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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5.3 인천사태]]와 [[10.28 건국대 항쟁]] 등으로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을 준비하자 [[1986년]] [[11월 5일]] 조건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였다. [[1987년]] 4월에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있다가 [[7월 9일]] 사면복권되었다. 다음날인 [[7월 10일]]에는 [[이중재]]·[[노승환]]·[[이용희]]·[[정대철]] 등이 함께한 동교동 자택 기자회견에서 "나는 대통령이 되는데 관심 없다. 현재로서 불출마 선언은 변함이 없다"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하루만에 불출마의사를 번복하게 된다.<ref name="dd199">이영훈,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에디터, 2006) 199페이지</ref>
         하지만, 당시 야권에서는 김대중으로는 정권교체가 불가능하니 후보를 교체하자는 제3후보론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국민회의 지지자들 다수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당대회를 통해 김대중을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2003108_6187.html 국민회의 전당대회 결과 김대중 후보 78% 지지 얻어] MBC 1997.05.19</ref> 김대중은 정대철을 꺾고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 [[정대철]]
  • 이지아(배우)
         2011년 12월 19일 이지아의 집안이 육영사업을 하던 재력가이며 '''덕망 있는 명문가'''라는 [[언플]] 기사가 떴다. [[정대철]] 당시 민주당 상임 고문은 이지아의 조부가 재력은 물론 남다른 인품의 소유자였고 자손인 이지아 부친에 이어 이지아 역시 유복하고 뼈대 있는 가정환경 속에서 바르게 자랄 수 있었다고 인터뷰했다.
  • 장면
         {{인용문|김의원 나 죽겠소. 여당 의원들이 자기 선거빚 좀 갚아달라 하고, [[정치자금]] 좀 달라 하며 자꾸 우는 소리를 해대니 내가 이를 어찌 할 수 있겠소.<ref name="강준만208"/><ref>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1997) 143페이지</ref>}}
         한편 측근이자 사돈인 [[경향신문]]의 [[한창우]] 등은 그에게 인사청탁을 했으나 그는 인사청탁을 거절하였다. 비서관이었던 [[박종률]]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한창우 사장은 장면 총리에 대해 심기가 불편했지요. 주일공사 등에 대한 인선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불평도 많이 하고 그랬지요. 당시 경향신문이 장면 정권에 대해서도 혹독하게 비판했어요. 사돈간 치고는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말입니다”라고 회고했다.<ref>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 1997) 320페이지</ref>
         1961년 봄 장면은 족청계 거사설을 가지고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불러 사실확인을 했다. 그러나 장도영은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계속 조사하겠다고만 대답했다.<ref>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 1997) 225페이지</ref>
         * [[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 1997)
  • 최형우(정치인)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부산광역시 [[연제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권 행보를 보이기도 했으나, 청와대의 뜻에 따라 대권 행보를 물리고[* 이런저런 풍문에 따르면 청와대에서 대선 시뮬레이션 결과를 들어 반대했는데, [[김대중]], [[조순(1928)|조순]] 등의 유력 후보는 물론이고 [[정대철]]과 붙어도 진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안습]](....).] 당권을 맡아 대권 후보를 지원하는 쪽으로 선회한다. 당시 민주계 내에서 가장 정치적 지분이 컸고, 당내 세력도 확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민주계 내 어느 한 후보를 밀기 시작하면 대세론을 타고 후보가 될 수 있었기 때문. 청와대에서도 당 대표로 최형우를 점찍은 상태였다. 그러나 대선 후보 경선을 준비하는 와중에 1997년 3월 11일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그것이 최형우의 정계 마지막이었다. 이틀 뒤 최형우 몫으로 갈 예정이던 신한국당 대표는 [[이회창]]이 되었고, 이회창은 그 여세를 몰아 민정계와 대세를 읽은 일부 민주계의 지지를 얻어 대선 후보가 되었다. 최형우가 누구를 밀어 주겠다고 확실히 말한 바가 없었기 때문에 최형우의 당내 세력은 민주계 각 후보는 물론 민정계, 더 나아가 야당 쪽으로까지 뿔뿔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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