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조선임전보국단"을(를) 전체 찾아보기

조선임전보국단


역링크만 찾기
검색 결과 문맥 보기
대소문자 구별
  • 서병조 . . . . 2회 일치
         [[1919년]] 4월 [[3·1 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조직된 대구자제단 발기인 겸 평의원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해서 [[동민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흥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 등 각종 친일단체에 가담하였다.<ref>{{서적 인용
         * [[조선임전보국단]]
  • 장헌식 . . . . 2회 일치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평의원이 되고,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이 출범할 때 창립발기인이자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40년]] [[1월 25일]] [[유도회]](儒道會) [[경성부]]지부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 [[조선임전보국단]]
  • 정광조 (1883년) . . . . 2회 일치
         정광조는 [[1942년]]에 천도교 교령으로 뽑히는 등 교단 원로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전시체제 하에서 천도교를 대표해 여러 친일단체에 가담했다. [[1941년]] 발족한 [[조선임전보국단]]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 국민총력천도교연맹 등 어용 단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태평양 전쟁 전몰 장병을 위한 위령제를 개최하기도 했고, [[1943년]]에는 [[이종린 (1883년)|이종린]]과 함께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 천도교 대표로 참가해 학병제를 선전하는 강연회를 열었다.
         * [[조선임전보국단]]
  • 최동 . . . . 2회 일치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38년]]에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을 지냈고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을 맡았다. 1941년에 [[동양지광]]이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자격으로 참석해 [[황인종]]의 시각에서 [[미국]]과 [[영국]]을 비난하는 내용의 강연을 한 일도 있다. [[1945년]] 광복 직후 제4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1947년 12월 4일 Severance 의과대학으로 승격시켜 6년제를 만들었고,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 [[조선임전보국단]]
  • 한규복 (1881년) . . . . 2회 일치
         [[1926년]] [[8월]]에 다시 도지사로 승진, [[8월 14일]] [[충청북도]]도지사가 되고 [[1929년]] [[4월]] [[고등관]]1등(高等官1等)으로 승급되었다. [[1929년]] [[11월 28일]] [[황해도]][[도지사]]로 부임하였다. [[1930년]] [[1월 24일]] [[황해도농민회]] 회장에 임명되었다.<ref>조선총독부 관보 1930년 01월 24일자</ref> [[1930년]] [[2월]] [[황해도]] 도지사에 재임명된 뒤 [[1933년]] [[4월 7일]]에 사직서를 내고 퇴직했으나 그해 [[6월 4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中樞院勅任官待遇參議)에 임명되었다. 중추원 참의로 재직하면서도 그는 수당에만 의존하지 않고 기업인으로 활동하면서 경성부 교화단체연합회 서부교화구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34년]] 중추원 참의에 재선되었다. 특히 [[태평양 전쟁]] 기간 중 [[흥아보국단]],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국민동원총진회]] 등 여러 전쟁 지원 단체에 적극 가담했다.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던 그는 [[1926년]]부터 [[1930년]]의 선전(鮮展)에서 4회 걸쳐 수상하였다.
         [[1942년]]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고 [[조선인]] [[참정권]] 허용 문제가 [[일본]] 의회 [[중의원]]과 [[귀족원]]에 상정되자,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부단장 자격으로 일본 수상과 참모총장에게 감사 전보문을 타전하고, 그해 [[5월 15일]] [[경성부|경성]] YMCA에서 [[이광수]](李光洙) 등 명사들을 초청해 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42년]] [[9월]]에는 [[조선국자주식회사]] 회장에 취임하였으나 [[1943년]] [[6월]] 사퇴하였다. [[1943년]] [[국민총력연맹]] 징병기념사업실행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에 피선되었다.
  • 강중인 . . . . 1회 일치
         [[1942년]]에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경성중앙방송국]]에서 저명 인사의 시국연설을 방송했을 때, 〈필승사상전(必勝思想戰)〉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한 일이 있다.
  • 이장우 (1871년) . . . . 1회 일치
         [[1926년]] [[9월 4일]] 경상북도 관선 도평의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8년]] [[8월 31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33년]] 11월 [[고려대학교|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회 실행위원을 지냈으며 영남명덕회(嶺南明德會) 대구지부 부지부장(1933년), 조선농회 통상의원(1934년, 1938년 5월 18일), 경상북도농회 부회장(1934년 4월 20일, 1938년 4월 13일), 경북미곡통제연합회 부회장(1936년 11월 18일), 조선나예방협회 평의원(1938년)을 역임했다. [[1941년]] [[9월 11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3년]] [[8월 3일]]부터 [[1944년]] [[1월 16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2363의 페이지중에 7개가 발견되었습니다 (5000개의 페이지가 검색됨)

여기을 눌러 제목 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