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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림
         [[신라]]의 시조 [[김알지]]가 탄생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김알지의 후손이 신라의 왕족인 김씨가 되었기 때문에, 계림은 신라 시대 내내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다. 이후 [[고려]], [[조선]]에서도 계림은 한 나라의 시조가 탄생한 곳으로 여겨져서 존중되었다.
  • 계성군
         '''계성군'''(桂城君, 1478년 ∼ 1504년)은 [[조선]]의 왕족이자 [[조선 성종|성종]]의 서자로, [[숙의 하씨]] 소생이다. [[조선 연산군|연산군]], [[조선 중종|중종]]의 이복 동생 & 이복 형이었다. 이름은 순(恂), 자(字)는 수견(壽堅)이다.
         계성군은 조선의 왕자이자 왕족으로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李翰)의 27세손이다. [[조선 성종|성종]]의 2남이며 어머니는 [[숙의 하씨]]로 영의정 하연(河漣)의 딸이다.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이복 동생이자 [[조선 중종|중종]]의 이복 형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녀가 없이 27세에 요절하였다.
         * 부: 제 9대[[조선 성종|성종]]
         [[조선 성종|성종]]의 친형 [[월산대군]]의 아들 [[덕풍군]](德豊君)의 차남인 [[계림군]] 유(瑠)를 양자로 삼아 후손을 퍼뜨렸다. 후손들 중 무과 급제자수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무림군]]파, [[덕흥대원군]]파와 더불어 문중의 3대 무관 집안으로 불린다{{출처|날짜=2010-5-29}}. 그밖에 15대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가 있고 3대 덕양구청장을 지녔던 [[이대휘]](李大輝)도 후손이다.
         * [[조선 왕 가계도]]
         {{조선의 왕자}}
         {{토막글|조선|한국 사람}}
         [[분류:1478년 태어남]][[분류:1504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 성종]]
  • 고순이
         '''고순이'''(高順伊, [[1798년]] ~ [[1839년]] [[12월 29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바르바라'''(Barbara)이다.
  • 고영희 (1849년)
         |출생지= [[조선]] [[한성부]] [[서울특별시]]
         |국적= {{국기나라|대한제국}} <br /> {{국기나라|일제 강점기 조선}}
         |작위 = [[자작]]([[조선귀족]])
         '''고영희'''(高永喜, [[1849년]] [[12월 16일]]([[음력 11월 2일]]<ref>{{서적 인용 |편집자= [[국사편찬위원회]] |제목=대한제국관원이력서(大韓帝國官員履歷書) |연도= 1971년 |출판사= 도서출판 탐구당 |페이지=584, 752쪽 }}</ref>) ~ [[1916년]] [[1월 24일]])는 [[대한제국]]의 정치인으로 [[일제 강점기]]의 [[조선귀족]]이다.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포함되었다. [[자 (이름)|자]]는 자중(子中), 본관은 [[제주 고씨|제주]](濟州), 본적은 경성 북부(北部) 옥동(玉洞) 15통 9호(1914년 당시 주소)이며 고진풍(高鎭豊)의 아들이다.
         훈장으로는 이화대수장(李花大綬章) 및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위를 받고, 10만 엔을 받았다. 또한,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ref>{{서적 인용
         *** 장남 : [[고희경 (1873년)|고희경]](高羲敬, 1873~1934) - 1891년 진사, 1916년 자작을 습작했다 1920년 백작으로 승급,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조선귀족열전(朝鮮貴族列傳, 大村友之丞編, 1910)
         [[분류:1849년 태어남]][[분류:1916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자작]][[분류:유교 신자]][[분류:급진개화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한일 병합 조약 관련자]][[분류:제주 고씨]][[분류:독립협회]][[분류:이화대훈장 수훈자]][[분류:친일파]]
  • 고종(조선)
         [[조선]]의 왕들
         고종은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다. 아명은 이명복[* 가끔씩 고종을 까는 사람들이 시호 대신 이 이름으로 고종을 부르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김옥균]]과 [[박영효]] 등은 --희대의 병크--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되고 이로 인해 조선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바람에[* 아이러니하게도 이로 인해 그 당시 조선 조정 내부에서 가장 친일적이었던 급진개화파는 세력이 엄청나게 쪼그라들어 구성원들 모두가 죽거나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여기에 위협을 느낀 민씨와 고종은 청과 일본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 이후 10여년동안 조선은 청이 주류로, 그리고 일본이 보조로 마지막으로 미국등의 열강이 찔끔찔끔 이권을 뺏어먹는 형편이 되고(...), 결국 이는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으로 이어진다. 처음에 동학의 교주였던 최시형의 탄원시도로 시작한 이 운동은 결국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분노한 농민들이 황토현에서 관군을 박살내고 전주성을 점령하자 놀란 조정은 청군에게 병력을 급파해주길 요청한다. 그런데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홍계훈의 대포에 밀려 더이상의 북상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청과 미리 텐진조약을 맺은 일본은 청이 조선으로 간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조선에 병력을 상륙시킨다. 어찌됐든 '''일본이 개입하자''' 놀란 농민군과 조정은 전주화약을 맺어 일단 농민군의 요구를 어느정도 수용해주는걸로 끝난다.
         [[분류:조선 인물]]
  • 공혜왕후
         |작위 = [[조선의 역대 왕비|왕비]]
         |배우자 = [[조선 성종|성종]]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1456년]] [[11월 8일]]([[음력 10월 11일]]) ~ [[1474년]] [[4월 30일]]([[음력 4월 15일]]))는 [[조선]] [[조선 성종|성종]]의 원비(元妃)이다. 시호는 '''휘의신숙공혜왕후'''(徽懿愼肅恭惠王后)이다. [[한명회]]의 딸로 언니이자 시숙모인 [[장순왕후]]와 마찬가지로 20세를 못 넘기고 요절했다.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이다.
         한씨는 상당부원군 충성공 [[한명회]](上黨府院君 忠成公 韓明澮)와 황려부부인 민씨(黃驪府夫人 閔氏)의 막내딸로 [[1456년]] 연화방(蓮花坊)에서 태어났다.<ref name="성종5">《성종실록》 5년(1474) 6월 7일 1번째 기사</ref> [[1467년]] [[1월 12일]] [[조선 세조|세조]]의 손자이자 [[의경세자]]의 아들인 한 살 연하의 [[조선 성종|잘산군]](乽山君)과 혼인했다.<ref>《세조실록》 13년(1467) 1월 12일 1번째 기사</ref> 이 해에는 잘산군의 형 [[월산대군|월산군]]과 누이 [[명숙공주]]도 혼인을 했는데 한명회의 집에 예단이 보내진 것은 월산군의 혼례가 있은 지 5일만이었다.<ref name="smh">신명호, 《조선왕비실록(숨겨진 절반의 역사)》 역사의 아침, 2007, p.198~ {{ISBN|978-89-958849-6-6}}</ref> 훗날 공혜왕후의 지문에 따르면 잘산군의 배필로 한씨를 택한 것은 세조의 의향이었다고 한다.<ref name="성종5"/> 그러나 실제로는 잘산군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수빈 한씨]]가 잘산군과 함께 피접을 나갔다가 허계지(許繼智)라는 사람의 집에서 그 수양딸이었던<ref>《성종실록》 1년(1470) 5월 28일 4번째 기사</ref> 한씨를 눈여겨보고 며느릿감으로 골랐다는 견해도 있다.<ref name="smh"/> 실제로 잘산군이 직계 왕손인 [[제안대군]]이나 형 월산군을 제치고 성종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데에는 권신 한명회의 딸을 아내로 맞은 일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ref>최선경, 《왕을 낳은 후궁들》 김영사, 2007, p.65, {{ISBN|978-89-349-2668-9}}</ref><ref>강현식, 《심리학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살림, 2008, p.81, {{ISBN|978-89-522-1018-0}}</ref> 한씨는 잘산군과 혼인 후 천안군부인(天安郡夫人)으로 불리다 [[1469년]] 잘산군이 [[조선 예종|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ref>《성종실록》 2년(1471) 1월 19일 1번 째기사</ref> 인수대비는 며느리들에게 무척 엄격한 시어머니였는데 한씨에게 중국의 현모양처들에 관한 이야기인 《열녀전》을 읽게 하는 등 유교 윤리에 따라 철저히 교육했다.<ref name="smh"/> 한씨가 자식을 두지 못하자 성종은 후궁을 들였는데 한씨는 싫어하는 내색 없이 그들에게 옷을 준비해서 내리고 그 뒤에도 패물 등을 선물했다.<ref name="성종5"/> 한씨는 [[1473년]] 음력 7월에 병으로 친정(한명회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성종이 하루 걸러 한명회의 집에 들러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ref name="성종5"/> 이후 회복하여 궁궐로 돌아왔으나, 이 해 12월에 병이 다시 도지고 말았다.<ref name="성종5"/> 병이 낫지 않을 것을 예감한 왕후 본인의 요청으로 [[1474년]] 음력 3월에 [[창덕궁]] 구현전(求賢殿)으로 처소를 옮겼고, 성종과 삼대비([[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가 날마다 구현전으로 가 그녀를 보살폈다.<ref name="성종5"/> 친정 부모인 한명회와 부인 민씨도 입궐해 병을 돌보았지만 차도가 없었고 한씨는 죽기에 앞서 부모가 며칠째 밥을 먹지 못하는 것을 보고 밥을 먹도록 명했다.<ref name="성종5"/> [[1474년]] [[음력 4월 15일]], 19세의 젊은 나이로 훙서하였다.
         이에 성종은 공경하고 유순하게 윗사람을 섬김을 공(恭)이라 하고,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인자함을 혜(惠)라 하여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시호를 올렸으며, 능호는 순혼(順魂, 나중에 순릉이 되었다), 전호는 소경전(昭敬殿)으로 정하였다. [[조선 연산군|연산군]] 4년(1498년)에는 휘의신숙(徽懿愼肅)이라는 존호가 더해지기도 했다.
         ***** 형부이자 시숙부 : 제8대 [[조선 예종|예종대왕]](睿宗大王, 1450~1469)
         * 시고조부 : 제3대 [[조선 태종|태종대왕]](太宗大王, 1367~1422)
         ** 시증조부 : 제4대 [[조선 세종|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
         *** 시종조부 : 제5대 [[조선 문종|문종대왕]](文宗大王, 1414~1452)
         **** 종숙부 : 제6대 [[조선 단종|단종대왕]](端宗大王, 1441~1457)
         *** 시조부 : 제7대 [[조선 세조|세조대왕]](世祖大王, 1417~1468)
         **** 시숙부이자 형부 : 제8대 [[조선 예종|예종대왕]] (睿宗大王, 1450~1469)
         **** 시아버지 : 추존 [[조선 덕종|덕종대왕]](德宗大王, 1438~1457)
         ***** '''남편''' : 제9대 [[조선 성종|성종대왕]](成宗大王, 1457~1494)
         직책=[[조선의 역대 왕비|조선 역대 왕후]]|
         {{조선의 왕후와 대한제국의 황후}}
         [[분류:1456년 태어남]][[분류:1474년 죽음]][[분류:조선의 왕비]][[분류:한명회]][[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청주 한씨]][[분류:15세기 한국 사람]][[분류:조선 덕종]]
  • 곽상훈 (국회의원)
         |출생지 = [[조선]] [[부산광역시]]
         졸업 후 불우한 나날을 보내다가 교육청 [[장학사]]로 있던 유진태(柳鎭泰)의 주선으로 [[안동시|안동]] 오산학교(五山學敎)의 교사로 임용, 교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급사 대신 학교의 행정 서무일도 맡게 되었다. 교사 재직 중에도 [[조선총독부]] 경찰국에서는 사람을 보내 그의 동태를 미행했는데, 한번은 그의 하숙방에 몰래 들어와 있던 총독부 경찰국 형사 김태규(金泰奎)를 가장한 지인 김영주의 설득으로 일본 유학을 결심하였다.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1920년]]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신간회 중앙간부로도 활약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2>http://news.itimes.co.kr/Default.aspx?classCode=101&id=view&seq=330448{{깨진 링크|url=http://news.itimes.co.kr/Default.aspx?classCode=101&id=view&seq=330448 }}</ref> 이후 신간회 검찰위원을 지냈다.<ref name="다음"/> [[1920년]] [[6월 16일]] [[경성부]] 명월관에서 열린 [[조선체육회]]발기인회에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ref>이학래 《한국체육사연구》 (국학자료원, 2006) 375~376페이지</ref> [[1920년]] [[8월]] 한용단 단장으로 활동하며 이우구락부와 공동으로 열린 음악회를 후원하였다.<ref name="신정회1">[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4737 국악동호인회를 조직했던 서병훈] 기호일보 2008년 11월 16일</ref> [[1921년]] 원산의 부두노동자들이 [[원산총파업]]을 강행하자 신간회 인천지부에서 활동하며 국민들을 상대로 원산의 인부모집에 응하지 말라며 설득, 호소하였다.<ref>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1:해방 그날이 오면》(한길사, 2006) 98페이지</ref>
         [[1923년]]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 세이소쿠영어학교 재학 중 [[9월 1일]] [[동경 대지진]]을 만났으나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동경 대지진이 조선인들의 음모라는 낭설이 퍼지면서 조선인들은 처형당하거나 구제받지 못했고, 그는 1년만에 자퇴하고 다시 귀국했다. 부산에서 김영주와 헤어진 뒤 다시 안동 오산학교를 찾아가 이사장 유인원(柳寅源)이 그를 받아주어 다시 교사 생활을 하였다.
         이후 동경 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의 참상을 호소하는 호소문을 작성, 대구 오산학교 명의로 등사판을 주문하여 자신의 집에서 동경대지진 참상을 호소하는 격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다가 대구 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가택 압수수색 후 [[베이징]]에서 김영주가 보낸 편지가 발견, '베이징의 일은 다 끝나가니 바로 오라'는 김영주의 편지가 화근이 되어 [[의열단]]원으로 몰려 고문당하였다. 대구형무소 7개월 수감 후 시말서를 내고 석방되었다.
         [[1924년]]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에 의해 희생된 한국인 희생자 명단을 입수하고 한국인 학살사건의 진상기록을 수집, 보존하는 활동을 하였다.<ref name="경인"/> [[1925년]]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조직, 결성하여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 최선경 등과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조선총독부]] 경찰의 추적을 받고 [[중국]]으로 망명,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한국인청년동맹'의 간부로 활동했다.
         25년 중국의 상하이 한인 교포들을 통해 동경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대량학살당한 소식을 전달하고, 25년 8월 동경대지진 조선인학살자 2주기 추도식을 주관했다. [[1927년]] [[6월 6일]] 계급과 파벌을 타파하고 전인천적 집단체로 인천의 유지들이 창립한 신정회(新正會) 창립에 참여, 신정회의 창립멤버가 되었다.<ref name="신정회1"/>
         {{본문|조선어학회 사건}}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이윤재,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등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증인의 한 사람으로 소환되었다.<ref>이희승 《일석 이희승 전집》 7(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570페이지</ref><ref name="진술">유광재 《전공국어 문학론》 (하) (EBS 방송교재) (북타운, 2007) 727페이지</ref><ref name="성신1">성신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편 《한국근대문화운동》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143페이지</ref> 그러나 피고들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치장에 감금당하였다.<ref name="진술"/><ref name="성신1"/>
         독립운동가 박차정의 형제인 박문희, 박문하 등과도 인연이 있었는데, 박문희의 친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ref name="범어사">박문하 《잃어버린 동화》(범우사, 2008) 130페이지</ref> [[일제 강점기]] 후반 그는 일제의 요시찰인물이 되어 감시를 당하던 중 박문하가 이주한 범어사 아래 촌가를 전전하면서 생활하였다.<ref name="범어사"/> 이때 술에 취하면 그는 일제가 [[동경대지진]]의 책임을 물어 조선인들을 학살한 것의 잔인성을 통박하였다 한다.<ref name="범어사"/>
         [[1954년]] [[12월]] [[뉴델리 밀회 조작사건]]의 직후, 그의 집에 [[북조선 인민위원회]] 최고위원회 명의로 된 남북협상을 호소하는 촉구문이 그의 집에 투입되었다.<ref>송건호 《송건호 전집 07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한길사, 2006) 31페이지</ref> [[1955년]] [[호헌동지회]] 결성에 참여했다. 이때 그는 조병옥, 김준연과 함께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참여를 강하게 반대하였다.<ref>송건호 《송건호 전집 01 민족통일을 위하여 》1 (한길사, 2006) 109쪽</ref>
         * 조선청년단 경기도연합회 위원장
         [[분류:1896년 태어남]][[분류:1980년 죽음]][[분류:반일 감정]][[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조선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제국의 사회 운동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
  • 곽월
         '''곽월'''(郭越, [[1518년]] ~ [[1586년]] [[8월 6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이다. [[1556년]](명종 1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제주목사에 이르렀다. 본관은 [[현풍 곽씨|현풍]](玄風)으로 자는 시정(時靜), 호는 정재(定齋) 또는 정암(定庵)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아버지이다. 사후 아들 [[곽재우]]의 훈공으로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병마절도사]][[분류:수군절도사]][[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현풍 곽씨]][[분류:병사한 사람]]
  • 광평대군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한성부]] 대군 사저에서 병사
         |친인척= 신자수(장인)<br/>[[조선 태종|태종 이방원]](친조부) <br /> [[심온]](외조부) <br /> 심준(외숙부) <br /> [[심회]](외숙부) <br /> [[심결]](외숙부) <br /> [[양녕대군]](큰아버지) <br/> [[효령대군]](큰아버지) <br /> [[성녕대군]](작은아버지) <br/> [[조선 문종|문종]](형) <br/> [[조선 세조|세조]](형) <br /> [[안평대군]](형) <br /> [[임영대군]](형) <br/> [[금성대군]](동생) <br /> [[평원대군]](동생) <br /> [[클라라(배우)]](동생) <br /> [[채시라]](누이동생)
         '''광평대군 이여'''(廣平大君 李璵, [[1425년]] [[5월 2일]] ~ [[1444년]] [[12월 7일]])는 [[조선]]의 왕족 종실로 [[조선 세종|세종대왕]]과 [[소헌왕후|소헌왕후 심씨]]의 다섯째 아들이다.
         세종 18년([[1436년]]) 12세에 동지중추부사 [[신자수]](증 [[좌의정]])의 딸 신씨와 결혼하고 같은 해, 동생 [[금성대군]]과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부왕 [[조선 세종|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경서에 통달하였고, 문선 등에 재능이 있었으나 일찍 요절하였다.
         형제가 부왕 [[조선 세종|세종대왕]]을 찾아가 『근지는 사예(射藝)에 능하여 마땅히 쓸 만합니다.』고 고하였다. 임금이 병조에 명하여 그 재주를 시험하니, 보사(步射)와 기사(騎射)에 모두 합격하였다. 그러나 뒤에 논란이 되어 [[신효창]]과 [[신근지]]의 임명장은 빼앗겼다가 도로 되돌려받았다.|세종실록 76권|세종 19년(1437 정사 / 명 정통(正統) 2년) 3월 20일(경술) 1번째기사}}
         * 부 : [[조선 세종|조선 제4대 왕 세종]]
         ** 형님 : [[조선 문종|조선 제5대 왕 문종]]
         ** 형님 : [[조선 세조|조선 제7대 왕 세조]]
         * [[조선 왕 가계도]]
         * [[조선 세종|세종대왕]]
         * [[조선 문종|문종]]
         * [[조선 세조|세조]]
         {{조선의 왕자}}
         [[분류:1425년 태어남]][[분류:1444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자]][[분류:병사한 사람]][[분류:유교 신자|이여]][[분류:양자|이여]][[분류:조선 세종]][[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광해군
         [[조선]]의 왕들
         광해군은 [[조선]]의 15대 왕이다.
         [[분류:조선 인물]]
  • 권득인
         '''권득인'''(權得仁, [[1805년]] ~ [[1839년]] [[5월 24일]]([[음력 4월 12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다.
  • 권람
         |출생지= [[조선]] [[한성부]]
         |직책2 = 前 조선국 좌의정<br />(前 朝鮮國 左議政)
         |직책 = 前 조선국 우의정<br />(前 朝鮮國 右議政)
         |군주 = [[조선 세조|조선 세조 이유]]
         |군주2= [[조선 세조|조선 세조 이유]]
         |사망지= [[조선]] [[한성부]]에서 병사
         |거주지= 조선 한성부
         |국적= [[조선]]
         '''권람'''(權擥, [[1416년]] ~ [[1465년]] [[2월 6일]])은 [[조선]] 초의 문신, 역사학자, 작가, 문인이다. [[자 (이름)|자]](字)는 정경(正卿), [[호 (이름)|호]]는 소한당(所閑堂) 또는 소한당(所閒堂), 후주당(後週堂)이다. 본관은 [[안동 권씨|안동]](安東)으로 [[권근]]의 손자이다. 남이와 신수근이 그의 사위다.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다가 [[한명회]]와 교유했고, 그를 통해 [[신숙주]] 등을 소개받고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측근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을 지냈으며, 그 이듬해에는 [[수양대군]]과 함께 《역대병요》를 편찬하였다. [[1453년]](단종 1년) 김종서를 몰아낼 때 앞장섰던 공으로 [[정난공신]] 1등관으로 녹훈되고, [[승정원]]우부승지에 특진되었다. [[1455년]] [[조선 세조|세조]] 즉위 후,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 1등관으로 [[이조]] [[참판]] 길창군이 되었고, [[1458년]](세조 4년)에는 수찬관으로 [[신숙주]] 등과 함께 《[[국조보감]]》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그는 활을 잘 쏘았을 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뛰어났으나, 횡포가 심하고 많은 축재를 하여 여러 번 탄핵을 받았다. [[우찬성]]과 [[좌찬성]],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길창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5촌 당조카딸 권영금이 백촌 [[김문기]]의 며느리로서 [[사육신]] 사건 이후 노비가 되었으나 자신이 권영금을 분배받는 형태로 하여 노비 신세를 면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친척인 [[조선 단종|단종]]의 후궁 소의 권씨의 재산을 차지하여 비난을 받기도 했다. [[조선 태종|태종]]의 외손자 [[남이]](南怡) 장군과, 훗날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처남이자 [[조선 중종|중종]]의 장인이 되는 [[신수근]]이 모두 그의 사위였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한상환]], [[류태재]]의 문인이다.
         [[조선 문종|문종]] 즉위 직후 [[1450년]](문종 즉위년) [[진의부위]]로 재직 중 [[식년]][[과거 제도|문과]]에 응시하여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다. [[조선 문종|문종]]이 친히 주관한 시험에서 시사(時事)를 가리켜 진술한 것이 시험관의 마음에 들어 제4등으로써 의논했다가 당초 장원이던 [[김의정]](金義精)의 집안 배경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왕명으로 특별히 장원으로 하게 되었다. 이후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나, 그는 불우한 처지에 있던 [[한명회]] 등과 꾸준히 교류하였다.
         감찰을 거쳐 그 뒤 [[1451년]](문종 1년) [[집현전]]교리(校理)로서 [[수양대군]](首陽大君, 훗날의 世祖)과 함께 《[[역대병요]] (歷代兵要)》를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이때 수양의 측근이 된다. 《역대병요 (歷代兵要)》를 함께 편찬하고 음주(音註)를 편찬하는 데 동참하여 그와 더 가까워졌다.<ref name="park114">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14페이지</ref> 역대병요의 음주를 달던 중 권람은 [[수양대군]]이 큰 뜻을 품고 있음을 알고 그와 가까이 지내다가 [[수양대군]]과 뜻이 통하여, 그의 참모가 된 뒤 [[양정 (조선)|양정]](楊汀), [[홍달손]](洪達孫), [[홍윤성]], 유수(柳洙), 유하(柳河) 등 무장들을 설득, 포섭하는데 기여하였다.
         한명회와 동문수학하던 사이인 그는 [[조선 단종|단종]] 등극 후 [[김종서]] 등이 권력을 독점하는 데 불만을 품고 [[집현전]] 시절부터 친분을 쌓게 된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도모한다.<ref>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13페이지</ref>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권력은 [[김종서 (1383년)|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 소수 대신들이 정사를 좌지우지하자, 그는 어린 [[조선 단종|단종]]에게 왕의 나라인지 대신의 나라인지 항의하기도 하였다.
         [[조선 단종|단종]] 즉위 초 [[계유정난]](癸酉靖難)때 [[김종서 (1383년)|김종서]], [[황보 인]] 등을 제거할 때에 적극 가담, 앞장섰으며 김종서, 황보 인 등 대신들의 세력을 제거하고 이들이 왕을 능가하는 권력남용을 했다며 이들을 비판하였다. 그 뒤 정난의 성공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 1등관에 녹훈되고 바로 [[승정원]]동부승지에 승진했다가 이후 우부승지에 올랐다. [[1454년]](단종 2년) [[2월]] [[승정원]][[우부승지]], [[8월]] [[좌부승지]]로 승진했다. [[1455년]] 여름 우승지를 거쳐, [[1455년]](세조 즉위년) [[6월]] [[조선 단종|단종]]이 강압으로 양위하고 [[조선 세조|세조]]가 즉위하자 [[6월]]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발탁되고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었다.
         이어서 [[1455년]] [[7월]] 겸 동지경연사를 겸하고 [[조선 세조|세조]]의 즉위에 세운 공으로 동년 [[9월]]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관으로 녹훈된 뒤 다시 [[이조]][[참판]]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고, 다시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바로 [[조선 세조|세조]]의 즉위를 알리고 책봉 고명을 받기 위한 사신으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온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456년]] [[2월]]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어 [[집현전]][[대제학]]과 지경연춘추관사를 겸임하였다. 이후 [[감춘추관사]]로 [[세종실록]]의 편찬과 증보에 참여하였다. 또한 [[조선 세조|세조]] 즉위 초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의정부 서사제]]를 반대하여 [[육조직계제]]를 지지하였다.
         한편 [[조선 단종|단종]]의 후궁인 [[숙의 권씨 (단종)|숙의 권씨]]도 권람의 일족이었다. 그러나 권람은 권 숙의의 논밭과 집과 노비를 권람이 다 차지하고 주지 않아서 숙의를 굶주리게 하여, [[이목 (1471년)|이목]](李穆) 등 학자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ref>[http://www.itkc.or.kr/index.jsp?bizName=MK&url=/MK/MK_NODEVIEW.jsp%3Fdbname=MK%26set_id=2294361%26start=4%26count=10%26disp_cnt=10%26tot_cnt=10%26qry=%26keyword=%26sortsection=BOOKNAME%26order=ASC%26type=CONT%26seojiid=%26gunchaid=%26muncheid=%26stype=%26sectionname=CONT%26nPage=1%26thecount=3 한국고전번역원<!-- 봇이 붙인 제목 -->]</ref> 이는 자신의 5촌 조카딸인 권영금을 일부러 자신의 노비로 분배받아 보호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권람에 대한 [[조선 세조|세조]]의 총애는 각별하였다. 권람이 어느날 어머니 이씨를 위해서 특별히 잔치를 벌였는데,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를 비롯 지체 높은 손님들이 끊이지 않아 초헌과 일산이 문을 메우고 학발(鶴髮, 학의 털)이 마루 위를 뒤덮을 정도였다. 그의 어머니를 위한 잔치라 하자, 이를 들은 [[조선 세조|세조]] 역시 친히 찾아와 친히 권람의 어머니께 헌수했다고 전한다.
  • 권벌
         '''권벌'''(權橃, [[1478년]](성종 9) [[11월 6일]] ~ [[1548년]](명종 3) [[3월 26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중허(仲虛), 호(號)는 충재(冲齋) 또는 훤정(萱亭), 송정(松亭) 등이며, 작위는 길원군(吉原君)이고,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안동]] [[북후면]] 출신.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 [[김정국]](金正國)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 정치에 영남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으며, 명종 때는 [[이언적]] 등과 함께 소윤의 대윤 제거 시 사림을 구하려다가 실패했다. [[1545년]] [[8월]]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대윤 [[윤임]]을 제거하면서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과 사림을 엮어서 무고하자, 이에 반대하여 [[유인숙]], [[유관]] 등을 적극 변호하였다.
         [[1514년]](뭉종 9년) [[이조]][[정랑]], [[호조]][[정랑]]이 되고, [[영천]][[군수]]로 부임하였다. [[1517년]] [[장령]], [[1518년]] [[승정원]][[동부승지]], [[좌승지]], [[도승지]], 겸[[경연]][[참찬관]], [[예문관]][[직제학]] 등을 거쳐, [[1519년]](중종 14년) [[예조]][[참판]]이 되었다가 외직을 자청해 [[삼척]][[부사]]로 나갔다. 그해 [[11월]] [[기묘사화]]로 삭출되고,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15년 간 지내다가 복직, [[부호군]], [[밀양]][[부사]], [[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했다. [[1537년]] [[12월]] [[한성부]][[좌윤]], [[1538년]] [[2월]]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그해 [[10월]] [[형조]][[참판]]에 임명되고, [[1539년]](중종 34년) [[3월]] [[병조]][[참판]], [[6월]]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1539년 7월 [[대명회통]]에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임명된 것을 바꿔달라는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 奏請使)에 임명, 동지사 [[임권]](任權) 등과 함께 연경에 갔다가 [[1540년]] [[2월]] [[명나라]]에서 귀국한 이후에는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에 임명되어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하여 [[세자]] [[조선 인종|인종]]을 가르쳤다.
         [[1512년]] [[11월]]에는 [[현덕왕후]]의 복권을 건의하였다. 이후 [[사헌부]]지평, [[성균관]]사성(司成)을 거쳐 [[1514년]] [[이조]][[정랑]]에 임명되었고, 사건으로 인해 해직되었다가 그 뒤 얼마 안 되어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얼마 뒤 외직으로 [[영천]][[군수]]로 발령되었다. [[1517년]](중종 12년) [[사헌부]]장령, 그해 [[10월]]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1518년]] [[승정원]][[동부승지]], 좌승지가 되었다. 1518년 가을 좌승지로 재직 중 [[조선 중종|중종]]이 유생(儒生)을 불러 친강(親講)할 때 그는 [[조선 단종|단종]]과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주고 제사지내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인용문|금일 강론에는 인(仁)에 대해 논하였는데 인은 끊어진 세대를 이어 주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노산군]](魯山君)은 선왕(先王)의 의친(懿親)이고 연산군(燕山君)은 전하의 동기(同氣)이니, 비록 연산군이 [[종묘]](宗廟)에 죄를 지었으나 또한 일시에 군림(君臨)하였습니다. 영원히 세대가 끊겨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면 어찌 전하의 인(仁)이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조선 세종|세종 장헌대왕]](莊憲大王)이 [[광평대군]] 여(廣平大君 璵)를 공순공 방번(恭順公芳蕃)의 후사로, [[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를 소도공 방석(昭悼公 芳碩)의 후사로 삼았는데, 친한 이를 자애하는 후덕(厚德)을 지금까지 칭송해 마지않으니, 이는 후세 임금의 본보기입니다.}}
         그는 [[우승지]] [[김정국]](金正國) 등과 같이 [[조선 단종|단종]]과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주고 제사지내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부 훈신들의 반대로 비판받고 무산되었다. 그러나 그의 단종 복권과 연산군 후사 입양 건의는 시론(時論)이 옳게 여겼다.
         [[삼척]][[부사]]로 발령받아 부임했다가 [[1519년]](중종 14) [[11월]]에 [[조선 중종|중종]]이 [[훈구파]] [[심정]], 외척 [[홍경주]], 온건 사림파인 [[남곤]], [[김전]] 등을 부추겨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키고 조광조 일파를 제거할 때, 연루시켜서 파직당하고 귀향하였다. [[1520년]](중종 20년) [[안동부]](安東府) [[내성면]] 유곡(酉谷)에 은거하였다. 이후 15년 간 고향에서 지내다가 [[1530년]] 직첩(職牒)을 돌려받았다가 곧 환수되었다.
         [[1539년]] [[3월]]에 [[병조]][[참판]]에 임명되고, [[6월]] [[한성부 판윤]]에 올랐다가 얼마 뒤 [[중추부]][[지사]]로 전직되었다. [[1539년]] [[7월]]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일로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 奏請使)가 되어 [[동지사]] [[임권]](任權) 등과 함께 [[연경]]에 갔다가 이듬해 [[2월]]에 [[명나라]] 황제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적은 칙서(勅書)를 받아들고 돌아왔다. 긍정적인 칙서를 얻은 일로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승진시키고 토지와 노복을 하사받았다. [[명나라]]에서 귀국한 직후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에 임명되어 세자우빈객을 겸하여 [[세자]] [[조선 인종|인종]]을 가르쳤다.
         [[1540년]] [[병조판서]]에 임명되자 그는 여러번 체직을 청했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곧 [[한성부 판윤]]에 임용되었으며, 1541년 [[5월]] [[예조판서]], [[11월]]에는 [[의정부]][[좌참찬]]에 임명되었다.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예조판서와 좌참찬 재직 때는 지[[의금부]]사를 겸직했다. [[1542년]] [[5월]] 장령이 되었으며, 같은 해 [[가정제]]의 엽기행각에 궁비인 양금영(楊金英) 등이 가정제를 시해하려 했다가 실패했다. 이때 [[조선 중종|중종]]이 봉변을 당한 [[가정제]]를 위로하겠다고 진위사(陳慰使)를 파견하려 하자, 그는 경연(經筵)에서 이를 반대하였다. 그는 오히려 중종에게 "천자가 만승(萬乘)의 지존(至尊)으로 깊은 구중 궁궐에 있는데도 뜻밖의 음모가 측근의 시어(侍御)에서 나왔으니, 잠시도 경계하지 않으면 위험한 화가 따릅니다. 원컨대 이를 거울로 삼아 항상 성찰을 더하시면 좋겠습니다."고 하며 오히려 중종에게 타산지석 삼아서 항상 성찰하고 깨닭으라고 권고했다. [[정경세]]에 의하면 그 말이 매우 기휘(忌諱)를 범하였으므로 동료들이 두려워해서 고개를 움츠렸을 정도였다 한다.
         [[1567년]](명종 22년) 신원(伸寃) 복권되었고, [[조선 선조|선조]] 즉위 직후 그해 [[10월]] [[조선 선조|선조]]의 명으로 직첩을 되돌려받았다. 이후 [[기대승]]은 '당시 학문했던 사람으로 [[이언적]]이나 권벌 같은 이들이 어찌 추호인들 윤임에게 붙을 리가 있겠느냐'며 억울함을 상주하였다. 그가 복권되자 미암 [[유희춘]](柳希春)은 교지를 읽다가 권벌과 [[이언적]]의 누명을 씻어 주시는 말씀에 이르러서는 저도 모르게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한다.[[조선 선조|선조]]는 그를 가리켜 급제 권벌은 덕행이 갖추어졌고 충성 또한 지극했다(故及第權橃, 德行純備忠誠俱至)고 평하였으며, [[1568년]](선조 1년) [[2월]]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감춘추관사]]에 [[추증]]되었다. [[1571년]] [[9월]] 충정(忠定)의 시호가 추서되었는데, 사군진절왈충 순행불상왈정(事君盡節曰忠 純行不爽曰定)이라 하여 충정으로 정해진 것이다.
         [[1588년]](선조 21년) [[경북]] [[봉화]](奉化)의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조선 현종|현종]] 때 가서 사액을 받았다. [[1591년]](선조 24) [[대명회전]] (大明會典)이 수정되어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인임]]에서 [[이자춘]]으로 수정되자, 그는 [[조선]]의 종계(宗系)가 바로잡히게 한 데 노력한 공으로 [[광국공신|광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다시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그 해 [[불천위]](不遷位)로 지정되었다. 문집에 《충재문집 (冲齋文集)》등이 있다.
         그는 [[연산군]] 때 정시에 합격하였지만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파방되었다. 그러나 [[1518년]] [[승정원]][[좌승지]]에 있을 때는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서 제사지내게 해줄 것을 [[조선 중종|중종]]에게 적극 상소하였다.
         [[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학자]][[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 연산군]][[분류:조선 중종]][[분류:조선 명종]][[분류:조선의 공신]][[분류:옥사한 사람]][[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안동 권씨]][[분류:서예가]][[분류:조선의 작가]]
  • 권상하
         '''권상하'''(權尙夏, [[1641년]] - [[1721년]] [[9월 2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학자, 교육자로 효종, 현종, 숙종 때의 성리학자였다. [[송시열]], [[송준길]]의 문하생이다. [[한성부]] 출신. 호는 수암, 본관은 [[안동 권씨|안동]](安東)이다.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적통이자 그 지도자로서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했다. 특히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계승자였으며, 그의 유언을 받들어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웠다. 자신의 동생이기도 한 성리학자 겸 문신 [[권상유]]의 형이자 스승이었다.
         [[1659년]](효종 10) [[조선 효종|효종]]의 국장기간 중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이 3년복이냐 기년복이냐를 놓고 복제문제가 발생하여 스승 [[송시열]]이 남인에 의해 덕원부(德源府)로 귀양가게 되자,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를 다짐하였다. 1660년(현종 1년) 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 진사로 수학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한 뒤 [[예송 논쟁]]과 [[남인]]-[[서인]]간의 갈등을 피해 시끄러운 세상을 영원히 단절하고 자신을 위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부모의 3년상을 마친 뒤 [[송시열]]을 따라 화양(華陽)에서 사서(四書), 계몽(啓蒙), 계사(繫辭), 홍범(洪範) 내편(內篇)을 강론하였다.
         당시 그는 당쟁에 초연한 태도로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한편으로 스승인 [[송시열]]의 논적인 [[허목]]과 [[윤휴]]에 대한 상당한 적개심과 공격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주로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선배 [[유학]]자들인 [[서경덕]](徐敬德), [[이황]](李滉),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으로부터 제기되던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 문제에 대하여 연구, 규명하려는데 힘을 기울였다. 한편으로 [[남인]]과 [[소론]]의 학문을 이단이라고 공격하여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 뒤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임명되어 출사한 뒤 순룽 참봉(順陵參奉),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 공조 정랑(工曹正郞) 등을 거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발탁되었다가 장령(掌令), 집의(執義) 등을 지내고,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 시강원 진선(侍講院進善), 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지냈다. [[송시열]]과 [[김수항]]의 사후 그들의 유지를 받들어 [[조선 단종|단종]]의 묘호를 회복하고 복권시킬 것과 사육신, 생육신 외에도 [[조선 단종|단종]]을 위해 순절한 신하들의 충의를 현창하고 포상할 것을 여러 번 상소하였다.
         그는 [[조선 숙종|숙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일망타진된 뒤 숙종의 총애를 받아 [[의정부]][[우의정]], [[좌의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기호학파의 지도자로서 학문 연구와 제자를 양성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생애 후반 그는 [[송시열]]의 저서를 보급하며 [[윤증]]을 이단이라며 공격하여 [[소론]]의 심한 비판을 받았다. 시호는 문순이다.
         사계 [[박세당]](朴世堂)이 주자(朱子)의 사서육경에 달은 주석 대신 독자적인 주석을 달자 이를 공격, 그와 논쟁하였다. 또한 [[이경석 (조선)|이경석]]의 묘갈명에서 [[송시열]]을 불상인이라고 비평한 [[박세당]]을 성토하고, [[노론]]언관들을 시켜 [[박세당]]에 대한 공격 여론을 주도한다. 한편 이경석의 비석 문제를 걸고 넘어지는 가운데 이경석의 손자와 갈등하기도 했다.
         1717년 아들 [[권욱]]의 죽음을 보았다. [[1721년]](경종 1년) [[조선 경종|경종]] 즉위 초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간결하고 힘이 넘쳤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문집에 《한수재집(寒水齋集)》 《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이 있다. 그해 8월 29일에 향년 8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관학(館學)의 유생(儒生)들이 모두 신위(神位)를 모신 곳으로 달려가 곡(哭)하였고 상복(喪服)을 입은 문인(門人)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본성의 문제를 물성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태도는 인성론이 자연물에까지 확대된 형이상학적 전개로서, 이황·이이 이래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발전상을 보여준다. 또한 17세기 이후 성리학이 예학(禮學)에 의해 구체적인 사회 규범으로써 경직되어가는 학문 풍토에서 인성·물성 상이론의 제기는 예학적 학문 이론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이 교조적인 예학(禮學)에 의하여 개혁성이나 예학으로서의 본래 취지를 상실한 채 사회규범으로서 경직되어가는 학문풍토에서, 인성·물성 상이론의 제기는 예학적 학문이론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송시열]]은 [[1689년]]에 제주로 유배의 길을 가면서 수암 권상하에게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울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ref name="mandd">[http://www.cjmuseum.org/v2011/cjm_exhibition03.htm 화양서원과 만동묘]{{깨진 링크|url=http://www.cjmuseum.org/v2011/cjm_exhibition03.htm }}</ref> 그 편지의 마지막에 '[[만동묘]]에서 [[명나라]] [[만력제|신종]](神宗)과 [[숭정제|의종]](毅宗)을 제사지내는 이유를 이야기한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만력제|신종]]에게는 멸망하는 나라를 지켜준 은혜에 보답하는 의리(義理)를 다하는 것이요, [[숭정제|의종]]에게는 나라가 망하면 국왕이 죽음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도(正道)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하였다.<ref name="mandd"/>
         [[분류:1641년 태어남]][[분류:1721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사상가]][[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조선의 시인]][[분류:송시열]][[분류:이이]][[분류:성혼]][[분류:허목]][[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안동 권씨]][[분류:병사한 사람]][[분류:노론]][[분류:17세기 한국 사람]]
  • 권진이
         '''권진이'''(權珍伊, [[1819년]] ~ [[1840년]] [[1월 31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아가타'''(Agatha)이다.
         [[중국인|청국인]] [[사제]]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권진이는 그의 식복사 즉 [[성직자]]를 시중드는 사람으로 일했다. 권진이는 유방제 [[사제|신부]]에게 [[처녀]]로 살기를 원한다고 말했고, 유방제 신부는 그녀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어 주어, 그녀는 처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제 신부와 권진이 사이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아서 [[교회]]에 해를 입혔다. 그러므로, [[프랑스인]] [[사제]] [[모방 베드로|모방]] 신부는 입국 하자 곧 유방제 신부를 [[청나라]]로 돌려보냈고, 모방 신부는 권진이를 곁에 불러 권진이가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하도록 격려하였다. 그 덕에 몇 달 동안 교우들을 불안케 하던 소문이 가라앉았다. 권진이는 어떻게 자신의 행동이 행동이 부지불식간에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는지를 깨달았고, 회개하며 속죄의 뜻으로 스스로 [[하느님]]을 위해서 [[순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권진이는 어머니 [[한영이]]에게 돌아가 함께 살게된 [[이경이]]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권진이는 감옥에서 어머니 한영이를 만났고, [[천국]]의 영원한 행복을 희망하는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권진이는 그녀의 한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열렬한 애정과 귀의로 가득차 있었다. 그 젊은 [[조선]] 여성은 [[하느님]]에게 [[예수]]의 수난과 죽음 때의 [[마리아 막달레나]] 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았고 더 좋은 향기를 풍겼다.
  • 권희
         '''권희'''(權喜, [[1794년]] ~ [[1839년]] [[9월 3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바르바라'''(Barbara)이다.
  • 길안현주
         길안현주 이억천(吉安縣主 李億千, ? ~ ?)은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8남 [[영응대군]] 염의 딸이다. 그의 며느리는 [[연산군]]의 딸 [[휘신공주]]로, 휘신공주는 [[조선 성종|성종]]의 손녀딸이 되므로 친정 쪽으로는 그의 재종손녀에 해당된다. [[조선 원종|정원군]]의 비 [[인헌왕후|계운궁 구씨]] 역시 그녀의 후손이다. 이름은 억천,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영응대군]] 이염(永膺大君 李琰)이고 어머니는 판중추 송복원(宋復元)의 딸 [[대방군부인 송씨|대방군부인 여산 송씨]](帶方府夫人 礪山宋氏)이다. 안국방의 영응대군 저택 혹은 동별궁 영응대군 사저에서 태어났다.[[조선 세조|세조]]는 그의 둘째 숙부가 된다. 어머니 [[대방군부인 송씨]]는 자녀를 여럿 낳았으나 일찍 죽고 그만이 살아남았다. 뒤에 영응대군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서자 청풍군 이원이었다.
         [[1467년]](세조 2) 아버지 영응대군이 일찍 죽자 [[조선 세조|세조]]는 제수씨인 송씨와 조카 딸 길안현주를 극진히 보살피고 많은 재물을 내려주었다. [[구수영]](具壽永)에게 하가하였고, 딸은 다시 [[임사홍]]의 아들 [[임숭재]]의 처가 되었으나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의 지시로 임숭재와 그의 딸이 이혼당했다.
         그의 다른 아들 구문경은 [[연산군]]의 딸 [[휘신공주]]와 결혼하였다. 반정 이후 공신의 편이 된 [[구수영]]의 청으로 이혼당했다가<ref> 《조선왕조실록》 중종 1권, 1년(1506년) 9월 25일 3번째 기사. </ref>, [[1508년]], 유순(柳洵) 등의 의견에 따라 [[조선 중종|중종]]은 공주를 다시 남편 구문경과 재결합시키고 집을 내리게 하였다.<ref> 《조선왕조실록》, 중종 7권, 3년(1508년) 10월 7일 6번째 기사. </ref><ref> 《조선왕조실록》, 중종 7권, 3년(1508년) 10월 10일 3번째 기사. </ref>
         ** 숙부 : [[조선 세조|세조]]
         *** 사촌 오빠 : [[조선 덕종|의경세자]]
         **** 오촌 당조카이자 사돈 : [[조선 성종|성종]]
         *** 손자 : 구사안, [[조선 중종|중종]]의 딸 [[효순공주]]의 남편
         *** 손자 : 구사맹, [[조선 원종|정원군]]의 처 [[계운궁 구씨]]의 친정아버지, [[조선 인조|인조]]의 외할아버지
         {{토막글|조선|한국 사람}}
         [[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공주]][[분류:조선 세종]][[분류:조선 세조]][[분류:조선 연산군]][[분류:전주 이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길재
         '''길재'''(吉再, [[1353년]]~[[1419년]])는 [[고려]]후기의 문신이자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해평 길씨|해평]],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ref> [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front/dirservice/ppl/viewDocumentPpl.jsp?pLevel2Name=&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a_A1353_1_0001122&pPplCount=&pOrderByType=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ref>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으로 불린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후인 [[1400년]]([[조선 정종|정종]] 2년)에,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세자 [[이방원]]이 그에게 태상박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거절하고 고향인 [[경상북도]] 선산(善山)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조선 세종|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19년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그는 [[조선]]의 관직에는 진출하지 않았으나 그의 동문들, 그가 후에 길러낸 제자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권우 (1363년)|권우]]→[[조선 세종|세종대왕]]<br />
         [[분류:1353년 태어남]][[분류:1419년 죽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사상가]][[분류:고려의 문신]][[분류:고려의 정치인]][[분류:고려의 유학자]][[분류:고려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고려의 작가]][[분류:고려의 시인]][[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해평 길씨]][[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 태종]][[분류:14세기 한국 사람]][[분류:15세기 한국 사람]]
  • 김 로사
         '''김 로사'''(金--, [[1784년]] ~ [[1839년]] [[7월 20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로사'''(Rosa)이다. 관찬기록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김노사'''(金老沙)로 나와 있는데, 노사는 그녀의 [[세례명]]인 로사로 보인다.
         [[1839년]] [[6월]], [[천주교]]를 병적으로 싫어하던 [[조병구]]가 [[조선]] [[조정 (정치)|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7월 5일]]에는 [[교회]]를 완전히 박멸하라는 [[칙명|교지]]가 내려졌다. 그 이후에 [[순교]]한 첫번째 인물들은 이미 수감되어 있던 여덟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그들 중 김 로사가 맨 먼저 체포되었다.
  • 김 로사 (1784년)
         '''김 로사'''(金--, [[1784년]] ~ [[1839년]] [[7월 20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로사'''(Rosa)이다. 관찬기록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김노사'''(金老沙)로 나와 있는데, 노사는 그녀의 [[세례명]]인 로사로 보인다.
         [[1839년]] [[6월]], [[천주교]]를 병적으로 싫어하던 [[조병구]]가 [[조선]] [[조정 (정치)|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7월 5일]]에는 [[교회]]를 완전히 박멸하라는 [[칙명|교지]]가 내려졌다. 그 이후에 [[순교]]한 첫번째 인물들은 이미 수감되어 있던 여덟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그들 중 김 로사가 맨 먼저 체포되었다.
  • 김 루치아
         '''김 루치아'''(金---, [[1818년]] ~ [[1839년]] [[7월 20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그녀의 이름은 '''김누시아'''(金累時阿)<ref name=dictionary>*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dic_view.asp?ctxtIdNum=4429 가톨릭 사전: 김누시아]</ref>로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름 누시아는 그녀의 [[세례명]] '''루치아'''(Lucia)로 보인다.
  • 김 루치아 (곱추)
         '''김 루치아'''(金路濟亞, [[1769년]] ~ [[1839년]] [[9월]])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인 [[기해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루치아'''(Lucia)이다.
  • 김 바르바라
         '''김 바르바라'''(金巴巴拉, [[1805년]] ~ [[1839년]] [[5월 27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바르바라'''(Barbara)이다.
  • 김경주 (승려)
          | 출생지 = [[조선]] [[부산광역시]]
          | 직책 = 前 [[조선총독부]] 불교 인가 예하 대본산 범어사 주지승
         [[1921년]] 여름에 도쿄조선불교청년회 전선순강단이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경남 지역에서 순회 강연을 하다가 경남 경찰부에 불온사상 선전 혐의로 적발된 사건이 있었다. 이때 도요 대학 재학 중이던 김경주도 전선순강단의 일원으로 "종교와 문화적 사명" 등의 강연을 했으며, 구금된 학생들 가운데 유일하게 공판에 붙여졌다. 당시 김경주는 [[공산주의]] 사상을 소개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1심에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이 무렵은 [[조선총독부]]가 불교와 [[유교]] 계열을 동원해 심전개발 운동이라는 관제 황민화 운동을 벌일 때였는데, 김경주는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매일신보]]》에 [[석가모니]]나 [[불경]]과 심전개발을 관련짓는 강의를 펼쳤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난 뒤 전쟁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 중일 전쟁 발발 직후인 [[8월 5일]]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서울의 [[개운사 (서울)|개운사]]에서 황군 무운장구 장병안태 기원제라는 행사를 개최하고 시국 강연회를 열었을 때, 김경주는 "나라를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는다(為國不為身)"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1938년]] 신년 초에는 《[[불교시보]]》를 통해 〈시국 인식과 거국 일치의 신념〉이라는 제목으로 시사문을 발표하였는데, [[중국]]의 도발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명시하고 [[일본군]]은 정의와 사람의 도리를 위하여 싸우고 있으니 곧 동양의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 김광림 (1948년)
         |출생지 = 미 군정 [[조선]] [[경상북도]] [[안동시|안동]]
  • 김굉필
         |출생지= [[조선]] [[한성부]] 정동
         |사망지= [[조선]] [[전라도]] 순천군 철물시
         |국적= [[조선]]
         '''김굉필'''(金宏弼, [[1454년]] ~ [[1504년]] [[10월 7일]])은 [[조선]] 전기의 문인, [[교육자]], [[성리학자]], 화가로 [[호 (이름)|호]](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ref>[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25465&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1005F00410031003400350034005F0031005F0030003000300031003200360030&pName=AE40AD49D544002891D15B8F5F3C0029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깨진 링크|url=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25465&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1005F00410031003400350034005F0031005F0030003000300031003200360030&pName=AE40AD49D544002891D15B8F5F3C0029 }}</ref> 또는 한훤(寒暄), 말곡(末谷<ref>중종실록 100권, 중종 38년 1월 4일 기유 8번째기사 1543년 명 가정(嘉靖) 22년 판중추부사 김안국의 졸기</ref>)이며 자(字)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 [[김전]], [[남곤]], [[정여창]] 등과 동문이었다.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1484년]] [[10월]] 스승 [[김종직]]이 [[이조]][[참판]]에 등용된 뒤 [[훈구파]]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자 김굉필은 이를 비판하였다. 이때 김굉필을 비롯한 김종직의 문하생들은 스승이 훈구파에 맞서 조정을 바로잡아 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오히려 중직에 임용되자 김종직은 조정에 건의 하나 올리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굉필은 스승과 사이가 벌어질 것을 각오하고 한 편의 시를 지어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김종직의 현실타협적인 처세를 완곡하게 비판했다.<ref name=""hahao">한정주,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 조선 500년 명문가 탄생의 비밀》 (다산초당, 2015) 193페이지</ref>
         그러나 이때의 일로 김굉필은 김종직과 틈이 갈라져 끝내 사제 간의 정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굉필의 나이 39세가 되는 1492년 스승 김종직과 절친한 지기 남효온이 모두 세상을 떠났는데 연보(年譜)에는 남효온의 집을 방문한 기록은 나오지만 김종직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ref name=""hahao"/> 그러나 사림의 학통과 인맥은 김종직이 세상을 떠난 이후 오히려 김굉필을 김종직의 뒤를 이를 사림의 영수로 만들었다.<ref>한정주,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 조선 500년 명문가 탄생의 비밀》 (다산초당, 2015) 194페이지</ref>
         죽은 뒤 그의 수급은 효수(梟首)되어 [[순천부]]의 철물시장에 걸려졌다. [[중종 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짐에 따라 [[증직|증]] [[승정원]][[도승지]]겸 [[경연]][[침찬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았다. [[이황]]은 그를 '근세 도학(道學)의 조종(祖宗)'이라 하여 [[성리학]] 도통의 정통으로 규정했고, 그의 제자 중 [[조광조]]와 그의 문인 [[백인걸]], [[백인걸]]의 문인 [[이이]], [[성혼]] 등을 통해 기호학파를 형성하고, 이들은 다시 [[조선 선조|선조]] 때에 [[서인]] 당을 형성하게 된다.
         [[중종 반정]] 이후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됨에 따라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는데,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컸다.<br/>그 결과 [[1517년]]([[조선 중종|중종]] 12년)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 등에 의하여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증직|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는 사우가 세워져 제사를 지냈다.
                           →[[권우 (1363년)|권우]]→[[조선 세종|세종대왕]]<br />
         [[분류:1454년 태어남]][[분류:1504년 죽음]][[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조선의 화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갑자사화 관련자]][[분류:무오사화 관련자]][[분류:연좌제]]
  • 김근행 (1610년)
         '''김근행'''(金謹行, [[1610년]] - ?)은 [[조선]] 후기의 [[역관]]이다. 자는 선회(鮮悔), 본관은 [[김해 김씨|김해]](金海)이며, [[선조]]의 후궁인 [[순빈 김씨]]의 친정 조카이다.
         그는 자신의 부를 자랑하지 않고 일부러 질이 낮은 관대와 관복, 호패, 패도 등을 사용했다. [[조선 인조|인조]]대부터 [[조선 현종|현종]]대까지 [[대마도]]와 [[일본]]과의 무역 활동, [[훈련도감]]과 [[병조]]의 부탁으로 여러 번 [[화약]]과 [[유황]], [[조총]] 등을 반입해오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또한 고리대금을 하여 막대한 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1676년]]의 [[부산]] [[초량왜관]] 신축공사에 투입된 [[일본인]]과 [[대마도]]인 목수들의 임금을 지급할 수 없자, 단기 고리대금으로 이자를 남겨 그 이자로 목수들의 임금을 지급하였다.
         그의 아버지 [[김득기]]는 [[역관]]과 [[조선]]시대 외교 비사인 《[[통문관지]](通文館志)》에 등재될 정도로 이름 있는 역관이었다. 아버지 김득기는 [[1592년]](선조 25)에 [[명나라]]에 청병 사신의 수행원으로 파견되어 가서 선조가 피난해 있던 평양으로 귀환하여 의주(義州)까지 왕을 호행한 공로로 호군(護軍)에 특배되었으며, [[선조]]가 [[명나라]]에 귀순할 뜻을 비치자 조정의 신하들과 함께 불가함을 힘써 간쟁하였다. 또한 조천사로 여러 차례 다녀오면서 받아오는 은화(銀貨)를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다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임금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아버지 [[김득기]]는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1등관에 책록되었다.
         그 뒤 김근행은 [[부산광역시|부산]]의 왜관 건물의 개·증축 등 수리공사를 담당하는 [[왜관]] 감동역관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사역원]] 왜학훈도로 [[왜학]] 통역관을 길러냈다. 또한 그는 [[대마도]] 도주(對馬島 都主)의 애경사(哀慶事)를 위로 및 축하하는 목적에서 파견되는 [[문위행]]의 역관으로 여러 번 [[대마도]]를 다녀왔는데 [[1640년]](인조 18)에 문위행(問慰行)의 당하역관으로 파견된 이후 문위행의 수행원으로 7회를 [[대마도]]에 파견되어 다녀왔다. [[1633년]] [[훈련도감]]에서 [[청나라]]의 눈을 피해 유황과 무기의 밀수를 추진하였는데, 김근행이 그 일을 맡아서 일본으로 들어가 밀매 상인과 접촉하여 유황 4만근을 [[조선]]으로 밀수, 반입하였다. 이 공로로 후일 그는 당상역관을 거쳐 가선대부가 되었다.
         [[1643년]](인조 21) 통신사의 [[상통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그 뒤 [[사역원]]교회를 거쳐 당상관에 올라 1655년(효종 6) 통신사가 파견될 때는 당상역관으로도 파견되었다. [[조선 효종|효종]] 때에도 문위행의 통역관과 문위행으로 [[대마도]]를 다녀왔는데, 이때는 [[청나라]]의 눈을 피해 북벌에 쓸 무기를 구입해 왔다.
         [[분류:1610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17세기 한국 사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역관]][[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일본 관계]][[분류:무역]][[분류:밀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 효종]][[분류:김해 김씨]]
  • 김기수 (국악인)
         [[경성부]] 출생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왕실 관리를 위해 설치된 [[이왕직 아악부]]의 아악부원양성소에서 국악을 공부하였고,<ref>[[이왕직아악부]]는 광복 후 설립된 [[국립국악원]]의 전신이다.</ref> 이왕직아악부에서 아악수와 아악사를 맡았다.<ref name="글로벌_1"/>
          |출판사 = 조선일보 (연합뉴스 인용)
  • 김만기 (1633년)
         '''김만기'''(金萬基, [[1633년]] ~ [[1687년]] [[3월 15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인·[[문신]]이자 척신이다. [[인경왕후]]의 친정아버지로 [[조선 숙종|숙종]]의 장인이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서석(瑞石), 정관재(靜觀齋), 본관은 [[광산 김씨|광산]](光山)이다. [[구운몽]]을 지은 서포 [[김만중|만중]]은 그의 아우이며, [[김익훈]]의 그의 숙부이다. [[김익희]], [[송시열]]의 문인이다. 당색으로는 [[서인]] 당원이었다가 서인 분당 시 [[노론]]에 가담하였다.
         [[1652년]](효종 2) 생원,진사시 양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뒤, [[165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1659년]] [[조선 효종|효종]]이 죽고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 논쟁이 발생하자, [[송시열]], [[송준길 (1606년)|송준길]], [[김수항]]을 따라 기년복설을 지지하였다. [[1666년]](현종 7) 전라도 도사로 임명되었다가 [[사간원]][[대사간]], [[승정원]][[좌승지]] 등을 역임했다. 1671년(현종 13) 딸 인경왕후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국혼을 하고, 1674년 사위 숙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로 승진하고 광성부원군에 봉작되었다.
         |출생지= [[조선]]
         |사망지= [[조선]]
         |국적= [[조선]]
         1653년 별시문과에 을과 3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그 뒤 장예원 주서, 승문원 주서, 시강원 설서 등을 역임하고 예조, [[병조]][[좌랑]]과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수찬,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657년]](효종 8) 교리(校理)로 재직 중 글을 올려 [[오례의]](五禮儀)』의 복상제(服喪制) 등 잘못된 것을 개정하기를 청하였다. 관료생활 초반 김만기는 문장력과 재주를 인정받아 [[조선 효종|효종]]은 "나와 더불어 일을 함께 할 자는 그 누구인가? 법도에 맞게 지적하여 인도해 줄 자는 경 등 약간의 사람뿐이다."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1659년 [[조선 효종|효종]]이 북벌을 준비하다가 그해 [[5월]] 갑자기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예송논쟁|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논란이 일자 송시열, [[송준길]] 등의 기년설을 지지하였다. 이후 [[서인]]으로 활동하며, 3년설을 주장하는 [[윤선도]](尹善道), [[윤휴]] 등 [[남인]]을 공격했다. 이후 흥문관 응교,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 등을 지냈다.
         1674년(현종 16) 예조판서로 옮겨 [[정헌대부]]로 승진되고 이듬해(숙종 1) [[조선 숙종|숙종]]이 즉위하자 국구로서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책봉되었고, [[오위도총부]] 도총관, 호위대장, 전생서 제조를 겸했다. 이후 총융사(摠戎使)를 겸하여 병권(兵權)을 장악하였으며, 이로 인해 척신이 군사력을 손에 넣었다며 [[남인]]들의 공격과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 후 [[김수항]](金壽恒) 등의 천거로 [[대제학]]을 지냈으며 1680년(숙종 7) [[경신환국|경신대출척]] 때 [[훈련대장]]으로 끝까지 남인과 맞섰으며, 이후 숙부 [[김익훈]], 숙종의 외당숙인 청성부원군 [[김석주]]와 공모하여 역모를 날조하였다.
         ***** 장녀 : [[인경왕후|인경왕후 김씨]] - [[조선 숙종|숙종]]의 원비
         ****** 외손녀 : 심사주(沈師周, [[조선 효종|효종]]의 부마 청평도위 [[심익현]]의 손자)에게 출가
         [[분류:1633년 태어남]][[분류:1687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부원군]][[분류:조선의 군인]][[분류:병자호란 관련자]][[분류:예송 논쟁 관련자]][[분류:과거 급제자]][[분류:광산 김씨]][[분류:조선 숙종]][[분류:송시열]][[분류:인현왕후]][[분류:노론]][[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김명순 (1759년)
         김명순(金明淳, [[1759년]] - [[1810년]] [[7월 24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인이다. 자(字)는 대숙(大叔), 본관은 (신)안동이다. [[1801년]](순조 1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조선 순조|순조]]의 국구 [[김조순]](金祖淳)과는 6촌간이다. [[서울특별시]] 출신.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분류:1759년 태어남]][[분류:1810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음서]][[분류:과거 급제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안동 김씨 (신)]]
  • 김범부
          | 출생지 = [[조선]] [[부산광역시|경상남도 부산시]]
  • 김병기 (1814년)
         '''김병기'''(金炳基, [[1814년]] ~ [[1891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옥천군수, 강릉부사, 통정대부, 형조참의 등을 지냈다. [[갑신정변]]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김옥균]](金玉均)의 양아버지이다. 양자 [[김옥균]]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고 끝내 사면받지 못하였다. 이조참판 [[김광현 (조선)|김광현]](金光炫)의 8대손으로 증조부는 이조참의 김이적(金履績), 할아버지는 이조참의 김후순(金厚淳), 아버지는 광주목사 김교근(金喬根)이다.
         [[음서]]로 출사하여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고 형조참의에 이르렀으나 [[1884년]](고종 21년) [[12월]]의 [[갑신정변]]으로 연좌되어 파면당했다. 이후 [[1886년]] 허직 등이 그의 사면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조선 고종|고종]]에 의해 거부당하고 수감생활 중 옥사하였다. 본관은 [[안동 김씨|안동]]이다.
         선원 [[김상용]]의 아들인 [[김광현 (조선)|김광현]]의 8대손으로 [[김조순]], [[김문근]], [[김조근]]은 먼 일가였다. 아들이 없었던 그는 충청남도 공주에 살던 육촌 동생 김병태의 장남 [[김옥균]](金玉均)을 양자로 입양하였다. 그의 할아버지 김후순의 형제인 김능순이 [[김옥균]]의 증조부가 된다. [[1846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여러번 응시하였으나 급제를 못하고 여러번 낙방하다가 결국 [[음서 제도|음서]]로 벼슬길을 시작했다. [[1852년]]([[조선 철종|철종]] 3) 광릉참봉을 지냈다. 1856년 옥과현감으로 부임하였으며, 금성현령·옥천군수·강원도 양양부사·강릉부사·가평현감 등 주로 외직을 담당하였다.
         * 부인 : 풍양조씨, [[조영하]]의 당고모, [[신정왕후 (조선)|신정왕후]]의 사촌
         * [[신정왕후 (조선)|신정왕후]]
         [[분류:1814년 태어남]][[분류:1891년 죽음]][[분류:한국의 옥사한 사람]][[분류:병사한 사람]][[분류:음서]][[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갑신정변]][[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안동 김씨 (신)]][[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김병욱 (1895년)
         '''김병욱'''(金秉旭, <small>일본식 이름:</small> 永田種秀, [[1895년]] [[8월 8일]] ~ ?)은 [[일제 강점기]]의 교육인 출신 관료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한성부]]에서 [[조선]] 말기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4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이 학교 사범과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했다.
         학교를 졸업한 [[1915년]]에 조선공립보통학교 훈도에 임명되면서 교육계에 들어섰다. 순천공립보통학교와 모교인 경성고등보통학교 훈도를 거쳐 [[1922년]]에는 [[경성사범학교]] 훈도를 역임했다.
         약 10년 동안의 교직 생활 끝에 [[1925년]]에 [[조선총독부]] 도 시학에 임명되어 교육행정 관료가 되었다. [[경상북도]] 학무과에서 근무하다가 [[1930년]]에는 총독부 군수로 승진하여 경북 [[봉화군]]과 [[청도군]]에서 군수로 근무했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분류:1895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김보지
         '''김보지'''(金保之, ? - ?)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정치인이다. 평안도찰방, 길주판관(吉州 判官),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를 거쳐 [[조선 세조|세조]] 때 [[좌익공신|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조선]]후기의 문신 [[김상로]], [[김재로]], [[김약로]], [[김치인]], [[김종수]] 등과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방계 조상이다.<ref>그의 동생 김의지의 후손들이다.</ref> 본관은 [[청풍 김씨|청풍]]이다.
         일찍이 관직에 올라 [[진무 (조선의 관직)|진무]](鎭撫)를 역임하였다.<ref name="jin01">세종실록 72권, 세종 18년(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년) 4월 1일(정유) 4번째기사 "김보지 등에게 명하여 경기 충청의 도둑을 체포하게 하다"</ref> [[경기도]]와 [[충청북도|충청도]] 경계선 연로에 도둑이 나타나 밤이면 원우(院宇)에 들어가서 사람의 재물을 겁탈하니, [[1436년]](세종 18년) [[4월]]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장력이 있고 용기가 있는 군사 30여 명을 인솔하고 가서 체포하게 하였다.<ref name="jin01"/>
         [[1450년]](문종 1) [[조선 문종|문종]] 즉위 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겸임하였다.<ref name="mun01">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9월 10일(신해) 3번째기사 "이견기·박연·김의지·연경·허눌·이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그러나 [[세종대왕]]의 국상(國喪) 중에 한 기생을 사랑하였다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음탕 방종하여 행검(行檢)이 없어서 충청도 도사가 되어 국상의 졸곡(卒哭) 전에 청주(淸州)의 기생을 지나치게 사랑했으며, 또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대관(臺官)에 임명하니, 뭇사람의 평판이 크게 놀랍게 여겼다.<ref name="mun01"/>'한다. 그해 사직(司直)을 지냈다.
         이후 고사(庫使)로 재직 중<ref>세조실록 2권, 세조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12월 27일(무진) 3번째기사 "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 공신에 녹훈하다"</ref>, [[조선 세조|세조]] 즉위 후 [[좌익공신|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에 녹선되었다.
         [[안종례]]는 [[안당]]의 종증조부이자 [[안구 (조선)|안구]]의 숙부이다.
         * [[안구 (조선)|안구]]
         *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9%87%91%E4%BF%9D%E4%B9%8B&keyword=%E9%87%91%E4%BF%9D%E4%B9%8B 조선왕조실록]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군인]][[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청풍 김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김사연 (1896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서대문구역
          | 직책 = 前 [[조선총독부]] 주임 참의
         '''김사연'''(金思演, <small>일본식 이름: </small>金思演, [[1896년]] [[1월 2일]] ~ [[1950년]] [[9월 20일]])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언론인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일본어]]로 발행되는 잡지인 《[[조선공론]]》의 사장을 맡았고, 부협의원 등 여러 직책에서 일하며 [[경성부]]의 유지로 활동했다. [[1931년]] 중추원의 주임참의직에 처음 임명되어 [[1941년]]에는 칙임참의에 올랐다. [[최린]]의 [[천도교]] 신파가 [[1934년]]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결성한 [[시중회]]에 발기인으로 가담한 바 있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김상로
         '''김상로'''(金尙魯, [[1702년]] [[1월 3일]] ~ [[1766년]] [[12월 29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며 당색으로는 [[노론]] 벽파의 지도자였다. 자는 경일(景一). 호 하계(霞溪)·만하(晩霞). 시호는 익헌(翼獻). 본관은 [[청풍 김씨|청풍]]이다. 대제학 [[증직|증]] [[의정부]][[좌찬성]] [[김유 (1571년)|김유]]의 아들이며 [[좌의정]]을 지낸 [[김약로]](金若魯)의 동생이다. [[영의정]] [[김재로]]는 그의 사촌형제였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으며 [[노론]] 벽파의 지도자였다. 1748년(영조 24) 병조판서가 된 뒤, 이조·호조 판서를 거쳐 1752년에 우의정, 1754년 좌의정, 1759년 영의정을 지냈다.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멱우리(화성시 우정읍 멱우리)에 매장되었다. 죽은 후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영조와 사도세자를 이간질하여 세자를 죽이게 했다 하여 관작을 추탈당하고, 그의 네 아들과 형제의 아들들도 모두 파직 후 유배당했다. 그 후 [[조선]] [[대한제국 고종|고종]] 때 신원, 복권되었다.
         [[분류:1702년 태어남]][[분류:1766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청풍 김씨]][[분류:과거 급제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김규식]]
  • 김상로 (1702년)
         '''김상로'''(金尙魯, [[1702년]] [[1월 3일]] ~ [[1766년]] [[12월 29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며 당색으로는 [[노론]] 벽파의 지도자였다. 자는 경일(景一). 호 하계(霞溪)·만하(晩霞). 시호는 익헌(翼獻). 본관은이다. 대제학 [[증직|증]] [[의정부시]] 좌찬성의 아들이며 좌의정을 지낸 김약로(金若魯)의 동생이다. 영의정 김재로는 그의 사촌형제였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으며 [[노론]] 벽파의 지도자였다. 1748년(영조 24) 병조판서가 된 뒤, 이조·호조 판서를 거쳐 1752년에 우의정, 1754년 좌의정, 1759년 영의정을 지냈다.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멱우리(화성시 우정읍 멱우리)에 매장되었다. 죽은 후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영조와 사도세자를 이간질하여 세자를 죽이게 했다 하여 관작을 추탈당하고, 그의 네 아들과 형제의 아들들도 모두 파직 후 유배당했다. 그 후 [[조선]] [[대한제국 고종|고종]] 때 신원, 복권되었다.
         [[분류:1702년 태어남]][[분류:1766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청풍 김씨]][[분류:과거 급제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김상용 (1561년)
         '''김상용'''(金尙容, [[1561년]] ~ [[1637년]] [[1월 22일]])은 [[조선]]시대 중·후기의 문인, 시인, 정치가, 서예가로 [[조선 선조|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작은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판돈녕부사에 이르렀고,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문루에 화약을 쌓고 불을 붙여 자폭하였다.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신 안동 김씨|(신)안동]]<ref name=autogenerated1> http://kgib.co.kr/new/04_project/project_news.php?idx=281254&cate=ps13 </ref>.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조선 광해군|광해군]]의 가까운 인척이었음에도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다. [[조선 광해군|광해군]] 때 한성부판윤·호조참판·승정원도승지·지의금부사·사헌부대사헌·지의금부사·형조판서·지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도총관과 지중추부사를 지내는 동안 [[인목대비]]가 폐비되자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원주(原州)로 낙향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부름을 받고 관직에 나갔다. 이후 김상용은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한 사람으로 판돈령부사를 거쳐 [[조선 인조|인조]] 즉위후 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626년 3월 좌참찬에 제수되고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1628년 판의금부사, 이조판서, [[1629년]] 예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1630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노령으로 치사(致仕)하고 관직을 사퇴하려고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631년 다시 치사를 청하였으나 불허되었고,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32년 우의정에 임명되자 거듭 사퇴하여 허락받았다. 1635년 우의정을 사퇴하고 영[[돈령부]]사로 전임되었다.
         그의 묘 옆에는 서손(庶孫) 김수전(金壽全)의 묘가 있다. 김상용의 죽음에 대해 그가 순절한 것이 아니라 종에게 자기 옷을 입히고 숨어 있던 중에 담배를 피우다가 화약에 불이 붙어 폭사한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했는데,<ref>인조실록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10월 28일(임술) 5번째기사</ref> 김상용의 아들들은 김상용이 실수가 아닌 순절을 한 것이라 주장하며 당시 13세였던 김수전이 순절하는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다고 간청해 불에 뛰어들었다고 주장했다.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갸륵한 효심을 기려 사후에도 할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도록 할아버지 김상용의 묘 옆에 그의 묘를 안장하였다고 한다. 한편 묘역 입구의 충효각에는 김상용의 충신정려와, [[조선 숙종|숙종]] 때 예조판서 [[민진후]]의 주창으로 세워진 김수전의 효자정려가 모셔져 있다.<ref>숙종실록 30년(1704 갑신 / 청 강희(康熙) 43년) 3월 15일(갑인) 3번째기사 </ref><ref>[http://poongsoojiri.org/bbs/view.php?id=gallery04&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50 »ç´Ü¹ýÀÎ Á¤Åëdz¼öÁö¸®ÇÐȸ<!--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poongsoojiri.org/bbs/view.php?id=gallery04&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50 }}</ref><ref name=autogenerated1 />
         사후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시|의정부]]에 [[추증]]되었다. 인천의 충렬사(忠烈祠),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상주(尙州)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안변(安邊)의 옥동서원(玉洞書院), 정주(定州)의 봉명서원(鳳鳴書院), 정평(定平)의 모현사(慕賢祠) 등에 배향되었다. [[1758년]] [[조선 영조|영조]]의 특별명령으로 [[의정부시|의정부]]이 증직 추서되었다.
         **** (아들) 이조참판 부제학 [[김광현 (조선)|김광현]](金光炫, ? ~ [[1647년]] [[7월 17일]])
         ***** (손자) 김수빈(金壽賓, [[이건명 (조선)|이건명]]의 장인)
         [[분류:1561년 태어남]][[분류:1637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서예가]][[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시인]][[분류:자살한 정치인]][[분류:안동 김씨 (신)]][[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병자호란 관련자]][[분류:서인]][[분류:폭발물에 죽은 사람]]
  • 김석원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대한민국 육군 보병학교|조선경비보병학교]] 졸업
         [[한성부]] 출생이다. [[1909년]]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일본 육사를 제27기로 졸업하고 [[1917년]]에는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 중대장으로 화려한 전과를 기록했고, [[1937년]] [[중일 전쟁]] 때는 대대장으로 출전했다. 일본군에서 제대할 때까지 별은 달지 못했으며, 최종 계급은 일본군 대좌(대령)였으므로 중장이었던 [[홍사익]]에 이어 일본군에 복무한 조선인 중 최고위급 인물이다.
         [[1945년]] 광복 당시에는 대좌 계급으로 평양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광복 후 바로 상경하여 이응준이 위원장을 맡은 [[조선임시군사위원회]]에 참가했다. 이 조직은 일본 육사 출신의 장교 모임인 [[계림회]]가 주도하여 조직한 군사 단체였다. 그는 대한민국 국군 대령으로 임관하여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 인사가 국군의 중추를 형성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1949년 10월 한국군이 북한 상인과 북한산 북어를 밀무역하여 이익을 챙긴 이른바 '북어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두고 국방부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장군을 거론하였다가 강제 예편 당하였다. 이듬해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사단장으로 현역 복귀하여 [[조선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브루스 커밍스 박사는 그가 김일성의 아내 김혜순의 죽음과 상관이 있다는 루머가 있다고 말했다.<ref>[http://www.hani.co.kr/arti/SERIES/231/396630.html 이승만·김일성 모두 ‘침공’ 추진…북, 중·소 설득해 선공], [[한겨레신문]]</ref> 그러나 이는 아무 근거없는 낭설에 불과하며, 저명한 학자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일본 관동군 노조에 쇼도쿠(野副昌德) 소장이 이끈 노조에(野副) 토벌대 산하 나가시마(長島玉次郞) 공작대가 동북항일연군 토벌 작전 중 1940년 4월에 제2방면군장(第二方面軍長) 김일성의 처라는 김혜순(金惠順)을 체포하였다. 19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가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金惠順)에 대해 보도했는데, 김혜순이 전향하여 항일연군 귀순을 위한 선무 공작 제1선에 나섰다고 하였다.<ref>[[:File:김일성 처 김혜순 체포 기사.jpg| 金日成의 愛妻가 귀순 선무공작 제1선에 - 소설같은 전향의 경위]] 조선일보 1940년 07월 05일 석간 2면</ref> [[이명영|이명영(李命英, 1928-2000)]]이 1970년 일본에서 나가시마 다마지로(長島玉次郞)를 직접 만나 당시 일에 대해 증언을 들은 바로는 김혜순은 나가시마의 집에서 같이 머물며 그 부인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ref>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317~318]</ref><ref>[http://news.joins.com/article/1381671?ctg= 진위 김일성 열전(41) 동북 항일 연군 내의 2대 김일성|2대 김일성의 입만과 군사 활동] 중앙일보 1974년07월18일<br>
         [http://gangnam.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1382288&sc=&mc= 진위 김일성 열전 (44)2대 김일성의 정체(하)|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25<br> [http://gangnam.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1382546&sc=&mc= 진위 김일성 열전 (45) 입소 이후의 2대 김일성] [중앙일보] 1974-07-29</ref> 탈북한 장해성 국제펜 망명북한펜센터 이사장이 북한에 있을 때 김정숙 이전 빨치산 시절 [[:파일:김일성 처 김혜순 체포 기사.jpg|김일성의 처였던 김혜순(金惠順)]]을 1980년대 중반에 만나서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한 글을 보면<ref>장해성, [http://www.nkpen.org/bbs/board.php?bo_table=b03&wr_id=2&sfl=&stx=&sst=wr_hit&sod=desc&sop=and&page=1 인간의 운명 : (김일성의 여자, 김정숙 그리고 김혜순의 이야기)] NK-PEN 2014-06-28</ref><ref>[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2/25/2013122590210.html <nowiki>[생생토크 평양수다]</nowiki> 北, 크리스마스 어떻게 보내나?] TV조선 2013. 12. 25</ref> 그녀는 당시까지 북한에 생존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므로 김석원보다 더 오래 살았다. 더구나 김석원이 김혜순을 만날 일도 전혀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커밍스의 주장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재미 언론인이었던 [https://ko.wikipedia.org/wiki/%EB%AC%B8%EB%AA%85%EC%9E%90 문명자(1930 ~ 2008)]가 북한 [[김일성]] 사망 직후인 1994년 7월 25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김일성]]과 같이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박정숙(78세)과 김혜순(77세)을 인터뷰 했는데<ref name="moonmj">[https://ko.wikipedia.org/wiki/%EB%AC%B8%EB%AA%85%EC%9E%90 문명자(1930 ~ 2008)],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0098926# 《항일무장투쟁 여전사 박정숙, 김혜순 인터뷰 : 나의 사령관 김일성 장군》] 월간 말 1994년도 9월호(통권 99호), 1994.9, pp.46-48</ref>, 두 사람 모두 [[:파일:김일성 처 김혜순 체포 기사.jpg|조선일보의 김일성 처 김혜순 체포 기사]]에 나왔던 사람들과 이름이나 나이가 일치하므로 같은 사람들이다.
         |제목=조선전쟁발발 50년에 즈음한 비망록/조선정부
         |출판사=조선중앙통신
         소위 간삼봉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 부대와 맞붙었던 일본군을 실제로 지휘한 사람은 서울 용산연대(20사단 78연대)의 김석원이 아니라, 그와 일본 육사 동기로 당시 함흥연대(19사단 74연대) 소속이었던 [[김인욱|김인욱(金仁旭, 1892- ?)]] 소좌였다.<ref>[http://db.history.go.kr/id/im_101_03034 김인욱(金仁旭, 1892- ?)] 조선인사흥신록, 한국사데이타베이스</ref> 이는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확인이 되며,<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8020020910102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8-02&officeId=00020&pageNo=1&printNo=5269&publishType=00010 王公族附武官 李王垠 附屬步兵 少佐 金仁旭 補 步兵第七十四聯隊附 (咸興)] 동아일보 1935-08-02 조간 1면 13단<br>
         [[분류:1893년 태어남]][[분류:1978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 육군 소장]][[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 당원]][[분류:공3급 금치훈장 수훈자]][[분류: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경주 김씨]][[분류:호국군사관학교 동문]][[분류:조선경비보병학교 동문]][[분류:통위부 보병학교 동문]][[분류:국방부 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
  • 김석원 (1893년 9월)
         | 출생지 = [[조선]] [[서울특별시|서울]]
         * [[대한민국 육군 보병학교|조선경비보병학교]] 졸업
         [[서울특별시|서울]] 출생이다. [[1909년]]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일본 육사를 제27기로 졸업하고 [[1917년]]에는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 중대장으로 화려한 전과를 기록했고, [[1937년]] [[중일 전쟁]] 때는 대대장으로 출전했다. 일본군에서 제대할 때까지 별은 달지 못했으며, 최종 계급은 일본군 대좌(대령)였으므로 중장이었던 홍사익에 이어 일본군에 복무한 조선인 중 최고위급 인물이다.
         [[1945년]] 광복 당시에는 대좌 계급으로 [[평양]]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광복 후 바로 상경하여 이응준이 위원장을 맡은 [[조선임시군사위원회]]에 참가했다. 이 조직은 일본 육사 출신의 장교 모임인 [[계림회]]가 주도하여 조직한 군사 단체였다. 그는 대한민국 국군 대령으로 임관하여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 인사가 국군의 중추를 형성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1949년 10월 한국군이 북한 상인과 북한산 북어를 밀무역하여 이익을 챙긴 이른바 '북어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두고 국방부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장군을 거론하였다가 강제 예편 당하였다. 이듬해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사단장으로 현역 복귀하여 [[조선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브루스 커밍스 박사는 그가 김일성의 아내 김혜순의 죽음과 상관이 있다는 루머가 있다고 말했다.<ref>[http://www.hani.co.kr/arti/SERIES/231/396630.html 이승만·김일성 모두 ‘침공’ 추진…북, 중·소 설득해 선공], [[한겨레신문]]</ref> 그러나 이는 아무 근거없는 낭설에 불과하며, 저명한 학자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일본 관동군 노조에 쇼도쿠(野副昌德) 소장이 이끈 노조에(野副) 토벌대 산하 나가시마(長島玉次郞) 공작대가 동북항일연군 토벌 작전 중 1940년 4월에 제2방면군장(第二方面軍長) 김일성의 처라는 김혜순(金惠順)을 체포하였다. 19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가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金惠順)에 대해 보도했는데, 김혜순이 전향하여 항일연군 귀순을 위한 선무 공작 제1선에 나섰다고 하였다.<ref>[[:File:김일성 처 김혜순 체포 기사.jpg| 金日成의 愛妻가 귀순 선무공작 제1선에 - 소설같은 전향의 경위]] 조선일보 1940년 07월 05일 석간 2면</ref>이 1970년 일본에서 나가시마 다마지로(長島玉次郞)를 직접 만나 당시 일에 대해 증언을 들은 바로는 김혜순은 나가시마의 집에서 같이 머물며 그 부인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ref>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317~318]</ref><ref>[http://news.joins.com/article/1381671?ctg= 진위 김일성 열전(41) 동북 항일 연군 내의 2대 김일성|2대 김일성의 입만과 군사 활동] 중앙일보 1974년07월18일<br>
         [http://gangnam.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1382288&sc=&mc= 진위 김일성 열전 (44)2대 김일성의 정체(하)|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25<br> [http://gangnam.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1382546&sc=&mc= 진위 김일성 열전 (45) 입소 이후의 2대 김일성] [중앙일보] 1974-07-29</ref> 탈북한 장해성 국제펜 망명북한펜센터 이사장이 북한에 있을 때 김정숙 이전 빨치산 시절을 1980년대 중반에 만나서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한 글을 보면<ref>장해성, [http://www.nkpen.org/bbs/board.php?bo_table=b03&wr_id=2&sfl=&stx=&sst=wr_hit&sod=desc&sop=and&page=1 인간의 운명 : (김일성의 여자, 김정숙 그리고 김혜순의 이야기)] NK-PEN 2014-06-28</ref><ref>[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2/25/2013122590210.html <nowiki>[생생토크 평양수다]</nowiki> 北, 크리스마스 어떻게 보내나?] TV조선 2013. 12. 25</ref> 그녀는 당시까지 북한에 생존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므로 김석원보다 더 오래 살았다. 더구나 김석원이 김혜순을 만날 일도 전혀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커밍스의 주장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재미 언론인이었던 [https://ko.wikipedia.org/wiki/%EB%AC%B8%EB%AA%85%EC%9E%90 문명자(1930 ~ 2008)]가 북한 김일성 사망 직후인 1994년 7월 25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김일성과 같이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박정숙(78세)과 김혜순(77세)을 인터뷰 했는데<ref name="moonmj">[https://ko.wikipedia.org/wiki/%EB%AC%B8%EB%AA%85%EC%9E%90 문명자(1930 ~ 2008)],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0098926# 《항일무장투쟁 여전사 박정숙, 김혜순 인터뷰 : 나의 사령관 김일성 장군》] 월간 말 1994년도 9월호(통권 99호), 1994.9, pp.46-48</ref>, 두 사람 모두에 나왔던 사람들과 이름이나 나이가 일치하므로 같은 사람들이다.
         |제목=조선전쟁발발 50년에 즈음한 비망록/조선정부
         |출판사=조선중앙통신
         소위 간삼봉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 부대와 맞붙었던 일본군을 실제로 지휘한 사람은 서울 용산연대(20사단 78연대)의 김석원이 아니라, 그와 일본 육사 동기로 당시 함흥연대(19사단 74연대) 소속이었던 [[김인욱|김인욱(金仁旭, 1892- ?)]] 소좌였다.<ref>[http://db.history.go.kr/id/im_101_03034 김인욱(金仁旭, 1892- ?)] 조선인사흥신록, 한국사데이타베이스</ref> 이는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확인이 되며,<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8020020910102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8-02&officeId=00020&pageNo=1&printNo=5269&publishType=00010 王公族附武官 李王垠 附屬步兵 少佐 金仁旭 補 步兵第七十四聯隊附 (咸興)] 동아일보 1935-08-02 조간 1면 13단<br>
         [[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경주 김씨]][[분류:호국군사관학교 동문]][[분류:조선경비보병학교 동문]][[분류:통위부 보병학교 동문]][[분류:국방부 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
  • 김성동 (조선)
         '''김성동'''(金誠童, [[1452년]]<ref name=a>『국조방목』</ref> ~ [[1495년]] [[음력 10월 29일|10월 29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명보(明甫)<ref name=a/>, 본관은 [[구 안동 김씨|안동]](安東)이다. [[김질]](金礩)의 4남이자 [[김언]](金漹)의 아버지이다.
         ***** 차남 - 김려(金濾)<ref name=d/> : 충좌위부호군(忠佐衛副護軍), 증 병조참판(兵曹參判), [[김찬 (조선)|김찬]](金瓚, [[1543년]] ~ [[1599년]])의 조부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분류:1452년 태어남]][[분류:1495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학자]][[분류:음서]][[분류:과거 급제자]][[분류:병사한 사람]][[분류:안동 김씨 (구)]][[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김성수 (1891년)
          | 출생지 = [[조선]] [[전라북도]] [[고창군]]
          | 경력 = 경성방직 사장<br>[[동아일보]] 사장<br>조선인민공화국 문교부 부장<br>조선인민공화국 내각중앙대표인민위원<br>[[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 최고위원 겸 고문
         '''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 ~ [[1955년]] [[2월 18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인 겸 언론인·기업인·[[근대주의]] 운동가였으며, [[대한민국]] 초기 [[정치인]], 언론인, 교육인, 서예가였다. [[전라북도]] [[고창군|고창]]출신이며에서 자랐다. 본관은 [[울산 김씨|울산]]이며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자(字)는 판석(判錫), [[호 (이름)|아호]]는 인촌(仁村)이다.<ref name="in680">인촌기념회, 인촌김성수전(인촌기념회, 1976) 680페이지</ref>
         김성수는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군|고창]] 에서 [[동방 18현]]의 한 사람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으로 출생했다. 당시 [[군수]]를 역임한 낙재 [[김요협]](金堯莢)의 둘째 아들 [[김경중 (1863년)|김경중]](金暻中)과 [[장흥 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가 되었다. 어릴 적 이름은 판석(判錫)이었다.
         큰어머니이자 양모였던 [[전주 이씨]]는 [[조선]] [[조선 태종|태종 이방원]]의 차남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경의(李景儀)의 딸이었다.<ref>《인촌김성수의 애족사상과 그 실천》 (동아일보사, 동아일보사, 1982) 21페이지</ref>
         그의 가계는 [[김인후|하서 김인후]]의 선조인 민씨 부인이 [[조선 태종|태종]]비 [[원경왕후]]의 친족으로 태종 때 외척을 제거하자 화를 피하여 낙향,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낙담(落膽)하면서부터 [[전라남도]] [[장성군]]에 새 본거지로 삼아 가문이 융성하였다. 그 뒤 [[김인후|하서 김인후]]가 다시 관직에 올라 [[한성부|한성]](漢城)에 거주하였으나 다시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내려와 이후 대대로 거주하였다. 이후 그의 증조부 [[김명환]](金命煥)이 자신의 셋째 아들 [[김요협|낙재 김요협]]을 [[전라북도]] [[고창군]]의 거부인 연일 정씨(延日 鄭氏) 정계량(鄭季良)의 무남독녀와 혼인을 맺음으로써 처가인 [[전라북도]] [[고창군]]에 정착하게 되었다. 증조부 김명환은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 중추부사가 되었다.<ref name="in80">인촌김성수의 애족사상과 그 실천(동아일보사, 동아일보사, 1982) 20</ref>
         그중에서도 차분하고 내성적이었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그의 사람됨됨이를 알아보고 깊은 신뢰를 하게 된다. 송진우는 [[조선총독부]]와 협상하는 일과, 김성수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자신이 대신 나서서 처벌을 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등 그를 앞장서서 도와주었다고 전해진다.{{출처|날짜=2013-09-24}}
         청년기에 김성수는 [[문맹]] 백성들을 보며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켜서 조국의 [[민족 해방|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 하에 [[도쿄|동경]][[유학]]을 결심<ref name="건국영웅"/> 했다. 그는 무식함과 무지함이 조선의 멸망의 원인이라 확신하고 먼저 배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계몽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1908년]] 10월 상투를 단발하고, 상투를 자른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사죄의 편지를 부모에게 남기고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함께 비밀리에 [[일본]](日本)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가정 사정 때문에 [[백관수]]는 중도에 포기했지만 김성수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길을 떠났는데, 집안에서는 병환을 핑계로 노비를 보내 그를 불렀으나 자신을 부르려는 계획임을 간파하고는 하인을 돌려보낸 뒤 급히 [[전라북도]] [[옥구군]]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4년]] 가을 김성수는 교육계몽에 뜻을 품고, 사립 [[중등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서울특별시|서울]]로 떠났다. 이때 집안에서 자금을 주지 않자, 그는 3일동안 단식을 한 끝에 집안에서 자금을 마련해 갔다.<ref name="ill7">일석 이희승 전집 7(서울대학교출판부 | 2007) 321</ref> 그의 첫 시도는 [[사립학교]] 설립안이었는데, [[조선총독부]] 교육국으로부터 거절 당하면서 무산되었다.<ref name="건국영웅"/> [[1914년]]말 김성수는 [[최남선]](崔南善), [[안재홍]](安在鴻) 등 [[일본]] 유학시절 동창들과 함께 교육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白山學敎)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안을 만들고 학교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허가를 해주지 않아 좌절당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설립인가 거절 이유로는 백산은 [[한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을 뜻하는 것이니, [[학교]] 이름이 불온하다고 퇴짜를 놨던 것이다.<ref name="ill7"/> 그해 [[안희제]] 등이 세운 [[백산상회]](白山商會)가 독립운동 자금을 공급하는 단체임이 총독부에 정보가 입수되면서 [[백산상회]]와의 관련성을 취조당했다.
         [[식민지|식민]] 치하의 [[조선]] 백성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한국]]에 유행던 시절,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민족]][[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자본 육성 계획을 세웠다. 김성수는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보]]의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하였다. [[1917년]] 방직기술자인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들여<ref name="최준1">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전진문 지음 | 황금가지 | 2007) 182쪽</ref> 일제 당국은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사업을 승인해주었다. [[1917년]]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광목]]제조 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윤치소]] 등으로부터 인수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이 조선에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시장진출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창안해낸 것은 조선인 지사들을 주주로 공모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외부 자본의 침투는 민족의 경제를 갉아먹고, 외환의 유출을 촉진한다는 점을 들어 조선인 인텔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1918년]] 봄 [[경상북도]] [[경주시|경주]]를 찾아 [[최부잣집]]의 후손 [[최준]]을 방문하였다.<ref name="최준1"/> 김성수가 [[최준]]을 찾은 것은 [[경성방직]]과 후에 세우게 될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 인사들의 참여를 권유하기 위함이었다.<ref name="최준1"/> 김성수가 [[경상북도|경북]] [[경주시|경주]]를 다녀간 지 1년 후 [[1919년]] 10월 [[경성방직]]이 설립되었고, [[최준]]은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ref name="최준1"/> [[최준]]은 김성수와 [[안희제]] 등과 교류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한다. 김성수는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설립자가 되었는데, 그해 11월 [[부산]]에 설립된 조선방직회사는 [[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ref>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584~585</ref> 중앙학교의 졸업생 중에서도 [[윤주복]](尹柱福) 등은 그의 권고로 규슈대학 방적학과로 진학, 졸업한 뒤 [[경성방직]]에 입사하기도 했다. 전국을 다니며 모집한 끝에 많은 주주와 후견인들을 모았고 [[경성방직|경방]] 창림 발기인들의 주식은 3,790주였고 16,210주는 일반공모주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파리강화회담]]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약소국 국민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사실이 한반도에도 알려지면서 이를 접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했다.<ref name="동아일보"/>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김성수는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 어릴때부터 오랜 친구였던 고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를 학교 학감직에 임명한 뒤 [[1919년]]초 그에게 [[학교장]]직을 넘기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어 송진우의 도움을 받아 함께 일본 [[도쿄]]에 연락 동경 조선 유학생들과 기맥을 통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1918년]]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송진우 등의 가담으로 중앙학교 교장직을 맡긴 후 주로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비밀리에 추진하였다.<ref name="동아일보"/><ref name=autogenerated3 />
         그는 [[중앙학교]]를 인수할 때부터, [[한양]]이라는 이름을 미리 짓고 [[전문학교]]([[전문대학]])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계획은 무산되고 차선으로 언론사 설립을 계획한다.<ref name="lee585">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585</ref> 그러나 그는 [[조선총독부]] 당국에 비협조적이었고, [[조선총독부|총독부]] 당국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1919년]] 10월에는 중앙상공주식회사와는 별도로 근대 [[자본주의]]적 회사인 [[경성방직]]을 창설하여 운영하였다.<ref name="동아일보"/><ref name="기념">《인촌기념회》[http://www.inchonmemorial.co.kr/incho_think1.html 사상과 일화 - 기업운동] {{웨이백|url=http://www.inchonmemorial.co.kr/incho_think1.html# |date=20070812233739 }}</ref> [[일본]]의 방직회사들과의 경쟁을 위해 대량 생산과 소량의 고품질 생산 등의 기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의 기술로는 [[일본]]의 신식 기술과 경합하기 어렵다 판단하고 [[일본]] 방직기계와 [[미국]]의 방직 기계를 도입하였다. 도입한 기계의 성능을 그는 직접 일일이 시험한 뒤 공장으로 보냈다.
         한편 김성수는 [[경방|경성방직]]의 초대사장에 [[박영효]](朴泳孝)를 영입하였는데, 이는 그가 당대의 거물[[친일파]] [[박영효]]를 끌어들인 것은, [[박영효]]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조선총독부|총독부]]와 [[조선]] 내 유지세력들을 사업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풀이할 수 있다<ref name="malsso1"/>. [[경성직뉴]]를 인수하고 경방을 창립키 위해 인촌(仁村)은 설립허가서를 [[조선총독부|총독부]]에 제출했으나 그들은 당장 허가를 내주지 않고 질질 끌었다. 그 이유는 [[조선인]]의 방직회사 건설로 그때까지 폭리를 취해 오던 [[일본]]계 [[방직]]회사가 [[조선]]내의 시장을 빼앗길 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더구나 1919년 그 해에는 [[일본]]의 <미쓰이>재벌이 부산에 조선방직회사를 설립하던 해여서 경방이 맞서게 되면 불리한 여건이었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면 조선인이 스스로 자각, 깨우쳐서 실력을 양성해야 되는 것이었다. 기술을 배워서 익히고, 식품과 생산품을 자체 조달할 수 있어야 되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실력을 양성해야 된다고 봤다.
         특히 김성수의 [[개량주의]] 노선은 이같은 [[동아일보]] 노선의 사상적 골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ref name="malsso1"/> [[동아일보]]는 1920년대 초반부터 총독부에 대해 조선인 자본의 보호를 요구하였고, 김성수는 1922~1926년 기간에 사이토 총독과 13번이나 만났다.<ref name="omykjs0612"/> 신문사 정착과 사회활동을 위해서는 총독부의 허가를 얻는 일이 필요했고, 조선인의 시각에서 조선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이 몇 개 쯤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이유로 총독부 공보국을 설득하였다.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출감후 김성수는 그와 함께 [[동아일보]]를 경영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손잡고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ref name="해공주1">[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199510100350 인촌 김성수(해방공간의 주역:9)]{{깨진 링크|url=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199510100350 }} 동아일보 1995년 10월 10일자</ref> [[1920년]] [[4월 15일]] [[조선총독부]]는 [[평양시|평양]]에서의 반일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를 달아, 창간 직후의 [[동아일보]]에 판매와 배포를 금지처분하였으나 김성수는 중단하지 않았다.<ref name="동아일보"/> [[동아일보]]는 이후 총독부에 의해 기사 삭제, 압류, 배포금지, 정간 등 끝없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ref name="동아일보"/> 김성수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장덕수]]와 함께 수시로 [[조선총독부|총독부]] 공보담당 부서에 출입하며 보도내용을 해명해야 했다.
         [[1922년]] [[이상재]], [[윤치호]], [[이승훈 (1864년)|이승훈]], [[김병로]]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ref>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이이화, 한길사, 2006) 290페이지</ref> 그러나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923년]]부터는 [[조만식]]·[[안재홍]]·[[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과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이라는 구호로, 국내에서 생산된 국산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 김숙자 (1389년)
         '''김숙자'''(金叔滋, [[1389년]] [[8월 24일]] ∼ [[1456년]] [[3월 2일]])는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江湖)·강호산인(江湖散人)으로 불렸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ref name="김숙자">《한국민족문화대백과》,김숙자(金叔滋),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선산 출신의 도학자이자 유학자이다. 야은 [[길재]](冶隱 吉再), [[윤상 (조선)|윤상]](別洞 尹祥)의 문인이다.
         김숙자는 12세 때부터 [[길재]](吉再)로부터 『소학』과 경서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역학에 밝은 당시 [[조선]] 유학자 별동 윤상(別洞 尹祥)이 황간현감으로 임명되어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걸어가서 배움을 청하자 윤상은 그 열의를 보고 『[[주역]]』의 깊은 뜻을 힘써 가르쳐주었다. 윤상은 다시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생 중 한 사람인 조용(趙庸)이 [[1392년]](태조 1) [[역성혁명]]을 반대하다가 [[예천]]에 유배되어 오자, 조말생(趙末生)·배강(裵杠) 등과 함께 조용을 찾아가 그를 사사하여 문인이 되었다. 김숙자는 [[길재]] 외에도 윤상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정몽주]]의 학통을 이었다. 그밖에 그는 조용, 김말 등과도 교류하였다.
         그는 관료생활 외에도 [[소학]]부터 경학 등 학문을 가르쳤고, 아들 [[김종직]] 외에도 탁중(卓中), [[이재인 (조선)|이재인]], 손조서(孫肇瑞) 등의 문인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김숙자의 문인 중에서 우수한 제자 9명은 세칭 아홉 현인이라 불리기도 했다.
         [[길재]]는 많은 제자를 길러 냈는데, 가장 먼저 입지를 세운 이가 김숙자였다. 이후 그의 제자들이 속속 중앙정계에 진출했다. 특히 세조 때부터 김숙자와 [[김종직]] 부자 등 여러 신진 사류가 과거 급제 등을 통해 중앙정치 무대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른바 ‘영남사림파 ’의 등장이었다. 이후에 [[이중환]]이 ‘[[택리지]]’를 통해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왔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나왔다”고 한 것은 김숙자 이후에 ‘영남사림파 ’의 발흥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ref>[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30628.010110742170001 영남사림의 기반을 구축한 김숙자(金叔滋)] 영남일보(2013.06.28) 기사 참조</ref>
         * [[윤상 (조선)|윤상]]
         [[분류:1389년 태어남]][[분류:1456년 죽음]][[분류:고려 사람]][[분류:과거 급제자]][[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
         [[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교육자]][[분류:사상가]][[분류:조선 세종]][[분류:조선 세조]][[분류:원종공신]][[분류:선산 김씨]]
  • 김시습
          | 출생지= [[조선]] [[경기도]] <br /> (現 {{KOR}} [[서울특별시]])
          | 사망지= [[조선]] [[충청남도]] [[부여군]] <br/> (現 {{KOR}} [[충청남도]] [[부여군]])
          | 국적= [[조선]]
         '''김시습'''(金時習, [[1435년]] ~ [[1493년]])은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조선 세조|수양대군]]이 자행한 [[조선 단종|단종]]에 대한 [[세조 찬위|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경기도]] (현재의 [[서울특별시|서울]] [[사육신 공원]])에 암장했다고도 한다.
         [[1493년]] [[조선]] [[충청남도|충청도]] [[부여군|부여]] 에서 병사한 그는 [[이계전]](李季甸), [[김반]](金泮), [[윤상]](尹祥)의 문인이다.
         5세 때 이미 《[[중용]]》 《[[대학 (책)|대학]]》에 통하여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 주었다. 어린시절 [[조선 세종|세종대왕]]이 그의 천재성을 듣고 5세의 김시습을 불러다가 글을 짓게 하자 바로 글을 지었다. 그 내용에 감동한 [[조선 세종|세종대왕]]이 [[문학]]에 재능이 있는 그에게 칭찬하며 [[비단]]을 선물하자, 그 비단들을 끝을 묶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금오신화 (조선중기 문신 윤춘년이 필사한 필사본)
         [[1466년]](세조 12)에 김시습은 [[충청남도]] [[공주시|공주군]]의 지역유지들과 함께 [[동학사]] [[숙모전]]을 증축하고, 숙모전 옆에 단을 쌓고 [[사육신]]과 [[조선 단종|단종]]에 관련되어 순절한 신하들을 추모하였다. 그러나 김시습이 증축한 건물은 년(영조 4)에 화재로 동학사가 불에 소실되었다가 후대에 1864년(고종 원년)에 만화(萬化) 스님이 다시 세웠다.
         뒤에 중종은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선조는 [[이이]]를 시켜 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조선 숙종|숙종]] 때에는 해동의 백이(佰夷)라 하였으며 [[집의]]의 벼슬을 추증, [[남효온]]과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공주시|공주]]의 [[동학사]] [[숙모전]]에도 배향된다. 향년 59세(1493년).
         * [[조선왕조실록]]
         * [[조선 세종|세종대왕]]
         * [[조선 문종|문종]]
         * [[조선 단종|단종]]
         * [[정보 (조선)|정보]]
         * [[하원 (조선)|하원]]
         [[분류:김시습]][[분류:1435년 태어남]][[분류:1493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생육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승려]][[분류:사상가]][[분류:조선의 사회 운동가]][[분류:조선의 정치운동가]][[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학자]][[분류:강릉 김씨]][[분류:병사한 사람]]
  • 김영목 (1870년)
          |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경상도]] [[안동시|안동]]
  • 김온순 (1812년)
         '''김온순'''(金蘊淳, [[1812년]] ~ ?)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 김씨 (신)|신안동]]이다. [[음서 제도]]로 관직에 올라 [[참봉]] 등을 지내고 [[1862년]] 문화현령으로 부임한 이래 해주판관, 합천군수, 순창군수, 담양군수, 해주군수, 밀양부사, 수운판관, 임실군수, 진주목사, 청주목사, 안주목사, 다시 청주목사와 안주목사 등 20년간 지방관을 역임하고, [[1882년]] [[공조]][[참판]]으로 발탁되었다. 지방관으로 재직 당시 실적을 인정받아 여러 번 포상을 받았으며, 청주목사 처음 재직 시에는 통정대부로, 두 번째 청주목사 재직 중에는 1882년 1월에 가선대부, 1882년 4월에 가의대부로 승진하였다.
         [[1866년]] [[2월]] [[조선 고종|고종]]의 왕비 간택 때 그의 딸 중 한명도 간택대상자에 해당되었으나 그는 병을 이유로 [[예조]]를 통해 간택에 불참하였다. [[1866년]] [[6월]] 선정으로 별천되기도 했다. 그해 [[6월 18일]] 선치를 베푼 지방관들을 포상할 때 활과 화살과 통개(筒箇)를 [[조선 고종|고종]]에게 선물로 하사받았다.
         고종은 지방관 인사 실적과 암행어사들의 계본을 보고는 "전 진주 목사(晉州牧使) 김온순(金蘊淳)은 과연 잘 다스렸구나."하고 칭송하기도 했다. [[1878년]] [[4월 26일]] [[청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879년]] [[8월]]에는 [[선혜청]]으로부터 정공(正供)으로 거두어들이는 세금이 가장 낮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했지만 [[조선 고종|고종]]이 알아서 하겠다 하고 무마시켰다.
         [[1883년]] 행[[호군]]으로 전임되었다가 [[8월 1일]] [[자헌대부]] [[한성부 판윤]]으로 발탁되었다가 [[8월 20일]] [[대호군]]으로 전임되었다. 상소를 올려 사직하려 하였으나 [[조선 고종|고종]]이 만류하였다. [[8월 27일]] [[공조판서]]를 천거할 때 [[조선 고종|고종]]이 특별히 3망까지 받았는데도 김온순의 이름을 더 넣어서 결국 그로 낙점하여 임명했다. [[9월 19일]] [[대호군]]으로 다시 전임되었다.
         [[분류:1812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음서]][[분류:서재필]][[분류:안동 김씨 (신)]][[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김육
         |직책 = 前 조선국 충청도 관찰사
         | 군주 = [[조선 인조|조선 인조 이종]]
         |출생지= [[조선]] [[경기도]] [[가평군]]
         |사망지= [[조선]] [[한성부]]
         |국적= [[조선]]
         '''김육'''(金堉, [[1580년]] [[8월 23일]]([[음력 7월 14일]])~[[1658년]] [[10월 1일]]([[음력 9월 5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실학자]], 사상가, 작가, 정치가, 철학자이며, [[조선 효종|효종]]·[[조선 현종|현종]] 연간에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주장, 추진하였으며 [[화폐]](동전)의 보급에 힘썼다. 자(字)는 백후(伯厚), 호(號)는 잠곡(潛谷), 회정당(晦靜堂),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638년(인조 16) [[충청도 관찰사]]에 재직 중 [[대동법]]을 제창 건의하였고, 수차(水車)를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전후복구 사업을 시도하였고, 《구황촬요》(救荒撮要)와 《벽온방》 등을 증보·재간행하였다.
         [[인조 반정]] 직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가 그 뒤 과거에 급제하여 음성현감,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했다. 그 뒤 [[충청]]감사 재직 중 [[충청도]] 지역에서 시범으로 [[대동법]]을 실시하게 했으며, 호서대동법이 실시될 때 [[호조]] [[판서]]로서 실무를 지휘한 이시방과 함께 [[대동법]] 시행의 주역으로 꼽힌다.<ref>[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47373.html 격동의 조선후기를 지켜낸 힘 ‘대동법’]</ref> 병조참판, 형조판서, [[의정부]][[우참찬]], [[사헌부]][[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43년]]과 [[1645년]] [[청나라]]에 사절로 다녀온 뒤 화폐의 주조·유통을 건의하여 [[평안도]]부터 추진하였고, 수레의 제조, 보급을 확산시켰으며,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을 건의하고, 《유원총보(類苑叢寶)》 《종덕신편(種德新編)》 등을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1636년]](인조 14년) [[성절사]]로서 [[명나라]]의 [[연경]]에 다녀왔는데, 그는 [[조선]]에서 [[명나라]]에 보내는 마지막 공식 사신이었다.
         자(字)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초호는 회정당(晦靜堂)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본관은 [[청풍 김씨|청풍]](淸風)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고손자이다. [[조선 현종|현종]]비 [[명성왕후]]의 친정 할아버지이며 [[김석주]], [[김석연 (1648년)|김석연]]의 할아버지, 청풍부원군 [[김우명]], 증 청릉부원군 [[김좌명]]의 아버지이다. [[조선 정조|정조]]의 장인 청은부원군 [[김시묵]]은 김육의 5대손이다. [[조호익]], [[성혼]], [[윤두수]], [[윤근수]],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김상헌]]의 문인이 되었다. [[경기도]] 출신.
         [[1624년|1625년]](인조 2년) 증광 문과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하고, 동년 [[10월]]에 [[사간원]][[정언]]에 임명됐다가 사헌부와 호패청에서 근무했다. 이후 그는 [[조선 인조|인조]]에게 전후 복구책이 우선임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33년]] [[9월]]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로 부임하여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였다.<ref name="hanafos" /> 그 뒤로도 전후 복구와 구휼을 청하는 상소와 [[후금]]의 침략에 대비해 병력을 양성하고 변방의 성곽을 세우고, 기존의 성곽을 개보수해야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역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느냐 여부를 놓고 찬성하는 [[서인]] 유생 및 학자들과 반대하는 [[남인]] 유생과 학자들이 올린 상소들에 묻혀져서 [[조선 인조|인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36년 [[명나라]]에 파견될 성절사(聖節使)로서 연경에 갔으며, 37년 명나라에서 [[병자호란]]의 발발과 [[조선 인조|인조]]의 항복 소식을 접하였다.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조선]]이 외국 군사의 침입, 약탈을 당한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통곡하니 중국 사람들은 그를 동정하면서도 의롭게 여겼다. 명나라에 다녀와서 남긴 《조천일기(朝天日記)》에는 그가 직접 목격한 [[명나라]] 관원의 타락과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를 기술하였다. 그는 [[조선]]에서 [[명나라]]에 파견된 마지막 사신이기도 했다. 귀국 후 1637년(인조 14) 조천일기(朝天日記)를 저술하기 시작했고, [[1638년]]초 [[승문원]]부제조를 거쳐 그해 [[6월]] [[충청남도|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도내의 토지대장과 세금 징수상황을 점검하였다.
         [[조선 인조|인조]] 때인 1636년 그는 대동법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묵살당했다.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로 있던 인조 16년인 [[1638년]]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자고 주장했다.<ref name="dangjaen179"/> 양란으로 곤궁에 빠진 국가 재정과 농민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정책으로 대동법 시행을 건의한 것이다. 그러나 김육의 이 주장은 조정에 파란을 몰고 왔다.<ref name="dangjaen179"/>
         [[1646년]] [[조선 인조|인조]]가 [[소현세자]]비 강씨(姜氏)를 처벌하려 할때 그는 강빈의 처벌에 적극 반대하였다. [[소현세자]]빈이 세자를 독살할 이유가 없고 확증도 없이 세자빈을 처벌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ref>그러나 인조의 심중은 세자빈 강씨와 그 일족을 제거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ref> 이에 [[조선 인조|인조]]의 비위를 상하게 하여 체직되었다.
         중국의 명대에 와서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샬과 같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서양의 천문학이 중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때 유입된 서양 천문학은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천문학이 아니라 주로 [[티코 브라헤]]의 관측치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당시에 사용한 천문수치는 티코 브라헤의 관측치를 케플러가 편찬한 루돌프 표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ref name="seeheon">[http://weekly1.chosun.com/site/data/html_dir/2003/02/03/2003020377023.html <nowiki>[</nowiki>임경순의 과학세상<nowiki>]</nowiki> 우리나라 전통 역법(曆法)]</ref> 이 서양 선교사들과 주로 서광계의 노력으로 중국에서는 ‘숭정역서(崇禎曆書)’가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이 역서를 공포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고 대신 명을 멸망시킨 청조가 이 역법을 ‘서양신법역서(西洋新法曆書)’라는 이름으로 공포했다. 우리나라 조선 효종 때 김육의 건의로 시행한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은 바로 이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ref name="seeheon"/> 그러나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문물을 모두 의심하던 [[조선 인조|인조]]는 [[소현세자]]를 의심했듯 그 역시 의심하였으나, 그는 시헌력의 사용을 적극 건의하였고, 산림 측에서도 별다른 반발이 없어 [[조선]]조정은 [[1653년]]부터 시헌력을 시행하게 된다.
         [[1649년]](효종 1년) [[조선 효종|효종]]이 즉위하자 그는 전후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지적하고, 전후 복구와 민심 수습, [[대동법]] 시행을 건의하였다. 그해 [[5월]] [[조선 효종|효종]] 즉위 초에 특별히 발탁되어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동년 9월 특진하여 의정부 [[우의정]]이 되었다.
         [[조선 효종|효종]]이 [[대동법]]의 시행을 약속함에 따라 우의정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조건부 출사에 [[산림]]은 그가 왕의 의지를 사적인 목적에 이용한다며 비난했고, 이어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김육은 [[조선 효종|효종]]에게 대동법의 내용을 설명하고 이 법의 시행 여부는 오직 왕의 결단에 달려 있으니 만일 시행하지 못하겠으면 자신을 벌해달라는 강경한 소차를 올렸다.<ref name="dangjaen183"/> 한편 그가 명리를 취하는 사람이다, 일부 대동미 업자들에게 뇌물을 받았다 등의 각종 유언비어들이 돌면서 그를 괴롭혔다. 소문이 계속되자 [[조선 효종|효종]]은 한때 그를 의심하였다.
         반대파들은 김육이 [[남송]]의 [[왕안석]](王安石)과 같다며 공격했다. [[주자학]]이 지배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에서는 왕안석과 같다는 것이 욕이었다.<ref name="dangjaen183"/> 사실 왕안석의 신법 중 소농민에게 정부가 저리 금융을 하는 청묘법(靑苗法), 국가에 대한 농민의 신역을 전납화하는 모역법(募役法) 등은 대동법처럼 농민 생활의 안정을 추구하는 개혁안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김육을 [[왕안석]]과 같다고 비판했던 대동법 반대론자들의 평은 역설적으로 오늘날에는 맞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ref name="dangjaen183"/>'라는 결론을 내렸다.
         서인은 공신들의 파벌인 낙당과 [[김장생]], [[김집]], [[안방준]] 직계인 산당 외에 김육의 대동법을 지지하는 한당이라는 새로운 파벌이 나타나게 되었다. 낙당이 몰락할 때 한당의 일부 역시 함께 몰락했지만 그의 손녀가 세자빈(현종비)이 되면서 한당은 [[조선 현종|현종]] 때 가면 정파로서의 생명력은 지리멸렬해지지만 외척 세력으로 재편성되기에 이른다.
         1650년(효종 1) 중국 사행길에 [[중국]]인들의 화폐 사용을 목격하고 귀국 후 [[조선]] 조정에 동전 유통을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받는 한편, 아랫사람을 시켜 [[조선]]의 특산물인 인삼과 비단을 마련하여 중국 동전 15만문(十五萬文)을 구입하여 [[평안도]]에 유통 시킨다.
  • 김윤정 (1869년)
         </ref>, [[1869년]] [[6월 25일]] ~ [[1949년]] [[10월 23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이자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경무관 재직 시절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한 혐의로 끌려온 [[김구|김창수]](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의 본명)를 심문하기도 했고, 외교관으로 있을 때는 미국 국무부에 고종의 밀서를 전달해 달라던 [[이승만]]의 청을 거절하였다.
         인천부 경무관으로 있다가 정부유학생으로 [[미국]], [[영국]]을 유학하였으며 주미조선공사관의 3등 서기관과 1등 서기관, 주미공사 직무대리 등을 역임했다. [[1905년]](광무 8년) [[을사 보호 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귀국하여 [[태인군]] 군수, [[1906년]] [[인천부]] 부윤 겸 감리사를 역임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한일 합방]]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그해 11월 [[조선총독부]]의 특채로 등용되어 [[전라남도]] 참여관과 [[경기도]] 참여관을 거쳐 [[충청북도]][[도지사]]로 고속승진한 후 [[1926년]]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가 [[1945년]]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그의 딸 [[윤고려]]는 개화파 정치인 [[윤치오]]의 두 번째 부인으로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윤씨로 성을 바꾸기도 했다. 본관은 [[청도 김씨|청도]]이다.
         그러나 [[1910년]] [[11월]] 개화파 친일 관료로서 등용되어 [[조선총독부]]의 [[전라북도]] [[참여관]]에 임명되었다. [[1919년]] [[3월 13일]] [[전주]] 만세 시위의 주동자인 [[윤건중]](尹建重)의 습격을 받았다. [[윤건중]]은 행사에 참석한 김윤정을 살해하려다가 그가 재빨리 단상으로 뛰어내리는 바람에 미수에 그치고 수배당하였다.
         [[1925년]] [[4월 2일]]에는 [[충청북도]] [[도지사]]로 부임하였다. 1925년 고등관 2등 충청북도지사, 곧이어 고등관 1등으로 승급한 뒤 이듬해 도지사직에서 물러났다.<ref name="네이트1">[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0973 네이트 백과사전]{{깨진 링크|url=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0973 }}</ref> 1927년부터 여성의 취직과 직업훈련을 목적으로 조선여자직업사(朝鮮女子職業社) 설립이 추진되자 창립준비위원으로 참여하고, [[1928년]] [[1월 15일]] 조선여자직업사 대표이사에 선임되었다.
         [[1926년]] 도지사 직에서 퇴임한 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처음 임명되었으며, 이후 중추원 참의직을 6차례나 연임하다가 광복 직전인 [[1945년]]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1935년]] 편찬된 총독부의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올라와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윤치오]]의 부인이며 한국 최초로 양장을 입은 여성이라는 설이 있는 윤고려가 김윤정의 딸이다.<ref>{http://leekcp.new21.org/zb41/zboard.php?id=rmswjs&no=267 {{웨이백|url=http://leekcp.new21.org/zb41/zboard.php?id=rmswjs&no=267 |date=20160414022939 }} 이경찬의 국사교실}</ref> 윤고려는 본래 김씨이나 남편을 따라 성을 바꾸었다. 일제강점기 말기 전시체제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 1940년 10월 전시 황민화정책 시행 당시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국민의용대]] 고문 등 각종 단체에 활동했다.
         [[1945년]] [[4월]]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다시 [[1945년]] [[6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지만<ref name="네이트1"/> 2개월 뒤인 [[8월]] 광복을 맞이하였다.
         [[2010년]] 김윤정의 손자 2명이 "[[1896년]] [[김구]]가 투옥 중일 때 경무관으로서 배려한 사실 및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다."면서 국가를 상대로 친일반민족행위결정처분취소 소송을 걸었다. 그러나 서울행정법원 행정2부에서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참의를 지낸 것은 그 자체로 친일 활동”이라며 “손자들의 주장하는독립운동지원 사실은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정한 조사범위 내에 있지 않다”며 [[2010년]] [[9월 7일]]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ref>[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568672&sid=E&tid=0 “조선총독부 중추원 활동, 그 자체로 친일”]{{깨진 링크|url=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568672&sid=E&tid=0 }}</ref>
         실업계에서도 활동하여 조선상사주식회사의 사장으로 활동했다.<ref name="네이트1"/> 딸 [[윤고려]]는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초기의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는 [[서광범]], [[이범진 (1852년)|이범진]], [[이승만]], [[김규식]](金奎植), [[서재필]], [[하란사]](河蘭史) 등과 함께 초기 조선인 [[미국]]유학생의 한 사람이었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 손세일, [http://monthly.chosun.com/board/view_turn.asp?tnu=200202100062&catecode=J&cpage=1 孫世一의 비교 傳記 (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월간조선》 (2002년 2월호)
         [[분류:1869년 태어남]][[분류:1949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외교관]][[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청도 김씨]][[분류:암살 미수 생존자]]
  • 김임이
         '''김임이'''(金任伊, [[1811년]] ~ [[1846년]] [[9월 20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테레사'''(Theresia)이다.
  • 김장생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지 = [[조선]] [[충청도]] [[논산시|논산군]](現 대한민국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병사
         |거주지 = [[조선]] [[한성부]] <br/> [[조선]] [[충청남도|충청도]] [[논산시|논산]]
         |국적 = [[조선]]
         |직책 = 前 조선국 강원도 철원부사 <br/>(前 朝鮮國 江原道 鐵原府使)
         |군주 = 조선 광해군 이혼
         '''김장생'''(金長生, [[1548년]] [[7월 8일]] ~ [[1631년]] [[8월 3일]])은 [[조선]]의 유학자, 정치인, 문신이다. [[문묘]]에 종사된 [[동방 18현|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김장생은 [[신라]] [[신무왕]]의 셋째 아들인 광산부원군 김흥광의 후손이었다. [[조선]] 초기에 살던 그의 7대조 김문(金問)은 [[과거 시험|과거]]에 급제했지만 일찍 요절한다. [[사헌부]][[대사헌]]을 지낸 [[허응]]의 딸인 부인 양천 허씨는 일찍 결혼했으나 [[1393년]](이조 태조 2년) 17세 때에 과부가 된다. 허응 내외가 딸을 재혼시키려 했으나 딸 허씨는 재혼을 거부하고 시댁이 있는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면]]까지 내려왔다 하며 이때 [[호랑이]]가 허씨 부인을 연산까지 수행했다 한다. 이 사실이 알려져 [[조선 세조|세조]] 때 [[정려]]가 세워졌다. 유복자 아들인 김철산(金鐵山)은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김국광]](金國光), 김겸광(金謙光), 김정광(金廷光), 김경광(金景光) 등을 둔다. 김장생의 6대조 [[김국광]]은 [[조선 세조|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올랐고 [[승지]], [[병조판서]], [[의정부]][[우찬성]] 등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1575년]](선조 8년) 가을, 아버지 [[김계휘]]가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자, 김장생도 평안도로 갔다. [[조선]]시대 [[평안도]]는 상업과 광업이 발달하여 물자가 많고 번화한 곳이었다. 유흥객들이 날마다 음악과 여색으로서 즐거움을 삼았고 김장생에게도 온갖 유혹의 손길이 왔다. 그러나 김장생은 모두 거절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여가가 있을 때 어울리더라도 조금도 오만하지 않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향락을 기피하여 모두들 '보통 사람으로는 어려운 일'이라며 경외하였다. 김장생이 송시열에게 “내 젊었을 때 색욕을 금하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비록 오래 평안도에 머물렀으나 끝내 마음에 잡된 생각을 가져 본 바 없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였으나 후일 관직은 [[가의대부]] 행[[용양위]]부호군에 이르렀다. 이 때 김장생 천거의 이유는 “성경(聖經)에 깊이 몰입하고 사색하여 옛 교훈을 독실하게 믿는다”는 것이었다. 이조(吏曹)가 이처럼 천거하자, [[조선 선조|선조]]가 [[의정부]][[영의정]] [[홍섬]](洪暹), [[의정부]][[좌의정]] [[노수신]](盧守愼)과 상의하게 했는데 모두 동의하였다. [[1578년]] [[12월]] 학행과 문장력으로 [[조선 예종|예종]]능인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다. 이어 [[돈녕부]][[참봉]]. [[순릉]][[참봉]]이 되었다.
         [[1580년]](선조 13년)에 아들 [[김반]](金槃)이 태어났다. 김반은 [[조선 숙종|숙종]]비 [[인경왕후]], [[김익훈]], [[김만중]], [[김만기]], [[김춘택]] 가계의 선조가 된다. [[1580년]] [[5월]] 그는 다시 스승의 한 사람인 우계 성혼의 문하에 다시 찾아갔다. [[1581년]](선조 14년) [[홍순언]] 등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가 파견될 때 [[돈녕부]]참봉으로 변무사(辨誣使)의 수행원이 된 아버지 [[김계휘]]를 따라 [[명나라]]에 갔으며, 귀국 후 다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1582년]] 귀국했으나 아버지 [[김계휘]]의 상을 당하였다.
         [[서인]]의 영수인 박순이 세력을 잃고 벼슬자리에서 물러나자 [[정개청]]은 스승과 같은 박순을 멀리하고 [[동인]]의 영수이자 실력가였던 [[이산해]]를 찾아갔다.<ref name="shin207">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2000) 207</ref> 한편 정개청이 박순을 떠난 뒤에 김장생이 그 말의 진부가 의심이 나서 정개청과 같이 제관으로 내정되었을 때 물었다.<ref name="shin207"/> "그대는 박사암(박순의 호)을 따라서 배운 지가 얼마나 되었는가?" 이 말에 정개청은 "(단지) 그 집에 서적이 많으므로 왕래하면서 빌려 보았을 뿐이다"라고 말했고, 그 때부터 김장생은 정개청과 절교했다고 한다.<ref name="shin207"/> 이때 스승 우계 성혼에게 옥사를 피할 것을 조언하자 [[성혼]]은 '의리로서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상례비요는 일반인이 쓰기에 편리하도록 서술한 상례(喪禮)와 [[제사]]에 관한 초보적 지침서로, 김장생의 [[상례비요]]는 [[서인]]은 물론 [[남인]]과 [[북인]]의 당원들도 참고하였고, 법으로 규정하지 않았는데도 [[1910년]](융희 4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조선 백성들의 상례 규범이 되었다. 상례비요 원본은 신의경(申義慶)이 지은 책인데, 김장생이 보충, 삭제, 교정하여 완성한 것이다. 김장생의 상례비요를 신의경의 원본과 구별하여 증보상례비요라 부르기도 한다.
          | 제목 = 조선의 문화공간 2
          | 제목 =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
         한편 [[경상북도]] [[성주군]]에 사는 [[정구 (1543년)|정구]]를 찾아가 예학에 대한 문답을 주고 받았다. 이때 관혼상제 및 각종 예의를 적용하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려 논쟁을 하게 되었는데 임금에게도 예의를 적용하는 문제였다. 김장생은 예의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것이므로 임금이라고 해도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였고, [[정구 (1543년)|정구]]는 임금은 지존인데 만백성과 똑같이 예의를 적용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는 김장생과 정구의 대담으로 종결되었지만 후에 [[조선 현종|현종]] 때에 가서 [[예송 논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김장생은 계축화옥을 계기로 또 다시 연산으로 내려와 문을 닫은 채 외인과 접촉하지 않고 오직 경서를 연구하는데 몰두했다. 하지만 누이와 동생들에게도 우애가 독실했던 김장생은 두 서제(庶弟)의 죽음을 무척이나 가슴 아파했다 한다. 이를 계기로 관직을 버리고 충남 연산에 내려가 은둔하여 경서와 고훈(古訓)을 탐독하며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1617년]](광해군 9년) [[정철]]의 아들 [[정홍명]]의 부탁을 받고 [[정철]]의 행록(行錄)을 찬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경서변의(經書辨疑) 8권을 완성하였다. 그 뒤 [[조선 광해군|광해군]]이 여러번 불렀으나 [[인목대비]] 폐모론, [[영창대군]] 사형에 반대하여 관직에 나가지 않다가 [[인조반정]] 이후 출사하였다.
         [[1624년]]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논공행상을 적절하게 하지 못함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확대되어 [[조선 인조|인조]]가 파천, [[공주시|공주]]로 피신해오자 급히 달려가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이괄의 난]]이 평정된 뒤 [[조선 인조|인조]]의 간곡한 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그를 따라 [[한성부]]로 상경하여 원자보양관이 되어 다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았다. 이후 [[상의원]]정이 되었다가 겸임 [[성균관]]사업이 되었다가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다. 이후 여러 번 낙향하려고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모두 반려되었다. 이어 휴가를 청하여 고향에 돌아와 중요한 정사(政事) 13가지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의 이권행위와 부패가 계속되자 부패한 자들을 가려내 처벌할 것을 [[조선 인조|인조]]에게 건의하였으나 묵살당하였다. [[1624년]] [[8월]] 통정대부 공조참의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10월에 왕명으로 입궐하여 강의를 드렸다. [[1625년]](인조 3년) 가선대부로 승진되어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하였다. [[1626년]] 행호군(行護軍)으로 전임되었다가 낙향한 뒤 연산에 두 스승 [[이이]]와 [[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건립하였다.
         [[1624년]]부터 [[조선 인조|인조]]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자신의 생부 정원군(定遠君)을 왕으로 추존하려 하여 추숭논의(追崇論議)를 일으켰다. 그러자 김장생은 그가 선조의 대통을 이은 것이나 다름없다며 정원군 추숭을 강하게 반대하였다. 이후 정원군 추숭의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당시 그에 찬동한 [[이귀]], 최명길(崔鳴吉) 등과 갈등하였고, 유학자 내부에서도 이를 찬성한 [[박지계]] 등과 갈등하였다.
  • 김정렬 (1917년)
         }}</ref>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선]]에서 무관을 지낸 집안으로, 큰아버지 김기원과 아버지 김준원은 구한말 군관학교를 졸업한 대한제국 군인으로 일제 강점기 무렵에 각각 다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15기와 26기 졸업생으로 일본군에 편입되어 일제 강점기에도 군인으로 활동했다. 특히 아버지 김준원은 해방 후 육군 창군에 참여, [[한국 전쟁]]에는 육군 대령으로 경남병사구사령관으로 활동하였고 예비역 [[1성 장군|준장]]으로 예편하기도 했다.
         광복 후 [[1946년]] [[최용덕 (1898년)|최용덕]], [[이근석]], 아버지 [[김준원 (1888년)|김준원]] 등과 함께 조선국방경비대 [[육군 항공대]]([[공군]]의 전신) 창설에 앞장섰으며, 그해 이희재와 결혼하였으나 야근과 훈련 등의 이유로 2년간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가 [[1948년]]에 결혼하였다.
  • 김정록 (미학자)
         '''김정록'''(金正祿, [[1907년]] ~ [[1982년]])은 [[서울대학교]] 미학과 교수를 지낸 학자이다. 호는 학보(學步). [[일제 강점기]]에 할아버지인 [[김춘희]]의 조선귀족 작위를 3대째 습작했다. 본관은 [[경주 김씨|경주]]이다.
         김정록의 할아버지 김춘희는 [[조선]] 말기의 정치인인 [[김홍집 (1842년)|김홍집]]의 조카였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남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김춘희가 받은 조선귀족 작위는 세습되는 것이어서, [[1926년]] 사망한 후 아들 김교신(金敎莘)을 거쳐 [[1932년]] 7월 경에 손자인 김정록이 습작하였다.
         남작 작위를 세습하고 조선귀족 단체인 에서 매달 150원의 생활보조비를 수령한 사실이 있어 광복 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자수하여 조사를 받았다. [[1939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가 신병으로 사임한 상태였다.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1982년 죽음]][[분류:조선남작]][[분류: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경주 김씨]]
  • 김종수 (1728년)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지 = [[조선]] [[경기도]] [[포천시]]
         |군주 = [[조선 정조|정조 이산]]
         |국적 = [[조선]]
         |직책 = 조선국 [[기로소]] 봉조하
         '''김종수'''(金鍾秀, [[1728년]] ~ [[1799년]] [[1월 7일]])는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풍 김씨|청풍]](淸風). [[자 (이름)|자]](字)는 정부(定夫), 호는 몽오(夢梧)·진솔(眞率)이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1750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1766년]] [[음서]]로 출사하여 [[세손]]이던 [[조선 정조|정조]]를 보필하였다. [[1768년]] 과거에 급제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과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1795년]]에 [[치사]]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세손 시절의 [[조선 정조|정조]]의 스승으로 당론에 반하여 [[조선 정조|세손]]을 옹호하였으며, 그 뒤 [[조선 정조|정조]] 즉위 후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에 이르렀다. [[조선 정조|정조]]에게 도의정치를 역설하며 임금이면서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스승이 될 것을 건의하였다.
         당색은 [[노론]]이었으며 [[노론]] [[벽파]]의 강경파였던 선조들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당숙 [[김치인]]과 함께 [[노론]]온건파에 가담하였다. [[세손]] 시절의 [[조선 정조|정조]]의 사부이기도 했다. 대의명분에 입각한 군사부일체론을 주창하였다. 뒤에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의 부주석인 [[김규식]]의 종고조부이기도 하다.
         그는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형 [[김종후]]는 산림의 대학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의 가계는 [[노론]] 벽파였고 재종조부 [[김상로]]는 [[노론]][[벽파]]의 거두로서 [[사도세자]]의 정적이자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선 인물로 단죄되었으나, 그의 당숙 [[김치인]]과 그는 노론 청명당으로 전향하였으므로 [[조선 정조|정조]] 즉위 후 벽파는 몰락하였으나 그의 가족들은 화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뒤 [[세손]]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거쳐 [[1768년]](영조 44년) [[군수]](郡守)로 재직 중 그 해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다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보직되었다. 이때 [[세손]]사부가 되어 [[세손]]이었던 [[조선 정조|정조]]를 가르치기도 했다.
         김종수는 군주는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학문적 스승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가르쳤다.<ref name="karkso">[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702021002 <nowiki>[</nowiki>선택! 역사를 갈랐다<nowiki>]</nowiki> (18)조선 정조의 두 재상 김종수·채제공 ‘살벌한 대립’] 서울신문 2012.07.02.</ref> 이는 군주나 스승 가운데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그 둘을 겸함으로써 이른바 군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김종수는 통치자가 바른 학문을 안다는 것은, 군주 자신이 진정으로 학문을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가능하다고 교육했다.<ref name="parks191"/> 즉 이상적 시대인 [[하]], [[은]], [[주]] 삼대 시절에는 군주가 학문을 이끌었고, 그 이후 시기부터는 신하들이 학문을 이끌었지만, 탕평이 표방된 지금의 시대는 새로운 사회로서의 개혁을 표방하고 있으므로 삼대 시절처럼 다시금 군주가 학문 정치를 이끌 수 있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었다.<ref name="parks191"/> 곧, '임금은 통치자이면서 스승'이라는 것이다.<ref name="parks191"/> 그는 군사부(君師父)라 하여 통치자는 통치자이면서 스승의 역할도 겸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하고, 어린 세손에게 만개의 하천을 비추는 밝은 일월처럼 될 것을 강조하였다.
         이 임무를 스스로 맡아서 실천에 옮길 때, 임금은 임금으로서, 개인으로서도 큰 뜻을 달성할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ref name="parks191"/> 또한 그는 군주는 만인을 감싸안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이 건의는 후일 정조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정조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결국 후일 모든 신하들이 [[조선 정조|정조]]야말로 군주이면서 동시에 스승이기도 한 위대한 성인이라고 추모할 정도로 효과가 나타났다.<ref name="parks191"/> 김종수의 존재는 본인 사후 정조의 치적을 방해한 역적이라는 평가와 노론 당내에서도 당론을 어기고 홀로 튀는 인물로 몰려 [[조선]] 멸망때까지 비판 일색이었지만, 정조에 대한 그의 구상, 이미지메이킹은 그의 사후에도 성공적으로 확립되었다.
         [[1769년]] [[3월]] [[홍문관]]부교리, [[세손시강원]]필선, [[6월]] [[홍문관]]교리(校理)를 거쳐 응교가 되었다. [[12월]] 장연 현감(長淵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왕의 특별 배려로 다시 [[홍문관]]수찬으로 직책이 바뀌었다. 이어 [[경연]]시강관을 겸하였으며 그 뒤 다시 [[홍문관]]교리로 임명되었으나 [[1772년]] 당폐(黨弊)를 일으킨 죄로 탄핵을 받고 [[조선 영조|영조]]의해에 유배되었다.
         [[1776년]], 유배된 지 4년 만에 영조의 죽음으로 [[행장]]찬집당상(行狀纂輯堂上)이 되었고, [[조선 정조|정조]]가 그를 특별히 요직에 발탁하였다. 조정에 돌아온 그는 [[세손]]의 즉위를 반대한 [[홍인한]], 음모를 꾸민 [[정후겸]], [[김귀주]] 등을 복주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는 [[노론]] 내에서도 [[노론]] [[벽파]] 인사들을 왕의 자리를 택군하려 한 대역죄인들이라 성토하고 이들을 처치할 것을 상주했다. 김종수는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도 [[홍인한]], [[정후겸]], [[문성국]]과 한패라며 법으로 처단할 것을 건의한다.
         이후 기용되어 승지에서부터 1년 사이에 우참찬(右參贊), [[병조판서]]로 승진되었다. [[노론]][[벽파]]의 강경파였던 선조들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당숙 [[김치인]]과 함께 [[노론]]온건파에 가담하여 숙청을 면하고 [[조선 정조|정조]]에 의해 등용되었던 것이다.<ref>또한 정조의 세손시절 사부로서 위기에 몰린 정조를 두둔한 것도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ref> [[사도세자]]와 그 후손은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노론]]의 당론을 어기고 일부 인사와 함께 세손은 영조의 적법한 계승자라 주장하였다. 그는 [[노론]] 내에서도 따돌림을 받게 되었고, 이후 정조 즉위 후 개혁작업을 하면서도 같은 노론 인사들의 처벌을 묵인, 동의하게 된다.
         [[1778년]] [[4월]] [[의정부]][[좌참찬]] 겸 [[성균관]]사업이 되어 [[4월 20일]] 경연고사비례(經筵故事比例)를 지어 [[조선 정조|정조]]에게 올렸다.
         김종수가 표방한 핵심 정치 원칙은 외척과 궁중세력을 멀리하여 그들의 정치 간여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ref name="parks191"/> 따라서 [[영조]] 말기에 [[소론]]과 손잡고 [[세손]]의 정통성을 인정하려는 [[홍인한]], [[홍봉한]] 계열을 공격하여 몰락시켰다. 그 뒤 [[조선 정조|정조]] 즉위 초에는 왕권에 위협이 되는 [[김귀주]], [[김관주]]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킨다. 그밖에 정조 암살을 시도한 [[홍계능]] 일파를 맹렬하게 성토하여 몰락시켰다.
         그 뒤 승지·경기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치고, 규장각의 제도가 정비되면서 제학에 임명되었다.<ref name="nate01"/> 이어 [[규장각]]의 각신인 [[박지원]]과 [[홍대용]], [[박제가]], [[서이수]] 등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성리학]]이나 [[주자]]의 주해보다는 [[공자]], [[맹자]]의 원시유학과 [[순자]]의 성악설 등을 가르쳤다. 한편 [[규장각]]을 중심으로 노론 서얼과 노론 [[북학파]]를 중용하자 [[노론]] 일각에서는 [[조선 정조|정조]]가 당을 분열시키려 책동한다며 반대하였으나, 김종수는 이를 강하게 반박하며 규장각 각신들을 보호하였다.
         그래서 [[노론]] 붕당의 초대 당수 [[송시열]]의 위패를 [[조선 효종|효종]]의 위패 옆에 추가로 모신 반면, [[영조]]가 되돌려준 [[소론]] 붕당의 영수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 부자의 관작은 다시 박탈했다.<ref name="parks192"/>
  • 김종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 생애에는 정계에서 그다지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세조(조선)|세조]] 대에 출사했으나, 실무를 위해 [[잡학]]을 익히라는 세조의 권유를 까다가 크게 질책을 당하기도 했고, 《[[조의제문]]》으로 세조를 ~~당시의 대역죄 수준으로 뒷담화하면서~~ 비판하기도 하는 등 근본적으로 세조를 좋아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럼 관직에 왜 나갔냐?--[* 좀 이상한 게 김종직은 [[성종(조선)|성종]] 앞에서 대놓고 [[성삼문]]을 찬양한 적도 있는데 성삼문은 [[사육신]] 중 하나이며 성종은 [[세조(조선)|세조]]의 [[손자]]이다. 따라서 김종직의 말은 성종의 입장에서는 [[할아버지]]가 모욕당한 셈이다. 근데 정작 [[본인]]은 세조와 성종을 섬겼으니 [[이뭐병]].]
         어린아이처럼 [[단신|키가 작았지만]] 글을 잘 썼고, [[성종(조선)|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의외로 조선 시대에도 평가가 좋지만은 않았다. [[이황]]은 말년에 '김종직의 평생 사업은 시화(詞華)였다고 평했다. 성리학의 도를 깊게 닦은 게 아니라, 문장을 아름답게 쓰는 것에만 평생을 바쳤다는 뜻이다. 성호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김종직은 하나의 문사(文士)일 뿐이다.' 라고 비판했다. 특히 [[허균]]은 《김종직론》에서 '《[[조의제문]]》을 쓰고도 세조에게서 벼슬을 한 것은 가소로운 일'이라며 맹비난했다.[* 다만 허균도 당대나 후대나 유학자들에게는 이단아 취급받은 인물인지라, "네놈이 뭔데 김종직을 까냐?" 라고 역으로 맹비난당했다.-- 하지만 누가 보면 유학자들이 김종직 빠돌이나 호의적 입장이라서 그런 것으로도 보일지도 모른다.--]
         사실 결정적 계기는 수제자 김굉필이 김종직이 문장에만 치중한다고 스승과 갈라선 것이다(...). 이후 조선 성리학의 전통이 정통 성리학 공부에 몰두한 제자 김굉필과 정여창, 그리고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로 이어지면서 이들과는 달리 김종직은 조선 문묘배향 18현에서도 제외된다. [[송시열]]을 비롯한 후대 성리학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정몽주]]와 김굉필을 이어주는 중간다리 정도. 그리고 김굉필이 조선 성리학의 정통주자로 인정받다보니, 후대 유학자들은 김굉필이 스승과 결별한 것도 다 진정한 학문의 길을 가기 위함이었다고 옹호해 주는 분위기이다. --군사부일체 아니었나?--
  • 김좌근
         '''김좌근'''(金左根, [[1797년]]~[[1869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외척으로 안동김씨 세도기 후반의 중심인물이었다. [[본관]]은 (신)[[신 안동 김씨|안동]](安東)이며 [[자 (이름)|자]](字)는 경은(景隱), [[호 (이름)|호]](號)는 하옥(荷屋),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의 아들이자 [[김유근]]의 동생이며, [[조선 순조|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남동생이다. [[조선 문조|익종]]의 외숙부였다. 순탄한 벼슬생활을 하면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파락호의 처지에 있던 [[흥선군]]이 그의 저택을 방문하자 재정적으로 후원하였으며 처지가 궁한 그가 석파란으로 알려진 난초화를 가져오면 이를 받고 소정의 금액을 지불해주기도 하였다. 흥선군을 귀찮게 여긴 다른 사대부가와는 달리 흥선군에게 용돈, 노잣돈을 줘서 돌려보내기도 했다. [[안동 김씨]]의 중심인물로서 [[조선 헌종|헌종]]과 [[조선 철종|철종]]대에 걸쳐 세도정치를 폈으며 1863년 12월 철종이 아들없이 급서하여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원상 정원용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인 명복(命福)이 사왕(嗣王)으로 결정되자 봉영사(奉迎使)로 파견되어 [[대한제국 고종|고종]]으로 옹립하는 일을 주관했다.
         《조선정감》에 보면 고종(高宗)이 [[조선 정조|정조]](正祖)의 능인 [[융건릉|건릉]](健陵)에 행행(行幸)했을 때 흥선대원군이 김좌근에게 무안을 준 일화와 그의 애첩이었던 [[나주]](羅州)의 기생 양씨(梁氏), 즉 나합(羅閤)의 투기를 트집잡아 청수동 별장(淸水洞別莊)으로 대원군이 찾아가 궁궐중건비 10만냥과 고종의 가례비(嘉禮費) 10만냥을 받아낸 재미있는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ref name=autogenerated1 />
         ****** 매형 : [[조선 순조|순조대왕]](純祖大王)
         ******* 조카 : [[조선 익종|익종대왕]](翼宗大王=효명세자)
         김좌근과 [[김흥근]]은 [[조선 철종|철종]]이 병석에 눕자 만나서 비밀리에 숙의했다.<ref name="aris137">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 (박광희 편역, 다산초당, 2010) 137페이지</ref>
         * [[최종원]] - [[2014년]] ([[조선 총잡이]]) [[KBS2]] 드라마
         직책=[[조선]]의 상급 국상|
         [[분류:1797년 태어남]][[분류:1869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한국의 섭정]][[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안동 김씨 (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영의정]]
  • 김주로
          |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경상도]] [[안동시|안동군 臨河面 川前里 111番地]]
         이들은 1924년 "갑자년(甲子年)에가 표하는 힘에 의해 대한제국 조선 황조가 독립될 것"이라 선전하면서 자금 모집 및 교도 포섭에 힘을 쏟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결국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21년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에서 1921년에서 1931년까지 [[한국독립당]] 행정위원을 지냈으며 1931년 한국독립당 탈당하였으며 그 후 1936년에서 1943년까지 홍콩에서 소작농, 치즈 장수, 땅콩 장수, 나막신 장수 등으로 소일하며 대한 독립 운동 관련 자금과 생활비와 [[홍콩]] [[샹치]]방(홍콩에서 중국 전통 장기 두는 곳)의 [[샹치]] 경기비 등으로 사용하였고 그 후 1945년 중화민국 광둥 성 포산에서 팔일오 일본국 패망과 조선국 광복을 목도하였다.
         그 후 1946년 5월 26일을 기하여 미 군정 남조선 과도정부 시대 경북 안동 땅에 귀국 및 귀환한 그는 그 후 1946년 8월 26일을 기하여 한국독립당 복당하여 1946년 8월 26일에서 1948년 2월 26일까지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직을 지냈으며 1948년 2월 26일을 기하여 한국독립당 재탈당하였다.
  • 김진
         * '''[[김진 (조선)|김진]]'''(金搢, [[1585년]] ~ ?)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 김질 (1422년)
         |직책 = 조선국 상급 국상
         |군주 = [[조선 성종|성종 이혈]]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지 = [[조선]] [[한성부]]
         |거주지 = [[조선]] [[한성부]]
         |국적 = [[조선]]
         '''김질'''(金礩, [[1422년]] ~ [[1478년]] [[2월 24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무신, 문신, 정치인이다.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으나 실패를 예상하고 이를 고변하였다. 자(字)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 시호는 '''문정'''(文靖). 본관은 [[구 안동 김씨|(구) 안동]]이다.
         [[음서]]로 무관이 되고,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을 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청원하여, 특별히 허락받았다. 그 뒤 [[1447년]] 에 2등으로 합격했으며 [[1450년]](문종 즉위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수찬, 사간원 우정언, 성균관 사예 등을 거쳐 [[1455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여러 번 기회를 놓치고 위험을 느끼게 되자, 뜻을 바꾸어 [[조선 세조|세조]]에게 사육신의 거사를 알렸으며 이 공로로 1456년(세조 2) 6월 25일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가 되고,<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g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D%8C%90%EA%B5%B0%EA%B8%B0%EA%B0%90%EC%82%AC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6월 25일(계해) 2번째기사] "윤사로와 정창손에게 품계를 더하고, 박중손·성봉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1455년 9월 5일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과<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g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A%B9%80%EC%A7%88+3%EB%93%B1 세조 2권,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9월 5일(정축) 1번째기사] "좌익 공신을 정하다"</ref> 1459년(세조 5) 8월 25일 상낙군(上洛君)에 봉해졌고<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g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C%83%81%EB%9D%BD%EA%B5%B0 세조 17권, 5년(1459 기묘 / 명 천순(天順) 3년) 8월 25일(갑술) 3번째기사] "윤사흔·조석문·김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뒤에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그 뒤 [[관찰사]], [[공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경상남도|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468년]] [[우의정]], [[좌의정]]이 되었다. [[1468년]] [[조선 세조|세조]]의 사망과 [[1469년]] [[조선 예종|예종]]의 사망 당시에는 [[원상]]의 한사람으로 정무를 처결하였다. 그 뒤 [[조선 성종|자을산군 혈]]을 지지하고, [[조선 성종|성종]] 즉위 직후에는 왕족 [[귀성군]]을 숙청하였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으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군되었다.
         관직은 [[의정부]][[좌의정]]에 이르렀고, [[조선 성종|성종]] 초에 〈경국대전〉의 편참에 참여하였다. 고려의 장군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으로, [[개국공신]] 익원공 [[김사형]]의 증손자이자 [[의정부시|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사위이다. 또한 [[강희맹]]의 사돈으로 [[강희맹]]의 딸은 그의 아들 [[김성동 (조선)|김성동]]과 결혼했다. [[조선 세조|세조]] 사후 [[영의정]]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院相)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원상제]]의 전범이 되었다. 낙풍부원군 [[김자점]]의 5대 선조이며 백범 [[김구]]의 20대 방조에 해당된다.
         쌍곡 김질은 [[1422년]] 조선 개국 공신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증직|증]] [[의정부]][[영의정]] [[김종숙]]의 아들로 태어났다.
         [[1450년]](문종 즉위년) [[사직]](司直) 재직 중, 추장[[문과]]에 응시하여 정과로 급제, 바로 [[성균관]]주부가 되었다. 그 뒤 집현전 학사가 되었으며, 사간원우정언, 병조좌랑을 지내며 [[집현전]] 학사를 겸임하였다. 김질은 글씨를 잘 썼고 고전에 능하였으며 지식이 해박하였다. 그 무렵 [[성삼문]](成三問), [[박팽년]], 최항(崔恒), [[신숙주]](申叔舟) 등 몇몇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조선 문종|문종]]의 각별한 사랑과 총애를 받았다.
         [[조선 문종|문종]]은 병세가 깊어지자 부왕 [[조선 세종|세종대왕]]이 그랬듯이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서 어린 세자를 잘 부탁한다는 부탁을 거듭 하였다. 그러나 뒤에 그는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직전에 등을 돌리게 된다.
         [[1453년]](단종 2년) [[이조]]낭관을 거쳐 [[1454년]] [[8월]]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추천<ref name="dan122">단종실록 12권, 단종 2년(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8월 11일(경인) 1번째기사 "세조가 김질 등에게 4품의 직사를 제수한 사유를 아뢰다"</ref>으로 6품에서 4품으로 특별 승진하였다.<ref>단종실록 12권, 단종 2년(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8월 5일(갑신) 3번째기사 "조혜·강맹경·이인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뒤에 [[조선 단종|단종]]이 그를 6품에서 4품으로 특별 승진시킨 것을 [[수양대군]]에게 문제삼자 [[수양대군]]은 이를 극력 변호하였다.<ref name="dan122"/>
         이후 그는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심복이 되어 활약하였다. [[1455년]](세조 1년)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다.
         사정전(思政殿)의 정사를 마친 뒤 술좌석에 참석하였다. 이때 집의(執義) 이예(李芮)가 술이 취하여 어탑(御榻)으로 올라가 [[당나라]] [[당 태종|태종]](唐太宗)의 고사(故事)를 끌어서 [[금성대군]] 이유(李瑜) 등의 죄를 강력히 청하자 이를 불쾌하게 여긴 [[조선 세조|세조]]는 김질과 한계미(韓繼美), 박수미(朴壽彌), 김석제(金石梯)에게 술을 남용했다는 이유로 파면하였다.<ref>세조실록 2권, 세조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11월 20일(신묘) 1번째기사 "술자리에서 집의 이예가 취하여 어탑에 올라가 이유 등의 죄를 청하다"</ref>
         [[조선 단종|단종]] 폐위 이후 [[1456년]] [[성삼문]]·[[박팽년]]·[[하위지]]·[[유성원]] 등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하였으나 마음을 바꾸어, 이를 [[조선 세조|세조]]에게 알렸다. [[1456년]]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운동에 김질이 가담하자, 장인 [[정창손]]은 이를 설득하였다. 김질은 거사가 성공하지 못할 줄로 알고 장인인 정창손에게 달려가 수시로 상의하였다. 그해 [[6월]] [[운검]] 설치가 취소되면서 일이 여의치 않자 불안감을 느꼈던 김질은 전향, 이 사실을 [[정창손]]에게 알렸다.
         김질은 장인 [[정창손]]에게 일부 집현전 학자들의 단종 복위 계획을 알리고고, [[정창손]]은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조선 단종|단종]]의 외삼촌인 [[권자신]](權自愼), [[성승]] 등이 가담했음을 확인하였다. 정창손은 이를 바로 [[조선 세조|세조]]에게 알렸다.
         사육신의 거사를 고변한 공으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승진했고 [[조선 세조|세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원종공신에서 정공신인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으로 승급되었으며<ref>세조실록 4권, 세조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7월 3일(경오) 1번째기사 "좌익 3등 공신 정창손을 2등으로 올리고, 김질을 3등으로 기록하게 하다"</ref> 특별히 말 한필을 선물로 받았으며<ref>세조실록 4권, 세조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7월 10일(정축) 2번째기사 "좌익 공신 김질에게 말 한필을 하사하다"</ref> 상락군(上洛君)에 봉작되었다.
         이후 그는 [[조선 세조|세조]]가 주관한 활쏘기에 여러번 활을 잘 쏘아 상을 받기도 했다. 그해 세자의 병을 간호한 공로로 1자급 특진하였다. [[승정원]]우부승지, 좌부승지, [[좌승지]] 등을 거쳐 [[1458년]] 활을 잘 쏘았다 하여 돌솥 1개를 선물로 받았다.<ref>세조실록 11권, 세조 4년(1458 무인 / 명 천순(天順) 2년) 1월 20일(기묘) 4번째기사 "후원에서 활쏘는 것을 구경하고 김질 등에게 돌솥 1벌씩을 하사하다"</ref>
  • 김집 (1574년)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거주지= [[조선]]
         |국적= [[조선]]
         '''김집'''(金集, [[1574년]] [[음력 6월 6일]] ~ [[1656년]] [[음력]] [[윤달|윤]] [[5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광산 김씨|광산]],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신독(愼獨)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ref name="인물정보">{{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PPL_6JOb_A1574_1_0002824}}</ref> [[이언적]], [[이황]], [[이이]], [[송시열]], [[박세채]]와 함께 인신(人臣)으로서 최고 영예인 [[문묘]]와 [[종묘]]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다.
         [[조선 선조|선조]], [[광해군]], [[조선 인조|인조]] 때의 [[서인]] 지도자로, [[인조 반정]] 이후 비공신계 서인과 산림세력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등이 연이어 죽자 이들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고 복권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청음 [[김상헌]], 우산 [[안방준 (1573년)|안방준]] 등과 함께 [[북벌론]]을 제창하였다. [[서인]] 산림의 당수로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1607년)|이유태]]와 [[윤선거]], [[윤문거]], [[박세채]]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어 학문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의 공동조상이다. [[조선 효종|효종]] 초에는 [[안방준 (1573년)|안방준]]과, 송시열, 송준길 등과 함께 [[김육]]의 [[대동법]]을 적극 반대하였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사계 [[김장생]]의 아들이며 율곡 [[이이]]의 서녀사위이다. 또한 [[조선 숙종|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종증조 할아버지이며, 양관대제학 [[김익희]] 광남군 [[김익훈]]의 숙부가 된다. [[서포만필]]과 [[구운몽]]의 작가 서포 [[김만중]]은 그의 종손자였다. [[한성부]] 출신.
         일찍부터 총명하여 6세 때 이미 글을 읽고 작문하였는데, 당시 사류의 중망을 받던 할아버지 김계휘와 아버지 김장생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김집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로부터도 점차 주목받기 시작했다. 8세에 [[주자강목]](朱子綱目)을 읽고 그 뜻을 대강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문리(文理)가 빨리 트이자, [[1581년]](선조 14) [[송상현 (조선)|천곡 송상현]]과 [[송익필|귀봉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 무렵 김집은 <대부송>(大夫松)이란 시를 지었는데, 이 시를 본 [[최립]]은 그의 재능을 크게 칭찬하면서 “문장가의 솜씨이다."라고 했다 한다. 학통은 가학을 이어받았다.<ref name="역사정보">
          | 제목 = 조선의 문화공간 2
          | 제목 =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
         아버지 [[김장생]]은 서제들이 연루된 [[계축화옥]] 때 [[북인]]의 공격을 받았으나, 혐의가 없어 처벌받지 않았다. 아버지 김장생은 계축화옥을 계기로 연산으로 내려와 문을 닫은 채 외인과 접촉하지 않고 오직 경서를 연구하는데 몰두했다. 이때 김집도 김장생을 모시고 연산으로 낙향했다. 그리고 김집 역시 자취를 감추고 뜻을 기르며 장차 몸을 마칠 듯 지냈다고 한다. 계축화옥으로 김집은 더욱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아버지 김장생을 스승으로 모시며 묵묵히 학문에 정진하여 가학을 조선예학으로 발전시키게 되었다.
         [[1649년]](인조 27) [[1월]]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5월에 인조가 승하하고 세자가 [[조선 효종|효종]]으로 즉위하자, 특명으로 부름을 받아 청서(淸西)의 [[김상헌]]과 함께 등용되어 [[가선대부]]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고, 그해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어 상례이동(喪禮異同)과 시정의 개혁을 논한 시무 7조를 올렸다.<ref>이를 본 효종이 탄복하여 그 소장을 늘 옆에 두었다.</ref> 효종은 즉위 후 '나를 위해 잠시 머물러 준다면 국가에는 도움이 되고, 사림들에게는 얼마나 모범이 되겠는가.' 하며 그를 계속 거듭 불러들였다.
         김장생의 업적은 사계의 예학과 더불어 조선 예학을 학문적 수준의 예학으로 발전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5경의 학문을 밝히고 논어를 강하고 성리학의 근본을 정하고 다듬었으며 아버지 김장생과 스승 성혼 등의 학문을 계승, 이를 더 깊이 연구하고 가르쳐 예학의 체계를 [[조선]]사회에 보급, 확산시켰다.
         [[분류:1574년 태어남]][[분류:1656년 죽음]][[분류:종묘배향공신]][[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사상가]][[분류:송시열]][[분류:김육]][[분류:성혼]][[분류:이이]][[분류:성리학]][[분류:서예가]][[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임진왜란 관련자]][[분류:정묘호란 관련자]][[분류:병자호란 관련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광산 김씨]][[분류:서인]]
  • 김창숙(독립운동가)
         ||<#ffd700> 출생지 ||[[조선]] [[경상북도|경상도]] [[성주군]] ||
         ||<#ffd700> 국적 ||[[조선]] -> [[대한제국]]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한민국]] ||
         조선 시대에 태어나서, [[대한 제국]], [[일제 강점기]], [[미군정]], 대한민국 [[1공]], [[2공]], [[3공]]까지 격변하는 근현대사를 살아왔다. 광복 전에는 독립운동에, 미군정기에는 유림의 후예인 성균관의 재건과 독립된 모국의 안정적인 수립에 힘썼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민주화 투쟁에 몸을 던진 인물로, 망국, 건국, 민주화까지 끊임없는 투쟁의 삶을 산 '''진정한 선비'''였다.
         [[8.15 광복]] 후, 초창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나타냈으며 민족주의 계열에서 정치 활동하였다. 1945년 12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2월 남조선 대한국민 대표 민주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친일파, [[한민당]] 세력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바로 비난 성명서를 내어 민주 의원 직을 거부했다.
  • 김창집
         '''김창집''' (金昌集, [[1648년]](인조 26년) ∼ [[1722년]] [[5월 2일]](경종 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작가이다. 자(字)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시호(諡號)는 충헌(忠獻)이며, 본관은 [[신 안동 김씨|(신) 안동]](安東)이다.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이며, 문곡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다가 [[노론]], [[소론]] 분당 후에는 [[노론]]에 가담하였다. 예조 판서 [[김창협]](金昌協), [[이조 판서]] [[김창흡]](金昌翕), [[김창업]] 등의 형이다. [[조선 순조|순조]]의 장인 [[김조순]]은 그의 4대손이었다.
         당색으로는 [[노론]]이었으며, [[노론]]의 영수였으나 [[소론]]인 [[조문명]]의 처삼촌이기도 하다.<ref>조문명은 김창집의 동생 김창업의 사위이고, 영조의 서장자 효장세자의 장인이며 조선 정조의 양 외할아버지이다. 따라서 김창집은 효장세자의 처외종조부가 되고, 법적으로는 조선 정조의 외외종증조부가 된다.</ref>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 일족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신원, 복권시켰다. [[조선 경종|경종]] 때 [[조선 영조|연잉군]](후일의 [[조선 영조|영조]])의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했다가 [[소론]]에 의해 역모로 몰려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 (조선)|이건명]] 및 아들 김제겸, 손자 김성행 등과 함께 사사되어 이를 [[신임사화]]라 부른다. 이른바 노론 4대신으로 불리며, 창협(昌協), 창흡(昌翕), 창업(昌業), 창즙(昌緝), 창립(昌立)등 육창(六昌)으로 불린다.
         그 뒤 숙종 31년(1705년) 을유 9월 14일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어 복귀하였다. 숙종 32년(1706년) 병술 1월 8일 한성판윤(漢城判尹)이 되었다. 그러나 숙종 32년(1705년) 을유 10월 12일 우의정(右議政)에 제수되었으나 십수 차(十數次) 사직 상소(辭職上疏)를 올리고 등청(登廳)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숙종|숙종]]이 여러 차례 사관과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다가 임금이 특별히 유시(諭示)를 내려 판부사(判府事)로 임명되었다.
         경종 2년(1722년) 임인 4월 18일 영의정 조태구(趙泰耈), 좌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원로 대신이므로 정형(正刑)에 처하지 말고 국문(鞠問)을 하자고 청하였으나 [[조선 경종|경종]]은 이를 허락 하지 않았고, 같은 해 4월 29일 성주(星州) 요도(蓼島)에서 도사(都事)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후손 조문보(趙文普)에 의해 억울하게 사사(賜死)되었다.
         [[조선]] 말의 학자 [[김원행]]도 그의 손자였고, 조선 말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연 [[김조순]](金祖淳)은 그의 4대손이 된다.
         * [[조선 순조|순조]]비 [[순원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조순]]은 김창집의 4대손이었다. [[김조순]] 등은 노론 중에서도 시파에 속했는데, 이 때문에 정조는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를 세자빈으로 간택한다.
         * [[소론]] 중 [[조문명]], [[조현명]] 일가와는 개인적으로 친분관계였다. [[조문명]]은 그의 동생 [[김창업]]의 사위로 그의 조카사위였고, 그의 다른 동생인 [[김창협]]의 문하생이었다. 또한 [[조선 진종|효장세자]]빈 [[효순왕후|현빈 조씨]]의 외종조부이기도 하다.
         * [[이건명 (조선)|이건명]]
         * [[조선 숙종|숙종]]
         * [[조선 경종|경종]]
         * [[조선 영조|영조]]
         [[분류:1648년 태어남]][[분류:1722년 죽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안동 김씨 (신)]][[분류:사형된 사람]][[분류:독살된 사람]][[분류:노론]]
  • 김창집 (동음이의)
         * '''[[김창집]]'''(1648 ~ 1722)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학자, 정치인으로 [[노론]] 4대신의 한사람이다. 본관은 안동.
  • 김창하 (조선)
         '''김창하'''(金昌河, 생몰년 미상)는 [[조선]] 말기의 [[국악사]]로, 자는 의선(義善), 본관은 [[경주시|경주]]이며, [[서울특별시|서울]] 출신이다.
         [[가야금]]과 [[정재]](呈才)의 명인으로 유명한 국악가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선 정조|정조]] 때 국악사를 지냈던 김대건(金大建)이며, 아들은 조선 말기의 가야금 명인인 [[김종남]](金宗南)이다.
         [[1827년]]([[조선 순조|순조]] 27년) 전악에 올랐으며, [[조선 문조|익종]]을 도와 악단 구후관을 조직하여 구후관 감관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보상무]](寶相舞)·[[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춘앵전]](春鶯囀) 등을 제작, 안무하였다.
         [[분류:생몰년 미상]][[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조선의 관료]] <!-- 국악사, 전악 -->[[분류:조선의 음악가]][[분류:한국의 연주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경주 김씨]]
  • 김처선
         [[조선]] 시대의 유명한 [[환관]].
         사실 김처선은 젊었을 때만 해도 상당히 '''노는''' 내시였던 모양으로, 세종 때 내시가 된 이후 [[문종(조선)|문종]] 때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1453년(단종 1년) 귀양이 풀리고 이듬해 직첩이 되돌려졌으나, 1455년(단종 3년) 금성 대군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탈 관직 당하고 유배되어 본향의 관노가 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 1457년(세조 3년)에 다시 복직되어 1460년(세조 6년)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되었으나, 이후 세조로부터 시종이 근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아 자주 [[곤장]]을 맞았다. 사실 공신이 아니었으면 진작 노비로 다시 떨어졌을지 모를 정도로 놀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후 [[성종(조선)|성종]] 때에 이르어서는 의술이 능하여 [[대비]]를 치료한 일로 다시 인생 역전하여 자헌대부에 올라갔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다시 복권되기에 이르지만 [[중종(조선)|중종]]은 그를 썩 좋게 보지 않았던 듯 싶다. "김처선은 술처먹고 주정부리다가 죽은 건데 무슨 놈의 [[공신]]?"이라고 반문했다는 기록이 있어서인지 중종은 김처선의 행적을 기리고자 하는 사림들의 상소를 모두 무시한다. [* 《중종 실록》 권17 7년 12월 4일 갑진 2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ka_10712004_002]] ]
         대중 매체에서 이렇듯 제법 자주 나온 이유인지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의 전체 누적(실록 홈페이지 '''개설 때'''부터 누적된 것이라고 한다) 인기 검색어 검색 순위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비범한 인물이다. 참고로 실록 홈페이지의 전체 누적 인기 검색어 1위는 [[이순신]].
         전하 이 늙은 것이 [[단종(조선)|단종]] 대왕 때부터
         [[세조(조선)|네]] [[예종(조선)|분]] [[성종(조선)|임]][[연산군|금]] 섬겨왔나이다
         [[분류:세종특별자치시 출신 인물]][[분류:조선/인물]][[분류:1505년 사망]]
  • 김춘택
         '''김춘택'''(金春澤, [[1670년]] ~ [[1717년]])은 [[조선]]후기의 문신, 외척, 작가이다. 자(字)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 본관은 [[광산 김씨|광산]]이다.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손자이다. 종조부인 [[김만중]]의 문하생이다.<ref>서포만필과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작자이다.</ref>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으로 쫓겨난 서인들은 [[숙빈 최씨]]가 낳은 왕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왕자는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ref name="inbeok01"/> 그러나 서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수문록』은 왕비 장씨가 후궁 최씨를 결박해 심하게 때린 후 거꾸로 세운 큰 독 안에 가둬 두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왕비 장씨의 핍박을 받는 최씨로서는 서인들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ref name="inbeok01"/> 김춘택은 [[인현왕후]]의 친정과도 친밀했는데, 이 때문에 후일 [[소론]]은 [[김일경의 옥사]] 당시 [[조선 영조|영조]]가 [[조선 숙종|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 하여 [[조선 영조|영조]]에게 충격을 주기도 한다.
         [[조선 숙종|숙종]] 때 [[기사환국]]으로 종조부 [[김만중]]과 가문의 당파인 [[서인]]이 실각하여 자신도 수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숙종의 첫 정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친정 조카인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고 여전히 궁 출입도 자유로웠다. 이러한 배경 조건과 재물을 이용해 [[1694년]](숙종 21) 갑술옥사(甲戌獄事) 직전 인현왕후 복위를 은밀히 추진하여 [[갑술환국]]과 폐비 민씨의 복위를 성공시켰다.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의 처를 유혹하여 간통한 뒤 그로부터 [[남인]]측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고, [[갑술옥사]] 이후 [[1701년]]의 무고의 옥으로 [[남인]]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소론]]과 [[남인]]은 그가 [[장희재]]의 처와 간통한 것을 끈질기게 물고늘어졌고, [[노론]]에서도 그의 행동이 부적절했다며 비난 여론이 일부 나타났다. [[노론]]의 절대적인 변호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발을 들이지 못한 채 탄핵을 받다가 [[1697년]] 10월 금천으로 유배되었고, [[1701년]] [[무고의 옥]]에 대한 수사 중에 [[갑술환국]] 전에 장희재의 처와 간통하여 간자로 삼았었다는 증언이 발고되어 다시 소론의 공격을 받고 [[전라북도]] [[부안]](扶安)으로 정배되었다. [[1706년]]에는 장희재의 처와 내통한 것은 [[조선 장희재|장희재]]를 죽이려는 목적때문만이 아니라 장차 세자(뒷날의 경종)를 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상소가 빗발쳤는데, 우의정 [[김창집]]의 강력한 보호에도 불구하고 끝내 김춘택은 [[제주도]](濟州道)로 무기 유배되었다. [[1710년]] 제조 민진후가 숙종에게 감률 품지를 올려 육지로 이배되었다가 [[1712년]]에 방송되었다<ref name="inbeok012">[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905083 미인계로 떴다 미인계로 하루아침에 떼죽음] 중앙일보 2009년 09월 09일자</ref>. [[대한제국 고종|고종시대]]에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를 추증받았으며 광령군(光寧君)에 추봉되었고, 충문(忠文)의 시호를 받았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충효의 대절을 지켰다 한다. 일설에는 [[숙빈 최씨]]와도 내연 관계였다는 설이 있다. 이 주장은 [[이인좌의 난]] 때 [[소론]]과 [[남인]] 인사들에게서 주로 채택되었다. 그에 의하면 [[조선 영조|영조]]는 그가 무수리인 [[숙빈 최씨]]와 사통한 뒤 [[조선 숙종|숙종]]에게 보내졌다는 것이다.
         [[조선 숙종|숙종]]때부터 [[조선 영조|영조]] 때까지도 그가 [[숙빈 최씨]]와 사통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악형을 금지한 [[영조]]였지만 [[영조]] 때 이를 언급하는 자에게는 예외로 심한 형문을 가하였다. 사생활과 과격했던 정치활동 등으로 정적은 물론 [[노론]]내부에서도 비난 받았지만 글씨를 잘 썼을 뿐만 아니라 시에 대한 재주와 문장이 뛰어나 명성이 높았다. 종조부 [[김만중]]의 언문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배포하였다. 저서로 <북헌집>과 글씨 <호판 김진귀 표>가 있다.
         일부 야사에서는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닐 것으로 추정한다. 가장 큰 근거는 영조의 외모가 숙종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ref>[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0554 <동이>는 진짜 숙종의 아이를 낳았을까?] 프레시안 2010.05.05</ref> 18세기 [[조선]]에서는 [[조선 영조|영조]]가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고, [[소론]]과 [[남인]] 강경파 중에는 [[조선 영조|영조]] 김춘택 아들설을 신봉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이인좌의 난]] 당시 형장에 끌려간 소론 인사들이 경종의 복수를 다짐하면서 영조의 면전에서 김춘택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영조가 소론계 인사들을 심문할 때의 내용을 그 내용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돼 돼 돼.
         숙빈 최씨와 사랑을 나누던 김춘택이 임금의 씨가 아닌 자기 씨앗을 숙빈 최씨에게 잉태시키고, 그래서 태어난 것이 영조라는 것은 당시 18세기를 살던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유포되었던 소문이었다.<ref name="pisiss">[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527 동이 비밀병기 심운택, 숙빈최씨의 애인?] 미디어스 2010.06.09</ref> 결국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다. 왕실의 씨가 바뀌었다" 라는 내용으로 영조 집권 4년만인 [[1728년]] [[3월 15일]]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다. [[이인좌의 난]]은 보름만에 진압이 되지만 영조는 집권 내내 190여차례 괘서사건을 접하게 된다. 그 내용 중의 하나가 바로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닌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내용이었다 한다.<ref name="pisiss"/>
         [[분류:조선의 문신]][[분류:1670년 태어남]][[분류:1717년 죽음]][[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학자]][[분류:정치 운동]][[분류:조선의 작가]][[분류:한국의 수필가]][[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번역가]][[분류:광산 김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노론]]
  • 김홍미
         김홍미(金弘微, [[1557년]] ~ [[1605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 관료, [[성리학]]자이다. 자(字)는 창원(昌遠)으로, 호는 성극당(省克堂), 성극(省克)이고,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경상북도]] 출신.
         역사와 제자백가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경연에서 반드시 옛 사례를 인용하여 당시의 일을 정정함으로써 왕의 찬탄을 받았다. 선박 제조 기술이 있어서 [[조선 선조|선조]]는 그에게 [[판옥선]] 설계 제조와 [[거북선]] 설계 제조 업무를 맡기기도 했다.
         [[1585년]](선조 19년) [[과거 제도|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고 [[홍문관]]에 등용 되었으며,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발탁되고, [[홍문관]]정자, 저작, 부수찬 등을 거쳐 [[예문관]]검열, 다시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당시 그의 형인 김홍민(金弘敏)도 옥당(玉堂)에서 근무하여, 형제가 모두 옥당에 근무한 일로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후에도 [[1588년]] [[홍문관]]의 관직에 결원이 생기자 [[조선 선조|선조]]는 [[이조]]에 특명을 내려 홍문관의 빈자리에 그를 임명할 것을 지시했다.
         탈상 후 [[1595년]] [[9월]]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가,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교리 겸 [[시강원]]문학(校理兼侍講院文學)을 거쳐 그 다음해 [[경연관]]에 임명되었으며, [[경연관]]으로 《[[주역]]》의 [[경연]]을 맡아보았다. 그때 마침 [[조선 선조|선조]]가 《주역 (周易)》을 강론하기 앞서 경학(經學)에 정통한 선비를 선발하여 경연의 강관(講官)을 충원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그가 경연에서의 강론에 고전의 의리를 인용하여 정밀하게 분석하였으며, 가끔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예로 들어 10여 줄을 연달아 외웠으므로, 임금이 싫증내지 않고 경청하면서 그가 박식하다고 거듭 칭찬하였다.
         [[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성리학]][[분류:조선의 작가]][[분류:과거 급제자]][[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순직한 사람]][[분류:조선 선조]][[분류:임진왜란 관련자]]
  • 김홍집 (1842년)
         | 출생지= [[조선]] [[한성부]]
         | 사망지= [[조선]] [[한성부]]에서 아관파천 사건 때 타살됨.
         | 국적= {{국기|조선}}
         | 경력= 문관, [[총리대신 (조선 말기)|총리대신]], 문필가
         | 군주 = [[대한제국 고종|조선 고종 이형]]
         | 직책 = 前 조선국 영의정 권한대리청정총리대신<br/>(前 朝鮮國 領議政 權限代理聽政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 [[1842년]] ~ [[1896년]] [[2월 11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 [[정치가]]이다. 자(字)는 경능(敬能), 호는 도원(道園)·이정학재(以政學齋), 시호는 충헌(忠獻), 본관은 [[경주 김씨|경주]]이다.
         원래 이름은 김홍집(金弘集)이었으나, [[청 고종]](高宗) [[건륭황제]]의 휘가 ‘홍력’(弘歷)이었기 때문에 이를 [[피휘|피하기 위해]] 김굉집(金宏集)으로 가운데 자(字)를 바꾸었다.<ref>[[정교]](鄭喬) 저, 조광(趙珖) 편, 《대한계년사 1》(소명출판, [[2004년]]) 93쪽.</ref> [[조선]]말기의 문신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은 그의 사위였다. [[박규수]], [[오경석]], [[강위]]의 문인이다.
         [[1842년]] [[이조]][[참판]]을 지내고 [[증직|증]] [[의정부시|의정부]]에 [[추증]]된 [[김영작]](金永爵)과 정부인 성씨(成氏)의 넷째 아들로 [[한성부]]에서 출생하였으며 한때 1845년에서 1848년까지 [[경상북도|경상도]] [[경주시|경주]]에서 잠시 3년간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의정부시|의정부]][[좌의정]]을 지낸 [[김명원]]의 후손으로, [[조선 숙종|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의 친정아버지인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5대손이었다. 증조부 [[김효대]]는 [[공조]][[판서]]를 지냈고, 종조부 [[김사목]]은 [[의정부시|의정부]][[좌의정]]을 지냈다. 어머니 성씨는 우계 [[성혼]](牛溪成渾)의 후손이다.
         [[1868년]](고종 5년) [[조선의 과거 제도|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1873년에는 권지[[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승문원부정자, 승문원박사를 겸직하고, [[승정원]]가주서가 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으로 사퇴했다. [[1870년]] 다시 어머니 창녕성씨의 상을 당하여 다시 3년상을 더 치뤘다.
         김홍집은 귀국한 뒤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과 [[정관응]](鄭觀應)의 《이언 (易言)》을 소개하여 개화 정책을 적극 추진케 한 공으로 예조 참판에 승진했으나, 개화를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배척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책을 소개한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개화파의 지지를 받았지만 유학자 중심의 척사위정파(斥邪衛正派)의 심한 반발을 받아 부득이 자리를 물러났다. 그러나 곧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으로 통리기무아문의 [[통상사]][[당상]](通商司堂上)으로 복직했다. 그는 [[조선책략]]과 [[이언]]을 소개하며 [[조선]]은 미국, 청국, 일본 등과 손을 잡고 세계발전의 대열에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당시 유생들과 지역의 유림들은 그가 흉악한 모의를 꾸민다며 규탄하였다.
         [[1882년]] 구미 열강의 통상 요구와 [[임오군란]]의 뒤처리 등 복잡한 문제에 부딪친 조선 정부에 다시 기용되었다. 전권대신 [[이유원]](李裕元)의 부관으로서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는 데 앞장서는 등 여러 나라와 수호조약(한미(韓美)·한영(韓英)·한독(韓獨) 등) 등을 맺을 때 유효적절한 수완을 발휘하여 ‘비오는 날의 나막신’에 비유되곤 하였다.<ref name="실록친일파">{{서적 인용
         이후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주사(陳奏使)에 진주사 [[조영하]](趙寧夏)와 함께 진주 부사로 톈진(天津)에 파견되어 [[흥선대원군]]의 석방을 교섭하고, [[조선]] 정부의 [[흥선대원군]] 석방 운동을 중재하여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어 [[이홍장]]의 막료인 마건충(馬建忠), 주복(周馥)을 설득하여 무역협정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의정, 조인했다.
         [[1883년]] [[규장각]][[직제학]]을 거쳐 1884년 지춘추관사, 예조판서, [[한성부 판윤]], 독판교섭통상사무 등을 지내면서 대외교섭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항상 조선이 발전하려면 선진 외국과 제휴해야 한다는 개화 교류사상의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피력하였다. 그의 개화사상의 특징은, 개화는 필연적으로 실현시켜야 하지만, 급진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점진적 방법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위정척사파와 지방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맹목적인 반감을 사게 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며 협력을 요청하였지만 대원군은 그의 협조 요청을 냉소적으로 대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일본 세력의 침투가 표면화되자 그 힘을 빌어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해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청나라군을 끌어들였고, 조선에 침투를 바라던 일본군은 [[청일 전쟁]]을 일으키기 며칠 전인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에 경복궁을 습격하고 무기고를 탈취하는 등 김홍집 일파를 지원하였다. 한편 김홍집은 일본 조정과 친하다는 이유로 음력 6월 말부터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고 [[총리대신]]이 되어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개혁기구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대원군을 불러들여 민중의 불만을 완화하고자 하였다.
         법률과 제도를 바꾸고 [[일본]]의 변화된 관제와 복식을 조선에 도입하려 했다. 또한 양력의 사용과 우편 제도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는 항상 조선이 발전하려면 선진 외국과 제휴해야 한다는 개화 교류사상의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피력하였다. 그의 개화사상의 특징은, '''개화는 필연적으로 실현시켜야 하지만, 급진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점진적 방법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김홍집은 행실이 그가 주장한 바와 엇갈리는 바가 많아서 ‘친일파 애국자’로 표현되곤 한다.<ref name="실록친일파" />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정치가라는 평가와 함께 일본에 이용당한 친일파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또한 그가 죽기에 앞서 “일국의 총리로 동족 손에 죽는 것은 천명”이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에 책임감 있는 정치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을미사변을 방조한 점'''과 고종에게 명성황후를 '서인'으로 폐하는 조칙에 서명하도록 한 강요한 점 등은 여전히 그의 정치적 기준에 대한 논란으로 남아있다.
         * [[최상훈]] - [[1990년]]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 (1990년 드라마)|대원군]]) [[MBC]] 드라마
         * 정성희, 조선 말기 난세를 살다간 최고의 정치외교가 김홍집, 네이버케스트<ref>[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43197 정성희, 조선 말기 난세를 살다간 최고의 정치외교가 김홍집, 네이버케스트]</ref>.
  • 김효원
         '''김효원'''(金孝元, [[1542년]] ~ [[1590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퇴계 이황|이황]]과 [[남명 조식|조식]]의 문인이다.<ref name=autogenerated2>[http://weekly.hankooki.com/lpage/nation/200611/wk2006111416012337070.htm 주간한국 : [종가기행 24] 善山金氏 省庵 金孝元 - 부친 여윈 뒤 家勢 기울어 "가문의 전통 범절 잘 몰라요"<!-- 봇이 붙인 제목 -->] </ref> 본관은 [[선산 김씨|선산(善山, 일선)]]으로, 자는 인백(仁伯)이고 호는 성암(省庵)이다.
         김효원은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직에 천거되자 외척이 인사권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였다. [[심의겸]]과 [[심충겸]]은 [[조선 명종|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들로, [[선조]]가 [[조선 명종|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그의 주장이 인정되었다. 사후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교산 [[허균]]과 [[허난설헌]]의 인척으로, [[허균]]은 그의 사위이며 [[허균]]의 형 [[허봉]]의 딸이 그의 맏며느리였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지만, 생전에는 청렴한 선비로서 신진 인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친구 중 [[조선 명종|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尹元衡)의 사위로, 장인 [[윤원형]]의 집에 처가살이하던 [[이조민]](李肇敏)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일찍이 [[윤원형]]의 집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다. 그의 다른 친구들은 [[이조민]]을 멀리할 것을 권고했으나 그는 [[이조민]]의 사람됨됨이를 보고 [[윤원형]]의 집에 출입하였다. 그러나 [[인순왕후]]의 친정 남동생으로 역시 왕실의 인척이던 [[심의겸]]이 집안 어른들과 함께 [[윤원형]]의 집에 출입하다가 그를 보게 된다.
         그는 문을 닫고 봄에 직접 꼬은 신발 한 켤레로 십여 년 이상 신었다 한다.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의 친구인 탓에 한때 [[윤원형]]가의 식객으로 있기도 했다. 그 뒤 [[조선 명종|명종]]말엽 [[윤원형]](훈구파)일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크게 진출할 때 [[이황]]과 [[조식]]의 문인인 덕에 신진사류의 한사람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1564년(명종 19)의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바로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1565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병조좌랑·[[정언]]·지평을 지냈으며 사헌부 지평으로 재직 중 김효원은 [[문정왕후 윤씨]]가 죽고 [[척신계]]가 정계에서 몰락하면서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신진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1574년]](선조 7년) 이조전랑으로 있던 오건(吳健)이 자리를 옮기면서 이조전랑으로 [[오건]]이 그를 추천하였으나<ref>1575년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이조 전랑의 임명은 전임자의 후임자 천거로 임명되었다.</ref> 과거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이 강하게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외척도 아니고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심의겸]]의 반대를 견뎌내고 [[이조]][[전랑]]이 되었다. 또한 그는 [[심의겸]]이 외척으로 그의 집안이 [[윤원형]]의 집안과 인척이고 가까이 왕래한 것과, [[심통원]]의 부패, 비리를 지적하며 공격하였다.
         이후 그는 이일을 가슴에 담아두고 [[심의겸]]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뒤 김효원의 후임으로 [[이조]]에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전랑 후보로 천거되자, 그는 [[심충겸]]이 [[조선 명종|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남동생인 척신이라는 이유로 극력 반대하였으며 이조전랑직이 외척집안의 물건이냐며 [[심의겸]]과 [[심충겸]]을 공격하였다.
         [[1574년]] 이조전랑을 지냈고 이듬해인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전랑의 관직은 절대로 척신의 사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 /> 이후 그는 [[심의겸]]과 [[심충겸]]을 외척이라며 비난하였고, [[선조]]가 [[조선 명종|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한 것과 같으므로 그의 주장이 공론으로 받아들여졌다.
         [[분류:1542년 태어남]][[분류:1590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철학자]]
         [[분류:조선의 작가]][[분류:사상가]][[분류:허균]][[분류:성리학]][[분류:이황]][[분류:선산 김씨]][[분류:경상북도 출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사림파]][[분류:동인]][[분류:16세기 한국 사람]]
  • 김효임
         '''김효임'''(金孝任, [[1814년]] ~ [[1839년]] [[9월 26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콜룸바'''(Columba)이다.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金孝珠, [[1816년]] ~ [[1839년]] [[9월 3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아녜스'''(Agnes)이다.
  • 김희정 (1992년)
         '''인목왕후'''(金希庭, [[1992년]] [[4월 16일]] ~ )은 [[조선]]의 [[왕후]]이다.
         [[분류:조선 인물]]
  • 나씨
         * [[나만갑]](羅萬甲, 1592년 ∼ 1642년) : 조선 자는 몽뢰(夢賚), 호는 구포(鷗浦). 나급의 아들. 인조반정 후 순릉참봉(順陵參奉)이 되고 통덕랑으로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수찬을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종사관이 되어 왕을 따라 강화도에 가서 풍기를 바르게 하고 도민을 서로 경계하게 해 범죄를 엄하게 다스렸다. 이듬해 환도해 병조정랑·수찬·지평 등을 역임하고, 1631년 부수찬·헌납, 1634년 홍주목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형조참의에 올랐으나 시폐(時弊)에 대한 상소를 하다가 파직당하고 고향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공조참의·병조참지로서 관향사(管餉使)가 되어 군량 공급에 큰 공을 세웠다. 저서로는 『병자록(丙子錄)』과 『구포집』이 있다.
         안정 나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6명을 배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040_341_0107}}</ref>
  • 나향욱
         참고로 실제 성은 '[[라]]'씨라고 한다. 그래서 원래는 라씨로 하는게 맞지만 우리나라 행정상 공문서에 라씨를 [[나씨]]로 기록하던 관례로 학교 다닐 때부터 성인된 이후까지 나씨로 계속 등록되어 와서 본인도 그냥 나씨로 살았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에는 많은 라씨들이 행정상 나씨로 살고 있다. [[라미란]]의 경우에도 과거 데뷔 초 언론에서 '나미란''이라고 표기한 적이 많았다. 2007년 법이 개정되어 [[대법원]]이 호적예규 변경을 통해 [[두음법칙]]을 적용하는 성씨(姓)에 예외를 둠에 따라 '라'씨로 정정신청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신청한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로 신청할 때 아버지 호적까지 라씨로 바꿔야 하는 규정이 있어 행정상 복잡한 부분도 있고 하기에 대부분의 라씨들이 안 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라미란의 경우에는 이를 신청하여 이후 언론에서 나미란이 아닌 라미란으로 표기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세한 사항은 [[라(성씨)|나]] 문서 내에 관계된 내용을 찾아 보면 알 수 있다. ~~이게 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윗 동네]] 때문이다.~~]
         2016년 7월 7일 저녁,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교육부 대변인, 대외협력실 과장이 동석하고 [[경향신문]] 정책사회부장 송현숙, 교육부 출입기자 아무개와 저녁을 함께 하였다.[*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1&nNewsNumb=20160720907&nidx=20908|조선일보]]에서는 "[[연세대]] 출신의 경향신문 부장(88학번)이 같은 연세대 선배인 나씨(87학번)·교육부 대변인(85학번)에게 “밥이나 한번 사라”고 해 만들어진 자리였다"고 했다. 그러나 연세대 출신의 경향신문 기자는 88학번이 아니라 91학번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는 점심식사를 대변인실에서 수 개월 전 제안해왔으며, 일정이 맞지 않아 서울에 올 일이 있을 때 보자고 약속해 만난 자리였다고 한다. 당일 나향욱의 참석은 전날 대변인실에서 통보했다고 한다.] 나향욱과 경향신문 정책사회부장은 서로 초면이었다고 한다.[*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1&nNewsNumb=20160720907&nidx=20908|조선일보]]에서는 "학교 선후배끼리인 데다, 재학시절 같은 수업을 들은 인연 때문에 식사 자리는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고위 공무원과 기자와 사석으로 밥을 같이 먹는거 자체가 문제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고위 공무원이 기자와 밥 한끼 먹는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금품이나 향응의 일방적 제공이 문제일 뿐. 깔끔하게 서로 더치 페이 하거나 시장에서 국밥 같은 것 한 그릇 먹는 정도라면 문제시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기자가 공무원하고 친분이 없으면 무슨 수로 깊이 있는 정보를 얻어 국민들에게 고발하겠는가?
         엄격한 [[성리학]]적 신분사회였던 [[조선]]도 백성을 통치할 때 이런 이념을 내세우진 않았다. 적어도 "통치하는 사람은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지, 결코 개·돼지로 보라고 하지 않았다. 조선의 '''법적 신분은 양인과 천민'''이고[* [[양반]]과 천민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건 명백히 잘못됐다. 왜냐 하면, 양반이란 건 관직에 올라서 문반이나 무반 중 하나가 되어야 붙는 것이다. '''애당초, 양반이란 말 자체가 문반+무반=양반이다.'''] 사농공상은 사회적인 신분이었지 공식적 신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농부도 '''과거'''에 붙으면 관리가 될 수 있다.[* 물론 농사짓고 먹고 살기 바쁜 농부가 과거 공부를 한다는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법적으로는 가능했다. 그래서 비록 수가 적고 고위직까지 승진하기는 힘들다는 한계가 있지만 평민 출신 급제자도 엄연히 존재했다.]
         또한 성리학적 관점에서 백성은 계도의 대상이지 지배의 대상이 아니었다. 공자가 빈민인 [[안회]]와 양아치 [[자로]]를 받아들인 것처럼, 누구나 노력하면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유학의 관점이다.[* 괜히 예를 중요시하는 게 아니다. 예를 익히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시각은 [[정충신]]의 등용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원칙은 16세기 이후 [[성리학]]의 보급 속에서 절대적인 불문율이 되었다. 조선 말 [[삼정의 문란]] 등의 폐해는 세도정치 이후 관직매매가 본격화되면서 발생하였다. 역사적으로 나향욱과 비슷한 발언을 한 관리가 있었는데, [[세종대왕]] 때의 [[정창손]]이 있다. 정창손은 《삼강행실도》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선민사상|성인군자는 타고 나는 것이라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번역씩이나 해주면서 교육시켜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라고 말해 세종대왕을 [[역린|격분]]시켜 당시 반대하던 신료들 중 유일하게 파직, 투옥됐다.[* 하지만 정창손은 얼마 안 가 같은 해 풀려나와 복직되었다. 이후 1446년 세종이 [[불경]](佛經)을 간행하려 하자, 왕실의 [[불교]] 숭상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다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용서를 받아 직예문관에 등용, 같은 해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직제학을 거쳐 1448년 집현전부제학이 되었다.]
         이처럼 명백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의 원칙도 백성을 사랑하는 것인데,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선 말할 것도 없다'''. 그의 발언에서 '''절대 다수의 국민들을 '언제까지나 주체적이지 못한, [[가축|먹고 살게만 해주면 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타인의 인간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발언이다.[* 여담으로 만일 이 사람이 조선 시대 사람이었더라도 파직을 당하거나 심하면 사형을 당했을 것이며, 원한을 품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을 것이다. 만약 덮으려고 한다면 대간들이 벌떼같이 일어나고, 전국의 유생들이 앞다투어 엄벌에 처하라는 상소문을 무더기로 올렸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 시대의 목민관은 원님([[사또]])을 지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면 이들은 백성들과 직접적으로 접촉을 하는 관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님에게 주어지는 업무는 방대하다. 그 지역의 치안도 확보해야 하고, 백성들에 대한 교육도 실시해야 하며, 재판도 공정하게 진행해야 한다. 목민관은 어리석은 백성, 정확히는 먼저 깨달은 자로써 깨달지 못한 백성들을 돕는 존재라는 뜻으로 목민(牧民)을 썼다. [[정약용]]이 [[목민심서|'목민'심서]]라 책 제목을 지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돼지 발언 이후로 [[디시인사이드]] 각 갤러리에서 이른바 '[[미개]]'한 사건사고가 벌어질 때 나타나던 '[[의문의 1승|몽주니어 1승 추가]]'를 대체하는 글이 올라왔다. 몽주니어 드립이 2년이 지나가다 보니 유행어에서 탈락하고 사어가 된 뒤 개돼지 발언이 대체재가 되기도 했다. 몽주니어 1승 추가스러운 사건들에 대신 '[[헬조선]] 조센징들 개돼지 맞는 것으로 밝혀져', '나향욱 정책관 복직 운동합시다' 등의 댓글이 달린다.
         김현철 전 대통령비서실 경제보좌관이 젊은이들은 헬조선 탓하지 말고 동남아로 가면 해피조선, 5,60대는 할 일 없이 산에 가거나, SNS에 험한 댓글 달지말고 동남아로 진출하라는 망언을 했다.
  • 낙천군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왕가 = [[조선]]
         '''낙천군 이온'''(洛川君 李縕, <small>락천군</small> [[1720년]] [[11월 26일]](음력 [[10월 21일]] - [[1737년]] [[9월 28일]])은 [[조선]] 시대 후기의 [[왕족 종실]]이며 [[조선 숙종|숙종]]의 서자(庶子)인 [[연령군]]의 양자이며 [[조선 경종|경종]], [[조선 영조|영조]]의 조카이다. 낙천군 이온의 경우 본래는 [[조선]] [[조선 선조|선조]]의 서 6대손으로, 생부는 [[조선 선조|선조]]의 아홉째 서자였던 [[경창군]] 이주(慶昌君 李珘)의 5대손 이채(李埰)이다.<ref>가계는 경창군 → 창원군(경창군의 장남) → 청평군(창원군의 장남) → 서천군(청평군의 장남) → 이정소(李廷熽, 서천군의 2남으로 현감을 지냄) → 이채</ref> 가계상 [[남연군]]의 할아버지뻘, [[흥선대원군]]의 증조부뻘이 된다. 초명은 수신(守愼), 자는 온중(蘊仲)이다.
         원래 [[조선]] [[조선 선조|선조]]의 아홉번째 [[서자]] [[경창군]]의 6대손이었으나, 아들 없이 사망한 [[연령군]]의 사후 양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도 아들이 없이 사망하였다. 일설에는 [[은신군]]([[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서2남)이 그의 제사 받들기를 꺼렸다는 풍문이 나돌았으나, [[은신군]]은 죽은 뒤에 [[1777년]] 이복형 [[정조]]에 의해 연령군의 봉사손이 되었다. 관직은 [[수덕대부]](綏德大夫)<ref>종일품 상계</ref> 에 이르렀고, 부인은 [[서종수]](徐宗秀)의 딸이다. [[호적]]상 [[흥선대원군]]의 증조부가 된다.
         [[1720년]](숙종 46) [[11월 26일]] [[한성부]]에서 조봉대부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와 [[홍문관]]정자를 지낸, 왕족 출신 문신 이채와 그의 부인인 [[승지]], [[한성부]][[우윤]]을 지낸의 딸 진주유씨(晉州柳氏)의 아들로 탄생하였다. 처음 이름은 수신(守愼)이었다. 그는 본래 [[조선 선조|선조]]의 아홉째 서자 [[경창군]] 주(慶昌君 珘)의 후손으로, 한때 [[임해군]]의 양자로 지목되었던 창원정(昌原正) 증 [[창원군]] 이준(贈昌原君 李儁)의 5대손이다.
         [[조선 숙종|숙종]]의 서자인 [[연령군]]의 [[상원군 (왕족)|상원군 이공]]이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파양되고, 그가 연령군의 양자가 되었다. 낙천군은 본래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를 지낸 이채의 아들로, [[조선 선조|선조]]의 아홉째 서자 [[경창군|경창군 이주]]의 7대손이다. 창원정(昌原正)으로 사후 군으로 추봉된 창원군 준(昌原君 儁)과 청평도정(清平都正) 증 청평군 전(贈清平君 洤)의 후손이고, 왕족으로서의 예는 증조부 서천군 황(西川君 榥)에서 끝났다. 할아버지 이정숙(李廷熽)은 [[경기도]] [[교하군|교하]][[현감]]을 지냈다. 후에 [[현감]]을 지내고 [[증직|증]] [[이조]][[참판]]에 [[추증]]된 달성 서씨 [[서종수]](徐宗秀<ref>영조의 부인 정성왕후의 일족이다.</ref>)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한 기록은 미상이다. [[연령군]]과 그의 [[강화부]][[유수]] 겸 진무사(鎭撫使)를 지낸 [[김동필]](金東弼)의 딸 [[상산군부인 김씨]]는 자녀가 없었다. 이온의 나이 13살 때에 [[조선 영조|영조]]의 명령으로, [[연령군]] 훤의 [[양자]]로 입양되고, 이름을 수신(守愼)에서 온으로 [[개명]]한 뒤, [[한성부]] 북부 안국방(北部 安國坊)으로 이사하였다. 그가 출계한 후 생모 진주유씨의 청으로, 생부 이채는 어머니 삼촌 이기(李垍)의 아들을 사후양자로 들였다.
         [[1736년]](영조 12) [[2월 29일]] 가덕대부(嘉德大夫)에 가자되고, 이해 [[8월 15일]] [[수덕대부]](綏德大夫)로 승진했다. 그해 영조의 특명으로 시직(侍直) 김치만(金致萬)의 딸과 가례를 올리게 하였으나, 상신 [[홍치중]](洪致中)의 손자와 약혼한 사이여서 거절당하였다. 그러자 영조는 그해 [[11월 29일]] 김치만을 체포였으나, 김치만이 끝내 반대하므로 김치만을 삭탈관직했다. [[조선 영조|영조]]는 대신 자신의 처가 일족으로 [[감역]]과 [[별제]]를 지낸 달성서씨 서종수(徐宗秀)의 딸과 가례를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서종수도 처음에 거절하므로, 영조는 서종수를 투옥시킨뒤 엄명을 내려 [[종부시]]로 하여금 날짜를 정해 [[1737년]](영조 13년) [[4월]] 결혼시켰다. 바로 서종수는 [[별제]]로 진급하였고, 이후 통정대부 서흥현감에 이르렀다.<ref>서종수는 사후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ref>
         서종수는 [[조선 선조|선조]]와 [[인빈 김씨]] 소생 서장녀 [[정신옹주 (선조)|정신옹주]]의 증손자였고, 낙천군과는 친가 쪽으로도 [[정신옹주 (선조)|정신옹주]]와 [[경창군]]이 이복 남매간이라 서종수가 8촌 할아버지뻘이었고, 입양된 양가 쪽으로도 [[정원군]]이 [[정신옹주 (선조)|정신옹주]]의 동복 친오빠라서 서종수가 8촌 할아버지뻘이 되었다.
         [[1747년]](영조 23) [[9월 4일]] [[조선 영조|영조]]의 명으로 [[도정궁]](都正宮) 사손(嗣孫) [[동지돈녕부사]]를 지낸 [[이형종 (1706년)|이형종]](李亨宗)의 둘째 아들 이철해(李喆楷)를 사후 양자로 정해, [[이영]](李泳)으로 이름을 바꿔 달선군(達善君)으로 봉하고, 낙천군의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달선군 영이 후사 없이 자살하면서 후사 논란이 발생한다.
         [[1750년]](영조 26) [[3월 14일]] 낙천군(洛川君) 이온(李縕)의 계자(繼子)인 달선군(達善君) 이영(李泳)을 파양(罷養)하여 본가로 돌려보냈다. 낙천군은 [[조선 숙종|숙묘]]의 왕자 [[연령군]](延齡君)의 계자인데, 일찍 죽고, 부인 서씨(徐氏)는 투기가 심하여 영과 그 아내 신씨(愼氏)를 괴롭히니, 달선군 영이 참다못해 약을 먹고 죽었다.
         낙천군 부인 서씨가 상언(上言)하여 파양을 청하니, [[조선 영조|영조]]가 하교하기를, “서로 헐뜯고 이간하여 어머니는 어머니답지 못하고 아들은 아들답지 못하며 며느리는 며느리답지 못하니, 엄히 사핵할 일이다. 그러나 결국 증거가 없으니 어떻게 사핵하겠는가? 그 어머니가 이미 소장(訴狀)을 올렸으므로 그대로 봉사하게는 할 수 없으니, 파양하여 본가로 돌려보내라. 아! 왕자의 봉사는 막중한 것이니, 형망 제급(兄亡弟及)의 예에 따라 봉사할 사람을 조용히 골라 정해야 한다.”하였다.
         [[조선 정조|정조]]가 [[은신군]]을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정했지만 확실한 계통정리를 하지 않았다. [[조선 순조|순조]] 때 낙천군을 파양하여 본가로 돌려보내느냐, 그냥 두느냐 여부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다. [[1819년]] 당시까지의 선원보에는 연령군의 양자로 낙천군이 등재되어 있었다.<ref name="yigsa">"영중추부사 이시수 등이 왕세자의 관례에 대하여 의논하다", 순조실록 22권 1819년(순조 19년, 청 嘉慶 24년) 1월 24일 정사 1번째기사</ref>
         그러나 낙천군이 생전에 [[연령군]]의 양자로 입양된 것과,<ref name="yigsa"/> 연령군의 양자로서의 책무를 다한 것 등이 감안되어 낙천군을 파양하느냐에 대한 의견에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명확한 답변을 내리기 곤란했던 [[조선 순조|순조]]는 일단 보류로 두라고 하였다.
         낙천군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논란은 [[조선 정조|정조]] 때부터 [[조선 순조|순조]] 때인 [[1819년]](순조 19) [[1월]]까지 문제가 되었지만, 그뒤 철종, 고종 때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중 왕실의 가까운 근친 관련 부분을 대량으로 인멸, 세초해서 누군가에 의해 어떤 논의가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1819년]]까지의 [[조선]] 왕실 족보 [[선원보략]]에는 낙천군이 연령군의 양자로 등재되었다. 그런데 1901년과 1907년의 선원보략에는 낙천군이 생부 [[경창군]]파인 생부 이채의 아래에 등재되었다. 이때 낙천군을 파양하여 본가로 돌려보낸다면, 낙천군이 연령군에게 입양된 뒤에 삼촌 이박의 아들들 중 한명으로 이채의 양자가 되어 살다가 이미 죽은 이유복(李有福)은 또 어떻게 하느냐를 두고 논란이 발생하였다.
         남연군의 후손들은 남연군 후손들의 묘비문이나 신도비 등을 쓸 때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의 후손임을 강조했었다. [[남연군]]의 후손들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왕실 직계와 더 가까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 장조|장조]]의 후손임을 강조하다가 20세기 이후에 [[연령군]]과 낙천군을 가계상 선조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 양 조부 : [[조선 숙종|숙종]](肅宗, [[1661년]] [[10월 7일]]([[음력 8월 15일]]) ~ [[1720년]] [[7월 12일]]([[음력 6월 8일]]))
         * 생부 : 이채(李埰), [[1700년]] - [[1762년]], [[조선 선조|선조]]의 서 9남 [[경창군]]의 5대손.
         *** 양손자 :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788년 - 1836년), [[은신군]]의 양자, [[조선 원종|원종]]의 3남 [[능창대군]] 6대손 [[이병원]]의 아들.
  • 남경문 (1796년)
         '''남경문'''(南景文, [[1796년]] ~ [[1846년]] [[9월 20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다.
  • 남궁억
         '''남궁억'''(南宮 檍, [[1863년]] [[12월 27일]] ~ [[1939년]] [[4월 5일]])은 대한제국 조선 황조 말기의 교육자, 계몽운동가이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 사회운동가, 시인, 작사가, 작곡가, 언론인이다.
         그의 자(字)는 치만(致萬)이고 호(號)는 한서(翰西)이며 본관은 [[함열 남궁씨|함열]](咸悅)이다. [[한성부|조선 한성부]]에서 출생하였으며과 [[서울특별시|조선 경기도 서울시]]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비롯한 노래들을 작곡하였으며 [[좌옹 윤치호]]의 사돈이기도 하다.
         [[1910년]] [[10월]] [[한일합방]] 이후에는 배화학당 교사와 상동학원 원장을 겸하며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웠으며, 신편언문체법(1914), 가정교육(1914) 등의 교과서를 저술하였다. [[1918년]] 고향 홍천 모곡으로 낙향하여 교회와 학교를 짓고 [[무궁화]] 보급 운동을 추진했다. [[1933년]] [[12월]] [[조선총독부]]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석방되었다. 성이 남(南)이고, 이름이 궁억인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성이 남궁이고 이름이 억이다.
         [[1884년]](고종 21)에는 영어학교 1학년 재학 중 해관(海關) [[묄렌도르프]](P.G. Von Möllendorff)의 견습생이 되었고, 1886년 내부주사(內部主事)로 특채되었다. [[1887년]] 초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조선 고종|고종]]의 어전통역관이 되었다.
         그해 별군직으로 임명되었으나 한직이었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의 창립총회에 참여했으며, 이때 남궁억은 독립협회의 중앙위원 겸 수석 총무로서 또 서기가 되었다가 [[독립협회]] 평의원, 사법 위원을 겸하였다. [[1897년]] 관직을 사퇴하였다. 한편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 (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902년(광무 5년) 5월에도 [[황성신문]]에 일본이 '[[1894년]] [[동학난]] 이래 [[조선]]을 침략해 들어오면서 러시아와 맺은 조약이라며 [[러일협정]]의 성격을 논박한 사설을 실었다. 이 사건으로 황성신문 총무 나수연과 함께 다시 경무청에 체포, 구속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03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특별히 성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성주목사와 [[1904년]] 양양군수를 역임하면서 부패한 토호들과 토색질을 일삼는 향리들을 엄히 단속하여 처벌하였으며 조정 고관들의 비리를 탄핵하기도했다. 강원도 양양군수 재직 중 폐습타파와 단발령, 신식 학교 유치, 도로 정비, 병원 유치 등을 추진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부당함을 간하다가 실패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로 복직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광무 10년) 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양양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11월에는 권동진(權東鎭), 여병현(呂炳鉉), 유근, [[유길준]], 이우영(李宇榮), [[오세창]](吳世昌), [[윤효정]](尹孝定), [[안국선]], [[장지연]], 정운복(鄭雲復), 홍필주(洪弼周), [[윤치호]] 등과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대한협회 회장이 되었다. 이어 기관지로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07년 [[7월]] [[일본]]이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을 이유로 [[조선 고종|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가하여 사퇴시키고 [[이완용]], [[박제순]] 등과 [[정미칠조약]]을 체결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관직을 사임하고 홍천 모곡으로 낙향하였다.
         낙향 초기에는 교회를 설립한다 하여 주민들의 편견과 비방에 시달리기도 했다. 문맹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 그는 20대에서 30,40대의 학생들도 받아서 가르쳤다고 한다. 낮에는 학교 교사로 밤에는 부락의 마을 지도자로 활동하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또한 조선이야기 와 동사략 등을 집필, 간행하였다. 후에 모곡학교는 총독부 학제 개편에 의해 한서국민학교와 한서중학교로 분리되었다. 그는 홍천군 모곡리 유리산에 올라 매일 '불의의 일본을 이 땅에서 물리쳐 주소서.', '이 민족에게 불의에 굴하지 않는 힘을 주소서.'하고 매일과 같이 기도하였다 한다. 또한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로 시작하는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을 비롯한 몇몇 노래와 시 등을 직접 작사 작곡하였다. 그는 학교 안에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노동과 애국심을 주제로 한 찬송가와 시, 가사 등을 지어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들에 보급하였다. 특히 그가 지은 창가(唱歌) 가사 무궁화동산, 기러기 노래, 조선의 노래, 운동가, 조선지리가(朝鮮地理歌) 등은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다.
         그뒤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학무국의 회유를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고문을 당하였다. [[1935년]], 복역 중 병으로 석방되어 [[개성]]의 [[윤치호]] 자택에서 얼마간 요양하다가 고향인 으로 낙향하였다. 저서로는 《동사략(東史略)》, 《조선이야기》, 《가정교육》, 《조선어보충(朝鮮語補充)》, 《신편언문예법》, 《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 등이 있으며 이 중에는 기독교계열 학교의 교과서, 교재로도 활용되었다. 석방된지 4년 만인 [[1939년]] 4월 5일에 고문 후유증 등으로 사망하였다.
         * [[죠션니약이]] (조선이야기) - 아동용 한국사
         * 조선의 노래
         * 아버지 : 남궁영(南宮泳), [[조선]]시대에 [[중추부]][[도사]](都事) 역임
         [[분류:1863년 태어남]][[분류:1939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고문 피해자]][[분류:개화파]][[분류:사상가]][[분류:반일 감정]][[분류:음서]][[분류:일제 강점기의 감리교도]][[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분류:대한제국의 언론인]][[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작가]][[분류:대한제국의 저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저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작사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곡가]][[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분류:독립협회]][[분류:신민회]][[분류:함열 남궁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남궁염
         * 할아버지 : 남궁영(南宮泳), [[조선]]왕조에 [[중추부]][[도사]](都事) 역임
         *** 조카사위: [[채동규]](蔡東圭, [[1917년]] - [[2003년]] [[12월 18일]]<ref>{{웹 인용 |url=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312/200312190017.html |제목=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확인날짜=2013년 5월 16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0118115131/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312/200312190017.html |보존날짜=2012년 1월 18일 |깨진링크=예 }}</ref>,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제2대 학장, [[대한약학회]] 회장 역임
         그의 부인 우복자는 이승만이 자신의 약혼자인 프란체스카를 오스트리아에서 뉴욕으로 데려오던 날 이승만과 함께 마중을 나간 이후 결혼식에서 신부 들러리를 스고 틈이 날 때마다 조선 사회에 대한 코치를 해주기도 했다.
  • 남명혁
         '''남명혁'''(南明赫, [[1802년]] ~ [[1839년]] [[5월 24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다미아노'''(Damianus)이다.
         남명혁은 [[1802년]]에 [[한양]]에 있는 유명한 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을 때,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에 대하여 배웠고 그것을 따르기 시작했다. [[중국인|청국인]] [[사제]] [[유방제]] 파치피코가 [[조선]]에 왔을 때, 남명혁은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 남효온
         --조선의 갈릴레이--
         [[조선]] 초기의 학자. 재야 [[사림]] 학자의 일원으로서, [[생육신]]의 일원이다.[* 단, 생육신은 사육신과 숫자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분류한 점이 있는 개념으로, 당대에 세조의 집권에 반대한 이들은 생육신으로 알려진 인물들 외에도 몇 명 더 존재했으며, 특히 남효온은 다른 생육신들에 비해 한두 세대 이후의 인물로 시대 차이가 매우 커서 논란이 있다. (당대에는 '권절'과 같은 인물들의 인지도가 더 컸다.)]
         남효온의 여러 저술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이 돋보이는 것은 역시 육신전이다. 육신전은 사실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과는 차이가 있으며, 여러가지 오류가 존재한다. 또한 남효온의 연령이나 행적으로 보아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사림파 내부에서 전해지던 단종복위운동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여 남기는데 의의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분류:조선 인물]]
  • 남희석
          * [[조선]] 개국공신으로 [[남은]]의 형인 남재[* 개국 이후에는 형제가 행보가 갈려 [[무인정사]]에서 살아남았고 [[태종(조선)|태종]] 때 [[영의정]]이 되었다.]의 21대손이자 숙종 대 영의정인 [[남구만]]의 11대손이다. 남희석의 증조할아버지가 남구만의 8대 종손으로 그 대에서 종가와 갈라졌다.
          * 내 몸 사용설명서 (TV조선)
  • 노숭
         '''노숭'''(盧嵩, [[1337년]] ~ [[1414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 노씨|광주]](光州). 자는 중보(中甫), 호는 상촌(桑村). 목은 [[이색]]의 문생이다. [[고려]]조에서 동지밀직(同知密直) 겸 [[대사헌]](大司憲), [[전라남도|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조선 개국 후 [[조선의 개국공신|개국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조선 태종]] 때 벼슬이 검교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평(敬平)이다.
         조선 개국 후 한양윤(漢陽尹)으로서 [[조선의 개국공신|조선 개국원종공신]]에 추가로 녹훈되었고 공신전 30결을 받았다. 1395년(태조 4) 개성유후(開城留後)를 거쳐 1397년에는 경기좌도도관찰사(京畿左道都觀察使)가 되었다. 이때 경기 땅에 고관들의 별장이 많았는데, 차역(差役)을 고르게 하고 청탁을 하지 않는 청렴함을 보였다.
         [[조선 태종|태종]]이 즉위하자 삼사좌사(三司左使)·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발탁되었고, 다음해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기복(起復)되었으며, 그 뒤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거쳐 1414년 검교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평(敬平)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ca_11408004_001 태종실록 28권, 14년(1414 갑오 / 명 영락(永樂) 12년) 8월 4일(갑진) 1번째기사]</ref>
         [[분류:1337년 태어남]][[분류:1414년 죽음]][[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광주 노씨]][[분류:과거 급제자]][[분류:고려의 문신]][[분류:고려의 정치인]][[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개국공신]]
  • 능창대군
          | 왕조 = [[조선|조선 왕조]]
          | 아버지 = [[신성군|신성군 이후]](양부) <br/> [[조선 원종|정원대원군 원종 이부]](생부)
          | 친인척 = 허서(사위) <br/> [[평운군|평운군 이구]](양아우) <br/> [[조선 인조|인조 이종]](동복 친형) <br/> [[오강군|오강군 이건]](양조부) <br/> [[조선 선조|선조 이연]](친조부) <br/> [[신립|신입]](양외조부) <br/> [[구사맹]](친외조부)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성서 새문리 [[조선 원종|정원군]] 사저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강화도|강화]] [[교동면|교동군]] 유배 배소에서 자진(自盡)
         '''능창군 이전'''(綾昌君 李佺, 또는 '''증 능창대군 이전'''(贈 綾昌大君 李佺), [[1599년]] [[7월 16일]] ~ [[1615년]] [[11월 17일]])은 [[조선]]의 [[왕족|왕족 종실]]이다.
         그는 가계상 [[대한제국 고종|고종]] 친조부 [[남연군]]의 생7대조가 된다. 성은 [[전주 이씨|이]](李)이며 이름은 전(佺)이고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 시호는 효민(孝愍)이다. [[조선 선조|선조]]의 다섯째 서자 [[조선 원종|정원군]]과 그의 적실 부인 능성 구씨의 아들로 동복 큰아버지 [[신성군]]의 양자가 되었다. 생전에는 능창군이었으나 인조 10년 대군으로 추존되어서 능창대군으로 불린다. 승마(말타기)와 무예(특히 활쏘기)에 능했다.
         형 [[조선 인조|인조]]는 자신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 이요를, 아들 없이 죽은 동생 능창대군의 사후양자로 입양되었다. 따라서 [[인평대군]]의 후손들이 그의 제사를 받들었고, 그의 묘소에는 인평대군의 손자 의원군 이혁의 묘가 같이 있었다. [[남연군]]의 호적과 [[일제 강점기]] 당시 [[흥친왕]], [[이준용 (1870년)|영선군 이준용]]의 호적에는 능창대군부터 시작되는 능창대군의 후손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한성부]] 성서(城西) 새문리(塞門里)에서 태어났다. [[조선 인조|인조]], [[능원대군]]과 형제간이며, [[능풍군]]은 이복 형이었다. 어머니는 [[구사맹]]의 딸 [[인헌왕후|계운궁]] 구씨(具氏)이다. 생부가 정원군이었으나, 아들 없이 사망한 선조의 넷째 서자이자 동복 큰아버지인 [[신성군]]의 양자가 되어 큰어머니이자 양어머니인 군부인 신씨가 그를 양육하였다. 따라서 [[신립|신입]]은 양외조부가 되고, [[신경진]], [[신경희]]는 양 외삼촌이 된다. [[조선 원종|정원군]]과 [[신성군]] 모두 인빈 김씨 소생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고, 외모도 훤칠하였으며 궁마술(弓馬術)에 능해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했다 한다.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별칭은 현공자(賢公子)였다 한다.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조선의 공신|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임해군]]의 옥사 직후 [[익사공신|익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인평대군]]의 묘는 바로 그의 묘 옆에 조성되었다가 35년 만에 [[경기도]] [[포천시|포천]]으로 이장된다. [[1658년]] [[5월 13일]] 양자 [[인평대군]]이 사망하여 그해 7월 13일 발인하고 8월 2일 [[광주군]] [[동부면]] 춘궁리에 있던 그의 묘소에 안장되었지만, [[조선 숙종|숙종]]의 지시로 [[1693년]] [[7월 17일]] [[포천]] [[왕방산]]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묘소 바로 아래에는 그의 9대손 [[이재극]] 내외의 묘와, 그의 증손자 [[의원군]]의 4대손이자 그의 7대손인 [[이낙중]]의 부인 대구서씨의 묘소가 있었다. 좌측에는 [[의원군]] 이혁 내외의 묘소가 조성되고, 의원군 이혁 내외의 묘 바로 아래에 [[이연응]] 내외의 묘소가 조성되었다.
         사후 [[1623년]] 3월 형이 반정을 일으켜 [[조선 인조|인조]]로 즉위하면서 3월 15일 복권되었고, 가덕대부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현록대부로 추증되었다. [[조선 인조|인조]]는 자신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을 능창대군의 사후 양자로 지명하였다. 이로서 후대에 왕실로 입양되는 [[남연군]] 등의 호적에는 능창군의 7대손으로, 능창군부터 가계가 시작된다.<ref>능창군-인평대군-복녕군-의원군-안흥군-이진익-이병원-이채중(남연군)</ref>
         * 할아버지 : 조선 14대 임금 [[조선 선조|선조]]
         ** 형 : 조선 16대 임금 [[조선 인조|인조]]
         ** 조카, 양자 : [[인평대군]] 요(麟坪大君 㴭, 1622년-1658년) - 조선 인조의 3남
         [[조선 선조|선조]]의 다른 서자인 [[인성군]] 이공의 증손자 [[능창군 이숙]](綾昌君 李橚, ? ~ [[1768년]] [[11월 30일]])과는 동명이인이다. [[해원군]] 이건의 손자이며, 화산군 이연(花山君 李渷)의 아들인 [[능창군 이숙]]은 능창군 이전에게 재종손이 된다.
         * [[조선 원종|원종 정원대원군]]
         {{조선의 왕자}}
         [[분류:1599년 태어남]][[분류:1615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자]][[분류:운현궁]][[분류:자살한 정치인]][[분류:사형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강화군의 역사]][[분류:조선 선조]][[분류:조선 인조]][[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원종]]
  • 담양군 (왕족)
          | 왕조 = [[조선]]
          | 부모 = [[조선 세종|세종]](부) <br /> [[신빈 김씨]](생모) <br /> [[소헌왕후]](적모)
          | 친척 = [[조선 문종|문종]](이복 형) <br /> [[계양군 (왕족)|계양군]](동복 형)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 국적 = {{국기|조선}}
         '''담양군 이거'''(潭陽君 李璖, [[1439년 1월 8일]] ~ [[1450년]] [[3월 10일]])는 [[조선]]전기의 [[왕족]].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 시호는 회간(懷簡)이다.
         이때 그가 [[남경우]]의 딸과 이미 약혼한 것을 두고, 상복을 입느냐 마느냐 논쟁이 벌어졌다. 담양군은 사망 직전 남경우의 딸과 약혼했고,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인을 청하는 납채(納采)를 하기 전에 신랑이 죽었기 때문에, 담양군의 약혼자가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예조]]에서 남경우의 딸은 이미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의 날까지 정하였으니, 성혼(成婚)의 예절과 같이 당연히 상복(喪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조 판서 [[정인지]](鄭麟趾)는 이존의 제도와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인용하여 상복을 입지 않아도 괜찮다고 주장하였다. [[조선 문종|문종]]은 남경우의 딸이 다른 사람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담양군]] 이거와 약혼했던 남경우의 딸은 뒤에 [[소헌왕후]]의 친정아버지 [[심온]](深溫)의 증손자 심미(深湄)와 혼인하였다.
         ** 형 : [[의창군 (조선)|의창군]] 공 (義昌君 玒, [[1428년]]-[[1460년]])
         * [http://www.rfo.co.kr/view_party.php?list_mode=people1&refnum=063&party_name= 대한제국 조선 황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 담양군 이거 - 1]
         * [http://www.rfo.co.kr/view_party.php?refnum=063 대한제국 조선 황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 담양군 이거 - 2]
         {{조선의 왕자}}
         {{토막글|조선|한국사}}
         [[분류:1439년 태어남]][[분류:1450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자]][[분류:조선 세종]][[분류:조선 문종]][[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전주 이씨]][[분류:병사한 사람]]
  • 대방부부인 송씨
         '''대방부부인 송씨'''(帶方府夫人, ? ~ [[1507년]])는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조선 세종|세종]]의 여덟째 아들 [[영응대군]]의 첫 부인이며, [[조선 단종|단종]]의 부인 [[정순왕후 (단종)|정순왕후]]의 친고모이다. 몸이 병약하여 강제 이혼당하였으나 영응대군은 그를 잊지 못하여 재결합했다. 그러나 남편 사후 [[군장사]](窘長寺)의 중 [[학조]]와 간통하여 물의를 빚었다. 본관은 [[여산 송씨|여산]]이다.
         [[판중추부사]] [[송복원]]의 딸이며 [[지돈녕부사]] [[송현수]]의 누이이다. 몸이 병약하여 강제 이혼당하여 친정으로 돌아갔다.<ref>《조선왕조실록》, 세종 123권, 세종31(1449) 3월 18일 1번째기사</ref> 그 뒤 영응대군은 재혼했지만 아내를 잊지 못하여 송씨의 사가에 찾아갔고 두 사람 사이에 두 딸이 태어났다.<ref>《조선왕조실록》, 단종 9권, 단종 1(1453) 11월 28일 4번째기사</ref> 결국 [[조선 단종|단종]] 때 송씨는 영응대군과 재결합했다. 영응대군과의 사이에 아들을 여럿 낳았으나 모두 죽고 살아남은 것은 딸 길안현주 뿐이다.<ref>《조선왕조실록》, 성종 86권, 성종8(1477) 11월 10일 6번째기사</ref> [[1479년]] [[조선 성종|성종]] 대에 중전 [[폐비 윤씨|윤씨]]가 폐위되자 어린 [[연산군|원자]]는 잠시 송씨의 집에서 보살핌을 받았다.<ref name="kth">김태형,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심리학자가 만난 조선의 문제적 인물들)》, 역사의 아침, 2009, p.309, {{ISBN|9788993119084}}</ref><ref>[[영응대군]]은 이 때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ref> [[군장사]]란 절에 올라가 설법을 듣다가 계집종이 깊이 잠들면 [[승려]] [[학조]]와 사통을 했다.<ref name="park01">박홍갑,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가람기획, 1999) 114페이지</ref><ref name="deok312">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5) 312페이지</ref> [[무오사화]] 당시 이 사실도 사초에 들어 있었다.<ref name="park01"/>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송씨의 성품이 질투심이 많고 사나워 영응대군이 그녀를 매우 총애하다가 나중에는 두려워했다고 적고 있다.<ref name="예종8">《조선왕조실록》, 예종 8권, 예종1(1469) 10월 6일 3번째기사</ref> 누군가에게 낡은 옷을 한 벌 주려해도 송씨의 허락이 필요했으며 허락없이는 주지 못했다고 한다.<ref name="예종8"/> 송씨는 평소 궁중에 자주 드나들면서 외명부 중에서도 각별히 총애를 받았는데 그 조카인 [[송영]]이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송씨 덕분이었다.<ref name="성종14">《조선왕조실록》, 성종 157권, 성종14(1483) 8월 26일 2번째기사</ref> 송영이 논핵을 당했을 때 그 처가 8촌 오라비 [[홍석보 (조선 전기)|홍석보]]의 집을 찾아가 남편의 일을 청탁하며, 시고모인 송씨가 마음이 불편해 병이 났다고 전하자 윤은로 등이 송영을 탄핵하였다.<ref name="성종14"/> 그러나 [[조선 성종|성종]]은 이를 듣지 않고 윤은로 등을 벌하였다. 또한 송현수의 아들인 송거가 아버지의 죄로 인해 관직에 나아가지 못할 때 송씨는 조카의 과거 응시를 성종에게 부탁하기도 했다.<ref>《조선왕조실록》 성종 69권, 성종7년(1476), 7월 11일 1번째 기사</ref> 조선왕조실록에는 성종과 연산군이 송씨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노비와 쌀, 베 등 물품을 하사한 기록이 등장한다.
         *** 조카딸 : [[정순왕후 (조선 단종)|정순왕후]]
         *** 조카사위 : [[조선 단종|단종]]
         [[박경 (조선 중기)|박경]]은 [[김일손]]과 기맥이 통하여 홍인문 밖에서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중 학조와 사통(私通)을 했다'는 방문(榜文)을 보고 알렸다가, [[김일손]]이 사초에 적는 바람에 호된 고문을 당하고 겨우 살아난 적이 있었다.<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71113161022&Section=04 말과 글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프레시안 2007-11-26</ref>
         * 이덕일, 《조선 선비 살해사건》 (다산초당, 2006)
         *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5)
         * [[조선 세종|세종대왕]]
         * [[조선 단종|단종]]
         [[분류:생년 미상]][[분류:1507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 세종]][[분류:스캔들]][[분류:여산 송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대한제국 순종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
          | 왕조 = [[조선|조선 왕조]]
         '''순종'''(純宗, [[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 [[1926년]] [[4월 25일]])은 [[대한제국]] 제2대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대한제국은 출범 당시 [[대한국 국제]]에 따라 [[조선|조선 왕조]]의 법통을 이었음을 분명히 하였으며 사실상 [[대한제국의 황실|한국 황실]]의 혈통도 마찬가지로 조선 왕조에서 유래하였으므로, 역사학계에서는 조선의 제27대 군주로 취급하기도 한다.<ref>[[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1947 순종(純宗)]》
         </ref><ref>{{서적 인용|url=|제목=고등학교 국사|저자1=|이름=|저자2=|날짜=2002|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쪽=343|확인날짜=}}</ref><ref>한국사 콘텐츠.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276 순종(조선)] {{웨이백|url=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276 |date=20190123010625 }}》</ref>
         순종은 [[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조선 한성부 에서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명성황후]]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명성황후는 순종 이외에도 몇수 명의 자식을 더 얻었지만 장성한 것은 순종이 유일하다.
         * 조부 : [[조선 문조|문조]](文祖, 효명세자, 1809년~1830년)
         * 조모 : [[신정왕후 (조선)|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 趙氏, 1808년~1890년)
         * [[이진우 (1969년)|이진우]], [[이민우 (1976년)|이민우]] - 《[[대원군 (1990년 드라마)|대원군]]》(1990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
         * [[조선]]
         * [[조선왕조실록]]
         * [[조선의 역사]]
         * [[조선 왕 가계도]]
         * [[조선 철종|철종]]
         * [[조선 문조|익종]]
         |후임자=[[데라우치 마사타케]]<br>(조선 총독)
         직책=[[조선의 역대 국왕|조선의 27대 국왕]]|
         {{조선의 왕자}}
  • 등림수
         '''이순신'''(李舜臣, 생몰년 미상)은 [[조선]]시대 중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시|전주]](全州)이다. 종실(宗室)로 [[춘양군]]의 서자이며 등림수(登臨守)의 작위를 받았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동명이인으로 [[충무공 이순신]], [[무의공 이순신]]과의 구별을 위해 '''등림수 이순신'''이라 부른다.
         이순신은 [[보성군]]의 서손이자 [[춘양군]](春陽君) 이내(李徠)의 서자로 여러 관직을 지내고 '''등림수'''에 올랐다. [[1518년]] 그의 적형(嫡兄) [[임강부정]](臨江副正) 이준(李晙)이 죽자, 적형이 죽은 지 겨우 4일 만에 형의 첩을 꾀어다가 그 집에 감추어 두었는데, 이후 추문(醜聞)이 외부로 돌게 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1>[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B%93%B1%EB%A6%BC%EC%88%98&keyword=%EB%93%B1%EB%A6%BC%EC%88%98 :::::조선왕조실록의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봇이 따온 제목 -->]</ref>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이순신은 이 소문을 없애려고, 이웃에 사는 피혁장(皮革匠)을 형의 첩이 거처하는 방에 갖다 두고 강제로 관계하게 하였다. 그러나 소문이 조정까지 알려지면서 [[종부시]](宗簿寺)가 이 사건을 적발하여 [[조선 중종|중종]]에게 아뢰니, 의금부에 내려서 추국(推鞫)하게 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 />
         {{토막글|조선|한국 사람}}
         [[분류:조선 사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전주 이씨]][[분류:범죄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류순정
         '''류순정''' (柳順汀, [[1459년]] ~ [[1512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 [[성리학자]]이자 [[사림파]] 정치인의 한사람으로 [[1506년]]의 [[중종 반정]]에 참여하였다. [[사림파]] 출신으로 처음 공신에 책록된 정치인이었다.
         과거 급제 후 [[조선 연산군|연산군]] 때 [[홍문관]]과 삼사의 요직을 거쳐 참판, 이조판서 등을 지냈으나 [[1506년]]의 [[중종 반정]]에 가담하여 일등공신이 되었다. 관직은 [[의정부시|의정부]] 에 이르렀고 청천부원군에 이르렀지만 동문 선후배들로부터 외면당하였다. 자는 지옹(智翁), 시호는 무안과 문성, 본관은 [[진주 유씨|진주]]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1487년]] 진사를 거쳐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홍문관]]전적에 등용되었다.이어 훈련원정으로 승진하고 배편으로 비밀리에 전라도지방에 침투한 왜적을 수색, 포획하는데 성공했다. 그 뒤 무재를 인정받아 [[1491년]] 북정도원수 허종(許琮)의 막하로 야인 정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평안도평사를 역임하였다. [[조선 연산군|연산군]] 때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다.
         [[1506년]]초 [[박원종]] 등이 [[김종직]]의 문하생인 유순정과 [[성희안]], [[남곤]] 등에게 사람을 보내 [[중종 반정]]을 지지해주고 협력해줄 것을 요청했다.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때려죽이고, 아버지 [[조선 성종|성종]]의 첩 두 명과 이복 동생 두 명을 때려죽인 [[연산군]]을 도덕적 패륜아라고 규정한 유순정은 [[성희안]]과 함께 적극 호응하여, 반정에 가담하였다. 그해의 [[중종 반정]]에 병력을 동원, 반정이 성공하면서 이후 [[이조판서]], [[대사헌]]을 겸임하였다.
         [[1509년]] [[좌의정]]에 오르고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직접 경상도도원수로 출정하여 전란을 평정하였다. [[1510년]] 경오왜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가 되어 병사를 총괄하였으며, 다시 도원수로서 현지에 출동하여 삼포(三浦)의 난을 평정하고, 각 포에 왜구로부터 방어할 '비왜방략(備倭方略)'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때 [[대간]]들로부터 식화(殖貨, 재화를 늘림)를 이유로 탄핵당했으나 오히려 [[조선 중종|중종]]으로부터 군공을 치하받았다. 이어 [[1512년]] [[성희안]]의 양보로 [[의정부시|의정부]] 에 올랐다.
         사후 [[조선 중종|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바로 시호는 무안(武安)으로 내려졌으나 뒤에 개시되어 문정(文定)으로 고쳐졌다.
         직책=[[조선]]의 [[섭정]]<br/>([[성희안]]과 공동)|
         [[분류:1459년 태어남]][[분류:1512년 죽음]][[분류:사상가]][[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군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한국의 섭정]][[분류:영의정]][[분류:정국공신]][[분류:정난공신 (중종)]][[분류: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한국의 장군]][[분류:진주 류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훈구파]]
  • 류승룡
         [[명량]]을 시작으로 [[최종병기 활]]까지 약 40년간 연속된 시간상 영화에 출연했다. 나름대로 [[배우개그]]이다. --일본 장수였다 조선의 도승지, 청나라 장수로 태어난 사내-- --[[조선|한]][[청나라|중]][[전국시대(일본)|일]] 모두 겪어봤다-- ~~아 북한도있지~~
  • 류형원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한성부]]
         |국적= [[조선]]
         '''류형원'''(柳馨遠, [[1622년]] [[음력 1월 21일]] ~ [[1673년]] [[음력 3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실학자]], [[성리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문화 류씨|문화]],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이다.<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front/dirservice/ppl/viewDocumentPpl.jsp?pLevel2Name=&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b_A1622_1_0008347&pPplCount=&pOrderByType=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깨진 링크|url=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2Ffront%2Fdirservice%2Fppl%2FviewDocumentPpl.jsp%3FpLevel2Name%3D&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b_A1622_1_0008347&pPplCount=&pOrderByType= }}</ref> [[한성부|한성]] 태생으로 벼슬을 하지 않고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학문에 일생을 바쳤다.<ref name="글로벌 유형원"> 《[[글로벌 세계대백과]]》〈[[: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서울특별시/서울의 사회·문화#유형원|유형원]]〉 </ref>
         당색으로는 [[북인]]계열로, [[북인]] 당원이던 아버지 [[류흠]]이 [[인조 반정]]으로 장살된 이후,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그 뒤 [[1654년]](효종 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후 [[조선 효종|효종]] 때 [[북인]]계 인사들을 발탁, 등용하던 [[허목]], [[윤휴]]의 천거 등 관직에 나갈수 있는 주변의 배경이 있었으나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남인]] 실학자의 첫 세대 인사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경제력 양성과 사회 개혁, 그리고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존주대의의 실천을 위해 그는 [[북벌론]]을 주장했고, 북벌을 위한 이상촌 건설, 병력 양성, 훈련, [[중국]] 현지 답사 등을 하기도 했다. 흉년과 기아, 농민들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그는 권세를 지키기에 급급한 벼슬아치들이나 고통받는 농민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고담준론(高談峻論)하는 유식자들을 비판하였다.<ref name="sidee176">정옥자 금장태 이광표 외,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효형출판, 1998) 176페이지</ref> 이후 그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선비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고, 당대의 권세가들이 권유하는 벼슬도 마다하였다.<ref name="sidee176"/> 이후 [[조선 현종|현종]] 때인 [[1665년]], [[1666년]]에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반계 유형원은 [[1622년]] [[3월 2일]]([[음력 1월 21일]]) [[조선 세종|세종]] 때 [[의정부시|의정부]]을 지낸 [[유관]](柳寬)의 8대손으로, 증조부는 현령을 지낸 유위(詣)이고, 할아버지는 정랑을 지낸 [[유성민]]이었다. 외가인 [[한성]] 소정릉동(지금의 서울 정동)에서 [[예문관]][[검열]]을 지낸 문신 유흠의 아들이자 [[이익 (학자)|성호 이익]]의 종조부인 [[참찬]] 이지완(李志完)의 외손자로 태어났다. 당색으로는 [[북인|북인(北人)]] [[대북|대북(大北)]]계열이었으나 [[남인|남인(南人)]] 계열에 영향을 주었다.<ref>그의 외6촌 동생 성호 이익은 남인 계열이었다.</ref> 그는 자신의 외증조부이기도 했던 [[이상의]]의 생전에 태어나 그를 볼 수 있었다.
         외종조부 이지안은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정언옹]]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지안의 동문은 [[허목]]으로 후일 그가 [[허목]]의 문하에 출입하게 되는 데는, 외종조부와의 인연이 작용했다. 아버지 [[유흠 (조선)|유흠]]과 할아버지 유성민(柳成民)은 [[북인]]이었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도 관직에 나갈 방법이 있었음에도 그가 관직에 출사를 거부하게 된 원인을 아버지 [[유흠 (조선)|유흠]]의 비명횡사가 원인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 뒤 [[허목]]과 [[윤휴]]가 조정에 출사하여 [[북인]]계 출신 인사들을 적극 관직에 천거하면서, 유형원 역시 학덕이 높음을 들어 계속 천거하였으나 모두 고사하였다. 당시 그의 스승이던 [[허목]]과 그의 지인인 [[윤휴]]는 [[조선 효종|효종]]의 유일 천거에 의해 출사하면서 [[북인]]계 출신 학자, 문사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등용시켰다.
         [[조선 효종|효종]]의 관직 제수를 사양하자 [[허목]]과 [[윤휴]]는 높은 이상을 품었더라도 현실 정치에 참여해야 실천할 수 있다하여 계속 그에게 조정에 출사할 것을 권고하였지만 이 역시 거절하였다. 또한 [[1659년]] [[조선 효종|효종]]의 사후 벌어진 [[예송 논쟁]] 역시 공리공담으로 판단하여 관망하였다.
         그래서 청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준마를 기르며 말을 타고 하루에 300리를 달리는 기마연습을 했고, 좋은 활과 조총을 마련했으며 집안의 종들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200여 명의 군민들을 단련시켰다는 것이다.<ref name="ban01"/> 그는 [[조선 현종|현종]]에게 존주대의의 실현을 위해 북벌을 추진해야 함을 상소했으나 그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68년]](현종 9) 스승인 [[허목]]이 [[조선 현종|현종]]에게 유형원이 국왕을 보좌할 재주(王佐之才)를 가진 인재라며 발탁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서인]]들은 그의 이론이 괴이하다며 반대하였다. 그해에 다시 [[윤휴]]가 유형원은 경세의 재능을 가진 식견있는 선비라며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생전 그의 학문에 관심을 준 인물은 절친한 친구였던 [[배상유]](裵尙瑜)와 스승 [[허목]], 선배였던 [[윤휴]], [[윤선도]]와 [[서인]]으로는 [[영의정]]을 지낸 잠곡 [[김육]]이 있었다. 그의 사상은 후에 [[서인]] [[이사명]]과 [[이이명]], [[소론]]의 [[윤증]]과 [[박세채]], [[노론]]의 [[홍계희]] 등 소수의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고 높이 샀고, [[조선 영조|영조]] 때에 이르러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상은 [[양득중]], [[이익 (1681년)|이익]], [[안정복]], [[신후담]], [[정약용]] 등을 통해 계승되었다.
         바로 [[경기도]] [[용인시|용인군]] (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산 28-1에 있는 아버지 [[유흠 (조선)|유흠]] 내외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사후 부안 동림서원(東林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1674년]] 그의 문인 제자들이 그의 서적 [[반계수록]]을 조정에 바쳤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1678년]]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참봉]](參奉) [[배상유]]가 그의 [[반계수록]]의 내용을 언급하며 이를 [[조선 숙종|숙종]]에게 바쳤지만 역시 외면당하였다.
         [[1793년]](정조 17년) [[12월 10일]] [[조선 정조|정조]]의 특명으로 다시 [[증직|증]](贈) [[이조]][[참판]](吏曺參判)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에 [[추증|가증]](加贈)되었다.
         그가 [[북인]] 당원의 후예인데다가 이후에도 [[남인]] 인사들과 가까이 지냈으므로 그의 학문은 관심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당색을 초월하여 [[서인]]인 [[이이명]], [[윤증]] 등은 그의 [[반계수록]]을 입수하여 탐독하고 이를 높이 사기도 했다. 그의 학문이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 영조|영조]] 때로, [[홍계희]]는 일찍이 그의 저서 [[반계수록]]을 읽고 감화되어 이를 실전에 적용하려 하였으며, [[조선 영조|영조]]는 직접 내탕금을 하사하여 [[반계수록]]의 간행을 명하였다. 이후 [[조선 정조|정조]] 때에 가서는 그의 학문과 사상에 폭넓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조선 정조|정조]] 때 [[정약용]]은 [[수원 화성|수원성]]을 축성하면서 그의 성지 축성 이론을 적용하려 하였다.
         아버지 [[유흠 (조선)|유흠]]은 [[북인]] [[대북]](大北) 계열이었고 따라서 그 역시 북인, 대북 계열로 분류된다.
         [[분류:1622년 태어남]][[분류:1673년 죽음]][[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한국의 경제학자]][[분류:조선의 실학자]][[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군사학자]]
  • 마성린
         '''마성린'''(馬聖麟, [[1727년]] ∼ [[1798년]])은 [[조선]]의 문신, 서예가이다. 본관은 [[장흥 마씨|장흥]](長興). 자는 성희(聖羲), 호는 미산(眉山)이다. 관직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기증유물로 보는 수원] 박종식 묘표|url=http://www.suwon.com/news/articleView.html?idxno=64171|날짜=2011-03-14|뉴스=수원일보}}</ref>
         [[1727년]] [[3월 28일]] [[조선]] [[한성부]] (大貞洞,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외가에서 태어나, 외가와 두석동 본가 및 다방동 외종가를 다니면서 자랐다. 마성린의 5대조 마시봉(馬時鳳)은 호조서리, 증조부 마점석(馬點碩)은 내수사 별제(別提), 부 마수한(馬壽漢)은 내수사 제원이었다. 내수사와 [[호조]]는 각각 왕실과 국가의 재정을 관장하는 곳인 만큼 수입이 좋은 관직이었다. 마성린(馬聖麟)이 일생을 시와 글씨로 보낸 것은 세전된 경제력 위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14&cp_code=cp0440&index_id=cp04401383&content_id=cp044013830001&search_left_menu= 한국콘텐츠진흥원]</ref>
         18세에는 필운동으로 이사했으며, 인왕산 언저리에 살던 겸재 [[정선 (화가)|정선]](鄭敾)의 문하에 드나들며 산수화를 배웠다. 마성린은 《안화당사집》이란 문집에서 “선생님의 제자로 10년 있었는데 하도 대필을 많이 시켜 힘들어서 그만두었다”는 내용의 기록을 남겼다. 조선시대 화가 중에 [[정선 (화가)|정선]]은 다작을 남긴 작가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대필 논란이 있다.<ref>{{뉴스 인용|제목=‘조영남 사건’으로 본 ‘代作과 創作의 경계’|url=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6052501032327097001|날짜=2016-05-25|뉴스=문화일보}}</ref>
         마성린은 58세에 다시 [[승문원]]으로 들어가 근무했다.<ref>{{뉴스 인용|제목=[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4) 서예가 마성린의 일생|url=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0402015002|날짜=2007-04-02|뉴스=서울신문|저자=허경진 연세대학교 교수}}</ref>
         [[분류:1727년 태어남]][[분류:1798년 죽음]][[분류:장흥 마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서예가]][[분류:조선의 화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김홍도]]
  • 맹형규
         |출생지 =[[미 군정]] [[조선]]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
  • 민규호
         '''민규호'''(閔奎鎬, [[1836년]] [[8월 20일]] ~ [[1878년]] [[10월 15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척신으로, [[민유중]]의 아들 [[민진원]]의 5대손이다. [[명성황후]]의 12촌 오라버니이며 [[순명효황후]]의 아버지 [[민태호 (1834년)|민태호]]의 친동생이자 8촌 동생이다.
         [[민유중]]의 아들이며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원]]의 고손 [[민치오]]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철종|철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859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66년 11촌 아저씨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이 왕비가 됨에 따라 그 일족으로 특별히 등용되어 [[이조]][[참의]]가 되었다. 1867년(고종 4) 다시 이조참의가 되고 이조참판으로 승진한 뒤 한성부우윤을 지냈다. [[1869년]] 형조참판이 되었다가 다시 이조참판을 지냈다. [[흥선대원군]]의 집권중 서구 문물에 대한 개국론(開國論)을 주장하며 [[쇄국 정책]]에 정면 반대하였다. [[1874년]] [[11월]]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친정하면서 대원군의 정책을 폐지시켜 나갔다.
         [[분류:1836년 태어남]][[분류:1878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수구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여흥 민씨]]
  • 민극가
         '''민극가'''(閔克可, [[1788년]] ~ [[1840년]] [[1월 30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스테파노'''(Stephanus)이다.
  • 민승호
         '''민승호'''(閔升鎬, [[1830년]] ~ [[1874년]] [[음력 11월 28일]])는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민치록의 양자이며, 명성황후의 양오라버니이다.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친동생으로 [[흥선대원군]]의 처남이자 고종, [[흥친왕]]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축출된 직후 민씨 정권의 수장이었으나 의문의 폭사를 당한다. 본관은 [[여흥 민씨|여흥]]으로 자는 복경(復卿),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분류:1830년 태어남]][[분류:1874년 죽음]][[분류:한국의 암살된 정치인]][[분류:폭발물에 죽은 사람]][[분류:한국의 폭발]][[분류:테러 피해자]][[분류:음서]][[분류:수구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여흥 민씨]][[분류:명성황후]][[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민영환
         |출생지= 조선 [[서울특별시]]
         |국적= 조선, 대한제국
         '''민영환'''(閔泳煥, [[1861년]] [[8월 7일]] ([[음력 7월 2일]]) ~ [[1905년]] [[11월 30일]])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대신(大臣)이자 척신이다.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본관]]은 [[여흥 민씨|여흥]]이며, [[민치구]]의 손자이자 [[민겸호]]의 친아들이며, 고종에게는 외사촌 동생이다.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 조카로 알려지지만 실제로는 13촌지간이 되는 먼 친척에 불과하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하였다.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SBS]]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 제작진의 저서인 《하룻밤, 미스터리를 찾아서》(더난비즈)에 따르면 민영환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위험에 처한 [[조선]]을 걱정하며 [[자결]]한 장소에서 [[대나무]]가 자랐다고 전해진다. 이 대나무를 혈죽이라고 부른다.<ref>《하룻밤, 미스터리를 찾아서》역사 속 미스터리를 찾아서:08 피를 먹고 자란 대나무, 혈죽/백만불 미스터리 제작진/더난비즈</ref> 당시 일본에서는 항일운동이 번질 것을 우려하여 혈죽이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조사하였으며, 민영환의 후손들에 의해 보관되어 내려왔다.
         *** 고종형님 : [[조선 고종|고종]]
         [[분류:1861년 태어남]][[분류:1905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자살한 정치인]][[분류:자살한 사람]][[분류:종묘배향공신]][[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한일 병합 조약 관련자]][[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분류:금척대훈장 수훈자]][[분류:이화대훈장 수훈자]][[분류:태극장 수훈자]][[분류:여흥 민씨]]
  • 민영환 (1861년)
         |출생지= 조선 [[서울특별시]]
         |국적= 조선, 대한제국
         '''민영환'''(閔泳煥, [[1861년]] [[8월 7일]] ([[음력 7월 2일]]) ~ [[1905년]] [[11월 30일]])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대신(大臣)이자 척신이다.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본관]]은 [[여흥 민씨|여흥]]이며, [[민치구]]의 손자이자 [[민겸호]]의 친아들이며, 고종에게는 외사촌 동생이다.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 조카로 알려지지만 실제로는 13촌지간이 되는 먼 친척에 불과하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하였다.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서울방송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 제작진의 저서인 《하룻밤, 미스터리를 찾아서》(더난비즈)에 따르면 민영환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위험에 처한 [[조선]]을 걱정하며 [[자결]]한 장소에서 [[대나무]]가 자랐다고 전해진다. 이 대나무를 혈죽이라고 부른다.<ref>《하룻밤, 미스터리를 찾아서》역사 속 미스터리를 찾아서:08 피를 먹고 자란 대나무, 혈죽/백만불 미스터리 제작진/더난비즈</ref> 당시 일본에서는 항일운동이 번질 것을 우려하여 혈죽이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조사하였으며, 민영환의 후손들에 의해 보관되어 내려왔다.
         *** 고종형님 : [[조선 고종|고종]]
         [[분류:1861년 태어남]][[분류:1905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자살한 정치인]][[분류:자살한 사람]][[분류:종묘배향공신]][[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한일 병합 조약 관련자]][[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분류:금척대훈장 수훈자]][[분류:이화대훈장 수훈자]][[분류:태극장 수훈자]][[분류:여흥 민씨]]
  • 민철훈
         '''민철훈'''(閔哲勳, [[1856년]] [[9월 9일]] ~ [[1925년]] [[7월 1일]])은 [[조선]] 시대의 관료로 [[일제 강점기]]의 [[조선귀족]]이다. 자는 성약(聖若), 호는 만향(晩香)이며 본관은 [[여흥 민씨|여흥]], 본적은 [[경성부]] 입정정(笠井町)이다.
         [[1895년]] [[조선의 과거 제도|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다. [[궁내부]] 등에서 일했으며 [[1901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영국을 겸임하는 특명전권공사로 발령 받아 외교관으로 근무했다.<ref name="매일1967">{{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03020009920101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7-03-02&officeId=00009&pageNo=1&printNo=292&publishType=00020|제목= 韓獨修交82年略史 |출판사 = 매일경제 | 날짜 = 1967-03-02 }}</ref> [[1905년]] [[독일 황태자 빌헬름]]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했다.
         [[분류:1856년 태어남]][[분류:1925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조선남작]][[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여흥 민씨]]
  • 민회빈 강씨
         |작위 = [[조선의 역대 왕세자빈|세자빈]]
         |국적 = [[조선]]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 [[1611년]] ~ [[1646년]] [[4월 30일]]/[[음력 3월 15일]])는 [[조선]] [[소현세자]]의 부인이다. 본관은 [[금천 강씨|금천]](衿川)이며, [[강석기]](姜碩期)의 딸이다.
         [[조선 인조|인조]]에 의해 법살당했으나 당대에도 [[김집 (1574년)|신독재, 김집]], [[송시열]], [[김홍욱]], [[송준길]] 등은 그녀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 여러 번 억울함을 신원하는 상소가 올려졌으나 거절되었고, 숙종 때 송시열이 다시 그녀의 억울함을 주장하여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조선 숙종|숙종]] 때 [[송시열]], [[김수항]] 등의 신원 상소로 복관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을 발발 후 이듬 해 [[1637년]]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게 되고, 강화조약에 따라서 [[소현세자]]와 19세의 [[봉림대군]](효종)과 그의 부인 장씨(인선왕후)와 함께 [[청나라]] [[선양 시|선양]]에 볼모로 잡혀간다. [[1644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살]]하고 명이 멸망하자, [[1645년]] 정월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8년간의 억류생활을 끝마치고 조선에 귀국하게 된다.
         [[1646년]] 강빈의 죽음 이후 세 아들도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로 귀양을 보내진다. 그곳에서 [[1648년]] 첫째 석철은 장독으로 죽고, 둘째 석린은 병으로 죽게 되며, 셋째 석견([[경안군]])은 작은 아버지인 [[조선 효종|효종]] 때에 귀양에서 벗어났다.
         강빈과 그녀의 아들들의 옥사는 [[김자점]]과 [[조선 인조|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 (인조)|귀인 조씨]] 일파의 정치공세성 성격이 짙었으므로 [[김집 (1574년)|김집]] 등은 [[조선 효종|효종]] 때 경안군(강빈의 셋째 아들)의 석방을 탄원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ref>이덕일,《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1997, 석필) 250쪽.</ref> 이후 [[서인]] 산림 계열은 그녀가 억울하게 죽었다 보고 [[김집 (1574년)|김집]], [[송시열]], [[송준길]]은 [[소현세자]]와 강빈의 명예 회복과 복권을 여러번 건의하였다. 이 때문에 [[남인]]으로부터 [[조선 효종|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기도 했다.
         효종 즉위후 5년째 되던 해에 구언에 의해 [[황해]][[감사]] [[김홍욱 (문정)|김홍욱]]은 강빈 옥사의 조작을 탄원하며 억울하게 옥사로 죽은 강빈의 신원회복과 [[소현세자]]의 살아있는 셋째 아들 석견([[경안군]])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 효종|효종]]은 [[김홍욱 (문정)|김홍욱]]을 국문 끝에 장살로 죽였다.<ref>이덕일,《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1997, 석필) 249~251쪽.</ref><ref name=autogenerated1>이덕일,《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1997, 석필) 163쪽.</ref> 숙종 때 [[송시열]]이 다시 그녀의 억울함을 주장하여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김수항]]의 신원 상소로 복관되었다. [[조선 숙종]]은 [[1718년]] 그녀의 무혐의를 인정하고, 민회(愍懷)라는 시호를 내려 복권시켰다. 억울하게 죽은 지 80년 만이었다.<ref name=autogenerated1 />
         * 시조부 : 추존 [[조선 원종|원종대왕]](元宗大王, 1580~1619)
         ** 시아버지 : 제16대 [[조선 인조|인조대왕]](仁祖大王, 1595~1649, 재위 1623~1649)
         당대에 이미 법살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라 동정되었다. 그의 억울한 죽음을 주장했던 [[황해도]][[관찰사]] [[김홍욱]]은 장살로 고문치사하기도 했다. 이후 그녀의 죽음은 금기사항이었지만 [[김집 (1574년)|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은 계속 그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주장하여 결국 [[조선 숙종|숙종]] 때에 가서 명예회복을 하게 된다.
         *[[조선 인조|인조]]
         * <강빈(새로운 조선을 꿈꾼 여인)> 박정애, 예담, 2006. 12. 07, {{ISBN|8959131865}}
         * <조선 왕 독살사건> 이덕일, 다산초당, 2005. 07. 08, {{ISBN|8991147305}}
         *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이수광, 다산초당, 2006.09.15 {{ISBN|8991147763}}
         *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신동준, 살림, 2007.11.09 {{ISBN|9788952207395}}
         [[분류:1611년 태어남]][[분류:1646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세자빈]][[분류:인질]][[분류:운현궁]][[분류:병자호란 관련자]][[분류:정묘호란 관련자]][[분류:사형 집행 후 무죄가 밝혀진 사람]][[분류:독살된 사람]][[분류:금천 강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 인조]]
  • 박규수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지 = [[조선]] [[경기도]] [[수원시|수원군]]에서 노환으로 병사
         |국적 = [[조선]]
         |직책 = 前 [[조선|조선국]] [[경기도]] [[수원시|수원부]] [[유수부|유수]]<br/>(前 朝鮮國 京畿道 水原府 留守)
         '''박규수'''(朴珪壽, [[1807년]] [[10월 27일]] ~ [[1877년]] [[2월 9일]])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潘南). 초명은 '''박규학'''(朴珪鶴), 자는 환경(桓卿, 瓛卿) 또는 정경(鼎卿), 호는 환재(桓齋, 瓛齋), 헌재(獻齋), 환재거사(瓛齋居士) 등이다.
         1848년(헌종 14년) 42세 때 [[조선의 과거 제도|증광시]]에 합격해 출사했다. 당시 [[세도 정치]] 하에서 비주류였던 [[북학파]] 출신으로 요직과 거리가 멀었지만 1862년(철종 13년) [[진주민란]]을 수습하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에서 승리하는 등 잇따른 난을 평정한 공으로 크게 승진했다.<ref name="lee34">황현, 《매천야록》 (정동호 역, 일문서적, 2011) 34페이지</ref> [[사헌부]] [[대사헌]]과 [[홍문관]] [[제학]]을 거쳐 조선 유학의 최고 영예의 하나인 [[대제학]]에 올랐고, 이후 [[이조]][[참판]], [[형조판서]]를 거쳐 에 이르렀다. 1876년 [[강화도 조약]] 때까지 줄기차게 개화를 주장하면서 [[흥선대원군]] 및 척사파들과 계속 갈등을 빚고 실각했다. 1877년 [[수원시|수원부]] [[유수]]로 재직 중 죽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종묘]] [[고종]]실에 배향된 [[종묘배향공신]]이다.
         일곱 살 무렵, 박규수가 외가에 놀러 갔을 때 일화다. 항상 무언가 그리길 좋아했던 그는 땅바닥에 불탑을 그리며 놀았다. 그런 모습을 외종조이자 스승인 [[류화]]가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류화는 고명한 성리학자였음에도 '선비가 될 놈이 왠 불탑이냐'라는 식으로 면박을 주진 않았다<ref name="omious">[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38383 (역사 파고들기④) '조선 천재' 박규수의 특별한 학습법] -2012년 5월 31일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ref>. 대신 그에게 시 한 수를 지어줬다.<ref name="omious"/>
         그를 아는 사람중에는 박규수가 늘 특이한 것에 관심을 둔다며 기인이라 평하기도 했지만, 그의 집안 어른들은 그의 폭넓은 지적 호기심을 나무라기 보다는 오히려 더 북돋아 줬다.<ref name="omious"/><ref>박규수를 비롯한 당시 사람들 중 일부는 지구가 둥근 형태이고 그 속에는 말랑말랑하거나 묽은 용암이나 화산같은 것이 지구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화산]] 폭발이나 용암을 신의 진노, 귀신의 재앙으로 여기던 조선 대부분의 전통적 시각이 변한 건 아니었다.
         1828년 약관의 박규수는 [[조선 익종|효명세자]](孝明世子)와 친분을 나누며 개화를 논했고, 친구 이상의 관계로 학문과 미래를 토론했다.<ref name="hyomms">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5319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효명세자'] 오마이뉴스.</ref> 주로 《[[역경|주역]]》과 나랏일이었다.
         후일 익종으로 추존되는 [[조선 익종|효명세자]]는 대리청정 2년째에 아직 벼슬도 없던 20세의 박규수를 불러들여 '박규학의 학문은 누구도 따를 수 없으리만큼 출중하다'며 그를 곁에 뒀다. [[역경|주역]]을 신하들 앞에서 진강케 하는 한편, 조부 [[박지원 (1737년)|박지원]]의 저작을 모두 모으라 명하고, 박규수 자신의 저술도 있으면 같이 올리라 했다. 이때 직접 [[상고도설]](尙古圖說) 80권을 지어 [[조선 익종|효명세자]]에게 바쳤다. [[조선 익종|효명세자]]는 이런 그를 몹시 아꼈다.
         [[조선 익종|효명세자]]는 대리청정 중에 [[안동 김씨]] [[세도 정치|세도문벌]]들을 배제하고 처가인 [[풍양 조씨]]와 [[노론]]내 비주류 및 [[남인]]을 중용하는 한편, [[이인좌의 난]] 이후 축출됐던 [[소론]]까지 과감히 등용하는 등 개혁군주로서의 싹을 보였다. 박규수는 이런 효명세자의 개혁 가능성에 모든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조선 익종|효명세자]]가 1832년 갑자기 훙거하면서 그의 꿈은 꺾였다. 슬픔과 실망이 너무 컸던 나머지 원래 자신의 자와 호의 '환'(桓: <small>굳셀 환</small>)이라는 글자를 '환'(瓛: <small>옥홀<ref>옥홀: 보석 구슬을 장식한 막대, 천자가 지니고 다녔음</ref> 환, 재갈 얼</small>)으로 바꿀 정도였다.
         1848년(헌종 14년) 42세가 된 그는 [[조선의 과거 제도|문과 증광시]](增廣試)에 병과(丙科) 25위로 합격했다. [[조선 헌종|헌종]]은 '일찍이 부왕의 사랑을 받던 너를 내가 너무 늦게 알아보았다. 앞으로 크게 쓸 것이니 진력하라'고 했다.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고 [[병조]][[정랑]]을 지냈으며 [[용강군|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외직에 나간 동안 [[조선 헌종|헌종]]이 사망했다.
         1861년(철종 12년) 초 귀국 후 [[성균관]] [[대사성]]이 됐다. 얼마 후 그는 열하부사로 다시 [[청나라]]에 갔다. [[제2차 아편 전쟁]] 직후라 [[청나라]]를 통해 격변하는 국제 정세를 살피기 위해 일부러 사행(使行)을 다시 지원했다. 그는 이때부터 1871년 [[신미양요]] 때까지 [[승문원]]에서 각종 외교 문서들을 작성했다. [[영어]]를 몰랐던 당시 조선 정부였기 때문에 그는 [[영어]]를 해석한 중국 문헌들에 기초해서 서양과 외교 문서를 작성했다.
         1866년([[대한제국 고종|고종]] 3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터졌다. 선교사 토마스<small>(한국식 이름 [[최난헌]])</small> 등을 태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The General Sherman)가 조선 정부의 분명한 통상요구 거절에도 허가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자 박규수가 공격 명령을 내렸다.<ref> 문일평, 《호암전집》 제3권, 서울: 조광사, 1939년, 267~268쪽. </ref>
         셔먼호는 상선이었으나 무장을 적재한 상태였고 밀물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왔지만 곧 조수가 밀려나가면서 모래톱에 좌초됐다.<ref name="lee34"/> 박규수는 체포조를 구성하는데 상금을 걸었다. 이 때 한 교졸<ref>교졸: 조선시대 서울의 궁중·관청·군영 및 지방관서에서 근무하던 군교(軍校)와 나졸(羅卒)의 총칭. 지방아전의 하나로 중요 인사들의 경호, 관할 구역 방범순찰, 범법자의 체포 구금을 담당했다.</ref>이 곧 자원해 어촌에서 징발한 괴피선<ref>괴피선: 나룻배. 작은 배의 총칭</ref> 여러 척에 기름먹인 섶을 가득 실어 셔먼호 옆에 붙였다. 그리고 궁수들로 일제히 불화살을 당기게 해 화공했다.<ref name="lee34"/> 화공이 시작되자 셔먼 호 내부의 인화물질에 옮겨 붙으면서 셔먼 호가 항행 불능에 빠졌다. 미국인들이 다급히 배에서 뛰어내려 도망쳤으나 대개가 사살되고 선장과 선교사 토마스는 평양 부민들에게 맞아죽었다.
         조정에 전말이 보고된 후 박규수는 승차<small>(품계가 승진됨)</small>됐고 한낱 지방 아전<small>(중인 계급)</small>에 불과했던 교졸도 정3품 진장<ref>진영장: 1627년([[조선 인조|인조]] 5년) 각 도의 지방군대를 관할하기 위하여 설치된 진영(鎭營)의 정3품 당상직 장관(將官)</ref>(鎭將)에 올랐다.<ref name="lee34"/> 외세에 대해 민심이 흉흉했던 차에 박규수는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었고 아울러 [[대원군]]의 각별한 총애도 얻게 됐다.
         예문관제학 당시 지은 청나라발 조선의 외교 문서(1871년 5월 27일자)
         1871년(고종 8년) [[예문관]] [[제학]]과 [[홍문관]] [[제학]]을 겸했고 외교 자문을 직접 [[청나라]]에 지어보내 글씨 좋다는 칭찬을 들었다. 이듬해 [[홍문관]] [[대제학]] 겸 [[예문관]] [[대제학]]이 돼 조선 [[유학]]의 종장으로 인정받았다.
         1872년(고종 9년) [[조선 철종|철종]]의 하나 남은 혈육인 [[영혜옹주]](永惠翁主)의 혼례를 정하게 됐다. 부마자리를 두고 4월 수원부유수 신석희(申錫禧)와 함께 자신의 문하생이자 같은 일족인 [[박영효]]를 부마로 추천했다. 조선 왕실은 그의 추천대로 박영효를 부마로 삼아 금릉위의 봉작을 주는 한 편, 고종의 친척 매제 뻘이 된 10살짜리 박영효에게 삼정승의 품계인 [[조선의 품계|상보국숭록대부]]도 내리고 왕실종친 반열에 올렸다.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의 품계보다 높았다.
         1873년(고종 10년) 12월 [[일본]]이 자신들의 [[메이지 유신|왕정복고]]와 이에 대한 정식수교 요청을 통고해 왔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은 종전의 서계 격식을 버리고 [[조선의 역대 국왕|고종]]에게 '황'(皇), '칙령'(勅令), '대일본'(大日本) 등의 표현을 써보냈다. 이른바 서계문제(書契問題)로서 [[조선]] 정부로서는 적어도 대등한 위치도 아니고 일본이 상국의 위치에서 써보낸 외교 전문에 대해 수리를 거부했다.
  • 박명언(독립운동가)
          |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 [[칠곡군|칠곡]]
         경상북도 칠곡(漆谷) 출생인 그는 1892년 음서로써 대한제국 조선 황조 관료직에 천거되어 이후 1909년까지 17년까지 영남 지방과 강원도 지방과 호남 지방에서 부군수 직을 지내었고 1909년 전라남도 영광군 부군수 직을 끝으로 대한제국 관료직 사퇴 이후 경상북도 칠곡에 낙향을 하였으며 그 후 향교 성리학 수장 등을 지낸 그는 1919년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진평리(慶尙北道 漆谷郡 仁同面 眞坪里)의 이상백(李相栢)을 중심으로 이영식(李永植)·이내성(李乃成) 등 동지 수명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이었던 경상북도 칠곡 출신의 이영식은 독립선언서 20여매를 가지고 이상백 등을 찾아와 동지들을 모이게 하여 상의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는 동리에 독립선언서를 내붙였고 3월 12일 오후 8시 뒷산 마루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른다는 사실을 동리 사람들에게 알렸다. 1919년 3월 12일 이날 오후 8시가 되자 동민들은 뒷산 기슭으로 속속 모여들어 그 수는 300명에 달하였고, 그를 비롯한 주동인물들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밤이 깊도록 만세를 부르다가 급히 출동한 일군경에 의해 주동 인물 8명이 검거되고 강제 해산 조치 처분되었으나, 그후에도 이들의 저항 의식은 더욱 높아갔다. 그는 1919년 3월 14일 오후 9시경에 2백 여명 동민과 아울러 동리 뒷산 기슭에서 다시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2차에 걸친 대한 독립 만세 운동으로 그는 많은 주동 인물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었으며 재판에 회부된 인사들만도 무려 20여명에 달하였다. 그는 이해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 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으며 1920년 3월 25일을 기하여 석방되었고 이후 1922년에서 1929년까지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행정위원 직을 지냈으며 [[1931년]]에서 [[1932년]]까지 1년간 [[한국독립당 (1930년)|한국독립당]] 상임고문 직을 지내다가 사퇴한 이후 1934년 대한조선제국에 귀국을 하였고 1945년 조선 광복 이후 [[1946년]] 한국독립당 재복당을 하여 1946년에서 1947년까지 1년간 [[한국독립당]] 대표최고위원 직을 지냈으며 1947년 한국독립당을 마지막 탈당하였다.
         * 前 조선국 경상도 [[경주시|월성군]] 부군수(1892년 ~ 1893년)
         * 前 조선국 강원도 [[인제군]] 부군수(1893년 ~ 1897년)
         [[분류:1873년 태어남]][[분류:1948년 죽음]][[분류:밀양 박씨]][[분류:칠곡군 출신 인물]][[분류:음서]][[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의 관료]][[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한국독립당 (1930년)]][[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한국독립당]][[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유교 신자]][[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건국훈장 애족장 수훈자]]
  • 박민영
         | 출생지 = [[조선]] [[한성부]]<ref>{{뉴스 인용 |제목=박민영, 나이 잊은 ‘봄향기’와 닮은 화사한 패션 화보 공개 |url=http://www.topstar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97889#08e1|날짜=2018-04-20 |뉴스=톱스타뉴스|저자=장영권}}</ref>
         |<ref>{{뉴스 인용 |제목=정해인X박민영, 2018 APAN 어워즈 남녀 인기상 선정 |url=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810100100075860005892&servicedate=20181010 |날짜=2018-10-10 |뉴스=스포츠조선|저자=김영록}}</ref>
         [[분류:조선 인물]]
  • 박봉손
         '''박봉손'''(朴鳳孫, [[1796년]] ~ [[1839년]] [[9월 26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막달레나'''(Magdalena)이다.
  • 박사유
         '''박사유'''(朴師愈, [[1703년]] - [[1767년]] [[6월 2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포의로 생활하다 만년에 음서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ref>[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S&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S&jwId=K01&moId=010&daId=100&gaLid=194&gaId=&yoId=&ilId=&leId=&NodeId=ms_K001&setid=278013&Pos=2&TotalCount=5&vipyunid=undefined 이비가 2차 정사에서 정환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깨진 링크|url=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S&url=%2Fitkcdb%2Ftext%2FnodeViewIframe.jsp%3FbizName%3DMS&jwId=K01&moId=010&daId=100&gaLid=194&gaId=&yoId=&ilId=&leId=&NodeId=ms_K001&setid=278013&Pos=2&TotalCount=5&vipyunid=undefined }}</ref> 사후 손자 [[박규수]]의 출세로 여러번 [[증직]]되어 [[증직|증]]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돈령부]]지사 [[박필균]]의 아들이고 연암 [[박지원]]의 아버지이며 환재 [[박규수]]의 증조부가 된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으로, 자는 퇴지(退之)이다.
         [[분류:1703년 태어남]][[분류:1767년 죽음]][[분류:음서]][[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반남 박씨]][[분류:박지원 (1737년)]][[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박사유 (1703년)
         '''박사유'''(朴師愈, [[1703년]] - [[1767년]] [[6월 2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포의로 생활하다 만년에 음서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ref>[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S&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S&jwId=K01&moId=010&daId=100&gaLid=194&gaId=&yoId=&ilId=&leId=&NodeId=ms_K001&setid=278013&Pos=2&TotalCount=5&vipyunid=undefined 이비가 2차 정사에서 정환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깨진 링크|url=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S&url=%2Fitkcdb%2Ftext%2FnodeViewIframe.jsp%3FbizName%3DMS&jwId=K01&moId=010&daId=100&gaLid=194&gaId=&yoId=&ilId=&leId=&NodeId=ms_K001&setid=278013&Pos=2&TotalCount=5&vipyunid=undefined }}</ref> 사후 손자 [[박규수]]의 출세로 여러번 [[증직]]되어 [[증직|증]]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돈령부]]지사 [[박필균]]의 아들이고 연암 [[박지원]]의 아버지이며 환재 [[박규수]]의 증조부가 된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으로, 자는 퇴지(退之)이다.
         [[분류:1703년 태어남]][[분류:1767년 죽음]][[분류:음서]][[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반남 박씨]][[분류:박지원 (1737년)]][[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박상
         |출생일= [[1474년]]([[조선 성종|성종 5년]])
         |사망일= [[1530년]]([[조선 중종|중종 25년]])
         |국적= [[조선]]
         |학력= [[1501년]]([[연산군|연산군 7년]]) 식년시 을과(乙科) 급제<br>[[1526년]] ([[조선 중종|중종 21년]]) 병술(丙戌) 중시(重試) 갑과(甲科) 장원급제
         |친척= 형: 박정(朴禎)<br />동생: [[대사헌]] 박우(朴祐)<br />조카: 박개(朴漑), [[박순 (조선)|박순]](朴淳)
         '''박상'''(朴祥, [[1474년]] ~ [[1530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충주 박씨|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이다. [[전라남도|전라도]] [[광주광역시|광주]] 출신이다.<ref name="np">《국역 국조인물고》 속고8 기묘(己卯) 박상의 시장(諡狀)</ref>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던 [[조선 중종]] 때의 관료로 사림 운동에 전력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훈구파|훈구 공신]]들의 전횡을 지속적으로 고발해 권신들의 미움을 사 관직 대부분을 외직으로 나가있었으며, 가는 곳마다 사림 후배들을 챙겼다. 특히 [[기묘사화]] 이후 살아남은 [[조광조]]의 문하생들을 거둬 사림 운동의 맥을 이어줬다. [[단경왕후]] 복위에 관한 상소로도 유명한데 이에 대해 생전의 [[조광조]]가 '강상의 법도를 세웠다'라고 칭찬한 바 있다. 평소 그의 학식과 인품에 대해 후배였던 [[이황|퇴계 이황]]이 원우의 완인(행동과 인품에 흠이 없는 사람)이라 평하기도 했다.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1474년]]([[조선 성종|성종]] 5년) [[광주광역시|광주]]에서 박지흥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대전광역시|대전]]에 살던 박지흥은 [[조선 세조|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해 사돈 [[권람]]의 천거도 뿌리치고 처가인 광주로 내려온 터였다. 환갑이 넘어 늦둥이로 얻은 박상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보살핌과 8살 터울의 형에게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막 사림 운동이 싹을 내려 전국 8도 곳곳에서 성리학 연구가 일어나던 시기에 형 박정(朴禎)은 호남 사림으로 일컬어지는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에 있었다. 점필재 [[김종직]]이 전라 관찰사로 그를 만나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고는 '나라의 실로 큰 그릇이 되겠다'고 평한 기록도 보인다.<ref>국조인물고 권17 경재(卿宰) 육봉(六峰) 박우(朴祐)의 묘갈명(墓碣銘)-임억령(林億齡:1496~1568) 作</ref> 아버지같고 스승같던 형이 요절했지만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3살 터울의 동생과 함께 공부를 계속했다.
         [[1496년]]([[연산군|연산군 2년]])에 생원(生員)시에 합격해 상경한 후 교서관<ref>교서관: 경적(經籍)의 인쇄와 제사 때 쓰이는 향과 축문ㆍ인신(印信 : 도장) 등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교서감(校書監) 또는 운각(芸閣)이라고도 한다. [[1392년]]([[조선 태조|태조 1년]])에 설치되었다. 관원은 모두 문관을 쓰며, 전자(篆字)에 익숙한 자 3인은 그 품계에 따라 겸임시켰다.</ref>(校書館) 정자(正字-정9품)가 됐다.
         [[1501년]]([[연산군|연산군 7년]])에 식년시<ref>식년시(式年試): 조선시대 과거제도 중 하나로 정기시를 말한다. 12지 가운데 자(子)묘(卯)오(午)유(酉)가 드는 해를 식년(式年)이라고 칭하며, 3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이 해에 정기적으로 과거시험을 치렀다.</ref>(式年試) 을과(乙科)에 급제, 교서관(校書館) 박사(博士-정7품), 별제(別提-종6품<ref>별제직은 영조 때 [[속대전]]제정시 폐지됨</ref>) 등을 역임했다.
         [[1506년]]([[조선 중종|중종 1년]]) [[중종반정]] 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허락받고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small>정5품,대간(臺諫)</small>)이 되자마자 반정공신 책정의 난맥상을 줄기차게 지적했다. 중종으로서는 그들의 추대로 즉위한지라 눌재의 간언이 크게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그는 왕실 종친들의 중용을 극구 반대하는 한편 훈구공신들의 전횡에 대해 끊임없이 탄핵 상소를 올린 끝에 결국 임금과 [[훈구파]] 모두의 공분을 샀다. 곧 그는 한산군수(韓山郡守-종4품)로 발령됐는데 이는 품계만 올린 사실상의 좌천이었다. [[사헌부]]가 [[대간]](臺諫)을 외직으로 돌리다니 말도 안된다고 임금과의 말씨름을 1년이나 끌자, 중종은 할 수없이 [[종묘|종묘서]] 령(宗廟署令-종5품), [[소격서]] 령(昭格署令-종5품)등 한직을 내렸고 마음이 상한 눌재는 모친 봉양을 핑계로 임피(臨陂-<small>전북 군산</small>)현감(縣監-종6품)을 자청해 자신이 품계에 연연하는 것이 아님을 보이고는 궁을 떠나버렸다.
         [[1515년]](중종 10년) [[장경왕후]]가 죽었다. 담양부사(정3품<small>당하관</small>)로 재직하던 그는 순창군수 [[김정 (조선)|김정]](金淨)과 함께 [[중종반정]] 직후 폐서인 됐던 [[단경왕후|단경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했는데, 이게 다시금 중종과 대왕대비인 [[정현왕후]]의 진노를 사 오림역(烏林譯-<ref>오림역(烏林譯): 나주 남평 소재</ref>)으로 유배당했다.
         [[1519년]](중종 14년) 3년상을 치르고 눌재공이 의빈부<ref>의빈부: 조선시대 공주,옹주등과 혼인한 부마(駙馬)에 관한 일을 관장</ref> 경력(經歷-종4품)으로 중앙정계에 돌아오기 직전,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조광조]] 등 선비들이 죽거나 다치고 [[윤원형]],[[윤원로]] 등 외척 훈구권신들이 더욱 득세하던 때였다. 하루는 훈구권신 [[심정 (1471년)|심정]](沈貞)이 [[경기도]] 양천에 소요당을 짓고 크게 벌이는 잔치에 그도 섞여 초대됐다. 한참 자리도 불콰해져 다들 흥들이 올랐건만 눌재공은 뼈가 부러지고 살이 튀었던 후배들이 생각나 도저히 그 자리에 섞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반산<small>(半山)</small>에 상을 차렸고 가을구렁 추학<small>(秋壑)</small>에 술잔들을 별였구나"라고 읊었는데 잔치 술자리는 순식간에 얼어붙고 다들 [[심정 (1471년)|심정]]의 눈치만 살피느라 안절부절했다. 반산은 [[왕안석]](王安石)의 호요, 추학은 [[가사도]](賈似道)의 호인데 이 둘은 [[송나라]]를 망친 위인들로 당시 선비들 사이에 회자됐었다. 뜻을 모를리 없는 [[심정 (1471년)|심정]]은 좋은 자리에 차마 화는 크게 못내고 벌겋게 달아올라, 아직 안달고 뒀던 소요당 현판을 사람을 시켜 태워버렸다. 모친상으로 [[기묘사화]]만은 피했던 눌재공은 권신 [[심정 (1471년)|심정]](沈貞)의 원한을 사 결국 외직으로 쫓겨났다.
         [[1527년]](중종 22년) [[조선 인종|인종]] 때의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가 찾아와 배움을 청하였다. [[김인후]]를 어릴적 보고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예로부터 기동(奇童)치고 끝이 좋은 자가 없었는데, 오직 이 사람은 마땅히 잘 마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연산군]]이 전국 팔도에 채홍사(採紅使)<ref>채홍사: 연산군이 궁녀들을 충원하기 위해 전국에 내려보냈던 관원들. 성리학의 조선에선 왕이 미인을 탐함을 좋지 않게 여겨 일부러 박색을 들이는 것이 상례였으나 연산군은 미모로 누가 유명하다 소문이 나면 즉시 사람을 보내 궁으로 불러들였다. </ref>를 내려보내 미녀사냥을 하던 중 나주골에 사는 천민 우부리(牛夫里)의 딸이 간택됐다. 그 딸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게되자 그 아비 우부리가 그 권세를 믿고 패악과 부정부패를 멈추지 않으니 민심이 날로 흉흉하고 그곳 수령은 물론 전라도 관찰사<ref>관찰사: 종2품 외직,병권까지 모두 관장한 지방최고직</ref>조차도 그에게 거스르면 목이 달아나는 판이었다. 서울에서 벼슬을 살던 눌재는 이를 알고 전라도 도사(都事<ref>감찰과 규탄을 맡은 종5품 관직</ref>)를 자원해 부임한 직후, 인사를 오지 않은 죄라며 우부리와 집안 가속들을 금성관(錦城館-<small>나주 관아</small>) 마당에서 모조리 곤장으로 때려죽였다. 우부리의 집에서는 장례치를 생각도 못하고 서울로 급히 고변을 하니 연산군이 화가 나 길길이 뛰었다. 왕명으로 금부도사가 사약을 갖고 나주로 내려오던 참이었다.
         한편 눌재공은 우부리의 죄상을 글로 조정에 낱낱이 밝히는 동시에 당당히 임금에게 대죄(待罪)를 청하려고 즉시 상경길에 나섰다. 바로 나주목사에게 사표를 제출하고 전남 장성 갈재를 넘어 입암산(笠岩山)밑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난데없이 들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 야옹"거리며 바지가랑이를 물어채기에 이상히 여겨 오라는대로 따라갔다. 바로 그 때 금부도사가 반대쪽 큰길로 서로 길이 엇갈려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했는데 얼마안가 중종반정으로 그 사건은 불문에 붙이게 됐다(<small>脚註: [[중종반정]]의 성공은 그가 왕의 장인을 때려죽인 이 사건에 조정의 모든 이목이 쏠렸던 덕분이라는 견해도 있다</small><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0/30/2011103001216.html 조선일보 2011년10월31일 칼럼 '이종범 교수의 호남인물열전 16번 김개(金漑)편' 발췌] - '연산군 12년(1506) 8월 전라도 김준손(金駿孫)·이과(李顆)·유빈(柳濱)이 거사를 도모하였다.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추대하자! 궁중의 연회와 사치를 비판하다가 쫓겨온 적객들이었다. 남원시 운봉의 김준손이 앞장섰는데, 김일손의 백형이었다. 박상의 '우부리 장살사건'에 눈귀가 쏠릴 때였다'</ref><ref> 반정 공신에 책록된 사항도 없고 공신을 정할 때 거절한 기록도 없는 것으로 보아 반정 세력과 도모한 일은 아닌 거 같다.</ref>).
         눌재공은 그 은공을 잊지 않기위해 자신의 전답중 수십 결의 논을 따로 묘답(<small>苗畓-고양이의 은혜를 갚는 논</small>)이라 이름붙이고 거기서 나온 소출을 매년 금강산 정양사에 공양했다. 눌재의 후손들은 고양이를 은혜로운 동물로 여겨 특히 귀여워했다고 전한다. 공양은 조선조가 망할 때까지 후손들이 계속했는데 일제시대 일본인들에게 역둔토(<small>주인없는 땅이라 국유화한다는 뜻</small>)라며 묘답을 몰수당했다.
         *** 조카 : [[박순 (조선)|사암 박순]](朴淳)
         [[분류:1474년 태어남]][[분류:1530년 죽음]][[분류:충주 박씨]][[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문신]]
  • 박상민 (1970년)
         * [[1993년]] 《풍운아 홍길동》 ... [[홍길동 (조선)|홍길동]] 역(주인공, [[연출가]] 겸무)<ref>이 [[연극]] 작품에 설계된 캐릭터 [[홍길동 (조선)|홍길동]]은 [[조선]] [[조선 세조|세조]]· [[조선 예종|예종]]· [[조선 성종|성종]]· [[조선 연산군|연산군]]· [[조선 중종|중종]] 5군주 치세 시대에 걸쳐 협객(俠客) 활약한 신협걸물(神俠傑物)이며 [[숙의 홍씨 (성종)|조선 성종 후궁 숙의 남양 홍씨]]의 친정 서얼 숙부이다.</ref>
  • 박세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국적 = [[조선]]
         | 군주 = [[조선 숙종|조선 숙종 이순]]
         | 직책 = 조선국 좌의정<br/>(朝鮮國 左議政)
         '''박세채'''(朴世采, [[1631년]] ~ [[1695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남계(南溪), 현석(玄石)이다. 현석은 그가 살았던 한양의 지명(마포구)에서 따온 것이다. [[이언적]], [[이황]], [[이이]], [[송시열]], [[김집]]과 함께 [[조선]]시대 [[문묘]]와 [[종묘]]에 종사된 6현 중 하나이다. 시호는 문순(文純).
         보통 노론의 정치적 입장에 우호적이었으며, [[유학]]자들의 학통을 서술, 기록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집필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자, [[유학]]자들의 계보를 [[신라]]시대까지로 소급, 파악하였다. 이는 유학의 뿌리를 [[송나라]] 이후로 보려는 조선후기의 통상적인 견해와 다른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이이]]를 사숙,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로써 학문을 출발했으며 평생 [[이이]]를 존경하였다. [[1638년]](인조 16) 아버지 박의에게 글을 배우며 가학을 수학하다가 [[김집 (1574년)|김집]]과 청음 [[김상헌]]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그 뒤 18세 때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성균관 유생 시절에 [[이이]]와 [[성혼]]의 [[문묘]](文廟) 종사(從祀)와 추대를 주장, 영남유생 유직(柳稷)이 이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박세채는 유직의 상소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내었는데,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批答)이 [[남인]] 유생을 옹호하는 것이었으므로 이에 분개하였다. 그 뒤 [[허목]] 등 [[이이]]·[[성혼]]의 문묘 종사에 대하여 반대하는 세력들을 비판, 공격하다가 [[조선]] [[조선 효종|효종]]의 꾸지람을 듣고서 [[성균관]] 수학 2년만에 과거를 단념하고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1659년]] [[조선 효종|효종]]이 죽고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놓고 1차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기년복설을 주장한 [[서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는 당초 [[허목]]과 [[윤휴]]의 견해도 일단 수용하자는 입장이었으나 [[윤선도]]의 상소 이후 [[송시열]], [[송준길]]의 예론을 무조건 지지하였다. [[1674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파직당하고 [[양근]]으로 유배되었다.
         저서로는 《남계집》이 있다. 성리학 이론에 해박하여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중기까지 [[유학]]자들의 학통을 서술, 기록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집필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자, [[유학]]자들의 계보를 [[신라]]시대까지로 소급, 파악하였다. [[예학]] 지식에도 해박하여 《남계예설》(南溪禮說) 《삼례의》(三禮儀) 《육례의집》(六禮疑輯) 등 많은 예학서를 저술하였다.
         그가 죽자 문인(門人)들 중 상복을 입고 3년상과 시묘살이를 한 이들이 2백여인이나 되었다. [[윤증]]이나 [[박세당]]과는 달리 [[송시열]]과 크게 충돌하지 않았으므로 사후에도 별 탈이 없었다. 바로 [[조선 숙종|숙종]]의 묘정에 종사되었으며, [[1764년]](영조 40년) 집권 [[노론]]의 반대와 여러 논란 끝에 [[조선 영조|영조]]에 의해 [[성균관]]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 [[이경석 (조선)|이경석]]
         * [[박종관]] - [[1988년]] [[조선왕조 오백년]] [[인현왕후 (드라마)|인현왕후]], [[문화방송|MBC]] 드라마
         [[분류:1631년 태어남]][[분류:1695년 죽음]][[분류:반남 박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문신]][[분류:사상가]][[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송시열]][[분류:김육]][[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서예가]][[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소론]][[분류:서인]][[분류:병사한 사람]][[분류:종묘배향공신]]
  • 박순 (조선)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경기도]] [[포천]]
         |국적= [[조선]]
         '''박순'''(朴淳, [[1523년]] ~ [[1589년]])은 [[조선]]의 문신이며 성리학자, 시인이다. 본관은 [[충주 박씨|충주]]. 자는 화숙, 호는 사암이다.
         성균관 대사성 박우(朴祐)의 아들이며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조카이다. [[훈구파]]와 [[사림|신진 사림]]의 교체기에 [[조식]]과 [[이황]]의 문하생으로서 사림운동에 전력한 선비이자 관료로서, 왕의 외삼촌이자 훈구파의 대부였던 [[윤원형]]을 축출시켜 [[조선]] 역사에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 [[성균관]] 대사성, 예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고 청백리에 녹선됐다. 정승은 내리 14년을 지냈으며, 그 중 영의정은 7년을 지내어 조선시대를 통틀어 장원급제자는 영의정이 되지 못한다는 징크스를 깬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1553년]](명종 8년) 31세의 나이로 대과에 응시했다. 해당 시험은 [[조선 명종|명종]]이 특히 갑과를 직접 주관했는데 그의 답안을 보고 감탄한 왕의 몇가지 직접 질문에 뛰어난 답을 제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했다. 갑을병 세 등급의 과거에서 갑과 1등이었던 그는 핵심요직인 이조좌랑(吏曹佐郞-6품), 홍문관수찬(修撰-정6품), 교리(校理-정5품) 등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고, 당시 젊은 신진 관료들에게 주어졌던 안식년에 궁궐 도서관인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었다.
         [[1562년]](명종17년), 부친 박우의 고향인 광주 송정리에서 1년간 독서 중 명종이 다시 그를 불러 한산(韓山)군수(郡守-정4품 외직)에 임명했다.<ref>《조선왕조실록》 명종 28권, 17년(1562년) 2월 6일 2번째기사</ref> 그는 사림 운동의 연장선에서 그 지방의 사림 육성책으로, 공무가 끝난 후에도 정사(亭舍)로 가 그날그날 커리큘럼을 정하여 강론하고 이웃 고을 선비들과 글을 읽었다. 이것이 점점 소문이 나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1563년]](명종18년)에 [[성균관]] 사성(司成<ref>1392년(태조 1년)에 좨주(際酒), 1401년(태종 1년)에 다시 사성(司成)으로 고쳤다. 경국대전에는 정원 2원으로 증원되었으나, 1658년(효종 9년)에 1원을 감원하고, 좨주(際酒) 1원을 새로 두었다. 문묘(文廟) 외 제례(祭禮)가 있을 때는 이를 주재하기도 하였다.</ref>-정3품)으로 불려 들어가 시강원(侍講院-<small>조선 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small>) 보덕(輔德-종3품), [[사헌부]] 집의(執義-종3품),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정3품 당하관)을 역임하면서 차자(箚子-<small>국왕에게 올리는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small>)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였고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정3품 당상관)로 승진하였다.
         |직책 = [[조선]]의 [[영의정|영의정부사]]
         [[분류:1523년 태어남]][[분류:1589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 명종]][[분류:조선 선조]][[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학자]][[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공신]][[분류:영의정]][[분류:충주 박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성혼]][[분류:이이]]
  • 박순천 (배우)
         '''박순천'''(朴順天, [[1961년]] [[2월 19일]] ~ )은 [[조선]]의 [[김굉필]]배우자이다.
         * 2015년 [[TV조선]] & [[tvN]] 단막극 《[[위대한 이야기]] - 이산가족 이야기 (TV조선) / 놓지 말자 정신줄 (tvN)》 ... 순옥 역
         [[분류:조선 인물]]
  • 박승임
         '''박승임'''(朴承任, [[1517년]] ~ [[1586년]])은 [[조선]] [[조선 명종|명종]], [[선조]] 때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 자는 중포(重圃), 호는 소고(嘯皐)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자 수제자였다.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 때 [[조선 태종|태종 이방원]]을 도운 공로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된 [[박은 (1370년)|박은]]의 5대손이다. 아버지 박형은 원래 안동 출신으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으며 뒤에 안동을 떠나 처가가 있던 영천(榮川)으로 이주해서 살게 됐다. 어머니는 영천 지역의 명문가인 예안김씨 출신으로, 김만일(金萬鎰)의 딸이다. 박승임은 7형제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 [[이량]] 등이 제거되자 다시 조정에 나아간 박승임은 이후 병조 참지와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진주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고을의 부로(父老)들을 모아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향약을 실시하며 백성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1568년(선조 1) 병으로 사직,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으나 1568년 특명으로 중국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절단의 동지부사(冬至副使)에 임명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대사간 재직 중 [[서인]]의 영수이던 [[이이]]와 [[박순 (조선)|박순]]의 당론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좌천당하였다.
         [[분류:1517년 태어남]][[분류:1586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사상가]][[분류:조선의 유학자]]
         [[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경상북도 출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반남 박씨]]
  • 박승희 (1901년)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의 고관이었던 [[박정양]]의 셋째 아들이다. 지금의 [[서울특별시|서울]] [[중구 (서울특별시)|중구]] 에서 태어났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1919년]]에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 박아기
         '''박아기'''(朴阿只, [[1783년]] ~ [[1839년]] [[5월 24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안나'''(Anna)이다.
  • 박원종
         '''박원종'''(朴元宗, [[1467년]] ~ [[1510년]])은 [[조선]] 전기의 무신(武臣) 겸 [[정치가]](政治家)로 자는 백윤, 시호는 무열로 본관은 [[순천 박씨|순천]]이다.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의 처남이자 [[윤임]]과 [[장경왕후 (조선)|장경왕후]]의 외숙부이기도 하다.
         승평부부인이 자결하자 [[조선 연산군|연산군]]에게 앙심을 품고 정변을 준비, [[유순정]], [[성희안]] 등을 포섭하여 [[1506년]] [[중종반정]]을 기획한다. 중종반정 직후인 [[1506년]] [[9월]]에서 이듬해 [[1507년]] [[8월]]까지, 그리고 1509년에서 15010년가지 두 차례로 [[조선 중종|중종]] 임금을 보좌하여 [[섭정]]을 맡았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일족이기도 하다.
         판서 박중선의 아들로 부지돈녕부사 [[박거소]](朴去疎)의 손자이다. 증조부 평양군 박석명(朴錫命)은 좌정승 박가흥의 큰아들이자 [[고려]] [[고려 공양왕|공양왕]]의 조카사위로 대사헌을 지냈으며, 사육신 [[박팽년]]과는 8촌간이었다. 할머니는 청송 심씨로 영의정 [[심온]]의 딸이며 [[조선 세종|세종]]비 [[소헌왕후]]의 동생이다. 심씨의 셋째형부 [[노물재]]의 본관은 [[교하 노씨|교하]]로 그 아들이 [[조선 세조|세조]] 때의 정승 [[노사신]]이다. 심씨의 넷째 형부 부지돈녕부사 유자해의 본관은 [[진주 유씨|진주]]로, 유자해의 손자가 박원종과 함께 [[중종 반정]]을 거사한 [[유순정]]이다.<ref>유순정과는 서로 진이종 6촌간이 된다.</ref>
         박원종의 큰누이 [[승평부부인]]은 [[조선 성종|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에게 시집갔고, 또다른 누이인 [[순천부부인]]은 [[윤여필]]에게 시집가 윤임과 [[장경왕후 (조선)|장경왕후]] 등을 낳았다. 또다른 누이는 [[조선 예종|예종]]의 차남 제안대군의 계부인이 되는 등 박원종의 가문은 일찌감치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특히 자식이 없었던 월산대군은 손아래처남인 박원종을 친동생처럼 사랑했는데 성종이 이로 인해 월산대군 사후 그의 죽음을 애도해 박원종을 동부승지로 삼게 되었다.<ref>《조선왕조실록》 성종 268권, 23년(1492년) 8월 7일 2번째기사</ref>
         무술이 뛰어나 [[음서 제도|음보]]로 무관직에 기용되었고 [[1486년]] [[선전관]]으로 있을 때 [[과거 제도|무과]]에 급제하여 선전내승으로 승진했으며, 오랫동안 [[조선 성종|성종]]의 측근으로 있었다. [[1492년]] 성종의 특지로 동부승지에 발탁되고 공조와 병조의 참의를 거쳐 [[조선 연산군|연산군]] 때 중추부지사 겸 경기도관찰사, 함경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평성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승정원]][[동부승지]], [[우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등을 지냈다.
         [[1506년]] [[성희안]], [[유순정]] 등과 함께 중종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조선 중종|중종]]으로 옹립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맡아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반정의 1등 공신이며 먼 친척의 딸을 수양녀로 거둔 [[경빈 박씨]]가 중종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되었고, 역시 후궁으로 들어간 외조카딸 [[장경왕후 (조선)|윤씨]]가 폐위된 [[단경왕후]]를 대신하여 중종의 두 번째 계비가 되면서 조정의 실세로 올라서게 된다. [[1507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 매형 : [[월산대군]]([[조선 성종|성종]]의 친형)
         **** 동생 : 순천부부인 박씨([[장경왕후 (조선)|장경왕후]]의 모친)
         **** 매제 : [[윤여필]]([[윤임]]과 [[장경왕후 (조선)|장경왕후]]의 아버지, [[조선 인종|인종]]의 외조부)
         **** 매제 : [[제안대군]](조선 예종의 차남)
         * 박상진, 조선조 영의정 박원종 연구 (국학자료원, 2001)
         직책=[[조선]]의 [[섭정]]|
         직책=[[조선]]의 [[섭정]]|
         [[분류:1467년 태어남]][[분류:1510년 죽음]][[분류:순천 박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음서]][[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군인]][[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육군 군인]][[분류: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분류:정국공신]][[분류:한국의 장군]][[분류:병사한 사람]][[분류:훈구파]][[분류:정난공신 (중종)]][[분류:영의정]][[분류:한국의 섭정]][[분류:중종반정]]
  • 박재혁 (독립운동가)
         |출생지= 조선 [[부산광역시]]
         [[1895년]] [[5월 17일]] [[조선]] [[경상남도|경상도]] (현재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凡一洞))에서 출생하였으며 한때 1898년에서 1901년까지 [[대한제국]] [[홍천군|강원도 홍천군]]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01년 부산에 귀향하여 성장한 이후 부산진공립보통학교(현 [[부산진초등학교]])를 거쳐 부산공립상업학교(구 [[부산상고]] 전신, 현 부산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 박정양
         | 출생지= [[조선]] [[한성부]]
         | 사망지= [[조선]] [[한성부]]에서 병사
         | 국적= {{국기|조선}}
         | 경력= 문관, [[총리대신 (조선 말기)|총리대신]], 문필가
         | 군주 = [[대한제국 고종|조선 고종 이형]]
         | 직책 = 前 조선국 의정부영의정권한대리청정내각총리대신<br/>(前 朝鮮國 議政府領議政權限代理聽政內閣總理大臣)
         '''박정양'''(朴定陽, [[1842년]] [[2월 4일]]([[1841년]] [[음력 12월 24일]]) ~ [[1905년]] [[12월 15일]]([[음력 11월 19일]]))은<ref>[http://yoksa.aks.ac.kr/dataFiles/img/book2/8/JE_A_80560/JE_A_80560_001_000011.gif 박정양시장 [朴定陽諡狀]]</ref>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대한제국]]의 정치가 겸 외교관이다. 구한말의 온건 개화파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였다. [[조선]] 시대 첫 주미국 대사이기도 했다.
         [[조선 정조|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친정 일족으로, [[판관]]과 강서현령을 지낸 박제근(朴齊近)의 아들이다. [[수빈 박씨]]의 친정아버지 [[박준원]]의 형 [[박윤원]]의 4대손이다. 증조부 박종여(朴宗與)는 서흥부사를 지냈고 할아버지 박운수(朴雲壽)는 순흥부사를 지냈다. 어려서 먼 친척인 [[박규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유대치]]의 문하에 출입하며 [[김윤식]], [[김홍집]], [[김옥균]] 등과 만나 교분을 쌓았으며 [[오경석]]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1864년]](고종 1년) 증광과 [[생원시]]에 병과로 입격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서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1866년]](고종 3년) [[조선의 과거 제도|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온건개화파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1879년 형조참의, 형조참판 등을 지내고 [[1881년]] [[윤웅렬]], [[어윤중]], [[홍영식]], [[조병직]], [[조준영]] 등과 함께 [[조사 시찰단|신사유람단]](紳士遊覧團)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일본의 정부기관은 물론 각종 사업기관과 조폐공장 등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관제 개혁, 급여의 화폐지급, 관습법의 성문법화 추진 등 근대화 정책 추진에 참가했다. 일본을 시찰하고 [[제물포]]를 통해 귀국, 이용사 당상 경리사(理用司堂上經理事)가 되었다.
         [[1887년]](고종 24년) 다시 [[협판]][[내무부|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가 되었다가 그해 [[미국]] 특파 전권대사로 임명되었으나 조선주재 [[청나라]]군 최고사령관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凯)의 압력으로 출발하지 못하고 [[한성]]에 머무르며 출발을 연기하였으나 그해 연말에 [[청나라]]의 방해 공작을 무릅쓰고 [[제물포 항]]에 정박된 상선을 타고 비밀리에 건너갔다. [[미국]] [[워싱턴 D.C.]]에 부임하여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클리블랜드]](S. G. Cleveland)에게 신임장을 제정받는 등 외교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미국행은 조선인 최초의 외교관 파견이었다. 이때 그는 백악관 대통령 관저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미국 대통령에게 큰 절을 하자 [[그로버 클리블랜드|클리블랜드]]가 매우 당황해하여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서광범]] 등과 함께 [[미국]]에서 [[조선]]을 자주 독립국으로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미국은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이 아닌 동등한 외교국가로 인정하였다. 그 뒤 청나라의 압력으로 사직하고 [[1889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교섭을 벌인 끝에 호칭은 전권공사의 호칭을 사용하되, [[청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여 [[위안 스카이]]와 영약삼단(另約三端) 조약을 맺었다. 영약삼단의 내용은 "조선의 외교사절(공사)은 ①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②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청국공사의 밑에 자리를 잡는다 .③ 중대사건이 있을 때 반드시 청국공사와 미리 협의한다."라는 것이었다.
         박정양은 미국에서 전권대신으로 활동한 경험을 [[1888년]] 미속습유'(美俗拾遺)에 썼다. 박정양은 미속습유에서 "이 나라는 여러 사람이 마음을 합해 만든 나라로 권리가 주인인 백성에게 있다. 그러므로 비록 보잘것없는 평민이라 할지라도 나랏일을 자기 일처럼 돌보아 마음과 몸을 다하여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다."라면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기억했다.<ref>{{뉴스 인용|url=http://v.media.daum.net/v/20180507115217611?d=y|제목=130년전 조선 외교관 눈에 비친 미국은 어땠을까|날짜=2018-05-07|뉴스=연합뉴스|확인날짜=2018-05-07}}</ref>
         [[1895년]] [[8월]] 일본 낭인과 내통한 조선인 병력들이 대궐에 난입,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서광범]] 등과 함께 위정척사파 및 수구파의 대대적인 탄핵, 정치공세를 받고 파면되었다가, 3차 김홍집내각의 [[내부]][[대신 (조선 말기)|대신]]이 되었다. [[을미사변]] 당시 조정의 요직에 있었다는 이유로 위정척사파들로부터 왕비 살해 공모자로 몰려 [[최익현]], [[윤용선]] 등으로부터 수시로 규탄을 당했다.
         [[1896년]](고종 33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 [[김홍집]]이 수구파, 위정척사파 측에 의해 살해되자 내부대신으로 [[총리대신]] 서리와 [[궁내부]][[대신 (조선 말기)|대신]] 서리를 겸임했다. 이해 양력 9월 내각을 [[의정부]]로 개혁하자 [[의정부]]참정대신(參政大臣)이 되고 [[1896년]](건양 1년)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윤치호]], [[이상재]] 등의 주도로 [[만민공동회]]가 조직되자 정부측 대표로 참석, 이후 만민공동회에 계속 참석하였다.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1898년]](광무 2년) [[10월]]의 [[만민공동회]]에 참석, 시정의 개혁을 약속했으나 [[수구당|수구파]]와 위정척사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양력 11월 [[황국협회]]가 폭력으로 독립협회를 탄압한 사건이 일어나 내각이 경질(更迭)되자 사직서를 올렸지만, 다시 [[대한제국 고종|고종]]에 의해 [[내무부]][[대신 (조선 말기)|대신]]이 되었다.
         [[이상재|월남 이상재]]는 그의 문하생이다. 조선 말기의 불편부당한 온건중립파로서 진보적인 개화사상을 가지고,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 개화파인사들의 정치적 후견인으로 이들을 후원하였다.
         * 박정양, 조선시대 포쇄일기 (최강현 역, 신성출판사, 1999)
         |직책 = [[조선]]의 [[섭정]]
         [[분류:1841년 태어남]][[분류:1905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온건개화파]][[분류:통역사]][[분류:갑신정변]][[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유교 신자]][[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사상가]][[분류:한국의 섭정]][[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독립협회]][[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유길준]][[분류:반남 박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박제빈
         '''박제빈'''(朴齊斌, [[1858년]] ~ [[1921년]])은 [[조선]]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이다.
         [[한성부]] 출신으로 [[1874년]] [[조선의 과거 제도|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과 [[홍문관]], [[사헌부]] 등에서 주로 언관 벼슬을 맡아 보았다. [[1891년]]에는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찬의로도 임명되었다. [[1911년]]에는 [[경학원]]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친일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에도 가담했다.
         [[분류:1858년 태어남]][[분류:1921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조선남작]][[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
         [[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반남 박씨]]
  • 박종원 (종교인)
         '''박종원'''(朴宗源, [[1793년]] ~ [[1840년]] [[1월 31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Augustinus)이다.
         박종원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충고하려 들었다. 그는 누군가가 죄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을 볼때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친절하여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박종원이 화난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박종원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솔선하였다. 그는 [[선교사]]들을 [[조선]]에 데려오는데 엄청난 노력을 쏟았다. 그의 재능과 덕행이 [[앵베르]] [[주교]]에게 알려져, 주교는 그를 [[교리]] [[교사]]로 임명하였다. 박종원은 교리 선생으로서 그의 의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 박종채
         '''혜전 박종채'''(朴宗采, [[1780년]] ~ [[1835년]] [[11월 13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1810년]]([[순조]] 10년) [[증광과]] [[진사시]](소과)에 합격해 연암 [[박지원 (1737년)|박지원]]의 아들로서 음서직인 경산 현감에 제수됐다.<ref>제수: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상태에서 왕명으로 특별히 관직을 받는 일</ref><ref name=autogenerated1> 1795년 가을에~:《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박지원 지음, 박희병 옮김, (돌베게, 2006) 14쪽. </ref> 대과에 급제는 하지 못했으나 평생 아버지의 유업인 북학 사상을 계승하고 그 저작들을 정리했으며 아버지와의 추억을 담은 글들도 다수 남겼다. 전주 류씨와 사이에 [[박규수]], 박선수 형제를 두었고 장남 박규수가 잇따른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이조참판, 이조판서에 이어 [[영의정]]에 추증됐다. 자(字)는 사행(士行)이다.
         [[분류:조선의 문신]][[분류:1780년 태어남]][[분류:1835년 죽음]][[분류:조선의 작가]][[분류:음서]][[분류:반남 박씨]][[분류:박지원 (1737년)]][[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박지원 (1737년)
         |출생지= {{국기나라|조선}} [[한성부|한성]] 반송반 야동
         |사망지= {{국기나라|조선}} [[한성부|한성]]에서 병사
         |직책= 前 [[조선|조선국]] [[충청도]] [[당진시|면천군 군수]]<br/>(前 朝鮮國 忠淸道 沔川郡 郡守)
         |군주 = [[조선 정조|정조 이산]]<br/>[[조선 순조|순조 이공]]
         |섭정 =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대왕대비 경주 김씨]]
         '''박지원'''(朴趾源, [[1737년]] [[3월 5일]]([[음력 2월 5일]]) ~ [[1805년]] [[12월 10일]]([[음력 10월 20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실학자]]이자 사상가, 외교관, [[소설가]]이다.
         그는 [[청나라]]의 신문물에 관심을 두었다. [[조선 정조|정조]] 즉위 후 여러번 학문과 문장력으로 추천받았지만 고사하다가 집안의 거듭된 권고로 [[1786년]] 문음으로 출사하게 된다.
         박지원은 [[1737년]]([[조선 영조|영조]] 13) [[3월 5일]]([[음력 2월 5일]]) 축시에 [[한양]] 서부(西部) 반송반(盤松坊 : 야동(冶洞))에서 지돈녕부사를 지낸 [[노론]]중진 장간공 박필균(朴弼均)의 손자이며, 열상외사(洌上外史) [[박사유]](朴師愈)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이창원(李昌遠)의 딸이다. 그의 형제들 중에는 2남 2녀가 전하는데 위로 형 박희원과 누나 두 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였다.
         5대조 박미(朴瀰)의 동생 박의(朴漪)의 아들은 현석 [[박세채]]로 소론의 거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서인]] 당원이었으나 [[조선 숙종|숙종]] 때 [[노론]]과 [[소론]]이 갈리면서 그의 가문도 노론과 소론으로 당론이 나뉘었고, [[박세채]]는 소론을 선택하였다. 당대인 [[조선 영조|영조]] 때의 거유 성리학자인 여호 [[박필주]](黎湖朴弼周)는 그의 재종조부로, 증조할아버지 박태길의 형 박태두의 아들이자 할아버지인 박필균의 사촌이었다. 할아버지 박필주는 지중추부사와 지돈녕부사를 역임한 노론 거물이었지만 당쟁에 뜻을 두지 않고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할아버지 [[박필균]]은 당쟁에 초연했고 연암 역시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당쟁에서 거리를 두었다.
         [[1776년]] [[조선 정조|정조]] 즉위 직후 [[조선 정조|정조]]의 측근에서 군림한 근신인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으면서 같은 [[노론]]이지만 [[벽파]](僻派)를 공격하면서 [[벽파]]에 속했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1777년]]([[조선 정조|정조]] 1년) 권신(權臣) [[홍국영]]에게 [[벽파]](辟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이듬해 황해도 김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였다. 연암이란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ref name="지만지">[http://zmanz.blogi.kr/search/연암집 지만지 연암집 책소개]{{깨진 링크|url=http://zmanz.blogi.kr/search/%EC%97%B0%EC%95%94%EC%A7%91 }}</ref> 이때 그는 개성유수로 부임한 교우 [[유언호]]에게서 생활하는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린 것도 이에 연유한다. 박지원은 이곳에 생활하는 동안 직접 농사를 지어 생활하였으며,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게 되었다.
         [[1776년]] [[조선 정조|정조]] 때 여러번 학행과 [[문장력]]으로 추천되었지만 번번히 사양하고 고사하였다. 이후 여러번 천거되었는데도 모두 거절한다. 그러나 집안과 주변의 거듭된 권고로 [[1786년]](정조 10년) 50세 때 [[음보]]로 처음 출사하여 조정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787년]] [[조선 정조|정조]]의 명을 받아 [[춘추관]][[기주관]]으로 <[[송자대전]]> 편수에 참여하다. 이때 박지원은 우암 [[송시열]]의 편지 중 [[윤휴]]의 일을 성토한 대목에 오해를 살 만한 뜻이 있다고 보고 한두 자를 삭제할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개탄하였다.
         [[1790년]] 다시 [[의금부|금부]][[도사]]가 되었다. 그해, 8촌 형 [[박명원]]의 부음을 들었다. 그에게 신문물을 전해주고 그의 재주를 아끼고 사랑했던 친척이었다. 박지원은 '삼종형금성위증시충희공묘지명 (三從兄錦城尉贈諡忠僖公墓誌銘)'을 쓰고 조문하였다. 이어 [[사복시]][[주부]]로 전보되었다가 다시 [[사헌부]][[감찰]]을 거쳐 [[제릉]]령(齊陵令)이 되고, [[1791년]](정조 15) [[한성부]] [[판관]]을 거쳤다. 이후 안의(安義) 현감 · 면천(沔川) 군수(1797년)를 거쳐 양양(襄陽) 부사(1800년) 등 지방 수령으로서 자신의 이용후생론을 실험하고 그 경험을 지식으로 구체화하였다. 《열하일기》에서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 풍요하게 하기 위한 이용후생론을 제시하며, 조선 사회의 편견과 타성의 폐단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그 개선책을 강구하였다. 또한 [[북벌론]]을 말하면서도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음을 꾸준히 지적하였다.
         [[청나라]]로부터 괘종시계, 태엽시계, [[자명종]], [[망원경]], [[안경]] 등을 본 뒤로 그는 조선의 수준으로 [[청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청나라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인 뒤 실력을 양성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편이 옳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당시의 배청의식 속에서 수용되기는 어려웠다. 그의 안의현감 시절은 [[열하]] 여행의 경험에서 본 것으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면천군수 시절에는《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안설 按說》 등을 저술하였다.
         [[1791년]](정조 15년)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안의 현감으로 내려간 연암 박지원이 부임 첫날 지역 터줏대감들과 술자리에 앉았다.<ref name="pisoss">[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4/16/2011041600250.html '엉덩이 뿔 난' 연암 박지원… 현감 생활 4년을 엿보다] 조선일보 2011.04.16</ref> 토호들은 그에게 놀이나 하나 하자며 엉뚱하게도 글짓기 경연(競演)을 시작한다. 벌칙은 술, 운자(韻字)는 '지'였다. "술술 잘 넘어가는 안의 막걸리/안주도 좋아라. 황석산 멧돼지." "촌사람 섣불리 보지 마소/ 안의 사람들 정말 무섭지" "아무리 짝사랑이라도 목은 왜 매나/ 벗겨나 보든지 한 번 대어나 보고 죽지<ref name="pisoss"/>" 그를 보기좋게 길들이려던 토호들은 오히려 그에게 골탕을 먹었다고 한다.
         안의현감 부임 직후 [[조선 정조|정조]] 임금이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하고는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직접 응하지는 않았다.<ref name="지만지"/> [[1792년]] 다시 [[조선 정조|정조]]가 문체반정을 명하며 [[남공철]](南公轍)을 다시 보내 통해 순정문(醇正文)으로 지을 것을 명하다. 이에 [[남공철]]에게 속죄하는 내용의 답서를 보냈는데 [[조선 정조|정조]]가 그의 편지를 보고 문장에 감탄하였다.
         [[1793년]] [[조선 정조|정조]]는 그에게 《열하일기》로 잘못된 문체를 퍼뜨린 잘못을 속죄하라고 하교하였다. 박지원은 [[조선 정조|정조]]의 거듭된 경고에 이에 '답남직각공철서 (答南直閣公轍書)'를 썼다. 왕의 문책을 받은 처지로 새로 글을 지어, 글로써 만든 과거 잘못을 덮으려 하는 것은 오히려 누가 되는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덕무]]가 죽자, [[조선 정조|정조]]는 그에게 지시하여 행장을 짓도록 하여 '형암 행장 (炯菴行狀)'을 썼다. 그해 [[이덕무]]의 유고집을 간행하는데 참여하였다.
         그해 면천군청을 새로 중수하였는데, 직접 벽돌을 구워 관아에 새로 정각들을 짓는데 참여했다. 이때 '백척오동각을 지어 놓고 (百尺梧桐閣記)', '공작관기 (孔雀館記)', ‘아침 연꽃, 새벽 댓잎 (荷風竹露堂記)’ 들을 지었다. 고을 아전들이 전에 있던 현감 곽준의 제사를 지내는 일을 높이 사서 '안의현감 곽후의 제사 지내며 (安義縣縣司祀郭侯記)'를 특별히 지었다. [[거창읍]] 이술원에게 정려가 내린 일을 기록한 '충신증대사헌이공술원정려음기 (忠臣贈大司憲李公述原旌閭陰記)'를 지어 주었다. 한편 그는 조선 사회에서 여자들에게 과부 수절, 절개를 일방적으로 강요한다며 지적해왔다. [[1793년]] 함양의 과부 박씨가 수절하다 죽은 것을 듣고, 지나친 수절 풍습을 비판한 '열녀 함양 박씨전 병서 (烈女咸陽朴氏傳幷序)'을 지었다.
         [[1798년]] [[면천군]]에 [[천주교]]가 성행했으나, [[천주교]]도들을 크게 벌하지 않고, 기회를 주어 석방시켰다. [[1798년]]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였다. 《[[과농소초]]》라는 [[농업]] 연구책을 지어 [[조선 정조|정조]]에게 바쳤으며, [[1799년]] [[황강서원]](黃江書院)에 [[한원진]](韓元震)을 배향하는 제사를 지낼 때 집사로 차출되었다. [[1800년]](정조 24년) [[8월]] [[양양]]부사(襄陽府使)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조선 정조|정조]]가 죽고 [[1801년]] 관내의 신흥사(神興寺)의 승려들이 궁속과 결탁, 폐단을 끼치자 [[노론]][[벽파]]가 집권했음에도 치사(致仕)하고 물러났다.
         [[1826년]] 아들 [[박종채]]가 그의 언행을 기록한 《[[과정록]]》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의 문집을 편찬하려 했다가 내용을 보고 놀라 아버지의 저서들을 간행하지 못했다. 후일 [[우의정]]을 지냈던 그의 손자 [[박규수]]는 그의 실학 사상을 계수하여 개화 사상을 열어준 인물로 비중이 크다. 그가 가지는 생각들이 당대의 사고와 많은 차이를 내포하고 있어 그의 문집은 그의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였고, 사후에도 간행되지 못했다. 그의 손자 [[박규수]](朴珪壽)는 [[조선 고종|고종]] 때 [[의정부]][[우의정]]에 올랐지만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려다가 편찬을 그만두었다.
  • 박큰아기
         '''박큰아기'''(朴大阿只, [[1786년]] ~ [[1839년]] [[9월 3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마리아'''(Maria)이다.
         박큰아기는 [[한양]]의 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에게는 동생 [[박희순 루치아]]가 있다. 박희순은 미모가 출중하여 일찍이 왕궁으로 부름을 받아 [[순원왕후]]의 시녀가 되었다. 그녀는 영리하고 유능하여 빠르게 승진했다. 그녀는 [[조선어]]와 [[중국어|청국어]]를 모두 읽고 쓰는데 매우 능했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미모가 문제 거리였다. 그녀가 15세 때, 17세의 [[순조]] [[임금]]이 그녀를 보고서 미모에 매료되어 그녀를 유혹하려고 온갖 노력을 쏟았다.
         [[궁녀]]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영광으로 알았고 그들 중 대부분은 [[왕]]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희순은 왕비의 신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큰 용기를 내어 그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궁궐]]에서는 그러한 소문이 돌았다. 후일에, [[앵베르]] [[주교]]도 그 이야기를 들었고,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용감하고 올곧은 행동이다. 그와 같은 사람은 그 전까지 [[조선]]에서 본 적이 없었다."
  • 박태한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가평군|가평]]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직책 = 前 조선국 승문원 정자<br/>(前 朝鮮國 承文院 正字)
          | 군주 = [[조선 숙종|숙종 이순]]
          | 국적 = [[조선]]
         '''박태한'''(朴泰漢, [[1664년]] ~ [[1698년]])은 [[조선]]의 [[문신 (관료)|문신]] 겸 [[저술가]]이다.
         그의 [[본관]]은 [[고령 박씨|고령(高靈)]]이고 자(字)는 교백(喬伯)이며 [[윤증]](尹拯)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조선 숙종|숙종]] 치세 시기였던 [[1694년]]에 별시문과 을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관직에 발탁되었지만 병약하여 과거 급제 4년여만에 요절하였다.
         * 그는 [[조선 영조|영조]] 때 암행어사의 명불허전으로 유명한 [[박문수]](朴文秀)의 큰아버지이기도 한데 그의 사후 친조카 [[박문수]]는 그의 친손자들 가운데 1명을 박문수 자신의 양자(養子) 출계하기도 하였다.
         {{토막글|조선|작가}}
         [[분류:1664년 태어남]][[분류:1698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고령 박씨]][[분류:17세기 한국 사람]][[분류:조선 숙종]][[분류:조선의 시인]][[분류:유교 신자]][[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학자]][[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가평군 출신 인물]][[분류:조선의 작가]]
  • 박팽년
         | 국적 = 조선
         '''박팽년'''(朴彭年, [[1417년]] ~ [[1456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 겸 학자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순천 박씨|순천]](順天). 자(字)는 인수,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의 학사로 활동했고, 관직은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손자 [[박일산]]이 생존하여 [[사육신]] 중 [[하위지]]가와 함께 후손이 전한다. [[조선 중종|중종]] 때의 권신 [[박원종]]의 일족이기도 하다.
         [[조선]] [[조선 세종|세종]] 때인 14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황보인]]·[[김종서 (1383년)|김종서]] 등과 함께 [[조선 문종|문종]]과 [[조선 단종|단종]]을 보필하였다. 세종 말년에 [[신숙주]], [[성삼문]], [[윤기견]], [[윤회]], 김종서 등과 [[고려사절요]], [[고려사]]의 편찬과 간행에 참여하였다.[[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전후해서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1454년]]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1455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조선 세조|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안평대군]]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후, 그를 [[형조]][[참판]]에 임명하였으나, 세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1456년, [[형조]][[참판]]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질 (1422년)|김질]]의 밀고로 6월 2일 잡혀 갔으며, 고문 받던 중 6월7일 사망하였다.
         뒤에 그 아이는 박비라는 이름으로 숨어 지내다가 [[조선 성종|성종]]때 자수하여 성종으로부터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조선 숙종|숙종]]은 그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절개를 표창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ref name="글로벌 서울 박팽년"> 《[[글로벌 세계대백과]]》〈[[: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서울특별시/서울의 사회·문화#박팽년|박팽년]]〉</ref>
         ***** 삼녀: [[영풍군 (왕족)|영풍군]]([[조선 세종|세종]]의 서자, [[혜빈 양씨]]의 3남)부인 박씨
         * [[조선왕조실록]]
         * [[조선 세종|세종대왕]]
         * [[조선 문종|문종]]
         * [[조선 단종|단종]]
         * [[정보 (조선)|정보]]
         * [[하원 (조선)|하원]]
         [[분류:1417년 태어남]][[분류:1456년 죽음]][[분류:한국의 고문 피해자]][[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조선의 언어학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시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순천 박씨]][[분류:조선 세종]][[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훈민정음]][[분류:사육신]]
  • 박필균
         '''박필균'''(朴弼均, [[1685년]] [[1월 1일]] ∼ [[1760년]] [[8월 2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정치인으로 [[조선 영조|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여 [[노론]]의 맹작으로 활동하였다. 초명은 필현(弼賢), 자는 정보(正甫),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여호 [[박필주]]의 사촌형제이며, [[소론]]의 영수 [[박세채]]의 재종손이다.
         고조부 [[박동량]]은 [[의정부]][[우참찬]]에 이르렀으며 공훈을 세워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지고 사후 [[증직|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증조부 [[박미]]는 [[조선 선조|선조]](宣祖)의 다섯째 서녀 [[정안옹주]](貞安翁主)의 부군이 되어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박세교]]의 사촌인 재종조부 현석 [[박세채]](朴世采)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재종조부이자 스승인 현석 [[박세채]]는 [[김집 (1574년)|김집]]과 청음 [[김상헌]]의 문인으로 그들을 통해 [[이이]]와 [[성혼]]의 학통을 계승했다. [[권상하]]의 문하생 중 수제자 8인인 [[강문 8학사]]의 한 사람인 [[박태만]](朴泰萬)은 그의 숙부였다. 저명한 당대의 [[노론]]학자인 여호 [[박필주]]는 그의 사촌 형으로 박필균의 아들 사근(師近)을 아들이 없던 [[박필주]]에게 양자로 주었다. 또한 [[소론]]의 정객으로 [[사변론]]의 저자인 [[박세당]]도 그의 할아버지뻘 되는 그의 일족이었다. [[조선 효종|효종]]의 부마인 [[박필성]](朴弼成)은 그의 친척 형님뻘이었다.
         [[조선 경종|경종]]대에 득세한 [[소론]]을 피하여 관직의 뜻을 버리고 [[경기도]] [[통진]](通津)에 은거하다가 사촌형 [[박필주]]의 거듭된 권고로 [[1725년]](영조 1년) [[과거 제도|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 봉교가 되고 겸[[세자시강원]]설서(說書)에 제수되었다. 이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가 대교(待敎)가 되었다.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그의 친족인 박필현, 박필몽 등이 연루되었는데, 이때 그는 자기 이름을 필현에서 필균으로 고쳤다.
         [[1740년]] [[홍문관]]부응교(副應敎)에 제수되고 그해 [[6월]]에 [[조선 효종|효종]]의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할 때 축문을 읽는 제관 중 우두머리인 대축(大祝)의 직임을 맡은 노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승정원]][[동부승지]]를 제수받았다.
         그는 [[영조]] 연간에 정계에서 탕평책에 비판적인 [[노론]]의 맹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탕평파]]의 지도자인 [[조현명]]을 공격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 효종|효종]]의 부마인 [[박필성]](朴弼成)의 친척이며 [[영조]]의 서녀 [[화평옹주]](和平翁主)의 남편인 금양위 박명원(朴明源)의 종조(從祖)였으며, 그 자신도 [[영조]]의 깊은 신임을 받았지만 [[척신]]이 발호한다는 혐의를 피하고자 청요직이 부여되면 여러번 사양하였으며, 청렴한 생활을 하여 집안에 재물을 두지 않았다. 한편 왕가의 사위로 알려진 이들의 집에는 발길도 하지 않아 [[박명원]]은 '우리 선대(先代)에서도 왕가(王家)와 혼인이 있었는데, 지금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도 소원하게 대하여 마치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긴단 말인가. 유독 우리 선친께서 소싯적에 그 고아 신세를 비호해 준 일은 생각지도 않는가'하며 그를 원망했다고도 한다.
         [[1758년]]에 동지돈녕부사,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그해 다시 동지돈녕부사가 되어 [[조선 영조|영조]]의 특명으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지중추부사를 거쳐 [[1760년]](영조 36년) 지돈녕부사가 되고 지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도총관 [[승문원]]제조를 겸임하였다. 그해 [[8월 2일]] 지돈녕부사로 재직 중 타계하였다. 벼슬에 있을 때 청백리로 알려져 깨끗한 선비라는 평을 받았다. 그가 죽었을 때는 장례지낼 형편이 안되었다 한다.
         [[분류:1685년 태어남]][[분류:1760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성리학]][[분류:조선 영조]][[분류:조선 정조]][[분류:반남 박씨]][[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박현동 (1886년)
          | 출생지 = [[조선]] [[광주광역시|전라도 광주 瓦谷面 相村里]]
          | 군주 = [[대한제국 고종|대한제국 조선 고종 이형]]
         '''박현동'''(朴玄東, [[1886년]] [[10월 1일]] ~ [[1962년]] [[1월 20일]])은 [[대한제국]] [[조선]] 황조 [[관료]] 직과 [[의병|항일 의병장]]을 지낸 [[대한민국]]의 [[한국의 독립 운동|항일 독립운동가]]이다.
         === 8.15 조선 광복 이후 ===
         그는 1945년 8월 15일 타이베이에서 일본국 패망과 조선 광복을 목도하였고 1946년 8월 2일 조선 고국에 귀국하여 1947년 8월 21일에서 1958년 2월 1일까지 [[한국독립당]] 민족행정자문위원 직을 지냈으며 1948년 종교를 불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하였고 그 후 1958년 2월 1일을 기하여 한국독립당 탈당하였으며 1959년 종교를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또다시 개종하여 개신교 이탈하였다.
         [[분류:1886년 태어남]][[분류:1962년 죽음]][[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조선 의병장]][[분류:한말 의병장]][[분류:건국훈장 애족장 수훈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한국독립당 (1930년)]][[분류:한국독립당의 당원]][[분류:밀양 박씨]][[분류:불교 이탈자]][[분류:환속한 사람]][[분류:개신교도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대한민국의 반일 감정]][[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박희순 루치아
         '''박희순'''(朴喜順, [[1801년]] ~ [[1839년]] [[5월 24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루치아'''(Lucia)이다.
         박희순 루치아는 [[한양]]의 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에게는 같은 데에서 태어난 언니 [[박큰아기 마리아]]가 있었다. 박희순은 미모가 출중하여 일찍이 왕궁으로 부름을 받아 [[순원왕후]]의 [[궁녀]]가 되었다. 그녀는 영리하고 유능하여 빠르게 승진했다. 그녀는 [[조선어]]와 [[중국어|청국어]]를 모두 읽고 쓰는데 매우 능했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미모가 문제 거리였다. 그녀가 15세 때, 17세의 [[순조]] [[임금]]이 그녀를 보고서 미모에 매료되어 그녀를 유혹하려고 온갖 노력을 쏟았다.
         [[궁녀]]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영광으로 알았고 그들 중 대부분은 [[왕]]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희순은 왕비의 신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큰 용기를 내어 그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궁궐]]에서는 그러한 소문이 돌았다. 후일에, [[앵베르]] [[주교]]도 그 이야기를 들었고,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용감하고 올곧은 행동이다. 그와 같은 사람은 그 전까지 [[조선]]에서 본 적이 없었다."
  • 방산수
         '''방산수 이난'''(方山守 李瀾, [[1460년]] ~ ?)는 [[조선]]시대 전기의 왕족이자 시인으로, 이름은 난(瀾)이며, [[조선 세종|세종]]의 서손자이자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 서자였다. 부인은 [[동래 정씨]] 직장 정계은(鄭繼殷)의 딸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이다.
         관련자들이 어우동과의 혐의를 부인하는 가운데 그는 혐의를 부인하지 않고, 도리어 그간 [[어우동]]과 만났던 남성들의 이름을 실명으로 언급했다. [[1482년]](성종 23년) [[8월]] 석방되었으나,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이감]](李堪) 등으로부터 불가하다는 탄핵이 빗발쳤고, [[1492년]] [[7월]] 복작되었으나 역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최세걸(崔世傑) 등의 반대가 빗발쳤으나 [[조선 성종|성종]]이 이를 모두 무마시켰다.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 고조부 : [[조선 태조|태조]] 이성계(李成桂)
         ** 증조부 : [[조선 태종|태종]] 이방원(李芳遠)
         *** 조부 : [[조선 세종|세종]] 이도(李祹)
         [[분류:1460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15세기 한국 사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세종]][[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방정환
         | 소속 = 前 조선소년소녀연합회 회장
         [[1915년]] 생활비 조달을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에서 취직하여 서류 필사 업무를 하였는데,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은 [[토지조사사업]] 즉, [[조선인]]의 토지수탈작업을 담당하여 지탄을 받는 기관이었던지라 곧 사직하고 마는데, 이때 함께 일했던 유광렬과 뜻이 맞아 이후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해 활동한다. [[1917년]]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던 [[천도교]]인 권병덕의 천거로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셋째 딸인 손용화 여사와 중매 [[결혼]]하였다. 그 뒤 손병희가 교주로 있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고 천도교청년회의 핵심 활동가로 부각되면서 삶의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된다. 그 무렵 청년 단체인 경성청년구락부(여기서 구락부는 Club의 일본식 음역이다.)를 조직하여 활동하면서 문예지 [[신청년]](1919~1920)을 편집 발행하는데 관여했으며 청년운동가이자 문학가로서 열성을 보였다.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보성학교 교장 윤익선(尹益善)이 천도교 보성사에서 인쇄한 [[조선독립신문]]을 내다 체포되자 직접 [[등사기]]로 찍은 [[조선독립신문]] 2호를 찍어 중학생들의 도움으로 돌리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일경이 들이닥치기 전에 [[등사기]]를 우물에 버린 덕에, 일주일 만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왔다. 하지만 같이 독립신문 발행에 동참한 청년구락부 동료들은 일경의 [[고문]]으로 옥사하였으며 방정환도 고문을 당했다.
         방정환이 《사랑의 선물》을 만든 이유는 당시 조선의 어린이들이 누릴 만한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미 [[메이지 유신]]의 영향으로 인하여 제법 어린이 문학이 발전하여 어린이책들이 서점에 깔렸는데, 아직도 [[조선]]의 어린이들은 그러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 (잡지)|어린이]]》([[1923년]] 3월 20일 창간- [[1934년]] 3월 통권 122호를 마지막으로 발간 중지)를 창간하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엽서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서 보내 주면 돈을 받지 않고 보내 준다고 선전해도 불과 18명이 신청할 만큼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는 [[일본 제국|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대다수의 [[민중]]들이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던, 그래서 [[민중]]들에게는 [[독서]]가 사치로 여겨지던 [[조선]]의 현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정환은 자신의 특기인 재미있는 구연 동화로 현실의 장벽을 극복하였다.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잡지]]를 선전했다. 《어린이》는 색동회의 동인이었던 [[마해송]], [[고한승]], [[정순철]], [[윤극영]]뿐 아니라 독자였던 [[이원수 (작가)|이원수]], [[윤석중]], 윤복진, 최순애 등이 작품을 투고하면서 이후 [[아동 문학]]가로 이름을 알리는 기회가 되어, 한국 아동문학계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923년]] [[5월 1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하였는데, 색동회라는 이름은 후에 동요작가로 활약하게 되는 [[윤극영]] 선생이 예쁜 색동저고리를 떠올리며 제안한 이름이다. [[1927년]]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형제별〉등의 [[동요]]·[[동화]]·모험 탐정소설인《[[칠칠단의 비밀]]》<ref>[[사계절출판사]]에서 펴냄.</ref> 등의 소년 [[소설]]·동극 창작과 외국 동화 번역에 힘썼으며,1928년에는 세계[[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열기도 하였다. 당시 그가 기획한 전시회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올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1931년]] [[7월 23일]] 잡지의 발행·편집, 동화 구연과 소년문제 강연회 및 집필 중 일제의 가중되는 탄압과 개벽사의 재정난, 소년운동 진영의 분열 등 과로와 스트레스, [[비만]]으로 건강이 나빠진 방정환은 누적된 피로로 쓰러져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 (현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겼으나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간호사]]들에게 동화를 들려줄 만큼 성격이 밝았던 그는 '문간에 검은말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ref>“조선의 어린이를 어떡하나…”가 마지막 말이었다고도 한다. 「빙수를 좋아하던 小波」, 《경향신문》, 1962.5.3 참고.</ref>
  • 배극렴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94153E>'''[[정승|{{{#red 조선 초기의 역대 수상(首相)}}}]]''' ||
         ||<width=30%><:> ||<:> {{{+1 ←}}} ||<:><width=30%><#94153E> '''{{{#yellow 1대 문하좌시중 배극렴[BR](1392)}}}''' ||<:> {{{+1 →}}} ||<:><width=30%> 2대 [[조준(조선)|조준]] ||
         '''[[조준(조선)|조준]]과 더불어 조선 최초의 재상[* 두 명인 이유는 조선 초에는 [[영의정]]같은 총리급 재상이 존재하지 않았고, 좌우상 체제로 갔기 때문이다.]이 된 인물이자 조영무, 최윤덕 등의 선배 격인 조선 최초의 무신 재상.'''[* 조영무가 조선 최초의 무신 재상으로 잘 알려져 있었으나, 배극렴도 무신 출신이었던 만큼 사실은 그가 진정한 최초라고 볼 수 있다.]
         1391년 정월에는 중군 총제사로 임명되었다가 평리를 옮겨 가을 8월에 한양의 궁궐을 수리하는 일을 맡았으며, 1392년에는 만호를 지내다가 파직되었고 여름 4월에는 수문하시중으로 임명되고 이후 판삼사사, 우시중 등을 지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익대 보조 공신 문하좌시중 성산백에 봉해졌고 [[조준(조선)|조준]], [[정도전]] 등과 함께 세자를 세울 것을 청했을 때, 이성계가 신덕왕후를 위해 [[무안대군]]을 세자로 세우려고 하자 배극렴은 [[의안대군]]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인정사]]의 시발점'''이 된것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특히 만약에 반대를 하고 싶어도 그의 위치상 그러기가 힘들었으니, 당시 같이 의논을 하던 재상들은 그를 제외하고는 전부 문신 출신이었던데다 조준, 정도전, 남은은 물론이고, 그들만큼은 아니어도 김사형 또한 고려가 멸망하기 직전에는 정몽주를 견제하는 등 이성계 측과 같은 길을 걸었던 이로써 그들은 전부 다 조선 건국에 영향을 미친 이들이자 진정한 실세들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2인자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발언권이 약할 수밖에 없었으니......특히나 조준을 제외하고는 반대하는 이가 없었던데다, 이후의 상황을 보면 진정한 2인자인 정도전과 그의 지지자인 남은은 이성계와 신덕왕후를 지지하였으니......그가 의안대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은 어쩌면 위치 상 2인자인 만큼 대표 격으로 한 것일 수도 있다.
         [[용의 눈물]]에선 태조 왕건의 수달역으로 유명한 [[김시원(동명이인)|김시원]]이 분했다. 고려말은 간략하게 다루고 조선 건국으로 빠르게 넘어가기 때문에 건국 직후 병사한 그의 비중은 크지 않으나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려 할 때 영광이라며 기뻐하고 옥새를 얻으러 갈 때 [[정비 안씨|대비 안씨]]를 면전에서 겁박해 벌벌 떨게 만드는 등 매우 충성스러운~~하지만 고려 입장에서는 역적놈~~ 신하로 나온다. 그의 죽음에 이성계도 매우 안타까워했다.
  • 백이소
         '''백이소'''(白以昭, [[1557년]] [[경상북도]] [[경주시]] ~ [[1597년]])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융원(隆遠), 호는 부암(傅巖)이다. 본관은 [[청도 백씨|청도]](淸道)이나 옛 지명인 오산(鰲山)으로 쓰기도 한다.
         [[분류:1557년 태어남]][[분류:1597년 죽음]][[분류:조선의 무신]][[분류:의병]][[분류:의병장]][[분류:조선 의병장]][[분류:임진왜란 의병장]][[분류:정유재란 참전 중 사망자]][[분류:임진왜란 관련자]][[분류:정유재란 관련자]][[분류:16세기 한국 사람]].[[분류:백씨]][[분류:청도 백씨]][[분류:문천회맹]][[분류:경주시 출신 인물]]
  • 변수 (1447년)
         '''변수'''(邊修, [[1447년]] [[경상북도|경북]] [[고령군|고령]] ~ [[1524년]])는 [[조선]]의 무신이다. 본관은 [[원주 변씨|원주]](原川)이다.
         [[1479년]]([[조선 성종|성종]] 10) 통정대부 병조 참지(兵曹參知)가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1001023_006 성종실록 100권, 성종 10년 1월 23일 경진 6번째기사]</ref> 이어 승정원으로 옮겨 동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쳐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분류:1447년 태어남]][[분류:1524년 죽음]][[분류:원주 변씨]][[분류:조선의 무신]][[분류:정국공신]][[분류:수군절도사]][[분류:고령군 출신]][[분류:병마절도사]]
  • 변수 (1861년)
         1883년 9월 미국에 파견된 조선의 보빙사절단원, 앞줄 왼쪽부터 부사 홍영식, 정사 민영익, 종사관 서광범, 미국인 로웰, 뒷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최경석, 수행원 유길준, 고영철, 변수
         '''변수'''(邉燧, Byun Soo, [[1861년]] ~ [[1891년]] [[10월 22일]])는 [[조선]] 말의 개화파 관료, 정치가, 개화운동가이자 외교관이며 [[미국]]의 공무원이다. 본관은 [[원주 변씨|원주]](原州)이고, 다른 이름은 수(樹)이며, 자는 한명(漢明), 호는 소천(小泉)이다. [[박규수]], [[오경석]], [[강위]](姜瑋)의 문인이다.
         그러나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일본]]과의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자, 그해 [[8월]] 조선 조정에서 [[일본]]측에 답례로 수신사를 파견할 때 수신사로 임명된 [[박영효]]의 수행원이 되어 서장관 [[서광범]]·[[김옥균]]·[[민영익]]·[[유혁로]] 등과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옥균]] 등이 차관교섭을 벌여 국채위임장에 대한 보장을 받는 동안 다시 양잠술과 화학 공부를 마치고, [[1883년]] [[3월]] 귀국하였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그 결과로 1883년 5월 주[[조선]][[미국]]공사 [[존 루시우스 푸트]](John L. Foote)가 방문하자 답례사절을 선발하였다. 그는 자청하여 답례 사절단의 수행원을 지원하였다.
         [[1883년]] [[6월 11일]] 조선의 친선사절단인 [[보빙사]]가 미국에 파견될 때,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홍영식]]·[[유길준]]·[[서광범]] 등과 함께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임명돼 [[1883년]] 7월 인천항을 출발, 같은해 [[9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기차편으로 뉴욕에 도착한 후 40여 일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 대통령을 만나 면담하고 각 기관을 두루 시찰하고 귀국했다.<ref name="중앙">[https://archive.is/20130426215657/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854588 〈키워드로푸는역시〉 유길준 한국인 최초 미국 유학] 중앙일보 2007-08-17</ref> [[1884년]] 봄 [[일본]]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이후 [[갑신정변]] 직전 대궐 안의 정보를 정탐하고, 정변 직전 사정을 신속하게 알아내 [[김옥균]] 등의 개화당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그는 주[[조선]][[일본]]영사관 영사 [[다케조에 신이치로]]({{lang|ja|竹添進一郎}})와 교섭하여, 일본 영사관군과 낭인들을 지원받았다. [[12월 4일]] 저녁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이 발생하자 일본영사관군과 낭인들을 바로 동원하여 연경당(演慶堂) 경비를 맡게 되었다. [[12월 5일]] [[갑신정변]]이 성공하면서 바로 [[통정대부]] [[외무아문]][[참의]]로 승진했다. 그러나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정변이 3일 만에 무너지자 일본공사 다케조에를 따라 일본 영사관에 숨었다가, 영사관 직원 기노시타의 집에서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인천항에 도착, 센자이마루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2월 12일]], 다케조에 공사가 이들의 피신을 주선하였다. [[김옥균]]·[[박영효]]·[[이규완]]·[[정란교]]·[[서광범]]·변수 등 일행 9명은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 옷을 변복하고 인천주재 주[[조선]]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추격대대를 이끌고 오자, 기노시타의 배려로 일본인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제물포항]]에 정박중이던 쓰지 가쓰사부로({{lang|ja|辻勝三郞}})의 일본 상선 '센자이마루'({{lang|ja|千歳丸}})에 승선했다.
         {{인용문2|내가 이 배에 [[조선]] [[개화당]] 인사들을 승선시킨 것은 공사의 체면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의 말을 믿고 모종의 일을 도모하다가 잘못되어 쫓기는 모양인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이들더러 배에서 내리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도리인가? 이 배에 탄 이상 모든 것은 선장인 내 책임이니 인간의 도리로는 도저히 이들을 배에서 내리게 할 수 없다.|쓰지 가쓰사부로}}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1105023002 <nowiki>[</nowiki>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nowiki>]</nowiki> (45) 세계일주 나선 역관들] 서울신문 2007년 11월 05일자, 23면
         [[분류:1861년 태어남]][[분류:1891년 죽음]][[분류:혁명가]][[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통역사]][[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급진개화파]][[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유길준]][[분류:갑신정변]][[분류:미국의 공무원]][[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메릴랜드 대학교 동문]][[분류:원주 변씨]][[분류: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봉석주
         |태어난 곳= [[조선]] [[충청북도]]
         |죽은 곳= [[조선]] [[충청북도]]
         |복무= [[조선]]
         '''봉석주'''(奉石柱, ? - [[1465년]] [[4월 19일]])는 [[조선]] 전기의 무신이자 장군, 정치인이며, [[계유정난]]과 [[세조 찬위]]에 공을 세운 공신이다. 본관은 [[하음 봉씨|하음]](河陰)이며, 자는 군보(君輔), 호는 서관(墅觀)이다.
         1455년 다시 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56년(세조 2년)에는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고, 1457년 다시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그해 [[8월]] [[길주군|길주]](吉州)의 관노로 영속(永屬)된 여종 정비(定非)와 [[유응부]](兪應孚)의 첩의 딸 환생(還生)을 노비로 하사받았다. 그해 도진무(都鎭撫)를 거쳐 [[1460년]] [[10월]] [[상호군]](上護軍)으로, [[조선 세조|세조]]와 [[정희왕후]]의 황해도(黃海道)·평안도(平安道) 순행(巡幸)을 호종하고 돌아왔으며, 바로 [[전라도]]처치사(全羅道處置使)로 부임하였다. 전라도 처치사로 부임했을 때 탐욕을 부려 말썽이 되었으며, 그 후 전라도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군사들을 시켜 섬에 참깨와 면화를 심게 하여 거두어들인 후 배에 가득 싣고 귀임하여 횡령하였으므로 탄핵을 받아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1461년]] 초 도진무(都鎭撫)가 되었다. 한편 전라도 처치사로 있을 때 불법과 탐욕을 자행하여 대간으로부터 거듭 탄핵을 받자 소환, [[조선 세조|세조]]에게 불려가 질책당하였다.
         하며 [[조선 세조|세조]]가 진노하였다. 그러나 봉석주가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죄를 불복(不服)하고 말이 자못 불손하자 세조는 진노하였다.
         그가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자 세조는 당일로 관직을 박탈하였다. 이후 [[사헌부]]가 그를 거듭 탄핵했으나 [[조선 세조|세조]]가 이를 무마시켰다. 그러나 세조로부터 심하게 질책당하자 [[1465년]] 김처의(金處義)·최윤(崔潤) 등과 같이 역모를 꾀하였다가 탄로날 것이 두려워 자백하였으나 훈작과 관직이 삭탈당하고 [[4월 19일]] 처형되었다.
         [[분류:1465년 죽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군인]][[분류:육군 군인]][[분류:한명회]][[분류:조선 세조]][[분류:신숙주]][[분류:병마절도사]][[분류:정난공신]][[분류:하음 봉씨]][[분류:충청북도 출신 인물]][[분류:참수된 사람]]
  • 상계군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강화군|강화유수부]]에서 병사(의문점을 남긴 음독 절명)
          | 왕조 = {{국기나라|조선}}
          | 아버지= [[조선 정조|정조]](양부) <br/> [[은언군]](생부)
          | 친인척 = [[조선 영조|영조]](증조부) <br/> [[영빈 이씨]](친증조모) <br/> [[정빈 이씨]](양증조모) <br /> [[정성왕후|정성황후 서씨]](적증조모) <br/>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계적증조모) <br/> [[조선 장조|사도장헌세자]](친조부) <br/> [[숙빈 임씨]](친조모) <br /> [[헌경왕후|혜경궁 헌경의황후 홍씨]](적조모) <br /> [[조선 진종|효장세자]](양조부) <br /> [[효순왕후|효순황후 조씨]](양조모) <br /> [[의소세손]](큰아버지) <br /> [[은신군]](작은아버지) <br /> [[은전군]](작은아버지) <br /> 송낙휴(친외조부) <br /> [[홍국영]](양외숙부) <br /> [[풍계군]](동복 아우) <br /> 이창순(동복 아우) <br /> 이창덕(동복 아우) <br /> [[이성득 (조선 왕족)|이성득]] (이복 동생) <br /> [[이철득]](이복 동생) <br /> [[전계대원군]](이복 동생) <br /> [[조선 철종|철종]](이복 조카)
         양부이자 이복 중부 조선 정조 이산
         '''상계군 이담'''(常溪君 李湛, [[1769년]] [[1월 21일]] ~ [[1786년]] [[11월 20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초명(初名)은 '''이준'''(李濬)이다. 그는 [[조선 정조]]의 이복 조카이자 [[조선 철종]]의 백부가 된다.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 초명은 준(濬)이며 뒤에 담(湛)으로 개명하였다. 다른 이름은 '''식'''(湜)이다.
         그는 [[조선 영조]]의 서증손자(庶曾孫子)이기도 하며 [[조선 영조|영조]]의 차남(次男)인 [[조선 장조|사도장헌세자]]의 서손자(庶孫子)이자 [[은언군]](恩彦君)의 장남(長男)이다. [[1779년]] [[원빈 홍씨]]의 상에 빈전 대전관과 수묘관으로 참여하고 소의대부 완풍군(完豊君)에 임명되었으며, [[홍국영]] 등에 의해 [[원빈 홍씨]]의 양자가 되었다. 한때 왕의 잠재적 후계자로 지명되어 가[[동궁]](假東宮)으로도 불렸다. [[1780년]] 다시 상계군으로 개봉되고 이름은 준에서 담으로 개명되었다.
         [[조선 정조|정조]]가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연령이었으나 원빈이 자녀 없이 사망하여 [[홍국영]], [[송덕상]] 등에 의해 이복 백부 [[조선]] [[조선 정조|정조]]의 양자로 내정되고, 이것이 결국 화근이 되어 역모로 몰리게 되었다. [[1786년]](정조 10) [[11월]] 신오의 딸 군부인 신씨와 혼례를 치른 뒤 의문의 음독 사망하는데, 자살설 외에도 [[은언군]]에 의한 독살설과 [[홍국영]] 일파에 의한 독살설이 존재한다. [[조선 철종]]의 이복 백부로,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1849년]](철종 즉위) [[6월 17일]] 복권되고, [[1858년]](철종 9) [[11월 9일]] [[증직|증]] [[현록대부]]에 추증되었다. 묘소의 위치는 실전되었다.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처음 봉작명은 '''완풍군'''(完豊君). [[조선 장조|사도장헌세자]]의 서손자로 아버지는 [[은언군]] 인이며, 어머니는 [[송낙휴]](宋樂休)의 딸로 상산군부인 진천 송씨(常山郡夫人 鎭川 宋氏)이다. [[조선 영조|영조]](英祖)의 서증손자(庶曾孫子)였는데 증조할아버지 [[조선 영조|영조]]의 살아 생전에 태어났다. 아래로 친동생으로 이창순, 이창덕, 이당, [[한각신]]에게 시집간 여동생 1명이 태어났다. 이 중 이당은 또 아버지 은언군의 다른 첩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그밖에 1821년에 사망한 이름 미상의 서모에게서 [[이성득 (조선왕족)|이성득]], [[이철득]]이 태어났고, 다른 서모 [[전산군부인]] 전주 이씨에게서 요절한 이복동생과 [[조선 철종|철종]]의 생부인 이복동생 [[전계대원군|이광]]이 태어났다.
         생부(生父) [[은언군]] 이인에게는 장남으로 증조부(曾祖父)인 [[조선 영조|영조]](英祖)의 생전인 [[1769년]](영조 45) [[1월 21일]]에 [[한성부|한성]] 태어났으며, 처음 이름은 준(濬)이다. 부인은 [[통덕랑]]을 지낸 [[신오]](申王+奧)의 딸로 군부인 [[평산 신씨]](郡夫人 平山 申氏)이다. 유년기와 소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미상이다.
         일설에는 그의 생모가 [[상산군부인 송씨]]가 아니라 [[은언군]] 인과 어느 [[궁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상계군 역시 궁녀에게서 자손을 보았으나, [[조선 철종|철종]] 때와 [[조선 고종|고종]] 때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의 은언군 가족, 상계군 관련 기록들을 대량으로 세초해버려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종친부]]의 법전에 의해 [[왕세자]]의 손자, 서손들에게 봉작되는 군작위와 도정의 작위가 내려졌어야 했으나, [[조선 영조|영조]] 때 봉작이 내려졌다는 기록은 없다.
         [[1779년]] 혹은 그 이전에 [[원빈 홍씨]]가 자녀를 낳지 못하자, [[홍국영]]에 의해 중부(仲父) [[조선 정조|정조]](正祖) 임금과 그의 후궁 [[원빈 홍씨]](元嬪 洪氏)의 양자로 입양, 출계되었다. 당초 은언군은 [[홍국영]]의 제의를 사양했지만, [[홍국영]]의 거듭된 부탁으로 이담을 일단 양자로 보냈다. 홍국영이 왜 은언군의 아들을 선택했는가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있다. [[1779년]](정조 3) [[5월 7일]] 수빈관(守殯官)에 임명되었다.
         [[1779년]](정조 3) [[5월 7일]] [[세자]]의 중손의 예에 따라 종2품 소의대부(昭義大夫)에 임명되고, 같은 날 완풍군(完豊君)에 봉작되었다. 완풍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과 [[홍국영]] 자신의 본관인 풍산에서 한글자씩 따온 것이라 한다. 많은 기록들이 이 완풍군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 [[홍국영]](洪國榮)임을 지적하고 있다. [[원빈 홍씨]]가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고 병사하자, 홍국영은 상계군을 [[원빈 홍씨]]의 양자로 들이고 그를 자신의 외조카라 칭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다른 후궁에게서 자녀를 생산할 수 있음을 들어 일각에서는 반대하였다. 같은 날인 [[5월 7일]] 이복 둘째 큰아버지 [[조선 정조|정조]](正祖) 임금의 후궁인 [[원빈 홍씨]](元嬪 洪氏)가 갑자기 사망했다. 당일 정조에 의해 원빈의 빈전 수빈관(守殯官)에 임명되고 수묘관(守墓官)에 내정되었다.
         [[1784년]](정조 8) [[1월 5일]]부터 [[조선 정조|정조]]는 친히 상계군의 혼처를 찾았다. 그러나 [[1월 21일]]까지도 신하들은 회피하며, 상계군의 혼처를 찾는 [[조선 정조|정조]]의 명에 쉽게 응하지 않았다. 사대부 안광집(安光集)의 딸이 결정되었으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 통덕랑 신오의 딸이 낙점되었다. 1784년 [[7월 2일]] [[사옹원]]부제조(司饔院副提調)가 되고 [[8월 3일]] 특명으로 숭헌대부(崇憲大夫)로 가자되고 [[9월 24일]] 다시 가덕대부(嘉德大夫)로 승작되었다.
         [[1786년]](정조 10)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가 연달아 죽은 해에, 그는 혼례를 올린 직후 [[11월 20일]] [[독약]]을 마시고 음독사했는데, 자살설과 [[홍국영]]의 독살설, 생부 [[은언군|은언군 이인]]이 독살했다는 설 등이 있다. 외조부 [[송낙휴]]에 의하면 사망 직전에도 그는 건강했는데 갑자기 사망했다 한다. 최종 관직은 [[가덕대부]] 상계군이었다. 한편 그의 혼례를 주관하던 김우진(金宇鎭)은 상계군 사후, 상계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파직되고 유배되었다. 그밖에 영조, 정조 때 [[훈련대장]]을 지낸 [[구선복]](具善復<ref>그에게는 외외재종증조부가 된다.</ref>) 등도 평소 원한을 샀다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한다. [[예조판서]] [[서유린]]은 상계군이 죽었다는 보고를 꺼렸으나, 결국 상계군의 사망 소식이 궁궐에 알려지게 되었다. 장례식은 [[조선 정조|정조]]의 특명으로 친왕손의 예대로 예장(禮葬)하였다.<ref>예조에서는 그의 친왕손 장례를 반대하였으나 정조는 [[낙천군]](洛川君)의 전례를 들어 친왕손의 예로 장례를 치루도록 하였다.</ref>
         이어 [[12월 1일]] [[정순왕후 김씨|정순왕후]]가 [[언문]]교서를 직접 발표하여 상계군과 [[홍국영]]을 역적으로 지목하고, 처분을 요구하는 언문 하교문을 [[승정원]]에 내렸다. 정조 3년 당시 상계군이 [[홍국영]] 등에 의해 완풍군에 봉작된 일과 가동궁 또는 왕위 후계자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일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그의 작위는 즉시 폐작되어 그때부터 "역적 담"으로 불리게 된다.<ref>동시에 그의 아버지 은언군 인은 역적 인, 어머니 송씨는 송성(宋姓)으로 격하된다.</ref> 정순왕후가 역적의 가족들도 처분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은언군 일가는 [[강화도]]로 유배된다. 삼사는 합계하여 상계군의 일가를 공격했고, [[조선 정조|정조]]는 계속 거부하였으나 삼사의 합계에 밀려 은언군 인 일가의의 유배를 승인하였다. 이후 정조는 직접 상계군 사건에 대한 언급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상계군에 관련된 일을 언급하지 말도록 신하들에게 계속 부탁하였다.
         시신은 [[한성부]] 북부 [[연희방]] [[연희궁]]좌 근처(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2호선 [[신촌역 (지하)|신촌역]] 2, 3번 출구와 [[연세대학교]] 정문 주변)에 매장되었으며, 후에 사사된 부인 [[군부인 신씨]]도 합장되었다.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1854년]](철종 5) [[2월 1일]]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으나, 후일 그의 묘소는 실전되었다.
         [[1849년]](철종 즉위년) [[6월 17일]] 이복 조카인 [[조선 철종|원범]]이 [[조선 순조|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면서, 철종의 즉위를 주관했던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상계군(常溪君) 내외가 복작(復爵)되고, 이해 [[6월 23일]] 가덕대부(嘉德大夫)로 복작되었다. [[1858년]](철종 9) [[11월 9일]] 정1품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증작(贈爵)되었다. 이때 [[순원왕후]]의 명으로 과거 상계군 사건에 대한 기록이 대거 세초, 각자, 말소되었다. 이후 철종 때와 고종 때 상계군 일가 관련 기록 및 은언군 관련 기록이 대량으로 세초되어 유실되었다.
  • 서명선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달성군]]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국적 = [[조선]]
         '''서명선'''(徐命善, [[1728년]] ~ [[1791년]])은 [[조선]]의 [[문신 (관료)|문신]] 겸 [[정치가]] 및 [[시인]]이다.
         [[서명응]](徐命膺)의 아우이기도 한 그는 [[경상도]] [[달성군]]에서 출생하였고 [[한성부]]에서 성장하였으며 [[조선 영조|영조]] 때인 [[1753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763년]] 증광문과에 을과 급제하였다. 이후 겸사서, 부교리, 교리, 지평, 수찬, 헌납 등을 거쳐 부교리, 사간, 응교 등을 지냈다.
         [[영의정]]과 중추부영사를 지낸 그는 [[조선 영조|영조]] 임금 때와 [[조선 정조|정조]] 임금 때의 원로대신 가운데 한 사람이며 [[시 (문학)|시인]]으로도 활약하였다.
         {{토막글|조선}}
         [[분류:1728년 태어남]][[분류:1791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대구 서씨]][[분류:과거 급제자]][[분류:영의정]][[분류:조선의 시인]]
  • 서명응
         '''서명응'''(徐命膺, [[1716년]]∼[[1787년]])은 [[조선]]의 문신, [[학자]]이다. 자는 군수, 호는 보만재, 본관은 [[대구 서씨|대구]]이다.
         [[한성부]] 출신인 그는 [[조선 영조|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장사·정언·부수찬·수찬·헌납·교리·함경도어사·집의·부응교 등을 거쳐서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에 집의·필선·부응교·교리·응교 등을 거쳐 당상관으로 승진해서 대사간·승지·대사성·부제학·이조참의·황해도관찰사·예조참판·대사헌을 거쳐 홍문관 제학·대사성·대사헌·부제학·도승지·이조참판·예문관 제학·예조참판·갑산부사·황해도 관찰사·수군절도사·형조판서·병조판서·이조판서·예조판서·지중추부사·우참찬·경기도 관찰사·대제학·공조판서·호조판서·평안도관찰사·규장각제학·판중추부사·수어사·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다. 그리고 지경연사와 약방제조도 겸했다.
         [[역학 (철학)|역학]]에 통달했으며 [[실학]] 연구에 전력한 북학파의 시조로 일컬어지며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조선 영조|영조]]의 명으로 악보를 수집하여 《[[대악후보]]》를 간행했으며 글씨에도 능했다. 저서로 《보만재집》, 《계몽도설》 등이 있다.
         {{토막글|조선|작가}}
         [[분류:1716년 태어남]][[분류:1787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학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대구 서씨]]
  • 서산군 (왕족)
         '''서산군 이혜'''(瑞山君 李譿, ? - [[1451년]] [[4월 10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왕족으로 [[조선 태종|태종]]의 손자이며,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적 3남이다. [[조선 세종|세종대왕]]의 조카이다. 정효전 등과 기생을 놓고 다투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된 바 있고, 이름은 혜(譿),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다.
         조선전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휘는 혜(譿)이다. 태종의 손자이며, 세종, [[효령대군 이보]], [[성녕대군 이종]]의 친 조카이다. 아버지는 [[양녕대군]] 이제(讓寧大君 李褆)이고,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증직|증]] 좌의정 광산군 [[김한로]](光山君 金漢老)의 딸로 [[수성부부인]](隨城府夫人 金氏)이다. 부인은 안산김씨(安山金氏) 안산군 [[김개]](安山君 金漑)의 딸로 양천군부인 김씨(陽川郡夫人 金氏)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의 세종 32년의 기사에 의하면 그의 사고 원인에 대해 아버지 [[양녕대군]]이 그의 첩을 빼앗았기 때문이라 기록하였다. 그에 의하면 '혜(譿)는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아들인데, 사랑하는 첩을 아비에게 빼앗기고 심화병을 얻어, 술김에 자주 사람을 죽인 까닭에,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ref>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2월 11일(병술) 2번째기사</ref>'라는 것이다.
         * [[조선 태종|태종]]
         * [[조선 세종|세종]]
         * [[조선 문종|문종]]
         * [[조선 세종|세종대왕]]
         * [[민제 (조선)|민제]]
         * [[이량 (조선)|이량]]
         [[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작가]][[분류:자유 연애]][[분류:조선 세종]][[분류:자살한 정치인]][[분류:병사한 사람]]<!--자해의 후유증에 의한 사망-->[[분류:전주 이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선 (시호)
         *[[조선]]선황제 [[정조]]
         * [[조돈|조선자 돈]]
  • 선조
          [[조선]]의 왕들
         선조는 조선의 14대 왕이다.
         ~~[[인조]]와 함께 조선 최악의 왕 투톱 / 연산군이나, 망국의 군주 고종까지 합해서 '조선조 암군 F4'라는 사람도 있다 카더라~~[* 다만 고종의 경우에는 앞의 세 사람과 동급으로 비교할 정도는 아니고, 일제강점기를 막지 못한 부분이 이미지상 악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인재풀의 포텐이 폭발할 때 재위에 올랐으며[* 이순신, 권율, 류성룡, 이이, 정인홍, 이덕형, 이항복, 이원익 등 '''당대 최고의 인재들이라고 칭송받을 수 있는 인물들이 모두 이 시기 사람들이다!'''] 본인의 인재 보는 안목도 나쁘지 않았다.[* 당시 왠 하급 군관을 10계급 특진시키냐면서 말이 많았던 때도 있었는데 '''그 군관 이름이 이순신'''.] ~~그러나 본인의 인성이 문제여서...~~ '기축옥사' 같은 경우에는 다소 수단이 음습했으나, 이 때만 해도 '왕권 강화를 위한 수단'이라고 실드칠 여지는 있었다.
         왜란 이후에도 그의 삽질은 계속되어, 당시 세자인 '''광해군보다 10살 가까이 어린''' 인목왕후를 들이지 않나[* 사실 이는 현대 관점에서 보면 충공깽이지만, 관례적으로 중전의 지위를 공석으로 놔둘 수 없었던 조선 시대에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크다. 중전은 궁녀들의 모임인 내명부를 통솔하는 안주인 역할을 맡고 있다. 중전은 단순히 사적인 '왕의 배우자'가 아니라, 업무를 통솔하는 직책이기도 하므로 중전이 부재하면 궁궐의 기능에 문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중전은 정치적으로 왕권과 후계의 안정에 큰 기여를 한다. 문종 때 새 중전을 들이지 않았던 탓에 단종이 '수렴청정'을 통한 왕권 수호를 받지 못한 것이 세조의 쿠데타를 쉽게 했다는 분석도 나올 정도.--인목왕후는 오히려 불안정만 불러왔지만--], 심지어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인 [[영창대군]]을 [[유영경]]등과 영합해 나중에 영창대군이 좀더 장성할 때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했다! 그것때문에 광해군은 비정상적으로 보일 정도로 왕위에 집착하게 되고, 영창대군의 최후와 [[인조반정]]의 원인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분류:조선 인물]]
  • 성 (시호)
         * [[조선]] 성황제 [[조선 헌종|헌종]]
  • 성수침
         '''성수침'''(成守琛, [[1493년]] [[3월 6일]]([[음력 2월 19일]])~ [[1564년]] [[2월 7일]]([[음력 1월 25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창녕 성씨|창녕]]이며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聽松)·죽우당(竹雨堂)·파산청은(坡山淸隱)·우계한민(牛溪閒民)이다.
         [[분류:1493년 태어남]][[분류:1564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사상가]][[분류:성리학]][[분류:성혼]][[분류:이이]][[분류:병사한 사람]][[분류:창녕 성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성원묵
         '''성원묵'''(成原默, [[1785년]] ~ [[1865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인이자 학자, 서예가이다.
         [[음서 제도|음보]]로 관직에 올라 [[동궁]]에서 근무하던 중 [[1829년]](순조 29)에 [[조선 문조|효명세자]]가 [[성균관]]에서 친히 주관한 감시(柑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소과와 대과를 거치지 않고 바로 1831년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모사도감도청(模寫都監都廳)이 되고 이후 [[조선 헌종|헌종]] 초에 [[홍문관]]과 [[사간원]], [[사헌부]]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843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 행안변도호부사(行安邊都護府使)로 부임하였다. [[1846년]](헌종 12년) [[사간원]]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1849년]](철종 즉위년)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동반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강등되었다.
         * [[성재기 (조선 사람)|성재기]]
         [[분류:1785년 태어남]][[분류:1865년 죽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음서]][[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서예가]][[분류:창녕 성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성재기 (조선)
         |출생지 = {{국기나라|조선}} [[한성부]]
         |사망지 = {{국기나라|조선}} [[한성부]]
         |거주지 = {{국기나라|조선}} [[한성부]]
         |국적 = {{국기나라|조선}}
         '''성재기'''(成載琦, [[1821년]] ~ ?)는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인이다. [[음서 제도|음서]]로 출사하여 교관으로 재직 중 [[진사시]]에 합격하였다.<ref>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58_033154 성재기] </ref> 동몽교관, [[선공감]] [[봉사]], [[조지서]] 별제, [[장악원|장악원정]] 등을 역임하고, [[아산군|신창]][[현감]] 겸 [[홍성군|홍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에 이르렀다. 자는 운서(雲瑞)이고, 본관은 [[창녕 성씨|창녕]]이다. [[한성부]] 출신.
         [[분류:1821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음서]][[분류:창녕 성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성혼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경기도]] [[파주시]] 파산서실에서 병사(노환)
         |국적= [[조선]]
         |직책 = 前 조선국 좌찬성<br/>(前 朝鮮國 左贊成)
         |군주 = [[조선 선조|조선 선조 이연]]
         '''성혼'''(成渾, [[1535년]] [[6월 25일]] ~ [[1598년]] [[6월 6일]])은 [[조선]]중기의 문신, 작가, 시인이며 [[성리학]]자, 철학자, 정치인이다. 자(字)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또는 묵암(默庵).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창녕 성씨|창녕]]. [[성수침]]의 아들이자 문하에서 수학하다 휴암 [[백인걸]] 문하에서 배웠다. 이때 [[이이]]를 만나 평생 친구로 지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거듭 사퇴하였으나 [[이이]]의 권고로 출사했고, [[이이]] 사후에 출사하여 [[의정부]][[좌찬성]]에 이르렀다. [[문묘]]에 종사된 [[동방 18현|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경기도]][[관찰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특별히 [[전생서]] [[능참봉|참봉]](參奉)을 제수받았는데, 이후 계속 조정으로부터 벼슬이 내려졌으나 성혼은 이를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그 뒤 [[적성]][[현감]]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여러 번 관직이 내려졌으나 사양하였고 [[공조]][[좌랑]]과 [[공조]][[정랑]]을 잠시 지내고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 뒤 [[이이]] 등이 찾아와 그에게 관직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였다. [[조선 명종|명종]] 말엽에 [[이량]], [[이기]], [[심통원]], [[윤원형]] 등의 외척 권신들이 몰락하고 사림파들이 정치에 등용되자 그 역시 출사하였다. 그러나 오래 머물러있지 않거나 사양하기를 반복했다.
         [[조선 명종|명종]]이 죽고 [[조선 선조|선조]]가 즉위하자 그는 인재를 초빙하는 정책을 펴, 선조 초년에 그는 학덕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로도 장원(掌苑), 조지서 사지, 주부, 판관, 첨정 등의 직책이 내려졌으나 모두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을해당론 이후 [[심의겸]], [[정철]] 등을 중심으로 [[서인]]이 형성되자 그는 [[서인]]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조선 선조|선조]]가 오늘날 조정의 인재는 어떠한가 하고 묻자 그는 '몸을 용납하여 지위만 보전하려는 자가 많고 임금을 올바른 도리로 인도하는 자가 적으니, 이는 우려할 만합니다.' 하였다. 또 백성을 구제할 계책으로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고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 주어야 하니, 이는 인심을 굳게 결속시켜 하늘에 영원한 명을 기원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하였다. 그 뒤 물러 나와 상소로 지어 다시 이 내용을 강조하였다.
         [[전라감사]] [[홍여순]]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진주]]에 살고 있던 [[최영경]]을 길삼봉이라고 잡아들였다.<ref name="jud144">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2000) 144</ref> 그러나 사실무근으로 판정되어 석방되었으나, 곧 두 사람이 친교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됨에 따라 최영경은 다시 잡혀와 국문을 받던 도중 의문사했다.<ref name="jud144"/> 그는 [[최영경]]이 [[정여립]]과 사적인 친분은 있더라도 사악한 짓은 같이 하지 않을 사람이라며 변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성혼은 [[정철]]에게 [[최영경]]을 구원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ref name="jud144">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2000) 144</ref> 선조에게도 상소를 보냈지만 간절한 상소에도 선조가 평범한 격례로 답하니 성혼은 사직하고 돌아갔다.<ref name="jud145">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2000) 145</ref>
         경기도 [[파주목]] 주내면 항양리(현 파주시 파주읍 항양리 산 8-2)에 안장되었다. [[1602년]](선조 35년) [[북인]]들에 의해 [[기축옥사]]와 [[정여립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삭탈관작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 복권여론이 나와 [[조선 인조|인조]] 때인 [[1633년]](인조 11년) 복직되고, 그 뒤 다시 [[증직|증]](贈)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그 뒤 다시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그러나 [[남인]]들은 그가 죽은 뒤에도 [[임진왜란]] 당시 임금을 외면하였다고 꼬투리잡아 비난하였다. [[1623년]]부터 [[서인]]계 유생들이 그를 문묘에 종향하려 하였고, [[조선 숙종|숙종]] 때 서인들이 집권한 경신환국 이후 [[이이]]와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으나 남인이 재집권한 기사환국 때 출향되었고, 서인이 재집권한 갑술환국 때 다시 문묘에 복향되었다. 경기도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여산의 죽림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후에 그의 묘소는 [[경기도]]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서인]] 중에서도 [[이황]]의 학설을 인정, 수용하여 [[동인]]과 온건파 [[남인]]들로부터는 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 인조|인조]] 때 그의 위패를 [[이이]]의 위패와 함께 문묘에 모시는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문제를 야기했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중봉 [[조헌]]이나 [[김덕령]] 등도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사위이자 제자인 [[윤황]]의 손자가 [[윤증]]으로 [[소론]]의 영수가 된다. 그의 만년에 길러낸 제자 중에는 [[조선 인조|인조]] 때의 [[친청파]] 정치인 [[김자점]]도 있었다.
         [[분류:성혼]][[분류:1535년 태어남]][[분류:1598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사상가]][[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서예가]][[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조선의 시인]][[분류:이이]][[분류:김육]][[분류:송시열]][[분류:임진왜란 관련자]][[분류:창녕 성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유교 신자]][[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서인]][[분류:소론]][[분류:16세기 한국 사람]]
  • 세종 (동음이의)
         * '''[[조선 세종|세종]]'''(世宗, 1397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왕으로 흔히 '''세종대왕'''으로 불린다. 보통 '''세종'''은 이 인물을 뜻한다.
         * 《'''[[대왕 세종]]'''》은 [[조선 세종|세종대왕]]의 일생을 다룬 [[한국방송공사]]의 [[2008년]] [[드라마]]이다.
  • 소학
         == 조선의 수용 ==
         [[조선시대]]의 '[[바른생활]]' [[교과서]].
         소학은 [[고려]]말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매우 중요시되었다. [[천자문]]과 함께 [[서당]]에서 배우는 기초적인 교재로 쓰였다.
  • 소한당
         * [[권람|소한당]](所閑堂)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권람]]의 호이다.
         * [[신수근|소한당]](所閒堂)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외척인 [[신수근]]의 호이다. [[소한당 권람]]의 사위이기도 하다.
  • 소혜왕후
         |작위 = [[조선의 역대 왕세자빈|세자빈]]
         |작위2 = [[조선의 역대 왕비|왕비]]
         |작위3 = [[조선의 역대 왕대비|왕대비]]
         |후임자4 =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성렬대왕대비)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창경궁|경춘전]]
         |능묘 = [[경릉 (조선 덕종)|경릉]]
         |국적 = [[조선]]
         |배우자 = 추존왕 [[조선 덕종|덕종(의경세자)]]
         |자녀 = [[월산대군]] ([[1454년]] 출생),<br />[[명숙공주]] ([[1455년]] 출생),<br />[[조선 성종|<span style="visibility:hidden">성</span>성종<span style="visibility:hidden">종</span>]] ([[1457년]] 출생) 손자 [[장성원 (배우)]] [[조선 예종|<span style="visibility:hidden>]] ([[1461년]] 출생) 손녀 [[장나라</span>]] ([[1415년]] 출생)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1437년]] [[10월 7일]]([[음력 9월 8일]]) ~ [[1504년]] [[5월 11일]]([[음력 4월 27일]])는 [[조선]] 초기의 [[세자빈]]이자 [[조선 덕종|덕종]](德宗, 추존왕)의 왕비이며 [[시호]]는 '''인수자숙휘숙명의소혜왕후'''(仁粹慈淑徽肅明懿昭惠王后)이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큰아들인 [[조선 덕종|도원군]](의경세자, 덕종)과 혼인하여 [[군부인]]에 봉작되었으며, [[1455년]](세조 즉위년)에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왕위로 즉위하여 자신은 맏며느리로서 [[세자빈]]이 되어 궁궐에 들어갔으나, [[1457년]](세조 3년)에 남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어 사가로 물러났다. 그러나 [[1469년]]에 자신의 둘째 아들인 [[조선 성종|자을산군]](성종)이 왕위에 등극하고, 자신도 궁궐에 다시 들어가 곧 [[조선의 역대 왕비|왕비]]로 진봉되었다가 [[1475년]](성종 6년) [[조선의 역대 왕대비|왕대비]]에 올라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되었다.
         [[의정부시|의정부]][[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양절공 [[한확]](西城府院君 襄節公 韓確)과 남양부부인 홍씨(南陽府夫人 洪氏) 여섯째 딸로,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이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한문과 유교 경전에 능통하여 《열녀》,《여교》,《명감》,《소학》등에서 발췌하여 엮어 《[[내훈]]》(內訓)을 편찬하였다. 내훈은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들의 수신서이자 당시 여성교육의 기본서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 [[불교]] 옹호론자로 [[숭유억불|불교 억압 정책]]에 강력히 반발하였으며, 이 때문에 당시 조정의 신하들과 4차례의 격한 논쟁을 벌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금승법(禁僧法)<ref>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ref> 과 그녀가 추진한 [[봉선사]] 금자경 간행 작업이다.
         그녀는 [[연산군]]의 할머니로도 유명한데, 며느리이자 연산군의 생모가 되는 [[폐비 윤씨|윤씨]]가 왕비 시절 성종의 얼굴을 할퀴는 사건으로 내쫓기고 사사되는 데에는 거의 전적으로 그녀의 의지로 단행되었기 때문이다.<ref>신명호, 조선왕비실록 (역사의아침, 2007) 214페이지</ref> [[1504년]](연산군 10년) 봄에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숭했다. 이 과정에서 윤씨를 폐비하고 사사하는 데 개입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추방했는데, 인수대비는 당사자가 되므로 손자인 연산군과 갈등을 빚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위치한 [[경릉 (조선 덕종)|경릉]](敬陵)이다.
         한씨의 아버지 [[한확]]은 당시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내면서 [[명나라]]로부터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작위를 하사받은 조선 최고의 세도가였다.
         그리고 한씨의 둘째언니는 [[조선 세종|세종]]의 둘째 서자인 [[계양군 (왕족)|계양군]]의 부인으로 한씨의 가문은 양국의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었고 한확은 명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던 당시의 외교관으로서 명나라의 총애를 바탕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1450년]], [[조선 문종|문종]]이 병약하고 [[조선 단종|어린 세자]]사이에서 [[김종서]]와 대립하고 있었던 [[조선 세조|수양대군]]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해서 큰아들인 [[조선 덕종|도원군]]과 세도가 [[한확]]의 막내 여식인 한씨의 정략결혼을 추진했다. 소혜왕후는 수양대군의 이복동생인 계양군의 처제였고, 시어머니가 될 정희왕후의 형부인 홍원용의 생질녀(누이의 딸)였고, 외종언니인 강녕부부인(홍이용의 딸)은 [[평원대군]](세종의 일곱번째 왕자)의 정실이었으므로 여러모로 왕실과 인연이 깊었다.
         한씨의 나이 14살에 수양대군의 큰아들 도원군과 혼인(1450)하여 도원군부인(桃源君夫人)가 되었다. 남편 도원군이 당시 대군(大君)의 적장자로 아직 승습(承襲)하지 않았고, 종친부에는 정의대부(正義大夫)로 기록된 점으로 보아 한씨의 품계는 정2품(正二品) 군부인(郡夫人)임을 알 수 있으나 작호는 [[조선왕조실록]]에 따로 기록된 바가 없다.<ref>세종 107권, 27년(1445 을축 / 명 정통(正統) 10년) 1월 24일(무술) 1번째기사</ref>
         [[1455년]],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하고 아들인 도원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자신도 [[왕세자빈]]이 되었다.<ref>세조 1권,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7월 26일(기해) 1번째기사</ref> 그해 동궁(東宮)에서 두 번째 자녀인 [[명숙공주|태안군주]]를 낳고, 익익년(翌翌年) [[1457년]]에는 세 번째 자녀인 [[조선 성종|자산군]](훗날 성종)을 낳았다.
  • 손돌이
          |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 [[안동시]]
  • 손소벽
         '''손소벽'''( 孫小碧, [[1801년]] ~ [[1840년]] [[1월 31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사람이다. [[세례명]]은 '''막달레나'''(Magdalena)이다.
  • 송기인
         [[2005년]] [[12월 27일]]자로 사목(司牧)직에서 은퇴 후<ref name=or/> [[조선]] 최초의 [[천주교]] 희생자 [[김범우]]의 묘가 있는 [[삼랑진읍]]에서 능참봉을 자처하며 지내고 있다.
  • 송익필
          | 출생지= [[조선]] [[한성부]]
          | 사망지= [[조선]] [[충청남도]] [[당진시]]
          | 국적= [[조선]]
         '''송익필'''(宋翼弼, [[1534년]] [[2월 10일]] ∼ [[1599년]] [[8월 8일]])은 [[조선]] 중기의 서얼 출신 유학자, 정치인이다. 자(字)는 운장, 호는 구봉(龜峯) 또는 구봉(龜峰), 현승(玄繩), 본관은 [[여산 송씨|여산]](礪山)이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신분과 도리를 중시하는 유생들은 송사련에게 등을 돌리며 심히 비난하였다. 송사련은 80세로 죽을 때까지 양반으로 부귀를 누렸지만 선비들은 이를 무시하였고, 사림파가 [[조선 명종|명종]]말엽에 집권하게 되면서 그 화(禍)는 송익필 형제들에게 대물림된다.
         이이·성혼 등과 사귀어 성리학을 논하여 통하였고 예학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문장에 능해 [[이산해]], [[최경창]], [[백광훈]] 등과 함께 8문장가<ref>조선 중기 팔문장계: 이율곡, 송익필, 최립, 하응림, 최경창, 이달, 백광훈, 이산해</ref> 의 한 사람으로 시와 글씨에도 탁월하였다. [[김장생]]·정엽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특히 김장생은 스승의 예학을 계승하여 조선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ref>그러나 송사련과 관련하여 김장생의 제자들은 김장생이 이이, 성혼의 학맥을 계승한 것처럼 하고, 그의 존재를 언급하기를 꺼려하였다.</ref> 특히 예학에 밝아 김장생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후대의 [[송시열]], [[윤선거]], [[송준길]] 등에게로 학문이 계승되었다. 또한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성혼과 이이를 구수(仇讎)로 여기던 인사들은 노여움을 그에게로 돌려 계속 공격했다. 조헌은 글을 올리되 백의 차임으로 도끼를 들고 궐문에 엎드려 '송익필을 굳이 벌 주려거든 나도 죽여 달라'고 청하였다. 그가 이를 듣고필기하되'조여식(趙汝式, 조선의 자)과 만난지가 10년이 넘었는데 소인들이 글 가운데에 나를 못난 사람이라 함으로써 함께 이같이 억울함을 받노라'하며 한탄하였다. [[1586년]] 그의 형제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구수를 피하였다. 이때 조헌이 글을 올려 그의 억울함을 풀어 주도록 극언(極言)하고 또한 그의 현명(賢明)함을 들어 벼슬을 줄 것을 상소하였으나 선조는 들어주지 않았다.
         송익필은 이이, 성혼 등과 너나 하며 평교하던 사이로, 지혜가 뛰어나 '[[서인]]의 [[제갈공명]]'이란 말을 들었는데, 그 신분에 서얼이라는 결정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송익필의 이러한 약점은 '곽사원의 제방 송사'에서 드디어 폭발하였다.<ref name="kimjaejo111">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11페이지</ref> 1579년의 곽사원의 제방 송사가가 [[정언지]] 등에 의해 [[1589년]] 터지게 된다. 이 10년 된 사건은 결국 주관 부처인 공조의 [[참판]] 정언지의 상소로 선조의 결심을 얻어 조사하게 되었다.<ref name="kimjaejo111"/> 그 과정에서 이이 등이 의혹이 있는 송익필 일가의 뒤를 이이가 봐주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음모를 꾸며서 이런 송사 사건을 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얼마 후 이발, 이길, 백유양 등 동인당 편에서 송익필에게 공격의 화살을 집중시켰다.<ref name="kimjaejo112">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12페이지</ref>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의 옥사]]가 발생한다. 선조는 [[좌의정]] 이산해, [[우의정]] [[정언신]] 등에게 위관(委官)이 되어 죄인들을 심문하게 했다.<ref name="lee161">이성무, 재상열전:조선을 이끈 사람들 (청아출판사, 2010) 161페이지</ref> 그러나 정철이 차자를 올려 정언신이 정여립의 일가이니 재판관으로는 적당하지 않으므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선조는 정언신 대신 정철을 우의정으로 제수하고 위관으로 삼았다.<ref name="lee161"/> 기축옥사 결과 2천 명의 동인 당원이 희생되었다.
         그는 무너진 사회 질서를 회복시키는 방안으로 예의와 예절을 강조하였다. 제자들 중 사계 [[김장생]]은 단연 돋보이는 인물로, 그는 송익필에게서 예의와 예절에 대한 예론을 전수받아 이를 아들 [[김집 (1574년)|김집]]과 함께 조선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 부자의 문하에서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미촌 [[윤선거]], 명재 [[윤증]] 등이 배출되어 예학을 더욱 크게 계승 발전시킨다.
         그러나 인조반정의 1등 공신 9명을 직·간접 제자로 둔 서인 세력의 정신적 구심점<ref name="jo01">[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2/25/2010122500172.html 역사에 가려진 '송익필'을 재조명하다] 조선일보 2010.12.25일자</ref> 이었으며, 정여립 사건을 비롯한 역사의 고비마다 논리와 심리를 파고드는 예리한 상소를 통해 동인의 몰락<ref name="jo01"/> 을 불러오게 했다는 평가도 있다.
         아버지 송사련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안당 집안의 노비로서 안돈후의 첩이었기 때문에, 안처겸 형제의 대화를 엿듣고 고변한 송사련은 주종관계와 친척관계를 파탄시킨 인간이라는 지탄을 계속 받게 되었다. 이는 신분제도와 위계질서, 계급제, 가족제가 중요시되던 조선사회에서는 용납되기 힘든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해 송익필은 생전과 사후에도 아버지가 행한 밀고의 멍에를 평생 지고, 사후에도 노비 출신이 참람하게 예를 논한다며 인신공격을 당하였다.
         [[분류:1534년 태어남]][[분류:1599년 죽음]][[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예절]][[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성혼]][[분류:이이]][[분류:송시열]][[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유교 신자]][[분류:임진왜란 관련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여산 송씨]][[분류:병사한 사람]][[분류:기축옥사 관련자]][[분류:서인]][[분류:16세기 한국 사람]][[분류:16세기 시인]]
  • 송준길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충청남도]] [[예산군]]
         |직책 = 조선국 사헌부 대사헌 <br/> (朝鮮國 司憲府 大司憲)
         |군주 = [[조선 효종|조선 효종 이호]]
         |국적= [[조선]]
         '''송준길'''(宋浚吉, [[1606년]] [[12월 28일]] ~ [[1672년]] [[12월 2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였다. [[문묘]]에 종사된 [[동방 18현|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일찍부터 [[김장생]]과 그 아들 [[김집 (1574년)|김집]]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24년(인조 3) 진사로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조선 인조|인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보고 그들을 동정하였고, 소현세자 사후에게는 세자의 아들에게 계승권이 돌아가야 된다고 주장하다가 인조의 눈밖에 났다. 그 뒤 학문 연구에 정진하다 [[1649년]] [[조선 효종|효종]] 즉위 직후 스승 김집의 천거로 발탁되어 청요직을 역임했다. 그 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 [[김수항]]과 함께 [[서인]]논객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때 서인 온건파를 이끌며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윤선도]]의 상소 이후 한때 윤선도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사계는 " 송준길은 자라 반드시 예가의 종장이 될 것이다."고 칭찬하였다. 조선조에서 예학의 쌍벽으로 김장생과 정경세를 꼽았다.
         1624년([[조선 인조|인조]] 2년) 증광과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그해의 진사시에 입격하여 [[진사]]가 된 뒤에도 학문을 계속 연구하였다. 그 뒤 학행으로 천거받아 1630년(인조 8년) [[세자익위사]]세마(洗馬)에 제수된 이후 [[조선 효종|효종]]이 즉위할 때까지 내시교관(內侍敎官)·동몽교관(童蒙敎官)·시직(侍直)·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단지 [[1633년]]에만 잠깐 동몽교관직에 나갔다가 장인인 [[정경세]]의 죽음을 이유로 사퇴하였고, 그 뒤 대군사부로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가르치는 사부의 한사람이 되었다.
         한편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그의 스승 [[김집 (1574년)|김집]]은 소현세자가 살해된 것으로 간주하였고, 그 역시 소현세자가 살해된 것으로 봤다. 소현세자가 죽자 [[조선 인조|인조]]는 차남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는데, 그는 소현세자의 아들을 세손으로 삼아 후사를 이어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민회빈 강씨]]까지 사사되고 석견, 석철 등이 [[제주도]]로 유배되자 강씨가 [[김자점]] 등의 공신세력과 조귀인 등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봤다. 한편 당색으로는 같은 [[서인]]임에도 권력을 장악한 김자점·원두표(元斗杓) 등 반정공신 일파를 계속 공격, 탄핵하였다.
         송시열 등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진선·장령 등을 거쳐 집의에 임명되었고 통정대부로 승진했다. 집의로 있으면서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하였으며, [[1649년]]에 [[조선 인조|인조]] 말부터 권력을 장악한 [[김자점]]·[[원두표]] 등 반정공신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켰으나, 그들이 [[조선 효종|효종]]의 반청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조선이 청나라의 압력을 받자, 그도 사퇴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1657년]](효종 8년) [[8월 18일]] 통정대부 [[세자시강원]]찬선에 임명되었다. 이후 여러번 직책이 개정되면서도 세자시강원찬선을 겸임하여 59년 6월까지 세자인 [[조선 현종|현종]]의 사부로서 가르쳤다.
         그 뒤 [[자헌대부]]로 승진 발탁되어 [[사헌부]][[대사헌]]겸 [[성균관]]제주가 된 뒤 이조판서로 있던 [[송시열]]과 함께 조정의 공론을 장악하였다. 그 뒤 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쳐 [[1659년]](효종 10년) [[병조판서]]로 특별 발탁되었다. 이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우참찬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던 중 [[조선 효종|효종]]이 죽고 [[조선 현종|현종]]이 즉위, 효종상에 대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이른바 1차 [[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이 기년제(朞年祭, 만 1년)를 주장할 때, [[김수항]], [[원두표]] 등과 함께 송시열의 참최복 설을 지지하여 [[남인]]의 [[윤휴]]·[[허목]]·[[윤선도]] 등의 3년설과 논란을 거듭한 끝에 일단 참최복을 관철시켰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는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 상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ref name="park0318">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318</ref>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원칙대로 당연히 기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ref name="park0318"/>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ref name="park0318"/> 서인과 남인의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ref name="park0318"/>
         예론에서 승리한 이후 서인 당내의 남인을 처형하자는 주장에 그는 반대했다. 생각이 다르면 다른 것이지 죽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송시열과 [[김수항]]을 찾아가 사형 반대의견을 개진했고, [[조선 숙종|숙종]]에게도 윤선도의 감형을 적극 주청하기도 했다. 그는 적극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에 반대하고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고 만다.
         [[윤선도]]와 등은 [[예송 논쟁]] 때 [[송시열]]과 송준길이 [[조선 효종|효종]]에게 소현세자빈의 명예회복과 복권을 강력하게 주청했다는 점을 걸고 넘어지며, 그들이 [[소현세자]]를 정통으로 생각했다고 공격하고, [[윤휴]] 등도 이에 동조했다.
         소현세자와 소현세자빈은 [[조선 인조|인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어 죽었고, 세자빈을 구명했다가 희생된 [[김홍욱]]을 의를 위해 희생된 선비라고 확신하던 송시열과 송준길은 윤선도, 윤휴와 남인들의 정치공세에 크게 분노했다.
         [[1663년]] 행 [[부호군]](行副護軍)이 되었고, 그해 9월 [[송시열]]을 변호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1665년([[조선 현종|현종]] 6년) 원자의 보양(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 번째 [[원자]]보양관이 되었다가 사퇴하였다. 이후 김집, 송시열, 윤선거 등과 강독하고 토론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송준길은 [[윤선거]]의 사람됨을 아깝게 여겨 그를 계속 관직에 추천했으나, 윤선거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또 윤선거와 송시열의 사이를 화해시키려 여러번 노력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윤선거는 죽기 직전까지도 벼슬하지 않겠다는 뜻을 결코 꺾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의 아들에게 내려진 벼슬까지 거두어줄 것을 간청했다.<ref name="balchik0207">정구선, 발칙한 조선의 지식인을 만나다 (비전비앤피 애플북스, 2009) 207페이지</ref> [[1669년]](현종 10년) [[4월]] 윤선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 현종|현종]]은 "윤선거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가? 내가 한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었으니, 정말 슬픈 일이다"라고 애석해했다. 또한 송준길은 "사우(스승과 동료)간에 윤선거를 엄탄지신(嚴憚之臣)이 될만 하다고 했는데 불행히 일찍 죽었으니, 정말 국가의 불행입니다."하고 탄식했다.<ref name="balchik0207"/> 윤선거 사후 그에게는 [[이조]][[참의]]가 [[추증]]되었다.<ref name="balchik0207"/> 그에 대한 추증은 당시 [[의정부]][[좌참찬]] 송준길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는데, 송준길이 아뢴 바를 보면 "윤선거는 국가에서 예우하던 신하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어 사우들이 모두 애석해합니다. 윤선거가 항상 죄인으로 자처하여 소장(梳章)에까지 한번도 직함을 쓰지 않은 것은 성상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사후 명정(銘旌)에도 '성균 생원'이라 썼다 하니, 그 예우하는 도리로 [[증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했다.<ref name="balchik0207"/>
         [[1673년]](현종 14년 [[2월]] [[조선 현종|현종]]의 특명으로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시|의정부]]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성균춘추관관관상감사 세자사에 추증되었다. 1674년 [[조선 효종|효종]]의 왕비인 [[인선대비]]가 죽자 또 한 차례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일어나게 되고(제2차 예송 논쟁),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설이 서인의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누르고 남인의 주장을 관철시킴으로써 남인이 정권을 장악, 1675년(숙종 1) [[허적]]·[[윤휴]]·[[허목]] 등의 공격을 받아 관작을 추탈당하였다. 이어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그해 2월 증작이 복작되었다.
  • 송지효
         {{조선인 정보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송준효'''([[1606년]] [[12월 27일]] ~ )는 [[조선]]의 [[부인]]이다.
         | 《[[천명: 조선판 도망자 이야기|천명: 조선판 도망자 이야기]]》
         [[분류:조선 인물]]
  • 순천군 (1518년)
          | 왕조 = [[조선]](朝鮮)
          | 친인척 = [[금천군 (1515년)|금천군 이함]](형) <br /> [[강양군 (1453년)|강양군 이숙]](조부) <br /> [[담양군 이거]](양증조부) <br /> [[계양군 이증]](친증조부) <br /> [[조선 세종대왕|조선 세종대왕 이도]](고조부)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에서 병사
         '''순천군 이관'''(順川君 李琯, [[1518년]] ~ [[1577년]] [[10월]])은 [[조선]] [[조선 중종|중종]]· [[조선 인종|인종]]· [[조선 명종|명종]]· [[조선 선조|선조]] 때의 [[왕족 종실]] 겸 [[성리학|성리학자]]이다.
         그는 [[조선 세종대왕]](1397년 ~ 1450년)의 서자(庶子)인 [[담양군 이거]](1439년 ~ 1450년)의 양증손(養曾孫)이기도 하다.
         * [[원천군 (1533년)|원천군 이휘]] (같은 시대의 조선 왕족 종실 친척이자 학행 및 효행자.)
         * [http://www.rfo.co.kr/view_party.php?list_mode=people1&refnum=063&party_name= 대한제국 조선 황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 순천군 이관]
         {{토막글|조선|작가}}
         [[분류:1518년 태어남]][[분류:1577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전주 이씨]][[분류:유교 신자|이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조선의 학자]][[분류:조선 중종]][[분류:조선 인종]][[분류:조선 명종]][[분류:조선 선조]][[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조선의 저술가]]
  • 순헌황귀비
         |출생지 = [[조선]] [[한성부]]
         |국적 = {{국기|조선}} <br /> {{국기|대한제국}}
         |배우자 = [[대한제국 고종|대한제국 조선 고종 황제]]
         |출판사=조선일보
         [[분류:1854년 태어남]][[분류:1911년 죽음]][[분류:조선의 후궁]][[분류:대한제국의 후궁]][[분류:대한제국의 교육인]][[분류:영월 엄씨]][[분류:운현궁]][[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일제 강점기 사람]][[분류:병사한 사람]][[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숙명여자대학교]][[분류:서봉장 수훈자]]
  • 순화군
         '''순화군'''(順和君, [[1580년]] [[음력 10월 10일]] ~ [[1607년]] [[음력 3월 18일]])은 [[조선]] 중기의 [[왕족]]이다. 아버지는 조선의 제14대 왕 [[조선 선조|선조]]이며 어머니는 [[순빈 김씨]]이다. 이름은 보(𤣰), 시호는 희민(僖敏)이다.
         양인과 사대부, 노비 가릴것 없이 잡아 구타하였고, [[수원시|수원]]으로 유배당한 뒤에도 부사들이 자신에게 인사를 오지 않는다 하여 물의를 빚었다. [[1607년]] 풍병(風病)으로 사망하였고 시호는 [[조선 정조|정조]] 때 [[정존겸]]의 상소로 추서되었다.
         [[1580년]](선조 13) [[음력 10월 10일]] 조선의 14대 왕 [[조선 선조|선조]]와 [[순빈 김씨]] 소생으로 태어났으며, 그는 [[조선 선조|선조]]의 여섯째 서자였다. 그는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민가의 재물을 약탈하는 등의 행동을 하여 양사(兩司)로부터 거듭 탄핵당했다. 특히 그는 술만 마시면서 행패를 무렸으며 남의 재산을 빼앗았다. 이복 형인 [[임해군]]이나 또다른 이복 형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으나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이 되었다.
         이후 장인 황혁, 처조부 황정욱과 함께 [[안변군]]의 토굴에 감금되었다가 [[경상남도|경상도]] [[밀양시|밀양]]으로 이송되고, [[1593년]](선조 26) 초, 부산 다대포에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군의 본진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는 선조에게 항복 권유문을 쓰게 하라는 강요를 받고 항복권유문을 썼다. 그러나 처조부 황정욱은 비밀리에 항복 권유문은 진심이 아니라는 글을 써서 숨겨둔 뒤, 항복권유문을 쓰는 하인편에 딸려서 같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글을 써서 보냈다. [[1593년]](선조 26) [[8월]] [[부산광역시|부산]] [[다대포]]항에 정박된 배 안에 구금되어 일본으로 보내지려 할 때, 명나라의 사신 심유경(沈惟敬)과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카]]의 회담이 성사되어, 그해 [[9월 29일]]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이복형 [[임해군]], [[김귀영]], 장인 [[황혁]], 처조부 [[황정욱]] 등과 함께 조선군에 송환, 인계되었다.
         [[1604년]] [[한성부]]의 이수준의 집에 감금된 상태에서 [[풍]]에 맞아 병석에 누워있다가 사망했다. 사망하자 선조는 특명으로 그의 작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다음은 순화군이 죽었을 당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후에 [[조선 정조|정조]]조에 이르러 [[부사직]] [[정존겸]]이 그의 시호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 희민(僖敏)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 부 : [[조선 선조|선조]]
         {{조선의 왕자}}
         [[분류:1580년 태어남]][[분류:1607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자]][[분류:조선 선조]][[분류:임진왜란 관련자]][[분류:포로]][[분류:운현궁]][[분류:조선의 공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중풍으로 죽은 사람]][[분류:한국의 강간범]][[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신면
         {{다른 뜻|[[신면 (1607년)|조선 전기의 문신, 군인 신면|조선 후기의 문신 신면]]}}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국적= [[조선]]
         |친척= [[신정 (1442년)|신정]](동생), [[윤회 (조선)|윤회]](외증조부), 윤경연(외할아버지), [[숙원 신씨]](이복 여동생), [[신용개]](조카), [[한명회]](사돈), [[정호]](장인), [[한확]](사돈)
         '''신면'''(申㴐, 또는 申沔, [[1438년]] ~ [[1467년]] [[5월 22일]])는 [[조선]]전기의 문신, 군인으로 [[신숙주]]의 차남이며 [[좌의정]] [[신용개]]의 아버지이다. 본관은 [[고령 신씨|고령]](高靈)이다. 우부승지, 지공조사 등을 역임했고 [[승정원]][[도승지]]로 [[조선 세조|세조]]를 보필하였다.
         [[음서 제도|음보]]로 관직에 올라 행 부승(行副丞)으로 재직 중 [[1455년]](세조 1년)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그 뒤 [[1458년]] [[도염서]]령(都染署令),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 등을 거쳐 [[조선 세조|세조]]의 명을 받고 [[함길도]] 도체찰사로 나간 아버지 [[신숙주]]를 위문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1461년]](세조 7) [[3월]] [[사헌부]] 장령이 되고, 1463년 [[승정원]]우부승지‧지공조사(知工曹事), 이듬해 다시 우부승지가 되었다. 1464년 12월 [[승정원]]우승지를 거쳐 [[1465년]] 무거 참시관(武擧參試官)으로 무과를 주관하였다.
         [[1465년]] [[5월]]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조선 세조|세조]]를 보필하였고 [[1466년]]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같은해 아버지인 [[신숙주]], [[정창손]](鄭昌孫) 등과 함께 독권관(讀券官)이 되어 문과의 초시, 중시를 관장하였다. 그해 [[양정]]이 [[조선 세조|세조]]의 퇴위를 권고하자 의금부 판사(義禁府判事) 윤자운(尹子雲)과 함께 [[양정]]을 탄핵, 처형하게 했다.
         [[1471년]](성종 2년) 윤 9월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추록되었다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홍귀달(洪貴達)·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최한정(崔漢禎)의 반대로 추탈되었다. [[숭록대부]] [[좌찬성]] 겸 [[이조 판서]](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吏曹判書) 행 [[가선대부]] [[관찰사]] 겸 [[함흥]][[부윤]](行嘉善大夫咸吉道觀察使兼咸興府尹)에 [[추증]]되었다가 [[조선 중종|중종]] 때 다시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추증]]되었다.
         ** 조부 : [[신장 (조선)|신장]](申檣)
         * 외증조부 : [[윤회 (조선)|윤회]](尹淮)
         * [[이행 (조선)|이행]]
         * [[윤회 (조선)|윤회]]
         * [[조선 세조|세조]]
         * [[이징 (조선)|이징]]
         * [[양정 (조선)|양정]]
         [[분류:생년 미상]][[분류:1467년 죽음]][[분류:음서]][[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군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 세조]][[분류:신숙주]][[분류:한명회]][[분류:고령 신씨]][[분류:조선의 공신]][[분류:적개공신]][[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작전 중 사망자]][[분류:살해된 사람]][[분류:한국의 장군]]
  • 신병주
         서울대·건국대·국민대·가톨릭대·서울여대 등에서 조선 시대 지성사, 조선 시대 후기 사회와 실학, 한국사를 이끈 지성들 등 조선 시대 사상과 문화 관련에 대한 내용을 주로 강의하고 있다.
         역사의 대중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KBS의 '역사추리', 'TV 조선왕조 실록', '역사 스페셜', 『불멸의 이순신』 자문을 맡았으며, 현재 KBS의 'HD 역사스페셜', EBS의 어린이 역사드라마의 자문을 맡고 있다. [[남명 조식|남명]]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외교통상부 외규장각도서 자문포럼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규장각에 소장된 자료를 바탕으로 선조들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92052&cid=41708&categoryId=41736]]</ref>
         *66세의 [[조선 영조|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하룻밤에 읽는 조선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조선]] 최고의 명저들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신사헌
         '''신사헌'''(愼思獻, 1520년 ~ ?)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성백(誠伯), 아명(兒名)은 '''신충헌'''(愼忠獻)이고, 본관은 [[거창 신씨|거창]](居昌)이다. [[단경왕후]] 신씨의 친정 조카이자, [[연산군]]의 왕비였던 폐비 신씨의 친정 종손자가 도니다. [[신승선]]과 [[신수근]]의 후손이고, 외가로는 [[임사홍]]의 외증손자가 된다. 또한 증조모를 통해 [[세종대왕]]의 외5대손이 된다. [[한성부]] 출신이다.
         초기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음서]]로 관직에 올라 [[찰방]](察訪)을 역임했고, [[진사]]시에 합격했다. 이후 다시 [[음서|음직]]으로 [[현감]]을 지내다가 [[1558년]](명종 13년) [[과거 제도|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지만, [[과거 시험]] 문제를 시험 감독관인 [[정사룡]](鄭士龍)에게 뇌물을 주고 답을 미리 알아냈다가, 시험의 장원급제자의 문제가 공론에 오르면서 그가 뇌물을 주고 답안을 미리 알아낸 것도 밝혀져 문제가 되기도 했다. 곧 파방되었지만, [[조선 명종|명종]]비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李樑)의 심복이 되면서 이듬해 다시 과거 복과조치 되었다. 이후 정랑, 성균사예, [[사간원]]사간, 봉상시부정 등을 지내며 [[이량]]의 심복으로 활동하다가 [[1563년]](명종 18) [[이량]]이 사림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면서, 그해 [[8월]] [[심의겸]], [[기대항]] 등의 공격을 받고 [[이량]], [[윤백원]](尹百源), [[이감 (조선)|이감]], [[고맹영]] 등과 함께 6간으로 몰려 몰락하였다. [[1563년]] [[8월]] [[제천시|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두달 뒤 [[거제도]]로 이배도었다.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며, [[양주군|양주]] [[장흥면]] 삼상리에 매장되었다.
         1520년(중종 15)에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생일은 미상이다을 지낸 [[신승선]](愼承善)의 증손이고, 할아버지는 [[신수근]](愼守勤)이며 [[연산군]]의 부인 [[거창군부인 신씨]]는 그의 대고모가 되며, 그의 또다른 대고모는 [[세종대왕]] 아들 [[광평대군]] 여의 손자였던 회원군 쟁의 아들인 승평부정 형에게 시집갔다. [[조선 중종|중종]]의 첫 부인으로 [[중종반정]] 때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는 그의 고모가 된다. 아버지는 사헌부장령, 행령(行義盈庫令) 등을 지낸 신홍조(愼弘祚)이고, 어머니는 풍천임씨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지냈으나 [[갑자사화]],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죽은 [[임희재 (1472년)|임희재]](任熙載)의 딸이다. [[임사홍]]은 그의 외증조부였다. 자는 성백(誠伯), 다른 이름은 충헌(忠獻)이다.
         결국 [[1558년]](명종 13년) [[9월]]부터 대간과 [[사헌부]] 등의 여러 차례 논계와 규탄으로 공론(公論)이 조성되면서 [[정사룡]]은 한때 파직되고, 신사헌은 과거급제가 취소되었으며 곧 유배되었다.<ref>그러나 어디로 유배되었는지는 실록에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ref> 그해 [[12월]] 아들 신희(愼喜)가 아버지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 [[조선 명종|명종]]이 [[윤원형]]을 견제할 요량으로 [[인순왕후]]의 친정 외삼촌이자 부계로는 10촌인 [[이량]](李樑)을 찾아가 그의 심복이 되면서 [[1558년]] [[12월]] 왕이 [[승정원]]에 그가 억울하게 삭방되었다고 전교를 내렸다. [[1559년]] [[3월]] [[이량]] 등의 힘으로 그는 과거 급제에 과거 급제자에 복과(復科)되었다. [[사헌부]]가 그의 복과를 취소할 것을 여러번 요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어 그해 [[3월 29일]] 아들 신희는 다시 아버지의 억울함을 [[조선 명종|명종]]에게 상소로 호소했고, 이 상소가 받아들여지면서 그의 복과가 확정되었다.
         [[조선 성종|성종]]과는 다중으로 인척관계에 해당되었는데, 그의 대고모가 [[조선 성종|성종]]의 아들 [[연산군]]의 부인 [[폐비 신씨]]로서 성종의 며느리였고, 친 고모는 [[단경왕후]]로 성종의 다른 아들 중종의 부인이자 성종의 며느리였다. 그의 외할아버지 임희재의 형 임광재(任光載)는 성종의 사촌여동생이자 [[조선 예종|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혼인했고, 임희재의 동생이자 그의 외종조부 [[임숭재]](任崇載)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혼인하였다. 따라서 그의 친가, 외가로도 모두 성종과 인척, 사돈간이 된다.
         {{토막글|조선|정치인}}
         [[분류:1520년 태어남]][[분류:음서 제도]][[분류:조선의 문신]][[분류:음서]][[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연좌제]][[분류:양주시]][[분류:조선 명종]][[분류:거창 신씨]][[분류:조선 성종]][[분류:부정 행위]][[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신석우 (1895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경력 = [[조선일보]] 사장 <br/> [[신간회]] 상임위원 <br/>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하이 주재 대한 임정]] 교통총장<br/> [[한국독립당]] 교통도시행정위원 <br/> [[한국독립당]] 국방외교행정위원
         신석우는 1924년 30세의 나이에 만석꾼 부친을 설득해 8만 5천원을 주고 [[조선일보]]를 인수하였다. 만성적인 경영난을 겪고 있던 조선일보는 신석우의 인수로 재도약 계기를 마련했으며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신석우는 1927년 2월 15일 오후 7시 경성 종로 기독교 청년회 대강당에서 열린 [[신간회]](新幹會) 창립총회에서 사회를 맡았고 이상재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산되자 신변에 위험을 느낀 신석우는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에게 조선일보 사장직을 물려주고 상해로 탈출했다.
         《[[삼천리 (일제 강점기의 잡지)|삼천리(三千里)]]》는 1936년 6월호 기사에서 장안의 유명 인사들이 타고 다니던 자동차 가격표를 공개한 적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신석우가 조선일보 사장 시절에 타고 다니던 승용차 1대의 가격은 7,000원으로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8억 4천만원에 이른다.
         [[분류: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분류:1895년 태어남]][[분류:1953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 사람]][[분류:한국독립당의 당원]][[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조선일보]][[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중화민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고령 신씨]][[분류:대한민국의 침례교도]][[분류:와세다 대학 동문]][[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러시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자유 연애]]
  • 신수근
         '''신수근'''(愼守勤, [[1450년]] ~ [[1506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외척이다. [[신승선]]과 [[중모현주]]의 아들로, [[조선 세종|세종대왕 이도]]의 4남인 [[임영대군|임영대군 이구]]의 외손이자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처남이며, [[조선 중종|중종]]의 장인이다. 따라서 왕실과는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하였으며, 그 외에도 그의 부인은 [[권람|권남]]의 여섯째 딸로 [[남이]]의 처제가 된다. 또한 두번째 부인은 [[인수대비]]의 친정 사촌 형제였던 한충인의 딸이다. [[1506년]] [[중종반정]] 직전 반정 참여를 권유받았으나, 도의상 반정에 참여하기를 거절했다가 살해되었다. 본관은 [[거창 신씨|거창]](居昌), 자는 근중(勤仲), 호는 소한당(所閒堂)이며, 시호는 신도(信度)이다.
         [[신승선]]의 아들로 어머니 [[중모현주]]는 [[임영대군]]의 딸이자 [[조선 세종|조선 세종대왕]]의 손녀딸이었다. [[조선 성종|성종]] 때 [[음서]]를 통해 [[장령]]이 되어 조정에 입문하였고, 누이동생이 연산군의 비가 된 뒤로 [[우승지]], [[도승지]], [[이조]] [[판서]], [[우찬성]], [[좌의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또한 진성대군([[조선 중종|중종]])이 그의 사위가 되었다.
         [[박원종]], [[성희안]] 등은 그에게 꾸준히 사람을 보내 [[조선 연산군|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조선 중종|진성대군]]을 추대할 것을 권고했으나 신수근은 자신의 사위를 위해 누이를 배신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1506년]] [[음력 9월 2일]] [[성희안]], [[박원종]]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 때 박원종 일파가 보낸 이심, [[신윤무]] 등에게 수각교에서 격살(擊殺)되었다.
         《[[조선왕조실록|중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수근은 [[폐비 신씨]](愼氏)의 오빠로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총애를 얻어 세력과 지위가 극히 융성하니, 권세가 한때를 휩쓸었다. 오랫동안 이조(吏曹)를 맡아 거리낌없이 방자하였으며, 뇌물이 폭주(輻湊)하여 문정(門庭)이 저자와 같았고, 조그만 원수도 남기지 않고 꼭 갚았다. 주인을 배반한 노비(奴婢)들이 다투어 와서 그에게 투탁(投托)하였으며, 호사(豪奢)를 한없이 부려 참람됨이 궁금(宮禁)에 비길 만했다.<ref>민족문화추진회, 국역《[[중종실록]]》14 집 71 면.</ref>
         : 임금이 ‘[[고금 동충]](古今同忠)’이라는 4자를 써서 내려 주고 이르기를, "신수근(愼守勤) 은 [[포은]](圃隱)과 함께 충의(忠義)가 같다."하고, 호조에 명하여 사우(祠宇)를 만들어 주고 그 곁에 각(閣)을 세워서 이것을 새기어 걸게 하라고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영조실록]] 영조 51년 8월 24일 기해 2번째기사.</ref>
         [[조선 중종|중종]]의 장인이며,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처남이다. 또 [[조선 세종|세종대왕]]의 외증손자로, 사돈인 [[조선 성종|성종]]은 그의 외재종형이 된다. 성종은 두 아들들을 신수근의 누이와 딸에게 각각 장가들게 해 이중으로 사돈 관계를 맺었다.
         ** 어머니 : [[중모현주]] 전주 이씨([[임영대군]]의 딸, [[조선 세종|세종]]의 손녀, [[조선 세조|세조]]의 조카)
         *** 여동생: [[폐비 신씨]]([[조선 연산군|연산군]]의 비)
         *** 매제 : 조선 10대 국왕 [[조선 연산군|연산군]]
         **** 차녀: [[단경왕후]]([[조선 중종|중종]]의 비)
         **** 사위 : 조선 11대 국왕 [[조선 중종|중종]]
         *** 사돈 : 조선 9대 국왕 [[조선 성종|성종]]
         * [[조선 연산군|연산군]]
         {{토막글|조선|정치인}}
         [[분류:1450년 태어남]][[분류:1506년 죽음]][[분류:거창 신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음서]][[분류:조선의 문신]][[분류:유교 신자]][[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살해된 사람]][[분류:화기에 죽은 사람]][[분류:암살된 사람]][[분류:조선의 부원군]]
  • 신애라
         {{조선황후 정보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국적 = [[조선]]
          | 형제자매 = [[조선세조|세조]] [[조선예종|예종]]
         '''신애라'''(辛愛羅, [[1415년]] [[3월 7일]] ~ )는 [[조선]]의 [[황후]]이다.
         [[분류:조선 인물]]
  • 신응희
         '''신응희'''(申應熙, [[1858년]]/[[1859년]] [[11월 2일]] ~ [[1928년]] [[2월 12일]])는 [[조선]] 후기·[[대한제국]]의 무신,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갑신정변]] 당시 행동대원으로 참여하였다. 본관은 [[평산 신씨|평산]]이다. 다른 이름은 응희(應凞)이다.
         무관으로 재직하며 [[박영효]]의 심복이 되었으며, [[1883년]](고종 20년) [[5월]] [[김옥균]], [[박영효]] 등의 추천으로 [[일본]]으로 유학, [[일본]] [[도야마 하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8월]] 귀국하였다. 이후 남행부장 겸 사과, 후영군사마 등을 역임하여 [[갑신정변]] 거사에 참여하였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조선 고종|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景祐宮)으로 모셨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정변이 3일만에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6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왔으며, [[1886년]] [[5월]]에는 [[박영효]], [[김옥균]]을 암살하려고 [[조선]] 조정이 파견한 [[지운영]](池運永)을 [[김옥균]]의 유인책으로 [[유혁로]], [[정난교]], [[이규완]] 등과 함께 유인하였다. 김옥균, 박영효에게 불만이 있는 척 가장하여 한참 안심시킨 뒤 [[지운영]]을 유인하여 암살 계획을 폭로하였다.
         [[1894년]](고종 30년) [[7월]] 사면을 받고 귀국, [[박영효]]의 심복으로 활동했으며 [[1895년]] [[박영효]], [[유혁로]] 등과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했다가 [[유길준]]의 밀고로 폭로되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을사 보호 조약]] 이후 사면받고 귀국, [[중추원]]부찬의, [[1908년]](융희 2년) [[전라남도]][[관찰사]], 겸임 [[전라남도]][[재판소]] [[판사]]를 지냈으며, [[1910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전라북도]][[도지사|도장관]], [[1919년]] [[전라북도|전북]][[도지사]]를 역임했다.
         [[1858년]](철종 9년) [[11월 2일]]에 [[신식]](申式)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일설에는 [[11월 5일]]에 태어났다는 설, [[9월]]생 설도 있다. 출생년대에 대해서도 다른 설이 있어 [[1859년]]생 설이 있다. [[대한제국]]의 관원 이력서와 [[조선총독부]] 관원 이력서에는 1858년생 설과 1859년생 설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한성부]] 서서(西署) 동영동(東嶺洞) 42통 7호 출신으로, 이후 [[경성부]] 북부(北部) 송현방(松峴防)에서 거주하였다. 어려서 집안의 서당인 가숙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소년 시절에 첫 결혼을 하였지만, 첫 부인과 이별한 사연은 알려져있지 않다.
         그는 키와 체격이 컸다 한다. [[조선총독부]]에서 남긴 인사자료 중 그의 체형과 성격에 대한 자료에 의하면, 거구의 비대한이며 풍채는 당당했지만, 도량이 아주 좁아서 타인을 포용할줄 모른다는 평을 남겼다.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행동대의 1개 부대를 이끌고 [[서재필]], [[정난교]], [[서재창]], [[윤경순]], [[유혁로]], [[이규완]] 등과 함께 생도들, 장사패들을 이끌고 궐내에 잠입하였다. 그는 [[서재필]]의 부대, [[이규완]]이 인솔하는 부대와 함께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국왕과 비빈들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겼다. 그러나 [[12월 7일]]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이규완]] 등 10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886년]](고종 23) [[박영효]], [[서광범]], [[이규완]],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이듬해 그는 [[박영효]] 등과 함께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1896년]] 다시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망명생활 중 그는 [[도쿄사범학교]](東京師範學校)를 다녔다. 그는 일본에 체류하며 [[유혁로]], [[정난교]] 등과 함께 [[박영효]], [[김옥균]]의 경호를 담당하였으나 어느정도 거리를 두었다. [[1886년]] [[5월]] [[이규완]]이 [[지운영]](池運永)이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임을 간파하자, [[김옥균]]의 지시로 [[유혁로]], [[정난교]] 등과 함께 김옥균, 박영효에게 불만이 있는 척 가장하여 김옥균 암살밀지를 받고 일본으로 온 지운영을 유인, 그를 안심시킨 뒤 [[조선 고종|고종]]의 밀서와 비수, 칼 등을 압수하였다. [[1888년]](고종 23) 다시 배편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894년]] 초 귀국하였다.
         [[1904년]] [[4월]] 중순 [[조선 고종|고종]]은 주한일본국공사관에 조선인 출신 정치적 [[난민]] 신청자 중 [[박영효]], [[유길준]], [[장박]], [[조희연]], [[이두황]], [[이진호]], [[권동진]], [[구연수]], [[정란교]], [[이규완]], 이범래, 신응희 등 14명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나머지 다른 망명객은 송환할 것을 요청하였다. 주한일본공사는 [[4월 14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이들의 송환을 거절하였다.
         [[전라남도]][[관찰사]]로 재직 중, [[1909년]](융희 3) [[8월]] 의병운동 탄압 작전인 [[한국통감부]]의 남조선대토벌작전을 지원하고, 의병들을 회유하는 공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한국통감부]]는 당시의 한국 관원들 중 신응희를 지목하여 "그는 폭도의 절멸에 열중하여 군대 간부와 함께 전후 2회 폭도가 창궐하는 지방을 순시하면서 군수 이하를 경고, 장려하고 민중을 훈유하는 등 백방으로 수단을 강구"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 조선총독부 고등관 재직 ====
         [[1910년]] [[10월 1일]] [[한일합방조약]] 체결과 동시에 [[조선총독부]]고등관에 임용되었다. 한일합병 조약 직후 [[전라북도|전라북도 장관]] [[고등관]]3등(咸鏡南道長官高等官三等), 종5위(從五位)가 되었고<ref name="실록친일파">{{서적 인용
         [[함경남도|함경남도 장관]] 재직 시 [[일본]]과 [[미국]]의 어업 도구와 그물 등을 들이고 양식업을 독려하여, 함경남도 일대의 어업 생산량을 늘렸다. 특히 [[조선총독부]]의 평에 의하면 "[[전라북도]] 서호진(西湖津) 이북의 어업이 舊來의 면모를 일신하여 융성해지고 관내의 저금 액수가 장관의 독려로 이상 증대를 초래한 치적이 있다고 평가됨"이라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측의 인사자료에 의하면 한 도의 장관으로서 백성들에게 털끝만한 위엄이라도 실추하지 않는 것만을 염려하며, 부하가 직무를 행할 때 큰 일 작은 일을 불문하고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다. 한편 그의 일본인 부인 신매자(申梅子)가 [[3.1 운동]] 전후하여 한때 [[대한애국부인회]]에 관여하여 부인회 함흥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18년]] [[9월]] 황해도 도장관으로 전임되었으며. 그해 [[11월]] 훈4등과 금배 한 잔을 선물로 받았다. [[1919년]] [[4월]] [[3.1 운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도장관 명의로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경고문에서 그는 [[미국]]의 민족자결은 조선의 독립과 하등 관계가 없는 망발이며, 앞으로 시위에 참가하는 자는 가차없이 탄압할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이후 [[자제단]]에 가입, [[황해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각 군에 [[자제단]]을 조직했다.
         1921년 [[2월]] 황해도지사에서 물러났으며 동시에 휴직을 신청했으며, [[1923년]] [[2월]] 도지사직에서 사퇴했다. [[1922년]] [[2월]] [[흥린건축주식회사]] 취체역에 선임되었다. [[1924년]] [[4월]] 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ref name="실록친일파"/>
         [[1924년]] [[4월]]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만든 내선융화단체인 [[동민회]]의 결성에 참여하고, 동민회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동민회]] 본부 이사, [[1927년]] [[동민회]] 상담역의 직책을 맡았다. [[1926년]] [[11월]] [[경성부]][[부군면협의회|부협의회]] 의원 후보자로 추천되었으며<ref>"京城府協議員 公認候補如此", 동아일보 1926년 10월 16일자 2면, 사회면</ref>, [[11월 20일]]의 투표에서 113표를 받아 6위로 낙선하였다.<ref>"日人 十八名에 朝鮮人 十二名", 동아일보 1926년 11월 22일자 2면, 사회면</ref> [[1928년]] [[2월 12일]] 중추원 참의로 재직 중, [[경성부]] 종로구 도렴동 자택에서 [[급성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조선총독부]]의 관원 이력서에는 그의 인물됨을 부정적으로 평하였다. 한 도의 장관으로서 백성들에게 털끝만한 위엄이라도 실추하지 않는 것만을 염려하며, 부하가 직무를 행할 때 큰 일 작은 일을 불문하고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인사 기록에 의하면 그의 인물됨을 원래 준민 교혜(寯敏巧慧)하며 부하를 대하는데 아주 엄하지만 윗사람을 맞이할 때는 아첨을 하고 허리를 굽실거리기에 정신이 없다. 천성이 교묘하고 영리하기 때문에 중후함이 결여되었고, 움직이기만 하면 이익을 쫓는 버릇이 있다며 부정적으로 평하였다. 그밖에도 [[조선총독부]]는 그의 인물됨을 평가하기를, 경박한 미국의 공기에 접한 그는 협소한 인물에 더하여 일종의 뻔뻔스러움이 숨어 있으며 툭하면 건방진 태도를 보인다. 지식이 저급하고 천하의 형세에 어둡다고 하였다. 다만 됨됨이는 도량이 아주 협소하지만 축재(蓄財) 문제에는 깨끗하여, 억지로 재산을 모으는 일에 급급한 것 같지는 않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분류:1858년 태어남]][[분류:1928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호흡기 질환으로 죽은 사람‎]][[분류:육군 군인]][[분류:급진개화파]][[분류:혁명가]][[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한국의 장군]][[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군인]][[분류:갑신정변]][[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
         [[분류:일제 강점기의 정치인]][[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박중양]][[분류:평산 신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신태영 (1891년)
         |출생지 = [[조선]] [[한성부]]
         |근무 =[[조선군 (일본군)|일본 조선군]] 제19사단<br/>[[조선군 (일본군)|일본 조선군]] 제20사단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일본이 군을 파병한 ‘시베리아 간섭전쟁’ 당시, 신태영은 북만주 이북에 파견된 일본군 연대 소속 장교로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가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 육군]] 중좌였다. 그는 특히 1943년 무렵에는 학생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임시특별지원병제도 종로익찬위원회’에 참여해 병력 동원의 선전, 선동에 협력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발표한 ‘잡아라 철의 신념, 첫 출진의 목표는 야스쿠니 신사’라는 제목의 수기에서는 “제국의 신민이 되어 대화민족과 혼연일체가 되어 일본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를 개척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자신의 첫 출진의 목표가 “야스쿠니 신사(안장)”였다고 밝히기도 했다.<ref>{{저널 인용
         광복 후 육사 동기생 대부분이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참여하였으나, 그는 근신하는 뜻으로 군문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뒤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 터진 이후 자진 입대, [[1948년]] [[11월]] 대령계급과 함께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 겸 국방부 제1국장이 되었다.
  • 신팔균
         | 국적 = [[조선]]
  • 신후담
         '''신후담'''(愼後聃, [[1702년]] [[2월 8일]] ~ [[1761년]])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실학]]자, [[성리학]]자이자 [[철학자]], 소설가이다. 본관은 [[거창 신씨|거창]](居昌)이고 자(字)는 이로(耳老), 연로(淵老), 호는 하빈(河濱), 돈와(遯窩), 금화자(金華子)이다. 박세흥, [[성호 이익]]의 문인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영혼 불멸론, 사후세계를 허황된 교리이며 [[불교]]의 사상를 짜깁기한 것, 협박이자 혹세무민으로 보았다. [[불교]]의 교리를 차용했으면서도 불교를 비판한다며 [[기독교]]를 비판하였다. 그는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천주교]]에 대한 것도 접하였다. 특히 [[1724년]]에는 이익에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보낸 문답에서 [[마테오 리치]]의 인물됨됨이를 이익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신후담이 서태(마테오 리치)의 인물됨을 묻자 성호 이익은 "이 사람의 학문은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그가 저술한 문자로서 [[천주실의]]와 천학정종 등 여러 서적을 보면, 비록 그의 도가 우리 유교와 반드시 합치되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그 도에 나아가 그것이 도달하는 바를 논한다면, 그 또한 성인이라 할 수 있다."고 답하였다.<ref name="hyoo61">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61페이지</ref> 또한, 그는 평소 [[이익 (1681년)|이익]]이 관심을 두었던 [[역사]]학과 [[지리학]]에도 몰두했다.<ref>신병주,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332페이지</ref>
         [[1745년]](영조 21년) [[10월 10일]] [[이익관]], [[이순관]]에 연관된 이색(李穡)이 괘서 사건으로 [[의금부]]에서 형문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신후담은 이색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뤘다가 소환, [[조선 영조|영조]]의 친국 국문을 받았다.<ref name="chinguk">영조실록 62권, 1745년(영조 21년, 청 건륭 10년) 11월 3일 경오 4번째기사, "숙장문에 나아가 권두령, 이용발, 신후담, 신후함 등을 국문하다"</ref> 그러나 단지 자신의 외삼촌이기 때문에 장례를 치뤘을 뿐이라 답하여<ref name="chinguk"/>, 별다른 처벌이나 불이익은 받지 않았다.
         그의 문하생들과 순암 안정복의 문인들은 천주교에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공서파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노론]]에 의해 [[신서파]] 남인이 숙청당한 뒤에도 조선 말까지 정치세력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 힘은 미약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도 편견이고, 사람 따라 달라지는 편애라고 주장했다. 그는 "천주된 자가 널리 천하의 모든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 중에서 사사롭게 사랑함이 있어서 혹은 은총을 내려 주기도 하고 혹은 내리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우(公祐)가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우(特祐)로서 천상의 참된 복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천주가 편벽되어 공평하지 못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ref name="taegeuk107">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107페이지</ref>
         신후담은 [[천주실의]]를 읽어본 뒤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해 "그 귀결은 천국, 지옥의 설로 사람들을 겁주어 유혹하고, 사람이 죽어도 정령(精靈)은 불멸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사람이 죽기를 기다렸다가 상벌을 내린다는 것에 불과하다<ref name="hyoo">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90페이지</ref>"고 규정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천국, 지옥의 설로 사람들을 겁주어 유혹<ref name="hyoo"/>'한다며,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을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공갈, 협박으로도 해석하였다.
         좋은 일을 한다 해서 사후에 천당에 오른다는 보장이 없다고 보았다. 더욱이 [[하느님]]을 믿어야만 천당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두고 하느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차별적인 시혜를 베푸는 하느님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영언려작]]의 서문에서도 강조하는 '천상에 변함없이 있는 복'이란 사람이 죽은 뒤에 영혼이 불멸하여 선한 사람이 천당에 오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ref name="hyoo101">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101페이지</ref>
         그는 천당과 지옥을 논하는 것이 공허한 공론이라 보았다. 그는 '스스로 즐거운 곳에 있으니, 군자의 마음은 어느 때나 편안하고, 순조롭게 대하여 살고 죽는 것에 대 해 근심을 하는 일이 없다"고 하여, 죽음을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그리스도교]]의 태도와 유교의 당당한 사생관을 대비시켰다.<ref name="sa100">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100페이지</ref>
         사후세계 역시 현실을 망각하거나, 현실에서 이탈하려는 행동으로 보아다. 그는 [[유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일상의 규범인 사친, 사군에 대한 일인데 반해 천주교의 가르침은 하늘의 복, 천상의 복을 구하는 것만을 옳게 여겨서 사친, 사군 등 일상의 도리를 저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대비하였다.<ref name="hyoo102">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102페이지</ref> 따라서 이것은 "윤리를 업신여기고 이치를 어그러뜨리는 것이며, 사사로움을 따르고 이익을 바라는데 머무는 것이니 어찌 심히 미워할 것이 아니겠는가. ... 저들이 학문하는 방법은 오로지 자기 복을 구하는데서 나왔으니, 그것은 역시 불성(不誠)함이 심하며, 오로지 사사로운 이욕으로 마음을 삼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ref name="hyoo102"/> 그는 사후에도 인간의 영혼이 지각능력이 있는가, 감각능력이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한 기능이 없다면 천국에 가서 좋은 것을 어떻게 느끼고, 지옥에 가서 고통을 어떻게 느끼느냐는 것이다.
         그는 [[영혼]]은 육체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천주교]]에서 영혼은 인간의 바깥으로 드러난 형체의 모상인 외모가 아니라, 인간의 안에 존재하는 실체의 모상인 체모라고 한 데 대해, 신후담은 "형체가 있은 다음에 혼이 있는 것이지, 먼저 혼이 있고 이 혼의 모상에 의지하는 것이 형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여, 혼이 체모(體模)가 될 수 없다고 부정하였다.<ref name="hon106">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106페이지</ref> 그는 [[영혼]]이 실제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이 죽으면 소멸하여 느낌, 자각을 할수 있는가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는 영혼의 존재가 실체규명이 불가능, 불분명하며 죽은 뒤에 혼은 흩어지고, 몸은 땅에 들어가 썩어서 소멸한다고 보았다. 신후담은 주역의 귀신생사설을 근거로 "사람이 태어남은 음(精)과 양(氣)가 모여서 개체를 이루고 죽게 되면 혼은 날아가고 백은 내려가서 흩어져 변하게 되니, 변하게 되면 존재하는 것도 없어진다.<ref name="hyoo101">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101페이지</ref>고 하였다. 따라서 사후에 어떤 자각을 하거나 느낀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영혼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다른 세계에 가서 복과 안녕을 누린다는 것은 허황된 공상으로 봤다.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에서 천주(하느님)을 [[유교]] 경전의 '상제'나 '천(하늘)'과 일치시키면서 [[송나라]] [[성리학]]의 [[태극]]이나 리의 궁극적 실재성을 부정하였다.<ref name="taegeuk97">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97페이지</ref>
         [[마테오 리치]]는 리가 인심이나 사물에 있다는 것은 리가 사물의 뒤에 존재하는 것은 리가 사물의 뒤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사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하여, 리理를 사물의 속성으로 규정하였다.<ref name="taegeuk98">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98페이지</ref> 이에 대해 신후담은 "리와 사물은 애초에 기르고 나누어 두 가지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니, 이제 이것으로 理가 사물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옳지만, 만약 이 사물에 앞서서 이 사물이 되는 리가 없다고 하면, 이 사물이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랴?"라고 하여, 리는 사물에 내재하면서 사물의 존재근원으로 보았다.<ref name="taegeuk98"/> 그는 인간이 태어나지 않더라도 그 전에 살던 인간에게는 도덕성과 판단력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이는 인간이 없어도 존재하는 개념으로 보았다.
         신후담은 [[기독교]]가 영혼불멸론, 천국지옥을 [[불교]]와 동일하거나, [[불교]]의 아류로 보았다. 그는 [[천주교]] 교리에서 말하는 천당지옥설과 정령불멸설은 [[유교]]에서는 없는 불교의 설이라 지적하였다. 그는 "천주교가 불교와 다른 것이 무엇인지, 우리 [[유교]]와 같은 것은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다.<ref name="bul91">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91페이지</ref>"고 하였다. [[그리스도교]] 비판에 앞서 그는 삼봉 [[정도전]]의 《[[불씨잡변]]》을 통독, 완독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영혼이나 사후세계, 천당 지옥론은 [[불교]]의 그것과 다를바 없는 허위, 혹세무민으로 보았다.
         [[마테오 리치]]는 사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공허(空虛)의 상태에서는 '이理'가 의존할 수 없어서 떨어지고 말 것이라 하여 사물에 앞서서 리가 존재할 수 없음을 밝혔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나무]]와 [[돌]]처럼 형태가 있는 사물과 달리 리는 무형, 형태가 없는 것이므로 하늘이나 빈 공간에서 떨어질 염려가 없음을 강조하고, 하늘과 땅이 형성된 뒤에도 하늘과 땅 사이에 빈 공간이 있지만, 리는 어디에나 있으며 떨어질 리가 없음을 지적하였다.<ref name="leelee99">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99페이지</ref>
         그는 젊어서 [[안정복]]을 만나 [[독서]]하는 방법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때 그는 "성인과 현자의 글은 만 번 정도 읽어야 비로소 의미를 깨닭을 수 있다.<ref name="hass">한정주, 《조선 지식인의 독서 노트》 (포럼, 2008) 90페이지</ref>"고 하였다.
         * 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분류:1702년 태어남]][[분류:1761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실학자]][[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작가]][[분류:반기독교주의자]][[분류:조선의 소설가]][[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거창 신씨]][[분류:병사한 사람]]
  • 실업팀
         [[야구]], [[축구]], [[농구]], [[배구]]에서는 [[프로 스포츠]]화가 진행되기 전 까지 기업 실업팀 실업리그가 '최상위 리그'로서 명성을 누렸다. 야구와 축구는 1980년대 프로가 출범하기 전 까지, 농구와 배구는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프로가 시작되기 이전까지가 실업리그의 전성기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종목에서 프로 리그 출범 이후로 많은 실업팀 선수가 프로선수로 전환했다. 축구의 경우는 [[중공업]], [[조선]], [[석유화학]] 등 제조업 팀이 많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한국축구를 이끌어 나간 중심은 금융팀이 금융단 축구를 박정희의 비호 아래 육성하면서 본격적인 세미프로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야구는 한 때 실업리그가 존폐 상태에 놓일 정도로 쇠퇴했으나 2010년대에는 [[프로야구]] 붐을 타고 아마추어 야구단이 새롭게 설립되면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농구, 배구는 실업팀이 고사 위기에 놓인 상태이다.
  • 심대윤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경기도]] [[안성시]] 가곡(佳谷) <br> (현재의 [[평택시]])
         |거주지= [[조선]]
         |국적= [[조선]]
         '''심대윤'''(沈大允, [[1806년]] ~ [[1872년]])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본관은 [[청송 심씨|청송]](靑松), 자는 진경(晉卿), 호는 백운(白雲) ‧ 석교(石橋)이다.
         사물의 실리를 통하여 실득(實得)을 탐구하는 그의 학문 자세가 곧 그가 평생 지향했던 학문 방법이었다. 이러한 학문자세는 장구(章句)에 얽매어 해석하는 정주(程朱)의 학문과 이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당시 학자들의 학문풍토와 그 방향을 달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성취한 경학세계 또한 당시 학자들의 경전해석과 그 궤를 달리한다. 그가 실을 바탕에 깔고 경학으로 현실에 대응하려고 한 자체가 이미 주자의 사유와는 그 담론을 전혀 달리한다. 그는 현실 토대에서 벗어나 관념적으로 이해한 정‧주적 학문 태도를 부정하고 실리와 실득에 바탕한 학문 방식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특징은 가학적인 학통과는 약간의 관련성이 있는데, 그의 증조부 심악(沈䥃)의 형이었던 [[심육]](沈錥)이 조선 [[양명학]](陽明學)의 개조라고 불리는 [[정제두]](鄭齊斗)의 수제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생을 걸었던 경학 저술은 양적인 면에서는 물론이며, 질적인 면에서도 19세기 경학사의 한 획을 긋는 업적이다. 위당 [[정인보]]는 [[심대윤]]에 대하여 “근세의 학자로서 [[이익 (1681년)|이익]]과 [[안정복]]은 역사학으로 빼어났고, [[정약용]]은 정치학으로 뛰어났다. 그러나 [[심대윤]]은 적막한 가운데 외롭게 지켜, 명성이 파묻히게 되었다. ...그러나 공정하게 논평하건대 정밀한 뜻과 빼어난 해석이 여러 학설 가운데에서 빼어났으니 삼한(三韓‧조선) 경학의 밝은 빛이라 하겠다.”라고 평하였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심대윤(沈大允)}}
         [[분류:1806년 태어남]][[분류:1872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사상가]][[분류:조선의 실학자]][[분류:조선의 양명학자]][[분류:조선의 역사가]][[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번역가]][[분류:반기독교주의자]][[분류:청송 심씨]][[분류:소론]][[분류:19세기 한국 사람]]
  • 심상학
         '''심상학'''(沈相學, [[1830년]]/[[1845년]] ~ [[1890년]] [[5월 10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 관료이자 외교관이다. [[승문원]]과 [[홍문관]] 등에 근무할 때 겸직으로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임명되어 [[대한제국 순종|세자 척]](뒷날의 [[대한제국 순종|순종]]을 가르쳤다. [[순원왕후]]의 외종손이고<ref>순원왕후의 외삼촌 심능적(沈能迪)이 심상학의 증조부, 심영의 5대조가 된다.</ref>, [[연극]][[배우]] 겸 [[영화]][[배우]], 탤런트인 [[심영 (1910년)|심영]](沈影)의 할아버지이다. 그러나 [[심영 (1910년)|심영]]의 아버지 심완섭은 심상학의 서자였다. 자(字)는 덕초(德初), 본관은 [[청송 심씨|청송]](靑松)이다.
         1863년(철종 13년)부터 [[조선 철종|철종]]이 친히 주관하는 응제에 2등으로 합격한 이후, 고종이 정기적으로 주관하는 각종 응제에 3등 이상의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음서 제도]]로 관직에 올라 잠시 [[의금부]]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초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직부전시 자격을 받고 [[과거 제도|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1873년(고종 10년) 문과에 급제, [[규장각]], [[승정원]], [[홍문관]] 등에서 근무하고 [[승지]], [[이조]][[참의]], [[예조]][[참의]], [[호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881년]](고종 18)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의 변화된 모습을 파악하라는 밀명을 받고 [[어윤중]] 등과 함께 [[신사유람단]](조사 시찰단)원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파견, 근대적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귀국했으며, 귀국 직후 [[동래부]]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감찰을 하고 귀경했다. 이후 [[예조]][[참판]], 동지성균관사 등을 거쳐 [[1886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부사로 다녀왔으며, 전라우도[[암행어사]]로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협판교섭통상사무와 [[호조]][[참판]](戶曹參判), 안악군수를 역임했다.
         [[1830년]](순조 30) 또는 [[1845년]](헌종 12년)에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나 생일은 미상이며, 본적지는 [[경기도]] [[시흥시|시흥군]]이었다. 본관은 청송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효정공 [[심경택]](沈敬澤)이고, 어머니는 양주조씨로 현령과 목사(牧使)를 지낸 조이순(趙臣+頁淳)의 딸이다. 할아버지 심의복은 현감(縣監)이며, 고조부는 [[심건지]]로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장인이며, [[조선 순조|순조]]비 [[순원왕후]]의 외할아버지였다.
         [[1880년]](고종 17) [[홍문관]] 응교, [[사헌부]] 집의, 부교리 등을 역임했다. [[1880년]](고종 17) [[8월]] [[조선 고종|고종]]이 진전(眞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할 때의 제관인 상례(相禮)로 참여, 찬례(贊禮) 이하 제관들에게 시상할 때 상을 받고 [[당상관]]으로 가자되었다. [[1881년]](고종 18)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정식 전문위원으로 선발, [[어윤중]] 등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어 4개월간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적 문물과 행정 제도를 시찰, 연수하고 돌아왔다. 귀국 직후 바로 동래부 [[암행어사]](東萊府暗行御史)에 임명되어 [[경상남도]] [[동래부]]와 [[부산부]] 지역을 암행하고 [[한성]]으로 입경하였다. [[1881년]] [[12월]] [[평안남도]] 성천부사(成川府使) 겸 성천진관(成川鎭管)으로 부임했다가 얼마 뒤 다시 되돌아왔다. 그 뒤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되어 7사(司) 가운데 [[경리통리기무아문]]의 부[[경리통리기무아문]]사(副經理統理機務衙門事)에 임명되어, 개화 정책의 실무 업무를 맡게 되었다.
         * [[조선 순조|순조]]
         * [[조선 문조|익종]]
         [[분류:생년 미상]][[분류:1890년 죽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통역]][[분류:조선 순조]][[분류:조선 문조]][[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조선의 작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청송 심씨]]
  • 심의면
         '''심의면'''(沈宜冕, [[1808년]] ~ [[1865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주경(周卿), 본관은 [[청송]]이다. [[조선 고종|고종]] 때, [[이조판서]]와 내무 독판을 지낸 [[심이택 (1832년)|심이택]](沈履澤)의 아버지이다. 또한, [[조선 고종|고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심의원(沈宜元)의 친동생이다. [[흥선대원군]]을 조롱하고 멸시하다가 [[조선 고종|고종]] 즉위 후 몰락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 [[1842년]](헌종 8년) [[황해도]][[암행어사]]로 나갔고 삼사의 요직을 거쳐 [[1848년]][[홍문관]]응교가 되었다가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승정원]][[승지]]로 발탁되었다. [[1855년]](철종 6년) [[이조]][[참판]], [[1860년]] [[형조]][[판서]] 등을 거쳐 [[1864년]](고종 1년) 지의금부사가 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정치보복으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사망하였다.
         [[조선 명종|명종]]비 [[인순왕후]]의 방계 후손으로, 청릉부원군 [[심강]]의 11대손이자, [[심강]]의 아들 [[심인겸]]의 10대손이다. [[서인]]의 초대 당수 [[심의겸]]과 [[심충겸]]의 종9대손(從9代孫)이 된다. 이후 그의 가계는 [[서인]]이었다가 [[노론]], [[소론]]이 분당되자 그의 조상들은 [[노론]]이 되고, [[사도세자]]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노론]] 중에서도 [[벽파]]와 [[시파]]가 갈라지자, [[노론]] [[벽파]]에 가담했다. [[노론]] [[벽파]]의 중진이었던 심의면의 할아버지 [[심풍지]]는 [[조선 정조|정조]]가 [[남인]] 인사들을 등용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1837년]]([[조선 헌종|헌종]] 3년) 참봉으로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1842년]]([[조선 헌종|헌종]] 8년) [[옥당]], [[경기도]] [[암행어사]], [[1848년]]([[조선 헌종|헌종]] 14년) [[홍문관]] 응교, [[승정원]] 승지, [[1850년]]([[조선 철종|철종]] 1년)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고, [[1851년]]([[조선 철종|철종]] 2년) 동지[[의금부]]사 겸 승지, [[1853년]]([[조선 철종|철종]] 4년) [[충청남도|충청도]] [[관찰사]], [[1855년]]([[조선 철종|철종]] 6년)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그는 비참한 처지에 몰려 술주정꾼에 노름 등으로 소일하던 [[흥선대원군]]을 조롱하고 멸시하였다. [[흥선대원군]]이 흥선군이었을 때 생계비를 구걸하러 [[김좌근]], [[김병기 (1818년)|김병기]] 등의 집에 왔을 때는 흥선군을 면전에서 멸시하고 백안시했다. 그는 흥선군을 향해 궁도령(宮道令), 상가집(上家) 개라고 하였다. 흥선군은 차남이 고종으로 등극할 때까지도 기억하였다.
         [[1860년]]([[조선 철종|철종]] 11년) [[오위도총부]] 도총관, [[형조판서]]를 지내고, [[1864년]]([[조선 고종|고종]] 1년) 지[[의금부]]사에 이르렀으나, 이전에 [[인현왕후]]의 집이었던 감고당(感古堂)을 함부로 개축하여 사용한 죄로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사판(仕版)에서 영구히 삭제되고 방축향리(放逐鄕里)되었다. 또 다시,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자신은 공주목(지금의 충남 공주)에 찬배(竄配)되는 [[유배]]형을, 아들 [[부윤]] [[심이택]](沈履澤)은 [[제주시|제주도]]에 [[가극]](加棘)되는 [[유배]]형을 당하였다. [[1865년]]([[조선 고종|고종]] 2년) 심의면은 [[유배]]지인에서 죽었고, 사후 죄가 탕척(蕩滌)되었다. 아들 [[심이택]]은 방축향리(放逐鄕里)로 형벌이 감해졌다.<ref>《헌종실록》《철종실록》《고종실록》</ref>
         * 고조부 : [[심택현 (조선문신)|심택현]](沈宅賢) - 이조판서 · 좌참찬 · 판돈녕부사, 시호는 청헌(淸獻)
         * [[심택현 (조선문신)|심택현]]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분류:1808년 태어남]][[분류:1865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학자]][[분류:과거 급제자]][[분류:청송 심씨]][[분류:조선 철종]][[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옥사한 사람]]
  • 심의석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심의석'''(沈宜錫, [[1854년]] ~ [[1924년]])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도시건설자 · 건축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관료였다. 본관은 [[청송 심씨|청송]](靑松)이다.
         한편 그는 파고다공원 내의 팔각정(八角亭, 1897), 조선호텔 내의 원구단(圜丘壇)과 황궁우(皇穹宇) 그리고 석고단(石鼓壇, 1901.11.), 광화문 소재 기념비각(紀念碑閣, 1902.9.) 등 전통건축에도 참여하였다. 또, 당시의 선각자 이채연(李采淵)·남궁 억(南宮檍)과 함께 서울을 개혁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니, 우리 나라 최초의 극장이며 또한 최초의 원형극장인 협률사(協律社, 1902.8.)는 그가 세운 것이다. 그 밖에 이화여고 프라이홀(Fry Hall) 자리에 있던 손탁(孫鐸)호텔(1902∼1903), 덕수궁 내의 석조전(石造殿, 1909) 등도 그가 지었다.
         {{인용문|독립문의 설계는 서재필의 스케치를 기본으로 했다. 서재필은 파리의 개선문을 모형으로 해 기본스케치를 했다. 세부설계도는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러시아인 기사가 했다는 주장도 있음)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공은 당시 유명한 서양식건물 건축기사였던 심의석(沈宜碩)이 맡았다.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 건립 비용은 조선 민중들의 성금으로 충당됐으며 독립문 건립에는 모두 3천825원이 지출됐다.|남도일보 - 전라도역사이야기-83.독립신문과 보성 서재필기념공원}} <ref>[http://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9673 남도일보 - 전라도역사이야기-83.독립신문과 보성 서재필기념공원]</ref>
         {{인용문|미스터선샤인 티저 촬영분에 유진 초이가 독립문을 지나쳐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이 나온다. 그래서 그런지 독립문을 바라보노라면 “그들이 원한 단 하나는 제나라 조선의 ‘주권’이었다”는 의미심장한 문구와 맞물려 유진 초이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인용문|독립문은 중화중심의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였던 조공과 책봉의 체제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의미로 청의 사신을 맞는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1896년 11월 21일 공사를 시작해서 1897년 11월에 완공한 것입니다. 필립 제이슨(서재필)이 직접 파리의 개선문을 보고 기본 스케치를 하였고, 사바틴이 설계를 했으며 조선인 건축기사 심의석이 실제로 건축을 하였습니다.
         정동구락부는 구미외교관과 선교사 그리고 조선인 관료들로 구성된 친교클럽으로 손탁호텔에서 모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압력을 받고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구미열강의 힘을 빌려 일본세력을 물리치고자 배일 성향의 정동구락부에 시종을 보내어 호의를 베풀고 신하들에게도 정동구락부를 통한 구미인들과의 친교를 권장했습니다.
         미국공사 H. B. 실, 프랑스영사 C. V. 플랑시 등의 외교관과 M .디, C. 르장드르,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가 멤버였고 조선인으로는 민영환, 윤치호, 이상재, 이완용 등이 회원이었으며, 독립협회 결성을 주도한 인사들의 상당수가 정동구락부를 드나들던 이들이었습니다.
         중국 사신이 올 때는 2품 이상인 원접사(遠接使)를 의주에 보내고, 선위사 또한 2품 이상인 자로 도중 5개 처에 보내어 맞게 하고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였으며 한양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모화관에 머물며, 이때 조선의 왕세자와 백관이 그의 앞에 나아가 예를 행하였고 사신이 돌아갈 때는 백관이 품계의 정종(正從)의 위치를 달리하여 두 줄로 섰다가 일제히 예를 행하였다고 합니다.|프레시안 - 가을빛 짙어가는 정동길을 걸으며...}} <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02&aid=0002068175 프레시안 - 가을빛 짙어가는 정동길을 걸으며...]</ref>
         {{인용문|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圜丘壇)에 나아가 수많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등극했다. 이때 조선의 국호를 ‘대한’으로 고쳐 대한제국의 탄생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다음 날 고종황제는 외국 공사들을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초청해 대한제국 선포를 알렸다.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뒤편과 서울시청광장 왼쪽에 위치한 환구단(서울 중구 소공로 106)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제천행사는 농경문화의 형성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로 시행됐다. 고려 성종 2년(983) 정월에 처음 열렸고 설치와 폐지를 되풀이하다가 조선 초에 제천의례가 억제되자 폐지됐다. 세조 2년(1456)에는 일시적으로 제도화해 1457년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됐다. 그러나 세조 10년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환구단에서의 제사는 중단됐다. 환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다.
         환구단은 고종이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내기 위해 중국 사신이 머물던 남별궁터에 3층의 원형 제단 형태로 조성했다. 당시 최고 도편수였던 심의석이 설계, 1000여 명의 인력이 동원돼 10일 만에 완공했다. 풍수가들은 조선의 옛 남별궁(南別宮) 터에 조성한 환구단에 대해 하늘의 천기가 쏟아져 내려오는 곳이고, 하늘상제와 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는 지기가 솟구쳐 오르는 곳이라고 주장했다.|문화일보 - 1897년 고종이 황제 즉위식과 제사 위해 옛 남별궁터에 환구단 조성}} <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1&aid=0002343854 문화일보 - 1897년 고종이 황제 즉위식과 제사 위해 옛 남별궁터에 환구단 조성]</ref>
         * 《[[조선호텔]] 내의 [[환구단]](圜丘壇, 원구단, 1897년)과 황궁우(皇穹宇, 1899년) 그리고 석고단(石鼓壇, 1901년 11월)》
         [[분류:1854년 태어남]][[분류:1924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건축가]][[분류:대한제국의 건축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20세기 한국 사람]][[분류:19세기 건축가]][[분류:20세기 건축가]][[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대한제국 순종]][[분류:청송 심씨]]
  • 심일운
         '''심일운'''(沈日運, [[1596년]] ~ ?년 [[5월 18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 [[명종]]~[[선조]]때의 재상인 [[심수경]](沈守慶)의 서자였다. [[심수경]]의 비첩(婢妾) 소생 서자였지만 그는 [[허통]]을 통해 [[과거 제도|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했다. [[중종]] 때의 재상인 화천부원군 [[심정]]에게는 증손자가 된다. 같은 서출인 친형 [[심일준]]은 [[1641년]](인조 18) 신사 [[과거 제도|정시문과]]에 병과 23위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허통]]하고 과거 시험을 본 뒤에도 반대를 이겨내고 [[이원익]](李元翼)의 도움으로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의 관직진출 사례는 이후에 [[서자]], [[서얼]]들이 [[조선]]조정에 허통을 요구하는 근거가 되었다. 자(字)는 경원(景遠), 본관은 [[풍산 심씨|풍산]](豊山)이다.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심일준
         '''심일준'''(沈日遵, [[1590년]] ~ [[1659년]] [[2월 26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명종]]~[[선조]]때의 재상인 [[심수경]](沈守慶)의 서자였다. [[심수경]]의 비첩(婢妾) 소생 서자였지만 그는 [[허통]]을 통해 [[과거 제도|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했다. [[중종]] 때의 재상인 화천부원군 [[심정]]에게는 증손자가 된다. 같은 서출인 친동생 [[심일운]] 역시 [[1633년]](인조 11) [[과거 제도|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자(字)는 경행(景行), 본관은 [[풍산 심씨|풍산]](豊山)이다.
         [[1650년]](효종 1) [[4월 15일]] [[의금부]]에서 12회 형문을 받았으나 불복하여 가형(加刑)하였고, [[4월 20일]] [[의금부]]에서 의논하여 처리하기를 삭직방송(削職放送)하기로 하여 [[조선 효종|효종]]이 윤허하였다.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심정 (1471년)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지 = [[조선]] [[전라북도]] [[무주군]]
         |국적 = [[조선]]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전라북도]] [[무주군]]
         |거주지= [[조선]]
         |국적= [[조선]]
         '''심정'''(沈貞, [[1471년]] 양력 [[11월 7일]]([[음력]] 윤 [[9월 25일]]) ~ [[1531년]] [[12월 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공신으로,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 시호는 문정(文靖)이고, 봉군호(封君號)는 화천군(花川君)에 봉군되었다가 부원군으로 진봉되어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이 되었다. 본관은 [[풍산 심씨|풍산]](豊山)이다.
         심정은 [[1471년]] [[11월 7일]](음력 윤 [[9월 25일]]) [[심응]]과 정경부인 서씨(徐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태종|태종]]의 즉위를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고 풍천군(豊川君)에 봉해진 [[심귀령]](沈龜齡<ref>태종을 도와 1차, 2차 왕자의 난에 출정하였으며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풍산군(豊山君)에 봉해졌다. 벼슬은 정헌대부(正憲大夫) 판의흥삼군부군자감사(判義興三軍府軍資監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양(靖襄)이다.</ref>)의 증손으로, 할아버지 심치(沈寘)는 가선대부 남원부사를 지냈다.
         심정은 4형제 중 삼남으로, 큰형 심원(沈元)은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정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둘째형 심형(沈亨) 또한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3등에 책록되어, 풍창군(豊昌君)에 봉해졌다. 심형(沈亨)은 [[조선 성종|성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온성부사, 훈련원 첨정, 경원부사를 지내고, [[조선 연산군|연산군]] 때, 종성부사, [[의주]][[목사]]를 지냈으며, [[조선 중종|중종]] 때에는 전라북도 [[수군절도사]], [[충청남도|충청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동생 심의(沈義)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사가독서]]), [[이조]]정랑, [[소격서]]령을 지냈다.
         [[5월]] 밤에 숙직근무하던 중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명을 받아 홍문관 응교(應敎) 정환(鄭渙)과 함께 선정전 월랑(月廊)에서 '간신을 베어 없애다.'는 뜻으로 율시(律詩)를 지어 바쳤다. [[6월]] 왕이 밤까지 사냥을 나가자, 다른 언관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사냥을 다니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간했다가 끌려가 공초를 당했고, 바로 태형 40대를 받고 유임되었다.
         [[1507년]]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1507년]]초 박경(朴耕), [[김공저]](金公著)의 옥사를 고변한 공로로 상을 받았다. 그는 김공저가 삼공을 제거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남곤]]에게 전하였다. 남곤은 이를 [[유숭조]]에게 알렸고, 김공저, [[박정]] 등을 체포, 처벌하였다. 그는 바로 가선대부로 승진하였으며,<ref>《조선왕조실록》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윤1월 30일(갑술) 6번째기사</ref> 그해 다시 화천군(花川君)에 봉군되었다. 그러나 김공저의 옥사로 사류의 비판이 계속되자 사퇴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ref>《조선왕조실록》 중종 3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8월 28일(기해) 1번째기사
         [[1521년]] [[3월]] 지중추부사, [[5월]] 의정부 좌참찬을 거쳐 안당 등의 추국에 참여한 공로로 1계급 특진되자 스스로 사양하였으나 왕은 그에게 1자급을 특진시켰다. 그해 [[10월]] 다시 좌참찬에 임명되고, [[1522년]] [[4월]] [[왜구]]가 [[조선]]에 침략하자 대책을 논의하였으며, 김전, 남곤 등과 함께 [[일본]]에 끌려간 백성들의 쇄환을 건의하였다. [[6월]]에 순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527년]](중종 21년) [[1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특진하여 의정부 되었다되자 여러 번 사직상소를 청했으나 왕이 사양하였다. [[2월]] 우의정에서 사직하고 영경연관사가 되었다가 [[3월]] 다시 이 되었다. 그 해에 남곤의 죽음으로 조정을 홀로 장악하게 되었다. 남곤이 죽은 뒤 의정부 [[좌의정]]이 되어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에 올라 [[이항 (조선 전기)|이항]](李沆)과 [[김극핍]](金克愊), [[채무택]] 등을 수하에 두고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때 세자(후일의 [[조선 인종|인종]])의 누이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이자 권력 경쟁자였던 이조판서 [[김안로]]와 권력 암투를 벌인다.
         그러나 훈구파가 몰락한 후, 다시 추탈되었다. 그만은 [[사림]]의 미움을 받아 신원되지 못하고 남곤과 함께 '곤정(袞貞)'으로 일컬어져 소인의 대표적 인물로 길이 매도되었으며, 곤쟁이 젓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손자 [[심수경]]은 연좌되지 않고 [[조선 명종|명종]]과 [[선조]] 을 지낸다. [[1910년]](융희 3년) 조선이 멸망하고 난 뒤에야 그의 저서와 작품이 간행되었다.
         심정의 장남은 중종 때, 문음(門蔭)으로, 호조정랑을 지내고, [[조선 명종|명종]] 때, 내자시 정(內資寺正)을 지낸 심사공(沈思恭)이고, 차남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 사관(史官), 사간원 정언, [[옥당]](玉堂), [[병조]]정랑, 비변사 낭관, 의정부 사인, [[암행어사]], 사헌부 집의, 홍문관 직제학, 만포진 첨절제사(정3품 [[당상관]])를 지낸 심사손이며, 삼남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을 거쳐, 승지,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심사순이다. 또, 심사손의 아들 [[심수경]]은 명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호당을 거쳐, [[선조]] 때, 팔도관찰사,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 《소요정》: [[1517년]]([[조선 중종|중종]] 12년) 심정이 조광조의 사림 세력들에 의하여 파직되고, 위훈 삭제까지 당하자,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서울특별시)|강서구]] 탑산 남쪽 기슭에, '소요정(逍遙亭)' 이라는 정자를 짓고 울분을 달랬다고 한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분류:1471년 태어남]][[분류:1531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번역가]][[분류:과거 급제자]][[분류:장원 급제자]][[분류:조선의 부원군]][[분류:기묘사화 관련자]][[분류:테러 피해자]][[분류:암살 미수 생존자]][[분류:고문 피해자]][[분류:사형된 사람]][[분류:독살된 사람]][[분류:조선의 공신]][[분류:정국공신]][[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정국공신]][[분류:풍산 심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 연산군]][[분류:조선 중종]][[분류:훈구파]]
  • 심통원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한성부]]
         |거주지= [[조선]]
         |국적= [[조선]]
         |친척= 신영석(외조부) <br /> 덕림군 이자(장인) <br /> [[심연원]](형) <br /> [[심달원]](형) <br /> 심봉원(형) <br /> [[심강]](조카) <br /> [[심전]](조카) <br /> 심건(조카) <br /> [[인순왕후]](종손) <br /> [[심의겸]](종손) <br /> [[심충겸]](종손) <br /> [[심우승]](종손) <br /> [[심희수]](종손) <br /> [[윤원형]](사돈) <br />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사돈) <br /> [[이량 (조선)|이량]](사돈) <br /> [[상진]](사돈) <br /> 이황(사위) <br /> 상기손(사위) <br /> 창성부수 이명(사위)
         '''심통원'''(沈通源, [[1499년]] ~ [[1572년]] [[7월 8일]])은 [[조선]] 중기의 권신, 척신이다.
         [[1565년]] 왕의 외척으로 [[윤원형]] 등과 함께 권력을 남용했다는 탄핵을 받고 사직했으나, [[1567년]] [[조선 선조|선조]]가 즉위한 후 [[이이|율곡 이이]] 등의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했다.<ref>대비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죄를 감면하자는 여론이 나오기도 했다.</ref>
         [[서인]]의 초대 당수 [[심의겸]], [[심충겸]] 형제 및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종조부이다. [[이량 (조선)|이량]], [[김안로]], [[윤임]], [[윤원형]], [[윤원로]] 등과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척신 세력이었으며, 특히 이량, 윤원형과 함께 3흉으로 불렸다.
         [[1499년]] [[조선 세조|세조]] 때을 지낸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심회]]의 증손으로, [[갑자사화]] 때, [[조선 연산군|연산군]]에 의해 참수된 심순문(沈順門)의 4남으로 태어났다.<ref>{{웹 인용 |url=http://www.csshim.or.kr/htmls/webjokbo_new/search/index.asp# |제목=청송 심씨 대종회 인터넷 족보 검색 (연원, 달원, 봉원, 통원 - 父순문) |확인날짜=2010-09-06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0623043040/http://www.csshim.or.kr/htmls/webjokbo_new/search/index.asp# |보존날짜=2011-06-23 |깨진링크=예 }}</ref> 그는 [[조선의 개국공신]] [[심덕부]]의 5대손으로, [[조선 세종|세종]]의 장인 [[심온]]이 그의 고조부이다.
         [[조선 명종|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연원]], 기묘명현(己卯名賢) [[심달원]], 동지[[돈녕부]]사 심봉원(沈逢源)의 동생이다.<ref>{{웹 인용 |url=http://www.csshim.or.kr/htmls/webjokbo_new/search/index.asp# |제목=청송 심씨 대종회 인터넷 족보 검색 (연원, 달원, 봉원, 통원 - 父순문) |확인날짜=2010-09-06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0623043040/http://www.csshim.or.kr/htmls/webjokbo_new/search/index.asp# |보존날짜=2011-06-23 |깨진링크=예 }}</ref> 명종의 장인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의 숙부로, 그 딸인 명종비 [[인순왕후]]는 심통원의 종손녀이다. [[조선 선조|선조]] 때 [[병조판서]]를 지낸 [[서인]]의 초대 영수 청양군(靑陽君) [[심의겸]], 선조 때, [[병조판서]]를 지낸 청림군(靑林君) [[심충겸]] 형제와 청성부원군 [[심희수]](沈喜壽)의 이기도 하다.
         [[1564년]] 의정부 [[좌의정]]에 이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 뒤 명종이 자신의 외삼촌 [[윤원형]]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량 (조선)|이량]]을 세우자, 윤원형의 경쟁자이기도 했던 심통원은 그를 지원하였다. [[1565년]] 왕의 외척으로서 윤원형 등과 권력을 남용하고 뇌물을 받아 물의를 빚었으며, 3사로부터 탄핵을 받고, 좌의정에서 물러나,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으며 약방 도제조를 겸하였다.
         심통원은 얼른 사과하고는 손수 내의원 별당 다락으로 올라가 약을 찾았다. 그때 이준경은 다락으로 통하는 문을 잠가버렸다. 그리고 다급히 명종을 배알하고는 후사를 지명할 것을 주청했다.<ref name="sim01"/> "아직 나라의 근본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하교해 주시기 바랍니다.<ref name="sim01"/>" 숨이 턱에 받친 명종이 간신히 입을 열어 "덕흥군 제삼자"라고 말하니 이준경이 뒤를 돌아보고는 큰 소리로 따라 외쳤다. [[주서]] 황대수가 큰 글자로 받아 적어 등에 지고 나갔고, 이로써 하성군이 왕업을 물려받으니 그가 바로 [[조선 선조|선조]]였다.<ref name="sim01"/>
         *** 조카 : [[심강]](沈綱,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조선 명종|명종]]의 국구)
         [[이량 (조선)|이량]], [[윤원형]]과 함께 삼흉(三凶)이라 불렸다.<ref>[http://www.prometheus.co.kr/articles/111/20081023/20081023004900.html 조선의 붕당정치를 해부하다(4) : 프로메테우스] 2008.10.23</ref> 혹은 [[이기 (1476년)|이기]], [[윤원형]]과 함께 삼흉으로도 불렸다.
         이듬해 [[1550년]] 어전회의에서 좌의정 [[심연원]]([[조선 명종|명종]]왕비 [[인순왕후]]와 [[심의겸]]의 조부)이 [[조선 명종|명종]]에게 [[백운동서원]] 이야기를 꺼냈다.
         두 달 뒤 [[조선 명종|명종]]이 '紹修(소수)'라는 이름과 책을 백운동에 내리니, 이게 영주에 있는 조선 최초의 사액(賜額·왕이 현판을 내린) 서원, [[소수서원]]이다.
         이후 사액서원 토지에는 세금이 면제되고 서적과 노비가 하사되는 관행이 법제화되었다.|2019년 1월 30일 조선일보 - [박종인의 땅의 歷史] "가뭄 구제보다 중한 것이 교화로다!" <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3&aid=0003424699 2019년 1월 30일 조선일보 - <박종인의 땅의 歷史> "가뭄 구제보다 중한 것이 교화로다!"]</ref>}}
         * [[조선 연산군|연산군]]
         * [[조선 중종|중종]]
         * [[이량 (조선)|이량]]
  • 아기발도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는 "보기에는 나이가 겨우 15, 6세 되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성계가 고려 정계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계기를 마련한 부분 때문에 [[조선]] 역사에서 오랫동안 그 이름이 회자되었으며, 이 때문에 고려를 멸망시킨 주역인 이성계에 대한 반감을 토벌당한 아기발도에게 투영하여 그를 동정적으로 보는 설화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아기발도 우투리 관련설]] 문서 참고.
  • 안계군 (1703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사저
          | 국적 = [[조선]]
          | 왕가 = [[조선|조선 왕조]]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조선 왕조]]
         '''안계군 이지'''(安溪君 李墀, [[1703년]] ~ [[1738년]] [[7월 15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왕족 종실]]이다. [[조선 인조|인조]]의 아들 [[인평대군]]의 서손으로, [[호적]]상 [[능창대군]]의 증손자에 해당된다. 사후에 군으로 [[추증]]되었다.
         사후 아들 둘이 후사없이 일찍 죽어, [[조선 태종|태종]]의 아들 양녕대군의 후손 호의 아들 진벽을 사후양자로 입계하였다. 1794년(정조 17) [[2월 5일]] 양자 이진벽이 종2품 동지에 임명되면서 증직으로 증 '''안계군'''(安溪君)에 추증되었다. 시신은 [[양주시|양주군]](현 [[경기도]] [[남양주시]])에 안장되었다.
         * [http://www.rfo.co.kr/view_party.php?list_mode=people1&refnum=099&party_name= 대한제국 조선 황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 안계군 이필]
         {{토막글|조선|정치인}}
         [[분류:1703년 태어남]][[분류:1738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당뇨병으로 죽은 사람]][[분류:운현궁]][[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숙종]][[분류:조선 경종]][[분류:조선 영조]]
  • 안병길(1886)
          |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 [[경산시]]
          | 직책 = 前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참의<br/>(前 朝鮮總督府 中樞院 參議)
         어린 시절 한문을 수학했고 [[1906년]] 일어학교를 졸업했다. [[1925년]] [[11월 27일]] 경상북도 관선 도평의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27년]] 경산금융조합장을 역임했다. [[1927년]] [[6월 3일]]부터 [[1930년]] [[6월 2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으며 [[1928년]] [[11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5월 1일]] 조선박람회 평의원에 촉탁되었으며 [[1930년]] [[4월 1일]] 경상북도 관선 도평의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6월 2일]] 정7위에 서위되었고 [[1931년]] 경산수리조합장과 경산면협의회원을 역임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경일은행 감사를 역임했으며 [[1934년]] [[4월 9일]]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준비위원회 증선(增選, 추가 선출)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분류:1886년 태어남]][[분류:1936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경산시 출신 인물]][[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순흥 안씨]]
  • 안용복
         '''안용복'''(安龍福, [[생몰년 미상]])은 [[조선 시대]] [[17세기]]의 어부이자 능로군(能櫓軍)<ref>노를 젓는 병사, 두산백과 '능로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78470&cid=40942&categoryId=31748]</ref>이다.
         17세기 말 당시 [[울릉도]]에는 아직 [[공도 정책]]이 실시중이어서 [[조선]]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조선 태종]]은 [[1417년]](태종 17년) [[공도 정책]]을 실시해서 [[울릉도]]를 비롯한 많은 섬에 있는 백성을 모두 내륙 지방을 비롯한 한반도로 이주시켰다. 1614년([[조선 광해군|광해군]] 6년) 조정은 빈 섬에 일본인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에 60여년 동안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와 일본을 왔다갔다 하며 울릉도 바다에서 조업을 했다.
         안용복은 [[1693년]]([[조선 숙종|숙종]] 19년) 동래 어민과 함께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3월 박어출과 함께 일본인 어부들에게 납치되어 [[이나바 국|인슈(因州)]]로 끌려갔다. [[호키 국]](伯耆国)의 번주(藩主)가 막부에 보고하자 막부는 그들을 설득하여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다. 6월 30일 안용복 일행은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안용복은 그가 호키 국의 번주와 담판을 벌여서 막부는 안용복 등을 나가사키(長崎)로 이송해 돌려보내라고 지시하면서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라는 내용의 서계(書契)를 써주게 했다. 막부로부터 울릉도, 자산도가 조선령 이라는 서계를 받아냈는데, 나가사키에서 대마도 번주([[쓰시마 후추 번]]주)에게 빼앗겼다고 주장했다.
         대마도 번주는 안용복 일행 편에 다케시마(竹島) 출어를 금지해 달라는 서찰을 보냈다. 조정은 대마도로 보낸 답변에서 독도와 죽도를 서로 다른 섬으로 표현했다. 대마도 번주는 독도릉도’라는 말을 싫어해서 그 표현을 지울 것을 조선 측에 주장했다. 한편 안용복의 심문에서 조정은 호키슈에서는 안용복을 잘 대해줬지만 대마도에서 책망한 점을 알아내고 대마도 번주의 행동이 [[에도 막부]]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대마도 측 사절에게 막부에게 대마도 번주의 행동을 밝히는 서계를 보내겠다고 말해 사절을 승복시켰다. [[영의정]] [[남구만]]은 화답문을 고쳐서 울릉도와 죽도(다케시마)가 서로 같은 섬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일본인들이 조선 영토에 들어와 안용복 일행을 데려간 것은 실책”이라고 했다.
         막부는 이듬해 울릉도 근처 출어를 금지하겠다는 사실을 대마도 번주를 통해서 공식으로 조선 측에 통보했다. 그 후 [[조선 철종]] 때까지 울릉도에 대한 분쟁이 없었다.
         * 안용복이 막부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는 내용의 서계는 17세기 무렵 일본이 울릉도(와 그 부속 도서인 독도)가 자신의 영토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매우 중요한 증거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중대한 결정을 일개 어부인 안용복이 이끌어낸 것이었다. 한편, 일본 정부는 안용복에 대해 "조선을 대표하지 않는다", "진술에는 많은 모순"이라고 지적하고있다.<ref>[http://www.mofa.go.jp/mofaj/a_o/na/takeshima/page1w_000022.html#q3 竹島問題に関するQ&A]、일본국 외무성 (일본어)</ref>
         [[분류:1650년대 태어남]][[분류:생몰년 미상]][[분류:조선의 해군 군인]][[분류:17세기 한국 사람]][[분류:한국의 어부]][[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사칭자]][[분류:독도 갈등]]
  • 안회남
         | 직책 = 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선전성|북조선국 문화선전상]] 예하 차석보좌관<br />(前 北朝鮮國 文化宣傳相 隸下 次席補佐官)
         | 장관 = [[허정숙]] (북조선국 문화선전상)
         | 국적 = {{국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경력 = [[소설|소설가]], [[문학 평론|문학평론가]]<br/> 前 [[조선문학가동맹]] 소설분과위원장
         '''안회남'''(安懷南, [[1909년]] [[11월 15일]] ~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설|소설가]]이며 [[문학 평론|문학평론가]]이다. [[아명|초명(初名)]]은 '''안필승'''(安必承)이며 나중에 '''안회남'''(安懷南)으로 개명하였다. 본관은 [[죽산 안씨|죽산]](竹山)이다.
         [[신소설]] 《[[금수회의록]]》의 작가 [[안국선]]의 외아들로, [[한성부]]에서 출생해서를 다녔다. 휘문고보 동창인 소설가 [[김유정 (소설가)|김유정]]과는 절친한 사이였으며, 김유정이 요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쓴 편지글이 안회남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193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발(髮)〉로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광복 후 [[좌익]] 계열 문학 단체인 [[조선문학건설본부]]에 이어 [[조선문학동맹]] 결성에 참가하여 소설분과위원장을 맡았다. [[1947년]]경에 월북하였고, [[한국 전쟁]] 시기에 종군작가단에 참가하여 서울에 왔다가 박태원, [[현덕]], [[설정식]] 등 아직 월북하지 않고 있던 문인들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돌아갔다. 1960년대 숙청되었다는 설만 있을 뿐, 1954년경까지의 활동만 확인되었고 이후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 아버지: [[안국선]](安國善, [[1878년]] [[12월 5일]] ~ [[1926년]] [[7월 8일]], [[대한제국]] [[조선]] 왕조의 [[신소설]] [[작가]].)
         [[분류:1909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설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서울수송초등학교 동문]][[분류:죽산 안씨]][[분류:월북자]]
  • 안흥군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사저
          | 국적 = [[조선]]
          | 왕가 = 조선 왕조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 왕조
         '''안흥군 이숙'''('''安興君 李俶''', [[아명]]은 '''李琡''', [[1693년]] [[10월 9일]] ~ [[1768년]] [[4월 7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왕족 종실]]이다. [[능창대군]]의 4대손이고, [[남연군]]의 생가 증조부가 된다. 특명으로 [[인평대군]]가의 봉사손에 지정되었다. 왕족 종실 신분으로 [[흥록대부]](興祿大夫) 작위에 이르렀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 생 고조부 [[조선 인조|인조]]
         * [http://www.rfo.co.kr/view_party.php?list_mode=people1&refnum=099&party_name= 대한제국 조선 황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 안흥군 이숙]
         {{토막글|조선}}
         [[분류:1693년 태어남]][[분류:1768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운현궁]][[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숙종]][[분류:조선 경종]][[분류:조선 영조]]
  • 알천
         족보는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한 이후, 알천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소벌도리를 문열왕(文烈王)에 봉했다고 전한다. 태종무열왕 3년에 알천은 선조 소벌도리가 꿈에서 지목한 진주 도사곡((塗斯谷, 현재 진주시 [[상대동 (진주시)|상대동]])으로 이주해 일가를 이뤘다. [[조선]]시대 중기 홍문관, 예문관의 [[대제학]]을 역임한 문신 양곡 [[소세양]]과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문신 곤암 [[소세량]]은 그의 먼 후손이었다. 묘소는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 선학산록(仙鶴山麓)에 안장되었고, 사후 대각간(大角干)을 지낸 [[김인문]](金仁問)이 그의 비문을 찬하였으나 실전되었다. 그 뒤 1977년 전국 소씨 종친회에서 비석을 재건하였다.
  • 야규 슈메
         야규 가문의 가신.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야규 성씨를 쓰게 되었다. 출신이 특이한데, [[조선]] 출신이거나 그 혈통으로 보인다.
         야규 가문의 가전 기록인 『옥영습유(玉栄拾遺)』에 따르면, 「전하기를 슈메라는 자 조선국의 종자라 한다(伝に曰く、主馬者朝鮮国の種也)」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다른 기록(야규번구기柳生藩旧記, 수은초袖隠抄 등)에 따르면 「어떤 곳에서 말하길 슈메는 타국인으로 문벌(씨氏)도 모르는 자(然る所主馬は他国人にて氏も不知者)」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어떤 사정[* 야규 신지로 요시카츠(柳生新二郎厳勝)의 적남 야규 구사부로는 임진왜란에서 조선에 갔다가 울산에서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으로 [[일본]]으로 가게 된 인물이거나, 그 자손으로 추측된다.
  • 양녕대군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지 = [[조선]] [[한성부]] 병사
         |국적 = [[조선]]
         |왕가 = [[조선]]
         |아버지 = [[조선 태종|태종 이방원]]
         |친인척 = [[효령대군]](동복 아우) <br /> [[조선 세종|세종대왕]](동복 아우) <br /> [[조선 태조|태조 이단]](할아버지) <br /> [[완풍대군|완풍대군 이원계]](큰할아버지) <br />[[진안대군|진안대군 이방우]](큰아버지) <br /> [[조선 정종|정종 이경]](큰아버지) <br /> [[김한로]](장인)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년]] ~ [[1462년]] [[9월 7일]])은 [[조선|조선 시대]] 초기의 왕세자이자 왕족, 정치인, 화가, 시인이다.
         그는 [[조선]] [[조선 태종|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4남으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 성은 이(李), 휘는 제(禔), 자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조선]] [[조선 세종|세종]], [[효령대군]], [[성녕대군]]의 친형이다.
         [[1404년]](태종 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9년]]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이후 1412년에서 1413년까지 부왕 [[조선 태종|태종]]이 [[대리청정]]을 1년간 하였으며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조선 태종|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유정현 (1355년)|유정현]](柳廷顯) 등의 상소로 폐위되었다. 그 뒤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세자가 되었다. 세자 폐위 이후에도 자유분방한 활동이 문제시되어 여러 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양녕대군은 [[1394년]]에 [[조선 태종|정안군]]과 군부인 민씨(뒤의 [[원경왕후]])의 장남으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곧 [[1402년]](태종 2년) 3월 8일 제(禔)란 이름을 받았고 동년 [[4월 18일]]에 원자(元子)로 책봉되었다.
         {{인용문2|조선의 왕자 제가 조공 닦으러 만리 길을 찾아오니
         [[1407년]](태종 7년) 14세에 [[광산 김씨]] [[김한로]]의 딸과 혼인하였다. [[김한로]]는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사위인 그가 폐위된 것을 전후하여 한때 유배당하기도 했다. [[1407년]]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고 [[조선 태종|태종]]은 외척 제거 목적으로 [[민무구 형제의 옥사]]를 계획한다. 양녕은 이들 두 외삼촌이 억울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을까 겁을 먹고 외숙인 민무구 형제가 태종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도 외면하였다. [[1409년]]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품행이 자유분방하고 색을 밝혀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부왕인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고, 부왕은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심지어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가 궁으로 데려온 한 기생 출신 첩의 존재를 알게 되자 [[조선 태종|태종]]은 그 기녀를 사형에 처했다. 양녕대군은 부왕 [[조선 태종|태종]] 역시 여러 여인을 첩으로 거느리는 것을 언급하며 항의하다가 끌려나가기도 했다.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여색을 금하고 인군으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쌓으라 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부왕 태종이 여색을 밝히고 후궁을 들이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가 들인 후궁을 태종이 내침으로서 부왕 태종과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1417년]] 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王親錄)을 열어봤다가 발각, 이것이 소문으로 퍼지면서 부왕 [[조선 태종|태종]]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 또한 전중추 곽선(郭旋)의 첩을 취한 사실도 밝혀졌다.
         당시 [[조선]]에서 붓을 잘 만든다고 소문이 난 [[김호생]]이란 이가 있었다. 그는 사족 출신으로 붓을 만들었는데 호기심에 양녕은 [[김호생]]을 찾아가 그가 붓을 만드는 것을 보았고, 몰래 대궐에 들어와 세자에게 붓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비밀리에 출입하던 중 내시에게 발각되어 도주하다 붙잡혀 어전에서 [[조선 태종|태종]]에게 심문을 받았다. 태종은 양녕이 몰래 시중의 잡것들을 불러들여 장난을 치는 등 체통없는 짓을 한다 하여 잡는 대로 혹 귀양보내기도 하고 혹 죽이기도 했다는데, [[김호생]]에게 붓을 만들게 한 뒤 그의 재능을 본 뒤 오히려 기특히 여기고 [[김호생]]에게 특별이 공조(工曹)로 보내 필장(筆匠)직을 내렸다.
         어느날 밤 부왕 [[조선 태종|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던 중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의 재질이 뛰어나나 셋째 아들이라 아쉽다고 대화하는 내용을 엿듣게 되었다. 원경왕후 역시 태종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부왕과 모후의 뜻이 양녕대군에게서 떠나있다는 것을 간파한 [[효령대군]]은 열심히 공부하였다. 하루는 양녕대군이 술을 잔뜩 마시고 효령대군을 찾아갔다. 그는 효령에게 '공부해야 소용이 없다' 고 말했다.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으니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고 하였다는 야사가 전해 온다. 이에 크게 낙심한 효령대군은 매일 북을 치는데, 여느 스님과 달리 팔에 힘이 들어가 북 가죽이 늘어질 정도로 세게 쳤다. 그래서 속담에 늙은이의 늘어진 뱃가죽을 효령 북이라 부르기도 한다. 결국 충격을 견디지 못한 [[효령대군]]은 모든 공부를 중단하고 출가, [[합천군|합천]] [[해인사]]로 들어갔다.
         [[1418년]](태종 18년) [[유정현 (1355년)|유정현]] 등이 세자 양녕을 탄핵하였다. 이때 이미 사람들에게 신망을 잃은 양녕을 비호한 이는 [[황희]] 등 소수였다.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될 것을 예상하자 그의 동생 [[효령대군]]은 독서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생을 찾아가 세자 자리는 충녕에게 넘길것 같으니 헛된 꿈을 꾸지 말라고 충고하였다는 야사가 있다. 부왕 [[조선 태종|태종]]이나 모후 [[원경왕후]]의 뜻이 모두 충녕에게 있음을 안 [[효령대군]]은 이후 불교에 전념하게 된다.
         김시양(金時讓)은 저서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세가지 추론을 하였다.<ref name="칼럼"/> 첫 번째로는,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이 곧 폐하여 세종을 세웠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양녕대군과 동생 [[조선 세종|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해서,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겨나 [[경기도]] [[이천시|이천군]]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종대왕이 몰래 양녕대군을 불러 위로했다고 한다.<ref name="칼럼"/>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세자(양녕대군)의 계속된 비행으로 아버지 [[조선 태종|태종]]이 몇번 질책하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태종)은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하는 상소를 올려 태종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여 [[이천군]]으로 귀양보내고 동생 [[조선 세종|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한다.<ref>[[조선왕조실록]] 태종대왕실록 참고</ref> 그해 [[5월]] 결국 세자에서 폐위되고 만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지난 날 부왕 태종과 방석, 방번, 그리고 방간 등 숙부들과의 골육상쟁을 떠올리며 최종적으로 충녕에게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는 전승도 전한다.
         1418년 [[조선 세종|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동생 [[조선 세종|세종대왕]]은 [[이천군]]에 유배된 형 양녕대군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동생의 즉위 이후에도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세종의 즉위 뒤에도 여러 번 비행을 저질렀는데,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사후 비행의 강도가 더해졌다. 과거의 왕세자였고 현재 왕이 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일거일동이 세밀한 관찰과 감시의 대상이 되어 번번이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언관들로부터 탄핵되었다. 특히 자신의 며느리까지 범하는등 인간 이하의 행위까지 서슴치 않았고 이에 충격을 받아 아들이 목을 매 자결할 정도였다.
  • 양원군 (1658년)
          | 왕가 = [[조선|조선 왕조]]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조선 왕조]]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인평대군|인평군]] 가통 사저에서 병사
         '''양원군 이환'''(陽原君 李煥, [[1658년]] [[4월]] ~ [[1724년]] [[3월]])은 [[조선]]의 [[왕족 종실]]이다.
         그는 왕족 종실 [[복녕군]](福寧君)의 장남(長男)이다. 그의 생부 [[복녕군]]은 [[조선 인조|인조]](仁祖)의 손자이자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장남이며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양자이다.
         * [http://www.rfo.co.kr/view_party.php?list_mode=people1&refnum=099&party_name= 대한제국 조선 황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 양원군 이환]
         {{토막글|조선}}
         [[분류:1658년 태어남]][[분류:1724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운현궁]][[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효종]][[분류:조선 현종]][[분류:조선 숙종]][[분류:조선 경종]][[분류:조선 영조]]
  • 양재창 (1885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종로구]]
          | 직책 = 前 [[조선총독부]] [[경기도]] [[용인시]] 군수<br/>(前 朝鮮總督府 京畿道 龍仁郡 郡守)
         '''양재창'''(梁在昶, <small>일본식 이름:</small> '''하리카와 사이아사히'''(梁川在昶), [[1885년]] [[9월 29일]] ~ [[1968년]] [[1월 14일]])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 출신 기업인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다.
         [[한성부]]에서 경성학당을 졸업하고 [[1905년]]에 [[농상공부]] 기사로 임명되는 등 대한제국 말기에 기술직 관리로 근무했다.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총독부]] 소속으로 편입되고 [[한국병합기념장]]도 수여받았다.
         이후 실업계에 들어가 [[조선생명보험회사]] 취체역, 선만토지브로커 사장, 경성상공회의소 의원, 부평수리조합 부조합장 등을 역임했다. 경성부회 의원으로도 두 차례 당선되는 등 경성 지역 유지로 활동하였다.<ref>{{저널 인용
         [[1920년대]]부터 [[조선불교단]], [[동민회]], [[구일회]] 등 유력한 인물들로 구성된 단체에 꾸준히 참여했으며,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도 맡았다.<ref>{{서적 인용
         * [[조선총독부 중추원]]
         * [[조선임전보국단]]
         [[분류:1885년 태어남]][[분류:1968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서울교동초등학교 동문]][[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한국민주당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당원]][[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남원 양씨 (梁)]]
  • 어유구
         '''어유구'''(魚有龜, [[1675년]] [[4월 18일]] ~ [[1740년]] [[1월 16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외척으로 [[조선 경종|경종]]의 비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학자 [[어유봉]](魚有鳳)의 동생이다. 본관은 [[함종 어씨|함종]](咸從). 자는 성칙(聖則), 호는 긍재(兢齋).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서인]] 당원이었으나 서인의 분당 이후 [[노론]]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딸은 경종비가 된 이후 [[소론]]성향으로 돌아선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조선의 공신|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경종의 장인이면서 조카사위 홍상한을 통해 사도세자빈 [[혜경궁 홍씨]]와도 인척간이 된다.
         이후 [[호조]][[참의]]와 [[예조]][[참의]]를 여러번 역임하고유수로 발령되었다. 유수 재직 중이던 [[1720년]] [[6월]] [[조선 숙종|숙종]]이 죽고 [[조선 경종|경종]]이 즉위하자 [[돈령부]]영사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에 봉해지고, [[1721년]](경종 1) 호위대장을 겸직하고, [[1721년]] 사직 [[김일경]](金一鏡) 등이 상소를 올려, [[노론]]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이 역모라고 규탄하여 4대신이 파직되자, 그는 오히려 노론 4대신을 옹호하며 김일경 등의 상소를 비판했다. 그 해 어영대장(御營大將) 겸 훈련대장, 22년 영돈령부사가 되었다. 이때 유생 황욱(黃昱), 김수구(金壽龜) 등이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 부자의 사면과 복권을 상소하자, 그는 [[윤증]]에 대해 스승을 배반한 죄를 지적하며 이들의 복권을 반대하였다.
         [[조선 경종|경종]]이 [[소론]]에 기울었던 것에 반해 어유구는 [[신임사화]] 때 [[노론]](老論)을 극력 옹호하였고 유생들이 건의한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 부자의 신원과 복직에 반대하였다. [[1722년]](경종 3)에는 [[사간원]]사간 정해(鄭楷)가 그가 [[노론]]을 비호한다며 논죄하였다. 그 뒤 경기도 [[양주시|양주]](楊州)에 낙향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 [[조선 영조|세제]]가 영조로 즉위하자 [[노론]] 일각에서 그가 [[신임사화]] 때 내통했다며 심문하자는 건의를 하였으나 영조가 이를 거절, 무마시켰다. [[영조]] 때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조선의 공신|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735년]] 훈련대장, [[1736년]] 수어사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다시 어영대장에 임명되어 세번을 어영대장을 역임했다. 문집에 《긍재편록 (兢齋編綠)》, 《농암사단칠정변 (農巖四端七情辨)》 등이 있다. [[1739년]] 가을에 병에 걸려 여러번 사직을 청하여 [[어영대장]]에서 물러났다. [[1740년]] [[1월]] [[감기]]에 걸렸다가, [[감기]]가 악화되어 그해 [[1월 16일]]에 사망했다.
         **** 장인 : 이하번(李夏蕃) - [[조선 중종|중종]]의 5세손
         ***** 본인 : [[어유구]](魚有龜) - [[조선 경종|경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 장녀 :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
         ****** 사위 : [[조선 경종|경종]]
         ****** 사위 : [[청송 심씨]] 심이지(沈履之, 1720년 ~ 1780년, 이조참판) - 호조판서 [[심이지 (1735년)|심이지]](沈頤之, 1735년 ~ 1796년)의 사촌, 이조판서 [[심수 (조선)|심수]](沈鏽, 1707년 ~ 1776년)의 조카, 광주목사 · 증 이조참판 심탁(沈鐸)의 아들, 담양부사 · 증 좌찬성 심계현(沈啓賢, [[심택현 (조선문신)|심택현]]의 형)의 손자
         ****** 며느리 : [[청송 심씨]] - [[조선 영조|영조]]의 [[의빈부|부마]] 청성위 [[심능건]](靑城尉 沈能建, 1752년 ~ 1817년)의 고모, 삭녕군수 · 증 영의정 심정지(沈鼎之)의 여동생, 해주목사 · 증 좌찬성 심규(沈규)의 딸, 이조판서 · 좌참찬 · 판돈녕부사 청헌공 [[심택현 (조선문신)|심택현]](淸獻公 沈宅賢, 1674년 ~ 1736년)의 손녀
         *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
         * [[조선 경종|경종]]
         * [[심택현 (조선문신)|심택현]]
         * [[심수 (조선)|심수]]
         {{토막글|조선|한국 사람}}
         [[분류:1675년 태어남]][[분류:1740년 죽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 숙종]][[분류:조선 영조]][[분류:조선 장조]][[분류:조선의 공신]][[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함종 어씨]][[분류:조선의 부원군]][[분류:감기로 죽은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어진익
         '''어진익'''(魚震翼, [[1625년]] [[11월 6일]] ~ [[1684년]] [[8월 25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익지(翼之). 호는 겸재(謙齋), 본관은 [[함종 어씨|함종]]이다. [[한성부|한성]] 출신. 당색으로는 [[서인]] 당원이다.
         [[1674년]] [[인선왕후]]가 죽어 복상 문제에 관한 2차 예송(禮訟)이 발생하자 남인(南人)을 공격하였다가 좌천되어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서인(西人)이 집권하자 풀려나와 [[여주시|여주]][[목사]], [[좌승지]], [[참의]], [[충청남도|충청도]]와 [[강원도 (남)|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사후 [[증직|증]]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직|증]] [[의정부시|의정부]][[좌찬성]]으로 가증되었다. [[성리학]]자 [[어유봉]]의 할아버지이고, [[조선 경종|경종]]비 [[선의왕후]] 어씨의 증조부가 된다.
         병조 낭관으로 전임되고 다시 정언에 옮겨졌다가 얼마 안 되어 어버이 봉양을 위해 지방관으로 나갈 것을 요청하여 현종이 승인, [[함평군|함평]]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어머니 안동권씨는 이미 형 어진열(魚震說)의 임지인 [[전라남도|전라도]] [[무안군|무안현]]에 있어, 형제가 교대로 어머니 권씨를 판여(板輿)에 모시고 왕래하며 봉양하였다. 다음해에 어떤 일로 파직되어 돌아왔다가 다시 서용되어 정언, 사서가 되고 사예, 장령에 승진되었다. 이후 [[사간원]]헌납(獻納), [[사간원]]사간을 거쳐, [[1673년]](현종 15) [[사복시]]정이 되고, 그해 [[세자시강원]]사서, 문학이 되어 [[조선 숙종|세자 광]](爌)을 보도하였다. 헌납에 옮겨졌다가 다시 1674년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으로 [[조선 숙종|세자 광]](爌)을 보도하였다. 그러나 그해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살아있던 시어머니 [[자의대비]] [[장렬왕후]]가 입는 상복 문제로 [[윤휴]](尹鑴), [[허목]] 등 [[남인]]을 공격했다가, [[동래구|동래]][[부사]]로 좌천되었다.
         아들 [[어사형]](魚史衡)이 종2품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어 추은(推恩)으로 [[증직|증]]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후일 손자 [[어유구]]가 보국숭록대부 [[돈녕부]]영사에 올라, 그는 다시 [[증직|증]] [[의정부시|의정부]][[좌찬성]]으로 가증되었다. 그의 증손녀 [[선의왕후]] 어씨는 [[조선 경종|경종]]비가 되었다.
         [[분류:1625년 태어남]][[분류:1684년 죽음]][[분류:음서]][[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송시열]][[분류:허목]][[분류:조선 숙종]][[분류:조선 경종]][[분류:함종 어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엄복동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국적 = {{국기|조선}}(1892~1910)</br>{{국기|일제강점기}}(1910~1945)</br>{{KOR}}(1948~1951)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유행가]]가 만들어질만큼 조선 [[민중]]들의 [[스타]]가 된 엄복동은 자전거 대회에서 초청선수로 참여하여 우승을 휩쓸었다.
         [[1922년]]에도 전 조선 자전거 대회에서 우승하자,일본 [[심판]]들은 [[1920년]] 경성시민대운동회에서 날이 저물었다며 서울를 중단시키는 등 비상식적인 판정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엄복동은 본부석으로 뛰어든 뒤, 우승기를 잡고 꺾어버림으로써 항의했다. 이 일로 일본 관객과 조선 관객 사이에서다툼이 일어났을 정도로 조선 사람들에게 엄복동은 영웅이었다. [[1928년]] 6월 [[전국운수조합]] 대회에도 참여했으며,[[1932년]] 4월에도 40세의 나이에 전 조선 남녀자전거대회 1만m 경주에 참여하여 당당히 우승하였다.
  • 엄주명
         |태어난 곳= [[조선]] [[경성부]] 서소문
         |출판사=조선일보
         }}</ref>)은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자 [[대한민국]]의 교육인, 군인이다.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육군]] 장군으로 참전, 지휘하였다. [[순헌황귀비]]의 조카이며, [[영친왕]]의 외사촌이자 친구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 초기에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을 주장했던 [[민원식]]의 처남이다.
         [[1896년]](고종 34년) [[11월 19일]](음력 [[10월 15일]]) [[경성부]] [[서소문]]에서 출생하였다. [[진명여학교]] 초대 이사장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대한제국]]의 고위 무관 [[엄준원]]의 아들로, [[순헌황귀비]] 엄씨에게는 조카가 된다.<ref>{{서적 인용
         [[1940년]] [[7월 2일]] [[경성의학전문학교 (서울)|경성의학전문학교]] [[서울대학교병원|부속병원]]에서 [[협심증]] 판정을 받고 정양을 요한다고 하여 [[7월 30일]]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직을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가 요양하였다. [[태평양 전쟁]] 후반에는 전쟁 지원 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와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도 맡은 바 있다.<ref>{{서적 인용
  • 엄주익 (1872년)
         '''엄주익'''(嚴柱益, [[1872년]] [[6월 26일]] ~ [[1931년]] [[4월 16일]])은 [[대한제국]]의 교육인, 군인 겸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의 교육인으로 호는 춘정(春庭), 본관은 [[영월군|영월]]이다. [[조선 고종|고종]]의 귀비인 [[순헌황귀비]], [[엄준원]]의 7촌 조카가 된다.
         [[1872년]](고종 9년) [[6월 26일]] [[한성부]]에서 엄인영(嚴仁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고종|고종]]의 후비이자 [[영친왕]]의 생모 [[순헌황귀비]] 엄씨의 7촌 조카로, 엄주익은 [[순헌귀비]]의 증조부 엄성복(嚴性復)의 장남 엄재화(嚴載和)의 증손자였다.
         16대조 [[엄유온]](嚴有溫)은 [[조선]]초기에 좌군도총재를 지냈다. 6대조 만향재 [[엄한붕]](晩香齋 嚴漢朋)은 [[1728년]] [[이인좌]]가 일으킨 무신난 진압에 참여하여 [[원종공신]]이 되고, [[증직|증]] [[한성부]][[좌윤]]에 추증되었다. 5대조 엄계응은 관직이 없었으나 형제인 종5대조 엄계흥 등과 함께 [[송석원시사]] 등에서 활동한 이름 있는 시인이었다. 고조할아버지 엄성복은 사후에 [[증직|증]] [[승정원]][[좌승지]] 벼슬에 [[추증]]되었는데, 이는 종증조부 엄재우의 아들이며, 엄주익의 큰 재종조부가 되는 [[엄진일]]의 출세에 의한 증직이었다.
         장례식은 [[4월 22일]] [[양정고보]] 학교장으로 거행되어 오후 8시 관철동 자택을 나와 [[광희정]](光熙町)의 구 [[훈련원]] 광장에서 노제를 거쳐 장지로 향하였다.<ref name="jangui">"故 嚴柱益氏 葬儀", 동아일보 1931년 04월 23일자 2면, 사회면</ref> 학교장 장례식에는 양정고보 학생 6백여명,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의 대표 학생들, 그밖에 [[조선총독부]] 조선군 사령부에서 특별히 보내준 의장대 2백 명이 장례식을 호송하였다.<ref name="jangui"/> 시신은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광주군]] (현 [[서울특별시]] [[강동구]])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분류:1872년 태어남]][[분류:1931년 죽음]][[분류:조선 사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대한제국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사]][[분류:한국의 장군]][[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민원식]][[분류:영월 엄씨]][[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병사한 사람]]
  • 여릉군
          | 왕가 = [[조선|조선 왕조]]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조선 왕조]]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양원군 사저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포천시|포천군]] 배소
          | 국적 = {{국기|조선}}
         '''여릉군 이기'''(驪陵君 李圻, [[1680년]] [[6월]] ∼ [[1730년]])는 [[조선]]의 [[왕족|왕족 종실]]이다.
         그는 [[조선 숙종|숙종]] 치세 시기이자 나이 6세 시절이던 [[1685년]] '''여릉부정'''(驪陵副正)에 책봉되었으며 이듬해 [[1686년]] '''여릉군'''(驪陵君)에 진봉된 이후 가덕대부(嘉德大夫)에 책록되어 [[조선 경종|경종]]·[[조선 영조|영조]] 때까지 왕족 종실 지위를 온온히 지내었지만 [[조선 영조|영조]] 치세 시기였던 [[1728년]]에는 갑작스레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포천시|경기도 포천]]에 유배되었다가 끝끝내 [[1730년]] 복주 처분되었다.
         * [http://www.rfo.co.kr/view_party.php?list_mode=people1&refnum=099&party_name= 대한제국 조선 황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 여릉군 이기]
         {{토막글|조선}}
         [[분류:1680년 태어남]][[분류:1730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사형된 사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운현궁]][[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숙종]][[분류:조선 경종]][[분류:조선 영조]]
  • 여릉군 (사람)
          | 왕가 = [[조선|조선 왕조]]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조선 왕조]]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저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포천시|포천군]] 배소
          | 국적 = {{국기|조선}}
         '''여릉군 이기'''(驪陵君 李圻, [[1680년]] [[6월]] ∼ [[1730년]])는 [[조선]]의 [[왕족|왕족 종실]]이다.
         그는 [[조선 숙종|숙종]] 치세 시기이자 나이 6세 시절이던 [[1685년]] '''여릉부정'''(驪陵副正)에 책봉되었으며 이듬해 [[1686년]] '''여릉군'''(驪陵君)에 진봉된 이후 가덕대부(嘉德大夫)에 책록되어 [[조선 경종|경종]]·[[조선 영조|영조]] 때까지 왕족 종실 지위를 온온히 지내었지만 [[조선 영조|영조]] 치세 시기였던 [[1728년]]에는 갑작스레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경기도|경기도 포천]]에 유배되었다가 끝끝내 [[1730년]] 복주 처분되었다.
         * [http://www.rfo.co.kr/view_party.php?list_mode=people1&refnum=099&party_name= 대한제국 조선 황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 여릉군 이기]
         {{토막글|조선}}
         [[분류:1680년 태어남]][[분류:1730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사형된 사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운현궁]][[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숙종]][[분류:조선 경종]][[분류:조선 영조]]
  • 여천군 (왕족)
          | 왕가 = [[조선|조선 왕조]]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조선 왕조]]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저
          | 사망지 = [[조선]] [[전라남도]] [[해남군]] 배소
          | 국적 = {{국기|조선}}
         '''여천군 이경'''(驪川君 李境, [[1683년]] ∼ [[1730년]])은 [[조선]]의 [[왕족|왕족 종실]]이다.
         그는 [[조선 숙종|숙종]] 치세 시기이자 나이 7세 시절이던 [[1689년]] '''여천군'''(驪川君)에 책봉된 이후 [[조선 경종|경종]]·[[조선 영조|영조]] 때까지 왕족 종실 지위를 온온히 지내었지만 [[조선 영조|영조]] 치세 시기였던 [[1728년]]에는 갑작스레 친형 [[여릉군]]과 아울러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결국 [[전라남도|전라남도 해남]]에 유배되었다가 끝끝내 [[1730년]] 복주 처분되었다.
         * [http://www.rfo.co.kr/view_party.php?activePage=2&keyword=&sort=&list_mode=people1&refnum=099 대한제국 조선 황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 여천군 이경]
         {{토막글|조선}}
         [[분류:1683년 태어남]][[분류:1730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사형된 사람]][[분류:운현궁]][[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숙종]][[분류:조선 경종]][[분류:조선 영조]]
  • 연갑수
         '''연갑수'''(延甲洙, [[1961년]] ~ [[2011년]] [[3월 4일]])는 [[대한민국]]의 [[사학자]]이자 대학 교수이다. [[조선]] 말기 특히 [[흥선대원군]] 연구에 큰 기여를 남겼다. [[2011년]] 화재 사고로 사망했다.<ref>{{뉴스 인용|제목=서울대, 화재로 숨진 교수 자녀에 희망 장학금|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9&aid=0002170422|출판사=MBN|저자=갈태웅|쪽=|날짜=2011-03-23|확인날짜=2017-03-22}}</ref>
         * 《조선정치의 마지막 얼굴》, 사회평론아케데미, 2012
  • 염상섭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1932년]]에 발표된 [[김동인]]의 단편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1932)를 읽은 염상섭은 그것이 늦장가를 간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생각해 동인과 설전을 벌였다. 당대 문단을 주도했던 두 사람은 이 일로 무려 15년 동안이나 관계를 끊고 살았다.<ref>[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22570285 평론가 이상진, '한국 근대작가 12인…' 출간] 조선일보 2004.02.25</ref> 일각에서는 염상섭의 아이가 다른 사람의 아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었고, 김동인은 그 무렵에 [[발가락이 닮았다]]를 발표했던 것이다.
         * [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04/02/25/2004022555285.html (북스) 평론가 이상진, ''한국 근대작가 12인...'' 출간] 조선일보 2004.02.25
         *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22570285 평론가 이상진, '한국 근대작가 12인…' 출간] 조선일보 2004.02.25
  • 염창섭 (1890년)
         |출생지=[[조선]] [[한성부]]
         [[3·1 운동]] 이후 이청천이 항일 운동을 시작하는 등 상당수의 조선인 일본군 장교들이 진로를 바꾸었다. 염창섭은 보병 중위를 마지막으로 군복을 벗고 [[평안북도]] [[정주군]]의 사립 [[오산학교]] 교감으로 부임하였다.<ref>{{서적 인용
  • 예안 김씨
         * [[김담]](金淡, [[1416년]]~[[1464년]]) : 10세. [[자 (이름)|자]](字) 거원(巨源), [[호 (이름)|호]](號) 무송헌(撫松軒). [[조선]] [[세종]], [[조선 문종|문종]] 때의 명신. [[이조]] [[판서]] 역임. [[시호]]는 문절(文節). [[단계서원]](丹溪書院), [[구강서원]](龜江書院) 배향.
         * [[김륵]](金玏, [[1540년]]~[[1616년]]) : 14세. 자 희옥(希玉), 호 백암(栢巖). 퇴계 [[이황]] 문인. 조선 [[선조]] 때의 명신. 이조 판서 추증. 시호는 민절(敏節). [[구강서원]](龜江書院) 배향.
         * [[김약련]](金若鍊, [[1730년]]~[[1802년]]) : 21세. 자 유성(幼成). 호 두암(斗庵). 조선 정조 때의 승지. 문집 [[두암집]](斗庵集).
  • 오강군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사저 <br/><small>([[신장병|신장풍]]과 [[당뇨병|소갈증]]의 합병증으로 병사)</small>
          | 왕가 = [[조선|조선 왕조]]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조선 왕조]]
          | 친인척 = 이운환(양누이) <br/> 조민원(장인) <br/> [[조선 중종|중종 이역]](조부) <br /> [[조선 인종|인종 이호]](이복 숙부) <br/> [[덕흥대원군|덕흥군 이초]](이복 숙부) <br/> [[조선 명종|명종 이환]](이복 숙부) <br /> [[조선 선조|선조 이연]](사촌 형) <br/> [[능원대군|능원군 이보]](양손자) <br/> [[능창대군|능창군 이전]](양손자) <br /> [[평운군|평운군 이구]](양손자) <br/> [[영풍군 (이식)|영풍군 이식]](양증손자) <br/> [[인평대군|인평군 이요]](양증손자)
         '''오강군 이건'''(烏江君 李鍵, [[1560년]] ~ [[1648년]])은 [[조선]] 중기의 [[왕족 종실]]이다. [[해안군|해안군 이기]]의 여섯째 서자이며, 후사 없이 죽은 이복 백부 [[복성군|복성군 이미]]의 사후 양자로 출계하였다.
         [[해안군|해안군 이기]](海安君 李㟓)의 여섯째 서자로 출생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복 숙부 [[조선 명종|명종]]의 총애를 받으며 6세 시절이던 [[1565년]] '''오강부수'''(烏江副守)에 책봉되었고 이듬해 [[1566년]] '''오강수'''(烏江守)에 진책되었으며 1년 후 [[1567년]] '''오강부정'''(烏江副正)에 진봉되었고 그 해에 큰아버지 [[복성군|복성군 이미]]의 양자 출계하였으며 이듬해 [[1568년]] '''오강정'''(烏江正)으로 승작되었고 1년 후 [[1569년]] '''오강군'''(烏江君)에 봉군되었다.
         원래 [[복성군|복성군 이미]]의 사후 양자로 [[덕흥대원군|덕흥군]]의 셋째아들 [[조선 선조|하성군 이연]]이 내정되었으나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면서 결국 오강군이 [[복성군|복성군 이미]]의 양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오강군도 후사가 없어, 1580년 선조는 자신의 아들 의안군을 양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후일 선조의 서4남 신성군을 양자로 입후하였다. 선조는 오강군을 복성군의 양자로 지정하고도, [[1580년]] 다시 선조 자신의 아들 [[의안군 (왕족)|의안군]]을 [[복성군]]의 양손자로 지명하여 [[유성룡]] 등이 종조부와 종손자 관계이며 중간에 아버지가 없다 하여 비판하기도 했다. 오강군은 후일 다시 친형 서천군 이금의 서자 화원수 이효성을 양자로 입양했다가 관직을 받으려고 허위로 고했다 하여 [[1638년]](인조 16) [[12월 25일]] [[종부시]] [[도제조]] [[김세렴]]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 조부: [[조선 중종|중종]]
         * [http://www.rfo.co.kr/view_party.php?activePage=2&keyword=&sort=&list_mode=people1&refnum=081 대한제국 조선 황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 오강군 이건]
         {{토막글|조선}}
         [[분류:1560년 태어남]][[분류:1648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병사한 사람]][[분류:당뇨병으로 죽은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문신]][[분류:유교 신자|이건]][[분류:양자]][[분류:운현궁]][[분류:전주 이씨]][[분류:16세기 한국 사람]][[분류:17세기 한국 사람]][[분류:조선 명종]][[분류:조선 선조]][[분류:조선 광해군]][[분류:조선 인조]]
  • 오경석
         '''오경석'''(吳慶錫, [[1831년]]([[순조]] 31년) [[3월 5일]]([[음력 1월 21일]]) ~ [[1879년]]([[조선 고종|고종]] 16년) [[10월 7일]]([[음력 8월 22일]]))은 [[조선]] 후기의 역관, 외교관이자 정치인, 사상가이다. 작가이자 시인이며 서예가, 서화가였고, 고미술품 감정에도 식견을 갖추었다. 그는 조선왕조 19세기 중엽의 [[개화사상]]의 비조로서, 한국 최초의 개화사상가이다.<ref name="한국최초">{{서적 인용
         [[1846년]](헌종 12년) 역과(譯科)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사역원]][[한학]]습독관이 되었다. 이후 [[사역원]]첨정을 지낸 이정(李挺)의 딸 금산이씨(金山李氏)와 결혼했으나 곧 전염병으로 사별하고 이듬해 중인 가문의 딸 김해김씨와 재혼하였다. [[1853년]] 23살 때 처음으로 북경으로 가는 사신단에 참여하였다. 그때 서양 세력에게 침탈되는 청나라 모습에 충격을 받았으며, 그것이 장래에 조선에도 닥치게 될 위기임을 절감한다. 그런 생각을 바탕을 서양 문물과 사상이 담긴 서적을 사들였고, 조선에서는 그 책들을 신서(新書)라고 불렀다. 신서는 한문으로 번역된 세계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에 관한 책들이었으며, 양수기 제조법이나 세계 지도 등도 수록되어 있었다.
         훗날 아들 [[오세창]]의 증언에 의하면, [[유대치]]가 오경석에게 어떻게 해야 [[조선]]사회의 개혁을 성취할 수 있느냐고 묻자, 오경석은 [[김옥균]] 등의 개혁적 성향의 북촌 양반들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그는“북촌의 양반 자제 가운데 동지를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오경석이 [[베이징]]에서 구입해 온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 과학과 정치 서적들은 [[이동인]]이 구해온 박물, 서양어 서적, 태엽기계, 거울, 망원경, 돋보기 등과 함께 [[유대치]], [[강위]], [[박규수]] 등에게도 전달되었고, 이들을 통해 [[김윤식]], [[김홍집]], [[유길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북촌 청년들에게 전해지며 개화파라는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다.
         [[1860년]](철종 11년) [[10월]]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하사]] 겸 [[사은사]] [[신석우]](申錫愚)의 수행 역관으로 [[베이징]]을 방문했다가 [[1861년]] [[3월]]에 귀국했는데, 이때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을 목격하고 돌아와 개항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역관으로 재직하면서 스승 [[이상적]]을 가르친 추사 [[김정희]]를 찾아가 사사하였으나 얼마 뒤 사망하였다. [[1866년]](고종 3년) [[5월]] [[병인양요]] 발생 직전, 프랑스 동양함대의 [[조선]] 침공이 준비되자, 이 정보를 입수하여 [[조선]]정부가 사태를 해명하고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청나라]]로 파견하는 주청사(奏請使) 일행의 역관으로 [[베이징]]을 방문하였다. 이때 서양의 침략에 경험이 있던 [[청나라]]의 양무파 정객, 외교가들을 방문하여, 이들을 설득하여 [[프랑스]] 함대의 동태와 그들의 조선침략 대책수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대응책에 대한 정보를 얻어왔다. 귀국 후 그는 [[청나라]]는 [[프랑스]]의 [[조선]] 침공에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프랑스군은 군량(軍糧)이 부족하므로 지형을 이용하여 굳게 지키고 가능한 한 싸움을 피하면서 시간을 오래 끌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조선]] 정부에 보고했다.
         그는 [[유대치]], [[박규수]], [[강위]] 등과 개항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개화파 청년들의 육성을 고민하였다. 조선의 정치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장차 정치의 전면에 나설 젊은 양반자제들과 접촉하여 개화사상을 교육하고 발전시켜서 근본적인 개혁정치를 실시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1860년]]대부터 [[김윤식]], [[유길준]], [[김홍집]] 등이 [[박규수]]와 유대치, 강위의 문하와 그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오경석은 또한 13차례나 청나라를 오가면서 서양 문물과 제도를 알 수 있는 물품, 곧 세계 지도를 비롯하여 자명종, 망원경 등을 조선에 들여왔다. 흥선대원군이 애용하던 [[회중시계]]도 오경석이 청나라에서 사와서 선물했으리라 여겨진다. 또한 한국 최초로 [[사진|초상 사진]]을 찍은 사람이며, [[1853년]] 주청 프랑스 공사 필립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여 청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돌아왔다.
         [[강건]]이 만들고 오경석이 소장했던 옥으로 만든 해시계가 발견되었다. 시계에는 강건이 제작하고 오경석이 소장했다는 글이 씌여 있다. 강건의 집안은 시계를 제작해 온 명문가의 후손으로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을 지냈고, 오세창과 가깝게 교류를 했다. 을 정도다. 강건의 증조부는 조선 후기의 [[강세황]]이고, 그의 아버지 [[강이오]]와 큰아버지 [[강이중]]은 혼천시계를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ref>허윤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5/02/2016050200067.html 개화파 오경석이 지녔던 휴대용 해시계 발견], 조선일보</ref>
         어려서부터 글씨와 그림을 즐겼으며 북경에 왕래하면서 세계 정세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많이 흡수하여 조선의 국제무대 등장을 주장했다. 그가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해국도지(海國圖誌)》와 같은 책은 세계 정세를 국내에 소개하는 자료가 되기도 했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23&oid=358&aid=0000000655 <nowiki>[</nowiki>국회보 2012년 3월호<nowiki>]</nowiki> 조선청년에 개화사상 전파해 위기의 조국 구하려 한 역관 오경석] 국회보 2012.03
         [[분류:1831년 태어남]][[분류:1879년 죽음]][[분류:혁명가]][[분류:조선의 역관]][[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서예가]][[분류:조선의 화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작가]][[분류:과거 급제자]][[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유길준]][[분류:사상가]][[분류:통역사]]<!-- 역관 -->[[분류:금석학자]][[분류:조선의 상인]][[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해주 오씨]][[분류:개화파]][[분류:통상 개화론자]]
  • 오달제
         |출생지= [[조선]] [[한성부]]
         |국적= {{국기나라|조선}}
         '''오달제'''(吳達濟, [[1609년]] ∼ [[1637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 오씨|해주]](海州),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토막글|조선}}
         [[분류:1609년 태어남]][[분류:1637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해주 오씨]][[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화가]][[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장원 급제자]][[분류:사형된 사람]][[분류:병자호란 관련자]]
  • 오사충
         '''오사충'''(吳思忠, [[1327년]]~[[1406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며,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본관은 [[영원 오씨|영원]](寧遠). 시호는 공희(恭僖)다.
         [[1392년]] [[음력 7월 17일|7월 17일]]에 이성계 추대에 참여하여 조선 개국공신 3등으로 [[호조]][[전서]]가 되고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졌다. 1394년 중추원부사에 오르고, 교주강릉도관찰사(交州江陵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과 가까운 수령·군인들이 직책을 소홀히 하거나 차례를 뛰어넘어 승진한 것 등을 엄하게 조사, 처리하였다. 1395년에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가 되고, 이듬해 정당문학(政堂文學)·경기좌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404년(태종 4)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로 재직하다가 영성군(寧城君)에 봉군되었다. 1406년 졸하였고 시호는 공희(恭僖)이다. 아들은 [[서자]]인 오계종(吳繼宗) 하나가 있다.
         {{조선의 개국공신}}
         [[분류:1327년 태어남]][[분류:1406년 죽음]][[분류:포항시 출신 인물]][[분류:연일 오씨]][[분류:영원 오씨]][[분류:고려의 문신]][[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고려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개국공신]]
  • 오세창
         '''오세창'''(吳世昌, [[1864년]] [[8월 6일]] ~ [[1953년]] [[4월 16일]])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 정치인이자 계몽 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의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화가, [[대한민국]]의 정치인, 서화가이다. [[조선]] 말기에는 개화파 정치인이었고,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서화와 고미술품 감정 등의 활동도 하였다. [[한국]]의 역대 왕조의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1928년)의 저자이다. [[1918년]] 설립된 [[조선]]인 미술가, 서예가, 조각가 단체인 [[서화협회]] 창립 발기인이기도 하다.
         개화파 중인 역관 [[오경석]]의 아들로 조선 말기에는 개화운동에 동참했고, [[을미사변]]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했으나 [[190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귀국 후 [[만세보]], [[대한민보]]의 대표이사로 언론 활동을 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과 [[천도교]] 사역 활동에 종사하였으며 [[1918년]] 말부터는 만세 운동 계획에 참여, [[1919년]] [[3월]]의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예술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서예가이기도 했다.
         [[1896년]](건양 1년) [[일본 문부성]]의 외국어학교 교사 초빙 당시 초빙되어, [[도쿄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부임하였다. [[1897년]]에는 정식으로 [[토쿄외국어학교]]에 조선어과 교사로 파견되어 [[일본]]에서 1년 가량 교사 생활을 하면서 근대 문물을 직접 접했다.
         [[1918년]] [[1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손병희]], [[최린]](崔隣), [[권동진]](權東鎭)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우선 동지를 포섭하기로 한다. 또한 일부 [[천도교]] 연락원들이 [[기독교]] 지도자 일부와 합의하자, 범거족적인 만세 시위 개최에 동의한다.
         [[1919년]] [[2월 10일]] [[최린]], [[최남선]] 등이 협의하고,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초안하여 제출하자 그는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내용을 검토하고 그 내용에 동의한다. [[2월 25일]] 오세창은 [[손병희]], 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조선 고종|고종]] 국장에 참배할 목적으로 상경한 [[천도교]]도 박준승(朴準承), 홍기조(洪基兆), 홍병기(洪秉箕),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알리고 이들을 설득하여 찬동을 얻었다. 이때 오세창은 그는 [[천도교]] 월보과장 옥파 [[이종일]](李鍾一)을 설득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이후로는 서예가, 전각가(篆刻家) 및 서예학과 금석학 역사가로 주로 활동했다. [[1922년]] 초대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렸을 때 서예 부문에서 수상했고, 서화사 연구에도 뛰어들어 아버지 오경석과 자신이 수집한 풍부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역대 [[한국]]의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 (槿域書畫徵)》(1928)과 [[고려]]∙[[조선]]의 서화들을 직접 찾아서 사진촬영 및 자신이 소장한 고미술품을 합친 화보집 《근역서화휘(槿域書畫彙)》를 출간하였다. 근역서화징은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들을 총망라한 인명 사전이다. 그 밖에도 《근역서휘》, 《근역화휘》, 《근묵》, 《근역인수》, 등을 펴내었다.
         일제강점기 중반 이후 자택에 칩거하며 서예, 서체, 서화가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밖에도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 서예가, 문인학자들의 날인(捺印)된 낙관, 인장 혹은 관련 정보들을 모아 《근역인수 (槿域印藪)》를 편찬하였으며, 여러 서화가들의 다양한 낙관과 아호 연구의 자료가 되었다. 그는 [[1918년]]에 근대적 미술가 단체의 효시인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13인의 발기인으로 참석하였으며, [[서화협회]]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직후 [[9월]] 창당된 우익 계열의 보수 정당 [[한국민주당]]도 창당때 그를 공동 당수로 영입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한민당 영수직을 거절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도 추대되었으나 거절했다. 이어 매일신보(每日申報)의 명예사장과 서울신문 명예사장으로 추대되자 이를 수락하였다.
         46년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일명 민주의원) 의원, [[서울신문]] 명예사장 등을 지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이후 남북협상과 단정수립론이 갈렸을 때는 입장표명을 하지 않다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에 참석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친일하지 않은 독립운동의 원로였기에, 광복후 고령에도 불구하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위원,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일명 민주의원) 의원, [[서울신문]] 명예사장 등에 위촉되었다.
         [[분류:1864년 태어남]][[분류:1953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역관]][[분류:급진개화파]][[분류:한국의 기자]] <!-- 조선의 기자-->[[분류:대한제국의 정치인]][[분류:대한제국의 작가]][[분류:대한제국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천도교 교역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서예가]]
  • 오시만
         '''오시만'''(吳始萬, [[1647년]] - [[1700년]])은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1666년]](현종 7)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음서]]로 출사하여 [[통덕랑]]으로 재직 중 [[1676년]](숙종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으로 합격, [[성균관]][[전적]]과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그 뒤 삼사의 요직을 거쳐 [[1679년]] [[헌납]]으로 재직 중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수찬, 부수찬, 부교리, 사간원헌납, [[홍문관]]교리 등을 지냈다.
         부인은 청주한씨로, [[조선 인조|인조]]의 장인인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증손인 돈령부판관(敦寧府判官) 한두상(韓斗相)의 딸이다.
         이때 [[서인]]에서 그의 양아버지이자 삼촌인 [[오정위]]의 서녀를 첩으로 둔 [[서인]]당원 [[김환]]을 사주하여 오정위 등이 역모를 꾸민다고 무고, [[김석주]], [[김익훈]] 등이 날조한 [[허영의 옥사]]에 연루되어 [[서인]]의 공격을 당했으나 [[조선 숙종|숙종]]이 듣지 않아 사형은 모면하였다.
         [[분류:1647년 태어남]][[분류:1700년 죽음]][[분류:음서]][[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동복 오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병사한 사람]]
  • 오원 (조선)
         |출생지= [[조선]] [[한성부]]
         |국적= {{국기나라|조선}}
         '''오원'''(吳瑗, 1700년 ~ 1740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 오씨|해주]](海州). 자는 백옥(伯玉), 호는 월곡(月谷)이다.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오두인]](吳斗寅)이고, 아버지는 오진주(吳晋周)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의 딸이다. 백부인 [[오태주]](吳泰周)와 조선 제18대 왕 [[조선 현종|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의 양자가 되었다. 1728년(영조 4)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고 벼슬은 [[대제학]]에 이르렀다.<ref name="대제학">[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ua_11610010_001 《영조실록》 52권, 16년(1740 경신 / 청 건륭(乾隆) 5년) 10월 10일(정미) 1번째기사]</ref>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월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va_11712017_002 《정조실록》 38권, 17년(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년) 12월 17일(병자) 2번째기사]</ref>
         오원은 [[해주 오씨]] 시조 [[오인유]](吳仁裕)의 19세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오두인]](吳斗寅)이고, 아버지는 오진주(吳晋周)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의 딸이다. 백부인 [[오태주]](泰周)와 조선 제18대 왕 [[조선 현종|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의 양자가 되었다.
         * 고조모 : [[전주 이씨]](全州李氏) - 한성 서윤(漢城庶尹) 이시중(李時中)의 딸, [[조선 세종|세종]]의 6대손
         **** 양모(백모) : [[명안공주]](明安公主, [[1667년]] ~ [[1687년]]) - 제18대 [[조선 현종|현종대왕]](顯宗大王, 1641~1674, 재위 1660~1674)의 딸, 제19대 [[조선 숙종|숙종대왕]](肅宗大王, 1661~1720, 재위 1674~1720)의 여동생
         [[분류:1700년 태어남]][[분류:1740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해주 오씨]][[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장원 급제자]]
  • 오종렬
         |출생지= [[일제 강점기]] [[조선]]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산군]]
  • 완친왕
         '''완친왕'''(完親王, [[1868년]] [[5월 31일]] ~ [[1880년]] [[1월 12일]])은 [[조선]]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자이며 추존 친왕이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서장자로, [[귀인 이씨 (영보당)|영보당 귀인 이씨]] 소생이다. 완화군(完和君)에 봉해졌다. 한때 [[흥선대원군]]은 그를 총애하였으나 일찍 요절하였다.
         {{조선의 왕자}}
         [[분류:1868년 태어남]][[분류:1880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자]][[분류:조선의 왕족]][[분류:대한제국의 황자]][[분류:병사한 사람]][[분류:운현궁]][[분류:의문사한 사람]][[분류:유교 신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전주 이씨]]
  • 울릉군
         [[조선]] 시대 때 [[왜구]]가 많이 습격하자 조정에선 주민을 모두 이주시키고 공도(空島)정책을 쓴다. 이후 [[일본인]]들이 들어와 어업을 하기도 했지만 [[안용복]]의 활약으로 1696년에 [[도쿠가와 막부]]에서 울릉도를 조선의 땅으로 인정하고 막부는 일본인들의 출입을 금했다([[http://anyongbok.kr/ahn/ahn_01.php|안용복 재단]] 참조). 그 후 19세기 고종 시절에 울릉도를 개척하는 정책이 시행되어 전남, 경남 지역 도서민을 이주시켜 다시 유인도가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일제강점기]] 때 도동이 일본인 마을로 통했다면 저동은 조선인 마을로 통했다는 점. 실제로 도동에는 아직도 일본식 건축물이 약간 남아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으로 울릉도를 방문했을때[* 이후 2012년에 이명박 대통령이 울릉도와 독도를 방문하였다.], 묵고 갔다던 당시 울릉군수 관사도 일본식 건물이다.
         제주도처럼 육지와 떨어진 섬으로 흔히 제주도처럼 울릉도만의 독자적인 사투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울릉도는 조선시대 공도 정책으로 사람들을 육지로 이주시켜 오랜 세월 무인도에 가까웠고, 오늘날 울릉도 주민들은 대부분 [[고종황제]] 시대 이후 이주민들이라 조상 대대로 울릉도에서 살아온 건 아니라서 울릉도만의 사투리는 없다. 다만 이주민들 대부분이 경북출신 특히 [[경주시]], 영일([[포항시]]) 출신이 많아서 경북 사투리가 많이 남아있다.
  • 울진군
         [[신라]] 시대에는 [[명주]], [[고려]] 시대에는 동계, [[조선]]~[[대한민국]] 시대(1962년)까지 1000년이 넘도록 강원도 관할이었고, 현재 [[경상도]](경상북도) 관할로는 2014년 현재 겨우 50여 년이 되었다. 경상도 다른 지역보다 강원도 정서가 좀 더 강한 것은 당연하다. [[애초에]] 도급 행정구역의 경계지역은 완전히 그 도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것도 강원도같이 도내에서도 지역차가 확고한 지역이라면.
          최근에 개발된 관광지. 조선 시대의 기인인 격암 남사고의 생가를 유적지로 개발한 곳이다. 성류굴에서 왕피천을 따라 약 2 km 상류에 위치해 있다.
          근남면 산포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이 곳 역시 관동팔경 중에 하나이다. 참고로 이 곳은 정철의 [[관동별곡]]의 종지부를 찍은 곳이기도 하다.
  • 원천군 (1433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가통 사저에서 [[신부전증|음수증]]으로 병사
          | 왕가 = [[조선|조선 왕조]]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
          | 친인척 = [[안평대군|안평군 이용]](양형.사촌형) <br /> [[조선 태종|태종 이방원]](친조부) <br /> 성억(양외조부) <br /> 정역(친외조부) <br /> [[양녕대군|양녕대군 이제]](동복 백부) <br /> [[조선 세종|세종대왕 이도]](동복 숙부) <br /> [[조선 문종|문종 이향]](사촌 형) <br /> [[조선 세조|세조 수양대군 이유]](사촌 형) <br /> [[임영대군|임영대군 이구]](사촌 형) <br /> [[조선 덕종|의경세자 도원군 이장]](5촌 재종조카) <br /> [[귀성군|귀성군 이준]](5촌 재종조카) <br /> [[조선 단종|단종 이홍위]](5촌 재종조카) <br /> [[조선 예종|예종 해양대군 이황]](5촌 재종조카) <br /> [[월산대군|월산대군 이정]](재종손) <br /> [[조선 성종|성종 자을산군 이혈]](재종손)
         '''원천군 이의'''(原川君 李宜, [[1433년]] ~ [[1476년]] [[3월]])는 [[조선]]의 [[왕족|왕족 종실]]이며 [[성녕대군|성녕대군 이종]]의 양차자(養次子)이다.
         그의 [[본관|본관(관향)]]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고 생부는 [[효령대군|효령대군 이보]]이며 [[효령대군|효령대군 이보]]의 적6남(嫡六男)으로 출생한 그는 6세 시절이던 [[1438년]]에 숙부 [[조선 세종|세종대왕]]으로부터 '''원천부윤'''(原川副尹)에 책봉되었으며 9년 후 [[1447년]] 숙부 [[조선 세종|세종대왕]]으로부터 15세의 나이로 '''원천윤'''(原川尹)에 진봉되었고 12년 후 [[1459년]] [[1월]]에는 숙부 [[성녕대군|성녕대군 이종]]의 양차자(養次子)로 출계하였으며 이듬해 [[1460년]] 사촌 형 [[조선 세조|세조]] 임금으로부터 '''원천경'''(原川卿)이라는 [[작위]] 개봉을 제수받았다가 [[1466년]] [[1월]]에는 '''원천군'''(原川君)이라는 [[작위]]에 다시 개봉되었지만 그 해 [[1466년]]에 과음 주독으로 인한 [[신부전증|음수증]]으로 10년간 투병하다가 재종손자 [[조선 성종|성종]] 임금이 치세하던 시기인 [[1476년]] [[3월]]에 향년 44세로 병사하였다.
         * [http://www.rfo.co.kr/view_party.php?list_mode=people1&refnum=041&party_name= 대한제국 조선 황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 원천군 이의(1433~1476)]
         {{토막글|조선}}
         [[분류:1433년 태어남]][[분류:1476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양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전주 이씨]][[분류:효령대군파]][[분류:조선 세종]][[분류:조선 문종]][[분류:조선 단종]][[분류:조선 세조]][[분류:조선 예종]][[분류:조선 성종]][[분류:조선의 불교 신자]][[분류:신부전으로 죽은 사람]]
  • 원천군 (1533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에서 병사
          | 왕조 = [[조선]]
          | 가문 = [[조선|조선 왕조]] [[전주 이씨]]
         '''원천군 이휘'''(原川君 李徽, [[1533년]] ~ [[1594년]])는 [[조선]]의 [[왕족|왕족 종실]] 겸 [[시 (문학)|시인]]이자 [[문신 (관료)|문관]] 겸 [[무신 (관직)|무관]]이며 [[정치가]]이다.
         그는 [[조선 세종|조선 세종대왕 이도]](1397년 ~ 1450년)의 서자(庶子)인 [[영해군 이당]](1435년 ~ 1477년)의 직계 후손이다.
         [[본관|본관(관향)]]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며 아버지 [[은계수|은계군 이말숙]]과 어머니 해주 최씨 부인의 슬하 1남 6녀 중 셋째이자 외동아들로 출생한 그는 [[조선 중종|중종]] 임금 시기이던 [[1540년]] '''원천부위'''(原川副尉)에 책봉되었고 1년 후 [[1541년]] '''원천부수'''(原川副守)에 개봉된 이후 13년이 지난 [[1554년]]에는 [[조선 명종|명종]] 임금에 의하여 '''원천군'''(原川君)에 진책되었으며 1년 후 [[1555년]]에 학행과 효행으로써 [[음서]] 천거된 이후 [[1556년]]에 열린 예과와 [[1563년]]에 열린 예과에 각각 장원을 하는 등 두번씩 장원 급제를 하였고 정의대부 작위 시절이던 [[조선 선조|선조]] 임금 치세 시기(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란 대책에 공을 세워 [[1593년]]에는 중의대부(中議大夫) 작위에 올랐지만 곧 관직을 사퇴하여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1594년]] 갑작스레 풍병에 걸려 향년 62세로 서거하였다.
         * [[순천군 (1518년)|순천군 이관]] (같은 시대의 조선 왕족 종실 친척이자 학행 및 효행자.)
         * [http://www.rfo.co.kr/view_party.php?activePage=3&keyword=&sort=&list_mode=people1&refnum=062 대한제국 조선 황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 원천군 이휘]
         {{토막글|조선|시인}}
         [[분류:1533년 태어남]][[분류:1594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중종]][[분류:조선 인종]][[분류:조선 명종]][[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 선조]][[분류:조선의 시인]][[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음서]][[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유교 신자|이휘]][[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학자]][[분류:과거 급제자]][[분류:장원 급제자]]
  • 위안커원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어머니 = [[조선]] [[안동 김씨]] 여인(생모) <br/> 황후 위씨(적모)
         [[조선]] [[한성부]]에서 [[청나라|중국 청나라]]의 [[군인|무관]](武官)이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서자(庶子)로 출생한 그의 [[자 (이름)|자]](字)는 바오천(豹岑, 표잠)이고 [[호 (이름)|호]](號)는 한윈(寒云, 한운)이며 원적지는이다.
         아버지는 [[중화민국의 총통|중화민국(中華民國) 대총통]]과 [[중화제국|중화제국(中華帝國) 황제]]를 지낸 [[위안스카이]](袁世凱)이며 어머니는 [[조선]] 출신의 [[안동 김씨]](安東 金氏) 여인으로 아버지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첩|측실]](側室)이었고 아버지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조선]] [[한성부]]에 머물러 있던 중에 위안커원 그가 출생하였으며 위안커원 그는 지난날 한때 조선 경상도 안동에서도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는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 제국|일본]]에 패한 직후 아버지를 비롯한 일가족과 함께 [[조선]]을 떠나 [[청나라|청 제국(淸 帝國)]]으로 귀국하였고 그 후 중국 청나라 허난 성 쉬창 부 샹청 현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아직 얼마 아니 되어 [[베이징시|베이핑]]으로 옮겼다.
  • 유대철
         '''유대철'''(劉大喆, [[1826년]] - [[1839년]] [[10월 31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으로, 그들 중 가장 나이 어린 [[성인]]이다. [[세례명]]은 '''베드로'''(Petrus), 축일은 [[9월 20일]]이다.
  • 유동근(배우)
         대중은 '''[[왕]] 전문 배우'''로 기억한다. 군주 역할을 많이 맡았지만 '''특유의 후덜덜한 발성'''이 강렬한 카리스마를 각인시키는 탓도 있다. 비슷하게 카리스마형 배우로 유명한 [[김영철(배우)|김영철]]이 야인시대 2부의 그 유명한 '''[[내가 고자라니|공산당 할 거야 안 할거야!!!]]'''로 대표되는 귀청이 떨어질듯 쩌렁쩌렁한 호통으로 유명하다면, 유동근은 마치 호랑이가 낮게 으르렁거리다가 포효하는 듯한, 절로 오금을 저리게 하는 초저주파 타입의 호통이다. [[https://youtu.be/DhGlBFPcmCg|이 영상을 보면 그 특유의 성난 음색이 드러난다!]] [[사자후]]라는 말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배우. 그야말로 역대급이다. 사극의 주요 배역에서도 카리스마가 있고 강력한 권력자 역을 많이 맡았다. [[계백]], [[연개소문]]이나 '''[[태조(조선)|태조(이성계)]]''', '''[[태종(조선)|태종(이방원)]]''', [[세조(조선)|세조]], [[연산군]], '''[[흥선대원군]]''' 등.
         '''[[용의 눈물]]에서 연기한 [[태종(조선)|태종]]'''은 그야말로 압권. 이때 보여준 연기는 대중에게 길이길이 남았으며, 나중에 처음으로 연기대상까지 얻는다. 용의 눈물에서는 명장면이 많았지만, 거기서도 '용의 춤[* 노쇠한 아버지 이성계를 즐겁게 하기위해 스스로 용포를 휘날리며 춤을 추던 씬.]' 부분이 압권이다. 하긴 이 장면은 유동근, 故[[김무생]], [[최명길(배우)|최명길]] 모두가 폭발한 씬이어서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이외에도 세간에 '''아내가 미인'''으로도 정평이 나 있는데, 바로 탤런트 [[김을동]]이다.[* 원래는 방송가 사람들 사이에서 돌던 말이었는데 여러 번 스포츠신문 연예란이나 예능 등에서 가볍게 언급되다 보니 어느 새 일반 대중들도 이 이미지를 받아들였다. 연예인 중에서는 [[남희석]]이 '자신의 이상형은 전인화'라며 이를 이용한 드립을 방송에서 많이 치고 다녔다. 심지어 결혼 이후에도 한동안...] 대표작으로는 '[[여인천하]]'를 들 수 있으며('''나 거성의 안주인이야'''라는 모습을 기억하는 시청자들이 많다), 여기서 [[문정왕후]] 역으로 출연했다.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왕조 500년'의 '인현왕후'에서 [[장희빈]] 역으로 출연했다.
         유동근은 '용의 눈물'로 KBS 연기대상을, [[전인화]]는 '여인천하'로 SBS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남편은 왕으로, 아내는 왕비로 대상 차지한 부부.''' 그것도 '''[[태종(조선)|태종]]'''과 '''[[문정왕후]]'''라는, '''[[조선]] 역사상 최강의 권력을 누린 왕과 왕비''' 역할이다.
         2014년에 방영될 KBS 드라마 [[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 [[이성계(정도전)|이성계]] 역할을 맡았다. 담당 PD가 용의 눈물 시절 연출부의 막내인걸 생각하면... 재미있는 것은 [[용의 눈물]]에 이어 [[이방원(정도전)|아들]]역에는 [[안재모]]. [[이지란|의형제]]역에는 [[선동혁]]이 그대로 나온다는 것. 참고로 '''[[서북 방언]]'''을 구사한다! 공교롭게도 사극에서 [[정도전]]과 관계 깊은 사람을 세 번 연기한 셈인데, [[이성계|정도전을 발탁하고 중용한 사람]], [[이방원|정도전을 죽인 사람]], [[흥선 대원군|정도전을 복권시킨 사람]]을 모두 연기했다는 진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유동근은 이 세 가지 배역을 통해서 세 번의 연기대상을 수상했다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 유동근이 대상을 수상한 배역들은 모두 조선 왕조의 인물들이며 직간접적으로 정도전과 연관점이 있다는 특징이 있다.
  • 유민상 (1979년)
         | 직업 = [[조선선종|선종]]
         '''유민상'''(柳敏相<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izstpVU1j4U&feature=youtu.be&t=82|title="유민상의 어쩌다 돼지" [맛있는 녀석들 미공개 영상]|author=맛있는 녀석들 (Tasty Guys)|publisher=Youtube|date=2017-08-21|accessdate=2019-01-04}}</ref>, [[1461년]] [[10월 9일]] ~ )은 [[조선]]의 [[조선선종|선종]]이다.
         [[분류:조선 인물]]
  • 유소사
         '''유소사'''(柳召史, [[1761년]] ~ [[1839년]] [[11월 23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체칠리아'''(Caecilia)이다.
         그녀의 아들 [[정하상]]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에 깊히 연관되어 있었고, 그녀는 그와 몇 해를 떨어져 지내왔다. 그 이별은 그녀에게 고통이었으므로, 정하상이 [[주교]]와 [[사제]]들의 조수가 되자, 그녀는 그들을 찾아가서 아들과 같이 살 수 있었다.
  • 유시태 (1890년)
          | 경력 = 前 [[조선총독부]] [[경상북도]] [[성주군]]
          |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 [[안동시]]
          | 직책 = 前 [[조선총독부]] [[경상북도]] [[봉화군]] <br/>(前 朝鮮總督府 慶尙北道 奉化郡 郡守)
         본적지는 [[경상북도]] [[안동시|안동]] 이다. 본관은 [[풍산 류씨|풍산]](豊山), 호(號)는 산촌(山村). 서애 유성룡 선생의 13대 후손인 그는 [[1913년]]부터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판임관견습으로 근무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어 총독부 군서기가 되었다. 이후 군서기로에서 차례로 근무했다.
  • 유옥겸
         총론은 다시 지리학, 천문지리, 지문지리, 인문지리에 대한 세부단원으로 나뉜다. 총론에서 지리학을 세 개의 소단원으로 구분, 천문지리학에서는 지구가 천체를 하나님이 창조한 이래 형성과정 그리고 각 행성의 대소, 위치, 운동 및 그 결과, 경위선 등에 관한 사항을 다루었고 이를 수리지리학(數理地理學)이라 칭하기도 한다. 당시까지도 지구가 평평한 것으로 인식하던 [[조선]] 백성들은 그의 이러한 견해에 놀라기도 했다.
         [[분류:1883년 태어남]][[분류:1922년 죽음]][[분류:조선 사람]][[분류:대한제국의 역사가]][[분류:대한제국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역사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교육학자]][[분류:수사학자]][[분류:유길준]][[분류:저술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사상가]]
  • 유진길
         '''유진길'''(劉進吉, [[1791년]] ~ [[1839년]] [[9월 22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Augustinus)이다.
         [[조선]] 최초의 그 [[천주교]] 저작들은 공무상에 갔던 [[외교관]]들이나 [[통역관]]들을 통해 [[조선어]]로 번역되어온 것이었다. 유진길의 가족이 통역관으로 [[청나라]]를 왕래한 이래로 그들도 그 책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신유년의 박해]] 동안에, 온 [[백성]]들에게 [[서학]]을 다루는 모든 문헌을 파기하라는 국령이 떨어지자, 유진길의 가족은 낡은 궤짝을 수선하여 그 책을 숨겼던 것이었다.
         그 당시, [[1801년]] [[신유박해|신유년의 박해]]로 인하여, [[베이징]]에서 온 [[중국인|청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자, [[조선]]에는 사제가 한 명도 없게 되었다. 살아 남은 [[천주교]]인들은 [[교회]]의 재건과 [[청나라]]에서 또 다른 사제를 모셔오고자 고투했다. 유진길은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하상]]의 교수로 인해 매일마다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를 암송했으며 충실하게 [[십계명]]을 따랐다.
         그 사절단은 무사에 도착했다. 두 명의 [[천주교]]인이 그 무리를 빠져나와 베이징의 [[주교]]를 찾아갔다. 유진길은 [[중국어|청국어]]로 그에게 [[세례성사]]를 요청했다. 주교는 먼 곳에서온 그 손님들을 맞이한 것을 아주 기뻐하였지만 유진길이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기 위해 그에게 질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진길은 [[교리]]서에 있는 데로 정확히 질문에 답변했다. "[[인간]]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하느님]]을 알고 경배하기 위해서이며 그들의 [[영혼]]을 [[구원]] 받기 위해서 입니다..." 주교는 [[박해]] 받고 [[성직자]]도 없는 [[조선]]의 교회에서 그처럼 열정적이고 잘 교육받은 신자가 나올 수 있음에 경탄하며 이렇게 외쳤다. "이것은 참으로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조선]]의 사절단은 [[사제]]들에게 실제 [[과학]]과 [[서양]]의 [[발명]]에 대해서 배웠다. 그들은 [[서양인]] 사제들과의 토론을 통해, 서양 학문의 많은 부분과 친숙해지게 되었다. 그들은 특히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세계에서 가장 문명화된 나라도 아니라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인간이 [[귀족]]이나 [[평민]]으로 창조된 것은 아니며, 그 구분은 귀족이 평민을 억압하는 사회 체계라는 것에 대해서도 아연해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모두 동등하며 모두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인 것이었다.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으로 인해 조선 [[백성]]의 의식에 대한 엄청난 변화를 이끌게 되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한 나라에서, 그들은 삶을 변화시킬 씨앗을 뿌리게 되었다. 그러함은 그들이 가진 진리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의 [[섭리]]에서 기인한 것이다. 유진길과 [[정하상]]은 [[사제]]들에게 그들을 맞이했던 [[주교]]와 만나기를 청했고 조선 [[교회]]의 결핍에 대해서도 말했다. 유진길은 그들에게 그들이 [[주교]]를 만나기 위해 극복해야 할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들의 교회는 매우 초라한 상태인데, 거의 20년 동안 한 명의 사제도 없었다. 유진길은 [[청나라]]로 와서 [[세례성사]]를 받을 수 있었기에 행운이었지만, 조선에는 [[세례성사]]를 받을 수 없는 많은 예비 신자들과 [[견진성사]]와 [[고해성사]] 그리고 [[성체성사]] 등의 [[성사]]를 받을 수 없는 많은 신자들이 있었다. 주교는 그들의 말을 듣고는 유감스럽다는 듯 말했다. [[청나라]]에서도 역시 [[박해]]로 인해 마음대로 사제들이 입국할 수 없으며 따라서 [[조선]]으로 보낼 사제 또한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주교는 만일 그들이 [[교황]]에게 그들이 처한 상황을 직접 설명한다면, 그들의 요청을 지지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유진길과 정하상은 그들을 도와주겠다는 주교의 약속에 용기를 얻었다. 그들은 숙소로 복귀해서 사제들을 요정하는 다음의 [[편지]]를 작성했다. 그들은 만일 그 편지가 [[조선]] [[조정 (정치)|조정]]에 발각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박해를 낳을 것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이름을 "암브로시오 외"라고 적었다.
         [[조선]] [[교회]]의 가르침이 아무리 진실된 것이라 하여도, 만일 그 [[교회]]가 현재의 형태를 지속한다면, 진실은 소진될 것입니다. 저희의 머리가 아둔하여, 교회의 가르침이 열매를 맺지 못하였으며 [[하느님]]의 [[은총]] 또한 가로막혀 있습니다. 노환이나 병으로 죽는 사람들은 [[종부성사]]를 받을 수 없으며 비탄에 빠진 채 자신들의 무덤으로 옮겨집니다. 그들이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슬픔을 견디며 삶이 지쳐갑니다. 슬픔과 고통이 서서히 저희의 마음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러 차례 [[베이징]]의 [[주교]]에게 저희를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주교는 우리와 걱정을 같이 하며 [[죄]]에 빠진 [[영혼]]들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하기 위하여 [[사제]]들을 보내기를 희망합니다. 하지만, 그가 보내줄 사제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조선]]의 상황을 설명한 뒤, [[마카오]]에 그들을 도우러 올 수 있는 [[선교사]]들이 있을지도 모름을 암시했다. 이어서 그들은 [[사제]]들이 올 수 있는 방법을 서술했다. 만일 그들이 [[선박|배]]로 온다면, 선원이 몇 명 필요할지, 회피해야 할 위험은 무엇인지, 최선의 상륙지는 어디인지 그리고 그들이 만날 수도 있는 관리들을 다루는 방법 등이 그 내용이다.
         유진길과 [[정하상]]은 [[조선]]으로 돌아와서 [[남명혁]]을 비롯한 천주교 공동체들의 지도자들에게 자신들이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자초지종을 알렸다. 그 소식은 무너져가는 [[교회]]에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유진길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유대철 베드로]]이다.
         유진길과 그의 동료들의 호소문으로 인하여 [[1831년]] [[9월 9일]]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에 [[베이징]]에서 분리된 하나의 [[대교구|대목구]]를 설정했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사제|신부]]를 그곳의 초대 [[주교]]로 임명했다. 그 시작은 [[1826년]]의 그 서신이 교황의 마음을 움직인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국]] [[방콕]]에서 근무하고 있던 [[브뤼기에르]] [[신부]]는 [[1832년]] [[7월 25일]]의 얼마 뒤에 [[조선]]의 초대 [[주교]]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조선으로 향하던 중 [[요동]]에서 [[뇌출혈]]을 일으켜 [[1835년]] [[10월 20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 소식은 곧바로 조선에 퍼졌다. 유진길과 그의 동료들은 슬픔에 잠겼지만, 다른 [[사제]]들의 입국을 돕기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한편, 그는 마치 신부처럼 행동하며 저명한 많은 학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내와 딸들은 개종시키지 못했고, 그의 아들만이 그를 따랐다. 후일에 그의 13살 된 장남 [[유대철]]은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한국 천주교의 103위 순교성인]] 중에 가장 어린 사람이 되었다.
         포장은 유진길에게 [[앵베르]] [[주교]]와 두 명의 다른 [[선교사]]들에 대해서 물었다. 유진길은 그에게 그들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가르치고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돕고자 조선에 왔다고 말했다. 그는 그 선교사들은 결코 자신들의 부와 명예 그리고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포장은 그들을 조선으로 보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유진길은 자신이 그랬다고 말했다. 그러자 포장은 앵베르 주교를 데러와서 그들에게 같이 물었다. 주교는 유진길에게 [[조정 (정치)|조정]]은 이미 [[모방 베드로|모방]] [[사제|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진길은 [[조선]]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의 이름을 대기를 거부했다. 그의 다리는 주뢰형으로 뒤틀려 버렸고, [[밧줄]]에 묶인 채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포장은 [[심문]]을 계속했다. "이것은 너 같이 우둔하고 낮은 신분의 사람이 혼자서 저지를 수 있는 죄가 아니다. [[천주교]]도들 중 누가 이 일을 지시했느냐? 네가 네 나라의 아름다운 전통과 의식을 버리고 [[외국인]]들의 불충한 풍습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네가 만 번을 사형에 처해진다 하여도, 그 형벌은 너무 가볍지 않겠느냐? 이것은 엄숙한 심문이다. 따라서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신중히 답하거라." 그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이 그릇되며 불충하고 반사회적이기 때문에 외국인 [[사제|신부]]들을 조선으로 보낸 사람들은 [[반역죄]]를 지었음을 강조했다.
  • 유진오
         같은 해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 예비시험 격으로 [[일본]] 학생과 [[조선]] 학생이 공동으로 치른 '제1회 대학예과 고등학교 입학 모의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ref name="min621">친일인명사전 2 (민족문제연구소, 2009) 621</ref>
         같은 해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예과로 입학한다. 입학 후 경성제국대학의 조선인학생 모임인 ‘문우회’를 조직하고 회보 ‘문우’를 발간했다. 성인이 된 뒤 아호를 현민(玄民)이라 하였다.
         [[1927년]] 5월에는 단편소설 ‘스리’를 [[조선지광]]에 발표하면서 작가로 등단했다. 1929년에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조선인 졸업생 모임인 ‘낙산구락부’를 조직하여 학술잡지 ‘신흉’을 발간했다.
         [[1929년]] [[4월]]부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수로 재직하다가 [[1931년]] 법철학연구실 조수로 옮긴 뒤, 겸임 예과 교수로 예과에서 법학통론을 강의하면서 강사생활을 시작했다.<ref name="min622">친일인명사전 2 (민족문제연구소, 2009) 622</ref> 같은 해 9월 무렵부터 [[이강국]], [[최용달]], [[박문규]], [[김광진 (경제학자)|김광진]] 등과 함께 경제연구회의 주요구성원을 중심으로 한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설립하여 활동했다.
         [[1930년]] 이지휘란 필명으로 당시 운동의 상황과 문제점을 정리한 '년간조선사회운동개관'을 [[동아일보]]에 기고했다.<ref name="min622"/> 같은 해 [[만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후 마적, 귀향, 송군남매와 나 등의 동반자적 경향이 짙은 작품을 발표했다. 당시 카프(KAPF)에서 가입 권고를 받았으나 그는 카프가 조선의 식민지적 현실을 등한시한다고 판단하고 거리를 두었다.<ref name="min622"/>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친일 협력의 길로 걷게 된다. [[1939년]] 7월호 ‘삼천리’ 잡지에 중일 전쟁을 적극 지지하는 내용의 사설을 기고한것을 시작으로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각종 총독부 어용단체에 가입하면서 활동하였고 [[1940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와 선전부 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한다.
         39년 [[10월]] 조선실업구락부에 가입하였다. 11월 3일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외곽지지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경성에서 결성될 때, 발기인과 간사로 참여했고, 조선문인협회 회원이 되었다. [[11월 8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전선(戰線)에 위문문·위문대 보내기 행사'를 주관, 진행하였다.
         [[12월]] 조선문인협회의 간사로서 사업부 조직의 임무를 맡았다.<ref name="min622"/>
         [[1940년]] [[2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평양문예대회에서 '조선문학과 요어 문제'라는 연제로 대중강연을 펼쳤다.<ref name="min622"/> [[9월]] [[만주국]] 민생부(民生部)가 주최한 만주문화건설공작강연회(滿州文化建設工作講演會)에서 '조선문학과 만주 문학-특히 현대 조선의 입장으로부터'라는 연재로 만주국 순회강연을 했다. [[10월 12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문사부대(文士部隊) 육군지원병훈련소 1일 입소에 참여한 뒤 '삼천리' 12월호에 '일사불란의 그 훈련'이라는 짧은 산문을 통해 "지원병훈련소를 견학하고 그 질서와 규율에 다시금 탄복하였다. 공교로이 그날 오후 나는 불가피한 사무가 있어 훈련의 실상은 견학하지 못하였으나 숙사 학교 식사 등의 실경을 보았을 때 그 질서의 정연함에 탄복하였다. 그 일사불란의 훈련 속에서 동아신질서 건설의 굳센 힘도 우러나올 것으로 믿는다.<ref name="min622"/>" 라는 소감을 밝혔다. [[1940년]] [[11월]]부터 [[12월]]까지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순회 시국강연회의 연사로도 평안도에 파견되어 '신체제와 국어보급'이라는 연제로 강연했다.<ref name="min622"/> [[1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와 선전부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사변을 단지 소극적인 것으로, 군사적인 것으로 한정시켜 버린다면 저희 문화인은 단지 일 국민으로서 시국에 협력하는 데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변을 적극적인 것으로까지 발전시켜 보면 저희들은 단지 일 국민으로서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실로 문화인으로서의 막중한 책무도 지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릇 동아 신질서의 건설은 또한 동아 신문화의 건설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여 동아 신문화를 건설할 것인가, 어떻게 하여 동양의 오랜 전통을 새로운 규모 아래 건설해 낼 것인가. 대단히 막막하고 곤란한 과제이긴 하지만 지금 저희들 조선에서 자란 사람은 조선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또한 이중으로 과제를 짊어졌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전 3주년을 맞이하면서, 저는 저희 문화인들의 책무가 크고 막중하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됩니다.<ref>《삼천리》, 1940년 7월호, 일문, 《친일문학선집》2</ref>}}
         [[1941년]] [[2월]] 제1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좌담회에참석하여 '문화익찬의 반도체제- 금후 문화부 활동을 중심하여'라는 주제로 토론했다.<ref name="min622"/> [[7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용산 호국신사 어조영지 근로봉사(護國神社御造營地)에 참여했다.<ref name="min622"/> [[1941년]] [[8월]] 조선문인협회 상무간사를 맡았다.<ref name="min622"/>
         1941년 유진오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에 위촉되었고, 같은 해 8월 12일 열린 문인협회 간부회의에서는 김동환, 박영희 등과 함께 상무간사로 위촉되었다. 이때 그는 친일잡지 {삼천리} 등에 친일 논문을 실었고<ref>삼천리 지 1940년 12월호, [일사불란의 그 훈련]</ref>, 학병 지원의 권유와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역설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명에는 당시 친일문학자들이 만든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단체가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결합되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1941년에 결성되었는데 당시 조선 문학자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최린(崔鱗), 김동환 계열의 임전대책협의회와 윤치호(尹致昊) 계열의 흥아보국단이 통합한 것이었다.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은 이름 그대로 조선에서 일본의 대동아전쟁을 위한 병력의 보충 등 선전·선동의 역할을 나서서 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국민의용대의 조직 및 활동에 일치시키기 위해 해산될 대까지 학병의 권유와 내선일체를 열심히 외쳤다. 유진오는 총력연맹 문화부에서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결전소설 공모를 심사하였다.
         조선내 친일문학계는 이에 부응하여 지원병, 징병 제도 등의 병력동원을 적극 권장하는 노래가사 만들기 등을 자발적으로 한다. 이광수는 가요 <지원병장행가>를 작사했고, 주요한은 시 <첫 피>로써 지원병의 죽음을 예찬하였다. 유진오는 [[1943년]] [[11월]] 한 달 동안 《매일신보》에 12편의 되는 학병 관계 사설을 기고했다. [[1943년]] [[11월 18일]] 유진오의 '병역은 힘이다<ref>매일신보 1943년 11월 18일자</ref>'는 매일신보 [[11월 18일]]자 기사 제1면에 헤드라인으로 게시되었다.
         [[1944년]] [[8월 13일]] 전국 항복 대강연회에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이 강연에서 그는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이 눈앞에 있던 그 시기에 유진오는 일본의 '영원한 승리'를 다짐하며 '대화일치(大和一致)'를 강조하였다.
         패전 직전 [[1945년]] [[6월 8일]] 조선언론보국회가 출범하자 유진오는 언론보국회의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그 뒤 조선언론보국회가 주최한 [[1945년]] [[6월 15일]] 언론총진격 대강연회에 참여한다.
         [[9월]] [[조선인민공화국]]이 조직하자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를 요청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선인민공화국]]의 헌법제정 작업은 진주군이 인정한 권력 기구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전혀 도외시하면서 친일 지주들로 구성된 [[한민당]]의 헌법제정 작업 요청에는 수락하였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를 중심으로 한 독립촉성회의 전위조직이며 [[신익희]](申翼熙)에 의해 구성된 일제하 행정 관리들의 연구모임인 '행정연구회'에 참여하여 자문과 헌법제정 작업을 준비하는 활동을 하며 미국, 이승만, 한민당 계열로 인맥들을 충분히 활용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1946년]] [[미군정]]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이 된 뒤, [[1947년]] 6월 [[남조선과도정부]] 산하 법전편찬위원회 위원(헌법 분과위원)에 임명되었다.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 유진찬
         '''유진찬'''(兪鎭贊, [[1866년]] [[8월 14일]] ~ [[1947년]] [[3월 6일]])은 [[조선]]과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의 유학자이다.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조사과 촉탁으로 일했고 [[1929년]] [[9월 7일]]부터 [[1943년]] [[4월 26일]]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 부제학으로 일했다. [[1937년]] 12월 [[중일 전쟁]]을 찬양하고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은 한시를 지었으며 [[1938년]] [[2월 5일]] 명륜학원 강사로 임명되었다.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에 참여했고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분류:1866년 태어남]][[분류:1947년 죽음]][[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대한제국의 유학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유학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기계 유씨]]
  • 유평 (1577년)
          | 출생지 = [[조선]] [[광주광역시]]
          | 거주지 = [[조선]] [[부산광역시]]<br/>[[조선]] [[충청남도]] [[서산시]]<br/>[[조선]] [[충청남도]] [[논산시]]<br/>[[조선]] [[전라남도]] [[나주시]]<br/>[[조선]] [[강원도 (남)|강원도]] [[춘천시]]<br/>[[조선]] [[경기도]] [[고양시]]<br/>[[조선]] [[경기도]] [[양주시]]<br/>[[조선]]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광주시]]<br/>[[조선]] [[경기도]] [[시흥시]]<br/>[[조선]] [[서울특별시]]
          | 군주 = [[조선 인조|조선 인조 이종]]
          | 직책 = 前 [[조선|조선국]] 순무영 창의도유사<br/>(前 朝鮮國 巡撫營 倡義都有司)
         '''유평'''(柳玶, [[1577년]] ~ ?)은 조선 시대 관료이다. 본관은 서산(瑞山). 자(字)는 화보(和甫), 호(號)는 송암(松庵).
         그는 아직 [[조선 선조]] 치세 말기였던 1603년 문음으로 천거되어 결국 참봉(參奉)에도 제수되었으나 9년 후 1612년([[조선 광해군]] 4) 참봉(參奉)을 사직 및 사퇴하였으며 그 후 [[조선 인조]] 임금 치세 초기 시절이던 1624년 갑자식년사마시(甲子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해 이괄(李适)의 난이 발발하자, 창의도유사(倡義都有司)가 되어 난을 평정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12년 후 1636년(조선 인조 13)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청주(淸州)까지 진군하였다가 강화도(江華島) 화의 사태 소식을 듣고 귀향하여 두문불출하였다. 뒤에 현재 전라남도 나주(全羅南道 羅州)에 있는 경렬사(景烈祠)라는 사당(祠堂)에 배향되었다.
         [[분류:1577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조선의 문신]][[분류:유교 신자]][[분류:조선의 관료]][[분류:조선의 무신]][[분류:서산 류씨]][[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조선 선조]][[분류:조선 광해군]][[분류:조선 인조]][[분류:음서]][[분류:16세기 한국 사람]][[분류:17세기 한국 사람]][[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저술가]]
  • 유형원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한성부]]
         |국적= [[조선]]
         '''유형원'''(柳馨遠, [[1622년]] [[음력 1월 21일]] ~ [[1673년]] [[음력 3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실학자]], [[성리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문화 류씨|문화]],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이다.<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front/dirservice/ppl/viewDocumentPpl.jsp?pLevel2Name=&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b_A1622_1_0008347&pPplCount=&pOrderByType=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깨진 링크|url=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2Ffront%2Fdirservice%2Fppl%2FviewDocumentPpl.jsp%3FpLevel2Name%3D&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b_A1622_1_0008347&pPplCount=&pOrderByType= }}</ref> [[한성부|한성]] 태생으로 벼슬을 하지 않고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학문에 일생을 바쳤다.<ref name="글로벌 유형원"> 《[[글로벌 세계대백과]]》〈[[: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서울특별시/서울의 사회·문화#유형원|유형원]]〉 </ref>
         당색으로는 [[북인]]계열로, [[북인]] 당원이던 아버지 [[유흠]]이 [[인조 반정]]으로 장살된 이후,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그 뒤 [[1654년]](효종 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후 [[조선 효종|효종]] 때 [[북인]]계 인사들을 발탁, 등용하던 [[허목]], [[윤휴]]의 천거 등 관직에 나갈수 있는 주변의 배경이 있었으나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남인]] 실학자의 첫 세대 인사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경제력 양성과 사회 개혁, 그리고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존주대의의 실천을 위해 그는 [[북벌론]]을 주장했고, 북벌을 위한 이상촌 건설, 병력 양성, 훈련, [[중국]] 현지 답사 등을 하기도 했다. 흉년과 기아, 농민들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그는 권세를 지키기에 급급한 벼슬아치들이나 고통받는 농민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고담준론(高談峻論)하는 유식자들을 비판하였다.<ref name="sidee176">정옥자 금장태 이광표 외,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효형출판, 1998) 176페이지</ref> 이후 그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선비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고, 당대의 권세가들이 권유하는 벼슬도 마다하였다.<ref name="sidee176"/> 이후 [[조선 현종|현종]] 때인 [[1665년]], [[1666년]]에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반계 유형원은 [[1622년]] [[3월 2일]]([[음력 1월 21일]]) [[조선 세종|세종]] 때 [[의정부시|의정부]]을 지낸 [[유관]](柳寬)의 8대손으로, 증조부는 현령을 지낸 유위(詣)이고, 할아버지는 정랑을 지낸 [[유성민]]이었다. 외가인 [[한성]] 소정릉동(지금의 서울)에서을 지낸 문신 유흠의 아들이자 [[이익 (학자)|성호 이익]]의 종조부인 [[참찬]] 이지완(李志完)의 외손자로 태어났다. 당색으로는 [[북인|북인(北人)]] [[대북|대북(大北)]]계열이었으나 [[남인|남인(南人)]] 계열에 영향을 주었다.<ref>그의 외6촌 동생 성호 이익은 남인 계열이었다.</ref> 그는 자신의 외증조부이기도 했던 [[이상의]]의 생전에 태어나 그를 볼 수 있었다.
         외종조부 이지안은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정언옹]]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지안의 동문은 [[허목]]으로 후일 그가 [[허목]]의 문하에 출입하게 되는 데는, 외종조부와의 인연이 작용했다. 아버지 [[유흠 (조선)|유흠]]과 할아버지 유성민(柳成民)은 [[북인]]이었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도 관직에 나갈 방법이 있었음에도 그가 관직에 출사를 거부하게 된 원인을 아버지 [[유흠 (조선)|유흠]]의 비명횡사가 원인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 뒤 [[허목]]과 [[윤휴]]가 조정에 출사하여 [[북인]]계 출신 인사들을 적극 관직에 천거하면서, 유형원 역시 학덕이 높음을 들어 계속 천거하였으나 모두 고사하였다. 당시 그의 스승이던 [[허목]]과 그의 지인인 [[윤휴]]는 [[조선 효종|효종]]의 유일 천거에 의해 출사하면서 [[북인]]계 출신 학자, 문사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등용시켰다.
         [[조선 효종|효종]]의 관직 제수를 사양하자 [[허목]]과 [[윤휴]]는 높은 이상을 품었더라도 현실 정치에 참여해야 실천할 수 있다하여 계속 그에게 조정에 출사할 것을 권고하였지만 이 역시 거절하였다. 또한 [[1659년]] [[조선 효종|효종]]의 사후 벌어진 [[예송 논쟁]] 역시 공리공담으로 판단하여 관망하였다.
         그래서 청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준마를 기르며 말을 타고 하루에 300리를 달리는 기마연습을 했고, 좋은 활과 조총을 마련했으며 집안의 종들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200여 명의 군민들을 단련시켰다는 것이다.<ref name="ban01"/> 그는 [[조선 현종|현종]]에게 존주대의의 실현을 위해 북벌을 추진해야 함을 상소했으나 그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68년]](현종 9) 스승인 [[허목]]이 [[조선 현종|현종]]에게 유형원이 국왕을 보좌할 재주(王佐之才)를 가진 인재라며 발탁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서인]]들은 그의 이론이 괴이하다며 반대하였다. 그해에 다시 [[윤휴]]가 유형원은 경세의 재능을 가진 식견있는 선비라며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생전 그의 학문에 관심을 준 인물은 절친한 친구였던 [[배상유]](裵尙瑜)와 스승 [[허목]], 선배였던 [[윤휴]], [[윤선도]]와 [[서인]]으로는 [[영의정]]을 지낸 잠곡 [[김육]]이 있었다. 그의 사상은 후에 [[서인]] [[이사명]]과 [[이이명]], [[소론]]의 [[윤증]]과 [[박세채]], [[노론]]의 [[홍계희]] 등 소수의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고 높이 샀고, [[조선 영조|영조]] 때에 이르러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상은 [[양득중]], [[이익 (1681년)|이익]], [[안정복]], [[신후담]], [[정약용]] 등을 통해 계승되었다.
         바로 [[경기도]] [[용인군]] 백암면 석천리(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 28-1에 있는 아버지 [[유흠 (조선)|유흠]] 내외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사후 부안 동림서원(東林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1674년]] 그의 문인 제자들이 그의 서적 [[반계수록]]을 조정에 바쳤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1678년]]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참봉]](參奉) [[배상유]]가 그의 [[반계수록]]의 내용을 언급하며 이를 [[조선 숙종|숙종]]에게 바쳤지만 역시 외면당하였다.
         [[1793년]](정조 17년) [[12월 10일]] [[조선 정조|정조]]의 특명으로 다시 [[증직|증]](贈) [[이조]][[참판]](吏曺參判)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에 [[추증|가증]](加贈)되었다.
         그가 [[북인]] 당원의 후예인데다가 이후에도 [[남인]] 인사들과 가까이 지냈으므로 그의 학문은 관심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당색을 초월하여 [[서인]]인 [[이이명]], [[윤증]] 등은 그의 [[반계수록]]을 입수하여 탐독하고 이를 높이 사기도 했다. 그의 학문이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 영조|영조]] 때로, [[홍계희]]는 일찍이 그의 저서 [[반계수록]]을 읽고 감화되어 이를 실전에 적용하려 하였으며, [[조선 영조|영조]]는 직접 내탕금을 하사하여 [[반계수록]]의 간행을 명하였다. 이후 [[조선 정조|정조]] 때에 가서는 그의 학문과 사상에 폭넓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조선 정조|정조]] 때 [[정약용]]은 [[수원성]]을 축성하면서 그의 성지 축성 이론을 적용하려 하였다.
         아버지 [[유흠 (조선)|유흠]]은 [[북인]] [[대북]](大北) 계열이었고 따라서 그 역시 북인, 대북 계열로 분류된다.
         [[분류:1622년 태어남]][[분류:1673년 죽음]][[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한국의 경제학자]][[분류:조선의 실학자]][[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군사학자]]
  • 유홍기 (1831년)
         '''유홍기'''(劉鴻基, [[1831년]] ~ [[1884년]]?)는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가]]이자 [[학자]]이자 [[정치인]]이였다. [[오경석]]과 동갑으로 [[한의사]]이다. 초기 개화사상가의 한 사람이며, 오경석(吳慶錫),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백의정승(白衣政丞), 산림정승이라는 별호로도 불렸다. 호는 대치(大致)로 따라서 '''유대치'''(劉大致)로도 불린다. 본관은 [[한양 유씨|한양]](漢陽)으로, 자는 성규(聖逵), 호는 대치(大致) 또는 대치(大癡), 여여(如如) 등이다.
         [[윤치호]], [[서재필]], [[김옥균]], [[박영효]] 등의 편지와 서신을 보면 대치장(大致丈)이라는 칭호로 많이 쓰인탓에 그것이 그의 이름보다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한의사였던 그는 친구인 역관 오경석이 [[청나라]]와 조선을 오가며 가져다 준 신 문물을 일찍이 접하였다. 그는 역관 집안에서 태어 났으므로 신분상 중인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무관이었으므로, 그는 한의업에 종사한 양반 출신 유의였다.
         추사 [[김정희]]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그로부터 [[금석문]] 해독하는 것도 배웠다. 이후 친구인 [[역관]] [[오경석]]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서학 서적을 탐독, 개화에 눈을 떴으며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 청년들이 그의 무하에 출입하며 [[오경석]], [[박규수]] 등과 문인들을 길러냈다. 그뒤 유홍기는 개화당 인사들의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교]] 사상이 인간의 자유로운 사상을 억압한다고 본 그는 [[불교]]를 깊이 신앙하였으며 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 고금의 역사 지식도 해박하였다. 신체가 장대하고 변설이 유창하였다고 한다.
         유대치는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겪은 뒤에 서세동점의 위기가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급박해졌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머지않아 외세가 조선으로도 침입해올 것이며 그에 대비하여 우리가 먼저 개항과 개화를 시도하여 저들과 손잡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장을 하였다. 그의 주장에 위정척사파나 조정의 수구파는 모두 터무늬없는 생각으로 치부하였다.
         이능화가 지은 <조선불교통사>에는 ‘유대치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김의환이 지은 <조선개화당의 막후 지도자 유대치의 활약과 그의 최후>라는 논문에서는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경기도 용문산에 토굴을 짓고 살면서 [[1890년]] 경 임종할 때까지 좌선(坐禪)으로 일관하며 살았다’고 쓰여 있다
         유홍기는 [[1831년]](순조 31년) [[10월 14일]]에 아버지 유익소(劉益昭)와 어머니 김해 김씨와의 사이에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역관인 최영원(崔榮遠)의 딸 강릉 최씨와 결혼하여 외동아들 운두(運斗)와 두 딸을 두었다.<ref> 신봉승,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출판사 답게, 1996) 261페이지. </ref>
         김옥균전에 따르면 대치선생은 원래 역관의 집에서 태어났으나 의(醫)를 업으로 했고 깊이 불교를 믿어 도(道)는 높고 품성은 청백(淸白)했다.학문으로서는 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 고금의 역사에 통달하였다.변설(辨說)은 유창했고 신체는 장대하고 홍안 백발이며 항상 생기에 넘쳐 행동하였다 한다.
         * [[한인수]] -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 [[1990년]] - [[MBC]] 드라마
         * 조선시대 잡과합격자 총람(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 신봉승, 《나라를 세웠으면 역사를 고쳐야지-흐름으로 읽는 조선의 역사:조선사회사 총서 28》(가람기획, 2010)
         * 신봉승,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도서출판 답게, 1996)
         [[분류:1831년 태어남]][[분류:1884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학자]][[분류:조선의 사상가]][[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조선의 한의사]][[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역관]][[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암살된 사람]][[분류:의문사한 사람]]
  • 윤간 (군인)
         |태어난 곳= [[조선]]
         |죽은 곳= [[조선]]
         |복무=[[조선]]군
         |부대= [[조선]] 육군
         |지휘= [[조선]] [[국군]]
         '''윤간'''(尹旰, [[1573년]] - [[1665년]] [[2월 12일]])은 [[조선]] 중기, 후기의 무신, 군인이다. [[1591년]] [[광국공신|광국]][[원종공신]] 3등(光國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고 [[임진왜란]] 시 일가를 따라 [[의주 파천]]에 참여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호성]][[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고, [[1609년]](광해군 1)에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 종성부사 등을 거쳐 [[1617년]]~[[1618년]] [[인목대비]] 폐비 논의 당시, 정청에 참여를 거부하였다.
         [[1592년]](선조 25) [[조선 선조|선조]]의 어가가 [[의주]]로 몽양갈 때 호종한 공로로, 훗날 [[1604년]] [[호성공신|호성]][[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ref>호성원종공신록</ref> 전란 종결 이후 [[수문장]](守門將)이 되고<ref>최립, 윤두수신도비문</ref>, [[1601년]] 부친상으로 사직했다가 [[1603년]] 다시 [[수문장]](守門將)으로 복직하고, [[1604년]] 겸사복(兼司僕)을 역임했다. [[1609년]](광해군 1)에 [[과거 제도|증광 무과]](增廣武科)에 급제, 선전관, 종성부사, 첨사 등을 거쳐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공론에 의해 [[인목대비]]의 폐모를 주청하는 논의에 형 [[윤방]]이 불참하자 그도 역시 참여를 거부하고 불참하였다. 그는 서자는 어머니도 없는가 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다. 이후 외직을 자청하여 1620년(광해군 13년) 전라북도 전북도부사, [[1621년]] 종성부사(鍾城府使)로 부임하였다. 이때 [[김류 (1571년)|김류]] 등이 외지로 부임해서는 안된다고 만류하였으나 외직을 자청하였다.
         {{토막글|군인|조선}}
         [[분류:생몰년 미상]][[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군인]][[분류:육군 군인]][[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임진왜란 관련자]][[분류:병자호란 관련자]][[분류:해평 윤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공신]]
  • 윤경순 (1855년)
         '''윤경순'''(尹景純, [[1855년]] ~ [[1885년]] [[12월 23일]])은 [[조선]] 말기의 상인, 무신, 혁명가이다. [[1884년]]의 [[갑신정변]]에 행동대장의 한사람이자 [[서재필]]의 휘하에서 1개 분견대를 지휘하였다. [[박영효]], [[서재필]] 등을 만나 감화되어 그들의 사상적 동지가 되었다.
         수구파 대신 척살을 계획했을 때 그는 [[민영익]] 담당을 맡게 되었다. 실행할 담당자는 요인들 한 사람에게 두 사람씩 배정하되 한 사람은 단검을, 또 한 사람은 단총을 소지하기로 했다.<ref name="songkun59">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59페이지</ref> 또 만일 그 장소에서 실패하는 때에는 예비로 특별히 조선 옷을 입은 일본 사람 네 사람으로 각각 한 사람씩 감당키로 했다. 그리하여 [[민영익]]은 윤경순, 이은종 두 사람이, [[윤태준]]은 박삼룡, 황용택이, [[이조연]]은 최은동, 신중모가, [[한규직]]은 [[이규완]], 임은명 두 사람이 담당키로 했다.<ref name="songkun59"/> 그러나 사건 당일 민영익은 [[서재창]]의 피습을 당해 한쪽 눈을 찔렸다고 한다.
         [[1907년]](융희 1년) [[11월 18일]]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법부]] [[대신 (조선 말기)|대신]] [[조중응]](趙重應)이 그의 죄명을 벗겨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부되었다. [[1908년]] [[3월 25일]] 다시 [[이완용]], [[조중응]] 등이 다시 상주하여 죄명이 벗겨졌다.
         [[분류:1855년 태어남]][[분류:1885년 죽음]][[분류:혁명가]][[분류:조선의 상인]][[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군인]][[분류:육군 군인]][[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갑신정변]][[분류:급진개화파]][[분류:사형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윤경완
         '''윤경완'''(尹景完, [[1860년]] ~ [[1885년]] [[12월 23일]])은 [[조선]] 후기의 상인, 무신으로 [[갑신정변]]의 행동대원이었다. [[한성부]] 출신으로 소년 시절부터 무청 장사를 하다가 [[박영효]], [[서재필]] 등에 의해 발탁되어 [[1883년]] 국비장학생으로 선발, [[일본]]에 유학하게 되었다.
         당초 갑신정변 계획에는 나이가 어려 참여하지 않다가 형 [[윤경순]]으로 인해 참여하게 되었다. [[갑신정변]] 직전 거사에 참여하여, [[12월 5일]] 조련국 사관장 [[서재필]], [[조련국]] 소속 병사 이응호(李應浩), 민창수(閔昌洙), 전흥룡(全興龍), 김창기(金昌基), 최성욱(崔聖郁), 이점돌(李點乭) 등 부하 50명과 [[이규완]], 형 [[윤경순]]과 함께 갑신정변 때 행동대원으로 가담하여 군사를 지휘, [[조선 고종|고종]] 내외를 [[창덕궁]]에서 [[경우궁]]으로 이어(移御)하는 일과 경우궁의 수비책임을 맡았다.
         [[분류:1860년 태어남]][[분류:1885년 죽음]][[분류:혁명가]][[분류:조선의 상인]][[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군인]][[분류:육군 군인]][[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급진개화파]][[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갑신정변]][[분류:사형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윤고려
         [[조선]]과 [[대한제국]]의 문신 [[김윤정 (1869년)|김윤정]](金潤晶)의 딸<ref>{{웹 인용 |url=http://leekcp.new21.org/zb41/zboard.php?id=rmswjs&no=267 |제목=이경찬의 국사교실 |확인날짜=2010년 10월 22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414022939/http://leekcp.new21.org/zb41/zboard.php?id=rmswjs&no=267 |보존날짜=2016년 4월 14일 |깨진링크=예 }}</ref>로, 윤고려는 본래 성이 김씨였으나 남편을 따라 성을 바꾸었다.<ref>다른 이름으로 윤고라(尹高羅), 김고라(金高羅)라는 이름도 있다.</ref><ref>《뉴스플러스》 (1999.4.1)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s_plus/news177/np177gg030.html 20세기 한국의 풍물 풍속사⑫ 옷 - '미니스커트 단속' 그 때를 아시나요]</ref> 결혼 후 김고라는 남편을 따라 성을 바꿔 ‘윤고라’로 불렸고, 여성교육운동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지만, 20대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ref name="근녀1">[http://newwoman.culturecontent.com/cp0423e/cp0423e0101.asp?pageNum=2&sub=2&depth=2&spageNum=1&ssub=1 근대여성<!--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newwoman.culturecontent.com/cp0423e/cp0423e0101.asp?pageNum=2&sub=2&depth=2&spageNum=1&ssub=1 }}</ref>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윤치호]]의 사촌이며 대한민국 4대 대통령 [[윤보선]]의 큰아버지인 [[윤치오]]의 둘째 부인이다. 의학자 [[윤일선]]의 계모이다. 본관은 [[청도 김씨|청도]]이다.
         [[분류:1891년 태어남]][[분류:1913년 죽음]][[분류:조선 사람]][[분류:대한제국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사]][[분류:윤치호]][[분류:윤보선]][[분류:청도 김씨]][[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윤선도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전라남도]] [[해남군]] 에서 노환으로 사망(병사)
         |군주 = [[조선 인조|조선 인조 이종]]
         '''윤선도'''(尹善道, [[1587년]] [[7월 27일]]([[음력 6월 22일]]) ~ [[1671년]] [[7월 16일]]([[음력 6월 11일]]))는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시인·문신·작가·정치인이자 음악가이다. 본관은 [[해남 윤씨|해남]], 자는 약이(約而)<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front/dirservice/ppl/viewDocumentPpl.jsp?pLevel2Name=&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b_A1587_1_0008531&pPplCount=&pOrderByType=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깨진 링크|url=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2Ffront%2Fdirservice%2Fppl%2FviewDocumentPpl.jsp%3FpLevel2Name%3D&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b_A1587_1_0008531&pPplCount=&pOrderByType= }}</ref> 이고,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윤유심(尹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이다. 화가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5대조부이다.
         [[정철]], [[박인로]], [[송순]]과 함께 [[조선]] 시조시가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며, [[오우가]]와 [[유배지]]에서 지은 시인 [[어부사시사]]로 유명하다.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홍재전서]]에는 제2의 무학(無學)이라는 별칭이 등재되기도 했고, 의사로 민간요법에 관련된 저서인 약화제(藥和劑)를 남기기도 했다.
         [[1613년]](광해군 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조정의 [[임해군]], [[영창대군]]의 옥사 등과 [[북인]](北人)정권의 전횡을 비난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16년]] 30세에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규탄했다가 [[전라북도|전북도]] [[무주군|무주]] [[경상남도|경남도]] [[기장군|기장]](機張)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623년]](인조 1년) 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후 [[인조 반정]] 이후에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조선 효종|봉림대군]], [[인평대군]] 형제의 대군사부로 발탁되었다.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29년]](인조 6년)부터는 [[세자시강원]]문학으로 발탁되어 [[소현세자]]를 보도하였다.
         그는 [[남인]] 중진 문신이자 [[허목]], [[윤휴]]와 함께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자 예송 논쟁 당시 선봉장이었다. [[서인]](西人) [[송시열]]과 함께 [[조선 효종|효종]], [[조선 현종|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후일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맹공을 받고 자신이 [[삼수]](三水)에 유배되어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하였다. [[조선]] [[조선 효종|효종]]과 [[조선 현종|현종]]의 [[왕세자|세자]] 시절 [[세자시강원]] [[사부]]의 한사람이었던 덕에 사형은 모면하고 유배를 받았다. 유배지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지은 [[어부사시사]] 등은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는 유배지에서 가사문학과 저서를 남긴 [[송강 정철]], 20여 년간의 유배지에서 수십권의 저서를 남긴 [[정약용|다산 정약용]] 등과 비견된다.<ref>윤선도는 문인화가 윤두서의 증조부로, 정약용의 외가 선조이기도 하다.</ref> 그의 학문과 시맥은 [[이서우 (1633년)|이서우]]를 통해 [[이익 (1681년)|성호 이익]]과 [[채제공]]에게로 이어졌다.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되고, [[조선 숙종|숙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글을 잘 지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고조할아버지는 어초(漁樵) [[윤효정]](尹孝貞)으로 그는 [[무오사화]], [[갑자사화]]로 사림이 학살되자 관직에 나오지 않고 은둔생활을 했다. 증조할아버지 윤구(尹衢)는 [[조선 중종|중종]] 때 홍문부교리(弘文副校理)를 지냈으나, [[기묘사화]]로 희생되어, 기묘명신(己卯名臣:기묘사화때 화를 입은 사림)으로 기묘당적(己卯黨籍:기묘년에 화를 입은 제유의 약전)에 실려 있다. 증조부 윤구눈 윤홍중과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윤의중(尹毅中)을 낳았다.
         [[정여립 사건]]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1591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되었다. 그는 북인에 가담하지 않고 남인이 되었다.<ref>북인은 동인 중에서도 [[정철]]에 대한 [[사형]]론을 주장하던 강경파였다.</ref> 윤선도는 일찍부터 [[송시열]]과 [[서인]]들에게 숙원을 품게 된다. 그 숙원의 뿌리는 [[정여립의 난]]까지 소급된다. 정여립의 난 때 위관은 서인인 정철이었는데 이때 죽음을 당한 [[이발]]은 생조부 [[윤의중]]의 사위였다.<ref name="leedeok245">[[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도서출판 석필, 2004) 245페이지</ref>
         반정 직후 서인 조정에서 '죄를 입은 사람을 모두 뽑아 쓰자.'는 말이 있었는데 일부에서 [[1616년]] 당시 그가 [[김제남]]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일로 그의 등용을 반대하자 [[조선 인조|인조]]의 사돈인 신풍부원군 [[장유]](張維)가 그를 두둔하였다. 장유는 "[[형가]](荊軻)는 연나라의 수치를 씻으려고 살아 있는 오기(於期)에게 머리를 달라고 했는데 선도(善道)는 간신 [[이이첨]]을 죽이자고 청했거늘 도리어 죽은 제남을 아끼는가?"하며 윤선도를 변호하였다. 그 뒤 여러번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다. [[1623년]](인조 1년) [[7월]]에 [[의금부]] [[도사]]로 [[통덕랑]]에 승진했다가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임명되었다.
         또한 윤선도는 송시열처럼 [[조선 효종|효종]]이 세자로 있을 때 세자시강원의 사부로 효종의 스승이었다. 세자가 임금으로 즉위하면 세자시강원 사부는 중용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는 중용되지 못했다. 윤선도는 그 이유가 바로 [[서인]]인 송시열의 반대 때문이라고 느끼고 있었다.<ref name="leedeok245"/>
         [[1628년]](인조 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초시(初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고향인 [[해남]]에서 조용히 지내던 중 1628년(인조 6년) [[3월]]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특별 추천으로 [[왕자사부]](王子師父)의 한 사람이 되어 봉림(鳳林)·인평(麟坪) 두 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조선 인조|인조]]의 신임을 얻어 [[호조]][[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역임했다.<ref>봉림대군이 효종이다.</ref> 이때 [[세자시강원]]에서 [[송시열]]을 만난다. [[세자시강원]]에 있을 때 학범(學範)을 엄하게 세워 교훈하되 '소학(小學)'으로서 근본을 삼았으며, 학문을 강론할 때마다 반드시 옛 공자의 득실과 선악을 인용하여 되풀이해서 극진히 하니, 상(인조)이 더욱 어질 게 여겼으며 공자도 또한 더욱 삼가서 존경하고 예우하였다. 이때 그는 역시 대군사부로 보임된 [[송시열]]을 만나게 되는데 후일의 정적이 된다.
         [[1629년]](인조 7년)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고 다시 [[세자시강원]]문학에 임명되어 계속 왕자들을 보도하고 [[소현세자]]에게도 강론하였다. 이때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견제하던 [[소현세자]]측 사람이 유언비어를 내 "선도가 몰래 모략을 꾸미니 앞으로 세자에게 이롭지 못하리라."하자 그는 즉시 벼슬을 내놓았다. 그러나 [[조선 인조|인조]]가 사람을 보내 그를 달래어 다시 데려왔다. 5년간 한양에서 [[대군사부]]로 있었으나,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며 벼슬하는 것이 어울리는 것이 맞지 않았던 그는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해남군]]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조선 인조|인조]]의 거듭된 청으로 다시 올라와 왕자사부로 [[봉림대군]], [[인평대군]]에게 글과 학문을 가르쳤다.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사부(師傅)와 겸임하여 [[공조]][[좌랑]], [[형조]][[정랑]], [[한성부]][[서윤]] 등을 겸임하였다. 그해 [[12월 27일]] 행[[공조]][[좌랑]]으로 전임되었다.
         [[1635년]](인조 13년)에는 8촌 윤선오(尹善五)에 의해 실전되었던 윤광전(尹光典)의 묘소가 발견되었다. 이후 제각을 겸한 문중 사당 조성에 적극 참여한다. 윤선도는 [[1635년]] 직계 선조인 6대조 사보(思甫)와 5대조 경(耕)의 묘소와 향사를 위한 경비를 마련하였다.<ref name="yihae">이해준,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경인문화사, 2008) 31페이지</ref> 윤선도는 6대조와 5대조부모의 묘소가 종가의 친진(親盡) 이후 주사인(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없이 내외자손이 기 천명에 이르지만 향화가 영영 끊어지고 관리가 소홀하여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기 천명에 이르는 내외손이 포와 미를 거두어 제향경비로 쓰기로 하였다가, [[1649년]]에 재답을 마련하는 방법으로 전환하고 이를 기화로 문중재실인 [[추원당]]을 건립하였다.<ref name="yihae"/> [[1635년]] 내내 그는 관직 출사를 단념하고 문중 선산과 분묘 발굴, 문중 사당 건립에 사재를 투자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12월]] [[병자호란]] 때 왕이 [[강화도]]로 피난하게 되자, 37년 1월 [[병자호란]] 중에 그는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났다. 그러나 그는 왕을 보호하기 위하여 [[선박|배]]를 타고 [[강화도]]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미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이번에는 환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ref name="youn2007"/> [[조선 인조|인조]]가 [[청나라]]에 항복, 화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평생 은거를 결심, 뱃길을 돌려서 [[제주도]]로 향하였다.
         그러나 [[조선 인조|인조]]가 거절하여 그는 국문을 당하지 않았다. 윤선도는 [[보길도]]의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짓고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여기에서 시문과 술, 문객과 문인들, 동남동녀들을 데리고 풍류를 즐겼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 세연정(洗然亭), 회수당(回水堂), 석실(石室) 등을 지었다. 그러나 [[정축하성]]의 후유증이 수습된 뒤 [[한성부]]에 상경했다가, 한성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당한다.
         [[조선 인조|인조]]의 피난 행렬 근처에 있었으나 임금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서인]] 언관들의 탄핵을 받았으며, 그해 대동찰방에 임명되었다가 처음에 거부했었다는 이유로 [[1638년]] [[6월]] [[경상북도]] [[영덕군|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
         영덕 유배지에서 풀려난 후,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거했다. 그 뒤 곳 전국의 아름다운 명산과 사연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그 무렵에 나온 작품이 〈산중신곡〉, 〈속 산중신곡〉 등이다. [[1643년]]에는 [[거금도]] 풍광에 대한 소문을 듣고 거금도를 찾아가 여러 날머물면서 산중신곡을 펴냈다.<ref>[http://san.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03/2008120300807.html (모닥불 송년산행) 섬산낙조산행 {{!}} 고흥 거금도 적대봉 르포] 조선일보</ref> 이후 그는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1644년]](인조 22년)에 [[조선 인조|인조]]가 병을 얻자 태의(太醫)를 통해 그를 불렀으나 가지 못하고 상소문을 올렸다. 그는 상소에서 "마음은 한 몸의 주장이 되므로 장부(臟腑)ㆍ규맥(竅脉)ㆍ기혈(氣血)ㆍ음양(陰陽)의 역순 성쇠(逆順盛衰)가 다 마음에 매어 있으니, 마음이 편안하면 곧 몸도 편안해서 풍한(風寒)ㆍ서습(暑濕)ㆍ귀매(鬼魅)ㆍ백사(百邪)가 저절로 들어오지 못하지만, 마음이 편치 못하면 곧 이와는 반대로 되는 법입니다."하고, 이어 섭식과 [[약석]](藥石)으로 병을 다스리는 방법을 논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보호할 것을 비유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중간에서 인멸, 위에 보고되지 않았다. 오히려 [[서인]]들은 그가 건방지게 왕명을 받고도 즉시 도성에 올라오지 않았다며 죄를 주어야 된다며 공격하였다.
  • 윤소정(배우)
          * 1993년 이괄과 흥안군 ... 정혜옹주[* [[조선]] [[선조]]와 [[인빈 김씨]]의 딸] 전주 이씨 역(단역)
  • 윤아 (동음이의)
         * [[현부인창녕송씨|송윤아 ]] - [[조선]]의 황후이다.
  • 윤영선 (1896년)
         |출생지= {{국기|조선}} [[한성부]]
         '''윤영선'''(尹永善, [[1896년]] [[12월 25일]] ~ [[1988년]] [[2월 6일]])은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 미국 유학 후 귀국하여 농업과 양잠업을 하였고 해방 후 제3대 [[농림부|농림부장관]]과 무임소 장관을 지냈다. [[1925년]]부터 [[1945년]]까지는 [[동아일보사]] 맡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의 [[친일지식인]]인 [[윤치호]]와 중국인 [[마애방]]의 아들이다.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 [[윤보선]], 경기도지사 [[윤원선]] 등과는 재종간이며, [[조선일보]] 사주를 역임한 [[방상훈]]의 처조부가 된다. 본관은 해평으로 호는 오당(梧堂), 초명은 용성(龍成), 자는 용성(龍成)이다.
         오당 윤영선은 [[1896년]] [[12월 25일]] [[조선]] [[경성부]] (현재의 종로구)에서 태어난 그는 [[윤치호]]와 중국 여인 [[마애방]]의 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기독교]] 신자였다. 어머니 [[마애방]]은 중국 여인으로 아버지 [[윤치호]]가 [[갑신정변]]의 실패로 [[청나라]] [[상하이]]로 망명했을 때 만나 결혼했다. 위로 누나 윤봉희가 있었고, 바로 아래로 일찍 요절한 동생 봉선과 광선이 있었다. 동생 [[윤광선]]은 아버지 [[윤치호]]의 비서일을 보았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미군정청]] 통역관으로 근무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그리고 바로 태어난 친여동생 [[윤용희]]는 [[미국]] 유학후 [[일제 강점기]] 당시 잠시 국내에 입국했으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거주하였다.
         [[1923년]] [[1월]] 인천의 일본 경찰서에 목장사업을 인가해달라는 신청서를 냈다.<ref name="yn240">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240페이지</ref>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ref name="yn240"/> 그의 아버지 [[윤치호]]는 그들은 일본인 목장을 보호해 주고 싶었던 것<ref name="yn240"/> 이라 봤다. 그해 [[9월]]에는 [[개성]]에서 개최된 [[조선부업품공진회]](朝鮮副業品共進會)에 밀납(蜜蠟, [[벌꿀]]을 추출해서 만든 기름)을 출품하여 3등을 수상하기도 했다.<ref>"개성의 부공 수상자", 동아일보 1923년 10월 29일자 4면, 경제면</ref> [[1924년]] [[경상남도]] [[양산시|양산군]]의 훈도가 되어 교편을 잡았다.
         윤영선은 아버지 [[윤치호]]의 영향을 안 받을수 없어 [[일본]]의 [[만주]] 정책에 대해서도 아버지 [[윤치호]]의 견해를 잘 따르는 편이었다.<ref name="유일한1"/> [[1928년]] 재단이사의 한사람으로 취임했고, [[1929년]] [[7월 28일]]에는 [[인천광역시|인천]]의 지역유지 [[김정호 (1885년)|김정호]](金正浩)와 함께를 조직하고 그해 [[9월 23일]] 씨름장에서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하였다. [[1929년]] [[2월 18일]] [[공성학]], 김정호 등과 면직물 제조 판매와 양말 제조 판매를 하는 주식회사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의 창립에 참여하고 주주 겸 이사로 참여했다. [[10월 30일]]에서 [[송선주]](宋善洙)와 함께 전등 및 전기선 제조 회사 장연전기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공동대표로 출자하였다.
         [[1932년]] 재단이사에 취임하고, [[1933년]] 의 교장에 취임했다. 그해 [[6월]]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로부터 자금 지원이 줄어들어 운영난에 처한 의 재정문제를 구제하였다. 바로 [[김정호 (1885년)|김정호]], [[마종유]]와 함께 송도고보 재정유지 실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공성학]]과 함께 각각 1백원의 기금을 기부하였다. [[1934년]] [[4월]]에는 [[인천광역시|인천]]에서 개최된 전조선육상경기대회 계시부원과 기록부원을 겸하였다. [[5월 11일]] [[송도학원]] 재단설립 실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39년]] [[유일한]] 등이 설립한 [[유한양행]]의 주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40년]] [[조선 총독부]]에 의해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그의 문중은 성을 '이토'(伊東)로 개명하였다. 그도 문중을 따라 이토 나가젠(伊東永善)으로 창씨개명하였다. 그러나 별도의 정치적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농장과 목장, 양잠업에 종사하였다. [[1940년]] [[7월]] 주식회사 [[경인기업]](京仁企業)의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그 밖에 목장과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 맏손녀 사위 : [[방상훈]](方相勳, 1948. 2. 6~ 조선일보 사장 역임)
         * [[조선일보]]
         * [[조선일보]]
         [[분류:1896년 태어남]][[분류:1988년 죽음]][[분류:조선 사람]][[분류:대한제국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농업인]][[분류:낙농업]][[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상인]][[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농림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무임소장관]][[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윤치호]][[분류:윤치영]][[분류:윤보선]][[분류:조봉암]][[분류:농업인]][[분류:한국 전쟁 관련자]][[분류:중국계 한국인]][[분류:오하이오 주립 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윤영선 (1922년)
         동호 [[윤일선]]과 [[윤승선]]의 이복 동생이고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윤보선]]의 사촌 동생이며, [[조선]]말의 민권운동가였던 좌옹 [[윤치호]]의 5촌 조카가 된다.
  • 윤유후
         윤유후(尹裕後, [[1541년]] [[1월 11일]] - [[1606년]] [[8월 13일]])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작가, 시인으로, 자(字)는 경여(慶餘), 호는 송당(松堂), 쌍백(雙栢), 쌍백당(雙栢堂)이고, 본관은 [[파평 윤씨|파평]]이다. [[세조반정]] 이후 전하지 않는 사육신 [[성삼문]]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사육신]] [[성삼문]]의 시문 몇편을 모아 성근보유고와 기타 시문을 정리해 [[성삼문]]의 문집 2권을 간행한다. [[한성부]] 출신.
         윤유후의 어머니의 외삼촌 [[송인]]이 [[조선 중종|중종]]의 서녀와 결혼하여, 대고모할머니 [[정현왕후]]의 아들인 [[조선 중종|중종]]하고는 이중 인척관계가 된다. 인재 [[홍섬]]과 이암 [[송인]]의 문인이다.
         [[조선 선조|선조]]의 형 [[하원군]] 정의 부인인 [[남양군부인]]은 외삼촌 [[홍섬]]의 딸로 윤유후의 외사촌여동생이 된다. [[조선 중종|중종]]이 내종숙부가 되기에 [[덕흥대원군]] 이초는 서6촌형이고, 하원군은 조카뻘이 된다.
         그는 [[윤곤]]의 5대손으로, 고조부는 [[윤삼산]]이며, 종고조부 [[윤희이]]는 [[조선 세종|세종]]의 서녀 [[정현옹주]]의 부마 [[윤사로]]의 할아버지가 된다. 증조부 [[윤호]]는 [[조선 성종|성종]]의 제2계비 [[정현왕후]]의 친정아버지가 된다. 세종의 부마 [[윤사로]]는 그의 삼종조부가 된다. [[정현왕후]]는 대고모 할머니이고, [[조선 중종|중종]]은 내종숙부가 된다. [[정희왕후]]의 친정아버지이며 [[장경왕후]], [[문정왕후]], [[윤원형]],[[윤원로]]와 [[윤지임]], [[윤춘년]] 및 [[윤여필]], [[윤여해]], [[윤임]]의 선조가 되는 정정공 [[윤번]]은 5대조 윤곤의 사촌으로, 윤유후에게는 재종5대조가 된다.
         그는 돈녕부도정을 지낸 윤진(尹珍)과 남양홍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 윤진은 [[남효온]], [[김시습]]의 친구이자 점필재 [[김종직]]에게서 수학한 소총 [[홍유손]](篠叢 洪裕孫)의 문인이다. [[홍유손]]은 [[세조]]와 [[연산군]]에 저항한 조선 초기 죽림 7현(竹林七賢)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다. 친형은 [[충의위]]와 부사과를 지내고 사후 [[증직|증]] [[이조]][[참판]]에 [[추증]]되고에 [[추봉]]된 윤유곤(尹裕昆)이다. 형수는 [[양녕대군]] 이제의 아들 함양군 이포(咸陽君李布)의 손자 이수남(保安正 李壽男)의 손녀였다. 그러나 형 유곤이 일찍 죽어 자신의 차남으로 공조참의를 지내고 파평군(坡平君)에 봉작된 윤공(尹鞏)을 양자로 보냈다.
         그는 [[1575년]]에서 [[1590년]] 사이로 추정되는 어느 때에 그는 집안에 전해지던 [[성삼문]](成三問)의 문집 성근보유고와 기타 시문을 정리해 [[성삼문]]의 문집 2권을 간행한다. 문집에 실리지 못하고 각종 문헌 [[동문선]](東文選), [[청구풍아]](靑邱風雅), [[용재총화]](慵齋叢話), [[황화집]](皇華集), [[대동시림]](大東詩林) 등에 전하던 [[성삼문]]의 시와 글들을 모아서 정리, 성근보선생집 (成謹甫先生集), 육선생유고(六先生遺稿) 등을 간행하였으며, 발문을 썼다. 윤유후는 자신이 [[성삼문]]의 문집을 정리하게 된 것에 대해 성근보집 발문에 누가 편집한 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필사본으로 베낀 성근보유고 (成謹甫遺稿) 1권이 집안에 대대로 가전(家傳)되어 왔기에, 문집에 실리지 못한 시문이 있을까 찾다가 자신이 [[동문선]](東文選), [[청구풍아]](靑邱風雅), [[용재총화]](慵齋叢話), [[황화집]](皇華集), [[대동시림]](大東詩林) 등에 수록된 [[성삼문]]의 미수록 유작을 채집하여 시부(詩賦) 89수‚ 전(箋)‚ 찬(讚)‚ 함(箴)‚ 서(書)‚ 설(說)‚ 성삼문이 지은 타인의 묘비명(墓碑銘)‚ 대책(對策) 등 16편의 글을 찾아내 유집을 완성시켰다 하였다. 그의 성근보집과 육선생유고는 [[조선 고종|고종]] 때에 간행한 매죽헌선생문집 (梅竹軒先生文集) 등의 참고자료가 된다.
         이후 [[삭녕군|삭녕]][[군수]]를 거쳐 [[1591년]](선조 24) [[3월 2일]] [[영월군|영월]][[군수]]로 부임하고, 그해 [[10월 12일]] 체직되었다. [[1592년]](선조 25) [[자산군|자산]][[군수]](慈山郡守)로 재직 중 그해 [[4월 27일]] [[탄금대]]가 함락되고 일본군이 [[경기도]]로 상륙하자,[[4월 30일]] [[조선 선조|선조]]는 어가를 이끌고 [[의주파천|파천]]하였다. [[6월 12일]] 선조의 어가를 맞이하고, 3천 병사를 이끌고 자산군의 장경문(長慶門)을 지켰다. 병력이 소수이기에, 그는 빽빽한 숲 사이 소나무에 사람의 옷을 걸어두어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ref>연려실기술 제15권</ref><ref>재조번방지 제1권</ref> 이후 그는 선조의 어가가 [[평양성]]을 탈출하여 [[의주]]로 갈수 있도록 길목을 지켰다. 최종 관직은 통훈대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에 이르렀다.
         ** 대고모부 : [[조선 성종|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69~1495)
         *** 내종숙부 : [[조선 중종|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
         * 할머니 : 전주이씨, [[운산군 (조선 왕족)|운산군]] 이계(雲山君 李誡)의 딸, [[세종대왕]]의 서자 [[밀성군|밀성군 이침]]의 손녀
         * 부인 : 우계이씨(羽溪李氏, [[1541년]] [[12월 1일]] ~ [[1607년]] [[5월 17일]]), 사헌부대사헌 [[이감 (조선)|이감]](李戡)의 딸
         그는 [[조선 중종|중종]]과 이중으로 인척관계가 되는데, [[조선 중종|중종]]은 대고모할머니 [[정현왕후]]의 아들로써 내종 5촌숙이 된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윤진은 남양홍씨 [[홍언필]]의 딸이자 [[송질]]의 외손녀와 결혼하는데, [[홍언필]]은 외조부, 송인은 외외증조부, [[홍섬]]이 윤유후의 외삼촌이 된다. [[조선 중종|중종]]의 서녀와 결혼한 [[송인]]은 윤유후의 어머니 남양홍씨의 외삼촌으로, 윤유후의 외외종조부가 된다.
         [[혜정옹주]] 이철환은 [[조선 중종|중종]]의 서녀로서, 혜정옹주 이철환은 고모할머니 쪽으로 내종 6촌 여동생이지만, 친외가 어머니쪽으로는 외외종조모가 된다.
         * [[조선 중종]]
         * [[조선 성종]]
         * [[운산군 (조선 왕족)|운산군]]
         * [[이감 (조선)|이감]]
         [[분류:음서 제도]][[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도정궁]][[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파평 윤씨]][[분류:임진왜란 관련자]]
  • 윤이지 (1579년)
         | 출생지 = [[조선]] [[서울특별시]]
         | 사망지 = [[조선]] [[부산광역시]]
         | 국적 = [[조선]]
         '''윤이지'''(尹履之, [[1579년]] ~ [[1668년]])는 [[조선]]의 [[문신 (관료)|문신(文臣)]]이며 본관은 [[해평 윤씨|해평]](海平)이다. 자(字)는 중소(仲素)이고 호(號)는 추봉(秋峯)이며 시호(詩號)는 정효(靖孝)이다.
         [[1600년]] 관직에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를 제수받았고 이후 [[1616년]] 증광문과에 병과 급제했다. 관직에 있는 동안 [[조선 선조|선조]](宣祖), [[조선 광해군|광해군]](光海君), [[조선 인조|인조]](仁祖), [[조선 효종|효종]](孝宗), [[조선 현종|현종]](顯宗)에 이르기까지 다섯 임금을 섬겼다.
         {{토막글|조선|한국 사람}}
         [[분류:1579년 태어남]][[분류:1668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음서]][[분류:과거 급제자]][[분류:해평 윤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윤치영
         윤치영의 9대조 [[윤두수]]와 [[윤근수]]는 [[조선]] [[조선 선조|선조]] 때 형제 정승이었다. 8대조 [[윤흔]]은 [[조선 선조|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를 거쳐 [[자헌대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고, [[호종공신]]으로 사후 [[증직]]으로 [[의정부시|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었다. 7대조 [[윤취지]]는 [[광해군]]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관직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6대조 윤채(尹埰, 1603~1671) [[조선 인조|인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은 세자익위사 사어에 이르렀다. 5대조 [[윤세겸]](尹世謙, 1668~1748)는 윤채의 아들이며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고조부 윤발(尹潑, 1728~1798) 때에 가계가 몰락하여 윤발은 관직을 지내지 못했다. 증조부 [[윤득실]](尹得實, 1768~1823)은 생전 관직이 [[통덕랑]]에 이르렀으나 술을 좋아하여 가세가 몰락하였다.
         일찍부터 [[영어]](英語)를 배운 그는 영어를 잘 구사하였는데, 유년시절에 배운 [[영어]] 실력은 훗날 [[미국]] 유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윤치영은 [[중앙중학교 (서울)|중앙중학교]] 7회 졸업생이었다. 애교심이 워낙 강한 그는 아들 차남 [[윤인선]](尹仁善, [[국회사무처]] 해외자료과장 역임)과 손주 윤황구가 진학할 때 [[중앙고등학교]]를 선택하도록 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윤황구는 중앙중학교만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경복을 나왔다. 윤치영은 무시험세대인 손자가 [[중학교]]에 진학할 당시 주소를 옮기기까지 하며 중앙을 권했다고 한다. 차남 윤인선은 [[중앙고등학교]] 57회 동문이다.<ref>이건우 주간부기자. 교육화제, 주간조선. 1993.</ref> 그는 한글 외에도 [[영어]], [[한자]],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1918년]] [[일본]]을 방문한 [[여운홍]] 등을 만나 [[미국]] 교포들의 현황과 독립자금 모금 현황 등의 정보를 입수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 중 [[동경]]에서 유학생들의 [[조선]] [[2·8독립 선언]]에 참여하였으며, 같은해 [[11월 23일]]에는 [[여운형]]의 일본 입국을 환영하는 유학생 환영회를 개최하고 한국 독립의 당위론을 강연하는데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그는 [[YMCA 청년회]]에도 활약, 재동경 한인 YMCA 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귀국하여 윤치호·[[이상재]] 등이 지도하던 [[조선기독교중앙청년회관]]에 들어가 일하였다. 또한 모교의 야구부 코치이자 조선기독교중앙청년회(YMCA)의 야구부 감독, 축구부 감독을 겸하였다. 기독교청년회에서 일하던 중 그는 [[이승만]]의 권고로 [[미국]] 유학을 결심, 미국 [[하와이]]로 건너갔다. [[하와이]]에서 그는 [[1921년]] 7월에 조직된 [[동지회]](同志會)에 가입하여 이승만을 총재로 추대하고 그는 민찬호·김영기 등과 [[대한인동지회]] 중앙부 이사원에 임명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옹호와 대동단결을 목적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21년 태평양잡지(뒤에 태평양주보로 개칭)의 주필로서 민족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동시에 [[동아일보]]의 연락으로 [[동아일보]]와 제휴, 동아일보 북미합중국 특파통신원을 겸하였다.
         [[1923년]]에는 귀국하여 [[중앙고등학교|중앙고보]]의 야구팀 코치가 되었다. [[1923년]] [[7월 5일]] [[하와이]] 이주노동자 2세 학생들이 야구팀을 결성했다.<ref name="끝나지 않는 신드롬">천정환, 《끝나지 않는 신드롬》 (푸른역사, 2005) 106-107페이지</ref> 이때 YMCA에서는 [[하와이]]로 원정경기를 가는 야구단을 조직했다. [[중앙중학교 (서울)|중앙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축구, 야구, 육상 선수로 활동했고 중앙고보의 야구 코치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야구단의 한사람으로 차출, 1루수로 선발되어 태평양에 건너갈 수 있게 됐다. [[조선총독부]] 외무국에서는 윤치영이 반일분자라 하여 출국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당시 [[충청남도지사]] [[김관현]](金寬鉉)의 주선으로 출국이 허용, [[조선총독부|총독부]] 외무국에서 여권을 발급받고 출국하였다.<ref name="경향19720408">경향신문, 1972년 04월 08일자 4면, 사회면</ref> 그러나 그가 [[하와이]]에서 [[이승만]]을 만난 것이 알려지면서 [[김관현]]은 징계를 받게 되고, [[조선총독부]]는 [[하와이 섬]]에 밀정을 파견한다.
         당시 [[일본]]은 30여 명의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윤치영은 일본측 대표단장 쓰루미 유스께(鶴見佑輔)를 그의 숙소로 찾아갔다.<ref name="경향19720408"/> 쓰루미 유스케에게 그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역사적 침략상과 [[조선총독부|총독부]] 정치의 잔혹성 등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윤치영의 회고에 의하면 "만약 그가 불손한 태도로 나온다면 주먹다짐이라도 할 생각이었다.<ref name="경향19720408"/>"한다. 그런데 쓰루미는 윤치영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면서 신중한 태도로 듣고 있더니 반박하였다.
         {{인용문2|[[일본인]]들은 비록 하찮은 인력꾼(잡역부)이라도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치는데,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은 잘사는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애국심]]이 없어서 협박에 약하다.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대학]] 출신들이고 당신부터도 [[일본]]의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 아니냐? 그래도 조선인 가운데 애국애족 하는 사람들은 상당수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니 이 점을 너희는 [[일본]]에게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ref name="경향19720408"/>}}
         [[1932년]]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국제법]] [[학사]] 학위를 받고, [[1934년]] [[아메리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하였고<ref name=autogenerated2 /> [[국제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카네기 평화재단]]에서 [[국제법]]을 연구하던 중 [[1936년]] YMCA 기독교 청년회 부총무에 선출되었다.<ref name="조선19960210">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6021070057 고 윤치영 전공화당 당의장], 1996년 2월 10일자</ref>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출입하던 그는 미행을 당했고, 종로 연건정에서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불심검문을 이유로 체포되어 전신수색을 당한 뒤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뒤 사촌형 [[윤치호]]가 사건 연루자 전원 52명의 신원을 책임진다는 신원보증서와 시말서를 작성했고 이 때문에 풀려날 수 있었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5"/> 이후 그는 석방되었지만, 사촌형 윤치호가 조선총독부 특무기관으로부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공황상태에 빠져 그해 가을 내내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다. 이후 [[1942년]]까지 4년간 [[대화숙]] 보호 관찰소에 출입하였다.
         30년대 후반 이후에도 윤치영은 청년들과 사귀며 연락을 통해 국내외 정세와 언론 동향, 정보 등을 입수하여 대응하였다. 윤치영은 [[야구]]와 [[축구]] 등을 잘 했고 체육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체육]]을 통해 그는 청소년들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또한 교회 청년 활동에도 참석하여 교회를 통해서도 청년층을 주변에 포섭하였고 [[이승만]]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조선총독부|총독부]] 당국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분류하여 내사, 감시하였다.
         {{참고|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대화숙}}
         [[대화숙]]에 입소하면서 그는 하루에 대여섯 시간을 묶인 뒤 세뇌교육을 당했다. 꿇어 앉혀놓고 [[일본]] [[승려]]가 나와 [[불경]]을 읽고 정신을 차리라고 냉수를 머리에 끼얹는 모욕을 당했다. [[일본]] [[군인]]을 데려다가 강연도 시켰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그 중에서도 제일 고약한 짓은 남산 꼭대기에 있는 [[조선신궁]] 광장으로 끌고 올라가 [[신사 참배]]를 시키는 일이다'라고 회상하였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7"/> 그는 자신이 [[기독교]] 신자임을 들어 [[신사 참배]] 거부 의사를 표현하였다가 온갖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총독부]]의 엄한 감시와 고문에 그는 일본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된다. 그에 의하면 "그들의 무자비한 식민 통치의 폭력 앞에 나는 하루 아침에 짐승이나 벌레만도 못한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채 나를 죽음의 일보 직전 까지 몰고 가는 것이다.", "나라 없는 인간은 이렇게 당하다가 맥없이 죽어가야만 하는구나 하는 뼈저린 자각을 했다." 라며<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0"/> 이후에도 한일 외교에 부정적인 시각을 표출하며 [[일본]]에 대한 공공연한 적의를 드러냈다.
         [[1940년]] [[1월]] 그의 문중에서 [[창씨개명]]을 할 것인가 여부를 놓고 토론하였다. [[1월 7일]] [[윤치소]], [[윤치호]], [[윤치왕]], [[윤치창]] 등과 함께 형 [[윤치오]]의 집에 모여 창씨개명 문제를 논의했다. 치창, 치왕, 치오 등은 아이들을 위해 창씨개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치영은 창씨개명을 완강히 반대했다.<ref name="윤치호 일기 p.452">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 역, 역사비평사, 2001) 452페이지</ref> 형제들과 사촌들, 조카들 등이 참여한 문중 회의에서 그는 "[[이승만]] 박사 등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조선의 독립은 달성될 것이다" 라는 견해를 피력했지만 묵살당했다. 그는 문중의 창씨개명 시도를 반대하고 저항하였지만, 문중 총회에서 창씨개명은 결정되었고 그도 본인 의사와 관계 없이 창씨개명을 하게 되었다.
         [[1940년]]대초 [[태평양 전쟁]]을 전후하여 그는 [[조선총독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그는 [[이승만]], [[윤치호]] 등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 이외에 대외활동을 줄였다. [[이승만]] 등이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에 출연하였다. 그는 당국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라디오 단파방송을 청취하였다.
         [[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제의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는 조선 사회에 논란이 되었다.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다. 그런데 그가 뒤이어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면 흐뭇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ref name="윤치호 일기 p.452"/> 총독에게 아부하는 조선인 지식인들은 당연한 것이라며 총독을 추켜세웠다.
         윤치영은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며 창씨는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해 [[4월]]에 열린 [[해평 윤씨]] 문중의 문중회의 결과 창씨개명을 하기로 결의되었고, 문중회의에서 창씨 성을 이토(伊東)로 하기로 정해지자 결국 그는 이토 치에이로 창씨 개명한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직후 [[조선총독부]] 당국에서는 국내에 있는 문사,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전쟁의 승전을 찬양하는 말과 글을 여기저기 내걸도록 강요하고 나섰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9">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139페이지</ref> 그는 [[일본 제국주의]]가 점점 미쳐간다며 분개하다가 주변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이때 [[민족 대표 33인|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 [[기미독립만세 사건]]에 가담하였던 [[박희도 (1889년)|박희도]](朴熙道)가 그를 만나자고 하였다. 윤치영에 의하면 "그는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그 당시 [[조선총독부|총독부]]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경무부 잡지 〈[[동양지광]] (東洋之光)〉의 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동양지광〉에서 이번 호에 대동아전쟁 승전특집을 냈는데 다른 저명인사들의 것과 함께 나의 글이 실려 있다고 말하였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9"/> 윤치영은 자신의 허락 없이 명의를 도용했느냐며 항변하였다.
         [[박희도 (1889년)|박희도]]는 지금 일본은 1억 인구가 총동원이 되어 전쟁수행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조선]]의 유지들이 살아남는 길은 억지로라도 그들에게 협력하는 체 하는 길뿐이어서 자기가 다 알아서 처리했노라고 하였다. [[박희도 (1889년)|박희도]]는 그의 이름 뿐만 아니라 백모, 현모, 신모 등 다수의 이름을 본인의 승락 없이 게시한 모양이었다. 윤치영은 그들과 같이 [[박희도 (1889년)|박희도]]를 찾아가 심한 항의를 하였으나, 일제 전시하의 때가 때이니만치 명예훼손 소송 등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9"/>
  • 윤치일
         '''윤치일'''(尹致日, [[1935년]] [[2월 10일]] [[경기도]] [[서울특별시|서울]] ~ [[1985년]] [[4월 8일]])은 [[대한민국]]의 농업인, 농학자로 [[조선]] 말기에 [[육군]][[참장]]을 지낸 [[윤영렬]]의 아들이었다. 대통령 [[윤보선]],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에게는 배다른 삼촌이 되지만 [[윤보선]], [[윤일선]]보다도 40년 연하였다. [[윤치호]], [[윤치왕]]은 사촌 형이 된다.
  • 윤호 (1424년)
         '''윤호'''(尹壕, [[1424년]] ~ [[1496년]] [[4월 9일]])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외척으로 [[조선 성종|성종]]의 장인이며 [[조선 중종|중종]]의 외할아버지이다. 본관은 [[파평 윤씨|파평]](坡平)이고 자(字)는 숙보(叔保), 시호는 평정공(平靖公)이다.
         실록에 의하면 성품이 검소하고 교만함이 없었다고 하나, [[1470년]](성종 1년) [[영응대군]]의 종 금희(金希)를 도둑으로 몰고 매질을 하여 때려 죽였다. 그러나 [[정희왕후]]의 조카뻘 친족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기도 했다. [[조선 세조|세조]]의 장인 [[윤번]]의 친족으로, [[윤번]]은 그의 재종조부가 된다. [[윤은로]], [[윤탕로]], [[정현왕후]]의 아버지이며, [[윤필상]], [[윤사로]] 등은 그의 당조카가 된다.
         [[고려]]말 문하평리를 지낸 [[윤승순]]의 증손이자 [[윤곤]]의 손자이며,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사후 증 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영천부원군에 [[추증]]된 [[윤삼산]](尹三山)의 아들이다. [[윤승순]]의 형제 판도판서 [[윤승례]]는 [[조선 세조|세조]]의 장인 정정공 [[윤번]]의 아버지였다. 그래서 [[조선 세조|세조]]의 장인 [[윤번]]은 윤호의 재종조부, [[세조]]비 [[정희왕후]]는 7촌 재종고모가 된다.
         행[[종부시]]승(行宗簿寺丞)으로 재직 중 [[1455년]](세조 1년) [[세조 반정]] 이후 [[좌익공신|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3등관에 책록되었다.<ref>세조실록 2권, 세조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12월 27일(무진) 3번째기사 "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 공신에 녹훈하다"</ref> 그 뒤 천릉도감의 민혜(閔憓)가 뇌물을 받고 군사를 놓아준 일이 발각되었는데 이를 알면서도 보고하지 않았다 하여 [[의금부]]의 탄핵을 받고 추국당했다.<ref>예종실록 4권, 예종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3월 24일(무신) 1번째기사 "민혜의 일을 즉시 계달하지 않은 도감 낭관 윤호를 잡아 오게 하다"</ref> 그러나 [[조선 예종|예종]]의 특명으로 곧 석방되었다.<ref>예종실록 5권, 예종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4월 3일(병진) 3번째기사 "승정원에서 전지를 받들어 천릉 도감 제조에게 윤호를 놓아보낼 것을 치서하다"</ref> 이후 [[양주시|양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472년]] [[조선 성종|성종]]의 광릉 참배에 배종하였고, 그해 [[3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다시 행양주 목사(行楊州牧使)에 임명되었으며, [[6월]] 병조참지가 되었다. [[1473년]] 딸 윤씨가 [[조선 성종|성종]]의 후궁 숙의(淑儀)로 간택되어 입궐하였다.
         [[1479년]] [[조선 성종|성종]]이 거동할 때 횃불의 수가 적었다 하여 장령(掌令) 신형(申泂) 등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무마하였고, 이어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박안성(朴安性) 등이 여러번 탄핵하였으나 왕이 무마시켰다. 그해 윤 10월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거쳐 [[1480년]] 딸이 [[조선 성종|성종]]의 계비로 책봉되어 [[정현왕후]]가 되자, [[조선 성종|성종]]의 국구(國舅)로서 영돈령부사에 임명되고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졌다.
         **** 사위 : 제 9대 [[조선 성종|성종]]
         *** 사돈 : [[조선 덕종|덕종]], 인수대비
         * [[조선 성종|성종]]
         * [[조선 중종|중종]]
         [[분류:1424년 태어남]][[분류:1496년 죽음]][[분류:음서]][[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부원군]][[분류:원종공신]][[분류:연천군]][[분류:조선의 공신]][[분류:파평 윤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병사한 사람]]
  • 윤훤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경기도]] [[강화군]]
         |거주지= [[조선]]
         |국적= [[조선]]
         |태어난 곳= [[조선]] [[한성부]]
         |죽은 곳=[[조선]] [[경기도]] [[강화군]]
         |복무=[[조선]]
         |지휘= [[조선]] [[평안도]]군
         '''윤훤'''(尹暄, [[1573년]] ~ [[1627년]] [[2월 15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군인, 작가이다. 본관은 [[해평 윤씨|해평]]으로, 자는 차야(次野), 아호는 백사(白沙)이다.<ref>[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b_A1573_1_0008788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윤훤]</ref> 해흥군(海興君)에 봉군되고 황해도관찰사, 부체찰사 등을 역임했으나 [[정묘호란]]때의 철군 문제로 사형당하였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조선 선조|선조]] 때의 [[윤두수]]의 아들이자, [[윤방]]의 동생이며, 선조의 부마 [[윤신지]]의 숙부이다. 구한 말의 정치인 좌옹 [[윤치호]]의 8대 방조이며, [[윤보선]]의 9대 방조가 된다. [[성혼]]의 문인이다.
         인조반정 이후 [[1624년]] [[조선 인조|인조]]의 책봉을 받는 책봉주청사가 [[명나라]]에 파견될 때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귀국 후 병조 참의가 되었다. 또한 명나라에서 책봉을 성사시킨 공로로 상으로 노비 5구와 토전 15결을 하사받고 가자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체찰사]](副體察使)로서 적과 싸웠으나, 안주(安州)를 빼앗겼다. 서울감사였던 윤훤은 적병이 가까이 오는데도 계엄을 펴지 않아 군민이 모두 흩어져버렸다.<ref name="choi157">최범서, 《야사로 보는 조선의 역사》 (가람기획, 2003) 157페이지</ref>
         당시 [[서울특별시|서울시]]에는 평안감사 윤훤이 6000여 명의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인근 수령들이 병력을 이끌고 [[서울특별시|서울]]으로 집결하면서 병력은 총<ref>장학근, 《조선 평화를 짝사랑하다》 (플래닛미디어, 2008) 242페이지</ref> 8000명에 달했다.<ref name="jang243">장학근, 《조선 평화를 짝사랑하다》 (플래닛미디어, 2008) 243페이지</ref> 그러나 이들은 정예병이 아니라 민가에서 강제로 징발된 오합지졸들이었다.<ref name="jang243"/>
         후금군이 서울시 밖으로 집결하면서 안주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성내의 군민들 중에는 도주자가 속출했다.<ref name="jang243"/> 후금군이 성 밖에서 공격태세를 취했을 때 응전한 조선군은 2000명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대부분이 노약자들이었다. 적의 예봉을 피한 후 후미를 공격하자는 종사관 [[홍명구]](洪命耉)의 건의에 따라 윤훤은 병력을 성천으로 이동시켰다.<ref name="jang243"/> 서울시의 병력이 이동했다는 기미를 간파한 후금군은 서울시을 공격하지 않고 바로 대동강을 건너 황주로 진격했다.<ref name="jang243"/>
         황주는 조선의 제2방어선으로, 황해병사 정호서가 지휘하는 5000여 명의 병력이 안주에서 서울을 거쳐 남하하는 후금군을 저지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지휘관 정호서는 윤훤이 서울시 방어를 포기하고 성천으로 병력을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소수의 병력으로 후금군의 남하를 저지할 수 없다며 병력을 봉산으로 후퇴시켰다.<ref name="jang243"/> 이로써 황주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제2방어선은 싸움 한번 못해본 채 붕괴되고 말았다.<ref name="jang243"/>
         ***** 조카 : [[윤신지]](尹新之), [[조선 선조|선조]]의 부마
         * [[이경석 (조선)|이경석]]
         [[분류:1573년 태어남]][[분류:1627년 죽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군인]][[분류:육군 군인]][[분류:조선의 공신]][[분류:임진왜란 관련자]][[분류:병자호란 관련자]][[분류:정묘호란 관련자]][[분류:사형된 사람]][[분류:효수된 사람]][[분류:해평 윤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한국의 장군]][[분류:원종공신]]
  • 윤훤 (동음이의)
         * [[윤훤|윤훤]](尹暄, [[1573년]] ~ [[1627년]])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군인이다. [[병자호란]] 때 패하고 후퇴했다가 사형당한다. [[윤두수]]의 아들이다.
         * [[장윤훤|윤훤]](允暄, ?- [[1837년]])은 [[조선]] 후기의 승려이자 선승으로 속성은 장씨(張氏)로 [[장윤훤]]으로 부른다. 호는 설곡(雪谷)이고 [[전라남도]] [[해남군|해남]] 태생이다.
  • 윤휘
         '''윤휘'''(尹暉, [[1571년]] - [[1644년]])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조선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호종, [[조선 인조]]를 도와 적진인 [[청나라]] 진영을 왕래, 교섭하며 설득과 화의를 추진하였고, 환도 뒤 도승지가 되어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였다.
         과거 급제 후 삼사의 요직을 거쳐 1613년(광해군 5) 계축화옥에 관련, 삭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1618년 동지겸진주사(冬至兼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이 [[명나라]]에 구원군을 보낼 때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론을 지지했다가 [[인조반정]] 직후 파면되었다. [[1626년]] 복관되고, 성주목사, 청주목사 등을 지냈다. 그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어가를 [[남한산성]]까지 호종하였고, 주화론에 참여하여 [[조선]]측 대표로 [[청나라]]군과의 사이를 오가며 타협을 주관,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환도 뒤 도승지가 되어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였다.
         그해 [[동부승지]]를 거쳐 [[정유재란]] 종전 후에도 [[조선]]에 주둔하던 [[명나라]][[군대]]의 철군 문제를 교섭, 타결시켰다. 이어 [[의인왕후]]의 장지 문제 선정에 참여하고 [[명나라]]의 전몰 장병 위문을 주관하였으며, [[우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아버지 [[윤두수]]가 [[이홍로]]의 탄핵으로 [[홍원군]]으로 유배되자, 이홍로의 친지들과 친하게 지냈던 그는 이후 이홍로와 관련된 사람들과 절교하였다.
         [[1618년]](광해군 11년) [[5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동지 겸 진주사(冬至兼陳奏使)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여 체차되었으나 다시 성절사로 임명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 기간 중 [[누르하치]]와 [[여진족]]의 움직임을 수시로 장계를 올려 조선 조정에 보고하였고, 염초(焰硝)를 구해서 [[조선]]조정으로 보냈다. 그 뒤 [[공조]][[참판]]·[[예조]][[참판]]을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조선 인조|인조]]를 [[남한산성]]에 호종하고, 주전론과 주화론이 나뉠 때는 주화론에 동조하였다.
         이후 [[조선]] 조정의 특명전권대사로 [[청나라]]군과 [[남한산성]]을 오가면서 화의 교섭을 노력, [[청나라]]군사들을 설득시키고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환도 후 [[도승지]]에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였고, 사신으로 [[청나라]]와 [[명나라]]를 여러 번 다녀왔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조선]]의 정벌 여론을 무마시키기도 했다. [[1638년]]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를 거쳐 [[조선 인조|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책봉[[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책봉 고명을 받아왔다. 그러나 귀국 도중 [[담배]](南草)를 [[가마]]속에 숨겨갖고 왔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사신직에서 파직당했다.
         [[1639년]](인조 17년) [[3월]] [[청나라]]에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환국할 때 [[가마]]를 타고 천천히 가서 맞이하는데 참여했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조선 인조|인조]]는 이를 무마시켰으나 계속 간관들의 탄핵을 받고 원배되었다가, [[유배지]]로 가던길에 석방되어 되돌아왔다.
         **** 이복동생 : [[윤간 (조선)|윤간]](尹旰)
         [[분류:1571년 태어남]][[분류:1544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서예가]][[분류:조선 광해군]][[분류:조선 인조]][[분류:병자호란 관련자]][[분류:정묘호란 관련자]][[분류:해평 윤씨]][[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병사한 사람]]
  • 윤휴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지 = [[조선]] 한성부
         |거주지 = [[조선]]
         |국적 = [[조선]]
         '''윤휴'''(尹鑴, [[1617년]] [[10월 14일]] ~ [[1680년]] [[5월 20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이다. [[남인]]의 거두이며, 청남의 중진이자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었다. 본관은 [[남원 윤씨|남원]](南原). 자(字)는 두괴(斗魁),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 야보(冶父)이다. 이름 휴(鑴)를 잘못 오기하여 윤준(尹鑴), 윤전(尹鐫)으로 읽기도 한다. 학자 간서재(澗西齋) [[김덕민]]의 외손으로, 김덕민, [[이민구 (1589년)|이민구]], [[이원익]]의 문인이다. 학행(學行)으로 [[시강원]][[진선]]이 되었으며 이후 [[성균관]]사업,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의정부시|의정부]][[좌찬성]] 등을 지냈다. [[윤선도]], [[허목]]과 함께 [[서인]] 공격의 선봉장이었다.
         어려서 외할아버지인 김덕민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남인 학자인 이원익, 이민구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이괄의 난]] 때에는 [[여주시|여주]]에 피신하였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는 보은 삼산(三山)의 외가에 은신했으며, [[병자호란]], [[정묘호란]]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653년]]([[조선 효종|효종]] 3년) 우의정 [[심지원]], 병조판서 [[원두표]]의 천거로 발탁되어 관직에 나갔으나 사퇴와 복직을 반복했다. 그 뒤 [[민정중]], [[송시열]], [[송준길]] 등의 요청으로 다시 관직에 나갔다.
         [[조선 인조|인조]] 즉위 초부터 시종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 종사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다. 이때 남인 중에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 등이었다.<ref name="Leedeok211">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211 페이지</ref>
         {{인용문|울곡 [[이이]]가 성학집요(聖學輯要) 서문에서 말하기를 '먼저 요로(要路)를 찾아서 문정(門庭)을 확실히 연 후에 정해진 방향 없이 널리 배우라'고 했는데, 이 말은 크게 잘못되었다. ...(이하 중략)... 율곡의 말처럼 한다면 근본을 세움이 확실하지 못하고 방향이 정해지기도 전에 요로와 문정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 무슨 말인가? ...(이하 중략)... 이는 불가(佛家)의 거꾸로 배우는 방법이지 공자의 가르침이 절대 아니다.<ref>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212 페이지</ref>}}
         이때 [[김좌명]](金佐明), [[이단상]](李端相) 등도 윤휴의 학행을 적극 추천하였으나, [[이후원]]이나 [[이단상]]의 형 이일상(李一相) 등은 그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1649년]] 효종 즉위 초부터 그는 이기설을 저술하여 [[조선]] [[유교]]의 정통인 이퇴계(李退溪)·이율곡(李栗谷)의 [[이기설]](理氣說)을 모두 반대하였다.
         [[조선]]후기 이후 신분제 사회가 붕괴되면서 연애 결혼이 나타났고, 과부의 재혼도 증가하였다. 보쌈이라는 용어가 민간에서는 과부를 자루에 넣어 납치하는 형식의 일종의 재혼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며 중매결혼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한편 그는 신분제 붕괴와 가족 제도의 변화를 인륜이 땅에 떨어지는 현상이라며 안타까워하였다.
         {{인용문2|남자가 전적으로 혼자 장가들지 않고 여자는 전적으로 혼자 시집가지 않는다. 반드시 부모를 통하고 중매를 필수로 한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부끄러움을 멀리하고 [[음란함]]을 방지하기 위해서다.<ref name="juk00">[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9/06/2011090600700.html 옛글에 담긴 애틋한 부부 이야기]{{깨진 링크|url=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9/06/2011090600700.html }} 조선일보 2011년 09월 06일자</ref>}}
         그가 후에 '독서기'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언급, 지적한 것처럼 조선시대의 결혼은 대부분 부모가 개입된 중매결혼이었다.<ref name="juk00"/> 그는 연애 결혼을 일종의 [[음란]]함으로 규정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자녀결혼에 부모의 개입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중매결혼을 옹호하였다.
         20대 초반에 '사단칠정인심도심설 四端七情人心道心說'을 지어 이기심성(理氣心性)의 문제에 대해 [[이황]]와 [[이이]]의 견해를 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형성하였다. 이는 그의 스승이던 [[김덕민]], [[이원익]], [[이민구]]의 견해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라서 화제가 되었다.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조선 효종|효종]] 즉위 초, 그는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에 의해 학행으로 천거되어 [[시강원]]진선(侍講院進善)·[[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중용장구보록, 중용대학후설 등에서 주희와 다른 해석을 하여 [[송시열]]과 논쟁을 벌이는 등 학문에 뛰어났다. 그는 관직에 여러번 천거되었으나 그때마다 모두 사양하고 저술 활동과 강연에 전념했다.
         당시 [[송시열]]이 그를 천거하자 [[이후원]]은 송시열이 이단으로 지목한 그를 등용했다가 화를 불러올 것이라며 반대했고, [[이유태 (1607년)|이유태]]는 윤휴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그를 추천하는 일은 중단할 것을 권고한다. 이렇게 만류했음에도 [[송시열]]은 윤휴를 경연관으로서의 적임자라고 계속 추천한다.<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rb_10105003_005&tabid=k 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 1년 기사]</ref>
         앞서 [[1660년]]([[조선 현종|현종]] 11년)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와 함께 [[송시열]], [[송준길]] 등의 예론(禮論)을 통박하다가 사문난적으로 낙인이 찍혔다. 논쟁 초기에 [[송시열]]은 윤휴의 주장을 접수하였으나, [[남인]]이 [[복상 문제]]로 [[송시열]]을 제거하려 하자 [[송시열]]은 그를 공격하였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는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 상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ref name="park0318">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318</ref>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원칙대로 당연히 기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ref name="park0318"/>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ref name="park0318"/> 서인과 남인의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ref name="park0318"/>
         이때 윤휴와 [[허목]]은 약간 견해를 달리했는데, 같은 3년복 설을 주장했지만, [[허목]]은 어머니가 혈통을 계승한 장남에 대한 예로서 자최삼년설(齊衰三年)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윤휴는 [[조선 효종|효종]]이 [[조선]]의 국왕이고 [[자의대비]]는 임금과 감히 촌수를 계산할 수 없는 신하라며 참최삼년(慘衰三年)을 주장했다. 이어 윤휴는 그 근거로 신모설(臣母說)을 주장하고 [[주 무왕|무왕]]이 자신의 어머니 읍강을 신하로 간주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허목]]은 다소 절충을 해야 한다고 하며 자최삼년을 주장했다.
         그는 [[조선 효종|효종]]이 일단 왕위를 계승하였고 국가의 지존이니 [[장렬왕후|자의대비]]는 사사롭게는 [[조선 효종|효종]]의 어머니가 되지만 공적으로는 국가의 신민의 한사람이 된다고 주장하였다.([[신모설]]) 그가 신모설을 주장하자 [[서인]]은 아들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예가 어디있느냐며 패리, 패륜이라며 그를 공격했다. [[송시열]]은 '[[주나라]] 무왕의 고사를 들어 아들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예는 없다'며 후인이 어찌 이를 반박하느냐며 일축하였다. 이어 [[송시열]]은 [[장렬왕후|자의대비]]는 이미 [[조선 효종|효종]]이 [[왕자]]시절 왕자(신하)의 입장에서 국모로 받들었기 때문에 자의대비가 효종의 신하가 될 수가 없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이때 [[윤선도]] 등은 [[예송 논쟁]] 때 [[송시열]]과 [[송준길]]이 [[조선 효종|효종]]에게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명예회복과 복권을 강력하게 주청했다는 점을 걸고 넘어지며, 그들이 [[조선 효종|효종]] 대신 [[소현세자]]를 정통으로 생각했다고 공격했고, 윤휴 역시 이에 동의, 묵인하였다. 그가 이를 묵인하거나 동조하는 태도를 취한 것에 분개한 [[송시열]]은 그에 대한 신뢰를 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송시열과 교류했는데, 그의 이모의 아들인 송규정, 송규렴 형제가 송시열의 제자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송시열과 대립하면서 송규정, 송규렴과의 관계도 소원해진다.
         [[남인]]들이 송시열 등이 소현세자를 정통으로 봤다는 상소를 계속 올릴 때 윤휴는 묵인하거나 수수방관하였다. [[소현세자]]와 소현세자빈, [[김홍욱]] 복권의 당론 외에도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소현세자빈]]은 [[조선 인조|인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어 죽었고, 세자빈을 구명했다가 희생된 [[김홍욱]]을 의를 위해 희생된 선비라고 확신하던 [[송시열]]과 [[송준길]]은 윤선도, 윤휴와 남인들의 정치공세에 크게 분노했다.
  • 윤흔
         '''윤흔'''(尹昕, [[1564년]] - [[1638년]] [[12월 17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무신, 정치인이다. 본관은 해평. [[윤두수]]의 둘째 아들, [[윤훤]]의 형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초명은 양(暘)이고, 자는 시회(時晦), 호는 도재(陶齋) 또는 청강(晴江), 계음(溪陰)이다. 시호는 정민(靖敏)이다.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 당시 [[조선 인조|인조]]를 수행하였으며, [[병자호란|병자]], [[정묘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협상을 반대하며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당색은 [[서인]](西人)으로, [[광해군]] 때 [[승정원]][[우승지]] 등을 지냈으나 한때 첩의 남동생이 칠서지변의 서양갑이라서 [[계축옥사]]로 파직되었다가,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 뒤에 관작이 복구되어 [[예조]][[참판]]·[[중추부]][[지사]],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조선 인조|인조]]를 [[공주시|공주]]까지 호종하였고,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가의대부에 오르고 예조참판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에는 [[후금]]과의 협상을 강력 반대하였다. 그 뒤 [[예조]][[참판]]으로 재직 중에는 [[1632년]] [[인목대비]]와 [[1635년]] [[인열왕후]]의 [[국상]] 장례를 주관하였으며 [[정묘호란]] 때에도 임금을 호종하였으며, [[1636년]](인조 14년) [[정묘호란]] 때에도 [[남한산성]]으로 [[조선 인조|인조]]를 수행, [[김상헌]]과 함께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사후 [[병자]], [[정묘호란]] 때의 [[호종]] 공로로 [[증직|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윤웅렬]](尹雄烈), [[윤영렬]](尹英烈) 형제는 그의 7대손, [[윤치호]]는 그의 8대손이다. [[이이]]·[[성혼]]·[[정철]]의 문인이다.
         도재 윤흔은 [[1564년]] [[조선 선조|선조]]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오음 [[윤두수]](尹斗壽)와 참봉 황대용(黃大用)의 딸 황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직|증]] [[의정부]][[좌찬성]] 윤희림의 증손으로, [[조선 인조|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방]](尹昉)의 동생이다.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윤훤]], 윤휘(尹暉)의 형이고, [[조선 선조|선조]]의 부마 [[윤신지]]의 백부였다.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을 지낸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월정 [[윤근수]]는 그의 삼촌이었다. 처음 이름은 양(暘)이었는데 뒤에 흔으로 개명하였다.
         첫 부인은 [[조선 덕종|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의 손자 [[양원도정]](陽原都正) 이혜(李譓)의 딸과 결혼하였다가 일찍 상처하고, 뒤에 스승 [[이이]], [[성혼]]과 동문수학한 [[신응시]]의 딸 영산신씨(靈山申氏)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재취 부인 영산신씨 역시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전처 전주이씨에게서 1남 1녀를 두니 아들 윤취지(尹就之)와 유시경(柳時慶)에게 출가한 딸이 있다. 또한 첩실에서 1남 1녀를 두었으니, 서자 윤태지(尹泰之)는 관상감 직장(觀象監直長)을 지냈고, 서녀는 무과(武科)에 급제한 유지만(柳之蔓)과 결혼하였다.
         [[경력]]으로 재직 중 [[1595년]](선조 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선발되었고, 얼마 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이때까지도 이름은 윤양이었는데 뒤에 흔으로 개명한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595_004467 윤양]</ref> 향시에는 장원했지만 중앙의 과거에 낙방하였는데, 이때 비로소 굴욕을 펴게 되었다 한다. 그는 과거 급제 후에도 자신의 스승의 한사람인 우계 [[성혼]]과 송강 [[정철]]의 문하에 출입하며 가르침을 청하였으며, [[임진왜란]] 중에는 [[조선 선조|선조]] 임금을 따라 [[의주]]로 피난갈 때 수행하였다. 그 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공으로 [[성균관]][[전적]](典籍)으로 특진하였다.
         [[1624년]](인조 2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 등이 거병하여 도성으로 쳐들어와, [[이괄의 난]]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즉시 [[공주시|공주]]까지 달려가 [[조선 인조|인조]]를 호종하였으며, 그 뒤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그 뒤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로 호종하였으며, [[청나라]]와의 강화, 회담을 강력히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그의 결사항전 주장은 묵살되었찌만 주화에 절대 반대한 점으로 [[사림]]의 지지를 받았다.
         [[1630년]](인조 8년) 행[[용양위]][[부호군]]으로 전직되었다가 그해의 임오년(1582년) 사마시 합격자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임오년사마방회도에 기록되었다.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1632년]] [[예조]][[참판]]이 되고, 1632년에는 예조참판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국장]] 업무를 주관하였고, 다시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다시 예조참판이 되어 1635년에도 예조참판으로 재직하며 [[조선 인조|인조]]의 정비 [[인열왕후]](仁烈王后)의 국장업무를 주관하였다.
         저서로는 《계음만필 溪陰漫筆》, 《도재수필》, 《도재집》, 편저서에 《십묘한람도동편(十畝閒覽道東編)》 등이 있으며, [[여주시|여주]]의 향토지인 《황려지 (黃驪志)》를 편찬하였다. 그밖에 [[창랑정]](滄浪亭) 등 약간의 [[시조]] 몇 수가 전한다. [[1638년]](인조 16년) 초겨울에 가벼운 병을 앓다가 [[감기]]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고 그해 겨울 [[12월 17일]] [[감기]]와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그가 죽자 [[조선 인조|인조]]는 애도를 표하여 정사를 파하고 바로 좌의정에 증직하였다.
         *** 이복동생 : [[윤간 (조선)|윤간]](尹旰)
         [[분류:1564년 태어남]][[분류:1638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수필가]][[분류:조선의 작가]]
  • 윤흥인
         윤흥인(尹興仁, [[1516년]] ~ [[1545년]] [[9월]])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군인, 외척이다. 자(字)는 영중(榮仲), 본관은 [[파평 윤씨|파평]](坡平)이다. [[중종]]의 제2계비 [[장경왕후]]의 친정 조카이고, 증조모를 통해 [[효령대군]]의 외6대손이 된다. 소윤 [[윤원형]]은 아버지쪽으로 10촌이었고, 그의 형 윤원개 역시 10촌 형인데 윤원개는 동시에 외가로는 친이모부가 된다.
         ** 고모 : [[장경왕후 (조선)|장경왕후]], 조선 11대 국왕 [[조선 중종|중종]]의 제1계비
         ** 고모 : 윤씨, [[덕풍군]] 이이([[조선 성종|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서자)의 처
         {{토막글|조선|군인}}
         [[분류:1516년 태어남]][[분류:1545년 죽음]][[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군인]][[분류:육군 군인]][[분류:조선의 왕족]][[분류:파평 윤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사형된 사람]]
  • 율원군
         '''율원군 이종'''(栗元君 李倧, [[1433년]] ~ [[1476년]] [[1월 17일]])은 [[조선]] 중기의 왕족, 문신으로 [[효령대군]]의 손자이자 [[보성군 (왕족)|보성군]](효령대군의 3남)의 다섯째 아들이다. 이름은 종(倧)이요 자는 유안(幼安), 시호는 양경(襄頃), 양환(襄桓)이다. [[1467년]](세조 13) 특명으로 부원수(副元帥)에 책봉되고, 적개공신으로 군에 승작되고 정의대부(正義)가 되었다.
         그가 임지에서 병을 얻었다는 주달(奏達)을 접하였다. 이 해 [[12월 10일]] 병으로 체직을 청하자 [[조선 세조|세조]]는 후임자로 당시 [[승정원]][[도승지]] [[권맹희]](權孟禧)를 천거했으나, 후임자로 천거된 권맹희가 자신의 아버지의 병을 이유로 부임을 거부하므로 계속 함길남도 병마절도사를 맡아보았다. 12월 11일 세조가 친히 약물을 하사하여 [[12월 15일]] 내의(內醫) 차득참(車得馬+參)의 편에 보내 약을 주고, 진료를 받게 했다. 그러나 병이 깊어 [[1468년]](세조 14) [[병]]으로 소환,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정의대부 율원군에 임명되었다. 그는 성질이 침착하고 진득하여 일을 만나면 세밀히 살피고 다른 사람을 대접할 때는 겸손하고 공손하였다 한다. [[1476년]](성종 7) [[1월 18일]]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 [[이량 (조선)|이량]]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분류:1433년 태어남]][[분류:1476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군인]][[분류:조선 세종]][[분류:조선 세조]][[분류:전주 이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한국의 장군]][[분류:병사한 사람]]
  • 은신군
         |가문 = 조선 왕조 전주 이씨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지 = [[조선]] [[전라남도]] [[제주시]] 배소
         |아버지 = [[낙천군|낙천군 이온]](양부) <br /> [[조선 장조|사도장헌세자 이선]](생부)
         |친척 = [[연령군|연령군 이훤]](양조부) <br /> [[조선 영조|영조 이금]](친조부) <br /> [[달선군|달선군 이영]](양형) <br /> [[조선 정조|정조 이산]](이복 형) <br /> [[은언군|은언군 이인]](친형)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禛, [[1755년]] [[음력 1월 11일]] ~ [[1771년]] [[음력 3월 29일]])은 [[조선]]시대의 왕자, 왕족이다. [[조선 영조|영조]]의 손자로,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숙빈 임씨]] 소생으로는 둘째 아들이며, [[조선 정조|정조]]의 이복 동생이다. [[은언군]]의 친동생이며 [[은전군]]의 이복 형이기도 하다. 사후 정조에 의해 연령군의 양손자로 출계하여<ref>낙천군과의 관계를 놓고 한동안 이견이 벌어지기도 했다.</ref>, [[호적]]상 정조, 의소세손, 은언군, 은전군과는 6촌간이 되었다.
         [[1769년]] [[김귀주]] 등의 탄핵으로 [[제주시|제주도]]에 유배된 뒤 풍토병으로 병사한다. 사후 복권되었다. 아들이 없어 [[조선 인조|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ref>호적상으로는 능창군 전의 7대손이다. 인평대군이 삼촌 능창대군의 사후 양자가 되었기 때문이며, 일제 강점기 초반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흥친왕, 이준용 등의 실록에도 등재되어 있다.</ref> [[남연군]] 이채중(뒤에 구로 개명)을 양자로 삼아 가계를 이었다.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자는 신재(愼哉), 시호(諡號)는 소민공(昭愍公)이며 후에 충헌공(忠獻公)으로 개시되었다. 가계상 조선 26대 [[조선 고종|고종]]의 증조부가 된다.
         사후 [[남연군]]의 후손들은 은신군이 사도세자, 조선 장조의 후손임을 강조하다가 20세기 이후에 가서 [[연령군]]-[[낙천군]]-은신군으로 가계도를 정립하였다.
         이진은 [[1755년]](영조 31년) [[음력 1월 11일]]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양제 임씨(良娣 林氏)<ref>대한제국 광무(光武) 3년(1899년) 숙빈(肅嬪)으로 추봉(追封)</ref> 의 서(庶) 차자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친형 [[은언군]] 외에 이복형 [[의소세자]], [[조선 정조|정조]], 그리고 이복동생 [[은전군]] 찬이 있었다. 그는 보모 황덕혜(黃德惠)에 의해 양육되었다.
         [[1757년]](영조 33) [[1월 2일]] [[조선 영조|영조]]는 특별히 [[왕손]]교부에 [[홍계능]]을 임명하여 은신군, 은언군 형제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왕손의 나이 6세에 왕손사부를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영조는 1757년에 두 왕손을 가르칠 왕손교부를 초빙, 임명하였다.
         곧이어 시전(市廛)상인들에게 수백 냥의 빚을 지고 갚지 않은 것이 조부 [[조선 영조|영조]]에게 알려져 양사의 탄핵을 받는다. 은신군의 보모 황덕혜의 남동생 황경룡(黃景龍)이 내시들과 결탁하여 시전 상인의 재물을 탈취한 죄목으로 고발당했다. 황경룡을 고발하는 과정에서 은언군, 은전군 형제가 시전 상인들에게 빚을 진 것이 영조의 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1771년]] [[2월 2일]] 할아버지 [[조선 영조|영조]]에 의해 삭직처분되고, [[2월 3일]] 호서의 연읍으로 유배의 명이 내려졌다.
         그는 [[조선 영조|영조]]의 명으로 형 은언군(恩彥君)과 함께 [[충청북도|충북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시|제주도]]으로 위리안치 되었다. 또한 그의 외조부 [[임지번]]은 [[제주시|제주도]]의 [[병역|군역]]에 충군(充軍)되었다. 그러나 은신군과 그의 형 [[은언군]]이 유배당한 뒤에도, 그는 분에 넘치는 가마를 탔다는 죄목이 더해져 계속 탄핵당하였다. 당시 [[노론]] [[벽파]] 일각에서는 [[조선 정조|세손]]을 사전에 제거하려 했고, [[조선 영조|영조]]는 이를 알아보고 [[홍봉한]]이 은신군과 [[은언군]] 형제의 빚을 갚아준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1776년]] [[조선 정조|정조]] 즉위 직후 정조에 의해 [[1776년]](정조 1) [[4월 10일]] [[조선 영조|영조]]의 유지를 이유로 [[연령군]] 훤에게 사후 양손자로 적통(嫡統) 입적(入籍)되었다. 그러나 사후 양자라서 이미 [[연령군]]의 양자가 된 [[낙천군]]의 제사를 은신군의 후계자들이 모시느냐 여부를 놓고 논란이 되었으며, [[남연군]]의 후손들은 사도세자와의 관계를 더 강조하는 차원에서 사도세자, 장조를 유독 강조했다.<ref>연령군과 낙천군의 제사만 받들고, 사도세자를 강조하였다. 이는 선원속보 및 남연군 후손들의 묘비명, 신도비명에도 장조의 별자, 사도세자의 별자 은신군의 후손이라 명시하였다.</ref> 이 문제는 20세기에 가서야 남연군의 후손들이 연령군, 낙천군을 선조로 인정하고 연령군-낙천군-은신군으로 계통이 확정되었다.
         은신군 역시 아들이 없어 [[1815년]](순조 15) [[조선 순조|순조]]의 특명으로 [[돈녕부]]판사 [[이언식]](李彦植)과 왕실 각 왕자군파 문장들, [[예조]]의 회의 끝에 [[1815년]] [[12월 19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6대손인 이병원의 차남 이채중을 간택, 그의 사후 양자로 입양시켜 후사를 이었다.<ref>인평대군이 [[능창대군|능창군 이전]]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므로, 호적상으로는 [[능창대군|능창군 이전]]의 7대손이 된다.</ref> 이채중은 이름을 이구(李球)로 바꾸고 바로 [[남연군]](南延君)에 봉작되었다.
         이복 형인 [[조선 정조|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1779년]](정조 3년) [[1월]] [[증직|증]]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추증되었다. [[1779년]] [[12월 12일]] 소민공(昭愍公)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가 고종 때 충헌으로 개정되었다. [[1786년]] 정조는 그의 [[신도비]]를 직접 쓰기도 했다.
         일설에는 그가 친왕손으로 [[낙천군]]([[연령군]]의 양차자)의 제사를 모시는 것을 꺼려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은신군은 생전에 연령군에게 입양된 것이 아니며 은신군은 사후 6년 뒤에 이복 형인 [[조선 정조|정조]]에 의해 [[연령군]]의 후사로 입양되었다. 후일 [[남연군]]의 후손들은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후손 은신군에게서 가계가 시작되는 것으로 간주했지만 후대에 가서는 [[연령군]]-[[낙천군]]-은신군-[[남연군]]으로 계통을 확립하였다.
         * 양조부 : [[연령군]] 이훤(延齡君 李昍, 1699 ~ 1719)<ref>증조부 [[조선 숙종|숙종]]의 서자이다.</ref>
         * '''조부''' : 제21대 [[조선 영조|영조대왕]](英祖大王, 1694 ~ 1776, 재위 1724 ~ 1776)
         ** '''아버지''' : 추존 [[조선 장조|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1735 ~ 1762)
  • 은언군
         |출생지= [[조선]] 서울시
         |사망지= [[조선]] [[경기도]] [[강화군]]
         |국적= [[조선]]
         |아버지= [[조선 장조|장조]]
         |친척= 이복 형 [[의소세자]], [[조선 정조|정조]], <br /> 친동생 [[박예진]], 이복 동생 [[은전군]]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䄄, [[1754년]] [[5월 29일]] ~ [[1801년]] [[6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조선]] [[조선 영조|영조]]의 손자이자 [[조선 장조|장조]]의 서장자이며 [[조선 정조|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조선 장조|장조]]의 아들 중 [[조선 정조|정조]], [[은전군]]과 함께 성년기까지 살아남았다. [[조선 철종|철종]]의 할아버지로, 25대 왕 [[조선 철종|철종]]은 그의 서자 [[전계대원군]]의 서자이자 셋째 아들이었다. 본관은 전주, 자는 명흥(明興),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771년]] 은언군과 은신군 형제의 빚을 [[홍봉한]] 등이 대신 갚아주자, [[노론]]이 세손을 제거하려는 것에 위협을 느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제주시|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776년 석방되어 돌아와 원릉 수릉관, 종부시제조, 가덕대부 수릉관, 수덕대부 등을 역임하였다. [[1778년]](정조 2) 그의 아들 [[상계군]]이 [[홍국영]]에 의해 [[원빈 홍씨]]의 양자로 내정되었으나 [[1786년]] 상계군을 추대하려던 구선복(具善復)의 계획이 발각되면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노론]][[벽파]]는 여러 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요구하였으나 [[조선 정조|정조]]는 상소를 물리치고 그를 보호하였다. [[조선 정조|정조]] 사후 그를 죽이라는 상소는 계속되었다. [[1801년]] 그의 정실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 상계군부인 신씨가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실을 알고 배소에서 탈출하려다가 붙잡혀 사사되었다.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복권되고, 그와 [[상계군]]에 관련된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의 기사는 대량 세초되었다. [[양주시|양주]](현. [[서울특별시|서울시]] [[은평구]])의 지산 [[이말산]]에 안장된 그의 분묘는 [[6.25 전쟁]] 중 유실되었다.
         [[조선 영조|영조]]의 손자이며, [[조선 정조|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아버지는 [[조선 장조|장조]]이며, 어머니는 [[숙빈 임씨]](肅嬪 林氏)이다. 부인은 진천인(鎭川人) [[송낙휴]](宋樂休)의 딸로 상산군부인 송씨(常山郡夫人 宋氏)이다. 그에게는 친동생 [[은신군]], 이복형 [[의소세자]], [[조선 정조|정조]], 그리고 이복동생 [[은전군]] 찬이 있었다.
         [[1757년]](영조 33) [[1월 2일]] [[조선 영조|영조]]는 특별히 [[왕손]]교부에 [[홍계능]]을 임명하여 은신군, 은언군 형제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왕손의 나이 6세에 왕손사부를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영조는 1757년에 두 왕손을 가르칠 왕손교부를 초빙, 임명하였다.
         [[1771년]] 외람되게 근수(跟隨)를 많이 거느리고 남여(藍輿)를 타고다닌다 하여 친동생 [[은신군]](恩信君)과 함께 관직에 서용되지 못하는 처분을 받았다. 곧이어 시전(市廛) 상인들에게 수백 냥의 빚을 지고 갚지 않은 것이 조부 [[조선 영조|영조]]에게 알려져 [[조선 영조|친]]동생 은신군과 함께 [[충청북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안치되었다. 또한 그의 외조부는 [[대정현]]에 군역 충군되었다. 이 해 [[3월]] 친동생 [[은신군]]은 제주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했고, 그는 천극(栫棘)죄인 신분으로 혼자 버티다가 [[1771년]] [[4월 19일]] 영조의 석방 명령이 내려졌지만 [[1774년]](영조 50) [[5월]] 서용, 복직되었다.<ref>승정원일기에 의하면 5월 15일에 이미 숭헌대부의 직책에 있었는데 심상운이 은언군, 은전군의 직급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ref> [[1774년]] 가을, 안치된 지 3년 만에 [[조선 영조|영조]]의 특명으로 은언군은 석방되어 [[한성부|한성]]으로 돌아왔다.
         이후 [[한성부]]로 돌아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다가 2품으로 품계가 올라가고, [[1776년]](영조 52) [[4월]] 할아버지 [[조선 영조|영조]]가 별세하자 [[원릉]] [[수릉관]](元陵守陵官)에 임명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가 즉위하자 그해 [[5월 8일]]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 겸 [[서울특별시|서울시]]제조(宗簿侍提調)에 제수하고 가덕대부(嘉德大夫)에 가자되었다. 이해 [[8월]] [[산릉]] [[수릉관]](山陵守陵官)에 임명되고, 이해 [[8월 24일]] 수덕대부(綏德大夫)에 가자되었다.
         [[1778년]](정조 2) [[홍국영]](洪國榮)이 [[조선 정조|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후사가 없는 것을 기화로 누이동생을 [[원빈 홍씨]](元嬪 洪氏)를 들여 왕세자를 낳게 하려 하였으나 이듬 해인 [[1779년]](정조 3)에 죽자, 대신에 은언군의 맏아들인 담(湛)을 원빈의 장례 때에 대준관(代尊官)을 시켜 양자로 삼고,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은언군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홍국영]]의 거듭된 부탁으로 결국 아들을 원빈의 양자로 들이는 것을 수용하고 만다.
         한편 [[1779년]] 가을 유학 이덕희(李德喜)의 딸을 소실로 들였다. 첩 이씨는 후일 서손자 [[조선 철종|철종]]이 왕이 되면서 [[전산군부인]](全山郡夫人)으로 [[추증]]되었다.
         강화도로 유배된 뒤에도 그가 [[홍국영]] 등과 한패거리이며, 상계군 추대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에서는 번갈아가며 은언군의 토죄, 처벌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은언군이 [[홍국영]]과 적극적으로 모의했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은언군과 그 일가의 [[강화군|강화도]] 유배생활은 기록이 대부분 전하지 않는다. 은언군과 그 일가들에 대한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은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대량으로 세초되었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재위기간에도 일부 남아있었으나 고종 대에 와서 먹줄로 긋거나, 해당 기사를 잘라버리는 식으로 기록을 대부분 말소시켰다.
         [[1786년]] [[5월]]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고, 이어 같은 해 [[9월]]에 [[의빈 성씨]](宜嬪成氏)가 출산 과정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러자 [[노론]]은 은언군과 [[홍국영]]을 의심하였다. [[노론]] 계열에서는 은언군에게도 흑심이 있었을 것이라며 노론계 언관들을 통해 그를 사형을 처해야 한다는 탄핵 상소를 거듭해서 올렸으나, [[조선 정조|정조]]는 이를 거부하였다. 계속해서 [[노론]]계 대신들의 탄핵이 폭주하자, [[1789년]](정조 13) [[9월 26일]] 정조는 비밀리에 변복하고 출궁하여 은언군에게 연락, 변복하고 썰매를 타고 [[강화군|강화도]] 입구로 나왔다. 정조는 은언군을 데리고 [[한성부|한성]]으로 도착했지만, 이 사실이 노론 벽파계 대신들에게 알려졌고, 이때 정순왕후의 명으로 [[의정부시|의정부]]김익(金熤)은 은언군을 배소에 도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이에 [[조선 정조|정조]]는 [[강화군|강화도]]로 가서 은언군의 유배지 근처에서 유숙하며 항의성 시위를 벌였다. [[정순왕후]]는 정조에게 당장 돌아오라며 연락을 보낸다. 정조의 은언군 구하기 항의성 시위는 그 해 [[9월 28일]] 일단 벽파대신(僻派大臣)들이 정조의 체신을 생각하여 수용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1789년]] [[10월]] 은언군은 다시 [[강화군|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그는 [[혜경궁 홍씨]]의 생일과 [[사도세자]]의 생일과 기일, [[정순왕후]] 김씨의 생일 등에만 일시 방면되어 왕궁에 초대되고는, 탄신행사가 끝나면 다시 강화도로 돌려보내졌다. 이때 은언군의 [[강화군|강화도]] 감시를 게을리했다는 이유로 당시의 [[강화군|강화]][[부사]] [[윤승렬]](尹承烈) 역시 계속 탄핵당하게 된다.
         [[조선 정조|정조]]는 은언군이 유배지에서 고통받고 있다며 아우를 잃을까봐 걱정된다는 뜻을 자주 피력하였고, 은언군의 석방을 계획했으나 그때마다 삼사와 [[승정원]] 등에서 반대하며 은언군을 탄핵했고, 관학과 사부학당의 유생들도 들고 일어나 반발하여 은언군 석방은 번번히 무산되었다.
         그러나 [[1800년]](정조 24) [[8월]] [[조선 정조|정조]]가 등창과 연훈방 중독으로 갑자기 죽고, 나이 어린 [[조선 순조|순조]]가 즉위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자 상황이 뒤바뀌게 되었다. 순조 즉위 초부터 조정에는 다시 은언군을 사사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그는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자손들 중 [[조선 정조|정조]], [[은전군]]과 더불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몇 안되는 자손이기도 했다. 또한 은전군이 19세에 사사당함으로써 40세 이상 생존한 혈족은 정조와 그가 유일했다. [[1801년]] [[5월 27일]] 새벽 비가 오는 틈을 타 아들 이철득(李鐵得)과 함께 [[강화군|강화도]]를 탈출하려다가 붙잡혔다. 이 일로 [[강화군|강화]] [[유수]] 황승원(黃昇源)으로부터 탄핵을 당한다.
         [[1801년]](순조 1) [[2월]] [[신유박해]]에 체포된 양제궁 나인의 진술로 부인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 [[평산군부인]] 신씨가 [[청나라]]에서 온 [[천주교]] [[선교사]]인 [[주문모]](周文謨)[[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고<ref>당시 조선의 국교는 유교 성리학이었다.</ref>, [[상산군부인 송씨]]이 [[주문모]] 신부를 양제궁에 숨겨둔 것도 밝혀지면서 대간과 사헌부의 탄핵을 무수히 받고 [[1801년]](순조 1년) [[3월 17일]] [[사약]]형을 받게 되었다. 이때 은언군은 삼사로부터 가족이 사교(邪敎)에 물들도록 단속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줄기차게 탄핵을 받았고, 삼사와 정부 관료들은 [[상계군]], [[홍낙임]] 등과 관련해서도 계속 탄핵하였다. 그해 [[6월 13일]] [[사사]]령이 내려지고, [[6월 30일]] [[강화도]] 배소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이때 그의 향년 48세였다.
  • 은전군
         |출생지 = [[조선]] 한성부
         |국적 = [[조선]]
         |아버지 = [[조선 장조|장조]]
         |친척 = 이복 형 [[의소세자]], [[조선 정조|정조 이산]], <br /> [[은언군|은언군 이인]], [[은신군|은신군 이진]] <br />이복 누나 [[박예진]]
         '''은전군 이찬'''(恩全君 李禶, [[1759년]] [[8월 14일]] ~ [[1778년]] [[8월 26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왕족으로, [[조선 영조|영조]]의 [[서손]]이자 [[사도세자]]([[조선 장조|장조]]로 추존)의 서자이며, 어머니는 [[경빈 박씨 (장조)|경빈 박씨]](景嬪朴氏)이다. [[정후겸]], [[홍계능]] 등과 [[조선 정조|정조]]에게 반감을 품었던 [[노론]] [[벽파]]는 정조를 제거하고 은전군의 추대를 기도했고, 결국 무옥(誣獄)으로 몰려 희생되었다. 이름은 찬(禶), 자(字)는 연재(憐哉), 시호는 효민(孝愍)이다. 다른 이름은 이찬(李瓚), 이명(李䄙)이다. 별칭은 하엽생(荷葉生)이다.
         1762년 1월 그의 생모 [[경빈 박씨 (장조)|경빈 박씨]]가 아버지 [[조선 장조|사도세자]]에게 살해당한 것을 두고,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서자]]들 중 그가 사도세자에게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 [[노론]][[벽파]]로부터 주목받아왔다. [[노론]]은 그를 추대할 음모를 꾸미기도 했고 [[1776년]] 정조 즉위 후 노론 벽파의 택군(擇君)의 대상이 되었다. [[1777년]] [[8월]]과 [[9월]] 자객이 담을 넘다가 발각되어 [[홍계능]], [[홍상범]] 등이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던 중 그를 추대하려 한 계획이 드러났다. 정조는 그에게 자결을 명했으나 그는 반항했고, 결국 사사되었다. 자녀가 없어 사후 이복 형 [[은언군]]의 아들 [[풍계군]]을 양자로 입양하였고, 풍계군 역시 일찍 죽어 양손자를 입양하였다. [[1850년]](철종 1년)에 가서야 [[서영순]]의 상소로 복작되고 [[1871년]](고종 8) [[3월 16일]] 효민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이름은 찬(禶), 자(字)는 연재(憐哉), 시호는 효민(孝愍)이다. 아버지는 [[조선 장조|장조]]로 추존된 [[조선 장조|사도세자]]이며, 어머니는 [[경빈 박씨 (장조)|경빈 박씨]] 빙애이다.<ref>고종 때 [[조선 장조|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되면서 [[귀인]]으로 [[추증]]되었다가, 2년 후에 장조 황제로 추존되자, 다시 경빈으로 진봉되었다. 생전 작위는 수칙이었다.</ref> 어머니 빙애의 실명은 한중록에 기록되어 후대에 알려졌다. [[의소세손|의소세자]]와 [[조선 정조|정조]], [[은언군]], [[은신군]]의 이복 동생이다. 부인은 평양인(平壤人) [[조성]](趙峸)의 딸 군부인 조씨(郡夫人 趙氏)이다.
         장조의 서자로 [[1759년]](영조 35)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3살 되던 [[1762년]], 의대병이 있던 [[조선 장조|사도세자]]가 옷이 몸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1월 그의 생모 수칙 박씨 빙애를 살해한다. 빙애를 구타할 때 [[사도세자]]는 빙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돌이 갓 지난 왕자 은전군도 칼로 쳤다. 그리고 칼 맞은 은전군을 문 밖 연못에 던졌다. 이를 알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가 은전군을 구하여 이름을 하엽생(荷葉生), 곧 '연잎이'라고 불렀다.<ref>[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3/10/18/201310180500013/201310180500013_3.html 권력은 나눌 수 없다? ‘영조의 비극’ 외면한 편견]</ref> 영조는 자(字)를 연재(憐哉), '가련하도다!'로 지어주었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상궁]]들에 의해 양육되었다. [[조선 장조|사도세자]]와 [[조선 정조|정조]]를 미워하던 [[노론]] [[벽파]]는 그가 아버지에게 원한과 적개심을 품었을 것이라 내다봤고,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자녀들 중에서 그를 유독 주목하였다. 은전군을 추대하려던 이들 중에는 [[김귀주]]와 [[홍계희]] 등의 일가 친척들, [[조선 정조|정조]]의 친모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친정 일족들도 끼어 있었다.
         [[1765년]](영조 41) [[6월 26일]] 그의 이름이 [[의소세자]]의 이름 정(琔)과 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할아버지 [[조선 영조|영조]]는 이름을 찬에서 명(䄙)으로 개정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개명되지 않았다. [[1767년]] [[11월]] 군호는 은전으로 정해지고, 곧 은전군에 책봉되었다. [[1768년]](영조 44) [[1월 1일]] [[승정원]]의 건의로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은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775년]](영조 51) [[4월 24일]] 영조의 특명으로 [[흥록대부]](興祿大夫)에 가자되고, 이해 [[12월 10일]] 다시 [[현록대부]](顯祿大夫)에 가자되었다. [[1776년]](영조 52) [[1월 17일]] [[종부시]]제조(宗簿侍提調)가 되어 《[[선원보략]] (璿源譜略)》의 발문을 썼다. 이해 [[2월 5일]] [[조선 정조|왕세손]] 및 이복형 [[은언군]](恩彦君)과 함께 [[수은묘]](垂恩墓)에 가서 봉심(奉審)과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한때 그는 전주이씨 문중의 문장(文長) 후보로 추천, 문장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아버지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노론]]에게 반감을 품던 [[조선 정조|정조]] 대신 [[노론]]은 그의 이복 동생인 [[은언군]]과 [[은신군]]을 임금으로 추대할 계획을 세웠으나 [[홍봉한]]이 이들의 시장에서 진 빚을 갚아준 것을 이상하게 본 [[조선 영조|영조]]에 의해 [[제주시|제주도]]에 유배, [[은신군]]은 그곳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한다. 그 뒤 [[노론]]은 그에게 주목하였다.
         [[1776년]](영조 53년) [[1월 17일]] [[종부시]]제조에 임명되었다. 종부시제조로 있으면서 역대 국왕의 팔고조도(八高祖圖), 왕비세보(王妃世譜)의 현황을 새로 갱신하였고, [[인빈 김씨]]과 [[숙빈 최씨]]의 팔고조도를 제작하고 [[1월 20일]] 영조에게 보고하였다. [[1776년]] [[3월 5일]] 영조가 죽고 [[조선 정조|정조]]가 즉위한 뒤, 도총관에 임명되었다. 그해 [[5월 12일]] 궁궐에 입궁할 때 [[수행원]]을 많이 대동하고 들어왔다는 이유로 [[도승지]] [[서호수]]의 탄핵을 받아 정조에 의해 파직되었다가, 바로 당일날 취소되고 서용되었다.<ref>정조실록 1권 1776년(정조 즉위년 청 건륭 41년) 5월 12일 임오 1번째기사, "은전군 이찬을 삭직하도록 명하였다가, 이어 직첩을 주고 서용하도록 명하다."</ref> 그러나 은전군의 장인 조성은 [[김귀주]]의 측근이었고, 정조는 그를 의심하였다.
         정조 즉위 직후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할 계획을 세워 [[1777년]](정조 1) [[7월]] [[홍술해]](洪述海)의 아들 [[홍상범]](洪相範 ), [[홍계희]]의 8촌 진선 [[홍계능]] 등이 밤낮으로 정조의 즉위를 못마땅히 여겨 나라를 원망하면서 [[전라북도|전북도]] [[전주시|전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강용휘]](姜龍輝) 등과 공모하여 [[조선 정조|정조]]를 시해하고, 은전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은전군이 이들과 적극적으로 모의하거나 만나거나, 내통했다는 근거는 없다. 한편 은전군을 추대하려던 이들 중에는 [[조선 정조|정조]]의 친외삼촌인 [[승정원]]승지 [[홍낙임]](洪樂任)도 있었다. 홍낙임은 대장(大將)의 역할을 맡게 된다.
         [[1777년]](정조 1) 후사가 없어 후일 이복형 은언군(恩彦君)의 아들을 후사로 내정했고 후일 은언군의 사남 [[풍계군]](豊溪君) 이당(李瑭)을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풍계군]] 역시 후사가 없이 일찍 죽어 파양되었다. [[조선 순조|순조]] 때에 이르러 그에 대한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무산되었고, [[1819년]](순조 19) 그의 처 군부인 조씨가 그의 신원을 청하는 격쟁을 하여 [[형조]]는 승정원에 계를 올렸다. [[조선 철종|철종]]이 즉위한 [[1850년]](철종 1) [[11월 10일]]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유치선]](兪致善)에게 정조때 당시 부득이한 처분이므로 금일 가부를 논해야 하느냐며 일의 관계가 무거운바 시원임대신을 모아 상고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해 [[12월 22일]] [[비변사]] 시원임대신 회의에서 그의 일은 [[건릉]]의 구 지문을 근거로 논의하였다.
         [[1851년]](철종 2) [[7월 14일]] 은전군의 봉사손을 정하라는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뜻에 따라, 철종은 은전군의 사후양자 후보를 찾다가, [[풍계군]]을 다시 은전군의 양자로 지정했다. 다시 [[풍계군]]의 사판을 은전군의 사판과 함께 봉사하게 되었다. [[1851년]] 다시 [[조선 철종|철종]]의 명으로 풍계군을 양자로 들이고, [[이세보]]를 풍계군의 양자로 들였다. 그러나 이세보가 외척의 정치 관여를 비판하다가 유배되면서, [[조선 선조|선조]]의 9남 [[경창군]] 8대손 [[이도식]](李道植)의 아들인 [[이승응]]을 다시 풍계군의 양자로 삼아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철종, 고종, 흥선대원군의 직계이며, [[일제 강점기]] 당시 소설, 연극, 시 등 대중문화의 소재가 된 이복 형 [[은언군]], [[은신군]]과는 달리 오랫동안 조명받지 못하였고, [[1948년]] 이후 편찬된 한국의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았다. 1970년 이후 국사펀찬위 등에서 조선욍조실록,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등을 한글로번역하기 시작했고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관계, 사도세자 정신질환자설에 대한 이의제기, 사도세자가 노론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견해 등이 나오면서 조명받게 되었다.
         * 조부 : 제21대 [[조선 영조|영조대왕]](英祖大王, 1694 ~ 1776, 재위 1724 ~ 1776)
         ** '''아버지''' : 추존 [[조선 장조|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1735 ~ 1762)
         *** 이복형 : 제22대 [[조선 정조|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1752 ~ 1800)
  • 의소세자
         |출생지={{국기나라|조선}} [[한성부]]
         |사망지 ={{국기나라|조선}} [[한성부]]
         |왕조 = {{국기나라|조선}}
         |아버지 = [[조선 장조|사도장헌세자 이선]]
         |친인척 = [[조선 영조|영조 이금]](조부)<br/>[[조선 진종|효장세자 이행]](이복 백부)<br/>[[조선 정조|정조 이산]](아우)<br/>[[상계군|상계군 이담]](이복 조카)<br/>[[문효세자|문효세자 이향]](동복 조카)
         동복 아우 조선 정조 이산
         '''의소세자'''(懿昭世子, [[1750년]] [[9월 27일]]([[음력 8월 27일]]) ~ [[1752년]] [[4월 17일]]([[음력 3월 4일]])) 또는 '''의소세손'''(懿昭世孫)은 [[조선]]의 [[왕세손]]이자 추존 왕세자,대한제국의 추존 황태자로 [[조선]]의 21대 왕인 [[조선 영조|영조]](英祖)의 장손이자 [[조선 장조|장조]](莊祖)의 적장자로 [[헌경왕후]](獻敬王后) 소생이다. 이름은 정(琔)이고, 시호는 의소(懿昭)<ref>덕성(德性)이 순숙(純淑)한 것을 의(懿)라 하고 용의(容儀)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한다. 【영조실록 제76권, 영조 28년 음력 4월12일 1번째기사】</ref>이며, [[조선]] [[조선 정조|정조]]의 친형이자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의 이복 형이다.
         원손으로 태어나 [[조선 장조|사도세자]]와 갈등하던 [[조선 영조|영조]]는 그가 태어나자 크게 기대하여 바로 원손에 봉했고, 어느정도 성장하기도 전에 왕손사부를 직접 물색하였다. [[1751년]] [[6월 6일|5월 13일]]에 [[조선 영조|영조]]가 직접 왕세손에 책봉하였으나 이듬해에 병을 앓다 사망하였다. [[조선 영조|영조]]는 성격 문제와 갈등, 정치적 대립 등으로 [[사도세자]] 대신 그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그가 일찍 요절하여 오래 상심하였다.
         [[1750년]] [[9월 27일]](영조 26년 [[음력 8월 27일]]) [[조선 영조|영조]](英祖)의 장손인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홍봉한]]의 딸인 [[혜빈 홍씨]](惠嬪 洪氏)의 적장자로 [[한성부]] [[창경궁]] 내 경춘전(景春殿)에서 태어났다. [[조선 정조|정조]] 이산은 그의 동복 친동생이 되고, [[청연군주]], [[청선군주]]는 친 여동생이다.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은 이복 서제가 된다. 그는 영조의 후손 중 첫 정실소생 적장자였다.
         그가 태어나자 할아버지 [[조선 영조|영조]]는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조선 영조|영조]] 자신이 가까운 친척이 없는 삼종의 혈맥이라는 점과, 첫째 아들 효장세자 사후 사도세자 외에는 다른 후손이 없었던 점, 서자에 방계라는 출신 콤플렉스를 가졌던 [[조선 영조|영조]]의 후손 중 정실에게서 얻은 첫 적장자라는 점, 그리고 둘째 아들 사도세자가 [[소론]]에 호의적인 것 등 정견이 달라서 일찍부터 정적으로 취급한 영조는 어린 손자의 탄생에 크게 기대하였다. 영조는 후궁에게서도 아들을 원했지만 전부 딸이었다. [[조선 영조|영조]]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원손]]으로 책봉하였다. 사도세자의 첫 아들이자 영조에게도 첫 손자였으므로 영조는 그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다 한다. 바로 그의 태는 [[12월 25일]] [[경상북도]] [[영천시|영천군]](현, 영주시) 괴정(槐亭) 동편 야산에 묻었다. 영조는 직접 그에게 학문을 가르칠 학자들을 물색하여 세손사부로 임명하였다.
         [[1751년]] [[6월 6일]](영조 27년 [[음력 5월 13일]]) [[조선 영조|영조]]에 의해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나, [[1752년]] [[3월 4일]] 3살의 어린 나이로 [[통명전]](通明殿)에서 갑작스럽게 훙서하였다. [[1751년]] [[11월]]의 [[효순왕후|현빈 조씨]]의 죽음에 이어 그의 죽음으로 영조는 깊이 상심하였다. 영조는 슬퍼하여 그의 제문을 친히 지어주었고, 그해 4월 12일에는 요절한 손자에게 의소라는 시호를 친히 내려주었다.
         그 뒤 아버지 [[사도세자]]가 [[1899년]](광무 2) [[조선 고종|고종]]에 의해 장종(莊宗)으로 처음 추존되었을 때, 그해 [[9월 1일]] 의소세자(懿昭世子)로 격상되었고, 곧 [[1901년]](광무 4) [[10월 17일]] 장종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다시 추존되자, 의소태자(懿昭太子)로 역시 격상되었다.
         그가 죽던 해 태어난 친동생 [[조선 정조|정조 이산]]은 3년이 지나서 [[왕세손|세손]]으로 책봉되었다.
         널리 공론을 수렴하여 조금이나마 나의 슬픔을 풀었노라. 이에 신 의정부 우참찬 홍상한을 보내서 옥책을 받들고 시호를 의소(懿昭)라 내리노라. 강보에서 갑자기 떠나니 비록 오래 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간책(簡冊)에 소상히 실리니 영원히 징신(徵信)은 될 수 있으리라. 다만 바라노니 밝은 혼령아, 거짓없는 이 교유를 받들지어다. 아! 슬프도다.<ref>조선왕조실록 영조 28년(1752 임신, 청 건륭(乾隆) 17년) 4월 12일(계묘) 1번째기사</ref>}}
         의소세손의 3년상을 탈상하고도 [[1756년]] [[조선 영조|영조]]는 지금도 세손을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나온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한편 그가 죽던 해 친동생 [[조선 정조|이산]]이 태어났지만 영조는 바로 원손, 세손에 책봉하지 않고, 책봉을 뒤로 미루었다.
         * 조부 : 제21대 [[조선 영조|영조대왕]](英祖大王, 1694~1776)
         ** '''아버지''' : 추존 [[조선 장조|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사도세자, 1735~1762)
         *** 동생 : 제22대 [[조선 정조|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1752~1800)
         **** 조카 : 제23대 [[조선 순조|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1790~1834)
         * [[조선 영조|영조]]
  • 의숙공주
         |왕조 = [[조선 왕조]]
         |아버지 = [[조선 세조|세조]]
         |친척 = 할아버지 [[조선 세종|세종대왕]], 할머니 [[소헌왕후]] <br /> 백부 [[조선 문종|문종]], 백모 [[현덕왕후]] <br /> 숙부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br />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br /> 사촌언니 [[경혜공주]]
          사촌오빠 [[조선 단종|단종]] <br /> 오빠 [[조선 덕종|덕종]] 동생 [[조선 예종|예종]]
         |출생지 = {{국기나라|조선}} [[한성부]] [[조선 세조|수양대군]] 사저
         |사망지 = {{국기나라|조선}} [[한성부]]
         |국적 = {{국기나라|조선}}
         '''의숙공주'''(懿淑公主, [[1441년]] ~ [[1477년]] [[음력 12월 3일]])는 [[조선]] 전기의 왕족, 공주로 조선 제7대 임금인 [[조선 세조|세조]](世祖)와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1418~1483)의 딸이다. 본명은 세선(世宣)이다.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와 혼인하였으나 자녀 없이 사망하였다.
         [[1442년]](세종 25년) [[한성부]]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사저에서 아버지 [[조선 세조|수양대군]]과 어머니 [[정희왕후|낙랑부대부인]]의 딸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오빠 [[조선 덕종|덕종]](德宗, 1438~1457) 동생 [[조선 예종|예종]](睿宗, 1450~1469)이 있다. 이름은 세선이라 하였다. 그가 태어날 때는 할아버지인 [[세종대왕]]의 치세기였다.
         * 조부 : 제4대 [[조선 세종|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 재위: 1418~1450)
         ** 백부 : 제5대 [[조선 문종|문종대왕]](文宗大王, 1414~1452, 재위 1450~1452)
         *** 사촌오빠 : 제6대 [[조선 단종|단종대왕]](端宗大王, 1441~1457, 재위 1452~1455)
         ** '''아버지''' : 제7대 [[조선 세조|세조대왕]](世祖大王, 1417~1468, 재위 1455~1468)
         *** 오빠 : 추존 [[조선 덕종|덕종대왕]](德宗大王, 1438~1457)<ref>야사 금계필담에는 언니([[이세희]])가 있었다고 하나, 실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ref>
         *** 동생 : 제8대 [[조선 예종|예종대왕]](睿宗大王, 1450~1469, 재위: 1468~1469)
         * [[조선 세조]]
         {{조선의 왕녀}}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분류:1441년 태어남]][[분류:1477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공주]][[분류:조선 세조]][[분류:조선 세종]][[분류:전주 이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의원군 (1520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사저
          | 국적 = [[조선]]
          | 왕가 = [[조선|조선 왕조]]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 왕조
          | 친척 = [[완원군|완원군 이수]](조부) <br /> [[조선 중종]](이복 종조부) <br /> [[의천군 이인]](아우)
         '''의원군 이억'''(義原君 李億, [[1520년]] ~ [[1544년]] [[11월 11일]])은 [[조선]]의 [[왕족|왕족 종실]]이다.
         [[1525년]] '''의원부정'''(義原副正)에 책봉되었고 [[1542년]] '''의원군'''(義原君)에 진봉되었다. 생전에 기품이 온화하고 화목한 효성이 지극하여 직방종족들의 자자한 칭찬을 받았지만 갑작스레 병에 걸려, 작은할아버지 [[조선 중종|중종]]이 훙서하기 며칠 전인 [[1544년]] [[11월 11일]]에 향년 25세로 타계하였다.
         {{토막글|조선}}
         [[분류:1520년 태어남]][[분류:1544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문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중종]]
  • 의원군 (1661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사저
          | 왕가 = [[조선|조선 왕조]]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조선 왕조]]
         '''의원군 이혁'''(義原君 李爀, [[1661년]] [[6월 13일]] ~ [[1722년]] [[11월 12일]])은 [[조선]]의 [[왕족|왕족 종실]] 출신 성리학자, 문인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성리학자로 저술들을 남겼으며 [[조선 고종|고종]] 때 가서 [[의정부시|의정부]][[김병학 (1821년)|김병학]]의 상소로 의정부 판종정경에 특별 증직되었다.
         [[능창대군|능창군 이종]]의 증손이고 생증조부는 [[조선 인조|인조]]이다. 할아버지는 인평대군 이요(麟坪大君 李㴭)이고, 생부는 [[복녕군]] 이욱(福寧君 李栯)이며 생모는 군부인 양천허씨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낸 허열(許悅)의 딸이다. [[한성부]] [[낙산]] 동쪽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1723년]](경종 3) [[12월 1일]] [[양원군]] 이환 등과 함께 [[조선 경종|경종]]의 특명으로 작첩을 돌려받았다. 이때 승정원이 따르기를 거부했으나 경종이 듣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인빈 김씨]]의 제사를 대신 지내기도 하였다. 한편 왕조실록에 의하면 그가 [[인빈 김씨]]의 제사를 주관하는 것을 그의 6촌 [[동평군]]이 매우 싫어했다 한다.
         * [http://www.rfo.co.kr/view_party.php?activePage=2&keyword=&sort=&list_mode=people1&refnum=099 대한제국 조선 황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 의원군 이혁]
         [[분류:1661년 태어남]][[분류:1722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유교 신자]][[분류:양자]][[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역사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문신]][[분류:운현궁]][[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현종]][[분류:조선 숙종]][[분류:조선 경종]]
  • 의천군 (1524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사저
          | 국적 = [[조선]]
          | 왕가 = [[조선|조선 왕조]]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조선 왕조]]
          | 친척 = [[완원군|완원군 이수]](조부) <br /> [[조선 중종|중종 진성대군 이역]](이복 종조부)<br /> [[의원군 이억]](형)
         '''의천군 이인'''(義泉君 李仁, [[1524년]] ~ [[1578년]] [[10월 18일]])은 [[조선]]의 [[왕족|왕족 종실]]이다.
         [[1529년]] '''의천부정'''(義泉副正)에 책봉되었고 1560년 '''의천군'''(義泉君)에 진봉되었으며 특히 [[조선 명종|명종]] 임금 때는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 1등의 공신 작위와 사옹원 부제조 및 진작관을 역임하였다.
         * [http://www.rfo.co.kr/view_party.php?list_mode=people1&refnum=069&party_name= 대한제국 조선 황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 의천군 이인]{{깨진 링크|url=http://www.rfo.co.kr/view_party.php?list_mode=people1&refnum=069&party_name= }}
         {{토막글|한국사|조선}}
         [[분류:1524년 태어남]][[분류:1578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문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중종]][[분류:조선 인종]][[분류:조선 명종]][[분류:조선 선조]][[분류:조선의 공신]]
  • 의친왕
         | 군주5 = [[대한제국 고종|대한제국 조선 황조 이태왕 이형]]<br />[[대한제국 순종|대한제국 조선 황조 이왕 이척]]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직책 = 조선국 내의원 제조 겸 사옹원 제조
          | 그림설명 = 대한제국 조선 의친왕 만오 이강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경력 = 前 조선국 보빙대사 <br/> 前 [[대한적십자사]] 총재 <br/> 前 대한제국 보빙대사 <br/> 前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겸 전임고문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은 [[조선]]의 [[왕족]]이고 [[대한제국]] [[황족 종실]]이며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다섯째 아들(서자)이자 [[한국의 독립 운동|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이다.<ref>[http://mpva.tistory.com/2040 〈대한제국 황족 의친왕 망명 작전〉] {{웨이백|url=http://mpva.tistory.com/2040 |date=20160304121354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ref>
         [[1919년]] [[11월 20일]]자의 [[독립신문]] 기사에는 '의친왕의 친서', '의친왕 전하' 라는 말과 함께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라고 쓰여 있다.<ref name=autogenerated1>{{서적 인용|제목=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저자=서중석 지음 |출판사=역사비평사 | 연도=2006 |쪽=327}}</ref> 그해의 [[11월 25일]]자 《[[독립신문]]》 2면의 기사에는 의친왕의 상해행 기사로 대부분 할애되었으며 이후 그 뒤에도 상당 지면 할애되었다 한다.<ref name=autogenerated1 />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 정부에 보고하여 의친왕에게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이강 공이라는 공족의 작위를 박탈당했으며, 그의 공위는 장남 [[이건 (1909년)|이건(李鍵公)]]에게 습공되었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로 연금된 뒤에는 실의에 빠져, [[이수길]]에 의하면 집에서 술을 자주 마셨다 한다. [[1955년]] [[8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별궁에서 [[영양실조]] 후유증과 [[스트레스]](화병) 등의 합병증으로 79살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 조부 익황제 조선 [[조선 문조|문조대왕]], 대한 문조 <sup>익</sup>황제(文祖 翼皇帝), [[효명세자]], [[대리청정]]<ref>[[조선 문조]] 혹은 익종([[추숭]]) 혹은 [[효명세자]](孝明世子), [[1819년|순조 19년]](1819)에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827년|순조 27년]](1827) 부왕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청정 4 년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1830년|순조 30년]](1830) 졸</ref>
         * 조모 익황후 조선 [[신정왕후 (조선)|신정왕후]], 대한 신정 <sup>익</sup>황후(神貞 翼皇后), [[조대비]]<sup>풍양 조씨</sup>
         * 부황 조선 고종대왕, [[대한제국|대한]] [[고종 태황제|고종 <sup>태</sup>황제]](大韓 高宗 皇帝) [[광무제]](光武皇帝) - 조선 제'''26'''대, [[대한제국]] '''건국조'''
         * 모후 조선 명성왕후, [[대한제국|대한]] [[명성 태황후|명성 <sup>태</sup>황후]](大韓 明成 皇后)<sup>여흥 민씨</sup>
         |style="background:#eeeeee"|5남||[[이주 (황족)|황손 이주]](李鑄)||수길||해일||1917년||1982년||수인당 김흥인||-||[[대궁]]의 [[이인용 (조선귀족)|이인용]]
         * [[1990년]] 《[[대원군 (1990년 드라마)|대원군]]》([[문화방송|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배우: [[이정훈 (1963년)|이정훈]], [[강현종]])
         * 《조선의 왕실과 외척》(2003.04.27) 박영규 저, 김영사.
         * [http://imperial.or.kr/ 대한황실문화원] : 조선왕실과 대한제국황실 문화를 계승, 발전하기 위해 뜻을 함께하는 사회인사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단체
         * [https://web.archive.org/web/20060403033806/http://rfo.co.kr/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 대한제국 황실 종묘제례 주관 공식 단체. 조선왕실계보, 선원계보(황실 족보) 등
         {{조선의 왕자}}
         [[분류:의친왕]][[분류:1877년 태어남]][[분류:1955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왕자]][[분류:대한제국의 황자]][[분류:대한제국의 장군|이강]][[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소장|이강]][[분류:일본의 왕공족]][[분류: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수훈자]][[분류:대훈위 국화대수장 수훈자]][[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독립당의 당원|이강]][[분류:전주 이씨]][[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이강]][[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게이오기주쿠 대학 동문]][[분류:로노크 대학교 동문]][[분류: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동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이강]][[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이강]][[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성락원]]
  • 이 가타리나
         '''이 가타리나'''(李加大利納, [[1783년]] - [[1839년]] [[10월]])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카타리나'''(Catharina)이다.
  • 이 바르바라
         '''이 바르바라'''(李巴巴拉, [[1825년]] ~ [[1839년]] [[5월 27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바르바라'''(Barbara)이다.
  • 이 아가타
         '''이 아가타'''(李亞加大, [[1824년]] ~ [[1840년]] [[1월 9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아가타'''(Agatha)이다.
  • 이가원
         |출생지= {{국기나라|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안동시]]
         또한 조선시대의 선현과 서예 대가들의 필법을 두루 익혀 서예에도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하였으며, 선현들의 묵적, 골동, 서화 등에 대한 식견과 수집에 대한 관심이 높아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보물급 문화 유적을 많이 소장하였다. 그러나 평소에도 개인 소유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고, [[1986년]] 그동안 애써 모은 [[박지원 (1737년)|박지원]]의 『열하일기』원본, [[정선 (화가)|정선]]의 산수화 등 그동안 애써 모은 3만여 점의 [[골동품]]과 서화를 [[1986년]] [[단국대학교]] 부설 퇴계학연구소에 기증했다. 더욱이 [[1995년]] 고령의 나이에 『조선문학사』를 집필하여 [[대한민국]] 문학사를 집대성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에 있다.
         [[1969년]]부터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구성한 고서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ref>古書委員會구성, 《동아일보》, 1969.12.4</ref> [[1945년]] 구입한 《규원사화》 고서에 대하여 [[1972년]] [[11월 3일]], 당시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심의의원이었던 [[손보기]](孫寶基), [[임창순]](任昌淳)과 함께 [[조선]] 중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고 인증서를 작성하여 국립중앙도서관의 직인으로 인증하였다.<ref> 고평석, 《한배달》 6호, 1989 </ref>
         *『조선호랑이 이야기(편)』(학민사, 1993)
         *『조선문학사』(태학사, 1995)
  • 이가환
         '''이가환'''(李家煥, [[1742년]] ∼ [[1801년]] [[4월 8일]])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천주교 순교자이다. 자는 정조, 호는 금대, 본관은 [[여주 이씨|여주]](驪州)이다.
         [[조선 정조|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남인]]에 속하는 [[안정복]]·[[정약용]]·[[권철신]] 등과 가까이 지내면서 새로운 학문연구를 위해 노력하였다. [[1784년]](정조 8년) 조카 [[이승훈 (영세자)|이승훈]]이 [[북경]]에서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오자, 이에 흥미를 느끼고 [[이벽]] 등과 함께 교리를 번역·연구했으나 입교는 하지 않았다.
         [[1801년]]([[조선 순조|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이승훈 (1756년)|이승훈]] 등과 함께 체포되어 순교했다.
         [[분류:1742년 태어남]][[분류:1801년 죽음]][[분류: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 정조]][[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순교자]][[분류:사형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여주 이씨]][[분류:남인]][[분류:조선의 수학자]][[분류:조선의 천문학자]][[분류:조선의 학자]]
  • 이간난
         '''이간난'''(李干蘭, [[1814년]] ~ [[1846년]] [[9월 20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아가타'''(Agatha)이다.
  • 이갑성
         그의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이고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아호는 연당(硏堂).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1931년]] [[신간회 사건]]으로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 시|상하이]]로 망명,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귀국하였다.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하다가 [[윤치호]]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다. [[1945년]] 독립촉성국민회의 조직에 참여하여 회장이 되고 [[1947년]]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지냈으며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뒤 [[1952년]] [[이승만]]의 친위조직이 된 [[대한인 국민회]] 회장을 지냈고, 그해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에 입당, [[1952년]] [[10월]] [[한국 전쟁]] 중 전시내각(戰時內閣)의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임시 국무총리]](國務總理)를 역임했다. [[1953년]] 자유당의 최고위원, 정무부장을 역임하였다. 4.19 혁명 후 야인으로 생활하다 [[1963년]] [[2월]]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이 되었다. [[1965년]] [[광복회]] 회장을 지냈다.
         [[3월 1일]]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벌어지자 학생시위운동 및 전단살포 등 중책을 맡아 수행하던 중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 33인들은 태화관(泰華館)에 모였고 이갑성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에 미리 의견서를 제출한 뒤, 회합 장소를 떠나지 않고 조용히 포박당하기로 약속한다. [[3월 1일]] 오후 이갑성은 조선총독부에 [[민족대표 33인]]의 의견서를 제출하러 갔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 회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갑성은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45년]] [[10월]] 반탁운동을 위해 결성된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에 참여하고 [[독립촉성국민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45년]] [[10월 5일]] 조선 각지에 파벌다툼이 심한 점을 지적, 이를 개탄하며 정당통일기성회를 결성하였다. [[12월 14일]] 김여식(金麗植), [[권동진]] 등과 함께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을 창당하고 [[권동진]]을 당수로 추대했다.
         당시 조선에는 여러 정당, 사회단체가 생겼다. 이갑성은 [[1971년]] [[12월 9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해방이 되니까 왜 그리 많은 정당이 생기는지 한심한 상태였다. 그때가 언젠지 모르나하지 중장을 만나 등록된 정당이 몇개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74개라고 대답합디다"라는 것이다. [[한민당]]의 창립 발기인이었던 그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정부가 선후에라야 정당이 있는 법이지 독립도 정부도 아직 안섰는데 정당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한다. [[1945년]] [[10월]] 우후죽순 생겨난 정당, 단체들을 하나로 모을 목적으로 정당통일기성회를 조직했고, 수십개의 단체들 중 뜻이 맞거나 성격이 비슷한 단체들은 통합되었다.
         [[1947년]] [[10월]]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 그해 [[12월]]부터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지냈다.
         [[3·1 운동]] 당시 [[한국]]의 독립운동 장면을 사진으로 촬영해달라는 [[석호필]](스코필드)의 부탁을 받고 [[경성부|경성]] 시내에서 학생들의 만세 장면을 카메라 사진으로 여러장 촬영해서 주기도 했다. 학생들의 만세 장면과 [[조선총독부]] 헌병들의 사격장면 등을 담은 이 사진들은 [[스코필드]]와 [[조선총독부]] 치하 [[조선]]에 와 있던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해 서방세계로 알려지게 되었다.
  • 이경윤
         '''이경윤'''(李慶胤, [[1545년]] [[6월 10일]] ~ ?)은 [[조선]]중기의 왕족 출신 [[화가]]이다. 자는 수길, 호는 낙파, 봉호(封號)는 학림정(鶴林正) 또는 학림공(鶴林公)<ref name='cs'>[http://www.chosun.com/editorials/news/200604/200604140449.html 왕족 화가 이경윤] {{웨이백|url=http://www.chosun.com/editorials/news/200604/200604140449.html |date=20160513120839 }} 조선일보 2006.04.14.</ref>, 본관은 전주이다.
         조선 인조 때의 서출 왕족이었다.<ref name='cs' /> [[조선 성종]]의 일곱째 서자 [[익양군]] 이회의 증손자로, 청성군 이걸(靑城君 李傑)의 아들이다. [[이중윤]](李仲胤), [[이영윤]](李英胤)의 형이다.
         조선에서 유행했던 화풍 중의 하나가 절강성(浙江省) 출신의 [[대진 (명나라)|대진]](戴進)을 중심으로 이룩된 [[절파]](浙派) 화풍이다. 이는 대경산수인물화(大景山水人物畵)와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가 특징인데, 이경윤이 조선 중기의 절파화풍을 대표하는 화가이다.<ref name='cs' />
         그동안 이경윤의 작품은 [[호림박물관]] 소장의 〈시주도(詩酒圖)〉만 진품으로 여겨졌으며,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열상화보(洌上畵譜)에는 〈석상분향도(石上焚香圖)〉란 이경윤의 작품 이름이 나오지만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ref name='cs' /> 그밖에 〈수족도〉, 〈고사탁족도〉, 〈관폭도〉, 〈산수도〉 등이 있다. 또한 일제의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 1852~1919)가 가져갔던 작품 중 이경윤 화첩집 《[[낙파필희]](駱坡筆戱)》가 있다.<ref name='cs' />
         * [https://web.archive.org/web/20160513120839/http://www.chosun.com/editorials/news/200604/200604140449.html 왕족 화가 이경윤] 조선일보 2006.04.14.
         [[분류:1545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16세기 한국 사람]][[분류:조선의 화가]][[분류:조선의 왕족]][[분류:전주 이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이경희 (1880년)
         그뒤 [[의열단]]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23년]] [[조선총독부]] 폭파를 목적으로 [[김시현]](金始顯) 등과 함께 총기와 폭탄, [[신채호]]의 격문과 [[조선총독부]] 관료들에게 보낼 투항권고문 사본 등을 국내로 반입, 격문 수백장을 받아 배포하였고, [[조선총독부]] 건물 폭파미수 직전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한 후 [[신간회]](新幹會)의 조직에 참여했고, [[신간회]] 경북지부, 대구지부 등을 조직했으며, [[밀양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지오 이경희는 [[1880년]](고종 17년) [[6월 11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무태리(현, [[대구광역시]] [[북구 (대구광역시)|북구]] 서변동)에서 아버지 이병두(李柄斗) 어머니 경주 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생 [[이강희 (독립운동가)|이강희]] 역시 독립운동가였다. 본관은 [[인천 이씨|인천]]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증직|증]][[영의정]](贈領議政)에 [[추증]]된 공도공(恭度公) [[이문화|오천 이문화]](烏川 李文和)의 19대손이며, [[조선]]중기의 [[성리학]]자이자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이주 (임란 의병장)|태암 이주]](苔巖 李李輈)의 11대손이다.
         [[1923년]] [[의열단]] 단원으로 비밀거사를 준비하여 5월의거를 계획, 국내에 잠입하였다. [[1923년]] [[김원봉]] 의 지령아래 [[김지섭]], [[김시현]](金時顯), 유시태(柳時泰), 홍종우(洪鍾佑), 황옥(黃鈺) 등과 모의하여 [[중국]]과 [[만주]]로부터 무역 목적으로 [[안둥현]]에서 [[쌀가마]]에 숨겨서 국내로 반입해온 폭탄 36개, 권총 13정, 폭탄장치용시계 6개와 뇌관 여러정, 수류탄 10발,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서]](革命宣言書)의 인쇄 사본 및 [[조선총독부]] 관공리에 대한 투항권고 격문 사본 2,000매 등을 반입, [[1923년]] [[3월 15일]] 이를 국내에 반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무기와 폭탄이 들어오자 그는 [[김시현]], [[유석현]] 등으로부터 〈혁명선언서〉와 투항권고 격문 수백 장을 받아 [[경성부]] 시내 곳곳에 살포하고, 전국 각 도의 도지사와 경찰부(警察部)에 발송하였다. [[김시현]], [[유석현]](劉錫鉉) 등 [[의열단]] 단원들이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매일신보사]] 등을 폭파하할 것을 계획하고 준비에 들어갈 때 이경희는 [[조선총독부]] 폭파를 맡았다. 그러나 [[1923년]] [[5월]] [[조선총독부]] 폭파 일보 직전에 이들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누군가의 신고로 밀정이 따라붙어, 동지 12명과 [[조선총독부]] 종로 경찰서에 체포되어 테러 미수 혐의로 재판받았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어 1년 넘게 형을 살고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대종교]]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로 신자들은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당했으나 그는 개종을 거부하였다. [[1939년]]부터 [[창씨개명]]령이 나오고 [[1940년]]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경희는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1942년]] 여름 [[경성부]] [[돈암동]]을 떠나 대구로 내려가 야산에 숨어 밭을 갈고 농부로 생활하였으며, [[항일 단파 방송]]인 [[미국의 소리]] 방송을 비밀리에 밀청하고 해방을 예상하였다. 이때 그 몰래 그의 부인 조씨가 [[청도군]]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둘째 사위에게 [[보리쌀]]을 얻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 [[조선혁명선언서]]
  • 이관용 (황족)
         '''이관용'''(李⿰土灌鎔, 생몰년 미상)은 [[조선]]시대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손이자 [[완은군]] [[이재선]]의 양자로, [[인평대군]]파보에 의하면,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이명응(李明應)의 손자이며 군수(郡守)를 지낸 이재택(李載宅)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군부인 신씨에 의해 입양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시점까지는 왕족으로서의 작위도, 예우도 받지 못했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다.
         한편 같은 시대에 [[조선 선조|선조]]의 아홉번째 서자(庶子)인 [[경창군]] 이주의 후손인 동명이인의 독립운동가 [[이관용 (독립운동가)|이관용]](李灌鎔)도 존재한다.
         [[1907년]]에는 양아버지 [[이재선]]은 복권되고 완은군에 추증된다. 조선의 왕족들이 왕궁에 출입할때 함께 출입, 문안하는 등의 예우는 지속되었다. 1912년 양궁에 [[이재면|이희]], [[의친왕|이강]], [[이준용]] 등과 출입하였으며, [[1921년]]말에 부상을 당하여, 그해 [[12월 8일]]에는 부상 치료차 [[대한제국 순종|순종]]으로부터 60원을 하사받는다.
         그는 한때 [[주식]]투자 등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서울특별시|서울]]로 올라갔다가, 양어머니 신씨가 파양을 청하는 소송을 올렸다. 그러나 경성지방법원은 조선사회의 통념상 안되며, 그가 양자로 오래 있었다는 이유를 들어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 양 숙부 : [[조선 고종|고종]](高宗, [[1852년]] - [[1919년]])
         {{토막글|조선}}
         [[분류:생몰년 미상]][[분류:운현궁]][[분류:흥선대원군]][[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전주 이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이광민
         |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 [[안동시]]
         1926년 1월 [[정의부]](正義府) 중앙총부의 결정에 따라 김세준(金世俊), 김홍식(金鴻植) 등과 함께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황해도 등에서 군인과 군자금 모집을 담당했다. 1926년 11월 제3회 [[정의부]](正義府) 중앙의회에서 재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조직의 살림을 총괄했다.<ref>[http://www.mpva.go.kr/narasarang/month_hero_view.asp?id=371&ipp=12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ref> 같은 해 가을에 결성된 [[조선공산당]] 남만총국 조직부 간부에 선출됐다. 1927년 4월 15일 길림 남쪽 영길현(永吉縣) 신안둔(新安屯)에서 [[좌우합작]] 추진을 위한 유일당촉성회의가 열릴 때, [[정의부]] 중앙위원으로서 [[김동삼]](金東三), [[오동진 (1889년)|오동진]](吳東振), 김원식(金元植) 등과 함께 참석했다. 같은 해 5월 한족노동당 중앙집행위원이자 조선공산당 남만도 간부로서 기관지『농보(農報)』를 복간했다.<ref name="기념관" />
         1927년 9월 조선공산청년회 남만 제1구 선전부 간부에 임명됐고, 1928년 5월 전민족유일당촉성회파(全民族唯一黨促成會派)인 여족공의회(麗族公議會)의 대표로 선출됐다. 1930년 3월 전만한인반제국주의대동맹창립주비회(全滿韓人反帝國主義大同盟創立籌備會) 결성에 참여해 [[김동삼]]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ref name="기념관" /> [[정의부]] 대표로서 만주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힘썼다. 1932년 [[이상룡 (1858년)|이상룡]] 서거 후에도 중국에 남아 항일운동을 했다. 만주 서란현에 가매장 상태였던 백부 [[이상룡 (1858년)|이상룡]]의 유해를 [[하얼빈]] 취원창으로 이장해 후일 유해의 본국 송환을 가능케 했다.<ref name="이종서1" />
  • 이구지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지 = [[조선]] [[한성부]]에서 사사됨.
         |왕조 = [[조선]]
         '''현주 이구지'''(縣主 李仇之, ? ~ [[1489년]] [[3월 7일]])는 [[조선]] 초기의 왕족 출신 기생으로, [[조선 태종|태종]]의 장남(長男)인 [[양녕대군]]의 8번째 서녀이다.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어우동]], [[유감동]], [[황진이]], [[대방군부인 송씨]] 등과 함께 음란한 여성의 표본으로 지목되어 마녀사냥감이 되어왔다. 이후 왕실 족보에서도 제명되었고, 은폐되어 왔던 그녀의 존재는 [[1970년대]]가 되어서야 알려졌다. [[장평도정|장평도정 이흔]], [[서산군 (왕족)|서산군 이혜]]는 그녀의 이복 오빠들이었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고 [[한성부]] 출신.
         [[1475년]] [[12월 22일]] 무렵 이구지가 남자 종 천례와 정분이<ref>김만중, 《숨겨진 조선의 연애 비화 48가지》(올댓북, 2008) 296페이지</ref> 나서 살림을 차렸다는 말이 도성에 자자하였고, [[사헌부]]장령 [[허계]]가 이 문제를 갖고 왕에게 신분을 뛰어 넘은 금지된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을 붙잡아 국문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ref name="soom48">김만중, 《숨겨진 조선의 연애 비화 48가지》(올댓북, 2008) 297페이지</ref> 종친들이 모여서 이를 의논하였다.
         왕실과 왕의 생각은 달랐다. 이것은 집안 일이라는 것이다.<ref name="soom48"/> '집안 일은 각자 알아서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던<ref name="soom48"/>' [[조선 성종|성종]]은 불쾌해하며 '왕실의 좋지 않은 이야기를 또 꺼내는 저의가 무엇인가?'라며 반문하였고, [[사헌부]]장령 [[허계]]는
         그러나 [[조선 성종|성종]]은 언급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허계]] 등은 계속 이 일을 문제삼았다. [[조선 성종|성종]]은 대비의 언문교서를 읽어주었다.
         {{인용문2|장령 [[허계]]는 왕실의 일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좋지 않은 소문이<ref name="soom48"/> 파다하게 퍼진 죄로 그의 관직을 거둔다.<ref name="soom298">김만중, 《숨겨진 조선의 연애 비화 48가지》(올댓북, 2008) 298페이지</ref>}}
         양반이 여종에게서 얻은 자녀들은 중인이 되고, 왕족이 여종에게서 자녀를 얻었을 경우에는 천민으로 간주하지 않고 왕족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왕족이나 양반이 노비에게서 얻은 자녀는 [[조선]]의 법률상 천인이 아니기에 천인과 결혼할 수 없다.<ref>이때문에 연산군이 폐출된 뒤, 연산군의 첩 장녹수의 딸과 결혼한 천민이 처벌받은 사례가 있다.</ref>
         이구지는 딸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우리 아이는 왕실의 자손이다.'라고 떠벌리고 다니다가 [[사헌부]]의 감찰에 접수되었다.<ref name="soom299">김만중, 《숨겨진 조선의 연애 비화 48가지》(올댓북, 2008) 299페0이지</ref> 또한 종과 간통하여 얻은 딸을 시집보내는 과정에서 간통 사실이 드러나 [[김종직]] 등의 탄핵<ref name="no1"/><ref name="no2"/> 을 받고 관아로 끌려가 추국당하면서 왕실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사내들이 일으키는 간통 사건은 흔한 일이니 그렇다 쳤으나 [[양녕대군]]의 서녀 이구지와 종의 간통 사건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ref name="soom300">김만중, 《숨겨진 조선의 연애 비화 48가지》(올댓북, 2008) 300페이지</ref> 성종은 천례와 이구지의 사랑을 사랑으로 보지 않고 그저 그런 종과 음란한 여인의 간통사건으로 봤다.<ref name="soom300"/>
         [[조선]]왕조 내내 음란함의 대명사로 매도당하였으며, [[선원록]]에도 실리지 못하였다. [[유감동]]이나 [[어우동]], [[사방지]] 등은 [[1910년]] 이후 문학과 영화, 연극 등의 소재가 된 반면 이구지의 존재는 철저하게 묻혀졌다. 그녀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1970년]]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조선왕조실록]] 등을 국역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준비(准非)는 현주 이구지와 노비 천례(天禮)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왕족이 노비에게서 얻은 자녀는 어머니가 노비이지만 [[조선]]의 법률상 천인이 아니기에 천인과 결혼할 수 없다. [[1475년]] 이구지의 간통 사실이 풍문으로 알려진 뒤 목사 허계가 이를 추국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1488년]] 그녀가 시집가는 과정에서 어머니인 현주 이구지가 남편 사후 종과 간통한 사실이 다시 드러났다. 이는 관찰사 [[김종직]]의 보고로 조정에 알려졌고<ref>성종실록 221권, 성종 19년(1488 무신 / 명 홍치(弘治) 1년) 10월 4일(갑오) 4번째기사 "양녕 대군 이제의 딸 이씨가 종 천례와 사통한 일을 분간하여 풀어주게 하다"</ref> 이구지는 왕명을 받고 사사되었으나, 종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 준비는 이미 시집갔으므로 연좌되지 않았다. 이후 왕조실록에는 그에 대한 기사는 나타나지 않는다.
         *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A%B6%8C%EB%8D%95%EC%98%81&keyword=%EA%B6%8C%EB%8D%95%EC%98%81 조선왕조 실록]
         [[분류:15세기 태어남]][[분류:1489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기녀]][[분류:사형된 사람]][[분류:독살된 사람]][[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세종]][[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15세기 시인]]
  • 이근택(1865)
         [include(틀:조선귀족)]
         [[조선]]과 [[대한제국]] 후기의 군인이자 [[정치가]]. 그리고 [[을사오적]], [[민족 반역자]], [[매국노]]이다.
         본관이 [[전주 이씨]]다. [[성종(조선)|성종]]의 아들인 경명군의 아주 먼 후손으로, 1865년 [[충청북도]] [[충주시|충주]] 출신이며 초명은 근용(根湧)이다. 무신 집안이었지만 출사의 계기는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 민씨]]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함으로써 눈에 들어 발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성 황후가 환궁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1884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입문하였고 병조 참판 등을 역임 한 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당시 친위 연대 제3대대장으로 정부 전복을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이듬해 돌아와 한성 판윤·의정부 찬정 등을 거쳐 1905년 법부 대신과 군부 대신을 역임하였는데 [[이완용]]이 주도한 을사 조약 체결에서 적극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힘으로서 을사오적이 되었다. --결국 [[을사조약|다른]] [[일제강점기|방]][[경술국치|식]]으로 정부를 [[망국|전]][[전복(동음이의어) #s-2|복]]시켰다.-- --그 [[전복]] 아니다.-- 그 이후로 [[조선]] 민중들과 의사의 표적이 되어서 습격을 받거나 위협을 받았지만 살아남았고 이후로는 [[일본군]]을 호위 대동하여 출퇴근을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1919년]] 자연사
         [[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충주시 출신 인물]][[분류:을사오적]] [[분류:1865년 출생]][[분류:1919년 사망]] [[분류:조선의 반란자]]
  • 이대근 (조선)
         '''이대근'''(李大根, ? ~ ?)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자(字)는 불발(不拔), 본관은 [[우계 이씨|우계]](羽溪)이다.
         [[분류:생몰년 미상]][[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우계 이씨]]
  • 이득윤
         '''이득윤'''(李得胤, [[1553년]] ~ [[1630년]])은 [[조선]] 중기(선조-광해군)의 정치가·학자·음악 이론가이다. 자는 극흠(克欽), 호는 서계(西溪),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이다. 고려 말 문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1588년]](선조 21년) 진사가 된 뒤, 참봉, 형조좌랑, 괴산(槐山)군수를 지냈다.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역학 (철학)|역학]](易學)에 뛰어났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1620년]](광해군 12년)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를 엮어서 세상에 내놓아 [[거문고]]의 법도(法道)를 바로 전하게 하였다. 음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여러 금보 및 그 저자와 [[거문고]] 대가에 대하여 다룬 것을 보면, 그가 음악에 조예가 깊고 상당히 박학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저서로 〈서계집(西溪集)〉이 남아 있다.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米院面) 가양리(佳陽里) 인경산(引頸山) 아래에 있다.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과 [[청안군|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분류:1553년 태어남]][[분류:1630년 죽음]][[분류:충청북도 출신 인물]][[분류:조선의 음악가]][[분류:조선의 학자]][[분류:경주 이씨]]
  • 이봉희
         |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 [[안동시]]
  • 이상동
         |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 [[안동시]]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한<ref>[http://www.kyongbuk.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959430 경북일보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 생가 임청각]</ref> 안동 [[안동 임청각|임청각]]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신돌석]] 휘하에서 참여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에서 국권 회복 운동을 했다.<ref name="역대인물">[[한국학중앙연구원]]_[http://people.aks.ac.kr/index.aks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ref> 1911년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듬해 평양의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들어갔다. 이후 안동으로 돌아와 교회를 세우고 장로로 재직했다.
  • 이상룡 (1858년)
         |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 [[안동시]]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경상도]] [[안동시|안동군]]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안동군]]
         [[분류:이상룡]][[분류: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분류:1858년 태어남]][[분류:1932년 죽음]][[분류:안동시 출신]][[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대한제국의 저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저술가]][[분류:무오독립선언 연서자]][[분류:신민회]][[분류:경학사]][[분류:부민단]][[분류:서로군정서]][[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반]][[분류:한국독립당의 당원]][[분류:고성 이씨]]
  • 이상백 (1904년)
         그후 제11회 도쿄 올림픽 대회 유치위원과 준비위원으로 미국, 영국, 독일, 스위스, 프랑스, 스웨덴, 핀란드, 폴란드 등을 방문하여 대회 유치와 준비에 협조를 구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체육계의 공로자로 칭송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에는 모교인 [[와세다 대학]] 재외특별연구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동양학을 연구했으며,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였으나 도쿄 올림픽 유치와 추진의 공로로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했다. [[1944년]]에는 [[여운형]]이 결성한 지하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광복 직후에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활동하였다. 건준의 해산 이후 별다른 정치적 입장표명은 하지 않았고 [[1945년]] [[9월]] [[조선 체육 동지회]]를 결성하여 회장에 취임, 본격적인 체육단체 조직 및 체육경기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해 [[12월]] [[조선 체육회]] 상무이사가 되었다. 그 뒤 IOC 가입을 목표로 활동하였으며, 반탁 시위에 휘말리지 않고 IOC 가입 문제를 논의하였다. [[1946년]] 초 IOC 가입 대책 위원회를 조직하고 부위원장에 위촉되었다.
         [[1946년]]에는 조선체육회 이사장에 취임했으며, [[1948년]] [[10월]] 잡지 학풍(學風)이 창간되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ref>정진숙, 《출판인 정진숙》 (을유문화사, 2007) 180페이지</ref> [[1948년]] 단독 정부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대두되었을 때 그는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대한체육회 설립 이후 [[1951년]]에는 [[대한체육회]] 부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아시아경기연맹 집행위원을 거쳐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서자들을 차별대우하는 문제인 '서얼차대(庶孽差待)의 연원에 대한 일문제'를 [[진단학회]] 학보에 기고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 전기와 건국 초기 분야에 대한 것을 연구하였다. 그는 '삼봉인물고(三峰人物考)', 이조 태조의 사전개혁운동(私田改革運動)과 건국 후의 실적, 위화도회군고(威化島回軍考),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에 취하여', '[[고려]]말 이조초에 있어서의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운동(田制改革運動)과 그 실적' 등 고려 말, 조선 건국, 조선 전기 분야의 정치, 사회적인 현상에 대한 연구와 분석을 시도하였다.
         또한 [[1910년]]까지도 [[고려]]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 손자라는 주장의 허구성을 논증하고, 조선의 건국 세력이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손인 것처럼 유포했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를 근거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에 취하여'를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 전기의 서자 차별 문제에 대한 연구 외에도 과부 재가 금지법인 '재가금지습속(再嫁禁止習俗)의 유래에 대한 연구' 등의 논저를 발표하였다. 그밖에 진단학회에서 편찬한 《한국사-근세전기편-》과 《한국사-근세후기편-》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삼봉인물고(三峰人物考)'를 발표한 이래 그는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린 것은 [[정도전]]의 잘못도 있지만 [[정도전]]의 정적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비난, 부정적인 시각만 강조되어 왔음을 주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주로 고대사와 중세사, 상고사를 연구하는 타 학자들과 달리 그는 주로 조선 왕조사의 연구에 집중하여 힘썼으며 [[조선]] 건국과 조선 초기 분야의 연구에 업적을 이룩하여 [[1963년]] [[건국훈장]]과 [[문화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수여받았다.
         주요 저서로 《조선 문화사 연구 논고》, 《이조 건국의 연구》 등이 있다. 사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해마다 그의 이름을 딴 이상백배 한-일 대학선발농구대회가 개최되고 있고, 아시안게임 최우수선수에게는 이상백배(杯)가 특별 수여되고 있다.
         *《조선 문화사 연구 논고》
         *** 사촌 매부 : [[윤홍열 (1893년)|윤홍열]](尹洪烈, [[1893년]] ~ [[1947년]] [[2월 19일]]),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과 [[대구시보]]사 사장 역임 - [[윤필오]]의 아들
  • 이성계
          조선의 왕
         이성계는 [[고려]]말의 [[무신]]이자 [[조선]]의 건국자이다. 즉위 후 '이단'으로 개명을 했는데 사람들은 좀처럼 개명한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는다.(…)
         한국사의 명장 반열에 반드시 낄 정도로 군사적인 역량과 개인의 무용이 후덜덜했던 인물로, 이러한 업적을 통해 정계의 거물로 성장하였고, 그 후 명과의 외교 마찰로 인해 우왕과 최영이 요동 정벌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하였으나 묵살당하자 최영이 우왕을 달래느라 정벌군을 직접 이끌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해 국경지대의 하중도(河中島)인 '위화도'에서 군대를 물려 쿠데타를 단행해 최고 권력을 거머쥐게 된다. 그 후 정몽주 등의 저항을 뿌리치고 마침내 조선을 건국한다.
         [[분류:조선 인물]]
  • 이성득
         * '''[[이성득 (조선 왕족)|이성득]]'''(李成得, 1775 ~ 1817)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은언군]]의 서자이며 [[조선 철종|철종]]의 이복 숙부였다. 생전에는 왕족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고문을 받던중 사망했다.
  • 이숙
         * '''[[이숙 (1373년)|이숙]]'''(李淑, 1373 ~ 1406)은 [[조선]] 초기의 왕족 종실로 [[의안대군 (이화)|의안대군 이화]]의 아들이자 [[조선 태조|조선 태조 이성계]]의 조카이다.
         * '''[[이숙 (1625년)|이숙]]'''(李塡, 1625 ~ 1690)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 '''[[이숙 (1626년)|이숙]]'''(李䎘, 1626 ~ 1688)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 '''[[낙선군|이숙]]'''(李潚, 1641 ~ 1695)은 조선 후기의 왕족 '''[[낙선군]]'''의 이름이다.
  • 이숭인
         | 그림설명 = 조선 후기에 그려진 작자 미상의 이숭인 초상
         [[조선]]이 건국되자 유배 도중 정도전의 사주를 받은 [[황거정]]에게 고의적 장형으로 처형되었다.
         고려 말기의 권신 [[이인임]], [[이인복]], 이인립, [[이인민]] 형제는 그의 5촌 당숙이었다. 그의 종형제이자 이인립([[이인임]]의 아우)의 아들인 [[이제 (여말선초)|이제]]는 [[조선 태조|이성계]]의 사위였다.
  • 이승화 (1876년)
         |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 [[안동시]]
  • 이영 (1492년)
         이영(李榮, [[1492년]] [[2월 10일]] ~ [[1583년]] [[10월 20일]])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은자|은사]]이다. 자(字)는 양수(陽臼+又), 호는 북산(北山), 본관은 [[우계 이씨|우계]](羽溪)이다. 조정의 부름을 거절하고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녹래리로 이주하였다. 뒤에 노인직으로 통정대부와 가선대부를 역임하였다. [[경상북도]] 출신.
         할아버지는 도촌 [[이수형 (1435년)|이수형]]이며 아버지는 [[홍천]][[현감]] [[이대근 (조선)|이대근]](李大根)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부호군 증 이조판서 권곤(權琨)의 딸이다. 형 이양은 [[충순위]]였으나 일찍 죽었고, 다른 형은 이당인데 정략장군 부호군을 지냈다.
         * 아버지 : [[이대근 (조선)|이대근]](李大根)
         [[분류:1492년 태어남]][[분류:1593년 죽음]][[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은자]][[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
  • 이영 (1494년)
         '''이영'''(李英, [[1494년]] ~ [[1563년]] [[2월 22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 군인이다. 자는 현보(顯父), 호는 괘편, 본관은 영천이다. 청렴결백하였으며, 수령 재직시는 선정을 베풀었으며 무관으로 [[청백리]]에 녹선되기도 하였다. 무신으로 드물게 청렴하고 근실했다는 평을 들엇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신.
         [[조선 중종|중종]] 때인 1514년(중종 9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거쳤으며, 절도사, 참판 등을 역임했다. 벼슬에 있으면서 염근(廉謹)하기가 무반(武班)에서 가장 보기 드문 자라는 평을 들었다. 1545년 [[조선 명종|명종]]이 즉위하자 단천 군수를 지냈다. 이듬해 정평 부사에 부임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명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정평부사 재직시 사적으로도 백성을 범하지 않아 감사가 포장(褒奬)하고 통정대부로 가자(加資)되었다. 1552년 회령부사로 있으면서 훌륭한 정치를 베풀고 청백리에 뽑혔다. 또한 야인을 회유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이듬해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군비 확충과 군사훈련에 공을 세워 동지중추 부사가 되었다. 1556년 평안도 절도사가 되었다. 그 후 병조참판과 제주 목사·경상우도 병마절도사·부호군·호군 등을 지냈다.
         {{토막글|조선|군인}}
         [[분류:1494년 태어남]][[분류:조선의 무신]][[분류:1563년 죽음]][[분류:조선의 군인]][[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육군 군인]][[분류:병마절도사]][[분류:병사한 사람]][[분류:영천 이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의 장군]]
  • 이영은
         * '''이영은'''([[1434년]] ~ [[1471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 이영은 (1982년)
         이영은은 [[경상북도]] [[김천시]] 다수동 (새동네길) 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로 이주했으며,<ref>{{뉴스 인용|제목="스타 메모리 13탄" ② 이영은, 수리 크루즈 뺨치는 어린 시절|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6&aid=0002016973|출판사=스포츠조선|저자=이진호|쪽=|날짜=2009-12-29|확인날짜=2014-07-23}}</ref> 와를 거쳐의 연극영화과로 진학했다. 예고 1학년 때 친구가 참여한 의류브랜드 '스톰'의 제4기 모델 선발 대회에 응원차 동행했다가 모델로 뽑혔으며, 당시 같이 선발된 동기 모델로는 [[김흥수 (배우)|김흥수]]와 [[강현수]]가 있었다.<ref>{{뉴스 인용|제목=이영은이 엉겁결에 모델 된 사연|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1124266|출판사=연합뉴스|저자=홍성록|쪽=|날짜=2005-10-17|확인날짜=2014-07-23}}</ref> 이 시기에 교내 연극반에서 활동하여 《가스펠》등 교내 연극에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스타 메모리 13탄" ③ 이영은, "연예활동 반대 부딪혀 눈물 펑펑"|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6&aid=0002017086|출판사=스포츠조선|저자=이진호|쪽=|날짜=2009-12-30|확인날짜=2014-07-23}}</ref> 2001년에를 졸업하고로 진학하여 방송연예학을 전공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이영은, 속 깊은 여동생|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40&aid=0000009148|출판사=씨네 21|저자=박혜명|쪽=|날짜=2007-10-25|확인날짜=2014-07-23}}</ref>
         이후에는 [[김지석 (1981년)|김지석]], [[한지혜]], [[조동혁]], [[유인영]], [[이상윤 (배우)|이상윤]]과 함께 KBS 일일연속극 《[[미우나 고우나]]》에서 조동혁이 연기한 나선재의 옛 애인이자 이상윤이 연기한 서우진과 새로운 사랑을 키워나가는 동물병원 수의사인 황지영을 연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이영은, KBS '미우나 고우나'에 캐스팅|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1714534|출판사=연합뉴스|저자=강종훈|쪽=|날짜= 2007-08-01|확인날짜=2014-07-23}}</ref><ref>{{뉴스 인용|제목='미우나 고우나' 이영은, "다 해보고 싶어요"|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114319|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임이랑|쪽=|날짜= 2007-10-26|확인날짜=2014-07-23}}</ref> 그 해 9월에는 추적 특집으로 편성된 SBS의 특집 드라마 《맛있는 이야기》의 두번째 에피소드인 '원 테이블 레스토랑' 편에 음식점 서빙 담당 서빈 역으로 출연해 상대 역인 문식을 연기한 [[원기준]]을 도와 손님들의 사연을 받아 음식으로 만드는 연기를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이영은, 먹는것 좋아해 '맛있는 이야기' 자청|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1714534|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임이랑|쪽=|날짜= 2007-09-12|확인날짜=2014-07-23}}</ref> 또 이 시기에 자신의 두번째 영화인 [[라희찬]]이 감독을 맡고, [[정재영]], [[손병호]]가 주연을 맡은 은행 강도를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 《[[바르게 살자]]》에 인질로 잡힌 은행 여직원 전다혜 역으로 출연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영화 <바르게 살자> 프리미엄 시사회 폭발적 반응|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6&aid=0000073080|출판사=스포츠조선|저자=|쪽=|날짜= 2007-09-06|확인날짜=2014-07-23}}</ref><ref>{{뉴스 인용|제목=이영은 '얼떨결에 인질 됐어요'|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108646|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권태완|쪽=|날짜= 2007-09-20|확인날짜=2014-07-23}}</ref> 이 영화는 누적 관객 수 219만 250명으로 흥행에 성공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열한시’ 정재영, 韓 최초 1000만 배우의 귀환|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108646|출판사=뉴스엔|저자=이소담|쪽=|날짜= 2013-11-20 |확인날짜=2014-07-23}}</ref> 《바르게 살자》 촬영 후에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 지원을 받은 [[김은주 (영화 감독)|김은주]] 감독의 저예산 영화 《[[여름, 속삭임]]》에 [[최종원]]이 연기한 교수의 제자 영조 역을 맡아 [[하석진]]과 연기 호흡을 맞췄다.<ref>{{뉴스 인용|제목='여름, 속삭임' 이영은 "개봉 못할 줄 알았어요"|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1979620|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강지훈|쪽=|날짜= 2008-09-25|확인날짜=2014-07-23}}</ref> 또 이 해에 [[김동률]]의 노래 "감사"와 [[성아 (가수)|성아]]의 노래 "사랑했었는데"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이영은, 김동률 뮤비 ‘감사’로 여성미 인정!|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2&aid=0000218901|출판사=세계일보|저자=이혜린|쪽=|날짜= 2007-04-04|확인날짜=2014-07-23}}</ref><ref>{{뉴스 인용|제목=검색 1위 성아, 정식가수 데뷔|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3&aid=0000453753|출판사=뉴시스|저자=이승영|쪽=|날짜= 2007-06-14|확인날짜=2014-07-23}}</ref>
         2008년에는 KBS2의 공포 시대극 드라마인 《[[전설의 고향]]》"오구도령" 편에 배경이 되는 마을 촌장의 딸 채옥과 극중에 이미 상한 양반집 자제인 여림 등 두가지 역할을 맡았다.<ref>{{뉴스 인용|제목=이영은, "'전설의 고향' 마쳤는데 멜로드라마 끝낸 기분"|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1977307|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임이랑|쪽=|날짜= 2008-09-14|확인날짜=2014-07-23}}</ref> 이영은은 드라마 이 드라마 촬영 때 수장되어 죽은 물귀신들에게 끌려 들어가 깊은 강물에 빠지는 장면 촬영을 위해 수심 5m 수영장에 납을 달고 들어가 천천히 밑으로 가라앉는 일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전설의 고향’ 이영은 “납 매달고 5m 입수 아찔”|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0&aid=0001983728|출판사=동아일보|저자=이유나|쪽=|날짜= 2008-08-22|확인날짜=2014-07-23}}</ref> 이후 [[최지우]], [[유지태]], [[이기우 (1981년)|이기우]], [[차예련]]이 출연한 SBS 미니시리즈 《[[스타의 연인]]》에 여대생으로 카메오 출연하였고,<ref>{{뉴스 인용|제목='스타의 연인' 9.5% 시청률로 산뜻한 출발|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9&aid=0001945684|출판사=한국경제|저자=김시은|쪽=|날짜=2008-12-11|확인날짜=2014-07-23}}</ref> 그 해 5월부터 10월까지 희극인 [[유세윤]]과 함께 MBC의 예능 프로그램 《[[행복주식회사]]》의 진행자를 맡았다.<ref>{{뉴스 인용|제목=‘미우나 고우나’ 이영은, <만원의 행복> 새 MC|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15&aid=0002026250|출판사=데일리안|저자=손연지|쪽=|날짜= 2008-04-21|확인날짜=2014-07-23}}</ref> 이 해에 [[성제 (1985년)|성제]]의 노래 "사랑은 되는 거라며"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다. 2009년에는 [[최성국 (배우)|최성국]]과 함께 [[황승재]] 감독의 코미디 영화 《[[구세주2]]》에 여주인공이자 최성국이 연기한 택시 기사 임정환의 상대역인 이은지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누적 관객 수 117,000명에 그치며 흥행에 실패했다. 같은 해에 《미우나 고우나》에 함께 출연한 김지석과 함께 KBS2의 공포 시대극 드라마 《[[전설의 고향]]》 "혈귀" 편에 출연하여 여주인공인 연을 연기했으며,<ref>{{뉴스 인용|제목='전설의 고향' 이영은 "감독님들이 내가 놀라는 모습, 좋아하는 것 같아"|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77&aid=0002206819|출판사=아시아경제|저자=고재완|쪽=|날짜=2009-08-05|확인날짜=2014-07-23}}</ref> [[조선]] 시대의 [[실학|실학자]] [[정약용]]을 탐정으로 설정한 [[OCN (방송)|OCN]]의 미니시리즈 추리 사극 《[[조선추리활극 정약용]]》에 여주인공이자 정약용을 연기한 [[박재정 (배우)|박재정]]의 상대역인 금정골 관아의 소속 [[다모]] 설란을 연기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이영은, '조선추리활극 정약용' 히로인으로 캐스팅|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9&aid=0002102461|출판사=노컷뉴스|저자=김재윤|쪽=|날짜= 2009-10-26|확인날짜=2014-07-23}}</ref> 같은 해에 대한민국의 록 밴드 [[네미시스 (밴드)|네메시스]]의 노래 "슬픈 사랑의 왈츠"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이영은, 네메시스 뮤비에 노개런티 출연|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9&aid=0002170833|출판사=매일경제|저자=이현우|쪽=|날짜=2009-10-20|확인날짜=2014-07-23}}</ref>
         이듬 해 2010년에 방영된 [[장서희]], [[고주원]], [[서지석]] 주연의 SBS 미니시리즈인 《[[산부인과 (드라마)|산부인과]]》에 조연인 분만실 간호사 김영미 역으로 출연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이영은 '산부인과 여의사' 캐스팅, 백의의 천사로 합류|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6&aid=0002017684|출판사=스포츠조선|저자=이진호|쪽=|날짜=2010-01-06|확인날짜=2014-07-23}}</ref> 이후 2011년 3월 까지 방영된 [[tvN]]의 시트콤 드라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생초리!]]》에 삼진증권 영업부 사원이자 후에 해고되어 목가적인 마을 생초리로 내려가게 되는 어설프고 실수투성인 캐릭터 유은주를 연기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하석진-이영은, 김병욱 PD '생초리' 남녀주인공 발탁|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2094074|출판사=한국일보|저자=안진용|쪽=|날짜=2010-10-01|확인날짜=2014-07-23}}</ref><ref>{{뉴스 인용|제목='생초리' 이영은 "이제 짝사랑은 끝이에요"(인터뷰)|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13&aid=0000059882|출판사=TV 리포트|저자=서은혜|쪽=|날짜=2010-11-01|확인날짜=2014-07-23}}</ref>
         2012년 초에는 SBS의 설날 특집극 《[[널 기억해]]》와 [[TV조선]]의 설날 특집극 《[[아버지가 미안하다]]》에 각각 주인공인 정은수 역과 경애 역으로 출연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널 기억해’ 김병만 첫 정극도전 ‘기막힌 디테일’ 연기까지 달인|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01210738451001|출판사=뉴스엔|저자=조연경|쪽=|날짜=2012-01-21|확인날짜=2014-07-23}}</ref><ref>{{뉴스 인용|제목=TV조선, 김수현 특집 드라마 설날 방송|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6&aid=0002178420|출판사=스포츠조선|저자=이정혁|쪽=|날짜=2012-01-18|확인날짜=2014-07-23}}</ref> 이후 [[강혜정]], [[이규한 (배우)|이규한]], [[차화연]]과 함께 tvN의 미니시리즈 《[[결혼의 꼼수]]》에 출연하여 하숙집 "김치움"의 장녀인 유선희를 연기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이영은, '결혼의 꼼수' 전격 출연…강혜정과 대립|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2211434|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함상범|쪽=|날짜=2012-02-27|확인날짜=2014-07-23}}</ref> 이후 [[일본]]의 만화가 [[나카조 히사야]]의 동명의 순정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설리 (배우)|설리]], [[민호]], [[이현우 (배우)|이현우]], [[김지원 (1992년)|김지원]]이 주연을 맡은 SBS 미니시리즈 《[[아름다운 그대에게 (드라마)|아름다운 그대에게]]》에 극 중의 학교 지니 남자체육고등학교의 유일한 여교사인 국어교사 이소정 역으로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이영은, 아름다운 그대에게 합류 “아이돌과 호흡 기대돼”|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96&aid=0000182510|출판사=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저자=손재은|쪽=|날짜=2012-06-11|확인날짜=2014-07-23}}</ref> 또 [[김지운 (영화 감독)|김지운]], [[임필성]] 감독의 SF 옴니버스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 단역인 아나운서로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인류멸망보고서', 특급 카메오 군단 '눈길'|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6&aid=0002201997|출판사=스포츠조선|저자=정해욱|쪽=|날짜=2012-04-11|확인날짜=2014-07-23}}</ref>
         | rowspan=2 | [[조선추리활극 정약용]]
         | TV조선
  • 이용구(1868)
         [include(틀:조선귀족)]
         [[조선]]의 [[정치인]], [[종교인]]. [[일제강점기]] 직전 [[일진회]] 회장을 지냈던 [[친일파]]로 1910년 [[한일병합]] 때 [[이완용]] 등과 함께 병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다만 이후 일제에게 토사구팽 당하고, 귀족 작위도 거절하는 등 허탈해하다 1912년 사망했다. [[경상북도]] [[상주시]] 출신. 본명은 [[이상옥]].
         1905년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강화 및 포교하게 되면서 동학시절 옛 동지였던 손병희의 [[천도교]]에 맞서[* 이 당시 손병희는 이용구를 비롯한 62명의 동학 지도자에게 출교 처분을 내렸다.] [[친일파]] 성향의 신흥종교인 시천교(侍天敎)를 창시하여 시천교 교주가 되었다. [[일진회]]를 만들고 동 단체의 회장이 된 뒤, 일본의 우익 인사 [[우치다 료헤이]]와 그의 단체 [[겐요샤|현양사]]의 도움으로 친일행위에 나서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모티브로 조선과 일본이 1:1로 대등합방 하자는 생각 하에 백성들에게 [[일본]]의 사상을 전파하고 친일행위를 찬양하며 [[한일병합]]을 제창하고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까지 병합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친일파로 변신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용구는 당시 많은 개화파 지식인들처럼 [[아시아주의]]를 진짜로 믿고 있었던것 같다. 이용구는 한일 양국이 연방국처럼 1대1로 국가 연합을 하리라고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기당했다-- 결국 그는 뒤통수 당했다는 것을 알고 일본이 준 [[조선귀족]] 작위도 거절한 이후 허탈함과 격분에 빠진 나머지 몸져 눕고 만다. 1912년 죽기 얼마 전 문안차 찾아온 [[우치다 료헤이]]에게 "[[송병준|우]][[일진회|리]]는 [[친일|바보짓]]을 했어요. [[1904년|처음]]부터 [[사기|속았던 건 아니었을까요?]]"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 이운형
         |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 [[안동시]]
  • 이인 (동음이의)
         * '''[[영춘군 (왕족)|이인]]'''(李仁, [[1465년]] ~ [[1507년]])은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조선 세종|세종]]의 서자 [[영해군]]의 아들 '''영춘군'''(永春君)이다.
         * '''[[양평군 (왕족)|이인]]'''(李仁, [[1498년]] ~ [[1506년]])은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아들 '''양평군'''(陽平君)이다.
         * '''[[하릉군|이인]]'''(李鏻, [[1546년]] ~ [[1592년]])은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덕흥대원군]]의 차남이자 [[조선]] [[조선 선조|선조]]의 둘째 형 '''하릉군'''(河陵君)이다.
         * '''[[은언군|이인]]'''(李裀, [[1755년]] ~ [[1801년]])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恩彦君)이다.
  • 이제현 (1288년)
         고려 말의 [[유학자]]이자 [[성리학자]]이며, [[공민왕]]의 후궁 [[혜비 이씨]]의 친정아버지였다. [[고려]]말 [[신진사대부]]와 [[조선]]의 [[사림파]]의 학문적 선조로서, 성리학을 들여와 발전시켰으며, 그의 문하생 목은 [[이색]]은 후일 [[정도전]], [[조준]], [[남은]], [[정몽주]], [[길재]]로 학파가 나뉘게 된다. 그림과 서예에도 능하여 그림과 서예작도 남겼고, 평론서인 [[역옹패설]] 등과 많은 산문, 시문 등을 남겼다. [[백이정]], [[권부]]의 문인이다.
         [[1303년]] 권무봉선고 판관(權務奉先庫判官),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에 임명되고 [[1308년]] 예문 춘추관에 들어갔다. [[1309년]]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이 되었다. 충선왕이 복위되어 귀국하자 왕을 따르던 원나라 여인이 따라왔다. 왕은 연꽃 한 송이를 이별의 징표로 주어 되돌려보냈다. 고려에 돌아온 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한 충선왕은 이제현에게 원나라에 가서 그녀를 만나보게 하였다.<ref name="deoksa46">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 46</ref> 이제현이 갔을 때, 그 여인은 다락 속에 있었는데 며칠 동안 먹지를 않아 말도 잘 못하는 지경이었다. 겨우 붓을 들어 시 한 구절을 썼다.<ref name="deoksa46"/>
         연경을 방문한 그는 충선왕이 세운 만권당에서 염복, [[조맹부]](趙孟頫), 요수, 원명선 등의 한인 출신 대학자들과 학문을 논할 기회를 갖게 된다.<ref name="pare1996438">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438페이지</ref> 원나라 체류 시 [[만권당]]에서 고전을 연구하며 원나라의 명사 [[요수]](姚邃)·[[염복]](閻復)·원명선·[[조맹부]] 등과 교우하며 학문이 더욱 심오해졌으며, 그때 [[진감여]](陳鑑如)가 이제현의 초상화를 그리고 원나라의 석학 [[탕병룡]](湯炳龍)이 찬(贊)을 썼는데, 그 필적과 그림이 [[대한민국의 국보]] 제110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ref>이 외에도 이제현의 초상화는 고려 말에서 조선 중기 사이에 제작되었는데, 2000년 현재 4점이 더 전하고 있다.</ref>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 자신에게 익숙한 원나라에 있으면서 새로이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기며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하였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하였던 것이다.<ref name="nae01">[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2042 이제현]</ref>
         그는 관료생활 외에 여가시간에는 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이색]](李穡)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이색]]은 후에 [[정몽주]]와 [[정도전]], [[조준]], [[권근]], [[길재]] 등을 길러냈고, 이들을 통해 [[조선]]의 [[성리학]]자들로 학맥이 이어진다.
         또한 역사책인 《국사 國史》 편찬하면서 그는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하여 [[이달충]](李達衷), [[백문보]](白文寶) 등과 함께 편찬작업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사의 유고는 후일 [[조선]]건국 초기 [[고려사]] 편찬의 자료로 활용되었다. [[1367년]]에 사망하니 당시 향년 80세였다.
         [[1504년]](연산군10) 이제현의 후손인 [[조선]] 전기의 문신 눌헌(訥軒) [[이사균]](李思鈞, 1471 ~ 1536)은 [[연산군]]의 [[폐비 윤씨]] 추존 건의를 반대한 죄로 보은에 귀양 와 있을 때 영정을 모사하여 내려와 사당을 세우고 영당(影堂)에 봉안하였다.<ref>[http://www.icpn.co.kr/sub_02_view.asp?kind_code=2&idx=1535 CPN 문화재방송국]</ref> 이 영정은 조선시대 이모본(移模本)으로 크기나 채색, 제발(題跋) 등이 원본의 옛 모습과 거의 유사하여 충북유형문화재 72호로 지정되었다.
         * 조선고전문학선집, 리제현 작품선집(국립문학예술서적 출판사)
  • 이준형 (1875년)
         |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 [[안동시]]
  • 이진만 (1675년)
         이진만(李鎭萬, [[1675년]] ~ [[1752년]])은 [[조선]] 후기의 문인, 학자로 자(字)는 맹능(孟能)이고, 호는 백은(白隱), 본관은 우계이다. [[1699년]](숙종 25)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시험 주제에 문제가 있다 하여 파방되었다. 뒤에 [[1702년]](숙종 28) 식년시 생원 3등에 합격하고 그 해의 진사시에 다시 응시하여 식년시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사마양시에 모두 합격하였지만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분류:1675년 태어남]][[분류:1752년 죽음]][[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
  • 이진주 (1678년)
         '''이진주'''(李鎭周, [[1678년]] ~ [[1737년]] [[10월 28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문보(文甫), 문주(文周),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취사 [[이여빈]]의 종4대손이 된다.
         [[1726년]](영조 2) [[12월 28일]] [[성균관]]박사, 1727년 3월 양현고직장, 8월 7일 전적,1728년(영조 4) [[2월 3일]] [[양현고]]주부, [[6월]] 직강, [[1729년]] [[11월 25일]]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겸춘추(兼春秋)직을 겸하여 입직하였다. [[1730년]] [[2월 10일]] 성균관직강, 3월 25일 사예 등을 역임했다. [[1730년]] [[3월]] 진보현감(眞寶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조선 영조|영조]] 조정에서 입시한 신하가 아뢰기를, '이진주는 조용히 자신을 지켜 성균관에서 공부한 10여 년 동안 재신(宰臣)과 명사(名士)가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영조가 수령을 선발할 때는 마땅히 조용히 자신을 지키는 자를 취해야 한다 하고, 곧이어 다시 진보현감에 재임명되었으나 얼마 뒤에 사망하였다. 1737년
         [[분류:1678년 태어남]][[분류:1737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작가]][[분류:과거 급제자]][[분류:우계 이씨]][[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
  • 이채연 (1861년)
         | 국적 = [[조선]]
         '''이채연'''(李采淵, Ye Cha Yun, [[1861년]] ~ [[1900년]] [[8월 16일|8월 15일]])은 19세기 조선 시대에 한성전기 회사 사장및 한성부 판윤, 농상공무 협판을 맡았다. 1896년 한성판윤에 처음으로 임명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직책을 맡고 사망하기전까지 한성판윤의 직책을 유지했다. 재임시절 한성 개발에 주력하였으며 독립협회 창립에도 참가하였다. 이후 1898년 한성전기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다.<ref>[http://100.naver.com/100.nhn?docid=912226{{깨진 링크|url=http://100.naver.com/100.nhn?docid=912226 }}]{{깨진 링크|url=http://100.naver.com/100.nhn?docid=912226%7B%7B%EA%B9%A8%EC%A7%84 }}, <<네이버 백과사전 이채연>></ref>
         이채연은 1861년 [[경상북도]] [[칠곡군|칠곡]]에서 통사랑(通仕郞) 선공감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 이이봉(李以鳳)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7년 번역관의 직책을 가지고 미국에 첫발을 내딧고 이듬해에 서기관이 되었다. 초대주미공사관의 관원은 전권공사 박정양, 참찬관 이완용, 번역관 이채연, 서기관 이하영, 이상재, 수행원 2명,무관 1명, 하인 2명 등 모두 10명이었고, 여기에 미국의 의사 알렌이 외국인 참찬관 자격으로 동행했으며, 박정양 일행보다 두 달 일찍 출발했다. 막상 이들 가운데 영어를 조금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완용, 이하영, 이채연 3명뿐이었다.<ref> 박성래 <韓國近代의 西洋語通譯史(2)1883년부터 1886년까지> 《국제지역연구》제7권 제1호, 2003, 353쪽. </ref> [[이완용]]에 이어 대리공사로 재직하던 중, [[미국]], [[워싱턴 D.C.]]에서 미국에서 태어난 첫 번째 한국인인 아들을 낳았다.<ref> The New York Times, October 13 1890. </ref> 워싱턴에서 태어난 그들의 첫 아기를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의 이름을 Ye Washon으로 지었지만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아들을 잃었다.<ref> The Baltimore Sun, December 25 1890. </ref>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Chicago World's Columbian Exposition에서 한국관을 개설하고 총책임을 맡았다.<ref> Chicago Daily Tribune, May 2 1893. </ref> 이후 미국에서의 공식적인 모든 일정을 마치고 1893년 조선으로 귀국하여 고종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미국에서의 모든 임무를 끝마쳤다.<ref> The Washington Post, September 16 1893. </ref>
         귀국후 이채연은 1894년(고종 31)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928위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894년(고종 31) 갑오(甲午) 전시(殿試) 갑과(甲科) 3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ref>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ETC_A9999_1_0018864],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ref> 이후, 제 2차 [[김홍집 (1842년)|김홍집]]내각의 농상공부 협판을 맡고 김홍집 내각의 개혁의 한 축을 맡았다.<ref> The New York Times, Jan 30 1895. </ref> 농상공무는 조선 후기 농 ·상 ·공 및 우체 ·전신 ·광산 ·선박에 관한 사무를 맡은 관청으로써 협판은 칙임관 3등급으로 봉급은 2,500원이었고, 이채연은 최초로 임명된 농상공무 협판이다.<ref>[http://100.naver.com/100.nhn?docid=39678{{깨진 링크|url=http://100.naver.com/100.nhn?docid=39678 }}]{{깨진 링크|url=http://100.naver.com/100.nhn?docid=39678%7B%7B%EA%B9%A8%EC%A7%84 }}, <<네이버 백과사전 농상공무>></ref>
         조선의 근대화 사업의 일환으로 1896년 아관파천 직후 한성 개조 사업이 시행되었는데, 개조 사업의 실무를 담당한 인물이 [[한성판윤]]을 재임한 이채연이다. 한성 개조 사업의 중요 내용으로는 1896년 9월 28일 발령된 내부령(內部令) 제9호 「한성부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건」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중요 사업을 포함하고 있다.
         미국에서 대리공사로 재직하던 중, 조선의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피로연을 [[워싱턴 D.C.]]에서 열게 되었다. 이 때, 미국의 상원 의원 Frye, Davis와 차관보 Mr.Quiney, Walker 제독 및 멕시코, 영국, 일본, 독일, [[니카라과]]의 공사들이 참여하는 등 국외에서도 많은 인맥을 소유하였다.<ref> The New York Times, March 26, 1893. </ref>
  • 이평 (1572년)
         '''이평'''(李坪, 1572년 [[8월 17일]] - 161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자(字)는 여원(汝遠)이고 본관은 우계(羽溪), 도촌 [[이수형]](李秀亨)의 4대손이다. [[경상북도]] [[영천]] 출신이며 이잠(李埁)의 형이다.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우계 이씨]]
  • 이한응 (1849년)
         이한응(李漢應, [[1849년]] [[2월 24일]] ~ [[1905년]] [[4월 23일]])은 [[조선]] 후기의 무신, 군인이다. 자는 공모(公模),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다른 이름은 이한경(李漢景)이다. 비슷한 시기에 [[과거 제도|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나 그 해에 사망한 동명이인 이한응(李漢應), 외교관 [[이한응]](李漢應) 등의 동명이인이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였다.
         [[1870년]](고종 7년) 봄 무과(武科)에 급제, 영의정 [[김병학]](金炳學)의 건의로 특별히 가설 내승(內乘)에 임명되었다.<ref name="dager1">고종실록 7권, 1870년(고종 7년, 개국 479년) 5월 20일 을유 1번째기사, 조선 개국(開國) 479년 문희묘, 의소묘, 육상궁, 연호궁, 선희궁에 전배하다</ref> [[김병학]]은 '(故) 충장공(忠壯公) 이복남(李福男)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절개와 의리에 대해서는 열성조(列聖朝)로부터 여러 번에 걸쳐 보답하는 은전(恩典)을 받았습니다. 이번에 그의 봉사손(奉祀孫)이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마땅히 조정에서 뜻을 보여주는 거조(擧措)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종전에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선전관(宣傳官)과 내승(內乘) 중에 가설(加設)하여 단부(單付)한 전례(前例)가 이미 많았다'며 그에게도 선전관이나 내승을 가설하여 임명해줄 것을 청하였다.<ref name="dager1"/>
         [[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군인]][[분류:육군 군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대한제국 사람]][[분류:충청북도 출신 인물]][[분류:우계 이씨]]
  • 이형국
         |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 [[안동시]]
  • 이호성 (대한제국)
         '''이호성'''(李鎬性, [[1842년]]/[[1843년]] - ?)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 정치인이다. [[1864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음서 제도|음서제]]로 출사하여 태자[[시강원]]첨사에 이르렀다. 본관은 [[우봉 이씨|우봉]]이며, 자는 사명(士明)이다. 독립운동가 [[서재필]], [[갑신정변]]에 참여한 [[서재창]]과는 사돈간으로 그의 손녀딸이 [[서재필]], [[서재창]]의 형 [[서재춘]]의 손자며느리였다.
         [[분류:1807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정치인]][[분류:음서]][[분류:과거 급제자]][[분류:서재필]][[분류:우봉 이씨]][[분류:충청북도 출신 인물]]
  • 이황
          |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 [[안동시]]
          | 사망지 = [[조선]] [[경상북도]] [[안동시]]
          | 국적 = [[조선]]
          | 직책3 = 조선국 성균관 예하 성균대사성지제교<br/>(朝鮮國 成均館 隸下 成均大司成知製敎)
          | 직책 = 조선국 충청도 단양군 군수<br/>(朝鮮國 忠淸道 丹陽郡 郡守)
          | 직책2 = 조선국 경상도 풍기군 군수<br/>(朝鮮國 慶尙道 豊基郡 郡守)
          | 군주3 = [[조선 명종|조선 명종 이환]]
          | 군주2 = [[조선 명종|조선 명종 이환]]
          | 군주 = [[조선 명종|조선 명종 이환]]
         '''이황'''(李滉, [[1502년]] [[1월 3일]]([[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1년]] [[1월 3일]]([[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진보 이씨|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이언적]], [[이이]], [[송시열]], [[박세채]], [[김집]]과 함께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 사람이다.
         퇴계 이황은 [[1501년]](연산군 7) 경북 안동부 (오늘날의 안동시) 에서 진사(進士)이식(李埴)<ref> [[좌찬성]]에 증직됨</ref>과 부인 [[의성 김씨|문소 김씨]](2남 1녀) [[춘천 박씨]](5남)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보 이씨|진보]](眞寶), [[자 (이름)|자]]는 경호(景浩), [[호 (이름)|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 <u>물러나 시내 위에 머무르다</u>는 뜻),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사후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동인]]과 [[남인]] 계열의 종주이며 일부 [[북인]]도 그의 문인들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사색, 후진 양성에 주로 치중하였다. [[조선 명종|명종]]은 그를 존경하여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그는 [[조광조]]의 죽음을 봤고 왕의 출사 요청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출사 요청을 계속 거절하자 [[조선 명종|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어 그 풍경을 그리게 하고,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하였다.
         [[조선 명종|명종]]의 총애를 안 [[경상북도|경상도]][[관찰사]] [[이감]](李戡)은 수시로 그를 찾아 예를 표하고 우대하였다. 그의 사상은 50~60세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변론·저술·편저 등 중요한 것은 모두 이 기간에 되었으며,《[[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 《계몽전의》, 《심경석의》 및 기대승과 문답한 《사단칠정분리기서》와 같은 것은 그의 대표적인 명저이다.
         [[조선 명종|명종]]이 갑자기 죽고 [[조선 선조|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선왕의 행장을 짓는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질병으로 부득이 귀향하게 되었다. 선조가 즉위한 후 [[조선 선조|선조]]가 여러번 부를 때마다 시정의 폐단을 간하는 사퇴 상소를 올리고 낙향했다가 거듭된 부탁으로 출사, 대제학, 지경연이 되어 성리학을 그림과 함께 쉽게 서술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왕에게 올려 성리학이 국가 이념임을 밝히게 한다. 또한 그는 아녀자들도 쉽게 이해하게 하기 위해 성학십도를 [[언문]]으로 번역한 것을 인쇄, 간행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생애 후반에 그는 친구로서 호남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 사마시에 함께 급제한 [[김난상]] 등과 교류하였다.
         [[조선 숙종|숙종]] 때까지 그를 기리는 뜻에서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에서 특별 과거가 주관되었다가, [[노론]] 집권 후 [[조선 영조|영조]] 때 폐지되었으나 [[조선 정조|정조]] 때 가서야 [[조선 정조|정조]]가 행차하면서 부활하였다.<ref>이인좌의 난에 억울하게 연루된 영남 선비들을 위문하는 뜻에서 도산서원, 소수서원에서 행하는 별시를 부활시킨다.</ref> [[1968년]]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1천원 권의 첫 주인공으로 도완되었다. 이후 30년간 천원권 지폐의 도완 인물로 계속 유지되었다.
         그는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와 기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으로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ref>조선성리학을 이기이원론, 이기일원론으로 파악하는것은 이기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것이므로 수정하길 바람.</ref>
         이황은 [[조식 (1501년)|조식]]에 대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판<ref name="npodae204">노대환,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204페이지</ref>했다.
         그러자 [[조식 (1501년)|조식]]은 선비들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의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응수했다. 남명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虛名)을 훔친다"고 맞대응 하는 등의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ref name="npodae205">노대환,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205페이지</ref> 그러나 이황의 조식 비판은 후일 [[정인홍]]이 조식을 옹호하는 글을 올림으로서 다시한번 재현된다.
         [[1592년]](선조 25년)부터 발생한 [[임진왜란]] 당시 [[경상북도|경상도]] 지역의 서적과 도공 등이 상당수 약탈당했는데, 이때 이황의 저서가 상당수 약탈당하였다. [[경상북도]]의 해안가를 통해 유출된 이황의 서적, 서한들은 후일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미국]]에 의해 서구 문물이 강제로 유입되기 전까지 [[일본]]에는 [[조선]]에서 전래된 이황 계열의 성리학이 [[막부]] 세력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유행하였다.
         [[1548년]](명종 3) [[2월]] 이황의 둘째 아들이 일찍 요절하였다. 그는 둘째 며느리가 정혼한지 1년도 안되어 남편이 죽고 청상과부가 되자, 며느리의 개가를 허용하고 남의 눈을 피해 친정으로 몰래 돌려보낸다. 그가 [[조선 선조|선조]] 즉위 초 [[한성부]]로 가던 길에 한 주막에 들렀을 때, 그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해온 이가 있었는데 그때 그가 개가를 허용한 둘째 며느리였다 한다.
  • 익평공
         * [[권람]](權擥, 1416년 ~ 1465년)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 [[이극배]](李克培, 1422년 ~ 1495년)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 [[이극돈]](李克墩, 1435년 ~ 1503년)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 인수대비 (드라마)
         《'''인수대비'''》는 [[JTBC]]의 텔레비전 드라마로, [[조선]] [[조선 문종|문종]] 시대부터 [[조선 연산군|연산군]] 시대까지의 인물인 [[소혜왕후]]의 삶을 다루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 '인수대비' 주인공 3인방 채시라-김미숙-김영호 모습 첫 공개 |url = 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199859 |출판사 = 엑스포츠뉴스 |저자 = 정윤희 |쪽 = |날짜 = 2011-11-11 |확인날짜 = }}{{깨진 링크|url=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199859 }}</ref>
         : [[조선 세조|세조]]의 며느리. [[조선 덕종|덕종]]의 왕비. [[조선 성종|성종]]과 [[월산대군]]의 모후. 연산군과 중종의 친할머니.
         * [[백성현]]: [[조선 덕종|도원군(의경세자)]] 역<ref>1인 2역</ref>
         * [[김영호 (배우)|김영호]]: [[조선 세조|수양대군(세조)]] 역
         : [[조선 세종|세종]]의 둘째 아들. [[조선 문종|문종]]의 첫째 아우. 성종의 친할아버지. 연산군과 중종의 친증조할아버지.
         : 세조의 왕비. 덕종(의경세자)과 [[조선 예종|예종]]의 어머니. 성종의 친할머니.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함.
         * [[전무송]]: [[조선 세종|세종]] 역 (특별 출연)
         : 조선 4대 임금. 조선 3대 임금인 [[조선 태종|태종]]의 셋째 아들. 조선 초대 임금인 [[조선 태조|태조]]의 친손자.
         * [[선우재덕]]: [[조선 문종|문종]] 역 (특별 출연)
         : 조선 5대 임금. 세종대왕의 첫째 아들로, 왕위에 오른 조선 왕조 최초의 적장자. 즉위한 지 2년 3개월 만에 지병으로 승하함.
         * [[채상우]]: [[조선 단종|단종]] 역
         : 조선 6대 임금. 문종과 [[현덕왕후]]의 1남 2녀 중 막내. [[계유정난]] 후 상왕으로 물러나나 [[사육신]] 등의 [[단종복위운동|상왕복위운동]]으로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사사됨.<ref>1698년(숙종 24년)에 복위되어 '단종' 이라는 묘호를 받는다.</ref>
         * [[조정은]]: [[정순왕후 (조선 단종)|정순왕후]] 역
         * [[노영학]]: [[조선 예종|예종]] 역 (아역: 양온유, [[김준성]], [[박준목]])
         : 조선 8대 임금. 세조의 둘째 아들.
         : 조선 8대 임금인 예종과 안순왕후의 아들. 예종이 붕어하자 왕위 승계 1순위였으나 당시 4세의 어린 나이로 사촌 형에게 왕위를 넘겨준 비운의 왕자.
         : 조선 덕종과 소혜왕후의 첫째 아들.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 백성현: [[조선 성종|성종]] 역 (아역: [[이태우 (배우)|이태우]], [[최원홍]])
         : 조선 9대 임금. 덕종의 둘째 아들. 연산군과 중종의 아버지. 인종과 명종의 친할아버지.
         : 조선 10대 임금. 성종의 맏아들로, 폐비 윤씨의 소생이며 중종의 이복 형. 중종반정 때 폐위된 후 유배지에서 숨을 거둠.
  • 인조
         == 조선의 왕 ==
         [[조선]]의 왕들
         인조는 [[조선]]의 16대 왕이다. [[인조반정]]을 통해 집권했으며,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표방한 [[광해군]]을 비판하면서 존명배금(명을 따르고 후금을 배척한다)를 내걸었다. 그러나 현실은 명이 후금보다 여러모로 딸리는 상황이었기에 애매한 외교정책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다.
         청나라한테 굴복한 일 외에도 이괄의 난을 비롯해 권력을 둘러싼 내분을 조정하지 못해 혼란을 야기한 부분이라던가 소현세자를 상대로 보인 졸렬함 등으로 인해 아마도 안티가 가장 많은 조선 왕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분류:조선 인물]] [[분류:동음이의어]]
  • 임경업
         || 임경업의 영정. 그런데 이 영정도 그림 주인공의 일생처럼 [[명나라]]와 [[조선]]의 교집합을 보여준다.[* 전언에 따르면, 1640년 명나라 황제가 임경업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 해서 명나라 화공이 조선에 와서 그려갔다고 한다. 당시는 '''임경업이 명나라와 짜고 가짜 전투를 했던 그 시기이다.''' 이 때 화공이 2장을 그려서 한 장은 명나라로 가져가고, 한 장은 조선에 남기고 갔다고 전한다, 현재의 그림은 임경업 사후 다시 그려진 것이다. 우측에 기재된 <충민공 임장군 유상>이라는 표제도 그렇고, 그림체에 조선 후기의 특징과 명나라 화풍의 특징이 많이 묻어난다고 한다.][* 여담으로 [[흉배]]가 아주 특이하다. 이것은 [[인조]] 때에 공이 있다고 판단한 무신들에게 특별히 하사한 것으로, 본래 호랑이와 곰 등 동물을 주로 한 것과는 달리 구름과 방사형등 도상적 이미지가 강하다.] ||
         [[조선]]과 [[명나라]]의 장군.
         1630년 평양 중군으로 검산성과 용골성을 수축하는 한편 [[평안도]] [[철산군]]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 도독 유흥치의 군사를 감시, 그 준동을 막았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 청군의 요동 공격을 막지 못하고, 조선으로 탈출한 [[모문룡]] 이래로 가도 주둔 명군은 섬에 틀어박혀 싸우라는 청군과는 제대로 교전도 안붙고 인근 조선 백성들을 약탈하며 분탕질 치기 바빴다. 반정으로 정통성이 취약했던 조선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명의 도움을 받은 점 때문에 강경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반면 후금 - 청의 입장에서는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문룡의 제거가 필요했다. 이는 2번에 걸친 호란의 한 배경이 되었고, 조선 입장에서도 자국 영토에 주둔하여 패악질만 쳤지 정작 호란이 터졌을 땐 청군과는 전투 한번 벌이지 않고 틀어박혀 영향력 확장만 노려 득될 것이 없었다. 모문룡의 뒤를 봐주던 환관 [[위충현]]이 제거되면서 모문룡도 [[원숭환]]에 의해 제거되지만, 모문룡이 이끌던 이른바 '모군(毛軍)'은 그대로 남아 진계성이 이어받았다가 이를 유흥치가 제거하고 수장이 되어있던 상황이었다. 이 병력은 모문룡을 제거한 명, 뒷통수가 가렵던 청, 주변 고을이 약탈당하고 있던 조선 등 삼국 모두에게 껄끄럽던 상황이었다.[* 유흥치는 모문룡과 똑같은 뻔뻔한 인물로, 무려 1만의 조선 양민들을 죽여서 청군의 목이라 위장하여 명나라 본국에 보내던 자들이었으며, 이들의 잔악한 조선 양민 학살을 '''보다 못한 청나라 군사들이 나서서 이들을 물리쳐 구해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후 임경업은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으로 역침공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청 태종은 조선 침략에 정예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올인한 상황이였으니 발상 자체는 좋았지만 현실은 암울했다 우선 임경업의 군은 위에 언급됐듯이 고작 400명 밖에 안됐다. 고로 원래는 아마 명나라의 군대나 [[김자점]]의 북방군과 연계하여 적의 심장부를 역공을 가할 계획이었을 듯 한데, 김자점은 애초에 청나라군과 싸울 의지가 없었고 명나라는 국내 [[이자성|각종 도적들의 반란들]] 때문에 신경을 쓸 여력도 없었다[* 실제로 명나라는 병자호란 내내 조선에 아무런 지원 병력을 보내지 못했다. 원래는 강화도 방어를 도와주려고 수군이라도 조금 보내주려 했지만, 이 마저도 풍랑으로 무산됐다고 한다.]. 그래서 임경업이 평안 병사 유림과 함께 연합 전선을 펴고자 했지만 유림은 어명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이후 임경업은 '''이미 화의를 맺고 철군하던''' 청나라 황제의 조카 요퇴의 병력 300명을 압록강 인근에서 공격하여 격파하고 포로로 잡힌 남녀 120여 명과 말을 회수한다. 의도와 결과는 좋았지만, 자칫 잘못했으면 이를 빌미로 삼아 청군의 재침을 부를 수도 있는 행동이었고, 조선 조정의 의도도 아니었다.
         1638년 청군이 명의 금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자,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병자호란 시기 항복 조건에 병력 파견이 있었으므로 다시 병력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 때 비변사에서는 유배를 가있던 임경업을 용서하여 조방장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이에 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심양으로 가서 병력 동원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전투를 피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공로로 인조에게 말 1필을 받고 의주 부윤을 거쳐서 평안 병사가 된다.
         1640년 청은 명의 금주위를 공격하려는 의도에서 다시 조선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였고, 임경업을 주사상장의 직위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이에 임경업은 [[최명길(조선)|최명길]] [* 병자호란 시기 주화파로 이름 높은 그 최명길이 맞다.]과 함께 명의 수군 대도독 홍승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후 청군과 함께 싸우면서도 싸움도 벌이지 않고 가지고간 군량미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이 문제로 청은 조선 정부와 명이 서로 짜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고, 소현세자는 이를 적극적으로 부인하였다. 이후 청은 임경업을 달랬으나 임경업은 대부분의 병력은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군량미는 모조리 파기, 여전히 명나라와 전투는 없었다. 결국 임경업은 마지막으로 배까지 버리고 청을 정탐하여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에 청은 임경업이 명과 내통하였다는 심증을 가지고 조선을 닥달하였으나 물증이 없었다. 조선은 청의 압박으로 임경업을 삭탈 관직하였다가 바로 그 해에 동지중추원부사에 임명하였다.
         1642년 이런 전말이 결국 드러나게 된다. 결국 청의 금주위 공격이 성공하였고, 임경업과 내통하였던 홍승주가 청에 투항하면서 그간의 서찰들이 모두 청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런 확증을 잡고 청은 조선에 임경업과 최명길 등을 압송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정은 형조 판서 원두표에게 임경업을 청으로 압송할 것을 명령했다. 이미 잡히기 전에 '''심기원'''에게 은과 승복, 칼을 받았던[* 이 때 심기원에게 지원을 받은 것이 임경업의 [[사망 플래그]]가 된다.] 임경업은 압송 도중 금교역에서 탈출하여 미리 맡겨둔 승복을 걸치고 승려로 변장하여서 숨어지내게 된다. 이후 몇차례의 명나라 망명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하였고, 이 과정을 의심한 청의 요청으로 조선 조정은 임경업의 가족들을 청나라로 압송한다.
         이후 해를 넘겨서 1643년, 임경업은 결국 '''김자점의 종'''이었던 상인의 도움[* 이 시기 명이 아직 잔존해 있었으므로 임경업을 명에 보내서 끈을 대려는 의도를 가진 세력은 많았고, 심기원과 마찬가지로 역시 임경업을 한 번 도와준 적이 있어서 끈이 있던 김자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결국 임경업의 2번째 사망 플래그가 된다.]으로 배를 구하여 명나라로 건너간다. 임경업은 명에서 등주 도독 황종예 휘하의 총병 마등고 휘하의 평로 장군으로 4만의 병사를 이끌게 된다. 하지만 [[이자성]]의 난으로 북경이 함락되고, 청군이 [[오삼계]]의 요청을 받고 뒤이어 입성하면서 도독 황종예도 남경으로 이동하였고, 임경업은 마등고와 함께 석성에 재기를 노리게 된다. 하지만 남경으로 도주했던 명은 결국 남경마저 함락되면서 멸망했고, 이번에는 마등고마저 청에 투항했다. 그리고 1644년 조선 조정에서도 후원자 심기원의 옥사가 벌어지면서 임경업은 국제적 미아가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에서는 좌의정 심기원과 김자점의 정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결국 김자점이 심기원이 난을 일으키려 했다는 명목으로 심기원 일파를 모두 제거하게 된다. 이에 임경업도 심기원의 일파로 결론이 내려져서 북경에 투옥 중이던 임경업에 대한 송환 요청을 하게 된다. 이 시기 임경업의 죄목은 심기원의 반란에 연루된 것과 국가에 대한 배신죄[* 명군과의 위전은 임경업의 독자적인 의도로 광해군 시기 [[강홍립]]과는 상황이 달랐고, 명나라 장수로 들어간 시기에는 철저하게 명나라 장수로 활동했다는 것 등이 주요 이유였다.]로 조사를 받았다.
         이 때 임경업은 “조정에서는 이미 천하의 일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나를 죽인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라고 외쳤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남명]]과 [[정성공]]만 남은 시점의 현실에서 임경업의 이 발상은 정세 판단 미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었다. [[삼번의 난]]을 가정한다 한들 임경업이 살아있었다면 난 당시 나이는 아흔살(...). 실제로 [[최명길]] 등 대부분의 인물들은 명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기 전까지는 명나라의 멸망보다는 [[남북조시대]]의 재현을 현실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명나라에 최명길 등이 협조를 했던 장면이나, 김자점이나 심기원 등이 임경업을 통해서 명에 줄을 대려고 했던 것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남경이 함락당한 시점까지 가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정성공이나 남명 게릴라 만으로 남북조 시대는 불가능하다. 이걸 알았기 때문에 김자점이 친청파로 돌아서고, 소중화사상이 등장하는 것이다.
         민담이지만, [[청성잡기]]에 보면 임경업이 명나라로 망명하면서 기생 출신 애첩을 지인에게 맡겨두고 갔다고 한다. 나중에 [[효종(조선)|효종]]이 북벌을 하려는데 입경업 같은 인물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입경업의 애첩을 불러올려 어찌하면 임경업 같은 이를 얻겠냐고 물었는데, 이 첩은 "설사 임경업 같은 이가 있어도 전하께서는 북벌을 하지 못할 것"이라 한다. 효종이 웃으며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묻자, 임경업의 첩은 과거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이었던 효종이 능히 [[김경징]]을 베어 죽일 수 있었으나 그 간단한 일도 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북벌을 할 수 있겠냐며 이는 계집인 자신도 안다고 대답했다. 효종은 무안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당시 봉림대군이던 효종이 김경징을 자의로 참했으면, 효종은 인조의 분노를 샀을 것이다.[* 분노는 둘째 치고 사람을 죽이고 살릴 권한은 군주에게만 있다고 했으니... 물론 김경징의 병크를 보면 봉건대군이 이적행위를 해서 참했다고 최대한 변명하면 될 가능성나마 없는건 아니지만] 인조는 김경징의 삽질이 드러난 상황에서도 반정 공신 [[김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살리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김류가 김경징이 죽어 마땅하다고 해서야 김경징이 사약먹고 죽었다. 봉림대군은 세자도 아니고 차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저 때 인조의 마음에서 엇나갔다면 조선 국왕 효종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외에도 인조에게는 인평대군과 용성대군이라는 대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이후 북벌과 관련하여서 재평가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사후 50년만에 [[숙종(조선)|숙종]]은 그를 옛 관직에 추서하고 충민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임경업의 아내 완산 이씨[* 진안 대군의 7세손]의 경우 청나라의 옥중에서 자살했다. 청나라에서는 아내의 '''명나라를 향한 충성심'''에 감동하여, 시신을 정중히 조선으로 돌려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충렬사에 정렬비가 세워져있으며 그 충렬비의 이름은 '''대명충신''' 조선 임장군 경업 처정부인완산이씨정렬비(大明忠臣 朝鮮林將軍 慶業 妻貞夫人完山李氏貞烈碑)[* 꽤 오랫동안 조선이란 단어가 빠져있었다. 뭐 충렬사를 관리하는 충주시의 디지털충주문화센터 [[http://chungju.grandculture.net/Contents?local=chungju&dataType=01&contents_id=GC01900796|페이지]]에서도 잘못 적혀 있었으니. 참고로 저 조선이란 것은 단순 출신지 이야기이기 때문에 대명 충신 부분에는 한점의 흐트러짐도 없다. 애초에 저 비석 자체가 임경업을 복권한 숙종 때에 세워졌다.]. '''명나라를 향한 임경업과 그 아내 완산 이씨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함이라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8112400329207006&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8-11-24&officeId=00032&pageNo=7&printNo=10201&publishType=00020|박정희 대통령도 '대명 충신' 부분을 언짢게 여겨 정렬비는 보관하고, 정렬비의 내용만 '''한글'''로 새긴 비석을 따로 세울 것을 검토케 했다.]] 명나라에서 세운 것도 아니고, 숙종 때 조선에서 세운 비석에 마치 명나라의 속국을 자칭하는 것처럼 썼으니 기분 나쁜 게 당연한 일.
         이후 설화를 바탕으로 임경업전이 저술되었고 많은 야화가 추가되면서 비운의 명장이란 평이 많아졌지만, 동시에 모화 사상에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보이며[* 실제로 임경업의 아내까지도 청나라의 옥중에서 자살할 때 "내 남편은 대명의 충신이요, 나는 그 충신의 아내다. 오랑캐의 옥중에서 욕을 보며 남편의 충절을 욕보일 수 있겠는가?" 라고 까지 했다. 청나라에 끌려갔던 삼학사 중 한 명인 홍익한도 스스로를 대명 조선국의 신하라고 자처했다. 명나라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이론적으로 조선의 관료들은 궁극적으로 명나라의 신하였던 것이다. 이를 극단주의라고 부르며 고려의 부마국 시절을 드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지적이다. 조선과 고려와 원명관계는 상당히 다르다. 당장 광해군 대에도 신하들이 '중국 조정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성상께 죄를 짓는게 낫다'라고 발언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당시에는 이것이 보편적 세계질서였다. 홍익한은 그나마 대명 조선국이었다면, 임경업은 그냥 대명이라는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다. 이 차이는 성리학 기준에서는 엄청난 차이다.] 자국을 위험에 빠트렸다는[* 임경업이 한 행동은 최대한 미뤄봐도 병자호란 이후에는 명이라면 몰라도 조선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임경업이 한 무수한 행동들(예를 들면 회군하는 청군을 무단 공격한 것)은 이를 빌미로 청의 재침을 부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청에 볼모로 잡혀가있었던 소현세자는 청의 재침을 막기 위해서 엄청나게 고생했다.] 전쟁에서 제대로 공을 세운 기록도 단 한번도 없는 인물[* 임경업의 전공은 2가지인데, [[이괄의 난]] 당시 정충신의 부하로 참전하여 이름만 올린 것과 앞서 기록된 '''화의를 맺고 본국으로 철수하던''' 청군 기병 300을 급습한 것 뿐이다.]이란 상반된 평가가 따라 다닌다.
         사실 임경업은 군사적인 무공보다는 외교에서 더 많이 활약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횡의와 통교 사건이 있기 전까진 대청 외교에서 군사 파견 문제를 놓고 계속 청을 오가면서 조선의 입장을 대변했고 이후 명나라와의 밀외교도 최명길과 함께 담당했다. "맹장"이라기보다는 "수완 좋은 정략형 무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임경업전> 또는 <임장군전>이라는 제목의 [[고전소설]]이 있다. 주인공 [[최치원]]이 사실상 비범한 도사로 신격화된 [[최고운전]]과는 달리, 해당 소설의 임경업은 전형적인 조선 영웅상으로 묘사된다. 최후에 김자점의 모함으로 죽는 건 역사와 동일하나, 판본에 따라 김자점이 보낸 자객에게 죽었다고 묘사되기도 하며, 김자점은 청나라로 도피하지 못하고 조선 정부에 붙잡혀 임경업을 죽게 한 대가로 참수형을 받는다.
         [[분류:조선군/군인]] [[분류:명나라의 인물]][[분류:충주시 출신 인물]][[분류:1594년 출생]][[분류:1646년 사망]]
  • 임양군
          | 왕가 = [[조선|조선 왕조]]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조선 왕조]]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가평군|가평]] 청평군 사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낙선군|낙선군 가통]] 사저
          | 친척 = [[조선 인조|인조 능양군 이종]](양조부)
          | 국적 = {{국기|조선}}
         '''임양군 이환'''(臨陽君 李桓, [[1656년]] ~ [[1715년]])은 [[조선]]의 [[왕족 종실]]이다.
         청평군 이전(淸平君 李洤)의 슬하 3남 1녀 중 차남(次男)으로 출생한 그는 7세 때였던 [[1662년]] [[조선 인조|인조]]의 서자(庶子)인 [[낙선군|낙선군 이숙(樂善君 李潚)]]에게 양자(養子)로 출계되었다.
         특히 그는 [[조선 숙종|숙종]] 때 도총관, 사옹원, 종부시 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토막글|조선}}
         [[분류:1656년 태어남]][[분류:조선의 왕족]][[분류:1715년 죽음]][[분류:전주 이씨]][[분류:가평군 출신 인물]][[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운현궁]][[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 효종]][[분류:조선 현종]][[분류:조선 숙종]]
  • 임창모
          | 출생지 = [[조선]] [[광주광역시]]
          | 최종 계급 = 대한제국 조선 전라남도 보성 의병 독립 부대 부대장 대장군
          | 근무 = 대한제국 조선 전라남도 보성 의병대
  • 장나라
         | 작위모친 = [[조선 제19대 성종 국왕 정비]],
         '''공혜나라왕후'''([[1981년]] [[3월 18일]] ~ )는 [[조선]]의 [[제20대]], [[예종]]이다.
         [[분류:조선 인물]]
  • 장면
         [[종로구|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에는 [[천주교]] 선교 사목 활동과 언론 활동, [[용산]][[신학교소|신학교]], [[동성상업고등학교]], 계성[[국민학교]], 혜화[[유치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광복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1946년 [[민주의원]] 의원,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1948년]] [[대한민국]]의 제헌 국회의원<ref>1949년 2월에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로 부임하였고, 1949년 3월에는 종로구 을 선거구에 대한 보궐선거가 치러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1949년 2월 경에 사임한 것으로 추정된다.</ref> 에 당선되었으며, 1948년 12월 7일부터 12월 12일까지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에서 열리는 제3차 [[UN 총회]]에 한국대표단 수석대표로 파견되어 국제사회에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냈다.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과도입법의원 의원]] 재직 중에는 국대안(국립대학교 설치안)을 발의하여 성사시켰고, [[공창제]] 폐지를 주창하여 가결시켰다. [[1948년]] [[UN 총회]]에 [[대한민국]]의 승인을 요청하는 한국 대표단의 수석대표로 회의에 참석하여 국제사회에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냈고, [[한국 전쟁]] 때는 UN과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여 지원을 이끌어냈다. [[호헌동지회]]의 조직과 [[민주당 (1955년)|민주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군사정권에 실각한 이후 [[1990년대]]부터 재평가 여론이 나타나고 있으며 [[1999년]]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기독교 청년학관 졸업반 재학 중인 [[1919년]] [[3월 1일]]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ref name="회고록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의 위기에 몰렸으나, [[조선총독부|총독부]] 헌병이 변장한 그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덕에 극적으로 체포를 모면하였다.
         [[1930년]] [[8월 21일]] 소책자 《구도자의 길》을 출간하였고 이듬해 [[1931년]] [[3월 18일]] 천주교 평양대교구 사무직을 사퇴하고 경성부로 내려왔다. [[4월 1일]] 천주교 교인들의 추천으로 [[동성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초빙되었다. 1931년부터 동성상업학교의 교사로 부임해 [[1936년]]에 교장이 되어 해방 때까지 근무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79쪽.</ref> [[9월 15일]] 천주교 한국교구설정 백주년 기념 《조선천주공교회 약사》 를 출간하였다. 1931년 동성상업학교 교사로 서무주임(행정실장)을 겸하였다.
         [[1936년]] [[11월]] 동성상업학교 [[박준호]](朴準鎬) 교장이 별세하자 동성상고 서무주임으로 있던 장면은 [[11월 19일]] 천주교재단의 추천으로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천거되어 취임하였다.<ref name="unsuk"/>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하자 그는 [[조선총독부]]가 감시를 위해 파견한 [[일본인]] 교사 사이고를 축출했다. [[1937년]] [[4월 1일]] 경성 혜화유치원 원장이 되었고 38년 학사 시찰차 출국, 3주간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왔으며<ref name="unsuk"/> [[1938년]] 친일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간사에 선출되었다.<ref name="협조1"/>
         [[1938년]] [[10월 20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산하의 비상 시 국민생활개선위원회 제1부 위원 44명 중 1인으로 선임되어 명동천주교회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가입시켰고 같은 해 [[5월 14일]]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의 간사로 참여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085916 <`친일인사' 포함여부 놓고 격론벌인 인물들> :: 네이버 뉴스<!-- 봇이 붙인 제목 -->]</ref><ref>[http://www.koreakjh.com/kjhphp/board.php?board=kkkgoods3&command=body&no=108 민족정기구현회 -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봇이 붙인 제목 -->]</ref> 그러나 이때의 칼럼 기고 등은 그가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했다기 보다는 천주교 교단을 살리기 위한 소극적인 부일에 불과했다는 반론도 있다.<ref>김수환의 회고</ref> 당시의 이런 활동은 그가 [[대한민국 국무총리|제7대 국무총리]]로 임명될 무렵 과거전력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939년]] 4월부터 [[1942년]] 8월까지 경성 계성국민학교 제3대 교장을 겸임하였고 [[1939년]] 9월 [[천주교청년회연합회]] 회장에 피선되었다.<ref name="MBC" /> 또한 조선교육심의회위원, 중등교육위원회위원을 지냈으며 [[1941년]] 이후 일제 당국의 [[창씨개명]] 강요에 따라 '''다마오카 쓰토무'''({{llang|ja|玉岡勉}})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이때의 창씨개명 사실과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초청을 받은 것과 이때 촬영한 사진은 후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과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당시 반대파로부터 친일파라는 비방의 소재로 활용된다.
         [[일제 강점기]] 후반 조선총독부로부터 협력 압력을 받았고 총독부는 그에게 기방에 초청하는 등의 회유책을 쓰기도 했다. 그는 거절하지 않았지만 조선총독부에 협력하지도 않았다. [[1942년]] 8월에는 계성국민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였고 [[1944년]], 번역서 『[[교부들의 신앙]]』을 출간하였다. 광복 이후 조선교육심의회위원, 조선중등교육위원회위원에 선출되었고 [[1944년]] 8월에는 경성 계성국민학교의 제5대 교장으로 다시 부임하였다.<ref>[http://www.gyeseong1882.es.kr/?doc=sub/m14.php 서울계성초등학교 연혁]</ref>
         [[1946년]] [[2월 14일]], [[이승만]]·[[김구]]에 의해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인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ref>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6) 528페이지</ref><ref>이연복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국학자료원, 2006) 91페이지</ref> 2월에는 미군정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영어 구사에 능했던 그는 민주의원으로 활동할 당시 미군정과의 연락과 통역을 맡아보았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1946년 10월부터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 의원에 출마, [[1946년]] [[12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과도입법의원]]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MBC" /> 그리고 서울시 교육위원회 위원에도 피선되었다. 그는 모든 무질서와 혼란의 원인은 무식함, 무지함 때문이며 교육만이 무너진 한국 사회를 다시 일으킬수 있는 바탕임을 역설하였다.
         {{참고|남조선과도입법의원}}
         [[1947년]] [[3월 5일]] [[대한적십자사|조선적십자사]] 고문이 되었다.<ref>"적십자 사원 고문위원회", 동아일보 1947년 03월 05일자 2면, 사회면</ref> 그해 [[10월]]에는 교황 비오 12세가 파견한 사절 방 주교의 통역을 담당하였다. [[1947년]] [[11월]] 미 군정청 군정장관 딘 미육군 [[소장 (군인)|소장]]으로부터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5·10 총선거]]를 관리하기 위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에 임명되었다.
         [[1948년]] [[4월 1일]]과 [[5월 10일]]에 열리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서울특별시]] 종로 을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양심적인 교육인’ 이라는 구호로 선거활동을 하였다. [[5월 19일]] 과도정부법률 제12호에 의하여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해산하여 과도입법위원회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5월 30일]] [[대한민국 제헌국회|제헌국회의원]]에 당선, 취임하였다. 한편 [[강원용]]은 이승만이 노골적으로 지원했던 사람으로 [[개신교]]계의 [[이윤영]]과 천주교계의 장면을 꼽았다.<ref name="kk111">강원용, 《역사의 언덕에서 1:엑소더스》 (강원용, 한길사, 2006) 368페이지</ref> 강원용에 의하면 장면은 이박사의 지지자<ref name="kk111"/> 라 하였다.
         [[1949년]] [[1월 1일]] [[미국]]이 가장 먼저 [[대한민국]] 정부를 세계적, 공식적으로 승인하자 그는 한국정부 특별대표(Special Representative)에 임명되어 주한미국대사관 개설 준비에 착수하여 외교 업무를 시작하였다. 주한미국대사관의 첫 건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외교위원부]]에서 시작하였다. [[1월 2일]] 대통령 이승만은 장면을 주미대사로 인정해달라는 붓글씨를 친필로 작성해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게 보냈다.<ref name="heri1">[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25/2010032502107.html [대한민국 제1호] 張勉 초대 주미대사 붓글씨로 신임장 작성]-조선일보</ref> 욕심이 없었던 그는 관료생활 내내 술과 유흥은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귀국 예정대로 짐을 전부 본국으로 부쳤다가 1949년 2월 정식 주미대사에 임명되어 [[1951년]] 2월까지 초대 주미 한국대사관 대사로 부임하였다.
         1950년 [[6월 3일]] 부인 신병 치료차 자녀 2인을 동반하여 출국, 미국에 건너갔다. [[6월 25일]] 미국에 체류 중인 새벽에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대한민국 정부의 긴급훈령을 받아 미국 국무성에 알려 사태의 절박성을 전하였다. [[6월 25일]] 저녁 이승만과 통화 후, 미국의 상·하원을 찾아다니며 한국 파병을 역설하였고, 이후 UN과 국제사회에 [[조선인민군|북한군]]의 남침을 알리고 한국 전쟁에 참전해줄 것을 설득하여 [[미군]]과 UN군의 한국 파병을 이끌어냈다. 1950년 6월 25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연설하였다.<ref name="장면회고록107">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107페이지</ref>
         {{인용문|[[유엔]] 승인을 받은 [[대한민국]]은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조선인민군|괴뢰군]]의 불법 공격을 받고, 이에 대항하여 고전 분투하고 있다. 북괴군의 대규모 침공은 우리 대한 민국 정부를 전복시키고, 북한 괴뢰 정권 치하에 몰락시키려는 야망에서임<ref name="장면회고록107"/> 이 분명하다. 이런 불법 공격은 인도와 민심을 거스르는 죄악일 뿐 아니라, 국제 평화와 안전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니 만큼 귀 안보 이사회에서 침략자들로 하여금 일체 공격을 즉각 중지케 하고, 38선 이북으로 철퇴하도록 강력히 조처해 줄 것을 호소한다.<ref>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108페이지</ref>}}
         [[6월 27일]]에는 [[UN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하였고 다음날인 [[6월 28일]] 서울은 [[조선인민군]]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장면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통해 유엔 결의 사항 등을 본국에 방송하였다. 1950년 6월 말 장면은 병석에 있는 [[서재필]]에게 서신을 보내 입원 중인 서재필의 빠른 완쾌를 비는 한편, 당시 전쟁 상황을 전하며 “지금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반드시 승리 할 것이다”라는 것과 “자유로운 분위기 내에서 제2대 총선거가 진행되었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휴전을 못보고 사망했다. 한국 전쟁 직후 미국의 정치인들 중에는 [[대한민국]]의 서울이 3일만에 점령당하여 가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장면은 미국내 정치인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에 파병해줄 것을 설득하였다. 소련과 중국이 안보리에 불참하는 동안 그는 줄곧 UN안보리 이사회에도 참석하여 회의 내용을 청취하였다. 전쟁발발 15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인 7월 10일, "38선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한국의 해방과 통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ref>{{웹 인용 |url = http://images.library.wisc.edu/FRUS/EFacs2/1950v07/reference/frus.frus1950v07.i0009.pdf | 제목 =The United States Representative at the United Nations (Austin) to the Secretary of State |인용문=He said that 38th parellel was meaningless and that liberation and unification of all of Korea was essential, after which there should be UN supervised elections for whole country. |웹사이트=FRUS 1950 Vol. VII Korea |출판사=[[미국 국무부]] |쪽=354 }}</ref> 장면의 언명 속에서 대한민국의 리더십이 6월 25일의 침략을,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을 시점부터 이미 통일의 호기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f>{{서적 인용 |저자=[[박명림]] |제목=한국 1950 전쟁과 평화 |연도=2002|출판사=나남|출판위치=서울 |ISBN= 89-300-3939-1 |페이지=552 }}</ref>
         1950년 9월 [[유엔 본부]]에서 열린 [[한국 전쟁]] [[참전용사|참전]] 부상자를 위한 헌혈에 참여하였다. 9월 제6차 UN 총회에 파견될 한국대표단에 [[장택상]], [[이묘묵]], [[김규홍]] 등과 함께 대표단으로 선발되었다. [[9월 29일]] 서울 수복 직후 그는 경향신문 상임고문에 추대되었다.<ref>[http://unsuk.kyunghee.ac.kr/jangmyun_2004/NZEO/bbs/view.php?id=memory&page=1&sn1=on&divpage=1&sn=on&ss=off&sc=off&keyword=%C7%E3%B5%BF%C7%F6&select_arrange=hit&desc=desc&no=30 장면 총리 40주기 추모사-이성모의 추도사]</ref> [[10월 4일]] 그는 누님 장정온 수녀가 [[북한]] [[조선인민군|인민군]]에 납치된 후 행방불명된 소식을 접하였다. 주미대사로 재직 중 “[[남로당]]원을 무혐의로 풀어 줬다”는 이유로 체포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이홍규]]의 석방을 탄원하여 곧 풀려나게 하기도 했다.<ref name="dae1">[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1080169 ‘대쪽’ 이미지 퇴색… ‘변절’ 꼬리표 부담]</ref>
         1952년 5월 무렵, 대한민국 군부는 한때 그를 이승만의 대안으로 추대할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한때 장면을 추대하려는 [[대한민국 국방부|군부]]의 교섭이 오기도 했으나 실패하였다. 1952년 [[5월 10일]] 새벽 3시경, [[이용문]]은 장면의 비서로 있다가 4월에 사퇴한 [[선우종원]]의 부산 자택을 찾았다.<ref name="정변">[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51570380 [박정희 생애] 제6부 쿠데타 연습-이승만제거계획(2) - (183) - 조선닷컴 인물<!-- 봇이 붙인 제목 -->]</ref> [[선우종원]]의 [[평양고등보통학교]]의 2년 선배였던 이용문은 선우종원에게 혁명을 하자며, 장면의 추대를 말하였으나 선우종원은 민주주의란 수단과 절차가 중요하며 방법이 옳지 못함과 자신의 집안은 3대째 천주교 신자임을 들어 반대하였고<ref name="정변"/> 장면에게까지 전해지지도 않았다. 1952년 초부터 [[조병옥]] 등과 함께 [[이순신|충무공기념사업회]]를 이끌기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62&aid=0000002125& [발굴 공개] 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한 박병주 선생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장면 대통령 추대음모설과 내각제 개헌 후 국무총리로 대통령 이승만을 거세하고 실권을 장악하는 실권장악설 등이 돌면서 장면과 이승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승만의 측근인 [[윤치영]], [[장택상]], [[박용만 (1924년)|박용만]], [[허정]] 등은 그가 이승만을 제거할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장성원 (배우)
         |직업 = [[조선의예종]]
         |작위모친 =[[조선 제19대 국왕 예종의 정비]]
         |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북도|경북]] [[국가 조선. png]]
         '''인성대군'''([[1976년]] [[8월 7일]] ~ )은 [[조선]]의 [[세자빈]]이다. [[1995년]] [[MBC]] 24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하였다.
         [[분류:조선 인물]]
  • 장성집
         '''장성집'''(張--, [[1786년]] ~ [[1839년]] [[5월 26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요셉'''(Joseph)이다.
  • 장순왕후
         |작위 = [[조선의 역대 왕세자빈|세자빈]]
         |작위2 = [[조선의 역대 왕비|추존 왕비]]
         |능묘 = [[공릉 (조선)|공릉]]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1445년]] [[2월 22일]]([[음력 1월 16일]]) ~ [[1462년]] [[1월 5일]]([[1461년]] [[음력 12월 5일]]))는 [[조선]] [[조선 예종|예종]](睿宗)의 정비이다. [[시호]]는 '''휘인소덕장순왕후'''(徽仁昭德章順王后)이며, 상당부원군 충성공 [[한명회]](上黨府院君 忠成公 韓明澮)와 황려부부인 민씨(黃驪府夫人 閔氏)의 셋째 딸로,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이다. 세자빈 시절 [[인성대군]]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요절하였다.
         1460년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되어 당시 세자였던 [[조선 예종|예종]]과 가례를 올리고 부부가 되었으니 이때 나이가 16살이었다. 정숙한 성품에 아름다운 용모로 시아버지 [[조선 세조|세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책봉 이듬해인 [[1461년]] [[음력 11월 30일]], 왕실의 적통인 원손(예종의 장남인 인성대군)을 낳았으나 같은 해 [[음력 12월 5일]] 녹사(錄事) 안기(安耆)의 집에서 산후병으로 향년 17세로 요절했다.
         야사에서는 장순왕후와 그의 동생 [[공혜왕후]], 형부 [[조선 덕종|덕종]](의경세자), 남편 [[조선 예종|예종]]과 아들 [[인성대군]] 등 [[조선 세조|세조]]의 자손들이 이른 나이에 요절한 것이 [[조선 단종|단종]]을 억울하게 죽인 [[조선 세조|세조]]에 대한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저주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저주의 첫 대상자로 알려진 [[조선 덕종|덕종]]의 경우 [[조선 단종|단종]]보다도 먼저 사망했으며, 따라서 [[조선 세조|세조]]가 [[조선 덕종|덕종]]의 죽음에 분노해 [[현덕왕후]]의 능묘를 파헤치고 폐서인했다는 설명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조선 세조|세조]]는 총애하던 며느리의 죽음에 비통해하며, 온순하고 너그럽고 아름다운 것을 장(章), 유순하고 어질고 자혜로운 것을 순(順)이라 하여 세자빈 한씨에게 장순(章順)의 시호를 내리고 장순빈(章順嬪)으로 삼았다. 후일, 장순빈의 제부이자 시조카인 [[조선 성종|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를 장순왕후로 추존했다.
         ***** 제부이자 시조카 : 제9대 [[조선 성종|성종]] (成宗, 1450~1469)
         * 시아버지 : 제7대 [[조선 세조|세조]](世祖, 1417~1468)
         ** 시아주버니 : 추존 [[조선 덕종|덕종]](德宗, 1438~1457)
         ** '''남편''' : 제8대 [[조선 예종|예종]] (睿宗大王, 1450~1469)
         * [[조선 예종]]
         직책=[[조선의 역대 왕비|조선 역대 왕후]]|
         {{조선의 왕후와 대한제국의 황후}}
         [[분류:1445년 태어남]][[분류:1461년 죽음]][[분류:조선의 추존왕후]][[분류:조선의 왕세자빈]][[분류:한명회]][[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청주 한씨]][[분류:조선 예종]]
         [[분류:조선 인물]]
  • 장승원(1852)
         '''장승원'''(張承遠, [[1852년]] ~ [[1917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공유(公裕), 호는 운정(雲庭)이다. [[경상북도]] [[칠곡군|칠곡]] 출신이며 장석구(張錫龜)의 아들로, 판서 장석용(張錫龍)에게 출계하였다.<ref name="칠곡">[http://tour.chilgok.go.kr/02culture/01_02_j121.php 칠곡군 문화관광 - 문화유산 - 칠곡문화역사 - 인물<!-- 봇이 붙인 제목 -->]{{깨진 링크|url=http://tour.chilgok.go.kr/02culture/01_02_j121.php }}</ref> <ref name="인동">[http://www.indongjangssi.or.kr/3_people/search.htm?start=230 ::::::: 인동장씨 홈페이지 :::::::<!-- 봇이 붙인 제목 -->]</ref> 국무총리를 지낸 창랑 [[장택상]], [[장직상]]의 아버지기도 하다.
         대농토를 소유한 대지주로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은 한때 그의 집을 출입하기도 했는데, 이 인연으로 박성빈의 아들 박무희는 대지주이기도 했던 그의 농토를 7:3의 비율로 소작하기도 했다.<ref>[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11470357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82)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봇이 붙인 제목 -->]</ref>
         [[분류:1852년 태어남]][[분류:1917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유교 신자]][[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칠곡군 출신 인물]][[분류:인동 장씨]]
  • 장영 (조선)
         '''장영'''(張銢, [[1622년]] ~ [[1705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 (이름)|자]](字)는 명세(鳴世), [[호 (이름)|호]](號)는 소매당(訴梅堂)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장응일]](張應一)의 아들로, 할아버지인 [[장현광]](張顯光)에게서 학문을 이어받았다.
         [[분류:1622년 태어남]][[분류:1705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
  • 장평도정
         '''장평도정'''(長平都正, ? - ?)은 [[조선]]시대 전기의 왕족이다. 조선 [[조선 태종|태종]]의 손자이자 [[양녕대군]]의 다섯 번째 서자이며, 이름은 이흔(李訢)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15대조로, 이승만은 그의 장남 부림령(富林令) 이순(李順)의 14대손이다. [[임진왜란]] 때에 활약한 [[이순신 (1554년)|무의공 이순신]]은 그의 6대손이다.
         아버지는 [[조선 태종|태종 이방원]]의 아들 [[양녕대군]] 이제(讓寧大君 李禔)이고, 어머니는 이름 미상의 첩이다. 그의 출생년도와 생일에 대한 기록은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 선원보략에는 그가 1438년생으로 나타나나 [[세종실록]]에는 1437년 정윤에 봉해진 기록이 나타난다.
         * [[조선 태종|태종]]
         * [[조선 세종|세종]]
         [[분류:생년 미상]][[분류:몰년 미상]][[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문신]][[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세종]][[분류:이승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장혁주
         | 국적 = {{국기나라|일제 강점기 조선}} <br /> {{국기나라|일본}}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일본인 장수 [[가토 기요마사]]를 다룬 〈가등청정〉(1939)을 시작으로 전시 체제에 협력하는 친일 작품을 집필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url=http://www.artnstudy.com/zineasf/Nowart/penitence/lecture/03.htm}}</ref>, 이 시기에 [[황도조선연구회]], [[대륙개척문학위원회]] 등의 친일단체에 가담한 바 있다.
  • 전경협
         '''전경협'''(全敬俠, [[1790년]] ~ [[1839년]] [[9월 26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아가타'''(Agatha)이다.
  • 전성군 (1488년)
         '''전성군'''(全城君) 이대(李對, [[1488년]] [[7월 21일]] ∼ [[1543년]] [[10월 29일]])는 [[조선]]시대 중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 자(字)는 성중(盛仲)이다. [[효령대군]] 이보의 고손으로 아버지는 여양군(呂陽君), 조부는 율원군(栗元君), 증조부는 보성군(寶城君). [[인순왕후|인순왕후 심씨]], [[심의겸]], [[심충겸]] 등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다른 이름은 이대(李薱)이다.
         [[1527년]](중종 22) [[7월]] [[함열읍|함열]][[현감]](咸悅縣監)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 면직되었다. 이후 좌익찬(左翊贊), [[사복시]]주부, 겸[[한성부]][[참군]](兼漢城府參軍), [[장예원|장예]][[사평]](掌隷司評), [[종부시]]주부를 거쳐 다시 사헌부감찰이 되었다가 용강 [[현령]](龍岡縣令), [[평양]][[진관]] 병마첨절제 도위, [[돈녕부]] 주부(敦寧府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541년]](중종 36) 부정(副正) 이공장(李公檣)의 천거를 받았다가 [[사헌부]]로부터 성품이 본래 침착하지 못하고 소행도 탐욕스럽고 간특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ref>중종실록 94권, 1541년(중종 36년, 명 가정 20년) 2월 17일 갑술 1번째기사, "헌부가 천거하는 자들이 사적으로 천거를 함으로 폐단이 심하다고 아뢰다"</ref>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낸 정종보(鄭宗輔)의 딸 동래정씨와의 사이에서 8남 1녀를 두었는데, 일곱째 아들이 권신 [[이량 (조선)|이량]]이고, 고명딸은 [[청송 심씨]] [[의정부]][[영의정]][[심연원]]의 아들이자 [[좌의정]] [[심통원]]의 조카 [[심강]]에게 출가했다.
         [[1542년]](중종 37) 자신의 외손녀딸 [[인순왕후]]가 삼간택을 거쳐서 [[조선 중종|중종]]의 명으로 [[경원대군]]의 부인으로 간택되는 것을 생전에 보았다. [[경원대군]]은 그가 처가의 가장(家長)이라는 이유로 건의하여 그는 곧 [[돈녕부]]주부에 제수되었다. 그는 곧 병이 들었고 중종은 특별히 [[내의원]]을 보내서 입진하게 했으나 효험이 없었다.<ref name="heomyong"/> [[1543년]](중종 38) [[10월 29일]]에 사망했다.
         사후 여섯째 아들 [[이량 (조선)|이량]]의 영귀로 [[증직|증]]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증직|증]] 자헌대부 호조판서에 추증되고 다시 [[증직|증]]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다른 후손들의 출세로 [[증직|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전성군(全城君)에 추봉되었다. 후일 [[대한민국]]의 초기 정치인인 [[이기붕]]은 그의 아들 [[이량]]의 직계 후손이었다.
         ** 아들 : [[이량 (조선)|이량]](1516년 ~ ?)
         *** 외손녀 : [[인순왕후|인순왕후 심씨]], [[조선 명종|명종]]비
         * [[조선 명종|명종]]
         * [[조선 중종|중종]]
         * [[조선 중종|중종]]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분류:1488년 태어남]][[분류:1543년 죽음]][[분류:음서]][[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문신]][[분류:전주 이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 중종]][[분류:조선 명종]]
  • 전인화
         배우 [[윤동근]]의 아내로서, 연예계 대표 잉꼬 커플로도 유명하다.[* 이거 진짜다! 대표 잉꼬커플이라 했던 이영하·선우은숙 커플이 알고보니 쇼윈도 부부인 것이 드러나 팬들에게 충격을 선사한 바 있는데, 그들 못지 않게 오래된 이 커플은 그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윤동근이 '왕과 나' 촬영장에 찾아가 쪽대본으로 아내를 괴롭히던 제작진을 두들겨 팸으로서 여실히 증명한 셈.] [[대한민국]]에 넷 뿐인 연기대상 [[부부]].[* 나머지 셋은 [[최수종]] [[하희라]] [[부부]]와 [[지성(배우)|지성]] [[이보영]], [[송중기]] [[송혜교]] [[부부]]. 최수종과 유동근은 KBS 연기대상 트리플 크라운이다. [[하희라]]는 KBS 연기대상을 받았는데, 6명 중에 전인화와 이보영은 SBS 연기대상을 탔다. 유일한 MBC 연기대상 수상자는 지성. 하지만 [[송중기]] ,[[송혜교]] 가 결혼하면서 세쌍에서 네쌍으로 늘었다] 그것도 '''[[조선]] 역사상 최강의 권력을 누린''' [[문정왕후|왕비]]와 [[태종(조선)|왕]] 연기로 연기대상을 차지한 흠좀무한 부부.
         대표적인 캐릭터는 [[조선왕조 오백년]] [[인현왕후]] 편의 [[장희빈]], [[여인천하#s-1]]의 [[문정왕후]], [[제빵왕 김탁구]]의 [[서인숙]]과 [[내 딸, 금사월]]의 [[신득예]]이다.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드라마라서, 임일래라에서는 남자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순애보적인 캐릭터로 나왔다. 주로 [[KBS]]에서 연기하던 그녀에게 MBC '조선왕조오백년-인현왕후' 편의 [[장희빈]] 역은 꽤 큰 모험이었고, 주위의 우려도 많았다.[* 아직도 여전히 드라마 소재가 되는 [[장희빈]] 역은 당시에는 가장 주목받는 역할이었다. 김지미, 고 남정임, [[윤여정]], [[이미숙]]이 이전의 장희빈 역 배우였다.] 그녀의 연기는 궁인(宮人)으로서의 고급스러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전인화는 악녀 역도 잘 소화해내는 배우다'라는 평을 안겨 주었다.
         연기자로서는 [[대인배]]에 속하는 인품을 지녔다. 이미지 훼손 문제 때문에 서로 안 하려는 배역도 전인화는 그냥 담당한다. 그런데 전인화가 담당하면 악역도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대표적으로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 [[인현왕후]] 편의 [[장희빈]] 역.
          * 1988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인현왕후]] - [[장희빈]] 역
  • 전장운
         '''전장운'''(全長雲, [[1811년]] ~ [[1866년]] [[3월 9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요한'''(Ioannes)이다.
         [[1845년]]에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조선]]으로 귀국하자, 남종삼은 [[고해성사]]를 받았고 동료 교우들의 감탄과 존경을 받는 매우 충실한 [[천주교]]신자로 살았다.
  • 정 (시호)
         * [[조선]](朝鮮) 정종 [[조선 정종|이경]](李曔)
         * [[조선]](朝鮮) 정조(正祖) [[조선 정조|이성]](李祘)
  • 정난정
         '''정난정'''(鄭蘭貞, ? ~ [[1565년]] [[11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외척이며 [[조선 명종|명종]]의 넷째 외삼촌이자 재상인 [[윤원형]]의 애첩이자 그의 둘째 부인이다. [[조선 명종|명종]]조의 권력자 중 한 명으로, [[윤원형]]의 본부인 연안 김씨를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사후 [[사림파]]는 그를 악녀의 대명사로 일컬었다.
         젊은 시절에는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눈에 들어 첩이 되었다. 훗날 김안로가 문정왕후를 폐위하려 한 음모가 발각되자 김안로가 사사되고 김안로의 질녀였던 윤원형의 부인 김씨를 윤원형과 문정왕후의 묵인하에 몰아내고 실질적인 안방 주인이 되었다. 그 후 명종8년 문정왕후는 정난정을 적처로 올리라는 전교를 내려,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이 되었다.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였으며, [[1553년]](명종 8) 직첩(職帖)을 받아 마침내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이 되었다. 또한 [[윤원형]]이 상소하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로서는 신분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으며 신분제도 때문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았다. 승려 [[보우 (조선)|보우]]를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선종판사(禪宗判事)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선·교(禪敎) 양종이 부활되고 도첩제도(度牒制度)가 다시 실시되는 등 한때나마 [[불교]]가 융성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보우 (조선)|보우]]를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에게 적극 추천하여 그를 총애받게 한다.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병조판서직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불교가 융성하기도 했다.<ref name="park207">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07페이지</ref>
         윤원형이 이조판서에 오를 때 정부인으로, [[의정부]] [[우의정]]과 [[영의정]]에 오를 때에는 [[정경부인]]으로 작호가 올랐다. 정경부인으로 오른 후 궐에 자주 들어 [[조선 명종|명종]]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은 정난정에 대한 반감이 극심하여 그 후원자인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가 죽기만을 기다렸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승려 [[보우 (조선)|보우]]는 제주도로 귀양을 가 사망하고 정난정은 [[사림]]의 탄핵을 받아 본래 신분인 천민으로 강등되었다. 이후에도 사림의 계속적인 탄핵으로 남편 [[윤원형]]과 함께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유배되었다.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가 승하한 지 5개월 후인 1565년 9월 8일 [[윤원형]]의 본부인 연안 김씨의 계모 강씨는 정난정이 김씨를 독살했다며 [[의금부]]에 고발하였다. 이 사건으로 점차 사대부의 공격이 심해지자 [[1565년]] [[11월 13일]] 독술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윤원형]]도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사후 [[사림파]]에 의해 악녀의 대명사로 일컬어졌다. 조선의 사대부는 정난정을 조선의 질서를 어지럽힌 타락한 여성으로 묘사하였는데, 구전과 민담을 통해 작품과 희극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당하리 산 4-20번지(현 [[경기도]] [[파주시]] 당하동 산4-20번지) 선산 근처에 안장되었다.<ref>http://media.daum.net/culture/art/view.html?cateid=1021&newsid=20061103140413945&p=segye</ref> [[윤원형]]과 본부인 연안 김씨가 매장된 묘소 뒤쪽에 매장되었으며 비석은 없이 전하다가 [[조선]]이 멸망한 뒤에 세워졌다.
         그는 자신이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의 측근인 점을 이용,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에게 서자 서녀도 능력이 되는 인물을 등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남편 윤원형이 상소하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하였다.<ref name="yunnaev"/> 이는 당시로서는 신분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으며 신분제도 때문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았다.<ref name="yunnaev"/>
         *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
         * [[보우 (조선)|보우]]
         * [[이량 (조선)|이량]]
         [[분류:생년 미상]][[분류:1565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윤원형]][[분류:음독 자살한 사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불교 신자]][[분류:초계 정씨]]
  • 정도복 (고려)
         '''정도복'''(鄭道復)은 [[고려]]시대 말기, [[조선]]초기의 문신이다.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선, 상시 등을 지내고 [[조선]] 건국에 참여하였으며 밀직제학, 한성부우윤,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했으며 형 [[정도전]]이 암살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성주 유학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 뒤 인녕부사윤에 이르렀다. 본관은 [[봉화 정씨|봉화]](奉化)이고 자(字)는 내지(來之)이고 호(號)는 일봉(逸峯)이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이며, [[정도전]](鄭道傳)의 친 아우이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공양왕 2년(1390년)에 승정원 좌승선이 되었다. 그 뒤 [[고려]]에서 상시(常侍)에 이르렀다. [[1392년]] 형 [[정도전]] 등과 함께 조선 건국에 참여하였다. 조선이 개국 되면서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폈으나, 아직 초창기여서 불교를 숭상하는 구습이 그대로 성하고 있어, 선생은 유생들에게 큰형 삼봉선생이 지은 『심문·천답』과 『심기리』3편을 강석하는 등 불교의 폐단을 바로잡음에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더불어 힘썼으며, 유학(儒學)을 진흥시키고 사회 기강을 잡는데 기여하였다.
         조선 태조 3년(1394년)에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겸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올랐다.
         * 1392년 형 [[정도전]] 등과 함께 [[조선]]의 개국에 참여하였다.
         [[분류:과거 급제자]][[분류:고려의 문신]][[분류:고려의 정치인]][[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공신]][[분류:조선의 성리학자]]
         [[분류:봉화 정씨]][[분류:조선의 공신]][[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
  • 정만조
         '''정만조'''(鄭萬朝, [[1858년]] ~ [[1936년]])는 [[조선]] 말기의 학자이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 협조한 대표적인 [[유교]] 계열 인물이다. 호는 무정(茂亭)이다.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과 가까운 친척으로 [[한성부]]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개화파 학자였던 [[강위]]의 제자로 수학하여 글과 글씨에 뛰어난 재사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884년]] [[교섭통상아문]]에서 주사 벼슬로 관직을 시작하였고, [[1889년]] [[조선의 과거 제도|과거]]에 합격한 뒤 예조참의, 승지, 내부참의 등을 역임했다.
         정만조는 명문가의 자제였지만 개화 사상을 익힌 앞서가는 지식인이었다. 당시 세도 세력인 [[여흥 민씨]] 일파와는 대립하다가 정치적인 사건에 말려들어 [[전라남도]] [[진도 (진도군)|진도]]로 유배되었다. 10년이 넘는 유배 생활 끝에 [[1907년]] [[대한제국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에야 사면을 받아 다시 관계로 복귀하였으며, 이후 [[통감부]]와 조선총독부의 이익에 따라 활동하는 친일 학자가 되었다.
         [[1929년]] 관제 친일 유림 조직인 [[경학원]]의 대제학을 지냈고, 국사 편찬 업무에 발탁되어 일본의 시각에서 역사를 적는 데 일조했다. [[1921년]]부터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내며 일본 측의 시각에서 《조선사》를 집필하였고,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의 편찬에도 감수위원으로 참여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동생 [[정병조]]도 세 명단에 들어 있다.
         [[분류:1858년 태어남]][[분류:1939년 죽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개화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정부인 안동 장씨
         '''정부인 안동 장씨'''(貞夫人 安東 張氏, [[1598년]] [[12월 21일]]([[음력 11월 24일]])~ [[1680년]] [[8월 1일]]([[음력 7월 7일]]))는 [[조선]] 중기의 문인, 요리 연구가로, 본명은 '''장계향'''(張桂香)이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요리 방법을 순[[한글]]로 기록한 《[[음식디미방]]》을 남겼다.
         그녀의 작품으로 《[[음식디미방]]》과 《맹호도》 그리고 시 9편이 전해지고 있다. 《[[음식디미방]]》은 그의 집안 며느리와 딸들에게만 전해지던 것으로, 종부를 통해서 계속 전해졌으며, 기타 며느리나 딸들은 원본을 물려받을 수 없고, 다만 필사본을 베껴갈 수는 있도록 허락하였다. [[조선]]시대 중기의 다양한 요리 방법이 기록된 《[[음식디미방]]》은 [[1910년]]에 와서 우연히 대중에 공개되었다.
         [[분류:1598년 태어남]][[분류:1680년 죽음]][[분류:조선의 저술가]] <!-- 문인 -->[[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화가]] <!-- 맹호도 -->[[분류:조선의 시인]][[분류:한국 요리 연구가]][[분류:안동시 출신]][[분류:안동 장씨]]
  • 정선 (화가)
         |국적={{국기|조선}}
         '''정선'''(鄭歚, [[1676년]] ~ [[1759년]])은 [[조선]]의 화가,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 정씨|광주]],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이다.<ref>[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1138&pTotalSearchCount=3&pPosition=2&pRecordId=PPL_6JOc_A1676_1_0012083&pName=정선(鄭歚){3} 한국역대인물정보시스템 - 정선]</ref>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어 관직에 나갔다.
         18세기 조선 화단을 이끌었던 [[강세황]]은 겸재 정선이 실제 경치를 잘 그린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ref name="강세황평">{{서적 인용|저자=변영섭|제목=1월의 문화인물 미술인 강세황|출판사=문화체육부·한국문화예술진흥원|연도=1995|쪽=15}}</ref> 그러나 강세황은 진경을 그릴 때는 각 장면에서 알맞은 화법을 찾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ref name="강세황평"/>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정선의 산수화를 다음과 같이 비평하였다.
         [[분류:정선| ]][[분류:1676년 태어남]][[분류:1759년 죽음]][[분류:조선의 화가]][[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서예가]][[분류:조선의 작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광주 정씨]][[분류:18세기 화가]]
  • 정순조 (1888년)
         |출생지= [[조선]] [[광주광역시]]
  • 정이주
          | 출생지 = [[조선]] [[광주광역시]]
          | 사망지 = [[조선]] [[강원도 (남)|강원도]] [[춘천시]]
          | 국적 = [[조선]]
         '''정이주'''(鄭以周, [[1530년]] ~ [[1583년]])는 [[조선]]의 [[문신 (관료)|문관(文官)]] 겸 [[정치가|정치가(政治家)]]이며 [[시 (문학)|시인(詩人)]] 겸 [[서예|서예가(書藝家)]]이다.
         [[이이|율곡 이이(栗谷 李珥)]]와 더불어 [[조선 선조|선조(宣祖)]] 임금을 섬기며 [[문신 (관료)|문관 관료(文官 官僚)]] 직위를 지낸 그는 [[1558년]] 생원시 합격을 거쳐 같은 해 [[1558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68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 급제를 하였으며, 이후 의영고직장, 예문관 검열, 승정원 주서, 성균관 전적, 공조좌랑, 형조좌랑, 예조좌랑, 평안도 도사, 사헌부 지평, 사헌부 직강, 호조좌랑, 경상도 경차관, 사헌부 헌납, 사헌부 장령, 사헌부 봉상시 첨정, 사헌부 사예, 사헌부 사성, 사헌부 사섬시정을 거쳐 평안도 정주목사를 지내었으며 [[1579년]] 평안도 정주목사 직위를 사퇴하고 관직을 떠나 [[강원도]] [[춘천시|춘천]]에 낙향하여 [[1583년]]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사후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토막글|조선|시인}}
         [[분류:1530년 태어남]][[분류:1583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광주 정씨]][[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서예가]][[분류:조선의 정치인]]
  • 정진
         * '''[[정진 (1361년)|정진]]'''([[1361년]] ~ [[1427년]])은 [[고려]] 말기~[[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 정진 (1361년)
         '''정진'''(鄭津, [[1361년]] ~ [[1427년]])은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으로 시호는 희절공(僖節公)이며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아들이다. 고려 말에 관직에 올라 사재감령, 전농감령 등을 거쳐 [[조선]] 건국 후 [[개국공신|개국]][[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1398년]](태조 7년) 아버지 [[정도전]]이 [[요동 정벌]] 계획 중 [[조선 태종|태종 이방원]]에게 피살되자 수군 병력으로 충군되었으나 [[조준]], [[권근]] 등의 건의로 복직하여 [[자헌대부]]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사후 [[대구광역시|대구시]][[우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을 최초로 간행하였다. [[경상북도]] 출신으로 본관은 [[봉화 정씨|봉화]].
         === 조선 건국 ===
         {{참고|조선 건국|역성 혁명|개국공신|원종공신}}
         [[1392년]] [[7월]] 조선왕조가 건국 [[개국공신|개국]][[원종공신]]에 녹훈되고 공신의 적자로 외직을 자청하여 [[연안군|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 연안부사 재직 시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1393년]] 판사재감사를 지내고, [[1396년]](태조 5년) [[승정원]][[도승지]]로 승진했다.
         [[1398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事)로 있을 때,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아버지 정도전이 [[남은]], [[심효생]]과 함께 [[이방원]]에게 살해당하고 동생 두 명도 살해당하였으나, 그는 [[조선 태조|태조]]를 수행하여 삼성재(三聖齋) 방문 길을 수행하여 [[안변군]] [[석왕사]]에 체류 중이라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하였다.
         [[1416년]](태종 16년) 인령부윤(仁寧府尹)이 되고, [[1417년]] 판[[안동대도호부]]사가 되었다. 그 뒤 관찰사를 거쳐 [[조선 세종|세종]] 즉위후 [[1419년]](세종 1년) [[충청북도|충청도]]도관찰사로 부임했다.
         * [[조선 태종|태종]]
         [[분류:1361년 태어남]][[분류:1427년 죽음]][[분류:음서]][[분류:고려의 문신]][[분류:고려의 정치인]][[분류:고려의 군인]][[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군인]][[분류:해군 군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봉화 정씨]][[분류:조선의 공신]]
  • 정차온
         '''정차온'''(鄭次溫, [[1399년]](정종 1) ~ ?)은 [[조선]]시대 전기의 학자,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 정씨|경주]]이고 자(字)는 공후(孔厚)이다. [[경상북도]] 출신.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조산대부(朝散大夫)로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상주]][[판관]](尙州判官)에 이르렀다. [[1455년]] [[조선 단종|단종]](端宗)이 강제로 [[조선 세조|세조]](世祖)에게 강제로 선위하고 상왕이 되자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세조가 평양판관(平壤判官)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경주 정씨]][[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
  • 정칠성
         '''정칠성'''(丁七星, [[1897년]] ~ [[1958년]]?)은 [[대한제국]]의 기녀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한 항일 독립 운동가, [[페미니스트]], 언론인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페미니스트]]이다. 별칭은 '''금죽'''(錦竹 또는 琴竹)이다.
         유년 시절에 기녀가 되어 “금죽”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였고, 후일 필명이자 아호로 사용하였다. 기생학교에서 수료한 후 한남권번의 기생으로 있다가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계기로 사회운동에 참여하였고, [[여성주의]]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24년]] [[허정숙]](許貞淑), [[정종명]](鄭鍾鳴), 오수덕(吳壽德) 등과 함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 여성들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하였고, [[일본]] 유학 중 1925년 도쿄에서 여자유학생단체인 삼월회를 조직했다.
         해방 후 조선부녀총동맹을 결성해 부위원장이 되고, [[조선공산당]]과 [[민족주의민주전선]]에서 활동하다 [[1948년]] [[4월]]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남북협상]]에 참가한 뒤, 그해 [[8월]] 미군정의 좌익 탄압을 피해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차 월북했다가 내려오지 않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8년]] [[10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 1955년 민주여맹 부위원장,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58년]] 국내파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을 제거할 때 숙청되었다.
         [[파일:1910년대 조선 기생.jpg|섬네일|left|180px|[[1910년]]대 무렵의 어느 작은 술집의 기생]]
         [[3.1 운동]]에 참여한 [[기생]]의 한사람이었으며, [[조선총독부|총독부]]의 눈을 피해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여자기예학교]]를 수학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동조하게 되었다.
         그는 작문에도 능하여 글과 논설을 지어 발표하였는데, 여성의 계몽, 교육의 장려, 사회 부조리의 개선, 위생 청결론 등을 주장하여 이른바 '사상 기생'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당시 태화관을 출입하던 소설가 장혁주는 그의 존재를 인상깊게 기억했다가 회상하기도 했다. [[1920년]]에는 [[김일엽]], [[나혜석]], [[김명순 (1896년)|김명순]] 등과 함께 잡지 [[신여자]]지의 필진으로 참여하였으나 [[신여자]]지는 재정난으로 곧 폐간되었다. 이후 그는 [[조선]]의 역사 관련 서적, [[사회주의]] 사상과 [[페미니즘]] 관련 서적들을 구해서 독서하였다.
         [[1923년]]말부터 [[허정숙]], [[정종명]](鄭鍾鳴), 오수덕(吳壽德) 등과 함께 여자도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가부장제]]의 억압과 남성들의 억압, 제국주의의 억압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허정숙]], [[정종명]] 등과 함께 여성사회운동단체를 조직하려고 여학생과 부인 중에서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이 중 신분과 배경을 보지 않고 사람을 사귀던 [[허정숙]]과는 특별히 친하게 지냈으며, 이후 정칠성은 [[허정숙]]과 함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사상을 조선에 소개하는데 앞장섰다.
         [[1924년]] [[5월 15일]] 그는 [[경성]] [[천도교당]]에서 [[허정숙]], [[주세죽]], [[김조이]], [[정종명]], 박원희, 김필애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성 사회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를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여성동우회 창립발기식의 사회자로 활동했다. 바로 [[조선여성동우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신사회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할 여성의 단결 등을 목표로 설정하였고,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사회운동을 벌였다.
         정칠성은 정종명, 오수덕 등과 함께 종래의 소극적 여성운동을 극복하고자 여성해방단체조직에 착수하였다.<ref name="dispose"/> 당시 여성의 사회활동이란 생소한 것이었기에, 정칠성은 일반 부인을 대상으로 직접 회원모집에 나섰다.<ref name="dispose"/> 이후 그는 각지의 순회강연과 칼럼, 기고를 통해 여성 계몽운동에 나섰고, 경성에서 다른 여성단체의 일을 보면서도 [[1925년]] [[3월]]까지 대구여자청년회 집행위원을 겸직하였다. [[1924년]] [[7월 20일]] [[조선여성동우회]] 집행위원으로, 인천노동총동맹회 상무위원(仁川勞働總同盟會常務委員)에 선출, 겸임하였다. 또한 대구여자청년회 집행위원 일도 겸하였다.
         이후 [[일본]]에 건너가 체류 중, [[1925년]] [[3월]] [[도쿄]]에서 무산계급 및 여성의 해방을 목적으로 [[이현경]], [[황신덕]] 등의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의 조선여성단체인 [[삼월회]](三月會)를 조직, 삼월회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3월 8일]] [[대구]]부내 노동공제회에서 [[대구여자청년회]] 주최 [[세계 여성의 날|국제부인데이]] 기념행사에 연사로 초빙되어 '국제부인운동의 의의'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5년]] [[3월 22일]]에는 [[대구청년회관]]에서 경북지역 인사들이 모인 사회주의 연구 사상단체 사합동맹(四合同盟)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 맹원으로 활동하였다. [[3월 31일]] 다시 유학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도쿄 여자기예학교]]에 복학하였다.
         [[1925년]] [[11월]] [[일본]] 정부에서 가상의 적을 대비하여 각급 중고등학교에 군사훈련 및 각종 군사교육을 실시하자, 정칠성은 군사교육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11월 7일]] [[홋카이도]]의 소준고등학교 강당에서 일본내 시민단체, 여성단체, 사회주의 운동단체 및 조선인 유학생단체, 삼월회, 일월회(남성 단체) 공동 주최로 열린 [[군사교육 반대 집회]]에 그는 [[삼월회]]의 대표 자격으로 박경희(朴慶姫)와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 2백 명이 급히 투입되어 진압하자, 바로 피신하였다.
         [[1926년]] [[1월]] [[삼월회]] 간부 자격으로 《조선일보》에 '신여성이란 무엇?'이라는 칼럼을 발표했다. 여기서 정칠성은 강렬한 자립정신, 강력한 계급의식을 지닌 여자가 모든 불합리한 환경을 개선해 나갈 수 있는 진정한 여자로 거듭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여자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어야 남자와 가정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경제력을 얻으려면 여자 역시 취직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1926년]]에는 조선여성친목회에 가입하였다. [[1926년]] [[3월]] 동경예기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중에서도 정칠성은 유독 원리 원칙에 충실했다. 그는 평소 이론을 떠난 개인적 경험담은 가급적 자제하며, 동지들에게는 [[사회]] 운동과 여성의 해방이 더 중요하므로 가정을 뛰쳐나오라고 권유하였다.<ref name="mungongs">[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rView=no&Dictionary_Id=10028184 정칠성]</ref> 그는 일찍부터 노동여성의 고통에 공감하며 계급해방을 당당히 외쳤지만 당대 사회가 지닌 제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조선사회가 용납하지 않을 테니 성과 사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ref name="mungongs"/> 그는 여성이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여성이 해방되어야 하고, 여성이 해방되는 길은 결혼과 가족, 가정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했다.
         [[10월 6일]] [[박원희]]와 함께 [[근우회]] 조사위원 겸 전권위원에 임명되어 [[경성]]에서 [[함흥]]으로 파견되었다. 바로 [[근우회]] 함흥지회를 개설하고, 함경도지역 조사 후 [[10월 6일]] [[함흥]] 오로리의 오로여자상조회(五老女子相助會)에서의 강연을 계획하였으나 함흥경찰에 의해 체포, 강연회 자체가 무산되고 되돌아왔다. 정칠성과 박원희가 경성으로 되돌아간 뒤 [[함흥여자청년회]]와 함흥기독청년회 주최, [[동아일보]], [[조선일보]] 후원 하에 부인문제대강연회가 열리자 연사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경찰의 방해로 집회가 무산되자 오히려 사회단체의 집회를 방해한다 하여 지식인층의 반발을 불러오게 됐다. [[10월 16일]] 근우회 집행위원으로 대구에 다녀온 뒤 다시 함흥으로 가서 근우회 함경남도 지부 조직에 착수하였다.
         [[1927년]] [[11월]] 서대문정 [[조선여자기예원]](女子技藝院) 교수로 초빙되었다. 여자기예원 교수로 있으면서 부녀자들에게 수자수, 편물, 공예 등을 가르쳤고 일과시간 이후에도 자신의 사택을 찾아온 부녀자들에게 개인지도를 하기도 했다. [[12월 2일]] 마포청년회 강당에서 열린 [[신간회]] 경성지회 강연에 [[이관용]](李灌鎔), 이관구 등과 함께 연사로 참여, '신간회와 여성운동'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8년]] [[1월 15일]] 서대문구 서대문정에 있는 [[조선여자직업사]](朝鮮女子職業社)의 교사로 출강하였다. [[1928년]] [[2월 3일]] [[근우회]] 총회에서 경성지회 설치가 결정, 심은숙(沈恩淑), 조원숙(趙元淑), 문인순(文仁順) 등과 함께 근우회 경성지회를 조직하였다. [[2월 23일]] 공평동 근우회관에서 [[허정숙]] 등과 함께 근우회 경성지회 창립 발기인이 되고, [[3월 13일]]에 근우회 경성지회 출범 후 경성지회 중앙위원에 위촉되었다.
         여자직업사의 수자수 교사와 근우회 각 지회설치 활동을 하면서도 동아일보, 삼천리지 등에 칼럼과 논설을 발표하였다. [[1928년]] [[5월 20일]]에는 황주청년회관에서 [[신간회]] 황해도 황주지회가 주최한 '사회문제대강연회'에 연사로 참여, '여성운동과 신간회'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강연 주제 중 그는 '우리 조선여자들은 남자들의 완롱물이요, 남자의 위안물이며, 남자들의 일개의 생식기계에 지나지 않는 노예였다.'는 내용이 문제시되어 임석경찰관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었다가 풀려났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사랑과 섹스가 무관하다는 관점은 [[1920년]]대 [[1930년]]대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정칠성은 사랑과 성이 무관하다는 콜론타이의 이론을 수용, [[조선]]에 소개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사랑과 섹스는 무관하며 사랑 없이도 섹스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당시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성리학]]자들과 남성 문필가들로부터 음란하다는 비난과 반발을 초래하였다.
         또한 "[[입센]]의 [[인형의 집]]의 노라의 해방과 [[붉은 사랑]]의 여주인공<ref name="seoji193"/> 왓시릿샤(바실리샤)의 해방이 어떤 차이를 지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정칠성은 '노라는 '[[개인주의]]적인 자각'으로서 개성에 눈을 떠 남편의 집을 뛰쳐나갔지만 거리에서 얼어 죽은 '공상적 여성'인 반면, 바실리사는 노라와 달리 경제적으로 해방되어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자유로워진 여성이라 대답한다.<ref name="seoji194">서지영, 《역사에 사랑을 묻다》 (도서출판 이숲, 2011) 194페이지</ref> 이렇게 당시 사회주의 조선 신여성들에게 콜론타이는 "계급의식을 바탕으로 성적, 경제적으로 해방된 진정한 자유를 얻은 여성"의 상징으로 수용되었다.<ref name="seoji194"/> [[콜론타이]]의 이론을 적극 수용, 조선에 소개시킨 여성운동가로는 정칠성 외에도 [[허정숙]], [[정종명]] 등이 있었다.
         ==== 광주 학생 운동과 조선공산당 활동 ====
  • 정호근(배우)
         본격적으로 악역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99년]] MBC 드라마 [[왕초]]에서 [[조선]]인 출신 고등계 형사 '[[아베]]'역을 맡아 호연하면서부터이다.[* 그 작품에 선덕여왕의 [[석품]] [[홍경인]]이 그의 사위(?)인 '날파리'로 출연했으며, 나중에 아베는 그를 인정해 준다.] 이후로 많은 사람들에게 '아베'로 낙인(?)[*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에는 역할이 죄다 친일파 아니면 일본인이다.(...) 위의 '아베'역은 물론이고 한반도의 '오카모토'도 그렇고...하다하다 해방후를 다루는 야인시대 2부에서도 하필 일본식 이름을 별명으로 쓰는 아오마스 역이니 뭐... ]되었으며 맡은 역할마다 항상 악역이 되고 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정환덕
         '''정환덕'''(鄭煥悳, [[1857년]] ~ [[1944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작가이자 [[대한제국]]의 문신, 작가으로 본관은 연일, 휘는 환덕(煥悳), 호는 퇴산(退山)이다. 시종원 부경으로 궁궐에서 15년 동안 재직하면서 궁 안에서 듣고 본 온갖 일들을 저술하여 "[[남가록]](南柯錄, 남가몽)"이라는 책에 남겨 놓았다.
         * [[정보 (조선)|정보]]
         [[분류:1857년 태어남]][[분류:1944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학자]][[분류:대한제국의 정치인]]
  • 조선 세종
         |이름 = 조선 세종
         |작위 = [[조선의 역대 국왕|조선 국왕]]
         |전임자 = [[조선 태종|태종]]
         |후임자 = [[조선 문종|문종]]
         |섭정 = [[조선 태종|상왕 태종 이방원]] (1418년~1422년) <br/> [[류정현|영의정 류정현]] (1422년) <br/> [[조선 문종|왕세자 이향]] (1442년~1450년)
         |출생지 = [[조선]] [[한성부]]<br/>(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왕조 = {{국기나라|조선}}
         |아버지 = [[조선 태종|태종]]
         |자녀 = 적자녀 10명:<br />[[정소공주]] ([[1412년]] 출생),<br />'''[[조선 문종|<span style="visibility:hidden">문</span>문종<span style="visibility:hidden">종</span>]]''' ([[1414년]] 출생),<br />[[정의공주]] ([[1415년]] 출생),<br />'''[[조선 세조|<span style="visibility:hidden">세</span>세조<span style="visibility:hidden">조</span>]]''' ([[1417년]] 출생),<br />[[안평대군]] ([[1418년]] 출생),<br />[[임영대군]] ([[1419년]] 출생),<br />[[광평대군]] ([[1425년]] 출생),<br />[[금성대군]] ([[1426년]] 출생),<br />[[평원대군]] ([[1427년]] 출생), <br /> [[영응대군]] ([[1434년]] 출생)
         |친인척 = [[민제 (조선)|민제]](외조부) <br /> [[심온]](장인) <br /> [[경신공주]](고모) <br /> [[이애 (1363년)|이애]](고모부) <br /> [[경선공주]](고모) <br /> [[심종]](고모부) <br /> [[노한]](이모부) <br /> [[민무구]](외숙부) <br /> [[민무질]](외숙부) <br /> [[민무휼]](외숙부) <br /> [[민무회]](외숙부) <br /> 심준(처남) <br /> [[심회]](처남) <br /> [[심결]](처남) <br /> 안맹담(사위) <br /> [[심안의]](사위) <br /> [[윤사로]](사위) <br /> [[채시라 (시호)|채시라]](외조모) <br /> [[클라라 (조선)|클라라(배우)]](외숙모)
         '''세종'''(朝鮮 世宗, [[1397년]] [[5월 7일]]<ref>세종대왕 탄생일은 [[1397년]] [[음력 4월 10일]]이다. 이를 [[태양력|양력]]으로 환산할 때, [[1397년]] 당시 서양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5월 7일]]이 되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5월 7일]]이 된다. (더 자세한 것은 [http://astro.kasi.re.kr/Life/ConvertSolarLunarForm.aspx?MenuID=115 한국천문연구원 천문우주지식정보 사이트] {{웨이백|url=http://astro.kasi.re.kr/Life/ConvertSolarLunarForm.aspx?MenuID=115 |date=20130805215029 }} 혹은 [http://astro.kasi.re.kr/Community/QuestionViewForm.aspx?MenuID=1593&QuestionID=22978 천문참여관 질문상자] {{웨이백|url=http://astro.kasi.re.kr/Community/QuestionViewForm.aspx?MenuID=1593&QuestionID=22978 |date=20140225040727 }} 를 참조하라.)</ref> ([[음력 4월 10일]]) ~ [[1450년]] [[3월 30일]]([[음력 2월 17일]]), 재위 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왕|군주]]이며 [[언어학자]]이다. 그의 업적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은 명칭인 '''세종대왕'''(世宗大王)으로 자주 일컬어진다. [[성씨|성]]은 [[이씨|이]](李), [[이름|휘]]는 도(祹),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 [[자 (이름)|자]]는 원정(元正), 아명은 막동(莫同)이다. '''세종'''은 [[묘호]]이며, [[시호]]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고,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존시를 합치면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 된다. [[조선 태종|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의 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며, 조선의 왕 중에서 [[왕세자]]에게 양위를 하지 않고 훙서한 최초의 왕이다.<ref name="aks">[[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a_A1397_1_0005792 "세종 (世宗)"]</ref><ref name="encyber">[[두산세계대백과사전|두산 백과사전]] [http://www.encyber.com/search_w/ctdetail.php?masterno=93122&contentno=93122 "세종 世宗"]{{깨진 링크|url=http://www.encyber.com/search_w/ctdetail.php?masterno=93122&contentno=93122 }}</ref>
         [[한성부|한성]] 준수방(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고을에서 아버지 [[조선 태종|정안군 이방원]]과 어머니 [[원경왕후|민씨 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종 8년(1408년)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태종 12년(1412년), 둘째 형 [[효령대군|효령군 이보]]와 함께 [[대군]]으로 진봉된다. 1418년 첫째 형 양녕대군이 [[왕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얼마 후 부왕의 [[선위]]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조선 태종|태종]]이 [[대리청정]]을 하며 국정과 정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과 그의 측근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김종서 (1383년)|김종서]],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체제는 일종의 [[의원 내각제|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1418년]] 9월에서 [[1450년]] 3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418년 9월에서 [[1422년]] 5월까지 부왕인 [[조선 태종|태종]]이 [[태상왕]]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태종이 훙서한 후 1422년 5월에서 6월까지 한 달 동안 영의정 [[류정현]]이 한 달 간 2차 대리청정을 하였고 그 후 1422년 6월에서 [[1442년]] 1월까지 친정을 하였으며 1442년 1월에서 1450년 3월 승하할 때까지 첫째 아들 [[조선 문종|문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이도'''(李祹)는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 당시 정안군이던 [[조선 태종|태종]]과 [[민제]]의 딸 [[원경왕후|원경왕후 민씨]]의 육남으로태어났다. 위로는 형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 및 세명의 요절한 친형이 있었고,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등 동복 친누나 세 명이 있었다. 뒤에 친 여동생 [[정선공주]]와 남동생 [[성녕대군]] 종이 태어난다. 처음 그의 이름은 막동으로 지었다가 뒤에 이름을 도(祹)로 고쳤다.
         실록에는 그의 도발적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ref name="Joseon0602">[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504/200504150255.html 세종 "나도 임금감"… 황희는 매관매직?] {{웨이백|url=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504/200504150255.html |date=20131029230339 }} 조선일보 2005년 04월 15일자</ref> 충녕대군은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한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아버지 태종에게 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왕세자|세자]]인 [[양녕대군|이제]]에게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몸을 꾸미라”고 충고하기도 하였다.<ref name="Joseon0602"/> 이 일로 이제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418년]]에 [[조선 태종|태종]]이 신하들과의 회의<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D%9B%88%EB%AF%BC%EC%A0%95%EC%9D%8C&keyword=%ED%9B%88%EB%AF%BC%EC%A0%95%EC%9D%8C "훈민정음" 검색 결과,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ref> 에서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無道)하여 종사(宗社)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청(請)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廢)하였다.”라고 하며 김한로와 연관되는 등의 심각한 비행으로 인해<ref>한쪽에서는 이제가 일부러 비행을 해서 세종에게 왕위가 가게 했다고 주장하나, 다른 한쪽에서는 세종대왕이 즉위한 뒤에도 여전히 비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이덕일외 공저/김영사.</ref> 왕세자에서 폐위되고 충녕대군의 학문과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황희]]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이 해 6월 22살의 그를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고, 이제를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강봉(降封)하였다.<ref name="aks" /> 부왕이 왕세자를 폐위할 것을 예감한 [[효령대군]]은 세자 자리를 기대하였으나, 이제는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가 갈 것이니 포기하라고 하였다.
         충녕대군은 처음에는 [[왕세자|세자]] 자리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해 8월 초8일 태종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 주고 연화방의 옛 세자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충녕대군은 이를 거두어줄 것을 여러번 청하였지만 태종의 결심이 굳건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이틀 뒤인 8월 10일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또한 [[양녕대군]]의 폐립(廢立) 문제에 반대 의견을 내던 이조판서 [[황희]]는 [[1413년]] 초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되었다가, [[1418년]](태종 18년)에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交河, [[파주시|파주]]) 지방에 유배된다. 이 해에 [[조선 태종|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나는데, 이때 교하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원]](南原)으로 옮겨서 5년을 더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상왕 태종의 진노가 풀려 [[1422년]](세종 4년) 부왕 태종은 그를 소환하도록 권고, 직첩(職牒)을 주며 세종에게 부탁하여 곧 등용토록 하였다. 세종은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것을 알고 즉시 유배에서 불러들였다.
         세종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금·은 세공을 [[말]]과 [[포]](布)로 대신토록 하는 데에 합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윤덕]]과 [[이천 (조선)|이천]]에게 [[압록강]] 상류지역에 4군(郡)을, [[김종서 (1383년)|김종서]]와 [[이징옥]]에게 두만강 하류지역에 6진(鎭)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 주현미
         [[화교]] 3세[* 주현미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4살에 한국으로 이민와서 자랐으므로 사실상 2세인 것이나 다름없다.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 180412 주현미편에서 주현미의 친할아버지는 중국인이고 친할머니는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할머니는 중국으로 이주하여 생활한 조선인 1세(그 당시에는 [[조선]]이라고 불렀다. 물론 한국인 맞음)인 것으로 추정한다. 주현미의 [[할머니|친할머니]]와 [[어머니]]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현미의 형제들은 어린 시절 집안에서부터 이미 한국 문화 방식으로 자랐다고 한다. 따라서 오히려 주현미와 형제들은 처음 화교 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그것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출신으로, [[전라북도]] [[남원시|남원]] 에서 4남매 중 첫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4살 때 한국으로 이주하여 자란 [[중국인]][* [[중국]] [[산동성]] 모평현에서 4살 때 한국으로 이주한 [[중국인]]이지만, 당시 [[북한]]과 대치 중인 한국의 [[정치]] 및 군사적 상황에 의하여 [[대만]] [[국적]]이 되었다.] [[한의사]]였고, 어머니는 [[한국인]]이었다. 참고로 주현미의 친할머니 역시 [[한국인]]이었다고 방송에서 밝혔다. 따라서 주현미는 굳이 혈통을 따지자면 중국 [[쿼터]](1/4) [[혼혈]]인 셈이다. 대만 국적이었으나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주현미의 동생들은 아직 [[중화민국]] 국적이라 한다.[* 한국화교는 [[타이완 섬]]과는 거리가 먼 [[산둥 성]] 출신들이며 단지 국적을 부여한 나라가 [[중화민국]]이었을 뿐이다. 상황이 이렇게 좀 꼬인 건 국부천대 때문. 물론 현재 화인들의 대부분이 귀화를 택하면서 중화민국 국적자는 줄고 있다.] 종교는 [[가톨릭]]으로 소화 데레사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있다.[* 좀 비슷한 케이스인 외성인 출신 대만가수 [[등려군]]도 테레사라는 세례명을 가진 [[가톨릭]] 신자이다. 등려군 역시 산둥 출신.~~틀린 정보이다 등려군 자신은 타이완 태생 부친은 하북성 모친이 산둥성 출신이다~~]
  • 창성군 (1499년)
          | 왕조 = [[조선]](朝鮮)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 국적 = {{국기|조선}}
         '''창성군 이요명'''(昌城君 李堯命, [[1499년]] ~ [[1546년]])은 [[조선]]의 [[왕족 종실]]이다.
         그의 친조부(親祖父)는 [[조선 태종|태종 이방원]]의 친손자(親孫子)인 [[옥산군|옥산군 이제(玉山君 李躋)]]이다.
         [[순안군 (왕족)|순안군 이희]]([[옥산군|옥산군 이제]]의 차남)의 삼남(三男)으로 출생한 그는 [[조선 연산군|연산군]] 치세 시기이던 [[1502년]]에 4세의 나이로 '''창성정'''(昌成正)에 책봉되었고 이듬해 [[1503년]]에 나이 5세로 '''창성군'''(昌成君)에 진책되었으며 이후 장성하여 [[조선 중종|중종]] 임금 때는 종이품 정의대부(從二品 正義大夫) [[작위]]를 역임하기에 이르렀다.
         {{토막글|조선}}
         [[분류:1499년 태어남]][[분류:1546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문신]][[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 연산군]][[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중종]][[분류:조선 인종]][[분류:조선 명종]]
         [[분류:조선 인물]]
  • 채시라
         |출생지 = [[조선]] 영순군사저
         친인척:((조선세종 조선세종대왕 이동))증조부 임영대군 이구 양조부 광평대군 이여 친조부 문종 이향 종조부 세군이유 종조부 의경세자이장 종숙부 단종 이홍위 종숙부 예종 이황 종숙부 월산대군 이정 6촌형 성종이혁 6촌형 여동생[[클라라(배우)]] 동생 [[이태영 (방송인)]]
         '''채시라채징'''(蔡時那, [[1465년]] [[6월 25일]] ~ )는 [[조선]] 회원군 의부인이다
         * 1989년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파문 (드라마)|파문]]》 ... 윤보배 역
         * 1990년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대원군 (1990년 드라마)|대원군]]》 ... [[숙의 범씨|숙의 금성 범씨]] 역
         [[분류:조선 인물]]
  • 채연 (동음이의)
         *'''[[이채연 (1861년)|이채연]]'''(李采淵, [[1861년]] ~ [[1900년]] [[8월 15일]])은 [[19세기]] [[조선]] 시대 인물이다. 한성전기회사 사장을 지냈다.
  • 채형석
         1960년 서울에서 애경그룹 창업주 [[채몽인]](蔡夢印)과 [[장영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제주판관을 역임한 [[채구석]](蔡龜錫)이다.
  • 청릉군
          | 왕가 = [[조선|조선 왕조]]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
          | 친인척 = [[덕안대군|문안군 이방연]](양조부) <br/> [[조선 태조|태조 이단]](양증조부)<br/>[[학천군|학천군 이징]](친조부)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청릉군 이희철'''(靑陵君 李希哲, [[1426년]] ~ [[1486년]])은 [[조선]]의 [[왕족 종실]]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고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덕안대군]](문안군)의 양손자(養孫子)이며, [[이중군|금산군]]의 양자(養子)이다.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낸 [[학천군|학천군 이징]]의 친손자인 그는 [[덕안대군|문안군 이방연]]([[조선 태조|조선 태조 이단]]의 여섯째아들)의 양자(養子)였던 [[이중군|금산군 이중군]](金山君 李仲窘)의 양자 출계를 하였다. 사정공부사(司正公府使)를 지냈다.
         * [http://www.rfo.co.kr/view_party.php?activePage=2&keyword=&sort=&list_mode=people1&refnum=021 대한제국 조선 황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 청릉군 이희철]
         {{토막글|조선}}
         [[분류:1426년 태어남]][[분류:1486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태종]][[분류:조선 세종]][[분류:유교 신자|이희철]]
  • 최남선
         |출생지= [[조선]] [[한성부]]
         [[한성부]] 출생이고 한때 [[철원군 (남)|강원도 철원]]과 [[창원시|경상남도 창원]]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대한제국]]의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갔으나 중퇴와 복학을 반복하다가 1907년 [[와세다대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귀국했다. 1907년 [[이광수]]와 함께 [[소년]]지를 창간했으나 [[한일 합방]] 후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당했고, 1912년 [[이광수]]의 도움으로 《붉은 저고리》, 1913년《아이들 보이》,《새별》등의 잡지을 발간하였으나 [[조선 총독부]]의 '신문지법' 명령으로 모두 강제 폐간되었다. 1914년에는 잡지 《[[청춘 (잡지)|청춘]]》을 발간했으나 1918년 [[일본]]의 압력으로 폐간당했다.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49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 낭독하였다. [[3.1 운동]]을 사주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투옥, 1921년에 석방되었다.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설립, 주간잡지 《동명(東明)》을 발행하였고 1924년 《[[시대일보]] (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자금과 총독부의 압력 등으로 폐간, 1925년 [[동아일보]]의 객원과 [[조선일보]] 객원 논설위원을 지냈다. 1927년 총독부의 연구비와 생계 지원 유혹으로 [[조선사편수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친일 성향으로 전향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친일 행적은 적극적인 친일이 아니라는 반론이 1950년대에 [[장준하]] 등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ref name="changs">[[장준하]], 「육당 최남선 선생을 애도함」, 『[[사상계]]』 53호, [[사상계사]], 1957.12.</ref>
         [[1957년]] [[10월 10일]] [[뇌일혈]]로 별세한 그는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에 [[이광수]],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다.
         같은 해 10월 그는 [[조선]]의 귀중한 옛 책들을 다시 간행하였으며, 민족 문화를 널리 퍼뜨리기 위한 국가적인 사업을 일으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해 조선고서를 [[한글]]로 번역, 발간하였고, 20여 종의 육전소설(六錢小說)을 발간했다. 한편 그는 조선광문회를 통해 [[조선어]] 사전 편찬 계획을 세우고 구상했었다. 조선어 사전 편찬계획 세우는 그 과정에서 당시 《[[동국통감]]》, 《[[열하일기]]》 등을 비롯한 20여 종의 고전이 간행되었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잡지 창간을 계속해왔지만, 1911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소년》이 폐간되었다. 이듬해 1912년 [[이광수]]의 도움으로 《붉은 저고리》, 1913년 《아이들 보이》, 《새별》등의 잡지을 발간하였으나 [[조선 총독부]]의 '신문지법' 명령으로 모두 강제폐간되었다.
         1914년 몇몇 뜻있는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다시 종합 계몽 잡지 《[[청춘 (잡지)|청춘]] (靑春)》을 발간하여 새로운 지식의 보급과 민중 계몽을 위해 공헌했으나 이 역시 총독부에의해 [[1918년]] 강제폐간되었다. 1918년 《[[청춘 (잡지)|청춘]]》에 역사 연구 논문인 《계고차존》(稽古箚存)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신문관에서 많은 책과 잡지를 발행하는 한편 한민족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조선광문회]]’를 1910년 설립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체포되어 2년 8개월형을 받아 복역한 뒤 1921년 10월 18일에 가출옥하였다. 그 뒤 변절하였다는 설이 있다. 가출옥 사유는 “청년들을 규합하는 데 대단히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었다. 총독부는 [[조선은행]] 총재 미노베(美濃部俊吉)에게 잡지 《[[동명]]》의 발행 자금을 지원토록 주선하였으며, 그 이유를 최남선의 출판물이 “조선의 사상계의 악화를 구하고, 또 [[진학문]](秦學文)·[[이광수]] 등의 생계비 출처로 삼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가출옥 후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창립했다. 같은 해 9월 주간지 '동명'을 창간해 [[1923년]] 6월까지 발행했다. [[1925년]]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계명구락부'활동에 참여했고, 동시에 《[[동아일보]]》에 사설을 쓰는 한편, 1926년 옛 백제 영토 방문기 '심춘순례'를 근대 최초의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를 출간했다. 이어 〈[[단군론]]〉(1926년), 〈[[불함문화론]]〉(1928년)을 발표하였는데, 특히 〈불함문화론〉에서 그는 동방 문화의 근원지를 단군 신화의 무대인 백두산이라고 주장하였다.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설립, 주간잡지 《동명(東明)》을 발행하였고, 국사 연구에 전념하여 《조선역사통속강화》를 연재했다. 1924 《[[시대일보]] (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자금도 부족하였고, 신문의 반일적인 논조로 [[조선총독부]]의 압력을 받아 경영난에 처하자 곧 사임하였다. 1925년 [[동아일보]]의 객원과 [[조선일보]] 객원 논설위원이 되어 사설과 칼럼을 발표하였다.
         1927년 계명구락부의 기관지 《[[계명]]》 제18호에 [[일연]]의 《[[삼국유사]]》 전체를 게재하게 하였다.<ref>《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스토리텔링 삼국유사 1) (현암사, 2009) 24~25쪽. {{ISBN|978-89-323-1536-2}} “1927년, 계명구락부의 기관지 『계명』에다 일연(一然)의『삼국유사(三國遺事)』 를 실은 것이었다.” </ref> 같은 해 총독부가 집과 연구 비용을 지원한다고 회유하자 그해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다.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총독부의 조선사 편수회에 가담한 일로 [[이광수]]와 절교하고, [[한용운]]과 [[홍명희]] 등도 연이어 그와 결별 선언을 했다. [[한용운]]은 그의 나무 위패를 새기고 장례식을 거행하여 그를 조롱하려고 시도했다.
         1920년대에 문화 운동 활동한 동시에 같은 해 1928년 10월 [[조선총독부]] 내에 [[식민사관]] 유포를 위해서 만든 어용단체인 ‘[[조선사 편수위원회]]’를 창립했을 때 편수 위원직을 맡았다. 1930년 8월 [[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 교수와 조선총독부·조선사편수회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연구'를 표방하며 조직한 [[청구학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37년 중추원 참의를 맡아 1938년 3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2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7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조선문화의 당면과제'를 연재해 조선문화의 일본화야말로 당면한 문제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라며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사설을 기고했다. 이어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총독부 어용기관지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각종 친일논설을 게재했다.
         1943년 귀국 직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가 강연활동을 한 후 그해 중순 귀국하였다. 1943년 11월 다시 [[이광수]]와 함께 학병 독려의 목적으로 출국했다.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는 1943년 11월 24일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전문·대학생들에게 학병에 지원하라는 강연을 했다.<ref name="daedams">[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3/03/2007030300046.html “화랑 사상 지금 부활해도 좋을듯…”] 조선일보 2007.03.03</ref> 당시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 ‘조선화보’(1944년 1월호)에서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사회로 진행된 육당과 춘원의 대담 내용이 기록되었다. 이 대담에서 춘원은 강연회에 대해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라며 “그때의 압권은 최(남선) 선생님의 강연이 아니었을까요”라고 말했다. 육당은 “적어도 천오백 명은 모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며 “일찍이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요”라고 화답했다.<ref name="daedams"/>
         *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 《조선조선민족(朝鮮及朝鮮民族)》, 1927년
         * 《조선역사》
         * 《조선유람기》
         * 《조선 독립운동사》
         1944년 1월의 조선화보에서 육당의 계몽가요 ‘경부철도가’(1908)가 일어로 번역된 영국 시인 바이런의 ‘해적’을 일본의 신체시 형식으로 모방했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ref name="daedams"/>
         * [[조선일보]]
  • 최동
         |출판사=조선일보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38년]]에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을 지냈고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을 맡았다. 1941년에 [[동양지광]]이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자격으로 참석해 [[황인종]]의 시각에서 [[미국]]과 [[영국]]을 비난하는 내용의 강연을 한 일도 있다. [[1945년]] 광복 직후 제4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1947년 12월 4일 Severance 의과대학으로 승격시켜 6년제를 만들었고,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황인종]]의 우수성을 논하고 [[한민족]]의 시원을 먼 곳에서 찾는 최동의 논리는 《[[조선]]문제를 통하여 본 만몽(滿蒙) 문제》(1932)에서와 같이 일제의 [[만주]] 침략이나 [[대동아공영권]]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오랜 집필 작업 끝에 은퇴 후인 [[1966년]]에 《[[조선상고민족사]]》를 탈고했고, 이 업적으로 [[1968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 [[조선임전보국단]]
  • 최두선
         |출생지= [[조선]] [[한성부]]
         [[1920년]] [[6월 16일]] [[경성부]] 명월관에서 열린 [[조선체육회]]발기인회에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ref>이학래 《한국체육사연구》 (국학자료원, 2006) 375~376페이지</ref>
  • 최명길
         * [[최명길 (1586년)|최명길]](1586년 ~ 1647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 최석민
         | 작위 = [[조선귀족|남작]]
         | 후임자 = [[최정원 (조선귀족)|최정원]]
         '''최석민'''(崔錫敏, [[1858년]] [[8월 6일]] ~ [[1915년]] 양력 [[12월 20일]])은 [[조선]] 말기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와 포상금 형식의 [[은사공채]](恩賜公債) 2만 5천원을 받았다. 조선귀족 중 남작 작위는 본래 전직 관료에게 주어졌으나, 그는 칙임관 1등 이상의 현직에 재직 중인 것을 기준으로 이 작위를 수작했다. 최석민의 작위는 양자 [[최정원 (조선귀족)|최정원]]이 습작했다. [[1911년]] [[8월 29일]]에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1주년을 기념하는 축사를 《[[매일신보]]》에 게재하기도 했다.
         [[분류:1858년 태어남]][[분류:1915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조선남작]][[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최씨]]
  • 최영이 (종교인)
         '''최영이'''(崔榮伊, [[1818년]] ~ [[1840년]] [[2월 1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바르바라'''(Barbara)이다.
         [[1840년]] [[2월 1일]], 최영이는 [[한양]] 근교의 [[당고개역|당고개]]로 압송되어 [[이문우 요한]]과 [[홍영주 바오로]]와 함께 [[참수형]]을 받았다. 그렇게 그녀가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23세였다. 그 전날에는 최영이의 어머니가 처형 받아 순교하였는데, 모녀가 같이 순교하지 못한 까닭은 당시 [[조선]]의 [[형법]]에 따르면 친족을 같은 날에 처형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최창흡
         '''최창흡'''(崔昌洽, [[1786년]] ~ [[1839년]] [[12월 29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다.
         최창흡은 [[1786년]] 경에 [[한양]]에 있는 한 [[중인]] 신분의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13살일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천주교]]의 [[교리]] 수업을 시작했지만, [[세례]]는 받지 않았다. [[박해]]로 인해, 그는 교우들과 멀어진 이래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815년]]에 그는 한 천주교 공동체에 입회하여 교리를 다시 배웠다. 그는 온화한 성품을 지녔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신유년의 박해]] 동안에, 그의 집안은 파산하였다. 그러한 곤궁한 상황 속에서, 그는 [[손소벽]]과 결혼하였고, 열한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들 중 아홉 명은 어릴때 운명을 달리했다. [[1821년]]에, [[조선]]에 [[콜레라]]가 창궐하여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최창흡은 그 무렵에 세례를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천주교]] 신자로서의 모든 의무를 지켰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했을 때, 최창흡은 가장 독실한 신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는 제가 젊어서 저지른 [[죄]]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것들을 속죄하고 제 [[영혼]]을 구원받기 위해서 [[하느님]]을 위해 죽어야만 합니다."
  • 추증
         [[조선]]에서는 종친(왕족), 문관, 무관 가운데 2품 이상인 관료는 그의 조상을 삼대까지 추증하여, 부모는 본인의 품계에 준하고 조부모와 증조부모는 본인의 품계에서 1품계를 강등하여 관직을 주었다. 또한 아내에게는 남편의 벼슬에 준하는 품계를 주었다. 이를 삼대 추증(三代追贈)이라 한다. 또한 왕비의 친정아버지(왕의 장인)에게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대군(大君)의 장인에게는 정1품 [[의정부]][[좌의정]]을, 군(君)의 장인에게는 종1품 [[의정부]][[우의정]], 세자의 장인에게는 종1품 [[의정부]] [[좌찬성]] 등을 각각 본인 사후에 추증하였고<ref>그 직책보다 낮은 직책을 지낸 사람에 한해서</ref>, 그 위의 삼대에도 그에 맞게 추증하였다. 공신의 아버지에게도 일정한 직위를 주었다. 공신의 아버지에게는 그 공신의 직책에 준하는 공신직책을 부여하고 자손의 관직에 준하는 직책을 추증하거나, 관직을 지낸 사람은 그가 살아생전에 최종적으로 지낸 관직에서 1계급을 더 추가로 추증하는 방식이었다.
         [[분류:조선의 관직과 칭호]][[분류:고려의 관직과 칭호]][[분류:일본의 율령제]][[분류:정치 용어]][[분류:군사 용어]][[분류:칭호]][[분류:시호]][[분류:사후 인정]]
  • 칠곡군
         1914년 인동군(仁同郡)을 병합하고 군청 소재지를 구 [[칠곡(대구)|칠곡]](현재의 [[대구광역시]] 칠곡)에서 현재의 왜관으로 옮겼다. 당시 인동군은 현재의 [[구미시]] [[낙동강]] 동부 지역(인동동, 진미동, 양포동)과 오태동, 칠곡군 석적읍, 북삼읍, 약목면, 기산면 일대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이때문에 칠곡[[향교]]도 현재 대구 북구 읍내동에 있다. 동네 이름 자체도 '[[읍내]]'동이다('읍내'는 [[조선]]시대 각 군현의 소재지가 있던 곳임을 의미한다). 원래 왜관은 약목면 관호리에 있었다. [[8.15 광복|해방]] 이후 1949년 왜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 [[조선희(사진가)|조선희]] : [[숭례문 방화 사건]] [[채종기(범죄자)|채종기]] 의막내딸
  • 클라라(배우)
         [[분류:한국 여배우]][[분류:조선인물]][[분류:재한 영국인]][[분류:1447년 출생]][[분류:라디오 스타의 역대 게스트]][[분류:영덕군 출신 인물]]
         || '''국적''' ||<(> [[조선]] ||
         >1) 맞습니다. 어제 디스패치에서 보도한대로 제가 수영복 사진과 속옷 사진을 카톡으로 이규태 회장[* 전 [[조선일보]] 수필가/컬럼니스트였던 故 이규태와는 동명이인.]님에게 보냈습니다.
         [[분류:조선 인물]]
  • 탁신 (조선)
         |사망지= {{국기나라|조선}} [[한성부]]
         |거주지= {{국기나라|조선}}
         |국적= [[고려]] → {{국기나라|조선}}
         '''탁신'''(卓愼, [[1367년]] ~ [[1426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이다. 본관은 [[광산 탁씨|광주]](光州). 자는 자기(子幾)·겸부(謙夫)·계위(係危), 호는 죽정(竹亭)이다. [[조선 태종]] 때 지신사(知申事), [[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내고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세종]] 때 [[예조]][[참판]], [[의정부시|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올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분류:1367년 태어남]][[분류:1426년 죽음]][[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고려의 문신]][[분류:고려의 학자]][[분류:고려의 정치인]][[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학자]][[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광산 탁씨]][[분류:조선 세종]]
  • 태종무열왕
         태종 무열왕에 대한 당대 신라인들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 이는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를 올린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는 신라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였다.<ref group="주">그러나 고구려의 [[태조왕]]의 경우에는 묘호로 봐야 되는가, 시호로 봐야 되는가에 대한 이견이 있다. 그 밖에 태조의 묘호를 받은 [[태조 성한왕]]이나, 국조의 묘호를 받은 [[박혁거세]]도 존재한다.</ref> 이에 대해 [[당 고종]]<ref group="주">《삼국사기》에는 [[당 중종]]이라 표기됨</ref>이 “당 태종이 위징(魏徵)·이순풍(李淳風) 등을 얻어 천하를 평정하는 대업을 이루었기에 태종이라 하였지만, 너희 신라는 바다 밖에 있는 조그만 나라임에도 태종의 호를 사용하여 천자의 칭호를 참칭하니 그 뜻이 불충하므로” 이를 고칠 것을 요구하자,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은 “(당 태종처럼) 무열왕도 김유신이라는 성신(聖臣)을 얻어서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다”며 완곡하게 거절하는 답서를 보냈다. 이 답서를 받은 고종은 그가 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이르기를 “33천(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내려가 유신이 되었다.”고 한 일이 있어서 이를 기록한 바가 있는데, 이 기록을 찾아 확인해보고서는 놀랍고 두려워서, 태종의 묘호를 허락했다고 한다.<ref name="유사-기이1"/> 훗날 [[조선]](朝鮮)의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고려]](高麗)의 [[왕건|태조]](太祖) 이래 역대 군주들의 묘호를 시호로 대체하고자 하는 [[조선 성종|성종]](成宗)에게 태종 무열왕의 선례를 들며 굳이 기록된 묘호를 뺄 필요는 없음을 주장하였다.<ref>《성종실록》 성종 18년 정미(1487년) 2월 경진(10일)조</ref>
         [[성덕왕]](聖德王)은 태종 무열왕의 명복을 빌고자 [[봉덕사]](奉德寺)를 지었으며,<ref name="유사-성덕왕">《삼국유사》 권제2 기이 성덕왕</ref> [[혜공왕]](惠恭王)은 오묘(五廟)를 정하면서 김씨로서 처음으로 왕이 된 [[미추왕]](味鄒王)과 더불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을 대대로 헐지 않는 신주(世世不毁之宗)로 삼았고,<ref>《삼국사기》 권제32 잡지 제1 제사(祭祀)</ref> 이것은 [[애장왕]] 2년([[801년]])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만 따로 떼어 모시는 사당을 지어 신주를 옮길 때까지 계속되었다.<ref>《삼국사기》 권제10 신라본기 제10 애장왕 2년(801)</ref> 9세기 중엽 신라의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郞慧和尙白月普光塔碑)』([[890년]]경 건립)에서 무열왕의 8세 손으로 당에 유학하여 불법을 배우고 돌아온 승려 [[낭혜화상]]의 행적과 무열왕의 업적을 교차대비시켜 "이때(태종 무열왕의 입당 후 귀국)부터 우리는 한 번 변하여 [[노나라]]가 되었다(自玆吾土一變至於魯)", "두 적국(敵國)을 평정하고 문명에 접하게 하여 주셨다(平二敵國俾人變外飭)"고 하여 태종 무열왕이 신라 국내의 제도를 당풍으로 개편하여 '문명화'시키고, 당시 신라뿐 아니라 중국에게도 적국으로 여겨지던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여 평화를 가져왔다고 찬양하였으며, 또한 [[진성여왕]] 7년([[893년]])에 당의 태사시중에게 보내는 글에서 옛날 고구려와 백제의 강성함과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 그 직후 무열왕이 당으로 들어가 수교를 맺고 원병을 청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과 이후 고구려의 유민들에 의해 세워진 [[발해]]와 당, 신라의 충돌 등의 사실들을 열거하면서 "3백여 년 동안 한쪽 지방은 무사하고 넓은 바다가 편안한 것은 곧 우리 무열대왕의 공로"라고까지 평가하였다. [[고려]]나 [[조선]]의 유학자들도 대부분 이와 비슷한 인식이었다.
         [[신채호]]는 민족주의적 견지에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를 다 똑같이 '신성한 부여족', 즉 '조선 한민족의 형제'라 부르며, 당과 손을 잡고 고구려와 백제를 친 김춘추(태종 무열왕)의 행동을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인” 격으로, “다른 민족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 백제를 없앤 역사의 죄인”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특히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4천 년간의 민족사는 [[부여족]] 소장성쇠(消長盛衰)의 역사라 하여 [[부여족]]이 주족이라는 인식하에 긍정적으로 평가되던 ‘[[삼국통일]]’의 대업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비판해 [[김유신]](金庾信)·[[김춘추]](金春秋) 및 [[김부식]](金富軾)의 공죄(功罪)를 논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고대사를 반도 중심으로 보았던 종래의 [[역사]] 인식 체계를 [[만주]] 중심과 [[단군]], [[부여족]]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ref>신채호, [[:s:ko:독사신론#제9장 김춘추의 功罪|〈독사신론〉 제9장 김춘추의 功罪]] 《대한매일신보》</ref>
         [[남북국 시대]]론을 지지하였으며 《조선상고사감》을 저술하기도 했던 [[안재홍]]도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것은 [[평양]]이나 [[관북]] 일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북방 영토를 방기한 데다 당의 명령을 빌어 외세의 힘을 이용한 [[신라]]의 행동에서 후세 역사에 등장한 소위 '[[사대주의]]'의 대부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평하였다.<ref>"新羅가 唐을 聯하야 麗濟를 깨뜨리매 渤海가 北方에서 再興하야 비록 南北朝 200년의 歷史를 나타내엇스나 分裂의 形勢는 드듸어 나흘 수가 업섯고 朝鮮의 勢力은 더욱 減殺됨이 잇섯다. 金庚信이 太宗 武烈王을 도아 統三의 業을 이루엇다 하지마는 당시의 記錄은 平壤이 오히려 茂草를 悲嘆하엿고 關北의 地 太半 荒廢하엿슴을 전하엿다. 하물며 唐의 誥命을 빌고 그의 節度에 應하는 등 外力을 이용하는 後世 所謂 事大政策은 이때부터 大部이나 作俑된 觀이 만타." 1926년 7월 1일자 〈[[개벽 (잡지)|개벽]]〉 제71호 「한양조 5백년 총평(漢陽朝五百年總評)」</ref>
         [[1993년]] [[성균관대학교]]의 김영하 교수는 [[천리장성]]의 예를 들어 축소된 강역으로 [[만주]]의 요동땅을 밟지못하고 고토를 잃고 살다가 [[조선]]에 와서야 겨우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백두산]]만을 찾을 수 있었다고 평가를 내놓으면서 당의 [[한반도]] 경략에 발맞추어 외세와의 공조로 [[백제]]만을 겨우 정복한 [[신라]]는 "통일을 완수할 힘도 의도도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고 '통일신라 시대' 대신에 '신라와 발해' 내지는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적극 주장했다.
         [[백제]]의 영토를 흡수하고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을 차지하게 된 신라는 후대의 한반도 통일국가인 [[고려]], [[조선]]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에 7세기 말에 신라인들이 사용했던 '삼한일통'이나 '삼국통일'과 같은 말은 [[19세기]]까지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져 계속 쓰였다.<ref>박노자,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163000/2008/07/021163000200807160719009.html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인가]. 《한겨레21》 제719호 (2008년07월16일)</ref>
         * [[김경중 (1863년)|김경중]], 《조선사》
         * [[신채호]], 《조선상고사》
         * 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 (독사신론, 조선사연구초, 사론, 외)》 (박기봉 역, 비봉출판사, 2007)
  • 토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의 통치자가 된 히데요시는 야욕이 더욱 강하게 가져, [[명나라]]를 정벌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 토탈워: 쇼군 2/가문
         자신들이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이들로, 실제 역사에서는 시코쿠 전체로 세력권을 넓혔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굴복해야 했다. 이후 [[큐슈]]와 [[조선]]에 원정을 가기도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벌어진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세력 다툼에서 도요토미 가문을 지지했다가 도쿠가와가 승리하며 모든 권력을 잃게된다.
         실제 역사에서는 [[큐슈]]까지 뻗어나갔으나 오다 가문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오다 가문의 다이묘이던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에게 통수맞고 죽어버리는 덕분에 살아남았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실한 가신으로 활동해 조선에 군대를 보내기도 했다.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도쿠가와 가문간의 분쟁에서는 도요토미 가문 지지 세력인 서군을 이끌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가문 상대로 빠르게 딜을 하고 빠져나갔다. 그 결과 모리 가문은 초소카베 가문처럼 망하지 않고 영지 대다수를 몰수당하는 선에서 끝나게 된다. 모리 가문은 자신들이 도쿠가와 가문을 도왔음에도 영지를 몰수당했다는 것에 반감을 느끼게 되었고, 이 원한은 [[토탈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200여년 뒤에 폭발하게 된다.]]
  • 폐비 윤씨
         |작위 = [[조선의 역대 왕비|왕비(폐비)]]
         |배우자 = [[조선 성종|성종]]
         |자녀 = 이효신, [[조선 연산군|연산군]], 왕자
         }}</ref> ~ [[1482년]] [[8월 29일]] ([[음력 8월 16일]]))는 [[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 尹起畝)<ref>조선왕조실록에는 둘 모두 쓰였으나, 윤기무라는 이름이 비교적 적게 등장하므로 {{출처|날짜=2009-03-14|윤기견의 오기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한편 작가 [[신봉승]]은 자신이 집필한 드라마 《[[한명회 (드라마)|한명회]]》의 제94회에서, 윤기무는 윤기견의 아우로 슬하에 자식이 없었음이 [[함안 윤씨]]의 세보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고, 이를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ref> 와 고령 신씨(申氏)의 딸로 [[조선]]의 제9대 임금 [[조선 성종|성종]]의 계비이자 둘째부인으로 투기와 남편인 [[조선 성종|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내어 폐위되었다.
         [[1473년]] [[조선 성종|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의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王妃)로 책봉되었으나 남편 용안에 상처를 내어 폐비(廢妃)되어 사사되었다. 아들 [[연산군]] 즉위 후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삭탈되면서 죽을 당시의 폐서인 신분으로 돌아갔다.
         남편 [[조선 성종|성종]]의 후궁들 문제로 시어머니인 [[소혜왕후|인수대비]]와 고부갈등으로 유명하며, [[조선 성종|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낸 일로 인해 폐비(廢妃)된 후 사사되었다. 사사 당시 윤씨는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세자가 자라서 왕이되거든 피를 토한 금삼을 넘겨줄 것을 유언했고, 이는 후일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도화선이 된다. [[조선 연산군|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가 되는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왕비(王妃)의 작호를 추숭시켰다. 그러나 [[중종 반정]]이 일어난 후 왕후(王后)의 호는 삭탈되었다.
         [[조선 성종|성종]]과의 슬하에 세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장남은 이효신(李孝信), 차남은 조선 10대 왕 [[조선 연산군|연산군]]이고 셋째 아들은 조졸하였다. [[신숙주]]는 윤씨의 외당숙이며, [[조선 명종|명종]] 때의 권신 [[이량 (조선)|이량]]은 윤씨의 오빠 [[윤구 (조선 전기)|윤구]]의 손녀사위이다.
         할아버지 [[윤응]](尹應)은 통훈대부(通訓大夫) 교하현감(交河縣監)이었고, 증조 할아버지 [[윤득룡]](尹得龍)은 [[조선]]조정에 처음 벼슬하여 자헌대부 (資憲大夫) 와 호조판서 (戶曹典書) 를 역임했다.
         일부 현대극이나 야사 등에서 그녀의 아버지 [[윤기견]]의 죽음으로 인해 집안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궁녀로 입궁했다고 하지만<ref>[[2011년]] 방영된 [[JTBC]]의 드라마 《[[인수대비 (드라마)|인수대비]]》 등에서는 폐비 윤씨가 궁녀로 입궁한 것으로 그렸다.</ref>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희왕후]](자성대왕대비)가 그녀를 훗날의 [[정현왕후]]가 되는 [[윤호]]의 딸과 함께 입궁시켜 숙의(淑儀)의 첩지를 내린 사실이 명백히 표기되어 있다.
         당시 윤씨는 임신 중인 몸으로, [[8월 27일]]([[음력 8월 9일]]) 왕비(王妃)로 책봉되어 3개월 뒤인 [[11월 23일]]([[음력 11월 7일]])에 적통대군인 [[조선 연산군|원자]]를 낳아 중전(中殿)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조선 성종|성종]]이 자신의 처소인 [[교태전]]에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다른 후궁들을 질투하여 잡아다가 추궁, 취조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 성종의 눈밖에 났는데, 남편과 말싸움 중 남편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는 설이 있고, 다른 설로는 삼사의 탄핵으로 폐출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그녀에 대한 왕실의 사후 예우를 본다면 왕실의 눈밖에 나 폐위된 것이 유력하다.
         또한 경쟁관계에 있던 [[조선 성종|성종]]의 다른 후궁들이 [[인수대비]]를 찾아가 윤씨를 비판하며 그녀의 폐위를 부추기기도 하였다.<ref>
         훗날 [[조선 연산군|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면서 [[1504년]]에 [[갑자사화]] 등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로 인해 [[한명회]], 한치형 등의 사람들이 부관참시를 당한 데 이어 그 이외의 사람들이 사사되거나 유배되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의 [[조선 연산군|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조선 연산군|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齊獻王后)에 추숭되고, [[회묘]]는 회릉(懷陵)으로 격상되었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반정]]으로 [[조선 연산군|연산군]]이 폐위되어 [[조선 연산군|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윤씨에게 올린 관작과 존호는 모두 삭탈되었고,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친정오빠 [[윤구]]의 손녀사위는 [[조선 명종|명종]]비 [[인순왕후]]의 외삼촌이자 권신인 [[이량 (조선)|이량]]이다.
         *** 오빠 : 병조참판 [[윤구 (조선 전기)|윤구]](兵曹參判 尹遘, 미상~1513)
         * 시아버지 : 추존 [[조선 덕종|덕종]](德宗, 1438~1457)
         ** '''남편''' : 제9대 [[조선 성종|성종]](成宗, 1457~1495, 재위 1469~1495)
         *** 아들 : 제10대 [[조선 연산군|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4~1506)
  • 하동부대부인
         |출생지 = {{국기나라|조선}} [[조선]] [[한성부]]
         |사망지 = {{국기나라|조선}} [[조선]] [[도정궁]]
         |국적 = [[조선]]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1522년]] [[9월 23일]] - [[1567년]] [[6월 24일]])는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정인지]]의 후손이며 [[조선]] 제14대 [[선조]]의 사친이자 [[덕흥대원군]]의 부인이다. [[조선 중종|중종]]의 서자 [[덕흥군]]과 가례를 올려 군부인이 되었으며, [[1567년]] 셋째 아들 [[조선 선조|선조]] 즉위 직전에 사망하였다. 사후 임금의 사가 생모로서 '''하동부부인'''으로 추증됐으나 정의상의 오류로 인해 '''하동부대부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본관은 [[하동 정씨|하동]](河東)이다.
         하동부대부인은 영의정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증손녀이며, 판중추부사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정세호]]의 딸로 1522년(중종 17) [[9월 23일(음력 9월 4일)]]에 태어났다. [[조선 중종|중종]]의 서자<ref>창빈 안씨 소생으로 중종의 서9남</ref> [[덕흥대원군|덕흥군]]과 가례를 올리고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으로 제수되었다. 자녀로는 3남 1녀를 두었고, [[1567년]](명종 22) [[6월 24일(음력 5월 18일)]] 향년 46세 일기로 별세하니 [[왕비]] 부모를 장사지내는 예로 장사지냈으며, 같은 해 [[8월 9일]] 신주를 대원군 옆 이실(異室)에 모셨다.
         셋째 아들 [[조선 선조|하성군]](河城君) 균(鈞)이 [[조선 명종|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조선 선조|선조]]로 즉위하였다. 선조는 생부와 생모를 [[1569년]](선조 2)에 송(宋)나라 [[북송 영종|영종]](英宗)의 생부 [[복안의황|복왕]](濮王)을 [[추존]]하는 고사(故事)를 따라 생부 [[덕흥군]]을 추숭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하고, 생모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부인(河東府夫人)으로 추존하였다.
         [[조선 명종|명종]] 부부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으로 즉위한 [[조선 선조|선조]]는 [[조선 예종|예종]]부부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하였다가 즉위 직후 스스로를 파양하고 친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한 [[조선 성종|성종]]과는 달리 강력한 배경도 없었으며 생부 [[덕흥군]]이 후궁 소생 왕자에 불과하여 부모를 왕과 왕후로 격상할 수 없었다. 이에 절충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작위가 공신 정1품의 작위로 왕비의 아버지의 작위로도 쓰여진 부원군(府院君)의 부(府)를 대(大)로 교체한 대원군(大院君)이다. [[조선 선조|선조]]는 생부 덕흥군을 조선 최초의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으로 추증하였고, 생모 군부인(郡夫人) 정씨는 외명부 소속 왕실 여성의 최고 품작인 부부인으로 추증하였다.
         {{인용문|중종 공희 대왕의 손자이며,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岧)의 셋째 아드님이다. 어머니은 하동 부부인 정씨(河東府夫人鄭氏)로 증 영의정 정세호(鄭世虎)의 따님이다.|《조선왕조실록》선조 총서}}
         {{인용문|선묘(宣廟) 때에도 국장(國葬)이 세 차례나 있었지만 모두 궐문 안에서 곡송만 하였다고 사람들이 모두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동 부부인(河東府夫人) 발인 때에는 선조께서 궐문 밖에서 곡송하려고 하였으나 예조가 아뢰어 대내의 뜰 아래에서 망곡(望哭)만 하였습니다.|《조선왕조실록》인조 12권, 4년(1626 병인 / 명 천계(天啓) 6년) 3월 2일(을사) 1번째기사}}
         {{인용문|옛적에 우리 선조 대왕께서 즉위하신 지 3년째 되는 기사년에 덕흥군을 추승하여 덕흥 대원군으로 하였고, 부인 정씨(鄭氏)를 봉하여 하동 부부인(河東府夫人)으로 하였으며, 자손이 습직(襲職)하여 계속 대군(大君)의 예에 따랐습니다.|《조선왕조실록》인조 13권, 4년(1626 병인 / 명 천계(天啓) 6년) 7월 27일(정유) 1번째기사}}
         이를 전례로 삼아 [[조선 인조|인조]] 역시 자신의 어머니 구씨를 부부인으로 책봉하여 연주부부인으로 삼았다가<ref>《승정원일기》[http://sjw.history.go.kr/inspection/search_result_list.jsp?oflag=0&M=0&query=%E9%80%A3%E7%8F%A0%E5%BA%9C%E5%A4%AB%E4%BA%BA&set_id=596444&selK=1&selT=1&query_im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9%80%A3%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7%8F%A0%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BA%9C%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A4%AB%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4%BA%BA%3C%2Fspan%3E&x=21&y=7 연주부부인]</ref>, 이후 [[인헌왕후]]로 추존하였다.
         하동부부인이 하동부대부인으로 오인된 것은 [[조선 영조|영조]] 즉위년에 [[조선 영조|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추보를 논의할 때 예조판서 [[이진검]]이 "선조(宣祖) 때에 덕흥군(德興君)을 높여서 ‘대원군(大院君)’이라고 하였고, 군부인(群夫人)을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고 하였다."고 잘못 진달하였기 때문인데<ref>《조선왕조실록》영조 1권, 즉위년(1724 갑진 / 청 옹정(雍正) 2년) 9월 21일(신유) 2번째기사</ref>, 사실 이는 [[이진검]]의 잘못이라기보다 [[조선 경종|경종]]2년에 부제학 이명헌이 [[조선 경종|경종]]의 사친인 [[희빈 장씨]]를 추보할 것을 상소하며 "선조조(宣祖朝)에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追崇)하였을 때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의논을 인용하여, 빈(嬪)자 위에 특별히 하나의 대(大)자를 더하고, 이어서 본관(本貫)을 취하여 모부대빈(某府大嬪)으로 삼을 것"을 시초로 한다.<ref>《조선왕조실록》경종 9권, 2년(1722 임인 / 청 강희(康熙) 61년) 7월 17일(경자) 1번째기사</ref> 당시 동석했던 [[이진검]]이 이명헌의 말을 잘못 기억하여 영조 즉위년에 잘못 진달하였을 가능성도 없진 않으나 예조판서인 [[이진검]]이 사실을 전혀 확인하지 않고 진달하였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만큼 [[조선 경종|경종]]의 각별한 충신이었던 [[이진검]]이 부대빈(府大嬪) 작호의 유지를 위해 고의적으로 잘못 진달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로 인해 이후 정씨의 작위는 다시 본래의 작호인 하동부부인으로 정정되어 불리기도 하다가 하동부대부인·하동부인·대원군부인으로 섞여서 일컬어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아들의 지위에 따라 어머니의 작호에 대(大)를 더할 수 있다는 세종14년 때의 법령과 이미 부대부인의 작호를 쓴 여성이 있었던 전례에 의거해 마땅히 부대부인으로 삼았어야 할 정씨를 부부인으로 삼은 것은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탓으로 짐작된다.<ref>《승정원일기》[http://sjw.history.go.kr/inspection/search_result_list.jsp?oflag=0&M=0&query=%E6%B2%B3%E6%9D%B1%E5%BA%9C%E5%A4%AB%E4%BA%BA&set_id=-1&selK=1&selT=1&query_im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B2%B3%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9D%B1%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BA%9C%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A4%AB%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4%BA%BA%3C%2Fspan%3E 하동부부인], [http://sjw.history.go.kr/inspection/search_result_list.jsp?oflag=0&M=0&query=%E6%B2%B3%E6%9D%B1%E5%BA%9C%E5%A4%A7%E5%A4%AB%E4%BA%BA&set_id=596421&selK=1&selT=1&query_im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B2%B3%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9D%B1%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BA%9C%E5%A4%A7%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A4%AB%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4%BA%BA%3C%2Fspan%3E 하동부대부인], [http://sjw.history.go.kr/inspection/insp_result_s.jsp?M=0&oflag=0&set_id=596427&selK=1&selT=1&query=%E5%A4%A7%E9%99%A2%E5%90%9B%E5%A4%AB%E4%BA%BA&query_Result=&sinfo=&list_per_page=10&chkID=0&opAll=0&opP=0&opA=0&opB=0&opR=0&opT=0&opG=0&opW=0&qAll=&qP=&qA=&qB=&qR=&qT=&qG=&qW=&idS=&idE=&tc=2&pc=2&cp=1&startpos=0&pos=0 대원군부인]</ref><ref>《조선왕조실록》영조 117권, 47년(1771 신묘 / 청 건륭(乾隆) 36년) 8월 9일(정축) 1번째기사 中 "그 사체에 있어서 창빈(昌嬪)·대원군(大院君)·하동 부인(河東夫人)을 대진한 후에 어떻게 합제(合祭)할 수 있겠는가?"</ref>
         이를 바탕으로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조선 철종|철종]]의 생부로서 대원군으로 추증된 [[전계대원군]]의 세 부인이 부대부인으로 봉해졌으며<ref>《조선왕조실록》철종 1권, 즉위년(1849 기유 / 청 도광(道光) 29년) 6월 17일(계미) 1번째기사</ref>, 이후 [[조선 고종|고종]]의 생모 여흥민씨 역시 부대부인으로 봉해져 왕족부인으로서 왕의 사친이 된 여성은 부대부인으로 봉작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현대 국어사전에는 부대부인을 왕의 사친의 작위로 정의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하동부부인은 본래 작위인 하동부부인이 아닌 하동부대부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 시아버지 : 제11대 [[조선 중종|중종대왕]](中宗大王, 1488~1544, 재위 1506~1544)
         ** 시어머니 : [[장경왕후 (조선)|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1491~1515)
         ** 시어머니 :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1565)
         **** 삼남 : 제14대 [[조선 선조|선조대왕]](宣祖大王, 1552~1608, 재위 1567~1608)
         ***** 손자 : 제15대 [[조선 광해군|광해군]](光海君, 1575~1641, 재위 1608~1623)
         ***** 손자 : 추존 [[조선 원종|원종대왕]](元宗大王, 1580~1619)
         * [[조선 선조|선조]]
  • 한규복 (1881년)
         '''한규복'''(韓圭復, <small>일본식 이름:</small> 井垣圭復, [[1885년|1881년]] [[7월 7일]] ~ [[1967년]] [[9월 13일]])은 [[대한제국]]의 관료, 통역관, 화가, 서예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관료, 화가, 서예가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친일파의 한 사람이었다.
         [[1899년]](광무 2년) 관비장학생으로 [[일본]] 유학, [[동경전문학교]]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서 수학하다가 [[1903년]] 귀국, 대한제국 관료로 임용되어 [[탁지부]] [[주사]], [[군부]]와 [[탁지부]]의 [[번역관]] 등을 거쳐 탁지부 [[서기관]], [[주임관]]을 역임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 [[한일 합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토지조사국]] 감사담당관, [[1913년]] [[진주군|진주]][[군수]], 이후 [[동래군|동래]][[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충청남도청]] [[참여관]], [[1924년]] [[경상북도청]] [[참여관]], [[1926년]] [[충청북도]][[도지사]], [[황해도]][[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1933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고 이듬해 재선된 뒤 [[중추원]] [[참의]]에 재선되었다.
         해방 후에는 정계에 참여하지 않고 [[한국곡자]]의 대표이사 등으로 활동하였고, [[1949년]] [[반민특위]]에 자수한 뒤, 조사받고 풀려났다. 이후 기업 활동과 언론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조선인 도지사 경력자 42명 가운데 배경이 되는 엘리트 출신 고위관료 8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서예]]에 능했던 그는 [[1926년]]부터 [[1930년]]의 선전(鮮展)에서 4회나 수상하였다.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이고 자(字)는 덕중(德仲), 호는 온재(溫齋)이다.
         [[1902년]]에는 [[와세다 대학]]에 다니면서 [[일본]]의 [[유도]]도장인 [[강도관]](講道館)에 다녔다. 공승화전개(일본 工勝花雷介)의 《비록일본유도(秘錄日本柔道)》의 기사와 일본강도관에 조회한 바에 의하면 [[1902년]] 한규복 등이 [[강도관]]에 입문하여 [[유도]]를 배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ref>김정행, 《무도론》 (대한미디어, 1997) 129페이지</ref> 그는 [[1902년]] [[8월]]부터 [[유도]]를 배웠다고 한다.<ref>이학래, 《한국유도발달사》 (보경문화사, 1989) 37페이지</ref> 일본의 유도 전승에 자극받은 그는 귀국 후 [[조선]]의 [[유도]] 단체를 지원하는 한편 상소를 올려 [[택견]] 관련 인물과 유파를 찾아 지원해줄 것을 정부에 상주하기도 했다.
         [[1910년]] [[10월 6일]] [[한일 합병 조약]] 체결 이후 다시 조선총독부 [[고등관]] 7등에 임용,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1臨時土地調査局) 감사관(監査官)에 임명되었다. 이후 임시토지조사국 측량과장과 정리과장을 거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감사담당관이 되었다. [[1913년]] [[1월]] 총독부 군수가 되어 [[경상남도]] [[진주군|진주]][[군수]] [[고등관]]6등(晉州郡守 高等官6等)이 되고, [[경상남도]][[참여관]]을 겸직하였다. [[1914년]]부터 [[1915년]]까지 [[경상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을 역임했다. 그밖에 [[농업]] 단체인 [[조선농회]] 경상남도지회에 상의원으로 가입하였다. [[1916년]]과 [[1917년]] [[경상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조사위원에 재위촉되었다.
         [[1926년]] [[8월]]에 다시 도지사로 승진, [[8월 14일]] [[충청북도]]도지사가 되고 [[1929년]] [[4월]] [[고등관]]1등(高等官1等)으로 승급되었다. [[1929년]] [[11월 28일]] [[황해도]][[도지사]]로 부임하였다. [[1930년]] [[1월 24일]] [[황해도농민회]] 회장에 임명되었다.<ref>조선총독부 관보 1930년 01월 24일자</ref> [[1930년]] [[2월]] [[황해도]] 도지사에 재임명된 뒤 [[1933년]] [[4월 7일]]에 사직서를 내고 퇴직했으나 그해 [[6월 4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中樞院勅任官待遇參議)에 임명되었다. 중추원 참의로 재직하면서도 그는 수당에만 의존하지 않고 기업인으로 활동하면서 경성부 교화단체연합회 서부교화구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34년]] 중추원 참의에 재선되었다. 특히 [[태평양 전쟁]] 기간 중 [[흥아보국단]],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국민동원총진회]] 등 여러 전쟁 지원 단체에 적극 가담했다.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던 그는 [[1926년]]부터 [[1930년]]의 선전(鮮展)에서 4회 걸쳐 수상하였다.
         [[1933년]] [[7월 21일]]에는 중추원 시정조사위원회 학예부장이 되었다. [[10월 21일]]에는 소작농심의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34년]] 경성부 교화단체연합회 서부교화지구위원장(京城府敎化團體聯合會 西部敎化地區委員長)이 되었다. [[1934년]] [[7월 14일]] [[금융]]단체의 연합회인 [[금융조합연합회]] 창립에 참여, 자문상담역<ref>"금조연합회, 자문기관 설치", 조선중앙일보 1934년 07월 22일자 4면</ref>에 위촉되었다. [[7월 21일]] [[금융조합연합회]] [[경기도]]지역 참여에 임명되었다. [[1934년]] 여름 홍수로 [[조선]] 삼남 지방에 수해가 심해지자, 그해 [[8월 30일]] [[조선총독부]]에서 [[치소조사위원회]]를 설치할 때 그는 민간측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일본 정부는 한규복에게 여러차례 훈장을 수여해 공적을 인정했다. [[1929년]] 훈3등 서보장을 받는 등 퇴관할 때에는 정4위 훈3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된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ref>{{뉴스 인용
         |제목=‘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1936년]]에는 그는 [[참정권]]을 얻어낼 계획을 세웠으나, 일제 당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ref name="jiji">송건호, 《송건호전집 4: 한국현대사 2》(한길사, 2002) 100페이지</ref> [[이규완]]의 [[조선인]][[참정권]]론, [[자치]]권 획득론에 공감하게 된 그는 [[박중양]]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에 조선인 참정권을 허용해줄 것을 여러 번 건의하였으나 번번히 묵살되었다.
         [[지원병제]]는 [[1930년]]대 중반부터 일부 친일 유지층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제기되었다. 먼저 [[박춘금]](朴春琴)이 [[대의사]](代議士)가 된 후 일본국회에서 이 문제를 들고 나왔고, 그후 친일인사들에 의해 여러 번 건의되었다. [[1936년]] [[11월 24일]] 경성부회의원 조병상(曺秉相), 중추원참의인 한규복 등이 중심이 되어 30여 명의 간담회를 열어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추진키 위해 위원 8명으로 기성회를 구성하고 [[1937년]] 발회식(發會式)을 가질 예정이었다.<ref name="jiji"/> 그러나 [[일본]] 당국은 이 문제가 [[참정권]]하고도 관계가 있다 하여 일단 중지시켰다.<ref name="jiji"/> 이후에도 그는 [[조선총독부]]에 참정권 허용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한다.
         [[1937년]] [[1월]] [[방송선전협의회]](放送宣傳協議會) 위원으로 위촉되어 수양강좌·부인강좌·상식강좌의 강사로 출연하였고, [[7월]] [[중추원]] 주최 행사에 참여하였다. 동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들의 소득을 조사할 목적으로 국민소득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 한규복은 국민소득조사위원회 경성지역 관내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8월 3일]]부터는 [[10월]]까지 총독부 학무국에서 지나사변 이후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고자 순회시국강연위원회를 조직할 때 연사가 되어 [[서울]]과 각지에 시국강연을 다녔다. [[8월 16일]]에는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시국강연을 하였다. [[9월 10일]]에는 용인공보교 대강당에서 [[용인군]] 지역 시국강연회를 주최하였다.
         [[1938년]] [[조선간이생명보험사업 자문위원회]] 자문위원에 위촉되었다. [[1938년]] [[3월 3일]] [[성남고등보통학교]] 재단인 [[원석학원]] 재단 이사가 되었다. [[5월]] 재무간담회(財務懇談會) 회장에 선임되었다. [[5월 17일]] 체포된 법학자 [[정광현]]에 대해 선처를 호소하여 석방시켰다.<ref name="yunchi381">윤치호, 《윤치호 일기 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381페이지</ref> [[서대문경찰서]] 서장을 만나 '나를 봐서라도 [[정광현]]에게 선처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5월 17일]] 오전 9시 30분, 서장은 한규복의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였다.<ref name="yunchi381"/>
         [[1938년]] [[8월]] 설치된 총독부내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 97명 가운데 한규복은 [[김연수 (1896년)|김연수]](金秊洙), 박영철(朴榮喆), [[박중양]], [[박흥식 (1903년)|박흥식]], [[윤덕영]], 이기린(李基燐), [[이승우]](李升雨), [[최린]](崔麟), [[한상룡]](韓相龍), [[현준호]](玄俊鎬) 등과 함께 조선인 위원 11명 가운데 1명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해 [[육군특별지원병령]]이 공포, 시행되자 한규복은 윤치호, 이승우, 조병상, 조성근 등과 함께 지원병제 축하회 구성을 위한 타협발기인회를 열고 실행위원진을 구성하였다. [[7월 8일]] [[국민정신총동원연맹]] 경성지회 설립에 참여하고 이사가 되었다. [[10월 7일]]에는 [[중일전쟁]] 등 부상병을 위문하기 위해 [[용산육군병원]]을 방문하고 [[금일봉]]을 지급하였다.<ref>"中樞院參議 傷病兵慰問", 동아일보 1938년 10월 07일자 2면, 사회면</ref>
         [[1939년]] [[6월 4일]] [[중추원]] 참의로 재선되었다. [[8월 5일]]에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주최로 전국 순회강연을 할 때, 순회강사가 되어 국민 저축 장려를 목적으로 '백억 저축 생활 쇄신'이라는 주제로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다. [[9월 26일]]에는 각지의 노무자와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만든 [[사회조사위원회]] 위원에 피임되었다.<ref>"勞務者와 細窮民을 來月中에 綜合調査", 동아일보 1939년 09월 26일자 2면, 사회면</ref> 그해 [[9월 30일]] [[경성]]에서 자본금 백만원을 투자하여 [[조선공영회사]](朝鮮工營會社)를 창립하고 대표이사 사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5일]] [[조선중앙임금위원회]] 임시위원으로 선임되면서 사퇴했다. [[12월 22일]] [[세제조사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939년]]부터 그는 [[경성부]], [[충주군]], [[함양군]], [[수원군]], [[용인군]], [[양주군]] 등을 다니며 저축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1939년]]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참여에 선임되었다. [[1940년]] [[5월 30일]]에는 [[동아일보]]에 "저축과 국민생활"이라는 주제의 칼럼을 발표하였다.<ref>"貯蓄과 國民生活", 동아일보 1940년 05월 30일자 5면, 생활/문화면</ref> [[5월 30일]]과 [[5월 31일]], [[6월 1일]]에는 경성중앙방송국에 출연하여 저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5월 31일]] 오후 7시 30분에는 경성제2방송국에 출연하여 저축의 필요성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1941년]] [[12월]] [[중선주조조합연합회]] 회장에서 해임되었다. [[1942년]] [[4월]] [[조선맥자주식회사]](朝鮮麯子株式會社) 취체역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해 [[5월]]에는 [[재무간담회]] 회장직을 사퇴했다.
         [[1942년]]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고 [[조선인]] [[참정권]] 허용 문제가 [[일본]] 의회 [[중의원]]과 [[귀족원]]에 상정되자,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부단장 자격으로 일본 수상과 참모총장에게 감사 전보문을 타전하고, 그해 [[5월 15일]] [[경성부|경성]] YMCA에서 [[이광수]](李光洙) 등 명사들을 초청해 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42년]] [[9월]]에는 [[조선국자주식회사]] 회장에 취임하였으나 [[1943년]] [[6월]] 사퇴하였다. [[1943년]] [[국민총력연맹]] 징병기념사업실행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에 피선되었다.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당시 한규복은 일제 치하에서 관리를 지냈을 뿐 “양심에 비추어 민족정신을 망각한 사실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관비로 유학을 마치고 대한제국 관리로 일하다가 “한일합병과 동시에 다시 왜인에게 아부하여 조선총독정치에 헌신한 유일한 친일분자”로 평가했다.<ref name="neftkin"/> 당시 그를 심문한 이는 위원장 [[이인]] [[변호사]]였다.
         한규복은 자신은 오로지 민중의 계발 보도를 위해 일했음을 강조하였다.<ref name="parksgi86"/> 또한 자신은 "민족 지도자"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ref name="parksgi87">박지향, 《윤치호의 협력일기》 (도서출판 이숲, 2012) 87페이지</ref> 심문 과정에서 그는 잘못된 점이 있다면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저항하되, [[조선총독부]]의 정책이나 일본의 정책을 맹신, 맹종하지는 않았다며 그는 시종일관 담담한 태도로 심문에 응하였다.
  • 한명진 (1426년)
         '''한명진'''(韓明溍, [[1426년]] ~ [[1454년]])은 [[조선]] 초기의 문신, 공신이다. [[조선 세조|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에 참여하였으며,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이고 [[한명회]]의 아우이다.
         [[분류:1426년 태어남]][[분류:1454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한명회]][[분류:정난공신]][[분류:조선의 군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병사한 사람]][[분류:청주 한씨]]
  • 한명회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경기도]] [[광주목]] 언주면 압구정리
         |국적= [[조선]]
         |친척= [[한상질]](할아버지), [[한확]](친족), [[소혜왕후]](친족), [[조선 세조|세조]](사돈), [[조선 예종|예종]](사위), [[조선 성종|성종]](사위)
         '''한명회'''(韓明澮, [[1415년]] [[11월 26일]] ([[음력 10월 25일]]) ~ [[1487년]] [[11월 28일]] ([[음력 11월 14일]]))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며 외척이다. 1475년에서 1476년까지 1년간 조선국 상급 국상 지위를 지낸 그의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 자(字)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압구(狎鷗)·사우당(四友堂)이며, 별칭은 칠삭동이<ref>7개월만에 출생하여 생애 초기에 칠삭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ref>,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일찍이 [[조선 태조]]때 학사로 [[명나라]]에서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온 [[개국공신]]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이자 [[증직|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의 아들이고, 이조참판과 직제학을 지낸 [[여주 이씨]] [[이척]]의 외손자이자 [[대제학]] 이행의 증외손이다. [[조선 예종|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조선 성종|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2300건이나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상환(韓尙桓), 류태재(柳泰齋)의 문인이다. [[한성부]] 출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야 겨우 [[문음]]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ref name="park115">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15페이지</ref> [[1456년]]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여 좌절시키고, 사육신과 관련자들의 처벌에 가담하였다. [[조선 세조|세조]]의 최측근이자 책사로, 세조로부터 나의 [[장량]]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책사로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이 되고, [[조선 세조|수양대군]]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기여하여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이 되었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토벌과 북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1466년]]~[[1467년]], [[1469년]] 두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으며 [[1457년]] 상당군(上黨君)에 봉군되고 [[1461년]] 진봉하여 상당부원군이 되었다. 만년에는 권신이자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삭탈당하였다. 그러나 후일 [[종묘]] 세조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압구정 한명회는 [[1415년]](태종 15년) [[음력 10월 25일]] [[한성부]]에서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이며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사후에 [[증직]]으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와 이초참판 겸 [[예문관]] 직제학 [[이척]](李逖)의 딸인 증 정경부인 [[여주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미숙아]]로 태어났는데, 모친 여주이씨 부인이 수태된 지 7개월만에 태어났다 하여 칠삭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때 배에는 태성과 두성 모양([[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한상질]]은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조선 태조]]때 학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영흥]]이라는 [[국호]]와 [[조선]]이란 국호 중 국호를 낙점받아왔다. [[한상질]]은 처음 [[경주 이씨]] [[문하시중]]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이성림]](李成林)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딸만 1명 두고 요절하였으므로, 청풍송씨(淸風宋氏) 송신의의 딸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이 곧 한명회의 아버지 [[한기]]이다.
         그는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한강(韓康)의 후손으로 [[조선 세조|세조]]의 사돈이었던 [[한확]]과는 9촌숙질간이다. [[한확]]은 한악(韓渥)의 넷째 아들 한방신의 증손이었고, 한명회는 [[한악]]의 둘째 아들 한공의의 4대손이었다.<ref>광윤-강-악-방신-녕-영정-확, 광윤-강-사기-악-공의-수-상질-기-명회</ref> 그가 태어난지 얼마 뒤 동생 [[한명진]]이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10개월도 안되어 태어나 병으로 위기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몸 전체가 완전치 못하고 병약하여 온 집안이 거두려 하지 않으니 한 늙은 여종이 그를 거두어 솜털 속에 싸서 정성껏 보살폈는데, 점점 자라서 몇 달 만에 웃고 안아 볼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 또한 그가 태어날 때 배 위에 검은색 별 모양 점이 있었다고 한다.<ref name="hwan1">[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642700&cloc=rss%7Cnews%7Csociety 한명회, 황보인 사위 될 뻔했다?] 중앙일보 2009년 6월 10일자 </ref> 이후 그의 몸에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었다는 소문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동생 명진과 함께 고아가 된다. [[한학]]을 수학하였지만, 불행한 가계와 빈한함, 작은 체구로 주변의 멸시와 놀림을 받으며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다.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민첩하였는데, 그의 종조 할아버지 [[한상덕 (조선)|한상덕]](韓尙德)은 그를 가리켜 집안의 천리마가 될 것이라 예견하였다.
         그는 종조 할아버지들인 [[한상경]](韓尙敬)과 [[한상덕 (조선)|한상덕]]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종조 할아버지 한상환(韓尙桓)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에 [[자망산]]을 찾아가 [[류태재]](柳泰齋)의 문하생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친구 [[권람]] 등을 만나 사귀었는데, [[강원도]] 자망산의 유학자 [[류태재]]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사가 [[서거정]](四佳 徐居正) 등을 만나 사귀게 된다. 이후 그는 [[권람]], [[서거정]] 등과 함께 천하를 차지하겠다는 웅지를 품게 된다.
         [[개성]]에 유람차 놀러 갔을 때 [[영통사]](靈通寺)의 한 노승이 그를 보고 " 그대의 두상에 광채가 있으니 필연코 귀할 징조라" 하였다. 당시 그는 이 노승의 예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뒤 두 종조부가 별세하자 [[중추원|중추원사]](中樞院使) [[민대생]](閔大生)이 그를 거두어 사위로 삼았다. 부인 황려부부인에게서는 1남 4녀가 태어났는데, 이 중 셋째 딸이 [[조선 예종|예종]]비 [[장순왕후]]와 넷째 딸이 [[조선 성종|성종]]비 [[공혜왕후]]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데다가 집안에 가산이 없었으므로 [[개국공신]]의 후손이라는 신분이 무색하게 청년기 역시 불우하게 지냈다. 자를 자준(子濬)이라 했는데, 어려서부터 사귄 친구 [[권람]] 등과 어울려 풍류를 즐기다가 교리(校理) [[권람]]의 소개로 [[신숙주]]를 알게 되었고, [[조선 세조|수양대군]]을 소개받았다. [[조선 세조|수양대군]]이 비범한 인물임을 알게 된 그는 수양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의 사람됨됨이를 알아보았다.
         글을 읽어서 학업을 쌓았으나 오래 과거를 보지 않다가, 뒤늦게 여러번 [[과거 시험]]에 응시했지만 번번히 낙방하고 가세도 빈한해져 그는 불우한 청년기를 보낸다. [[1452년]](문종 2년) [[음서 제도|음보]](蔭補)로 처음으로 출사하여 [[송도]](松都-[[개성]])에서 경덕궁직(敬德宮直)이라는 벼슬을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조선 세조|수양대군]]과 자주 교류하였고 뒤에 그의 모사로 활약하였다.
         과거로는 도저히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친구 [[권람]]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논의하였다. [[경덕궁]]직으로 있을 때 그는 역시 같은 [[경덕궁|경덕궁직]]에 있던 무사 [[홍달손]](洪達孫), [[홍윤성]], [[양정]] 등을 만나 사귀게 되는데, 한명회는 이들 30여 명을 [[조선 세조|수양대군]]에게 적극 천거하여 이들의 인맥을 통해 거사를 일으킬 병력을 모으게 된다.
         과거로는 도저히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친구 [[권람]]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논의케 했고, 다시 [[권람]]에 의해 천거되어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ref name="park115">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8) 115페이지</ref>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여 [[김종서]](金宗瑞), [[황보 인]] 등 대신이 집권하자, 친구인 교리(校理) [[권람]](權擥)의 주선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자주 만나며 집권 계획을 역설,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추천하여 그의 심복을 삼게 하였다.
         권람은 처음에 이해를 못하다가 나중에 그의 말을 이해하고 동의하였다. 이에 그는 [[조선 세조|수양대군]]이 참된 임금감이라 주장하였다.
         [[권람]]의 진언을 받은 [[조선 세조|수양대군]]은 그를 불러들였고, 한명회는 강력한 왕권을 주장하였다. 한명회의 진언을 들은 [[조선 세조|수양대군]]은 '어찌 진즉 만나지 못했을까? 지금 주상께서는 비록 유충(幼沖)하지만 곁에서 잘 보필하면 수성(守成)은 할 수는 있는데, 대신들이 간교하여 [[안평 대군]] 이용(李瑢)에게 포섭되어 선조(先朝)의 충자(冲子)를 부탁하신 뜻을 저버리니 조종(祖宗)의 선령(先靈)이 장차 어디에 의탁하시겠는가?'하고,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자, 한명회는 이에 감격하여 [[쿠데타|반정]](反正)의 책략을 남김없이 말하였다.
         [[수양대군]]은 처음 집권을 위한 그의 계획에 머뭇거렸으나 이내 집권을 결심하고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람을 모으게 된다. 이후 [[조선 세조|수양대군]]과 의기투합하여 이런 저런 사람을 주변으로 모았다.
         [[수양대군]]은 세력과 사람이 없어서 실패할 것을 염려하였다. '형세(形勢)가 고단(孤單)하고, 세력은 미약하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하며 묻자 한명회는 당위성을 역설하며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조선 세조|수양대군]]을 독려하였다.
  • 한병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거주지 = 조선 [[충청북도|충청도]] [[청원군|청원]] <br/> 조선 [[청주시|충청도 청주]] <br/> [[대한제국]] [[한성부]] <br/> 대한제국 [[시흥시|경기도 시흥]] <br/> [[일제 강점기]] [[경성부]] <br/> 일제 강점기 [[평안북도]] [[신의주시|신의주]] <br/>[[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 시|상하이]] <br/>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br/> 대한민국 [[경기도]] [[시흥시|시흥]] <br/>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수원]]
         [[한성부]] 출생이며 1884년에서 1886년까지 [[충청도]] [[청원군|청원]]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1886년에서 1892년까지 [[청주시|충청도 청주]]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이후 1892년 [[한성부]]로 귀향하였고 줄곧 [[한성부]]에서 성장한 한병주는 1898년에서 1911년까지 경기도 시흥 양천향교에서 유교 성리학 훈도를 지냈으며 1919년 [[경성부]]에서 3.1 독립 만세 운동에 동참하였고 1920년 2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성지부 교통국 국장 대리(大韓民國 臨時政府 京城支部 交通局 局長 代理)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같은 해 1920년 2월 25일 자택에서 김태규(金泰奎)로부터 김창의(金昌義)가 보내온 인쇄물 100여 장을 받았다. 김창의는 당시 임시정부 산하 평북 독판부(督辦府)의 내무참사(內務參事)로 국내 [[연통제]] 조직 예하에서 일하고 있었다. 인쇄물은 군무부 포고 제1호라는 제목 아래에 '서로 함께 분기하여 일본 제국의 기반을 벗어나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한병주는 이것을 받고서 1920년 2월 29일, 김순원(金純元), 오정주(吳政柱) 등에게 각 5매씩을 교부하고, 독립 시위 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는 등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이로 인하여 체포된 한병주는 1920년 4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만기출감하였다. 이후 1922년 3월, 한국독립당 입당하여 이후 조선 광복(1945년)이 지난지가 3년 후인 1948년 3월까지 한국독립당에 당원 직위하였고 1948년 3월,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낙향을 하였다.
  • 한영이
         '''한영이'''(韓榮伊, [[1784년]] ~ [[1839년]] [[12월 29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막달레나'''(Magdalena)이다.
  • 한창수
         '''한창수'''(韓昌洙, [[1862년]] [[1월 19일]] ~ [[1933년]] [[10월 7일]])는 [[조선]] 말기의 관료 겸 [[일제 강점기]]의 [[조선귀족]]으로,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이며 자는 경문(景文), 호는 영애(穎愛)이다.
         [[1888년]] [[조선의 과거 제도|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에서 주로 벼슬을 하였으며, [[1895년]]에는 [[한성재판소]]의 판사를 맡기도 했다. 외국어에 능통하여 [[관립한성외국어학교]], [[한성사범학교]]의 교장직과 함께 [[유럽]] 지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바도 있었다.
         외교 관계 쪽 관직을 맡으며 [[일본]]에 드나들면서 친일 세력과 가까워진 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귀족|남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일제의 신임을 받아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대한제국 순종|순종]] 등 왕실을 전담하는 [[이왕직 장관]]도 역임했다.
         ***** 양자 : [[한상기 (조선귀족)|한상기]](韓相琦)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자신의 [[남작]] 작위를 물려받은 아들 [[한상기 (조선귀족)|한상기]], 서자 [[한상억 (1898년)|한상억]]과 함께 선정되었다.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분류:1862년 태어남]][[분류:1933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남작]]
         [[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청주 한씨]]
  • 한충 (조선)
         '''한충'''(韓忠, [[1486년]] ~ [[1521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서경(恕卿), 호는 송재(松齋),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이다. 주부(主簿) [[한창유]]의 아들이다.
         [[1519년]] 전한(典翰)이 되었으며, 이후 직제학(直提學) · 동부승지(同副承旨) ·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하지만 그 뒤 남곤에 의해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전임되었으며, [[1520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이에 휘말려 [[거제도]]로 유배당했다. [[1521년]] [[신사무옥]] 때 남곤의 흉계도 인해 [[의금부]]에 투옥되었으며, [[조선 중종|중종]]에 의해 풀려나게 되었으나, 남곤의 자객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분류:1486년 태어남]][[분류:1521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충청북도 출신 인물]][[분류:암살된 사람]]
  • 한호문
         한호문(韓好問, ? ~ ?)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자(字)는 선경(善卿),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이다. 음서로 관직에 올라 정헌대부 [[중추부]][[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훈련원]][[지사]]에 이르렀다. 봉호는 서원군(西原君)이다.
         {{토막글|조선}}
         [[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군인]][[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음서]][[분류:청주 한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의 장군]]
  • 한확
         |군주 = [[조선 세종|세종대왕 이도]]
         |직책 = [[역대 한성판윤|조선국 판한성부사]]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한성부]]에서 노환으로 병사
         |거주지= [[조선]] [[한성부]]
         |국적= [[조선]]
         |친인척= [[월산대군|월산대군 이정]](외손) <br/> [[조선 성종|성종 이혈]](외손)
         '''한확'''(韓確, [[1400년]]<ref>1403년생 설도 있다.</ref> ~ [[1456년]] [[음력 9월 11일]])은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외척, 외교관이며 [[명나라]]의 문신이다.<ref>{{브리태니커|b24h3077a|한확}}</ref>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이며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조선 덕종|덕종]]의 비이자 [[월산대군]]· [[조선 성종|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와 [[조선 세종|세종]] 서자 [[계양군 (왕족)|계양군]]의 부인인 [[정선군부인]]의 친정아버지이다.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 [[여비 한씨]], [[선덕제|선종]]의 후궁 공신부인은 그의 넷째, 다섯째 누이이다. 검소하고 청렴하였으며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조선 세조|세조]]의 즉위를 도왔고, [[1418년]]의 [[세종]]의 책봉 고명과 [[1455년]] [[조선 세조|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왔다. 그는 누이들이 황제의 후궁인 점을 활용하여,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둘째 딸은 [[조선 세종|세종]]의 서자 [[계양군 (왕족)|계양군 증]]에게 출가하였고, 여섯째 딸은 [[조선 세조|세조]]의 장남 [[조선 덕종|의경세자]]의 비 [[인수대비]]로서 [[조선 세종|세종]], [[조선 세조|세조]] 2대에 걸쳐 사돈이 되었다. [[한명회]]의 일족이다.
         고려(高麗 때 시중(侍中)을 지낸 한강(韓康)의 후손으로 [[조선 세조|세조]]의 측근이었던 [[한명회]]와는 9촌숙질간이다. 한확은 한악(韓渥)의 넷째 아들 한방신의 증손이었고, [[한명회]]는 한악의 둘째 아들 한공의의 4대손이었다.<ref>광윤-강-악-방신-녕-영정-확, 광윤-강-사기-악-공의-수-상질-기-명회</ref>
         [[1418년]] 태종의 양위로 [[조선 세종|세종]]이 즉위하자 책봉 고명을 위한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들어갔고, [[1419년]](세종 1년) [[1월]] [[명나라]] 황제의 책봉 고명서를 받들고 [[명나라]]의 책봉정사(冊封正使)가 되어 부사인 홍려시승 유천(劉泉)과 함께 귀국하여 판한성 부사가 되었다.
         [[1420년]] [[1월]] [[조선]]의 흉년기에 공물면제를 위한 사절단의 대표로 예조참판 하연(河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의 광록시소경으로서 태종 이래 추진하였던 금과 은의 공물면제를 주청하여 황제의 허락을 받고 귀국하였다. [[1424년]] 명나라 성조가 북정(北征) 중 유목천(楡木川)에서 죽자 여비는 [[영락제]] 사후 순장당하였다.<ref>목을 매고 죽었다.</ref> 그뒤 장군 절제사(掌軍節制使)가 되었다.
         [[1425년]] 전감무(前監務) 김성정(金成鼎)의 첩의 딸 고미(古未)와 간통하였다가 [[사헌부]]집의(執義) 정연(鄭淵)·헌납 윤맹겸(尹孟謙) 등으로부터 탄핵을 당하였으나 [[조선 세종|세종대왕]]은 주저하다가 윤허하지 않았다.<ref name="se29">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9월 28일(갑자) 2번째기사 "장군 절제사 한확이 간통했다고 갈아 임명하게 하다"</ref>
         [[1435년]](세종 17년)에 자헌대부 행중추원부사,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37년]] 그의 딸 한씨가 계양군(桂陽君) 이증과 혼인하고 정선군 부인(旌善郡夫人)에 봉작되었다. 그의 또다른 딸은 [[수양대군]]의 아들 [[조선 덕종|도원군 숭]]과 결혼하는데 이 딸이 바로 후일의 [[소혜왕후|인수대비]]가 된다.
         [[1443년]]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그해 동지중추원사로 [[의금부]]제조(義禁府提調)를 겸하였고, 그해 다시 [[판병조사]] 겸 지중추원사를 거쳐 다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다. [[1444년]] [[경상도]], [[전라도]]의 진상품을 받을 것을 청하였으나 [[세종]]이 이를 듣지 않았다. 그 해 [[판이조사]]가 되었는데, 이때 인사에 공정을 기하여 자못 명망이 있었다. [[1445년]] 중추원지사 겸 [[판병조사]](병조판서)를 겸하다가, 다시 판이조사(이조판서)가 되었다. [[1446년]] [[판중추원사]]로 승진되었다가 [[1447년]] 이조 판서가 되고, 행[[평안도]] 관찰사로 나아갔다. 그해 행[[평안도]][[관찰사]]로 평양판윤과 [[평안도]] 병마도절제사까지 겸임하였다. [[1448년]] [[평안도]]병마절도사 겸하였다. [[1450년]](세종 32년)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그 후 판이조사·[[좌찬성]] 등을 거쳐 [[조선 세조|세조]] 때 서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즉위하자 판중추원사로 소환되었고, 그해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1452년]](문종 2년) 초에 귀국, 그해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 이후 [[한명회]], [[신숙주]], [[권람]], [[정인지]] 등과 긴밀히 연락하며 사돈 [[조선 세조|수양대군]](首陽大君)의 즉위를 도왔으며 [[명나라]]에 있는 누이 [[공신부인]]과 죽은 [[여비 한씨]]의 후광에 힘입어 이들의 거사를 은밀히 지원하였다.
         [[1453년]](단종 원년)에 [[계유정난]]이 성공하면서 [[정난공신]]으로 책록된 뒤 [[우의정|우의정부사]]로 발탁되어 서성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이어 [[계유정난]] 당시 [[명나라]]에서 외교적인 문제를 제기할 때 [[명나라]] 사신을 설득하여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정치적 입지를 탄탄히 하였다. [[계유정난]]의 성공 이후 수양대군을 도와 그해 11월 좌찬성이 되었다가 다시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의정부 우의정 서원 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작되었다.
         [[1455년]](세조 1년) 좌의정이 되고 그해 사은사로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양위로 명분을 세워 명나라를 설득하러 연경에 갔다. 명나라에 가서 [[조선 단종|단종]]의 양위를 의심하는 추궁에 [[조선 세조|세조]]의 왕위찬탈을 양위(讓位)라고 설득시켰다.
         귀국길에 올라 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 돌아오던 중, 칠가령(七家嶺)에 이르러 병을 얻어, 귀환하는 도중에 [[음력 9월 11일]] 사하포(沙河浦)에서 갑작스럽게 객사하였다. 당시 향년 56세였다.<ref>1400년생 설을 따를 경우</ref> 사망 당시 가사에 대한 말은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둘째 딸은 [[세종]]의 서자 [[계양군]] 증에게 출가했고, 여섯째 딸은 [[소혜왕후|인수대비]]로 [[조선 덕종|덕종]]의 비이며 [[월산대군]]· [[조선 성종|성종]]의 어머니였다.
         동생 한전(韓磌)·한질(韓)이 모두 일찍 죽었는데, 한확이 그 고아를 무육(撫育)하기를 자기 자식과 다름이 없었다. 작품으로는 [[고려]]말기의 문신 [[차원부]]를 애도하는 치제문이 있다. 그가 죽자 [[조선 세조|세조]]는 9월 22일까지 정사와 조회를 중단하였다. 이때 강무까지 중단하려 하였으나 [[승정원]]의 반대로 강무는 계속하였다.
  • 해양군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인성군]] 사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흥안군 이제|흥안군 가통]] 사저
          | 왕가 = 조선
          | 왕조 = 조선
          | 친척 = [[해원군]](형) <br /> [[조선 선조|선조]](조부) 등
          | 국적 = {{국기|조선}}
         '''해양군 이희'''(海陽君 李僖, [[1620년]] ~ [[1682년]])는 [[조선]]의 [[왕족]]이다.
         {{토막글|조선}}
         [[분류:1620년 태어남]][[분류:1682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의 무신]][[분류:전주 이씨]][[분류:운현궁]][[분류:조선 광해군]][[분류:조선 인조]][[분류:조선 효종]][[분류:조선 현종]][[분류:조선 숙종]]
  • 해원군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인성군]] 사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사저
          | 국적 = {{국기|조선}}
          | 왕가 = [[조선|조선 왕조]]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조선 왕조]]
          | 친척 = [[조선 선조|선조 하성군 이연]](조부)
         '''해원군 이건'''(海原君 李健, [[1614년]] ∼ [[1662년]])은 [[조선]]의 [[왕족|왕족 종실]]이다.
         * [http://www.rfo.co.kr/view_party.php?list_mode=people1&refnum=090&party_name= 대한제국 조선 황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 해원군 이건]
         {{토막글|조선|작가}}
         [[분류:1614년 태어남]][[분류:1662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조선의 왕족]][[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군인]][[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화가]][[분류:조선의 서예가]][[분류:운현궁]][[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의 저술가]]
  • 허근욱
         [[1930년]] [[3월 28일]]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에서 변호사 겸 독립운동가 [[허헌]]과 문화 유씨 유덕희(柳德禱, 또는 유문식(柳文植))의 딸로 태어났다. 위로는 이복 언니 2명이 있었고, 둘째 언니가 독립운동가 겸 여성운동가 허정자([[허정숙]]으로 개명)였다. 유덕희에게서는 첫 딸이었다. 그 아래로 음악가인 여동생 [[허선욱]]과 허기욱, 허영욱, 허선욱 그리고 [[북조선]]에서 외교관을 역임한 [[허종욱]] 등이 태어났다.
  • 허목
         |출생지= [[조선]] [[한성부]] 창선방
         |사망지= [[조선]]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은거당에서 노환으로 병사
         |국적= [[조선]]
         '''허목'''(許穆, [[1596년]] [[1월 10일]](음력 [[1595년]] [[12월 11일]]<ref>이익, 《성호전집》 권58, 미수 허 선생 신도비명</ref>) ~ [[1682년]] [[6월 2일]]([[음력 4월 27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및 유학자, [[역사가]]이자 교육자, 정치인이며, 화가, 작가, 서예가, 사상가이다. 본관은 [[양천 허씨|양천]](陽川)으로, 자(字)는 문보(文甫)·문부(文父)·화보(和甫)<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front/dirservice/ppl/viewDocumentPpl.jsp?pLevel2Name=&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b_A1595_1_0014464&pPplCount=&pOrderByType=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ref>, 호(號)는 미수(眉叟), 태령노인(台領老人),대령노인(臺領老人), 석호장인(石戶丈人)이다. 별호는 미로(眉老), 희화(熙和), 공암지세(孔巖之世), 승명(承明)이고 별호로는 동교노인(東膠老人), 구주노인(九疇老人), 동서노인(東序老人), 이서포옹(二書圃翁),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과거 시험|과거]]에 급제하지 않고도 정승 반열에 올라 [[의정부]][[우의정]]겸 영경연사에 이르렀다. 당색은 [[남인]]으로, [[남인]] 중진이며, 청남의 영수였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올랐으며 [[조선 효종|효종]] 사후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조선 효종|효종]]은 장남의 예로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고, 제2차 [[예송 논쟁]] 당시 [[인선왕후]]의 1년복이 채택되자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에 발탁된 뒤 [[1675년]]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 겸 [[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 [[의정부]][[좌참찬]],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특별 승진하여 그해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겸 영경연사, [[사복시]]제조를 지냈다.
         [[이황]]과 [[조식 (1501년)|조식]]의 제자인 한강 [[정구 (1543년)|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정구 (1543년)|정구]] 사후 그의 수제자인 모계 [[문위 (조선)|문위]](文緯)와 여헌 [[장현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구]]에게 수학하였으나, [[박지화]]의 제자였던 부친 [[허교]]와 외조부인 [[임제]]의 영향으로 천문, 지리, 도가 등에도 능통하였다 한다. 글씨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조예가 깊어 자신의 독특한 필체인 미수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인]]에서도 [[청남]]에 속하며, 고결한 인품 덕분에 남인이 실각한 뒤에도 88세까지 천수를 누렸다.<ref>윤홍식·오병문, 2006, 조선선비들에게 배우는 마음 챙김의 지혜, 봉황동래.</ref> [[서예]]의 대가였으며 [[전서체]]에 능했다. 사후 [[1689년]] 복관되고 왕명으로 저서가 간행되었으며, [[1692년]] [[증직|증]]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되었다.
         허목 자신은 [[이언적]]과 [[이황]]의 학맥을 계승한 [[성리학]]자였으나 [[서경덕]]과 [[조식 (1501년)|조식]] 등 [[북인]]계 학통도 일부 계승하였다. 그는 후일 [[유형원]], [[이서우 (1633년)|이서우]], [[이담명]], [[이익]] 등에게로 학맥을 연결시킨, [[성리학]]과 [[실학]]의 과도기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목내선]] 등의 [[남인]]계 성리학자들도 그의 문하에서 다수 배출되었다. 시문에도 능하여 당대의 대가, 부호들이 그에게 묘비명과 신도비명을 부탁하였다. 그림에도 능하여 [[학문]] 교육 외에 그림 해설, 강의도 하여 [[화가]]들을 길러냈다. [[조선 인조|인조]] 때의 [[남인]] 정승 오리 [[이원익]]의 손녀사위이다. [[조선]]왕조 역사에서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 정승이 된 몇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산해]], [[정언옹]], [[정구 (1543년)|정구]], [[문위 (조선)|문위]], [[장현광]]의 문인이다.
         미수 허목은 [[1595년]](선조 28년) 또는 [[1593년]](선조 26년) [[12월 11일]] [[한성부]] 창선방(彰善坊)에서 [[포천]][[현감]](抱川縣監)으로 사후 [[증직|증]] [[의정부]][[영의정]](贈領議政)에 [[추증]]된 [[허교]](許喬)와 [[정랑]](正郞)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딸 임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증조는 동애 [[허자]](東厓 許磁)로 [[훈구파]]의 일원이었고 증조모 전주이씨는 왕족으로 [[조선 태종|태종]]의 장남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증손녀였다. 할아버지는 퇴계(退溪)가 그 학문과 덕망을 기린 송호처사(松湖處士) 허강(許橿)이고, 할머니 진주강씨는 문량공 [[강희맹]](文良公 姜希孟)의 5대손이며, 사용(司勇) 강복(姜復)의 따님이다. 또한 할머니 진주강씨는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이자 정암 [[조광조]]의 동문인 모재 [[김안국]](慕齋金安國)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아래로 남동생이 2명이 태어났는데, 동생 허의(許懿)는 율(律)에 능통하였고 인물화에 뛰어났다. 막내 아우 [[허서]](許舒)는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다. 외할아버지 [[임제]]는 시문 등에 두루 정통했으나,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에 염증을 느꼈고, [[조선]]이 [[중국]]의 속국과 같은 형태로 있는 것을 못마땅히 여겨 자신이 죽은 뒤에는 곡을 하지 못하게 했다 한다.
         허목에게는 또 30년 이상 나이차이가 나는 서제(庶弟)가 몇명 더 있었는데, 아버지의 첩에게서는 [[허달]](許達)과 또다른 서모에게서는 [[허순]](許順)이라는 이복 동생들이 태어났다. 이복 동생 허순(許順)은 [[조선 현종|현종]] 때인 [[1672년]] [[무과]]에 급제하였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U_6JOb_1672_009959&isEQ=true&kristalSearchArea=B 허순-무과 합격 기록]</ref>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기억력이 좋고 학업에 전념하였으며 9세에 입학하여 10세 때 관립 서당에서 [[동몽교관]](敎官)에게 수학하였고 총산(蔥山) 정언옹(鄭彦옹) 선생에게서 예기와 단궁(檀弓)을 배웠다. 그는 [[조선]]의 문인으로서는 드물게 활쏘기와 무예 재주에도 능했다. 아버지 [[허교]]는 그에게 관직에 나가지 말라고 권고하였으나 후일 [[조선 효종|효종]]의 거듭된 부름과 가르침을 청하니, 어머니 임씨에게 허락을 받고 관직에 나가기도 했다.
         (종전 내용(아래 서술된 내용)과 관련하여 내용이 논리적이지 않은 점들이 있어 내용을 바로 잡고자 합니다. 첫째, 미수 공은 서울 창선방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현감 이었고, 할아버니는 송호 강으로 역대사감 30권을 편찬하였고, 증조 할아버지는 좌찬성 이었습니다. 좌찬성은 의정부의 종1품 관직으로서 정 2품인 6조 판서보다도 높은 벼슬입니다. 미수 공의 가계 자체가 청렴 결백한 가계이기에 부유한 가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집안이 가난하고 한미한 집안이 아니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더우기, 앞에서도 논의된 바와 같이 증조모가 왕족이고, 어머니 또한 그 유명한 백호 임제의 따님입니다. 또한, 선대에도 벼슬하신 분들이 많고, 명문벌족의 자손이기에, 많은 선비들이 집안에 왕래를 하고 이에, 미수 공은 그 인연들로 인해 유명한 분들로 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유명한 가계에서 왜 혼처를 찾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집안이 가난하고 한미하여 혼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합당치 않습니다.) 두번째로, 오리 이원익 대감이 나이든 손녀 사위감을 찾고자 분주했던 것은 아닙니다. 손자도 아닌 손녀의 혼처를 왜 할아버지가 적극 찾아야 되겠습니까? 할아버지 보다는 부모가 딸의 혼처에 대해 더 관심이 많겠지요. 손주(아들)이라고 하면, 가계도 이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적극적으로 혼처를 알아 보았을 것입니다. 또한, 오리 이원익은 예전부터 허목의 조부 증조부와도 잘 아는 사이 입니다. (조선왕조실록). 퇴청길에 아이의 됨됨이가 범상치 않아 이름과 가계를 물어보니, 본인이 잘 아는 집안의 아이였고, 이에 손녀 사위로 삼아야 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손녀와 허목 모두 나이가 어리기에 미리 혼담이야기를 하여 훗날 혼사를 하리고 약조를 해 두었던 것입니다. 오리 이원익 정승의 아들과 며느리가 좀 더 넉넉한 집안으로 딸을 시집 보내고 싶었기에 처음에 반대했던 것은 전해 오는 내용이 같습니다. 즉 오리 이원익 대감이 청백리 입니다.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지만 집안 살림이 아주 넉넉치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생활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 시대의 유명한 청백리가, 황희 정승과 오리 이원익 정승이지요. 따라서 오리 대감의 아들 내외는 명문벌족 집안이나 역시 청렴하고 강직한 허목 집안 보다는 좀 더 부유한 다른 집안으로 딸을 출가시키기 원해서 처음에 반대를 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문장 "[이원익]에게는 결혼을 해야 할..." 중 4번째 줄에는 오리 정승이 허목을 본인의 부인에게 "시골의 가난한 선비의 자식이라오"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서울 창선방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동학재임 시절 유생 중 한 사람인 박지계가 임금에게 아첨하여 예를 문란시켰다고 박지계를 유생명부에서 제명을 시키는 바람에 임금님으로 부터 화를 사기도 하였습니다. 동학재임 시절이 32세이니, 19세때 혼인을 하여 32세때에도 한양(서울)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아버님이 현감으로 여러 고을을 사셨기에 이 곳 저 곳 방문을 한 적은 있지만, 두번째 단락에서 이야기 하는 "시골의 가난한 선비의 자식이라오"는 합당치 않다는 것을 이야기 드립니다. 세번째로, 세번째 단락 둘째 줄에 묘사하고 있는 "... 처, 장인인 이의전 내외, 처숙모 등은 그가 가난한 집안 사람이고, 별다른 재주가 없는 점을 들어 딸이 고생할 것이라며 반대..."에서 허목은 어려서 부터 많은 재주가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손에 글월 문자가 있었고, 글씨, 그림등 모든 방면에 아주 능한 것으로 다른 문헌들에 묘사되고 있습니다. 옛날 명문벌족 출신의 선비에게 무슨 재주가 필요합니까? 학문에 전념하고, 다른 사람을 포용할줄 알고,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할 줄 알면 그 것이 최고 입니다. 즉 허목이 장사를 할 것도 아니고, 의술을 익힐 것도 아닌데 "재주가 없어 딸이 고생할 것 같아 반대를 했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이런 연유들로 인해 내용을 바로 잡고자 하여 간략히 편집을 한 것입니다. 새 내용은, 미수공이 종손댁으로 미수공의 혼인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요약한 것입니다. 미수 허목과 과련하여 바로 잡고자 하는 내용들은 시간이 나는대로 계속 편집을 하겠습니다. (끝)
         허목은 젊은 시절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조선 인조|왕]]의 심기를 거슬러 나라에선 그에게 평생 과거를 못 보게 만들었다. 그래서 스스로 산림에 묻혀 글만 읽다가 [[조선 효종|효종]] 때에 56세 나이로 말단 벼슬인 능참봉이 내려졌고 그 후 80세에는 정승까지 올랐다.<ref name="sugeun">
         [[1624년]](인조 2년)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우천(牛川)의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때 독서와 글씨에 전념해 그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하였다. 이듬해 [[사부학당]](四部學堂) 중 동부학당(東部學堂)의 유생이 되었다. [[1626년]](인조 4년) [[1월 14일]]에 [[조선 인조|인조]]의 생모인 [[인헌왕후|계운궁]](啓運宮) [[인헌왕후|구씨]]가 죽자 [[조선 인조|인조]]는 자신의 모친의 장례식을 성대히 하려 했다. 예관들은 왕자 군부인의 예로서 장례를 치뤄야 된다고 주장했고, 이때 [[조선 인조|인조]]는 스스로 주상(主喪)이 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상복도 3년복을 입으려다 1년복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허목은 인조의 생모 [[인헌왕후|계운궁 구씨]]의 복상 문제와 관련하여 1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주장했다가 [[조선 인조|인조]]의 눈밖에 났다.
         [[1626년]](인조 4년) 유생으로서 동학(東學)의 재임(齋任)을 맡고 있을 때 [[조선 인조|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 具氏)의 복상(服喪)문제와 관련 생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조선 인조|인조]]의 뜻에 부합하여 [[성리학]]자 [[박지계]](朴知誡) 등을 중심으로 [[조선 원종|원종]](元宗)의 추숭론(追崇論)을 제창하자, 허목은 원칙을 거스르고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예(禮)를 혼란시킨다고 규탄, "예를 어기고 임금에게 아첨하였다"며 유적(儒籍)에서 제적(除籍) 하는 [[유벌]]을 가하였다.
         {{참고|인조반정|조선 원종|원종추숭론}}
         [[1628년]](인조 6) [[조선 인조|인조]]가 다시 생부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려 하였다. 이때 [[정원대원군]] 추상은 부당하다며 [[조선 인조|인조]]가 [[조선 선조|선조]]의 대통을 계승했음을 주장했다. 그는 고례를 근거로 선조를 황고로 하고 정원군은 황숙고로 해야 된다며 인조의 [[정원대원군]] 국왕 추숭론(追崇論)에 반대하고, 추숭에 찬성하는 학자들을 시류에 영합한 자들이라며 비판, 규탄하다가 다시 [[조선 인조|인조]]의 눈밖에 나면서 그는 왕명으로 정거(停擧<ref>과거에 응시가 금지되는 벌</ref>)의 벌을 받게 되었다. 뒤에 벌이 풀렸으나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고 [[광주군|광주]] [[자봉산]]에 입산, 은거하면서 독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 하였다.
         [[조선 인조|인조]] 즉위 초부터 시종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 종사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다. 남인 중에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 등이었다.<ref name="leedeok211">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211 페이지</ref> 허목은 [[이이]]가 승려라며 불교 승려이자 노장 사상에 치우친 인물이라며 문묘 종사는 가당치 않다고 주장했고, [[서인]]들과 논쟁을 벌였다.
         {{인용문|[[임진왜란]] 때 임금이 서쪽으로 몽진했는데, [[성혼]]은 [[파주]]에 살면서 임금의 수레가 지나가는데도 나와 보지도 않으면서 말하기를, '국도를 떠난 뒤에는 임금을 호종할 의무가 없다'고 했다.<ref name="leedeok212">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212 페이지</ref>}}
         [[1638년]](인조 16년) [[조선 인조|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의 조정 출사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출사 권유를 뿌리친 뒤 모부인이 계시던 [[경상남도]] [[의령]](宜寧) 모의촌(慕義村)으로 내려가 생활했다. 1641년 다시 사천(泗川)으로 이주했다가, 창원(昌原), 칠원(柒原) 등지에 10여년간을 우거하면서 강론(講論)과 저술(著述)을 게을리 하지 않는 한편 지리산 남해안을 유상(遊賞)하고 선세유적(先世遺跡)을 기행, 답사 하였다.
  • 허위
         ||<#ffd700> 출생지 ||[[조선]] [[경상도|경상북도]] [[구미시|선산군]] 하고면 임은동 ||
         ||<#ffd700> 국적 ||[[조선]] (1854년 ~ 1897년) [br] [[대한제국]] (1897년 ~ 1908년)||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가 [[고종(조선)|고종]]이 내밀봉서(內密封書)로 의병 해산 명령을 내리자 해산하였다.
         1907년 [[고종(조선)|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정미 7조약]]으로 대한 제국 군대가 해산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13도 창의군]]의 군사장으로 선봉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였으나[* 허위가 이끌던 13도 창의군이 최종적으로 머물었던 길을 그의 호를 따 명명하게 됐는데, 그게 현재의 [[왕산로]]이다.] 준비하고 있던 [[일본군]]에 의해 격퇴당하고, 총대장인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나자, 후임 총대장이 되어 2차 진격을 계획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이듬해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분류:조선 의병장]][[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구미시 출신 인물]]
  • 허정숙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종로방 관철동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국적 = [[조선]], 대한제국, 중화민국, 미 군정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태어난 곳 = [[조선]] [[한성부]] 종로방 관철동
         |죽은 곳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허정숙'''(許貞淑, [[1902년]] [[7월 16일]] ~ [[1991년]] [[6월 5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여성운동가, [[사회주의]]자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법관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언론 활동과 [[사회주의]] 운동, [[신간회]]와 [[근우회]]의 조직 등에 참여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자유연애]]주의자로도 유명하였다.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귀국, [[여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 [[조선여성동우회]], [[1924년]] [[5월]]의 [[조선여성해방동맹]] 등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조선공산당]] 조직에도 참여하여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신간회]]와 [[근우회]] 등의 조직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동아일보]]의 기자와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6년]] [[5월]] 도미했으나 이듬해 귀국,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 여학생들 선동을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36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 [[민족혁명당]], [[조선독립동맹]] 등에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서울]]로 귀국했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38도선]] 이북으로 월북, 남북을 오가며 활동하던 중 [[1948년]] [[4월]]의 [[남북 협상]]에 북측의 여성계 대표로 참여한 뒤 [[북조선]]에 정착했다. 그해 [[9월]]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되고, 38선 이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 단독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내각 [[문화선전상]]과 [[보건성]] 부상, [[1949년]] [[보건부|보건상]], [[1959년]] [[법무부|사법상]]과 최고재판소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연안파]] 숙청 때는 전 남편인 [[최창익]]을 비판하여 숙청을 면하였다. [[1965년]] 정계에 복귀,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재판소|최고재판소 소장]]에 복직하였다. [[1972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 되고 그해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에 선출된 뒤, 제6,7,8기 [[최고인민회의|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연임, 재선되었다.
         그는 사랑 없이도 성관계를 가질 수 있고, 사랑 없이도 결혼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변호사]] [[허헌]](許憲)의 맏딸이며, [[조선공산당]]의 간부인 [[임원근]], [[송봉우]], [[중국]] [[연안]](延安)의 [[조선독립동맹]]의 부주석 [[최창익]]의 부인이고, [[신일룡]] 등의 연인이었다. 본명은 허정자(許貞子), 다른 이름은 허정숙(許貞淑) 또는 허정숙(許正淑), 필명은 수가이(秀嘉伊)이고 가명은 정은주(鄭恩珠), 별칭은 '조선의 [[콜론타이]]'이다. [[1945년]] 이름을 정자에서 정숙(貞淑)으로 개명하였다.
         몰락 양반가 출신이었지만 할아버지 허추(許抽)의 대에 다시 집안을 일으켜세웠다. 자수성가했던 할아버지 허추는 조선 말에 관직에 올라 [[대한제국]] 시절에는 [[경원군 (함경북도)|경원]][[부사]]와 [[한성부]][[경무관]]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허헌]]은 15세에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으나 집안은 유복하였다. 외할아버지인 정종언은 지주로, 외가인 경주 정씨 역시 [[함흥군]]의 갑부 집안이었다.
         아버지 [[허헌]]은 계속 학업에 계속 종사하여 [[경성]]으로 올라갔고, 가정의 생계는 어머니인 정보영이 꾸려나갔다. 언니 허정희는 일찍 요절하여 사실상 허정숙이 장녀가 되었다. 그 후 아버지 [[허헌]]은 [[경성]]에서 [[유덕희]](柳德禧)와 재혼하고, 30년 연하의 이복 동생들인 [[허근욱]]과 [[허선욱]], [[허종욱]], 허영욱, 허선욱, 허기욱 등이 태어난다. 이복 여동생 [[허근욱]]은 소설가 겸 작가이고, [[허선욱]]은 음악가이며, 이복 남동생인 [[허종욱]]은 [[북조선]]의 외교관이다.<ref>한때 한국에서는 그의 아들과 이름이 비슷했던 허종욱이 그의 아들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ref>
         기숙사 생활 외에도 그는 끝내 학교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1919년]] [[3월]], [[3·1 운동]] 직후 귀국하였다. [[경성]]에서 그는 [[3·1 운동]] 이후 계속 이어지던 만세 대열에 참여하였지만 만세 운동은 곧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검속을 피해 은신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생활 중 습득한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 공부한 뒤 귀국 후에는 [[사회주의]]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한다.
         [[일본]], [[중국]], [[미국]] 등지로 유학을 하면서 당시의 진보적인 이론과 비판적인 사회의식을 길렀다.<ref name="shinyoung133"/> 동시에 잘못된 [[가족제도]]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ref name="shinyoung133"/> 유학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 그는 [[조선]] 여성들을 억압하는 가장 큰 원인이 [[식민지]]와 계급의 문제임을 깨닫고 이른바 '인습 타파'와 '교육 계몽'에 중점을 두는 기존의 [[부르주아 여성운동]]과는 또 다른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주의|여성운동]]을 주도하게 된다.<ref name="pyung01"/> 한편 유학생 [[공산주의]]자들 끼리의 만남도 주선하여 [[박헌영]]과 [[주세죽]]의 만남을 적극 주선하기도 해 주었다.
         [[1920년]] [[4월 14일]] [[차미리사]]의 [[조선여자교육회]]에 참여하고, [[여자교육회]] 여자교육선전강연대에 참여하여 [[1921년]] [[6월 10일]]부터 [[10월 10일]]까지 4개월간 전국 13도를 순회하면서 계몽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821년]]부터 그는 [[동아일보]]의 객원논설위원이었고, [[동아일보]] 외에도 [[조선일보]], [[매일신보]]와 각종 잡지에 칼럼을 발표하였다.
         [[1921년]]부터 각지에서 여성 단발운동이 벌어지자 허정숙은 단발을 감행하였으며 이후 여성 단발 운동을 지지하고, 적극 주도하였다. [[1923년]] [[조선일보]] 기사에는 "이것(단발)을 본 여러 군중들은 물밀듯 모여들어 혼잡을 이루는 동시에, 그 해괴함을 놀내지 안이하는 이가 없섯다더라."며 조선일보 1923년 3월 26일자에 실린 황해도 해주의 야학강습소 여교사 이춘봉(李春鳳)의 단발(斷髮)을 알리는 기사가 보도되었다.<ref name="chossdd">[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0/11/2011101102429.html <nowiki>[</nowiki>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nowiki>]</nowiki> <nowiki>[</nowiki>68<nowiki>]</nowiki> "단발한 여자는 후년(後年)에 대머리가 된다"] 조선일보 2011.10.12</ref> 이 교사의 단발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그는 단발의 편리함, 위생성과 머리 감을 때의 간단함을 이유로 들어 반박하였다. 또한 [[단발령]]을 큰 잘못이자 망국의 원인으로 규정한 [[성리학]]자들에 대해서도 사회가 부패하고 정치인들의 잘못으로 [[조선]]이 망한 것이며 [[단발령]]과는 무관하다며 반박하였다.
         이후 '세상이 귀찮아 중이나 되겠다고' 단발했든(조선일보 1924년 7월 21일자), 부부싸움 끝에 남편이 강제로 삭발을 시켰든(1923년 12월 13일자), 여성의 단발은 빠짐없이 기사로 소개됐다. 군산 기생 강산월(康山月)이 더 이상 '유산계급 노리개'를 할 수 없다며 단발했을 때는 박스기사로 크게 소개됐다.(조선일보 1925년 3월 20일자)<ref name="chossdd"/> 그러나 [[단발령]]을 최대의 불효와 패륜으로 규정한 [[성리학]]자들은 그가 사회를 금수처럼 만들려 한다, 뉘집의 딸이냐며 비방하였다. 단발 운동을 지지, 주도하던 그는 [[1925년]] 다시 공개 단발을 감행한다.
         [[1922년]]부터 사회주의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1922년]] [[1월 24일]] [[조선여자교육회]]가 정식으로 [[조선여자교육협회]]로 승격되자 창립 멤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23년]]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모스크바 공산대학]](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 трудящихся Востока)에 입학하였다. [[1924년]] [[1월]]초 [[모스크바공산대학]]을 중퇴하고 김찬웅 등과 함께 [[만주]]를 거쳐 국내에 들어오던 중, [[평안북도]][[경찰부]] 형사 [[이성근]](李聖根), [[김덕기]](金德基) 등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25년]] 허정숙은 '[[화요회|신사상 연구회]]'(후일의 [[화요회]]로 개명)에 가입하였고, [[1925년]] [[4월]]에는 [[경성]]에서 [[사회주의]] 활동가인 [[박헌영]]등과 [[안티 기독교]] 공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가,[[기독교인]]들이 이들의 강연회를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신고하여 일본 경찰을 피해 한동안 은신하기도 했다. [[1926년]] 5월[[미국]]으로 유학할 때까지 그는 각종 [[안티 기독교]] 강연에 참여하였다. 그 뒤 [[송봉우]]와 한때 동거하기도 했다.
         [[1924년]] [[1월]]부터 그는 여성 해방 사상을 국내에 소개하는 한편 YMCA청년회와 [[사회주의]] 모임, 여성 계몽 강연에 나가 여성해방론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국내의 여성 지식인들의 참여와 자각을 호소하였다. [[1924년]] [[5월]] [[주세죽]]·허정숙·[[박원희]] 등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했던 여성운동가들이 [[조선여성동우회]]를 만들었다.<ref name="yeosong182">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서해문집, 2004) 182페이지</ref> [[1924년]] [[5월 23일]] 허정숙은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는 등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작성한 [[조선여성동우회]]의 강령 초안에는 '사회진화의 법칙', '신사회 개척', '조선여성해방운동' 등이 있었다. 또한 그는 [[동아일보]] 등에도 글과 컬럼을 기고했는데 이때 그는 '수가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고<ref>영어 sky를 한글 음운으로 순화한 것이다.</ref>, 한자로는 '秀嘉伊'라 하였다.
         허정숙은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는 사회의 변화가 필요함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한 사람의 개인의 참여가 사회를 바꾸는 중요한 동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1924년]]에는 [[여성동우회]]의 주요 멤버로, 그리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을 때에는, 직접 참여는 않았지만 그는 여성해방은 궁극적으로 사회 변혁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는 이념을 가지고,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 지지하였다.<ref name="shinyoung143"/>
  • 허참례
         신입 관리는 선임 관리에게 술과 음식, 기녀를 대접해야 했으며, 짓궂은 명령을 받들기도 한다. '''면신'''(免新)또는 '''신래침학'''(新來侵虐)으로도 불린다. [[고려]] 말 [[우왕]]때, 권문 세족의 아들들이 부모의 권세를 배경으로 관직을 얻는 일이 많아지자(→[[음서]]) 선임 관리들이 그들의 기를 꺾고 관리들의 질서를 잡고자 시작되었던 것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이것을 오늘날 [[신고식]]의 유래로 보기도 한다.
         신입 관리에게 뇌물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흙탕물에서 구르기'나 '목욕물 마시기', '동물 울음소리 따라하기' '얼굴에 똥칠하기'등 다양한 종류의 명령들을 내리곤 했다. 이러한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구타를 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이러한 면신례로 인해 재산을 모두 잃거나 병을 얻기도 하고, 심하면 기절하거나 목숨을 잃는 사람도 많았다. 면신례를 거부하면 관청에 발조차 붙일 수 없거나 관청 내에서 [[왕따|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예:[[조선 명종|명종]]때 [[율곡 이이]]는 [[승문원]]의 면신례를 거부했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심각한 문제가 되자 조선 정부에서는 면신례를 없애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며, [[사헌부]]에서 면신례를 금지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ref>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8B%A0%EB%9E%98%EC%9D%98+%ED%8F%90%EB%8B%A8%EC%9D%84+%EC%82%AC%ED%97%8C%EB%B6%80%EA%B0%80+%EC%83%81%EC%86%8C%ED%95%98%EB%8B%A4&keyword=%EC%8B%A0%EB%9E%98%EC%9D%98+%ED%8F%90%EB%8B%A8%EC%9D%84+%EC%82%AC%ED%97%8C%EB%B6%80%EA%B0%80+%EC%83%81%EC%86%8C%ED%95%98%EB%8B%A4 조선왕조실록:중종 36년의 상소] </ref>가 올라오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관습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이어져 왔다.
         조선시대에 신입 관리가 출사를 할 때 선임 관리에게 음식을 차려 대접하고 인사드리는 예식으로서는 면신례 이전에 '''허참례'''(許參禮)가 있었다. '''허참'''(許參), '''허참연'''(許參宴)으로도 불리는 이 관례는 서로 마주 대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의미로서 새로 부임하는 관리의 오만함을 방지하기 위한 관습이었다. 이후 열흘쯤 지난 후에 본격적으로 면신례를 행하는데, 이를 치르고서야 비로소 선배 관리와 동석(同席)할 수 있었다.<ref>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D%97%88%EC%B0%B8&keyword=%ED%97%88%EC%B0%B8 조선왕조실록:허참례] </ref>
         [[분류:고려의 문화]][[분류:조선의 문화]][[분류:집단 따돌림]]
  • 허협
         '''허협'''(許-, [[1796년]] ~ [[1840년]] [[1월 31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바오로'''(Paulus)이다.
  • 헌경왕후
         |작위 = [[조선의 역대 왕세자빈|세자빈]]
         |작위2 = [[조선의 역대 왕비|추존 왕후<br />추존 황후]]
         |배우자 = [[조선 장조|장조]]
         |자녀 = 2남 2녀<br/>[[의소세자]]<br/>[[조선 정조|정조]]<br/>[[청연공주]]<br/>[[청선공주]]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景春殿)
         |왕조=[[조선]]}}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 [[1735년]] [[8월 6일]]([[음력 6월 18일]]) ~ [[1816년]] [[1월 13일]]([[1815년]] [[음력 12월 15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왕세자빈, [[추존]]왕비로, [[대한제국]]의 추존황후이기도 하다. [[조선 영조|영조]]의 차남 [[조선 장조|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비이자, [[조선 정조|정조]]의 어머니이다. 원래 시호는 헌경혜빈(獻敬惠賓)이었으나,<ref>순조실록 19권, 순조 16년(1816 병자년 / 청 가경 21년) 1월 19일(기해) 1번째기사, "혜경궁 시책문"</ref> [[대한제국 고종|고종]]때 왕후로, 다시 황후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王后)로,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 또는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선조때의 문신 [[홍이상]]의 7대손이다. 모계로는 [[조선 선조|선조]]의 외6대손으로, 선조의 부마 영안위 [[홍주원]]과, 선조와 인목대비 소생 [[정명공주]]가 5대조부와 5대조모가 된다. 그가 태어날 때 할아버지 [[홍현보]]는 태몽을 꾸고, 그가 태어나자 아들 내외에게 특별한 아이라고 예상하였다. [[1735년]](영조 11년) 한성부 반송반에서 [[홍봉한]](洪鳳漢)과 한산부부인 이씨의 둘째 딸로 태어나, [[1743년]](영조 19년) 사도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할아버지 홍현보는 예조판서까지 역임했지만 [[한중록]]에 의하면 아버지 [[홍봉한]]은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지만 낙방했고, 그의 가계는 빈한하여 언니를 시집보낼 때와 그가 출가할 때 혼수품이 넉넉하지 않았다 한다. 그가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릴 때, 얼굴도 모르고 처음 보는 친척들이 나타나서 자신의 이름을 알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바로 영조의 특명으로 아버지 [[홍봉한]]은 그에게 《소학(小學)》, 《내훈(內訓)》, 《어제훈서(御製訓書)》를 가르쳤다 한다. 영조 20년인 [[1744년]](영조 20년) 10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낳은 아들로는 [[의소세손]]과 [[조선 정조|정조]]가 있다. 영조는 첫 손자인 의소세손 이정이 태어나자 기대가 남달랐으나 의소세손은 곧 요절했다. 그러나 2년 만에 둘째 아들 세손 이산이 태어났다.
         [[1762년]](영조 38년) [[5월 22일]] [[나경언]]이란 자가 사도세자의 10가지 비행을 고변하자, 영조는 친히 국문을 하였다. 나경언은 액정별감 나상언의 형으로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속였다. 가산이 탕진되어 자립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세자를 제거할 계책을 내어 형조에 글을 올렸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ua_13805022_002&grp=&aid=&sid=247168&pos=0|제목=영조실록 99권 38년(1762년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5월 22일(을묘) 2번째 기사|확인날짜= |저자= 영조실록|날짜 =|출판사=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 = 1762-5-22|인용=}}</ref>
         [[1762년]](영조 38년) [[7월 4일]](윤[[5월 13일]]) 부왕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는 참혹한 형벌을 내렸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ua_13805113_002&grp=&aid=&sid=247168&pos=5|제목=영조실록 99권 38년(1762년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을묘) 2번째 기사|확인날짜= |저자= 영조실록|날짜 =|출판사=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 = 1762-5-13|인용=}}</ref>
         [[1762년]](영조 38년) [[7월 12일]](윤[[5월 21일]])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자는 뒤주에서 나오지 못하고 폭염 속에서 사경을 헤매었고 결국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아사(餓死)하였다. 영조가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홍씨에게는 '혜빈(惠嬪)'의 호를 내렸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ua_13805121_002&grp=&aid=&sid=0&pos=0|제목=영조실록 99권 38년(1762년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21일(을묘) 2번째 기사|확인날짜= |저자= 영조실록|날짜 =|출판사=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1762-5-21|인용=}}</ref>
         [[1776년]](정조 즉위년) 영조가 83세에 서거하고, 대리청정하던 세손 이산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등극하니, 곧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어머니 혜빈 홍씨 역시 '혜경궁(惠慶宮)'으로 궁호가 높아졌다. 당시 왕실에서 혜경궁 홍씨가 제일 연장자였으나, 서열상 10살 아래인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가 대비의 위치를 차지하여 왕실 서열상 제2위의 위치에 있었다.
         생전 그는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의 존호를 받았다. [[1805년]](순조 5년)부터는 담현증(痰昡症)을 앓아 오래 병석에 누웠다. [[1815년]](순조 15년) 창경궁 경춘전에서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며 헌경빈(獻敬嬪)의 시호를 받았다. 이는 총명하고 예지(睿知)함을 헌(獻)이라 하고 밤낮으로 경계함을 일러 경(敬)이라 하였다 한다.<ref>순조실록 18권, 순조 15년(1815 을해년 / 청 가경 20년) 12월 25일(을해) 2번째기사, "빈청에서 혜경궁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여 올리다"</ref> 순조 즉위 직후 혜경궁은 아들 [[조선 정조|정조]]의 약속을 이유로 친정에 대한 신원을 요구했고, [[1814년]](순조 14년) 그의 친정집은 신원, 복권된다. 또한 [[홍봉한]]의 죽음 직전에 그를 비난했던 정이환, 이심도 등의 처벌을 요구한다. 이심도는 사형에 처해진다.
         [[1854년]](철종 5년) 유정(裕靖)의 존호가 추가되었다. [[1899년]](광무 3년) [[8월 3일]]에 경연특진관 서상조(徐相祖)의 상소로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할 것을 청하여 [[조선 고종|고종]]이 승인하여 장헌세자가 장종대왕으로 [[추존]]되자, 함께 헌경왕후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성립 이후인 [[1903년]](광무 7년) 장조가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격상되자 그녀 역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되었다.
         《[[한중록|한중록》]]은 청상과부가 된 그녀를 동정하는 소재가 되었다. 그리고 편집증적인 영조의 사도세자 핍박과정을 상세히 적어놓은탓에 사도세자의 살인행각을 영조의 탓으로 사도세자를 미화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권력의 최상부에서 70년이상을 직접 보고 겪은 정사에서는 볼수없는 정치사의 이면을 폭로한 정보가 하나둘이 아니며 피상적으로 적혀있는 사건들의 사건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또한 조선후기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 칠십년을 궁에서 살아온 경험들을 상세히 기술해 그 어떤 사료보다 당대 풍속을 상세히 그려볼수있게한다.
         ***** 당숙 : 증 영의정 [[홍상한]](贈 領議政 洪象漢, 1701~1769) - [[어유구]]의 조카사위,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의 사촌제부
         * 시고조부 : 제17대 [[조선 효종|효종대왕]](孝宗大王, 1619~1659)
         ** 시증조부 : 제18대 [[조선 현종|현종대왕]](顯宗大王, 1641~1674)
         *** 시조부 : 제19대 [[조선 숙종|숙종대왕]](肅宗大王, 1661~1720)
  • 현경련
         '''현경련'''(玄敬連, [[1794년]] ~ [[1839년]] [[12월 29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베네딕타'''(Benedicta)이다.
  • 현석문
         '''현석문'''(玄錫文, [[1797년]] ~ [[1846년]] [[9월 19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가롤로'''(Carolus)이다.
         그는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신부]]가 [[순교]]하고 사흘 뒤에 순교하였다. 현석문은 [[앵베르]] [[주교]]를 [[조선]]에 데려오고 [[샤스탕]] 신부를 도와 여러 곳을 다니며 [[선교]] 활동을 함께 한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현석문은 순교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독실한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는 [[조선 헌종|헌종]] 2년([[1836년]])에 [[의주]]로 가서 [[앵베르]] 주교를 [[조선]]으로 맞아들였다. [[1837년]]에 [[샤스탕]] [[사제|신부]]가 입국하자, 현석문은 그의 [[복사 (기독교)|복사]]가 되어 신부와 함께 [[선교]] 여행에 동참하는 한편, 교인들의 신앙지도에 힘썼다.
         [[앵베르]]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될 때, 현석문은 [[한양]]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주교는 [[순교]] 전에 [[조선]]의 [[교회]]를 맡겼다. 이 사실은 주교와 교우들이 그를 얼마나 크게 존경했는지를 보여준다. 현석문은 체포를 피하기 위해 이재영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새로 입교한 교우들을 격려했고 여러 [[선교]]지들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부금을 모아서 그들의 신앙생활을 뒷바라지 하였다.
         그는 아내와 누이가 순교한 후에 《[[조선]] [[천주교]] [[순교자]] 열전》을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기해박해]]가 끝나자, 그것의 편찬을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상하이]]까지 피해다니기도 하면서 살아남은 [[최희원]]과 [[모방 베드로|모방]] [[사제|신부]]의 [[복사 (기독교)|복사]] [[최형 베드로]], [[이승훈 베드로]]의 손자 [[이재의 토마스]] 등의 협조를 받아 [[순교]] 자료를 모아서 확인 및 보충 정리하여 3년 만에 단편의 《[[기해일기]]》를 완성하였고 교우들에게 배포하였다.
         그는 빈번히 [[베이징]]으로 전령을 보내 [[선교사]]들과 연락하였다. [[1845년]] 그는 [[부제 (기독교)|부제]] [[김대건]]과 함께 작은 나무배를 타고 [[상하이]]로 가는 험란한 항해에 동참하였고, [[천주교 서울대교구|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를 맞아들였다. 현석문은 [[한양]]으로 돌아온 뒤, 위험을 무릅쓰고 김대건 [[사제|신부]]의 집을 자신의 명의로 [[등기]]하였다. [[1846년]]에는 [[병오박해]]가 일어났다. 현석문은 김대건 신부의 [[체포]] 소식을 듣고 새로운 집을 구입하여 교회의 모든 재산을 그곳으로 옮겼으며, 김 신부의 처소에 남아 있던 여성 교우들을 새 집으로 피신시켰다.
         [[분류:1797년 태어남]][[분류:1846년 죽음]][[분류:연주 현씨]][[분류:조선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참수된 사람]][[분류: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분류:19세기 기독교 성인]]
  • 현정건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대구광역시|대구]]
         조선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 24년([[1887년]])에 [[대구광역시|대구(大邱)]]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 시|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의정원|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이규홍(李奎洪)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Verkhneudinsk) 회의<ref group="설명">이동휘의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김철훈ㆍ안병찬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경쟁을 완화하고 두 세력을 합치기 위해 코민테른에서 그들에게 베르프네우딘스크에서 연합대회를 갖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한인 공산주의 운동 계열의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하였는데, 국내에서는 정재달, [[조봉암]] 등도 여기에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대회는 대표의 자격 문제가 제기되면서 파탄나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철수, 코민테른 당국이 각파 지도자를 모스크바로 불러 조정하려 했으나 이마저 실패하자 결국 코민테른은 양파 모두 해산하고 단일당을 조선 안에 세울 것을 지시함으로써 상하이파도 이르쿠츠크파도 없어지게 된다. 김학준 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2005, 민음사.</ref>에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는 윤해(尹海)ㆍ신숙(申肅)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王三德)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員)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ref>「創造派의 회의 종료」 『동아일보(東亞日報)』 1923년 6월 25일자.</ref>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8월에 조선의 관서([[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ref>「同胞의 ㅁ愛! 해외각디동포의열렬한동정 가련한수재당한형뎨들에게」 『동아일보』1923년 10월 4일자 기사.</ref> 여기에 현정건의 이름이 실려 있다.
         [[1924년]] 6월, 현정건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해 오는 조선인 학생들의 중국 사회 적응과 그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돕기 위한 [[김규식|김규식(金奎植)]]의 제안을 받아들여, 상하이에서 [[1917년]] 여운형이 세웠던 인성학교(仁成學校) 내에 개설된 조선인 학생을 위한 예비교(豫備校, 예비강습소)에서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영어 과목을 맡아 가르쳤고<ref>이는 국내에도 알려져 신문에 「上海에 豫備講習」(『동아일보』 1924년 6월 6일자), 「豫備校 設立」(『시대일보』 1924년 6월 9일자) 등의 기사가 나기도 했다.</ref>, 그 뒤 상하이 고등보통학교(上海高等普通學校)로 개편된 뒤에도 여운형, 김종상(金鍾商) 등과 함께 전임교사로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9월에는 상하이교민단에서는 실시한 의사원(議事員) 총선거에서 당선되기도 했다.<ref> 재상해일본영사관경찰부(在上海日本領事館警察部)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 1946년, 동문사서점(東文社書店)</ref> 11월에는 상하이에서 윤자영이 조직한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상하이한인청년동맹)에 가입, 집행위원이 되었고 『횃불』, 『새길』 등의 잡지를 발간하였다.
         [[1925년]] 5월 9일에는 상하이에 있던 [[조소앙|조소앙(趙素昻)]]ㆍ여운형ㆍ윤자영ㆍ김상덕(金尙德)ㆍ최창식(崔昌植)ㆍ김규면(金圭冕)ㆍ손두환(孫斗煥) 등 약 30명의 조선인 동지와 함께 서문 밖 체육장에서 배일(排日) 중국인 단체의 집합에 참가하였고 이곳에서 "중국과 한국이 합동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상하이주간(上海週刊)』5월 9일자 특별호에 실린 사설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ref>이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 의해 7월 1일에 일본 외무성의 외무차관에 보고되었다. 국회도서관(國會圖書館) 편찬 『한국민족운동사료(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 1976년, 567~568쪽.</ref> 9월 8일에는 상하이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10일에 중국사정연구회(中國事情硏究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1월에 상하이에서 의열단 창립 9주년을 맞아 재중 조선인들에게 격문을 발표하며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1927년]] 4월 10일 홍진(洪鎭)ㆍ홍남규(洪南杓) 두 사람의 명의로 발표된 전민족적독립당결성선언문(全民族的獨立黨結成宣言文)에 따라 11일에 삼일당에서 약 40명이 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 창립총회를 열고,
         등의 강령 및 명칭, 위원 기타를 결정하고 조직을 끝냈는데 이때의 집행위원으로 [[이동녕]]ㆍ조소앙 등과 함께 현정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11월에 다시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를 조직할 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ref>대한민국 국회도서관 편찬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 1976년, 618~621쪽 및 일본 외무성경찰사(外務省警察史) 지나지부(支那之部) 『조선민족운동사(朝鮮民族運動史)』≪미정고(未定稿)≫ 4, 고려서림(高麗書林), 1989, 11~22쪽.</ref>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을 하나로 집결시키려 애썼으나 [[1928년]] 봄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항경리(恒慶里)에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 11월 9일에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변동화(邊東華)ㆍ황의춘(黃義春) 등과 함께 공판이 열렸다. 이때 변호를 맡은 것은 최창조(崔昌朝)ㆍ이희적(李熙迪)ㆍ탁창하(卓昌河) 등 신의주 변호사 세 명과 손홍팔(孫洪八)ㆍ현석건(玄奭健)<ref group="설명">현정건의 친형이다.</ref> 등 진주 변호사 두 사람이었다. 현정건은 자신은 회합에 참여한 적도 없고 관련도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으나, 12월 12일에 신의주 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하였다. 이에 불복하였으나 [[1929년]] 1월 19일에 평양으로 압송, 6월 10일에 열린 민사 제1호 법정 복심에서 원심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 10일에 만기출옥하였으나,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복막염]]으로 12월 30일 의전병원에서 향년 45세로 사망하였다.
  • 현철 (1891년)
         | 출생지 = [[조선]] (現 {{KOR}} [[부산광역시]])
         메이지 대학에서 다니면서 신극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연극 공부를 시작하였다. 조선적인 연극을 구현할 뜻을 품고 [[1917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상하이 시|상하이]]로 건너갔다. 이 곳에서 연극학교를 잠시 운영한 뒤 [[1919년]]에 귀국하여 전방위적 예술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특히 [[1924년]]에 세운 [[조선배우학교]]는 한국의 근대예술사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 연극 관련 과목은 현철이, 영화 관련 과목은 [[이구영 (영화 감독)|이구영]]이 담당하여 배우를 양성했다. [[박제행]], [[서월영]], [[왕평 (작가)|왕평]], [[양백명]], [[복혜숙]], [[이금룡]] 등이 이 학교의 제1기 교육생 출신이다. 조선배우학교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해체되었으나, 현철은 끊임없이 연극인 양성 사업에 주력하여 한국 예술계의 중요한 인력이 그의 손을 거쳐 배출되었다.
         주요 관심사였던 연극인 양성 작업을 통해 현철은 차츰 영화계와 관련을 맺게 되었는데 [[1927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의 영화선전부 주임으로 재직하며 좀 더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뛰어들게 되었다. 아울러 조선배우학교가 제작과 캐스팅을 맡는다는 조건으로 [[단성사]]와 합작하여 [[1928년]] 영화 《숙영낭자전》이 기획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극장]] 경영에도 참여하여 공연 기획과 극장 경영을 시작했다. 이 극장 안에 연예학교를 설치해 배우를 양성하고, 매주 토요일을 예술선전일로 삼아 강연을 개최하며, 전문 월간지를 발간하는 등의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조선극장의 소유권과 경영권이 넘어가 현철의 계획은 제대로 달성되지 못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야담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신정언]], [[유추강]] 등이 유명한 야담가로 활동 중이었는데, 현철은 이과 함께 야담대회를 개최하고 야담동호회도 조직하는 등 야담 운동에 투신했다. 야담과 만담 분야 예술인들이 모여 [[조선담우회]]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다.
         * [[조선배우학교]]
  • 혜원군
  • 홍국영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지 = [[조선]] [[강릉시|강원도 강릉]]에서 병사
          | 왕조 = [[조선]]
         '''홍국영'''(洪國榮, [[1748년]] ~ [[1781년]] [[4월 28일]]([[음력 4월 5일]])<ref>정조실록 11권, 정조 5년 4월 5일 세 번째 기사</ref>)은 [[조선]] 영조,정조대의 [[세도]] 정치가.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豊山)이며, [[자 (이름)|자]]는 덕로(德老)이다. 세손궁의 궁료(宮僚) 시절 때부터 [[조선 정조|정조]](正祖)의 총애를 얻고, 정조 즉위 후 부홍파(扶洪派)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세간에는 흔히 권력을 잡은 후 세도를 부리다가 축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축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1772년]] 9월 정시(庭試:별시의 일종) 문과에 병과 11위<ref>15명 중에 15위였다. 출처 조선문과방목 영조48년 정시</ref> 로 급제하였다. 대과에 급제하고도 6개월간 보직을 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2월부터 가주서(假注書)로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계속해서 이 해 [[4월]] [[정민시]]와 함께 한림소시에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영조]]를 보좌하는 사관으로 봉직하기 시작했다. [[한중록]]에서는 그가 사관으로 봉직할 당시 [[영조]]가 홍국영을 "내 손자"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쓰고 있다. 이듬해인 [[1774년]] 3월에는 동궁시강원 설서(說書)로 임명된다. 세간에 홍국영이 과거 급제와 동시에 설서에 임명되었다는 설이 많이 퍼져있는데<ref>박광용《영조와 정조의 나라》(푸른역사, 1998)와 이덕일《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1》(고즈윈, 2008)에서는 홍국영이 과거 급제한 달에 바로 세손의 시강원에 임명되었다고 적고 있다. </ref>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조선 정조|정조]]와는 동궁시강원 설서가 되면서부터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이 당시 궁료들이 서연에서 아뢴 말들을 모아 《현각법어》(賢閣法語) <ref>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규6836</ref> 라는 책을 펴냈는데, 실제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홍국영의 언행이라고 한다. 《명의록》 등은 이 시기 홍국영이 "세손의 오른날개(右翼)"라고 불렸다고 적고 있다.
         홍국영의 몰락에 대해서는 각종 설만 난무할 뿐,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탄핵의 포문을 연 김종수의 상소에서 언급된 공식적인 탄핵 사유는 '후궁 간택을 막았다'라는 것이었다. 또한 (원빈의 수원관)완풍군을 정조의 양자로 들여 동궁으로 삼으려 했다는 가동궁 사건설도 몇몇 군데에서 언급된다. 정조7년 문양해 반란사건 당시 '왕비의 목숨을 위협했다'라는 기록도 있고,《정종대왕묘지문》에는 홍국영이 [[은전군 이찬]]([[조선 정조|정조]]의 이복 아우)을 죽게해서 몰락했다고 정조가 원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속설 중에 홍국영이 완풍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거나, 효의왕후 김씨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던 것이 발각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는 19~20세기에나 등장한 야사로 짐작된다.
         *** 매제 : [[조선 정조|정조]] (正祖)
         *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 (드라마)|한중록]]》(1989, [[MBC]], 배역: [[김동현 (1950년)|김동현]])
         * 《[[조선왕조 오백년]] - [[파문 (드라마)|파문]]》(1989, [[MBC]], 배역: ?)
         직책=[[조선]]의 [[섭정]]|
         [[분류:1748년 태어남]][[분류:1781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왕족]][[분류:한국의 섭정]][[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유교 신자]][[분류:과거 급제자]][[분류:풍산 홍씨]][[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 정조]][[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노론]]
  • 홍금주
         '''홍금주'''(洪今珠, [[1804년]] ~ [[1839년]] [[9월 26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페르페투아'''(Perpetua)이다.
  • 홍명희
         [[한국]]의 [[소설가]],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 월북 [[북한]] 정치인. 호는 벽초(碧初)[* 뜻은 "[[에스페란토|푸른빛(碧)의 말]]을 처음으로(初) 배운 [[한국인]]". 에스페란토을 상징하는 색이 초록색이라 그렇다.]이다. 춘원 [[이광수(소설가)|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조선]] 3대 [[천재]]'''로 알려진[* 참고로 말하는데, 이 3대 천재라는 것은 대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홍명회, 이광수, 최남선은 같은 시기에 동경유학을 하였고, 양건식과 신형철들이 이들을 동경삼재라고 불렀다.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중에서 유능한 인재들이란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들이 귀국하면서, 잡지 소년에 함께 글을 기고하면서 동경삼재라는 이름은 (일제시대하) 조선삼재로 변했다. 이들은 모두 문인으로, 문학계에서 칭찬 삼아서 붙여준 별명이었던 것 같다. 다만 명칭이 이런 식이라서 그럼 왜 세종대왕이나 정약용 대신에 이런 인물들이 있느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여담]]으로 이 3대천재 드립은 전부 다 홍명희 관련으로 나왔다. 현대에 이 언급을 한 것도 홍명희 평전이었고, 조선삼재 이야기도 홍명희와 [[현상윤]]이 나눈 1940년대 인터뷰에서 나왔다.] 인물로 실제로 이 셋은 죽마고우였으나 앞의 둘은 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데 비해서 홍명희는 변절하지 않지만 월북하여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와 친교를 유지했고, 훗날 [[한국전쟁]] 당시 춘원이 납북되자 그의 신변을 보호했으며 그가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병원으로 이송까지 할 정도로 막역했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친한 만큼 매섭게 이광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야사에서는 이광수가 친일파로 변절하자 홍명희는 이광수의 집 대문 앞에 음식상을 차리곤 곡을 하기 시작했다. 놀란 이광수가 나와서 연유를 묻자 홍명희는 "내 친구 춘원(이광수의 호)이 그만 죽고 말아서 이렇게 곡을 하며 슬퍼하고 있소."라고 대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비슷한 이야기가 꽤 많다. [[최남선]]과 [[정인보]], 최남선과 정인보의 스승인 승려 석전 박한영 간에도 있다. 최남선이 변절한 뒤 정인보(또는 스승 박한영)를 만나자 "나에게 최남선은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오."하고 헤어졌다는 야사.]
         우리에게는 소설 <[[임꺽정]]>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단 한편의 소설 《임꺽정》(林巨正)이 1928년부터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비롯해 1930년대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여담으로 일제치하에서 수감된 문인들중 유일하게 옥중집필이 허용된 작가가 홍명희 였다. 홍명희가 수감된이후 임꺽정이 연재중단되자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총독부 관리들조차 임꺽정에 맛들려서 제정신을 못차렸던 상황. 옥중에서 임꺽정 집필이 완료되면 총독부 관리들이 먼저 읽고 조선일보에 넘겼다고 한다.
         [[1928년]] [[11월 21일]] 연재되기 시작된 <[[임꺽정]]>은 홍명희의 투옥과 개인 사정 등으로 연재가 4차례 중단됐으며,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에는 ‘[[조광]]’에 발표됐다. 이 소설은 토속어 구사가 뛰어나서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소설에 대해 만해 [[한용운]]은 “연재기간의 연장으로는 세계적으로 최고 기록일지도 모른다.”고 말한 바 있다. 훗날 손자 홍석중이 이야기를 마무리지었으므로 대를 이어서 창작한 셈이다. 홍석중 씨가 완결을 발표하기 전에는 미완성 작품이라서, 홍명희가 북한에서 소설을 완성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었는데, 홍석중의 발언에 따르면 홍명희는 '소설의 결말은 독자들의 생각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임꺽정을 완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 뒤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다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했고 여운형 암살 후 지도자가 되기도 했으나 환경과 리더십의 부족으로 실패했다. 결국 이후 월북했다. 월북 계기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한 제정당ㆍ사회단체 연석회의’에 [[김구]] 등과 함께 참석했다가 북한에 남았다. 그의 월북 동기에는 '친일파들과 결탁하여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강행추진하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실망감'이 컸다는 견해가 있다. ~~근데 [[김일성]] 정권도 핵심 실무인력에서는 친일 청산 안했잖아?~~
         그의 아들 홍기문은 [[조선왕조실록]]을 완역[* 북한에서는이를 “리조실록”이라고 부른다.]한 사람이자 북한 [[향가]] 연구의 대가인[* 북한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향가 전체를 해독한 사람이다. 어찌나 해독을 잘 했는지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향가를 해독한 [[양주동]] 선생도 홍기문의 향가 해독을 칭찬했었다고.]유명 국학자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 조평통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손자인 석형은 조선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함경북도당 책임비서를 역임하다 2011년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형의 동생 석중은 <[[황진이]]>를 쓴 유명 소설가다.
  • 홍병주
         '''홍병주'''(洪秉周, [[1798년]] ~ [[1840년]] [[1월 31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다.
  • 홍순언 (1530년)
         '''홍순언'''(洪純彦, [[1530년]] ∼ [[1598년]])은 [[조선]] 중기의 한어 통역관, 외교관으로 본관은 [[남양군|남양]](南陽)이다. 종계변무(宗系辨誣)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구원군 파병에 공을 세웠으며, [[종계변무]]에 세운 공로로 [[광국공신]] 2등관(光國功臣二等管)에 책록되었다. 기방에 팔려온 [[남경]]의 [[호부]][[시랑]] 류모의 딸을 구해준 인연으로 그녀의 남편이자 당시 [[예부]][[시랑]] [[석성 (명나라)|석성]]의 전폭적인 신뢰로 종계변무와 임진왜란 시 [[명나라]] 군대의 파병을 이끌어냈다.
         홍순언은 대죄하여 무릎꿇고 '작은 나라의 미관 말직 벼슬아치가 어떻게 대국의 귀한집 따님을 욕보이겠습니까' 하며 부복하여 절을 올리고, 자신이 가져온 돈 2천 냥과 인삼을 그녀에게 주었다. 2천냥과 인삼을 팔아 마련한 돈 1천냥으로 그날로 류씨 소녀의 빚을 청산해주고 장례비용까지 대주었다. 류씨 소녀는 거듭 감사하다 하며 그에게 성과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자신은 그냥 [[조선]]의 홍역관이다.<ref>혹은 성을 밝히지 않고 그냥 조선의 역관이라 했다.</ref>라고 했다. 류씨소녀는 은장(恩丈)이라 하며 거듭 감사를 표시했고, 그는 친히 소녀를 배웅하였다. 조선의 역관들은 조정의 허락 없이도 사적으로 인삼과 비단 무역이 가능했는데, 동료 역관들은 이것을 공짜로 류씨 소녀에게 주고 온 그를 바보라고 놀려댔다. 도리어 그가 류씨 소녀에게 준 2천냥의 돈이 공금이라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옥에 갇혔다. 하지만 얼마 뒤 석방되었다.
         이후 [[조선]]에서 종계변무사신이 파견될 때마다 담당인사 였던 석성은 사신을 만나주지 않으면서 이상하게 홍역관이 왔느냐는 질문을 계속 했다고 한다.
         [[종계변무]]란 조선 건국 때부터 선조 때까지 2백여 년간 명(明)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잘못 기록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세계(世系)를 시정해 달라고 주청하였던 사건이다. 태조때부터 시정을 위해 사신을 15회나 파견하였지만 전부 거절당하였다. 지속적으로 거부당하자 조선 14대임금인 선조는 “종계변무를 이번에 성사시키지 못하면 목을 쳐버릴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역관들은 겁에 질려 선뜻 나서지 못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조선]] 조정에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청병사신을 파견하게 되었다. 홍순언은 청병사신으로 북경에 갔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바칠 뇌물을 마련하여 홍수언에게 주었으나 홍수언은 진심으로 설득해도 설득이 될까말까 한데 어찌 뇌물로 매수할 생각을 하느냐며 대신들을 호통쳤다.
         그가 [[장안]]에 도착하여 [[조선]]이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조국 정벌 음모를 접했음에도 이를 거절하다가 침략을 당했다며 사정을 설명하였으나 [[명나라]]의 관리들은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토벌하려 하는 것은 아니냐며 조선 지원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당시 병부시랑으로 있던 석성의 도움으로 홍수언은 [[명나라]] 군사 5만 명의 파병을 성사시킨다. [[석성]]을 통해 그의 의기를 접하게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그를 믿고 선뜻 가겠다고 자청했고, 선조가 이여송을 만날 때에도 그가 통역했다고 한다.
         관직은 [[자헌대부]]에 이르렀고, [[1598년]]에 병사하니 향년 68세였다. 사후 [[조선]]에서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증직]]되었고, [[명나라]]로부터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의 [[증직]]을 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조선 효종|효종]]의 부마인 동평위 [[정재륜]]의 동평위공사견문록과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옥갑야화 편, [[이익]]의 [[성호사설]] 17권 임진재조 편 등에 기록되어 후대에 전하게 되었다. 첫째 아들 [[홍건]]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당상관]]을 지냈고, 넷째 아들 [[홍운]](洪運)은 [[광해군]] 때인 [[161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홍건의 아들인 손자 [[홍효손]]은 숙천부사를 지냈다.
         홍순언의 일화는 [[조선]] 후기의 소설 《[[이장백전]]》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그의 행적은 [[정재숭]]과 [[박지원]], [[이익]]의 저서를 통해 일부 알려졌으나,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도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일화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20년]]대였다.
         [[조선]] 멸망 후 [[1928년]] 위당 [[정인보]]는 그의 방계후손 [[홍정구]]의 부탁을 받고 당릉군유사징(唐陵君遺事徵)을 찬하였다. [[정인보]]는 당릉군유사징의 '唐陵君遺事徵引文'에서 홍순언 동생 [[홍덕린]]의 후손인 [[홍정구]](洪正求)가 자신([[정인보]])을 찾아와 선조 당릉군의 행적이 너무 미약하니 선조의 행적을 기술한 유사(遺事) 편찬을 부탁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홍정구]]는 여러 번 [[정인보]]를 찾아와 거듭 부탁하였고, [[정인보]]는 시대가 바뀌어 가족도 몰라보는 시대에 [[홍정구]]의 조상을 추모하는 의리에 감동하여 결국 이를 수락했는데, [[정인보]]는 자료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동평위공견사문록, 열하일기의 옥갑야화편 외에도 직접 여러가지 사적을 조사하여 [[1928년]] 당릉군유사징 제1권《당릉군유사 (唐陵君遺事)》를 집필하였다.
         [[성호사설]] 17권 임진재조에는 이후 [[명나라]]가 [[청나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게 될 때 [[임진왜란]] 당시 5만의 병력을 파견하게 했던 [[석성]]이 투옥된 것을 기록한다. [[이익]]은 '[[1640년]]대 [[석성]]이 투옥된 후 [[이항복]]이 [[명나라]]의 [[베이징]]에 갔을 때 [[석성]]의 문하생인 양씨가 와서 "귀국에서 말 한마디라도 올려 스승을 구해주기를 청한다"고 간청하였지만 [[이항복]] 등 조선의 사절단들은 이를 웃으면서 방관하였고, 한 사람도 사신을 보내 [[석성]]의 억울한 옥사를 변명해주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석성]]의 문인은 [[조선]]에 와서도 스승 석성을 구해줄 것을 청했으나 [[조선]] 조정은 입으로만 소중화, 재조지은을 외칠 뿐 양씨의 청을 거절하였다. 성호 [[이익]]은 이를 언급하며 당시 관료들의 배은망덕함을 질타하였다.
         [[분류:조선의 역관]][[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번역가]][[분류:임진왜란 관련자]]
         [[분류:조선의 공신]][[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남양 홍씨 (당홍)]][[분류:병사한 사람]]
  • 홍승목
         '''홍승목'''(洪承穆, [[1847년]] [[음력 10월 11일]] ~ [[1925년]] 양력 [[2월 15일]])은 [[조선]] 말기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냈다. 자는 경희(敬熙), 호는 연운(硯耘),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 본적은 [[경기도]] [[경성부]] 계동이다.
         [[한성부]] 출신으로 [[1875년]] [[조선의 과거 제도|과거]]에 합격하여 [[승정원]]에서 관직을 시작했다. 이후 [[홍문관]]과 [[사헌부]] 등에서 근무하다가 [[1879년]] 형조와 병조의 참의 자리에 올랐으며, [[1881년]]과 [[1883년]]에는 각각 [[사간원]]의 대사간과 [[성균관]]의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1890년]] 형조참판과 병조참판을 지냈고, [[1900년]] [[궁내부]] 특진관에 올랐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조선총독부]]가 설치한 중추원의 찬의가 되어 [[1921년]] 관제 개편때까지 재직했다. [[1912년]]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도 서훈 받았다.
         아들은 경술국치 때 자결한 [[홍범식]]이며, 손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을 지낸 소설가 [[홍명희]]이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분류:1847년 태어남]][[분류:1925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풍산 홍씨]]
  • 홍영식
         '''홍영식'''(洪英植, [[1856년]] [[2월 5일]]([[1855년]] [[음력 12월 29일]]) ~ [[1884년]] [[12월 7일]]([[1884년]] [[음력 10월 20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 외교관, 시인이다. 구한말 [[개화파]] [[정치인]]이며 [[갑신정변]]의 주역<ref>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95776 '프라하의 연인'과 김옥균, 북촌을 걷다] - 오마이뉴스. </ref>으로,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 본관은 [[남양 홍씨|남양]](南陽)이며, 서울 출신이다. 한국 [[우편]], [[우표]] 제도의 선각자이기도 하다.<ref name="뉴스메이커">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17600&pt=nv <nowiki>[우정이야기]</nowiki>우초(우표)를 아십니까] - 뉴스메이커 776호([[2008년]] [[5월 27일]]자) </ref><ref name="노컷">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214016 근대 우편은 언제 시작됐나 : '우편, 우표, 우체국 이야기'] - 노컷뉴스, [[2006년]] [[4월 21일]]자(김선경 기자). </ref> 개화파의 중진으로서 신설된 우정총국의 총판(總辦)이 되어 낙성식을 기회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의 아버지 [[홍순목]]은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고 [[흥선대원군]]의 부탁을 받아 그의 아들 [[이재면]], [[이재선]], [[이명복]](훗날의 [[조선 고종|고종]]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러나 홍영식은 [[박규수]]와 [[오경석]]의 문하에 가서 글을 배운다.
         [[파일:1883년조선주미보빙사절단01.jpg|섬네일|180px|left|[[1883년]] [[9월]] [[미국]]에 파견된 [[조선]]의 보빙사절단원(앞줄 왼쪽 첫 번째가 홍영식, 앞줄 왼쪽 두 번째는 [[민영익]], 뒷줄 가운데는 [[유길준]]) ]]
         한편 [[일본]]에서 [[1870년]]대부터 시행되던 [[우편]]제도를 상세히 검토했을 뿐 아니라, 당시 일본인들이 부산에서 멋대로 우편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것을 항의하는 한편, 우편제도에 대한 것을 자문하여 조선이 우편제도를 시행하도록 적극 도와줄 것과, 조선에서 우편제도가 시행되면 조선의 제도에 따르겠다는 약속을 일본으로부터 받아냈다고 한다. 이후 [[1882년]]에는 김옥균·박영효·서광범과 함께 국가의 개혁 방안을 토론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883년]](고종 20년) [[6월]], 그 전해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의 사절이 [[한성부]]를 방문하고 돌아간 뒤, 그해 [[6월]] [[미국]]의 사절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 정부에서 [[미국]]에 [[보빙사]](報聘使)가 파견될 때 그는 보빙부사 겸 전권부대신에 임명되어 보빙사 겸 전권대신 [[민영익]]의 부사(副使) 자격으로 [[민영익]],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에 파견되었다. [[6월 5일]] 보빙사(報聘使) 전권대신 민영익을 수행, 전권부대신으로 출국하였다.
         홍영식은 고영철, 최경석, 외국인 로웰, 오에당(吳禮堂), 오카모토 등을 거느리고 [[10월 16일]] [[워싱턴]]을 출발하여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배편으로 [[일본]] [[도쿄]]를 거쳐 [[1883년]] [[11월 20일]] 귀국하고, [[11월 21일]] 고종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미국]]에서 열차와 버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미국]] [[워싱턴 D.C]]를 시찰하면서 기관차와 버스를 목격했고, 농작물을 수확 자르는 기계를 보고 그해 [[11월]]에 귀국하여 [[미국]]에서 신품종의 농작물과 농기계를 도입할 것을 조정에 상주하였다. 그리고 로웰의 노고를 고종에게 보고했으며 고종은 그를 국빈으로 초대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왕실의 초대에 힘입어 로웰은 12월 20일 다시 조선을 방문하였다. 이후 개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개항 운동을 적극 주도한다.
         [[1881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할 때 홍영식도 이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당시 시찰 대상은 병제였으나, 홍영식은 [[우편]]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것은 “일본 우편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마에지마의 자서전인 《우편창업담》에 홍영식이 역체국에 찾아와서 우편에 관한 일들을 질문하여 모든 서류를 증여하고 직원으로 하여금 우편실무를 설명시키고 자신도 홍씨를 만나 우편 제도를 설명하고 조선에도 빨리 우편을 개설할 것을 권고하였다고 한다.<ref name="노컷" />
         [[1883년]] [[1월 12일]]([[1882년]] [[음력 12월 4일]]) 창시된 교섭통상아문에 근대식 체신기관인 우정사(郵程司)가 설치되자 홍영식은 우정사 담당 협판이 되었다.<ref name="노컷" /> [[1883년]] [[음력 9월]] 보빙사의 부사로 미국에 갔을 때는 뉴욕의 우체국과 전신국을 시찰하였으며, 귀국 후 고종에게 우편 업무의 개설을 건의하였다.<ref name="노컷" /><ref name="뉴스메이커" /> 동시에 [[미국]] 체류 중 홍영식에게는 특별히 [[조선 고종|고종]]의 특사 자격이 임명되었다. [[1884년]] 초에는 [[함경북도]] 병마수군절도사 겸 안무사로 임명되어 부임했다가 며칠만에 협판군국사무로 전임되어 다시 되돌아왔으며,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884년]] [[4월 22일]]([[음력 3월 27일]]) 우정총국을 창설하게 되었고,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에 임명되었으며, [[11월 18일]]([[음력 10월 1일]]) 서울·인천 간에 근대식 우편제도의 실시를 보았다.<ref name="노컷" />
         당시 [[우정총국]]이 새로 설치된 건물은 [[조선 선조|선조]]조에 전의감(典醫鑑)으로 지은 건물로 고종이 하사한 것이다. 이어 그는 분국을 [[제물포]]에 최초로 설치하고 급한대로 외국인과 교통이 잦은 [[인천]], [[부산]] 등에 임시로 우정국 분국을 설치했다. 또한 [[박정양]]이 추천한 [[이상재]]를 제물포 우정국장으로 임명하였다. 바로 우표의 도완을 그려 문위우표(文位郵票) 5종을 [[일본]] 인쇄소에서 인쇄, 주문하였다. 그 가운데 5문, 10문 등 2종이 [[1884년]] [[10월]] 국내에 들어 왔다. 그러나 25문, 50문, 100문은 미처 국내에 반입되지 못하였다. 우편 업무 취급장정의 제정, 인력과 장비 등 준비를 거쳐 [[11월 18일]]([[음력 10월 1일]]) 최초로 한성과 제물포분국, 인천분국 간에 우편물 교환을 개시하였다.
         [[1882년]] [[음력 12월]]부터는 [[덴마크]]와 [[미국]]의 전신회사들과 교섭하여 [[덴마크]] 대북부 전신회사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1883년]](고종 20년) [[1월 24일]] 덴마크 대북부 전신회사에 약정을 허가하고 계약, [[조선]]에 전신 통신선 설치 공사를 시작한다.
         또한, [[일본]] [[규슈]]의 서북쪽 해안에서 [[쓰시마 섬]]을 연결하여 [[조선]]의 부산해안에 이르기는 전선을 설치하고, 다시 [[부산]]에서 국내로 전선을 연결하여 전신을 설치하는 공사를 체결하기 위해 다시 [[일본]]과 조선과 일본간의 조관 조약(條款條約)을 [[1월 24일]] [[일본]]과 체결, 서명하였다.
         12월 20일 다시 조선을 방문한 로웰은 조선에서 약 3개월간 체류하면서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을 백과사전 형식으로 자세히 기록했다. 2년 뒤 1885년, 그는 이 기록을 정리하여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았는데, 서문에 홍영식에 대한 추모글이 있다.
         [[분류:1856년 태어남]][[분류:1884년 죽음]][[분류:혁명가]][[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우편]][[분류:우표]][[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혁명가]][[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갑신정변]][[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유길준]][[분류:홍명희]][[분류:급진개화파]][[분류:사형된 사람]][[분류:살해된 사람]][[분류:부관참시된 사람]][[분류:남양 홍씨 (당홍)]][[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사상가]]
  • 홍영주
         '''홍영주'''(洪永周, [[1801년]] ~ [[1840년]] [[1월 31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명이다. [[세례명]]은 '''바오로'''(Paulus)이다.
  • 홍인한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도]]
         |국적= [[조선]]
         '''홍인한'''(洪麟漢, [[1722년]] ~ [[1776년]] [[7월 5일]])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정여(定汝), 본관은 풍산(豊山). [[예조]][[판서]] [[홍현보]]의 아들이고 [[영의정]] [[홍봉한]]의 이복동생이다. 혜경궁 홍씨의 이복 삼촌이 된다. [[홍국영]]의 일족이기도 하다. 당색으로는 [[노론]]이며 노론내 외척당의 지도자였다.
         노론 내 벽파의 주도로 사도세자 및 세손 제거론이 나올때 동조하였으며, 세손 제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1775년]] 이후 세손의 대리청정을 극력 반대하였으며 [[1776년]] [[조선 정조]] 즉위 후 [[정후겸]] 등과 함께 유배, [[전라도]] [[완도군]] [[고금도]]로 유배되었다가 위리안치된 후 [[처형]]되었다. 1855년(철종 6) [[조선 철종|철종]]이 그를 복권하였으나 여러 차례 반대로 취소되었다가 다시 1858년(철종 9) 복권되었다.
         [[고구마]]를 처음 도입한 [[조엄 (조선)|조엄]]은 그의 매형이 되고, 누나는 [[조선 문조|익종]]비 [[신정왕후 (조선 후기)|조대비]]의 증조할머니가 된다.
         음서로 관직에 올라 [[통덕랑]]이 되었다. 통덕랑으로 재직 중 [[175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조선의 대표적 명문 가문인 [[풍산 홍씨]] 가문의 일원이며, 혜경궁 홍씨의 친정 숙부라는 점도 작용해 [[영조]]의 신임을 받으며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53년 가주서와 [[정언]]을 지내고 1754년 [[교리]]로 있을 때 [[조영순]](趙榮順)을 변호하려다 파직되었다.
         아들인 동지돈령부사 [[홍낙윤]](洪樂倫)이 아버지 홍인한의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거절당하였다. [[1809년]] [[1월]]에는 [[조선 순조|순조]]를 찾아가 아버지의 억울함을 들어 변호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1832년]]에는 손자 홍백영(洪百榮)이 할아버지의 억울함을 격쟁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이때 홍백영을 처벌하자는 주장이 나왔으나 순조가 무마시켰다.
         후에 [[조선 철종|철종]] 때인 1855년(철종 6) 철종이 그의 혐의가 애매하다는 이유로 그를 복직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홍문관과 양사의 반대를 받았다. 결국 여러차례 반대로 철종은 홍인한 복권 명령을 취소하였지만 1858년(철종 9) 10월 25일 복권되었다.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2004)
         [[분류:1722년 태어남]][[분류:1776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가족 살해자]][[분류:사형된 사람]][[분류:독살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풍산 홍씨]][[분류:노론]]
  • 홍진
         |출생지 = [[조선]] [[충청도]] [[영동군|영동]]
         |사망지 = [[미 군정 조선]]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심장질환으로 병사
         |거주지 = [[조선]] [[충청도]] [[영동군|영동]] <br/> [[조선]] [[한성부]] <br /> [[대한제국]] [[한성부]] <br /> [[중화민국]] [[쓰촨 성]] [[충칭 시|충칭]] <br/> [[미 군정 조선]] [[서울특별시|서울]]
         |출생지 = [[조선]] [[충청도]] [[영동군|영동]]
         |사망지 = [[미 군정 조선]]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심장질환으로 병사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당의 무장부대로 한국독립군을 편성하고 중국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활동했다. [[1934년]] 한국혁명당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가 곧 한국독립당을 재조직했고, 1935년 7월에는 이를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발전시켰다. [[1937년]] 7월 만주와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조직하자 선전위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고문이 되었으며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이 [[한국독립당]]으로 3당 통합되자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어 한국광복군의 창설에 이바지했다. [[1942년]] 10월 한중문화협회 명예이사로 선출되었으며, 국무위원회 고문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겸직하면서 [[8·15 해방]]까지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 조선 시대 ===
  • 황석두
         '''황석두'''(黃錫斗, [[1813년]] ~ [[1866년]] [[3월 30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루카'''(Lucas)이다.
         비천주교인들까지도 황석두의 헌신과 충실함 그리고 훌륭한 성품에 감복하였다. [[페레올]] [[주교]]가 [[조선]]에 입국 했을 때, 황석두는 여생을 [[교회]]를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절제와 [[금욕]]을 위해 페레올 [[주교]]에게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 받고 독신으로 살았다. 주교는 황석두를 [[사제]]로 만들기로 결심했지만, [[교황청]]에서는 [[조선]]에 황석두의 아내가 입회할 [[수녀회]]가 없다는 이유로 주교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 회원군 (1464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영순군]] 사저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귀성군 이준|귀성군 가통]] 사저에서 병사
          | 왕가 = [[조선|조선 왕조]]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조선 왕조]]
          | 친인척 = [[조선 세종|조선 세종대왕 이도]](증조부) <br /> [[임영대군|임영대군 이구]](양조부) <br /> [[광평대군|광평대군 이여]](친조부) <br /> [[조선 문종|문종 이향]](종조부) <br /> [[조선 세조|세조 이유]](종조부) <br /> [[조선 덕종|의경세자 이장]](종숙부) <br /> [[조선 단종|단종 이홍위]](종숙부) <br /> [[조선 예종|예종 이황]](종숙부) <br /> [[월산대군|월산대군 이정]](6촌 형) <br /> [[조선 성종|성종 이혈]](6촌 형) [[클라라(배우)|회라라]](6촌여동생)
         '''회원군 이쟁'''(會原君 李錚, [[1464년]] ~ [[1493년]])은 [[조선]]의 [[왕족|왕족 종실]] 겸 [[시 (문학)|시인]]이다.
         [[조선 세종|조선 세종대왕 이도]]의 적손자(嫡孫子)이자 [[광평대군]]의 외아들인 [[영순군|영순군 이부]]의 삼남(三男)으로 출생한 그는 [[1470년]] '''회원군'''(會原君)에 책봉되었고 이어 같은 해 [[1470년]] 친아버지 [[영순군]]의 상(喪)을 치렀는데 그 당시 그는 7세였으며 그로부터 3년 후 [[1473년]]부터 [[한시]]를 짓기 시작하였고 [[1477년]]에는 14세로 [[결혼|혼례]]를 치렀으며 3년 후 17세 시절이던 [[1480년]]에는 5촌 종숙부 [[귀성군 이준]]의 양자(養子)로 출계하였다.
         * 증조부: [[조선 세종|조선 세종대왕 이도]]
         * 종조부: [[조선 문종|문종 이향]]
         * 종조부: [[조선 세조|세조 이유]]
         * 종숙부: [[조선 덕종|의경세자 이장]]
         * 종숙부: [[조선 단종|단종 이홍위]]
         * 종숙부: [[조선 예종|예종 이황]]
         * 6촌 형: [[조선 성종|성종 이혈]]
         * [http://www.rfo.co.kr/view_party.php?list_mode=people1&refnum=051&party_name= 대한제국 조선 황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 회원군 이쟁]
         {{토막글|조선|시인}}
         [[분류:1464년 태어남]][[분류:1493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조선의 시인]][[분류:병사한 사람]][[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세조]][[분류:유교 신자]][[분류:조선 예종]][[분류:조선 성종]]
         [[분류:조선 인물]]
  • 효 (시호)
         * [[조선]] 효황제 [[대한제국 순종|순종]]
  • 효령대군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지 = [[조선]] [[한성부]]에서 노환으로 병사
         |국적 = 조선
         |왕가 = 조선
         |부모 = [[조선 태종|태종]](부) ,[[원경왕후]] 민씨(모)
         |친척 = 형 [[양녕대군]], 동생 [[조선 세종|세종대왕]]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년]] [[1월 6일]] ([[음력]] [[1395년]] [[12월 11일]]) ~ [[1486년]] [[6월 12일]]([[음력 5월 11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왕자]], [[왕족]], [[서예|서예가]], [[정치가]]이다.
         [[조선]]의 제3대 국왕 [[조선 태종|태종]]의 둘째 아들이며, [[원경왕후]] 민씨의 소생이다. [[조선 세종|조선 세종대왕]]의 둘째 형으로 성씨는 '''[[전주 이씨]]'''(全州 李氏), 이름은 '''보'''(補)이다. 초명은 '''호'''(祜)였는데 19세에 '''보'''(補)로 [[개명]]하였다. [[자 (이름)|자]]는 '''선숙'''(善叔)이고, [[호 (이름)|호]]는 '''연강'''(蓮江)이며 [[불교]] [[법명]]도 '''연강'''(蓮江)이고,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조선 세종|세종대왕]]의 형이자 [[조선 세조|세조]]의 백부로 실의 원로였으며, [[조선]]의 숭유 억불 정책으로부터 [[불교]]를 옹호,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 세종|세종대왕]] 즉위 후에도 [[조선 문종|문종]], [[조선 단종|단종]], [[조선 세조|세조]], [[조선 예종|예종]], [[조선 성종|성종]] 등 6대에 걸쳐서 장수를 누렸다. [[임사홍]]은 그의 손녀 사위였고, [[이량 (조선)|이량]]은 그의 5대손이며, [[조선 명종|명종]]<ref>그의 종6대손이기도 하다. 세종-세조-예종-성종-중종-명종</ref> 의 부인인 [[인순왕후]]와 [[심의겸]], [[심충겸]]은 그의 외6대손이다.
         * 조부 : [[조선 태조|태조]](1335~1408)
         * 부왕 : [[조선 태종|태종]](1367~1422)
         * 장인 : 좌찬성 [[정역 (조선)|정역]](? ~ 1425년)
         *** 6남 : [[원천군 (1423년)|원천군 의]](原川君), (1423년 ~ 1476년) - 조선 제3대 임금 [[조선 태종|태종]]의 4남 [[성녕대군]]에게 출계
         * 백부 : [[조선 정종|영안대군]](1357년 ~ 1419년)
         효령대군은 아버지 [[조선 태종|태종]](太宗)의 의중을 헤아려 아우인 충녕대군([[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미덕을 [[세종대왕]]이 '나의 형(효령대군)이 곧 청권'이라고 칭송하였고, [[정조]](正祖) 대에 이르러 효령대군의 사당을 [[청권사]]로 사액(賜額)하였다. 효령대군의 사당과 묘소는 [[서울특별시|서울]] [[서초구]] 방배동 [[효령로]]에 있으며, [[서울특별시|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조선 중기의 문신, 김시민(金時敏, 1681~1747)이 편집한 『조야휘언』필사본에는 '세종이 태평관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여 잔치를 하는데 효령대군이 술을 권하자 일어나 받았다. 이를 보고 사신이 말하길 "임금이 형을 우대하는 것이 이와 같구나"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서술하였다. 당시 왕실의 형제간 우애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1411년]]([[조선 태종|태종]] 11), 동생인 충녕([[조선 세종|세종]])에게 보위를 양보하고 전국을 떠돌던 양녕과 효령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관악사를 현위치로 옮기고 연주대의 이름을 따서 연주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위치를 바꾼 이유는 관악사의 원래 위치에서는 왕궁이 바로 내려다보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의 아들 중 [[보성군]]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역대 주요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보성군]]의 사위 [[임사홍]]은 [[조선 성종|성종]]과 [[조선 연산군|연산군]] 대의 문신이며, 그의 아들(효령대군에게는 외증손) [[임광재]]는 [[조선 예종|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혼인하고, 다른 아들 [[임숭재]]는 [[조선 성종|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혼인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
         [[보성군]]의 증손 [[전성군 (1488년)|전성군 이대]]는 생전에 용강현령, 병마동첨절제사에 이르렀지만 다시 후손들의 출세로 [[증직|증]](贈) [[호조]][[참판]], [[호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영의정]]으로 여러 번 증직을 받았다. [[전성군 (1488년)|전성군 이대]]의 아들이 [[이량 (조선)|이량]]이고, 딸 부부인 이씨는 청송 심씨 [[심연원]]의 아들 [[심강]]과 혼인하여 자녀를 두었는데, 딸이 [[인순왕후]]로 [[조선 명종|명종]]의 비가 된다. 아들은 [[심의겸]]과 [[심충겸]]으로, [[심의겸]]은 [[서인]](西人)의 초대 당수가 된다.
         [[조선 선조|선조]], [[조선 광해군|광해군]] 때의 형제 정승 [[이충]]과 [[이명]] 역시 효령대군의 후손이자 보성군의 7대손이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정치인 만송 [[이기붕]] 역시 보성군의 후손으로, 효령대군의 20대손이자 보성군의 19대손이며 [[전성군 (1488년)|전성군 이대]]의 16대손이었다.
  • 흥인군
         |사망지= [[조선]] [[한성부]]에서 암살(고환외상(매천야록의 기록))됨.
         |왕가 = [[조선 고종]]
         |왕조 = [[조선]]
         '''이최응'''(李最應, [[1815년]] [[2월 17일]] ~ [[1882년]] [[6월 10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 정치인으로, 자는 양백(良伯), 호는 산향(山響), 군호는 흥인군(興寅君)이다. [[남연군]] 이구와 여흥군부인 여흥 민씨의 셋째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바로 윗 형이었다. 자는 양백(良伯)이고 호는 산향(山響), 시호는 효헌(孝憲) 또는 충익(忠翼), 문충(文忠)이었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이다.
         흥선대원군의 친형이었으나 그의 무시를 당했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흥선대원군]] 실각 후 좌의정, 세자부, 영의정 등을 지냈으며 통리기무아문 총리대신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했다가 유림과 갈등하였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여 [[1880년]] 이후 [[미국]], [[일본]]과의 개항 정책에 적극 동조하였다. [[1882년]](고종 19) [[6월]]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의 사주를 받은 난병에게 [[민겸호]](閔謙鎬)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신도비]]문에는 [[조선 고종|고종]]이 어의를 보내 진료했으나 차도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하나, 난병을 피해 도주하다가 추락사했다는 설도 있다. 한편 동생인 흥선대원군과의 감정대립으로 민씨 정권의 측근으로 지냈는데, 민승호와 흥선대원군은 그를 이용해서 상대방의 정세를 염탐하는데 이용하려 하였다. 별칭은 '''유유정승'''(唯唯政丞)이다.
         [[1829년]](순조 29년) [[1월 1일]] 흥인부정(興寅副正)이 되고 [[1830년]] [[5월 6일]] [[명선대부]]로 승진한 뒤 흥인도정(興寅都正)으로 진봉되고, 다시 군으로 진봉된 뒤 [[돈녕부]]도정에 임명되었다. 이어 [[현록대부]]로 승진하자 형인 [[흥녕군]]보다 작위가 높다는 이유로 스스로 사양하고 받지 않다가, 형 흥녕군이 현록대부로 승진하자 그해 [[10월 20일]] 소의대부로 승진하고, 군의 품계를 받았다. [[1834년]](순조 34년) [[11월]] [[순조]]가 죽자 그의 능침 조성 때 [[수릉관]](守陵官)으로 참여하였다. 헌종 즉위 후 [[1835년]] 연주 도감(練主都監) 수릉관에 임명되었으며, 남연군의 3년 상을 마친 후 헌종 연간에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고종 즉위 후, [[1863년]] [[12월]] 판[[종정경]]부사에 임명되고, [[조선 철종|철종]]의 빈전에 종척집사(宗戚執事)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매천 [[황현]]은 그가 [[물고기]] [[어]](魚)와 [[노나라]] [[노]](魯)자를 제대로 구별하지도 못한다며 그의 자질을 의심했지만, 그는 [[조선 헌종|헌종]] 때의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고, 고종 때는 종종 [[과거 시험]]의 주시관으로 과거를 주관하기도 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대미 개국 방침을 결정한 [[1880년]] [[10월]]의 중신회의에서 영의정으로서 회의를 주재했다.<ref name="sisi459">강재언,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한길사, 20003) 459페이지</ref> 그는 쇄국 정책에 비판적이었다.<ref name="sisi459"/> [[일본]]에 갔던 수신사 [[김홍집]] 일행이 귀국하면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와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연미론(聯美論)를 주장하자 그는 "[[미국]]은 본래 원수의 나라가 아니니 서계(書契)를 가져오면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여 [[1880년]] [[9월 8일]] 연미론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의 주장에 고종도 [[병인양요]], [[신미양요]]는 우리나라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하여 [[미국]]과의 조약체결을 결심하게 되었다. [[1881년]] [[1월]] 흥인군의 건의로 고종은 지난해 [[6월]] 자신이 미국사신을 거부한 것을 후회하는 문서를 톈진(天津)으로 가는 영선사, 유학생들을 보낼 때, 그들을 통해 [[청나라]]로 보냈다.
         흥선대원군과 흥인군의 알력과 갈등을 눈여겨본 [[민승호]]는 [[명성황후]]에게 흥인군을 중용할 것을 상주했고, [[명성황후]]는 이를 수용하였다. [[명성황후]]는 흥인군을 의정부의 대신으로 임명하고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자 흥인군은 감격하여 한목숨 다 바쳐 충성할 것을 다짐하고 거듭 왕비의 은혜에 보답하리라 결심했다.<ref name="ysys40"/> 그러나 그는 이 한 때의 요행으로 작은 세도를 얻어 대부호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닥치는 대로 돈과 재물을 긁어모았다.<ref name="ysys40"/> 조선 말의 정치가 [[윤효정]]에 의하면 "흥인군 집 대문을 들어서는 빈객과 출석하다시피 하는 수령들은 말 한마디, 웃음 하나에 이르기까지 온통 뇌물에 관한 것 뿐이어서, 흥인군 집에서 이루어지는 내외 관료의 발탁, 임명 전형은 흡사 무역이 성한 도시 장터의 모습과 같았다.<ref name="ysys40"/>" 한다.
         [[분류:1815년 태어남]][[분류:1882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문신]][[분류:운현궁]][[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살해된 사람]][[분류:추락사한 사람]][[분류:대한제국의 황족]][[분류:유교 신자|이최응]][[분류:자유 연애|이최응]][[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덕흥대원군파]]
  • 흥친왕
         |출생지 = {{국기나라|조선}} [[한성부]] 안국방 운현궁
         |사망지 = {{국기나라|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안국정 운현궁
         |국적 = [[조선]], [[대한제국]], [[일본 제국]]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완흥군(完興君), [[1845년]] [[8월 22일]]([[음력 7월 20일]]) ~ [[1912년]] [[9월 9일]])은 조선 말기의 왕족·군인·정치인이자 [[대한제국]]의 황족·군인으로, [[흥선대원군]]의 적장자(嫡長子)이자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친형이며 [[영선군 이준]]의 아버지이다. 대한제국 성립 후 완흥군(完興君)에 책봉되었다가 [[1910년]] 흥친왕(興親王)으로 진봉되었다.
         [[1874년]] [[11월]] 이후 [[흥선대원군]]은 그의 아들 [[이준용 (1870년)|이준용]]을 [[조선 고종|고종]]과 [[민비]]를 몰아내고 추대하려 했고, 4회의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했다. 이후 그는 고종의 냉대를 받았고 [[1899년]](광무 2) [[조선 장조|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된 뒤에도, 당시 황제의 친형이었음에도 4대 승습에 따른 작위를 받지 못했다. [[1907년]](융희 1) 완흥군에 책봉되었고, [[1910년]](융희 4) [[8월]] 흥친왕으로 진봉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공작]]으로 강등되어 이희 공이 되었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고, 처음 이름은 재록(載錄), 자는 무경(武卿), 호는 우석(又石)이고 나중에 개명하여 이희(李熹)로도 알려져 있다. 첫 작위가 완흥군이었으므로 '''완흥군 이재면'''으로도 부른다.
         흥친왕 이재면은 [[1845년]] [[8월 22일]]([[음력 7월 20일]]) [[한성부]] 사동(寺洞) 사저에서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재록(載錄)이었다가 뒤에 재면으로 고쳤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이희공실록]]에 의하면 그가 태어나자마자 지어진 이름은 재록이었다 한다. [[조선]] [[조선 헌종|헌종]]과 [[조선 철종|철종]]이 연이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이재면 역시 유력 왕위계승권자로 지목되었으나, [[조선 철종|철종]]이 사망할 무렵 그는 성인이었기에 왕위계승권 서열에서 밀리게 되었다.
         이는 [[조선 철종|철종]] 사망 당시 12세의 미성년자였던 [[대한제국 고종|이명복]]([[흥선대원군]]의 차남)이 성인인 흥친왕보다 조종하기 쉬울 것이라는 [[흥선대원군]]의 계략과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묵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일부를 포섭할 때, [[김병학]](金炳鶴)의 딸, 혹은 [[김병문 (조선후기)|김병문]]의 딸 중에서 둘째 아들인 [[대한제국 고종|명복]]의 배필로 맞이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 이것 역시 재면 보다는 명복을 선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한때 그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 큰아버지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로 보내지는 것이 고려되기도 했다. 그의 흥완군 양자 지정 논란은 [[1864년]] 고종에 의해 취소되어 최종 종결되었다.
         친동생 [[조선 고종명복]]이 있었고, 그 외에도 서출 출신 이복형 [[이재선]]과 [[이윤용]]의 처가 된 이씨가 있었다. 한때 [[이재선]]은 그의 동생으로 알려졌다가 [[이재선 모역 사건]] 당시의 심문, 추궁, 재판기록이 나타나면서 이재선이 그보다 연장자인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철종 치세기간 중 [[흥선대원군]]은 일부러 어리석음을 가장하여 [[김병기 (1818년)|김병기]]에게 아들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하기도 했다. [[윤효정]]은 [[흥선군]]이 [[김병기 (1818년)|김병기]]에게 그의 과거 합격 청탁을 했다 한다. [[흥선군]]은 일부러 김병기를 찾아가 아들 [[이재면]]의 [[문과]] 합격을 청탁했는데, [[김병기 (1818년)|김병기]]는 마음 속으로는 몰지각함과 비열함을 비웃으며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다.<ref name="riss167">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 백성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망국사》 (다산초당, 2010) 167페이지</ref> 흥선군은 똑같이 김병기의 외조카 남병철에게도 똑같이 아들의 등과 합격을 청탁하니, 남병철은 몹시 분개했다. 왕실의 금지옥엽인데, 이렇게 초라해진 형편으로 아들의 등과를 청탁하니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었다.<ref name="riss167"/> 그런데 [[박제형]]의 [[근세조선정감]]에는 흥선군을 대놓고 멸시하던 인물의 한 사람으로 남병철을 지목했다.
         [[1863년]] 관직에 올랐고, 그 해 사용(司勇)이 되었다.<ref name="daum1">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8a0288a</ref> [[11월]] 인정전(仁政殿)에서 [[조선 철종|철종]]이 감제(柑製<ref>매년 감과 귤이 처음 열리는 날 직후에, 조선의 임금이 감귤 열리는 것을 기념하여 직접 주관하는 과거 시험이다.</ref>)를 친히 주관할 때 1등하여, 바로 [[과거 제도|과거]]에 직부전시(直赴殿試)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되었다.
         [[1863년]] [[12월]] 동생 [[대한제국 고종|재황]]이 후사없이 죽은 [[조선 철종|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바로 승후관부사용(承候官付司勇)에 제수되었다. [[1864년]](고종 1년) [[5월]] [[문과]]에 급제하여 그날로 규장각 대교(待敎)에 임명되었고, 여러 고위 관직을 거쳤다. 그해 [[8월]]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다시 그를 아들 없이 죽은 형 [[흥완군]]의 양자로 보냈다. 그러나 대왕대비 조씨의 특명으로 다른 종친의 자제를 [[흥완군]]의 양자로 하도록 하고, 이재면의 양자 입양은 취소되었다.
         [[1866년]] [[3월]] [[약방]] 부제조<ref>신병주,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232페이지</ref> 가 되었다.
         [[1885년]] 민씨 정권이 친러, 친일 등의 성향을 보이며 [[청나라]]를 견제하려 하자,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청나라 정부와 [[위안스카이]] 등의 정치적 계산으로 4년여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ref name="daum1">[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5h3642b daum 사전]</ref> 대원군은 [[1887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조선 고종|고종]]을 폐위시키고 큰 아들 이재면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였다.<ref name="daum1"/>
         그러나 당시 이미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의 지위에 있던 아들 [[이준용]]은 그의 작위와는 상관없이 [[남작]]의 지위를 받았다. 한일 합방 직후 막대한 양의 합방 공채금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에 별도로 협력하거나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 첩며느리 : 이옥경<ref name="한국사1"/> [[조선총독부|총독부]] 간부나 고위 장성과 어울려 친일 행각을 벌였다.<ref name="한국사1">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4) 135페이지</ref>
         ** 이복 매제 : [[이윤용]], [[이호준 (조선)|이호준]]의 서자, [[이완용]]의 서형
         * [[이원재 (1958년)|이원재]] - 《[[대원군 (드라마)|조선왕조 오백년 - 대원군]]》, [[1990년]] - [[MBC]] 드라마
         * 조선신사명감(朝鮮紳士名鑑)
         [[분류:1845년 태어남]][[분류:1912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군인]][[분류:조선의 외교관|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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