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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나라 . . . . 12회 일치
기원전 770년 서주는 유왕(幽王) 때 서융(西戎)의 침공을 받아 서주는 멸망한다. 유왕은 미녀 [[포사]](褒姒)에게 빠져, 국정을 그르치다가 서융의 침공을 불러 멸망하였다고 전해진다. 서융에 점령된 호경 지역에서는 주나라의 한 왕자가 서융의 후원으로 주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이렇게 잔존 서주 정권은 동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
춘추시대에는 제후들은 실질적으로 주나라 이상의 실력이 있었으나, 명분상 주나라의 신하를 자처하였으므로 군주의 지위는 공(公), 후(侯)에 머물렀다. 단지 초(楚), 오(吳), 월(越) 같은 주나라 외부의 국가들만이 왕(王)을 자칭하였다.
주나라의 권위는 시대가 갈수록 저하하였다. 전국시대에 이르면 각국이 왕(王)을 칭하는 등 주나라의 권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어 일개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결국 전국시대 말기에 진(秦)나라에게 항복하여 멸망하고 만다.
* 주공(周公) : 무왕의 동생 주공 단(旦)에서 시작된 지위. 천자(天子)인 주나라의 왕(王)과는 별도로 지속되었는데, 주공 단의 전례에 따라서 재상-섭정 격인 역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방 통치에서 주나라는 [[봉건제]]를 실시했다. 무왕은 자신의 형제들을 노(魯), 위(衛), 채(蔡), 조(曹), 등(滕)의 16개국에 봉하였고, 무왕의 아들은 진(晉) 등 4개국에 봉해졌다. 주공 단의 자식들은 형(邢) 등 6개국에 봉해졌다. 강태공의 후손이 봉해진 제(齊) 등, 그 외 약 140개의 제후국이 존재했다.
주나라에서는 청동기 제조 기술이 발달하였는데,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구정]](九鼎)에 대한 전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주나라는 청동기로 만들어진 정(鼎, 솥) 같은 제례도구를 제조하여 제후국에 하사하였는데, 이는 주나라의 높은 기술력과 문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또한 주나라의 청동기에서는 그 연혁을 기록한 금문(金文)이 새겨져 있어, 후대에 역사를 탐색하는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 삼감의 난 . . . . 6회 일치
[[주나라]] 초기에 일어난 반란.
[[상나라]]의 왕족으로 [[주왕]]의 아들인 무경(武庚)은 [[주나라]]에 항복하여 옛 상나라 영토에 봉해지고, 이를 [[주문왕]]의 아들들([[주무왕]]의 동생들)이 감시하게 되었다. 감시를 맡은 주나라 왕자들을 삼감(三監)이라고 한다. 무경은 덕(德)이 있어 옛 상나라 영토를 부흥시켰고, 본래 감시를 맡은 주나라 왕자들은 오히려 무경에게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반면 주나라는 주무왕이 젊은 나이에 병사하고, 어린 [[주성왕]]이 즉위하며 [[주공단]]이 섭정을 맡아 보좌하는 상태가 되었다.
본래 주공단의 동생인 삼감은 주공단이 정권을 잡고 섭정을 하는데 반발한다. 삼감 가운데 관숙선(菅叔鮮) 등 2인이 무경을 옹립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명분은 주공단이 주성왕이 어린 것을 이용하여 자의적으로 국정을 운용한다는 것이며, 주나라를 대신하여 상나라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 계력 . . . . 4회 일치
[[주나라]]의 왕.
[[고공단보]](古公亶父)의 3남. 계력의 아들 창(昌)[* 후의 주문왕]이 태어나자 상서로운 징조가 있어, 고공단보가 창이 후에 주나라를 번창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장남 태백(太伯)과 차남 중용(仲雍)은 계력에게 뒤를 잇게 하고 남쪽으로 떠나 오(吳)의 왕이 되었다. 계력은 고공단보를 이어 정의롭게 행동했기 때문에 제후들이 그를 따랐다고 한다.
[[죽서기년]]에 따르면 융족(戎族)과 7년간 싸워서 격파하고 융족의 장수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상나라 왕 문정(文丁)[* 혹은 태정(太丁)이라고도 한다]은 주나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시샘하여, 겉으로는 보물을 하사하고 후대하면서 새고(塞庫)로 보내서 가둬버렸다. 문정에게 유폐된 계력은 [[아사]]하고 말았다.
[[분류:주나라]]
- 킹덤/528화 . . . . 3회 일치
* 견융족은 과거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를 연 장본인들이자 오늘날 대륙의 북부를 어지럽히는 [[흉노]]의 선조. 산민족도 그들의 먼 후예다.
* 우습지만 그들의 존재가 뜨악한 것은 조군도 마찬가지였다. 일선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었고 장수들 또한 "견융족"이란 이름만 알 뿐, 왜 그들이 이곳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견융족은 500년 전 주나라를 멸망시킨 대기마민족으로 역사서에도 이름이 올라 있었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중화대륙에선 사라진 종족. 그들이 어째서 조나라에, 그것도 왕도권인 요양에 있단 말인가? 술렁거리는 장교들을 향해 순수수가 입을 열었다. 견융족은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사라진게 아니었다. 처음엔 그들도 대륙에 정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대부분의 무리는 북쪽으로 유입되었다. 그것이 오늘날에 "흉노"라는 형태로 변해 조나라와 지겹게 싸워왔다. 하지만 모든 견융족이 흉노가 된 것은 아니다. 일부는 태행산맥을 근거지로 잔류했으며 훗날 조나라가 태행산맥을 끼고 생겨나면서 그들과 충돌했다. 조나라는 이들과 다투기보다는 회유하는 정책을 펴 요양성을 내주고 왕도권에 편입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편입시켰다는 건 조나라의 입장일 뿐.
- 규성 진씨 . . . . 2회 일치
규성 전씨는 순(舜) 임금을 조상으로 삼는다. 순 임금의 성씨는 요씨(姚氏)였으나, 순 임금의 후손이 규예(嬀汭)로 이주하면서 규(嬀)를 성으로 삼았다. 상나라 말기에 순의 후예 알보가 주나라에 의탁하였고, 주나라 무왕은 알보의 아들 규만을 완구(宛丘)에 봉하였으며 이 나라는 진(陳)으로 불리게 된다. 규만은 사후 호공(胡公)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호공 규만' 이들의 조상이 된다.
- 위의공 . . . . 2회 일치
이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회맹-제후연합군을 구성하여 이민족과 대항하는 집단안보체계는, 과거 [[주나라]]가 주도하였으나 춘추시대가 개막하고 주나라의 권위가 상실하면서 붕괴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권위로 제후국들의 '연합군'을 만들어서 질서를 바로 잡을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국강병 정책을 펼치던 제나라의 [[제환공]]이 주도하여 위나라를 재건해줌으로서, 주 천자의 권위를 대신하여 이러한 집단안보체계를 주도하는 '패자'의 시대가 나타나는 배경이 되었다.--결국 제환공의 패업의 발판일 뿐이라는 뜻인데 장대하게 썼다.--
- 킹덤/527화 . . . . 2회 일치
* 그 무리의 정체는 한때 주나라를 멸망으로 몰고간 이민족 "견융". 양단화의 산민족 대 조나라의 견융족이라는 이민족 전쟁이 막을 올린다.
한때 천자의 나라 주나라를 몰락시킨 이민족의 후예. 지금은 요양성을 자치하고 있는 자들. 순수수가 이들을 전장에 끌어들였다. 이민족 대 이민족이라는 [[이이제이]]나 다름없는 상황. 지금껏 볼 수 없전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 회맹 . . . . 2회 일치
[[주나라]]의 [[주문왕|문왕]]이 [[상나라]]의 [[주왕]]을 칠 때, 제후들을 모아서 회맹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춘추시대]], 주나라의 질서가 무너진 뒤 회맹은 유력한 제후, 패자(覇子)를 중심으로 한 제후들이 맺게 되었으며, [[존왕양이]]를 명분으로 삼았다.
- 공후백자남 . . . . 1회 일치
[[주나라]] 시대의 작위. 다섯 등급으로서 '오등작'이라고 한다.
- 레갈리아 . . . . 1회 일치
* [[중국]] [[주나라]] - [[구정]]
- 춘추 . . . . 1회 일치
춘추시대, 각국의 사관이 편찬한 공식적인 기록이다. 『[[맹자]]』에서는 진에 '승', 초에 '도올', 노에 '춘추'(晉之乘, 楚之檮杌, 魯之春秋)가 있다고 하였으며, [[묵자]]에는 주나라, 송나라, 연나라, 제나라에 춘추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춘추는 점차 국가 기록이 아닌 개인에 대한 기록에도 쓰이게 됐는데, 여씨춘추, 노씨춘추, 안자춘추 등이 그것이다.
- 킹덤/517화 . . . . 1회 일치
그렇게 말한 그는 상나라 주왕, 주나라 여왕의 사례를 들며 도양왕이 그 부류에 들지는 않기를 바래야겠다고 말한다. 모두 나라를 망친 암군으로 유명한 자들이었다.
- 킹덤/525화 . . . . 1회 일치
주나라의 천하가 펼쳐진지 500여 년. 한때 백에 이르렀던 나라들이 도태와 규합을 거듭해 지금은 고작 일곱이 남았다. "일대국". 분명 대륙의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진왕이 품은 꿈은 곧 역사가 바라는 "해답"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이같은 지적에 조군이 반발했다. 왕분도 그들의 입장은 이해했다. 그러나 이곳은 전장. 그런 말뿐인 대립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태학 . . . . 1회 일치
[[유교]] 경전에서는 고대에 이미 비슷한 성격의 학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예기]]에는 순 임금이 상상(上庠)이라는 --상상력이 증진될듯한-- 학교를 만들었다고 하며, [[주나라]] 천자는 벽옹(辟雍)이라는 학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학교들을 국학(國學), 태학(太學), 대학(大學)으로 총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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