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일본인"을(를) 전체 찾아보기

일본인


역링크만 찾기
검색 결과 문맥 보기
대소문자 구별
  • 카치구미 . . . . 38회 일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이겼다고 믿었던 브라질의 일본인 이민자 그룹'''. 간단히 말하자면 '''미친놈들'''(…) 1945년 부터 브라질에 거주하는 일본인들 가운데 90% 가량이 일본의 승리를 믿고 발광과 폭동을 벌였던, 미친 사건이다.
         1940년대 무렵 [[브라질]]에는 [[일본인]]이 약 30만 명 가량 거주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브라질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양국은 적대관계가 되었으므로, 브라질과 일본은 외교관계가 단절되었고 브라질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일본어로 출판이나 언론 활동을 할 수 없고, 일본인끼리 모이는 것도 금지되어 있고, 일본어 학교는 폐쇄되었다. 1942년에는 브라질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 외교관들도 [[포로 교환]]으로 일본으로 귀국하여, 완전히 본국과 연결이 단절되었다. 또 이 당시 [[포르투갈어]]를 읽을 수 있는 일본인은 숫자가 적었으며, 지식인과 브라질 사회에서 성공한 소수의 사람에 국한되었고 대부분은 오지에서 농장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인 1945년 7월, 브라질 일본인들이 조직한 신도연맹(臣道連盟)이라는 단체가 [[상파울로]]에서 결성되었다. 신도연맹은 이들의 조국인 '''일본을 응원하고, 승리를 믿는 조직'''으로서, 7월에 발족하고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12월에는 회원은 3만 가구에 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막대한 조직을 구축한 신도연맹은 황당한 행동을 시작했으니, 브라질 일본인 사회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는 정보를 날조해서 전파했던 것이다.'''
         신도연맹이 배포한 정보는 이상과 같은 황당무계한 것이었으나, 아무튼 일본이 유리한 정보만을 전달했기 때문에 브라질의 일본인들은 이를 받아들여서 믿었으며, 약 80%~90%의 브라질 일본인이 이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1945년 9월에는 위문사절단이 일본 군함으로 온다는 소문이 퍼져서, 오지에서 일본인이 상파울로 항구에 몰려들기도 했다. 물론 일본 군함들은 그때 대부분 바다 밑바닥에 있었다.
         사실 신도연맹이 탄생하기 이전, 1944년 부터 브라질 일본인 사회는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이 당시 '박하국적론'이라는 괴문서가 브라질의 일본인들 사이에 나돌고 있었는데, 이것의 내용이 이상과 같이 황당무계한 것이었으나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믿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괴문서가 돌면서 당시 박하를 재배해서 미국에 수출하던 브라질의 일본인은 모두 미국에 무기를 보내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들은 적에게 협력하여 일본을 공격하는 국적(国賊)이라는 논리였다. 이 괴문서 때문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박하 재배 농장, 박하 가공 공장에서 일본인에 의한 [[방화]]가 잇따라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대부분 [[세탁소]] 등에서 근근하게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박하 가공 공장이나 박하 재배 농장을 경영하는 부유한 일본인에 대한 질투도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된다.
         이 같은 카치구미의 연속 테러 활동은 브라질 국민들이 보기에는 '일본인끼리 서로 죽이네?'에 불과했고, 일본인들의 인상은 매우 나빠졌다. 브라질 신문은 일본인 간의 항쟁을 크게 보도했으며, 경찰에서 개입해왔지만 카치구미는 수습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일본인과 브라질 시민들 사이에서도 대립이 발생하여, 7월 30일에서 8월 2일 까지는 파울리스타 선 오스왈드 드 크루즈 시에서 일본인과 브라질 시민 사이에서 대규모 난투극이 벌어져 살해까지 일어났다.
         브라질 경찰은 신도연맹(臣道連盟) 회원을 닥치는대로 검거하고, 일부는 감옥에 보냈으며, 추방 처분을 내리기도 했다.(실제로는 실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8월 27일에는 브라질 연방헌법 제정회의에서 "일본인 이민을 금지하는 조항"을 '''헌법'''에 넣는 것을 심의하기도 했다. 가부동수를 이뤘다가 의장이 반대표를 던져서 부결되었는데, 반대 이유는 일본인 이민 금지에 찬성이지만 이런 규정을 '헌법'에 포함시키는 것에 반대한다는 이유일 뿐이었다.
         패전 이후, 1946년 1월 일본은 새 화폐로 전환했으나, 브라질 국내에는 아직 구 일본 화폐가 남아 있었다. 일본 구화폐는 사용하지도 못하고, 외환으로 환전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이 이겼다는 소문을 퍼트려서 귀국하려는 일본인들에게 구 일본화폐를 파는 사기였다. 귀국하려는 일본인의 땅, 집, 가축, 그리고 브라질 화폐를 '''이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구 일본 화폐로 사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휴지]](…)와 전재산을 바꿔버리고 전 재산을 잃고 자살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심지어 "일본에서 온 황족"을 자칭하고 일본의 승리를 축하하며, 현지 일본인에게 헌금을 받고 그대로 도주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브라질의 신문, 라디오에서 나오는 정보는 점점 일본인 사회에도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정보를 알아도 카치구미는 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카치구미를 내버려두면 브라질에서 일본인은 서로 죽이거나, 사기를 거듭하며 일본인 사회는 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일본인, 일본계 브라질인 가운데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카치구미를 설득하고자 했는데, 이를 '인식파'라고 불렀다.
         1945년 10월 3일, 브라질 일본인 사회에서 명망이 높은 인사였던 미야코시 치바타(宮腰千葉太)가 일본에서 종전을 알리는 문서와 외상이 해외 일본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만국 적십자사 브라질 지부를 통하여 받았다.
         6월 3일 스웨덴 공사관 일본인 권익부는 요시다 총리의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상파울루 주 집정관이 관저에 카치구미 600명을 모아서 진실을 알리고 설득했다. 심지어 일본에서 직접 정치인이 브라질까지 와서 향후에 대한 연설을 하기도 했지만, ''''카치구미는 믿지 않았다.'''
         >아마존 오지에 『신일본(新日本)』이라고 하는, 일본과 꼭 닮은 나라가 있다. 지금 패전을 설득하는 놈들은 그 『신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온 놈들이다. 저놈들은 일본인이 아니다. 속지 마라.
  • 정재학 (1856년) . . . . 32회 일치
         1907년 일본인들이 장악한 구한말 중앙은행은 신 통화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민간은행에 제시한다. 일반서민들은 신 통화에 대한 거부감을 보였기 때문에 파격적인 특혜를 줬다. [[대구상공은행]]에 대해 20만원(현 240억 원)을 2년 거치 무이자 무담보로 빌려주겠다고 제시했다. 2년 동안 요즘 돈 240억 원을 이자 없이 쓸 수 있었다.
         [[정재학]]과 은행 주요 주주들은 이 돈을 투자하여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 아울러 경부선 철도 개통으로 해외 상품들이 일본인들의 손을 거쳐 대량으로 유입되고 대구에도 연초 공장 등이 들어섰다. 아울러 미곡 무역, 운수업 등이 번창하면서 대출 수요도 늘어났다. 정재학도 이 무렵 자신의 자본으로 독자적인 은행을 만들 준비에 나섰다 .
         정재학은 26살 연하인 사카모토 순지(板本俊資 1884~?) 란 일본인과 끈끈한 인연을 이어갔다. 사카모토는 20살이던 1904년 일본에서 부산으로 건너와 상점 점원으로 일하다 대구에서 잡화상을 차렸다. 사업이 번창해 대구역 앞에서 창고사업도 병행했다 . 이 때 [[경상농공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면서 정재학과 안면을 트게 됐다. 정재학은 일본 젊은이로부터 일본에서 번창하고 있는 [[자본주의]]경제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됐다. 나아가 사카모토는 후일 [[대구은행]] 발기인으로 참여하게 된다.
         일본인 지인의 참여는 조선총독부의 간섭에 대한 방패막이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일본인 고객들을 끌어들이는 역할도 했다. 사카모토가 오구라 다케지스케 (小倉武之助 <ref>동아일보 1995년 11월 9일 1면</ref> 에 의해 대구에 설립된 일본계 남선은행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대구은행]]에 기꺼이 참여한 것은 정재학의 경륜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14일 7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편 -14</ref><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13</ref>
         1910년 조국이 일본 치하에 들어가자 [[정재학]]은 은행 감사 경험을 바탕으로 민족은행 설립을 결정한다. 일본인들이 규합해 설립한 일본계은행에 대한 견제에 공감한 경북지역에 민족 자본가들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일본인들의 경영권찬탈 시도가 이어지자 경찰 출신의 일본인 지배인을 선임하는 등 경영권 방어전략으로 맞섰다. 또한 총독부와 일제강점기 중앙 은행이었던 조선은행이 자신을 행장 자리에서 줄기차게 몰아내려 했지만 그들의 시도는 번번히 실패했다. 주주총회에서 한국인 주주들이 정재학 행장에게 표를 몰아줬기 때문이다,<ref>경향신문 1981년 6월 15일 9면 경제인록 = 금융계 일제하의 금융인</ref><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17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17편</ref> 31년간 민간은행장 자리를 유지한 사례는 전 세계 어디 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일제 치하에 설립된 수많은 [[민족계은행]]이 있었지만 일제의 강제합병 과정에서 사라져갔지만 정재학 행장은 생의 마감 직전까지 저항했다.<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창조사, 1970) P.674 "조흥은행 되기까지"</ref>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은행정책은 시기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1910년대에는 [[일반은행]] 신설을 장려했으나 1922년 이후 신설을 불허하고 합병정책으로 [[민족자본은행]]을 일본인소유은행으로 전환시켜갔다. 1910년대 수도권및 지방에 잇따라 신설된 민족자본은행들은 총독부의 관리를 받는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의 주도로 일본인은행에 흡수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 흡수과정의 첫 단추는 1928년 3월 단행된 [[한성은행]]에 대한 정리 작업이었다. 총독부는 한성은행에 조선은행 출신 일본인 임원을 진입시켜 경영권을 장악했다. 일본인 임원의 진입은 조선은행의 일반은행에 대한 차입금 지원의 대가란 성격이 짙었다. 일반은행이 경영상 어려움으로 중앙은행 격인 조선은행으로 돈을 빌리기 위해 핵심 임원 자리를 일본인에게 내줘야 했다.
         이 같은 일본인 임원의 침투전략이 수차례 반복되면서 한국인은행은 일본인은행으로 탈바꿈했다. 정태헌 [[고려대]] 교수는 "어미새(국가)가 둥지를 틀고 품어줘야 새끼(자본주의)가 알을 깨고 나와 먹을 공급(은행)받아 성장할 수 있지만 남의 둥지를 독점한 뻐꾸기(총독부 산하 특수은행과 일본인은행)는 둥지의 원주인(조선인은행)을 하나하나 떨어뜨려 죽인다. 식민지자본주의 조선인은행의 모습이었다."고 강조했다.<ref>정태헌, <<한성은행의 경영권 대주주 구성추이와 일본인은행화과정>> 한국사연구 P148~149 2010년</ref>
         [[대구은행]]의 출범은 일본인 오구라 다케지스케 (小倉武之助)에 의해 1912년 설립된 대구 최초의 민간은행인 [[선남은행]]에 대한 대구 지역 내 한국인 재계의 경계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부산과 대구에서 활동 중인 일본인 재력가들의 자본을 끌어 모아 [[선남은행]]을 설립했다. 앞서 1907년에는 대구 인근 밀양에 일본인 은행인 [[밀양은행]]이 설립됐다. 오구라 다케지스케는 이미 대구에서 다양한 상업 제조업을 운영하면서 은행자금을 사금고로 이용하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1930년대 말 [[대구은행]] 주식을 대거 매집, 최대주주로 오른다. 그러나 총독부 당국은 그에게 경영권을 주지 않았다. 오구라 다케지스케는 1940년대 들어 은행 쪽에 발을 빼고 전력회사 경영에 몰두하게 된다. [[대구은행]]의 출범 시기는 1913년으로 선남은행 영업 개시후 1년 뒤였다. 대구 지역의 금융산업이 일본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경북 일대의 지주 등 민족 재력가들이 뭉쳐 [[대구은행]]을 설립하고 나선 것이다. [[대구은행]]의 설립계획서 제출 시기가 1912년 9월5일로 [[선남은행]] 설립일자인 1912년 9월1일에 비해 4일 뒤였다는 점은 대구 경북 지역 민족자본가들의 위기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ref>매일경제 1982년 11월 26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1편</ref>
         [[대구은행]]은 [[민족계은행]]답게 [[한국인]] 대출비중이 컸다 . 대출 가운데 한국인 비중은 77%, 일본인 비중은 23%에 그쳤다 . 비록 1인당 대출액은 일본인에 비해 적었지만 가능한 동포들에게 더 대출혜택을 주기로 한 [[정재학]]의 경영 방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25</ref>
         [[대구은행]]의 이 같은 [[민족자본]] 수호 의지는 해방직후 [[조흥은행]]의 자본구성에서도 드러난다. 1948년 [[미군정]]이 우리 정부에게 넘겨준 주요 은행 주식분포를 보면 [[조흥은행]]의 경우 한국인 지분비율이 54%에 달한 반면 [[상업은행]] (36%) [[저축은행]](6.3%) [[신탁은행]] (9.4%) [[상호은행]](9.5%) [[조선은행]](3.5%) [[식산은행]](6.7%) 등 나머지 은행들은 대부분은 일본인 소유에서 미군정 관리에 이어 우리 정부로 귀속됐다. 일제 당시 총독부 등이 민족자본 기반의 은행들을 수탈, 국유화시키거나 일본인에게 주식을 넘겼기 때문이다.<ref>경향신문 1978년 1월12일 5면</ref>
         특히 [[조흥은행]]의 경우 1948년 현재 일본인소유주(귀속주) 비율이 5%에 그친 반면 은행상호보유주 41%, 한국인소유주 54%이었다. 나머지 은행들의 일본인 보유비중은 26~80%에 달했다. [[조흥은행]]이 민족자본의 적통을 이어받았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ref><<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113</ref> 또한 광복 당시 조흥은행의 인적 구성 역시 총 2000명 행원 가운데 일본인 직원은 139명에 불과해 혼란 없이 은행을 운영할 수 있었다.<ref><<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115</ref>
         [[조흥은행]]은 1997년 발간한 [[조흥은행100년사]]를 통해, 조흥은행의 출범에 대해 민족계은행의 대동합병이라고 규정했다. 조흥은행은 1943년 10월1일 최초의 민족은행인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이 합병하여 출범했다. 한성은행은 1938년 1월 29일 해동은행을 흡수했고, 그리고 1941년 경상합동은행을 합병했다. 조흥은행 출범에 앞서 일본 총독부는 다단계 인수합병을 거쳐 민족자본을 와해시키거나 통폐합시켰다. 한성은행 계열 5개은행(한성은행, 해동은행,구포은행, 주일은행,대구은행)과 동일은행 계열 4개은행(한일은행,호서은행,동래은행,호남은행)은 조흥은행으로 최종 통합된 것이다.<ref><<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97), p.133</ref> <br>이 가운데 경상합동은행은 한성은행과 합병되기 직전인 1941년 6월말 현재 한국인 주주 비중이 더 컸다. 일본인 주주 비중은 33%였고 일본인보유 지분은 총 4만5000주 가운데 45.4%인 2만409주에 그쳤다.<ref><<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97), p.173</ref> <br>조흥은행 출범 당시 한성은행 10만5000주와 동일은행 8만주를 합쳐 조흥은행 주식 수는 18만5000주였다. 한성은행 총주식10만5000주에는 대구은행을 설립한 정재학이 이끌어온 경상합동은행 4만5000주도 포함됐다. 경상합동은행은 1941년 9월30일 한성은행에 흡수 합병된 바 있다. 조흥은행 총주식 18만5000주는 경상합동은행 4만5000주, 한성은행 6만주, 동일은행 8만주 등의 융합으로 구성됐다. 정재학 가문은 경상합동은행 주식 가운데 1만여 주를 보유한 최대주주 자리에 오른 바 있다.<ref><<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97), p.222</ref>
         [[조흥은행]]은 1943년 10월 1일 민족자본에 기반을 둔 9개은행( [[한성은행]] [[대구은행]] [[한일은행]] [[호서은행]] [[호남은행]] [[동래은행]] [[주일은행]] [[구포은행]] [[해동은행]])의 다단계 합병에 의해 탄생했다.<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 (창조사, 1972) p684쪽 조흥은행계보도</ref> 해방직후 [[조흥은행]]의 지분구성을 보면 일본인 5.1%, 한국인 53.7% 그리고 은행상호보유주 41.0%로 나타났다.<ref><< 조흥은행90년사 >> (조흥은행, 1987) p113~114</ref> 한국인지분 가운데 [[대구은행]]을 설립한 [[정재학]] 가문과 [[한일은행]]의 경영권을 장악한 [[민대식]] 가문 등 두 가문의 비중이 가장 컸다.<ref>경향신문 1955년 10월22일 3면</ref>
         부친 아들 손자 등 3대에 걸쳐 은행장을 배출한 사례는 한국근대 금융사에서 유일한 사례다. 대한민국의 본격적인 근대적 은행업은 구한말인 1897년부터 시작됐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도 은행업은 유지되면서 비록 일제 금융당국에 의해 통폐합되면서 조흥은행으로 통합됐지만 민족자본은행들의 한국인 지분은 [[조흥은행]]의 지분구성에서 절반을 웃돌았다. 해방 이후 조흥은행을 제외한 주요 시중은행들은 대부분 일본인 지본이 절대 우위였으며 이 지분들은 미군정청에 귀속된 뒤 이승만 정권 당시 재계에 불하됐다. 조흥은행 100년사에 따르면 [[조흥은행]]만이 당시 시중은행 가운데 유일한게 한국인 지분이 50% 이상이었다. 해방 직후 조흥은행의 총 주식수는 18만5000주로 이 가운데 [[경상합동은행]]은 4만5000주, [[한성은행]]( 경상합동은행 합병전 기준) 6만주, [[동일은행]] 8만주 등으로 구성됐다. 해방이후 민족자본은행의 대표격으로 부상한 조흥은행의 지분 가운데 [[정재학]] 가문이 설립한 경상합동은행의 지분율은 24%에 달했다.
  • 인종개량 . . . . 12회 일치
         인종개량이라는 용어의 등장은 19세기 말, 일본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서양 문명을 도입하던 시기로써, 우생학도 일본에 전해지게 되어 이것이 인종개량론이 나타나는 배경이 되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인종개량이라는 것이 혼혈을 통한 개량은 매우 극소수의 사람이 주장하던 것이였고, 의식주 같은 환경을 개량하여 순혈의 잠재력을 최대한 키우자는게 주류고 이게 인종개량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대부분 의견이었다. 근데 그래봤자 인종개량이라는거 자체가 일본에서 주류는 커녕 존재감이 크게 없었다.
         [[일본]]의 작가 타카하시 요시오(高橋義雄)는 1884년 『일본인종개량론(日本人種改良論)』이라는 저술을 발표했다. 이 저술은 "일본인종은 신체적, 육체적으로 서양인종에 비해서 열등하므로, 서양인과 대등하게 경쟁하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일본인과 서양인 사이에 혼혈을 만들어, 서양인의 피를 일본인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쳤다. 물론 어디까지나 매우 극단적인 주장이었고 그 당시 일본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정치가 카토 히로유키(加藤弘之)는 1886년 「인종개량의 변(人種改良ノ弁)」이라는 주장으로 타카하시 요시오의 인종개량론에 반박하였다. 그것을 위해서는 [[의식주]] 등의 환경을 개량하는 방법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혼종 생산을 통한 인종개량의 비현실성도 지적하였다. (1) 어떤 조합으로 인종을 개량해 나가야 할지, 그에 대한 연구가 불충분하다. (2) 많은 세월이 걸려서 비현실적이다. (3) 몇대나 잡종을 반복하다보면 일본인의 피가 멸종해버린다.
         또 호즈미 야츠카는 혼혈을 하게 되면 일본인의 전통이 훼손되고 조상숭배가 흔들린다는 점을 들어 비판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모리 아리노리는 인터넷에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일본인과 서양인과의 잡혼을 통한 인종개량을 주장한 적이 없다. 영문과 일어 어느쪽에서도 관련 근거를 찾을수 없다. 아마 타카하시 요시오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제자란 점과 모리 아리노리가 극단적인 영어 공용어화를 주장했다는 점 때문에 루머가 퍼진듯하다. 단, 건강한 일본인끼리의 결혼이나 의식주의 개량을 통한 것은 주장했을 수도 있다.
         일본인의 의식주의 개선을 통한 환경개량은 괜찮은 호응을 얻었을지 몰라도 타카하시 요시오가 주장하는 서양여자를 수입해와 잡혼을 통해 혼혈로 일본인종을 개량하자는 주장은''' 당시에도 극단적인 개소리로 취급됐고, 단 한번도 일본정부에 의해 정책적으로 시행된적이 없다.''' 애시당초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이야기임에도 일본을 혐오하는 사람들에게는 생각보다 널리 퍼져있는 잘못된 사실이다.
          * 혼혈을 통한 인종개량 같은 극단적인 주장은 사실 근대 일본에서도 그리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은 주장이었고, 실제로 정책적으로 옮겨진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가 와전되었는지 한국 인터넷에서는 일본인들이 개화기에 '혼혈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는 펼쳤다는 루머가 퍼져 있다.[[http://bobaedream.co.kr/view?code=strange&No=363548&rtn=%2Fmycommunity%3Fcid%3Db3BocWlvcGhyM29waHFnb3BocW5vcGhxb29waHFxb3Boc2ZvcGhza29waHNmb3Boc2g%3D (참조)]][[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freeboard&no=1073574 (참조)]]
  • 울릉군 . . . . 5회 일치
         [[조선]] 시대 때 [[왜구]]가 많이 습격하자 조정에선 주민을 모두 이주시키고 공도(空島)정책을 쓴다. 이후 [[일본인]]들이 들어와 어업을 하기도 했지만 [[안용복]]의 활약으로 1696년에 [[도쿠가와 막부]]에서 울릉도를 조선의 땅으로 인정하고 막부는 일본인들의 출입을 금했다([[http://anyongbok.kr/ahn/ahn_01.php|안용복 재단]] 참조). 그 후 19세기 고종 시절에 울릉도를 개척하는 정책이 시행되어 전남, 경남 지역 도서민을 이주시켜 다시 유인도가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일제강점기]] 때 도동이 일본인 마을로 통했다면 저동은 조선인 마을로 통했다는 점. 실제로 도동에는 아직도 일본식 건축물이 약간 남아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으로 울릉도를 방문했을때[* 이후 2012년에 이명박 대통령이 울릉도와 독도를 방문하였다.], 묵고 갔다던 당시 울릉군수 관사도 일본식 건물이다.
          * 옛 일본인 가옥(이영관가옥)-등록문화재 235호. 도동항 골목을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인 벌목업자가 지은 집이라고 하고, 입구에서는 까페라떼(...)와 쿠키 등을 판다. [[일제강점기]]의 일본 건축양식([[일본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을 바로 구경할 수 있다. 관람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으니, 배편을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살짝 들러볼 법하다.
  • 현진건 . . . . 4회 일치
         *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우승규의 술회에 따르면, [[1936년]]의 물난리(병자년 수해)에 수재의연금을 모으러 동지들과 창의문 밖에서 가진 모임에서, 술이 취하여 "일본인한테 기대지 말고 우리끼리 자족자구(自足自求)하자고."하고 기염을 토하다가 공교롭게도 옆에 있던 일본 경찰로부터 주의를 받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일본인을 '일본인'이라 부르지 말고 '내지인內地人'이라 부를 것을 강요했고 그러지 않는 자는 소위 '불령선인'으로 몰았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내지인'이라고 쓰고 그 위에 '일본'이라는 두 글자를 적었던 것이다)<ref>「나절로 만필」(48) '大水災와 日帝監視' 『동아일보』 [[1974년]] 11월 8일 제5면 기사.</ref>
  • 돈가스 . . . . 3회 일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서양인의 체격을 따라잡기 위해 육식을 허용[* 일본은 675년부터 1872년까지 포유류 고기를 먹는걸 금지했다.]했다. 하지만 10세기 넘게 고기를 먹지 않았던 일본인들이 고기에 적응할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인들 입맛에 맞는 고기 요리가 만들어지는데 그 중 하나가 돈가스다.
         한국인들이 시험 전에 엿먹는 것처럼 일본인들은 시험 전에 돈가스를 먹는다. 이는 돈가스를 뜻하는 トンカツ의 カツ가 승리를 뜻하는 勝つ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
  • 김문집 . . . . 2회 일치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제국대학]] 문과에서 수학했다. 일본인 소설가 [[요코미쓰 리이치]]({{llang|ja|橫光利一}}) 문하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1935년]] 귀국했다.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일본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계 일본인]]
  • 빌리 블랭크스 . . . . 2회 일치
         2008년에 부인과 [[이혼]]하고, 2009년에 14세 연하로서 자신의 통역을 담당하던 일본인 여성과 재혼했다. 2008년 11월에 일본인 부인과의 사이에서 장녀를 얻었다.
  • 요시다 세이지 . . . . 2회 일치
         요시다 세이지는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시모노세키 지부에서 동원부장으로 일했다고 주장했으며, 1977년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1983년 '나의 전쟁범죄'라는 책을 저술하여, 이 책에서 자신이 군부대를 이끌고 [[제주도]]의 마을 등에서 200여명의 여성을 강제로 징병하여 위안부로 삼았다고 진술했다. 또한 1982년 9월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증언하였다. 1900년대 아시히 신문은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바탕으로 다수의 기사를 작성했고, 이는 일본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널리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소위 '요시다 증언'에는 의혹도 뒤따르게 되었다.
         [[분류:일본인]]
  • 요코타 메구미 . . . . 2회 일치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분류:일본인]]
  • 윤정희(1944) . . . . 2회 일치
         1967년, 영화 "[[청춘극장(1967)]]"의 오유경 역할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지금 이 영화는 원본이 소실되었으나 중국어 더빙이 남아 있다.] 이후 [[남정임]]·[[문희]]와 함께 [[1960년대]]와 [[1970년대]] 대한민국 여자 영화배우 트로이카로 큰 인기를 얻었다. 청춘극장은 1967년 팔도극장 다음의 관객을 동원했다. [[1968년]]에는 [[내시]], [[천하장사 임꺽정]], [[일본인]] 등으로, 1969년에는 [[독짓는 늙은이]], [[팔도 사나이]]로 큰 인기를 끌었다. 물론 이는 일부분일 뿐 흥행한 영화는 이보다 많다.
         || 일본인 || 1968 || 118,000 || ||
  • 일본어 단어를 찾아보기 좋은 사이트 . . . . 2회 일치
          일본인들도 모르는 일본어 단어가 있다. 이런 경우 지혜봉투에서 검색해보면 질문과 답변이 나올 수 있다.
          일본인들도 모르는 일본어 단어가 있다. 하나 더.
  • 장혁주 . . . . 2회 일치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일본인 장수 [[가토 기요마사]]를 다룬 〈가등청정〉(1939)을 시작으로 전시 체제에 협력하는 친일 작품을 집필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분류:1905년 태어남]][[분류:1998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재일 한국인]]
  • 정운용 . . . . 2회 일치
         마침내 1945년 해방을 맞아 미 군정시대가 열리면서 조흥은행 일본인 임원들이 한국을 떠났다. 정운용은 미군정에 의해 1945년 11월 해방 후 첫 한국인 조흥은행장(2대)로 선임됐다. 불과 41세의 나이에 국내 최고 민간은행의 수장이 됐다.<ref><<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412~431쪽 역대임원</ref>
         앞서 민씨 가문은 일제 강점기 당시 조흥은행 대표취체역(대표이사)으로 [[민규식]]을 배출했다. 그러나 일본인 행장이 따로 있었고 실권은 없는 자리였다. 이어 해방 후 초대 한국인 조흥은행장은 정재학의 손자인 정운용이 맡았고 정재학의 3남인 정종원이 5대 행장을 역임했다.<ref name="ReferenceA"/>
  • 진창현(음악인) . . . . 2회 일치
          * 혼자서 허름한 오두막을 짓고 막노동과 바이올린 제작으로 소일하다가 [[1961년]]에 일본인 여성 나미코와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고, 장남 진창호와 차남 진창룡은 각각 현악기 제작자와 현악기용 현 제작자로 활동하며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고 있다. 자서전에 의하면 바이올린 제작을 위한 연장들을 찾기 위해 골동품 가게를 전전하다가 가게를 보고 있던 나미코를 처음 만났다고 하며, 가난한 조선인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처음에는 결혼 승낙을 받기 어려웠지만 예전에 근무했던 건설 회사 사장이 장인에게 사위의 인품을 칭찬해 주면서 결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나미코 부인은 가족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할 때 자신의 이름을 [[한국어]] 식으로 이남이(李南伊)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 일본인임에도 조선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아이카와는 교편을 잡으면서 병역을 피할 수 있었지만, 불과 2년 뒤 현역병으로 소집되어 [[중일전쟁]]에 참전해야 했다고 한다. 이후 편지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았지만, 전투 중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연락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진창현은 이후 일본에서 현악기 제작자로 성공한 뒤 아이카와의 친족들을 수소문해 만나기도 했고, 죽기 직전까지 [[사이타마]]의 혼조 시에 있는 아이카와의 묘지를 정기적으로 찾았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후지테레비의 드라마에서도 꽤 비중있는 인물로 나온다.
  • 코만단테 카펠리니 . . . . 2회 일치
         일본군으로 활동할 시 코만단테 카펠리니의 승무원 구성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떠돌고 있다. 이탈리아인, 독일인, 일본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의견과 독일인+이탈리아인 승무원만 태웠지 일본인은 태우지 않았다는 의견. 판단은 알아서 하자.
  • 하쿠다 켄 . . . . 2회 일치
         * [[한국계 일본인의 목록]]
         [[분류:195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일본으로 귀화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하버드 대학교 동문]]
  • 한규복 (1881년) . . . . 2회 일치
         《[[친일파 군상]]》에서는 한규복과 [[전라북도]][[도지사]]를 지낸 [[손영목]]에 대하여는 "일본인들에게 무조건 친일 또는 아부자가 아니었다 한다"며 그러한 주장을 인정해 주었다.<ref name="parksgi87"/> 그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라는 의견이 존재하여 그의 처벌에는 반대하는 여론도 나타났다.
         그러나 [[민족정경문화연구소]]의 보고서인 《친일파 군상》에서는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라고 인정해 주었다. 《친일파 군상》에 의하면 그를 가리켜 "이러한 기회에 일층 적극 진충보국하면 자기 개인은 물론이요, 민족적으로도 장래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한 자"로 분류하였다.<ref>김학진·정운현 역, 《친일파죄상기》(학민사, 1993), 353페이지</ref> 한규복과 [[전라북도]][[도지사]]를 지낸 [[손영목]]에 대하여는 "일본인들에게 무조건 친일 또는 아부자가 아니었다 한다"며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였다.<ref name="parksgi87"/>
  • GHQ . . . . 1회 일치
         예) 일본인이 미국 문화를 추종하는 것은 GHQ의 세뇌에 의한 것 등등.
  • weeaboo . . . . 1회 일치
         [[일빠]] + [[덕후]]. [[일본]]이나 일본 문화, 일본 애니에 과도한 집착을 가진 사람. 일상 생활에서 일본어를 가끔 쓰며 일본인처럼 행동한다. 만화 코너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비슷한 말로 [[와패니즈]](wapanese)가 있다.
  • 김윤아(1974) . . . . 1회 일치
         물론 만화 오덕의 필수 소양(…)인 일본어도 능통하게 한다. 다만 이건 오덕질로 배운 것인지, 일본인 엔지니어랑 작업을 하면서 배운 것인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 라무네 . . . . 1회 일치
         1853년에 [[페리 제독]]이 [[일본]]에 내항했을 때, 일본인들은 페리 제독 함대를 통해서 [[레모네이드]]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1865년 부터 [[나가사키]] 현에서 레모네이드가 레몬 물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 명예백인 . . . . 1회 일치
         [[나치 독일]]에서는 [[일본]], [[이탈리아]]와 [[추축국]] 동맹을 맺게 되자 일본인은 명예 아리아인으로 대우 받게 되었다.
  • 박두을 . . . . 1회 일치
         박두을은 남편 [[이병철]]이 대학 재학 중인 [[1929년]]에 장녀 [[이인희|인희]]를 낳은 데 이어 3남 5녀를 둔 어머니가 되었다. 호암자전에서 [[이병철]]은 자신의 자녀 수를 4남 6녀라고 적시했다. 이 중 자신과 박두을과의 사이에서 3남 5녀를 두었고, 일본인 아내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 방실이 . . . . 1회 일치
          * 몇 년 뒤 같은 팀원이던 박진숙, 양정희가 [[결혼]] 때문에 활동을 중단하자 서울 시스터즈는 공식 해체되었고 방실이는 데뷔 4년만인 1990년에 솔로로 전향하였다. 중장년층을 겨냥한 방실이의 솔로 데뷔곡이자 방실이의 1집 앨범의 타이틀곡 〈서울탱고〉는 탱고리듬으로 된 가요였다는 점과 그룹 활동 때 갈고 닦은 그녀의 풍부한 가창력을 바탕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 곡은 낯선 곳을 떠도는 나그네의 쓸쓸한 넋두리를 부질없는 세상사에 연관지어 관조하듯 표현해 특히 중장년층과 기성세대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1992년, 2집 앨범 〈여자의 마음〉도 유행하여 다시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의 대한민국 가요계를 뜨겁게 달궜던 방실이는 1994년에 사업가인 김연국과 결혼하고 한동안 잠정 은퇴하였다.[* 이 결혼은 당시 소속사 때문에 강제로 했다고 한다. 당시의 남편은 [[일본인]]이었다고...] 그러던 1997년, 선행 연예인으로 문화체육부 장관 표창을 받은 적 있다.
  • 배성룡 . . . . 1회 일치
         아버지는 운홍(運鴻)이며, 어머니는 유윤이(柳允伊)이다. 1917년 결혼을 전후해 일본의 니혼(日本)대학에 유학해 1923년 졸업했다. 귀국 후 조선일보사 기자로 활동하다가 퇴사하고 1924년 11월 화요회(火曜會)에 가입했다. 가입 후 사회주의 운동에 관련된 여러 편의 논저를 발표해 김경재(金璟載)와 함께 화요파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활동했으며 1925년 8월 이후 〈동아일보〉를 주무대로 활발한 평론활동을 했다. 1926년 3월 제2차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1928년 2월 1년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9월 만기 출옥했다. 1929년 조선일보사 경제부장이 되었다. 1931년 11월 새로 창간된 중앙일보사에 경제부장으로 입사하여, 1932년 봄 정치부장, 10월에는 논설반 주필 겸 편집부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 3월 〈중앙일보〉가 〈조선중앙일보〉로 제호를 변경하자 편집차장·정치부장을 역임하다가 10월 신문이 정간되자, 절필하고 은둔했다. 이 시기에 발표한 글들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경제 현실에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중층적으로 존재하게 한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파악하고 일본인 자본 대 조선 민중의 대립을 기본 모순으로 상정했다. 조선인 내부의 부르주아 계급과 노농계급 모두를 일본 자본주의에 의한 공동의 피해자로 파악하면서, 민족협동전선론을 주장했다. 8·15해방 후에는 중도파로서 좌우익의 편향노선을 비판했다.
  • 붐(연예인) . . . . 1회 일치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했던 [[일본인]] 패널 준코와 사귄 적이 있다는 고백을 했다가 당사자인 준코가 미니홈피에 "당신이랑 사귄 적이 없는데요..." 라고 딱 잘라 말해서 완전 새가 되기도 했다.[* 일부에선 준코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단 둘이서 어디 놀러가고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는데, 붐은 그 정도면 사귄 거라고 생각한 것이라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 덕분에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에선 연신 '준코! 준코!' 를 외치며 놀려대는 [[김구라]]와 [[신정환]]에게 [[관광]]타고 착잡한 표정으로 ''''제가 경솔했습니다'''' 라는 말을 되뇌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준코 사건은 이때 개그 소재로 쓰이며 오히려 이미지 세탁에 도움을 준 편.
  • 서영춘(코미디언) . . . . 1회 일치
         사실 70년대까지는 우리 나라 문화 예술에서 6.25 동란 이후 일찌기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의 그림자가 짙던 시절이라, [[웃으면 복이와요]]나 [[고전 유모어극장]] 같은 공중파 프로그램까지 일본 방송의 내용을 대놓고 똑같이 베껴 쓰던 때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세운 극장에서 공연을 하던 배우들이 TV시대가 되면서 TV에 등장한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영춘을 비롯한 당시 코미디언들이 독창성 면에서 부족한 개그를 하였더라도 폄하할 수만은 없다. 일단 악극도 연주와 노래 개그가 들어가는 뮤지컬 비슷한 형식이지만 분명히 순발력과 암기력이 필요한 연극이었기 때문에 연기력은 필수였고, 노래와 춤도 대충 해서는 안 되었던 분야였다.
  • 손예진 . . . . 1회 일치
         {{일본인 정보
  • 손치은 . . . . 1회 일치
         [[1932년]]에 [[경상북도]] 안동경찰서에서 순사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일본인 경찰관이 살해되고 조선인 청년 5명이 용의자로 체포된 일이 발생했다. 이때 손치은이 무료로 변호를 맡아 이들이 무죄임을 밝혀냈다.<ref>{{저널 인용
  • 승리(빅뱅) . . . . 1회 일치
          * 일본어 실력이 상당하다. 개요에 서술되어 있듯 사키가케, 남자의 요리 등의 프로그램에서 MC를 맡기도 했으며(AKB48 멤버들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외국인이 보면 일본인으로 착각할 수준. 한 재일 교포에 따르면 승리는 일본 표준어 뿐만 아니라 사투리[* 일본의 간사이 지역에서 사용하는 사투리([[칸사이벤]])다.]도 어색함 없이 잘 해, 정말 원어민 수준이라고 한다. 그러나 너무 오버스러운 사투리를 구사해서 듣기 민망하다는 반응도 있다. 승리의 일본 방송을 끝까지 볼 수 있는 팬은 없다 카더라. 외국어 공부도 열심히 하는지 15년 MAMA에서는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총 4개국어로 수상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이 4개국어 수상 소감은 16년 [[골든디스크 시상식|골든디스크]] 등 각종 시상식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데, 골든디스크 시상식의 경우 분명 한국에서 상을 받으면서도 '''한국에 계신 [[VIP(빅뱅)|VIP]] 여러분''' 이라고 --해 팬들을 [[안습]]하게-- 했다. --얼마나 한국에 안 왔으면-- --한국에 계신 VIP가 습관이 되었을까-- 그리고 데뷔 10주년 '''국내''' 콘서트에서는 가득 찬 팬들을 향해 VIP '''재팬''' 이라고 말했다. 팬들이 '아아~ 승리야~' 라는 식으로 야유하자, ' '''VIP 제 팬''' 이라고요!' 라고 이야기 했지만... 팬들 입장에서는 속이 상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와중에 환호하며 소리지른 섬녀...~~ 그러나 빅뱅 내에서 승리가 가장 팬 서비스가 좋고 한국 팬을 가장 아끼기에 최근 일본 스케쥴을 많이 돌며 습관처럼 입에 붙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는 의견이 많다. 유행어와 신조어에 민감한 승리가 오죽 해외 스케쥴을 많이 뛰었으면 '히트다 히트'를 모를까...
  • 식극의 소마/209화 . . . . 1회 일치
          같은시 이탈리아 계통인 [[타쿠미 알디니]]는 이 대결이 결코 쉽지 않을 거라고 예측한다. 일본인들의 편견과는 달리 장어는 서양에서도 고급 식재이다. [[쿠로키바 료]]가 선발시합에서 선보였던 "장어 마틀로트"도 대표적인 이탈리아의 장어요리. 특히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크리스마스 음식으로 장어를 먹는다. 그정도로 보편적으로 알려진 식재. 따라서 이탈리아 요리 전문인 쥬리오도 나름대로 자신있는 분야일 거라고 추측한다.
  • 식극의 소마/219화 . . . . 1회 일치
          * 그런 그녀가 고른 재료는 무려 [[악어]]. 보통 일본인들은 듣도보도 못했을 재료다. 이에 대항해 조용히 승부욕을 불사르는 메기시마. 이렇게 제 1대결과 제 2대결이 동시에 막이 올랐다.
  • 아마쿠사 키리시탄 진중기 . . . . 1회 일치
         쿠치노츠무라 마을(口之津村)에 살던 남만화가 야마다 우에몬사쿠(山田右衛門作)가 그렸다. 그는 아마쿠사에 와있던 이탈리아 출신 신부에게 서양화를 그리는 법을 배웠으며, 시진중기는 일본인이 그렸음에도 서양식으로 그려져 있다.
  • 오보카타 하루코 . . . . 1회 일치
         [[분류:일본인]]
  • 온주완 . . . . 1회 일치
         || 2002년 || [[SBS]] || [[야인시대]] || 일본인 학생 1 || 단역 ||
  • 외도 . . . . 1회 일치
          * (한국어) 불륜.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하고 성관계를 맺는 것. 여담으로 일본인들에게 '불륜은 외도 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외도라고 할 정도로 사악하게 느껴지는 행위까지는 아닌 모양이다(…).[[http://ayiva.sakura.ne.jp/doc/gedou/dic/ptalk-korean.html (참조)]]
  • 위안부 소녀상 망치 테러 사건 . . . . 1회 일치
          * 일본 대사관 앞의 평화의 소녀상은 상징성이 강하여, 과거에도 테러 목표가 된 적이 있다. 2012년 6월, 극우 일본인 [[스즈키 노부유키]]가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라고 적은 말뚝을 소녀상에 묶는 [[위안부 소녀상 말뚝 테러 사건]]을 저질렀다.
  • 이경희 (1880년) . . . . 1회 일치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여 일제 패망론을 주장하며, 해방을 준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고 [[일본인]] 도지사와 부지사 등이 업무를 내려놓고 사퇴를 선언하자 행정공백을 피하기 위해 [[8월 16일]] 위촉장을 받고 초대 [[경상북도]] [[부지사]]가 되고, 그날 [[대구광역시장|대구부윤]]을 겸직하였다.<ref>당시 경상북도청은 대구시내에 있었으므로 그는 경상북도 부지사와 대구부윤 업무를 보느라 양쪽을 오고 갔다.</ref> 그는 대구부윤 上野彦八에게서 행정권과 치안권 일체를 인수하였다. 그밖에 그는 [[대종교]] 본부 경의원의 참의로도 임명되었다.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레이몬드 재노스키(Raymond A.Zanowski) 미육군 대령의 천거로 경상북도 미군정 사령부 민정관으로 위촉되었다.
  • 이계순 (1927년) . . . . 1회 일치
         일본으로 유학, [[1940년]] [[교토]](京都) 제일고녀를 다녔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1421094 일본인들이 부러워한 조선인 석주명] 국민일보 2009.09.14</ref> 귀국 후 [[1953년]] [[부산]] [[경남중학교]] [[영어]]교사가 되었다. 이후 부산연세실업학교 교수 등을 거쳐 [[1964년]] [[서울대학교]] 사범대 영어교육과 교수가 되었다. [[1977년]] [[전문직 여성클럽]] 한국연맹 회장이 되어 여성단체 활동에 뛰어들었고 교수직과 병행하였다. [[1985년]]부터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회장을 맡았다. 1990년 3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정무제2장관을 지냈다.
  • 이민호(1987) . . . . 1회 일치
         그러던 중 KBS의 [[꽃보다 남자(KBS)|꽃보다 남자의 한국판]]에서 주인공 구준표역할에 발탁. 특유의 소라빵 머리와 우월한 기럭지를 자랑하며 시청률 대박을 치게되어 신드롬을 일으키며 일약 떠오르는 청춘스타 대열에 합류한다. 이때의 인기는 상당해서 대부분의 예능, 코미디 프로에서 특유의 소라빵머리를 하고 나오는 캐릭터들이 한명씩은 꼭 있었다. 아시아 3국의 꽃보다남자 캐스팅중에서 일본인들이 꼽은 원작에 가장 가깝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이 드라마로 이민호는 5년간의 무명 세월을 마감하고 톱스타가 된다. 그야말로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이다.
  • 이상무(만화가) . . . . 1회 일치
         이상무는 데뷔작이 고교생이 주인공인 청춘 개그물이었고 스포츠 만화나 가족 드라마를 주로 그렸지만, 주 독자층인 어린이들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성인 취향의 주제를 자주 다루었다. 예를 들어, 재일교포 형제를 주인공으로 그린 [[현해탄 너머]]에서 동시대 만화가들처럼 단순히 일본인들의 재일교포 차별만 넣는 대신 두 나라 사이에서 갈등하는 2세대 교포의 모습도 다루었다. 독고 탁이 투수로 나오는 한국인 시리즈가 그 극이라 할수 있다. [[비둘기 합창]]에서 소아마비 장애 때문에 남자친구에게 버림 받는 여자를 그렸는가 하면, [[달려라 꼴찌]]에서 일본의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한국의 흑인 혼혈인에 대한 인종 차별을 묘사하였다. 밝은 그림에 비해서는 주제가 무거운 편.
  • 이순재(1935년 10월) . . . . 1회 일치
         [[서울대학교]] 철학과 54학번이다.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래 정치학과에 들어가려 했으나 떨어지는 바람에 [[철학과]][* 이 시절의 철학계는 [[독일]]이 그야말로 대세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번역본이라는 것 자체가 생소했기 때문에, 독일어가 필수였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마누엘 칸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등의 전공책들을 '''[[독일어]] 원서'''로 읽으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독일어]] 실력이 동년배에 비해 썩 나은 편임을 [[꽃보다 할배]] 스위스편에서 독일어로 쓴 지명을 부드럽게 읽음으로써 보여 줬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인지, [[유럽]]에서 만난 일본인 팬들과 일본어로 문제 없이 소통 가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70년대 이전 명문대 출신들은 비록 회화는 어렵더라도 왠만한 일본어 원서는 그냥 읽을만큼 일본어가 능통하다. 애당초 대학교 교재들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거나 국내에서 쓸만한 교재들이 쓰이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김수행]]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도 [[박정희]] 군부독재시절이라 마땅히 읽을만한 책을 구하지 못해,자본론을 일본어로 읽었다.]로 원서를 넣어 재수해서 들어갔다. 이후 평범한 학생연극부에 입부하면서 배우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당시 연극부 부원 중에는 --요즘 건달 할배(...)로 유명한--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도 있었다. 그리고 채현국 이사장을 건너 [[고건]] 전 국무총리와도 아는 사이. 사실 고건 전 총리의 아버지 [[고형곤]] 박사가 이순재를 가르쳤던 주임교수였다. 한 번은 4학년 때 연극 합숙 연습 때문에 수업을 두 차례 빠져야 해서 찾아가 말씀드렸더니 '그래, 연극도 잘하면 철학이야' 라며 흔쾌히 봐주었다고.] [[1964년]] 12월 7일 [[동양방송]] 공채 1기 탤런트로 입사해 본격적인 텔레비전 연기에 들어가게 된다.
  • 이장희 (시인) . . . . 1회 일치
         [[1900년]]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이병학 (1866년)|이병학]]의 11남 8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구의 부호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병학 (1866년)|이병학]]이며, 어머니는 박금련이다. 다섯 살때, 어머니를 잃고 이후 계모 밑에서 크며 아버지와 불화했다. 아버지 이병학은 두 번째 부인과 5남 6녀를 두었고, 이장희가 죽기 5년 전에 세 번째 결혼을 하였으며 그 외에 측실도 1명을 거느렸다. 이장희 자결 당시 형제는 모두 10남 8녀로 매우 복잡한 가계였다.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교토]]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교우관계는 [[양주동]], 유엽, 김영진, [[오상순]], 백기만, [[이상화 (시인)|이상화]], [[현진건]] 등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부친이 중추원 참의로서 일본인들과의 교제가 빈번하여 아들 이장희 시인에게 중간 통역을 맡기려 했으나, 이장희 시인은 한 번도 복종하지 않았고, 총독부 관리로 취직하라는 지시도 거역하여 부친은 이장희 시인을 버린 자식으로 아주 단념하였다 한다. 그래서 극도로 빈궁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9년]] [[11월 3일]] 대구 자택에서 음독 자살하였다.<ref>장백일, 〈고월 이장희시 연구〉, 《국어국문학》84권, 국어국문학회, 1980, 79~82쪽</ref>
  • 이홍렬(코미디언) . . . . 1회 일치
          * [[결혼]]은 비교적 늦게 했으며[* 1987년 결혼 당시 34세. [[아내]]는 26세.], 1987년(당시 32세)에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입학한 것으로 유명한 [[만학도]]. 그래서 그런지 상당한 다독가라고 한다. 2년간 [[일본]]에 체류 한 적이 있다.[* 당시 한참 잘 나가던 시점에서 갑자기 [[일본]]으로 공부한다고 떠난 경우였다. 때문에 [[전유성]]같은 이들은 대단히 높이 평가하였다.] 이때 체류 경험에 바탕해서 쓴 [[일본]], 일본어 서적도 있고, "아버지 되기는 쉬워도 아버지 노릇하기는 어렵다"라는 자녀 교육서를 쓴 적도 있다. 그 외 아버지에 관련된 책을 번역했으며 당연히 일본어에 매우 능통해서 일본인과 직접 대화가 가능하다.
  • 일본어의 청음과 탁음 . . . . 1회 일치
         음절 위치나 화자의 컨디션에 따라 한국인 귀에는 상당히 변화무쌍하게 들린다. 엄밀히 말하면 일본어의 청음은 숨소리(aspiration)가 우리말의 평음보다는 약간 높되, 격음보다는 낮은 음가이다. 진짜 일본인들과 같은 느낌으로 발음하는 방법은, '''카, 타를 소리내면서 힘을 살짝 빼주는 것이다.''' 아무래도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에서 어두 청음 표기를 탁음과 구별 없이 무조건 '가, 다'로 정해버린 이유가 이것 때문인 듯 하다(...)
  • 장도 (1876년) . . . . 1회 일치
         1908년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 위원<ref> {{웹 인용 |url= http://db.history.go.kr/url.jsp?ID=jw_1908 |제목= 대한제국 직원록 1908년 (02. 내각 > 문관전고소) |확인날짜=2008-11-18 |형식= |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 }} </ref>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변호사]]로 등록했다. 이미 이전부터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분쟁에서 소송을 대리한 일이 있어, 실질적인 의미에서 한국 최초의 변호사로 볼 수 있다. [[조선변호사협회]] 호장을 지냈다.
  • 전명운 . . . . 1회 일치
         이에 분노한 그는 스티븐스의 친일 발언 이틀 후인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의 여객선 선착장에서 [[일본인]] 총영사와 함께 있는 스티븐스를 공격했고, 격투가 벌어지자 같은 목적에서 별도로 대기하던 [[장인환]]이 [[권총]]으로 스티븐스를 저격, 이틀 후인 [[3월 25일]] 절명하게 하는 중상을 입혔다. 그는 이때 장인환의 총격에 총상을 입고 장인환과 함께 구속되었으나, 공범 관계가 아님이 드러나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당시 교민들은 성금을 모아 [[네이던 코플란]]을 변호사로 선임했다. 이때 통역은 [[이승만]]에게 요청했으나 자신은 기독교인이라 살인범의 변호를 통역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함에 따라 유학생이던 [[신흥우]]가 맡았다.
  • 정종원 . . . . 1회 일치
         민 씨 가문은 1957년 하반기부터 1958년 상반기까지 조흥은행 주식을 대거 처분한다.<ref>동아일보 1957년 7월 20일 3면</ref> 조흥은행에서 소수주주로 전락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 조선맥주은 주세체납 등으로 은행관리로 넘어가게 됐다.<ref>매일경제 1968년 7월 2일 7면 빚만 늘어가는 조선맥주</ref> 앞서 민 씨 가문은 일제 강점기 당시 조흥은행 대표취체역(대표이사)으로 [[민규식]]을 배출한 바 있다. 일본인 행장이 따로 있었고 실권은 없는 자리였다. 이어 해방 후 초대 한국인 조흥은행장은 정재학의 손자인 정운용이 맡았고 정재학의 3남인 정종원이 5대 행장을 역임했다.
  • 정진(1941) . . . . 1회 일치
         * [[2004년]] [[MBC]]《[[영웅시대 (2004년 드라마)|영웅시대]]》 ... 일본인 이발사 역
  • 창작:치킨교 . . . . 1회 일치
         후라이드 치킨교도들이 흔히 "제1차 외식전쟁"에서 죽을 쑤자 나타난 종파였다. 제1차 외식전쟁은 미국의 위대한 선지자 맥도날드와 피자헛이 한반도에 선교를 하러 오고, 한국인지 일본인지 애매한 하이브리드인 롯데리아가 참전하면서 시장통을 지배하던 후라이드 치킨교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 결과로 치킨교는 제법 상당한 피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 피해로 인해 후라이드 교는 일종의 종교개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내부에서도 별도의 총대주교(소스) 세력에 불과하면 양념파가 따로 떨어져 나오는 결정적인 빌미가 된 것.
  • 최남선 . . . . 1회 일치
         또한 최남선의 [[단군론]]은 1926년 3월 3일부터 1926년 7월 25일까지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에 연재된 글인데 특유의 논법에 의거 ‘[[단군론]]’을 내세워 일본인 중심의 [[식민사관]]에 맞서기도 하였다.<ref>「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 단군론의 문헌검색, 김성호 저, 푸른숲(2000년, 43~51p)</ref>
  • 최홍만 . . . . 1회 일치
         최홍만의 MMA 데뷔는 2006년 12월 K-1 다이너마이트 2006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입식 뿐 아니라 MMA로의 진출도 시도하고 있던 K-1의 의도에 따라 이벤트성 매치에 얼굴마담으로 출전한 것이다. 상대는 [[나이지리아]]의 개그맨 겸 무술가인 바비 올로건이었다.[* 일본에선 꽤 유명한 방송인으로 [[시릴 아비디]]에게 이기기도 했다. 유명세 덕에 비디오게임 호혈사에서 캐릭터로 등장했으며, 일본인들에게 일반인 중 최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 결과는 11초 초살 KO승으로 데이터만으로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입식에서도 잘나가고 있던 때였고 전직 씨름선수로서 차라리 MMA에서 더 강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겹쳐 "최홍만은 MMA로 진출하면 최강자가 될 것이다"라는 떡밥이 한국의 전 격투 커뮤니티를 달구기도 했다.
  • 키라키라 네임 . . . . 1회 일치
          * 일본인 같지 않은 외국인 스러운 이름…아마존(雨存), 루나루나(月々菜), 루나(月), 레오나루도(玲央那瑠斗)
  • 파치카스 . . . . 1회 일치
         [[일본어]]로 카스(滓, かす)는 [[앙금]],[[찌꺼기]],[[쓰레기]] 같은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 이런 이름의 [[맥주]]가 있다는 것이 일본인들에게는 유머(…).]
  • 한창수 . . . . 1회 일치
         한창수는 거침 없이 친일적 언행에 더하여, 이왕직 장관을 지내면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를 어린 나이에 일본에 유학 보내고 일본인과 강제로 결혼하게 하여 결국 정신병을 앓게 한 일로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한창수가 이왕직 장시국장 재직 중 고종이 사망했는데, [[고종 독살설]]에 [[이완용]], [[이기용]], [[윤덕영]], [[한상학]], 그리고 어의 [[안상호]] 등과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한다.
  • 허준호(배우) . . . . 1회 일치
         [[2005년]] [[뮤지컬]] "갬블러"를 공연(재공연)하러 일본에 갔는데, 그가 비중있게 출연했던 드라마 [[올인(드라마)|올인]]이 당시 일본에서 인기리에 방영중이었던지라 일본인 [[기자(직업)|기자]]로부터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독도]]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받고는 말없이 걸어가 [[펜]]을 훅 뺏고는 "기분이 어떠세요?"라고 했다는 [[간지폭풍]]의 일화가 전한다. [[http://sangto3.tistory.com/1193|#]] 기자는 사과했다고.
  • 홍승목 . . . . 1회 일치
         [[대동학회]] 부회장을 맡았다가 회장 [[신기선 (1851년)|신기선]]이 사망하자 회장직을 물려받았고, 대동학회 후신인 [[공자교회]]의 부회장도 역임했다. [[1908년]]에는 [[민원식]]이 주도한 [[제국실업회]]의 회장을 맡았는데, 이 단체 역시 일본인을 고문으로 위촉하고 친일 성향의 보부상 등을 끌어모아 합방을 앞당기기 위한 활동을 벌인 친일 단체였다. 이 무렵 [[윤덕영]], [[민영기 (1858년)|민영기]]가 [[박제순]]을 회장으로 내세워 조직한 [[관진방회]]에 가담했고, [[1909년]] 이완용이 [[일진회]]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국민연설회]] 기초위원도 지냈다.
11533의 페이지중에 58개가 발견되었습니다 (0개의 페이지가 검색됨)

여기을 눌러 제목 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