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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중인
         [[1939년]]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대리가 되었고, [[1940년]]에 예비검사를 거쳐 그해부터 [[1943년]]까지 [[조선총독부]] 검사로 근무했다. 강중인은 경제담당 검사로 일하면서 [[태평양 전쟁]] 중 시국 연설과 기고로 사회 활동을 병행했다.
  • 강창희 (1894년)
         [[한성부]]에서 [[대한제국]] 무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운수주식회사 전무취체역을 거쳐 조선운송주식회사의 취체역을 맡는 등 운수업 부문에서 종사했다. [[조선총독부]] 운수국 운수위원과 [[조선철도협회]] 평의원 등을 지냈다.
  • 고황경
         이후 [[조선총독부]]의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 가담하면서 친일 단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 단체는 총독부의 정책을 홍보하고 계몽하는 여성 단체였으며 지역별로 순회 연사를 배당했는데, 고황경은 [[홍승원]]과 함께 [[호남]] 지역 강연을 담당했다. 역시 총독부에서 발족시킨 [[방송선전협의회]]의 방송 강좌에도 참가했고, [[윤덕영]]의 부인 [[김복수]]가 회장을 맡은 [[애국금차회]] 간사와 [[조선임전보국단]] 임원으로서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연설과 좌담회로 전쟁을 적극 지원했다.
  • 곽상훈 (국회의원)
         졸업 후 불우한 나날을 보내다가 교육청 [[장학사]]로 있던 유진태(柳鎭泰)의 주선으로 [[안동시|안동]] 오산학교(五山學敎)의 교사로 임용, 교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급사 대신 학교의 행정 서무일도 맡게 되었다. 교사 재직 중에도 [[조선총독부]] 경찰국에서는 사람을 보내 그의 동태를 미행했는데, 한번은 그의 하숙방에 몰래 들어와 있던 총독부 경찰국 형사 김태규(金泰奎)를 가장한 지인 김영주의 설득으로 일본 유학을 결심하였다.
         [[1924년]]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에 의해 희생된 한국인 희생자 명단을 입수하고 한국인 학살사건의 진상기록을 수집, 보존하는 활동을 하였다.<ref name="경인"/> [[1925년]]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조직, 결성하여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 최선경 등과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조선총독부]] 경찰의 추적을 받고 [[중국]]으로 망명,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한국인청년동맹'의 간부로 활동했다.
  • 구용서
         [[1899년]]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출생했다. 외할아버지가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송병준이며, 아버지인 구연수는 [[조선총독부]] 소속 경무관과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므로, 유복한 가정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 권중환 (1890년)
         경상북도 영양군수([[1930년]] [[11월 24일]] 임명)와 의성군수(1933년 7월 26일 임명), 청송군수(1938년 3월 25일 ~ 1940년 3월 28일)를 역임하는 동안 일본 정부로부터 훈7등 서보장(1932년 2월 8일 수여)과 훈6등 서보장(1934년 2월 7일 수여), 훈5등 서보장(1940년 2월 16일 수여)을 받았으며, [[1935년]] 10월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을 받았다.
  • 권태술
          | 직책 = 前 [[조선총독부]] 경성지방법원 예하 서기관 <br/> (前 朝鮮總督府 京城地方法院 隸下 書記官)
  • 김건 (극작가)
         [[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관제 연극경연대회가 열렸는데, 김건은 [[1943년]] 열린 제2회 대회 출품작으로 식량 증산을 통한 애국을 주제로 삼은 〈신곡제(新穀祭)〉를 집필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 김경주 (승려)
          | 직책 = 前 [[조선총독부]] 불교 인가 예하 대본산 범어사 주지승
         이 무렵은 [[조선총독부]]가 불교와 [[유교]] 계열을 동원해 심전개발 운동이라는 관제 황민화 운동을 벌일 때였는데, 김경주는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매일신보]]》에 [[석가모니]]나 [[불경]]과 심전개발을 관련짓는 강의를 펼쳤다.
  • 김기창 (화가)
         24살 때인 [[조선미술전람회]](줄여서 ‘선전’)에서 최고상을 받은 운보는 연4회 특선 경력으로 27살에 선전 추천작가가 되었는데, 이후로 [[광복]] 전까지 주로 일제의 내선일체 사상을 정당화하는 친일 활동이 이어졌다. 1942년에서 1944년까지 일제 말 친일 미술전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후소회 동문인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다. 1943년 8월 6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지에 실린 그림과 훈련병을 그린 〈총후병사〉,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경성일보사가 1944년 3월부터 7개월간 서울에서 연 ‘결전’ 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적진육박〉이 친일 작품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1940년 10월 조선남화연맹전, 1943년 1월 애국백인일수전람회를 통해 일제의 기금 모집에 협력하였다.
         그러나 〈총후병사〉에 대해서 김기창은 "정식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삽화에 불과해 친일한 작품으로 볼 수 없다."고 친일작품행위를 부정했다. 이러한 운보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에 당시 남양군도에서 대검을 소총에 끼운 채 적진을 향하고 있는 일본군의 육박전을 묘사한 〈적진육박〉(1944)이라는 작품이 공개되면서 이 말은 거짓말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적진육박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소위 ‘황국신민’의 영광을 고취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경성일보사가 1944년 3월부터 7개월간 서울에서 연 ‘결전’ 미술전람회에 출품됐다”고 밝혔다.
  • 김낙헌
         '''김낙헌(김락헌)'''金洛憲, [[1874년]] 양력 [[7월 28일]]([[음력 6월 15일]]) ~ [[1919년]] 양력 [[7월 2일]])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초기의 법조인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찬의를 지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뒤 이듬해 [[조선총독부]] 산하의 고등법원 판사가 되었고, [[1918년]] 중추원의 부찬의에 임명될 때까지 판사로 재직했다. 조선총독부 판사로 재임한 기간 중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 다이쇼대례기념장을 수여받은 바 있으며, 중추원 부찬의 임기 중인 1919년 사망했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분류:1874년 태어남]][[분류:1919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법조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안동시 출신]]
  • 김달호(1912)
         사법관시보를 거쳐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용되었고, 청진지방법원과 광주지방법원 판사를 지냈다. 이후 [[만주국]] 변호사도 역임했다. 《국회20년》에는 만주국에서 근무할 때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퇴직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일제 패망 후 [[서울]]에서 서울고등검찰청 차장을 지내는 등 검사로 일했고, 이후 [[변호사]] 개업을 하고 고시위원도 역임하였다.
  • 김대우 (1900년)
         [[1919년]]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산학과 2학년 재학 중, 그해 [[3.1 만세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징역 7개월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1925년]] [[조선총독부]] 관료 채용시험에 합격하여 관료로 활동했다.
         해방 뒤에도 그는 미군정에 의해 신임을 얻어 [[경상북도지사]]로 유임되어 일본인 관료 및 구 [[조선총독부|총독부]] 관료들을 파면하고 새로운 인물을 군수로 임명했지만, [[1946년]] [[공금]]을 횡령하고 도피하였다. [[1948년]] [[5월 10일]]에는 초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고, 5대, 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경성공전 졸업 후 [[일본]]에 유학하여 [[규슈 대학|규슈 제국대학]] 공학부로 진학했다. [[1925년]] [[규슈 대학|규슈 제국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해 [[조선총독부]] 관리 채용시험에 합격하면서부터는 유명한 친일파 관료가 되었다.
         [[1951년]] 일본인으로 조선총독부 관료로 조선에서 지방관을 역임한 고시진이 비밀리에 [[부산]]에 방문, [[장택상]]과 만났다가 [[족청]]계의 폭로로 장택상은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김대우는 고시진의 밀입국과 [[부산]] 밀항에 관련되어 [[1952년]] [[9월 28일]] 경찰에 긴급 구속되었다. [[10월 22일]] 구류기간이 만류되었으나 다른 이유로 계속 구속되었고 김대우는 구속의 부당함을 주장, 장준택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하여 항소하였다. [[1953년]] [[2월 8일]] 불기소 및 유예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전임자 = [[김대우 (1900년)|김대우]]<br/>(조선총독부 최후의 경상북도지사)
  • 김동선 (1905년)
         [[한성부]] 출신으로 [[1921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6년]]부터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어 행정 관료로 근무했다.
         |전임자 = 김동선<br/>([[조선총독부]] 최후의 [[용인군|용인군수]])
  • 김병욱 (1895년)
         '''김병욱'''(金秉旭, <small>일본식 이름:</small> 永田種秀, [[1895년]] [[8월 8일]] ~ ?)은 [[일제 강점기]]의 교육인 출신 관료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약 10년 동안의 교직 생활 끝에 [[1925년]]에 [[조선총독부]] 도 시학에 임명되어 교육행정 관료가 되었다. [[경상북도]] 학무과에서 근무하다가 [[1930년]]에는 총독부 군수로 승진하여 경북 [[봉화군]]과 [[청도군]]에서 군수로 근무했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분류:1895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김사연 (1896년)
          | 직책 = 前 [[조선총독부]] 주임 참의
         '''김사연'''(金思演, <small>일본식 이름: </small>金思演, [[1896년]] [[1월 2일]] ~ [[1950년]] [[9월 20일]])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언론인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일본어]]로 발행되는 잡지인 《[[조선공론]]》의 사장을 맡았고, 부협의원 등 여러 직책에서 일하며 [[경성부]]의 유지로 활동했다. [[1931년]] 중추원의 주임참의직에 처음 임명되어 [[1941년]]에는 칙임참의에 올랐다. [[최린]]의 [[천도교]] 신파가 [[1934년]]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결성한 [[시중회]]에 발기인으로 가담한 바 있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김상호 (승려)
         그러나, [[1936년]]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신임이사로 선출되어 제도권에 진입한 뒤에는 [[조선총독부]]와 가까이 지내며 [[중일 전쟁]]에 협조한 행적이 있다. 이사가 된 해에 [[미나미 지로]] 신임 총독을 환영하러 [[서울역|경성역]]에 나간 것을 시작으로, 일제 관료들과 수시로 만나면서 [[일본군]] 부대 송영, 일본군 전병사자 위령 법요식, 시국강연회, 전사자 유골 맞이와 장례식, 전사자 가족 조문 및 전상자 가족 위문, 국방헌금과 위문금 모금, [[신사참배 강요]]에 따른 신사참배 등 여러 행사를 진행했다.
  • 김성수 (1891년)
         그중에서도 차분하고 내성적이었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그의 사람됨됨이를 알아보고 깊은 신뢰를 하게 된다. 송진우는 [[조선총독부]]와 협상하는 일과, 김성수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자신이 대신 나서서 처벌을 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등 그를 앞장서서 도와주었다고 전해진다.{{출처|날짜=2013-09-24}}
         [[1914년]] 가을 김성수는 교육계몽에 뜻을 품고, 사립 [[중등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서울특별시|서울]]로 떠났다. 이때 집안에서 자금을 주지 않자, 그는 3일동안 단식을 한 끝에 집안에서 자금을 마련해 갔다.<ref name="ill7">일석 이희승 전집 7(서울대학교출판부 | 2007) 321</ref> 그의 첫 시도는 [[사립학교]] 설립안이었는데, [[조선총독부]] 교육국으로부터 거절 당하면서 무산되었다.<ref name="건국영웅"/> [[1914년]]말 김성수는 [[최남선]](崔南善), [[안재홍]](安在鴻) 등 [[일본]] 유학시절 동창들과 함께 교육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白山學敎)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안을 만들고 학교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허가를 해주지 않아 좌절당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설립인가 거절 이유로는 백산은 [[한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을 뜻하는 것이니, [[학교]] 이름이 불온하다고 퇴짜를 놨던 것이다.<ref name="ill7"/> 그해 [[안희제]] 등이 세운 [[백산상회]](白山商會)가 독립운동 자금을 공급하는 단체임이 총독부에 정보가 입수되면서 [[백산상회]]와의 관련성을 취조당했다.
         그는 [[중앙학교]]를 인수할 때부터, [[한양]]이라는 이름을 미리 짓고 [[전문학교]]([[전문대학]])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계획은 무산되고 차선으로 언론사 설립을 계획한다.<ref name="lee585">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585</ref> 그러나 그는 [[조선총독부]] 당국에 비협조적이었고, [[조선총독부|총독부]] 당국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한편 김성수는 [[경방|경성방직]]의 초대사장에 [[박영효]](朴泳孝)를 영입하였는데, 이는 그가 당대의 거물[[친일파]] [[박영효]]를 끌어들인 것은, [[박영효]]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조선총독부|총독부]]와 [[조선]] 내 유지세력들을 사업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풀이할 수 있다<ref name="malsso1"/>. [[경성직뉴]]를 인수하고 경방을 창립키 위해 인촌(仁村)은 설립허가서를 [[조선총독부|총독부]]에 제출했으나 그들은 당장 허가를 내주지 않고 질질 끌었다. 그 이유는 [[조선인]]의 방직회사 건설로 그때까지 폭리를 취해 오던 [[일본]]계 [[방직]]회사가 [[조선]]내의 시장을 빼앗길 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더구나 1919년 그 해에는 [[일본]]의 <미쓰이>재벌이 부산에 조선방직회사를 설립하던 해여서 경방이 맞서게 되면 불리한 여건이었다.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출감후 김성수는 그와 함께 [[동아일보]]를 경영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손잡고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ref name="해공주1">[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199510100350 인촌 김성수(해방공간의 주역:9)]{{깨진 링크|url=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199510100350 }} 동아일보 1995년 10월 10일자</ref> [[1920년]] [[4월 15일]] [[조선총독부]]는 [[평양시|평양]]에서의 반일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를 달아, 창간 직후의 [[동아일보]]에 판매와 배포를 금지처분하였으나 김성수는 중단하지 않았다.<ref name="동아일보"/> [[동아일보]]는 이후 총독부에 의해 기사 삭제, 압류, 배포금지, 정간 등 끝없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ref name="동아일보"/> 김성수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장덕수]]와 함께 수시로 [[조선총독부|총독부]] 공보담당 부서에 출입하며 보도내용을 해명해야 했다.
         [[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1864년)|이승훈]], [[윤치호]],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과 함께 [[민립대학 기성회|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ref name="min09">[http://news.donga.com/3//20091009/8849097/1 민립대학 설립운동] {{웨이백|url=http://news.donga.com/3//20091009/8849097/1 |date=20130927194416 }} 동아일보 2009년 10월 9일자</ref> 그러나 이 운동은 1924년 중반을 기점으로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불온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기성회 임원을 미행하고 강연을 막았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1923∼1924년 잇따른 가뭄과 홍수로 이재민 구호가 시급해지자 민립대학 모금은 지지부진해졌다.<ref name="min09"/> 또한 [[조선총독부]]의 수시 간섭으로 운동은 차질을 빚었다.
         경방에서 22년 3월에 출시한 태극성 광목은 조선 기술로는 최초로 대량 생산된 광목을 출하하였다. 이 때에 신제품의 상표인 태극성표(太極星標)의 태극 마크가 태극기라는 이유로 그를 소환하여 추궁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표의 가운데 둥근 원은 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고, 원 가운데의 S자는 영문의 방직을 뜻하는 'spinning'의 첫머리를 따서 방직회사를 뜻하며, 주위의 별8개는 조선팔도를 나타내어 광목이 조선팔도에 퍼져나가 잘 팔려 달라는 소원이 들어 있을 뿐"이라고 답변하고, 이 상표가 아무런 하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특허국의 허가를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자 [[조선총독부]]는 그를 되돌려보냈다.
         [[1924년]] 자치운동의 일환으로 '[[연정회]](硏政會)'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소위 '민족개량주의' 혹은 '실력양성론'이라는 미명하에 [[일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발맞춰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 민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고 말았다.<ref name="'일장기 말소'에 분노한 '민족지' 창업주">[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48050 '일장기 말소'에 분노한 '민족지' 창업주]</ref> 그는 항상 자원이 부족한 사회에서 산업 시설과 기술 인재를 키워서 나라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민족의 힘을 기르고, 국가가 자주 독립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넘치는 혈기에 반발하던 청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의견에 공감하게 되었다. [[1925년]] [[사회주의]]자들의 반(反) [[기독교]] 강연이 문제시되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들은 기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해야 했다. 그는 해고된 기자들에게도 6개월간 생활비 등을 지원해 주었고, 해고된 기자들의 새로운 일자리 알선도 주선해 주었다. [[조선총독부|총독부]]의 압력으로 억지로 해고당하는 것이었지만 사주인 그에게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1926년]] [[6월 11일]]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벌어진 [[6·10 만세 운동]]의 배후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소환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바로 풀려났다. 6월말 [[6.10 만세운동]] 당시 [[중앙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만세시위에 연루되어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김성수는 '학교 걱정말고 가서 싸우라'고 학생들을 독려하였다. 이후 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의로운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1929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이 되었다. 11월 3일 통학열차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다가 한인 남학생들이 가해 남학생을 구타, 한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싸움이 발생하여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발생했다. 동아일보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보도정지령을 내렸으며, 그는 여학생 성추행 사건을 기회로 사태 확산을 획책한 것으로 의심받고 총독부에 소환되었다.
         농촌지역은 문맹과 기아, 질병이 만연하였으므로 농촌을 계몽하겠다는 이상을 품은 대학생들이 방학, 혹은 휴학기간을 이용해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최용신]], [[심재영]], [[심훈]] 등이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했고, 사회주의자들도 브나로드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학무국과 경무국으로부터 반일사상 고취를 의심하여 방문, 소환, 전화 항의 등을 받았으나 별다른 혐의접이 없어 [[브나로드 운동]]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이는 [[1938년]]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고 중단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대학의 농촌 봉사활동 (농활) 운동으로 이어진다.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 과목을 의무,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도록 지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가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을 필수 이수 과목으로 지정한 것을 두고 불령선인 양성 목적이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 트집삼았으나 그는 조선의 역사와 언어를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며 다른 뜻은 없다며 학무국 측을 무마하였다.
         그러나 항일독립운동의 온상이자 불령선인의 양성소, 불순언론으로 지목되어 [[보성전문학교]]와 [[동아일보]]가 총독부의 압력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자 그는 한강 철교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은 그의 투신기도를 접한 [[조선총독부]] 경찰의 제지로 실패한 적이 있었다. 경영난으로 다시 한번 한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하였다가 그의 투신 기도를 누군가 목격, 전화연락으로 접한 친구 [[박용희]](朴容喜)와 [[장현식]](張鉉軾)이 달려와 그를 말리고 각각 자산 500석을 희사하여 경영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김성수는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았고, 동아일보는 수시로 폐간을 당하여 마찰을 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기부터 일제 식민지 정책이 중일전쟁 (1937-1945)에 때맞춰서 민족말살정책으로 펼쳐지면서 더 많은 압제정책으로 한국의 지성인들을 강압적으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암흑기였지만 독립을 멀리 내다 보시면서, 일본 식민지 정부가 우리나라 정부였기 때문에 강경하게 맞서지 않고 온화하게, 거부하지 않고 일본의 강압적인 동원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일제 식민정부는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사람들을 더 압박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김성수는 학병을 모집하는 연설을 하도록 강요 받았고 전쟁물자 지원에도 앞장 서지 않을 수 없었다.
         [[1936년]] [[8월 25일]] 기사에서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 선수 사진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동아일보]]에서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인]] 선수 [[손기정]]이 우승을 하자, 기자 이길용 등은 보도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하고 내보냈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 보도 이후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에서도 일장기 말소 기사를 내보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다. 그러나 일장기 말소를 반대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의하면
         일장기 말소사건의 후유증으로 [[동아일보]]는 강제폐간 당했다가 [[1937년]][[6월 3일]] 복간하였다.<!--당시 일장기를 지운 신문은 동아일보 외에도 많습니다. 또한 이 부분은 김성수 관련 부분이 아니라 동아일보 관련 부분으로 봐야 합니다.--> 동아일보는 네 번 강제 폐간 당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찰청|경무국]]에 불려가 수차례 협박과 멸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서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서대문경찰서]]에 감금된 [[윤치영]]의 진술로 [[1938년]] [[5월 18일]]자 [[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의 한사람으로 보고되었다.<ref name="dddd1">우남 이승만 연구 (정병준, 역사비평사, 2005) 365페이지</ref> 그러나 그는 [[흥업구락부]]와 관련되어 조사받거나 처벌받지는 않았다.<ref name="dddd1"/> [[1939년]] 9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직을 사퇴하였다.
         [[1940년]] [[8월 10일]]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폐간시키자,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1945년]] [[8.15 광복]]때까지 칩거,은거하였다.<ref name="동아일보"/>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조선총독부|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또한 일제가 제안한 귀족원(상원의원)을 거절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2033698 "교학사의 '김성수'서술, 위키백과와 90% 동일"]</ref>
         [[1944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강제로 격하당하였으나<ref>{{웹 인용|제목=고려대학교 약사|url=http://www.korea.ac.kr/content/K/K2_1_2_01.jsp|웹사이트=고려대학교|확인날짜=2011-06-04}}</ref><ref name="ku1962">{{뉴스 인용|제목=캠퍼스의 봄 (2) 고려대학편(高麗大學篇)|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31400329204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2-03-14&officeId=00032&pageNo=4&printNo=5013&publishType=00020&doNotReadAnyMore=notClose|출판사=경향신문|날짜=1962-03-14|확인날짜=2011-07-01}}</ref>, [[1945년]] 9월 광복을 맞아 [[보성전문학교]]로 교명을 환원하였다.<ref>{{웹 인용|제목=연표|url=http://www.korea.ac.kr/content/K/K2_1_3_03.jsp|웹사이트=고려대학교|확인날짜=2011-06-06}}</ref>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여 항복하고 [[조선총독부|총독부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치안권 이양을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에게 제시하였으나, 송진우는 거부의사를 알려왔고 김성수도 이에 동의하였다고 한다.<ref name="동아일보"/> 그러나, 이에 대해서 훗날 [[1957년]]에 前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지냈던 [[엔도 류사쿠]]는 인터뷰에서 '이 같은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ref><한국현대사 인물연구2>, 백산서당 출판사. -고하 송진우의 생애와 활동- 부분. p140.</ref>
         이 과정에서 그가 [[1930년]] [[12월 30일]] [[조선총독부|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보낸 편지가 일부 공개되었다.
  • 김윤정 (1869년)
         [[1910년]](융희 4년) [[10월]] [[한일 합방]]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그해 11월 [[조선총독부]]의 특채로 등용되어 [[전라남도]] 참여관과 [[경기도]] 참여관을 거쳐 [[충청북도]][[도지사]]로 고속승진한 후 [[1926년]]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가 [[1945년]]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그의 딸 [[윤고려]]는 개화파 정치인 [[윤치오]]의 두 번째 부인으로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윤씨로 성을 바꾸기도 했다. 본관은 [[청도 김씨|청도]]이다.
         그러나 [[1910년]] [[11월]] 개화파 친일 관료로서 등용되어 [[조선총독부]]의 [[전라북도]] [[참여관]]에 임명되었다. [[1919년]] [[3월 13일]] [[전주]] 만세 시위의 주동자인 [[윤건중]](尹建重)의 습격을 받았다. [[윤건중]]은 행사에 참석한 김윤정을 살해하려다가 그가 재빨리 단상으로 뛰어내리는 바람에 미수에 그치고 수배당하였다.
         [[1926년]] 도지사 직에서 퇴임한 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처음 임명되었으며, 이후 중추원 참의직을 6차례나 연임하다가 광복 직전인 [[1945년]]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1935년]] 편찬된 총독부의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올라와 있다.<ref>{{뉴스 인용
         [[1945년]] [[4월]]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다시 [[1945년]] [[6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지만<ref name="네이트1"/> 2개월 뒤인 [[8월]] 광복을 맞이하였다.
         [[2010년]] 김윤정의 손자 2명이 "[[1896년]] [[김구]]가 투옥 중일 때 경무관으로서 배려한 사실 및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다."면서 국가를 상대로 친일반민족행위결정처분취소 소송을 걸었다. 그러나 서울행정법원 행정2부에서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참의를 지낸 것은 그 자체로 친일 활동”이라며 “손자들의 주장하는독립운동지원 사실은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정한 조사범위 내에 있지 않다”며 [[2010년]] [[9월 7일]]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ref>[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568672&sid=E&tid=0 “조선총독부 중추원 활동, 그 자체로 친일”]{{깨진 링크|url=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568672&sid=E&tid=0 }}</ref>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분류:1869년 태어남]][[분류:1949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외교관]][[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청도 김씨]][[분류:암살 미수 생존자]]
  • 김장섭
         [[일제강점기]]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인 1940년 [[조선총독부]]의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판사]]를 역임하였다.
  • 김정배 (1902년)
         [[한성부]] 출신으로 법과를 졸업한 뒤 [[1926년]]부터 [[조선총독부]] 소속 관리로 일하기 시작했다.
  • 김진민 (1888년)
         [[경기도]] [[서울특별시|서울시]] 출신이다. [[1911년]]에 관립법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어 사세국 세무과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 김태년 (1893년)
         출신지는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군]]이다. [[1915년]]에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1917년]]에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었다.
  • 김호규
         [[1938년]] [[조선실업구락부]] 회원을 역임했고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총독부]] 내무국 지방과 촉탁으로 근무했다. [[1941년]] 3월에 열린 [[대동아공영권]] 확립에 관한 연설에서 도쿄 회의(대동아공영권에 대한 회의)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는 등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적극 지지했다. [[1940년]] 일본 기원 2600년 축전 기념 초대자로 선정되었고 1940년 11월 10일 일본 정부로부터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1942년]] [[12월 28일]] 일본 정부로부터 종4위에 서위되었으며 그해 [[8월]] 광복 이후 칩거하였다.
  • 남궁억
         [[1910년]] [[10월]] [[한일합방]] 이후에는 배화학당 교사와 상동학원 원장을 겸하며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웠으며, 신편언문체법(1914), 가정교육(1914) 등의 교과서를 저술하였다. [[1918년]] 고향 홍천 모곡으로 낙향하여 교회와 학교를 짓고 [[무궁화]] 보급 운동을 추진했다. [[1933년]] [[12월]] [[조선총독부]]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석방되었다. 성이 남(南)이고, 이름이 궁억인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성이 남궁이고 이름이 억이다.
         그뒤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학무국의 회유를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고문을 당하였다. [[1935년]], 복역 중 병으로 석방되어 [[개성]]의 [[윤치호]] 자택에서 얼마간 요양하다가 고향인 으로 낙향하였다. 저서로는 《동사략(東史略)》, 《조선이야기》, 《가정교육》, 《조선어보충(朝鮮語補充)》, 《신편언문예법》, 《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 등이 있으며 이 중에는 기독교계열 학교의 교과서, 교재로도 활용되었다. 석방된지 4년 만인 [[1939년]] 4월 5일에 고문 후유증 등으로 사망하였다.
  • 노창성
         [[경기도]] [[서울특별시|서울시]] 출신으로 [[일본]] [[도쿄도|도쿄]]로 유학하여 [[도쿄 공업대학|도쿄고등공업학교]] 전기화학과를 졸업하였다. 귀국한 후 [[조선총독부]] 체신국 기수로 채용되어 방송국 설립에 필요한 기술을 맡았다가 방송계에 뛰어들게 되었다.
  • 문정창
         * 1923년 [[동래군]] 서기, [[경상남도|경남도청]], [[조선총독부]]에 근무
         * 《조선의 시장 朝鮮の市場》, 조선총독부, 1941
         * 《조선농촌단체사 朝鮮農村團體史》, 조선총독부, 1942
  • 민병도 (1916년)
         [[경성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의 [[게이오의숙]]을 나온 그는 [[조선은행]]에 입사하여 근무했다. 민대식이 창설한 [[동일은행]] 취체역을 지냈으며,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1938년]]에 주식회사로 전환할 때 발기인<ref>{{서적 인용
         **** 숙부 : [[민규식]](閔圭植) -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 박관수 (1897년)
         귀국한 뒤 교사로 임관되어 [[대구사범학교 (1923년)|대구사범학교]]에서 교육학 교사와 심리학 교사로 일했다. 이때 [[대구사범]]에 재학 중이던 박정희를 가르쳤다. [[수원고등농림학교]] 강사를 거쳐, [[조선총독부]] 소속의 교육 관료인 시학관으로 오래 근무했다. [[1939년]]에 [[경기공립고등여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궁성요배를 하며 교직원들에게 전시체제에 대한 훈시를 했다 한다.<ref>{{서적 인용
  • 박기환 (1896년)
         [[한성부]] 출신으로 [[일본어]]를 공부하여 [[1911년]]에를 졸업했다. [[1913년]]에 판임관견습시험에 합격한 뒤에 발령받아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었다.
         이어서 구성군 서기에 임명되었고, 약 12년 동안의 관직 생활끝에 [[1925년]]에 조선총독부 군수로 승진하였다. [[초산군]] 군수를 거쳐 [[1928년]]에는 [[철산군]] 군수로 발령받았고, [[1931년]]부터는 [[위원군]] 군수를 지냈다.
  • 박문웅(1890)
         '''박문웅'''(朴文雄, 일본명:朴忠文雄 호추 후미오, [[1890년]] [[12월 7일]] ~ [[1959년]] [[8월 14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관료이다. [[일제 강점기]]의 [[일본]] 유학파 관료로 [[1916년]] 판임관 공개채용 시험에 합격, [[선산군]]속, [[김천군]]속, [[경상북도]] 학무과 주사, [[경주시]] 총무과 서무주임 등을 거쳐 [[경북]] 달성군수, 경북 청송군수(1934.9.14~1938.3.25), 청도군수(1938.3.25~1943.3.6), 상주군수(1943.3.6~1944.12.21) 등을 역임하였다.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친일파 관료 [[박중양]]의 아들로, [[치과]][[의사]]이자 대학 내 [[치의학]]과 설립 운동을 한 [[이열희 (1924년)|이열희]]는 그의 사위였다. 다른 이름은 영문(泳文) 또는 순성(淳聖)이다.
  • 박영지
         * [[2002년]] [[서울방송|SBS]] 《[[야인시대]]》 ... 종로경찰서장,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오카 역
  • 박용구 (1879년)
         '''박용구'''(朴容九, [[1879년]] [[음력 7월 12일]] ~ [[1943년]] [[4월 4일]])는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본관은 [[밀양 박씨|밀양]]이다.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총독부 사무관으로 발탁되었다. [[1925년]]에는 [[경기도]] 참여관이 되었고, 황해도 내무부장, 전라남도 참여관, 전라북도 참여관을 역임하였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분류:1879년 태어남]][[분류:1943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밀양 박씨]]
  • 박용섭 (1892년)
         일본의 우에다 잠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곧바로 [[조선총독부]] 관리로 임용되었다. [[1914년]]에 [[전라남도]] [[무안군]]에 발령받은 이래 [[1916년]]에는 [[목포부]] 서기, [[1919년]]부터는 [[일본 제국]]이 잠업 육성을 위해 설치한 전라남도 잠업취체소에서 근무했다.
  • 박용현 (1892년)
         [[광주광역시|전라남도 광주군]] 출신으로 광주농업학교를 졸업했다.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하여 [[1913년]]에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판임관 견습으로 근무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었다.
  • 박이양
         '''박이양'''(朴彛陽, [[1858년]] [[음력 8월 4일]] ~ [[1925년]] 양력 [[1월 14일]])은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이다.
         [[1908년]] 친일 성향의 고위 관료들이 결성한 유림 단체인 [[대동학회]]의 평의원이 되었고, 이 단체의 경리부장을 지냈으며 일본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11년]] [[조선총독부]] 취조국 위원에 임명되었고, 조선어사서 편찬위원으로도 근무했다. [[1920년]] 역시 [[유교|유학]] 계열의 친일 단체인 [[대동사문회]]에 이사 및 편찬위원이 참가하였다.
         [[1921년]] 중추원 개편 때 주임대우 참의와 조선총독부 산하 구관급제도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고, 참의 임기 중인 1925년 사망했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분류:1858년 태어남]][[분류:1925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반남 박씨]]
  • 박재수 (1899년)
         [[경성부]] 출신으로 [[광신상업고등학교]]의 전신인 협성학교를 졸업했다. [[1911년]]부터 [[조선총독부]] 통역생으로 일하다가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하여 [[1913년]]에 총독부 경부에 임명되면서 경찰계에 입문했다.
  • 박제균 (1887년)
         이듬해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총독부]] 체제가 들어서면서 총독부 군서기에 임명되었다. 안동군에서 근무를 시작하여 [[예안군]], [[비안군]], [[의성군]], [[경주군]] 등 경상북도 지역에서 군서기로 일했다. 경상북도 재무부 세무과를 거쳐 [[1924년]]에는 총독부 군수로 승진하였다.
  • 방준경
         [[1933년]] 8월에 [[조선총독부]]의 공주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었고, [[1934년]] 8월부터는 부산지방법원 판사로, 이듬해 8월부터는 동 법원의 통영지청 판사로 임명되어 1940년 5월까지 통영에서 근무했다. 이후 대전지방법원, 상주지방법원, 통영지방법원, 인천지방법원 등의 판사를 역임했다. 판사로 근무하면서도 1933년 〈맑스주의의 문학론 음미〉로 아나키즘 문예이론 정립을 시도하고, 아나키즘 문학론을 대표하는 소설 〈악마도〉, 〈이대장전〉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 부완혁
         [[경성부]]에서 출생했다. [[1941년]]에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를 지내는 등 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선총독부]] 관리로 일했다. 이때의 경력으로 인해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 서정국 (1896년)
         [[한성부]] 출신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법조인이 되었다. 광주지방법원에서 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하다가 [[1929년]]에 [[조선총독부]] 판사에 임용되었다.
  • 소진우
         [[1914년]]에는 판임관 견습이 되었고, [[1915년]]에 [[조선총독부]] 서기로 승진하여 [[영일군]]과 [[의성군]], [[달성군]], [[대구광역시|대구부]], [[김천시|김천군]] 등에서 차례로 근무했다.
  • 소진은
         [[조선총독부]] 군수를 지낸 [[소진하]](蘇鎭夏)와는 형제 관계이며, 아버지는 [[소영규]](蘇榮奎)이다. [[1911년]]에 문관보통시험에 합격하여 총독부 관리가 되었다. [[1912년]] [[1월 29일]] 조선총독부 경상북도 김산군 서기로 임명되었고, 1914년부터 1920년까지 [[김천군]] 서기로 근무했다.
         [[1921년]] 조선총독부 경상북도 경부에 임명되었으며, 왜관경찰서 경부로 발령받은 뒤부터 경찰 간부로 이동했다. 상주경찰서(1922년 ~ 1923년), 포항경찰서(1925년 ~ 1929년)를 거쳐 경상북도 경찰부 보안과 경부(1930년 ~ 1931년)로 근무하면서 정치범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경상북도 경찰관교습소 교관으로 활동했고, [[1933년]] [[5월 12일]]에는 도경시로 승진하면서 전라북도 경무과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 때부터 전라북도 순사교습소장, 순사징계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34년]] [[11월 27일]]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이동한 뒤부터 도순사징계위원회 예비위원, 순사부장 시험위원으로 활동했고, 1935년 8월 23일 평안남도 농촌진흥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35년]] 10월에는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표창과 은배를 받았으며, [[1936년]] 10월 16일 조선총독부 경무국 통역관으로 임명되었다. 1936년 10월 21일에는 평안남도 보안과장, 도순사부장 시험위원, 도순사징계위원회 예비위원, 농촌진흥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 소진하
         [[1912년]]에 인동공립보통학교 훈도로 옮긴 뒤 판임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관리로 전직했다. [[1913년]] 김천헌병대 통역생을 거쳐 [[1914년]]에 경상북도 [[청도군]] 서기, [[1915년]]에 [[달성군]] 서기로 발령받았고, [[1919년]]부터는 경상북도 재무부 세무과에서 근무했다.
  • 손석도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 출신으로 법과를 졸업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뒤 [[조선총독부]] 경부에 임명되어 경찰 간부로 근무했다.
  • 송금선
         [[1937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 가입하여 순회 강연을 다니면서부터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조선총독부]]의 [[방송선전협의회]]에서 친일 강좌를 맡았고, [[조선귀족]] 부인들과 여성계 친일 인사들이 공동 조직한 [[애국금차회]]에도 가담했다.
  • 송문헌 (1892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송문화]]의 동생이다.<ref>{{뉴스 인용
         }}</ref> [[한성부]]에서 태어나 송문화와 마찬가지로 관립 [[한성사범학교]]에서 수학했다. [[1911년]]에 학교를 졸업한 뒤 견습으로 일하다가, [[1915년]] [[평안북도]]에서 군서기로 임명되어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었다. 이후 지역과 [[경기도]] 지역에서 도서기로 근무했다.
         [[조선총독부]] 내무국에서 일하던 [[1923년]]에 [[경상북도]] [[청송군]] 승진했다. 경북 지역에서 청송군, [[예천군]], [[상주시|상주군]] 군수를 역임했으며, [[1930년]]에는 경상북도 산업과장, [[1934년]] [[경상남도]] 산업과장에 임명되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도지사, 도 참여관, 조선총독부 사무관의 세 부문에 수록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송문화
         '''송문화'''(宋文華, <small>일본식 이름:</small> 山本文華, [[1886년]] 12월 ~ ?)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1924년]] [[조선총독부]] 군수로 승진 발령을 받았다. 경기도 지역에서 [[강화군]], [[광주시 (경기도)|광주군]], [[양주시|양주군]] 군수를 차례로 지냈다. [[1931년]] 훈6등 서보장을 받는 등 [[1935년]]을 기준으로 훈6등 종6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이후 참여관을 거쳐 [[1941년]]에는 중추원 참의에까지 올랐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중추원과 도 참여관, 조선총독부 사무관의 세 분야에 수록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서도 중추원과 관료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분류:1886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납북자]]
  • 송병주 (1890년)
         이때는 [[조선총독부]] 체제가 출범하여 조선 전국의 행정기관과 경찰 조직이 총독부 휘하로 편입되면서 [[일본어]] 통역 수요가 늘어난 시기였다. 송병주는 귀국 직후 경무부 소속인 당진경찰서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면서 경찰계에 입문했다.
  • 송영 (극작가)
         1930년대 후반부터 전향하여 친일 행적을 보였다. [[1943년]]부터 [[조선총독부]]가 후원하고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주최하여 열리기 시작한 친일 성향의 연극경연대회에 〈산풍〉, 〈역사〉, 〈달밤에 걷던 산길〉을 출품했다.<ref>이재명, 〈조선연극문화협회의 활동을 통해서 본 친일 연극〉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5년 하반기 워크숍)</ref> 이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확인된 친일 저작물 수는 총 7편이다.<ref>{{저널 인용
  • 송학선
         1926년 [[4월 26일]] [[대한제국 순종|순종]]이 사망하자 빈소가 마련된 [[창덕궁]] 앞에서는 호곡을 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모여 들었다. 고종은 망국의 상징이었고 일본인들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에 비통함이 더욱 컸다. [[금호문]](金虎門)은 창덕궁의 서남문으로 빈소의 출입구였으며, 송학선은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이 이 곳으로 드나드는 것을 보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처단하기로 마음 먹었다.
  • 송학선(독립운동가)
         1926년 [[4월 26일]] [[대한제국 순종|순종]]이 사망하자 빈소가 마련된 [[창덕궁]] 앞에서는 호곡을 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모여 들었다. 고종은 망국의 상징이었고 일본인들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에 비통함이 더욱 컸다. [[금호문]](金虎門)은 창덕궁의 서남문으로 빈소의 출입구였으며, 송학선은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이 이 곳으로 드나드는 것을 보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처단하기로 마음 먹었다.
  • 신석린
         '''신석린'''(申錫麟, <small>일본식 이름:</small> 平林麟四朗, [[1865년]] [[1월 9일]] ~ [[1948년]] [[2월 14일]])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이를 진압, 시위대 해산을 독려하던 단체인 [[자제단]]의 대구지부 창립에 참여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행정 체계가 [[조선총독부]] 산하로 편입되어 개편되자 곧바로 [[경상남도]] 참여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경상북도]] 참여관으로 이동했다. 경북 참여관으로 재직 중인 [[1919년]]에 [[3·1 운동]]이 발생했다. 이때 [[박중양]]과 함께 대구자제단을 발기하여 3·1 운동을 방해하는 활동을 벌였다.<ref>{{서적 인용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분류:1865년 태어남]][[분류:1948년 죽음]][[분류:조선 사람]][[분류:개화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민권운동가]][[분류: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분류:박중양]][[분류:윤치호]][[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평산 신씨]]
  • 신응희
         '''신응희'''(申應熙, [[1858년]]/[[1859년]] [[11월 2일]] ~ [[1928년]] [[2월 12일]])는 [[조선]] 후기·[[대한제국]]의 무신,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갑신정변]] 당시 행동대원으로 참여하였다. 본관은 [[평산 신씨|평산]]이다. 다른 이름은 응희(應凞)이다.
         [[1894년]](고종 30년) [[7월]] 사면을 받고 귀국, [[박영효]]의 심복으로 활동했으며 [[1895년]] [[박영효]], [[유혁로]] 등과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했다가 [[유길준]]의 밀고로 폭로되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을사 보호 조약]] 이후 사면받고 귀국, [[중추원]]부찬의, [[1908년]](융희 2년) [[전라남도]][[관찰사]], 겸임 [[전라남도]][[재판소]] [[판사]]를 지냈으며, [[1910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전라북도]][[도지사|도장관]], [[1919년]] [[전라북도|전북]][[도지사]]를 역임했다.
         [[1858년]](철종 9년) [[11월 2일]]에 [[신식]](申式)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일설에는 [[11월 5일]]에 태어났다는 설, [[9월]]생 설도 있다. 출생년대에 대해서도 다른 설이 있어 [[1859년]]생 설이 있다. [[대한제국]]의 관원 이력서와 [[조선총독부]] 관원 이력서에는 1858년생 설과 1859년생 설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한성부]] 서서(西署) 동영동(東嶺洞) 42통 7호 출신으로, 이후 [[경성부]] 북부(北部) 송현방(松峴防)에서 거주하였다. 어려서 집안의 서당인 가숙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소년 시절에 첫 결혼을 하였지만, 첫 부인과 이별한 사연은 알려져있지 않다.
         그는 키와 체격이 컸다 한다. [[조선총독부]]에서 남긴 인사자료 중 그의 체형과 성격에 대한 자료에 의하면, 거구의 비대한이며 풍채는 당당했지만, 도량이 아주 좁아서 타인을 포용할줄 모른다는 평을 남겼다.
         ==== 조선총독부 고등관 재직 ====
         [[1910년]] [[10월 1일]] [[한일합방조약]] 체결과 동시에 [[조선총독부]]고등관에 임용되었다. 한일합병 조약 직후 [[전라북도|전라북도 장관]] [[고등관]]3등(咸鏡南道長官高等官三等), 종5위(從五位)가 되었고<ref name="실록친일파">{{서적 인용
         [[함경남도|함경남도 장관]] 재직 시 [[일본]]과 [[미국]]의 어업 도구와 그물 등을 들이고 양식업을 독려하여, 함경남도 일대의 어업 생산량을 늘렸다. 특히 [[조선총독부]]의 평에 의하면 "[[전라북도]] 서호진(西湖津) 이북의 어업이 舊來의 면모를 일신하여 융성해지고 관내의 저금 액수가 장관의 독려로 이상 증대를 초래한 치적이 있다고 평가됨"이라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측의 인사자료에 의하면 한 도의 장관으로서 백성들에게 털끝만한 위엄이라도 실추하지 않는 것만을 염려하며, 부하가 직무를 행할 때 큰 일 작은 일을 불문하고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다. 한편 그의 일본인 부인 신매자(申梅子)가 [[3.1 운동]] 전후하여 한때 [[대한애국부인회]]에 관여하여 부인회 함흥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21년 [[2월]] 황해도지사에서 물러났으며 동시에 휴직을 신청했으며, [[1923년]] [[2월]] 도지사직에서 사퇴했다. [[1922년]] [[2월]] [[흥린건축주식회사]] 취체역에 선임되었다. [[1924년]] [[4월]] 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ref name="실록친일파"/>
         [[조선총독부]]의 관원 이력서에는 그의 인물됨을 부정적으로 평하였다. 한 도의 장관으로서 백성들에게 털끝만한 위엄이라도 실추하지 않는 것만을 염려하며, 부하가 직무를 행할 때 큰 일 작은 일을 불문하고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인사 기록에 의하면 그의 인물됨을 원래 준민 교혜(寯敏巧慧)하며 부하를 대하는데 아주 엄하지만 윗사람을 맞이할 때는 아첨을 하고 허리를 굽실거리기에 정신이 없다. 천성이 교묘하고 영리하기 때문에 중후함이 결여되었고, 움직이기만 하면 이익을 쫓는 버릇이 있다며 부정적으로 평하였다. 그밖에도 [[조선총독부]]는 그의 인물됨을 평가하기를, 경박한 미국의 공기에 접한 그는 협소한 인물에 더하여 일종의 뻔뻔스러움이 숨어 있으며 툭하면 건방진 태도를 보인다. 지식이 저급하고 천하의 형세에 어둡다고 하였다. 다만 됨됨이는 도량이 아주 협소하지만 축재(蓄財) 문제에는 깨끗하여, 억지로 재산을 모으는 일에 급급한 것 같지는 않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분류:일제 강점기의 정치인]][[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박중양]][[분류:평산 신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안형식 (1888년)
         [[한성부]] 출신으로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에 순사가 되면서 경찰계에 입문했다. 한성부 북부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중,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총독부]]로 소속을 옮겼다. [[1912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았다.
  • 양재창 (1885년)
          | 직책 = 前 [[조선총독부]] [[경기도]] [[용인시]] 군수<br/>(前 朝鮮總督府 京畿道 龍仁郡 郡守)
         '''양재창'''(梁在昶, <small>일본식 이름:</small> '''하리카와 사이아사히'''(梁川在昶), [[1885년]] [[9월 29일]] ~ [[1968년]] [[1월 14일]])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 출신 기업인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다.
         [[한성부]]에서 경성학당을 졸업하고 [[1905년]]에 [[농상공부]] 기사로 임명되는 등 대한제국 말기에 기술직 관리로 근무했다.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총독부]] 소속으로 편입되고 [[한국병합기념장]]도 수여받았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분류:1885년 태어남]][[분류:1968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서울교동초등학교 동문]][[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한국민주당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당원]][[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남원 양씨 (梁)]]
  • 엄주익 (1872년)
         장례식은 [[4월 22일]] [[양정고보]] 학교장으로 거행되어 오후 8시 관철동 자택을 나와 [[광희정]](光熙町)의 구 [[훈련원]] 광장에서 노제를 거쳐 장지로 향하였다.<ref name="jangui">"故 嚴柱益氏 葬儀", 동아일보 1931년 04월 23일자 2면, 사회면</ref> 학교장 장례식에는 양정고보 학생 6백여명,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의 대표 학생들, 그밖에 [[조선총독부]] 조선군 사령부에서 특별히 보내준 의장대 2백 명이 장례식을 호송하였다.<ref name="jangui"/> 시신은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광주군]] (현 [[서울특별시]] [[강동구]])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 오국영
         출신지는 [[경상북도]]이다. 경성학당을 졸업하고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일제 강점기 초기에 [[조선총독부]] 관리로 근무했다. [[함경남도]] 내무부에서 근무하던 중 [[1910년대]] 후반에 총독부 군수로 발탁되었다. [[이원군]] 군수로 수년 동안 재직했다가 병으로 퇴관했다. 이때 정8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 오두환 (1883년)
         [[1902년]] 경기도 공립고등소학교, [[1907년]]에 [[관립한성일어학교]]를 졸업했다. [[1908년]] [[농상공부]] 산림국 임무과 주사로 근무하면서 대한제국 말기에 관리로 일하기 시작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인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고원(雇員, 임시직원)으로 채용되었고 [[1912년]] [[1월 31일]]에는 총독부 경기도 서기로 승진하였다. 1920년 [[인천부]] 서무계 서기, 1921년 인천부 부속(府屬)으로 근무했고 [[1921년]] [[7월 21일]] [[경기도]] 군수(고등관 8등)로 임명되었다.
  • 오승근 (1908년)
         [[한성부]]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주오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뒤 대구지방법원 사법관시보를 거쳐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용되어 근무했다.
  • 오정민
         [[1938년]] 2월 [[일본 제국]]의 [[좌익]] 계열 연극 탄압으로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연극 운동이 조선에 침투했다고 발표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풀려난 뒤로는 전향하여 1940년대부터 친일 연극인으로 활동했다. 《[[매일신보]]》, 《국민문학》, 《조광》, 《문화조선》, 《신시대》에 [[조선총독부]]가 후원한 연극경연대회에 대하여 평가하는 등 사실상 친일 어용 연극인 '국민연극'을 지지하는 내용의 평론, 징병제 실시와 태평양 전쟁을 찬양하는 내용의 평론을 써서 발표했다.
  • 원덕상
         '''원덕상'''(元悳常, <small>일본식 이름:</small> 元村肇, [[1883년]] [[11월 7일]] ~ [[1961년]] [[3월 15일]])은 [[일제 강점기]]의 의사 겸 금융인, 기업인이며 일제 강점기 중반 경기도 도평의회 의원과 경성부 부협의회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이다. [[원응상]], [[원은상]]의 동생이고 [[원훈상]]의 형이다.
         원응상은 젊은 나이부터 장기간 중추원 참의를 지냈던 만큼 [[조선총독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활동을 했다. 1920년대부터 [[조선산림회]] 이사를 맡고 [[조선불교단]], [[조선구락부]], [[동민회]], [[조선대아세아협회]] 등에 가담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시기에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 각종 전쟁지원 단체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등 두드러지는 행적을 보였다.<ref>{{서적 인용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분류:1883년 태어남]][[분류:1961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의사]][[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유시태 (1890년)
          | 경력 = 前 [[조선총독부]] [[경상북도]] [[성주군]]
          | 직책 = 前 [[조선총독부]] [[경상북도]] [[봉화군]] <br/>(前 朝鮮總督府 慶尙北道 奉化郡 郡守)
         본적지는 [[경상북도]] [[안동시|안동]] 이다. 본관은 [[풍산 류씨|풍산]](豊山), 호(號)는 산촌(山村). 서애 유성룡 선생의 13대 후손인 그는 [[1913년]]부터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판임관견습으로 근무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어 총독부 군서기가 되었다. 이후 군서기로에서 차례로 근무했다.
  • 유시환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 출신이다. [[1908년]]에 부설 측량과를 졸업하고 [[1910년]] [[조선총독부]]가 설치한 임시토지조사국원양성소를 마쳤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도 참여관과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에 수록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유완종
         농상공부 산림국에서 기수로 근무하던 중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총독부]] 체제가 출범했다. 유완종은 총독부 농상공부 식산국 산림과로 소속이 이동되었다.
  • 유일선
         '''유일선'''(柳一宣, [[1879년]] [[12월 27일]] ~ [[1937년]] [[4월 11일]])은 [[일제 강점기]]의 [[개신교]] [[목사]]이며 [[조선총독부]]에서 촉탁으로 근무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생했을 때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조직된 '3·1운동 진정운동'에 참가했다. 그는 호남 지역 주임자로 활동했으며,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대한민국임시정부)|독립신문]]》이 반드시 처단해야 할 7적을 꼽아서 보도했을 때 여기에 포함되었다. 3·1운동의 여파가 남아 있던 1919년 9월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회의에서 조선의 행복을 위해서는 일본을 사랑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철저한 내선일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기도 했다. [[여운형]]을 포섭하기 위해 일본이 꾸민 공작에 밀정으로 참가하여 여운형과 [[장덕수]]의 활동을 감시하는 역할도 맡았다.
         '조선전도론'을 주창한 일본조합교회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친일파]]로 활동한 점, 3·1 운동 방해에 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활동이 두드러지는 점, 조선총독부의 밀정 역할을 한 점 등에서 [[선우순]]과 경력이 유사하다.
         [[1921년]] 일본조합교회의 후신인 조선회중기독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1924년]]부터는 [[이재극]], [[박영효]], [[이완용]], [[박승직]] 등의 유력 인사들이 항일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한 친일 단체인 [[동민회]]에 가담하여 [[1933년]] 이사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1936년]] 조선총독부 [[경기도]] 내무부의 지방과에서 촉탁으로 발령받은 것을 마지막으로, 이듬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 유진오
         39년 [[10월]] 조선실업구락부에 가입하였다. 11월 3일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외곽지지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경성에서 결성될 때, 발기인과 간사로 참여했고, 조선문인협회 회원이 되었다. [[11월 8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전선(戰線)에 위문문·위문대 보내기 행사'를 주관, 진행하였다.
  • 유진찬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조사과 촉탁으로 일했고 [[1929년]] [[9월 7일]]부터 [[1943년]] [[4월 26일]]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 부제학으로 일했다. [[1937년]] 12월 [[중일 전쟁]]을 찬양하고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은 한시를 지었으며 [[1938년]] [[2월 5일]] 명륜학원 강사로 임명되었다.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에 참여했고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 윤석중 (1893년)
         [[1912년]]에 [[강원도 (남)|강원도]] [[삼척시|삼척군]]의 임시직원으로 채용되면서 관계에 들어섰다. 삼척군 내무계에서 근무하다가 [[1918년]]에 [[조선총독부]] 군서기로 채용되어 정식 직원이 되었다.
  • 윤치영
         [[1923년]]에는 귀국하여 [[중앙고등학교|중앙고보]]의 야구팀 코치가 되었다. [[1923년]] [[7월 5일]] [[하와이]] 이주노동자 2세 학생들이 야구팀을 결성했다.<ref name="끝나지 않는 신드롬">천정환, 《끝나지 않는 신드롬》 (푸른역사, 2005) 106-107페이지</ref> 이때 YMCA에서는 [[하와이]]로 원정경기를 가는 야구단을 조직했다. [[중앙중학교 (서울)|중앙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축구, 야구, 육상 선수로 활동했고 중앙고보의 야구 코치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야구단의 한사람으로 차출, 1루수로 선발되어 태평양에 건너갈 수 있게 됐다. [[조선총독부]] 외무국에서는 윤치영이 반일분자라 하여 출국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당시 [[충청남도지사]] [[김관현]](金寬鉉)의 주선으로 출국이 허용, [[조선총독부|총독부]] 외무국에서 여권을 발급받고 출국하였다.<ref name="경향19720408">경향신문, 1972년 04월 08일자 4면, 사회면</ref> 그러나 그가 [[하와이]]에서 [[이승만]]을 만난 것이 알려지면서 [[김관현]]은 징계를 받게 되고, [[조선총독부]]는 [[하와이 섬]]에 밀정을 파견한다.
         당시 [[일본]]은 30여 명의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윤치영은 일본측 대표단장 쓰루미 유스께(鶴見佑輔)를 그의 숙소로 찾아갔다.<ref name="경향19720408"/> 쓰루미 유스케에게 그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역사적 침략상과 [[조선총독부|총독부]] 정치의 잔혹성 등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윤치영의 회고에 의하면 "만약 그가 불손한 태도로 나온다면 주먹다짐이라도 할 생각이었다.<ref name="경향19720408"/>"한다. 그런데 쓰루미는 윤치영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면서 신중한 태도로 듣고 있더니 반박하였다.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출입하던 그는 미행을 당했고, 종로 연건정에서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불심검문을 이유로 체포되어 전신수색을 당한 뒤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뒤 사촌형 [[윤치호]]가 사건 연루자 전원 52명의 신원을 책임진다는 신원보증서와 시말서를 작성했고 이 때문에 풀려날 수 있었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5"/> 이후 그는 석방되었지만, 사촌형 윤치호가 조선총독부 특무기관으로부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공황상태에 빠져 그해 가을 내내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다. 이후 [[1942년]]까지 4년간 [[대화숙]] 보호 관찰소에 출입하였다.
         30년대 후반 이후에도 윤치영은 청년들과 사귀며 연락을 통해 국내외 정세와 언론 동향, 정보 등을 입수하여 대응하였다. 윤치영은 [[야구]]와 [[축구]] 등을 잘 했고 체육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체육]]을 통해 그는 청소년들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또한 교회 청년 활동에도 참석하여 교회를 통해서도 청년층을 주변에 포섭하였고 [[이승만]]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조선총독부|총독부]] 당국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분류하여 내사, 감시하였다.
         [[조선총독부|총독부]]의 엄한 감시와 고문에 그는 일본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된다. 그에 의하면 "그들의 무자비한 식민 통치의 폭력 앞에 나는 하루 아침에 짐승이나 벌레만도 못한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채 나를 죽음의 일보 직전 까지 몰고 가는 것이다.", "나라 없는 인간은 이렇게 당하다가 맥없이 죽어가야만 하는구나 하는 뼈저린 자각을 했다." 라며<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0"/> 이후에도 한일 외교에 부정적인 시각을 표출하며 [[일본]]에 대한 공공연한 적의를 드러냈다.
         [[1940년]]대초 [[태평양 전쟁]]을 전후하여 그는 [[조선총독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그는 [[이승만]], [[윤치호]] 등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 이외에 대외활동을 줄였다. [[이승만]] 등이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에 출연하였다. 그는 당국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라디오 단파방송을 청취하였다.
         [[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제의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는 조선 사회에 논란이 되었다.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다. 그런데 그가 뒤이어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면 흐뭇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ref name="윤치호 일기 p.452"/> 총독에게 아부하는 조선인 지식인들은 당연한 것이라며 총독을 추켜세웠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직후 [[조선총독부]] 당국에서는 국내에 있는 문사,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전쟁의 승전을 찬양하는 말과 글을 여기저기 내걸도록 강요하고 나섰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9">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139페이지</ref> 그는 [[일본 제국주의]]가 점점 미쳐간다며 분개하다가 주변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이때 [[민족 대표 33인|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 [[기미독립만세 사건]]에 가담하였던 [[박희도 (1889년)|박희도]](朴熙道)가 그를 만나자고 하였다. 윤치영에 의하면 "그는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그 당시 [[조선총독부|총독부]]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경무부 잡지 〈[[동양지광]] (東洋之光)〉의 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동양지광〉에서 이번 호에 대동아전쟁 승전특집을 냈는데 다른 저명인사들의 것과 함께 나의 글이 실려 있다고 말하였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9"/> 윤치영은 자신의 허락 없이 명의를 도용했느냐며 항변하였다.
         빚을 갚기 위해 다시 친구와 친지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녔지만 냉담하게 거절당했다. [[조선총독부]]의 [[고문]]과 감시, [[파산]] 이후 경제적인 빈궁함과 주변의 무시, 조롱, 친한 친구와 지인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외면 등은 그에게 [[인간]]에 대한 [[회의주의|회의]]와 함께 [[냉소주의|냉소적]]인 [[인간관]]을 품게 된다. 이후 각종 회식이나 모임 자리에 나가는 일을 스스로 기피하였고, 홀로 독서와 사색에 빠졌다.
         결국 이러한 행동으로 그는 [[조선총독부]]의 눈밖에 나게 된다. [[1945년]] 여름 총독부 경무국에 출입하는 어느 지인이 윤치영을 찾아와 하는 말이 "오는 [[10월 17일]] 밤 1시를 기하여 [[안양]] 근교의 어느 산록에서 과거 독립운동과 관련되었던 조선인 유지들을 끌어다가 전부 사형시킨다."는 것이었다. 윤치영은 그의 정보가 막연한 것이 아니고 6하원칙에 들어맞는 것이므로 반드시 근거가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42"/> 공포감에 사로잡힌 윤치영은 도주를 시도한다.
         뒤에 알려진 일이지만 패전에 대비하여 총독부 당국은 불온한 인사들에 의한 후환을 없애려고 그들이 요시찰 인물로 지목했던 한국의 지도급 인사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그것도 총탄이 아까워 목을 졸라 죽이려고 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42"/> [[미군정|미 군정기]] 무렵 [[조선총독부]]가 남기고 간 서류들을 살펴보던 윤치영은 [[조선총독부|총독부]]가 [[1945년]] 초, 그해 [[10월 17일]]과 [[8월]] 패전 직전에 [[조선인]] 독립운동가와 불령선인, 요시찰 인사들을 안양군 골짜기로 끌어모은 뒤 모조리 살해할 계획을 세웠고, 그 중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윤치영은 이를 간단하게 메모해두었다가 자신의 회고록을 낼 때 기술하였다.
  • 윤태빈
         [[한성부]] 출생이다. 말기에를 졸업하고 곧바로 외국어학교 교관으로 근무했다. [[일본어]]에 능통한 윤태빈은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후부터 [[조선총독부]] 소속 관리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경기도]] 도청 내무부에서 일하다가 [[1935년]] 서울도 참여관에 올랐으며, 이후 [[강원도 (남)|강원도]]와 [[충청북도]]의 지사를 지내면서 [[1942년]] 퇴임 때까지 약 22년간 총독부 소속 고위 관료를 역임했다. 퇴임 무렵에는 [[조선귀족]]의 예우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종4위]], [[정4위]]에 서위되기도 했다. 총독부가 [[1935년]]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ref>{{뉴스 인용
         관직 활동 외에 [[1933년]] [[조선신궁]] 설치 1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결성된 [[조선신궁봉찬회]]에서 평의원을 지냈고, [[중일 전쟁]] 발발로 인한 전시체제 구축을 위해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사회교화방송 상식강좌에는 강사로 참여했다. 같은 해 [[애국금차회]]가 발족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발기인회에 참석해서 모임 결성의 취지를 설명한 일이 있다. [[1938년]]에는 [[신사참배 강요]] 정책에 따라 [[궁성요배]]와 [[신사참배]]를 실행하며 황국신민으로서의 각오를 다지고 후방의 동요를 막자는 취지로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를 역임했다.
         * [[2002년]] : [[친일파 708인 명단]] 3개 부문 수록 - 도지사, 도 참여관, 조선총독부 사무관
  • 의친왕
         [[1919년]] [[11월 20일]]자의 [[독립신문]] 기사에는 '의친왕의 친서', '의친왕 전하' 라는 말과 함께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라고 쓰여 있다.<ref name=autogenerated1>{{서적 인용|제목=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저자=서중석 지음 |출판사=역사비평사 | 연도=2006 |쪽=327}}</ref> 그해의 [[11월 25일]]자 《[[독립신문]]》 2면의 기사에는 의친왕의 상해행 기사로 대부분 할애되었으며 이후 그 뒤에도 상당 지면 할애되었다 한다.<ref name=autogenerated1 />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 정부에 보고하여 의친왕에게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이강 공이라는 공족의 작위를 박탈당했으며, 그의 공위는 장남 [[이건 (1909년)|이건(李鍵公)]]에게 습공되었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로 연금된 뒤에는 실의에 빠져, [[이수길]]에 의하면 집에서 술을 자주 마셨다 한다. [[1955년]] [[8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별궁에서 [[영양실조]] 후유증과 [[스트레스]](화병) 등의 합병증으로 79살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 이갑성
         그의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이고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아호는 연당(硏堂).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1931년]] [[신간회 사건]]으로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 시|상하이]]로 망명,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귀국하였다.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하다가 [[윤치호]]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다. [[1945년]] 독립촉성국민회의 조직에 참여하여 회장이 되고 [[1947년]]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지냈으며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뒤 [[1952년]] [[이승만]]의 친위조직이 된 [[대한인 국민회]] 회장을 지냈고, 그해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에 입당, [[1952년]] [[10월]] [[한국 전쟁]] 중 전시내각(戰時內閣)의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임시 국무총리]](國務總理)를 역임했다. [[1953년]] 자유당의 최고위원, 정무부장을 역임하였다. 4.19 혁명 후 야인으로 생활하다 [[1963년]] [[2월]]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이 되었다. [[1965년]] [[광복회]] 회장을 지냈다.
         [[3월 1일]]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벌어지자 학생시위운동 및 전단살포 등 중책을 맡아 수행하던 중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 33인들은 태화관(泰華館)에 모였고 이갑성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에 미리 의견서를 제출한 뒤, 회합 장소를 떠나지 않고 조용히 포박당하기로 약속한다. [[3월 1일]] 오후 이갑성은 조선총독부에 [[민족대표 33인]]의 의견서를 제출하러 갔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 회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3·1 운동]] 당시 [[한국]]의 독립운동 장면을 사진으로 촬영해달라는 [[석호필]](스코필드)의 부탁을 받고 [[경성부|경성]] 시내에서 학생들의 만세 장면을 카메라 사진으로 여러장 촬영해서 주기도 했다. 학생들의 만세 장면과 [[조선총독부]] 헌병들의 사격장면 등을 담은 이 사진들은 [[스코필드]]와 [[조선총독부]] 치하 [[조선]]에 와 있던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해 서방세계로 알려지게 되었다.
  • 이겸제
         '''이겸제'''(李謙濟, <small>일본식 이름:</small> 福田謙治, [[1867년]] [[11월 9일]] ~ [[1947년]] [[7월 6일]])는 구한말 무관으로 개화파의 일원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쇼와 천황]] 즉위 기념으로 내려진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고, 중추원 참의로 재직 중이던 [[1935년]]을 기준으로 종4위 훈3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같은 해 [[조선총독부]]가 시정 25주년을 기념하여 표창한 표창자 명단에도 들어 있었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분류:1867년 태어남]][[분류:1947년 죽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무신]][[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개화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전의 이씨]]
  • 이경희 (1880년)
         그뒤 [[의열단]]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23년]] [[조선총독부]] 폭파를 목적으로 [[김시현]](金始顯) 등과 함께 총기와 폭탄, [[신채호]]의 격문과 [[조선총독부]] 관료들에게 보낼 투항권고문 사본 등을 국내로 반입, 격문 수백장을 받아 배포하였고, [[조선총독부]] 건물 폭파미수 직전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한 후 [[신간회]](新幹會)의 조직에 참여했고, [[신간회]] 경북지부, 대구지부 등을 조직했으며, [[밀양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1923년]] [[의열단]] 단원으로 비밀거사를 준비하여 5월의거를 계획, 국내에 잠입하였다. [[1923년]] [[김원봉]] 의 지령아래 [[김지섭]], [[김시현]](金時顯), 유시태(柳時泰), 홍종우(洪鍾佑), 황옥(黃鈺) 등과 모의하여 [[중국]]과 [[만주]]로부터 무역 목적으로 [[안둥현]]에서 [[쌀가마]]에 숨겨서 국내로 반입해온 폭탄 36개, 권총 13정, 폭탄장치용시계 6개와 뇌관 여러정, 수류탄 10발,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서]](革命宣言書)의 인쇄 사본 및 [[조선총독부]] 관공리에 대한 투항권고 격문 사본 2,000매 등을 반입, [[1923년]] [[3월 15일]] 이를 국내에 반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무기와 폭탄이 들어오자 그는 [[김시현]], [[유석현]] 등으로부터 〈혁명선언서〉와 투항권고 격문 수백 장을 받아 [[경성부]] 시내 곳곳에 살포하고, 전국 각 도의 도지사와 경찰부(警察部)에 발송하였다. [[김시현]], [[유석현]](劉錫鉉) 등 [[의열단]] 단원들이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매일신보사]] 등을 폭파하할 것을 계획하고 준비에 들어갈 때 이경희는 [[조선총독부]] 폭파를 맡았다. 그러나 [[1923년]] [[5월]] [[조선총독부]] 폭파 일보 직전에 이들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누군가의 신고로 밀정이 따라붙어, 동지 12명과 [[조선총독부]] 종로 경찰서에 체포되어 테러 미수 혐의로 재판받았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어 1년 넘게 형을 살고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대종교]]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로 신자들은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당했으나 그는 개종을 거부하였다. [[1939년]]부터 [[창씨개명]]령이 나오고 [[1940년]]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경희는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1942년]] 여름 [[경성부]] [[돈암동]]을 떠나 대구로 내려가 야산에 숨어 밭을 갈고 농부로 생활하였으며, [[항일 단파 방송]]인 [[미국의 소리]] 방송을 비밀리에 밀청하고 해방을 예상하였다. 이때 그 몰래 그의 부인 조씨가 [[청도군]]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둘째 사위에게 [[보리쌀]]을 얻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 이근직
         이후 귀국하여 [[강원도청]]에서 [[조선총독부]]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43년에 [[평창군]]수, 1944년에 [[원주시|원주]][[군수]]를 지냈다.
  • 이근택(1865)
         [[1910년]] [[경술국치]]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1919년]] 자연사
  • 이상백 (1904년)
         그후 제11회 도쿄 올림픽 대회 유치위원과 준비위원으로 미국, 영국, 독일, 스위스, 프랑스, 스웨덴, 핀란드, 폴란드 등을 방문하여 대회 유치와 준비에 협조를 구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체육계의 공로자로 칭송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에는 모교인 [[와세다 대학]] 재외특별연구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동양학을 연구했으며,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였으나 도쿄 올림픽 유치와 추진의 공로로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했다. [[1944년]]에는 [[여운형]]이 결성한 지하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 이우익
         [[1912년]]부터 [[1927년]]까지 약 15년 동안 [[조선총독부]] 소속 법원 서기와 검사, 판사로 근무했다. 1927년에 퇴임할 당시 정6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이후 [[변호사]]를 개업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이육사]] 사건 등 항일 사건의 변호를 맡은 일이 있다.
  • 이인
         이후 언론탄압반대연설회 등으로 여러 차례 유치장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조선어학회]]를 비밀리에 지원한다는 혐의로 [[곽상훈]] 등과 함께 요시찰 인물이 되었고, [[1936년]] 이후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소환하기도 했으며, [[조선총독부]]는 그의 변호사 면허를 취소시키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깨끗한 처신으로 흠을 잡을수 없었다.
  • 이재명 (영화인)
         1940년대 국책영화 시기에 [[조선총독부]]의 협찬으로 제작된 어용영화 《흙에 산다》(1942) 등을 기획했다. [[황도학회]] 발기인을 맡았고, 1941년 잡지 《영화평론》에서 마련한 친일 성격의 좌담회에 [[백철]], [[최인규 (영화 감독)|최인규]], [[허영 (영화 감독)|허영]] 등과 함께 참가<ref>{{뉴스 인용
  • 장헌식
         1895년 일본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1903년까지 일본에 유학하며 [[게이오 의숙]]의 보통과와 고등과 과정, 도쿄 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서 수학했으며, 일본 사법성과 요코하마항 지방재판소의 사무견습, 대장성의 사무견습으로 재직했다. 귀국 후 궁내부 주사로 임용되어 학부에서 근무하다가 한성부윤을 역임했다. [[1910년]] [[10월]]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평안남도 참여관, [[1917년]]에 [[충청북도]] 장관(도지사)으로 승진한 뒤 충청북도 도장관, 조선총독부 사무관, 총독부 관방실 계원, 1924년 전라남도 지사 등을 역임했다.
         [[1910년]] [[10월 2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평안남도]] 초대 참여관 고등관 3등(平安南道 參與官 高等官三等)에 임명하였고, 1910년 12월 27일 종5위(從五位)로 승급한 뒤 1912년 8월 1일 일한병합기념장, 1915년 11월 10일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수여받았다. 1916년 3월 31일 정5위(正五位)로 승급하였다. 이후 훈3등(勳三等), [[1917년]] [[6월 12일]]에 [[충청북도]] 장관(도지사) 고등관 2등(忠淸北道 長官 高等官二等)으로 승진한 뒤 도장관이 도지사로 관직 명칭이 바뀌자 그대로 [[충청북도지사]]로 유임되었다. [[1920년]] [[7월 31일]] 훈2등(勳二等)에 올라 서보장(瑞寳章)을 하사받고 [[1920년]] [[9월 27일]] 고등관 1등(高等官一等)에 올랐다. [[1920년]] [[6월 24일]] 청주청년회 발족에 참여하였다.
         [[1921년]] [[2월 12일]] [[조선총독부]] 사무관(朝鮮總督府 事務官)이 되고, 3월 10일 종4위(從四位)로 승급하였다. [[1921년]] [[3월 18일]] 조선총독부 총독관방실(總督官房室) 행정관이 되었다. 1921년 3월 20일 칙임사무관(勅任事務官) 민정시찰관에 임명되어 4월 7일부터 6월 19일 [[평안남도]], [[평안북도]] 일대를 민정시찰하였고, [[10월 16일]]부터 [[12월 27일]]까지는 민정시찰관으로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민정시찰을 다녀왔다. 이때 그는 관용 차량이 주어졌지만 거부하고 열차와 대중교통으로 시찰을 다녔다. [[1922년]] [[2월 15일]]에는 [[전라남도]]를 [[3월 5일]]부터는 [[전라북도]]를, [[7월]]에는 [[강원도]]를 시찰다닌 뒤 [[7월 22일]] 귀환하였다. [[9월 4일]]에는 [[황해도]] 수해현장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ref> [[1921년]] [[2월]] [[조선총독부]] [[사무관]](朝鮮總督府 事務官)으로 전임되고, [[고등관]] 1등(高等官一等)에 서임었다. [[1921년]] [[3월 18일]] 총독부 총독 관방실에 발령되었다.
         1926년 5월 1일 정4위(正四位)로 승급했지만 1926년 8월 14일 스스로 의원면관(依願免官)하였다. 바로 조선총독부 충주원 참의 칙임관대우(中樞院參議 勅任官待遇)에 선발되었다. 1926년 9월 13일 종3위(從三位)로 승급하고, 1928년 11월 16일 다시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받았다. 1927년 4월 6일에는 한식(寒食)일을 기념하여 사회단체에 5원을 기부하였다.
         장헌식은 관직에서 퇴임한 뒤로도 일본의 전쟁을 지원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37년에는 각지에 시국강연을 다녔다. [[만주 사변]] 이후 일본군을 후원한 활동을 인정받아 [[1937년]] 일본 육군대신 명의의 표창을 받은 바 있고,<ref name="실록친일파" /> 37년 8월 21일에는 애국금차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로는 시국강연반에 가담하여 전쟁 지원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38년]] 친일 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뒤 [[1941년]] [[국민총력 조선연맹]]과 [[조선 임전 보국단]]에도 가담했다. 이때는 이미 70대의 노구였으나, 학병 지원을 독려한다며 전국에서 강연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38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 칙임관대우 참의에 임명되었다.
         [[1926년]]부터 [[1945년]] 광복 시점까지 19년 동안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으며, [[1945년]] [[5월]] [[이왕직]] 장관으로 관직에 복귀해 있었다. 광복 당시 그는 이왕직 장관이었고, 11월 8일 구황실사무청이 설치될 때까지 계속 재직하였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 김윤정, 《조선총독부 중추원 연구》 (경인문화사, 2011)
         [[분류:1869년 태어남]][[분류:1950년 죽음]][[분류:조선 사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군정기]][[분류:대한민국 사람]][[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인동 장씨]]
  • 전예용
         [[일본]]에 유학하여 [[규슈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군수직과 [[조선총독부]] 사회과 과장, [[황해도]] 산업부 농업과장 등을 지냈다.<ref>{{뉴스 인용
         }}</ref> [[1934년]] [[조선총독부]] 세무부 경성세무감독국 서무과속, [[1936년]] [[경기도]][[개성세무서]]속을 거쳐 [[1937년]] [[경기도]][[광주군|광주]][[군수]]로 부임하여 1939년까지 재직하였다.
         [[1944년]]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장이 되고 [[1945년]] [[조선총독부]] 재무부장으로 재직 중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9월 2일]] [[미 군정]]이 설치되자 학무국장 보좌관에 임명되었고, [[조선주택영단]] 이사를 겸임하였다. [[1946년]] [[조선주택영단]]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미군정]] 영림국 총무과장에 임명되었다.
         * 1944년 :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장
         * 1945년 : 조선총독부 재무부장
  • 정만조
         '''정만조'''(鄭萬朝, [[1858년]] ~ [[1936년]])는 [[조선]] 말기의 학자이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 협조한 대표적인 [[유교]] 계열 인물이다. 호는 무정(茂亭)이다.
         정만조는 명문가의 자제였지만 개화 사상을 익힌 앞서가는 지식인이었다. 당시 세도 세력인 [[여흥 민씨]] 일파와는 대립하다가 정치적인 사건에 말려들어 [[전라남도]] [[진도 (진도군)|진도]]로 유배되었다. 10년이 넘는 유배 생활 끝에 [[1907년]] [[대한제국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에야 사면을 받아 다시 관계로 복귀하였으며, 이후 [[통감부]]와 조선총독부의 이익에 따라 활동하는 친일 학자가 되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동생 [[정병조]]도 세 명단에 들어 있다.
  • 정재학 (1856년)
         일본인 지인의 참여는 조선총독부의 간섭에 대한 방패막이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일본인 고객들을 끌어들이는 역할도 했다. 사카모토가 오구라 다케지스케 (小倉武之助 <ref>동아일보 1995년 11월 9일 1면</ref> 에 의해 대구에 설립된 일본계 남선은행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대구은행]]에 기꺼이 참여한 것은 정재학의 경륜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14일 7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편 -14</ref><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13</ref>
         1913년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그 해 5월 창립총회에서 은행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대구은행]] 행장 직을 수행하면서도 지분참여 등을 통해 [[경상농공은행]], [[경일은행]] 등의 경영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
         == 조선총독부와의 갈등 ==
         [[정재학]]은 [[조선총독부]]와 타협하기도 했지만 부당한 요구에 대해서는 끝까지 맞섰다. [[조선총독부]]와 [[조선은행]]이 [[경남은행]]과 통합하라고 강요했을 때 그는 전심전력을 다해 저항했다.<ref>고승제,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제7편 2. 정재학/은행업의 개척자 p.371~372</ref>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은행정책은 시기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1910년대에는 [[일반은행]] 신설을 장려했으나 1922년 이후 신설을 불허하고 합병정책으로 [[민족자본은행]]을 일본인소유은행으로 전환시켜갔다. 1910년대 수도권및 지방에 잇따라 신설된 민족자본은행들은 총독부의 관리를 받는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의 주도로 일본인은행에 흡수되는 과정을 거쳤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도 [[조선총독부]] 소속 개령군수로 계속 그 자리를 지켰으며, [[1911년]] 도지사 자문 직책인 경북 도참사를 지냈다. 1910년 한일 병합 직후 은사금 1천 엔을 하사받고 정8위에 서위되어 일제로부터 공을 인정받았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분류:1856년 태어남]][[분류:1940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정치국 (기업인)
         [[1906년]] 인천항 미곡 거래를 담당하는 근업사를 창립해 사장을 맡고, [[1908년]]에는 인천 조선인상업회의소의 회두가 되는 등 인천 지역을 대표하는 사업가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인천부 참사, [[경기도]] 도평의회원, 경기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맡는 등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적극 협조하는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1919년]]부터는 인천금융조합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 정칠성
         [[3.1 운동]]에 참여한 [[기생]]의 한사람이었으며, [[조선총독부|총독부]]의 눈을 피해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여자기예학교]]를 수학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동조하게 되었다.
         1938년 5월 함경남도 장진에서 삼포금광배급소 주임으로 일하면서 생활하였다.<ref name="dispose"/> 정치 활동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여 [[조선총독부]]의 의심의 눈을 피한 그는 지하활동을 하는 [[박헌영]], [[김조이]], [[조봉암]] 등과 수시로 연락하며 정세를 살폈다.
  • 최남선
         [[경술국치]] 이후에도 잡지 창간을 계속해왔지만, 1911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소년》이 폐간되었다. 이듬해 1912년 [[이광수]]의 도움으로 《붉은 저고리》, 1913년 《아이들 보이》, 《새별》등의 잡지을 발간하였으나 [[조선 총독부]]의 '신문지법' 명령으로 모두 강제폐간되었다.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설립, 주간잡지 《동명(東明)》을 발행하였고, 국사 연구에 전념하여 《조선역사통속강화》를 연재했다. 1924 《[[시대일보]] (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자금도 부족하였고, 신문의 반일적인 논조로 [[조선총독부]]의 압력을 받아 경영난에 처하자 곧 사임하였다. 1925년 [[동아일보]]의 객원과 [[조선일보]] 객원 논설위원이 되어 사설과 칼럼을 발표하였다.
         1920년대에 문화 운동 활동한 동시에 같은 해 1928년 10월 [[조선총독부]] 내에 [[식민사관]] 유포를 위해서 만든 어용단체인 ‘[[조선사 편수위원회]]’를 창립했을 때 편수 위원직을 맡았다. 1930년 8월 [[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 교수와 조선총독부·조선사편수회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연구'를 표방하며 조직한 [[청구학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37년 중추원 참의를 맡아 1938년 3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2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7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조선문화의 당면과제'를 연재해 조선문화의 일본화야말로 당면한 문제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라며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사설을 기고했다. 이어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총독부 어용기관지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각종 친일논설을 게재했다.
         [[분류:1890년 태어남]][[분류:1957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역사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출판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번역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공작원]][[분류: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만주국 관련자]][[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출판인]][[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대한민국의 한문학자]][[분류:민족대표 48인]][[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최서일
         1906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ref>통천최씨 족보에는 전라남도 완도군 약산면 관산리에서 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ref> [[도쿄 대학|동경제국대]] 수산대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이후 [[조선총독부]] 산업기사를 지냈다. 해방 이후 (주)조선수산개발 사장으로 사업을 펼치다 공직에 들어섰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상공부|상공부]] 수산국장과 초대 해무국장을 지냈다. [[1960년]] 해무청 청장에 임명되었다. 1963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완도군]]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제 6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민주공화당 중앙상임위원을 지냈다. 1970년에 사망하였고, 묘는 양주군 모란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 최창홍
         [[1941년]] [[1월 24일]] [[경상남도]] 이사관 겸 [[경상남도청]] [[내무부]] 학무과장으로 임명된 뒤부터 [[경상남도]] 내무부 전무과장(1941년 8월 18일 임명), 도청 전매국 제조과장(1943년 9월 30일 임명)을 역임했고 [[1943년]] [[12월 1일]] [[조선총독부]] 서기관 겸 재무국 전매사업과장, [[1944년]] [[11월 22일]] 재무국 연초과장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조선중앙정보위원회]] 간사, [[조선총독부]] 학도동원본부 참사, 조선총독부 근로동원본부 참사, 조선총독부 농업계획위원회 간사, [[조선철도간선긴급증강위원회]] 간사를 역임하는 동안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했다.
         [[1945년]] [[5월 11일]] [[충청북도]] 참여관 겸 광공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45년 8월 광복 때까지 고등관 3등과 정6위에 서위되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경시 부문, 도 참여관 부문,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찰 부문, 관료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최팔근 (방송인)
         한국어로 부른 나니와부시의 사례는 [[1930년대]] 초에도 보이나,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1940년]]에 최팔근이 귀국해 나니와부시 보급에 나서면서부터였다. 최팔근은 [[도쿄]]에 유학하여 나니와부시를 배웠고, 1940년 3월에 [[조선방송협회]]와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아 귀국했다.
  • 한규복 (1881년)
         '''한규복'''(韓圭復, <small>일본식 이름:</small> 井垣圭復, [[1885년|1881년]] [[7월 7일]] ~ [[1967년]] [[9월 13일]])은 [[대한제국]]의 관료, 통역관, 화가, 서예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관료, 화가, 서예가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친일파의 한 사람이었다.
         [[1899년]](광무 2년) 관비장학생으로 [[일본]] 유학, [[동경전문학교]]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서 수학하다가 [[1903년]] 귀국, 대한제국 관료로 임용되어 [[탁지부]] [[주사]], [[군부]]와 [[탁지부]]의 [[번역관]] 등을 거쳐 탁지부 [[서기관]], [[주임관]]을 역임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 [[한일 합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토지조사국]] 감사담당관, [[1913년]] [[진주군|진주]][[군수]], 이후 [[동래군|동래]][[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충청남도청]] [[참여관]], [[1924년]] [[경상북도청]] [[참여관]], [[1926년]] [[충청북도]][[도지사]], [[황해도]][[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1933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고 이듬해 재선된 뒤 [[중추원]] [[참의]]에 재선되었다.
         해방 후에는 정계에 참여하지 않고 [[한국곡자]]의 대표이사 등으로 활동하였고, [[1949년]] [[반민특위]]에 자수한 뒤, 조사받고 풀려났다. 이후 기업 활동과 언론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조선인 도지사 경력자 42명 가운데 배경이 되는 엘리트 출신 고위관료 8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서예]]에 능했던 그는 [[1926년]]부터 [[1930년]]의 선전(鮮展)에서 4회나 수상하였다.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이고 자(字)는 덕중(德仲), 호는 온재(溫齋)이다.
         [[1910년]] [[10월 6일]] [[한일 합병 조약]] 체결 이후 다시 조선총독부 [[고등관]] 7등에 임용,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1臨時土地調査局) 감사관(監査官)에 임명되었다. 이후 임시토지조사국 측량과장과 정리과장을 거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감사담당관이 되었다. [[1913년]] [[1월]] 총독부 군수가 되어 [[경상남도]] [[진주군|진주]][[군수]] [[고등관]]6등(晉州郡守 高等官6等)이 되고, [[경상남도]][[참여관]]을 겸직하였다. [[1914년]]부터 [[1915년]]까지 [[경상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을 역임했다. 그밖에 [[농업]] 단체인 [[조선농회]] 경상남도지회에 상의원으로 가입하였다. [[1916년]]과 [[1917년]] [[경상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조사위원에 재위촉되었다.
         [[1926년]] [[8월]]에 다시 도지사로 승진, [[8월 14일]] [[충청북도]]도지사가 되고 [[1929년]] [[4월]] [[고등관]]1등(高等官1等)으로 승급되었다. [[1929년]] [[11월 28일]] [[황해도]][[도지사]]로 부임하였다. [[1930년]] [[1월 24일]] [[황해도농민회]] 회장에 임명되었다.<ref>조선총독부 관보 1930년 01월 24일자</ref> [[1930년]] [[2월]] [[황해도]] 도지사에 재임명된 뒤 [[1933년]] [[4월 7일]]에 사직서를 내고 퇴직했으나 그해 [[6월 4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中樞院勅任官待遇參議)에 임명되었다. 중추원 참의로 재직하면서도 그는 수당에만 의존하지 않고 기업인으로 활동하면서 경성부 교화단체연합회 서부교화구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34년]] 중추원 참의에 재선되었다. 특히 [[태평양 전쟁]] 기간 중 [[흥아보국단]],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국민동원총진회]] 등 여러 전쟁 지원 단체에 적극 가담했다.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던 그는 [[1926년]]부터 [[1930년]]의 선전(鮮展)에서 4회 걸쳐 수상하였다.
         [[1933년]] [[7월 21일]]에는 중추원 시정조사위원회 학예부장이 되었다. [[10월 21일]]에는 소작농심의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34년]] 경성부 교화단체연합회 서부교화지구위원장(京城府敎化團體聯合會 西部敎化地區委員長)이 되었다. [[1934년]] [[7월 14일]] [[금융]]단체의 연합회인 [[금융조합연합회]] 창립에 참여, 자문상담역<ref>"금조연합회, 자문기관 설치", 조선중앙일보 1934년 07월 22일자 4면</ref>에 위촉되었다. [[7월 21일]] [[금융조합연합회]] [[경기도]]지역 참여에 임명되었다. [[1934년]] 여름 홍수로 [[조선]] 삼남 지방에 수해가 심해지자, 그해 [[8월 30일]] [[조선총독부]]에서 [[치소조사위원회]]를 설치할 때 그는 민간측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36년]]에는 그는 [[참정권]]을 얻어낼 계획을 세웠으나, 일제 당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ref name="jiji">송건호, 《송건호전집 4: 한국현대사 2》(한길사, 2002) 100페이지</ref> [[이규완]]의 [[조선인]][[참정권]]론, [[자치]]권 획득론에 공감하게 된 그는 [[박중양]]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에 조선인 참정권을 허용해줄 것을 여러 번 건의하였으나 번번히 묵살되었다.
         [[지원병제]]는 [[1930년]]대 중반부터 일부 친일 유지층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제기되었다. 먼저 [[박춘금]](朴春琴)이 [[대의사]](代議士)가 된 후 일본국회에서 이 문제를 들고 나왔고, 그후 친일인사들에 의해 여러 번 건의되었다. [[1936년]] [[11월 24일]] 경성부회의원 조병상(曺秉相), 중추원참의인 한규복 등이 중심이 되어 30여 명의 간담회를 열어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추진키 위해 위원 8명으로 기성회를 구성하고 [[1937년]] 발회식(發會式)을 가질 예정이었다.<ref name="jiji"/> 그러나 [[일본]] 당국은 이 문제가 [[참정권]]하고도 관계가 있다 하여 일단 중지시켰다.<ref name="jiji"/> 이후에도 그는 [[조선총독부]]에 참정권 허용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한다.
         [[1937년]] [[1월]] [[방송선전협의회]](放送宣傳協議會) 위원으로 위촉되어 수양강좌·부인강좌·상식강좌의 강사로 출연하였고, [[7월]] [[중추원]] 주최 행사에 참여하였다. 동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들의 소득을 조사할 목적으로 국민소득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 한규복은 국민소득조사위원회 경성지역 관내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8월 3일]]부터는 [[10월]]까지 총독부 학무국에서 지나사변 이후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고자 순회시국강연위원회를 조직할 때 연사가 되어 [[서울]]과 각지에 시국강연을 다녔다. [[8월 16일]]에는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시국강연을 하였다. [[9월 10일]]에는 용인공보교 대강당에서 [[용인군]] 지역 시국강연회를 주최하였다.
         한규복은 자신은 오로지 민중의 계발 보도를 위해 일했음을 강조하였다.<ref name="parksgi86"/> 또한 자신은 "민족 지도자"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ref name="parksgi87">박지향, 《윤치호의 협력일기》 (도서출판 이숲, 2012) 87페이지</ref> 심문 과정에서 그는 잘못된 점이 있다면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저항하되, [[조선총독부]]의 정책이나 일본의 정책을 맹신, 맹종하지는 않았다며 그는 시종일관 담담한 태도로 심문에 응하였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전임자 = [[쓰쓰이 다케오]]<br />(조선총독부 최후의 황해도지사, 유임)
         [[분류:1881년 태어남]][[분류:1967년 죽음]][[분류:조선의 화가]][[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통역관]][[분류:조선의 번역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화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정치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철학자]][[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사상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화가]][[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철학자]][[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청주 한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와세다 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번역가‎]]
  • 한석명
         [[1928년]]에 [[조선총독부]] 군수로 천거되어 관계로 이동하였고, [[사천군]]을 시작으로 [[동래군]]과 [[하동군]] 군수를 지냈다. 하동군수로 재직 중이던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ref> {{뉴스 인용
  • 현정건
         [[1925년]] 5월 9일에는 상하이에 있던 [[조소앙|조소앙(趙素昻)]]ㆍ여운형ㆍ윤자영ㆍ김상덕(金尙德)ㆍ최창식(崔昌植)ㆍ김규면(金圭冕)ㆍ손두환(孫斗煥) 등 약 30명의 조선인 동지와 함께 서문 밖 체육장에서 배일(排日) 중국인 단체의 집합에 참가하였고 이곳에서 "중국과 한국이 합동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상하이주간(上海週刊)』5월 9일자 특별호에 실린 사설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ref>이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 의해 7월 1일에 일본 외무성의 외무차관에 보고되었다. 국회도서관(國會圖書館) 편찬 『한국민족운동사료(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 1976년, 567~568쪽.</ref> 9월 8일에는 상하이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 현제명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 있는 기독계 무디성경학교에서 음악 교육을 이수하고, 귀국한 뒤에는 조선음악가협회를 창설하고 연희전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 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관한 조선문예회 정회원으로 가입하다가, 독립 계몽단체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 이후 친일 성향 단체인 대동민우회의 정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음악가협회를 해체하고 이후에도 시국대응전선보국연맹,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실내악단 등에도 가입하면서 친일 행위를 하였던 전적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특히 친일 찬양적인 성향의 '''[[후지산]]을 바라보며'''에 작곡자로 개입하면서 친일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 홍승목
         '''홍승목'''(洪承穆, [[1847년]] [[음력 10월 11일]] ~ [[1925년]] 양력 [[2월 15일]])은 [[조선]] 말기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냈다. 자는 경희(敬熙), 호는 연운(硯耘),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 본적은 [[경기도]] [[경성부]] 계동이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조선총독부]]가 설치한 중추원의 찬의가 되어 [[1921년]] 관제 개편때까지 재직했다. [[1912년]]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도 서훈 받았다.
         * [[조선총독부 중추원]]
         [[분류:1847년 태어남]][[분류:1925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풍산 홍씨]]
  • 홍헌표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관리로 근무했다. 광복 후 [[미군정]]에서 관료로 발탁되어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과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에서 내무부 차관, 체신부 장관 등을 지냈다. 체신부 장관으로 재임했을 때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입건되었으나,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병으로 사망했다.
         [[2002년]] 공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에 포함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에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도 수록되었다.
  • 황옥 (1885년)
         의열단은 황옥, 김시현 등이 밀반입시킨 무기류를 통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 등을 동시에 테러하는 제2차 국내 거사를 준비했지만 김재진이 밀고하여 실패했다. 김재진은 재판 이후 흔적이 증발하는데, [[유석현 (1900년)|유석현]]은 1983년 [[중앙일보]]에 기고한 회고록에서 김재진은 가명이고 [[권태일]]이 본명이라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김원봉, [[김지섭]] 등 소수만 탈출했고 황옥, 김시현, [[김진기]], [[조동근]], [[홍종우]], [[홍종무]], 유석현 등은 1923년 3월 15일에 체포당한다.
  • 흥친왕
         흥친왕 이재면은 [[1845년]] [[8월 22일]]([[음력 7월 20일]]) [[한성부]] 사동(寺洞) 사저에서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재록(載錄)이었다가 뒤에 재면으로 고쳤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이희공실록]]에 의하면 그가 태어나자마자 지어진 이름은 재록이었다 한다. [[조선]] [[조선 헌종|헌종]]과 [[조선 철종|철종]]이 연이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이재면 역시 유력 왕위계승권자로 지목되었으나, [[조선 철종|철종]]이 사망할 무렵 그는 성인이었기에 왕위계승권 서열에서 밀리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미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의 지위에 있던 아들 [[이준용]]은 그의 작위와는 상관없이 [[남작]]의 지위를 받았다. 한일 합방 직후 막대한 양의 합방 공채금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에 별도로 협력하거나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 첩며느리 : 이옥경<ref name="한국사1"/> [[조선총독부|총독부]] 간부나 고위 장성과 어울려 친일 행각을 벌였다.<ref name="한국사1">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4) 135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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