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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희(1964) . . . . 26회 일치
|| '''이름''' ||<(> 이철희 (李哲熙) ||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다. 실제로 번듯한 정치 연구소 소장이라기보다는 전화 받고 사무실 지키는 직원 하나 둔 개인 사무실에 간판 하나 달아 놓은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러나 [[썰전]]에 출연하기 시작한 후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연구소에 부소장도 생겼다. [[서양호]] 씨인데 2011 통합민주당 전략기획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던 정당인 출신이다. 이철희 의원이 정계에 입문하면서 자연스럽게 소장직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서양호 소장은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 중구청장으로 당선.
2012년 대선 정국 당시, 한겨레 TV의 [[김어준의 뉴욕타임스]]에 출연해 [[김어준]]과 날선 토론을 벌여 김어준의 눈에 띄게 되었고[* 이 시기 이철희보다 먼저 출연하였고, 이름을 알렸던 인물이 바로 [[김용민(1974)|김용민]]의 소개로 출연하였던 [[고성국]]이다. 그리고 고성국이 친박 성향을 확연히 드러내면서 빠진 자리를 이철희가 메웠다.], 그 후 고정 패널로 안착하여 대선이 끝나고 프로그램이 없어질 때까지 출연하게 된다.
진보 성향의 인터넷 언론인 [[프레시안]]이 운영하는 시사 팟캐스트 방송 '이철희의 이쑤시개'를 진행했다. 그리고 종편인 [[채널A]]의 '아침 신문쇼 돌직구'에도 고정 출연 했었다. 2013년 10월부터 평일 오후 6시 16분부터[* 앞의 15분 동안은 6시 뉴스를 진행한다. 7시에도 뉴스가 진행되어 7시 6분에 시작한다.] 오후 8시까지 [[tbs 교통방송]] 생방송 '퇴근길 이철희입니다'를 진행하기도 했다. 2014년 2월 "뭐라도 합시다"와 "누가해도 당신들보다 낫겠다."(윤여준, 이상돈 공저)라는 서적도 냈다. 2015년에는 "이철희의 정치썰전: 보수와 진보를 향한 촌철살인 돌직구"와 "7인의 충고 : 이철희가 따져 본 진보 집권 전략"을 출간. 이 가운데 7인의 충고는 [[Daum]]과 [[미디어오늘]]에서 기획하여 이철희가 '논과 쟁'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전문가들과 인터뷰한 것들을 모아 낸 것인데, 정작 미디어오늘에서는 중간에 수록을 하다 말았고, 인터뷰 전문은 책이나 [[http://7author.tistory.com/m/post?categoryId=847004|여기에서 볼 수 있다]].
강용석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했다. 다만 이걸 칭찬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철희가 처음 썰전 출연제의를 받았을 때 파트너가 강용석이라고 하자 '그럼 나는 이거 안 하겠다' 라고 했었다는 걸로 봐서는, 강용석을 아주 그냥 말도 못 섞을 사람으로 본 것. 그나마 그 정도는 아니라는 뜻에 가깝다.
한편으로는 썰전에서 강용석이 이철희의 예상보다 토론주제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해온 티가 날 때 했던 적이 많아서("아니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아왔어?" 하는 식) 사적으로 사람 됨됨이가 괜찮다거나 하는 의미라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고, 방송하는 사람으로서의 성의있는 태도에 대해 인정하는 부분이었던 걸로 해석하는 게 유력하다.
E.E. 샤트슈나이더라는 학자를 좋아해서 그의 책과 이름을 자주 거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엘머 에릭 샤트슈나이더는 미국의 정치학자이다. 보통 샤'''츠'''슈나이더로 많이 알려져 있다. 민주정의 발전은 다양한 정당들의 공정 경쟁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정당 정치에 깊이 관심 있는 사람치고 샤트슈나이더 영향 안 받은 사람은 드물다. 이철희는 샤트슈나이더의 책을 번역한 적도 있다. 참고로 샤트슈나이더는 대의제 민주정을 강력히 주장하는 입장인데, 현 새정련 주류인 친노계가 직접, 참여적 민주정 강화를 지향하는 입장임을 보면 애초에 정당 운영 면에서 비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만 갖고 까는 건 아니지만~~][[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128769|그래서 오픈프라이머리(완전 국민경선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또한 학부 시절 [[최장집]] 교수에게 배운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장집 교수 역시 저서에서나 강연에서 대의제 민주정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기 때문.
이철희 소장은 [[권미혁]] 여성민우회 공동대표와 같이 [[더민주]]에 입당한다고 한다. [[http://media.daum.net/politics/all/newsview?newsid=20160119204538930|관련 기사 참조]] 1월 19일 기사시점으로 다음날인, 1월 20일에 같이 영입을 발표할 예정.
그렇게 첫인상이 좋지 않던 상황에서 인재 영입 당시 대부분의 인물들이 '당이 원하면 어디든 가겠다' 라고 하며 개인의 욕심을 보이지 않았던 반면, 이철희 전 소장의 경우에는 [[http://mnews.jtbc.joins.com/News/Article.aspx?news_id=NB11174997|'지역구 출마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13분 25초부터)라고 발언하며 낙선의 위험을 안아야 하는 지역구보다 상대적으로 당선이 수월한 비례대표를 노리고 있던 것 때문에 이미 정치 세계에 대해서 알 만큼 알고 있고, 또 [[썰전]] 등을 통해 충분한 인지도와 지지를 확보한 사람이니 지역구 선거로 나가는 게 맞지 않느냐는 비판이 있었다.
또한 [[더불어민주당]]에서 당무를 맡게 된 이후의 공천 잡음과 관련되어 있지 않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입당 직후 [[https://www.viewsnnews.com/article?q=128501|문재인 의원의 부산 공천]]을 주장해서 논란을 만들기도 했고[* 대권주자 또는 당의 핵심인원으로 전국에서 선거지원 활동을 나서야 하는 인물들을 지역구 선거에 투입할 경우 지역구 선거유세에 발이 묶이기 때문에 전국지원유세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그 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라 볼 수 있다.], 2월 초에는 '[[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60205100351001&mobile|막말, 운동권 공천 배제]]'를 주장하였는데 [[정청래]] 의원의 공천 배제의 가장 큰 근거가 된 게 '막말'이었으며 운동권 출신 의원들이 대거 공천 배제당하다보니 이철희 전 소장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산 것이다.
마지막으로 청년 비례대표 논란이 있는데, '더벤저스'라고 불리며 당내 활동에 적극적이던 영입 인사인 [[http://m.moneyweek.co.kr/view.html?no=2016031507208018613|김빈 디자이너가 예심에서 5분 면접 후에 탈락]]당한 반면, [[http://news.donga.com/ISSUE/Vote2016/News?m=view&gid=77018257&date=20160315|더민주 당직자가 첨삭지도를 해 준 것]]과 [[http://mnews.joins.com/article/19388510|과거 국민의당 발기인]]이었던 상황임에도 청년비~~리~~례대표 결선대상자로 지정되어서 논란이 된 최유진 예비 후보가 이철희 전 소장의 대학원 시절 제자라고 밝혀지면서 '자기 사람 끼워넣기'가 아닌가 하는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김빈 디자이너는 비례대표 심사 이전에 비례대표 예비후보로서 자신을 홍보하면서 자신의 본명인 '김현빈'이 아닌 예명 '김빈'이라는 이름을 쓴 적이 있다. 본명을 기재하지 않았다면 선거법 위반 사항이다. 이것 때문에 탈락했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있다.]
이러한 비호감에 쐐기를 꽂아버리는 발언이 발생했는데, 첫 번째는 [[http://gosunggo.com/693|박영선 의원과의 녹취록 논란]]이고, 두 번째는 [[유시민]] 씨가 인터넷 방송을 통해 밝힌 [[http://m.hani.co.kr/arti/politics/assembly/735001.html|'특정 지인을 지역구에 꽂아주기 위해 인원을 컷오프했다. 그 배경에 박영선, 이철희가 있다']] 라는 내용.[* 유시민 작가는 불만이 있으면 자신에게 소송을 걸라며 당당하게 주장을 하긴 하였으나 민주당을 떠난 지 오래된 사람인지라 더민주 내부 상황을 얼마나 잘 아는지 의문스럽고 또 정황 증거만 제시할 뿐 확실한 상황 증거는 내놓은 게 없다. 게다가 공개적인 토론 장소에서도 '새누리당 다음으로 싫어하는 정당이 더민주'라고 할 정도인 데다, 그때 김종인 더민주 대표가 정의당과의 당 대 당 야권 연대 방침을 철회하면서 정의당으로서는 지역구에서 궤멸당할 위기에 처했던 상황이기도 했다. 사적인 감정이 배제된 객관적인 판단으로 보긴 어렵다는 뜻이다.][* 해당 발언의 사실성을 떠나서 민주당을 떠난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친분이 있는 인사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심지어 참여정부 시절 한나라당 의원과도 친분이 있었다. 특히 소위 친노 인사들과는 당연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고 민주당 내 주류가 친노라는 점에서 유시민 씨가 민주당 내부 사정을 잘 모를 것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이러한 장대한 논란 거리를 만들어내다보니 [[박영선]], [[이종걸]] 의원과 함께 당내의 어그로 지분을 확보했다.
하지만 본인이 속한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이 [[최순실 게이트]]로 인하여 청산을 더 중요시한다는 것을 크게 경시한 것이기에 이후 자신이 지지하던 안희정이 경선에서 탈락하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다. 물론 이철희 본인이 이기는 곳에 가는 것에 연연했다기 보다 본인에게 맞는 쪽으로 간 것이기에 이철희 본인도 이후 경선결과에 토를 달지 않고 승복, 이후 문재인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주적 표현에서 대통령다운 표현이라고 말하면서 국민의당의 김경진 의원과 설전을 벌인 것이 대표 사례.
어떤 불리한 주장들도 다 정부나 여당으로 책임을 돌리는 논법 때문에 이러한 말들을 적절히 바꾼 말들이 페이스북 등지에서 유행을 하고 있다. 다만 집권여당의 전신들 같은 경우엔 이철희가 하지 않았던 말이라고 한다. --그냥 '한나라당 아닙니까' 이런 건 있다--
* [[경상도]] 사투리 억양을 가진 편임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고 정확한 발음이나 발성, 톤 조절 등 기초적 발언 능력이 상당히 뛰어날 뿐만 아니라, 토론에서의 치고 빠지는 타이밍(?)[* 평론가 시절 방송 토론에서 --노답-- 상대가 억지 논리로 나올 때도 이철희는 처음엔 참고 있다가 자신에게 유리한 시점(큰 헛점이 표출될 때)에 치고 나오며, 막판에 상대와 같이 깽판을 치더라도 상대 빈틈을 파고들 타이밍을 안 놓치고 맹공격하곤 했으며, 상대의 억지 논리를 그대로 이용하여 받아치는 것도 정확한 타이밍을 잡아 왔고, 역으로 소위 막가는(?) 언쟁을 끝낼 때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칼같이 끊어버리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 봐도 상대가 먼저 깽판을 쳤고, 이철희는 그에 잘 맞섰다는 인상을 주었다. --상대는 콧김만 씩씩, 사회자는 그냥 멘붕--] 설정 능력, 짧은 시간에 상대 논리의 빈틈을 찾아내는 능력, 상대와 상황에 맞춰서 발언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기술이 탁월하여, 농담으로 '말 못하는 사람도 토론은 잘 한다'[* 말투가 어눌하거나 목소리 톤이 별로거나 하는 등 대화에 불리한 조건을 가진 사람조차도 상대의 뜻을 빠르고 정확히 찾아내어 자신의 목적에 적합한 문장을 구성하고, 그 상황에 맞는 비언어적 표현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단점들을 극복하고 부드럽게 대화하는 능력은 뛰어나다는 뜻이다. 즉, 언어라는 요소만을 이용해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것에는 그 사람만의 [[포스]]나 [[카리스마]]도 포함된다. 한국 근대 민주화의 뿌리였던 [[김대중]]은 대통령 시절 연예인들이 그 말투를 흉내내어 당대에 가장 유행한 개그 패러디 소재가 되었을 정도로, 발음이나 말투가 매력적인 편이 아니었음에도 평생 수많은 진보 인사들을 연설과 대화로 매료시켰던, 한국 정치사 최고의 웅변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대한민국사 최초의 [[필리버스터]]도 김대중이 했다.) 그와 대화했던 정치인들의 경험담들을 보면 짧은 문장에도 힘이 실려있었다고 한다. '우리 박동지가 날 좀 도와줘야겠어'라는 말 한 마디에 사람이 움직인다는 것은 말을 못해도 말을 잘한다는 개념과 일치한다. 물론 이런건 김대중처럼 정치인생의 험난한 경험과 그런 고난들을 수없이 극복한 뒤에만 얻어지는 절대적 카리스마가 많이 쌓여야만 가능한 것으로, 초선의원 이철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분야다.--원래 말 잘하는 사람은 그냥 말 잘하면 된다--]는 소리도 있는 스피킹의 달인들이 모인 정치인 집단들 중에서도 정상급이다.
[[더불어민주당|민주당]]에서는 그를 '전략가'로서 영입했으나 사실 그 이전까지 이철희 자신을 대중적 인지도 높은 스타로 키운 건 그의 발언 및 토론 능력이다. 침착하게 말하다가도 상대의 공격에는 바로 강하게 맞설 수 있고, 강하게 말하다가도 이내 차분히 말할 수 있는 능력이 굉장하다. 그러나 전략가라는 분야는 말을 잘해서 특정 상황을 잘 넘기거나 옳은 말로 물러나지 않고 맞서는 능력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전체 상황을 유리하게 바꾸는 설계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한데, 연륜과 언변으로 인한 기대치에 비해서 전략 측면에서는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적 전략가가, 합리적으로 상대가 잘못했고 자기 진영이 잘못이 없더라도, 정의와 논리로 이기기만 할 뿐이고 상대를 협상의 장으로 흡인력있게 끌어들이는 판을 만드는 설계 능력은 별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정치에서 항상 떠넘기기식 상황 전개를 유지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실질 이득을 얻을 수 없어 자신의 가치를 상실하기 쉽다.
* 썰전에 출연할 당시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말을 잘 했으나, 경제적인 의제와 관련해서는 식견 부족으로 그저 원론적이고 이상적인 얘기만 늘어놓았다는 비판이 있었다. 사실 이 부분은 신자유주의적 성향을 드러낸 강용석과 복지를 주장한 이철희의 성향차이라고 보면 된다. 썰전에서 차라리 정치적 부분은 양자가 타협을 하기도 하고 서로의 주장을 인정하기도 했으나, 경제적 문제를 보는 인식 차이는 완벽한 평행선이었다. 썰전에서 즐겨 인용한 말이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의 '''왜 부자들을 돕는 것은 "투자"라고 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비용"이라고만 말하는가?'''였으니.
* [[맥심(잡지)|맥심]] 2016년 2월호에 (뒤)표지모델로 나왔다. [[http://i63.tinypic.com/2evdy07.png|사진 참조]] 그 후 맥심 2016년 2월호가 완판되는 영광을 누렸는데, 이건 이철희 사진이 멋있게 잘 나와서가 아니라, 실제로는 순전히 [[시노자키 아이|(앞)표지모델로 나온 사람]]덕분이었다는 게 정설이다.[[http://i67.tinypic.com/24yp6qg.jpg|사진 참조]] ~~의문의 완판남~~
- 이기택 . . . . 9회 일치
1974년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된 직후 [[신도환]] 계보에 속하면서 김영삼의 당 운영이 독선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1976년 [[이철승]]이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는 데 기여하였다. 그 해 11월 이철승에 의해 역대 최연소 제1야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나이 39세 때였다.
그러나 1978년 신도환 계보에서 이탈하였고, 1979년 5월 [[전당대회]] 때에는 따르는 의원 1명도 없이 원외인사들로만 독자 계보를 형성하여 1차 대회에서 신도환을 뛰어넘는 92표를 획득했다. 그리고 전당대회 2차 투표를 앞둔 시점에서 사퇴하여 자신의 표들을 김영삼에게 몰아 주어서 김영삼이 이철승을 꺾고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는 데 기여하였다.[* 이때 신민당 내에서는 중도통합론을 내걸고 사실상 독재정권과 야합하던 이철승에 대한 반감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그래서 2차 투표를 앞두고 [[선명야당]]을 내걸고 박정희 정권과 정면대결을 공언하고 있던 김영삼으로 반이철승 세력들이 결집한 것이다. 이기택의 후보사퇴는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도 자신의 측근들을 불러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철승을 떨어뜨리고, 김영삼을 총재로 당선시키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김영삼은 이들의 표를 모두 모아서 [[중앙정보부]]의 정치공작 속에서도 총재경선에서 승리하였다.]이 때 박정희 정권은 이기택이 이철승이 아닌 김영삼을 지지하려 하자 자형 이임용이 운영하는 태광그룹의 장부를 압수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김대중이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정치적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김대중과 동교동계 의원들이 떠나면서 민주당의 거대한 당사와 당재정을 그에게 물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어쨌든 그 후에도 시민운동가들이 창당한 개혁신당을 흡수하여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을 창당한 뒤 [[조순(1928)|조순]], [[노무현]], [[이부영]], [[이철]], [[김원기(1937)|김원기]], [[제정구]], [[김정길(1945)|김정길]], [[홍성우(1938)|홍성우]], [[서경석(목사)|서경석]], [[강창성]] 등 쟁쟁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긴 하였으나, 문제는 이들이 이기택 말을 듣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 명단을 보면 알겠지만 모든 정치권이나 재야민주화운동, 시민운동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평범한 국회의원급은 뛰어넘는 지명도를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다. 이 때문에 당시 통합민주당은 스타군단으로 불렸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게 마련.]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정계은퇴를 권유하였으나, 놀랍게도 통합민주당을 [[신한국당]]과 합당시키는 결단을 내렸다. 김영삼의 밑에 있다가, 김대중과 손을 잡았는데, 그 뒤에는 이회창의 밑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때 조순, 이철과 제정구는 이기택과 함께 한나라당으로 갔다. 그러나 노무현, 김정길, 김원기는 이기택과 절연하고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로 합류하였다.] 이기택으로서는 DJ, YS, JP 3김을 중심으로한 정치에 염증이 느끼고 있었고, [[1996년]] 김대중의 정계 복귀 뒤에 김대중과 갈등이 크게 겪게 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통합민주당이 와해당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3김 정치 청산을 내세운 이회창과 손을 잡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해서 [[한나라당]]을 창당했으나, 결국 1997년 12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여당해보나 했더니 또 야당됐네~~
- 이철우(1955) . . . . 7회 일치
||<width=30%><:>초대[br][[박맹우]]||<width=5%><:>→||<width=30%><:>'''제2대[br]이철우'''||<width=5%><:>→||<width=30%><:>제3대[br][[박맹우]]||
||<width=30%><:>제15~17대[br][[임인배]]||<width=5%><:>→||<width=30%><:>'''제18~20대[br]이철우'''[* 경북도지사 출마로 인해 의원직을 사퇴.]||<width=5%><:>→||<width=30%><:>제20대[br][[송언석]]||
||<height=40><width=20%><bgcolor=#C9151E> {{{#FFFFFF ''' 이름 ''' }}} ||<bgcolor=#FCFEFE><width=80%><(> '''이철우(李喆雨, Lee Cheol Woo)''' ||
2018년 8월 15일 첫 시행된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8위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지방선거 득표율 대비 직무수행 지지도 증감을 나타내는 주민지지 확대지수는 3위를 차지했다. [[http://www.idaegu.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6586|17개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권영진 시장 6위·이철우 지사 8위]]
2018년 9월 4일 한 언론사와 한 인터뷰에서 하락하는 경북 경제의 해법으로 4차 산업혁명을 제시하였다. 정부의 탈원전 기조에 맞추어 포항, 울릉, 울진, 영덕을 중심으로 동해안 에너지 클러스터를 구축하여 풍력, 수소에너지 등 신재생 에너지 산업 확장에 나서고 농어업이 4차 산업혁명시대에 맞게 스마트팜 혁신 밸리와 스마트 양식장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http://www.etnews.com/20180903000231|[인터뷰]이철우 경북도지사...'동해안에너지클러스터와 4차 산업혁명 일자리 창출']]
[[2017년]] [[6월 20일]] 제주도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전당대회 타운홀미팅에서 문재인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며 "얼마 못 갈 것"이라는 발언[* 당 최고위원에 당선되기 위해 지지층 결집용으로 격한 말을 던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으로 파문이 일었다. 내년 지선과 총선에서 당이 승리를 결의한 것과 달리, 문재인의 현재 하는 행동이 박근혜처럼 탄핵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면서 비난을 한 것. 이에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측에서는 야당의 막말이 점점 도를 지나치고 있다며 정부 흔들기를 그만하라고 비판했다. [[http://m.news.naver.com/rankingRead.nhn?oid=001&aid=0009348444&sid1=100&date=20170620&ntype=RANKING|연합뉴스]] 본인은 이 사태를 단순히 문재인이 경각심을 가지기 위한 것으로 해명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830754|한국당 이철우 '문 대통령 탄핵 암시 발언' 논란에 "경각심 차원의 말"]]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철우, version=25)]
- 송언석 . . . . 6회 일치
||<width=30%><:>제18~20대[br][[이철우(1955)|이철우]][* 경북도지사 출마로 인해 의원직을 사퇴했으며, 제 32대 경북도지사가 되었다.] ||<width=5%><:>→||<width=30%><bgcolor=#FFFFA0><:>'''제20대[br]송언석'''||<width=5%><:>→||<width=30%><:>''현재''||
[[이철우(1955)|이철우]]가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당협위원장직을 사퇴하자 2018년 2월 자유한국당에 입당하여 김천시 당협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동시에 치러질 [[2018년 재보궐선거]]에서 경상북도 김천시 [[선거구]]에 출마할 후보로 [[공천]]되었다.
|| 2018 || [[2018년 재보궐선거|재보궐선거]] (경북 김천 국회의원) || [[자유한국당]] || '''39,323 (50.32%)''' || '''당선 (1위)''' || '''초선'''[* 전임자 [[이철우(1955)|이철우]] 경상북도지사 출마를 위해 사퇴] ||
- 최대원(정치인,국회의원) . . . . 4회 일치
[[자유한국당]] [[이철우(1955)|이철우]] 의원이 경북도지사 출마로 국회의원을 사퇴하게 되자, 해당 지역구인 [[경상북도]] [[김천시]] 선거구에 도전했다. 당초 자유한국당 소속으로 도전을 시도했으나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도전하게 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은 관계로 자유한국당 [[송언석]] 후보와 맞붙게 되는데, 이로 인해 민주당 및 진보 지지자들의 기권 가능성이 높아졌으나, 민주당 도의원 후보의 암묵적인 지원사격을 받으면서 자유한국당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친여무소속 취급을 받았다.
|| 2018 || [[2018년 재보궐선거|재보궐선거]] (김천 국회의원) || 무소속 || 38,830 (49.68%) || 낙선 (2위) || [* 전임자 [[이철우(1955)|이철우]] 지방선거 출마를 위한 사퇴.] ||
- 김재규 . . . . 3회 일치
* 실제로 항쟁 당시 [[부산]]과 [[마산]] 내의 시민들이 대거 경찰서로 끌려가거나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또 [[김영삼]] 당시 [[신민당(1967년)|신민당]]총재 외에도 [[김대중]], [[이철승]] 등 호남인사가 신민당에 있었고 [[여촌야도]] 현상이 강하여 수도권 민심이 야당에 있었으므로 단순히 부마에만 그치지 않고 '''호남, 수도권까지 퍼져 전국적으로 경찰, 군인들과 시민들의 대규모 충돌'''이 생겨 엄청난 희생자가 났을 것이다.
이철 전 국회의원은 박정희가 종신집권을 위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이때문에 10.26 사건이 발생한 것이라고 하면서 10.26 사건을 의거로 지칭하였다.
이철 전 국회의원의 증언에 의하면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한 후 김재규는 자신의 선산학교 후배인 고교 교사에게 "민청학련 사건의 관련자들은 의로운 일을 한 사람들이며 공산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무고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박정희에게 분개하였다고 한다.[[http://m.newsfreezo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423#07hq|#]]
- 장세용 . . . . 3회 일치
7월 6일, 이철우 경상북도지사와의 면담에서 새마을운동 사업 축소에는 한발 물러섰고, 대구취수원 구미 이전에는 구미시민 동의하에 이전하는 것으로 의견을 밝혔다.
9월 20일, [[이철우(1955)|이철우]] 경상북도 도지사가 새마을운동 테마파크를 경상북도에서 직접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http://www.ksmnews.co.kr/default/index_view_page.php?idx=220851&part_idx=274#09HT|“경북, 새마을테마파크 직접 운영”]]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425991|879억 애물단지 ‘새마을공원’ 운영비, 결국 경북도가 부담]] 이로써 연간 20~30억원의 운영비 부담은 덜었지만 역사자료관 명칭 변경에서 보수측은 박정희 지우기라면서 반발하고 있다. ~~[[남유진|지난 시장]]이 저러다가 이번 지선에서 뒤집혔는데, 국회의원도 [[더불어민주당|파랗게]] 뒤집고 싶을 듯, 이 동네에서 [[정의당|노란색]]이나 [[바른미래당|민트색]]은 안 뽑힐 듯 하니~~[* 구미 갑은 원도심(원평, 도량, 형곡)vs공단+신시가지(공단/비산+선주원남/오태 등) 싸움이고, 구미을은 읍면vs동지역+공단(인동/진미/양포/산동)의 싸움인데(갑을 모두 앞쪽이 보수 우세 뒤쪽이 진보 우세), 구미 갑은 양쪽 인구 수는 비슷하지만, 자유한국당vs더불어민주당이 아니라 범보수vs범진보로 본다면, 선주원남동, 비산동, 상모사곡동이 경합으로 넘어간다. 구미을은 동지역+산동면이 읍면 지역 인구의 1.5배 정도 되지만, 범진보가 8~22%p 우세를 보이는 동지역+공단과 달리 읍면지역은 범보수가 19~'''66'''%p 우세를 보여 읍면지역이 투표율이 더 높은 것과 함께 구미을 선거에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 남유진 . . . . 2회 일치
한 지자체장에 3선을 초과하여 도전할 수 없다는 우리나라 법에 따라 구미시장 4선 도전은 할 수 없기에 2018년 1월 25일에 [[경상북도지사|경북도지사]] 출마를 위해 자진 퇴임을 하였다. 곧바로 박정희 정신을 계승하겠다며 경북도지사 출마 선언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참석 이력을 강조하며 공약으로 포항 영일대에 박정희 동상을 설치하겠다고 한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2/26/0200000000AKR20171226141300053.HTML|연합뉴스]] 하지만 자유한국당 경상북도지사 경선에서 11.0%를 득표함으로써 경선을 꼴찌로 마감했다. 이후 경선에서 선출된 [[이철우(1955)|이철우]] 경상북도지사 후보의 공동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 베이식 (가수) . . . . 2회 일치
| 본명 = 이철주
'''베이식'''(Basick, {{본명|이철주}}, [[1986년]] [[8월 12일]] ~ )은 [[이노베이터]]와 같은 [[더블 트러블]] 멤버이자 힙합 가수이다. 본관은 [[광주 이씨|광주(廣州)]]로 베이식은 2007년 2월부터 리드머 스튜디오를 통해 처음 가사를 쓰고 랩을 시작해 꾸준히 활동하다, [[2007년]] 여름 Z-juc 의 앨범을 통해 데뷔를 했다. [[DJ Soulscape]] 창작과 비트 Rap Competition 에서 2위 수상한 경력이 있으며<ref>[http://www.openmic.co.kr/bbs/bbs/viewbody.html?code=bbs_3&category=61&page=1&sort=1&number=210813&keyfield=&key= DJ Soulscape 랩컴피티션 발표]</ref>, 2007년 11월, 크루 [[Jiggy Fellaz]]에 영입되었다. [[이노베이터]]와 함께 [[더블 트러블]]을 결성했다. Jiggy Fellaz의 Vasco가 설립한 Independent Record로 거처를 옮겼지만 Vasco의 이혼으로 레이블이 와해되며 현재 [[RBW]]와 계약을 맺었다.
- 서정제 . . . . 2회 일치
|후임2 = [[이철환 (법조인)|이철환]]
- 오중기 . . . . 2회 일치
2018년 4월 3일 경상북도지사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단수공천이 확정되었으나[[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8523033|#]] 상대 후보인 [[이철우(1955)|이철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하지만 경북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로써는 최선의 결과, 더 나아가서는 최고의 결과를 내었다. --선거비용을 보전받은 것은 덤-- 이 기록은 역대 민주당계 정당 소속 경북지사 후보가 받은 득표율 최고치를 갱신한 것으로, 직전 기록은 현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인 [[박명재]]가 2006년 4대 지선 당시 열린우리당 당적으로 기록한 23.19%이다.
- 윤종신 . . . . 2회 일치
||<bgcolor=#201e1f> {{{#FFFFFF '''예명/가명'''}}} ||<(> 신경필[* 소속사 문제로 1996년 015B 6집 앨범에서 쓴 가명. 비슷한 경우로 3집과 5집엔 [[이승환|이철민이라는 가명의 가수가 있었다]].], 탁영[* 하림 1집 작사 당시 사용한 가명. 박진영의 파티피플 출연 당시 '탁한 영혼'이라는 뜻이라고 말했으나, 탁한 그림자(影)일 수도 있다. [[http://yoonjongshin.org/xe/index.php?mid=shinsmind&page=12&sort_index=regdate&order_type=desc&document_srl=37771|한자 출처]]], 풍운아[* 디지털 싱글로 트로트곡 <사랑의 뒷북> 발매 당시] ||
[[1996년]] 발매된 [[015B]] 6집의 "[[21세기 모노리스]]"를 '신경필'이라는 가명으로 불렀다.[* 비슷한 케이스로 [[토이]] 3집, 5집에서 [[이승환]]이 이철민이라는 가명으로 불렀다.]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팬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당시 대영AV에 소속되어 있던 [[015B]]가 LG미디어로 옮기면서, 대영에 남아 있었던 윤종신이 대놓고 참여하기 어려워서 그랬다는 설이 있다.[* 참고로 LG미디어는 [[1997년 외환 위기]] 때 사업을 정리했다. 덕분에 [[015B]] 6집은 음악 성향이 상당히 실험적으로 변한 것과 맞물려 재발매도 안 되어서 다른 앨범에 비해 현재 구하기 엄청나게 어렵다.(다만 근래에는 2006년 발매된 7집이 더 구하기 힘들어지긴 했지만. 이 앨범은 1만장 한정 판매) 아닌 게 아니라 1980~1990년대에 괜찮은 음악을 내던 음반사와 기획사들이 [[1997년 외환 위기]]로 대부분 몰락한 것이 [[MP3]]의 범람과 함께 [[대한민국]] 음악 시장이 1990년대 말에 급변한 하나의 원인으로 꼽힌다. 예당음향, 동아기획, 대영AV, [[로엔엔터테인먼트|서울음반]] 등도 이 시기에 치명타를 맞으면서 사그라들었고, 그 빈 자리를 채운 것이 기획형 아이돌을 내세운 [[SM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 등이다. 이외에 [[서태지]] 5집, 토이 4집을 낸 삼성뮤직도 음반업계에서 결국 철수했다. (다만 토이 4집은 다른 회사에서 재발매 중이다.)] 그 외에도 [[하림(가수)|하림]]의 1집 앨범에서 '탁영'이라는 가명의 작사가로 활동한 적도 있다.
- 이경영(1958) . . . . 2회 일치
* MBN [[대한민국 정치비사]] - [[이철희(1923)|이철희]] 전 중앙정보부 차장 역 (2013년)
- 임인배 . . . . 2회 일치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김천고등학교 동기생인 [[이철우(1955)|이철우]]에게 밀려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하였다. 같은 해부터 2010년까지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2014년부터 [[안양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고 있다.
- 현진건 . . . . 2회 일치
| 친척 = 재종조부 현학표(玄學杓)<ref>현학표는 혈연적으로는 현진건의 친할아버지에 해당하지만, 현진건이 현학표의 조카 현보운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법적으로는 현진건의 재종조부가 된다.</ref> <br /> 6촌 형 현홍건(玄鴻健) <br /> 6촌 형 현석건(玄奭健) <br /> 6촌 형 [[현정건]](玄鼎健)<ref>이들은 혈연적으로는 현진건의 친형제에 해당하지만, 현진건이 당숙 현보운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법적으로는 현진건의 6촌 형이 된다.</ref> <br /> 6촌 누나 [[현송자]](玄松子)<ref>[[현영운]](현진건의 5촌 숙부)과 그의 2번째 아내 [[배정자]] 사이에서 출생한 딸이다.</ref> <br />6촌 자형 [[이철 (1903년)|이철]](李哲)<ref>[[현송자]]의 2번째 남편이다.</ref> <br /> 6촌 아우 현성건(玄盛健) <ref>현성건 또한 혈연적으로는 현진건의 이복 동생에 해당하지만, 현진건이 당숙 현보운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법적으로는 현진건의 6촌 아우가 된다.</ref> <br /> 5촌 숙부 현철운(玄轍運) <br /> 5촌 숙부 [[현영운]](玄暎運)<br /> 5촌 숙부 현양운(玄暘運) <br /> 5촌 숙부 현붕운(玄鵬運)<ref>이들은 혈연적으로는 현진건의 친숙부에 해당하지만, 이들의 조카 현진건이 이들의 사촌 형제인 5촌 당숙 현보운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법적으로는 현진건의 5촌 당숙이 된다.</ref> <br /> 5촌 숙부 [[현철 (1891년)|현철]](玄哲)<ref>본명은 현희운(玄僖運).</ref> <br /> 5촌 숙모 [[배정자]](裵貞子)<ref>[[현영운]]의 2번째 아내이다.</ref> <br /> 장인 이길우(李吉雨) <br /> 사돈 [[박종화]](朴鍾和)<br />사돈 [[윤치호]](尹致昊)<ref>친형이자 호적상 6촌 형인 현정건의 처당숙</ref><br />사돈 [[윤치영]](尹致瑛)<ref>삼촌이자 호적상 5촌 숙부인 현영운의 사위 윤치오의 동생</ref><br />사돈 [[윤보선]](尹潽善)
- MC메타 . . . . 1회 일치
2012. 1집 Wanna Play A Circus? - 재즈합(JAZZHOP) [* MC 메타와 베이시스트 [[이철훈]]의 합작앨범]
- 고성국 . . . . 1회 일치
2012년 12월 8일 [[한겨레]]는 토요판을 통해 정치평론가 5명의 대선정국 시나리오 분석을 보도했다. 이 분석에서 고성국은 2012년 대선 투표율이 65~67%일 것이며, 박근혜가 150만~200만표 차이로 승리할 것이라 전망했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64337.html</ref> 다른 4명의 평론가([[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김종배]] 평론가, [[김형준]] 명지대 교수,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들은 [[문재인]] 당선을 예측하거나 구체적인 당선자 예측을 하지 않았다.
- 김동욱(배우) . . . . 1회 일치
||<|2> 2015년 || [[OCN]] || [[귀신 보는 형사, 처용|귀신 보는 형사, 처용2]] || 이철규 || 우정출연 ||
- 김주승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의 [[배우]]. 1980년에 연극배우로 먼저 데뷔하였으며, 그 이후 [[1983년]], [[MBC]] [[공채]] 16기 탤런트가 되었다. [[1990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5공비리]]의 큰 손 [[장영자]]의 [[사위]]가 되면서 화제가 되었었다. 그러나 [[2007년]] 초에 [[이혼]]하면서 그 이후로는 장영자와는 남남이 되었다. [[딸]]이 한명 있었으며, 딸은 전 부인이 데려갔다. 그리고 동년 [[여름]], 지병이던 [[췌장암]]이 악화되면서 결국 [[사망]]하였다.
- 김충섭 . . . . 1회 일치
공직을 퇴직한 이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무소속으로 김천시장에 출마하게된다. 김천시장직은 박보생 시장이 3선 연임제한에 걸려 출마할 수 없었기에 도전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TK지역 여당인 [[자유한국당]] 공천을 바라며 경선에 참여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공천을 정하는 과정에서 불투명한 여론조사와 당원투표 등 여러 문제로 공천 잡음 들이 생겨나게된다. 이러한 문제 들로 인해 이에 불복한 [[최대원|시장 후보 중 한명]]은 아예 탈당하고 체급을 올려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나가게 되었다. 공천 문제로 분열된 자유한국당은 원래 보수층의 지지를 받고 [[더불어 민주당|친여 세력]]의 지원사격까지 받으며 진보층 세력까지 흡수한 김충섭 후보에게 시장직을 내주고 [[이철우(1955)|전직 의원]]이 경북도지사 후보로 영전함에도 불구하고 후계자 격인 [[송언석]] 후보는 최대원 후보에게 1%정도 차이로 초박빙 승부를 벌이는 모습을 보이며 국회의원직도 겨우 당선되는 등 옆동네인 구미와 함께 자유한국당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 김태룡(정치인) . . . . 1회 일치
1963년 [[국민의당(1963년)|국민의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이후 민주당, [[민중당(1965년)|민중당]] 등의 야당에 몸담았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1967년)|신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김용태(1926)|김용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용태 후보와 [[민주통일당]] [[박병배]][* 재검표로 당선 확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5년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되었다. 1977년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의 온건노선에 반발하여 신민당야당성회복투쟁위원회 공동의장 겸 대변인을 역임하였다.
- 김희철(1983) . . . . 1회 일치
* [[천만번 사랑해]] - 이철 역 (2009.08.29~2010.03.07)
- 박명수(MC) . . . . 1회 일치
* 내 이름은 공주 (2002) - 이철희 역
- 박홍 (신부) . . . . 1회 일치
* [[이철승]]
- 송병구 . . . . 1회 일치
* 2009년 IEF 2009 스타크래프트 부문 우승 (2:1 [[이예준|이철민]])
- 오승근 (가수) . . . . 1회 일치
오승근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1968년]]에 17세의 나이로 홍순백과 함께 음악 그룹《투에이스(=금과 은)》를 결성하며 데뷔하였다. 데뷔 당시 4곡을 발표했는데 《빗속에서 울리라》, 《그 얼굴》, 《비둘기집》, 《두 마음》이다. 그 중에서 《비둘기집》(전우 작사/ 김인배 작곡)은 발표 당시 인기를 얻으며 [[1970년]]에 KBS 가수상을 받기도 하였다. [[1971년]] 약 3년 간 같이 활동한 홍순백과 결별하고 잠시〈영에이스〉라는 그룹사운드에서 최이철과 활동하다 입대를 하였으며 [[1974년]]에 복귀하면서 임용재와 함께 그룹 《금과 은》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조금씩 [[트로트]] 느낌이 나는 《빗속을 둘이서》(김정호 작사/ 김정호 작곡)를 히트시키며 다시 인기가수로 등극하였다. 또한 옛노래 모음(Remake) 앨범을 발표하였는데 앨범 수록곡이었던 《처녀 뱃사공》(윤부길 작사/ 한복남 작곡)이 히트하여 MBC 10대 가수상, KBS 최우수 남자 가수상을 받으며 전성기를 누볐다. [[1979년]]에 해체될 때까지 각 방송사의 연말 시상식에서 중창부문을 독식하기도 하였다.
- 윤용현(1969) . . . . 1회 일치
* MBC [[도둑놈, 도둑님]](2017) - 이철호
- 이동찬(기업인) . . . . 1회 일치
이 무렵, 이동찬은 코오롱그룹을 기업공개(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주식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코오롱그룹의 주주가 된 장영자와 친분을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영자와 식사도 자주 하고 골동품 구경도 하였다. 참고로 이동찬의 취미는 골동품 수집이었다. 장영자와 친해지면서 1982년 5월경 이동찬은 장영자에게 코오롱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코오롱건설을 팔려고 하였다. 그런데 팔기 직전 장영자가 검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 바람에 다행히 이동찬은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으로 기소되는 화를 면하였다.
- 이인 . . . . 1회 일치
*** 동생 : 이철 (李哲)
- 이효상 . . . . 1회 일치
* [[이철승]]
- 이희근 (1929년) . . . . 1회 일치
| 친척 = 아우 이익근(李益根) <br/> 아우 이학균(李鶴筠) <br/> 아우 이철규(李哲奎)
- 천호진 . . . . 1회 일치
| 이철식 역
- 최정호 (성우) . . . . 1회 일치
* 2005.12.18 이철환 <행복한 고물상> '''(해설)'''
- 허화평 . . . . 1회 일치
좌천된 상태에서도 저 정도의 위상이라면 실세로서 잘나가던 시절에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에 대한 견제 기회로 인식하고 친인척의 공직 사퇴를 건의하였다. 이러한 행동이 전두환 대통령에게는 항명으로 비춰져 1982년 12월 정무제1수석비서관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이후 허삼수와 함께 청와대를 나와 [[미국]]에 체류하며 헤리티지 재단 연구원으로 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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