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이기붕"에 대한 역링크 찾기

이기붕의 역링크


역링크만 찾기
검색 결과 문맥 보기
대소문자 구별
  • 강경헌
         * 2002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 ... [[이기붕]] 여비서 역
  • 강경헌(배우)
          * [[2002년]] [[SBS]] 대하드라마《[[야인시대]]》 … [[이기붕]] 여비서 역
  • 김용우 (1912년)
         |후임자 = (서대문구 갑) [[김도연 (1894년)|김도연]]<br/>(서대문구 을) [[이기붕]]
  • 남궁염
         [[미국]] 유학 중 남궁염은 [[1921년]] [[북미한인학생회]](北美韓人學生會) 대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며 같은 해 미국 뉴욕에서 이승만(李承晩), 이용직(李容稷) 등과 함께 조국광복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였다. 또한 [[허정]], [[이기붕]] 등과 함께 [[동지회]]의 뉴욕 지부의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歐美委員部) 위원으로 피선되었고, [[1924년]] 구미위원부의 임시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재미한인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
         [[1928년]]에는 [[허정]], [[이기붕]] 등과 함께 삼일신보사(三一申報社)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33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뉴욕지부 대표후보로 활동하였다. [[1938년]] 일시 귀국하여 [[충청북도]] [[제천시|제천군]] 의 삼화성광산(三火星鑛山)을 운영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1941년]] 다시 구미위원부 위원에 재선임되고 [[1942년]] 이후 북미동지회(北美同志會) 총부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경제위원을 역임하면서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 배도환
         *2002년 SBS 《[[야인시대]]》 - 한백수 역 ([[이기붕]]의 비서)
  • 백성욱
         * [[이기붕]]
  • 신태영 (1891년)
         |전임 = [[이기붕]]
         |전임자 = [[이기붕]]
  • 오경석
         ******* 손자 : [[오일육]](吳一六, [[장면]] 비서관, [[경무대]]·[[이기붕]] 비서관 역임)
  • 오세창
         * 아들 : [[오일육]](吳一六, [[장면]] 비서관, [[경무대]]·[[이기붕]] 비서관 역임)
  • 윤치영
         [[이기붕]]을 사무비서로 고용한 뒤에도, 윤치영은 방문자 선별과 이승만 내외 경호 업무는 직접 맡았다. 송진우 암살과 여운형 암살, 장덕수 암살 이후로 윤치영은 밤을 새면서 [[이승만]]의 신변 안전을 위해 미군정이 보낸 경호원들과 함께 이승만을 직접 경호하였다. 그는 [[5.10 총선거]] 직전까지 [[이승만]]의 신변을 담당했는데, 나중에는 종종 짜증을 내기도 했다. 사소한 방문자들이면 너는 누구냐? 웬놈이냐? 라는 반말도 하게 됐다.
         [[1948년]] [[이승만]]의 비서에서 밀려나자 이때부터는 [[이범석 (1900년)|이범석]], [[이기붕]] 등이 [[이승만]]을 주변에서 시종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프란체스카]]의 시중을 들던 조카딸 [[윤노라]] 역시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윤치영의 오랜 지우이자 [[이승만]]과는 한때 로맨스가 있었던 [[임영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윤치영의 부인에게도 거부감을 갖던 [[프란체스카]]는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가 사소한 심부름까지 하게 되면서 그들을 신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협상]] 직후 [[5.10 총선거]]에 출마하려던 [[한국독립당]] 당원들이 상당수 당에서 쫓겨났다. 윤치영은 [[한독당]]에서 출당당한 인사들을 대다수 [[이승만]] 진영으로 영입해 왔다. [[1948년]] 정부 수립 직전 한미정권이양 한국특명전권 위원을 지냈다.
         그러나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에서 [[신익희]], [[지청천]] 등이 탈당하여 당세가 약화되었다. 1949년 2월 대한국민당 일부의 민국당 입당으로 당이 사실상 와해되자 그는 이정회를 조직하여 꾸렸다. 이정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데 선봉에 섰다.<ref name="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1949년]] 반민특위에서 국회의원에 대한 조사에 착수할 때는 조사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이기붕]] 세력, [[장택상]] 세력 등과 경쟁관계에 놓였으며, 그들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이승만]]의 주변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동지이자 경쟁자인 이기붕, 돈암장 시절 이후로 그의 라이벌로 전락했다.
         후일 그는 한 인터뷰에서 [[조봉암]]을 회고하면서 '비극의 주인공<ref name="ji43">〈인터뷰 전직 내무부장관을 찾아서 : 윤치영 전장관에게 듣는다〉《지방행정 1986년 6월호》 (대한지방행정공제회, 1986) pp.43</ref> 이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조봉암]]의 사법살인은 [[이기붕]]일파와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당원들의 농간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조봉암]]이 [[대통령 선거]]에 도전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고 보면서도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일파들의 정치인 법살행위에는 분개했다.
         그는 부통령 출마의 변 중 하나로 "[[이기붕]]을 낙선시키기 위해서"라고 하였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308">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308-309페이지</ref> '나는 만송이 [[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면 그를 에워싼 아첨배들의 극성으로 나라의 장래를 그르칠 것이라고 염려가 되었고, 그러한 그들의 파당책 작폐를 예방하려는 뜻에서 내가 속해 있는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의 [[부통령|부통령 후보]]로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당선되리라는 예상 보다는 내가 고약하게 보고 있는 무리들에 업힌 이기붕 후보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낙선시켜야 한다는 하나의 사명감 때문이었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308"/>'는 것이다.
         [[1960년]]의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은 그를 선거대책위원회로 영입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그는 부통령에 출마한 이유를 '[[이기붕]]을 낙선시키기 위해서' 완주해야 된다며 [[부통령]] 후보로 출마, 완주하였다. 다만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 지지를 선언하였다. [[3월 15일]] 부통령 선거 기표결과 낙선하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기붕]]은 부정선거 및 개표조작으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었다.
         [[3·15 부정선거]]에 대한 후유증으로 [[4·19 혁명]]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승만]]의 측근이었다가 [[이기붕]] 등에 밀려났으므로 화를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윤치영은 [[4·19 혁명]]을 4.19 사태라며 비판하였다. 윤치영은 [[4·19 혁명|4.19]]를 두고 [[김창룡]]의 요절을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윤치영은 [[김창룡]]이 오래 살았다면 4.19 사태와 같은 허술한 사태 처리로 [[이승만]]이 맥없이 하야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308"/> 윤치영은 4.19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그는 4.19를 '4.19 사태'라고 보았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308"/> 그의 주장은 학생 운동권들의 격렬한 반발을 유발했다.
         윤치영은 [[장면]]에 대해 냉소적이었으며, [[장면 내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장면이 이승만을 몰아내려고 쿠데타를 기도했다고 봤다. 한번은 반도 호텔 지하실 이발소에 갔던 길에 윤치영은 우연히 [[장면]] [[국무총리]]와 마주쳤다. 윤치영에 의하면 "[[이기붕]]이 그러했던 것처럼 장면도 이 건물의 8층인가 어딘가에 큰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공공연한 비밀이 생각났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329"/> 는 것이다. 이후 [[장면]]을 만날 때마다 조소하게 되었다.
         그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기간 중의 부패와 선거 관련 문제는 [[이승만]]과는 무관하다고 확신했다. '얼마간의 무리도 따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0년대 들어 저질러진 그러한 행태들은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정권의 부패한 세력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가령 [[이기붕]], [[박마리아]]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유지시키고 심지어는 대권을 생각해서 저지른 짓들입니다.<ref name="han01">한국논단 1991년 9월호 (한국논단, 1991) pp.73</ref>'라고 주장했다.
         한편 윤치영은 [[이기붕]]과 함께 [[이승만]]의 귀를 막았다는 비판도 있다. 윤치영은 청년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젊은이들을 채용하여 주변에 배치해 두었다. 그러나 [[최기일]]에 의하면 윤치영과 [[이기붕]]에게 [[이승만]]에 대한 언론과 여론은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ref name="자존심을 지킨"/>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일반 대중, 그리고 이 박사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이승만의 독선에 환멸을 느꼈다. 그 결과 이승만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가 떨어졌다. [[최기일]]에 의하면 [[이승만]]에 대한 대중의 환멸과 결과적으로 생기는 대중의 [[이승만]] 지지 악화를 윤치영과 이기붕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한다. 그들의 자세는 다만 이승만 박사를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 뿐이었다.<ref name="자존심을 지킨"/> [[최기일]]은 '그들은 사람들이 이승만을 지지하고 따르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고 혹평했다.<ref name="자존심을 지킨"/>
         [[이범석 (1900년)|이범석]]은 [[이은혜 (정치인)|이은혜]]에게 누님이라고 불렀는데, [[이승만]]의 또다른 측근이었던 [[허정]](許政)은 그의 두 번째 부인 [[이은혜 (정치인)|이은혜]]와 [[이범석 (1900년)|이범석]]이 먼 인척관계<ref>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ref> 였다 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한편 [[이승만]]의 또다른 측근이었던 [[장택상]]과는 앙숙이었다. 후에는 [[이기붕]]과도 앙숙이었고, [[장면]]이 [[이승만]]의 곁을 떠나자 [[장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목사로 [[국무총리]]서리에서 3번 인준부결된 [[이윤영 (1890년)|이윤영]]과 가까이 지냈으며 그에게는 호의적이었다.
  • 이갑성
         [[1953년]] 집권당이던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의 최고위원과 당 정무부장이 되었고,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도 출마하였다. [[1953년]] [[3.1 운동]] 관련 단체인 민족대표 33인유족회의 회장이 되고, 국산부흥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족청계가 숙청된 뒤 [[이승만]]의 특별 부탁으로, 혼란에 휩싸인 자유당을 재건하기 위한 8인 재건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정무부장(政務部長)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기붕]] 계열과 주도권을 두고 암투를 벌이던 중 [[이기붕]]계열에 의해 숙청되어 당의 실세에서 밀려나게 된다.
  • 전성군 (1488년)
         생전 관직은 [[함열읍|함열]][[현감]](咸悅縣監), 용강 [[현령]](龍岡縣令), [[평양]][[진관]] 병마첨절제 도위, [[돈녕부]][[주부]] 등이었지만 후손들의 거듭된 출세로 [[증직|증]]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증직|증]] [[호조]][[판서]]와 [[증직|증]] [[이조]][[판서]]를 거쳐 [[증직|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는 등 거듭 증직이 [[추증]]되었다. [[대한민국]] 초기의 정치인 만송 [[이기붕]]은 그의 13대손이다.
         사후 여섯째 아들 [[이량 (조선)|이량]]의 영귀로 [[증직|증]]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증직|증]] 자헌대부 호조판서에 추증되고 다시 [[증직|증]]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다른 후손들의 출세로 [[증직|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전성군(全城君)에 추봉되었다. 후일 [[대한민국]]의 초기 정치인인 [[이기붕]]은 그의 아들 [[이량]]의 직계 후손이었다.
         * [[이기붕]]
  • 전예용
         |전임자 = [[이기붕]]
  • 한갑수(1913)
         [[1957년]]부터 [[1960년]]까지 [[국회의장]] [[이기붕]]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이후 한글기계화연구소 이사장, 한글학회 회장, 한글재단 초대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5년]]부터 37년 동안 [[KBS 1라디오]] 프로그램 ‘바른 말 고운 말’에 출연하여 한글의 올바른 사용법을 알렸다.
  • 효령대군
         [[조선 선조|선조]], [[조선 광해군|광해군]] 때의 형제 정승 [[이충]]과 [[이명]] 역시 효령대군의 후손이자 보성군의 7대손이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정치인 만송 [[이기붕]] 역시 보성군의 후손으로, 효령대군의 20대손이자 보성군의 19대손이며 [[전성군 (1488년)|전성군 이대]]의 16대손이었다.
         * [[이기붕]]
12238의 페이지중에 15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을 눌러 제목 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