](廉想攝)이 "살아있는 춘화도"라 평하고 있을 정도로 정밀하고 세련된 묘사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최남선이 주재한 동인지 『동명(東明)』의 편집동인으로 참여하여, 번안소설 「나들이」를 기고하는 한편으로 1924년 3월 31일에 창간된 「시대일보」(동명사의 후신)에 입사하였다(이때 그의 부인은 병치레로 대구의 친정으로 가 있었고 현진건만 홀로 서울에 남아 있었다<ref>「文壇風聞」 1923년 1월 1일자 『개벽』 제31호.</ref>). [[1924년]] 1월에는 단편 「까막잡기」를 『개벽』 , 2월에 「그립은 흘긴 눈」을 잡지 『폐허이후』에서 발표하고, 이어 다시 6월에 단편 「[[운수 좋은 날]]」을 『개벽』에 발표한다. 또한 4월 2일부터 5일까지 「시대일보」 지면에 소설 「발(簾)」을 연재했다.
         [[1926년]] 1월에 현진건은 『개벽』에 평론 「조선혼(朝鮮魂)과 현대정신의 파악」을 기고하였다. 이 평론은 오늘날 현진건이 가진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 것으로 평가받는다.<ref>현진건이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을 실을 무렵에 기자로서 재직하고 있던 「동아일보」에 현진건이 「시대일보」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최남선이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으로 있었던 점을 지적하고, 최남선이 당시 주창한 '조선주의'가 현진건의 '조선혼' 주창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보기도 한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9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2월에는 『조선문단』에 수필 「무명 영웅」을 기고하고, 11월에는 『개벽』에 단편 「사립정신병원장」을 기고하였다. 또한 이 해 3월에 단편집 『조선의 얼골』이 출판사 글벗집에서 간행되었다.
  • 오세창 . . . . 4회 일치
         [[1919년]] [[2월 10일]] [[최린]], [[최남선]] 등이 협의하고,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초안하여 제출하자 그는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내용을 검토하고 그 내용에 동의한다. [[2월 25일]] 오세창은 [[손병희]], 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조선 고종|고종]] 국장에 참배할 목적으로 상경한 [[천도교]]도 박준승(朴準承), 홍기조(洪基兆), 홍병기(洪秉箕),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알리고 이들을 설득하여 찬동을 얻었다. 이때 오세창은 그는 [[천도교]] 월보과장 옥파 [[이종일]](李鍾一)을 설득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1919년]] [[2월 27일]] 오세창은 [[천도교]] 지도자들을 설득, 그들과 함께 [[경성부]] 재동(齋洞)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최종 확인하고 찬동, 민족대표자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 날인한다. 이어 그는 [[최남선]]의 독립선언서 용지 보급과 인쇄 등을 지원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오세창은 [[경성부]]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 요리집에 [[손병희]], [[최남선]] 등 민족대표자들과 함께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데 함께 서고, 대한독립 만세삼창을 외쳤다. 바로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성]]경시청 총감부에 구금되었다. 이후 항소하였으나 유죄 판결을 받았다.
  • 이상백 (1904년) . . . . 4회 일치
         | 친척 = 이동진(할아버지) <br /> 이일우(큰아버지) <br /> [[이상정 (1897년)|이상정]](형) <br /> 한문이(형수) <br /> [[권기옥]](형수) <br /> [[이상화 (시인)|이상화]](형) <br /> [[이상오]](아우) <br /> [[박창암]](조카사위) <br/> [[이열희 (1924년)|이열희]](5촌 조카) <br /> [[최남선]](사돈) <br /> [[박중양]](사돈)
         상백 형제의 할아버지 이동진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대구]]에 신식 학교인 우현서루를 열어 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남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나중에는 교사를 초빙, 수학, 역사, 국어, 영어, 일본어 등 신식 학문을 가르쳤다. 할아버지 이동진의 뒤를 이어 큰아버지 이일우가 우현학교의 일을 맡아보았다.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했는데, [[2000년]]대 초반 그의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학 학장 3명, 교수 10명, 의사 30명, 장군 2명, 언론·출판분야 11명을 배출하였다.<ref name="daemyonh">[http://www.lifemaeil.com/news_view.php?print_no=1540&seq=5570 특집- 상화의 큰 집 사람들] 주간매일 2002년 11월 27일자</ref> 또한 사촌 [[이상악]]은 작가이자 그의 친구인 육당 [[최남선]]과 사돈이 되었고, 다른 자손들 중에는 '박작대기' [[박중양]] 집안과도 인척 관계를 형성하였다.<ref name="daemyonh"/>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이일우에 의해 양육되었다.
         * 사돈 : [[최남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
         * [[최남선]]
  • 이열희 (1924년) . . . . 3회 일치
         그의 큰아버지 이상악의 딸은 육당 [[최남선]]의 아들과 결혼하여 사돈을 맺었다. 이 인연으로 이상악의 조카이자 이열희의 사촌인 이합희는 육당 [[최남선]]이 만든 문예지 '소년'의 출판사인 동명사에서 장기간 부사장직을 맡는다.<ref name="daemyonh"/>
         * [[최남선]]
  • 윤덕주 (농구인) . . . . 2회 일치
         * 사돈 : [[최남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
         * [[최남선]]
  • 이갑성 . . . . 1회 일치
         [[3·1 운동]]이 일어날 때는 병원 제약부 담당으로 재직 중 [[민족대표 33인]]에 [[기독교]]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원로격인 33인과 학생들과의 매개 역할을 맡아 학생 시위를 조직했다. [[1919년]] [[2월 20일]] 밤 [[서울]] [[남대문로]]5가의 함태영 집에서 [[함태영]], [[현순]](玄楯), [[안세환]], 오상근(吳尙根) 등과 만나, 3월 1일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2월 22일]] 학생들이 따로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독립선언을 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이를 중지하고 [[손병희]] 등이 주도하는 독립운동 계획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여 성사시켰다. [[2월 27일]] [[박희도 (1889년)|박희도]], [[함태영]](咸臺永),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오화영]](吳華英), 이인한(李寅煥),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박동완(朴東完) 등과 함께 이필주의 집에 모여, [[함태영]]이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한 여러 가지 문서의 초안을 [[천도교]]계 인사 [[최린]](崔隣)으로부터 받아와, 그 취지에 찬성하여 [[기독교]]측의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 날인한다.
  • 최동 . . . . 1회 일치
         최동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교분이 있던 [[개화파]]의 [[박영효]], [[서재필]], 계몽운동 계열의 [[안창호]]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성장해서는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특히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에 크게 영향 받아 본업인 의학 연구 외에 역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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