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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운용 . . . . 31회 일치
|이름 = 정운용
|친척 = '''[[정재학]]'''(할아버지) <br /> '''이남숙'''(할머니) <br /> '''[[정종원]]'''(삼촌) <br /> '''[[정운철]]'''(사촌) <br /> '''[[정운익]]'''(사촌) <br /> '''[[정은정]]'''(조카)
'''정운용 (鄭雲用)''' (1904년 ~ 1963년 10월24일 )은 [[조흥은행]] 2대행장으로 일본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이후 최초의 한국인 행장이었다. 그는 [[경상합동은행]] [[취체역]](이사), 경상합동은행 [[두취]] (행장),한성은행 상무취체역(상무이사) 등을 거쳐 1945년 11월 조흥은행 행장에 올랐다.<ref><<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97), p.231~234</ref>
정운용은 대구 부호이자 민족자본은행의 개척자인 [[정재학]]의 장손으로 태어났다.<ref>고승제,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제7편 2. 정재학/은행업의 개척자</ref> 그의 모친 김인아는 정운용이 중학생이었던 1918년 타계했고 부친인 정응원마저 1933년 서거한 뒤 정재학 조부 밑에서 자랐다. 정재학은 3남인 [[정종원]]과 장손인 정운용을 각별히 여겨 니혼대학 법학과, 메이지대학 법학과로 유학을 보낸 뒤 3남에게는 관료로 활동하도록 했고 맏손자에게는 은행경영 노하우를 전수했다.<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10~226</ref><ref>윤재실, <<팔도명인전>>, ( 진명사, 1979) p.211</ref>
정운용은 1938년 24세의 나이에 경상합동은행 취체역(이사)에 선임됐다. 조부인 정재학 경상합동은행 두취(행장)이 은행경영권을 손자에게 넘겨주기 위한 포석이었다. 또한 동일은행 최대주주였던 민대식 등 황실외척이었던 민씨가문에 의한 경영권 장악 기도는 물론 대구상공은행을 운영하던 오구라 다케지스케 (小倉武之助)의 경영권 탈취시도와 맞서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ref name="ReferenceA">매일경제 1982년 12월 8일~19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1~19편"</ref>
정운용은 조부 밑에서 은행경영 노하우를 습득한 뒤 1940년 조부의 타계 직후 경상합동은행 두취(행장)에 선임됐다. 하지만 일본 총독부는 1941년 경상합동은행을 수도권은행인 한성은행에 흡수 합병하다. 이때 그는 경상합합동은행 두취 경력을 인정받아 한성은행 상무취체역(상무이사)에 임명됐다. 1943년 동일은행과 한성은행이 합병돼 출범한 조흥은행에서도 전무취체역(전문이사)을 맡았다.
마침내 1945년 해방을 맞아 미 군정시대가 열리면서 조흥은행 일본인 임원들이 한국을 떠났다. 정운용은 미군정에 의해 1945년 11월 해방 후 첫 한국인 조흥은행장(2대)로 선임됐다. 불과 41세의 나이에 국내 최고 민간은행의 수장이 됐다.<ref><<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412~431쪽 역대임원</ref>
정운용은 대구은행과 경상합동은행 등에서 27년간 최고경영자였던 [[정재학]]의 맏손자다.
[[정종원]] 제5대 조흥은행장은 그의 삼촌이고 한평생 외교관을 지낸 정운철, 기업가이자 하와이 오하나 퍼시픽 은행 초대 이사장을 역임한 정운익과 사촌이다.
정운용은 조부인 [[정재학]] 대구은행장, 경상합동은행장 그리고 삼촌인 [[정종원]] 조흥은행장과 더불어 3대에 걸친 정씨 가문 은행장 배출이란 진기록을 남겼다. 정씨 가문의 3명 행장 재임기간을 합치면 34년에 이른다.
정운용은 1921년 여름 서귀조와 결혼하여 1923년에 장녀 연수(蓮洙)를 낳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1930년 그의 아내는 7세의 여야를 두고 사망했다. 정운용은 다음 해인 1931년 김분조와 결혼했다.<ref><<대구사회비평 2003년 7~8월 통권 10호>> 문예미학사 http://hrznnzrh.blog.me/60033398980
정운용 조흥은행장은 미 [[군정청]] 골든 재무부장(중령)과 친밀한 관계였다. 해방 후 중앙은행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여서 조흥은행은 강력한 중앙은행 후보로 꼽혔다. 조흥은행은 민족자본비중이 절반을 넘은데다 일본자본의 침투가 가장 적었다.<ref><<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97), p.222</ref> 하지만 1946년 광복1주년을 맞이하여 미 군정청 내각 전원이 한국인으로 채워진다. 골든 재무부장이 본국으로 돌아갔고 윤호병이 신임 재무부장으로 선임됐다. 조흥은행 대신 조선은행이 중앙은행으로 선정됐다.<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 >> (창조사, 1970) p.237</ref> 정운용 행장 역시 1947년 10월 군정장관의 명령에 의거 행장에서 물러났다.<ref>경향신문, 1947년 10월 18일 2면 정운용 행장 해임</ref>
대구은행 설립자 정재학의 후손인 [[정종원]](3남)과 정운용(장손)은 1957년 무렵 조흥은행의 주도권을 두고 동일은행계의 대주주였던 조선황실 외척인 민씨가문과 맞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조흥은행은 일제 말 동일은행과 경상합동은행을 흡수한 한성은행이 합병해 탄생한 은행이다. 따라서 양대 대주주인 [[경상합동은행]] - [[대구은행]])계 정씨 집안과 동일은행계 민씨 집안 가운데 어느 쪽이 주도권을 잡느냐가 관심사였다.
정재학의 3남 정종원이 조흥은행장으로 재직하던 1957년 3월말 실시 된 [[귀속주]]입찰에서 민씨 가문은 [[민덕기]]를 중심으로 계성(주), 휘문재단, 영보합명회사 및 민병도 당시 조흥은행 전무 등의 지분을 합쳐, 7만8000 주를 확보하며 4만6000 주에 그친 정종원, 정운용 가문을 압도했다. 그러나 민씨 가문의 주력 기업이었던 조선맥주의 경영악화로 인해 민씨가문은 조흥은행 주식을 팔아 긴급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민씨 가문은 1957년 하반기부터 1958년 상반기까지 조흥은행 주식을 대거 처분한다.<ref>동아일보 1957년 7월 20일 3면</ref> 조흥은행에서 소수주주로 전락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 조선맥주은 주세체납 등으로 은행관리로 넘어갔다.<ref>매일경제 1968년 7월 2일 7면 빚만 늘어가는 조선맥주</ref>
앞서 민씨 가문은 일제 강점기 당시 조흥은행 대표취체역(대표이사)으로 [[민규식]]을 배출했다. 그러나 일본인 행장이 따로 있었고 실권은 없는 자리였다. 이어 해방 후 초대 한국인 조흥은행장은 정재학의 손자인 정운용이 맡았고 정재학의 3남인 정종원이 5대 행장을 역임했다.<ref name="ReferenceA"/>
[[정재학]]의 손자이자 해방 후 처음으로 한국인으로서 2대 조흥은행장에 오른 정운용은 첫 아내와 사별한 뒤 김분조와 재혼했다. 김분조의 부친 [[김진만]]은 1915년 대구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한광복단]] [[대구권총사건]]'의 핵심인물이었다.<ref>경향신문 1963년 3월 1일 3면 대한광복단 사건</ref><ref>대구사회비평 2003년 7~8월 통권 10호 문예미학사 http://hrznnzrh.blog.me/60033398980 근대 100년 대구 거부실록 정재학가</ref><ref>경향신문 1966년 10월 8일 7면</ref><ref>독립기념관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의 전개 4. 대한광복회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456</ref> 김진만은 대한광복회 단원으로 대구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펼치는 가운데 대구 지역 부호였던 장인 [[서우순]]의 집을 찾아가 설득했다. 그러나 실패한 뒤 도피하다 반항하는 하인 우도길에 총상을 입혔다.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돼 1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ref>민족문화대박과사전 독립운동가 김진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10638</ref><ref>독립기념관 29 김진만 독립운동가 서한집 http://www.i815.or.kr/media_data/data_chong/32.pdf</ref>
[[김진만]]의 손자 [[김일식]] 역시 1920~1930년대 대구 지역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김진만]]과 함께 [[서우순]] 자택에 침입했던 광복단원들 가운데 [[정재학]]과 먼 친척관계인 [[정운일]](鄭雲馹)도 있었다. 정운일 역시 검거돼 10년형을 선고받아 7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광복 후 미군정 경상북도 상임고문과 반민특위 경북 도위원장을 역임했고 건국포장과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ref>민족문화백과사전 정운일 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50653</ref><ref>놀라운 사실은 [[정재학]] [[대구은행]]장이 자신을 협박대상으로 꼽았던 친척 [[정운일]]에 대해 각별히 배려해줬다는 점이다. 정재학 행장은 정운일의 아들인 [[정인택]]( 1911~ 1973 )이 감옥에 있는 부친 때문에 상급학교진학이 어려웠던 사정을 알고 보증인 역할을 해줬다. 정인택은 정 행장의 보증 덕에 대구고보에 합격할 수 있었다. 정인택 역시 항일학생운동에 가담, 경찰에 잡혀 처벌을 받기도 했다. 그는 사범학교를 나와 교편도 잡고 부산소년원장을 지냈다. 소년원장을 그만둔 뒤 가난한 이웃을 돕는데 최선을 다했다. 대구시립희망원을 맡으면서 유아에서 노인까지 갈 곳 없는 이들을 보살폈다. 원장 관사마저 병실로 개조한 뒤 원내 마당에 조그만 흙벽돌집을 세워 거처로 삼았다.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는 [[1966년]] 경향신문이 제정한 제1회 '국민의 주는 희망의 상' 대상수상자로 선정됐다. 내무부장관 국회사무총장 등 각계에서 격려 축전을 보냈다. 정인택은 경향신문에 연재한 당선소감에 자신이 정재학의 증손자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정재학이 1858년 출생인 점에 비춰볼 때 1911년생인 정인택이 증손자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정재학의 맏손자인 정운용 1대 조흥은행장이 태어난 해가 1904년이기 때문이다. 다만 항렬 등에 비춰볼 때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먼 친척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인택의 부친인 독립투사인 [[정운일]] (1884~1956)은 [[정재학]] [[대구은행]]장(1856~1940) 의 손자인 정운용 제2대 조흥은행장 (1904~ 1963 )과 같은 항렬이다.</ref>
- 정재학 (1856년) . . . . 18회 일치
|친척 = [[정운용]], [[정운철]], [[정운익]], [[정은정]]
27년 간 이어진 그의 은행경영 노하우는 아들과 손자에게 넘겨졌다. 숱한 합병 과정을 거치면서 [[민족계은행]] 자본의 총집결지였던 [[조흥은행]]에서 같은 가문의 한국인 행장을 두 명이나 배출했다. 5대 [[정종원]] 행장과 해방 후 첫 한국인 행장에 오른 2대 [[정운용]] 행장이 각각 그의 3남이고 장손이다. [[정재학]]이 [[대구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 투입한 민족자본은 정씨 가문 지분으로 상속되면서 고스란히 [[조흥은행]]에 남겨졌다.<ref name="ReferenceC"><<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83~87</ref><ref><<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412~431쪽 역대임원</ref><ref>서광운, << 한국금융백년>> (창조사, 1970) p.684 조흥은행 계보도</ref>
경상합동은행에서도 정재학의 경영권 장악력이 다시금 발휘되면서 [[경남은행]] 출신 인사들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졌다. 1939년 그는 맏손자 [[정운용]]을 이사 겸 부장으로 발탁하여 경영 수업을 받게 했다.<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15</ref><ref name="ReferenceB"/>
[[정재학]]의 손자이자 해방 후 처음으로 한국인으로서 2대 조흥은행장에 오른 [[정운용]]은 1921년 결혼, 여아를 뒀지만 1930년 아내가 사망했다. 이듬해인 1931년 그는 대구 남산동 거주 김분조와 재혼했다. 그런데 김분조의 부친 [[김진만]]은 1915년 대구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한광복단]] [[대구권총사건]]'의 핵심인물이었다.<ref>경향신문 1963년 3월 1일 3면 대한광복단 사건</ref><ref>경향신문 1966년 10월 8일 정인택 수기 겨자씨한알 =2</ref><ref>독립기념관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의 전개 4. 대한광복회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456</ref>
김진만은 대한광복회 단원으로 대구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펼치는 가운데 대구 지역 부호였던 장인 [[서우순]]의 집을 찾아가 설득했다. 그러나 실패한 뒤 물러나던 중 반항하는 하인 우도길에 총상을 입혔다.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돼 1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ref>민족문화대박과사전 독립운동가 김진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10638</ref><ref>독립기념관 29 김진만 독립운동가 서한집 http://www.i815.or.kr/media_data/data_chong/32.pdf</ref> <br> [[김진만]]의 손자 [[김일식]] 역시 1920~1930년대 대구 지역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김진만과 함께 [[서우순]] 자택에 침입했던 광복단원들 가운데 [[정재학]]과 친척관계인 [[정운일]] ( 鄭雲馹 )도 있었다. 정운일 역시 검거돼 10년형을 언도고 7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광복 후 미군정 경상북도 상임고문과 반민특위 경북 도위원장을 역임했고 건국포장과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ref>민족문화백과사전 정운일 편
그러나 정재학이 1858년 출생인 점에 비춰볼 때 1911년생인 정인택이 증손자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정재학의 맏손자인 정운용 1대 조흥은행장이 태어난 해가 1904년이기 때문이다. 다만 항렬 등에 비춰볼 때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먼 친척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인택의 부친인 독립투사 [[정운일]] (1884~1956)은 [[정재학]] [[대구은행]]장(1856~1940) 의 손자인 [[정운용]] 제2대 조흥은행장 (1904~ 1963 )과 같은 항렬이다. 정재학 행장은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던 먼 친척의 아들을 위해 기꺼이 진학추천서를 써줬다.
그러나 오구라는 행장에 오르지 못한 반면 정재학의 손자인 [[정운용]]은 1940년 4월 27일 열린 이사회에서 대표 이사 (대표취체역) 겸 행장에 선임됐다. 이듬해인 1941년 7월 총독부는 전시금융체제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금융기관 정리통합 방침을 밝혔다. 예상과 달리 [[경상합동은행]]은 [[대구상공은행]]과의 합병대신 1941년 8월10일 서울 소재 [[한성은행]]에 흡수 합병됐다. 정운용은 한성은행 주식 1220주를 보유하면서 [[상무]] [[취체역]](상무이사)로 발탁됐다. 해방 후 한국인 최초의 은행장이 되는 계기였다. 오구라는 이에 상심한 듯 은행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본업인 전력산업에 집중한다.
이전에는 1943년 [[취체역]] 회장 (이사회장) [[민규식]](閔奎植)을 1대 행장으로 대우했으나 1897년 한성은행장 [[김종한]] (金宗漢 )을 1대 조흥은행장으로 결정했다. [[민영휘]] 가문은 주요주주였음에도 조흥은행장을 배출하지 못한 격이 된 것이다. 반면 [[정재학]]의 3남인 [[정종원]]은 제5대 조흥은행장, 손자인 [[정운용]]은 제2대 조흥은행장에 이름을 올렸다.<ref>국가문화유산포털 조흥은행 http://www.heritage.go.kr/culture_2008/kor/search/pop_search_view.jsp?pk=PS01004029001422024000DC</ref>
[[조흥은행]] 100년사에서 [[대구은행]], [[경상합동은행]], [[한성은행]], [[조흥은행]] 등으로 명칭이 변경될 때에도 [[정재학]], [[정종원]],[[정운용]]이라는 이름은 지워지지 않는다. 대구를 대표적인 근대적 자본가였다. 특히, 가난한 상민의 아들에서 시중 은행의 최고경영자가 된 정재학은 말 그대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게다가 조흥은행에 아들과 손자가 행장을 역임했다.<ref>대구사회비평 2003년 7~8월 통권 10호 문예미학사 http://hrznnzrh.blog.me/60033398980 근대 100년 대구 거부실록 정재학가</ref>
일본제국주의 통치 시절 정재학 행장의 27년 은행경영 노하우는 해방후 아들과 손자에게 이어졌다. 일제가 강요한 민족자본은행 간 합병 과정을 거치면서 [[민족계은행]] 자본의 총집결지였던 [[조흥은행]]에서 정재학 행장의 아들과 손자가 행장 자리에 오른 것이다. 5대 [[정종원]] 행장과 해방 후 첫 한국인 행장에 오른 2대 [[정운용]] 행장이 각각 그의 3남이고 장손이다. [[정재학]]행장이 [[대구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 투입한 민족자본은 정씨 가문 지분으로 상속되면서 [[조흥은행]]지분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ref name="ReferenceC"/><ref><<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412~431쪽 역대임원</ref><ref><<대구사회비평 2003년 7~8월 통권 10호>> (문예미학사, 2003 ) http://hrznnzrh.blog.me/60033398980
* [[정운용]]
- 정종원 . . . . 16회 일치
|자녀 = [[정운철]] (장남) <br /> [[정운익]] (차남)
|친척 = [[정은정]] (손녀) <br /> [[정운용]](조카)
'''정종원''' (1896년 5월 22일 ~ 1977년 3월12일)은 [[조흥은행]] 5대 행장이다. 동아일보 창간발기인으로 참여했고 대한아이스하키협회 4대 회장도 역임했다. 1960년 불교단체인 [[법시사]]를 창립한뒤 1990년까지 발행된 불교 전문 잡지 [[법시]]의 초대 발행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상남북도에서 공직생활을 거쳐 평안남도에서 군수를 역임했다. 그의 부친은 [[정재학]] 대구은행 - 경상합동은행 행장으로 일제하 27년간 행장 직을 유지했다. 또한 그의 조카인 [[정운용]]은 해방 후 첫 조흥은행 행장으로 선임된 바 있다.
이후 1947년 조흥은행 취체역(이사)으로 선임된 뒤 1956년부터 516군사혁명 직전인 1961년 4월말까지 조흥은행 행장자리를 지켰다. 정종원은 한때 그의 조카인 해방후 첫 조흥은행장인 정운용과 함께 부친 정재학의 뒤를 이어 조흥은행 대주주의 자리를 유지한 바 있다.
정종원은 구한말 경기여고와 서울 사범대 출신의 교사였던 부인 신양정(신양숙)과 슬하에 2남 4녀를 뒀다. 두 사람 다 재혼이고 전 배우자들과의 사이에 자식들이 있다. 신양정은 정종원 사후 [[법시사]] 이사장과 법시 발행인을 역임했다.<ref>윤재실, <<팔도명인전>>, ( 진명사, 1979) p.233</ref> 장남 [[정운철]]은 하와이 최연소 부영사와 일본 고베 총영사를 역임했다. 정운철은 두산그룹 [[박용성]]과 동서 지간이다. 정운철과 박용성의 장인은 삼성물산 대표를 역임한 [[김선필]]이다.
막내 정운익은 하와이 오하나 퍼시픽 은행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팀을 처음으로 직접 구성했다. 그는 대한아이스하키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국제아이스하키연맹 집행위원을 겸직했다.<ref>경향신문, 1998년 2월 25일 26면</ref> 정종원 행장 내외가 생전에 장충동 본가에서 키우며 마지막으로 안아 본 손녀가 정운익의 3녀인 뉴욕퀸이다.
정종원은 1947년 조흥은행에 입행했다. [[윤호병]] 전 재무부장이 그를 조흥은행 취체역(이사) 겸 특수업무부장으로 추천해준 결과다. 그의 조카 [[정운용]]은 이미 41세였던 1945년 11월 조흥은행 2대 행장이자 해방 후 첫 한국인 행장으로 선임된 바 있다. 정종원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이로써 대구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서 27년갖 은행장을 역임한 정재학은 3남 정종원, 장손 정운용을 조흥은행장으로 배출하게 됐다. 3대에 걸쳐 은행장을 낸 사례는 [[정재학]] 가문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대구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 대한 정씨 가문의 지분은 조흥은행 출범 당시 조흥은행 주식으로 변경됐다. 정종원과 정운용은 조흥은행 대주주로 남게 됐다.
대구은행 설립자 정재학의 후손인 정종원(3남)과 [[정운용]](맏손자)은 1957년 무렵 조흥은행의 주도권을 두고 동일은행계의 대주주였던 조선황실 외척인 민 씨 가문과 맞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조흥은행은 일제 말 동일은행과 경상합동은행을 흡수한 한성은행이 합병해 탄생한 은행이다. 따라서 양대 대주주인 [[경상합동은행]](전 [[대구은행]])계 정씨 집안과 동일은행계 민 씨 집안 가운데 어느 쪽이 주도권을 잡느냐가 관심사였다.
정재학의 3남 정종원이 조흥은행장으로 봉직하던 1957년 3월말 실시 된 귀속주입찰에서 민 씨 가문은 [[민덕기]](조선맥주)를 중심으로 계성(주), 휘문재단, 영보합명회사 및 민병도 당시 조흥은행 전무 등의 지분을 합쳐, 7만8000 주를 확보하며 4만6000 주에 그친 정종원, 정운용 가문을 압도했다. 그러나 민 씨 가문의 주력 기업이었던 조선맥주의 경영악화로 인해 민 씨가문은 조흥은행 주식을 팔아 긴급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민 씨 가문은 1957년 하반기부터 1958년 상반기까지 조흥은행 주식을 대거 처분한다.<ref>동아일보 1957년 7월 20일 3면</ref> 조흥은행에서 소수주주로 전락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 조선맥주은 주세체납 등으로 은행관리로 넘어가게 됐다.<ref>매일경제 1968년 7월 2일 7면 빚만 늘어가는 조선맥주</ref> 앞서 민 씨 가문은 일제 강점기 당시 조흥은행 대표취체역(대표이사)으로 [[민규식]]을 배출한 바 있다. 일본인 행장이 따로 있었고 실권은 없는 자리였다. 이어 해방 후 초대 한국인 조흥은행장은 정재학의 손자인 정운용이 맡았고 정재학의 3남인 정종원이 5대 행장을 역임했다.
- 박근혜 . . . . 7회 일치
재임 직후부터 [[국정원 댓글 사건|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이라는 위기를 맞으며 국정을 본 박근혜는 임기 중 [[세월호 침몰 사고|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등 국가적 재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창조경제]]를 위시한 추진한 정책 다수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더러, 미숙한 국정운영과 불통 논란 등으로 숱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다 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져 민간인의 국정 개입 사실이 낱낱이 폭로되면서 2016년 12월 3일 [[대한민국 국회]]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이 발의<ref name="impeachment" />되어 12월 9일 대한민국 헌정사상 두 번째로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다.<ref>{{뉴스 인용|저자=주영재·허남설|제목=[속보]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찬성 234·반대 56·무효 7·기권 2|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2091610001|뉴스=[[경향신문]]|날짜=2016.12.09 16:10:00}}</ref>
박근혜는 [[정운찬]] 총리가 "자족기능 강화를 위해 세종시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고 하자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이 같은 비판은 10·28 재보선이 끝나자마자 정 총리가 세종시 수정 추진 행보에 속도를 붙이자 제동을 건 것으로 보였다.<ref>(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09103120144229109&outlink=1 박근혜 "세종시 국민과의 약속" 정운찬 비판)</ref>
박근혜는 [[2009년]] [[10월 31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에서 기자들과 만나 "세종시는 국회가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한 약속"이라며 "세종시 문제를 개인적인 정치 신념으로 폄하해선 안 된다"고 말하였다. [[정운찬]] 총리의 면담 제안에 대해서도 "국민과의 약속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모르고 하는 말"이라며 "설득하고 동의를 구한다면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해야지 내게 할 일이 아니다"라고 일축하였다. "[[행정복합도시]]라는 말 속에 문화시설과 교육, 과학 등을 다 포함한 자족기능이 들어가 있는 것"이라며 "약속을 지키고 부족하면 플러스 알파로 더 잘되게 해야지 약속을 어기면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식 세종시 수정 발언에도 불구하고 [[11월 27일]] "할 말을 이미 다 했고, 입장(원안+알파(α))에 변함이 없다"며 기존 입장을 고수하였다.<ref>[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854434 박근혜 "세종시 원안+α 변함없다"]</ref>
박근혜는 취임사에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공식 언급<ref>[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652966 [박근혜 정부 출범_취임사로 본 국정운영] 경제부흥ㆍ국민행복ㆍ문화융성…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가동]</ref>한 이래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간 신뢰를 형성함으로써 남북 관계를 발전시키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며, 나아가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려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ref>[http://www.korea.kr/celebrity/contributePolicyView.do?newsId=148757873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기반 구축]</ref> 가 대표적인 통일 정책으로 추진되었다.
|총선 패배에 대한 대통령 책임론, 기존 국정운영 방식 고수, 이란 방문
박근혜는 원칙, 신뢰, 약속을 지킨다는 이미지가 장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녀는 세종시 문제,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등을 통해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거나 원칙을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얻었다. 2012년 대선에 출마한 후보로서, 이러한 이미지는 국정운영에서의 안정감에 대한 기대로 연결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한 이미지는 지지층에서만 통할 뿐이며,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겐 소통도 안 되고 감동도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고 평가되기도 했다.<ref name="mk1">[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199680 <매경이 만난 사람> 공천 탈락후 정계은퇴 선언한 강봉균 3선의원]매일경제, 2012년 3월 30일</ref><ref name="mk">[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425368 원칙·소신 두각 vs 불통·신비주의 한계] 매일경제, 2012년 7월 11일</ref><ref>[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629300 박근혜·문재인·안철수 SWOT분석] 매일경제, 2012년 9월 28일</ref><ref>[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391745 SWOT 분석으로 본 대선 주자들…장단점은?] 서울방송 8시뉴스, 2012년 9월 20일</ref><ref name="kh">[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272200245&code=910402 [새누리 후보 박근혜 뒤집어보기](1) 원칙인가, 독선인가] 경향신문, 2012년 8월 27일</ref>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일부 대선 공약을 수정해 반대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0161539471&code=940100]</ref>
- 최윤수(정무직공무원) . . . . 7회 일치
== [[정운호 게이트]] 연루 ==
국정원 제2차장으로 일하면서 2016년 6월 ‘[[정운호 게이트]]’ 사건과 관련한 수사를 받았다. 서울지검 제3차장 시절이던 2015년 2월경 [[홍만표]] 변호사로부터 청탁을 받아 정운호의 무혐의 처분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 실제로 2016년 6월 [[정운호]] [[네이처 리퍼블릭]] 대표는 도박 혐의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홍만표 변호사에게 사건 청탁 명목으로 3억원을 건넸고, 홍 변호사가 당시 박성재 서울중앙지검장과 최윤수 3차장 검사에게 청탁하겠다고 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닌 게 아니라 2015년 2월 당시 최윤수 차장검사가 홍만표 변호사의 청탁 알선을 받고 정운호의 뒤를 봐줬기 때문인지 정운호는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그 후 검찰은 홍만표 변호사의 통화추적 등을 통해 홍 변호사가 최윤수 차장을 두 차례 찾아갔고, 최윤수와 무려 20여 차례나 통화한 사실까지 확인했다. 하지만 검찰은 결국 최윤수 국정원 제2차장을 소환하지 않고 서면으로 조사하는 데 그쳤다. 이로 인해 당시 검찰은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사건 당시에도 최윤수와 우병우 간의 관계가 입길에 올랐다. 우병우는 2013년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한 뒤 이듬해 5월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기용될 때까지 1년 동안 변호사로 활동했고, 이 기간에 홍만표 변호사와 함께 사실상 ‘2인 1조’로 움직이면서 정식 선임계도 내지 않고 정운호 대표 등의 ‘몰래 변론’을 맡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홍만표와 우병우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당시 수사기획관과 1과장으로 대검 중수부에서 함께 일한 인연이 있다. 우병우가 변호사 활동을 할 때 사무실을 연 곳이 서울 서초동 오퓨런스 빌딩 1111호로, 홍만표의 사무실(1010호)과 같은 건물 아래 위층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홍만표와 최윤수 차장 간의 연결 고리가 우병우 아니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1421.html#csidxde4c88fecae9760b9b6c86f97f5e042|#]]]
- 김민기(가수) . . . . 2회 일치
* [[정운찬]]
전 국무총리인 정운찬에게 부인될 사람(서울대 미대 동문)을 소개해주었다고 한다 [[http://news.joins.com/article/3759174|관련기사]] [[http://cluster1.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Iv0I&fldid=29Q1&datanum=298&openArticle=true&docid=Iv0I29Q129820020828090019|관련기사]]
- 정도복 (고려) . . . . 2회 일치
'''정도복'''(鄭道復)은 [[고려]]시대 말기, [[조선]]초기의 문신이다.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선, 상시 등을 지내고 [[조선]] 건국에 참여하였으며 밀직제학, 한성부우윤,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했으며 형 [[정도전]]이 암살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성주 유학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 뒤 인녕부사윤에 이르렀다. 본관은 [[봉화 정씨|봉화]](奉化)이고 자(字)는 내지(來之)이고 호(號)는 일봉(逸峯)이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이며, [[정도전]](鄭道傳)의 친 아우이다.
* 아버지 : [[정운경]]
- 김국진(MC) . . . . 1회 일치
[[김구라]]같이 영문과 출신인데도 불구, 정작 [[영어]]에는 능통하지가 않다. 전성기에는 김국진에게 영어를 잘 한다고 얘기하면 김국진이 특유의 혀짧은 소리로 어설픈 짧은 영어 몇 마디를 하는 것도 하나의 준비된 개그였다. 데뷔 시절 감자골 4인방(김국진, [[김용만]], [[박수홍]], [[김수용(코미디언)|김수용]])으로 인기를 얻은 몇년 뒤 김용만과 함께 [[미국]] 어학 연수를 갔건만 영어는 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지진]]을 겪었을 뿐[* 그래도 [[남자의 자격]]에서 [[영어마을]]로 가는 에피소드에서 [[김성민(1973)|김성민]], [[이정진]], [[이윤석]] 등과 함께 그럭저럭 준수한 [[영어]] 실력을 보여주었다.]. 여담으로 당시에 밥과 고추장으로 생계를 이어나갈 정도로 궁핍했는데, [[1994 FIFA 월드컵 미국]] 때 [[미국]]을 찾은 [[고정운]], [[황선홍]] 등이 놀러와서 넌지시 용돈을 줬는데 그게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 김상조 . . . . 1회 일치
[[대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81학번으로 [[서울대]]에서 경제학 학부, 석사 및 박사과정을 거쳤다. [[1993년]] '설비자금의 동원 및 배분체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당시 지도교수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었다.
- 김진향 . . . . 1회 일치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였고, '한반도 통일에 관한 담론의 분석'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된 연구분야로는 북한 체제, 남북관계, 평화통일 등이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에서 시간강사 생활을 하다가 [[세종연구소]]에 들어가 객원연구위원으로 일했다.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제32대 통일부 장관 [[이종석 (정치인)|이종석]]을 만났다.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참여했고, 인수위원회에서 [[국가 안전 보장 회의]](NSC) 설계 작업을 했다. [[노무현 정부|참여정부]]에서 NSC 한반도 평화체계담당관으로 국정운영에 참여하여 남북 평화체계를 다루다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에서 더 폭넓게 남북관계를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여러 번 교섭과 협상을 했다. 학자 입장에서 북한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개성공업지구]] 근무를 자원했고 [[2008년]] 2월부터 4년간 [[개성]]에서 근무했다. 이 때 개성에서 발생하는 신청·세무·회계·세금·임금협상 등 북한과의 모든 협상을 담당하면서 거의 매일 북한 사람들과 부대끼고 토론하고 협상하는 경험을 했다.<ref>원희복.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3&aid=0000032094 (원희복의 인물탐구)카이스트 김진향 교수…종북을 각오하고 ‘북한’을 말하다]. 주간경향. 2016년 1월 16일.</ref>
- 박준규(1925) . . . . 1회 일치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외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신민당(1967년)|신민당]] [[정운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해 [[10.2 항명 파동]]으로 [[중앙정보부]]에서 [[고문]]당한 [[김성곤]]이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직을 사퇴하여 치러진 경상북도 달성군-[[고령군]] 선거구 재보궐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서울특별시/인물 . . . . 1회 일치
* [[박정운]] - 종로구
- 이경희 (1880년) . . . . 1회 일치
* 사돈 : [[정운일]]([[1884년]] [[1월 16일]] - [[1956년]] [[2월 5일]])
- 이시영 (1882년) . . . . 1회 일치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듬해 기울어가는 국운을 한탄하고 남의 나라를 삼키려는 일본을 무찌르겠다는 결연한 각오 아래 [[중국]]으로 망명,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베이징]], [[만주]]일대 그리고 국내의 각지를 그야말로 날개달린 호랑이처럼 다녔다. 괄괄한 성격의 그는 실력투쟁만이 독립의 길이라고 확신하고 [[윤상태]](尹相泰), [[서상호]](徐相鎬), [[정운일]](鄭雲馹) 등과 [[애국단]]이란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애국단을 조직한 그들은 우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모라는 당시 대구부호의 지원을 얻기로 했다. 그러나 서부자는 이름난 구두쇠인데다 민족의식이 없어 말로 해서는 응하지 않을 것 같았고 더욱 서는 우재의 사돈(族兄의 妻家)이었다.<ref name=autogenerated1 />
- 전희숙 . . . . 1회 일치
| 코치 = 조종형<br/>[[양달식]]<br/>이정운
- 정형돈 . . . . 1회 일치
| 가족 = 정운봉(부), 박경순(모), 슬하 2녀 <br/> 정유주, 정유하 (쌍둥이 자매)
- 조진호 (축구인) . . . . 1회 일치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1994년 아시안 게임|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본선 출전하였지만,끝내 한국은 4강에서 떨어졌고, [[1996년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선임된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은 한국 축구의 체질개선을 선언하였고,좋은 체격조건을 가진 선수를 추구했던 탓에 조진호의 대표팀에서의 입지는 줄어들었으며, [[1995년]] 다이너스컵 출전을 앞두고 [[아나톨리 비쇼베츠]]의 기용방식에 불만을 품고 올림픽대표팀 합류 거부 파문을 일으켰고, 황금기를 열지도 못한채 6개월 선수 자격정지와 함께 축구팬들의 외면을 받아고, 부상으로 인해 포항에서조차도 [[고정운]],[[박태하]]등에 밀렸으며, [[2000년]] [[제주 유나이티드|부천 SK]]로 이적하였다.
- 최재환(배우) . . . . 1회 일치
|| [[SBS]] || [[비밀의 문]] || 허정운 || ||
- 피우진 . . . . 1회 일치
취임 이후 '사후 약방문식'의 보훈업무 일처리를 지양하고, 보훈복지의 사각지대를 선제적으로 찾아 문제점을 미리 제거하는 등 보훈복지 강화에 조직운용의 역점을 뒀다. 피 처장 부임이후 다양한 조직운용의 변화 시도가 결국 성과로 연결되면서 보훈처는 국정운영평가에서 '매우 우수' 기관으로 선정됐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4&aid=0004085797|*]]
- 한규복 (1881년) . . . . 1회 일치
그러나 [[민족정경문화연구소]]의 보고서인 《친일파 군상》에서는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라고 인정해 주었다. 《친일파 군상》에 의하면 그를 가리켜 "이러한 기회에 일층 적극 진충보국하면 자기 개인은 물론이요, 민족적으로도 장래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한 자"로 분류하였다.<ref>김학진·정운현 역, 《친일파죄상기》(학민사, 1993), 353페이지</ref> 한규복과 [[전라북도]][[도지사]]를 지낸 [[손영목]]에 대하여는 "일본인들에게 무조건 친일 또는 아부자가 아니었다 한다"며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였다.<ref name="parksgi87"/>
- 황보관 . . . . 1회 일치
|다음={{국기그림|대한민국}} [[고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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