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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견미리
         *[[1985년]] [[MBC]] 창사24주년 특별기획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풍란 (드라마)|풍란]]》 ... [[정난정]]의 몸종 역
  • 박주미 (배우)
         * 2016년 [[MBC]] 《[[옥중화]]》 - [[정난정]] 역
  • 전인화
         [[여인천하]]의 [[문정왕후]] 역할을 맡아 기품 있고 무게감 있고 카리스마 있는 [[왕비]]의 역할을 잘 해냈으며, 권력 다툼의 한 축을 이루면서도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캐릭터를 표현했다. 악녀 이미지가 강했던 [[강수연]]의 [[정난정]]역이나 [[도지원]]의 [[경빈 박씨]]와는 큰 차이. [[여인천하]]는 시청률도 높았지만 화제성이 특히 커서 여러 곳에서 패러디되고 계속해서 회자되었다. 결국 [[여인천하]]로 [[강수연]]과 [[SBS 연기대상]] 공동수상.
  • 희빈 장씨
         기록의 진실성은 차치하더라도 조선 시대의 신분법 상 희빈 장씨를 얼녀 출신 천민으로 계산하기에는 오차가 있다. 희빈 장씨의 생모인 윤씨는 첩이 아닌 엄연한 정실 부인인 계실이었으며, 남의 집 여종을 첩도 아닌 정처로 삼기엔 [[장형 (조선)|장형]]의 사회적 위치 및 조건이 결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ref group="주">남의 집 여종을 아내로 삼은 자를 비부(婢夫)라 하는데, 비부는 아내의 주인 집에 종속되어 그 집안의 대소사에 노동력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자식은 탄생한 즉시 주인집의 사유재산이 된다. 이러한 한계때문에 자신의 남종이 남의 집 여종과 혼인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여 노인이 되도록 혼인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적 문제가 되었으며, 지극히 가난하여 나이를 먹도록 혼인을 하지 못한 양인 남성이 생계를 유지하고 대를 이을 목적으로 비부를 자청한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실록 등에 기록된 강력 범죄 사건에 비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비부가 법적으로는 그 가문의 종이 아니기에 사례를 조건으로 주인의 범죄를 대리시켰거나 덮어씌운 결과인데 이는 비부의 사회적 위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ref> 첩을 처로 만들 수 없는 조선의 국법<ref group="주">[[윤원형]]이 첩 [[정난정]]을 처로 만든 전례가 있어 첩을 처로 만드는 것이 흔한 일인 양 오해되고 있지만 [[윤원형]]이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의 사후에 관직을 잃고 유배되었던 공식적인 이유는 국법을 어기고 첩을 처로 만들었다는 죄목때문이었다. 조선 사회에서 첩실을 정실로 격상할 수 있는건 왕과 왕세자 뿐으로, 이 또한 1701년 이후로 금지되었다.</ref> 과 윤씨 소생 아들인 [[장희재 (조선)|장희재]]가 무과(武科)로 등용<ref>옥산부원군신도비 기록</ref> 되어 [[1680년]]에 내금위에 재직<ref>숙종실록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22일(을해) 3번째기사 中 동평군 이항의 공초내용</ref> 하였고 [[1683년]]에 좌포도청 부장에 재직<ref>숙종실록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ref> 하였던 점<ref group="주">선조16년 병조판서였던 [[이율곡|이이]]의 주청으로 납속을 낸 서얼을 허통하여 무과에 입시하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숙종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청요직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무과에 합격한 서얼은 관직은 받지 못한채 무기 발령대기 상태로 남거나 지방 군졸로 발령, 혹은 외적의 침입이 잦은 국경으로 발령되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중인 역관의 얼자가 [[내금위]]에 재직하고 경내 좌포도청에 부장으로 재직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희빈 장씨가 숙종의 후궁이 된 건 1686년 12월이니 누이의 후광을 입었다고 볼 수 없다.</ref>, [[1689년]] 11월 13일 윤씨를 당하관인 역관의 처로 언급한 윤덕준(尹德駿)의 상소내용<ref group="주">조선시대에는 처와 첩, 적서의 구분을 명확히 구분하여 언급하거나 기록하였다.</ref>, [[1698년]]에 사망한 윤씨가 남편 [[장형 (조선)|장형]]과 전처 제주 고씨의 옆에 나란히 매장된 것<ref group="주">첩은 가문의 묘산에 매장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며 특별히 매장되더라도 남편 부부의 무덤에서 떨어진 음지나 발치 아래에 묻어 정처와 확고한 차별을 두었다. 희빈 장씨는 1694년에 강봉되었으며 오빠 장희재가 [[노론]]의 공격으로 목숨이 위태로웠던데다가 왕세자인 아들 [[조선 경종|경종]]은 [[인현왕후]]에게 입적되어 [[노론]]이 이미 모자의 연이 끊겼다고 주장했던 만큼 만약 윤씨가 첩으로서 처와 동등하게 매장되었다면 당시 탄핵이 되지 않았을 리 없으며 희빈 장씨의 사후나 경종의 사후에도 반드시 탄핵이 있었어야 정상이다.</ref> 은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이 원자가 되어서나 그녀가 왕비가 되어 [[조선 숙종|숙종]]이 특별히 장씨의 생모를 첩에서 처로 승격해주었을 가능성조차 극히 희박함을 증명한다. 이는 윤씨가 설사 여종 출신이었더라도 이미 면천한 후에 [[장형 (조선)|장형]]의 계실이 되어 장씨 남매를 낳았음을 뜻하는데, 그렇다면 장씨 남매에게는 노비 종모법이 적용되지 않아 이들의 신분은 아비를 따라 중인이 된다. 물론 윤씨가 애초에 종 출신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ref group="주">종(奴婢)의 정의에는 '남에게 얽매이어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도 있다. 조사석의 처인 권씨는 권문세가의 딸이고 윤씨는 역관의 딸이었던 만큼 두 사람이 교류하였던 것을 신분의 위계 상 윤씨를 종으로 비유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런 식의 말장난은 [[민진원]]의 특기이기도 했다는 점이 유의사항이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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