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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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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정건 . . . . 3회 일치
         [[1925년]] 5월 9일에는 상하이에 있던 [[조소앙|조소앙(趙素昻)]]ㆍ여운형ㆍ윤자영ㆍ김상덕(金尙德)ㆍ최창식(崔昌植)ㆍ김규면(金圭冕)ㆍ손두환(孫斗煥) 등 약 30명의 조선인 동지와 함께 서문 밖 체육장에서 배일(排日) 중국인 단체의 집합에 참가하였고 이곳에서 "중국과 한국이 합동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상하이주간(上海週刊)』5월 9일자 특별호에 실린 사설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ref>이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 의해 7월 1일에 일본 외무성의 외무차관에 보고되었다. 국회도서관(國會圖書館) 편찬 『한국민족운동사료(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 1976년, 567~568쪽.</ref> 9월 8일에는 상하이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등의 강령 및 명칭, 위원 기타를 결정하고 조직을 끝냈는데 이때의 집행위원으로 [[이동녕]]ㆍ조소앙 등과 함께 현정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11월에 다시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를 조직할 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ref>대한민국 국회도서관 편찬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 1976년, 618~621쪽 및 일본 외무성경찰사(外務省警察史) 지나지부(支那之部) 『조선민족운동사(朝鮮民族運動史)』≪미정고(未定稿)≫ 4, 고려서림(高麗書林), 1989, 11~22쪽.</ref>
  • 허정숙 . . . . 2회 일치
         [[1954년]]∼[[1955년]] 전후 복구사업에서 자신감을 얻은 북한은 선전문화를 전파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냈다.<ref name="pussann">[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8/0223/060020080223.1016171752.html [저자는 말한다] "한국전쟁 전후 월북은 배신 아닌 선택"] 부산일보 2008. 02.23</ref> 이때 허정숙은 북한으로 납북된 [[조소앙]], [[안재홍]] 등의 통일 운동에도 지지를 보냈다.
         허정숙은 이들 재남 월북 인사들과의 토론에도 나섰다. 토론에 나선 문화선전상 허정숙은 경제·문화 교류를 제안했다.<ref>이신철, 《북한 민족주의운동 연구》 (역사비평사, 2008) 334페이지</ref> 그러나 고령이었던 [[조소앙]], [[조완구]] 등의 연이은 죽음과 [[8월 종파 사건]], [[연안파]] 숙청 등으로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 최두선 . . . . 1회 일치
         광복후 교육계를 떠나 경성방직주식회사 사장, [[1947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선임되었다. [[동아일보]]사 사장 재직 중 유엔총회에 한국대표의 한 사람으로 파견되었다. [[1946년]]에는 [[김구]], [[김성수 (1891년)|김성수]], [[조소앙]] 등의 신탁통치 반대 운동, 미소 공위 반대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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