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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 . . . 55회 일치
[[1982년]]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최태민도 육영재단에 합류하였다. 이후 박근혜와 최태민은 함께 [[1989년]] 육영수를 추모하는 단체인 [[근화봉사단]]을 조직하였고, 박정희와 육영수를 추모하는 월간 신문인 [[근화보]]도 발행하였다. 1년 뒤인 [[1990년]] [[9월]] 근화보는 1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고, 박근혜와 여동생인 [[박근영]]과의 육영재단 운영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박정희, 육영수 숭모회는 다툼의 원인은 최태민이 박근혜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육영재단의 간부는 [[1987년]] [[9월 2일]] 어린이회관 노조원들이 외부세력 물러가라며 1주일 동안 농성하였던 것은 최태민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특별한 직책도 없으면서 육영재단 운영을 좌우해온 최태민을 싫어하면서도 박근혜와 막역한 관계 때문에 어느 누구도 기를 펴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박근혜는 [[1990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 퇴진 기자 회견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열린우리당]] [[윤호중]] 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돈이 9억이 아니라 6억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을 빼고 하나도 새롭게 검증된 것이 없는 청문회였다"면서 "국민이 궁금해 하는 후보의 자질의혹을 검증하기보다 면죄부와 해명 기회만을 준 시간이었고 후보자의 맷집만 훈련시킨 청문회였다고 평가한다"라고 주장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 범여권 "면죄부 청문회" 비난 |url = http://www.fnnews.com/view?ra=Sent0801m_View&corp=fnnews&arcid=070720062807&cDateYear=2007&cDateMonth=07&cDateDay=20 |출판사 = 파이낸셜뉴스 |저자 = 최승철 |쪽 = |날짜 = 2007-07-20 |확인날짜 = 2013-01-24}}</ref>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 김형탁 대변인은 "정치쇼에 불과하다"면서 "하나마나한 청문회, 시간낭비, 전파낭비일 뿐"이라고 깎아 내렸다.
폭로전은 경선 때부터 시작되었다. 전당 대회를 3일 앞둔 2007년 8월 17일, 박근혜 경선후보는 "거짓으로 한나라당이 과연 집권할 수 있습니까?"라고 발언하기도 했다.<ref>{{웹 인용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14&aid=0000056525|제목 = 되돌아 본 대선|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2007-12-20|확인날짜 = 2013-03-23}}</ref> 이명박 후보측은 도곡동 땅에 대한 검찰 발표가 판세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자체 조사와 각 언론사 조사를 종합할 때 10% 이상 차이로 낙승할 거라고 주장했다.<ref name="imnews.imbc.com">{{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058737_5780.html|제목 = |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2007-08-17|확인날짜 = 2013-03-23|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0927121334/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058737_5780.html|보존날짜 = 2013-09-27|깨진링크 = 예}}</ref> 이와 관련해 진수희 대변인은 "1위 후보가 압승을 해야 경선 후유증이 최소화 된다라는 생각이 확산되어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우리가 15% 격차로 압승할 것으로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ref name="imnews.imbc.com"/> 그러나 박근혜 후보측은 자체 전수 조사 결과 근소하게나마 앞서기 시작했다면서 각종 의혹으로 이 후보에 불안감을 느낀 당심이 옮겨온다고 주장했다.<ref name="imnews.imbc.com"/> 당시 세대별 지지율을 보자면, 이명박 후보는 3,40대로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얻은 반면, 박근혜 후보는 50대 이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얻었다.<ref name="imnews.imbc.com"/>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모두 승리하였지만, 1표를 실제의 5표로 환산한 여론조사에서 뒤져 이명박에게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했다. 표의 등가성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으나, 박근혜는 깨끗이 승복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 이명박,박근혜에 2452표차 승리…경선결과 집계 |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20/2007082000855.html |출판사 = 조선닷컴 |저자 = |쪽 = |날짜 = 2007-08-20 |확인날짜 = 2009-07-07}}</ref> 하지만, 논란의 연장선상으로 이후에 대선 후보 자리를 박근혜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ref>[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25336 세상을 보는 다른 눈 "뷰스앤뉴스" - 이동복 "이명박, 박근혜에게 후보 양보하라"<!-- 봇이 따온 제목 -->]</ref>
국회의원 재직 중 대선 경선을 맞이하게 된 박근혜는 대선 경선 캠프 선대위원장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2항 '경제 민주화'의 입안자인 전 [[민주정의당]] 헌법개정위원 [[김종인]]을 임명하는 등 [[사회양극화]] 문제 해소에 적극적 의지를 보였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assembly/newsview?newsid=20120628031405843] 김봉기 기자, '경제 민주화' 원조 김종인… 내달 출범 박근혜 캠프 맡는다, 조선일보, 2012.6.28.</ref> 박근혜는 재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보다는 경제력 남용을 바로잡는 데 방점을 뒀다. 재벌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긍정적 역할은 인정하자는 쪽이었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820160408085] 이제훈, 재벌이 싫어하는 헌법 조항, 한겨레21,2012.8.20.</ref> [[사회양극화]] 해소가 목적인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세수확보가 중요한데 박근혜 의원은 2012년 7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법인세는 가능한 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야기했다. 우리나라 법인세 최고세율은 2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5.6%(지방세 포함)보다 낮은 편이다. 일본과 미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각각 39.5%, 39.2%에 이른다.<ref name="hani.co.kr">[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42826.html] 류이근, 성연철 기자, 박근혜 "법인세 인하"…친박서도 "경제민주화와 모순", 한겨레신문, 2012.7.17.</ref> 현재 법인세는 내국세 총액 가운데 부가가치세(33.0%) 다음으로 높은 비중(28.6%)을 차지한다.<ref name="hani.co.kr"/> 강병구 인하대 교수(경제학)는 “법인세를 낮추겠다면 소득세나 부가가치세 등에서 ‘박근혜식 복지’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것인지 대안을 내놔야 하는데 그게 안 보인다”고 지적했다.<ref name="hani.co.kr"/> '법인세 인하와 경제민주화 간의 모순성' 및 '법인세 감소분에 따른 대체 세수 확보' 등의 논란은 대통령 선거일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박근혜 후보는 안철수 전 후보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지지 유세를 함으로써 고비를 맞았지만, 지지층 및 여론의 굳건한 지지를 받으며 대선 기간 중 시행된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지속적으로 1위를 기록하였다. 한편 대통령 선거 후반에 국정원 여직원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민주통합당]]은 2012년 12월 11일 [[국가정보원]] 소속 심리정보국 공무원들이 국가정보원의 지시에 따라 인터넷에 게시글을 남겨서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공개했다. 이어서 해당 활동에 참여한 국가정보원 직원중 1명을 지목했다. 그러나 해당 직원은 오피스텔에서 경찰과의 대치 과정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경찰은 수사에 들어갔으나, 국가정보원 요원은 전화를 통해 자신이 항상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으며 대선과 관련한 어떤 글도 인터넷에 올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ref>조혜령,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2422919 국정원 직원 "문재인 후보 비방 댓글 단 적 없다"], 노컷뉴스, 2012년 12월 12일</ref>
2013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불가침합의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하였다.<ref name="ReferenceB">{{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3245396_5780.html|제목 = 北 "남북 불가침 합의 폐기"‥'전면전 준비' 언급|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2013-03-08|확인날짜 = 2013-04-03|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0311025446/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3245396_5780.html#|보존날짜 = 2013-03-11|깨진링크 = 예}}</ref> 북한은 또한 각종 미사일이 핵탄두를 장착한 채 대기상태에 있다고 위협했으며, 1991년 남북 불가침 합의 폐기와 판문점 남북 직통전화 단절을 선언하는 등 대한민국에 대하여 공개적인 적대행위의 의사를 밝히며 위협하였다.<ref name="ReferenceB"/> 이에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우리 한국을 공격한다면 인류의 의지,대한민국은 당연하고 인류의 의지로 김정은 정권은 지구상에서 소멸될 겁니다."라고 주장하였다.<ref name="ReferenceB"/> 국방부 또한 북한군이 대규모 훈련을 위해 집결한 상태라며, 만약에 공격할 경우 대응 규모와는 상관 없이 응징하겠다고 강조했다.<ref name="ReferenceB"/>
그러나 박근혜는 첫판부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북한과의 관계가 그것이었다. 북한은 첫판부터 남북불가침합의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했다.<ref name="ReferenceB"/> 북한은 또한 각종 미사일이 핵탄두를 장착한 채 대기상태에 있다고 위협했으며, 1991년 남북 불가침 합의 폐기와 판문점 남북 직통전화 단절을 선언했다.<ref name="ReferenceB"/> 이에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우리 한국을 공격한다면 인류의 의지,대한민국은 당연하고 인류의 의지로 김정은 정권은 지구상에서 소멸될 겁니다."라고 주장하였다.<ref name="ReferenceB"/> 국방부 또한 북한군이 대규모 훈련을 위해 집결한 상태라며, 만약에 공격할 경우 대응 규모와는 상관 없이 응징하겠다고 강조했다.<ref name="ReferenceB"/>
2012년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과 [[국군사이버사령부]]가 직원들을 동원해 [[문재인]]을 비방하는 댓글을 쓰는 등 박근혜에게 유리하도록 여론을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국가정보원]] 사건'이 불거져 수사를 진행 중이던 [[2012년]] [[12월 16일]], 박근혜는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의 토론 중 당해 사건의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전이었음에도, 해당 사건의 증거가 없는 것으로 나왔다고 발언하였다. 토론회 직후 대선 3일 전인 [[12월 16일]] 일요일, 서울지방경찰청은 국정원 여직원이 댓글을 단 흔적이 없다고 사전 발표했다. 그러나 대선 이후인 2013년 6월, 검찰은 경찰의 발표와 달리 국정원 직원들이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댓글을 단 사실이 있다고 상반된 발표를 했다.<ref>성혜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22&aid=0000013643 원세훈 '선거법' 적용키로...영장은?],뉴스와이,2013년 6월 7일</ref> 더구나 서울지방경찰청이 거짓 발표를 할 당시 국정원 직원들이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댓글을 단 사실이 있는 것을 이미 확인했던 것으로 드러났다.<ref>이윤상,[http://news1.kr/articles/1175796 김용판, 100여페이지 분석자료 폐기…수사방해 분석결과 나오기도 전 보도자료 작성],뉴스1, 2013년 6월 14일</ref>
이후 해경 및 정부의 구조 및 사고 대응에 있어서 매스컴 및 여론의 엄청난 비판이 발생하였다. 박근혜는 사고 발생 후 10여일이 지난 4월 하순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통하여 대국민 사과 메시지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여론의 비난은 계속되었고 일부 진보세력은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면서 청와대 홈페이지에 대통령 하야 청원글을 올리기도 하여 논란을 빚었다.
청와대는 이 사건에 대하여 문건 유출이 핵심이라고 규정했고, 문건 유출자로 지목된 박관천 경정 등을 검찰에 수사 의뢰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수석비서관 회의 모두발언을 통해‘청와대 문건 유출은 국기 문란’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하여 야당에서는 ‘비선 실세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정윤회가 국정에 개입하였는지 여부가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박관천의 상관이었던 전 청와대 비서관 조응천은 문건의 내용 중 60% 이상이 사실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2013년 11월 정부가 청구한 통합진보당에 대한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에 대하여 재판관 8(인용) : 1(기각)의 의견으로 인용하였다. 이에 따라 통합진보당은 선고 즉시 해산되었고, 소속 의원 5명 역시 의원직이 박탈되었다. 헌법재판소는 통진당의 강령, 통진당이 내세우는 ‘진보적 민주주의’ 등이 북한의 주장을 추종하고 있고, 북한의 대남 적화 노선을 추종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더불어 통진당이 내세우는 주장과 달리 그들의 숨은 목적은 ‘적화통일’이며, 통진당이 북한을 추종하는 자주파(주사파)에 의하여 장악되었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등을 볼 때 통진당이 내란 등의 무장투쟁을 통해 대한민국 체제를 위협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통진당을 해산한다고 판시하였다.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1심 무죄판결, 야권의 특검도입 주장, 체육계의 부조리 관행 여부를 지시
2018년 8월 23일 통계청이 발표한 2분기 가계동향조사(소득 부문) 결과에 따르면, 노무현정부(2004~2007년·2003년은 통계 작성 시작연도로 전년과 비교 불가)에서의 1분위 가구 연평균 소득성장률은 4.0%였으며, 5분위 가구는 5.0%를 기록해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보수정권으로 분류되는 이명박·박근혜정부에서는 오히려 1분위 가구의 소득성장률이 높게 나타났다. 이명박정부에서 1분위 가구의 가계소득은 연평균 6.6%나 오른 반면 5분위 가구 성장률은 4.6%에 그쳤다. 박근혜정부는 1분위 가구가 2.5%, 5분위 가구는 2.0%의 성장률을 보였다. 보수 정권기에는 소득 5분위 배율과 지니계수가 개선되었으나 진보 정권기에는 도리어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두원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보수정권에서 양극화가 심해질 것이란 통념과 달리 2000년대 이후로는 보수·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사회보장성 제도가 대폭 확대돼 왔다"며 "오히려 높은 경제성장을 통해 분배도 개선시키는 방식이 효율적임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 중인 소득주도성장은 이번 2분기 가계소득 통계를 통해 그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평가된다. 그동안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취약계층의 소득을 올려주는 방식으로 새로운 성장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지난 1분기에 이어 이번 2분기에도 저소득층의 소득이 절대적으로는 물론 상대적으로도 큰 폭으로 감소한 게 확인됐기 때문이다.[https://www.mk.co.kr/news/economy/view/2018/08/530847/|#]{{깨진 링크|url=https://www.mk.co.kr/news/economy/view/2018/08/530847/%7C }}[https://www.yna.co.kr/view/AKR20180823079851002|#]{{깨진 링크|url=https://www.yna.co.kr/view/AKR20180823079851002%7C }}
2018년 8월 29일 국회예산정책처에서 발행한 '조세정책의 소득재분배 효과분석'이라는 제목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소득 분배가 악화되지 않은 것으로 5일 밝혀졌다. 국세청의 소득 100분위 자료를 활용해 소득계층별 소득분배 추이를 분석한 국회예산정책처는 "소득 상위구간의 소득점유비중인 통합소득의 소득집중도(상위 20%)는 2008년 56%에서 2016년 54.7%로 감소했다"며 "소득집중도의 값이 클수록 소득분배가 악화됨을 의미하므로, 위 결과는 분석대상기간 우리나의 소득분배는 악화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국회예산정책처는 "상위 20%의 소득점유비중이 하락한 이유는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상위 20%의 연평균 소득 증가율이 하위 20%의 연평균 소득 증가율에 비해 낮았기 때문"이라며 상위 20%의 연평균 소득 증가율은 6.5%였고 하위 20%의 연평균 소득 증가율이 9.5%였다"고 부연했다. 국회예산정책처의 이번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인 2008년부터 2016년까지의 소득 양극화는 오히려 개선됐다. 처분가능소득을 기준으로 지니계수는 2008년 0.314에서 꾸준히 줄어 2015년 0.295까지 떨어졌고 2016년에는 0.304로 소폭 올랐다. 문재인 정부가 소득주도 성장으로 하위 소득자의 실업을 야기하면서 양극화를 심화시키자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책임이라는 주장을 내놓았지만 국회예산정책처가 과거 보수 우파 정부에서 소득분배가 악화되지 않았다는 보고서를 내놓은 것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경기가 많이 안 좋았는데 그러면 자산 가격이 떨어지고 자산 소득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그런 이유 때문에 자산이 많은 고소득자 소득이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도 “부동산 시장이 이명박 정부 때 침체했다가 박근혜 정부에서 다시 살아나는 흐름을 보였다. 한국 고소득자의 소득 중 부동산 관련 소득이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부동산 시장의 변동이 소득 불평등 해소에 영향을 줬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예정처 관계자는 “소득 양극화 해소가 특정 정부와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 경제 양극화 논의가 본격화되는 흐름이 있었고, 그 결과 소득 격차를 줄이려는 정책적 노력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기초노령연금 등 복지제도가 확충되고, 상위계층에 대한 실효세율이 높아진 게 소득 격차를 줄이는 데 일조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ref>https://news.joins.com/article/22942774</ref><ref>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9592</ref>
2019년 4월 11일 통계청이 새롭게 공개한 소득분배지표에서 2011~2017년 한국의 분배 상황이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보수정권에서 소득분배가 지속적으로 악화됐기 때문에 소득주도성장이 필요하다는 문재인 정부의 주장과 상반되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2019년 4월 11일 통계청이 처음 공개한 가계금융복지조사 소득분배 부문 추가 지표에 따르면 한국의 팔마비율(Palma ratio·처분가능소득 기준)은 2011년 1.74배에서 2017년 1.44배까지 하락했다. 팔마비율은 호세 가브리엘 팔마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개발한 소득 불평등 지표로 소득 상위 10% 인구의 소득 점유율을 하위 40% 인구의 소득 점유율로 나눈 값이다. 숫자가 낮아졌다는 것은 소득 불평등이 개선됐다는 의미다. 또 다른 분배지표인 소득 10분위 경곗값 비율(P90/P10)도 2011년 6.42에서 2017년 5.79까지 떨어졌다. `소득 10분위 경곗값 비율`은 처분가능소득 기준 가계소득 상위 10% 경곗값을 하위 10% 경곗값으로 나눈 수치다. 이날 공개한 다른 2개의 소득분배지표(P90/P50, P50/P10) 모두에서도 역시 2011~2017년 소득분배가 개선된 것으로 집계됐다. 이 기간은 이명박 정권 중반기인 2011년부터 약 6년 반 동안 보수 정권이 이어진 후 마지막 반년 가량 동안에는 진보 정권인 문재인정부 집권기에 해당한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2018년 8월 1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소득주도 성장을 내세우면서 최저임금을 급속도로 인상해 일어난 '고용 참사'의 책임이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지난 10년간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성장잠재력이 매우 낮아져서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김진표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역시 2018년 8월 24일 "양극화가 유례없이 심화된 것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경제정책이 역주행한 것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말한 바 있고 그 근거를 묻는 질문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한국의 소득불평등이 최근 10년간 악화됐다는 보고서를 본 기억이 있어 그렇게 말했다"고 설명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018년 12월 인사청문회에서 “박근혜 정부에서 양극화가 지속됐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월 신년회견에서 "우리는 부의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이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나라"라고 언급하는 등 진보 진영에서는 지난 두 차례의 보수 정권 집권기간에 분배 상황이 악화됐다고 주장해 왔다. 이두원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에서는 보수와 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복지 확대 정책을 펼쳐 왔다. 보수 정권에서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라는 진보 세력의 주장은 이 같은 정책 요인을 전혀 감안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ref>https://www.hankyung.com/economy/article/2019041161511</ref><ref>https://www.mk.co.kr/news/economy/view/2019/04/224437/</ref>
[[2004년]] 제17대 국회에서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맡고 있던 박근혜와 함께 원내대표로 활동하였던 [[김덕룡]]은 박근혜가 소통이 안 되는 것을 넘어 "먹통"이라고 평가하면서, 당시 박근혜에게 정수장학회 문제를 털고 넘어가야 한다고 조언을 했지만 자신의 조언을 거부한 것은 물론 이후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일화를 예로 들었다. 또한 박근혜에게 친구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으며, 그녀의 참모들조차 그녀가 주요 현안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누구와 상의하는지 모른다고 주장하였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65492.html "정수장학회 해결 제안하자 날 멀리하더라"] 한겨레신문, 2012년 12월 14일</ref>
박근혜는 2012년 8월 7일 뉴미디어 토론회에서 최저 시급을 묻는 사회자에게 "5000원 좀 넘는 것 아니냐"고 답했다. 4580원이라는 사회자의 정답 발표에 박근혜는 "아르바이트 시급이 5000원이 안 되느냐"고 대답했다. 참고로 박근혜는 지난 18대 [[대한민국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이었다. 이에 야권에서는 박근혜는 "평생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사람" "서민과 노동자의 생활에 관심이 없는 사람" 이라고 주장하며 여태까지의 서민 [[코스프레]]가 위선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강력히 비난하였다.<ref>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100&key=20120809.22004212735</ref>
* [[2005년]] [[열린우리당]]의 [[4대 개혁 법안]]에 반대했다.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나, 고무·찬양과 같은 독소 조항을 빼자고 주장했다.<ref name="%2525EC%2525A7%252584%2525EB%2525B3%2525B4%2525EC%252598%2525A4%2525ED%252595%2525B4"/>
* [[2002년]] 박근혜는 한나라당을 탈당해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을 만나기도 했다. [[새누리당|한나라당]] 내에서 [[김정일]]을 만났던 정치인은 박근혜가 유일하다. 이는 박근혜가 남북 관계에 대해 새누리당 주류의 인식과는 다른 '나름의 관점'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는 주장이 있다.<ref name="%2525EC%2525A7%252584%2525EB%2525B3%2525B4%2525EC%252598%2525A4%2525ED%252595%2525B4"/>
- 희빈 장씨 . . . . 33회 일치
희빈 장씨의 입궁 시기는 불분명하다. 그가 11세의 어린 나이에 아비 [[장형 (조선)|장형]]을 잃고 생계가 어려웠던 탓에 궁녀가 되었다는 주장과 [[장형 (조선)|장형]]이 사망하기 전에 역시 궁녀였던 딸이 있는 [[장형 (조선)|장형]]의 사촌형 [[장현 (조선)|장현]]의 권고를 받아 막내 딸인 장씨를 입궁시켰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생부 [[장형 (조선)|장형]](張炯)의 옥산부원군신도비 기록에 따르면 희빈 장씨가 어린 나이에 간택되어 입궁해 성장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숙종 실록에도 머리를 스스로 땋아 올리기 전에 입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ref>숙종실록 15년 5월 6일 2번째 기사</ref>
일부 역사학자들은 희빈 장씨가 아비의 사후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당백부 [[장현 (조선)|장현]]이 [[경신환국]]에 휘말린 후 가세가 기울자 서인들과 권력 투쟁을 벌이던 남인들의 입궁 제의를 받아 궁녀로 입궐하였다고 주장하여 현재까지 정설로 알려졌지만, [[경신환국]] 당시 그의 나이가 이미 22세였기에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ref group="주"> 궁녀의 통상 입궁 연령은 4세부터 16세이며, 조선시대 여성들의 법적 혼인 연령은 14세~20세이다. 부모가 50세를 넘긴 경우엔 관아의 특별 허가를 받고 12세 이상의 자녀를 혼인시킬 수 있는데 16세기 이후엔 수 차례에 거듭된 외란으로 남성의 숫자가 급감하였고 처녀를 차출하여 청으로 진상하거나 궁녀로 뽑는 분위기로 인해 법금을 어기고 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ref> 이러한 주장의 근원은 희빈 장씨가 [[경신환국]] 당시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궐하였다는 [[인현왕후]]의 주장으로 불거진 것인데, [[경신환국]]과 같은 해 말에 장씨가 강제 출궁이 되었다가 7년 후인 [[1686년]]에 다시 입궁했던 만큼 이미 궁녀인 신분으로 출궁을 당한 후에 [[남인]]과 연계하여 돌아왔다는 것이 오역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또한 [[조선 효종|효종]] 때 이미 막대한 부를 쌓은 [[장현 (조선)|장현]]도 딸을 궁녀로 입궁시켰으며, [[조선 현종|현종]] 5년에 대왕대비전의 궁녀로 뽑혔다가 이미 사주가 오간 상대가 있으니 정혼을 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유로 출궁된 역관 최우의 딸의 전례<ref>현종실록 5년(1664 갑진 / 청 강희(康熙) 3년) 12월 30일(정해) 2번째기사</ref> 도 있는 만큼 희빈 장씨의 가세가 빈궁하여 궁녀가 되었다는 가설은 억측에 불과하다.
같은 해, 숙종의 어머니였던 대비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에 의해 강제로 출궁되었다. 숙종실록이나 인현왕후전 등에는 숙종을 모시기에 장씨의 출신이 천하고 성품이 극악한 이유로 쫓아낸 것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경신환국]] 당시 [[장현 (조선)|장현]] 일가가 [[복평군]] 형제와 절친한 사이이니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해 몰락시킨 장본인이 바로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 오라비 [[김석주]]였던 것으로 비추어 장씨의 보복을 견제한 탓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녀가 출궁된 직후인 [[1681년]] 1월 3일에 계비 간택령이 내려졌고, 3월에 [[조선 숙종|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대비 김씨]]와 [[송시열]]의 추천으로 민씨([[인현왕후]])가 간택되어 [[1681년]] 5월 14일 [[조선 숙종|숙종]]과 민씨가 가례를 올렸는데 본래 [[명성왕후|대비 김씨]]의 친정 가문과 원한이 있던 [[송시열]]과 [[민유중]]<ref group="주">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우명]]은 당파로선 엄연한 서인이었지만 [[조선 현종|현종]]의 척신으로서 예송논쟁 당시 [[송시열]]과 [[송준길]]을 비판하고 [[남인]]의 손을 들어주어 [[서인]]의 공적이 되었다. [[민유중]]은 과거 [[김우명]]의 형인 [[김좌명]]과 심하게 다투어 벼슬을 버리고 지방에 은거하였던 경력이 있다.</ref> 의 혈육인 민씨가 [[조선 숙종|숙종]]의 계비가 된 것은 [[경신환국]] 당시 [[서인]]과 손을 잡았던 명성왕후의 정치적 계약임을 짐작할 수 있는 만큼 [[인경왕후]]의 죽음 직후 계비로 내정된 민씨를 위해 장씨를 [[조선 숙종|숙종]]의 곁에서 치운 것일 가능성도 존재한다.<ref group="주">본래 정처의 3년상이 마치기 전에 재혼하는 것은 경국대전과 의례의 조항으로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이는 왕 또한 마찬가지이다. [[조선 숙종|숙종]]이 [[인경왕후]] 김씨의 사후 3년상은 고사하고 불과 반 년도 되지 않아 [[인현왕후]] 민씨와 재혼을 한 것은 조선 왕실 역사 상 전례에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논란이 있어야 할 [[인현왕후]] 민씨와의 재혼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던 서인은 [[인현왕후]] 민씨의 사후 3년상이 마쳐지기 전에 [[조선 숙종|숙종]]이 계비 간택령을 내리라는 명을 내리자 반대를 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37권, 28년(1702 임오 / 청 강희(康熙) 41년) 8월 27일(병오) 2번째기사</ref>
[[1683년]] 10월, [[조선 숙종|숙종]]이 두질(豆疾: 두창, 마마, [[천연두]])을 앓았다. [[조선 숙종|숙종]]의 모후 [[명성왕후|왕대비(王大妃)]] 김씨는 [[인현왕후|중전]] 민씨와 함께 [[조선 숙종|숙종]]의 쾌차를 기원하기 위해 무당의 권고대로 절식을 하고 매일 속옷 차림으로 냉수욕을 하며 치성을 올리다가 감질(感疾: 감기)에 걸렸는데 [[조선 숙종|숙종]]이 와병 중이라 쉬쉬하며 치유치 않다가 점점 위중해졌고, [[조선 숙종|숙종]]이 온전히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 12월 5일에 [[열병]]으로 사망하였다.<ref group="주">이 사실을 발고한 [[박세채]]의 상소에 대해 [[조선 숙종|숙종]]은 [[명성왕후|대행왕대비(사망한 왕과 왕후에겐 대행을 붙인다)]] 김씨가 무속을 싫어하였다며 강력히 부정했다. 『숙종실록 9년(1683 계해 / 청 강희(康熙) 22년) 12월 15일(임자) 2번째기사』 하지만 다음해 2월 박세채의 주장이 사실이었음이 증명되어 무녀 막례가 유배되었다. 『숙종 15권, 10년(1684 갑자 / 청 강희(康熙) 23년) 2월 21일(정사) 3번째기사』 실제로 [[명성왕후 김씨]]는 전속 무당을 두었을 만큼 무속을 신봉했고, [[조선 숙종|숙종]]도 무속에 대해 너그러운 편이었다.</ref>
숙종은 [[인현왕후]]와 [[영빈 김씨|김씨]]에게서 장씨를 떨어뜨리기 위해 중궁전과 후궁의 처소가 있는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 비밀리에 인부를 불러 장씨의 처소를 새로 건축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숙종이 직접 장씨를 종4품 숙원으로 봉해 정식 후궁으로 만듦<ref group="주">승은궁녀에게 첩지를 내리는 것은 내명부 수장인 중전의 고유권한이었다.</ref> 으로서 인현왕후의 처지를 위해 장씨의 출궁을 종용하던 서인은 더이상 숙종에게 장씨를 출궁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장씨를 숙원으로 봉하며 하사하기로 한 노비 100명과 전답은 흉년을 이유로 무기한 연기하도록 하였다.<ref group="주">[[조선 숙종|숙종]]이 [[장희재 (조선)|장희재]]에게 최초로 관직을 내린 것은 원자 명호를 취소할 것을 주장한 [[송시열]]의 상소로 인해 [[남인]]이 정계로 돌아온 후이며, 승진이 아닌 부서 이동에 불과했던 것으로 미루어 장씨가 후궁이 되고도 친정이 혜택을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숙종 15년 2월 11일 (기유) 원본333책/탈초본17책 (5/26)』</ref>
[[인현왕후]]는 직접적으로 숙종에게 숙원 장씨를 쫓아낼 것을 종용하기도 하였는데, 숙종에게 [[명성왕후]] 김씨가 꿈에서 계시를 내리길 장씨가 원한을 품고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며 불순한 무리(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궁했으니 쫓아내야 한다고 발언했던 기록이 숙종실록에 실려 있다.<ref>숙종실록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5월 2일(정유) 2번째기사</ref> 또한, '장씨 팔자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노고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다'는 주장도 했는데 이는 모두 훗날 [[인현왕후]] 민씨가 폐서인이 되어 폐출되는 이유가 된다. [[조선 숙종|숙종]]은 원자([[조선 경종|경종]])가 탄생하자 [[인현왕후]]가 매우 노여워했으며, 급작스레 주가(主家: 공주의 처소. [[홍치상]]의 어미 [[숙안공주]] 혹은 [[명안공주]] 등을 의미한다)와 더욱 친밀해지고 [[1688년]] 2월, '[[조사석]]이 장씨 친정의 청촉으로 상신에 제배되었다'는 소문을 유포했던 것이 발각되어 유적에서 삭제되고 위리안치된 [[홍치상]]의 방면을 종용했던 것을 폭로하기도 했다.<ref group="주">[[1688년]] 4월에 발발한 [[기사환국]]의 여파로 [[노론]] 과격파였던 [[김만중]]이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문되었는데 소문의 근원지가 [[조선 숙종|숙종]]의 고모인 [[숙안공주]] 들에게서라는 자복이 있자 [[홍치상]]에게 교형이 내려졌다. [[갑술환국]]으로 [[홍치상]]은 다시 복관되었지만 [[조선 숙종|숙종]]은 '매우 가까운 친척이고 높은 연세인 공주가 집에 있으니, 내가 차라리 떳떳하지 않은 데에 빠지겠다. 특별히 복관(復官)하라'하며 불쾌함을 드러냈으며, 1702년 [[홍치상]]의 아들이 [[홍치상]]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격쟁하자 '[[홍치상]]의 지은 죄는 만번 통분할 일인데 아들이 감히 격고하였다'며 분노를 터트렸고 곧 '지은 죄가 낭자한데도 관작이 그대로인 탓이다'하여 복관한 관작을 다시 거두었다.</ref>
옥교 사건은 그때까지 장씨에 대한 [[서인]]의 공격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조선 숙종|숙종]]을 강하게 자극하였다. [[조선 숙종|숙종]]은 같은 당하관의 아내인 귀인 김씨의 어미도 옥교를 타고 수시로 궁에 드나들지만 문제 삼아진 적이 없으며, 장씨의 생모는 후궁이 해산할 때 교자를 타고 입궁할 수 있다는 왕실 규례에 따라 [[조선 숙종|숙종]]의 어명을 받고 입궁한 것이며, 어명을 상징하는 선소동패(宣召銅牌)를 보였음에도 입궁치 못하고 내쫓긴 것은 왕을 능멸하는 행위임을 선포하며 [[이익수]] 및 사헌부 관원을 체포하여 엄형을 내리고 사형할 것을 명하였고 그들을 옹호하는 이들에게도 벌을 내릴 것을 선포했다. 하지만 [[조선 숙종|숙종]]의 척신이자 최측근이기도 했던 우의정 [[조사석]]마저 윤씨가 탄 가마가 8인교<ref group="주">옥교에는 2인교, 4인교, 6인교, 8인교 등이 있는데 이후 사치풍조가 만연해져서 12인교도 생겨났다. 임금과 왕후가 타는 가마는 연으로 20명이 들었고, 세자의 연은 16명으로 규정되어 있다. 공주와 옹주가 타는 덩은 8명이 든다. [[조사석]]은 윤씨가 공주와 옹주의 덩보다는 못하지만 8명이 드는 8인교를 탄 것은 부당하다고 고발한 것이다.</ref><ref>《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정연식 저</ref><ref group="주">사람이 드는 가마의 상급은 말이 끄는 가마인데 쌍교와 독교로 나뉜다. 말 두 마리가 앞뒤로 가마를 끄는 쌍교가 상급으로 2품 이상과 승지만이 탈 수 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영조시대엔 이미 예사로와진 일이 되어 여인들도 쌍교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이는 숙종시대에도 비슷한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신생왕자의 외조모이자 왕명을 받고 입궐하던 윤씨가 8인교를 탄 것은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스러운 행위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윤씨가 옥교를 탄 흔적은 존재하지 않는다.</ref> 였음을 강조하며 [[영빈 김씨|귀인 김씨]]의 어미는 비교 대상이 아님<ref group="주">귀인 김씨의 어미는 당상관의 아내는 아니지만 판서였던 [[이정영]]의 딸이다. 또한 귀인 김씨의 종조부인 [[김수항]], [[김수흥]]이 정승이었기에 [[조사석]]은 귀인 김씨의 어미는 역관 가문 출신인 윤씨에 비해 옥교를 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ref> 을 주장함으로써 숙종은 서인 대신은 물론 윤씨를 모욕한 하리에게 내린 벌조차도 취소하고 그들을 위로해야 했다.
[[서인]]은 장씨의 생모는 앞으로도 옥교를 탈 수 없는 명을 내릴 것을 종용함과 동시에 윤씨의 옥교 사건을 예로 삼아 가마에 대한 법을 개정하여 선포하라는 보복성 주장을 제기하여 [[조선 숙종|숙종]]을 재차 굴욕시켰다. 이 사건의 발발한 지 불과 2개월 후, [[조선 숙종|숙종]]은 반격을 가한다.
[[서인]]이 차지하고 있던 삼사(三事: 삼정승)와 승정원, 사간원의 중앙 최고 요직이 경신년에 조정에서 밀려나 은신 중이었던 [[남인]]으로 교체되자 조정으로 돌아온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윤빈]](尹彬) 등은 먼저 원자 윤의 탄생과 [[조선 숙종|숙종]]의 원자가 정해진 것에 대해 경하와 찬사를 올려 [[서인]]과는 극적으로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이는 경신년에 [[남인]]에게 대역죄를 씌워 [[경신환국]]을 일으켰던 [[서인]]을 향한 정치 보복의 시작이었다. [[송시열]]에게 유배령을 내리고 [[김수항]] 및 일부 [[서인]]을 조정에서 내쳐버리긴 했지만 분노가 가시지 않았던 [[조선 숙종|숙종]]은 [[남인]]의 부추김으로 [[송시열]]을 최고 유배지인 제주로 유배할 것을 명하고 [[김수항]] 등에게도 진도 유배령을 내렸다. [[민암]]을 위시한 [[남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6판서·참판·참의 등 남인 경재(卿宰) 수십인과 사헌부·사간원이 합계(合啓)하여 과거의 환국([[경신환국]])을 위해 역모를 날조하여 무고한 남인 영수 [[허적]]과 [[윤휴]] 들을 살해하였고 과격한 처벌로 죄없는 [[남인]] 인사를 학살한 [[김석주]]와 [[김익훈]]의 죄를 묻게 하였으며 이들을 옹호하였던 [[송시열]]과 [[남인]] 옥사의 위관으로서 [[남인]] 재상 [[오시수]] 등을 죽게한 [[김수항]]의 가중처벌을 맹렬히 주장하였다.
다음날 23일은 [[인현왕후|중전]] 민씨의 생일이었는데 [[조선 숙종|숙종]]이 [[자의대비|대왕대비]] 조씨의 국상기간 등을 이유로 탄일 하례 의식을 생략하라는 어명을 내렸지만 국모의 당연한 권한이라는 이유로 어명이 무시되고 [[인현왕후|중전]] 민씨에게 하례가 올려졌다. 이에 [[조선 숙종|숙종]]이 분노하여 [[인현왕후|중전]] 민씨와 크게 다투고, 조정 대신들에게 [[인현왕후|중전]] 민씨를 '''교사스럽고 간특한 부인'''으로 칭하며 평소의 언동<ref group="주">시부모([[조선 현종|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계시를 빙자하여 희빈 장씨가 아들을 낳을 수 없는 팔자라고 거짓을 고한 것, 원자가 탄생하자 노여워하며 주가(主家: 공주의 시가. [[홍치상]]의 어미 [[숙안공주]]를 의미)와 급격히 친밀해지고 [[홍치상]]의 무죄방면을 종용한 것, 궁인들의 당파를 나눠 핍박한 것, 폐출되는 [[귀인 김씨]]에게 동정심을 보이지 않고 가마를 타지 말고 걸어서 빨리 궁에서 나가라고 재촉한 것 등</ref> 을 비난하며 [[인현왕후|중전]] 민씨에게 국모로서 군림할 자격이 없으니 고사를 찾아보라는 명을 내렸다. 이는 민씨를 폐서인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이다. 이에 [[서인]] 대신 뿐만 아니라 [[남인]]조차 당황하여 [[권대운]] [[목래선]] [[김덕원]] [[민암]] 등은 [[인현왕후|중전]] 민씨에게 올려진 '''탄일 문안은 신자(臣子)들의 상례'''이니 [[인현왕후|중전]] 민씨에게는 죄가 없음을 주장하며 강력히 [[인현왕후|중전]] 민씨를 변호하였고, [[권대운]]은 고사를 찾으라는 [[조선 숙종|숙종]]의 명에 불복하며 사직을 청하였다. 이러한 조정 안팎의 반발에 대해 [[조선 숙종|숙종]]은 [[서인]]은 처벌하고 [[남인]]은 용서하는 차별을 보임과 동시에, 24일에는 [[인현왕후|중전]] 민씨가 [[조선 숙종|숙종]]과 크게 말다툼을 하면서 그녀 자신의 입으로 '진실로 나의 죄이다. 어찌할 것인가? 폐출시키려거든 폐출시키라.'는 과격한 언사들을 입에 담았던 사실을 폭로했다.
5월 2일, [[조선 숙종|숙종]]은 당시 사대부 여성으로선 입에 담을 수 없는 발언을 했던 [[인현왕후|중전]] 민씨의 언사를 낱낱이 폭로하여 공개적으로 망신을 시킨 후 폐서인하여 강제로 출궁시켰다. [[조선 숙종|숙종]]은 [[인현왕후|중전 민씨]]의 폐출은 폐비 윤씨와 비교할 바가 아니며 그녀의 인성이 여후<ref group="주">한고조([[유방]])의 아내 [[여태후]]를 의미한다. 여태후는 중국 3대 악녀(여태후, 측천무후, 서태후)로 꼽히는데, 투기와 잔혹성은 여태후가 단연 으뜸이다. 여태후는 남편 한고조가 사망하자 그녀의 정적이었던 척부인의 혀와 팔다리를 자르고 인간돼지라고 명명하여 변소에 장식하였으며 척부인의 소생을 살해하였다.</ref> 와 흡사하다고 비교하였다. [[인현왕후]] 민씨에게 물어진 죄는 죽은 시부모의 계시를 빙자하여 왕에게 거짓을 고한 죄<ref group="주">'''(장씨의) 팔자(八字)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를 말한다</ref>, 왕의 육체를 조롱한 죄<ref group="주">(장씨의) 팔자(八字)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노고(勞苦)하셔도 공이 없을 것'''의 부분을 말한다.</ref>, 투기로 내전(內殿)의 일을 조정으로 확대시켜 국정을 어지럽힌 죄<ref group="주">서인이 장씨를 출궁시키도록 종용한 것과 옥교 사건, 장씨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삼은 것에 대한 서인의 반대를 의미한다.</ref>, 내전에서 궁인의 당파를 나누어 붕당을 일으킨 죄였다. [[조선 숙종|숙종]]은 [[인현왕후|폐서인]] 민씨의 남겨진 물건을 모두 불태워버리도록 명하였으며 그녀가 가례를 올릴 때 입었던 장복은 대내에서 공개적으로 태우도록 했다.<ref group="주">이후 노론은 숙종이 옳은 주장을 한 [[송시열]]을 처벌하고 정권을 갈아치운 목적이 왕비 민씨를 내쫓고 후궁 장씨를 왕비로 올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왕비 민씨의 폐출은 장씨의 모략이었다고 기록한다.</ref>
[[조선 숙종|숙종]]의 복위 명령에 병조판서 [[서문중]]은 이조참판 [[박태상]] 등과 함께 사람을 모아 ‘9년·6년과, 아들이 있고 아들이 없는 것은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경한가?’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인현왕후]]가 비록 희빈 장씨보다 더 오래 왕비로 있었으나 왕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가 더 귀하다는 뜻이다. 정원(政院)은 조정백관과 신중히 공론을 한 후에 결정지어질 때까지 명을 받들 수 없다는 거부의사를 표명했다.<ref>《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3일(경진) 2번째기사</ref> [[인현왕후]]의 복위가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노론]]과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소론]]의 격렬한 언쟁이 오가던 가운데<ref>《숙종실록》에는 누락된 내용으로 《승정원일기》 4월 12일 ~ 4월 16일까지의 기사에 수록되어 있다.</ref> 4월 16일에 이르러 우의정 [[윤지완]], 공조판서 [[신익상]], 한성부우윤 [[임상원]], 병조참의 [[이유]] 등의 [[소론]]의 대표 인물들이 단체로 사직상소를 올리기에 이르렀는데<ref>《승정원일기》 숙종 20년 4월 16일 (계미) 원본356책/탈초본18책</ref> [[조선 숙종|숙종]]이 갑술환국을 일으키며 중앙을 [[소론]] 중심으로 채웠던 만큼 사태가 심각했다. 이 사건은 엿새 후인 4월 17일, 영의정이자 소론 영수였던 [[남구만]]이 '이미 복위하라는 왕명은 내려졌고, 자식이 어미(國母: [[인현왕후]])의 죄를 논하며 도로 쫓아내라 마라 의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고 [[소론]]을 중재하여 결국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ref>『숙종 20년 4월 17일 1번째 기사』</ref> 이 사건을 계기로 [[소론]]은 희빈 장씨를, [[노론]]은 [[인현왕후]]를 지지하는 세력이 되었는데 [[소론]] 영수인 [[남구만]]은 중립을 지켰다.
[[1701년]] 9월, 인현왕후와 함께 노론에 있던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는 [[조선 숙종|숙종]]에게 희빈 장씨가 취선당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왕에게 발고하였고, [[인현왕후]]는 병이 아닌 희빈 장씨의 저주에 의해 시해당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인현왕후]]의 동복 오라비인 민진후(閔鎭厚) 형제는 인현왕후가 생전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그들에게 말한 바가 있었음을 숙종에게 발고했다.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희빈 장씨는 그녀의 처소인 취선당 한편에 신당을 지었고 굿을 하였다. 하지만 희빈 장씨의 측근은 1699년 [[조선 경종|세자 윤]]이 두창에 걸리자 쾌유를 기원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미 세자의 두창은 완쾌되었지만 세자가 후유증으로 안질을 앓았고, 병이 나았다고 하여 신증(떡을 바치는 것)을 그만 두면 귀신의 분노를 산다는 무당의 말에 철거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고문 중에도 번복되지 않았으며 다만 인현왕후의 죽음을 기원하였다는 추가 증언이 더해졌을 뿐이다.
신당의 존재가 1699년부터 존재하였다면 [[숙빈 최씨]]를 비롯한 궁인 전원은 물론 [[조선 숙종|숙종]] 또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주자학을 신봉하는 조선 사회에서 무속 행위는 국법으로 엄중히 금하였지만 궁 밖은 물론 궁 안에서도 자주 치루어졌고<ref group="주">광해군 부부, 인조, 민회빈 강씨도 굿을 즐겨 하였다.</ref>,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도 [[인현왕후]]와 함께 숙종의 두창의 쾌유를 기원하는 굿을 하였던만큼 장씨의 신당 설치 자체는 굳이 문제 삼을 사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숙빈 최씨]]는 신당의 존재에 이견을 주장하였고, [[조선 숙종|숙종]]은 [[숙빈 최씨]]가 거론한 신당의 존재를 조정 대신들에게 공식화하며 장씨가 몰래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를 시해하는 저주굿을 하였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때에 소론은 고문 과정이 비정상적이었음을 주장하며 희빈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이미 희빈을 죽일 결심을 한 숙종의 뜻이 단호하였다. 이에 영의정 [[최석정]]과 소론은 희빈에게 죄가 있다고 치더라도 세자의 어미이니 처우에 관대하게 하자고 주장을 바꿨지만 이 역시 기각되었고 [[최석정]]은 부처되었다.<ref group="주">같은 해 12월부터 숙종은 다시 최석정을 조정으로 부르지만 최석정은 수십 차례 사직을 고집한 후 은거하였다.</ref> 1701년 10월 7일, [[조선 숙종|숙종]]은 빈어(嬪御:임금의 첩)에서 후비(后妃:임금의 정실)로 승격되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고, 다음날 10월 8일에 승정원을 통해 공식적으로 장씨에게 자진의 명을 내렸다. 10월 10일, [[조선 숙종|숙종]]은 희빈 장씨가 이미 자진하였음을 공표하였다. 향년 43세였다.
1717년 12월, 장씨의 묘가 용맥(龍脈)은 있으나 혈(穴)이 없고 수법(水法)도 합당하지 못하여 완전한 곳이 아닌 것 같다는 함일해의 상소가 올라왔다. 1718년, 숙종은 노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장리 묘의 천장(=이장)을 명하였다. 예조참의가 지사로 이름난 자 10여 명을 대동하여 1년 간 기내(畿內) 길지(吉地)를 간심한 끝에 가장 평가가 우수한 광주 진해촌으로 와병 중인 숙종이 직접 택점하였다. 1719년에 치루어진 천장식 역시 궁에서 주관하였으며 숙종이 왕세자 부부에게 망곡례를 명함으로써 노론의 극렬한 반발이 있었다.<ref group="주">인장리(仁章里)에서 영구(靈柩)가 발인(發靷)하여 진해촌(眞海村) 신산(新山)으로 향하였는데, 세자가 경현당(景賢堂)에서 망곡(望哭)하고, 세자빈(世子嬪)도 궐내(厥內)에서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하였다.『조선왕조실록 숙종 45년 4월 5일 기사』당시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세자(경종)가 정사를 보던 경현당에서 망곡례를 하는 것을 맹비난하던 노론은 경현당은 대리청정 업무를 보는 곳으로 곧 법전(法殿)과 차이가 없는데 세자의 사친(희빈)을 위한 예절이 지나치다고 비판</ref> <ref group="주">이러한 숙종의 처사는 숙종의 사후에도 논란이 되어 영조시대에도 경종이 숙종의 적자이며 희빈 장씨가 숙종의 제2계비로 기록한 서적이 발간되기에 이르렀다. 경종이 즉위한 후 유학 조중우는 숙종의 처사가 아들인 경종이 희빈 장씨를 추존하라는 은밀한 뜻이었다고 주장하였다.『조선왕조실록 경종즉위년 7월 21일 기사』 이에 반해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은 숙종의 처사를 다시 거론하며 맹렬히 비난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영조1년 3월 25일 기사』</ref> 천장지 또한 초상 때와 마찬가지로 종친부 1품의 예장으로 단장되었으며 청룡(靑龍: 주산(主山)의 좌향(坐向)에서 본 좌측의 산맥)에 앞서 자리하고 있던 종친의 묘와 많은 민전도 모두 값을 치루어 옮기도록 하였다.
1720년, 그녀의 아들인 [[조선 경종|경종]]이 즉위하자 장씨를 추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이에 노론이 노골적으로 극심한 반발을 하자 [[조선 경종|경종]]은 [[조선 숙종|숙종]]이 승하한 지 한 달만에 이러한 화제를 올리는 것이 해괴하다며 상소를 올린 유학 조중우를 유배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하였지만 노론은 조중우에게 대역죄를 물어 사형에 처했다. 이 사건 직후, 성균관 장의 윤지술이 [[조선 숙종|숙종]]이 장씨를 죽인 것은 빛나는 업적이니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경종과 소론이 이에 대해 분노하여 윤지술에게 유배형을 내리고 곧 처형하려 하였지만 노론은 윤지술의 의기를 높이 사야 한다며 윤지술에게 죄를 주어선 안 된다고 방면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와 동시에 노론은 [[조선 경종|경종]]에게 왕세제 책봉을 종용하여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데 성공하였고, 그 직후 왕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해 [[조선 경종|경종]]이 정치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신임사화]]가 발발하여 노론이 숙청되었다. 1721년 12월, [[조선 경종|경종]]은 비로소 1년 전에 그의 생모를 모욕한 윤지술에게 사형을 내릴 수 있었다.
다음 해인 1722년, [[조선 경종|경종]]은 생모 장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에 추존하였다. 숙종이 후궁 출신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어명을 내렸기에 즉시 왕후로 추존할 수 없었다. 옥산부대빈에 대한 예우는 [[조선 선조|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과 일치하였다. [[조선 경종|경종]]은 희빈 장씨를 왕비로 추숭하려 하였으나 재위 4년만인 1724년에 사망하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 경종|경종]]이 죽고 [[조선 영조|영조]]가 즉위함으로써 노론의 천하가 되자 옥산부대빈 장씨의 위치는 대역죄인으로 격하되었으며, [[민진원]]은 장씨를 [[인현왕후]]가 폐서인되었던 원흉으로 지목하였으며 그 죄가 발각되어 [[조선 숙종|숙종]]에게 폐출되었다가 [[인현왕후]]의 사후에 사사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애초, 당시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후궁(희빈 장씨)의 어미가 조사석의 집과 친분이 있어서 그 연줄로 조사석이 정승에 제배된 것"이라는 김만중의 발언이었는데, 숙종 15년(1689년) 2월, 김만중의 아들 김진화의 공초 내용인 "후궁(後宮)의 어미는 예전에 조 정승의 집과 같은 방(坊: 동네)에서 살았는데, 근일(近日)에는 발걸음을 끊고 왕래하지 않는다."<ref>숙종실록 숙종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2월 28일(병인) 3번째기사</ref> 는 장씨의 어미가 조사석 처갓집의 여종이었기에 조사석과 친분이 있었던게 아니라 이웃에 살았기 때문에 친분이 있었던 것을 시사하며, 동시에 장씨의 어미가 조사석 처갓집의 여종이었다는 사실이 이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상징한다. 더욱이 조사석이 정승에 제배된 것이 장씨와의 연줄 덕이라는 소문을 배포한 자가 [[홍치상]]이었다는 점은 순수성에도 의혹을 제기하는데, [[홍치상]]은 장씨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영빈 김씨]](당시 귀인)의 이모부이기 때문이다.<ref group="주">[[홍치상]]의 첫아내는 [[영빈 김씨]]의 이모이다. [[홍치상]]의 아들인 [[홍태유]]는 아비를 구명하며 [[홍치상]]이 이모인 [[숙명공주]]에게서 소문을 얻은 것이라 주장하였는데, [[숙명공주]]의 아들인 [[심정보]] 또한 [[영빈 김씨]]의 이모부이다. [[영빈 김씨]]의 폐서인 사유는 궁내의 사정을 친정에 전달한 것과 주가(主家: 공·옹주를 의미)와 내통하여 분란을 일으킨 죄목이었으며, [[영빈 김씨]]는 [[인현왕후]]의 복위로 특별히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2차례나 홀로 승급에서 제외되는 등 [[조선 숙종|숙종]]의 외면을 받았다. [[기사환국]]때 교형을 당한 [[홍치상]] 또한 [[인현왕후]]의 복위로 특별히 복관되었지만 어머니인 [[숙안공주]]와 [[인현왕후]]가 모두 사망한 1702년에 다시 복관이 취소되고 국가 죄인으로 강등되었으며 [[조선 숙종|숙종]]은 이후에도 [[홍치상]]이 복관되지 않도록 다시금 엄명을 내릴 만큼 반감을 표명했다.</ref> [[홍치상]]이 계실의 지친인 [[이사명]]에게 소문을 전달했고, [[이사명]]이 사돈인 [[김만중]]에게 전달해 [[김만중]]이 [[조선 숙종|숙종]]에게 따진 것이 숙종실록 숙종 13년 6월 16일 기사에 기록된 사건의 배경이다.
- 김재규 . . . . 23회 일치
1977년 박정희에게 [[직선제]]를 건의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건의했다. 이때 김재규는 “긴급조치 9호는 효력을 다했으니 더 강력한 긴급조치 10호가 필요합니다.” 라며[[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3&aid=0000007473&viewType=pc|긴급조치 10호를 건의했다가 반려당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에는 노동및 종교의 추가탄압이 들어가있어 과격하기는 마찬가지였던지라 현재까지도 그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다만 김재규는 훗날 법정에서 그 건에 대해 말하길 박정희의 눈을 속이고 긴급조치 9호의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고 해명했다.[* [[파일:walderppk-20161228-150640-001.jpg|width=600]][[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102800209105001&ed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3-10-28&officeId=00020&pageNo=5&printNo=22327&publishType=00010|출처]] ] 김재규는 또한 당시 연금중이던 [[김대중]]의 외출을 눈감아주어서 [[김대중]]이 김영삼측 단합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해서 김영삼의 전당대회 당선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에 책임을 진다는 구실로 중정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사의를 표했으나 거절당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2017191&viewType=pc|출처]] 이는 그가 권력욕에 취해 [[10.26 사태]]를 일으켰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논거로 쓰인다.] 당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던 정국을 순리대로 풀기 위해서 나름대로 방법을 모색한 것. (물론 결과적으로는 남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박정희에게는 소귀에 경읽기였다.)
유야무야 하면서 유신이 장기화 되었다면, '''최악의 경우 [[북한]]처럼 반대세력이 모두 숙청되거나 [[중국]], [[싱가포르]]처럼 정도는 덜해도 독재가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가 만약 이 상태로 정치에 참여하였다면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박씨 일가가 다스리는 독재국가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김재규를 긍정하는 사람들로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강신옥, 장호권, 이해학 등이 있다. 보면 알겠지만 주로 교계 사람들로, 민주혁신계 중에서도 약간 보수적인 사람들 쪽이다. [[http://www.nocutnews.co.kr/news/1153519|함세웅 신부는 "김재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79530|효림 스님은 "여러가지 정황 근거로 봤을때 재평가할 가치는 충분하며, 사회 분위기 때문에 좀더 시일을 요구할 뿐 명예 회복은 희망적"이라고 보고 김재규의 행적과 뜻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작업에 매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재규를 비판하는 재야/민주운동가들은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동기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의한 기여도 및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다. 대표적인 좌파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역시도 “박정희 정권은 당시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민중저항을 통해 어차피 붕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며 “김재규의 행위가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홍구는 하단의 긍정론에 서술되어 있듯 2013년을 기점으로 김재규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다.] 진보적 사회운동가 백기완도 “당시는 박정희 유신독재를 타파하기 위한 민중항쟁이 거셌고, 박정희 내부 권력의 모순이 더 격화되어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조그마한 사건일 뿐이며 민주화운동의 본체, 기본적인 흐름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라고 주장하였다.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11784.html|출처]]
'''요약: "비록 김재규가 박정희 정권에 충성하며 부역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재규가 아니었다면 민주화는 10년, 20년 미루어지거나 심지어 아직도 박정희의 [[차지철|후]][[전두환|계]][[노태우|자]][[박근혜|들]]이 [[북한|북쪽]]마냥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라는 주장.'''
김재규는 [[차지철]]과의 갈등 이전에도 유신의 방향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자주 내비쳤고, [[장준하]] 등의 민주화 운동 인물들을 비밀리에 도우면서 관련 가족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기도 했으며,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에게 박정희를 '환자'로 비유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고, 법정에서도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보이며 사형 선고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자세를 보았을 때 단순히 차지철과의 갈등으로 인한 우발적인 권력 싸움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결정적으로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결단했던 건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대응책 방향이었는데, 박정희와 차지철은 강압적인 진압을 요구했으나 김재규는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결국 이것이 10.26이라는 도화선으로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1970, 80년대에도 국정 방향에 대해서는 뒤에서 "[[박정희]]에게 실망했다"는 의사를 자주 표명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으며, 7대 대선에서 마지막만 하고 다시는 안 하시겠다는 약조를 김재규가 청원했다는 증언과 더불어, 한 때 진지하게 하야를 권고하려 했다는 증언도 있다. 결국 10.26은 박정희에게 오랫동안 직언을 통해 온건한 설득을 하려 했지만, 박정희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차지철을 중용하며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동안 쌓였던 실망감과 울분이 폭발하여 강경한 수를 두었다는 주장이다.
그동안 김재규를 썩 좋게 평가하지 않았던 한홍구도 2013년에는 주장이 달라졌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188416|#]]
야권의 거물정치인인 [[천정배]] 의원도 10.26 희생자 30주기 합동 추모제에 참석하여 "김재규 장군과 의인들이 역사의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http://www.amn.kr/sub_read.html?uid=3329§ion=sc1§ion2=|#]]
[[김영삼]]의 측근으로 현재 민주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봉조(1939)|김봉조]] 전 의원도 처음에는 김재규를 유신정권의 사냥개쯤으로 여겼으나, 자신을 직접 찾아와 격려하며 김영삼에게도 격려와 덕담을 전해 달라는 김재규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인 이유는 사심이나 감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닌 역사 앞에 정의감 때문이었다며, 훗날 이런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 주장했다.[[http://m.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773|#]]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를 의사라 칭하며 박정희는 절대로 스스로 물러날 사람이 아니기에 김재규의 거사가 없었으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불가피했을 거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최태민 문제 관련하여 박근혜와 최태민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김재규의 충언을 무시하고 김재규의 주장이 모함이라는 박근혜의 말만 믿고 사건을 덮어버린 박정희의 행태도 10.26의 원인이 되었다고 증언하였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2152883|#]]
자유총연맹 회장이자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닌 [[김경재]]는 저서 '쓰러지는 역사, 일어나는 역사'를 통해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하여 독재정권에 부역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씻었다면서 민주인사들이 김재규의 거사를 폄훼하거나 냉소적으로 보는 분위기를 비판하였다. 소위 진보 및 민주인사들은 박정희 정권 말기 민중혁명의 성공이 눈 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갑자기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해버려 당시 끓어오르던 혁명의 분위기에 찬 물을 끼얹어 버렸다고 주장하는데, 김경재는 이들의 주장이 화려한 응접실에 앉아서 입으로 노동계급의 승리를 외치는 '안락의자 속의 급진주의자'들의 주장과 다를바 없다고 비판하였다. 설사 그들의 주장대로 민중혁명이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살상당할 수 백, 수 천의 무고한 희생자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며 반문하였다.
2015년 박권흠 전 의원이 김영삼과 김재규가 단 둘이 나눈 대화 내용을 한 언론매체에 공개하였는데, 당시 현직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가 야당 총재였던 김영삼을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큰 인상을 남기고 있다. 1979년 김영삼은 <뉴욕타임스>와의 기자회견에서 "한국정부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은 김영삼의 발언을 '사대주의적 망언'으로 규정하고 국회의원직 제명을 시도한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양 측을 중재하고자 김영삼에게 만남을 요청하여 실제로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박권흠 전 의원이 공개한 둘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http://m.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876|#]]
가정이긴 하지만, 박정희가 살아있었다면 3저 호황을 통한 경제발전, [[핵무기]] 개발 등을 통해 [[리콴유]] 처럼 박씨 일가의 세습독재 체제를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있다. 육사를 나와 장교가 된 박지만은 군부를 장악하여 [[리셴룽]]처럼 젊은 나이에 장성을 지내고 나서 정계로 들어와 후계자가 되었을 것이고 박근혜는 최씨 일가의 도움으로 문화, 여성, 종교계를 장악했을 것이다. 반면, 박정희의 무리한 국가주도식 경제정책과 국민들에 대한 과도한 통제, 오랜 독재정치로 인한 선진국들과의 외교갈등 등의 요소들을 고려해보면 과연 박정희가 80년대의 격변기를 유연히 대처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당시 한국은 이스라엘처럼 미국정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국가도 아니었으며 영국, 프랑스 같은 강대국도 아니었기에 무리하게 핵무기를 개발하였다고 하여 미국 등의 강대국들이 한국의 핵무기 보유를 용인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박정희의 오랜 독재체제를 못마땅해하던 카터 대통령의 입장을 고려해봤을때 무리하게 핵무기를 개발했을 경우 국제적인 경제제재가 가해져 외교뿐만아니라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말 더 간단한 예를 들어 반박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북한]]은 주민들이 다 멍청이라 3대 독재가 이루어졌나?''' 박정희는 헌정사상 독재자 중 가장 군을 잘 장악한 인물이었다. 박정희는 공무원, 군인 등을 다룰 때 소위 '금일봉 정치'라는 것을 행하였다. 이는 누군가에게 포상을 줄 때, 훈장이나 공적 상금 등의 공식적 포상을 주지 않고, 지극히 사적인 포상인 '금일봉'을 전달하여 포상을 주는 사람이 바로 '박정희'라는 것을 부각, 충성심을 유도하는 정치행위였다. 이는 조선시대에 국왕이 [[내탕금]]을 가지고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에게 포상을 주는 것과 동일한 중세 수준의 정치행위였지만 효과는 매우 굉장했다. 이런 금일봉 정치는 상당한 비자금을 필요로 해서 박정희 휘하 3,4공 실세들은 정치자금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특히 출처나 사용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중앙정보부]]의 돈이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활용되었고, 관행이 되었다.''' 당장 2010년대에만 해도 대통령이 [[국정원]]의 돈을 개인 쌈짓돈 마냥 써서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이라는 희대의 사건이 터졌는데, 이는 박정희 당시, 정보기관이 대통령에게 돈을 갖다 바치던 '관례'가 고스란히 유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노무현]], [[김대중]]의 경우 특수활동비에 대한 사적유용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많다. 그러나 진위여부가 불분명한 두 대통령과 달리 박정희 이후의 '''나머지 대통령은 다 받았다.''']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킨 것은 결국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권력투쟁' 속에서 벌인것 이라는 해석이 있다. 2004년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도 김재규의 행위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92551|출처]] 김재규는 자기보다 새파랗게 젊고 군대 계급도 낮은 차지철에게 면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수모를 당했고 이에 대해서 격분했다는 증언이 주변 인물들로부터 흘러나온 바 있다.[* 대표적으로 김재규는 그가 교사 시절 제자였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과 가까웠는데, 10.26이 터지기 전 [[이만섭]]과의 식사 자리에서 "다른 건 다 참겠는데 [[차지철]]이 때문에 골치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8031802395|출처1]] ] [[http://news.donga.com/3/all/20130813/56988552/1|출처]] 이런 점들로 비추어 보았을 때 김재규가 민주화 운운하는 것도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건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그가 차지철이라고 하는 인물에 대비해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온건성향으로 비쳐질 따름일뿐, 그 역시도 '''결국 독재정권에 부역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28100§ion=sectio|출처]]
유신정권의 크게 3개의 권력 축인 대통령 경호실, 중앙정보부[* 강직한 군인 유능한 건설부장관 무능하고 유약한 중정부장을 보면 알듯이 폭주하던 중정을 제어한 것을 보면 이런 비난도 무색하다], 국군보안사령부를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차지철]], [[김재규]], [[전두환]]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서로 간에 치열하게 견제하고 있었다. [[http://www.usjournal.kr/News/6936|출처]] 바로 이러한 구도 속에서 파장이 일어난 것이 10.26이라는 것.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8150020921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08-15&officeId=00020&pageNo=11&printNo=21914&publishType=00020|출처]]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 등 공화국시리즈 등에서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 특히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대립과 반목은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시절에도 이들은 사이가 몹시 좋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무렵에 [[차지철]]계로 분류되고 있던 [[김치열]] 법무부장관이 차기 중앙정보부장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박정희]]가 야당문제와 [[부마항쟁]] 등에 대한 미흡한 대처에 대해서 김재규를 책망하는 일이 잦아지자 김재규 본인도 파워게임에서 밀릴 것이라는 직감을 하게 될 공산이 컸다는 주장이 있다. [[http://news.donga.com/3/all/20130906/57493166/1|출처]]
그러나 민주화 이후 그에 대한 재평가가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함세웅 신부의 재평가 주장을 비롯하여 시사in 등의 일부 언론과 문영심 작가, 김재규를 변호했던 안동일 변호사, 천정배 의원 등이 김재규 재평가에 힘을 실어줬고, 공화국 시리즈 등 드라마에서도 비교적 호의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또 월간지 신동아 1996년 10월호에선 김재규를 특집기사로 다루었고, 최후진술이 담긴 육성테이프를 최초로 공개하면서 신동아 독자들에 의한 재평가 여론이 일었다. 당시 김재규의 최후진술을 듣고 감동받은 많은 독자들이 신동아의 편집실로 전화하여 "김재규를 그동안 잘못 알았다. 명예회복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하였다고 한다. 허나 당시는 박정희 신드롬이 점점 떠오르던 시기라 김재규의 재평가 여론은 금세 묻히고 만다.[[https://news.naver.com/main/tool/print.nhn?oid=020&aid=0000006228|#]]
그리고 이러한 재평가 흐름에 정점을 찍게 만든 것이 바로 2016년 말 벌어진 한국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였다. 1970~80년대 독재 정권에서나 일어날 법한 박근혜의 후안무치한 행각과 헌법부정으로 인해 퇴진운동이 불붙으며 자연스럽게 그 아버지인 [[박정희]]와 그의 독재정권을 종결시킨 김재규에 대한 관심도도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비록 그의 암살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주장은 있지만 적어도 그의 행동이 박정희의 절대권력을 깨부순 것은 사실이며, 이전부터 보여온 친민주화적 행각이 대중들 사이에서 조명 받으며 재평가 움직임은 대중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단순히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박정희 독재를 종결'한 것이 재평가 받은게 아니라, '생전에도 존경받을만한 많은 언행 + 특히 독재정권에 몸을 담고는 있지만 민주세력들을 배려하는 행동 + 사형 직전까지 재판에서 보여준 평소 신념에 대한 논리정연함' 등이 조명받으면서 '''"권력 투쟁이 아닌, 진심으로 시민과 민주주의를 생각한 거사"'''로 뒤바뀐 평가가 퍼져나간 것이다.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학생들을 전부 빨갱이로 몰아서 취직을 포함해 아무 것도 못하는 폐인으로 만드는 [[박정희]]의 통치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방식으로 생긴 '자생적 빨갱이'가 북한에서 넘어오는 '진짜 빨갱이'보다 무서운 존재"라며 박정희에게 정책의 시정을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김재규는 평소에 유능한 인재들이 빨갱이란 이유로 탄압받는 일에 안타까워 하였고,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원인이 개인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인재들이 잘못된 이념에 빠지도록 몰아가는 사회제도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http://www.ahnsamo.kr/news/69488|#]]
- 인종개량 . . . . 17회 일치
특정한 '인종(人種)'을 유전적으로 '개량(改良)'해야 한다는 [[우생학]]적인 주장을 뜻한다. 특히 인종개량은 특정 인종(주로 자신이 속한 인종이나 민족)이 '열등'하다고 주장하며, 다른 민족과의 혼혈을 통하여 이를 개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인종개량이라는 용어의 등장은 19세기 말, 일본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서양 문명을 도입하던 시기로써, 우생학도 일본에 전해지게 되어 이것이 인종개량론이 나타나는 배경이 되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인종개량이라는 것이 혼혈을 통한 개량은 매우 극소수의 사람이 주장하던 것이였고, 의식주 같은 환경을 개량하여 순혈의 잠재력을 최대한 키우자는게 주류고 이게 인종개량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대부분 의견이었다. 근데 그래봤자 인종개량이라는거 자체가 일본에서 주류는 커녕 존재감이 크게 없었다.
[[일본]]의 작가 타카하시 요시오(高橋義雄)는 1884년 『일본인종개량론(日本人種改良論)』이라는 저술을 발표했다. 이 저술은 "일본인종은 신체적, 육체적으로 서양인종에 비해서 열등하므로, 서양인과 대등하게 경쟁하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일본인과 서양인 사이에 혼혈을 만들어, 서양인의 피를 일본인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쳤다. 물론 어디까지나 매우 극단적인 주장이었고 그 당시 일본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정치가 카토 히로유키(加藤弘之)는 1886년 「인종개량의 변(人種改良ノ弁)」이라는 주장으로 타카하시 요시오의 인종개량론에 반박하였다. 그것을 위해서는 [[의식주]] 등의 환경을 개량하는 방법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혼종 생산을 통한 인종개량의 비현실성도 지적하였다. (1) 어떤 조합으로 인종을 개량해 나가야 할지, 그에 대한 연구가 불충분하다. (2) 많은 세월이 걸려서 비현실적이다. (3) 몇대나 잡종을 반복하다보면 일본인의 피가 멸종해버린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모리 아리노리는 인터넷에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일본인과 서양인과의 잡혼을 통한 인종개량을 주장한 적이 없다. 영문과 일어 어느쪽에서도 관련 근거를 찾을수 없다. 아마 타카하시 요시오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제자란 점과 모리 아리노리가 극단적인 영어 공용어화를 주장했다는 점 때문에 루머가 퍼진듯하다. 단, 건강한 일본인끼리의 결혼이나 의식주의 개량을 통한 것은 주장했을 수도 있다.
일본인의 의식주의 개선을 통한 환경개량은 괜찮은 호응을 얻었을지 몰라도 타카하시 요시오가 주장하는 서양여자를 수입해와 잡혼을 통해 혼혈로 일본인종을 개량하자는 주장은''' 당시에도 극단적인 개소리로 취급됐고, 단 한번도 일본정부에 의해 정책적으로 시행된적이 없다.''' 애시당초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이야기임에도 일본을 혐오하는 사람들에게는 생각보다 널리 퍼져있는 잘못된 사실이다.
* 혼혈을 통한 인종개량 같은 극단적인 주장은 사실 근대 일본에서도 그리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은 주장이었고, 실제로 정책적으로 옮겨진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가 와전되었는지 한국 인터넷에서는 일본인들이 개화기에 '혼혈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는 펼쳤다는 루머가 퍼져 있다.[[http://bobaedream.co.kr/view?code=strange&No=363548&rtn=%2Fmycommunity%3Fcid%3Db3BocWlvcGhyM29waHFnb3BocW5vcGhxb29waHFxb3Boc2ZvcGhza29waHNmb3Boc2g%3D (참조)]][[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freeboard&no=1073574 (참조)]]
* 국내에서도 열등감 때문에 인종개량을 하자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을 인터넷에서 때때로 찾아볼 수 있다.[[http://www.inven.co.kr/board/wow/762/439257 (참조)]]
- 박진성(시인) . . . . 15회 일치
이러한 자기 고발은 이후 ‘성폭력을 시인했다’는 내용으로 다수의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나 박진성 시인 본인이 적극 해명에 나섰고 GQ 코리아 등에서 [[http://www.gqkorea.co.kr/2017/09/29/%EC%A0%95%EC%A0%95%ED%95%A9%EB%8B%88%EB%8B%A4/?_C_=18|정정보도]]를 내기도 했다. 이후의 여러 정황들을 봤을 때 자신의 죄과를 시인했다고는 볼 수 없고 당시 문단 분위기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성찰하고 회고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어떻게 보면 자충수가 된 글이다. 이 글을 근거로 당시 다수의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트위터리안 및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자신이 이런 글을 써 놓고 이제 와서 무혐의라고 말한다', '스스로 자백했으면서 무고를 주장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라는 공격을 당했고, 그 트위터리안 및 페미니스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도 그가 남성들에게 [[여혐]] 프레임을 씌울 수 있는 빌미를 줬다고 '[[보빨]]남의 최후' 라던가 하는 식으로 양쪽에서 공격을 당했다.] 문제는 성폭력이 무혐의 판정이 나자 이 글을 빌미로 사생활이 문란했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무고를 당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이다. 사생활이 어떻든 범죄 사실과는 관련이 없다. 성범죄를 당한 여성에게 평소 행적이 문란했다고 몰아가는 경우와 똑같다. 박진성을 가해자라 주장하는 측은 계속 이 건을 근거로 물고 늘어지며 박진성이 '면죄부'를 얻으려했다거나 '피해자'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아래에서 보듯 박진성은 무혐의, 무고가 밝혀졌다.
2016년 10월 19일, 한 트위터리안이 박진성 시인이 미성년자인 자신에게 [[성희롱]]을 했다고 주장했고, 이후 [[2016년 문화계 성추문 폭로 사건|여러 트위터리안들이 박 시인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며칠 뒤인 2016년 10월 21일에는 여러 언론사에서 [[트위터]]에서 나온 주장들을 바탕으로 박진성 시인이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자 습작생들에게 수년 간 상습적으로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을 가했다는 기사를 내 파문이 일었다.
박진성 시인이 이후에 공개한 카카오톡 내용을 보면 익명으로 폭로한 최초 폭로자는 박진성 시인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차리자 "그럼 본명 말해도 돼요?"라고 실명 폭로할 것임을 협박하며, "주실려면 저는 돈이 좋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37|#]] 전형적인 [[꽃뱀]]의 수법으로 보인다.[* 이후 사건 전개 과정에서 성희롱을 당했다는 본인이 그 트윗 내용을 스스로 삭제했다. 이는 허위 사실 적시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스스로 삭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초 폭로자가 한 말과 [[탁수정]]이 한 말이 비슷한 내용이라 혼동하는 사람이 많은데, 박진성 시인은 2018년 2월엔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67662925585432576|최초 폭로자는 의혹이 언론에 보도되자 계정을 폭파했다]]고 했고 7월 22일엔 이 사람이 김○○이라고 밝혔다(이름을 밝히게 된 것은 7월 19일에 자신이 그 최초 폭로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 사과를 했는데 이 트위터 계정이 박 시인의 다중계정 중 하나라는 의혹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의혹에 대한 자세한 건 '자살 시도와 이와 관련된 그의 이후 행적'을 참조.).]
이 주장을 처음으로 기사화한 것은 [[한국일보]] 소속의 황수현 기자이며, [[http://www.hankookilbo.com/v/0564032fc2164032b7c5c3af3f668c50|이 기사]]([[https://archive.is/uTwCo|@]])를 보면 [[메갈리아]] 성향의 [[페미니스트]]로 보인다. 위의 보도 이후로는 대표적인 [[기레기]]로 평가되고 있다. 박 시인은 2017년 2월에 한국일보와 황 기자를 상대로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시작했다. 2018년 4월 27일에 말하길 26일이 1심 6차 변론 기일이었는데, 한국일보 측이 정정보도를 할 것은 확실해졌고 손해배상의 규모 정도만이 남은 기일 동안 정해질 것 같다고 한다.[[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9895731627474944|#]] 그리고 7월 18일에 1심에서 승소, 한국일보와 황수현 측이 정정보도와 함께 5천만원의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이 나왔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06&aid=0000092780|#]]
==== 도의적 사과 및 성폭력 의혹 결백 주장 ====
2016년 11월 11일, 박진성 시인은 해당 사안에 대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그것을 입증할 증거가 있음을 밝힌다. [[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37|해당 기사 링크]]
박진성 시인은 무혐의로 결론이 난 내용을 주장한 2명을 각각 무고 및 허위 사실 적시 명예훼손, 허위 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두 명 다 그 죄가 인정되었으나 초범에 [[심신미약]]을 주장하며 기소유예, 벌금 30만원이 나와 논란이 되고 있다.[[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483930&plink=ORI&cooper=|해당 기사 링크]] [[https://imgur.com/pmqT0ao|뒤늦게 거짓임을 고백하는 고발자의 카톡 내용]]
그 와중에도 페미니스트들과 박진성 시인을 앞장서서 비난했던 사람들은 '자살하면 죄가 없어지냐' 같은 소리를 하거나 '박진성이 자살하기 전에 여성 습작생들에게 집적거렸다', '과거에도 자살을 빌미로 여자들을 꼬시고 동정심을 유발했다(본인의 고백 내용)' 같은 주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도 2017년 12월 7일 기준으로, 트위터를 이용해 마녀사냥한 주요 오프라인 가해자들은 비판을 받아 재판에 불리해질 것 같아 비공개로 돌리거나 계정을 폭파시키기까지 했지만, 가해자들의 편을 드는 SNS에서의 옹호자들([[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69276420290576384|#]][[http://archive.is/meecs|@]][* 이 사례는 Holden 🔻Weatherfield라는 닉네임과 psychokinesis23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페미니즘]] 계정이다. 성향은 [[메갈리아]] 옹호자이자 가해자 [[이준행]]에게 [[재기#s-6|재기]]라는 [[남성혐오]] [[고인드립]]을 들은 피해자 [[전우용]]이 [[전우용#s-4.3|고소하다 용서한 사건]]의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비난한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https://twitter.com/psychokinesis23/status/772794350883315713|#옹호증거1]][[http://archive.is/gGvKe|@1]][[https://twitter.com/histopian/status/772787036306546688|#옹호증거2]][[http://archive.is/QG3O0|@2]]). 특히 박진성의 자살시도가 성공해야 기네스북에 올라갈 거라는 조롱을 일삼은 점을 자신의 취향으로 추정되는 아이디와 연관지어 해석해보면, ''''염동력이라는 초능력이 있다면 저 시인을 자살로 몰고갈 수 있을 텐데''''라는 입장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진영논리]]에 휩싸인 나머지 [[사이코패스|자기 진영 일원의 범죄의 피해자에 대한]] [[소시오패스|공감을 잃은]] 최악의 사례라 할 수 있다.])은 아예 사건에 입을 다물거나 익명의 계정에 숨거나 검색을 막기 위한 부계정과 스팸계정을 아직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https://twitter.com/No_JS_OK|해당 트위터 링크]] 이들은 어쨌든 관계를 맺고, 인정한 사실을 발설하더라도 [[지랄 옆차기 하네|해당 상황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따른 보호 조치라고 설명한다.]]
* 7월 19일에 자신이 그 최초 폭로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https://twitter.com/ugeWQfbFleFEVyh|'그 발언은 관심을 끌기 위해 장난삼아 한 거짓이며 죄송하다']]([[http://archive.is/hcuSe|@]])는 내용의 트윗을 올렸는데, 탁수정은 최초 폭로자에게서 이 트윗이 자신이 쓴 게 아니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한 뒤 해당 트위터 계정과 박 시인을 옹호하는 어떤 계정에 등록된 전화번호 끝자리가 박 시인의 트위터 계정에 등록된 전화번호 끝자리 04와 같다는 점을 들어 두 계정이 박 시인의 다중계정일 가능성을 제기했다.[[https://twitter.com/Bookistak/status/1020219141146341377|#]] 22일에 이 의혹에 대해 [[트페미]]들이 이야기하는 걸 본 박 시인은 한 트페미에게 최초 폭로자가 04로 끝나는 휴대폰 번호까지 개통해 조작을 하는 걸 거라고 말했는데, 그 트페미는 그가 여러 계정을 운영한다는 내용이 있는 트위터 신고 결과가 있다고 말했다.[[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1020861907266228226|#]] 그러자 박 시인은 여러 계정을 운영했다는 이유로 제재당한 적 없다고 말했다.[[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1020873415547224064|#]]
2018년 6월 7일, 3월에 성추행 논란이 생긴 [[하일지]] 교수와 고발자와의 문자 내역을 공개하면서 그가 허위 고발당했다고 주장했다.
* 故 [[성재기]]를 비상식적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성재기는 [[성재기/평가|'박근혜 지지=남성연대지지'라며 박근혜 지지철회자들에게 "병신"이라며 "조금만 좋으면 학학대고 조금만 싫으면 획 바뀌는 인스턴트인생들,너희들이 하찮다.굿이나보고 떡이나 처먹어"]]라고 말했다. 그런데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당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박근혜를 밀어줬고 박근혜 측도 "준비된 여성대통령" 슬로건을 사용했는데도 그는 계속 '박근혜 지지=남성연대 지지'라고 주장해서 제대로 된 남성인권단체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게 했다. 아래는 박진성 시인의 평가다.
- 북한의 역사왜곡 . . . . 15회 일치
평양지역에 살았던 구석기 시대 인류가 '조선민족'의 기원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조선민족의 고향은 [[평양]]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세계고대문명 가운데,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과 함께 '대동강 문명'이 고대 문명의 발상지라고 주장한다.[[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korean_history/history-01262010172151.html (참조)]]
이러한 주장은 남한과 외국의 일반적인 역사적, 고고학적 견해와는 배치된다.
북한 교과서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은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배신]]이라고 주장한다.
[[제네럴 셔먼호]]를 '미국의 군함'이라고 주장하며,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가 결사대를 이끌고 공격하여 공적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제네럴 셔먼호는 [[무장상선]]이었으며,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는 당시 어떤 기록에서도 제네럴 셔먼호 사건에 참여했음이 언급되지 않는다.[[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korean_history/sherman_ship-08032010161025.html (참조)]]
북한은 3.1 운동의 주역을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라고 주장한다.[[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korean_history/sherman_ship-08032010161025.html (참조)]]
북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은 [[북한]]의 승리라고 주장한다. 월미도에서 리대훈 해안포 중대장이 단 4문의 포, 1,000대의 비행기와 수백천의 함선의 함선을 이끌고 공격하는 맥아더의 5만 대군을 3일간 좌절시켜 대참패를 안기고 '''전승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것이다. 위 내용은 1983년에 북한에서 "월미도"라는 영화를 제작하여 홍보하였으며 북한의 공식적인 역사관으로 보인다.
2016년에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개봉하고 [[우리민족끼리]] 웹사이트에서, 반박문을 올리며 인천상륙작전에서 북한이 승리를 거뒀다고 주장했다.
* 참조 : [[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media_in_out/MediaInandOut-08032016100307.html 북한의 황당한 ‘월미도 방어’ 주장]]
6.25 전쟁을 '''"북한의 승리"라고 주장'''하면서, 7월 27일을 전승절로 기념하고 있다. 이들은 미군과 한국군이 선제 북침을 하였으나, "김일성의 전략으로 미군이 무릎을 꿇고 정전협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kim_chon_ae/seoulpyongyang-08042017101743.html (참조)]]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미국이 학살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브레진스키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압을 허가하고, ‘필요한 최소한의 무력 사용’을 주장했다는 주장이 있다.[[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796459.html 출처]] [*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단견적이고 음모론적인 해석이라는 지적도 있다.]
- 유승민(정치인) . . . . 15회 일치
사실 이같은 인기(?)는 유승민의 언론 독립성에 대한 소신 덕택일 가능성도 높다. 유승민은 KDI연구원 시절부터 공기업 독점에 의한 광고업의 폐혜 등 언론의 독립성을 매우 강력하게 주장해왔고, 특히 재벌 대기업의 언론사 소유를 금지해야 한다고 한 바 있다. 그리하여 2009년 속칭 '미디어법 개정 파동' 사태 당시 한나라당의 찬성이라는 당론을 깨고 반대하였으며, 2012년 [[이명박 정부]]와 MBC의 갈등으로 촉발된 언론노조 파업 당시에도, '''정부와 정치권의 입김이 셀 수밖에 없는 현재 MBC와 KBS의 사장선임방식 등 지배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해당 파업을 지지하였다.
심지어 이로 인해 MBC에 미운털이 박혀, 그를 향한 복수를 하고 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462|노조파업 지지했던 유승민에 대한 MBC의 꼼꼼한 뒤끝과 복수]]
특히나 한나라당의 토론 에이스이자 저격수였던 유승민이 국방위로 자리를 옮기자, 그야말로 국방부와 군 장성들을 압도하는(...) 논리와 날카로운 질의로 화제를 모았다. 예를들어 2009년 1월 국방위 전체회의에서, 제2롯데월드 관련하여 공군참모총장 본인의 주장을 본인의 발언으로 반박하게 만들어버리기까지 했다.
경제, 국방, 외교통상의 삼박자를 고루 거친 탓에 각 분야에서 웬만한 전문가급 식견을 가졌다고 평가받고, 그 때문인지 국방정책 관련으로도 주목할 만한 주장을 간간이 내놓기도 한다. 그리고 모 신문사에서 매년 평가하는 '국감 스코어보드'에서 유승민 의원은 항상 최상위권에 등재되어 유승민 의원의 국방관련 식견이 상당히 탄탄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국회 내 대표적인 [[THAAD]] 도입론자이며, "국내 예산으로 [[THAAD]]를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서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에 따르면, 2013년부터 [[THAAD]]도입을 주장했는데 정작 그땐 [[친박]]계에서 반대했다고(...) [[http://defense.na.go.kr/servlet/Download?committeeId=2005110000006&boardId=2006011000274&recordId=2014010040549&fileId=01|2014년 1월에 실시한 북핵방어관련 세미나 자료 - 유승민 국회 국방위원장]] 유승민 당시 국방위원장은, 북핵대응 강화를 위해 기존의 종말단계 하층방어에서 중 고고도를 포함한 다층방어 체계로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2017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북핵(미사일) 방어능력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우며, 현재 저고도 방공을 담당하는 대한민국의 PAC-2는 독일에서 중고로 들여온 1980년대 연식에 원래는 전투기 요격용(...)으로 개발된 체계이기때문에 효용성이 낮다.
[[THAAD]] 배치가 결정되자 "[[칠곡군]]에 배치하면 수도권 방어가 어렵다"고 주장하며 사드 2~3포대 추가배치를 주장하였고, 후에 [[성주군]] 배치로 결정된 7월 12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 "TK에 배치돼도 감당해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8536495|유승민 "사드, TK에 배치돼도 감당해야"(연합뉴스)]] 또한 사드 문제로 인해 방중했던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에게는 매우 부적절한 처사이며 굴욕외교를 하고 있다고 이례적으로 매우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보수진영의 대표 논객인 [[전원책]] 변호사는 본인이 진행하는 시사프로그램 <이것이 정치다> 1월 5일자에 유승민 의원을 초청해 대화를 나눴다. 당시 유승민 의원은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 관련하여 미사일 발사 종류와 사거리, 사격고도 및 발사각도, 그리고 미사일 발사기지 위치 등의 자료를 만들어와 전원책 변호사 앞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사드배치 관련 타당성 주장을 하였는데, 전원책 변호사는 "이건 정말 정확한 자료이다", "공부를 많이 하셨다", "유승민 의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겼다" 등으로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면 [[대한민국 공군|공군]]력 건설, 특히 [[KFX]]나 [[L-SAM]]을 비롯한 국산 무기개발 사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숨기지 않았다.[* 2015년 국정감사에서 [[미국]]의 KFX 관련 주요 기술의 이전 문제가 논란이 된 상황에서도 정부가 자체 개발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방사청과 청와대 참모진이 대통령을 속이고 있다"며 여권 소속 의원으로는 이례적으로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 대안으로 KFX F-35 도입으로 전환, THAAD, [[미국]] 주도 MD 참여 등에 호의적인 견해도 나타냈다. 때문에 국산 개발을 통한 자주국방력 강화를 선호하는 이상주의적 [[밀덕]] 사이에서는 비판을 받았지만, 국산 무기의 여러 결함 때문에 검증된 미국산 무기를 선호하는 현실주의적 [[밀덕]]들에게는 오히려 호평을 받고 있다.[* KFX의 경우, 실패하면 그대로 [[대한민국 공군]] 미래전력을 다 말아먹는 결과가 된다. 때문에 차라리 개발이 본궤도에 오르기 전에 접고 검증된 미국제 전투기 도입을 찬성하는 주장이 [[밀덕]]들 사이에서도 의외로 많다.]
한일 군사정보 포괄보호협정(GSOMIA)도 절차상의 하자와 국민동의 미흡을 지적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찬성입장을 보이고, 사드 조기배치 및 추가 2~3포대 설치를 주장했다. 그리고 독자 핵무장은 반대하지만, '공포의 균형'을 근거로 전술핵무기의 재배치는 찬성하는 입장이다. 이미 [[유럽]]에서 시행되고 있는 NATO식 핵공유를 모티브로 삼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NCND(Neither Confirm Nor Denied) 즉 전술핵무기의 존재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않는 전략을 사용할 것이라 토론에서 밝혔다.
'이미 돈을 미국이 대기로 합의를 하고 끝난 사안이라서, 우겨도 돈을 줄 이유가 없다. 트럼프는 사업(비지니스)을 한 사람이라, 속칭 '지르는' 데 굉장히 능한 사람이다. '''즉,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데, 방위비 분담 쪽으로 얘기가 올 듯하다.''' 내가 대통령 되면 이거 협상해서 잘 해결할 거다." 라는 것. 실제로 이후 한미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공정한 분담이 이루어져야 한다' 며 방위비분담금 재협상을 시사하였다. 실제로 한미 FTA 개정협상과 각종 통상압박에 맞물려 방위비분담금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동업자끼리 불공평한 관계를 만들지 말아야 하는것''' 이라는 주장으로 압박에 나서고 있다.
대선토론부터 시작해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난 이후에도, 유승민 후보는 일관되게 사드배치 조기완료와 추가도입을 주장했고, 전략성 모호성이라는 개념과 국회비준 운운하는 문재인정부를 '''사드배치를 왜그리 머뭇거리냐''' '''운동권식 사고로는 국정 망친다''' 고 거세게 비난하였다. 그 이후 북한의 잇다른 ICBM도발과 6차 핵실험이 발생하자 결국 9월 7일 사드배치를 완료하였다. 또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문제에서도, 유승민 의원은 '잡음이 있긴 했지만 그 자체는 찬성' 의 입장이였다. 2016년 당시 야당이였던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을 배신한 밀약''' 이라고 거세게 비난하였고, 당시 문재인 전 대표도 일관되게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했으나, 2017년 8월 군사정보보호협정은 연장되었다.
보수 진영 일각에서는 좌파적인 발언을 했다고 하여 논란이 있다. 그런데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과거에는 자유주의 성향의 경제학자의 모습이 강했는데 재벌정책에 대해서는 입장의 변화가 없고 다른 나머지 경제, 복지, 노동에 대한 생각은 지역구 국회의원을 하면서 많은 지역구 주민들과 만나고 그들의 삶을 접하면서 생각이 바뀐 부분도 있다고 밝혔다. 또한 성장 동력이 점점 쇠진해가고 외환위기와 미국발 금융위기 등의 여파로 점점 [[양극화]]가 심화되어가는 현상을 보면서 전통적인 보수의 방법과 노선에서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임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이 주장으로 말미암아서 새누리당 원내대표시절 유승민은 박근혜 정부와 정면 충돌하게 되고 그의 정치적 험로를 예고하게 된다.]
- 트로피코 4/인물 . . . . 15회 일치
Penultiomo. 대통령 각하의 충실한 보좌관. 아틀란티스 대학에서 페눌티모를 전공했다……고 주장한다.
게임 내에서는 충성파의 주장을 대변한다.
게임 내에서는 자본주의자의 주장을 대변한다.
게임 내에서는 공산주의자의 주장을 대변한다.
게임 내에서는 지식인의 주장을 대변한다.
게임 내에서는 종교인의 주장을 대변한다.
게임 내에서는 군국주의자의 주장을 대변한다.
게임 내에서는 자연주의자의 주장을 대변한다.
달에 트로피코 깃발을 꽃아 트로피코를 세계에서 제일 넓은 국가로 만들자는 주장을 했다. 대통령 각하는 그걸 진짜 해냈다.
게임 내에서는 국수주의자의 주장을 대변한다.
게임 내에서는 미국의 주장을 대변한다.
게임 내에서는 소련의 주장을 대변한다.
게임에서는 유럽의 주장을 대변한다.
게임 내에서는 중국의 주장을 대변한다.
게임 내에서는 중동의 주장을 대변한다.
- 로힝야 . . . . 13회 일치
* 방글라데시 : '미얀마 난민'으로 규정. 미얀마에서 대책을 세우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때때로 송환하고 있다.
미얀마에서는 '벵갈리'라고 부르며 방글라데시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방글라데시 정부는 로힝야를 꺼려하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유엔난민기구가 인정하는 로힝야 난민이 3만명 가량 있으며, 유엔 난민촌 주위에는 미등록 난민 20만명 가량이 거주하고 있다. 2012년 방글라데시는 [[국경없는의사회]] 등 국제 구호단체의 활동이 난민 유입을 증가시킨다는 이유로 사업 중단을 요구했으며, 국경 순찰을 강화하고 있다.
이들이 기원에 대해서는 미얀마 정부 측과 로힝야 측의 주장이 다르다. 미얀마 정부 측은 [[영국]]이 1824년 미얀마를 영국령 [[인도 제국]]의 일부로서 식민통치를 시작한 뒤, 똑같이 영국의 식민통치 지역이었던 방글라데시에서이 이주해왔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방글라데시에서 넘어오는 불법이민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방글라데시 사람이라는 뜻에서 '벵갈리'로 부른다.
반면 로힝야 측에서는 자신들이 7세기 라카인주에 정착한 [[아랍]] 계통 [[무슬림]] 상인들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2011년 미얀마가 [[민주화]]되기 시작하였으나, 로힝야에 대한 박해는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미얀마의 다수 종교인 불교 승려들이 로힝야에 대해서 극단주의 주장을 펼치며 배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에는 라카인주에서 불교도인 라카인족과 로힝야족 사이에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버마무슬림협회와 유엔의 보고에 따르면, 이 폭동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동원된 것이라는 의혹이 있다. 미얀마 정부가 밝힌 공식 사망자는 43명, 모스크 37곳과 건물 1300여채가 불탔고, 1만 3천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버마무슬림협회는 사망자가 70~100여명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얀마 정부는 민간인 학살과 인종청소를 부인하였으며, 저 타이 미얀마 대통령실 대변인은 유엔의 주장을 부정하고, 확실한 증거에 기반하여 발언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미얀마 군부와 정부는 민가 방화는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려는 로힝야 무장세력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국제위기그룹의 보고서는 로힝야 무장단체가 국제무장세력과 연관이 있으나, 미얀마 내 불교도를 공격대상으로 삼는 것보다는 차별을 끝내고 시민권을 확보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종교적 주장을 펼치는 단체이고 국제 지하드 조직과 연결이 있어 언제나 목표가 바뀔 수 있으며, 미얀마 정부가 군사작전에만 치중하지 말고 로힝야의 고통을 외면하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미얀마 승려 위라투는 이 음모론에 대응하는 '969 운동'을 시작했는데, 9는 붓다, 6은 법륜, 9는 붓다의 제자, 승려를 뜻한다. 969 운동은 무슬림의 '786 음모'에 맞서는 운동임을 주장한다. 위라투는 2003년 버마 중부 만달레이주 카욱세의 반 무슬림 폭동에서 배후를 자처했다. 이 때 위라투를 비롯한 5명의 승려가 경찰에 '증오 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25년 형을 선고받았다. 2011년 그는 민간 정부 출범을 기념한 대사면으로 석방됐으며, 이후로 미얀마 전역의 불교 사원을 순례하며 반무슬림 정서를 자극하고 있다. 예를 들어, 무슬림이 운영하는 회사나 무슬림 상점에 보이콧을 선동하고, 신심있는 불교도라면 969 운동의 [[스티커]]가 붙은 가게에서만 물건을 사야 한다는 식이다.
불교 승려들로 이루어진 '마 바 타'(Ma Ba Tha, 민족종교 보호를 위한 애국연합)라는 단체가 로힝야 탄압에 앞장서고 있다. 이들은 로힝야 보트피플이 사망한 사고에 대해서 미국 대사관이 논평을 내며 '로힝야'라는 표현을 사용하자, 미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로힝야 같은 종족은 없고 그런 말을 할거면 이들을 다 데려가라고 주장했다.
- 어쌔신 크리드 III/임무일람/주요임무 . . . . 12회 일치
존슨의 계산과 지도가 잘 안 맞아떨어진다. 모호크의 도움을 받을까도 했는데 걔네들에게 해준것도 없는데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 이때 히키가 방법을 생각해낸다. 노예상으로부터 원주민을 구출하면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것. 벤자민 처치라는 사람이 노예상이 어디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라는 찰스 리의 주장에 따라 헤이덤과 찰스 리는 처치의 집을 찾아간다.
저택의 문을 두드렸던 사람은 카나도곤이었다. 카나도곤은 사람들이 와서 땅이 팔렸다고 주장하며 마을 사람들을 내쫓으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한다. 템플기사단원인 윌리엄 존슨이 이에 연관되었다는 걸 안 코너는 존슨을 막기로 결심한다. 아킬레스는 템플기사단은 강하다며 보스턴에 있는 새뮤얼 애덤스의 도움을 받으라고 한다.
코너가 윌리엄 존슨을 찾는다는걸 알게 된 애덤스는 코너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데려가려 한다. 길을 가는 도중 애덤스가 "드디어 사람들이 불의에 맞서는걸 보니 기쁘군"이라는 말을 하자 코너는 "노예를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라곤"이라며 애덤스를 까버린다. 애덤스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서리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둘은 식민지인의 노예제에 대한 갑을론박을 하던 도중 세금 징수원이 왕당파 병사들을 대동하고 세금 징수를 거부하는 집을 공격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마침 식민지인의 권리 문제가 더 심각하니 그것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애덤스는 증거가 충분할 정도로 늘어났다는 대사를 치지만 코너는 애덤스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는 집주인의 편을 들어 병사들을 공격한다. 병사들을 처리하고 난 후, 코너는 집주인에게 괜찮냐고 물어보지만 집주인은 한두번 있는 일도 아니라고하고 감사를 표한 후 가버린다.
상점 창문을 몸으로 깨부시며 나온 코너가 본 것은 대륙군 병사들에게 멱살이 잡혀있는 히키였다. 병사들이 코너를 히키의 공범으로 생각해 잡으려 하는 사이, 히키는 병사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친다. 코너는 도망가는 히키를 붙잡아 벽에 밀어붙이지만 병사들에 의해 체포된다. 코너는 자신이 히키의 공범이 아니며, 자신을 잡는 것 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고 주장하다 뒷통수를 맞고 기절한다.
코너가 한달 전 자신을 덮쳤을 때 죽이지 않은 이유를 묻는다. 헤이덤은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대답하며 다른 질문 없냐는 반응을 보인다. 코너가 템플기사단이 진짜로 원하는건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헤이덤은 질서, 목적, 방향이라고 말하며 암살단이 말하는 자유는 터무니 없는 소리라고 한다. 암살단이 옛날에 주장했던 목적인 평화가 더 합리적이라고. 코너가 자유가 평화라고 반박하자 헤이덤은 자유는 혼돈으로의 초대라고 하며 모두가 자유의 이름으로 쿵쾅거리고 소리지르던 대륙 의회의 모습을 말해준다. 헤이덤은 자기들이 나라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바보들보다는 나라가 되려고 곳에 필요한게 뭔지 아는 리가 더 낫다고 주장한다. 코너가 사람들이 워싱턴을 선택했다고 하자 헤이덤은 배불릴 생각만 하는 특권층 겁쟁이들이 선택한 것이며, 자신과 코너의 유일한 차이점은 자신은 남을 위한 척을 하지 않는 점이라고 말한다.
코너와 헤이덤은 밸리포지의 애국자들 진지 입구에서 만난다. 코너가 리한테 정보를 알리는걸 거부하자 헤이덤 압제와 부당함은 증상일 뿐이며, 진정한 원인은 인간의 약함에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코너는 헤이덤이 말한건 많지만 보여준건 없다고 받아친다.
코너는 앞서가던 애국자 전령들을 처리한 후, 카니엔케하카 마을의 부족 어머니에게 찾아간다. 하지만 부족 어머니는 뜻밖의 소식을 전한다. 찰스 리가 카나도곤과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애국자들을 공격하러 간 것. 코너는 숲으로 달려가 근처 애국자들을 공격하려는 카니엔케하카 전사들을 제압한다. 마지막으로 카나도곤을 제압하려 하는 순간, 카나도곤은 라둔하게둔에게 단검을 휘두른다. 카나도곤은 찰스 리가 모든걸 말해줬다며 라둔하게둔이 카니엔케하카를 파괴하려 하는 자들을 돕는다고 주장한다. 라둔하게둔은 리는 거짓말을 하는거라고 주장하지만, 카나도곤은 애국자들이 카니엔케하카 바로 앞까지 왔는데 그렇게 주장할 수 있냐며 동족을 저버린 라둔하게둔을 죽이려고 한다. 카나도곤이 라둔하게둔을 덮쳐 단검으로 찌르려 하는 순간, 라둔하게둔은 암살검을 뽑아 카나도곤을 찔러 죽인다.
- 월드 인 컨플릭트/줄거리 . . . . 12회 일치
1988년, [[소련]]의 경제적 파탄으로 냉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소련은 이에 대한 책임이 서방에 있다고 주장하며 원조를 요구하지만 협상은 지연된다. 1989년 여름, 원조를 두고 벌어지던 협상이 결렬된다. 소련은 국민들에게 서방의 자본주의자들은 평화 따윈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며 선전하고, 소련 병사들은 앞으로 있을 전쟁에 대해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전쟁을 경험한, 전쟁이 어떤건지 아는 병사들만은 그 농담에 웃지 않았다.
핸슨은 킹돔[* King Dome. 시애틀에 있던 종합경기장. 안전 문제로 2000년에 철거되었다.]으로 대피한 민간인들의 구조를 주장한다. 배넌은 후퇴하는 것도 바쁘다며 이를 거부하지만 민간인을 죽게 놔둘 수 없다는 핸슨의 반발에 파커에게 구조를 맡긴다. 파커는 부대를 이끌고 킹 돔으로 향한다. 킹 돔 앞 주차장에서 다수의 소련군을 발견하지만 파커의 부대는 킹 돔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헬리콥터로 도착한 증원군이 포격으로 킹 돔이 무너지기 직전에 민간인들을 구출해낸다.
소련의 선전 방송은 소련군이 미국 서해안 대부분을 해방시켰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은 시애틀 외부로 빠져나가는데도 미군의 저항을 상대해야만 하는 상황. 소련 군인들이 미국 땅을 밟으며 느꼈던 환상적인 감정은 빠르게 사라졌고, 자신들이 적지에 있다는 불안감이 그 자리를 빠르게 채웠다.
로마노프 중대는 다리를 지키던 미군들을 무력화시키고 다리를 확보한다. 뒤이어 말라셴코 중대 휘하 A 소대가 다리를 건너오고, 그 뒤 올로프스키 중대의 잔여 병력들 역시 다리를 건너오기 시작한다. 이때 미군 전투기가 날아와 다리를 무너뜨린다. 자신의 부하들이 고립되었다는 보고를 들은 말라셴코는 당장 교량전차로 다리를 만들 것을 요청하지만 올로프스키는 너무 위험하다며 서쪽의 얕은 부분으로 건너가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말라셴코는 지금은 우회 공격 따위를 할 시간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올로프스키의 지시를 따르게 된다.
소여 대령과 휘하 중대장들은 눈밭에 나뭇가지와 돌맹이로 지도를 급조한 다음 브리핑을 한다. 웹 대위가 강을 건널 수 있는 지점들을 요새화시키고 유일한 다리를 폭파시키자는 제안을 하자 소여는 윌킨스에게 시간을 벌어줄 수 있겠다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배넌 대위는 이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적다고 주장하나 소여는 소련군이 포트텔러에 도착한다면 우리들 손으로 핵전쟁을 벌여야 한다며 배넌을 신나게 까댄다. 이때 소련군 정찰기가 이들 위를 지나간다. 소여는 배넌을 15km 북동쪽으로 정찰 나가라고 지시한 뒤 급조한 지도를 부수며 작전을 시작한다.
지연 작전은 파커가 전차가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얕은 여울 두 곳을 확보하면서 시작되었다. 웹은 파커가 확보한 여울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두개의 여울을 확보하고 난 뒤, 소여는 파커에게 다리를 확보하고 배넌의 C 중대가 돌아올 때 까지 버틸 것을 지시한다. 하지만 배넌이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전멸당한 것으로 판단하고 다리를 폭파할 생각이었다. 웹은 전차 중대인 C 중대를 잃으면 포트텔러 방어전이 어려워질거라고 주장하지만, 소여는 만약 다리를 온전한 채로 빼앗긴다면 다음 전투고 뭐고 없다고 말한다.
같은 날, 레베데예프 소령은 사기 관리반에게 넘길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말라셴코 대위와 인터뷰를 한다. 미국 침공 후 몇주가 지난 시점에서의 감상을 묻는 레베디예프에게 말라셴코는 영광스러운 성과에 대해서는 매우 만족스럽지만 딱 한가지가 불만스럽다고 한다. 미국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이 소련군에게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매복 공격을 가해 인명피해를 낸다는 것. 그는 전쟁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미국인들이 더 대담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레베디예프가 생각해본 해결책은 있냐고 물어보자 그는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매복을 당할 때 마다 민간인 10명을 무작위로 처형하는 것. 이에 레베디예프가 그래도 매복이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어보자 말라셴코는 다 죽여버려야 한다고 대답한다.
선전 방송은 미국에 상륙한 소련군이 북미의 서쪽 절반을 해방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소련군은 워싱턴 주의 민병대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련군은 네개 대대를 캐스케이드폴스라는 마을로 투입하였다. 그곳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소련군 지휘부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올로프스키 대령 마저도 그 무언가가 뭔지는 몰랐지만, 소련군 장병들은 그 무언가가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다른 대대들이 차가운 바람이 부는 캐스케이드폴스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올로프스키 대대는 시골에서 민병대를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헬리콥터가 떠날 준비를 시작할 무렵, 올로프스키는 말라셴코를 부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말라셴코가 민병대로 추정되는 인물을 심문하러 근처 농장으로 갔다는 이야기 뿐. 한편, 말라셴코는 병사들에게 무기를 숨긴 민간인들을 처형할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말라셴코가 우물쭈물하는 병사들에게 짜증을 내며 자기 손으로 민간인들을 처형하려 할 때, 올로프스키가 난입해 이를 저지한다. 올로프스키는 병사들에게 민간인들을 데리고 나가게 한 후 말라셴코를 추궁한다. 말라셴코는 민간인들이 민병대를 위해 무기와 음식을 숨기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올로프스키가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말하자 말라셴코는 명령이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해야하냐며 화를 낸다. 이에 올로프스키도 다시 한번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군사재판에 회부해서 소련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받아친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나가버리는 말라셴코. 올로프스키는 이를 보고있던 레베데예프에게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냐고 묻는다. 레베데예프는 맞건 틀리건 올로프스키는 자신의 선택을 한 것이라는 이도저도 아닌 대답을 한다. 올로프스키는 레베데예프가 자신의 선택을 했는지 되묻고는, 조만간 선택할 순간이 오게 될 것이라면서 농장을 떠난다.
공세가 어느 정도 진행된 후, 소련군은 배넌이 담당하고 있던 서쪽 다리에 대규모 부대를 보낸다. 소여는 파커에게 동쪽 다리를 사수하는 동시에 배넌을 도와 서쪽 다리를 사수하라는 지시를 보낸다. 배넌은 자신 혼자 감당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소여는 배넌이 밀릴 것이라면서 파커를 보낸다.
소여 대대가 마을 중앙에 알박기를 하고 버티는 동안, 소여는 나쁜 소식을 전해온다. 소련군 기갑대대 3부대가 캐스케이드폴스로 막 투입되고 있었다. 이는 소여 대대가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후퇴해서 모든걸 잃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배넌에게 소여는 전술 핵폭탄을 투하할 계획이라고 밝히며 핵폭발에 휩쓸리지 않도록 북쪽 다리 너머 고등학교로 후퇴할 것을 지시한다. 이때, 배넌이 모든 부대가 후퇴하면 소련군이 알아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고는 부하들과 상의가 끝났으니 자신의 중대가 미끼 역할을 하겠다고 말한다. 소여는 자신은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결국 배넌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파커의 중대와 웹의 중대가 후퇴한 후, 마을 중앙에 남겨진 배넌의 부대가 자신들의 좌표를 보낸다. 파커는 배넌이 보낸 좌표로 전술 핵미사일을 유도한다.
- 이지아(배우) . . . . 12회 일치
이지아의 사촌동생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그냥 세금 좀 많이 내면 친일이란 거냐고 주장하며 자신의 할아버지는 나쁜 친일파가 아니었고 시대의 희생자였을 뿐이라는 글을 게재하여 또 한 번 논란이 되기도 했다.[* 세금 많이 내면 친일파는 아니다 당연히. 그렇게 따지면 당시 재력가는 모두 일고의 여지가 없는 친일파일 것이다.~~물론 대다수가 그렇지만~~ 김순흥의 경우는 자발적인 기부금이었다는 것에서 친일색을 띠고 있음이 증명되는 것이고, 더해서 반일운동에 대항하기 위한 자금도 지원했으며, 강제 징병이 실시된 이후로는 징병제를 찬성하는 성명을 내놓고, 일본 패망 직후에 [[한국민주당]]의 발기인으로 참석해 친미 성향, 혹은 친일에 대한 세탁 등을 한 인물이다. 이를 두고서 친일파가 아니라면, 참 서글픈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샤를 드 골]]과 프랑스의 처우와 비교되는 모습이다.] 팬들 중 몰상식한 일부 사람들도 이런 논리를 주장하거나 이후에 육영사업에 기여했으니 죗값을 씻은 거~~100억 원 꿀꺽하고 1억 원 기부하면 깨끗한 거냐~~라는 둥 지나친 두둔을 하여 반감을 사기도 한다.
2011년에 했던 소송은 이혼소송이 아닌 위자료 및 재산 분할소송으로 이지아는 국내법에 따라 2009년 이혼 성립을 주장, 서태지는 미국법에 따라 2006년 이혼이 성립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지아측 발표에 따르면, 이지아가 만 15세 때(1993년) 팬과 스타의 만남으로 서태지와 만난 인연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태지가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미국에서 서태지를 만나 친언니의 증인참석으로 결혼에 골인한다. 어쨌든 그녀와 연관성이 짙은 남자만 해도 [[서태지|한국 굴지의 대중 뮤지션]], [[배용준|전설적인 한류 탤런트이자 사업가]], [[정우성|연예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미남 배우]]이다.
비판하는 여론의 주장은 아무리 그렇다고해도 정우성을 속인 것은 심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하나.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입장에서 자신을 굳이 이혼녀라고 밝힐 이유는 없지만, 전 남편과의 관계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시점에서 연애를 한 것은 경솔하다는 주장. 덕분에 애꿎은 정우성만 졸지에 서태지와 이지아 사이에 끼인 꼴이 되어서 언론의 이목이 집중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한 것은 두말 할 것 없고. 또 다른 것은 서태지에게 건 거액의 소송을 이유로 남자를 등쳐먹으려는 [[악녀]]라고 하는 것이다.
97년 결혼 이후 "서태지의 비공식 아내"로 숨어 살아온 시간에 대해서 동정하는 입장도 있다. 실질적으로 00년에 이미 별거(서태지측 주장)에 들어갈 만큼 결혼생활보다 소송기간이 더 길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어린 여자와 결혼하면서 자신의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은 서태지의 행동이 의문스러운 게 사실이며~~[* 하술된 기사 내용에 이 부분은 사실상 거짓] 06년에 이혼 소송을 할 때까지 결혼생활의 끝마무리를 이지아 혼자 해야 했다고 [* 서태지 측에서 04년 이혼에 대한 합의, 06년 이혼 요구를 받았다며 인정한 내용이다.]하니.
그러나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은 결혼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디스패치]]의 [[http://www.dispatch.co.kr/107147|반박 기사]]가 나왔다. 디스패치가 네바다 등기소까지 뒤져서 취재한 결과 결혼식의 증인이 다름아닌 이지아의 이복 언니였다는 것. 이는 “양 측이 동의를 했고 많은 지인들은 두 사람의 교제나 결혼 사실을 알고 있었다”라는 서태지 측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또한 같은 기사에서 확인된 이지아의 교통법규 위반 사실이나 쇼핑, 가족 왕래 증언 등으로 볼 때, 결혼생활에 자유가 없었다는 이지아 측의 주장을 무작정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SBS [[힐링캠프]] (2014.8.11) ~~ 여기서 '''[[서태지|전 남편]]'''을 디스 했다.~~ 출연 전부터 광복절 앞두고 친일파 후손을 부르다니 제정신이냐며 힐링캠프의 섭외 자체를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반대로 이지아의 팬들은 방송 전부터 문제없다고 주장하며 포털 사이트를 옹호 댓글로 도배했다. 방송 후 댓글란에선 같은 여자로서 동정한다는 등 주로 여성층이 이지아의 불운한 결혼생활을 동정한다며 고무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네이버, 네이트, 다음 등 댓글란만 보면 매력적이라며 감탄했다는 반응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대다수 남초 성향 커뮤니티들과 일부 여초 커뮤니티에선 비판하는 여론이 훨씬더 많았다. [* 일부 여초 커뮤니티에서 비판적인 것은 할아버지의 실체를 알린 글이 석연찮은 이유로 삭제된 것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 정칠성 . . . . 11회 일치
그는 작문에도 능하여 글과 논설을 지어 발표하였는데, 여성의 계몽, 교육의 장려, 사회 부조리의 개선, 위생 청결론 등을 주장하여 이른바 '사상 기생'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당시 태화관을 출입하던 소설가 장혁주는 그의 존재를 인상깊게 기억했다가 회상하기도 했다. [[1920년]]에는 [[김일엽]], [[나혜석]], [[김명순 (1896년)|김명순]] 등과 함께 잡지 [[신여자]]지의 필진으로 참여하였으나 [[신여자]]지는 재정난으로 곧 폐간되었다. 이후 그는 [[조선]]의 역사 관련 서적, [[사회주의]] 사상과 [[페미니즘]] 관련 서적들을 구해서 독서하였다.
[[1923년]]말부터 [[허정숙]], [[정종명]](鄭鍾鳴), 오수덕(吳壽德) 등과 함께 여자도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가부장제]]의 억압과 남성들의 억압, 제국주의의 억압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허정숙]], [[정종명]] 등과 함께 여성사회운동단체를 조직하려고 여학생과 부인 중에서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이 중 신분과 배경을 보지 않고 사람을 사귀던 [[허정숙]]과는 특별히 친하게 지냈으며, 이후 정칠성은 [[허정숙]]과 함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사상을 조선에 소개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여성의 자유를 넘어서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가정과 결혼에서 독립하는 것이 바로 여성의 해방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등이 여성 해방을 외치지 못하고 여성의 자유, 남녀 평등만을 외친다는 점을 두고 상당히 소극적이라며 비판했다. 단순한 자유를 넘어서 남성과 가정, 가족으로부터 독립하지 않는 한 여성의 권리를 찾는 것은 요원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동아일보]]와 매일신문 [[삼천리]]지 등에 칼럼과 논설, [[대구]], [[부산]], [[전주]] 등지의 전국으로 순회강연을 다니며 여자의 자유 연애와 여자의 남자, 가정으로부터의 독립, 자립을 역설하였다. [[1927년]] [[6월 6일]]에는 [[평양여성동우회]] 주최로 [[평양]]부내 평양천도교당에서 열린 평양여우강연회와 여성문제대강연회(女性問題大講演會)의 연사로 참여하였다. 여성문제대강연회의 연사로 연설을 끝마친 뒤 평양경찰이 난입해 강연을 중단시켰다. 이후에도 그는 각지로 돌아다니며 가사노동 등으로부터의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였고, 경찰의 감시망에 오르게 되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사랑과 섹스가 무관하다는 관점은 [[1920년]]대 [[1930년]]대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정칠성은 사랑과 성이 무관하다는 콜론타이의 이론을 수용, [[조선]]에 소개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사랑과 섹스는 무관하며 사랑 없이도 섹스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당시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성리학]]자들과 남성 문필가들로부터 음란하다는 비난과 반발을 초래하였다.
}}</ref> 1930년 말에 제기된 신간회 해소론에 반대하고 계몽운동에 주력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일부 [[부르주아]]층 여성들의 이탈로 신간회는 붕괴된다.
[[1931년]] [[1월]] 《조선지광》 1931년 정월호에 '연애의 고민상과 그 대책'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녀는 연애로 인한 고민과 여성의 나아가야할 길을 제시하였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종속적인 관계의 결혼을 하게 되는 여성들과 남자에 대한 애정으로 자신의 길을 포기하는 여성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성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연애도 결혼도 모두 평등한 여성으로서의 인권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상적인 사랑을 위해서는 이러한 불합리한 사회적 제도와 환경과 싸워야한다고 하였다. 그녀는 '연애의 고민상과 그 대책'으로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여중, 여고를 다니며 강연활동을 하였다.
그는 성욕과 사랑은 별개로 규정하였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성욕과 연애는 당연히 갈라져야<ref name="seoji193"/>'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욕과 사랑이 별개인 이유로 [[조선]] 사회가 '결혼의 자유, 이혼의 자유가 아주 완전하게 없는 곳<ref name="seoji193"/>'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제시하였다.
정칠성은 여성의 자유를 넘어서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그는 [[입센]]의 소설에 나오는 [[노라]]보다는 [[콜론타이]]가 말하는 남성과 가정에 얽매이지 않는 여성을 높이 평가했다. 정칠성은 '노라는 '[[개인주의]]적인 자각'으로서 개성에 눈을 떠 남편의 집을 뛰쳐나갔지만 거리에서 얼어 죽은 '공상적 여성'인 반면, 바실리사는 노라와 달리 경제적으로 해방되어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자유로워진 여성<ref name="seoji194"/>'이라 평가 하였다.
- 김상조 . . . . 9회 일치
공정거래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내정되며 대중적인 인지도가 급속도로 올라갔지만[* [[최순실 국정조사]]에서 참고인으로 나와 재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최순실 특검]]에게도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보여 대중에게 조금씩 그 이름을 인식시켰다.] 이력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듯 아주 오랫동안 재벌개혁 시민운동을 계속한 인물로 한국 재벌과 관련해서 학문적인 관심이 있어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접할 수 있었다. TV 토론에도 종종 얼굴을 비췄고 언론 기고 또한 활발했으며 독자적인 저술은 한 권밖에[* 제목은 '종횡무진 한국경제'. 책을 읽어보면 통계적 근거와 [[경제학]]적 통찰을 근거로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해 담백하게 논하는 대중 서적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진보인사라고 하면 거리를 둘 법한 주장도 많이 보인다.] 없는 듯하지만 [[알라딘]]에서 [[http://www.aladin.co.kr/search/wsearchresult.aspx?SearchTarget=All&SearchWord=%b1%e8%bb%f3%c1%b6&x=0&y=0&|김상조]]를 검색해 보면 확인할 수 있듯 한국 경제, 재벌과 관련해서 다양한 저술에 저자로 참여해왔다. 공정위 위원장으로 내정되기 이전 소장으로 적을 두고 있던 경제개혁연대에서 수많은 저작물을 쏟아낸 것은 물론이다.
언론에서 흔히 이력이나 일부 발언들을 인용하여 '재벌 저격수' 등의 별명을 붙여 강경한 반(反)재벌주의자 내지는 좌파(?)로 여기기도 하는데 사실 꼭 그렇지는 않다. 일단 김 교수의 학문적 베이스부터가 주류경제학이고 그가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운동을 하며 내놓은 주장이나 연구자료를 봐도 과격하거나 급진적인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도입을 주장하는 정책도 해외 [[선진국]]의 선례를 근거로 삼는 경우가 많은 편. 기본적으로 진보적인 스탠스의 경제학자인 것은 맞으나 그 바탕이 주류경제학이기 때문에 일정한 한계 내지는 선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상조 아내도 부정 취업 의혹을 받고 있다. 아내 조 씨는 서울의 한 공업고등학교의 계약직 영어회화 전문 강사로 취직하여 5년 정도를 재직하였다.[* 참고로 영어회화 전문 강사는 임용고시를 통하여 채용되는 것이 아니라 계약직으로, 연봉은 현재 시점으로 약 2500만 원 수준이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311261849211&code=115|#]]] 자유한국당 측의 주장으로는 현재 취직 조건이 토익 901점인데 아내의 점수는 토익 900점이었으며, 채용 응시자는 조 씨 1명뿐이었고, 조 씨가 합격이 확정된 이후에야 지원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동시에 재임용 과정에서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30/2017053090046.html|관련기사]]
현재 김상조 후보자 측에서는 지원자가 1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채용되었다고 해명하였다. [[http://www.m-economynews.com/news/article.html?no=19766|#]] 이코노미 뉴스에서는 당시 조 씨의 이력서를 공개하였는데, 주장대로 토익 점수가 1점 미달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외 능력에서는 TESOL과 TEFL 자격증을 모두 취득하였으며, 해외 거주 기간이 2년이 넘는다. 때문에 옹호하는 네티즌 측에서는 당연히 다른 후보가 있으면 모르되, 이 정도 자격증 및 경험 보유자는 학원을 가도 3천 이상의 연봉을 받는 수준이며, 사실상 취업 비리가 아니라 하향 지원 내지는 재능 기부에 더 가깝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학교 입장에서도 학기 시작 전에 강사를 구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아내는 자기 입으로 자기 재벌 저격수의 별명을 가진 남편 이름을 남들에게 제대로 말하고 다니지 못한다면서 특혜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 완벽한 공산주의 . . . . 9회 일치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카를 마르크스]]의 이상론, '''SF 창작 설정'''. SF 창작 설정이라는 표현이 부적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카를 마르크스가 자신이 갖춘 과학적 지식과 따라서 상상한 것을 뜻하므로, 현실에 있었던 공산주의 체제와의 '명확한 대비'를 위하여 이 문서에서는 'SF 창작 설정'이라는 표현을 떄떄로 사용하고 있다. 소설로서 써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상당히 SF적으로 창작된 이상론이라고 봐도 좋다.
[[소련]]은 사회주의를 실현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체제를 '현실 사회주의'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전부터 소련에 비판적이던 일부 좌파 세력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라고 외면하며 소련과 같은 형태가 아닌 '완벽한 공산주의'를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소련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하여 이 당시는 비주류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았다.
없다. 나타날지도 알 수 없다. 일부는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완벽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산주의(1) 망했잖아 그거"라는 사람을 일단 "무식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소련은 사실 공산주의(2)'''가 아니고''', 공산주의란 내가 말하는 '완벽한 공산주의'가 맞는 거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화는 상대방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활동이 아니라, 단지 언어의 개념정의에서 오는 혼란에 불과하다.
일부는 여기서 갑자기 [[설정놀음]]으로 들어가기도 하는데, 공산주의(2)의 설정에서 '''자본주의를 거쳐서''' 라는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은 소련은 진정한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주장을 통하여 소련체계가 공산주의임을 부정하는 설정놀음을 하는 것이다.
* 공산주의(2) : 카를 마르크스의 설정. (1)에서 소련과 위성국들의 통치이념으로 떠받들어졌다. 일부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1)과는 다르다.
설사 99%의 인간이 이 체제는 공산주의가 맞다고 주장해도, 아마 그때도 누군가, 삐딱한 사람 한둘은 해당 정의에 반대할 수도 있다. 따라서 모두가 동의하는 완벽한 공산주의 체계가 실존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지게 된다고 볼 수 있다.
* 자신의 설정을 현실이라고 주장하며 조직을 만들고, 사회에 충격을 준 인물로서, 카를 마르크스와 비슷한 인물로는 '[[사이언톨로지]]'를 만든 SF작가 '론 허버드'가 있다.
- 이철희(1964) . . . . 9회 일치
E.E. 샤트슈나이더라는 학자를 좋아해서 그의 책과 이름을 자주 거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엘머 에릭 샤트슈나이더는 미국의 정치학자이다. 보통 샤'''츠'''슈나이더로 많이 알려져 있다. 민주정의 발전은 다양한 정당들의 공정 경쟁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정당 정치에 깊이 관심 있는 사람치고 샤트슈나이더 영향 안 받은 사람은 드물다. 이철희는 샤트슈나이더의 책을 번역한 적도 있다. 참고로 샤트슈나이더는 대의제 민주정을 강력히 주장하는 입장인데, 현 새정련 주류인 친노계가 직접, 참여적 민주정 강화를 지향하는 입장임을 보면 애초에 정당 운영 면에서 비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만 갖고 까는 건 아니지만~~][[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128769|그래서 오픈프라이머리(완전 국민경선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또한 학부 시절 [[최장집]] 교수에게 배운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장집 교수 역시 저서에서나 강연에서 대의제 민주정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기 때문.
전반적으로 온건 합리적인 리버럴 스탠스를 가진 것과는 달리 사관엔 [[이덕일]]류 노론사관을 맹신한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저서 <뭐라도 합시다>와 썰전에서 대한민국 보수의 뿌리는 노론으로, 이는 [[친일]] 단정 [[박정희|군사]] [[전두환|독재]] 세력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또한 [[더불어민주당]]에서 당무를 맡게 된 이후의 공천 잡음과 관련되어 있지 않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입당 직후 [[https://www.viewsnnews.com/article?q=128501|문재인 의원의 부산 공천]]을 주장해서 논란을 만들기도 했고[* 대권주자 또는 당의 핵심인원으로 전국에서 선거지원 활동을 나서야 하는 인물들을 지역구 선거에 투입할 경우 지역구 선거유세에 발이 묶이기 때문에 전국지원유세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그 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라 볼 수 있다.], 2월 초에는 '[[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60205100351001&mobile|막말, 운동권 공천 배제]]'를 주장하였는데 [[정청래]] 의원의 공천 배제의 가장 큰 근거가 된 게 '막말'이었으며 운동권 출신 의원들이 대거 공천 배제당하다보니 이철희 전 소장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산 것이다.
이러한 비호감에 쐐기를 꽂아버리는 발언이 발생했는데, 첫 번째는 [[http://gosunggo.com/693|박영선 의원과의 녹취록 논란]]이고, 두 번째는 [[유시민]] 씨가 인터넷 방송을 통해 밝힌 [[http://m.hani.co.kr/arti/politics/assembly/735001.html|'특정 지인을 지역구에 꽂아주기 위해 인원을 컷오프했다. 그 배경에 박영선, 이철희가 있다']] 라는 내용.[* 유시민 작가는 불만이 있으면 자신에게 소송을 걸라며 당당하게 주장을 하긴 하였으나 민주당을 떠난 지 오래된 사람인지라 더민주 내부 상황을 얼마나 잘 아는지 의문스럽고 또 정황 증거만 제시할 뿐 확실한 상황 증거는 내놓은 게 없다. 게다가 공개적인 토론 장소에서도 '새누리당 다음으로 싫어하는 정당이 더민주'라고 할 정도인 데다, 그때 김종인 더민주 대표가 정의당과의 당 대 당 야권 연대 방침을 철회하면서 정의당으로서는 지역구에서 궤멸당할 위기에 처했던 상황이기도 했다. 사적인 감정이 배제된 객관적인 판단으로 보긴 어렵다는 뜻이다.][* 해당 발언의 사실성을 떠나서 민주당을 떠난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친분이 있는 인사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심지어 참여정부 시절 한나라당 의원과도 친분이 있었다. 특히 소위 친노 인사들과는 당연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고 민주당 내 주류가 친노라는 점에서 유시민 씨가 민주당 내부 사정을 잘 모를 것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이러한 장대한 논란 거리를 만들어내다보니 [[박영선]], [[이종걸]] 의원과 함께 당내의 어그로 지분을 확보했다.
어떤 불리한 주장들도 다 정부나 여당으로 책임을 돌리는 논법 때문에 이러한 말들을 적절히 바꾼 말들이 페이스북 등지에서 유행을 하고 있다. 다만 집권여당의 전신들 같은 경우엔 이철희가 하지 않았던 말이라고 한다. --그냥 '한나라당 아닙니까' 이런 건 있다--
* 썰전에 출연할 당시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말을 잘 했으나, 경제적인 의제와 관련해서는 식견 부족으로 그저 원론적이고 이상적인 얘기만 늘어놓았다는 비판이 있었다. 사실 이 부분은 신자유주의적 성향을 드러낸 강용석과 복지를 주장한 이철희의 성향차이라고 보면 된다. 썰전에서 차라리 정치적 부분은 양자가 타협을 하기도 하고 서로의 주장을 인정하기도 했으나, 경제적 문제를 보는 인식 차이는 완벽한 평행선이었다. 썰전에서 즐겨 인용한 말이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의 '''왜 부자들을 돕는 것은 "투자"라고 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비용"이라고만 말하는가?'''였으니.
- 제3의 로마 . . . . 9회 일치
이탈리아의 [[민족주의]], [[공화주의]] 운동가들은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구호로서 이탈리아를 민중의 제3의 로마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 왕국]]이 이러한 사상을 계승하였으며,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에서도 제3의 로마 제국을 선전 구호로 내세웠다.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룸 카이세리(Kayser-i Rum, 로마의 황제)라는 칭호를 내세우며, 정교회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였다.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그리스 왕국은 [[민족 종교]]로서 [[정교회]]라는 종교 열정과, [[민족주의]] 운동에 따라서 비잔티움 제국의 계승을 주장했다.
[[카롤링거 왕조]]는 [[서로마 제국]]의 계승을 주장했으며, 이 계승권 주장은 [[신성로마제국]]으로 이어진다. 이 계통에서는 '서로마제국'이 제1제국이며, 신성로마제국이 제2제국, 그 계승국가가 제3제국이 된다. 신성로마제국의 붕괴 이후 계승권 주장은 이렇게 되는데….
오스트리아 제국은 신성로마제국의 계승으로서, 제3의 로마 제국임을 주장했다.
독일 제국은 신성로마제국의 계승으로서, 제3의 로마 제국임을 주장했다.
사실 독일 제국이 제3이면 [[나치 독일]]은 '제4제국'이 되어야 하지만, 서로마를 떼어버리고 [[독일인]]만 기준으로 해서 신성로마제국, 독일 제국, 나치 독일로 해서 제3제국임을 주장한다.--[[바이마르 공화국]]의 눈물-- '제4'는 아무래도 뭔가 애매하게 느껴지나보다.
- 마기/349화 . . . . 8회 일치
* [[우고(마기)|우고]]가 나타나 "차원 연결"은 엄청난 마고이를 소모하므로 알리바바의 "적은 마고이로 가능"하다는 주장은 불가능하다고 격렬히 반발한다.
* 분리를 주장하는 알라딘, [[아르바(마기)|아르바]]와 연결을 주장하는 알리바바, 우고의 대립. 그 가운데 신드바드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 이들이 내놓은 의견은 저마자 근거도 있고 어느 정도 타당했지만 분명히 어느 의견이 옳다 결정할 수가 없었다. 알라딘은 벽을 부순다면 대체 어디까지 부술 것인지를 지적했다. 아르바는 일 일라 같은 존재들을 단순한 에너지체로 취급한 알라딘이나 우고 등을 "거만하다"고 까며 그분에겐 의지가 있고 자신에겐 그게 들린다고 주장했다. 우고는 "같은 인격체"일 뿐이라는 아르바의 주장에 반박해 "상위의 존재들은 하위 세계의 운명을 쥐고 있다"고 못박고 신드바드의 말대로 세로의 벽을 부숴 그들을 타도해야 한다 주장한다. 아르바는 여기에 반박, 계속 솔로몬이 한 것처럼 상위의 신을 쓰러뜨리고 그 힘으로 새 세상을 만든자면 자기도 세상을 계속해서 멸망시킨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신드바드는 우선은 국경을 올바로 관리하되 미지의 세상에서 미지의 생명체와 의사소통이 가능한지를 먼저 알아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그걸로 발전적인 관계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없는 자원을 교류하며 유익한 거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토론자들은 그 점을 놓치고 있는가? 비로소 우고와 알라딘, 알리바바가 아차하면서 맞는 말이라 맞장구친다. 물론 처음부터 "커뮤니케이션은 된다"고 주장했던 아르바는 왜 이제야 그 말을 듣냐고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 김연경(배구선수) . . . . 7회 일치
'아직 김연경이 '''김연경 룰'''에 의해 국내 V리그에서 FA 자격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흥국생명은 김연경의 원소속구단' 임을 주장하였다.[* 만약 김연경이 국내 V리그에서 계속 뛰었다면 2010~11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을 텐데 흥국생명은 일본-터키의 3년 임대 기간을 흥국생명 소속 선수로서의 기간으로 치지 않았다.]
이번 최종 결정은 터키 구단인 [[페네르바체 여자 배구|페네르바체]]가 끝날 것 같지 않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자문 변호사단을 꾸린 것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스포츠 국제룰을 근거로 들면서 FIVB에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과 김연경 간의 계약서가 없음을 어필했고 보통 판결을 뒤집지 않는 선례에도 불구하고 FIVB는 판결을 바꾸었다. 하지만 김연경의 소유권을 계속 주장하고 싶은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은 FIVB의 결정에 반발하면서 재심을 요청했고 [[페네르바체 여자 배구|페네르바체]] 역시 김연경의 계약을 정당하게 인정하고 싶어 재심을 받아들였다.
여자 선수 차별이라고 하는 주장이 저런 현실적인 리그 수익 반론과 부딪치고 있다.
2014 FIVB 월드그랑프리와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처음으로 국가대표팀 주장으로 뽑혔다. 물론 김연경보다 나이가 더 있는 언니들이 있기는 하지만, 국가대표팀에서 중고참의 위치라는 점과 김연경의 위상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때 [[박지성]]이 주장이 된 것과 같은 비슷한 맥락. 그만큼 김연경은 국가대표팀의 무게감있는 에이스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진출권을 놓고 일본에서 펼쳐진 세계 최종예선에서 첫 경기인 이탈리아전에서 패했으나, 네덜란드-일본-카자흐스탄-페루를 연파하며 대한민국은 6경기인 태국전 2세트에서 무난하게 올림픽 진출권 획득. 당연하게도(?) 김연경은 맹활약. 다만 국내용 공격으로 여겨지던 개인 시간차가 국제무대에서 통하기 시작한 [[양효진]], 서브 맹폭 일본 킬러 [[김희진(배구선수)|김희진]], 반전의 리시브 실력을 보여준 [[박정아(배구선수)|박정아]] 등이 올라오기 시작한 건 고무적인 현상. 그리고 전체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대표적인 것이 박수 세리머니... 이 대회부터 김연경의 주도로 승리 후 3-3-7 박수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데 보면 중독성이 아주 강하다. ~~응?~~]로 소통이 잘 이뤄지고 있는 걸 보면 주장 역할도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 듯 하다.
* ~~인천에 중국집을 개업했다고 하더라. 중국집 사장님(...)~~ 2014 국가대표팀과 함께 찍은 사진. 처음으로 주장을 맡은 2014 대표팀에서 최고참과 어린 선수들의 중간에서 잘 연결하며 항상 대표팀의 즐거운 분위기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2014년 여름에 한창 벌어졌던 [[아이스 버킷 챌린지]]에서 ~~선수들에게 잔혹하게(...) 얼음물을 끼얹으며~~ 재미있게 팀 단합을 이끄는데 솔선수범했다.
- 깨끗한 독일국방군 신화 . . . . 7회 일치
--[[북유럽 신화]]-- 깨끗한 [[독일국방군]] 신화란, [[나치 독일]] 시기의 독일국방군(Wehrmacht)이 [[전쟁범죄]], 인종 학살([[홀로코스트]], 소련인 학살) 등과 무관하며, 이러한 범죄 행위는 전적으로 [[나치 친위대]](Schutzstaffel)에 위하여 자행되었다는 역사적 주장을 뜻한다. 이는 20세기 후반 까지 통설적으로 널리 통용되었으나, '''21세기 시점에서는 이미 깔끔하게 논파되어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사라진 주장'''이다.
개요에서 설명한 대로, 깨끗한 독일국방군 신화는 독일국방군이 전쟁범죄와 같은 범죄행위와 무관함을 주장한다. 심지어 이러한 전쟁범죄를 막으려고 노력했다고 까지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또 다른 맥락은 독일국방군을 '유능'으로 포장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작전 차원의 유능과는 달리, [[전략]] 측면에서 독일국방군은 '무능'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독일 정부와 독일군의 관계는 그리 안정적이지 않았다. 독일군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나 에리히 루덴도르프 같은 이들이 주장한, 그리고 전간기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믿어지게 된 [[내부중상설]]에 따라서 '''자신들은 아무 것도 잘못 하지 않았지만, 사회주의자들의 반란으로 독일이 멸망했다'''고 굳게 주장했다. 그리고 황제를 몰아낸 사회주의자들이라고 [[독일 사회민주당]]을 배척했다.
- 정인숙 (1945년) . . . . 7회 일치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은 19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고 난 뒤 "동생과 관계했던 고위층이 뒤를 봐준다고 했다는 아버지(정도환)의 회유로 거짓 자백을 했을 뿐, 집앞에 있던 괴한들이 동생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숱한 의문점 때문에 정인숙 사건은 단순 살인사건이라는 수사기관의 발표에도 불구하고‘권력기관에 의한 살인’이라는 세간의 의혹을 잠재우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 사건으로 남아있다.<ref name="jon01"/> [[2010년]] 2월 [[중앙일보]] 측에서 어렵게 만난 오빠 정종욱은 "억울해서가 아니라면 수감생활까지 다 마치고 나와 '내가 쏘지 않았다'고 얘기하겠냐"며 그의 결백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주장했다. 70대 중반에 들어선 그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마지막으로 재심청구를 통해서라도 명예회복을 하고 싶다"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ref name="jon01"/>
정인숙 살해 혐의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뒤 1989년 가석방으로 풀려난 정종욱은 당초의 진술을 번복했다. 2000년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국무총리실에서 심부름 왔다’는 저격수에게 동생이 살해당했다”고 주장했다.<ref name="ilsa01"/>
제작진은 이를 근거로 오빠 정종욱을 범인으로 지목하게 만든 결정적인 증거였던 탄도검사와 화약흔 반응 등이 또 다른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은지 알아봤다. 당시 수사기관은 소매 끝에서 나온 화약흔 반응을 근거로 총을 쏘지 않았다면 오빠의 소매끝에서 화약흔이 나올리 없다며 오빠 정종욱씨의 범행을 확신했다.<ref name="jon01"/> 하지만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팀이 당시 사고차량의 내부와 동일한 크기의 세트를 바탕으로 총기발사 실험을 한 결과, 정종욱씨의 주장처럼 직접 총을 쏘지 않은 상황에서도 화약흔이 검출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ref name="jon01"/>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관이었던 [[선우련]]도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정일권씨가 [[1971년]] 봄, 형님인 [[선우휘]] 씨를 찾아와 '이동원 외무장관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정 여인을 알게 되었으며, 내 아들을 낳았으나 공개할 수가 없다'고 털어놓았다.<ref name="sung71">"정성일이는 내 아들, 정일권씨 71년 고백", 경향신문 1993년 2월 20일자, 23면</ref>"고 말했다.<ref name="kum109"/> 그러나 [[선우휘]]가 정일권을 만난 [[1971년]]과 같은 해에 정일권을 만난 재미언론인 문명자는 정일권에게 "문 기자, 나는 정인숙과 딱 한번 같이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 니가 없소. 나는 이미 불임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ref name="kum110">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10페이지</ref>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정성일이 [[박정희]]의 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했다.<ref name="kum108"/>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은 귀국 후, [[1991년]] 초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추진했다가 갑자기 소송을 취소하였다. 정성일의 생부에 대한 논란은 [[정일권]] 설과 [[박정희]] 설, [[박종규]] 설, [[이후락]] 설<ref name="ilyo01"/>, 기타 정부 각료 설 등이 유력하였다. 그러나 정인숙의 유족들은 처음에 [[정성일]]을 정인숙의 배다른 동생이라고 하였다가, 나중에는 정일권의 친자라고 주장하였다.
- 정좌관심 . . . . 7회 일치
송나라 이후 [[유교]]에서 주장하는 수행법이다. 정좌는 조용히 앉아서(정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관심)으로서, 줄여서 정좌(靜坐)라고 하였다. [[주희]]는 특히 이를 강조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안정 상태로 두는 거경(居敬)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독서]]와 함께 수행법으로서 중시되었다.
유교의 정좌는 [[불교]]와의 대립, 영향 관계에서 나타난 수행법으로 보인다.--[[좌선]] 퍼가요~-- 실제로 주희는 자신의 저작에서 유교의 '정좌'는 [[불교]]의 [[좌선]]과는 목적과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였으나, 이후에는 오히려 불교와의 관련성을 지적받게 되었다. [[정약용]]은 주희가 강조한 '본성'과 '명덕'이 『능엄경』의 '여래장'과 동일하며, 주희가 주장한 공부 방법 역시 불교의 [[좌선]]과 사실상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는 주희가 불교와의 차별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반론도 있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유교]]에서 정좌가 도입된 것이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북송]] 시기에 주염계는 자신의 저서 『태극도설』에서 ‘주정입인극(主靜立人極)’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그 뒤 명도와 이천이 정좌를 가르쳤고, 정좌 수행은 유교의 주류가 되었다.
증국번은 "매일 시간을 가리지 말고 한 시간 정도 정좌하라"고 주장했다.
[[퇴계 이황]]은 정좌를 하는데 있어서 적절한 자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연구한 바 있으며, 주희의 주장에 근거하여 정좌는 불교의 수행과 다르다는 것을 밝히려 했다.
- 진격의 거인/86화 . . . . 7회 일치
* 그리샤는 올빼미에게 받은 고대의 역사서로 마레가 가르치는 역사와 전혀 다른 역사를 알아냈다고 주장한다.
*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유미르의 민족은 거인의 힘으로 인류에게 문명과 부를 가져왔으며 마레에서 가르치는 것은 모두 날조된 거짓역사.
* 하지만 우습게도 그리샤는 역사서에 써진 고대언어를 전혀 읽을 줄 몰랐고 그림을 보고 적당히 끼워맞춘 주장이었다.
* 조직원들은 그런 절대적인 힘이 있는 프리츠 왕이 왜 전쟁에 패해서 도망친 거냐고 의문시하는데, 다이나는 그 역사 자체가 날조라고 주장한다.
* 마레 측은 파라디섬의 프리츠왕이 선전포고를 해왔다고 주장하며 여기에 맞서기 위해 엘디아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지크는 자신이 "아버지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데 그리샤가 지크를 마레의 전사로 넣긴 했어도 직접적으로 학대하거나 피해를 입힌 걸로 보이진 않는다. 마레측의 정신조작이 의심되는 부분.
복권파는 올빼미가 마레 정권에 침투해 있는 내부 정보원이라고 주장하지만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우선 엘디아인이 차별받고 있는 상황에서 고위 공직자로 기용될 수 있는지가 문제. 설사 그렇다해도 정보원 개인이 조직 하나를 먹여살릴 정도의 자금과 무기를 융통해주는게 가능한지 미지수. 게다가 올빼미가 제공하는 정보는 수상한게 너무나 많다.
- 콘도 마코토 . . . . 7회 일치
암 치료의 3대 요법인 외과수술, 화학요법, 방사선요법을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유해하다고 주장하고, 암은 방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주장은 암 치료로 수명이 길어진다는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합병증이나 후유증으로 불이익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암의 조기발견이나 치료에는 의미가 없고, 암 치료를 받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을 여러 책으로 저술하였는데, 그 가운데 『환자여, 암과 싸우지마라(患者よ、がんと闘うな)』『항암제는 효과없다(抗がん剤は効かない)』가 [[베스트 셀러]]가 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47가지 방법(医者に殺されない47の心得)』은 [[밀리언 셀러]]가 되었다.
콘도 마코토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비판이 있다.
* 그의 주장에 따라서 [[암]]을 방치하여, 말기 암이 된 채로 병원에 와서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 의사를 신뢰하지 마라, 의사가 환자를 죽인다 등의 자극적인 주장을 하여, 환자와 의사의 신뢰관계를 파괴하였다.
- 표창원 . . . . 7회 일치
일부에선 '흉악범죄의 책임이 개인에게 있는가. 사회에게 있는가'에 대한 시각차이로 이전부터 논쟁의 중점에 있던 인물이란 말이 있는데 논쟁의 중점이라는 말이 어폐가 있는데, 모든 형법이론들은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모든 형법학자들은 전부 저것을 기반으로 이론을 전개한다. 범죄론부터 시작해서 세세하게는 행위론, 구성요건론에서 위법성론, 책임론까지 모두 구이론인 객관주의와 신이론인 주관주의를 따라 견해가 나뉘며, 현대 형법은 이 둘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한 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위있는 형법 저서 하나 없는 사람이 저 논쟁의 중점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학계의 관점에서 논쟁의 중점에 있다고 할 수는 없고, 단지 그러한 논쟁을 '''일반 대중에게 던져준 사람'''으로서 논쟁의 중점에 있다고 하면 어느 정도 이러한 표현이 들어맞을 것이다. 실은 국내에서는 어떤 사람이 범죄자가 되는 이유를 "그 범죄자 개인의 인성보다 자라온 환경, 못 가지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냉혹한 사회 탓이 적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튀는 것이다.
다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점은 수사의 90%이상은 경찰이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4년 기준으로 검사 한 명 당 하루에 11.4건의 사건을 배당받고 있는데, '''잔업해서 12시간 근무를 해도 거의 한시간에 사건 하나를 해결해야 한다(...)''' 사실상 수사의 주체는 경찰이고 경찰이 수사한 그 내용을 바탕으로 검사가 영장 집행시에만 지휘하는게 일반적이다. 즉 사실 이미 경찰이 수사 개시해서[* 경찰의 수사개시권은 2011년 때 법안 개정을 통해 이미 법률적으로 명문화되어 있다.], 증거를 모아서, 용의자를 잡아서, 검사한테 주면 검사가 이를 확인한 뒤 "OK" 외치고 끝나는 상황인데, 이것을 검사가 수사지휘를 하고 있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즉 경찰에게 유리한 내용이라기보다는 수사/기소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경찰은 수사에, 검사는 기소와 공소유지에 전념하자는 내용이다. 그리고 수사지휘권이 없어도 검찰의 기소권만으로도 얼마든지 보완수사를 요청하거나 경찰의 수사권을 통제할 수 있다고도 일선 경찰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장 청구권이 없으면 수사에 애로사항이 많다는 점에서[* 강제수사의 핵심은 영장이다. [[영장주의]]참조.] 검사의 권한은 해당 개정안에서도 여전히 막강하다.[* 실제로 표 의원보좌관의 SNS를 보면 해당 개정 내용을 접한 일선 경찰들이 표 의원의 보좌관(보좌관도 경찰출신이다.)에게 연락해서 "영장청구권를 왜 검찰에 남겼냐."라며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2018년에 있을 제7회 지방선거 때 같이 치뤄질 개헌 안을 살펴보면 검사의 독점적 영장청구권 폐지에 대해 동의하는 의원들이 있으므로 경찰에게도 영장청구권이 생길 가능성은 매우 높으며 개헌이 되지 않을 가능성에 대비해 경찰도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검사에게 영장을 청구할 시 검사는 법리적인 내용만 검토하게 하거나 혹은 변호사 자격을 가진 경찰을 특별검사와 같은 지위를 부여해 이들에게 영장청구권을 허용하게끔 하는 방안, 검사에 의해 영장이 반려되었을 때 법원에 항고를 할 수 있는 항고권 부여 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다. 표창원 의원의 경우 발의한 법안과의 균형을 고려해 경찰의 항고권 보유에 찬성하고 있다. 이에 관해 2018년 6월 21일 KBS 라디오에 전화로 출연해 다시 한 번 본인의 주장을 내세웠다. 현재는 경할은 수사는 하지만 종결권이 없다. 이는 한 번 한 수사 결과를 검찰이 받아서 다시 검토하는 두 번 일이 되므로 수사 결과를 기다리는 피해자/피의자가 더 오래 기다려야 하는 폐단이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수사권을 가지고 종결까지 할수 있게 될 경우에는 이를 해소할수 있으며, 문제가 없으면 바로 기소하면 되고 문제가 있으면 검찰이 재수사나 보완을 지시할수 있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경찰 내에서 종결권이 있다면, 경찰이 껄끄러운 사건을 묻어버리면 어쩌냐" 하는 반론이 있는데, 이에 대해 표 의원은 "검찰에서 묻어버리면 이미 대민 창구인 경찰의 손을 떠난 후라 사람들이 알수 없지만, 경찰에서 그러면 사건 관련된 사람들이 언론과 온라인으로 문제 제기를 하게 되고, 수사 지휘권이 있는 검찰도 알게 되므로 경찰이 사건을 묻어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하였다.
2018년 6월 22일, [[조국]] 민정수석에 의해 검경 수사권 합의안이 발표되었다. 표 의원이 주장한 내용이 상당 부분 반영되었고, 검찰은 금융 비리, 정재계 사건 특검 등 일부만 직접 맡고 다른 것은 모두 경찰에 맡긴다고 한다. 그리고 경찰 업무 중에서도 중하지 않은 사건, 즉 민생 관련 건은 자치경찰로 넘기게 되며, 이를 위해 현재 제주도에만 있는 자치경찰을 서울 등 일부 지역에서 시범 실시하고, 차후 확대한다고 한다.
>'매스미디아가 보여주는 범죄'에 대한 오랜 관심과 우려는 흥미거리만을 �는 매스미디아의 '선택적 특성'과 이러한 보도가 사회의 범죄문제에 끼칠 잠재적 영향력 때문인데, 그간의 숱한 미디아 프로그램 분석들은 거의 이구동성으로 미디아에 나타난 범죄가 특정한 범죄 - 강력사건 -에 편중되어 있으며 범죄문제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비판적 범죄학자들은 매스미디아가 범죄문제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으로 규정지으며 사회일반으로부터 격리시킴으로써 오히려 사회의 범죄문제를 악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중매체上의 폭력'은 오랫동안 학계와 일반대중의 관심과 우려의 대상이었다. 특히나 엽기적인 강력사건이 일어나는 상황을 생생히 보여주거나 재구성하여 보여주는 TV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1980년대 이후에는 '미디아 폭력'을 둘러싼 논란이 더욱더 뜨거워지고 있다. 영국에서는 1984년 BBC 방송국이 경찰의 도움을 얻어 미해결된 강력사건을 재구성하여 보여주며 목격자나 제보자를 찾는 'Crimewatch UK'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프로가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며 성과를 거두자 기타 민방들에서 유사한 프로그램들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런 유형의 프로그램의 原型은 1960년대에 시작된 독일 ZDF 방송국의 "미해결사건 XTZ..."이며 영국 BBC에서 도입한 이후 미국, 네덜란드, 핀란드, 러시아, 한국 등 세계각국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지대한 대중적 관심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프로그램의 제작과정과 내용, 사회적 파급효과 등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아직까지 미미한 실정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제작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요소가 경찰이다. 경찰은 이 프로그램들에 범죄사건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경찰관 및 경찰장비를 제공해 준다. 경찰의 입장에서 보면 이 프로그램들은 사건해결의 유용한 도구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홍보매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범죄 재구성' 프로의 범람에 대해 "남의 불행을 보고 즐기는 일종의 '관음증'을 조장하며 독거노인, 여성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불필요한 공포를 확산시키고 강력범죄 피해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며 일반대중의 범죄에 대한 공포를 확산시키고 강력범죄 피해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며 일반대중의 범죄에 대한 공포심을 이용하여 시청률 올리기에만 치중하는게 아니냐"는 방송의 윤리에 대한 심각한 질문이 그간 심심찮게 제기되어 왔다. 방송사들은 이에 대해 "범죄퇴치에 협력한다는 공익에 이바지할 뿐"이란 논리로 대응해 왔다. 높은 시청률과 시청자의 신고가 주요범죄를 해결했다는 주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집행의 대명사인 경찰의 걍력한 지지가 이러한 '공익논리'를 받쳐주는 주요요소이다. 본 논문은 영국전역에 산재한 28개 지방경찰청, 내무성 경찰국, BBC Crimewatch UK 제작팀, 민간기구인 Crimestoppers Trust 등 30여 관련기관을 방문, 60여명에 이르는 관계자와의 심도깊은 면담 및 관련자료 분석결과와 13편의 Crimewatch 프로그램 분석 결과를 종합분석하여 '범죄 재구성'프로그램인 Crimewatch UK를 통해서 본 영국경찰의 매스미디아관련 정책과 실행, BBC방송국의 다큐멘타리 제작 지침과 실태상의 불일치를 비판적으로 조명해 보았다.
- 한명회 . . . . 7회 일치
권람은 처음에 이해를 못하다가 나중에 그의 말을 이해하고 동의하였다. 이에 그는 [[조선 세조|수양대군]]이 참된 임금감이라 주장하였다.
[[권람]]의 진언을 받은 [[조선 세조|수양대군]]은 그를 불러들였고, 한명회는 강력한 왕권을 주장하였다. 한명회의 진언을 들은 [[조선 세조|수양대군]]은 '어찌 진즉 만나지 못했을까? 지금 주상께서는 비록 유충(幼沖)하지만 곁에서 잘 보필하면 수성(守成)은 할 수는 있는데, 대신들이 간교하여 [[안평 대군]] 이용(李瑢)에게 포섭되어 선조(先朝)의 충자(冲子)를 부탁하신 뜻을 저버리니 조종(祖宗)의 선령(先靈)이 장차 어디에 의탁하시겠는가?'하고,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자, 한명회는 이에 감격하여 [[쿠데타|반정]](反正)의 책략을 남김없이 말하였다.
그는 세조 집권 초반부터 변방의 성곽 수축과 병력 양성을 건의하고, 해안가에도 성곽을 쌓고 병력을 보내 방비를 튼튼히 해야 하며 미구에 있을 왜구와 [[여진족]]의 침략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456년]]부터 [[조선 단종|노산군]]과 [[금성대군]]을 처형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조선 세조|세조]]가 듣지 않았다. [[1457년]](세조 2년) 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고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한 뒤, 상당군(上黨君)에 봉군되었다. 그해 [[금성대군]]과 [[순흥부|순흥]][[부사]] [[이보흠]]의 모의를 적발하여 처형시켰다. 그해 겨울 [[조선 예종|해양대군]]의 [[왕세자]] 책봉을 주청(奏請)을 위한 [[세자]][[책봉]]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의 [[연경]](燕京)에 들어갔다.
그해 [[남이]](南怡)가 쓴 시구가 문제가 되어 [[남이의 옥|모역사건]]으로 몰리자 [[유자광]]의 고변을 듣고, [[신숙주]], [[유자광]] 등과 함께 [[남이]], [[강순]] 등의 사형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남이]] 등이 처형된 후 [[유자광]], [[신숙주]] 등과 [[남이]], [[강순]]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추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推忠保社炳기難翊載功臣) 1등관의 호를 받고는 [[1469년]](예종 1년)에 다시 [[의정부]][[영의정]]이 되었으나 곧 사직했다.
[[1456년]] [[6월]] 단종복위사건이 일어나자, [[정보 (조선)|정보]]는 서매제인 한명회를 찾아가 사육신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한명회가 이를 들어주지 않자 [[정보 (조선)|정보]]는 천추의 악인이라며 규탄하였다. 그해 12월 한명회가 그를 난언죄(亂言罪)로 고발하여 죽음을 받게 하였다.<ref name="정보1">[http://www.sugmo-jeon.co.kr/haenglog/haenglog-jeongbo.htm 정보(鄭保)<!-- 봇이 붙인 제목 -->]</ref>
[[정보 (조선)|정보]]는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에는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국문장에 끌려가서 이들을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서매제인 한명회의 고발로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 박석민 . . . . 6회 일치
||<-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074CA1><:> '''{{{#ffffff 삼성 라이온즈 역대 주장}}}''' ||
||<-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315288><:> '''{{{#ffffff NC 다이노스 역대 주장}}}''' ||
||<-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315288><:> '''{{{#ffffff NC 다이노스 역대 주장}}}''' ||
2017년 [[NC 다이노스]]의 새 주장을 맡게 되었다.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382&aid=0000522776|기사]] 그러나 부상으로 인한 잦은 이탈과 부진으로 인해 시즌 중 주장 완장을 [[손시헌]]에게 넘겨 주었다.
* 퇘가놈, [[정현욱|박그분]] : 주장인데도 팀을 버리고 야반도주했다는 이유. 박석민이 당연히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 삼팬들이 많았으나 FA이적으로 차세대 [[이호준|엔전드]]의 길을 걷자 바로 금지어로 등극했으며 박석민 팬은 [[노리타(야구)|퇘리타]]로 격하되었다. ~~두산팬 : [[홍성흔|우리가 한 번 당한 적이 있어서]]...~~ 더불어 브콜돼 이놈 대구로 오기만 해 봐라고 잔뜩 벼르는 중. 하지만 예상이 무색하게 첫 대구 원정에서 삼성팬들이 기립박수로 반겼다.[* 물론 여전히 온라인 반응은 안 좋은편. 일부는 박수친 팬들을 비난했는데, 이유는 우리 팀 투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 다만 이 경기에서 1회 말이 끝났을 때 삼성은 '''7대1'''로 이기고 있었다! 직관 간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끝난 경기인데 예전에 삼성에서 뛰던 선수가 왔으니 반갑다고 박수나 쳐 준 것. 박석민이 이 경기에서 솔로홈런을 쳤을 때도 마찬가지로 그거 한 방에 뒤집는 것이 불가능한 점수차였기 때문에 삼성팬들은 '''홈런을 맞았음에도 기분 좋게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냈다.''' 덕분에 이날 삼성 선발이었던 [[윤성환]]은 상대 타자가 자팀 팬들에게 기립박수를 두 번이나(한 번은 자신의 피홈런으로!) 받는 것을 마운드에서 지켜봐야 했다.] 꽤나 오랜 시간 이후 당시 삼성 스포츠단의 지원금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정유라]] 지원으로 인한 지원금 축소 의혹으로 계약금차이가 너무 컸다는 것과 친정 팀에 대한 애정을 종종 드러내는 것으로 인해 재평가되고 있다. 혹자는 괜히 오버해서 안먹어도 될 욕을 먹었다고도 하는 편.
- 심현섭(코미디언) . . . . 6회 일치
그러다가 그 화려한 전성기 시절, [[2002년]] [[16대 대선]] 때 [[이회창]] 후보 선거운동에 참여했으나 이회창 후보와 함깨 고배를 마셨고 유력한 후보로 점쳐졌던 코미디 대상에서도 [[신동엽(코미디언)|신동엽]]에게 대상을 넘겨줘야 했다.[* 그 자신의 주장으로는 12월 17일 이미 수상이 통보되었으나 정작 발표 때는 결과가 뒤집혔다고 한다. 이 당시 윤도현의 러브레터에 출연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했었는데, 실제로는 매니저와 담당자간의 오해로 밝혀져 심현섭이 사과했다.][* 그 전에도 모 프로그램에서 말실수를 심하게 하여 공영방송에 출연정지를 당한 적이 있었다.]
개그맨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이후 2002년 대선에서 보수정당인 [[한나라당#s-1|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 후보를 공개 지지하는 것을 시작으로 2012년 대선까지도 보수파 계열에서 정치적 지지 의사를 꾸준히 표명했는데, 이러한 행보는 사실 정치권에 대한 개인적인 야망이나 출세욕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심현섭 본인의) [[아버지]]가 [[북한]]이 벌인 [[테러]]로 순직하게 된 특수한 개인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참여정부 시절의 탄압 주장도 사실 그의 정치적 지지 행보와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아웅산 테러를 일으킨 공작원이 2008년 [[미얀마]] 감옥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 공작원도 아버지와 함께 남북 분단 시대의 희생자"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아버지의 사망 이후 가세가 기울어진 상태에 놓이고 후에 정치적 논란도 겪게 되는 심현섭 본인 또한 시대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보수 네티즌들은 심현섭의 몰락이 [[참여정부]] 시절의 정치압력이라고 주장하며, 이명박 정부 시대의 [[김미화]]·[[김제동]]·[[윤도현]]·[[김C]] 등의 방송 하차가 정치 압력의 결과라는 주장을 역공하는 근거로 삼았다. 정권이 확실히 바뀌어버린 후에도 여전히 방송에 얼굴을 잘 비치지 않으며 가끔 나와도 추억속 개그맨 이상의 모습은 보이지 못하는걸 보면 그냥 본인이 개그쪽을 더이상 중시하지 않는다고 보는게 더 정확할 것이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241&aid=0002762322|피해자라고 주장하는 L씨의 폭로글 전문]]
- 하이큐/273화 . . . . 6회 일치
* 바로 이 시점에서 선수교체. 오지로 대신 이나리자키의 주장 [[키타 신스케]]가 등판한다. [[타나카 사에코]]는 주장이 이런 시점에서 에이스를 쉬게 하는 거냐고 경악했다. 시마다도 비슷하게 봤는데 아마도 이번 세트를 이미 딴 걸로 생각하고 마지막 세트에서 에이스인 오지로를 풀로 활용하기 위해 잠깐 휴식시키는 걸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지금이 찬스일수도 있지만, 막상 교체로 들어온건 팀의 주장. 그냥 "대역"은 아닐 공산도 있었다. 카라스노의 벤치도 그 점을 경계하고 있었다. 특히 [[타케다 잇테츠]]는 기어코 자료로 접하지 못했던 선수가 나왔다고 우려했다. 우카이 코치는 거기에다 오지로를 조금 더 흔들어 놓고 싶었던 참이라 아쉬워한다.
그것과 별개로, 막상 주장을 맞이한 이나리자키의 선수들도 경직된 기색이 완연하다. 그 미야 형제 조차도 기합이 잔뜩 든 모습이다. 후배들의 "나이스 서브" 응원을 받으며, 버티는 역할의 키타가 서브 위치에 선다.
후반엔 오지로 대신 서버로 기용된 주장 키타 신스케 앞에서 그야말로 얼어붙는다. 언제나 까불거리던 두 형제가 키타 앞에선 기합이 꽉 들어찬 모습.
카라스노가 경기 데이터를 취득하지 못했던 선수. 이나리자키의 주장이지만 왠지 자신은 "대역"일 뿐이고 그저 "버티는 역할"일 뿐이라고 겸손한 태도다. 하지만 정작 바로 전화에선 리세키가 안전빵일 뿐 아무 위협도 안 되는 서브를 넣고 들어오자 "우리 팀에 들어갈 뿐인 서브는 필요없다"고 독설을 날렸고, 그가 들어서자 마자 그 까불거리던 미야 형제가 군바리처럼 뻣뻣하게 굳은 걸 보면 뭔가 있는건 분명.
- 긴나라 . . . . 5회 일치
인도학자 아스코 파폴라(Asko Parpola)는 산스크리트어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고대 드리비다어에서 기원했으며, 소리를 뜻하는 킬(Kil)과 현악기를 뜻하는 나람(Naram)을 합성한 것으로, 이는 곧 '악사(樂士)'를 뜻하는 단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반대로 킴푸루사가 고대 산스크리트어 킨나라를 산스크리트어로 음차한 것이다. 제사의 희생물로 '킴푸루샤'를 제단 밑에 묻었다는 단서로 보아 악사들을 희생 제물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마이어호퍼(Mayerhoper) 역시 긴나라는 악사를 뜻하는 말이었을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수다나 왕자가 전쟁에 승리하여 돌아오기 전에, 부왕은 기묘한 꿈을 꾼다. 사제는 그 꿈을 [[해몽]]하면서 거짓으로서 왕자가 위험에 처했으니 긴나라 공주 마노하라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노하라는 다시 희생 제물이 될 운명에 처하는데, 왕비가 마노하라를 구하기 위하여 그녀에게 본래 그녀가 가지고 있던 옷과 보물을 돌려주었다. 마노하라는 옷과 보물의 힘으로 새로 변신하여 하늘로 날아가 도망친다.
- 김영환(1955) . . . . 5회 일치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6년 1월 8일 탈당하고 [[국민의당(2016년)|국민의당]] 합류를 선언했다. 2016년 초 국민의당 인재영입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당시 총선 전 국민의당 지지율이 마구 떨어지면서 도로 민주당으로 합류하자는 의견이 거셀 때 국회의원 중 거의 홀로 국민의당을 지키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재명(1964)|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이재명(1964)/논란 및 사건사고|각종 의혹들]]로 공격할 때, [[이정희|작정하고 나왔는지]] 정책 홍보와 검증보다는 이재명 후보에 대한 온갖 의혹들을 들고나와 [[네거티브]] 공세를 펼치는데 집중한 모습을 보였다.[* 사회자가 없는 자유토론 방식이라 중재자가 없는 점도 한 몫 했다.] 성남 FC 후원금 관련 의혹, 시민 상대 고소, 형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했다, 조폭 연루설, 일베 가입 논란, 혜경궁 김씨, 김부선과 스캔들 의혹[* [[주진우]] 기자가 김부선에게 메일을 보냈다는 새로운 의혹을 제기했는데, 토론회 후 때마침 주진우로 추정되는 남성과 김부선의 대화 녹취 파일이 공개되었다.] 등을 주제로 네거티브를 걸었고, 이재명이 그에 대한 해명을 해도 거짓말로 단정짓고 자신의 주장만 강하게 몰아붙이며 토론회를 진흙탕 싸움으로 몰고갔다. 흡사 경찰이나 검찰이 취조하듯 몰아붙였는데, 이재명은 처음엔 적극적으로 해명했으나 계속되는 공세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기도 했고, 여기 청문회장 아니라고 반박하자 김영환은 진실공방이 아니라 '검증'이라고 주장했다. 후반부엔 20년 국회의원 경력 동안 이재명처럼 문제가 많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자신이 이자리에 있는것이 부끄럽다며, 왜 이런사람들과 토론을 해야 하냐며 한탄하며 반듯하게 살아서 미안하다는 자기반성을 했다. 또한 자신은 전과가 없다고 말했는데 이어서 한 말이 "투옥되고 노동자 생활하고.."라고 삐끗하자 이재명이 투옥이 전과아니냐고 물으니 긴급조치 운운하며 [[정신승리|전과지만 전과가 아니라며 반박했고]] [[유체이탈|이재명이 그런 전과는 자신도 있다고 반론하자 교도소의 도둑놈들도 다 이유가 있다며,]] [[내로남불|이재명이 반성을 안한다며 되려 비난했다.]] 마지막으론 이재명이 박근혜를 비판할 자격이 있냐고 하며 발언시간을 마무리했다. 모두까기로 컨셉을 잡은건지 마찬가지로 이재명에게 네거티브 공격을 하고 김영환이 혜경궁 김씨를 언급할 때 같이 거들어 준 [[남경필]]도 자유한국당 소속으로 출마한 점을 들어 비난했고, 이런 토론 태도를 보다못한 [[정의당]] [[이홍우(1959)|이홍우]] 후보가 인신공격과 진흙탕 논쟁은 도민들이 불편해하니 자제하고 경기도의 미래를 논의하는 토론을 할 것을 촉구하자 자기 얘기만 하라는 호통으로 막아섰다. [[https://www.youtube.com/watch?v=3d1pNRO-1Io|김영환 후보의 토론회 주요 장면 모음]][* 경기도지사 후보로서 경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는데 ~~본인은 후보가 아니라는 듯~~너나 잘하세요라며 고성을 지르는 모습이 참으로 막장스럽다(...).]
또한 토론회 마무리 발언으로 [[JTBC]]와 [[손석희]]사장을 자신에게 갑질을 한다고 [[http://www.edaily.co.kr/election/view.asp?newsId=01161126619214168|비판하며]], JTBC 본사 앞에서 농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유는 JTBC가 6월 2일과 3일 개최할 경기지사와 서울시장 후보 토론회에서 내실 있는 검증을 이유로 지지율 5%이상 후보에게만 토론회 참가를 제안했는데, 김영환 본인의 지지율은 2.5%에 불과해 자신에게 참가 요청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바른미래당에선 방송 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신청했고, JTBC측은 이를 받아들여 지지율이 낮은 후보에게도 기회를 주기로 했지만 이번엔 다른 후보의 캠프에서 부정적인 입장을 표하자 토론회 자체가 무산되었다. 하지만 김영환 본인은 1년전 안철수 대선후보 캠프의 미디어본부장을 맡았을 당시 유력후보간 양자토론을 주장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본인의 지지율이 낮은 것을 JTBC의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 비춰질 여지가 있다. [[http://v.media.daum.net/v/20180531211335605?f=m|JTBC '경기지사·서울시장 후보 토론회' 무산..배경은]]
그리고 6월 7일 오후, 뜻밖의 [[공지영|원군(?)]]이 [[https://namu.wiki/w/%EA%B3%B5%EC%A7%80%EC%98%81#s-3.3.4|등장한다.]] 그러나 아직까진 어느쪽이 옳다고 판단하긴 이른 단계. 애초부터 공지영은 과거 논란들로 신뢰성을 잃어버린지 오래 되었고[* 때문에 이번 사건에 대해 보수 일각에서는 현재 이재명에 대한 반발로 인해 과거부터 줄곧 공지영에 대해 그렇게 비난해대면서 정작 이재명 의혹에서는 공지영의 말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웃지 못할 일이 보수내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공지영의 발언을 섣불리 신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추가적인 증거들이 나와야만"''' 공지영의 말이 신뢰성을 얻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번 사건에서 공지영 본인이 무슨 새로운 증거들을 거론한 것도 아니다.[* 관련자의 말을 자신이 들었다는 것이다.]
- 난치병 모금사기 . . . . 5회 일치
모금에 비판적인 주장.
'죽는다 죽는다 사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문제점.
* 실제로 필요한 총액을 매우 낮게 계산하여, 모금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 자신의 아이가 난치병일 경우, 자산을 모두 매각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
* 모금 유용 여부에 대해서 증명을 하지 않고 유용했다고 주장한다. 명예훼손의 가능성이 높다.
- 맥스 페인 2: 맥스페인의 몰락/줄거리 . . . . 5회 일치
맥스는 경찰서로 가서 집이 습격당했다고 보고한다. 이 상황에 [[짐 브라부라]]는 어이없어 한다. 맥스는 브라부라에게 [[블라디미르 렘]]의 주장 - [[비니 고그니티]]가 스쿼키 청소회사와 손을 잡았다, 라는걸 말한다.
* 경비실에서 나오면 보이는 TV에서 "주소지 불명"이 방영되고 있다. 의사들이 주인공이 연쇄살인마 "존 미라"라고 주장하며 주인공을 드릴로 치료하려 한다. 주인공은 의사의 손에서 드릴을 빼앗아 의사들과 환자들을 죽이고 탈출한다.
맥스는 [[모나 색스]]가 폭탄을 해체해줄거라며 폐 놀이공원으로 차를 몬다. 그 말을 들은 비니는 모나는 블라드 만큼 나쁜 년이고 분명히 청소부들과 한패일 거라고 주장하지만 맥스는 이를 망상이라며 무시한다. 둘이 폐 놀이공원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기폭장치를 들고 미소짓는 블라드가 있었다.
다시 시점은 맥스에게 넘어간다. 맥스와 [[비니 고그니티]]를 붙잡은 [[블라디미르 렘]]은 맥스를 은신처로 끌고온다. [[스쿼키 청소회사|청소부]]의 대사에 따르면 인형탈의 머리가 너무 커서 비니는 못 끌고오겠다고. 블라드는 맥스에게 권총을 겨누며 아이러니하지 않나고 물어본다. 맥스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자, 그는 맥스의 가족을 죽게 한 사람은 [[알프레드 우든]]이라고 말한다. 우든이 지방 검사를 협박하기 위해 발할라 계획의 파일을 보냈고, 지방 검사 밑에서 일하던 맥스의 아내가 그걸 봄으로써 가족이 몰살당했다는 것. 블라드는 [[모나 색스]] 또한 우든의 부하로 블라드와 같은 편이었던 이너 서클 회원들을 암살했다고 주장한다. 맥스는 그 말을 웃어넘기지만, 블라드는 윈터슨의 복수를 하겠다며 맥스의 머리에 총을 쏴버린다.
취조실에서 맥스는 또다른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또다른 맥스를 제압하려고 했지만 또다른 자신은 총을 쏘고 도망쳐버린다. 맥스는 취조실에서 나와 또다른 자신을 쫓는다. 둘은 아파트 복도에서 추격전을 벌인다. 또다른 맥스는 자신은 모함당한거라고 주장한다.
- 박경석(1933) . . . . 5회 일치
[[월남전]]에 있어, 초대 [[주월 한군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의 회고에서도 "장교 이하 모든 장병이 누구하나 우리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다. 국가의 명령으로 갈수 밖에 없었다"[* "나를 지금 억르누고 있는것이 고엽제 문제와 고엽제를 앓고 있는 전우에요. 내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방문도 하고 격려도 하고 그러는데. 그 사람들은 월남에 간 것은 국가의 명령에 의해서 간 것이지, 나나 우리 장병들이 가고 싶어서 월남에 간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국가를 위해서 월남에 갔고, 실지 국가의 경제 발전에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면, 그것이 없어더라도 국가의 명령에 의해서 갔다면 국가가 거기에 대한 보상을 해야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문화방송 1993년 정치드라마 [[제 3공화국]] 22회 월남파병 편에서 인터뷰 전문]을 하는 등 국가의 월남파병 장병들의 고엽제 문제와 국가 차원의 보상 문제가 남아있고, 일말의 강제적 파병의 성격을 띄었지만, 용병이다, 돈을 받고 군대를 보낸것이다,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에 동조한다는 일각의 생각은 매우 잘못되고 편협한 것이다. 분명 [[월남전]]은 우리 스스로 원해서 파병을 결정한 전쟁이 아니었지만, 당시 기성세대가 목숨 걸고 싸워주었기에 그에 상응한 군사원조와 경제적 원조 및 이익을 바탕으로 1970년대 공업화를 이루어 우리 아들, 딸들이 적어도 풍요롭게 사는데 있어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주지없는 사실이다.[* 2000년 일부 진보적인 학자라 자처하는 성공회대 교양학부 [[한홍구]] 교수 등이 월남전 파병 기간 동안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하자 [[채명신]] 장군, [[박경석]] 장군, [[지만원]] 예비역 대령 등 월남전 참전 원로들이 나서서 이에 반박하는 글과 함께 학살 주장에 무게를 잡는 학자들을 상대로 토론을 제안했다. 동년 한겨례 신문에서 이와 관련된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의 신문을 기고하자, [[채명신]] 장군, [[지만원]] 예비역 대령--[[5.18광주 민주화 운동]]을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하여 일어난 내란이며, 5.18 희생자와 시민군들을 광수1, 2로 지칭하며 현재 북한의 고위층과 비슷하다며 개드립을 쳤던 그 지만원 박사가 맞다. 삼만원도 안되시는 그분--이 [[문화방송]] [[100분 토론]]에 나와 이 주장에 반박하며,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등 학자들과 토론을 했다. 이와 동으로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http://book.naver.com/search/search.nhn?query=%ED%95%98%EC%96%80%EC%A0%84%EC%9F%81|[[하얀전쟁]]]]의 원작자 [[안정효]] 작가는 월남전에 참전한 병사로써, 당시 한국군의 학살이 있었다며 자신의 소설에 실화를 밝혔는데, 적과 민간인의 구별과 식별이 어려웠던 현대전 특히 민간인 복장으로 게릴라전이 빈번했던 월남전에서 총기 오발 또는 오폭으로 민간인을 살해했을 가능성은 있다. 이것은 월남전에 대대장으로 참전했던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이나, [[유학성]], [[우종림]], [[전성각]] 장군들의 회고록에도 기술되어 있다. 일단 월남전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관련 논의는 충분한 시간과 자료 수집, 그에 근거한 증언이 더 필요하다. 성급히 주장해서는 안된다.][* 다만, 이러한 것들을 이유로 베트남 전쟁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도 금물이다. 원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나라가 타국의 전쟁에 정당한 명분 없이 개입한 것은 사실이며 민간인 학살 역시 아예 없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기 때문. 또한 [[라이따이한]] 문제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 전쟁은 보다 더 신중한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 세속주의 . . . . 5회 일치
[[정교분리]]를 통하여 [[종교]] 기관과 [[국가]] 정부 기관을 분리, 종교가 대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고, 모든 종교가 국가의 법 앞에서 평등해야 취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세속주의에 기반을 둔 국가를 [[세속국가]]라고 한다.
== 주장 ==
세속주의는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특정 종교의 규범이 국가기관을 통하여 사회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반대한다. 세속주의는 국가기관이 어떤 형태로든 종교 단체와 관련되는 것을 비판한다.
세속주의 사상에서는 특정 종교를 가졌다는 신념의 문제 떄문에 [[차별]]이 이루어지는 것을 반대한다. 이는, 특정 종교의 신자가 특혜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봄과 동시에, 모든 종교의 신자는 물론 [[무신론]] 역시 평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세속주의는 [[무신론]]과 혼동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무신론과는 달리 세속주의는 개인적인 생각 보다는 정치와 사회 구조에 집중된 주장이다. 개인적으로 종교를 믿어도 상관없지만, 국가적으로 특정 종교를 지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아기발도 우투리 관련설 . . . . 5회 일치
[[고려]] 말기에 한반도 남부를 침공하였던 [[왜구]]의 장군 [[아기발도]]가 대표적인 아기장수 설화의 하나인 [[아기장수 우투리]]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전에는 [[인터넷]] 상에서 간간히 주장되던 이야기였으나, 2016년 1월에 이를 다룬 논문이 나온 바 있다.
아기발도 자체는 조선시대 초기에 사대부 계층에서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이는 조선의 개창자인 태조 이성계의 대적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기발도 이야기는 "왜군 장수 아기발도는 강했다. 하지만 장군 이성계가 물리쳤다. 따라서 이성계의 권력에 정당성이 있다."는 줄거리로서, 전형적인 '외부의 위협'(아기발도)에 대항하는 '내부의 영웅'(이성계)을 강조하여 국가의 수호자로서 왕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정치적 바탕이 되었다.
이 주장은, '왜구 장수 아기발도'가 '민중 영웅'으로 여겨지는 '아기장수'의 원형이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므로 매우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어쌔신 크리드 III/임무일람 . . . . 5회 일치
코너는 그 세명에게서 도면을 빼앗아 대번포트 농지에 있는 랜스에게 돌려준다. 랜스는 그 도면이 '''접을 수 있는''' 의자의 도면이라며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주장한다.
코너는 여관 앞에서 올리버와 빅 데이브가 영국군 정찰병 한명을 붙잡은걸 본다. 빅 데이브의 말에 따르면 그 정찰병은 탈영병인 빅 데이브를 찾아 여관 근처에 숨어 들었다가 잡힌 것이었다. 그 정찰병은 자신 혼자 왔다고 주장했지만, 또다른 정찰병이 코너에게 들켜서 도망친다.
1776년, 동해안. 아퀼라는 아만다 베일리와 만나 니콜라스 비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낸터킷 인근으로 향한다. 코너가 베일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의문을 품지만 폴크너는 그녀를 목숨을 걸고 믿는다고 한다. 아퀼라에 탑승한 베일리는 현재는 애국자들 소속 함선 랜돌프의 함장으로, 애국자들 지역인 낸터킷이 왕당파의 기지라고 주장하며 그곳을 공격하고 있다고 전한다.
선교사 던컨 리틀은 갱단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들도 뭉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코너와 리틀은 갱단과 맞서기 위해 부두로 향한다.
영국군 징집관이 끌려온 사람들을 세워놓고 "정규군에 온걸 환영한다"로 시작하는 환영인사를 하고있다. 클리퍼 윌킨슨은 징집관이 젊은이들을 잡아와 배에 태워보내는 모든 일의 책임자라며 그를 끝장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코너는 윌킨슨에게 지붕 위에서 라이플로 엄호할 것을 요청한다.
- 요시다 세이지 . . . . 5회 일치
요시다 세이지는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시모노세키 지부에서 동원부장으로 일했다고 주장했으며, 1977년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1983년 '나의 전쟁범죄'라는 책을 저술하여, 이 책에서 자신이 군부대를 이끌고 [[제주도]]의 마을 등에서 200여명의 여성을 강제로 징병하여 위안부로 삼았다고 진술했다. 또한 1982년 9월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증언하였다. 1900년대 아시히 신문은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바탕으로 다수의 기사를 작성했고, 이는 일본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널리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소위 '요시다 증언'에는 의혹도 뒤따르게 되었다.
전시중 조선반도 동원을 연구한 토노무라 마사루 도쿄대부교수는, 요시다가 소속되었다고 주장한 노무보국회는 [[후생성]]과 [[내무성]]의 지시로 만들어진 명령으로서, 지휘계통을 생각해보면 군이 동원명령을 내리는 것도, 그 직원이 직접 조선에 가는 것도 어렵다고 주장했다.
2014년 이래 일본 우익들은 요시다 증언이 허위로 드러난 것을 이용하여 '위안부 강제연행'은 허구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고노 담화의 폐기 등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저지른 위안부 강제연행 날조에 대해, 요시다 가문의 장남으로서, 일본 국민 여러분께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가능하다면, 전세계에 있는 소녀상을 크레인으로 철거해버리고 싶습니다.(중략) 나 자신도 아버지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또한 "아버지는 한 번도 제주도에 간 적이 없다. 이는 아버지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다", "아버지는 제주도 지도를 보면서, '나의 전쟁범죄' 원고를 썼다"고 주장했다.
- 이철우(1955) . . . . 5회 일치
[[2016년]] [[11월 25일]] [[새누리당]] 의원총회 비공개회의에서 개헌을 주장하다가 "(개헌이 안 되면) 이러다 세월호 학생들처럼 다 빠져 죽을 것"이라고 발언했다고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그를 향한 여론이 --위의 사건과 맞물려서-- 더욱 나빠졌다. [[http://news.joins.com/article/20937723|중앙일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52&aid=0000938082|YTN]]
[[2018년]] [[5월]] 경북도지사 후보 정책 토론회에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33098|독도의 날이 2월 22일이냐는 질문에 맞다고 답했다.]] 이날은 일본에서 주장하는 다케시마의 날이고 독도의 날은 10월 25일이다. 다만 이때 질문에는 민주당 예비 후보를 제외하고 전부 틀렸다고 한다.
[[2018년]] [[6월 28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story_kr_5b3617afe4b08c3a8f6976f8|"‘결혼을 하지 않으면 죄를 짓는다’는 생각을 갖게 하자"]]라는 범국민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네티즌의 반응은 "어쩌라고?","(미혼인)내가 죄인이야?"+"부모나 영감들에게 작은 죄는 지어도, 아이들에게 가난의 되물림이라는 더 큰 죄는 짓지는 않겠다"라는 반응. 추가로 [[장세용]] [[구미시]] 시장 당선인이 선언한 박정희 기념사업 예산 재조정 검토를 도지사로써 막겠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넌씨눈]] 정치인~~
2018년 8월 6일 청탁과 관련하여 의혹이 제기되었다. 당사자는 민원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좀더 지켜보아야 될 것 같다. [[https://m.news.naver.com/read.nhn?oid=052&aid=0001178176&sid1=100&backUrl=%2Fhome.nhn&light=off|#]]
- 전태일 . . . . 5회 일치
'''전태일'''(全泰壹, [[1948년]] [[9월 28일]] ~ [[1970년]] [[11월 13일]])은 [[대한민국]]의 봉제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 [[인권]] 운동가이다. [[1960년대]] [[평화시장 (서울)|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1968년]]에 우연히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인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ref>[[위기철 (작가)|위기철]]이 쓴 전태일 위인전(산하)에 의하면, [[노동운동]]을 했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읽게 되었다고 한다.</ref> 그 뒤 해설서를 구입해 그 내용을 공부하면서 법에 규정되어 있는 최소한의 근로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의로운 분노를 느끼고,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ref>바보회라는 이름은 전태일의 노동자로서의 반성이 담긴 이름이다.노동자도 인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투쟁을 하기보다는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노동환경에 순응한 바보라는 뜻이 담긴 것이다.</ref> 를 창립하여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과 현재 근로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기 시작하고 설문을 통해 현재의 근로실태를 조사하였다.
기본적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고발한 그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켜, [[11월 16일]] [[서울대학교|서울대]] 법대생 1백여명은 그의 유해를 인수하여 학생장을 거행하겠다고 주장했고, 상대생 4백여명은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였다. [[11월 20일]] 서울대생, 성균관대생, 이화여대생 등과 기타 서울시내 학생운동가들이 모여 서울대 법과대학에서 전태일 추도식을 거행하고 공동으로 시위를 벌였다가 해산되었으며, 고려대, 연세대생들도 집회를 열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李少線) 등 민주화운동 관련자 유가족 8명이 [[12월 31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보상금 지급을 현실화해 줄 것을 요구하며 재심을 청구했다.<ref name="hjaeshims">[http://www4.hankooki.com//nation/200212/h2002123116132714510.htm "민주화운동 보상금 현실화" 전태일씨 유족등 재심청구] 한국일보 2002/12/31</ref> 어머니 이소선은 "태일이가 보상금으로 930만원으로 받는데 비해 [[1991년]] 분신 자살한 [[윤용하]]씨는 2억 3천만원을 받는다"며 "이는 태일이의 보상금을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지 않고 당시 임금만을 단순 반영한 [[호프만식 계산법]]으로 산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ref name="hjaeshims"/> 재심청구를 주선한 전국민주민족유가족협의회(유가협)도 보상금심의위원회가 당시 전문 기술자였던 전씨를 [[단순일용직 근로자]]로 분류해 [[보상금]]을 지급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ref name="hjaeshims"/>
- 창작:치킨교 . . . . 5회 일치
모두 근본이 되는 닭의 튀긴 형상을 숭배하고 먹는 것을 종교활동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신앙구조를 갖고 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각종 양념을 통한 이념화가 진행되면서 치킨의 "특정형태"를 주로 신앙생활의 근본으로 삼는 종파로 분열되게 된다. 이들은 서로가 똑같이 "치킨"을 숭배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하고 있으나, 어떤 형태의 치느님이 신앙적으로 우월한지 끝없이 논쟁을 일삼으며 오늘도 주문하기 전에 서로를 비방하며 "이걸 주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싸운다. 이는 마치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가 똑같은 신을 섬기면서도 싸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하나의 종교전쟁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소스라 불리는, 찍먹에 불과했던 것을 넘어 아예 스스로를 치킨교를 대표할 수 있는 총대주교라 선포하며 하나의 종파로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초기의 이들은 치킨의 가장 우월한 형태는 양념을 두른 치느님이라 강하게 주장하는 한편, 이 강한 호전성을 바탕으로 이교도와의 외식전쟁에서 어느 정도 치킨교도들을 끌어모으는 데 아주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던 중에 이름 없는 선지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조류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전능하신 치느님은 그 몸을 나누시어 한 몸에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을 실현하사 분쟁을 멈추셨다"는 주장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가르침은 "양념 치느님을 영접한 혀로 후라이드 치느님의 미묘한 은사를 접할 수 있을리 없다"는 반박이 부딪혔다. 쓰러져가는 반반파를 구제한 것이 성자 무마니였다. 무마니는 치킨무의 묵묵한 헌신을 가르치며 "양념 치느님을 영접했으면 치킨무로 혀를 씻고 후라이드 치느님을 영접하라"는 신묘한 가르침을 창시하였다.
후라이드든 양념이든 상관없이 뼈만 없으면 된다는 이들의 주장은 매우 급진적이었지만 후라이드교와 양념교 양측의 교도들이 일부 여기에 합세하게 되었고, 그 수가 적지 않자 후라이드 교황과 양념 총대주교는 회합을 갖고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이단으로 규정된 사유는,
1. 치느님은 스스로 양식이 되시기 위해 처음으로 식탁위에 오르사, 그 형태는 뼈가 있었다는 점을 보면 순살교도들의 주장과는 달리 결코 순수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
- 최준석 . . . . 5회 일치
||<#ffffff><tablewidth=100%><-5><:> '''{{{#000000 최준석의 수상 및 역임 주장 경력 }}}''' ||
||<-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000000><:> [[롯데 자이언츠|[[파일:external/oi63.tinypic.com/15n4uvk.png|width=80]]]] '''{{{#ffffff 롯데 자이언츠 역대 주장}}}''' ||
* 2014 시즌이 끝난 뒤 주장으로 임명되어 됒캡이라는 별명이 수여됐다.
* 《[[2015년|2015]] 타이어뱅크 [[KBO 리그]] 미디어데이&팬페스트('15. 3. 23.)》행사에서 [[롯데 자이언츠]]의 [[주장#s-1|주장]] 자격으로 참석하여 [[배지현|사회자]]의 "[[홈런]] 세리머니[* 각 루를 차례로 돌고난 뒤 홈 베이스를 밟을 때 하늘을 향하여 두 번 손짓.]의 의미가 혹시 경기 끝나고 [[족발]] 2인분?"이라는 질문에...[*스포일러 "[[중학교|중]]1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이 [[홈런]]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바친다는 의미입니다."라고 대답하여 빵터졌던 장내를 일시에 숙연하게 하였다.] [[https://youtu.be/11ez9dbOz94|백문이 불여일견(유튜브 링크)]] ...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이 세리머니는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407001&redirect=false|홍성흔과의 합작품.]] 원래는 홈런친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외부에 드러냄으로서 동료의 사기를 높이고 상대에게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고... 이후 세리머니 논란을 의식했는지 대외적으로는 추모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발표하였다. 2016년부터는 세리머니를 [[http://mlbpark.donga.com/mlbpark/b.php?&b=kbotown2&id=2203353|안 하기로 결정했다.]]
- 하이큐!!/등장인물 . . . . 5회 일치
* [[우시지마 와카토시]] (WS) 주장
* 코마키 유즈루 (S) -주장
* 테루시마 유지 (WS) -주장
* 나카시마 타케루 (WS) -주장
예정표를 건내주러 사와무라를 찾아왔을 때 첫 등장. 인터하이 여자 배구 대회에서 1회전 탈락했다. 남자 배구부의 주장 사와무라와 자주 대화한다. 은근히 사와무라를 신경쓰여하는 모습이 있었는데, 150화에서 제대로 플래그를 꽂았다. 시라토리자와와의 결승전을 앞둔 다이치에게 찾아가 결승 힘내라며 잔뜩 빨개진 얼굴로 오마모리(부적)을 전해주었다.
- 2016 K리그 다득점 우선적용 논란 . . . . 4회 일치
한국프로축구연맹의 발표에 따르면 "공격축구"가 관중을 끌어모은다는 판단 하에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422&aid=0000168424|"타 리그와 비교해도 골 수가 적으니 관중이 잘 안 모이고 흥행이 되지 않는다"]며 이 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웃긴 이야기는 여기에서 예시로 든 분데스리가와 J리그를 보면 골 수와 관중 사이에는 의미있는 데이터가 성립하지 않는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주장대로, 공격축구를 통해 골이 많이 터질수록 흥행이 이루어진다면 골이 많이 나온 시즌은 관중이 많아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분데스리가의 10-11시즌부터 14-15시즌까지 과거 5시즌동안의 평균 골 수와 골당 관중 수의 변화추이를 확인하면 위의 링크한 기사와는 달리 연맹의 주장은 말도 안된다는 걸 알 수 있다. 13-14시즌을 제외하면 '''골 수가 줄어들었는데 전년보다 관중이 늘어나고, 골이 늘었는데 관중이 직전년도보다 줄어드는''' 상황이며, 이 13시즌조차도 증감폭에 의미를 두기 어렵다. 14-15시즌은 골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는데 평균관중은 수십명 수준의 변화폭만 보여 여기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힘든 상황.[* 그마저도 그래프를 그려보면 반대방향을 그린다.] J리그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아서 2012시즌부터 2015시즌까지는 골이 얼마가 되었든지간에 평균관중은 17000명에서 500여명 정도의 변화밖에 없고, 오히려 2011시즌에는 경기당 2.8골이 넘었지만 평균관중은 15000명 수준이었던 것이 2012시즌에 2.8골 미만으로 줄어들었음에도 17000명까지 평균관중이 증가한 것은 연맹의 주장이 뭘 어떻게 봐도 틀렸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K리그도 분데스리가와 마찬가지로 2012시즌부터 2015시즌까지 오히려 '''골 수는 줄었는데 관중이 늘고, 골 수가 늘었는데 관중이 줄어드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연맹은 그 어떤 명확한 해답을 내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근거라고 내 놓은 분데스리가와 J리그 모두 연맹의 주장을 뒷받침할 사례를 제시할 수 없다. 한마디로 2016년 한국프로축구연맹 활동중에 최대의 뻘짓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
- 김석형 (역사학자) . . . . 4회 일치
'''김석형'''(金錫亨 [[1915년]] ~ [[1996년]] [[11월 26일]])은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태어나 [[1946년]] 월북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이다. [[1963년]]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에 맞서 [[삼한]]의 주민들이 일본에 이주하여 분국을 세웠다는 학설을 주장한 역사학자이다.
김석형은 1963년 칠지도의 명문을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고 고대 삼국이 일본(당시 왜)에 식민지 국가인 분국을 세웠다는 이른바 [[삼한 삼국 분국설]]을 주장했다.
김석형은 1963년에 발표한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과 이 논문을 보완하여 1966년에 발표한 《초기조일관계사》라는 저서에서 칠지도가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게 바쳤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부정하고 오히려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게 하사했다고 주장했다. 김석형의 삼국분국설은 현재 많은 부분이 수정되거나 파기되었지만, 백제 왕이 칠지도를 하사한 것이라는 학설은 남북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당시 유물의 상감 기법 등으로 제작 연대가 6세기로 추정되며 가지가 실제로는 7개가 아닌 6개라는 등 칠지도를 《[[일본서기]]》의 내용에 맞추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 김윤아(1974) . . . . 4회 일치
자우림, 김윤아의 음악에 대한 개인의 견해야 다양한 것이지만 작곡가의 곡을 받아서 연주하는 가수가 아닌 '''자신이 직접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싱어송라이터에게 '자의식 과잉' 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가 만드는 노래' 에 '자의식을 빼야' 한다는 건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 주장이다. 차라리 "자의식에 진정성이 없다" 라든가 "자의식을 지나치게 패셔너블하게 다룬다" 라는 식의 비판이 그나마 나을 수 있으나 이것들 역시 죄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허세 같다, 그냥 싫다" 는 비판은 유효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진정성이 없는지 판단할 기준도 없고 패셔너블한 것도 죄는 아니다. 스타일리쉬한 영화 감독은 칭찬받는데 김윤아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김윤아가 성형했다는 터무니없는 헛소리는 도대체 어디서 유래했을까? 성형을 했다면 도대체 언제, 그리고 어딜 했단 말인가? 누군가 내가 잠든 사이에 나를 수술대에 올려놓고 쌍꺼풀을 만들고 코를 세우고 눈을 찢고 턱을 깎았다는 말인가? 그리고 나서 나를 다시 내 침대에 돌려놓았다는 말인가? 김윤아 성형설을 침 튀기며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통 어디서 이상하게 나온 사진 몇 장을 주워다 늘어놓고 증거랍시고 제시하는데, 이상하게 나온 옛날 사진이라면 내 사진보다 당신 사진에 훨씬 더 많지 않을까? 나는 애초에 이런 얼굴로 태어났다. 아무리 당신이 김윤아가 성형했다고 주장하고 싶다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 김윤아 <헛소리는 집어 치워라> 中
자우림이 '미쓰코리아', '실리콘벨리'를 부를 당시, "김윤아는 성형했으면서 외모지상주의와 성형 하는 X들 비판하는 노래를 부른다"며 위선적이고 가식적이라는 김윤아 안티들의 개소리가 많았는데 사실 무근이다. 그들은 김윤아의 졸업 사진과 90년대 후반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과거 사진을 들먹이며 "쌍꺼풀이랑 코 성형했다"라든지 "쌍꺼풀 수술하고 붓기 감추려고 선글라스 끼고 방송하는 걸 봤다.", "이마에 뭐 넣은 것 같다", 심지어는 "김윤아가 시달렸던 안면신경마비의 원인은 성형 부작용이다~~라는 말 그대로 헛소리~~."등의 개소리를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 실어 나르며 김윤아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행위를 그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 하고 있다. 그들이 김윤아 성형설을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과거 사진과 현재 사진이 차이가 난다는 것인데, 과거 사진과 현재 사진이 차이가 나는 것은 90년대 후반 당시의 화장법이나 헤어스타일이 지금의 화장법이나 헤어스타일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헤이헤이헤이 이전에도 홍대 앞에서 미모는 알려져 있었고, 그 때나 지금이나 ~~무려 20년 동안~~얼굴이 똑같다. 눈코입은 예쁘지만 동양인답게 평면적인 편이라 카메라 잘 안 받는 얼굴이라, 직접 보면 화보나 영상에서보다 실물이 더 예쁘다.
- 니쿠쟈가 . . . . 4회 일치
쿠레시는 도고 헤이이치로가 마이즈루에 부임하기 10년 전에 이미 쿠레 진수부(呉鎮守府)에 참모장으로서 부임했다는 점을 근거로, 니쿠쟈가는 쿠레가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니쿠쟈가 자체가 특별히 발명할 필요가 없는 요리라는 주장도 있다. 고기를 간장, 설탕 양념으로 끓이는 스키야키 류의 요리는 이미 메이지 시대에 널리 퍼졌고, 감자 역시 에도 시대에 많이 보급된 작물이었기 때문에 감자와 고기를 이용한 요리가 자연발생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여담으로 니쿠자가라는 명칭 자체도 굳어진 것은 1965년대 말로서, 그 전 까지는 "감자와 쇠고기 조림(じゃがいもと牛肉の煮物)", "쇠고기와 감자 단조림(牛肉とじゃがいもの甘煮)"등으로 명칭이 통일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 둠 패트롤 . . . . 4회 일치
* 둠 패트롤의 각본가 아널드 드레이크는 [[스탠 리]]의 [[X-MEN]]은 고의적으로 둠 패트롤을 도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다음과 같은 컨셉이 둠 패트롤의 도용이라는 것이다. 둠 패트롤은 1963년 6월에 시작했고, 엑스맨은 그해 9월에 시작했다.
나일스 콜더. 현 매드 사이언티스트. 볼툼의 반지의 새 숙주가 된 제시카 크루즈의 앞에 둠 패트롤을 이끌고 등장했다. 루터가 말하길 새로운 파워 링이 된 제시카 크루즈 또한 실험체 리스트에 올리기 위해 확보대상에 속하는 거라고 주장하지만, 치프는 루터의 모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팀원들에게 휘말린 민간인들 냅두고, 볼툼의 반지에 집중하라 하면서 이를 따르지 않으면 자기가 준 생명을 다시 거둬갈거라 위협하고, 제시카가 반지에 지배 당하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뇌에 손을 대는거라 주장하며 이 막장 선택지를 실행하려 한 막장 인물. 이를 보아 루터의 언급의 진위 여부는 둘째 치고, 현재의 그가 막장인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 하다. 한편 폭주하는 제시카를 배트맨이 저지한다.
자신은 저스티스 리그와 달리 사회에서 대우받지 못하는 메타휴먼을 위한다고 루터에게 강변한다. 다른 멤버들은 치프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일부러 다른 멤버들에게 오직 자신만이 다른 멤버들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존재라고 반복해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을 위협하기도 하는 등 정말일지는 의문스럽게 하는 인물. 일단 치프에 대한 묘사는 치프 스스로의 말과 루터의 말이 엇갈리고, 리붓 이후의 치프의 과거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저스티스 리그와 대면한 에피소드에서 보인 행동이나 내뱉는 말들을 보면 최소한 지금의 그는 확실히 영 아닌 인성으로 보인다. 여기까지만 보면 둠 패트롤 멤버 중에서 가장 괴물같은, 혹은 진짜 괴물인 인간.
- 마니교 . . . . 4회 일치
[[교조]] 마니 하이이(216~277)가 활동했던 시기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여러 종교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유대교]], [[기독교]] 계통의 종파, [[이탈리아]]에서 나온 [[피타고라스 교단]][* [[윤회전생]]을 주장했다.], 소아시아의 마르키온 교회, 이집트의 발렌티누스 교단, [[이란]]계통의 조로아스터교나 미트라 숭배 등이 있었다.
기독교 계에서는 마니교에 경계의식을 품고 맹렬하게 마니교를 공격했다. 특히 340년 경 주교 헤게모니우스는 아쿠타 아르케라이(아르케라이 행전)을 저술하여 마니교를 공격하였다. 이 책에 따르면 마니교는 다음과 같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니는 마술서를 도작하여 60세 까지 제자를 기른다. 페르시아 왕의 아들이 병이 들자 마니는 병을 치료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체포되고, 옥중에서 기독교 서적을 읽으며 자신의 가르침이 기독교와 닮았다고 주장하며 성령을 사칭하여 사악한 교설을 기독교로 치장하였다. 마니는 옥졸을 매수하여 탈옥하고, 로마 제국 국경 지댂지 왔으나 주교 아르케라이와의 공개 토론을 하다가 자비와 자애로 가득찬 기독교의 올바른 가르침에 불명예스러운 패배를 당하고, 페르시아 왕에게 다시 체포되어 불명예스럽게 처형당하게 된다.
돈황에서 발굴된 『불설 아미타경강경문(佛説阿弥陀経講経文)』에 따르면, 서역에서 96종의 외도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 '마니(摩尼)'를 꼽는다. 그리고 출가를 하여 생사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며 속임수라고 비판하고, 석가모니의 제자만이 사람들에게 공양을 받기에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 박옥수 . . . . 4회 일치
예수교장로회연합회라는 단체에서 발표한 [[정통과 이단]]이라는 책자에서는 이들이 이단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책을 만든 사람이 친이단인사로 유명한 사람이고, 주류 개신교단 입장에서는 정상적인 비평으로 볼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어서[*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8592|참조]].] 결국 교단 측에서 이단 옹호책자로 완전히 털리고 책 자체가 완전 폐기되었고 예장연 측에서도 이 책의 내용을 공식 부정하고 있다.
박옥수는 지난 45년간 딕욕 선교사를 통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딕욕 선교사는 “박씨에게 안수를 준 적 없으며 목사 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이라 답했다. 그의 개인 홈페이지에는‘Shield of Faith Mission’ 선교학교에 입학(1962~1964년) - 딕욕, 말론 베이커 등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신학교 졸업, 딕욕(Dick York) 선교사로부터 목사 안수(1971년)라고 게시되어 있다. 하지만 딕욕 측이 운영하는 ‘믿음의 형제들’ 홈페이지에는 박씨에게 “안수를 준 적이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자신(박옥수)이 자신에게 안수를 준 것”이라 덧붙였다.
>제가 박옥수에게 ‘목사’안수를 줬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웹사이트에도 게시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가 왜 그렇게 주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목사’라는 직위는 제가 반대의 권면을 했음에도 그 자신이 붙인 것입니다.''' 그의 직위에 대한 신임장은 없으며 그러니까 '''그 자신이 자신에게 안수를 준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교회와 교회의 체계는 그와는 매우 다릅니다. 그리고 목사에 대한 관점은 그와 매우 다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 질문에 대한 주제에서 벗어나므로 그 주제는 나중에 언제 더 얘기하기로 하겠습니다.
딕 욕은 2010년 9월 30일 사당 청소년 문화의 집 강당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교회에는 성직제도가 없어야 된다고 그들(故[[유병언]], [[이요한]], [[박옥수]])에게도 가르쳤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6월 2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진○○(박씨와 같은 혐의를 받고 있다) 측 변호사는 박씨가 딕욕 선교사에게 안수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박씨는 4월 20일 수백억 원의 주식을 사기로 판매했다는 혐의로 전주지방법원에서 첫 공판을 했다. 하지만 재판에서 현재 항소심에서 무죄로 판결되었다.) 진○○ 측 변호사는 미국의 딕욕 선교사에게 이메일을 보내 사실 관계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딕욕 선교사가 박씨에게 목사 안수를 준 적이 없다고 답해왔다며 박씨는 가짜 목사라고 밝혔다. [[http://hdjongkyo.co.kr/news/view.html?section=22&category=1007&no=14622|기사 전문]].
- 보통국가 . . . . 4회 일치
[[일본우익 사관]]에서 말하는 '보통국가'는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이다. 이들의 역사관에서 현재 일본은 소위 '평화헌법'으로 인하여 전쟁할 권리가 박탈당한 '보통이 아닌 국가'이며, '보통국가'와는 달리 '전쟁을 할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다. 따라서 일본을 '보통국가'로 만들어서 전쟁을 할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 평화헌법 폐지론을 펼치는 우익사관의 주장이다.
몇몇 일본 [[밀덕]]들은 보통국가화를 통하여 일본을 [[미국]], [[영국]], [[프랑스]] 등과 동등한 '세계의 경찰 국가'로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의 '[[전쟁]]에 대한 [[상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걸 무시하고, 1차대전 이전 기준으로 마음대로 다른 나라에 '침략'(그네들 말로는 '출병')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하는 것이 일본 우익들의 주장인 것이다. 양차대전을 거치면서 '''세상이 바뀌었다'''는걸 의도적으로 국민들에게 감추고, 1차대전 이전의 질서가 올바르다고 주장하고 있는 어이없는 모습이다.
- 세미스텔스 . . . . 4회 일치
세미스텔스에 비판적인 의견을 가진 밀덕들은, 결국 실전 상황에서는 다양한 무장을 하면서 RCS가 늘어나고 결국 스텔스기보다는 비스텔스기와 별 차이 없는 RCS 밖에 나오지 않게 되므로, 세미스텔스는 별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해서 세미스텔스 옹호론자들은 그래도 큰 돈 들여서 여러 회사들이 만든 것이니까, 쓸모 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이런 주장은 매몰비용에 집착하는 도박사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본격적인 스텔스만은 못해도 세미스텔스 역시 상당한 전술적 효과가 있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 원피스/879화 . . . . 4회 일치
미러월드에서 [[샬롯 카타쿠리]]와 일기토 중.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다. 카타쿠리가 모치모치 열매 능력이 고무고무 열매의 상위호환이라 주장하며 루피가 쓰는 기술을 배껴서 더 강력하게 어레인지해서 사용하는데 전혀 대응을 못하는 중. 카타쿠리는 미래예지 가능한 견문색 패기까지 갖췄기에 전혀 사각이 없고 유효타 한 번 맞추질 못한다. "레드 호크 개틀링"이나 "호크 스탬프" 같은 기술이 전혀 통하지 않다 "엘리펀트 건"으로 공격하는데 이마저도 카타쿠리가 훨씬 크고 아름다운 스케일의 엘리펀트 건으로 부딪혀온다. 힘과 스피드, 기술에서 조차 완전히 밀리면서 그대로 처맞고 천장에 처박힌다.
[[몽키 D. 루피]]를 완전히 가지고 노는 중. 부하들이 일기토를 구경하는 중인데 "삼장성 최강은 카타쿠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루피가 손도 발도 못 써보고 발리는 중. 루피가 사용하는 기술을 그대로 따라하거나 더 강하게 어레인지해서 되돌려주고 있다. 자기입으로 "고무가 되는게 내가 안 될릭 없다"고 주장 중. 루피가 레드호크 개틀링을 쓰면 자신은 팔을 늘려서 천수관음같은 모습으로 막아내고 그 많은 팔로 러쉬를 가해 되갚아주는 식으로 싸우고 있다. 견문색 패기로 루피의 움직임을 완전히 읽고 있어서 루피가 "체"로 모습을 감춰도 전혀 소용이 없다. 결국 루피의 필살기격인 엘리펀트 건까지 더 크고 아름답게 배껴서 밟아버린다.
모치모치 열매가 고무고무 열매에 상하드립이 가능한지 여부는 논란 중. 일단 자연계라고 나왔기 때문에 방어적인 면에선 고무고무를 월등히 능가하는게 맞다. 하지만 고무처럼 탄력을 이용한 공격이나 기어 4 바운스 맨 같은 기술을 따라할 수 있는지는 의문. 애초에 모치모치 열매는 떡처럼 늘어지고 달라붙는 능력을 컨셉으로 한 듯 한데 이제와서 고무능력과 동류라고 주장하는게 무리수라는 주장도 있다.
- 이기택 . . . . 4회 일치
민주당 대표가 된 후 [[국가보안법]] 폐지, 6공 비리 청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대한민국-미국-북한의 3자 회담 등을 주장하며, 90여 명의 민주당 의원들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치력의 부족으로 당시 대통령인 김영삼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만 보였으며, 당내에서는 [[권노갑]] 등 [[동교동계]]와 대립을 거듭하는 등 정국을 전혀 주도하지 못했다. 특히 1994년 한반도에 전쟁위기가 몰아닥치자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대한민국-미국-북한의 3자 회담을 주장했으나 북한 쪽에서 무시하면서, 체면만 구기고 말았다.[* 이때 김대중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대북특사 파견을 주장했는데, 이게 실제로 성사되면서 주가를 높혔다.] 그 후 1995년 6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동교동계와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천한 [[장경우]] 경기도지사 후보가 민자당 [[이인제]] 후보에게 패배하면서 당내 리더십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동교동계는-- 사실상 김대중 --이종찬 전 의원을 주장했고, 이 공천과정에서 동교동계와 이기택 양자간에 감정적인 골이 생겼다. 게다가 김대중이 전격적으로 지원유세에 나서자, 모든 언론과 유권자들은 김대중만 주시했고 이기택은 순식간에 존재감을 상실했다. 거기에 김대중은 다른 후보는 전부 지원유세를 다니면서도 장경우 후보 유세장에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 이영훈 (경제학자) . . . . 4회 일치
한신대학교 등에 강사로 출강했었고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 및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사, 경제사학회 연구이사를 역임하였으며,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후 2017년 2월 28일 정년 퇴임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2/28/0200000000AKR20170228081000004.HTML?input=1195m|제목=서울대 교수정년식…'식민지근대화론' 이영훈 등 28명 퇴임|성=이재영|날짜=2017-02-28|뉴스=연합뉴스|언어=ko-KR|확인날짜=2017-03-26}}</ref>. 현재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다.<ref>{{웹 인용|url=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mcate=M1002&nNewsNumb=20170324115&nidx=24116|제목=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 “자본주의 맹아론은 대한민국 부정으로 이어지는 주장”|언어=ko|확인날짜=2017-04-13}}</ref>
그의 저서 《대한민국 이야기》와 여러 논문에서 이영훈은 무력이 아니라 법과 무역을 통해 전개된 식민지적 수탈을 논하였다. 대한민국 이야기에서 이영훈은 정신대와 종군위안부의 차이점을 명확히 밝히고, 위안부는 강제 징집된 것은 아니나 배후에 일본군과 조선총독부가 있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2004년]] [[9월 2일]] [[문화방송]]의 100분 토론에 출연하여 "정신대가 조선총독부의 강제동원이 아니라 한국인의 자발적으로 참여로 이뤄진 상업적 공창"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함으로써 일제 식민 통치를 찬양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욕했다는 논란에 휘말렸다. 이 교수는 "정신대 관련 일본 자료를 보면 범죄행위는 권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참여하는 많은 민간인들이 있었다"며 "한국 여성들을 관리한 것은 한국업소 주인들이고 그 명단이 있다"고 주장하여 정신대 문제를 성매매와 동일시 하였다.<ref>{{뉴스 인용
}}</ref> 그러나 이영훈은 이후 자신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으나 결과적으로 할머니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었다며 사과를 한 바 있다.
- 임수정(탤런트) . . . . 4회 일치
* 나이 : 그녀의 프로필은 1980년 7월 11일 생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그녀가 본격적으로 알려질때부터 사실은 그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친한것으로 알려진 공효진이 그녀를 언니라고 부른다. 공효진은 프로필상 1980년 4월 4일생으로 되어있어 생일도 더 빠르고 방송이나 영화데뷔도 공효진이 더 빠른데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는것이다. 2008년 10월 13일 놀러와 215회에서 공효진이 그녀를 지칭할때 언니라고 불렀다. [[http://ent.jknews.co.kr/article/news/20081014/0087269.htm|#]] 또한 소속사 홈페이지가 새 개장을 했을때 그녀의 영문 프로필에 출생년이 1979년으로 나왔다가 소속사가 다시 수정했다. 그런데 2011년 10월, 소속사를 옮기면서 아무런 언급도 없이 기습적으로 포털사이트에 있는 프로필에 '''1979년생으로 출생년도를 바꿨다.''' 아마 1980년은 전 소속사에서 고집하던 나이인듯.
* 학력위조? : 처음에 그녀는 수원대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인터넷에 알려졌으나, 이는 학교4에 나온 다른 출연진의 프로필이 섞여생긴 해프닝이다. 2007년 학력위조 파문으로 연예인들의 학력위조 사례도 알려졌는데 한 언론매체는 그녀가 호서전문대를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프로필상 고졸로 한것은 학력위조라고 주장했다. 종종 그녀가 호서전문대에 다녔다는 주장이 나오긴 했었다. 2000년 기사엔 호서[[전산원]](당시 이름) 1학년 휴학 중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직업전문학교는 교육기관일뿐 대학교와 달리 취급한다. [[서울호서직업전문학교]]는 1998년 학점은행제 시범운영 기관지정이 되었다. 현재는 직업전문학교를 졸업할때 80학점 이상 이수하면 전문학사 학위가 주어져서 전문대 졸업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만 졸업했을때의 경우다. 재학 중에는 어떤 학력도 인정이 되자 않는다. 또한 졸업을 한게 아니기 때문에 학력에 기재할 필요가 없었고, 직업전문학교는 '중퇴'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 예를 들면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유치원이 아닌 미술학원을 다녀도 유치원을 다닌것과 같이 취급 받았다. 유치원과 같은 교육 어쩌면 미술에 대해선 더 자세히 교육을 받았다. 또한 똑같이 졸업식도 하고 유치원과 다를바 없다. 하지만 유치원은 졸업이라고 말하고 기재할수 있지만 미술학원 졸업이라고 쓰지 않는, 그와 다를바 없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 학교는 대학이 아닌 교육기관이고 만약 그녀가 전문대 중퇴라고 했으면 그것이야말로 학력위조다. 서울호서직업전문학교는 2년제 전문대학 과정을 중심으로 4년제 학사과정까지 개설했으며 일정 학점 이상 이수하면 학위를 인정해준다. 호서전산원에 대한 언급이 처음부터 속이고 없었던 것도 아니며 처음엔 호서전산원 1학년 휴학 중이라고 밝혔으나 학력에 표기하기엔 당시 위와 같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어 고졸로 표기된게 아닌가 싶다. 물론 현재 서울호서직업전문학교는 졸업했을시 학점은행제를 통해 학사 학위가 주어져서 전문대 졸업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결국 학력위조인지 아닌지는 판단에 맡긴다.
2007년 9월 당시 커피프린스 1호점으로 인기절정이었던 공유와 [[제주도]] 여행을 갔다는 특종이 실린다. 당시 [[수학여행]] 중이던 많은 고등생들이 사진을 찍었다. 누리꾼들은 학교 4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다며 이들의 연애를 주장했지만..... 사실 단 둘이서 간것이 아니라 [[이천희]], [[공효진]], [[여욱환]] 등의 이들과 절친한 이들과 함께 여행을 간것이었다. 2008년 3월 7일 방송된 [[놀러와]]에선 당시 같이 여행을 간 이천희가 출연해 내막을 밝힌바 있다. 당시 수학여행을 간 고등학생들이 공항에서 임수정과 공유를 알아보고 몰려들어 일행들이 베이비룸으로 피했으나 일행과 떨어진 이천희가 뒤늦게 합류해 문을 열다가 이들이 플래시 세례를 받아 오해를 샀다는 것. 특히 여행 중 이천희는 임수정과 쇼핑도 했는데 아무도 관심을 안가졌다고(...)[[http://www.tvreport.co.kr/ArticleShellView.asp?art_id=200803080004|#]]
- 진격의 거인/91화 . . . . 4회 일치
갤리어드와 피크, 두 "거인"의 힘이라면 적을 섬멸할 수 있다고 콜트는 주장한다. 하지만 마가트는 한 마디로 각하한다. 카드를 잘못 쓰면 그대로 패배한다는 이유였다.
* 소위 '편의병'은 현실의 국제법에서도 금지된 것이지만, 일본 우익들은 중국에서 난징 학살 등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 변명으로 사용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일본군은 '편의병 사냥'을 명목으로 도주한 중국군/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으며, 현재 일본 우익들은 "편의병은 죽여도 된다."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군은 단순히 군복을 벗고 도주했을 뿐. 조직적으로 군복을 벗고 위장 공격을 했다는 근거는 없다.[* 애초에 이러한 '특수작전'을 실행하려면 상당한 사전 준비와 그에 걸맞게 훈련된 특수부대가 필요하다. 군복을 벗어 군사 지휘체계에서 벗어난 상태에서도 자연스럽게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활동하면서 동시에 전투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편의병 사냥'은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군복을 벗고 도주한 병사를 색출해서 무조건적으로 죽여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 제네바 전투 조약상 이러한 행위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하나, 이는 즉결처분을 정당화하지 않는다.]이다. 또한 이때 쓰인 색출기준이란 눈빛이 날카로운 사람, 자세가 좋은 사람, 구두를 신어 발목이 까진 사람 등으로 자의적이고 조잡해서 청년, 장년을 무차별로 죽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 태종무열왕 . . . . 4회 일치
태종 무열왕에 대한 당대 신라인들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 이는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를 올린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는 신라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였다.<ref group="주">그러나 고구려의 [[태조왕]]의 경우에는 묘호로 봐야 되는가, 시호로 봐야 되는가에 대한 이견이 있다. 그 밖에 태조의 묘호를 받은 [[태조 성한왕]]이나, 국조의 묘호를 받은 [[박혁거세]]도 존재한다.</ref> 이에 대해 [[당 고종]]<ref group="주">《삼국사기》에는 [[당 중종]]이라 표기됨</ref>이 “당 태종이 위징(魏徵)·이순풍(李淳風) 등을 얻어 천하를 평정하는 대업을 이루었기에 태종이라 하였지만, 너희 신라는 바다 밖에 있는 조그만 나라임에도 태종의 호를 사용하여 천자의 칭호를 참칭하니 그 뜻이 불충하므로” 이를 고칠 것을 요구하자,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은 “(당 태종처럼) 무열왕도 김유신이라는 성신(聖臣)을 얻어서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다”며 완곡하게 거절하는 답서를 보냈다. 이 답서를 받은 고종은 그가 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이르기를 “33천(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내려가 유신이 되었다.”고 한 일이 있어서 이를 기록한 바가 있는데, 이 기록을 찾아 확인해보고서는 놀랍고 두려워서, 태종의 묘호를 허락했다고 한다.<ref name="유사-기이1"/> 훗날 [[조선]](朝鮮)의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고려]](高麗)의 [[왕건|태조]](太祖) 이래 역대 군주들의 묘호를 시호로 대체하고자 하는 [[조선 성종|성종]](成宗)에게 태종 무열왕의 선례를 들며 굳이 기록된 묘호를 뺄 필요는 없음을 주장하였다.<ref>《성종실록》 성종 18년 정미(1487년) 2월 경진(10일)조</ref>
그러나 20세기 초, 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고 식민지배하에 놓이면서, 기존의 한국 역사에 대한 비판과 함께 태종 무열왕은 외세를 끌어들어 민족사적 강역을 축소시켰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을사늑약]]을 비판하여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기고하기도 했던 [[장지연]]은 김춘추가 당병을 이끌어 동족(백제와 고구려)을 친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국 역사는 천여 년을 외국의 사상에 이끌려 다니며 자국의 위풍을 멸하고 타인의 위세가 늘어나게 되었다고 비판하였고 이것이 한국이 하나로 뭉치지 못한 요인의 하나라고 주장하였다.<ref>"新羅武烈王及金庾信이 能討滅麗濟고 統合邦土니 其 功烈이 可謂嵬矣나 驅唐兵而狀吾同族이 豈足謂能事哉아 因此而啓千餘年依賴外國之思想야 滅自國之威風고 增他人之勢力니 嗚乎라 此ㅣ 依賴之癮이 所以爲不能團合之第三病根也오." [[1906년]] 11월 25일자 《대한자강회월보》 제5호, 「團體然後民族可保」</ref>
[[1993년]] [[성균관대학교]]의 김영하 교수는 [[천리장성]]의 예를 들어 축소된 강역으로 [[만주]]의 요동땅을 밟지못하고 고토를 잃고 살다가 [[조선]]에 와서야 겨우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백두산]]만을 찾을 수 있었다고 평가를 내놓으면서 당의 [[한반도]] 경략에 발맞추어 외세와의 공조로 [[백제]]만을 겨우 정복한 [[신라]]는 "통일을 완수할 힘도 의도도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고 '통일신라 시대' 대신에 '신라와 발해' 내지는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적극 주장했다.
[[박노자]]는 부정론에 대한 반론을 펼쳤다. 그 주장은 다음과 같다.
- 한규복 (1881년) . . . . 4회 일치
[[1939년]] [[6월 4일]] [[중추원]] 참의로 재선되었다. [[8월 5일]]에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주최로 전국 순회강연을 할 때, 순회강사가 되어 국민 저축 장려를 목적으로 '백억 저축 생활 쇄신'이라는 주제로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다. [[9월 26일]]에는 각지의 노무자와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만든 [[사회조사위원회]] 위원에 피임되었다.<ref>"勞務者와 細窮民을 來月中에 綜合調査", 동아일보 1939년 09월 26일자 2면, 사회면</ref> 그해 [[9월 30일]] [[경성]]에서 자본금 백만원을 투자하여 [[조선공영회사]](朝鮮工營會社)를 창립하고 대표이사 사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5일]] [[조선중앙임금위원회]] 임시위원으로 선임되면서 사퇴했다. [[12월 22일]] [[세제조사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939년]]부터 그는 [[경성부]], [[충주군]], [[함양군]], [[수원군]], [[용인군]], [[양주군]] 등을 다니며 저축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당시 한규복은 일제 치하에서 관리를 지냈을 뿐 “양심에 비추어 민족정신을 망각한 사실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관비로 유학을 마치고 대한제국 관리로 일하다가 “한일합병과 동시에 다시 왜인에게 아부하여 조선총독정치에 헌신한 유일한 친일분자”로 평가했다.<ref name="neftkin"/> 당시 그를 심문한 이는 위원장 [[이인]] [[변호사]]였다.
《[[친일파 군상]]》에서는 한규복과 [[전라북도]][[도지사]]를 지낸 [[손영목]]에 대하여는 "일본인들에게 무조건 친일 또는 아부자가 아니었다 한다"며 그러한 주장을 인정해 주었다.<ref name="parksgi87"/> 그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라는 의견이 존재하여 그의 처벌에는 반대하는 여론도 나타났다.
그러나 [[민족정경문화연구소]]의 보고서인 《친일파 군상》에서는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라고 인정해 주었다. 《친일파 군상》에 의하면 그를 가리켜 "이러한 기회에 일층 적극 진충보국하면 자기 개인은 물론이요, 민족적으로도 장래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한 자"로 분류하였다.<ref>김학진·정운현 역, 《친일파죄상기》(학민사, 1993), 353페이지</ref> 한규복과 [[전라북도]][[도지사]]를 지낸 [[손영목]]에 대하여는 "일본인들에게 무조건 친일 또는 아부자가 아니었다 한다"며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였다.<ref name="parksgi87"/>
- Europa Universalis 4/공략/유럽 . . . . 3회 일치
초반에 저지대 국가 셋(플랜더스, 홀란드, 브라번트)을 동군연합휘하에 두고 있다. 그리고 느베르를 속국으로 가지고 있으며, 브로타뉴랑 동맹이다. 이것때문에 전통에 외교관계+1이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그나마 시작지점 군주인 선량공 필리프의 능력치가 555로 [* 이게임에서 군주의 최대 능력치는 666이다. 일단 여기에 시작지점에서 가장 근접한 군주는 [[세종]]과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 정도.] 좋다만 그다음 후계자인 샤를의 능력치가 204(...) 이것때문에 외교테크 올리기 꽤나 힘들다. 다만 그렇다고 못올리는 수준은 아니니 외교관계수에 주의하면서 적절한 동맹을 구하자. 일단 시작지점에서 좋은 동맹으로는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역사적 라이벌이기에 가끔 시작지점에서 라이벌로 찍지 않는 이상은 동맹하기 어렵지 않다.], 카스티야, 아라곤등이 있다. 그뒤 교황령이 제발 빨리 프로방스에 파문에 걸기를 기대하면서 기다리자. 아비뇽때문에 백프로 이둘은 사이가 좋지 않을것이고, 교황령은 프로방스에 파문을 걸것이다. [* 파문이 걸린 국가의 땅을 먹으면 AE가 50퍼센트 더 적게 늘어난다.] 교황령이 프로방스에 파문을 걸면 바로 프로방스에 그걸 명분으로 공세를 취해서 로레인에 속하는 지방[* 메프, 로트링겐, 바]를 모두 먹어두자.[* 시작지점에서 프로방스와 프랑스가 동맹상태일텐데, 어차피 프랑스 시작부터 프로방스에 왕위주장을 걸기때문에 동맹은 풀린다. 동맹 푼 틈타서 먹으면 됀다.]
후자의 경우가 조금 어려운데, 우선은 적절히 프랑스와 사이가 안좋으면서 잉글랜드의 부족한 육군을 보충해줄수 있는 나라가 필요하다. 아라곤, 오스트리아, 카스티야정도가 물망에 오르는데 문제는 얘들이 잉글랜드를 라이벌지정하는 경우가 있다는것(...) 스코틀랜드는 얼마 안가 프랑스와 동맹하면서 귀찮게 할 가능성이 높으니 초반에 공격해서 속국화 시키고, 이베리안 웨딩이 뜨길 기대하며(...)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랑 동맹하기전에 미리 오스트리아와 동맹해서 막는것도 좋다. 프랑스보다 프로빈수 수가 많고, 병력이 더많을경우에 왕위주장 미션이 뜨는데, 이것만 성공시키면 그때부터 두려울게 없다. 오스트리아고 스페인이고 다 날려버리자.
1.19 패치 이후에 '메인 할양'이벤트가 생겼다. 헨리 6세가 앙쥬의 샤를로트와 혼인하는 대신 메인을 프랑스에 할양하는 실제 역사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이벤트로, 이를 거절하면 프랑스에 잉글랜드가 '왕위주장'명분으로 공격하게 됀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건 프랑스가 방어측이기에 프랑스는 동맹들 다끌고 올 수 있지만 잉글랜드는 공격측이기에 못그런다는거(...) 1대1로도 못이기는걸 1대다로 싸우면 절대로 못이기니 얌전히 주거나 아니면 프로방스에 팔아버리거나(...)하자.
- 김광석 . . . . 3회 일치
부인 [[서해순]]은 타살이 아닌 자살이라고 주장을 했지만 가족 및 지인들은 의혹을 제기했다. 세간에 알려진 김광석의 자살설에 대해 가족들은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김광석의 누나들은 "광석이는 '부모보다 먼저 가는 자식만큼 불효는 없다'라고 항상 말했다. 오래 살고 싶다고 했다" 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가 없다는 모습을 보였다. 어머니 역시 "활발하고 마음이 약한 아이다.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 착하고 남한테 해코지할 사람도 아니다" 라며 아들의 자살을 믿지 못했다.<ref>{{뉴스 인용|제목=故 김광석 타살의혹 재점화… 가족들 입 모아 “자살 아니다”|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2269614|출판사=한국일보|저자=최인경 기자|날짜=2012-06-19|확인날짜=2013-12-29}}</ref> 또, 김광석과 음악 동호회 활동을 했던 한 지인은 "돌아가시기 한 6개월 전쯤부터는 거의 매일 보다시피 했다"며 "자살했다는 것 자체가 황당하다. 개인적으로 타살이라고 생각하는데 의문점들이 지금이라도 밝힐 수 있다면 밝혀져 김광석이 어떻게 돌아가시게 된 것인지 밝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총 3가지 주요 의문점이 있었는데 1.김광석이 목을 스스로 맸냐는것, 2. 유서가 발견되지 않은 점, 3. 정말로 우울증이 있었냐는것이다. 1번 의문의 근거는 목을 매달 전깃줄을 묶기 위해 쓰였어야 했을 의자가 발견되지 않았고 목을 매달 위치조차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살을 할만한 장소가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또 지인은 "계단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것처럼 해서 발견됐다. 줄이 늘어나야 사람이 서있을거다. 근데 전깃줄이 늘어나냐"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고 김광석 자택은 현재 내부 공사가 이루어져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2번 의문은 고 김광석씨는 메모광으로 유명하였는데, 아무런 유서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 김광석 첫째 자형은 "(김광석은) 메모가 아주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습관이 있다. 틀림없이 유서가 있을 것이다"라고 털어놨다. 3번째 이유가 된 고 김광석씨의 부인 서해순씨가 주장한 우울증 역시 지인 말에 따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음악 동호회 지인은 "분명 말씀 드릴 수 있다. 김광석 씨가 우울증이 있었으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다"며 "적어도 1년동안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라이브 1,000회 공연 할때 매일 봤었고 그동안 병원 가는걸 본적이 없다"라고 설명했다.<ref>{{뉴스 인용|제목=故김광석 타살의혹 제기 이유 3가지 들어보니..|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06191535352210|출판사=뉴스엔|저자=허설희 기자|날짜=2012-06-19|확인날짜=2013-12-29}}</ref>
- 김민희(1982) . . . . 3회 일치
아직 사실 확인이 되지 않긴 했다만 김민희와 홍상수 역시 간통설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과거 [[설경구]]-[[송윤아]] 커플의 경우처럼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미 배우의 팬사이트라 할 수 있는 김민희 갤러리 역시 일시적으로 서포트 활동을 중단했으며 루머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팬질을 접겠다는 사람이 대부분인 판국이다. 거기다 이 경우에는, (일단 홍상수 부인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긴 하지만) 김민희가 부인에게 [[아침 드라마]]에 등장하는 [[악녀]]나 할법한 '''"그러게 남편 관리 잘 하지 그랬어요."'''라는 망언까지 했다는 루머까지 나온 판이다.[[http://m.entertain.naver.com/read?oid=433&aid=0000017690|기사]]
거기다 두 사람이 위 결별설 기사 당시 한 주장대로 "단순 우정이지만 서로의 미래를 위해 동료로서도 인연을 끊겠다"고 했든, 아니면 진짜 바람이 났으나 여론을 의식해 해어졌건 간에, 여지껏 영화 준비를 해온 게 밝혀진 이상 간통이 사실이든 아니든 '''위의 헤어졌다던 해명은 거짓이 된다.''' 둘이 진작에 헤어졌다고 주장하며 모든 일이 스캔들이라 믿었던 김민희 팬들은 [[멘붕]] 중이며, 일반 대중들의 반응은 "환장하겠네" 정도.
- 김재박 . . . . 3회 일치
* 웹툰 [[삼국전투기]]에서도 패러디 캐릭터로 특별출연한다. 우천취소를 쉽게 결정하는 모습을 반영하여, 요동전투 편에서 폭우가 내리자 철군을 주장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관구검]]이 대장이었을 때는 ~~우천취소~~철군을 받아들이나, [[사마의]]가 왔을 때는 철군 주장을 하자마자 바로 처형당한다.(...)
||<-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1552F8><:> '''{{{#ffff00 MBC 청룡 역대 주장}}}''' ||
- 김효원 . . . . 3회 일치
김효원은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직에 천거되자 외척이 인사권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였다. [[심의겸]]과 [[심충겸]]은 [[조선 명종|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들로, [[선조]]가 [[조선 명종|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그의 주장이 인정되었다. 사후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교산 [[허균]]과 [[허난설헌]]의 인척으로, [[허균]]은 그의 사위이며 [[허균]]의 형 [[허봉]]의 딸이 그의 맏며느리였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지만, 생전에는 청렴한 선비로서 신진 인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1574년]] 이조전랑을 지냈고 이듬해인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전랑의 관직은 절대로 척신의 사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 /> 이후 그는 [[심의겸]]과 [[심충겸]]을 외척이라며 비난하였고, [[선조]]가 [[조선 명종|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한 것과 같으므로 그의 주장이 공론으로 받아들여졌다.
청의(淸議)를 주장하여 사림으로부터 선명성을 인정받고 [[동인 (정치)|동인]]의 영수로 추대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2 /> 그러나 10여년간 지방관 생활을 하며 서원과 서당 설립을 장려, 권장하는 등의 문교 진흥 정책에 힘썼다. 또한 당쟁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고 정치와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또한 지방관으로 재임하며 사사로운 일로는 한 번도 도성을 밟지 않았다.
- 동군연합 . . . . 3회 일치
본래 포르투갈은 프랑스의 부르고뉴 지방에서 건너온 가문인 카페가문의 분가인 보르고냐가문의 분가인~~뭐저리 복잡해~~ 아비스가문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당시 포르투갈의 왕인 세바스치앙이 북아프리카로 원정을 나가다가 모로코 술탄국에게 대패하고 본인도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전사해버리면서 문제가 생긴다. 왕위 자체는 그의 종조부인 엔리케 추기경이 환속하면서 상속받았지만, 그의 나이는 이미 66세인데다가 자식도 없어서 후사를 남길 가능성이 적었다. 결국 그가 2년 뒤인 1580년에 죽으면서 문제가 터졌다. 당시 왕위 주장자는 총 세명이었는데, 브라간자 공작 주앙 1세와 결혼한 카타리나 공주와, 주앙 3세의 손자인 안토니오 대주교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가 있었는데,[* 3명 모두 조부가 포르투갈 왕 마누일 1세였다.(펠리페는 외손자)] 결국 펠리페 2세와 협업한 알바 대공 페르난도가 리스본을 점령하면서 펠리페가 다른 주장자들을 물리치고 포르투갈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후 영국과 협업한 포르투갈 토착 귀족들이 독립전쟁을 일으켜 승리해 해체된다. [* 단, 세우타는 스페인이 가졌다.]
여담으로, 브란덴부르크가 핵심지였지만, 이후의 국명은 '프로이센'이 되는데 이는 프로이센이 당시 '독일 바깥'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독일왕'을 겸하므로 독일영역 내부의 영주는 별도의 왕위를 주장할 수 없다. 프로이센은 본래 독일인의 영역이 아닌 발트계 민족 프루사 족의 땅이라서 별도의 왕위로서 '프로이센 왕'이라는 칭호를 내세우는게 가능했던 것이다.(마찬가지로 체코 지역도 본래의 독일 지역이 아니었으므로 '보헤미아 왕'을 칭할 수 있다.) 다만, 역시 프로이센 공작위도 엄밀히 말하자면 본래 폴란드 왕의 봉신인 신세라 이걸로 트집이 잡힐걸 우려해서인지 'King of Prussia'(프로이센 왕)이 아닌 'King in Prussia'(프로이센 안의 왕)이라는 일종의 외왕내제식 편법을 썼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시기에 'King of Prussia'라는 칭호를 쓰게 됀다.
- 마기/348화 . . . . 3회 일치
* 이 주장은 신드바드를 따르는 진들도 예상 밖이라고 여기는데, 뜻밖에도 [[우고(마기)|우고]]만은 그런 마법이 있어서도 안 되며 불가능하다 단언한다.
알리바바는 자신만이 죽었다 되살아난 사람이며 그 비결은 수많은 사람의 도움 덕이라 주장한다.
* 그의 "대마법"은 차원과 차원을 순간적으로 연결하는 마법이었다. 이론적으론 일 일라가 있는 차원 조차 현세로 연결할 수 있고, 알리바바 자신이 실증했다. 그는 신드바드에게 말한다. 그의 주장은 마치 파르테비아의 고층건물처럼 높은 건물을 1층부터 꼭대기까지 주파하는 식이다. 대마법을 사용한다면 이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층 그 자체"를 없앨 수 있으니까. 각 층의 천장이 없어지면 맨 꼭대기에 있던 존재 조차 "같은 층"으로 내려오게 되는 것이다. 모두 같은 층에 있게 되면 누가 누구의 운명을 쥐고 있는건 불가능하다. 신드바드의 방법은 "거대한 힘"이 필요한 반면, 알리바바의 방법은 적은 힘으로도 가능성이 있다.
- 무라하치부 . . . . 3회 일치
*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서 시체가 썩으면 질병이 생기가 쉽다. 혹은 죽은 자는 벌을 줄 수 없다는 관념.(죽을 때까지가 벌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른 설도 있는데, 없애다 줄이다는 뜻의 하부쿠(はぶく)나 튕기다는 뜻의 하지쿠(はじく) 혹은 쫓아내고 신용하지 않는다는 뜻의 하츠무(撥撫)가 변화하여 무라하치부가 되었고, 이상의 이유는 민간어원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6월 24일 자 아사히 신문을 시작으로 전국의 신문과 잡지가 따돌림 문제를 보도하여 우에노 마을은 전국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시카와는 "불의를 보고도 가만히 있는 것이 마을을 사랑하는 길입니까?"라고 신문 지상에서 주장하였고, 이시카와가 다니던 후지노미야 고등학교(富士宮高等学校)의 학생회는 만장일치로 이시카와의 행동에 지지를 선언, 교직원들도 이시카와를 지지하여 7월 상순에는 교직원 조합의 후지노미야 고등학교 분회, 시즈오카 현 교직원 조합에서도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 문근영 . . . . 3회 일치
극우 군사평론가 [[지만원]]이 문근영의 선행을 빨치산인 그녀의 외조부와 연관지어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쓰면서 논란이 일었다.[[http://www.systemclub.net/bbs/zb4pl5/zboard.php?id=new_jee&no=4917|#1]] [[http://www.systemclub.net/bbs/zb4pl5/zboard.php?id=new_jee&no=4926|#2]] [[http://www.systemclub.net/bbs/zb4pl5/zboard.php?id=new_jee&no=4918|#3]] 여기에 대해 문근영의 선행까지 색깔론으로 보는 것이냐는 비판이 있었고, 지만원은 문근영을 이용하려는 미디어를 비판한 것이라 반박한다. 서울지법은 지만원의 패소로 판결했으나 서울고법에서는 양쪽의 주장을 모두 밝히라는 반론보도로 판결을 내리게 된다.
||본지는 지만원 씨가 배우 문근영의 기부와 관련하여 인터넷에 올린 게시물에 대하여 2008.11.16-18.에 걸쳐 2회의 인터넷신문기사와 1회의 신문사설을 통해. “지만원 씨가 문근영의 선행에 대하여 이념적인 색깔을 들어 비방하고, 올바른 기부문화 형성에 방해를 하였다”는 취지로 보도를 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지만원 씨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재한 글은 문근영 씨의 선행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그 선행을 이용하여 빨치산을 미화하려는 일부 언론을 비판한 내용”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끝.||
||본 방송은 2008년11월17일 8시 뉴스에 배우 문근영의 기부와 관련하여, 우익논객 지만원 씨가 문근영 씨의 기부에 색깔론을 들고 나오면서 손녀인 문 씨의 선행은 빨치산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으로 보도를 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지만원 씨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재한 글은 ‘문근영 씨의 선행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선행을 이용하여 빨치산을 미화하려는 일부 언론을 비판한 내용’ 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끝.||
- 박영진(코미디언) . . . . 3회 일치
급기야 2013년 6월 2일 [[개그 콘서트]]의 [[현대레알사전]]에서 외화 더빙에 대해 풍자개그를 했다가 성우계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기도 했다. 이에 대해 자사 성우인 [[구자형]]은 외화를 더빙할 때 말하는 대사의 길이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게 기본인데 이걸 지키지 않는 것처럼 묘사를 했다고 주장하였으며 이 문제는 삽시간에 논란이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현대레알사전]] 문서 참조.
여기까지는 박성광의 주장. 박영진의 주장은 좀 다르다.
- 박진옥 . . . . 3회 일치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9b2743><:> '''{{{#ffffff 대전 시티즌 역대 주장}}}''' ||
2013 시즌을 앞두고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계약이 만료되자 자유 계약(FA) 신분으로 팀 동료인 [[윤원일]], 오봉진과 함께 전격적으로 대전 시티즌으로 이적하며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11&aid=00003136080|대전 시티즌에 입단하였다.]] 대전 시티즌 입단 후 주장을 맡아 활약하였으나 팀의 [[K리그 챌린지]] 강등을 막지 못하였다.
2016 시즌을 마무리로 [[용인시청 축구단]]이 해체되자 2017 시즌부터 [[K3리그]] 소속 클럽인 [[FC 의정부]]에 입단하였으며 '''주장'''으로 선임되어 1년간 활약하고 '''현역 은퇴'''를 하였다.
- 백승주(정치인) . . . . 3회 일치
1.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0804&yy=2016|불법이지만 단 1달러도 줄 수 없다!]] 국방부 차관 재직당시인 2012년, [[마이크로소프트]]가 우리나라 국방부와 합참, 육·해·공군이 MS 소프트웨어를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며 사용료 지급을 요구했다. 윈도 서버 접근 권한인 '사용자 서버 접속 허가'(CAL·Client Access License) 구매 숫자를 훨씬 초과해 윈도 서버에 접속해 손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MS사는 피해 액수가 무려 연 2011억원에 이른다고 주장했으나, 백승주는 '''라이센스 등록 안하고 접속하는 곳 만큼 등록해놓고 접속 안 하는 곳도 많다! 라이센스 관리를 미숙하게해서 그렇지 플러스 마이너스 따져보면 우린 정당하게(?) 돈 내고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단 1달러도 못 준다! => 우리가 자체 조사해보니 불법 사용자도 없더라![* 말이 자체 조사지, 군부대와 군시설에 공문 보내서 혹시 불법으로 쓰는 곳 있으면 자백해라 정도 였을 것이다.] => 못 믿겠으면 니네가 니네 비용으로 전수조사해서 증명해라! => 대신 군사기밀을 건드려서는 안되고 당연히 우리는 조사에 협조도 못해준다!!!'''라는 식의 --어거지--주장을 강력하게 펼쳤다.
- 벤 존슨 . . . . 3회 일치
벤 존슨은 자신의 도핑 파문이 음모였다고 주장한다. 벤 존슨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의 스폰서는 이탈리아의 스포츠 메이커 '디아도라'로서, 당시는 [[나이키]]나 [[아디다스]]에 비하면 작은 기업이었으나 벤 존슨 자신의 활약으로 급성장 하였다. 당시는 유명 선수에 대한 도핑 테스트는 기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누구나 다 하고 있었으며, 반감기를 이용하여 몸을 '클린' 하게 하고 검사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라 아무도 걸리지 않았다. 벤 존슨은 칼 루이스도 약물을 했는데 걸리지 않았고, 자신만 기습적으로 걸린 것은 자신을 저격하여 디아도라의 성장을 막으려는 음모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 승리(빅뱅) . . . . 3회 일치
그러나 [[양현석]]은 승리를 나름 자신의 방식으로 좋아하는 듯 하다는 주장도 있다. --싫어했으면 승리가 재계약 안했겠지--
다만 초반에 많은 기대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 승리에게 실망을 많이 한듯 보인다. 그러니 사업가로서 회사의 사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승리의 대우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약적인 측면이 있다. --제대로 못 써먹은 건 YG란 건 생각 안하는 듯--
콘서트장에서 팬들이 양현석 언급에 야유를 하자 승리가 양현석 옹호 발언을 하였다. 다만 이 때 팬들이 야유를 한 것은 승리 뿐 아니라 다른 빅뱅 멤버, 빅뱅 자체에 대한 양현석의 취급에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한 것이므로 위의 주장에 대한 밑밤침으로는 타당하지 않다. 대다수의 팬들이 양현석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승리 때문만이 아니다. 애초에 승리 정리글이 나타나기 전부터 양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실제로 예전에 팬들이 YG 사옥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12년동안 생일축하 한번 안해주다 한 번 해줬는데 [[https://www.youtube.com/watch?v=_FlqDGPD4do|영상]] 재수없다, 이미지 메이킹이다, 승리 너무 불쌍하다 등의 댓글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 아이린(레드벨벳) . . . . 3회 일치
과거 연관 검색어나 [[http://me2.do/FzfeHQ6b|인터넷 기사]]도 떴을 정도로 [[소녀시대]] [[태연]]과 닮은꼴이라는 주장이 많았다. 아이린은 인터뷰에서 '[[태연]]은 자기가 존경하는 선배님'이라며 영광이라고 설명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19/2018031902590.html|스포츠조선]], [[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836851.html|한겨레]]를 비롯한 다수 언론은 여러 사람이 읽은 베스트셀러를 읽었다는 것만으로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했다"라고 주장하는 이러한 반응을 비정상적인 것, 황당한 논리 등으로 평가했다. 또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 언론들은 다양한 견해들을 제시했다.
이들이 특히 첨예하게 공격하는 대상은 페미니즘이며, 때문에 [[http://ppss.kr/archives/158704|페미니즘 같은 거 묻으면 장사 안된다]]라는 말까지 생겼다. "여자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말은 매우 상식적인 수준의 문구임에도, "[[래디컬 페미니즘]]에서도 같은 주장을 한다"는 이유로 그러한 내용의 컨텐츠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이 모두 적으로 규정된다. 이 일 역시 페미니즘의 ㅍ만 나와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줬다. 조선일보에서는 "점점 격렬해지는 페미니즘 마녀사냥"이라고 표현했다.
- 윤종신 . . . . 3회 일치
윤종신 작사, 이규호 작곡의 '팥빙수'는 가요사상 거의 전무후무한 요리 [[레시피]]를 가사로 쓴 것이라 개그소재 등으로 자주 애용된다. 어느 방송에서 가사를 어떻게 썼느냐는 질문에 "인터넷에서 [[팥빙수]] 레시피를 검색했다"고 밝혔다.[* 물론 조크다. 실제로는 이 레시피대로 하면 망한다. 음과 박자를 고려해서 세심하게 단어를 배치한 것. 그렇게 쉽지 않다.] 본인 스스로 '대한민국 푸드송의 원조' 라고 주장했으나 별 근거는 없다.[* 1994년에 정광태가 발표한 '''김치 주제가'''가 있다. '''김치 없인 못살아, 정말 못살아.'''의 그 곡. 또 1980년대 후반에 [[아기공룡 둘리]]의 삽입곡으로 나온 [[라면과 구공탄]]도 있다.] 요즘은 예능용으로 자주 써먹는다. [[박명수]]의 "바다의 왕자", 쿨의 "해변의 여인" 등과 함께 오래도록 깨지지 않을 여름의 레전드 곡이다.
유희열에 따르면 윤종신은 '뮤지션들이 휴지기를 가져야 음악이 나온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즉, "녹음실 갈 때나 집 갈 때 '''생각나면 쓸 수도 있는 것.''' 그건 급하지 않아서 그렇다"라고 했다. [[유희열]]은 "만년 대리"같다고 평했고, [[성시경]]은 요즘 임원이 되어서 [[조정치|음악]] [[하림(가수)|노예]]들을 부려먹는다고 디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희열은 윤종신의 음악노예 1호 수준이었다. '''윤종신 특유의 부지런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 참고로 한때 유희열은 윤종신이 참 게으르다며 한탄을 한 적이 있다. 아무래도 음악에 한해서인듯.]
* 한 때 [[포유류]]만이 고통을 느낀다는 주장을 믿고 있었던 듯 하다. 이를 [[강호동]]에게 전파했고 1박 2일에서 이 떡밥으로 논쟁이 벌어진 끝에 강호동이 짜장면을 못 먹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강호동은 본래 윤종신이 엄청나게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이미지가 와장창 깨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방송에서 어려운 문제에서 윤종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 윤흔 . . . . 3회 일치
'''윤흔'''(尹昕, [[1564년]] - [[1638년]] [[12월 17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무신, 정치인이다. 본관은 해평. [[윤두수]]의 둘째 아들, [[윤훤]]의 형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초명은 양(暘)이고, 자는 시회(時晦), 호는 도재(陶齋) 또는 청강(晴江), 계음(溪陰)이다. 시호는 정민(靖敏)이다.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 당시 [[조선 인조|인조]]를 수행하였으며, [[병자호란|병자]], [[정묘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협상을 반대하며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후금]]과의 협상을 강력 반대하였다. 그 뒤 [[예조]][[참판]]으로 재직 중에는 [[1632년]] [[인목대비]]와 [[1635년]] [[인열왕후]]의 [[국상]] 장례를 주관하였으며 [[정묘호란]] 때에도 임금을 호종하였으며, [[1636년]](인조 14년) [[정묘호란]] 때에도 [[남한산성]]으로 [[조선 인조|인조]]를 수행, [[김상헌]]과 함께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사후 [[병자]], [[정묘호란]] 때의 [[호종]] 공로로 [[증직|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윤웅렬]](尹雄烈), [[윤영렬]](尹英烈) 형제는 그의 7대손, [[윤치호]]는 그의 8대손이다. [[이이]]·[[성혼]]·[[정철]]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2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 등이 거병하여 도성으로 쳐들어와, [[이괄의 난]]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즉시 [[공주시|공주]]까지 달려가 [[조선 인조|인조]]를 호종하였으며, 그 뒤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그 뒤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로 호종하였으며, [[청나라]]와의 강화, 회담을 강력히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그의 결사항전 주장은 묵살되었찌만 주화에 절대 반대한 점으로 [[사림]]의 지지를 받았다.
- 이갑성 . . . . 3회 일치
석방 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에 가입하여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재단 이사, 세브란스의약(醫藥) 지배인이 되었다. [[1925년]] [[2월]] 이창제(李昶齊), 현신덕(玄信德), 조철호(趙喆鎬), 배집(裵執), 변성옥(邊成玉) 외 5인과 함께 [[공산주의]] 계열의 [[반기독교 운동]]에 저항하기 위해 [[시사구락부]](時事俱樂部)를 조직하여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주장에 저항하였다.<ref>김준엽, 김창순 공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 2》(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69)</ref>
이와 같은 이갑성의 논란은 [[민족문제연구소]]나 한겨레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되다. 2005년 3.1절 특집 SBS 뉴스추적 "누가 변절자인가" 편에서는 이갑성의 친일의혹을 면밀히 검증한 결과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며 민문연에서 제시한 것들도 근거가 희박한 것들이 많고, 이갑성이 광복 이후 우익계열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좌익단체로부터 집단적인 음해를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ref>{{뉴스 인용
[[1980년]] 다시 그의 밀정설이 제기되었다. 80년 임정 국무위원 출신 [[조경한]](曺擎韓)이 [[박창암]]을 불러 이갑성이 일제의 밀정이라 주장 '내가 이걸 밝혀야 되겠는데 자네 용기 있나'라고 했고, [[박창암]]은 [[조경한]]의 부탁을 수락했다. [[박창암]]은 [[조경한]]의 진술을 토대로 월간 <자유>에 발표했고 이갑성은 병석에서 [[박창암]]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재판진행 중 소송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사망, 소송은 취소되었다. 뒤에 [[윤치영]]이 [[박창암]]을 찾아가 몇이 달라붙어도 해결못할 일을 해결했다며 치하하였다. 이갑성은 그해 [[3월 25일]]에 사망했다.
- 이상백 (1904년) . . . . 3회 일치
[[1924년]] 일본의 [[일본 대학농구연맹]]을 결성하고 [[와세다 대학]] 농구팀 대표로 [[일본 대학농구연맹]]에 참여하였으며, 일본 대학농구연맹 농구부 주장으로 [[미국]]에 원정 경기에 출전하여 여러 번 우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밖에 축구, 야구에도 주전 선수로 실력을 보여주었다. [[1927년]]에 [[와세다 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모교인 [[와세다 대학]] 동양사상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또한 [[1910년]]까지도 [[고려]]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 손자라는 주장의 허구성을 논증하고, 조선의 건국 세력이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손인 것처럼 유포했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를 근거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에 취하여'를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 전기의 서자 차별 문제에 대한 연구 외에도 과부 재가 금지법인 '재가금지습속(再嫁禁止習俗)의 유래에 대한 연구' 등의 논저를 발표하였다. 그밖에 진단학회에서 편찬한 《한국사-근세전기편-》과 《한국사-근세후기편-》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삼봉인물고(三峰人物考)'를 발표한 이래 그는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린 것은 [[정도전]]의 잘못도 있지만 [[정도전]]의 정적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비난, 부정적인 시각만 강조되어 왔음을 주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주로 고대사와 중세사, 상고사를 연구하는 타 학자들과 달리 그는 주로 조선 왕조사의 연구에 집중하여 힘썼으며 [[조선]] 건국과 조선 초기 분야의 연구에 업적을 이룩하여 [[1963년]] [[건국훈장]]과 [[문화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수여받았다.
- 이열희 (1924년) . . . . 3회 일치
'''이열희'''(李烈熙, [[1924년]] [[12월 18일]] - [[2012년]] [[8월 9일]])는 [[대한민국]]의 의학 교육자, [[치과]] 의사, [[구강 성형외과]] 의사, 대학 교수 및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대위]]이자 [[경북대학교]] 치의과대학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이며, 치과, 악안면외과(악안면성형외과) 전문의였다. [[경북대학교]] 의과 대학의 치의학과 과장이자, 경북대학교 치의과대학 초대 학장이었다. [[1962년]] [[11월]] [[대한악안면성형재건외과학회]](大韓顎顔面成形再建外科學會)의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6.25 전쟁 당시에는 군의관으로 참전했고, [[1950년]]대부터 [[치과]]대학 부설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1979년]] [[경북대학교]]에 치의과대학을 별도로 설치하고, 이후 치과대학이 의과대학에서 분리, 단설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57년]] 경북대 의대에 발을 디딘 그는 당시 [[치과의사]] 부족으로 불법 치과의료 행위가 극성을 부리자 치과대 설립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는 인근 국가의 인구 대비 치과의사수를 파악, 직접 [[보건사회부]]와 [[문교부|교육부]] 등을 찾아 치과대 설립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ref name="imails"/> 그뒤 1973년 전국 7개 지방국립대에 치의예과 설립 허가를 얻어내고 79년에는 치과대로의 독립을 이뤄냈다.<ref name="imails"/>
경북대 재직 초기 당시 그는 "치과대 설립을 허가해 주고는 예산을 제때 배정해주지 않아 교실없이 신입생을 모집, 강의실을 구하기 위해 우왕좌왕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ref name="imails"/> [[1957년]]부터 [[대한민국 문교부|문교부]]를 상대로 치과 관련 대학의 별도 단설을 주장, 설득한 끝에 [[1979년]] 경북대학교 치과 대학외 7개 대학교의 치과대학을 시범으로 설립하여 성과가 나타나자 각 대학의 치과대학 별도 설치를 허가받았다.
- 전인범 . . . . 3회 일치
이에 앞서 그는 2월 4일 문재인 후보가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자신의 저서인 《대한민국이 묻는다》를 주제로 연 북 콘서트에 국방·안보분야 패널로 참석<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9006981 문재인, 경희대서 '대한민국이 묻는다' 북 콘서트], 《연합뉴스》, 2017년 2월 4일</ref>, 문 후보를 가리키며 “이분하고 함께하면 우리나라 안보를 든든히 하고 한미 관계를 튼튼히 해 우리 국민들이 앞으로 걱정없이 살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있었다. 문 전 대표는 빨갱이가 아닌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하며 문재인 캠프 합류 선언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2352238 특전사령관 출신 전인범도… 문재인 캠프 ‘전방위 수혈’], 《한겨레》, 2017년 2월 5일</ref> 3성 장군 출신의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이 전례 없는 여론의 각광을 받자 조선일보는 “[[송영무]], [[박종헌]] 등 참모총장 출신 4성 장군 두 명을 포함, 장성 10명이 문재인 캠프에 참여했을 때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 그만큼 ‘의외’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고 평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3&aid=0003252738 [만물상] 야당으로 간 특전사령관], 《조선일보》, 2017년 2월 7일</ref> 후일 전인범 영입을 기획한 것은 전적으로 문재인 후보의 작품임이 밝혀지기도 하였다.<ref>박성현. 2017.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7089 “[집중분석] 파격인사! 문재인 대통령의 용인술(用人術).”] 『월간중앙』 201707호, 20-25.</ref> 당시 그를 영입하고자 다가온 많은 정치계 인사들에게 그는 군 개혁에 대하여 강하게 호소했으나 어느 누구도 그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이가 없었고, 그중 유일하게 진지하게 들어준 사람이 문재인 후보였기에 안보자문 합류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문재인 대선 경선 캠프에서 호감형은 아니었다는 그는 문재인 캠프 내의 안보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군 복무도 제대로 안 한 사람들이 무슨 안보자문이냐”고 일갈했다는 일화가 있다.<ref>[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8/02/02/2018020200018.html [컬럼] 특전사 다목적대검 사태를 바라보며... #2], 《뉴데일리》, 2018년 2월 13일</ref> 자문위원 직은 맡았으나 [[더불어민주당]]에는 입당하지 않음을 강조한 그는 외교·안보 문제에 대해 문재인 전 대표와 차이가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21&aid=0002546436 '文측' 전인범 "사드, 中 경제 압력 굴복 않아야"(종합)], 《뉴스1》, 2017년 2월 6일</ref> 이와 관련해 [[THAAD|사드]] 한반도 배치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의 경제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기존 한미 정부 간 합의는 존중한다는 두 가지를 선언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동안 한중관계를 고려해 사드 배치 재검토를 주장해온 야권과는 결이 다른 의견을 표명한 바 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144&aid=0000474843 문재인 캠프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사드 해법’ 제시], 《스포츠경향》, 2017년 2월 7일</ref> 이에 문재인 전 대표도 “사드 배치는 차기 정부로 넘겨 국회 비준 등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서도 “한미간 합의가 이뤄진 것이라 쉽게 취소하기 어렵다”며 유연한 입장을 취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69&aid=0000186840 “中 경제적 압력 굴복 말고, 美와 사드 합의 존중해야”], 《한국일보》, 2017년 2월 6일</ref> 그의 문재인 캠프 합류에 실망한 일부 보수세력의 거센 비난이 쏟아지자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충분히 분노하시는 마음을 이해합니다”라며 “제가 이번 결심의 결정적 이유는 지난번 특전사에 갔는데 그간 추진했던 많은 사업들이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특히, 7만원짜리 특수작전 칼([[:en:Survival knife|서바이벌 칼]])을 부결시켰다는 얘기를 듣고 조용히 살 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문재인 지지 선언의 이유를 설명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3&aid=0003252237 文 캠프 합류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페친 5000명 중 28명 이탈했다"], 《조선일보》, 2017년 2월 5일</ref> 친정인 군을 향한 비판에 육군은 공식 브리핑에서 “특전사 장병들이 생존용으로 사용하는 특수작전 칼을 당초 7만원씩에 구입하려고 했으나 더 나은 15만원짜리로 구입하기로 하고 2022년까지 모두 18억500만원을 예산에 편성했다”고 해명했으나, 2017년 예산에는 특수작전 칼 예산이 거의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5&aid=0002683233 전인범과 육군의 ‘칼 싸움’], 《중앙일보》, 2017년 2월 7일</ref> 육군 관계자는 시범사업으로 구입했다가 나중에 평가에서 합격해야 향후 5년간 18억원으로 칼을 구입하게 된다는 뜻에서 “올해는 시범사업으로 소량만 구입할 예정이며 예산은 5000만원”이라고 재차 해명했다.
2017년 5월 23일부터 25일까지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지상군(LANPAC) 심포지엄에 초청을 받아 한미동맹의 중요성과 발전 방안에 대해 발표하였다. 전인범 중장은 이례적으로 [[예비역]] 한국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각 국의 현직 육군 최고 수뇌부가 참석하는 이 심포지엄에 초청을 받아 예비역으로는 유일하게 발표했는데, 현직 미군 주요 지휘관들은 물론 전직 미군 수뇌부들로부터 한·미 군사동맹과 한·미 연합전력 극대화 해법에 대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한국군 출신으로 평가받고 있어 이 심포지엄에도 초청되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70528010015215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한·미 군사 혈맹, 한국군 주도적 역할 중요”], 《아시아투데이》, 2017년 5월 28일</ref> 그는 발표문에서 “한미간 긴밀한 연합작전과 지휘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전술지휘통제자동화체계(C⁴I)가 기반되어야 하며 양국간 언어장벽의 문제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고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는 등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고, “미국이 우리나라의 주도적 역할을 인정하고 우리나라는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46579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 美 'LANAPC'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 및 발전 방안 발표], 《뉴데일리》, 2017년 5월 26일</ref> 또한 심포지엄이 끝나고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미군 발표자들 대부분은 기조연설과 발표문에서 북한을 ‘부상하는 적(rising adversary)’으로 지칭했다”면서 “미국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질주하는 북한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라고 전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9292284 "美, 아태 지상군회의서 북한을 '부상하는 적' 지칭"], 《연합뉴스》, 2017년 5월 25일</ref>
2009년 11월 27사단장 취임식 때 부인 심화진이 총장으로 재임 중인 성신여자대학교의 직원들이 동원됐음이 논란이 되었다. 대법원은 그가 문재인 지지 선언 5일 뒤인 2017년 2월 9일 그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성신여대 조모 교수에 대한 상고심에서 조 교수의 의혹 제기가 일부 사실이라고 본 항소심 판결이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앞선 2016년 11월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은 고소인(전인범)의 사단장 취임식에 성신여대 ‘학생’이 동원된 사실이 없는 점 및 위 보도에는 ‘강제’로 직원과 학생을 동원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피고인(조 교수)은 어떻게 직원과 학생을 강제로 동원했다는 것인지 전혀 밝히고 있지 못한 점 등의 이유를 들어 이 부분 제보 내용 및 보도 내용이 ‘허위’라고 판단하였으나,<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8&aid=0003727066 전인범 예비역 중장 명예훼손한 성신여대 교수 벌금형], 《머니투데이》, 2016년 8월 16일</ref>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정에 비추어 보면 이 부분 피고인의 제보 내용 및 언론 보도 내용은 그 중요한 부분에 있어 객관적 사실에 합치된다고 할 것이고, 따라서 검사 제출 증거들만으로는 위 내용이 ‘허위’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결문에서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2&aid=0002025125 [단독] 전인범 '갑질' 논란, 본인 취임 행사에 부인 학교 직원 동원], 《프레시안》, 2017년 2월 9일</ref> 한편 아내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이 학교 공금 횡령 혐의로 재판 중일 때 그는 자신의 SNS에 심 총장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우리 집사람이 비리가 있었다면 제가 어떻게 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라고 자문한 뒤 “권총으로 쏴 죽였을 것”이라고 자답해 일부 누리꾼들에게 비판 받았다. 후일 심 총장에게 1심에서 징역형이 선고되자 “무죄를 확신해서 경솔한 표현을 했다”며 해명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9017871 전인범 "아내 무죄 확신해 경솔한 표현… 文 계속 돕는다"], 《연합뉴스》, 2017년 2월 8일</ref>
- 전효성 . . . . 3회 일치
2018년 10월 29일 토미상회 엔터테인먼트와 새로 계약했음을 알렸으나, [[TS엔터테인먼트]]가 전속계약 위반을 주장하고 있다. 이후 11월 14일 전속계약효력부존재확인 소송에서 승소하면서 TS와의 관계를 일단락했다. 승소로 TS 측에서 전효성에게 1억 3000여만원과 소송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경축 탈 TS!!-- 소송이 끝난 뒤 자신의 SNS에 게시물을 올리면서 후련한 마음을 표출하기도...[[https://www.instagram.com/p/BqJLhWKgkdx/?utm_source=ig_share_sheet&igshid=10ae4h7tbvsnj|#]][[https://www.instagram.com/p/BqJ-IUlAaVT/?utm_source=ig_share_sheet&igshid=1my9qr2d0tmde|#]]
논란이 일어난 지 1시간도 되지 않아서 전효성 본인이 트위터에 [[http://twtkr.olleh.com/view.php?long_id=L1XIci|해명 게시물]]을 올렸다. 전효성과 소속사는 [[http://isplus.joinsmsn.com/article/947/11518947.html?cloc=|뜻을 모르고 사용했다]]고 주장했으나 이 주장은 팬층을 포함해 말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왜냐하면 전효성의 발언은 명백히 인터넷 은어로서의 '[[민주화]]'의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발빠르게 사과문을 올렸지만 납득이 되지 않는 설명이었기에 세간의 반응은 싸늘했고, [[5.18]] 기념식으로 인해 전효성의 행동은 꾸준히 회자되었다. 결국 전효성은 [[2013년]] [[5월 20일]]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20406|2차 사과문]]을 올린다. 그런데 이 2차 사과에서는 '[[민주화]]의 의미를 처음에는 몰랐다더니 이제와서 딴 소리냐' 라는 식의 비난을 받게 되며 전효충 등의 별명을 써가며 전효성을 비하하는 반응이 상당히 많았다. 솔직히 20살 넘은 성인이 민주화 뜻 모른다는거 자체가 골 때리는 사실이다(...)
- 조원진 . . . . 3회 일치
|| '''소속 정당''' ||[[대한애국당|{{{#0D2680 '''대한애국당'''}}}]][* [[친박]] [[극우]]정당이다. 오직 [[박근혜]]의 석방만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국회의원은 [[조원진]] 오직 한 명으로 간신히 원내정당 유지를 하고 있다.]||
'''[[김진태(정치인)|김진태]]와 함께 [[박근혜]] 호위무사를 자처한 국회의원. 국민보다 박근혜가 우선이었다.'''[* 그러나 다른 의견으로는 박근혜에게 인간적으로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친박이라는 것 외에 딱히 정치적 자산이 없고 본인에게 특출난 능력, 우러러 볼 업적도 없기 때문에 박근혜를 놓을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조원진은 태극기 집회 연설이나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자신의 극단적인 언행을 전달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현재 그가 박근혜 석방을 위해서 실질적으로 하는 일이 뭔지 떠올려 보면 딱히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진태(정치인)|김진태]]와 [[김태흠]]이 친박의 돌격대장이라면 조원진은 [[광신도]]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사실 광신도인 척을 하면서 박근혜를 동정하는 국민들의 표를 바탕으로 정치 활동을 해나가고자 하는 고도의 전략을 가진 인물일지도 모른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8&aid=0003781608|#]] 탄핵까지는 아니지만, 4월 30일 퇴진을 주장했고, 최순실 특검법에도 찬성표를 던진 바 있다. 게다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소속으로 대구광역시장 예비후보로 등록했으나, 넷 중 4위라는 처참한(...) 경선 결과로 인해 다음 지선에서 대구시장 공천을 장담할 수 없게 되어 정당의 공천을 받기 위해 직접 신당을 만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참고로 정당 소속 후보가 내야 하는 공탁금이 무소속 후보가 내야 하는 공탁금보다 적다.
- 죽으면 부처님 . . . . 3회 일치
엄밀히 말하여 이는 교리적으로 잘못된 주장으로서, 정토교 계열 근본경전이나 정통적인 고승의 가르침을 보아도 직접적으로 이러한 주장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토교는 포교 과정에서 "죽으면 부처님"이라는 구호를 널리 사용하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널리 침투하게 되었다. 마치 "예수천국 불신지옥" 처럼 엄밀히 말하면 교리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간략화 되어 쓰이는 포교용 구호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정치적 문제와 연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서 "일본에서는 죽으면 부처님. 그러니까 A급 전범 합사도 용인된다."는 식으로, 외국의 비판을 '문화적 차이'라고 실드치고 넘어가려는 움직임을 우익 논객들이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한국이나 중국은 죽은 사람을 언제까지나 비난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문화차별적 주장도 곁들여진다.
- 창원시 . . . . 3회 일치
[[경상남도]] 중동부에 위치한 [[시(행정구역)|시]]. 2017년 기준 인구는 약 106만명. 공업을 기반으로 한 '''계획도시이자 명실상부한 경남의 중심지'''로 [[경상남도청]] 소재지다. 과거 [[부산광역시|부산]]에 있던 경상남도청이 1983년 창원으로 이전되었다.[* 여담으로 도청 이전 당시 진주와 옛 마산이 유치싸움을 벌이기도 했는데, 진주는 부산으로 이전하기 이전에 원래 경상남도청이 있었던 곳이라는 점을 내세웠고, 마산은 당시 경남에서 가장 큰 도시이고 전국적으로도 대도시 축에 ~~잠깐~~ 들었다는 점에서 도청 소재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1981년 도청이전지가 현재의 장소로 확정되었는데, 옛 창원시 권역은 마산시 창원출장소가 1980년 시로 승격된 같은 생활권인지라 사실상 마산으로 이전한 것에 가깝긴 했다. 비슷한 예론 [[광주광역시]]에 있던 전라남도청이 사실상 [[목포시]] 생활권인 [[무안군]] [[남악신도시]]로 이전한 바 있다.]
19대 총선 때는 시청사 소재지를 두고 후보들 간에 치열한 대립각을 세웠다. 옛 창원 지역에서는 현 청사 리모델링을, 옛 마산 지역에서는 마산으로의 이전을 주장하고, 옛 진해 지역의 야권, 무소속 후보들은 진해 분리독립을 주장했다. 선거 결과를 보면, 진해구에서 막판에 간신히 야권 단일화를 이루었음에도 꽤 큰 차이로 여당 후보에게 패한 것을 볼 때, 다시 나누어지는 파국으로 치달을 생각까지는 없어 보이지만 통합의 후유증이 상당히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 창작:IDF . . . . 3회 일치
IDF는 원칙적으로 가맹국 간의 합의로 활동하는 국제기구임을 주장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IDF의 이사국으로 활동하는 주요 강대국의 입김에 따라서 움직이는 군대로 여겨진다.
평화-반전을 주장하는 시민사회에서는 국제기구의 탈을 쓴 현대판 용병, 사실상 [[PMC]]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IDF는 전쟁에 투입되는 자국민의 '희생'을 제3세계에 전가함으로서, 선진국의 분쟁 개입 빈도를 늘리고 이에 따라 세계의 전쟁을 오히려 더욱 가속화 한다는 것이다.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IDF의 해체나 개혁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 최홍만 . . . . 3회 일치
결국 최홍만은 이 경기에서 허벅지 부상을 입어 한동안 불참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일본어 위키피디아]]의 최홍만 항목에서는 '''로우킥 부상 부위에 세균에 감염되어 사망하였다'''는 반달이 있기도 했다(...). 사실 경기 내용으로는 완벽히 말렸지만 피지컬 자체는 본야스키를 훨씬 능가하는 괴물이었기에 시합 도중에 본야스키의 로우킥을 맞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께를 들썩이기도 하고, 경기가 끝난 뒤 "본야스키의 로우킥에 대미지를 입지 않았다"라고 했지만 인터뷰 이후 다리를 절뚝이며 퇴장해서 허세라는 지적도 있었다. 훗날 인터뷰에서 악수 거부 논란에 대해 최홍만은 "너무 아쉬워서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로우킥 관련해선 경기를 치를 당시 이미 왼쪽 허벅지가 부상당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38&aid=0000307310|#]] 사실 이때 최홍만이 판정에 불만을 표한 것도 좀 에러였던 게, 워낙 상대 선수보다 훨씬 크고 강하니 버텨낸 거지 유효타를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이 허용한 반면 본야스키는 최홍만의 타격을 대부분 막아냈다.(물론 워낙 타격이 세서 막아도 대미지가 들어갔지만) 애초에 이건 그냥 싸움이 아니라 (KO가 안 나온다면) 기술적으로 점수를 따내서 비교하는 격투기이기 때문에 확실한 본야스키의 승리가 맞다.
2007년 12월 야렌노카에서는 '[[마지막 황제]]' [[에밀리아넨코 효도르]]를 상대로 경기를 하는 경험을 얻기도 했다. 효도르의 스피드에 밀리면서도 클린치 싸움에서 2번이나 테이크다운을 성공시키고 상위에서 파운딩을 날리는 등 선전했으나 결국 리버스 암바에 걸려 서브미션으로 패하고 말았다. 패배하긴 했으나 확실히 레슬링에 있어서 강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마이티 모전 패배를 일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이 경기는 K-1의 농간으로 인해 경기 5일 전에 오퍼를 받아서 거절했다가 결국 3일 전에 오퍼를 수락하고 이틀 훈련해서 경기에 출전하게게 되었다고 [[무릎팍도사]] 출연을 통해 본인은 주장했지만 대회 18일 전인 2007년 12월 13일에 대전 확정 기사가 뜬 걸로 봐서 별로 신빙성은 없다.[[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76&aid=0000085857|#]]]
일부에서는 [[거인증]]이 맞다면 지금까지의 최홍만은 '성장 호르몬 과잉분비' 상태였기 때문에 사실상 '''[[도핑]]'''을 하고 있었던 것과 다름 없으며,[* 실제로 성장 호르몬은 운동선수들이 도핑을 위해 사용하는 호르몬이다.] 이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괴력을 잃게 되었고 이후의 부진은 그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수술과 어느 정도의 연관성이 있는 변화인지는 의사의 진단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으나, 수술을 전후하여 비전문가의 눈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차이가 보일 정도로 근육량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물론 뇌수술과 같은 큰 수술을 받았다면 굳이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신체적으로 부담이 많이 걸릴 것이다.
-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 . . . 3회 일치
그리고 외벽과 내벽중 어느쪽에 방어를 집중할것이냐를 놓고 논쟁이 펼쳐졌는데, 황제와 주스티니아니 모두 1422년에 무라트 2세가 도시를 공격했을때 외벽방어에 집중해 막아낸것처럼 이번에도 외벽에 방어하기로 결정하려 했으나, [* 내벽에도 병력을 배치하는게 좋긴 하겠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스스로를 '전략가'라 자칭했던 교황청의 사절 레오나르도 대주교가 내벽을 방어하라고 우겨 잠깐동안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는 1422년 무라트 2세의 공격으로 인해 수리된 외벽이 제대로 수리되지 않았다면서, 이게 모두 수리비를 두명의 그리스인인 자가루스와 수도사 네이피토스가 횡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부당한 주장으로, 자가루스는 마누엘 팔레올로고스가 본명인 황제의 친족으로, 수리된 성벽에 이름까지 적힌, 당시에 굉장히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다. 또다른 횡령범으로 지목된 네오피토스는 통합반대파였다만, 황제와 친한 수도사중 한명으로 공적인 일에 일체관여하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던 중이었다. 레오나르도 대주교의 주장은 가톨릭교도들의 전형적인 반통합파와 그리스인들에 대한 적개심에서 비롯된 편견이었다.
- 톤데모 . . . . 3회 일치
가타카나로 '톤데모'라는 것은 매우 강한 의미가 있어서, 특히 커다란 오해, 망상에 기반하여 세워진 이론을 주장하고, 일반적인 학문계의 상식과 어긋나는 주장을 펼치는 것을 뜻한다. [[유사과학]]이나 [[유사역사학]], [[음모론]] 등의 부류가 여기에 들어간다.
* 톤데모본(トンデモ本) : '톤데모'에 해당하는 주장을 펼치는 책(本,본)을 뜻하는 말이다.
- 하이큐/228화 . . . . 3회 일치
* 귀가 중 다테 공고 3학년 3인방과 마주치는 카라스노 3학년 3인방. 긴장된 분위기가 감돈다. 특히 아즈마네 아사히는 엄청 굳은 표정. 저쪽도 카마사키 야스시가 만만치 않은 표정이다. 모니와 카나메는 봄고 대회 열심히 하라고 격려의 말을 한다. 카라스노 주장 사와무라 다이치가 점잖게 "감사합니다"하고 화답하고 돌아서는데 막상 갈라진 뒤에는 각자 일행끼리 실없는 대화나 주고 받는다.
* 그날 저녁. 자율연습은 최대한 간단하게 하라는 주장지시가 있었지만 선수들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키노시타 히사시는 니시노야 유에게 언제나처럼 서브 연습을 청한다. 하지만 자신만만하게 연습을 청한거 치곤 수십분 만에 페이스를 따라가기 버거워서 헉헉 거린다. 니시노야는 서브 연습은 심박수가 높은 상태에서 하는게 이상적이라며 페이스를 늦추지 않는다. 실제로 경기에선 심박수가 높아진 상태에서 때리기 마련이므로 틀린 말은 아니다.
* 주장 지시도 있고 하니 히나타도 서둘로 귀가하지만 집에 가서도 개인연습을 시작한다. 학교에선 카게야마가 있으니 주로 스파이크 연습을 하지만 리시브는 집에서 혼자 연습하는 것. 집에 있던 여동생이 기웃거리자 여동생에게도 시켜준다. 나츠는 자신만만하게 덤비지만 만만치가 않다.
- 하이큐/248화 . . . . 3회 일치
* 똑같이 주어진 시간이지만 양팀이 그걸 쓰는 모습은 사뭇 다르다. 워밍업 생각만 하며 안절부절하는 카라스노와 달리, 이나리자키 측은 주장이 언론 인터뷰에 응하는 등 상당히 여유롭다. 주장 3학년 [[키타 신스케]]. 포지션은 Ws이고 키는 175cm로 배구선수 치고 크진 않다. 인터뷰하는 상대도 마치노 아나운서라는 유명한 언론인.
* 마침내 1시합이 등장하고 오늘의 주인공 이나리자키가 등장한다. 주장 키타 신스케를 필두로 미야 형제가 뒤를 따르고 있다.
- 하현우 . . . . 3회 일치
일단 가사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다기보단 노래가 말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표현하는 수단이 아닐까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들은 애초에 국카스텐이 추구하는 '이미지적인 음악'이라는 음악관으로 봐서는 가사에 의미를 찾으려고 너무 애쓰는 것이 오히려 음악에 몰입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입장에 속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무엇”이라는 단어가 있으면 그 단어의 “의미”가 아니라 그 단어의 “느낌”으로 작사 한다는 것. 예를 들자면 “너를 사랑해”라는 문장의 의미는 사랑한다는 뜻이지만 이 문장에서 하현우가 “슬픈 느낌” 을 느낀다면 “자신이 앉아서 우는 모습”을 “나는 사랑이라는 의자에 발을 디뎠어”라고 작사한다는 것. 비유, 은유로 치부하기에는 상당히 추상적인 작사법이라고 할 수 있다. 국카스텐이라는 밴드가 '사이키델릭 록'이란 장르의 노래를 주로 만드는 밴드인데, 이 장르의 정의가 환각에 취한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러니까 진짜 약을 빤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음향, 그리고 그러한 '가사'를 가진 음악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르에 걸맞은 작사라는 것이다.[* 하현우가 [[피카소]]의 큐비즘을 자주 언급하는 것에서도 이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대상의 정밀한 묘사나 명확한 의도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
번번히 가왕전 진출이 실패하는데도 불구하고 경연 때마다 여전히 자신감을 뿜어내며 1위감임을 어필하는 모습이 비쳐져 초반에 비해 거만해졌다는 여론이 일었으나[* 특히 나가수 제작진의 농간으로 [[시나위(밴드)|시나위]]와의 록밴드 대결에 붙여졌을 때 하현우의 '선배고 뭐고 모두 다 적', '그럼 사뿐히 즈려밟고~' 등의 멘트들로 불이 붙었는데, 시청자들이 원래 자기들 음악 세계의 자부심이 우선되는 록 밴드조차 봐주지 않고 장유유서 따지는 한국적인 풍토가 어김없이 발휘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 놈은 원래 인디 때부터 저랬다', '하현우가 겸손했다면 지금의 국카스텐은 없었을 것' 이라는 증언들이 속속 올라오면서 그 주장은 밟히고 있는 상황. 10월의 가수전에서 [[한영애]]의 '누구 없소' 로 가왕전에 진출하자 오히려 실력이 되니 나오는 자신감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 주위로부터 "자신감이 넘친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본인은 자신감이라기보다 거리낄 것이 없기에 막힘이 없다고 주장한다. 말이나 태도를 보면 상당히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타입. 하루 일과도 심플한 만큼[* 아침 기상→식사→TV 시청 40분→화장실→씻음→작업실→새벽 3시 귀가→숙면.][* 2010년 인터뷰에 따르면 술을 못 마신다고 언급했다. 또한 독서와 등산을 즐긴다고 한다.] 딱히 내세울 것도 없고 그렇다고 숨길 것도 없기에 편하게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성격인 듯.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OMLE&fldid=6UOH&datanum=22319&q=%C7%CF%C7%F6%BF%EC%BF%A9%C0%DA%C4%A3%B1%B8|#]]
- 황옥 (1885년) . . . . 3회 일치
의열단은 황옥, 김시현 등이 밀반입시킨 무기류를 통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 등을 동시에 테러하는 제2차 국내 거사를 준비했지만 김재진이 밀고하여 실패했다. 김재진은 재판 이후 흔적이 증발하는데, [[유석현 (1900년)|유석현]]은 1983년 [[중앙일보]]에 기고한 회고록에서 김재진은 가명이고 [[권태일]]이 본명이라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김원봉, [[김지섭]] 등 소수만 탈출했고 황옥, 김시현, [[김진기]], [[조동근]], [[홍종우]], [[홍종무]], 유석현 등은 1923년 3월 15일에 체포당한다.
황옥은 재판정에서 자신이 일본 경찰의 지시를 받고 의열단에 [[프락치]]로 잠입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유죄를 선고받고 1924년 징역 12년형에 처해졌다([[황옥 경부 폭탄사건]]). 1924년 [[김지섭]]이 [[도쿄 어소 투폭사건]] 때 사용한 폭탄도 황옥이 총독부 물건이라는 소인을 붙여 세관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후 [[결핵]]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25년 12월 가출옥하였다가 1928년 5월 재수감, 1929년 다시 가출옥한 이후 해방될 때까지 행적은 불분명하다. [[일본 제국]]이 패망한 뒤 [[반민특위]], [[조선독립운동사편찬발기인회]]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 [[한국 전쟁]] 때 납북되어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다.
경기도 경찰부장 [[시로가미 유키치]]는 황옥이 자신의 재가를 받은 작전에 따라 활동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하지만 김원봉과 김시현은 황옥이 의열단원이 맞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상호 증언이 엇갈리고 있기에 황옥이 의열단원이었는지, 일본 경찰의 프락치였는지, 또는 양자에 모두 발을 걸친 [[이중간첩]]이었는지 여부는 아직까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83년 [[서울대학교]] 도서관 건물에서 추락사한 민주화운동가 [[황정하]]가 황옥의 손자이다.
- 흥친왕 . . . . 3회 일치
[[1892년]] [[봄]],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황현]]은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황현은 운현궁의 폭탄 테러 사건을 [[명성황후]]가 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인 짓이라고 주장하였다.<ref name="p316">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5~316쪽.</ref> 이때 [[흥선대원군]]의 사랑채와 이재면, [[이준용]] 부자의 거처에도 폭약이 장치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점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각되었다. 이는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에게 폭약을 보내 일가를 폭사시켰던 전례에 대한 정치적 보복극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ref name="p316"/>
[[1893년]] 그는 동학 농민군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ref name="p316">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5~316쪽.</ref>
1월 18일 서울행정법원에 따르면 이씨는 소장에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증조부와 조부의 행위를 일제 강점기하에서의 친일반민족 행위로 결정한 근거법률인 반민족특별법이 위헌이기 때문에 이 결정은 효력이 없어 취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ref name="연합뉴스1"/>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디시전 . . . . 2회 일치
뮌헨 조약을 통해 주데텐란트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주데텐란트 지역을 영토 분쟁 지역으로 만드는 동시에 체코슬로바키아에게 해당 지역의 할양을 요구한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승인 여부에 상관 없이 영국,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관계도가 10-20 하락하며 독일의 호전도가 1 증가한다. 정치 슬라이더가 간섭주의로 3칸, 강경파로 1칸 이동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평화시 공업력 패널티가 "전쟁 준비" 이벤트로 10% 감소한다. 이를 체코슬로바키아가 받아들였을 시, 히틀러의 연설과 네빌 체임벌린의 연설이 재생된다.
덴마크가 독일에게 항복하며 영국군이 점령한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를 미군이 관리한다.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를 국민구역으로 주장하는 동시에 "미국의 그린란드 및 아이슬란드 지배" 이벤트로 해당 지역을 영국에게서 넘겨받는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장관 . . . . 2회 일치
>케인즈 경제학은 민간 분야의 선택이 비효율적인 거시경제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이들은 중앙은행의 금융정책이나 정부의 재정정책과 같은 공공 정책을 시행해 경기 순환의 생산량을 안정화 시킬 것을 주장한다.
>자유방임 자본주의자는 시장 경제의 전문가다. 그는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해야한다고 확고히 주장하고 있다. 전시던 평시던, 옛날부터 이어져 온 보이지 않는 손이 국가 자원을 제일 효율적으로 관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 USS 피닉스 (CL-46) . . . . 2회 일치
영국 국방부는 벨그라노가 전쟁 구역인 포클랜드 반경 200 마일 내에 들어왔을 때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아르헨티나 정부는 벨그라노가 격침 당할 당시 전쟁 구역에서 36 마일 떨어져 있었기에 벨그라노에 대한 공격 행위는 전쟁 범죄라고 주장했다.
- Victoria II/정당 . . . . 2회 일치
국가간 거래를 통제하자고 주장한다. 관세를 평균치의 200% 수준으로 뜯어낼 수 있지만 평균치의 75% 수준까지 밖에 끌어내릴 수 없다.
상인들의 거래에 간섭하지 말자고 주장한다. 관세를 폐지할 수 있지만 평균치의 125% 수준까지 밖에 끌어올릴 수 없다.
-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 . . . 2회 일치
이때 정도를 지켜야할 언론에서는 사건을 원색적이고 편파적으로 다루면서 논란을 부채질했다. 특히 한겨레, 경향신문 등 진보 언론에서는 워마드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면서 극도의 페미나치스러운 기사를 쏟아내어 진보 진영 안에서도 성토를 당했다. 일부 유명인들도 이 사건과 관련해서 워마드에 편승하는 의견을 내놓으면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 특히 진보논객이자 미학자로 유명한 진중권은 한국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규정하면서 "x잡고 반성이나 해라"는 폭언을 늘어놓고 욕을 먹었다.
당초 여초사이트로 악명을 떨치고 있던 것은 메갈리아였다. 그러나 메갈리아가 여러 사건을 거치며 세력이 위축되자 거기서 한 번 더 분화되어 나온 것이 워마드였다. 워마드는 여성판 일베, 혹은 소라넷으로 불리울 정도로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주장을 펼치는 세력이었는데 강남역 살인사건 논란과 함께 주목을 받으면서 급속도로 세력을 불렸다.
- 강동우 . . . . 2회 일치
이미 [[삼성 라이온즈]]를 떠난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삼성 팬들에게 [[강기웅]], [[박충식]]과 함께 여전히 안타까움으로 가슴에 남는 선수다.[* 다만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을 때는 까였던 적도 있다.] 강동우와 관련된 신문기사의 리플을 보면 '''[[한화 이글스|한화]] 팬들보다 삼성 팬들의 응원이 더 많을 때도 있다.'''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삼갤]]에는 간간히 '은퇴식만큼은 삼성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이 올라온다. 이미 [[마해영]]의 사례도 있고.
2008 시즌 종료 후 [[신종길]]을 상대로 [[한화 이글스]]에 트레이드되었다. 2009 시즌 붙박이 1번 타자 겸 [[중견수]]로 기용되면서 놀랍게도 맹활약을 펼쳤고, 1998년 이후 12년 만에 3할 타율과 준수한 출루율을 기록하였다. 또한 팀 내에서 가장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를 보이서 부활의 날개를 펼쳤다. 한화가 간만에 건진 수준급 1번 타자. 농담으로 [[FA로이드]]를 복용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로 2009 시즌 종료 후 [[FA 제도|FA]]를 선언했고, [[한화 이글스]]와 1년 총액 3억 원(계약금 1억 5천+연봉 1억 5천)의 조건으로 재계약에 합의했다. 팬들은 반짝 활약이 아니기를 바랐으나...
- 경관 . . . . 2회 일치
적과 아군의 시체를 함께 매장해서 통일성을 주장하고자 했다는 가설이다. 피아를 가리지 않고 일종의 현대적인 '전사자 묘지'로서 삼았다는 것이다. 비교적 현대적 관점의 해설이다. 하지만 일단 경관이 되는 것 자체가 [[유교]]에서 중시하는 정식 매장 절차와는 거리가 멀고, 경관은 잔혹한 행위로 보아 부정적으로 여겨진 바가 이미 춘추좌씨전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적과 아군의 시체를 함께 매장해서 통일성을 주장하고자 했다는 가설이다. 피아를 가리지 않고 일종의 현대적인 '전사자 묘지'로서 삼았다는 것이다. 비교적 현대적 관점의 해설이다. 하지만 일단 경관이 되는 것 자체가 [[유교]]에서 중시하는 정식 매장 절차와는 거리가 멀고, 경관은 잔혹한 행위로 보아 부정적으로 여겨진 바가 이미 춘추좌씨전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 권혁 . . . . 2회 일치
팬들은 권혁은 2군으로 내려서 쉬게하고 추격조에서 가장 폼이 좋은 [[이동걸]]이나 구위는 좋으나 선발로 쓰기에는 이닝 소화능력이 너무 떨어지는 윤규진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자존심에 순순히 받아들일지는...필승조가 좋아보인다고 황금알 낳는 거위 배가르듯 써버린 대가로 '''한화는 6월 초 필승조가 단 한 명도 없는 팀이 되었다.''' --양심 있으면 권혁은 건드리지 말자--
그리고 셋업 상황이라고 볼 수 없는 5점 차 이상의 경기에서 2년간 17경기 22이닝 355구를 던졌는데, 이 중에서 10점 차 이상 경기도 2경기가 있었다. 큰 점수 차에서 권혁의 경기감각을 조율하기 위해 등판한 경기도 있었지만 김성근 감독의 조바심으로 인해 등판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타고투저 시대라서 5점 차 리드가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으나, 최근 2년간 5점 차 리드가 뒤집힌 것은 1,282경기 중 30경기로 2.3%에 불과했다(2016년 8월 26일 기준).[[http://www.msn.com/ko-kr/news/sports/%EA%B8%B0%EB%A1%9D%EC%9C%BC%EB%A1%9C-%EB%B3%B4%EB%8A%94-%EA%B6%8C%ED%98%81-%EB%B6%80%EC%83%81%EC%9D%80-%EC%98%88%EA%B2%AC%EB%90%9C-%EC%9E%AC%EC%95%99/ar-BBw1kEy|#]]
- 김우중 . . . . 2회 일치
그러나 [[1997년]] [[IMF 구제금융사건|IMF 구제금융]]으로 한국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고, 그로 인한 여파로 부채비율이 400% 이상이었던 [[대우그룹]]은 쌍용을 인수하는등 확장정책을 이어나갔지만 [[일본]] 노무라 증권이 [[1998년]] [[10월 25일]]에 발표한 '[[대우인터내셔널|대우]]에 비상벨이 울린다'는 보고서 1장으로 사실상 [[대우그룹]]이 위기를 맞게 된다. 후에 계열사를 41개에서 4개업종 10개 회사로 구조조정 단행과 [[삼성그룹]]과의 빅딜도 추진하나 둘다 실패했다. [[1999년]] [[8월 26일]] 이미 구조조정으로 회사 41개중 16개가 매각되었고 남은 25개 회사중 12개가 워크아웃을 신청하였다. 당시 부채는 500억 달러였다. 당시 [[대우그룹]]은 금융부문을 중점으로두고 사업확장을 하여 내부적으로 부채가 많았다. 사실상의 그룹 해체였다. [[1999년]] [[11월 1일]] 김우중은 13명의 [[대우그룹]] 사장단들과 함께 경영포기 및 회장직을 사퇴하였다. [[대한민국 검찰청|검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출국한 후 도피생활을 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서 호화롭게 생활을 했다는 주장과, 반대로 [[유럽]] 등지의 3류 호텔에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며 어렵게 생활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대우그룹]]은 당시 [[김대중 정부]]가 정치적으로 탄압했다는 설과 단순한 [[구조조정]] 실패라는 의혹이 있다.
- 김윤환 . . . . 2회 일치
이렇게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김윤환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이내 자신이 후보가 될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고 [[이회창]]을 차기 대통령으로 밀면서 다시 '킹 메이커'로서의 위세를 떨쳤다. 당내 민정계와 영남세력을 대거 규합해 이회창을 대선 후보로 옹립한 김윤환은 3회 연속으로 대통령을 좌지우지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울 뻔했지만, 정작 이회창은 아들들의 병역 문제와 [[이인제]]의 이탈을 막지 못하면서 대선에서 [[김대중]]에게 패했다. 여당에서 야당으로 전락한 이때부터 김윤환의 정치적 생명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는 자신이 밀었던 이회창 총재에게조차 구시대 정치인으로 몰리면서 [[토사구팽|팽]]당해 공천을 못받고 한나라당에서 쫓겨난다.[* 이 당시 이회창의 참모가 [[윤여준]]이었는데, 그간 총선의 화두는 공천이었음을 상기시키며, 김윤환을 위시한 민정계, 구시대 인물들을 쳐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이회창은 계속 망설이다가 결국 윤여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윤여준의 전략대로 중진급 현역 의원과 정계 거물 수십여명을 날리고 정치 신인들을 대거 전면에 내세운 개혁 공천은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예상을 뒤엎고 한나라당의 총선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후 [[조순(1928)|조순]], [[이수성(정치인)|이수성]], [[박찬종]], [[이기택]] 등 3김 정치 + 이회창에게서 팽당한 정계의 옛 거물들을 끌어모아 [[민주국민당(2000년)]]을 차렸다. 재야의 장기표나 심지어 신군부 출신 [[허화평]]도 있었다! 이렇게 거물과 명망가만으로는 상당히 그럴싸했지만, 선거를 앞두고 급조한 정체성이 불문명한 정당으론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결국 양당 구도에 밀려 지역구에선 [[춘천시]]의 [[한승수]] 前 경제부총리, 전국구에선 후보 1번이던 [[강숙자]] 등 총 2명 당선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본인 역시 자기 지역구인 구미시에서 한나라당 [[김성조]] 후보를 상대로 10% 차의 패배를 당했다.(41.7%:32.1%)
- 김태우(god) . . . . 2회 일치
그러다가 2014년 말부터 소속 가수인 메건 리와 계약 해지를 둘러싼 마찰이 일어났다. 메건 리는 미국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모색하면서 소울샵측과 계약 해지를 주장했고, 길건은 메니징 소홀을 이유로 계약 해지를 주장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는 김태우 처가 쪽 인물들의 경영 간섭. 오히려 이들은 김태우 [[본인]]에 대해서는 불만 없다는 식으로 밝힌 것으로 봐서는 본인의 [[인성]]은 원만한 모양.
- 김효기 . . . . 2회 일치
||<-7><#4f1b87><:> '''{{{#ffffff FC 안양 역대 부주장}}}''' ||
2013년부터는 군문제를 위해 공익근무요원 생활을 하면서 [[화성 FC]]에서 활약하게 되었는데, 당시 화성의 [[김종부]] 감독은 김효기에게 주장을 맡기며 신임했고, 김효기도 공익근무 생활에 적응하면서 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 김희철(1983) . . . . 2회 일치
4season이라는 그룹으로 [[유노윤호]], [[김재중]], [[강인]]과 함께 데뷔하려다가 기획이 취소되고 이후 [[슈퍼주니어]]로 데뷔. [[이특(슈퍼주니어)|이특]]과 함께 [[슈퍼주니어]] 내 최고령. 하지만 희철 쪽이 실질적 팀 내 [[실세]] 이미지가 강하다. 슈퍼주니어 데뷔 당시 [[강인]]과 함께 팀의 인지도 상승에 많은 공헌을 한 멤버이기도 하다. 팀에서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할 말은 반드시 하는 성격 때문에 멤버들 내에서도 '''무서운 형''' 이미지로 통하는 듯하다. 워낙 솔직하고 거칠 것이 없어 호불호가 갈리는 캐릭터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매우 좋아해 '희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명 예의바른 4가지라 [[카더라]].
애니메이션 뿐만 아니라 게임도 즐긴다. [[리그 오브 레전드]] 랭크 게임에서 다이아 티어에 서식하고 있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 [[이현우(게임 해설가)|이현우]]와 친해서 방송에 시시때때로 출연하는 것은 물론 [[박정석]]과는 서로 욕설(...)까지 주고받는 동갑내기 친구 관계다. 2016년 롤드컵 당시에는 게임방송국 [[OGN]]에서 객원해설로도 출연하며 적당히 게임을 좋아하는 게 아님을 보여주기도 했다. 인터뷰에 의하면 OGN 측이 나름 챙겨준다고 출연료를 챙겨줬지만 원래 희철의 몸값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이 나가겠다고''' 적극 주장해 출연했으며, 원만한 진행 능력&게임 지식을 발휘해 일반적인 객원 해설보다 훨씬 더 퀄리티 높은 해설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dwEu2bY5KI|해설영상]]. 이 해설을 기반으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게임과 애니메이션에 대한 견해도 알 수 있다([[http://www.inven.co.kr/webzine/news/?news=165285&iskin=esports|인터뷰]]). 그 밖에 트위터에 이특과 [[킹 오브 파이터즈]]를 한다는 내용의 트윗을 올린 것을 보면 롤 이외의 게임도 즐기는 모양. 이특이 [[야가미 이오리|이오리]] 안 시켜주고 시원이 닮은 [[로버트 가르시아]]로 얍삽이만 쓴다고 폭로했다. 또한 2017년 2월에 있었던 SBS [[게임쇼 유희낙락]] 녹화중 트위치 스트리머 [[케인(스트리머)|케인]]의 킹오브 방송을 굉장히 재밌게 보고 있다고 언급하였고, 실제로 케인을 해당 방송에 섭외해서 녹화도 했다.[* 이때 섭외 과정에서 5개월 구독을 끊었다가 희철을 사칭으로 오해한 케인에게 생방으로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었는데, 이를 계기로 케인과 친구를 먹고 이후로는 케인의 방송에서 시청자들과 채팅도 종종 주고받고 있다.]2018년 1월18일 케인의 방송에 출현했다[* 출연 계기는 다른 연예인들과 술마시던 중에 갑자기 케인이 보고싶어서 전화했더니 왔다고 한다. 그에 고마움을 느껴 합방제의를 했고, 뒤늦게 정신차렸지만 이미 뱉은 거 책임진다는 마인드로 합방을 하게 됐다고]~~케조씨도 희님덕분에 만명찍었다 그와중에 만명이면 적게보네라고한 희님 흠좀무 인스타라이브만 3~4만명보는데~~ 이 방송에서 단 1초도 오디오가 비지 않게 게임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습에 시청자들이 "제발 그만..." "차라리 죽여줘..." "야 누가 00게임 얘기 꺼냈냐" "뇌 용량이 얼마인거냐" "박찬호를 능가하는 투머치토커다" "귀에서 피 난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대단하기도 대단한 것이 게임 캐릭터의 인상착의, 배경음악, 스킬, 줄거리와 엔딩, 감상평까지 자세히 말을 하여 정작 방송의 주인인 케인은 아주 가끔 한 마디씩 끼워넣는 것 말고는 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음성 도네로 에미넴 비트를 깔며 랩 드립을 쳤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15화 . . . . 2회 일치
현재 엔데버는 오히려 "히어로 약체화의 상징"이다. 하는 일도 너무 지나친 부분이 있고 지지층도 2~40대 남성으로 편중되어 있다. 미야기 캐스터는 이렇게 된 마당에 그저 보호만 받기 보단 히어로를 북돋아 약점을 보완해나갈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마의 상처는 그때 생겼다. 그의 분신은 어느 정도 데미지를 받아야 없어졌기 때문에 쉽게 없앨 수도 없었다. 이윽고 분신들은 그를 사로잡고 서로 자기가 진짜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은 9일간이나 계속됐다. 종국엔 서로 죽인 끝에 모두 사라졌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자신이 진짜 나인지 어떤지 알 수 없게 됐다. 그게 그가 보인 증상의 정체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84화 . . . . 2회 일치
* [[키리시마 에지로]]는 바쿠고 카츠키를 구하러 갈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이이다 텐야를 비롯해 프로 히어로에게 맡길 것을 주장하는 학생들도 많다
- 네드 켈리 . . . . 2회 일치
1878년 4월, 피츠패트릭 순경(Constable Fitzpatrick)이라는 [[경찰]]이 켈리 가족에게 찾아온다. 피츠패트릭은 네드의 동생인 댄 켈리(Dan Kelly)를 말도둑 혐의로 체포하려고 했다. 피츠패트릭은 총에 맞았고[*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후 피츠패트릭의 주장이 있는걸로 보아 죽지는 않은 것 같다.], 켈리 가족의 어머니인 엘렌 켈리(Ellen Kelly)는 이 일을 사주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유력한 용의자인 네드와 댄은 도주했다. 훗날 네드의 친구인 조 번(Joe Byrne)과 댄의 친구인 스티브 하트(Steve Hart)가 합류, 켈리 갱(Kelly Gang)이라고 불리는 범죄 조직을 만들었다.
네드 켈리는 제릴더리(Jerilderie)의 은행을 털며 편지 하나를 남겼다. "제릴더리 편지[* Jerilderie Letter]"라고 불리는 이 편지는 1870년부터의 켈리 갱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당시 호주의 경찰이 부패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 편지는 경매에 나와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이 사들였다. [[http://search.slv.vic.gov.au/primo_library/libweb/action/dlDisplay.do?vid=MAIN&search_scope=default_scope&docId=SLV_VOYAGER1636991&fn=permalink|전자책으로도 보게 해 주는 것 같으니 관심 있으면 클릭.]] 오른쪽의 View Online을 누르면 된다. 흘려쓴 영문을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로버트 켈리 . . . . 2회 일치
[[트위터]]에서는 몇몇 영어권 여성 페미니스트 계정에서도 "겁에 질린 듯한 행동을 봐서 유모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하거나, "억압받는 아내처럼 보인다."고 주장하며 이를 정당화 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에 공감하지 않았다.[[http://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32965699 (참조)]]
- 로어셰크 . . . . 2회 일치
미쳐 날뛰던 [[코미디언(왓치맨)|코미디언]]에 대해 우호적으로 보고 있던 인물. 저스페직이 코미디언이 자신의 어머니를 [[강간]]하려 한 일을 언급하자 이를 "근거 없는 주장", "자신의 나라에 봉사하며 살다간 자의 '일시적 타락'" 등등으로 부르며 쉴드쳤다. 왓치맨의 도입부도 로어셰크가 코미디언을 죽인 범인을 찾기위해 뉴욕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걸로 시작한다.
1975년, 블레어 로셰라는 이름의 6살 된 여자아이가 납치당한다. 코백스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15명의 사람들을 심문해 한 양장점의 위치를 알아낸다. 그곳에 간 코백스는 로셰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후 그 양장점에서 길러지는 셰퍼드 두마리의 먹이가 되었다는걸 알아낸다. 그는 셰퍼드 두마리를 죽인 후, 밤 늦게 양장점으로 돌아온 양장점 주인을 묶은 다음에 양장점째로 불태워버린다. 그는 이 일 이후 자신이 "로어셰크 인 척 하는 코백스"가 아니라 "로어셰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 마기/330화 . . . . 2회 일치
* 루프가 고쳐진 팔인장들은 한결같이 신드바드의 주장에 찬동한다.
* 야무라이하는 현재와 미래를 다 지키고 싶고 그러기 위해선 세상을 루프로 환원하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알라딘은 진심이냐고 묻는데 야무라이하는 자신은 진심이며 그들의 루프가 신들의 노예취급 받고 있다고 호소한다. 그런건 과거 매그노슈타트가 비마도사들의 마고이를 착취한 것과 다를바 없다고 말한다. 알라딘이 그래서 어쩌자는 얘기냐고 하자...
- 마기/339화 . . . . 2회 일치
* 신드바드는 그가 겪은 불행은 곧 솔로몬 왕의 부조리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솔로몬 왕은 죄없는 많은 사람들까지 불행과 고통으로 떨게 했다. 신드바드는 바로 이런 세상을 바꾸려 한다. 정의에 행복을, 악에 불행을 주는 마땅한 세계. 그런 "올바른 세계"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낟.
- 마기/340화 . . . . 2회 일치
신드바드는 그 실패의 대가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으로 국경을 없애고 인류의, 세상의 힘을 신드바드 자신에게 집약시킨 것이라 주장한다.
* 백룡은 거기에 의문을 표한다. 설사 실패를 최소화하더라도 어째서 힘을 신드바드 개인에게 집중시킬 필요가 있는가? 왜 자신 외의 존재와 힘을 나눌 수 없는가? 백룡의 그러한 질문에, 신드바드는 자신이 실패할거 같냐는 반문으로 답한다. 자신이 실패할거 같아 불안한게 이유라면 적당한 이유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 마기/341화 . . . . 2회 일치
* 알라딘은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신드바드는 그가 실제론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뜻대로 행동한다고 지적한다.
* 알라딘은 솔로몬이나 우고, 시바여왕의 영향을 받은 점을 인정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의 영향도 받았고 그건 자신을 조종한게 아니라 "진화"시켰다고 주장한다.
- 마기/343화 . . . . 2회 일치
* 신드바드는 [[알라딘(마기)|알라딘]]을 솔로몬의 사자라 부르며 "솔로몬의 사자가 솔로몬의 의지를 거스르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 [[신드바드(마기)|신드바드]]는 자신이 신이 되는 것이 솔로몬 왕의 의지라고 주장한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없이 성궁에 가는 것이나 한 번 루프로 환원되고도 살아돌아온 일을 들어 자신이야 말로 솔로몬의 의지가 택한 자라고 말한다. 그 증거로 다윗이나 [[아르바(마기)|아르바]], [[우고(마기)|우고]] 조차 그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왜 그런 일이 생겨났을까? 그거야 말로 솔로몬의 의지라고 해석해야 하지 않냐는 것이다.
- 모레아 전제국 . . . . 2회 일치
비잔티움 제국의 학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받고, 종교 세력이 강한 폐쇄적인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모레아로 이주하기도 했는데,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Georgios Gemistos Plethon)은 [[고대 그리스 철학]]을 연구하여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고대 그리스의 재생과 제국의 복원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한 저작을 발표하고 국정 개혁을 주장하였으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국정에 채택되지는 않았고, 너무 급진적이고 이교도적이라는 이유로 교회에서는 그의 저작물을 [[분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물이 활동할 정도로 제국에서 모레아는 자유로운 기풍을 가진 지역이었다.
- 몬스터 페어런트 . . . . 2회 일치
몬스터 페어런트라는 단어의 등장이 보호자의 과도한 주장을 옹호하고 학교와 교원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언론의 풍조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정당한 클레임을 한 사람에 대해서도 몬스터 페어런트로 싸잡혀서 비난을 받게 되는 풍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 건으로 불만을 품은 부모는 딸에게 IC레코더를 항상 소지하고 있도록 지시하고, 10월에는 교사가 갑자기 반 아이들 전원을 기립시켜서 "거짓말을 인정하고 사과할 때까지 전원이 선 채로 수업을 받도록!" 지시하고 사과를 강요하는 사건까지 있었으며, 이후로 딸은 신발을 버려지는 등의 괴롭힘을 받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언론의 취재에 녹취록을 공개하였다.
- 박명수(MC) . . . . 2회 일치
개그맨이면서도 가수, 작곡가 활동을 겸임하였는데, 이전까지는 본인은 "상업적으로 실패하는 것도 개그 레퍼토리로 삼기 위해서다"라고 주장했지만 <바다의 왕자>라는 히트 곡을 내놓기도 하고 이후 진지하게 뮤지션으로 도전하는 모습을 보면 본인의 꿈이기도 했던 듯. 최근에는 [[유재환]]의 곡을 작곡해준다. 데뷔 곡인 '커피', 최근에 나온 싱글 '꽃같아'가 박명수의 작품.
흔히 어린시절 공병 줍고 다녔던 시절, 동급생들에게 눌려지내던 쭈구리 시절 등 본인의 주장에서 비롯된 가난한 가정사가 언급되는데, 사실 군산에서 살때는 엄청 잘 살았다. 방마다 화장실을 따로 썼고, 집 안에 [[유치원]] 앞에 있는 그런 [[놀이터]]가 있었다고 한다. 라디오 방송에서 말하길, 학창시절 당시 기백만원 하던 컴퓨터(MSX급)를 아버지가 사주셔서 집에서 프로그램도 직접 짜며 놀고, PC용 게임도 많이 알고 있었다. PC통신도 즐겨한 듯한 언급이 있었다. 박명수의 어린 시절이 1970 ~ 1980년대라는 걸 생각해보면 대단한 것이다. 아버지께서 중동으로 가서 달러를 벌어오시기도 했고 귀국 후 아버지가 운수업을, 어머니가 [[만화방]], 그것도 컬러 TV[* 지금이야 훨씬 더 선명하고 깔끔한 컬러 TV가 집마다 한 대씩 있고, 이젠 컬러냐 아니냐가 아닌 HD냐 LCD냐 등을 따지는 시대이니 별로 대단하지 않지만, 70년대 초반에는 흑백TV도 부의 상징이었고 컬러방송이 늦게 시작되어서 그때쯤 되어서야 컬러TV의 보급이 시작된지라 1980년대 초반 기준으로 컬러TV를 가진사람이 아직은 적었을때였다. 그래서 어쩌다 컬러 TV를 들여놓은 영업장에서는 컬러 TV를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대가로 시간당 요금을 받는 식으로 굴려먹기도 했다.]가 있는 만화방까지 운영한 적도 있었다. 다만 사업이 뒤집어지면서 그 많던 재산을 죄다 날리고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200만원 융자 받아서 사글세 방에서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연대보증이 이렇게 무서운 거다~~ 공병 줍는 시절과 쭈구리 시절은 아마 이 시절을 기점으로 한 이야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 배성룡 . . . . 2회 일치
아버지는 운홍(運鴻)이며, 어머니는 유윤이(柳允伊)이다. 1917년 결혼을 전후해 일본의 니혼(日本)대학에 유학해 1923년 졸업했다. 귀국 후 조선일보사 기자로 활동하다가 퇴사하고 1924년 11월 화요회(火曜會)에 가입했다. 가입 후 사회주의 운동에 관련된 여러 편의 논저를 발표해 김경재(金璟載)와 함께 화요파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활동했으며 1925년 8월 이후 〈동아일보〉를 주무대로 활발한 평론활동을 했다. 1926년 3월 제2차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1928년 2월 1년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9월 만기 출옥했다. 1929년 조선일보사 경제부장이 되었다. 1931년 11월 새로 창간된 중앙일보사에 경제부장으로 입사하여, 1932년 봄 정치부장, 10월에는 논설반 주필 겸 편집부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 3월 〈중앙일보〉가 〈조선중앙일보〉로 제호를 변경하자 편집차장·정치부장을 역임하다가 10월 신문이 정간되자, 절필하고 은둔했다. 이 시기에 발표한 글들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경제 현실에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중층적으로 존재하게 한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파악하고 일본인 자본 대 조선 민중의 대립을 기본 모순으로 상정했다. 조선인 내부의 부르주아 계급과 노농계급 모두를 일본 자본주의에 의한 공동의 피해자로 파악하면서, 민족협동전선론을 주장했다. 8·15해방 후에는 중도파로서 좌우익의 편향노선을 비판했다.
1945년 9월 이극로가 주도하는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에 가입해 교섭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권오익(權五翼) 등과 각당통일기성회(各黨統一期成會)를 조직해 좌우익 정당통합에 주력했다. 1946년 1월 이극로·권오익 등과 함께 통일정권촉성회를 결성해 우익의 비상국민회의와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7월 도진호(都鎭浩)와 함께 좌우합작촉진회를 결성했다. 1947년 2월 〈세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이극로·조봉암·백남규(白南奎) 등과 함께 민족주의독립전선을 결성하고 상임위원 및 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10월에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이 결성되자 권태석(權泰錫) 등과 함께 5인 정강·정책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 문화인 108인 성명'에 서명하고, 권태석과 함께 김규식의 제2차 특사로 평양에 가서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7월 김규식과 김구가 연합한 통일독립촉진회에 참여했다. 1950년 이후 〈동아일보〉와 〈사상계〉 등에 경제평론을 발표하여, 대외의존체제의 극복과 내포적(內包的) 공업화를 통한 경제자립을 주장했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동양경제를 강의하기도 했다.
- 배영수 . . . . 2회 일치
결국 한화로 확정. 3년 21.5억의 값으로 결정됐다. 그 과정에서 직원이 [[안지만]], 윤성환 등의 계약을 하는데 배영수를 1시간 동안 멍하니 기다리게 했다고 한다.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018&article_id=0003131452|배영수 '길었던 1시간' 그리고 한화행]]. 하지만 작성한 [[정철우#s-2|기자]]가 기자인 만큼 걸러서 볼 필요가 있는 기사다. 그리고 이런 수법은 필요없어진 직원을 모멸감을 줘서 제발로 나가게 할 때 쓰이는 흔한 수법이라 온전히 실수라고 보는 것은 순진한 시각이다. 또 다른 기사에서는 저녁에 경산볼파크에 왔다가 허탕치고 10시에 불러서 다시 나갔다고 하니, 1시간이 아니라 몇시간씩 방치되었다고 주장했다.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44&article_id=0000287923&date=20141204&page=1|'한화행' 배영수 "광야에서 기다림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안현호 단장은 '전부 1~2시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마지막 협상이고 시간이 촉박해 개별적으로 약속을 잡을 상황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이후 KBO측에서 [[http://sport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76&aid=0003140133|부정투구가 맞으며]] 차후 적발시 엄중조치를 취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배영수는 몰랐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7월 12일 경기에서 [[http://live.sports.media.daum.net/video/kbo/322960/324897|로진백으로 2루심에게 지적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 블랙 클로버/113화 . . . . 2회 일치
* 자신이 "잭스 류그너"라 주장하는 괴한은 [[마법제]] 율리우스에게 불경한 태도를 보여서 대회장에 있는 전원의 공분을 산다.
* 자신이 자줏빛 범고래단의 부단장 "잭스 류그너"라 주장하는 사내. 하지만 진짜 잭스는 그에게 당해 어느 골목에 버려져 있다. 사내는 뻔뻔하게 잭스를 사칭한데다 뒤늦게 대회장에 도착해 [[마법제]] 율리우스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모욕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는 늦은 것에 대해서도 "곤란해하는 할머니가 있어서 마법기사단답게 도와줬다"는 뻔한 거짓말로 둘러대는데 마법제는 그런 태도나 거짓말에도 특별히 개의치 않는다. 물론 그게 측근 마르크스가 넘어가준다는 건 아니었다. 그는 잭스라는 사내를 무례하다 꾸짖으며 머리를 향해 마법을 날린다. 근거리에서 날린 마법이나 잭스는 훌쩍 뛰어넘어 피해 대회장으로 내려선다.
- 송주훈 . . . . 2회 일치
2010년 [[나이키]] U-16 친선 대회를 통해 처음으로 태극 마크를 달았으며, 2012년 [[발렌시아]] U-20 친선 대회 때 故 [[이광종]] 감독의 부름을 받은 후 꾸준히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려왔다. 2013년 [[FIFA U-20 월드컵]]에서도 골을 넣는 등 맹활약을 했고, 이광종 감독이 건강 문제로 하차한 후 출범한 [[신태용]] 감독 체제에서도 주장을 역임하는 등 중용되었으며, 2015년 [[킹스컵]], [[2016 AFC U-23 축구 선수권 대회]] 등의 대회에서도 꾸준히 주전 센터백으로 발탁되어 [[뿌뿌뿡|팀의 수비를 책임졌다.]] 올림픽 직전까지 있던 4개국 초청 대회에도 참가하는 등 대표팀의 주장을 맡으며 팀을 잘 이끌었으나, 올림픽 직전 입은 발가락 부상으로 올림픽 최종 명단에서 하차하게 되었다. 그의 대체자로는 [[김민태]] 선수가 발탁되었다.
- 슈퍼걸(드라마)/1시즌 3화 . . . . 2회 일치
카라는 어린애처럼 책임감이 낮다고 묘사한 그랜트가 쓴 자신의 기사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슈퍼걸은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바라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윈의 정보에 따라서 리액트론이 숨어 있는 폐차장으로 향한다.
DEO기지에서 행크는 눈을 붉게 빛내며 알렉스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행크는 알렉스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추궁하는데, 알렉스는 지구인과 외계인을 나눌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행크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하라고 말하며 리액트론을 잡는 법을 함께 생각해준다.
- 식극의 소마/203화 . . . . 2회 일치
* 하지만 [[타도코로 메구미]], [[타쿠미 알디니]]는 팀 사이바 쪽이 승리라고 주장한다. 특히 타쿠미는 에리나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 안영준 . . . . 2회 일치
삼광초-용산중-경복고를 거쳐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저학년 시절부터 실전에 투입되어 활약하였다. 3학년 시절에는 팀의 주축선수로 활약하였으며, 4학년 시절에는 주장인 [[허훈]]과 팀의 챔피언결정전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허재]]감독의 아들이자 [[허웅]]의 동생인 주장 [[허훈]]에 가려져있긴 하지만, 묵묵히 자기 할 일을 다하는 선수이다.
- 에이스 컴뱃 제로 : 더 벨칸 워 . . . . 2회 일치
벨카 공국은 경제적 파산으로 인해 우스티오 공국 같은 몇몇 국가를 독립시켰다. 그럼에도 벨카의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극우파가 집권한 벨카는 우스티오에서 발견된 천연자원을 자국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우스티오를 침공했다. 이것이 "벨카 전쟁"의 시작이었다.
벨카 전쟁을 일으킨 국가. 나라가 쪼개지는 와중에 극우파가 득세, 우스티오의 자원이 자국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우스티오를 침공했다. 전설적인 공군력으로 전쟁 초반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 왕당파 . . . . 2회 일치
[[영국]]의 경우, [[청교도 혁명]](영국 내전)을 시발점으로 하여 의회파와 왕당파가 나타났다. 의회파와 왕당파는 수차례 복권과 혁명을 거듭하며 경쟁하였으나,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기존의 절대주의 왕당파는 [[스튜어트 왕조]]의 복위를 주장하는 [[자코바이트]]로 분리되었고, 명예혁명으로 성립된 영국 왕실은 의회를 존중하여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전례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부터 절대주의 왕당파는 더 이상 영국 정계에서 유의미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 혁명]]을 시발점으로 하여 공화파와 왕당파가 나타났다. 왕당파는 [[부르봉 왕조]]의 복권을 주장하였으며, 혁명을 일으킨 공화파와 피를 피로 씻는 혈투를 벌였다. [[부르봉 왕조]]는 군주의 지위를 상실했지만, 수백년간 프랑스를 다스린 왕조였기 때문에 부르봉 왕조의 권위는 여전히 상당히 높아서 주로 보수적인 농촌을 중심으로 막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 왝더독/줄거리 . . . . 2회 일치
영화의 시작은 선거 홍보 영상으로 시작된다. 승마장에서 남자 두 명이 다음에는 대화하다가 "달리는 중에는 말을 바꾸지 않는다"라는 말을 한다.그러고는 현직 대통령의 재선을 주장하는 문구가 나오는 영상. 이 영상은 여러 버전이 있는데, 나올 때마다 등장인물들에게 구리다고 까인다.
대통령 선거 2주일 전 밤, 콘래드 브린(로버트 드 니로)이라는 남자가 [[백악관]]에 찾아온다. 백악관을 방문했던 "반딧불 소녀단"의 단원 중 하나가 대통령과 단 둘이 방에 들어갔다 나왔다. 이후 그 소녀는 대통령이 자신을 성희롱했다고 주장했다. 브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악관을 방문한 것. 그는 시간을 끌기 위해 당시 [[중국]]을 방문 중이던 대통령이 희귀병에 걸린걸로 위장해 귀국을 지연시킨다.
- 운명의 붉은 실 . . . . 2회 일치
붉은 실의 전승(赤い糸の伝承) 미카도만게츠의 음앙점술(土御門萬月の陰陽占術)이라는 지금은 없어진 사이트에 의하면, 서양에서는 붉은 실 이외에도 다양한 색상의 실이 있다고 주장한 듯 하다.
오행사주추명술(五行四柱推命術)이라는 점술 사이트에서는 운명을 잇는 다섯 개의 색의 실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유료로 생년월일을 받아 상대와 점술을 쳐주고 있다.
- 울릉군 . . . . 2회 일치
또한 항공편이 생긴다면 항공기에게 연료란 돈 폭탄이니 활주로가 완공되어 경비행기가 다닌다면 대구나 [[포항공항]]으로 갈 것이란 전망이 많다.[* 다만 1시간 내외의 단거리 항공노선은 이륙시 드는 연료비가 전체 연료비에 거의 40%에 육박할만큼 비중이 크기 때문에 포항, 대구보다는 김포노선이 추가될 가능성도 크다. 또한 착륙시 활주로 진입과정이 길기 때문에 실제로는 김포노선이든 대구, 포항노선이든 소요시간이라든지 요금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을(10~20분 차이)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김포 제주간 운항시간이 약 1시간 인데 광주나 여수에서도 제주까지 40분은 걸린다.] 게다가 울릉도 경제권이 이미 [[강원도]]가 아닌 [[경상북도]]로 통합되어 있는 데다가[* 울릉도는 천주교 교구도 [[천주교 대구대교구|대구대교구]] 소속이다. 교구 소속은 만약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강원 쪽으로 옮겨지면 따라서 [[춘천교구]]나 [[원주교구]] 쪽으로 이동할 수도 있겠지만..], 주민 대다수가 [[경상북도]] 출신이기도 하고 행정구역이 1914년 이래 경상북도가 되었으니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섬이라는 특성상 마냥 강한 소속감을 가지긴 쉽지 않다.[* 2013년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김순견 새누리당 예비후보가 [[http://www.kyongbuk.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632438|울릉특별자치군 설치법률을 제정하겠다는 주장]]을 한 적도 있다. 2017년에는 강원도에서 [[http://m.mbceg.co.kr/post/44307?|고성특별자치군 주장도 등장]]했다.] 그래도 일단 행정구역 관할구역 설정상 경북지방경찰청 소속이다. [[대한민국 해양경찰청|해경]]의 경우를 보면, 경북 해역 담당인 [[포항해양경찰서]]가 아닌 동해해양경찰서의 관할 구역인데 이건 해경이 애초에 '도' 단위로 관할 구역을 끊을 만큼 조직이 커서 도마다 하나씩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 --물론 동해가 더 가깝기도 하고-- 다른 예로 [[충청남도]] 해안의 경우 평택해경과 태안해경이 분할 관리하며, 이 평택해경은 [[경기도]] 남부와 충청남도 북부 해안을 아울러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평택해경이 생기기 전에는 태안해경이 전부 담당했다. 부산의 경우 역시 부산해경이 있는데도 부산신항 일대는 창원해경이 담당한다. 점점 조직이 커지면서 점점 관할 구역을 나눠가지는 구조다.
- 원우(가수) . . . . 2회 일치
[[승관]]이 "이 형만큼 애교 없는 사람 없어요."라고 평할 만큼 애교를 부리는 것에 어색해하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데뷔 후 열심히 연습했는지 [[2015년]] [[11월 8일]]에 열린 미니 팬미팅에서 [[https://youtu.be/wLJTh9HwbVM?t=46s|티아라의 뽀삐뽀삐]]를 추며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정한]]은 [[2018년]] 한 방송에서 [[원우]]를 두고 은근히 애교가 있는 성격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는데, 이 말을 들은 [[민규]]가 의아해 하자 "아냐, 있어. 형들한텐 있어."라며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민규]] : 엉?? 헣.. 궁금하다ㅎ..~~ 동갑인 [[준(세븐틴)|준]]도 [[원우]]가 상대방의 눈치를 볼 땐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문자로 돌려 물어본다는 일화가 밝히며 은근히 귀여운 행동을 많이 한다고 말해 동생들에겐 멋있~~는 척을 하~~고 동갑과 형들에겐 귀여운 그의 갭 차이가 드러나기도 했다.
* 서울에서 오래 살았는데도 가끔씩 [[https://youtu.be/UAPWgwcCnbg|사투리 억양이 묻어 나온다.]] 부산 출신에 비슷한 시기에 서울로 올라와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지만 사투리를 다 까먹어 이제 사투리를 잘 안 쓴다고 주장하는 [[우지(세븐틴)|이분]]과 대조된다. 종종 멤버들이 [[원우]]의 억양을 따라 할 때도 있다.
- 원한해결사무소/6화 . . . . 2회 일치
다음날 아줌마는 쓰레기를 뒤져서 우편물 도둑을 잡아내자고 한다. 아줌마는 새댁이 우편물 도둑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수수께끼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도둑맞은 우편물과 접착제, 그리고 부이사 아줌마의 집에서 먹었던 과자 상자가 모두 한 쓰레기 봉투에서 나타난다. 아줌마는 '개똥' 밖에 하지 않았다고 결백을 주장하지만 오히려 모든걸 자백한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 위안부 소녀상 망치 테러 사건 . . . . 2회 일치
'한일 위안부 합의 폐기! 소녀상 철거 반대! 대학생행동'은 오후 5시, 소녀상 테러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였다. 이들은 "소녀상 테러를 사주한 배후를 철저히 수사해 진실규명과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한 학생은 "여성이 소녀상의 머리를 가격하는데 바로 앞에 있던 수많은 경찰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고 주장했다.
- 유동근(배우) . . . . 2회 일치
그러나 이런 그에게도 [[흑역사]]가 있는데, 아내인 [[김을동]]가 출연 중이던 드라마 '왕과 나'의 CP(책임 프로듀서)와 조연출을 폭행한 적이 있었다. 본인이 주장하는 폭행 이유는 "대본이 [[쪽대본]] 형식으로 너무 늦게 나와 촬영이 길어지면서 아내 몸상태가 안 좋은 상태라서 배려해줄 것을 부탁하는 와중에 제작진이 들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여서..."였다고. 막장스러울 정도의 [[쪽대본]] 때문에 불만이 많은 상태였다고 한다.
정황을 따져보면 '왕과 나' 촬영 당시 쪽대본 & 이런 저런 사유 때문에 그 날따라 몸도 아픈 상태이던 아내 전인화가 너무 힘들어서 눈물까지 흘리는 바람에 유동근씨가 화가 나서 따지러 간 거 같은데... 본인 주장에 따르면 아내가 걱정되어서 항의하는 와중에도 CP가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고. [[http://star.mt.co.kr/stview.php?no=2007122719592056123&type=3|당시 인터뷰]]. 자기 자신도 연기자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항의한 취지 자체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완력을 사용한건 아무래도 잘못이 맞다. 설상가상으로 이 사건이 터진 후 이 드라마의 연출자인 故 [[김재형]] PD도 건강상의 이유로 사극 제작에서 완전히 은퇴한다. 그리고 이걸 보고 온라인 상에선 '''용의 주먹'''이라며 조롱하는 반응도 있었다. 이 바람에 [[SBS]] 드라마는 언제 다시 나올 수 있을 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가, [[SBS]]의 [[아테나:전쟁의 여신]]에 NTS국장 권용관 역으로 출연이 확정되면서 4년만에 SBS 드라마로 컴백하게 되었다.(여기서 유동근 외모가 스플린터 셀 컨빅션 샘 병장과 닮았다.)
- 은혼/600화 . . . . 2회 일치
* 이 싸움은 긴 세월 이어진 천도중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기 위한 싸움. 당연히 해방군과 손을 잡는 것이 옳지 않겠냐고 주장한다.
* 하지만 안절부절 못하는 노부노부의 태도를 놓고 공포에 떨고 있다고 판단, 강한 어조로 주장을 되풀이한다.
- 은혼/624화 . . . . 2회 일치
* 지휘관이 쓰러지자 신라 부대는 원통해하면서도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승리의 일각을 담당한 카츠오는 "우주제일의 야쿠자" 지로쵸의 힘을 잘 보았냐고 과시하며 자신도 은근슬쩍 "우주 제일의 7 대 3 가르마"라고 포장하지만 가구라가 가차없이 태클을 건다. 가구라는 이상한 대항심을 발휘해 소타츠를 쓰러뜨린게 자기네 대장이니 해결사는 곧 "우주제일 야쿠자 해결사"라고 주장한다. 신파치는 언제 야쿠자가 됐냐고 태클에 태클을 거는 직업정신을 발휘한다.
피라코는 애초에 도로미즈파의 부두목은 카츠오가 아니라 자신이라며 자리를 꿰찬다. 은근슬쩍 지로쵸가 후계는 자기로 정해놨다고 주장하는데.
- 이강돈 . . . . 2회 일치
||<-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fe5d0a><:> '''{{{#ffffff 빙그레 이글스 역대 주장}}}''' ||
당시 드래프트 제도상 대구 지역의 선수는 [[삼성 라이온즈]]가 우선권을 가졌는데, 여기서 삼성이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지명해 놓고서는 이강돈에게 먼저 군대를 갔다 오면 입단시켜 주겠다고 한 것. 다른 선수에게는 관대하게 입단 조건을 걸고서, 유독 자신만 군대를 걸고 넘어지는 것에 화가 난 이강돈은 전격적으로 빙그레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드래프트의 질서를 해치는 이 행동은 '''그냥 넘어갔다.'''[* 그렇긴 한데, MLB에서 [[스캇 보라스]]의 유명세를 알린 loop hole FA사건 원인이 드래프트 지명 후 15일 안에 구두로든 서면으로든 계약하겠다는 의사를 선수에게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 의무 불이행이므로 계약 무효를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져서인 만큼, 삼성 측이 계약하지 않고 군입대를 제안한 것이 의무 불이행으로 해석될 가능성 때문에 법적 공방 들어가도 이강돈에게 승산이 있는 사안이었다. 한국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 이경영(1960) . . . . 2회 일치
||1심 판결에 대해 이경영은 항소하지 않았다.[* 항소하지 않은 사실은 2심 판결문 상에 검찰의 항소에 대한 판단만이 담겨있을 뿐, 이경영의 항소에 대한 판단은 없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만약 이경영도 항소하였다면, 판결문에 이경영의 항소에 대한 판단도 담겨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검찰은 항소하였다. 검찰의 항소 이유는 '이경영은 첫 번째 성관계 때도 L양이 미성년자라는 점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첫 번째 성관계도 유죄'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2심 법원은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검찰의 항소를 기각하고, 1심 법원과 똑같은 판결을 하였다. 아래는 당시 판결을 보도한 기사다.||
>서울고법 형사2부(재판장 이성룡ㆍ李性龍 부장판사)는 25일 청소년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영화배우겸 감독 이경영(41)씨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1심대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160시간의 사회봉사명령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모(18)양과의 3차례 성관계 중 첫 번째 성관계를 맺을 때는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피고인의 주장을 인정, 이 부분에 대해 무죄를 인정한 원심 판결은 정당한 것으로 보여 검사 항소를 기각한다"고 밝혔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0157848|#]]
- 이성희(배구감독) . . . . 2회 일치
2013-2014 시즌에는 새 외국인 선수 조이스의 활약에 힘입어 14승 16패(3위)를 기록, 플레이오프에 진출[* 인삼의 홀수해 시작 시즌의 무조건 봄배구행 진리도 있었지만, 사실은 잘해서가 아니라 밑의 3팀이 못했던 게 [[이유]]. [[져주기 게임|옛 버릇]] 버리긴 커녕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대놓고 핵노답이었던 팀]], [[602 대첩|주장이 시구]]했더만 [[타어강]] 옮아서 [[김연견|병원 차릴 정도로]] [[김주하(배구선수)|부상 선수가]] [[정미선(배구선수)|속출해서]] [[수원 현대건설|강제 탱킹한 팀]], [[김상현, 진해수 ↔ 송은범, 신승현 트레이드]] 이상의 [[경북 김천 하이패스|최악의 트레이드로 탱킹한 팀]]들 덕분에 거둔 3위였다. 즉, 이성희의 역량 발휘로 3위를 한 건 절대로 아니라는 소리다.]하였으나, [[GS칼텍스 서울 KIXX|GS칼텍스]]에 스윕당하여 탈락하고 말았다.
결국 [[2016년]] [[4월 5일]] 자로 계약이 만료된 후, [[서남원]]에게 인삼공사의 감독직을 넘겼다. 팬들은 이성희에 대해 두 번 다시 감독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인삼공사가 재계약하지 않고 이성희를 내친 것에 대해 통쾌해하는 중. --헤일리! 이제 다시 와! 너 툭하면 맨날 갈구던 감독이 드디어 나갔어!!-- --그런데 서남원은 이성희와 [[서울시립대학교]] 동기이자 [[절친]]이라는 게 [[함정]].--
- 이순재(1935년 10월) . . . . 2회 일치
||<#878787> '''{{{#EEE156 출생}}}''' ||<(> [[1935년]] [[10월 10일]][* 주민등록상으로는 1935년 10월 10일생인데 실제로는 저 생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국회의원이던 당시나 현재 [[http://rokps.or.kr/profile/profile_view.asp?idx=169&page=1|대한민국헌정회에서는 1935년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2018년자 뭅뭅 인터뷰에서는 (세는나이) 84세로 본인을 소개하였다.]([age(1934-11-16)]세)[* 1934년생일 때 기준.][br][[일본령 조선]] [[전라북도]] [[전주시|덕진구]] ||
정치적 성향은 전반적으로 보수이다. [[2011년]] [[10월 22일]] [[KBS 1TV]]에서 진행한 [[4대강 정비 사업]] 홍보 방송 '특별생방송 4대강 새물결맞이'에 출연하여 5분 50초간 4대강 사업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산에 나무가 무성하고 강에 물이 풍부하게 흐르면 우리 삶도 풍부해진다'라며, 4대강 사업을 '새로운 문화가 생기고 새로운 행복이 만들어지게 하는 사업'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2012년 대선에서도 박근혜를 지지했다.
- 이유리(배우) . . . . 2회 일치
* 2006년 인기리에 연재된 박소희 작가의 동명의 순정만화가 드라마 《[[궁(드라마)|궁]]》으로 리메이크 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네티즌으로부터 주인공 '신채경'역으로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준수한 연기력과 만화 원작의 신채경 모습과도 싱크로율이 높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여주인공으로는 [[윤은혜]]가 낙점됐다. 이유리는 인터뷰에서 제의를 받았으나 연기자로서 차근차근 한 발을 내딛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사랑과 야망》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다만 '《[[궁(드라마)|궁]]》의 전작이 바로 이유리가 출연한 《영재의 전성시대》였는데 바로 다음 작품을 출연하는게 말이 안된다.', '제작사는 이유리에게 캐스팅 제의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등을 근거로 들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으나 《영재의 전성시대》에서 이유리는 주인공도 아니였을 뿐더러 전작을 했다고 다음 작품에 출연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견에 불과하고 제작사에서 캐스팅 제의를 한 적이 없다는 주장 또한 이유리가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캐스팅 제의 사실을 분명히 언급했던것과는 달리 출처가 불분명 하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 이인 . . . . 2회 일치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붕괴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야당 원로로서 범 야당통합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60년]]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1962년]] 유엔인권옹호한국연맹 이사에 임명되었고,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장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자(字)는 자옥(子玉), [[호 (이름)|아호]]는 애산(愛山)이며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다. [[대구광역시]] 출신.
이후 [[장택상]] 등과 고학생의 상조(相助)기관인 갈돕회를 조직했다. [[1925년]]에는 갈돕회의 총재를 맡고 여자고학생상조회를 조직하는데 도움을 주어 고학생을 돕는 한편,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위원이 되어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1927년]] [[신간회]]의 창립과 더불어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신간회]]의 해소론이 제기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만의 민족단체를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1930년]]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들의 흥농사(興農社) 사건을 변호하다 [[재판정|법정]]에서 일본의 학정(虐政)을 비난하여 법정불온변론 혐의로 6개월 동안 [[변호사]] 자격정지 및 정직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조선물산장려회]] 회장이 되었다. 1931년에는 조선변호사협회 회장이 되었고, 1935년에는 [[이우식]](李祐植)·[[김양수]](金良洙)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한 비밀후원회를 조직하여 재정지원을 했다.
- 이정재(영화배우) . . . . 2회 일치
2번 적발됐다. 첫 번째 음주운전은 1999년 9월 13일, 자신의 [[자동차]]인 [[BMW]]를 혈중 알코올 농도 0.222% 만취 상태로 운전을 하다가 당시 23살 여성(회사원) 송모씨가 타고 있는 [[마티즈]] 옆 부분을 들이 박은 것이다. 당시 동료배우 정모씨와 있었던 걸로 알려져 있었고, 이씨는 사고 직후 술을 마신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운전을 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며 출동한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정재는 경찰에서 "내가 운전하지 않고 매니저가 대신했다"라고 혐의 사실을 부인을 했었다. ~~[[강정호|17년 뒤 똑같은 수법을 쓴 메이저리거가 등장하는데...]]~~ 경찰서에서는 시인하였다고 한다. 이 음주운전으로 인해 불구속 입건 및 면허 취소가 되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091400209122009&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9-09-14&officeId=00020&pageNo=22&printNo=24301&publishType=00010#|기사]] 그리고 첫 번째 음주 운전 사고가 난 3년 뒤 또 한 번 2002년 7월 22일 [[강남구]] 청담동 청담초등학교앞에서 음주단속 중인 경찰에게 적발되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147301|기사]]
2015년 1월16일 '동양 사태' 항소심 5차 공판…동양피해자대책협의회·투기자본감시센터는 배우 이정재· 이혜경 동양그룹 부회장 배임 혐의 구속수사 촉구 기자회견을 개최하였다. 또한 동양그룹 사태로 피해를 본 소액투자자들이 동양네트웍스의 외부감사를 맡았던 삼일회계법인에 대해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피해자들은 이정재가 동양사태와 관련이 있으며 배임혐의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아직 재판중이다. [*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2978127|기사]]]
- 이지은(2000) . . . . 2회 일치
자신이 이지은의 질투로 친구 관계를 맺기 힘들었고 이지은의 전 남친과 친구, 그리고 이지은이 자신의 집에 술을 들고와 진창 취하고 잠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성폭행을 당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뮤직웍스가 네이트에 돈을 써서 글이 계속 내려간다는 주장도 있는데 뮤직웍스는 돈이 없고 이런 논란에 무대응으로 일관해왔다.
- 이채영(fromis_9) . . . . 2회 일치
이채영이 2013년에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글이[[http://pann.nate.com/talk/337716607|2017년 6월]]과 [[http://pann.nate.com/talk/339014341|2017년 10월]]에 [[네이트 판|한 커뮤니티]]에 올라간 적이 있다. '''[[아이돌학교]] PD는 2017년 7월에 [[http://hei.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707122947H|확인 결과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 많은 네티즌들이 커뮤니티에 올라간 글을 사실로 간주하고 [[악플]]을 작성하고 있다.
반대로, 이채영이 학교 폭력 가해자라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루머라고 생각하는 쪽에서는 이러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 전소민(배우) . . . . 2회 일치
* 2015년 초 [[윤현민]]과 공개연애를 하다 2016년에 헤어졌는데, 이 때의 경험때문인지 [[https://mnews.joins.com/article/22469099|공개연애는 하지 않을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덤으로 진지하게 연애를 한 경험은 세번이라고 한다. 2017년에 런닝맨 고정으로 첫 합류한 방송에서 직접 밝힌 적 있으며, 2018년 위험한 파트너 특집 때도 “20대 때 세명이랑 결혼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개중 두명은 눈물의 커피숍 휴지인 J와 윤현민인가....~~그리고 세번 다 차였다고 한다. 그 중 한번은 상대가 바람피는 걸 눈치채고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거라며 차인건 두번이라고 주장했는데 [[설득력 없는 설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글쎄...]][* 우습게도 바로 직전에 거의 동일한 경험담을 털어놓은 광수에게 그건 차인거라며 돌직구를 날려놓고 자긴 다르다고 주장하다 뜬금없이 그 전남친에게 “너, 나한테 연락하지마!”라며 영상편지를 시전하기도]
- 주주장 . . . . 2회 일치
|이름= 주주장<br />Juju Chang
'''주주장'''(Juju Chang, [[1965년]] [[9월 17일]] ~ )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다.
- 진격의 거인/92화 . . . . 2회 일치
* 지휘관 마가트와 콜트는 전선의 동향을 주시한다. 마가트는 콜트의 의견을 묻는데, 그는 적 전선을 충분히 타격했으니 전사대를 물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적의 퇴로를 봉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의 시선은 곧 하늘로 향한다. 이제 상공의 비행선이 육안으로도 뚜렷하게 보인다. 마레의 최주력이자 최고전력. 작전의 성패는 그들 몫이다.
- 집단연구 . . . . 2회 일치
최초 작성자의 주장에 따르면 함장이 어느날 "독자연구"에 대한 삭제 요구를 어떻게 둘러치기 하려고 대충 지어내서 주장한 말인데 규정화 되어서 등재되었다고 하는 단어.
- 최광식 . . . . 2회 일치
[[이경재]] 한나라당 의원은 “야당에선 낙하산 인사라고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장에서 문화재청, 문화부 장관에 임명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말 그대로 승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ref>[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32598 “최광식, ‘묻지마 청장’ 이어 ‘낙하산 장관’”]《PD저널》2011년 9월 15일 김세옥 기자</ref>
김제윤 민주당 의원은 최 후보자가 문화재청장 시절 제주해군기지 건설공사 승인과 관련‘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이하 ’매장문화재보호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제주해군기지 부지에서 문화재 발굴조사 과정에서, 수혈주거지(움집터), 유구 등이 잇따라 발견되고 있으나 문화재청이 해군 측의 공사를 중지시키지 않은 것은 물론 일부 조사완료구역에 대해서는 공사 시행을 승인까지 해주었다는 것이다.<ref>[http://www.newsjeju.net/news/articleView.html?idxno=69369 최광식 '제주해군기지 책임론' 유탄 맞을 듯]《뉴스제주》2011년 9월 14일 고병택 기자</ref><ref>[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04297 최광식 후보자 ‘제주해군기지 유탄’ 맞나?]《제주의소리》2011년 9월 14일 좌용철 기자</ref><ref>[http://www.ajnews.co.kr/view_v2.jsp?newsId=20110914000169 최광식 장관후보,‘제주해군기지 유탄’맞나 ?]《아주경제》2011년 9월 14일 박현주 기자</ref>
- 최남선 . . . . 2회 일치
가출옥 후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창립했다. 같은 해 9월 주간지 '동명'을 창간해 [[1923년]] 6월까지 발행했다. [[1925년]]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계명구락부'활동에 참여했고, 동시에 《[[동아일보]]》에 사설을 쓰는 한편, 1926년 옛 백제 영토 방문기 '심춘순례'를 근대 최초의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를 출간했다. 이어 〈[[단군론]]〉(1926년), 〈[[불함문화론]]〉(1928년)을 발표하였는데, 특히 〈불함문화론〉에서 그는 동방 문화의 근원지를 단군 신화의 무대인 백두산이라고 주장하였다.
[[장준하]]는 [[사상계]]지 1957년 12월호에 <육당 최남선 선생을 애도함>에서 그의 친일 협력이 본심은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한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요, 항간에 떠도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과는 전면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ref name="changs"/>'라는 것이다. 그의 협력은 어쩔수 없는 것으로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ref name="changs"/>'라는 것이며, 그가 악의를 품고 친일을 했다는 주장에 대해 [[장준하]]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이라며 일축하였다.
- 최태영 . . . . 2회 일치
[[고대사]] 연구에도 관심을 가져, [[단군]]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하였다. {{출처|날짜=2014-2-3|《[[삼국유사]]》의 ‘[[환인]](桓因)’은 ‘[[환국 (의사 역사학)|환국]](桓國)’의 조작이라는 주장을 통해 잘 알려졌다.}} [[1989년]]에는 《한국 상고사 입문》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이 [[이병도]]와 공저한 것이라 주장하였으나 정작 해당 책에는 이병도가 저술한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90세 이상의 고령일 때도 활발한 저작 활동을 펼쳤다.
- 카라스노 고교 . . . . 2회 일치
전반적으로 수비력이 떨어지는 팀이었지만, [[후쿠로다니 학원|후쿠로다니 학원 그룹]]과의 단체 합숙 등으로 팀원들이 성장을 거듭하면서 이런 느낌은 많이 사라진 분위기. 다만 수비력이 떨어지던 시절에도 희대의 사기캐인 [[니시노야 유|주전 리베로]]와 윙리베로(...)급 활약으로 수비를 [[캐리]]했던 [[사와무라 다이치|주장]]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 둘 말고 다른 선수들이 떨어지는 편도 아니다. ~~어째 배구 외적인 일로 더 유명한~~ [[아즈마네 아사히]]와 [[타나카 류노스케]] 등 준수한 공격 자원들이 있으며, 공격과 수비 모두 다재다능한 주장 [[사와무라 다이치]]가 있다. [[히나타 쇼요]]는 봄고 대회에서, 신장이 2m인 상대학교 선수와 대등하게 매치업하면서 타교 선수들에게 꽤 이름이 알려진 모양이다. 또 부원수가 적은 팀 치고, 주전과 벤치조 간 전력차가 그리 큰 편이 아닌 것도 장점이다. 1학년들 중 유일하게 벤치 멤버인 [[야마구치 타다시]]도 원포인트 서버로 활약하고 있으며, 존재감 없는 2학년 둘도 속공 없는(즉 카게야마가 없을 때)히나타 보다는 더 뛰어나다는 언급이 나온다.
- 코만단테 카펠리니 . . . . 2회 일치
1943년 2월 20일, 독일 해군 총사령관 [[칼 되니츠]]는 일본에서 전쟁물자를 가져오는 선박들의 손실이 크니 이탈리아의 대형 잠수함을 수송용으로 개장해 사용하자고 주장한다. 이탈리아는 이를 독일 잠수함 7척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 그렇게 개장된 잠수함 중에는 코만단테 카펠리니도 있었다
이외에 일부는 [[영국]] 상선 미구엘 데 라링가(Miguel de Larringa)를 격침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자료가 맞지 않는다.
- 콜 오브 후아레즈 : 건슬링어 . . . . 2회 일치
1910년, [[아칸소]] 주 애빌린에 위치한 한 술집에 판초를 입은 노인이 들어온다. 그 노인은 자신이 전설적인 현상금 사냥꾼 "사일러스 그리브즈"라고 주장하며 사실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 게임의 화자. 자신을 전설적인 현상금사냥꾼 사일러스 그리브스라 주장하는 노인. 자신이 겪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 페어리 테일/515화 . . . . 2회 일치
* 전쟁이 끝난 이후 일주일만에 장군은 아이린을 배신한다. 그녀가 용화되고 있는 것을 근거로 괴물이며 아크놀로기아처럼 될 거라고 선동에 앞장선다. 아이린은 자신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며 어떻게든 대화로 해결하려고 한다. 뱃속에 그의 아이가 있다고 항변해 보지만 장군은 냉정하게 "나에게 괴물의 아이는 없다"며 떨쳐낸다. 그는 이제 아이린을 "용녀"라고만 부른다.
아이린이 위악하는 것이고 실제론 차마 자기 아이를 이용할 수 없어 실험이 실패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페어리 테일에는 막장부모가 워낙에 많이 나오고 그 중엔 진짜로 사악한 인물도 있었던 만큼 어떻게 될지 아직은 미지수.
- 풍운 . . . . 2회 일치
무명에 필적할 정도의 고수. 현재 배검산장을 지배하고 있다. 아무리 봐도 손가락에서 그냥 빔을 쏘는 거지만 검기를 쏘는 거니까 검술이라고 주장하는(…) 단맥검기를 무공으로 사용한다. 배검산장 편의 최종보스로 엄청난 무공을 자랑했으나, 동영편 중반부에 들어가자 순식간에 삭제당해서 사형제인 검빈과 나란히 목이 데롱데롱 달려다니게 된다(…).
* 통수제일주의 : 이 세상에 의리는 존재하지 않다고 주장하려는 듯이(…) 부하 캐릭터들에서 주변 캐릭터들, 주요 악역 캐릭터들까지, 정말 의리라고는 하나도 없고, 통수질이 쩐다. 약간만 불리해지면 통수질이 일상화 되어 있다. '통운'(통수+풍운)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 아군이나 선역 문파가 털릴때면 꼭 배신하는 놈이 하나씩 있다.
- 하이브리스토필리아 . . . . 2회 일치
하이브리스토필리아를 진화심리학으로 설명하는 주장도 있다. '사이코패스'가 생존에 유리하다는 주장하고 일맥 상통한다.
- 하이큐!! . . . . 2회 일치
* 작가인 후루다테 하루이치의 성별이 불분명하다. 심지어는 후루다테 작가가 졸업한 도쿄 디자인 전문학교에 졸업 후 찾아왔었다는 포스팅이 어떤 블로그에 올라왔는데, 댓글에서 어떤 팬이 후루다테 하루이치의 성별을 묻자 '작가님이 직접 공개하지 않으신 사생활은 공개할 수 없습니다' 라고 철통방어(...)를 하기도 했다. 종합 1000만 부 이상 팔린 만화책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으로도, 온라인으로도, 심지어는 인터뷰조차도 그의 활동은 적어 필명이 본명인지, 나이가 얼마인지, 성별이 무엇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작품들이 [이와테]현 및 [미야기]현을 작중 배경으로 하고 있고 작가 본인도 인터뷰에서 그렇게 밝혔으므로 출신지가 그 쪽인 것은 분명하다. 작가가 여자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팀메이트 간의 감정 묘사, 이름 및 생일의 의미와 관련성까지도 계산한 ~~설정덕후의~~ 섬세함, 특유의 동글동글한 그림체를 근거로 내세워 여자 작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반면 작가가 남자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wiki:"니시노야 유" 니시노야]와 [wiki:"타나카 류노스케" 타나카]의 [wiki:"시미즈 키요코" 시미즈] 빠질을 저렇게 완벽하게(...)그려내는 것은 남자밖에 하지 못한다.', '[쿠로코의 농구]도 남자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감정선을 잘 그려내고 있다' 등을 근거로 남자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점치고 있다.
- 하이큐/230화 . . . . 2회 일치
주장 사와무라 다이치는 숙소에 짐을 풀고 네코마타 야스후미 감독의 협조로 얻은 체육관에서 현지 조정에 들어간다고 공지한다. 그러면서 특히 시끄러운 삼인조에게 "숙소에서 소란피우지 마라"고 경고한다. 조용히 대답하는 히나타, 타나카, 니시노야.
* 휴식 시간에 사와무라는 작전회의를 위해 자리를 비운다. 그 사이는 엔노시타에게 인솔을 맡기는데 부주장인 스가와라 코시가 왜 자기한테 맡기지 않느냐고 항의한다. 스가와라는 분위기 타고 같이 놀기 때문에 인솔로 부적합.
- 하이큐/233화 . . . . 2회 일치
츠바키하라 측에선 이들이 시라토리자와를 꺾고 올라왔다고 긴장하고 있는데 주장인 [[에치고 사키에]]는 "시라토리자와랑 붙는게 나았겠냐"고 질문을 던진다. 물론 그렇다고 하는 선수는 없다. 에치고는 경기 내용상 저들이 시라토리자와를 압도한 것도 아니며 세상엔 "우연"이란 것도 존재한다고 분위기를 바꾼다. 마루야마는 좀 팔랑귀인지 그런 설명을 듣고 나자 "우시와카랑 안 붙게 돼서 럭키"라고 태세전환한다. 사실 주장인 에치고는 "이긴건 이긴 것"이니 만큼 카라스노의 실력을 얕보지 않는다. 단지 "작년의 반복"을 하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격려한 것이다.
- 하이큐/246화 . . . . 2회 일치
* [[쿠로오 테츠로]]와 [[사와무라 다이치]]가 "내일도 열심히 살아남아 봐라"는 말을 주고 받으며 양팀이 헤어진다. 하지만 농담처럼 이런 말을 주고 받았을 뿐, 돌아선 주장들은 웃음기가 사라진다. "내일도 살아남는다"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마구치 타다시]]는 뜬금없이 "저 호텔 밥은 고급 뷔페"였다는 말을 꺼낸다. 조용하던 1학년들이 한순간에 술렁인다. 하지만 곧 처지를 직시한다. [[히나타 쇼요]]와 [[니시노야 유]]는 지금 민박집의 바삭바삭한 연어나 달걀말이, 밥 무한 리필도 좋다며 질보단 양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 하이큐/266화 . . . . 2회 일치
야마모토가 삐딱하게 나왔다. 노력해온걸 발휘하려는데 어떻게 쉽게 힘을 풀겠느냐며, 자신에게 "근성이 부족했던" 거라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번엔 코즈메가 삐딱하게 나올 차례였다.
하지만 코즈메의 주장은 야마모토의 근성론 이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슬슬 싸움은 몸싸움으로 번지려는 조짐이었다. 야쿠 조차 너무 나갔다 싶어서 말리려고 했는데, 뜻밖의 인물이 둘의 싸움을 종결지었다. 후쿠나가였다. 진작부터 둘의 다툼을 지켜보던 그가 물 한 바가지와 애드립만으로 둘을 제압했다.
- 하이큐/267화 . . . . 2회 일치
* 사루카와 주장 "시라미네"는 승부를 낙관하며 짐작하게 플레이에 나서나 어느 순간 코즈메가 블록을 유도하고 있는걸 직감한다.
* 매치 포인트 직전에서 동점. 주장 시라미네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동료들을 돌아보며 상대가 자신들에게 익숙해졌지만 "완벽하진 않다"는 말로 독려했다. 선수들은 한결같이 동의했다. 다만 코트 밖의 시시오 감독은 조금 달랐다. 뭔가가 석연치 않다. 분명 불안요소가 있다. 그게 뭔지 정확하게 짚을 수가 없을 뿐. 이런 상태에서 플레이가 재개됐다. 야마모토의 2회차 서브. 네트에 걸리며 실점. 서브권이 다시 사루카와에 돌아왔다. "와쿠치"의 서브. 느리고 앞쪽에 떨어지는 서브였다. 야쿠가 있는 위치였다. 무난하게 받을 수 있는 공이었지만, 실수가 생겼다. 어중간하게 흘리는 리시브. 다이쇼는 이 어이없는 실책이라 쓴소릴 했지만 눈을 의심할 만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시시오 감독도, 상황을 낙관하던 시라미네도 같은 걸 보았다. 들었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했다. 마치 친절하게 안내하는 코즈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 허화평 . . . . 2회 일치
=== [[5.18 민주화운동/왜곡|5.18 북한 개입설 주장]] ===
5공시절의 정치인들은 대부분 매체에 노출되는 빈도가 매우 적은 데 반해 허화평은 방송 등 언론 노출 빈도가 높은 편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쾌도난마(채널A)|쾌도난마]]에 출연해서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을 강도높게 비판한 바 있다.[* 당시 정무수석이던 [[조윤선]]이 11개월 동안 대통령을 독대하지 못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내뱉자 "정무수석쯤 되면 대통령이 안 만나 주더라도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야 된다."고 일갈했고 [[새누리당]]에 대해서도 "본인들이 앞장서서 이 정국을 헤쳐나갈 생각을 해야지 친박이니 비박이니 싸우기만 하면 안 된다."며 비판했다.] 또한 대한민국은 [[문고리 3인방|권력의 문고리만 잡으면]] 출세할 수 있는 나라라며 ~~문고리 잡아본 사람으로서~~ 제왕적 대통령제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현진건 . . . . 2회 일치
[[1925년]] 1월, 현진건은 『개벽』에 단편 「불」을 발표하였다. 이때 그는 「시대일보」의 사회부장이 되었으나 「시대일보」가 폐간되면서 동아일보사로 전직하여야 했다. 3월 1일자 『개벽』 제57호에는 이때의 현진건의 근황에 대해 "근래에 빙허(憑虛) 군은 신문사 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더 많은 독서와 연구에 노력하겠다 한다. 늘 군은 조선의 평론계가 아무 보잘 것 없는 것을 매우 분개해서 앞으로는 논문도 쓰실 작정이라고. 고마운 일이며 즐거운 일이며 마음히 든든해지는 일이다."라고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다.<ref>「文壇雜談」 1925년 3월 1일자 『개벽』제57호.</ref> 그리고 박문서관에서 그의 중편 「지새는 안개」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2월에 단편 「[[B사감과 러브레터]]」를 『조선문단』에 발표하고<ref>현진건이 『조선문단』에 작품을 싣기 시작한 것은 『개벽』이 점점 '계급주의 문학'을 외치는 [[카프]]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부터였다는 지적이 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9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4월과 5월에는 수필 「목도리의 복면」과 「설 때의 유쾌와 낳을 때의 고통」을 각각 기고하였다. 7월에는 「조선문단과 나」라는 기고에서 작가는 삼삼오오 짝을 짓고 당을 나누어 서로 갈라서서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 작가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개체라는 "일인일당(一人一黨)주의'라는 용어를 써가며, 계급주의 문학을 옹호하는 카프의 주장에 맞서 내용적 가치와 계급적 가치란 별개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조선문단』에서 만든 조선문단합평회의 정기회원으로서, 10월에는 『조선문단』 신추문예(新秋文藝)에 응모한 작품들의 심사를 맡아 처음으로 평론을 싣기도 했다.
- 황교충 . . . . 2회 일치
[[2014년]] [[강원 FC]]로 이적하였으며, [[2015년]]에는 [[백종환 (축구 선수)|백종환]]과 함께 [[강원 FC|강원]]의 공동 [[주장 (축구)|주장]]을 역임했다.
- 황효진(기업인) . . . . 2회 일치
더욱 충격적이게도 공장주들에게는 각서 따위를 쓰거나 스베누에 투자하겠다는 이름 모를 누군가를 대려와 공장주들을 안심시키는 등의 사기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고 황효진 본인은 다른 업자에게 횡령을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횡령으로 긴급체포된 건 본인이었다. 이 인간이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방송이나 신문기사 등 매체에서 억울하다고 뻔뻔하게 호소하던 걸 생각해보면 [[소시오패스]]가 의심되는 수준.
생색내기를 상당히 좋아하는듯. 스베누 이전 평소에도 자신의 신발팜을 중간 중간에 광고하면서 게임리그를 진행하면서도 순수히 자신은 이득도 없이 스타크래프트를 사랑하기 때문에 리그를 여는 거라고 말했다. 애당초 무슨 불법도 아니고 그냥 자기 사업도 광고도 하려고 한다고 솔직히 말하면 되는데 광고 넣을 건 다 넣고 본인에게는 이득이 없다느니 이런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로 자신의 순수성을 과도하게 주장하며 포장하자 본인이 할 수 있는 게임 컨텐츠는 죄다 노잼이라 어쩔 수 없이 리그 진행하는 주제에 이전 웰치스 사건이나 인성 문제를 덮으려고 이미지 세탁 쇼한다는 소리가 많았다.
- 2013 K리그 심판매수 . . . . 1회 일치
이 사실을 접한 전북팬들은 2015년 경남팬들이 겪었던 멘붕을 그대로 겪게 되었으며, K리그 팬들은 약팀이었던 경남부터 강팀인 전북에 이르기까지 심판 매수가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또한 전북의 스카우터 C모씨는 직위로만 보면 일개 직원처럼 보여 [http://sports.new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311&aid=0000611035|전북의 발표처럼 개인의 잘못으로만 비춰질 수 있으나] 각종 커뮤니티에서 언급되고 있는 저 C모씨는 전북 프론트 유일 15년 경력 최고참으로 전북 내부에서도 상당한 위치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경남과 마찬가지로 전북도 고위급 인사가 저지른 범죄인데다가 전북 역시 "단순한 도의적 책임"만이 있다고 보기엔 어렵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5분의 3 조항 . . . . 1회 일치
이 조항은 중대한 모순을 가지고 있다. 평소 남부 사회에서는 흑인 노예의 인권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경우에는 흑인 노예를 '재산'이라고 주장했지만 여기에서는 예외로 (5분의 3이긴 하지만) 인간으로 '취급'하고 있다.
- A-10 선더볼트 . . . . 1회 일치
근접항공지원용으로 설계되었기에 저공에서의 기동성과 생존성에 중점을 두었다. 생존성에 경우 콕핏 전방향에 3.8cm짜리 [[티타늄]] 장갑판을 둘렀을 정도. 이 티타늄 장갑은 흔히 "욕조"("bathtub")라고 표현된다. 미 공군의 주장에 따르면 23mm 포탄에 직격당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 COCOM . . . . 1회 일치
1949년 11월, [[자본주의]] 국가들 측에서 공산권 진영에 대한 수출 통제기구로서 출범한 위원회이다. [[미국]]의 주장에 따라서 설립되었으며, 공산권에 대한 전략 물자와 기술 수출의 방지를 목적으로 하였다. [[파리]]에 본부를 뒀다.
- Crusader Kings 2 . . . . 1회 일치
* 명분: 해당 인물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작위들. 이런 작위들의 경우에는 전쟁을 걸어서 빼앗을 수 있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 . . . . 1회 일치
자국의 국민지역이나 자국이 자기것이라고 주장하는 영토를 가지고 있는 국가에게 사용 가능. 해당 영토의 할양을 요구한다. 국토 전체가 할양 대상인 경우 합병된다.
- EM 드라이브 . . . . 1회 일치
* EM 드라이브의 작동은 워프 버블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 JOY축제 . . . . 1회 일치
그리고 JOY가 자신의 일기에 [[자전거]]를 탄 소년과 [[교통사고]]를 냈으나 오히려 자신보다 소년이 나쁘다고 주장하거나, 남편의 회사에 이름만으로 임원으로 올라가서 [[전업주부]]이지만 월급을 받는 상태이거나, 전업주부임에도 불구하고 [[보육원]]에 아이를 집어넣는 등. 다양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 V-22 오스프리 . . . . 1회 일치
2016년 12월 14일 주일미군 MV-22 오스프리가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660105&code=11141100&sid1=int|훈련중 오키나와 앞바다에 추락했다.]] 이전부터 오키나와의 반전단체들은 오스프리가 위험하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더욱 불이 붙었다.
- 강구열 . . . . 1회 일치
* 그밖에 [[박카스 스타리그 2008]] 4강에서 완패한 [[박찬수]]([[KTF 매직엔스]], 현재 영구제명), [[네이트 MSL 2009]] 8강에서 셧아웃당한 [[김대엽]]([[KT 롤스터]]), [[빅파일 MSL 2010]] 8강에서 [[김택용]]에 1대3으로 패해 탈락한 [[염보성]]([[제8게임단]]) 역시 강라인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네임밸류가 높다는 이유로 인해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박찬수는 [[로스트사가 MSL 2009]]에서 우승함) 최근 [[로스트사가 MSL 2009]]에서 박찬수에게 셧아웃당한 [[김명운]]([[웅진 스타즈]])등이 신규 멤버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8강에 진출하면서 광속 탈락을 피해가 가입 실패하고 말았다. 이중 1명은 영구제명, 1명은 사실상 은퇴. 또한 [[박카스 스타리그 2010]] 4강에서 [[송병구]]에 셧아웃당한 [[김현우 (프로게이머)|김현우]]([[STX 소울]])도 차기 [[진에어 스타리그 2011]] 8강에 진출해 강라인 가입에 실패했다. [[유병준 (1993년)|유병준]]([[삼성전자 칸]])도 [[ABC마트 MSL 2011]] 8강에서 [[이제동]]에게 3대1로다가 패하면서 다음 MSL에서 광탈하면 강라인이 될 뻔했으나, MSL이 없어지면서 유병준도 강라인 가입은 면했다. 유병준도 2012년 6월 은퇴. [[진에어 스타리그 2011]] 4강에서 [[허영무]]에 셧아웃당한 [[어윤수]]([[SK Telecom T1]])도 강라인이 될 뻔했으나 [[티빙 스타리그 2012]] 8강에 진출하면서 강라인 가입은 면했으며, [[김정우 (프로게이머)|김정우]]도 본래 강라인이었으나 [[대한항공 스타리그 2010 시즌1]]에서 우승하면서 탈퇴가 확정됐고, 영구제명된 [[박명수 (프로게이머)|박명수]]도 [[박카스 스타리그 2009]]에서 준우승하면서 탈퇴, 임의탈퇴한 [[한상봉 (프로게이머)|한상봉]]도 [[아발론 온라인 MSL 2009]]에서 준우승하면서 탈퇴, [[이영한]]도 8강에 3전전승으로 진출하면서 강라인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 강중인 . . . . 1회 일치
《[[삼천리 (일제 강점기의 잡지)|삼천리]]》에 〈최근의 반도의 경제사범 국민의 신경제 윤리의 파악을 위하여〉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경제사범을 "미증유의 국난"을 돌파해 "대동아를 건설하는" 국가적으로 중대한 순간에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집단으로 묘사하고, 이들은 국민의 일대수치이므로 엄벌주의로 대처할 것이라 경고했다. 또한 관민이 일체가 되어 "일사보국의 성을 다함"으로써 성업을 어서 완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 개미 . . . . 1회 일치
인간만이 서로를 죽인다는 주장을 반박하는데 주로 사용된다.
- 고유민 . . . . 1회 일치
스페셜 브이 프로그램에서 밑도 끝도 없는 드립으로 선배들을 쇼크에 빠지게 했는데, '''"내가 [[수지(miss A)|수지]] 닮았다."'''고 하는 이상한 사람이 들어왔다고 해서 보니 당시 1년차 고유민 이었다. 이는 [[황연주]]와 [[양효진]][* 양효진의 경우 심지어 본인이 [[전지현]] 닮았다고 말한 걸 들었을 정도다.]이 직접 들었고 아니겠지 하고 넘겼으나 동기 정현주가 당시 주장이던 황연주에게 일러바치면서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 공산당 지도 원리 . . . . 1회 일치
공산주의의 결정적인 반민주적 요소이다. 소련의 영향을 받은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공산당 지도 원리를 강하게 밀어붙였으나, 몇몇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이에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펼친 인물로는 [[카를 카우츠키]]나 [[로자 룩셈부르크]], --소련에서 쫓겨난 이후의-- [[레프 트로츠키]] 등이 있다.
- 국사님 . . . . 1회 일치
인터넷 상에서 과도하게 애국주의, 국수주의 적인 주장을 열광적으로 펼쳐서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을 뜻한다.
- 권희동 . . . . 1회 일치
10월 21일 플레이오프 1차전 4번타자로 출장한다.[[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117&aid=0002831242|기사]] 무사 1, 3루의 상황의 폭풍삼진(..)으로 아무래도 경험부족이라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는 편.
- 길용우 . . . . 1회 일치
이에 길성진은 "손님 또는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이 일반 대중에 공개된 옥상에 자발적으로 올라가 음식물을 취식한 것이지, 옥상에서 영업한 사실이 없다"며 소송을 냈다. 또 구청의 처분은 재량권을 남용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원 판결 조사 결과 "당시 건물 옥상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비치됐고 조명도 설치됐으며 옥상에 가기 위해선 해당 맥줏집 내부를 통과해야만 한다"며 "단속을 전후해 건물 옥상에서 나오는 음악·이야기 소리로 민원이 여러 차례 제기된 점을 들어 불법 영업을 옥상에서 했다는 증거가 된다라고 짚었다.
- 김갑수(배우) . . . . 1회 일치
|| KBS2 || [[아이언맨(드라마)|아이언맨]] || 주장원 || 주연 || ||
- 김국진(MC) . . . . 1회 일치
사실 둘의 사이는 굉장히 가까운 편이다. 과거 감자골이 방송사를 옮겼을 때도 여론이 안좋게 형성되어 방송사 내부에서 받아주지 말라는 의견이 팽배했는데 이경규가 나서서 감자골 멤버들의 이적을 지지했다고. 물론 이경규 본인의 주장이다.(...)[* 다만, 이때 이경규는 ~~몰래카메라로~~ 일밤의 중축이었기 때문에, 이경규가 반대했다면 못갔을 가능성이 크긴 하다.]
- 김근 (고려) . . . . 1회 일치
본관은 경주로 역사가 김부식의 아버지이다. 신라 왕실의 후예로, 할아버지는 [[경주]] 주장(州長)에 임명되었던 위영(魏英)이고 아버지는 원충(元冲)이다. 그의 생애 초기나 가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며, 아들 4형제가 중앙관료로 진출할 때까지는 경주에서 생활했다 한다.
- 김기창 (법학자) . . . . 1회 일치
한편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에서 행정 심판 위원을 역임한 바가 있고, [[서해안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하여 《서해안기름유출사고와 삼성중공업의 배상책임》에 대한 논문을 저술하였다. 2008년 10월에는 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에 대한 형사 소송 사건에서 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의 무죄를 주장하는 취지의 증언을 하였고, 2009년 6월에는 [[2009년 대한민국의 시국 선언|법률가 시국 선언]]에 참여하였다.
- 김부식 . . . . 1회 일치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로 증조부인 김위영을 [[고려 태조]]가 경주(慶州)의 주장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ref>《[[고려사]]》 권97, 열전10, 김부일전.</ref> 부친 김근이 좌간의대부로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지위가 높은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김부식과 그의 형제들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 김성주 (기업인) . . . . 1회 일치
김성주는 MCM을 글로벌하게 키워냈으며 직설적이고 튀는 발언을 많이 하는 캐릭터로도 알려져 있다. 2014년 제주 BPW(Business & Professional Women) Congress에서 '글로벌 여성 지도자 상' 수상 당시 "여성들의 사회 참여는 더이상 권리가 아닌 의무"라며 "세월호 사태도 기득권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며 여성들은 더이상 이런 사태를 주시해서는 안된다. 우리나라 장관의 1/3은 여성으로 채워져야만 한다"고 말하는 등 여성의 사회활동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 김수용(코미디언) . . . . 1회 일치
기독교 계열 방송국인 [[CTS]]의 한 프로그램에서 "[[동성애]]가 그냥 싫다."[* 정확히 말하면 동성애자에 대해 차별적인 생각이나 행동은 하지 않지만, 동성애 자체는 싫다는 뜻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 호모포브 논란에 불을 붙였다. 이후 그는 대학생 시절 동성애자에게 성추행을 당해 혐오감이 생겼다고 주장했으며, 이제는 동성애에 대해 "더 말하지 않겠다."라고 밝힌 바 있다.
- 김승대 . . . . 1회 일치
2014년 전반기 리그에서 이명주와 함께 발군의 활약을 보였기 때문에 일각에서 월드컵 엔트리 승선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으나 결국 탈락했다.
- 김영철(배우) . . . . 1회 일치
MBC주말드라마 [[가화만사성(드라마)|가화만사성]]에서는 [[봉삼봉]] 역할을 맡았는데 따뜻하지만 무뚝뚝한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연기했다. 가족들과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마음의 어긋난 벽이 무너지고 마침내는 아내를 위해 마음을 표현 방법에 있어서도 자상하게 변하는 봉회장 그자체로 열연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큰 울림을 이끌었다. 다만 중간중간 극중 캐릭터 붕괴로 이기적이고 자기주장만 관철하는 부분도 많이 나왔는데, 그런것도 굉장히 잘 어울렸다.
- 김용국 (야구인) . . . . 1회 일치
그러나, [[류중일]]이 다음 해인 [[1988년 한국프로야구]] 때 팔꿈치 수술로 출장 입지가 줄어들어 [[오대석]]이 [[류중일]]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서 [[1988년 한국프로야구]]부터 [[1993년 한국프로야구]]까지 줄곧 팀의 주전 [[3루수]]로 활약했다. 또한 1991~1992년, 2년간 팀의 주장을 맡으면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였다.<ref name="imaeil" /> [[1루수]] [[김성래]], [[2루수]] [[강기웅]], [[유격수]] [[류중일]], [[3루수]] 그로 이어지는 내야 수비진은 리그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한편, 그는 뛰어난 수비 실력에 비해 타격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 때문에 아쉽게도 매번 [[해태 타이거즈]] [[3루수]] [[한대화]]에게 밀려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수상자 (3루수)|3루수 골든 글러브]]는 단 한 차례도 수상하지 못했다.
- 김종훈 (1952년) . . . . 1회 일치
새누리당은 28일 논평을 통해 "4.11 총선거를 앞두고 홍사덕, 김종훈 후보 등 새누리당 후보들의 트위터 계정에 대한 공격이 잇따르고 있다"며 트위터 계정폭파를 신종 사이버 공격으로 규정하고, "검찰은 트위터 계정폭파 범죄에 대해 즉각 수사에 나서 선거를 방해하려는 집단의 배후를 밝혀내라"고 촉구했다.<ref>[http://news1.kr/articles/608133 새누리 "김종훈 트위터 폭파는 조직적 테러"] 《뉴스1》 2012년 3월 28일 차윤주 기자</ref> 그러나 "트위터 계정폭파란 존재하지 않으며,<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7745518&ctg=1200 트위터 본사 "계정폭파?...이용규정 위반으로 정지는 된다"] 《중앙일보》 2012년 3월 30일</ref> 오히려 사용자가 반복된 글을 일방적으로 보내는 등 이용규정 위반할 경우 정지된다"는 트위터 본사 측 반박<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330800080 트위터 측 “새누리당, 반복 글 보내 정지된 것” 반박] 《서울신문》 2012년 3월 30일</ref> 으로 새누리당 측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20329031607 김종훈 '트위터 계정폭파'? "새누리당, 새 됐네"] 《프레시안》 2012년 3월 29일 이명선 기자</ref><ref>[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84981 보수지 신봉하던 새누리, '국제적 대망신' 자초] 《뷰스앤뉴스》 2012년 3월 29일</ref><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25874.html 김종훈 트위터 계정폭파 당했다더니…“국제적 망신살”] 《한겨레》 2012년 3월 29일</ref>
- 김지수(배우) . . . . 1회 일치
|| [[2000년]]~[[2001년]] || MBC || [[온달왕자들]] || 주장미 || ||
- 김진우(WINNER) . . . . 1회 일치
* 또 같은 방송에서 본인의 나이를 19살이라고 주장했다.--진우 하고 싶은 거 다 해!--
- 김형기 (법조인) . . . . 1회 일치
*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80년 1월 19일에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때 선거 거부를 주장하다 기소된 전 서울대 학생 등 9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80년 1월 19일자</ref> 2월 9일에 통혁당 재건과 정부 전복을 기도한 혐의로 구속되어 1심에서 징역15년 자격정지15년을 선고받은 [[지정관]]에게 징역7년 자격정지7년,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박현채]]와 [[양정규]]에게 각각 징역2년 자격정지2년 집행유예3년과 징역2년6월 자격정지2년6월 집행유예4년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80년 2월 9일자</ref> 2월 22일에 '옛 석굴암'이라는 상호로 공예품 판매업을 하면서 문공부 장관의 허가없이 자신의 소장품인 유형문화재 청자 등 이조 자기류 10점을 점포에 진열하거나 매매 목적으로 진열했다는 혐의로 1심에서 징역1년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은 피고인에게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80년 2월 22일자</ref>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10화 . . . . 1회 일치
* 스테인 사건에서 그 원리주의적 주장은 히어로의 본질을 다잡으려는 사람들을 생겨나게 했고 이후 올마이트의 은퇴가 발표되면서 더욱 늘어났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25화 . . . . 1회 일치
*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그네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오버홀을 공격한다. 그는 자신들은 누구 밑에 들어가려고 모인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빌런연합이 휴식기를 가지는 동안 자신의 친구를 만나고 왔는데, 그 또한 마그네와 마찬가지로 오카마였다. 그 사실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그네와 달리, 그녀는 세상의 눈을 의식하며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상식에 얽매이는 사람들이 얽매이지 않는 사람을 비웃는"다. 그녀는 마그네는 거기서 뛰쳐나갈 용기가 있엇지만 자신에겐 없었다고 부러워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27화 . . . . 1회 일치
물에 빠진 학생이 당황한 나머지 수질을 식초로 바꿔버렸는데, 무적의 올마이트로 식초에 잠수하는 바람에 눈이 따가워 눈을 묘하게 찡그렸다. 미도리야는 이때의 얼굴을 재현한 것이라 주장한다. 나이트아이는 자신을 그저그런 팬인줄 아냐고 대꾸하지만 분명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걸 알고 있고 그걸 화제로 신나게 오덕 토크를 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32화 . . . . 1회 일치
* 시에핫사이카이를 찾아온 빌런연합의 [[시가라키 토무라]]. 그는 서로 대등한 "제휴"를 주장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42화 . . . . 1회 일치
* 1층에선 [[버블걸]]과 [[센티피더]]가 경찰과 협조해 시에핫사이카이 조직원을 거의 체포했다. 버블걸은 설마 전원이 방해하러 올 줄은 몰랐다며 제정신이 아니라고 비난한다. 이래서는 잡히러 온 것 밖에 안 되니까. 조직원들은 "제정신이라 잡히러 왔다"고 반박한다. 얌전히 있으면 오버홀에게 반드시 죽었을 거라며. 그들은 오버홀, 아니 치사키가 권력을 잡으면서 모든게 변했다고 털어놨다. 원래 지금의 두목은 야쿠자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시에핫사이카이도 빌런집단과 선을 긋고 어디까지나 "협객"으로서 양지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조직원들은 그런 두목의 뜻을 따랐다. 반기를 든 것은 두목의 아들이었던 치사키. 그가 오버홀이란 이름을 걸고 조직을 장악했다. 그러고 나서는 빌런 같은 이름을 대고 행동을 했으며 빌런과 힘을 합쳤다. 개성 관련 금지 약품을 유통한 것도 치사키. 반항은 할 수 없었다. 조직원들은 현두목이 와병생활을 하게 된 것도 분명 오버홀의 짓이라고 수군댔다. 버블걸은 그렇게 치사키를 싫어하면서도 그가 잡힐 거라고, 실패할 거라 생각하진 않는 거냐고 반문한다. 조직원은 그렇다고 답했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48화 . . . . 1회 일치
* 나이트아이에겐 관심없는 문제였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날인이 트와이스를 머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날인은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마스크 좌측을 크게 찢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나이트아이는 다음 날인을 꺼내고 있었다. 저 괴물은 저런걸 얼마나 가지고 다니는 걸까? 도망치자, 트와이스는 미련없이 등을 보였다. 그가 허겁지겁 뛰자 이리나카가 그와 나이트아이 사이를 벽으로 막았다.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었지만 트와이스가 원망을 늘어놨다. 찢어진 마스크. 트와이스는 이것도 이리나카가 미적거려서 당한 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열하고 있었다. 위험신호였다. 그의 자아가 주체할 수 없이 갈라지려고 했다. 만일 토가가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트와이스는 그대로 끝장이었다.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상냥하게 그의 찢어진 마스크를 감싸주었다. 감싸면 하나. 토가의 손길이 닿자 트와이스가 급속히 안정을 되찾았다.
- 나폴레옹 빠 . . . . 1회 일치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사상과 제국 부활을 주장했던 정치사상은 [[보나파르티즘]]이라고 부른다. 나폴레옹 사후로도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다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프랑스 제2제정]]을 만들고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하면서 실현했지만 [[보불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하면서 현실의 정치사상에서는 폐기처분 당했다.
- 남명학파 . . . . 1회 일치
남명 조식을 시초로 하는, 낙동강을 기준으로 경상도를 나눌때 그 오른쪽(서부)에 속하는 학파이다. 영남학파중 하나로 분류되며, 조선의 붕당에서 대북이라는 세력의 주축을 형성했다.[* 엄밀히 말해서 대북=남명학파는 조금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 아주 틀렸다 볼 수는 없지만, 이이첨등 애초에 남명학파도 아니면서 대북인 경우도 있고, 곽재우등 남명학파이면서 대북과는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한 이도 있기 때문.]
- 니세코이/219화 . . . . 1회 일치
* 이치죠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는 남자고 정신적으로 강하다며 당사자들이 직접 만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 니시키노미하타 . . . . 1회 일치
자신의 행동, 주장 등에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사용하는 명분을 뜻한다.
- 대중흑기 . . . . 1회 일치
1854년, 페리 제독의 내항으로 개항을 하게 되면서 일본을 대표할 깃발이 필요해졌다. 본래 [[도쿠가와 막부]]는 이 대중흑기를 일본의 국기에 해당하는 선박표로 지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츠마 번의 강한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대중흑기가 아닌 [[일장기]]가 채택되었다.[[http://www.worldflags.jp/blog/11373/ (참조)]]
- 대한민국 . . . . 1회 일치
일단은 반도국가지만 북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가라고 주장하는 무장집단]]이 점거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섬나라다.
- 독친 . . . . 1회 일치
세상의 잔인하고 가혹한 현실을 가르치기 위하여 아이에게 엄격하게 대한다고 주장한다.
- 드라콘 . . . . 1회 일치
벨로흐(K.J.Beloch)는 드라콘이란 그리스어로 [[뱀]]을 뜻하는 말이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아테네인들은 아크로폴리스에서 본래 [[뱀]]을 숭배하였으므로 드라콘법이란 이 뱀신을 모시던 사제들이 뱀신의 종교적 권위에 따라서 반포한 법이라고 한다.
- 로베르 기스카르 . . . . 1회 일치
그렇게 그해 가을과 겨울동안 여름때 모집한 신병들을 훈련시키는데 매진한 기스카르는 칼리브리아나 아풀리아 일대의 그리스인들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이 미카일 7세라고 주장하던 사이비 수도사까지 끌어들였다. 그의 말을 믿는 이들은 그리 없었지만, 로베르는 좋은 이용수단이던 그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줬다.
- 류중일 . . . . 1회 일치
[[1982년]] 3학년 재학 때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야구장]] 개장 기념으로 열렸던 와의 우수 고교 초청 대회 결승전에서 [[투수]] [[김종석 (1964년)|김종석]]을 상대로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야구장]] 개장 1호 홈런을 기록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410&aid=0000011188 류중일 감독, 손주인-강명구에게 특별한 선물] - 매일경제</ref> 1981년 봉황대기 미기상고 주장을 맡은 1982년 대통령배 감투상, 대붕기 최우수선수상을 수상. 초고교급 유격수로 발돋음하고. [[한양대학교|한양대]] 체육학과(1983학번) 시절 1985년 ~ 1986년에 3학년, 4학년 때 대학야구 올스타 [[유격수]]로 선정되었다.
- 리그컵(K리그) . . . . 1회 일치
다만, 여기에는 제법 잡음이 있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엉뚱하게도 [[아디다스]]가 해외상표이기 때문에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해외업체의 이름을 단 대회를 한국에서 치뤄야 하느냐?"라는 [[신토불이]]적 마인드가 표출화 된 것.[*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60400209217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92-06-04&officeId=00020&pageNo=17&printNo=21844&publishType=00020|당시 기사]를 보면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기사만 보면 재정자립을 위해 해외업체와의 협력도 꼭 필요하다는 협회의 주장이 일견 타당해 보일 수는 있으나 완산 푸마의 7구단 합류 과정에서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3646721|외국 스폰서 이름이 붙었다는 이유]로 참가를 못하게 된 사례를 보면 한국축구계가 왜 이렇게 이상하게 굴러가는지 수긍된다.]
- 마기/299화 . . . . 1회 일치
- 티토스. 의회에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며.
- 마기/305화 . . . . 1회 일치
* 신드바드는 "나만이 운명의 흐름을 볼 수 있다"고 말하며 "세상이 어떤 이치로 흘러가는지 아는 것은 나뿐이니 내가 이끌어야 맞다"고 주장한다.
- 마기/319화 . . . . 1회 일치
* 항상 다윗의 목소리 따윈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지금에 와서는 "의존하고 있었다"고 실토하고 있다.
- 마기/328화 . . . . 1회 일치
* 그들은 담판을 지으러 가지만 신드바드는 아주 뻔뻔한 태도로 자신은 솔로몬 왕이 한 것과 같은 일을 했다고 주장한다.
- 마기/331화 . . . . 1회 일치
* 알리바바는 어렵사리 "옳다"고 대답하지만, 그것도 잠시.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말한다. 물론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신드바드의 미치광이 주장에 동조하지 않을 거라고 보지만, 그것 자체가 자신의 바람을 담은 이야기일지 모르겠다고 한다. 알리바바는 혼란스러워하지만 알라딘은 꼭 그의 대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왕의 그릇이 나라를 만드는 자만을 칭하는건 아니라고 말하면서 "괴로울 때 모두를 이끄는 사람", 바르다르 사건 때의 알리바바 같은 인물이 그렇다고 말한다.
- 마기/332화 . . . . 1회 일치
* [[알리바바 사르쟈]]는 [[모르지아나(마기)|모르지아나]]에게 [[신드바드(마기)|신드바드]]를 타도할 것을 맹세한다. 모르지아나는 모든 사람들이 루프로 돌아가길 원한다고 반박하지만 알리바바는 단호한 태도로 "내가 아는 모르지아나는 그딴 소린 죽어도 안 할 여자"였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 마기/338화 . . . . 1회 일치
* 신드바드는 해답에 만족하는지 "신드바드는 꿈도 못 꿀 일"이라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음에도 그런 이상론을 주장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표하며 사라진다. 진 바알은 신드바드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그가 사라진 후 제 1 던전은 이것으로 공량이 됐다 선언하고 사라진다.
- 마기/342화 . . . . 1회 일치
동료들이 혁신가이길 거부하고 옛날을 쫓아, 혹은 옛날이 그대로 있기를 바라며 안주하는 것이 신드바드에겐 가장 괴로운 일이었다. 그는 끝없이 더 좋은 방향으로, 계속 바꾸어나가기를 염원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알라딘이 말했던 "운명"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결국 그는 큰 틀에서 알라딘의 주장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하는 셈이다.
- 마기/347화 . . . . 1회 일치
* 신드바드는 자신의 싸움을 "신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싸움"이라 정의하며 알마트란의 참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선 필수적인 과정이라 주장한다.
- 마기/350화 . . . . 1회 일치
그런데 우고는 이제와서 세삼 발언을 번복한다.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그가 불가능하다고 했던건 규모 때문이었다. 알리바바가 주장한대로 모든 벽을 부수고 세상을 통합하려면 엄청난 마고이가 필요한게 필연. 그러나 작은 구멍을 뚫어서 교류하는 정도라면 적은 마고이만 가지고도 그럭저럭 가능할지도 모른다. 알라딘 일행은 깜짝 놀라며 "그럼 왜 지금껏 하지 않았었냐"고 묻는다. 우고로선 억울한 지적이다. 생각해본 적도 없을 뿐더러 애초에 일 일라 같은 존재와 대화를 시도하는걸 어떻게 떠올릴 수 있을까? 게다가 이런 방법은 지금껏 실험해본 적도 없으니, 가능성은 여전히 미지수의 영역일 따름이다.
- 마이클 페이 . . . . 1회 일치
1994년 당시 18세였던 마이클 페이는 싱가포르에서 길가에 주차된 [[자동차]]에 [[페인트]]로 낙서를 하고 [[계란]]을 던지는 기행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싱가포르 법원은 마이클 페이에게 태형 6대와, 3500 싱가포르 달러의 [[벌금]]을 선고했다. 미국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 여론이 있었으며, 미 국무부는 "외교문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 [[빌 클링턴]] 대통령 까지 나서서 "태형을 면하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 마재윤 . . . . 1회 일치
2010년 4월 몇몇 팬들로부터 [[2010년 스타크래프트 불법 베팅과 승부 조작 사건|승부 조작]]에 마재윤이 가담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제기되면서 '마재윤 vs 이신형'전의 배팅 사건 등등이 제기되었지만, e스포츠 팬들의 반응은 마재윤이 맞다고 주장하는 쪽과 확실하진 않으니 검찰 조사를 기다리자는 쪽으로 나뉘면서 서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에 검찰은 마 모 프로게이머가 연루되었다고 발표하였는데, 실제 케스파에 등록된 마 씨 성을 가진 프로게이머는 마재윤이 유일한 것으로 밝혀져 사실상 마재윤이 승부조작에 연루되었음이 밝혀졌다. CJ 엔투스는 검찰 수사 공식 확인 하루 전 마재윤을 팀 선수 명단에서 제명하였고, 한국 e스포츠 협회는 그를 다른 승부조작을 꾸민 [[진영수]], [[원종서]], [[최가람]], [[김창희 (프로게이머)|김창희]], [[신희승]], [[김성기 (프로게이머)|김성기]], [[문성진]], [[박찬수]], [[박명수 (프로게이머)|박명수]], [[정진현]]을 모두 영구제명 조치하였다. 검찰 수사 발표 이후 MBC게임 해설진은 경기 중계 도중 과거 경기를 언급하며 마재윤을 우회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이후 마재윤은 승부 조작 혐의로 인하여 벌어진 재판 당시 재판장이 당신의 직업은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마재윤은 프로게이머라고 답하여 무직이라고 대답했던 [[원종서]]와 대조를 보였다. 마재윤은 e스포츠 팬들의 예상과는 달리, 자신이 직접 승부조작에 개입하여 고의적으로 경기를 패배한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 맥닐의 법칙 . . . . 1회 일치
유럽인들은 [[기독교]] 신앙의 우월성을 선전했고, 원주민들이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타락한 생활을 한 데 따른 징벌이라고 주장했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신이 질병 앞에 무력하고 가호를 해주지 못하는 현실에 부딪치자 열등감과 패배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 맥스 페인/줄거리 . . . . 1회 일치
엘레베이터가 내려간 곳은 기계장치가 즐비한 지하 시설, 딥 식스였다. 그곳에는 정장을 입은 남자 두 명, 그리고 용병 한명이 있었다. 용병은 자신들이 맥스를 막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정장을 입은 남자들은 용병을 쏴죽이고는 장치를 조작해 자폭 절차를 발동시킨다.
- 모리시오 . . . . 1회 일치
좀 더 복잡하게 따지는 경우도 있는데, 동북에서 남서로 이어지는 귀문 라인을 두는게 좋다는 주장이다.
- 몬스터버스 . . . . 1회 일치
* 레전더리 픽처스의 영화 중에 거대로봇과 괴수의 격투를 다룬 [[퍼시픽 림]]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 몽키 D. 루피 . . . . 1회 일치
앞서 말한 그 특유의 무모함 때문에 위기를 많이 겪기도 하지만, 때때로는 의외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감으로 움직이는 타입이지만, '''루피의 감은 그만큼 잘 맞는다'''. 분명히 루피가 무모해서 온갖 사선을 넘으면서도 밀짚모자 해적단이 모두 살아남은 것은 루피의 감도 한 몫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패기 설정이 두드러진 때부터 어찌하다보니 우연히 연결된 떡밥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mr.3 전때 같은 것만 봐도 작가가 구상정도는 하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독자들도 있다.]
- 몽키 D. 루피/작중행적 . . . . 1회 일치
팬덤에서는 2년 후 시점의 루피가 그렇게 강한 것 같지 않다는 논란이 있었고 지금도 논란이 크다. 도플라밍고와 싸우고 있지만 엇비슷하게 싸우는 것 같아 보여도 당장 지금의 도플라밍고는 로우의 감마 나이프에 맞아서 내장 자체가 파열된 것을 억지로 실로 급히 '''응급조치'''만을 해둔 상태이기 때문에 회복이 천천히 되어가는 중이지 회복이 된 것이 아니라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멀쩡한 몸 상태에서는 루피를 여러번이나 간단히 농락하고 제압했던 도플라밍고였기 때문에[* 실인형이 처음 드러났을때도 그렇고, 루피와 로우의 샴블즈 + 레드호크에 당했을때도 맞으면 맞아주면 그만이라며 간단히 루피의 손을 실로 묶어버리고 제압한 등.] 루피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도플라밍고에게 제대로 상대가 안되기에 도플라밍고에게 그만한 너프를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루피도 콜로세움에서부터 계속해서 체력을 소진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루피가 패밀리의 일반간부 수준인 돈 친자오 정도와 싸울 때 도플라밍고는 최고간부보다 훨씬 윗줄의 로우와 싸우고 있었다.(...)
- 문무왕 . . . . 1회 일치
12년([[672년]]) 당나라는 대군을 동원해 신라에 대한 침략을 개시했다. 이에 맞서 신라는 봄 정월에 백제 고성성(古省城)을 쳐서 이기고, 2월에는 다시 백제의 가림성 공격을 시도했다.<ref name="삼국사기-672">《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2년(672)</ref> 7월,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의 한병(漢兵) 1만, 말갈족 출신의 이근행이 거느린 말갈병 3만이 함께 평양에 이르러 여덟 곳에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머물렀다.<ref name="삼국사기-672"/> 이들은 8월부터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쳐서 이기고 백수성(白水城) 5백 보 거리까지 전진해 주둔하는 등 신라 땅을 침식해왔다.<ref name="삼국사기-672"/>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해 이들을 쳐서 이기고, 추격하는 당병을 석문(石門) 벌판까지 뒤쫓아가 싸웠지만, 군 내부에서의 논공행상 및 전략에 대한 견해차로 분열된 사이에<ref name="김원술">《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전 부록 원술(元述)</ref> 당병의 반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양신(良臣) 등이 죽었다.<ref name="삼국사기-672"/> 태대각간 김유신의 아들인 [[김원술|원술]]도 여기에 참전했다가 목숨을 건져 돌아왔는데, 아버지 유신은 자신의 아들을 군법으로 처형해야 한다며 왕에게 아뢰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ref name="김원술"/> 한편 각자 맡은 곳을 지키며 방어전으로 전략을 변경하자는 유신의 진언에 따라, 한산주에 둘레 4,360보 되는 주장성(晝長城)을 쌓는 등 방어진지를 구축했다.<ref name="삼국사기-672"/> 9월에는 앞서 신라 땅에 억류하고 있던 웅진도독부 소속의 백제인 관원들과 앞서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당으로 돌려보내면서 왕이 직접 표문과 많은 물품을 바치는 등 당에 대해 유화책을 폈다.<ref name="삼국사기-672"/>
- 문희옥 . . . . 1회 일치
11월 2일 후배가수 A씨의 아버지는 인터뷰에서 민사소송을 준비중이라고 했으나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44&aid=0000520632|관련가사]] 1월 3일 문희옥은 사기 및 협박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http://m.entertain.naver.com/read?oid=241&aid=0002725518|공식전문]] 그로 인해 12월 13일 후배가수 사기 및 협박 협의로 경찰조사를 받았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9749189|관련 기사]]
- 미안기 . . . . 1회 일치
미용상품의 하나. [[초음파]]를 사용해서 피부를 마사지 하는 [[기계]]. 피부 진동이 세포까지 전달되어 혈액과 림프액의 순환을 촉진하고, 신진대사가 활발해져서 노폐물을 배출하게 되어 피부가 건강해진다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미즈우치 타카시 살인사건 . . . . 1회 일치
2015년 10월 6일, 오사카 지방법원은 미즈우치 타카시에게 징역 18년(구형 20년)을 선고했다. 검찰은 미즈우치 피고가 흉기로 쓰인 가죽 벨트를 지참하는 등, 계획성이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재판장은 사전에 살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고 계획성은 부정하였다. 하지만 미즈우치 피고가 살려달라고 하는 피해자의 목을 집요하게 조르는 등의 행위에 대하여, "경찰관으로서 사람의 생명을 지킬 의무를 위반하여 생명을 빼앗은 것은 강하게 비난받을 만 하다."고 하였다.
- 바르나바 복음서 . . . . 1회 일치
* 지옥의 묘사나, 9단계의 하늘 등이 [[단테]]의 [[신곡]]에서 나온 천국이나 지옥의 묘사와 유사하여, 바르나바의 복음서가 단테의 신곡에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 바실레이오스 1세 . . . . 1회 일치
'''나는 여우를 내쫓았으나 그 대신 우리 모두를 잡아먹을 사자를 불러들이고 말았다.'''-바르다스[* 바실레이오스의 전임 황제인 미카엘 3세의의 외사촌으로, 쿠로팔라테스라는 황제에게 후사가 없을때 제위계승권도 주장할 수 있는 직위에 있었다.], 다미아누스 시종장을 해고한뒤.
- 박녹주 . . . . 1회 일치
[[송만갑]]과 그 제자 김정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그녀가 주장한 예술적인 기반 자체가 동편제였기 때문에 계보상으로 동편제 명창에 속하며, 20세기에 들어서 송만갑제 판소리의 전승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1964년]]에 처음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될 때 남긴 녹음자료에도 송만갑제의 더늠[* 일종의 '마스터피스'와 같은 의미로 명창들이 새로 짜거나 과거의 것을 이어받아 방창한 대목을 말한다.]을 중심으로 하는 대목을 맡아서 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송미경, 「판소리 춘향가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배경 및 지정자료 <춘향가>(1964)의 성격」, 『구비문학연구』 41, 2015 참조.] 그러나 실제로는 송만갑이나 김정문 이외에도 서편제의 김창환, 정정렬에게서도 소리를 배우는 등 사승 자체는 동편제나 서편제를 가리지 않고 배웠으며, 동편제 흥보가를 부르면서도 제비노정기 만큼은 서편제인 김창환의 소릿제로 부르고 있는 등, 동시대 여러 명창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유파를 겸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듯 하다. 다만 [[송만갑]]이나 정정렬 이외에도 동편제 명창인 박기홍, 유성준에게서도 배웠던 만큼 동편제의 소리 지향에 가까운 소릿제를 부르긴 하였다.
- 박상원(배우) . . . . 1회 일치
[[모래시계(드라마)|모래시계]]에서 맡았던 검사 역할은 현재 [[홍준표]] 전 경남지사의 검사 시절에서 모티프를 따와 만든 배역이라고 알려졌다. 당시 드라마 작가였던 송지나가 2017년 대선 당시 아니라고 주장했었으나 하는데 사실 맞다고 보는게 옳다. 자세한 내용은 [[모래시계(드라마)|모래시계]] 5번목차 참고. 홍준표는 이후 [[모래시계(드라마)|모래시계]]를 통해서 형성된 그의 대중적 인기에 주목한 신한국당의 권유로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1996년 총선에서 서울 송파 갑 지역구에서 무난하게 당선된다. 그러나 강직한 이미지와 달리 선거비용 사용 내역을 조작해서 의원직을 박탈당한다. 이후 2001년 동대문을 재보궐선거에 당선되면서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사실 홍준표는 슬롯머신 비리 사건 수사 과정에서 상급자인 [[이건개]] 검사장을 구속하면서 검사들 사이에서 왕따당하고 있었다. 2년 동안 자기한테 같이 밥 먹자는 동료 검사 한명이 없었다고. 정작 홍준표가 구속한 이건개는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1996년 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 전국구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때문인지 박상원 본인도 늘 정계진출 떡밥이 있는 배우. 일단 본인은 정계 입문은 생각에 없다고 못박아두고 있다. 하지만 1인 시위 등을 통해 본인의 정치적 입장[* 보수 성향으로, [[오세훈]] 전 [[서울특별시장]]과도 친분이 있다. 2011년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때 광화문 이순신 동상앞에서 오세훈 시장을 지지하는 1인 시위를 한 적도 있다.]을 드러내곤 해서 이 떡밥은 여전히 쉬지 않고 현재진행형이다.
- 박승호(정치인) . . . . 1회 일치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에 경상북도지사 예비후보로 등록하였으나 경선에서 현직 도지사인 [[김관용]]에 밀려 탈락하였다. 이때 [[구미시]]를 [[박정희]]시로 개칭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27528.html|#]]
- 박주영 . . . . 1회 일치
{{{+1 {{{#000000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 }}} }}} }}} ||
- 박철우(배구) . . . . 1회 일치
그런데 박철우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문제가 있으니 바로 '''군 문제'''. [[기흉]]이 [[장동건]] 때는 면제 사유였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아닌지라 병역 의무를 필해야 한다. 군대 문제 때문에 늦은 나이에 입대한 후 사그라든 선수들의 예를 봤을 때[* [[손석범]]이라든가, [[윤관열]]이라든가, [[백승헌]]이라든가... 이들은 모두 공익으로 복무한 후 복귀했지만 결국 은퇴했다. ~~여기에 [[신영수(배구선수)|신영수]], [[김학민]], [[한선수]]도 이 리스트에~~ 다행히 [[신영수(배구선수)|신영수]]는 공익으로 복무를 마치고 복귀한 후 예전 감각을 잃지 않았다. 덤으로 팀의 주축으로 2013-14 시즌부터 팀의 주장을 맡았다. 하지만 [[한선수]]는 [[일본]]에게 덜미를 잡혀 2015년 전역 확정.] 염려가 되는 게 사실이다. 본인이 건강 문제에 신경을 쓰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이가 태어났으니 [[한선수]]처럼 상근예비역으로 빠질 확률이 높긴 하다.--
- 백정현 . . . . 1회 일치
인스타를 하고 있는데 여행가며 찍은 사진을 올리는 용도로만 쓰는 듯. [[https://www.instagram.com/baek_junghyun/|보러가기]] 그 사진이 굉장히 높은 퀄리티라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선 야구 선수가 안 됐으면 사진작가가 됐을 거란 얘기가 종종 나올 정도. 아예 '백작가'라고 부르며, 그가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들이 종종 개념글로 올라온다. 일부는 반농담으로 [[라팍]]에서 백정현이 찍은 사진을 넣은 달력이나 엽서를 팔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붐(연예인) . . . . 1회 일치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했던 [[일본인]] 패널 준코와 사귄 적이 있다는 고백을 했다가 당사자인 준코가 미니홈피에 "당신이랑 사귄 적이 없는데요..." 라고 딱 잘라 말해서 완전 새가 되기도 했다.[* 일부에선 준코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단 둘이서 어디 놀러가고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는데, 붐은 그 정도면 사귄 거라고 생각한 것이라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 덕분에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에선 연신 '준코! 준코!' 를 외치며 놀려대는 [[김구라]]와 [[신정환]]에게 [[관광]]타고 착잡한 표정으로 ''''제가 경솔했습니다'''' 라는 말을 되뇌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준코 사건은 이때 개그 소재로 쓰이며 오히려 이미지 세탁에 도움을 준 편.
- 브이원 . . . . 1회 일치
[[2006년]] 군 입대를 선언했다. 병역비리에 연루되어 재입대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강현수는 서울 광화문의 병역특례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경영난에 부딪힌 회사가 그를 퇴사조치 했다. 다른 병역특례업체를 찾아보던 중, 때마침 연예인 병역비리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고 강현수도 검찰 조사를 받게 됐다. 회사가 어려워 임금을 받지 못했던 것인데, 상황이 꼬이다보니 ‘무임금을 조건으로 취업했다’는 혐의를 받게 됐고 재 입대까지 통보 받게 됐다는 강현수의 주장이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ent&arcid=1270147792&cp=nv|제목=‘하고 싶다’ 강현수 “남상미와 연기 하고파”|성=|이름=최은화 기자|날짜=2010-04-01|출판사=쿠키뉴스 국민일보|확인날짜=2010-04-17}}</ref>
- 블라디미르 렘 . . . . 1회 일치
블라드가 소유하던 창고를 [[스쿼키 청소회사]]의 청소부들이 습격해 블라드의 애인인 애니 핀을 살해한 일 때문에 맥스가 찾아간다. 하필 보드카는 [[비니 고그니티]]가 이끄는 펀치넬로 마피아들의 습격을 받은 때였다. 맥스는 러시아 범죄조직과 함께 블라드를 구해낸다. 그는 스퀴키 청소 회사를 조종하는 것이 비니일거라고 주장한다.
- 블랙 클로버/106화 . . . . 1회 일치
* 그런데 청중 사이에 끼어 있던 청동 마법의 [[셋케]]는 야비한 본성이 여전해서 둘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를 펼친다. 둘이 하층민 출신이고 특히 아스타는 마력도 없는 사기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셋케 자신은 정말로 아스타가 사기꾼이라고 믿고 있었다. 공적을 쌓은 것도 뭔가 치졸한 짓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청중들은 하층민이란 말에 쉽게 선동 당해 다시 여론이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간다.
- 블랙 클로버/117화 . . . . 1회 일치
레오폴드는 홍련의 사자와 소속 2등 중급 마법기사. 하몬은 금색의 여명 소속 2등 중급 마법기사다. 하몬은 유리마법을 구사하며 이름처럼 하몽 이베리코 돼지를 닮은 통통한 녀석이다. 성격은 쌈빡한 걸 선호하는 레오폴드하곤 정반대로, 키르슈를 진심으로 아름답다고 믿는 별종 중 하나다. 나서기 좋아하는 점만큼은 둘이 똑같아서 하몬이 "나의 유리마법을 주축으로 키르슈씨 처럼 우아하고 아름답게" 싸울 것을 주장하고 레오는 자기 불꽃 마법을 주력으로 아무튼 다 박살내면서 호쾌하게 가자고 티격태격한다.
- 블랙 클로버/128화 . . . . 1회 일치
팀원의 보조도 거절하고 혼자 힘으로 아스타를 꺾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아스타에게 발언을 정정하라며 찌질하게 굴고 자신이 승자니 뭘 해도 정당하다고 주장하지만 아스타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한편 마법제의 보좌인 마르크스는 마법제가 언급한 "무의식의 배신자"가 랜길스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 블랙 클로버/75화 . . . . 1회 일치
* 바람의 정령은 정석 츤데레. 유노에게 악담을 퍼붓는듯 하지만 결국 그런 유노를 좋아해주는건 자신 뿐이라고 주장한다.
- 블랙 클로버/84화 . . . . 1회 일치
바네사는 원래 여왕을 속여먹이고 아스타의 반마법의 검으로 어떻게든 하려 했다고 주장하지만 정말로 자신을 희생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아스타라도 마녀의 숲의 여왕을 상대로 얼마나 싸울 수 있을지 의문이며, 애초에 바네사가 숲에 억류된 상태에서 아스타와 재접촉이 가능할지도 미지수다. 바네사를 숨겨두고 아스타의 저주만 풀어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
- 블랙 클로버/92화 . . . . 1회 일치
* 마르스는 아군이라며 주장하는데 그 자리에 있던 [[증오의 파나]]를 발견하고 자신이 죽였던 친구 "파나"라고 소리친다.
- 블랙 클로버/95화 . . . . 1회 일치
* 라드로스는 아스타의 동료애를 비웃으며 남은 "이용"해야 하는 존재라 주장하지만 아스타가 반마법의 검을 투척하는 변칙 공격을 하자 어이없이 당한다.
- 블리치/697화 . . . . 1회 일치
* 슈헤이는 자신도 만해를 습득했다며 괜한 갈굼이라고 주장하는데, 켄세이를 포함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서 사기치는거 아니냐고 놀림 당한다.
- 비니 고그니티 . . . . 1회 일치
[[블라디미르 렘]]이 개장을 준비하던 식당 "보드카"를 습격하며 등장. [[스쿼키 청소회사]] 사건으로 블라드를 찾아왔다가 총격전에 휘말린 맥스를 보고 기겁하며 부하를 보낸다. 부하들이 전부 당하자 블라드를 죽이는걸 포기하고 도망친다. 블라드는 비니가 불법 총기매매사업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처리하고 있다며 그가 스퀴키 청소 회사를 부리는 흑막이라고 주장한다.
- 사혈 . . . . 1회 일치
* 동양 전통의학에서는 '어혈'이라는 '죽은 피'가 건강에 나쁜 영향을 일으키며, 사혈을 통하여 이를 제거해줌으로서 건강한 신체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살바도르 달리 . . . . 1회 일치
2015년 필라 아벨 이라는 여성이 자신을 달리의 딸이라고 주장하면서 마드리드 법원에 소송을 냈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4/20/0200000000AKR20150420001000072.HTML 참조]
- 삿시테쨩 . . . . 1회 일치
자기 주장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뜻을 짐작해달라고 하기 때문에 상대하기 곤란한 대상으로 여겨진다. 동료, 친구일 때라도 어려운데, 이러한 특성을 가진 [[상사]]가 되면 더욱 힘들게 된다.
- 서림 . . . . 1회 일치
야사 <연평일기>에 따르면, [[이괄의 난]]에서 패전 뒤 [[이괄]]의 목을 베어 바친 자들에게 대간이 반역죄를 주장할 때, 권신 이귀가 “선왕 때 서림(徐霖)이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비록 공훈은 삭탈당하였으나, 특명으로 동지(同知)에 임명되어 녹을 받은 사실이 있었으니 이제 이러한 전례에 따라 익헌 등의 죽음을 용서하여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 라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 서용주 . . . . 1회 일치
동의대의 주장이자 4번타자였지만 프로지명을 받는 해인 4학년에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 이후 39타수 1안타라는 최악의 ~~대삽질~~부진을 보이면서 결국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다.
- 성역 도시 . . . . 1회 일치
시애틀의 에드 머리 [[시장]]은, “오늘은 일본계 미국인들의 강제수용 이후 미국 이민역사상 가장 어두운 날”이라면서, 트럼프의 반헌법적 행정명령에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시애틀시의 가치를 지킬 것이라고 주장, 킹 카운티의 다우 콘스탄틴 수석행정관은 “킹 카운티는 어린이들과 가족들을 음지로 몰아넣지 않고 그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지 않을 것”, “다른 여러 지자체들과 함께 불법체류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튼튼한 대응장치를 구축할 것”이라고 했다.[[http://ny.koreatimes.com/article/20170126/1036862 (참조)]]
- 소격서 . . . . 1회 일치
[[중종]] 재위 시기, 1518년에 [[조광조]] 등의 요청으로 소격서를 일시적으로 혁파하였다. 하지만 중종은 조상 때부터 내려온 제도라면서 소격서 혁파 주장에 거부감을 보였고, [[기묘사화]] 이후 대비의 간청이라는 이유로 다시 부활시켰다.
- 슈가(방탄소년단) . . . . 1회 일치
* 한 때 '슈가의 시선(슈시홈마)'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멤버들의 사진을 찍어 업로드해줬던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가끔 팬미팅이나 팬싸인회가 끝나고 팬들에게 집에 일찍 안 들어가면 메모리 카드를 잃어버린다거나, 보정하다가 포토샵이 꺼진다는 둥의 저주를 할 때가 있다. [[https://youtu.be/bbI1H-DTAJY|팬잘알 민윤기]] 현재는 메모리 카드를 잃어버린 후 슈가의 시선 활동은 쉬고 있다. 클로즈가 아닌 레스트라고 꿋꿋이 주장 중이다.
- 슈퍼걸(드라마)/1시즌 4화 . . . . 1회 일치
루시 레인은 자신이 일에 몰두해서 제임스를 버리게 된 것은 제임스가 슈퍼맨에게 지나치게 몰두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슈퍼걸에게도 똑같이 빠지는게 아닐까 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 슈퍼걸(드라마)/1시즌 7화 . . . . 1회 일치
지진의 피해가 심각한 상황에서 맥스웰은 TV인터뷰에서 슈퍼걸이나 정부를 믿을게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슈퍼걸(드라마)/1시즌 9화 . . . . 1회 일치
카라는 넌과 싸우지만 밀린다. 행크는 카라를 돕다가 넌에게 납치당한다. 알렉스는 맥스웰 로드에게 협력을 요청하지만 맥스웰 로드는 거절한다. 맥스웰 로드는 클립톤 인의 공격을 은폐하여 산업스파이의 공격으로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 스쿼키 청소회사 . . . . 1회 일치
맥스가 처음으로 이들을 목격한 것은 [[블라디미르 렘]]의 창고에서 들린 총성을 조사하러 갔을 때였다. 이때는 일반적인 청소회사 직원으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맥스가 허점을 등을 보이자마자 공격을 시작했다. 블라드의 애인인 총기 제조업자 애니 핀을 살해한 이들은 경찰이 오자 도망쳤다. 맥스가 해당 사건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 블라드를 찾아갔을 때, 블라드는 이들이 펀치넬로 패밀리의 마피아인 [[비니 고그니티]]의 부하들일거라고 주장했다.
- 스탈리늄 . . . . 1회 일치
몇몇 [[월드 오브 탱크]]와 [[워 썬더]] 유저들은 제작사가 [[소련]]에 편향되었다는 주장을 해왔다. 소련 차량들이 비교적 성능이 좋은 편이었던데다가, 제작사들의 국적[* 월드 오브 탱크의 제작사인 워게이밍넷은 벨라루스 회사. 워 썬더의 제작사인 가이진은 러시아 회사.]도 구 소련의 구성국이었기 때문이다.
- 식객 . . . . 1회 일치
[[법가]] 사상에서는 이러한 식객을 사회 위험분자로 보고 단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식극의 소마/160화 . . . . 1회 일치
* 잇시키 사토시와 나키리 에리나는 식극 현장으로 가고 있는데, 잇시키는 아리스가 주장인 최첨단요리 연구부가 식극을 하고 있다고 알려준다
- 식극의 소마/176화 . . . . 1회 일치
* 감독관은 본색을 드러내며 "부족한 재료를 채우는게 시험"이라고 주장한다.
- 식극의 소마/200화 . . . . 1회 일치
* 도지마는 내일부터 이런 연대식극에 대비한 특훈인 2vs2 홍백전을 치를 생각을 했고 미리 팀원의 궁합에 따른 조합도 생각해뒀다. 하지만 죠이치로는 그런 적성 같은 건 개무시하고 "아무튼 여러번 할 거니까 대충 제비 뽑아서 하자"고 주장한다. 게다가 팀구성 보다는 "졌을 때 받을 벌칙"에 더 연연하는데. 결국 도지마가 격분해서 싸움으로 이어진다. 나잇살 먹을 만큼 먹은 아저씨들이 초딩처럼 유치하게 싸우기 시작한다. 도지마는 죠이치로가 귀국한 직후 짜증났던 점을 들먹이면서 공격한다. 일단 귀국했을 때 연락을 하긴 했었나 본데 딱 한 번했고 게다가 주소도 말하지 않았다. 도지마가 뭔가 메모하려고 했을 땐 멋대로 전화를 끊어서 소용이 없었다. 도지마가 항의하지만 죠이치로는 드립이나 치면서 흘려듣는다. 이렇게 싸운 결과 왠지 요리대결로 결판내자는 흐름이 되었고, 인원이 딱 떨어지질 않아서 원래 부를 예정이 없었던 에리나를 합류시키러 온 것이다.
- 식극의 소마/204화 . . . . 1회 일치
* 아자미는 자신의 딸 [[나키리 에리나]]는 원래 십걸이었고 처음부터 센트럴의 일원이었다며 자기들 측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 식극의 소마/205화 . . . . 1회 일치
* 센트럴 측의 기차가 떠난 뒤 소마는 에리나에게 "드디어 말했구나"라고 말을 붙이는데, 에리나의 상태가 이상하다. 생애 첫 반항이 지나치게 자극이 됐는지 뭔가 폭주하고 있다. 에리나는 아드레날린 과잉 상태가 돼서 "내가 현 십걸을 쓰러뜨리고 1석에 앉아 진정한 여왕이 되는 싸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소마를 포함한 학생들은 자신의 종자인 셈이니 영광인줄 알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해댄다.
- 식극의 소마/206화 . . . . 1회 일치
아리스가 [[쿠로키바 료]]까지 엮어서 그렇게 주장하자 하야마도 더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쿠로키바는 딱히 침울해 보이지는 않지만 멍한 상태. 그러다 하야마를 보고 "소마가 너한테 이겼다는건 나도 선발 때랑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라 말을 꺼낸다. 그러니 다음엔 자신과도 재대결하자고 하는데 하야마는 언제든 상대해주겠다며 간단하게 승락한다.
- 식극의 소마/219화 . . . . 1회 일치
* [[쿠가 테루노리]]는 스스로 "모든 걸 다 갖췄다"고 말하는 재수없는 부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집은 부자고 요리도 잘하고 생긴 것도 이럭저럭. 키는 못 받았지만 당사자가 애써 상관없다고 부정하는 부분이니 재쳐놓고. 어쨌든 부모의 애정도 듬뿍 받고 그만큼 여자애들의 애정도 듬뿍 받으며 무탈하게 성공가도를 걸어온 쿠가. 식극에 있어서도 다를 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신은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주지 않는다"는 말의 주인공은 자신이라 주장한다. 물론 여기서도 키는 별도 문제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자신감을 전부 태워먹을 정도로 역사적은 대패배"에 대한 것이었다.
- 식극의 소마/221화 . . . . 1회 일치
* 후배들의 빈궁한 상상력은 심사의원들이 책임진다. 이스트와르와 샤름은 고추와 아프리카라는 키워드를 조합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라면을 창작할 생각"이라고 추측한다. 메구미가 어떤 요리가 될지 알거 같냐고 묻는데, 그들을 대신해 책임자인 [[안(식극의 소마)|안]]이 나서는데... 형편없이 비틀거린다. 주정을 부린다고 하는게 맞겠다. 헤롱거리면서 쓸데없이 "알려주길 바라냐"며 성가시게 군다. 샤름이 아까 마신 [[사카키 료코]]의 술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심사의원 주제에 술에 터무니없이 약하다. 다행히 안은 특수체질이라 취할 수록 미각과 신경이 예민해져 심사에는 영향이 없다고... 고 이스트와르가 주장한다. 영 말같지 않은 소리라 소마가 쉽게 믿지 않는다
- 식극의 소마/222화 . . . . 1회 일치
말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메구미가 듣기에도 그랬다. 애초에 실력면에서 보면 연대식극에 승리했을 때 제 1석은 메기시마의 차지였다. 그렇게 지적하자 소마는 "그럼 그때는 메기시마 선배도 쓰러뜨린다"는 황당한 주장을 펼쳤다. 메기시마는 이제 불쾌해졌는지 식극도 싫지만 "입만 산 녀석"은 더 싫다며 등을 돌려버린다. 그가 이정도로 의사를 드러내는데 소마는 돌아갈 의향이 없다. 그가 자신의 힘을 실제 시험해 보지 않으면 입만 산 건지, 진짜배기인지 모르지 않겠냐며 승부를 청한다. 자신이 메기시마보다 맛있는 라면을 만들면 그 증명이 될 거라면서. 물론 이것도 메기시마에겐 "입만 산 녀석이란 증거"나 다름 없었다.
- 식극의 소마/227화 . . . . 1회 일치
그런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안은 그렇게 주장했다. 좌우간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격찬이었다. 그건 말하자면 "흑초 탕수육"이었다. 흑초 소스가 발라져 장식물처럼 반짝이는 탕수육. 그걸 먹는 순간 숨겨져 있던 녹차의 강렬한 향이 시야를 신록으로 물들이는 극상의 맛. 관건은 흑초 소스다. 발사믹 소스에 미마사카가 준 훈제 간장을 함께 졸여 향을 극대화했다. 쿠가는 기존 탕수육의 틀을 철저히 파괴하고 돼지고기 특유의 텁텁한 뒷막과 기름기를 신맛과 감칠맛으로 잡았다. 그 자리를 녹차의 향으로 채우면서 돋보이게 만들어 단연 요리의 주역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 아웃워드 작전 . . . . 1회 일치
당시 영국의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이 사건에 흥미를 느끼고는 이를 응용한 무기를 제안한다. 이에 영국 공군은 가격 대 효율이 별로일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영국 해군은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 아카짱가에리 . . . . 1회 일치
*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무서워한다.
- 악마의 대변인 . . . . 1회 일치
논쟁이나 제안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반대측 주장을 옹호하는 사람.
- 알프레드 우든 . . . . 1회 일치
블라드는 우든이 모든 것의 흑막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지방 검사를 겁주기 위해 발할라 계획에 대한 정보를 보냈는데, 그걸 어쩌다가 미셸이 보게 된 것. 그 결과 미셸과 그녀의 딸이 증거인멸을 위해 마약중독자의 손에 죽은 것이었다. [[모나 색스]] 또한 우든의 부하로, 블라드의 편을 든 이너 서클 멤버를 죽이는 일을 맡고 있었다.
- 에이스 컴뱃 5 : 언성 워 . . . . 1회 일치
벨카 전쟁에서 승리한 오시아가 벨카로부터 뜯어낸 지역. 현지인들은 이 지역을 "남벨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영생 . . . . 1회 일치
[[기독교]]에서는 [[불사]]라는 말보다 영생이라는 말을 선호하며, 기독교에서는 교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영창대군 . . . . 1회 일치
조령(鳥嶺) 길목에서 도적이 행상인을 죽이고 은자(銀子) 수백 냥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 수괴인 서얼(庶孽) 박응서(朴應犀) 등이 체포되었다. 박응서는 자신들이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자금을 모아 무사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하려 했다고 자백하였으며, 이 사건에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영창대군 이의가 연루되어 있다는 주장까지 하면서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게 된다.
- 오기노 쿄우사쿠 . . . . 1회 일치
1924년, "인체의 황체 연구"를 발표. 의학박사 학위를 얻는다. 그리고 1930년 독일잡지에 이를 정리한 논문 "배란일과 임신 날짜"를 발표. 이를 응용하여 배란주기 피임법을 주장했다.
- 오방낭 . . . . 1회 일치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등장한 바 있다. 이 때 오방색의 방위가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방위가 상생이 아니라 상극을 상징하게 되어 오히려 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주장이다.[[http://news.joins.com/article/20784391 (중앙일보)]][[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6102709342496489 (아시아경제)]]
- 오세창 . . . . 1회 일치
이후 [[대한협회]](大韓協會)의 부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1909년]] [[대한협회]]가 창간한 일간지로서 반일 논조를 분명히 한 《[[대한민보]]》 사장도 맡았다. 천도교 내부에서는 [[권동진]]과 함께 개화에는 찬성하되 일본과의 합병에 반대하는 이른바 문명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합병 청원으로 개화할 것을 주장하는 [[일진회]] 계열과는 대립하여 결국 [[이용구]]를 몰아냈다.
- 오타쿠 혐오 . . . . 1회 일치
[[오타쿠]]들에 대한 혐오는 다음과 같은 코드를 가지고 있다. 이하는 어디까지나 오타쿠 혐오를 가진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를 정리한 것이며, 이것이 모든 오타쿠에게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 우건도 . . . . 1회 일치
3월 7일, 기자회견을 열어 “게시글에 ‘2005년 6월 우 후보가 총무과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라고 했으나 실제 총무과장 근무기간은 2005년 7월 25일부터 그 해 9월 4일까지였다"며 “폭로 글은 악의적으로 날조된 허위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게시자가 성추행을 당한 날 모 식당에서 마셨다는 주류도 판매한 적이 없다고 주류 납품 업체가 확인해줬다”고 부연 설명했다. 현재 우 예비후보 관련 미투 폭로 글은 작성자에 의해 민주당 도당 홈페이지에서 모두 삭제된 상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469&aid=0000283022|*]]
- 우츠미 사토루 . . . . 1회 일치
의료에 있어서 약물이 불필요하다는 반약물주의자이며, 그 외 여러가지가 복합되어 있다(…). 그의 클리닉에서 펼치는 의료를 살펴보면 대략적인 주장을 알 수 있는데….
- 워터보딩 . . . . 1회 일치
[[도널드 트럼프]]는 이 기술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다행히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된 후 이 고문이 부활하지는 않았다.
- 원빈(배우) . . . . 1회 일치
2005년 11월 29일 [[입대]]한 후 강원도 최전방에 있는 [[제7보병사단]]의 8연대 산하 GOP 부대에서 근무하며 주목을 받게 된다. 특히 강원도의 전방사단 보병대대는 GOP 일대 감시라는 매우 중요한 임무를 받아 육체적으로도 고되고 힘든 편에 속하기에 군대를 안 가려는 다른 연예인들과 다르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왼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로 6개월 만에 [[의병 제대]]했다. 원빈 측에선 '원래 통증이 있었고 산악지대에서 [[행군]]을 하다보니 무리가 갔다' 라고 주장했다.
- 원피스/831화 . . . . 1회 일치
* 이들은 이상한 토끼의 습격을 받고, 나미는 숲 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 원피스/839화 . . . . 1회 일치
* 잠자코 있던 이치디가 입을 열어 "네 주장은 다수의 약자가 하는 헛소리"라고 폄하한다.
- 원피스/850화 . . . . 1회 일치
* 죄수 도서실은 루피의 발악과 그걸 말리는 [[나미(원피스)|나미]]의 목소리로 소란하다. 루피는 늘어나는 팔을 몸에 휘감아 가며 당겨대고 있다. 나미는 팔을 끊을 생각이냐고 말리는데 루피는 정말로 팔을 끊어버릴 생각이다. 루피는 그 외엔 나갈 방법이 없고 죽는 것보단 양팔을 끊는게 낫다고 주장한다.
- 원피스/853화 . . . . 1회 일치
* 하지만 푸딩 본인은 자신이 혼혈이나 그 "힘"이 눈뜰지 어떨지 미지수라고 주장한다.
- 원피스/870화 . . . . 1회 일치
* 이윽고 저지는 돌아서며 알겠다고 대답한다. 다시는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이스트 블루"의 발라티에도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이로써 그들의 관계는 완전히 정리됐다. 레이쥬는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결말을 얻었는지 작게 미소짓는다. 그러는 동안 탈출방법에 대한 논쟁은 답도 없이 치열해졌다. 무조건 성공확률 0%라고 주장하는 시저, 어차피 이대로도 죽는다는 벳지의 의견이 평행선이었다. 이 논쟁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저지. 그는 제르마가 호위가 될 테니 작전을 실행하자고 한다. 시저는 왜 너희 맘대로 하냐고 반발하지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벳지는 듣고 보니 제르마도 하늘을 날 수 있었다며, 다만 그럴 경우 제르마를 두고 가게 될 텐데 괜찮겠냐고 반문한다.
- 원피스/873화 . . . . 1회 일치
* 망가진 케이크는 "초콜릿 시폰 케이크", 초콜릿 장인인 자신과 시폰 케이크 장인인 [[샬롯 시폰]]이 합작하면 충분히 재현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 원피스/874화 . . . . 1회 일치
* 그러나 푸딩은 눈물과 함께 자신은 빅맘을 위해서 행동하는게 아니라 [[상디]]와 그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서 연극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 월드 인 컨플릭트 . . . . 1회 일치
[[냉전]]이 막바지에 달한 1980년대 말, 경제적 위기에 몰린 소련은 서방과의 군비경쟁으로 인해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 원조를 요청한다. 이를 두고 소련과 서방간 협상이 지지부진해지자 소련은 서베를린을 침공,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 윤보라 . . . . 1회 일치
||<#B26724> {{{#ffffff '''출생'''}}} ||<(> [[1989년]] [[12월 30일]][* 2017년 후크 엔터테인먼트와 전속 계약이후 변경되었다. [[씨스타]] 활동 당시에는 공식 프로필 생년월일이 [[1990년]] 1월 30일이었기에 변경됐을 당시 팬들에게 혼란을 주었지만, 소속사 측에서는 주민등록상 생일하고 실제 생일이 달라 수정한 것이라고 주장한다.]([age(1989-12-30)]세), [[경기도]] [[성남시]][* 한때 전남 진도로 알려졌으나 정확히는 엄마의 고향이다.] ||
- 윤태진(아나운서) . . . . 1회 일치
>서형욱 : [[김선신]] 아나운서가 자기가 그렇게 글래머라고 주장하는데 인정하십니까?
- 윤휘 . . . . 1회 일치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 때 [[환관]]과 결탁하여 인사권을 주무르고, [[요동]]을 정벌하려 할때 [[후금]]과의 화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서인]] 간관들의 탄핵을 받아 [[예조]][[참판]]에서 파면되고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다. 그해 [[4월]] 임피(臨陂)로 이배된 뒤 다시 [[아산]] 등지로 [[유배지]]가 이배되었다.
- 은혼/602화 . . . . 1회 일치
* 주민으로 위장한 나락이 해방군을 습격하려면 화평을 주장한 자작제독은 입장이 곤란해진다.
- 은혼/613화 . . . . 1회 일치
가츠라가 주장한 동맹론은 허무맹랑하게 들리지만 사실 현재 지구측에서는 달리 대안도 없다. 또 가츠라의 원본 카츠라 코타로는 일본의 개항과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인물로, 지구가 최초로 외계 행성과 동맹을 맺게 된다면 나름대로 역사재현이 되는 셈이다.
- 은혼/620화 . . . . 1회 일치
* 츠쿠요는 긴토키가 빈정거린 말을 맞아치며 "네 말대로 지구 여자의 평판을 낮추러 왔다"고 쏘아붙인다. 옆에 있던 [[야규 큐베]]는 자신이나 츠쿠요처럼 "여자"를 버리고 사는 여자들이 지구 여자들의 위신을 짊어지게 됐다고 쓴웃음을 짓는다. 긴토키를 짓밟던 [[가구라]]는 자기가 있으면 그정도 하향은 커버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긴토키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무라 타에]]는 남자들도 도망가는 사지에 모이는건 여자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여자를 버렸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한다.
- 은혼/621화 . . . . 1회 일치
* 그때 뜬금없이 [[쿠로고마 카츠오]]가 팔자에도 없는 안경을 쓰고 나타난다. 그는 겐가이포는 자신과 흙탕쥐파 야쿠자들이 만든 거라 주장한다. 그는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 어떻게 만든 건지 말해주라고 부하들을 에게 말한다. 하지만 그나 부하들이나 일자무식한 인생이라 "덧셈 뺄셈으로 만들었다"는 황당한 대답 밖엔 나오지 않는다. 카츠오는 그걸 한심해하지만 어차피도 그도 도찐개찐이다.
- 은혼/635화 . . . . 1회 일치
* 카무이는 노사가 주장하는 "진짜 야토의 피"라는 말에 코웃음을 친다.
- 은혼/648화 . . . . 1회 일치
* 엔쇼는 자기 같은 자들이 있어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주장했으나 신스케는 "전쟁이 끝나고 보통 인간으로 돌아가서야 진짜 전장에 서는 것"이라 역설한다.
- 이경희 (1880년) . . . . 1회 일치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여 일제 패망론을 주장하며, 해방을 준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고 [[일본인]] 도지사와 부지사 등이 업무를 내려놓고 사퇴를 선언하자 행정공백을 피하기 위해 [[8월 16일]] 위촉장을 받고 초대 [[경상북도]] [[부지사]]가 되고, 그날 [[대구광역시장|대구부윤]]을 겸직하였다.<ref>당시 경상북도청은 대구시내에 있었으므로 그는 경상북도 부지사와 대구부윤 업무를 보느라 양쪽을 오고 갔다.</ref> 그는 대구부윤 上野彦八에게서 행정권과 치안권 일체를 인수하였다. 그밖에 그는 [[대종교]] 본부 경의원의 참의로도 임명되었다.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레이몬드 재노스키(Raymond A.Zanowski) 미육군 대령의 천거로 경상북도 미군정 사령부 민정관으로 위촉되었다.
- 이광수(배우) . . . . 1회 일치
* [[2018년]] [[5월 27일]]에 이광수의 사형을 요청하는(...) 청원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이 유저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밝혔으며, 27일 당시 멤버들과 미션 찰영 도중 이광수가 '''너 [[꽃뱀]]이지?''' 라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광수가 예능을 할때 가끔씩 던지는 농담이자 컨셉이었다. 허나 이 청원이 2500이나[* 정확히 [[추가 바람]].] 되는 동의를 받는 어이없는 결과나 나왔다. [[https://youtu.be/2ZHCRCh4P7s|해당 영상1]] / [[https://youtu.be/9y9x0ET4a4w|해당 영상2]] / [[https://youtu.be/kGAlwT49Olk|해당 영상3]] / [[추가 바람|해당 청원글]][* 현재 삭제된걸로 추정. 링크 있으면 [[추가 바람]].]
- 이국철 . . . . 1회 일치
2011년 9월, [[신재민]] 전 [[대한민국의 문화체육관광부 차관|문화체육관광부 차관]]에게 그동안 수십억 원을 건넸다고 폭로했다.<ref>《시사저널》(2011.09.21),[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6092 <단독> “신재민 전 문화부 차관에게 수십억 원대 금품 줬다” ]</ref> 민주당 국회의원 [[박지원]]은 회장 이국철에게서 전 차관 [[신재민]]이 대선 전후 [[미국|아메리카합중국]] 출장 시 현지 법인카드를 사용한 내역을 가지고 있고 다른 여권 실세에게 돈을 주었다는 주장을 들었다고 밝혔다.<ref>《손석희의 시선집중》(2011.09.27), [http://www.imbc.com/broad/radio/fm/look/notice/?list_id=5667955 " 이국철 게이트 터지나" 박지원 민주당 전 원내대표 터뷰]</ref>
- 이금서 . . . . 1회 일치
**** 3남 : 이윤장(李潤張)<ref>[[평창 이씨]] 족보에 따르면 이금현의 아들은 2명으로 이윤장은 그 중 2남으로서 시조 [[이광]]의 7대조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이 있는 [[조선 숙종|숙종]] 대의 족보를 근거로 그 시조를 이윤장으로 하는 족보가 간행되기도 하여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조선 숙종|숙종]]대의 족보가 위작으로 밝혀져, [[평창 이씨]] 측에서는 그 시조를 [[이광]]으로 확정하였고, 이윤장과의 관련성에 선을 그었다. 이에 따라 [[평창 이씨]]는 [[경주 이씨]]의 분적종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윤장을 [[평창 이씨]]의 시조로 주장하는 견해도 있어 논란의 소지가 있다.</ref>
- 이동흡 . . . . 1회 일치
* [[서울고등법원]] 특별6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4년 10월 27일에 무학이 [[공정거래위원회]]를 상대로 낸 대선주조 지분에 대한 매도를 요구하는 시정조치 등 취소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467702]</ref> 10월 28일에 돈을 주고 청소년과 성관계를 맺은 혐의로 신상공개 처분을 받은 정모씨(29)가 "범죄사실이 알려지면 사업을 계속하기 어렵다"며 [[청소년보호위원회]]를 상대로 낸 신상공개처분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0091305]</ref> 2005년 1월 5일에 2002년 6월 29일 발생한 [[서해교전]] 직전에 대북정보를 지나치게 변형 보고하고 "기무사가 표적 조사했다"고 주장하여 비밀누설과 명예훼손, 품위유지위반 등을 이유로 "정직 1개월 처분을 내린 것이 부당하다"며 한철용 소장(예비역)이 국방부장관을 상대로 낸 정직처분취소 청구소송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4&aid=0000015524]</ref>
- 이소선 . . . . 1회 일치
이소선은 80세의 고령에도 계속하여 부르는 곳이면 마다 않고 참석하였다. 그러나 부른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을 하지는 않았다. 2006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전태일노동상의 시상을 마치고 내려가다 다시 마이크를 붙잡고 "입으로만 노동자는 하나라고 외치면 뭐 하냐. 가장 밑바닥에서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비정규직을 나 몰라라 해서 어찌 민주노총이라 할 수 있냐 …… 손잡고 싸우지 않으면 얼마 못 가 정규직도 비정규직 신세가 될 것"이라고 소리쳤고<ref>[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25965.html 노동자 어머니 이소선 “지금 정규직이라고 천년만년 할것 같냐”], 한겨레, 2008년 12월 5일</ref> 늘 노동자의 하나된 단결을 강조했다. 2009년 전태일 39주기 추모식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함께 플래카드에 이름을 올리자 이제 되었다며 무척 기뻐하였다.<ref name="연합_전순옥">[http://klsi.org/content/%EC%9D%B4%EC%86%8C%EC%84%A0-%EC%96%B4%EB%A8%B8%EB%8B%88%EC%99%80-%EB%85%B8%EB%8F%99%EC%9A%B4%EB%8F%99 이소선 어머니와 노동운동], 한국노동사회연구소</ref>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이소선은 늘 일자리 나누기와 노동시간 단축으로 위기를 고용문제를 극복하자고 주장하였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9/03/0200000000AKR20110903057900004.HTML "이소선 여사는 따뜻한 마음의 노동운동가"], 연합뉴스, 2011년 9월 3일</ref>
- 이원재(축구선수) . . . . 1회 일치
||||||||||||<#ff1924><:> '''{{{#ffffff 경남 FC 역대 주장}}}''' ||
- 이재학 . . . . 1회 일치
* [[물수제비]]를 10개까지 튀겨봤으며, [[반포대교]] 시작점부터 해서 맨 끝에 걸어가던 사람 뒤통수를 맞혔다고 '''본인이 주장한다'''(...) ~~재학아 [[허갤]]하니~~[[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396&aid=0000455235|관련 기사]]
- 이차강간 . . . . 1회 일치
* 재판의 과정. 피고인의 보호를 위해서 변호인이 하는 주장이 피해자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
- 이케다 초등학교 사건 . . . . 1회 일치
2003년 5월에 검찰은 "이 사건의 피해 참상과 많은 가족의 비통한 모습을 볼 때, 사형폐지론이 피해자나 유족의 입장과 심정을 무시하는 공허한 것인지 실감할 수 밖에 없다."고 사형을 구형했다. 변호인단은 정신이상과 심신미약을 주장했으나, 타쿠마는 최종변론 후에는 "죽는들 전혀 겁먹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실컷 불쾌한 경험을 겪었습니다.","어쩔 수 없는 가난뱅이 인생이었으니, 이런 패턴 쪽이 더 좋았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 일곱개의 대죄/205화 . . . . 1회 일치
* [[엘리자베스 리오네스|엘리자베스]]가 [[데리엘]]에게 당해 추락하자 상공에 나타난 두 사대천사는 "잘도 무례한 짓을 했다"고 말하지만 별로 심각한 기색도 없다. 그들에게도 엘리자베스는 "당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혼나는 귀찮은 것" 정도에 지나지 않는 늬앙스다. 둘은 또 과연 "산 미끼"를 가지고 십계가 낚일지 어떨지 내기를 한 모양인데, 시종 존댓말을 쓰는 쪽은 자기 승리라고 주장하지만 반대쪽은 "전원이 모이지 않았으니 무효"라고 우긴다.
- 일곱개의 대죄/208화 . . . . 1회 일치
* [[뤼드셀]]은 그녀의 결정에 반발하며 마신족을 멸절해야 한다 주장한다.
- 일장청 호삼랑 . . . . 1회 일치
* 미남, 미녀를 뜻한다는 설. 수호전의 원형 가운데 하나인 「[[송상36인찬]](宋江三十六人賛)」에서 [[연청]]을 묘사할 때, '일장청'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연청 역시 수호전 굴지의 미남이므로 미남을 뜻하는 것일 거라는 주장이다.
- 임신균 . . . . 1회 일치
'메루카리'라는 인터넷 프리마켓 사이트에서 여성이 임신하기 쉬워지는 "임신균"이 붙어있다고 주장하며, '임신미(妊娠米)'를 고가에 판매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마이니치 신문의 취재에 따르면, 출품한 사람은 실제로 임신한 경험도 없으며 판매하는 임신미는 제품명에 써있는 용량보다 훨씬 적은 양이었다. 전문가는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불임으로 고민하는 여성을 모독하는 사기 행위"라고 단언하였다.[[https://mainichi.jp/articles/20170502/k00/00m/040/105000c (참조)]][[http://archive.is/vrWZ4 (아카이브)]]
- 임은정(법조인) . . . . 1회 일치
이제 조용히 대세에 묻어가기만 하면 검찰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는 몸이었으나, 2012년 9월 6일,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던 [[박형규]] 목사의 재심 공판에서 무죄를 구형하여 검찰은 물론이고 법조계 전체에 커다란 충격파를 일으켰다. 당시 검찰 상부에서는 백지구형[* 백지구형이란, 검찰의 할 일을 포기하고 판사에게 형량을 일임하는 것이다. 즉 판사에게 "법과 원칙에 따라 선고해 달라"고 의견을 내는 것을 말한다. 관행이라는 말로 합리화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검찰권의 포기이자 검찰 고유 권한의 불이행이다.]을 지시해 놓은 상태였으나, 지시를 거부하고 무죄를 구형한 것이다.[* 정권의 바람을 잘 알고 있는 부장 검사는 "무죄 구형을 하는 것은 검찰의 잘못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 되니,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허나 임 검사는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무죄 구형도 그렇지만, 그때의 논고(최종진술) 또한 화제가 되었다:
- 장남석 . . . . 1회 일치
[[2006년]] [[대구 FC]]에서 데뷔하여, 그 해 [[FA컵 2006|FA컵]] 득점왕에 올랐다. [[대구 FC]]의 주장을 맡았다.
- 장서희(1972) . . . . 1회 일치
다만, 이 연기력이 주로 [[막장 드라마]]같은 자극적인 연출 내에서 빛을 제대로 발하는지라 약점 아닌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누구든 장서희를 떠올리면 복수의 화신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니...[* 복수극이 아닌데도, 장서희만 나오면 어르신들이 '''“그래서 쟤는 언제 복수한대니?”'''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실 젊은층도 그렇다~~] 그래서 복수극을 촬영한 다음에는 색다른 작품에 출연하면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해 왔으나, 이상하게도 비(非)복수극들은 작가의 삽질이나 안습한 대진운 등이 겹쳐서 인기를 끄는 데 실패했다. 일각에서는 '장서희의 연기력이 좋긴 하지만, 작품을 고르는 안목은 연기력에 비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아내의 유혹]]같은 작품을 보다보면 안목이 부족해도 연기력이 저 정도면 무슨 문제랴 싶은 생각이 든다. 너무나 개연성이 부족한데 신애리를 용서하고 다시 애정어린 관계로 돌아간다. 일일드라마라 티가 덜 났나 하는데 2018년에 하루에 4편씩해주는걸 보다보면 정말이지 배우들의 연기력에 치얼쓰하고 작가의 막장력에 기브업하게된다.
- 장세용 . . . . 1회 일치
대구취수원 구미 이전에서는 구미 공단 폐수 무방류 시스템 도입이 먼저라고 하였으며, 대구는 당연히 폐수 무방류라도 결국 방류되기에 폐수가 완전히 처리되지 않는다고 취수원 이전을 고집한다. 하지만, 대구시의 주장에서 모순되는 점이 하나는 대구 성서 공단에서도 폐수 무방류 시스템을 도입하려고 하며,[* 당연히 대구가 낙동강 삼각주 주변에 위치한 도시가 아니기에, 대구보다 하류인 부울경도 같은 논리로 취수원 이전을 시도할 수 있다.] 둘은 대구의 차세대 산업 중 하나가 물 산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서공단에서 방류된 폐수의 유해물질 농도가 구미공단에서 방류된 폐수보다 높다는 조사가 나오면서 결정타를 먹었다.
- 장재인 . . . . 1회 일치
그런데 나머지 세 명은 백스테이지에서 대놓고 장재인을 디스했다.--김지수 씨를 데려와야했어!--(대충 너무 튀는 장재인을 데려와서 반사손해를 봤다는 주장인데.. 솔직히 김지수가 장재인 대신 왔었어도 저 셋이 탈락하는 건 변함이 없었을 것 같다. --그냥 실력이 합격한 둘보다 딸리는 거..--)
- 장진수 (프로게이머) . . . . 1회 일치
* 게임아이 주장원전 1위2위3위
- 절대가련 칠드런/447화 . . . . 1회 일치
* 그는 그런 시도는 헛수고라고 폄하하고 "나는 나인 채로 블랙 팬텀"이라고 주장한다.
- 절대가련 칠드런/458화 . . . . 1회 일치
* 문제는 타니자키와 미나모토가 산 속에서 미아가 되어 버린다. 도시는 커녕 아직 산을 내려가지도 못하고 있다. 타니자키는 GPS를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하며 수원을 끼고 하산하는 방식을 썼는데 이게 잘못돼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다. 그들이 따라가던 강은 폭도로 이어져 길이 끊겨버린 것이다.
- 절대가련 칠드런/473화 . . . . 1회 일치
더 칠드런 등장. [[아카시 카오루]], [[노가미 아오이]], [[산노미야 시호]] 도착. 아키라는 어차피 [[미나모토 코이치]]도 없고 그들도 효부의 동료이긴 마찬가지, 아무리 레벨7이라도 못 이길 상황이 아니라며 작전 속행을 주장한다. 하츠네는 "본능이 뭔가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다"며 완강히 거부한다.
- 정승화(육군) . . . . 1회 일치
10.26 사건 이후 계엄사령관이 되어 사건 수습을 진행한다. 그러나 당시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 때 신군부측에 납치당하고 만다. [[10.26 사건]] 문서에도 자세히 나오지만, [[박정희]]가 피살된 [[10.26 사건]] 당시 궁정동 안가 '가'동(피살장소는 '나'동이었음)에 있었다는 점을 조사하겠다는 명목으로 전두환의 부하 허삼수 [[대령]] 등에게 강제 연행,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사건 당일 [[김재규]]는 대통령이 연회가 있으면서도 정승화에게 저녁을 같이 하자고 궁정동으로 불러냈다. 물론 김재규는 박정희와의 연회가 있었기 때문에 정승화와 함께하지 못했고, 정승화는 김재규가 보낸 중정 차장과 저녁을 먹던 중에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김재규의 치밀한 계략인지, 순간적인 기지인지, 본능적인 직감인지는 이제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당시 피살 현장에서 매우 가까이 있으면서도 김재규의 암살 시도를 눈치채지 못했고,[* 다만 뭔가 수상쩍다는 건 느꼈는지 차 안에서 김재규가 "목이 마를 텐데 이거라도 좀 드시라." 하면서 준 사탕을 바로 바닥에 버렸다고 한다. 본능적으로 자신도 암살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다고...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는 사탕 대신 껌을 준다.] 김재규와 같은 차를 타고 [[육군본부]]에 갔으며, 육군본부에 도착한 이후에도 대통령이 저격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숨긴 채 [[노재현]] [[국방부장관]]에게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으며 자세한 경위는 중앙정보부장에게 물어보라면서 사건 경위를 축소하여 보고하였고 [[차지철]]이 지휘했던 [[수도방위사령부|수경사]]를 불법적으로 장악하려 시도하는 등 김재규의 정권장악시도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행보를 보인 사실은 정승화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훗날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박정희의 죽음을 현장에서 막지 못한 죄인이니 마땅히 물러나야 하는 사람인데 뻔뻔하게도(?) 자리를 보전하길래 의로운 마음으로 들고 일어났다고 주장했지만...]이에 대해 정승화는 청문회 등에서 평소 차지철의 행보와, 당시 상황의 급박함으로 인해 대통령을 암살한 범인이 차지철이라고 오판해서 수경사 병력을 장악해 차지철을 제압하려 한 것이라고 자기 변호하였다.
- 정은표 . . . . 1회 일치
1999년작 영화 '유령'에서 미사일 발사키를 부함장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삼켰다가 [[끔살]][* 삼긴 미사일 키를 찾으려고 즉시 살아 있는 채로 개복수술을 하려는데 마취할 시간도 아깝다며 부함장이 그냥 꺼내라고 시켜서 그만... ]당하는 조리장역[* 그전에 함내 규칙상 금지되어 있는 가족사진을 보다가 주인공인 431에게 들켰으나 처벌없이 자기 방에 라면이나 두 그릇 끓여서 가져다 달라는 것으로 넘어간다. ~~방에 라면을 끓여 들고 오면서 "어떤 면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일단은 꼬들하게 끓여왔습니다." 라고 해주는 센스...는 한 "같이 먹지. 한 그릇은 자네꺼야."라는 정우성의 인자함에 바로 묻힌다.~~ 그렇게 자신을 봐주며 인간적 친분이 쌓인 431을 돕기 위해 미사일 발사키를 삼켰다가 그만...][* 순박한 인상으로 가족을 그리워 하다가 결국엔 그야말로 끔살당하며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계속 힘없이 눈치보며 살 수 없다.'며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부함장 202의 행동를 그저 대의를 앞세운 광기로 보일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는 역할을 훌륭한 연기로 소화해냈다보니 상대적으로 당시에 무명이던 손병호, 설경구 같은 연기파 배우들이 함께 출연했음에도 조연중 가장 주목 받을 만한 역할이었다.]을 맡으면서 영화 관객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나, 아무래도 전체 대중들에게 인지도를 얻은건 역시나 [[해를 품은 달(드라마)|해품달]]. ~~"전하~~~~ 좋아서 입이 안 다물어지옵니다."~~ 그래서인지 자신에게 특별한 이름이라는 이유로 막내 아들의 이름을 지'''훤'''이라고 지었다고 한다.[[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2317203|##]]
- 정주관백 . . . . 1회 일치
전국정주관백협회(全国亭主関白協会)라는 단체가 있다. 남편이 폭군이 되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는 아니며, 정주관백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자는 단체이다.(http://www.zenteikyou.com/zwhat.html)
- 정찬성 . . . . 1회 일치
버뮤데즈의 레슬링을 의식했는지 가드를 꽤 아래로 내리는 스타일로 경기를 시작했고 초반 버뮤데즈의 테이크다운 시도를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경기를 괜찮게 풀어갔다. 하지만 펀치가 대부분 빗나가면서 확실히 경기감각을 채 끌어올리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버뮤데즈의 큰 라이트 펀치를 맞으면서 위태위태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버뮤데즈의 왼손 셋업을 피하고 날린 어퍼가 그대로 턱에 꽂히면서 1R 2분 30초 만에 경기를 끝냈다.[* 언제나 그렇듯 너무 빨리 말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저 상태에서 안말릴 경우 맞던 사람은 후유장애를 가질 확률이 매우 높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찬성을 언더독으로 평가했지만 코리안 좀비의 부활을 전세계에 알렸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경기 내용을 말하면서 연습했던 대로 잘 안됐다고 밝히거나 질문 내용을 못알아들으면서 웃음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울먹거리며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을 걱정하는 발언을 남기면서 팬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vod/index.nhn?category=fight&listType=total&date=&gameId=&teamCode=&playerId=&keyword=&id=272392&page=1|영상링크]]
- 존 딜린저 . . . . 1회 일치
결혼까지 했음에도 딜린저는 에드 싱글턴(Ed Singleton)이라는 남자와 함께 무어스빌의 식료품에서 강도짓을 벌인다. 그리고 빠르게 체포ㅋ. 싱글턴은 법정에서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해 징역 2년을 받았지만 딜린저는 아버지의 조언대로 죄를 고백했다가 징역 2~14년+징역 10~20년[* 미국은 범죄를 여러개 저지르면 형량이 따로 붙는다.]이라는 선고를 받고 큰집에 처박히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해리 피어폰트(Harry Pierpont)와 같은 동료들을 만나게 된다.
- 존오그로츠 . . . . 1회 일치
영국 본토 최북단으로 알려져있다. [[http://m.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585432.html#cb|던넷헤드가 영국 최북단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존오그로츠가 더 유명하다. 존오그로츠에서 영국 최남단이라는 랜즈엔드까지 이어진 조글이라는 길을 완주하는 챌린지도 존재한다.
- 주장환 . . . . 1회 일치
'''주장환'''(1957년 1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신문기자, [[소설가]]이다. 서울신문(스포츠서울) 세계일보 기자를 거쳐 파이낸셜뉴스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중소기업사랑 청소년글짓기 공모전 심사위원장, 대한민국장애인예술대상 문학부문 심사위원, 충효예실천운동 본부 상임위원,부총재 [[731부대]] 한국인 희생자 진상규명위원회 대변인을 거쳐 [[극동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다. 하버드대학 Literati China 과정 수료. 월간조선 객원기자
- 진격의 거인/83화 . . . . 1회 일치
* 엘빈은 가능하다면 거인의 힘을 빼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중상을 입은 자도 거인화를 통해 회복할 수 있으므로 유사시 히든카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 진격의 거인/84화 . . . . 1회 일치
* 초대형 거인의 완전한 사망, 아군측 두 번째 거인화 확보로 인해 거의 망한 것 같았던 조사병단은 극적으로 성과를 거뒀다. 병력이 거의 전멸하고 지휘관 엘빈까지 사망했기 때문에 그대로 돌아갔다면 턱없는 패전으로 취급됐겠지만, 이로써 적어도 무승부라고 주장할 근거가 생겼다.
- 진격의 거인/87화 . . . . 1회 일치
마레 동쪽의 "적대국"이 언급되었는데, 이쪽도 거인의 힘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걸로 추정된다. 마레가 군사력을 원하는 이유도 바로 이 적대국의 존재 때문. 그 외에도 다양한 나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엘디아 복권파는 시조 거인의 힘을 앞세워 망명한다는 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정말로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글로스는 전인류가 엘디아인을 증오하고 박멸하려 한다고 주장하는데 과장이 섞였더라도 보통 인간의 나라인 이상 엘디아인에 대해서는 비슷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또 시조 거인의 힘이라는 매력적인 힘을 손에 넣는데, 그 주도권을 여전히 엘디아 복권파 손에 남겨놓을지도 의문. 결국 그 적대국에서도 엘디아 복권파의 미래는 밝지 않다.
- 진격의 거인/90화 . . . . 1회 일치
* 조사병단이 찾아낸 진실을 대중에 공표하는 일에 이르러 병단의 수뇌부는 이견을 보인다. 이 일이 공표될 경우 대중은 혼란에 빠질 것이며 어떤 사태가 야기될지 알 수 없다는 이유였다. [[도트 픽시스]]는 단호히 공표할 것을 주장한다.
- 진격의 거인/96화 . . . . 1회 일치
* 리더를 잃은 이상 작전은 시작도 못 해본 채로 실패, 애니가 귀환을 결정하나 라이너는 어머니 [[카리나 브라운]]의 당부를 떠올리며 그럴 순 없다고 주장한다.
- 짐 브라부라 . . . . 1회 일치
맥스가 게이트 상원의원 살인 사건의 용의자인 [[모나 색스]]와 함께 행동하다 붙잡히자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며 맥스를 꾸짖는다. 맥스가 자신이 맡은 사건과 게이트 상원의원 사건이 연관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자, 두 사건 모두 윈터슨이 맡게 한다. 그러고는 맥스의 총을 빼앗고 해당 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게 한다.
- 창작:좀비탈출/5-1-1-1-1 . . . . 1회 일치
그 옆에는 장롱이 넘어져 있다. 이건 앞으로 넘어져 있다. 매우 부자연스럽다. 녀석들이 창궐한 거지 지진이 난게 아니다. 녀석들에겐 장롱 정도로 무거운 걸 넘어뜨릴 힘은 없을 것이다. 이건 장롱 앞에서 당겨서 넘어진 형태다. 이런건 사람이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존자가 다녀갔을 거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보기엔 주장이 너무 깨끗하다. 여기까지 들어온 생존자라면 뭔가 찾으러 왔을 것이다. 나처럼 다이너스티를 노렸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일부러 어질러놨을까? 차키가 장롱 밑에 있을 것 같아서?
- 창작:좀비탈출/학교 . . . . 1회 일치
우리 학교는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러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업을 중지하기는 커녕 야간자율학습도 그만두지 않았다. 이유는 교감이 "'''이럴 때일수록 더욱 면학에 전념해야 합니다! 6.25 때도 학교는 닫지 않았습니다!"'''라고 열광적으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 챠라남 . . . . 1회 일치
흔히 챠라남이라 불리는 외모는, 선탠을 하거나 태닝을 해서 햇볕에 그을린 피부, 갈색이나 금발로 염색한 머리, 헌팅이나 소개팅 같은 곳에 자주 나간다는 이미지가 있다. 귀걸이나 목걸이 등의 액세서리를 많이 쓰고 다니고, 이 점 때문에 '챠라챠라 하다'고 부르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 체육회계 . . . . 1회 일치
고등학교, 대학 등에서 운동부(체육회)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이 사회 생활까지 가져온 운동부(체육회) 계통의 문화. 회사나 직장, 사람의 성격을 나타내는데 사용한다. 연예계가 체육회계가 강하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와는 '군대 문화', '군기잡기' 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 최동 . . . . 1회 일치
[[황인종]]의 우수성을 논하고 [[한민족]]의 시원을 먼 곳에서 찾는 최동의 논리는 《[[조선]]문제를 통하여 본 만몽(滿蒙) 문제》(1932)에서와 같이 일제의 [[만주]] 침략이나 [[대동아공영권]]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오랜 집필 작업 끝에 은퇴 후인 [[1966년]]에 《[[조선상고민족사]]》를 탈고했고, 이 업적으로 [[1968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 최상열 . . . . 1회 일치
김우종 전 경희대 교수와 소설가 이호철씨 등 [[문인간첩단 사건]]의 피해자와 유족 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김씨 등이 지난 2003~2008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지정돼 생활지원금을 받았기 때문에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자격이 없다"는 국가의 주장에 대해 " 민주화운동보상법에 따라 지급한 보상금이 위자료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며 "국가는 총 6억 9600여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 최선 (정치인) . . . . 1회 일치
서울시 강북구 기초 의회는 총 14명의 구의원을 위한 2007년 의정활동비를 3천284만원에서 5천495만원으로 67%인상하였다. 이때 반대의 압력과 강북구청정의 재의 요청에 따라 월 10만을 삭감하고 인상안을 기권1, 찬성11표로 통과시켰다. 그런데 최선은 이를 주민들의 동의를 얻지못하였으며 과도한 금액이라고 주장하고 1월치 의정비 중 인상분을 구청에 반납하였다. 하지만 구청은 수령할 이유가 없다고 수납을 거부하였으며 민주노동당은 이 인상분을 [[법무법인공탁]]처리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2008년 2월 5일 서울시 강북구 의회의 의장 윤영석및 다른 의원들은 의정비 인상이 정당했으며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행위라고 비판하고 MBC 라디오등의 인터뷰에서 동료의원의 명예를 실추 시켰다는 이유로 임시회 본의회를 열어 최선 의원을 징계하기 위한 윤리특별위 구성결의안을 처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반대의견이 거세어 회의는 무산되었다. 최선은 과다하다는 이유로 서울시 강북구의 재정자립도가 30%이며 서울의 25개 자치구중 22번째로 하위권임을 들고 있다.
- 최성국 (축구선수) . . . . 1회 일치
[[2011년 5월]] [[K리그 승부조작 사건|승부조작 사건]]이 터진 후 최성국은 승부조작 근절을 위한 [[K리그]] 전 구단 전 선수가 참여하는 워크숍에서 "부끄러움이 있다면 이 자리에 있지 않는다. 솔직히 웃어 넘길 수 있었으나 계속 들으니 지치기도 했다"라며 또 "모르는 전화는 받지도 않는다. 부끄러움 없이 정직하게 살았다"라고 하면서 승부 조작을 극구 부인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최성국∙유병수, “통장, 통화 내역 공개할 수 있다” |url=http://www.sportalkorea.com/news/view.phgisa_uniq=2011053117182513§ion_code=10&key=&field= |출판사=스포탈코리아 |저자=김성진 |날짜=2011년 5월 31일 }}</ref> 그러나 [[2011년]] [[6월 28일]] [[상주 상무 피닉스|광주 상무]] 소속 시절 승부조작에 참여했다고 자진 신고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결백 주장하던 최성국, 승부조작 자진신고 |url=http://www.sportalkorea.com/news/view.php?gisa_uniq=2011062910214013§ion_code=10&key=&field= |출판사=스포탈코리아 |저자=김성진 |날짜=2011년 6월 29일 }}</ref> 게다가 브로커 역할까지 한 것으로 밝혀졌다.<ref>{{뉴스 인용 |제목='혐의 없다던' 최성국, 400만원 수수에 선수 섭외까지 |url=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occer&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228785 |출판사=OSEN |저자=허종호 |날짜=2011년 7월 7일 }}</ref> 더 이상 축구계에 발을 딛을 수 없게 영구 제명되었으나,<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41&aid=0002054535 승부조작 가담 선수 모두 “선수자격 영구박탈”] 일간 스포츠 김민규 기자 2011-08-25</ref> [[마케도니아]]의 [[FK 라보트니치키]]에 입단하여 축구 선수로서의 생명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2012년]] [[3월 16일]](한국시간), [[국제 축구 연맹|FIFA]]가 최성국의 모든 선수 활동을 세계적으로 정지시키는 영구제명을 결정함으로써<ref>{{뉴스 인용 |제목=FIFA, 최성국에 '선수 활동 정지' 징계 |출판사=OSEN |날짜=2012년 3월 16일 |url=http://sports.media.daum.net/soccer/news/a_match/breaking/view.html?cateid=1172&newsid=20120316073304526&p=poctan }}</ref> 축구 선수로서의 삶은 끝나게 된다.
- 최원권 . . . . 1회 일치
전역 이후 [[제주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였으며 2012 시즌을 앞두고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 최창흡 . . . . 1회 일치
그는 [[1839년]] [[6월]]에 체포되었는데, 그때 그의 사위 [[조신철]]이 [[베이징]]에서 가져온 [[성물]]들이 발견되어, 극심한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그는 일곱 차례의 극심한 [[주뢰형]]과 주장질을 받고 [[태형]] 150대를 맞으면서도 결코 배교하지도 교우들의 위치를 발설하지도 않았다. 그는 [[형조]]에서도 세 차례를 더 극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신심으로써 견뎌냈다. 그는 사형장으로 압송되기 직전에, 한 형졸을 불러 수감되어 있는 자신의 아내와 딸에게 울지 말며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미]]하며 [[순교]]로서 자신을 따라오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청했다.
- 최태원 (야구인) . . . . 1회 일치
우여곡절 끝에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단은 해체 후 [[SK그룹]]에 인계되어 [[SK 와이번스]]라는 이름으로 새로 창단했고 [[인천광역시|인천]]으로 연고지를 옮겼다. [[2000년]] [[SK 와이번스]]의 초대 주장을 맡았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10160242 “반갑다 인천…이겨라 광주!”최태원 코치의 특별한 가을] - 동아일보</ref> 그러나 이미 30대 초반에 접어든 그는 빈볼의 후유증으로 인해 [[2001년]]에는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한 채 시즌을 마감했고, 프로야구판 [[노동조합]]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탓에 [[SK 와이번스|SK]] 프런트의 안 좋은 시선을 받았다.
- 추미애 . . . . 1회 일치
* 2016년 9월 22일, 추 의원에 대해 허위 기사를 쓴 지역 매체 기자에게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 40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이 내려졌다. 법원은 "기자로서 최소한의 사실 확인 의무조차 이행하지 않고 허위 기사를 작성해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고도 피해자의 고소가 언론 탄압이라고 주장해 범행 이후의 정황도 좋지 않아 징역형의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60919_0014394041|#]]
- 칼렉시트 . . . . 1회 일치
* 셜빈 피셔버(Shervin Pishevar) - 우버의 개발자이며, 하이퍼루프 원의 공동창업자. CNBC에서 "캘렉시트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발언하며,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애국적인 일이고, 미국을 떠난 캘리포니아를 '뉴 캘리포니아'라고 부르겠다"고 주장했다.--[[뉴 캘리포니아 공화국]]?-- 셜빈 피셔버는 예스 캘리포니아 캠페인을 구상하고 있으며, 스페인 카탈루냐의 독립운동을 모델로 하여 2019년 국민투표를 제안하였다. 그는 캘리포니아가 국가가 된 뒤에 다시 연방에 들어와도 된다고 발언했다.
- 크림 전쟁 . . . . 1회 일치
[[러시아]]는 전부터 부동항을 얻기 위해 남진해왔다. 그리고 그쪽 [[오스만 제국]]이 있었다. 러시아는 자신들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정교회 신자들을 지킬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오스만은 이를 부정하였다.
- 킹덤/511화 . . . . 1회 일치
환의는 아예 열미를 버린 채로 왕도권에 진입, 업을 따내버리는 전략도 있다고 주장한다. 언뜻 듣기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몽념이 무모하다고 하자 "그러니까 송사리"라며 환의의 깔보는 태도는 더해진다. 그러면서 왕전이 사라진걸 보고도 아직 모르겠냐고 말한다. 왕전은 바로 그게 가능한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성을 빠져나갔던 것이다.
- 킹덤/529화 . . . . 1회 일치
* 그때 언덕의 반대편, 기수군 후미를 요격하는 희고 붉은 깃발의 무리가 보였다. [[몽념(킹덤)|몽념]]의 [[낙화대]]였다. 몽념은 [[육선]]을 앞세워 우측으로 돌격시켜 기수 본진의 방어를 뚫고자 했다. 낙화대의 진격은 이미 기수군 후방의 2진까지 돌파하고 있었고 기수에게 급보가 올라갈 지경이었다. 부하들은 [[마정]]을 불러들여 본군을 사수해야 한다 주장했으나 기수는 그럴 경우 전방이 무너지는 사태가 일어날 거라 여겨 한사코 거절했다. 대신 기수는 자신이 직접 낙화대를 저지하러 나서는데.
- 태보 . . . . 1회 일치
태권도와 복싱의 동작을 사용하여, 에어로빅처럼 음악에 맞춰 춤추듯이 움직이고 동작을 반복하여 트레이닝을 한다. 태권도와 복싱의 동작을 쓰기 때문에 운동만이 아니라 [[호신술]]로도 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어디까지나 동작만 연습하는 것이고 실제 대련 프로그램은 없기 때문에 무술로서의 성격은 희박하다.--대신 빌딩은 파괴할 수 있다.--
- 토리코/388화 . . . . 1회 일치
* 팔왕과 다른 모두의 도움이 없었다면 진작 살해당했을 거라며 단 한 입이라도 그들에게 먼저 먹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 토탈워: 쇼군 2/가문 . . . . 1회 일치
자신들이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이들로, 실제 역사에서는 시코쿠 전체로 세력권을 넓혔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굴복해야 했다. 이후 [[큐슈]]와 [[조선]]에 원정을 가기도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벌어진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세력 다툼에서 도요토미 가문을 지지했다가 도쿠가와가 승리하며 모든 권력을 잃게된다.
- 퇴계 이황 . . . . 1회 일치
하지만 기묘사림의 명예회복과 이를 통한 조선 사림의 도통(道統)을 확정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선조 즉위년에 [[기대승]]이 [[정몽주]]만이 아니라 [[김굉필]],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고 발의하였으며, 이황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을 사현(四賢)으로 하여 현창(顯彰)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 특이한 세금 . . . . 1회 일치
* 스포츠 스타세 : 40개 이상의 주. 소득세의 일종으로서, 도시나 주를 방문한 사람이 해당 지역에서 수익활동을 했을 경우 그 소득세의 관할권을 주장하는 법률이다. 이론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행정능력의 한계 때문에 한 경기로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스포츠 스타들만 피해를 본다. 1991년 [[시카고 불스]]가 [[LA 레이커스]]를 NBA 파이널에서 꺽고나서, 캘리포니아 주에서 졸렬하게 보복성으로 제정했다(…). 그리고 이 졸렬함을 여러 주들이 앞다퉈서 따라하게 됐다.
- 특촬물 . . . . 1회 일치
단어 그 자체의 의미로는 '''특수촬영물'''(特殊撮影物)의 약자. 넓은 의미로는 특수촬영기법이 사용된 모든 영상물을 말하지만,[* 오죽하면 [[닥터후]]나 [[히어로즈]]와 같이 특수효과로 점철된 [[드라마]]들도 특촬물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크게 보자면 틀린말도 아니긴 하다)--한 술 더 떠서 [[텔레토비]]도...--][* 대표적으로 몇 년 전 [[루리웹]]의 애니 게시판에서(여기선 특촬물 관련 글도 같이 취급한다) 일부 회원들이 저 두 작품을 두고 '이것도 특촬이다'라며 도배하면서 논쟁이 일어났다가 잠시 동안 특촬 관련 게시글이 금지가 됐었다.] 일반적으로 '특촬물'이라고 하면 전대물, [[괴수]]영화 같은 일부 장르의 영상물에 한정된다. 특수효과를 뜻하는 약어인 SFX(Special Effect)가 영상물 전반의 이름으로 통칭되기도 한다. [[SF]]와 헷갈리지 말자! [[디워]]의 경우가 --애초에 이 영화 자체가 여러가지로 까이지만-- SF와 SFX를 구별 못한 대표적 사례로, SF영화라고 홍보했다가 엄청난 빈축을 사기도 했다.
- 파워스톤 . . . . 1회 일치
오컬트 상품의 일종. 특정한 광물에 특별한 힘이 있다고 선전하여, 파워스톤이라고 주장하며 판매한다. 주로 '수정' 같은 준보석류가 많다. 이전부터 보석 업계에서 쓰이던 [[탄생석]] 같은 것이 발전한 셈.
- 페어리 테일/541화 . . . . 1회 일치
* 종전을 맞이한 할지온 항구는 생존자들이 부상을 치유하며 휴식하고 있었다. [[리온 바스티아]]와 [[셰리아 브렌디]]는 누군가 워프로 접근하자 고개를 돌린다. [[메스트 그라이더]]의 도움을 받은 쥬비아와 그레이였다. 그레이는 한 번에 더 많이 옮길 순 없냐고 독촉하는데 메스트가 말도 안 되는 요구하지 말라고 대꾸한다. 쥬비아는 메스트는 안중에도 없는지 그레이와 단 둘이 워프하는게 딱 적당하다고 주장한다.
- 페어리 테일/543화 . . . . 1회 일치
* [[아크놀로기아]]를 하루지온으로 유인해 약점을 공략하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본능적인 직감인지 이쪽의 계산을 간파한 건진 모르지만 아크놀로기아는 항구가 보이자 마자 선수를 쳐서 정박해 있던 모든 배를 박살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아크놀로기아를 배에 접촉시켜 멀미를 유발하는 방법을 쓸 수가 없다. 페어리 스피어 발동 작전은 이대로 실패하는 걸까? 그때 [[그레이 풀버스터]]가 작전 속행을 주장하며 항구로 뛰어간다. 자신과 [[리온 바스티아]]가 힘을 합쳐 얼음조형마법을 쓰면 분명 큰 배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그들과 [[쥬비아 록서]]까지 가세해 얼음의 배를 만드는 작업이 개시된다.
- 페이데이 2/하이스트/블라드 . . . . 1회 일치
>캘리포니아 남부 대부분을 파괴한 지진이 발생한 직후, 고속도로에 버려진 두대의 운송 트럭이 수송품을 도난당했다. 해당 트럭들은 코왈스키 & 허치라는 시애틀-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 구간 운송 회사의 소유였다. 해당 회사는 러시아인 사업가와 계약을 맺었다고 주장했지만, 수사를 진행하기 전에 회사 사무실이 전소되었으며 모든 기록은 파괴되었다.
- 핑커톤 . . . . 1회 일치
1872년, [[제시 영거 갱]]의 핵심인물이었던 [[제시 제임스]]와 프랭크 제임스를 잡는답시고 그들의 가족이 사는 집에 폭탄을 던져버렸다. 이로 인해 제임스의 9살 먹은 이부동생 아치 사무엘(Archie Samuel)이 사망했으며 제임스의 모친인 제렐다 새뮤얼(Zerelda Samuel)[* 재혼해서 성이 바뀌었다.]은 한쪽 팔을 잃게되었다. 핑커톤측은 집을 불태워버리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주장했지만 앨런 핑커톤이 "집을 불태워버려라"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증언이 있다.
- 하이큐/209화 . . . . 1회 일치
* 그러나 주장 사와무라와 타케다 고문은 웃을 일로 들리지 않는다.
- 하이큐/223화 . . . . 1회 일치
* 후쿠타치 켄지가 리드를 살려가자고 팀원들을 격려하자 모니와 카나메는 주장다워 졌다고 기뻐한다.
- 하이큐/224화 . . . . 1회 일치
* 히나타는 점점 주장의 재목이 되어가고 있다.
- 하이큐/225화 . . . . 1회 일치
* 우카이 코치는 후쿠타치를 "빅서버"[* 강한 서브를 잘 때리는 선수]라 부르며 새로운 주장인 모양이라고 짐작한다.
- 하이큐/236화 . . . . 1회 일치
주장 에치고는 코트로 돌아가며 "카라스노 이겨라" 분위기를 뒤집어 주자고 팀의 분위기를 돋운다.
- 하이큐/239화 . . . . 1회 일치
* 실책을 저지른 히메카와는 사색이 된 표정이다. 하필이면 또 3학년 에이스 테라도마리를 건드렸으니. 그런데 그런 분위기를 주장 에치고가 풀어준다.
- 하이큐/244화 . . . . 1회 일치
센터 코트란 준결승 이상부터 특설 코트. 메인 아레나의 가운데 한 면만 설치되는 코트다. 국제시합 등이 이 규격에서 시행된다. 아카아시는 메인 아레나가 더 크고 사람도 많지만 그래봐야 그 중에서 보쿠토를 봐줄 사람은 4분의 1이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곳 서브 아레나는 후쿠로다니가 독점하고 있으니 모든 관객이 보쿠토를 주목하고 있다. 즉, 실질 봐주는 관객이 더 많다는 얘기.
- 하이큐/251화 . . . . 1회 일치
관중석에 와있는 노헤비 학원 배구부의 전주장 [[다이쇼 스구루]]는 나이브한 태도로 "이나리자키가 가차없다"고 평한다.
- 하이큐/252화 . . . . 1회 일치
* 취주악부를 내세운 이나리자키의 응원단은 TO 중에도 위세가 대단하다. 노헤비 학원의 전주장 [[다이쇼 스구루]]은 자기가 경기하는 것도 아닌데 굉장한 압박감을 받는다. 그 옆에 앉은 여친은 이런 사정은 눈치채지 못하고 취주악부의 연주에 빠져든다.
- 하이큐/253화 . . . . 1회 일치
주장 사와무라는 팀의 분위기를 다잡는다.
- 하이큐/256화 . . . . 1회 일치
* 우승후보인 강호를 상대로 선전을 펼쳐가는 카라스노. 관중석에서는 이 다크호스를 대단히 우효적으로 평가한다. 1학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리베로인 [[니시노야 유]], "사무라이"란 별명을 얻은 아즈마네 또한 "강하다"는 평이다. 주장 사와무라도 리시브가 뛰어난 걸로 고평가. 그런데 5번, 빡빡머리 [[타나카 류노스케]]가 어정쩡하다. 관중석에서는 "그냥 활발"하다는 걸로 평하며 놀림거리로 삼는다. 그 말을 듣고 있는 관계자 [[아마나이 카노카]]가 싸늘한 눈으로 키득거리는 관중을 쳐다본다. 당사자들은 원한을 샀다는 것도 모른다.
- 하이큐/259화 . . . . 1회 일치
* 이나리자키의 감독 [[쿠로스 노리무네]]. 가족관계가 심란해 보이는 41세다. 그는 선수들이 자꾸 10번, 히나타에게 정신 팔자 탐탁지 않아한다. TO 중에도 선수들이 10번의 움직임에 지나치게 연연했다. 쿠로스 감독은 "10번에 정신 팔리기 시작하면 카라스노에 먹힌다"고 지적한다. 그는 히나타를 개에 비유하며 "개한테도 무시가 제일 잘 먹힌다"고 주장했다. 이 개에 비유하는 버릇은 이미 유명한지 선수들은 "또 개에 비유한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마도 가족 중 그나마 친한게 개인 모양이다.
- 하이큐/262화 . . . . 1회 일치
그런 타나카가 보기에도 카라스노의 경기성적은 좋지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빴다. 인근 학교와 연습시합에서도 번번히 패했다. 3학년들은 "눈깜짝할 사이"에 은퇴했다. 남겨진 입장이 된 타나카는 "수수한 건 생각보다 힘들다"는 말로 심정을 표현했다. 이 시기 카라스노는 전용 체육관은 커녕 체육관을 쓰게나 해주면 감사해야 하는 처지였다. 타나카는 이런 대우에 반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지만 주장을 물려받은 사와무라는 "작년보단 낫다"거나 "밖에서도 할 수 있는게 있다"면서 말을 돌렸다. 타나카에겐 "느슨"하게 보였다.
- 하이큐/263화 . . . . 1회 일치
* 회심의 공격마저 무위로 돌아가며 최악의 난조를 보이는 [[타나카 류노스케]]. 주장 [[사와무라 다이치]]가 북돋아주지만 자괴감을 떨치기 힘들다.
- 하이큐/268화 . . . . 1회 일치
표적이 된 코즈메는 "비책이 떠올라 전혀 안 피곤하게 이기고 싶다"는 택도 없는 말을 했다. [[쿠로오 테츠로]]와 야마모토가 "멍청한 소리"라고 입을 모았다.[[네코마타 야스후미]] 감독이 좀 더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상대가 끈기와 인내를 무기로 나온다면 이쪽도 그렇게 나가야 한다는 것. 정공법. 주장의 견해도 같았다.
- 하이큐/272화 . . . . 1회 일치
* 리세키는 선배들에게까지 "그러니까 승부해야 했다"라는 말을 듣고 주장 [[키타 신스케]]에겐 "우리팀에 들어가기만 하는 서브는 필요없다"며 잔뜩 쓴소리를 들은 채 돌아간다. 스코어는 20 대 11. 이번엔 카라스노의 서브. 카게야마의 차례다. 헌데 카게야마가 뭔가 달랐다. 서브 위치에 선 카게야마는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서브를 넣는다. 이나리자키의 손에 닿지도 않고 코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서브. 노 터치 서브 에이스 달성. 코스와 스피드를 모두 갖춘 완벽한 서브였다.
- 하정우(영화감독) . . . . 1회 일치
* [[LG 트윈스|LG]] 팬이어서 [[두산 베어스|두산]]을 싫어한다는 루머가 있다. 러브픽션 시사회 당시 두산 팬이 "두산 경기에 시구하러 오세요"라고 했는데 하정우가 "죄송합니다, 저는 '''서울 팀'''만 시구할 겁니다." 라고 디스했다 [[카더라]]. 이유인 즉슨 두산과 LG의 오랜 연고지 다툼 때문이다. 한국프로야구 출범 당시 [[MBC 청룡|MBC]]가 서울, 두산(당시 [[OB 베어스|OB]])이 대전을 연고지로 했었는데, 두산은 3년 뒤 서울 이전을 조건으로 프로야구가 출범했던 터라 1985년부터 연고지를 공유했었다.[* 프로야구 출범 준비 시점 이전에 이미 [[문화방송|MBC]]는 창사 20주년 기념으로 1981년 6월 자체 프로야구단 창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프로야구 창립 계획 준비시점에 MBC가 전북 연고 기업 1안으로 선정되고 두산은 구단주의 연고지가 전북인데도 2안으로 밀려 경남 연고지를 부여받는다. 이에 두산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3년 뒤 [[연고지 이전]]을 약소하는 조건으로 프로야구가 출범하게 된 것. [[http://blog.naver.com/soonil39/|출처 : '홍순일(서울신문 주간스포츠 기자, 주간야구 창간편집장)의 야구이야기/프로야구 탄생비화']]] 비록 1990년 MBC가 [[LG그룹|럭키금성그룹]]에 구단을 매각했으나, LG 팬들은 원년부터 전북 연고였으므로 진짜 서울의 주인은 자신들이라고 주장하곤 한다.[* 두산 베어스도 원래는 서울로 팀을 하겠다 하고 안 된다니까 3년 뒤에 하겠다라고 했으니까, 실제로는 전북 연고지가 맞다. 어디까지나 진정한 주인이라는 거지 그렇다고 두산 보고 나가라고 하는 LG 팬들이 말하듯이 두산이 진짜 서울 밖으로 나갈 이유는 없는 것.]실제로 청룡의 역사를 계승한 팀이 맞고. 하지만 [[이범수]] 주연의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는 [[OB 베어스]]의 외야수 [[김우열]] 역을 맡은 적이 있다(...) --LG 팬의 [[흑역사]]-- 그래서 그런지 출연 내내 못마땅힌 얼굴을 하고 있다.
- 한방의학 . . . . 1회 일치
[[일본]]에서 [[한의학]], [[중의학]]을 부르는 명칭이다. 일본에서는 자국의 한방의학이 전래된 중의학과는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별개의 요소가 많다고 주장한다. 한방(漢方)이라는 명칭은 [[에도 시대]] 중엽에 [[네덜란드]]의 의학이 전래되어 이를 란방(蘭方) 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와 대조하여 기존의 중국에서 전래된 의학을 '한방'이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 한상대 (검사) . . . . 1회 일치
김학재 의원은 한 후보자가 서울 행당동 대지를 2006년 공시지가의 4분의 1 수준으로 매각한 것을 두고 ‘다운 계약서’ 의혹을 제기했다. 한 후보자는 “모친이 관리한 땅이라 계약서 작성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 후보자는 고교 동창이 운영하는 벤처회사의 비상장주식 1000주를 500만원에 매입했다가 2000만원에 팔아 수익을 냈다는 주장에 대해선 “실제론 주식을 2000만원에 구입했다. 500만원에 산 것으로 돼 있는 것은 해당 회사에서 회계편의상 액면가로 세무신고를 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땅 매도 당시 부동산 매매계약서, 토지측량 도면, 토지 매수자의 사실확인서를 공개했다.<ref>[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955222 인사청문회 앞둔 한상대·권재진 '의혹 백화점']《SBS》2011년 7월 22일 정혜진 기자</ref>
- 한상훈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2010 시즌 후 소집 해제로 팀에 복귀하였고, [[2011년]] 131경기에 나와 398타수 107안타 타율 2할6푼9리 3홈런 39타점 49득점 16도루로 공격력이 향상되었다. [[안치홍]]에게 밀려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골든 글러브 [[2루수]] 후보에도 올랐다. 시즌 후 [[신경현]]을 이어 주장이 되었다.<ref>[http://osen.mt.co.kr/article/G1109329265 첫 골든 글러브 후보 된 한상훈의 남다른 각오] 《OSEN》</ref> 2013 시즌 후 FA를 선언하여 4년 총액 13억 원(계약금 3억 원, 연봉 2억 원, 옵션 2억 원)의 조건으로 [[한화 이글스]]에 잔류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659141 한화, 내부 FA 3인방 전원 재계약 '이대수 4년 20억'] - OSEN</ref> 시즌 후 [[강동우 (1974년)|강동우]]가 현역 은퇴를 선언하자, 입대하기 전 자신이 썼던 등번호 3번을 되찾았다.2015년 보류선수명단에서 제외되면서 한화에서 방출되었다.
- 한승엽 (1985년) . . . . 1회 일치
*[[2001년 10월]] 이노츠배 주장원전 10월 2주차 3등
- 한승조 . . . . 1회 일치
이 주장에 책임을 지고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직에서 사퇴하였다.<ref>[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242805 오마이뉴스 - 한승조, 고대 명예교수직 사퇴] : 한승조는 "최근 저의 글 '친일행위가 반민족행위인가'로 인해 사회적 물의가 일었고 이로 인해 고려대에 간접적인 피해를 입힌 데 대해 책임을 지고 명예교수직으로부터 사임하고자 하니 선처가 있기 바란다"라고 사퇴 의사를 밝혔다.</ref> 그러나 한국 국내의 움직임과는 반대로 일본의 우파는 “양심적 한국인”이라고 평가를 했다.<ref>[http://myhome.cururu.jp/doronpa/blog/list/bt0_ct3_dc_pg4 Doronpaの独り言-CURURU] - 이 사람은 일본의 우파적 시민 단체의 회장이다.</ref>
- 한확 . . . . 1회 일치
한확의 저술은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차원부]] 치제문"이 있다고 주장되어 왔으나 실제와 다르고, 《차원부설원기》의 이본인 《차운암설원록》에 실려 있는 응제시 1편이 있으나 그의 저술이 아님이 논증되었다.<ref>[http://cafe.daum.net/moonwharyu/Gh3E/111 양성지와 한확의 차원부관련 글에 대한 고찰]</ref>
- 허준 (1981년) . . . . 1회 일치
창단 멤버로 입단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2014년]] 시즌 후 방출되었다.<ref>[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131357 NC, 창단 첫 주장 허준·품절남 정성기 등 6명 방출] - 경남신문</ref> 이후 [[마산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선임되었다.
- 허준호(배우) . . . . 1회 일치
* 1994년 MBC 《[[마지막 승부]]》... 명성대 농구부 주장 김만재 역
- 허협 . . . . 1회 일치
그러나, 몇 주 후, 허협은 [[고문]]을 견디지 못해 배교하였다. 하지만, 그는 즉시 속죄하고, 포장에게 가서 자신은 오직 입으로만 배교하였고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자신은 여전히 [[천주교]] 신자라고 주장하였다. 형리들은 그에게 배교를 취소하는 표시로 사람의 [[똥]][[오줌]]을 마시기를 요구하였고, 허협은 주저없이 그것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그는 [[십자고상]]에 절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 그가 한때 배교했던 것을 뉘우치며 [[예배]]하였다.
- 헌경왕후 . . . . 1회 일치
{{출처|날짜=2010-10-31|임오화변의 원인으로 영조가 노론을 견제키 위해 키운 외척계 탕평당인 홍봉한 계열과 영조의 탕평에 반발하던 노론계의 대립으로 기행을 일삼던 사도세자 문제가 정치적으로 떠올랐는데 반 탕평파에서 홍봉한을 공격하기 위해 그의 약점이던 사도세자 문제를 정치 문제화 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홍봉한은 이를 덮기 위해 뇌물까지 제공하며 은폐하려 했지만 나경언의 고변까지 들어가고 더이상 어쩔 수 없는 상태까지 오자 영조가 종사를 위해 아들을 포기했고 손자를 지키기 위해 홍봉한에게 자신의 명을 따르도록 종용했다고 한다.}} 당시 상당한 상소에서 사도세자의 비행을 은폐하는 홍봉한에 대한 공격이 나온다.
- 현주엽 . . . . 1회 일치
트레이드 소식을 최인선 감독이 아닌 신문기자에게서 처음 듣게 된 현주엽은 트레이드 직후 인터뷰를 통해 최인선 감독에게 대한 인간적인 실망을 토로하기도 했다. 애초에 현주엽의 트레이드는 현주엽과 최인선의 불화 때문이라는 주장이 한 매체를 통해 설득력있게 제기되었다.<ref>스포츠투데이 1999년 12월 27일 [http://blog.naver.com/einer6623/50015480828 “현주엽 트레이드 진짜 이유 .. 현주엽 항명과 최감독의 단죄”]</ref> 이에 따르면 1999년 12월 14일 현대와의 경기에서 역전패 당하고 난후 최인선은 패배의 책임이 현주엽에게 있다고 생각했고, 자존심이 강한 현주엽은 이에 항명하여 부상을 핑계로 다음 경기인 16일 LG전을 보이콧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 경기인 19일 신세기전에서 다시 현주엽은 워밍업까지 마치고 경기에 나설 준비를 하였으나 이번엔 최인선의 보복이 이어졌다. 현주엽을 고의로 출전시키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경기였던 23일 동양전은 현주엽에게 SK에서의 마지막 경기가 된다.
- 홍병선 . . . . 1회 일치
홍병선과 농촌진흥운동을 함께 했던 [[윤치호]], 신흥우 등이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전쟁 지원을 빌미로 적극적인 친일파로 돌아서면서, 홍병선도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한국 YMCA가 폐쇄되어 일본 YMCA 산하로 흡수 편입될 때 주역이었고, [[1938년]]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전쟁협력 강연에 [[정춘수]], [[박연서]], [[이동욱 (목회자)|이동욱]] 등 감리교 목사들과 함께 연사로 참가했다. 같은 해 YMCA가 발행하는 《청년》에 〈기독교도와 시국〉이라는 글을 발표해, 기독교도의 신사참배는 황국신민으로서 다른 말이 필요 없을 만큼 당연한 것이라며 [[신사참배 강요]]에 호응하는 주장을 편 일도 유명하다.<ref>{{서적 인용
- 홍인한 . . . . 1회 일치
아들인 동지돈령부사 [[홍낙윤]](洪樂倫)이 아버지 홍인한의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거절당하였다. [[1809년]] [[1월]]에는 [[조선 순조|순조]]를 찾아가 아버지의 억울함을 들어 변호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1832년]]에는 손자 홍백영(洪百榮)이 할아버지의 억울함을 격쟁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이때 홍백영을 처벌하자는 주장이 나왔으나 순조가 무마시켰다.
- 홍진기 . . . . 1회 일치
해방 이후 홍진기는 미국과 일본의 주도로 진행되던 대일강화조약에서 조약이 한국에 불리하다고 파악하여 정부를 설득 '대일강화회의 준비위원회'가 구성되도록 하였다.<ref>{{서적 인용|url=|제목=한일회담-제1차 회담을 회고하면서|성=유진오|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이는 일본의 부당한 외교적 침탈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구보타 망언 사건에서도 한국 측 대표로 일본의 부당한 주장에 반박하여 미일조약에 한국 내에 있는 귀속재산의 처리와 일본에 있는 한국 국민에 대한 인권 등에 대해 명시될 수 있도록 하여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독도에 대한 소유권이 미일간 협약에서 일본측으로 귀속되는 상황이 오자 이에 대한 국제법 논리로 대처하였으며 이후 독도에 접안시설과 태극기 계양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 히노쿠니 . . . . 1회 일치
* 2016년 4월 16일에 여배우 [[후지와라 노리카]]가 자신의 [[블로그]]에 쿠마모토의 지진 뉴스에 마음이 아파하면서 이상과 같은 문장을 써서, 쿠마모토 현의 주민들이 [[신]]에게 벌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거냐는 비판이 나와 논란이 되었다.[[http://www.asagei.com/excerpt/56724 (참조)]]
- 히포크라테스 . . . . 1회 일치
[[히포크라테스 선서]]로 유명하다. 인간의 몸에 4가지 체액이 흐른다는 [[4체액설]]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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