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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1891년)
         [[1906년]] 장인 고정주가 세운 [[창흥의숙]]에 입학하였다.<ref name="건국영웅"/> 이후 김성수는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의 처가댁에 가서 생활하며, 장인이 설립한 [[창흥의숙]]에서 공부하였다.<ref name="in26" /> [[창흥의숙]]에서는 [[한문]], [[영어]], [[일어]], [[수학]] 등을 가르쳤고<ref name="in26" />, 그는 장인 고정주의 배려로 신학문을 접했다.<ref name="in26" /> 장인 고정주는 특별히 [[영어]]교사를 초빙하여 [[영학숙]]을 열고 자신의 아들 [[고광준]](高光駿, 고재욱의 부)과 사위 김성수 등에게 영어공부를 시켰다.<ref name="in26" /> [[창흥의숙]]에 수학하면서 김성수는 오랫동안 의기투합할 동지인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를 만나<ref name="건국영웅"/> 친분을 쌓았다. 송진우의 아버지 송훈은 고정주가 영학숙을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아들도 배우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송진우도 이때부터 영학숙에 들었다.<ref name="in26" />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외에도 [[백관수]] 등을 이곳에서 만났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 [[이희승]]·[[가람 이병기]]·[[김선기]](金善琪) 등이 연행되어 옥고를 치렀다. 총독부는 김성수를 배후 지원자로 보고 연행, 심문하였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투옥은 모면하였다.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김선기]] 등이 김성수를 찾아갔더니 그 손을 잡으며 고생했다 하며 '고문을 당하면 못할 말이 어디있겠나' 하며 [[이극로]]의 안부를 걱정했다. 잡혀간 이극로는 가혹한 고문에 못이겨 사전 편찬 등은 독립운동의 일환이라고 거짓 자백을 했으며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책임자로 있던 김성수도 관련이 있는 것처럼 자백을 강요당하였다. 당시 [[경찰청|경무국]] 보안과장이 술 한 잔 사겠다는 이유로 김성수를 술집 청향원으로 불러, "[[조선어사전]] 편찬은 [[독립운동]]의 방법이었다"는 이극로의 자백을 들려주며 추궁하였는데 김성수는 "조선어 사전 하나 편찬해 독립이 된다면 진작 편찬하지 왜 이제 하겠는가."라며 반박했고 일본 경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ref>{{웹 인용 |url=http://www.inchonmemorial.co.kr/inchon_think4.html# |제목=::: 인촌기념회 :::<!-- 봇이 따온 제목 --> |확인날짜=2010-02-09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1118171625/http://www.inchonmemorial.co.kr/inchon_think4.html# |보존날짜=2011-11-18 |깨진링크=예 }}</ref>
         {{인용문|조선 징병령 감사주간에 당하여 소감의 일단을 들어 삼 가 반도청년 제군의 일고(一考)를 촉(促)코자 한다. 작년 5월 8일 돌연히 발포된 조선에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당시 전역을 통하여 선풍같이 일어나는 환회야말로 무엇에 비유할 바가 없었으며 오등 반도청년을 상대로 교육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특히 일단의 감회가 심절(深切)하였던 바이다.|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성하라."}}
  • 박세직
         [[외국어]]에 능통하였으며, [[영어]]를 비롯해 [[불어]]와 [[일어]]에 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81년 8월 '''박세직 사건'''으로 [[소장(계급)|소장]] 계급으로 예편하였다. 겉으로는 박세직이 육군사관학교 동기의 사업을 도와 준다는 이유로 비리를 저릴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두환과 [[허화평]], [[허삼수]] 등 측근 세력이 '하나회 출신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권력을 넘보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본보기를 보여 주려고 박세직을 예편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 사건은 1973년 일어난 [[윤필용 사건]]에서처럼 수도경비사령관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이 보안사령관인 상태에서 보안사령관이 동기생을 수사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당시 박세직은 박준병 국군보안사령관에 의해 조사를 받고 예편하였다. 후에 박준병은 조사 결과 박세직이 여기저기 “차기 대통령은 나”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밝혔다.
         그러나 곧 다시 [[전두환]]에게 중용되어 1982년 [[한국전력공사]] 부사장을 지냈다. 그러다가 1983년 [[국가안전기획부]] 제2차장에 임명되어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을 보좌하였다. 그러면서 노신영과 함께 그 해 5월에 일어난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을 해결하였다.
         1988년 12월 배명인의 뒤를 이어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으로 임명되어 1989년 7월까지 재임하였다. 1990년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91년 2월에 사직하여, 2개월의 단명시장에 그쳤다. 이것도 1991년 일어난 [[한보그룹]]의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수서비리 사건]]과 관련하여 여러 모로 루머가 많았는데, 특별히 문제가 불거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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