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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
         동원령 2단계. 모병제. 현실의 예시로는 현대의 [[중국]]과 [[일본]].
         프랑스가 독일에게 발리고 강화조약을 맺으면 인도차이나 연방의 소유권을 넘겨 받을 수 있는 디시전이 발동한다. 이러면 미국의 "대일본 최후통첩" 디시전이 해금되는데, 미국은 중일전쟁과 그에 딸린 각종 이벤트 때문에 일본을 싫어할게 뻔하므로 이 디시전을 발동한다. 최후통첩을 받아들이면 미국의 애완견[* 민주화, 중국 지역을 중화민국에게 반환, 모든 괴뢰국 해방, 한반도가 대한민국으로 독립, 영미와 군사 통행권&불가침 조약 체결, 불만도 +20%, 미국의 괴뢰국화.]으로 전락한다. 인공지능이 잡을 경우 100% 미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에게 엠바고 처먹기를 선택하고, 이후 "진주만 공습" 디시전을 갈긴다.
         연합군에게 항복하는 조건과 중국군에게 항복하는 조건이 다르다. 연합군에게 항복하는 조건은 본토에 핵공격을 두번 이상 당하거나 본토에 연합군이 상륙했을 경우.
         1937년 쯤에 일본이 "마르코 폴로 다리" 디시전을 발동시켜 중일전쟁을 일으키는데, 이러면 "국공합작" 이벤트가 발동되어 산서성 군벌과 광서성 군벌이 중화민국에 합병되고 중국 공산당도 중화민국과 동맹을 맺는다. 맨날 그런건 아니고 공산당이 튕기거나 할 때도 있다. 보통 이 경우 일본과 투닥거리다가 평화협상 맺고 구경한다. 아오 저 빨갱이놈들 ㅂㄷㅂㄷ.
          중국 남부를 지배하는 중화민국의 괴뢰국. 1936년 말에 이벤트로 해안지방을 뜯기고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중화민국에게 먹힌다.
  • EXO
         | 국가 = {{국기나라|대한민국}} <br/> {{국기나라|중국}}
         데뷔 미니앨범인 《MAMA》는 2012년 4월 8일에 발매되었고,<ref>{{뉴스 인용| work=Allkpop | url=http://www.allkpop.com/2012/03/smtown-releases-official-footage-from-exos-showcase-to-officially-debut-on-april-9th-with-mama | title=SMTOWN releases official footage from Exo’s showcase, to officially debut on April 9th with «MAMA» | date=2012-03-31 | accessdate=2012-04-24}}</ref><ref>{{뉴스 인용|work=뉴스엔|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04090834051002|title=SM신인 EXO 오늘(9일) 데뷔앨범 발매, 가요계 돌풍 임박|date=2012-04-08|accessdate=2012-04-30|확인날짜=2012-04-30|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0730203329/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04090834051002|보존날짜=2017-07-30|깨진링크=예}}</ref> [[EXO-M]]의 버전은 출시 하루만에 [[중국]]의 음악 차트 정상을 차지했으며, [[EXO-K]]의 《MAMA》 뮤직비디오는 [[유튜브]]의 글로벌 차트에서 7위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제목= EXO-K 'MAMA' 뮤비, 유투브 세계차트 7위…'REEEED VELVET 대형 신인' 탄생예감|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2246778&viewType=pc|출판사=한국일보|저자=한수연 기자|날짜=2012-04-09}}</ref><ref>{{뉴스 인용 | url=http://global.mnet.com/news/newsdetail.m?searchNewsVO.news_id=201204091703_5307 | title=EXO-K’s Music Video Comes In Seventh on Youtube Chart | publisher=Mnet | date=2012-04-09 | accessdate=2012-04-13 |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4104616/http://global.mnet.com/news/newsdetail.m?searchNewsVO.news_id=201204091703_5307 | 보존날짜=2016-03-04 | 깨진링크=예 }}</ref>
         1월, [[SM 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대표는 3월에서 4월쯤에 신인 남성 그룹을 데뷔시키는 계획을 언론에 공개했다.<ref name="predebut1">{{뉴스 인용| work=DC News| title=S.M. to debut a new male idol group | url=http://www.dcnews.in/news_list.php?code=ahh&id=613609 | date=2011-01-28 | accesdate=2012-04-30}}</ref><ref>{{뉴스 인용|제목 = SM 보이그룹 vs YG 걸그룹, 내년 新아이돌 자존심 성대결|url =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111141725051002|출판사 = 뉴스엔|날짜 = 2011-11-14}}</ref><ref>{{뉴스 인용|제목 = SM 신예 2팀 드디어 출격..샤이니 이후 4년만 `기대`|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18&aid=0002536185&viewType=pc|출판사 = 이데일리|저자 = 조우영 기자|날짜 = 2011-12-22}}</ref> 뒤이어 5월 [[이수만]]은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열린 '한류 비즈니스 세미나'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새로운 [[음악 그룹|남성 그룹]]에 대해 한 그룹을 두 개의 유닛 그룹으로 분리하는 자신의 전략을 설명하고, 그들이 [[한국어]]와 [[중국어]]로 같은 노래를 불러 각각 [[한국]]과 [[중국]]에서 앨범을 발표하고 활동한다고 발표했다.<ref name="leepress">{{뉴스 인용| work=Nate.com |title=SM's Lee Soo-man annunces new boy band | url=http://news.nate.com/view/20110509n18306 | date=2011-05-09 | accessdate=2012-04-15}}</ref> 그룹의 이름은 일시적으로 K와 M으로 불리었고, K는 [[한국인]] 8명과 M은 [[중국인]] 4명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알려졌다.<ref name="predebut2">{{뉴스 인용| work=Allkpop | title=Practice photo of SM Entertainment’s upcoming boy group "M1″ leaked! | url=http://www.allkpop.com/2011/03/practice-photo-of-sm-entertainments-upcoming-boy-group-m1-leaked | date=2011-03-22 | accessdate=2012-04-09}}</ref>
         12월에, 그룹의 이름은 태양계 외행성의 'Exo Planet'에서 따온 '''EXO'''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유닛 그룹은 'Korean' 에서 이름을 따온 [[EXO-K]]와 [[중국]]에서 활동하는 유닛 그룹은 표준 중국어를 의미하는 'Mandarin'에서 따온 [[EXO-M]]으로 이름을 확정하였다. 팬클럽 이름 EXO-L 은 영어 알파벳에서 K와 M 바로 사이에 있는 L로 선정 한 것으로, EXO-K, EXO-L, EXO-M 이 함께 있어야 알파벳 즉, 엑소가 완성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카이, 루한, 타오, 세훈, 레이, 시우민, 디오, 수호, 크리스, 첸, 백현, 찬열순으로 공개가 되었다.<ref name="kai">{{뉴스 인용| work=Allkpop | url=http://www.allkpop.com/2011/12/sm-introduces-new-boy-group-member-kai | title=SM introduces new boy group member, KAI | 날짜=2011-12-22 | 확인날짜=2012-04-09}}</ref>
         1월 30일, EXO는 첫 번째 프롤로그 싱글 《What Is Love》의 한국어와 중국어 버전 곡이 공개되었고, 이후 3월 9일, 두 번째 프롤로그 싱글 《HISTORY》의 한국어와 중국어 버전 곡이 공개되고,<ref>{{보도자료 인용| url=https://www.facebook.com/notes/smtown/the-prologue-single-ii-history-of-sms-new-groups-exo-k-and-exo-m-will-be-release/345653588810815 | title=The Prologue Single II ‘HISTORY’ of SM’s New Groups, EXO-K and EXO-M, will be Released on the 9th at 00:00 a.m.! |publisher=SM Entertainment |date=2012-03-26 | accessdate=2012-04-24}}</ref> 각 두 팀의 구성원도 공개되었다. 이렇게 총 23편의 티저 영상과 두 개의 프롤로그 싱글을 공개한 EXO의 쇼케이스 소식이 3월 23일 알려졌다.<ref>{{뉴스 인용|제목 = '대형신인' 엑소, 4월 론칭 앞두고 한중 쇼케이스 개최|url = 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209143|출판사 = TVREPORT|날짜 = 2012-03-23}}</ref>
         EXO는 3월 31일, [[서울특별시|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4월 1일에는 베이징 대외경제무역대학교 대극장에서 쇼케이스를 개최하였는데,<ref name="bshowcase">{{뉴스 인용| work=Sina.com | url=http://ent.sina.com.cn/s/j/2012-04-01/21493596302.shtml | title=S.M.'s new group Exo first press conference in China | date=2012-04-01 | accessdate=2012-04-13 | language=중국어}}</ref> 한국 쇼케이스가 열린 3월 31일은 EXO가 처음으로 공개된 지 100일이 되는 날이었다. EXO는 쇼케이스에서 데뷔 앨범의 타이틀 곡 «MAMA»의 무대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SM 쇼케이스에는 신인그룹으로는 이례적으로 8000명이 관람을 신청하였으며, 이 중 추첨을 통해 3000명의 팬들이 초대되었다.<ref name="showcase">{{뉴스 인용| work=Korea.net | url=http://www.korea.net/NewsFocus/Daily-News/view?flag=2&articleId=378 | title=Exo debuts in front of 3000 fans | date=2012-04-01 | accessdate=2012-04-13}}</ref>
         5월, [[SM 엔터테인먼트]]는 EXO의 컴백 앨범이자, 첫 번째 정규 앨범 《[[XOXO (KISS&HUG)|XOXO]]》의 티저 사진을 공개했다. [[EXO-K]]와 [[EXO-M]]은 따로 활동을 했던 «MAMA»의 프로모션과는 달리, 완전체로 활동을 발표했다.<ref>[http://www.allkpop.com/2013/05/exo-reveals-yearbook-like-teaser-photos-for-comeback-with-xoxo]</ref> 하지만 앨범의 타이틀 곡 "늑대와 미녀(Wolf)"만을 EXO 멤버 전체가 같이 부르고 한국어 앨범과 중국어 앨범의 수록곡은 EXO-K와 EXO-M 개별적으로 불렀다.<ref>{{웹 인용|url=http://www.allkpop.com/article/2013/06/exo-finally-drop-their-1st-full-album-xoxo-was-it-everything-you-waited-for | title=EXO finally drop their 1st full album 'XOXO' | publisher=allkpop |date= 2013년 6월 3일|accessdate=2013-05-04|author=Nefa}}</ref>
         《XOXO》는 두 가지 버전인 《Kiss》(한국어 앨범)과 《Hug》(중국어 앨범)으로 나뉘어 발매되었다.<ref>{{인용|title=EXO Decorates Several Music Charts with ‘XOXO’|url=http://enewsworld.interest.me/enews/contents.asp?idx=37696&idxType=News|accessdate=2013-06-04|newspaper=enewsWorld|date= 2013년 6월 3일|author=Grace Danbi Hong}}</ref><ref>{{인용|title=EXO′s ′XOXO′ Gobbles Up Top Spots on Album Charts|url=http://enewsworld.interest.me/enews/contents.asp?idx=37767&idxType=News|accessdate=2013-06-04|newspaper=enewsWorld|date= 2013년 6월 4일|author=Jeon Su Mi & Erika Kim}}</ref> 그들은 "늑대와 미녀(Wolf)"로 지난 2012년 데뷔 이래 대한민국 음악 방송에서 첫 1위를 차지했다.<ref>{{뉴스 인용|제목 = 엑소, '늑대와 미녀'로 지상파 음악프로 1위 점령… '대세 입증'|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311&aid=0000229951&viewType=pc|출판사 = 엑스포츠뉴스|저자 = 김영진 기자|날짜 = 2013-06-17}}</ref><ref name="showchamp">{{뉴스 인용| author=jennywill | work=Allkpop | url=http://www.allkpop.com/article/2013/06/exo-take-home-the-show-champion-trophy | title=Exo take home the 'Show Chamption' trophy | date=2013-06-19 | accessdate=2013-08-13}}</ref>
         EXO는 《XOXO》에 이어 겨울 스페셜 앨범이자, 미니 앨범 《[[12월의 기적 (Miracles In December)]]》을 12월 9일에 발매 했다.<ref name="midrelease">{{뉴스 인용| work=Allkpop | url=http://www.allkpop.com/article/2013/12/exo-ring-in-the-season-with-miracles-in-december-mv#axzz2mXbvsbIb | title=EXO ring in the season with 'Miracles in December' MV | date= 2013년 12월 4일 | accessdate= 2013년 12월 4일}}</ref> 타이틀 곡은 멤버 백현, 첸, 디오(D.O.)의 3명이 참여하였으며, 중국어 버전에는 멤버 첸, 백현, 루한의 3명이 참여했다.<ref>{{뉴스 인용| work=Allkpop | url=http://www.allkpop.com/article/2013/12/exo-reveals-romantic-and-bittersweet-mv-teaser-for-miracles-in-december | title=EXO reveals romantic and bittersweet MV teaser for Miracles in December | date=2013-12-02 | accessdate=2013-12-03}}</ref> 판매량은 40만 장을 기록했다.<ref name="presales">{{뉴스 인용| work=Kpopstarz | url=http://www.kpopstarz.com/articles/68830/20131209/exo-special-album-miracles-of-december-receives-over-400-000-pre-order-sales.htm | title=EXO Special Album, 'Miracles of December' Receives Over 400,000 Pre-Order Sales | date=2013-12-09 | accessdate=2013-12-10}}</ref>
         4월 15일, EXO는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삼성뮤직과 함께하는 컴백 쇼케이스를 갖고 미니앨범의 타이틀 곡 ''중독(Overdose)''을 공개했다.<ref>[http://www.allkpop.com/article/2014/04/exo-to-return-with-title-track-overdose]</ref> 또한, 쇼케이스는 삼성뮤직을 통해 온라인으로 실시간 생중계 되었다.<ref name="newsmp">{{뉴스 인용| author= | work=Soompi | title=EXO Holding Comeback Show Today | url=http://www.soompi.com/2014/04/14/exo-holding-comeback-show-today-livestream-links-inside/#.U0zzNfmqlOI | date=2014-04-15 | accessdate=2014-04-15}}</ref> [[EXO-K]]는 애당초 4월 18일 《[[뮤직 뱅크]]》에서 컴백 무대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세월호 사건]]의 여파로 컴백 일정이 갑자기 변경되었다. [[EXO-M]]은 예정대로 4월 19일 중국 음악 방송에서 컴백 하였다.
         10월, 지난 5월 자신의 전속계약 무효 소송을 접수한 EXO-M의 전 멤버 크리스에 이어 5개월 만에 멤버 [[루한]]은 소속사 측이 미래의 발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고, 이어 중국인 멤버 차별 대우, 불합리한 이익 분배, 고강도 스케줄 및 스트레스에 따른 건강 이상을 이유로 소속사의 [[SM 엔터테인먼트]]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전속계약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루한 탈퇴, 엑소 향후 활동은? “일본 활동 계획 없어, 10인 완전체 예상” |url=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arcid=0008755242&code=41181611&cp=nv |출판사= 쿠키뉴스 |날짜= 2014-10-13 |확인날짜= 2014-10-13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41018194652/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arcid=0008755242&code=41181611&cp=nv |보존날짜= 2014-10-18 |깨진링크= 예 }}</ref><ref>{{뉴스 인용
         |제목= 엑소 루한 소송, 크리스에 이어 이탈 상황 또 발생 최근 SM엔터테인먼트 연이... |url= http://biz.heraldcorp.com/view.php?ud=201410130917011035575_1 |출판사= 헤럴드POP |날짜= 2014-10-13 }}</ref> 한편 [[중국인]] 멤버들의 연이은 탈퇴에 [[SM 엔터테인먼트]]는 "스타로서 인기를 얻게 되자 개인의 이득을 우선시한 것으로 판단한다, 또한 지난 5월 EXO에서 이탈한 크리스 사건과 같이 소송을 제기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 동일한 법무법인을 통해 동일한 방법으로 패턴화된 소를 제기한다는 것은 그룹 활동을 통해 스타로서 큰 인기를 얻게 되자 소속사를 포함한 모든 관련 계약 당사자들의 이해 관계를 무시하고 개인의 이득을 우선시해 제기한 소송이다"라고 언급하였고, 이외에도 루한이 건강상 이유 및 EXO의 그룹 활동보다 중국 내 개인 활동에 집중하고 싶다는 의사 표현을 해 향후 활동 계획 등을 논의해 나가는 단계에서 급작스럽게 소송을 제기해 매우 당혹스럽고, 중국내 배후 세력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당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중국을 포함한 해외 파트너들 및 법률 전문가들과 함께 적극적이고 다각적으로 대응해 나갈 것이며 EXO의 향후 활동은 차질없이 진행될 것이다"라고 입장을 밝혔다.<ref>{{뉴스 인용
         |제목= ‘중국인 멤버’의 이탈… 中연예기획사가 배후? |url=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2811173&code=13110000&cp=nv |출판사= 국민일보 |날짜= 2014-10-10 }}</ref><ref>{{뉴스 인용
         7월 21일, SM엔터테인먼트와 소송을 진행중이던 크리스와 루한이 합의를 하여 EXO에서 공식으로 탈퇴하였다. 하지만 크리스, 루한, 타오 뿐 아니라 이들의 이탈과 관련된 업체들에게 대상으로 중국 현지 법원에서 14건의 소송도 현재 진행중이다.
         11월 2일, 정규 5집 앨범 《DON'T MESS UP MY TEMPO》으로 컴백하였다. 중국 음원에는 레이도 참여 한다.
  • 간문제
         '''간문제'''(簡文帝)는 [[중국]] [[황제]]의 시호 중 하나이다. 간문황제(簡文皇帝)를 줄여서 간문제로 한다.
  • 강타
         * 2013년 중국 스촨위성TV 《兩天一夜》
         * 2012년 [[중국]] [[SCTV]] 《고추와 김치》 - 강우혁 역
         * 2012년 [[중국]] 영화 《비밀화원》
         * 2011년 [[중화민국|대만]] [[타이완 텔레비전 공사|TTV]] 문예채널 《제금 : 가면의 비밀》 - 중국황제 역
         * 2007년 [[중국]] [[CCTV]] 드라마 《남재여모2》
         * 2007년 [[중국]] [[CCTV]] 특집극 《정가네 여자들 경사 났네》
         * 2005년 [[중국]] [[CCTV]] 드라마 《[[마술기연]]》 - 진슈 역
         * 중국 오우더리
         * 2004년 중국 금호상 시상식 최고 해외인기가수상
         * 2003년 [[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골든디스크 시상식 ‘해외음반특별상’ 수상
         * 2003년 중국 '사스퇴치 기념 공연'- [[대한민국|한국]], 중국 정부 감사패 수상
  • 경관
         고대 [[중국]]의 풍속. 전투에서 승리한 뒤, 패배한 적의 시신을 무더기로 쌓아서 기념물로 삼는 유적.
  • 고구마
         중국의 고구마 꽃.
         한반도엔 고구마가 조선 시대에 중국 문헌으로부터 감저(甘藷)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고구마 재배법을 기록한 [[서경창]]의 《종저방》(種藷方, 1813)에 따르면 늦어도 광해군 때 고구마를 들여왔으며 1633년(인조 11년) [[비변사]]에서 고구마를 보급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ref>{{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id=E0027593|제목=서경창(徐慶昌)}}</ref>
         고구마는 조선 초기 [[본초강목]]과 같은 중국 문헌에 의해 감저(甘藷)로 알려졌다. ‘고구마’라는 이름은 일본어의 음차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ref name="김무림"/> 조엄이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가 지내면서 쓴 [[해사일기]](1763~1764)에는 ‘이름은 감저라 하는데 孝子麻라고도 하며 일본 발음은 고귀위마(高貴爲麻)이다(名曰甘藷 或云孝子麻 倭音古貴爲麻)’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대마도 방언을 기록한 것으로, 지금도 쓰시마 지방에서는 고구마를 고코이모({{lang|ja|孝行芋, こうこいも}})라 부른다. 한글 기록으로는 유희의 《[[물명고]]》(1824년)에 '''고금아'''라는 형태가 등장한다.<ref name="김무림">{{잡지 인용|저자=김무림|제목=‘감자’와 ‘고구마’의 어원|잡지=새국어생활|권=19|호=3|년도=2009|url=http://www.korean.go.kr/nkview/nklife/2009_3/2009_0306.pdf}}</ref>
         [[일본]]에서는 고구마를 [[사쓰마반도|사쓰마 지방]]의 이름을 따 '사쓰마이모({{lang|ja|甘藷, サツマイモ}})'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번서(番薯/蕃薯), 감서(甘薯) 또는 디과(地瓜, 지과)라고 한다.
         * [[훠궈]] - 중국의 요리
         * [[해선장]] - 중국 조미료
  • 고다이고 덴노
         중세 일본의 덴노. 이 무렵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으며 덴노의 조정은 거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고다이고 덴노는 [[중국]]에서 전래된 [[주자학]]에 빠져서 덴노에 의한 직접 통치를 목표로 하였으며, 또한 천황가가 분열하여 양대 종통의 교대 계승이 있던 가운데 '''중간 땜빵'''으로 덴노의 지위에 올려진 몸이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벗어나서 본인의 혈통이 덴노의 지위를 대대로 물려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 고아라
         2007년 [[몽골]], [[일본]] 합작 영화 《푸른 늑대 - 땅 끝 바다가 다하는 곳까지》에 이어 2009년 [[한국]], [[일본]], [[중국]] 합작 영화 《스바루》에 출연했지만, 두 영화는 다소 혹평을 받으며 흥행에는 참패했다.<ref>{{뉴스 인용|제목= 반올림 후 10년..고아라는 왜 이제 시청자 ‘응답’ 받았나 |url=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311270843461910 |출판사=뉴스엔|날짜= 2013-11-27 }}</ref> 이후, 고아라는 2008년에 국내에 복귀해 드라마 《누구세요?》, 2009년 《[[맨땅에 헤딩]]》와 2012년 영화 《[[파파 (영화)|파파]]》, 《[[페이스 메이커]]》등에서 주연을 맡았지만 역시 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아쉬운 반응을 얻었고, 고아라가 어떤 연기를 하든 그녀의 출세작이도 한 《[[반올림]]》속의 '이옥림 같다'는 평과 연기력 논란 등을 겪으며, 배우로써 침체기를 맞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고아라, ‘응답하라 1994’로 대표작 교체할 수 있을까 |url= http://star.mbn.co.kr/view.php?no=977949&year=2013 |출판사= MBN |날짜= 2013-10-14 }}</ref><ref>{{뉴스 인용|제목= 고아라, 두 영화 합해 고작 100만?…실패일까, 성공일까 |url= http://star.mk.co.kr/new/view.php?mc=ST&no=113513&year=2012 |출판사= 매일경제 |날짜= 2012-02-20 }}</ref>
  • 곽상훈 (국회의원)
         [[1924년]]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에 의해 희생된 한국인 희생자 명단을 입수하고 한국인 학살사건의 진상기록을 수집, 보존하는 활동을 하였다.<ref name="경인"/> [[1925년]]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조직, 결성하여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 최선경 등과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조선총독부]] 경찰의 추적을 받고 [[중국]]으로 망명,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한국인청년동맹'의 간부로 활동했다.
         25년 중국의 상하이 한인 교포들을 통해 동경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대량학살당한 소식을 전달하고, 25년 8월 동경대지진 조선인학살자 2주기 추도식을 주관했다. [[1927년]] [[6월 6일]] 계급과 파벌을 타파하고 전인천적 집단체로 인천의 유지들이 창립한 신정회(新正會) 창립에 참여, 신정회의 창립멤버가 되었다.<ref name="신정회1"/>
  • 궁가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일부인 궁실(宮室), 그리고 왕실에서 [[분가]]하여 독립한 가문을 통틀어서 일컷는다. 대원군(大元君), 왕자군(王子君), 그리고 공주(公主), 옹주(翁主)가 사는 집을 통틀어서 일컫는다. 일본에서는 '미야케(宮家)'라 하여, 역시 [[천황가]]의 분가를 뜻하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친왕(親王)이나 이에 준하는 직위를 가진 황실 인물의 가문이 이에 해당하며 주로 왕부(王府)라 하였다.
  • 권상우
  • 김경주 (승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난 뒤 전쟁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 중일 전쟁 발발 직후인 [[8월 5일]]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서울의 [[개운사 (서울)|개운사]]에서 황군 무운장구 장병안태 기원제라는 행사를 개최하고 시국 강연회를 열었을 때, 김경주는 "나라를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는다(為國不為身)"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1938년]] 신년 초에는 《[[불교시보]]》를 통해 〈시국 인식과 거국 일치의 신념〉이라는 제목으로 시사문을 발표하였는데, [[중국]]의 도발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명시하고 [[일본군]]은 정의와 사람의 도리를 위하여 싸우고 있으니 곧 동양의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 김경준(축구선수)
         [[중국]] [[쿤밍]]으로 간 [[http://www.daegufc.co.kr/board_story_clubnews01/view.php?tn=board_story_clubnews01&list_count_s=6&G_state=Y&pm=4.2.1&part_part_s=&subject_s=&content_s=Y&name_s=&writedate_s=&search_word_s=%EA%B9%80%EA%B2%BD%EC%A4%80&sid=2934&gid=&cpage=1&spage=1|전지훈련]]에 참가했다. 전지훈련 기간 동안 4골을 기록하면서, 팀원들 중 가장 많은 골을 기록하여 이번 시즌 시작을 기대하게 했다.
  • 김기식 (국회의원)
         * 2015년 5월, [[우리은행]] 지원(480만원)으로 2박 4일 [[중국]] 충칭ㆍ[[인도]] 첸나이 출장
         2014년 2월 시중은행의 해외 지점 부당대출 관련하여 [[금융감독원]] 검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김기식 의원은 같은 해 4월 9일 열린 정무위 회의에서 [[우리은행]] 등에 대한 검사(檢査)를 빨리 끝내라고 금융감독원에 요구했다. 김기식의 질책 이후 4월 26일에 금융감독원은 [[우리은행]] 검사를 종료했다. 1년 후 김기식은 [[우리은행]]으로부터 항공비와 호텔비 480만원을 지원받아 중국 출장을 다녀왔다. 2018년 4월 11일 검찰은 뇌물과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된 김기식에 대한 수사를 착수하였으며, [[우리은행]], [[한국거래소]] 등 피감기관들이 김기식의 해외 출장을 지원하게 된 과정을 조사할 방침이다.<ref>{{뉴스 인용|제목=[단독] 우리은행에 유독 친절했던 ‘저승사자’… 檢 ‘김기식 외유’ 곧 수사 착수|url=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32287&code=11121100|날짜=2018-04-11|출판사=국민일보}}</ref>
         2015년 5월 우리은행 돈으로 중국·인도 출장 외유성 논란에 대해서 2018년 4월 8일 김기식은 "출장 일정이 매우 타이트하게 진행돼 출장 목적에 맞는 공식 일정만 소화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국회에 따르면 김기식 출장 이틀째인 5월 20일 중국 충칭 시내를 관광하였다. [[우리은행]]이 차량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ref name="김기식 여비서" />
  • 김민기(가수)
         1991년에는 [[독일]]의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 각본/비르거 하이만 작곡의 록 뮤지컬인 '[[지하철 1호선#s-2|지하철 1호선]]'의 [[한국어]] 번안과 연출을 담당했는데, 이 뮤지컬은 같은 해 김민기 자신이 사비를 들여 [[대학로(서울)|대학로]]에 개관한 학전 극장에서 공연되기 시작해 2008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상설 공연되었다. 심지어 2001년에는 [[독일]]과 [[중국]], [[일본]]에서 해외 순회 공연도 진행했고, 이 공로로 2007년에 독일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윤이상]]과 [[백남준]] 이래 세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 김성수 (1891년)
         그러나 그의 집안의 부의 축적과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는데, 그의 아버지와 생부 형제가 벼슬길에 있을 때 관권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했고, 심지어는 중국·일본과 밀수를 하여 돈을 모았다고 한다.<ref name="malsso1">[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97686 '일장기 말소'에 분노한 '민족지' 창업주 - 오마이뉴스] 2004년 07월 13일자</ref>
         서당에서 그는 [[명심보감]](明心寶鑑), [[소학]](小學),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고<ref name="in25"/> 이어 자치통감과 공자, 맹자, 중국의 역사 등을 배웠다.<ref name="in25"/> 이어 [[당시]](唐詩), [[유교|유학]][[철학]] 등을 공부하여 [[성리학]]을 익히기도 했다.<ref name="in26">《인촌김성수의 애족사상과 그 실천》 (동아일보사, 동아일보사, 1982) 26페이지</ref> 개인적으로는 [[사마천]]의 [[사기 (역사서)#열전|사기열전]]과 [[삼국지]]를 탐독하였다.<ref name="in26"/> 풍족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사치를 모르고 성장하였다.
         * [[1930년]]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모략이라 생각, [[중화민국|중국]] [[영사관]]에 5천원의 위문금을 보냈다. 광복 후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으로부터 감사의 표시로 '친인선린'(親仁善隣)이라는 글자가 각자된 [[은패]](銀牌)를 선물로 받았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은 김성수, [[김연수 (1896년)|김연수]] 형제가 [[만주]]에 설립한 [[남만방직주식회사]]에서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노동착취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때 사람들은 김성수의 돈 뭉치를 [[서울]]에서 [[만주]] 봉천까지 깔아도 못 다 깐다고 했다"며 생동한 비유를 했다. 이어서 이들은 이 [[공장]]의 생산품들은 모조리 [[일본군]]으로 납품했는데, [[전쟁]]이 발발한 이후 노임을 주는 노동자들 보다 학생들을 상대로 의무노동을 강요했다고 비판한다.<ref>{{웹 인용 |url=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4244# |제목=인촌 형제가 설립한 남만방직 노동자들“소처럼 일하고 쥐처럼 먹었다” |확인날짜=2010-07-0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1029072755/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4244# |보존날짜=2015-10-29 |깨진링크=예 }}</ref>
  • 김세영(정치인)
         이후 [[중국]] [[산둥 성]] 천탄광에서 근무하다가 귀국하여 [[강원도]] [[삼척시|삼척군]] (현 [[태백시]])에서 함태탄광을 경영하였다. 1957년부터 송설교육재단([[김천고등학교]] 등 소유) [[이사장]]을 지냈다.
  • 김수홍
         명청 교체기의 중국 연호 사용에서도, 명나라 숭정(崇禎) 연호 사용을 주장하자는 송시열과 영력 연호를 사용하자는 주장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청나라의 강희(康熙) 연호를 쓰자고 주장하였다.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편지를 보낼 때도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여 이들을 풍자했다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1666년]]에는 [[중국]]의 지도인 천하고금대총편람도(天下古今大總便覽圖)를 직접 제작, 편찬하였다. 그의 천하고금대총편람도(天下古今大總便覽圖)는 연대와 저자가 전하는 [[한국]]의 근세 고지도 중의 하나이다.
  • 김시진(야구감독)
         2013년에도 새 별명이 생겼'''었'''는데 바로 2013년 [[중국]]의 지도자 이름을 따서 언어유희로 만들어낸 [[시진핑|'''시진'''핑]]. 팀의 지도자라는 감독의 직책과 맞물려서 어울리는 별명으로 한 때 쓰였'''었'''다. '''결국 성적이 내려가자 [[병신|빙]]시진, 시진빙으로 바뀌었다'''.
  • 김연경(배구선수)
         || '''소속팀''' ||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천안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대한민국) (2005~2009) [br] [[JT 마블러스]] (일본) (2009~2011) [br] [[페네르바흐체 SK]] (터키) (2011~2017)[* 2007년 이후 스폰서명을 팀명으로 붙인다. (아즈바뎀 보건 그룹(2007년~2011년)-유니버셜(2011년)-그룬디히(2014년~2015년))] [br] 상하이 브라이트 유베스트 (중국) (2017~2018) [br] 엑자시바시 비트라 (터키) (2018~) ||
         >ㅡ [[중국]] 배구 대표팀 감독 랑핑[* 1984년 LA올림픽 금메달리스트 + MVP. 감독직으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중국을 최정상 금메달로 이끈 감독]
         그리고 종료 후 아제르바이잔 리그, 중국 리그 등 타국 리그의 팀에서 연 20억을[* 세계배구계에서는 사실상 최고 연봉 금액이다. 야구, 축구, 농구 등 리그 풀이 큰 리그의 고액연봉자에 비해서는 분명 많은 편은 아니지만. 참고로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의 [[로베르틀란디 시몬 아티스|로베르틀란디 시몬]]의 연봉이 이 정도다.] 제시하는 등 적극적인 구애 속에서도 거취 문제 당시 도와줬던 것을 잊지 않고 페네르바흐체와 2년 재계약에 합의했다.[[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8&aid=0002300250|관련 기사 1]][[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366&aid=0000247757|관련 기사 2]]
         자신의 20대 후반을 거의 보냈던 페네르바흐체와 2017년 5월 30일 결별하고, 중국으로 이적하기로 결정되었다. 중국구단과의 계약은 1시즌으로, 중국구단이 시즌이 짧고 한국과 가까워 국가대표로서 시간을 좀 더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결정한 듯.
         중국무대에서도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며 소속 팀의 [[http://m.spotvnews.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90876&page&total#cb|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상하이 팀은 17년 만에 정규 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이쯤 되면 김연경은 우승 청부사가 맞다.~~
         다만, 아직까지 중국 리그가 빅리그가 아닌 관계로 2018년 오프시즌 때 여러 리그의 복수의 팀들이 김연경 쟁탈전에 뛰어들었고, 결국 [[터키]] 리그의 강팀 중 하나인 엑자시바시로 이적하게 됐다.
         짧았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1년 간의 중국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터키리그로의 복귀가 결정되었다. 이전 소속구단인 페네르바체가 아니라 엑자시바시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엑자시바시와의 계약은 2시즌으로, 상하이와의 재계약을 고민하는 가운데 엑자시바시의 관계자가 한국까지 찾아와 고액 연봉은 물론 김연경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체력 안배가 가능한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고, 이에 혹해 계약을 맺은 듯. 금액만 비교했을 때 상하이가 더 높은 금액을 제시했지만, 여러 여건을 고려하여 터키로 복귀한 것이 추측된다. 이에 대해 국내 팬들은 환호하는 중.
         문제는, 부록에 적힌 대로 도쿄 올림픽이 열릴 때의 김연경의 나이는 32세인데, 이 정도 나이이면 슬슬 선수 생활의 황혼기이자 은퇴를 준비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이다. 물론 자기관리에 철저한 [[호날두]]나 [[이동국]]이나 불혹의 나이에도 국가대표 주전세터를 하는 [[이효희]]의 경우도 있지만, 김연경 본인의 실력도 나이의 노쇠화로 인해 조금씩 쇠퇴해 갈 무렵인데,[* 최근 열린 VNL 한일전에서 이 문제가 터졌다. 한국은 김연경이 나오고도 일본에게 시종일관 제압당하며 [[삼연벙|0대3으로 완패했다. 이후 김연경은 다시는 한일전에서 지지 않겠다며 굳은 결심을 밝혔다.]]] 올림픽은 그렇다 쳐도 김연경이 은퇴한 이후의 여자배구가 어떻게 될거냐는 우려도 충분히 나온다. 농담이 아니고 지금 현재에도 김연경이 잠시 쉬었다 들어가면 그 사이에 우리나라 경기가 헬게이트가 열리는데, 김연경 의존도가 너무 큰 우리나라가 국제대회에서도 먹혀들지는 의문이고[* '''배구도 엄연한 팀플레이 게임이다.''' 한명에 너무 의존하다보면 그만큼 상대팀에게 철저하게 파악되어서 나중에는 부담감 때문에 그 한명도 부진하거나 실수를 하게 될 가능성이 ~~'''엄청'''~~ 커진다. 당장 출전인원이 좀 더 많은 축구의 경우에도 한 명의 슈퍼스타로 모든 것을 풀어갈 수 없는 법인데 배구라고 예외는 없다.] 은퇴한 이후에 조직력 다지기며 대체자를 누구로 뽑느냐 등등 우려가 매우 큰 상황이다. 냉정히 말해서 김연경 없는 한국 대표팀은 독일[* 김연경이 나오고도 VNL 대회 이전 맞대결에서는 독일에게 2세트까지 내주며 끌려가다가 3세트에서 내리 연속으로 역전승했고, VNL에서는 1세트를 내줬지만 2세트에서 내리 이겨서 3대1로 승리했다.]과 태국[* 2018 아시안게임에선 김연경 있을때도 이겼다. 사실상 아시아 내에서 중국 다음의 강호로 떠오를 정도로 성장했다.] 그 이하의 수준이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 ~~인천에 중국집을 개업했다고 하더라. 중국집 사장님(...)~~ 2014 국가대표팀과 함께 찍은 사진. 처음으로 주장을 맡은 2014 대표팀에서 최고참과 어린 선수들의 중간에서 잘 연결하며 항상 대표팀의 즐거운 분위기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2014년 여름에 한창 벌어졌던 [[아이스 버킷 챌린지]]에서 ~~선수들에게 잔혹하게(...) 얼음물을 끼얹으며~~ 재미있게 팀 단합을 이끄는데 솔선수범했다.
          *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대표팀이 20년만에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땄음에도 불구하고 배구협회는 회식 자리를 [[김치찌개]]집으로 잡는 만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당시 배구협회의 푸대접에 화가 난 김연경이 사비를 털어 동료 선수단을 고급 레스토랑으로 데려가 한턱 쏘았다고 한다. 아래 사진을 자세히 보면 김연경 앞쪽에 놓여진 밥과 식기는 손조차 대지도 않았을 정도로 깨끗한 것을 알 수 있지만 나중에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회식 분위기 자체는 금메달도 따고 해서 나쁘지 않았던 듯 싶다. ~~다른 선수들 표정도 하나같이 다 어두운데 혼자 웃고 있는 [[한송이(배구)|한송이]]가 유독 튀는 건 기분 탓~~ ~~분위기상 양효진과 김희진이 쥔 주먹이 매우 무서워 보이기까지 하다. 참고로 김희진은 완력이 엄청나다.~~
          * 2017년 12월 14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정상 국빈 만찬에 참석하였다. 시진핑 국가 주석 주최로 이날 자리에는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함께 만찬에 초대를 받은 김연경, [[송혜교]], [[추자현]], [[우효광]] 등이 참석했다.
          * [[평창 동계올림픽]] 때 [[쇼트트랙]] 계주 경기 이후 특유의 [[중뽕]]으로 무장한 중국 네티즌들이 김연경의 [[인스타그램]]에 찾아와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며 물으며 부끄러운 줄 알라는 [[답정너]]에 [[피해자 코스프레]] 가득한 멘션을 날리자 ''' "여기서 내 나라를 욕하지 마라" '''는 우문현답을 날렸다.
          * 최근에는 [[일본어]], [[터키어]] 외에도 [[중국어]]도 배우고 있다.[[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2&aid=0003006899|#]]
          * 전통의 강호 중국 국가대표팀을 [[2016 리우 올림픽]]에서 금메달로 이끈 주전 레프트 주팅의 우상이다. 주팅은 94년생으로, 2012년 당시 MVP를 받고 터키 리그에서 전무후무한 아시안 스파이커로 활약하던 김연경을 보고 크며 선수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김연경은 "리우 올림픽에서 MVP를 받은 이후 우상이 바뀐줄 알았다" 라고 했지만, 2018년 현재까지도 주팅의 아이돌은 김연경이라고 확인 되었다! 점프는 자기가 더 높지만 수비와 리더쉽은 김연경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고.
  • 김용국
         '''김용국'''({{본명|용국}}, {{zh|s=金龙国|t=金龍國|p=Jīn Lóngguó}}, [[1996년]] [[3월 2일]] ~ )는 [[중국]]의 가수이다. 2017년 《[[PRODUCE 101 시즌 2]]》에 참가하였으나 최종 21위로 탈락하였다. 2017년 7월 31일, [[시현 (가수)|시현]]과 함께 [[용국&시현]]을 결성하였다.
         [[분류:199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중국의 남자 가수]][[분류:중국의 가수]][[분류:중국의 발라드 음악가]][[분류:대한민국에 거주한 중국인]][[분류:PRODUCE 101 참가자]][[분류:2017년 데뷔]][[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중국의 개신교도]]
  • 김우영 (1886년)
         [[1921년]]부터는 일본 외무성의 외교관으로 [[중국]]에서 근무하였는데, 임기를 마치고 나혜석과 함께 부부동반 세계 일주 여행을 한 사실도 널리 알려질만큼 화제였다. 그러나 2년 가까이 걸린 이 세계 일주 여행 중 일어난과 나혜석의 염문설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 김은중
         === 중국 진출, 제주 유나이티드 ===
         [[2009년]] [[K리그 자유계약선수제도|자유계약선수]]로 풀린 김은중은 신생팀 [[강원 FC|강원]]으로의 이적을 추진하였으나 불발되었고,<ref>[http://www.sportalkorea.com/news/korea/view.php?gisa_uniq=20090206111611 김은중, 강원FC행 불발… 해외진출도 모색? ]{{깨진 링크|url=http://www.sportalkorea.com/news/korea/view.php?gisa_uniq=20090206111611 }}</ref> 결국 [[K리그]] 선수 등록 마감일 내에 소속팀을 찾지 못하였다.<ref>[http://app.yonhapnews.co.kr/yna/basic/article/Search/YIBW_showSearchArticle.aspx?searchpart=article&contents_id=AKR20090303079900007 김은중 '어디로'..K-리그 미등록 ]{{깨진 링크|url=http://app.yonhapnews.co.kr/yna/basic/article/Search/YIBW_showSearchArticle.aspx?searchpart=article&contents_id=AKR20090303079900007 }}</ref> 2009년 [[K리그]]에서 뛸 수 없게 된 김은중은 [[중국 슈퍼리그]]의 [[광저우 푸리|창사 진더]]에 입단하였다.<ref>[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903131241272237 김은중, 중국 수퍼리그 창사 진더 입단]</ref>
         [[중국]]에서의 2009 시즌을 끝내고 [[2009년 12월]], [[K리그]] [[제주 유나이티드 FC|제주 유나이티드]]로의 이적이 확정되어 K리그로 복귀하게 되었다. [[2010년]] [[8월 28일]] [[대전 시티즌]]과의 서울에서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K리그 통산 10번째로 [[K리그 득점-도움 기록#40-40 클럽|40-40 클럽]]에 가입하였다. [[K리그 2010|2010 시즌]] 동안 정규리그에서만 13골 10도움, 컵대회 포함 17골 10도움으로 개인 통산 최다 공격포인트을 기록하며 [[제주 유나이티드]]의 정규리그 준우승에 큰 공헌을 하였고, [[2010년]] [[K리그 최우수선수상|K리그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343&aid=0000007408 MVP 김은중 "다시 태어난 기분"]</ref> [[K리그 2011|이듬해]] [[7월 2일]] 강원과의 경기에서 두 골을 넣었는데, 각각 시즌 3, 4호 골이자 역대 K리그에서 7번째로 100호 골을 달성하는 선수로 기록되었다.<ref name="경남, 콜롬비아 출신 공격수 조르단 영입">{{뉴스 인용 |제목=김은중, 역대 7번째 개인통산 100호골 달성 |url=http://star.fnnews.com/news/index.html?no=13859 |출판사=파이낸셜뉴스 |저자=송영두 |날짜=2011년 7월 3일 |확인날짜=2011년 11월 8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817101137/http://star.fnnews.com/news/index.html?no=13859 |보존날짜=2014년 8월 17일 |깨진링크=예 }}</ref>
         [[1998년]] [[AFC U-20 축구 선수권 대회|AFC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서는 [[이동국]]과 함께 투톱을 이뤄 활약하였다. [[1999년]] [[11월 22일]], [[공한증|한중 정기전]]에서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중국]]과의 경기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2004년 AFC 아시안컵]]에 참가하여 활약하였고, [[A매치]] 35경기에서 12골을 넣었다.
         === 중국 슈퍼리그 ===
         * '''18''' (2009년, {{국기그림|중국}} [[광저우 푸리|창사 진더]])
         [[분류:197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축구 감독]][[분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분류:일본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중국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대전 시티즌의 축구 선수]][[분류:베갈타 센다이의 축구 선수]][[분류:FC 서울의 축구 선수]][[분류:광저우 푸리의 축구 선수]][[분류:제주 유나이티드 FC의 축구 선수]][[분류:강원 FC의 축구 선수]][[분류:포항 스틸러스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1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2의 축구 선수]][[분류:J1리그의 축구 선수]][[분류:중국 슈퍼리그의 축구 선수]][[분류:1998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4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아시안 게임 축구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동메달리스트]][[분류:축구 공격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서울성내초등학교 동문]]
         [[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광산 김씨]][[분류:대전 시티즌의 코칭스태프]][[분류:벨기에의 외국인 축구 감독]][[분류:K리그1 베스트 11 수상자]][[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애꾸눈이]]
  • 김재규
         유야무야 하면서 유신이 장기화 되었다면, '''최악의 경우 [[북한]]처럼 반대세력이 모두 숙청되거나 [[중국]], [[싱가포르]]처럼 정도는 덜해도 독재가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가 만약 이 상태로 정치에 참여하였다면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박씨 일가가 다스리는 독재국가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김재규를 긍정하는 사람들로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강신옥, 장호권, 이해학 등이 있다. 보면 알겠지만 주로 교계 사람들로, 민주혁신계 중에서도 약간 보수적인 사람들 쪽이다. [[http://www.nocutnews.co.kr/news/1153519|함세웅 신부는 "김재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79530|효림 스님은 "여러가지 정황 근거로 봤을때 재평가할 가치는 충분하며, 사회 분위기 때문에 좀더 시일을 요구할 뿐 명예 회복은 희망적"이라고 보고 김재규의 행적과 뜻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작업에 매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 김정록 (미학자)
         [[한성부]] 출생으로 [[1926년]] [[만주]]에서 만철실업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의 배영전문학교 등에서 동양학과 문학을 수학했다. 이후 전문학교에서 교수를 지냈다.
         김정록은 반민특위의 조사에 응하여, 당시 중국 유학생이라 감시를 받고 있던 터에 작위를 물려받지 않으면 사상불온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어 어쩔 수 없이 습작했다고 해명하였다. 반민특위는 김정록이 순진한 학자풍의 인물로 남을 모함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습작 사실 자체를 외부에 알리지 않아 주위에서 그가 남작 신분인 것을 알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어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ref>{{웹 인용
  • 김정훈 (1980년)
         '''김정훈'''(金楨勳, [[1980년]] [[1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이다. [[2000년]]에 남성 듀오 그룹 [[UN (음악 그룹)|UN]]('''U'''nited '''N'''-generation)의 멤버로 데뷔하였다. [[중국]]에서는 '찐쩡쒼', [[일본]]에서는 '존훈(John-Hoo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목= '결정적 한방' 김정훈 "유동근 선배한테 200대 맞은 분 계세요?"(인터뷰) |url= 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178349 |출판사=TV리포트|날짜= 2011-12-07 }}</ref> 2005년 초 출연한 [[MBC]] 단막극 《한뼘 드라마 - 한밤의 티파니》에서 황인뢰 PD와 첫 인연을 맺은 이후, 2006년에 [[MBC]] 드라마 《궁》에 출연하며 국내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등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며 한류 스타로 발돋움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김정훈 "데뷔 5091일…희로애락으로 단단해진 날들"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6999610 |출판사= 연합뉴스 |날짜= 2014-07-07 }}</ref><ref>{{뉴스 인용|제목= 중국 방문 김정훈, '오맹달 사랑' 전해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053324 |출판사=마이데일리|날짜= 2006-07-10 }}</ref>
         김정훈은 2012년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천재적인 사기꾼 프랭크 역할을 맡아 뮤지컬에 첫 도전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김정훈, 뮤지컬 첫 도전! '천재적 사기꾼' 변신 |url= 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202030100026290001805&servicedate=20120203 |출판사= 스포츠조선 |날짜= 2012-02-03 }}</ref> 또한 [[일본]] 외에도 [[중국]]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비비안 수]]와 드라마 《연애병법》(2008년)에 출연했고, 중국 영화 《벽루천》(2011년), 《점기각첨문도애》(2013년)에 출연했다.
         | 중국 후난위성TV
         | 중국 드라마<ref>{{뉴스 인용 |제목= '입대' 앞둔 김정훈-비비안수 주연 드라마, 韓상륙 |url= http://star.moneytoday.co.kr/view/stview.php?no=2009041616411504149&type=1&outlink=1 |출판사=스타뉴스|날짜= 2009-04-16 }}</ref>
         | 중국 산시위성TV
         | 중국 드라마
         | 중국 호남위성TV
         | 중국 드라마
         | 중국 영화
         * 2012년 중국 공영 CCTV9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한강의 기적-무형의 손》<ref>{{뉴스 인용
         |제목= 김정훈, 한류 모든 것 중국에 알린다…CCTV 다큐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4593170 |출판사= 뉴시스 |날짜= 2012-07-06 }}</ref>
  • 김정훈(UN)
         [[UN(가수)|UN]] 활동시에도 연기 활동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2004년에 영화 《DMZ 비무장지대》에 출연하며 연기자로 데뷔했고, [[UN(가수)|UN]] 해체 후 본격적으로 연기자로 전향하여 <[[궁(드라마)]]>에 출연했다. 역할은 의성대군 이율. 원작과 완벽히 맞아 떨어지는 씽크로율을 보여주며 '백합대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7년 SBS 드라마 <마녀유희>에 출연한 후에는 몇몇 오락프로그램 등에 출연하였으나 국내 활동은 뜸했고, 거의 [[일본]]에서 여러 장의 음반을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 나갔다. [[중국]]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비비안 수]]와 드라마 <연애병법>에 출연하기도 했다.
  • 김준수(JYJ)
         그 이후로 활동 하나가 끝날 때 마다, 혹은 헤어가 질릴 때 마다 심심찮게 [[염색]]을 하고 있다. 2012년 솔로 1집 월드 투어때는 노란색([[한국]]), 파란색([[인도네시아]], [[태국]]), 빨간색([[중국]]), 갈색([[미국]], [[멕시코]]) 등 나라를 넘나들 때마다 염색을 해 팬들이 그의 모발에 대해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머리카락이 뚝뚝 끊겨서 굳이 자를 필요도 없었다고 한다. 월드 투어 이후에도 [[무지개|빨주노초파남보]] 모든 색깔을 섭렵하며 30번 가까이 머리 색깔을 바꾸었다.[* [[https://1.soompi.io/wp-content/uploads/2012/12/20121227_xia_junsu_01.jpg|노란색]] - [[https://1.soompi.io/wp-content/uploads/2013/07/Screen-Shot-2013-07-15-at-9.13.21-PM.png|검은색]] - [[http://cfile23.uf.tistory.com/image/2114A64252E9276520222E|갈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26.uf.tistory.com%2Fimage%2F212A05485339739D1413E8|노란색(주황빛)]] - [[http://m.imgur.com/TlGqtwF?r|핑크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10.uf.tistory.com%2Fimage%2F217ABA4453A63C860FD7B5|노란색]] - [[http://cfile3.uf.tistory.com/image/254355475409601522A7F3|빨간색]] - [[http://cfile6.uf.tistory.com/image/22796A4C541544FE1E3561|검은색]] - [[http://cfile9.uf.tistory.com/image/263BA9495423B8FA3584DC|어두운 보라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10.uf.tistory.com%2Fimage%2F255DC04E545DE283020879|애쉬 그레이]]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4.uf.tistory.com%2Fimage%2F235F95365471DE3624F80F|애쉬 브라운]]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25.uf.tistory.com%2Fimage%2F2731B03A54A5D1162A877E|빨간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5.uf.tistory.com%2Fimage%2F262A4C4154B3755D324510|핑크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4.uf.tistory.com%2Fimage%2F2161874E54CC95FE39CDBA|노란색(금빛)]]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28.uf.tistory.com%2Fimage%2F257EAB4E54F5AA76301F9E|노란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5.uf.tistory.com%2Fimage%2F2422854754D371D8344823|검은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24.uf.tistory.com%2Fimage%2F223F703C54F5A92A08F3D6|검은색+청록브릿지]]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9.uf.tistory.com%2Fimage%2F2501883554FD21231C10BF|청록색]]~[[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8.uf.tistory.com%2Fimage%2F244185415533E7780E8E87|민트색]][[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9.uf.tistory.com%2Fimage%2F240C0A4754FFFA2902F3C7|(노란빛)]](3집 활동 기간동안 여러차례 다시 염색을 해서 일주일 단위로도 색이 다르다)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1.uf.tistory.com%2Fimage%2F21257C3C5546F92B36B304|파란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25.uf.tistory.com%2Fimage%2F2503954055506B8F2CB40D|청록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26.uf.tistory.com%2Fimage%2F22214D4B555A1ECF2B3253|민트색]] - 애쉬 카키 - [[http://cfile22.uf.tistory.com/image/2516154D55D2C4552EFBA6|애쉬 브라운]] - 주황색 - 연주황색 - 로즈골드 - 갈색(보랏빛) - 민트색 - 노란색(금빛) - [[http://cfile24.uf.tistory.com/image/2469604A56AE40850293E8|빨간색]] - 갈색(붉은빛) - 갈색 - 검은색 - 노란색(은빛) - 석류색 - 검은색 - 레몬색(체코) - 노란색(금빛에 가까운) - 은백색 - 핑크색 - 노란색 - 검은색 - 갈색 - 검은색(입대)[[추가바람]] ] 이를 자신도 의식하고 있는지, 2015년 [[JYJ]] [[https://youtu.be/V5yhri6x2FQ|멤버쉽 위크]]에서는 '나는 사진 보면 머리 색깔로 이게 언제 때 사진인지 알 수 있어!'라고 자신있게 말하기도 했다.
         || 2012.07.07 || 중국, 상하이 || 4,000 ||
         || 2012.08.26 || 중국, 홍콩 || 3,500 ||
         || 2013.07.28 || 중국, 상하이 || ||
         || 2015.03.14 || 중국, 상하이 || 3000 ||
         || 2016.07.16 || 중국, 광저우 || 6000 ||
         || 2016.07.30 || 중국, 상하이 || 4000 ||
         || 제 1회 중국 '브이차트 어워즈' 한국 최우수 남자 가수상 ||
  • 김창숙(독립운동가)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1921년 [[신채호]] 등과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 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한편으로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 [[쑨원]]과 교섭해 독립운동 기금을 원조받는 등 군사 선전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 김취경전
         [[조선시대]]의 군담소설, [[계모]]형 가정소설.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군담소설이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매우 드물게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가 등장하고 단군이 나타나는 등 민족문화적 요소가 있다.--그리고 이때부터 고구려는 선역, 백제는 악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김태희
         이 드라마를 통해 자리를 확고히 한 김태희는, 2006년 제작비 130억,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올로케이션으로 촬영한 영화 《[[중천 (영화)|중천]]》에서 [[정우성]]과 함께 공연하며 소화 역할로 첫 장편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ref name="김태은"/> 이 영화로 [[백상예술대상]],<ref>최지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30&aid=0000001410 '국내' '이 상을 <하얀거탑> 폐인 분들께 바칩니다'] 매거진t 2007년 10월 4일</ref> [[대종상영화제]],<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43&aid=0000063392 ‘가족의 탄생’최우수작품·시나리오상…대종상 이변] 국민일보 2007년 6월 9일</ref> 그녀는 [[청룡영화상]]에서 인기스타상을 수상했다.<ref>{{웹 인용|url=http://www.blueaward.co.kr/bbs/board.php?bo_table=awards_news&sca=28|제목=제28회 청룡영화상|출판사=청룡영화상|확인날짜=2014-02-27}}</ref> 하지만 연기력에서 “대사 소화가 부족하고 표정연기가 풍부하지 못했다”, “평면적 연기다” 등의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ref name="김태은"/> 《[[중천]]》은 관객수 150만 명을 기록하면서 흥행에도 실패했다.<ref>{{뉴스 인용 |제목='중천' 참패, CJ 주가 폭락|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3&aid=0000319790|출판사=뉴시스|저자=김용호|날짜=2007-02-19|확인날짜=2014-03-05}}</ref> 2007년에는 영화 《[[싸움 (영화)|싸움]]》의 윤진아 역할을 연기했다. 연기파 배우 [[설경구]]와 공연하며 연기력에 있어서는 이전 작품보다 확실히 좋아졌다는 평을 받았으나,<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연기력과의 싸움에서 '웃다'|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1100&g_serial=299002|출판사=조이뉴스24|저자=정명화|날짜=2007-12-05|확인날짜=2014-03-05}}</ref> 3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쳤다.<ref>{{뉴스 인용 |제목=톱스타 마케팅, 더 이상 안 통한다!|url=http://osen.mt.co.kr/article/G1010070161|출판사=OSEN|저자=이명주|날짜=2010-10-07|확인날짜=2014-03-05}}</ref>
         2014년 5월 29일, 김태희는 중국 사극 드라마 《[[서성왕희지]]》 제작발표회에 참석하며 중국 데뷔를 알렸다. 그녀는 극중 왕희지의 아내 씨루이 역할을 맡아 연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중국 드라마 출연..'서성왕희지' 제작발표회 참석|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31&newsid=01453046606094168&DCD=A10102|출판사=이데일리|저자=고규대|날짜=2014-05-30|확인날짜=2015-08-05}}</ref> 김태희는 자신의 역할 씨루이에 대해 "뻔한 여성상이 아닌, 순수하고 정의로운 캐릭터"였기 때문에 더욱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中드라마 '서성 왕희지', 유학 동경해 선택한 작품"[TD포토]|url=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426553404869440017|출판사=티브이데일리|저자=고규대|날짜=2015-03-17|확인날짜=2015-08-05}}</ref> 이듬해 2015년에는 한국 브라운관으로 복귀해, [[SBS TV|SBS]] 드라마 《[[용팔이 (드라마)|용팔이]]》에 한여진 역할로 출연했다. 김태희에게는 2년만에 안방극장으로 복귀작으로 최고 시청률 20.4%를 기록하며 시청자들에 큰 인기를 얻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 최우수연기상, [[SBS 연기대상]] 미니시리즈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SAF 연기대상] 김태희, 최우수연기상 수상 "'용팔이' 덕에 행복한 한 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16&aid=0000174514|출판사 =SBS funE |저자 =김재윤|날짜 = 2016-01-01|확인날짜 =2017-09-09}}</ref>
         김태희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자연미인으로도 꼽힌다.<ref>{{뉴스 인용 |제목=한국 최고미녀 왜 김태희인가|url=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101131845363&sec_id=540101&pt=nv|저자=윤대헌|출판사=스포츠 칸 |날짜=2011-01-13 |확인날짜=2011-01-20}}</ref> [[중국]]에서 뽑은 [[한국]] [[여배우]] 순위 1위에도 뽑혔다.<ref>{{뉴스 인용 |제목=중국인, 김태희가 최고…송혜교 이다해 순|url=http://morningnews.co.kr/article.php?aid=129319437931191006|출판사=모닝뉴스 |날짜=2010-12-24 |확인날짜=2011-01-20}}</ref> 또, [[전지현]]·[[송혜교]]·[[손예진]]·[[한가인]]·[[이나영]]·[[한지민]]·[[한예슬]] 등과 200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미인]]으로 불린다.
  • 김현정 (1976년)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5&aid=0000370719 |출판사=한국경제|날짜=2001-05-04}}</ref> 중국어로 부른 정규음반을 발표 20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였으며 3집 후속곡 <거짓말처럼>을 중국어로 부른 <Forever>가 큰 인기를 얻어 홍콩 가요차트에서 1위를 차지,<ref>{{뉴스 인용|제목=김현정의 변신 “색다른 맛 드려요”…4집앨범 ‘와일드 뷰티’ 파격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562195 |출판사=머니투데이|날짜=2005-07-26}}</ref> [[2005년]] [[중국]] [[장쑤성]] 오시시 라디오 방송에서 열린 '제11회 중국 유행가요 연두 시상식'에서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외국인 댄스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애즈원, 中라디오서 최우수 R&B상 수상
         * 중국 유행 가요 연두 시상식 외국인 부문 최우수댄스상
  • 김희선
         |제목= 김희선 씨, 20년전과 똑같은 성격미녀 맞네요(종합) |url=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12180039570610 |출판사= 뉴스엔 |날짜= 2012-12-18|확인날짜 =2017-09-07}}</ref> 국내 외에도 드라마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중국]]에서도 대표적인 한류 스타로 발돋음하였다. 하지만 많은 인기를 끈 드라마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패자부활전 (영화)|패자부활전]]》(1997년), 《[[카라 (영화)|카라]]》, 《[[자귀모]]》(1999년), 《[[비천무]]》(2000년)가 연이어 흥행참패를 당하면서 연기력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브라운관에서는 여왕…영화계만 가면 참패하는 여배우는? |url= http://www.segye.com/Service5/ShellView.asp?TreeID=1052&PCode=0007&DataID=200705100949000011 |출판사= 세계일보 |날짜= 2007-05-09 |확인날짜= 2017-09-07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070520221239/http://www.segye.com/Service5/ShellView.asp?TreeID=1052# |보존날짜= 2007-05-20 |깨진링크= 예 }}</ref>
         2006년 9월 1일 서울 CGV 용산에서 열린 ‘2006 CJ중국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한 홍보대사 김희선.
         |제목= 김희선 '시청률 잔혹사', 그녀를 위한 처방전 |url=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7068 |출판사= 오마이뉴스 |날짜= 2012-10-09|확인날짜 =2017-09-07}}</ref> 2005년, [[중국]] 영화 《신화 - 진시황릉의 비밀》으로 첫 해외 작품에 참여하며, [[성룡]]과 호흡을 맞췄으며, 2006년에 2년 만의 브라운관 컴백작인 드라마 《[[스마일 어게인]]》 이후 연예계 활동을 전면 중단했다.
         김희선은 드라마 《[[스마일 어게인]]》 이후, 결혼과 출산으로 연기 활동을 중단한 이후, 2010년 [[중국]] 영화 《전국: 천하영웅의 시대》에 특별 출연하며 활동을 복귀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김희선 중국영화 ‘전국’출연… 4년만에 연기 기지개 |url= 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100312003899&subctg1=15&subctg2=00 |출판사= 세계일보 |날짜= 2010-03-13|확인날짜 =2017-09-07}}</ref> 2012년에는 퓨전 사극 드라마 《[[신의 (드라마)|신의]]》로 6년 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하였다. 당초 그녀는 2년 전부터 이 작품의 시놉시스를 받고 출연이 정해져 있었지만 상대 남자배우의 캐스팅 난항으로 제작이 지연되면서 복귀도 예정보다 다소 늦어졌다.<ref>{{뉴스 인용
         | 중국 영화, 성룡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개봉됨
         | 중국 영화, 특별 출연
         | 한국관광공사 - 중국
         | [[중국]] 광고, 장동건
         | rowspan="2"| LG전자 중국지사
         | rowspan="2"| 중국 전역
         | CJ 중국영화제 홍보대사
  • 나침반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 남구(유튜버)
          * [[디시위키]]에서는 국적이 [[중국]][* 정확히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바뀌어져 있다.(...) 그런데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일본으로 바뀌었다.
  • 노무현
         * 2005년 [[3월 7일]],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과 영유권 주장 등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동북아 역사재단]]을 지시, 설립하였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6779.html | 뉴스 = | 제목 = 내년 설립 ‘동북아 역사재단’ 고구려연구재단 통합한다 | 출판사 = 한겨레 | 날짜 = 2005-09-26 | 저자1 = 이제훈 | 저자2 = 안수찬 | 쪽 = | 확인날짜 = 2010-04-23 }}</ref>
         [[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은 조문에서 "노 전 대통령은 나의 오래된 친구"라며 "재임 기간에 중국과 한국의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수립 및 발전을 위해 중요한 기여를 했다"라고 밝혔다. [[원자바오]] 총리는 애도하면서 노무현의 대(對)중국 관계의 중시, 노무현의 솔직함과 성실함이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한중 관계 (1992년)|한중 관계]]의 전면적 발전 추진을 위해 기울인 공헌을 기억하겠다는 소회를 덧붙였다.<ref name="해외조문">{{뉴스 인용 | 제목 = 해외조문단 누가 왔나…후쿠다ㆍ빅터차 등 거물급 대거 참석 | url = http://www.heraldbiz.com/common/Detail.jsp?newsMLId=20090529000412 | 출판사 = 헤럴드경제 | 저자 = 최재원 | 쪽 = | 날짜 = | 확인날짜 = 2010-04-26 }}</ref>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긴급 애도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 노무현 재임 기간에 한국과 미국 간의 '강력하고 활기찬'(strong and vital) 관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외상 시절 노 전 대통령을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애도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청와대에 애도 조문을 보내어, "지난 2004년 노 전 대통령의 영국 공식 방문은 한·영 양국 관계 증진에 중요한 이정표였다"라고 전했다.<ref>{{뉴스 인용 | 제목 = [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각국 정상 애도 성명 줄이어 | url = http://www.etnews.co.kr/news/detail.html?id=200905240078 | 출판사 = 한국일보 | 저자 = 김유경 | 쪽 = | 날짜 = 2009-05-25 | 확인날짜 = 2010-04-26 }}</ref> [[반기문]] [[국제 연합]] 사무총장은 사망 관련 성명을 발표하고 애도의 뜻을 표명하면서, "노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 촉진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라고 노 전 대통령을 칭송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역시 애도의 뜻을 전했다.<ref>{{뉴스 인용 | 제목 = 각국 정상들, 노무현 전 대통령 애도 물결 | 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24/2009052400593.html | 출판사 = 이데일리 | 저자 = 피용익 | 쪽 = | 날짜 = 2009-05-24 | 확인날짜 = 2010-04-26 }}</ref>
         이날 영결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앞서 세계 150여 해외 공관에 설치된 분향소에도 각국 주요 인사가 추모 행렬에 동참했다. 미국 백악관의 제임스 존스 국가안보 보좌관과 [[성 김]] 대북 특사가 분향소가 차려진 주미 한국 대사관을 찾아 조문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미국 정부를 대표해 조문했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와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등 일본 정·관계 주요 인사들이 주일 한국 대사관으로 찾아가 분향했다.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는 노무현의 사망을 애도하는 메시지를 장례위원회에 보냈다.<ref name="해외조문" />
         [[2009년]] [[12월 2일]] 전국 7개 도시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멘토로 삼고 싶은 대통령" 에 대한 설문조사에 41.1%로 노무현이 1위를 기록했다. 서울 41.4%, 경기도 39.5%, 경상도 41.5%, 전라도 36.7%, 충청도 47.2%, 강원도 30%, 제주도 45%로 전국적으로 고른 인기를 얻었다. 또한 '2009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물'에는 12%로 2위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 | 제목 = 대학생들 '멘토로 삼고픈 대통령'으로 노무현 가장 많이 꼽아 | url = http://news.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95427 | 형식 = | 출판사 = CNBNEWS | 저자 = 최영태 | 쪽 = | 날짜 = 2009-12-02 | 확인날짜 = 2010-04-26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21210190119/http://news.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95427# | 보존날짜 = 2012-12-10 | 깨진링크 = 예 }}</ref> [[2009년]] [[12월 19일]]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반관영 통신사인 중국 신문사가 선정한 《2009년 세계 10대 뉴스인물》 중 노무현이 3위에 선정됐다. 선정한 이유로 "그의 자살 사건은 한국 정치에 깊은 생각거리를 남겼다"라면서 "노 전 대통령은 많은 공헌을 남긴 평민정치가였지만 재임 기간의 공적, 특히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라고 전했다.<ref>{{뉴스 인용 | 제목 = "노무현, 세계 뉴스인물 3위"<中언론> |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oid=001&aid=0003033468 | 형식 = | 출판사 = 연합뉴스 | 저자 = 홍제성 | 쪽 = | 날짜 = 2009-12-19 | 확인날짜 = 2010-04-26 }}</ref> [[2010년]] [[1월 1일]] [[G세대]] 505명을 대상으로 한 《지난 100년간 우리나라에서 훌륭한 인물》 조사에서 1위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 | 제목 = 'G세대'가 뽑은 대한민국서 가장 훌륭한 인물 | 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01/2010010100098.html | 형식 = | 출판사 = 조선일보 | 저자1 = 최승현 | 저자2 = 김정훈 | 저자3 = 박순찬 | 저자4 = 김수혜 | 쪽 = | 날짜 = 2010-01-01 | 확인날짜 = 2010-04-26 }}</ref>
         해양수산부 장관 출신으로 연안 어족자원 복원에 노력했다.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저인망식 불법어로를 근절하기 위해 촘촘한 그물을 제조하는 업체에 영업정지를 가하는 등 강경책을 사용했으며 연안에 인공 어초를 대량 투입하는 등의 대책을 시행하였다.<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7096006&ctg=13 [이철호의 시시각각]중국은 이 대형 참치를 보라]{{깨진 링크|url=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7096006&ctg=13 }}</ref><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408301829261&code=940301 저인망 싹쓸이 불법어로 大檢이 '칼' 뽑았다]</ref>
         [[김근태]]는 그가 외교 문제에서 실패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외교에 있어서도 실패하고 있다. 중국 가서 하는 이야기, 일본 가서 하는 이야기가 다르다. 국민의 자부심을 상처낸다. 한미 정상회담까지는 분명하게 지적하고 비판했지만 한일정상회담은 너무 기가 막혀서 얘기를 하지 않았다. 과거사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지 않은 일본 천황과 건배하는 것이나 일본 국민들과의 대화에서 '김구 선생이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철학과 원칙은 함께 하지만 판단이 다를 수 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34415 "대선자금공개 이회창씨에게 달려있다" - 오마이뉴스] 2003년 07월 19일자</ref>"는 것이다.
  • 대홍려
         '''대홍려'''(大鴻臚)는 고대 [[중국]]의 관직이다.
         [[분류:중국의 관직과 칭호]][[분류:부산광역시 출신]]
  • 독비도
         [[중국]]의 무협 영화. 한국에서는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로 개봉했다. 일본에서 개봉된 제목은 편완필살검(片腕必殺剣). [[김용]]의 [[무협 소설]] 《[[신조협려]]》를 원안으로 하여 제작되었다.
  • 두부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으나 어떤 시대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 디펜더 2
         [[중국]]의 Droidhen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디펜스]] [[모바일 게임]].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디펜더의 후속작이다. 사실 기술 몇개, 몬스터 1종류가 추가된것 이외에는 디펜더1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심지어 배경과 음악, 몬스터 이미지까지 다 똑같다!!
         전작과는 달리 한글 번역이 되었는데, 번역이 상당히 엉망이다. 'Strength'를 힘이 아닌 발음인 '스트렝스'라고 번역하지를 않나, 'Final Judgement'를 '말일심판'이라고 번역하지를 않나, 'Life'를 '생활'이라고 번역하지를 않나, 'Kills'를 '죽이기'라고 번역하거나 'Final Fantasy'를 직역해서 '최종환상'이라 번역하는 등.... 위의 몇 오역된 표현들이 중국식이고, 이 게임이 [[중국]]에서도 서비스가 되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중국 번역을 중역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 사실 Droidhen이 중국 회사인걸 생각해보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 레갈리아
          * [[중국]] [[주나라]] - [[구정]]
          * [[중국]] - [[전국옥새]]
  • 로손
         오사카부 토요나가시(大阪府豊中市)에 일본 1호점을 오픈했으며, [[중국]], [[인도네시아]]에도 가게를 열고 있다.
  • 류형원
         그는 경제력 양성과 사회 개혁, 그리고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존주대의의 실천을 위해 그는 [[북벌론]]을 주장했고, 북벌을 위한 이상촌 건설, 병력 양성, 훈련, [[중국]] 현지 답사 등을 하기도 했다. 흉년과 기아, 농민들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그는 권세를 지키기에 급급한 벼슬아치들이나 고통받는 농민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고담준론(高談峻論)하는 유식자들을 비판하였다.<ref name="sidee176">정옥자 금장태 이광표 외,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효형출판, 1998) 176페이지</ref> 이후 그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선비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고, 당대의 권세가들이 권유하는 벼슬도 마다하였다.<ref name="sidee176"/> 이후 [[조선 현종|현종]] 때인 [[1665년]], [[1666년]]에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그는 이상촌이 될 토지를 마련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군사 훈련을 하는 한편 [[중국]]현지에 사람을 보내 [[중국]]의 정세를 알아보기도 하였다. 무예에도 능했던 그는 직접 병사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 리안 탄
         '''리안 탄'''({{llang|fr|Lianne Tan}}, {{zh-stp|s=谭莲妮|t=譚蓮妮|p=Tán Liánnī|h=탄롄니}}, [[1990년]] [[11월 20일]] ~ )는 [[벨기에]] 태생의 [[중국]]계 여자 [[배드민턴]] 선수이다.
         [[분류:199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벨기에의 여자 배드민턴 선수]][[분류:벨기에의 올림픽 배드민턴 참가 선수]][[분류:2012년 하계 올림픽 배드민턴 참가 선수]][[분류:2016년 하계 올림픽 배드민턴 참가 선수]][[분류:2017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배드민턴 참가 선수]][[분류:중국계 벨기에인]][[분류:대전광역시 출신]]
  • 마츠자카소
         === 중국 유사 상표 사건 ===
         [[중국]]에서 상표권 침해 문제를 겪은 사례가 있다.
          * 2009년 3월에 마츠자카시 차원의 문제가 되었는데, 2004년 2월 24일 푸젠성의 한 식품회사가 송판(松阪)이라는 상표를 신청하여, 2008년 12월 20일 중국 상표국이 공고하였다. 마츠자카시에서는 2009년 3월 3일 마츠자카소 연락협의회를 통하여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시장이 중국을 직접 방문할 계획도 발표했다.
          * 2010년 5월 12일 발표에 따르면, 2006년에 마츠자카소 연락협의회는 마츠자카육(松阪肉), 마츠자카소(松阪牛) 등으로 중국에서 상표 출원을 하였으나, 중국 국가상표국에서는 '이미 2001년 9월 마츠자카 문자와 소의 얼굴 일러스트로 상표가 등록되어 있음', '마츠자카소는 일반적인 식재료 명칭', '마츠자카는 외국의 지명'이라는 3가지 이유로 출원을 기각하였다.
  • 박규수
         1860년(철종 11년) 조부 연암 박지원이 그랬듯, [[청나라]] 사신단에 [[열하|열하부사]](熱河副使)로 임명돼 6개월 간 [[연경]]에 다녀왔다. 이 때 그는 처음으로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과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을 접했다. 업무 외 시간에는 4년 전 [[제2차 아편 전쟁|애로우 호 사건]] 때 영·프 군의 [[북경]], [[톈진]] 점령 직후 [[함풍제]](咸豊帝)의 대응 방식과 그 후 4년 여의 전쟁에 대해 자세히 조사했다. 박규수가 청국에 당도한 때는 4년 전쟁도 끝이 나고 [[베이징 조약]]이 체결될 시점이었다. 거인 중국이 불평등 조약으로 [[홍콩]] [[주룽 반도]]와 [[연해주]]를 생으로 뺏기고 외교적 위신이 깎이는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하며 심각한 문제인식을 가지게 됐다. 또한 심병성(沈秉成), 왕증(王拯), 풍지기(馮志沂) 등 백여 명의 현지 문인, 학자들과 교류해 견문을 넓혔다.
         1861년(철종 12년) 초 귀국 후 [[성균관]] [[대사성]]이 됐다. 얼마 후 그는 열하부사로 다시 [[청나라]]에 갔다. [[제2차 아편 전쟁]] 직후라 [[청나라]]를 통해 격변하는 국제 정세를 살피기 위해 일부러 사행(使行)을 다시 지원했다. 그는 이때부터 1871년 [[신미양요]] 때까지 [[승문원]]에서 각종 외교 문서들을 작성했다. [[영어]]를 몰랐던 당시 조선 정부였기 때문에 그는 [[영어]]를 해석한 중국 문헌들에 기초해서 서양과 외교 문서를 작성했다.
         1874년(고종 11년) 9월 [[영의정]] [[이유원]]과도 계속 충돌하고 자신의 뜻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 걸 납득하게 된 그는 사퇴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사랑방에 출입하는 젊은 양반자제들에게 [[박지원 (실학자)|박지원]]의 사상을 강의하기도 하고 [[중국]]을 왕래한 사신이나 [[역관]]들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전하기도 했다. 《연암집 燕巖集》, 《해국도지 海國圖志》 등에 대한 강연과 [[자명종]], [[시계]], [[태엽]], [[기계]], [[서양화]] 등을 소개하는 한편, 서양 열강의 무서움 및 중국의 패배와 양무 운동 등 세계의 정세를 전하고 부국강병을 역설했다.
         그의 개화 사상은 실학 사상의 근대지향적 측면을 내재적으로 계승한 위에 외발적 요인이 작용해 촉발된 것으로, 선대의 [[북학파]] 학자들이 주장한 이용후생(利用厚生)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연행을 통하여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서구에 보다 우수한 문명이 있음을 인정, 좋은 것은 과감하게 수용하자는 의견을 개진하게 됐다. 중국의 개화파 관리들과 접촉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개항을 역설했다.
         [[제네럴셔먼호 사건|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우던 1866년 박규수는 강경한 척화파처럼 보인다. 이어 셰난도어호 내항 때에도 그가 미국·중국 등에 직접 지어 보낸 각종 문서는 어디까지나 정부 측의 강경한 입장 내지 힐문장들이었다.<ref name="kyunggi"/> 1871년 [[신미양요]] 때에도 미국과의 교전을 주장하고 이를 관철했다.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409134314 "서양 오랑캐가 중국 문명에 감화될 것이니…"] 프레시안 2010.04.09
  • 박명수(MC)
         또한, 깐족계의 제왕인 [[신정환]]과 [[탁재훈]]과도 궁합이 엄청나게 안 맞는다[* 위의 김수로, 김구라와도 더 안 맞는 편.]. 실제로 탁재훈과 투톱으로 함께한 프로그램을 거하게 말아먹기도 했다. 이를 두고 김구라는 한 팀에 [[마이클 조던]]이 둘이나 있는데 받쳐주는 [[스카티 피펜]]이 없는 격이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같은 [[공산주의]]라도 [[소련]]과 [[중국]]이 사이 나쁜 것처럼...~~
  • 박서양 (1885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은 그의 졸업 동기인 [[김필순]]이나 [[주현측]], [[신창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가 [[만주]]로 떠난 뒤 그의 행적은 단지 일제가 남긴 군(軍) 기밀서류에만 남아 있었다.<ref name="jseusa1"/> 잊혀졌던 박서양의 독립운동 기록은 박형우 [[연세대학교]] 의대 교수가 발굴했다. 이 기록으로 그는 숨진 지 68년이 지난 2008년에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았다. 그의 뒷얘기는 [[칠레]]로 이민 간 그의 손자(74)가 2005년 귀국하면서 알려졌다.<ref name="jseusa1"/> 박서양에 대한 자료와 기록들은 [[2005년]]과 [[2008년]] 이후 그의 손자들과 후손들이 일부 공개함으로써 비로소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 박영희 (1901년)
         1939년 4월 8일자 매일신보. 오른쪽부터 박영희,김동인,임학수. 이들은 1939년 4월 자발적으로 황군위문단으로 중국 전선에 파견했다.
         [[1938년]] 전향자 대표로 선출되어 [[도쿄]]에서 열린 시국대응전국위원회라는 행사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귀국한 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결성하였고, [[1939년]] [[조선문인협회]] 간사,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냈다. [[김동인]], [[임학수 (시인)|임학수]]와 함께 황군위문작가단에 포함되어 [[중국]] 전선에 파견된 뒤 기행문을 쓰기도 했다.
  • 박우상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재학 시절에 아이스하키 선수로 활동했으며, 이 시기에 추계 전국중고아이스하키 연맹전에서 두 번 우승(2002, 2003)하고 2003년 여름에는 [[김기성 (아이스하키 선수)|김기성]], [[이용준 (아이스하키 선수)|이용준]]과 함께 북미 아이스하키 리그인 [[내셔널 하키 리그]](NHL) 훈련 캠프에 참여했다. 같은 해에 [[대한민국 U-18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대한민국 U-18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발탁되어 국가대표로도 활동했다. 졸업 후에는 [[연세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연세대학교 1학년 때 주니어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2005 세계 주니어 아이스하키 선수권 대회 디비전2|2005 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 디비전2]]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가하였다. 또 성인 대표로도 발탁되어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2005년 세계 아이스하키 선수권 대회 디비전2|세계 선수권 대회 디비전2]]에 참가, A조에 출전하여 [[크로아티아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크로아티아]]와 [[오스트레일리아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오스트레일리아]]의 뒤를 이어 3위를 기록했다. 2007년에는 [[중국]] [[창춘 시]]에서 열린 [[2007년 동계 아시안 게임|동계 아시안 게임]]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참가하였으며, [[홍콩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홍콩]]과의 서울에서 [[박성민 (아이스하키 선수)|박성민]]과 [[김규헌]]의 어시스트로 인한 골 1개를 기록하였고, 이후에도 김규헌과 함께 김기성의 골을 어시스트하였다. [[말레이시아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말레이시아]]전에서도 골 2개를 넣고, 박성민과 함께 김기성의 골을 어시스트했다. 이후 파이널 라운드에서 [[일본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일본]]과 [[카자흐스탄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카자흐스탄]]에게 패햇으나 개최국 [[중국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중국]]을 잡으며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 박우상 (아이스하키선수)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경성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아이스하키 선수로 활동했으며, 이 시기에 추계 전국중고아이스하키 연맹전에서 두 번 우승(2002, 2003)하고 2003년 여름에는 [[김기성 (아이스하키 선수)|김기성]], [[이용준 (아이스하키 선수)|이용준]]과 함께 북미 아이스하키 리그인 [[내셔널 하키 리그]](NHL) 훈련 캠프에 참여했다. 같은 해에 [[대한민국 U-18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대한민국 U-18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발탁되어 국가대표로도 활동했다. 경성고 졸업 후에는 [[연세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연세대학교 1학년 때 주니어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2005 세계 주니어 아이스하키 선수권 대회 디비전2|2005 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 디비전2]]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가하였다. 또 성인 대표로도 발탁되어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2005년 세계 아이스하키 선수권 대회 디비전2|세계 선수권 대회 디비전2]]에 참가, A조에 출전하여 [[크로아티아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크로아티아]]와 [[오스트레일리아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오스트레일리아]]의 뒤를 이어 3위를 기록했다. 2007년에는 [[중국]] [[창춘 시]]에서 열린 [[2007년 동계 아시안 게임|동계 아시안 게임]]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참가하였으며, [[홍콩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홍콩]]과의 경기에서 [[박성민 (아이스하키 선수)|박성민]]과 [[김규헌]]의 어시스트로 인한 골 1개를 기록하였고, 이후에도 김규헌과 함께 김기성의 골을 어시스트하였다. [[말레이시아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말레이시아]]전에서도 골 2개를 넣고, 박성민과 함께 김기성의 골을 어시스트했다. 이후 파이널 라운드에서 [[일본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일본]]과 [[카자흐스탄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카자흐스탄]]에게 패햇으나 개최국 [[중국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중국]]을 잡으며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 박주영
         ||<:> 2008년 2월 17일||<:> [[충칭]]||[[파일:중국 국기.png|width=30]] [[중국]]||<:> 3-2 (2득점) ||<:> 2008 동아시안 컵||
          * 동팡주영 : 비슷한 맥락에서 한 때 맨유에 존재하기만 했던 중국인 공격수 동팡저우에 빗대.
          * SNS는 일절 하지 않다가 2016년 [[인스타그램]] 계정을 개설하였다. 그런데 계정을 파자마자 논란에 휩싸였다. [[광주 FC]]로 이적한 [[정조국]]과 농담따먹기를 하며 [[김진규(축구인)|돌 찾으러 갔냐]]는 말을 하는가 하면, [[상주 상무]]로 입대하는 후배 박희성의 사진을 올리며 비웃고 외모를 조롱하는 포스팅으로 크게 논란이 되었다. 3월엔 태국으로 이적한 김진규가 그립다는 [[최용수]] 감독의 인터뷰를 올려놓고 ㅋㅋ를 연타하고, '푸하하', '짝사랑' '뭥미', '뜬금포' 등의 해시태그를 덧붙이면서 마치 감독의 인터뷰를 디스하는 듯한 뉘앙스를 남겼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안티들이 논란을 만든거고''' 당사자들끼린 잘 지낸다. 최용수 감독과는 10번 가지고 농담 주고받고 15시즌 중반 최 감독이 중국 장쑤의 오퍼를 받자 가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고 FC 서울 동료들과도 친분이 깊다. 전북의 심판매수로 흉흉하던 시절 여유롭게 동료들과 야유회 나온 사진을 올려서 서울 팬들 사이에서 소소하게 화제가 된 바 있다.
  • 박지만
         [[2005년]] 1월 영화 《[[그때 그사람들]]》이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으며, 법원은 일부 장면을 삭제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같은 해 2월 MK픽처스는 가처분 이의신청소송을 냈으며, 박지만은 영화상영금지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2006년]]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손해배상 소송 금액 5억원 중 1억원을 박지만에게 제출하라고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지만, 상영금지 청구에 대해서는 기각하였다.<ref>〈영화 ‘그때 그사람들’,박 前대통령 명예훼손 …1억 배상 판결〉, 경향신문, 2006년 8월 10일</ref> [[2011년]] [[8월 19일]] [[서울강남경찰서]]는 박지만의 누나인 [[박서영|박근령]]의 남편 [[신동욱 (정치인)|신동욱]]에 대해 '[[2010년]] [[9월]] 박지만의 5촌 조카와 비서실장이 자신을 [[중국]]으로 납치했고, 자신이 중국에서 [[마약]]을 했다는 소문 등을 퍼뜨렸다며, 두 사람을 [[고소]]하는 등'의 무고 혐의로 [[구속]]하였다. 신동욱은 '박지만의 비서실장 등이 [[2007년]] 자신을 중국으로 납치하여 살해하려 하였고, 박지만이 이를 뒤에서 교사했다'는 주장도 제기하였으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지만이 죽이려했다는 녹취록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ref>{{뉴스 인용
  • 박지원 (1737년)
         [[1761년]] 초, 요양차 [[북한산]]에 들어가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이때 [[삼국지]], [[수호전]]을 비롯한 [[중국]]의 고전, [[일본]]의 서적 등을 새벽까지보거나 밤새워 탐독하느라 새치가 돋아나고, 수염이 은백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건륭제]]가 열하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박지원은 일행과 함께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熱河)까지 갔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발달된 사회를 보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된다.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는 이때의 견문을 기록한 것<ref name="지만지" /> 으로 이용후생에 관한 그의 구체적 견해가 담겨 있다. 《열하일기》는 당시 보수파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경제]]·[[군사|병사]]·[[천문]]·[[지리]]·[[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신문물을 서술하여 [[실학]] 사상을 소개하였다. 그의 실학 사상은 ‘이용후생’을 한 다음에 정덕(正德)을 할 수 있다는 방법으로서, 도학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근본([[도덕]])보다 말단(실용)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평가, 조명되기 시작하였다. [[1911년]] [[최남선]](崔南善)이 [[열하일기]](熱河日記)를 간행하였고, [[1916년]] 김택영(金澤榮)이 중국 남통(南通)에서 [[열하일기]]를 7권 3책으로 재편하여 간행하다.
         박지원의 문학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라”는 의미다. 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되려는 것은 참이 아니며, ‘닮았다’고 하는 말 속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그만의 독특한 글투를 지향했다. 이러한 그의 글쓰기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연암체’라고 불렀다. 나아가 옛날 저곳이 아닌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중국이 아닌 조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일러 ‘조선풍(朝鮮風)’이라고 하는데 ‘조선의 노래’란 뜻이다.<ref name="지만지"/>
  • 박차정 (독립운동가)
         [[동래]] [[동래여자고등학교|일신여학교]]에 입학하여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중앙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ref name="new22">[http://www.newswire.co.kr/newsRead.php?no=146639 5월의 독립운동가:박차정 전시회 개최]</ref> 1930년 근우회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한 후 [[의열단]]에 가입,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하였으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여자교관, [[조선민족혁명당|민족혁명당]] 부녀부 주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등으로 활동하였다.<ref name="new22"/> 1939년 2월 장시성 쿤륜산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ref name="new22"/>과 성병<ref>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도서출판 민음사, 2005) 244</ref> 등으로 1944년 5월 27일 충칭에서 병사하였다. 독립 운동 중 사용한 가명은 임철애(林哲愛), 임철산(林哲山)이다. <ref>[http://www.suwon.com/news/articleView.html?idxno=70943 부산이 낳은 대륙의 들꽃 '박차정'] 수원일보( 2011.12.14) 기사 참조</ref>
         [[경성부]]로 올라와 [[근우회]]가 결성되자 가입하였다. 근우회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선전과 출판부문에서 활동<ref name="new22"/>하던 중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연장으로 1930년 1월 서울지역 11개 여학교의 시위투쟁인 이른바 ‘근우회 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ref name="new22"/> [[1930년]] [[광주학생운동]] 후속 시위와 노동자 파업 주동 혐의로 또다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자, 둘째 오빠 [[박문호 (1907년)|박문호]]가 건너가 있던 [[중국]]으로 망명했다.
         ==== 중국 망명 ====
         [[1930년]] 봄 그는 [[중국]]에서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는 둘째오빠 [[박문호 (1907년)|박문호]]로부터 중국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배편으로 중국으로 떠났다. 망명한 그는 국내에서 항일투쟁공로가 오빠와 지인들을 통해 이미 중국까지 알려지면서 공적을 인정받아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위원과 [[의열단]] 간부에 선임되었다.
  • 배용준
         |제목= 배용준 사진집 일본서 6일 만에 10만부 동나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839209 |출판사= 연합뉴스 |날짜= 2004-12-01|확인날짜 = 2017-09-08}}</ref> 또한, 그는 [[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도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배용준 책, 日에 이어 中진출…영문판도 출간 예정 |url= http://www.segye.com/Articles/SPN/ENTERTAINMENTS/Article.asp?aid=20100916002024&subctg1=&subctg2= |출판사=세계일보|날짜= 2010-09-16|확인날짜 = 2017-09-08}}</ref> 또한 이 책의 [[중국어]]판은 중국 신문사 신경보가 선정한 '2010 우수도서'에 후보에 선정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배용준 여행서, 중국서 우수도서 후보 올라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8&aid=0002119892 |출판사=한국일보|날짜= 2011-01-10|확인날짜 = 2017-09-08}}</ref> 이후, [[MBC LIFE]]에서 2011년 1월 8일부터 3월 12일까지 동명의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 백운산 물고기
         가장 잘 알려진 종류는 [[중국]] [[백운산]]이 원산지인 백운산 미락어(白雲山 米諾魚,Tanichthys albonubes)이며, [[베트남]]에 서식하는 Tanichthys micagemmae, Tanichthys thacbaensis 2가지 종류가 있다.
  • 봉석주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를 지냈다. [[1442년]] [[6월]] 부사정(副司正)으로 재직 중, 주서(注書) 권효량(權孝良)와 함께 관기 패강아(浿江兒)와 관계하였는데 이는 [[중국]] 사신 오양(吳良)이 관계한 여기(女妓)라 하여 [[의금부]]의 탄핵을 받고 장 80대형을 받았다.
  • 부산 (동음이의)
         * [[부산 (문인)|부산]](傅山)은 [[중국]] [[청나라]] 시대의 문인이다.
  • 비(연예인)
         이렇게 인지도를 쌓아가던 비가 결정적으로 탑스타로 자리매김한 것은 2003년 [[KBS]]의 [[드라마]]인 '상두야 학교 가자!' 에 주연으로 출연하면서부터.[* 이 드라마로 KBS 연기대상 신인상, 네티즌상, 베스트 커플상을 수상했다.] 그 뒤에 발표한 2집인 '태양을 피하는 방법' 이 빅히트를 치고 이후 드라마 '풀 하우스' 가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권에서 대박이 터지면서(태국에서는 시청률이 63%가 나왔다고 한다.) 명실상부한 탑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성공했다는 자수성가형 스토리, 국위선양을 유달리 좋아하는 한국인의 정서[* 국가의 자부심이야 어느 국가나 있지만, 한국은 유독 국제적 관심에 대해 민감하다. 아무래도 중국, 일본이라는 아시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이웃 국가들을 둔 지라 조금이라도 화제면 월드스타니 한류니 해서 당장에 치켜주는 것이 있었다. 지금은 비에게 한류스타라는 말을 붙여주던 2000년대 중후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 '풀 하우스'의 후광효과(내용 중 탑스타로 등장한다) 등이 맞물리며 당대의 각종 CF를 휩쓰는 등의 결과를 보여준다.
         몇몇 사람들은 이 시기에 가수로서의 이미지는 희박해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게릴라 콘서트]]에 도전했다가 참패하기도 했다고 알고 있으나 상두야 학교 가자는 2003년 10월 방송을 시작했고, 게릴라 콘서트는 2003년 1월에 방영되었으니 아직 배우 활동을 시작하기 전이므로 듣보 연예인이었을 수는 있어도 가수로서의 이미지가 배우의 이미지보다 약하던 시기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풀하우스(드라마)|풀하우스]] 이후 나온 3집 [[https://youtu.be/9VqpPtb7RJg|It's raining]]으로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3집으로 2004년 가요대상[* [[MKMF]] 최고 인기 뮤직비디오상, [[KBS 가요대상]] 대상]을 석권함과 동시에 아시아 밀리언셀러로 등극했다. 그리고 비는 한류열풍과 '풀 하우스' 의 인기를 등에 업고 해외로 진출, Rain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권 투어를 비롯 [[미국]]에서도 활동하였기에 한국이 배출한 제1세대 월드스타라고 언론에 의해 포장되지만 자기 홍보를 크게 한 언론플레이에 불과하다는 평이 많았다. 이런 평은 초창기엔 극히 호감형이었던 비의 이미지를 깎아먹는 족쇄로 작용하는 결과로 후일 이어진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장나라]]나 [[안재욱]], [[일본]]의 [[BoA]]나 [[배용준]] 등이 매우 커다란 인기에도 불구 그 인기가 특정국에 한정되었던 특징이 있는 반면 비의 경우 아시아권에서 폭 넓은 인기를 끎으로써 기존의 한류 스타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3집 'It's raining' 의 음반판매량과 이어지는 콘서트투어가 그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아시아 전역에서 100만장 이상을 팔았고 아시아 여러 도시의 콘서트는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박찬욱]] 감독과 같이 찍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되면서 헐리웃 관계자들 눈에 들어오게 되고,[* [[이병헌]]이 헐리웃 진출한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헐리웃 관계자들은 아직도 티켓파워를 가진 한류스타를 선호하는 편이라고 한다. 지아이조에서 이병헌이 캐스팅 된 이유가 다름아닌 일본 팬미팅 영상때문이라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피드 레이서]]에서 "태조 토고 칸" 이란 국적 불명의 이름을 가진 일본인 가장과 중국인 여동생을 둔 가정의 장남으로 출연한다. [[몽골]]계와 [[일본]]계 이름이 혼합된 토고 칸이란 이름에 억지로 [[태조]]라는 단어를 넣은 것인데 이를 가지고 한국을 홍보했다는 발언--드립--을 하였다. --테조로 안 들리면 다행이겠다--
         하지만 제작팀의 인터뷰에 따르면 원작이 일본 만화다 보니 시나리오상에서의 토고 칸은 일본인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토고 칸의 아버지인 체트야는 일본인 배우와 일본풍 테마로, 여동생인 토고 호루코는 중국인 배우와 중국풍 테마로 유지되었다.
         <[[도망자 Plan.B]]> 이후 4년만에 SBS 수목드라마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드라마)|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에 출연했다. 방송 이전에 중국에 32억에 선수출되며 중국 드라마 수출 역사상 최고가를 경신했다는 언플이 나왔는데 중화권에서 아직도 비의 흥행파워가 남아있다는 평가다. 다만 시청률이 망해버렸다... 8.2%로 시작해 시청률이 꾸준히 하락해 5.5%로 마감했다. 드라마 자체도 캐릭터들의 감정선이 오락가락한다거나 오그라든다는 혹평이 많았다.
         2015년엔 중국 드라마 <다이아몬드 러버>에 60억을 상회하는 개런티를 받고 출연했다. 중국의 저장위성과 안후이위성에서 동시 방송한 다이아몬드 러버는 2015년 방영당시 시청률과 인터넷 조회수, 이 두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평가를 들으며 대성공한다. 인터넷 다시보기 조회수는 종영할 당시 70억뷰를 넘겨서 중국 드라마 역대 6위에 랭크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다이아몬드 러버는 국내 중국 드라마 팬덤에서도 꽤 추천이 많이 되곤 하는 드라마로 비가 오래간만에 괜찮은 작품을 만났다는 평.
         2016년 8월 기준 [[중국]]에서 [[빅토리아(f(x))|빅토리아]]와 <팔월미앙>이라는 드라마를 촬영중이다.
         === 중화인민공화국(중국) ===
          * 2006년: 중화인민공화국(중국) 팬택CM - 싱글 《수기(手記)》
          * 2008년: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삼성CM - 《Anydream》
         || 2015년 || 중국 저장위성TV || 다이아몬드 러버 || 소량 || 중국 드라마 ||
         || 노수홍안 (For Love Or Money) || 쉬청쉰 || 중국영화 ||
          * 07.24 중화인민공화국(중국) MTV Mandarin Music Honors(MMH) 올해의 한국가수상 (아시아 최초 MTV Grand slam달성)
          (중국 본토의 7개 주요 방송사가 연합해 한해 동안 해당 방송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중화권 앨범 판매(주요 레코드샵 판매율 조사), 인기 투표(웹사이트와 라디오 등), 음악 다운로드 횟수 등등 총 점수를 합산하여 선정앨범 판매, 방영횟수와 다운로드를 기록한 곡을 상대로 상을 수여하는 자리)
  • 빅토르 안
         |[[중국]] [[베이징]]
  • 사시 (시호)
         '''사시'''(私諡)는 근대 이전 [[한국]], [[중국]]에서 개인에게 붙이는 이름으로, 시호를 받지 못한 개인에게 친구, 문인, 개인, 단체 등에서 붙이는 시호를 가리킨다.
         * 푸이 : [[선통제|공종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 중국의 사학자들 중 일부가 선통제라는 칭호 외에 이 시호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중국]] 정부는 공인하지 않고 '손제'만 인정한다.
         [[분류:한국의 역사]][[분류:중국의 역사]][[분류:시호]]
  • 세븐 (가수)
         === 중국 ===
         * 와줘, 한번 단 한번의 중국어 버전 수록
         * [[1월 14일]] 《2005 [[중국]] 오리지널 종합음악랭킹 Sprite Awards》 - 아시아 베스트 뮤직아티스트
  • 소지섭
         | [[한국]], [[중국]] 제작
  • 손지환 (언론인)
         1936년 [[만주국협화회]] 간도성본부에서 근무한 기록과, [[1939년]] 《[[만선일보]]》에 전 간도협조회 회장 [[김동한 (1892년)|김동한]]의 동상 및 기념비 제막 기사에 [[중국]] 한구(漢口)에 배치되어 활동 중이라는 근황이 알려진 이래 행적을 알 수 없다. 김동한의 사망 2주기를 기념한 동상/기념비 제막식에서는 좌담회도 열렸는데, 손지환은 좌담회 사회를 맡아 일제에 대한 김동한의 충실한 협력 행위를 추억하는 내용으로 행사를 진행한 바 있다.
  • 손지훈
         | 수상 = [[2016년]]스타의밤 대한민국 톱스타시상식 한국을알린 중국스타상
         * [[2006년]] [[중국]] [[CCTV8]] 中韓合作 26부 ([[妈妈的酱汤馆]]) [[엄마의장국집]] - 주연 안평원 역
  • 손지훈 (1975년 2월)
         | 수상 = [[2016년]]스타의밤 대한민국 톱스타시상식 한국을알린 중국스타상
         * [[2006년]] [[중국]] [[CCTV8]] 中韓合作 26부 ([[妈妈的酱汤馆]]) [[엄마의장국집]] - 주연 안평원 역
  • 쉐샤오루
         | 국적 = {{국기나라|중국}}
         '''쉐샤오루'''({{Zh|c=薛晓璐|hanja=설효로}})는 [[중국]]의 [[영화 감독]], [[각본가]]이다. 일찍이 [[천카이거]] 감독의 영화 《[[투게더]]》(2002)의 작가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알렸으며, [[이연걸]] 주연의 《[[해양천국]]》(2010), [[탕웨이]]와 [[우슈보]] 주연의 《[[시절인연]]》(2013)과 《[[북 오브 러브]]》(2016)를 연출하였다.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중국의 영화 감독]][[분류:중국의 영화 각본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스틸오션
         [[중국]]의 게임회사 ICE Entertainment에서 만든 [[제2차 세계대전]] 배경 해전 [[슈팅 게임]]. 2015년 11월 12일 발매되었다.
         === 중국 ===
         제작사가 중국 회사라 그런지 등장. 현재로는 7티어 프리미엄 구축함 Anshan 과 7일 연속 접속 보상인 Ning Hai 밖에 없다.
  • 아이린(레드벨벳)
         ||<:><#FE3E5F>'''{{{#white 별명}}}''' ||<#FFFFFF>'''배추'''[* 아이린의 본명인 배주현의 '배주'가 변형된 것. 학창시절부터 쓰였다고 한다.], '''현이'''[*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애칭이라고 한다.], 우리현[* 우리+배주현], 배토끼[* 외모가 [[토끼]]를 닮았다. 그러나 아이린은 이 별명을 싫어하는 듯 하다.~~변형된 것은 배추토끼.~~ [[http://i.imgur.com/TtHvNRy.jpg|배토끼]]], 배주디[* [[주토피아]]의 [[주디 홉스]]라는 캐릭터를 닮았다. [[2016년]] [[9월 25일]] 분당 서현에서 진행된 공개 팬싸인회에서 한 팬이 아이린에게 주디 모자를 선물해 주었는데 그게 아이린의 [[레전드]]가 되면서 확실하게 별명으로 굳혀졌다.], 다리미 요정[* 다리미질을 좋아하고 잘한다. 숙소에서 예리의 교복을 직접 다려~~준다~~줬다.], 배프로디테[* 본명 '배주현'+[[아프로디테]]], 동안리더, 선녀언니[* 중국에서의 애칭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https://twitter.com/Joekim0614/status/1000671256813780995?s=19|여기로]]]--, 무통배선생--, --배들짝--,~~조장선생님~~ ||
          * 2017년 2월 21일, [[중국]] 사람들이 보는 실시간 인터넷 방송을 마무리 하던 중 특유의 놀라는(?) 소리로 국내 팬들에게 심쿵을 선사했다.[[https://youtu.be/nwg61zpWd-8|영상]] 거기에다가 아이린이 출연하는 모바일 게임 광고에서 재활용되면서 그 귀여움의 파급력이 입증됐다.~~끼윱! 이이잉ㅠㅠ~~
  • 안근영
         [[서울특별시]] 출신으로 동생인 안성근도 아이스하키 선수이다. [[강북중학교 (서울)|강북중학교]] 3학년 졸업을 앞두고 [[중국]]의 [[창춘 시]]에서 열린 [[2007년 동계 아시안 게임]]을 통해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데뷔했으며, [[대한민국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대한민국]]은 [[중국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중국]]에게 0-20, [[일본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일본]]에게 0-29, [[카자흐스탄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카자흐스탄]]에게 0-1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게 0-5으로 대패하며 단 하나의 득점도 올리지 못하고 전패를 기록하여 최하위인 5위를 기록하였다. 이후 [[2011년]]에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와 [[알마티]]에서 열린 [[2011년 동계 아시안 게임]]에 다시 국가대표로 발탁되었으며, 대한민국은 일본에게 0-10, 카자흐스탄에게 0-11, 중화국에게 0-1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게 1-6으로 패하여 5위를 기록하였다.
         이후 2012년 2월에 중국 [[치치하얼 시]]에서 열린 [[2012년 IIHF 여자 아시아 챌린지컵|여자 아시아 챌린지컵]]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참가하여 4서울에 출전하였다. 대한민국은 개최국 중국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패하여 4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 3월에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열린 [[2012년 세계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권 대회]] 디비전2 B그룹에 참가하여 [[아이슬란드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아이슬란드]]전에서 [[조수지]]의 골을 어시스트하였다. 안근영은 이 대회에 5서울에 출전하여 어시스트 1개를 기록했으며, 대한민국은 [[폴란드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폴란드]]와 [[스페인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스페인]]의 뒤를 이어 B그룹 3위를 기록하였다. 이후 2012년 9월에 [[2014년 동계 올림픽 아이스하키 예선|2014 소치 올림픽 참가 예선]]에 참가하였으며, [[네덜란드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네덜란드]]와의 서울에서 1골을 넣었으나, 대한민국은 네덜란드, 폴란드, [[슬로베니아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슬로베니아]]에게 모두 패하여 탈락했다. 2013년는 [[광운대학교]]에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하여 광운대학교 남자 선수들과 훈련을 하기 시작하였다. 2013년 4월에는 [[스페인]]의 [[푸이그세르다]]에서 열린 [[2013년 세계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권 대회]] 디비전2 B그룹에 참가하여 첫 서울인 [[크로아티아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크로아티아]]와의 서울에서 조수지의 어시스트로 동점골을 넣으며, 팀의 4-1 대승에 기여했다. 이후 아이슬란드와의 서울에서는 조수지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여 팀의 4-1 대승에 기여했으며, [[벨기에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벨기에]]와의 서울에서는 [[방선우]]와 함께 조수지의 골을 어시스트하여 2-0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서울에서도 조수지의 골을 어시스트하여 팀의 7-1 승리에 기여하여 B그룹 우승에 공헌하여 대한민국팀은 디비전 2 A그룹으로 승격했다.
  • 안재욱
         |제목= [인터뷰]안재욱, "이제 곧 서른…잔치는 시작이다"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039621 |출판사= 동아일보 |날짜= 2000-12-18 }}</ref> 안재욱이 극중 노래한 《FOREVER》라는 곡으로 데뷔 앨범을 발매해, 6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는등 그 해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 이례적으로 현역 배우가 신인가수상을 휩쓸기도 했다. 특히 이 작품을 계기로 아시아권과 [[중국]] 등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안짜이쉬'''(안재욱의 중국 발음)로 불리며 한류열풍의 중심에 서 있는 대표적인 한류 1세대 스타로 활동해 왔다.<ref>{{뉴스 인용
         |제목= [특집] 중국내 안재욱 이팩트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0094295 |출판사=한국일보|날짜= 2001-08-23 }}</ref><ref>{{뉴스 인용
         안재욱은 이후, 드라마 《[[복수혈전 (드라마)|복수혈전]]》(1997년), 《[[해바라기 (1998년 드라마)|해바라기]]》(1998년), 《[[안녕 내사랑]]》(1999년), 《[[나쁜 친구들]]》, 《[[엄마야 누나야 (드라마)|엄마야 누나야]]》(2000년)등의 30% 이상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작품에 연이어 출연하며, 톱스타로써 입지를 굳혔다. [[1998년]]에는 영화 《러브 러브》로 스크린에 첫 데뷔하였고, 같은 해 [[김혜수]]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춘 영화 《찜》에서는 여장남자라는 파격적인 역할을 천연덕스럽게 소화하며 제19회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후 출연한 영화 《키스할까요?》(1998년), 《[[하늘정원]]》(2003년)에서는 흥행에 참패했다. [[2000년]]초부터는 [[중국]]에서의 인기를 발판으로 본격적인 해외 진출을 하였고,<ref>{{뉴스 인용
         |align="center"| 중국 드라마
         * 2004년 휴대폰 "VK 모바일" (중국)
         * 2004년 한국관광홍보 "강원도 방문의 해" (중국)
         * 2003년 의류 브랜드 "eminu" (중국)
         * 2002년 남성정장 "BOSS SUNWEN" (중국)
         * 2001년 [[하이트진로]] "한국 명주 진로" (중국)
         * 2001년 한국 유나이티드제약 "홍타민 진생" (중국)
         * 2000년 샴푸 브랜드 "비가" (중국)
         * 2000년 [[삼성전자]] "싱크마스터 PC 모니터" (중국)
  • 안재욱(배우,가수)
         1997년 1집 Forever를 발매한 그는 탤런트 겸 가수로 성공적인 활동을 이어나가면서 가요프로그램에서 여러 번 1위를 차지했으며, 2000년대 초엔 [[중국]], [[대만]]에서 <[[별은 내 가슴에]]>가 방영되면서 중화권에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으며 우즈베키스탄과 중남미에서도 수출된 덕택에 거기서도 어느정도 인지도가 생겼다. 사실 상 1세대 한류스타 중 한 명이 된 시기에 안재욱은 중국을 무대로 배우보단 가수로서 활동에 더욱 집중했다.
  • 안창남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귀국하였으며 [[192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군 소속으로 근무한 바 있고,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여운형]]의 주선으로 [[산시 성 (산서성)|산시 성]]으로 옮겨가 비행학교 교장으로 비행사를 양성했다.<ref>[http://db.history.go.kr/front/dirservice/MA/viewDocumentMA.jsp?pLevel=5&pDatabaseID=ma_15&pRecordID=ma_15_038_0130&pSearchSetId=1348241&pTotalSearchCount=138&pPosition=8&pSearchType=0&pSearchName=C5ECC6B4D615&pQuery=00420049003A0028C5ECC6B4D6150029 한국사 데이터베이스]{{깨진 링크|url=http://db.history.go.kr/front/dirservice/MA/viewDocumentMA.jsp?pLevel=5&pDatabaseID=ma_15&pRecordID=ma_15_038_0130&pSearchSetId=1348241&pTotalSearchCount=138&pPosition=8&pSearchType=0&pSearchName=C5ECC6B4D615&pQuery=00420049003A0028C5ECC6B4D6150029 }}</ref> 이 무렵 [[대한독립공명단]]이라는 비밀 항일조직을 결성했고, 이 단체는 항일 비행학교 건설을 위해 활동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독립 운동에 참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미혼인 채로 사망하여 후손을 찾지못해 훈장은 정부에서 보관하고 있다.
         [[분류:항공 사고로 죽은 사람]][[분류:국민혁명군]][[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중장]][[분류:추락사한 사람]][[분류:항공 선구자]][[분류:중국에 거주한 한국인]]
  • 양녕대군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덕사부묘소(至德祠附墓所)가 있는데 지덕(至德)이란 [[중국]] 주(周)나라 때 태왕(太王)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우중을 건너뛰어 셋째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할 때 태백과 우중 두 형제는 부왕의 뜻을 헤아려 삭발하고 은거하며 왕위를 사양했다. 훗날 [[공자]](孔子)가 태백은 지덕, 우중은 청권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고사를 바탕으로 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덕사부묘소, [[효령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청권사부묘소라 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81153|제목=세종대왕의 '형님'으로 세상 살아가기|저자=이정근|날짜=2005-09-18|출판사=오마이뉴스|언어=한국어|확인날짜=2012-11-30}}</ref>
  • 양현종
         개막전에서 패전 투수가 됐지만 이후 광주에서는 타선의 지원과 호투를 앞세워 파죽의 10연승을 내달렸다. 이후 팀이 16연패에 빠지는 기간 동안 부진했으나 [[2010년]] [[7월 9일]] [[한화 이글스|한화]]전에서 5이닝 2실점으로 팀을 연패해서 구해내며 시즌 11승째를 기록했다. 이후 8월 4연패에 빠지며 부진해 16승 8패로 다승 2위, 4점대 평균자책점(10위)으로 시즌을 마쳤다. 광저우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발탁돼 중국전에 등판해 호투했으며 금메달을 획득해 병역도 면제됐다.
         [[중국]]전 선발등판 - 6이닝, 3피안타, 3사사구, 5탈삼진, 1실점, 승리 투수
  • 연정훈
         * 2015년 [[중국]] 관광의 해 홍보대사
  • 영공 (동음이의)
         *'''영공'''(靈公)은 [[중국]] 제후의 시호이다.
         *'''영공'''(-公) 또는 '''영국공'''(-國公)은 [[중국]]의 여러 봉호들이다([[영국공]] 참고).
  • 오늘만 산다
          * [[중국]] 동진 시기에 역술가가 반란을 일으킨 대장군 [[왕돈]]에게 불려가서, 점을 치게 되었는데 당당하게 '실패한다'는 점괘를 내놓고, 왕돈이 "너는 그럼 얼마나 살겠냐?"고 위협하자 "오늘까지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고사가 있다. 물론 역술가는 왕돈에게 살해당했다. 오늘만 사는 사람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왝더독/줄거리
         대통령 선거 2주일 전 밤, 콘래드 브린(로버트 드 니로)이라는 남자가 [[백악관]]에 찾아온다. 백악관을 방문했던 "반딧불 소녀단"의 단원 중 하나가 대통령과 단 둘이 방에 들어갔다 나왔다. 이후 그 소녀는 대통령이 자신을 성희롱했다고 주장했다. 브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악관을 방문한 것. 그는 시간을 끌기 위해 당시 [[중국]]을 방문 중이던 대통령이 희귀병에 걸린걸로 위장해 귀국을 지연시킨다.
  • 외척
         === [[중국]] ===
         전통적으로 중국의 왕조는 외척의 권세가 강했는데, 특히 [[전한]], [[후한]] 시기는 외척의 권세가 아주 강력했던 시기이다. 황제들은 이것을 제어하려고 [[환관]]과 손을 잡고 외척을 타도하기도 했으나, 이로 인해 이번엔 환관이 반대로 지나치게 강해져서 환관 세력이 창궐하게 된다.
         결국 후한은 붕괴하여 멸망하고, 중국은 삼국시대와 5호 16국, 남북조시대로 이어지는 막장에 빠진다. ~~에일리언 VS 프레데터~~
  • 우슈보
         | 국적 = {{국기나라|중국}}
         '''우슈보'''({{Zh|c=吴秀波|p=Wú Xiùbō|hanja=오수파}}, [[1968년]] [[9월 5일]] ~ )는 [[중국]]의 [[배우]]이다. [[서울특별시]] 출신으로 [[중앙희극학원]]을 나왔다. 영화 《[[시절인연]]》(2013), 《[[북 오브 러브]]》(2016)에서 [[탕웨이]]의 상대 역을 맡았다. 드라마 《[[정충악비]]》에도 출연하였다.
         [[분류:196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중국의 남자 가수]][[분류:중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중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중앙희극학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울릉군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을 가고자 한다면 대부분 [[포항시]]로 향하는 여객선을 이용, 포항에서 대구, 부산으로 향하는 리무진 버스, 전세버스 등을 대절하여 대구국제공항, 김해국제공항을 통해 [[일본]], [[중국]], [[몽골]], [[동남아시아]], 극동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등) 등지로 향하게 된다. [[미국]]이나 [[중동]], [[유럽]], [[호주]],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인도 공화국|인도]], [[카자흐스탄]], [[아프리카]] 등지로 나갈 경우 [[포항공항]]에서 [[김포국제공항]]까지 [[대한항공]] 또는 [[에어포항]]의 국내선을 이용, 김포공항까지 내려온 다음 다시 김포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버스, 공항철도를 이용하면 바로 인천공항에 닿는다.
  • 울진군
         그러나 울진은 항공교통의 요충지 중 하나로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일본]]이나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및 [[유럽]]/[[중국]]에서 우리나라 영공을 관통하여 [[일본]]으로 가는 대부분의 비행기들은 울진 상공을 거쳐서 대한민국을 떠난다. 일부 예외가 있는데 이 경우는 강릉 상공을 통해 대한민국을 떠난다.
  • 원흠
         '''원흠'''({{본명|조원흠}}<ref>{{뉴스 인용 |제목=노라조 시즌2 시작…조빈 "내가 아오이 소라 이겼다" |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8/21/0200000000AKR20180821130900005.HTML |저자=박수윤 |출판사=연합뉴스 |날짜=2018-08-21 |확인날짜=2018-08-28 }}</ref>, 趙元欽, [[1980년]] [[1월 13일]]<ref>{{뉴스 인용|url=http://www.xportsnews.com/jenter/?ac=article_view&entry_id=1022470|제목=[입덕가이드②] 노라조 원흠 "조빈, 사실 또.라이일 줄 알았는데…"|성=|이름=|날짜=2018-09-22|뉴스=|출판사=|언어=ko|확인날짜=2018-09-29}}</ref> ~ )은 [[중국]]의 가수, 배우이면서 [[대한민국]]의 가수로, 2017년에 락 그룹 [[노라조]]에서 [[이혁]]이 탈퇴한 이후 노라조에 새롭게 합류한 멤버로, 2018년 8월 신곡 발표와 함께 정식으로 영입되었다.
         2006년 중국에서 아이돌 그룹 ‘에스피 원’으로 데뷔하였으며, 이후 그룹명이 ‘아이콘’, ‘링가왕자’로 바뀌었으나 상업적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다.<ref name="vop201808">{{뉴스 인용 |제목=새 멤버 원흠, ‘아오이 소라’도 마다하고 노라조 온 사연 [말말말] |url=http://www.vop.co.kr/A00001323640.html |저자=이동현 |출판사=민중의소리 |날짜=2018-08-21 |확인날짜=2018-08-28 }}</ref> 2010년 [[노라조]] 〈[[환골탈태|카레]]〉 녹음 당시 작곡가가 원흠에게 가이드 보컬을 맡기면서 조빈을 알게 되었다.<ref name="vop201808"/>
         2012년 일본의 AV 배우 [[아오이 소라]]의 중국 진출 작품인 웹 영화 《第二梦》(두 번째 꿈)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았다.<ref name="vop201808"/>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아오이 소라, 마리잉(马娳颖)과 함께 3인조 그룹 果宝酱(JAM)으로 활동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s://music.163.com/#/artist/album?id=844974 |제목=果宝酱JAM (苍井空, 元钦, 马娳颖) |웹사이트=网易云音乐 |확인날짜=2018-08-28 }}</ref> 2015년 5월 [[박혜경 (1974년)|박혜경]]의 2003년 곡 〈안녕〉의 중국어 번안을 맡았다.<ref>{{뉴스 인용 |제목=‘中진출’ 박혜경 “6월 한중 교류회사 설립할 것”(인터뷰) |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505311926293410 |저자=전아람 |출판사=뉴스엔 |날짜=2015-06-01 |확인날짜=2018-08-28 }}</ref>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중국의 남자 가수]][[분류:중국의 남자 배우]][[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1980년 태어남]][[분류:2006년 데뷔]][[분류: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참가자]][[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 유대철
         부친은 [[1839년]] [[참수형]]으로 순교한 성인 [[유진길]](劉進吉,(1791∼1839)이다. 유진길은 정3품 당상역관(堂上譯官)으로 일한 역관이었으며 [[1823년]] [[중국]] [[선교사]] [[마테오 리치]] [[사제|신부]]가 쓴 ≪천주실의≫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부친의 영향으로 유대철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모친의 반대에도 믿음을 지키는 순수한 [[청소년]]이었다. 반면에, 그의 어머니와 누나는 천주교에 적대적이었으므로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유대철은 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다.
  • 유승민(정치인)
         국방위원장을 지낸 후 국회 운영위원장으로 옮기기 전 잠시 외교통일위원회에서 활동하였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청와대 얼라들' 발언으로 외교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을 질타하였다. 또한 "'왜 사드를 배치하는데 [[중국]]이 난리냐"'며 사드의 국내도입에대해 강경한 찬성 입장을 보였다. 또한 [[박근혜 정부]]의 한미 전작권 재협상을 대선공약 파기라고 인정하며 "박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고 비판하였다. 이 사건으로 [[친박]] 세력들로부터 비난을 들었다. 약 9개월 남짓한 외교통일위원회 활동이였지만 유승민 의원은 NGO 국감모니터단 선정 우수국감의원, 그리고 경실련에서 선정한 외통위 국감 우수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유진길
         그 당시, [[1801년]] [[신유박해|신유년의 박해]]로 인하여, [[베이징]]에서 온 [[중국인|청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자, [[조선]]에는 사제가 한 명도 없게 되었다. 살아 남은 [[천주교]]인들은 [[교회]]의 재건과 [[청나라]]에서 또 다른 사제를 모셔오고자 고투했다. 유진길은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하상]]의 교수로 인해 매일마다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를 암송했으며 충실하게 [[십계명]]을 따랐다.
         그 사절단은 무사에 도착했다. 두 명의 [[천주교]]인이 그 무리를 빠져나와 베이징의 [[주교]]를 찾아갔다. 유진길은 [[중국어|청국어]]로 그에게 [[세례성사]]를 요청했다. 주교는 먼 곳에서온 그 손님들을 맞이한 것을 아주 기뻐하였지만 유진길이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기 위해 그에게 질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진길은 [[교리]]서에 있는 데로 정확히 질문에 답변했다. "[[인간]]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하느님]]을 알고 경배하기 위해서이며 그들의 [[영혼]]을 [[구원]] 받기 위해서 입니다..." 주교는 [[박해]] 받고 [[성직자]]도 없는 [[조선]]의 교회에서 그처럼 열정적이고 잘 교육받은 신자가 나올 수 있음에 경탄하며 이렇게 외쳤다. "이것은 참으로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조선]]의 사절단은 [[사제]]들에게 실제 [[과학]]과 [[서양]]의 [[발명]]에 대해서 배웠다. 그들은 [[서양인]] 사제들과의 토론을 통해, 서양 학문의 많은 부분과 친숙해지게 되었다. 그들은 특히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세계에서 가장 문명화된 나라도 아니라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인간이 [[귀족]]이나 [[평민]]으로 창조된 것은 아니며, 그 구분은 귀족이 평민을 억압하는 사회 체계라는 것에 대해서도 아연해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모두 동등하며 모두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인 것이었다.
         평등이라는 말과 더불어 유진길의 귀에 들리는 범애 그리고 자유는 마치 그가 그 주변에서 [[중국]] 현인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는 마치 그가 큰 [[천둥]] 소리를 듣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예수]]를 보는 것처럼 느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신앙의 표시였고 [[하느님]]의 발견이었다. 그는 [[베이징]]으로 떠나기 직전까지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신앙을 지니고 있었지만, [[서양인]] [[사제]]들과의 만남 이후로 그의 깨달음은 더욱 깊어졌고 그의 안목은 더 밝게 자라났다.
  • 유형원
         그는 경제력 양성과 사회 개혁, 그리고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존주대의의 실천을 위해 그는 [[북벌론]]을 주장했고, 북벌을 위한 이상촌 건설, 병력 양성, 훈련, [[중국]] 현지 답사 등을 하기도 했다. 흉년과 기아, 농민들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그는 권세를 지키기에 급급한 벼슬아치들이나 고통받는 농민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고담준론(高談峻論)하는 유식자들을 비판하였다.<ref name="sidee176">정옥자 금장태 이광표 외,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효형출판, 1998) 176페이지</ref> 이후 그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선비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고, 당대의 권세가들이 권유하는 벼슬도 마다하였다.<ref name="sidee176"/> 이후 [[조선 현종|현종]] 때인 [[1665년]], [[1666년]]에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그는 이상촌이 될 토지를 마련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군사 훈련을 하는 한편 [[중국]]현지에 사람을 보내 [[중국]]의 정세를 알아보기도 하였다. 무예에도 능했던 그는 직접 병사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 유홍기 (1831년)
         이웃에 살던 친구이자 역관 개화사상가 [[오경석]]이 중국에서 구해온 《해국도지 海國圖志》, 《영환지략 瀛環志略》, 《박물신편 博物新編》 등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소개한 서적을 보고 탐독, 무력을 동원하여 동양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서양세력의 실체와 아편전쟁 이후 밀려오는 서양세력에 의해 반식민지가 되어가던 [[중국]]의 실상을 알게 되어 점차 개화사상 을 형성하게 되었다.
         유대치는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겪은 뒤에 서세동점의 위기가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급박해졌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머지않아 외세가 조선으로도 침입해올 것이며 그에 대비하여 우리가 먼저 개항과 개화를 시도하여 저들과 손잡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장을 하였다. 그의 주장에 위정척사파나 조정의 수구파는 모두 터무늬없는 생각으로 치부하였다.
         한편 그는 [[오경석]]과 상의해 [[한성부]] 북촌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을 뽑아 그들의 개화사상과 [[오경석]]이 중국 [[청나라]] 여행길로부터 구입해 온 신문물을 소개한 서적들을 젊은이들에게 소개하고, 이를 가르치고 새사상에 동조하는 인사들을 규합해서 나라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는 정치를 실행하게 하자고 합의하였다. 그의 제의에 [[오경석]]은 적극 동조하였다. 한편 [[1869년]](고종 6년) 지방관으로 나가있던 [[박규수]](朴珪壽)가 [[전라남도]][[관찰사]]에서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되어 오자, 유대치와 [[오경석]]은 이 방안을 [[박규수]]에게 제안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특채로 관직에 올랐으며 그는 말단 실무관료의 직책에 있었지만 감생청 제조 [[어윤중]]의 자문역을 겸하였다. 어윤중은 유대치로부터 지도를 받고 일본과 중국을 시찰하였으며 귀국한 뒤에는 유대치를 방문하여 그의 견문사항을 이야기하며 논의했다.
  • 육홍균
         1922년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비밀결사 흑우회에 가입해, 회지 흑우, 소작농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1923년에는 [[박열]], [[김중한]] 등과 함께 불령사를 조직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출옥 후인 1926년 10월 흑우회가 흑색청년연맹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할 때에도 계속 참여하였다. 1927년 고향 선산군으로 돌아와 [[협동조합]] 우리살림사를 조직하였고, 옥성농우회를 통해 지역 농민운동을 이끌었다. 1939년 4월 검거되어 투옥되었다가, 출옥 후 [[중국]]으로 떠났다.
  • 윤기선
         * 어머니: [[마애방]](馬愛芳, [[1871년]] [[2월 19일]] - [[1905년]] [[2월 14일]], [[중국]] 사람, [[1894년]] 재혼)
  • 윤치영
         일찍부터 [[영어]](英語)를 배운 그는 영어를 잘 구사하였는데, 유년시절에 배운 [[영어]] 실력은 훗날 [[미국]] 유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윤치영은 [[중앙중학교 (서울)|중앙중학교]] 7회 졸업생이었다. 애교심이 워낙 강한 그는 아들 차남 [[윤인선]](尹仁善, [[국회사무처]] 해외자료과장 역임)과 손주 윤황구가 진학할 때 [[중앙고등학교]]를 선택하도록 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윤황구는 중앙중학교만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경복을 나왔다. 윤치영은 무시험세대인 손자가 [[중학교]]에 진학할 당시 주소를 옮기기까지 하며 중앙을 권했다고 한다. 차남 윤인선은 [[중앙고등학교]] 57회 동문이다.<ref>이건우 주간부기자. 교육화제, 주간조선. 1993.</ref> 그는 한글 외에도 [[영어]], [[한자]],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1919년]] [[4월]] 경 재동경 YMCA 등을 방문하고 도쿄 시내의 번화가와 서양인 거주지 등을 방문하였다. 이때 재동경 중국 YMCA에 방문했다가 [[이승만]]의 밀명을 받고 파견된 조카 [[윤보선]]을 만났다. 재동경 중국 YMCA 사(謝) 총무로부터 좀 만나자고 하는 편지를 받았다. 그들은 [[동경]] 한복판 간다구(神田區)에 5층 건물 하나를 차지하고 위용도 당당하게 청년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가 총무실에 앉아 있던 중 방문한 인물은 그의 조카 [[윤보선]]이었다. [[윤보선]]은 당시 중국 남경 정부의 요인 서겸(徐謙)이라고 하는 당시 [[중화민국]] 사법부장의 조카를 위장하고 [[동경]]에 잠입한 것이었다.<ref name="윤치영 회고록 p.56"/> 그와 [[안재홍]], [[이광수]], [[윤일선]] 등은 놀랐지만 [[윤보선]]이 제출한 여권을 보고 안도하였다.
         [[1922년]] 귀국하여 윤치호·[[이상재]] 등이 지도하던 [[조선기독교중앙청년회관]]에 들어가 일하였다. 또한 모교의 야구부 코치이자 조선기독교중앙청년회(YMCA)의 야구부 감독, 축구부 감독을 겸하였다. 기독교청년회에서 일하던 중 그는 [[이승만]]의 권고로 [[미국]] 유학을 결심, 미국 [[하와이]]로 건너갔다. [[하와이]]에서 그는 [[1921년]] 7월에 조직된 [[동지회]](同志會)에 가입하여 이승만을 총재로 추대하고 그는 민찬호·김영기 등과 [[대한인동지회]] 중앙부 이사원에 임명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옹호와 대동단결을 목적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21년 태평양잡지(뒤에 태평양주보로 개칭)의 주필로서 민족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동시에 [[동아일보]]의 연락으로 [[동아일보]]와 제휴, 동아일보 북미합중국 특파통신원을 겸하였다.
         {{인용문2|[[일본인]]들은 비록 하찮은 인력꾼(잡역부)이라도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치는데,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은 잘사는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애국심]]이 없어서 협박에 약하다.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대학]] 출신들이고 당신부터도 [[일본]]의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 아니냐? 그래도 조선인 가운데 애국애족 하는 사람들은 상당수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니 이 점을 너희는 [[일본]]에게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ref name="경향19720408"/>}}
         [[1944년]] [[11월]] [[안재홍]]의 방문을 받았다. [[안재홍]]의 말은 "엔도(遠藤) [[정무 총감]]이 나와 [[여운형]]을 만나보라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에 윤치영은 "패전이 짙어가는 마당에 무슨 수작인가" 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7"/> 그에 의하면 '[[1944년]] [[7월 18일]] 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이 총사퇴하고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내각이 구성된 지도 여러 달이 되었다. [[일본]]에 대한 협력을 가장하고 [[중국]] 동부에 괴뢰정권을 세웠던 [[왕조명]](王兆銘, 개명 王精衛)은 같은 해 [[11월]]에 병사라는 구실하에 제가되었다. 민세의 말은 엔도가 몽양과 윤치영과 자기 세 사름에게 [[남경]]으로 가서 왕정위(王精衛)를 만난 뒤 [[장개석]]을 찾아가 [[일본]]이 [[중국]]과 휴전하는 화평 교섭을 펼 수 있도록 일본 정부의 밀서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7"/> 윤치영은 "이 사람이 기가 찬 소리를 한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7"/>"고 하며 반대했다.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YMCA에서 임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그는 연단에서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평양 일방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남북회담]]을 적극추진하고 있는 [[김구]]를 지적, 중국으로부터 귀국 시에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돌아오라는 하지 중장의 명령에 도장을 찍고 돌아왔으니 그는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다 라며 성토하였다.<ref name="songto2">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376페이지</ref> 윤치영의 성토가 있자 청중은 흥분하여 연설을 중단시키라며 연단으로 뛰어오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윤치영은 흥분한 청중을 피해 뒷문으로 뛰어 도망쳤다.<ref name="songto2"/>
  • 윤휴
         그는 [[허목]]과 함께 맏며느리의 예에 따라 1년복 설을 주장하였는데, 현종의 의중이 1년복 설에 있었으므로 승리를 거뒀다. [[1674년]](현종 15) [[7월]] 중국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반청(反淸)반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자 윤휴는 [[조선 현종|현종]]에게 '이 때가 전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라며 북벌을 주장하는 상소인 대의소(大義疏)를 올렸다. 그러나 현종은 곧 사망했고 그의 상소는 묻혀졌다.
         윤휴는 또 당시 [[중국]] 대륙의 상황을 근거로 들었다. 당시까지 [[명나라]]에 충성하고 [[청나라]]를 거부하는 중국의 대의 지사들이 존재함을 알리고, [[청나라]]에게 위협적인 [[오삼계]](吳三桂) 세력과 [[타이완]] 정금(鄭錦)의 세력, 그리고 [[몽골]] 지역의 제 부족들의 존재를 주장하고, 이들의 세력이 각각 확장되어 [[청나라]]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조선]]이 정금과 교통하여 [[청나라]]를 친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윤휴에게 비판적이었던 [[송시열]] 조차 그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같은 [[남인]]계 [[허적]], [[권대운]] 비롯한 중신들의 반대로 좌절된다. 한편 [[1679년]](숙종 5년) [[오삼계]]의 죽음 이후 그의 이러한 [[북벌]] 주장은 완전히 설득력을 잃게 된다.
         윤휴는 두 글에서 온통 [[청나라]] 정벌의 대의명분과 당위성을 말하고, 조선의 군비가 잘 정돈되었으며 만약 북벌을 단행하면 중국 내지의 여러 세력이 호응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송시열과 효종이 주장한 내용을 되풀이하거나 과장되게 부풀려 적었을 뿐이다. 굳이 다른 점을 들어 본다면 새로운 무기인 무강차(武剛車)를 만들어 만주 벌판을 달려야 한다는 정도가 더 보태졌을 뿐이다. 윤휴는 14세의 어린 숙종을 앉혀놓고 문답을 주고받으며 세뇌를 시켰다.<ref name="leelee93"/>
         {{인용문|만일 저들이 의심을 내서 군사를 움직이면 정말로 좋은 기회를 얻는 셈이오. 우리나라에는 십만의 정병이 있고 황해도, 평안도에서 군량미를 공급할 수 있으니 열흘이 못 돼 심양을 차지하고 심양이 거덜나면 중국 내륙이 진동하여 일이 성공하지 않을 염려가 없소.<ref name="leelee93"/>
         그는 [[유교]] 학문을 [[성리학]] 위주로만 이해하는 것에 반발하였다. 그는 늘 세상의 이치를 주자만이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느냐며 [[주자학]]([[성리학]])과 [[주자가례]]로 사물을 보려는 당시 시각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본적으로 유학자였고, 윤휴는 일반 유학자들처럼 이단배척의식이 강하였다. 그가 북벌을 주장한 것도 이단이며 사이비인 야만족이 중국을 정벌한 것에 대한 반감에서 유래한 것이다. [[도학]]과 [[노장 사상]], [[불교]]는 배척하였다. 역사의식에 있어서도 조선의 역사의 기원을 [[기자 (고조선)|기자]]로 보고, [[기자조선]]이 정통이라고 인정하는 것 역시 다른 성리학자들과 다르지 않다.
         [[허견의 옥사]] 당시 [[허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윤휴가 엮어져서 사형당한 것에 대해 [[조선 숙종|숙종]]의 계략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에 의하면 남부 중국 전역을 전쟁터로 몰고 갔던 삼번의 난이 거의 진압되고 있었다. 숙종 4년 8월 [[오삼계]]가 죽고 그 손자 [[오세 번]]이 뒤를 이었고, 청군은 숙종 5년 악주를 탈환했다.
  • 의상 (신라)
         '''의상'''(義湘, [[625년]] ~ [[702년]])은 고대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왕족 출신, [[승려|고승]]이다.<ref name="글로벌-의상">[[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통일신라와 발해/고대문화의 융성#의상|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통일신라와 발해 > 고대문화의 융성 > 의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br/>[[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귀족사회와 무인정권/귀족문화#의상|한국사 > 중세사회의 발전 > 귀족사회와 무인정권 > 귀족문화 > 의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또한,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작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엄]](至嚴)으로부터 [[화엄종]](華嚴宗)을 수학하고 법통을 받아 중국 화엄종의 제3 세조가 되었다.
         그 후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의 혼란을 피하여 [[661년]]([[문무왕]] 1년)에 [[당나라]] 사신의 배편을 빌려 타고 건너가 [[중난산 산|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지엄]](至嚴: [[중국의 불교|중국]] [[화엄종]]의 시조)의 문하에 [[법장 (당나라)|현수]](賢首: 법장)와 같이 [[화엄]]의 깊은 이치를 깨달았다.<ref name="글로벌-의상"/> [[법장 (당나라)|현수]]는 [[지엄]]의 뒤를 이어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되고, 의상은 귀국 후 [[한국]] [[화엄종]]의 시조가 된다.
  • 이경희 (1880년)
         동시에 현지 교민들의 문맹률을 보고 [[중국]] [[심양]](瀋陽)에서 달신학교(達新學校)와 중국어 학교를 세워 학생, 청년들을 가르치고, [[야학]]을 개설하여 성인들을 가르쳤다. 이어 마련한 돈으로 [[만주]] [[무송현]]에 둔전을 마련하여 다시 군자금을 만들고, 청장년을 훈련시켰다. [[1918년]] [[12월]] [[파리강화회의]]로 파견되는 [[김규식]] 박사와 일행의 차비와 여비로 일부 자금을 [[상하이]]로 보냈다.
         [[1923년]] [[의열단]] 단원으로 비밀거사를 준비하여 5월의거를 계획, 국내에 잠입하였다. [[1923년]] [[김원봉]] 의 지령아래 [[김지섭]], [[김시현]](金時顯), 유시태(柳時泰), 홍종우(洪鍾佑), 황옥(黃鈺) 등과 모의하여 [[중국]]과 [[만주]]로부터 무역 목적으로 [[안둥현]]에서 [[쌀가마]]에 숨겨서 국내로 반입해온 폭탄 36개, 권총 13정, 폭탄장치용시계 6개와 뇌관 여러정, 수류탄 10발,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서]](革命宣言書)의 인쇄 사본 및 [[조선총독부]] 관공리에 대한 투항권고 격문 사본 2,000매 등을 반입, [[1923년]] [[3월 15일]] 이를 국내에 반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 이민호 (1987년)
         2009년에는 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 (대한민국의 드라마)|꽃보다 남자]]》에서 주연을 맡아,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싱가포르, 일본 등 아시아 각지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한류 스타로 각광받고 있다.<ref name="ddd"/> 2010년에는 [[손예진]]과 공동 주연으로 드라마 《[[개인의 취향]]》에 출연해 [[MBC 연기대상]]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ref name="MBC"/> 이후 모두 SBS 드라마인 《[[시티헌터 (드라마)|시티헌터]]》 (2011), 《[[신의 (드라마)|신의]]》 (2012), 《[[상속자들]]》(2013), 《[[푸른 바다의 전설]]》(2016)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리고 2009년, 이민호는 무려 2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KBS2]] 《[[꽃보다 남자 (대한민국의 드라마)|꽃보다 남자]]》에서 구준표 역을 맡게 되고, '구준표 신드롬' 으로 불릴 정도로 큰 인기를 얻으며 대박을 친다.<ref name="기분좋은날"/> 몇 년간의 무명 시절 끝에 스타덤에 올랐고 드라마의 OST, 패션, 촬영지 등도 많은 화제가 되었다.<ref>{{뉴스 인용|출판사 =mk 뉴스|제목 =`꽃보다 남자` 신드롬 |url =http://news.mk.co.kr/v3/view.php?year=2009&no=74161|저자=전지현|날짜 = 2009-02-05|확인날짜=2011-01-26}}</ref> 인기에 따라 광고계에서도 이민호 열풍이 불었는데, 광고 건수만 해도 몇 십개에 이르고 [[이병헌]], [[송승헌]], [[조인성 (배우)|조인성]] 등 최고의 톱 배우들만 채용한다는 트루젠의 전속모델로 캐스팅되었다.<ref name="CF">{{뉴스 인용|출판사 =sportsseoul.com 연예|제목 =광고계에 부는 '꽃남' 이민호 열풍|url =http://news.sportsseoul.com/read/entertain/671747.htm?imgPath=entertain/broad/2009/0313/|저자 =조현정|날짜 =2009-03-14|확인날짜 =2011-01-26}}{{깨진 링크|url=http://news.sportsseoul.com/read/entertain/671747.htm?imgPath=entertain%2Fbroad%2F2009%2F0313%2F }}</ref><ref name="CF"/> 이러한 광고계에서의 활약으로 MTN 방송광고 페스티벌 시상식 CF모델남자상을 수상했다.<ref name="MTN">{{뉴스 인용|출판사 =뉴스엔|제목 =이민호 손담비 CF 최고스타 선정 ‘2009 방송광고 페스티벌’(종합)|url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6251738371010|저자=배선영|날짜 = 2009-06-25|확인날짜=2011-01-27}}</ref> 또한 연말 시상식에서는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역으로 제45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 신인연기상, [[KBS 연기대상]] 남자 신인상, 베스트 커플상 을 수상했다.<ref name="백상예술대상">[http://movie.naver.com/movie/bi/fi/prize.nhn?code=19&rnd=45 2009년 제45회 백상예술대상 정보] [[네이버]] 영화 2011-01-27 확인</ref><ref name="KBs">[http://www.kbs.co.kr/drama/2010award/history/2009/#수상 KBS 연기대상 수상] [[KBS]] 2011-01-27 확인</ref> 이후 《꽃보다 남자》는 아시아 각지에 수출되었는데, 좋은 반응을 얻어 일본,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싱가폴, 태국, 필리핀 등 아시아 10곳에서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팬미팅을 개최했다. 일본에서의 팬 미팅 티켓은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매진이 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출판사 =이데일리SPN|제목 ='이젠 한류스타!'…이민호, 亞 10개국서 대규모 팬미팅|url =http://spn.edaily.co.kr/entertain/newsRead.asp?sub_cd=EA31&newsid=01164406589887032&DirCode=0010301|저자 =박미애|날짜 =2009-11-18|확인날짜 =2011-02-25}}{{깨진 링크|url=http://spn.edaily.co.kr/entertain/newsRead.asp?sub_cd=EA31&newsid=01164406589887032&DirCode=0010301 }}</ref> 또한 중국 《국제제선》이 조사한 "2009 가장 인기있는 한국스타는?" 순위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1위를 차지해 인기를 확인시켰다.<ref>{{뉴스 인용|출판사 =마이데일리|제목 =이민호, 中 포털서 "2009 최고의 한류스타 1위' |url =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909281946061115&ext=na|저자=이용욱|날짜 = 2009-09-28|확인날짜=2011-02-25}}</ref>
         이후 2010년에는, [[MBC]] 《[[개인의 취향]]》의 가짜 게이 전진호 역으로 출연했다.<ref name="기분좋은날"/><ref name="기분좋은날"/><ref>{{뉴스 인용|출판사 =뉴스엔|제목 =‘개인의 취향’ 이민호 완벽변신 “구준표가 안보인다” |url =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3312346361001|저자=박선지|날짜 = 2010-04-01|확인날짜=2011-01-27}}</ref> 이 작품을 통해 더이상 고교생 이미지가 아닌 성숙되고 새로운 이미지로 거듭나며 [[MBC 연기대상]]에서 남자 우수상을 수상했다.<ref name="MBC">http://www.imbc.com/broad/tv/ent/event/2010mbc/winner/index.html [[MBC 연기대상]]</ref> 《개인의 취향》은 방영이 되기도 전에 아시아 각지에서 판권문의가 들어와 [[홍콩]], [[태국]] 등에 선판매 되었고, 아시아를 비롯해 [[미국]] 및 [[유럽]], [[이스라엘]], [[예멘]] 등 총 80개국에 수출되었다.<ref>{{뉴스 인용|출판사 =재경일보|제목 =개인의취향, 홍콩-태국 등 동남아서 선판매 완료.. ‘한류드라마’ 입성|url =http://news.jkn.co.kr/article/news20100401/5238229.htm|날짜 =2010-04-01|확인날짜 =2011-02-25|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31113163742/http://news.jkn.co.kr/article/news20100401/5238229.htm|보존날짜 =2013-11-13|깨진링크 =예}}</ref> 또한 이민호가 드라마상에서 입었던 의상들도 완판되며, 이로써 차세대 한류 스타로 각광받기 시작했다.<ref name="ddd">{{뉴스 인용|출판사 =아츠뉴스|제목 =이민호, 해외에서도 인기 대박 행진 |url =http://www.artsnews.co.kr/news/127537|저자=김송이|날짜 = 2011-01-14|확인날짜=2011-02-25}}</ref> [[2011년]] 5월, [[SBS]] 《[[시티헌터]]》의 주연 이윤성 역을 맡았다.<ref>{{뉴스 인용|출판사 =프런티어타임스|제목 ='시티헌터', 시청률 나홀로↑…압도적 인기|url =http://www.frontiertimes.co.kr/news/news/2011/07/14/71681.html|저자=이수아|날짜 = 2011-07-14|확인날짜=2011-11-16}}</ref> 《시티헌터》는 [[중국]], [[러시아]] 등 아시아 각지에서 인기를 얻었다. 특히, [[중국]]에서 좋은반응을 얻어, 이민호는 중국의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쾌락대본영' 에 출연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출판사 =아시아투데이|제목 =이민호, 아시아 넘어 러시아에서도 인기 ″전 세계 한류의 최고봉″|url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543831|저자=우남희|날짜 = 2011-10-20|확인날짜=2011-11-16}}</ref> 2011년 이민호는 《시티헌터》를 통해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 남자 최우수상, 한류스타 특별상, [[SBS 연기대상]] 드라마스페셜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네티즌 최고 인기상, 10대 스타상을 수상했다. 2012년에는 [[SBS]]의 퓨전사극 드라마 《[[신의 (드라마)|신의]]》에 [[김희선]]과 함께 주연으로 캐스팅되었고, 8월부터 방영되어 같은 해 10월 30일 종영했다.<ref>{{웹 인용|출판사 = [[씨네21]]|제목 = (캐스팅) 이민호·김희선 外|url = 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69543&page=1&menu=&keyword=&sdate=&edate=&reporter=|날짜 = 2012-04-09|확인날짜 = 2012-06-04}}{{깨진 링크|url=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69543&page=1&menu=&keyword=&sdate=&edate=&reporter= }}</ref> 2012년 이민호는 《[[신의]]》를 통해 [[SBS 연기대상]]에서 미니시리즈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10대 스타상을 수상했다. 다음해인 2013년에는 중국 싱샹대전에서 아시아 최고 인기상을 수상했다. 싱샹대전은 중국 상하이 방송이 매년 개최하는 패션어워드로 음악, 영화, 스포츠, 패션 등 각종 분야를 총망라해 인기있는 인물을 선정하는 중국의 권위있는 시상식이다.
         2013년 5월 22일 이민호는 가수 데뷔 목적이 아닌 팬서비스를 위해 총 7곡이 담긴 스폐셜 앨범 ''[[My Everything]]''을 발매했다.<ref>{{뉴스 인용|출판사 =뉴시스|제목 =이민호, 음반냈다 그러나 가수는 아니다…'My Everything'|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3&aid=0005153213|저자=박영주|날짜 = 2013-05-16|확인날짜=2013-11-13}}</ref> 이 앨범은 [[가온 앨범 차트]] 5위까지 올라갔고,<ref>{{웹 인용|출판사 =[[가온 차트]]|제목 =2013년 6월 1주차 가온 앨범 차트|url =http://gaonchart.co.kr/digital_chart/album.php?nationGbn=T¤t_week=22¤t_year=2013&chart_Time=week|날짜 =2013-05-25|확인날짜 =2013-11-13|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31113163921/http://gaonchart.co.kr/digital_chart/album.php?nationGbn=T¤t_week=22¤t_year=2013&chart_Time=week|보존날짜 =2013-11-13|깨진링크 =예}}</ref> 일본 [[오리콘|오리콘 일간 앨범 차트]]에서는 1위를 했다.<ref>{{뉴스 인용|출판사=[[매일신문]]|제목 =이민호 오리콘 차트 1위 “첫 앨범 ‘마이 에브리딩’ 폭발적 반응~!”|url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7003&yy=2013|날짜 = 2013-05-29|확인날짜=2013-11-13}}</ref> 5월 25일부터는 배우로써는 이례적인 콘서트 형식의 글로벌 팬미팅 투어 《My Everything》을 시작했다. 5월 25일 [[서울]]을 시작으로 8월 10일 [[베이징]]까지 3개월동안 [[일본]],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6개국 8개 도시에서 9회 공연을 했고, 총 52,0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ref>{{뉴스 인용|출판사=[[스포츠동아]]|저자=김민정|제목 =이민호, 3개월 글로벌 투어 ‘피날레’서 5만 팬 만났다|url =http://sports.donga.com/3/all/20130813/56993223/1?rec=1|날짜 = 2013-08-13|확인날짜=2013-11-13}}</ref> 원래 이 일정으로 끝낼 예정이였으나, 팬들의 요청에 따라 2014년 1월 18일 서울에서 앵콜 공연을 하기로했다.<ref>{{뉴스 인용|출판사=[[경향신문]]|저자=하경헌|제목 =이민호 글로벌 투어 1월 한국 앵콜공연으로 마무리|url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1111436361&code=960801|날짜 = 2013-11-11|확인날짜=2013-11-13}}</ref> 이후, 2013년 10월 9일부터 12월 12일까지 인기리에 방송 된 SBS 드라마 《[[상속자들]]》에서 김탄 역으로 출연한 이민호는 [[SBS 연기대상]]에서 중편 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10대스타상, 최고인기상, 베스트커플상, 베스트드레스상을 수상하며 5관왕에 올랐다.《상속자들》들은 중국에서도 큰 히트를 쳤으며 이후 이민호는 2014년 1월 30일 중국의 설 명절 풍습인 국영방송 [[중국중앙텔레비전|CCTV]] 《춘제완후이》<ref>{{뉴스 인용|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저우위보|제목 =[세계속으로]춘완, 그리고 그 배후에 숨겨진 사실들|url =http://news.mt.co.kr/mtview.php?no=2014020612454128969&type=1|날짜 = 2014-02-07|확인날짜=2014-02-17}}</ref>
  • 이민호(1987)
         그리고 그런 그가 선택한 작품은 [[SBS]] 드라마 [[시티헌터(드라마)|시티헌터]]. 이민호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드라마 [[시티헌터(드라마)|시티헌터]]는 처음부터 원작과 다르게 기획되었고 프리퀄을 표방하여 제작되었으며, 원작자가 주인공으로 이민호가 캐스팅된 것에 대해 대단히 만족감을 표시하고 싸인까지 보내 제작발표회에 공개하기도 했다. 오히려 원작과 차별화된 시나리오로 사회성 짙은 드라마가 되어서 흥행에 성공했다. 이민호의 연기력뿐만 아니라 매력이 돋보였고 특히 눈빛, 액션 연기는 굉장히 호평을 받아 "이민호의, 이민호에 의한, 이민호를 위한 드라마"라는 평가들이 나왔다. [[시티헌터(드라마)|시티헌터]]로 이민호는 [[중국]]에서 거의 신드롬급으로 인기를 끌었다. 거기다 해외 팬덤이 강력해서 드라마 수출 계약도 호조를 보이는 엄청난 한류 배우.
         2013년에는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 [[김은숙]]의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 상속자들|상속자들]]에서 주인공 [[김탄]]역을 맡아 최고 시청률 25.6%를 찍으며 연말 수목극 1위를 유지하며 대박 행진을 이어갔다. 기존의 까칠한 [[김은숙]]표 로코 남주들과 달리 다정하며 직진하는 고등학생의 모습을 담담하게 연기해 냈다.[* [[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196854|연애의 발견 정현정 작가는 트위터를 통해 이민호의 연기를 칭찬했다]].] 2013 SBS 연기대상에서 중편드라마 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베스트드레서상, 10대 스타상, 시청자 인기상, 베스트커플상의 다섯 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 상속자들|상속자들]]은 [[중국]]에서도 인기가 높아 이민호를 일약 최고의 한류스타로 도약시켰다. 2014년 1월 외국인은 출연이 힘들다는 [[중국]] CCTV의 춘완에 한국인 최초로 출연하여 이민호가 출연한 순간 최고시청률을 기록하였고 7억명의 시청자들이 보았다고 한다.
         2016년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는 허준재, 김담령 1인2역을 연기하였고 로맨틱 코미디와 액션, 스릴러를 넘나들며 섬세하며 차별화된 연기로 역시 이민호라는 찬사를 받았고 대만, 중국 등 아시아에서 인기를 끌었고 한국 영화 및 드라마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이트인 HanCinema에서 가장 좋아하는 남자 배우 1위에 선정됐다.
         || 제12회 중국 싱샹대전 시상식 || 아시아 최고인기상 || ||
  • 이상인(1971)
         [[한국교육방송공사|EBS]]의 세계견문록 아틀라스에서 2014년 8월 4일부터 6일에 걸쳐 무림기행 3부작의 체험 및 나래이션을 맡았다. 1부는 [[필리핀]], [[칼리 아르니스|아르니스]], 2부는 [[라오스]], 무에라오, 3부는 [[중국]], [[소림사]]([[남소림사]])와 서권(백학권).
  • 이설주
         대구수창국민학교(현재의 [[대구수창초등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으로 유학하면서 [[니혼 대학]] 경제학과에 재학했지만 사상범으로 체포되고 만다. [[1932년]] 대학을 중퇴하고 일본의 문학 잡지 《신일본민요(新日本民謠)》에 시 〈고소(古巢)〉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그 뒤 [[만주]]와 [[중국]] 등지를 방랑했고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
  • 이시영 (1882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듬해 기울어가는 국운을 한탄하고 남의 나라를 삼키려는 일본을 무찌르겠다는 결연한 각오 아래 [[중국]]으로 망명,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베이징]], [[만주]]일대 그리고 국내의 각지를 그야말로 날개달린 호랑이처럼 다녔다. 괄괄한 성격의 그는 실력투쟁만이 독립의 길이라고 확신하고 [[윤상태]](尹相泰), [[서상호]](徐相鎬), [[정운일]](鄭雲馹) 등과 [[애국단]]이란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애국단을 조직한 그들은 우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모라는 당시 대구부호의 지원을 얻기로 했다. 그러나 서부자는 이름난 구두쇠인데다 민족의식이 없어 말로 해서는 응하지 않을 것 같았고 더욱 서는 우재의 사돈(族兄의 妻家)이었다.<ref name=autogenerated1 />
  • 이연수(배우)
         그러다가 2005년, [[중국]] 으로 복귀하여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여러 드라마나 영화 등에 출연하며 조금씩 활동하였다. 2016년 4월부터 [[SBS]] [[불타는 청춘]]에 출연하여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방부제 외모로 첫 등장부터 많은 시청자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지금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 [[2003년]] || - || 강산미인(江山美人) || 채무쌍 役 || [* 중국 드라마][* 10여 년의 공백을 깬 복귀작] ||
  • 이용구(1868)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을 당하게 되자 그의 장례식 당일 독립관에서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주관해 왔다가 1910년 [[한일병합]]이 되면서 [[일진회]]가 1주일의 시한을 받게 된다. 쉽게 말해 1주일 내에 해산하라는 것. 그는 1909년 12월 일본 [[수상]]인 [[가쓰라 다로]]에게 합방 청원에 소요되는 비용 3백만엔을 상의했는데, 이때 가쓰라 다로는 그에게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3백만이 아니라 3천만이라도 주겠다."]]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1910년 일진회를 해산하고 나니 일본정부가 일진회에게 준 돈은 달랑 15만엔이었다. '''그것도 이용구 개인에게 준 게 아니라 일진회 회원들 전체에게 준 것.''' [[토사구팽]]이 따로 없다.
  • 이원조 (문학 평론가)
         왕족인 [[이관용 (독립운동가)|이관용]]의 딸과 결혼했을 정도로 명망이 높은 가문에서 유교적 소양을 쌓은데다, 서구문학을 전공하고 학예부 기자 생활을 한 그는 세련된 교양을 갖춘 [[좌파]] 지식인이었다. 외조부 [[허형]]이 독립운동가이며 둘째형인 이육사를 포함한 형제들이 [[의열단]]에 가입할 정도로 [[민족주의]]와 [[반일주의]]에 충실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1946년]], 2년 전 [[중국]]에서 옥사한 이육사의 유고 시집인 《육사시집》을 간행했다.
  • 이장우(배우)
         [[중국]]의 [[드라마]]에도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417903|출연했다]].
  • 이제동 (프로게이머)
         {{금메달|2009 중국 [[청두]]|[[스타크래프트]]}}
         '''이제동''' (李帝東, [[1990년]] [[1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전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이다. 종족은 [[저그]]이며 아이디는 '''Jaedong'''이다. [[로열로더]] 출신으로, [[스타리그]] 3회 우승(골든마우스), [[MSL]] 2회 우승 등 메이저 개인리그 5회 우승, 4회 준우승을 기록하였으며 2009년 11월, 중국 청두에서 개최된 [[WCG]] 2009 그랜드 파이널에서 생애 최초의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항상 구름과 같은 팬들을 몰고 다니는 이제동은 이처럼 높은 커리어와 꾸준한 고승률을 바탕으로 역대 종족별 최장기간(2011년 7월까지 43개월 유지)으로 저그 랭킹 1위를 기록했으며 홍진호,박성준,박태민,조용호를 넘어 브루드 워 역대 최고이자 최강의 저그로 평가 받는다.
         [[박카스 스타리그 2009]] 우승 전후로, 이제동은 소속팀과의 재계약에 난항을 겪으며 FA를 선언했다.<ref>[http://www.fomos.kr/board/board.php?mode=read&keyno=98552&db=issue ‘폭군’ 이제동, 화승 제시금액 거부하고 FA 선언 결정] {{웨이백|url=http://www.fomos.kr/board/board.php?mode=read&keyno=98552&db=issue |date=20090829144702 }} 포모스, 2009년 8월 20일</ref> 그러나 본인의 팀 잔류선언에 타 팀들의 입찰이 들어오지 않아 이적에 실패했고,<ref>[http://www.fomos.kr/board/board.php?mode=read&keyno=98734&db=issue FA 이제동, 응찰 프로게임단 전무]{{깨진 링크|url=http://www.fomos.kr/board/board.php?mode=read&keyno=98734&db=issue }} 포모스, 2009년 8월 25일</ref> 부친에 의해 은퇴 가능성이 시사되는 등<ref>[http://www.fomos.kr/board/board.php?mode=read&keyno=98690&db=issue 이제동 부친, “은퇴 후 외국 유학도 염두에 두고 있다"] {{웨이백|url=http://www.fomos.kr/board/board.php?mode=read&keyno=98690&db=issue |date=20120602092503 }} 포모스, 2009년 8월 24일</ref> 한동안 이제동의 거취 문제에 팬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결국 이제동은 최종협상 기간에 화승 OZ와 수정된 계약 조건으로 재계약했고,<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246440 'FA 최대어' 이제동 "화승과 2년 더" ] 노컷뉴스, 2009년 8월 31일</ref> 소속팀의 변경 없이 09-10 시즌을 맞이하게 되었다. 2009년 11월, 이제동은 [[중국]] [[청두]]에서 개최된 [[WCG]] 2009 그랜드 파이널 스타크래프트 부문 결승에서 송병구를 2:1로 꺾고 생애 최초의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스타리그|EVER 스타리그 2009]] 8강에서 에게 0:2로 패하며 탈락했으나, [[NATE MSL 2009|네이트 MSL]] 결승에서 펼쳐진 재대결에서 3:1로 설욕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이제동의 양대리그 통산 5번째 우승이자 저그 게이머 메이저 최다 우승이며, 역대 양대리그 최고 승률의 우승 기록이다. (13승 1패, 승률 92.9%)
         2014년 9월 중국 항저우 황룡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World E-sport Championships 2014에 출전한 이제동은 결승전에서 'Snute' 얀스 아스가드를 만나 1세트 스코어 2:0, 2세트 스코어 2:1을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제동에게는 지난 5월 미국 텍사스에서 벌어진 론 스타 크래시 시즌3 이후 5개월 만의 개인리그 우승이며 2013 ASUS ROG Tournament - NorthCon 2013 우승 이후 개인통산 두 번째 프리미어급 대회 우승이기도 하다.
         이후 얼마 뒤 2015년 11월 19일 중국에서 열린 GPL 인비테이셔널 패자전 2라운드에서 이제동은 이영호를 2-0으로 꺾고 공허의 유산 공식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현역 시절 마지막 리쌍록의 승리자가 됐다.
  • 이현재(1988)
         그룹 [[메이트]]의 드러머로 데뷔하여 지금은 [[중국]]에서 완전히 [[배우]]로서 활동하는 중. 친할아버지가 [[미국]] 출신의 [[백인]]이기 때문에 1/4 [[쿼터]] [[혼혈]]이다. [[라디오 스타]]에서 본인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미국]]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고, [[영어]]도 할줄 모른다고 말하였다. [[경기도]] [[이천]] 출신이다. 메이트 시절 드러머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각각 작곡, 편곡과 보컬까지 맡았던 [[정준일]], [[임헌일]]에 비하면 곡을 쓰거나 편곡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은 하지 않았다.~~얼굴마담?~~
         * [[2017년]] : [[후난위성텔레비전|중국 후난위성TV]] [[사미인]]
  • 임수정(탤런트)
         하지만 이는 기우였다. 드라마는 '미사폐인'을 만들 정도로 전국구 인기였고 [[소지섭]]과의 애절한 커플 연기는 많은 이들을 울렸다. 다만 [[동안]] 탓인지 인지도가 그다지 높지 않던 탓이었는지 드라마를 통해 그녀를 처음 본 어르신들은 그녀를 보고 '''"[[중학생]]이 연기 참 잘하네."'''라고 하기도하고 드라마에 '''술 먹는 장면'''이 나오자 놀라기도 했다! 그 후 연기대상 땐 '''"왜 아역상 후보에 없냐"'''고 놀리기도.(...) 착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동안인 것도 동안이지만 극중에서 [[소지섭]]에게 '''아저씨'''라고 부르고 목소리도 영락없는 어린애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목소리는 실제 임수정 [[목소리]]와 전혀 다르다.) 그 때문인지 중국과 태국 더빙판의 경우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어린이]] 캐릭터 스타일의 목소리로 더빙되었다.(...) 참고로 이 작품이 임수정 '''최초의 성인 역.'''(...)
         2007년 잠시 활동을 접겠다고 선언했다.[* 이걸 한 기자가 과대해석하여 '임수정 연예계 은퇴선언'으로 기사를 올렸다.] 2007년 12월경부터 [[미국]] [[뉴욕]]에서 목격되기 시작했다. [[2008년]] 1월 중순에서야 뉴욕대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게 보도가 되었다. 유학생들의 목격담으로는 스타의식을 티내지 않고 ~~옷을 불쌍하게 입었다는 말도 있었다.(...)~~ 평범하게 [[도서관]] 같은 곳에서 돌아다녔다고. 심지어 중국인 유학생의 목격담도 있었다. 그런데 찍힌 [[사진]]이 없다.
         2011년 10월, 장화홍련 이후 늘 함께 하던 소속사[* [[iHQ|싸이더스]]→노아 엔터테인먼트로 옮겼다지만, 노아 엔터테인먼트는 싸이더스의 자회사 개념으로 보고 있었다. 싸이더스 시절부터 함께하던 팀장과 매니저가 승진하면서 자기쪽 계열의 연예인들을 중심으로 한 회사다. 바로 현재의 [[판타지오]]다.]를 떠나 [[배용준]]의 [[키이스트]]로 옮겼다. 한류스타로의 행보를 노리는 듯.[* 그런데 [[일본]]이나 [[중국]]이나 임수정 하면 배역명인 송은채로 인식한다... 벌써 10년인데;;]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배우는 아니다. 따라서 한류스타로 보기는 어렵다. 역시나 드라마 출연이 많지 않은것이 원인인듯. 하지만 [[중국인]]들이 비교적 좋아하는듯 하다.[[http://spn.edaily.co.kr/news/newspath.asp?newsid=01302166589594128|#]] [* 또한 개소문 사이트에 똑같은 드레스를 입은 중화권 연예인과의 비교기사에 올라온 중국 누리꾼들의 댓글은 비교적 우호적이다.] 그리고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알려지면서 중동권과 [[터키]], 남미에도 어느 정도 알려졌다. [[일본]]에도 [[블로그]]를 운영하는 열성팬이 있었는데 2007년 그녀의 생일 이후로는 활동을 안하고 있다.
         2009년 그녀의 생일을 맞아 팬카페에서 외국팬들[* 팬카페에 생일축하에 대한 감사메시지를 올렸는데 이들도 언급이 되었다.]의 축하메시지를 모아 전달했는데 참여한 이들의 국적은 [[캐나다]], [[이탈리아]], [[독일]], [[영국]], [[핀란드]], [[터키]], [[아제르바이잔]], [[멕시코]], [[우루과이]],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중국]], [[팔레스타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필리핀]], [[말레이시아]]. 물론 여기에 없다고 해서 팬이 없는것은 아니다.
  • 장서희(1972)
         《인어 아가씨》 종영 직후에도 드라마와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더불어 《인어 아가씨》가 중화권에서 인기를 끌면서 [[중국]]에 진출했는데, [[중국 드라마]]인 《경자풍운》에 출연하여 인기를 끌었다.[* 특히 [[청나라]] 황실 복장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줘 좋은 반응을 이끌었다.]
         《[[아내의 유혹]]》 이후 드라마 《[[산부인과(드라마)|산부인과]]》에서 머리를 숏컷으로 자르고 지적인 의사로 변신, 호연을 펼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시청률이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꽤 괜찮은 성적이었고[* 그래도 《[[인어 아가씨]]》 이후 줄줄이 말아먹던(...) 드라마들보다야 훨 나았다.], 드라마 자체도 진지한 분위기에 구성도 좋아 호평을 받았다.[* 장서희 본인도 “새로운 연기를 선보일 수 있어 무척 만족스러웠다”고 자평했다.] 다만 경쟁작 《[[추노(드라마)|추노]]》에 밀려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고, 10%대 초반의 시청률로 중박은 쳤다. 《산부인과》 이후에는 [[독립영화]] 《사물의 비밀》과 중국 드라마에 출연하는 등 이색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 장우혁
         * [[2012년]] 중국 소후닷컴 웹드라마 《시크릿 엔젤》 - 환 역
         * [[2014년]] 중국 안강위성TV 《천금보모》 - 안강 역
         * [[2010년]] : [[중국]] [[중국중앙방송]] 풍운음악 CCTV 풍운대상
  • 장현수 (1991년)
         [[2014년]] [[중국 슈퍼리그]] [[광저우 푸리]]로 이적하였다.
         | [[중국]], [[우한 스포츠 센터]]
         [[분류:199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FC 도쿄의 축구 선수]][[분류:광저우 푸리의 축구 선수]][[분류:일본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중국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분류:2011년 FIFA U-20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14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아시안 게임 축구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분류:2015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분류:축구 수비수]][[분류:축구 센터백]][[분류:경희고등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육과학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2016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J1리그의 축구 선수]][[분류:중국 슈퍼리그의 축구 선수]][[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18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재호 (배우)
         *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2016년 [[중국]]에서 먼저 데뷔했으며 영화 《매일개서모도흔우상》(每一个徐毛都很忧伤)과 드라마《인간대포》(人间大炮)에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재호 "격정 멜로 주인공 욕심 난다"|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210&g_serial=1083921&rrf=nv|날짜=2018-03-21|뉴스=조이뉴스24}}</ref>
         《매일개서모도흔우상》에서는 다큐멘터리 촬영 차 중국에 왔다가 여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한국의 인기 배우 역할을 맡았고, 직접 중국어 연기까지 소화하며 현지 스태프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인간대포》에서는 평범한 주인공을 매력적인 남자로 거듭나게 도와주는 인물로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대군’ 재호, 대륙이 먼저 알아본 라이징★|url=http://sports.donga.com/3/all/20180329/89357445/1|날짜=2018-03-29|뉴스=스포츠동아}}</ref>
         또한 중국의 인기 여자 가수 류미린과 함께 음료 광고에도 출연했다.
  • 정경은(배드민턴선수)
         조별예선에서 세계랭킹 1위였던 [[중국]]팀이 4강에서 같은 중국팀과 만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조 2위를 노리고 일부러 져주기 게임을 했는데,이 경기에 불성실한 경기로 맞대응해 결국 중국과 함께 실격된 바가 있다.
         예선 3경기(vs [[중국]]):세트 스코어 2:0 승
         동메달 결정전(vs [[중국]]):세트 스코어 2:0 승[* 이 때 상대 중국 듀오는 평소보다 강력한 신승찬-정경은 듀오의 화력에 당황하며 게임 진행 중 코치진과의 입씨름 끝에 자멸하며 패배했다]
  • 정상희(정치인)
         1907년 [[충청북도]] [[충주시|충주군]]에서 태어났다. [[경성부]] [[양정고등학교(서울)|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 자오퉁 대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년을 수료하고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1974년 메이지 대학 [[대학원]]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 정선 (화가)
         20세에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중국]] [[남화]](南畵)에서 출발했으나 30세를 전후하여 [[한국]] [[산수화]]의 독자적인 특징을 살린 산수사생(山水寫生)의 진경(眞景)으로 전환하여 동방 진경산수화의 종화(宗畵)가 되었다.
  • 정성태
         '''정성태'''(鄭成太, [[1915년]] [[7월 28일]] - [[2000년]] [[8월 17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 공무원, 사회운동가로, 제3, 4, 5, 6, 7, 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광주광역시 출신이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대한인국민회|국민회]]의 [[전라남도|전남도지부]] 청년부장으로 활동했고, 해방 직후에는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서 활동했으며, 공무원이 되어 내무부 인사과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본관은 [[하동 정씨|하동]]이다. 국회의원과 서울 정무 부시장을 지낸 [[정두언]]과 [[중국]]의 음악가 [[정율성]]은 그의 일족이었다.
  • 조선
          * 서조선 : [[중국]]을 뜻한다. 중국이 자학하는 말.
  • 주나라
         [[중국]] 역사의 통일 왕조. '주왕조'라고 한다.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의 주도권을 잡은 주왕조는 전국시대 말기에 멸망할 때까지 약 800여년 동안 존속한다. [[갑골문]]의 발견으로 상나라의 역사가 해명될 때 까지는 주왕조를 거의 중국의 '역사시대'로 보았다.
  • 주현미
         주현미(周炫美 : 중국어 발음은 저우쉬안메이)는 [[1961년]] [[11월 5일]] 생 ([age(1961-11-05)]세) [* 음력 [[9월 27일]].].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다.
         [[화교]] 3세[* 주현미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4살에 한국으로 이민와서 자랐으므로 사실상 2세인 것이나 다름없다.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 180412 주현미편에서 주현미의 친할아버지는 중국인이고 친할머니는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할머니는 중국으로 이주하여 생활한 조선인 1세(그 당시에는 [[조선]]이라고 불렀다. 물론 한국인 맞음)인 것으로 추정한다. 주현미의 [[할머니|친할머니]]와 [[어머니]]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현미의 형제들은 어린 시절 집안에서부터 이미 한국 문화 방식으로 자랐다고 한다. 따라서 오히려 주현미와 형제들은 처음 화교 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그것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출신으로, [[전라북도]] [[남원시|남원]] 에서 4남매 중 첫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4살 때 한국으로 이주하여 자란 [[중국인]][* [[중국]] [[산동성]] 모평현에서 4살 때 한국으로 이주한 [[중국인]]이지만, 당시 [[북한]]과 대치 중인 한국의 [[정치]] 및 군사적 상황에 의하여 [[대만]] [[국적]]이 되었다.] [[한의사]]였고, 어머니는 [[한국인]]이었다. 참고로 주현미의 친할머니 역시 [[한국인]]이었다고 방송에서 밝혔다. 따라서 주현미는 굳이 혈통을 따지자면 중국 [[쿼터]](1/4) [[혼혈]]인 셈이다. 대만 국적이었으나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주현미의 동생들은 아직 [[중화민국]] 국적이라 한다.[* 한국화교는 [[타이완 섬]]과는 거리가 먼 [[산둥 성]] 출신들이며 단지 국적을 부여한 나라가 [[중화민국]]이었을 뿐이다. 상황이 이렇게 좀 꼬인 건 국부천대 때문. 물론 현재 화인들의 대부분이 귀화를 택하면서 중화민국 국적자는 줄고 있다.] 종교는 [[가톨릭]]으로 소화 데레사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있다.[* 좀 비슷한 케이스인 외성인 출신 대만가수 [[등려군]]도 테레사라는 세례명을 가진 [[가톨릭]] 신자이다. 등려군 역시 산둥 출신.~~틀린 정보이다 등려군 자신은 타이완 태생 부친은 하북성 모친이 산둥성 출신이다~~]
         [[화교]] 출신이라 차별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주현미가 상을 타면 왜 외국 가수에게 국내 가수상을 주냐고 비아냥대는 기자도 있었다고. 그래서인지 비슷하게 차별받던 흑인 혼혈인 [[인순이]]와 동질감을 느껴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초중고를 모두 [[화교]] 학교를 다녔던지라 [[중국어]]도 잘 하며 방송에서 중국어 노래도 곧잘 부른다.
  • 지아 (1990년)
         '''지아'''({{본명|멍지아}}, {{zh-stp|s=孟佳|p=Meng Jia}}, [[1989년]] [[2월 3일]] ~ )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배우]]이다. [[유몽엔터테인먼트]] 소속 음악 그룹 [[유용근밴드리즈]]의 멤버이다. 2016년 5월 20일 소속사 JYP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이 만료되면서, 재계약을 하지 않았고 미쓰에이에서도 탈퇴했다. 이후 본국인 중국으로 돌아가 활동 중이다.
         데뷔 전 [[중국]] 저장 TV 오디션 프로그램 ''춤을 추면 예뻐진다(越跳越美丽)''에 출연하였고, 중국에서 중국판 [[원더걸스]]인 '''시스터즈(Sisters)'''의 멤버로 활동하였다.<ref>[http://breaknews.com/sub_read.html?uid=103169§ion=sc4 중국판 원더걸스 ‘시스터즈’, 데뷔 전부터 유명세 ‘톡톡], 《브레이브뉴스》, 2009년 6월 2일 작성, 2011년 3월 1일 확인.</ref> 과거 [[유용근밴드리즈]]의 일원으로 2021년 4월 [[유용근밴드리즈]]의 싱글 《[[아파]]》으로 [[한국]] 음악 시장에 데뷔하였다.
         * 드래곤TV(중국) 《일과 이분의 일의 여름》 - 송청 역
  • 지증왕
         '''지증왕'''(智證王, [[437년]]~[[514년]], <small>재위:</small> [[500년]]~[[514년]])은 [[신라]]의 제22대 왕이다. [[내물왕]]의 증손이며 [[복호 갈문왕]]의 손자이자 [[습보 갈문왕]](習寶)의 아들이다. 전임 [[소지 마립간]]과는 6촌 형제간이었다. [[법흥왕]]의 아버지로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이라고도 한다. [[502년]] [[순장법]]을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였으며, [[소]]를 길러 땅을 갈게 하였다. 이듬해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마립간]] 대신 [[중국]]식 군주의 칭호인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ref>그러나 마립간 또는 매금이라는 칭호는 지증왕의 장남 법흥왕의 때까지도 비공식적으로나마 잔존하여 사용되었다. 이는 울진 봉평신라비와 울산천전리각석에 기록되어 있다.</ref>
  • 차남규
         |경력 = [[1979년]] [[한화그룹]] 공채 입사<br />[[1997년]] [[한화기계]] 재직<br />[[2005년]] [[대한생명보험|대한생명]] [[중국]]주재 임원 역임 등
  • 채연
         ===2007–현재: 중국 데뷔와 ''My Love''===
         2007년 4집 활동을 마무리한 뒤, 채연은 해외 진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특히 [[중국]]에서 인기가 많았는데, 2007년 10월부터 [[후난 TV]]의 '명성대전'에 고정 출연하게 되며 매주 공연을 선보였다. 하지만 채연은 한국과 중국 활동을 병행하는 무리한 스케줄로 인하여 과로와 몸살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채연, 과로·몸살로 쓰러져 병원 후송|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7121216450680320&type=1&outlink=1|출판사 =스타뉴스|저자 = 김원겸 기자|날짜 = 2007-12-12}}</ref> 이후 '명성대전'에서 3개월 간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었고 중국의 각종 행사를 다니며 경력을 쌓았다. 또한 중국어 음반 ''[[애인 (음반)|애인]](爱人)''을 발매하였고, 2008년 7월 30일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올림픽 콘서트의 진행을 맡을 정도로 현지 팬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9월 28일에는 항저우에서 콘서트를 열며 다시 한 번 중국에서의 인기를 확인시켰다.<ref>{{뉴스 인용 | 제목=채연, 중국어 음반 들고 베이징서 공연 | url=http://china.naeil.com/news/news_view.asp?nnum=15086 | 저자=중국망신문중심 | 출판사=중국망신문중심 | 날짜=2008-02-21 |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20708124648/http://china.naeil.com/news/news_view.asp?nnum=15086 | 보존날짜=2012-07-08 | 깨진링크=예 | 확인날짜=2010-07-22 }}</ref><ref>{{뉴스 인용 | 제목='섹스어필' 채연, 中 한류 대열 합류 | url=http://news.hankooki.com/lpage/sports/200809/h2008090507151191990.htm | 저자=한성숙 기자 | 출판사=한국일보 | 날짜=2008-09-05 |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20712140210/http://news.hankooki.com/lpage/sports/200809/h2008090507151191990.htm | 보존날짜=2012-07-12 | 깨진링크=예 | 확인날짜=2010-07-22 }}</ref>
         [[2009년]] 중국에서 커다란 성공을 한 뒤, 2년 여 만에 한국에서 컴백을 예고하며 2009년 5월 6일 EP 음반 ''[[Shake]]''를 발매하였다. 본래 12일 발매 예정이었지만 EP 1집의 전 수록곡이 인터넷에서 유출되어 6일로 앞당겨 발매되었으며 컴백도 앞당겨졌다.<ref>{{뉴스 인용|제목 =2년 만에 컴백 채연, 새 앨범 전곡 음원 유출로 앞당겨 컴백|url=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83977082|출판사 =맥스무비|저자 = 연예 A5|날짜 =2009-05-04}}</ref> 또한 타이틀곡 "흔들려"의 뮤직비디오는 공중파 3사 모두 심의에서 방송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 =채연 신곡 `흔들려' 뮤비, 방송 부적격 판정|url=http://nanumnews.com/sub_read.html?uid=10164§ion=sc208|출판사 =나눔뉴스|저자 =박상미 기자|날짜 =2009-05-19}}</ref> 이로써 EP 1집 활동은 커다란 성과 없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광고만 4개를 촬영하였고, 홍콩에서 개최된 동아시안게임에서는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주제가 가창 및 성화 봉송 주자로 참여하였다. 중국 외에 틈틈이 대만과 태국, 홍콩, 싱가포르에서 방송 출연 및 행사에 출연하며 차세대 한류스타로 자리잡았고, 대규모 팬클럽 '레인보우'도 생겨났다.<ref>{{뉴스 인용|제목 =‘섹시 디바’ 채연은 중화권 ‘귀하신 몸|url=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9230225|출판사 =동아일보 연예|저자= 김원겸 기자|날짜 =2009-09-23}}</ref>
         [[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중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비디오 자키]][[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미디어 라인 음악가]][[분류:전주 이씨]][[분류:안양시 출신]]
  • 초한춘추
         [[중국]] 한나라 시대의 역사서. 유방의 막료로 종사했던 육가(陸賈)의 저작이다. [[초한전쟁]]을 다룬 제1차 사료.--하지만 지금은 없다.--
  • 최동
         귀국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에 졸업했다. 모교의 [[해부학]]교실 조교로 일하다가 [[중국]] [[북경협화의과 대학]]과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1929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931년]]부터 3년 동안은 학교 재단이사를 겸직하기도 했다. 강의 과목은 [[기생충학]]과 [[병리학]]이었으며, 다시 일본 [[도호쿠 제국대학]] [[법의학]]교실에서 [[1936년]]에 [[법의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 최동희
         아들인 최동희를 최제우의 후계자로 선포하고 전국적으로 잔치를 열었다 [[서울]] [[종로 (서울)|종로]] 출생이며 [[3.1 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 운동을 하다가 [[1922년]] 7월 [[천도교]] 중심인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해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김광희]], [[강도희]]와 함께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갔다.
         [[1926년]] [[중국]] [[지린성]]에서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1927년]] [[상하이]] 적십자병원에서 사망했다.
  • 최은경 (쇼트트랙 선수)
         [[세화여자고등학교]] 2학년 때인 [[2002년 동계 올림픽|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과 [[한국체육대학교]] 3학년 때인 [[2006년 동계 올림픽|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에서 2회 연속으로 3000m 계주 금메달과 1500m 은메달을 획득했다. [[2003년]] [[폴란드]] [[바르샤바]] [[세계 쇼트트랙 선수권 대회]]와 [[2004년]] [[스웨덴]] [[예테보리]] [[세계 쇼트트랙 선수권 대회]]에서 2회 연속으로 종합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2005년]] [[중국]] [[베이징]] [[세계 쇼트트랙 선수권 대회]]에서는 종합 2위에 올랐다.
  • 추자현
         | 소속사 = [[BH 엔터테인먼트]]<br/>Strong Vision Media (중국)
         1996년 [[SBS]] 드라마 《성장느낌 18세》로 데뷔했고, 그 후 [[중국]]으로 진출하여 2011년 [[후난위성 TV]]의 《회가적 유혹》에 출연했다. 2011년 [[중국]]에서 [[한복]] 누드를 찍어 많은 화제를 모았다.
         2012년 [[중국]] [[드라마]] '마랄여우적행복시광'에 [[중국]] 배우 [[조동혁]]과 함께 출연하여 연인으로 발전<ref>[http://entertain.naver.com/movie/now/read?oid=108&aid=0002595616 추자현, 조동혁과 4월 아닌 올 하반기 결혼 "일정 때문"] 스타뉴스. 2017년 03월 07일</ref>, 2016년 9월 연인 관계임을 알렸다. 2017년 1월 18일에 배우 조동혁과 혼인신고를 했다.<ref>{{웹 인용|url=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996073|제목=[룩@차이나] "조동혁♥추자현, 1월 18일 결혼" 中매체 관심 보도|언어=ko-KR|확인날짜=2018-03-26}}</ref>
         * 《대기영웅전 大旗英雄傳》 (2005, [[중화인민공화국|중국]]) ... 수령광 역
         * 《초류향전기 楚留香傳奇》 (2005, 중국)
         * 《양애화작진주우 讓愛化作珍珠雨》 (2007, 중국)
         * 《회가적유혹 回家的誘惑》 (2011, 중국)
         * 《신오룡산초비기 新烏龍山剿匪記》 (2011, 중국)
         * 《호선 狐仙》 (2011, 중국) ... 섭소천 역
         * 《목부풍운 木府风云》 (2012, 중국) ... 아륵구 역
         * 《무악전기 舞乐传奇》 (2013, 중국) ... 야사라 역
         * 《장안삼괴탐 长安三怪探》 (2014, 중국) ... 위약소 역
         * 《수수적남인 秀秀的男人》 (2014, 중국) ... 엽수수 역
         * 《남교기공영웅전 南侨机工英雄传》 (2014, 중국) ... 욱란정/욱설청 역
         * 《최후일전 最后一战》 (2015, 중국) ... 심검옥 역
         * 《연상흑천사 恋上黑天使》 (2015, 중국) ... 예만링 역
         * 《행복재일기 幸福在一起》 (2016, 중국) ... 고진진 역
         * 《화려한 오피스족 華麗上班族》 (2016, 중국)
         * [[2012년]] CCTV 중국드라마 연도 스타성전 국제합작상
         [[분류:197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대구인지초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단국대학교 동문]][[분류:1996년 데뷔]][[분류:추계 추씨]]
  • 츠츠모타세
         [[일본]]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 나타난 츠츠모타세(筒持たせ)라는 단어에, [[중국]] [[원나라]] 시대에 쓰여진 『무림구사(武林旧事)』에 소개된 「미인국(美人局)」이라는 한자어가 결합되어 「미인국(美人局)」이라고 쓰고 「츠츠모타세」라고 읽는 은어가 만들어졌다. [[에도 시대]] 무렵에는 지금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인국(美人局)」은 [[중국]] [[원나라]] 시대에 쓰여진 『무림구사(武林旧事)』라는 책에 수록된 나오는 범죄 행위의 일종이다. 무림구사에서는 "[[창녀]]가 남자와 짜고 [[소년]]이나 [[청년]]을 유혹하고, 나중에 남자가 그 창녀를 자신의 [[아내]]나 [[첩]]이라고 속여서 돈을 뜯어낸다."는 의미였다.
  • 카치구미
         >[[소련]], [[중국]]이 무조건 항복. [[맥아더]]는 포로가 되고, 영미태평양함대는 무장해제.
  • 커맨드 앤 컨커: 제너럴
         [[RTS]] 게임인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의 작품. 2003년 발매되었다. 테러조직인 [[GLA]]에 대항해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고 싸우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 탕웨이
         [[2008년]] 3월, 탕웨이가 출연하는 텔레비전 광고가 [[중국]]의 국가 방송 영화 텔레비전 총국의 지시로 방영 금지되었다.<ref>{{뉴스 인용 | 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143&aid=0001941951 | 제목=‘색,계’탕웨이, 中 영화·TV 출연 금지 | 저자=이영미 | 뉴스=쿠키뉴스 | 날짜=2008-03-10 | 확인날짜=2014-07-02 |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60725050644/http://entertain.naver.com/read?oid=143&aid=0001941951 | 보존날짜=2016-07-25 | 깨진링크=아니오 }}</ref> 이유로는 당시 [[중국]]에서 《색, 계》를 둘러싸고 농도 짙은 정사신에 대한 논란과 함께 상하이 친일정부와 변절자를 미화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중국 내 인터넷 상에서는 탕웨이를 비판했다. 같은 해, 탕웨이는 [[홍콩]] 정부의 우수 인재 영입계획에 따라 [[홍콩]] 영주권이 수여되었다.<ref>{{뉴스 인용 |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5&aid=0000306962 | 제목=중국 TV·영화 탕웨이 출연금지 ‘색,계’ 러브신 이유 | 저자=이영미 | 뉴스=국민일보 | 날짜=2008-03-10 | 확인날짜=2014-07-02 |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60725051046/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5&aid=0000306962 | 보존날짜=2016-07-25 | 깨진링크=아니오 }}</ref>
         [[2014년]] [[7월 2일]] 탕웨이는 김태용 감독과 결혼 소식을 발표했는데, 김태용 감독의 소속사 "영화사 봄"에서는 영화 《만추》에서 함께 작업한 두 사람은 영화 작업 이후에도 좋은 친구로 지내오다 [[2013년]] 10월 광고 촬영을 위해 탕웨이가 한국에 내한 했을 때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예전 탕웨이와 김태용이 열애설을 부인한 이유는 2012년 당시는 호감은 있었지만 열애하기 전이라는 설명이다.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사랑을 키워온 두 사람이 올 가을 부부로 인연을 맺는다"고 [[7월 2일]] 언론에 발표하였다.<ref>{{뉴스 인용 |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57&aid=0000394350 | 제목=영화 '만추'가 이어준 탕웨이♥김태용, 배우에서 연인으로 '우리 결혼해요!' | 저자=MBN | 뉴스=MBN | 날짜=2014-07-02 | 확인날짜=2014-07-02 |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60725051854/http://entertain.naver.com/read?oid=057&aid=0000394350 | 보존날짜=2016-07-25 | 깨진링크=아니오 }}</ref><ref>{{뉴스 인용 |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44&aid=0000257056 | 제목=탕웨이·김태용 감독 결혼 발표에 대한 중국 언론 반응은? | 저자=박은경 | 뉴스=스포츠경향 | 날짜=2014-07-02 | 확인날짜=2014-07-08 |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60725052103/http://entertain.naver.com/read?oid=144&aid=0000257056 | 보존날짜=2016-07-25 | 깨진링크=아니오 }}</ref>
         * 2014년 제5회 중국영화감독협회상 올해의 여배우상 - 《시절인연》
         * 2007년 중국영화미디어시상식 여자배우상 - 《색계》
         * 2006년 중국 백화상 우수배우상 - 《색계》
         [[분류:197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홍콩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홍콩의 여자 배우]][[분류:중앙희극학원 동문]][[분류:중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중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중국의 여자 연극 배우]]
  • 태영호
         빨치산 가문에서 태어난 태영호는 고등중학교 재학 중에 [[중국]]으로 건너가서 [[영어]]와 [[중국어]]를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오진우]](1995년 2월 사망) 전인민무력부장 등 빨치산 1세대의 자녀들과 함께 공부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태영호는 평양 국제관계대학(5년제)를 졸업하고, 외무성 8국에 배치되었다.
         북한-중국 경계에서 영업하는 북한쪽 식당의 경우 한국인을 극도로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전에는 중·고교 수학여행시 종종 여행경로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그리고 국정원에서 담당 선생님에게 전화가 오고 그러지만~~ 북한이 테러를 벌일 가능성이 있어 아예 수학여행도 취소될 가능성이 생겼다.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01&aid=0008631654&date=20160821&type=1&rankingSeq=1&rankingSectionId=100|네이버 뉴스]]
  • 토탈워: 쇼군 2/가문
         자신들이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이들로, 실제 역사에서는 시코쿠 전체로 세력권을 넓혔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굴복해야 했다. 이후 [[큐슈]]와 [[조선]]에 원정을 가기도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벌어진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세력 다툼에서 도요토미 가문을 지지했다가 도쿠가와가 승리하며 모든 권력을 잃게된다.
  • 하정우(영화감독)
          * [[중국]]에서도 이미지가 상당히 좋은 편이다. [[전지현]], [[김수현(배우)|김수현]] 같은 한류 스타급 인기는 아니지만, 최고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고 있다. 연기 잘 하는 한국 배우를 뽑으면 항상 하정우가 1위나 2위에 랭크된다. 중국의 영화 평점사이트에서 '[[더 테러 라이브]]' 평을 보면 다들 하정우 연기에 대해 극찬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한명회
         {{인용문2|[[조선]]에서는 고대부터 지성으로 [[중국]]에 사대(事大)하였고 [[중국]]에서도 더없이 대우하고 있는데, 지금 달려가서 도와주지 아니하면 비단 우리가 울타리로서 야인들의 노략질을 막아주는 뜻을 잃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뒷말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다시 중장(重將)을 보내서 다시 참전을 강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 한지우 (1987년)
         |수상 = 2007년 [[2007년 미스코리아|미스코리아]] 중국
         한지우가 [[중국인]]이라는 유언비어에 대해 그녀는 "[[경상북도]] [[포항시|포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중국]] [[상하이]]로 유학을 갔다. 또한, [[아버지]]도 포항에서 [[경찰]] 생활을 하고 계신다"고 해명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정글피쉬2' 한지우, 중국인 루머에 "한국사람 맞다" 일축|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6&aid=0002046448|출판사 = 스포츠조선|저자 = 이다정|쪽 = |날짜 = 2010년 9월 9일|확인날짜 = }}</ref>.
         * KFC (중국)
         * 빙그레 요플레 (중국)
         *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중국)
         * 2007년 [[2007년 미스코리아|미스코리아]] 중국 진<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2&aid=0002081305 ‘작은 송혜교’ 한지우, ‘차이나 데이’에 초청받은 사연]</ref>
         | 제목 = [[미스코리아 해외 지역 대회|미스코리아 중국]] 진(眞)
  • 혜리(1994)
         || || 애목공간(愛沐空間) 화장품 || [[중국]] 광고(런칭 모델), 걸스데이 ||
  • 화표
         [[중국]]의 건축물. [[황제]]를 상징하는 [[기둥]] 모양의 상징물이다.
         [[중국 공산당]]의 간부로서, 2012년 권력 투쟁에 패배하고 실각한 보시라이(薄熙來)가 [[다롄]] 시 시장으로 있을 때 세운 화표이다. 보시라이는 1993년 부터 2001년 까지 다롄에서 부시장, 시장을 지냈는데, 1997년 부터 4년에 걸쳐서 완성된 다롄의 싱하이광장은 베이징의 천안문광장보다도 넓은 면적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 광장의 중심에 화표가 건설되었는데, 높이가 19.97미터로 천안문 광장의 화표보다 2배 가량 높다. 또 베이징의 화표에는 용이 1마리만 새겨져 있으나, 다롄 화표는 9마리의 용을 새겨서 더욱 화려하였다.
         [[분류:중국 건축]][[분류:황제]]
  • 회맹
         고대 [[중국]]의 의식. 여러 제후를 모아 맹주(盟主)를 뽑아 집단 동맹을 맺는 의식이다.
         [[분류:중국사]]
  • 효령대군
         효령대군의 신주를 모신 사당은 청권사(淸權祠)라 불리는데 ‘청권’의 뜻은 옛날 [[중국]] 주(周)나라의 우중(虞仲)왕자가 아버지 태왕(太王)의 뜻을 헤아려 아우에게 왕위를 양보한 미덕을 칭찬하면서 공자(孔子)가 청권이라고 하였다는데 유래한다.
         청권(淸權)이란 중국 주(周)나라 때 태왕(太王)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우중을 건너뛰어 셋째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태백과 우중 두 형제는 부왕의 뜻을 헤아려 삭발하고 은거하며 왕위를 사양했다. 훗날 공자가 태백은 지덕, 우중은 청권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고사를 본떠 [[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덕사]], 효령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청권사]]라 이름 하였다.<ref name="hrdg"/>
         또한 조선 중기의 문신, 김시민(金時敏, 1681~1747)이 편집한 『조야휘언』필사본에는 '세종이 태평관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여 잔치를 하는데 효령대군이 술을 권하자 일어나 받았다. 이를 보고 사신이 말하길 "임금이 형을 우대하는 것이 이와 같구나"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서술하였다. 당시 왕실의 형제간 우애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 히치하이킹
         2014년 [[중국]]에서 상하이에 사는 한 여성이 [[여자친구]]가 되어주는 대신에 여행경비를 받겠다고 [[웨이보]]를 통하여 홍보하는 방식으로 중국 전역을 여행하고 있다(…)고 하여 화재가되었다.[http://insight.co.kr/view.php?ArtNo=821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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