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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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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영식 . . . . 3회 일치
         그는 [[민영익]](閔泳翊)과도 가깝게 지냈다. [[1881년]](고종 18년)에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 파견되자 홍영식도 조사(朝士)로 선발되어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김옥균]], [[박정양]], [[어윤중]], 조준영(趙準永) 등과 함께 배편으로 [[일본]]을 방문, 시찰하였다. 이때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온 [[이상재]]와도 교우하였다. 홍영식은 [[일본]]의 군사 시설을 시찰하며 일본의 육군에 대한 보고서인 《일본육군총제 日本陸軍總制》, 《일본육군조전 日本陸軍操典》 등을 작성했다.
         당시 [[우정총국]]이 새로 설치된 건물은 [[조선 선조|선조]]조에 전의감(典醫鑑)으로 지은 건물로 고종이 하사한 것이다. 이어 그는 분국을 [[제물포]]에 최초로 설치하고 급한대로 외국인과 교통이 잦은 [[인천]], [[부산]] 등에 임시로 우정국 분국을 설치했다. 또한 [[박정양]]이 추천한 [[이상재]]를 제물포 우정국장으로 임명하였다. 바로 우표의 도완을 그려 문위우표(文位郵票) 5종을 [[일본]] 인쇄소에서 인쇄, 주문하였다. 그 가운데 5문, 10문 등 2종이 [[1884년]] [[10월]] 국내에 들어 왔다. 그러나 25문, 50문, 100문은 미처 국내에 반입되지 못하였다. 우편 업무 취급장정의 제정, 인력과 장비 등 준비를 거쳐 [[11월 18일]]([[음력 10월 1일]]) 최초로 한성과 제물포분국, 인천분국 간에 우편물 교환을 개시하였다.
         * [[이상재]]
  • 현진건 . . . . 1회 일치
         [[1922년]] 9월에 현진건은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ref>1년에 걸치는 「조선일보」 근무에 대해서 현진건은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이유로는 초기 「조선일보」가 보여준 노골적인 친일신문 표방 태도, 친일 색채가 농후한 발행 주체들이나 수시로 뒤바뀌는 발행인으로 인해 현진건 자신의 소신을 펼치기 곤란했던 점이 지적되고 있는데, 당시 「조선일보」의 친일 분위기에 대해 현진건의 문우였던 박종화는 "월남 이상재 선생 사장과 신석우 부사장, 민세 안재홍 편집국장 등이 취임하기 전의 초기 「조선일보」에는 양심있는 사람으로는 오래 거접(居接)할 것이 아니었다"(박종화, 「빙허 현진건 군(君)」, 『신천지』 1954.10. p.139~140)고 하였으며, 자전적 성격을 띠고 있는 현진건의 「지새는 안개」에는 「조선일보」를 빗대어 아예 "썩은내, 더러운내, 곰팡내, 음탕한내가 감도는 분위기", "도야지(돼지) 우리"로까지 표현하고 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135~136.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최남선]](崔南善)이 만든 동명사(東明社)에 들어간다. 그 다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창간 당시부터 민족적 색채가 농후했고, 역사지향적 성격을 추구하며 「조선통속역사강화」(최남선 저) · 「조선과거의 혁명운동」(문일평 저) 등 유독 국학(國學) 관련 논문이 자주 연재되었던 「동명」에서의 경험은 훗날 「고도순례 경주」, 「단군성적 순례」 등의 민족의식이 농후한 작품을 쓰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9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그리고 11월 13일에 그의 첫 창작집 『타락자』가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발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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