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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 (시호)
         * [[대한제국]] [[이성계|고제]] 이성계 (추숭)
  • 권벌
         [[1514년]](뭉종 9년) [[이조]][[정랑]], [[호조]][[정랑]]이 되고, [[영천]][[군수]]로 부임하였다. [[1517년]] [[장령]], [[1518년]] [[승정원]][[동부승지]], [[좌승지]], [[도승지]], 겸[[경연]][[참찬관]], [[예문관]][[직제학]] 등을 거쳐, [[1519년]](중종 14년) [[예조]][[참판]]이 되었다가 외직을 자청해 [[삼척]][[부사]]로 나갔다. 그해 [[11월]] [[기묘사화]]로 삭출되고,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15년 간 지내다가 복직, [[부호군]], [[밀양]][[부사]], [[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했다. [[1537년]] [[12월]] [[한성부]][[좌윤]], [[1538년]] [[2월]]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그해 [[10월]] [[형조]][[참판]]에 임명되고, [[1539년]](중종 34년) [[3월]] [[병조]][[참판]], [[6월]]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1539년 7월 [[대명회통]]에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임명된 것을 바꿔달라는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 奏請使)에 임명, 동지사 [[임권]](任權) 등과 함께 연경에 갔다가 [[1540년]] [[2월]] [[명나라]]에서 귀국한 이후에는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에 임명되어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하여 [[세자]] [[조선 인종|인종]]을 가르쳤다.
         [[1588년]](선조 21년) [[경북]] [[봉화]](奉化)의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조선 현종|현종]] 때 가서 사액을 받았다. [[1591년]](선조 24) [[대명회전]] (大明會典)이 수정되어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인임]]에서 [[이자춘]]으로 수정되자, 그는 [[조선]]의 종계(宗系)가 바로잡히게 한 데 노력한 공으로 [[광국공신|광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다시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그 해 [[불천위]](不遷位)로 지정되었다. 문집에 《충재문집 (冲齋文集)》등이 있다.
  • 김기현(성우)
          * [[장영실(드라마)|장영실]]([[KBS]]) - [[이성계]][* 작중 [[태종(조선)|태종]]의 회상신에서 잠깐 등장했다. 참고로 성우 연기 외에 실제 연기로 왕 역할을 한 것은 이것이 현재까지 유일하다]
  • 나씨
         시조 '''[[나천서]]'''('''羅天瑞''')는 [[1370년]]([[공민왕]] 19) [[이성계]]가 요동을 정벌하고 귀환할 때 추위와 기근으로 아사지경에 이른 1만5천여 군사를 수백 석의 양곡을 조달하여 무사히 생환시킨 공으로 안정백(安定伯)에 봉해졌으며, 이후 안천군(安川君)으로 이봉되었다.
  • 서인석(1949)
          * KBS <정도전>(2014): [[최영]] 역. [[위화도 회군]]에서 [[이성계]]에 패배.
  • 손병호(배우)
          * 2015년 영화 [[순수의 시대]] - 태조 [[이성계]] 역
  • 아기발도
         황산에서 [[이성계]]의 군대와 대치하여 싸우던 중에(황산대첩) 이성계와 이지란의 활에 의해 사살당한다.
         이성계가 고려 정계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계기를 마련한 부분 때문에 [[조선]] 역사에서 오랫동안 그 이름이 회자되었으며, 이 때문에 고려를 멸망시킨 주역인 이성계에 대한 반감을 토벌당한 아기발도에게 투영하여 그를 동정적으로 보는 설화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아기발도 우투리 관련설]] 문서 참고.
  • 아기발도 우투리 관련설
          * 아기발도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대적자이다.
         아기발도 자체는 조선시대 초기에 사대부 계층에서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이는 조선의 개창자인 태조 이성계의 대적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기발도 이야기는 "왜군 장수 아기발도는 강했다. 하지만 장군 이성계가 물리쳤다. 따라서 이성계의 권력에 정당성이 있다."는 줄거리로서, 전형적인 '외부의 위협'(아기발도)에 대항하는 '내부의 영웅'(이성계)을 강조하여 국가의 수호자로서 왕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정치적 바탕이 되었다.
         이 같은 변화가 일어나게 된 이유는 조선 왕조의 억압이나 소외자, 패배자들의 '반발 심리'로서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인물에 이성계를 투영하고, 조선왕조 중심의 왕권 정당화 설화에서 이성계('체제')의 대적자로 여겨진 아기발도를 '반체제'의 상징으로서 삼게 되었던 것이다는 것이다.
  • 양녕대군
         [[1407년]](태종 7년) 14세에 [[광산 김씨]] [[김한로]]의 딸과 혼인하였다. [[김한로]]는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사위인 그가 폐위된 것을 전후하여 한때 유배당하기도 했다. [[1407년]]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고 [[조선 태종|태종]]은 외척 제거 목적으로 [[민무구 형제의 옥사]]를 계획한다. 양녕은 이들 두 외삼촌이 억울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을까 겁을 먹고 외숙인 민무구 형제가 태종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도 외면하였다. [[1409년]]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 오사충
         선조는 [[경상북도]] [[포항시]] (延日縣) 출신이나 나중에 [[평안도]] [[녕원군|영원진]](寧遠鎭)으로 이사했다. [[1355년]](고려 [[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규정·헌납(獻納)·집의(執義)를 역임하고, 창왕 때에는 좌사의대부로서 사전(私田)의 폐단을 상소하였다. 이해 공양왕이 즉위하자, 사인(舍人) 조박(趙璞) 등과 함께 상소하여 우왕과 창왕을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 것을 주장하고, [[이색]](李穡)·[[조민수]](曺敏修)·[[이인임]](李仁任)이 [[우왕]]·[[창왕]]을 옹립한 것을 탄핵하였다. 이와 같은 과격한 상소로 인하여 한때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나, 다시 복직되어 대사성을 거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1392년(태조 1)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 일파를 몰아내려 할 때 그도 삭직되어 유배되었으나, 정몽주가 살해되자 풀려나와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1392년]] [[음력 7월 17일|7월 17일]]에 이성계 추대에 참여하여 조선 개국공신 3등으로 [[호조]][[전서]]가 되고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졌다. 1394년 중추원부사에 오르고, 교주강릉도관찰사(交州江陵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과 가까운 수령·군인들이 직책을 소홀히 하거나 차례를 뛰어넘어 승진한 것 등을 엄하게 조사, 처리하였다. 1395년에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가 되고, 이듬해 정당문학(政堂文學)·경기좌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404년(태종 4)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로 재직하다가 영성군(寧城君)에 봉군되었다. 1406년 졸하였고 시호는 공희(恭僖)이다. 아들은 [[서자]]인 오계종(吳繼宗) 하나가 있다.
  • 유동근(배우)
         대중은 '''[[왕]] 전문 배우'''로 기억한다. 군주 역할을 많이 맡았지만 '''특유의 후덜덜한 발성'''이 강렬한 카리스마를 각인시키는 탓도 있다. 비슷하게 카리스마형 배우로 유명한 [[김영철(배우)|김영철]]이 야인시대 2부의 그 유명한 '''[[내가 고자라니|공산당 할 거야 안 할거야!!!]]'''로 대표되는 귀청이 떨어질듯 쩌렁쩌렁한 호통으로 유명하다면, 유동근은 마치 호랑이가 낮게 으르렁거리다가 포효하는 듯한, 절로 오금을 저리게 하는 초저주파 타입의 호통이다. [[https://youtu.be/DhGlBFPcmCg|이 영상을 보면 그 특유의 성난 음색이 드러난다!]] [[사자후]]라는 말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배우. 그야말로 역대급이다. 사극의 주요 배역에서도 카리스마가 있고 강력한 권력자 역을 많이 맡았다. [[계백]], [[연개소문]]이나 '''[[태조(조선)|태조(이성계)]]''', '''[[태종(조선)|태종(이방원)]]''', [[세조(조선)|세조]], [[연산군]], '''[[흥선대원군]]''' 등.
         '''[[용의 눈물]]에서 연기한 [[태종(조선)|태종]]'''은 그야말로 압권. 이때 보여준 연기는 대중에게 길이길이 남았으며, 나중에 처음으로 연기대상까지 얻는다. 용의 눈물에서는 명장면이 많았지만, 거기서도 '용의 춤[* 노쇠한 아버지 이성계를 즐겁게 하기위해 스스로 용포를 휘날리며 춤을 추던 씬.]' 부분이 압권이다. 하긴 이 장면은 유동근, 故[[김무생]], [[최명길(배우)|최명길]] 모두가 폭발한 씬이어서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그리고 2002년에 그에게 다시 연기대상의 영광을 준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 [[흥선 대원군]] 역할을 맡았을 때 최고의 장면은 대신들에게 [[경복궁]] 증축의 필요를 역설했던 장면. 매우 조용조용 낮은 톤으로 영국 공사의 자금성 입성기를 들려주다가, [[조두순(문신)|조두순]]이 끼어들자 순간 "걸어서 가겠네, 걸어서 가겠네!"[* 당시 대본엔 '(큰 소리로)'라는 지문과 "걸어서 가겠네..."가 전부였다.]라고 크게 호통을 치고 다시 조용한 톤으로 돌아가는데 면전이었으면 오줌이라도 찔끔 지릴 것 같다. [[정도전(드라마)|정도전]] 37회에서도 [[정몽주]]와 논쟁 중 '''"야 정몽주!!!"'''라고 내지르는 장면도 압권으로 [[네이버]] 추천검색에 올라올 정도였다. 유동근이란 배우의 힘을 알 수 있는 명장면 중의 명장면이다.[* 이성계 계통, 간성, 유동근의 특징이 잘 어우러진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배역이 주력이지만, 재미있는 사람도 잘 연기한다. 평소 이미지와 전혀 다른 개그 캐릭터 연기를 보고 있으면 말로 형용하기 힘든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이성계(정도전)]] 역할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드라마에서는 엄숙하거나 카리스마있는 역할을 자주 하는 편인데, 반대로 영화에서는 주로 [[코미디]] 영화를 많이 하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성공한 코믹 영화로는 [[가문의 영광]] 시리즈의 [[가문의 영광(영화)|첫번째 작품이 있다.]]
         2014년에 방영될 KBS 드라마 [[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 [[이성계(정도전)|이성계]] 역할을 맡았다. 담당 PD가 용의 눈물 시절 연출부의 막내인걸 생각하면... 재미있는 것은 [[용의 눈물]]에 이어 [[이방원(정도전)|아들]]역에는 [[안재모]]. [[이지란|의형제]]역에는 [[선동혁]]이 그대로 나온다는 것. 참고로 '''[[서북 방언]]'''을 구사한다! 공교롭게도 사극에서 [[정도전]]과 관계 깊은 사람을 세 번 연기한 셈인데, [[이성계|정도전을 발탁하고 중용한 사람]], [[이방원|정도전을 죽인 사람]], [[흥선 대원군|정도전을 복권시킨 사람]]을 모두 연기했다는 진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유동근은 이 세 가지 배역을 통해서 세 번의 연기대상을 수상했다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 유동근이 대상을 수상한 배역들은 모두 조선 왕조의 인물들이며 직간접적으로 정도전과 연관점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정도전이 종방한 후 정말 짧은 휴식기를 가지고 바로 [[주말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에 출연하였었다. 바로 전작에서 박력 넘치는 무골 이성계를 연기했던 것과 정 반대로 여기서는 나이들어 쓸쓸함을 느끼면서도 자식 걱정에 마음을 쏟는 순박한 아버지 [[차순봉]] 역할로 나와서 정도전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 보면 엄청난 괴리감을 받게 된다. 달리 말하면 유동근이라는 배우의 연기력과 그 스펙트럼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 그야말로 1년 내내 KBS 드라마의 주역으로 미칠듯한 활약을 했고 그 열연의 결과로 2014 [[KBS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 3번째 대상의 영광을 품에 안았다. 이번 대상을 수상한 당시 나이 만 58세로 [[김혜자]]의 뒤를 잇는 최고령 연기대상 수상자로 남자 배우 중에선 두번째로 최고령 수상자.[* 2014년 수상 당시에는 남자배우 중 최고령 수상자였으나, 2017년에 [[아버지가 이상해]]에서 열연한 [[김영철(배우)|김영철]]의 대상 수상으로 그 기록이 깨졌다.(수상 당시 만 64세.)]
          * KBS <정도전>(2014): 이성계 역. 위화도 회군에서 최영에 승리.
  • 이방원
         [[이성계]]의 5남. 이성계 일파를 숙청하려던 정몽주를 참살하는 등 조선 개국에도 일조했으나, 이성계가 이복동생인 막내 방석을 세자로 세우려 하자 다른 동복형제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방석과 방번,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뒷배였던 정도전 등을 참살하여 실권을 장악한다(1차 왕자의 난). 그 후 조사의의 난이나 2차 왕자의 난 등의 도전을 제압한 뒤 정종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한다.
  • 이인민
         공민왕 9년(1360년) 문과에 급제, 우왕 9년(1383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관장하고 문하평리 겸 대제학(門下評理兼大提學)에 올랐다. 1388년 최영(崔瑩)ㆍ이성계(李成桂)에 의해 형 [[이인임]](李仁任)이 숙청당하자 이에 연좌되어 유배되었다가 1388년 공양왕의 즉위 이후 석방되어 관작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2년(1390년) 윤이(尹彛)ㆍ이초(李初)의 옥사(獄事)에 관련, 청주옥(淸州獄)에 갇혔다가 이듬해 국대비 왕씨(國大妃 王氏)의 생일에 사면령이 내려져 특사, 풀려났다. 그 뒤 경외종사관(京外從使官)이 되었다가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를 지냈다.
         도은 [[이숭인]]은 그의 사촌형제인 이원구(李元具)의 아들이다.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딸 [[경순공주]]의 부마인 [[이제]]는 그의 형 [[이인립]]의 아들이었다.
  • 이장경
         [[이백년]]의 아들이자 손자 [[이인기]]는 평양부 부윤이었고, 고손자(아들 이백년의 증손)는 [[포은]] [[정몽주]]의 제자이자 [[고려]] 멸망 이후 두문불출한 절신 [[이숭인]]이었다. 이인립(李仁立)의 아들이자 이장경의 고손자인 이제(李濟)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사위가 되어 조선 왕실과도 인척관계가 되었다.
  • 이제현 (1288년)
         * [[이성계]]
  • 이진우(배우)
          * [[신돈(드라마)|신돈]](2005~2006, [[문화방송|MBC]]) - [[이성계]] 역
  • 정종
         태조 [[이성계]]→'''정종 이방과'''→태종 [[이방원]]
         정종은 조선의 2대 왕이다. '1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쥔 정안군 이방원(후의 태종)의 의도에 의해 '[[징검다리]]'처럼 추대된 왕이어서 대중적으로 조선 왕 중에서 가장 이미지가 희박한 편이다. 부친 이성계에게도 신임을 얻은 등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괜찮은 구석도 있지만, 정치 역학적인 이유로 존재 자체가 묻혀버렸다가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정식으로 정종이라는 시호를 얻게 된다.
  • 지진희
         * [[2012년]] [[SBS]] 《[[대풍수]]》 ... [[이성계]] 역
  • 천호진
         | [[이성계]] 역
  • 최불암
          * [[김무생]]이 [[이순신]] 및 [[이성계]] 전문배우, [[이영후]]가 [[김구]] 전문배우이듯 최불암 역시 [[이승만]] 및 [[정주영]] 전문배우이다.
  • 허목
         그는 [[삼척]]부사로 재직 중 [[준경묘]](濬慶墓)와 [[영경묘]](永慶墓)를 찾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삼척은 [[조선 목조|목조]] [[조선 목조|이안사]]의 외가이자, 준경묘와 영경묘는 [[조선 태조|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이양무]] 장군 내외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삼척 미로리未老里에는 예전부터 목조 부모의 묘소가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왔다.
  • 효령대군
         연주대는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권유로 의상대 자리에 석축을 쌓고 30m<sup>2</sup> 정도의 대를 구축하여 그 위에다 암자를 지은 것이라 한다. 이곳에 특이하게도 효령각을 만들어서 효령대군의 영정([[경기도]] [[문화재]] 제81호)을 봉안하고 있다. 찾는 등산객의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는 곳이기도 하다.<ref>{{뉴스 인용|url=http://er.asiae.co.kr/erview.htm?idxno=2009042321152119354|제목=연주암 점심공양 300그릇에서500그릇으로 늘어나,관악산 체감경기|성명=이형구 기자|날짜=2009-04-28|출판사=이코노믹리뷰|언어=한국어|확인날짜=2010-05-15}}</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9&no=550624|제목=이웃과 함께하는 열린 종단 일궈낼 것|성명=문일호 기자|날짜=2009-10-23|출판사=매일경제|언어=한국어|확인날짜=2010-05-1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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