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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상훈 (국회의원)
         [[태평양 전쟁]] 무렵 [[일제]]가 창씨개명을 요구했을때 그는 [[창씨개명]]을 거절하고 피해 다녔다.
  • 김대중
         하지만 김대중은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였다. 4학년이 되면서 독서로 인해 넓어진 견문 탓에 반일 사상이 생겨나 일본인 학생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전 과목에 걸쳐 성적이 떨어지기도 했으며, 반일 작문이 문제가 됐다.<ref name="벌써 그립다 민족의 영웅 김대중 전 대통령">[http://breaknews.com/sub_read.html?uid=108854§ion=sc1 벌써 그립다 민족의 영웅 김대중 전 대통령] 브레이크뉴스 2009.08.25일자</ref> 일본의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미국 해군]]의 해상 봉쇄 정책으로 인해 여행 허가가 어려웠고 이에 학비가 무료인 [[만주국]]의 [[건국대학 (만주국)|건국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고려해 봤지만 진학해봐야 일본군에 징집이 될 것이 뻔하다는 2가지 이유에서였다.<ref name="벌써 그립다 민족의 영웅 김대중 전 대통령"/><ref name="1999년 김대중 자서전">{{서적 인용|제목=김대중 자서전 -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저자=일본NHK취재반|출판사=인동|연도=1999|isbn=9788995019405}}</ref> 15세가 되던 [[1938년]]에 '''도요타 다이쥬'''({{llang|ja|豊田大中}})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일본에 올 때마다 상업학교 시절 은사에게 이 이름을 사용했다고 [[아사히 신문]]은 보도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077661 말뿐인 '정쟁 중단' 與 '친일 시비' 잇단 공격]</ref>
  • 김성수 (1891년)
         한글학회 학자들에게 조용히 자금도 대주고 지원해 주었고, 연세대 한글 학자 외솔 최현배는 '인촌을 울다'라는 기고를 통해서 그내용을 말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창간 후에는 문맹퇴치에 목표를 두고 많은 기획들을 실천했다. 한글을 좀더 아름답게 문법도 발전시키도록 한글학회 학자들과 연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중에 일제 식민정부는 많은 압박을 가했지만 지혜롭게 대처도 하고 폐간도 방어해 나가면서 우리나라와 민족의 문화적 지도자로서 고뇌하면서 나라를 지켜나가셨다. 일본 내선일체 정책인 창씨개명에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고 일본 이름만은 끝까지 만들지 않았다. 늘 드러나지 않게 은미하게 교육인으로서 지내고 싶어했으며 고려대학교는 직접 경영도 하면서 학교에 애착을 갖고 돌보셨다. 세계의 명문대들을 둘러본 후에 고려대학교 건물 모양을 듀크대학교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그 모습으로 미학적으로 학교건물도 짓고 손수 나무도 사재로 심고 가꾸면서 교육인으로 살고자 했다. (참고문헌:Choong Soon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8)
         {{본문|창씨개명|조선어학회 사건}}
         [[1940년]] [[8월 10일]]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폐간시키자,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1945년]] [[8.15 광복]]때까지 칩거,은거하였다.<ref name="동아일보"/>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조선총독부|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또한 일제가 제안한 귀족원(상원의원)을 거절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2033698 "교학사의 '김성수'서술, 위키백과와 90% 동일"]</ref>
         {{출처|날짜=2013-09-06|한편 그는 [[1941년]]부터 [[이승만]]이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에 출연하자,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여운형]], [[안재홍]], [[장택상]], [[윤치영]] 등과 함께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하기도 했다. [[창씨개명]]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창씨를 거절했다. [[1942년]] 이후 그는 요시찰인물 2급으로 분류되어 감시와 내사를 당했다.}}
         {{출처|날짜=2013-09-06|학생들의 [[창씨개명]] 거부와 [[학도병]] 징집 거부가 이어졌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대로 행동하라며 이들의 창씨 거부와 학도병 징집 회피, 징집 거부를 방관하였다.}}
         반면, 김성수는 [[이광수]]나 [[서정주]]와는 달리 총독부의 [[창씨개명|창씨개명(創氏改名)]] 요구에 대해서는 끝까지 거부했고, 일제로부터 훈장이나 작위를 받은 경력은 없다.<ref name=autogenerated2 />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에 김성수는 "警察(경찰)의 迫害(박해)를 면하고 身邊(신변)의 安全(안전) 또는 地位(지위), 事業(사업) 等(등)의 維持(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 다닌 者"로 [[유억겸]]과 함께 분류되었다.<ref>[http://db.history.go.kr/front2010/srchservice/srcFrameSet.jsp?pSearchWord=%EA%B9%80%EC%84%B1%EC%88%98&pSearchWordList=%EA%B9%80%EC%84%B1%EC%88%98&pSetID=-1&pTotalCount=0&pSearchType=1&pMainSearchType=2&pQuery=%28BI%3A%28%EA%B9%80%EC%84%B1%EC%88%98%29%29&pSearchClassName=&oid=&url=&method=&lang=&code=&searchword=&return= 한국사 데이터베이스]{{깨진 링크|url=http://db.history.go.kr/front2010/srchservice/srcFrameSet.jsp?pSearchWord=%EA%B9%80%EC%84%B1%EC%88%98&pSearchWordList=%EA%B9%80%EC%84%B1%EC%88%98&pSetID=-1&pTotalCount=0&pSearchType=1&pMainSearchType=2&pQuery=%28BI%3A%28%EA%B9%80%EC%84%B1%EC%88%98%29%29&pSearchClassName=&oid=&url=&method=&lang=&code=&searchword=&return= }}</ref> [[1937년]] 도산 [[안창호]]가 고문후유증과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중일 때 안창호의 가족들이 그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했을 때 김성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거절하였다가 뒤로 몰래 사람을 보내 거액의 자금을 도산 안창호에게 전달했다는 증언이 있다.<ref name=autogenerated2 /> [[유진오]]는 그의 회고록 《양호기》에서 김성수의 이름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학도병' 기사는 매일신보사 기자 김병규가 유진오와 상의한 뒤에 대필하여 승인을 받은 글이라 주장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137페이지</ref><ref>《양호기》,[[유진오]] 저. p90~p110 참조.</ref>
         * [[1942년]] [[창씨개명]] 요구가 들어왔으나 거절하였다. [[태평양 전쟁]] 권고 협조가 들어왔으나 그는 병으로 거절하고 피신해 다녔다.
  • 박문웅(1890)
         [[1940년]] [[판임관]] 5등이 되었다. 그해 [[5월]]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그해 [[9월]] 박충으로 창씨개명하였다. [[1941년]] 다시 청도군수가 되었다가 [[1942년]] [[판임관]] 4등으로 승진하였다. [[1943년]] [[영천]][[군수]]가 되었다가 그해 [[3월 6일]] [[상주군|상주]][[군수]](尙州郡守)로 부임하였다. [[1943년]] [[8월 2일]] 각 도별로 [[일본적십자사]] 녹사(日本赤十字社錄事)를 선발할 때 [[경상북도]] 지역구 [[일본 적십자사]] 녹사의 한사람으로 선임되었다. [[12월 31일]] [[고등관]] 3급으로 승진하였다.
  • 박서양 (1885년)
         [[1940년]] [[창씨개명]]이 강요되자 그해 [[8월 1일]] 성을 우에노(植野)로 개명하였다.<ref>대한의사학회, 《의사학 제15권 제2호:통권 제29호 (2006년 12월호》 (대한의사학회, 2006) 248페이지</ref>
  • 배은희(1888)
         1888년 [[경상도]](현 [[경상북도]]) [[경산시|경산현]]에서 태어났다. [[종교]]는 [[개신교]]이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활동하였는데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다.
  • 신격호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33118|오마이뉴스]] 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창시개명당시 영월 신(寧越辛)씨는 중광(重光; 시게미츠), 신도(辛島; 카라시마)'로 바꿨다는 기록이 있다. '영월 신씨'는 영산 신씨에서 분관한 것으로, 영산 신씨인 신격호의 아버지 역시 '시게미츠'로 창씨 개명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신격호 회장도 일본에서 창씨개명으로 바뀐 성씨를 그대로 썼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또한 많은 '''신씨 성을 가진 조선인들이 시게미츠 성씨를 선호한 것으로 나타나''' 원래의 시게미츠 가문이 시게미츠 성씨를 못쓰게 막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신(辛)씨가 중광(重光)으로 성씨를 바꾼 가장 큰 사유는 바로 [[고갑자]]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10간 중 하나인 辛에 대응하는 글자가 바로 重光이기 때문이다.
          * '시게미츠'는 [[신격호]]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부터 [[창씨개명|조선에서 사용하던 성씨]]다. 『신격호의 비밀』의 저자 정순태도 그 책에서 "울산 삼동초등학교에 답사 갔을 때 봤던 졸업생 목록에 '중광무웅'(시게미츠 타케오)이라는 이름이 있었다"며, 이 설이 신빙성 없는 카더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 안석주 (작사가)
         '''안석주'''(安碩柱, [[창씨개명|일본식 이름]]: 安田 榮 <small>야스다 사카에</small>, [[1901년]] [[4월 10일]] ~ [[1950년]] [[2월 24일]])는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삽화가]], [[만화가]], [[작가|문학가]], [[영화 각본|영화 각본가]] 겸 [[영화 감독]]이다. 호가 "석영"(夕影)이라 '''안석영'''으로도 불린다.
  • 윤영선 (1896년)
         [[1939년]] [[유일한]] 등이 설립한 [[유한양행]]의 주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40년]] [[조선 총독부]]에 의해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그의 문중은 성을 '이토'(伊東)로 개명하였다. 그도 문중을 따라 이토 나가젠(伊東永善)으로 창씨개명하였다. 그러나 별도의 정치적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농장과 목장, 양잠업에 종사하였다. [[1940년]] [[7월]] 주식회사 [[경인기업]](京仁企業)의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그 밖에 목장과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 [[창씨개명]]
  • 윤치영
         {{본문|태평양 전쟁|창씨개명}}
         [[1940년]] [[1월]] 그의 문중에서 [[창씨개명]]을 할 것인가 여부를 놓고 토론하였다. [[1월 7일]] [[윤치소]], [[윤치호]], [[윤치왕]], [[윤치창]] 등과 함께 형 [[윤치오]]의 집에 모여 창씨개명 문제를 논의했다. 치창, 치왕, 치오 등은 아이들을 위해 창씨개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치영은 창씨개명을 완강히 반대했다.<ref name="윤치호 일기 p.452">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 역, 역사비평사, 2001) 452페이지</ref> 형제들과 사촌들, 조카들 등이 참여한 문중 회의에서 그는 "[[이승만]] 박사 등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조선의 독립은 달성될 것이다" 라는 견해를 피력했지만 묵살당했다. 그는 문중의 창씨개명 시도를 반대하고 저항하였지만, 문중 총회에서 창씨개명은 결정되었고 그도 본인 의사와 관계 없이 창씨개명을 하게 되었다.
         ===== 창씨개명 =====
         {{참고|창씨개명|단파방송 밀청 사건}}
         [[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제의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는 조선 사회에 논란이 되었다.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다. 그런데 그가 뒤이어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면 흐뭇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ref name="윤치호 일기 p.452"/> 총독에게 아부하는 조선인 지식인들은 당연한 것이라며 총독을 추켜세웠다.
         [[1월 7일]] 사촌 형 [[윤치호]]는 첫째 형 [[윤치오]]의 집으로 형제와 사촌들을 소집했다. 그날 오후 3시 30분 [[윤치호]], [[윤치소]], [[윤치왕]], [[윤치창]] 등과 함께 윤치오 집에 모여 창씨개명 문제를 논의했다. 윤치창, 윤치왕, 윤치오는 아이들을 위해 창씨개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윤치영은 창씨개명을 완강히 반대했다. 윤치소는 아직 그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ref name="윤치호 일기 p.452"/> 당시 윤치영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의 외교적 노력이 달성된다면 일본의 패전은 시간 문제이고, 해방은 멀지 않은 미래에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곧 독립이 된다는 윤치영의 말은 묵살당했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결정된 것은 없었고 윤치호는 고민하였다.
         윤치영은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며 창씨는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해 [[4월]]에 열린 [[해평 윤씨]] 문중의 문중회의 결과 창씨개명을 하기로 결의되었고, 문중회의에서 창씨 성을 이토(伊東)로 하기로 정해지자 결국 그는 이토 치에이로 창씨 개명한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창씨개명]]에 반대했다는 점<ref name="윤치호 일기 p.452"/>, [[이승만]]과 연락하면서 일제의 패망을 주장했다는 점 등이 지목되고 있다. 또한 당시 칼럼을 기고한 것은 명의 도용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도용된 동양지광에 실린 글에 그는 [[창씨개명]]이 실리지 않고 본명인 '윤치영'으로 게재<ref>미영타도 좌담회, 《동양지광》 1942년 2월호</ref> 되었다.
         === 창씨개명에 대한 저항 ===
         윤치영은 창씨개명을 단행한다고 하자 강하게 반발했다. 여러 사람의 중의에 의해 밀리게 되었지만, 그는 자기 고집을 꺾지 않고 반드시 조선의 독립은 이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창씨개명 후에도 창씨한 이름을 잘 쓰지 않았는데, 1942년의 미영타도 좌담회에 연사로 참여했을 때는 자신의 이름 윤치영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미영타도 좌담회에 참여한 다른 인사들은 대부분 창씨개명한 이름을 사용했다.
         [[1940년]] [[1월]] 문중에서 [[창씨개명]]을 단행하는 문제를 두고 회의를 했다. 이때 윤치영은 [[창씨개명]]을 완강히 반대했다.<ref name="윤치호 일기 p.452"/> 그해 [[5월]] 문중에서 공적으로 이토 로 창씨하자, 윤치영은 조선은 반드시 독립될 것이라며 이 결정은 잘못된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창씨개명을 한 후에도 창씨 성을 사용하지 않고 윤치영이라는 [[한국]]식 성명을 고집했다. 이는 [[1941년]]의 [[동양지광]] 주최 [[미영타도 좌담회]]에서도 나타났다. 다른 참석자들은 [[창씨개명]]한 성명을 썼지만 윤치영은 홀로 윤치영이라는 조선식 성명을 썼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개최식 때도 항상 그는 창씨명을 쓰지 않고 윤치영이라는 본명을 고집했다.<ref>매일신보, 1941년 10월 23일자, 2면</ref> 이후 임전보국단 행사에 불참했지만 그는 명단을 올리려거든 윤치영으로 올리라며 자신의 본명을 고집했다.
  • 윤태동
         尹泰東 ([[창씨개명|창씨명]] 倉內善藏)
  • 의친왕
         [[1919년]] 재판에 회부됐으며, 그는 같은 해 대동단 총재명의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하기도 했다.<ref name="hankooki">[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907/h2009072403120184800.htm 황손 이석씨 "아버지 의친왕 진면모 알려지길…"]{{깨진 링크|url=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907/h2009072403120184800.htm }} - 한국일보</ref> 이후,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 강요를 받았던 그는 끝까지 거절·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으며 [[일본 제국|일제]]에 의해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공족에서 강제로 물러났으며,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의친왕은 이후 광인과 주색에 빠진 것을 가장하여 [[일본 제국|일제]]의 감시의 눈을 피해 살았다. [[1940년]]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다.
  • 이갑성
         }}</ref> 이갑성은 민족대표 33인 중 [[최린]], [[정춘수]]와 함께 [[창씨개명]]을 한 세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 이경희 (1880년)
         [[대종교]]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로 신자들은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당했으나 그는 개종을 거부하였다. [[1939년]]부터 [[창씨개명]]령이 나오고 [[1940년]]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경희는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1942년]] 여름 [[경성부]] [[돈암동]]을 떠나 대구로 내려가 야산에 숨어 밭을 갈고 농부로 생활하였으며, [[항일 단파 방송]]인 [[미국의 소리]] 방송을 비밀리에 밀청하고 해방을 예상하였다. 이때 그 몰래 그의 부인 조씨가 [[청도군]]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둘째 사위에게 [[보리쌀]]을 얻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 이상백 (1904년)
         그후 제11회 도쿄 올림픽 대회 유치위원과 준비위원으로 미국, 영국, 독일, 스위스, 프랑스, 스웨덴, 핀란드, 폴란드 등을 방문하여 대회 유치와 준비에 협조를 구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체육계의 공로자로 칭송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에는 모교인 [[와세다 대학]] 재외특별연구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동양학을 연구했으며,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였으나 도쿄 올림픽 유치와 추진의 공로로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했다. [[1944년]]에는 [[여운형]]이 결성한 지하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 이운형
         1930년 평양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하고<ref>[http://www.cportal.co.kr/bbs/board.php?bo_table=dic&wr_id=17039&sca=%EC%9D%B8%EB%AC%BC&sfl=wr_subject&stx=%EC%9D%B4%EC%9A%B4%ED%98%95&sop=and 크리스천포털 인물정보]</ref>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영주읍교회(현 영주제일교회) 등에서 목사로 시무했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다시 투옥됐다.<ref>[http://tv.sarang.org/menu02/print.asp?db_idx=11583 사랑의 교회 인터넷 사역실]</ref> 광복 이후 [[대구]] [[계성학교]] 교목으로 근무했다.<ref>[http://www.pckworld.com/news/articleView.html?idxno=35886 기독공보-신앙의 가족, 사랑을 엮다]</ref> 1972년 미국 [[시카고]]에서 사망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ref name="보훈처" />
  • 이충영(법조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대구광역시|대구부]], [[함흥부]], [[광주광역시|광주부]], [[평양부]]의 복심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하다가, 1940년대 초반 [[변호사]]로 전직했다. 평양복심법원을 끝으로 판사직에서 사임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가족들은 이충영이 [[창씨개명]]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변호사 개업 허가도 받지 못했다고 밝혔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중 사법 부문에 포함돼 있다.
  • 현제명
         국내에서는 '''희망의 나라로'''를 작곡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친일 행적을 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서 [[논란]]에 휩싸였다. 결국 [[친일인명사전]]의 인명부에도 현제명이라는 이름이 올려져 있었다. 게다가 [[창씨개명]]에도 적극 동참해서 '''구로야마 즈미아키(玄山濟明)'''으로 [[개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일단 이노래는 1931년에 작곡 되었고, 친일로 변질했을때는 1937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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