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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중인
         [[1942년]]에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경성중앙방송국]]에서 저명 인사의 시국연설을 방송했을 때, 〈필승사상전(必勝思想戰)〉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한 일이 있다.
  • 고황경
         이후 [[조선총독부]]의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 가담하면서 친일 단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 단체는 총독부의 정책을 홍보하고 계몽하는 여성 단체였으며 지역별로 순회 연사를 배당했는데, 고황경은 [[홍승원]]과 함께 [[호남]] 지역 강연을 담당했다. 역시 총독부에서 발족시킨 [[방송선전협의회]]의 방송 강좌에도 참가했고, [[윤덕영]]의 부인 [[김복수]]가 회장을 맡은 [[애국금차회]] 간사와 [[조선임전보국단]] 임원으로서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연설과 좌담회로 전쟁을 적극 지원했다.
         * [[조선임전보국단]]
  • 노창성
         }}</ref> 로서 방송계 및 문화예술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전쟁 지원과 전시 체제 확립을 위해 조직된 단체에 두루 가담하기도 했다.<ref>{{서적 인용
         * [[조선임전보국단]]
  • 리종만
         [[1938년]] 1월 잡지 《농업조선(農業朝鮮)》을 창간했으며 [[1938년]] 6월 사립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설립, 경영했다. [[1939년]] 4월 조선산금협의회(朝鮮產金協議會)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39년 6월 28일 일본군 위문대 대금으로 1,000원을 헌납했다.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을 역임했으며 [[1940년]] 7월 잡지 《[[삼천리 (일제 강점기의 잡지)|삼천리]]》에 〈지원병(志願兵)과 혈(血), 한(汗), 사랑(愛)의 인(人))〉을 기고했다. [[1941년]] 9월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 명치정대에 참여했고 같은 달에 [[조선임전보국단]] 경성 지역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를 역임했으며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제 부문, 친일단체 부문에 수록되었다.
  • 박관수 (1897년)
         [[경기고등여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1941년]]에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해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을 맡았다.<ref>{{서적 인용
  • 박순천
         기장에 여학교인 명정의숙 여학당 설립이 논의되자 조언했다 하며{{출처|날짜=2009-10-19}} 경성가정여숙 부교장이자 여성계와 교육계의 저명 인사로서,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전쟁 지원을 독려하는 친일 활동을 했다. 1940년 친일 단체인 [[황도학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1941년부터 [[조선임전보국단]] 주최의 강연에 연사로 참여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과 친일단체 부문에 선정되었다.
         * [[조선임전보국단]]
  • 박순천 (국회의원)
         기장에 여학교인 명정의숙 여학당 설립이 논의되자 조언했다 하며{{출처|날짜=2009-10-19}} 경성가정여숙 부교장이자 여성계와 교육계의 저명 인사로서,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전쟁 지원을 독려하는 친일 활동을 했다. [[1940년]] 친일 단체인 [[황도학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1941년]]부터 [[조선임전보국단]] 주최의 강연에 연사로 참여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과 친일단체 부문에 선정되었다.
  • 박용구 (1879년)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다이쇼대례기념장]], [[1932년]] [[훈3등]] [[서보장]]을 수여받는 등 1933년을 기준으로 [[정4위]] [[훈3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년]]에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될 때 참가하여 이때까지 생존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ref>{{서적 인용
         * [[조선임전보국단]]
  • 서병조
         [[1919년]] 4월 [[3·1 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조직된 대구자제단 발기인 겸 평의원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해서 [[동민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흥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 등 각종 친일단체에 가담하였다.<ref>{{서적 인용
         * [[조선임전보국단]]
  • 손정규
         손정규는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전쟁 지원을 위해 조직된 친일 단체인 [[방송선전협의회]]와 [[애국금차회]],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등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학병 지원을 격려하고 《[[매일신보]]》에 일제의 논리를 선전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 [[조선임전보국단]]
  • 송금선
         전시체제 하에서 송금선의 친일 행적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활동하고 친일 잡지 《[[신시대]]》에 기고하는 등으로 계속된다. 친일 단체의 총본산격인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 가입하였고, 학병으로 지원할 것을 독력하는 연설 활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매일신보]]》에는 “이제 어디를 가든지 정말로 황국신민이 되었다는 자랑과 의무를 느낀다.”라고 하였고 이어 “여학생의 생도들도 어디까지나 군국의 어머니로서 교육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종전 직전 패전이 가시화되자 본토에서 최후의 1인까지 싸울 것을 독려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이 되기도 했다.
         * [[조선임전보국단]]
  • 안상덕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일제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 [[중일 전쟁]] 발발 후 강압적인 전시체제가 구축되면서 천도교단은 [[1939년]]에 효율적인 전쟁 지원과 국방헌금 모금을 위해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안상덕은 이 단체의 이사를 지냈고, 이듬해 조직이 개편되어 국민총력천도교연맹이 출범했을 때는 평의원을 맡았다. [[1941년]] 발족한 [[조선임전보국단]]에도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 [[조선임전보국단]]
  • 안상덕 (일본)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일제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 [[중일 전쟁]] 발발 후 강압적인 전시체제가 구축되면서 천도교단은 [[1939년]]에 효율적인 전쟁 지원과 국방헌금 모금을 위해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안상덕은 이 단체의 이사를 지냈고, 이듬해 조직이 개편되어 국민총력천도교연맹이 출범했을 때는 평의원을 맡았다. [[1941년]] 발족한 [[조선임전보국단]]에도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 [[조선임전보국단]]
  • 안석주
         안석영은 《지원병》과 《흙에 산다》와 같은 친일 영화 제작 외에도 [[황도학회]] 결성식에 참가하고 [[조선임전보국단]]에 가담했으며 《[[신시대]]》의 표지화도 그려<ref>{{뉴스 인용
  • 안석주 (작사가)
         안석영은 《지원병》과 《흙에 산다》와 같은 친일 영화 제작 외에도 [[황도학회]] 결성식에 참가하고 [[조선임전보국단]]에 가담했으며 《[[신시대]]》의 표지화도 그려<ref>{{뉴스 인용
  • 안종화
         본업인 영화 외에도 친일 단체인 [[황도학회]]와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을 역임하여, 영화계에서는 친일 행적이 가장 뚜렷한 편에 속한다. 이때문에 후에 친일 행적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양재창 (1885년)
         [[1920년대]]부터 [[조선불교단]], [[동민회]], [[구일회]] 등 유력한 인물들로 구성된 단체에 꾸준히 참여했으며,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도 맡았다.<ref>{{서적 인용
         * [[조선임전보국단]]
  • 엄주명
         [[1940년]] [[7월 2일]] [[경성의학전문학교 (서울)|경성의학전문학교]] [[서울대학교병원|부속병원]]에서 [[협심증]] 판정을 받고 정양을 요한다고 하여 [[7월 30일]]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직을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가 요양하였다. [[태평양 전쟁]] 후반에는 전쟁 지원 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와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도 맡은 바 있다.<ref>{{서적 인용
  • 원덕상
         원응상은 젊은 나이부터 장기간 중추원 참의를 지냈던 만큼 [[조선총독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활동을 했다. 1920년대부터 [[조선산림회]] 이사를 맡고 [[조선불교단]], [[조선구락부]], [[동민회]], [[조선대아세아협회]] 등에 가담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시기에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 각종 전쟁지원 단체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등 두드러지는 행적을 보였다.<ref>{{서적 인용
  • 유각경
         유각경은 [[1938년]] 조선YWCA가 일본YWCA에 흡수 통합될 때 이를 주도하였고, 친일 단체 [[애국금차회]](1938)에 간사로 참여하였으며,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에 가담하여 각종 연설회에 초청 받아 친일 연설을 했다. 여유있는 환경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명랑한 성격이었고 늘 자신감이 넘치는 연설을 해 명연설가로 꼽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 [[조선임전보국단]]
  • 유진오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친일 협력의 길로 걷게 된다. [[1939년]] 7월호 ‘삼천리’ 잡지에 중일 전쟁을 적극 지지하는 내용의 사설을 기고한것을 시작으로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각종 총독부 어용단체에 가입하면서 활동하였고 [[1940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와 선전부 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한다.
         1941년 유진오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에 위촉되었고, 같은 해 8월 12일 열린 문인협회 간부회의에서는 김동환, 박영희 등과 함께 상무간사로 위촉되었다. 이때 그는 친일잡지 {삼천리} 등에 친일 논문을 실었고<ref>삼천리 지 1940년 12월호, [일사불란의 그 훈련]</ref>, 학병 지원의 권유와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역설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명에는 당시 친일문학자들이 만든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단체가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결합되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1941년에 결성되었는데 당시 조선 문학자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최린(崔鱗), 김동환 계열의 임전대책협의회와 윤치호(尹致昊) 계열의 흥아보국단이 통합한 것이었다.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은 이름 그대로 조선에서 일본의 대동아전쟁을 위한 병력의 보충 등 선전·선동의 역할을 나서서 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국민의용대의 조직 및 활동에 일치시키기 위해 해산될 대까지 학병의 권유와 내선일체를 열심히 외쳤다. 유진오는 총력연맹 문화부에서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결전소설 공모를 심사하였다.
  • 유진찬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조사과 촉탁으로 일했고 [[1929년]] [[9월 7일]]부터 [[1943년]] [[4월 26일]]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 부제학으로 일했다. [[1937년]] 12월 [[중일 전쟁]]을 찬양하고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은 한시를 지었으며 [[1938년]] [[2월 5일]] 명륜학원 강사로 임명되었다.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에 참여했고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 윤치영
         그는 창씨개명을 한 후에도 창씨 성을 사용하지 않고 윤치영이라는 [[한국]]식 성명을 고집했다. 이는 [[1941년]]의 [[동양지광]] 주최 [[미영타도 좌담회]]에서도 나타났다. 다른 참석자들은 [[창씨개명]]한 성명을 썼지만 윤치영은 홀로 윤치영이라는 조선식 성명을 썼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개최식 때도 항상 그는 창씨명을 쓰지 않고 윤치영이라는 본명을 고집했다.<ref>매일신보, 1941년 10월 23일자, 2면</ref> 이후 임전보국단 행사에 불참했지만 그는 명단을 올리려거든 윤치영으로 올리라며 자신의 본명을 고집했다.
  • 이각종
         [[1938년]] 조선방공협회 경기도 연합지부 평의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를 역임했으며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 발기인, 참사, [[1940년]] 대동일진회 고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 평의원을 역임했다. [[1941년]] [[8월 25일]]에 열린 [[임전대책협의회]] 좌담회에서 《황도정신과 총력》이라는 주제의 글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9월 7일]] 임전대책협의회가 결성한 채권가두봉공대 남대문대원으로 활동했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과 평의원을 역임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대동민우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 이장우 (1871년)
         [[1926년]] [[9월 4일]] 경상북도 관선 도평의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8년]] [[8월 31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33년]] 11월 [[고려대학교|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회 실행위원을 지냈으며 영남명덕회(嶺南明德會) 대구지부 부지부장(1933년), 조선농회 통상의원(1934년, 1938년 5월 18일), 경상북도농회 부회장(1934년 4월 20일, 1938년 4월 13일), 경북미곡통제연합회 부회장(1936년 11월 18일), 조선나예방협회 평의원(1938년)을 역임했다. [[1941년]] [[9월 11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3년]] [[8월 3일]]부터 [[1944년]] [[1월 16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 장헌식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평의원이 되고,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이 출범할 때 창립발기인이자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40년]] [[1월 25일]] [[유도회]](儒道會) [[경성부]]지부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 [[조선임전보국단]]
  • 정광조 (1883년)
         정광조는 [[1942년]]에 천도교 교령으로 뽑히는 등 교단 원로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전시체제 하에서 천도교를 대표해 여러 친일단체에 가담했다. [[1941년]] 발족한 [[조선임전보국단]]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 국민총력천도교연맹 등 어용 단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태평양 전쟁 전몰 장병을 위한 위령제를 개최하기도 했고, [[1943년]]에는 [[이종린 (1883년)|이종린]]과 함께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 천도교 대표로 참가해 학병제를 선전하는 강연회를 열었다.
         * [[조선임전보국단]]
  • 최동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38년]]에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을 지냈고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을 맡았다. 1941년에 [[동양지광]]이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자격으로 참석해 [[황인종]]의 시각에서 [[미국]]과 [[영국]]을 비난하는 내용의 강연을 한 일도 있다. [[1945년]] 광복 직후 제4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1947년 12월 4일 Severance 의과대학으로 승격시켜 6년제를 만들었고,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 [[조선임전보국단]]
  • 한규복 (1881년)
         [[1926년]] [[8월]]에 다시 도지사로 승진, [[8월 14일]] [[충청북도]]도지사가 되고 [[1929년]] [[4월]] [[고등관]]1등(高等官1等)으로 승급되었다. [[1929년]] [[11월 28일]] [[황해도]][[도지사]]로 부임하였다. [[1930년]] [[1월 24일]] [[황해도농민회]] 회장에 임명되었다.<ref>조선총독부 관보 1930년 01월 24일자</ref> [[1930년]] [[2월]] [[황해도]] 도지사에 재임명된 뒤 [[1933년]] [[4월 7일]]에 사직서를 내고 퇴직했으나 그해 [[6월 4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中樞院勅任官待遇參議)에 임명되었다. 중추원 참의로 재직하면서도 그는 수당에만 의존하지 않고 기업인으로 활동하면서 경성부 교화단체연합회 서부교화구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34년]] 중추원 참의에 재선되었다. 특히 [[태평양 전쟁]] 기간 중 [[흥아보국단]],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국민동원총진회]] 등 여러 전쟁 지원 단체에 적극 가담했다.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던 그는 [[1926년]]부터 [[1930년]]의 선전(鮮展)에서 4회 걸쳐 수상하였다.
         [[1942년]]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고 [[조선인]] [[참정권]] 허용 문제가 [[일본]] 의회 [[중의원]]과 [[귀족원]]에 상정되자,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부단장 자격으로 일본 수상과 참모총장에게 감사 전보문을 타전하고, 그해 [[5월 15일]] [[경성부|경성]] YMCA에서 [[이광수]](李光洙) 등 명사들을 초청해 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42년]] [[9월]]에는 [[조선국자주식회사]] 회장에 취임하였으나 [[1943년]] [[6월]] 사퇴하였다. [[1943년]] [[국민총력연맹]] 징병기념사업실행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에 피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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