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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년 에드먼드 우체국 총기난사
         [[일본]]의 음악 그룹 [[사운드 호라이즌]]의 노래 사형집행에서 패트릭 헨리 셰릴의 이름이 언급된다.
  • COCOM
         [[아이슬랜드]]를 제외한 [[북대서양 조약기구]] 회원국 15개국이 참가했으며, [[일본]]과 [[호주]]가 이에 추가되었다. COCOM위원회에서는 참가국들에 [[소련]]과 공산권 국가 및 공산권 지역에 대하여 전략 물자 수출 기준을 제시하였고, 참가국들은 이에 따라야 했다. 구체적인 목록은 1988년 까지 비공개였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
         "디시전"이라는 기능이 생겼다. 정부 정책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인데, 이 때문에 침략전쟁을 벌이는 국가(독일, 일본 등등)의 경우 자신이 원하는 순간에 전쟁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정해진 시간에 나오는 이벤트에서 전쟁을 시작할 수 있던 HOI2에서는 등을 떠민다는 느낌이 강했다.
          1936년 1월 1일 시작하는 시나리오. 제일 기본적인 시나리오다. 약 3년간의 전쟁 준비 기간이 주어진다. 일본과 중화민국은 1년 정도나 주어지지만.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시나리오.1904년 2월 7일 시작해 1905년 9월 2월까지 진행된다. 플레이 가능 국가는 러시아와 일본.
          수장은 독일. 1936년 기준으로 독일 혼자 뿐이지만 게임을 진행하게 되면 이탈리아나 동유럽의 국가들, 일본 등을 끌어들일 수 있다.
          핵무기를 개발하고 원자로도 충분히 크면 생산되는 자원. 전략폭격기에 탑재해 적 프로빈스를 쑥밭으로 만드는데 쓰인다. "소형화된 원자폭탄"을 연구하면 비행폭탄과 로켓에도 탑재 가능. 핵공격을 받은 프로빈스는 건물과 자원 수급에 영구적인 피해를 입으며, 해당 프로빈스에 주둔하던 병력들도 괴멸적인 타격을 받는다. 불만도는 덤. 영국과 일본[* 영국은 본토에 핵을 맞으면 항복하며, 일본은 본토에 두번 핵을 맞으면 항복한다.]을 제외한 메이저 국가들의 경우 수도에 핵을 맞으면 최대 두번까지 수도 이전 이벤트가 뜬다.
         동원령 2단계. 모병제. 현실의 예시로는 현대의 [[중국]]과 [[일본]].
         동원령 9단계. 중학생부터 환갑 지난 할아버지까지 징집한다. 역사상의 예시로는 "우리 항복 안함 빼애애액!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을거임 빼애액!"을 시전하던 패전 직전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있다.
         실제 역사를 따라가려고 할 경우 일본의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 디시전 발동→"난징 대학살", "파나이 사건" 이벤트→미국의 "대일본 최후통첩" 디시전 발동→일본의 "진주만 공습" 디시전 발동과 같은 절차를 걸쳐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보통 이렇게 되면 똑같이 일본에게 선전포고 당한 연합군 세력이 동맹에 초대한다.
         1936년 대선의 FDR 당선, 1940년 대선의 FDR 당선, 일본의 "진주만 공습" 디시전 발동의 경우 당시 연설이 BGM으로 나온다.
         연합국의 우두머리. 섬나라라는 특성상 본토에 병력을 배치한 후 배에 태워 대륙으로 수송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같은 섬나라인 일본은 세력권이 동아시아로 한정되어 있지만 영국은 사실상 세계 전역에 깃발을 꽂고 있어서 더더욱 골치아프다.
         ==== Japan(일본) ====
         프랑스가 독일에게 발리고 강화조약을 맺으면 인도차이나 연방의 소유권을 넘겨 받을 수 있는 디시전이 발동한다. 이러면 미국의 "대일본 최후통첩" 디시전이 해금되는데, 미국은 중일전쟁과 그에 딸린 각종 이벤트 때문에 일본을 싫어할게 뻔하므로 이 디시전을 발동한다. 최후통첩을 받아들이면 미국의 애완견[* 민주화, 중국 지역을 중화민국에게 반환, 모든 괴뢰국 해방, 한반도가 대한민국으로 독립, 영미와 군사 통행권&불가침 조약 체결, 불만도 +20%, 미국의 괴뢰국화.]으로 전락한다. 인공지능이 잡을 경우 100% 미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에게 엠바고 처먹기를 선택하고, 이후 "진주만 공습" 디시전을 갈긴다.
         1937년 쯤에 일본이 "마르코 폴로 다리" 디시전을 발동시켜 중일전쟁을 일으키는데, 이러면 "국공합작" 이벤트가 발동되어 산서성 군벌과 광서성 군벌이 중화민국에 합병되고 중국 공산당도 중화민국과 동맹을 맺는다. 맨날 그런건 아니고 공산당이 튕기거나 할 때도 있다. 보통 이 경우 일본과 투닥거리다가 평화협상 맺고 구경한다. 아오 저 빨갱이놈들 ㅂㄷㅂㄷ.
         수도인 난징을 일본군에게 뺏기면 "난징 대학살" 이벤트가 발동된다. 불만도가 20% 감소하긴 하는데....... 음.......
          미국의 괴뢰국.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 마닐라가 함락되는 즉시 일본에게 점령 및 합병당한다. 이후 일본이 괴뢰국으로 다시 뱉어낸다.
  • GHQ
         --일본사 최후의 [[막부]]--
         GHQ는 General Headquarters의 약자로서, '총사령부'라는 뜻인데 [[일본]]에서는 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군]]--[[연합군]][* 소수의 영연방군이 참가하였으나, 대부분은 미군이었으므로 사실상 미군.]이 [[일본]]에 --[[막부]]--[[군정]]을 펼치기 위하여 설치한 사령부를 뜻한다. [[맥아더]]를사령관으로 하였으며, GHQ에서 지시하는 점령정책이 일본 정부에 의하여 시행되었다. 1945년에 설치되어, 1952년에 강화조약이 맺어지면서 폐지되었다.
         GHQ 통치 시기는 직접적인 군정이 아니라, GHQ의 지시를 일본 정부가 책임을 지고 시행하는 간접군정 방식이었다. GHQ의 영향력은 경제, 문화, 정치 측면에서 광범위하게 미쳤는데, 정치적 측면에서는 [[헌법]]을 비롯한 각종 법률이 개정되었으며, 지방자치와 선거제도가 개혁되었다. 교육, 문화 정책으로 [[민주주의]]를 확산시켰으며, 경제 개혁으로 [[재벌]]이 해체되었고, [[농지개혁]]으로 농촌의 [[지주]] 계급이 해체되었다.
         일본이 항복하고 1945년 부터 설치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1951년 맥아더 원수가 해임되고, 리지웨이 장군이 최고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2년 4월 강화 조약이 발효되어, GHQ는 폐지되었다.
         외국에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기관이지만 [[일본]]에서는 [[음모론]]의 단골소재이기도 하다.
         예) 일본인이 미국 문화를 추종하는 것은 GHQ의 세뇌에 의한 것 등등.
         [[분류:일본사]]
  • LDK
         [[일본]]의 부동산 업계에서 주택의 구조를 간단히 나타내는 단어. 2LDK, 3LDK 등이 있다. 주로 임대 건물에서 방의 구조를 나타낸다.
  • NEC 코퍼레이션
         [[일본]]의 전기제품 회사. 일본 8대 전기제품 기업이다. 일본의 [[IBM]] 같은 위치.
         [[메인프레임]]과 산업용 미니컴퓨터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했다. 현재도 업무용 컴퓨터나 서버 분야에서 일본 최고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 Q.E.D. 증명종료
         [[일본]]의 작가 [[카토 모토히로]]가 [[코단샤]]의 [[계간]]지 '월간 소년 매거진 플러스'[* 원래는 매거진 GREAT라는 이름이었으나, 2009년 매거진 Z라는 잡지가 폐간, GREAT에 흡수되면서 '매거진 이노'라는 잡지가 되었다가 이마저도 2011년에 폐간. 이노에서의 연재작들을 모아 새로 창간한 잡지가 매거진 플러스.]에 연재 중인 [[추리]]만화. 작가는 전에 일하던 출판사([[에닉스]])에서 정리해고당하고 이 만화까지 망하면 만화가를 그만두겠다는 각오로 그렸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왕창 팔린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판매 부수는 권당 4만부 정도. 잡지가 워낙 마이너하다 보니... ] 97년부터 2015년까지 장장 18년 동안 장수하며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격월간지 장기연재 만화로 기네스북에 등재돼있는 상태로, 실시간 갱신중이다.] [[date]] 기준으로 48권까지 정발되었다.
         기본적으로 자신과 타인에 무관심한 15세에 [[MIT]]를 졸업한 [[천재]]소년 [[토마 소]]가 일본의 [[고등학교]]에 입학해[* 평범한 고등학교 생활을 해보고 싶어서...라고 한다. 천재들이란...] 체력과 의욕이 넘치는 [[미즈하라 가나]]와 얽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일본에서는 각각 20권 돌파 기념, 드라마화 기념으로 일종의 특별편+가이드 북 격인 Q.E.D. 트릭노트, 트릭파일이 출시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거 없다|그런 거 없었다]].(당연한가...) 일본에서는 Q.E.D.와 C.M.B. 단행본이 같은 날 출시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발행되고 있었으나, 40권부터 C.M.B 18권과 같이 나오다가 42권 부터는 또 미묘한 텀을 두고 발매되고 있다.
          * 작품 자체의 소재가 일반인들은 접해보지 않은 개념들이 많아. 상당히 상식적인 면에서 읽어볼만하나 원체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 많기도 하고, 일본어 특유의 외국어 표기법(ex, 마구도나루도)으로 번역자가 그대로 해석해서 한국어의 외래어 표기법과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연속체 가설에서 만화책에서는 '아레후'라고 나오지만 제대로 된 명칭은 [[알레프]].
  • UR임대
         일본주택공단, 현재의 독립행정법인 도시재생기구에서 임대하는 아파트.
         과거에 공단주택(公団住宅)이라고 불렸으며, 도시공단에서 관리했다. 현재는 도시재생기구(都市再生機構)에서 관할하고 있으며, 이 단체의 영문명인 Urban Renaissance Agency 에서 UR을 따와서 UR임대주택이라고 불린다. 일본 전국에 약 75만 가구가 존재한다.
         [[일본]]에서 집을 임대할 때 필요한 레이킨(礼金)이 불필요하며, 집세 2개월 분의 보증금으로 입주할 수 있다. 또 중개수수료가 필요없으며, 계약수수료도 없다. 보증인 역시 필요 없다.
         우리나라의 LH 임대아파트(휴먼시아, 영구임대, 행복주택 등)와 비슷한 위치이나, 일본의 UR주택은 영구임대이면서 방이 넓고 시설 수준이 좋은 단지도 있다는 점에서 LH 영구임대와 큰 차이를 보인다.
         [[분류:일본 풍속]]
  • U턴 취직
         [[일본]]의 취업용어.
         [[분류:일본어]]
  • mixi
         [[일본]]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2004년에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일본 국내 한정으로 최대급의 SNS이다
  • weeaboo
         [[일빠]] + [[덕후]]. [[일본]]이나 일본 문화, 일본 애니에 과도한 집착을 가진 사람. 일상 생활에서 일본어를 가끔 쓰며 일본인처럼 행동한다. 만화 코너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비슷한 말로 [[와패니즈]](wapanese)가 있다.
  • ℃-ute
         [[일본]]의 [[아이돌 그룹]]. [[하로프로젝트]] 일원.
         제40회 일본 유선대상 유선음악상 수상
         제49회 일본 레코드 대상 최우수신인상 수상
         제50회 일본 레코드 대상 우수작품상 수상
         [[분류:일본 아이돌]]
  • 가모 마유
         | 국적 = [[일본]]
         '''가모 마유'''({{llang|ja|蒲生 麻由, がもう まゆ}}, [[1982년]] [[3월 16일]] ~ )는 [[일본]]의 [[배우]]이다.
         [[분류:198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일본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일본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1996년 데뷔]][[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아시아 대학 동문]]
  • 강동우
         [[삼성 라이온즈]] 시절 그의 재기를 도운 [[김응용]] 감독을 만나 의지를 불태웠으나, 결국 그 해가 [[한화 이글스]]에서 마지막 해가 되었다. 시범경기 11경기에 출장해 16타수 5안타 타율 .313 2타점 2볼넷 출루율 .389를 기록해 다시금 KBO 최고령 1번 타자의 재림을 노리고 있었으나, 시즌 개막을 앞두고 시범경기에서 발가락 부상(골절)을 당해 2군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2012 시즌 종료 직후 가을 마무리훈련부터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까지 빠짐없이 훈련을 소화했기에 더욱 아쉬운 부상이었다. 다행히 1번 타자의 공백은 [[이대수]]가 나름대로 메워주고 있지만 팀이 개막 직후부터 연패 수렁에 빠져있고 마땅한 좌타자 요원도 없는 상황이라 그의 공백이 더욱 더 아쉬운 상황이었다.
  • 강예솔
         2005년 말 연예 기획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ref name="star">{{뉴스 인용|제목=前소속사, 강예솔 상대 '연예활동금지' 가처분신청|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6101710183224717&type=1&outlink=1|출판사=스타뉴스|저자=양영권|쪽=|날짜=2006-10-17|확인날짜=2012-11-20}}</ref>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5월 [[전국춘향선발대회]]에 나가 춘향 진에 뽑히면서 주목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미스춘향 진 강예솔 "왕의 남자보다 왕이 좋아요"|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3&aid=0000029409|출판사=스포츠서울|저자=조현정|쪽=|날짜=2006-06-05|확인날짜=2012-11-20}}</ref> 같은 해 10월에는 소속사와 전속계약 문제로 법적 분쟁이 있었다.<ref name="star"/> 2007년 9월부터<ref>{{뉴스 인용|제목=두산, 소주 수출점유율 사상 최대치 기록|url=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07100409361224579&outlink=1|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홍기삼|쪽=|날짜=2007-10-04|확인날짜=2012-11-21}}</ref> 일본 수출용 소주 광고에 출연하면서 [[일본]]에 얼굴이 알려졌고,<ref>{{뉴스 인용|제목=신예 강예솔, 日서 떴다..술광고시장 점령|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9102108251863582&type=1&outlink=1|출판사=스타뉴스|저자=김수진|쪽=|날짜=2009-10-21|확인날짜=2012-11-21}}</ref> 이로 인해 2010년 9월에는 [[일본 프로 야구]]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니혼햄]]-[[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소프트뱅크]] 전에서 시구를 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애프터스토리] '생소한 그녀' 강예솔, 日 프로야구 시구 맡은 사연|url=http://foto.sportschosun.com/news/ntype2_o.htm?ut=1&name=/news/entertainment/201009/20100904/a9d75136.htm|출판사=스포츠조선|저자=이해완|쪽=|날짜=2010-09-03|확인날짜=2012-11-21|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325052601/http://foto.sportschosun.com/news/ntype2_o.htm?ut=1&name=%2Fnews%2Fentertainment%2F201009%2F20100904%2Fa9d75136.htm#|보존날짜=2014-03-25|깨진링크=예}}</ref>
  • 고구마
         조선에서 고구마 재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이다. [[1763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엄 (조선)|조엄]](趙曮)이 [[쓰시마 섬|대마도]](對馬島)에서 고구마를 가져와 [[동래]](현 [[부산]])에 심게 했는데 월동방법을 자세히 몰라 모두 얼어 죽었다. [[1764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강필리]]가 이 사실을 듣고 대마도 사람에게서 다시 종근(種根)을 구하여 [[동래]]와 절영도(부산 [[영도]])에 심게 하고 그 재배법을 기록한 「감저보」(甘藷譜)라는 책자를 발간함으로써 고구마가 널리 보급되었다.
         고구마는 조선 초기 [[본초강목]]과 같은 중국 문헌에 의해 감저(甘藷)로 알려졌다. ‘고구마’라는 이름은 일본어의 음차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ref name="김무림"/> 조엄이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가 지내면서 쓴 [[해사일기]](1763~1764)에는 ‘이름은 감저라 하는데 孝子麻라고도 하며 일본 발음은 고귀위마(高貴爲麻)이다(名曰甘藷 或云孝子麻 倭音古貴爲麻)’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대마도 방언을 기록한 것으로, 지금도 쓰시마 지방에서는 고구마를 고코이모({{lang|ja|孝行芋, こうこいも}})라 부른다. 한글 기록으로는 유희의 《[[물명고]]》(1824년)에 '''고금아'''라는 형태가 등장한다.<ref name="김무림">{{잡지 인용|저자=김무림|제목=‘감자’와 ‘고구마’의 어원|잡지=새국어생활|권=19|호=3|년도=2009|url=http://www.korean.go.kr/nkview/nklife/2009_3/2009_0306.pdf}}</ref>
         [[일본]]에서는 고구마를 [[사쓰마반도|사쓰마 지방]]의 이름을 따 '사쓰마이모({{lang|ja|甘藷, サツマイモ}})'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번서(番薯/蕃薯), 감서(甘薯) 또는 디과(地瓜, 지과)라고 한다.
  • 고기
         옛날 [[일본]]에서는 고기를 먹는걸 금지했다. 이는 19세기 일본이 서구화를 위해 육식을 허용할 때 까지 지속되었다.
  • 고독사
         고령화, [[핵가족]]화, 도시화로 인한 지역 커뮤니티 단절 등이 고독사가 증가하는 원인으로 여겨진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 [[한신대지진]] 이후에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으며, 사회 붕괴와 경제불황에 따라서 점차 증가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 고사기
         [[일본]]의 역사서. 주로 고대사나 신화가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와는 미묘하게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 고사기의 발음은 [[일본어]]로 '코지키'라고 하는데, 이는 [[거지]]를 뜻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이유로 일본 인터넷에서는 거지를 고사기(古事記)라고 쓰기도 한다.--거지 같은 역사서--
         [[분류:일본사]][[분류:역사서]][[분류:일본어]]
  • 고아라
         '''고아라'''([[1990년]] [[2월 11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ref>[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sm=tab_txc&where=people_profile&ie=utf8&query=%EA%B3%A0%EC%95%84%EB%9D%BC&os=160959 고아라-네이버 인물]</ref> 일본에서는 '''Ara'''(아라)라는 예명을 쓰고 있다.<ref>고아라의 이름을 [[일본어]]로 표기하면 {{lang|ja|コ・アラ}}가 되어 [[코알라]](koala, {{llang|ja|コアラ|코아라}})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ref>
         일본의여성 연예인
         고아라는 [[경상남도]] 진주군(현 [[진주시]])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진주에서 유년기 10여년을 보냈고, 공군 부사관인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대구광역시]]로 이동했다. 재학 당시 가수가 꿈인 친구를 도와주려 백댄서로 [[SM 엔터테인먼트]] 오디션에 우연찮게 참가했다가, 제5회 [[SM 엔터테인먼트|SM]] 청소년 베스트 선발대회에서 외모짱 1위, 대상을 거머쥐게 되면서, 연습생 생활을 하며 연예계 데뷔를 준비하게 되었다. 또한, 고아라는 춤과 노래, 기타 연주에 능숙하고 [[영어]], [[일본어]]의 외국어 실력도 뛰어나다.
         2003년 10월, 고아라는 1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KBS2]] 청소년 드라마 《[[성장드라마 반올림 1|반올림]]》의 오디션에서 주연으로 발탁되었다. 이 드라마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시즌 2로 제작 되어 인기리에 방송 되었고, 그녀 역시 주목을 끌며 서서히 인지도를 쌓기 시작했다. 또한 데뷔 동시에 여러 편의 광고에 출연하는 등 하이틴 스타로써 성장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스타인터뷰]KBS2 청소년드라마 ‘반올림#’ 출연 고아라양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0&aid=0000216137 |출판사= 동아일보 |날짜= 2003-11-26 }}</ref><ref>{{뉴스 인용|제목= <연합인터뷰> '반올림2' 주인공 고아라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917358 |출판사= 연합뉴스|날짜= 2005-02-21 }}</ref><ref>{{뉴스 인용|제목= 고아라 CF도 ‘엘리트 코스’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44&aid=0000010032 |출판사= 스포츠경향 |날짜= 2006-03-05 }}</ref> 2006년 [[SBS]] 드라마 《눈꽃》에서 [[김희애]]의 딸 역할로 캐스팅 되어 첫 정극 연기를 선보였고,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신인연기상을 수상했다.<ref>{{뉴스 인용|제목= 고아라, 백상TV부문 여자신인상 수상 |url= http://star.moneytoday.co.kr/view/stview.php?no=2007042515005883547&type=1&outlink=1 |출판사= 스타뉴스 |날짜= 2007-04-25 }}</ref> 이후 '아라'로 이름을 바꾸는 등 [[일본]]에서의 활동을 병행하며 아시아 시장을 노린 '한류스타' 행보를 이어갔다.<ref>{{뉴스 인용|제목= 고아라, 4만 대 1을 통과한 아시아 대표미녀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3&aid=0000225003 |출판사= 뉴시스 |날짜= 2006-11-05 }}</ref><ref>{{뉴스 인용|제목= 신인 고아라, '제2의 보아' 만들기 GO!..日 데뷔 앞두고 홍보전 |url= http://sports.chosun.com/news/news.htm?name=/news/entertainment/200610/20061031/6a113005.htm |출판사= 스포츠조선 |날짜= 2006-10-30 }}</ref>
         2007년 [[몽골]], [[일본]] 합작 영화 《푸른 늑대 - 땅 끝 바다가 다하는 곳까지》에 이어 2009년 [[한국]], [[일본]], [[중국]] 합작 영화 《스바루》에 출연했지만, 두 영화는 다소 혹평을 받으며 흥행에는 참패했다.<ref>{{뉴스 인용|제목= 반올림 후 10년..고아라는 왜 이제 시청자 ‘응답’ 받았나 |url=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311270843461910 |출판사=뉴스엔|날짜= 2013-11-27 }}</ref> 이후, 고아라는 2008년에 국내에 복귀해 드라마 《누구세요?》, 2009년 《[[맨땅에 헤딩]]》와 2012년 영화 《[[파파 (영화)|파파]]》, 《[[페이스 메이커]]》등에서 주연을 맡았지만 역시 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아쉬운 반응을 얻었고, 고아라가 어떤 연기를 하든 그녀의 출세작이도 한 《[[반올림]]》속의 '이옥림 같다'는 평과 연기력 논란 등을 겪으며, 배우로써 침체기를 맞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고아라, ‘응답하라 1994’로 대표작 교체할 수 있을까 |url= http://star.mbn.co.kr/view.php?no=977949&year=2013 |출판사= MBN |날짜= 2013-10-14 }}</ref><ref>{{뉴스 인용|제목= 고아라, 두 영화 합해 고작 100만?…실패일까, 성공일까 |url= http://star.mk.co.kr/new/view.php?mc=ST&no=113513&year=2012 |출판사= 매일경제 |날짜= 2012-02-20 }}</ref>
         | 일본 드라마, 3회 특별출연
         | 일본, 몽골 합작 영화
         [[분류:일본 연예인]]
  • 고아라(1990)
         [[2003년]] [[한국방송공사|KBS]] [[청소년 드라마]] [[반올림(드라마)|반올림]]의 '''1,000:1'''에 육박하는 치열한 주연 오디션을 뚫고 주연으로 발탁되며 데뷔, 큰 화제를 모았다. 청소년 성장 드라마치고는 상당한 인기를 구가했고, 고아라라는 배우를 알린 계기이기도 하다. [[2006년]]에는 드라마《눈꽃》에서 주인공 '다미'역으로 처음 정극 연기를 했고, [[백상예술대상]] TV 연기 부문 여자 신인 연기상을 수상했다. 아역치고 상당한 연기를 선보였음에도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하필이면]] [[주몽(드라마)|경쟁드라마가....]] 이후에는 이름도 '''아라'''로 개명하고[* 2008년 드라마 누구세요? 에선 고아라가 아니라 '아라'로 출연했다.] --소속사에서 아시아 쪽을 겨냥해서 그런지-- 아시아, 특히 [[일본]]에서 활동을 많이 했다.
         [[일본]]에서의 출연작으로는 소리마치 타카시 주연의 [[칭기즈 칸]]의 생애를 다룬 영화인 〈푸른 늑대〉오디션에서 '''40,000:1'''의 경쟁률을 뚫고 출연[[http://www.nocutnews.co.kr/news/140038|하였고]], 또 영화 '스바루'나 화려한 [[스파이]]에 출연하기도 했다.
          * [[일본]]에서는 활동할 때는 '아라'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한국에서는 먼저 고아라라는 이름으로 데뷔한지라, 고아라가 통칭으로 사용되지만, 이후 [[대한민국]]에서의 예명도 아라로 바꿨다.('[[고아]]' 또는 '[[코알라]](...)'라는 단어가 연상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한국에선 고아라로 불리면서 결국 다시 고아라로 회귀하였다.
          * [[SM엔터테인먼트|스엠]]에서 외국 진출을 노렸기 때문인지 준수한 외국어 실력을 지녔다. 파파나 해외에서 찍은 영화, 드라마 등에서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hGoqr9yySA|일본어와]], [[http://blog.naver.com/rkdm12/110180184109|영어를]] 잘 하는 편.
         || [[2007년]] || 푸른 늑대 - 땅 끝 바다가 다하는 곳까지 || 쿠란 || 몽골, 일본 합작 영화 ||
  • 고준희
         '''고준희'''([[1985년]] [[8월 31일]] ~ )는 [[일본]]의 [[가수]]이다.
         [[분류:일본 연예인]]
  • 고황경
         </ref> 이었으며, 비교적 여유 있는 환경이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일본]]의 [[도시샤 여자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했다.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소녀 범죄에 대한 논문으로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 고희경 (1873년)
         [[1902년]] [[이재각]]이 단장을 맡은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즉위 축하 사절단의 일원으로 영국에 다녀왔다. [[1906년]] [[예식원]] 부경(副卿)과 [[제도국]] 의정관, [[궁내부]]의 예식과장과 예식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일본]] 황태자를 맞는 봉영위원(奉迎委員)을 지냈다. 같은해 [[시강원]]에서 일하면서 [[영친왕]]의 강제 일본 유학 때 배종했다.
  • 곤조야키
         [[일본]]의 불량배 은어. 우리말로는 [[담배빵]]에 해당. 불 붙은 담배를 손목, 손등 같은 피부에 꽉 눌러서 화상 흉터를 만드는 행위, 혹은 그렇게 생긴 화상 자국. 직접 가져다 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피부 가까이에 가져다 대는 것도 포함한다. 우연히 담배불에
         [[분류:일본 풍속]]
  • 골든 위크
         [[일본]]에서 4월 말에서 5월 초에 이르는 약 일주일 가량의 장기 연휴. 줄여서 GW. [[한국]]에서는 "황금연휴"라고도 부른다.
         [[분류:일본 풍속]]
  • 공기교
         [[일본]]의 인터넷 은어.
         일본에서는 주변의 상황이나 분위기를 파악해서 행동하는 것을 「공기를 읽는다(空気を読む)」고 표현한다. 일본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같이 '공기를 읽는'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지만, 이것이 지나쳐서 마치 [[종교]]나 신념 같이 이야기하고 [[동조압력]]을 격렬하게 발산하는 사람들을 비꼬는 말로 공기교라는 말이 태어나게 되었다.
         [[분류:일본어]] [[분류:인터넷 은어]]
  • 과학모험대 탄사 5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은 [[선라이즈]]. 총 34화이며 1979년 7월 27일부터 1980년 3월 28일까지 방송.
  • 곽상훈 (국회의원)
         * [[일본]]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 속성연수과정 수료
         그는 이환과 함께 등사한 독립 선언서를 살포하였고, [[3월]] 하순 [[경상남도|경남]] [[부산광역시|부산]]과 [[마산시|마산]]에서 [[기독교]]조직들을 통해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학생대표 자격으로 [[부산상업학교]]와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궐기에 참여해줄 것을 당부하였다.<ref>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6) 245페이지</ref> 그러나 [[일본]] 경찰에 체포돼 수감, 8개월간 미결수로 옥고를 치렀다.<ref name="경인"/> 동래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대구서, 영등포 경찰서로 이감되었다가 미결수로 경성지검과 종로경찰서로 이송되었으며, 일본경찰은 연루자를 불라고 고문을 가하였으나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수감을 듣고 달려온 일본인 수원고농(水原高農) 도미나가 학교장 선생의 보증으로 풀려났다.<ref name="경인"/> 이후에도 경인기차통학생 모임을 중심으로 [[일본]]인 학생과의 싸움을 주동하다 고향인 동래지역으로 주거제한 조치를 받기도 했다.<ref name="경인"/> 이후 그는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어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뒤에는 형사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3.1 운동]] 이후 여행과 활동 시 일본 경찰의 동행으로 활동의 제한을 받아오다가 겨우 [[서울공업고등학교|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불우한 나날을 보내다가 교육청 [[장학사]]로 있던 유진태(柳鎭泰)의 주선으로 [[안동시|안동]] 오산학교(五山學敎)의 교사로 임용, 교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급사 대신 학교의 행정 서무일도 맡게 되었다. 교사 재직 중에도 [[조선총독부]] 경찰국에서는 사람을 보내 그의 동태를 미행했는데, 한번은 그의 하숙방에 몰래 들어와 있던 총독부 경찰국 형사 김태규(金泰奎)를 가장한 지인 김영주의 설득으로 일본 유학을 결심하였다.
         [[1924년]]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에 의해 희생된 한국인 희생자 명단을 입수하고 한국인 학살사건의 진상기록을 수집, 보존하는 활동을 하였다.<ref name="경인"/> [[1925년]]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조직, 결성하여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 최선경 등과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조선총독부]] 경찰의 추적을 받고 [[중국]]으로 망명,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한국인청년동맹'의 간부로 활동했다.
  • 곽태휘
         2010년에는 [[일본]] [[J리그]]의 [[교토 상가 FC]]로 이적했으나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벨라루스]]와의 평가전에서 부상으로 월드컵 엔트리에서 제외되는 불운을 겪었다.
  • 괴인 통카라통
         [[일본]] [[도시전설]]의 [[괴인]], [[요괴]].
          * 전신에 붕대를 감고, [[일본도]]를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통, 통, 통카라통"이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자전거를 타고 나타난다.
         [[분류:도시전설]][[분류:요괴]][[분류:괴인]][[분류:일본 요괴]]
  • 구본웅
         |학력 = [[일본]] [[도쿄]] [[다이헤이요 미술학교]] 학사
         [[경신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고려미술회]]의 [[고희동]]에게서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배웠다. 이후 조각가 [[김복진]]에게 사사하여 화가이면서도 조각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1921년]] 조각 부문에서 [[조선미술전람회]]에 〈얼굴습작〉으로 특선으로 입상한 뒤 [[일본]]에 유학했다.
         일본에서는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거쳐 [[니혼 대학]]에서는 미술이론을,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하는 등 다채로운 교육을 받았다. 다이헤이요 미술학교 재학 중 이미 두 차례의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히 활동하다가 [[1933년]]에 귀국하였다. 이듬해 서양화가 단체인 [[목일회]]를 창립했고, [[1938년]]에는 《청색지》를 창간해 약 2년 동안 발행했다. 종합문예지인 《청색지》는 [[이상 (작가)|이상]], [[이육사]] 등 유명 필진이 참여한 수준 높은 잡지였다.
         * [[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 졸업
         * [[일본]] [[도쿄]] [[다이헤이요 미술학교]] 졸업
         * [[일본]] [[니혼 대학교]] [[미술]]학과 학사
  • 구본웅 (판화가)
         |학력 = [[일본]] [[도쿄]] [[다이헤이요 미술학교]] 학사
         [[경신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고려미술회]]의 [[고희동]]에게서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배웠다. 이후 조각가 [[김복진]]에게 사사하여 화가이면서도 조각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1921년]] 조각 부문에서 [[조선미술전람회]]에 〈얼굴습작〉으로 특선으로 입상한 뒤 [[일본]]에 유학했다.
         일본에서는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거쳐 [[니혼 대학]]에서는 미술이론을,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하는 등 다채로운 교육을 받았다. 다이헤이요 미술학교 재학 중 이미 두 차례의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히 활동하다가 [[1933년]]에 귀국하였다. 이듬해 서양화가 단체인 [[목일회]]를 창립했고, [[1938년]]에는 《청색지》를 창간해 약 2년 동안 발행했다. 종합문예지인 《청색지》는 [[이상 (작가)|이상]], [[이육사]] 등 유명 필진이 참여한 수준 높은 잡지였다.
         * [[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 졸업
         * [[일본]] [[도쿄]] [[다이헤이요 미술학교]] 졸업
         * [[일본]] [[니혼 대학교]] [[미술]]학과 학사
  • 구용서
         [[1899년]]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출생했다. 외할아버지가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송병준이며, 아버지인 구연수는 [[조선총독부]] 소속 경무관과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므로, 유복한 가정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일본인 자녀를 위해 설립된 학교인 [[경성부]] 경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상과대학(현재의 [[히토쓰바시 대학]]) 로 진학했다. [[1925년]]부터 [[조선은행]]의 도쿄 지점에서 근무를 시작하여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고위직에 올랐다.
  • 구하라
         '''구하라'''([[1991년]] [[1월 13일]] ~ [[2021년]] [[1월 5일]])는 [[일본]]의 [[가수]]이자 [[배우]]였다 걸 그룹 [[오냥코 클럽]]의 멤버로 활동한다.
         [[2019년]] [[5월 26일]] 구하라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자택에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발견 이후 응급실로 이송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ref>{{뉴스 인용 |제목=가수 구하라, 극단 선택 시도…"의식 없지만 호흡·맥박 정상" |url=https://www.yna.co.kr/view/AKR20190526022100004 |출판사=연합뉴스 |저자=정래원 |날짜=2019-05-26 |확인날짜=2019-11-24 }}</ref> 이후 [[2019년]] [[6월]]에 활동을 재개하고 일본의 프로덕션 오기와 전속계약을 체결하였으며<ref>{{뉴스 인용 |제목=구하라, 日유명 소속사 프로덕션 오기 전속계약…카라 인연 |url=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id.asp?aid=23096060 |출판사=일간스포츠 |저자=황지영 |날짜=2019-06-22 |확인날짜=2019-11-24 }}</ref>, [[11월 13일]]에 첫 번째 일본 싱글 《[[Midnight Queen]]》을 발매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구하라, 日 솔로 앨범 '미드나잇 퀸' 실물음반 직접 공개 |url=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1848543 |출판사=텐아시아 |저자=우빈 |날짜=2019-11-06 |확인날짜=2019-11-24 }}</ref> 그러나 발매 12일만인 [[2019년]] [[11월 24일]] 오후 06시 09분경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ref><!--최초 보도-->{{뉴스 인용 |제목=[속보] 가수 구하라 자택서 숨진 채 발견(1보) |url=http://www.marke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696 |출판사=마켓뉴스 |저자=김민수 |날짜=2019-11-24 |확인날짜=2019-11-24 }}</ref> 사인은 자살로 밝혀졌다. 유골은 [[서울성모병원]]에서 장례 후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된 뒤 오포읍 신현리 [[스카이캐슬 (납골당)|스카이캐슬]]에 안치되었다.
         ==== 일본 ====
         * 일본: 2916
         ==== 일본 ====
         [[분류:일본 연예인]]
  • 권상우
  • 권오병(국회의원)
         1918년 [[경상남도]] 마산부(현 [[창원시|마산합포구]])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 및 동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 권용관
         이적한 첫날 친정 팀 [[LG 트윈스|LG]]와의 경기에서 7:7 상황이었던 연장 10회 초 타석에 들어서 밀어내기 볼넷으로 타점을 올리며 8:7로 역전에 성공하였으나, 다시 8:8로 동점이 된 10회 말 1아웃 주자 1·3루에서 [[정성훈 (1980년)|정성훈]]의 타구를 놓쳐 3루 주자 [[이택근]]이 홈을 밟아 끝내기 실책이라는 좋지 않은 기록을 남겼다. 2010 시즌 종료 후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고 재활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150153 수술 앞둔 권용관, "복귀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 - OSEN</ref> 이후에도 간간히 백업으로 나왔으나 [[2012년]] 시즌에 1군 3경기에만 출장하는 등 주전 기회를 잃어 시즌 후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어 방출되었다.
         [[2014년]] [[11월 25일]] 김성근 감독은 LG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된 권용관의 방출 소식을 접한 직후 직접 전화를 걸어 마무리훈련 중인 일본 오키나와로 건너와 입단 테스트를 받아 볼 것을 권유했다. 김 감독은 권용관이 LG에서는 설 자리를 잃어 유니폼을 벗게 됐지만 선수 층이 약한 한화에서는 백업 내야수로 활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469&article_id=0000033176 서른여덟 권용관 야구 인생 마지막 도전]</ref> [[2015년]] [[1월 7일]] [[한화이글스]]는 내야수 권용관 영입을 공식 발표했다. 한화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되는 권용관은 연봉 7천만원에 계약을 마무리지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17&article_id=0002556519 한화 이글스, 권용관-임경완-오윤 영입 최종 확정]</ref> [[2016년]] [[9월 13일]] 웨이버 공시가 되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kbo/news/read.nhn?oid=109&aid=0003394317&redirect=true 한화, 권용관 웨이버 공시 이양기등록]</ref>
  • 권태술
          | 군주 = [[쇼와 천황|히로히토]] (일본 군주)
          | 총리 = [[하마구치 오사치]] (일본 총리) <br/> [[와카쓰키 레이지로]] (일본 총리) <br/>[[다카하시 고레키요]] (일본 총리 권한대행 서리) <br/> [[사이토 마코토]] (일본 총리) <br/>[[오카다 게이스케]] (일본 총리) <br/> [[히로타 고키]] (일본 총리)
          | 학력 = 일본 주오 대학교 법학과
         '''권태술'''(權泰述, <small>일본식 이름:</small> '''야스히가시 마사유'''(安東正祐), [[1903년]] ~ ?)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며,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공무원이다.
         [[한성부]] 출신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에서 [[주오 대학|주오 대학교]] 법학과를 나온 그는 주오 대학교 법학과 학사 학위 후 관리가 되어 경성지방법원 서기로 일하는 등 사법 분야에 재직했다.
         이후 [[만주국]]으로 건너가 만주국 수도 [[신징]]에서 신징지방경찰청 서기관 직과 만주국 사법부 대신관방 사무관을 지내는 등 사법관청에서 다년간 근무했다.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해 만주국이 사라진 뒤 서울로 돌아왔다.
         권태술은 [[미군정]] 하에서 관리로 발탁되었다. 일본인들이 두고 간 재산을 처리하는 서울재산관리국 감찰서장을 거쳐 서울재산관리처장에 올라 재임하였다. 1948년 9월 이후 [[서울특별시|서울]] [[중구 (서울특별시)|중구]] 구청장을 맡고 있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 명륜동 자택에서 실종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끌려간 것으로 여겨진다.<ref> {{웹 인용
  • 권혁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일본]]전에 등판해 [[원 포인트 릴리프]]로 활약하여 병역특례 혜택을 받았다.
         그리고 권혁이 국내에서 치료를 하길 원하자 한화 선수들이 갔던 일본병원에서 수술과 재활을 원했던 김성근 감독은, 이에 발끈해 권혁에게 자비로 수술하라는 지시를 내린것이다.
  • 권희로
         |출생지= {{국기|일본 제국}} {{국기|시즈오카 현}} [[시즈오카 시|시미즈]]
         |학력= 1939년 일본 시즈오카 시미즈 소학교 5학년 중퇴
         '''권희로'''(權禧老<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193426 "저승에서는 전쟁같은 삶 살지 마시길…"]</ref>, [[1928년]] [[11월 20일]] [[일본]] [[시즈오카현]] ~ [[2010년]] [[3월 26일]] 대한민국 [[부산광역시]])는 [[재일 한국인]] 2세, 기업가, 범죄자로의 [[일본]] 최장기수였으며 [[일본]]인 조직폭력배를 살해한 죄로 체포되어 24년간 복역하였다.
         그는 1999년 [[대한민국]]에 돌아올 때까지 '''김희로'''(金嬉老)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따라서 '''김희로'''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일본]] [[시즈오카현]] [[시미즈]] 출생이지만 그의 고향을 모친의 출생지인 [[부산광역시|부산]]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1999년 대한민국 귀국 이후 [[부산광역시]]와 [[서울특별시]]에 주로 거주하였다.
         그는 1928년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목재 하역부인 부친 권명술, [[부산광역시|부산]] 출신의 모친 박득숙 사이에서 태어났다.<ref>그러나 권희로는 자신의 고향을 부산이라 했다.</ref> 1931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1933년에는 어머니가 김종석과 재혼함에 따라 이름이 '''김희로'''로 바뀌었다. 아버지와 그의 사이는 좋지 못했으며, 13세 때에는 가출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1968년 일본에서는 '김희로 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이 벌어진다. 1968년 2월 20일 권희로는 시즈오카 현 [[시미즈 시]]의 클럽 <밍크스>에서 [[야쿠자]] 2명과 말싸움을 하게 된다. 채권자의 채권청부를 받아 빚독촉을 하던 상대편의 [[일본]]인 야쿠자가 그에게 "조센진, 더러운 돼지새끼!"라고 모욕하자, 이에 격분한 그는 총으로 이들(미성년자 소년 한 명 포함)을 살해했다.
         이후 그는 [[M1 카빈]] 전용 30발 실탄을 장착했던 [[호와 공업]]의 엽총 <[[M300]]>과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현장을 탈출, 현장으로부터 45 km 떨어진 [[시즈오카현]] [[하이바라 군]] [[혼카와네 정]](現 [[가와네혼 정]])으로 도주한 후 하이바라의 스마타쿄에 있는 한 온천 여관에서 투숙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일본]] [[경찰]]과 대치했다.
         대치 당시 그는 기자 회견 중 그는 "경찰관의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면서 [[일본]] 경찰 고위층의 사죄와 해당 경찰관의 파면을 요구하기도 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강진권, <어머니 고향서 새 삶 열겠어요>, 중앙일보 1999년 8월 26일자 기사, 26면</ref>
         일본 경찰은 형사들을 기자로 변장시킨 후 호텔에 투입, 88시간만에 그를 체포하였다. 체포 당시 그의 어머니 박득숙은 그에게 "일본인에데 붙잡혀 더럽게 죽지 말고 깨끗이 자결하라"면서 흰 한복을 건네기도 했다.<ref name="강준만1">강준만, 시사인물사전(인물과사상사, 1999) 8페이지</ref>
         [[일본]] 경찰에 체포된 권희로는 1971년, 1974년, 1975년 3심을 거쳐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이후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24년을 복역하고 1999년 6월에 [[도쿄]] 시내 [[후추 형무소]], [[지바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권희로는 부산의 소년원과 사회복지시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5만엔 씩 기탁하기도 했다. 그의 김희로 사건은 후에 소설과 영화화 되었다. [[일본]]에서는 건국 이래 4대 테러사건으로 꼽히기도 한다.<ref name=autogenerated1 />
         1970년대 당시 [[일본]]의 현행법 상 무기수로서 복역한 지 10년이 넘은 모범수는 가석방되는 것이 상례이지만, 여덟 번이나 성실성으로 교도소 표창을 받은 그는 번번이 가석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석방노력이 시도됐고, 오랜 석방운동 끝에 1999년 9월 7일에 가석방되었으며, 1년 전에 먼저 사망한 모친의 유언에 따라 일본을 떠나 [[부산광역시|부산]]으로 갔다.
         일본의 언론인 [[혼다 야쓰하루]]는 《김희로, 나의 전쟁》을 통해 그의 범행 동기를 설명하였다. 당시 권희로는 오카무라라는 사람에게 18만 엔을 빚을 진 적이 있는데, 이것을 갚은 후에도 소가 유키오(살해된 야쿠자) 일당에 의해 38만 엔의 빚을 더 갚을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에 권희로는 소가에게 항의하였으나 오히려 권총 위협 아래에서 차용증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 범행의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1971년]] 1심, [[1974년]] 2심을 거쳐 1975년 11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던 권희로는 이후 24년간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복역해 오다가 [[1999년]] [[6월]] 하순 [[도쿄 시]]내 후추 형무소, [[지바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경찰과 대치중에도 일본의 한국인 차별 의식을 비판했던 그는,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출소되면 "재일 한국인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겠다"고 선언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 때문인지 권희로는 8번에 걸쳐 교도소 표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석방 대상에는 오르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을 전해들은 부산 자비사의 승려 박삼중은 이재현과 함께 권희로 석방 운동을 펼쳤다. 1990년에는 10만 명 서명운동을 벌여 규슈지방 갱생보호위원회에 접수시켰으며, 1990년 다시 서명운동을 벌이고 1993년에도 권희로의 서명 운동을 벌여 각각 규슈의 갱생보호위원회와 [[일본 법무성]]에 석방을 요청했다. 1993년의 재서명에는 1만 3천여 명의 서명을 얻어 일본 법무성에 보내기도 했다. [[1995년]]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도 권희로의 석방운동에 나섰다.
         1996년 3월에는 [[천주교]] 단체와 함께 각계 시민단체들의 서명, 탄원운동이 일어나 약 3만 명의 서명이 담긴 석방 청원서를 일본 법무성에 제출했다.
         위와 같은 일련의 활동은 권희로의 석방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98년]] [[11월]] "내 손으로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공기 먹일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던 그의 어머니 박득숙은 아들의 출감을 보지 못하고 [[1998년]] [[11월]] [[일본]] [[시즈오카현]] 시립 양로원에서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f>뉴스플러스, 1999년 7월 29일자 기사, 9면</ref>
         [[1999년]] [[1월]] 권희로는 [[부산광역시|부산]]의 한 소년원에서 [[일본]]돈으로 5만엔을 기탁했으며, 4월에는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광주군]](廣州郡)의 나눔의 집에서 살고 있는 정신대 출신 할머니들에게도 5만엔을 기탁했다.<ref name="강준만1"/> 그리고 그는 여생을 불우한 소년과 노인을 위해 아낌없이 바칠 것이다라고 했다.<ref name="강준만1"/> 이후 그는 각종 기탁과 모금 활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1999년 9월 7일 권희로는 부산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이름도 '김희로'에서 본명인 '권희로'로 다시 바꾸었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199909031788 문화일보, 1999년 9월 3일]</ref> 당시 권희로는 대한민국 언론 보도를 통해 일본 내 재일 한국인 차별에 맞선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에 [[경상대학교]] 병원은 그에게 평생 무료 진료를 약속하였다.
  • 금수현
         1940년 일본 [[도요 음악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작곡 활동을 하였으며, 이때 〈[[그네 (가곡)|그네]]〉를 작곡하였다.
         * [[일본]] [[도쿄 음악대학|도요 음악학교]] 전문학사
  • 길강욱
         | 학력= {{국기그림|일본}}[https://en.wikipedia.org/wiki/Bunka_Fashion_College Bunka Fashion College] 어패럴종합과<br />{{국기그림|일본}}[https://ja.wikipedia.org/wiki/%E6%96%87%E5%8C%96%E3%83%95%E3%82%A1%E3%83%83%E3%82%B7%E3%83%A7%E3%83%B3%E5%A4%A7%E5%AD%A6%E9%99%A2%E5%A4%A7%E5%AD%A6 Bunka fashion graduate university] 패션테크놀로지 코스
         '''길강욱'''([[한자]]:吉姜昱, [[영문]]: KANGWOOK KIL, [[일본어]]:[https://ja.wikipedia.org/wiki/キルカンウク キルカンウク] 1988년12월07일 ~ )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이며, 현재 일본을 거점으로 본인의 브랜드 [[네이비팩토리랩 강욱 길]](NAVYFACTORYLAB KANGWOOK KIL)의 컬렉션을 발표 중이다.<ref name="naverkilkangwook">[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EA%B8%B8%EA%B0%95%EC%9A%B1&sm=tab_etc&ie=utf8&key=PeopleService&os=3474209 프로필 - 네이버인물검색 - 길강욱]</ref><ref name="daumkilkangwook">[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33XXX2133676 프로필-daum인물정보 - 길강욱]</ref>
         2009년 [[일본]] [[도쿄]]로 거주지를 이전 2009년8월 본인의 회사 SOPOCO inc를 설립.
         2010년 4월 [[일본]]의 패션 학교 [https://en.wikipedia.org/wiki/Bunka_Fashion_College Bunka Fashion College] 에 입학.
         2013년 3월 [[일본]]의 패션 학교 [https://en.wikipedia.org/wiki/Bunka_Fashion_College Bunka Fashion College] 어패럴종합과 학원장상을 받고 졸업.
         2013년 4월 [[일본]]의 패션대학원 [https://ja.wikipedia.org/wiki/%E6%96%87%E5%8C%96%E3%83%95%E3%82%A1%E3%83%83%E3%82%B7%E3%83%A7%E3%83%B3%E5%A4%A7%E5%AD%A6%E9%99%A2%E5%A4%A7%E5%AD%A6 Bunka fashion graduate university] 패션 테크놀로지코스 입학.
         2013년 9월 대학원 재학 시절에 일본패션 브랜드를 한국으로 병행수입하는 [http://www.navyfactory.com NAVYFACTORY Store]를 오픈.<ref name="fbz1">[http://www.fashionbiz.co.kr/article/view.asp?idx=150212 <nowiki>20대 사업가 길강욱, 일낸다!</nowiki>]<패션비즈 Thursday, Sept. 24, 2015></ref>
         2015년 3월 [[일본]]의 패션대학원 [https://ja.wikipedia.org/wiki/%E6%96%87%E5%8C%96%E3%83%95%E3%82%A1%E3%83%83%E3%82%B7%E3%83%A7%E3%83%B3%E5%A4%A7%E5%AD%A6%E9%99%A2%E5%A4%A7%E5%AD%A6 Bunka fashion graduate university] 대학원 졸업
         2017년 9월이후 한국에서 활동을 끝으로 [[일본]]으로 회사를 이전
         2018년 [[일본]] [[도쿄]]에서 본인의 브랜드 [[네이비팩토리랩 강욱 길]]을 전개하고 있다.
         *2010년 3월 [[일본]] [https://en.wikipedia.org/wiki/Bunka_Fashion_College Bunka Fashion College] 입학<ref name="naverkilkangwook"/><ref name="daumkilkangwook"/>
         *2013년 3월 [[일본]] [https://en.wikipedia.org/wiki/Bunka_Fashion_College Bunka Fashion College] 졸업<ref name="naverkilkangwook"/><ref name="daumkilkangwook"/>
         *2013년 4월 [[일본]][https://ja.wikipedia.org/wiki/%E6%96%87%E5%8C%96%E3%83%95%E3%82%A1%E3%83%83%E3%82%B7%E3%83%A7%E3%83%B3%E5%A4%A7%E5%AD%A6%E9%99%A2%E5%A4%A7%E5%AD%A6 Bunka fashion graduate university] 입학<ref name="naverkilkangwook"/><ref name="daumkilkangwook"/>
         *2013년 9월 [[일본]] Bunka fashion graduate university 재학시절 [http://www.navyfactory.com NAVYFACTORY Store] 온라인스토어를 오픈 패션브랜드 'NAVYFACTORYLAB KANGWOOK KIL'의 전신<ref name="naverkilkangwook"/><ref name="fbz1"/>
  • 김건 (극작가)
         [[경성부]] 출신이다. [[일본]]에서 연극을 공부한 뒤 귀국하여 1930년대 중반부터 [[신파극]]의 작가로 활동했다.
         작품으로 조혼 풍습을 풍자한 [[일본어]] 단막 희곡 〈박〉을 비롯하여, 동양극장 전속작가 사절 발표하여 동양극장의 희극전문 극단인 [[희극좌]]가 공연한 〈쌍둥이 행진곡〉(1936), 광복 후 창작한 〈눈물의 38선〉 등이 있다. 아기자기한 희극성과 대중적인 멜로성이 특징이다.
  • 김경주 (승려)
          | 학력 = 일본 [[도요 대학|도요 대학교]] 불교학과 [[학사]]
         '''김경주'''(金敬注, <small>일본식 이름: </small>金山敬注, [[1896년]] ~ ?)는 [[일제 강점기]]의 [[불교]] [[승려]]이며, 친일 공산주의 운동가이다. 속성은 [[김해 김씨]]이며, 불교 법명은 '''영담'''(瑛潭)이다.
         [[부산광역시]] 출신으로 [[1908년]] 에서 출가하여 [[불교]] 승려가 되었다. 범어사 재적 중 [[경성부]]에 유학해 [[휘문의숙]]을 졸업한 뒤, 당시 범어사 주지인의 법맥을 상속받고 [[일본]] [[도쿄도|도쿄]]의 [[도요 대학]] 철학과에 진학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난 뒤 전쟁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 중일 전쟁 발발 직후인 [[8월 5일]]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서울의 [[개운사 (서울)|개운사]]에서 황군 무운장구 장병안태 기원제라는 행사를 개최하고 시국 강연회를 열었을 때, 김경주는 "나라를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는다(為國不為身)"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1938년]] 신년 초에는 《[[불교시보]]》를 통해 〈시국 인식과 거국 일치의 신념〉이라는 제목으로 시사문을 발표하였는데, [[중국]]의 도발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명시하고 [[일본군]]은 정의와 사람의 도리를 위하여 싸우고 있으니 곧 동양의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경주는 시국 행사에서 "동양평화와 부동의 정신", "황국정신발양에 대하야" 등의 강연을 계속했고, 1938년 말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이듬해 일본인 교장이 부임하면서 김경주는 교수직에서도 물러나, 경북 5본산이 공동 설립한 [[오산불교학교]] 교장에의 후임으로 취임했다. 오산불교학교 교장으로서도 강연 및 기고 활동을 계속되었다.
  • 김근행 (1610년)
         [[1627년]](인조 5년) [[왜학]] 역관 취재에 합격하여 관직은 [[사역원]]교회(司譯院敎誨)를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知中樞)에 이르렀다. [[1630년대]]부터 대마도에 파견되는 [[문위행]]의 통역관으로 다녀왔고, [[1643년]]과 [[1655년]]에는 통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 본토를 다녀왔으며, [[1663년]]에는 직접 문위행에 임명되어 [[대마도]]를 다녀왔다.
         그는 자신의 부를 자랑하지 않고 일부러 질이 낮은 관대와 관복, 호패, 패도 등을 사용했다. [[조선 인조|인조]]대부터 [[조선 현종|현종]]대까지 [[대마도]]와 [[일본]]과의 무역 활동, [[훈련도감]]과 [[병조]]의 부탁으로 여러 번 [[화약]]과 [[유황]], [[조총]] 등을 반입해오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또한 고리대금을 하여 막대한 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1676년]]의 [[부산]] [[초량왜관]] 신축공사에 투입된 [[일본인]]과 [[대마도]]인 목수들의 임금을 지급할 수 없자, 단기 고리대금으로 이자를 남겨 그 이자로 목수들의 임금을 지급하였다.
         [[왜학]] 역관으로 있으면서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여 한양의 이름있는 갑부의 한 사람이 되었으나 검소히 행동하였다. 현명하기로도 이름났다.
         [[1627년]](인조 5년) 왜학(倭學) [[역관]] [[취재]] 시험에 합격하여 [[일본어]] 역관으로 근무하였다.
         그 뒤 김근행은 [[부산광역시|부산]]의 왜관 건물의 개·증축 등 수리공사를 담당하는 [[왜관]] 감동역관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사역원]] 왜학훈도로 [[왜학]] 통역관을 길러냈다. 또한 그는 [[대마도]] 도주(對馬島 都主)의 애경사(哀慶事)를 위로 및 축하하는 목적에서 파견되는 [[문위행]]의 역관으로 여러 번 [[대마도]]를 다녀왔는데 [[1640년]](인조 18)에 문위행(問慰行)의 당하역관으로 파견된 이후 문위행의 수행원으로 7회를 [[대마도]]에 파견되어 다녀왔다. [[1633년]] [[훈련도감]]에서 [[청나라]]의 눈을 피해 유황과 무기의 밀수를 추진하였는데, 김근행이 그 일을 맡아서 일본으로 들어가 밀매 상인과 접촉하여 유황 4만근을 [[조선]]으로 밀수, 반입하였다. 이 공로로 후일 그는 당상역관을 거쳐 가선대부가 되었다.
         [[1643년]](인조 21) 통신사의 [[상통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그 뒤 [[사역원]]교회를 거쳐 당상관에 올라 1655년(효종 6) 통신사가 파견될 때는 당상역관으로도 파견되었다. [[조선 효종|효종]] 때에도 문위행의 통역관과 문위행으로 [[대마도]]를 다녀왔는데, 이때는 [[청나라]]의 눈을 피해 북벌에 쓸 무기를 구입해 왔다.
         [[1663년]] [[대마도]]에 문위행으로 다녀왔다. [[1663년]]에는 당시 [[좌의정]] [[원두표]], [[훈련대장]] [[이완]], [[한성부]]우윤 [[유혁연]] 등으로부터 유황 수입을 권유받았다. 이들의 권고로 김근행은 [[1663년]] [[문위행]]으로 대마도에 파견되어 일본인 잠상과 수입을 약속하고, [[1664년]] [[3월]] 귀환하였다. [[1644년]] 2월에 일본인 세 명이 유황 20,000근과 장검 200자루가 대마도로부터 왔다. 이 때 일본인과 무역하여 유황과 장검을 사들인 것은 서울의 부상(富商)인 이응상(李應祥)의 노복이었다. 이응상은 이미 [[1663년]] 가을에 [[훈련대장]] [[이완]]의 제의로 유황 1만4천 여 근을 [[훈련도감]]과 어영청에 각각 납입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북벌에 쓸 화포 마련에 총력을 기울였고, 그는 유황과 총기류 수입을 주도했다. 당시 유황 수입을 주선한 사람은 김근행과 그 외에도 이응상, [[임무상]](林茂祥), [[부산진]] 군관 [[박명천]](朴命天) 등이었고, 역관으로는 그 외에도 한시열(韓時說), 상인으로는 방이공(方以恭), 김덕생(金德生) 등이었다. 이들은 각각 자기의 자본으로 유황 100근당 은 70냥으로 계산하여 유황과 총기류를 수입하였다.
         [[1664년]]에도 그는 문위행에 임명되어 [[대마도]]를 다녀왔다. 이때 김근행의 노력으로 [[1664년]] 여름에 석류황 1만 2천근, 흑각, 포탄, 유황, 화약, 긴 조총, 장검 등 군수품을 다시 [[대마도]]로부터 수입해왔다. 이후로도 그는 조정의 명을 받아 화포와 총기류를 대마도와 일본으로부터 수입하였다. [[1665년]] [[7월]]에는 김근행이 주선하여 상인 임지죽(林之竹)은 유황을 수입하였다. 이때 그는 수입 과정에 적극 참여했으며, 이 외에도 유황 등 같은 군수품의 수입은 역관이 사행으로 파견되었을 때 무역을 주선하여 이루어졌다. 그리고 일본상인이 물화를 가지고 오면 특정 상인이 수입하여 군문에 납입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청나라]]에 발각되지 않기 위해 상인과 다른 역관, 개인 등을 통해 유황과 총기류를 수입하여 의정부와 비변사, 병조에 비밀리에 바쳤다. 그는 [[1663년]]과 [[1664년]] 연속으로 문위행으로 다녀오면서 유황과 무기류 구입에 크게 기여하였다.
         김근행은 [[1676년]] 초량왜관의 건립 비용을 고리대로 마련하였다. 조정에서 내린 자금으로 공사하다가, 자신의 사재를 투입하고도 비용이 부족하다고 본 그는 박재흥과 함께 만 냥을 빌려서 고리대하여 6천 냥의 이익을 얻어 초량왜관 건립비용에 추가로 투입시켰던 것이다. 김근행은 변승업 등 다른 역관들처럼 자기 자본으로 고리대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한다. [[1678년]] 일부 파손된 초량왜관을 신축할 때에 동원된 [[대마도]]와 [[일본인]] 목수들의 임금으로 지급할 비용이 부족하였다. 이때 비용 부족으로 문제가 될 뻔했으나 그는 신속하게 역관 김진하(金振夏), 박재여(朴再興), 박유년(朴有年), 홍우재(洪禹載) 등과 함께 영남 민결 5,000냥을 빌려 이것으로 고리대금을 하여 이자를 마련, 이 이자로 [[일본인]] 목수들의 임금을 마련, 지급하여 사태의 악화를 막았다.,
         [[분류:1610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17세기 한국 사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역관]][[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일본 관계]][[분류:무역]][[분류:밀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 효종]][[분류:김해 김씨]]
  • 김기수 (국악인)
         '''김기수'''(金琪洙, <small>일본식 이름:</small>光山哲三, [[1917년]] [[11월 22일]] ~ [[1986년]] [[10월 21일]])는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의 [[대금]] 연주자이자 신국악 작곡의 선두자이다. 아호는 죽헌(竹軒), 또는 순한국어로 풀어서 '대마루'라고도 한다.
         성악곡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 등 친일 국악곡을 작곡하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인 부문에 포함되었다. [[일본]] 건국 260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 천황]]을 칭송하는 내용의 《황화만년지곡》은 [[이능화]]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김기수는 이 명단에 수록된 음악인 가운데 친일자료의 편수는 많지 않으나 친일행위의 정도가 노골적이라고 평가된 경우이다.<ref>{{뉴스 인용
  • 김낙헌
         [[경상북도]] [[안동시|안동]] 출신이다. [[1895년]] [[대한제국]]의 법부 주사가 되면서 사법 분야에서 일하기 시작해 검사시보, 검사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1901년]]에는 [[평리원]] 검사, 이듬해에는 평리원 판사에 임명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의병 항쟁 탄압을 위해 사법권 장악을 시도했는데, 김낙헌(김락헌이 과정에서 충실히 협조했다. 1905년에는 법관양성소장을 맡았고 [[1909년]]에는 경성공소원 검사를 지내며 의병 재판에 검사로 참여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뒤 이듬해 [[조선총독부]] 산하의 고등법원 판사가 되었고, [[1918년]] 중추원의 부찬의에 임명될 때까지 판사로 재직했다. 조선총독부 판사로 재임한 기간 중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 다이쇼대례기념장을 수여받은 바 있으며, 중추원 부찬의 임기 중인 1919년 사망했다.
  • 김남주 (배우)
         {{일본여배우 정보
         | 출생지 = [[일본]] [[도쿄도]]
         | 자김남주녀 = [[후카다 쿄코 (일본여배우)|후카다 쿄코]]
         | 국적 = 일본
         '''남주'''([[1982년]] [[11월 1일]] ~ )는 [[일본]]의 [[배우]]이다.
         *김남주씨는 일본여배우 [[후카다 쿄코]]뱃속에서태어났다
         * 2009년 9월부터 일본여배우 으로 데뷔하게 된다.
         | 제목 = 일본여배우 김남주 지금까지는'행운'이젠 스스로 큰다
         [[분류:198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2009년 데뷔]][[분류:도쿄도 출신]][[분류:일본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일본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일본의 여 배우]][[분류:일본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일본의 영화배우]][[분류:도쿄 김씨][[분류:일본의 여자 모델]]
         [[분류:일본 여배우]]
  • 김달호(1912)
         '''김달호'''(金達鎬, <small>일본식 이름: </small>金橋 健, [[1912년]] [[3월 26일]] [[경상북도]] [[상주시]] ~ [[1979년]] [[3월 4일]]<ref>{{뉴스 인용
         [[경상북도]] [[상주시|상주군]]에서 출생하여 [[일본]]에 유학, [[주오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주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대학은 중퇴하였다.
  • 김대균
         또한 [[대한민국]]뿐 아니라 [[일본]]에서 TOEIC만점을 받은 기록도 있다. 신토익도 계속 만점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2. 토익 일본어판 최초수출(토익 답이보인다) 최고 수익 기록과 토익교재 300여권 출간의 최다 기록도 가지고 있다.
         * 신토익백서(일본에 수출, 영단기 인강)
         * <TOEIC 답이 보인다> 시리즈 (일본에 수출)
  • 김대균 (학원인)
         또한 [[대한민국]]뿐 아니라 [[일본]]에서 TOEIC만점을 받은 기록도 있다. 신토익도 계속 만점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2. 토익 일본어판 최초수출(토익 답이보인다) 최고 수익 기록과 토익교재 300여권 출간의 최다 기록도 가지고 있다.
         * 신토익백서(일본에 수출, 영단기 인강)
         * <TOEIC 답이 보인다> 시리즈 (일본에 수출)
  • 김대우 (1900년)
         해방 뒤에도 그는 미군정에 의해 신임을 얻어 [[경상북도지사]]로 유임되어 일본인 관료 및 구 [[조선총독부|총독부]] 관료들을 파면하고 새로운 인물을 군수로 임명했지만, [[1946년]] [[공금]]을 횡령하고 도피하였다. [[1948년]] [[5월 10일]]에는 초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고, 5대, 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경성공전 졸업 후 [[일본]]에 유학하여 [[규슈 대학|규슈 제국대학]] 공학부로 진학했다. [[1925년]] [[규슈 대학|규슈 제국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해 [[조선총독부]] 관리 채용시험에 합격하면서부터는 유명한 친일파 관료가 되었다.
         [[1936년]] 총독부 학무국의 사회교육과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황민화 정책의 첨병인 이 자리는 [[일본 고등문관시험]] 출신들이 앉는 요직이었다. 김대우는 이 직위에 근무하면서 [[1937년]] 학무부 촉탁 [[이각종]]에게 〈[[황국신민의 서사]]〉를 작성하도록 하고, 각급 학교 등에서 이를 암기, 제창하고 출판되는 모든 서적에도 반드시 실을 것을 강요하였다.
         광복 직후 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지시에 따라 임시로 경무국장 직무대리에 임명되어 행정권 인수 인계 절차를 위한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안재홍]] 등 조선인과의 협상에 참가했으며, [[경상북도지사]]에 유임되었다. 미군정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는 수완가였고, 그의 유임은 의심할 것 없이 지방 정부에서 가장 큰 효율을 촉진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제40사단의 지원과 함께 김대우는 여러 군과 다른 지역의 관리들의 교체를 진행했는데, 일본인들을 제거하고 조선인들을 지명했다.' 한다. [[9월 2일]] 이후 [[미군정]]이 총독부의 행정 기능을 그대로 인수하면서 그도 계속 경북 지사로 근무하다가 [[10월 19일]]에야 미 군정 도지사의 고문으로 물러났다.
         [[1951년]] 일본인으로 조선총독부 관료로 조선에서 지방관을 역임한 고시진이 비밀리에 [[부산]]에 방문, [[장택상]]과 만났다가 [[족청]]계의 폭로로 장택상은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김대우는 고시진의 밀입국과 [[부산]] 밀항에 관련되어 [[1952년]] [[9월 28일]] 경찰에 긴급 구속되었다. [[10월 22일]] 구류기간이 만류되었으나 다른 이유로 계속 구속되었고 김대우는 구속의 부당함을 주장, 장준택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하여 항소하였다. [[1953년]] [[2월 8일]] 불기소 및 유예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1960년]]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목록|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해 [[6월 22일]] 그가 민주당 공천을 받고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것이 문제시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장면]] 당시 민주당 대표가 그의 입후보를 권고하고 도왔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1961년]] [[7월]]에는 [[5.16 군사 정변]] 직후 군정이 [[민주당]] 정권 관련자들을 용공으로 몰아 재판할 때 그가 민주당 각료들을 도와 일본 약품을 밀입수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제6대 국회의원 목록|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낙선하였다.
  • 김대우 (1988년)
         [[서울고등학교]] 입학 당시에는 포지션이 야수였으나, 3학년 때 투수로 보직을 바꿨다. 프로 진출 대신 대학 진학을 선택했고 늦게 보직을 바꿔 대학 진학에 어려움을 겪었다. 투구 폼은 [[이승엽]]이 [[일본]] [[지바 롯데 마린스]]에 진출해 있을 당시 팀 동료였던 [[와타나베 슌스케]]를 보고 따라했다.<ref>[http://isplus.liv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5595004&cloc= 넥센 신인 김대우, 단 두 경기만에‘대물’예감]{{깨진 링크|url=http://isplus.liv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5595004&cloc= }}《일간스포츠》, 2011년 6월 5일</ref>
  • 김대중
         당시 [[하의도]]는 인구 1만 명 이내의 섬이었으며 [[대한제국 고종]]의 고명딸인 [[덕혜옹주]] 소유였으나, 덕혜옹주가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며 [[하의도]] 소유권이 [[일본제국]]에 넘겨져서 섬 전체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가 되었고 주민들은 일시에 소작농으로 전락해 버렸다.<ref name="손세일">[[손세일]], 金大中과 金泳三 (1985, 일월서각)</ref> 김대중이 태어날 때 아버지 김운식의 본부인 김순례에게서 이복 형과 누나들이 있었고 그가 태어난 뒤로도 김대현과 김대의 2명의 남동생과 여동생 김진찬이 태어났다.
         아버지 김운식은 조선인 소작인들을 대표하여 일본인들에게 항의나 진정을 내곤 했다. [[장덕수]]가 잠시 피신하러 하의도로 내려왔다가 김운식과 가깝게 친교가 있었으며 장덕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한다. 김대중은 "내가 태어난 이러한 토양이 민족과 같이 불의에 항거하는 힘을 주었다."라고 추억하곤 하였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하의도의 집과 농토를 다 팔면서까지 아들을 목포로 유학시킨 것이다. 부모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공부 뒷바라지에 나섰다. 그 후 일본인 학생들의 따돌림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학업에 전념하여 [[1937년]] 수석으로 졸업하여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1939년]]에는 5년제(중.고등학제) [[목상고등학교|목포상업학교]](목상고등학교)에 입학했다.<ref>[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96510 김대중 前 대통령 지석(誌石) 전문 공개] 프레시안 2009.08.23</ref> 은행에 취직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한 김대중은 학생의 절반가량이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입학해서 3학년 때까지 반장을 할 정도로 뛰어난 통솔력을 보였다. 이때의 죽마고우로 뒷날 [[신민당 (1967년)|신민당]] 국회의원이 되는 [[임종기]]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지내게 된다.
         그는 독서광이면서 정치와 영어에 관심이 많아 작문과 역사 성적이 뛰어났으며 웅변에도 소질을 보였다 한다. 고교 시절 학적부에는 김대중에 대하여 "언변은 늘 정확, 명료하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탓인지 훗날 그는 서울에서 웅변학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학원에서 정치적 동지인 김상현과 만나게 된다. 그의 한 동창생의 말에 의하면, 한번은 일본인 교관이 전교생을 모아 놓고 시국에 대한 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교관이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하자 김대중만이 입을 열었다. 질문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유럽 정세에 관한 것이었는데 교관은 답변을 하지 못하고 어물어물하여 창피를 당하고 말았다.<ref name="손세일"/> 3학년부터 학교 측의 정책으로 취직반과 진학반이 나뉘었는데, 은행 취업을 목표로 취직반에 들어갔으나 이내 대학 진학으로 진로를 변경하여 취직반 반장을 그만두고 진학반으로 옮기게 된다.
         하지만 김대중은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였다. 4학년이 되면서 독서로 인해 넓어진 견문 탓에 반일 사상이 생겨나 일본인 학생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전 과목에 걸쳐 성적이 떨어지기도 했으며, 반일 작문이 문제가 됐다.<ref name="벌써 그립다 민족의 영웅 김대중 전 대통령">[http://breaknews.com/sub_read.html?uid=108854§ion=sc1 벌써 그립다 민족의 영웅 김대중 전 대통령] 브레이크뉴스 2009.08.25일자</ref> 일본의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미국 해군]]의 해상 봉쇄 정책으로 인해 여행 허가가 어려웠고 이에 학비가 무료인 [[만주국]]의 [[건국대학 (만주국)|건국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고려해 봤지만 진학해봐야 일본군에 징집이 될 것이 뻔하다는 2가지 이유에서였다.<ref name="벌써 그립다 민족의 영웅 김대중 전 대통령"/><ref name="1999년 김대중 자서전">{{서적 인용|제목=김대중 자서전 -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저자=일본NHK취재반|출판사=인동|연도=1999|isbn=9788995019405}}</ref> 15세가 되던 [[1938년]]에 '''도요타 다이쥬'''({{llang|ja|豊田大中}})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일본에 올 때마다 상업학교 시절 은사에게 이 이름을 사용했다고 [[아사히 신문]]은 보도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077661 말뿐인 '정쟁 중단' 與 '친일 시비' 잇단 공격]</ref>
         대학 진학을 포기한 김대중은 [[목상고등학교|목포상업학교]](목상고등학교)를 [[1944년]] 봄에 졸업하였다.<ref>[http://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436226&g_menu=050220 [김前대통령 서거]민주화의 거목 김대중, 그 파란만장했던 삶] 아이뉴스 2009.08.18</ref> 졸업 후엔 일본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 목포상선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하였다.<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733076&cloc= 가택연금 55회...투옥 6년...망명...사형선고]《중앙일보》</ref>[[1945년]] 해방이 되자 김대중은 종업원 대표로 추대되어 종업원단체가 조직한 회사 경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 해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에 참여하여 선전부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책인 임영춘의 추천으로 건준 목포시 지부에 가입해 선전책에 종사하는 한편 목포청년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9월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으로 발전적 해체라는 이름하에 해체되자 이채현의 추천으로 [[김두봉]]이 [[1946년]] [[2월]]에 [[연안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창당한 [[공산주의]] 정당인 [[조선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을 병행하였다.<ref name="안기부 문건">[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210100031&ctcd=&cpage=1 미공개 자료를 中心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6) 좌익 행동대원 출신의 대한민국觀] 월간조선 2002년 10월호</ref>
         진산 파동이 수습되고 1971년 [[5월 25일]] [[대한민국 8대 총선|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로 당선된 김대중은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차 일본을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72년]] 10월 11일 일본 정계 순방을 위해 도쿄에 체류하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측근인 [[송원영]]의 설득으로 [[미국]] 망명을 결심한다. 유신 선포 직후 김대중은 [[고노 겐소]]를 비롯한 일본의 여러 정치인들과 회견을 갖고 일본 언론을 통해 [[비상계엄령]]과 유신 체제를 비판했으며 그해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국민투표 무효선언을 주장하는 연설과 기자회견을 하는 등 정력적인 반 유신 투쟁을 벌인다. 1973년 [[하와이 섬|하와이]]를 경유하여 1월 3일 일본 도쿄에 도착한 김대중은 [[조윤형]], [[김상현 (1935년)|김상현]]의 구속 소식을 접하게 된다.<ref name="손세일"/> 3월 25일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교포 사회에서 강연 및 반정부 시위 활동을 벌인다. 초대 서울시장 [[김상돈]], [[미주민주국민회의]] 의장 [[임창영]], 전 [[한국신학대학교|한국신학대학장]] [[김재준]], 예비역 해군제독 [[이용운]] 등 교포 사회에서 활동중인 여러 지식인, 예비역 장성들과 뜻을 모은 김대중은 7월 6일 워싱턴에서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하여 초대의장에 추대된다. 7월 10일엔 한민통 일본지부 결성을 위해 일본에 입국, 비록 8월 8일에 납치되긴 했으나 15일 결성된 한민통 일본지부를 통해 미국과 일본의 교포를 규합하며 유신 반대 민주화 운동을 벌이게 된다.<ref>《전후일본외교사》, 이리에 미치마사, 1983년</ref><ref>[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96686 [81회] 한민통 발족위해 동분서주] 후광 김대중 평전</ref>
         김대중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에 의해 [[일본]] [[도쿄도]]에서 피랍된 뒤 129시간 만에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난 사건이다. [[1973년]] [[8월 8일]] 그는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의 반(反) [[박정희]] 집회 참가를 앞두고 호텔 그랜드팰리스 2212호에 투숙하고 있었다. 8월 8일,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던 [[양일동]] [[한국]] [[민주통일당]] 대표의 초청을 받아 가진 회담을 끝내고 나오던 도중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했고, 비어 있었던 2210호실에 감금되었다. 한국 정보기관원에 의해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야 서울 자택 부근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일본 경찰청은 현장에서 주일 한국대사관 김동운 일등서기관의 지문 등을 채취하고 관련자 출두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사건은 한국 공권력의 일본국의 주권침해라는 한·일 양국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김 서기관의 해임, 김대중의 해외 체류 중 활동면책,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의 사과 방일 등을 약속 받고 물러섰다. 그러나 미국의 조정 및 한일 간의 막후절충으로 김동운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국무총리의 진사방일(陳謝訪日) 등이 합의됨으로써 양국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도쿄에서 납치된 후 동교동 자택에 귀환하면서 귀국하자마자 가택연금과 동시에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였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의회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은 한국 중앙정보부의 범행"이라고 발언하면서 사건이 다시 불거졌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3&aid=0000005733 [특집] 박정희에게 한방 먹이다] 위클리경향 2005.02.18</ref> 이어 [[1977년]] [[7월 1일]]에 일본 교토통신과의 회견에서 증언을 두고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발언한 [[후쿠다 다케오]] 일본 총리를 비난하면서 "한·일 두 정부가 반성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의 명예와 신뢰성에 상처를 입혀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에 대한 양국 국민의 눈을 가리려 한다면, 더욱 상세한 사실을 밝혀 양국 정부의 죄상을 고발하겠다"라고 밝혔다.
         1988년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제13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89년 1월 9일 일본 왕 [[쇼와 천황|히로히토]]가 사망하자 당시 [[평화민주당 (1987년)|평화민주당]] 총재를 역임 중이던 김대중은 주한 일본 대사관저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히로히토 영정 앞에 머리를 숙여 조문했다.<ref>[http://www.frontiertimes.co.kr/news_view.html?s=FR01&no=33336&s_id=12&ss_id=0 [오늘]DJ, 'A급 전범' 히로히토 일왕에 머리 숙인 지 20년 돼] 프런티어타임스 2009.01.09</ref>
         [[1998년]] 11월 [[한일어업협정]]이 다시 체결되었다. 그 결과 독도가 한일 배타적 경제 수역 안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대해 독도의 영유권이 침해당했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이 청구되었는데, 헌법재판소는 어업을 위해 양국이 정한 수역과 섬의 영유권 내지는 영해 문제는 서로 관련이 없다 하여 이를 기각했다.<ref>대한민국과일본국간의어업에관한협정비준등 위헌확인, 헌법재판소 결정문, 99헌마139등, 2001년 3월 21일.</ref>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를 통해 한일관계 증진에 기여했다.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인데도 이를 중간수역으로 설정하면서 일본의 독도강탈 시도를 그대로 받아 들였다는 주장이 있다. 제성호 교수는 이런 중간수역은 일종의 '분쟁수역'이라고 평했다.<ref>[http://dokdocenter.org/dokdo_news/index.cgi?action=detail&number=7128&thread=19r02 독도본부 -제성호]</ref> 독도를 한일중간수역에 놓이게 한 신 한일어업협정을 수정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최낙정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실효성이 없다"고 일축했다.<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898017 前 해수부장관 "新한일어업협정 수정, 실효성 없어"]</ref> 협상을 다시 한다고 해도 일본이 독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을 것이고, 또 다른 마찰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신 한일어업협정은 김영삼 정부 때부터 5년 간 진행되다 김대중 정부 들어 마무리 된 것"으로 "독도 영유권을 훼손했다고 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50322010130320020020 <데스크 시각>현명한 분노 표출법]</ref> 최낙정 전 장관은 또, 독도가 배타적 경제수역이 아닌 한일중간수역에 놓인 것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빌미를 준 것 아니냐는 질의에 "어업협정은 영토 영유권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최 전 장관은 "신 한일어업협정 조문에서 이 협정은 영유권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고 밝히고 있고, 헌법재판소나 국제사법재판소 역시 어업협정은 어업 문제에만 국한됨을 판시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과 정책 추진 도중 잡음도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2월 8일 일본 [[도쿄 방송|TBS]] [[NEWS23|지쿠시 데쓰야 NEWS23]] 특별 회견에서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라는 발언<ref>[http://www.tbs.co.jp/news23/old/onair/taji/s00208.html News23 多事争論 パックオ(変えろ!)] {{웨이백|url=http://www.tbs.co.jp/news23/old/onair/taji/s00208.html |date=20130928003045 }} 일본 TBS 2000.02.08</ref><ref>[http://news.donga.com/3//20000210/7507479/1 <DJ, 김정일 긍정평가>南北정상회담 조기성사 의지] {{웨이백|url=http://news.donga.com/3//20000210/7507479/1 |date=20130927202210 }} 동아일보 2000.02.10</ref> 을 해서 한동안 야당인 한나라당에게 색깔론 공세를 받게된다.<ref>[http://news.donga.com/3/all/20011012/7747281/1 <전문가들의 진단>왜 색깔 공방 인가] 동아일보 2001.10.12</ref> 여기에 [[대북 불법 송금]] 사건이 터지면서 햇볕정책은 본격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이 있기 전인 2000년 6월 12일 5억 달러를 현대그룹을 통해 북한에 송금한 이 사건은, 2003년 특검으로 [[현대상선]], [[현대전자]], [[현대건설]] 등이 5억 달러의 비밀 자금을 마련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ref>[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20670042 [대북 송금] "현대건설도 1억5천만弗 줬다"] 조선일보 2003.02.06</ref> 특검 도중인 2003년 8월,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자살하면서 파문이 일었다.<ref>[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80470037 정몽헌 회장 돌연 투신자살] 조선일보 2003.08.04</ref> 여기에 김대중의 측근인 [[박지원 (1942년)|박지원]]은 SK등 대기업 자금 1억원 수수 및 대북 불법 송금 혐의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으며 특검은 종결되었다.<ref>[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2006&M=05&D=26&ID=2006052601067 박지원씨 징역3년 법정구속 현대비자금 150억은 무죄] 조선일보 2006.05.26</ref> 한편, 김대중은 퇴임 이후 첫 외신과의 인터뷰였던 2004년 [[파이낸셜 타임스]] 인터뷰에서 "북한에 1억 달러를 지원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라고 대북 불법 송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420874 DJ, "대북 송금은 후회 안한다"-FT인터뷰] 머니투데이 2004.06.19</ref> 이렇듯 햇볕정책이라는 명분 하에 2000년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하고 불법을 무릅쓰며 현금까지 지원했지만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북한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북한은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등 두차례 도발을 감행했으며 2003년엔 미국과의 대화가 진행되지 않을시 핵실험을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ref>[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2003&M=07&D=28&ID=0307281903 "北, 美와 대화 진전없으면 곧 核실험"] 조선일보 2003.07.28</ref>
         2002년,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이 제17회 [[FIFA 월드컵]]을 개최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공동 개최한 것이기도 하다. [[2002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열렸다.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을 [[슬로건]]으로 하였으며,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각각 10곳, 총 20개의 도시에서 31일 간 64경기를 치렀다.
         경제력에서 앞서고 오랜 준비를 해온 일본의 단독 개최가 타당해 보였지만 일본은 월드컵 본선진출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약점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일본은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가 결정된 후 1998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또한 대한민국은 FIFA 부회장 정몽준을 앞세워 적극적인 로비와 범국가적 유치전에 나서면서 상대적으로 축구계 중심의 일본에 비해 유치전의 무게감에서 앞섰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공동개최는 세계 축구계를 양분하고 있던 남미와 유럽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한 부정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김대중은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 침범 및 도발사태에도 불구, 예정대로 일본을 방문한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198743 김대통령 월드컵 폐막식 참석] 연합뉴스 2002.06.30</ref> 이날 교전사태가 발생한 직후 [[임성준]] 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사태발생사실을 보고받고 [[NSC]] 소집과 함께 대응책을 마련했다. 또 이날 저녁 국무위원들과 함께 청와대 본관에서 월드컵 3∼4위전경기를 시청하려던 계획도 취소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198277 <정부 긴급 대응>-청와대] 연합뉴스 2002.06.29</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8&aid=0000143314 [남북교전] 金대통령 "단호·의연하게 대응"] 한국일보 2002.06.29</ref> 이어 정부는 [[6월 30일]] 서해도발 과정에서 전사 또는 실종된 해군장병 5명에게 일계급 특진과 함께 훈장을 추서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5&aid=0000109201 서해교전 전사자 훈장추서] 국민일보 2002.06.30</ref>
         [[2002년]] [[6월 30일]] 국군수도병원 합동분향소에는 [[이한동]]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과 국회의원, 군 장병 등이 방문했다. 이 총리 등 국무위원 일행 21명은 이날 합동분향소를 방문, 헌화 및 묵념하고 고(故) 윤영하 소령에게 충무무공훈장, 고(故) 조천형 중사등 사망 및 실종 병사 4명에게 화랑무공훈장을 각각 추서했다. 이 총리는 이어 병실을 찾아 부상장병 19명과 일일이 악수하며 "훌륭하게 싸웠소. 용감했소"라고 짤막한 격려의 말을 건넸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198935 <서해교전 순국장병 조문 행렬>] 연합뉴스 2002.06.30</ref> [[2002년]] [[7월 2일]] 일본에서 귀국한 김대중은 국군수도병원을 방문, 서해교전에서 부상당한 장병들을 위로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199932 부상병 위로하는 김대통령] 연합뉴스 2002.07.02</ref> [[7월 23일]] 김대중은 서해교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장병 5명의 가족 12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북한의 불법적이고 무도한 도발행위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142307 金대통령 6·29서해교전 유가족 12명 청와대 초청 위로] 동아일보 2002.07.23</ref>
         [[2009년]] 8월 2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미국·일본의 지식인들이 남북화해와 동북아의 평화를 촉구하는 3개국 지식인 110명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평화선언을 제안한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 교수는 "성명서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 후퇴는 있을 수 없다는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와다 교수는 당시 북한의 로켓 발사와 유엔 제재 등 악순환이 이어지자 3국의 지식인들에게 공동선언을 제안했다. 지식인들이 호응했고 곧바로 문안 작성에 착수했다. 그러나 문안 합의를 위한 지식인들의 토론이 길어지면서 문구 수정 작업에 반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와다 교수는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구명운동을 벌인 후 꾸준히 한반도 평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대표적인 지한파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8201758015&code=940100 DJ 유지 잇자” 110명 평화선언, 日하루키 교수 제안] 경향신문 2009.08.20</ref>
         ===== 일본 정계 =====
  • 김동석
         1903년 [[경상북도]] [[선산]][[군(행정구역)|군]] 선산면 동부리(현 [[구미시]] 선산읍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안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협성학교에 재학하다 중퇴하였다. 이후 [[일본]] [[도쿄]] 외국어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 김동준(제국의아이들)
         2017년 1월을 끝으로 [[스타제국]]과 계약이 만료된 후 [[KBS 1TV]] 드라마 [[빛나라 은수]] 촬영에 집중하느라 소속사가 없었는데, 6월 21일 부로 [[스타제국]] 시절에 함께했던 전 매니저 황정문이 설립한 기획사인 골드문엔터테인먼트[* 그 전에도 보이그룹 비트윈을 "골드문뮤직"을 통해 프로듀싱한 적이 있다.]로 이적했다는 오피셜이 떴다.[* 바로 다음 날에는 [[정희철(제국의아이들)|정희철]]이 [[스타제국]]과 재계약하지 않고 [[사회복무요원]]으로 입대했다.] 그리고 2017년 8월 [[윤민수]]의 기획사인 더바이브와 [[일본]] 게임회사인 아사쿠사 게임즈가 골드문엔터와 합병하여 신설한 메이저9 소속으로 변경됐다. 그래서인지 [[4MEN]]의 곡 스트리밍을 인증했다.
  • 김두환
         [[일본]]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를 졸업했고 [[1935년]]부터 [[1940년]]까지 일본 데이코쿠(帝國) 미술학교(현재의 [[무사시노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재학했다.
         [[1938년]]에 열린 제1회 재도쿄 미술협회전에서 《풍경》, 《봄의 풍경》을 출품했으며 [[1940년]]에 열린 제3회 재도쿄 미술협회전에서 《여승》, 《향수》, 《자화상》 등을 출품했다. [[1941년]]에 열린 제28회 일본 이과회전(二科會展)에서 《정좌야 부인상(正坐也 婦人像)》으로 입선했고 [[1942년]] 11월 경성부에서 열린 반도 총후 미술 전람회(半島 銃後 美術 展覽會)에서 유화로 입선했다.
  • 김문집
         | 국적 = {{국기나라|일제 강점기 조선}} <br /> {{국기나라|일본}}
         '''김문집'''(金文輯, <small>일본식 이름:</small> 大江龍之介(오에 류노스케), [[1907년]] [[7월 7일]] ~ ?)은 [[한국]]의 문학평론가이다. 아호는 화돈(花豚)이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제국대학]] 문과에서 수학했다. 일본인 소설가 [[요코미쓰 리이치]]({{llang|ja|橫光利一}}) 문하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1935년]] 귀국했다.
         중학교 때부터 일본에서 수학한 김문집은 일본 문학이론을 수입해 와 한국문학의 전통을 부정하는 친일적인 성향을 초기부터 보였다. [[중일 전쟁]] 발발 후에는 [[조선문인협회]] 발기인과 간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촉탁을 맡는 등 친일 단체에도 가담했다.
         [[1941년]] 도일한 뒤 돌아오지 않았고, 일본에 귀화했다.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일본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계 일본인]]
  • 김민기(가수)
         1991년에는 [[독일]]의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 각본/비르거 하이만 작곡의 록 뮤지컬인 '[[지하철 1호선#s-2|지하철 1호선]]'의 [[한국어]] 번안과 연출을 담당했는데, 이 뮤지컬은 같은 해 김민기 자신이 사비를 들여 [[대학로(서울)|대학로]]에 개관한 학전 극장에서 공연되기 시작해 2008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상설 공연되었다. 심지어 2001년에는 [[독일]]과 [[중국]], [[일본]]에서 해외 순회 공연도 진행했고, 이 공로로 2007년에 독일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윤이상]]과 [[백남준]] 이래 세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2016년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국의 노벨문학상 후보로 잠시 언론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같이 언급된 것은 일본의 [[하루키]] 작가이며, 어떤 기사는 한국의 밥 딜런으로 [[한대수]]를 언급하기도 했다. [[http://kns.tv/news/articleView.html?idxno=251534&daum_check=|관련 기사]]
  • 김범부
          | 언어 =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 학력 = [[일본]] [[교토 대학|교토 제국대학교 대학원]] [[철학]][[석사]]
         * [[일본]] [[도요 대학|도요 대학교]] [[동양 철학|동양철학과]] 학사
         * [[일본]] [[도쿄 외국어대학|도쿄 외국어학교]] [[영어|영어학과]] [[전문학사]]
         * [[일본]] [[도쿄 대학|도쿄 제국대학교]] [[독일어|독어독문학과]] [[학사]]
         * [[일본]] [[교토 대학|교토 제국대학교]] 대학원 [[철학|철학과]] [[철학]][[석사]]
  • 김병석
         [[2009년]] [[몬테디오 야마가타]]와 2년 계약을 체결하며 [[일본]] 무대에 진출하여 2시즌 간 리그 22경기에서 출전 2골을 기록하였다. 계약 기간 만료 후 [[J리그 디비전 2]]의 [[사간 도스]]에 입단하여 1년 간 활약하였으나 국내 복귀를 마음먹고 [[K리그]] 행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여의치 않자 [[알나스르 (리야드)|알나스르]]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분류:198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축구 공격수]][[분류:축구 미드필더]][[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분류:비토리아 FC의 축구 선수]][[분류:몬테디오 야마가타의 축구 선수]][[분류:사간 도스의 축구 선수]][[분류:알나스르 (리야드)의 축구 선수]][[분류:대전 시티즌의 축구 선수]][[분류:안산 무궁화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서울 이랜드 FC의 축구 선수]][[분류:안산 그리너스 FC의 축구 선수]][[분류:청주 시티 FC의 축구 선수]][[분류:포르투갈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일본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사우디아라비아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프리메이라리가의 축구 선수]][[분류:사우디 프로리그의 축구 선수]][[분류:J1리그의 축구 선수]][[분류:J2리그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1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2의 축구 선수]][[분류:K3리그의 축구 선수]][[분류:서울전농초등학교 동문]][[분류:숭실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포르투갈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사우디아라비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김병석 (축구선수)
         [[2009년]] [[몬테디오 야마가타]]와 2년 계약을 체결하며 [[일본]] 무대에 진출하여 2시즌 간 리그 22경기에서 출전 2골을 기록하였다. 계약 기간 만료 후 [[J리그 디비전 2]]의 [[사간 도스]]에 입단하여 1년 간 활약하였으나 국내 복귀를 마음먹고 [[K리그]] 행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여의치 않자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분류:198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축구 공격수]][[분류:축구 미드필더]][[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분류:비토리아 FC의 축구 선수]][[분류:몬테디오 야마가타의 축구 선수]][[분류:사간 도스의 축구 선수]][[분류:알나스르 (리야드)의 축구 선수]][[분류:대전 시티즌의 축구 선수]][[분류:안산 무궁화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서울 이랜드 FC의 축구 선수]][[분류:안산 그리너스 FC의 축구 선수]][[분류:청주 시티 FC의 축구 선수]][[분류:포르투갈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일본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사우디아라비아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프리메이라리가의 축구 선수]][[분류:사우디 프로리그의 축구 선수]][[분류:J1리그의 축구 선수]][[분류:J2리그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1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2의 축구 선수]][[분류:K3리그의 축구 선수]][[분류:서울전농초등학교 동문]][[분류:한양중학교 동문]][[분류:한양공업고등학교 동문]][[분류:숭실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포르투갈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사우디아라비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김병윤
         1922년 [[경상북도]] 영일군(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일본]] 오사카전문학교(현 [[긴키]]대학교) 법과를 중퇴하고 포항수산대학(현 [[포항대학교]]) 증식학과를 졸업하였다.
  • 김병철 (1949년)
         * [[일본]] [[와세다 대학]] 명예 이학박사(2014년)
  • 김상기 (1901년)
         이후 서울로 건나가서 1926년를 졸업하였다. 이후 유학을 떠나 1931년, [[일본]] [[와세다 대학]] 사학과(동양사 전공)를 졸업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하여 1934년, [[이병도]] 등의 역사학자들과 함께 [[진단학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후 1939~1945년 사이에교사 · 강사 등을 역임하였다. 1945년, [[서지학회]]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경성대학|경성대학교]] 법문학부 교수로 재직하였다.
  • 김상기 (1918년)
         1918년 4월 14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김성수 (1891년)|인촌 김성수]]와 그의 첫 부인 [[고광석]] 사망하시고 이아주 부인 소생 4남으로 출생해 와 상과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상과를 졸업했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1070401072730136002</ref> 1957년 동아일보에 입사해<ref>http://news.donga.com/3/all/20110704/38517785/1</ref> 동아일보사에서 동아일보 출판부장<ref>{{웹 인용|url=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1107/h2011070321291884840.htm# |제목=보관 된 사본 |확인날짜=2011-10-06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517120018/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1107/h2011070321291884840.htm# |보존날짜=2014-05-17 |깨진링크=예 }}</ref> 과 [[동아방송|DBS 동아방송]] 국장, [[동아일보]] 사장, [[동아일보]] 부회장을 거쳐 [[동아일보]] 회장 등을 역임했다.
  • 김석류
         신장은 163cm이고 [[서울특별시|서울]] 출신으로 [[2002년]] [[한양대학교]] 생활과학부에 입학해 실내환경디자인을 전공하였고, 교내 방송 ‘라이온TV’의 아나운서와 동문회보의 기자로 일하면서 졸업 후 방송 분야로 진출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2005년]]에는 국비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1년간 교환 학생을 다녀오기도 했다.<ref name="asia1" />
         2010년 자신이 썼던 책 《김석류의 아이 러브 베이스볼》에서 썼던 '나•는•야•구•선•수•와•연•애•하•지•않•겠•다'라는 글과 달리 갑작스러운 결혼발표 후[[2010년]] [[12월 11일]], 야구 선수 [[김태균 (1982년)|김태균]]과 결혼하였고, 결혼 발표 이후에 야구팬들의 조롱과 악플을 집중적으로 받았으며 자신이 진행하던 프로그램들에서 모두 하차한 후,<ref>[[마이 데일리]] - 2010년 8월 기사 [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08221450352271 "김태균 피앙새 김석류, 모든 방송 활동 접어요"]</ref>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ref>{{뉴스 인용 |url=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6985223&cloc=olink |2=article |3=default |제목="남편 출장갔다 오는날 日 대지진" 카페 글쓴이는 '야구여신' 김석류 |출판사=중앙일보 |날짜=2011-12-26 |확인날짜=2012-04-02 }}{{깨진 링크|url=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6985223&cloc=olink }}</ref> '나•는•야•구•선•수•와•연•애•하•지•않•겠•다'[http://pgr21.com/pb/pb.php?id=humor&no=239429] 이 글귀는 야구팬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패러디 글귀가 되어 야구팬들 인터넷카페에서 명언,패러디,별명 관련 게시판에서 지속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http://m.ppomppu.co.kr/new/bbs_view.php?id=freeboard&no=2675920][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humorbest&no=542510{{깨진 링크|url=http://m.ppomppu.co.kr/new/bbs_view.php?id=freeboard&no=2675920%5D%5Bhttp%3A%2F%2Fm.todayhumor.co.kr%2Fview.php%3Ftable%3Dhumorbest&no=542510 }}]
  • 김석원
         | 복무 = [[일본제국 육군]]<br/>[[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15년~1945년(일본제국 육군) <br/> 1948년~1949년(대한민국 육군) <br/> 1950년~1956년(대한민국 육군)
         | 최종 계급 = [[일본제국 육군]] [[대령|대좌]] <br/> [[대한민국 육군]] [[2성 장군|소장]]
         | 지휘= 일본제국 제20사단 제78연대 기관총대<br/>일본제국 제20사단 제78연대 대대<br/>대한민국 [[제1보병사단 (대한민국)|제1사단]]<br/>대한민국 [[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도사단]]<br/>대한민국 [[제3보병사단 (대한민국)|제3사단]]
         | 서훈 내역= 일본 훈5등 [[서보장]]<br/>일본 공3급 [[금치훈장]]<br/>대한민국 [[화랑무공훈장]]<br/>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김석원'''(金錫源, <small>일본식 이름:</small> 金山錫源('''가네야마 샤쿠겐'''), [[1893년]] [[9월 29일]] ~ [[1978년]] [[8월 6일]])은 [[일본군]] 장교를 지낸 [[대한민국 국군]]의 [[대한민국 육군|육군 군인]]이다.
         * [[일본 육군사관학교]] 27기
         [[한성부]] 출생이다. [[1909년]]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일본 육사를 제27기로 졸업하고 [[1917년]]에는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 중대장으로 화려한 전과를 기록했고, [[1937년]] [[중일 전쟁]] 때는 대대장으로 출전했다. 일본군에서 제대할 때까지 별은 달지 못했으며, 최종 계급은 일본군 대좌(대령)였으므로 중장이었던 [[홍사익]]에 이어 일본군에 복무한 조선인 중 최고위급 인물이다.
         김석원은 일본군 장교로 근무한 정도를 지나 침략 전쟁에 일선 지휘관으로 적극 뛰어들어서 훈장을 받았고, 특히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들과 직접 전투를 벌인 인물로 잘 알려져 있으나 그가 세운 대부분의 전공은 중국군을 상대로 한 것이다. 김석원은 2개 중대의 병력으로 1개 사단의 중국군을 쫓아버리는<ref>{{서적 인용
         [[1945년]] 광복 당시에는 대좌 계급으로 평양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광복 후 바로 상경하여 이응준이 위원장을 맡은 [[조선임시군사위원회]]에 참가했다. 이 조직은 일본 육사 출신의 장교 모임인 [[계림회]]가 주도하여 조직한 군사 단체였다. 그는 대한민국 국군 대령으로 임관하여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 인사가 국군의 중추를 형성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브루스 커밍스 박사는 그가 김일성의 아내 김혜순의 죽음과 상관이 있다는 루머가 있다고 말했다.<ref>[http://www.hani.co.kr/arti/SERIES/231/396630.html 이승만·김일성 모두 ‘침공’ 추진…북, 중·소 설득해 선공], [[한겨레신문]]</ref> 그러나 이는 아무 근거없는 낭설에 불과하며, 저명한 학자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일본 관동군 노조에 쇼도쿠(野副昌德) 소장이 이끈 노조에(野副) 토벌대 산하 나가시마(長島玉次郞) 공작대가 동북항일연군 토벌 작전 중 1940년 4월에 제2방면군장(第二方面軍長) 김일성의 처라는 김혜순(金惠順)을 체포하였다. 19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가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金惠順)에 대해 보도했는데, 김혜순이 전향하여 항일연군 귀순을 위한 선무 공작 제1선에 나섰다고 하였다.<ref>[[:File:김일성 처 김혜순 체포 기사.jpg| 金日成의 愛妻가 귀순 선무공작 제1선에 - 소설같은 전향의 경위]] 조선일보 1940년 07월 05일 석간 2면</ref> [[이명영|이명영(李命英, 1928-2000)]]이 1970년 일본에서 나가시마 다마지로(長島玉次郞)를 직접 만나 당시 일에 대해 증언을 들은 바로는 김혜순은 나가시마의 집에서 같이 머물며 그 부인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ref>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317~318]</ref><ref>[http://news.joins.com/article/1381671?ctg= 진위 김일성 열전(41) 동북 항일 연군 내의 2대 김일성|2대 김일성의 입만과 군사 활동] 중앙일보 1974년07월18일<br>
         }}</ref> 그러나 당시 복무 기록 등에는 김석원이 함흥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북한 측이 일본군 '''74연대'''와 김일성 부대 사이의 "간삼봉 전투"가 있었다고 하는 날짜(1937년 6월 30일) 직후인 1936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는 "'''78연대''' 소속 대대장인 김석원 소좌"가 탑골공원에서 시국강연회를 했음을 보도하고 있다. 일본어 버전 역시 간삼봉에 김석원이 참가했다는 주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실제 간삼봉 전투가 일부 일본군 파견대와 김일성 부대 사이의 소소한 총격전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소위 간삼봉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 부대와 맞붙었던 일본군을 실제로 지휘한 사람은 서울 용산연대(20사단 78연대)의 김석원이 아니라, 그와 일본 육사 동기로 당시 함흥연대(19사단 74연대) 소속이었던 [[김인욱|김인욱(金仁旭, 1892- ?)]] 소좌였다.<ref>[http://db.history.go.kr/id/im_101_03034 김인욱(金仁旭, 1892- ?)] 조선인사흥신록, 한국사데이타베이스</ref> 이는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확인이 되며,<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8020020910102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8-02&officeId=00020&pageNo=1&printNo=5269&publishType=00010 王公族附武官 李王垠 附屬步兵 少佐 金仁旭 補 步兵第七十四聯隊附 (咸興)] 동아일보 1935-08-02 조간 1면 13단<br>
         |제목="일본군 출신 김석원 동상 철거하라" - 민족문제연구소, 성남중고 설립자 동상 철거요구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 중위로 참전했다가 [[필리핀]]에서 전사한 그의 차남 [[김영수 (1923년)|김영수]]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저서로 회고록인 《노병의 한(恨)》(1977)을 남겼다. 회고록에서 김석원은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어떤 경우는 무지했던 탓으로 또 어떤 경우는 올바른 인생관과 올바른 세계관을 못 가졌던 탓으로 그동안 내가 저지른 잘못은 많다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유야 어쨌든 일제 식민지 시대에 오래토록 일본군인 노릇을 했다는 것은 나의 생애 중에서 가장 큰 불명예라 생각되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 [[일본육군사관학교]]
         |장=김석원 :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 가네야마 대좌 (임중)}}
         [[분류:1893년 태어남]][[분류:1978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 육군 소장]][[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 당원]][[분류:공3급 금치훈장 수훈자]][[분류: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경주 김씨]][[분류:호국군사관학교 동문]][[분류:조선경비보병학교 동문]][[분류:통위부 보병학교 동문]][[분류:국방부 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
  • 김석원 (1893년 9월)
         | 복무 = [[일본제국 육군]]<br/>[[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15년~1945년(일본제국 육군) <br/> 1948년~1949년(대한민국 육군) <br/> 1950년~1956년(대한민국 육군)
         | 최종 계급 = [[일본제국 육군]] [[대령|대좌]] <br/> [[대한민국 육군]] [[2성 장군|소장]]
         | 서훈 내역= 일본 훈5등 [[서보장]]<br/>일본 공3급 [[금치훈장]]<br/>대한민국 [[화랑무공훈장]]<br/>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김석원'''(金錫源, <small>일본식 이름:</small> 金山錫源('''가네야마 샤쿠겐'''), [[1893년]] [[9월 29일]] ~ [[1978년]] [[8월 6일]])은 [[일본군]] 장교를 지낸 [[대한민국 국군]]의 [[대한민국 육군|육군 군인]]이다.
         * [[일본 육군사관학교]] 27기
         [[서울특별시|서울]] 출생이다. [[1909년]]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일본 육사를 제27기로 졸업하고 [[1917년]]에는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 중대장으로 화려한 전과를 기록했고, [[1937년]] [[중일 전쟁]] 때는 대대장으로 출전했다. 일본군에서 제대할 때까지 별은 달지 못했으며, 최종 계급은 일본군 대좌(대령)였으므로 중장이었던 홍사익에 이어 일본군에 복무한 조선인 중 최고위급 인물이다.
         김석원은 일본군 장교로 근무한 정도를 지나 침략 전쟁에 일선 지휘관으로 적극 뛰어들어서 훈장을 받았고, 특히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들과 직접 전투를 벌인 인물로 잘 알려져 있으나 그가 세운 대부분의 전공은 중국군을 상대로 한 것이다. 김석원은 2개 중대의 병력으로 1개 사단의 중국군을 쫓아버리는<ref>{{서적 인용
         [[1945년]] 광복 당시에는 대좌 계급으로 [[평양]]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광복 후 바로 상경하여 이응준이 위원장을 맡은 [[조선임시군사위원회]]에 참가했다. 이 조직은 일본 육사 출신의 장교 모임인 [[계림회]]가 주도하여 조직한 군사 단체였다. 그는 대한민국 국군 대령으로 임관하여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 인사가 국군의 중추를 형성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브루스 커밍스 박사는 그가 김일성의 아내 김혜순의 죽음과 상관이 있다는 루머가 있다고 말했다.<ref>[http://www.hani.co.kr/arti/SERIES/231/396630.html 이승만·김일성 모두 ‘침공’ 추진…북, 중·소 설득해 선공], [[한겨레신문]]</ref> 그러나 이는 아무 근거없는 낭설에 불과하며, 저명한 학자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일본 관동군 노조에 쇼도쿠(野副昌德) 소장이 이끈 노조에(野副) 토벌대 산하 나가시마(長島玉次郞) 공작대가 동북항일연군 토벌 작전 중 1940년 4월에 제2방면군장(第二方面軍長) 김일성의 처라는 김혜순(金惠順)을 체포하였다. 19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가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金惠順)에 대해 보도했는데, 김혜순이 전향하여 항일연군 귀순을 위한 선무 공작 제1선에 나섰다고 하였다.<ref>[[:File:김일성 처 김혜순 체포 기사.jpg| 金日成의 愛妻가 귀순 선무공작 제1선에 - 소설같은 전향의 경위]] 조선일보 1940년 07월 05일 석간 2면</ref>이 1970년 일본에서 나가시마 다마지로(長島玉次郞)를 직접 만나 당시 일에 대해 증언을 들은 바로는 김혜순은 나가시마의 집에서 같이 머물며 그 부인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ref>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317~318]</ref><ref>[http://news.joins.com/article/1381671?ctg= 진위 김일성 열전(41) 동북 항일 연군 내의 2대 김일성|2대 김일성의 입만과 군사 활동] 중앙일보 1974년07월18일<br>
         }}</ref> 그러나 당시 복무 기록 등에는 김석원이 함흥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북한 측이 일본군 '''74연대'''와 김일성 부대 사이의 "간삼봉 전투"가 있었다고 하는 날짜(1937년 6월 30일) 직후인 1936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는 "'''78연대''' 소속 대대장인 김석원 소좌"가 탑골공원에서 시국강연회를 했음을 보도하고 있다. 일본어 버전 역시 간삼봉에 김석원이 참가했다는 주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실제 간삼봉 전투가 일부 일본군 파견대와 김일성 부대 사이의 소소한 총격전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소위 간삼봉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 부대와 맞붙었던 일본군을 실제로 지휘한 사람은 서울 용산연대(20사단 78연대)의 김석원이 아니라, 그와 일본 육사 동기로 당시 함흥연대(19사단 74연대) 소속이었던 [[김인욱|김인욱(金仁旭, 1892- ?)]] 소좌였다.<ref>[http://db.history.go.kr/id/im_101_03034 김인욱(金仁旭, 1892- ?)] 조선인사흥신록, 한국사데이타베이스</ref> 이는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확인이 되며,<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8020020910102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8-02&officeId=00020&pageNo=1&printNo=5269&publishType=00010 王公族附武官 李王垠 附屬步兵 少佐 金仁旭 補 步兵第七十四聯隊附 (咸興)] 동아일보 1935-08-02 조간 1면 13단<br>
         |제목="일본군 출신 김석원 동상 철거하라" - 민족문제연구소, 성남중고 설립자 동상 철거요구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 중위로 참전했다가 필리핀에서 전사한 그의 차남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저서로 회고록인 《노병의 한(恨)》(1977)을 남겼다. 회고록에서 김석원은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어떤 경우는 무지했던 탓으로 또 어떤 경우는 올바른 인생관과 올바른 세계관을 못 가졌던 탓으로 그동안 내가 저지른 잘못은 많다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유야 어쨌든 일제 식민지 시대에 오래토록 일본군인 노릇을 했다는 것은 나의 생애 중에서 가장 큰 불명예라 생각되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 [[일본육군사관학교]]
         |장=김석원 :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 가네야마 대좌 (임중)}}
         [[분류:1893년 태어남]][[분류:1978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 육군 소장]][[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 당원]][[분류:공3급 금치훈장 수훈자]][[분류: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
  • 김석훈(탤런트)
         말끔한 이목구비의 젠틀한 [[미남]]에 속하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배우이다. [[일본]]의 약간 여리여리한 이미지의 남자배우들과 닮아보이지만, 여림에만 갇힌 것이 아닌 이지적인 특유의 외유내강이다. 이미지는 선하면서도 강단성이 동시에 있고 연기에서도 관련배역을 맡았을 때 온유함과 강인함이 함께 배어난다.
  • 김성수 (1891년)
         그러나 그의 집안의 부의 축적과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는데, 그의 아버지와 생부 형제가 벼슬길에 있을 때 관권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했고, 심지어는 중국·일본과 밀수를 하여 돈을 모았다고 한다.<ref name="malsso1">[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97686 '일장기 말소'에 분노한 '민족지' 창업주 - 오마이뉴스] 2004년 07월 13일자</ref>
         일본 유학시절의 김성수(왼쪽 앉은 이)와 김연수.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간 김성수는 법적으로는 김연수의 사촌 형이었다.
         이때 만난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평생을 그와 함께 언론, 사회 활동, 정치 활동을 하는 정치적 동지가 된다. 그 뒤 그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함께 가족 몰래 비밀리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인 [[상인]]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일본]] [[상인]]들이 면제품, 농기구, [[냄비]], [[석유]], [[물감]], [[비누]], 유리그릇, [[거울]], [[가위]], [[사탕]] 등을 가게에 들여오거나 차에 싣고 산간벽지를 다녔다.<ref name="in59">인촌기념회, 인촌김성수전(인촌기념회, 1976) 59페이지</ref> [[일본]] 상인이 싣고온 문물에 호기심을 보이자 할아버지 [[김요협]]은 그런 물건들은 [[삼강오륜]]을 해치는 이물(異物)이라 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으나, 호기심이 많던 김성수는 가게 같은 곳에 다니며 이것저것 살펴보았다.<ref name="in59"/> 한편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온 박모라는 이와 어울려 화투에 빠졌고, 개화문물을 구경하느라 경성을 돌아다녔다.<ref name="in60">인촌기념회, 인촌김성수전(인촌기념회, 1976) 60페이지</ref> 그가 지방에서 온 건달과 어울린 것을 알게 된 할아버지 [[김요협]]은 대노하여 가족을 소집하고, 나라의 형편이 어떠한데 왜놈의 놀음에 정신을 팔고 있다며 김성수를 마당에 엎드리게 한후 볼기를 쳤다.<ref name="in60"/>
         [[1908년]] 4월 줄포 근처의 후포에서 있었던 한 교육계몽운동가의 시민권, 평등, 주권재민의 사상등에 대한 공개강연을 들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금호학교에 입학해 영어, 한국어, 역사, 지리, 물리, 화학, 음악 등 본격적인 근대 학문을 공부했다. 이곳에서의 새로운 교육을 통해 일본이라는 넓은 세계로 나아가 더욱 깊이 있고 더욱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것으로 추정된다.{{출처|날짜=2013-09-24}}
         청년기에 김성수는 [[문맹]] 백성들을 보며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켜서 조국의 [[민족 해방|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 하에 [[도쿄|동경]][[유학]]을 결심<ref name="건국영웅"/> 했다. 그는 무식함과 무지함이 조선의 멸망의 원인이라 확신하고 먼저 배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계몽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1908년]] 10월 상투를 단발하고, 상투를 자른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사죄의 편지를 부모에게 남기고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함께 비밀리에 [[일본]](日本)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가정 사정 때문에 [[백관수]]는 중도에 포기했지만 김성수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길을 떠났는데, 집안에서는 병환을 핑계로 노비를 보내 그를 불렀으나 자신을 부르려는 계획임을 간파하고는 하인을 돌려보낸 뒤 급히 [[전라북도]] [[옥구군]]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송진우 (정치인)|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일본]] [[도쿄]]에 도착한 김성수는 [[도쿄]] 시내에 하숙하며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와 [[수학]] 등을 배웠는데, [[일본어]] 실력이 다소 부족했던 김성수는 별도의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일본어]] 회화를 배웠다. 고향에서 부쳐주는 학비 외에 시내에서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함께 점원 등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과 학비를 조달하였다. [[1909년]] 4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함께 [[긴조중등학교]](錦城中等學敎) 5학년에 편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를 주로 집중해서 배웠으며, [[1910년]] 3월 [[긴조중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장덕수, 일본 와세다 대학 시절 만난 친구로, 동아일보와 한민당을 함께 운영한 정치적, 사상적 동지였다.
         이어 4월 김성수는 역시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함께 [[일본]] [[도쿄|동경]]의 [[와세다 대학교]](早稻田大學敎)에 입학하였다.<ref name="건국영웅"/> 이후 [[와세다 대학교]] 예과(豫科)에서 수학하던 중, [[8월 29일]] [[대한제국]]이 강제로 [[한일 병합 조약|병합]]되자 충격을 받은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귀국하였고, 김성수는 홀로 [[일본]]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1911년]] [[와세다 대학교]] 예과를 마치고, [[와세다 대학교]] 본과에 입학, [[정치경제학|정경학부]]에서 공부했다. 김성수는 집안에서 부치는 학비 등으로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였다. [[와세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은 [[설산 장덕수]], [[해공 신익희]], [[민세 안재홍]], [[가인 김병로]], [[낭산 김준연]] 등이었다.
         유학 당시에도 그자신 역시 유학생의 신분으로, 김성수는 불우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학생들을 찾아 지원해주었고, 대신 학비를 납부해 주기도 하였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그해 7월 귀국하였다.<ref name="건국영웅"/> 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승문]]에 의하면 인촌의 도움을 받은 확인된 사람만도 유학생 50여명을 포함 73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때 김성수는 일본에서 산업자본의 골간이 되는 부분들을 눈여겨 봐둔 뒤, [[기업]]·[[학교]]·[[언론]] 등을 통해 현실적인 힘을 마련하겠다<ref>박태균, 한국전쟁(책과함께, 2006) 42쪽</ref> 고 다짐하였다. 당시 식민치하의 조국에는 자원이 빈약하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구국운동의 방략으로 그는 세가지 목표를 설정 '인재배양'(人材培養), '경제자립'(經濟自立), '언론창달'(言論暢達)이라는 목표를 수립하였다.
         [[1914년]] 가을 김성수는 교육계몽에 뜻을 품고, 사립 [[중등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서울특별시|서울]]로 떠났다. 이때 집안에서 자금을 주지 않자, 그는 3일동안 단식을 한 끝에 집안에서 자금을 마련해 갔다.<ref name="ill7">일석 이희승 전집 7(서울대학교출판부 | 2007) 321</ref> 그의 첫 시도는 [[사립학교]] 설립안이었는데, [[조선총독부]] 교육국으로부터 거절 당하면서 무산되었다.<ref name="건국영웅"/> [[1914년]]말 김성수는 [[최남선]](崔南善), [[안재홍]](安在鴻) 등 [[일본]] 유학시절 동창들과 함께 교육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白山學敎)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안을 만들고 학교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허가를 해주지 않아 좌절당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설립인가 거절 이유로는 백산은 [[한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을 뜻하는 것이니, [[학교]] 이름이 불온하다고 퇴짜를 놨던 것이다.<ref name="ill7"/> 그해 [[안희제]] 등이 세운 [[백산상회]](白山商會)가 독립운동 자금을 공급하는 단체임이 총독부에 정보가 입수되면서 [[백산상회]]와의 관련성을 취조당했다.
         [[중앙학교]]의 인수와 동시에 자신도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ref name="ill72">일석 이희승 전집 7(서울대학교출판부 | 2007) 322</ref> 경제학 원론 교과목을 가르치면서 교재가 없었던 터라, 김성수는 학생들에게 일일이 필기를 시키고<ref name="ill72"/> 이를 꼼꼼히 지도하였다. 어려운 고학생들의 장학사업도 지원하였다. [[1915년]] 9월에는 부모를 여의고 학비곤란으로 귀국한 [[이광수 (1892년)|이광수]]를 후원하여 [[일본]]으로 유학시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시키기도 했다.<ref>[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337 네이트 한국학<!--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337 }}</ref> [[이광수 (1892년)|이광수]]는 당시 형편상 [[오산학교]]에서 [[교육자|교편]]을 잡고 있었다.<ref>[[이광수 (1892년)|이광수]](문학의 이해와감상31)(한승옥, 건국대학교출판부, 2008) 29</ref>
         이때 김성수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본]] 사람들에게 식민통치를 당하는 것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며, 알려면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이 자주독립을 할 수 있다. 지금 유행하는 학문이 계속 빛을 보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20년, 30년 후에는 바뀔 수가 있다. 문학보다는 과학에 관심을 가지라.'고 학생들에게 훈육하였다.<ref name="sa1">과학동아 2003년 12월호(동아사이언스, 2003) 177페이지</ref> 그의 감화를 받은 학생 [[정문기]]는 후에 수산학자가 된다.<ref name="sa1"/> 장로인 [[박관준]]으로부터 [[개신교]] 입교를 권고 받았으나, 그는 [[기독교]]에 관심은 있다고 대답하였다.<ref>하나님의 지문(박은배, 새로운사람들, 2007) 301</ref> 일부 교인들의 끈질긴 선교노력에 일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기는 하였으나 신앙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식민지|식민]] 치하의 [[조선]] 백성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한국]]에 유행던 시절,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민족]][[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자본 육성 계획을 세웠다. 김성수는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보]]의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하였다. [[1917년]] 방직기술자인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들여<ref name="최준1">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전진문 지음 | 황금가지 | 2007) 182쪽</ref> 일제 당국은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사업을 승인해주었다. [[1917년]]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광목]]제조 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윤치소]] 등으로부터 인수하였다.
         일본에서 도입한 도요타 방직기, 일본 업체들과의 경쟁을 위해 일본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량을 증가시켰으며, 그는 기계의 성능을 직접 시험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이 조선에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시장진출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창안해낸 것은 조선인 지사들을 주주로 공모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외부 자본의 침투는 민족의 경제를 갉아먹고, 외환의 유출을 촉진한다는 점을 들어 조선인 인텔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1918년]] 봄 [[경상북도]] [[경주시|경주]]를 찾아 [[최부잣집]]의 후손 [[최준]]을 방문하였다.<ref name="최준1"/> 김성수가 [[최준]]을 찾은 것은 [[경성방직]]과 후에 세우게 될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 인사들의 참여를 권유하기 위함이었다.<ref name="최준1"/> 김성수가 [[경상북도|경북]] [[경주시|경주]]를 다녀간 지 1년 후 [[1919년]] 10월 [[경성방직]]이 설립되었고, [[최준]]은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ref name="최준1"/> [[최준]]은 김성수와 [[안희제]] 등과 교류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한다. 김성수는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설립자가 되었는데, 그해 11월 [[부산]]에 설립된 조선방직회사는 [[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ref>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584~585</ref> 중앙학교의 졸업생 중에서도 [[윤주복]](尹柱福) 등은 그의 권고로 규슈대학 방적학과로 진학, 졸업한 뒤 [[경성방직]]에 입사하기도 했다. 전국을 다니며 모집한 끝에 많은 주주와 후견인들을 모았고 [[경성방직|경방]] 창림 발기인들의 주식은 3,790주였고 16,210주는 일반공모주였다.
         [[1918년]]에는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중앙상공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국내 의류업체들이 [[일본]]의 면직물 수입이 증가하면서 일본 면직물에 의존하여 제품을 생산, [[한국]]의 [[면직물]]은 거의 소멸될 위기에 처하자, [[1918년]]부터 중앙상공주식회사를 통해 직접 면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파리강화회담]]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약소국 국민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사실이 한반도에도 알려지면서 이를 접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했다.<ref name="동아일보"/>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김성수는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 어릴때부터 오랜 친구였던 고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를 학교 학감직에 임명한 뒤 [[1919년]]초 그에게 [[학교장]]직을 넘기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어 송진우의 도움을 받아 함께 일본 [[도쿄]]에 연락 동경 조선 유학생들과 기맥을 통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1918년]]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송진우 등의 가담으로 중앙학교 교장직을 맡긴 후 주로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비밀리에 추진하였다.<ref name="동아일보"/><ref name=autogenerated3 />
         [[1919년]] 10월에는 중앙상공주식회사와는 별도로 근대 [[자본주의]]적 회사인 [[경성방직]]을 창설하여 운영하였다.<ref name="동아일보"/><ref name="기념">《인촌기념회》[http://www.inchonmemorial.co.kr/incho_think1.html 사상과 일화 - 기업운동] {{웨이백|url=http://www.inchonmemorial.co.kr/incho_think1.html# |date=20070812233739 }}</ref> [[일본]]의 방직회사들과의 경쟁을 위해 대량 생산과 소량의 고품질 생산 등의 기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의 기술로는 [[일본]]의 신식 기술과 경합하기 어렵다 판단하고 [[일본]] 방직기계와 [[미국]]의 방직 기계를 도입하였다. 도입한 기계의 성능을 그는 직접 일일이 시험한 뒤 공장으로 보냈다.
  • 김성재 (가수)
         생전에 신장은 180cm이고 체중은 65kg이었던 그는 [[초등학교]] 시절과 [[중학교]] 시절에 [[일본]] 도쿄 요요기 우에하라에 살았고, 그의 호(號)는 범아(凡兒)이다.
         * [[삼성초등학교 (안양시)|삼성초등학교]](전학) → [[서울도곡초등학교]](전학) → [[서울대도초등학교]](전학) → [[서울언북초등학교]](전학) → [[일본]] [[도쿄 시부야 우에하라 소학교]] 졸업
         * [[일본]] [[도쿄 세인트 메리 국제 학교]] 중학부(전학) → 일본 [[도꾜조선중고급학교|도쿄 한국중학교]] 졸업
         [[분류:1972년 태어남]][[분류:1995년 죽음]][[분류:1990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래퍼]][[분류:아이돌 가수]][[분류:대한민국의 힙합댄서]][[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의문사한 사람]][[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김성춘
         [[1920년]]을 전후하여 영화 공부를 위해 [[일본]]에 유학한 뒤 처음에는 연기를 공부했다. 이후 영화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나고야 시]]의 [[동아키네마]]에서 조명 기술을 전수받았다.<ref>{{뉴스 인용
          |제목 = 똥기저귀 빨며 일본인에게 영화를 배웠지
         }}</ref> 일본에서 경험을 쌓은 뒤 [[1930년대]] 초반 귀국하여 선진적인 조명기술을 한국 영화에 도입하여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조명기사로 평가된다.
         데뷔작은 [[사실주의]] 성향이 강한 [[방한준]]의 《살수차》(1935)이다. 김성춘은 일본에서 최신 조명기를 들여와 이 영화의 조명을 담당함으로써 한국 최초로 빛과 조명이라는 개념이 영화 제작에 적용되었다.<ref>{{뉴스 인용
  • 김소운
         | 학력 = [[일본]] [[도쿄]] [[가이세이 학교|가이세이 중학교]] 중퇴
         * [[일본]] [[도쿄]] [[가이세이 학교|가이세이 중학교]] 중퇴
         [[부산광역시|부산]] 출신으로 13세에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인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llang|ja|北原白秋}}) 문하에서 시를 공부한 뒤 일본 시단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한국의 민요와 동요, 시를 일본에 번역 소개했고, 수필도 활발히 창작했다.
         작품으로는 서간체 장편 수필로 일본에서도 반향을 일으킨 《목근통신》(1952), 수필집 《삼오당잡필》(1955) 등이 있고,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행복한 부부 세 쌍의 일화를 소개한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이 잘 알려져 있다.
         일본 체류 중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이승만]]에 의해 입국이 거부되어 [[1965년]]에야 영구 귀국했다.
         김소운의 친일 혐의에 대해서는, 친일 작품 발표 시기가 강압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일제 강점기]] 말기에 몰려있고 편수도 적은 점, 평생에 걸친 주요 관심사가 한국 문학의 번역 소개였고 일본에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데 일조한 공으로 [[1980년]]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는 점, 보통학교 재학 중 밀항으로 도일한 김소운에게는 일본이 문학적인 고향이었다는 점 등 여러 요소로 인해 유가족의 부당하다는 항변이 있었다.<ref>《연합뉴스》 (2007.8.29) [http://www.yonhapnews.co.kr/society/2007/08/29/0701000000AKR20070828197000005.HTML "母는 민주투사 父는 친일작가?"] {{웨이백|url=http://www.yonhapnews.co.kr/society/2007/08/29/0701000000AKR20070828197000005.HTML# |date=20070930033522 }}</ref>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서는 제외되었다.
         부인 김한림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전신인 구가협 창설을 주도했고, 딸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복역한 농민운동가이다.<ref>《경향신문》 (2007.8.2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8291746201&code=960205 “김소운 친일문인 규정 억울 우리문학 日소개 애썼을뿐”]</ref> 큰딸 김영의 딸은 일본 가수 [[사와 도모에]].
  • 김수영
         | 학력 = [[일본]] [[히토쓰바시 대학교|도쿄 상과대학교]] 중퇴 <br /> [[연세대학교|경성 연희전문학교]] 중퇴
         이후 [[일본]]의 [[히토쓰바시 대학교|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학병]] 징집을 피해 대학 중퇴 후 [[만주]]로 이주했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시 창작을 시작하였다. 또 [[연세대학교|연희전문학교]]에서 잠시 수학했으나, 졸업하지 못한 채 중퇴했으며, [[1947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후 [[김경린]], [[박인환 (시인)|박인환]]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다.
  • 김수철 (범죄인)
         </ref>.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일보]]는 들의 학교 보안이 어떠한가를 보도하였다. [[미국]], [[프랑스]], [[호주]]의 경우에는 학부모조차도 쉽게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에는 같은 지역에 사는 학생들끼리 집단으로 하교(下校)하고, 단체 하교에서 빠지더라도 부모나 미리 정해진 보호자 없이 혼자 보내지 않는다고 한다<ref>{{뉴스 인용
  • 김수환(추기경)
         [[동성고등학교|동성상업학교]][* 現 동성중학교&[[동성고등학교]].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및 [[혜화동 성당]]과 바로 이웃해 있다.] 재학 시절, "[[천황]] 폐하의 생신을 맞이하여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윤리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그러므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 이에 당시 교장이던 [[장면]]은 노발대발하며 따귀를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아직 나이도 어린 학생이던 김수환이 [[일본인]]들과 [[일본 경찰]]에게 고문을 받을까봐 우려하여 쇼를 한 것이었다. 즉 장면이 적절하게 쇼맨십을 발휘하여 김수환의 목숨을 구해준 셈이다.[* 이 일화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피소드/2017년#s-16|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61회]]에 방영되었다.]
         이후 장면은 김수환이 [[일본]] [[조치 대학]][*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미션스쿨]]. 예수회는 한국에서 [[서강대학교]]도 운영하고 있다.]으로 [[유학]]을 갈 때, 추천서를 써주는 등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도 훗날 "장면 선생님이 해주시는 [[영어]] 강의 때 [[미국]]의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들었고, 여러 가지로 나를 도와주신 분이라 존경한다"고 언급했다. 비록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김 추기경은 "장면 총리의 시복시성을 희망한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로 존경심을 표했다.
         [[조치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수학하던 시절,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와중에도 자신을 차별하지 않은 [[독일인]] 신부에게 감명받아 사제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2016년 2월에 발매된 공식전기에 따르면, 신학교 시철 초기까진 진지하게 [[신부(종교)|신부]]가 될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은 개인상회를 열어 여태껏 형제들 키우느라 고생하신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겠다는 꿈이 있어서 그랬다고. 그러나 어머니의 소망을 이루어 드리고 싶은 마음과 신학교 선생님들과 여러 친구들에게 여러 조언을 들으면서 꾹 참았다고 한다.] 당시 김 추기경의 은사였던 독일인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는 해방 후 한국에 건너가 [[서강대학교]]의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김 추기경은 [[2002년]] [[게페르트]] 신부가 사망했을 때, 직접 장례[[미사]]를 주례했다. [[게페르트]] 신부(1904~2002)의 일본 [[조치대학]] 시절 제자인 [[김수환]] [[추기경]]은 "게페르트 신부님은 사제로서 훌륭했을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자상한 분이었으며, 특히 한국 유학생들에게 늘 자애롭게 대해주었다"고 회고했다.
          * 종교적 측면뿐 아니라 학문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한 [[먼치킨]]이었다. [[독일어]], [[라틴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하고 [[영어]], [[일본어]] 역시 수준급이라고 하며 신학자로서의 학문적 업적과 성취도 상당한 수준.[* [[독일어]]는 신학교 우수 성적자로 선발되어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어느 정도 배웠고, 나중에 [[독일]]로 박사과정을 위해 유학을 갔을 때 논문을 쓰기 위하여 마스터 했다고 한다. [[영어]]의 경우엔 [[일본군]]에 징집됐다가 풀려났을 때 만난 외국인 사제를 통하여 기초를 배우고, 나중에 [[괌]]에서 전범재판 증언하러 들렀을 때 틈틈이 공부하셨단다.] 애시당초 '''최연소 추기경 서임''' 기록을 세울 정도로 능력은 출중한 사람이었다. 특히 당시에는 유색인 출신 사제에 대한 은근한 차별이 꽤나 있었던 시대임을 김안하면 정말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김수환 추기경에게 [[친일몰이]]를 하는 사람도 가끔 있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로 '''강제적으로''' 징집된 [[일본군]] [[장교]]였던 경력이 있다는 것을 트집잡은 것이다. 그런데 사실 사관후보생으로 강제징집 되었던건 맞지만, 장교 교육과정에서 탈락되고 병사로 강제징집되면서 일본군에 복무했다.
         애초에 김수환 추기경은 강제징집이었던만큼 자발적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는 근본적인 원인부터 다르긴 했다. 비록 사관후보생으로 강제징집되기는 했지만 훈련과정에 들어있던 사상검증을 통과하지 못해서 낙오하는 형식으로 [[장교]]로 임관을 하지도 못했으며,[* 강제징집 당시 훈련소의 고위간부와 면담형식으로 사상검증을 하였는데, [[일본]]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하여 통과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위험한 발언을 한 김수환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입장이었지만, [[일본군]] 측에선 당장 죽이기보다는 최전방 보초역으로 배치하고 그냥 내버려두면 [[미군]] 폭격에 휘말려 알아서 죽을 것으로 생각해 [[차도살인]]처럼 크게 손을 안 댔던 걸로 보인다. 실제로 이 발언 이후 일본군 장교들에게 좀 맞았다고 한다.] 다시 밑바닥 계급인 [[병사]]로 재징집되면서 일본 남단의 섬에서 미국의 군함이나 폭격기가 오는지 감시하는 보초임무만 맡았다. 당시의 일본군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을 고급인력으로 분류하고 조선인/일본인의 구분없이 모두 다 사관후보생으로 강제로 밀어 넣었는데, 대학을 다니는 엘리트들을 공들여 키워서 일본 본토에서 장교로 활동하게 만드려는 못된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김수환 [[추기경]]처럼 일본군으로 강제징집되었던 조선인 청년들도 매우 많았으며, 사실상 총알받이 신세였던 [[카미카제]] 특공대로 징집된 사실도 흔했다. 게다가 당시의 일본군은 [[구타]] 및 [[가혹행위]]도 일상다반사였고, 만날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면서 미친 놈들처럼 [[반자이 어택]]을 했던 막장스러운 군대였다. 게다가, 사병도 아니고 장교를 사실상 강제징집으로 뽑는다는 것부터가 제대로 된 군대와는 백만광년도 넘게 떨어진 개판 5분전인 군대나 다름없었다.
  • 김순남 (작곡가)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 에서 태어났고,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1938년]]에는 [[도쿄 고등음악학원]] 본과 작곡부에 입학하였다. 당시 일본 [[프롤레타리아]] 음악계의 [[하라 다로]]를 만나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 김승용
         [[2010년]] [[전북 현대 모터스]]로 이적하였으나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다음 시즌 [[일본]] [[J리그]]의 [[감바 오사카]]로 이적하였다. 이적 후 리그 초반엔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으나 시즌 중반으로 접어들며 컨디션을 회복하여 주전으로 도약해 리그 28경기에서 4골을 기록하였다.
         * [[2011년]] {{국기그림|일본}} [[감바 오사카]]
         [[분류:전북 현대 모터스의 축구 선수]][[분류:감바 오사카의 축구 선수]][[분류:울산 현대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부리람 유나이티드 FC의 축구 선수]][[분류:강원 FC의 축구 선수]][[분류:센트럴코스트 매리너스의 축구 선수]][[분류:칭다오 황하이의 축구 선수]][[분류:인천 유나이티드 FC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1의 축구 선수]][[분류:A리그의 축구 선수]][[분류:J1리그의 축구 선수]][[분류:타이 리그1의 축구 선수]][[분류:중국 갑급리그의 축구 선수]][[분류:2008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중국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일본의 외국인 축구 선수]]
         [[분류:오스트레일리아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태국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오스트레일리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김시덕 (문헌학자)
         |학력 = [[일본]] [http://www.nijl.ac.jp/ 국문학연구자료관] 문학 박사<ref name="profile"/>
         * [[2010년]] [[일본]] [http://www.nijl.ac.jp/ 국문학연구자료관]({{llang|ja|国文学研究資料館|고쿠분가쿠켄큐시료칸}}) 문학 박사<ref name="profile"/>
         * 《임진왜란 관련 일본문헌 해제 - 근세편》(공저), 문, 2010. {{ISBN|9788996411192}}
         * 《그들이 본 임진왜란: 근세 일본의 베스트셀러와 전쟁의 기억》, 학고재, 2012. {{ISBN|9788956251660}}
         * 《그림이 된 임진왜란: 근세 일본 고문헌의 삽화로 보는 7년 전쟁》, 학고재, 2014. {{ISBN|9788956252612}}
         * 《일본의 대외 전쟁》, 열린책들, 2016. {{ISBN|9788932917931}}
         * 《일본 괴담집》, 문, 2010. {{ISBN|9788994427041}}
         * 《고문서 반납 여행 - 전후 일본 사학사의 한 컷》, 글항아리, 2018. {{ISBN|9788967354930}}
  • 김시진(야구감독)
         태평양-현대-넥센 시절[* [[염경엽]]과 김시진은 2000년 이전 태평양-현대 시절에는 코치와 선수로, 2001년 은퇴식을 치른 후부터 2006년까지는 코치와 팀 운영진([[프런트]])으로, 2007년과 2012년에는 감독과 코치 지간이었다. 코치, 감독은 김시진, 선수, 운영진, 코치는 [[염경엽]].] 그와 한솥밥을 먹었던 [[염경엽]] 감독이 김시진 본인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984981|미국과 일본을 돌면서 야구 공부를 한다고 한다]].
         이후 [[WBSC 프리미어 12|프리미어 12]] 대회를 앞두고 [[안치용]], [[이종열]]과 함께 국가대표팀의 전력분석관으로 합류하였으며, 전력분석 팀장으로 선임되었다. [[대한민국]] 경기가 있을 시간에는 관전하지 않고, 그 시간에 타 국가의 경기 분석을 했다고 한다. [[삿포로]]에서 열린 개막전 때 그는 [[일본]]이 아닌 [[대만]]에 머무르며 분석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예 한일전을 앞두고서는 [[오타니 쇼헤이]] 이후를 공략하자는 생각으로 분석했다고 한다. 다만 대회를 앞두고 [[베네수엘라]] 국가대표팀이 갑작스럽게 국대 엔트리를 무려 13명이나 교체하는 바람에, [[베네수엘라]] 대표팀에 대한 전력분석은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11&aid=0000444319|애를 좀 먹었다고 한다]].
          * [[이만수]] 前 감독과 특별한 사이이다. 대구상고 동문, 한양대 동문, 삼성 라이온즈 동문이자 고교 배터리, 대학 배터리, 프로팀 배터리의 관계이다. 이따금씩 방송에서 김시진이 [[이만수]]에 대한 일화를 말하는데 이게 꽤 웃기다. [[정동진|선생님]] 빠따 사건이라던지[* 대구상고 [[정동진]] 감독 취임날에 선수들이 하라는 훈련은 안하고 놀러다녔고, 이 소식을 들은 정동진 감독이 '''내 불찰이니 나를 때려라''' 라고 했다. 그래서 김시진이라든가 여러 사람이 대부분 말렸는데, 뜬금없이 [[이만수]]가 감독이 자신을 때리라고 하니까 진짜로 감독을 배트로 때리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뭐.. 다들 울먹이면서 잘못했다고 감독에게 사과하는 훈훈한 일로 끝났지만, 하필 이 소식이 쫙 퍼지는 바람에 전국의 대구상고 동문들이 들고 일어나서 정 감독이라던가 여러 사람이 일을 수습하느라 애먹었다고 한다.], 손바닥 성냥사건이라던지, [[1980년]] 일본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김시진이 차출됐다가 어깨 부상으로 출국 전날 엔트리에서 빼고 [[이만수]]가 대타로 갔다가 병역특례를 받았고 김시진은 그 해 현역으로 입대했다는 에피소드 등이 많다.[* 여기에 더해서 김시진은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육군 경리단 신분으로 참가하고 대회 우승을 하나 군인 신분이기에 다른 멤버들과 달리 병역특례를 받지 못한다.] 그런데 이 배터리는 2014 시즌이 끝나자 무능한 삼성 출신 감독들로 남고 말았다. [[안습]].
  • 김연경(배구선수)
         || '''소속팀''' ||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천안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대한민국) (2005~2009) [br] [[JT 마블러스]] (일본) (2009~2011) [br] [[페네르바흐체 SK]] (터키) (2011~2017)[* 2007년 이후 스폰서명을 팀명으로 붙인다. (아즈바뎀 보건 그룹(2007년~2011년)-유니버셜(2011년)-그룬디히(2014년~2015년))] [br] 상하이 브라이트 유베스트 (중국) (2017~2018) [br] 엑자시바시 비트라 (터키) (2018~) ||
         === [[일본]] JT 마블러스 시절 ===
         이후 2009-10시즌에 [[일본]] JT 마블러스로 임대 이적[* 첫 해에 좋은 성적을 거두면 옵션으로 그 다음 해에도 뛸 수 있는 1+1계약을 맺었다. 그래서 2010년 9월 국내 컵대회에 출전했다. 일본 리그가 오프 시즌인 때에는 9월에는 국내 컵 대회 출전이 가능했다.], 일본 여자배구계 외국인 선수 중 최고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김연경이 빠져나간 흥국생명은 2009-10 시즌 10연패라는 기록을 세우고 말았다(...) 사실은 2008-09 시즌에도 흥국생명은 정규 시즌을 겨우 3위를 해 플레이오프부터 봄배구를 시작했지만 김연경과 카리나 오카시오의 크레이지 모드로 우승을 차지했던 것. 어쨌든 흥국생명의 [[리즈 시절]]을 이끌고, 게다가 국가대표팀에서도 [[사기 캐릭터|캐사기 유닛]] 소리를 듣게되자 '국내 리그에서 뛰면 안 된다'라는 여론과 김연경 본인의 외국 리그 진출 의지가 합쳐져 결국 2009 오프시즌에 외국 리그 진출을 추진하게 된다. 사실 김연경은 완전 이적을 바랐겠지만, 흥국생명이 선수 임대 방식을 이용, '''당시 V-리그 선수 이동 규정에 없던 방식'''으로 제대로 신분 정리도 안 한 채 이적을 진행했고, 이것이 3년 후에 이적 파동의 도화선이 된다.
         어쨌든 이런 사정을 접어두고라도, 김연경은 일본 프리미어리그에서까지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으니 일본 리그의 감독들까지 '''일본에서조차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만들었다.[* 물론 당시 일본 여자배구에는 오야마 카나(大山加奈), 구리하라 메구미(栗原惠), 기무라 사오리(木村沙織) 등 대형 거포들이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야마는 전성기가 너무 짧았고, 구리하라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이후에 폼이 급격히 무너졌으며, 기무라는 이 둘보다는 기량이 서서히 떨어지기는 했지만, 2010년대 초반 들어서는 예전만도 못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여자 배구에 한류 열풍을 몰고 온 좋은 케이스. 2009-10 시즌 초에 신종 독감으로 고생하더니 2010-11 시즌 초에 역시 독감으로 몇 경기 결장한 바 있다. 그래서 팬들의 가슴을 졸이기도. 하지만 결국 천천히 컨디션을 끌어올려 JT 마블러스의 시즌 우승을 또 한 번 이끌어 냈다.[* 2011 [[도호쿠 대지진]]으로 일본 V리그는 잔여경기에 상관없이 시즌을 강제 종료했다. 이로인해 정규 리그 최종 성적이 시즌 통합 성적으로 인정되어 정규 시즌 1위였던 JT 마블러스와 사카이 블레이저스가 2010-11 시즌 우승팀이 됐다.]
         임대 이적이라는 신분 때문에 2009-10시즌 종료 후 비시즌인 9월 KOVO컵 때 흥국생명 소속으로 뛰기도 했고 2010-11 일본 V리그 가 포스트 시즌을 앞두고 [[도호쿠 대지진]]이 터져 시즌이 조기 종료되어 한국으로 일찍 귀국했다. 마침 그 시기가 국내 V-리그 포스트시즌과 맞물리는 바람에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으로서는 ''''김연경 룰''''[* 김연경이 JT 마블러스로 (임대)이적할 때 생긴 규정. 시즌 전(全) 경기의 25%를 뛰면 한 시즌 뛴 것으로 간주.]을 적용해 김연경을 포스트 시즌에 반짝 출장시키고 싶었으나 여론의 뭇매로 김연경은 한 달여 간의 휴식을 취하고 컵대회인 흑취기에 참가하기 위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여담으로, 팬들이 김연경이 뛰었던 팀중 선호도가 꽤나 높은 팀이기도 하다. 다케시타 요시에라는 일본의 명세터와 손발을 맞출 수 있는 기회였고, 김연경 본인또한 JT 마블러스에서 뛰며 배구 외적으로 문화, 음식, 예절 등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었다고 언급했기 때문. 팬들 입장에서는 초록색, 흰색의 유니폼과 아주 잘 어울려 좋아하기도 했다. 2년간 JT 소속으로 뛰어서 그런지 전세계적으로 배구 팬들 사이에선 인기가 많은 김연경이지만 유독 일본에 열렬한 팬들이 정말 많다.
         JT 마블러스의 흑취기 우승에도 큰 공을 세운 뒤 JT 마블러스와의 임대계약이 종료된 결국 2011년 5월 [[터키]] 명문 [[페네르바흐체 SK]]에 입단하게 된다. 역시 JT 때와 같은 임대계약. 여자배구에 있어서 터키 아로마 리그는 유럽 최대의 빅리그 중 하나인지라 얼마나 적응에 성공할 지는 미지수였던지라 페네르바흐체와도 1+1 계약을 맺었다. 그래도 일본에서도 ''''100년에 나올까 말까한 거포''''라고 칭송했으니.
         터키 아로마리그에서 시즌 무패로 정규리그 1위를 달성했다.(플레이오프 최종 3위) 거기에 CEV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우승했다. [[MVP]]와 득점왕을 수상했다. 공격, 서브 분야도 1위이다.[* 한 선수가 죄다 독식하면 안 된다고 해서 2관왕 먹었지만 사실은 4관왕인 셈이라고.] 팀은 22연승. ~~홍진호~~ 뭔가 일본에서 본 것 같은 기사가 다시 보인다. ~~그냥 기분 탓으로 하자~~
          '아직 김연경이 '''김연경 룰'''에 의해 국내 V리그에서 FA 자격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흥국생명은 김연경의 원소속구단' 임을 주장하였다.[* 만약 김연경이 국내 V리그에서 계속 뛰었다면 2010~11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을 텐데 흥국생명은 일본-터키의 3년 임대 기간을 흥국생명 소속 선수로서의 기간으로 치지 않았다.]
         ||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 패배 후[* 이틀 전 미국과의 경기에서 패한 후 인터뷰에서 “눈물이 날 뻔 했는데 참았다. 메달을 따면 울겠다”라고 말했던 김연경이었다. 코트 위에서 울지는 않았지만 끝나고 라커룸에 들어간 후 지인들이 보내준 메세지를 읽고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진출권을 놓고 일본에서 펼쳐진 세계 최종예선에서 첫 경기인 이탈리아전에서 패했으나, 네덜란드-일본-카자흐스탄-페루를 연파하며 대한민국은 6경기인 태국전 2세트에서 무난하게 올림픽 진출권 획득. 당연하게도(?) 김연경은 맹활약. 다만 국내용 공격으로 여겨지던 개인 시간차가 국제무대에서 통하기 시작한 [[양효진]], 서브 맹폭 일본 킬러 [[김희진(배구선수)|김희진]], 반전의 리시브 실력을 보여준 [[박정아(배구선수)|박정아]] 등이 올라오기 시작한 건 고무적인 현상. 그리고 전체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대표적인 것이 박수 세리머니... 이 대회부터 김연경의 주도로 승리 후 3-3-7 박수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데 보면 중독성이 아주 강하다. ~~응?~~]로 소통이 잘 이뤄지고 있는 걸 보면 주장 역할도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 듯 하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리우 올림픽]] 조별예선 A조 1경기 운명의 [[한일전]]에서 30득점을 기록하며 3-1로 승리, 4년 전의 아픔을 일본에 설욕했다. 점유율은 37.5%로 무난한 수준이었지만 ~~[[헤일리 스펠만|이 선수]]에 비하면~~ 성공률이 워낙 [[넘사벽]]이어서 일본 배구에 '알고도 못 막는다'를 다시 한번 시전했다. 게다가 토요일 황금시간대에, 그것도 한일전이라 [[KBS]], [[MBC]], [[SBS]] 공중파 3사에서 동시 생중계한 덕분에 경기하는 동안 실시간 검색어 1위를 놓치지 않았다. [[걸크러쉬]], ~~착한 제빵사~~ 등의 별명은 덤.
         문제는, 부록에 적힌 대로 도쿄 올림픽이 열릴 때의 김연경의 나이는 32세인데, 이 정도 나이이면 슬슬 선수 생활의 황혼기이자 은퇴를 준비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이다. 물론 자기관리에 철저한 [[호날두]]나 [[이동국]]이나 불혹의 나이에도 국가대표 주전세터를 하는 [[이효희]]의 경우도 있지만, 김연경 본인의 실력도 나이의 노쇠화로 인해 조금씩 쇠퇴해 갈 무렵인데,[* 최근 열린 VNL 한일전에서 이 문제가 터졌다. 한국은 김연경이 나오고도 일본에게 시종일관 제압당하며 [[삼연벙|0대3으로 완패했다. 이후 김연경은 다시는 한일전에서 지지 않겠다며 굳은 결심을 밝혔다.]]] 올림픽은 그렇다 쳐도 김연경이 은퇴한 이후의 여자배구가 어떻게 될거냐는 우려도 충분히 나온다. 농담이 아니고 지금 현재에도 김연경이 잠시 쉬었다 들어가면 그 사이에 우리나라 경기가 헬게이트가 열리는데, 김연경 의존도가 너무 큰 우리나라가 국제대회에서도 먹혀들지는 의문이고[* '''배구도 엄연한 팀플레이 게임이다.''' 한명에 너무 의존하다보면 그만큼 상대팀에게 철저하게 파악되어서 나중에는 부담감 때문에 그 한명도 부진하거나 실수를 하게 될 가능성이 ~~'''엄청'''~~ 커진다. 당장 출전인원이 좀 더 많은 축구의 경우에도 한 명의 슈퍼스타로 모든 것을 풀어갈 수 없는 법인데 배구라고 예외는 없다.] 은퇴한 이후에 조직력 다지기며 대체자를 누구로 뽑느냐 등등 우려가 매우 큰 상황이다. 냉정히 말해서 김연경 없는 한국 대표팀은 독일[* 김연경이 나오고도 VNL 대회 이전 맞대결에서는 독일에게 2세트까지 내주며 끌려가다가 3세트에서 내리 연속으로 역전승했고, VNL에서는 1세트를 내줬지만 2세트에서 내리 이겨서 3대1로 승리했다.]과 태국[* 2018 아시안게임에선 김연경 있을때도 이겼다. 사실상 아시아 내에서 중국 다음의 강호로 떠오를 정도로 성장했다.] 그 이하의 수준이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땄다. 아시안게임 내내 스타팅 멤버로 출전하며[* 심지어 승패와 상관 없이 조별2위가 확정이였던 대만전에서도 스타팅으로 출전했다!] 아시안 게임 예선 득점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13일동안 7경기를 치루며 체력적으로 크게 무리했다. 결국 체력적으로 한계에 내몰린 국가대표 팀은 이전부터 태국에 강한 팀이였음에도 준결승에서 태국한테 3:1로 패했다. 각오를 다잡은 김연경은 국가대표 팀을 이끌며 무려 32득점을 하고 결국 3:1로 일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동메달을 땄다.[* 9월 1일, 남자 정구 금메달, 여자 배구 동메달, 야구 금메달, 남자 축구 금메달로 한일전에서 무려 4승을 거뒀다!]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은메달을 딴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딴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면서 이렇게 김연경은 선수 인생 중 총 4번의 아시안 게임을 뛰게 되었다. 눈물을 잘 보이지 않는 김연경이지만 태국전에서 지고 [[https://sports.news.naver.com/volleyball/news/read.nhn?oid=477&aid=0000136550|눈물]]을 보였고, 동메달 결정전이였던 한일전 전에 각오를 다졌다고 하니 마지막 아시안 게임이라는 사실에 감회가 새로웠던 듯. 또한 동메달을 일본에게 놓치며 김연경 본인에게 한이 되어 남았던 [[2012 런던 올림픽]]이 생각 날 법도 하다.
         한편 이런 캐사기적인 플레이도 가능하다. 장면은 [[2012 런던 올림픽]] 최종예선 [[일본]]과의 경기. [[정대영]]이 2단으로 연결하는 상황에서 미처 도움닫기 준비를 못한 김연경이 제자리뛰기로 백어택을 성공시켰다. 오오. ~~ 그리고 무진장 배를 아파했다. ~~ ~~코레와스고이키무욘굔노 박쿠아타쿠~~
          * 데뷔 초기에는 ~~제빵의 명장~~ [[한유미]]와 더불어 [[씨발|식빵]]을 [[찰지구나|찰지게]] [[시발|구웠다]]. ~~한유미나 김연경이나 괄괄한 여장부 스타일이라서 그런 것 같다~~ 다만 일본 진출 이후 성격이 많이 바뀌면서 이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가끔은 와일드했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보고 싶다~~ ~~그러나 트위터에 들어가면 터키어로 쓰여진 욕을 종종 볼 수 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한일전에서 [[http://www.pgr21.com/pb/pb.php?id=olympic&no=779|찰지게 굽는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선명하게 잡혔다]].[* 실제로 이것 때문에 한일전 후 어머니께 꾸중을 들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클라스는 영원하다.~~ ~~덧글은 착한 식빵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 혼자 산다]] 176회에서도 재조명을 받았는데 [[이스탄불]] 현지에서 더운 날씨 탓에 [[돈두르마]]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러 돈두르마 가게로 향했건만 돈두르마 상인의 계속되는 손놀림 장난에 [[http://m.tvcast.naver.com/v/1159344|'''이런 식빵! 빨리 주세요~!''' 를 반장난으로 외쳤던 것]].[* 실제로 한국에서도 축제 현장에 가면 터키 상인이 고객에게 아이스크림을 줄듯 말듯 장난을 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다만 여기서는 정말로 [[식빵]]으로 발음했다.
          * 최근에는 [[일본어]], [[터키어]] 외에도 [[중국어]]도 배우고 있다.[[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2&aid=0003006899|#]]
  • 김연수(작가)
          * 세계의 끝 여자친구 (2009)[* [[일본]]의 [[일렉트로니카]] 뮤지션 [[world's end girlfriend]]에 영감을 받아 쓰여진 소설집. 실제로도 팬이라고 한다.]
  • 김영아
         | 배우자 = [[시바 고타로]]([[기업인]], [[일본인]])
         '''김영아'''(金榮兒, [[1985년]] [[10월 29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 겸 [[모델]]이다. [[대한민국]]에선 배우, 모델로 활동했으나, [[일본]]에서는 모델, 방송인으로서 인기가 많다. 일본에서는 '''Youn-A'''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남편은 기업인인 [[시바 고타로]] 이다.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태어나를 졸업했다. [[동국대학교]] 중퇴했다. [[2003년]]부터 [[대한민국]]에서 CF 광고 모델과 드라마 활동을 시작했다. [[2004년]] [[일본]]을 방문했고, 모델 활동을 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일본의 잡지 《오지》의 커버 모델로 활동을 하며 인기를 끌었다. 그 후 일본 CF 광고 모델을 활동하면서 인정을 받았다. 2009년 4월 한국인 청년 실업가와 결혼후 2013년 이혼. 2014년 사업가 [[시바 코타로]]와 재혼하였다.
         === 예능 {{국기그림|일본}} ===
         * [[후지 TV|CX]] 《[[대일본 야칸 경찰]]》
         === CF 활동 {{국기그림|일본}} ===
         * [http://ameblo.jp/youn-a2011/ 욘아 공식 블로그(일본어)]
         * [http://beamie.jp/t/youn-a2010.html 욘아 공식 사이트(일본어)]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모델]][[분류:198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일본의 여자 모델]][[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배우]][[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일본의 방송인]]
  • 김영환 (1921년)
         |복무= {{육군|일본제국}}<br/>{{육군|대한민국}}<br/>{{공군|대한민국}}
         |최종 계급= {{일본 육군 계급장|소위}}<br /> {{대한민국 국군 계급장|준장|공군}}
         [[서울특별시|서울]] 출생으로 [[1938년]] 3월 서울를 졸업하고 [[1944년]] 1월 [[일본]] [[간사이 대학]] 법과에 유학하여 1년을 중퇴로써 마친 후 [[1945년]] 학병 징집되어 일본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 큰아버지: [[김기원 (1878년)|김기원]](金基元, [[1878년]] [[11월 9일]] ~ [[1934년]] [[7월 14일]], [[일본]] [[육군]] [[중령|중좌]] 전역.)
         * [[일본]] [[간사이 대학|간사이 대학교]] 법학과 중퇴(사후 1957년 3월 16일 명예 학사 학위 추서)
         *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 [[졸업]]
         [[분류:1921년 태어남]][[분류:1954년 죽음]][[분류:항공 사고로 죽은 사람]][[분류:추락사한 사람]][[분류:대한민국 공군 준장]][[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군사영어학교 동문]][[분류: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조선경비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연희전문학교 동문]][[분류:간사이 대학 동문]][[분류:육군참모학교 동문]][[분류:육군대학교 동문]][[분류:미국 공군참모대학교 동문]][[분류:충무무공훈장]][[분류:을지무공훈장]][[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경주 김씨]]
  • 김영후
         김영후는 중앙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숭실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대학교 졸업 후 [[2006 K리그 드래프트]]에 참가하였으나 어떤 팀에도 지명받지 못하였고, [[일본]] [[J리그]]의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의 입단테스트를 받았으나 실패했다.
  • 김완섭
          | 언어 = [[한국어]], [[영어]], [[일본어]]
         반(反) [[페미니즘]] 발언과 반 [[민족해방]](반 NL) 시각을 견지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쇼비니즘]] 등을 비판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일부 [[한국]]·[[일본]] 언론에서의 [[친일파]] 옹호 발언과 [[김구]], [[안중근]], [[유관순]], 김좌진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비판이 갑작스레 문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명성황후]]를 비판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저술, 강연, 방송 출연 등을 하였으며 일본, 중국 등 외국의 학자들과 토론을 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모독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고 법적 제재를 받기도 하였으나 일본의 우익은 그를 양심세력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한국 사회의 애국주의, [[쇼비니즘]]을 꾸준히 비판해왔고, 인터넷에서는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층과 비난하는 층으로 나뉘게 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화제 인물로 등장한 이후에는 [[일본]], [[미국]] 등 외국 언론의 방문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2001년]] ‘일본을 존경하는 마음’이라는 이름의 인터넷 카페를 개설해 일본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칼럼을 기고했으나<ref name="dach1">[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5090270051 '일제 미화'작가 김완섭씨, 고종황제 손자 등에 배상 판결] 조선일보 2005년 9월 2일자</ref>, 곧 폐쇄되었다.
         [[2002년]] [[가을]]부터 [[2003년]] [[여름]]까지 [[일본]]의 격주간지 ‘사피오’에 총 20회 연재글을 쓰기도 했다.<ref name="서울대1"/> [[2002년]] “한일 강점”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으로 쓴 《[[친일파를 위한 변명]]》과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썼다. 이 책은 대한민국에서는 역사적 사실 왜곡 등을 이유로 2002년 4월 8일 청소년유해매체물(간행물)로 결정 되었지만,<ref>[http://www.kpec.or.kr/kpec/main.asp?menuKMCD=KP0607&subKMCD=KP0609&state=view&dlbno=8521&schGu=%B5%B5%BC%AD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심의결정목록 국내 청소년 유해간행물 '친일파를 위한 변명']{{깨진 링크|url=http://www.kpec.or.kr/kpec/main.asp?menuKMCD=KP0607&subKMCD=KP0609&state=view&dlbno=8521&schGu=%B5%B5%BC%AD }} 2002년 3월 23일 결정</ref> 일본에서는 4개월 동안에 35만 부가 팔렸다.
         한편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제 강점기]]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시각을 드러내면서 일부 [[민족해방]]파 및 인터넷 네티즌들로부터 다시 공격과 악플에 시달려야 했다. [[2002년]]초 김완섭은 '친일파를 위한 변명 1'을 내고 목숨이 위태롭다고 생각해 여동생들을 호주로 이민 보냈다.<ref name="서울대1"/> 광주에 있는 그의 노부모는 그냥 그곳에 살고 있었다.
         2003년 일본의 자유식민사관주의자 [[스기모토 미키오]]의 일제 식민 통치를 미화한 저작물인 《[[식민지 조선의 연구]]》를 자신이 세운 출판사인 춘추사를 통해 발간하였으나 인터넷 단체인 "우리 황실 사랑회"( http://www.sihk.org )에 의해 간행물 윤리위원회에 신고되어 2006년 청소년 유해 매체물(간행물)로 결정 및 고시되었다. 당시 유해매체라는 비판과 [[표현의 자유]] 존중이라는 찬반 양론이 갈렸으나 한국 법원은 황실 사랑회의 손을 들어주었다.
         [[국민일보]]와의 2006년 인터뷰에서는 [[안중근]] 의사를 민족의 원수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 조선을 개혁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은 즉 의사가 아닌 폭도이며, 이토는 평화주의자인데다 조선의 병합을 바라지 않았는데 이토가 죽어서 일본 정부에 군부 득세를 가져왔고 이는 결국 조선에 대한 핍박으로 이어졌으니 안중근은 민족의 원수라는 주장을 하였다. 또한 자신은 한국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진실을 알려주고 싶을 뿐인데 한국인들은 수준이 낮아 내 주장이 담긴 책도 읽지 않고 욕부터 한다고도 답변하였다.<ref name="서울대1"/> 이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 측에서는 [[명예훼손]]은 직계후손만 가능하여 미국에 있는 안웅호의 연로 등 한국에 귀국할 수 없는 상황이라 고소는 불가능 상황이라고 한다.<ref>[http://www.patriot.or.kr/05.community/submenu5701.php?ptype=view&idx=6012&page=1&code=free&searchopt=subcon&searchkey=%B1%E8%BF%CF%BC%B7 안중근 열사를 욕하는 내용이 있으면 법적 처벌 불가능?]{{깨진 링크|url=http://www.patriot.or.kr/05.community/submenu5701.php?ptype=view&idx=6012&page=1&code=free&searchopt=subcon&searchkey=%B1%E8%BF%CF%BC%B7 }} 안중근의사 기념관 질응답 2006년 8월 16일</ref>
         {{인용문|미친 불여우 민비를 한국인들은 무슨 자주독립의 순교자라도 되는 줄 착각하고 있다. 이런 나쁜 ×을 조용히 없애버린 일본의 처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ref name="명비1">[http://news.donga.com/3/all/20020814/7852724/1 명성황후 비방 작가 명예훼손 기소] 동아일보 2002년 8월 14일</ref>}}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욕설이 문제시됐다. 비판 과정에서 '이런 나쁜 ×을 조용히 없애버린 일본의 처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ref name="명비1"/>'라는 내용이 문제가 되어 [[2002년]] [[8월]]까지 1년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명성황후의 후손인 [[여흥 민씨|민씨]] 종친회는 [[2002년]] 초 그를 [[대한민국 검찰청|검찰]]에 고소했다.<ref name="명비1"/> [[8월 14일]] 서울지검 형사9부(신남규·辛南奎 부장검사)는 지난달 인터넷 사이트에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를 옹호하고 명성황후를 비방한 혐의(사자에 대한 명예훼손)로 그를 불구속 기소했다.<ref name="명비1"/> [[2003년]] [[2월]]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벌금 700만원을 선고<ref name="kimk1">[http://news.donga.com/3/all/20040727/8088232/1 ‘김구선생 명예훼손’ 작가 김완섭씨 기소] 동아일보 2004년 7월 27일자</ref> 받았다.
         이후 사건은 확대되어 그가 2002년에 펴낸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과 인터넷 컬럼 등에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왜곡 저술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의 손자 [[이석 (가수)|이석]], [[일본군]] 종군위안부 박두리(82)외 6명, 징용자 유족 5명, 의병대장 민종식의 손자, [[명성황후]]의 종증손뻘 되는 민병호, 충정공 [[민영환]]의 손자 민병덕 등에게 피소되었다.<ref name="ch22">[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5090270051 ‘일제 미화‘작가 김완섭씨, 고종황제 손자 등에 배상 판결] 조선일보 2005년 9월 2일</ref><ref name="han22">[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509/h2005090206021522000.htm 일제 식민통치 미화 親日작가 김완섭씨 고종황제 손자 등에 배상 판결]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509/h2005090206021522000.htm# |date=20111123165806 }} 한국일보 2005년 9월 2일</ref> 그러나 저서 《친일파를 위한 변명》과 관련된 소송에는 피소 후, 한번도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다.
         [[2005년]] [[9월]] 서울중앙지법 민사81단독 김창보 판사는 1일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과 인터넷 컬럼 등에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왜곡 저술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이석 등이 그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했다.<ref name="ch22"/><ref name="han22"/> 김 판사는 “2003년 소송이 제기된 후 피고는 재판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며 “당사자가 변론기일에 출석하지 않을 때 상대방이 주장하는 사실을 자백한 것으로 본다는 민사소송법에 따라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밝혔다.<ref name="ch22"/><ref name="han22"/>
         김창보 판사는 “박두리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6명에게 각 600만원, 징용자 유족 5명과 의병대장 민종식의 손자에게 각 500만원, 이석씨와 [[명성황후]] 유족 민병호씨, 충정공 민영환의 손자 민병덕씨에게 각 1,000만원씩 모두 9,600만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ref name="ch22"/><ref name="han22"/> 소송 이후 그의 저서 ‘친일파를 위한 변명’ 일본어판을 발행해 일본에서 40여만부가 팔렸다. 이 변호사는 “손해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일본 출판사로부터 김씨가 받고 있는 인세를 압류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ref name="ch22"/><ref name="han22"/>
         3·1운동은 기독교의 종교 폭동이라고 했다가 비난글이 빗발쳤다.<ref>그러나 3·1운동은 기독교 지도자들 이외에도 천도교, 불교 등의 종교지도자들이 참여, 거사한 운동이었다.</ref> 김완섭은 [[2005년]] [[3월 16일]] 보도한 ‘친일파 김완섭 “독도 일본에 돌려줘라” 망언’이라는 기사에 달린 ‘악플’(악의적 댓글)까지 수집, 고소하기로 했다. 자신의 글에 악플을 단 네티즌들을 고소하기로 하고, 최근 해당 네티즌들에게 메일 통지문을 발송했다.<ref>고뉴스 2006.02.08일자</ref> 논객 [[진중권]]은 그를 비판하였으며, [[변호사]] 출신인 [[한나라당]]의 [[원희룡]]은 김완섭에게 고소당한 4000명의 [[변호인]]을 자처하고 나섰다. [[원희룡]]은 자신이 네티즌의 벙커가 되어 지키겠다<ref>[http://breaknews.com/sub_read.html?uid=35591 무료변론 원희룡 의원 “네티즌 지켜내는 ‘벙커’될 것”] 브레이크뉴스 2006년 3월 3일</ref> 고 선언했고, 이후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을 비롯한 한나라당 변호인단은 김완섭에 맞서 피고소인들을 변호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143&aid=0000016298 원희룡―김완섭 3·1절 ‘맞짱’ 설전…김씨 “3·1운동은 종교폭동”] 국민일보 쿠키뉴스 2006년 3월 1일</ref> 소송 기간 중 [[원희룡]] 등은 고소당한 네티즌들의 무료 변호를 자청하였다.
         [[2003년]] [[11월]] 말 김완섭은 [[서울특별시|서울]] [[국회의사당]]을 방문, 국회 과거사진상규명특위 공청회에서 “김구 선생은 ‘민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뒤 중국으로 도피한 조선 왕조의 충견(忠犬)”이라는 내용의 문건을 배포<ref name="kimk1"/> 하였다. 또한 그는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ref name="무고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51135 뉴라이트와 현 정부에 조롱당하는 김구 각주] 오마이뉴스 2009년 1월 17일</ref> 는 내용의 인쇄물도 배부하였다. 문건을 받아 본 일부 국회의원과 시민들은 즉석에서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일부는 이를 근거로 검찰에 들고가 그를 고소했다.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일본]] [[군인]]이라고 기술하였으나<ref name="baik01">{{서적 인용
         [[2004년]] [[7월]] 검찰은 공소장에서 “김구 선생이 [[1896년]] [[10월]] [[황해남도|황해도]] [[안악군]] 치하포항에서 살해한 ‘쓰치다’는 당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김구 선생이 쓰치다를 처단한 뒤 체포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했는데도 도주한 것처럼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고 밝혔다.<ref name="kimk1"/> 이어 그는 서울고검으로부터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았다. 서울고검 정현태(鄭現太) 검사는 [[7월 27일]] 그를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소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의 작가 김완섭씨를 불구속 기소했다고 언론에 밝혔다.<ref name="kimk1"/> 또한 서울고검은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한 문건을 배포한 친일작가 김완섭씨를 허위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직권 기소한 바 있다. 서울고검의 [[검사]] 정현태는 김완섭에 대한 기소는 [[국사편찬위원회]]와 [[국가보훈처|보훈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나서 내린 결정이었다<ref name="무고1"/> 고 밝혔다.
         그러나 김완섭의 주장은 이미 사실로 확인된 것이었다. [[1987년]]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 소속 상인<ref name="kyunghang01">경향신문 1997년 8월 13일자, 19면</ref>으로 밝혀졌다.
  • 김용수 (야구인)
         그러나 [[중앙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재직하던 중 심판에게 식사비조로 100만 원을 건넨 혐의가 드러나, [[대한야구협회]]로부터 3년 간 지도자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463440 KBO, 고교 지도자 인건비 지급 검토...야구계 강타 비리 해법 실마리 될까] - OSEN</ref> 결국 이 사건으로 [[2012년]] 11월에 [[중앙대학교]] 야구부 감독직을 [[고정식 (야구인)|고정식]]에게 넘기고 [[일본]]으로 건너가 연수를 받았다. [[2014년]] 시즌 후 [[롯데 자이언츠]]가 그를 2군 투수코치로 영입하려고 했으나, 논란 끝에 영입을 철회했다. [[대한야구협회]]와 [[KBO (야구)|KBO]] 간 징계에 관한 상호 규약은 없지만, 논란의 소지를 방지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8&article_id=0002368553 롯데, 김용수 코치 계약 철회.. "검증 못해 송구"] - 스타뉴스</ref>
  • 김용준 (1904년)
         [[경상북도|경북]] [[구미시|선산]]에서 태어나 [[경성부]]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화가 [[이종우 (1899년)|이종우]]에게 수학한 뒤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건설이냐? 파괴냐?〉로 입선하면서 화단에 데뷔했다. [[1926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해 서양화를 공부했다. 이때 같은 도쿄 유학생이던 동갑의 [[이태준]]을 만나 평생 동안 교유했다.
  • 김우동
         1897년 [[경상북도]] [[선산]][[군(행정구역)|군]](현 [[구미시]])에서 태어났다. [[일본]] 니혼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 김우중
         그러나 [[1997년]] [[IMF 구제금융사건|IMF 구제금융]]으로 한국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고, 그로 인한 여파로 부채비율이 400% 이상이었던 [[대우그룹]]은 쌍용을 인수하는등 확장정책을 이어나갔지만 [[일본]] 노무라 증권이 [[1998년]] [[10월 25일]]에 발표한 '[[대우인터내셔널|대우]]에 비상벨이 울린다'는 보고서 1장으로 사실상 [[대우그룹]]이 위기를 맞게 된다. 후에 계열사를 41개에서 4개업종 10개 회사로 구조조정 단행과 [[삼성그룹]]과의 빅딜도 추진하나 둘다 실패했다. [[1999년]] [[8월 26일]] 이미 구조조정으로 회사 41개중 16개가 매각되었고 남은 25개 회사중 12개가 워크아웃을 신청하였다. 당시 부채는 500억 달러였다. 당시 [[대우그룹]]은 금융부문을 중점으로두고 사업확장을 하여 내부적으로 부채가 많았다. 사실상의 그룹 해체였다. [[1999년]] [[11월 1일]] 김우중은 13명의 [[대우그룹]] 사장단들과 함께 경영포기 및 회장직을 사퇴하였다. [[대한민국 검찰청|검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출국한 후 도피생활을 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서 호화롭게 생활을 했다는 주장과, 반대로 [[유럽]] 등지의 3류 호텔에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며 어렵게 생활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대우그룹]]은 당시 [[김대중 정부]]가 정치적으로 탄압했다는 설과 단순한 [[구조조정]] 실패라는 의혹이 있다.
  • 김원중 (아이스하키 선수)
         경복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대한민국 U-18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발탁되어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서 열린 [[2002년 U-18 세계 아이스하키 선수권 대회]] 디비전 1에 참가했고, [[2004년]]에는 [[폴란드]]의 [[소스노비에츠]]에서 열린 [[2004년 세계 U-20 아이스하키 주니어 선수권 대회]] 디비전 2에 참가하였다. 이후 [[2008년]]에 [[대한민국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성인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오스트리아]]와 [[일본]]에서 열린 [[2008년 세계 아이스하키 선수권 대회 디비전 1|2008년 세계 선수권 대회 디비전 1]]에 참가하였으며, A조의 모든 팀에게 패하여 디비전 2로의 강등을 피할 수 없었다. [[2009년]]에는 다시 대표팀의 디비전 1 승격을 위해 [[불가리아]]의 [[소피아]]에서 열린 [[2009년 세계 아이스하키 선수권 대회 디비전 2|2009년 세계 선수권 대회 디비전 2]]에 참가하여 B그룹에서 전승 우승하는 데에 기여했다. 이후 다시 디비전 1로 승격된 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에서 열린 [[2010년 세계 아이스하키 선수권 대회 디비전 1|2010년 세계 선수권 대회 디비전 1]]에 참가하여 [[크로아티아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크로아티아]]와의 경기에서 [[박우상]]의 득점 어시스트를 돕고 골을 기록하여 팀의 5-2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2011년]]에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와 [[알마티]]에서 열린 [[2011년 동계 아시안 게임 아이스하키|2011년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카자흐스탄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카자흐스탄]]과 [[일본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일본]]의 뒤를 이어 동메달을 획득했으며,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2011년 세계 아이스하키 선수권 대회 디비전 1]]에 참가하였고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A조 3위를 기록했다. 이후 [[2012년]]에 폴란드의 [[크리니차즈드루이]]에서 열린 [[2012년 세계 아이스하키 선수권 대회 디비전 1|2012년 세계 선수권대회 디비전 1]]에도 참가하여 개최국 [[폴란드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폴란드]]와의 경기에서 [[김현중 (아이스하키 선수)|김현중]]과 [[신상우 (아이스하키 선수)|신상우]]의 어시스트로 골을 성공시켜 팀의 3-2 승리에 기여했다. 대한민국은 이 대회에서 전승 우승을 했다. [[2013년]]에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대회 디비전1에 참가하여, 개최국 [[헝가리]]를 상대로 신상우와 [[이승엽 (1984년)|이승엽]]의 어시스트로 골을 성공하여 5-4 승리에 기여했다.
  • 김윤규
         '''김윤규'''(金胤奎, 필명 : '''다치하라 마사아키'''({{llang|ja|立原正秋}}), [[1926년]] [[1월 6일]] ~ [[1980년]] [[8월 12일]])는 [[일본]]의 [[소설가]]이다.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에서 태어났다. [[와세다 대학교]] 국문과를 중퇴했다(입학시에는 법률학과).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거기서 거주했으며, 1947년에는 일본으로 [[귀화]]하며 아내의 성을 따 '''요네모토 마사아키'''({{lang|ja|米本正秋}})로 이름을 고쳤다. 1980년 6월 필명인 '''다치하라 마사아키'''로 개명했다. 두 달 뒤인 8월에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분류:1926년 태어남]][[분류:1980년 죽음]][[분류:일본의 소설가]][[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안동시 출신]][[분류:와세다 대학 동문]][[분류:나오키상 수상자]][[분류:일본으로 귀화한 사람]][[분류:식도암으로 죽은 사람]]
  • 김윤정 (1869년)
         '''김윤정'''(金潤晶, <small>일본식 이름:</small> 淸道金次郞<ref>{{서적 인용
         </ref>, [[1869년]] [[6월 25일]] ~ [[1949년]] [[10월 23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이자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경무관 재직 시절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한 혐의로 끌려온 [[김구|김창수]](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의 본명)를 심문하기도 했고, 외교관으로 있을 때는 미국 국무부에 고종의 밀서를 전달해 달라던 [[이승만]]의 청을 거절하였다.
         [[한성부]] 출신으로 관직에 올라 [[인천부]] 경무관을 지냈다. 인천부 경무관 재직 중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의 암살범으로 지목된 [[김구|김창수]](金昌洙, 뒤에 [[김구]]로 개명)을 심문하였다. 당시 인천부윤은 [[이재정]]이었다.
         [[태인군]] 군수를 거쳐 [[1906년]] [[인천]][[부윤]]으로 발령받았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따르면 [[1896년]] 치하포에서의 일본인 살인 사건으로 인천에 압송된 김구가 김윤정에게 심문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ref>김구, 《백범일지》 상권 - [[s:백범일지#기구한 젊은 때|1.2 기구한 젊은 때]]</ref>, [[손세일]]은 김윤정의 나이와 유학 시기, 인천부윤 발령 시점을 고려할 때 연대가 맞지 않는다며 이를 김구의 착각으로 보았다. 그러나 [[김구]]의 [[백범일지]]에 의하면 당시 인천부윤 겸 인천감리사는 [[이재정]](李在正)이었고 [[김윤정]]은 [[경무관]]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1921년]] [[3월]] [[경기도]] [[참여관]]으로 전임되었다가 그해 [[10월]] 정기인사에서 다시 [[경기도]] [[참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4월 20일]]부터 [[5월 30일]]까지 [[경기도]]내 군수 30여명을 인솔하여 참여관-군수 시찰단의 한사람으로 [[일본]] [[도쿄]]를 다녀왔다.
  • 김윤하(1930)
         1930년 [[경상북도]] [[상주시|상주군]]에서 태어났다. 경북중학교, [[일본]] 제8고등학교, [[오사카대학]] 상과, [[교토대학]] [[대학원]], [[영국]] [[런던 대학교 시스템]] [[대학원]]을 졸업, 수료하였다.
         1990년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년 월드컵]] 유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 김윤환
         [[경북고등학교]]와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지역 언론사인 [[영남일보]]와 [[대구일보]]를 거쳐 [[조선일보]]에 입사해 일본특파원 및 편집국장 대리를 거쳤다. 이 시절에 오랫동안 주일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일본]] [[자유민주당(일본)|자유민주당]]의 금권 정치, 계파-계보 정치, 막후 정치를 보고 배운다. 중간에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성주군]]-[[칠곡군]]-[[구미시|선산군]]-[[군위군]] 선거구에 출마([[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신현확]] 후보와 [[신민당(1967년)|신민당]] [[김창환(정치인)|김창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는 등 정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기사는 거의 쓰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1978년 [[유신정우회]]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다.
         대화와 협력을 명분으로 실제론 막후 밀실에서 정치자금과 권력을 배경으로 야합하는 [[일본]]식 정치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노무현이 실제 "호남이 밀어주는 영남 대통령"으로서[* 개혁 성향의 영남후보를 세워서 영남표를 잠식하고 수도권의 개혁 성향 야당표를 결집시켜야 한나라당의 호남 포위 구도를 깨뜨릴 수 있다는 내용이다. 실제 [[천하삼분지계]]가 [[제갈량]]만의 독창적 사고가 아니라 당시 주요 책사들의 공통적 인식이었던 것처럼 '호남이 밀어주는 영남 대통령'도 정치권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나리오로 여겨지던 내용이다. [[노무현]]의 지지율이 2~3%에 불과할 때도 일단 민주당 후보 경선만 통과한다면 대선 승리 가능성으론 가장 높을 것이란 평가가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선 지배적이었다.] 당선된 것이나, 홀로 여러 계파를 다룬 점 등 정치적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뿐만 아니라 민주화 운동가로 활동하던 시절 김윤환이 속해 있던 민주정의당에 맞서 싸웠던 [[김근태]]는 국회의원이 되어 김윤환을 만난 다음 "그래도 김 선배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장내에서 민주주의의 명맥이 이어질 수 있었다."는 평가를 했고, 언론계 인사들 역시 "허주는 순리를 바탕으로 정치를 물 흐르듯 한다."는 평을 아끼지 않았던 점을 보면 친화력만큼은 역대 정치인들 가운데 최고로 손꼽힐 수 있을 만큼 대단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죽기 직전에 낙선하고 정계에서 은퇴한 이회창이 사과의 뜻을 표했으나 공식적 화해 없이 세상을 떴다.
  • 김은중
         === 일본 임대 이적 ===
         [[2003년]] [[일본]] [[J리그 디비전 1|J리그]]의 [[베갈타 센다이]]로 임대이적해 활약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0440303& 김은중, 일본 J리그 센다이 입단 ]</ref> 이 당시 왼쪽 눈이 거의 실명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한 점에 빗대어 배갈타 센다이 팬들에 의해 같은 외눈이었던 [[일본]] [[센고쿠 시대]] [[센다이]] 지방의 영주였던 [[다테 마사무네]]의 이명인 '''독안룡(獨眼龍)'''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 '''18''' (2003년, {{국기그림|일본}} [[베갈타 센다이]])
         [[분류:197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축구 감독]][[분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분류:일본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중국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대전 시티즌의 축구 선수]][[분류:베갈타 센다이의 축구 선수]][[분류:FC 서울의 축구 선수]][[분류:광저우 푸리의 축구 선수]][[분류:제주 유나이티드 FC의 축구 선수]][[분류:강원 FC의 축구 선수]][[분류:포항 스틸러스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1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2의 축구 선수]][[분류:J1리그의 축구 선수]][[분류:중국 슈퍼리그의 축구 선수]][[분류:1998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4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아시안 게임 축구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동메달리스트]][[분류:축구 공격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서울성내초등학교 동문]]
         [[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광산 김씨]][[분류:대전 시티즌의 코칭스태프]][[분류:벨기에의 외국인 축구 감독]][[분류:K리그1 베스트 11 수상자]][[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애꾸눈이]]
  • 김응수(배우)
         || '''학력''' ||<(> [[군산제일고등학교]] (졸업) [br] [[서울예술대학]] 연극학 학사 [br] 일본영화학교 영화연출 ||
         [[서울예술대학교]] 연극영화과 시절부터 극단 목화에서 활동했고, 목화 활동 중 도일하여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일본영화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입학전형이 이미 끝난 뒤였지만,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후지타 겐(이마무라 쇼헤이 작품의 시나리오 작가)이 입학시험을 보도록 했다. 졸업작품으로 [[재일동포]] 남자의 정체성을 다룬 <사자의 계절>의 연출을 맡았으며, 다큐멘터리 <가자! 가자! 신군>으로 유명한 하라 가즈오 감독과 연출자로 같이 일했다.
         그 덕에 [[일본]] [[영화]]나 일본인 연기를 자주 맡는 편이고 해당 작품의 [[일본어]] 연기를 지도해 주는 역할도 겸하는 편이다. 일본어 실력이 뛰어나서 주사도 일본어로 할 정도라고. 게다가 영화 [[투캅스]] 3에서는 [[중국어]]를 잘 하는 엘리트 조폭으로 등장하여 극중에서 보스의 [[중국어]] 통역을 해주는 연기도 했다. 사실 보스가 원화를 위안화로 환전해서 쓰라고 말하는 부분만 [[중국어]]로 말했고 나머지는 한국어 대사다.
         일본 유학 경력 덕분인지 몰라도 [[일제강점기]]를 다룬 작품들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나 '''[[일본인]]''' 역을 많이 맡아 전문배우화(...)되고 있다. 더 나아가 [[임진왜란]]을 다룬 [[임진왜란 1592]]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으로 출연.
         [[차승원]]과 함께 일본에서 연극 출연을 했다. 그때 같이 출연한 일본 출연진은 [[쿠사나기 츠요시]]와 [[히로스에 료코]]. 연기하다가 그만 기절한 적도 있을 정도로 열연했다고 한다. 그래서 차승원과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두터운 편이다.
         한류 스타들이 '''일본 팬들이 두려워서''' [[각시탈(드라마)|각시탈]] 주인공 역을 맡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자 [[http://media.daum.net/entertain/enews/view?newsid=20120810103515474|일침을 가하셨다]].
         일본에서 졸업할 때 향수병으로 인해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이때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귀국을 말리면서 누구든 김응수 본인이 원하는 감독과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해줄 테니 일본에 남으라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선택한 사람이 하라 가즈오 감독이었다. 하지만 결국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리다 귀국, 그 뒤 한국에서는 결국 영화감독의 꿈은 이루지 못했는데 자신의 손으로 만든 영화를 이미 고인이 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에게 보여주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 한 켠에 걸린다고. 그래서 영화감독 만큼은 언젠가는 반드시 해보고 싶다고 한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35982|참고1]] [[http://news.joins.com/article/6658617|2]]
         [[임진왜란 1592]]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어]]로 연기하며 완벽하게 표현해 큰 호평을 받았다. 드라마는 역사왜곡과 고증오류로 심하게 비난 받지만, 김응수의 연기만큼은 모두 인정하는 분위기. 김응수 본인도 도요토미를 연기할 때 전력을 다해 공을 들인 점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평양성 전투]]를 다룬 [[역사저널 그날]]에서도 히데요시 복장을 입고 특별출연했는데, [[벽제관 전투]]가 언급되면서 벽제에 살고 있다고 말하니 옆에 있던 [[신병주]] 교수는 "일본이 이긴 곳에서 산다."라고 농담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5xBGpAvgI0|또한 임진왜란 1592 관련해서 4시 뉴스집중에 특별출연을 통해 인터뷰하기도 했다.]] 이 열연으로 2016년 그리메상[* 그리메상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1993년부터 한국방송촬영감독연합회에서 제정한 나름 오래된 상이다.]에서 남자 최우수상을 받았다.[[http://entertain.naver.com/read?oid=427&aid=0000026228|#]][* 여담으로 임진왜란 1592는 KBS 드라마국이 아닌 KBS 다큐국에서 만든 작품이라 연말 [[KBS 연기대상]]에서는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만약 후보에 올랐다면 반드시 상을 받았을지도..] 또 2017년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 시상식에서도 방송출연자상을 수상했다.[[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599257|#]]
          * [[2001년]] [[2009 로스트 메모리즈]] - '''미우라''' [[경관]] 역 --일본인/친일파 연기경력의 시작--
          * [[2006년]] [[한반도(영화)|한반도]] - 일본 오오야마 [[대사]] 역
          * 2016년 [[임진왜란 1592]] (KBS) -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 흡사 일본인 원어민 같은 일본어 실력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소름끼치는 연기력으로 호평받고 있다. 일명 '응신수길'.] ~~일본인 연기의 정점~~
  • 김일 (프로레슬링 선수)
         |별명 = 일본식 이름은 '''오키 긴타로'''('''大木 金太郞''') <br /> [[별명|닉네임]]은 '''박치기왕'''
         [[1929년]] [[전라남도]] 에서 출생한 김일은 [[1948년]]부터 [[1957년]]까지는 [[씨름]] 선수로 활동하였고 [[1957년]] [[역도산]] 체육관 문하생으로 입문하면서 레슬링을 시작했다. [[1963년]] 그의 스승인 [[역도산]]이 사망하자 그는 [[1963년]]부터 [[1972년]]까지 박치기를 특기로 극동 헤비급 챔피언, 올아시아 헤비급 챔피언,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의 활약을 했다. 한국 프로 레슬링 1세대 격인 장영철과 [[천규덕]] 등과 함께 레슬링의 전성기를 꾸려가다 [[1995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현역 시절의 라이벌로는 [[일본]]의 [[안토니오 이노키]]가 있었는데 김일 선수가 병환으로 입원하자 문병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여러 사업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게다가 선수 생활의 후유증과 배우자의 사망에 이어 [[1987년]]부터는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가 [[1994년]] [[1월]]에 귀국하였고 [[서울특별시|서울]] [[을지병원]]에 입원하여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06년]] [[10월 26일]]에 그곳에서 향년 78세의 나이로 만성신부전증 및 심장혈관 이상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제자로는 [[이왕표]] 선수가 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10080032913001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8-10-08&officeId=00032&pageNo=30&printNo=16558&publishType=00010 내가 가장 아끼던 후계자 이왕표(오른쪽)와 함께] 1998년 경향신문</ref>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2006년 죽음]][[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프로 레슬러]][[분류:대한민국의 씨름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일본의 프로 레슬러]][[분류:프로레슬링 임원]][[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
         [[분류:체육훈장 청룡장 수훈자]][[분류:전라남도 출신]][[분류:김해 김씨]][[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심근 경색으로 죽은 사람]]
  • 김장섭
         [[일제강점기]]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인 1940년 [[조선총독부]]의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판사]]를 역임하였다.
  • 김재규
         ||<:> '''군복무''' ||<:> [[일본군 해군]] 예과연습생 [br]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 [br] [[대한민국 육군]] [[국군기무사령부|보안사령부]] [br] [[대한민국 육군]] [[제3군단]]||
         1943년 안동공립농림학교[* 해방 후 안동농림고등학교, 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한 후, 그 해, 대구농업전문학교 중등교원양성소[* 이 당시에는 2년제 전문학교였다. 해방 후 대구농과대학을 거쳐 1951년 대구사범학교 등과 통합하여 경북대학교로 개교한다.]에 입학하여 1945년 수료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중등교원의 수가 부족한데 반해, 조선 내에는 고등사범학교가 없었다. 문과의 경우 [[경성제국대학]] 졸업자 등으로 수요를 채울 수 있었지만, 이공계 쪽의 교사가 부족하여 일제는 각종 전문학교에 2년제 '교원양성소' 과정을 도입하여 교사인력을 충원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조선인이 징집 대상이 되었을 때 [[일본군 해군]]의 [[카미카제]] 양성을 위한 예과 후보생으로 차출되었으며 카미카제의 생존률이 0%라는것을 감안해보았을때 만약 일본이 빨리 몰락하지 않았다면 김재규는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재규의 거사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지만, 여성 연예인들이 저런 식으로 대통령의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큼은 확실히 차단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의 구명을 호소하면서 우리의 민주화가 김재규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민주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그 여성 연예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또다른 10·26 사건이 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70년을 두고 2개의 10·26 사건이 있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군사독재가 왔는데,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이토의 제삿날과 군사독재의 상징인 박정희의 제삿날이 같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중략)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졌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는 끝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김재규는 대가 끊겼던 한국 보수우익의 계보학에서 돌출한 마지막 대륙형 인간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본 순사가 조선인 나무꾼을 구타하는 걸 보고 '이 순사 도둑놈이다'라고 했다가 유치장에 갇힌 적이 있다.[* 아버지가 찾아오자 풀어줬다고 한다. 출처는 안동일 저서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제 부하들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제 명령에 복종한 죄밖에 없습니다. 과거 일본에서도 부하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나보다는 그들(부하들)을 위해 열심히 변론해주십시오.
          [[박근형]]이 극강의 김재규 포스를 보여주었다. 역대 최강의 포스를 자랑하는 김재규로 차지철을 쏠 때에 '''"이 새끼 너 건방져!"'''는 가히 명대사로서 차지철과의 말싸움과 그 싸움이 끝나고는 "이 [[개새끼]]!"라고 뇌까린 적도 있다. 10.26 사건을 일으키기 전 총을 겨누며 [[일본어]]로 '고로시마스(죽여버리겠습니다)'라고 중얼거릴 때의 포스는 압도적이다. 10.26 사건을 다룬 영상 매체에서 김재규가 '고로시마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그 장면에선 아이러니하게 박정희의 사진이 배경으로 보이면서 총을 겨누니 가히 긴장감을 일으키게 만드는 명장면.[* 그런데 이것은 영화 택시 드라이버 표절 냄새가 나긴 한다.] 박정희를 저격한 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더 이상 언급이 없다가 [[5.18 민주화운동]] 이후 4공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차지철과 말싸움을 주고받으면서 [[개그 캐릭터]]화가 될 뻔 하였으나 배우의 포스로 그나마 무게를 잡았다.
         [[분류:일본군/조선인]][[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한국전쟁/군인]][[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분류:구미시 출신 인물]][[분류:1926년 출생]][[분류:1980년 사망]]
  • 김재엽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1984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여 결승전까지 올랐으나 [[일본]]의 호소가와 신지에게 누르기 한판패를 당하면서 은메달에 머물렀다. 하지만 1986년에 열린 [[1986년 아시안 게임|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다시 두각을 나타냈다. 이듬해 [[서독]] [[에센]]에서 열린 세계 유도 선수권대회에서는 1984년 올림픽에서 패배를 안겨준 호소가와 신지와 또다시 결승전에서 맞붙어 통쾌한 허벅다리걸기로 한판승을 거두면서 패배를 설욕하였다.
  • 김재중(1986년 1월)
         [[일본]]에서는 금발의 이케맨으로 어필하며 인기를 끌었다. 사실 인기를 끈 정도가 아니라 다섯 멤버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인기가 많았다. 일본에서 드라마, 광고, 뮤비 출연을 단독으로 많이 했다.
         재중을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한국 활동보다 일본 활동에서 부른 노래가 더 인기를 끌었다. 아무래도 일본에서 보컬 위주로 가면서 파트 비중이 높았고 [[SMP]] 위주의 한국 활동과는 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동방신기/일본활동]] 참고.
         중성적인 외모로 인해 남성 팬들에게 진지하게 고백받은 적이 있다. 숙소 앞에 꽃다발을 챙기고 재중에게 고백한 일본의 남자 팬이 팬덤에서 언급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인에서는 "'''남자인데 김재중이 좋아요.'''"라는 제목의 글들이 많다. 팬덤 내부에서는 많은 팬들이 [[얼빠]]를 자처하고 있다. 팬 사이트에서는 김재중은 내일이 [[리즈 시절]]이라고 한다.
         운동을 좋아해서 자주 하는데 운동을 하면서 겪는 힘듦을 즐기면서 더 운동을 한다는 듯. 동방신기 3집 전후로 해서 운동으로 [[삼두근]]을 많이 키웠다. 팬들은 예쁘게 생긴 얼굴에 무슨 근육이냐고 [[나의 아스카는 그러지 않아|나의 재중이는 그러지 않다고]] 했으나 꿋꿋하게 운동을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라디오에서 성화를 부려 재중이 그만두라는 의견이 많으면 그만두겠다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그만두라는 의견이 많아]] 당황하는 걸 멤버들이 1년에 몇 번만 하라 결론을 내려 어떻게 그러고 사냐고 한다. 거진 운동 [[오타쿠]]. 팬들은 건강한 건 좋은 거니까 우락부락 [[마초]]만 안 되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 나중 들어서는 바빠서 못 해서 근육이 빠졌다고 한다.
         아이돌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보컬 중에서는 [[준수|같은 그룹의 멤버]]와 함께 '''최상위의 실력을 갖춘 보컬'''로 평가된다. 데뷔 초부터 꾸준히 가창력 논란에 휩싸였던 동방신기의 메인보컬로서, 창법 자체를 바꾸는 등 빠르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한국 1집과 2005년 여름 싱글 사이에 창법이 확 바뀌었다.] 팀의 음악의 중심을 잡아주었다. 현재에 가까운 [[가창력]]을 가지게 된 것은 대략 2006년 일본 1집-한국 3집 사이의 기간.
         한국 1집 때까지는 앞서 말한 파워에만 의존하는 보컬에 가까웠고 실제 라이브의 경우 힘이 너무 들어간 느낌을 종종 주었으나, 이후 여러 곡을 거치면서 기교와 표현력 면에서도 탈아이돌급으로 발전했다[* 2004년 활동 당시와 2005년 이후의 ‘Whatever They Say’ 공연을 비교해보면 확연히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해당 사항들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R&B계 곡에서도 당연하다는 듯이 메인. 발라드에서 감정선의 미세한 부분까지 잡아내는 표현력과 완급조절력 또한 인정받는 부분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한국 2집의 ‘내가 허락할테니’의 클라이막스 부분을 들어보자[* 이어지는 두 소절의 느낌이 판이하다.]. 일본 4집의 ‘[[TAXI]]’도 좋은 예. 1절 후렴과 마지막 후렴의 음/가사가 같은 부분을 곡 전개에 따라 판이한 분위기로 소화해낸다.
         한국 앨범에서도 물론 리드보컬이지만, 역할 배분이 좀 더 확실한 일본에서는 명실상부한 제 1보컬로서 맹활약한다. 특히 싱글컷된 [[My Destiny|명]] [[Begin|발]][[Lovin' you|라]][[Forever Love|드]][[시간을 멈춰서|들]]에서 후렴구를 포함한 곡의 거의 반 이상을 담당하며 좋은 평가를 받아온 바 있다. 역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곡들인데 파트 편중 덕택에 라이브 때마다 죽어나가는 모습도 곧잘 볼 수 있었다(...).
         2010년 일본 방송에서 가츠동을 만들어 드라마 촬영 스태프들에게 선물하기도...[[http://cfile4.uf.tistory.com/media/15019E474E03732C231D84|#]] 참고로 이 가츠동을 맛본 사람들 중에는 에이타도 있었다. 에이타는 "재중 밸런스가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가부장적인 성격이 강한 일본에서 이 점이 특이한 지 방송에서도 요리를 몇 번 했었고 이야기 소재로도 많이 사용했다. 방송에서 요리하는 코너가 있으면 단연 뛰어난 실력을 보여줬는데, 2008년에 channel-a에서 [[타코야키]]를 만들 때는 가장 모양과 맛이 괜찮아서 팬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와사비가 들어있어서 팬들은 먹으면서 눈물이 그렁그렁~~ 일본 스페이스샤워TV에서 한 '요리가 능숙할 것 같은 남성 뮤지션 베스트10'에서는 2위에 재중이 랭크되었다.
         [[JYJ]] 멤버들 중 SNS를 가장 많이 이용하고, 가장 팬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영향력이 크다. 한국 [[트위터]] 영향력 랭킹에서 꽤 큰 차이로 1위를 유지 중이다. 팔로워 수는 2012년 8월 96만명 이상으로 계속 늘고 있으며, 트위터 관련 시상식인 shorty award에서 1위를 하기도 했다. 2011년에 이어서 2012년에도 셀러브리티부분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2년 연속 [[저스틴 비버]]다. 자신의 셀카나 친구, 애완묘 등 소소한 일상 생활을 올려서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초창기에는 아침, 저녁 인사도 해주었다!~~ 그만큼 트위터에 올라오는 일상 생활이 기사화 되는 속도도 빨라졌다.
         해외 인기가 압도적으로, 일본 여성이 뽑은 '남자 친구로 삼고 싶은 싶은 남자(CDTV 2010년 상반기/하반기)' '''1위''', 베스트 지니스트(2010년 3위, 2011년 2위)에 등극했다.(국내외 통산) 이 두 투표는 일본 내에서 '''3대 투표'''에 속하는 차트로서 인기의 지표가 되는 가장 권위 있는 투표로 꼽힌다. 나머지 하나의 투표는 잡지 앙앙의 '안기고 싶은 남자'인데 현재 행하여지지 않고 있음을 고려하면 가장 신뢰도 있는 양대 투표라고 할 수 있다. 김재중은 이 차트에서 차근차근 올라와 결국 1위까지 기록하여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외국인이 1위를 차지한 것은 16년 만에 처음이다. 일본에서 [[동방신기]]를 아는 일반인은 대체로 '한가운데에 있는 애가 잘생겼다'로 알고 있다. 동방신기에서 나온 이후 국외 활동을 잘 못하고 있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엄청난 인기를 자랑한다. 참고로 2011년 일본 트위터 유명인 랭킹에서 화제의 일본 국민 걸그룹 [[AKB48]]에 이어 2위를 기록하였으며, 개인으로서는 1위의 기록이다.
         2014년 일본에서 시행된 K-POP [[이케멘]]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일본에서는 기존 팬을 위주로 콘서트밖에 활동하지 못했는데도. 1위로 뽑힌 이유가 여러 팬을 공감의 도가니에 빠트렸다.[* [[JYJ]] 멤버는 물론, 자신을 응원해주는 팬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있는 재중. 특히 여성에게 친절하고 신사적이라 그런 그의 따뜻함에 반해버린 팬들도 많다. 최근에는 소년같이 귀여운 웃는 얼굴뿐만 아니라 남자다운 섹시한 표정도 짓는 재중. 나이가 들수록 반짝임을 더해가는 재중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술자리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상당한 연예계 인맥을 가지고 있다. [[동방신기]]가 일본진출에 성공하고 일본어가 유창해지면서 일본에서도 친구를 만들 정도.
         야마시타 토모히사 외 일본 친구들은 재중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면서 인증샷을 남기고, 특히 야마시타 토모히사는 재중을 만나기 위해 직접 한국을 찾아와 재중이 감동의 트윗을 올리기도. 또한 인터뷰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시아의 아티스트는 Chen Bo-lin, 동방신기의 재중, Jaycee Chan 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일본||<:>요코하마 아레나||<:>2013.06.24~26 ||
         일본 공연에서는 라르크앙시엘(L'arc en Ciel)의 하이도가 작곡하고 나카시마 미카가 불러 유명한 'Glamorous Sky'와 B'z의 히트곡 'Ultra Soul' 등을 추가로 불렀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야외공연인 일본 [[요코하마]] 스타디움 공연에서 평일 이틀 동안 '''6만 명'''의 팬들이 콘서트에 참석해 그 인기를 과시했다. 이후에도 [[오사카]] 공연이 이틀 추가되었다.
         ||<:>일본||<:>요코하마 스타디움||<:>2013.11.15~16||
         ||<:>일본||<:>오사카 죠홀||<:>2013.12.17~18 ||
         ||<:>일본||<:>나고야 가이시홀||<:>2014.01.22~23 ||
  • 김정근(정치인)
         1916년 [[경상북도]] [[상주시|상주군]]에서 태어났다. [[경성부]] [[중앙고등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 김정렬 (1917년)
          | 별명 = 호(號)는 서암(曙巖)· 산남(山南)· 이열(怡悅)<br/>일본식 이름은 '''카가와 사다오'''(香川貞雄)
          | 복무 ={{육군|일본제국}}<br/>{{육군|대한민국}}<br/> {{공군|대한민국}}
          | 복무 기간 = 1941년 ~ 1957년 1월 6일 <br/> {{육군|일본제국}}[[1941년]] ~ [[1945년]] <br />{{육군|대한민국}}[[1946년]] ~ [[1949년]] <br />{{공군|대한민국}}[[1949년]] ~ [[1957년]] [[1월 6일]]
          | 최종 계급= 일본 육군 대위(1945년) <br /> 대한민국 육군 대령(1949년) <br /> {{대한민국 국군 계급장|중장|공군}} 전역(대한민국 공군 예편) - [[1957년]] [[1월 6일]]
         '''김정렬'''(金貞烈, 일본식 이름: 香川貞雄 카가와 사다오, [[1917년]] [[9월 29일]] ~ [[1992년]] [[9월 7일]]<ref>{{웹 인용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1941년]] 일본항공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조종수로 출전하였다. 해방 후 창군에 참여하고 [[1949년]]에는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참여하여 초대,3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57년]] 중장 예편 이후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1963년]]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가 그 해에 주미대한민국대사로 부임, 1년간 근무했다. 1966년에는 반공연맹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67년]]에는 [[민주공화당]] 공천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었다. 1970년대에는 기업인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때 총리 서리로 발탁되어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ref>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선]]에서 무관을 지낸 집안으로, 큰아버지 김기원과 아버지 김준원은 구한말 군관학교를 졸업한 대한제국 군인으로 일제 강점기 무렵에 각각 다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15기와 26기 졸업생으로 일본군에 편입되어 일제 강점기에도 군인으로 활동했다. 특히 아버지 김준원은 해방 후 육군 창군에 참여, [[한국 전쟁]]에는 육군 대령으로 경남병사구사령관으로 활동하였고 예비역 [[1성 장군|준장]]으로 예편하기도 했다.
         1935년 경성공립중학교(京城公立中學校)를 졸업한 뒤 다시 편제가 바뀐 에 4학년이 되었다. [[1937년]] 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예과사관학교에 들어갔다.
         === 일본군 복무 ===
         1940년 일본예과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일본 육군항공사관학교 54기로 편입, [[1941년]] 3월 일본 육군항공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제국 육군]] 항공대 소속 조종사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으며 [[1941년]] [[12월]] 항공 중위로 [[필리핀]] 공략 작전에 참여하였다. 일본 육군의 비행중대장 및 비행전대장으로 보임되었다.
         [[1942년]] 일본 아케노(明野)육군항공비행학교에 입학하여 [[1943년]] 일본 아케노(明野)육군항공비행학교를 졸업했다. 바로 대위로 승진하여 전투기 비행중대장으로 보임되었다.
         *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 졸업
         *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 [[일본 육군항공사관학교]] 졸업
         * 일본 [[육군나카노학교]] 졸업
         * [[일본 아키노 육군비행학교]] 졸업
         * 큰아버지 : [[김기원 (1878년)|김기원]](金基元, [[1878년]] [[11월 9일]] ~ [[1934년]] [[7월 14일]], [[일본]] [[육군]] [[중령|중좌]] 전역.)
         [[분류:1917년 태어남]][[분류:1992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참전유공자]][[분류:대한민국의 공군참모총장 직무대리]][[분류:대한민국의 공군참모총장]][[분류: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 제5공화국]][[분류:대한민국의 국무총리]][[분류: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박정희]][[분류:전두환]][[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일본 아키노 육군비행학교 동문]][[분류: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 동문]][[분류:일본 육군항공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통위부 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국방부 헌병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경주 김씨]][[분류:대한민국 공군 중장]]
  • 김정렴
         |경력= [[일본]] 주재 [[대한민국]] 대사 <br/> [[신민주공화당]] 최고위원 겸 고문 <br /> [[자유민주연합]] 고문
         [[1946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행하였다. 그 후 [[한국은행]] 조사부 차장과 [[대한민국 기획재정부|재무부]] 이재국장을 거쳐 [[1966년]] [[대한민국의 기획재정부 장관|재무부 장관]], [[1967년]] [[대한민국의 지식경제부 장관|상공부 장관]], [[1969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장|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고 그 후 [[1979년]] [[2월|1월]]부터 [[1980년]] [[9월|89월]]까지 [[일본]] 주재 [[대한민국]] 대사를 역임하였다. 화폐 개혁, [[새마을 운동]], 산림 녹화 등에 직접 관여하기도 하였다.
         * [[일본]] [[오이타 대학|오이타 고등상업학교]] 졸업
         * [[나고야 대학|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 졸업
         |직책 =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관|주 일본 대사]]
         [[분류:192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육군 군인]][[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재무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상공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재무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상공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장]][[분류: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일본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조선은행 관련자]][[분류:오이타 대학 동문]][[분류:나고야 대학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클라크 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경주 김씨]][[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
  • 김정록 (야구 선수)
         졸업하고 지명을 받지 못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키비국제대학에 입학한다. 키비대학 2학년을 마치고 휴학하고 ([[서울특별시]]에서 복무)에서 훈련 조교로 복무한 후 전역과 동시에 [[고양 원더스]]에 입단하였다.
  • 김정훈 (1980년)
         '''김정훈'''(金楨勳, [[1980년]] [[1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이다. [[2000년]]에 남성 듀오 그룹 [[UN (음악 그룹)|UN]]('''U'''nited '''N'''-generation)의 멤버로 데뷔하였다. [[중국]]에서는 '찐쩡쒼', [[일본]]에서는 '존훈(John-Hoo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목= '결정적 한방' 김정훈 "유동근 선배한테 200대 맞은 분 계세요?"(인터뷰) |url= 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178349 |출판사=TV리포트|날짜= 2011-12-07 }}</ref> 2005년 초 출연한 [[MBC]] 단막극 《한뼘 드라마 - 한밤의 티파니》에서 황인뢰 PD와 첫 인연을 맺은 이후, 2006년에 [[MBC]] 드라마 《궁》에 출연하며 국내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등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며 한류 스타로 발돋움 했다.<ref>{{뉴스 인용
         김정훈은 2007년 [[SBS]] 드라마 《[[마녀유희]]》이후, 여러장의 음반을 발표하며 거의 [[일본]]에서 활동을 한 2007년, 2008년에는 [[후지 TV]] 《[[기타노 다케시|타케시]]의 고마네치 대학 수학과》에 한국 대표로 출전해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많은 화제를 모았다.<ref>{{뉴스 인용|제목= 김정훈, 일본 '수학 퀴즈왕' 등극 ‥ 日 타케시 감독 제압 |url=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7122816617 |출판사=한국경제|날짜= 2007-12-28 }}</ref><ref>{{뉴스 인용|제목= 김정훈, 세계수학월드컵 2년 연속우승…엄친아 입증 |url= 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105040835421116&ext=na |출판사=마이데일리|날짜= 2011-05-04 }}</ref> 2009년 4월에 한국에서 첫 솔로 앨범을 발표한 김정훈은<ref>{{뉴스 인용|제목= ‘입대’ 김정훈, 국내 첫 솔로앨범 발매 “김치찌개 먹는 기분”(인터뷰①) |url=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4271323591002 |출판사= 뉴스엔 |날짜= 2009-04-27 }}</ref> 2009년 4월 28일, 현역으로 [[군대]]에 입대했다.<ref>{{뉴스 인용|제목= '한류스타' 김정훈, 韓中日 800여팬 배웅 속 입대(종합) |url= http://star.moneytoday.co.kr/view/stview.php?no=2009042813295434785&type=1&outlink=1 |출판사= 스타뉴스 |날짜= 2009-04-28 }}</ref> [[경기도]] [[의정부시]] 306보충대, [[강원도]] [[철원군]] 6사단 GOP, 6사단 군악대, 국방부 홍보지원대에서 1년 10개월의 군생활을 마친 후 2011년 2월 28일에 전역했다.<ref>{{뉴스 인용|제목= `한류스타` 김정훈, 제대 현장서 흔들림 없는 위상 `확인` |url= http://spn.edaily.co.kr/news/newspath.asp?newsid=01180806596155112 |출판사= 이데일리 |날짜= 2011-02-28 }}</ref><ref>{{뉴스 인용|제목= 김정훈 신드롬? 제대 후 첫 팬미팅에 아시아 팬 800여 명 대거 입국! |url= 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4&c1=04&c2=04&c3=00&nkey=201104091026283&mode=sub_view |출판사= 한국경제|날짜= 2011-04-09 }}</ref> 2011년 [[tvN]]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로 연기자로 복귀하였고,<ref>{{뉴스 인용|제목= 김정훈 제대 후 tvN 드라마로 복귀, 조여정과 연인 호흡 |url=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104141759451001 |출판사=뉴스엔|날짜= 2011-04-14 }}</ref> [[서울방송|SBS]] 드라마 《[[바보엄마 (드라마)|바보엄마]]》(2012년), [[JTBC]] 드라마 《[[그녀의 신화]]》(2013년)에 출연했다.
         김정훈은 2012년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천재적인 사기꾼 프랭크 역할을 맡아 뮤지컬에 첫 도전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김정훈, 뮤지컬 첫 도전! '천재적 사기꾼' 변신 |url= 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202030100026290001805&servicedate=20120203 |출판사= 스포츠조선 |날짜= 2012-02-03 }}</ref> 또한 [[일본]] 외에도 [[중국]]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비비안 수]]와 드라마 《연애병법》(2008년)에 출연했고, 중국 영화 《벽루천》(2011년), 《점기각첨문도애》(2013년)에 출연했다.
         | 일본 드라마
         | 일본 [[마이니치방송|MBS]]
         | 일본 드라마
         | 일본 단편 영화
         * 2011년 [[Mnet]] 재팬 《M-STUDIO》<ref>{{뉴스 인용 |제목= 김정훈, 日 간판 토크쇼 MC발탁 “유창한 일본어 진행 기대” |url= http://ntn.seoul.co.kr/?c=news&m=view&idx=108072 |출판사= 서울신문 |날짜= 2011-07-28 }}{{깨진 링크|url=http://ntn.seoul.co.kr/?c=news&m=view&idx=108072 }}</ref>
         * 2011년 일본 BS후지 《GAON MONTHKY COUNTDOWN》<ref>{{뉴스 인용
         * 2012년 일본 [[후지TV]] 《최신 K팝 랭킹 가온 TV》(한국가요순위프로그램)<ref>{{뉴스 인용 |제목= 김정훈, 日후지TV 순위프로그램 MC발탁 "100%일본어진행" |url= http://star.fnnews.com/news/index.html?no=56708 |출판사= 파이낸셜뉴스 |날짜= 2012-01-05 }}{{깨진 링크|url=http://star.fnnews.com/news/index.html?no=56708 }}</ref>
         * 2007년, 2008년 일본 [[후지 TV]] 《[[기타노 다케시|타케시]]의 고마네치 대학 수학과》
         * {{언어링크|ja}} [http://profile.ameba.jp/johnhoon146/ 이치욘로쿠(146)] - 김정훈 공식 일본 블로그
  • 김정훈(UN)
         [[UN(가수)|UN]] 활동시에도 연기 활동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2004년에 영화 《DMZ 비무장지대》에 출연하며 연기자로 데뷔했고, [[UN(가수)|UN]] 해체 후 본격적으로 연기자로 전향하여 <[[궁(드라마)]]>에 출연했다. 역할은 의성대군 이율. 원작과 완벽히 맞아 떨어지는 씽크로율을 보여주며 '백합대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7년 SBS 드라마 <마녀유희>에 출연한 후에는 몇몇 오락프로그램 등에 출연하였으나 국내 활동은 뜸했고, 거의 [[일본]]에서 여러 장의 음반을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 나갔다. [[중국]]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비비안 수]]와 드라마 <연애병법>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로는 [[김현주]]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바보엄마]]>에 캐스팅되어 출연했고, 뮤지컬 <캐치 미 이프 유 캔>도 주연을 맡았다. 일본에서는 가수 활동도 재개했다고 하니 2012년에 작심하고 복귀한 듯.
          * 2007년과 2008년에 [[일본]] [[후지TV]] <[[기타노 타케시]]의 코마네치 대학 수학과>라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 나가서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humorbest&no=208143|수학 풀이로 2회나 1등]]을 한 적도 있다. 본인은 "후지 TV에서 연 퀴즈 프로그램은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 문제였다.[* 프로그램 마지막 문제였던 [[하노이의 탑]]을 심화 파트에서 다루는 고등학교 수학 교과서가 있긴 하다. 물론 학생들이 쉽게 풀만한 수준이 아니라 이런 게 있다는 차원에서 실어놓았다.] 나만 문제를 맞혀서 1등을 하지는 않았다. 다들[* [[동경대]] [[수학과]] 학생들도 있었다.] 정답을 맞혔다.", "아마도 외국에서 왔고 공인이다 보니까 1등을 준 것 같다."고 말했지만, 심사위원인 교수들이 봤을 때 가장 아름다운 풀이로 문제를 푼 사람에게 1등을 주는 방식이었다. 즉, 문제의 풀이 과정이 가장 좋았다. 지금도 방송에 나와 문제를 푸는 모습을 보면, 문제를 푸는 것 뿐만 아니라 풀이도 굉장히 중요시 한다. 참고로 이 때 그는 일본어를 배운지 3개월 정도 되었을 땐데, 문제 풀이를 [[http://tvcast.naver.com/v/1360514|일본어로 설명했다.]]
          * 일본 배우 [[유민]]과 스캔들이 난적 있으나 공식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 김준수(JYJ)
         특유의 음색을 살리면서 매우 안정적이고 다이나믹하게 노래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기교와 표현력은 아이돌 가수 출신 중에서는 비교가 되는 상대를 찾기 어려운 수준이다. 띄울 때 띄우고 죽일 때 죽이는 완급조절에도 강해 곡의 도입부, 후렴구, 클라이막스 어느 파트를 맡아도 항상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낸다. 일본에서의 솔로곡 'Rainy Night'나 2005년 무렵 커버했던 빅마마의 '체념' 등을 들어보면 확실히 굉장히 꽉 찬 느낌의 노래를 감상할 수 있다. 동방신기 시절에 [[이소라(가수)|이소라]], [[백지영]], [[린(가수)|린]][* 이 중 린의 경우 2013년 12월 발매된 뮤지컬 디셈버 스페셜 앨범의 수록곡이자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를 리메이크한 곡 '스치다'로 준수와 듀엣을 하기도 했다.] 등 많은 선배 가수들이 한번쯤 같이 작업해보고 싶다고 꼽았을 정도로 가창력을 인정받았었다.
         과거 온라인 게임 [[그라나도 에스파다]]에서 쟁당 '''†십자가†'''의 당수로 활동했던 이야기는 유명하다. 쌍둥이 형과 함께 가상세계를 휩쓸고 다녔다는 위엄 넘치는 소문이 존재한다. 실제로 시아준수는 동방신기 활동시절 4집 앨범 Thanks to에 'GE 일본에 있으면서 저의 즐거운 취미생활에 활력소를 주신 우리 G.E 십자가 분들. 너무 고마워요~' 라는 글을 남겨 팬들이 [[열폭]]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장착하고 다니던 아이템들을 보면 [[현질]]도 많이 한 듯하다.[* [[http://pann.nate.com/talk/200708574&order=N&page=1|자료1]], [[http://ge.hanbiton.com/Comm/Free/View.aspx?postKey=236202|자료2]],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DgyH&fldid=4RkV&datanum=1522|자료3]].] 천 만원 넘게 현질을 해 아이템을 길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더라, 현질을 엄청나게 해서 아무리 때려도 죽지 않는다더라(...) 하는 [[카더라]]들도 있다. 이후 다른 팀원의 추천으로 인해 [[아이온 : 영원의 탑]]으로 옮겨타면서 완전히 접은 것으로 보이고, 아이온 만렙을 찍은 이후에는 [[아키에이지]]로 갈아탔다.
          '숲요'라고도 쓰인다. 2014년 봄 일본에서 열린 [[http://img.tenasia.hankyung.com/webwp_kr/wp-content/uploads/2014/06/2014062618055714419.jpg|'The Best Ballad' 콘서트의 포스터]]가 뜨자 팬들이 붙여 준 별명이다.
          아기 + ~짱(일본식 애칭).
          일본에서 생긴 별명. 5살인 일본 남자애에게 들은 말이다. 준수는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에서 쓰이는 애칭 '~짱'에서 파생된 별명으로 구동방시절 초면의 여성 아나운서 조차 본인도 모르게 사용해버린 마성의 호칭. 한국과 일본에서 지분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애칭이다. 이름 대신 쓰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스탭들이 그를 준수보다는 준쨩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인스타그램에서도. ~~만인의 준쨩~~ '준쨩', '쥰짱' 등의 바리에이션이 있다.
          2010년 일본 싱글 활동 당시 대략 [[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8/9/6/896d68ae9d31899f6fd931e0e7655c8c.jpg|이런 비주얼]]로 활동했었는데 이것이 마치 일본의 [[탄빵]]같다 하여 붙여진 별명. ~~아시아의 시꺼미~~
         JYJ로의 독립 이후 솔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단독(솔로) 콘서트도 매우 활발하게 개최하고 있다. 실제로 공연은 큰 수입이 되기 때문에[[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4/11/19/0602000000AKR20141119177600005.HTML|#]], JYJ 세 멤버 모두가 본격적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해 각 분야에서 호평을 받던 2012년에도 팀내 최고 매출은 준수의 몫이었다. 일례로 뮤지컬 입문 이후 일 년에 한 번 꼴로 열리고 있는 Ballad&Musical 콘서트의 경우 국내에서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발라드 투어로 개최될 정도로 큰 인기다. 또한 세계적으로 콘서트를 많이 여는 가수들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 2013.10.08-10 || 일본, 나고야 || 24000 ||
         || 2013.10.15-16 || 일본, 요코하마 || 36000 ||
         ||<|2>XIA The Best Ballad Spring Tour Concert In JAPAN || 2014.05.13-15 || 일본, 도쿄 || 33000||
         || 2014.05.22-24 || 일본, 오사카 || 30000 ||
         당시 29살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엄청 카와이하다. 또한 이 투어를 할 때 선보인 핑크색 머리가 기막히게 어울렸다는 점과 동방신기 5인 시절의 일본 히트곡을 메들리한 무대가 여초 사이트나 팬덤 내에서 크게 화제가 되며 휴덕했던 팬들을 많이 돌아오게 했다는 후문. 꾸준한 관리 덕인지 좀처럼 늙지 않는 외모~~[[드라큘라]]?~~와 압도적 실력의 퍼포먼스로 인해 '''아이돌 끝판왕'''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7>2015 XIA 3rd ASIA TOUR CONCERT - FLOWER || 2015.03.03-05 || 일본, 오사카 || 30000 ||
         || 2015.03.24-26 || 일본, 도쿄 || 33000 ||
         || 2015.03.31-04.01 || 일본, 후쿠오카 || 10000 ||
         || 2015.04.07-08 || 일본, 나고야 || 20000 ||
         || 2015.10.24-25 || 일본, 요코하마 || 40000 ||
         || 2015.11.28-29 || 일본, 나고야 || 18000 ||
         ||<|2>2016 XIA THE BEST BALLAD SPRING TOUR CONCERT vol.2 in JAPAN || 2016.03.15-16 || 일본, 나고야 || 16000 ||
  • 김준원 (1888년)
         |복무={{육군|일본 제국}}<br />{{육군|대한민국}}
         |복무 기간={{육군|일본제국}}[[1914년]] ~ [[1945년]]<br />{{육군|대한민국}} [[1946년]] ~ [[1954년]]
         |최종 계급= {{일본 육군 계급장|대위}}<br />{{대한민국 국군 계급장|준장|육군}}
         * [[일본 육군사관학교]] 26기 졸업
         출신지는 [[한성부]]이다. 형인 [[김기원 (1878년)|김기원]]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15기로 졸업한 [[대한제국]]의 무관이었다. 김준원도 [[일본]]에 유학하여 [[1914년]]에 일본육사를 제26기로 졸업<ref>{{서적 인용
         이후 [[일본군]] 장교가 되어 [[1923년]]에 일본 육군 보병 대위에 올랐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될 때 참여하여 [[1949년]]에 육군 소령이 되면서 김정렬과 함께 국군에서 복무했다.
         * [[일본육군사관학교]]
         [[분류:1888년 태어남]][[분류:1969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대한민국 육군 준장]][[분류: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경주 김씨]]
  • 김준현(코미디언)
          * 고교시절 [[검도]] 대회에서 검도왕을 차지했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고[* 20대 초반까지는 날씬했다. 덧붙여 모교인 [[광명고등학교|광명고]]도 ~~그나마 내세우는 게 검도.~~ 검도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실제로 광명고 학생들은 매주 1회 검도 수업을 한다. 게다가 맛있는 녀석들에서 [[본인]]이 언급한 바에 의하면 [[http://m.ytn.co.kr/ent_view.php?s_mcd=1406&key=201512052151017860&ref=10|초등학생 시절부터]] 검도시합을 하러 [[일본]]에 갔다온 적이 있다고 한다. 상당한 엘리트 체육인이었던 셈.][* 이름이 무슨 피구왕 통키스러워서 우스워 보이지만 김준현이 참가했던 SBS 검도왕대회는 개최 당시부터 현재까지 국내 검도대회 중 가장 큰 규모의 대회다.], [[http://media.daum.net/entertain/enter/newsview?newsid=20130205154907565|비만체형인 지금도 근육량은 운동선수급이라고 한다]].[* 사실 특정 부위 비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전반적으로 비만인 사람들은 원래 근육이 많다. 살 찌면 지방만 잔뜩 늘어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육중한 체구를 움직이기 위해 몸이 근육을 많이 만들어내기 때문. 이런 사람들이 다이어트를 하면 몸도 일종의 구조조정을 해서 근손실이 엄청나게 일어난다.]
  • 김지영 (2005년)
         |[[20년]] [[대한민국]]&[[일본]] 합작영화)
         | 어린 웨이웨이 역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일본]] 합작영화)
  • 김진우(WINNER)
          * [[여장]]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 [[일본]] ZEPP콘서트에서 박봄 역할로 [[여장]]을 했는데 매우 예쁘다 ] 상속자들 패러디에서 [[유라헬]] 역할로 분장했는데 닮은 모습 덕에 김라헬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진우+유라헬 합성어. 그 이후에도 일본 콘서트에서 여장을 하며 진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여기서 미담은 위너 멤버들끼리 여장을 할 멤버를 정할때 모든 멤버들이 꺼려하고 있는데 그걸 본 진우가 자기가 하겠다고 먼저 나섰다고 한다.(꽃보다 청춘 위너편 참고)
  • 김집 (1926년)
          | 기타 이력 = [[요코하마 국립 대학|일본 요코하마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br /> 소아과 의사 겸 [[교수|의과대학 교수]] <br /> [[경북대학교|경북대 의과대학]] 교수 <br /> [[영남대학교|청구대 보건학과]] 외래교수 <br /> [[계명대학교|계명대 보건학과]] 강사 <br /> [[대구가톨릭대학교|효성여대 가정학과]] 강사 <br />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br /> [[대한민국 체육부|체육부 장관]] <br /> [[중앙대학교|중앙대 행정학과]] 초빙교수 <br /> [[한양대학교|한양대 행정학과]] 초빙교수 <br /> 민주정의당 상임위원 <br/> 민주정의당 전임위원 <br/> 신민주공화당 보건행정교육특보위원 <br/> 자유민주연합 특임고문 <br /> [[한국청소년연맹]] 명예총재
         * [[일본]] [[요코하마 국립 대학|요코하마 국립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 《일본을 꺾던 날》
         * 《유행성 일본 뇌염의 저온요법》
  • 김철기 (1974년)
         |align="center"|[[와키자카 야스하루|협판안치 (와키자카 야스하루)]]<ref>[[일본]]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예하 장수</ref> 역
  • 김청태
         현재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재임 중이다.
         [[분류:198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양궁 선수]][[분류:양궁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분류:올림픽 양궁 메달리스트]][[분류:2000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양궁 참가 선수]][[분류:2000년 하계 올림픽 양궁 참가 선수]][[분류:체육훈장 맹호장 수훈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관악중학교 동문]][[분류:서울체육고등학교 동문]][[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김태완 (1984년)
         [[서울특별시|서울]] 출신으로 [[서울양목초등학교]]와 [[신월중학교 (서울)|신월중학교]]를 졸업하고 에 입학했다. 시절 수비 위치는 주로 [[3루수]]였으나 부쩍 커 버린 키 때문에 [[1루수]]로 이동했다. 시절 [[2002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02년]] [[한화 이글스]]의 2차 8순위(전체 60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했다.<ref>[http://www.sports2.co.kr/people/people_view.asp?LCT=0&AID=184401&PG=3/ 이제 시작일 뿐이다 한화 Big4 (4) 6번 타자 김태완]{{깨진 링크|url=http://www.sports2.co.kr/people/people_view.asp?LCT=0&AID=184401&PG=3%2F }} 《스포츠 2.0》, 2008년 5월 26일</ref> 성균관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4년]]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중화민국|대만]]에서 벌어진 제2회 세계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 [[대한민국]]이 [[미국]]과 [[일본]]에 이어 3위 입상을 하는 데 공헌했다.
         [[김태균 (1982년)|김태균]]과 [[이범호]]의 [[일본]] 진출 공백으로 인해 [[외야수]] [[최진행]]과 함께 중심 타선에서 1루수 수비를 맡기 시작했다. [[4월 10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8번 출루하여 개인 최다, 프로야구 최다 출루 기록을 수립했다. [[4월 18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서울에서 기습 번트 타구 수비 도중 왼쪽 어깨 부상을 당해 [[4월 21일]]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됐다. [[5월 11일]] 1군 엔트리에 다시 등록됐다. 6월 이후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고, [[KIA 타이거즈]]에서 3:3 트레이드된 [[장성호 (야구 선수)|장성호]]가 입단하여 수비 위치가 다시 [[지명타자]]로 변경되었다. [[2010년 아시안 게임|광저우 아시안 게임]] 야구 국가대표팀에 60인 예상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지만,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하여 결국 팀 내 [[류현진]] 혼자만이 [[2010년 아시안 게임|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차출됐다. 2010 시즌 종료 후,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여 [[대전고등학교]]에서 복무를 마치고 소집 해제되었다.
  • 김태희
         김태희는 2011년 1월부터 방영된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에 출연했다. 드라마는 평균 15%의 시청률을 기록하였다.<ref>{{뉴스 인용 |저자=이수아|제목='마이 프린세스', 종영…여심 흔든 달콤한 '황실로맨스'|url=http://www.frontiertimes.co.kr/news/news/2011/02/25/65491.html|출판사=프런티어타임스|날짜=2011-02-25 |확인날짜=2012-02-29}}</ref> 김태희는 [[송승헌]]과 함께 공연해 대학생 이설 역할을 맡아 기존의 이미지와는 달리 코믹한 캐릭터를 연기했고, 이미지의 변화와 이전보다 향상된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저자=김민호|제목=김태희 푼수연기 호평 "이제야 딱 맞는 캐릭터!"|url=http://www.toda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2348|출판사=투데이코리아|날짜=2011-01-06|확인날짜=2011-01-06}}{{깨진 링크|url=http://www.toda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2348 }}</ref> 4월 1일에는 《[[MBC 다큐스페셜]]》에서 셀러브리티 바이오그래피 [[MBC 스페셜 방영 목록#2011년|태희의 재발견]]이 방영되었고, 방송에서 김태희의 일상, 연기력 논란, 학창 시절 등에 대해서 다뤘다.<ref name="미디어스">{{뉴스 인용|저자=곽상아|제목=MBC스페셜 '태희의 재발견'…"황당·실망"|url=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960|출판사=미디어스|날짜=2011-04-03|확인날짜=2014-04-07}}</ref> 시청률은 지난 편에 비해 2배 가량 상승한 9.3%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저자=문완식|제목=궁금했던 김태희..'태희의 재발견' 시청률 9.3%|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1040209125306836&type=1&outlink=1|출판사=머니투데이|날짜=2011-04-02 |확인날짜=2014-04-07}}</ref> 하지만 일부에서는 “뭘 말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김태희 홍보프로” 등의 비판이 이어졌다.<ref name="미디어스"/> 이에 대해 [[성공회대]] 김서중 교수는 “[[MBC스페셜]]이 김태희도 다룰 수 있다. 문제는 소재가 아니라 다루는 방식”이라고 말했다.<ref name="미디어스"/> 《[[마이 프린세스]]》가 종영되고 나서 김태희는 [[일본]] 기획사 [[스위트 파워]]와 계약을 맺고 [[일본]] 진출을 한다고 발표했다.<ref>{{뉴스 인용|제목=김태희 일본 진출…"일본서 적극적으로 활동 펼칠 것"|url=http://sstv.hankyung.com/?c=news&m=v&nid=101064|출판사=SSTV|저자=신영은|날짜=2011-03-03|확인날짜=2014-04-07|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408214713/http://sstv.hankyung.com/?c=news&m=v&nid=101064#|보존날짜=2014-04-08|깨진링크=예}}</ref> 이후 [[일본]] [[후지TV]] 드라마 《[[나와 스타의 99일]]》에 여주인공 한유나 역할로 출연해 일본 배우 [[니시지마 히데토시]]와 공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김태희, 일본 드라마 주연…니시지마 히데토시와 호흡 |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519575|출판사=아시투데이|저자=정희영|날짜=2011-08-25 |확인날짜=2011-09-10}}</ref> 첫 [[일본]] 드라마는 평균 시청률 9.3%를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끝냈고, 많은 CF 촬영도 진행 할 예정이였다.<ref>{{뉴스 인용|제목=김태희, 日 드라마 성공 데뷔 후 해외 CF 러브콜 쇄도|url=http://isplus.joinsmsn.com/article/882/7420882.html?cloc=|출판사=일간스포츠|저자=김인구|날짜=2012-02-21|확인날짜=2012-02-25}}{{깨진 링크|url=http://isplus.joinsmsn.com/article/882/7420882.html?cloc= }}</ref> 그러나 2005년 이완과 함께 스위스에서 독도 사랑 캠페인을 벌인 것을 빌미로 각종 CF 방영 계획이 취소되었고, 드라마 촬영 중단까지 요구되었다.<ref name="광주일보">{{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日 CF행사 취소..독도발언 때문|url=http://www.kwangju.co.kr/read.php3?aid=1329898239461109010|출판사=[[광주일보]]|날짜=2012-02-22 |확인날짜=2012-02-25}}</ref>
  • 김한 (1909년)
         '''김한'''(金漢, <small>일본식 이름: </small>星村洋, [[1909년]] [[4월 25일]] ~ ?)은 [[한국]]의 [[영화 배우]] 겸 미술인이다. 김한은 배우로 활동할 때 사용한 예명이며, 본명인 '''김인규'''(金寅圭)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로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1928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 미술학교]] 도안과에서 수학했다. 도쿄 유학 시절에도 영화에 뜻을 두고 있다가, [[1931년]] 무렵 방학을 이용하여 귀국했을 때 《방아타령》의 미술감독을 맡고 출연까지 겸하면서 배우가 되었다. 이때 경향극에 참여하여 경찰의 탄압을 받고 다시 도쿄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 김한중
         * [[일본]] [[게이오기주쿠 대학교]] 명예 의학박사 ([[2011년]])
  • 김현철(교수)
         || '''약력''' ||<(> 쓰쿠바 대학 부교수[br]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위원[br]한국자동차산업학회장[br]한국중소기업학회 부회장[br]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br]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장 ||
         1962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대구 [[심인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민국]] 경제가 당면한 저성장 시대 생존 전략을 중심으로 꾸준히 연구해 온 학자로서 [[일본]] 등 글로벌 경제 환경에 대한 이해가 풍부하다는 평가가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체감한, 이른바 '일본통'으로 불린다. 토요타, 캐논, 후지필름 등 일본 기업뿐만 아니라 삼성전자, SK텔레콤 등의 기업들에게 자문을 해 왔다.
         2015년 11월 26일, 국회에서 열린 국회 최고위 경제분석과정 강의에서 “수출 부진과 가계부채 증가로 한국 경제는 파국에 접어들고 있다”며 지금의 [[대한민국/경제]]가 1990년대 중반 버블이 꺼지기 시작한 일본경제와 닮았다고 평가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소니가 삼성 때문에 쓰러졌다고 생각하지만 소니는 삼성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무너뜨린 것"[* 소니가 안 무너졌다는 반론은 있다. 오히려 반등에 성공했다는 지표도 있다. [[http://it.chosun.com/news/article.html?no=2819018|링크참조]] 그러나 맥락상 포인트는 소니가 무너졌다 안무너졌다의 단순 팩트 체크가 아니라, 일본 정부의 법인세율 인상 정책 때문에 소니가 피해를 입었다는 맥락이다.]이라며, 법인세율 인상은 기업을 망가뜨리게 되고 나아가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김혜선(배우)
         여담으로 시라카와 쇼코(白川翔子)라는 이름으로 갓 데뷔했던 시절에 [[일본]]에서 활동한 바 있다. 그런데 보통 배우활동이 아닌 '[[그라비아]] 돌'로 활동을 했다. 지금의 그라비아 돌의 노출수위에 비해 좀 약하긴 했지만, 어쨌든 20여 년 전 수영복 촬영은 꽤 노출도가 높은 편이었던지라 일본의 이런 --[[성진국]]-- 문화 때문에 맘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이후 2011년 출연한 영화 "완벽한 파트너"에서 그 당시보다 높은 수위의 노출연기를 선보였던걸 생각하면 흠좀무(...)
  • 김혜수
         {{일본인 정보
         | 출생지 = [[일본]] [[도쿄시]]
         * 전국시대 말기 아쯔치모모야마시대 의 [[일본]] 의 통치자
         [[분류:일본 인물]]
  • 김혜연
         |출생지 = {{국기|일본}} [[도쿄도]]
         '''김혜연'''(金蕙妍, [[1971년]] [[3월 28일]] ~ )은 [[일본]]의 주부이다.
         [[http://김혜연씨는그영륜군과결혼을한다 이때 김혜연씨는일본주부으로생활한다]
         [[분류:일본 풍속]]
  • 김홍집 (1842년)
         [[1880년]]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한 뒤, 신문물을 견학하고 돌아와 개화, 개항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한편으로 [[위정척사파]] 계열 인사들도 중용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으나 급진 개화파로 몰렸고,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진압 후 [[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그 뒤 [[1896년]] 관제 개정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끌어들인 일본측의 지원으로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총리대신 재직 중 [[신분제]] 폐지, [[단발령]] 등을 강행하는 한편, 함께 [[일본]]의 도움으로 개혁, 개방을 단행한 뒤에는 친일파로 몰려 [[아관파천]] 때 친러파의 군인들에게 살해당하였다.
         [[1875년]]에는 부사과를 거쳐 [[흥양]][[현감]]으로 나갔다가 [[1877년]] 사과(司果)를 역임했다. 1878년 이후 호조참의, 공조참의, 병조참의, 예조참의를 두루 지냈다. 그 뒤 광양 현감(光陽縣監)을 거쳐서 [[1880년]] 예조 참의로서 제2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58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 제국]]을 다녀왔다. 귀국 이후, 서양 근대의 기술적 성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일본]]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조사시찰단]]의 일본 파견을 상주하게 하였다.
         === 일본 유람 ===
         [[1880년]] 여름 그는 [[윤웅렬]](尹雄烈), [[이용숙]](李容肅), [[지석영]](池錫永) 등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홍집 일행은 [[1880년]] 7월 일본 기선 〈지토세 마루〉 편으로 [[부산항]]을 통해 [[도쿄]]로 도착했다. 도쿄 체재 1개월 동안 이들은 일본 정부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을 두루 살폈다. 그런 한편 일본의 감언이설과 유혹에 빠져들어 [[친일파]]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들은 수신사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일본 정부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바, 인천을 개항장으로 지정토록 하고, 일본 공사의 한성부 주재 등이 필요하다고 본국 정부에 품신하는 등 일본의 주구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다.<ref>{{서적 인용
         }}</ref> 한편 [[일본]]의 철도와 위생상태, [[증기 기관차]]와 [[자동차]]의 운용 등을 본 김홍집과 일행은 충격을 받았다.
         김홍집은 귀국한 뒤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과 [[정관응]](鄭觀應)의 《이언 (易言)》을 소개하여 개화 정책을 적극 추진케 한 공으로 예조 참판에 승진했으나, 개화를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배척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책을 소개한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개화파의 지지를 받았지만 유학자 중심의 척사위정파(斥邪衛正派)의 심한 반발을 받아 부득이 자리를 물러났다. 그러나 곧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으로 통리기무아문의 [[통상사]][[당상]](通商司堂上)으로 복직했다. 그는 [[조선책략]]과 [[이언]]을 소개하며 [[조선]]은 미국, 청국, 일본 등과 손을 잡고 세계발전의 대열에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당시 유생들과 지역의 유림들은 그가 흉악한 모의를 꾸민다며 규탄하였다.
         [[1882년]] 구미 열강의 통상 요구와 [[임오군란]]의 뒤처리 등 복잡한 문제에 부딪친 조선 정부에 다시 기용되었다. 전권대신 [[이유원]](李裕元)의 부관으로서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는 데 앞장서는 등 여러 나라와 수호조약(한미(韓美)·한영(韓英)·한독(韓獨) 등) 등을 맺을 때 유효적절한 수완을 발휘하여 ‘비오는 날의 나막신’에 비유되곤 하였다.<ref name="실록친일파">{{서적 인용
         }}</ref> 한학에 능통했던 그는 [[1882년]] 구미(歐美) 열강의 통상요구에 따른 복잡한 국내문제와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뒷처리 등으로 다시 기용되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과의 [[수호조약]] 체결에 전권대신들의 부사(副使)로서 활약하였고, [[윤치호]]를 통역으로 채용하여 번역과 내용해석을 전담했다. [[제물포 조약]] 체결에는 [[이유원]](李裕元)의 부관으로 참여하여 [[일본]]측의 요구를 일부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타협하였다. 여러 조약의 체결을 잘 처리한 공으로 [[경기도]] [[관찰사]]로 승진되었다.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일본 세력의 침투가 표면화되자 그 힘을 빌어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해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청나라군을 끌어들였고, 조선에 침투를 바라던 일본군은 [[청일 전쟁]]을 일으키기 며칠 전인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에 경복궁을 습격하고 무기고를 탈취하는 등 김홍집 일파를 지원하였다. 한편 김홍집은 일본 조정과 친하다는 이유로 음력 6월 말부터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고 [[총리대신]]이 되어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개혁기구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대원군을 불러들여 민중의 불만을 완화하고자 하였다.
         [[청일 전쟁]]의 결과 일본이 득세하자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갔던 강력한 친일파 박영효가 입각한 제2차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이 성립되었으며, 이때 군국기무처를 없애고 1차 내각때부터 작성한 초안을 완성, 새로운 법령인 [[홍범 14조]](洪範十四條)를 직접 수립하여 고종으로하여금 발표하게 하였다. 이어 8아문을 7부로 고치고, 지방 8도를 23부로 바꾸고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여 사범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재정난과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의 대립, [[유길준]] 등의 소극적 협력 등으로 지원 세력이 없어 내각은 곧 와해되고, 박영효가 역모사건으로 일본 망명하고 박정양 내각이 탄생하였다.
         법률과 제도를 바꾸고 [[일본]]의 변화된 관제와 복식을 조선에 도입하려 했다. 또한 양력의 사용과 우편 제도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설에는 김홍집은 자신이 군국기무처의 총재를 겸임하면서 총재보좌 명목으로 일본 공사관 직원 4~5명을 끌어들여 이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등 친일매국행위에 앞장섰다<ref>{{서적 인용
         이어서 들어선 박정양(朴定陽)내각이 열강에 접근하려는 정책을 쓰자, [[일본]]은 이를 경계했고 그는 이 사이 일본측과 접촉하였다. 박정양 내각이 새로 세력을 뻗기 시작한 구미 열강에 친근하려는 정책으로 기울어지자 일본 제국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죽인 후 [[갑오개혁#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제3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였다.
         김홍집 내각에서는 일본의 압력 외에도 [[단발령]](斷髮令)의 강행 등 급격한 개혁을 실시하다가 [[성리학]]자들의 반발로 전국적인 의병 봉기와 집회를 야기하였고, [[1896년]](건양 1년) 러시아의 세력이 증대하여 드디어 [[아관파천]]이 일어나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파 내각이 조직되었다. 그와 동시에 김홍집은 많은 대신이 피살될 때 매국 친일당의 두목으로 몰려 광화문에서 친러파 군인들과 군중들에게 살해되었다. 저서로는 '이정학재일록 (以政學齋日錄)'이 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4세였다.
         김홍집은 행실이 그가 주장한 바와 엇갈리는 바가 많아서 ‘친일파 애국자’로 표현되곤 한다.<ref name="실록친일파" />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정치가라는 평가와 함께 일본에 이용당한 친일파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또한 그가 죽기에 앞서 “일국의 총리로 동족 손에 죽는 것은 천명”이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에 책임감 있는 정치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을미사변을 방조한 점'''과 고종에게 명성황후를 '서인'으로 폐하는 조칙에 서명하도록 한 강요한 점 등은 여전히 그의 정치적 기준에 대한 논란으로 남아있다.
         [[분류:1842년 태어남]][[분류:1896년 죽음]][[분류:한국의 살해된 사람]][[분류:화기에 죽은 사람]][[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사상가]][[분류:온건개화파]][[분류:통역사]][[분류:과거 급제자]][[분류:한국의 섭정]][[분류:유교 신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번역가]][[분류:조선-일본 관계]][[분류:갑신정변]][[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영의정]][[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유길준]][[분류:친일파]][[분류:경주 김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김화랑
         '''김화랑'''(金火浪, <small>일본식 이름: </small>星野正史, [[1912년]] [[10월 8일]] ~ [[1976년]])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감독]]이며 연극인이다. 다른 이름으로 '''이익'''(李翼)이 있고, 본명은 이순재(李順載)이다.
         [[경성부]] 출신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배재고보 시절부터 연극부에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1937년]] [[주영섭 (1912년)|주영섭]] 등과 함께 [[조선영화작가협회]]를 결성하며 문화예술계에 첫선을 보였다. 그는 '천부적인 예술 감각의 소유자'로, 천재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ref>{{서적 인용
         [[중일 전쟁]]을 배경으로 [[1939년]]에 [[조선문화영화협회]]가 제작한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를 연출하여 영화감독으로도 데뷔했다. [[최운봉]]과 [[복혜숙]]이 출연한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는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고 근로와 저축으로 국가에 충성을 다할 것을 주제로 삼고 있는 직설적인 어용 영화이다. 주인공은 동네에서 손수 [[일장기]]를 만들고 나누어 주고 [[신사참배 강요]] 정책에서 앞장서 모범을 보이며, 마지막에는 일장기 아래에서 일본 궁성을 향해 죽는 인물이다.
  • 김희선
         김희선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스크린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드라마 출연을 한동안 중단하였다. 영화 《[[와니와 준하]]》(2001), 《[[화성으로 간 사나이]]》(2003)에 출연했지만 번번히 이렇다 할 흥행을 거두지 못한 채 2003년 [[일본]]의 인기 드라마 《[[야마토 나데시코]]》를 원작으로 한 로맨스 드라마 《[[요조숙녀]]》로 4년여만에 브라운관에 컴백하였다.<ref>{{뉴스 인용
  • 나길조
         1923년 [[경상남도]] [[창원시|마산합포구]] (현 [[창원시|마산합포구]])에서 태어났다.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 나다카 타츠오
         [[일본]]의 [[연예인]]. 남성. [[모델]] 출신의 배우. 생년월일 1951년 2월 9일. A형. 쿄토 출신. [[왼손잡이]].
         [[분류:일본 연예인]]
  • 나도향
         [[한성부]] [[용산구|용산방]]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에서 출생하였으며,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 (서울)|경성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한 뒤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공부하였다. [[1922년]] 《[[백조]]》의 창간호에 소설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상화 (시인)|이상화]], [[현진건]],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파라는 [[낭만파]]를 이루었다. 이듬해 [[동아일보]]에 장편 《환희》를 연재하여 19세의 소년 작가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때부터 작품 경향을 바꾸어 [[자연주의 (문학)|자연주의적]] 수법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1925년 《여명》 창간호에 《벙어리 삼룡이》를 발표하였는데, 한국 근대 문학사상 가장 우수한 단편 중의 하나로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날카로운 필치로 많은 작품을 써서 천재 작가로 알려졌으나 폐병으로 인해 25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 나향욱
         세상에 표리부동한 사람은 흔하지만 국가정책, 그것도 공교육을 담당하는 핵심 고위 공직자가 자기 직무에 관해 노골적으로 표리부동한 속마음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현실이 현실이라 해도 [[한국]]이나 [[일본]]처럼 [[유교]]사상이 아직도 건재한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정의당]] 대변인 한창민은 "공직자의 연이은 [[명언]]으로 국민들을 깨우쳤다. 얼마 전 '[[일본|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는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국가기후변화적응센터장([[이정호]][* 이 사람 아버지가 '''[[하나회]] 출신으로 국방장관을 지낸 [[이종구(군인)|이종구]]'''이며, 할아버지가 친일파라고 커밍아웃을 해버렸다.])과 '학생들은 [[빚]]이 있어야 한다'는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안양옥]])의 비판이 국민들의 분노를 유발했다"라고 하며 "고위 공직자의 망언이 [[박근혜 정부]] 아래에서 일상사가 되어가고 있다. 은연 중 또는 노골적인 자기 고백들은 우리 사회의 어둠과 고위 공직자들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http://justice21.org/newhome/board/board_view.html?num=67729&page=1&keycode=subject&keyword=%EB%A7%9D%EC%96%B8|논평]]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넌 국가의 내장에서 세금 빨아먹는 [[십이지장충]]”, “국가도 가끔 구충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벌레들은 당장 [[해고]]시켜야”라고 논평하였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022350005|2016년 5월 2일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모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미국]]은 집안 좋은 애들이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걸 당연히 여기는데''' 한국에서만 이상한 소리들을 한다.” “앞으로도 '''서포트 없는 애들은 들어오기 힘들게''' 해야 한다.[* 사실 이미 그러고 있다. 그리고 점점 더 이게 심화되는 중이고... 옆 나라 일본에서는 이미 저게 완전히 정착돼 버린 상황이다. 거기다가 한국에서 2010년대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의 경우는 사실상 계층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론.~~그대신 그 애들은 먹고살만한 직장을 구하는 것은 쉬울 것이다. 저출산으로 인구절벽이 심하거든.~~] 그러면 결국 우리 학교는 '''명문가 자제들만 들어올 수 있는 명문 로스쿨'''이 될 것.”[* 서울대학교가 이래서 비판받은 적 있다. 가장 머리좋은 인재가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지, 서울대학교가 가장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기술을 가진 데가 아니라고. 즉, 자기가 뛰어나서 잘사는 게 아니라 [[신데렐라 컴플렉스]], [[골드 디거]]처럼 부유한 배우자를 만나 신분상승을 이룬 것과 마찬가지란 뜻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서울대가 지원하는 것은 타이틀과 동문회 명부에 불과하다.] 물론 신분제나 개돼지 등의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발언 역시 나향욱의 발언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 나혜미
         |출생지 = [[일본]] [[도쿄도]]
         '''나혜미'''([[1991년]] [[2월 24일]] ~ )는 [[일본]]의 [[배우]]이자 [[모델 (직업)|모델]]이다.
         [[분류:일본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일본의 모델]][[분류:일본의 정치]][[분류:도쿄도 출신]][[분류:중앙대학교 동문]][[분류:1991년 태어남]][[분류:2001년 데뷔]][[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일본 인물]]
  • 남궁억
         [[1898년]] [[11월]] 왕당파로부터 왕정타도와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17명의 지도자와 함께 경성부 외곽에 숨었으나 결국 경무청 형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1899년]] [[12월]]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당하자 언론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900년]] [[7월]] [[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을 주장하고 이를 번역하여 외국 신문에서 옮겨 실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는 논평을 게시했다가 경무청에 체포, 구금되었다.
         1902년(광무 5년) 5월에도 [[황성신문]]에 일본이 '[[1894년]] [[동학난]] 이래 [[조선]]을 침략해 들어오면서 러시아와 맺은 조약이라며 [[러일협정]]의 성격을 논박한 사설을 실었다. 이 사건으로 황성신문 총무 나수연과 함께 다시 경무청에 체포, 구속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02년]]에는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의 한국 분할설과 러일 협정을 공박하였으며, [[1903년]] 영관(領官)을 지낸 유동근(柳東根)이 '황성신문 사장이던 남궁억과 신문사 총무 나수연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朴泳孝) 등과 공모,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하였다'고 모함하였다. 이 때문에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었으나 혐의 없음으로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출옥한 뒤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03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특별히 성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성주목사와 [[1904년]] 양양군수를 역임하면서 부패한 토호들과 토색질을 일삼는 향리들을 엄히 단속하여 처벌하였으며 조정 고관들의 비리를 탄핵하기도했다. 강원도 양양군수 재직 중 폐습타파와 단발령, 신식 학교 유치, 도로 정비, 병원 유치 등을 추진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부당함을 간하다가 실패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로 복직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광무 10년) 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양양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11월에는 권동진(權東鎭), 여병현(呂炳鉉), 유근, [[유길준]], 이우영(李宇榮), [[오세창]](吳世昌), [[윤효정]](尹孝定), [[안국선]], [[장지연]], 정운복(鄭雲復), 홍필주(洪弼周), [[윤치호]] 등과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대한협회 회장이 되었다. 이어 기관지로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07년 [[7월]] [[일본]]이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을 이유로 [[조선 고종|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가하여 사퇴시키고 [[이완용]], [[박제순]] 등과 [[정미칠조약]]을 체결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관직을 사임하고 홍천 모곡으로 낙향하였다.
         낙향 초기에는 교회를 설립한다 하여 주민들의 편견과 비방에 시달리기도 했다. 문맹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 그는 20대에서 30,40대의 학생들도 받아서 가르쳤다고 한다. 낮에는 학교 교사로 밤에는 부락의 마을 지도자로 활동하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또한 조선이야기 와 동사략 등을 집필, 간행하였다. 후에 모곡학교는 총독부 학제 개편에 의해 한서국민학교와 한서중학교로 분리되었다. 그는 홍천군 모곡리 유리산에 올라 매일 '불의의 일본을 이 땅에서 물리쳐 주소서.', '이 민족에게 불의에 굴하지 않는 힘을 주소서.'하고 매일과 같이 기도하였다 한다. 또한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로 시작하는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을 비롯한 몇몇 노래와 시 등을 직접 작사 작곡하였다. 그는 학교 안에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노동과 애국심을 주제로 한 찬송가와 시, 가사 등을 지어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들에 보급하였다. 특히 그가 지은 창가(唱歌) 가사 무궁화동산, 기러기 노래, 조선의 노래, 운동가, 조선지리가(朝鮮地理歌) 등은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다.
  • 노동기준감독서
         [[일본]]의 정부기관, 줄여서 노기(労基, 로우키)라고 한다. [[후생노동성]] 산하의 기관으로서, 노동기준법을 지키지 않는 기업에 대하여 지도를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분류:일본 정부기관]]
  • 노라 노
         방송인 [[노창성]]과 이옥경 부부의 차녀로 [[경기도]] [[경성부]] [[가회동|계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태어났다를 졸업하고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랭크 왜곤 테크니컬 컬리지'를 졸업하였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서울특별시|서울]] [[명동]]에 '노라 노의 집'을 열었다. 이후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로 건너가 '아카데미 줄리앙 아트 스쿨'에서 수학하였다. [[1956년]] [[서울특별시|서울]] 반도호텔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다. 이 '최초의 패션쇼'는 '100% [[대한민국]] 기술 사용'과 '처음으로 [[대한민국]] 내에서 생산된 모직 원단 사용' 등으로도 의미가 컸다. [[195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의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의상상 (Best Dress Award) 수상, [[1965년]] 하와이에서 최초로 해외 패션쇼를 개최하며 브랜드 수출을 시작했다. [[1966년]] [[대한민국]] 최초의 '기성복 패션쇼'를 열었고, [[1970년]]부터 [[1973년]]까지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 '프레타포르테 패션쇼'에 참가했으며, [[1974년]] 미국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1977년]] 예림양행을 설립했고, [[1978년]] 뉴욕 법인을 설립했으며, [[1990년]] [[홍콩]], [[일본]] 등에도 법인을 설립했다.<ref name="김패"/><ref>[http://www.ytn.co.kr/_ln/0106_201205221045464951 '대한민국 패션의 전설'...디자이너 노라 노]. YTN. 2012년 5월 22일.</ref><ref>양승은.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3067567_5780.html '대한민국 패션의 뿌리' 노라 노] {{웨이백|url=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3067567_5780.html# |date=20131103112116 }}. 문화방송. 2012년 5월 26일.</ref><ref>김윤덕.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5/25/2012052501366.html 대한민국 1호 패션디자이너… '노라 노' 노명자]. 조선일보. 2012년 5월 26일.</ref>
  • 노무현
         2006년 베트남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직후 한·미·일 정상 간의 기자 회견 모습. 왼쪽부터 한국의 노무현, 미국의 부시 대통령,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함께 한 노무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출범 이후 [[일본]]의 우경화 추세에 맞물려서 일본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2004년]] 3·1절 치사에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을 일으켰던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관련하여 일본의 지도자(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지만 문맥상 고이즈미를 가리킨다고 판단됨)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국민 감정을 대변하려는 것이었지만, 보수 언론 및 야당으로부터 감정적 대응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2005년]] [[야치 쇼타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한국의 야당 의원들과의 대담에서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 [[대북 유화 정책]]을 지속하려는 노무현 행정부를 비판하자 [[김만수 (1964년)|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이 외교적 결례로서 공식 항의하는 일도 벌어졌다. [[2006년]] 일본의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는 등 [[독도]] 문제에 관해 일본과의 긴장이 높아가자 [[4월 25일]]에는 특별 담화를 발표하여 일본에 대해 강하게 경고했다. [[아베 신조|아베]] 정권 출범 이후로도 점점 우경화되는 일본과 마찰을 빚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는 또 [[3월 23일]]에 일본의 행태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사태"로 규정하고 [[독도 분쟁|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 날 침략을 정당화하고 대한민국의 광복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성토하면서 외교적 갈등이 시작되었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830677 | 제목 = 냉탕·온탕 오가는 한일관계 'MB式' 해법은 | 출판사 = 노컷뉴스 | 날짜 = 2008-05-20 | 저자 = 이재기 | 쪽 = | 확인날짜 = 2010-04-22 }}</ref>
         미국의 [[UPI 통신]]은 '한국, 동해를 놓고 제안을 했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명칭)에 대한 타협안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평화의 바다'로 바꿔 부를 것을 제안했다"라고 보도했다.<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070109000622&ctg1=01&ctg2=00&subctg1=01&subctg2=00&cid=0101080100000&dataid=200701092159000488 외신들 "평화의 바다 제안 사실"]</ref> 이 같은 제의는 외교ㆍ안보 라인과 사전 협의도 거치지 않은 돌출 발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전문가들은 국제무대에서 국가 수장의 돌출 발언은 국익에 적잖은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의 일관성 없는 대일 영유권 시각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ref>[http://biz.heraldm.com/common/Detail.jsp?newsMLId=20070108000103 盧대통령 "동해를 '평화의 바다'로 부르자" 논란] 헤럴드경제</ref>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은 국민의 자존심과 역사의식에 상처를 입혔다"며 "반역사적 발언에 대해 깊이 반성하라"고 지적했다. 네티즌들도 "한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적절치 못한 역사관 표명이었다"며 노 전 대통령을 비난했었다.<ref>[http://www.freezonenews.com/news/article.html?no=26787 독도 분쟁으로 盧 ‘다케시마’ 발언 재조명]</ref> 2007년 10월 발행한 '2007 방위백서'의 한글 번역본에는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고 있다.<ref>[http://www.freezonenews.com/news/article.html?no=28051 盧정권 국방부, ‘다케시마’ 표기 물의] 프리존뉴스</ref>
         이와는 별개로 2003년 한일 정상회담 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고 하지요?'라며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표현을 써 파문이 일었다. 일본 언론들이 이를 "한국 대통령이 일본의 견해를 용인?"했다는 식의 보도를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2&aid=0000012143 盧대통령 "다케시마" 실언 논란] 프레시안</ref>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 박용진 대변인도 논평에서 "일제 강점기 만행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5&aid=0000170763 ″과거사 언급않겠다는 건 굴욕″…野 한일정상회담 비난] 국민일보</ref> 그러나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가 '다케시마 문제'라고 질문에 언급해서 이를 받아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케시마'라는 언급이 한 번 있었다"면서 기자의 질문을 받아 대답하는 과정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표현했다고 이를 왜곡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2&aid=0000012143 盧대통령 "다케시마" 실언 논란] 프레시안 2004년 7월 22일</ref>
         취임식 당일인 [[2003년]] [[2월 25일]]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5월 15일]]에 미국을 방문하여 [[조지 W. 부시|부시]]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였다.<ref name="chosun2003-1">{{뉴스 인용 | 출판사 = 조선일보 | 저자 = 권경복 기자 | 날짜 = 2003-05-16 | 확인날짜 = 2008-05-27 | 제목 = [韓·美 공동성명] 한국 '군사조치'로 해석될까 반대 | url = 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51670317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90603234208/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51670317# | 보존날짜 = 2009-06-03 | 깨진링크 = 예 }}</ref><ref name="chosun2003-2">{{뉴스 인용 | 출판사 = 조선일보 | 저자 = 신정록 기자 | 날짜 = 2003-02-25 | 확인날짜 = 2010-04-23 | 제목 = [韓·日정상회담] 고이즈미 "북한과 대화하겠다" | url = 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22570287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90603234203/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22570287# | 보존날짜 = 2009-06-03 | 깨진링크 = 예 }}</ref>
         * 2005년 [[3월 7일]],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과 영유권 주장 등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동북아 역사재단]]을 지시, 설립하였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6779.html | 뉴스 = | 제목 = 내년 설립 ‘동북아 역사재단’ 고구려연구재단 통합한다 | 출판사 = 한겨레 | 날짜 = 2005-09-26 | 저자1 = 이제훈 | 저자2 = 안수찬 | 쪽 = | 확인날짜 = 2010-04-23 }}</ref>
         [[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은 조문에서 "노 전 대통령은 나의 오래된 친구"라며 "재임 기간에 중국과 한국의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수립 및 발전을 위해 중요한 기여를 했다"라고 밝혔다. [[원자바오]] 총리는 애도하면서 노무현의 대(對)중국 관계의 중시, 노무현의 솔직함과 성실함이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한중 관계 (1992년)|한중 관계]]의 전면적 발전 추진을 위해 기울인 공헌을 기억하겠다는 소회를 덧붙였다.<ref name="해외조문">{{뉴스 인용 | 제목 = 해외조문단 누가 왔나…후쿠다ㆍ빅터차 등 거물급 대거 참석 | url = http://www.heraldbiz.com/common/Detail.jsp?newsMLId=20090529000412 | 출판사 = 헤럴드경제 | 저자 = 최재원 | 쪽 = | 날짜 = | 확인날짜 = 2010-04-26 }}</ref>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긴급 애도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 노무현 재임 기간에 한국과 미국 간의 '강력하고 활기찬'(strong and vital) 관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외상 시절 노 전 대통령을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애도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청와대에 애도 조문을 보내어, "지난 2004년 노 전 대통령의 영국 공식 방문은 한·영 양국 관계 증진에 중요한 이정표였다"라고 전했다.<ref>{{뉴스 인용 | 제목 = [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각국 정상 애도 성명 줄이어 | url = http://www.etnews.co.kr/news/detail.html?id=200905240078 | 출판사 = 한국일보 | 저자 = 김유경 | 쪽 = | 날짜 = 2009-05-25 | 확인날짜 = 2010-04-26 }}</ref> [[반기문]] [[국제 연합]] 사무총장은 사망 관련 성명을 발표하고 애도의 뜻을 표명하면서, "노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 촉진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라고 노 전 대통령을 칭송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역시 애도의 뜻을 전했다.<ref>{{뉴스 인용 | 제목 = 각국 정상들, 노무현 전 대통령 애도 물결 | 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24/2009052400593.html | 출판사 = 이데일리 | 저자 = 피용익 | 쪽 = | 날짜 = 2009-05-24 | 확인날짜 = 2010-04-26 }}</ref>
         이날 영결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앞서 세계 150여 해외 공관에 설치된 분향소에도 각국 주요 인사가 추모 행렬에 동참했다. 미국 백악관의 제임스 존스 국가안보 보좌관과 [[성 김]] 대북 특사가 분향소가 차려진 주미 한국 대사관을 찾아 조문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미국 정부를 대표해 조문했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와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등 일본 정·관계 주요 인사들이 주일 한국 대사관으로 찾아가 분향했다.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는 노무현의 사망을 애도하는 메시지를 장례위원회에 보냈다.<ref name="해외조문" />
         일본에서는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 미국은 스티븐스 주한 대사를 단장으로 알렉스 아비주 국무성 동아태 부차관보, 마이클 그린 [[국가 안보회의]](NSC) 선임보좌관, 빅터차 전 NSC 보좌관이 영결식에 참석했다.<ref name="해외조문" />
         [[국회의원]] [[김경재]]는 그의 정치력 자체를 의심하였다. [[2004년]] [[김경재]]는 노무현을 가리켜 "[[미국]]은 노 대통령이 다중인격자처럼 행동해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며 "노대통령은 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말하는 등 기본적인 상식이 없는 지도자"라고 지적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0038730 민주당 김경재의원 노대통령에 독설 퍼부으며 탄핵 정당성 부각] 뉴시스 2004년 03월 15일자</ref> [[김근태]]는 "한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는 것은 노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그들이 하라는 대로 다 했기 때문"이라면서 "어떻게 현충일에 일본에 가서 '김구(金九) 선생은 실패한 정치인'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 지적하기도 했다.<ref>[http://news.donga.com/3//20030722/7966546/1 김근태의원 "盧의 '웃음거리' 발언이 웃음거리"] {{웨이백|url=http://news.donga.com/3//20030722/7966546/1 |date=20140116202307 }} 동아일보 2003년 07월 22일자</ref>
         노무현은 [[2003년]] 6월의 [[일본]] 방문에서 한 "김구는 실패한 정치인" 발언과, [[2004년]] 7월의 한일 정상회담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 발언한 것을 두고 비판 여론이 제기되었다. 당시 [[한나라당]]에서는 그의 외교 정책을 "굴종 외교"로 규정하였다.
         [[2003년]] 6월 [[일본]] 순방 중, [[6월 8일]] [[도쿄]]에서 가진 공개 인터뷰에서 존경하는 인물에 대해 "과거에는 김구 선생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해 그 뒤 링컨으로 바꿨다"라고 평가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ref name="omai0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27583 노무현 대통령, 김구 평가 발언 논란 - 오마이뉴스] 2003년 06월 11일자</ref>
         그러나 언론들 사이에서는 노무현이 "김구는 실패한 정치인"으로 발언했다고 보도하면서 비판했다. 광주의 도청이전반대추진위원회 관계자는 "평생을 항일독립운동으로 민족의 재단 앞에 부끄럼없이 살아온 분을 일국의 대통령이 침략자였던 일본 국민들 앞에서 실패한 정치인으로 평가한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며 "그렇다면 항일독립운동이 실패한 정치활동이란 말이냐"고 분개했다.<ref name="omai03"/>
         [[김근태]]는 그가 외교 문제에서 실패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외교에 있어서도 실패하고 있다. 중국 가서 하는 이야기, 일본 가서 하는 이야기가 다르다. 국민의 자부심을 상처낸다. 한미 정상회담까지는 분명하게 지적하고 비판했지만 한일정상회담은 너무 기가 막혀서 얘기를 하지 않았다. 과거사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지 않은 일본 천황과 건배하는 것이나 일본 국민들과의 대화에서 '김구 선생이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철학과 원칙은 함께 하지만 판단이 다를 수 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34415 "대선자금공개 이회창씨에게 달려있다" - 오마이뉴스] 2003년 07월 19일자</ref>"는 것이다.
         [[2004년]] 7월 한일 정상회담 당시 [[독도]]를 [[일본]]이 자국 영토라며 부르는 호칭인 다케시마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7월 21일]] 한.일정상회담 후 가진 공동기자회견 과정에 일본 기자의 질문에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고 하지요?'라며 '독도'를 무심결에 일본인들이 독도를 자국영토라고 주장하며 부르는 '다케시마(竹島)'라는 표현을 써 파문이 일었다. 일본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 나온 '실수'이나, 일본 언론들이 이를 "한국대통령이 일본의 견해를 용인?"했다는 식의 보도를 하고 있고 야당도 이를 문제삼고 나와<ref name="pre01">[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40722095514§ion=01 盧대통령 "다케시마" 실언 논란] 프레시안 2004년 07월 22일자</ref> 논란이 되었다.
         노무현의 다케시마 발언은 곧 일본 언론들에게도 보도되었다. 지지통신은 "영토와 역사문제에 대한 견해를 묻는 일본인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 무심코 발언한 것으로 보이나, 눈살을 찌푸리는 한국인 기자도 있었다"고 비꼬았다.<ref name="pre01"/> 그의 다케시마 발언을 일본 극우 인사일각에서는 한국에서 다케시마로 인정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 노윤주
         '''노윤주'''(盧潤柱, [[1992년]] [[7월 31일]] ~ )는 [[대한민국]] 2012 미스코리아 일본 출신이다.
         [[서울특별시|서울]] 출생이고 한때 [[일본]] 유학을 한 그녀는 2012년 미스코리아 일본 진(眞) 입상하였으며 신장은 175cm이고 체중은 51kg인 그녀는 [[요가]]와 [[필라테스]]에 취미가 있고 [[수영]]에 특기가 있다.
         * [[2012년]] 미스코리아 일본 진(眞)
         * [[2012년 미스코리아]] 일본 진(眞)
         [[분류:199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모델]][[분류:2012년 데뷔]][[분류:미스코리아 지역 대회 입상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비디오 자키]][[분류:경희대학교 동문]]
  • 노창성
         '''노창성'''(盧昌成, <small>일본식 이름: </small>八幡昌成, [[1896년]] [[3월 25일]] ~ [[1955년]] [[1월 9일]]<ref>{{뉴스 인용
         [[경기도]] [[서울특별시|서울시]] 출신으로 [[일본]] [[도쿄도|도쿄]]로 유학하여 [[도쿄 공업대학|도쿄고등공업학교]] 전기화학과를 졸업하였다. 귀국한 후 [[조선총독부]] 체신국 기수로 채용되어 방송국 설립에 필요한 기술을 맡았다가 방송계에 뛰어들게 되었다.
  • 녹색 종이
         녹색 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위와 같이 [[일본]]의 이혼신고서가 녹색으로 되어 있으므로.
         [[분류:일본어]] [[분류:인터넷 은어]]
  • 농가
         [[일본]]의 속어.
         [[분류:일본어]]
  • 눈에서 비늘이 떨어진다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다는 일본에서 흔히 쓰이는 관용구로서, 어떤 계기로 [[각성]]을 얻는 것을 뜻한다. 유래는 [[신약성경]]의 『[[사도행전]]』이다. 단순히 줄여서 "눈에서 비늘"(目からウロコ,目から鱗,메카라우로코)라고 쓰기도 한다.
         [[일본]]에서 널리 쓰이는 표현이지만, [[성경]]에서 유래한 표현이라는 것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흔히 사용되는 관용어이다보니, 일본에서 써진 창작물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주 쓰인다. 하지만 한국에선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역자의 주석이 따로 달려있지 않은 [[라이트 노벨]]이나 설명 자체가 배제될 가능성이 높은 [[애니메이션]]을 접할 때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하는 경우가 많다.
         [[분류:관용어]] [[분류:일본어]] [[분류:성경유래 관용구]]
  • 니시노 카나
         [[일본]]의 연예인. 주로 가수로 활동. 헤이세이 원년 출생으로, [[미에현]] 출신이다. 2008년 메이저 데뷔.
         4th 앨범 「Love Place」로 「제54회 빛나라! 일본 레콛 대상(輝く!日本レコード大賞)」에서 최우수 앨범상 수상.
         [[분류:일본 연예인]]
  • 니시키노미하타
         붉은 [[비단]]에, 일월을 금은으로 자수하거나, 그린 깃발을 뜻한다. [[가마쿠라 시대]] 이래, [[일본]]에서는 조적(朝敵)을 토벌하러 갈 때 쓰는 관군(官軍)의 깃발로 쓰였다. 금기(錦旗,킨키)라고도 한다.
         이 '니시키노미하타'가 관군의 깃발로 쓰였으며, 관군이라는 것은 곧 일본 조정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의미이므로 역사적으로 좋은 명분이 되었다.
         [[분류:일본어]] [[분류:일본 풍속]]
  • 닌텐도
         [[일본]]의 [[게임 회사]].
         게임 소프트도 굉장한 것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인 [[마리오 시리즈]], 일본 RPG에서 논하지 않을 수가 없는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도 닌텐도의 게임 소프트다. 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포켓몬스터 시리즈]]도 닌텐도의 게임 소프트. 이외에도 [[동키콩 시리즈]], [[별의 커비 시리즈]] 등 다양한 게임 소프트를 보유하고 있다.
  • 단기대학
         [[일본]]의 교육제도. 직업 기술에 관한 전문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2년제, 혹은 3년제 대학. 단대(短大)라고 줄여서 부른다.
         이름으로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단기대학은 주로 여학생이 다닌다. 일본에서 단기대학은 주로 여성의 고등 교육과 직업 교육의 장으로서 활용되고 있으며, 특히 유치원 교사, 보육사. 영양사, 개호복지사 등 지역 대상 전문 직업인 양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014년도 학생 통계로 보면 교육분야가 37.4%로 비율이 가장 높다. 그 다음은 가사 분야. 통계에서도 여성이 많이 다니는데, 1999년 통계에서는 여학생이 33만 9742명(89.9%)로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2014년 통계에서도 졸업생 58,797명 가운데 "취업을 한 여학생"만 40,901명으로 69.6%를 차지했다.
         [[분류:일본 교육]]
  • 단신부임
         [[일본]]에서 가족이 있는 노동자가 기업의 전근 명령 등을 받아, 단신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근무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단신부임은 본인이나 가족에게 경제적, 정신적 부담이 크기 때문에, 별거 수당이나 귀가 교통비 같은 경제적 원조를 해주는 회사도 있다. 1984년에 단신 부임으로 남겨진 처자가 가족동반자살한 사건이 있었으며, 1985년에는 구 국철 간부가 종교적 이유로 단신 부임 명령을 거부하고 퇴직하는 사건이 있어, 단신부임의 문제점이 일본 사회에서 널리 주목받았다.
         [[분류:일본 풍속]]
  • 대군
         === [[일본]] [[쇼군]]의 칭호 ===
         외교문서에서 '일본국 대군(日本國 大君)'이라는 칭호를 썼다. 이는 명목상의 왕인 '[[덴노]]'와 실권자인 '쇼군'이 따로 존재하는 일본 정치의 특수성을 외부에 얼버무리기 위해 사용한 정치적 술책이다. 어떻게보면 [[외왕내제]]의 일종.
         예외적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명나라로부터 일본 국왕(日本 國王)으로 칭해진 사례가 있다. 하지만 명나라에 보내는 국서 외에는 이러한 명칭을 사용한 적이 없고, 그조차도 후세에 일본 우익들에게 덴노를 놔두고 국왕을 참칭했다고 까였다.
         덴노가 있다는 것은 외부에서도 왠만큼 다 알고 있지만, 덴노에게 실권이 없다는 것도 알만큼 다 알고 있었으므로, "자칭 일본 황제라는 놈이 있대. 근데 이름만 그럴 뿐이지 걔가 다스리는건 아냐."하는 수준으로 인식되고 외부에서는 쇼군이 진짜 통치자로 여겨지고 있었다.
         [[분류:동음이의어]] [[분류:한국사]] [[분류:일본사]]
  • 대중흑기
         [[일본]]에서 쓰였던 [[깃발]]. [[도쿠가와 가문]]의 조상인 [[닛타 가문]]의 깃발이다. 일본의 국기가 될 '''뻔''' 했던 깃발이다.
         1854년, 페리 제독의 내항으로 개항을 하게 되면서 일본을 대표할 깃발이 필요해졌다. 본래 [[도쿠가와 막부]]는 이 대중흑기를 일본의 국기에 해당하는 선박표로 지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츠마 번의 강한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대중흑기가 아닌 [[일장기]]가 채택되었다.[[http://www.worldflags.jp/blog/11373/ (참조)]]
  • 대한민국 망명정부 야마구치 현 설치계획
         [[6.25 전쟁]] 초기에 [[이승만]] 정부 측에서 [[일본]] 정부에, 대한민국의 망명정부를 일본에 설치할 수 있도록 준비해달라고 제안하고 일본 정부가 [[야마구치 현]][* 혼슈의 서쪽 끝, 큐슈와 마주보고 있는 지역이다]에 설치하도록 추진했던 계획. 이 제안에 관한 기초적인 기록은 전 야마구치 현 지사, 전 통산성 장관인 다나카 다쓰오가 쓴 회고록과 미국 국무부가 발행한 <미국 외교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이틀 뒤, 1950년 6월 27일 오전 2시, 이승만은 [[대전]]으로 피신했다. 2시간 뒤인 오전 4시에 이승만은 [[수원]]으로 천도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존 무치오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에 망명정부를 세울 수 있겠느냐?"고 문의했다. 이후 6월 28일 서울이 완전히 함락된다.
         이승만의 제안은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 이 제안을 전달받은 일본 정부는 당시 야마구치 현 지사 다나카 다쓰오에게 임시정부를 수용할 6만명 규모의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한편, 일본 정부에 대하여 특별 식량배급 요청 여부를 검토하였다. 당시 다나카 지사의 비서 역시 관련 증언을 하였다.
          * 아주 감정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일본으로 망명한다는 계획이 나올 정도로, 이승만 정부가 극도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당시 일본은 [[GHQ]]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망명을 시도했다면 망명정부 설치 지시는 이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수십만명 정도 규모의 망명정부는 결국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와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백제 시즌 2--
  • 도게자
         [[일본]]의 풍속.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숙이고 절하는, 극도의 경의를 나타내는 인사법으로서, 중대한 사태를 사과할 때 등에 사용한다. 보통은 도게자를 할 일은 없다. 무릎을 꿇고 한다고 하여 궤례(跪礼)한다.
         본래 고대로부터 일본에서 귀인이 통행할 때,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고 인사를 했는데 여기에서 도게자가 유례하였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도 기록될 정도로 오래된 풍속이었다. [[다이카 개신]]에서 궤례를 폐지하고 중국식 입례를 도입하는 칙령을 내렸으나,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게자는 계속 유지되어 [[가마쿠라 시대]]에 편찬된 일본의 귀족 사회 예법서인 『홍안예절(弘安礼節)』에서도 공식적으로 유지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다이묘]]가 지나갈 때 [[서민]]은 도게자를 해야 했으며, [[사무라이]] 역시 신분이 높은 귀족에게는 도게자를 해야 했다.
         [[분류:일본 풍속]]
  • 도재욱
         * '''도리야끼''' - [[일본]]의 힙합 가수인 [[MC 노리야끼]]와 닮은 외모로 인해 붙여진 별명이다. 여담으로, 도재욱은 SK 플래닛 프로리그 시즌 1에서 선수 BGM으로 노리야끼의 음악을 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독자 모델
  • 돈키호테(할인점)
         [[일본]]의 할인점 체인. 주식회사 돈키호테에서 전개하는 할인점. 통칭 돈키(ドンキ).
  • 동백기름
         [[동백]]의 씨앗에서 채취한 [[기름]]. 황색이며 독특한 냄새가 난다. 공업용, 화장품, 식품 등으로 사용된다. [[일본어]]로는 '츠바키 아부라'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머리카락]]에 미용 용도로 바르는 기름으로서 널리 쓰였다.
  • 두부
          [[기름]]에 튀긴 두부. [[유부초밥]] 등에 사용된다. [[일본]]에서는 [[여우]]가 좋아한다고 알려져있다.
  • 떨어진 용왕과 멸망해가는 마녀의 나라
         일본 'MF문고J'에서 발매중인 [[일본]]의 [[라이트노벨]]. 2015년 3월 기준으로 일본에선 6권까지 나와있으며, 국내에선 'L노벨'에서 5권까지 정발중이다. 작가는 '강철의 흰토끼 기사단'의 작가인 [[마이사카 코우]], 일러스트레이터는 요타. 역자는 김덕진.
  • 라무네
         [[탄산음료]]의 일종. [[일본]]에서 말하는 라무네란 [[레모네이드]](レモネード)가 원형이 된 음료이다.
         일본에서 라무네라고 하는 음료는, 레모네이드를 기반으로 한 탄산음료로, 유리구슬로 탄산이 나오지 않도록 막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유리구슬병(ビー玉ビン)에 담는 것이 특징이다.
         1853년에 [[페리 제독]]이 [[일본]]에 내항했을 때, 일본인들은 페리 제독 함대를 통해서 [[레모네이드]]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1865년 부터 [[나가사키]] 현에서 레모네이드가 레몬 물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1872년에 [[영국]]에서 유리구슬로 막는 병이 발명되고, 1887년에 일본에서 이 병을 사용해서 레모네이드를 담게 되어 이것이 '라무네'로서 일반인들에게 널리 팔리게 되었다.
         1953년에 라무네는 일본 내에서 팔리는 탄산음료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널리 팔렸으나, 여기에서 생산 피크에 도달해서 이후로는 다른 음료에 쉐어를 빼앗겨 점차 생산량이 감소하였다.
  • 라응찬
         [[2010년]] 9월 2일, 신한은행이 [[신상훈]] 신한금융그룹 사장을 의해 횡령, 배임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는 것으로 논란이 진행되었다. 이어서 9일, 라응찬은 신상훈 신한금융지주 사장과 [[이백순]] 신한은행장과 함께 [[일본]] 나고야로 출국하였다. 이어 13일, 라응찬 회장은 5개의 시민 단체들에 의해 [[2007년 3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 차명계좌를 이용하여 50억원을 송금하는 등 [[금융거래실명제법]]을 위반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여 고발되었다. 16일에 사내 게시판을 통해 사태를 설명하는 글을 올렸고, 신한금융은 일간지를 통하여 대국민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10월 7일, [[금융감독원]]은 금융실명제법 위반 혐의로 라응찬 회장에 대한 중징계를 통보하였다.<ref>[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DA22&newsid=01308726593138168&DCD=A01202&OutLnkChk=Y `신한금융사태 일지`..라응찬 회장 사퇴까지]</ref> 라응찬 회장은 27일에 귀국하려던 일정을 단축하여 25일 오후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대한항공 편으로 [[김포공항]]에 당도하였다.<ref>[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TM=news&SM=0299&idxno=370301 '빈손 귀국' 라응찬 자진사퇴 수순? 30일 이사회서 거취 표명 여부 촉각]</ref> 결국 10월 30일에 라응찬 회장은 공식 사퇴하고, [[류시열]] 이사가 직무대행을 맡게 되었다.<ref>[http://www.ytn.co.kr/_ln/0102_201010301556299996 라응찬 회장 사퇴...류시열 직무대행 선임]</ref> 금융감독원에 의해 3개월 직무정치가 처분되었다.
  • 레갈리아
          * [[일본]] - [[삼종신기]]
  • 령시
         [[일본]] [[오컬트]] 용어의 하나. 영적인 시각을 뜻하는 말이다.
  • 로손
         [[일본]]의 [[편의점]] 프랜차일즈 체인.
         오사카부 토요나가시(大阪府豊中市)에 일본 1호점을 오픈했으며, [[중국]], [[인도네시아]]에도 가게를 열고 있다.
  • 류시원(배우)
         배우로서의 연기력은 그냥 못하는 수준[* '''그냥 못한다고 봐도 무방하다'''(...)]으로, 멜로 연기는 부드럽고 잘생긴 외모와 목소리로 꽤나 호평을 받았지만 '''그게 전부다'''(...)[* [[본인]]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으며, 못하는 것에 도전하기보다는 잘하는 것(멜로)에 정진하겠다고 했다.] 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90년대 말 즈음에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당시 인기를 얻었던 배우들과 비교해서도 인기나 인지도가 급격히 떨어져 있다. 즉, 전성기가 금방 지나간 편. ~~물론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지금은 일본에서 더 많이 활동하고 있다.
         [[일본]]에서 [[가수]] 겸 [[연기자]]로 [[한류]]스타의 자리에 올라 상당한 인기를 끌고있다. [[2005년]]에는 제47회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대중상을 수상했고, [[2007년]] 나카마 유키에와 함께 죠시데카라는 드라마에 출연했다.
         레이서로서는 승부욕이 강한 편이고, 실력은 다른 연예인 드라이버들에 비해 특별한 것은 없는 수준이나 현재까지는 한국 [[모터 스포츠]] 사상 '''유일하게 팬클럽이 서킷에 나타나는 선수'''다. 일본 아줌마들의 오빠부대는 어디까지나 드라이버 류시원의 팬이라기보다는 탤런트 류시원의 팬이라는게 맞겠지만...
         이후 2000년대 중반 [[일본]]으로 진출--지금은 사실상 망명이지만--해 일본에서도 중박 정도의 [[인기]]를 얻고 있는 것 같다.
         || [[2005년]] || 제19회 일본 레코드디스크대상 본상 || ||
         || [[2005년]] || 제47회 일본레코드대상 대중상 || ||
          * [[2011년]] [[일본]] 동북 [[대지진]] 때 고액의 [[기부]]와 [[자원봉사]]를 행했다.
  • 류중일
         [[2006년]]·[[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및 [[2010년 아시안 게임|광저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코치로 발탁되어 활동했다. [[1999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2000년]]부터 [[김용희 (야구인)|김용희]], [[김응용]], [[선동열]] 감독 밑에서 코치로 보좌한 후, [[2010년]] [[12월 30일]] [[선동열]]이 경질되자 [[선동열]]의 후임으로 [[2011년]] [[1월 5일]]에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ref>[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09&yy=2011 류중일 감독 "신인 패기로 KS 우승 데뷔 축포 쏜다" ] - 매일신문</ref> 그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삼성 라이온즈]]는 오랜만에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감독을 맞이하게 되었다.<ref>최초의 [[삼성 라이온즈|삼성]] 선수 출신 감독은 [[서정환]]이고, 류중일은 [[삼성 라이온즈|삼성]] 출신 선수 중 선수 및 코치로 활동하면서 단 한번의 팀 이동 없이 감독이 된 첫 번째 경우이다.</ref> [[2011년]] 감독 부임 첫 해에 정규 리그 우승과 [[2011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으며, "야구 대통령"을 줄인 '''"야통"'''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ref>[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109280100191240017032&servicedate=20110927 류중일호, 우승을 가능케 한 키워드 4개] - 스포츠조선</ref> [[대한민국]]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 [[2011년 아시아 시리즈]]에서 [[일본]] 챔피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소프트뱅크]]를 꺾고 [[대한민국]] 프로 야구 팀 최초로 [[아시아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ref>[http://osen.mt.co.kr/article/G1109325476 '야통' 류중일 감독, 야신도 못한 亞 정상 위업] - OSEN</ref> [[2012년]] 역시 정규 리그 우승과 [[2012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뤄 냈다. [[2013년]] 정규 리그 우승과 [[2013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 후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13 WBC]]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었으나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2013년]] 시즌 후 계약 기간 3년의 조건으로 계약금 6억 원, 연봉 5억 원 등 총액 21억 원에 [[삼성 라이온즈]]와 재계약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672898 류중일 감독, 3년 재계약…총액 21억원 사상 최고 대우] - OSEN</ref> [[2014년 아시안 게임|2014 인천 아시안게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어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13 WBC]] 1라운드 탈락의 쓰라림을 딛고 우승을 이뤄냈다. [[2014년]]에 정규 리그 우승과 [[2014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면서 팀의 사상 최초 통합 4연패를 달성하였고, [[2015년]] 역시 정규 리그 우승으로 5년 연속 정규 리그 우승으로 새 역사를 썼지만, [[2015년 KBO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가 개최되기 전, 삼성 투수들의 해외 원정도박 파문으로 인해 [[2015년 KBO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두산 베어스]]에게 내주고 만다. [[2016년]]에는 [[박석민]], [[야마이코 나바로|나바로]], [[채태인]]을 잃었고, 외국인 선수 농사 실패, 선수들의 줄부상과 부진으로 팀 최초 정규리그 9위에 머물게 되자, [[2016년]] [[10월 15일]] 계약 만료로 [[김한수 (야구인)|김한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기술고문을 맡게 되었다.
  • 마법병
         [[일본]]에서 [[보온병]]을 부르는 명칭. 마호우빙(まほうびん).
         보온병은 1904년에 [[독일]]에서 생산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독일]]에서 보온병을 수입했는데, 이 때 병 안에 담은 액체의 온도가 변하지 않는 것이 마치 [[마법]]과 같다고 해서 마법병(魔法瓶)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1908년에 수입됐을 당초에는 광고에서 한란병(寒暖壜)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1911년에 일본에서 제작된 보온병이 발매됐을 때는 진공병(真空瓶)이라고 불렸다. 마법병이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쓰이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 [[일본]]의 [[보온병]] 제조 업체는 [[오사카]]에 많이 있는데, 당시 오사카에서는 [[유리]] 산업이 발달하여 [[전구]] 제조 등이 활발했고, 이런 기업들이 [[진공]] 기술을 보온병에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분류:일본어]]
  • 마의 2세아
         [[일본]]의 육아용어.
         [[분류:일본어]][[분류:육아]]
  • 마이사카 코우
         [[일본]]의 [[라이트 노벨]] 작가. ([http://maisaka100ka.blog.fc2.com/ 작가 블로그])
         [[분류:일본 인물]]
  • 마츠자카소
         [[일본]] [[미에 현]] 중부의 마츠자카 시(松阪市)를 중심으로 하여, 마츠자카소 협의회(松阪牛協議会)에서 관리하여 생산하는 [[소]]의 브랜드. 코베소(神戸牛),오우미소(近江牛)와 함께 일본 3대 화우(和牛,와규)로 이름이 높다.
         본래 [[에도 시대]]까지 일본에서 소는 [[농업]]용으로만 길러졌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소고기를 먹게 되었고, 이때부터 마츠자카 지방은 육우의 산지로 유명해졌다. 1958년에 마츠자카 육우협회가 창설되었으며, 1974년 부터 소 한마리를 개체 단위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 마치킨
         [[일본]]의 금융업자.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사채라고 보면 된다.
         [[분류:일본 풍속]]
  • 머라이온
          * 머라이온 석상은 입에서 물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토하는 것을 가리키는 은어로 쓰인다.
  • 먼슬리 맨션
         [[일본]]의 주거형태. '단기계약형 아파트'로서, 매 월 계약하는 형태를 뜻한다. 비슷한 것으로 매 주 계약을 하는 '위클리 맨션'이 있다.
          * 일본의 경우 부동산을 임대할 때, 보증금(敷金,시키킨), 사례금(礼金,레이킨) 등이 필요한데 먼슬리 맨션은 이런 것이 필요없다.
  • 메일빙
         [[일본]]의 [[택배]] 서비스의 일종.
         [[야마토 운수]]가 1997년에 우편 사업 민영화를 예상하여, 「쿠로네코 메일빙(クロネコメール便)」을 시작한 것이 첫번째 사례이다. 일본 우정은 2007년 [[민영화]] 되면서 기존의 책자 소포(冊子小包)를 「유우 메일(ゆうメール)」로 이름을 바꿔서 서비스를 하고 있다.
         [[분류:일본 풍속]]
  • 명예백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유색인종 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력이 백인 국가에 뒤지지 않게 성장하자, 국책상의 이유로 이들 국적의 아시아인에게 백인과 같은 대우를 주고 '명예백인'으로 취급하였다.
         [[나치 독일]]에서는 [[일본]], [[이탈리아]]와 [[추축국]] 동맹을 맺게 되자 일본인은 명예 아리아인으로 대우 받게 되었다.
  • 목꺾기
          *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샤프트가 즐겨 쓰는 구도를 찾아왔다면 [[샤프트 각도]] 페이지를 만드세요.(?)
  • 무라하치부
         [[일본]]의 풍속. [[집단괴롭힘]]의 하나.--전통 있는 집단괴롭힘--
         현재는 방송자숙 용어가 되어 있다. 일본의 [[흑역사]].
          * 소방 활동은 화재를 진압하지 못해서 불이 옮겨붙으면 마을의 다른 집 역시 곤란하기 때문이다.(일본의 가옥은 한국, 중국과 달리 나무를 쓰는 비중이 높다)
         전통적으로 일본의 농촌 마을을 무라(村)라고 부른다. 이는 자치적인 농촌 공동체로서, 가마쿠라 후기에서 나타났다.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서 농촌은 도적에 대비하여 자경 능력을 갖추고, 농업에 필요한 수리시설의 축조 같은 대규모 사업의 필요성이 있었으므로 마을 단위의 자치체제가 견고하게 형성되었다.
         일본의 선거는 미리 선거의 이름, 투표 시간, 선거인의 주소, 성별, 성명, 명단번호, 접수 번호 등이 기록된 투표소입장권(投票所入場券)을 배부하고, 이를 투표소에 가지고 가서 직원에게 전달하고 투표용지와 교환하여 투표하며, 이는 원칙적으로 본인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는 이렇게 회수한 입장권으로 마을의 유력자가 여러 차례 투표를 했다. 선거 관리자는 이를 묵인하였고, 마을 주민들도 이러한 행위에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았다.
         [[분류:일본 풍속]]
  • 무선호출기
         [[이동통신]] 장비. 약칭 호출기. 단방향 통신 장비로서 호출기 쪽에서 신호를 보내는 것은 할 수 없고, [[전파]]를 받아서 전화번호 숫자나 짧은 문자를 표시할 수 있는 기능만 가지고 있다. 전화번호를 받아오면 [[공중전화]]를 찾은 다음 해당 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연락을 할 수 있는 형식이다.[* 일부지만, 제품에 따라서는 수신만이 아니라 문자 송신 정도는 가능한 모델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삐삐'라고 불렀다. [[일본]]에서는 포케벨(ポケベル)이라고 불렸다.
  • 문근영
         [include(틀:상위 문서, top1=배우/일본)]
         ||<#f08080><:> {{{#ffffff '''출생'''}}} ||<(><#ffe4e1> [[1987년]] [[5월 6일]]([age(1987-05-06)]세), [[일본]] [[도쿄도]] ||
         [[일본]]의 [[여자]] [[배우]]. 원조 '''국민 여동생'''.
          * 과거 [[일본]]에서 나온 잡지에 이름이 문근'''염'''--소금--으로 표기되는 굴욕을 맛 본 적이 있다.
         [[분류:일본 여배우]]
  • 문동주
         2013년 [[FC 서울]]에 입단하였으며 2014년엔 임대 신분으로 [[일본]]의 [[에히메 FC]]에서 활약한 바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日 J리그서 ‘세월호 애도 인천’|url=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40424601004
         [[분류:199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인천광역시 출신]][[분류:인천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분류:FC 서울의 축구 선수]][[분류:에히메 FC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1의 축구 선수]][[분류:K3리그의 축구 선수]][[분류:일본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FC 의정부의 축구 선수]][[분류:J2리그의 축구 선수]]
  • 문성현
         [[2012년 한국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승부조작]]에 휘말릴 뻔했으나, 거절하였고 그 사실을 자진 신고했다. 반면 한 때 같은 팀에 있었던 [[김성현 (1989년)|김성현]]은 [[넥센 히어로즈]] 시절 승부조작 혐의가 드러났으나 그 사실을 숨기고 [[LG 트윈스]]로 이적했다가 사실이 밝혀지며 방출됐다. 그는 참고인 자격으로 훈련지인 [[일본]] [[가고시마 시|가고시마]]에서 잠시 귀국해 검찰 조사를 받은 후, 별 이상이 없이 가고시마 훈련장에 복귀했다.<ref>[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203021728353&sec_id=510201&pt=nv 문성현 복귀에 한숨 돌린 넥센 캠프] - 스포츠칸</ref>
  • 문성현 (야구선수)
         [[2012년 한국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승부조작]]에 휘말릴 뻔했으나, 거절하였고 그 사실을 자진 신고했다. 반면 한 때 같은 팀에 있었던 [[김성현 (1989년)|김성현]]은 [[넥센 히어로즈]] 시절 승부조작 혐의가 드러났으나 그 사실을 숨기고 [[LG 트윈스]]로 이적했다가 사실이 밝혀지며 방출됐다. 그는 참고인 자격으로 훈련지인 [[일본]] [[가고시마 시|가고시마]]에서 잠시 귀국해 검찰 조사를 받은 후, 별 이상이 없이 가고시마 훈련장에 복귀했다.<ref>[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203021728353&sec_id=510201&pt=nv 문성현 복귀에 한숨 돌린 넥센 캠프] - 스포츠칸</ref>
  • 문종두
         1916년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상업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일본]] [[주오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 문주란 (가수)
         그러나 [[1975년]] 사생활 문제로 연예협회로부터 6개월간 방송 정지를 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1981년]]에는 [[일본]]에도 진출해 활동하기도 했고, [[1982년]]에는 일본 [[동경음악제]]에서 최우수가창상을 수상했다. [[1983년]]에는 국내에 귀국하여 [[KBS]]의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배경음악에 수록된 〈누가 이 사람을 (남과 북)〉이 히트했다. [[1986년]]에는 《백치 아다다》로 인기를 얻었으나, 교통사고로 활동이 주춤하게 된다. 하지만 [[1990년]]에는 다시 재기,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가 각종 차트에서 오르면서, 많이 알려지게 된다.
  • 문채원
         {{일본연예인 정보
         | 출생지 = [[일본]] [[미에현]]
         | 국적 = [[일본]]
         '''문채원'''([[1986년]] [[11월 13일]] ~ )은 [[일본]]의 [[가수]]이다.
         * {{언어링크|ja}} [http://www.moonchaewon.jp 문채원 일본 공식 웹사이트]
         [[분류:일본 인물]]
  • 문호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는 설과 [[일본]]에서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다는 설이 있으며, [[1927년]]경부터 [[기타 연주자]]로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작곡가로 데뷔한 것은 [[1933년]]에 [[오케레코드]]에서 [[김능인]], [[신불출]]의 가사에 곡을 붙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 미소시루
         [[일본]]식 된장국. 미역과 된장을 주재료로 하여, 여러가지 건더기를 넣는다. 일식에서 거의 표준적으로 쓰이는 국 요리.
  • 민승호
         고종 3년([[1866년]]), 양누이동생인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되면서 [[이조]][[참의]](정3품 당상)으로 임명되었으며, [[1867년]] [[1월]] [[호조]][[참판]]에 승진되었다. 그 뒤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일본]]이 국서를 보내 와서 국교를 요청하였을 때 흥선대원군이 국교 수립에 반대하자 그에 맞서 찬성하였고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민씨 족당의 수령이 되었다.
  • 민영환
         이듬해 민영환은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그는 일본, 미국, 영국등지를 거치면서 서구 문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민영환은 친일적인 대신,관료들과 수차례 대립하였고, 일본제국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다가 주요요직에서 밀려나게 된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크게 개탄하며, [[조병세 (1827년)|조병세]]와 같이 을사늑약 반대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일제 헌병들의 강제진압에 의해 실패하게되고,〈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국민들에게 남기고 [[11월 30일]] 자결하였다. 유서 전문은 다음과 같다.
         [[SBS]]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 제작진의 저서인 《하룻밤, 미스터리를 찾아서》(더난비즈)에 따르면 민영환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위험에 처한 [[조선]]을 걱정하며 [[자결]]한 장소에서 [[대나무]]가 자랐다고 전해진다. 이 대나무를 혈죽이라고 부른다.<ref>《하룻밤, 미스터리를 찾아서》역사 속 미스터리를 찾아서:08 피를 먹고 자란 대나무, 혈죽/백만불 미스터리 제작진/더난비즈</ref> 당시 일본에서는 항일운동이 번질 것을 우려하여 혈죽이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조사하였으며, 민영환의 후손들에 의해 보관되어 내려왔다.
         * [[1904년]] [[한성부]] 감옥에 수감중인 [[이승만]]에게 석방의 대가로, 고종의 밀사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제출하게 한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상태로, [[이승만]]이 들고 간 밀서는 묵살당한다.
  • 민영환 (1861년)
         이듬해 민영환은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그는 일본, 미국, 영국등지를 거치면서 서구 문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민영환은 친일적인 대신,관료들과 수차례 대립하였고, 일본제국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다가 주요요직에서 밀려나게 된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크게 개탄하며, [[조병세 (1827년)|조병세]]와 같이 을사늑약 반대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일제 헌병들의 강제진압에 의해 실패하게되고,〈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국민들에게 남기고 [[11월 30일]] 자결하였다. 유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서울방송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 제작진의 저서인 《하룻밤, 미스터리를 찾아서》(더난비즈)에 따르면 민영환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위험에 처한 [[조선]]을 걱정하며 [[자결]]한 장소에서 [[대나무]]가 자랐다고 전해진다. 이 대나무를 혈죽이라고 부른다.<ref>《하룻밤, 미스터리를 찾아서》역사 속 미스터리를 찾아서:08 피를 먹고 자란 대나무, 혈죽/백만불 미스터리 제작진/더난비즈</ref> 당시 일본에서는 항일운동이 번질 것을 우려하여 혈죽이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조사하였으며, 민영환의 후손들에 의해 보관되어 내려왔다.
         * [[1904년]] [[한성부]] 감옥에 수감중인 [[이승만]]에게 석방의 대가로, 고종의 밀사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제출하게 한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상태로, [[이승만]]이 들고 간 밀서는 묵살당한다.
  • 바닷마을 다이어리
         [[일본]]의 영화.
         [[분류:일본 영화]]
  • 바리어프리
         1974년 유엔 장애인 생활환경 전문과 회의에서 『바리어프리 디자인』이라는 보고서를 냈으며, 이때부터 나타난 단어이다. [[일본]]에서는 [[고령화사회]]가 되면서 주목받게 된 개념이다.
         [[분류:일본어]]
  • 바코드 머리
         [[일본]]의 속어.
         [[분류:일본어]] [[분류:머리 모양]]
  • 박관수 (1897년)
         |학력= 일본 [[도쿄 대학|도쿄 제국대학교]] 철학과 학사 <br /> [[국방대학교|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1956년)
         '''박관수'''(朴寬洙, <small>일본식 이름: </small>琴川寬, [[1897년]] ~ [[1980년]])는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이자 [[대한민국]]의 교육자, 사회사업가, 보수주의 운동가이다. 박정희의 고등학교 시절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반공 우익 시민단체에서 활동하였다. [[한국반공연맹]] 제1대 이사장과 [[대한노인회]] 제3~4대 회장, [[공산권문제연구소]] 제2대 이사장 등을 지냈다. 본관은 [[밀양 박씨|밀양]](密陽)으로 호는 금계(琴溪). [[울산광역시|울산시]] 출신.
         [[경상남도]] [[울산광역시|울산]]의 [[밀양 박씨]] 선비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때 생활이 빈한했으나, 울산 지역 유지인 김홍조(金弘祚)의 도움으로 학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김홍조는 지역의 인재들에 대한 장학사업을 하였고, [[일본]] 등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후에 박관수는 김홍조의 누이동생과 결혼했다.
         지금의 울산초등학교인 [[울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부]]의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19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제국대학]]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 도중 유학생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한때 투옥당하기도 했다.<ref name="ReferenceA">{{서적 인용
  • 박규수
         [[박지원 (실학자)|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가 깊었고, [[제네럴셔먼호 사건|제네럴 셔먼 호]]를 격퇴하고 [[경복궁]] 재건의 총책임을 맡는 등 [[흥선대원군]]으로부터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박지원 (실학자)|연암 박지원]]의 학문 및 사상을 계승하는 이로서 척화론(斥和論)에 반대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후 [[양무 운동]]처럼 서양 기술의 선택적 도입과 국제 통상을 주장했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박정양]], [[윤치호]] 등 [[개화파]] 청년들을 길러냈으며 일본과 [[병자 수호 조약|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때는 위정척사파의 명분론을 반대하고, 막후에서 조정 대신들을 움직여 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2번에 걸친 양요(洋擾) 때 [[청나라]]로 보낸 자문(咨文) 및 [[미국]]에 대한 힐문장(詰問)과 통상 요구에 대한 거절 문건을 대부분 그가 만들었고, [[강화도 조약]] 때도 조정 중론을 모으는 것을 넘어, [[일본]]을 상대로 한 외교문서 다수의 자문과 감수, 교열에 참여했다.
         1873년(고종 10년) 5월 [[형조판서]]에 임명됐고 음력 12월에 마침내 [[우의정]]에 올랐다. 그 때까지도 그는 [[흥선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역설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박규수는 어디까지나 조정 중론에 따랐으면서도 당시 일본과의 국교문제에 있어서까지 줄기차게 개국을 주장했다.
         1873년(고종 10년) 12월 [[일본]]이 자신들의 [[메이지 유신|왕정복고]]와 이에 대한 정식수교 요청을 통고해 왔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은 종전의 서계 격식을 버리고 [[조선의 역대 국왕|고종]]에게 '황'(皇), '칙령'(勅令), '대일본'(大日本) 등의 표현을 써보냈다. 이른바 서계문제(書契問題)로서 [[조선]] 정부로서는 적어도 대등한 위치도 아니고 일본이 상국의 위치에서 써보낸 외교 전문에 대해 수리를 거부했다.
         조선 정부에서 충격 속에 격론을 벌이는 가운데 그는 "직함(職銜)을 가서(加書)한 것은 저네들 자신 그 나라의 정령(政令)이 일신되어 그 인군의 우상(優賞)을 입은 것을 과시한 것뿐이다. 소위 [[품계|관작]](官爵)을 승진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인가? 종래의 격식과 다르다고 하여 이를 힐책하며 받지 않는데, 이것이 일개 통역관의 견해라면 괴이할 것이 없겠지만, 하필 조정 스스로 이를 교계(較計)하려 하는가? 가히 일소에 붙일 일이다." 라며 그냥 형식적인 것이니 연연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대원군|흥선대원군]]을 직접 찾아가 일본이 평화적인 뜻으로 수교하려는 한 대국적 견지에서 서계를 받아들이자고 설득하였으나 역시 거부됐다.
         1875년(고종 12년) 5월 조선 정계에서 은퇴한 몸임에도 [[대원군]]을 찾아가 '만약 저들(일본)이 포성을 한 번 발사하기에 이르면 이후 받으려 해도 이미 때늦어 나라를 욕되게 할 것'이라며 재차 설득했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1875년(고종 12년) 9월 일본은 [[운요 호 사건|운요 호]]([[운양호]])로 강화도를 포격했다. 그와 제자 [[김홍집 (1842년)|김홍집]], 역관 [[오경석]] 등은 다시 한 번 수교를 강력히 촉구하고 설득해 이듬해 2월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됐다. 이후 다수에 의해 매국노로 규탄받고 모함에 시달린 그는 병석에 누웠다. 그의 문인 중 한 사람인 [[김윤식|운양 김윤식]]은 "공<small>(박규수를 지칭)</small>은 늘 천장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하며, 윤기(倫紀)가 끊어져 나라도 장차 따라서 망하리니 가련한 우리 생민(生民)이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저버려져야 하는가라고 했다. 드디어 걱정과 분함 때문에 병석에 누웠다."라고 했다.
         1884년(고종 21년) 10월 그의 제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유길준]] 등이 [[갑신정변]]에 실패해 대거 [[일본]]과 [[미국]]으로 망명갔다. 문하생들이 역도들이 되자 이미 사망한 그 역시 관작을 모두 삭탈당했으며, 집은 헐려 공터가 됐다가 1906년 [[보성중학교 (서울)|보성중학교]] 부지가 됐다.
         1894년(고종 31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등에 업고 개화파들이 조정에 복귀해 [[갑오경장]]을 실시한 뒤에야 사면복권됐다.
         1950년 [[6.25 전쟁]] 통에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광주군]]에 보관 중이던 그의 저서와 유물 상당수가 소실됐다. [[개화파]]들에 대해 해방 이후에도 평가가 좋지 않아 같이 잊혀져 가는 듯했던 그의 사상은 1970년 대가 돼서야 [[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해 한글로 번역됐고, 70년대 중반부터 [[일본]] [[덴리대학교]] [[조선학회]]에서도 그의 저서와 사상 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됐다.
         그의 개국론은 그가 [[운양호 사건]] 직전 '일본이 수호를 운운하면서 병선을 이끌고 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호의 사신이라 하니 우리가 먼저 선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의외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유사시 무력 충돌도 불사한다는 자주적 개국으로, 무력적 굴복에 따른 타율적 개국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개국론은 [[일본]]에 굴복하는 것처럼 곡해됐다.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될 때는 막후에서 반대파를 설득하여 조약 체결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호칭 문제가 아니라며 실질적으로 조선이 획득할 수 있는 이익을 찾아야 함을 역설했다. 1875년(고종 13년)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하자 [[최익현]](崔益鉉) 등의 강력한 척화 주장을 물리치고 [[강화도 조약]]을 맺게 했다. 그 뒤 그는 척사파로부터 온갖 인신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 김의환, 〈瓛齋先生集〉, 일본 덴리대학교 조선학회, 《朝鮮學報 86》 (덴리대학교 조선학회, 1978)
  • 박근혜
         아버지 [[박정희]]는 [[1917년]]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에서 소작농 [[박성빈]]과 부인 [[백남의]]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미공립보통학교(현재의 [[구미초등학교]]), 대구사범학교(현재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를 거쳐 [[만주군관학교]] 예과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만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위 때 해방을 맞아서 귀국, 국방경비사관학교(현재의 [[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임관하여 재직 중이였다.
         국회의원 재직 중 대선 경선을 맞이하게 된 박근혜는 대선 경선 캠프 선대위원장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2항 '경제 민주화'의 입안자인 전 [[민주정의당]] 헌법개정위원 [[김종인]]을 임명하는 등 [[사회양극화]] 문제 해소에 적극적 의지를 보였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assembly/newsview?newsid=20120628031405843] 김봉기 기자, '경제 민주화' 원조 김종인… 내달 출범 박근혜 캠프 맡는다, 조선일보, 2012.6.28.</ref> 박근혜는 재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보다는 경제력 남용을 바로잡는 데 방점을 뒀다. 재벌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긍정적 역할은 인정하자는 쪽이었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820160408085] 이제훈, 재벌이 싫어하는 헌법 조항, 한겨레21,2012.8.20.</ref> [[사회양극화]] 해소가 목적인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세수확보가 중요한데 박근혜 의원은 2012년 7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법인세는 가능한 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야기했다. 우리나라 법인세 최고세율은 2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5.6%(지방세 포함)보다 낮은 편이다. 일본과 미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각각 39.5%, 39.2%에 이른다.<ref name="hani.co.kr">[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42826.html] 류이근, 성연철 기자, 박근혜 "법인세 인하"…친박서도 "경제민주화와 모순", 한겨레신문, 2012.7.17.</ref> 현재 법인세는 내국세 총액 가운데 부가가치세(33.0%) 다음으로 높은 비중(28.6%)을 차지한다.<ref name="hani.co.kr"/> 강병구 인하대 교수(경제학)는 “법인세를 낮추겠다면 소득세나 부가가치세 등에서 ‘박근혜식 복지’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것인지 대안을 내놔야 하는데 그게 안 보인다”고 지적했다.<ref name="hani.co.kr"/> '법인세 인하와 경제민주화 간의 모순성' 및 '법인세 감소분에 따른 대체 세수 확보' 등의 논란은 대통령 선거일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 일본 ====
         박근혜는 2013년 4월 24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침략을 부인하는 등 우경화 노선을 취하려 하자, "역사 인식이 바르게 가는 것이 전제되지 않고 과거 상처가 덧나게 되면 미래지향적 관계로 가기 어렵다"고 말했다.<ref name="news.hankooki.com">{{웹 인용|url = 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304/h2013042503401121000.htm|제목 = 박근혜 대통령 "일본 바른 역사인식 없이 미래지향 관계 어렵다"|저자 = 이동훈|날짜 = 2013-04-25|확인날짜 = 2013-04-27|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0425095012/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304/h2013042503401121000.htm|보존날짜 = 2013-04-25|깨진링크 = 예}}</ref> 이후 한국일보를 비롯한 중앙 언론사 편집국장 및 보도국장단과의 오찬간담회에서 "일본이 우경화로 가면 동북아와 아시아 여러 국가들 간 관계가 어려워질 것이고, 일본에도 바람직한 방향이 아닌 만큼 깊이 신중하게 생각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으며, "우리 세대의 아픔과 걸림돌이 후세에 이어지지 않도록 정리하고 끊어야 한다"며 "정부는 항상 일관되게 원칙을 가지고 한일관계를 풀어나가겠다"고 덧붙였다.<ref name="news.hankooki.com"/> 이어 "미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기후변화와 테러방지, 원전 문제 등과 같은 비정치적 분야부터 신뢰를 구축하고 이를 토대로 다자간에 더 큰 신뢰를 구축하는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즉 '서울 프로세스'를 내달 미국 방문 때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으며, "북한도 얼마든지 이에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하지 않더라도 신뢰 쌓기 노력을 해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ref name="news.hankooki.com"/>
         |국정원 해킹관련 국회 현안보고, 박근령씨의 일본 관련 발언
         |12·28 일본군 위안부 합의
         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은 임기 초반에는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ref>'진행형' 세월호참사 속 박근혜정부 1년6개월 맞아, 연합뉴스 2014.10.19</ref> 임기 중반으로 가면서도 일본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아 한미일과의 군사적 동맹에서 한국이 소외된다는 비판과 함께 외교정책이 중국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도 받아 왔다.<ref>美·中 갈등 심화… 박근혜 정부 '3대 외교 정책(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동북아 평화 협력 구상·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모두 꼬일 수도, 조선일보 2013.12.02</ref><ref>박 대통령 ‘친중 반일’ 이면엔 미·중 사이 줄타기, 경향신문 2013-10-09</ref> 여기에 중국 또한 일본과의 관계회복을 도모하는 쪽으로 외교정책을 선회하여, 박근혜 정부 들어 동북아에서 한국만이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다는 우려도 있다.<ref>[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945437 유연해지는 중국의 대일 외교, 우리는, SBS뉴스 2015.04.24]</ref><ref>[http://www.hankookilbo.com/v/374aee9c3ef94bacbe98e033f3245f76 말 한마디 못한 채… 한국 외교 속수무책, 한국일보 2015.04.27]</ref> 박근혜 정부의 대일 외교정책은 과거사 문제 해결 없이는 한일관계를 개선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으나, 일본의 아베 정권과 미국의 오바마 정부가 철저한 전략적 외교로 실속을 챙기는 가운데 한국만이 외교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ref>[http://news.jtbc.joins.com/html/407/NB10872407.html 고도의 외교술로 실속 챙긴 아베…한국외교는 수렁에, JTBC, 2015-04-30]</ref><ref>[http://kr.wsj.com/posts/2015/04/30/%EC%95%84%EB%B2%A0-%EC%B4%9D%EB%A6%AC%EC%9D%98-%EB%8A%A5%EC%88%98%EB%8A%A5%EB%9E%80%ED%95%9C-%EC%99%B8%EA%B5%90%EC%88%A0-%EB%B0%95%EA%B7%BC%ED%98%9C-%EB%8C%80%ED%86%B5%EB%A0%B9-%EC%95%95%EB%B0%95/ 아베 총리의 능수능란한 외교술, 박근혜 대통령 압박, 월스트리트저널, 30. April 2015]</ref><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5051959901 박근혜 정부, 미-중 사이 갈팡질팡…아베의 '친미 외교'에 완패] 한국경제 2015-05-19 </ref>
         임기 중반에 들어서며 경제정책 면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데, 디플레이션 우려가 고조되는 가운데 경기활성화에 실패했고, 가계의 대출 요건 완화를 기조로 하는 [[초이노믹스]]의 여파로 가계부채가 급증, 사상 최대를 갱신하는 등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경기부양과 가계부채의 딜레마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ref>[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27/2015022703481.html?Dep0=twitter '눈덩이' 가계부채, 딜레마에 빠진 정부…다섯차례 대책 종합 정리]</ref> 기업들의 수출 실적이 급감하고, 미국, 일본, 중국의 주식 시장이 호황을 누린 것과 대조적으로 박근혜 대통령 임기 동안 한국의 주식시장이 침체되어 온 것도 박근혜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한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ref>일본형 불황 세계로 확산… 비빌 언덕 사라진 ‘수출 코리아’, 동아일보 2014-12-18</ref>
         야당들도 박근혜 후보의 발언을 일제히 비판하였다. 민주당 정성호 대변인은 2007년 재심을 통해 무죄와 국가배상이 선고되고 사법부가 사죄까지 한 점을 지적하며, 박근혜 후보의 발언은 사법부와 유족을 모독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사과를 요구했으며, 같은 당의 이해찬 대표 역시, 판결은 하나라는 점을 지적하고, 박 후보의 발언이 대법원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그밖에 유인태, 박지원, 박영선 의원 등도 "사법부를 무시한 황제적 발언", "일본 극우파들보다 더한 것", "헌정질서를 무시하는 초사법적인 발언"이라고 비판했다.<ref>[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DA32&newsid=02968406599658808&DCD=A01503&OutLnkChk=Y 민주 "박근혜, 역사부정 이어 사법부정 하나?"] 이데일리, 2012년 9월 10일</ref><ref>[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20910_0011432738&cID=10301&pID=10300 이해찬 "朴 인혁당 발언, 대법원 모독"] 뉴시스, 2012년 9월 10일</ref><ref>[http://news.kbs.co.kr/politics/2012/09/11/2533788.html 민주당, 인혁당 관련 박근혜 후보 비판 잇따라]{{깨진 링크|url=http://news.kbs.co.kr/politics/2012/09/11/2533788.html }} KBS, 2012년 9월 11일</ref> 진보신당 역시 박근혜 후보의 태도에 대해 자신에게 불리한 문제는 에둘러 말하며 기존 입장을 고수하는 보수 정치인들의 구태라고 비판했다.<ref name="박근혜 인혁당 판결 두개 논란···'통합' 걸림돌될까"/>
         일본 [[산케이 신문]] 전 서울지국장 [[가토 다쓰야]]에 의해 [[세월호 침몰 사고]]당일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오랜 비서였던 [[정윤회]]와 밀월 중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혐의가 없는 것으로 인정되었고, 이 건으로 명예훼손 수사를 받았던 가토 다쓰야는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인정되었지만 최종적으로 언론의 자유 보장 차원에서 무죄방면되었다.<ref>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154898</ref><ref>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60119_0013844797&cID=10101&pID=10100</ref><ref>http://news.donga.com/3/all/20151231/75674013/1</ref><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20/2015012000173.html</ref>
         일본 [[산케이 신문]] 전 서울지국장 [[가토 다쓰야]]가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사고]]당시 7시간 동안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이 오리무중이었다며, 박근혜 대통령의 오랜 비서였던 [[정윤회]]와 남녀애정핵각 중이었다고 의혹을 제기하였다. 이에 한국의 독도사랑회 등이 검찰에 명예훼손혐의로 고발하였고 한국 검찰은 수사를 시작하였다. 2015년 12월에 한국 법원은 명예훼손 혐의는 인정되나 다만 비방의 목적은 없다고 하며 최종 무죄방면하였다. 가토 다쓰야는 재판 후 '왜 나는 한국에 이겼나. 박근혜 정권과의 500일 전쟁'이라는 책을 2016년 1월 29일 산케이 신문 1면 보도 후 발간하여 '한국은 중세국가다'. '한국의 법은 대통령과 국민감정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된다' '한국과는 가치관을 공유할 수 없다' 등 한국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았다. 같은 날인 29일에 한국에서도 가토의 책을 반박하는 책이 발간되었다.
  • 박기채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 출신으로 [[1927년]]경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수학했다. [[1930년]], [[교토 시]]에 있는 [[동아키네마]]에 의탁생으로 입사하여 본격적으로 영화 촬영을 공부했다. [[1935년]]에 같은 영화사에서 일했던 [[양세웅]]과 함께 귀국한 뒤 유명한 문예인들이 대거 발기인으로 참가한 《춘풍》을 연출해 데뷔했고, 다음 작품으로는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영화화해 주목 받는 신진 감독이 되었다. 《무정》은 [[한은진]]의 첫 출연작이기도 하다. 이 무렵 문예 영화라는 새로운 흐름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주도한 감독 중 하나였다.
  • 박동혁 (축구인)
         [[2009년]], 돌연 [[일본]] [[J리그]] [[감바 오사카]]로 이적하였으나 반 시즌만에 하위권에서 맴돌던 [[가시와 레이솔]]로 임대되었다. 가시와의 강등을 막지는 못하였지만 수비력을 인정받아 시즌이 끝난 후 가시와로 완전 이적하였다. [[2010년]], 강등된 가시와가 한 시즌만에 [[J2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승격하는데 일조하였다. 다시 J1리그로 복귀한 후에도 주전 수비수로 활약하며 팀이 [[J1리그 2011|2011 J1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데 공헌하였다.
         [[분류:197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축구 수비수]][[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분류:일본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중국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전북 현대 모터스의 축구 선수]][[분류:울산 현대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감바 오사카의 축구 선수]]
         [[분류:1998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0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아시안 게임 축구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동메달리스트]][[분류:울산 현대 축구단의 코칭스태프]][[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아산 무궁화 축구단의 코칭스태프]][[분류:아산 무궁화 축구단의 축구 감독]][[분류:K리그1 베스트 11 수상자]][[분류:K리그2 감독상 수상자]][[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박동희 (야구인)
         시속 150km가 넘는 빠른 강속구가 주무기였던 그는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시절, [[1988년 하계 올림픽|1988년 서울 올림픽]]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에 선출되어 [[올림픽]]에서 [[일본]]의 [[투수]] [[노모 히데오]]와 선발 맞대결을 펼치는 등 아마추어 선수 시절부터 '[[선동열]]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부산고등학교|부산고]] 3학년 때 1차 3순위 지명을 받았고, [[고려대학교|고려대]]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한 후 [[1990년]] 1억 5천 2백만원의 계약금을 받으며 연고 팀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당시 '''수퍼 베이비'''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 박명환 (1977년)
         [[1996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199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고졸 우선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시속 150km가 넘는 빠른 공과 위력적인 [[슬라이더]]를 구사하는 파워 피처<ref name="d"/>였지만, 프로 데뷔 초창기만 해도 변화구의 컨트롤에 문제가 있었다. 이는 [[1996년]]부터 3년 동안 연속으로 폭투 1위를 한 기록이 증명했다. 많은 때는 한 시즌에 21개나 하기도 했다.<ref name="d">박동희 기자, "일본행 좌절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야구 인생을 시작하다 - LG의 박명환" 《LG 트윈스》, 2007, 1,1</ref>등번호는 27번을 사용했다.
         [[2006년]] 시즌 후 [[일본]] 진출을 노렸으나 무산되었고, [[자유계약선수제도|FA]]를 선언하여 4년 40억원의 조건으로 [[LG 트윈스]]에 이적했다. 이 때 [[두산 베어스]]는 보상 선수로 [[투수]] [[신재웅 (1982년)|신재웅]]을 지명했다.
  • 박문웅(1890)
         '''박문웅'''(朴文雄, 일본명:朴忠文雄 호추 후미오, [[1890년]] [[12월 7일]] ~ [[1959년]] [[8월 14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관료이다. [[일제 강점기]]의 [[일본]] 유학파 관료로 [[1916년]] 판임관 공개채용 시험에 합격, [[선산군]]속, [[김천군]]속, [[경상북도]] 학무과 주사, [[경주시]] 총무과 서무주임 등을 거쳐 [[경북]] 달성군수, 경북 청송군수(1934.9.14~1938.3.25), 청도군수(1938.3.25~1943.3.6), 상주군수(1943.3.6~1944.12.21) 등을 역임하였다.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친일파 관료 [[박중양]]의 아들로, [[치과]][[의사]]이자 대학 내 [[치의학]]과 설립 운동을 한 [[이열희 (1924년)|이열희]]는 그의 사위였다. 다른 이름은 영문(泳文) 또는 순성(淳聖)이다.
         [[일본]]으로 유학, [[일본]] [[시가현]](磁駕縣) [[하코네 중학교]](彦根中學校)를 졸업했다. [[세이소쿠 영어학교]]으로 진학, [[1914년]]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1914년]] [[11월]] [[판임관|판임문관]] 공개채용 시험에 합격한 뒤 [[1915년]] [[대구부]] [[판임관]] 견습(判任官見習)이 되었다.
         [[1940년]] [[판임관]] 5등이 되었다. 그해 [[5월]]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그해 [[9월]] 박충으로 창씨개명하였다. [[1941년]] 다시 청도군수가 되었다가 [[1942년]] [[판임관]] 4등으로 승진하였다. [[1943년]] [[영천]][[군수]]가 되었다가 그해 [[3월 6일]] [[상주군|상주]][[군수]](尙州郡守)로 부임하였다. [[1943년]] [[8월 2일]] 각 도별로 [[일본적십자사]] 녹사(日本赤十字社錄事)를 선발할 때 [[경상북도]] 지역구 [[일본 적십자사]] 녹사의 한사람으로 선임되었다. [[12월 31일]] [[고등관]] 3급으로 승진하였다.
         [[1944년]] [[12월 22일]] [[상주군|상주]][[군수]]에서 [[의원면직]]하였다. 이후 [[12월]]말 [[밀양]][[군수]]를 거쳐 [[1945년]] 해방 후 관직에서 물러난 뒤 [[대구]] 침산 근처로 낙향하였다. [[1945년]] [[9월 2일]] 미군정청 경상북도 자문관에 임명되었으나 12월 26일 사퇴하였다. [[미군정]]하에서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계속 채용하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대구 침산 근처에서 아버지 [[박중양]]과 일본인 계모와 생활하였다.
         * 서모 : 일본 여자([[1909년]] ~ ?)
  • 박상철(가수)
          * 무조건(2005) : 사원급 [[직장인]]들이 [[회식]] 자리에서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물론 다 개사해서 부른다. ~~부장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 2008년에 1박2일 시즌1 경남 [[거창]]편에서 1박2일팀이 전국 노래자랑 출전곡으로 이 곡을 불렀다. [[일본]]의 탤런트 카와사키 마요가 이 곡을 2015년에 [[리메이크]]했다.
  • 박석민
         타순은 2008~2009년까지는 주로 4번, 가끔 5, 6번에 기용되다 [[최형우]]의 포텐셜이 폭발한 후로는 3번이나 5번으로 나온다. 포지션은 데뷔 초기에는 [[2루수]][* '''2004년 한국시리즈 9차전 선발라인업 키스톤이 조동찬-박석민(!)이었다'''. (참고로 아래 움짤에서 18번 투수는 박석민이 아니라 [[박석진]].) 물론 이 키스톤이 선발출장한 이유는 수비보다도 당시 상대 선발이었던 [[오주원|오재영]]을 겨냥한 좌투수 저격 라인업의 의미가 더 컸었고 결과적으로 이날 삼성의 수비는......[[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br][[파일:external/lh3.googleusercontent.com/2004%252520KS.gif]]]였지만 현재는 주로 [[3루수]]이며 가끔 [[1루수]]. 막 제대했을 때는 타격면에선 합격점이었지만 같은 포지션의 [[조동찬]]에 비해 떨어지는 수비가 문제였다.[* 사실 3루수에서도 그의 천재성이 엿보이는게, 원래 2루나 유격수를 보았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그냥 '아 포지션변경하기 힘든 것을 천재성으로 극복했구나'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2루와 유격수 수비와 3루수비는 '''스텝부터가 다르다.''' 유격수나 2루수는 좌우 양 옆으로 움직여야 하지만--[[박기혁|좌우로 스텝을 밟는 게 아니라 전력질주로 뛰어가서 잡아야 하는 유격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3루수비는 앞뒤로 움직여야 한다. 당장에 [[알렉스 로드리게스|에이로드]]가 [[데릭 지터|절대 유격수만 고집하시는 분]]하고 양립이 안 되어서 3루로 전향했고, 그 때의 3루수비를 기억해보자. 멀리 갈 것도 없이 유격수에서 [[강정호|이 분]]을 제쳐내지 못하고 3루로 정착한 [[황재균|케이팝 모델 x스머신]]을 떠올리는 것도 있다. 황재균도 처음에 3루수비는 개판이었다. 다만 당시 수비코치이던 [[염경엽]]이 기초부터 다시 가르쳐 지금에 이르른 것.--물론 그 개판인 수비도 [[롯데 자이언츠|이 팀]] 팬들한테는 [[이대호|굉장히 예쁘게 보였을 거다]]-- 뭐 황재균을 사온 이유가 이대호의 수비를 감당못하고 1루로 보낸 거 였지만.]당시 수비력만으론 리그 하위권인데다 그전의 삼성 3루수는 역대 최강의 수비를 자랑하던 [[김한수]]였기 때문에 더욱 비교되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일취월장하여 3루 수비는 리그 최고 수준에 달하는 정도가 되었다.[* 3루수로서는 나무랄 데 없을 정도로 수비가 좋아졌지만, 1루수로서는 아직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특히 1루수로서 가장 중요한 포구에서 실수가 좀 잦은 편이다. 11년 [[채태인]], [[조영훈]], [[모상기]]가 부진할 당시에는 삼성의 차기 1루수 부분에 대한 우려가 크던 상황이었으나 12년은 국내복귀를 선언한 [[이승엽]]이, 13년과 14년은 각성한 [[채태인]]이 1루를 맡아 공수양면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15년 부터는 [[양준혁|어느 머리 큰 전설적인 신인왕의 컨택능력을 가진]] [[구자욱|중장거리 히터 스타일의 초대형 군필신인]]이 등장한 덕에 박석민이 억지로 1루를 맡을 필요가 없어졌다. 박석민의 아쉬운 수비와 원래 3루 대체제로 생각했던 [[조동찬]]이 시즌아웃 이후 경기를 전혀 뛰지 못하는 상황임을 생각할때 삼성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인 셈.]아이러니하게도 어려운 수비는 잘하는데 쉬운 수비는 잘 못한다. 가끔 글러브에 공이 낄 때도 있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때 수비시 [[투수]]용 글러브를 끼고 경기에 나섰다. [[투수]]용 글러브와 [[내야수]]용 글러브의 크기 차이를 생각하면 참 희한한 일. 2015년 현재 웹이 막힌 큰사이즈의 내야수 글러브를 사용중이다. 사실 막힌 웹은 무조건 투수용이라는건 우리나라 사회인야구에 주로 있는 편견이고 일본의 경우는 내야수들도 막힌웹의 글러브를 많이 사용한다.은퇴한 양키스의 유격수 데릭 지터또한 커리어 내내 소위 바둑판웹이라고 불리는 디자인의 글러브를 사용한것으로 유명하다.
         풀스윙을 할 때 배트를 놓쳐 배트가 '날아가'버리는 경우가 잦다. 카메라맨 쪽으로 날아간 적도 있고 상대 투수 쪽으로 날아간 적도 있다. 자칫하면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을 연출한다. 이런 위험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상대팀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 [[http://cfile287.uf.daum.net/image/184C3B194C2DD67D70ABC2|팀킬도 한다.]] 2011년 6월 21일 경기에서 [[오넬리 페레즈|오넬리]]의 투구에 삼진당하면서 놓친 배트가 오넬리에게 날아가는 바람에 오넬리는 당황, 박석민은 헉, [[신경현]]은 알밤 + 예끼~~[[한대화|니미 X발]]~~를 시전하는 장면이 잡혔다. 다행히 배트가 오넬리 정면으로 날아가지는 않았지만 매우 위험했던 상황.[[http://sports.news.naver.com/videoCenter/index.nhn?category=kbo&id=3478&gameId=20110621HHSS0&listType=game&date=20110621&page=1|영상]] ~~그리고 다음날 [[차우찬]]에게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고의는 아니고 다행히 배트는 빗나갔지만.~~ 다행히 빗나갔기에 '역시 브콜돼' 소리를 듣는데 그쳤다. '''__하지만 박석민이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왼쪽 중지 부상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__''' 2010 시즌부터 수비할 때 중지에 테이핑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타격할 때 중지와 약지를 테이프로 감아 하나로 묶어 타석에 들어선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격할 때 순간적으로 왼손에 힘이 빠지면서 배트를 놓치는 것. 중지를 총 두 번 수술해야 한다는데 2010 시즌 끝나고 한 번 했었고 2011 시즌이 끝나고 두번째 수술을 했다. 그 결과 100% 정상은 아니지만 상당히 호전되었다. 2013 시즌까지도 휴식일을 잡아서 [[일본]]에 주사를 맞으러 갔다. SNS에 올라온 글로 보아 히쓰마부시(장어모듬덮밥) 팬인 것 같다. ~~갈 때마다 먹는다~~
  • 박수진(1985년 11월)
         ||2010 ~ 2011||<|5>올'리브(Olive)||it City 일본에서 놀자||진행||정다솔, 배다해, 혜라, 김동욱, 정소민, 이태성과 공동 진행||
         [[슈가(걸그룹)|슈가]]를 탈퇴할 때 나쁘게 헤어지지 않았는지, 멤버들과 꾸준히 연락을 한다고 한다. 황정음과 자주 보고 있다고 한다. [[황정음]]은 고등학교 1년 선배였는데, 박수진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가끔 스케줄 때문에 일본을 방문하면 [[이토 유미|아유미]]를 만난다고 한다. 한예원, 하린과도 꾸준히 연락한다고 한다.
         슈가 시절에 [[일본]]에서 앨범을 낸 경력이 있다. 슈가는 일본에서 정규 앨범 2장, 싱글 5장을 발매했으나,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It City 일본에서 놀자'라는 프로그램에서 일본을 여행하는 모습을 촬영하였는데 이전에 각종 방송과 공연을 위해 일본 전국을 다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제대로 구경해 본 도시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본 시장 개척의 선구자인 셈이다. [[일본]]에서 활동을 하기 위해 배운 것인지 일본어를 잘 구사한다. 슈가 시절에는 어색의 절정이었지만 2010년 'It City' 방송에서는 자신의 일본어 실력을 유감 없이 보여줬다.
  • 박순천
         |학력= [[동래여자고등학교|경상남도 동래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br /> [[일본]] [[도쿄도|도쿄]] 요시오카 여자의학전문학교 중퇴 <br /> [[일본]] [[도쿄 여자대학|도쿄 여자대학교]] 사회사업학과 중퇴 <br /> [[일본]] [[니혼 여자대학|니혼 여자전문학교]] 사회학부 여공보전학과 전문학사
         1898년 10월 24일(음력 9월 10일)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한학자인 박재형의 딸로 태어났다. 한때 [[경상남도]] [[기장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12세에 아버지가내에 나갔다가 일본인에게 상투가 잘린뒤 모욕당하고 돌아왔는가 하면 기독교 교인이던 어머니가 태극기를 꺼내어 담장아래에 묻으면서 통곡하는 것을 보고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교육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박주연}}</ref> 하고 [[마산시|마산]] 최초의 여학교였던 의신여학교 교사로 부임, 성경 채플담당 교사와, 생리학 겸 동물학 교사가 되었다. 당시 일인교사는 24원의 월급을 받고 그는 12원의 월급을 받아 일본인 교사와의 차별대우에 항의, 싸우기도 했다.
         1919년 2월 박명련은 일본에서 귀국, 마산에 체류하고 있던 [[이갑성]]와 만나게 된다. [[이갑성]]은 [[일본]] 유학생들이 [[2월 8일]] [[일본]] [[도쿄도|동경]]에서 [[2·8 독립선언]]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주고 서울에서 3월에 거사 계획이 있을 것임을 알려주고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3월 1일]] [[3·1 운동]]이 각지에서 발생하자, 박순천도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3월 5일 박순천은 많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마산장에 나온 장꾼들에게 나눠 주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관헌에게 체포, [[신마산]]에 있는 [[일본헌병대]]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3월 12일 [[한석규]]목사와 시인 [[이은상]], [[이승규]] 목사([[이은상]]의 아버지) 등의 신원보증을 받고 가석방되었다. 12일 헌병대서는 석방과 동시에 가택수색을 실시했는데 이곳에서 [[태극기]]를 비롯 독립선언서와 항거계획, 일기장 등이 발견되자 도주, 다시 쫓기는 몸이 되어 야산으로 산행중 밤중에 30리길을 걸어 칠원에 도착했다.
         칠원에서 3개월간 은신했다가 다시 마산으로 돌아왔으나 일본 형사들의 눈을 피해 제자인 이수학의 집에 숨어있었다. 그는 마산교회 한석진목사의 따님인 한소재의 권고로, 경찰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그를 따라 기생으로 가장하고 일본으로 출국하는데 성공하였고, 동경 기찌오까 의전에 입학하였다. 그는 평양순의여학교를 나와 동경유학생으로 있던 황신덕(전 중앙여고 재단이사장)을 이때 만나 교분을 쌓았으며, 동경에 가서 그곳 일인하숙집인 상마라는 집에 하숙하던 중, 같은 하숙생이었고 의전에 다니던 [[변희용]]을 만나게 되었다.
         유학을 위장하여 [[일본]]으로 피신했으며 [[일본]] [[니혼 여자대학교]](日本女子大學校) 사회학부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고국인 [[경상남도]] [[기장군|기장]]에서 하숙 및 학비 등이 송금되어 왔는데 집에서는 본명인 박명련으로 송금한 것이 문제되어 3·1 운동 참가 경력이 드러나면서 국내로 압송되어 복역했다. 일본 도피 생활 중 사용한 순천댁(順天宅)이라는 별칭에서 '박순천'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1920년 4월 일본 우씨고매형무소에 수감되자 동경 유학생 총무였던 변희용은 면회 등 성의를 보였으며, 보안사범으로 죄수번호 98번을 부여받고 일본형무소에서 다시 마산형무소로 이감되어 1년 4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1921년 8월 출감, 고향인 기장의 대변리로 돌아왔다. 출감 후 그는 [[황신덕]]과 함께 항공사가 되겠다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여성이라는 체력적 약점 때문에 부득이 [[니혼 여자 전문학교]] 사회학부 여공보전과에서 유학했고 1924년 귀국, 12월 24일 서울 무교동의 태화관에서 [[변희용]]과 결혼했다.
         }}</ref> 그러나 김금진이 지원해 근무한 정신대는 통상적으로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와는 다른 여자 근로 정신대이며, 정신대 지원이 없으면 학교가 폐교된다는 협박 때문에 자발적으로 지원한 것이므로 황신덕과 박순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도 있다.<ref>{{뉴스 인용
         * 일본 도쿄도 요시오카 여자의학전문학교 중퇴
         * 일본 [[도쿄 여자대학|도쿄 여자대학교]] 사회사업학과 중퇴
         * 일본 [[니혼 여자대학|니혼 여자전문학교]] 사회학부 여공보전학과 전문학사
  • 박순천 (국회의원)
         |학력= [[동래여자고등학교|경상남도 동래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br /> [[일본]] [[도쿄도|도쿄]] 요시오카 여자의학전문학교 중퇴 <br /> [[일본]] [[도쿄 여자대학|도쿄 여자대학교]] 사회사업학과 중퇴 <br /> [[일본]] [[니혼 여자대학|니혼 여자전문학교]] 사회학부 여공보전학과 전문학사
         * 일본 도쿄도 요시오카 여자의학전문학교 중퇴
         * 일본 [[도쿄 여자대학|도쿄 여자대학교]] 사회사업학과 중퇴
         * 일본 [[니혼 여자대학|니혼 여자전문학교]] 사회학부 여공보전학과 전문학사
         [[1898년]] [[10월 24일]]([[음력 9월 10일]])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시]]에서 한학자인 박재형의 딸로 태어났다. 한때 [[부산광역시|부산시]] 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12세에 아버지가 기장읍내에 나갔다가 일본인에게 상투가 잘린뒤 모욕당하고 돌아왔는가 하면 기독교 교인이던 어머니가 태극기를 꺼내어 담장아래에 묻으면서 통곡하는 것을 보고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교육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박주연}}</ref> 하고 [[마산시|마산]] 최초의 여학교였던 의신여학교 교사로 부임, 성경 채플담당 교사와, 생리학 겸 동물학 교사가 되었다. 당시 일인교사는 24원의 월급을 받고 그는 12원의 월급을 받아 일본인 교사와의 차별대우에 항의, 싸우기도 했다.
         1919년 2월 박명련은 일본에서 귀국, 마산에 체류하고 있던 [[이갑성]]와 만나게 된다. [[이갑성]]은 [[일본]] 유학생들이 [[2월 8일]] [[일본]] [[도쿄도|동경]]에서 [[2·8 독립선언]]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주고 서울에서 3월에 거사 계획이 있을 것임을 알려주고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3월 1일]] [[3·1 운동]]이 각지에서 발생하자, 박순천도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3월 5일 박순천은 많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마산장에 나온 장꾼들에게 나눠 주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관헌에게 체포, [[신마산]]에 있는 [[일본헌병대]]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3월 12일 [[한석규]]목사와 시인 [[이은상]], [[이승규]] 목사([[이은상]]의 아버지) 등의 신원보증을 받고 가석방되었다. 12일 헌병대서는 석방과 동시에 가택수색을 실시했는데 이곳에서 [[태극기]]를 비롯 독립선언서와 항거계획, 일기장 등이 발견되자 도주, 다시 쫓기는 몸이 되어 야산으로 산행중 밤중에 30리길을 걸어 칠원에 도착했다.
         칠원에서 3개월간 은신했다가 다시 마산으로 돌아왔으나 일본 형사들의 눈을 피해 제자인 이수학의 집에 숨어있었다. 그는 마산교회 한석진목사의 따님인 한소재의 권고로, 경찰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그를 따라 기생으로 가장하고 일본으로 출국하는데 성공하였고, 동경 기찌오까 의전에 입학하였다. 그는 평양순의여학교를 나와 동경유학생으로 있던 황신덕(전 중앙여고 재단이사장)을 이때 만나 교분을 쌓았으며, 동경에 가서 그곳 일인하숙집인 상마라는 집에 하숙하던 중, 같은 하숙생이었고 의전에 다니던 [[변희용]]을 만나게 되었다.
         유학을 위장하여 [[일본]]으로 피신했으며 [[일본]] [[니혼 여자대학교]](日本女子大學校) 사회학부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고국인 [[경상남도]] [[기장군|기장]]에서 하숙 및 학비 등이 송금되어 왔는데 집에서는 본명인 박명련으로 송금한 것이 문제되어 3·1 운동 참가 경력이 드러나면서 국내로 압송되어 복역했다. 일본 도피 생활 중 사용한 순천댁(順天宅)이라는 별칭에서 '박순천'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1920년 4월 일본 우씨고매형무소에 수감되자 동경 유학생 총무였던 변희용은 면회 등 성의를 보였으며, 보안사범으로 죄수번호 98번을 부여받고 일본형무소에서 다시 마산형무소로 이감되어 1년 4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1921년 8월 출감, 고향인 기장의 대변리로 돌아왔다. 출감 후 그는 [[황신덕]]과 함께 항공사가 되겠다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여성이라는 체력적 약점 때문에 부득이 [[니혼 여자 전문학교]] 사회학부 여공보전과에서 유학했고 [[1924년]] 귀국, 12월 24일 서울 무교동의 태화관에서 [[변희용]]과 결혼했다.
         }}</ref> 그러나 김금진이 지원해 근무한 정신대는 통상적으로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와는 다른 여자 근로 정신대이며, 정신대 지원이 없으면 학교가 폐교된다는 협박 때문에 자발적으로 지원한 것이므로 황신덕과 박순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도 있다.<ref>{{뉴스 인용
  • 박승희 (1901년)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의 고관이었던 [[박정양]]의 셋째 아들이다. 지금의 [[서울특별시|서울]] [[중구 (서울특별시)|중구]] 에서 태어났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1919년]]에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 박신혜
         이문서는[[일본]]황후에대한문서입니다
         | 국적 = 일본
         '''박신혜'''([[1880년]] [[2월 28일]] ~ )는 [[일본]]의 [[황후]]이다.
         박신혜는 2009년, 드라마 《[[미남이시네요]]》로 이후 1년 반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하였다. 극중 속세와 차단된 수녀원을 나와 쌍둥이 오빠 고미남을 대신해 비밀과 가십, 계산과 계약으로 움직이는 연예계에서 살아 나가는 고미녀 역을 연기하며 배우 인생 전환점을 맞이했고, 일본 및 중화권에서도 인지도를 높히며 한류 퀸으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ref>{{웹 인용|url=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851058 |title=‘미남이시네요’가 ‘아이리스’에 기죽지 않는 이유 |출판사=일간스포츠 |저자= 정지원|날짜=2009-10-30 |확인날짜=2016-12-29}}</ref><ref>{{웹 인용|url=http://www.hancinema.net/jang-geun-seok-you-re-beautiful-beats-winter-sonata-33223.html |title=Jang Geun-seok "You're Beautiful" beats "Winter Sonata" @ HanCinema :: The Korean Movie and Drama Database |publisher=Hancinema.net |date=2011-09-14 |accessdate=2016-12-29}}</ref> 나중에 박신혜는 인터뷰에서 “성인이 돼 처음 한 작품으로, 아역이 아닌 ‘박신혜’라는 한 여배우의 시작을 알리게 해준 작품”이라고 ‘미남이시네요’에 대해 말했다.<ref name="mbn" /> 이듬 해, 2010년 박신혜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에서 연애 조작 요원 오민영 역을 맡아 [[엄태웅]], [[이민정]], [[최다니엘]]과 공연하며 영화는 260만명의 관객수를 동원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박신혜는 사전 제작 된 대만 드라마 《선풍관가 旋風管家》에서 샤오즈 역을 맡아 출연하였고, 2011년 방영되었다.
         박신혜는 2017년, [[정지우 (영화 감독)|정지우]] 감독의 영화 《[[침묵 (2017년 영화)|침묵]]》에서 변호사 최희정 역을 연기했다. 영화는 약혼녀가 살해당하고 그 용의자로 자신의 딸이 지목되자, 딸을 무죄로 만들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건을 쫓는 남자 ‘임태산’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ref>{{뉴스 인용 |제목 =최민식x박신혜x류준열 '침묵' 11월 개봉 확정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988848|출판사 =TV리포트 |저자 =김수정 |날짜 = 2017-09-20 |확인날짜 =2017-09-20 }}</ref> 2017년 11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박신혜는 2017년 6월부터는 지난 2013년 첫 투어 이후 4년만에 2017 아시아투어의 첫 스타트 무대를 홍콩에서 성황리에 마쳤으며, 이번 아시아투어는 올 해로 네 번째로 투어 수익금 전액은 기아대책에 기부되었다. 이외에도 대만, 필리핀, 일본, 싱가포르, 태국에서도 열릴 예정이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아시아투어 첫 무대 성료…"MC 없이 단독진행"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76&aid=0003105412|출판사 =스포츠조선 |저자 =정유나 |날짜 = 2017-06-12 |확인날짜 =2017-09-12 }}</ref><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한류여제’ 파워 과시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576478|출판사 =스포츠동아 |저자 =이정연 |날짜 = 2017-07-04 |확인날짜 =2017-09-12 }}</ref>
         박신혜는 매년 팬미팅 수익금을 현지 NGO나 사회단체에 기부해오고 있다. 2007년, 박신혜는 드라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의 순수제작비를 제외한 작가, 연출자, 연기자들의 원고료와 연출료 및 출연료 전액 등의 수익금을 NGO 단체를 기부하는 것에 동참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원고료-출연료 기부...첫 도네이션 극 방영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006327|출판사 =TV리포트 |저자 =김진도 |날짜 = 2007-05-14 |확인날짜 =2013-09-01 }}</ref> 2012년에는 한국 공식팬클럽 ‘별빛천사’와 함께 한 한국 팬미팅 티켓 판매금 전액을 팬들과 대표적인 [[NGO]] 단체 ‘기아대책’에 기부하며, 박신혜가 봉사를 다녀온 아프리카 가나의 별빛 천사 마을을 위해 후원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노래선물, ‘팬 위한 노래’ 직접 작사한 곡 ‘최초 공개’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38&aid=0002231659|출판사 =리뷰스타 |저자 =김숙희 |날짜 = 2012-02-20 |확인날짜 =2013-09-01 }}</ref> 같은 해 7월, 드라마 《[[넌 내게 반했어]]》의 후지TV 방송을 기념해 [[정용화]]와 함께 7월 15일과 16일 두 차례에 걸쳐 열린 팬미팅 행사를 성공리에 마쳤고, 팬미팅 수익의 일부를 국제기아대책기구를 통해 동일본대지진의 지원금으로 기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정용화, '넌 내게 반했어' 日 팬미팅 수익금 기부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76&aid=0002236717|출판사 =스포츠조선|저자 =김표향 |날짜 = 2012-07-17 |확인날짜 =2013-09-01 }}</ref> 2013년 일본 팬미팅 후에는 기아대책 일본지부에, 필리핀 팬미팅의 수익금도 현지에 되돌려 한류의 이미지 제고에 앞장서오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中 반려동물 성금 기부… 경시풍조에 경종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69&aid=0000056438|출판사 =한국일보 |저자 =이현아 |날짜 = 2015-04-05 |확인날짜 =2015-04-07 }}</ref> 같은 해 1월, 드라마 《[[이웃집 꽃미남]]》 제작발표회에서 팬들에게 받은 쌀 화환을 나눔의 집에 기부했고, 같은 해 2월, 한국 팬미팅 수익 전액과 일본 팬미팅 수익 일부를 기아 대책에 기부했다. 4월에는,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CGV 스타리움에서 영화 《사랑의 가위바위보》의 쇼케이스 행사에 참석한 박신혜를 응원하기 위해 일본 팬클럽과 공식 팬클럽 회원들은 쌀 화환 520kg과 공식 팬클럽은 '별빛천사는 사랑의 가위바위보를 응원합니다' 등의 메시지를 적은 쌀 화환을 보내고, 이날 받은 쌀 화환 520kg은 박신혜가 지정하는 기부처로 전달돼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 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쌀 화환 520kg 어려운 이웃에 기부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1&aid=0000330294|출판사 =조이뉴스24 |저자 =권혜림 |날짜 = 2013-04-30 |확인날짜 =2013-09-01 }}</ref> 6월 24일, 영화 《사랑의 가위바위보》의 청각장애인을 위한 한국어 대사와 해설 자막, 시각장애인을 위시·청각 장애인들도 비장애인과 함께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제작한 배리어프리 버전 녹음을 진행했고, 박신혜는 영화의 앞부분에 내레이터로 재능 기부에 참여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김지운 감독·박신혜, 시청각 장애인 위해 재능기부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348112|출판사 =마이데일리 |저자 =김미리 |날짜 = 2013-06-24 |확인날짜 =2013-09-01}}</ref>
         * {{언어링크|ja}} {{공식 웹사이트|http://www.parkshinhye.jp/}} (일본)
  • 박영록 (1927년)
         '''박영록'''(본명 '''박영노''', [[1927년]] [[1월 13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연기자]]이다. [[1978년]] [[영화]] 《[[세종대왕 (1978년 영화)|세종대왕]]》의 단역으로 [[영화 배우|영화배우]] 첫 데뷔하였다. [[텔레비전 드라마|TV 드라마]]로 활동하기 전에는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 박영희 (1901년)
         '''박영희'''(朴英熙, <small>일본식 이름: </small>{{lang|ja|芳村香道|요시무라 고도}}, [[1901년]] [[12월 20일]] ~ [[1950년]])는 [[일제 강점기 조선]]의 [[친일 사회주의]] 문학평론가, 시인, 소설가, 언론인이다. 1920년대 대표적인 [[카프]] 문학가로 활동했지만 [[1933년]] 카프에서 탈퇴, 이후 순수 문학과 예술주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 [[중일 전쟁]] 발발과 함께 사상 전향을 발표하고 친일 문학가로 변절했다. 호는 회월(懷月), 송은(松隱), 본명은 '''박거복'''(朴巨福)이며, 본관은 [[밀양 박씨|밀양]]이다.
         [[1920년]] 3월 배재고보를 수료한 뒤 [[일본]] 도쿄의 [[정칙영어학교|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6월, [[최승일 (1901년)|최승일]],[[나도향]] 등과 《신청년》을 발간, 《목동의 적(笛)》이란 시를 실었다. 이듬 해 [[1921년]] 귀국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21년]] 귀국한 뒤, [[박종화]],[[황석우]]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시 동인지 《[[장미촌]]》을 발행하며 창간호에 〈적(笛)의 비곡(悲曲)〉, 〈과거의 왕국〉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같은 해 《[[신청년]]》에 동인으로 참가했고, [[1922년]]에는 《[[백조 (잡지)|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감상적인 내용을 담은 낭만주의적 시를 썼다.
         [[1923년]] 김기진과 함께 [[파스큘라]]를 결성하고 《[[개벽 (잡지)|개벽]]》에 입사한 후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서구식 낭만주의풍의 작품 경향에도 변화가 왔다. [[도쿄]]에 유학한 친구 김기진이 일본에서 유행한 프로문학에 먼저 입문하면서 박영희의 감상적 낭만주의를 강력히 비판한 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백조》를 와해시키고 프로문학을 한국에 소개했다.
         [[카프]]도 박영희의 손에서 떠나 무산자사를 세운 기존 동경지부의 주장대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먼저 [[신간회]]가 1931년에 해체되었고 [[평양]] 등에서 파업을 선동하여 노동 계급의 조직과 투쟁 역량을 확대시킨다. 그리고 공산당 재건 운동의 기반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상황을 일본 경찰이 주목하기 시작한다. [[1931년]] 5월, [[신간회]] 본부가 해체될 때 경성지부 해소위원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6월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제1차 카프 검거 사건)
  • 박용철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산군]](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충주 박씨|충주]](忠州)이고 아호는 용아(龍兒)이다를 거쳐 [[일본]] [[도쿄]] 아오야마 학원(靑山學園)과 [[연세대학교|연희전문]]에서 수학했다.
         일본 유학 중 시인 [[김영랑]]과 교류하며 [[1930년]] 《시문학》을 함께 창간해 등단했다. [[1931년]] 《월간문학》, [[1934년]] 《문학》등을 창간해 순수문학 계열로 활동했다. "나 두 야 간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거냐/나 두 야 가련다"로 시작되는 대표작 〈떠나가는 배〉 등 시작품은 초기작이고, 이후로는 주로 [[극예술연구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해외 [[시 (문학)|시]]와 [[희곡]]을 번역하고 평론을 발표하는 방향으로 관심을 돌렸다.
  • 박이양
         [[1908년]] 친일 성향의 고위 관료들이 결성한 유림 단체인 [[대동학회]]의 평의원이 되었고, 이 단체의 경리부장을 지냈으며 일본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11년]] [[조선총독부]] 취조국 위원에 임명되었고, 조선어사서 편찬위원으로도 근무했다. [[1920년]] 역시 [[유교|유학]] 계열의 친일 단체인 [[대동사문회]]에 이사 및 편찬위원이 참가하였다.
  • 박주영
         박주영은 2005년 6월 정식 국가대표로 A매치에 출장해 첫 경기에서 득점을 올렸으며, 2008년 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득점왕을 수상했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는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 1골을 넣어 2-2무승부로 16강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2012 런던 올림픽]] [[일본]]과의 [[카디프 대첩|동메달 결정전]]에서 그 유명한 '''[[박주영/국가대표 경력#s-3.2|박시탈]]'''을 선보이기도 했다.
         ||<:> 2010년 5월 24일||<:> [[사이타마]]||[[파일:일본 국기.png|width=30]] [[일본]]||<:> 2–0||<:> 친선경기||
          * [[http://imgnews.naver.net/image/241/2012/08/11/htm_201208113495569006341_0_20120811092502.jpg|박시탈]] : 런던올림픽에서 일본 상대로 선제골을 터트려서 얻은 별명.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인 각시탈에 빗대어 등장한 멋있는 별명이다. 당시 런던 올림픽에서 대회 내내 경기력이 저조하다 일본 상대로만 선제골을 박은, 마치 항일 암살자 같았던 박주영의 모습을 빗대는 측면도 있다.
          * 박나모토 : 아스날에 잠시 소속되었던 일본 축구선수 이나모토와 같다 하여. 이나모토는 아스날이 경제적 목적으로 영입한 후 출전시키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 박지원 (1737년)
         [[1761년]] 초, 요양차 [[북한산]]에 들어가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이때 [[삼국지]], [[수호전]]을 비롯한 [[중국]]의 고전, [[일본]]의 서적 등을 새벽까지보거나 밤새워 탐독하느라 새치가 돋아나고, 수염이 은백이 되었다고 한다.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당대 양반 계층의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그는 기존의 시와 부, 문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썼다.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자신이 [[청나라]]나 [[일본]]을 다녀오고 그 당시 본 장면과 풍경을 그대로 기술하였다. 죽은 누나의 행장을 쓸 때는 부덕이나 현모양처임을 강조하거나 찬양하지 않고 어린 시절 자신이 누나에게 서운한 일이 있어, 누나의 화장품에 [[먹]]물을 타서 장난친 일 등을 기록하였다.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은 [[수필]]과 각종 글을 발표하였고, 글씨체 역시 기존의 서체에 구애받지 않고 글을 지었다.
  • 박찬현 (1917년)
         *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 박철우 (1964년)
         이후 [[광주진흥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고 [[2010년]]에는 [[일본]] 독립 리그 팀인 [[서울 해치]]의 감독을 맡았다가 팀이 해체된 후 [[2011년]] 10월 친정 팀 [[KIA 타이거즈]]의 타격코치로 복귀했다. 그러나 팀의 부진으로 [[2013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아 다시 친정 팀을 떠났다. 그 후 독립야구 팀인 [[고양 원더스]]의 타격/수비코치를 맡았다. [[고양 원더스]]가 해체되고 [[두산 베어스]]에서 타격 코치로 활동했다.
  • 박철우(배구)
         그런데 박철우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문제가 있으니 바로 '''군 문제'''. [[기흉]]이 [[장동건]] 때는 면제 사유였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아닌지라 병역 의무를 필해야 한다. 군대 문제 때문에 늦은 나이에 입대한 후 사그라든 선수들의 예를 봤을 때[* [[손석범]]이라든가, [[윤관열]]이라든가, [[백승헌]]이라든가... 이들은 모두 공익으로 복무한 후 복귀했지만 결국 은퇴했다. ~~여기에 [[신영수(배구선수)|신영수]], [[김학민]], [[한선수]]도 이 리스트에~~ 다행히 [[신영수(배구선수)|신영수]]는 공익으로 복무를 마치고 복귀한 후 예전 감각을 잃지 않았다. 덤으로 팀의 주축으로 2013-14 시즌부터 팀의 주장을 맡았다. 하지만 [[한선수]]는 [[일본]]에게 덜미를 잡혀 2015년 전역 확정.] 염려가 되는 게 사실이다. 본인이 건강 문제에 신경을 쓰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이가 태어났으니 [[한선수]]처럼 상근예비역으로 빠질 확률이 높긴 하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 출전했지만, 준결승 [[일본]]전에서 패해 '''결국 군대 확정....''' 2014년 10월 23일로 입소일이 찍힌 입대 영장이 아시안 게임 이후 통지됐다고 한다. 삼성화재에는 비상등이 켜졌다. 그런데 행정절차 때문에 입소일이 [[2014년]] [[11월 27일]]로 연기된 상태. 이유인즉슨 박철우가 오프 시즌 동안 주소지를 팀 숙소와 전용 체육관이 있는 [[경기도]] [[용인시]] 근처로 옮겼기 때문이었다. 주소지 변경 때문에 관할 병무청이 변경되어 박철우의 입소 날짜를 다시 세팅하게 되었으며, 일과를 마치고 팀 훈련장에서 훈련하기 위한 취지로 추측된다. 2014년 11월 20일 대전 홈 경기를 끝으로 입대했다. 이후 기초 훈련을 마치고 [[수원시|수원]] [[권선구|권선구청]]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복무 중이다.
  • 박태원 (1909년)
         | 언어 =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 학력 = [[일본]] [[호세이 대학|호세이 대학교]] 법정학과 중퇴
         1909년 [[한성부]]에서 출생하였으며 숙부가 의사, 숙모가 교사로 일하는 개화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일본]] [[호세이 대학]] 유학 이후 귀국한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33년 [[이태준]], [[정지용]], [[이상]], [[김유영 (1907년)]], [[김기림]] 등과 함께 순문학적, 유미주의적 성향의 [[구인회 (문학 단체)|구인회]]를 결성했다. 1934년 10월 27일 한의원 김중하씨와 이연사씨의 무남독녀 [[김정애 金貞愛(1912년)]]와 결혼. 신부는 숙명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사범 본과(1931년)를 졸업한 재원이었음.
         * 1931년 [[일본]] [[호세이 대학|호세이 대학교]] 법정학과 중퇴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본의 [[군국주의]]를 미화한 《군국의 어머니》(1942년)라는 책을 낸 바 있다. 그러나 친일 행적이 노골적이지는 않아서, '소극적 협력'으로도 불리고 있다.<ref>{{서적 인용
  • 박태환
         결승전에서 그는 350m 지점까지 4위를 달리다가 마지막 50m에서 역영을 펼쳐, 3분 44초 30으로 2·3위를 기록한 [[튀니지]]의 오우사마 멜로리와 [[오스트레일리아]]의 그랜트 해켓을 제치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 기록은 자신이 갖고 있던 [[대한민국]] 기록이자 [[아시아]] 기록을 1초 42 앞당긴 것이다. 2007년 8월 21일에는 ‘프레 올림픽’ 대회인 2007 일본 국제 수영대회 400m 자유형에서 3분 44초 77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2007년 일본 국제 수영 대회|일본 국제 수영 대회]]
         |[[일본]] [[지바현|지바]]
  • 박태환 (수영선수)
         결승전에서 그는 350m 지점까지 4위를 달리다가 마지막 50m에서 역영을 펼쳐, 3분 44초 30으로 2·3위를 기록한 [[튀니지]]의 오우사마 멜로리와 [[오스트레일리아]]의 그랜트 해켓을 제치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 기록은 자신이 갖고 있던 [[대한민국]] 기록이자 [[아시아]] 기록을 1초 42 앞당긴 것이다. 2007년 8월 21일에는 ‘프레 올림픽’ 대회인 2007 일본 국제 수영대회 400m 자유형에서 3분 44초 77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2007년 일본 국제 수영 대회|일본 국제 수영 대회]]
         |[[일본]] [[지바현|지바]]
  • 박해정(1916)
         1916년 [[경상북도]] [[경산시|경산군]]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 대구사범학교(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강습과, [[일본]] [[주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 박화요비
         [[포항문화방송|포항MBC]] 라디오 '별밤 뽐내기' 연말 결선에서 이희진의 '용서'를 불러 대상을 타고 데뷔하게 되었다. 데뷔 당시에는 박화요비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지만, [[일본]] 진출을 위해[* '박화요비'의 '박화'가 '[[바카|バカ]]' 로 들릴 수 있다. ~~[[몬데그린|바보요일]]~~] 예명을 화요비로 바꿨다. 18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보적인 가창력과 성숙한 목소리로 주목받았으며, [[박효신]] 등과 함께 국내 R&B 아티스트의 대표주자였다. 당시는 [[박정현]], [[박화요비]], [[박효신]]의 이른바 '3박' 시절. 당시 'KBS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출연해 환상적인 라이브 무대를 선보였고, 같은 소속사였던 [[박효신]]과의 듀엣곡 라이브도 선보였다. 본인의 노래 뿐만 아니라 [[머라이어 캐리]] 등의 팝을 굉장한 실력으로 소화했다. 화요비의 유명한 팝송 소화 능력은 데뷔 때부터 증명된 셈.
         이후로는 4집 <Soul saver>의 타이틀곡 <당신과의 키스를 세어보아요>, 이하 당키세 활동을 기점으로, 아래 항목에서 후술할 예능 활동과 더불어 대중적인 인기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당키세는 화요비의 앨범 타이틀곡 중에서도 1집의 <그런 일은>과 더불어 굉장히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곡으로 팬들 사이에서도 역시 지명도가 높다. 원곡은 일본 가수 코야나기 유키의 것인데, 원곡의 락 요소를 발라드적 요소로 편곡하고 가사도 일부 바꾼 리메이크곡. 이후 SBS '김윤아의 뮤직웨이브'에서 두 가수가 한 무대를 가지기도 했다.
         이후 일본 활동, 일부 팬들 사이에서 화요비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5집과 리메이크 앨범을 거친다.
  • 박흥식(야구)
         다만 [[삼성 라이온즈]]에서 10년 가까이 타격코치를 맡은 까닭에 매너리즘이 온 탓인지 2000년대 중후반에는 그 공포의 삼성 핵타선이 물타선으로 전락하고 만다.[* 물론 삼성의 핵타선을 이끌던 [[이승엽]]이 [[일본]]으로 진출하고, [[마해영]]도 FA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 외국인 타자 [[틸슨 브리또]]가 부상으로 인해 퇴출된 탓이 있었겠지만, 적어도 까다롭던 삼성 타선은 [[양준혁]]과 [[박한이]]를 제외하면 2006년부터 완전히 물타선으로 바뀌어버렸다.] 특히 2006년에 정말 심각했다. 물론 2006년은 역대적인 투고타저 시즌이어서 어느 정도 실드는 쳐줄 만했지만, 결국 물타선으로 삼성이 한국시리즈 2연패를 겨우 거둔 직후에 [[선동열]] 감독에 의하여 2007년 2군 타격코치로 내쳐졌고,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하며 11년 만에 팀을 떠나게 된다.
  • 반하면 패배
         [[일본]]의 연애 격언. 좋아하게 된 쪽이 패배. 반한 쪽이 패배. 라고도 한다.
         [[분류:일본어]]
  • 배용준
         배용준은 1994년 오디션을 통해 [[KBS]] 특채 탤런트로 발탁되어 청춘 드라마 《사랑의 인사》로 23세의 나이에 연기자로 데뷔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11월 안방극장에서 맞붙을 새 청춘드라마 2편|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824164|출판사=연합뉴스|날짜= 1994-10-29|확인날짜 = 2017-09-08}}</ref> 그는 60%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젊은이의 양지]]》(1995년)에서 영화감독 지망생인 재벌2세의 대학생 역할로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영애]]와 출연한 드라마《[[파파 (드라마)|파파]]》(1996년)에 이어, 최고 시청률 65.8%라는 한국 역대 드라마 시청률 1위를 기록한 《[[첫사랑 (1996년 드라마)|첫사랑]]》(1996년), 《[[맨발의 청춘 (2005년 드라마)|맨발의 청춘]]》(1998년) 등에 연이어 출연하며, 부드럽고 댄디하면서도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이미지로 인기를 끌며 톱스타로서 자리매김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인기스타 CF출연료 얼마? 배용준 4억원 "가장 비싼 사나이" |url=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23000209117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2-30&officeId=00020&pageNo=17&printNo=23410&publishType=00010 |출판사= 동아일보 |날짜= 1996-12-30|확인날짜 = 2017-09-08}}</ref> 그는 이후 1999년에 방송 된 [[노희경]] 작가가 극본을 쓰 드라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를 끝으로 활동을 중단했고, 이후로 숱한 많은 작품의 캐스팅 제의를 받았지만 역할 등의 의견이 맞지 않아 캐스팅이 무산되면서 2년간의 공백을 갖게 되었고, 2000년에는 [[성균관대학교]] 예술학부 영상학과 00학번으로 입학해 늦깍이 대학생으로 학업에 몰두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연기 폐업?…"배용준 나와라 오버!"|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6912215 |출판사=연합뉴스|날짜= 2014-05-18|확인날짜 = 2017-09-08}}</ref> (이후 2005년 3월말에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 학업을 중단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욘사마' 배용준 끝내 成大 자퇴|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969026|출판사=연합뉴스|날짜=2005-04-09|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제목= 배용준 자퇴에 일본 팬들, "몸이 두 개면 좋겠다"며 걱정|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007995 |출판사=마이데일리|날짜= 2014-04-10|확인날짜 = 2017-09-08}}</ref>
         |제목= [STAR★미니다큐] (1) 배용준 |url= 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ut=1&name=/news/entertainment/200707/20070724/77x80002.htm |출판사=스포츠조선|날짜= 2007-07-23|확인날짜 = 2017-09-08}}</ref> 352만 관객을 동원하며 그의 이름값을 돈톡히 해냈다.<ref>{{뉴스 인용|제목= 남자배우들 노출 러시...왕(王)자 복근 = '흥행 킹'?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6&aid=0000041133|출판사= 스포츠조선|날짜= 2006-09-05|확인날짜 = 2017-09-08}}</ref> 2004년 3월부터 4월까지 영화《스캔들》의 프로모션으로 [[중화민국]], [[싱가포르]], [[홍콩]], [[일본]]의 아시아 투어를 진행 하였다.
         === 2003-2006년: 겨울연가와 일본에서의 인기 ===
         《겨울연가》는 2003년 4월부터 [[일본]]의 방송사 [[NHK]] 위성 채널에 이어 지상파 채널에 방송되어 일본 중장년층으로부터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불러 일으키며 외국드라마로는 최초로 20%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ref>{{뉴스 인용|제목= "겨울연가" 최종회 시청률 20%넘어|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4&aid=0000129718 |출판사=YTN뉴스|날짜= 2004-08-23|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
         |제목= ‘배용준 신드롬’ 日열도 달군다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999&oid=032&aid=0000061046 |출판사= 경향신문 |날짜= 2004-04-07|확인날짜 = 2017-09-08}}</ref> 배용준은 부드럽고 따뜻한 매력남의 이미지로 [[일본]]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 "'''욘사마'''({{llang|ja|ヨン様, よんさま}})"라는 이례적인 극존칭으로 불릴 만큼 엄청난 파급력과 인기를 얻었다.<ref>{{뉴스 인용|제목=올해의 스타 ‘욘사마’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2&aid=0000100597|출판사=경향신문|날짜=2004-12-27|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제목=일본 중년여성의 ‘욘사마’신드롬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8&aid=0000092840|출판사=한겨레|날짜=2004-12-26|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제목=日紙 "톰 크루즈 인기의 7배 수준"|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1&aid=0000089897|출판사=문화일보|날짜=2004-11-27|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제목=일본 올해의 화제 상품 '욘사마' 8위-니칸스포츠|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5&aid=0000763760|출판사=한국경제|날짜=2004-12-14|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
         |제목= 일본 미혼 여성의 으뜸 결혼상대는 '배용준'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1&aid=0000001535 |출판사= 조이뉴스24 |날짜= 2004-11-25|확인날짜 = 2017-09-08}}</ref> 이후 배용준은 대표적인 한류스타로 자리매김하며 [[일본]]내 한국문화 붐을 이끌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방송]‘산업 역군’ 욘사마… 경제효과 2조4000억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20&aid=0000278039 |출판사= 동아일보 |날짜= 2004-12-29|확인날짜 = 2017-09-08}}</ref> 특히 욘사마라는 애칭은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선정한 [[2004년]] 올해의 유행어 대상에 선정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욘사마' 배용준 일본연예계 상반기 결산 뉴스 2위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3&aid=0000011350|출판사=스포츠서울|날짜=2004-07-06}}</ref><ref>{{뉴스 인용|제목=욘사마, 이치로보다 더 많이 불렸다‥日 아사히신문 올 최대 유행어 선정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5&aid=0000757104|출판사=한국경제|날짜=2004-11-17|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제목=배용준, 日 2004년 남성유명인 검색어 1위|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08&aid=0000003650|출판사=스타뉴스|날짜=2004-12-02|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제목=배용준 일본 CF계도 `평정`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16&aid=0000151697|출판사=헤럴드경제|날짜=2004-10-20|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제목=`욘사마`효과는 얼마 日관광객 15만명…2000억 수익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16&aid=0000147115|출판사=헤럴드경제|날짜=2004-09-03|확인날짜 = 2017-09-08}}</ref> 또한, 배용준이 [[일본]]에 공식적인 첫 방문을 했던 2004년 11월 24일에 [[나리타 공항]]에는 그를 보기 위해 7,000여명의 엄청난 인원의 팬들이 마중을 나왔고,<ref>{{뉴스 인용
         |제목= 배용준, 나리타 공항 개항 이후 최다 인파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2&aid=0000001023|출판사= 헤럴드POP|날짜= 2004-11-25|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제목=배용준 日입국, 7000명 몰려 공항업무 마비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08&aid=0000003333|출판사=스타뉴스|날짜=2004-11-25|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제목= 배용준 일본입국, 욘사마 열풍 일본 강타|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2&aid=0000058540|출판사=YTN TV|날짜=2004-11-25|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
         |제목= BBC, AP 등 세계유수언론도 ‘욘사마 입국’ 대대적 보도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2&aid=0000001037 |출판사= 헤럴드POP |날짜= 2004-11-26|확인날짜 = 2017-09-08}}</ref> [[일본]]의 지상파 방송사 [[도쿄방송|TBS TV]]가 헬기까지 띄우며 배용준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日 입국 `욘사마', TBS 헬기 생중계|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833003|출판사=연합뉴스|날짜=2004-11-25|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
         |제목= 배용준 입국에 일본 TV들도 덩달아 열광!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2&aid=0000001024 |출판사= 헤럴드POP|날짜= 2004-11-25|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제목=英, BBC도 "日 흔든 욘사마" 보도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9&aid=0000016541|출판사=노컷뉴스|날짜=2004-11-26|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제목="100명의 대사보다 1명의 욘사마"<요미우리>|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841943|출판사=연합뉴스|날짜=2004-12-04|확인날짜 = 2017-09-08}}</ref> 배용준은 [[일본 방송 협회|NHK]]측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탤런트 배용준 NHK서 감사장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20&aid=0000232142 |출판사= 동아일보 |날짜= 2004-04-07|확인날짜 = 2017-09-08}}</ref> 이외에 [[일본]]에서도 초특급대우인 10~13억원의 개런티를 받으며 《롯데제과》, 《오로라민C》, 《소니 사이버샷》, 《칠색아차》, 《세콤》등의 광고에 출연하며 높은 인기를 실감했다. [[대한민국]]의 현대경제연구원은 "한류현상과 문화산업화 전략" 보고서를 통해 한국, 일본 양국의 각종 자료를 취합한 결과 "욘사마"의 경제적 효과가 국내에서 1조원, 일본에서 2조원 등 최소 3조원을 넘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발표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욘사마 경제효과 韓.日서 최소 3조원'-<현대硏>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0860647|출판사=연합뉴스|날짜=2004-12-22|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제목=2004년 10대뉴스 : '욘사마' 일본내 韓流 열풍|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0262430|출판사=한국일보|날짜=2004-12-22|확인날짜 = 2017-09-08}}</ref> 2004년 가을에 발매 된 첫 사진집 《THE IMAGE VOL.1》는 초판 10만부가 매진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배용준 사진집 일본서 6일 만에 10만부 동나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839209 |출판사= 연합뉴스 |날짜= 2004-12-01|확인날짜 = 2017-09-08}}</ref> 또한, 그는 [[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도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ref>{{뉴스 인용
         2005년에는 [[허진호]] 감독의 영화 《[[외출 (영화)|외출]]》로 2년만에 스크린에 복귀하였고, [[손예진]]과 호흡을 맞췄다. [[한국]]에서의 관객수는 74만명에 그쳤지만, 같은해 9월 [[일본]]에서 개봉되어 약 300만명의 관객수를 동원하며 [[일본]]에서 개봉된 역대 [[한국]] 영화중의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ref>{{뉴스 인용|제목=배용준의 '외출', 日서 300만 관객 카운트다운|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027132|출판사=마이데일리|날짜=2005-10-25|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제목=배용준, ‘日, 한국 영화, 드라마 최고 흥행 기록’|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026694|출판사=마이데일리|날짜=2005-10-20|확인날짜 = 2017-09-08}}</ref>
         2008년 6월 1일에는 《[[태왕사신기]]》의 일본 지상파 방송을 기념해 오사카 교세라돔에서 개최된 《[[태왕사신기]] 프리미엄 이벤트 2008 in JAPAN》에 [[이지아]], [[문소리]], 김종학 PD 등과 참석했고, 3년만에 공식적으로 일본에 방문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배용준 최지우 깜짝 포옹에 '겨울연가' 5만여 팬 '전율' |url= http://spn.edaily.co.kr/news/newspath.asp?newsid=01403846589825040 |출판사=이데일리|날짜= 2009-09-30|확인날짜 = 2017-09-08}}</ref> 도쿄돔에서 펼친 이벤트 실황은 일본 전역의 극장에서도 위성 생중계돼 총 10만여 팬이 함께한 초대형 이벤트로 큰 화제를 모았고, [[3차원 영화|3D]] [[영화]]로 제작되어 일본 전역에 개봉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배용준-최지우 만남 도쿄돔 이벤트, 3D 극장판으로 日개봉 |url=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2250839541001 |출판사=뉴스엔|날짜= 2010-02-25|확인날짜 = 2017-09-08}}</ref> 또한 2008년에는 한류스타 최초로 [[일본]]을 비롯해 아시아권에서 한류를 알리는데 높은 공로를 인정 받아 문화체육관광부의 추천을 받아 [[대한민국의 훈장|화관문화훈장]](5등급)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배용준 문화훈장 수훈 한류스타로선 최초 배우로선 다섯 번째 |url=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10150476|출판사=동아일보|날짜=2008-10-15|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
         배용준은 [[2013년]] [[10월]]에 지난 2003년 [[일본]]에서 첫 방영된 드라마 《[[겨울연가]]》의 한류 10주년을 기념하는 '한류 10주년 위원회' 주관으로 [[치바 현|치바]] 마쿠하리 멧세 국제 전시장에서 개최된 '한류 10주년 대상 in [[일본]]' 시상식에서 '한국 드라마 대상 남자 배우 부문' 그랑프리와 대상을 수상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배용준 2관왕 달성, 2년만 일본行 순식간에 5천명 운집 |url=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310201354460510 |출판사=뉴스엔|날짜= 2013-10-20|확인날짜 = 2017-09-08}}</ref> 현재 배우 활동은 쉬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배용준의 키이스트 일본 법인 설립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1881805 |출판사=연합뉴스|날짜= 2008-01-04|확인날짜 = 2017-09-08}}</ref>
         * [[2004년 10월]] [[니가타 현 주에쓰 지진|일본 니가타 현 주에쓰 지진]] - [[일본]]에서 개최된 사진전의 수익금 3억원을 기부했다.
  • 백기만
          | 학력 = [[일본]] [[와세다 대학교]] 철학과 중퇴
         * [[일본]] [[와세다 대학교]] 철학과 중퇴
  • 백년설
         [[8.15 광복]] 이후에는 가수로 활동하는 것보다 사업체 운영과 [[고아원]] 운영에 몰두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다시 음반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가수 활동이 부진했다. 1963년 7월에 은퇴공연을 하며 공식적으로 가수 생활을 끝냈다.[* 은퇴공연 이후 1973년에,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부탁해서 <백년설 독집>을 냈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 경향신문 일본지사장을 맡았다. 1970년 이후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다. 1978년,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가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80년 12월 6일에 타계했다. 2002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이 추서되었다.
         백년설이 몸담은 [[오케레코드]]도 비록 설립자인 [[이철]]이 친일파 인맥으로 큰 것은 사실이나 그 역사를 보면, 일본인 앞에선 '을'의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백년설이 친일 가요를 녹음했을 때는 이철이 권한을 잃고 일본인의 간섭이 심해졌던 시기다. 따라서 소속 가수들은 '을' 못되는 '병', '정'이었을 것이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98868&cid=4491&categoryId=4491|#]]
         그런 점에서 백년설 같은 당시 가수들의 친일 행적을 [[일본]]의 [[리샹란]][* [[중국인]]으로 위장해 [[군국주의]] 선전 활동을 펼친 [[일본인]] 여가수. [[히키아게샤]].]이 했던 그것과 같다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전두환|29만 원님]] 시절에 '아 대한민국' 같은 관제 가요를 부른 [[정수라]] 같은 가수의 사례와 비슷하다 보아야 할지, 혹은 일종의 [[강제징용]]이거나 [[북한]] 김씨 왕조 치하 연예인의 경우와 유사하다 볼 수 있는지는 좀 더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 백운산 물고기
         [[열대어]]로 [[관상어]]의 일종. 학명은 Tanichthys. [[일본]]에서는 붉은 지느러미를 특징으로 보아 붉은 지느러미라는 뜻으로, 아카히레(アカヒレ)라고 부른다.
  • 백진희
         * [[공익광고협의회]] [[대한민국]]-[[일본]] 공동 [[캠페인]]
  • 백차승
         '''백차승'''(Cha Seung Baek, [[1980년]] [[5월 29일]] ~ )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전 [[일본]] [[퍼시픽 리그]] [[지바 롯데 마린스]]의 [[투수]]이다.
         ===일본 프로야구 시절===
         [[2011년]] 11월 일본 프로 야구 팀 [[오릭스 버펄로스]]에 입단했지만 [[2012년]] 시즌 1군 등판이 한 번도 없었고 [[2012년]] [[10월 5일]]에 방출됐다. 이후 [[2015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의 스프링 캠프장에 찾아가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불합격했다.
         ===일본 독립야구 시절===
         [[2015년]] [[4월 10일]] 일본의 독립 리그 중 하나인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팀 [[무사시 히트 베어스]]에 입단하였다.
         ===일본 프로야구 복귀===
         [[분류:198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출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분류:미국의 야구 선수]][[분류: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분류:시애틀 매리너스 선수]][[분류:샌디에고 파드리스 선수]][[분류:오릭스 버펄로스 선수]][[분류:지바 롯데 마린스 선수]][[분류:부산고등학교 동문]][[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미국으로 귀화한 사람]][[분류:일본 프로 야구 외국인 선수]]
  • 버리는 신 있으면 줍는 신도 있다
         [[일본]]의 격언.
         [[분류:일본어]]
  • 버블 시대
         [[일본]]에서 [[버블 경제]]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의 초호황기를 뜻한다.
         [[분류:일본사]]
  • 법테라스
         [[일본]]의 무료법률지원서비스. 정식명칭은 일본사법지원센터(日本司法支援センター). 2006년 설립된 일본 법무성 소관의 공공법인으로서, 민형사상의 법적 문제 해결에 필요한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다.
         [[분류:일본 행정]]
  • 벚꽃놀이
         [[일본]]의 절기행사. [[벚꽃]] 아래에서 [[꽃]]을 구경하는 행사를 뜻한다. 흔히 벚꽃놀이로 번역된다.
         이렇게 제사이자 놀이로서 즐기는 벚꽃놀이는 [[헤이안 시대]]에 [[일본 귀족]]들이 시작하였다. [[만엽집]]에서 벚꽃에 대해서 읊는 시가 나타나고 있으며, 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에도 봄의 노래는 벚꽃에 대한 것이 많다. [[겐지모노가타리]]에서 연회가 화려하게 묘사된다.
         일본에서 창작된 대중문화 작품에서는 흔히 나오는 이벤트이다. 특히 연애물에서는 빠지지 않는다.
         [[분류:일본 풍속]]
  • 변수 (1861년)
         [[1882년]] [[일본]] 유학을 갔다가 [[임오군란]]으로 귀국하였으나, [[제물포 조약]] 답례 수신사로 파견되는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1883년]]에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의 답례로 전권대신 [[민영익]]이 [[미국]]에 파견될 때 수행원으로 다녀왔다. 귀국 후 [[1884년]] [[7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로 임용되어 [[8월]] [[우정국]] [[주사]], [[군국사무아문]] [[주사]]로 발령되었다. 그해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정변 전후로 궁궐 내부 정보를 입수, 파악하였으며 거사 당시 1개의 행동대를 지휘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886년]] [[1월]] [[미국]]으로 유학, [[베어리츠 언어학교]]를 마치고 [[1887년]] [[9월]]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890년]]부터는 [[미국 농무성]]의 직원으로 근무하였으나 [[1891년]] 모교 입구 정거장에서 열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사후 [[1895년]] 복권되었다가 [[김홍집 내각]] 붕괴로 추탈, [[1908년]] 최종 복권된 뒤 [[1910년]] [[증직|증]] 종2품 [[가선대부]] [[규장각]][[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스승 [[강위]]가 [[김옥균]]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고, 그는 [[박규수]]·[[오경석]]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김옥균을 알게 되었다. 1882년 1월 김옥균이 일본을 시찰할 때 수행하였다. 이때 그의 스승 중 한 사람인 [[강위]]도 사행길에 같이 가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를 동행시켰다. 사절단이 일본에 있을 동안 그는 [[일본]] [[교토]]로 건너가 양잠술과 화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다 그 해 [[7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일본]]과의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자, 그해 [[8월]] 조선 조정에서 [[일본]]측에 답례로 수신사를 파견할 때 수신사로 임명된 [[박영효]]의 수행원이 되어 서장관 [[서광범]]·[[김옥균]]·[[민영익]]·[[유혁로]] 등과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옥균]] 등이 차관교섭을 벌여 국채위임장에 대한 보장을 받는 동안 다시 양잠술과 화학 공부를 마치고, [[1883년]] [[3월]] 귀국하였다.
         === 일본, 미국 견학 ===
         [[1883년]] [[6월 11일]] 조선의 친선사절단인 [[보빙사]]가 미국에 파견될 때,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홍영식]]·[[유길준]]·[[서광범]] 등과 함께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임명돼 [[1883년]] 7월 인천항을 출발, 같은해 [[9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기차편으로 뉴욕에 도착한 후 40여 일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 대통령을 만나 면담하고 각 기관을 두루 시찰하고 귀국했다.<ref name="중앙">[https://archive.is/20130426215657/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854588 〈키워드로푸는역시〉 유길준 한국인 최초 미국 유학] 중앙일보 2007-08-17</ref> [[1884년]] 봄 [[일본]]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1884년]] [[김옥균]] 등 개화파와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하였으나 정변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88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ref name="매경">[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6&no=246277 美 메릴랜드大, 피오리나ㆍ매코맥ㆍ슈왑 등 美 실력자 배출] 매일경제 2006-07-03</ref> [[1884년]] [[7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용되었으며, [[8월]]에는 [[우정국]] [[주사]]가 되었다가 며칠 뒤 바로 [[군국사무아문]]의 [[주사]]로 재발령되었다. 이때 그는 [[일본]]에 파견된 사관생도들이 귀국함에 따라 [[김옥균]]·[[박영효]]·[[서재필]] 등과 함께 갑신정변 거사에 가담하고, 행동대의 하나를 이끌게 되었다.
         이후 [[갑신정변]] 직전 대궐 안의 정보를 정탐하고, 정변 직전 사정을 신속하게 알아내 [[김옥균]] 등의 개화당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그는 주[[조선]][[일본]]영사관 영사 [[다케조에 신이치로]]({{lang|ja|竹添進一郎}})와 교섭하여, 일본 영사관군과 낭인들을 지원받았다. [[12월 4일]] 저녁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이 발생하자 일본영사관군과 낭인들을 바로 동원하여 연경당(演慶堂) 경비를 맡게 되었다. [[12월 5일]] [[갑신정변]]이 성공하면서 바로 [[통정대부]] [[외무아문]][[참의]]로 승진했다. 그러나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정변이 3일 만에 무너지자 일본공사 다케조에를 따라 일본 영사관에 숨었다가, 영사관 직원 기노시타의 집에서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인천항에 도착, 센자이마루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2월 12일]], 다케조에 공사가 이들의 피신을 주선하였다. [[김옥균]]·[[박영효]]·[[이규완]]·[[정란교]]·[[서광범]]·변수 등 일행 9명은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 옷을 변복하고 인천주재 주[[조선]]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추격대대를 이끌고 오자, 기노시타의 배려로 일본인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제물포항]]에 정박중이던 쓰지 가쓰사부로({{lang|ja|辻勝三郞}})의 일본 상선 '센자이마루'({{lang|ja|千歳丸}})에 승선했다.
         [[12월 13일]] [[인천광역시|인천]] [[제물포항]]에 있던 일본 상선 센자이마루에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과 함께 숨어있던 중 [[묄렌도르프]]가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와 인천감리 홍순학(洪淳學)을 대동하고 다케조에에게 '국적(國敵) 김옥균 일행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배안에서 이를 지켜보던 일행은 수중에 든 비상으로 자살까지 결심하였다. 우물쭈물대던 다케조에는 배로 올라와 일행에게 내렸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그러나 [[제물포항]]에 있던 [[일본인]] 교민들은 자국 공사의 비열함에 혀를 차며 질타했고, 선박의 선장 쓰지 가쓰사부로 역시 다케조에의 무책임함을 지적, 공사를 신뢰해서 이들을 태웠는데 이제와서 내리라 하면 이들을 죽이는 것밖에 더 되느냐며 다케조에의 신뢰 없음을 질타하였다.
         쓰지는 [[묄렌도르프]]에게 그런 사람은 없으며, [[일본]]의 선박을 함부로 수색할수는 없다, 임의로 수색했다가는 본국에 통보하여 외교 문제로 삼겠다며 [[묄렌도르프]] 일행을 되돌려보냈다. 쓰지의 배려로 박영효와 일행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의 망명 사건은 [[1942년]] [[7월]] [[조용만]]의 단편 소설 [[배 안에서]]의 소재가 되었다.
         [[1887년]] [[9월]]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 농과에 입학해 농학을 전공하고 1891년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생이다.<ref name="매경"/> 정확히 6월에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ref name="중앙"/> 대학 재학 시절인 [[1890년]]부터 [[미국 농무성]] 직원으로 근무했으며, [[1891년]] [[6월]] [[메릴랜드 대학교]] 농과 졸업과 동시에 이학사(理學士) 학위를 취득하였다. 1891년 9월에는 농무성통계국 월보 제89호에 '일본의 농업'이란 글을 싣기도 게재하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모교 [[메릴랜드 대학교]]를 방문했다가 돌아가던 길에 대학 정거장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중 열차 사고로 사망하였다.<ref name="매경"/><ref name="중앙"/>
  • 병 속의 악마
          * [[일본]]에서 [[보온병]]을 뜻하는 [[마법병]]의 유래가 된 동화가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명명한 본인은 이것을 [[이솝 우화]]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스티븐슨 부들부들--
  • 보아
         '''보아'''([[1986년]] [[11월 5일]] ~ )는 [[유몽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대한민국]] 그룹 [[가수]] 겸 [[배우]]다. 1998년 [[유몽 엔터테인먼트]] 오디션에 참가해 연습생이 되었고 그 동시에 유몽이 제일 공을 들여 만든 최고의 연예인이다. 데뷔 전부터 일본어와 영어를 배워 해외진출을 준비하고 있었고 오랜 연습 기간을 거친 뒤, 2000년 8월 25일 한국 첫 정규 음반 ''[[ID; Peace B]]''를 발매하며 데뷔했다.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이후 일본의 레이블사 [[AVEX]]와 계약을 체결하고 2001년 일본 데뷔 싱글 "[[ID; Peace B (노래)|ID; Peace B]]"를 발매하며 일본에 진출했다. 일본 첫 정규 음반 ''[[Listen to My Heart]]''는 한국 가수로 처음으로 [[오리콘]] 앨범차트 1위에 오르며 10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해 밀리언 인증을 받았다. 2004년 발매한 두 번째 일본 정규 음반 ''[[Valenti]]''와 일본 베스트 음반 ''[[Best Of Soul]]''이 100만 장을 넘겼다. 한국에서도 ''[[No.1·늘..|No.1]]'' (2002), ''[[Atlantis Princess]]'' (2003), ''[[My Name]]'' (2004), ''[[Girls On Top]]'' (2005)을 발매하였다. 2009년 4월 17일에는 미국 진출을 선언하며 미국 첫 정규 음반 ''[[BoA]]''를 발매해 한국 가수로 최초로 [[빌보드 200]] 127위에 진입했다. 2010년에는 한국에서 5년 만의 정규 음반 ''[[Hurricane Venus]]''를 발매했고, 2년 뒤인 [[2012년]] 일곱 번째 정규 음반 ''[[Only One (보아의 음반)|Only One]]''을 발매했다. 그로부터 2년여만인 [[2015년]] 5월에는 데뷔 15주년을 기념하여 보아 자신이 전곡을 작사, 작곡하고 직접 프로듀싱에 참여한 여덟 번째 정규 음반 ''[[Kiss My Lips]]''를 발매하였다. [[2018년]] 2월에는 데뷔 이래 첫 미니앨범인 ''[[ONE SHOT, TWO SHOT]]''을 발매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아홉 번째 정규 음반 ''[[WOMAN (보아의 음반)|WOMAN]]''을 발매하였다.
         보아는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오리콘 차트 1위를 달성하였다. 지금까지 여섯 장의 정규 음반을 연속으로 오리콘 위클리 앨범차트 1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는 [[하마사키 아유미]]와 [[코다 쿠미]]에 이은 역대 2위의 기록이다.<ref name="이데일리">{{뉴스 인용|제목=보아, 오리콘 위클리 차트 7연속 1위...日 역대 2위 대기록|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21&newsid=01144726586340040&DCD=A10202|출판사=이데일리|저자=최은영|날짜=2008-03-04|확인날짜=2011-08-08}}</ref> 세 장의 정규 음반을 100만 장 이상을 판매해 밀리언 셀러를 달성하였고, 일본에서 지금까지 1000만 장에 가까운 음반이 판매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4집 오리콘차트 1위 ; 최연소 1천만장 기록 눈앞|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038043|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이태문|날짜=2006-02-16|확인날짜=2011-07-11}}</ref> 2002년부터 2007년까지 6년 연속으로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日 '홍백가합전' 6년 연속 출연 보아, 올해는 '안나가요' |url=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003582|출판사=[[노컷뉴스]]|저자=오미정|날짜=2008-12-04|확인날짜=2011-12-06}}</ref> 보아의 경제적 가치는 2000억 원이 넘고, 음반 외 활동까지 합치면 수천 억 원에 이른다고 추산되고 있다.<ref name="세계일보">{{뉴스 인용|제목=‘경제가치 2000억’ 보아, 데뷔부터 성공까지|url=http://www.segye.com/Articles/Spn/Entertainments/Article.asp?aid=20070130001532&ctg1=01&ctg2=&subctg1=01&subctg2=&cid=0101060100000&dataid=200701301100000033|출판사=세계일보|저자=홍동희|날짜=2007-01-29|확인날짜=2011-07-11}}</ref>
         그러던 중 13살(6학년)이었던 [[1998년]], [[SM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 [[이수만]]에게 발탁되어 약 2년 반의 트레이닝 기간을 거쳤다.<ref name="경향신문"/> 나중에 보아는 인터뷰에서 "노래를 좋아하는 것만으로 무대에 설 수는 없었습니다. 가수가 되기 위해 3년 동안 피나는 훈련을 참아 냈습니다."라며 말했다.<ref name="YHankook20040706"/> SM 엔터테인먼트는 당시 보아를 "세계시장을 겨냥한 여가수"를 준비했다고 발표했고 이에 따라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해 [[NHK]] 아나운서의 집에 머물며 정확한 [[일본어]] 발음을 익혔고, [[구리시]] [[서울삼육중학교]]에 다니던 중 영어회화를 위해서 [[한국켄트외국인학교]]로 전학했다.<ref name="세계일보"/><ref name="경향신문"/> SM 엔터테인먼트는 보아의 데뷔 프로젝트를 "신비 프로젝트"라 이름을 붙이고 보아의 데뷔를 진행해 나갔다.<ref name="경향신문">{{뉴스 인용|제목=5년 전 MX프런트 등장 무명의 보아|url=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505021605561&code=900307|출판사=경향신문|저자=백승찬 기자|날짜=2005-05-02}}</ref> 이는 30억 정도를 들인 프로젝트였으며, SM 엔터테인먼트에서 [[H.O.T.]] 등의 가수들로 벌어들인 돈을 거의 모두 동원한 중대한 프로젝트였다.<ref>{{뉴스 인용|제목=이수만, 보아에게 ‘안티(Anti)’가 없어진 이유는?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2&aid=0000019096|출판사=헤럴드경제|저자=서병기 기자|날짜=2005-10-20}}</ref> 보아의 데뷔가 다가오면서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이름이 바비, 신비라는 소문이 돌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5년사랑 고마워요"; 데뷔5년, 팬들에게 러브레터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020516|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강승훈 기자|날짜=2005-08-23}}</ref>
         한국에서 데뷔 이후 2001년 3월 7일, 보아는 [[에이벡스]]와 레이블 계약을 체결하며 일본 진출을 선언했고 그동안의 수록곡들을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바꿔 부른 스폐셜 앨범 ''[[Jumping into the World|Don't start now - Jumping into the world]]''을 발매했다.<ref>{{웹 인용|제목=이즘 - 보아|저자=임진모|출판사=이즘|날짜=2001-03|확인날짜=2011-12-07|url=http://www.izm.co.kr/artistinfoRead.asp?bigcateidx=&artistidx=123}}</ref> 또한 같은 날, 일본 [[도쿄]]에서 대만, 홍콩, 일본 각국 취재진이 모여 쇼케이스를 취재했으며, 에이벡스는 이 쇼케이스에 7억을 투자했다.<ref name="동아">{{뉴스 인용|제목=보아 "내 무대는 아시아"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052530|출판사=동아일보|저자=허엽 기자|날짜=2001-03-12}}</ref> 에이벡스의 회장 요다 다츠미는 "보아는 카리스마와 빼어난 댄스동작, 가창력을 지녀 J-Pop의 여왕 [[아무로 나미에]]를 능가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다.<ref name="동아"/> 2001년 5월 30일 보아는 일본에서 데뷔 싱글 "[[ID; Peace B (노래)|ID; Peace B]]"를 발매하며 공식적으로 데뷔했고 오리콘 주간 싱글차트 20위권에 진입했다.<ref>{{뉴스 인용|제목=무명스타 K 日안방 공식데뷔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16&aid=0000165383|출판사=[[네이버]]|저자=홍성원|날짜=2005-03-08}}</ref> 7월 25일에 발매한 두 번째 싱글 "[[Amazing Kiss]]"를 발매해 역시 20위권에 진입했다.<ref name="박영사">{{서적 인용|저자링크= |저자= 장세진|제목=한국기업의 글로벌경영 사례문 |연도=2005년 8월 10일|출판사=박영사|쪽= 130|id=8910203242}}</ref> 12월 5일에는 세 번째 싱글 〈[[키모치와 츠타와루]]〉를 발매해 오리콘 싱글차트 최초로 11위에 진입했고, 이어 12월 19일에는 [[코다 쿠미]]와 함께 네 번째 싱글이자 [[9·11 테러]] 추모 싱글인 "[[The Meaning of Peace]]"를 발매해 오리콘 싱글차트 7위에 오르며 이때부터 일본에서 가능성을 보였다.<ref name="박영사"/> 2002년 1월 17일에는 네 번째 싱글 "[[LISTEN TO MY HEART (노래)|LISTEN TO MY HEART]]"를 발매해 처음으로 오리콘 싱글 차트 5위에 올랐고 18만 장에 가까운 판매량을 기록했다.<ref>{{뉴스 인용|제목=솔로 여가수 일본 진출사 ① '강수지부터 아이유까지 12년' (백종모의 K-WAVE)|url=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221827|출판사=엑스포츠뉴스|저자=백종모|날짜=2012-03-21|확인날짜=2012-08-08}}{{깨진 링크|url=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221827 }}</ref> 보아는 7장의 싱글을 발매한 이후 2002년 3월 13일 첫 일본 정규 앨범 ''[[LISTEN TO MY HEART (음반)|LISTEN TO MY HEART]]''을 발매해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오리콘 일간, 주간 앨범 차트 1위를 했다.<ref>{{뉴스 인용|제목=10대 댄스가수 보아 앨범 일본 판매 첫날 1위|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2/1887757_3841.html|출판사=MBC|저자=양효경 기자|날짜=2002-03-13}}{{깨진 링크|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2/1887757_3841.html }}</ref> 이후 100만 장 이상을 판매해 앨범은 밀리언 인증을 받았다.<ref>{{웹 인용| url=http://www.riaj.or.jp/data/others/million_list/2002.html | title= 2002년 일본 밀리언 셀러 앨범 목록| publisher=[[RIAJ]] | accessdate=2008-09-28|언어=일본어}}</ref>
         [[8월 28일]]에는 [[일본]]에서 6번째 싱글 "[[VALENTI (노래)|VALENTI]]"를 발매했다. "VALENTI"는 라틴 리듬의 경쾌한 댄스 곡으로, 보아의 일본 싱글들 중 [[{{CURRENTYEAR}}년]] {{CURRENTMONTHNAME}} 현재까지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 싱글이다. 음반 순위 면에서도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2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기록했다. 이어 3주 뒤에는 7번째 싱글 〈[[키세키·NO.1|奇蹟/NO.1]]〉을 발매했다. 특히 싱글 〈{{lang|ja|奇蹟}}/NO.1〉을 발매한 주에는 〈VALENTI〉와 〈{{lang|ja|奇蹟}}/NO.1〉이 모두 주간 차트 5위권 내에 진입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ref>[http://www.oricon.co.jp/search/result.php?kbn=js&types=rnk&year=2002&month=9&week=4&submit4.x=17&submit4.y=13 2002년 9월 넷째 주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ref> [[12월 11일]]에는 발라드 싱글 〈[[JEWEL SONG/BESIDE YOU-보쿠오 요부 코에-|JEWEL SONG/BESIDE YOU-僕を呼ぶ声-]]〉를 발매하고 활동했다. 한편, [[9월 26일]]에는 그 간의 일본 활동곡들을 모아 [[한국어]]로 번안하여 수록한 스페셜 앨범 《[[MIRACLE (보아의 음반)|MIRACLE]]》이 대한민국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서 보아는 〈VALENTI〉와 〈기적〉으로 활동했고, 30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히트했다.<ref name="2002년" /><ref>{{웹 인용 |url=http://www.miak.or.kr/stat/kpop_2003_1h.htm |제목=한국음악산업협회 판매량 집계 2003년 상반기 총결산 |확인날짜=2015년 3월 20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0718173326/http://www.miak.or.kr/stat/kpop_2003_1h.htm |보존날짜=2007년 7월 18일 |깨진링크=예 }}</ref><ref group="주해">2002년 총결산 판매량 265,360장과 2003년 상반기 판매량 49,309장을 합하면 314,669장이 된다. (보아의 2집판매량 984,215장/3집 판매량 527,772장/4집 판매량 209,021장/5집 판매량 123,948장/6집 판매량 63,634장/7집 판매량 37,081장)</ref> 이러한 정규 2집 활동과 스페셜 앨범에서의 활약 덕분에 한국음악산업협회 기준 [[2002년]] 최다 음반 판매량을 기록한 아티스트가 되었고, 연말 보아는 서울가요대상과 [[SBS TV|SBS]] 가요대전, m.net Music Video Festival에서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대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매년 [[12월 31일]] 그 해 인기 가수들이 출연하여 노래하는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게 되었고, 이 무대에서 보아는 〈VALENTI〉를 노래했다. 이 때 출연한 뒤 보아는 [[2007년]]까지 6년 연속으로 홍백가합전 무대에 올랐다.<ref>예진수 기자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1205010336300250020 보아, 日 NHK 홍백가합전 6년 연속 출연] 문화일보, 2007년 12월 5일</ref>
         [[2003년]] [[1월 29일]], 보아는 일본에서 2번째 정규 앨범 ''[[VALENTI (음반)|VALENTI]]''을 발매했다. 이 앨범은 발매 일주일 만에 6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다.<ref>[http://www.oricon.co.jp/search/result.php?kbn=ja&types=rnk&year=2003&month=2&week=2&submit5.x=29&submit5.y=11 2003년 2월 둘째 주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ref> 최종적으로는 120만장을 돌파하며 보아의 첫 밀리언 셀러로 기록되었고, [[2003년]] 오리콘 연간 앨범 차트에서 5위를 마크했다.<ref>{{웹 인용 |url=http://www.musictvprogram.com/corner-ranking-2003.html# |제목=2003년 오리콘 연간 차트(J-POP MUSIC PROGRAM FAN SITE) |확인날짜=2008-06-2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0304183136/http://www.musictvprogram.com/corner-ranking-2003.html# |보존날짜=2012-03-04 |깨진링크=예 }}</ref> 《[[VALENTI (음반)|VALENTI]]》 발매 이후에는 [[오사카 시]]·[[나고야]]·[[도쿄]] 등지를 돌면서 첫 콘서트 투어 '[[보아의 콘서트#《BoA 1st LIVE TOUR 2003 VALENTI》 (2003년)|BoA 1st LIVE TOUR 2003 VALENTI]]'를 개최하였다. [[3월 27일]]부터 [[4월 6일]]까지 4개의 공연이 일정에 잡혀 있었지만 이후 2회의 추가 공연이 결정되어 총 6회의 공연을 펼쳤다. 특히, 도쿄 공연 때에는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가 관람한 기사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ref name="storm">{{뉴스 인용|제목=보아 열풍…열도는 열병중 |출판사=한국일보|날짜=2009-12-03|확인날짜=2009-12-03|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0177905}}</ref>[[5월 14일]]에는 9번째 싱글 〈[[Shine We Are!/Earthsong]]〉을 발매하였다. 발매 당일 일간 차트 1위를 기록했지만, 주간 차트에서는 [[모리야마 나오타로]]의 〈{{lang|ja|さくら(独唱)}}〉에 밀려 2위를 기록했다. [[2003년]]은 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한 지 100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미국에는 한인들을 위한 음악제가 여럿 개최되었다. 보아도 [[4월 2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음악제'와 [[9월 29일]] [[뉴욕]]에서 열린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 한인 대축제'에 출연하였다. 5월에는 한인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 제작한 대한민국 특집 프로그램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수로서 출연하여 진행자와 영어로 인터뷰하는 장면이 방송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미국 공영방송 특집프로 출연(종합)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0368012|출판사=연합뉴스|저자=홍제성 기자|날짜=2003-05-02}}</ref>
         [[5월 30일]]에 보아는 대한민국에서 3번째 정규 앨범 《[[Atlantis Princess]]》를 발매하고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타이틀 곡은 〈아틀란티스 소녀〉로,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를 묘사한 동화 같은 가사를 담고 있는 밝은 댄스 곡이다. 보아는 이 곡으로 [[6월 1일]]부터 TV 활동을 시작했고, 후속곡 〈Milky way〉와 발라드 곡 〈나무〉로 활동을 계속하며 3집 활동은 9월까지 이어졌다. 이때 보아는 교통사고로 인한 매니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타이틀 곡 〈아틀란티스 소녀〉대신 〈나무〉를 불러 매니저를 추모하며 방송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3집 발매에 앞선 2003년 2월 보아는 [[서울특별시]]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 이에 맞춰 보아는 서울을 홍보하는 노래 〈서울의 빛〉을 녹음했으며,<ref>{{뉴스 인용|제목=가수 보아 서울 홍보노래 불러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9&aid=0000293007|출판사=매일경제|저자=|날짜=2003-05-19}}</ref> 2003년 [[5월 25일]] 제1회 하이 서울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며 대중들에게 공개했다. 〈서울의 빛〉은 이 시기에 발매된 3집에도 수록되었고, 서울특별시 홈페이지에서도 들을 수 있다.<ref>[http://www.seoul.go.kr/v2007/seoul/symbol/song.html Hi Seoul 노래 "서울의 빛" 듣기 (서울특별시청)]</ref> [[10월 22일]]에는 싱글 〈[[DOUBLE (보아의 노래)|DOUBLE]]〉이 발매되었다.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 동시 발매되어 대한민국에서는 첫 싱글, 일본에서는 통산 10번째 정규 싱글이었다. 이러한 싱글 동시 발매는 이어 발매된 〈[[Rock With You (보아)|Rock With You]]〉도 똑같이 이루어졌다. [[12월 3일]]에는 대한민국에서 《[[MIRACLE (보아의 음반)|MIRACLE]]》과 같은 방식의 스페셜 앨범 《[[SHINE WE ARE]]》가 발매되었다.
         [[2004년]] [[1월 15일]], 일본에서 3번째 정규 앨범 《[[LOVE & HONESTY]]》가 발매되었다.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했고, 보아의 통산 3번째 1위였다. 이 앨범으로 미국의 [[빌보드 차트]], 일본의 [[오리콘 차트]], 영국의 [[UK 차트]] 등 공신력있는 음악 차트를 토대로 세계 각국 음반 판매량을 집계하여 순위를 매기는 유나이티드 월드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오리콘 석권 이어 '유나이티드 월드 차트 1위'|출판사=뉴스엔|날짜=2007-01-27|확인날짜=2009-12-03|url=http://media.daum.net/entertain/music/view.html?cateid=1033&newsid=20070127090120497&p=newsen}}</ref>
         이후에도 보아는 《[[BEST OF SOUL]]》로 1위에 오른다. 앨범 발매 후 일본에서의 2번째 콘서트 투어도 진행되었는데, '[[보아의 콘서트#《BoA LIVE TOUR 2004 LOVE&HONESTY》 (2004년)|BoA LIVE TOUR 2004 LOVE & HONESTY]]'는 한 달여의 기간 동안 총 9회의 공연을 선보인 콘서트 투어였다. [[3월 19일]]에는 보아가 참여한 [[m-flo]]의 싱글 〈the Love Bug〉가 발매되었다. 이 때의 인연으로 이후 m-flo의 VERBAL이 보아의 콘서트 무대를 찾았을 때나, 2004년 연말 m-flo가 내한하여 [[MKMF]]에 참가했을 때 함께 〈the Love Bug〉를 부르기도 했다. [[2월 14일]]에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MTV 아시아 어워즈'에 한국과 일본의 공동 대표로 참가하여 '한국 최고 인기 아티스트상'과 특별상인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이 때 축하무대에서 보아는 록 밴드와 함께 〈[[Rock With You (보아)|Rock With You]]〉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동시에 불렀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아시아 대표가수 될래요" |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16&aid=0000126035|출판사=헤럴드경제|저자=김원겸 기자|날짜=2004-02-16}}</ref>
         [[6월 11일]]에는 대한민국 4번째 정규 앨범 《[[My name]]》을 발매하고 타이틀 곡 〈My Name〉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때의 음악 스타일은 이전의 보아와는 아주 다른 파격적인 변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전까지 〈NO.1〉·〈아틀란티스 소녀〉 등의 귀여운 10대 소녀로서의 이미지를 버리고 성숙한 여성으로서의 이미지로 변신했다. 타이틀 곡 〈My Name〉은 어반 댄스 스타일의 곡으로, 골반 댄스 등 노래의 안무도 화제를 낳았다. 보아는 이 앨범의 수록곡 〈Spark〉와 〈My Prayer〉로 9월까지 활동했고, 연말에 MKMF에서 대상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9월 1일]]에는 일본에서 13번째 싱글 〈[[QUINCY/고노요노시루시|QUINCY/コノヨノシルシ]]〉를 발매했다. 이어 3개월 뒤인 [[12월 1일]]에는 14번째 싱글 〈[[메리크리|メリクリ]]〉를 발매했다. 이 싱글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잘 맞는 발라드 곡으로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던 보아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판매량도 싱글 〈[[Shine We Are!/Earthsong]]〉 이후 넘지 못했던 10만 장 선을 넘었고,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롱 히트했다. 미국의 유명 록밴드 [[위저]]가 리메이크한 곡이기도 하다.
         [[2005년]] [[2월 2일]], 보아는 일본에서 첫 번째 베스트 앨범 《[[BEST OF SOUL]]》을 발매했다. 《BEST OF SOUL》은 [[2001년]] 〈[[ID; Peace B (노래)|ID; Peace B]]〉로 일본에서 데뷔한 이후, 〈[[메리크리|メリクリ]]〉까지 총 14장의 싱글을 발매하는 동안 발표했던 싱글 곡들을 모은 앨범으로, 첫 주 48만장으로 주간 차트 1위를 기록했고 최종적으로는 110만 장 가까이 팔렸다. 베스트 앨범을 발매하고 2개월 뒤 일본에서의 3번째 라이브 투어 콘서트 '[[보아의 콘서트#《BoA ARENA TOUR 2005 BEST OF SOUL》 (2005년)|BoA ARENA TOUR 2005 BEST OF SOUL]]'를 열었다. 투어 기간 직전에 발매된 15번째 싱글 〈[[DO THE MOTION]]〉은 보아의 싱글들 중 최초로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는 한국인으로서도 최초의 기록이다. [[2005년]] 보아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출판국에서 출간한 영어교재 《{{lang|en|Totally true|토틀리 트루}}》의 〈{{lang|en|Making an International star|메이킹 언 인터내셔널 스타}}〉라는 글에 국제적인 스타의 성공 사례로 실려 화제를 모았다. [[6월 24일]]부터는 [[대한민국]]에서 5번째 정규 앨범 《[[Girls On Top]]》을 발매하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타이틀 곡 〈Girls On Top〉은 남성 우월주의에 빠진 남성들에게 보내는 경고 메시지를 담은 강렬한 댄스 곡으로, 이 곡에서는 곡 후반에서 남자 댄서의 등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는 안무가 화제가 되었다. 이 곡으로 보아는 MBC 《음악캠프》에서 1위를 수상했고, SBS 《생방송 인기가요》에서는 [[7월 17일]]부터 [[7월 31일]]까지 3주 연속으로 1위에 해당하는 '뮤티즌 송'을 수상했다.<ref>[http://music.sbs.co.kr/livevideo/musicTV_artist_detail.jsp?str_vod_id=000000000377&str_clip_id=112&str_mainmenu=100&menu_no=1&str_artist_id=P0000000388 SBS 뮤직 보아 라이브비디오]</ref> 이어 후속곡 〈MOTO〉로 활동했다. 대한민국에서의 5집 활동이 마감되어 갈 때쯤, [[8월 31일]]에 16번째 싱글 〈[[make a secret]]〉이 발매되었다. 〈DO THE MOTION〉의 노선을 이어 나가듯 절제되고 세련된 분위기의 곡이다. [[11월 23일]]에는 빠른 댄스 곡을 앞세운 17번째 싱글 〈[[다키시메루|抱きしめる]]〉를 발매했다. 한편, 이때부터 보아는 본격적으로 미국 진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2006–08: 일본 활동 ===
         보아는 2006년 2월 15일 네 번째 일본 정규 앨범 ''[[OUTGROW]]''를 발매했다. ''OUTGROW''는 발매 첫 주 222,000만 장을 팔아 [[오리콘]] 위클리 앨범차트 1위에 올라 네 장의 앨범이 연속으로 1위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vs 마츠우라 아야, 한일 톱스타 TV랑데뷔 화제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039938|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이태문|날짜=2006-03-06|확인날짜=2011-08-08}}</ref> 그러나, 이전 앨범들에 비해 발매 첫 주 가장 낮은 판매량을 보였다. 2006년 4월 5일에는 일본 19번째 싱글 "[[나나이로노 아시타~brand new beat~/Your Color|七色の明日~brand new beat~/Your Color]]"를 발매했다. 이어 [[8월 9일]]에는 20번째 싱글 "[[KEY OF HEART/DOTCH]]"를 발매했다. 〈KEY OF HEART〉도 〈{{lang|ja|七色の明日}}~brand new beat~〉의 연장선 상에 서 있는 밝은 댄스 곡이다. 21번째 싱글 "[[Winter Love]]"는 [[11월 1일]]에 발매되었다. 처음으로 '실연'을 주제로 한 애절한 발라드 곡이다.
         여름에는 일본에서 여러 행사에 참가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ap bank 페스티벌'과 '[[메이지 신궁]] 불꽃놀이 축제'였다. 'ap bank 페스티벌'은 [[Mr.Children]]의 보컬 [[사쿠라이 가즈토시]]와 [[고바야시 다케시]], [[사카모토 류이치]] 등이 모여 만든 환경 단체인 ap bank에서 주최하는 축제로, 대형 가수들이 초대되며 [[2005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무대에서 보아는 사쿠라이 가즈토시와 함께 앨범 《[[OUTGROW]]》의 수록곡 〈cosmic eyes〉를 불렀다. '메이지 신궁 불꽃놀이 축제'는 매년 [[도쿄]] 메이지 신궁에서 개최되는 불꽃놀이로, 보아는 불꽃놀이 축하무대에 올라 6곡을 공연했다. 이 때 오른쪽 발목 부상을 입은 채 댄스 곡 공연을 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발목부상에도 日 불꽃놀이 무대 올라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2&aid=0000039797|출판사=스타뉴스|저자=김원겸 기자|날짜=2006-08-17}}</ref> 가을부터는 라이브 투어 '[[보아의 콘서트#《BoA THE LIVE 2006 -裏ボア…聴かせ系-》 (2006년)|BoA THE LIVE 2006 -裏ボア…聴かせ系-]]'를 개최했는데, 이 콘서트는 한 곡도 춤추지 않고 오직 노래만으로 공연한 콘서트이다. 댄스 곡도 새롭게 편곡하여 공연하였고, 이전까지와 비교하면 관객과 아주 가까운 작은 규모의 공연장에서 공연했다. 한편 2006년에는 한국 영화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사운드트랙|OST]] 〈[[Sunshine]]〉에 참여했고, 성우로써 목소리 연기에 도전했다. 보아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 《[[헷지]]》에서 '헤더' 역을 맡아 [[한국어]]와 [[일본어]]로 목소리 연기했는데, 《헷지》가 제59회 [[칸 영화제]]에서 비경쟁 부문에 출품되어 목소리 연기를 맡은 보아는 한국 가수로서는 처음이자 최연소로 칸 영화제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았다.<ref>{{뉴스 인용|제목=‘스무살’ 보아, ‘칸’서 성숙미 뽐내다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2&aid=0000039797|출판사=헤럴드경제|저자=길혜성 기자|날짜=2006-05-23}}</ref>
         [[1월 17일]]에 일본에서 5번째 정규 앨범 《[[MADE IN TWENTY (20)]]》가 발매되었다. 이어 3월부터는 일본 내 통산 5번째 콘서트 투어인 '[[보아의 콘서트#《BoA ARENA TOUR 2007 MADE IN TWENTY (20)》 (2007년)|BoA ARENA TOUR 2007 MADE IN TWENTY (20)]]'를 개최하였다. [[4월 25일]]에는 화장품 광고 음악으로 쓰인 싱글 〈[[Sweet Impact]]〉를, [[9월 26일]]에는 도시바 휴대전화의 광고 음악으로 사용된 발라드 싱글 〈[[LOVE LETTER (노래)|LOVE LETTER]]〉를 발매했다. [[12월 12일]]에는 일본의 록 밴드 DOPING PANDA의 Yutaka Furukawa와 함께한 격렬한 댄스 곡 〈[[LOSE YOUR MIND]]〉를 싱글로 내놓아 미국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마티 프리드먼으로부터 흑인도 무색할 정도로 펑키의 느낌이 잘 살아있고 전성기 때의 [[마이클 잭슨]]이 떠오른다는 극찬을 받았다. [[2005년]] [[영국]]에 이어 보아의 입지적인 스토리가 [[일본]] 영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성공기 일본 고교 영어교과서 수록|url=http://news.joins.com/article/2576970|출판사=중앙일보|저자=이재환 기자|날짜=2007-01-25|확인날짜=2016-07-03|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807181101/http://news.joins.com/article/2576970|보존날짜=2016-08-07|깨진링크=예}}</ref> 10월 말에는 [[애니콜]]의 광고 모델이 되었고, 애니콜을 홍보하기 위해 구성된 [[애니밴드]]라는 밴드의 메인 보컬로 참여했다. 이들은 11월 말 콘서트를 가지기도 했다. [[2006년]]에 이어 한국 영화 《M》의 OST 〈[[안개 (보아의 노래)|안개]]〉에 참여했다. [[11월 26일]]에는 일본 베스트 히트가요제 골드 아티스트상을 수상하였다. 이는 홍백가합전과 함께 6년 연속 수상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보아는 [[2월 27일]]에 일본에서 6번째 정규 앨범 《[[THE FACE]]》를 발매했다. 《THE FACE》는 11만장 대의 판매량으로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고, 보아는 데뷔 앨범부터 정규 앨범 6연속 1위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하마사키 아유미]]에 이은 역대 단독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ref name="이데일리"/> 이어 콘서트 투어 '[[보아의 콘서트#《BoA LIVE TOUR 2008 ~THE FACE~》 (2008년)|BoA LIVE TOUR 2008 ~THE FACE~]]'를 개최했다. [[8월 15일]]에는 [[SM 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이 펼치는 콘서트 "SM 타운 라이브 '08"에 출연해 9개월 만에 모국의 무대에 올랐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9개월만에 국내무대.. "원래 비를 몰고 다닌다"|url=http://www.asiaeconomy.co.kr/uhtml/read.jsp?idxno=381992§ion=S1N99§ion2=S2N600|출판사=아시아경제|저자=고재완 기자|날짜=2008-08-15}}</ref> 한편, [[구글|구글 코리아]]에서 리서치 목적으로 여러 웹페이지를 검색한 결과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등 모두 31개국가 및 국민의 대표적 한국 대표 키워드 10개로 인물 분야에서는 유일하게 확인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삼성-LG-현대와 함께 '한국 대표 키워드'|출판사=아이뉴스24|날짜=2008-11-19|확인날짜=2009-12-03|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373642}}</ref> 연말 보아는 연말 프로인 SBS 가요대전에 엔딩으로 참가하였으며 시간을 내어 연초까지 대한민국에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비슷한 시기, 보아는 2009년 4월 18일 일본에서 두 번째 베스트 음반 ''[[Best & USA]]''를 발매했다. ''Best & USA''는 발매 첫 날 29,433만 장을 팔아 [[오리콘]] 데일리 앨범 차트 1위에 올랐으나, 위클리 차트에서는 145,000만 장을 팔아 2위를 차지했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BEST&USA' 오리콘 차트 1위 올라 外|url=http://www.sportsseoul.com/news2/entertain/broad/2009/0319/20090319101040200000000_6742092943.html|출판사=스포츠서울|날짜=2009-03-19|확인날짜=2011-07-12|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0126080106/http://www.sportsseoul.com/news2/entertain/broad/2009/0319/20090319101040200000000_6742092943.html#|보존날짜=2012-01-26|깨진링크=예}}</ref> 200년 6월 2일 발매한 일본 26번째 싱글 ''[[Vivid]]''는 29,000만 장을 팔아 오리콘 위클리 싱글 차트 5위에 올랐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日 26번째 싱글 오리콘 주간차트 5위|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8061208091056063&type=1&outlink=1|출판사=스타뉴스|저자=길혜성|날짜=2008-06-12|확인날짜=2011-07-12}}</ref> 싱글의 수록곡인 "Kissing you", "Sparkling", "Joyful Smile"은 모두 영화와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었다. 2009년 2월 18일에는 27번째 싱글인 "[[에이엔/UNIVERSE/Believe in LOVE]]"를 발매했고 22,000만 장의 판매량으로 위클리 싱글 차트 8위에 올랐다. 이후 보아는 일곱 번째 일본 정규 음반 발매에 앞서 2009년 10월 28일 28번째 싱글 "[[BUMP BUMP!]]"을 발매했고, 13,800만 장을 팔아 위클리 싱글 차트 8위에 올랐다.<ref>{{뉴스 인용|제목=열도 휩쓴 ‘한류 파워’|url=http://www.fnn.co.kr/content.asp?aid=9106550a997e44bf80feccfff32b6483|출판사=포커스|저자=김지혜|날짜=2009-11-05|확인날짜=2011-07-12|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1127152553/http://www.fnn.co.kr/content.asp?aid=9106550a997e44bf80feccfff32b6483#|보존날짜=2011-11-27|깨진링크=예}}</ref> 같은 해 12월 9일 29번째 싱글 "[[마모리타이 ~White Wishes~]]"를 발매했고 50,000만 장을 팔아 오리콘 위클리 3위에 올려놓았다.<ref name="뉴스엔">{{뉴스 인용|제목=보아 日싱글, 오리콘주간차트 3위 등극 ‘저력 과시’|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12161107071002|출판사=뉴스엔|저자=차연|날짜=2009-12-16|확인날짜=2011-07-12}}</ref> 한편, "White Wishes"는 2009 도쿄 게임쇼에 출연해 ''Tales of Graces''의 주제곡으로 선정되었다고 발표했다.<ref name="뉴스엔"/> 2009년 12월 4일부터 5일은 [[도쿄]], 8일에는 [[오사카]]에서 공연하는 크리스마스 콘서트 BoA THE LIVE X'mas 2009를 진행했고, 2010년 3월 3일 공연 실황을 담은 DVD 음반 ''[[BoA THE LIVE 2009 X'mas]]''를 발매했다.<ref name="뉴스엔"/><ref>{{뉴스 인용|제목=보아, 일본 크리스마스 공연 ‘BoA THE LIVE 2009 X'mas’발매|url=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4&c1=04&c2=04&c3=00&nkey=201003161109303&mode=sub_view|출판사=한경닷컴but뉴스|저자=박영주|날짜=2010-03-16|확인날짜=2011-07-12}}</ref> 이후 보아가 직접 프로듀싱에 나선 일곱 번째 일본 정규 음반 ''[[Identity]]''를 2010년 2월 10일에 발매했다. 음반은 오리콘 위클리 앨범 차트 4위에 올랐으며, 72,000만 장을 팔아치웠다.<ref>{{웹 인용|url=http://blog.oricon.co.jp/nextstage-rarara/archive/116/0|title=2月22日付 アルバム 週間ランキング:NEXT STAGE - スタ☆ブロ -|accessdate=2010-02-16|date=2010-03-04|work=[[오리콘]]|언어=일본어|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00820084010/http://blog.oricon.co.jp/nextstage-rarara/archive/116/0|보존날짜=2010-08-20|깨진링크=예}}</ref> 이외에 타이완 국제 음반 차트 2위를 차지했고, 필리핀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ref>On the drop down Select 第9週 {{웹 인용|url=http://www.g-music.com.tw/GMusicBillboard3.aspx|title=G-Music 風雲榜 (東洋榜)|work=G-Music|accessdate=2010-03-09|언어=중국어}}</ref><ref>K-POP ROYALTY BoA "IDENTITY" CD ZOOMS TO NUMBER ONE! {{웹 인용|url=http://universalrecph.blogspot.com/2010/04/k-pop-royalty-boa-identity-cd-zooms-to.html |title=Music One Top 25|work=Music One @ Universal Records Blog|accessdate=2010-04-20|언어=영어}}</ref> 2010년 6월 21일에는 한국 컴백에 앞서 30번째 일본 싱글이자 디즈니 온 아이스 일본 공연 25주년을 기념하는 싱글 "[[WOO WEEKEND]]"를 발매해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10위에 올랐다.<ref>{{뉴스 인용|제목=韓서 '옆사람' 공개 보아, 日새싱글도 오리콘 톱10|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0072811443072156&type=1&outlink=1|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길혜성|날짜=2010-07-28|확인날짜=2012-06-19}}</ref>
         보아는 Live Tour 2010: Identity를 마치고 난 뒤, 2010년 8월 5일 여섯 번째 한국 정규 음반 ''[[Hurricane Venus]]''를 발매하며 5년만에 컴백했다. 보아는 발매에 앞서 "GAME", 〈옆 사람〉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했고, 2011년 8월 2일 타이틀곡 "Hurricane Venus"의 티저도 공개했다. "Hurricane Venus"는 공개되자마자 각종 음원 차트 1위를 휩쓸었고, [[가온 디지털 종합 차트]] 3위에 올랐다.<ref>[http://www.gaonchart.co.kr/main/section/search/list.gaon?Search_str=Hurricane+Venus 가온 차트> Hurricane Venus] 《[[가온 차트]]》 2011-07-12 확인.</ref> ''Hurricane Venus''는 55,0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ref>[http://www.gaonchart.co.kr/main/section/album/list.gaon 가온 앨범차트 - 2010년 연말] 《가온 차트》 2011-07-12 확인.</ref> 이후 6집의 리패키지 음반인 ''[[Copy & Paste]]''를 2010년 9월 24일 발매했다. 2010년 12월 6일에는 일본에서 디지털 싱글 "I See Me"를 발매하였으며, 이 곡은 보아 자신이 광고모델인 [[오디오 테크니카]]의 CM송으로 사용되었다.<ref>{{웹 인용|title=audio-technica CMソングBoA新曲「I SEE ME」|url=http://www.avexnet.or.jp/boa/mobile_disc/index.html|accessdate=2011-04-11|언어=일본어|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00213100920/http://www.avexnet.or.jp/boa/mobile_disc/index.html|보존날짜=2010-02-13|깨진링크=예}}</ref> 보아는 2011년 12월 4일부터 SBS 《[[K팝 스타]]》에 출연했는데, [[YG]]를 대표하는 [[양현석]], [[JYP 엔터테인먼트|JYP]]를 대표하는 [[박진영]]과 함께 [[SM 엔터테인먼트|SM]]을 대표하는 심사위원으로 2012년 4월까지 방송되었다.<ref>{{웹 인용 |제목=K팝 스타 공식홈페이지 - 방송보기|url= http://wizard2.sbs.co.kr/w3/template/tp1_review_list.jsp?vVodId=V0000349627&vProgId=1000714&vMenuId=1016051
         |확인날짜=2012-06-19|출판사=[[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ref> 12월 7일에는 일본 데뷔 10주년을 맞이해 발매하는 DVD을 선보였는데, 이에 앞서 첫 DVD 싱글 "[[Milestone]]"을 발매했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日 데뷔 10주년 싱글 'Milestone' 한국서 21일 발매|url=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182166|출판사=방송전문인터넷미디어|저자=강승훈|날짜=2011-12-21|확인날짜=2012-06-19}}</ref> 또한 2011년 12월 10일과 11일 양일간 일본에서 자신의 일본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 라이브, THE LIVE 2011 X'mas ~The 10th Anniversary Edition~을 개최했는데, 이 공연 실황을 담은 DVD도 발매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일본 공연 실황 라이브 앨범 발매|url=http://www.ajnews.co.kr/ajnews/view.jsp?newsId=20120315000086|출판사=[[아주경제]]|저자=황인성|날짜=2012-03-15|확인날짜=2012-06-19}}</ref>
         2012년 11월 18일부터는 지난 해에 이어 《[[K팝 스타 2]]》의 심사위원으로 출연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K팝스타2’ 양현석·박진영·보아, 더 강해져 돌아왔다|url=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53116088419880019|출판사=티브이데일리|저자=박진영|날짜=2012-11-17|확인날짜=2012-11-17|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420074446/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53116088419880019#|보존날짜=2014-04-20|깨진링크=예}}</ref> 2013년 1월 26, 27일에는 대한민국 서울 [[올림픽 공원 (서울)|올림픽 공원]] 올림픽홀에서 데뷔 이후 처음으로 한국에서 [[BoA SPECIAL LIVE 2013 ~Here I Am~]]이라는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였다.<ref>{{웹 인용|제목=BoA, 한국 첫 단독 콘서트 1월 26일 개최|url=http://www.gaonchart.co.kr/main/section/hotnews/Perform/view.gaon?idx=687|출판사=[[가온 차트]]|저자=조성훈|날짜=2012-12-11|확인날짜=2012-12-18}}{{깨진 링크|url=http://www.gaonchart.co.kr/main/section/hotnews/Perform/view.gaon?idx=687 }}</ref> 1월 28일에는 콘서트에서 처음 공개한 보아의 자작곡 〈그런 너〉의 음원을 공개했다. 이후 [[2월 27일]]에는 일본 31번째 싱글 〈[[Only One (보아의 노래)|Only One]]〉을 발매했고 첫 주 약 1만 장을 팔아 오리콘 위클리 차트 10위에 올랐다. [[6월 26일]] 발매된 32번째 싱글 〈[[Tail of Hope]]〉는 일본 [[후지 TV]] 드라마 《백의의 눈물》의 주제곡으로 쓰였다. 2013년 9월에는 KBS 드라마 《[[연애를 기대해]]》에 캐스팅되어 배우 데뷔를 하였으며, 보아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메이크 유어 무브 3D]]》도 개봉했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배우 변신|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44&aid=0000209404|출판사=스포츠경향|저자=하경헌|날짜=2013-07-17|확인날짜=2013-07-21}}</ref>
  • 보육원 떨어졌다 일본 죽어라!!!
         >(보육원 떨어졌다 일본죽어!!!)
         >뭐야 일본
         >아이를 낳아서 아이를 길러서 사회에 나와서 일하고 세금 내주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일본은 뭐가 불만이야?
         >헛소리하지마 일본.
         >진짜 제대로 히라 일본>
         [[2016년]] [[2월 15일]], [[하테나 익명 다이어리]]에 올라온 익명의 게시물에 대하여 [[일본]] 사회에서 보육문제로 논란이 일어났던 사건이다. 2016년 3월 전후의 게시물에 '일본 죽어!'라는 글이 보이면 대체로 이것과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월 29일에는 일본 국회의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야마오 시오리(山尾志桜里) 민주당 의원이 이 블로그에 대해서 거론했으나, [[아베 신조]] 총리는 "익명인 이상 실제로 진실인지, 내가 확인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으며, 의원석에서는 "누가 (블로그에) 쓴거야", "(질문자는) 제대로 (쓴) 본인을 내놔."라는 야유가 날아왔다고 한다.
          * "보육원 떨어졌다 일본 죽어라"익명 블로거에게 기자 접촉(아사히 신문) : http://www.asahi.com/articles/ASJ3355J2J33UTIL01N.html
          * "보육원 떨어졌다 일본 죽어라"라고 외친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보육원이 늘지 않는 이유 : http://www.komazaki.net/activity/2016/02/004774.html
         [[분류:일본 논란]], [[분류:일본 사건]]
  • 봉중근
         [[2009년]] [[3월 9일]]에 제 2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1라운드([[일본]] [[도쿄 돔]])에서 열린 [[일본]]과의 [[아시아]] 예선 순위 결정전에서 선발로 등판해 5⅓이닝 동안 3피안타, 무실점으로 [[일본]] 타선을 꽁꽁 틀어막아 팀의 1점차 영봉승을 이끌었다. [[삼성 라이온즈]] [[윤성환]]이 [[2009년]] 전 구단 상대 승리[[투수]]를 먼저 기록한 뒤 그도 전 구단 상대 승리 [[투수]] 반열에 오르면서, 팀 선발진의 중심이 됐다.
         당시 야구 국가대표팀은 [[2009년]] [[3월 7일]] 1번째 [[일본]]전 선발 [[투수]]로 [[2008년 하계 올림픽|베이징 올림픽]] [[일본]]전에만 2승을 거둔 [[일본]] 킬러 [[김광현 (야구 선수)|김광현]]을 내세웠지만 [[일본]] 국가대표팀의 철저한 분석과 공략으로 [[김광현 (야구 선수)|김광현]]의 투구 패턴이 읽히면서 2-14로 콜드패를 당했다. 그래서 [[김인식 (1947년)|김인식]] 감독은 2번째 맞대결에서는 [[김광현 (야구 선수)|김광현]] 대신 볼 끝이 좋고 빠른 직구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그를 선발로 내세웠다. 그리고 그 서울에서 [[일본]]에 1-0 완봉승을 거두었다. 이후 2라운드 3번째 [[일본]]전에도 그를 선발로 내세워 4-1로 승리를 거두었다.<ref>[http://www.hani.co.kr/arti/sports/baseball/343196.html 철벽 '황금계투' 일본 잠재우다] 《한겨레》, 2009년 3월 10일 작성</ref> 특히 [[일본]] 대표팀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고 시절부터 자신의 우상으로 여겼던 [[스즈키 이치로|이치로]]를 완벽하게 봉쇄했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견제 모션을 취하자 이치로가 움찔하며 1루로 귀루하는 모습은 두고 두고 야구팬들에게 회자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그를 [[중화인민공화국|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와 이름이 같다고 하여 "봉의사"라고 빗대었고 그의 소속 팀 [[LG 트윈스]]는 티셔츠를 한정 판매하여 반나절 만에 매진되자 [[일본]] 네티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ports_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143&article_id=0001981974 한일 네티즌, 스포츠로 감정 격화] - 쿠키뉴스</ref> 또 그의 이니셜인 J.K.를 "Japan Killer"로 빗대어 "재팬 킬러 봉"(Japan Killer Bong)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과의 5번째 대결 겸 결승전에 선발 등판해 4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지만 연장 10회에 [[임창용]]이 [[스즈키 이치로|이치로]]에게 결승타를 허용해 대표팀은 3-5로 패하여 준우승을 차지했다. 비록 WBC 해트트릭에 실패했지만, 이 대회를 통하여 그가 확실한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글 숨김 | [[2009년]] [[3월 18일]] 본선 일본 전(펫코 파크) : 승리 투수(선발출장), 5 1/3 이닝 3피안타 1실점, 탈삼진 1개, 볼넷 3개 | 제목색= silver}}
         |원정팀 = {{JPN}} |원정팀약자 = 일본
         {{글 숨김 | [[2009년]] [[3월 24일]] 결승 일본 전(다저스타디움) : 선발 투수(5회에 강판), 4이닝 6 피안타 1 실점, 볼넷 3개| 제목색= silver}}
         |원정팀 = {{JPN}} |원정팀약자 = 일본
  • 부모교실
         아버지 학교나 어머니 학교, 혹은 [[일본]]에서는 양친학급(両親学級), 모친학급(母親学級), 부친학급(父親学級)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곧 부모가 될 사람에게 부모로서 자각을 심어주고, 출산, 육아에 필요한 지식을 알려주는 교실이다. [[병원]]이나 [[보건소]]에서 주최된다.
  • 불꽃심장
         본래 그는 정식 음악교육을 받거나 음악에 뜻을 두지는 않았으나, [[2008년]] 봄 인터넷 온라인 동영상을 통해 자신의 연주곡을 공개하면서 [[일본]]에서 먼저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2009년]] [[현대자동차]] [[현대 그랜저|그랜저 TG]] 광고에 자신의 곡 《환각의 춤》이 삽입곡으로 사용되면서 [[대한민국]]에서도 널리 알려지며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보통 그의 음악 장르를 [[뉴에이지]]로 분류하나, [[개신교]] 신자인 그는 자신의 곡이 뉴에이지로 분류되는 것을 싫어하며, 음악을 시작한 동기도 신앙적인 이유에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2007년]]에는 자신의 기획사인 골든블러드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였으며, 현재 수 많은 피아노 음악 작곡가들을 산하에 두고 있다.
  • 불심자
         수상한 사람, 괴한이라는 뜻. 일반적으로 방범 분야에서 쓰인다. [[일본]]의 경우, [[경찰]]과 [[소방서]], [[지자체]] 등에서 이러한 불심자 정보를 수집하여 [[E메일]] 등으로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는 서비스가 있다.
         [[분류:일본어]] [[분류:일본 풍속]]
  • 블랙기업
         블랙기업은 [[일본]]에서 유래한 용어로 보통 노동환경이 보편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 명백히 나쁜 기업을 가리키는 신조어다,.--검은 조직--
         용어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래는 [[야쿠자]]들이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 만든 세탁기업들을 가리키는 은어였다. 일본에서 폭력단 대책법이 1992년 제정된 이후 경찰들이 야쿠자를 잡아들이기가 쉬워지자 야쿠자들이 명목상으로는 "나 야쿠자 아니요"라고 하기 위해 야쿠자들이 차린 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기존의 야쿠자 조직은 '기업' 형태가 아니라 일종의 '결사'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다나카 요시키]]가 지은 [[야쿠시지 료코의 괴기사건부]]에 등장하는 가상의 기업 '케이텐 흥업'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되는 케이스. 이를 '프런트 기업'이라고도 부른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1112128345&code=900308|일본의 사례]
         이게 일본에서 상당한 이슈를 끌었기에 [[블랙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지금 나는 한계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다. 한국에서도 개봉되었으며, 원작 소설도 "블랙회사"라는 제목으로 정식 발매되었다.
         [[분류:신조어]] [[분류:괴롭힘]][[분류:일본 풍속]]
  • 비(연예인)
         이렇게 인지도를 쌓아가던 비가 결정적으로 탑스타로 자리매김한 것은 2003년 [[KBS]]의 [[드라마]]인 '상두야 학교 가자!' 에 주연으로 출연하면서부터.[* 이 드라마로 KBS 연기대상 신인상, 네티즌상, 베스트 커플상을 수상했다.] 그 뒤에 발표한 2집인 '태양을 피하는 방법' 이 빅히트를 치고 이후 드라마 '풀 하우스' 가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권에서 대박이 터지면서(태국에서는 시청률이 63%가 나왔다고 한다.) 명실상부한 탑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성공했다는 자수성가형 스토리, 국위선양을 유달리 좋아하는 한국인의 정서[* 국가의 자부심이야 어느 국가나 있지만, 한국은 유독 국제적 관심에 대해 민감하다. 아무래도 중국, 일본이라는 아시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이웃 국가들을 둔 지라 조금이라도 화제면 월드스타니 한류니 해서 당장에 치켜주는 것이 있었다. 지금은 비에게 한류스타라는 말을 붙여주던 2000년대 중후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 '풀 하우스'의 후광효과(내용 중 탑스타로 등장한다) 등이 맞물리며 당대의 각종 CF를 휩쓰는 등의 결과를 보여준다.
         몇몇 사람들은 이 시기에 가수로서의 이미지는 희박해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게릴라 콘서트]]에 도전했다가 참패하기도 했다고 알고 있으나 상두야 학교 가자는 2003년 10월 방송을 시작했고, 게릴라 콘서트는 2003년 1월에 방영되었으니 아직 배우 활동을 시작하기 전이므로 듣보 연예인이었을 수는 있어도 가수로서의 이미지가 배우의 이미지보다 약하던 시기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풀하우스(드라마)|풀하우스]] 이후 나온 3집 [[https://youtu.be/9VqpPtb7RJg|It's raining]]으로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3집으로 2004년 가요대상[* [[MKMF]] 최고 인기 뮤직비디오상, [[KBS 가요대상]] 대상]을 석권함과 동시에 아시아 밀리언셀러로 등극했다. 그리고 비는 한류열풍과 '풀 하우스' 의 인기를 등에 업고 해외로 진출, Rain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권 투어를 비롯 [[미국]]에서도 활동하였기에 한국이 배출한 제1세대 월드스타라고 언론에 의해 포장되지만 자기 홍보를 크게 한 언론플레이에 불과하다는 평이 많았다. 이런 평은 초창기엔 극히 호감형이었던 비의 이미지를 깎아먹는 족쇄로 작용하는 결과로 후일 이어진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장나라]]나 [[안재욱]], [[일본]]의 [[BoA]]나 [[배용준]] 등이 매우 커다란 인기에도 불구 그 인기가 특정국에 한정되었던 특징이 있는 반면 비의 경우 아시아권에서 폭 넓은 인기를 끎으로써 기존의 한류 스타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3집 'It's raining' 의 음반판매량과 이어지는 콘서트투어가 그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아시아 전역에서 100만장 이상을 팔았고 아시아 여러 도시의 콘서트는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박찬욱]] 감독과 같이 찍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되면서 헐리웃 관계자들 눈에 들어오게 되고,[* [[이병헌]]이 헐리웃 진출한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헐리웃 관계자들은 아직도 티켓파워를 가진 한류스타를 선호하는 편이라고 한다. 지아이조에서 이병헌이 캐스팅 된 이유가 다름아닌 일본 팬미팅 영상때문이라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피드 레이서]]에서 "태조 토고 칸" 이란 국적 불명의 이름을 가진 일본인 가장과 중국인 여동생을 둔 가정의 장남으로 출연한다. [[몽골]]계와 [[일본]]계 이름이 혼합된 토고 칸이란 이름에 억지로 [[태조]]라는 단어를 넣은 것인데 이를 가지고 한국을 홍보했다는 발언--드립--을 하였다. --테조로 안 들리면 다행이겠다--
         하지만 제작팀의 인터뷰에 따르면 원작이 일본 만화다 보니 시나리오상에서의 토고 칸은 일본인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토고 칸의 아버지인 체트야는 일본인 배우와 일본풍 테마로, 여동생인 토고 호루코는 중국인 배우와 중국풍 테마로 유지되었다.
         === 일본 ===
          (일본인 가수를 제외하고 아시아 가수로는 최초로 공연 가수(Performing Artist)로 초청받음)
          * 01.21 대만 2006 HITO Music Awards HITO 일본•아시아 팝 뮤직 부문상(3집 I DO)
          * 06.16 중화민국(대만 = 타이완) 2008 HITO Music Awards HITO 일본•아시아 팝 뮤직부문상 (5집 Rainism)
  • 빌리 블랭크스
         트레이닝 비디오 '빌리의 부트 캠프'를 발매했으며, 이 비디오는 2006년에 특히 [[일본]]에서 히트하여 일본에서 빌리의 인지도를 크게 높여줬다.
         1970년대부터 각종 드라마, 영화에 출연했다. 2006년 부터는 일본에서 얻은 인기 덕분에 일본에서도 CM, 방송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에 부인과 [[이혼]]하고, 2009년에 14세 연하로서 자신의 통역을 담당하던 일본인 여성과 재혼했다. 2008년 11월에 일본인 부인과의 사이에서 장녀를 얻었다.
         2009년 6월에 오사카 시내에서 결혼식과 피로연을 열었으며, 7월에 오사카 신사이바시에 트레이닝 스튜디오 빌리 브랭크스 인터내셔널 스튜디오를 개설했다. 2009년 4월에 일본에 [[영주권]]을 신청했음을 밝혔다.
  • 사람을 죽여 보고 싶었다
         [[일본]]에서 몇몇 살인범들이 하는 발언. [[중2병]]이 심각하게 악화된 대사이기도 하다.
         [[분류:관용어]] [[분류:일본어]]
  • 삼고
         [[일본]]의 속어.
         [[분류:일본 속어]]
  • 생령
         [[일본]] [[오컬트]] 심령학계의 용어. 이키료우(いきりょう) 혹은 세이레이(せいれい) 이키스타마(いきすだま)라고 읽는다. 생령이란 살아 있는 사람의 영이다. 이와 대조하여 죽은 사람의 영을 사령(死霊)이라고 한다.
         생령이란 일본 문화에서 매우 뿌리 깊은 신앙으로서, [[겐지모노가타리]]에서도 이와 묘사가 나타난다.
  • 서기원 (1930년)
         * [[1965년]] [[서울신문]] [[일본]] 주재 특파원([[1965년]] [[3월]]).
  • 서영무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으로 [[대구상원고등학교|대구상고]]와 [[경북대학교|경북대]]를 졸업했다. 이후 공군 등 실업 야구 팀에서 선수 생활을 하였지만, 선수 시절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주 포지션은 [[내야수]]였다. 모교 [[대구상원고등학교|대구상고]]의 감독을 맡았다가 [[일본]]에 야구 연수를 다녀왔고, [[1967년]]부터 [[경북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아 명성을 쌓았다. [[1971년]]에는 전국 고교 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위력을 보여 주며 고교 야구계에서는 '''"우승 제조기"'''로 불렸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22&article_id=0000100831 한국 야구 100주년 ⑬ 우승 제조기 서영무] - 세계일보</ref> 이후 [[한양대학교]], [[서울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일하다가 [[1982년]] [[KBO 리그]]가 출범하자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의 초대 감독에 임명되었다.
  • 서용빈
         은퇴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 서태지
         || '''가족''' ||<(> [[아버지]] 정상규, [[어머니]] 강명숙[br][[누나]] 정혜원[* [[1970년]]생으로 2살 터울이다. 직장 때문에 한때 [[일본]]에 거주했지만 현재는 [[홍콩]]에 살고 있다. 여담이지만, 2014년 MAMA 때 서태지가 누나네 집에 놀러 갔다고 한다.][br]6촌 형[* 양측 모친끼리 사촌관계다.] [[신해철]] ||
         그 후로도 계속 밴드를 알아보거나 직접 멤버를 모집해 밴드 결성을 시도하기도 했고, 한국에 비해 음악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는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매니저 최진열의 증언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이 [[일본]] 공연을 하면서 지켜 본 바로는 서태지의 [[일본어]] 실력은 능숙해서 통역 없이 혼자 일본에서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사족으로 서태지라는 이름은 자신이 좋아하는 한자인 '태' 자와 '지' 자로 이름을 짓고 여기에 가장 어울리는 성씨인 '서' 씨를 합해 '서태지'로 지었다고 한다. 2009년 서태지 본인이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해 이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는데, 전 매니저 최진열의 증언으로는 서태후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공연장이라는 뜻의 영어 'STAGE'를 줄여 만들었다는 설도 있었다.[* [[신대철]]이 자신의 책 '뛰는 개가 행복하다(2014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시나위 가입 후 서태지라는 예명으로 바꾸겠다고 하길래 이름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서태지 본인이 [[서태후]]의 '서태'와 [[타이지]]의 '지'를 합친 거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중에서 [[일본]]의 록 밴드 [[엑스 재팬]]의 베이시스트였던 '[[TAIJI]](타이지)'에서 따왔다는 설(서쪽의 TAIJI - 서TAIJI)이 주류였는데 시간이 흘러 서태지 본인이 별생각 없이 그냥 글자가 멋져서 지었다고 밝혔으나, 최근에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은 자서전에서 서태지는 타이지에서 따온 게 맞다고 주장했다. 타이지처럼 실력 좋은 베이시스트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서쪽의 타이지를 줄여 서태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일본대중음악이 개방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신대철의 주장이 신빙성이 있다고 보지만, 이름에 관한 주장은 이름을 지은 본인의 주장이 공식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이는 영어 '스테이지'의 음차라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일본 그룹인 'X'의 전직 베이스 연주자였던 Taiji의 예명을 본떴다는 설이 있는데 실제로는 어떤 것인지...
         당연히 서태지만 이런 것도 아니다. 일본의 뮤지션 [[GACKT]] 역시 한 TV 방송에서 자택공개를 했는데, 유독 녹음실만 공개 거부를 하였다. 때마침 신곡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스포일러]] 방지 차원에서 작업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는 것. 방송 스탭이 이 경고를 어기고 몰래 촬영하려다가 각트에게 들키자 각트는 그 자리에서 스탭에게 화를 내며 방송 스탭들을 전원 내쫓아버렸다.[* 각트 개인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이러한 원칙에 철저하다. 드라마나 영화 출연진에 대한 인터뷰도 미리 스포일러가 안 되는 선 안에서 모든 인터뷰 준비를 영화/드라마 제작진들이 감수한다.]
          * 물론 [[민족문제연구소]]의 객관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이 일각에서는 있지만, [[친일몰이|인터넷상에 나도는 친일파 명단의 신뢰성은 그보다 더 심각하다.]] 이로 인해 피해를 본 분이 [[김수환]] 추기경. 이분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단순히 일본과 관련된 기관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친일파라면 대한민국에 남아나실 어르신들이 없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작성한 명단은 무려 수 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올라 있어, 일각에서는 친일의 기준을 너무 넓게 잡았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즉, 명단을 확대했으면 확대했지, 좀처럼 축소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 이러한 행적 때문에 반미 가수로 인식되어, 2004년에 미국 영주권을 포기한 것을 그런 의도로 해석하는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2&aid=0000008549|기사]]까지도 나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냥 영주권을 갱신하지 않은 것뿐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어서 굳이 미국 영주권을 갱신할 필요를 못 느꼈다는 것.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0049899|기사]]
  • 선동열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85년]] [[7월 2일]] <br /> [[삼성 라이온즈|삼성]]전 선발 <br /> [[일본 야구 기구|NPB]] / [[1996년]] [[4월 5일]] <br /> [[히로시마 시민 구장|히로시마]]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도요카프]]전 구원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1995년]] [[9월 27일]] <br />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광주]] 대 [[롯데 자이언츠|롯데]]전 구원 <br /> [[일본 야구 기구|NPB]] / [[1999년]] [[10월 27일]] <br /> [[나고야 돔]] 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다이에]]전 구원
         === 일본 프로야구 시절 ===
         [[대한민국]]에서 선수 생활을 마친 뒤 [[1996년]]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의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여 [[구원 투수]]로 활약하였다. [[일본]]에서는 [[1997년]]에 당시 각종 신기록들을 세우며 개인 최다 [[세이브 (야구)|세이브]]인 38세이브를 기록하여 [[사사키 가즈히로]]와 함께 세이브 공동 1위(구원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9 시즌 [[주니치 드래건스]]의 리그 우승을 이끈 후 [[1999년]] [[11월 22일]]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ports_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552168 선동열, 은퇴 공식 선언] - 연합뉴스</ref>
         !colspan="3"|[[일본 프로 야구|NPB]] 통산 : 4년
         === [[일본 프로 야구]] 기록 ===
         * [[일본]] 성적은 10승 4패 98세이브
         * [[일본 프로 야구]] 개인 통산 세이브 부문 24위의 기록,9 7시즌 외국인 세이브부문 1위
         * [[1997년]] 1승 38세이브(당시 [[일본]] 신기록) 기록 구원 2위, 세이브 성공률 1위 랭크
         [[분류:196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보성 선씨]][[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광주제일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KBO 리그 투수]][[분류:해태 타이거즈 선수]][[분류: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일본 프로 야구 투수]][[분류:주니치 드래건스 선수]][[분류:삼성 라이온즈 감독]][[분류:KIA 타이거즈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야구 감독]][[분류:한국 프로 야구 1500탈삼진 클럽]][[분류:한국 프로 야구 100승 클럽]][[분류:KBO 골든글러브 수상자]][[분류:KBO 평균자책점상 수상자]][[분류:KBO MVP 수상자]][[분류:KBO 승리상 수상자]][[분류:KBO 탈삼진상 수상자]][[분류:KBO 세이브상 수상자]][[분류:KBO 승률상 수상자]][[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분류:1984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분류:체육훈장 맹호장 수훈자]][[분류:KBO 리그 영구 결번]][[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설운도
         1986년에 [[이호섭 (1959년)|이호섭]]이 작사하고 본인이 작곡한 정통 트로트 《원점》(작사: [[이호섭 (1959년)|이호섭]]/ 작곡: 설운도) 을 발표하였지만 크게 알려지지 못하였다. 하지만 3년이 지난 1989년에 《[[전국노래자랑]]》연말결선에서 1위를 차지한 오세근 씨가 심장병이 있는 자신의 딸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출연하였다는 사연을 전하였는데 《[[전국노래자랑]]》에서 《원점》을 부르는 참가자가 많아지며 이 곡이 히트하게 되었다. 하지만 설운도는 매니저의 부재로 방송에 출연하지 못해서 계속 무명 시절을 보내야만 하였다. 1988년 12월에는 국내 가수 최초로 중국 교포들의 초청을 받아 [[옌볜 조선족 자치주|연변]]에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1989년 5월에는 일본 [[NHK]] TV의 인기 엔카 가요프로그램에 [[조용필]]과 [[나훈아]] 다음으로 [[일본]]에 진출하였으나 역시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989년에 경쾌한 폭스 트로트 《마음이 울적해서》(작사: 정월하/ 작곡: 김정일), 1990년에 정통 트로트 《혼자이고 싶어요》(작사: 이수진, 작곡: 설운도)를 발표하여 가수 활동을 하였으나 발표 당시 아무런 인기를 얻지 못하였고 이후에 히트하여 제 3회 고복수 가요제 남자 가수상, MBC 10대 가수상을 수상하였다.
  • 성시경
         |레이블 = {{국기그림|대한민국}} [[스톤뮤직 엔터테인먼트]] <br /> {{국기그림|일본}} [[JVC 켄우드 빅터 엔터테인먼트]]
         대입 입시생 시절이던 1999년 4월에 MBC 문화방송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에서 엑스트라 단역급으로 첫 출연한 적이 있고 이듬해 [[2000년]] [[2000년 9월|9월]]에 열린 제1회 드림뮤직 신인가수 선발대회 "뜨악 페스티벌" 인터넷 오디션 "발악"을 통해서 가수로 데뷔하였다. 첫 번째 싱글은 2000년 [[2000년 11월|11월]]에 발매된 "내게 오는 길"이었다. [[2001년]] [[2001년 4월|4월]]에는 데뷔 앨범인 "처음처럼"이 발매되었고, 신인상을 받았다. 지금까지 7개의 정규 앨범, 3개의 리메이크 및 스페셜 앨범, 1개의 베스트 앨범을 발매했다. 최근 [[일본]]에서 [[정규앨범]][[DRAMA]]발매 전 일본 4개도시 투어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으며 현재 일본과 서울을 오가며 왕성히 활동 중이다.<ref>{{뉴스 인용|url=http://star.mt.co.kr/stview.php?no=2018030715133349170&outlink=1&ref=https%3A%2F%2Fsearch.naver.com|제목=성시경, NHK 한국어 강좌 프로 출연 "일본어도 능통"|출판사=스타뉴스|날짜=2018-03-07}}</ref><ref>{{뉴스 인용|url=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8040901032939179001|제목=성시경 ‘일본 본격 진출’ 7개 도시 투어|출판사=문화일보|날짜=2018-04-09}}</ref>
         ==== 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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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197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99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R&B 가수]][[분류:2000년대 가수]][[분류:2010년대 가수]][[분류:한국어 가수]][[분류:일본어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발라드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고려대학교 정경대학 동문]][[분류: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동문]][[분류:순창군 출신]][[분류:토이]][[분류:골든디스크 본상 수상 음악가]][[분류:골든디스크 신인상 수상 음악가]][[분류:하이원 서울가요대상 신인상 수상 음악가]][[분류:하이원 서울가요대상 본상 수상 음악가]][[분류:Mnet 아시안 뮤직 어워드 수상 음악가]][[분류:SBS 인기가요 1위 수상자]][[분류:SBS 인기가요 뮤티즌송 수상자]][[분류:Mnet 엠카운트다운 1위 수상자]][[분류:1박 2일]][[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홍콩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젤리피쉬 엔터테인먼트 음악가]]
  • 성훈 (1983년)
         | [[일본]] [[도쿄]] 한류창작뮤지컬 《Summer Snow》
         | {{국기그림|일본}}
         | rowspan="3" | {{국기그림|일본}}
         | rowspan=5 | {{국기그림|일본}}
         | rowspan=2 | {{국기그림|일본}}
         | rowspan=2 | {{국기그림|일본}}
         | {{국기그림|일본}}
         | 1,500여명<ref>[http://m.busan.com/m/News/view.jsp?newsId=20140403000103 배우 성훈 일본 팬클럽 '성훈 재팬' 팬미팅 성황] 부산일보=이춘우 기자 2014-04-03 </ref>
         | 1,000여명<ref>[http://www.kookje.co.kr/mobile/view.asp?gbn=v&code=0500&key=20170208.99002160449#cb 배우 성훈, 도쿄 사쿠라홀서 일본 팬 완벽 매료] 국제신문=이원 기자 2017-02-08</ref>
         | rowspan="2"| 2017 SungHoon BUSAN Tour<ref>[http://m.sportschosun.com/news.htm?id=201706210100175330012539&ServiceDate=20170620&f_url=https://www.google.co.kr/#_adtep 성훈 일본 팬들과 1박 2일 부산투어, 외모만큼 눈부신 의리] 스포츠조선=김성원 기자 2017-06-20</ref>
         * [http://www.sunghoon.jp/ 일본 공식사이트]
  • 세븐 (가수)
         * 일본 데뷔 싱글 5만장 한정 라이센스
         === [[일본]] ===
         * [[3월 9일]] 《2005 [[일본]] 골드 디스크 대상》 - 한류공로상
         * [http://lucky-7.jp SE7EN/ LUCKY SE7EN] - 일본 공식 팬클럽 사이트
  • 센터 시험
         [[일본]]의 대학입시시험. 우리나라의 [[수학능력시험]]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 독립행정법인 대학입시센터의 주관으로 실시한다.
         [[분류:일본 교육]]
  • 소년보도
         [[일본]]의 경찰용어. 청소년 비행 등의 문제에 사용된다. 흔히 '보도'라고 한다.
         [[분류:일본어]]
  • 소이현
         {{일본인물 정보
         |출생지 = {{일본}}
         |국적 = {{일본}}
         |소속사 = [[일본군대]]
         '''오다이현'''({{본명|조우정}}, [[1534년]] ~1582 )은 [[일본]]의 [[인물]]이다.
         [[분류:일본 인물]]
  • 소지섭
         | 일본 모바일 단편드라마
         | [[일본]] 영화, 카메오
         | 한국, 홍콩, 대만, 일본, 싱가폴 등 총 5개국의 모델 활동
         | 제25회 일본 베스트 지니스트 어워드
  • 손나은
         | 소속사 = [[일본]]
         [[분류:197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2011년 데뷔]][[분류:에이핑크의 일원]][[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동국대학교 동문]][[분류:일본 출신]][[분류:플랜에이 엔터테인먼트 소속]][[분류: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동문]]
         [[분류:일본 연예인]]
  • 손예진
         {{일본인 정보
         손예진의 다음 작품으로는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외출 (영화)|외출]]》(2005)로 두 편의 영화 모두 [[일본]],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등 아시아 전역에서 대히트를 기록하였으며,<ref>{{웹 인용|title=The Best Selling Films of 2004|url=http://www.koreanfilm.org/kfilm04.html|work=Koreanfilm.org|accessdate=2013-08-08}}</ref><ref>{{웹 인용|title=A Moment to Remember breaks Japanese record|url=http://www.koreanfilm.or.kr/jsp/news/news.jsp?mode=VIEW&seq=326|work=Korean Film Council|date=14 December 2005}}</ref><ref>{{웹 인용|title=Son Ye-jin to Star Alongside Bae Yong-joon in New Film|url=http://www.koreanfilm.or.kr/jsp/news/news.jsp?mode=VIEW&seq=163|work=Korean Film Council|accessdate=24 December 2004}}</ref>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국내에서도 256만명의 관객수를 동원하며 흥행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각각 2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일본에서 개봉 된 역대 [[대한민국]] 영화중에서 흥행 기록 1, 2위를 기록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손예진, ‘日 2005 외국영화 흥행 톱10’서 2관왕|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032332|출판사=마이데일리|날짜=2005-12-16}}</ref><ref>{{웹 인용|title=Films Starring Sohn Ye-jin Attract 10 Mil. Viewers in Korea, Japan|url=http://english.kbs.co.kr/hallyu/entertainment_news_view.html?No=147|work=KBS Global|date=28 December 2005}}</ref> 특히 《외출》에서 손예진은 20대 중반 주부이면서 남편과 불륜 관계였던 여자의 남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여자 서영의 감정을 잔잔하면서 깊이 있게 그려내며 호평을 받알고, 이 영화로 제50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출연한 영화 《[[작업의 정석]]》에서 손예진은 최고의 선수, 작업계의 고수 한지원 역을 맡아 이 작품에서 과감한 섹시 댄스를 선보이는 등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였고, 234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오싹한 연애> 손예진, <작업의 정석> 뛰어넘을까?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47&aid=0001991399|출판사 =오마이뉴스 |저자 =하성태 |날짜 = 2011-12-17 |확인날짜 =2017-09-16 }}</ref>
         [[분류:일본 연예인]]
  • 손정규
         '''손정규'''(孫貞圭, <small>일본식 이름:</small> 伊原圭<ref>{{서적 인용
         [[창덕궁]]에서 관리로 근무하던 손용우의 딸로 태어났다. 제1회 졸업생으로, [[일본]]으로 유학하여 에서 수학했다. 귀국한 뒤에는 모교의 교사로 오랫동안 근무했다.
         저서로 일본어로 발행된 《조선요리》(1940)와 전통 궁중 요리 분야의 고전인 《궁중요리(宮中料理)》(1950)가 있다.
  • 손지환 (야구인)
         ===일본 독립야구 시절===
         이후 [[2010년]] [[2월]] [[일본]] 간사이 독립 리그의 한국인 구단 [[코리아 해치]] 팀에 입단하였으나 재정난으로 구단이 해체되었다.
  • 손지환 (언론인)
         |쪽=148~156쪽}}</ref> 이렇게 독립운동 가담자를 유인, 체포하여 항일 세력을 파괴하는 데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1936년]] [[일본]] 정부로부터 공훈 을(乙)을 받았는데, 이는 헌병 [[부사관]] 오장급의 대우였으며 매달 90원의 수당이 주어졌다.
  • 손해보고 이득얻다
         [[일본]]의 관용구. 처음에는 손해를 보지만 나중에는 큰 이득을 얻는다는 뜻.
         [[분류:관용어]] [[분류:일본어]]
  • 손혁찬
          | 학력 = 1992년 일본 [[:ja:京都芸術短期大学|도쿄 사진예술단기대학]] [[전문학사]]<br/>1995년 일본 [[도쿄 코게이 대학|도쿄 코게이 대학교]] 사진예술학과 [[학사]]
         1990년 [[일본]]에서 사진작가 첫 입문하였다.
         1990년 1월, 당시 연기자 데뷔 이전이었던 [[김원희]]를 처음 만난 그는 이후 김원희가 연기자 데뷔한 뒤로도 15년간을 간간이 김원희와 함께 대한민국, 일본, [[중화민국|중화민국 타이완]] 등을 다녀가면서 이후로도 김원희와 서신 교환을 비롯한 거의 비밀 연애를 하였고 이후 2003년 1월을 기하여 대한민국 영구 귀국을 한 그는 이후 2005년 6월 11일을 기하여 연기자 [[김원희]]와 전격 결혼하였다.
         [[분류:197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밀양 손씨]][[분류:대한민국의 사진가]][[분류:1990년 데뷔]][[분류:도쿄 예술단기대학 동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도쿄 코게이 대학 동문]][[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
  • 송금선
         '''송금선'''(宋今璇, <small>일본식 이름: </small>福澤玲子('''후쿠자와 레이코'''), [[1905년]] [[1월 15일]] ~ [[1987년]] [[10월 24일]], [[한성부]] 출생)은 [[덕성여자대학교]] 초대 학장을 지낸 [[한국]]의 [[교육]]자이다. 아호는 남해(南海).
         [[1919년]] [[숙명여자고등학교|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했다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모교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 송병주 (1890년)
         '''송병주'''(宋秉柱, <small>일본식 이름: </small>恩津明森, [[1890년]] [[7월 22일]] ~ ?)는 [[일제 강점기]]의 경찰이다.
         [[한성부]] 출신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일본]]에 유학하여 공부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후인 [[1911년]]에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한 뒤 귀국했다.
         이때는 [[조선총독부]] 체제가 출범하여 조선 전국의 행정기관과 경찰 조직이 총독부 휘하로 편입되면서 [[일본어]] 통역 수요가 늘어난 시기였다. 송병주는 귀국 직후 경무부 소속인 당진경찰서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면서 경찰계에 입문했다.
  • 송승헌(1976)
          * 2011년 [[일본]] 동일본 대지진때 [[구세군]]을 통해 2억원의 성금을 기부한 바 있다.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103150005361001|#]]
  • 송준근
         * 얘가 제일 문제야! [[일본]]에서 온 갸루상~(멘붕스쿨)
  • 수영 (가수)
         수영은 [[1990년]] [[2월 10일]] [[인천광역시]] [[동구 (인천광역시)|동구]] 송현동 (인천) (중봉대로68번길)에서 태어났다를 졸업하고 같은 해 [[2016년 2월]]<ref>{{뉴스 인용|제목=‘09학번 최수영’ 중앙대 출신 연예인 누가 있나 |url=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8110549067&type=&nid=&sid=0107&page=1|출판사=한국경제|저자=김시은 기자 |날짜=2008-11-05}}</ref>수영은 SM 엔터테인먼트에 캐스팅되어 [[2002년]] [[한국]]·[[일본]] 울트라 아이돌 듀오 오디션에 참가,<ref name=autogenerated1>{{뉴스 인용|제목=소녀시대 최수영, 과거 'Route O' 활동 화제!|url=http://www.sportsseoul.com/news2/entertain/news/2008/0325/20080325101040400000000_5353903859.html|출판사=스포츠서울닷컴|저자=뉴스편집팀|날짜=2008-03-25|확인날짜=2009-07-2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00502001057/http://www.sportsseoul.com/news2/entertain/news/2008/0325/20080325101040400000000_5353903859.html|보존날짜=2010-05-02|깨진링크=예}}</ref>
         [[2002년]]에서 [[2003년]]에 걸쳐 [[일본]] 듀오 걸 그룹 Route O의 멤버로 타카하시 마리나 (高橋麻里菜)와 함께 [[일본]]에서 약 2년간 활동.<ref name=autogenerated1 /><ref>{{웹 인용 |url=http://www.sportsseoul.com/news2/entertain/news/2008/0325/20080325101040400000000_5353903859.html |제목=Sportsseoul.com - [[소녀시대 |확인날짜=2009-07-26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00502001057/http://www.sportsseoul.com/news2/entertain/news/2008/0325/20080325101040400000000_5353903859.html |보존날짜=2010-05-02 |깨진링크=예 }}</ref><ref>[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274834 {{웨이백|url=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274834 |date=20091125144604 }} [스타의 모든것] ② 최수영 “살 찌우려고 노력하는데 쉽지 않네요” - 일간스포츠<!-- 봇이 따온 제목 -->]</ref> 현재도 친구 사이이다.
         수영은 [[1990년]] [[2월 10일]]생으로 [[1989년]]생인 [[태연]], [[써니 (가수)|써니]], [[티파니 영|티파니]], [[효연]], [[유리 (1989년)|유리]]와는 나이로는 만으로 한 살 차이가 나지만 방송에서 서로 동갑내기 친구처럼 반말을 하며 지내는 모습이 비춰진다. 이는 빠른 [[1990년]]생인 탓에 타 [[1989년]]생 멤버와 입학년도가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2년]] [[일본]]에서 Route O 활동으로 학교를 1년을 쉬었기 때문에 최종 졸업년도는 타 [[1989년]]생 멤버와 달리 [[2009년 2월]] [[윤아]]와 같은 년도 같은 달에를 졸업했다.
         * [[2003년]] : [[일본]] ‘CHUBBYGANG' 의류 브랜드
  • 순헌황귀비
         [[이준용 (1870년)|이준용]]은 [[일본]] 망명 직후부터 엄상궁의 빈 책봉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어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명성황후]]의 빈자리를 대체할 인물로 엄상궁을 택하고 그녀를 황후로 격상시키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를 접한 이준용은 망명 한인들에게 이를 알리며 반대 운동을 준비한다.
         [[1899년]] [[4월]] [[이준용 (1870년)|이준용]]은 [[일본]]망명객들이 벌인 엄상궁의 황후책봉에 대한 반대운동에 가담하였다.<ref name="oh327">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27쪽.</ref> 그는 [[유길준]], [[권동진]], [[조중응]] 및 기타 2~3인과 함께 논의한 결과 신분이 낮은 엄상궁을 황후로 삼는 것은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조치라는 이유를 들어 엄상궁의 황후 책봉을 반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를 담아 [[궁내부]]대신 [[청안군 (1851년)|이재순]]에게 충고서를 보내기로 하였다.<ref name="oh327"/> 이준용은 엄상궁의 출신 성분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왕실의 위신에 관련된 문제라며 엄상궁의 황후 책봉을 반대하였다.
         또한 이준용은 아버지 [[흥친왕]]에게 서한을 보내 엄상궁 같은 미천한 소생이 황제의 총애를 얻은 것을 기화로 간신배들이 벼슬을 얻기 위해 엄상궁을 황후로 책봉하려 기도하고 있으니, 이러한 때에 황실에 관계된 이들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준용이 엄상궁의 황후 책봉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인 것은<ref name="oh327"/> 엄상궁이 자신의 아들 [[의민태자|황자 이은]]의 권력 승계를 위해 [[일본]]에 망명중인 이준용과 [[의친왕|이강]] 등을 극력 배척하였기 때문이다.<ref name="oh328">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28쪽.</ref> 그러나 이런 처지에서 이준용의 [[엄상궁]] 황후 책봉 반대운동은 도리어 그의 신변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ref name="oh328"/>
         아들 [[의민태자|영친왕]]을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태자로 만드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의민태자|영친왕]]은 [[이토 히로부미]]가 자신이 [[황태자]] 사부(師父)라는 명목 하에 [[일본]]으로 인질로 데려갔다. 아들 [[영친왕]]이 [[일본]]의 [[사관학교]]에서 고된 훈련을 받는 도중 점심을 주먹밥으로 먹는 장면을 촬영한 필름을 보게 되었는데, 이를 보고 애통해하다가 먹던 떡이 급체하기도 했다 한다.
         [[1905년]] [[양정고등학교 (서울)|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을, [[1906년]] [[진명여자고등학교|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대학교]])를 세웠다. [[1911년]] [[7월]] [[장티푸스]]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 [[7월 20일]]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향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f>사흘 후인 7월 23일 상을 치르기 위해 아들 은(垠)이 귀국하였을 때, 일제는 위생상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그의 함녕전 접근을 막았다.</ref>. 당시 그의 아들 [[영친왕]]은 일본에 체류중이었다.
  • 순화군
         [[임진왜란]] 당시 근왕병을 모집하려 처조부 [[황정욱]] 등과 함께 [[강원도 (남)|강원도]]에 파견되었다가 일본군을 피해 회령으로 갔다. 그러나 왕자 신분을 내세워 행패를 부리다가 향리로 강등당해 [[회령]]으로 유배된 국경인(鞠景仁) 등에 의해 일본군에 넘겨졌다. [[1593년]] [[일본]]으로 압송되기 직전 명나라 사신 심유경과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카의 협상이 성사되어 풀려났다. 살인과 물건갈취로 [[1601년]] 군의 작위에서 파면되었으며, [[1604년]] 호성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임진왜란 직후 도성이 함락되자 그는 [[임해군]] 진과 함께 각각 부대를 인솔, 순화군은 장인인 [[호군]] [[황혁]](黃赫<ref>후에 승지를 역임하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ref>), 처조부 장계군 [[황정욱]](長溪君 黃廷或), [[김귀영]](金貴榮) 등과 함께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기 위해 [[강원도 (남)|강원도]]로갔으나 성과가 없었고, 동년 [[5월]] 일본군이 [[한강]]을 넘어 북상하자 이를 피하여로 들어가, 방면으로 파견되어 있던 이복형 [[임해군]]의 근왕병 모집대와 합류하여 [[회령]]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자임을 내세워 행패를 부리다가 함경도민의 반감을 샀다. 곧 일본군이 [[회령]]까지 올라오자, 향리로 강등되어 회령으로 유배되어 있던 국경인(鞠景仁)과 그 친척 국세필(鞠世弼) 등의 밀고로, 임해군, 황혁, 황정욱 및 수행원들과 함께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일본군 부장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이후 장인 황혁, 처조부 황정욱과 함께 [[안변군]]의 토굴에 감금되었다가 [[경상남도|경상도]] [[밀양시|밀양]]으로 이송되고, [[1593년]](선조 26) 초, 부산 다대포에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군의 본진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는 선조에게 항복 권유문을 쓰게 하라는 강요를 받고 항복권유문을 썼다. 그러나 처조부 황정욱은 비밀리에 항복 권유문은 진심이 아니라는 글을 써서 숨겨둔 뒤, 항복권유문을 쓰는 하인편에 딸려서 같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글을 써서 보냈다. [[1593년]](선조 26) [[8월]] [[부산광역시|부산]] [[다대포]]항에 정박된 배 안에 구금되어 일본으로 보내지려 할 때, 명나라의 사신 심유경(沈惟敬)과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카]]의 회담이 성사되어, 그해 [[9월 29일]]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이복형 [[임해군]], [[김귀영]], 장인 [[황혁]], 처조부 [[황정욱]] 등과 함께 조선군에 송환, 인계되었다.
  • 슈가(방탄소년단)
         '''13세 때부터 [[미디]] 작업을 시작했다.'''스튜디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작곡, 편곡을 익혔고, 그 덕분에 녹음 장비와 음향 장비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고 한다. [[http://navercast.naver.com/magazine_contents.nhn?rid=2039&contents_id=122930|링크]] 고등학생 때는 학교 교가를 편곡하여 용돈벌이를 했다고 한다. 일본의 하루하나 인터뷰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한 반면에, 학창 시절 음악 과목은 잘하지 못했다고 한다. 교과서에 나와 있는 음악은 이건 이렇게 하는 거야, 라고 정해져 있어서 그게 싫었다고. 그래서 교과서로는 음악 공부는 하지 않고 방과후에 음악을 했다고 한다. 피아노 실력 또한 본인이 독학으로 공부한 것.
          * 2015년 12월 27일, [[일본]] [[고베]] 콘서트 시작 전 슈가와 [[뷔]]가 어지럼증을 호소해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이로 인해 27일과 28일 예정되어 있던 일본 콘서트가 취소되고 2016년 3월로 미뤄졌다. 29일부터는 예정대로 스케줄을 소화했는데, 슈가는 이미 2013년에 [[충수염]]으로 인해 연말 가요제에 불참한 적이 있어서 스케줄을 빠지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회사 측에 강력하게 밝힌 듯하다. 그리고 2016년 1월 초에 멤버 모두가 휴가를 받았을 때, 혼자 '''고베에 다녀왔다'''. 고베 콘서트 때의 일이 꽤 큰 죄책감으로 남았던 듯. 다녀와서는 [[http://mblogthumb2.phinf.naver.net/20160808_117/dbswls231_1470634104836QpQ3I_JPEG/%C0%B1%B1%E2%B0%ED%BA%A3%C6%AE%C0%AD.jpg?type=w800|트위터에 장문의 글]]을 남겼는데, 외국 팬들이 번역기를 쓸 것을 배려해 간단하고 짤막한 문체로 쓰여진 것이 눈에 띈다.
  • 스낵
         [[일본]]의 유흥업소. 본래는 '스낵바'라고 하며, 경식(스낵)을 제공하는 바를 뜻한다. 여성 점장을 마마(ママ)라고 부르른다.
         [[분류:일본 풍속]]
  • 스쿨 카스트
         [[일본]]의 교육현장 용어. 학교 내에서 학생들 사이에 일종의 '계층'이 갈라지는 것을 뜻한다.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카스트 제도]] 같은 현상이라고 하여 '스쿨 카스트'라고 부른다. 다른 나라에도 이런 것은 있지만, 스쿨 카스트라는 명칭은 주로 일본에서 사용한다.
         좀 농담같이 소개되었지만 일본의 [[라이트노벨]] [[GJ부]]의 애니메이션 오프닝곡에서 나오는,
         이라는 가사에서도 잘 나오듯이 생각보다 이런 인식은 상당히 많은 퍼져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런 현상은 일본 외 국가에서도 별반 다르진 않다. 몬스터메탈그룹 Lordi의 Hard Rock Hallelujah의 뮤직비디오에서도 서구권의 스쿨 카스트가 묘사되고 있다.
         [[분류:일본 풍속]]
  • 스피커 아줌마
         [[일본]] 속어. 딱히 특정 인물은 아니다.
         [[분류:일본어]]
  • 시치고산
         [[일본]]의 풍속. 3세, 5세, 7세가 된 어린이의 성장을 축하하여, 11월 15일에 신사로 데려가서 조상신에게 참배를 하는, 어린이를 위한 통과의례적인 풍속이다.
         과거부터 일본에서는 15일이 길일로 여겨졌다. 시치고산과 유사한 풍속은 일본 역사에서 있었으나. 현재와 같은 형태가 된 것은 근대의 일이라고 한다.
         [[에도 시대]]에는 사무라이 집안에서 아들이나 딸의 3,5,7세 생일 때 약간의 행사를 하는 정도였던 것으로 보이며, 지금처럼 화려하게 축하하게 된 것은 [[다이쇼 시대]]에 [[간토 지방]]에서 나타났다고 한다. [[간사이 지방]]에서도 시치고산을 하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고도성장기 때부터 라고 한다.
         [[분류:일본 풍속]]
  • 신격호
         ||<#CF1020> {{{#FFF '''일본명'''}}} ||시게미츠 타케오 ([ruby(重光 武雄, ruby=しげみつ たけお)][* 중광무웅])||
         [[울산광역시]] 출신으로, 본관은 [[신(성씨)|영산 신씨]]. 일본 이름은 시게미츠 타케오 (重光武雄).
         홀수 달에는 [[한국]]에서, 짝수 달에는 [[일본]]에 머물며 그룹을 경영해 ‘[[대한해협]]의 경영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다만, [[도호쿠 대지진]] 이후로는 주로 [[http://www.newspim.com/view.jsp?newsId=20130325000217|한국에 머무른다고 한다]].
         1941년 부인 노순화[* 둘 사이에서 낳은 딸은 [[신영자]]]를 비롯해 가족과 고향을 모두 뒤로 한 채 성공하겠다면서 일본으로 밀항을 한다. 도쿄에 도착해 방을 하나 빌려 자취하면서 우유 배달 일을 하며 와세다실업학교 고등부의 야간부 화공과에 적을 두고 학업을 이어갔다.
         젊은 시절, 문학을 좋아해서 작가가 되고 싶어했다고 전해진다.[* 일본 유학생 혹은 밀항자들은 힘든 현실로 인해 소설을 읽고 자신이 직접 쓰고 싶다는 마음에 문학가를 동경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였기에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여러 일을 하다가 주변으로부터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사업을 꾸리게 된 것. 롯데의 이름을 짓게 된 원인이라고 한다.
         일본식 기업풍토에 안정적인 현금흐름과 시장지배력을 중시하는 재일교포 특유의 경영행태로 많은 화제를 낳았다. 일단 2015년 기준으로 94세[* 보통 94세 노인이면 거동도 힘든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리고 염색을 자주 하는지 흑발인 사진만 있다.]인데 [[http://www.newspim.com/view.jsp?newsId=20130325000217|아직도 현역으로 활동중이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작업복 차림으로 영업이 끝난 백화점이나 마트 등을 둘러보고 담당자에게 세부적인 관리내용을 꼬치꼬치 묻는가 하면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비행기도 민간 항공사 1등석을 혼자서 탑승하는 사실은 재계에서는 꽤나 유명했다.
         한동안 그의 국적은 미스터리였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이고 [[일본]]에서는 [[일본인]]'''인 기묘한 형태. 때문에 편법적 이중국적자로 의심받았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일관계]]의 역사적 배경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 회장은 [[한일기본조약|한일 국교 정상화]] 이전에 일본 국적을 취득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일본과 대사급 외교 관계가 없었던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체제에서는 그의 일본 국적 취득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한국 국적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또한 일본 정부는 1985년까지 [[이중국적]]을 허용했으므로 일본 내에서도 그의 한국 국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중국적이지만 이중국적이라 말할 수 없고, 신격호는 한국인이고 시게미츠 타케오는 일본인이라는 기묘한 상황이 지속된 것이다.
         그런데, 한 언론사가 입수한 일본 롯데 계열사의 대주주 목록에는 신격호와 시게미츠 타케오가 함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며, 신격호 회장은 한 번도 일본 국적 취득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중 호적이 심히 의심되는 상황이다.
         일본 교민회에서 [[조치훈]]의 형과의 인연으로 조치훈을 후원하기 시작해 20년 이상 후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 조상연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조치훈이 개명하기 전의 이름이 바로 조풍연.] [[http://kimdooho.interview365.com/51|#]]
         2017년 6월 24일 오전 일본 롯데홀딩스는 도쿄 신주쿠 하쓰다이 본사에서 주주총회를 열고 임기가 만료된 신 총괄회장을 새 이사진에서 배제한 인사안을 의결했다. 이에 따라 신 총괄회장은 1948년 (주)롯데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롯데그룹을 창립한 지 약 70년 만에 롯데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명예회장직을 대신 받게 되었지만 사실상 불명예 퇴진이나 다름 없다.
         [[2015년]] [[7월 28일]] 신격호는 일본 롯데홀딩스 회장직에서 전격 해임되고 '''총괄회장'''에서 '''명예회장'''이 되었다[* 애초에 이전에 '명예회장'이라는 직함을 거부하고 '총괄회장'을 맡았던 것 역시 끝까지 경영을 직접 하겠다는 신격호의 ~~똥고집~~ 현역 의지 때문이었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8/01/2015080100243.html|기사]] 해당 기사는 신격호와 신동빈의 경영 스타일 차이에 대해서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27일 장남인 신동주 전 부회장이 한국롯데 몰래 롯데가 인사 여럿과 함께 일본에서 자신을 제외한 차남 신동빈 회장을 포함 여섯 명의 이사들을 해임하려고 했다가 이사회에서 제동을 건 것이다. 한마디로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이 고령의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을 등에 업고, 차남 신동빈 회장 체제를 무너뜨리려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한 것이 된다.
         문제는 장남 신동주가 처음에 해임했던 인물들에 포함된,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쓰쿠다 다카유키가 예전에 신격호 총괄회장으로부터 "잘 부탁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점. 그런 쓰쿠다를 신격호+신동주가 다시 해임했다는 것은 신격호 회장이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 장남에게 설득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기자들의 분석이 있다. 하여 차남 신동빈 측에서는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는 것. 이 때 롯데 자이언츠 구단주 대행 [[신동인]] 역시 신동주의 쿠데타에 가담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무능함의 대명사이자 롯데 자이언츠 CCTV사건에도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는 [[신동인]]이 드디어 짤릴 수 있다면서(…). ~~롯데 자이언츠 팬들: 신동빈 회장님! [[신동인]]부터 잘라 주세요!~~
         어쨌든 이로 인해 본인은 1948년 회사설립 이후 처음으로 일본롯데의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이고 신동빈 체제가 확고하게 굳어질 것으로 보인다. 귀국 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277&aid=0003552220|엄청난 취재진이 몰려 곤욕을 치렀다]].
         그런데 [[2015년]] [[7월 30일]] 신동주 부회장이 일본롯데에 대해 [[주주총회]] 소집을 요구했고 그 골자가 신격호 회장의 복위(+ 신동주 부회장의 복위)라고 한다. 신동빈 회장은 펄펄 뛰는 중이라고. 또한 신동주 측에서 "아버지 신격호 역시 신동빈+쓰쿠다를 그만두게 했다"라며, 이와 관련한 신격호의 (일본어) 육성 녹음 파일을 공개하면서 상황이 묘연해지고 있다. 신격호가 이전에 쓰쿠다에게 "잘 부탁한다"라고 한 것은 "(그만두고 나서도) 다른 데 가서 잘 하라"는 덕담이었다는 것(…). [[http://joongang.joins.com/article/912/18364912.html|기사]] 신동빈 쪽에서는 "롯데 경영 전반에 있어 아버님(신격호)의 의중이 중요하긴 하지만, 신동빈+쓰쿠다 해임 지시는 제대로 된 절차 없이 이루어진 것이므로 따를 수 없다"며 맞서는 중. 신격호의 장녀 신영자는 신격호+신동주에 가세하는 양상. 하지만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105475|2011년에 신동빈을 한국 롯데 회장에 임명해 놓고 그런 적이 없다고 하는 등]]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모습을 보여 정말 신격호가 판단력에 문제가 없는 것인지도 의심 되었었다.
         2015년 8월 2일 신동주 부회장이 인터뷰에서 한 발언에 따르면 6월달에 롯데그룹의 중국 진출 과정에서 손해가 발생한 것에 대해 신동빈 회장을 추궁하던 중 격노하여 [[싸닥션|뺨을 때렸다]]고 한다.[[http://media.daum.net/economic/others/newsview?newsid=20150802160754458|#]] (...) 결국 8월 28일에 있던 일본 롯데홀딩스 주주총회에서 신동주 측의 안건이 죄다 부결됨에 따라 1차 표결은 신동빈 측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2016년 2월 12일, 신동주는 신격호가 경영관 분쟁과 관련해 인터뷰하는 동영상과 친필 서명이 들어간 일본어 문서를 공개했다. 일본말로 진행된 해당 인터뷰에서 신격호는 “당연히 장남인 신동주 전 부회장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했다. 또 신동빈을 롯데에서 추방해야한다는 내용도 남겼다. 문서는 2015년 12월 30일자 서명이 있었다. [[*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068|#]]
         하지만 2016년 3월과 6월에 두 차례에 걸친 일본 롯데홀딩스의 주주총회에서 또 다시 신동주 측의 안건은 죄다 부결되면서 신격호의 롯데그룹 자체의 장악력이 이제는 떨어진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2017년 6월 24일 일본 롯데홀딩스 주주총회에서 자신의 이사직 재선임안이 통과되지 않음에 따라 결국 회사의 경영일선에서 모두 물러나고 말았다. 4차에 걸친 신동주 vs 신동빈의 싸움에서는 신동빈의 완승으로 끝나게 되었고, 신격호는 자신이 세운 기업의 경영 일선에서 불명예 퇴진하게 되었다.
         신격호 회장의 현재 부인이자, [[신동주]], [[신동빈]]의 어머니는 [[일본인]]인 시게미츠 하츠코인데, 그가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 외무상[* 한국의 외교부 장관]을 지냈던 A급 전범 [[시게미츠 마모루]]의 외[[조카]]라는 설이 있다.
         전범 연관설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98년]]에 출판된, 언론인 출신 정순태씨가 쓴 책 ‘''신격호의 비밀''’이란 책이다. 롯데그룹의 A급 [[전범]] 집안의 비호 아래 [[일본]]에서 승승장구했다는 것이다. [[http://www.factoll.com/page/news_view.php?Num=1909|#]] [[https://www.youtube.com/watch?v=l9uU8BpuQlo|#]]
  • 신석린
         '''신석린'''(申錫麟, <small>일본식 이름:</small> 平林麟四朗, [[1865년]] [[1월 9일]] ~ [[1948년]] [[2월 14일]])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이를 진압, 시위대 해산을 독려하던 단체인 [[자제단]]의 대구지부 창립에 참여했다.
         [[한성부]] 출신으로 어릴 때는 한문을 수학했다. [[1896년]]에 [[오사카 시]]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등 일찍부터 [[일본]]을 오가며 개화파로 활동했다. 일본 정치인 [[하야시 곤스케]]와는 친밀한 사이였다. 그뒤 [[1897년]] [[서재필]], [[양기탁]], [[윤치호]], [[안창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에 참여하였다.
         일본 정치인 [[하야시 곤스케]]와 친밀한 점이 문제가 되어 곤욕을 당했다. 이 때문에 하야시가 공사로 대한제국에 파견되었을 때, [[민영기 (1858년)|민영기]]의 추천으로 [[시종원]]에서 근무하며 일본공사관과 [[대한제국 고종]] 사이를 오가면서 총애를 받았다.<ref>{{서적 인용
         |장=광무 3년(1899) - 1899년 11월}}</ref> 정치적인 조작 사건에 휘말려 귀양을 가기도 했으나, 일본의 세력이 강해진 [[1906년]]에는 [[웅천군]] 군수, [[1908년]]에는 [[창원부]] 부윤을 맡는 등 지방관을 지냈다.
  • 신세휘
         그 후로 [[여초 사이트]][* [[아이유/소아성애 컨셉 논란]] 부터 시작하여, 로리타 관련 의혹에 부정적인 반응이 많다.]에 신세휘 관련 글이 올라오면 댓글에서 "힝"을 하나씩은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일본]] [[자위대]]의 군기가 표지에 사용된 책 사진을 게시했다는 논란이 있었으나 이와 관련하여 해명한 일은 없었다.[* 현재 사진은 삭제한 상태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인도 콘셉트 캐릭터에 후광 효과를 주기 위해 욱일기와 유사해 보이는 문양을 넣은 노트였다.] 신세휘 본인의 공식 입장은 사과문이지만, 억울한 심정인 듯 하다.
  • 신은미
         보수단체 '활빈단' 대표는 신은미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201412112485o 고발]해 대한민국 경찰 당국은 신은미에 대해 출국 정지를 요청했다. 대한민국 검찰 당국으로부터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신은미는 강제 출국 조치를 받았고 5년 동안 대한민국 입국이 금지되었다. [[2015년]] 여름에는 [[일본]]에서 순회 강연을 열었다.
  • 신응희
         무관으로 재직하며 [[박영효]]의 심복이 되었으며, [[1883년]](고종 20년) [[5월]] [[김옥균]], [[박영효]] 등의 추천으로 [[일본]]으로 유학, [[일본]] [[도야마 하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8월]] 귀국하였다. 이후 남행부장 겸 사과, 후영군사마 등을 역임하여 [[갑신정변]] 거사에 참여하였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조선 고종|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景祐宮)으로 모셨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정변이 3일만에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6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왔으며, [[1886년]] [[5월]]에는 [[박영효]], [[김옥균]]을 암살하려고 [[조선]] 조정이 파견한 [[지운영]](池運永)을 [[김옥균]]의 유인책으로 [[유혁로]], [[정난교]], [[이규완]] 등과 함께 유인하였다. 김옥균, 박영효에게 불만이 있는 척 가장하여 한참 안심시킨 뒤 [[지운영]]을 유인하여 암살 계획을 폭로하였다.
         [[1894년]](고종 30년) [[7월]] 사면을 받고 귀국, [[박영효]]의 심복으로 활동했으며 [[1895년]] [[박영효]], [[유혁로]] 등과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했다가 [[유길준]]의 밀고로 폭로되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을사 보호 조약]] 이후 사면받고 귀국, [[중추원]]부찬의, [[1908년]](융희 2년) [[전라남도]][[관찰사]], 겸임 [[전라남도]][[재판소]] [[판사]]를 지냈으며, [[1910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전라북도]][[도지사|도장관]], [[1919년]] [[전라북도|전북]][[도지사]]를 역임했다.
         ==== 일본 유학과 귀국 ====
         [[1883년]](고종 20년) [[5월]] [[김옥균]], [[박영효]] 등의 주선으로 [[서재필]], [[정란교]], [[이규완]] 등 13명과 함께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게이오기주쿠 대학교|게이오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웠고, [[1883년]] [[10월 3일]] [[일본 육군]]의 [[부사관]] 양성기관인 [[육군 도야마 하사관학교]]에 입학, [[1884년]] 5월에 졸업하였다.<ref name="hang1">1883년 5월~행동대원으로 활동했다.: {{서적 인용
         |쪽=174쪽}}</ref> 1883년 5월 그는 일본에 건너가자 마자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신중모]] 등과 [[게이오기주쿠 대학교|게이오의숙]]에 입학했으며, 그는 [[10월 3일]]에 [[게이오기주쿠 대학교|게이오의숙]]을 수료하고 [[도야마 하사관학교]]로 진학하였다.<ref>서재필은 1884년 1월, 이규완은 1884년 2월에 게이오의숙을 수료하고 도야마 하사관학교로 진학하여 각각 진학 시기가 다르다.</ref>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행동대원으로 활동했다.<ref name="hang1"/>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행동대의 1개 부대를 이끌고 [[서재필]], [[정난교]], [[서재창]], [[윤경순]], [[유혁로]], [[이규완]] 등과 함께 생도들, 장사패들을 이끌고 궐내에 잠입하였다. 그는 [[서재필]]의 부대, [[이규완]]이 인솔하는 부대와 함께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국왕과 비빈들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겼다. 그러나 [[12월 7일]]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이규완]] 등 10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886년]](고종 23) [[박영효]], [[서광범]], [[이규완]],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이듬해 그는 [[박영효]] 등과 함께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1896년]] 다시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망명생활 중 그는 [[도쿄사범학교]](東京師範學校)를 다녔다. 그는 일본에 체류하며 [[유혁로]], [[정난교]] 등과 함께 [[박영효]], [[김옥균]]의 경호를 담당하였으나 어느정도 거리를 두었다. [[1886년]] [[5월]] [[이규완]]이 [[지운영]](池運永)이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임을 간파하자, [[김옥균]]의 지시로 [[유혁로]], [[정난교]] 등과 함께 김옥균, 박영효에게 불만이 있는 척 가장하여 김옥균 암살밀지를 받고 일본으로 온 지운영을 유인, 그를 안심시킨 뒤 [[조선 고종|고종]]의 밀서와 비수, 칼 등을 압수하였다. [[1888년]](고종 23) 다시 배편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894년]] 초 귀국하였다.
         [[1894년]] [[일본]]으로 잠입한 [[홍종우]]가 [[김옥균]]을 만나려 할 때, 주선하여 [[홍종우]]를 [[김옥균]]과 만나게 했다. 그러나 [[이규완]], [[유혁로]] 등의 극력 만류에도 김옥균은 그해 [[3월]] [[홍종우]]를 신뢰하여 함께 [[상하이]]로 떠나게 된다. 김옥균이 떠난 뒤에는 도쿄사범학교의 공부와 [[박영효]]의 경호에 전념하였다.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 여인 신매자(申梅子)와 결혼, 1남 7녀를 두었다.
         [[1894년]](고종 30년) [[7월]] 비밀리에 환국, 그해 [[11월]] [[통위영]] [[정령관]](統衛營副領官)에 임명되었다. [[1895년]] [[1월]] [[대한제국]] 육군 [[정위 (관직)|정위]](正尉)가 되어 [[훈련대]](訓練隊)에 배치되었고, [[2월]] [[훈련대]] 제1대대장이 되고 [[육군]][[참령]](陸軍參領)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그는 [[박영효]],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등과 함께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했으나, [[유길준]]의 밀고로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이 실패로 돌아갔다. [[1895년]] [[12월]] [[박영효]], [[오세창]], [[이규완]], [[권동진]], [[우범선]], [[이두황]], [[정난교]]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5년 12월 말 다시 입국했으나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8년]](광무 1년) [[9월]]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의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1904년]] [[4월]] 중순 [[조선 고종|고종]]은 주한일본국공사관에 조선인 출신 정치적 [[난민]] 신청자 중 [[박영효]], [[유길준]], [[장박]], [[조희연]], [[이두황]], [[이진호]], [[권동진]], [[구연수]], [[정란교]], [[이규완]], 이범래, 신응희 등 14명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나머지 다른 망명객은 송환할 것을 요청하였다. 주한일본공사는 [[4월 14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이들의 송환을 거절하였다.
         [[1905년]](광무 8) [[11월]] [[을사 보호 조약]] 이후 환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07년]] [[4월 27일]] 아버지 신식의 부음을 [[전보]]로 보냈으나, 분망하지 못할 이유가 있다며 다른 사람을 보내 치상을 대신하게 했다.<ref>"送人慰問",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27일자 2면, 잡보</ref>
         [[함경남도|함경남도 장관]] 재직 시 [[일본]]과 [[미국]]의 어업 도구와 그물 등을 들이고 양식업을 독려하여, 함경남도 일대의 어업 생산량을 늘렸다. 특히 [[조선총독부]]의 평에 의하면 "[[전라북도]] 서호진(西湖津) 이북의 어업이 舊來의 면모를 일신하여 융성해지고 관내의 저금 액수가 장관의 독려로 이상 증대를 초래한 치적이 있다고 평가됨"이라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측의 인사자료에 의하면 한 도의 장관으로서 백성들에게 털끝만한 위엄이라도 실추하지 않는 것만을 염려하며, 부하가 직무를 행할 때 큰 일 작은 일을 불문하고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다. 한편 그의 일본인 부인 신매자(申梅子)가 [[3.1 운동]] 전후하여 한때 [[대한애국부인회]]에 관여하여 부인회 함흥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24년]] [[4월]]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만든 내선융화단체인 [[동민회]]의 결성에 참여하고, 동민회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동민회]] 본부 이사, [[1927년]] [[동민회]] 상담역의 직책을 맡았다. [[1926년]] [[11월]] [[경성부]][[부군면협의회|부협의회]] 의원 후보자로 추천되었으며<ref>"京城府協議員 公認候補如此", 동아일보 1926년 10월 16일자 2면, 사회면</ref>, [[11월 20일]]의 투표에서 113표를 받아 6위로 낙선하였다.<ref>"日人 十八名에 朝鮮人 十二名", 동아일보 1926년 11월 22일자 2면, 사회면</ref> [[1928년]] [[2월 12일]] 중추원 참의로 재직 중, [[경성부]] 종로구 도렴동 자택에서 [[급성폐렴]]으로 사망하였다.
         * 부인 : 신매자(申梅子), [[일본]]인
  • 신적강하
         [[일본]]에서 황족을 신하(臣下)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고대 율령제 시대에 일본의 황족은 성씨가 없으며, 다양한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이 같이 황족을 무한정으로 늘릴 수는 없기 때문에, 덴노의 직계에서 일정 이상 멀어진 황족은 성씨를 주고 황족에서 제외하여 신하의 신분으로 만드는 조치를 취했다. 이것을 신적강하라고 한다. 신족강하가 원인으로 고대 일본의 귀족과 무사는 많은 수가 황족에 기원을 두고 있다.
         사실 신적강하가 이루어진 가장 주요한 원인은 '''일본 황실의 재정난'''(…)이다. 황족은 방치해두면 자연적으로 번식(…)하면서 그 숫자가 지속적으로 불어날 수 밖에 없고, 아무리 혈통이 먼 황족이라고 해도 황족으로서 품위 유지를 위해서 어느 정도 비용을 지출해줘야 하는데 이런 황족의 숫자가 불어나면 재정에 큰 부담이 된다.
         황족을 깔끔하게 신적으로 옮겨서 --호적을 파버린-- 정리해고한 일본의 사례는 비교적 불어나는 황족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재정압박 문제에 잘 대응했다고 볼 수 있는 편. 황족이나 왕족은 특권계급이라서 세월이 가면서 우대해줘야 하는 특권계급의 숫자가 불어나면 재정압박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의외로 많은 왕조들이 이런 문제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물론 일본과 명나라와는 시대적 차이, 관습적 차이가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서 명나라와는 달리 일본은 섬나라라서 대외 침략의 위험이 적었고, 일본 황족은 관습적으로 친족 내의 근친혼이 권장되었기 때문에 근친결혼으로 황족의 숫자가 늘어나는 속도를 약간 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황족 문제에 대처가 거의 없으면 고작 200년 만에 국가 재정이 파멸적인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류:일본사]]
  • 신칸센
         [[일본]]의 [[고속철도]].
         [[분류:일본어]]
  • 신팔균
         [[1907년]] 8월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당하자 신팔균은 군 복무를 그만두고 낙향하여 향리인 진천군 [[이월면]](梨月面) 노원리(老院里)에서, 이월청년학교(梨月靑年學校)를 설립하였다. [[1909년]] [[안희제]], [[서상일]] 등이 조직한 비밀 결사 [[대동청년당 (1909년)|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담하면서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경남 동래에서 결성되어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된 대동청년당에는 [[윤세복]], [[김동삼]], [[이원식]](李元植), [[김사용]](金思容), [[윤병호]](尹炳浩) 등 80여 명이 참가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활동을 하였다.
         이무렵 그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임관했다가 만주로 탈출해온 [[지청천]], [[김경천 (1888년)|김경천]]과 만나게 되었는데, 마음이 통한 세 사람은 '하늘 천(天)'자를 넣어 새 이름을 지어 가졌다고 한다. 신팔균은 '동천(東川)'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세 사람을 묶어 '남만삼천(南滿三天)'이라고 불렀다.<ref>《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09051742381&code=210000 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 Ⅲ 러시아편-5. 시베리아 항일영웅 김경천] (2005.9.5)</ref>
         [[1920년]] [[경신참변]] 이후 남만주 지역으로 이동한 뒤, [[1922년]] 6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 [[광한단]] 등 8단9회(八團九會)의 여러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이 집결하여 군정부 성격인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로 통합되고, 2개월 뒤 다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설치되자 대한통의부 의용군의 사령장(司令長)과 군사부 위원장을 맡았다. 대한통의부 의용군은 국내로 진공하여 [[평안북도]] 등에서 일본 경찰과 전투를 벌이는 등의 전적을 쌓았다. 내부 이념적 갈등으로 [[의군부]](義軍府)가 분리되고 [[참의부]](參義府)로 이탈하여 세력이 약해진 대한통의부를 [[현익철]](玄益哲)·[[김창환 (1872년)|김창환]](金昌煥) 등과 힘을 모아 재건,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4년]] 7월 2일 독립군의 훈련지인 흥경현 왕청문 이도구(興京縣 旺淸門 二道溝) 밀림 속에서 무관학교 생도와 독립군 합동군사훈련 중, 중국인 마적의 기습 공격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일본 제국|일제]]가 아닌 중국인들과 싸우다 전사하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했다 하나, 이들 마적단의 기습은 일제의 사주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분류:1882년 태어남]][[분류:1824년 죽음]][[분류:작전 중 사망자]][[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분류:서로군정서]][[분류:통의부]][[분류:육군무관학교 동문]][[분류:평산 신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
  • 신해철
         넥스트는 이후에도 멤버교체가 있었고<ref group="주">2집 앨범작업 막바지에 합류한 것으로 알려졌던 기타리스트 임창수가 음악적 견해 차이를 이유로 2집 발매 두 달도 지나지 않아 팀을 떠났다. 대신 그룹 다운타운 출신의 김세황이 기타리스트로 영입되었다. 그리고 1995년 3월에는 신해철의 솔로 투어때 베이스를 맡았던 김영석이 영입되었다.</ref>, [[1995년]]에는 세 번째 앨범 《''[[The Return of N.EX.T Part 2: World]]''》를 발표하였다. 이 앨범은 세상(World)을 주제로 한 컨셉앨범으로서,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en:Burrn!|Burrn!]]'이라는 일본의 유명 록 음악 잡지에 소개되었으며, 음악평론가 마쯔다 야스히로({{llang|ja|松田頂光}})로부터 '올해 나온 음반 중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일본에서 정식 수입음반이 아닌 해적음반으로 수만 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렸다. 또한 같은 해 2월 4일, COEX 대서양관에서 넥스트의 첫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1집 발표 후 신해철의 군입대, 대마초 사건, 멤버교체 등의 우여곡절 때문에 넥스트의 첫 콘서트는 결성 후 4년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표가 모두 매진된 것은 물론 COEX에서 열린 유료공연 사상 최고의 입장객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공연을 하였다.
         한편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2008년, 신해철은 음악평론가 [[임진모]]와의 했던 인터뷰에서 넥스트 해체의 배경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털어놓았다. 이 인터뷰에서 신해철은 넥스트 해체의 결정적 계기는 일본진출 제의 수용 여부에 대한 멤버들간 의견차이였다고 밝혔다. 해당 인터뷰에서 신해철은 당시 공연 위주의 활동을 하는 록밴드의 입장에서 국내 시장이 너무도 좁아서 질식할 것만 같았다고 하였다. 2주일이면 전국 투어가 끝날 정도로 작은 국내 공연 시장 크기에 답답함을 느꼈다고 회상하였다. 그러던 차에 일본 쪽에서 넥스트 측에 일본시장 진출을 제의해왔는데, 당시 일본 측 관계자는 "일본은 전국투어를 할 경우 현 단위까지 다 돌아서 전국투어가 1년 내로 종료가 안 되는 나라"라는 얘기를 하였고, 이것이 자신(신해철)의 구미를 자극했다고 하였다. 한편 일본 측 관계자들은 일본 진출시 넥스트 멤버들이 일본에 체류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였다. 이 조건에 대해 넥스트의 멤버들이 거부했었다고 하였다. 이에 신해철은 넥스트 라인업을 교체하느냐, 밴드 자체를 없애느냐의 기로에 있었고, 멤버들에게 예우를 해주고 싶어서 후자, 즉 밴드를 없애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ref>[http://www.izm.co.kr/contentRead.asp?idx=19522 2008.08. izm, 신해철 인터뷰(인터뷰어 임진모)]</ref><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241&aid=0002485698{{깨진 링크|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241&aid=0002485698 }} 일간스포츠, 2015-10-25, 고(故) 신해철, '살고 싶어했던 마왕의' 마지막 인터뷰</ref>
         [[2002년]]에는 4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김수철 (1957년)|김수철]]의 트리뷰트 앨범 《Pops & Rock》에서 〈이대로가 좋을뿐야〉를 리메이크 했고, [[한일 월드컵]] 직전에 [[붉은악마]] 회원용으로 배포된 《꿈★은 이루어진다》앨범에 〈Into the Arena〉([http://tirano.egloos.com/4051593 탄생비화 1], [http://tirano.egloos.com/4051798 탄생비화 2])를 만들어 수록했다. 또 그 당시까지 신해철이 발표한 모든 음악 중 본인이 선곡한 노래들을 담은 박스세트 《''[[The Best of Shin hae-Chul - Struggling]]''》을 발매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유학시절 만나 교제해오던 미스코리아 출신의 회사원 윤원희와 일본의 한 성당에서 비공개로 결혼식을 올렸다.<ref>{{뉴스 인용|출판사=연합뉴스|제목=가수 신해철씨, 일본서 결혼|저자=연합뉴스|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246603|날짜=2002-09-29}}</ref> 같은 해에는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새천년민주당]] 후보였던 [[노무현]]의 지지 유세 및 선거방송을 하기 위해 진행하고 있던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 스테이션을 잠시 중단했다가 선거가 끝난 후, 같은 해 [[12월 20일]] 복귀하였고,<ref>{{뉴스 인용|출판사=한국일보|제목=대선 끝났으니 다시 연예인으로|저자=한국일보|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0164746|날짜=2002-12-20}}</ref> {{날짜|2003-04}} 봄 개편 시기에 방송은 막을 내렸다. 또한 이 시기에는 비트겐슈타인의 데빈과 임형빈, [[독일]]의 밴드 톡식 스마일의 기타리스트 안회태<ref>{{뉴스 인용|출판사=세계일보|제목=가수 이덕진과 록 밴드 제라를 만나다|저자=뉴스팀|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2&aid=0002537845|날짜=2013-06-05}}</ref>, [[닥터코어 911]]의 [[베이시스트]] [[쇼기 (음악가)|쇼기]] · [[드럼셋|드러머]] 이용준과 함께 가칭 '신해철 밴드'를 결성하여 훗날 재결성되는 넥스트의 초석을 다진다.
         [[2003년]] 신해철은 여러 음악인들이 참여한 프로젝트 앨범 《Project X》에서 [[싸이]]와 함께 작업한 곡을 수록하였다. 또 일본 대전액션 게임 '[[GUILTY GEAR]] XX #Reload'의 한국버전 음악을 수록한 앨범을 작업했는데<ref group="주">이것은 일본에서 반응이 좋아 한국버전 음원이 담긴 앨범이 일본 내에 한하여 따로 발매되었다.</ref> 이 OST는 일본 현지에서의 반응이 좋아 따로 음악만 일본에서 CD로 발매되기도 하였다. 10월부터는 [[MBC FM4U]]에서 ‘고스트 스테이션’의 다른 이름인 ‘[[고스트네이션]]’ 방송을 시작하게 된다. [[2004년]]에는 새로운 라인업으로 재결성한 [[N.EX.T|넥스트]]의 다섯 번째 정규앨범이자 저예산 레코딩 방식으로 제작한 더블앨범 《[[The Return of N.EX.T Part 3: 개한민국]]》을 발매하였다. 이 앨범은 일본의 'Euro Rock Press'라는 록 음악 잡지에서 평론가의 리뷰를 통해 수작으로 평가받은 이력이 있다. [[2005년]]에는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i]]와 공동출자 형식으로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 매니지먼트 회사인 싸이렌(SIREN)을 설립했다. 또 같은 해에 라디오 프로그램이 개편되면서 고스트네이션은 1시간으로 방송 시간이 줄어들었고, 주파수도 MBC 표준FM으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MBC에서 방송되었던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 시즌2에 안드레 대교주 역으로 출연하였다.
         * 신해철은 아내에 대한 각별한 사랑으로 많이 알려져있다. 그의 9살 연하인 아내 윤원희는 [[재일 한국인]] 출신으로 [[미국]]의 명문 여대인 [[스미스 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또한 [[골드만삭스]] (※[[일본]]지사)에서도 잠시 근무를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미스코리아]] 대회에도 출전했던 적이 있었다. (미스코리아 뉴욕 진 출신) 신해철과 윤원희가 교제중, 윤원희가 암 투병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해철은 윤원희를 그저 단순한 연인사이의 친구가 아닌, 부부관계에 있어 부인의 한 남편으로서 그녀를 돌봐야 한다며 [[2002년]] [[9월 29일]] 일본의 모 성당에서 비밀리에 결혼을 올렸다. 그의 아내 윤원희가 암을 완치한 이후, [[2006년]] [[9월 14일]] 결혼 4년 만에 첫 아이인 딸 신지유를, [[2008년 7월]] [[7월 15일|15일]]엔 둘째 아이인 아들 신동원을 얻었다. 고스트스테이션 방송에서 자신의 아내를 '영숙이', 딸을 '동동이', 아들을 '동생이'로 부른다고 나온다. 넥스트의 여섯 번째 앨범 《[[666 Trilogy Part I]]》의 자켓에도 위의 명칭을 사용한 바 있다.<ref>[http://www.iworld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92686]</ref><ref>[http://www.iworld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77566]</ref><ref>[http://star.mt.co.kr/view/stview.php?type=1&no=2008111911111190930&outlink=1]</ref>
  • 신현준(군인)
         부모를 따라 일찍 [[만주]]로 이주하여 [[하얼빈]]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이 [[만주]]에 세운 봉천군관학교에 [[1936년]] 4월 [[입학]]하였다. [[졸업]]한 후에는 [[만주군]] [[대위]]로 근무했으며, 이때 [[박정희]]보다 상관으로 같은 부대에 있었다. 그는 [[박정희]]를 비롯하여, [[정일권]], [[백선엽]], [[이한림]], [[김석범]], [[원용덕]], [[김창룡]] 등과 함께 국군 내의 대표적인 만주군 인맥이었다.
         [[분류:일본군/조선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한국전쟁/군인]][[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김천시 출신 인물]][[분류:1915년 출생]][[분류:2007년 사망]]
  • 신혜진
         이후 [[친척]]과 함께 [[일본]]에 [[여행]]간 [[사진]]이 [[SNS]]에 올라와 회복된 모습을 보였으나 [[WM엔터테인먼트|소속사]] 측에서는 아직까지 회복이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11&aid=0002991553|2017년 4월 컴백에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다]]. [[오마이걸]]의 완전체 컴백을 바라던 [[미라클|팬들]]은 그저 안타까워하면서도 하루빨리 완쾌되기를 바라는 중. 그래도 자필 [[편지]]를 통해 자신의 근황을 알리면서 많이 나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http://www.newspim.com/news/view/20170403000123|뉴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12&aid=0002907803|링크]]
  • 심상학
         1863년(철종 13년)부터 [[조선 철종|철종]]이 친히 주관하는 응제에 2등으로 합격한 이후, 고종이 정기적으로 주관하는 각종 응제에 3등 이상의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음서 제도]]로 관직에 올라 잠시 [[의금부]]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초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직부전시 자격을 받고 [[과거 제도|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1873년(고종 10년) 문과에 급제, [[규장각]], [[승정원]], [[홍문관]] 등에서 근무하고 [[승지]], [[이조]][[참의]], [[예조]][[참의]], [[호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881년]](고종 18)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의 변화된 모습을 파악하라는 밀명을 받고 [[어윤중]] 등과 함께 [[신사유람단]](조사 시찰단)원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파견, 근대적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귀국했으며, 귀국 직후 [[동래부]]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감찰을 하고 귀경했다. 이후 [[예조]][[참판]], 동지성균관사 등을 거쳐 [[1886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부사로 다녀왔으며, 전라우도[[암행어사]]로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협판교섭통상사무와 [[호조]][[참판]](戶曹參判), 안악군수를 역임했다.
         외교관 경력으로는 일본의 조사시찰단원 파견 4개월, 독일 등 유럽 주5개국 주차파견전권대신, [[1886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동지부사 등을 수행하였다.
         [[1880년]](고종 17) [[홍문관]] 응교, [[사헌부]] 집의, 부교리 등을 역임했다. [[1880년]](고종 17) [[8월]] [[조선 고종|고종]]이 진전(眞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할 때의 제관인 상례(相禮)로 참여, 찬례(贊禮) 이하 제관들에게 시상할 때 상을 받고 [[당상관]]으로 가자되었다. [[1881년]](고종 18)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정식 전문위원으로 선발, [[어윤중]] 등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어 4개월간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적 문물과 행정 제도를 시찰, 연수하고 돌아왔다. 귀국 직후 바로 동래부 [[암행어사]](東萊府暗行御史)에 임명되어 [[경상남도]] [[동래부]]와 [[부산부]] 지역을 암행하고 [[한성]]으로 입경하였다. [[1881년]] [[12월]] [[평안남도]] 성천부사(成川府使) 겸 성천진관(成川鎭管)으로 부임했다가 얼마 뒤 다시 되돌아왔다. 그 뒤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되어 7사(司) 가운데 [[경리통리기무아문]]의 부[[경리통리기무아문]]사(副經理統理機務衙門事)에 임명되어, 개화 정책의 실무 업무를 맡게 되었다.
  • 심윤조
         * 1991년 01월 : 주 [[일본]] 대사관 1등서기관
  • 심정 (1471년)
         [[1521년]] [[3월]] 지중추부사, [[5월]] 의정부 좌참찬을 거쳐 안당 등의 추국에 참여한 공로로 1계급 특진되자 스스로 사양하였으나 왕은 그에게 1자급을 특진시켰다. 그해 [[10월]] 다시 좌참찬에 임명되고, [[1522년]] [[4월]] [[왜구]]가 [[조선]]에 침략하자 대책을 논의하였으며, 김전, 남곤 등과 함께 [[일본]]에 끌려간 백성들의 쇄환을 건의하였다. [[6월]]에 순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 심현섭(코미디언)
         [[2000년대]] 후반, 의외로 개그보다는 정극 [[드라마]]에서 더 자주 볼 수 있었는데 몇몇 드라마에서는 약간 비중있는 [[조연]]이나 [[단역]]으로 출연했다. 재독 작가 이미륵의 일대기를 다룬 [[SBS]]-[[독일]] 합작 특집극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일본]] [[장교]]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 아게만
         [[일본]] 연예계에서 사용하는 [[은어]]로, '사귀는 [[남자]]의 운을 올려주는(혹은 출세를 돕는) 여자'라는 뜻. 반대로 남자의 운을 깎아먹는다고 생각되는 여자는 '사게만'(さげまん)이라고 한다.
         1990년에 개봉한 동명의 일본 영화가 존재한다. 여주인공인 게이샤 '나요코'를 중심으로 그녀와 관계한 남성들의 출세와 몰락을 그린 내용.
         [[분류:일본어]][[분류:은어]]
  • 아데랑스
         [[일본]]의 종합모발기업. 1968년 설립, 2007년 무렵 13개국 2백 50여 곳에 지점을 운영하고 있는, 대규모 종합모발기업이다. 가발 상품 이외에 증모, 육모 분야에서도 다각도로 탈모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남성용 브랜드 아데랑스 이외에, 여성용 맞춤가발 레디스 아데랑스, 여성용 레디메이드 가발 브랜드 폰티누(FONTAINE), 해외에서 모발이식클리닉을 전문으로 하는 보즈레(BOSLEY), 해외용 판매 브랜드 헤어클럽(HAIRCLUB) 등의 브랜드를 가지고 있다.
         2009년 5월, 아데랑스에 투자했던 미국계 투자회사 스틸 파트너스는 사외이사로서 오오츠키 타다오(大槻忠男)를 진출시켰다. 그는 일본 펩시콜라 등에서 활동한 전문경영인이다. 그리고 오오츠키 타다오는 2009년 10월 CEO로서 사장 취임, 다양한 새로운 경영 방침을 발표했다. 2010년 10월에는 사명을 "유니헤어(ユニヘアー)"로 변경, 아데랑스는 남성용 브랜드로 남기고, 가발 이외에 증모, 육모 분야로 사업을 확대한다고 발표했다.[[https://facta.co.jp/article/201109066.html (참조)]]
         [[분류:일본 기업]][[분류:모발 기업]]
  • 아동수당
         [[일본]]의 복지정책의 하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국가에서 수당을 지급하는 제도. 물론 부모가 받아가서 양육 등에 쓰라는 목적이다. 2000년대 초에 민주당 정권에서 추진되어 실행되었으나, 이후 일반 가정에서 저소득 가정 대상으로 범위가 축소되었다.
         [[분류:일본 풍속]]
  • 아라포
         [[일본]]의 속어. 40대 전후의 여성을 뜻한다. 40세 전후 35~44세의 여성을 의미하며, 이를 '아라포 세대'라고 부른다.
         [[분류:일본어]]
  • 아이린(레드벨벳)
         ||<:><#FE3E5F>'''{{{#white 국적}}}''' ||<#FFFFFF>[[일본]][[파일:대한민국 국기.png|width=30]] ||
         '''일본에서솔로데뷔를앞두고있다
         [[분류:일본 연예인]] [[분류:1991년 출생]] [[분류:시노자키 아이의동생]]
         [[분류:일본 연예인]]
         [[분류:일본 인물]]
  • 안상미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었고,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정화여자고등학교]] 3학년 때, [[일본]] [[나가노]]에서 열린 [[1998년 동계 올림픽]]에 출전하여, [[전이경]], [[원혜경]], [[김윤미 (쇼트트랙 선수)|김윤미]]와 함께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강원도]]에서 열린 [[1999년 동계 아시안 게임]]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2000년]]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세계 쇼트트랙 선수권 대회]]에서 종합 2위에 올랐다. [[폴란드]] [[자코파네]]에서 열린 [[2001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3000m와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2001년 동계 유니버시아드]]까지 국가대표로 활동했다. [[계명대학교]]를 졸업하고, [[강릉시|강릉시청]]에서 실업 선수로 활동하였다. 은퇴한 후, [[대구광역시]] 체육회 총무과에서 근무하다가, 결혼 후 [[서울특별시|서울]]로 이주했다. [[2003년]]부터 잠깐잠깐씩 해설을 맡아 오다가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해설위원 활동을 시작했다. [[SBS TV|SBS]]를 통해 [[쇼트트랙]] 해설위원으로 데뷔했으며, [[2010년 동계 올림픽|2010년 캐나다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는 [[SBS ESPN]] [[쇼트트랙]]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온라인 시민기자도 겸했다. [[2014년 동계 올림픽|2014년 러시아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도 [[SBS TV|SBS]] [[쇼트트랙]]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 안상태(코미디언)
         한참 슬럼프를 타던 시기에 [[일본]]의 [[예능 프로그램]]인 곳츠이이칸지의 한 코너를 [[표절]][* 코너 이름이 누렁이였다. 그 코너는 그 때문이었는지 오래가지 못했다.]했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좀처럼 예전의 인기를 회복하질 못했던 안 좋은 과거가 있다.
  • 안석주 (작사가)
         '''안석주'''(安碩柱, [[창씨개명|일본식 이름]]: 安田 榮 <small>야스다 사카에</small>, [[1901년]] [[4월 10일]] ~ [[1950년]] [[2월 24일]])는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삽화가]], [[만화가]], [[작가|문학가]], [[영화 각본|영화 각본가]] 겸 [[영화 감독]]이다. 호가 "석영"(夕影)이라 '''안석영'''으로도 불린다.
         [[한성부]] 출신으로 [[서울교동초등학교|교동보통학교]]와 [[휘문고등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과 미술 수업 후에 언론사 삽화 작가로 일했다. 안석영은 예술 다방면에 다양한 재주를 지닌 팔방미인형의 인물이었다. 일본 유학 후 미술, 영화, 문학, 연극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이념적으로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계열에 속해 있었다. [[박영희 (1901년)|박영희]], [[김기진]] 등과 함께 참가자들 각자의 이름 머릿글자를 따서 작명한 [[파스큘라]]에 참가하여 카프로 발전시키는 등 문예 운동 부문에서 활발한 행보를 보였다.
  • 안재모
         2004년 [[몽골]]에서 야인시대의 열풍으로 [[몽골]]의 [[나차긴 바가반디]] 대통령으로부터 국빈 초청받아 국민적 대우<ref>{{뉴스 인용|제목= '야인' 안재모, 몽골 최고 한류스타로 떴다|url= http://www.business.co.kr/bbs/view.php?tbl=os_topic_tv&no=1195&start=210&n=1168|출판사= 굿데이|저자= 홍성규 기자|쪽= |날짜= 2004년 8월 7일|확인날짜=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30917075347/http://www.business.co.kr/bbs/view.php?tbl=os_topic_tv&no=1195&start=210&n=1168|보존날짜= 2013년 9월 17일|깨진링크= 예}}</ref>와 2008년 [[일본]]에서도 팬클럽을 창단하는 등 외국에서도 좋은 반응을 받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2119390 안재모, 日서 팬 사인회 열고 활동 개시] 2008-06-09 연합뉴스</ref><ref>[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193008 한류스타들 日서 크리스마스 축제 릴레이] 2008-12-23 아시아투데이</ref>
  • 안종화
         '''안종화'''(安鍾和, <small>일본식 이름: </small>安田辰雄, <small>야스다 다츠오</small>, [[1902년]] [[1월 21일]] ~ [[1966년]] [[8월 21일]]<ref>{{뉴스 인용|url=http://gonews.kinds.or.kr/BEFORE_90_IMG/1966/08/23/19660823DAM07.pdf |출판사=동아일보|쪽=7면|제목=映畵監督 安鍾和씨|날짜=1966-08-23|확인날짜=2008-07-02}}</ref>)는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영화 배우]] 겸 [[영화 감독]], 연극인이다. 본명은 '''안용희'''(安龍熙)이다.
         [[한성부]]에서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가정에서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문예 방면에서 소질을 드러냈다. [[1922년]] [[일본]] [[도쿄]]에 체류 중이던 조선인 유학생들이 [[경기도]] [[서울특별시|서울시]]에서 창립한 연극단체 [[예림회]](藝林會)에서 문예부장을 맡아 공연예술계에 모습을 드러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13382|출판사=오마이뉴스|저자=한상언|제목=불꽃처럼 타버린 서글픈 천재 - <nowiki>[한국영화스타 1] 춘사 나운규</nowiki>|날짜=2004-10-16|확인날짜=2008-05-12}}</ref> 이때 안종화는 아들이 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몰래 함흥으로 간 것이었다.
         예림회가 해체된 뒤 [[부산광역시|부산]]에 잠시 내려가 [[무대예술연구회]]에서 참가했다가 이 단체가 일본인이 세운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주식회사]]로 흡수되면서 영화계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ref>{{뉴스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86761|출판사=오마이뉴스|저자=한상언|제목=영화로 혁명을 꿈꾼 사나이 - <nowiki>[한국영화스타6-①] 영화 배우 주인규</nowiki>|날짜=2007-01-19|확인날짜=2008-06-11}}</ref> [[1925년]] [[제주도]]에서 촬영된 《해의 비곡》에 아버지와 아들의 1인 2역으로 출연하는 등 1920년대 중반부터 영화 배우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 안창남
         [[한성부]] 출신으로, 3·1 운동 직후에 휘문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휘문고보 시절 아트 스미스의 곡예 비행을 보고 비행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ref name="한국최초">{{서적 인용
         [[일본]] [[오사카 시]] 오사카 자동차 학교에서 2개월간 자동차 운전을 배운 뒤 [[1920년]] [[봄]]에 [[오구리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비행기 제조법에 이어 조종술을 공부해 비행기 조종사가 되었다. 비행학교의 이수 과정은 6개월이었고, 학과 교육인 비행보다는 기술교육에 치중했기 때문에 6개월 과정만 거치면 조종간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종사가 되려면 비행학교 수료가 아닌 면허시험에 합격해야 했는데, 안창남이 학교를 졸업한 [[1920년]] 11월에는 자격 규정이 없었고, 이듬해인 [[1921년]] [[4월 25일]]에야 그 규정이 정해졌다. 1921년 5월 일본 최초로 치러진 비행사 자격시험에서 합격하여 비행사가 된다.
  • 안치용 (야구인)
         2008 시즌 개막과 동시에 팀 내 4번 타자 [[최동수 (야구 선수)|최동수]]가 허리 부상을 입고 [[박용택]]까지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프로 데뷔 7년 만에 주전으로 발탁이 되었고, [[5월 11일]]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대전]] [[한화 이글스|한화]]전에서 자신의 프로 데뷔 후 첫 홈런을 치는 등 [[2008년]] 5월까지 3할 5푼대의 높은 타격 스탯을 꾸준히 보여 주면서 외야수 [[이병규 (1974년)|이병규]]의 [[일본]] 진출로 취약해진 [[LG 트윈스]] 타선의 새로운 대안으로 다시 주목받았다. [[6월 26일]] 서울에서 [[KBO 리그]] 통산 13호인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였다. [[2008년]] 1군 101서울에 출장하여 타율 .295, 52타점을 기록하였다. 투타 모두가 무너진 LG 팀에서 홀로 맹타를 휘두르며, '''"난세영웅 (亂世英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10년]] 시즌 전 현금 트레이드로 [[이택근]]이 영입되고, [[일본]]에 갔던 [[이병규 (1974년)|이병규]]도 LG로 복귀하게되어 LG의 외야는 이른바 [[이진영]], [[박용택]], [[이택근]], [[이병규 (1974년)|이병규]], [[이대형]]의 '국가대표급 5인방' 으로 채워지게 되었기 때문에 팀 내에서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시즌 중에는 [[이택근]], [[박용택]] 등이 부상과 부진으로 잠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을 때에 잠시 기용되기도 했으나, 불과 1군 16서울밖에 출전하지 못하고 결국 [[2010년]] [[7월 28일]] 트레이드되었다.
  • 야규 슈메
         야규 가문의 가전 기록인 『옥영습유(玉栄拾遺)』에 따르면, 「전하기를 슈메라는 자 조선국의 종자라 한다(伝に曰く、主馬者朝鮮国の種也)」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다른 기록(야규번구기柳生藩旧記, 수은초袖隠抄 등)에 따르면 「어떤 곳에서 말하길 슈메는 타국인으로 문벌(씨氏)도 모르는 자(然る所主馬は他国人にて氏も不知者)」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어떤 사정[* 야규 신지로 요시카츠(柳生新二郎厳勝)의 적남 야규 구사부로는 임진왜란에서 조선에 갔다가 울산에서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으로 [[일본]]으로 가게 된 인물이거나, 그 자손으로 추측된다.
         [[분류:일본 인물]]
  • 야마무라 사다코
         [[일본]]의 공포 소설, 공포 영화 등으로 제작된 [[링 시리즈]]에 나오는 [[캐릭터]]. 통칭 '사다코(貞子)'.
  • 야마우바
         [[일본]] [[요괴]]의 일종. 산에 들어간 여자가 야마우바가 된다고 여겨진다.
         일본에서는 옛날 이야기나 노오, 가부키 같은 민속 문학에 자주 등장했다. 하지만 현대에는 무서운 할머니라는 외모 때문인지 별로 등장하는 매체가 없다.
  • 야마토 운수
         [[일본]]의 택배업체. 아기 고양이를 데리고 가는 부모 고양이를 디자인한 마크로 유명하여, 쿠로네코 택배(クロネコ宅配)라고도 불린다. 1919년에 창립되어 2019년이면 역사가 100년이 되는 장수 기업.
         일본 전역에 택배망이 퍼져 있으며, [[메일빙]] 등의 서비스를 하고 있다.
  • 야차원숭이
         [[바키 시리즈]]에 등장하는 생물. 일단 [[일본]]에 서식하는 [[원숭이]]의 일종으로 되어 있다.
         고대 일본에는 다수의 야차 원숭이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대에 확인 된 것은 바키의 친구가 된 야차원숭이와 그 자식 야차원숭이 Jr. 뿐.
  • 야키소바
         소바([[메밀국수]])를 볶아서 만든 [[일본]] 요리. 소스를 쳐서 마치 [[짜파게티]] 비슷한 느낌.
  • 야키우동
         [[우동]]면을 볶아서 만든 [[일본]] [[요리]].
  • 양세웅
         '''양세웅'''(梁世雄, <small>일본식 이름: </small>三原世雄<ref>{{서적 인용
         [[부산광역시|부산]] 출신으로 [[부산제이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아키네마]]에 입사한 뒤 촬영을 전문적으로 공부했다.<ref>{{뉴스 인용
         [[1932년]]에는 동아키네마에서 카메라맨으로 승진하여, 《눈물의 빛》, 《두 개의 유방》, 《그 밤의 노래》 등을 촬영했다. 양세웅은 일본에서 정식 촬영기사로 활동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1935년]]에 귀국하여 일본에서 함께 공부한 [[박기채]] 연출의 《춘풍》 촬영을 맡아 조선 영화계에 첫 선을 보였다. 이때 [[경성촬영소]]의 [[김학성 (1913년)|[김학성]]이 양세웅의 조수로 촬영에 참여했다. [[1930년대]] 중반 [[발성 영화]] 시대 개막과 함께 등장한 세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촬영기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은데다 일본 영화계의 카메라맨 경력까지 갖추고 있어 각광받는 존재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제작된 친일 영화에 촬영 담당으로 참여했다. 친일 영화 시대를 예고하는 《군용열차》(1938)를 시작으로, [[일본군]] 공군을 그린 어용 영화 《우러르라 창공({{llang|ja|仰げ大空}})》(1943),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의 친일 영화 《감격의 일기({{llang|ja|感激の日記}})》(1945), 징용 나간 남편을 참고 기다리는 여성을 통해 전시 지원을 강조한 《우리들의 전쟁({{llang|ja|我れらの戰爭}})》(1945)을 차례로 촬영했다.
  • 양진우
         '''양진우'''(楊鎭宇, [[1979년]] [[9월 3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호주]]로 이민을 가서 대학교까지 마쳤다. [[퀸즐랜드 공과대학교]] 재학시절, [[일본]] 삿포로 대학에 교환학생을 한 경험이 있어 [[영어]] 뿐 아니라 [[일본어]]에도 능통하다. 영어 이름은 '테리(Terry)'이다.
  • 양키
         [[미국인]]의 속칭, [[일본]]에서 양키(ヤンキー)라고 하면 불량청소년을 뜻하는 은어로 쓰인다.
         === 일본 ===
         일본에도 불량소년 소녀를 가리키는 은어는 많이 있지만 양키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전반에서 나타난 말이다.
         [[분류:영어]] [[분류:일본어]] [[분류:동음이의어]]
  • 엄복동
         [[1922년]]에도 전 조선 자전거 대회에서 우승하자,일본 [[심판]]들은 [[1920년]] 경성시민대운동회에서 날이 저물었다며 서울를 중단시키는 등 비상식적인 판정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엄복동은 본부석으로 뛰어든 뒤, 우승기를 잡고 꺾어버림으로써 항의했다. 이 일로 일본 관객과 조선 관객 사이에서다툼이 일어났을 정도로 조선 사람들에게 엄복동은 영웅이었다. [[1928년]] 6월 [[전국운수조합]] 대회에도 참여했으며,[[1932년]] 4월에도 40세의 나이에 전 조선 남녀자전거대회 1만m 경주에 참여하여 당당히 우승하였다.
         엄복동이 사용한 자전거는 [[영국]]의 [[자전거]] 및 [[모터사이클]] 제조 회사 러지휘트워스([[:en:Rudge-Whitworth|Rudge-Whitworth]])가 [[1910년]]에서 [[1914년]] 사이에 만들어 [[일본]]에 수출한,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전거로서 [[대한민국 문화재청|문화재청]]은 문화재 등록 당시 “전면 상표의 일련번호 ‘1065274’를 통해 세계적인 희귀 기종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 엄주명
         |최종 계급=[[일본 제국 육군]] 중위<br />[[대한민국 육군]] 준장
         사촌이자 나이도 비슷한 [[의민태자]] 이은과 어릴 때부터 [[덕수궁]]에서 함께 뛰놀며 자란 절친한 사이였다. [[1907년]]에 이은이 강제로 [[일본]]에 유학했을 때 순헌황귀비의 뜻에 따라 비공식 동행했다.<ref>{{서적 인용
         |페이지=26쪽}}</ref> 이때 [[의민태자]]가 일본에 볼모로 가기 전 그를 보고 "나는 규성이 하고 꼭 같이 갈 테야"하고 간절히 소원하니 같이 가게 됐다 한다. 그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놀고 있다가 영친왕의 눈에 띄게 되자, 그는 곧바로 [[창덕궁]]에 들렸다가 집에 들리지 못하신 채 [[일본]] [[도쿄]]로 함께 떠났다 한다. 그는 [[영친왕]], [[이토 히로부미]] 및 영친왕 수행원과 함께 선박으로 도쿄로 가게 된다. [[1908년]](융희 2)부터 1910년(융희 4)까지 [[도쿄]]시내 도리이사카의 [[영친왕]]의 관저에서 함께 생활하며, 소학교와 중학 제1학년 과정을 수학하였다. 1911년 1월 가쿠슈인 중등학과 1학년에 입학했으나 동년 9월 가쿠슈인학원 중등학과를 중퇴하고 육군중앙유년학교로 편입한다.
         후일 그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에서 [[영친왕]]이 엄귀비의 별세 소식을 듣고, 의연하게 대응하였으나 목욕탕에서 단 둘이 있을 때 통곡했다 한다. [[순헌황귀비|엄귀비]]의 부음 소식을 듣고 [[영친왕]]은 "[[목욕탕]]으로 조용히 부르시고는 "너도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지 않으냐?"하면서 통곡하더라"는 것이다.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30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임관했다. [[일본 제국 육군]] 보병 중위를 지냈으며, 1923년 진명 재단의 간사직에 취임하면서 [[진명학교]] 재단 평의원, 재단 이사에도 피선되었다. [[1938년]]에 아버지 엄준원이 중추원 참의 재직 중 사망하자 그해 [[3월 1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밖에 [[숙명재단]]의 재단 이사로도 임명되어 [[1965년]]까지 재직했다.
         |issue=제5호}}</ref> 계급은 육군 중위였다. 당시 일본군 육군 중위로 소집되어 중일 전쟁에 출정하여 중국 북부 천안부대에 복무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부에서는 그가 출정 중에 부친상을 당하고 재단 이사장에 추대된 점을 고려하여, [[1938년]] 3월중에 귀국하게 하고 4월의 신학년도에 맞추도록 예편시키고, 군부촉탁을 해제하였다. 당시 교장과 교감 외에 부교장 제도를 두어, 교감이던 이세정이 그의 귀국을 주선하였다.
         예편 이후 1956년 [[8월 18일]] [[재향군인회]] 부회장, [[1957년]] [[대한상무회]](大韓尙武會) 부회장 등에 위촉되었다. [[1959년]] [[4월 24일]] [[대한상업은행]] 주주총회에서 취체역 상무에 선임되었다. [[1960년]] [[8월]] [[일본]]을 방문하여 [[영친왕]]을 면담하고 돌아왔으며 이듬해 8월에도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이은을 문병하고 돌아왔다. [[5·16 군사정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이은의 귀국을 추진했을 때 [[김을한]]과 함께 귀국특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일본에 파견되어 이은의 병세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 [[일본육군사관학교]]
  • 엄주익 (1872년)
         군부 협판으로 재직 중이던 1904년 근대적인 군사 제도를 시찰하기 위한 차원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의 새로운 사조에 접한 당시 일본의 새 문물에 감명을 받았다. 당시 상황에서의 급선무는 교육의 보급임을 절감한 그는 귀국 이후에 안종원(安鍾元), 이철우(李哲宇), 윤정석(尹晶錫), 박용숙(朴容淑), 장현주(張炫周), 김진현(金鎭賢), 한만용(韓晩容) 등과 함께 [[양정의숙]](養正義塾)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1904년]] [[5월]] [[육군]][[참령]]이 되고 [[일본]]을 방문, 군사제도 관련 시찰을 하고 귀국했다. 그해에 [[법부]](法部) 협판, [[대한제국 육군]] 참장(參將), 군부 협판, 군부대신서리 등을 역임했다. [[1905년]] [[2월]] 서리 교츅총감이 되었다.
         양정의숙을 설립한 뒤에도 교육부총감 사무서리, 군부대신서리, 평리원 재판장, 적십자사 부사장, 육군법원장,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하였다. [[1907년]] 11월에는 [[통감부]]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의민태자]]를 배종하기도 했다. 그 밖에 [[규장각]] 지후관(祗候官), [[경선궁]] 감무(監務) 등을 역임하는 동안 서구의 신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1910년]] [[10월 2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 역병신
         [[일본]]에서 역병이나 재앙을 불러온다는 [[신]]을 통칭하는 말. 액병신(厄病神)이라고도 한다. 좋지 않은 것을 불러오는, 재수가 없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일본에서는 욕설로 쓰인다. [[병신]]과 어감이 비슷하게 느껴지겠지만 무관하다.
         [[분류:일본어]]
  • 연소조 연중조 연장조
         [[일본]]에서 [[유치원]], [[보육원] 등에서 아이들을 나이대에 따라서 나누는 '반'의 이름.(조는 한국에서는 반이라는 의미)
         [[분류:일본어]]
  • 염상섭
         [[1897년]] [[8월 3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중추원 참의 염인식(廉仁湜)의 손자이며, 가평 군수 염규환(廉圭桓)의 8남매 중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경주(慶州) 김씨, 부인은 의성(義城) 김씨 문중 출신이던 김영옥(金英玉)이다.<ref>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7%BC%EC%83%81%EC%84%AD&ridx=0&tot=1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f> 한국 근대 문학의 선구자인 그는 [[일본]] [[게이오기주쿠 대학]] 유학 시절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됐다. 귀국한 후 [[1920년]] 《[[폐허]]》동인에 가담해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1921년]] 발표한 단편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 는 한국의 첫 [[자연주의 (문학)|자연주의]]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동인]], [[현진건]]과 함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을 이 땅에 뿌리내린 작가로서 큰 공적을 남겼다. [[1936년]]에 매일신보의 정치부장, 만선일보의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1946년]]에는 경향신문의 창간 편집국장을 지내는 등 신문기자로도 많이 활동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해군 소령으로 임관되어 해군본부 정훈감실에서 편집과장으로 근무했으며, [[1954년]] 서라벌 예술대학 학장으로 취임했다.
         * 1913년 일본 도쿄 아사부 중학교 수료
         * 1914년 일본 도쿄 아오야마 중학교 수료
         * 1918년 일본 교토 제2중학교 졸업
         * 1919년 [[일본]] [[게이오기주쿠 대학|게이오 대학교 사학과]] 중퇴
         * 1911년 가을, [[일본]]으로 건너갔다.
         [[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 해군 소령]][[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한국독립당]][[분류:대한민국의 자유주의자]][[분류:보성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파주 염씨]][[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예술원 회원]][[분류:직장암으로 죽은 사람]][[분류:불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서라벌예술대학교 교수]][[분류:서라벌예술대학교 총장]]
  • 예학영
         * [[2009년]] [[6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는 마약 투약 및 밀반입 혐의로 기소된 예학영에게 징역 2년 6개월과 집행유예 4년, 보호관찰 2년, 사회봉사 200시간을 선고하였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엑스터시]]와 [[케타민]]은 환각작용이 [[메스암페타민]]과 [[LSD]]에 못지 않으나 가격이 저렴하고 경구 투약이 가능해 사회전반에 확산될 우려가 있다", "연예인들의 마약사건은 대중, 특히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부분을 감안한 필요가 있다", "예씨는 투약횟수가 많고 [[일본]]에서 마약을 밀수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라고 밝히었고, 예학영은 동료 연예인인 [[주지훈]], 지인 전모씨 등과 함께 [[엑스터시]]와 [[케타민]]을 투약하고, [[일본]]에서 밀수입하여 판매한 혐의를 받았다. 또 함께 마약을 투약한 [[윤설희]]와 [[주지훈]]에게는 각각 징역 3년과 징역 6월과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였다.<ref>{{뉴스 인용
  • 오경석
         [[청나라]]의 사행길을 여러번 수행하고 돌아온 오경석은 1840년대의 [[아편전쟁]], [[1851년]]의 [[태평천국]] 운동, 그밖에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 등으로 청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베이징]] 현장에서 보고,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자기만 개화사상을 지닐 것이 아니라 국내 지도층이 함께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청나라에서 간행된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瀛環志略)', '박물신편(博物新編)', '양수기제조법(揚水機製造法)', '중서견문록(中西見聞錄)'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귀국했다. 또한 [[일본]]을 자주 방문하던 개화승려 [[이동인]] 등과도 만나 세계정세를 논하였다.
         [[1876년]](고종 13년) [[1월 13일]] [[강화도 조약]] 직전 [[일본]]의 선박이 [[인천항]]에 나타나 항의 시위를 하자, [[강화군|강화]] [[유수]] [[조병식]](趙秉式)의 지시를 받고 [[훈도]](訓導) 현석운(玄昔運)과 함께 [[항산도]](項山島)에 정박중이던 일본측 군함의 통역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를 접견하였다. 그해 [[2월 5일]] 왜국 군함이 물러나는데 기여한 공로로 [[흥인군]] [[이최응]]의 건의로 자헌대부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강화도 조약]] 체결 과정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과로]]하여 [[일본]]의 군함이 되돌아간 직후인 [[1876년]](고종 13년) [[4월]] 쓰러졌으며, 이후 [[중풍]]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 오기노 쿄우사쿠
         [[일본]]의 [[산부인과]] [[의사]]. 일본 산부인과회 명예회장과 세계불임학회 명예회장을 지냈다.
         여성의 생리 주기를 연구하여, 배란기와 임신가능한 기간에 대한 학설을 발표, 임신수태조절이 응용되는 오기노학설(荻野学説)을 제창했다. 그의 업적을 기려 일본에서는 배란주기를 이용한 피임법을 오기노식(オギノ式)이라고 부른다.
  • 오마모리
         [[일본]]의 [[부적]].
         불교 사찰, 신도 신사에서 주로 판매한다. 일본의 오마모리는 한손으로 쥘 수 있을 법한 작은 주머니 형태를 하고 있으며, 끈이 달려 있어서 상시 휴대하고 다니기 편리하다. 광의적으로는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물건을 모두 통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분류:일본 풍속]][[분류:오컬트]]
  • 오미쿠지
         [[일본]]의 풍속, 점술. 쿠지(籤,鬮,くじ)는 [[제비뽑기]]나 추첨을 뜻하며, '오미(おみ)'는 접두사이다. 신불에게 빌면서, 제비뽑기를 하여 일의 길흉(吉凶)을 점치는 것을 뜻한다.
         [[분류:일본 풍속]] [[분류:점술]]
  • 오상순
         |학력 = [[일본]] [[도시샤 대학|도시샤 대학교 종교철학과]] [[학사]]
         [[일본]] [[도시샤 대학|도시샤 대학교]] 종교철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20년]] 《폐허》의 동인으로 한국 신시 초창기부터 활동하였다. 《아시아의 밤》, 《허무혼의 독언》 등 어둡고 절망적인 시를 주로 썼다. 1925년 보성고보의 교사를 거쳐, [[1930년]] 불교중앙학림([[동국대학교]]의 전신)에서 교편을 잡았던 인연으로 [[개신교]]에서 [[불교]]로 개종하여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특히 [[담배]]를 즐긴 것으로 유명했다.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이 되었고, [[1959년]] 예술원상,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대통령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오상순 시선》이 있으며 《한잔술》, 《첫날밤》 등의 작품이 있다.
         * [[일본]] [[도시샤 대학|교토 도시샤 대학교]] 종교철학과 [[학사]]
  • 오상순 (시인)
         |학력 = [[일본]] [[도시샤 대학|도시샤 대학교 종교철학과]] [[학사]]
         [[일본]] [[도시샤 대학|도시샤 대학교]] 종교철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20년]] 《폐허》의 동인으로 한국 신시 초창기부터 활동하였다. 《아시아의 밤》, 《허무혼의 독언》 등 어둡고 절망적인 시를 주로 썼다. 1925년 보성고보의 교사를 거쳐, [[1930년]] 불교중앙학림([[동국대학교]]의 전신)에서 교편을 잡았던 인연으로 [[개신교]]에서 [[불교]]로 개종하여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특히 [[담배]]를 즐긴 것으로 유명했다.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이 되었고, [[1959년]] 예술원상,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대통령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오상순 시선》이 있으며 《한잔술》, 《첫날밤》 등의 작품이 있다.
         * [[일본]] [[도시샤 대학|교토 도시샤 대학교]] 종교철학과 [[학사]]
  • 오세창
         개화파 중인 역관 [[오경석]]의 아들로 조선 말기에는 개화운동에 동참했고, [[을미사변]]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했으나 [[190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귀국 후 [[만세보]], [[대한민보]]의 대표이사로 언론 활동을 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과 [[천도교]] 사역 활동에 종사하였으며 [[1918년]] 말부터는 만세 운동 계획에 참여, [[1919년]] [[3월]]의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예술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서예가이기도 했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 직후 [[권동진]], [[정난교]] 등과 함께 화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다.<ref>"生物進化論을 修正케한 世界的植物學者", 동아일보 1950년 01월 22일자 2면, 사회면</ref> 그러나 그는 직접적인 혐의점이 없어 곧 귀국했다.
         [[1896년]](건양 1년) [[일본 문부성]]의 외국어학교 교사 초빙 당시 초빙되어, [[도쿄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부임하였다. [[1897년]]에는 정식으로 [[토쿄외국어학교]]에 조선어과 교사로 파견되어 [[일본]]에서 1년 가량 교사 생활을 하면서 근대 문물을 직접 접했다.
         [[1902년]](광무 5년)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 후일 [[권동진]]은 [[삼천리]] 誌자에 당시 망명중이던 자신의 옛 동지를 소개할 때 한 사람으로 그를 소개하였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일본]] 조정에 계속 사람을 보내 망명객들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일본]]에서는 이를 거절했다.
         [[1902년]]부터 일본에 망명해 있던 중,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만나 [[손병희]], [[양한묵]](梁漢默) 등의 거듭된 권고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6년]] 천도교 기관지를 겸한 일간지 《[[만세보]] (萬歲報)》 사장으로 계몽 운동을 펼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1907년]] [[3월]]에는 [[의친왕]]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갔다가 천장절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그해 [[7월 10일]]에 귀환하였다. [[11월]]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부찬의(中樞院副贊議) [[주임관]]2등(奏任官二等)에 임명되었다.
         이후 [[대한협회]](大韓協會)의 부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1909년]] [[대한협회]]가 창간한 일간지로서 반일 논조를 분명히 한 《[[대한민보]]》 사장도 맡았다. 천도교 내부에서는 [[권동진]]과 함께 개화에는 찬성하되 일본과의 합병에 반대하는 이른바 문명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합병 청원으로 개화할 것을 주장하는 [[일진회]] 계열과는 대립하여 결국 [[이용구]]를 몰아냈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오세창은 [[경성부]]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 요리집에 [[손병희]], [[최남선]] 등 민족대표자들과 함께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데 함께 서고, 대한독립 만세삼창을 외쳤다. 바로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성]]경시청 총감부에 구금되었다. 이후 항소하였으나 유죄 판결을 받았다.
  • 오소영 (조각가)
         '''오소영'''(吳素英, [[1960년]] ~ )은 [[일본]]의 [[살인 조각가]] 겸 대학 교수이다. 본관은 [[해주 타씨|해주]](海州)이며 [[호 (이름)|아호]](雅號)는 추량(秋凉)이다.
         [[분류:일본 인물]]
  • 오승희
         {{일본아이돌 정보
         | 출생지 = [[일본]] [[도쿄도]]
         | 소속그룹 = [[모닝구 무스메 (일본아이돌)|모닝구 무스메]]
         '''오승희'''(吳承姬<ref name="hanja">[https://www.facebook.com/Umusic.JKPOP/photos/a.260040747449.141783.251736272449/10154571559607450/?type=3 모닝구 무스메 한자 자필]</ref><ref>[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1/2017082102498.html [더스타프로필] 오승희 "모닝구 무스메만의 리얼리티 찍고 싶다…빅재미 드릴 것"] {{웨이백|url=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1/2017082102498.html |date=20170912003602 }} 2017-08-25</ref>, [[1995년]] [[10월 10일]] ~ )는 일본의 가수로, [[모닝구 무스메]]의 서브보컬이다.<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aWRTsHtA9zY|title=Debut Greeting at 모닝구 무스메 SHOWCASE|first=|last=보따리 bottari|date=2015-03-25|publisher=|accessdate=2017-08-12|via=YouTube}}</ref><ref>{{웹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now/read?oid=311&aid=0000587211|title=[XP★SHOT] 모닝구 무스메가 궁금해? 안전담당부터 보호본능까지③|publisher=xportsnews|date=2016-03-15|accessdate=2017-08-12}}</ref><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y0Rau6SssxE|title=칯트키 Live - “PRODUSORN” EP02: LIFE AS A GIRL GROUP|first=|last=Cube Ent|date=2017-04-25|publisher=|accessdate=2015-03-18|via=YouTube}}</ref><ref>{{웹 인용|url=https://m.facebook.com/모닝구 무스메.UnitedCube/photos/a.1511382879116331.1073741828.1489401217981164/1558678227720129/?type=3&source=54|title=CLC Facebook:Seunghee|date=2017-03-14}}</ref><ref name=supertv>2018-04-06,XtvN,SUPER TV EP11,「메인래퍼、은지」「센터、은지」「리드보컬、모닝구 무스메」「리더、모닝구 무스메」。</ref>
         [[분류:1990년 태어남]][[분류:도쿄도 출신]][[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일본의 여자 가수]][[분류:일본의 가수]][[분류:일본의 아이돌]][[분류:1997년 데뷔]][[분류: 충쿠 소속]][[분류:모닝구 무스메의 일원]]
         [[분류:일본 아이돌]]
         [[분류:일본 아이돌]]
  • 오오반후루마이
         원래는 밥과 전복, 매실장아찌, 해파리, 식초와 소금을 차린 밥상인 '오반'에서 유래했다. [[일본]] 전국시대 시기까지는 정월에 아랫사람이 이 '오반'을 윗사람에게 헌상하는 것이 의례였으나, 에도 막부 시대에 이르러서는 윗사람이 부하들을 대접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분류:일본어]]
  • 오위영
         '''오위영'''(吳緯泳, [[1901년]] [[5월 5일]] ~ [[1978년]] [[10월 2일]], [[울산광역시|울산]])은 [[일제 강점기]]의 금융인이자 대한민국의 금융인, 정치인으로 제2·4·5대 국회의원이었다. 일본 고베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초계ㆍ진해금융조합이사, 조선신탁은행 두취(은행장), 제2대·4대 국회의원, 제5대 참의원, 자유당 중앙상임위원장, 민주당 중앙상위의장, 전원위ㆍ재경위ㆍ예결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경상남도]] [[울산시|울산]] 출신으로,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 1928년 일본 고베고상(神戶高商, [[고베 대학]]의 전신)을 졸업하고 바로 귀국하였다. 그해 금융조합이사에 선출되면서 금융계에 진출하였다. 그 뒤 초계군금융조합 이사, 진해군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했다.
  • 오정민
         | 국적 = {{국기나라|일본}}
         1930년대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극단을 조직해 활동하던 연극인들 중 한 명이었다. [[1934년]] 창립한 [[고려극단]]의 단원으로 처음 연극계에 모습을 보였으며, [[도쿄]]에서 조직된 진보적 대중예술 조직 [[조선예술좌]]에 위원으로 참여<ref>{{서적 인용
         [[1938년]] 2월 [[일본 제국]]의 [[좌익]] 계열 연극 탄압으로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연극 운동이 조선에 침투했다고 발표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풀려난 뒤로는 전향하여 1940년대부터 친일 연극인으로 활동했다. 《[[매일신보]]》, 《국민문학》, 《조광》, 《문화조선》, 《신시대》에 [[조선총독부]]가 후원한 연극경연대회에 대하여 평가하는 등 사실상 친일 어용 연극인 '국민연극'을 지지하는 내용의 평론, 징병제 실시와 태평양 전쟁을 찬양하는 내용의 평론을 써서 발표했다.
         [[1943년]] 6월부터는 조선문인보국회에서 평론수필부회 간사를 맡았으며 [[1944년]] 3월에는 조선문인보국회의 기관지인 《국민시가》의 편집장을 맡았다. 광복 직전 일본에 있다가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도 그대로 머물러 국내에서의 활동 기록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 오주은
         '''오주은'''([[1980년]] [[7월 7일]] ~ )은 [[일본]]의 [[배우]]이다.
         [[분류:일본의 여자 배우]][[분류:198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95년 데뷔]][[분류:동덕여자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광주광역시 출신]]
  • 오치
         [[일본]]의 인터넷 속어. 뭔가를 흥미롭게 관찰한다는 의미.
         [[분류:일본어]]
  • 오토하(연예인)
         [[일본]]의 여성 연예인. 1981년 1월 28일 생. 혈액형은 A형으로, 출신지는 나가노 현(長野県) 이다.
         [[분류:일본 연예인]]
  • 오하라이
         [[일본]] [[신도]]의 주술 의식. 재앙이나 부정을 씻어내고 퇴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국 무속의 [[굿]]과 비슷하며, 굿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분류:일본 풍속]][[분류:오컬트]]
  • 온죠우지
         [[일본]]의 사찰.
         불타고 재건하길 반복하여 일본에서는 [[피닉스]] 염상사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주로 불태운건 대립하는 [[엔라쿠지]].
  • 와규
         [[일본]]의 [[소]] 품종으로 [[고기]]를 먹기 위한 육우 용도로 키운다. 살이 부드럽다고 한다. 일본의 마케팅에 따라서 고급화 된 품종으로 유명도가 높다. [[고베]] 산이 유명.
  • 와타나베 나오미
         [[일본]]의 여성 연예인. [[요시모토 흥업]] 소속.
         [[분류:일본 연예인]]
  • 왕상은
         * [[일본]] [[도시샤 대학]] 상과대학 졸업
  • 외척
         === [[일본]] ===
         [[일본]]에서는 [[후지와라]] 씨, 그 가운데서도 5개의 가문(고노에, 쿠죠, 니죠, 이치죠, 타카츠카사)인 [[고셋케]], 일명 '후지와라 섭관가'가 오랬동안 황후를 배출하면서 외척으로서 권세를 누렸다. 사실상 후지와라 가문이 일본의 지배자였다.
         일본 귀족 정치가 몰락하고 무가(武家) 정치가 대세가 되면서 섭관가는 물론 덴노가 까지 쩌리가 되고 실권은 [[쇼군]]이 차지하게 되어 섭관가 역시 실권을 잃었으나, 그래도 덴노의 외척이라는 권위는 근세까지 이어질 정도로 독보적이었으며 덴노가의 황후를 배출하는 것은 현대에 이르기 전까지 섭관가 출신으로 한정되었다. 관습적으로 후지와라 섭관가가 '왕비족'의 지위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 요괴:가면라이더
         [[일본]]에 출몰한다는 요괴. 약 1970년대 부터 목격담이 있었으며, 정기적으로 유행을 거듭하여 21세기에도 목격담이 끊이질 않는다.
         오토바이 문화의 확산과 함께, 기괴한 치장을 하고 다니는 일본의 [[폭주족]]에서 요괴 설화가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목 없는 라이더]] 등과의 유사성도 보인다.
         일본에서는 요괴 '가면라이더'를 소재로 한 TV드라마나 극장 영화가 자주 제작되는데, 대체로 영웅적인 모습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 요괴:선풍기
         기괴한 형상의 요괴로서, 납짝한 발 하나에 길쭉한 몸통이 붙어 있다. 머리는 큰데, 철망으로 덮혀 있으며, 철망 안에 팔랑거리는 부채가 3~4개 달려 있다. [[여름]]에서 집 안에 자주 출몰한다. 다른 때는 대개 창고 같은 곳에 숨어 있다. 기계가 저 스스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일본]]의 [[츠쿠모가미]]와 유사한 종류이다.
  • 요시노야
         [[일본]]의 [[규동]] 체인점. 전국으로 전개하고 있는 대규모 체인점이다. 주로 규동 등의 정식을 판매한다.
         일본 만화 '근육맨'의 주인공 근육 스구루가 이 요시노야의 규동을 좋아한다는 설정이 있는데, 만화가 뜨면서 요시노야도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분류:일본 음식점]]
  • 요시다 세이지
         [[일본]]의 저술가, 활동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중대한 악영향을 끼친 인물'''.
         요시다 세이지는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시모노세키 지부에서 동원부장으로 일했다고 주장했으며, 1977년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1983년 '나의 전쟁범죄'라는 책을 저술하여, 이 책에서 자신이 군부대를 이끌고 [[제주도]]의 마을 등에서 200여명의 여성을 강제로 징병하여 위안부로 삼았다고 진술했다. 또한 1982년 9월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증언하였다. 1900년대 아시히 신문은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바탕으로 다수의 기사를 작성했고, 이는 일본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널리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소위 '요시다 증언'에는 의혹도 뒤따르게 되었다.
         1992년 일본의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가 제주일보 기사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제주도를 직접 취재하여 이 사실을 [[산케이 신문]]을 통하여 일본에 알리게 되었다.
         요시다는 1943년 5월 당시 제주도에 '육군부대본부'가 '군정을 펼치고 있었다'고 설명했으나, 일본근현대사를 전공한 나가이 카즈 교토대 교수는 제주도로 육군 대부대가 집결한 것은 1945년 4월 이후라고 지적하며, 이러한 기술이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2014년 이래 일본 우익들은 요시다 증언이 허위로 드러난 것을 이용하여 '위안부 강제연행'은 허구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고노 담화의 폐기 등을 시도하고 있다.
         사실, 요시다 증언의 영향은 한정적이다. 위안부 문제에 관련된 증거는 요시다 증언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1993년 고노 담화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요시다 증언을 참조하지 않았으며, 이는 1991년 1월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동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음을 증명하는 일본 정부의 내부 문서를 아사히 신문이 공개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1991년 8월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가 첫 공개 증언을 하면서, 한국은 물론 동남아에서도 피해자 증언이 잇따르게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위안소 제도를 운영했다는 것 " 자체에 제기되는 인권 문제이며, 강제연행의 유무나 피해자들 증언에 관한 세부 논란은 '각론'에 불과하다.
         요시다 세이지의 장남(2016년 당시 66세)는 일본 월간지 '신쵸 45' 9월호와의 인터뷰에서 "소녀상을 크레인으로 철거하고 싶다."는 발언까지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저지른 위안부 강제연행 날조에 대해, 요시다 가문의 장남으로서, 일본 국민 여러분께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가능하다면, 전세계에 있는 소녀상을 크레인으로 철거해버리고 싶습니다.(중략) 나 자신도 아버지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또한 "아버지는 한 번도 제주도에 간 적이 없다. 이는 아버지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다", "아버지는 제주도 지도를 보면서, '나의 전쟁범죄' 원고를 썼다"고 주장했다.
         [[분류:일본인]]
  • 우라센케
         [[일본]]의 [[다도]] 유파의 하나. 우라센케 다도전문학원 등이 있다. 일본의 다도를 정립한 명인 [[센노 리큐]](千利休)의 후손으로서, 센노 리큐의 후손들이 세운 산센케(三千家)의 하나이다. 딱히 삼천개의 가문이 있는게 아니라 세 개의 센케(千家,센 가문)라는 뜻이다.--세다고 센가가 아니다.--
         여러 다도 유파 가운데서도 명성이 높다. 특히 우라센케는 16대 센 겐지츠(千玄室)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三笠宮崇仁親王)의 차녀 마사코 내친왕(容子内親王)과 결혼하여, 황족과 인척 관계가 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 황족, 일본을 [[국빈]]들이 와서 다도를 배우기도 한다.
  • 우메보시
         [[일본]]의 매실장아찌. 일본에서는 흔한 [[반찬]]이다.
  • 우메즈 카즈오
         [[일본]]의 [[만화가]]. 주로 공포, SF 만화를 그렸다.
         [[분류:만화가]] [[분류:일본 인물]]
  • 우츠미 사토루
         [[일본]]의 [[의사]]. 내과의사, 한방의사이며, [[음모론자]](…). 인터넷 상에서 쓰는 닉네임은 미치광이 의사(キチガイ医).
         [[분류:의사]] [[분류:일본 인물]]
  • 울릉군
         [[조선]] 시대 때 [[왜구]]가 많이 습격하자 조정에선 주민을 모두 이주시키고 공도(空島)정책을 쓴다. 이후 [[일본인]]들이 들어와 어업을 하기도 했지만 [[안용복]]의 활약으로 1696년에 [[도쿠가와 막부]]에서 울릉도를 조선의 땅으로 인정하고 막부는 일본인들의 출입을 금했다([[http://anyongbok.kr/ahn/ahn_01.php|안용복 재단]] 참조). 그 후 19세기 고종 시절에 울릉도를 개척하는 정책이 시행되어 전남, 경남 지역 도서민을 이주시켜 다시 유인도가 되었다.
         [[러일전쟁]] 때는 울릉도 역사 상 드물게 주변국의 각축장이 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의 함대는 울릉도를 병참기지로 활용하여 [[러시아]] 발트 함대를 격파하였다. 물론 대한제국 정부의 승인 따윈 없고, 일본이 자의적으로 울릉도를 사용했다. 그리고 근해에 침몰한 러시아 제국 해군의 [[방호순양함]]인 [[드미트리 돈스코이함]]은 군자금으로 실린 막대한 금괴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0765525|관련기사]]
         역사적으로 줄곧 그래왔듯이 한국 본토에서 어떤 급변상황이 터지더라도 일단 멀찍이서 지켜볼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하다. 다만 러시아나 일본과 시비가 붙는다면 가장 위험해지는 위치이다. 실제로 과거 일본이 독도뿐 아니라 울릉도도 자국땅으로 삼으려 하기도 했고...자세한 것은 [[울릉군/역사]]를 참조.
         재미있는 점은 [[일제강점기]] 때 도동이 일본인 마을로 통했다면 저동은 조선인 마을로 통했다는 점. 실제로 도동에는 아직도 일본식 건축물이 약간 남아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으로 울릉도를 방문했을때[* 이후 2012년에 이명박 대통령이 울릉도와 독도를 방문하였다.], 묵고 갔다던 당시 울릉군수 관사도 일본식 건물이다.
          * 옛 일본인 가옥(이영관가옥)-등록문화재 235호. 도동항 골목을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인 벌목업자가 지은 집이라고 하고, 입구에서는 까페라떼(...)와 쿠키 등을 판다. [[일제강점기]]의 일본 건축양식([[일본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을 바로 구경할 수 있다. 관람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으니, 배편을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살짝 들러볼 법하다.
          * 옛 울릉군수 관사-울릉읍사무소 옆에 위치해 있으며, 도동항 골목을 더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발견할 수 있다. 이영관가옥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의 일본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있으며, 울릉도 발전사에 대해 전시되어 있다.
         물가가 싼 편은 아니다. 1970년대에는 어업이 울릉도 경제의 중심이였지만 요즘은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공무원들이 많다고 한다. 따라서, 공산품을 싸게 사려면 편의점을 가야 한다. 울릉도에는 이마트나 홈플러스가 없고, 울릉도의 기본 물가가 높기 때문에 울릉도 주민들도 공산품(농수산물 제외) 구매는 [[CU]]와 [[GS25]]를 애용하는 편. [[세븐일레븐]], [[위드미]] 등의 편의점은 없다. 콜택시를 부를 경우 콜비로 2천원이 추가되나 기본 요금은 경상북도와 동일하며[* 울릉도는 콜센터를 이용하기보다 특정 콜 기사의 명함으로 개인적으로 만나는 경우가 많다. 택시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 주점[* 술마시는 노래방. 울릉도에는 그냥 노래방이 없고, 기본으로 술을 시켜야 한다. 당연히 19세 출입금지]의 경우 기본이 7만원. 보통 포항-울릉도 배삯은 약 6만원 가량 하지만, 울릉주민이라면 7천원 대로 저렴한 가격에 배를 탈수 있다. 허나, 울릉주민이 표를 사서 비울릉주민에게 양도하다가 걸리면 평생 6만원씩 내면서 타야한다고 한다. --그 돈이면 일본, 동남아 간다. 물가도 울릉도가 더 비싸다.--
         울릉도 공항 얘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울릉공항]]의 건설이 최근 급격히 대두된 것은 일본의 독도 침입 때문이었다. 해상자위대의 함선이나 해상보안청 순시선, 항공자위대의 군용기가 독도에 출몰했을 때, 본토의 [[F-15]], [[F-16]]등이 발진해 독도로 오더라도 연료 공급문제상 체공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고 독도에 대한 실효지배를 강화하려는 의미에서 공항 건설이 추진되었던 것. 규모가 [[대한민국 공군]]의 각종 항공기가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계획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최근 공군이 체공시간 문제를 연료탱크 장착 및 [[공중급유기]] 도입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어 공항 건설이 불투명해지는 듯 했으나, IATA, ICAO 등의 각종코드가 이미 부여된 것을 보면 공항 건설은 예정대로 진행할 듯하다. 국토해양부는 2020년까지 [[Let L-410]] 정도의 소형 여객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울릉공항]]을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을 가고자 한다면 대부분 [[포항시]]로 향하는 여객선을 이용, 포항에서 대구, 부산으로 향하는 리무진 버스, 전세버스 등을 대절하여 대구국제공항, 김해국제공항을 통해 [[일본]], [[중국]], [[몽골]], [[동남아시아]], 극동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등) 등지로 향하게 된다. [[미국]]이나 [[중동]], [[유럽]], [[호주]],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인도 공화국|인도]], [[카자흐스탄]], [[아프리카]] 등지로 나갈 경우 [[포항공항]]에서 [[김포국제공항]]까지 [[대한항공]] 또는 [[에어포항]]의 국내선을 이용, 김포공항까지 내려온 다음 다시 김포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버스, 공항철도를 이용하면 바로 인천공항에 닿는다.
         울릉도에서 굴러다니는 차는 딱 2종류라고 봐도 좋다. [[경차]] 아니면 [[현대 싼타페|싼타페]]같은 [[SUV]]. 우선 도동이나 저동 등 대부분의 마을길 폭이 좁기 때문에 [[경차]]가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경차]]로도 울릉도의 가파른 산길을 타는 데 문제가 전혀 없다고 한다. [[일본]]식 경차처럼 배기량 0.66리터 엔진을 달면 상대적으로 산이 많은 [[대한민국]]에서 퍼지기 쉽다고 하여 [[대한민국]]에서 티코가 나올 때부터 0.8리터로 내놓았고 [[2008년]]부터는 정부에서 배기량 1.0리터로 규정을 변경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 퍼질 듯... 그래도 산길이 많고 해안도로에 절벽에서 떨어지는 돌들이 많기 때문에 차량 하체도 긁히기 쉬워서 경차보다 튼튼한 차를 산다면 같은 급의 중형 세단보다는 SUV를 사게 된다고. 심지어 '''이 동네의 경찰 [[순찰차]]와 [[택시]]도 전량 SUV다.''' 거기에 울릉도는 눈이 꽤 오는 곳이니 '''SUV가 아니면 [[답이 없다]].''' 거기에 군 내에 [[LPG]] 충전소가 없다는 점을 유의하자. 따라서 택시가 다니더라도 LPG 차량이 없고 100% 디젤차다. 그리고 세단을 대여해 오는 관광객들을 보다못한 택시나 관광차량이 중앙선침범을 빈번하게 하니 아예 택시를 이용하자. 요금은 기본 2,800원으로 포항 시내와 동일하다.
  • 울진군
         그러나 울진은 항공교통의 요충지 중 하나로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일본]]이나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및 [[유럽]]/[[중국]]에서 우리나라 영공을 관통하여 [[일본]]으로 가는 대부분의 비행기들은 울진 상공을 거쳐서 대한민국을 떠난다. 일부 예외가 있는데 이 경우는 강릉 상공을 통해 대한민국을 떠난다.
          [[관동팔경]] 중 제 1경. 가장 남쪽에 있다. 동해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산 위의 정자로, 주변에 소나무가 많다. 풍경 이외에는 볼 거리가 없지만 울진읍에 가까워 접근하기도 쉽고 각 관광지로 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지나가다 잠시 들르기 좋은 곳이다. 정자 자체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헐어버린 뒤 터만 남아 있다가 1960년대에 콘크리트로 어설프게 지은 것을 다시 철거, 1980년에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 웃음 주머니
         [[일본]]에서는 쇼와 45년(1970년) 무렵에 대유행 했다고 한다. 단순한 장난감이지만 왠지 유행해서 1년 정도 일본 각지에서 널리 팔렸으나, 단순한 장난감이었기 때문에 곧 유행은 사라졌다고 한다.「아오키 상회(青木商会)」라는 완구 제조업체에서 만든 것으로, 현재에는 법인명을 「아이코(アイコ)」로 변경하였으나 이후에도 발매했다고 한다.
  • 원덕상
         '''원덕상'''(元悳常, <small>일본식 이름:</small> 元村肇, [[1883년]] [[11월 7일]] ~ [[1961년]] [[3월 15일]])은 [[일제 강점기]]의 의사 겸 금융인, 기업인이며 일제 강점기 중반 경기도 도평의회 의원과 경성부 부협의회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이다. [[원응상]], [[원은상]]의 동생이고 [[원훈상]]의 형이다.
         [[한성부]] 안국방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1912년]]에 [[지바 대학]] 전신인 지바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경성부]]에 덕제의원(德濟醫院)을 개업하고 의사로 일했다. [[1923년]]에 음독 환자를 방치해 의료 사고를 내는 등 의사로서의 태도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ref>{{뉴스 인용
         [[1920년]]에 [[경기도|경기도 서울]]에 출마하여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경성부 부협의회(京城府府協議會) 의원 등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경성상공회의소 특별평의원, 금융제도조사위원, [[조선생명보험회사]] 전무취체역, 서울종로금융조합 조합장, 경성상공회의소 부회두, 금융조합연합회 감사, 금융제도조사위원 등 여러 직책을 거쳤다. 위생 시설 시찰을 위해 일본 및 [[만주]]를 순시한 일도 있다.
         ** 동생 : [[원훈상]](元勛常, 일본식 이름: 元村重盛, [[1881년]] ~ ?)
  • 원빈(배우)
         [[1997년]]의 [[KBS]]의 TV 드라마 '프로포즈'에서 비중 있는 조연[* 자주 개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다니며 여주인공 [[김희선]]의 이웃에 살면서 그녀를 짝사랑하며, 몽상적 성향을 보이기도 하는 약간 4차원스러운 청년역할이었다. 그래서 스토커라는 단어도 안 쓰이던 시절인데도 자기 주위를 자주 맴도는 그가 정신적으로 이상해 보였던 여주인공이 가족과 지인에게 상담도 하고 두려워하며 경계하는 장면이 많이 나왔다. 나중에는 여주인공 쪽에서 먼저 대화를 해봐야겠다고 결심하고 살짝 말을 거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도 몽상적인 대답만 한다. 직업도 대략 시인 비스무레한 사람인 듯이 말하는데 드라마 내용 자체에 자세한 부분이 나오지 않아 그냥 시를 좋아하는 청년인지 진짜 시인인지는 알 수 없다. 대신 여주인공은 그가 폭력적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라는 걸 확인해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자신은 좋아하는 남자(주인공)가 있다고 설득한 뒤 안심하며 좋게 마무리된다. 사실상 나쁘게 보면 스토커 같은 역할이라 원빈의 외모나 현재 이미지와 그렇게 많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워낙 심하게 잘생긴 외모라 역할 자체의 부정적 측면이 안 보일만큼 미화되어 보이기도 했고 아직도 그가 프로포즈에서 멋진 역할로 나왔다고 기억하는 팬이 있을 정도. 당시 남자주인공이자 김희선의 상대역이었던 배우는 [[류시원]].]으로 출연하여 주목을 받았고 그 이후에도 '레디, 고!'라는 드라마에서도 주연으로 나오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1999년]] [[광끼]], [[2000년]] [[꼭지]], 단막극 '그가 간이역에 내렸다'를 찍은 뒤 드디어 [[가을동화]]를 통해 슈퍼스타가 된다. 2002년에는 한일합작 드라마 '프렌즈' 등에 출연했다. 프렌즈에는 [[일본]] 여배우 [[후카다 쿄코]]가 여주인공 역을 맡았다. 이후 드라마 대신 영화에만 출연하고 있으며 많은 작품에 출연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작품 횟수는 적으나 출연한 작품마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 일본의 야구 선수 [[스즈키 이치로]]가 원빈 때문에 굴욕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2006 WBC 우승 이후 귀국해서 호텔에 들어가려다 거기서 원빈을 기다리는 수많은 팬들을 보고 그 앞에 차를 세우고 "나는 어때?"라고 물었는데 원빈인줄 알고 몰려갔던 팬들이 "뭐야 이치로잖아"라고 [[https://www.youtube.com/watch?v=QUC-DOU4Rco|싸늘하게 무시해버렸다고...]]
          * 2011년 제22회 일본 보석 베스트 드레서 남성 특별상
  • 유동훈 (야구인)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4년]] 8월에 김건덕, [[손지환 (야구인)|손지환]] 등과 함께 청소년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 (캘리포니아주)|롱비치]]에서 열린 한·미·일 국제 고교야구 대회에 출전, [[일본]]과 공동 우승을 하는 데 기여를 했다.
  • 유림 (1894년)
         [[1953년]] [[3월]] 휴전협정에 대한 논의가 있자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협정 반대를 내세웠다. 그러자 유림과 독립노농당은 더 이상의 동족상쟁을 막기 위해서 휴전협정을 체결할 것을 촉구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2 /> [[1959년]] [[12월]]부터 [[일본]]에서 [[재일동포]]의 북한 송환이 시작되자 ‘재일동포 강제추방’이라며 이를 강력히 비판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2 /> [[혁신동지총연맹]]의 후보로 [[1960년]] [[대한민국 제5대 총선|7ㆍ29선거]]에 출마하였으며, 여러번 선거에서 낙선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3 />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이유로 외아들 [[유원식 (군인)|유원식]]과 일찍이 부자의 연을 끊어버렸다고 한다.<ref name=autogenerated3 /> 그리고 아내에게 아들을 잘못키웠다고 멀리하였으며 또한 사위가 이승만 정권의 경찰 간부로 승진하자 딸과도 인연을 끊었다고 한다.<ref name=autogenerated2 />
         외아들이 일본군 장교가 되자 아들이 일본군 장교가 됐다는 이유로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고 부인마저 아들을 잘못 키웠다고 멀리하여 유림은 인생의 마지막을 혼자서 지냈다. 사위가 [[이승만]] 정권의 고위 경찰관이 되자, 이승만 정권의 고위경찰이라는 이유로 사위 본인은 물론, 그의 아내가 된 외동딸도 눈을 감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ref name=autogenerated2 />
  • 유병재(방송인)
          *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매니저와 함께 [[일본]] [[마쓰야마]]를 여행하던 중, 매니저가 기차 승무원에게 유병재를 '옐로우 티스 스타'라고 소개하는 것을 승무원이 ''' '에로ㅅ... [[포르노 배우|에로스타]]?' ''' 라고 오해를 해버렸고, 이로 인해 일본에서 섹시보이라는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본인은 그것이 싫지 않다고 한다(...).
  • 유상철
         2002년 10월 시즌 종료까지 8서울를 남기고 있던 친정팀 울산 현대로 복귀하였다.<ref>[http://planning.kfa.or.kr/news/old_news_kfa_content.asp?idx=34&content_id=19 유상철, 울산 현대로 복귀]{{깨진 링크|url=http://planning.kfa.or.kr/news/old_news_kfa_content.asp?idx=34&content_id=19 }}</ref> 팀의 우승을 위해 남은 8서울에서 경기마다 1골을 넣어 전승을 기록하겠다는 말을 남긴 유상철은 이 8서울에서 9골을 기록하는 엄청난 활약을 보였다. 울산은 우승컵을 들진 못했지만 유상철의 활약으로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2003년 6월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다시 이적해<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0398762& 유상철, 일본 J리그 다시 간다]</ref> 2003년과 2004년 팀의 [[J리그]] 2연패에 이바지한 뒤, [[2005년]] [[울산 현대 축구단|울산 현대]]로 재복귀하여<ref>[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210&g_serial=137068 '유비' 유상철, 또다시 '울산맨']</ref> 그 해 K리그 우승에 이바지하였다.
         1994년 3월 5일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과의 친선 경기에서 데뷔하여, [[1998년 FIFA 월드컵]], [[2002년 FIFA 월드컵]] 등에 참가하였다. [[1994년 아시안 게임]] 8강전이었던 [[일본]]전에서는 동점골을 득점하여 [[황선홍]]과 함께 역전승을 합작했다. 첫 월드컵이었던 [[1998년 FIFA 월드컵]]에서는 [[네덜란드]]전 대참패로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어 분위기가 나쁜 상태에서 맞이한 [[벨기에]]전에서 후반 26분에 [[하석주]]의 프리킥을 받아 동점 골을 넣었다. [[2002년 FIFA 월드컵]] 예선 1차전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폴란드]]전에서 중거리 슛으로 골을 넣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의 4강 진출에 이바지했다. 월드컵에서 통산 2골을 기록했다.
         * [[1999년]] ~ [[2000년]] {{국기그림|일본}} [[요코하마 F. 마리노스]]
         * [[2001년]] ~ [[2002년]] {{국기그림|일본}} [[가시와 레이솔]]
         * [[2003년]] ~ [[2004년]] {{국기그림|일본}} [[요코하마 F. 마리노스]]
         ==== {{국기그림|일본}} [[요코하마 F. 마리노스]] ====
         * [[일본]] 슈퍼컵 우승 1회 (2004년)
         [[분류:197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축구 미드필더]][[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축구 감독]][[분류:대한민국 국적의 축구 해설가]][[분류:울산 현대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축구 선수]][[분류:가시와 레이솔의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K리그1의 축구 선수]][[분류:J1리그의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일본 진출 축구 선수]][[분류:일본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대전 시티즌의 축구 감독]][[분류:전남 드래곤즈의 축구 감독]][[분류:대한민국의 고등학교 축구부 감독]][[분류:인천 유나이티드 FC의 축구 감독]][[분류:FIFA 센추리 클럽]][[분류:K리그1 베스트 11 수상자]][[분류:K리그1 득점상 수상자]][[분류:1998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2002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참가 선수]][[분류:1996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분류:2000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분류:2000년 CONCACAF 골드컵 참가 선수]][[분류:2002년 CONCACAF 골드컵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4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199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1998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체육훈장 맹호장 수훈자]][[분류:체육훈장 기린장 수훈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서울응암초등학교 동문]][[분류:경신중학교 (서울) 동문]][[분류:경신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건국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 유수영
         | 출생지 = [[일본]] [[경상북도]] [[영양군]]
         '''유수영'''(<small>[[예명]]:</small> 슈, {{llang|en|Yoo Soo-Young}}, {{한자|柳水永}}, {{일본명|邦光 洙|くにみつ しゅ|쿠니미츠 슈}}, [[1981년]] [[10월 23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 뮤지컬 배우이다. 1997년 11월 28일 [[SM 엔터테인먼트]] 최초의 [[걸 그룹|걸 그룹]] 《'''''[[S.E.S.|S.E.S.]]'''''》의 멤버 슈로 데뷔하였다.
         [[1981년]] [[10월 23일]] [[경상북도]] [[영양군]] 에서 태어나고, [[일본]] 영주권을 가진 [[재일교포]]이다. 중학교 때부터 [[대한민국]]에서 에 다녔다. 당시 한 연예기획사에서 계약서 없이 [[god (음악 그룹)|god]]의 [[손호영]], [[데니 안]]과 [[NRG (음악 그룹)|NRG]]의 [[김환성]]과 함께 혼성그룹 결성을 준비하던 연습생이었다. [[롯데월드]]에 친구들과 놀러갔다가 [[SM엔터테인먼트]] 캐스팅 디렉터의 눈에 띄어 캐스팅 되었고 오디션을 거쳐 1세대 그룹 [[S.E.S]] 멤버로 합류해 [[1997년]] 데뷔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슈 "뮤지컬 연출도 도전할래요"|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449085|출판사=연합뉴스|저자=이은정 기자|날짜=2009-01-12}}</ref>
         [[2009년]] 뮤지컬 《슈퍼몽키》의 여주인공 발탁되어 [[일본]] 니세이(日生)극장 공연을 예정중이었지만 남자주인공이던 와오 요우카카가 건강상의 문제로 하차하는 바람에 뮤지컬이 취소되었다. 뮤지컬 주최 측이 와오 요우카의 비중을 이유로 대역을 쓰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뮤지컬 공연이 취소된 것이다. 이 때문에 슈 역시 돌연 하차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SES 슈 출연 예정 日 뮤지컬 공연 돌연 취소|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1131509211001|출판사=연합뉴스|저자=뉴스엔 엔터테인먼트부|날짜=2009-01-13}}</ref>
         * [[2001년]] 연극 [[일본]] [[후지TV]], 관서TV 주최 《동아비련》 여주인공 발탁. [[도쿄]], [[오사카]] 공연
         * [[2002년]] 연극 [[일본]] [[후지TV]], 관서TV 주최 《동아비련》 앵콜 공연
         * [[2005년]] 뮤지컬 《뱃보이》 - 쉘리 역 일본 5개도시 공연, 한국 대학로 신시뮤지컬극장 공연
         * [[2006년]] 뮤지컬 《뱃보이》 - 쉘리 역, 한국 앵콜 공연, 일본 7개도시 공연
         * [[2007년]] 뮤지컬 [[일본]] [[후지TV]], [[월트디즈니]] 주최 《[[하이스쿨 뮤지컬]]》 - 여주인공 테이라 역 발탁. [[도쿄]], [[오사카]] 공연
         [[분류:198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재일 한국인]][[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1997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S.E.S.의 일원]]
  • 유승민(정치인)
         >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중부담-중복지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민부담과 복지지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기준으로 [[OECD]] 회원국 평균 정도 수준을 장기적 목표로 정하자는 의미입니다. 이는 [[스웨덴]],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같은 [[유럽]] 국가들보다는 낮은 수준이지만, 현재의 [[미국]], [[일본]]보다는 다소 높은 수준을 지향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결코 낮은 목표라 할 수 없습니다. 최근 여야 간에 중부담-중복지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는 만큼, 우리는 국민의 동의를 전제로 이 목표에 합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날 [[JTBC 뉴스룸]]에서는 원래 북핵 문제를 비롯한 안보 이슈를 가지고 인터뷰가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지진으로 인해 인터뷰의 주제는 '지진과 [[대한민국]]의 재난대비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급작스럽게 지진 이슈에 대해 [[손석희]] 앵커와 대담을 했는데, 준비도 안 되었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안전처의 재난대응 문제,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견해와 더불어 국회 지진안전 예산문제까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진행하였다. 심지어 원전 현황을 이야기 할때는 원전 소재지역과 가동, 건설 중인 원전의 갯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지진예측시스템, 원전 소재지의 단층파악문제까지 언급하는 등 디테일한 사항까지 꿰뚫고 있어 뉴스룸 시청자들은 놀라웠다는 반응을 보였다.
  • 유진오
         같은 해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 예비시험 격으로 [[일본]] 학생과 [[조선]] 학생이 공동으로 치른 '제1회 대학예과 고등학교 입학 모의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ref name="min621">친일인명사전 2 (민족문제연구소, 2009) 621</ref>
         1941년 유진오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에 위촉되었고, 같은 해 8월 12일 열린 문인협회 간부회의에서는 김동환, 박영희 등과 함께 상무간사로 위촉되었다. 이때 그는 친일잡지 {삼천리} 등에 친일 논문을 실었고<ref>삼천리 지 1940년 12월호, [일사불란의 그 훈련]</ref>, 학병 지원의 권유와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역설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명에는 당시 친일문학자들이 만든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단체가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결합되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1941년에 결성되었는데 당시 조선 문학자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최린(崔鱗), 김동환 계열의 임전대책협의회와 윤치호(尹致昊) 계열의 흥아보국단이 통합한 것이었다.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은 이름 그대로 조선에서 일본의 대동아전쟁을 위한 병력의 보충 등 선전·선동의 역할을 나서서 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국민의용대의 조직 및 활동에 일치시키기 위해 해산될 대까지 학병의 권유와 내선일체를 열심히 외쳤다. 유진오는 총력연맹 문화부에서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결전소설 공모를 심사하였다.
         [[1942년]] 이후 문단의 중요 행사로 매년 1회씩 3회에 걸쳐서 개최된 '대동아문학자 대회'가 개최되자 대표로 참여했다. 이것은 대동아 문예부흥을 목표로 내걸었던 일본의 전시문화 공세의 한 종류로, 여기에 대표로 참가한 사람 중에 두 번을 연이어 참석한 사람은 단 세 사람이었는데, 이광수와 쓰다, 그리고 유진오였다.
         [[1944년]] [[8월 13일]] 전국 항복 대강연회에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이 강연에서 그는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이 눈앞에 있던 그 시기에 유진오는 일본의 '영원한 승리'를 다짐하며 '대화일치(大和一致)'를 강조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난 뒤 고려대학교 임시 관리 책임자,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외교위원회 위원 등을 맡았다. [[1951년]] 대한민국교수단 단장, 전시연합대학 총장(4월 ~ 8월), 고려대학교 총장 서리로 활동했다. 같은 해 한일회담 준비조사차 [[일본]]으로 건너갔고, 10월에는 한일회담 대표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1952년]] 5월에 한일회담 결렬로 귀국했다.
         [[1955년]] [[연희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ref>[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1179 유진오:네이트 한국학]{{깨진 링크|url=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1179 }}</ref>, 동년 [[9월]] [[민주당 (1955년)|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59년]] 재일교포 북송을 반대하여 재일교포 북송반대 전국위원회에 참여하였고 재일교포 북송반대 전국위원회 국민대표로 [[장택상]], [[최규남]] 등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일본의 교포 북한송환을 규탄하고, 반대하는 뜻을 알리고 귀국하였다.
         [[1969년]] 9월 10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1970년]] [[1월 7일]] 일본 [[도쿄]]의 병석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당수직 사퇴를 공식 발표했다.<ref>1970년 1월~: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41쪽</ref> [[1974년]]에는 민주회복 국민회의에 참가했다. 이후 그는 병석에 누웠지만 [[박정희]] 정권의 회유와 지지 요청을 여러 번 거절하였다.
         {{인용문|그러나 어떤 삶을 살아왔든지를 불문에 붙이고 고인을 과대미화시킴으로써 그것이 악을 방관·조장하고 현재의 비리마저 정당화시키는 데 악용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관행과 통념에 아부·순종하기보다는 이에 도전하여 이를 극복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 진정한 지성인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히 교육자로서 이미 일제 치하에서는 대동아공영권을 노래했었고, 해방 직전까지도 "우리(일본 제국)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외치는 등 친일행각의 전력도 있거니와 야당 당수로서 반독재 투쟁을 하다가 처참한 광주의 불행과 직결된 정통성을 결여한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으로 다시금 변신했던 고 유진오 씨의 빈소가 고대에 차려진다는 것은 비교훈적이라고 생각하여 사회적 통념과의 충돌을 무릅쓰고 항의 시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유진오 - 일본의 '영원한 승리'를 다짐한 한국현대사의 큰별 (김민철)}}
  • 유홍기 (1831년)
         유대치는 개화파 인사들과의 연락행동 책임자로 [[이동인]]을 [[일본]] [[본원사]](本願寺) 승려의 도움으로 [[1879년]] [[8월]] [[일본]]에 밀항케 했다. [[이동인]]이 일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올 때 서울에 있던 유대치는 부산에 가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이 때 [[이동인]]이 [[대원군]]계열의 동래부사에 체포되어 옥에 갇혀 있을 때 유대치가 백방으로 주선하여 석방했다.
         그는 일찍이 백의정승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지며 그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1882년]](고종 19년) [[감생청]](減省廳)의 참봉으로 출사하여 감생청 직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개항 후 [[개화파]]들이 정계에 진출하고 정부에서도 개화정책을 실시하면서 행정기구를 미국 혹은 일본식으로 본딴 새 기관으로 행정조직을 개편 정리하기 위한 임시기관으로 감생청을 설치할 때 직원으로 임명된 것이다.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특채로 관직에 올랐으며 그는 말단 실무관료의 직책에 있었지만 감생청 제조 [[어윤중]]의 자문역을 겸하였다. 어윤중은 유대치로부터 지도를 받고 일본과 중국을 시찰하였으며 귀국한 뒤에는 유대치를 방문하여 그의 견문사항을 이야기하며 논의했다.
  • 육홍균
         1900년 [[경상북도]] [[선산]][[군(행정구역)|군]](현 [[구미시]])에서 태어났다.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 대학 문과를 수료하였다.
  • 윤경순 (1855년)
         [[1883년]] 관비유학생의 한 사람으로 [[일본]]으로 유학, [[도야마 육군하사관학교]]에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등과 함께 입학하였다. [[1884년]] [[7월]] 수료하고 귀국, [[병조]] [[조련국]]의 교관이 되어 사관생도를 양성하였다. [[갑신정변]] 거사 직전 [[서재필]]의 지휘하에 있던 개화당의 행동대원으로 활동하며 거사를 준비, 모의하였다.
         수구파 대신 척살을 계획했을 때 그는 [[민영익]] 담당을 맡게 되었다. 실행할 담당자는 요인들 한 사람에게 두 사람씩 배정하되 한 사람은 단검을, 또 한 사람은 단총을 소지하기로 했다.<ref name="songkun59">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59페이지</ref> 또 만일 그 장소에서 실패하는 때에는 예비로 특별히 조선 옷을 입은 일본 사람 네 사람으로 각각 한 사람씩 감당키로 했다. 그리하여 [[민영익]]은 윤경순, 이은종 두 사람이, [[윤태준]]은 박삼룡, 황용택이, [[이조연]]은 최은동, 신중모가, [[한규직]]은 [[이규완]], 임은명 두 사람이 담당키로 했다.<ref name="songkun59"/> 그러나 사건 당일 민영익은 [[서재창]]의 피습을 당해 한쪽 눈을 찔렸다고 한다.
  • 윤경완
         '''윤경완'''(尹景完, [[1860년]] ~ [[1885년]] [[12월 23일]])은 [[조선]] 후기의 상인, 무신으로 [[갑신정변]]의 행동대원이었다. [[한성부]] 출신으로 소년 시절부터 무청 장사를 하다가 [[박영효]], [[서재필]] 등에 의해 발탁되어 [[1883년]] 국비장학생으로 선발, [[일본]]에 유학하게 되었다.
         [[1884년]](고종 21년) [[8월]] [[일본 도야마하사관학교]]를 유학하고 [[서재필]] 등과 함께 귀국, [[병조]]의 [[조련국]] 교관 겸 전영 소대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12월]] [[갑신정변]] 거사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하고 피신, 체포되었다가 [[1885년]] [[12월 23일]] 참수당했다. 다른 이름은 윤계완(尹啓完)이다.<ref>《승정원일기》에는 윤계완으로 되어 있고, 《갑신일록(甲申日錄)》과 《서재필박사자서전》에는 윤경완으로 되어 있다.</ref> 함께 [[갑신정변]] 거사에 가담한 [[윤경순]]은 그의 형이다. [[한성부]] 출신.
  • 윤고려
         일찍이 친정아버지 [[김윤정 (1869년)|김윤정]]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 [[미국]] 서울 워싱턴의 여학교에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도쿄)에서 여자학원에 입학하고 도쿄여자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ref name="국민보1">국민보 제41호, 1914년 01월 07일자 기사</ref>,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김고라는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덕에 일본ㆍ미국에서 여학교를 마친 보기 드문 여성이었다.<ref name="근녀1"/>'는 평가도 있다. 국민보는 그녀의 서거 기사를 취재할 때, 여성교육을 위한 활동에 열심이였고 경성 있는 양심·양원 두 여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불행히 요절하였다.<ref name="국민보1"/>며 아쉬워했다.
  • 윤극영
         * [[경성법학전문학교]] 중퇴 후, [[일본]] [[도쿄 음악학교]], [[도요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
         * [[일본]] [[도쿄 음악학교|도요 음악학교]] 전문학사([[테너]] [[성악]] 전공)
         * [[일본]] [[도쿄]] [[도쿄 음악대학|예술학교]] 전문학사([[바이올린]] 전공)
         * [[일본]] [[오사카 음악학원]] 전문학사([[지휘]] 및 [[화성학]] 전공)
  • 윤기선
         [[윤치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그는 [[안양자]], [[유수만]] 등을 찾아가 [[음악]]의 기초를 사사하였다. 그 뒤와 [[경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경성고보 재학 중 조선일보사 주최 제1회 콩쿠르에 출전하여 우승하고 이후 1~4회 연속으로 피아노 부문 1위를 차지했으며, 전국남녀중등학교 현상 음악경연대회에서 1등을 했다. 4학년 때 일본으로 유학, 동경 예술 대학(우에노 음악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
         그 뒤 [[일본]] [[도쿄 예술대학|우에노 음악학교]](지금의 일본 도쿄 예술대학)과 [[도쿄 예술대학|우에노 음악대학원]]을 마치고 1944년 귀국했다.
         * [[일본]] [[도쿄 예술대학|우에노 음악학교]](지금의 [[도쿄 예술대학|도쿄 예술대학교]]) 피아노학과 [[전문학사]]
         * [[일본]] [[도쿄 대학교|도쿄 제국음악학교]] [[학사]]
         * [[일본]] [[도쿄 예술대학|우에노 음악대학원]] [[음악학]] [[석사]]
         [[분류:192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피아노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클래식 음악가]][[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지휘자]][[분류:이화여자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피아노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미국의 클래식 음악가]][[분류:미국의 개신교도]][[분류:미국의 피아노 연주자]][[분류:미국의 지휘자]][[분류:미국의 대학 교수]][[분류:윤치호]][[분류:윤보선]][[분류:윤치영]][[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도쿄 예술대학 동문]][[분류:줄리아드 학교 동문]][[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해평 윤씨]]
  • 윤덕주 (농구인)
         * [[1999년]] [[4월 27일]] ~ [[1999년]] [[6월]] 제18회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5월2-9일, 일본 시즈오카) 한국 선수단 단장<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570997 한국 여자농구대표팀 28일 결단식]</ref>
         *** 외당숙 : 이상오(李相旿, [[1905년]] ~ [[1969년]], [[사냥|수렵가]], [[바둑]]인. 아호(雅號)는 모남(慕南).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 우현고등보통학교 및 [[일본]] [[호세이 대학교]] 법정학과 졸업.)
  • 윤석중
         그는를 거쳐 [[1942년]]에 [[일본]] [[도쿄]] [[조치 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24년]] 《신소년》에 [[동요]] 〈봄〉, [[1925년]] [[잡지]] 《어린이》에 [[동요]] 〈오뚜기〉가 당선된 후 많은 [[동요]]를 발표하였다.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태어났다를 재학하였으나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운동]]이 발발하고, 이에 동참하지 못하고 [[졸업장]]을 받는 게 양심의 가책이 되어 <중외일보>에 '자퇴생의 수기'를 투고한 후 [[졸업]]을 며칠 앞두고, [[자퇴]]를 한다. [[1930년]] [[가을]]에는 [[일본]]으로 [[유학 (교육)|유학]]을 가지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귀국을 하게 된다. 이후 [[1942년]] [[일본]] [[조치 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잡지]] [[어린이]]에 그의 [[동요]] 〈오뚜기〉가 당선된 후 많은 동요 가사를 창작·발표하였다. [[1933년]], [[방정환]]의 뒤를 이어 《어린이》 주간으로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그 후 《소년중앙》·《소년》·《소학생》의 주간을 지냈으며, [[1955년]] 조선일보 편집 고문을 지냈다. [[1956년]] 새싹회 회장에 선출되고, [[1961년]] 3·1 문화상 예술 부문 본상과 [[1966년]]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70년]] 어린이 회관 고문이 되는 등 아동들을 위한 많은 공헌을 하였다. 저서로 《윤석중 동요집》, 《초생달》, 《굴렁쇠》, 《어린이를 위한 윤석중 시집》 등이 있다. [[1956년]] 새싹회 동요집 엄마손 등을 비롯하여 윤석중 동요집, 잃어버린 댕기 등 30여 편에 이른다. [[2003년]] [[12월 9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 [[일본]] [[조치대학교]] 신문학 학사
  • 윤아 (동음이의)
         * [[윤하]] - [[대한민국]] 출신으로,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활동중인 가수.
  • 윤영선 (1896년)
         [[1923년]] [[1월]] 인천의 일본 경찰서에 목장사업을 인가해달라는 신청서를 냈다.<ref name="yn240">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240페이지</ref>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ref name="yn240"/> 그의 아버지 [[윤치호]]는 그들은 일본인 목장을 보호해 주고 싶었던 것<ref name="yn240"/> 이라 봤다. 그해 [[9월]]에는 [[개성]]에서 개최된 [[조선부업품공진회]](朝鮮副業品共進會)에 밀납(蜜蠟, [[벌꿀]]을 추출해서 만든 기름)을 출품하여 3등을 수상하기도 했다.<ref>"개성의 부공 수상자", 동아일보 1923년 10월 29일자 4면, 경제면</ref> [[1924년]] [[경상남도]] [[양산시|양산군]]의 훈도가 되어 교편을 잡았다.
         윤영선은 아버지 [[윤치호]]의 영향을 안 받을수 없어 [[일본]]의 [[만주]] 정책에 대해서도 아버지 [[윤치호]]의 견해를 잘 따르는 편이었다.<ref name="유일한1"/> [[1928년]] 재단이사의 한사람으로 취임했고, [[1929년]] [[7월 28일]]에는 [[인천광역시|인천]]의 지역유지 [[김정호 (1885년)|김정호]](金正浩)와 함께를 조직하고 그해 [[9월 23일]] 씨름장에서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하였다. [[1929년]] [[2월 18일]] [[공성학]], 김정호 등과 면직물 제조 판매와 양말 제조 판매를 하는 주식회사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의 창립에 참여하고 주주 겸 이사로 참여했다. [[10월 30일]]에서 [[송선주]](宋善洙)와 함께 전등 및 전기선 제조 회사 장연전기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공동대표로 출자하였다.
         [[태평양 전쟁]]의 추이를 관망하던 중 [[윤치영]]으로부터 [[일본]]이 반드시 패망하리라는 소식을 접하였으나, 아버지 [[윤치호]]로부터 일본이 패망할 수 있지만 일본이 승리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사태를 관망하였다. [[1941년]] [[윤치영]] 등으로부터 [[이승만]]이 출연한 미국 방송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입수하여 시청하였다.
  • 윤채경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일본]]에서 [[퓨리티]]의 멤버로 활동하였으나, [[대한민국]]에서는 데뷔도 못한 채, 2년 만에 팀이 해체되었다. 해체 직후 2014년 [[카라 (음악 그룹)|카라]]의 새 멤버 프로젝트인 《[[카라 프로젝트: 카라 더 비기닝]]》에 참가하였으나, 최종멤버에 발탁되지 못하였다.
  • 윤채경(가수)
         '''산전수전 다 겪은 아이돌계의 [[명불허전]] 프로데뷔러'''[* 이게 농담이 아닌 게, 자국도 아닌 [[일본|외국]]에서 첫 데뷔해서 ~~일본어까지 배워 가며~~ 현지 [[https://www.youtube.com/watch?v=FcNIk35AVfc|예능]]에 '''출연'''하는 등 활약했으나 팀은 해체되었고, 같이 [[안소진|한솥밥을 먹던 동료]]가 [[자살|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하는 것을 겪어야 했으며, 자신보다 더 어리고 연습 기간이 짧은 후배 연습생이 먼저 데뷔하는 것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다. 성인이라도 멘탈이 몇 번은 나갔을 상황인데, 채경은 이 모든 것을 '''20세가 되기 전에 겪었다.''' 20세가 된 후에도 [[프로듀스 101|101명이나 참가하는 걸그룹 서바이벌]]에 참가해 [[윤채경/프로듀스 101#s-2.1|실력에 대한 혹평]]과 ~~결국에는 득이 된 몰래카메라와~~ [[프로듀스 101/6회#s-5.3|왕따 논란]]까지 견뎌낸 인물이다. 프로듀스 101에 참가한 많은 연습생들이 증언했다시피 프로듀스 101은 엄청난 멘탈과 실력으로 정신적, 신체적 노고를 이겨내야 하는 방송인데, 이 모든 것을 겪은 후 드디어 데뷔하여 인지도를 얻고 그룹에 안착했으니 진정한 인간 승리자~~또는 아이돌계의 산전수전 다 겪은 프로데뷔러~~라 할 수 있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JBrk83tDl7U|매 순간이 힘들었어요]]]
         각 그룹은 각자의 컨셉트에 따라 멤버를 선정하고 적으면 수 주, 많으면 수 년 간 트레이닝을 시켜 데뷔시킨다. 실력이 뛰어나도 해당그룹의 컨셉트에 맞지 않으면 멤버가 될 수 없다. [[퓨리티]]의 ~~애기애기한~~ 아직 미성숙한 일본풍 성장형 컨셉트와, 이미 정상급 걸그룹인 카라의 멤버가 되기 위한 컨셉트는 정말 극과 극이며, 나름 전연령 가능 ~~청정돌~~ 컨셉트인 [[APRIL]]과 이름부터가 방통위의 제제를 받았고 ~~[[https://youtu.be/h8El2kWazIU|뮤비]]도 그렇지만~~ [[https://youtu.be/tsz-C8coKJg|난리부르스 풀파티]]에 초대받을 정도의 성인취향 [[C.I.V.A]]의 컨셉트. 서로 상이한 이 모든 컨셉트의 걸그룹에 모두 멤버로 발탁될 정도로 어떤 상황에도 적응 가능한, 그것이 타고난 재능이든 뼈를 깎는 노력이든 간에 '''그만한 자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한번 데뷔한 멤버가 다른 그룹에 재데뷔하는것은 무척 어렵다.
         2012년 4월 7일 일본에서 정식으로 데뷔했으며 '체키☆러브'와 '슈와슈와 BABY' 2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5월 2일, [[http://www.nailtv.com|네일TV]] 5월호 화보에 나온다고 한다. [[https://www.instagram.com/p/BE56Is3PH58|여신 강림]] 여담으로 네일TV 화보는 원래 비매품으로, [[윤채경 갤러리]] 갤러들을 위해 100권 정도를 특별히 일반판매 했는데 반나절만에 완판되었다.[* 이 문단은 2017년 3월 한 방송에서 채경이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chaekyoung&no=179151|스스로 '''인증'''했다.]] ~~작가가 나무위키러? 반나절만에 완판이라는 문구는 여기밖에 없는데?~~] 갤러리 내에서는 굿즈 1호라고. [* 이때 [[퓨리티]] 시절 CD/DVD를 구입하려는 갤러들로 인해 일본 내 인터넷 소핑몰 재고를 단숨에 품절시켰다.]
         2017년 4월 <에IF릴> 2회 미션으로 일본 게릴라콘서트에 도전했다. 목표인원 달성후 채경은 퓨리티 이후 다시 일본무대에서 정식그룹으로 공연을 하게 되는 [[http://www.vlive.tv/video/27144|감격을 누렸다.]]
         2017년 12월 9일 에이프릴 일본 두번째 콘서트(「DREAM LAND」) 를 가졌는데 채경은 채원과 함께 '큐티하니' 무대를 보여주기도 했다.
         2018년 4월 25일 에이프릴이 일본 데뷔 앨범 ‘TinkerBell’을 발매하고 일본에서 정식으로 데뷔하게 되면서 채경은 퓨리티 이후 6년여 만에 일본무대에 재데뷔하게 되었다.
         2018년 5월 일본에서 [[http://www.vlive.tv/video/70186|귀국한 후]] [[http://www.vlive.tv/video/70187|단독 브이앱을 진행했다.]]
          * [[조시윤]]과 세트로 영혼의 듀오라는 어필이 되고 있다. 워낙 두 사람이 같이 걸어 온 시간이 길고, [[퓨리티]]는 [[일본]]에서만 고생한 채 한국 데뷔가 무산된 데다가 [[카라 프로젝트]]의 탈락과 불우한 결말, 연습생 친구들의 이탈과 데뷔 등을 지켜보며 함께해 왔는지라 서로에 대해 각별하기 때문인 듯하다. 사실상 없는 분량을 쥐어짜서 보면 늘 붙어 있을 정도. 아는사람만 알고있던 둘의 애정은 [[조시윤]]이 탈락하는 8화에서 시청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팍팍한 경쟁과 악마의 편집이 난무하는 이 프로그램에 간만에 제대로 된 감동을 보여 줬다는 평이 많다. --울었다는 사람들도 꽤 있다!!..--
          * 자신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만화 캐릭터가 일본 [[TVA]], 대한민국 웹툰으로 둘씩이나 존재한다.[* 물론 팬아트, 일러스트는 제외. 일본 성우 및 아이돌계에서는 아주 흔한 케이스지만(대표적인 케이스가 같은 작품에 연출된 [[프리즈미]], [[AKB0048]] 등.) 대한민국에서는 드문 케이스이다. 웹툰 캐릭터가 아이돌 모티브로 만들어지거나 아이돌을 패러디한 캐릭터가 단역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흔하지만 결과적으로 본인 역할이 아닌 경우가 많으며, 또 TVA, 웹툰 캐릭터 둘다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다. 일본에서 채경과 비슷한 케이스를 가진 아이돌이 대표적으로 TVA [[AKB0048|두]] [[마법사 프리큐어!|편]]이나 출연한 [[와타나베 마유|와타나베]] [[와타나베 마유(마법사 프리큐어!)|마유]].]
          * 2018년 4월 에이프릴이 팅커벨로 일본 활동을 시작하면서 멤버들로부터 팅커벨 의상이 가장 잘 어울리는 멤버로 뽑혔다.
  • 윤치영
         일찍부터 [[영어]](英語)를 배운 그는 영어를 잘 구사하였는데, 유년시절에 배운 [[영어]] 실력은 훗날 [[미국]] 유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윤치영은 [[중앙중학교 (서울)|중앙중학교]] 7회 졸업생이었다. 애교심이 워낙 강한 그는 아들 차남 [[윤인선]](尹仁善, [[국회사무처]] 해외자료과장 역임)과 손주 윤황구가 진학할 때 [[중앙고등학교]]를 선택하도록 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윤황구는 중앙중학교만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경복을 나왔다. 윤치영은 무시험세대인 손자가 [[중학교]]에 진학할 당시 주소를 옮기기까지 하며 중앙을 권했다고 한다. 차남 윤인선은 [[중앙고등학교]] 57회 동문이다.<ref>이건우 주간부기자. 교육화제, 주간조선. 1993.</ref> 그는 한글 외에도 [[영어]], [[한자]],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 일본 유학과 2·8 독립 선언 ====
         사립(현재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을 졸업하고 모교의 [[야구]]부 코치를 맡던 그는 [[1917년]] 도일,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예과(豫科,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였다. [[1918년]] [[2월]] [[와세다 대학]]의 예비 과정(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그해 [[3월]]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정치경제학부]] [[법학|법학과]]에 입학했다.
         [[1918년]] [[일본]]을 방문한 [[여운홍]] 등을 만나 [[미국]] 교포들의 현황과 독립자금 모금 현황 등의 정보를 입수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 중 [[동경]]에서 유학생들의 [[조선]] [[2·8독립 선언]]에 참여하였으며, 같은해 [[11월 23일]]에는 [[여운형]]의 일본 입국을 환영하는 유학생 환영회를 개최하고 한국 독립의 당위론을 강연하는데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그는 [[YMCA 청년회]]에도 활약, 재동경 한인 YMCA 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에 붙잡힌 그는 그의 셋째형 [[윤치성]](尹致晟)이 "[[일본]] [[육군사관학교|육사]] 출신으로 [[러일전쟁|노일전쟁]] 때 [[일본군]] [[기병]]대 [[장교]]로 참전해 용맹을 떨친(《윤치영의 20세기》, 72쪽)" 덕분에 [[불령선인]] C등급으로 분류되어 구속은 모면하고 훈계 방면되었다. 그는 유학기간 중 방학이나 휴가 때 아르바이트로 돈도 벌고 여행을 하며 즐겁게 지낸 일을 소중한 추억으로 그의 자서전에 회고하였다. 또한 일본 유학 중 일본 YMCA 청년회에 나갔으며 YMCA 청년회 야구부와 축구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밖에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야구나 축구 모임이 없으면 [[등산]]을 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에는 절대 빠져들지 말라는 사촌형 [[윤치호]]의 경고와, 부유층에 대한 비판에 대한 혐오감을 가진 점 때문에 [[사회주의]] 청년 단체와는 멀리하였으며, 윤치영은 그들로부터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조롱을 당했다. [[일본]] 유학 중 그는 [[신익희]], [[장덕수]], [[안재홍]], [[장택상]], [[조봉암]] 등을 만나서 어울렸다. [[1922년]] 봄 [[인천광역시|인천]] [[제물포]]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그는 [[상하이]]로 건너가려 하였으나, 사촌 형 [[윤치호]]와 스승 [[이승만]] 등의 만류로 고국에 체류하게 된다.
         이듬해 [[1924년]] [[6월]] 중앙YMCA야구단은 이들을 답방했다. 중앙YMCA야구단의 주장은 윤치영이었다. 당시 그는의 야구 코치도 맡고 있었는데, [[윤치호]]가 그에게 하와이로 가서 시합도 하고 [[이승만]]을 만나보라고 했다. 6월 초 윤치영은 중앙YMCA야구단을 이끌고 출국, [[미국]] [[하와이]]에 도착했다. 윤치영이 이끈 팀은 [[하와이]] 한국인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하와이]]의 [[일본인]] 팀과 서울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4대 0 패배였다.<ref name="끝나지 않는 신드롬"/>
         윤치영의 하와이행에는 [[야구]]보다 중요한 비밀 임무가 있었다. 이는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윤치호]], [[이상재]](李商在), [[김성수 (1891년)|김성수]](金性洙) 등이 보내는 약 5만 달러의 자금을 [[이승만]]에게 전하는 사명이었다. 떠나기 직전 [[이상재]]는 윤치영의 귀에다 대고 "이놈아 잘 가져가. 가서 우남장 뵙거든 우리 모두 씩씩하게 일 잘한다고 전해라<ref name="경향19720408"/>"하고 안부 전할 것을 당부했다. 그는 자신의 아랫배 속옷에 돈을 감추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 출국할 수 있었다. 그가 일행들을 데리고 [[부산]]에서 탄 배는 [[시모노세키]]-[[도쿄]]-[[요코하마]]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 도착 직후 [[워싱턴 D.C.]]에서 달려온 [[이승만]]에게 그는 안부편지를 전하며 숨겨온 약 5만 달러를 전달했다
         [[1924년]]초 윤치영은 [[대한인동지회]] 본부이사 겸 재무부장에 선출되었다. 1924년 [[11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으로부터 해군군비 축소와 태평양 및 극동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제2차 태평양 회의에 파견, [[한국인]] 대표로 참석한 [[이승만]]을 수행하여 일본의 침략적 야만성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태평양]] 연안 국가 17개국이 참가한 이 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서재필]]을 대표단장으로, [[신흥우]], [[유억겸]], [[이승만]], [[양유찬]]과 윤치영을 대표단원으로 임명하는 임명장을 전보로 보내왔다.
         당시 [[일본]]은 30여 명의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윤치영은 일본측 대표단장 쓰루미 유스께(鶴見佑輔)를 그의 숙소로 찾아갔다.<ref name="경향19720408"/> 쓰루미 유스케에게 그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역사적 침략상과 [[조선총독부|총독부]] 정치의 잔혹성 등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윤치영의 회고에 의하면 "만약 그가 불손한 태도로 나온다면 주먹다짐이라도 할 생각이었다.<ref name="경향19720408"/>"한다. 그런데 쓰루미는 윤치영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면서 신중한 태도로 듣고 있더니 반박하였다.
         {{인용문2|[[일본인]]들은 비록 하찮은 인력꾼(잡역부)이라도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치는데,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은 잘사는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애국심]]이 없어서 협박에 약하다.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대학]] 출신들이고 당신부터도 [[일본]]의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 아니냐? 그래도 조선인 가운데 애국애족 하는 사람들은 상당수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니 이 점을 너희는 [[일본]]에게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ref name="경향19720408"/>}}
         윤치영으로부터 고무적인 간찰들을 접수한 [[이승만]]은 직접 친필로 네 차례의 답신을 통해 [[하와이]]의 동지촌과 [[동지식산회사]]의 실황을 알려주고 또 윤치영이 제기한 네 가지 의문점에 대해 대답을 하였다.<ref name="이승만 동문 서한집 (상)"/> 윤치영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이상촌 건설 주장에 고무되었다. 그는 한국인 유학생및 한인동포 청년들을 모으고, 청년 비서들을 채용하여 미국 및 한국 국내외, 일본 등의 정세와 언론의 동향을 파악, 정보를 입수하여 [[이승만]]에게 전달하였다. 체육활동, 청년들과의 대화를 좋아하던 윤치영은 청년들을 통해 정보를 입수하여 [[이승만]]에게 전달하였고 [[이승만]]은 그를 각별히 신뢰하였다.
         이후 [[종로구]] 집에 도착 생활하던 중, [[1938년]] 말 집에 찾아온 [[서대문구|서대문]] 경찰서 소속 형사들에게 다시 연행되었다. 이때 그의 가택에서 발견된 '[[일본]]경찰의 눈에 띈 [[이승만]]과 함께 찍은 사진 역시 화근'이 되었다. 체포된 그날로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취조 과정에서 [[서대문 경찰서]] 2층에 끌려간 그는 [[이승만]]으로부터 어떤 밀명을 받고 귀국했는가 추궁당했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23"/> 이어 [[미국]]에서의 행적을 설명하라는 요구와 함께 [[이승만]]과의 관계, [[안창호]]와의 관계 등을 집중 추궁당했다.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3개월간 감금당했다.<ref name="경향19720408"/> [[일본]] 경찰로부터 [[워싱턴 D.C.|워싱턴]]의 [[구미위원부]]에서의 활동을 추궁당하다가, 일제는 그와 [[임시정부]]와의 비밀연락을 걸고 넘어졌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23"/> 이후 일본 경찰로부터 연락망을 대라, [[임정 구미위원부|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국내 비밀공작을 대라, 해외 독립단체들과의 연락관계를 불라는 구타와 협박을 당하였다.
         그는 [[이승만]]이나 [[임시정부]]를 모른다며 잡아떼었다. 그러자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종로구에 있는 그의 집을 뒤져서 그의 서재에서 [[이승만]], [[서재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부원들과 촬영한 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의 독립공채표 등을 찾아내 그에게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는 모른다며 부인했고, 일본 형사들은 그에게 고문을 가한다.
         {{인용문|칠성판 처럼 생긴 판대기가 철침대 모양의 대각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처음이라 일본 헌병들이 시키는 대로 칠성판 위에 머리를 제친 채 드러누웠다. 두 팔을 칠성판 밑으로 비틀어서 오랏줄로 붙들어 매어 꼼짝 못하도록 고정시킨 뒤, 덩치 큰 놈이 내 배에 올라카는 것이었다. 내 몸을 요지부동의 상태로 만들어 놓고는 물이 담긴 주전자를 코에다 대고 들이붓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숨이 막혀 질식하게 되었다. 그들이 번갈아가며 이 짓을 계속하였는데 나는 어느 새 기절하고 말았다. 그들의 인공호흠으로 내가 얼마만에 정신이 들자 그동안에 다그쳐온 질문들을 또 다시 반복하는 것이었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0"/>}}
         옥중에서 그는 [[3월 10일]] [[안창호]]의 부음 소식을 접하였다. 그리고 곧 [[경기도경찰청|경기도 경찰부]]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일본]] 경찰은 [[안재홍]]을 추켜세우고 [[여운형]]도 이미 자백을 하였는데 너만 혼자서 버틴다며 회유하였다. 그 뒤 그의 국내활동을 따지더니 교우관계를 추궁당하였다. 일경은 그에게 제시한 흥업구락부의 명단을 제시하며 관련성을 집중 추궁하기도 했다. 그 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3,4개월 수감되어 있었고, [[유길준]]의 아들이자 순종의 동서인 [[유억겸]]도 끌려와 취조당하였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0"/> 중부서와 경기도경찰청 등으로 끌려다니며 5개월간 심한 고문을 당했다.<ref name="경향19720408"/> 고문 과정에서 윤치영은 [[흥업구락부]] 회원은 아니지만 흥업구락부의 영향하에 있는 서울 거주자들의 명단을 진술한 적이 있다.<ref name="우남 이승만 연구 p.365">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365-366페이지</ref>
         심한 고문을 이기지 못한 그는 또 [[흥업구락부]] 예하 3개 그룹에서 포섭하려던 포섭자 명단을 [[일본]] 경찰에 발설하였다.<ref name="우남 이승만 연구 p.365"/> 마침 [[서대문 경찰서]]에 취재차 왔다가 윤치영이 고문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매일신문]] 기자 [[서정억]]은 그의 처참한 고문 장면을 목격하고 항의했다가, 취조형사들에게 구타당하였다. [[서정억]]의 구타사건으로 현명건 등 서대문경찰서 출입기자들이 경기도 경찰부에 항의하기도 했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5">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135-136페이지</ref> 윤치영은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면서 부모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다.
         그의 고문현장을 목격한 [[동아일보]]사 [[서정억]] 기자에 대한 구타사건은 언론계와 [[기독교]]계로 번졌고, 외부로도 알려져 [[일본]] 본국의 언론인과 [[기독교]] 단체에서 총독부에 항의성명서와 항의방문을 하는 사태로 확산되었다.
         {{인용문|아내의 정성 어린 뒷바라지로 나의 몸이 차차 정상을 찾아가던 어느 날 나는 또 그들의 호출을 받아, 어느 장소로 끌려나갔다. [[서대문구|서대문]]에서 신촌 굴레방다리로 넘어가는 아현 마루턱에 있는 옛날 감리교 신학교 자리였다. 해방 후에는 다시 신학교로 쓰이다가 지금은 새마음 병원으로 변하였지만 당시 일제는 이 건물을 강제 징발하여 그들의 '''[[일본]]정신 고취'''를 위해 설립했다는 이른바 '대화숙 보호관찰소'(大和塾 保護觀察所)를 여기서 운영하였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5"/>}}
  • 윤태동
         [[1900년]] 5월 13일 [[충청북도]] [[충주시|충주]]에서 출생하였다. [[경기고등학교|경성제일고보]]를 거쳐 [[1925년]] [[일본]] [[도쿄대학|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학부/농업생명과학대학|수원고등농림학교]], [[보성전문학교]],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 등에서 강사로,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수로 근무하였다. [[1934년]] 7월에는 [[경성제대]] 예과 [[교수]]로 임명되어 그해 11월까지 근무하였다. 조선인이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임명된 것은 윤태동이 3번째이며, 전 기간을 통틀어 4명에 불과하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간도성(間島省) 교육청 학무과장, [[만주국]] 민생부 교육사 독학관, 대신관방 이사관 겸 교학관, 자료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협화회]]의 분회(수도계림분회)에서 참여(參與)로 활동하였으며 협화회 주최 행사에서 '일본국민과 협화정신'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간도성 차장을 거쳐 [[1945년]] 4월에 간도성장(間島省長)에 취임했는데 조선인이 성장(省長)에 발탁된 것은 [[이범익]] 이래 두번째이다.
         [[일본제국|일제]] 패망 후 [[소련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이주됐으며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 윤한
         2008년 전역 후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위해 윤한은 직접 영화 제작사를 찾아다니며 문을 두드렸으나, 그가 배웠던 영화 음악이 한국의 시스템과 전혀 달랐기에 모두 외면당하고 만다.<ref>[http://news.sookmyung.ac.kr/news/articleView.html?idxno=2944 자신의 인생을 연주하다], 《숙대신보》, 2014년 3월 31일</ref> 각종 오디션과 콘테스트에도 많이 나갔지만 한 번도 입상을 하지 못 하고 떨어졌고, 동네 학원에서 전공생도 아닌 일반인들에게 ‘도레미파솔라시도’를 가르치며 한 달에 30~40만원을 벌 때도 있었다.<ref name="g">[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7421551 틀에 갇히는 건 싫다… 윤한, 이번엔 클래식과 만나다], 《연합뉴스》, 2015년 2월 22일</ref> 그렇게 2년의 시간을 보내다가 마지막으로 참가한 콩쿠르에서도 떨어지며 실망하고 있던 중 연주음악 전문 레이블인 스톰프뮤직의 눈에 띄게 되었다.<ref>[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17377 유난히 윤한 스러운 - 많은걸 가진 남자], 《여성중앙》, 2016년 6월 1일</ref> ‘제2의 [[이루마]]’로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에 그는 2010년 1집 《Untouched》를 발표하며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였다. 앨범 제목인 Untouched는 ‘순수한, 손대지 않은’이란 의미를 담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재즈]]의 대중화, 그리고 쉽게 들을 수 있는 [[솔 음악|소울]]에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음악을 만들고 싶은 마음으로 데뷔 음반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펑크|펑키]], 재즈, 소울 등 여러 장르를 복합시켜 본인이 전곡을 작사, 작곡, 편곡 및 프로듀싱한 이 앨범은 한터 차트 및 [[핫트랙스]] 실시간 음반판매량 1위를 기록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16&aid=0000384729 [Musician Interview] 가볍거나 혹은 가볍지 않거나], 《헤럴드경제》, 2011년 5월 26일</ref> 같은 해 [[KBS 2TV|KBS2]]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삽입곡 ‘그대를 그리다’를 만들며 첫 OST 작업을 하였다. 2011년 [[일본]] 음반사 [[:ja:ポニーキャニオン|포니캐년]]의 요청으로 드라마 명곡 피아노 솔로 연주집 《Love & Sorrow》를 발매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81&aid=0002216787 내 피아노는 김동률 덕분], 《서울신문》, 2011년 8월 8일</ref> 이는 한류 열풍에 맞추어 한국 인기 드라마 OST를 피아노로 연주할 한국인 연주자를 물색한 끝에 그가 낙점되어 만들어진 작품으로, ‘한류 피아노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ref>[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337240540328033002 팝피아니스트 윤한, 소극장콘서트 개최 ‘손끝으로 전하는 감성’], 《티브이데일리》, 2012년 5월 17일</ref> 그해 [[tvN]] 《[[로맨스가 필요해]]》 OST 제작에 참여했다.
         2017년 2월 일본의 영화 감독 [[이와이 슌지]]의 첫 한국 작품인 《장옥의 편지》의 OST에 참여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312&aid=0000239654 윤한, 이와이 슌지의 첫 韓작품 '장옥의 편지' OST 참여], 《텐아시아》, 2017년 2월 16일</ref>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이와이 감독은 직접 영화의 메인 테마 ‘DAWN and DUSK’의 작곡을 맡았으며 일본 아티스트들과 함께 한국인으로는 윤한이 피아노에 참여, 잔잔한 분위기를 한층 담백하게 채웠다. 3월예술디자인대학 포스트모던음악학과 및 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 실용음악학과 조교수로 임용되어 공연과 방송, 그리고 강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9&aid=0003907578 윤한, 경희대 포스트모던음악학과 전임교수 임용], 《매일경제》, 2017년 3월 20일</ref> 12월 디지털 싱글 음반 《It was you》를 발표했다. ‘It was you’는 발라드 장르의 곡으로 작사·작곡을 맡은 윤한은 다양한 악기 구성을 통해 풍성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한 버전과 피아노와 노래만으로 이뤄진 버전 등 두 곡으로 사랑 이야기를 풀어냈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296501 윤한, 오늘(7일) 첫 디지털 싱글 음반 발매.. 'It was you'], 《텐아시아》, 2017년 12월 7일</ref>
  • 윤형빈
         [[연극]](2003년), [[뮤지컬]](2004년) 등을 하다가 [[2005년]] [[한국방송공사|KBS]] 20기 공채 개그맨으로 정식 데뷔했고《[[개그 콘서트]]》의 '특종! 나불나불' 코너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2008년 4월 《[[개그콘서트]]》의 '[[봉숭아 학당]]' 코너에서 '''왕비호''' 역을 맡아 맹활약, 큰 인기를 끌었다. '안 웃기는 개그맨'이란 평가에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독하게 준비한 역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 식상하다는 지적에 하차하고 말았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280253 윤형빈, 개그맨 '왕비호'부터 '핵주먹 파이터'까지], 스타뉴스. 2014.02.10.</ref> 당시 [[한국방송공사|KBS]] 《[[연예가 중계]]》의 '윤형빈의 조금 불편한 인터뷰'라는 코너에서 [[리포터]]로도 활동했는데 이 마저도 곧 하차했다. 2013년 5월 19일 《[[개그콘서트]]》로 다시 복귀, '살아있네' 코너에서 활약했지만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코너는 조기 폐지됐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을 했다. [[종합격투기]]에의 도전이었다. 2009년 종합격투기를 시작, 2011년부터 선수 데뷔를 준비해 오던 그는 "두려움에 맞서는 순간을 만나고 싶었다."며 2013년 10월 30대의 늦은 나이에 본격적으로 [[로드 FC]]와 계약을 맺고 종합격투기 데뷔를 선언했다. 그리고 2014년 2월 9일 [[Road FC 014]] 대회에 출전, [[일본]]의 [[츠쿠다 다카야]]를 상대로 1라운드 4분 19초 만에 TKO<ref>[http://imnews.imbc.com/replay/2014/nwtoday/article/3414666_13495.html <nowiki>[연예 투데이]</nowiki>윤형빈 종합격투기 데뷔전, 통쾌한 KO승]</ref>로 승리했다.
         | {{국기그림|일본}} [[츠쿠다 다카야]]
  • 의친왕
          | 학력 = 일본 [[게이오기주쿠 대학|게이오 기주쿠]] <br/> 미국 [[로노크 대학교]] <br/>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불과 한 달 후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개봉된 그는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6개국 특파 대사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창건되면서 의왕에 책봉되었으며, [[1899년]] [[미국]]에 유학하고, 이듬해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귀국하여 육군 부장, 적십자사 총재, 순종 황제 대리청정 등을 지냈다. [[한국 강제 병합|한국 병탄]] 이후 [[일본 제국|일제]]에 비타협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이하며, [[1919년]] [[대동단]]의 최익환 등과 연락,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喪服) 차림으로 변장하고 [[만주|만저우]] [[단둥 시|안둥 현]]에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1919년 11월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독립신문》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 후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건너올 것을 계속 강요받았으나 거절하였고, 끝까지 [[일본 제국|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이후 [[일본 제국|일제]]로부터 형식적인 공(公)의 지위가 박탈되었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하였으며, 세례명은 '''비오'''이다.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불과 한 달 후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개봉되었고, [[1893년]] [[12월 6일]] [[김사준]]의 딸 [[덕인당 김씨|김수덕]](金修德, [[아명]](兒名)은 김숙(金淑), [[1881년]] [[12월 22일]] ~ [[1964년]] [[1월 14일]])을 아내로 맞았다. [[1894년]] [[7월]] [[내의원]]제조 겸 [[사옹원]]제조에 임명됐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 제국|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려다가 취소하고 중도에 되돌아왔다. 그 뒤 을미년 왕세자 작위 선양 파동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일단락된 이후 일본 유학을 하여 일본의 [[게이오기주쿠 대학교|게이오 의숙]]을 거쳐 [[1899년]](광무 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0년]] [[미국]] 내 각지를 순행하였다.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2성 장군|부장]]이 되었다. [[1906년]] 7월 12일 의친왕 이강은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이후 고종의 후궁으로 귀인이 된 [[순헌황귀비]]의 견제를 받았다. 황자 서열로는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다음 서열이었으나 순헌황귀비의 견제와 [[일본]]의 영향 등으로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직후 그는 친왕(親王)에서 공(公)으로 강등당하여 이강 공이 된다. 국권 피탈 이후에는 주색에 빠진 폐인행세로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던 의친왕은 항일 독립 투사들과 비밀리에 끊임없이 접촉, 교신하며 묵묵히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다. [[1911년]] [[11월]]에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11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의친왕은 독립운동가 및 [[상하이 시|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사들과 연락하며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臣民)의 자격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또한 구 양반이었던 동농 [[김가진]] 등이 상하이로 망명, 이들은 임시정부와 의친왕 간의 연락선을 접선, 주선하였다. 그 해 상복을 입고 상하이로 가려다 일본 경찰에 잡혔다. [[대한제국 황실|황실]]인사를 망명하게 하여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등과 탈출을 모의하여 대내외적인 화제를 일으켰으나 도중 [[만주]] 안동에서 발각되어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허용되었던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보복을 당했다.<ref>{{서적 인용|제목=우리역사의 수수께끼3권|저자=이덕일 외|출판사=김영사}}</ref> 의친왕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ref>주명준, [http://academic.naver.com/view.nhn?doc_id=16450011&dir_id=1&field=0&unFold=false&gk_adt=0&sort=0&qvt=1&query=%EB%8C%80%EB%8F%99%EB%8B%A8&gk_qvt=0&citedSearch=false&page.page=1&ndsCategoryId=10102 〈의친왕의 상해 망명기도 사건〉], 《황실학논총》 제7호, 한국황실학회, 2006년, 87~109쪽</ref>
         {{인용문|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
         [[1919년]] [[11월 20일]]자의 [[독립신문]] 기사에는 '의친왕의 친서', '의친왕 전하' 라는 말과 함께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라고 쓰여 있다.<ref name=autogenerated1>{{서적 인용|제목=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저자=서중석 지음 |출판사=역사비평사 | 연도=2006 |쪽=327}}</ref> 그해의 [[11월 25일]]자 《[[독립신문]]》 2면의 기사에는 의친왕의 상해행 기사로 대부분 할애되었으며 이후 그 뒤에도 상당 지면 할애되었다 한다.<ref name=autogenerated1 />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 정부에 보고하여 의친왕에게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이강 공이라는 공족의 작위를 박탈당했으며, 그의 공위는 장남 [[이건 (1909년)|이건(李鍵公)]]에게 습공되었다.
         [[1919년]] 재판에 회부됐으며, 그는 같은 해 대동단 총재명의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하기도 했다.<ref name="hankooki">[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907/h2009072403120184800.htm 황손 이석씨 "아버지 의친왕 진면모 알려지길…"]{{깨진 링크|url=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907/h2009072403120184800.htm }} - 한국일보</ref> 이후,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 강요를 받았던 그는 끝까지 거절·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으며 [[일본 제국|일제]]에 의해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공족에서 강제로 물러났으며,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의친왕은 이후 광인과 주색에 빠진 것을 가장하여 [[일본 제국|일제]]의 감시의 눈을 피해 살았다. [[1940년]]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다.
         * 일본 [[게이오기주쿠 대학교|게이오 의숙]]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98968 "나는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 오마이뉴스 기사
         [[분류:의친왕]][[분류:1877년 태어남]][[분류:1955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왕자]][[분류:대한제국의 황자]][[분류:대한제국의 장군|이강]][[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소장|이강]][[분류:일본의 왕공족]][[분류: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수훈자]][[분류:대훈위 국화대수장 수훈자]][[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독립당의 당원|이강]][[분류:전주 이씨]][[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이강]][[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게이오기주쿠 대학 동문]][[분류:로노크 대학교 동문]][[분류: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동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이강]][[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이강]][[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성락원]]
  • 이강우 (1938년)
         * [[1968년]] ~ [[1969년]] : [[일본]] [[와세다 대학|와세다 대학원]] 상학과 상학석사
         * [[1966년]] ~ [[1969년]] : 주일본한국청구권사절단([[도쿄]])
         * [[1983년]] [[4월]] ~ [[1986년]] [[12월]] : 주일본대사관 재무관(부이사관)
  • 이건 (대한제국 황족)
         |사망지 = [[일본]] 사이타마 동경본궁 별저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계급 = [[일본 제국 육군]] [[중좌]]
         |서훈 = [[일본 제국]] [[대훈위 국화대수장]]<br />[[일본 제국]]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이건'''(李鍵, [[1909년]] [[10월 28일]] ~ [[1990년]] [[12월 21일]])는 [[일본]]의 [[일본 제국 육군|육군]] [[군인]]이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의친왕|이강]]의 장남으로 [[이왕가]]의 일원이자 [[대한제국 황실]]의 후예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 첫 이름은 '''용길'''. 의친왕이 1930년에 강제 은거를 당하자 [[왕공족|공위]]를 세습 받아 ‘이건공 전하’로 불렸다.
         대한제국 [[한성부]]에서 태어나 [[1930년]] [[육군사관학교 (일본)|일본 육군사관학교]] 42기생, [[1938년]] [[육군대학교 (일본)|육군대학교]] 51기생으로 졸업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중좌]] 계급에 이르렀다. [[1931년]] [[일본 제국 해군|해군]] [[대좌]] [[마쓰다이라 유타카]](옛 [[다카마쓰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토시 (1834년)|마쓰다이라 요리토시]] [[백작]]의 10남)의 장녀이자 [[히로하시 다다미쓰]] 백작의 양녀 [[마쓰다이라 요시코]]([[영친왕]]비 [[이방자]]의 외사촌)와 결혼하였으며, [[1947년]] '''모모야마 겐이치'''({{llang|ja|桃山虔一}})로 개명하고 [[1955년]] 일본에 귀화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당시 공포된 [[메이지 천황]]의 조서에 따라 고종, [[대한제국 순종|순종]], [[순정효황후]], [[영친왕]], 의친왕, 의친왕비, [[흥친왕]], 흥친왕비 등 총 8명만 [[왕공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부여받았고, 나머지 왕실 구성원들은 공식적으로 이에 포함되지 못하였다. 이건의 이복동생 [[이우]](李鍝)가 1917년에 [[이준용 (1870년)|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가 공위를 계승받으면서 동생은 왕공족인데 형은 왕공족이 아닌 상황이 발생하였다.<ref>{{서적 인용|저자=김기훈|제목=일제하 재일 왕공족의 형성배경과 관리체제|연도=2009|출판사=부경대 대학원 학위논문(석사)|쪽=36 ~ 37}}</ref> 이건은 일본 유학 이후 임의적으로 ‘공자’(公子)라는 칭호를 받았고, 1926년에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이 공포되고 난 이후에야 왕공족으로 정식 인정받게 되면서 그때까지 한정된 범위의 왕공족에게만 사용되던 ‘전하’(殿下)의 경칭을 받게되었다.<ref>김기훈, 위의 책, 72쪽.</ref><ref>{{뉴스 인용|제목=왕공궤범 제정과 덕혜옹주, 이건공자에게 전하의 경칭을 사용|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60822u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26-08-22|확인날짜=2012-06-1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6141545/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60822u00_01.pdf|보존날짜=2016-03-06|깨진링크=예}}</ref>
         === 일본 유학과 입대 ===
         1916년 6월에 경성유치원을 졸업하고, 1917년 4월 6일에 일출소학교에 입학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총애를 일신에 종하고, 이강공 장자 용길아지기, 지금은 일출학교에 통학 통명하고 활발한 그 천성|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170408u00_03.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17-04-08|확인날짜=2012-06-1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7151338/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170408u00_03.pdf|보존날짜=2016-03-07|깨진링크=예}}</ref> 1921년에 유학 명분으로 일본으로 보내져 [[학교법인 가쿠슈인|학습원]] 초등과에 입학하였고, 1923년 3월에 초등과를 졸업하였다.<ref name="인사여신록">{{서적 인용|언어 =ja|저자=人事興信所|제목=人事興信録 第13版|연도=1941|출판사=人事興信所|url=http://dl.ndl.go.jp/info:ndljp/pid/1070509/53}}</ref> 같은 해 4월에 [[육군유년학교 (일본)|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하였다. 한일병합 이후 대한제국 황실을 규율하기 위하여 1926년 12월 1일에 일본 황실령 제17호로 제정·공포되었던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 제59조에 따르면 왕·왕세자·왕세손·공은 만18세에 달한 후 육군이나 해군 무관으로 임관하여야 하는 의무가 강제되었다.<ref name="왕공">{{웹 인용|url=http://law.go.kr/lsInfoP.do?lsiSeq=67698&chrClsCd=010202#0000|제목=왕공가궤범|저자=조선총독부황실령 제12호|출판사=국가법령정보센터|날짜=1941-07-10}}</ref> 1926년 4월에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42기생으로 예과에 입교하였다. 1926년 4월 26일에 [[대한제국 순종|순종]]이 사망하자 장례식을 집행하는 종척집사(宗戚執事)로 임명되었고,<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1904026_008&grp=&aid=&sid=890654&pos=4|제목=후작 윤택영을 총호원으로 임명하고 이해창, 이해승, 이윤용 등을 종척집사에 임명하다|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926-04-26}}</ref> 5월 10일에 순종의 능을 천릉할 때에도 종척집사로 임명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1905010_002&grp=&aid=&sid=0&pos=5|제목=천릉할 때의 수빈원과 종척집사를 임명하다|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926-05-10}}</ref>
         1933년 7월에 육군기병학교를 졸업하였고, 같은 해 8월에 기병 중위로 진급하였다.<ref name="인사여신록"/> 1935년 3월 15일에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육군 정기 대이동 15일 정식 발령|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50315v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35-03-15|확인날짜=2012-06-1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8183955/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50315v00_02.pdf|보존날짜=2016-03-08|깨진링크=예}}</ref> 1936년 8월 1일에 대위로 진급하였고,<ref>{{뉴스 인용|제목=육군정기이동내명|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60729v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36-07-29|확인날짜=2012-11-17|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6141753/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60729v00_02.pdf|보존날짜=2016-03-06|깨진링크=예}}</ref> 같은 해 12월 17일에 [[일본 육군대학교]] 제51생으로 입학하였으며,<ref>{{뉴스 인용|제목=이건공 전하 육대 어입학|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61217v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36-12-17|확인날짜=2012-06-1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8183656/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61217v00_02.pdf|보존날짜=2016-03-08|깨진링크=예}}</ref> 12월 28일에는 육군대학교 입학과 관련하여 육군사관학교 마술(馬術) 교관에서 근위 기병 연대 소속으로 전보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이건공 전하 어전보|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61230y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36-12-30|확인날짜=2012-06-1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7152058/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61230y00_01.pdf|보존날짜=2016-03-07|깨진링크=예}}</ref> 1938년 12월 8일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ref>{{뉴스 인용|제목=육군대학교 졸업식|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81209y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38-12-09|확인날짜=2012-06-1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7142702/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81209y00_01.pdf|보존날짜=2016-03-07|깨진링크=예}}</ref> 12월 10일에 근위 기병 연대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육군 정기 이동 발표|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81211y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38-12-11|확인날짜=2012-06-1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6150605/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81211y00_01.pdf|보존날짜=2016-03-06|깨진링크=예}}</ref> 일제 강점기에 일본육군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이건을 포함하여 [[영친왕]] 이은, 이우, [[홍사익]] 뿐이다.<ref>{{서적 인용|저자=정범준|제목=제국의 후예|연도=2006|출판사=황소자리|쪽=490|id={{ISBN|89-91508-18-9}}}}</ref> 1939년 9월 13일에 육군대학교 연구부 주사 겸 병학 교관으로 전보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이건공 전하 어전보|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90913y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39-09-13|확인날짜=2012-06-1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8183220/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90913y00_01.pdf|보존날짜=2016-03-08|깨진링크=예}}</ref> 1940년 8월 1일에 [[소좌]]로 진급하였으며,<ref>{{뉴스 인용|제목=미카사노미야 전하 승진 다케다노미야 이건공 전하께서도|url=http://db.history.go.kr/viewer/viewIpqDataNP.jsp?pItemCode=np_da&pIpqParam=np_da_19400802_w0001&pLevel=6&pDatabaseID=np_da&pRecordID=np_da_1940_08_02_0030&pTitle=%EB%8F%99%EC%95%84%EC%9D%BC%EB%B3%B4+%3E+1940%EB%85%84+%3E+08%EC%9B%94+%3E+02%EC%9D%BC+%3E+%E4%B8%89%E7%AC%A0%E5%AE%AE%E6%AE%BF%E4%B8%8B%E5%BE%A1%E6%98%87%E9%80%B2+%E7%AB%B9%E7%94%B0%E5%AE%AE+%E6%9D%8E%E9%8D%B5%E5%85%AC%E6%AE%BF%E4%B8%8B%EA%BB%98%EC%84%9C%EB%8F%84%28%E6%9D%B1%E4%BA%AC%29...|출판사=동아일보|날짜=1940-08-02}}{{깨진 링크|url=http://db.history.go.kr/viewer/viewIpqDataNP.jsp?pItemCode=np_da&pIpqParam=np_da_19400802_w0001&pLevel=6&pDatabaseID=np_da&pRecordID=np_da_1940_08_02_0030&pTitle=%EB%8F%99%EC%95%84%EC%9D%BC%EB%B3%B4+%3E+1940%EB%85%84+%3E+08%EC%9B%94+%3E+02%EC%9D%BC+%3E+%E4%B8%89%E7%AC%A0%E5%AE%AE%E6%AE%BF%E4%B8%8B%E5%BE%A1%E6%98%87%E9%80%B2+%E7%AB%B9%E7%94%B0%E5%AE%AE+%E6%9D%8E%E9%8D%B5%E5%85%AC%E6%AE%BF%E4%B8%8B%EA%BB%98%EC%84%9C%EB%8F%84%28%E6%9D%B1%E4%BA%AC%29... }}</ref> 1943년 3월 1일에 [[중좌]]로 진급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육군 정기 이동|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30302y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43-03-02|확인날짜=2012-06-1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6210910/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30302y00_01.pdf|보존날짜=2016-03-06|깨진링크=예}}</ref> 1944년 5월 15일에 육군대학교 연구부 주사로 전보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이건공 전하 육대 연구부 주사 어전보|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40516v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44-05-15|확인날짜=2012-06-1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7151820/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40516v00_01.pdf|보존날짜=2016-03-07|깨진링크=예}}</ref>
         모모야마 요시코는 사교적인 반면 이건은 조용한 성격이었기에 아내의 긴자클럽의 취직에 대한 불화 및 전쟁 중에 장남인 다다히사(忠久)가 본인의 아이가 아님을 알게 되어, 두번째 부인 마에다 요시코(前田美子)를 알게 되었을 무렵인 1951년 5월에 마쓰다이라 요시코와 이혼하였다. 1955년에 일본으로 귀화하였다.<ref>〈법무성 고시 제165호〉, 《官報》(昭和 30년 3월 1일), 印刷局, 東京. 1955년, 5면</ref>
         1952년에 마에다 요시코(前田美子)와 사이에서 아들 모모야마 고야(桃山孝哉)를 낳았다. 모모야마 고야(桃山孝哉)는 후일 가이세이 학원(開成学園) 학교 교감을 역임하였다. 이건은 가족과 [[사이타마현]] [[요노 시]]의 시영주택을 임대하여 살았으며, 1990년 12월 21일 일본에서 사망하였다. 일본 황실과 지인 등의 주관으로 장례식이 진행되었고, 장례식에는 육사 동기이자 일본 황족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三笠宮崇仁親王)이 [[우라와 시]]까지 와서 참석하였다.
         전쟁 이전에는 스포츠카 매니아로서 유명했고 영국제 스포츠카인 Alvis speed 20, 미국의 Pierce-Arrow의 대형 리무진 등 많은 차량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것이 연이 되어 1970년대부터 사망시까지 일본클래식자동차클럽(CCJC)의 회장으로 재직하였다.
         * 1930년 10월 - 일본 제국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ref>{{뉴스 인용|제목=이건공 전하 서훈 12월경 환차|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01026y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30-10-26|확인날짜=2012-06-15|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6142212/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01026y00_01.pdf|보존날짜=2016-03-06|깨진링크=예}}</ref>
         :1888년에 제정된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은 남자에게 수여되는 훈장인 [[욱일장]]의 최고위 훈장이다.<ref>{{웹 인용|url=http://www8.cao.go.jp/shokun/shurui-juyotaisho-kunsho/tokasho.html|제목=훈장의 종류(동화대수장)|저자=일본 내각부|확인날짜=2012-06-05}}</ref> 일본 제국 정부가 1926년 12월에 공포한 《왕공가궤범》 제58조에 따르면 “공은 만 15세가 넘으면 훈1등에 서훈되어 욱일동화대수장을 받는다”고 규정되어 있다.<ref name="왕공"/>
         * 1940년 11월 3일 - 일본 제국 [[대훈위 국화대수장]]<ref>{{뉴스 인용|제목=다케다노미야, 이건공 양전하 서훈|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01105y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40-11-05|확인날짜=2012-06-15|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6141957/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01105y00_01.pdf|보존날짜=2016-03-06|깨진링크=예}}</ref>
         : 대훈위 국화대수장은 일본의 최고위 훈장으로 1876년에 제정되었으며 주로 황족을 대상으로 수여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8.cao.go.jp/shokun/shurui-juyotaisho-kunsho/kikkasho.html|제목=훈장의 종류(대훈위국화장)|저자=일본 내각부|확인날짜=2012-06-05}}</ref> 영친왕 이은(1920년 4월 27일)<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1304027_003&grp=&aid=&sid=0&pos=0|제목=왕세자가 육군 보병 중위에 임명되고 대훈위에 서임되어 국화 대수 훈장을 받다|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920-04-27}}</ref>, 의친왕 이강(1924년 1월 10일)<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1701010_002&grp=&aid=&sid=17077&pos=0|제목=이강 공 부부와 이희 공 비에게 훈위를 내린다는 궁내성의 통지가 있다|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924-01-10}}</ref>, 이우(1943년 11월 7일)<ref>{{뉴스 인용|제목=타케히코왕, 이우공 양전하께 대훈위|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31109v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43-11-09|확인날짜=2012-06-1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5173132/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31109v00_01.pdf|보존날짜=2016-03-05|깨진링크=예}}</ref> 에게도 대훈위 국화대수장이 서훈되었다.<ref>{{언어링크|ja}} {{웹 인용|url=http://www.geocities.jp/nakanolib/giten/kikka2.htm|제목=대훈위국화장경식·대훈위국화대수장 수장자 일람|저자=나가노 문고|확인날짜=2012-06-01|보존url=https://www.webcitation.org/6JdF6AnsU?url=http://www.geocities.jp/nakanolib/giten/kikka2.htm|보존날짜=2013-09-14|깨진링크=예}}</ref>
         이건이 일본 제국 육군에 복무하였고,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친일 논란이 있었지만<ref>{{뉴스 인용|제목=친일 책임 가장 큰 왕족은 왜 빠졌나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7&aid=0000008952|저자=정진석|출판사=주간동아|날짜=2009-11-27|확인날짜=2012-07-22}}</ref> 2009년에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왕공족]]을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편찬위원회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논의 끝에 왕공족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지만 친일보다는 망국에 대한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다만 기준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친일 행위가 있는 경우에는 수록대상자로 선정하기로 정리되었다”고 해명하였다.<ref>[http://www.minjok.or.kr/userdata/pdf/dicdip.pdf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쟁점과 의의〉], 조세열, 《역사비평》 91호, 2010년 여름호, 284쪽.</ref> 이와 더불어 “왕공족은 대한제국 황실을 예우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고안한 일본 황족과 일본 [[화족]], [[조선귀족]] 사이의 특수한 지위로 협력에 대한 대가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면서 “공족 중 이재면과 이준용, [[이재곤 (1859년)|이재곤]], [[이해승]], [[이재극]] 등 구체적인 매국행위를 일삼은 인사들은 친일 행적으로 사전에 수록되었으나 영친왕 이은과 이우는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음을 감안하여 제외하였다”고 밝혔다.<ref>조세열, 위의 책, 296쪽.</ref> 이건은 영친왕 이은, 이복동생 이우와 마찬가지로 《친일인명사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 모모야마 겐이치로 이름을 바꾸고 일본으로 귀화하였다는 점에 대하여 비판 받고 있다.<ref>{{뉴스 인용|제목=〈역사 속의 인물〉 나라 뺏은 적국 신민이 된 조선의 왕족 이건|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316493|출판사=매일신문|저자=정인열|날짜=2013-10-28|확인날짜=2013-11-19}}</ref>
         * [[일본 육군사관학교]]
  • 이관우
         [[1999년]] [[일본]] [[J리그]]의 [[아비스파 후쿠오카]]로의 입단을 추진하였고 계약까지 성사되었으나, 당시 [[드래프트 (스포츠)|드래프트]] 공시 상태였던 관계로 이적이 무산되었다. 결국 [[2000년]] [[K리그]] [[대전 시티즌]]에 입단하였고 여러 차례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팀의 주전 미드필더로 활동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2006년]] [[3월 29일]]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원정 서울에서 K리그 통산 51번째로 20-20클럽에 가입하였다.<ref>[http://new.kleaguei.com/news/kleague/view.aspx?u=7661 대전, 이관우 선수 20~20 기록 달성]{{깨진 링크|url=http://new.kleaguei.com/news/kleague/view.aspx?u=7661 }}</ref> [[2006년]] 7월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하였으나,<ref>[http://www.sportalkorea.com/news/korea/view.php?gisa_uniq=20060723000006 대전 이관우, 수원으로 이적 확정]{{깨진 링크|url=http://www.sportalkorea.com/news/korea/view.php?gisa_uniq=20060723000006 }}</ref> 그 과정에서 [[대전 시티즌]]과 마찰을 빚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1363173& 상처입은 이관우, 대전 남을까]</ref>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한 후에 좋은 활약을 펼쳐 [[K리그 2006|2006년 K리그]] 준우승, [[K리그 2008|2008년 K리그]] 우승 등에 공헌하였고, 이적 6개월 만인 [[2007년]]에는 팀의 주장을 맡기도 하였다.<ref>[http://www.bluewings.kr/news/news_view.asp?seq=1624 2007 새출발 수원, 주장 이관우-부주장 이정수 선임]{{깨진 링크|url=http://www.bluewings.kr/news/news_view.asp?seq=1624 }}</ref> [[2007년]] [[8월 25일]] [[대구 FC]]와의 원정 서울에서 K리그 통산 21번째로 [[K리그 득점-도움 기록#30-30 클럽|30-30클럽]]에 가입하였다.<ref>[http://new.kleaguei.com/news/kleague/view.aspx?u=14950 수원 이관우 K리그 통산 21번째 30~30 기록 달성]{{깨진 링크|url=http://new.kleaguei.com/news/kleague/view.aspx?u=14950 }}</ref> [[2006년]]과 [[2007년]]에 연속으로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2009년]]부터 부상에 계속 신음하며 경기 한 번 나가는데 1억인 귀하신 몸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2시즌 간 단 8서울만 나갔고 [[K리그 2010|2010 시즌]] 후 수원에서 방출되었다. 이후 음식점 사업을 하다가 [[홈 유나이티드 FC]]의 [[이임생]]감독의 제의에 2013년 [[홈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하였고, 그곳에서 날카로운 프리킥 등을 선보였다.
         대한민국과 [[일본]] 프로 축구 사상 첫 올스타 맞대결인 [[조모컵|조모컵 2008]]의 K리그 올스타 선수로 선발되었던 [[박원재]]가 급성 위염으로 제외되자, 대신 엔트리에 포함되었다.<ref>[http://new.kleaguei.com/news/kleague/view.aspx?u=18321 조모컵 2008 선수 변경 (박원재 → 이관우) ]{{깨진 링크|url=http://new.kleaguei.com/news/kleague/view.aspx?u=18321 }}</ref>
  • 이구영 (영화 감독)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극장과 촬영소를 드나들면서 영화를 공부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영화 관련 일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1924년]]에 단성사가 제작한 장화홍련전의 각본을 쓴 것이 본격적인 데뷔이다. [[1924년]]에는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하고 영화 담당 강사로 후진을 양성하였다.
         연출작으로는 데뷔작 《쌍옥루》(1925) 외에 《낙화유수》,《아리랑 그 후 이야기》, 《승방비곡》, 《수일과 순애》, 《갈대꽃》 등이 있다. 1930년대 후반에 [[방한준]]의 《한강》과 《성황당》을 제작한 뒤 [[태평양 전쟁]]이 종전될 때까지 활동을 거의 쉬었다. 이때문에 다른 많은 영화인들과는 달리 태평양 전쟁 중에 [[일본 제국]]에 협력한 행적이 남아있지 않다.
  • 이근직
         1903년 [[경상북도]] 김산군(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이후 관상가의 조언으로 이근직으로 개명하였다. [[일본]]으로 [[유학]]가서 도쿄고료척식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 이동춘
         |사망지 = {{국기나라|일본}} [[도쿄도]]
         '''이동춘'''(李東春, Dong-Chun Lee, [[1963년]] [[3월 8일]] ~ [[1995년]] [[9월 9일]])은 [[대한민국]]의 전 [[권투]] 선수로,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했다. 일본명은 '''그레이트 가나야마'''(グレート 金山)이다.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80년]] [[11월 18일]] [[대한민국]]에서 프로 무대에 데뷔했으며, [[1981년]] [[11월 18일]] [[OPBF]] 밴텀급 경기에서 [[오장균]]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1983년]] [[7월 26일]] 대한민국 밴텀급 챔피언에 올랐으며, [[1992년]] [[6월 6일]] [[일본]] 밴텀급 챔피언에 올랐다.
  • 이루마
         * [[2002년]] [[2002년 6월|6월]] ~ 8월 - 특별 음반 《Oasis & Yiruma》가 출시되었고, [[일본]]과 [[중화민국|타이완]]에서 프로모션 투어를 하다.
  • 이름뿐인 관리직
         [[일본]]의 노동법에서 관리직은 잔업수당 등의 할증임금 적용에서 제외되는 것을 악용하여, 직함만 관리직으로 하고 실제로는 임금 등을 지불하지 않는 직원.
         [[분류:일본 풍속]]
  • 이민호 (1987년)
         2009년에는 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 (대한민국의 드라마)|꽃보다 남자]]》에서 주연을 맡아,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싱가포르, 일본 등 아시아 각지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한류 스타로 각광받고 있다.<ref name="ddd"/> 2010년에는 [[손예진]]과 공동 주연으로 드라마 《[[개인의 취향]]》에 출연해 [[MBC 연기대상]]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ref name="MBC"/> 이후 모두 SBS 드라마인 《[[시티헌터 (드라마)|시티헌터]]》 (2011), 《[[신의 (드라마)|신의]]》 (2012), 《[[상속자들]]》(2013), 《[[푸른 바다의 전설]]》(2016)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리고 2009년, 이민호는 무려 2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KBS2]] 《[[꽃보다 남자 (대한민국의 드라마)|꽃보다 남자]]》에서 구준표 역을 맡게 되고, '구준표 신드롬' 으로 불릴 정도로 큰 인기를 얻으며 대박을 친다.<ref name="기분좋은날"/> 몇 년간의 무명 시절 끝에 스타덤에 올랐고 드라마의 OST, 패션, 촬영지 등도 많은 화제가 되었다.<ref>{{뉴스 인용|출판사 =mk 뉴스|제목 =`꽃보다 남자` 신드롬 |url =http://news.mk.co.kr/v3/view.php?year=2009&no=74161|저자=전지현|날짜 = 2009-02-05|확인날짜=2011-01-26}}</ref> 인기에 따라 광고계에서도 이민호 열풍이 불었는데, 광고 건수만 해도 몇 십개에 이르고 [[이병헌]], [[송승헌]], [[조인성 (배우)|조인성]] 등 최고의 톱 배우들만 채용한다는 트루젠의 전속모델로 캐스팅되었다.<ref name="CF">{{뉴스 인용|출판사 =sportsseoul.com 연예|제목 =광고계에 부는 '꽃남' 이민호 열풍|url =http://news.sportsseoul.com/read/entertain/671747.htm?imgPath=entertain/broad/2009/0313/|저자 =조현정|날짜 =2009-03-14|확인날짜 =2011-01-26}}{{깨진 링크|url=http://news.sportsseoul.com/read/entertain/671747.htm?imgPath=entertain%2Fbroad%2F2009%2F0313%2F }}</ref><ref name="CF"/> 이러한 광고계에서의 활약으로 MTN 방송광고 페스티벌 시상식 CF모델남자상을 수상했다.<ref name="MTN">{{뉴스 인용|출판사 =뉴스엔|제목 =이민호 손담비 CF 최고스타 선정 ‘2009 방송광고 페스티벌’(종합)|url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6251738371010|저자=배선영|날짜 = 2009-06-25|확인날짜=2011-01-27}}</ref> 또한 연말 시상식에서는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역으로 제45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 신인연기상, [[KBS 연기대상]] 남자 신인상, 베스트 커플상 을 수상했다.<ref name="백상예술대상">[http://movie.naver.com/movie/bi/fi/prize.nhn?code=19&rnd=45 2009년 제45회 백상예술대상 정보] [[네이버]] 영화 2011-01-27 확인</ref><ref name="KBs">[http://www.kbs.co.kr/drama/2010award/history/2009/#수상 KBS 연기대상 수상] [[KBS]] 2011-01-27 확인</ref> 이후 《꽃보다 남자》는 아시아 각지에 수출되었는데, 좋은 반응을 얻어 일본,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싱가폴, 태국, 필리핀 등 아시아 10곳에서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팬미팅을 개최했다. 일본에서의 팬 미팅 티켓은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매진이 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출판사 =이데일리SPN|제목 ='이젠 한류스타!'…이민호, 亞 10개국서 대규모 팬미팅|url =http://spn.edaily.co.kr/entertain/newsRead.asp?sub_cd=EA31&newsid=01164406589887032&DirCode=0010301|저자 =박미애|날짜 =2009-11-18|확인날짜 =2011-02-25}}{{깨진 링크|url=http://spn.edaily.co.kr/entertain/newsRead.asp?sub_cd=EA31&newsid=01164406589887032&DirCode=0010301 }}</ref> 또한 중국 《국제제선》이 조사한 "2009 가장 인기있는 한국스타는?" 순위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1위를 차지해 인기를 확인시켰다.<ref>{{뉴스 인용|출판사 =마이데일리|제목 =이민호, 中 포털서 "2009 최고의 한류스타 1위' |url =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909281946061115&ext=na|저자=이용욱|날짜 = 2009-09-28|확인날짜=2011-02-25}}</ref>
         2013년 5월 22일 이민호는 가수 데뷔 목적이 아닌 팬서비스를 위해 총 7곡이 담긴 스폐셜 앨범 ''[[My Everything]]''을 발매했다.<ref>{{뉴스 인용|출판사 =뉴시스|제목 =이민호, 음반냈다 그러나 가수는 아니다…'My Everything'|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3&aid=0005153213|저자=박영주|날짜 = 2013-05-16|확인날짜=2013-11-13}}</ref> 이 앨범은 [[가온 앨범 차트]] 5위까지 올라갔고,<ref>{{웹 인용|출판사 =[[가온 차트]]|제목 =2013년 6월 1주차 가온 앨범 차트|url =http://gaonchart.co.kr/digital_chart/album.php?nationGbn=T¤t_week=22¤t_year=2013&chart_Time=week|날짜 =2013-05-25|확인날짜 =2013-11-13|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31113163921/http://gaonchart.co.kr/digital_chart/album.php?nationGbn=T¤t_week=22¤t_year=2013&chart_Time=week|보존날짜 =2013-11-13|깨진링크 =예}}</ref> 일본 [[오리콘|오리콘 일간 앨범 차트]]에서는 1위를 했다.<ref>{{뉴스 인용|출판사=[[매일신문]]|제목 =이민호 오리콘 차트 1위 “첫 앨범 ‘마이 에브리딩’ 폭발적 반응~!”|url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7003&yy=2013|날짜 = 2013-05-29|확인날짜=2013-11-13}}</ref> 5월 25일부터는 배우로써는 이례적인 콘서트 형식의 글로벌 팬미팅 투어 《My Everything》을 시작했다. 5월 25일 [[서울]]을 시작으로 8월 10일 [[베이징]]까지 3개월동안 [[일본]],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6개국 8개 도시에서 9회 공연을 했고, 총 52,0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ref>{{뉴스 인용|출판사=[[스포츠동아]]|저자=김민정|제목 =이민호, 3개월 글로벌 투어 ‘피날레’서 5만 팬 만났다|url =http://sports.donga.com/3/all/20130813/56993223/1?rec=1|날짜 = 2013-08-13|확인날짜=2013-11-13}}</ref> 원래 이 일정으로 끝낼 예정이였으나, 팬들의 요청에 따라 2014년 1월 18일 서울에서 앵콜 공연을 하기로했다.<ref>{{뉴스 인용|출판사=[[경향신문]]|저자=하경헌|제목 =이민호 글로벌 투어 1월 한국 앵콜공연으로 마무리|url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1111436361&code=960801|날짜 = 2013-11-11|확인날짜=2013-11-13}}</ref> 이후, 2013년 10월 9일부터 12월 12일까지 인기리에 방송 된 SBS 드라마 《[[상속자들]]》에서 김탄 역으로 출연한 이민호는 [[SBS 연기대상]]에서 중편 드라마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10대스타상, 최고인기상, 베스트커플상, 베스트드레스상을 수상하며 5관왕에 올랐다.《상속자들》들은 중국에서도 큰 히트를 쳤으며 이후 이민호는 2014년 1월 30일 중국의 설 명절 풍습인 국영방송 [[중국중앙텔레비전|CCTV]] 《춘제완후이》<ref>{{뉴스 인용|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저우위보|제목 =[세계속으로]춘완, 그리고 그 배후에 숨겨진 사실들|url =http://news.mt.co.kr/mtview.php?no=2014020612454128969&type=1|날짜 = 2014-02-07|확인날짜=2014-02-17}}</ref>
  • 이민호(1987)
         그러던 중 KBS의 [[꽃보다 남자(KBS)|꽃보다 남자의 한국판]]에서 주인공 구준표역할에 발탁. 특유의 소라빵 머리와 우월한 기럭지를 자랑하며 시청률 대박을 치게되어 신드롬을 일으키며 일약 떠오르는 청춘스타 대열에 합류한다. 이때의 인기는 상당해서 대부분의 예능, 코미디 프로에서 특유의 소라빵머리를 하고 나오는 캐릭터들이 한명씩은 꼭 있었다. 아시아 3국의 꽃보다남자 캐스팅중에서 일본인들이 꼽은 원작에 가장 가깝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이 드라마로 이민호는 5년간의 무명 세월을 마감하고 톱스타가 된다. 그야말로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이다.
         [[일본]]에서의 전담 성우는 [[타카하시 히로키]].
  • 이박사
         일본에서의 캐치프레이즈는 "[[뽕짝]]의 제왕"이다. 1990년대 중반 [[일본]]에서 뽕짝 붐을 일으켰으며, 2000년대 초반에는 한국에서 젊은이를 중심으로 해서 인기를 얻은 적이 있었다.
         그는 1978년부터 1989년까지 11년의 관광버스 안내원 생활을 하는 동안 특유의 노래솜씨로 이박사란 별명을 얻었다. 일본에서 살충제 브랜드 긴초(KINCHO) 광고에 출연해 [[강원도 아리랑]]의 가사를 바꾼 CM송을 불렀다. 또한 [[후지TV]]의 "HEY! HEY! HEY!"에 출연한 적도 있다. 더불어 [[덴키 그루브]]의 개막 출연으로서, [[일본 무도관]]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다.<ref name="lady"/>
         원래, 뽕짝은 중장년에 적합한 댄스 뮤직, 또는 [[택시]] [[운전사]]와 [[버스]] [[운전사]]의 졸음을 쫓는 수단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박사는 이미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한국에 역수입되는 형태로 2000년에 첫 앨범 (그 이전은 [[카세트 테이프]] 발매) "SPACE FANTASY"를 시판하고, 젊은이를 중심으로 해서 내내 인기를 끌었다.
         === 일본 ===
         === 일본 ===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대한민국의 자서전 작가]][[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1977년 데뷔]][[분류:일본의 남자 가수]][[분류:남양주시 출신]][[분류:195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
  • 이범수(배우)
          * [[일본]]에서 전담 성우는 [[모리쿠보 쇼타로]]였지만 [[자이언트(드라마)|자이언트]]부터는 [[코니시 카츠유키]]가 맡고 있는 듯하다.
  • 이봉원
         | 학력 = [[장안대학교|장안실업전문대학]] 일본어학과 전문학사 <br/> [[일본]] [[도쿄도|도쿄]] 비주얼 아트 연구과 전문학사
         }}</ref> 개그맨 실장 자리를 내놓아야 했고 당시 공동 MC로 활동해 온 <좋은 친구들> <코미디 전망대> 진행도 그만뒀다. 한참 활동할 무렵 [[1999년]] 3월 코미디 연출을 공부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1년간 일본어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나서 [[2006년]] 4월에 2년제 전문학교인 도쿄비주얼아트 연구과에 입학했다. 귀국 후에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프로덕션을 설립해 직접 연출도 하고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후배들의 연기를 지도하기도 했다.
         * [[장안대학교|장안실업전문대학]] 일본어학과 전문학사 졸업
  • 이봉원(코미디언)
         || '''학력''' ||<(> 서울용강초등학교[br]수도중학교[br][[유한공업고등학교]][br][[장안대학교]] 일본어과 ||
         대략 살펴보면 [[단란주점]]을 했다가 오픈한지 얼마 안 돼 심야 단속이 강화되면서 손님이 끊겨 망하고, [[백화점]]에 [[커피숍]]과 삼계탕집을 시도했다 또 실패하고, [[일본]] [[유학]] 자금을 위해 [[고깃집]]을 했다 또 망하고, 이후 일본 유학 후 돌아와서 기획사와 연기학원을 하다가 또 실패했다. 기획사에는 [[김구라]], [[이광기]]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는데, 하필 이들은 이 소속사를 나오자마자 뜨기 시작했다는 듯.(...) 그러나 김구라가 방송을 통해서 여전히 존경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 보면 서로 사이가 나쁘진 않은 듯하다.
         한편, 이봉원은 1999년 3월에 일본 유학을 떠난 뒤 2001년 10월 귀국했고, 같은 해 11월 3일 시작한 SBS [[코미디쇼 오 해피데이]]의 진행을 맡아 방송활동을 재개했는데, [[홍록기]]와 공동 [[MC]]를 맡았던 이 프로그램은 정통 코미디의 부활을 꿈꿨지만, [[시청자]]들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얻게 되자 처음 시작할 때 참여했던 출연진들이 대거 빠져나간 뒤 [[신인]] 개그맨[* 2001년, [[공채]] 6기 개그맨들인 [[윤성호]], [[최국]], [[엄태경]], [[박보드레]], [[손명은]], [[김주현(코미디언)|김주현]], [[김경욱(코미디언)|김경욱]], [[조세호]] 등. 이 프로그램이 종영된 이후 6기 모두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윤성호|KBS로 이적해서야 유명해진 개그맨]]이 있었고, [[김주현(코미디언)|SBS에 계속 남아서 기회를 얻은 개그맨]]도 있었으며, [[김진성(코미디언)|방송 기회를 얻지 못해 방송이 아닌 다른 무대를 선택한 개그맨]]도 있었다.]들 위주로 꾸며왔다. 그 결과 동시간대 [[KBS 2TV]] [[뮤직플러스]]와 MBC [[생방송 음악캠프]](2001년 11월 3일 첫 회), [[코미디 하우스]](2001. 11. 10. ~ 2001. 12. 29. 최종회) 때문에 [[시청률]] 부진을 면치 못하여 2001년 12월 8일 방송분부터 [[임하룡]]이 공동 MC로 투입되어 이봉원, [[홍록기]] 등과 함께 3인 체제로 바뀌었으나 역시 시청률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9회(2001년 12월 29일)만에 [[조기종영]]됐고, 이봉원은 그 이후 [[경인방송|iTV]] 위주로 활동해 왔다.
         사업과는 별개로 본인이 KBS표 정통 희극연기에 대해서 나름 자부심 같은 건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개그스타]] 같은 심야 신인 코미디 발굴프로에 [[송은이]] 등과 함께 출연(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감독 역할)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일본 희극인들과의 교류 프로그램 같은 것이 있을 때에도 종종 등장하는 편으로, 2014년에는 [[요시모토 흥업]] 소속 [[코미디언]]들과 KBS 공채 개그맨들의 협동무대인 '코미디 한일전'의 한국 좌장 역으로 출연했다. ~~자세를 취하는 [[아사다 마오]].~~
         원래 [[1990년대|90년대]] 말 일본 유학을 가서 [[NHK]]의 한국어 강좌방송에 나왔었다. 본인이 개그맨이라는 장점을 살려 유쾌하고 독특한 컨셉으로 방송을 이끌어 나가서 [[NHK]] 쪽에서는 계속 방송해 주길 바랬는데, 한국으로 귀국하고자 마음 먹으면서 방송이 종료되었다고 한다. 계속 일본에 남아 있었으면 일본 방송계에서 나름 활약했을 지도 모를 일...
         위에 서술되어 있는 기획사와 연기학원의 경우, 일본 유학 당시 [[요시모토 흥업]]의 전속시스템에 흥미를 느끼고 이를 벤치마킹한 'B1(비원) 엔터테인먼트'를 런칭했던 것이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여기에 소속되었던 대표적인 인물이 김구라와 이광기. 이후 김구라도 이봉원 자신도 방송에서 사업실패 이야기소재(...)로 가끔 우려먹고 있다.[* 코미디 40주년을 맞이해서 [[개그 콘서트]]에서 '''시커먼스'''가 다시 뭉쳤는데 자신이 가수 생활한다며 자신만만해하는 장두석에게 이봉원은 자긴 본 적도 없다고 디스. 그리고 이봉원이 자신은 ~~누구와는 다르게~~ 초지일관 하던 일 계속 한다고 하지만 장두석이 '''"아하, 사업?"'''이라며 반격. 이때 이봉원의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표정이 일품이다.] 그리고 이런 코미디언 전문 소속사 사업은 [[박승대]]가 [[스마일매니아]]를 런칭하고 소속 코미디언들을 [[웃찾사]]에 꽂아넣으면서 성공하는 듯... 했으나, 이후 [[스캔들]]이 터지면서 [[나가리]].
  • 이상백 (1904년)
         상백 형제의 할아버지 이동진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대구]]에 신식 학교인 우현서루를 열어 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남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나중에는 교사를 초빙, 수학, 역사, 국어, 영어, 일본어 등 신식 학문을 가르쳤다. 할아버지 이동진의 뒤를 이어 큰아버지 이일우가 우현학교의 일을 맡아보았다.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했는데, [[2000년]]대 초반 그의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학 학장 3명, 교수 10명, 의사 30명, 장군 2명, 언론·출판분야 11명을 배출하였다.<ref name="daemyonh">[http://www.lifemaeil.com/news_view.php?print_no=1540&seq=5570 특집- 상화의 큰 집 사람들] 주간매일 2002년 11월 27일자</ref> 또한 사촌 [[이상악]]은 작가이자 그의 친구인 육당 [[최남선]]과 사돈이 되었고, 다른 자손들 중에는 '박작대기' [[박중양]] 집안과도 인척 관계를 형성하였다.<ref name="daemyonh"/>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이일우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는 [[1915년]] [[경북고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1919년]] [[3·1 만세 운동]]의 여파로 대구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에 참여하려다가 실패하고 잠시 은신하였다. 그 뒤 [[부산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으로 유학, 일본 와세다제일고등학원(早稻田第一高等學院)을 거쳐, [[1923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에 입학했다.
         ==== 일본 유학 시절 ====
         [[1924년]] 일본의 [[일본 대학농구연맹]]을 결성하고 [[와세다 대학]] 농구팀 대표로 [[일본 대학농구연맹]]에 참여하였으며, 일본 대학농구연맹 농구부 주장으로 [[미국]]에 원정 경기에 출전하여 여러 번 우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밖에 축구, 야구에도 주전 선수로 실력을 보여주었다. [[1927년]]에 [[와세다 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모교인 [[와세다 대학]] 동양사상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일본]]에서 수학, 연구하는 동안에도 자주 배편으로 귀국, [[경성]]과 [[일본]]을 내왕하며 국내 학계 학자들과 긴밀히 제휴하거나 학문적인 견해를 주고 받앗으며, [[진단학회]]의 결성준비와 창립 발기에 참여하고, [[진단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또한 [[진단학회]]의 기관지 [[진단학보]]에도 칼럼과 논문을 송고하였다. [[1927년]] [[와세다 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 3년간 동양학, 사회학을 수학하고 [[1930년]]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1930년]]에 [[일본농구협회]]를 창설하여 창립회원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일본농구협회 상무이사에 선임되었다. [[1931년]]에 일본체육회 상무이사를, [[1935년]]에 일본체육회 전무이사를 맡았다. 그는 일찍부터 유명한 농구선수로 활약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당시의 체육계 경력이 인정되어 만년에는 체육 이론가와 행정가로서 활동하였다.
         [[1932년]]에는 [[1932년 하계 올림픽|로스앤젤레스 하계 올림픽]] 일본 선수단 임원으로 참가하여 로스앤젤레스에 다녀왔다. [[1935년]] [[일본체육회]] 전무이사에 취임하고 [[1936년]]에는 [[1936년 하계 올림픽|베를린 하계 올림픽]] 일본 대표선수단 총무로 참가, 베를린에 다녀왔다.
         그후 제11회 도쿄 올림픽 대회 유치위원과 준비위원으로 미국, 영국, 독일, 스위스, 프랑스, 스웨덴, 핀란드, 폴란드 등을 방문하여 대회 유치와 준비에 협조를 구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체육계의 공로자로 칭송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에는 모교인 [[와세다 대학]] 재외특별연구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동양학을 연구했으며,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였으나 도쿄 올림픽 유치와 추진의 공로로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했다. [[1944년]]에는 [[여운형]]이 결성한 지하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그가 죽은 이후 바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고, [[1966년]] 8월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삼등 욱일중수장을 추서받았으며, [[1970년]] 12월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의 훈장#국민훈장(國民勳章, Order of Civil Merit)|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 아우: 이상오(李相旿, [[1905년]] ~ [[1969년]], [[사냥|수렵가]], [[바둑]]인. 아호(雅號)는 모남(慕南).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 우현고등보통학교 및 [[일본]] [[호세이 대학교]] 법정학과 졸업.)
         * [[일본]] [[와세다 대학교|와세다]] 제1고등학원 [[전문학사]]
         * [[일본]] [[와세다 대학교]] 사회철학과 [[학사]]
         * [[일본]] [[와세다 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사회과학]] [[석사]]
  • 이상오
          | 학력 = [[일본]] [[호세이 대학]] 법정학과 [[학사]]
         * [[일본]] [[호세이 대학|호세이 대학교]] 법정학과 [[학사]]
  • 이상정 (1897년)
         * [[일본]] [[육군유년학교 (일본)|도쿄 세이조]] [[도쿄 공업대학|중학교 육군유년학부]] 졸업
         * [[도쿄 예술대학|일본 도쿄 미술전문학교]] [[전문학사]]
         * [[히토쓰바시 대학|일본 도쿄 상업전문학교]] 전문학사
         * [[고쿠가쿠인 대학|일본 고쿠가쿠인 대학교 역사학과]] [[학사]]
  • 이상화 (시인)
          | 학력 = [[일본]] [[도쿄 외국어학교]] [[프랑스어|불어학과]] 중퇴
         [[1919년]] 대구에서 [[3·1 운동]] 거사를 모의하다가 모의가 발각되어 피신하였으며, [[1921년]] 잡지 [[백조]]의 동인이 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후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가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시와 소설 등 작품 활동과 평론 활동, 《개벽》, 《문예운동》, 《여명》, 《신여성》, 《[[삼천리]]》, 《[[별건곤]]》, 《조선문단》, 《[[조선지광]]》 등에 동인 활동을 하였다. 아마추어 [[권투 선수]]로서 [[대륜고등학교|교남학교]] 교사로 재직 중 [[1938년]]에는 교남학교 권투부를 창설, 지도하였다.
         할아버지 이동진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대구광역시|대구]]에 신식 학교인 우현서루를 열어 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남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나중에는 교사를 초빙, 수학, 역사, 국어, 영어, 일본어 등 신식 학문을 가르쳤다. 할아버지 이동진의 뒤를 이어 큰아버지 이일우가 우현학교의 일을 맡아보았다.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했는데, [[2000년]]대 초반 그의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학 학장 3명, 교수 10명, 의사 30명, 장군 2명, 언론·출판분야 11명을 배출하였다.<ref name="daemyonh">[http://www.lifemaeil.com/news_view.php?print_no=1540&seq=5570 특집- 상화의 큰 집 사람들] 주간매일 2002년 11월 27일자</ref> 또한 사촌 [[이상악]]은 작가이자 그의 친구인 육당 [[최남선]]과 사돈이 되었고, 다른 자손들 중에는 '박작대기' [[박중양]] 집안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ref name="daemyonh"/>
         사촌 매형인 윤홍열은 후일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위원과 [[대구시보사]] 사장을 역임했는데, 사촌 매부 윤홍열의 소개로 바로 [[충청남도]] 공주 규수인 서순애 여사를 상화와 중매시켰다.<ref name="daemyonh"/> 몇 차례 연락이 오고가다가 [[1919년]] [[12월]] [[충청남도]] [[공주시|공주군]] 출신과 결혼하였다. 부인 서온순은 독립운동과 유학 등 경제적으로 불우한 환경에도 남편의 탓이나 원망을 하지 않았다 하며, 남편 사후에도 서온순은 재혼하지 않고 홀로 자녀를 키웠으며 [[1980년]]대에 사망하여 그의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1922년]] 이상화는 《[[백조 (잡지)|백조]]》1~2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해 프랑스에 유학할 기회를 얻으려고 일본으로 갸루 짱 예쁘다 같이놀래 예쁜니가 좋아좋아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 프랑세 어학원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였다. [[일본]] 유학 중에도 틈틈이 작품 활동을 하거나 칼럼과 글을 국내의 잡지사로 송고하였다. [[1923년]] [[간토 대지진|관동 대지진]]이 나자 불령선인으로 몰려 일본인 폭도들로부터 암살 위협을 겪었으나 극적으로 어느 일본인의 배려로 은신해 있었다. 얼마 뒤 분장하고 집주인인 일본인이 준 여비를 받고 [[간토 대지진|관동 대지진]]의 수난을 피해 귀국했다.
         [[1937년]] [[3월]] [[만주]]에 있던 큰형 [[이상정]]을 만나러 중국에 3개월간 다녀왔다. 그가 형을 만난 사실이 확인되면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으나 특별한 혐의점이 없어 그해 [[11월]] 말경 가석방되었다. 다시 [[대구]]로 내려와 [[대륜고등학교|교남학교]]에 조선어, 영어, 작문담당 교사로 복직하여 [[교가]]를 작사했다. 또한 교남학교 권투부를 창설하여 지도하기도 했다. 그는 약소 민족은 주먹이라도 잘 써야 된다며 학교 체육대회 종목에도 권투를 넣었는데, 교남학교 권투부 출신들은, 졸업후 훗날 [[대구 권투 클럽]]을 결성하였다.
         * [[일본]] [[도쿄 외국어학교]] 불어학과 중퇴
         ** 아우: 이상오(李相旿, [[1905년]] ~ [[1969년]], [[사냥|수렵가]], [[바둑]]인. 아호(雅號)는 모남(慕南).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 우현고등보통학교 및 [[일본]] [[호세이 대학교]] 법정학과 졸업.)
  • 이설주
         대구수창국민학교(현재의 [[대구수창초등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으로 유학하면서 [[니혼 대학]] 경제학과에 재학했지만 사상범으로 체포되고 만다. [[1932년]] 대학을 중퇴하고 일본의 문학 잡지 《신일본민요(新日本民謠)》에 시 〈고소(古巢)〉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그 뒤 [[만주]]와 [[중국]] 등지를 방랑했고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
  • 이수영
         세 번째 정규 앨범 《[[Made in Winter]]》는 [[2001년]] [[12월 11일]]에 발매되었다. 기존 앨범과 달리 현악기 세션을 최대한 자제한 이 앨범의 타이틀곡인 〈그리고 사랑해〉는 〈라라라〉와 함께 팬들에게 이수영 최고의 명곡으로 꼽히고 있다. 3집 활동의 주된 변화는 예능 프로그램출연을 통한 홍보였다. 많은 이들이 노래는 아는데, 그녀의 얼굴은 모르는 상황이었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연변 사투리 개인기를 선보여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후 이수영은 [[MBC TV|MBC]] 예능 프로그램인《[[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 〈[[게릴라 콘서트]]〉에 출연해 자신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더욱 강하게 인식시켰다.<ref>《소년한국일보》[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3&oid=041&aid=0000010816 '눈물로 부른 게릴라콘서트' 이수영]</ref> 홍콩의 유명 영화배우인 [[청룽]]과 함께 청룽의 앨범에 수록된 듀엣곡인 〈몽상적천제〉를 녹음하며 동남아시아 프로모션의 모습도 보였으나 보도자료에서와 달리 프로모션 행사 이후 동남아시아에 더 이상 방문하지 않았고 활동 또한 전무했다. 이수영은 일본 유명 비디오게임인 《[[파이널 판타지]]》 열 번째 편의 인터내셔널 버전의 OST를 한국어로 번안하여 녹음했다. OST 참여 였지만 〈얼마나 좋을까〉는 게임유저들에게 이수영이란 존재를 알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후속곡〈차라리〉로 활동하던 중 MBC 라디오 프로그램 《감성시대》를 진행하게 되었다. [[2002년]] [[6월]] 월드컵 개막과 동시에 3집 활동을 마무리 지었다.
         [[2002년]] 4월 MBC는 정규 봄 개편을 단행했다. 봄 개편과 더불어 이수영은 [[MBC 표준FM]]에서 오전 0시에 진행되는 《감성시대》 [[디스크 자키|DJ]]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2003년]] [[3월]]이 되자 돌연 DJ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이로써 이수영은 2002년 4월 1일부터 2003년 3월 10일까지 진행하던 감성시대 DJ를 그룹 UN의 [[최정원 (1981년 5월)|최정원]]에게 물려주고 DJ 활동을 마무리지었다. 실제로 이전에 계획중이었던 이수영의 일본진출같은 경우 1년 3개월 후에 이루어졌다.
         정규 4집 《[[My Stay in Sendai]]》는 라디오 프로그램인 감성시대를 진행 중이던 [[2002년]] [[9월 16일]] 발매되었다. 이수영은 앨범 활동과 DJ활동을 병행하였는데 이 점은 앨범 홍보에 도움이 되었고 특히 [[파이널 판타지 X]] OST인〈素敵だね〉를 리메이크한〈얼마나 좋을까〉는 파이널 판타지 유저들에게 많이 알려질 정도로 유명하다. 타이틀곡인 〈라라라〉는 이수영의 음색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고, 공중파 가요 프로그램 첫 1위라는 숙원을 풀게 해주었다. [[SBS 인기가요]]에서 첫 1위를 수상한 이수영은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해 진행자들을 당황시킬 정도였다. 후속곡 〈빚〉도 〈라라라〉에 못지않는 인기를 끌며 가요 프로그램 1위를 기록했다. 이 여세를 몰아 [[2003년]] 1월 4.5집 스페셜 앨범인 《[[Sweet Holiday in Lombok]]》을 발매하여 싱글로는 [[일본]] 밴드 [[ZARD]]의 곡인 〈[[GOOD DAY]]〉를 리메이크한 〈굿바이〉를 선보이기도 했다. 4집은 그녀의 역대 앨범 중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 4집 활동으로 이수영 개인적으로 최고의 한해를 보냈으며, 그 해 연말 시상식 프로그램에 처음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공식 활동 마무리 후 음악공부를 위해 외국 유학을 간다는 소문이 돌았고 소속사에서 보도자료를 배포하기도 했으나 이수영이 해외 유학을 거절함에 따라 무산되었다.
         === 2004년 ~ 2005년 : 일본 진출, The Colors of My Life ===
         5집 활동을 마친 이수영은 휴식기에 들어갔다. 소속사가 이미 일본 진출을 선언한 터라<ref>《머니투데이》[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274324 YBM서울, 이수영 해외진출]</ref> 다른 작업은 할 수 없었다. 공백기 동안 이수영은 리메이크 앨범 《[[Classic the Remake]]》를 발매하고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리메이크해 첫 싱글로 내세웠다. 이 앨범은 CD와 테이프의 판매 비율이 거의 비슷한 경우를 찾아보기 힘든 유례없는 기현상을 보였다. 휴식기동안 이수영은 여행을 통해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고 귀국했다.
         [[팬텀 엔터테인먼트 그룹|팬텀엔터테인먼트]]는 이수영의 일본진출을 오래 전부터 계획해왔다. [[2004년]] 5월 소속사는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와 정규앨범 1장, 싱글앨범 2장 발매를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인 일본 진출을 감행했다. 일부 언론의 기사에서 '일본 시장에서 성공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를 보여주기도 했다.<ref>《STARNSTAR 엔터테이너 뉴스》[http://www.starnstar.net/board/view.php?code=3&no=8 "이수영의 고별 선물"]</ref> 일본에서 발매한 싱글 〈사이고노 와가마마 ([[사이고노 와가마마|最後の我がまま]])〉는 오리콘 차트 125위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어서 나온 6집 《[[The Colors of My Life]]》는 전체적으로 듣기 편안한 음악들로 이루어졌고 이는 이수영이 지향하는 음악이다. 6집에 대한 대중들의 평은 전 앨범들에 비해 그리 좋지 못한 편이었다. 그러나 앨범 판매량에 있어서는 [[2004년]] [[9월 10일]]에 발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2월까지 34만장의 판매고를 올려 그 해 앨범판매량 3위를 차지했다. 2위 또한 이수영의 앨범인 《[[Classic the Remake]]》였다. 6집 활동에서 소속사인 [[팬텀 엔터테인먼트 그룹|팬텀엔터테인먼트]]는 각종 예능 프로그램의 크레딧타임에 타이틀 곡 〈휠릴리〉의 뮤직비디오를 방영시켰다. 연말 시상식에서 이수영은 제19회 [[골든디스크상]]에서 대상을 수상했으며,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도 가요대상을 2년 연속 수상했다. 이수영은 [[2005년]] [[1월 1일]]을 기해 6집 활동을 마무리지었다.
         2005년 9월 30일을 기해 정규 7집 앨범의 인터넷 예약 판매가 시작되었고, 그와 동시에 팬텀의 첫 번째 앨범도 동시에 예약 판매를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7집은 발매일이 [[10월 21일]]이었고, 팬텀의 첫 번째 앨범은 [[10월 20일]]이었다. 팬텀이 발매한 이가스페셜앨범은 기존 곡들과 일본 싱글제작 당시 녹음한 미공개곡 두 곡과 기존에 공개했던 일본어곡 한 곡을 포함한 베스트앨범이었다. 이 앨범은 역대 최저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이수영 측은 7집 발매를 11월로 연기하였다가 내년에 발매하는 것으로 결정내렸고, 이로 인해 정규 7집은 [[2006년]] [[1월 21일]] 발매되었다. 타이틀 곡 〈Grace〉는 앨범 발매 한 달 만에 방송횟수 1000회를 돌파하였고, [[SBS 인기가요]] 에서 2주 연속 1위를했고, 특히 [[MBC]] 라디오 프로그램 [[정오의 희망곡]]에서는 7주간 1위를 차지했으며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 벅스뮤직에서는 8주간 1위라는 부동의 자리를 지켰다. 그 당시 이수영은 이미지 변신을 꾀했다. 각종 예능프로그램에 많이 출연을 한 것이다. 이수영은 본인 스스로가 웃긴 사람이라고 칭할 만큼 유머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나, 전 소속사인 [[팬텀 엔터테인먼트 그룹|팬텀엔터테인먼트]]의 이미지 관리로 인해 많은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후속곡〈시린〉으로 활동중이던 이수영은 하반기 앨범작업과 각종 국내외공연 일정을 이유로 [[2006년]] [[4월 9일]] 7집의 공식적인 활동을 마감했다. 하지만 [[2006년]] 7월 말, 소속사인 [[리쿠드엔터테인먼트]]는 항간에 떠도는 이수영의 소속사간의 불화설은 사실무근이라는 보도자료를 언론사에 내보냈다. 그러나 이 루머에 대해서는 일반 대중이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니였기에 루머 관련 기사 이전의 사실 무근 기사는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7월 31일]] 이수영측은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소속사간의 불화 사실을 공식발표했다. 소속사 [[리쿠드엔터테인먼트]]는 미숙한 업무처리로 인해 이수영에게 계약금을 지급하지 않았으며, 계약금 지급을 요구한 이수영의 요구에 이수영의 매니저팀을 전원해고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또한 [[2006년]] 하반기의 전국투어 콘서트일정을 이수영의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체결하는 등 여러면에서 불성실한 계약이행을 해왔다는 것이다. 당시 이수영은 소속사를 상대로 소송을 한 상태로 재판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으며, [[리쿠드엔터테인먼트]] 또한 이수영을 맞고소하였다. 이수영은 7집 《[[Grace (이수영)|Grace]]》의 음원 권리를 넘긴다면 고소를 취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결국, 이수영과 전 소속사인 리쿠드와 분쟁은 2007년 1월에 양 측이 이수영의 리쿠드 전속 계약금 10억원 중 2억1000만원을 리쿠드 측이 반환 한다는 합의를 보고 종결되었다. 그 후, 이수영은 소속사를 세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해브엔테테인먼트]]이다. 이수영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적할 마땅한 소속사가 없자 자신이 소속사를 차리게 되었다고 밝혔으나, 이수영은 소속사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2004년]] 일본 싱글 〈[[사이고노 와가마마|最後の我がまま]]〉
  • 이수현(1974)
         ||<#524E4D> {{{#ffffff '''사망'''}}} ||<(> [[2001년]] [[1월 26일]] (향년 26세)[br][[일본]][[파일:일본 국기.png|width=25]] [[도쿄도]] [[신주쿠구]] [[신오쿠보역]] ||
         [[울산광역시]] 출신으로 [[부산광역시]]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1993년 [[고려대학교/세종캠퍼스|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당시 서창캠퍼스)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에 1년 6개월간의 일본어 공부를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올바르게 이해하여 한일 교역에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을 품게 되었다.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를 휴학하고 아카몬카이 일본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이수현 씨의 홈페이지에는 [[지뢰찾기]] [[이스터 에그]]가 기록되어 있었다.
         || 일본어 || 한국어 ||
         || カメラマンの関根史郎氏、韓国人[br]留学生の李秀賢氏は、2001年1月26日[br]午後7時15分頃、新大久保駅において[br]路線上に墜落した男性を発見し、自らの[br]身の危険を顧みず救助しようと敢然と[br]路線に飛び降り, 尊い命を落とされ[br]ました。[br][br]兩氏の崇高な精神と勇敢な行為を[br]永遠にたたえ、ここに記します。[br][br]東日本旅客鉄道株式会社 || 한국인 유학생 이 수현씨, 카메라맨[br]세키네 시로씨는 2001년 1월 26일[br]오후 7시 15분경, 신오오꾸보역에서[br]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발견하고 자신[br]들의 위험을 무릅쓴 채 용감히 선로에[br]뛰어들어 인명을 구하려다 고귀한 목숨[br]을 바쳤습니다.[br][br]두 분의 숭고한 정신과 용감한 행동을[br]영원히 기리고자 여기에 이 글을 남깁니다.[br][br]동일본 여객철도 주식회사 ||
  • 이슬비(컬링선수)
         ||<:><#87CEEB>'''{{{#white 국적}}}'''||<:><#ffffff> [[일본]][[파일:대한민국 국기.png|width=25]] ||
         ||<:><#87CEEB>'''{{{#white 출생}}}'''||<:><#ffffff> [[1988년]] [[6월 25일]]([age(1988-06-25)]세), [[일본]] [[도쿄도]] ||
  • 이승엽
         |첫 출장 = [[KBO 리그|KBO]] / [[1995년]] [[4월 15일]] <br /> [[LG 트윈스|LG]]전 <br /> [[일본 야구 기구|NPB]] / [[2004년]] [[3월 27일]] <br /> [[세이부 돔]] 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세이부]]전
         |마지막 경기 = [[KBO 리그|KBO]] / [[2017년]] [[10월 3일]] <br />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대구]] 대 [[넥센 히어로즈|넥센]]전 <br /> [[일본 야구 기구|NPB]] / [[2011년]] [[10월 18일]] <br /> [[오사카 돔]] 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세이부]]전
         * [[2003년]] [[6월 22일]] [[SK 와이번스|SK]] 투수 [[김원형]]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기록하여 일본의 [[오 사다하루]](27세 3개월 11일)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알렉스 로드리게스]](27세 8개월 6일)를 제치고 세계 최연소 300호 홈런 고지(26세 10개월 4일)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투수 [[이정민 (1979년)|이정민]]을 상대로 56번째 홈런을 쳐내며 대한민국 프로야구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자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다.
         === 일본 프로야구 시절 ===
         [[2005년]] 시즌 후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계약이 종료되며 재계약하는 듯했으나 수비 위치 보장과 극단적인 플래툰 시스템 하의 기용 등 본인의 의사와 [[지바 롯데 마린스]]가 내세운 조건이 맞지 않아 [[2006년]] [[1월 19일]]에 이적했다.<ref>스포츠 춘추 - 2008년 9월 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083 "일본 프로 야구의 대리인 제도를 말한다"]</ref>
         당시 감독이었던 [[하라 다쓰노리]]는 그를 개막전 4번 타자로 파격 기용했는데, 이에 부응해 일본 진출 이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반면 그의 맹활약과는 반대로 팀은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진과 부상자가 속출해 2005 시즌에 이어 2년 연속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가 기록한 [[2006년]] 성적은 타율 2위, 타점 1위(108), 홈런 1위(41개<ref>실제로 [[2006년]] 그는 155개의 공을 펜스 너머로 넘겼지만, 이 중 [[2006년]] [[6월 11일]]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대결에서 상대 선발 투수 [[와타나베 슌스케]]로부터 친 홈런이 심판이 당시 1루 주자 [[오제키 데쓰야]]가 3루를 밟지 않고 홈에 들어왔다고 판단해 단타로 처리되며 공식 기록은 41개가 됐다{{뉴스 인용|제목=<nowiki>[스포츠 10대 해프닝②]</nowiki> 이승엽, 도둑 맞은 19호 홈런|url=http://media.daum.net/breakingnews/sports/view.html?cateid=1071&newsid=20061221135010895&p=joynews24|출판사=조이뉴스24|저자=최정희|날짜=2006-12-21|확인날짜=2008-09-22}}</ref>)를 기록해 공격 전 부문에서 리그 정상급의 활약을 펼쳤다. 특히 홈런에서는 일본 진출 이후 최다 홈런을 기록했는데 6월에는 44홈런을 몰아치며 리그 홈런 1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8월 중순 경 발생한 무릎 부상 이후 홈런 페이스가 주춤했고, 시즌 중반부터 페이스를 높여 온 [[주니치 드래곤즈]]의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 숫자에서 추월당해 결국 리그 최다 홈런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타율은 [[주니치 드래곤즈]]의 후쿠도메에게 밀리고 홈런과 타점은 [[타이론 우즈]]에게 밀렸지만 시즌 내내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며 최정상급의 기량을 뽐냈다.
         이듬해 [[2007년]] 1월, 모친상 소식을 일본에서 전해 들었고 왼쪽 엄지손가락에 염증이 생기는 부상 등 시즌 내내 고전했다. 외다리 타법을<ref name="sword"/> 고쳐보기도 했지만 성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7월 중에는 스스로 2군행을 자처하기도 했다. 시즌 후반기에는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요코하마]]와의 첫 대구에서 연타석 홈런을 치는 등 부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으며, 시즌 후반에는 승부에 결정적 기여를 한 홈런을 여러 개 쳐 내며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홈런을 한 개도 치지 못하는 등 장타력이 실종된 모습을 보이며 시즌을 마감했다.<ref name=world>{{뉴스 인용|제목=이승엽 2007년 시즌 결산, 모친 타계… 부상… 악재의 연속|url=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2246545&year=2007|출판사=세계일보|저자=강구열|날짜=2007-10-22|확인날짜=2008-06-01}}{{깨진 링크|url=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2246545&year=2007 }}</ref> 종합적으로 2007 시즌에는 타율 0.274, 30홈런, 74타점을 기록하였다.
         시즌 초반에는 지난 시즌 후 받은 손가락 수술로 인해 심각한 슬럼프에 빠지며 2군으로 강등됐다.<ref>스포츠 춘추 - 2008년 4월 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011 "한·일 전문가가 꼽는 이승엽의 문제"]</ref> 그러던 중 8월에 있었던 [[2008년 하계 올림픽 야구|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해 대한민국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특히 그는 4강전인 일본전에서 투런 홈런을, 쿠바와의 결승전에서도 투런 홈런을 쳐 내며 자신의 건재함을 보였다.<ref>스포츠 춘추 - 2008년 8월 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079 "한-일 기자 대담 “9회초 대타 김현수가 의미하는 것”"]</ref><ref>스포츠 춘추 - 2008년 8월 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080 "일본에서 본 호시노 JAPAN의 침몰"]</ref> 그러나 그 해 45대구에 출장해 2할대 타율, 7할 5푼 5리의 OPS를 보였으며, 8홈런 27타점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2008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에서도 극도의 부진을 드러냈다. 그 해 일본 시리즈는 퍼시픽 리그 우승 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 진행했는데 여기에서 7대구 동안 홈런과 타점 없이 18타수 3안타(타율 0.167), 12삼진이나 당하는 등 극심한 부진에 시달리기도 했다.
         전년도 시즌을 아주 저조한 성적으로 마친 그는 스스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불참을 선언하며 시범 대구에서만 8홈런을 기록하는 등 [[2009년]] 시즌에 대한 기대를 하게 했다. 기대에 부응하듯 시즌 초 3할 타율, 장타율 1위 등에도 오르는 등 나아진 모습을 보였으나 갈수록 페이스가 떨어졌고, 7월에는 시즌 처음으로 2군에 내려갈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팀이 정규 시즌 우승 헹가래를 칠 때도 자리에 없었고, 결국엔 2군에서 정규 시즌을 마감했다. [[2009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에서는 2대구에 선발 출장을 했으며, 그 외의 경기엔 대타로 주로 출전했다.
         16홈런, 2할대 타율로 시즌을 마감한 그는 일본 시리즈가 끝난 이후인 [[11월 14일]]에 [[한일 클럽 챔피언십]] [[KIA 타이거즈]]와의 대구에 1루수로 선발 출전해 2루타 두 방을 날리며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제목=이승엽 “내 야구 인생에 포기는 없다”|url=http://news.nate.com/view/20091116n04063|출판사=스포츠월드|날짜=2009-11-16}}</ref>
         [[2011년]] [[10월 21일]] 기자 회견을 열어 8년 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영구 귀국했다.<ref>{{뉴스 인용|제목='국내 복귀' 이승엽, 日서 기자회견 '굿바이, 오릭스'|url=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979943.htm|출판사=스포츠서울|날짜=2011-10-21|확인날짜=2012-11-2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007070317/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979943.htm#|보존날짜=2013-10-07|깨진링크=예}}</ref> 이후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76&aid=0002218871 이승엽, 와이프에게 어쩔 수 없는 경상도 남자인가 보다] - 스포츠조선</ref> [[2011년]] [[12월 5일]] 연봉 8억원, 플러스 옵션 3억원에 계약을 체결하며 복귀했다.
         === [[일본 야구 기구|NPB]] ===
         ‘국민타자’,‘라이언 킹’ 등으로 불린다. 일본 진출 이후에 붙여진 애칭은 ‘승짱’({{llang|ja|スンちゃん}}, 한자 및 [[일본어]] 동시 표기: {{lang|ja|スン様}})이다. [[2008년 하계 올림픽]] 때 [[일본]]의 스포츠 신문인 《스포츠 호치》의 [[2008년]] [[8월 22일]]자 보도 기사에 언급된 것처럼 올림픽,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와 같은 국제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데에 기여함으로써 많은 병역 미필 선수들의 병역을 면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해“합법적인 병역 면제 브로커”라는 별명이 추가됐다.<ref>{{뉴스 인용|제목=승엽은 병역 브로커|url=http://www.donga.com/fbin/moeum?n=sports$e_701&a=v&l=0&id=200808270265|출판사=동아일보|저자=김도헌|날짜=2008-08-27}}</ref> 또한, 국제 대회나 중요한 대구 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곤 했는데 특히 8회에 결정적 역할을 해 '8회의 사나이'라는 별명도 지니고 있으며 [[삼성 라이온즈]]의 제 2구장인 [[포항야구장]]의 성적도 뛰어나 '포항의 사나이'라고도 불린다.
         === [[일본 야구 기구|NPB]] ===
         * [[2005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 (2005년)
         * [[일본 프로 야구 월간 MVP|월간 MVP]] 1회 (2006년 6월)
         !colspan="3"|[[일본 프로 야구|NPB]] 통산 : 8년
         === [[일본 야구 기구|NPB]] ===
         * 일본 진출 첫 출장 · 첫 안타 : [[2004년]] [[3월 27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1차전([[세이부 돔]], 상대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
  • 이열희 (1924년)
         *** 5촌 당숙: [[이상오]](李相旿, [[1905년]] ~ [[1969년]], [[사냥|수렵가]], [[바둑]]인. 아호(雅號)는 모남(慕南).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 우현고등보통학교 및 [[일본]] [[호세이 대학교]] 법정학과 졸업.)
  • 이영은 (1982년)
         2012년 초에는 SBS의 설날 특집극 《[[널 기억해]]》와 [[TV조선]]의 설날 특집극 《[[아버지가 미안하다]]》에 각각 주인공인 정은수 역과 경애 역으로 출연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널 기억해’ 김병만 첫 정극도전 ‘기막힌 디테일’ 연기까지 달인|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01210738451001|출판사=뉴스엔|저자=조연경|쪽=|날짜=2012-01-21|확인날짜=2014-07-23}}</ref><ref>{{뉴스 인용|제목=TV조선, 김수현 특집 드라마 설날 방송|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6&aid=0002178420|출판사=스포츠조선|저자=이정혁|쪽=|날짜=2012-01-18|확인날짜=2014-07-23}}</ref> 이후 [[강혜정]], [[이규한 (배우)|이규한]], [[차화연]]과 함께 tvN의 미니시리즈 《[[결혼의 꼼수]]》에 출연하여 하숙집 "김치움"의 장녀인 유선희를 연기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이영은, '결혼의 꼼수' 전격 출연…강혜정과 대립|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2211434|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함상범|쪽=|날짜=2012-02-27|확인날짜=2014-07-23}}</ref> 이후 [[일본]]의 만화가 [[나카조 히사야]]의 동명의 순정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설리 (배우)|설리]], [[민호]], [[이현우 (배우)|이현우]], [[김지원 (1992년)|김지원]]이 주연을 맡은 SBS 미니시리즈 《[[아름다운 그대에게 (드라마)|아름다운 그대에게]]》에 극 중의 학교 지니 남자체육고등학교의 유일한 여교사인 국어교사 이소정 역으로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이영은, 아름다운 그대에게 합류 “아이돌과 호흡 기대돼”|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96&aid=0000182510|출판사=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저자=손재은|쪽=|날짜=2012-06-11|확인날짜=2014-07-23}}</ref> 또 [[김지운 (영화 감독)|김지운]], [[임필성]] 감독의 SF 옴니버스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 단역인 아나운서로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인류멸망보고서', 특급 카메오 군단 '눈길'|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6&aid=0002201997|출판사=스포츠조선|저자=정해욱|쪽=|날짜=2012-04-11|확인날짜=2014-07-23}}</ref>
  • 이용구(1868)
         > [[우치다 료헤이]]: 뒷날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가 될 것입니다.[* 허나 정작 저 말을 전한 우치다 료헤이야말로 일진회의 고문이자 이토 통감의 참모였으며, 일본의 대륙진출을 음지에서 추진하던 대륙낭인의 거두였다. 즉, 되도 않은 구라를 쳤을 확률이 높은 셈(...). --게다가 지금도 호평은 못받고 있다.-- [[아시아주의]] 항목도 참조.]
         1868년 [[경상북도]] [[상주시|상주부]]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농사일을 지어왔다가 1890년 [[동학]]에 입교(入敎)하여 동학 교주 2세인 [[최시형]]의 교육을 받아왔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으로 참전하였으며 [[동학]] 교주 3세인 의암 [[손병희]]와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03년 귀국하여 [[동학]] 포교(布敎) 운동을 벌였다.
         동학 포교활동 중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된 진보회를 결성하였다가 [[친일파]] [[송병준]]의 권고로 [[일진회]]와 합병하여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를 시작하게 되었고 [[러일전쟁]] 때는 [[일본]]을 지지하기도 했다.
         1905년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강화 및 포교하게 되면서 동학시절 옛 동지였던 손병희의 [[천도교]]에 맞서[* 이 당시 손병희는 이용구를 비롯한 62명의 동학 지도자에게 출교 처분을 내렸다.] [[친일파]] 성향의 신흥종교인 시천교(侍天敎)를 창시하여 시천교 교주가 되었다. [[일진회]]를 만들고 동 단체의 회장이 된 뒤, 일본의 우익 인사 [[우치다 료헤이]]와 그의 단체 [[겐요샤|현양사]]의 도움으로 친일행위에 나서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모티브로 조선과 일본이 1:1로 대등합방 하자는 생각 하에 백성들에게 [[일본]]의 사상을 전파하고 친일행위를 찬양하며 [[한일병합]]을 제창하고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까지 병합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친일파로 변신하게 되었다.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을 당하게 되자 그의 장례식 당일 독립관에서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주관해 왔다가 1910년 [[한일병합]]이 되면서 [[일진회]]가 1주일의 시한을 받게 된다. 쉽게 말해 1주일 내에 해산하라는 것. 그는 1909년 12월 일본 [[수상]]인 [[가쓰라 다로]]에게 합방 청원에 소요되는 비용 3백만엔을 상의했는데, 이때 가쓰라 다로는 그에게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3백만이 아니라 3천만이라도 주겠다."]]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1910년 일진회를 해산하고 나니 일본정부가 일진회에게 준 돈은 달랑 15만엔이었다. '''그것도 이용구 개인에게 준 게 아니라 일진회 회원들 전체에게 준 것.''' [[토사구팽]]이 따로 없다.
         게다가 이용구는 당시 많은 개화파 지식인들처럼 [[아시아주의]]를 진짜로 믿고 있었던것 같다. 이용구는 한일 양국이 연방국처럼 1대1로 국가 연합을 하리라고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기당했다-- 결국 그는 뒤통수 당했다는 것을 알고 일본이 준 [[조선귀족]] 작위도 거절한 이후 허탈함과 격분에 빠진 나머지 몸져 눕고 만다. 1912년 죽기 얼마 전 문안차 찾아온 [[우치다 료헤이]]에게 "[[송병준|우]][[일진회|리]]는 [[친일|바보짓]]을 했어요. [[1904년|처음]]부터 [[사기|속았던 건 아니었을까요?]]"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1911년에 [[일본]] 스마(須磨) 지방으로 건너가 요양생활을 하게 되었다가 1912년 병고(病苦)로 죽었다. 죽은 후 [[천황]]으로부터 훈(勳) 1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그의 아들인 이석규[* 1909년 두번째 부인 이화사(李華師)사이에서 태어났다. 일본 이름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大東碩奎, 大東國男, 佐藤國郞 이다. 성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죽을 때까지 대동아 공영을 주장했다. 특히 大東國男는 '대동국의 남아'라는 뜻이다.][* 이 아들을 보기 전, 조카인 이현규(李顯奎)를 양자로 두었으나 이 아들을 늦둥이로 보고 바로 파양하였다.]도 [[친일파]]이자 [[일진회]] 고문 출신으로 아버지와 함께 [[이완용]], [[송병준]]을 위한 [[한일병합]] 공로자 합동 위령제를 지내는 등 [[친일]] 행위를 해 왔으며 해방 후에도 이용구 전기[* 이용구의 생애(李容九の生涯), 時事通新社, 1961.] 등을 저술하였다가 1986년 [[일본]]에서 사망했다. 이 사람은 평생 자기 아버지 이용구가 [[송병준]]의 농간 속에 이용만 당했다고 주장하였다.
  • 이원조 (문학 평론가)
         [[경상북도]]출생으로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1935년]] [[호세이 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돌아온 뒤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했다.
  • 이육사
         | 사망지 = 중화민국 일본총영사관 감옥처
         이원록의 필명은 여러가지가 있고, 호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가 있어 기재한다. 하나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받은 수인 번호 '264'의 음을 딴 '二六四'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며,'李活'과 '戮史', '肉瀉'를 거쳐 '陸史'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1929년]] 이육사가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요양을 위해 집안어른인 이영우의 집이 있는 포항으로 가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어느 날 이영우에게 "저는 "戮史"란 필명을 가지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말은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의미였다. 당시 역사가 일제 역사이니까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 즉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이영우는 "표현이 혁명적인 의미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陸史를 쓰라'고 권고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陸史'로 바꿔 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肉瀉'라는 이름은 고기 먹고 설사한다는 뜻으로 당시 일제 강점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1932년]]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했을 적 대구 약령시에 대한 기사를 네 차례 연재할 때 사용되었다. 이육사의 필명이나 호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李活(1926-1939), 大邱二六四(1930), 戮史(1930), 肉瀉(1932), 陸史(1932-1944)와 같고 이원록이 '陸史'로 불리게 된 연유이다.
         [[1943년]]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체포되어으로 압송되었고, 다음해인 [[1944년]] [[1월 16일]]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중국에서 군사간부로 육성된 목적에 충실하기 위하여 국내 공작원으로서 부여받은 사명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 1934년 3월 22일 경찰에 체포됨. 일본 경찰은 육사가 만주로 사라진 1932년 4월 이후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음. 일본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1932년 4월에 다시 만주로 갔으나 그 뒤에 소재불명이어서 요주의 인물로 수배중에 있었음"이라고 적혀 있으며, 체포 후 6월 23일 기소유예로 풀려남.
         * 베이징 소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 (1944년 1월 16일)
         #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소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 (독립운동가이자 먼 친척인 이병희 여사 시신 수습 후 셋째 동생인 이원창에게 인계함.)
  • 이인
         |학력= 일본 [[니혼 대학|니혼 대학교 대학원]] 법학석사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법률가, 정치인이다. 자(字)는 자옥(子玉), 호(號)는 애산(愛山). [[일본]] 유학 후, [[192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 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등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고, 해방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에 가담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정부수립 이후 국회의원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49년]] 7월에 [[반민특위]] 위원장에 임명되어 반민특위를 와해, 해체시켰다.<ref>{{서적 인용
         [[대구광역시|대구]] 달동의숙(達東義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고, 경북실업보습학교(慶北實業補習學校)로 진학하였다. [[1912년]] 경북실업보습학교를 졸업했다. [[1912년]] [[일본]]에 건너가서 세이소쿠 중학교(正則中學校)를 다니다가 [[1914년]] 졸업하였다. 그해 [[일본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과 야간부에 입학했고, [[1916년]]에는 수료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과에 편입했다.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에는 대학원과정인 일본대학 고등전공과(高等專攻科)에 진학, 공부하였다.
         [[1917년]] 귀국했다가 [[191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2년]]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1923년]] 5월 [[경성부]]에서 [[변호사]]·[[변리사]] 개업을 하여 7월 첫 변론으로 [[의열단]] 사건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았다. 이후 계속 민족운동사건의 변론을 맡아 [[6·10 만세 운동]]·[[고려혁명당 사건]]·[[의열단]] 사건·[[원산총파업]]·[[통의부사건]]·[[정의부사건]]·[[신간회]]민중대회사건·[[수양동우회 사건]] 등과 각종 소작쟁의, 필화(筆禍)·설화(舌禍) 사건과 [[친일파]]나 일본관리의 암살사건 등의 변론을 맡았고, 자청하여 [[안창호]](安昌浩)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그가 맡은 변호만도 약 1천 5백여건에 달한다.
         이후 [[장택상]] 등과 고학생의 상조(相助)기관인 갈돕회를 조직했다. [[1925년]]에는 갈돕회의 총재를 맡고 여자고학생상조회를 조직하는데 도움을 주어 고학생을 돕는 한편,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위원이 되어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1927년]] [[신간회]]의 창립과 더불어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신간회]]의 해소론이 제기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만의 민족단체를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1930년]]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들의 흥농사(興農社) 사건을 변호하다 [[재판정|법정]]에서 일본의 학정(虐政)을 비난하여 법정불온변론 혐의로 6개월 동안 [[변호사]] 자격정지 및 정직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조선물산장려회]] 회장이 되었다. 1931년에는 조선변호사협회 회장이 되었고, 1935년에는 [[이우식]](李祐植)·[[김양수]](金良洙)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한 비밀후원회를 조직하여 재정지원을 했다.
         *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부졸업
         * [[1922년]] 일본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개업
         *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일본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 [[졸업]]
         * [[일본]] [[메이지 대학|메이지 대학교 법학과]] 법학사 졸업
         * [[니혼 대학|일본 니혼 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법학]][[석사]] 졸업
  • 이인성 (화가)
         그는 [[1929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 시작하였으며 [[1935년]]에 열린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창덕궁상(昌德宮賞)을 수상했다. [[1930년]]에는 [[일본]] 다이헤이요 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에 입학함과 동시에 일본 수채화 연맹(日本水彩畵聯盟) 회원이 되었으며 [[문부성미술전람회]]와 [[제국미술전람회]]에 여러 차례 입선하기도 하였다.
  • 이임용
         [[1935년]] 영일군 청하공립보통학교, [[1944년]] [[일본]] [[나고야 시|나고야]] [[쓰쓰이 실업학교]]를 졸업한 후 일선공무원으로 일하다 [[1954년]] [[태광그룹]]을 창설했다.
  • 이장희 (시인)
          | 언어 =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 학력 = [[일본]] [[교토 대학|교토 중학교]] 졸업
         [[1900년]]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이병학 (1866년)|이병학]]의 11남 8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구의 부호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병학 (1866년)|이병학]]이며, 어머니는 박금련이다. 다섯 살때, 어머니를 잃고 이후 계모 밑에서 크며 아버지와 불화했다. 아버지 이병학은 두 번째 부인과 5남 6녀를 두었고, 이장희가 죽기 5년 전에 세 번째 결혼을 하였으며 그 외에 측실도 1명을 거느렸다. 이장희 자결 당시 형제는 모두 10남 8녀로 매우 복잡한 가계였다.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교토]]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교우관계는 [[양주동]], 유엽, 김영진, [[오상순]], 백기만, [[이상화 (시인)|이상화]], [[현진건]] 등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부친이 중추원 참의로서 일본인들과의 교제가 빈번하여 아들 이장희 시인에게 중간 통역을 맡기려 했으나, 이장희 시인은 한 번도 복종하지 않았고, 총독부 관리로 취직하라는 지시도 거역하여 부친은 이장희 시인을 버린 자식으로 아주 단념하였다 한다. 그래서 극도로 빈궁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9년]] [[11월 3일]] 대구 자택에서 음독 자살하였다.<ref>장백일, 〈고월 이장희시 연구〉, 《국어국문학》84권, 국어국문학회, 1980, 79~82쪽</ref>
         * [[일본]] [[교토 대학|교토 중학교]] 졸업
  • 이재학
         2011년 시즌 시작 전 [[일본]]에서 [[스프링캠프]] 도중 오른쪽 팔꿈치의 연골이 깨졌고, 수술은 피했지만 재활에만 매진해 1군 기록이 없었다.
  • 이준석(선장)
         [[1945년]] [[11월 12일]] 생.[* [[http://www.bobaedream.co.kr/view?code=freeb&No=935784|생존자 명단 160번이다.]]][*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에 최종선고를 받았다. '''뭐 그날에 그가 왜 태어났냐는 말이 더 맞겠지만.''']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으로 세월호 사고 이후 과거 인터넷 신문과의 인터뷰 및 방송출연 그리고 기자의 취재 결과 드러난 바에 따르면 20대에 선원 생활을 시작해 32세였던 1977년에 외항선 선원이 됐고, 17년간 외항선을 탄 뒤 연안 여객선 선장으로 다시 20년간 근무했다. 2004년 제주투데이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선원이 되어 처음으로 탔던 원목선이 [[오키나와]] 부근에서 전복되어 [[일본]] [[항공자위대]] [[헬기]]에 구조되었다고 한다. 그때 구조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경력 30년의 베테랑 선장으로서 알려져 2010년에 [[OBS]]에서 출연한 방송분에서[* 해당 방송 당시 운항하던 배는 오하마나호였다고 한다.] 말했다.
         세월호 사고 때 본 선장이 아닌 대리땜빵 선장으로 알려졌으나, [[세월호]]의 전신인 나미노우에마루를 일본으로 건너가 처음 국내로 몰고 온 게 바로 이준석이며, 6개월간 초대 선장으로 근무하기로 했다. 사고 당시의 본 선장인 신보식씨는 이후 입사하여 인수인계를 받았기에 이준석은 대리선장이라곤 하지만, 직능상 배 자체에 서툰 것은 아니며 청해진해운 소속의 다른 배인 오하마나호 역시 본 선장 부재시 대리 선장으로서 근무했었다.
  • 이지은 (1971년)
         | 학력 = [[일본]] 도쿄모드학원
         * [[일본 도쿄 모드학원]] 졸업
         [[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이충영(법조인)
         [[경상북도]] [[칠곡군|칠곡]] 출생이다.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하였고, 일본제5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법학과를 [[1932년]] 졸업했다.
  • 이쾌대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단에 데뷔하였고, 그 해 가을에 제3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 회화부 2등상을 수상했다. 1934년 [[일본]]으로 유학, 도쿄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 졸업했다. [[1941년]] 도쿄에서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협회 구성원들은 [[이중섭]], [[최재덕 (화가)|최재덕]], [[문학수]], [[김종찬 (화가)|김종찬]], [[김학준 (화가)|김학준]], [[진환]]이었다.<ref name=sinsae>{{서적 인용
  • 이홍렬(코미디언)
         1991년 한창 잘 나가던 방송 일을 뒤로 하고 일본으로 2년간 유학을 가서 화제가 되었다. 일본 유학 후 방송계로 복귀하여 전성기를 다시 열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이홍렬쇼]]라는 [[토크쇼]]로 나름대로 토크쇼 MC로서의 명성을 굳혔다. [[서세원쇼]]가 토크박스 하나에 의지한 것과 달리 다양한 코너로 굉장한 인기를 구가해 전성기에는 자타공인 최고 인기 토크쇼였지만 이홍렬 본인의 사정으로 100회를 채우고 그만뒀다가 2000년대 초에 다시 부활, 또 200회까지 채우고 막을 내렸다.[* 부활했을 당시에도 인기는 좋았다.] 프로그램 코너들 중에서는 특히 '참참참'이 유명세를 탔는데, 당시 유명 스타가 나와서 [[밤참]]을 만들면서 토크를 하는 방식이었다. 주재료는 [[라면]], [[만두]], [[참치]] 통조림 등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으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 맞아 맞아 참참참이라는 제목으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3989|책]]까지 발매되었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이 책을 발견하기는 거의 어려울 것이다. 관심이 있다면 인근 도서관을 뒤져보자. 이때 게스트와 같이 했던 놀이 '참참참'을 전국에 유행시켰다. [[롯데월드]]에는 이 코너에서 만들었던 메뉴를 상품화해서 파는 참참참 레스토랑도 있었다. 특히 참참참은 당시 일본 버라이어티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 숱하게 시도되었던 [[쿡방]]들이 우리나라 사정에 안 맞아 몽땅 망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장수했던 코너였다는 점도 특색이다.
          * [[결혼]]은 비교적 늦게 했으며[* 1987년 결혼 당시 34세. [[아내]]는 26세.], 1987년(당시 32세)에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입학한 것으로 유명한 [[만학도]]. 그래서 그런지 상당한 다독가라고 한다. 2년간 [[일본]]에 체류 한 적이 있다.[* 당시 한참 잘 나가던 시점에서 갑자기 [[일본]]으로 공부한다고 떠난 경우였다. 때문에 [[전유성]]같은 이들은 대단히 높이 평가하였다.] 이때 체류 경험에 바탕해서 쓴 [[일본]], 일본어 서적도 있고, "아버지 되기는 쉬워도 아버지 노릇하기는 어렵다"라는 자녀 교육서를 쓴 적도 있다. 그 외 아버지에 관련된 책을 번역했으며 당연히 일본어에 매우 능통해서 일본인과 직접 대화가 가능하다.
  • 이황
         [[이언적]]의 사상을 이어받아 영남학파의 중추적 학자가 되었으며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가 되었다. 학맥은 [[동서 분당]] 뒤에 [[동인]]의 핵심을 이루고, 다시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이황 제자들은 남인, 조식 제자들은 북인을 이룬다. 한편 그의 저술 중 일부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약탈해갔는데, [[일본]]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조정에서 다시 불러 [[1545년]](인종 원년) 6월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이 되었다. 바로 [[일본]]과 강화를 하고 변경을 방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해 [[1545년]](명종 즉위년) [[10월]] [[이기 (1476년)|이기]](李芑)로부터 [[을사사화]]의 역신인 [[김저]]와 같은 무리라 탄핵 당하여 삭탈관직 되었으나, 곧바로 [[10월]]말 [[이기 (1476년)|이기]]가 죄가 없다고 하여 다시 복관되었다. 그 뒤 사복시 정 겸 승문원 참교가 되었다.
         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에도 시대]]에는 기몬 학파와 구마모토 학파가 있었고, [[메이지 시대]]의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황의 학문적 근본 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실로 그의 학문·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을 70여 생애를 통하여 실천한 것이 이황이었다. 그는 문학·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 일본 유학에 영향 ===
         [[임진왜란]] 당시 그의 저서들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이황의 저서와 작품, 서한, 편지 등은 [[일본 주자학|일본 유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592년]](선조 25년)부터 발생한 [[임진왜란]] 당시 [[경상북도|경상도]] 지역의 서적과 도공 등이 상당수 약탈당했는데, 이때 이황의 저서가 상당수 약탈당하였다. [[경상북도]]의 해안가를 통해 유출된 이황의 서적, 서한들은 후일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미국]]에 의해 서구 문물이 강제로 유입되기 전까지 [[일본]]에는 [[조선]]에서 전래된 이황 계열의 성리학이 [[막부]] 세력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유행하였다.
         그 문하생으로는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ref>황윤길과 함께 일본 정세를 정탐하러 파견되었다.</ref>, 소고 [[박승임]], 성암 [[김효원]], 황재 [[심의겸]] 등이 있다. 월천 조목(趙穆), 송암 권호문(權好文), 두곡 고응척이 그의 문인이었으며, 특히 권호문에게 글 쓰는 법을 설명한 필법을 선물하였다. 권호문은 이를 퇴도선생필법-퇴도선생유첩(退陶先生筆法─退陶先生遺帖)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만들어 소장하고 후대에 전하였다. [[김효원]]은 [[동인]]의 영수가 되었고, [[심의겸]]은 [[서인]]의 영수가 되었다. [[심의겸]]은 [[이황]]의 문인임에도 [[이이]], [[성혼]]과 어울린 탓에 자연스럽게 [[서인]]이 되었다. [[박승임]]은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그 제자 가운데 일부는 [[북인]], 일부는 [[남인]]으로 출사한다. [[류성룡]]과 그의 주변 인물, 제자는 모두 [[남인]]으로 이어진다. 368인 문인 가운데 정유일(鄭惟一), 매암 이숙량, 약포 정탁(鄭琢), 김취려(金就礪)도 그의 문인이었고, 한강 [[정구]]는 [[조식]]의 문하에서도 수학했지만 그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이황의 저서와 글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이황의 사상과 저술에 감동받은 [[일본]]의 사무라이 지식인 중에는 [[양명학]]이나 기타 학문에서 [[성리학]]으로 사상적인 전향을 하기도 했다.
         === 일본 유학에 영향 ===
         [[임진왜란]] 당시 이황의 저서들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이황의 저서와 작품, 서한, 편지 등은 [[일본 주자학|일본 유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 이효봉(야구선수)
         그의 아버지는 [[문화방송|MBC]]의 [[아나운서]]였던 이성규다. 이성규의 야구 사랑은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이런 일화가 있다.[* 2010년 4월 16일, 스포츠동아 발췌.] 프로야구 출범 이전, 부산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이었다. 이날 해설을 맡기로 한 故 김계현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해설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이때 장내 아나운서가 “야구장에 이성규 아나운서 있으면 중계실로 좀 와 달라”고 방송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성규 아나운서는 어렸을 때부터 평소 라디오를 통해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경기를 즐겨 들었고, [[일본]] 야구전문잡지 슈칸베이스볼을 정기구독할 정도로 야구에 심취해 있었다. [[고교야구]]가 최고인기를 구가하던 그 시절, 방송 관계자들은 이성규 아나운서가 분명 구덕구장을 찾았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었다. 야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그에게 대타 해설을 맡긴 것이었는데, 기존 해설가 뺨치는 해설로 대박을 터뜨렸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이후 아나운서를 은퇴한 이성규에게 MBC는 지방 야구중계 해설을 맡겼다.
  • 이후락(전 국회의원)
         1924년 2월 [[경상남도]] 울산군(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에서 태어났다. 1943년 울산농업고등학교 졸업 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육군]]에 입대, [[육군]] [[하사관]]까지 이르렀다가 해방 이후 귀국,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이듬해 3월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9년 [[남로당]] 사건으로 파면당한 [[박정희]]의 후임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가 사망했다.][* [[박정희]]는 이 때 이후락의 밑에서 문관으로 있었고 그 시절에 훗날 자신의 조카사위가 되는 [[김종필]]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1952년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수료, 1957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였다. 1958년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에서 만들어진 79 부대라는 정보기관의 수장이 되어[* 당시 이후락 자신의 군번이 79번이여서 이름을 79 부대라고 지은 것이다.] [[라오스]]에 잠입하여 밀파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나라의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961년 [[육군]] [[소장(계급)|소장]]으로 예편하여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장면]] 총리에 의해, [[장면]] 내각이 만들어준 [[정보기관]]인 총리실 산하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장으로 임명되었다.
         === 주 일본 대사 ===
         1969년 [[3선 개헌]] 당시 [[이만섭]] 등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소속 일부 [[국회의원]]들에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부정부패 그리고 [[3선 개헌]]의 막후 원흉으로 지목되어 [[대통령비서실장]]에서 경질되었다. 이어 1969년 10월 주 [[일본]] 한국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나면서 [[대통령비서실]] 직원들에게 "여러분들은 [[박정희]]를 교주로 하는 '박정희교' 라는 종교를 신봉하는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라고 했던 일화가 있었다. 주 일본 한국대사로 있으면서도 [[박정희]]를 향한 그의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는데,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초밥 에피소드'이다. 당시 주 [[일본]] 한국대사관 부근에 '이즈미'라는 유명한 일식집이 있었는데, 이후락은 이집의 맛있는 스시를 특별 주문하여 잘 포장하고 간이 냉동상태로 대사관 사무관을 시켜 비행기편으로 [[청와대]]까지 직배송을 시켰다고 한다. 그것도 몇 차례나, 이 정성스런 선물을 받은 [[대통령]] [[박정희]]는 이후락을 더욱 특별하게 생각했을 것은 자명할 것이다. 이 일화를 소개한 책인 '남산의 부장들' 초판이 발행될 당시(1992년) 이 스시 심부름을 하던 사무관은 외교부 열손가락 안에 드는 고위 외교관이 되었다고.[* 출처 :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제1권, 동아일보사.] 이는 [[황병태]] 전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회고록 등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이후락의 기대와는 달리 [[박정희]]의 정적인 [[김대중]]을 납치한 [[김대중 납치사건]]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주도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내 여론은 물론 사건 발생 장소인 [[일본]]을 비롯한 국제 관계까지 험악해지자 그해 12월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되었다. 1998년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1973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이후락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일본 대사인 권철현이 [[김대중]]을 납치한 후에 각하의 재가를 받은 것이 확실하냐고 물었을 때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신이 독단적으로 주도했음을 암시했다. 근데 후에 이후락은 회고에서 자신이 주도했다고 주장했다가 다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 등 모순되는 증언을 많이 하여 역사학자들을 골때리게 만들었다. 한편 1980년 친구 [[최영근(1922)|최영근]] 전 신민당 의원에게 "1973년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했으나 자신은 곤혹스러워 계속 미뤘었고 [[김종필]]과도 이야기가 다 되었다며 [[박정희]]가 재촉하자 실행했다"라고 말하였다.
  • 이희승(1913)
         1913년 [[충청북도]] [[충주시|충주군]]에서 태어났다. [[일본]] [[주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 인종개량
         인종개량이라는 용어의 등장은 19세기 말, 일본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서양 문명을 도입하던 시기로써, 우생학도 일본에 전해지게 되어 이것이 인종개량론이 나타나는 배경이 되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인종개량이라는 것이 혼혈을 통한 개량은 매우 극소수의 사람이 주장하던 것이였고, 의식주 같은 환경을 개량하여 순혈의 잠재력을 최대한 키우자는게 주류고 이게 인종개량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대부분 의견이었다. 근데 그래봤자 인종개량이라는거 자체가 일본에서 주류는 커녕 존재감이 크게 없었다.
         [[일본]]의 작가 타카하시 요시오(高橋義雄)는 1884년 『일본인종개량론(日本人種改良論)』이라는 저술을 발표했다. 이 저술은 "일본인종은 신체적, 육체적으로 서양인종에 비해서 열등하므로, 서양인과 대등하게 경쟁하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일본인과 서양인 사이에 혼혈을 만들어, 서양인의 피를 일본인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쳤다. 물론 어디까지나 매우 극단적인 주장이었고 그 당시 일본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정치가 카토 히로유키(加藤弘之)는 1886년 「인종개량의 변(人種改良ノ弁)」이라는 주장으로 타카하시 요시오의 인종개량론에 반박하였다. 그것을 위해서는 [[의식주]] 등의 환경을 개량하는 방법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혼종 생산을 통한 인종개량의 비현실성도 지적하였다. (1) 어떤 조합으로 인종을 개량해 나가야 할지, 그에 대한 연구가 불충분하다. (2) 많은 세월이 걸려서 비현실적이다. (3) 몇대나 잡종을 반복하다보면 일본인의 피가 멸종해버린다.
         또 호즈미 야츠카는 혼혈을 하게 되면 일본인의 전통이 훼손되고 조상숭배가 흔들린다는 점을 들어 비판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모리 아리노리는 인터넷에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일본인과 서양인과의 잡혼을 통한 인종개량을 주장한 적이 없다. 영문과 일어 어느쪽에서도 관련 근거를 찾을수 없다. 아마 타카하시 요시오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제자란 점과 모리 아리노리가 극단적인 영어 공용어화를 주장했다는 점 때문에 루머가 퍼진듯하다. 단, 건강한 일본인끼리의 결혼이나 의식주의 개량을 통한 것은 주장했을 수도 있다.
         일본인의 의식주의 개선을 통한 환경개량은 괜찮은 호응을 얻었을지 몰라도 타카하시 요시오가 주장하는 서양여자를 수입해와 잡혼을 통해 혼혈로 일본인종을 개량하자는 주장은''' 당시에도 극단적인 개소리로 취급됐고, 단 한번도 일본정부에 의해 정책적으로 시행된적이 없다.''' 애시당초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이야기임에도 일본을 혐오하는 사람들에게는 생각보다 널리 퍼져있는 잘못된 사실이다.
         이후 일본정부는 야마토 정신을 가진 [[야마토 민족]]이 가장 우월하고 [[귀축영미]]는 정신과 사상이 썩어빠진 놈들이라는 프로파간다를 펼치며, 일본민족이 가장 우수하므로 귀축영미로부터 아시아를 지켜내야 한다는 [[대동아공영권]]에 심취한다.
          * 혼혈을 통한 인종개량 같은 극단적인 주장은 사실 근대 일본에서도 그리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은 주장이었고, 실제로 정책적으로 옮겨진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가 와전되었는지 한국 인터넷에서는 일본인들이 개화기에 '혼혈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는 펼쳤다는 루머가 퍼져 있다.[[http://bobaedream.co.kr/view?code=strange&No=363548&rtn=%2Fmycommunity%3Fcid%3Db3BocWlvcGhyM29waHFnb3BocW5vcGhxb29waHFxb3Boc2ZvcGhza29waHNmb3Boc2g%3D (참조)]][[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freeboard&no=1073574 (참조)]]
  • 인터넷 카페
         인터넷 카페(インターネットカフェ). [[일본]]의 [[PC방]]. 줄여서 넷카페(ネットカフェ) 혹은 네카페(ネカフェ)라고 불린다.
         일본에서는 2001년 부터 대중화 되었다.
         [[분류:일본 풍속]]
  • 임방울
         그는 [[서편제]]의 명창이다. 어려서부터 가세가 빈곤하여 판소리 수도에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고향에서 이재현에게 판소리 《[[춘향가]]》, 《[[흥보가]]》를 공부하였고 [[공창식]] 문하에서 다시 닦았다. [[유성준 (1874년)|유성준]]에게 《[[수궁가]]》, 《[[적벽가]]》를 사사했다. [[전라남도|전남]]의 거상인 남국일에게서 경제적 후원을 얻어 판소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28년]]에 상경하여 외숙부 [[김창환 (국악인)|김창환]]의 소개로 무대에 나갔다가 크게 인기를 얻었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맛있는 목구성으로 청중을 휘어잡은 명창이다. 서편제 중 특히 단계면조에 능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는 한편, 컬럼비아·빅타 레코드 회사의 전속으로 있으면서 《춘향가》, 《심청가》 등의 전집을 제작하였다. 현재 빅터레코드판 《춘향가》 전집과 오케이판 《흥부가》 전집이 남아 있다. [[일본]]에서 〈쑥대머리〉와 〈호남가〉를 취입한 음반은 당시에 100만 매가 팔렸다고 한다. 《춘향가》 중에서 〈쑥대머리〉가 특히 유명하다. 편곡을 비롯하여 작곡에도 재주가 있었으며, 〈호남가〉와 〈사별가〉를 남겼다.
  • 임수정(탤런트)
         2011년 10월, 장화홍련 이후 늘 함께 하던 소속사[* [[iHQ|싸이더스]]→노아 엔터테인먼트로 옮겼다지만, 노아 엔터테인먼트는 싸이더스의 자회사 개념으로 보고 있었다. 싸이더스 시절부터 함께하던 팀장과 매니저가 승진하면서 자기쪽 계열의 연예인들을 중심으로 한 회사다. 바로 현재의 [[판타지오]]다.]를 떠나 [[배용준]]의 [[키이스트]]로 옮겼다. 한류스타로의 행보를 노리는 듯.[* 그런데 [[일본]]이나 [[중국]]이나 임수정 하면 배역명인 송은채로 인식한다... 벌써 10년인데;;]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배우는 아니다. 따라서 한류스타로 보기는 어렵다. 역시나 드라마 출연이 많지 않은것이 원인인듯. 하지만 [[중국인]]들이 비교적 좋아하는듯 하다.[[http://spn.edaily.co.kr/news/newspath.asp?newsid=01302166589594128|#]] [* 또한 개소문 사이트에 똑같은 드레스를 입은 중화권 연예인과의 비교기사에 올라온 중국 누리꾼들의 댓글은 비교적 우호적이다.] 그리고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알려지면서 중동권과 [[터키]], 남미에도 어느 정도 알려졌다. [[일본]]에도 [[블로그]]를 운영하는 열성팬이 있었는데 2007년 그녀의 생일 이후로는 활동을 안하고 있다.
         대학 진학은 하지 않았지만 싸이더스에 소속되었을 당시 [[영어]]를 종종 공부해서 행사장에서 [[나카타 히데토시]]를 비롯한 [[외국인]]들과 영어로 대화를 하기도 했는데 미안하다 사랑한다 1화를 보면 영어 배운 지 얼마 안 된 어린이가 하는 수준으로 영어를 말한다.(...) 태국 단편 영화에선 그보다 더 나은 수준으로 영어를 길게 말하긴 하고 은밀한 유혹에선 영어 대사도 길게 하고 [[광동어]] 대사도 하는데 흥행작이 아니라서 기억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흥행작인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말하는 일본어 대사도 어색하긴 하다.~~
  • 임신균
         [[일본]]의 [[도시전설]](?)
  • 임원희(영화배우)
         여담으로 [[신세경]]과 닮았다(…) 자기 입으로 닮았다고 [[드립]]치기도. [[유노윤호]]와도 닮았다.[[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3&dirId=302140101&docId=111595433&qb=7J6E7JuQ7Z2sIOycoOuFuOycpO2YuA==&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1&pid=g5%2BhMz331y0ssveYfJKssv--121208&sid=TJ9pD-Jfn0wAAGNNFYg|#]] 또 [[일본]]의 유명 [[성우]] [[후루야 토오루]]하고도 은근히 닮았고, 살만 찌면은 왠지 '''[[차지철]]'''과도 상당히 흡사하다. 축구선수 [[마리오 괴체]]를 닮았다는 소리도 있고 [[하세가와 요헤이]]와도 닮았다는 소리도 있다.
  • 임응구
         | 별칭 = 일본식 이름은 '''이토 오큐'''(伊藤應九)
         | 사망지 = {{국기나라|일본}}
         | 학력 = [[일본]] [[도쿄 예술대학|도쿄 미술학교]] [[전문학사]]
         '''임응구'''(林應九, <small>일본식 이름: </small>伊藤應九 <small>이토 오큐</small>, [[1907년]] [[9월 13일]] ~ [[1994년]])는 [[한국]]과 [[일본]]의 서양화가이다. 본관은 [[나주 임씨|나주]](羅州)이다.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부]](現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출신이다.어릴 때부터 자주 일본을 왕래하며 미술을 공부했다. [[도쿄 미술학교]]를 졸업<ref>{{저널 인용
         |작성월=11}}</ref> 한 뒤, 일본 여성과 결혼하면서 [[1936년]] 일본에 귀화했다.
         [[1943년]] 한국과 일본의 친일 미술인들이 결성한 [[단광회]]에 가입하여 징병제 실시에 즈음한 관제 미술 작품을 단광회 회원들과 함께 공동 창작하여 발표했다. [[1943년]] 완성된 단광회의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는 제작에만 여러 달이 걸린 대작으로, 징병제 분위기를 고취하고자 순회 공연으로 전시되었으며 [[조선군사령부]]에 기증되었다.
         이후 일본에서 활동하며 [[일본제국미술전]]에 9차례 출품하고 특선을 한차례 했고, 백수상(白壽賞)을 받았다. 문제전(文帝展)에서 총 12회 입선하였으며, 살롱 도톰(가을의 전람회) 회원, 일전회우(日展會友)를 지냈고 살롱상도 받았다.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1994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화가]][[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도쿄 예술대학 동문]]
  • 임지호
         11살의 나이에 [[일본]]으로의 [[밀항]]을 시도하려고 [[부산광역시|부산]]으로 향했으나, 중도에 [[목포시|목포]]로 방향을 바꾸었고 얼마 뒤에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이후로도 자주 방랑의 길에 오르게 되었고, 이 때문에 요리사가 된 후에 '방랑식객'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ref name="파인"/>
  • 임지호(요리사)
         [[1956년]]생(만 [age(1956-01-01)]살).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났다. [[한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사생아]][* [[서자]]다. 그의 생모는 소위 말하는 [[씨받이]]로 들어온 사람이었고, 임지호 셰프가 3살일 때 생이별을 하게 되어 생모의 얼굴도 행방도 모르게 되었다. 그 이후에 자신의 계모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으며, 계모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자랐던 기억과 친모와 생이별한 아픔 때문에 유난히 [[어머니]]의 정에 집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해도 1950년 당시 씨받이를 들인 집안은 [[남아 선호 사상|남아선호]]가 매우 강한 집안이 아닌 이상 극히 드물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지역도 위에 나와있듯이 [[안동시]]다. 안동시는 유교문화의 메카로 유명한 도시이고 전국적으로 남아선호가 매우 강한 지역들중 하나다.] 라는 점 때문에 어릴 적부터 동네 사람들에게 무수한 차별을 받았고, 이것이 그의 방랑벽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결국 11살 이라는 어린 나이에 [[목포]]로 가출까지 하였으나[* [[SBS]]의 토크쇼 프로그램인 [[힐링캠프]]에 출연해서 밝힌 바에 의하면, [[일본]]으로 밀항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극심한 배고픔에 허덕이다가 한 식당에서 밥 한 끼를 훔쳐먹은 후[* [[힐링캠프]] 출연 시에 밝힌 바에 의하면, 그 식당의 여사장이 자기 아들뻘 되던 그를 안타깝게 여겨, 일부러 모른 체하고 달아나게끔 자리를 피해준 것 같다고 말했다.] 귀가했다고 하며, 그때 자신의 어머니[* 선술한 대로 그의 계모이다.]가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감격해 우는 모습에 [[어머니]]의 정을 느끼게 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이를 잊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도 방랑 도중에 자기 어머니나 누나뻘 되는 나이 든 여성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들을 위해 요리를 해주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고 한다.
  • 임효숙 (배구선수)
         [[2008년 하계 올림픽|베이징 올림픽]] 여자배구 예선전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2008년]] [[5월 17일]]부터 [[일본]]에서 경기를 치렀다. 그녀가 국가대표팀으로 발탁되어 태극 마크를 단 것은 [[2008년 하계 올림픽|베이징 올림픽]] 예선전이 처음이다. 2011-2012 시즌 후 [[한국 배구 연맹|V-리그]] 은퇴를 선언했고, [[2012년 하계 올림픽|런던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코트를 완전히 떠난 후, '효숙'에서 '정은'으로 개명하였다.
  • 장건상(독립운동가)
         1882년 [[경상도]] [[칠곡군|칠곡 도호부]]에서 태어났다. 이후 집이 경상도 [[동래]]부로 이전하면서 [[부산광역시|동래부]]에서 자랐다. 좌천재에서 한문을, 육영재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이후 공립 영어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했다가 일제의 민족 차별에 반발하여 자퇴하였다. 이후 [[미국]] 발프레이조 예비 학교, [[인디애나 대학교|인디애나 주립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 장도 (1876년)
         [[한성부]]에서 무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895년]]에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유학할 수 있었다. [[1896년]] [[도쿄]]의 [[게이오의숙]] 보통과를 졸업하고, [[주오 대학]]의 전신인 도쿄법학원에서 3년 동안 법학을 공부했다.
         [[1899년]] 도쿄법학원을 졸업하고, 일본의 법원을 순회하면서 견습까지 마친 뒤 귀국했다. [[1900년]]부터 사립 광흥학교 교사로 법학과 일본어 등을 가르쳤고, 이후 [[한성법학교]] 강사와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일하면서 [[형법]] 전문가로 활동했다.
         1908년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 위원<ref> {{웹 인용 |url= http://db.history.go.kr/url.jsp?ID=jw_1908 |제목= 대한제국 직원록 1908년 (02. 내각 > 문관전고소) |확인날짜=2008-11-18 |형식= |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 }} </ref>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변호사]]로 등록했다. 이미 이전부터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분쟁에서 소송을 대리한 일이 있어, 실질적인 의미에서 한국 최초의 변호사로 볼 수 있다. [[조선변호사협회]] 호장을 지냈다.
  • 장발 (화가)
         우석 장발은 [[1901년]] [[4월 3일]] [[한성부]] [[종로구|종로]] 친척 집에서 인천세관의 관리 [[장기빈]]과 그의 부인이었던 황루시아의 아들로 태어났고 이후 [[인천광역시|인천]]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의 형은 후일 [[대한민국의 부통령]]을 역임하는 [[장면]](張勉)이다. [[인천광역시|인천]]의 개화한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초명은 지완(志完)이라 했다가 뒤에 발(勃)로 개명하였다. [[1920년]] [[일본]] [[도쿄 미술학교]]에서 유학한 뒤, [[1922년]]부터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미술사와 미학을 수학했다.
         * [[일본]] [[도쿄 미술학교]] 전문학사
  • 장은숙 (가수)
         | 웹사이트 = [http://www.chang-suu.com/ 장은숙 일본 공식 홈페이지]<br />[http://cafe.naver.com/sookjjang 장은숙 한국 팬 카페]
         '''장은숙'''(張恩淑, 1957년 5월 2일 ~ )은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활동하는 [[가수]]이다. 일본에서는 주로 [[엔카]]와 [[발라드]]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서 활동 후 1995년 일본 [[토라스레코드]] 회사의 스카우트 제의로 일본 무대로 진출하였고, 그 후부터 '장수(チャン・スー)'라는 예명을 사용하였다.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한 첫해 일본 유선 방송 신인상을 받았고, 2000년 발표한 '[[운명의 주인공]]' 으로 방송 및 각종 차트에서 12주 이상 1위를 차지하며 총 25만장의 앨범 판매 기록도 세우기도 했다. 지금까지 20장의 음반을 발표했으며 2015년 5월에 발표한 "눈물의 공항 대합실"을 포함해 총 14곡이 유선방송 1위에 랭크되었다.
         현재 일본 [[테이치쿠 레코드]]에 소속되어 있으며, 2009년부터는 일본에서의 활동명을 본명인 장은숙(チャン・ウンスク)으로 바꿨다. 2003년에는 연예 기획사인 "오피스 장수"를 설립하기도 했다. 2006년부터는 점차 한국에서의 활동 비중도 늘리고 있다.
         === 일본 앨범 ===
         * [http://www.chang-suu.com/ 일본 공식 홈페이지]
  • 장진홍
         [[경상북도]] [[칠곡군|칠곡]] 출생이다. [[일본 제국|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면서 황실 경호 명목으로 남겨놓은 [[조선보병대]]에서 복무했고, [[1916년]] 조선보병대에서 제대한 뒤 동향 선배인 [[이내성]]의 소개로 비밀 결사인 [[광복단]]에 가입하여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경찰의 수사망이 점점 조여오자 [[일본]]으로 피신하여 [[오사카 시|오사카]]의 동생 집에 은신해 있다가 [[최석현]] 등을 앞세운 일경의 끈질긴 추적 끝에 [[1929년]] 체포되었다. 이듬해 사형 선고를 받았고, 최종심에서도 사형이 확정된 뒤 [[대구 형무소]]에서 자결했다.
  • 장헌식
         }}</ref> 본관은 [[인동 장씨|인동]](仁同), 호는 취운(翠雲)이다. 일본식 창씨명은 기타 하리마(張間憲植)이다.
         1895년 일본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1903년까지 일본에 유학하며 [[게이오 의숙]]의 보통과와 고등과 과정, 도쿄 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서 수학했으며, 일본 사법성과 요코하마항 지방재판소의 사무견습, 대장성의 사무견습으로 재직했다. 귀국 후 궁내부 주사로 임용되어 학부에서 근무하다가 한성부윤을 역임했다. [[1910년]] [[10월]]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평안남도 참여관, [[1917년]]에 [[충청북도]] 장관(도지사)으로 승진한 뒤 충청북도 도장관, 조선총독부 사무관, 총독부 관방실 계원, 1924년 전라남도 지사 등을 역임했다.
         [[1895년]] [[일본]]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 그해 [[3월]]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 보통과에서 수학했다. 당시 근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뽑아 보낸 관비 일본 유학생들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 다양한 부문의 전문가이자 친일파로 활동하게 되는데, 장헌식도 그런 인물들 중 하나였다.
         ==== 일본 유학 생활 ====
         1896년 7월 25일 게이오의숙 보통과를 졸업하고, [[게이오 의숙]] 고등과에 들어갔다. 당시 게이오의숙은 조선인 유학생이 급증함에 따라 조선인 특별 고등과를 설치하였다. 1897년 4월 25일 게이오의숙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1897년]] [[5월]]부터 [[12월]]까지 그는 [[일본 사법성]] 행정사무급재판소 병설 검사국 견습사무원이 되었다. 그는 [[게의오의숙]]을 졸업하고 사법 부문의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 사법성의 재판소 검사부에서 견습 사무원으로 일했고, [[1898년]] [[1월]]부터 [[10월]]까지는 일본 [[교토부]] [[가나가와현]] 요코하마항 지방재판소(神奈川縣 橫濱港地方裁判所) 검사국의 견습사무원으로 재직했다.
         견습사무원으로 재직하면서 그는 [[도쿄 제국대학]]에 진학, [[1898년]] [[10월]]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교 법과에서 [[행정법]]을 전공하며 행정법 전문가로 일본 대장성 총무국에서 견습 근무했다. [[1902년]] [[7월 11일]]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교 법과를 졸업하였다. [[1902년]] [[10월 21일]] [[도쿄 제국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1903년]] [[3월]] 중퇴하였다. [[1902년]] [[11월]] 그는 일본 도쿄에 있는 [[대장성]] 총무국 사무견습 겸 사무촉탁이 되었다, 같은 달 그는 대장성 사무견습 통신사(大藏省 事務見習通信事)로 발령되어 [[1903년]] [[3월]]까지 근무했다.
         8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03년]] [[3월]] 학부의 훈령으로 귀국한 뒤로는 대한제국의 [[궁내부]]에서 주사로 관직을 시작했다. [[1904년]] [[8월]] 궁내부 어홍원 주사(宮內府御供院主事), [[10월]] [[궁내부]] 제실제도정리국 비서관(帝室制度整釐局祕書官)을 거쳐 [[1905년]] [[7월 13일]] [[일본]] 시찰 수행원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어 일본을 다녀왔다.
         장헌식은 관직에서 퇴임한 뒤로도 일본의 전쟁을 지원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37년에는 각지에 시국강연을 다녔다. [[만주 사변]] 이후 일본군을 후원한 활동을 인정받아 [[1937년]] 일본 육군대신 명의의 표창을 받은 바 있고,<ref name="실록친일파" /> 37년 8월 21일에는 애국금차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로는 시국강연반에 가담하여 전쟁 지원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38년]] 친일 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뒤 [[1941년]] [[국민총력 조선연맹]]과 [[조선 임전 보국단]]에도 가담했다. 이때는 이미 70대의 노구였으나, 학병 지원을 독려한다며 전국에서 강연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38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 칙임관대우 참의에 임명되었다.
         [[1946년]] [[1월 3일]] 이왕직 재산 관련 공금횡령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이때까지도 출국하지 못한 [[일본]]인 이왕직 회계과장 사이토 치로(齋藤治郎)와 함께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ref name="jigga">"전 李王職 장관인 張憲植 수감명령", 자유신문 1946년 01월 03일자, 2면 10단</ref> 그는 반성의 기미가 없었고, 과거 일본 정치하에서 있었지만 그래도 고관대작으로 있었는데 어찌하겠느냐고 대응하였다. 검찰관들은 분노했고 방청석을 분노하게 했다.<ref name="jigga"/> [[1월 16일]] [[보석금]]을 내고 보석출감하였다.<ref>"張憲植 보석출감", 자유신문 1946년 01월 16일자, 2면 5단</ref>
  • 장혁주
         | 사망지 = {{국기나라|일본}} [[사이타마현]] [[히다카 시]]
         | 국적 = {{국기나라|일제 강점기 조선}} <br /> {{국기나라|일본}}
         '''장혁주'''(張赫宙, <small>일본식 이름:</small> 野口稔('''노구치 미노루'''), 野口赫宙('''노구치 가쿠추'''), [[1905년]] [[10월 13일]] ~ [[1998년]] 2월)는 [[한국]]의 소설가, 문학평론가로, 본명은 '''장은중'''(張恩重)이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 [[1926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아나키즘]] 단체인 진우연맹(眞友聯盟)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9년]] 이후부터 대구 희도(喜道)소학교 훈도로 근무했고 [[1932년]] 소설 〈아귀도(餓鬼道)〉를 발표하여 [[일본]] 문단에 등단했다. [[일본어]]로 쓰인 소설이지만, 식민지의 참혹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당시 계급문학에서 유행하던 농민소설에 못지않은 현실 비판 의식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 문단에서 활동하던 장혁주는 [[1933년]] 장편 《무지개》로 한국 문단에도 선을 보였다. 도시를 배경으로 한 《무지개》도 초기의 사실주의적 작풍이 살아 있는 작품이나, 이후 남녀간의 복잡하게 얽힌 애정 관계가 묘사된 《삼곡선(三曲線)》(1934~1935) 등 점차 통속적인 경향의 소설을 발표했다. 이 무렵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일본인 장수 [[가토 기요마사]]를 다룬 〈가등청정〉(1939)을 시작으로 전시 체제에 협력하는 친일 작품을 집필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광복 후 일본에서 활동하며 일본에 귀화했다. [[사이타마현]] [[히다카 시]]에서 거주하다가 사망했다.<ref>{{뉴스 인용
         |언어=일본
         [[분류:1905년 태어남]][[분류:1998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재일 한국인]]
  • 장후영
         [[한성부]] 출신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법과와 [[일본]]의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대학원을 졸업했다. [[교토 제국대학]] 대학원에서도 수학한 바 있다.
         경성제국대학에 재학 중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경성지방법원과 광주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로 일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고 물러간 뒤 [[미군정]] 법사국 법제부장을 역임했다.
  • 쟈니즈
         [[일본]]의 연예 기획사. [[SMAP]], [[아라시]] 등 유명한 그룹이 소속되어 있다. 주로 남성 꽃미남 연예인들로 유명.
         일본 내에서 굉장한 인기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 전가의 보도
         [[일본]]의 무가([[사무라이]] 가문)에서는 가문 대대로 명검(보도)를 유산으로 전수하는 사례가 많았다. 과거에는 공업 기술이 낮았으며, 칼을 만들려면 [[장인]]이 수작업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 때문에 명장이 만든 보도는 매우 높은 [[부가가치]]와 [[희소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자손 대대로 전수할 만한 자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귀한 가치가 있는 반면, 가치가 너무 높기 때문에 쉽게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전가의 보도였다. 가문 대대로 물려줄 정도의 보도라면 가치가 매우 높지만, [[일본도]]는 관리하기가 어렵고 실전에서 사용하면 손상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가의 보도에는 높은 가치가 있는 만큼 실제로 사용하다가 손상을 입히면 그만큼 깍여나가는 피해액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헤이세이 24년도 일본 문화청에서 발표한 「국어에 관한 여론조사(国語に関する世論調査)」에 따르면, 전가의 보도(伝家の宝刀)로 쓰는 사람이 54.6%, 그런데 본래 한자가 아닌 천하의 보도(天下の宝刀)[* 일본어로는 발음이 같다.]로 쓰는 사람이 무려 31.7%나 됐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사실 이 말은 굳이 말하자면 '''일본어의 잔재'''. 애초에 대대로 보도를 물려주는 문화가 일본 사무라이 가문에서 나온 것인지라(…).
         [[분류:일본어]][[분류:관용구]]
  • 전근족
         --[[일본]]의 부족. 유목생활을 한다.--
         [[분류:일본 풍속]]
  • 전명운
         이곳에서 [[안창호]] 등이 조직한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1908년]] [[친일파]] [[미국인]]으로 [[대한제국]]의 외부 고문을 맡고 있던 [[더럼 스티븐스|더럼 화이트 스티븐스]]가 귀국하여 [[일본]]의 보호가 한국에게 유익하며 [[한국인]]들도 환영하고 있다는 망언을 늘어놓자, 이 사실에 매우 격분하였다. 스티븐스의 망언은 [[샌프란시스코]] 지역 언론에 보도되었고, 공립협회는 [[대동보국회]]와 공동으로 항의를 위한 4인 대표단을 구성했으나, 스티븐스는 대표들의 항의에도 극언을 계속하다가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분노한 그는 스티븐스의 친일 발언 이틀 후인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의 여객선 선착장에서 [[일본인]] 총영사와 함께 있는 스티븐스를 공격했고, 격투가 벌어지자 같은 목적에서 별도로 대기하던 [[장인환]]이 [[권총]]으로 스티븐스를 저격, 이틀 후인 [[3월 25일]] 절명하게 하는 중상을 입혔다. 그는 이때 장인환의 총격에 총상을 입고 장인환과 함께 구속되었으나, 공범 관계가 아님이 드러나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당시 교민들은 성금을 모아 [[네이던 코플란]]을 변호사로 선임했다. 이때 통역은 [[이승만]]에게 요청했으나 자신은 기독교인이라 살인범의 변호를 통역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함에 따라 유학생이던 [[신흥우]]가 맡았다.
  • 전예용
         '''전예용'''(全禮鎔, <small>일본식 이름: </small>江原禮三, [[1910년]] [[1월 3일]] [[한성부]]<ref>{{웹 인용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391-1번지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당시 은행원이자 기업인이었던 아버지 전성욱과 어머니 이성원의 셋째 아들이었다. 형 인용, 의용은 일본 유학 후 고베상고를 졸업했으며, 동생 전지용은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그밖에 2명의 누이가 있었다.
         [[일본]]에 유학하여 [[규슈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군수직과 [[조선총독부]] 사회과 과장, [[황해도]] 산업부 농업과장 등을 지냈다.<ref>{{뉴스 인용
  • 전한길
         [[일본]]에 대한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어 "[[쪽바리]] 개xx들! [[아베 신조|아베]] 보고있나!" 할때마다 수강생들이 엄청나게 속 시원해 한다는 후문 아베가 널 왜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하--잇!!"~~ (시험 예상 질문에 자문자답할 때. [[일본어]] 하이(はい)인데, [[한국사]] 수업이라 이런 일본어에 대해 살짝 거부감을 나타내는 수강생들도 종종 보인다.)
  • 정경은(배드민턴선수)
         4강(vs [[일본]]):세트 스코어 2:0 패[* 일정으로 인한 체력소모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 정명훈 (지휘자)
         줄리어드 재학 중이던 [[1976년]]에 뉴욕 청소년 교향악단을 [[지휘]]해 [[지휘자]]로 공식 데뷔했고,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부지휘자로 프로 관현악단 지휘의 [[경험]]을 쌓았다. [[1980년]]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가 되어 상임 지휘자인 줄리니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고, [[1983년]]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거처를 옮겼다. [[1984년]]에는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발탁되었고, 재임 기간 동안 [[윤이상]]의 교향곡 제3번 세계 초연과 음반 녹음 등의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1986년]]에는 [[파리 국립 오페라]]에서 [[프로코피에프]]의 '불의 천사' 를 [[지휘]]했고, 같은 해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도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 를 [[지휘]]해 오페라 지휘자로도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에서 [[무소륵스키]]와 [[베르디]],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지휘]]해 절찬을 받았고, [[1988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상을 [[상 (표창)|수상]]했다. [[1989년]]에는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 [[바스티유 감옥]] 부지에 새로 건립한 [[오페라극장]]의 전속 오페라단인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현.[[파리 국립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고, 신축된 [[오페라극장]]의 개관 공연에서 [[베를리오즈]]의 대작 오페라 '트로이인' 을 상연해 호평을 받았다. [[1990년 10월]]에는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고 음반 제작도 시작했으며, [[조르주 비제|비제]]의 관현악 작품들을 시작으로 [[생상]], [[메시앙]], [[베를리오즈]], [[앙리 뒤티외|뒤티외]] 등의 작품들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생상의 '삼손과 데릴라(EMI)', 베르디의 '오텔로' 등 오페라 전곡을 [[녹음]]했다. 특히 [[메시앙]]과는 생전에 각별한 친교를 맺고 있었고, 녹음들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994년]]에 새로 부임한 프랑스 문화부 장관과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음악 감독직에서 해임되었고, 이는 [[프랑스]]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기도 했다. [[1995년]] 유네스코 서울 협회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에 [[대한민국의 훈장|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97년]]에는 [[이탈리아]]의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고, [[도이체 그라모폰]]의 전속 계약을 유지하면서 녹음 활동도 병행했다. [[1998년]]에는 [[한국]]에서 첫 직책으로 [[KBS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기도 했지만, 악단원들과 [[갈등]]을 빚어 불과 수 개월 후 사임하기도 했다. [[2000년]]에는 [[프랑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에 취임했고, 이듬해에는 신성 일본 교향악단을 흡수해 재구성된 [[일본]]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특별 예술 고문으로 초청되었다. [[2005년]]에는 [[대한민국]] [[서울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2012년]]부터는 [[독일]]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의 역사상 첫 번째 수석 객원지휘자로 임명되어 [[활동]]을 시작한다. 이외에도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네덜란드]] [[콘세르트헤바우 관현악단|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RCO)나 [[영국]]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미국]]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독일]]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세계 각국의 주요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극장들을 객원 [[지휘]]하고 있으며, 다수의 영상물과 음반들을 남기고 있다. [[아시아인]] 혹은 아시아계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비상설 관현악단인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도 맡고 있으며, [[대한민국]] [[인천]]과 [[서울]]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공연하고 있다.
         [[북한]] [[함경남도]]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루시여고]], [[대한민국]] [[배화여고]], [[이화여전]] 가사과를 [[졸업]]한 후 한 때 [[동덕여고]] 교사, [[이화여대]] 가정과 강사로 일했다. [[일본]]에서 [[유학 (교육)|유학]]하다 정준채 씨를 만나 [[결혼]]. [[1962년]] [[미국]]으로 이주해 한식당을 운영. [[1968년]] [[한국]]으로 돌아와 구미물산주식회사, 주식회사 원 등을 운영. [[1986년]]엔 [[미국]] 밸리포지신학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주]] 미들타운에 한인교회를 개척하였고 [[1988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미국]]에서 목사로 활동.
         * 1996년 일본 [[아사히 방송|아사히 방송사]] ABC음악재단의 96 ABC인터내셔널 음악상
  • 정민철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92년]] [[4월 5일]] <br />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대전]] 대 [[LG 트윈스|LG]]전 구원 <br /> [[일본야구기구|NPB]] / [[1999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09년]] [[9월 12일]] <br />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대전]] 대 [[넥센 히어로즈|히어로즈]]전 선발 <br /> [[일본야구기구|NPB]] / [[2001년 10월]]
         [[일본 프로 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적 후 [[일본]]에서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귀국하였다.<ref>[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B21&newsid=01085686583229288&DCD=A20102 달인에게 묻는다 9 - 정민철의 '라이징 볼에서 아리랑 볼 까지'] 《이데일리》, 2007년 8월 20일 작성</ref>
         === 일본 프로야구 시절 ===
         2000년 [[일본 프로 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2시즌을 보낸다. 국내에서는 리그 최고 수준의 에이스였지만 일본 리그에서는 현지 적응 실패와 리그격차로 인해 뚜렷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일본 리그에서 그는 2시즌 동안 3승 2패의 초라한 성적을 거두었고, 부진했던 주요한 원인으로는 급격한 구위 저하, 팔꿈치 통증이었다. 그렇지만 이 안타까운 결과에는 여러 논란이 있는데 실제로 정민철의 요미우리 입단 후 첫 등판은 야쿠르트를 상대로 7이닝 1실점 승으로 호투하였으나 경기 직후 2군 통보를 받고, 다시 올라온 1군 대전에서 요코하마를 상대로 9이닝 무실점으로 완봉승 하였으나 이후로도 등판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그 후 국내 복귀 20완봉 달성 인터뷰에서 "요미우리의 시스템이 참 이상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 2000년~2001년 10월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
         !colspan="3"|[[일본 프로 야구|NPB]] 통산 : 2년
  • 정상희(정치인)
         1907년 [[충청북도]] [[충주시|충주군]]에서 태어났다. [[경성부]] [[양정고등학교(서울)|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 자오퉁 대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년을 수료하고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1974년 메이지 대학 [[대학원]]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 정영일
         ==일본 독립야구 시절==
         [[이대호]]의 형이자 에이전시 대표 이차호의 주선으로 [[2013년]] 3월 [[일본]]의 [[독립 리그]] 중 하나인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 소속 팀 [[가가와 올리브 가이너스]]에 입단해<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604387 정영일의 간절함이 통했다] - 스포츠동아</ref> 그 해 [[7월 1일]]까지 활동했다. 퇴단 전까지 4광주에 등판해 2.2이닝 동안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3.38을 기록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295&article_id=0000001014 정영일 “신인 2차 지명 참가한다”] - 박동희 칼럼</ref>
         2015년 9월 제대를 앞두고 [[2015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제29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국가대표로 참가했다. 풀리그 2차전 중국전에서 구원 등판해 1이닝 1탈삼진, 무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했으며, 4차전 일본전에서도 구원 등판해 [[김재영 (1993년)|김재영]], [[이용찬 (야구 선수)|이용찬]] 등과 이어 던지며 광주 후반을 무실점으로 틀어막는 데 힘을 더했다. 일본전의 극적인 역전 승에 힘입어 한국은 5전 전승으로 드림팀 2기가 활약했던 1999년 제 20회 대회 이후 16년 만에 아시아 정상 자리를 되찾았다.
  • 정옥숙
         그렇게 최진실과 최진영 두 남매가 연예계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1999년, 최진실은 당시 인기 [[야구선수]]였던 [[조성민]]과 교제를 시작하였다. 당시 최진실과 조성민의 나이 차이는 5살이었다. 당시만 해도 여자 [[연상연하|연상]] 커플은 흔치 않았기에, 정옥숙은 조성민과의 교제를 반대하였다. 초반에는 최진실도 이를 수긍하고 조성민과 연락을 끊었으나, 조성민이 [[일본]]에서 자살을 시도하면서 최진실이 "'''내가 뭔데 나까지 약까지 먹고... 저렇게 잘 생기고 훌륭한 야구선수가 나 때문에 죽으면 안 되지"'''라고 걱정하여 결국 정옥숙도 [[결혼]]을 허락하였다. 두 사람은 2000년 12월 5일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 정용화
         [[2009년]] [[8월 19일]] [[Now or Never (씨엔블루의 음반)|Now or Never]]을 발매하고 일본에서 인디즈활동을 시작하였다. [[2009년]] [[10월 7일]] [[SBS 드라마 스페셜]] 《[[미남이시네요]]》를 통해 연예계에 데뷔하였고, 당시 '수건남,' '밀크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ref name="milk">[http://artsnews.mk.co.kr/news/43637 '미남' 정용화, 수건남에서 이번엔 밀크남?], 《아츠뉴스》, 2009년 10월 15일 작성.</ref>
         * [[2010년]] [[6월 23일]] 일본에서 발매한 《The Way》앨범 타이틀 One Time 을[[작사]], [[작곡]] 하였고 이 곡으로 씨엔블루로는 오리콘 싱글차트 11위에 진입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씨엔블루, 日 싱글 'The Way' 오리콘 데일리 11위|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500570|출판사 = 조이뉴스24 |날짜 = [[2010년]] [[6월 24일]]}}</ref>
         * [[2010년]] [[9월 15일]]에는 [[일본]]에서 두 번째 싱글 ''[[I don't know why]]''를 발매하였는데, 정용화의 자작곡 "I don't know why"는 [[오리콘]] 싱글차트 데일리 8위,<ref>{{뉴스 인용|제목 = 씨엔블루, 정용화 자작곡 싱글 日 오리콘 8위 진입 ‘쾌거’|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9170942221002|출판사 = 뉴스엔 |날짜 = [[2010년]] [[9월 17일]]}}</ref> [[오리콘]] 인디즈 차트 주간 1위를 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ref>{{뉴스 인용|제목 = 씨엔블루, 새 싱글 'I don't know why'로 오리콘 차트 1위|url=http://autotimes.hankyung.com/apps/news.sub_view?popup=0&nid=81&nkey=90590|출판사 = 오토타임즈 |날짜 = [[2010년]] [[9월 30일]]}}</ref>
         * [[2011년]] [[1월 9일]], 일본에서 세 번째 싱글 ''[[RE-MAINTENANCE]]''를 발매하였다. 타이틀 "Try again, Smile again"을 작곡 및 작사하였고 오리콘 싱글차트 데일리 2위에 올랐다.<ref>{{뉴스 인용 |제목 = '씨엔블루' 日 투어 전석 매진 신기록…오리콘 챠트 2위 겹경사 |url = http://mystar.mdtoday.co.kr/mystar/index.html?no=426803 |출판사 = 마이스타뉴스 |날짜 = [[2011년]] [[1월 10일]] |확인날짜 = 2012년 8월 19일 |보존url = https://archive.today/20130111191550/http://mystar.mdtoday.co.kr/mystar/index.html?no=426803 |보존날짜 = 2013년 1월 11일 |깨진링크 = 예 }}</ref>
         * [[2011년]] [[6월]]부터 [[8월]]까지 [[문화방송 수목 미니시리즈|MBC 수목 미니시리즈]] 《[[넌 내게 반했어]]》에서 주인공인 이신 역을 맡았으며 정용화 효과로 《[[넌 내게 반했어]]》가 일본 정규방송에 편성되었다.
         * [[2011년]] [[9월 1일]]에 일본에서 인디즈 마지막 앨범인 《[[392(Thank you too(much))]]》를 발매하여 오리콘 데일리 앨범 3위와 인디즈 위클리 1위를 차지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씨엔블루 日 앨범 ‘392’, 오리콘 데일리 앨범 차트 3위 |url=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93705691|출판사 = 맥스뉴스 |날짜 = [[2011년]] [[9월 2일]]}}</ref> 또한, [[2011년]][[9월 10일]]에 일본에서 열린 일본 마쿠하리 멧세(MAKUHARI MESSE)에서 열리는 [[린킨파크]](Linkin Park) 단독 공연의 오프닝 무대에 서게 됐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CNBLUE), 린킨파크(Linkin Park)와 '오프닝 무대' 가져|url= http://www.topstarnews.net/n_news/news/view.html?no=3065|출판사= 톱스타뉴스|날짜= [[2011년]] [[9월 9일]]|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30120220518/http://topstarnews.net/n_news/news/view.html?no=3065|보존날짜= 2013년 1월 20일|깨진링크= 예}}</ref>[[9월 17일]]~[[9월 18일]]에는 서울에서 열린 콘서트 "BLUE STORM"을 이틀에 걸쳐 진행하고,<ref>{{뉴스 인용|제목 = 씨엔블루, 아시아투어 콘서트…9월 제주에서 출발한다.|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110801001713&subctg1=10&subctg2=00|출판사 = 스포츠월드 |날짜 = [[2011년]] [[8월 1일]]}}</ref> [[9월 25일]]에는 인디즈그룹으로는 유례없이 1만 5천석의 Yokohama Arena에서 인디즈 마지막 콘서트를 진행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씨엔블루 단독 콘서트, 요코하마의 밤을 불태운 ‘열정의 무대’|url=http://sstv.tvreport.co.kr/index.html?page=news/flypage&cid=24&nid=119144|출판사 = SSTV |날짜 = [[2011년]] [[9월 26일]]}}</ref><ref>{{뉴스 인용|제목 = 이것이 밴드다…'씨엔블루' 日콘서트,1만 5천 팬 열광 |url=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927290|출판사 = 노컷뉴스 |날짜 = [[2011년]] [[9월 26일]]}}</ref>
         * 오리콘 싱글 위클리 차트에 일주일 만에 7만 1200장을 팔아 치우고 일본 메이저 데뷔를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데뷔싱글 일주일 만에 7만장 판매|url=http://sports.chosun.com/news/utype.htm?id=201110270100197960017298&ServiceDate=20111026|출판사 = 스포츠조선|날짜 = [[2011년]] [[10월 26일]]}}</ref><ref>{{뉴스 인용 |제목= 씨엔블루 '인 마이 헤드', 日 오리콘 주간 차트 4위 랭크 |url= 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19589921221164011 |출판사= 티브이데일리 |날짜= [[2011년]] [[10월 26일]] |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 |보존url= https://archive.today/20120715225340/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19589921221164011 |보존날짜= 2012년 7월 15일 |깨진링크= 예 }}</ref> 《[[In My Head]]》는 [[2011년]][[11월 10일]]에 일본 레코드 협회에서 선정하는 골드 레코드가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일본 데뷔싱글 10만장 넘겨, 日 '골드 레코드' 선정|url= 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21064770229443011|출판사= 티브이데일리|날짜= [[2011년]] [[11월 12일]]|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보존url= https://archive.today/20130112003527/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21064770229443011|보존날짜= 2013년 1월 12일|깨진링크= 예}}</ref>
         * [[2011년]] [[12월 4일]]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겨울투어를 실시하여, [[12월 4일]] 센다이, [[12월 6일]] 나고야, [[12월 14일]] 오사카, 그리고 [[12월 16일]] 도쿄에서 일본 전국 투어를 실시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전국투어 마지막 공연 13000명 동원 ‘1분 만에 티켓 매진'|url=http://wstar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1&c1=01&c2=01&c3=00&nkey=201112191637321&mode=sub_view|출판사 = 한국경제연예|날짜 = [[2011년]] [[12월 19일]]}}</ref>
         * [[2011년]][[12월 28일]]에 일본에서 매년 연말 개최되는 Music Festival 'COUNTDOWN JAPAN'에 외국인 최초로 출연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씨엔블루(CNBLUE), 일본 락 페스티벌 'COUNTDOWN JAPAN' 외국인 최초 출연 |url= http://www.topstarnews.net/n_news/news/view.html?no=4208 |출판사= TOP스타 뉴스 |날짜= [[2011년]] [[11월 18일]] |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30120220609/http://topstarnews.net/n_news/news/view.html?no=4208 |보존날짜= 2013년 1월 20일 |깨진링크= 예 }}</ref><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연말 최대 록축제 외국인 최초 출연|url=http://sports.hankooki.com/lpage/music/201111/sp2011111809264695510.htm|출판사 = 스포츠한국|날짜 = [[2011년]] [[11월 18일]]}}</ref>
         * [[2012년]]은 첫 주부터 아시아투어를 하였다. [[2012년]] [[1월 7일]]~[[1월 8일]]을 시작으로 홍콩에서 씨엔블루의 아시아투어 첫 콘서트가 열렸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일본 이어 홍콩도 녹였다 '8000 구름팬 운집'|url= 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26249160257638011|출판사= 티브이데일리|날짜= [[2012년]] [[1월 11일]]|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20119163458/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26249160257638011|보존날짜= 2012년 1월 19일|깨진링크= 예}}</ref><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홍콩에서 아시아투어 화려한 출발|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120111001281&subctg1=10&subctg2=00|출판사 = 스포츠월드|날짜 = [[2012년]] [[1월 11일]]}}</ref> 이번 홍콩콘서트는 1회를 추가하여 총 이틀에 걸쳐 콘서트가 진행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홍콩콘서트, 1시간만에 매진|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111021001089&subctg1=10&subctg2=00|출판사 = 스포츠월드|날짜 = [[2011년]] [[10월 21일]]}}</ref>
         * [[2012년]] [[1월 31일]] 일본 MTV '언플러그드' 출연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어쿠스틱한 연주와 청중과의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 무대 등 라이브를 진행하는 것으로 유명하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韓 가수 최초로 日 MTV '언플러그드' 출연|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300&g_serial=634129&rrf=nv|출판사 = 조이뉴스24|날짜 = [[2012년]] [[2월 1일]]}}</ref> 또한, 수용인원 150명에 응모인원만 1만 5천여명이 응모하여 100배의 응모 수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MTV ‘언플러그드’ 출연…티켓 응모 ‘정원의 100배’ 기염|url= http://www.eto.co.kr/news/outview.asp?Code=20120201170502960&ts=95729|출판사= 경제투데이|날짜= [[2012년]] [[2월 1일]]|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60304124520/http://www.eto.co.kr/news/outview.asp?Code=20120201170502960&ts=95729|보존날짜= 2016년 3월 4일|깨진링크= 예}}</ref>
         * [[2012년]] [[2월 1일]]에 일본에서 두 번째 싱글앨범인 ''[[Where you are]]''를 발매하였고 타이틀인 "Where you are"를 작사 및 작곡하고 "feeling" 작사 및 작곡, "Where you are(Inst.)" 작곡하였다. 이 앨범은 하루에 3만 2천여장이 나갔고 ''[[Where you are]]''는 오리콘 싱글 데일리 차트 1위에 올랐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정용화 자작곡 日오리콘 차트 1위|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2020208385422373&type=1&outlink=1|출판사 = 스타뉴스|날짜 = [[2012년]] [[2월 2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아시아 대세 씨엔블루, 두 번째 싱글 ‘웨어 유 아’로 오리콘 차트 1위|url=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202020838404&sec_id=540101&pt=nv|출판사 = 스포츠경향|날짜 = [[2012년]] [[2월 2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록 한류' 통했다..인디서 日오리콘까지 |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2020715142874966&type=1&outlink=1|출판사 = 스타뉴스|날짜 = [[2012년]] [[2월 7일]]}}</ref>
         * [[2012년]] [[2월 4일]] 일본 간사이, [[2월 5일]] 도쿄돔 씨티홀에서 두 번째 메이저 음반 발매 기념으로 한 이벤트에 1만2000여명이 참가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앨범 발매 라이브 이벤트서 현지 팬 12,000명 동원 |url=http://wstar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1&c1=01&c2=01&c3=00&nkey=201202072211591&mode=sub_view|출판사 = 더블유스타뉴스|날짜 = [[2012년]] [[2월 7일]]}}</ref>
         * [[2012년]] [[2월 13일]] 일본 전국투어를 시작했다. 오사카를 시작으로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지에서 이뤄진 이번 투어는 두 번째 메이저 음반 발매 기념으로 팬클럽 회원 한정의 전국 투어 콘서트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지난 2009년부터 일본에서 인디밴드로 활동할 당시 공연했던 클럽에서 이루어졌으며, 인디즈 활동 당시 공연했던 장소에서 다시 공연하는 것을 테마로 이뤄진 이번 공연은 9회에 걸쳐 이뤄졌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인디밴드 활동 당시 공연했던 日클럽서 라이브공연|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02251028531002|출판사 = 뉴스엔|날짜 = [[2012년]] [[2월 25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전국투어 1만명 팬 열광…티켓 전쟁 |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602306|출판사 = 아시아투데이|날짜 = [[2012년]] [[2월 25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초심으로 돌아가 日 전국투어 라이브… 폭발적인 반응 |url=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TM=news&SM=4101&idxno=550042|출판사 = 이투데이|날짜 = [[2012년]] [[2월 25일]]}}</ref>
         * [[2012년]] [[7월]]부터 [[2011년]] [[6월]]부터 [[8월]]까지 방영된 [[문화방송 수목 미니시리즈|MBC 수목 미니시리즈]] 《[[넌 내게 반했어]]》가 일본 공중파 후지TV에 방영을 시작하게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 일본 인기 파워 실감- ‘넌 내게 반했어’ 일본 공중파 입성 |url=http://nanumnews.com/sub_read.html?uid=42246§ion=sc208|출판사 = 나눔뉴스|날짜 = [[2012년]] [[5월 16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 출연작 '넌 내게 반했어' 日 후지TV 진출 '경사났네' |url=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226944TM=news&SM=4101&idxno=587637|출판사 = TV리포트 |날짜 = [[2012년]] [[5월 16일]]}}</ref> 또한, 공중파 방영 전에 [[2012년]] [[7월 16일]]에 일본에서 공식적인 팬미팅을 개최하였으며,<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 박신혜, 日 '넌 내게 반했어' 방영 앞두고 팬미팅 개최 |url=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TM=news&SM=4101&idxno=595980|출판사 = 이투데이|날짜 = [[2012년]] [[6월 13일]]}}</ref><ref>{{뉴스 인용 |제목= 정용화-박신혜, '넌 내게 반했어' 日 팬미팅 성료 |url= 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17/2012071701006.html |출판사= 조선일보 |날짜= [[2012년]] [[7월 17일]] }}{{깨진 링크|url=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17/2012071701006.html }}</ref> 티켓이 모두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박신혜, ′넌 내게 반했어′ 日팬미팅 1만석 매진 ″현지 열기 후끈″ |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667085|출판사 = 아시아투데이|날짜 = [[2012년]] [[7월 11일]]}}</ref>
         * [[2012년]] [[8월 1일]]에 일본에서 세 번째 싱글앨범인 ''[[Come On]]''를 발매하였고 타이틀인 "Come On"를 작사하고 "Wake up"를 작사 및 작곡하고 "My miracle"을 작사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싱글 ′Come on′ 8월 1일 발매|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667993|출판사 = 아시아투데이|날짜 = [[2012년]] [[7월 12일]]}}</ref> 또한, [[2012년]]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일본 전국에 걸쳐 팬사인회를 진행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씨엔블루, 세 번째 日 싱글 'Come on' 발매 기념 팬사인회 '성료' |url= 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02/2012080201321.html |출판사= 조선일보 |날짜= [[2012년]] [[8월 2일]] |확인날짜= 2012-11-26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60125165532/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02/2012080201321.html |보존날짜= 2016-01-25 |깨진링크= 예 }}</ref>
         * [[2012년]] [[8월 28일]] 일본 도쿄 오다이바에서 열린 일본 후지TV 여름 야외공연 '메자마시 라이브'에 참가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일본 메자마시 라이브 성황…'타임 이즈 오버' 최초 공개' |url=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20830.990011130485442|출판사 = 영남일보|날짜 = [[2012년]] [[8월 30일]]}}</ref>
         * [[2012년]] [[8월 29일]] 일본에서 첫 번째 정규앨범인 《[[CODE NAME BLUE]]》를 발매하였고<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일본 정규 1집 ‘CODE NAME BLUE’ 29일 발매|url=http://artsnews.mk.co.kr/news/214267|출판사 = 아츠뉴스|날짜 = [[2012년]] [[8월 2일]]}}</ref> 타이틀인 "Time is over"를 작사 및 작곡하고<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정용화, 영화 '어벤져스' 영감 얻어 日 정규앨범 타이틀곡 제작 |url=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4&c1=04&c2=04&c3=00&nkey=201208070953443&mode=sub_view|출판사 = 한경닷컴 bnt뉴스|날짜 = [[2012년]] [[8월 7일]]}}</ref> "Intro 02" "Have a good night" "No more" "Where you are(English Ver.)"를 작사 및 작곡하였다. 이 앨범은 하루에 2만 2천여장이 나갔고 ''[[CODE NAME BLUE]]''는 오리콘 싱글 데일리 차트 1위에 올랐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첫 정규앨범으로 日오리콘 주간 1위 |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2090416303911913&type=1&outlink=1|출판사 = 파인낸셜뉴스|날짜 = [[2012년]] [[9월 4일]]}}</ref>
         * [[2012년]] [[9월 10일]]에 일본 파시피코 요코하마에서 일본 첫 번째 정규 음반 ‘코드 네임 블루’ 발매 기념 이벤트를 진행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씨엔블루, 日 요코하마 이벤트 대성황 |url=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209/h20120911151020111780.htm |출판사= 한국일보 |날짜= [[2012년]] [[9월 11일]] |확인날짜= 2012-11-26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31212114241/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209/h20120911151020111780.htm |보존날짜= 2013-12-12 |깨진링크= 예 }}</ref>
         * [[2012년]] [[10월 2일]]부터 [[10월 21일]]까지 일본 전국 6개지역을 돌며 아레나 투어《Arena Tour 2012 Come On~》를 실시하여 10만명을 동원하였으며, 마지막은 사이타마 슈퍼아레나에서 마무리지었다.
  • 정우영 (1989년생 축구선수)
         2018년 1월 [[J1리그|일본 J1리그]] [[비셀 고베]]로 다시 이적 하였다.
         [[2017년 EAFF E-1 풋볼 챔피언십|2017 E-1 풋볼 챔피언십]] 3차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일본]]과의 경기에서 오른발 무회전 프리킥으로 A매치 22번째 경기만에 데뷔골을 쏘아올렸다. 경기 후에 진행된 인터뷰에서 차는 순간 골임을 직감하였다고 말했으며 원래는 김진수가 차야 했지만 자신이 차겠다고 하자 양보해주었음을 밝혔다.
         | [[일본]], [[아지노모토 스타디움]]
         [[분류:198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교토 상가 FC의 축구 선수]][[분류:주빌로 이와타의 축구 선수]][[분류:비셀 고베의 축구 선수]][[분류:충칭 리판의 축구 선수]][[분류:J1리그의 축구 선수]][[분류:J2리그의 축구 선수]][[분류:중국 슈퍼리그의 축구 선수]][[분류:2012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2012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분류: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분류:일본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중국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학성고등학교 동문]][[분류:경희대학교 동문]][[분류:울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18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2019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분류:카타르 스타스 리그의 축구 선수]]
  • 정운용
         |학력 = [[일본]] [[메이지대학교]] 법학과 전문부
         '''정운용 (鄭雲用)''' (1904년 ~ 1963년 10월24일 )은 [[조흥은행]] 2대행장으로 일본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이후 최초의 한국인 행장이었다. 그는 [[경상합동은행]] [[취체역]](이사), 경상합동은행 [[두취]] (행장),한성은행 상무취체역(상무이사) 등을 거쳐 1945년 11월 조흥은행 행장에 올랐다.<ref><<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97), p.231~234</ref>
         정운용은 조부 밑에서 은행경영 노하우를 습득한 뒤 1940년 조부의 타계 직후 경상합동은행 두취(행장)에 선임됐다. 하지만 일본 총독부는 1941년 경상합동은행을 수도권은행인 한성은행에 흡수 합병하다. 이때 그는 경상합합동은행 두취 경력을 인정받아 한성은행 상무취체역(상무이사)에 임명됐다. 1943년 동일은행과 한성은행이 합병돼 출범한 조흥은행에서도 전무취체역(전문이사)을 맡았다.
         마침내 1945년 해방을 맞아 미 군정시대가 열리면서 조흥은행 일본인 임원들이 한국을 떠났다. 정운용은 미군정에 의해 1945년 11월 해방 후 첫 한국인 조흥은행장(2대)로 선임됐다. 불과 41세의 나이에 국내 최고 민간은행의 수장이 됐다.<ref><<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412~431쪽 역대임원</ref>
         정운용 조흥은행장은 미 [[군정청]] 골든 재무부장(중령)과 친밀한 관계였다. 해방 후 중앙은행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여서 조흥은행은 강력한 중앙은행 후보로 꼽혔다. 조흥은행은 민족자본비중이 절반을 넘은데다 일본자본의 침투가 가장 적었다.<ref><<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97), p.222</ref> 하지만 1946년 광복1주년을 맞이하여 미 군정청 내각 전원이 한국인으로 채워진다. 골든 재무부장이 본국으로 돌아갔고 윤호병이 신임 재무부장으로 선임됐다. 조흥은행 대신 조선은행이 중앙은행으로 선정됐다.<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 >> (창조사, 1970) p.237</ref> 정운용 행장 역시 1947년 10월 군정장관의 명령에 의거 행장에서 물러났다.<ref>경향신문, 1947년 10월 18일 2면 정운용 행장 해임</ref>
         앞서 민씨 가문은 일제 강점기 당시 조흥은행 대표취체역(대표이사)으로 [[민규식]]을 배출했다. 그러나 일본인 행장이 따로 있었고 실권은 없는 자리였다. 이어 해방 후 초대 한국인 조흥은행장은 정재학의 손자인 정운용이 맡았고 정재학의 3남인 정종원이 5대 행장을 역임했다.<ref name="ReferenceA"/>
         [[정재학]]의 손자이자 해방 후 처음으로 한국인으로서 2대 조흥은행장에 오른 정운용은 첫 아내와 사별한 뒤 김분조와 재혼했다. 김분조의 부친 [[김진만]]은 1915년 대구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한광복단]] [[대구권총사건]]'의 핵심인물이었다.<ref>경향신문 1963년 3월 1일 3면 대한광복단 사건</ref><ref>대구사회비평 2003년 7~8월 통권 10호 문예미학사 http://hrznnzrh.blog.me/60033398980 근대 100년 대구 거부실록 정재학가</ref><ref>경향신문 1966년 10월 8일 7면</ref><ref>독립기념관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의 전개 4. 대한광복회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456</ref> 김진만은 대한광복회 단원으로 대구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펼치는 가운데 대구 지역 부호였던 장인 [[서우순]]의 집을 찾아가 설득했다. 그러나 실패한 뒤 도피하다 반항하는 하인 우도길에 총상을 입혔다.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돼 1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ref>민족문화대박과사전 독립운동가 김진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10638</ref><ref>독립기념관 29 김진만 독립운동가 서한집 http://www.i815.or.kr/media_data/data_chong/32.pdf</ref>
  • 정은지
         | 출생지 = [[일본]] [[도쿄도]]
         | 소속그룹 = [[모닝구 무스메 (일본아이돌)|모닝구 무스메]]
         '''모닝정은지'''([[1993년]] [[8월 18일]] ~ )는 [[일본]]의 [[일본아이돌]] [[모닝구 무스메]]의 메인보컬을 맡고 있다. 개명 전의 이름은 정혜림이였다.<ref>한 무속인에게 "정혜림"이라는 이름이 어머니 사주에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정은지"로 개명하였다.</ref>
         [[분류:일본 아이돌]]
  • 정인숙 (1945년)
         가세가 기울면서 그는 방황하였고 [[대구]] [[신명고등학교|신명여고]]에 재학 중에 정인숙의 학교성적은 중위권 이하로 추락하였다. 그러나 영어실력만은 뛰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영어회화를 잘했는데, 정인숙이 영어를 잘 했던 것은 오빠들의 도움이 컸다. 당시 일본에서 전기 부속품상을 하거나 무역회사 등을 하던 오빠들은 모두 [[영어]]에 능통했다. 정인숙은 결혼하여 분가한 오빠들의 집에 종종 출입했고, 이런 오빠들 밑에서 영어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신원조회는 당시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의 비서<ref name="hp104"/> 실장인 [[문학림]]이 맡았고, 고위층만이 가질 수 있었던 회수여권은 정일권의 비서관 [[신성재]]가 주선하였다.<ref name="hp105">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05페이지</ref> 여권 발급 날짜는 [[1968년]] [[12월 30일]]이고, 이후 정인숙은 [[1969년]] [[3월]] 큰오빠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10월]]에는 [[워싱턴 D.C.]] 한인회장 [[노진환]]의 안내로 미국에서 3개월 동안 머물다가 [[1970년]] 1월 21일 귀국했다.<ref name="hp105"/>
         [[1968년]] 12월 30일자로 발급된 출입국 회수여권을 받았다. 아기를 낳은 이후 고급 요정과 비밀요정을 그만두었고, 출입하는 곳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타워호텔, 사보이호텔, 반도조선 아케이드 등에는 자주 나타났다. [[1969년]] 봄 [[일본]]에 다녀온 뒤 그해 5월에 [[서울특별시|서울]]시내의 고급 코로나를 매입하였다.
         {{인용문|정인숙이 아이를 낳은 뒤 자꾸만 고위층(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인 것처럼 행세했다. 정 여인은 어쩌면 박통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자꾸만 청와대를 귀찮게 하자 경호실장 [[박종규]]가 골치가 아파졌다. 여권을 만들어 미국으로 내보냈으나 자꾸만 귀국하겠다고 해서 일본에도 머물게 했다. 그때 [[일본]]에서 박종규 실장과 가장 친한 사람이 정건영 씨였다. 마치이로 통하는 이 교포 사업가는 도쿄에서 손꼽히는 '암흑가의 신사'이기도 했다. 바로 이 정건영 씨에게 정인숙 모자를 돌보아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건영은 그 대가로 거액의 사업자금을 [[도쿄]]의 [[외환은행]]에서 빌려 쓸 수 있도록 실력자인 박종규 실장에게 부탁했다.<ref name="hp104"/><ref>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1 (동아일보사, 1992) 216쪽</ref>}}
         출국을 한 정인숙은 무료한 이국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갑갑해 한다. 미국 일본 등지를 여행하던 정인숙은 정일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다시 남성편력을 시작한다. 국내로 들어온 정인숙은 홀로 호텔나이트클럽, 카바레 등지로 다니며 흥청망청 돈을 쓰고,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면 잠자리도 같이 하는 등 난잡한 생활을 한다. 이 때는 전과는 달리 주로 돈 잘 쓰는 사람들을 상대했고, 재일교포와 사업가 등 유력 인사들이 그녀를 거쳐 갔다. [[1969년]] [[10월 10일]] [[국무총리]] [[정일권]]의 주선으로 그녀는 아기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석 달 동안 있다가 되돌아 왔다. 다시 돌아온 그녀는 주변에게“곧 미국에 갈테니 차를 팔아야 겠다”는가 하면“돈 달라는 사람 많아 귀찮아 죽겠다”고 말했다. 한때는“이젠 미국 안 갈래”라고 하기도 했다. 사건 당일인 [[3월 17일]] 낮, 자동차 매매업소에 나타나 시보레 6기통짜리를 흥정을 했다.
  • 정종원
         |학력 = [[일본]] [[니혼대학교]] 법학과 전문부
         1918년 일본 니혼대학 법학과 전문부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식민지 시절 [[중앙은행]] 역할을 했던 [[조선은행]]에 잠시 몸담았다. 당시 그는 가업인 은행업을 염두에 두고 성실히 근무했다. 후일 조흥은행 임원을 거쳐 행장에 오르게 된다.
         그는 일본유학 시절 지인들이었던 [[동아일보]] 핵심경영진들과의 인연으로 1920년 4월1일 창간한 동아일보 지령 1호에 창간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당시 지면에는 그의 개명전 이름인 정충원으로 기록됐다.
         정종원은 구한말 경기여고와 서울 사범대 출신의 교사였던 부인 신양정(신양숙)과 슬하에 2남 4녀를 뒀다. 두 사람 다 재혼이고 전 배우자들과의 사이에 자식들이 있다. 신양정은 정종원 사후 [[법시사]] 이사장과 법시 발행인을 역임했다.<ref>윤재실, <<팔도명인전>>, ( 진명사, 1979) p.233</ref> 장남 [[정운철]]은 하와이 최연소 부영사와 일본 고베 총영사를 역임했다. 정운철은 두산그룹 [[박용성]]과 동서 지간이다. 정운철과 박용성의 장인은 삼성물산 대표를 역임한 [[김선필]]이다.
         정종원은 1914~1918년 일본 유학 시절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동아일보]] 3대 사장), [[최두선]] (8대 국무총리), [[장덕수]] ( 보성전문 교수, 동아일보 이사), [[신익희]](독립운동가), [[김연수 (1896년)|김연수]](경성방직 삼양사 사장), [[이광수]] (소설가) 등과 교류했다.<ref>윤재실, <<팔도명인전>>, ( 진명사, 1979) p.235</ref> 이 같은 인맥을 바탕으로 정종원은 동아일보 경상북도 지역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당시 그는 정충원이란 이름을 쓰고 있어 동아일보 1970년 4월1일 13면 창간특집기사 '동아일보 발기인 명단'에 대구지역 발기인 정충원으로 기록됐다.<ref>동아일보 1920년 4월1일 2면 하단 발기인 명부</ref><ref>동아일보 1977년 3월 14일 "본보 창간발기인 정종원 씨 별세 "</ref>
         민 씨 가문은 1957년 하반기부터 1958년 상반기까지 조흥은행 주식을 대거 처분한다.<ref>동아일보 1957년 7월 20일 3면</ref> 조흥은행에서 소수주주로 전락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 조선맥주은 주세체납 등으로 은행관리로 넘어가게 됐다.<ref>매일경제 1968년 7월 2일 7면 빚만 늘어가는 조선맥주</ref> 앞서 민 씨 가문은 일제 강점기 당시 조흥은행 대표취체역(대표이사)으로 [[민규식]]을 배출한 바 있다. 일본인 행장이 따로 있었고 실권은 없는 자리였다. 이어 해방 후 초대 한국인 조흥은행장은 정재학의 손자인 정운용이 맡았고 정재학의 3남인 정종원이 5대 행장을 역임했다.
  • 정찬성
         오미가라 미치히로, 손환진 등 이 외에도 한국, 일본의 단체에서 얻은 8승
         === 일본 진출 ===
         2008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DEEP에서 오미가와 미치히로를 상대로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두었다. 오미가와는 유도가 출신으로 [[UFC]]와 [[PRIDE]]를 모두 경험했던 베테랑 파이터였으나 정찬성의 공세에 밀려 패배하고 말았다. 훗날 오미가와는 Dream 15회 대회 이후 인터뷰에서 이 경기를 회상하며 '그 때는 정찬성의 정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붙으면 꼭 이기겠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정찬성 선수는 블로그에 '오미가와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 다시 붙는다면 그 때는 변명을 대지 못 하게 이기겠다.'며 재대결을 강력하게 희망했다. 이후 오미가와는 센고쿠 토너먼트에서 수많은 페더급 강자들을 쓰러뜨리고 페더급 토너먼트에서 준우승을 하면서 TOP 10급 파이터로 부상하게 된다.
         같은 해 5월에는 역시 일본의 신성인 카네하라 마사노리를 상대로 8강전을 치르지만 아깝게 분패하고 말았다. 카네하라가 상위를 차지하고 정찬성이 하위에서 서브미션을 시도하는 형태로 흘러갔다. 카네하라는 정찬성의 타격을 봉쇄하며 초반을 뚜렷한 우세를 보였다. 스탠딩에서는 정찬성의 우세였고 중반 이후에는 전체적으로 호각인 양상이 계속되었으나 결국 카네하라의 만장일치 판정승이 선언되었다.
  • 정충원
         '''정충원'''(鄭忠源, <small>일본식 이름:</small> 烏川忠源, [[1896년]] [[5월 22일]] ~ [[1977년]] [[3월 12일]]<ref>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는 정충원의 출생일이 [[1893년]] [[5월 22일]]로 표기되어 있으며 사망일은 미상으로 표기되어 있다.</ref>)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 겸 [[관료]]이자 [[대한민국]]의 금융인으로 본관은 연일이며 다른 이름으로 '''정종원'''(鄭宗源, 1949년 10월 개명한 이후부터 사용한 이름)이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정재학 (1856년)|정재학]]의 셋째 아들이며 [[경상북도]] [[대구부]](현재의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1918년]] [[일본]] [[니혼 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경상북도 경무과 경시(1922년), 경상북도 경무과 경부(1923년 ~ 1928년), 경상북도 고등경찰과 경부(1928년), 경상북도 위생과 경부(1929년), 경상북도 포항경찰서 경부(1930년 ~ 1936년), 경상남도 순사교습소 경시(1937년)를 역임했으며 [[1937년]] [[8월 6일]]부터 [[1941년]] [[3월 31일]]까지 평안남도 보안과 경시로 근무했다.
         평안남도 보안과 경시로 재직 중이던 1937년에 발발한 [[중일 전쟁]] 당시 공습에 대비한 방공 사무를 수행하는 한편 군용 자동차를 징발하고 운전수를 징집하여 [[관동군]]의 군사 작전에 협조했다. 또한 시국 범죄 위반 단속 차원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을 검거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적극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공로 을(功勞 乙)과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1년 3월 31일 평안남도 성천군수, [[1943년]] [[3월 29일]] 평안남도 순천군수로 각각 임명되었고 [[1942년]] [[4월 8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광복 이후인 [[1947년]] [[조흥은행]] 취체역을 역임했으며 [[1956년]] 10월부터 [[1961년]] 4월까지 조흥은행 은행장, [[1958년]] [[금융통화위원회]] 정위원을 역임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경시‎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찰 부문과 관료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정칠성
         유년 시절에 기녀가 되어 “금죽”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였고, 후일 필명이자 아호로 사용하였다. 기생학교에서 수료한 후 한남권번의 기생으로 있다가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계기로 사회운동에 참여하였고, [[여성주의]]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24년]] [[허정숙]](許貞淑), [[정종명]](鄭鍾鳴), 오수덕(吳壽德) 등과 함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 여성들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하였고, [[일본]] 유학 중 1925년 도쿄에서 여자유학생단체인 삼월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기량이 뛰어나 [[기녀]]로서는 특별히 [[일본]]으로 유학, [[일본]]의 [[동경여자기예학교]](東京女子技藝學校)에서 수학하였다. 원래 책 읽는 것을 좋아해 춤과 무용 수업을 빠지다가 선생에게 혼나기가 일수였다 한다. 시를 잘 지었고,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이지만 그림도 잘 그렸으며, [[바둑]]과 [[장기]]를 잘 두었다고 한다. 기예로는 남중잡가, 가야금산조, 병창, 입창, 좌창, 정재 12종무 등의 실력에도 탁월하였다.
         [[3.1 운동]]에 참여한 [[기생]]의 한사람이었으며, [[조선총독부|총독부]]의 눈을 피해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여자기예학교]]를 수학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동조하게 되었다.
         ==== 여성주의 운동과 일본 유학 ====
         [[1922년]] [[부산]]에서 배편으로 [[일본]]에 다시 건너가, [[동경]]의 [[도쿄영어강습소]]에서 영어를 수강하였다. 그러나 비용 마련의 실패로 [[미국]] 유학의 꿈은 좌절되었다.
         [[1924년]] [[5월 15일]] 그는 [[경성]] [[천도교당]]에서 [[허정숙]], [[주세죽]], [[김조이]], [[정종명]], 박원희, 김필애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성 사회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를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여성동우회 창립발기식의 사회자로 활동했다. 바로 [[조선여성동우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신사회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할 여성의 단결 등을 목표로 설정하였고,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사회운동을 벌였다.
         ===== 일본 유학 전후 =====
         이후 [[일본]]에 건너가 체류 중, [[1925년]] [[3월]] [[도쿄]]에서 무산계급 및 여성의 해방을 목적으로 [[이현경]], [[황신덕]] 등의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의 조선여성단체인 [[삼월회]](三月會)를 조직, 삼월회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3월 8일]] [[대구]]부내 노동공제회에서 [[대구여자청년회]] 주최 [[세계 여성의 날|국제부인데이]] 기념행사에 연사로 초빙되어 '국제부인운동의 의의'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5년]] [[3월 22일]]에는 [[대구청년회관]]에서 경북지역 인사들이 모인 사회주의 연구 사상단체 사합동맹(四合同盟)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 맹원으로 활동하였다. [[3월 31일]] 다시 유학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도쿄 여자기예학교]]에 복학하였다.
         [[1925년]] [[11월]] [[일본]] 정부에서 가상의 적을 대비하여 각급 중고등학교에 군사훈련 및 각종 군사교육을 실시하자, 정칠성은 군사교육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11월 7일]] [[홋카이도]]의 소준고등학교 강당에서 일본내 시민단체, 여성단체, 사회주의 운동단체 및 조선인 유학생단체, 삼월회, 일월회(남성 단체) 공동 주최로 열린 [[군사교육 반대 집회]]에 그는 [[삼월회]]의 대표 자격으로 박경희(朴慶姫)와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 2백 명이 급히 투입되어 진압하자, 바로 피신하였다.
         정칠성은 근우회 제1회 창립준비위원회에서 회원모집의 업무를 맡았고, 이후 근우회 창립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dispose"/> 창립대회장에서 정칠성은 "여자의 날(당시 4월16일) 제정기념으로 시위를 하자" 는 의견을 내었으나 감시중이던 일본경관들의 저지로 시행할 수 없었다.<ref name="dispose"/> [[5월 27일]] [[근우회]] 선전조직부 위원, [[5월 29일]] [[근우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7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편물학당을 개설하여 뜨개질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 뒤 [[태평양 전쟁]] 중에는 [[창씨 개명]]을 거절하고 상점 운영에 종사하는 한편, 1931년부터 나가던 경성, 평양 등의 공회당 수자수, 편물 강사일을 계속하였다. 또한 틈틈이 조선지광, 삼천리 등에 칼럼을 기고하고 고료를 받기도 했다. [[1938년]] [[일본]]에 유학중인 아들 이동수의 학비 조달이 곤란하자 다시 기생이 되려 하였으나, 대동광업회사에서 아들 이동수의 학비를 지원하였다.
         정칠성이 관여한 단체들은 한결같이 여성 해방과 무산계급 여성에 의한 새로운 사회 건설을 목표로 했다.<ref name="propp"/> 그녀는 남자에게서 그리고 사회의 억압과 인습의 굴레에서 독립하여 한 사람의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 중요하다 하였다. 정칠성은 3.1운동 뒤 화류계를 떠나 사회주의사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922년 도일하여 일본 도쿄영어강습소에서 수학했다.<ref name="dispose"/>
  • 정태리
         {{일본여배우정보
         | 출생지 = {{일본}} [[도쿄도]]
         '''태리정'''([[1994년]] [[4월 18일]] ~ )는 [[일본]]의 [[배우]]이다.
         {{토막글|일본 배우}}
         [[분류:1994년 태어남]][[분류:경기대학교 동문]][[분류:일본의 배우]][[분류:2009년 데뷔]]
         [[분류:일본 여배우]]
  • 제웅
         [[짚]]으로 만든 [[인형]]. [[일본]]에서는 와라닝교(わらにんぎょう, ·藁人形, 짚인형)이라고 한다.
  • 조관우
         8집 《Impression》과 EP 앨범 《가을의 기적》, 《소나기》, 《화애》, 《Maybe U》 등으로 꾸준히 음악 활동을 이어갔고, [[일본]]에 팬클럽이 생긴 것을 계기로 2007년과 2009년 성황리에 일본에서의 팬미팅과 단독 공연을 마쳤다.<ref>[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99839§ion=sc4 가수 조관우, 일본열도 사로잡다], 브레이크 뉴스</ref>
  • 조긍하
          | 학력 = 일본 [[구니타치 음악대학|도쿄 제국음악학교]] 성악학과
         * 일본 [[구니타치 음악대학|도쿄 제국음악학교]] 성악학과를 졸업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 출신으로 대구에서 중등교육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구니타치 음악대학|도쿄 제국음악학교]] 성악학과를 졸업하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48383&mobile&categoryId=1639 조긍하 - 네이버 지식백과]</ref>. 그 후 [[테너]] [[성악가]]와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하다가 은퇴하고 [[사진가|사진]] 촬영과 [[영화]] 분야로 전향하였다. 사진작가의 관록으로 조감독 수련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감독이 되었는데, [[1952년]]에 《베일부인》을 감독한 것을 시작으로 《황진이》([[1956년]]), 《곰》, 《육체의 길》([[1959년]]), 《인간만세》, 《과부》([[1960년]])등의 영화를 감독하였고, 시나리오도 직접 집필해왔다. 또한, 1960년대 말에는 《상해임시정부》, 《인천상륙작전》 등 애국지사들의 일대기를 내용으로 한 작품들을 만들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13000329212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1-30&officeId=00032&pageNo=12&printNo=11181&publishType=00020 故(고) 趙肯夏(조긍하)감독의 人間(인간)과 作品(작품)세계 고지식하면서도 유머풍부 - 1982년 1월 30일 경향신문]</ref>.
         * [[일본]] [[구니타치 음악대학|도쿄 제국음악학교]] 성악학과 학사 (테너 전공)
  • 조선
          * 동조선 : [[일본]]을 뜻한다. 일본이 자학하는 말.
  • 조선진
         '''조선진'''(趙善津, [[1970년]] [[4월 18일]] ~ [[전라남도|전남]] [[광주광역시|광주]])은 [[대한민국]] 출신의 [[일본]] [[바둑 기사]]이다. [[일본기원]] 소속 9단. [[안도 다케오]] 7단 문하. [[혼인보]] 우승 1회, [[삼성화재배]] 준우승 1회 등.
         [[광주광역시]] 출신. 1982년 도일해 일본기원 원생이 됐다. 1984년 입단. 1998년 9단. 1999년 혼인보. 2004년 9월 결혼. 2008년 7월 17일 통산 600승.
         * [http://www.nihonkiin.or.jp/player/htm/ki000187.htm 일본기원의 조선진 소개 페이지]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4092657/http://www.net-kiin.com/kishi/t_line/sonjin_choh.html 인터넷 기원(일본) 조선진 소개 페이지]
         [[분류:197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일본의 바둑 기사]]
  • 조영철 (축구선수)
         [[일본]]에서 오랜 기간 선수 생활을 하여 [[일본어]]에 능숙하다.
         [[분류:198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분류:요코하마 FC의 축구 선수]][[분류:알비렉스 니가타의 축구 선수]][[분류:오미야 아르디자의 축구 선수]][[분류:카타르 SC의 축구 선수]][[분류:울산 현대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상주 상무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경남 FC의 축구 선수]][[분류:J1리그의 축구 선수]][[분류:J2리그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1의 축구 선수]][[분류:카타르 스타스 리그의 축구 선수]][[분류:2008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2010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15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10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아시안 게임 축구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동메달리스트]][[분류:축구 윙어]][[분류:축구 공격수]][[분류:학성고등학교 동문]][[분류:일본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카타르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울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카타르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조용기 (1936년)
         조용기는 20세에 대조동 천막촌에서 최자실 전도사와 공동으로 목회를 시작하여, 교인 약 78만 명에 이르는, 세계 개신교 최대 교회인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당회장 목사로 목회하였다. [[일본어|일어]], [[영어]]에 능숙하며, 해외에서의 [[오순절교회]] 선교활동을 통해 [[개신교]] 선교에 공헌했다.
         2014년 1월 21일, 5년 징역과 75억 과징금이 구형되었다. 대한민국 목사 중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이며, [[2004년]] [[시사저널]]은 조용기 목사의 비리, 사생활, 베데스다 대학 [[세금]] [[횡령]] 의혹을 제기했다. 시사저널은 수 조원대에 이르는 순복음교회 재산과 한해 1천 7백억 원에 달하는 헌금 가운데 상당 부분이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용되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또한 [[MBC]]는 [[뉴스후]] 프로그램을 통하여 조용기 목사의 장남 조희준의 횡령 및 탈세 후 [[일본]] 도피 중인 사실을 취재하여 보도하였다.<ref>[http://www.imbc.com/cms/SISA000001050/TV0000000064362.html MBC 뉴스후]</ref>
  • 조정훈(야구선수)
         이에 대해 반론 측에선 스플리터가 주무기였던 [[로저 클레멘스]]나 [[커트 쉴링]], [[존 스몰츠]]는 40대까지 준수하게 활약했고, [[노모 히데오]]도 [[메이저리그]]에서 뒤늦게 부활하며 제 2의 전성기를 보내기도 했다는 사실. 국내에서도 태평양-현대의 [[정명원]] 선수가 34세까지 전성기를 누리다 은퇴(은퇴는 2001년 35세, 당시 투수 생명에 비해 상당히 길었던 편)한 사실이 있다. 또한 같은 팀 내의 [[송승준]] 역시 주무기가 포크볼인데 매우 롱런하고 있다. 속설과는 달리 실제로는 [[일본]]과 [[메이저리그|메이저]] 어느 곳에서도 포크볼 투수 생명이 짧거나 팔꿈치, 어깨 등 특정 부위 부상이 많다는 통계가 나오지 않고 있지만, 양측이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부분은 포크볼 의존도가 높을수록 직구 구속 저하의 위험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공을 빼는 감각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직구를 던지는 능력이 퇴화되어 구속이 저하되고, 이어서 포크볼 효과도 떨어지는 악순환이 거듭될 수 있다고 한다. [[http://news.donga.com/3//20100821/30643918/1|관련 기사]]
         2013년 1월 2일 팬들의 오래고 오랜 기다림 끝에 2년 간의 복무를 끝마치고 드디어 소집 해제되어 롯데 에이스의 귀환을 알렸으나 오른쪽 팔꿈치와 몸 상태가 만족할 정도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시즌과 동시에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빠르면 5-6월 경에나(...) 복귀한다고 한다. 1월 말이 되었는데도 아직 조정훈의 컨디션이 70%에서 더이상 올라가지 않고 있다고 [[김시진]] 감독이 탄식. 조정훈의 복귀 시점은 7월로 늦춰 잡았다고 한다. 2월 6일 롯데 구단은 [[사이판]]에서 1차 전지훈련을 마치고 2차 캠프를 위해 [[일본]] [[가고시마]]로 이동했지만, 조정훈은 특별 관리 대상으로 사이판에 남아 2주간 더 머무르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사이판의 따뜻한 날씨가 재활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 2월 20일 드디어 조정훈이 가고시마 전지훈련에 합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복귀 시점은 아무리 빨라도 6~7월 이후라고 한다. 가고시마 전지훈련때 다시 팔꿈치 통증이 찾아와 결국 전반기에 1군 복귀에 실패했다. 6월이 되어도 팔꿈치 통증으로 복귀 시점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7월 롯데 구단은 조정훈의 팔꿈치 통증이 계속되어 수술 대신 9일 조브 클리닉에 가서 감바델라 박사에게 검진을 받고 재활 과정에 들어갔다고 한다.
         결국 2013년에 복귀하지 못했으며, 2013년 11월 일본으로 건너가 재검사한 결과, 인대 손상이 발견되어 다시 팔꿈치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이후 기사에 따르면 동년 12월부터 10개월 과정의 재활 프로그램에 돌입했다고 한다. 팬들은 제발 돌아와서도 몸 건강하길 바라고 있다.
  • 조치훈
         |거주지 = 일본 [[지바현]] [[지바 시]]
         |소속 = [[일본기원]]
         '''조치훈'''(趙治勳, [[1956년]] [[6월 20일]] ~ ) 또는 '''조치쿤'''(ちょう・ちくん, Cho Chikun)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프로 [[바둑]] [[바둑 기사|기사]]이다. 그는 [[부산광역시|부산]] 출생이며 한때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의 바둑 제자는 같은 한국 국적의 일본기사인 [[김수준]] 9단이 있다. 그 외 다른 제자들은 한국기원과 일본기원 그리고 관서기원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 [[1962년]] 6세때 일본으로 건너감. [[기타니 미노루]](木谷 實) 9단 문하로 입문.
         * [[1968년]] 프로 입단(만 11세 8개월로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 기록)
         * [[1980년]] [[명인전 (일본)|명인전]] 우승. 이후 명인전을 5연패하여 최초의 명예명인(名譽名人) 자격 획득.
         * [[1983년]] [[기성전 (일본)|기성전]], 명인전, [[혼인보]]전에 우승하여 [[대삼관]](大三冠) 달성.
         * [[2005년]] 일본기원 사상 세 번째 통산 1천200승 달성.(48세 7개월.승단 후 36년9개월만에 거둔 1천200승은 일본기원 사상 최단기)
         * [[2008년]] 일본기원 사상 두 번째 통산 1천300승 달성(51세 11개월. 승단 후 40년 2개월만에 거둔 1천300승은 일본기원 사상 최단기),제32기 일본 [[기성전 (일본)|기성전]] 준우승
         * [[2008년]] 8월11일 일본기원 사상 두 번째 통산 2천국 대국.
         * [[2010년]] 12월 일본 최다승 경신.(1364승),제17기 [[아함동산배]] 준우승
         * [[2011년]] 제1회 일본 바둑 마스터즈 우승,9월 현재 일본 최다 통산 타이틀 획득(72회) 기록.
         * [[2012년]] 9월 27일 일본기원 사상 최초 통산 1천400승 달성 (56세 3개월.)<ref>{{뉴스 인용|제목=조치훈, 일본 최초로 1400승 달성|url=http://www.baduk.or.kr/info/report_view.asp?gul_no=586|출판사=한국기원|저자=|쪽=|날짜=2012-09-28|확인날짜=2012-10-09|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1112232702/http://www.baduk.or.kr/info/report_view.asp?gul_no=586|보존날짜=2014-11-12|깨진링크=예}}</ref>
         * [[2014년]] 현재 일본 통산 최다 타이틀 획득(73회) 기록. 제4회 일본 바둑 마스터즈 우승,
         * [[2015년]] 제5회 일본 바둑 마스터즈 우승(2연패)
         * [[2016년]] 제23기 일본 아함동산배 준우승
         *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출생하였고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유년기를 보내다가 6살 때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지금까지 일본에서 활동 중이다.
         * 만 11년 8개월로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기록을 수립하였다.
         * 2011년 9월 현재 일본 최다 통산 타이틀 획득(72회) 기록을 가지고 있다.
         * 일본 언론 등은 '25세 본인방 치쿤'(二十五世本因坊治勲)이라고 부른다.
  • 주석 (1978년)
         [[2002년]] 클럽 [[마스터플랜|MP]]가 레이블로 변모한 후에도 MP와 계약을 맺어 MP 소속으로 남은 주석은, 'Blood Brovas INC.'라는 자신의 단체를 만들어, [[스퀘어|Square]], [[스케쥴 원|Schedule-1]], QJ 등의 아티스트와 잦은 교류를 하였다. 그가 발표한 두 번째 앨범은, [[일본]] 아티스트 [[지브라|Zeebra]], Maccho 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의 래퍼 Weapon-X와의 [[콜라보]]도 담겨 있어 화제가 되었다. 두 번째 앨범부터 이전의 언더그라운드 성향이 짙은 사운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그는, 세 번째 앨범에 와서 메인스트림적인 프로듀싱 스타일을 완성한다. 이는 이전의 스타일로 주석을 좋아하던 매니아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변화였으므로, 좋은 반응만을 얻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이 스타일은 그의 네 번째 앨범에도 그대로 이어져 지금은 주석의 고유 스타일이 되었다.
         [[2005년]]에는 'Finest Records'라는 작은 레이블을 세우고, [[마이티 마우스 (음악 그룹)|Mighty Mouth]]라는 그룹을 서포트하던 주석은, 그때까지만 해도 Master Plan의 멤버였으나, [[2007년]] 결국 MP에서 나오게 되었다. 나오기 직전 그는 Finest Records를 정리하고 Mighty Mouth와 함께 101 Entertainment와 계약하였다. 한편 산업기능요원으로 게임 업체에서 군 복무를 한 주석은, 복무 중 [[프리스타일 (게임)|Free Style]] 제작에 음악 담당으로 참여, 타이틀곡 "Neva Lose"를 제작하였으며, 타이틀곡을 [[일본어]]로 다시 작사하여 일본 등지에 게임을 수출하는 데 공헌하기도 하였다.
  • 주형광
         [[2008년]] 1월에 [[일본]]에서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코치 연수를 마치고 [[2008년]] [[10월 17일]] [[롯데 자이언츠]]의 재활군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쓰던 등번호 28번은 2007년 당시 [[롯데 자이언츠]] 소속이었던 [[장원준 (야구 선수)|장원준]]에게 넘겨줬고 그의 등번호는 37번으로 변경했다.
  • 죽으면 부처님
         [[일본]] [[정토교]]에서 흔히 쓰이는 격언. "죽으면 부처님", "죽으면 모두 부처님(死んだらみんな仏さま)", "죽으면 누구라도 부처님" 같은 식으로 쓰인다.
         일본에서 고인을 [[호토케]](仏)라고 부르는 것 역시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 일본의 정치, 외교문제 ==
         이는 정치적 문제와 연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서 "일본에서는 죽으면 부처님. 그러니까 A급 전범 합사도 용인된다."는 식으로, 외국의 비판을 '문화적 차이'라고 실드치고 넘어가려는 움직임을 우익 논객들이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한국이나 중국은 죽은 사람을 언제까지나 비난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문화차별적 주장도 곁들여진다.
         [[분류:불교]][[분류:일본 풍속]]
  • 지뢰녀
         [[일본]]의 속어. [[지뢰]] 같은 여자를 뜻하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거나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했지만, 깊이 사귀게 되자 괴상한 성격이나 집착을 드러내며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이다. [[스토커]] 같은 사례가 포함된다.
         [[분류:일본어]]
  • 진구 (동음이의)
         == 일본 ==
         * [[신궁 (신토)|신궁]]({{llang|ja|神宮|; 진구}})은 [[일본]]의 [[이세 신궁]]의 정식 명칭이며, 이름에 '진구({{llang|ja|神宮}})'가 들어가는 [[신사 (신토)|신사]]를 뜻하는 단어이다.
         * [[진구 황후]]는 [[일본]] [[주아이 천황]]의 [[황후]]이다.
         * [[메이지 진구 구장]]은 [[일본]] [[도쿄도]] [[신주쿠 구]]에 위치한 [[야구장]]이다.
  • 진헌식
         1902년 [[충청남도]] 연기군 (현 [[세종특별자치시]])에서 태어났다. [[양정고등학교(서울)|양정고등보통학교]], [[일본]] [[주오 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 차선우
         B1A4의 타이틀 곡뿐만 아니라 '''수록곡 일체의 랩메이킹을 담당'''. B1A4 일본어 번안곡의 J-RAP 파트 역시 그의 작품일 정도로 랩메이킹이 상당히 익숙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열정 또한 대단한 편. G.DRAGON급의 레전드 작곡돌을 제외하고, 아이돌이 자작곡과 작사로 다작을 하게 되면 그에 따른 비판 역시 따라오는 법이라, 제일 잘 만든 한두 곡을 발표하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안주하는 경우가 많다. 전곡 랩메이킹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다른 아이돌 그룹의 ~~부심쩌는~~ 래퍼'들'과는 비교 범주 자체가 다르다.
         [* [[일본]] 콘에서 선보인 정규 1집에 수록된 바로의 솔로곡 '''둘만 있으면'''.]
         ||<#FFF57C><width=40px> 단독 ||<#FDDB79><width=100px> 단독 (일본 작사가와 [br] 공동작사(번역) ) ||<#D6FF7F><width=40px> 공동 ||<#FDC1B9><width=40px> 불참 ||<width=70px> (Inst.) 제외 ||
         ||<|1> 일본 미니 9집 《'''Do You Remember'''》 ||<|1> [[2018년]] ||<|1> [[2월 7일]] || '''02''' || Paradise ||<#D6FF7F> 공동 ||<#D6FF7F> 공동 ||
         원래 바로는 B1A4의 음원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최초의 시도는 1집 때 '둘만 있으면'에서 랩인지 노래인지 모를 미묘한 파트를 맡은 게 전부였고, 그 뒤로 일본 싱글 오리지널 fly away에서 확실하게 노래했지만 랩의 연장선이었고 초저음(...)이었다.
  • 차영화
         차영화는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일고]]에 다니면서 고교야구 생활을 하는데 그는 2루수로 활동하면서 대통령배 고교야구 준준결승에서 역전 결승타를 때려내는 결정적인 역할<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52400209208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5-24&officeId=00020&pageNo=8&printNo=16198&publishType=00020 대통령배 고교야구 「9회말의 건아들」광주일고팀], 동아일보, 1974년 5월 24일.</ref> 과 함께 많은 활동을 하다 [[1976년]] 실업 야구 팀 [[롯데 자이언츠]]로 진출한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100700329206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10-07&officeId=00032&pageNo=6&printNo=9547&publishType=00020 롯데, 한일은행 대파 4:1 실업야고 농협, 한전과 함께 공동선두], 경향신문 1976년 10월 07일.</ref> 실업 리그에 진출한 그 해 그는 실업 야구 추계리그 최우수상을 받게 되고 나서<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102900209208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10-29&officeId=00020&pageNo=8&printNo=16946&publishType=00020 롯데, 한일은행 대파 4:1 실업야고 농협, 한전과 함께 공동선두], 경향신문, 1977년 3월 3일</ref> 그 다음 해인 [[1977년]] [[일본]] 전지훈련에서 [[일본 프로 야구]] 팀 롯데 오리온스 가네다 감독에게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030300329208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03-03&officeId=00032&pageNo=8&printNo=9670&publishType=00020 最優秀 車榮華 新人王 辛鉉碩], 동아일보, 1976년 10월 29일</ref> 그 해 차영화는 실업·대학야구 올스타전에 내야수로 출전과 함께<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052400209208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05-24&officeId=00020&pageNo=8&printNo=17118&publishType=00020 大學(대학)·實業(실업)올스타戰(전) 28일부터 3일동안], 경향신문, 1977년 5월 25일</ref> [[1978년]], [[1979년]] 실업야구 올스타전에 뽑히기도 하였으며 이후 국가대표로 세계선수권대회같은 국제대회에도 출전하면서 많은 활약을 펼쳤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8062800209208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8-06-28&officeId=00020&pageNo=8&printNo=17455&publishType=00020 실업야구연맹 오올스타 56명뽑아], 동아일보, 1978년 6월 28일</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041200329208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04-12&officeId=00032&pageNo=8&printNo=10315&publishType=00020 韓美야구 實業선발,빅토리에 樂勝], 경향신문, 1979년 7월 9일</ref> [[1981년]] [[KBO 리그]] 출범준비와 함께 프로야구 구단들의 스카웃할 선수들의 명단의 윤곽이 밝혀지면서 차영화는 [[해태 타이거즈]]로 스카웃된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122500099212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12-25&officeId=00009&pageNo=12&printNo=4865&publishType=00020 三星,선수스카우트 매듭 롯데·해태·OB 도일부확정], 매일경제, 1979년 12월 25일</ref>
  • 착각 영국인 기사도 사건
         1980년대 [[일본]]에서 있었던 사건. 간단하게 설명하면, [[가라테]] 3단의 [[영국인]]이 오해로 사람을 과실치사 해버린 사건이다.
         일본 대법원에서는 2심을 인정했다. 일본에서는 정당방위 등의 개념에 대해서 반드시 나오는 판례로 유명하다.
         [[분류:일본 사건]]
  • 창원시
          * [[일본]]
  • 채종범
         그러나 2004년 어깨 부상을 당하며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동안, 하필이면 [[병역비리]] 크리가 터져 이듬해 8경기 뛰고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게 되었다. 2008년 소집해제 후 [[SK 와이번스]]에 복귀했으나, 장기간의 공백에 이미 몸은 예전의 좋은 성적을 내던 상태가 아니었다. 거기에 팀의 주축으로 성장해 버린 [[조동화]], [[김강민]], [[박재상]] 등에 밀려 2군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SK의 타격코치였던 [[이세 다카오]]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년 동안 제대로 된 훈련을 하지 못해 어깨가 정상이 아니었다며, [[대한민국]]의 병역 의무가 선수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말하였다. [[http://chars.egloos.com/1867683|#]] [[2008년]] [[5월 5일]] [[KIA 타이거즈]]와 [[전병두]], [[김연훈]] - [[이성우(야구선수)|이성우]], [[김형철]], '''채종범''' 트레이드로 인해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게 되었다.
          * [[이종범]]이 2001년 [[일본]] 생활을 마치고 [[KIA 타이거즈]]로 복귀했을 때 복귀전에서 맹활약하며 [[KIA 타이거즈]]에 패배를 안겨 주기도 했다.
  • 최남선
         |언어 =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한성부]] 출생이고 한때 [[철원군 (남)|강원도 철원]]과 [[창원시|경상남도 창원]]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대한제국]]의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갔으나 중퇴와 복학을 반복하다가 1907년 [[와세다대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귀국했다. 1907년 [[이광수]]와 함께 [[소년]]지를 창간했으나 [[한일 합방]] 후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당했고, 1912년 [[이광수]]의 도움으로 《붉은 저고리》, 1913년《아이들 보이》,《새별》등의 잡지을 발간하였으나 [[조선 총독부]]의 '신문지법' 명령으로 모두 강제 폐간되었다. 1914년에는 잡지 《[[청춘 (잡지)|청춘]]》을 발간했으나 1918년 [[일본]]의 압력으로 폐간당했다.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49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 낭독하였다. [[3.1 운동]]을 사주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투옥, 1921년에 석방되었다.
         1902년 경성학당에서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10월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국비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갈 때 국비 유학생 중 중학생반의 소년반장(少年班長)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 해 11월 [[도쿄]] 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얼마못가 12월에 중퇴하고 배편으로 귀국했다.
         1906년에 다시 일본 유학을 떠나 4월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학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지만, 역시 3개월간 다니다 동맹 휴학으로 제적당하다가 복학하였다. 이어 [[이광수]] 등 유학생과 사귀면서 러시아 문학 작품을 탐독하였다. 1906년 7월 유학생 회보인 《[[대한 흥학회보]] (大韓興學會報)》편찬회를 맡아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대한 흥학회보]] (大韓興學會報)》의 편집 활동을 하면서 그는 회보에다 새로운 형식의 시([[신체시]])와 [[시조]]를 발표하였다.
         1920년대에 문화 운동 활동한 동시에 같은 해 1928년 10월 [[조선총독부]] 내에 [[식민사관]] 유포를 위해서 만든 어용단체인 ‘[[조선사 편수위원회]]’를 창립했을 때 편수 위원직을 맡았다. 1930년 8월 [[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 교수와 조선총독부·조선사편수회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연구'를 표방하며 조직한 [[청구학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37년 중추원 참의를 맡아 1938년 3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2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7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조선문화의 당면과제'를 연재해 조선문화의 일본화야말로 당면한 문제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라며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사설을 기고했다. 이어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총독부 어용기관지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각종 친일논설을 게재했다.
         1938년 《[[만몽일보]]사 (滿蒙日報社)》 고문과 일본 관동군이 만주에 세운 [[건국대학]](建國大學)의 한국사, 한국학 교수직에 임명되어 교수로 부임해 1943년 2월까지 역임했다. 1940년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 무장 세력을 상대로 귀순 및 투항공작을 전개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東南地區特別工作後援會) 고문으로 활동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매일신보를 비롯해 경성일보등에 학도병 권유 유세문을 기고했고, 각종 시국강연에 나서면서 활동했다.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는 1943년 11월 24일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전문·대학생들에게 학병에 지원하라는 강연을 했다.<ref name="daedams">[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3/03/2007030300046.html “화랑 사상 지금 부활해도 좋을듯…”] 조선일보 2007.03.03</ref> 당시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 ‘조선화보’(1944년 1월호)에서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사회로 진행된 육당과 춘원의 대담 내용이 기록되었다. 이 대담에서 춘원은 강연회에 대해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라며 “그때의 압권은 최(남선) 선생님의 강연이 아니었을까요”라고 말했다. 육당은 “적어도 천오백 명은 모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며 “일찍이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요”라고 화답했다.<ref name="daedams"/>
         최남선은 “어떤 학자는 ‘(일본)무사도의 연원은 신라의 화랑이 그 토대였다’라는 것을 생각할 정도”라며 한일 양국 공통의 상무(尙武) 정신을 역설했고, 이에 [[이광수]]는 “저 ‘화랑’의 사상이란 오늘날 막 바로 부활시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며 동조했다.<ref name="daedams"/>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경성부]] 우이동(牛耳洞)에 은거, 외부 출입을 삼가고 역사논문 집필에 전념하였다. 그해 9월 [[한민당]]의 영입 제의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광복 후 그는 '민족개량주의로 흘러가 친일파로 변절했다.'는 것 때문에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비난을 받았다.
         * [[일본]] [[도쿄]] 제1중학교 중퇴
         * [[일본]] [[와세다 대학교]] 지리역사학과 중퇴
         1925년 일본어로 발표된 〈불함문화론〉은 한·일 문화동원론, [[일선동조론]]을 위한 것으로 동이문화권에 [[발칸반도]], [[카스피해]], [[일본]], [[오키나와 섬|유구]]를 끌어들여 단군의 [[민족주의]]를 [[세계주의]]로 변질시키고 역사인식을 혼란시켰다는 지적이 있다.<ref>박광용, 「대단군 민족주의의 전개와 양면성」, 1992년.</ref><ref>{{서적 인용
         또한 최남선의 [[단군론]]은 1926년 3월 3일부터 1926년 7월 25일까지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에 연재된 글인데 특유의 논법에 의거 ‘[[단군론]]’을 내세워 일본인 중심의 [[식민사관]]에 맞서기도 하였다.<ref>「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 단군론의 문헌검색, 김성호 저, 푸른숲(2000년, 43~51p)</ref>
         1944년 1월의 조선화보에서 육당의 계몽가요 ‘경부철도가’(1908)가 일어로 번역된 영국 시인 바이런의 ‘해적’을 일본의 신체시 형식으로 모방했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ref name="daedams"/>
  • 최동
         '''최동'''(崔棟, <small>일본식 이름: </small>山佳棟, [[1896년]] [[2월 16일]] ~ [[1973년]] [[7월 30일]]<ref>{{뉴스 인용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는 관직을 내놓고 [[일본]]에 망명 중인 [[박영효]]를 만나러 도일했다. 최동은 [[가톨릭]] 계열인 [[도쿄]]의 [[교세이학교]](曉星學校)에서 수학했다. 이때 아버지는 이미 [[미국]]으로 떠나 [[안창호]]와 함께 활동하던 시기라 고학을 하며 공부했다. 중등 과정을 마친 뒤 [[미국]]으로 가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약 1년간 수학했다.
         귀국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에 졸업했다. 모교의 [[해부학]]교실 조교로 일하다가 [[중국]] [[북경협화의과 대학]]과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1929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931년]]부터 3년 동안은 학교 재단이사를 겸직하기도 했다. 강의 과목은 [[기생충학]]과 [[병리학]]이었으며, 다시 일본 [[도호쿠 제국대학]] [[법의학]]교실에서 [[1936년]]에 [[법의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 최두선
         휘문의숙을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 [[1917년]] [[와세다 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18년]] [[김성수 (1891년)|김성수]]를 알게 되어 그가 운영하던 [[중앙학원]]의 학감으로 초빙되었다. [[1919년]]에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이 피체되면서 중앙학교의 학교장직을 맡아보게 되었다.
         [[1963년]] [[고려대학교]]로부터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8년]]에는 모교인 [[일본]] [[와세다 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와세다 대학|일본 와세다 대학교 철학과]] [[학사]] [[졸업]]
         * [[게이오기주쿠 대학|일본 게이오 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문학]][[석사]] 졸업
         * [[1968년]] [[일본]] [[와세다 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 최상수 (1918년)
          | 언어 = [[한국어]], [[영어]], [[일본어]] <br/> [[중국어]], [[베트남어]], [[몽골어]]
          | 학력 = {{국기나라|일본}} [[오사카 외국어대학교|오사카 외국어학교]] 영어학과 전문학사
         본관은 [[경주 최씨|경주]](慶州)이고 [[호 (이름)|호(號)]]는 석천(石泉)이며 [[부산광역시|경상남도 부산]]에서 출생하였고 한때 [[경상북도]] [[경주시|경주]]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일본]] [[오사카 외국어대학교|오사카 외국어학교]] 영어학과에서 전문학사 학위 취득하였다. [[1947년]] [[한국민속학회]] 회장이 되었으며 이때 <민속학보>를 발간하였다. 그 후 [[한국외국어대학교]] 조교수·[[경기대학교]] 교수·[[이화여자대학교]] 강사·[[한미아시아민속학회]] 이사장·[[경희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분류:1918년 태어남]][[분류:1995년 죽음]][[분류:경주 최씨]][[분류:민속학자]][[분류:대한민국의 한문학자]][[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번역가]][[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러시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몽골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베트남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역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경기대학교 교수]][[분류: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분류:이화여자대학교 교수]][[분류:경희대학교 교수]][[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오사카 외국어대학 동문]]
  • 최석민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와 포상금 형식의 [[은사공채]](恩賜公債) 2만 5천원을 받았다. 조선귀족 중 남작 작위는 본래 전직 관료에게 주어졌으나, 그는 칙임관 1등 이상의 현직에 재직 중인 것을 기준으로 이 작위를 수작했다. 최석민의 작위는 양자 [[최정원 (조선귀족)|최정원]]이 습작했다. [[1911년]] [[8월 29일]]에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1주년을 기념하는 축사를 《[[매일신보]]》에 게재하기도 했다.
  • 최성국 (축구선수)
         [[2003년]]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하여,<ref>{{뉴스 인용 |제목=최성국, 계약금 3억원에 울산 입단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0326390& |출판사=연합뉴스 |date={{날짜한글화|2003-2-27}} }}</ref> 그 해 [[K리그]] 준우승에 공헌하였다. [[2005년]] [[J리그]]의 [[가시와 레이솔]]에 임대되었으나,<ref>{{뉴스 인용 |제목=최성국, 가시와로 5개월간 임대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0922660& |출판사=연합뉴스 |date={{날짜한글화|2005-2-24}} }}</ref> 만족스러운 활약을 하지 못한 채 5개월 뒤 [[울산 현대 호랑이|울산]]으로 복귀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최성국, K리그로 복귀 |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210&g_serial=157864 |출판사=조이뉴스24 |date={{날짜한글화|2005-6-25}} }}</ref> [[울산 현대 호랑이]]로 복귀한 뒤 그 해 [[K리그]] 우승에 공헌하였고, [[2006년]] [[K리그 컵 2006|K-리그 컵]] 득점왕에 올랐다.<ref>{{뉴스 인용 |제목=성남 '컵대회 준우승', 최성국 '득점왕 우뚝' |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210&g_serial=216823 |출판사=조이뉴스24 |date={{날짜한글화|2006-7-29}} }}</ref> [[2007년]] [[1월 17일]]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하여,<ref>{{뉴스 인용 |제목='리틀 마라도나' 최성국, 성남에 현금 트레이드 |url=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701171527142230 |출판사=마이데일리 |date={{날짜한글화|2007-1-17}} }}</ref> 그 해 [[K리그]] 준우승에 공헌하였다. [[2008년]] [[8월 2일]]에는 [[대한민국]]과 [[일본]] 프로 축구 사상 첫 올스타 맞대결인 'JOMO CUP 2008'의 MVP를 차치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K리그 올스타, J리그 올스타에 3-1 대승...최성국 MVP |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210&g_serial=347254 |출판사=조이뉴스24 |date={{날짜한글화|2008-8-2}} }}</ref>
         [[분류:198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울산 현대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가시와 레이솔의 축구 선수]][[분류:성남 FC의 축구 선수]][[분류:광주 상무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축구 선수]][[분류:FK 라보트니치키의 축구 선수]][[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4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6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7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아시안 게임 축구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동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정명고등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승부조작에 관여한 스포츠인]][[분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분류:일본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분류:대한민국의 축구 해설자]][[분류:J1리그의 축구 선수]][[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최신해
          | 경력 = [[야마구치 대학교|일본 야마구치 醫大院]] [[의학박사]] 출신 <br/> [[정신과|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br/> [[정신과|정신과의학교육 저술가]] <br/> [[수필|수필가]] 겸 [[교수|대학 교수]] <br/> [[서울청량리뇌병원|국립 서울청량리뇌병원]] 원장 <br/> [[서울대학교|서울대 의과대학]] 대우교수 <br/> [[통일민주당]] 보건행정특임위원 <br/> [[신민주공화당]] 문화예술행정특임고문
         이후 그는 [[1951년]]에 대한민국 육군군의학교 교관으로 이임되어 복무하다가 [[1954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으며 [[1956년]]에는 [[서울청량리뇌병원|국립 서울청량리뇌병원]] 원장이 되었고, [[1961년]]에 [[일본]] [[야마구치 대학교]] 의과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대한민국]]에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대한신경정신과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 [[일본]] [[니혼 대학|니혼 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석사
         * [[일본]] [[야마구치 대학|야마구치 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 최우석 (야구선수)
         [[한화 이글스]] 스프링캠프에서 투구를 하는 도중 [[김성근 (야구인)|김성근]] 감독이 좌투로 던져보라는 요구를 통해 [[KBO 리그]] 최초 스위치 투수가 되었다. 최우석은 특별 제작된 스위치 투수 전용 글러브를 [[일본]]에서 들여왔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241&article_id=0002349706 '스위치피처' 최우석 "감독님이 지시하면 양손으로"] - 일간스포츠</ref>
  • 최유진 (가수)
         {{일본아이돌 정보
         | 출생지 = [[일본]] [[도쿄도]]
         | 소속그룹 = [[모닝구 무스메 (일본아이돌)|모닝구 무스메]]
         '''최유진'''(崔有眞<ref>{{뉴스 인용 |제목 = [더스타프로필] 모닝구 무스메 최유진 "이상형?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반전매력!" |url = 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1/2017082102499.html |출판사 = 조선일보 |저자 = |날짜 = 2017년 8월 25일 |확인날짜 = 2017년 9월 27일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70913102122/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1/2017082102499.html |보존날짜 = 2017년 9월 13일 |깨진링크 = 예 }}</ref><ref>[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7&no=577351 M+사소한인터뷰-CLC 편① 최유진 “토끼·쥐·다람쥐? 닮은 동물이 많아요” ] 2017-08-30</ref>, [[1996년]] [[8월 12일]] ~ )은 일본의 가수이자 배우이다. [[일본]]의 [[아이돌]] [[모닝구 무스메 ]]의 메인보컬, 리드댄서를 맡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m.facebook.com/CLC.UnitedCube/photos/a.1511382879116331.1073741828.1489401217981164/1558117857776166/?type=3&source=54|title=CLC Facebook:Yujin|date=2017-03-13}}</ref><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aWRTsHtA9zY|title=Debut Greeting at CLC SHOWCASE|first=|last=보따리 bottari|date=2015-03-25|publisher=|accessdate=2017-08-12|via=YouTube}}</ref><ref>{{웹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now/read?oid=311&aid=0000587211|title=[XP★SHOT] CLC가 궁금해? 안전담당부터 보호본능까지③|publisher=xportsnews|date=2016-03-15|accessdate=2017-08-12}}</ref><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y0Rau6SssxE|title=칯트키 Live - “PRODUSORN” EP02: LIFE AS A GIRL GROUP|first=|last=Cube Ent|date=2017-04-25|publisher=|accessdate=2015-03-18|via=YouTube}}</ref><ref name=supertv>2018-04-06,XtvN,SUPER TV EP11,「메인래퍼、은지」「메인보컬、유진」「리더、모닝구 무스메」「리드댄서、모닝구 무스메」「 메인보컬、승희」。</ref><ref name=cubetv>2018-11-01,Cube TV,성동구민 씨엘씨CLC EP1,「모닝구 무스메、리드보컬、메인댄서」「유진、서브보컬 、리드댄서」「모닝구 무스메、서브보컬」「은지、래퍼」。</ref>
         [[분류:199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일본의 여자 가수]][[분류:일본의 가수]][[분류:일본의 댄스 음악가]][[분류:일본의 아이돌]][[분류:모닝구 무스메의 일원]][[분류:도쿄도 출신]][[분류:충쿠 엔터테인먼트 소속]][[분류:전주 최씨]]
         [[분류:일본 아이돌]]
  • 최재우
         7세 때 부터 스키를 타기 시작했으며, 2004년에 모굴 스키에 입문하였다. [[서울유현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6년에 캐나다 블랙콤에서 열린 스피릿 시리즈 하프파이프 경기와 슬로프스타일 경기에서 1위를 했고, 같은 해에 실버스타 스키장에서 열린 대회에서도 모굴 1위, 듀얼 모굴 2위를 기록했다. [[2007년]]에 캐나다 사이프러스에서 열린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청소년 모굴 대회에 참가하여 우승하였으며, 2009년 1월 31일에 대한민국 대표로 발탁되어 [[일본]] [[이나와시로]]에서 열린 FIS 레이스에 참가하여 모굴 경기에서 46위를 기록하였다. 2월에도 이나와시로에서 열린 FIS 레이스에 참가하여 모굴 부문 20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 3월에는 이나와시로에서 열린 [[2009년 세계 프리스타일 스키 선수권 대회|세계 프리스타일 스키 선수권 대회]]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참가하여 모굴 부문에서 26위, 듀얼 모굴 부문에서 22위를 기록하였다. 그 해 8월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주]]에 위치한 페리셔 스키 리조트에서 열린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컵에 참가하여 21일에 진행된 모굴 경기에서는 35위, 다음 날에 열린 경기에서는 13위에 올랐다.
         이듬 해인 2010년 1월에는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생애 첫 [[FIS 프리스타일 스키 월드컵|월드컵]]에 참가하여 모굴 경기에서 38위를 기록하였다. 이후 12월에 캐나다 퀘벡 주의 발생콤 리조트에서 열린 FIS 레이스에서 캐나다의 [[마르크앙투안 가뇽]]의 뒤를 이어 2위를 기록하였다. 2011년에는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와 [[알마티]]에서 열린 [[2011년 동계 아시안 게임|아시안 게임]]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모굴 부문과 듀얼 모굴 부문에 출전했다. 모굴 부문에서는 카자흐스탄의 [[드미트리 레이헤르트]]와 일본의 [[우에노 오사무]], 카자흐스탄의 [[드미트리 바르마쇼프]]의 뒤를 이어 4위를 기록했다. 듀얼 모굴 종목에서도 카자흐스탄의 바르마쇼프와 일본의 우에노, [[쓰키타 유고]]의 뒤를 이어 4위를 기록했다. 이후 2012년에 [[캘거리]], [[나에바]] 등지에서 열린 월드컵에 참가하였고 같은 해에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의 [[손드리오 현|손드리오]]의 마을 [[발말렌코]]에서 열린 [[2012년 세계 주니어 프리스타일 스키 선수권 대회|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미국의 [[브래들리 윌슨 (스키 선수)|브래들리 윌슨]], 스웨덴의 [[루드비그 피엘스트룀]]의 뒤를 이어 3위로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 대회의 듀얼 모굴 종목은 11위를 기록했다. 그 해 8월 16일에는 페리셔 스키 리조트에서 열린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컵에서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이듬 해인 2013년에는 [[노르웨이]] [[보스 (노르웨이)|보스]]에서 열린 [[2013년 세계 프리스타일 스키 선수권 대회|세계 선수권 대회]]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참가하여 모굴 경기에서 450.00점을 획득하여 캐나다의 [[미카엘 킹즈버리]], [[알렉상드르 빌로도]], 미국의 [[패트릭 데닌]], 오스트레일리아의 [[맷 그레이엄 (스키 선수)|맷 그레이엄]]의 뒤를 이어 5위에 올라 주목을 받았으며, 듀얼 모굴 종목에서는 14위를 기록하였다. 이후 발말렌코에서 열린 [[2013년 세계 주니어 프리스타일 스키 선수권 대회|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는 모굴 부문 29위, 듀얼 모굴 부문 5위를 기록했다.
         2018년 3월 12일 [[일본]] [[아키타현]] [[센보쿠시]]의 [[다자와호]]에서 열린 FIS 월드컵 참가 도중 동료 선수 [[김지헌 (스키 선수)|김지헌]]과 함께 음주를 하고 동료 여자 선수들에게 음주 강요를 하였고, 이 과정에서 추행 및 폭행을 한 것이 발각되어 [[대한스키협회]]로부터 영구제명 되었다.<ref>{{뉴스 인용 | 제목=모굴 스키 국가대표 최재우·김지헌, 동료 여선수들 성추행 ‘영구제명’ |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857671 | 출판사=경향신문 | 저자=윤승민 | 쪽= | 날짜=12018-03-14 | 확인날짜=2018-09-17}}</ref>
  • 최창홍
         '''최창홍'''(崔昌弘, <small>일본식 이름:</small> 廣田昌弘, [[1903년]] [[5월 7일]] ~ [[1951년]] [[4월 21일]])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 겸 관료로,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이다.
         [[1937년]] [[2월 20일]] [[평안북도]] 경찰부 보안과 경시로 임명된 뒤부터 군용 자동차 징발 및 운전수 징집, 지하자원 개발 및 공출, 시국 범죄 위반 단속 및 검거, 국내 물자 조사에 관한 업무를 수행했으며 [[1938년]] [[3월]] [[평안북도]] 방공위원회 간사를 역임했다.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1년]] [[1월 24일]] [[경상남도]] 이사관 겸 [[경상남도청]] [[내무부]] 학무과장으로 임명된 뒤부터 [[경상남도]] 내무부 전무과장(1941년 8월 18일 임명), 도청 전매국 제조과장(1943년 9월 30일 임명)을 역임했고 [[1943년]] [[12월 1일]] [[조선총독부]] 서기관 겸 재무국 전매사업과장, [[1944년]] [[11월 22일]] 재무국 연초과장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조선중앙정보위원회]] 간사, [[조선총독부]] 학도동원본부 참사, 조선총독부 근로동원본부 참사, 조선총독부 농업계획위원회 간사, [[조선철도간선긴급증강위원회]] 간사를 역임하는 동안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했다.
  • 최홍만
         거구의 전직 씨름 선수로 한국인 최초[* 정확히는 한국 무에타이 챔피언인 이면주와 거의 동시에--물론 이면주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로 [[K-1]] 입식격투기 선수로 데뷔하며 한국의 격투기 붐을 일으켰다. MMA 무대에서도 활동했으며 [[일본]]의 연예계에도 진출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서울 그랑프리 우승자로써 월드 그랑프리 개막전 참가 자격을 가진 최홍만은 9월의 오사카 월드 그랑프리 16강에서는 희대의 괴수 [[밥 샙]]과 난타전 끝에 빰 클린치 니킥으로 다운을 뺏으며 2-0 판정승을 거뒀다.[* 밥 샙이 리치가 긴 최홍만에게 거리를 두지 않기 위해 초반부터 안쪽으로 파고들며 무식하게 펀치를 날렸는데, 최홍만이 전혀 밀리지 않고 난타로 되받아치는 게 인상 깊은 경기였다. 기술적으로 부족하기로 유명한 두 선수는 심지어 난타전 중 가드도 하지 않으며 펀치를 주고받았는데, 체력 조절을 생각치 않고 펀치를 퍼부은지라 후반에는 둘 다 체력이 완전 고갈되어서 거의 그로기 상태였다. 초반과 후반의 경기력 차이가 극명했던 경기. 그 와중에 최홍만은 긴다리와 팔로 거리를 두며 유효타를 은근히 계속 먹이는데 성공해 대미지를 줬으나, 샙은 특유의 정면돌파 후 난타를 벌이는 스타일도 자신만큼 힘이 센 최홍만에게 먹히지 않고 체력 고갈 이후 파고드는 것도 못하면서 거의 무력화되었다.] 육중한 신체능력으로 괴수 이미지를 지닌 밥샙이 더 큰 괴수에게 밀리는 점이 이색적이던 경기. 그 후로는 일본에서도 꽤나 괜찮은 흥행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11월 [[도쿄]]에서 열린 8강전에서는 [[레미 본야스키]]의 철저한 아웃파이팅에 말려들어 로우킥만 40대 정도 허용한 끝에 판정패한다. 이때 판정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고 승자인 본야스키와의 악수도 거부하면서 비매너 논란이 있었다.
         결국 최홍만은 이 경기에서 허벅지 부상을 입어 한동안 불참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일본어 위키피디아]]의 최홍만 항목에서는 '''로우킥 부상 부위에 세균에 감염되어 사망하였다'''는 반달이 있기도 했다(...). 사실 경기 내용으로는 완벽히 말렸지만 피지컬 자체는 본야스키를 훨씬 능가하는 괴물이었기에 시합 도중에 본야스키의 로우킥을 맞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께를 들썩이기도 하고, 경기가 끝난 뒤 "본야스키의 로우킥에 대미지를 입지 않았다"라고 했지만 인터뷰 이후 다리를 절뚝이며 퇴장해서 허세라는 지적도 있었다. 훗날 인터뷰에서 악수 거부 논란에 대해 최홍만은 "너무 아쉬워서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로우킥 관련해선 경기를 치를 당시 이미 왼쪽 허벅지가 부상당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38&aid=0000307310|#]] 사실 이때 최홍만이 판정에 불만을 표한 것도 좀 에러였던 게, 워낙 상대 선수보다 훨씬 크고 강하니 버텨낸 거지 유효타를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이 허용한 반면 본야스키는 최홍만의 타격을 대부분 막아냈다.(물론 워낙 타격이 세서 막아도 대미지가 들어갔지만) 애초에 이건 그냥 싸움이 아니라 (KO가 안 나온다면) 기술적으로 점수를 따내서 비교하는 격투기이기 때문에 확실한 본야스키의 승리가 맞다.
         그러나 2007년 3월 요코하마 스페셜 매치에서 그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마이티 모]]에게 KO패를 당한 것이다. 시합은 최홍만이 긴 리치를 이용하여 공세를 펼치고, 모가 간간히 오버핸드 라이트로 카운터를 노리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2라운드 57초 모의 오버핸드 풀스윙 라이트가 작렬했고 최홍만은 그대로 다운당하며 [[안드로메다]]로 떠나버렸다. 충격적인 첫 KO패.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최홍만이 이 무렵부터 안면타격 공포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시합을 계기로 그동안의 최홍만의 행태, 즉 격투기를 등한시하고 한국과 일본 예능 활동에만 치중하는 모습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폭발하였다. 카오클라이나 밥샙, 아케보노를 꺾을 때까지만 해도 호의적이었던 여론이 이 시합을 기점으로 완전히 돌아선다.
         최홍만의 MMA 데뷔는 2006년 12월 K-1 다이너마이트 2006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입식 뿐 아니라 MMA로의 진출도 시도하고 있던 K-1의 의도에 따라 이벤트성 매치에 얼굴마담으로 출전한 것이다. 상대는 [[나이지리아]]의 개그맨 겸 무술가인 바비 올로건이었다.[* 일본에선 꽤 유명한 방송인으로 [[시릴 아비디]]에게 이기기도 했다. 유명세 덕에 비디오게임 호혈사에서 캐릭터로 등장했으며, 일본인들에게 일반인 중 최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 결과는 11초 초살 KO승으로 데이터만으로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입식에서도 잘나가고 있던 때였고 전직 씨름선수로서 차라리 MMA에서 더 강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겹쳐 "최홍만은 MMA로 진출하면 최강자가 될 것이다"라는 떡밥이 한국의 전 격투 커뮤니티를 달구기도 했다.
         이 시합을 끝으로 최홍만은 잠정적으로 격투계를 떠나 연예활동에 전념한다. 파이터 활동을 그만두고 일본 예능분야에서 활동 중이며, 본인은 인터뷰를 통해 2010년 하반기에 격투기에 복귀할 뜻을 밝혔다. 하지만 동년 12월 모든 격투기 활동을 잠정 중단한 상황이라고 밝혔고, 이후 격투기 경기를 뛰지 않고 있으며, 정치 활동에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4&aid=0002159169|사업]]도 하는 등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기에 격투기계로 복귀할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2015년 4월 27일 국내 종합격투기 단체 [[ROAD FC]]와 계약했다.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ports_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410&article_id=0000236284|#]] 동년 7월 25일 일본 도쿄에서 개최되는 ROAD FC 24 대회에서 첫 경기가 잡혔으며, 상대선수로 레볼루션에서 원래 맞붙기로 했다가 엎어졌던 카를로스 도요타와 다시 맞붙었으나 1R 1분 11초만에 상대 강력한 오른손 훅에 실신하며 KO로 허무하게 패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UpphV3sKg|영상]]
         최홍만과 로드 FC에 대한 여러 비판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최홍만 선수의 경우 사기 사건과 연루되면서 일본 방송이 취소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http://www.monstersport.net/index.php?mid=sports_mma_livetalk&category=2066773&document_srl=3863266|#]] [[http://sports.media.daum.net/sports/general/newsview?newsId=20150727060206359|두 방 맞고 쓰러진 최홍만, 이제 나오지 마라]] [[http://sports.media.daum.net/sports/general/newsview?newsId=20150727060006244|'예견된 참사' 최홍만, 로드 FC가 경찰보다 더 알 수 없다]] [[http://sports.media.daum.net/sports/general/newsview?newsId=20150727110807270|로드 FC 최홍만 재기 프로젝트.."빚 갚아주겠다"]] [[http://sports.media.daum.net/sports/general/newsview?newsId=20150727111921037|난타전 감행 최홍만 죄 없다..화근은 로드FC 과욕]]
         그리고 일본의 노장 우치다 노보루를 판정으로 이겼다. 우치다는 과감하게 계속해서 최홍만의 얼굴을 노렸는데, 가드와 긴 팔에 막혀 유효타를 얻지 못했다. 3라운드에 레프트 펀치로 다운시킨게 결정적인 승리의 요인. 입식경기로는 무려 10년 만에 거둔 승리.
         데뷔 초부터 최홍만은 예능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그래서 한국과 일본에서 방송 출연이 잦은 것이 격투기 팬들에게 까이고 있다. 한때는 음반까지 낸다고 해서 가수라고 까이기도 했다. [[디시인사이드]]의 [[격투 갤러리]]에선 그를 凶物([[흉물]])이라고 부른다(…)~~그 동네는 원래 그렇다~~
         여담이지만 노래도 불렀다. 2006년 강수희와 듀엣으로 한 '''미녀와 야수'''(…)를 K-1 다이너마이트 2006에서 틀고 입장했다. 의외로 2008년 정식 가요무대에서 공공연하게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후 국내 연예 활동은 중지했지만 일본에서는 오히려 더욱 활발한 연예 활동을 이어갔다.
         2009년 10월에는 미노와 이쿠히사와의 경기를 앞두고 '''3일 전 일본 쇼프로에 출연'''한 것으로 알려져 엄청난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
         2009년 격투기 활동을 잠시 중단한 후 부터는 일본의 쇼프로, 영화 등에서 자주 출연하고 있다. 주로 거구를 살린 악역 겸 개그 캐릭터 역을 맡는데, 외모가 전설적인 프로레슬러 자이언트 바바와 닮은 점도 화제꺼리가 되는 등 나름대로 인기가 있다. 본인도 예능 생활이 상당히 만족스러운 모양. 소질도 이쪽 분야에 더 있는 듯 하다. 심지어 2010년에는 [[포켓몬스터]] 관련 TV프로인 [[포켓몬 스매시]]에도 출연한다(...). 일본어도 [[나름]]대로 잘하게 된 모양.[* 일본어는 2006년경부터 잘 하기는 했다.] 시무라켄의 바카도노에도 특별 게스트로 나온 적 있고, 여러 모로 일본 연예인 다 됐다. [[사사키 노조미(모델)|사사키 노조미]]와 사귀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2010년 3월 즈음 일본의 괴물군이라는 드라마의 프랑켄 역으로 출연이 결정되었다. 분장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여기 저기서 대체 왜 저런 짓을 하냐는 악플이 달렸고 촬영을 위해 아예 일본에서 거주하다가 까이기도 했다.[* 출신이 어떻든 일단 연예인으로 나선 만큼, 기괴한 분장을 마다하지 않고 연기하고 활동을 위해 해외에서 거주하는 것이 칭찬을 할 수는 있어도 잘못된 일은 전혀 아니다. 그런 논리라면 메이저 리그 활동 야구 선수나 LPGA 활동을 위해 미국에 건너가 있는 선수들도 다 까야 한다.] 하지만 원작자는 더 없이 완벽한 싱크로라고 극찬했다.
         ~~5번 항목의 모든것이 설명된다.~~ [[미국]] 네바다 주에서 [[브록 레스너]]와의 경기를 가지기 위해 신체 검사를 받다가 [[뇌하수체 종양]]이 발견되었다는 결과가 나와서 경기가 중단되는 일이 있었다.[* 경기 일주일 전까지는 경기를 치루는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 하였지만, 3~4일을 앞두고 최홍만을 포함한 대다수 선수가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결장하여 큰 돈을 들인 다이나마이트 미국 대회가 망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일본에서 열었던 대회 때처럼 3~4일 전 대회 준비를 하려다가 미국 주 체육위원회의 대회 운영 방식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K-1의 병크다.(PRIDE도 미국 진출 당시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미국 주 체육위원회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국내와 일본 격투 언론들은 '''UFC의 K-1 진출을 막기 위한 음모다'''는 음모론 기사를 쏟아내었다.~~UFC만 조금 봤더라도 그런 소리는 못한다~~] 최홍만 측에서는 건강에 문제가 없다면서 검사 결과에 반발했다.
         [[대한민국]] 언론에서는 그냥 강한 한국 파이터 정도로 내보내고 있지만, K-1 내부에서의 역할은 악역 포지션을 맡고 있으며 일부러 건방진 어조나 태도를 보이고 있다(본인 성격이 그런 것은 아니고 프로모터에 의한 것). 때문에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 특히 [[2ch]]에서는...[[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에서도 안티가 많은 상태.
         그런데, [[레진코믹스]]의 태양초고추장 연재 만화가인 개호주가 일본에서 목격한 적이 있다고 한다. [[http://www.dogdrip.net/83988346|개호주가 또!]] 그러나 10월26일 오후 7시 40분 최홍만이 서울 동부지방검찰청에 출석해 사기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으며, 향후 사건의 전개에 따라 내용이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 최희섭
         [[2007년]] 12월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결혼]]할 예정이었던 [[일본]]인 약혼녀 야스다 아야와 결혼을 앞두고 [[11월 26일]]에 파혼하였다. 파혼의 이유는 성격 차이와 결혼 이후 사회 활동에 대한 의견 차이로 알려졌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73&aid=0000086675& 최희섭 충격 파혼…日야스다 씨와 합의 하에 헤어져] - 스포츠서울</ref> 특히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팀으로 오게 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한민국]] 복귀 첫 해에 부진하였던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최희섭은 이후 [[2010년]] [[12월 6일]]에 [[서울특별시|서울]] 신라호텔에서 [[미스코리아]] 출신 [[김유미 (1983년)|김유미]]와 결혼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20&aid=0002189951 최희섭 장가 가던 날 ‘홈런 스윙 세리머니’] - 동아일보</ref>
  • 추미애
          *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미국]]/[[일본]] 특사'
  • 츠츠모타세
         츠츠모타세(美人局, 미인국)는 [[일본]]에서 특정한 [[사기]] 범죄를 뜻하는 [[은어]]이다. 미인국(美人局)은 음독을 하면 비진쿄쿠(びじんきょく)가 되지만, 이 단어는 츠츠모타세(つつもたせ)라고 읽게 되어 있다.
         [[일본]]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 나타난 츠츠모타세(筒持たせ)라는 단어에, [[중국]] [[원나라]] 시대에 쓰여진 『무림구사(武林旧事)』에 소개된 「미인국(美人局)」이라는 한자어가 결합되어 「미인국(美人局)」이라고 쓰고 「츠츠모타세」라고 읽는 은어가 만들어졌다. [[에도 시대]] 무렵에는 지금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일본속어사전 : http://zokugo-dict.com/18tu/tutumotase.htm
         [[분류:일본어]] [[분류:은어]] [[분류:사기]]
  • 카고메카고메
         [[일본]]의 아이들 놀이.
         [[분류:일본 풍속]]
  • 카라아게
         [[일본]]의 [[튀김]]요리. 일본에서는 여러 음식점에서 쉽게 접할 수 있으며 [[편의점]]에서 팔기도 한다.
  • 카치구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이겼다고 믿었던 브라질의 일본인 이민자 그룹'''. 간단히 말하자면 '''미친놈들'''(…) 1945년 부터 브라질에 거주하는 일본인들 가운데 90% 가량이 일본의 승리를 믿고 발광과 폭동을 벌였던, 미친 사건이다.
         일본의 승리를 믿었던 자들은 자신들을 카치구미(勝ち組), 반대로 패배했다고 올바른 정보를 알리고 있었던 사람을 '마케구미(負け組)'라고 부르며 적대시했다. 혹은 전승파(戦勝派)나 신념파(信念派)라고도 한다.
         1940년대 무렵 [[브라질]]에는 [[일본인]]이 약 30만 명 가량 거주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브라질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양국은 적대관계가 되었으므로, 브라질과 일본은 외교관계가 단절되었고 브라질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일본어로 출판이나 언론 활동을 할 수 없고, 일본인끼리 모이는 것도 금지되어 있고, 일본어 학교는 폐쇄되었다. 1942년에는 브라질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 외교관들도 [[포로 교환]]으로 일본으로 귀국하여, 완전히 본국과 연결이 단절되었다. 또 이 당시 [[포르투갈어]]를 읽을 수 있는 일본인은 숫자가 적었으며, 지식인과 브라질 사회에서 성공한 소수의 사람에 국한되었고 대부분은 오지에서 농장에 종사하고 있었다.
         일본어 신문이 폐지되었고, 본국과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날리는 [[단파방송]]만이 일본의 소식을 알려주는 거의 유일한 루트였다. 하지만 단파방송 수신기를 가진 사람은 소수였고, 입에서 입으로 [[루머]]가 전파되기 쉬웠다. 게다가 단파방송으로 얻을 수 있는 일본의 소식 역시, 군부에서 일방적으로 패전을 승전으로 바꿔서 발표하는 엉터리였기 때문에 일본은 항상 이기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 쉬웠다.
         적대국 국민으로서 브라질 정부에서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일본계 이민자들은 '일본의 승리'만이 이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인 1945년 7월, 브라질 일본인들이 조직한 신도연맹(臣道連盟)이라는 단체가 [[상파울로]]에서 결성되었다. 신도연맹은 이들의 조국인 '''일본을 응원하고, 승리를 믿는 조직'''으로서, 7월에 발족하고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12월에는 회원은 3만 가구에 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막대한 조직을 구축한 신도연맹은 황당한 행동을 시작했으니, 브라질 일본인 사회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는 정보를 날조해서 전파했던 것이다.'''
         >미국의 8배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원자폭탄]] 공격으로, 누보자키(犬吠崎沖) 앞바다에 집결해있던 미국, 영국 함대 400 척이 전멸.
         >일본의 고주파폭탄(高周波爆弾) 공격으로, 오키나와에서 적 15만명이 15분 만에 격멸.
         >일본군이 발사한 구형의 불을 쏘는 무기(球状の火を出す兵器)로, 미국민 3,650만명이 사망.
         >일본군함 30척, [[하와이]]에 입항. 미국 대통령은 일본이 지명.
         신도연맹이 배포한 정보는 이상과 같은 황당무계한 것이었으나, 아무튼 일본이 유리한 정보만을 전달했기 때문에 브라질의 일본인들은 이를 받아들여서 믿었으며, 약 80%~90%의 브라질 일본인이 이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1945년 8월이 되자 당연히 패전 소식이 퍼졌으나, 곧 '일본의 패전은 루머다'라는 소식으로 바뀌었고, 이게 거꾸로 뒤집혀서 '일본이 이겼다'는 루머가 되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45년 9월에는 위문사절단이 일본 군함으로 온다는 소문이 퍼져서, 오지에서 일본인이 상파울로 항구에 몰려들기도 했다. 물론 일본 군함들은 그때 대부분 바다 밑바닥에 있었다.
         사실 신도연맹이 탄생하기 이전, 1944년 부터 브라질 일본인 사회는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이 당시 '박하국적론'이라는 괴문서가 브라질의 일본인들 사이에 나돌고 있었는데, 이것의 내용이 이상과 같이 황당무계한 것이었으나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믿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괴문서가 돌면서 당시 박하를 재배해서 미국에 수출하던 브라질의 일본인은 모두 미국에 무기를 보내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들은 적에게 협력하여 일본을 공격하는 국적(国賊)이라는 논리였다. 이 괴문서 때문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박하 재배 농장, 박하 가공 공장에서 일본인에 의한 [[방화]]가 잇따라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대부분 [[세탁소]] 등에서 근근하게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박하 가공 공장이나 박하 재배 농장을 경영하는 부유한 일본인에 대한 질투도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된다.
         1946년 3월 7일, 산업조합 이사 키요베 이쿠타(清部幾太)가 상파울로에서 460킬로미터 떨어진 바스토스 마을에서 살해되었다. 키요베 이쿠타는 일본의 패배를 인정하는 '마케구미'였기 때문에 카치구미의 과격파에게 습격을 받아, 한밤중에 화장실을 갔다가 살해당했던 것이다. 키요베 이쿠타를 시작으로 하여 총 23명의 마케구미로 지목된 인사가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테러 행위를 벌이던 카치구미 과격파는 자신들을 특행대(特行隊)라고 불렀다. 본래 특공대(特攻隊)를 의도한 것으로 보이지만, 브라질에서 라디오 소리만으로 일본의 정보를 들었기 때문에 '톳코다이(とっこうたい)'의 한자를 알지 못해서 같은 코우(こう)를 쓰는 '행(行)'자를 잘못 쓴 것으로 추측된다. 카치구미는 전시중에는 국가에 도움이 되지 못했으나, 마케구미를 살해하여 드디어 나라에 도움을 주었다고 믿고 있었다.
  • 캡슐 호텔
         [[일본]]의 숙박 시설. '캡슐'이라고 불리는 간이형 취침 설비로 구성되어 있다. 도시의 주요 역이나 번화가 주변에 위치한다.
         [[일본]]에서는 1979년 오사카 부 오사카 시에서 처음으로 개업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분류:일본 풍속]]
  • 캡콤
         [[일본]]의 [[게임]] [[회사]]. 일본어 발음은 '카프콘'.
  • 캬바쿠라
         [[일본]]의 [[유흥업소]] 형태 가운데 하나.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캬바레(キャバレー,cabaret) 」와 [[영어]]에서 유래한 「쿠라브(クラブ,club=클럽)」을 합성한 단어.--어느 한쪽만 하라고.-- 줄여서 캬바(キャバ).
         [[분류:일본 풍속]]
  • 커피 젤리
         [[젤라틴]]과 [[커피]]를 사용하여 만든다. [[일본]]에서는 재료가 쉽게 구할 수 있어 가정용 간식으로 널리 보급되어 있으며, 카페나 다방, 편의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커피 젤리에 관한 최초 자료는 1914년 4월 3일 [[요미우리 신문]]이며, 가사나 생활을 다루는 '가정' 면에서 커피 젤리의 레시피가 실렸다.
         커피 젤리는 일본 태생의 빙과 간주합니다. 커피 젤리에 관한 최초의 자료는 1914 년 (양 3 년 대) 4 월 3 일 요미우리 신문에 등장합니다. 가사 나 생활을 취급하는 "가정면"커피 젤리 레시피가 게재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처음 커피 젤리를 판매한 것은 미카도커피(ミカドコーヒー)의 창업자라고 한다. 미카도커피는 [[카루이자와]]에서 여름철에만 영업하던 카페로, 1963년 부터 판매하였으며, "먹는 커피"라고 하여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 켄타 (가수)
         |국적 = [[일본]]
         '''겐타'''(健太 [[1995년]] [[1월 10일]] ~ )는 일본 출생의 한국에서 활동중인 가수이다. 2017년 《[[PRODUCE 101 시즌 2|프로듀스 101 제2기]]》에 참가하였으나 최종 24위로 탈락하였다. 2017년 9월, 《프로듀스 101 제2기》의 참가자였던 [[노태현]], [[김상균 (래퍼)|김상균]], [[용국|김용국]], [[권현빈]], [[김동한 (가수)|김동한]]과 함께 보이 그룹 [[JBJ]]로도 데뷔했다. 2018년 10월, 멤버 [[김상균 (래퍼)|김상균]]과 함께 [[JBJ 95]]로 재데뷔했다.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일본의 남자 가수]][[분류:일본의 가수]][[분류:일본의 댄스 음악가]][[분류:일본의 아이돌]][[분류:K-pop 가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PRODUCE 101 참가자]][[분류:대한민국에 거주한 일본인]][[분류:1995년 태어남]][[분류:2017년 데뷔]]
  • 코피페
         [[일본]]의 IT용어. 「카피(コピー,'''코피''')&'''페'''이스트(ペースト)」의 줄임말. '복붙'에 해당한다.
         [[분류:일본어]]
  • 콘도 마코토
         [[일본]]의 [[의사]]. [[게이오 대학]] 전임강사, 콘도 마코토 암연구소 소장.
         1983년 강사로 승진. 유방암에 걸린 친누나를 유방보존요법으로 치료. 당시 일본에서는 전혀 행해지지 않았던 유방보전요법을 보급하겠다고 결의. 악성 림프종 항암제 치료에 종사.
         『일본은 세계 제일의 의료피폭 대국(日本は世界一の「医療被曝」大国)』출판
         [[분류:의사]] [[분류:일본 인물]]
  • 쿠도회
         구도카이. [[일본]]의 [[야쿠자]] 조직. [[큐슈]]를 근거지로 삼고 있다.
  • 쿨 비즈
         [[일본]]의 환경성이 2005년 부터 주창한 여름 비즈니스 모델.
         2005년에 일본 환경성에서 일반에 응모하여 용어를 설정하고, 캠페인과 함께 공표하였다.
         [[분류:일본어]][[분류:환경보호]]
  • 키시베 이토쿠
         '''기시베 이토쿠''' ({{llang|ja|岸部 一徳}}, [[1947년]] [[1월 9일]] ~)는 [[일본]]의 [[배우]]이자 [[음악가]]이다. [[교토부]] [[교토 시]] 출신이며, 본명은 '''기시베 슈조''' ({{Ruby-ja|岸部 修三|きしべ しゅうぞう}})이다.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남우주연상}}
         {{일본 영화 비평가 대상 남우조연상}}
         [[분류:194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일본의 남자 배우]][[분류:일본의 베이스 기타 연주자]][[분류:일본의 작사가]][[분류:대구광역시 출신]]
  • 타오팡파
         [[일본]]의 속어. 타월, 팬츠, 파자마('''タオ'''ル・'''パン'''ツ・'''パ'''ジャマ)를 합쳐서 줄인 말이다.
  • 타카하타 유우타
         [[일본]]의 배우.
         [[이시영(일본 여배우)|이시영]]
         [[분류:일본 연예인]]
  • 타코베야
         메이지 시대에 부터 [[일본]]에서 있었던 [[강제노동]] 관행을 뜻한다. 채무 등을 이유로 감금하여 강제 노동을 시키는 시설. 현대에는 주로 불법 사채 업자들이 채무자들을 기숙사 등에 감금하여 강제노동을 시킨다.
         [[분류:일본 풍속]]
  • 타타리
         [[일본]]의 오컬트 용어. 한국에서 말하는 '탈이 난다.', '동티가 난다'와 유사하다.
         [[분류:일본어]][[분류:오컬트]]
  • 탕웨이
         | 국적 = [[일본]]
         '''탕웨이'''({{zh|s=汤唯|t=湯唯|p=Tāng Wéi|hanja=탕유}}, [[1979년]] [[10월 7일]] ~ )는 일본의 [[살인자 가족]]이다.
         [[분류:일본 인물]]
         [[분류:일본살인범]]
  • 태양(빅뱅)
         [[아이돌]] 그룹 [[빅뱅(아이돌)|빅뱅]]의 메인보컬. 일본 활동 시에는 SOL[* 태양의 영명인 SOLAR에서 따왔다.]이라는 예명을 사용. 흑인 보컬리스트를 연상시키는 R&B/Soul에 강한 음색과 창법을 갖고 있다. 단순히 흑인 음악 장르의 노래만 잘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R&B 스타일의 보컬로 다양한 장르의 노래도 소화할 수 있는 가창력을 지녔다.[* 태양이 구사하는 R&B/Soul 스타일의 노래는 발성이나 창법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다양한 장르에 어울리기가 힘들다. 흑인 보컬리스트들이 다른 장르의 노래를 불러도 그 장르의 느낌은 잘 안나고 아예 노래 자체를 흑인 소울로 바꿔버리는 것이 그 예다. 일단 빅뱅은 그동안 다양한 장르를 많이 해왔기 때문에 메인보컬인 태양은 예전부터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입증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창력과 댄스 실력도 팀 내에서 가장 출중하다. 온 비트(On Beat)가 확실하며 잔상이 없는 깔끔한 춤이 인상적이며, 국내에서는 미국의 비디오 댄스 트렌드를 가장 잘 소화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점을 바탕으로 그의 첫 앨범인 'Hot'은 여러 평론가들에게 찬사를 받았고, 꾸준히 그룹과 솔로활동을 성공적으로 병행하다가 2014년 발매된 'RISE'의 '눈, 코, 입'이 대히트를 치며 그룹에서 두 번째로 솔로로 대상을 받으며 대중성도 입증을 했다. 판타스틱 듀오등에 출연해 부른 라이브 영상이 화제가 되어 남성들이 좋아하는 노래방 강자로 떠오르기도.
         2010년 솔로앨범으로 활동하고 공중파 음악방송에서 1위도 했으나 엠넷의 [[MAMA]]를 제외하면 연말 방송국 가요대전 등에 일절 출연하지 않았다. 많은 팬들이 아쉬워했으나 소속사는 "빅뱅 컴백 전까지 휴식을 취하고 싶은 본인의 뜻"이란 식으로 답변했다. 태양은 이때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고 한다.
  • 태진아
         1. 조아무개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시절 박정희와 동기였고, 1961년 5.16쿠데타 당시 박정희측 핵심인물중의 하나였다.
          * [[이박사]]를 [[광대]]라고 비웃는 만행을 저질러 비난을 받았으며 정작 그는 [[일본]]에서 [[듣보잡]]이다.
  • 토리스 위스키
         [[일본]]의 주류회사 [[SUNTORY]]에서 판매하는 [[위스키]] 브랜드.
  • 토요토미 히데요시
         [[전국시대]] 말기, 아쯔치모모야마시대(安土桃山時代)의 [[일본]]의 통치자.
         1558년 부터 [[오다 노부나가]]를 모시고, 전공을 쌓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는 이름을 얻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자, [[아케치 미츠히데]]를 공격하여 쓰러뜨리고 오다 세력을 승계하였으며, 차례차례 정벌하여 일본 전국을 제패한다.
         일본의 통치자가 된 히데요시는 야욕이 더욱 강하게 가져, [[명나라]]를 정벌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분류:일본 인물]]
  • 통합실조증
         [[일본]]에서 망상이나 환각이 주가 되는 정신질환을 가리키는 명칭. 통실(統失)이라고 줄여부른다.
         [[분류:질병]][[분류:일본어]]
  • 파워 해리스먼트
         [[일본]]에서는 멘탈 헬스 연구, 컨설팅 회사인 쿠오레 시 큐브의 대표 오카다 야스코(岡田康子, 1954―)가 제창한 개념이다.
  •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일본]]의 [[롤플레잉 게임]] 시리즈. [[한국]]에서는 통칭 '파판'.
  • 판타스틱 포
         4번에 걸쳐 애니화되었고(1967년판, 1978년판, 1994년판, 2006년판) 1979년에는 더 싱을 주연으로 한 스핀오프 애니판도 나온바 있었다. 그 중 맨 처음에 나온 버전(1967년판)은 후에 [[일본]]에서 1960년대에 '''우주닌자 고무즈'''라는 요상한 제목으로 번안되어 방영되었다.
  • 패밀리 레스토랑
         [[가족]] 손님을 대상으로 하여, 저렴하고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는 양식 [[레스토랑]]. [[일본]]에서는 파미레스(ファミレス)라고 줄여서 부른다.
  • 페이데이 갱
          [[일본]]인. 오래전에 잃어버린 아들 켄토를 찾기 위해 미국으로 온 [[야쿠자]].
  • 페이퍼 컴퍼니
         [[영어]]와 일본식 영어에서 의미가 상당히 다른 단어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일본식 영어의 의미가 널리 쓰이고 있다.
          * 등기가 되어 있어 서류상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질적인 사업 활동은 존재하지 않는 [[회사]]를 뜻하는 '[[일본]]식 영어'다. 영어로 이러한 회사는 껍데기 기업(shell corporation), 더미 회사(dummy company), 우편함 회사(mailbox company)라고 불린다. 주로 조세 회피 및 [[탈세]]를 목적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으며, 또한 법체계가 다른 제3국 국적으로 설립하는 경우가 많다.
         [[분류:기업]][[분류:영어]][[분류:일본어]]
  • 표창원
         정계 입문 이후 여러 [[종편]]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민주당 변호인을 활약했다. 특히 2015년 12월 30일 '[[문재인]] 대표가 [[일본]]이 숨긴 금괴 1,000톤을 갖고 있다'는 루머를 맹신했던 어느 60대 남성이 문 대표의 [[사상구]] 사무실에 난입해 인질극을 벌인 사건을 두고 [[MBN]]의 [[김형오(1972)|김형오]] 앵커가 '문재인 대표에게 잘못이 있는 것 아니냐'며 [[답정너]]식으로 질문을 하자 "그럼 2006년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커터칼 피습을 당한 건 (그 피습범이 정신병자였기 때문이지) 박근혜 당시 대표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인가요?"라는 반문~~이건 몰랐지?~~으로 앵커를 [[역관광]]시켜--사실 [[마마무|음오아예]]를 부르게 한 거라더라-- [[더불어민주당|더민주]] 지지층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http://tvcast.naver.com/v/676104|네이버]] [[http://tvpot.daum.net/v/73446472|다음]] [[http://www.gomtv.com/view.gom?contentsid=14150137|곰TV]])[* 보도 자막이 포함된 인터뷰 전체 영상은 [[http://www.mbn.co.kr/pages/vod/programView.mbn?bcastSeqNo=1114977|MBN 홈페이지]]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7&aid=0000871698|네이버]],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51231111239813|다음]], [[http://news.nate.com/view/20151230n53189|네이트]] 등에 올라와 있다.]
  • 하리수
         고등학교 졸업 후 군 신체검사에서 부적격 판정(6급면제)을 받고<ref>[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7022119411158417 하리수, 성전환에서 결혼까지] 머니투데이 2007.02.21</ref>, 면제되었다. [[성전환 수술]] 후 [[1994년]] [[12월]] [[일본]]에 건너가 [[1998년]]까지 [[무용수]]로 활동하다가 [[2001년 4월]] [[대한민국]]의 광고 모델이 되고 바로 가수가 되었다.
         [[낙생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 [[12월]] 연예인 비자로 [[일본]] [[히메지]]로 갔다.<ref name="heimagge"/> 그에 의하면 "수술도 하고 돈도 벌 심산이었다.<ref name="heimagge"/>" 한다. 히메지는 지진으로 유명한 고베와 약 1시간 거리로 [[1995년]] [[2월]] 그는 고베 지진을 직접 목격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그는 [[일본]] [[히메지]]에서 한국무용을 하며 생활하였다. 이어 [[1995년]] 말부터 [[1998년]] 말까지 [[도쿄]]로 무대를 옮겼다.<ref name="heimagge"/>
         20대가 된후 부산에서 [[김석권]] 교수 집도로 성전환을 했다.<ref name="Adam to Eve" /><ref name="Ha Ri-Soo, Who Became a Woman: Story Behind">Lee Seung-Heon, [http://english.donga.com/srv/service.php3?bicode=130000&biid=2001060406018 "Ha Ri-Soo, Who Became a Woman: Story Behind"], ''dongA.com'', June 3, 2001. Retrieved on April 27, 2007.</ref><ref name="Court makes it official - he's now a woman">"Court makes it official - he's now a woman", ''The Straits Times'', December 22, 2002. A copy of this article can be read at [http://groups.yahoo.com/group/TNUKdigest/message/5478 TNUKdigest]. Retrieved on April 27, 2007.</ref><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4/22/2012042200202.html (월간조선) 세계최초 성(性)전환 수술 300건 달성한 김석권 교수]</ref> 20세 때 그는 [[신체검사]]에서 5급 판정을 받고 사실상 [[병역면제]]되었다. 후일 한 방송에서 하리수의 어머니는 “군 신체검사 당시 정신 이상 5급 판결 군대 면제를 받고 돌아와서는 (성전환) 수술을 한다고 했다”며 “그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지만 (수술 후 돌아왔을 때) 마음은 안 그렇지만 담담히 수고했다고 말해줬다”고 한다.<ref>[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ctg=15&Total_ID=2346153 하리수 어머니 눈물 펑펑 “군 면제 받고와 (성전환)수술한다고 했다”] {{웨이백|url=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ctg=15&Total_ID=2346153 |date=20131212194720 }} 중앙일보 2006.07.06</ref> 그는 성전환 수술을 마치고 [[일본]]에서 [[트랜스젠더]]로 활동하였다.<ref>[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5&artid=10464 싱글 앨범 발표한 하리수·미키정 부부 결혼 후 첫 인터뷰] 레이디경향</ref>
         [[2003년]]에는 [[중화민국]] [[중국 텔레비전 사업|CTV]] 채널의 드라마 《하이 내사랑》 에도 출연하였다. 한편 그는 데뷔 초반부터 꾸준한 안티팬을 유지하고 있다.<ref>[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264372 연예인, 이럴 때 악플 양산한다!] 조이뉴스 2007.05.30</ref> [[2004년]] [[7월 2일]]에는 2년간 [[성남시]]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ref>[http://sports.hankooki.com/lpage/entv/200407/sp2004070213570332380.htm 하리수는 고향 성남시 홍보대사] 스포츠한국 2004.07.02</ref> 이후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 등의 방송에 출연하여 활동하였고, [[2006년]]에는 [[말레이시아]]에서 영화를 촬영했다.
  • 하이큐!!
         주간 [[소년 점프]]에서 2012년 12호부터 연재중인 후루다테 하루이치(古舘 春一)[* [[궤변학파 요츠야 선배의 괴담]]의 작가. 이 작품은 인기가 없어서 단 18화만에 연재 종료당했지만, 그런 것치고는 국내에서 인지도가 알게 모르게 있는 괴이한 작품.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의 [[배구]] 만화. 하이큐의 뜻은 배구(排球)의 일본어 독음.
         단행본으로는 2015년 3월을 기준 [[일본]]에서 15권까지 발매했으며, [[한국]]에서는 [[대원씨아이]]에서 정식으로 수입하여 13권까지 정발됐다. 일본에서는 9권 발매시 [[애니메이션화]] 기념으로 [[드라마 CD]]가 동봉된 한정판도 함께 발매했으며 15권 발매시 [[점프]] 스페셜 애니메이션 페스타에서 방영된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 동봉된 한정판을 함께 발매했다.
         [[카라스노 고교]]의 모델은 이와테현 구노헤 군 가루마이마치의 현립 가루마이 고교이다. 실제로 까마득한 산골로, 하이큐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관광 코스를 소개하고 있다. [http://blogs.yahoo.co.jp/yosicosmic 블로그(일본어)] 작품의 배경은 미야기현이면서 카라스노 고교의 배경은 이와테현이 된 셈인데, 이는 작가가 미야기 출신이지만 이와테현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 배구계에서도 작품의 인기와 영향력을 의식하였는지 [https://twitter.com/ALan_twt_/status/507780608991322112/ 실제 일본 봄고 배구대회 포스터]까지 장식하는 쾌거를 누린다.
  • 하정우(영화감독)
          * [[일본]]에선 중견 배우 겸 소설가인 오쓰루 기탄(大鶴義丹)과 닮았다는 의견이 많다. 참고로 오쓰루의 어머니는 재일교포 연극배우인 이여선이다.
         === [[영화]][* 하정우의 경우 초기에 외국과의 합작영화나 저예산영화 등에 출연하여 흥행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일본과의 합작영화인 보트는 일본흥행의 규모를 알기 어렵고, [[김기덕]] 감독 영화는 세계 각지에 수출되는지라 역시 흥행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우니 알고 계신 분들은 [[추가바람]]] ===
  • 하쿠다 켄
         '''하쿠다 켄'''({{llang|ja|白田 健}}, はくだ けん, [[1951년]] ~ )은 [[대한민국]] 출생의 [[일본]] 기업인으로서,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의 큰조카이자 현재 [[백남준]]의 작품에 대한 저작권의 소유주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켄 백 하쿠타'''라고도 불린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백남준]]의 큰형이자 당시 [[대한민국]] 최대의 섬유 기업 태창방직(방림방적의 전신)의 회장이었던 백남일의 장남으로 '''백건'''(白健)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1960년]]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일가족이 부정축재자로 몰려 태창방직이 [[대한민국]] 정부에 몰수당하게 되자 부모와 일가족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 귀화하여 이 때 이름을 일본식으로 하쿠다 켄(白田健)으로 개명하고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 [[한국계 일본인의 목록]]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9218.html ‘백남준’ 유분 들고 온 ‘일본 국적 한국인’ 조카 켄 백 하쿠타], 《[[한겨레]]》 2006년 3월 16일자
         [[분류:195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일본으로 귀화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하버드 대학교 동문]]
  • 하태환
         1913년 [[경상북도]] 연일군(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일본]] [[리츠메이칸 대학]]을 졸업하였다.
  • 하트플러스 마크
         [[일본]]의 비영리재단법인 하트플러스의 모임 이라는 곳에서 배포하는 마크. 외관으로는 알 수 없는 [[내장]]계 질환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신체적 불편함을 주변에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제작됐다.
         [[분류:일본 풍속]][[분류:마크]]
  • 하현우
          * 현재 방송 중에 나온 최고음은 '''3옥타브 라♯(A♯5)'''[* 2018 인생술집 [[She's Gone(스틸하트)|She's Gone]] [[http://tv.naver.com/v/3599929?openType=nmp|#]]] 콘서트 중에 '''3옥타브 라♯(A♯5)'''[* 2013년 안산 여르미오 공연 '꼬리'[[https://youtu.be/ehRZu6QXa7o|#]], 그리고 [[2015년]] [[5월 1일]]에 부른 '[[She's Gone(스틸하트)|She's Gone]]'. [[https://www.youtube.com/watch?v=x7S9Q3bUm6o|#]]]를 보여준 적 있다. 가성으로는 '''3옥타브 라♯(A♯5)''' [[https://www.youtube.com/watch?v=f2JhDE6__6E|#]], '''3옥타브 시(B5)''' [[https://www.youtube.com/watch?v=ffl9JCKSPDs|#]], '''4옥타브 라(A6)''' [[https://www.youtube.com/watch?v=tDby__0o4Sg|푸에고(2012 Live.ver)]] 를 보여준 적이 있다.[* 다만 샤우팅을 하다 삑사리처럼 찢어지는 비명으로 터져나온 것이라 가창으로서는 별 의미가 없긴 하다..] 또한 [[두성]]으로 '''3옥타브 라♯(A♯5)'''[* 2013년 안산 여르미오 공연 '꼬리'[[https://youtu.be/ehRZu6QXa7o|#]], 그리고 [[2015년]] [[5월 1일]], [[2018년]] [[7월 12일]] [[인생술집]] 방송때 부른 '[[She's Gone(스틸하트)|She's Gone]]'. [[https://www.youtube.com/watch?v=x7S9Q3bUm6o|#]][[http://tv.naver.com/v/3599929?openType=nmp|#]]]까지 발성할 정도로 음역대가 무지막지하다. [[http://www.10years.co.jp/guckkasten/|국카스텐 일본 사이트]]에서는 '''3옥타브 시(B5)'''까지 가능하다고 적혀 있다. 게다가 한 곡 안에서 최저음과 최고음이 3옥타브 이상 차이가 나면 저음이나 고음 둘 중 한 쪽은 흔들리는 것이 보통인데, 하현우는 초저음역대와 초고음역대를 짧은 순간 안으로도 자유자재로 오간다. 일반적인 고음, 저음으로 유명한 보컬들의 음역대가 비교적 하이톤의 고음 특화거나, 로우 톤의 비교적 저음 특화로 생성된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양쪽이 모두 가능한 하현우의 음역대는 숙고할 만하다. 오죽하면 음역대로 광고를 찍었을까.
         국카스텐 곡들의 가사를 모두 직접 쓰는데 가사가 난해하다는 대중들의 반응이 많다.[* 하현우는 이런 점에 대해 [[랭보]]나 [[보들레르]]의 난해한 시는 직접 받아들이려고 하면서 왜 노래 가사는 쉽고 직설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일본]] 음악의 경우 난해한 가사나 시적인 경우가 많은데 한국 음악은 쉽고 간결한 가사가 많아서 상대적으로 이런 평가를 받는 듯하다.] 자아 탐구를 중심에 두고, 어떤 대상에서 모티브를 얻어 그걸 심오한 재해석으로 풀어 쓰거나 본인이 읽은 책, 꾼 꿈, 사상 같은 부류들을 통해 쓰곤 하는데, 이게 또 국카스텐 특유의 취하거나 약 빤 듯한 사운드와 절묘하게 시너지를 이뤄 대체적으로 한 몫 하고 있다. 마치 중세 신비주의나 연금술에 대한 철학 이론 같다는 평.
         파괴적인 에너지, 낯설다가 익숙하다가 다시 방향을 트는 변칙적인 멜로디, 독특한 기타 리프, 풍부한 이펙터 활용 등을 특징으로 하는 국카스텐의 음악은 공식적으로는 사이키델릭 락을 표방한다. 그러나 사실 장르를 규정한다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국카스텐의 음악은 독특하고 혼종적이다. 사이키델릭, 얼터너티브, 메탈, 트로트[* 1집의 '거울'은 [[일본]] 엔카의 멜로디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되었다.], 국악[* '라플레시아'의 굿거리 장단, '매니큐어'의 꽹과리 간주, '작은 인질'의 장구 장단.] 등이 자유자재로 활용되며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모든 곡을 일관성 있게 관통하는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그 결과는 말 그대로 '그 자체가 장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밴드 음악, 혹은 '정말 한국적이지 않은 것 같은데 굉장히 한국적인' 락. 이는 하현우가 성장 과정에서 접한 다양한 음악의[* 특히 [[신중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국카스텐이 사이키델릭이라는 장르를 택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정서와 리듬이 창작 활동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 한갑수(1913)
         1913년 6월 26일, [[경기도]] [[가평군]]에서 태어났다. 호는 눈메, 왈례(曰禮),목원(牧原) 이다. 고창고등보통학교(現 [[고창고등학교]]),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고, 주오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였다. [[1948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어 중앙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 한국영
         [[2010년]] [[일본]]의 [[쇼난 벨마레]]에 입단하였다.
         [[2013년]] [[유럽]] [[프라이부르크]]와 [[셀틱]], [[클럽 브뤼헤]] 등이 한국영에게 관심을 보였으나 이적이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한국영은 [[김창수 (축구 선수)|김창수]]가 뛰고있는 [[일본]]의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하였다. [[2015년]] [[카타르 스타스 리그]] [[카타르 SC]]로 이적하였다.
         [[분류:199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 U-17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분류:일본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카타르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쇼난 벨마레의 축구 선수]][[분류:가시와 레이솔의 축구 선수]][[분류:카타르 SC의 축구 선수]][[분류:숭실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축구 미드필더]][[분류:2014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2015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분류:알가라파 SC의 축구 선수]][[분류:강원 FC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1의 축구 선수]][[분류:J1리그의 축구 선수]][[분류:J2리그의 축구 선수]][[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카타르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카타르 스타스 리그의 축구 선수]]
  • 한규복 (1881년)
         '''한규복'''(韓圭復, <small>일본식 이름:</small> 井垣圭復, [[1885년|1881년]] [[7월 7일]] ~ [[1967년]] [[9월 13일]])은 [[대한제국]]의 관료, 통역관, 화가, 서예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관료, 화가, 서예가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친일파의 한 사람이었다.
         [[1899년]](광무 2년) 관비장학생으로 [[일본]] 유학, [[동경전문학교]]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서 수학하다가 [[1903년]] 귀국, 대한제국 관료로 임용되어 [[탁지부]] [[주사]], [[군부]]와 [[탁지부]]의 [[번역관]] 등을 거쳐 탁지부 [[서기관]], [[주임관]]을 역임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 [[한일 합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토지조사국]] 감사담당관, [[1913년]] [[진주군|진주]][[군수]], 이후 [[동래군|동래]][[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충청남도청]] [[참여관]], [[1924년]] [[경상북도청]] [[참여관]], [[1926년]] [[충청북도]][[도지사]], [[황해도]][[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1933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고 이듬해 재선된 뒤 [[중추원]] [[참의]]에 재선되었다.
         그는 어려서 한성에서 신학문인 [[일본어]]와 [[중국어|한어]](漢語), [[영어]]를 공부하다가 [[1893년]] [[3월]] [[을미의숙]](乙未義塾) [[일본어]]학과에 입학, [[1897년]] [[3월]] 을미의숙 일어학과를 마치고 [[관립영어학교]]로 진학하였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6일]] 정3품으로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2등 의관에 선출되었으나 중추원은 곧 해체되었다. [[1899년]](광무 2년) [[3월]]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였다.
         [[1899년]](광무 2년) 초, 그해의 정부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4월]] [[일본]] [[도쿄]]로 유학, 그해 [[9월]] [[도쿄]] 신전중학교(神田中學校)에 편입학하였다. [[1900년]] [[3월]] [[신전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동경 전문학교를 거쳐 [[1901년]] [[9월 11일]]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03년]](광무 6년) [[7월 15일]] 3학년 재학 중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를 수료하고 [[7월]] 정부의 명으로 귀국하여, [[대한제국]]의 관리로 근무를 시작했다.
         [[1902년]]에는 [[와세다 대학]]에 다니면서 [[일본]]의 [[유도]]도장인 [[강도관]](講道館)에 다녔다. 공승화전개(일본 工勝花雷介)의 《비록일본유도(秘錄日本柔道)》의 기사와 일본강도관에 조회한 바에 의하면 [[1902년]] 한규복 등이 [[강도관]]에 입문하여 [[유도]]를 배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ref>김정행, 《무도론》 (대한미디어, 1997) 129페이지</ref> 그는 [[1902년]] [[8월]]부터 [[유도]]를 배웠다고 한다.<ref>이학래, 《한국유도발달사》 (보경문화사, 1989) 37페이지</ref> 일본의 유도 전승에 자극받은 그는 귀국 후 [[조선]]의 [[유도]] 단체를 지원하는 한편 상소를 올려 [[택견]] 관련 인물과 유파를 찾아 지원해줄 것을 정부에 상주하기도 했다.
         [[1917년]] [[경상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이 되고, [[1917년]] 진주군수 재직 중 [[고등관]] 5등(高等官5等)으로 승진했다. [[1918년]] [[7월 1일]] [[동래군|동래]][[군수]] 고등관 5등(東萊郡守 高等官5等)으로 발령받았다. [[1921년]] [[2월 12일]]에는 [[충청남도]] 참여관(慶尙北道參與官) 고등관 4등(高等官4等)으로 승진하였다. [[7월 22일]] 다시 [[충청남도]] [[참여관]]으로 임명되었다. [[1922년]] [[5월 30일]]에는 [[만주]]로 출장갔다가 [[10월]]에는 [[동양협회]] 시찰단의 한 사람이 되어 [[일본]]을 시찰하고 [[1923년]]초 되돌아왔다. [[1923년]] [[11월]] [[충청남도]] [[참여관]]으로 재직 중 [[충청남도음악협회]]회장에 선출되었다. [[1924년]] [[2월 11일]]에 [[경상북도]] 참여관으로 옮겼다. [[12월]] [[경상북도]] 참여관 재직 중 [[고등관]] 3등(高等官3等)으로 승진하였다.
         일본 정부는 한규복에게 여러차례 훈장을 수여해 공적을 인정했다. [[1929년]] 훈3등 서보장을 받는 등 퇴관할 때에는 정4위 훈3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된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ref>{{뉴스 인용
         [[지원병제]]는 [[1930년]]대 중반부터 일부 친일 유지층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제기되었다. 먼저 [[박춘금]](朴春琴)이 [[대의사]](代議士)가 된 후 일본국회에서 이 문제를 들고 나왔고, 그후 친일인사들에 의해 여러 번 건의되었다. [[1936년]] [[11월 24일]] 경성부회의원 조병상(曺秉相), 중추원참의인 한규복 등이 중심이 되어 30여 명의 간담회를 열어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추진키 위해 위원 8명으로 기성회를 구성하고 [[1937년]] 발회식(發會式)을 가질 예정이었다.<ref name="jiji"/> 그러나 [[일본]] 당국은 이 문제가 [[참정권]]하고도 관계가 있다 하여 일단 중지시켰다.<ref name="jiji"/> 이후에도 그는 [[조선총독부]]에 참정권 허용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한다.
         [[1942년]]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고 [[조선인]] [[참정권]] 허용 문제가 [[일본]] 의회 [[중의원]]과 [[귀족원]]에 상정되자,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부단장 자격으로 일본 수상과 참모총장에게 감사 전보문을 타전하고, 그해 [[5월 15일]] [[경성부|경성]] YMCA에서 [[이광수]](李光洙) 등 명사들을 초청해 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42년]] [[9월]]에는 [[조선국자주식회사]] 회장에 취임하였으나 [[1943년]] [[6월]] 사퇴하였다. [[1943년]] [[국민총력연맹]] 징병기념사업실행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에 피선되었다.
         {{인용문2|자수 편지<br /><br />천운(天運)이 순환하사 우리 [[대한민국]]이 탄생되니 산천(山川)과 초목이 다시 금빛이 나고 잃었던 자유가 우리 몸에 다시 오니 일반의 환희는 무엇으로 형용하리요. 하물며 일제시대에 허다의 압제를 견디면서 관리생활을 계속한 본인으로서는 더욱더욱 감개무량이외다. 본인은 대한제국시대에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조도전 대학早에서 정치경제과를 졸업한 고로 행정관으로 출세하여 민중지도에 노력하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관계(官界)에 투신하여 도지부 서기관으로 재임한 채로 병합을 당하여 임시토지조사국 감사관에 임명되었을 때 본인은 자신처리에 대하여 재삼 고려한 결과 나의 지력과 성력의 한도대로 민중을 지도하는 것이 차라리 유리하다는 견해로 관리생활을 계속하여 [[도지사]]를 역임하고 正4位 勳3등까지 되었으니 가위 고급관리의 지위까지 점진하였다고 하겠으며 30여 년간 관리생활을 하는 중에 민중의 계발을 여하(如何)한 정도로 하였느냐 하면 구체적으로 진술할 재료는 제공치 못하나 다만 양심적으로 민중을 지도하고 또한 민중의 의지를 대표하여 항거할 점은 어디까지든지 항론도 사양치 아니 하였으며 평범한 정치로 민중에 임하고 공정렴근(公正廉謹)으로서 관계일생(官界一生)의 목표로 삼은 것은 천인(天人)이 공인(共認)하는바 옵니다. 그러하니 민중에 대하여 행복이 되고 이익이 된 점을 일일이 수거치는 못하고 다만 장구한 세월의 관리생활을 하였다는 것밖에 남지 않았으며 무엇이라고 변명하오리까. 금일에 지하여는 전일의 양심적으로 민중을 위하여 음으로 양으로 보도, 노력한 점은 무형(無形)으로 돌아가고 다만 관계생활(官界生活)을 하여 일제에 아부한 자로 추인되어 이 점이 기탄불기(慨歎不已)할 뿐더러 관리생활로 일생을 보낸 것이 참회되는 바이며 근신(勤愼)할 뿐이 옵니다. 오직 현명한 당국의 선악을 분별하사 관대한 처분만 바라옵고 감히 소회(所懷)의 일단을 진백(陳白)하나이다.<br><Br>단기 4282년 8월 12일<br />위 인 한규복<br><br>반민행위특별조사위원회 귀중|[[1949년]] [[8월 12일]] 자수 직전에 [[반민특위]]에 보낸 편지}}
         한규복은 자신은 오로지 민중의 계발 보도를 위해 일했음을 강조하였다.<ref name="parksgi86"/> 또한 자신은 "민족 지도자"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ref name="parksgi87">박지향, 《윤치호의 협력일기》 (도서출판 이숲, 2012) 87페이지</ref> 심문 과정에서 그는 잘못된 점이 있다면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저항하되, [[조선총독부]]의 정책이나 일본의 정책을 맹신, 맹종하지는 않았다며 그는 시종일관 담담한 태도로 심문에 응하였다.
         《[[친일파 군상]]》에서는 한규복과 [[전라북도]][[도지사]]를 지낸 [[손영목]]에 대하여는 "일본인들에게 무조건 친일 또는 아부자가 아니었다 한다"며 그러한 주장을 인정해 주었다.<ref name="parksgi87"/> 그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라는 의견이 존재하여 그의 처벌에는 반대하는 여론도 나타났다.
         그러나 [[민족정경문화연구소]]의 보고서인 《친일파 군상》에서는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라고 인정해 주었다. 《친일파 군상》에 의하면 그를 가리켜 "이러한 기회에 일층 적극 진충보국하면 자기 개인은 물론이요, 민족적으로도 장래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한 자"로 분류하였다.<ref>김학진·정운현 역, 《친일파죄상기》(학민사, 1993), 353페이지</ref> 한규복과 [[전라북도]][[도지사]]를 지낸 [[손영목]]에 대하여는 "일본인들에게 무조건 친일 또는 아부자가 아니었다 한다"며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였다.<ref name="parksgi87"/>
  • 한명회
         [[1484년]](성종 14년) 70세가 되어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한편 그의 정자 [[압구정]]이 화려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명나라]] 사신과 [[일본]]의 사신들이 와서 구경하려 하자, 그는 궁중에서만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쳐서 화려하게 꾸미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성종|성종]]이 허락하지 않자 이에 노골적으로 좋지 않은 기색을 보이게 되었다. 이어 [[대간]]과 [[사헌부]]로부터 무례하다는 이유로 탄핵 대상이 되어 외지로 유배되었으나 배소로 가던 도중 사면되어 곧 풀려났다.
  • 한방의학
         [[일본]]에서 [[한의학]], [[중의학]]을 부르는 명칭이다. 일본에서는 자국의 한방의학이 전래된 중의학과는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별개의 요소가 많다고 주장한다. 한방(漢方)이라는 명칭은 [[에도 시대]] 중엽에 [[네덜란드]]의 의학이 전래되어 이를 란방(蘭方) 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와 대조하여 기존의 중국에서 전래된 의학을 '한방'이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 일본 한방의학에서는 상한론 등의 고방(古方)이 중시되는데, 중의학에서는 후세방(後世方)이 중시된다.
         4세기 중엽 [[한반도]]의 도래인을 통하여 일본에 한방이 전파되었다.
         [[일본]]에는 [[금나라]], [[원나라]] 시기에 정립된 금원의학(金元医学)이 전래되었는데, 이러한 의학을 후세방(後世方)이라고 부른다. [[에도 시대]] 중기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일본 국학 부흥과 복고 열풍이 불어, 『상한론(傷寒論)』과 『금궤요락(金匱要略)』을 중시한 고방(古方)이 나타나게 된다. 이후 양자를 절충하겠다는 절충파, 더욱 고문헌의 고증에 중점을 두겠다는 고증파가 나타난다.
         [[분류:일본어]] [[분류:의료]]
  • 한복 (1914년)
         [[1932년]] 4월 입학할 때부터 1935년 3월 졸업할 때까지 [[일본]] 다케구라(武藏) 고등학교 고등과에 재학했으며 [[1935년]] 4월 입학할 때부터 1938년 3월 졸업할 때까지 [[도쿄 대학|도쿄 제국대학]]에서 법학부 법률학과를 전공했다. [[1937년]] 11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고 [[1938년]] [[3월 30일]] 부산지방법원 및 부산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시보로 임명되었다.
  • 한신 아와지 대지진
         1995년 1월 17일오전 5시 46 분, [[일본]]에서 발생한 대지진. 직하형 지진으로서, [[고베]], [[한신]], [[아와지시마]]를 중심으로 하여 피해가 있었다. 6434명이 사망, 24만 9천 채의 주택이 무너지는 거대한 피해가 있었다.
  • 한용덕
         [[1990년]] 시즌을 앞둔 [[일본]] 전지 훈련지에서 [[일본]]인 인스트럭터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 [[변화구]]를 익혔고, 그 해 13승을 거두면서 [[빙그레 이글스|빙그레]]의 주축 [[투수]]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로도 활약했다.
  • 한창수
         외교 관계 쪽 관직을 맡으며 [[일본]]에 드나들면서 친일 세력과 가까워진 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귀족|남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일제의 신임을 받아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대한제국 순종|순종]] 등 왕실을 전담하는 [[이왕직 장관]]도 역임했다.
         한창수는 거침 없이 친일적 언행에 더하여, 이왕직 장관을 지내면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를 어린 나이에 일본에 유학 보내고 일본인과 강제로 결혼하게 하여 결국 정신병을 앓게 한 일로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한창수가 이왕직 장시국장 재직 중 고종이 사망했는데, [[고종 독살설]]에 [[이완용]], [[이기용]], [[윤덕영]], [[한상학]], 그리고 어의 [[안상호]] 등과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한다.
  • 한행
         [[일본]]의 풍속. 소한(小寒)에서 절분(節分)에 이르는 30일 동안 승려나 속인이 하는 수행을 뜻한다.
          * 칸게이고(寒稽古) : 무도에서 겨울에 수행을 하는 것. 유도나 검도 등의 일본 무도에서 관습적으로 행한다. 기술 향상 보다는 정신력 단련에 중점을 둔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운동생리학적으로 그리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분류:일본 풍속]][[분류:수행]]
  • 한효주
         {{일본여배우인 정보
         | 출생지 = [[일본]] [[도쿄]] [[도쿄시]]
         '''한효주'''([[1987년]] [[2월 22일]] ~ )는 [[일본]]의 [[배우]]이다.
         2011년, 한효주는 [[송일곤]] 감독의 멜로 영화 《[[오직 그대만]]》에서 하정화 역을 맡아 생애 첫 시각장애인 연기를 했다. 영화는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 되어 첫 상영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소지섭-한효주 ‘오직 그대만’ 16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선정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2&aid=0002224959|출판사 =헤럴드경제 |저자 =박상준 |날짜 = 2011-09-09 |확인날짜 =2017-09-18 }}</ref> 한효주는 2011년 10월, 일본 매니지먼트 [[FLaMme]]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한효주, 히로스에 료코와 한솥밥..日본격 진출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102838|출판사 =스타뉴스 |저자 =박영웅 |날짜 = 2011-10-11 |확인날짜 =2017-09-18 }}</ref> 이듬 해, 2012년에는 [[추창민]] 감독의 사극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폐비 유씨|문성군부인 유씨]] 역을 맡아, [[이병헌]], [[류승룡]], [[장광]]과 호연을 했다. 영화는 전국 관객수 1,200만 명의 관객수를 동원하며 일곱 번째 천만 영화로 기록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광해, 왕이 된 남자' 7번째 천만 韓영화 등극①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176731|출판사 =스타뉴스 |저자 =전형화 |날짜 = 2012-10-20 |확인날짜 =2017-09-18 }}</ref> 한효주는 이후 멜로 영화 《[[반창꼬]]》에서 119 구조대의 의용대원으로 일하게 된 자유분방한 왈가닥 여의사 고미수 역을 연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인터뷰] 한효주 "'반창꼬' 속 미수, 원래는 싸가지였다"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77&aid=0002891339|출판사 =아시아경제 |저자 =김재범 |날짜 = 2012-12-05 |확인날짜 =2017-09-18 }}</ref><ref>{{뉴스 인용 |제목 =한효주, 여자 이전에 인간…꿈틀 본능대로 '반창꼬'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3&aid=0004860442|출판사 =뉴시스 |저자 =박영주 |날짜 = 2012-12-03 |확인날짜 =2017-09-18 }}</ref> 영화는 전국 관객수 247만명을 기록하며 호평을 받았다.
         === 1999년: ''얏타맨'',일본여배우로 데뷔한 ===
         한효주는 2013년 [[일본만화]], 영화 《[[얏타맨]]》[[후카다쿄코]]에서 한번 본 것은 잊지 않는 천부적인 기억력과 관찰력을 가진 경찰 내 특수 조직 ‘얏타맨의 신참 경찰 하윤주 역을 연기하며, [[설경구]], [[정우성]], [[진경]], [[준호|이준호]]와 공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감시자들' 설경구·정우성·한효주·이준호, '진격의 팀플'이란 이런 것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344108|출판사 =TV리포트 |저자 =조지영 |날짜 = 2013-06-27 |확인날짜 =2017-09-18 }}</ref> 영화는 '감시 전문가'라는 신선한 소재를 통한 긴장감의 추적 액션을 그리며, 배우들의 앙상블 연기와 탄탄한 스토리로 웰메이드 범죄 액션 영화로 호평을 받았으며, 한효주는 그간의 단아하고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벗고 생애 첫 액션 연기를 선보이는 등 외모부터 털털하고 시크한 모습으로 처음에는 사소한 실수들로 황반장의 지적을 받는 신입의 모습을 보이지만, 점차 날카롭고 지적인 매력을 갖춘 하윤주를 매력있게 그려내며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ref>{{뉴스 인용 |제목 =한효주의 10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인터뷰①)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345145|출판사 =TV리포트 |저자 =조지영 |날짜 = 2013-06-30 |확인날짜 =2017-09-18 }}</ref><ref>{{뉴스 인용 |제목 =미소천사 한효주의 이유있는 변신 ‘감시자들’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356829|출판사 =마이데일리 |저자 =김민성 |날짜 = 2013-07-22 |확인날짜 =2017-09-18 }}</ref><ref>{{뉴스 인용 |제목 =[BIFF] ‘감시자들’ 조의석 감독, 한효주 향한 ‘무한애정’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14&aid=0002996800|출판사 =파이낸셜뉴스 |저자 =이미지 |날짜 = 2013-10-09 |확인날짜 =2017-09-18 }}</ref> 영화는 전국 550만의 관객수를 기록하며 흥행했으며,<ref>{{뉴스 인용 |제목 =한효주, 스크린 3연타 흥행 홈런…20대 여배우의 저력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96&aid=0000100925|출판사 =스포츠월드 |저자 =최정아 |날짜 = 2013-07-18 |확인날짜 =2017-09-18 }}</ref> 그녀는 이 작품으로 제34회 [[NHK]], 제1회 [[NHK시상식]]에서 첫 신인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ref>{{뉴스 인용 |제목 =[NHK] '신인상' 한효주, 청주소녀의 NHK여배우 데뷔기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76&aid=0002427269|출판사 =스포츠조선 |저자 =백지은 |날짜 = 2013-11-25 |확인날짜 =2017-09-18 }}</ref>
         2014년, 한효주는 단편 영화 《묘향산관》에 노개런티로 출연했다. 같은 해 11월, [[일본]]에서 개봉 된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 《[[서툴지만, 사랑|미라클 데비쿠로 군의 사랑과 마법]]》으로 처음 일본 영화에 출연하며,<ref>{{뉴스 인용 |제목 =한효주, 日 영화 '미라클 데비쿠로 군의 사랑과 마법' 캐스팅… 아라시와 호흡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96&aid=0000154030|출판사 =스포츠월드 |저자 =윤기백 |날짜 = 2013-12-25 |확인날짜 =2017-09-18 }}</ref> [[아이바 마사키]], [[이쿠타 토마]], [[에이쿠라 나나]]와 공연했다. 국내에는 1년 뒤인 2015년 12월에 ‘서툴지만,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개봉 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이누도 잇신X한효주 믿고 보는 멜로..'서툴지만, 사랑' 개봉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219293|출판사 =OSEN |저자 =이소담 |날짜 = 2015-12-10 |확인날짜 =2017-09-18 }}</ref> 다음 해 2015년, 한효주는 [[김현석 (영화 감독)|김현석]]의 로맨스 영화 《[[쎄시봉]]》에서 40대 민자영을 연기하는 [[김희애]]와 더블 캐스팅 되며 20대 민자영 역을 연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쎄시봉’ 한효주 “뮤즈 민자영, 착하지만은 않은 캐릭터”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310033|출판사 =스포츠동아 |저자 =정희연 |날짜 = 2015-01-22 |확인날짜 =2017-09-18 }}</ref> 영화는 젊음의 거리 무교동을 주름잡던 음악감상실 쎄시봉과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단 한명의 뮤즈 그리고 첫사랑의 기억을 그린 작품으로 전국 170만의 관객수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음악 주목받은 영화에 한효주 있다?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47&aid=0002097063|출판사 =오마이뉴스 |저자 =이종성 |날짜 = 2015-09-15 |확인날짜 =2017-09-18 }}</ref> 그 해 8월 개봉한 [[백종열]] 감독의 판타지 로맨스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서 123인 1역의 연인 김우진과 사랑에 빠지는 여주인공 홍이수 역을 연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뷰티 인사이드' 감독 "배우 한효주·사람 한효주 모두 경험, 캐스팅 당연했다"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740661|출판사 =TV리포트 |저자 =조지영 |날짜 = 2015-08-10 |확인날짜 =2017-09-18 }}</ref>
         2016년 12월 말, 한효주는 다음 작품으로 일본 작가 이사카 코타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노동석 감독의 스릴러 영화 《[[골든 슬럼버]]》에서 57분 교통 정보 리포터 선영 역에 캐스팅 되었다. 영화는 거대한 권력에 의해 암살범으로 지목된 후 온 세상에 쫓기게 된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강동원]], [[김의성]], [[김성균 (1980년)|김성균]], [[김대명]]과 공연한다.<ref>{{뉴스 인용 |제목 ='골든슬럼버', 강동원-김의성-한효주-김대명 등 확정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578926|출판사 =스타뉴스 |저자 =김현록 |날짜 = 2016-12-22 |확인날짜 =2017-09-18 }}</ref> 2017년 7월에는 [[김지운 (영화 감독)|김지운]] 감독의 영화 《[[인랑 (2018년 영화)|인랑]]》에 캐스팅 되었다. 영화는 근 미래, 남북한이 7년의 준비기간을 거치는 통일을 선포한 가운데, 반통일 무장 테러단체 섹트와 이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경찰조직인 특기대, 그리고 통일정책에 반대하는 강력한 권력기관인 공안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숨막히는 암투와 격돌을 그리는 작품으로, 한효주는 죽은 섹트 소녀의 언니로 임중경의 마음에 동요를 불러오는 이윤희 역을 연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인랑' 강동원x한효주x정우성x민호…꿈의 캐스팅 확정[공식]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976828|출판사 =TV리포트 |저자 =김수정 |날짜 = 2017-07-18 |확인날짜 =2017-09-18 }}</ref> 2018년 7월 25일에 개봉했다. [[2019년]] 가을에 미국에서 방송예정인 미국드라마 [[트레드스톤]]에서 베일에 싸여 있던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되면서 가족을 지키려고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소윤 역으로 출연중이다.
  • 함인섭
         |학력 = [[도쿄 농업대학|일본 도쿄 농업대학교 농업대학원]]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촉탁직원이 되었다가 [[연희전문학교]]의 [[교수]], [[황주군|황주]][[춘광원예학교]]와 [[자동농업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46년]] [[춘천공립농업중학교]]의 [[교장]]이 되었다가 이후 주로 [[강원도]]에서 교편을 잡았다. [[강원대학교]]의 전신인 [[춘천농업대학]]의 설립에 주로 참여하였다. [[1952년]]에는 농림부 장관으로 잠시 재직하면서 8.25 직후와 건국 직후의 토지보상 문제와 토지 관련 분쟁을 모두 해결하였다.
         천안 출신인 그는 경성으로 올라와 [[1923년]] [[경성]] [[중앙고등학교|중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중동고보 재학 중인 1924년 3월 26일 유기환(柳基桓)의 딸 유순희(柳順嬉)와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6남매를 두고 [[1949년]] 사별하였다. [[1927년]] [[경성]] [[중앙고등학교|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일본]]으로 유학, [[동경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1930년]] [[3월]] [[동경농업대학]] 예과를 수료하고 동경농대 본과 농학부에 입학, [[1933년]] [[3월 24일]] [[동경농업대학]] 농학부를 졸업하였다.
         [[1962년]] [[3월 27일]] [[도쿄 농업대학|일본 도쿄 농업대학교 농업대학원]]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허삼수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초기 [[허문도]] · [[허화평]]과 함께 3허(Three 許)로 불리면서 [[전두환]]의 핵심 측근 그룹을 형성하였으나, [[1982년]] 전두환의 신임을 잃고 물러나 [[미국]]으로 건너가 동서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재직했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 대학교]] 교수, [[교토 대학교]]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뒤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88년]] 귀국하였고, 같은 해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 미국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일본 교토대·일본대·미국 스탠퍼드대 객원교수(1983년 ~ 1987년)
  • 현진건
         | 학력 = [[대륜고등학교|경상북도 대구노동학교 보통부]] 졸업 <br/>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 전퇴 <br/> 일본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 중퇴 <br/> [[후장 대학|중국 상하이 후장 대학교]] 독일어전문부 중퇴
         현진건은 [[광무 (연호)|광무]](光武) 4년([[1900년]]) 8월 9일(양력 [[9월 2일]]) [[대구광역시|대구부]](大邱府)에서 현경운과 어머니 완산 이씨(完山 李氏) 정효(貞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당시 대구군 2정목(町目),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구광역시)|중구]] 속칭 '뽕나무골'이라 불리던 마을이었다. 어머니는 [[융희]](隆熙) 4년([[1910년]]) 6월 13일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위로는 홍건(鴻健), 석건(奭健), [[현정건|정건]](鼎健)의 세 형이 있었는데, 맏형 홍건은 대한 제국의 육군 참령과 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 부교관(副敎官)을 지냈고 칭경시예식사무위원(稱慶時禮式事務委員)을 잠시 맡기도 했다. 석건은 일본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근무했으며, 정건은 훗날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나섰다.
         현진건의 집안인 연주 현씨는 [[역관]](譯官) 등의 [[잡과]](雜科) 출신을 많이 배출한 [[중인]](中人) 집안에 해당한다. 현진건의 6대조로 왜역(倭譯) 즉 [[일본어]] 통역관이었던 태형(泰衡)부터 한역(漢譯) 즉 [[중국어]] 통역관이었던 5대조 상복(商福), 몽역(蒙譯) 즉 [[몽골어]] 통역관이었던 시석(時錫)에 이르기까지 모두 역관으로서 활약하였으며(각자의 처가도 또한 역관 집안이었다) 증조부 경민(敬敏)도 왜역으로 [[동래]](東萊)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현진건의 숙부인 현양운이 조민회의 후임으로 주왜공사(住倭公使)가 된 사실을 기록하면서, 영운의 가계를 그의 할아버지(즉 현진건의 증조할아버지)가 왜역으로 오랫동안 동래에 머무르다가 현지 기생과의 사이에서 현양운의 아버지를 얻었고, 현양운 자신도 그 아버지가 첩에게서 본 자식이었다고 적고 있다.<ref>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 양진오, 2008, p.26</ref>
         국권 피탈 뒤인 [[1915년]], 16세의 나이로 당시 경주 향리의 부호인 [[진사]] 이길우(李吉宇)의 딸 순득(順得)과 혼인하여 [[대구부]] 수정(竪町) 255번지(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에 있던 처가에서 신혼생활을 하였다. 그 해 [[11월]]에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2학년 재학 중인 이듬해 [[7월]]에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 입학하였다.
         [[1917년]]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때 대구에서 [[백기만]](白基萬) ·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등과 습작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하였다.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문학'이었다(다만 본격적인 동인지는 아니고 작문지 정도의 수준이었다고<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4월에 현진건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5년제 세이조 중학교(成城中學校)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18년]] 3월에 다시 귀국하였는데<ref>일본 학자 시라카와 유타카에 의해 세이조 중학교 3학년 성적대장 일람표에서 현진건의 이름이 확인되어, 그가 1917년 4월부터 1918년 3월까지 실제 이 학교에 재적했음을 고증할 수 있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3.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얼마간 대구에 머물다가 집안 몰래 형 정건이 있던 [[중화민국|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 가서 [[후장 대학]](扈江大學)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한다.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여파가 상하이에까지 커져 상하이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던 해인 [[1919년]] 다시 귀국하여, 당시 육군 공병 영관을 지낸 당숙 현보운(玄普運)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면서 서울로 상경, 지금의 종로구 관훈동 52번지에서 살았는데, 현보운은 1919년 음력 9월 10일에 사망하고 그가 호주가 되었다. 12월에 첫딸 경숙(慶淑)이 태어났으나 이듬해에 죽고 만다.
         처음 「희생화」를 발표하던 때부터 현진건은 이미 '빙허'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어 쓰고 있었는데, 대체로 그가 혼인을 올리던 1915년에서 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1916년 사이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자신은 회고하고 있다. 다소 허무주의적 표현이 없지 않지만 '허공(虛空)에 의지한다'는 이 말이 자신의 심경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었고, 고대 중국 [[북송|송]](宋)의 문인 [[소식 (북송)|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의 구절 가운데 "넓기도 하구나,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타고서(浩浩乎! 憑虛御風而)..."란 구절에서 느낀 바가 있어 그대로 '빙허'를 자신의 아호로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ref>「雅號의 由來(2)」 1930년 5월 1일자 『삼천리』제6호.</ref> [[1920년]] 11월에 현진건은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해 1등을 차지한 조선인 선수 [[손기정]](孫基禎)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채 신문에 실은 사건으로([[일장기 말소 사건]]) 현진건은 기소되어 1년간 복역해야 했으며, 이듬해 출옥하면서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관훈동에서 서대문구 부암동 325-5번지로 이사하여<ref>당시 부암동은 서울에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는 곳이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156.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그곳에서 땅을 빌려 양계 사업을 시작한 한편, [[1938년]] 7월 20일부터 다시 「동아일보」지면에 장편역사소설 「무영탑(無影塔)」을 연재한다.(~ 1939년 2월 7일) [[1939년]] [[7월]]에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복직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25일부터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흑치상지(黑齒常之)」 연재를 시작하는데, 이 와중에 문예지 「문장」과 가진 인터뷰에서<ref>「침묵의 거장 현진건 씨의 문학종횡담」, 『문장』 1939년 11월. p.116~120.</ref> 현진건은 당시의 소설들에 대해서 "(자신이 처음 글을 쓰던 때에 비해) 문장이라든가 소설 만드는 기술은 가히 괄목할 만큼 진보.... 그러나 구상의 도약이 드뭅니다"라며 "동경(東京) 문단의 말기적인 신변잡기 같은 것에 안주하려는 경향"에 대해 경계하고, 또한 현재가 여러 면에서 세계적인 문학의 빈곤시대가 아닌가 싶다며 "문은 실상 기(氣)이며 기가 없으면 아무리 진주같다 해도 곧 사회"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고 12월에는 같은 잡지에 또 한 번 「역사소설의 제(諸)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여 역사소설이라는 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부친 경운의 첫 부인이자 현진건의 친어머니인 완산 이씨 정효(貞孝)는 진건을 비롯한 네 명의 아들을 낳은 뒤 막내 진건의 나이 열 살 때인 [[1910년]] 6월 13일에 죽고, 경운은 정선(旌善) 전씨를 후처로 맞아들여 또 한 명의 아들을 두었다. 진건의 큰형 '''홍건(鴻健)'''은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으로 대한 제국의 육군 참령을 지냈다. 한때 러시아 대사관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으며, 《각사등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문헌에 따르면 광무 6년([[1902년]])에 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 부교관(副敎官)과<ref>《각사등록》 광무 6년(1902년) 7월 28일조. 이듬해인 광무 7년(1903년) 4월 23일(양력 5월 19일)에 면관되었음이 《승정원일기》에 수록되어 있다.</ref> 칭경시(稱慶寺)의 예식사무위원(禮式事務委員)을 잠시 맡기도 했다<ref>《승정원일기》 광무 6년([[1902년]]) 6월 24일조. 그러나 광무 7년(1903년) 2월 28일(양력 3월 26일)에 해임되었다(《승정원일기》 같은 날 기록).</ref> 말년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미소공동위원회|미(美)·소(蘇) 공동위원회]] 시절에 납북되었다는 설도 있다.<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3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둘째 형 '''석건(奭健)'''은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변호사로 근무했으며, 아우 정건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변호를 맡기도 했다. 셋째 형 '''[[현정건|정건]](鼎健)'''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이들 형제는 현진건이 5촌 당숙 '''현보운'''([[1875년]]~[[1919년]])의 양자로 [[입양]]되어 들어간 뒤 법적으로는 친형제에서 6촌 형제로 바뀌었다. 관립 일어학교 출신의 보운은 고종 33년인 [[건양]](建陽) 원년([[1896년]]) 8월 3일에 외국어학교의 교관(敎官)이 되었고, 광무 3년([[1899년]])에는 궁내부 번역관, 광무 4년([[1900년]]) 12월 24일에는 예식원 참리관으로 임명되어 봉직하다가 [[러일전쟁]]이 일어난 광무 7년(1903년) 11월 11일에 주일공사관 이등참서관이 되었고, 광무 8년(1904년) 일본 보병대 수원(隨員)으로 일본으로부터 즈이호오 4등 훈장을 받기도 했다. 광무 9년(1905년)에는 [[병조|군부]] 군무국 포병과로 옮겨 정위가 되었다.
         *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우승규의 술회에 따르면, [[1936년]]의 물난리(병자년 수해)에 수재의연금을 모으러 동지들과 창의문 밖에서 가진 모임에서, 술이 취하여 "일본인한테 기대지 말고 우리끼리 자족자구(自足自求)하자고."하고 기염을 토하다가 공교롭게도 옆에 있던 일본 경찰로부터 주의를 받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일본인을 '일본인'이라 부르지 말고 '내지인內地人'이라 부를 것을 강요했고 그러지 않는 자는 소위 '불령선인'으로 몰았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내지인'이라고 쓰고 그 위에 '일본'이라는 두 글자를 적었던 것이다)<ref>「나절로 만필」(48) '大水災와 日帝監視' 『동아일보』 [[1974년]] 11월 8일 제5면 기사.</ref>
  • 현철 (1891년)
         | 학력 = [[일본]] [[히노데 중고등학교|도쿄 중학교]] 수료 <br/> [[보성고등학교 (서울)|한성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br/> [[일본]]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 졸업 <br/>[[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 중퇴
         본명은 '''현희운'''(玄僖運)이며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출생하였다. 소설가 [[현진건]](玄鎭健)에게는 당숙이 된다. 14세 시절이던 [[190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던 중, 아버지가 별세해 귀국하여 [[보성고등학교 (서울)|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다시 도일하여 [[일본]] [[도쿄]]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세이소쿠 영어학교]]와 [[메이지 대학]] 법과에서 수학했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은 [[1921년]]의 '신파극-신극' 논쟁이다. 현철은 [[1910년대]]에 일본의 [[신파극]]을 들여온 이 분야 선구자 [[이기세 (1888년)|이기세]]와 지상 논쟁을 벌였다. 또한, 유명한 희곡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거나 번안하여 소개하였다. 1920년부터 3년 동안이 현철의 일생 중 가장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친 시기이다. 그밖에 《부인》, 《상공세계》, 《자활》, 《중성》 등 여러 잡지의 발행에 관계했다. 저서로 《한국과 한국인》,《문화기관과 연극사업》이 있다.<ref>{{웹 인용
         ** 당질: 현석건(玄奭健)<ref>[[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 졸업. [[일제 강점기]] 초기에 [[변호사]]로 근무. 당숙 '''현철'''(玄哲)보다 나이가 많았음.</ref>
  • 혐저
         [[일본]]의 속어. 돈벌이는 나쁘다고 하는 사고방식, 혹은 [[부자]]를 증오하고 질투하는 사고방식을 뜻한다. 읽는 방식은 「이야쵸(いやちょ)」「이야모우(いやもう)」「켄모우(けんもう)」등 다양하다.
         [[분류:일본어]]
  • 형불상대부 예불하서인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하는 [[할복]] 역시 형불상대부의 원칙에 의거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 혜리(1994)
          2012년 4월경, 국내의 한 행사 리허설 현장에서 [[욱일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리허설을 하는 장면이 촬영되었다. 이 티셔츠는 [[토호쿠 대지진|일본 지진]] 피해자를 돕기 위한 걸스데이의 [[일본]] [[센다이]] K팝 무료공연(Girl's Day in Sendai)과 피해 복구를 돕기 위한 무료공연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일본 팬이 선물했다고 알려져 있다. 작은 하트에 욱일기 무늬가 그려져 있어 확 알아채기 애매한 옷이었지만 어쨌든 욱일기를 의식하지 못한 것은 대중을 상대하는 연예인으로서 큰 실수. 논란이 커지자 결국 걸스데이의 외국 팬 페이지인 '걸스데이 데일리'에서 [[http://tip-top.tistory.com/1781|사과글]]을 올렸고, 5월 2일 혜리 본인도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5/02/2012050202676.html|공식 사과했다.]]
         일본에서 활동할때는 ヒェリ(혜리)가 아닌 ヘリ(헤리)를 쓴다. 일본 사람들이 ヒェリ를 발음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리 정한 듯 하다. 다만, 일본어로 ヘリ는 [[헬기]]라는 뜻도 있다(…).
  • 혜은이
         [[1977년]] [[일본]] '야마하가요제'에 출전한 그녀는 일본 빅터 레코드사에서 영입 제안을 받기도 했다. '당신만을 사랑해'를 일본어로 내고 [[조용필]]에 앞서 일본 활동도 짧게 했다. 당시 일본에선 '강코쿠(한국) 아이돌'로 소개되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6/18/0200000000AKR20150618054000005.HTML 40주년 혜은이 "가수인생 골든타임 놓쳐 아쉬움 투성이죠"] 연합뉴스. 2015년 06월 18일</ref>
         [[분류:195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75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광주시 (경기도) 출신]][[분류:대한민국의 감리교도]]
  • 호농
         [[일본]]에서 부유한 [[농민]]을 뜻하는 말.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부농(富農)이라고 한다.
         일본의 호농 계급은 [[에도 시대]] 말기에서 [[메이지 시대]]에 걸쳐서 나타났다. 대규모 토지를 보유하고, [[소작농]]에게 소작을 시키거나 일부를 자작농으로서 경작하였다. 또한 양잠업이나 직조업 같은 [[수공업]]이나, [[상업]]도 겸업하여 부를 쌓았다.
         이들은 일본의 무라(농촌 마을) 사회에서 지도자 격인 촌역인(村役人, 무라야쿠닌)을 맡는 경우가 많았으며, 후기 에도 시대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점차 호농형 생산이 줄어들고, 직접 농업이나 생산에는 참여하지 않는 [[지주]] 계급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분류:일본 풍속]]
  • 호소키 카즈코
         [[일본]]의 [[점술가]],[[트랜스젠더]],[[전문 사기꾼]],[[변두리마법사]], [[탤런트]].
  • 호시즈나
         [[일본]]에서는 [[오키나와]] 등의 몇몇 해변에 호시즈나를 볼 수 있는 해변이 존재한다. 채집은 금지되어 있지만, 기념품으로 팔고 있다.
  • 홍석천
         [[커밍아웃]] 이후 방송 일이 끊겨 힘든 시기를 보내던 중, 홍석천은 생계를 위해 [[이태원동]]에 [[이탈리아 요리]] 레스토랑 "아워플레이스(Our Place)"를 차렸다. 그 후 이태원 지역에만 자신의 레스토랑을 연달아 차려 성공시키면서 "이태원 재벌", "이태원 지주"의 자리에 오른다. 처음 차렸던 아워플레이스는 이후 접었고, 현재는 My Hong(아시아퓨전- [[일본 요리]]+[[태국 요리]]), My Chi Chi's--내 찌찌--(아시아퓨전), My Thai([[태국 요리]]), My Thai China(아시아퓨전-[[중국 요리]]+[[태국 요리]]), My X(와인바), My Chelsea([[펍]]), My Noodle(면류), My Sweet(디저트 카페) 등 7개의 가게를 하고 있다. 2015년 7월 토크쇼 <택시>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연 매출이 50~70억에 달한다고 한다.
         [[대한민국]]에 본격적으로 [[태국 요리]]를 소개한 것도 바로 홍석천이다. 다만, [[서태화의 누들샵]]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100% 정통 [[태국 요리]]의 맛은 아니고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약간 개량한 형태라고. 처음에 정통 [[태국 요리]]를 시도했다가, 익숙하지 않은 향과 맛에 손님들이 거부감을 나타내자 방향을 바꿨다고 한다.[* 어느 나라의 것이건 식문화는 각 나라의 문화에 걸맞게 현지화가 되는 게 일반적이다. 특히 [[태국 요리]]는 우리나라에서 잘 먹지 않거나 간식류에나 사용하는 고수, 민트, 라임, 바실, 래몬그라스 같은 향신료가 중요한 맛의 포인트다. 그중에서도 민트와 고수는 호불호가 극명히 갈려서, 이것 들어간 음식을 못 먹겠다는 사람들도 꽤 많다. 때문에 레시피를 100% 그대로 반영했다간 손님들이 불만을 가져 대부분의 한국 내 태국 식당은 레시피가 바뀐다. 참고로 우리가 즐겨먹는 [[중국 요리]], [[일본 요리]] 등도 정작 본국에서는 꽤 다르게 생겼다. 심지어 같은 중국 요리인데 [[중화요리#s-5|미국식 중식]]과 [[중화 요리#s-4|일본식 중식]]은 180도 다르다. [[한국 요리]]도 외국에서 파는 것을 보면, 이게 우리가 늘상 밥상에서 보던 그게 맞나 싶을 정도의 독특한 물건들이 가득하다.]
          * 그리고 가끔씩 드라마에 나오는 노출 장면만 봐도 알듯이, 굉장한 근육질 몸매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한국과 달리 [[게이]]하면 [[하드게이|우락부락한 근육질에 수염, 가죽옷]], [[오토바이]] 등, 한국에서 '남자답다'고 여기는 상을 떠올리는 사람이 더 많다.
  • 홍순언 (1530년)
         그가 [[장안]]에 도착하여 [[조선]]이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조국 정벌 음모를 접했음에도 이를 거절하다가 침략을 당했다며 사정을 설명하였으나 [[명나라]]의 관리들은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토벌하려 하는 것은 아니냐며 조선 지원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당시 병부시랑으로 있던 석성의 도움으로 홍수언은 [[명나라]] 군사 5만 명의 파병을 성사시킨다. [[석성]]을 통해 그의 의기를 접하게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그를 믿고 선뜻 가겠다고 자청했고, 선조가 이여송을 만날 때에도 그가 통역했다고 한다.
  • 화장실의 하나코 씨
         [[일본]]의 [[도시전설]]. 화장실에 나온다는 여자아이의 '유령'. 3칸째의 하나코 씨(3番目の花子さん)라는 명칭도 있다.
  • 황규봉
         하지만 그 해 팀이 [[일본]] 원정을 가던 중 비행기 안에서 고소공포증으로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처음으로 고소공포증이 생겼을 때보다 증세가 더욱 심해졌는데, 고층에 위치한 입원실에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수 개월을 집에서 요양하며 증세가 조금 나아진 후에야 병원에 입원했다.
  • 황두성
         [[2008년]]에는 선발로 활약하다가 시즌 중반에 소속 팀이 마무리 부재로 불펜진 운영에 어려움을 겪자, 자진해서 잠시 마무리로 전향했다. 그러다 [[일본]]인 마무리 [[투수]] [[다카쓰 신고|다카쓰]]의 입단으로 선발 보직으로 다시 옮겼다.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국가대표팀으로 뽑혔지만 컨디션 난조로 중도 하차하여 [[임태훈 (야구 선수)|임태훈]]과 교체되었다.
  • 황보관
         '''황보 관''' (皇甫 官, [[1965년]] [[3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감독, 축구 클럽 경영자이자 전 [[대한축구협회]] 소속의 행정가였다. [[일본]] [[J리그]] 팀 [[오이타 트리니타]]의 코치, 감독을 거쳐 오이타 구단의 부사장 및 이사를 맡았고 [[2010년]]부터 오이타의 감독직을 다시 맡게 되었다. [[2011년]] [[대한민국]] [[K리그 클래식|K리그]] 팀 [[FC 서울]]의 감독을 맡아 [[대한민국]] 무대에 복귀했으나 성적 부진으로 117일 만에 사임하고 [[최용수 (축구인)|최용수]]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사임한 후 [[대한축구협회]]로 옮겨 기술교육국장을 맡았고 [[이회택]]의 후임으로 기술위원장이 되었다. 본관은 [[영천 황보씨]]이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1988년]] [[제주 유나이티드 FC|유공 코끼리]]에서 데뷔하여, 그 해 [[K리그 영플레이어상|K리그 신인상]]을 받았다. [[1994년]] [[8월 6일]] [[전북 현대 모터스|전북 버팔로]]와의 경기에서 [[K리그 클래식|K리그]] 통산 7번째로 [[20-20클럽]]에 가입하였다. [[1995년]] [[일본]]의 [[오이타 트리니타]]로 이적하여 [[1996년]] 팀의 1부 리그로의 승격에 공헌하는 등 중심 선수로 활약하며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하였다. [[1998년]] 시즌 중 은퇴하였다.
         은퇴 후 그는 지도자보다는 구단 경영자, 행정가로 더 두각을 드러냈다. [[1998년]] 은퇴한 후, [[아시아 축구 연맹|AFC]]에서 주관하는 'C,B,A 코스' 및 '프로페셔널 지도자 코스'를 이수하였다. [[1999년]]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U-20 대표팀]] 트레이너를 맡은 뒤, [[오이타 트리니타]]에서 코치로 활동하였다. [[2001년]] [[오이타 트리니타]] 유스 팀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고, 지도력을 인정받아 [[2004년]] [[오이타 트리니타]]의 수석 코치로 활동하였다. [[2005년]] [[요한 베르거]]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자, [[오이타 트리니타]] 감독으로 승격하였다.<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4120600017 황보관 J리그 오이타 감독 승격]</ref> 감독 취임 뒤,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열린 [[통영컵]]에 참가하여 데뷔전을 치러 우승을 차지하여 성공적인 시작을 알렸으나,<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5022700011 황보관의 오이타, 2005 통영컵 패권]</ref> 성적 부진으로 9개월 만에 해임되었다.<ref>[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220&g_serial=167328 황보관 오이타 감독, 전격 해임 '성적 부진 탓']</ref> 이후 [[오이타 트리니타]] 유소년 육성부장을 거쳐, [[오이타 트리니타]] 부사장 및 이사에 올랐다. [[2008년]] 팀이 [[J리그 컵]]에서 우승하자, 우승컵을 갖고 [[대한민국]]을 방문하였다. 또한 [[일본문리대학]] 축구부의 테크니컬 디렉터도 맡았다. 오이타가 [[2009년]] 경영난 속에 [[J리그 디비전 2|2부 리그]]로 강등된 후, 이듬해 감독직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2부 리그에서도 15위에 그치자 사임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황보관, J2 오이타 사령탑에서 퇴임|url=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11300164 |출판사=OSEN |date={{날짜한글화|2010-11-30}} }}</ref>
         [[2008년]] [[3월 25일]] [[슈에이샤]]에서 발매된 [[비즈니스 점프]]의 증간지 <BJ혼> ([[5월 1일]])에서 연재되는 '[[오이타 트리니타]] 이야기・제로부터 스타트'(원작:기무라 모토히코,작화:미야기 신지)가 [[오이타 트리니타]] 설립에 분주하였던 前 자치성 동료 [[미조하타 히로시]]와 황보관의 교류를 그리고 있다.<ref>[http://www.sportsseoul.com/news2/soccer/world/worldnews/2008/0423/20080423101020202000000_5454151980.html 황보관 오이타 총괄 본부장, 일본 만화잡지 주인공 화제]</ref>
         * [[1995년]] ~ [[1997년]] {{국기그림|일본}} [[오이타 트리니타|오이타 트리니티]]
         * [[1999년]] {{국기그림|일본}} [[오이타 트리니타]] 코치
         * [[2000년]] ~ [[2003년]] {{국기그림|일본}} [[오이타 트리니타]] U-18 감독
         * [[2004년]] {{국기그림|일본}} [[오이타 트리니타]] 코치
         * [[2005년]] {{국기그림|일본}} [[오이타 트리니타]] 감독
         * [[2010년]] {{국기그림|일본}} [[오이타 트리니타]] 감독
         [[분류:196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축구 감독]][[분류:제주 유나이티드 FC의 축구 선수]][[분류:오이타 트리니타의 축구 선수]][[분류:오이타 트리니타의 축구 감독]][[분류:FC 서울의 축구 감독]][[분류:FC 서울의 코칭스태프]][[분류:1988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분류:1990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90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1990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아시안 게임 축구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동메달리스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구침산초등학교 동문]][[분류:계성중학교 동문]][[분류:서울체육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동문]][[분류:영천 황보씨]][[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일본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일본의 외국인 축구 감독]][[분류:J1리그의 축구 감독]][[분류:J2리그의 축구 감독]][[분류:K리그1의 축구 감독]][[분류:재팬 풋볼 리그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 영플레이어상 수상자]][[분류:K리그1 베스트 11 수상자]][[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감독]]
  • 황재규
         [[청원고등학교 (서울)|서울청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동기인 [[허유강]] 선수와 함께 팀의 주축 선발 [[투수]]로 활약하였다. 제 4회 세계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에 국가 대표팀으로 참가하여,<ref>[http://isplus.joins.com/sports/kbo/200806/12/200806122017013276010700000107020001070201.html 세계 대학야구 선수권 대표팀 명단 발표] 《일간스포츠》, 2008년 6월 12일 작성</ref> [[일본]]전에서 좋은 투구를 보여 주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95&aid=0000000067& 세계 대학야구 결산 - 협회의 외면 속에서도 유망주는 큰다] 《박동희칼럼》, 2008년 7월 29일 작성</ref> 제 1회 KBO 총재기 대학 야구 결승전에서 선발 [[투수]]였던 [[정태승]]에 이어 팀의 2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8.1 이닝 3안타 6탈삼진 1실점의 호투로 [[성균관대학교]]의 우승에 기여하였고, 대회 최우수 선수에 올랐다.<ref>[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120&g_serial=348816 성균관대, 연세대 꺾고 제 1회 KBO 총재기 우승] 《조이뉴스》, 2008년 8월 8일 작성</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95&aid=0000000075& 대학야구 취재기,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박동희칼럼》, 2008년 8월 9일 작성</ref>
  • 황정오
         [[1981년]]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동메달]]을 따고,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서 열린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도 동메달을 획득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1984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결승전까지 올라갔으나 [[일본]]의 [[마쓰오카 요시유키]]에게 패해 은메달에 머무르고 말았다.
  • 황종률 (정치인)
         '''황종률'''(黃鍾律, <small>일본식 이름: </small>光田矗顯, [[1909년]] ~ [[1972년]] [[1월 21일]], [[서울특별시|서울]])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관료 겸 정치인이다.
         [[한성부]] 출신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규슈 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고, [[만주국]] [[대동학원]]을 거친 뒤 뒤 만주국에서 관리로 근무했다.<ref>{{서적 인용
         * 1947년 : 주 [[일본]] 공관장
  • 후미에
         [[일본]] [[에도 시대]]의 풍속. [[에도 시대]]에는 [[기독교]]를 억압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도를 색출하기 위하여 [[예수]]를 그린 동판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밟도록 하여 숨은 기독교인을 색출하려 했다.
  • 후지와라 노리카
         [[일본]]의 탤런트, 배우. 1971년 6월 28일 출생. 혈액형 A형, 신장 171cm.
         1992년 미스 일본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1993년에 도쿄 레이스에서 수영복, 기모노 캠페인 모델로 활동하였으며, 여성 패션지 『JJ』『CanCam』에서 인기 모델이 되었다. 여배우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분류:일본 연예인]]
  • 후지와라 섭관가
         [[일본]]의 귀족 가문. 후지와라 씨(藤原氏)가 천황가의 [[외척]]이자 [[섭정]]으로서 지위를 세습하여, 이들을 후지와라 섭관가라고 부른다. [[일본 귀족]]의 정점에 서있는 가문이며, 섭가(摂家) 혹은 섭관가(摂関家)라고도 한다. 5개의 가문으로 분화되었기 때문에 오섭가(五摂家)라고 불린다.
         [[분류:일본사]]
  • 후카다 쿄코
         {{다른사람:[[정태리|일본배우]]}}
         [[일본]]의 [[여배우]]. 1982년 11월 2일 생, [[도쿄도]] 출신. [[O형]]. 1997년 FIVE(니혼 테리비)로 데뷔했다. [[드라마]], [[영화]], [[버라이어티]], [[CM]]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다. 애칭은 후카쿈(深キョン)
         [[분류:일본 여배우]] [[분류:O형]]
  • 흥인군
         흥선대원군의 친형이었으나 그의 무시를 당했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흥선대원군]] 실각 후 좌의정, 세자부, 영의정 등을 지냈으며 통리기무아문 총리대신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했다가 유림과 갈등하였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여 [[1880년]] 이후 [[미국]], [[일본]]과의 개항 정책에 적극 동조하였다. [[1882년]](고종 19) [[6월]]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의 사주를 받은 난병에게 [[민겸호]](閔謙鎬)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신도비]]문에는 [[조선 고종|고종]]이 어의를 보내 진료했으나 차도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하나, 난병을 피해 도주하다가 추락사했다는 설도 있다. 한편 동생인 흥선대원군과의 감정대립으로 민씨 정권의 측근으로 지냈는데, 민승호와 흥선대원군은 그를 이용해서 상대방의 정세를 염탐하는데 이용하려 하였다. 별칭은 '''유유정승'''(唯唯政丞)이다.
         그는 대미 개국 방침을 결정한 [[1880년]] [[10월]]의 중신회의에서 영의정으로서 회의를 주재했다.<ref name="sisi459">강재언,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한길사, 20003) 459페이지</ref> 그는 쇄국 정책에 비판적이었다.<ref name="sisi459"/> [[일본]]에 갔던 수신사 [[김홍집]] 일행이 귀국하면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와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연미론(聯美論)를 주장하자 그는 "[[미국]]은 본래 원수의 나라가 아니니 서계(書契)를 가져오면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여 [[1880년]] [[9월 8일]] 연미론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의 주장에 고종도 [[병인양요]], [[신미양요]]는 우리나라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하여 [[미국]]과의 조약체결을 결심하게 되었다. [[1881년]] [[1월]] 흥인군의 건의로 고종은 지난해 [[6월]] 자신이 미국사신을 거부한 것을 후회하는 문서를 톈진(天津)으로 가는 영선사, 유학생들을 보낼 때, 그들을 통해 [[청나라]]로 보냈다.
  • 흥친왕
         |국적 = [[조선]], [[대한제국]], [[일본 제국]]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로 대원군이 집정하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동문사당상경리사(同文司堂上經理事)가 되었다.<ref name="daum1"/> [[7월 14일]] 특별 가자되어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의 품계를 받고, [[7월 15일]] 궁내부 대신에 임명됐다. [[8월 13일]]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에 임명되었다. 이어 궁내부 대신을 거쳐 [[1895년]] [[8월]]에 다시 궁내부 대신에 임명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이 일어났을 때 그는 난에 가담하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제거되자, 그는 [[흥선대원군]]과 주한[[일본]]공사관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밀약에 의해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ref>제1차 김홍집 내각</ref>)의 궁내부대신이 되었다.<ref name="daum1"/>
         [[1902년]] [[일본]]에 망명중인 장남 [[이준용]]으로부터 생활비 지원요청을 받자 그는 임정규를 통해 충분하지 못한 액수의 생활비를 지원하였다.<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1p</ref> [[1907년]]까지 이재면은 별다른 관직도 직업도 없이 생계가 곤란하였다. 하지만 이준용은 망명지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아버지 이재면을 내심 원망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재면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여 왕족으로 예우함과 동시에 그를 회유하려 하였다. 1907년 그는 동생 고종으로부터 대훈이화장(大勳李花章), 서성장(瑞星章)을 받았고, [[1907년]] [[11월 27일]] [[대한제국]] [[육군]] 부장(副將)에 임명됐다. 이어 일본에 보내는 특별보빙사절단에 임명되고, 아들 [[이준용]]은 육군 참장에 임명되어 수행원이 되었다. 그해 11월 보빙사절단 과 수행원 [[이준용]], [[이달용]] 등을 대동하고 [[일본]] [[도쿄]]에 다녀왔다.
         한편 그의 아들 [[이준용 (1870년)|영선군 이준용]]은 아버지 흥친왕 이재면이 사망한 뒤에도 그는 빈소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이 때문에 아저씨뻘 되는 [[이재완]] 등에게 호된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이는 [[국왕]]의 친형인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신원을 요청하지 못하고 자객들의 [[일본]]행도 막지 못한 점, [[일본]] 망명 중에 아버지이 충분한 경제적 지원을 해주지 못했고 집안을 제대로 경영하지 못한 데 대한 실망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ref name="p342">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42쪽.</ref>
         [[친일파]]나 적극적인 친일본 인사는 아니었으나 [[한일 합방]] 직후 83만 엔(2010년 대한민국 기준 166억 원)이라는 거액의 은사금<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141120011&code=940100</ref> 을 받아 논란이 되었다. 이는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완용]]이 받은 15만 엔, [[정미칠적]] 가운데 한 사람인 [[송병준]]이 받은 10만 엔의 약 6, 7배에 해당되는 액수라 지탄받는 원인이 됐다.
         [[분류:유교 신자|이희]][[분류:과거 급제자|이희]][[분류:대한제국의 황족]][[분류:대한제국의 부장]][[분류:대한제국의 친왕]][[분류:일본의 왕공족]][[분류:육군 장군]][[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한국의 귀족]][[분류:테러 피해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전주 이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병사한 사람]][[분류:한일 병합 조약 관련자]][[분류:운현궁]][[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대한제국 순종]][[분류:영선군|영선군]][[분류:금척대훈장 수훈자]][[분류:서성대훈장 수훈자]][[분류:이화대훈장 수훈자]][[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19세기 한국의 군주]]
  • 히나마츠리
         [[일본]]에서 여자아이의 성장을 축하하는 날. 양력 3월 3일에 실시한다. 과거에는 음력 3월 3일에 실시했다. 지방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다.
         히나마츠리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헤이안 시대에는 인형 놀이로서 행해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에도 시대에 장식물과 놀이로서의 의미 이외에, 인형이 대역이 되어 재액을 대신 받아낸다는 주술적인 의미가 포함되었다. 에도 시대에 일본 전국에 널리 퍼진 풍속이 되었다.
         [[분류:일본 풍속]]
  • 히토모도키
         [[일본]]의 [[넷 우익]]이 [[한국인]]을 '쵸우센히토모도키'라고 불렀던 [[차별용어]]에서 유래한다.
         [[분류:일본어]] [[분류:비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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