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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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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수(배우) . . . . 63회 일치
         ||||<table bordercolor=#93DAFF><table width=800><#93DAFF> {{{+1 '''{{{#!html<span style="text-shadow: 0 0 6px #ACF3FF;color:#000000"> 이광수 / LEE KWANGSOO}}}'''}}} ||
         ||<#ACF3FF> '''{{{#000000 이름}}}''' ||<#ffffff><(> 이광수(李光洙 / Lee Kwang-Soo)[*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지은 춘원 [[이광수(소설가)|이광수]]와 한자도 같은 동명이인이다.] ||
         ||<#ACF3FF> '''{{{#000000 별명}}}''' ||<#ffffff><(>아시아 프린스[* 유독 해외에서 인기가 많아 붙여진 별명.], 금사빠, 꽝수, 광바타, 모함광수, [[기린]], [[불나방]][* [[런닝맨]]에서 물불 안 가리고 게임에 무작정 달려들거나, 더티 플레이를 즐기는 [[유재석]], 이광수, [[전소민]], [[양세찬]] 등을 일컫는 별명.], 얌생이[* 이다희가 붙여준 별명.], 송중기 친구[* 유재석이랑 김종국이 유독 이광수를 놀려먹을 때 쓴다.] ||
         ||<#ACF3FF> '''{{{#000000 사이트}}}''' ||<#ffffff><(> [[http://kingkongent.com/ent/inc/artist_view.php?name=이광수|공식 사이트]] ||
         '''아시아 프린스, [[런닝맨]]의 최대 수혜자[* 런닝맨 고정 7인 중 프로그램 시작 당시 인지도가 낮은 편이었으나, 현재는 런닝맨의 실세가 되었다. 특히 해외 팬들의 인기는 가히 압도적. 그에 걸맞게 중국 최대의 SNS인 [[웨이보]] 팔로워 수만 봐도 약 830만 명인데, 웨이보 한류 스타 순위 TOP 100명 중에 12등이다. 런닝맨 내에서도 팔로워가 두 번째로 많은 송지효와 200만 이상 차이가 난다.][* 런닝맨이 시작하던 2010년 7월 기준, [[유재석]]-[[지석진]]은 이미 십수년간 대중에게 인정받은 톱 개그맨이자 MC였고, [[김종국]]은 가수로서 정점을 찍은 상황에서 [[X맨을 찾아라]]과 [[패밀리가 떴다]] 등 예능에서도 맹활약한 스타였다. [[하하(가수)|하하]] 역시 X맨, [[무한도전]] 등 예능에서 잔뼈가 굵었고, [[송지효]]는 배우 경력이 꽤 길고 패밀리가 떴다 등의 예능 출연 경험 등이 있었다. 이들에 비해 [[개리(리쌍)|개리]]와 이광수는 비교적 인지도가 낮은 상황이었다. 개리의 경우 그룹 [[리쌍]]은 많은 히트곡과 힙합계에서 오랫동안 쌓아올린 명성, [[길(리쌍)|길]]의 무한도전 출연 등으로 그룹 자체는 유명했지만 개리 개인의 인지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고, 이광수는 시청률 20%를 넘겼던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주요 조연으로 나와 갓 이름을 알렸던 때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화제성이 워낙 대단했기 때문에 이광수도 적지 않은 인지도를 자랑했지만 아무래도 다른 멤버들에 비해서는 덜 알려진 상태였던 것.]'''
         예능 캐릭터로는 [[기린(동물)|기린]][* 이광수의 대표 별명. 그 이유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키가 커서.], 꽝손의 신 혹은 꽝손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그리고 20꽝수로 [[전율미궁|여기]]에 혼자 들어갔다-- 최근에는 얌생이로도 웃음을 자아내는 중.
         런닝맨 초창기에는 소심한 성격 때문에 낯가림이 심해 큰 활약을 하지는 못했지만[* 다만 초창기에도 송지효나 김종국을 저격하는 모함광수 캐릭터로 종종 분량을 확보했던 것을 볼때 기본적으로 재능은 충분히 있었다.] 날이 갈수록 예능감이 늘어나 미치다 못해 폭주하게 되었다.[* 런닝맨 초창기 때랑 지금이랑 비교하면 완전히 천지개벽 수준이다. 그 당시에는 낯도 많이 가리고 말을 하다가도 말이 끊기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게스트들도 광수랑 팀이 되면 많이 어색해했는데 최근에 와서는 오히려 게스트가 광수랑 팀이 되면 게스트 분량도 많이 나오고 서로 편한듯한 모습이 나와서 게스트들도 이광수랑 팀이 되는 걸 선호한다. 런닝맨 초창기 때를 보면 저런 사람이 어떻게 지금 이런 캐릭터가 되었지라고 의문을 가질 정도.] 덕분에 물이 오른 예능감으로 현재 런닝맨의 분량을 상당히 뽑아 인기가 더 높아졌고 게스트들도 이광수랑 팀을 되는 것을 은근 선호한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런닝맨의 실질적인 실세라고 불릴 정도로 런닝맨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멤버는 물론이고 게스트까지 이광수를 놀리면서 주로 분량을 뽑는다. [[제니(블랙핑크)|제니]]도 런닝맨에 나왔을 때 대놓고 이광수를 놀렸다.이광수가 말을 하면 다 그건 별로라고 놀렸다. 한마디로 이광수는 멤버는 물론 게스트들한테까지도 편한 이미지를 장착했다는 말이 된다.
         상대를 괴롭히는 쪽이든, 본인이 괴롭힘을 당하는 쪽이든 예능인으로써 이런 쪽으로 망가지는 것에 거부감 없이 매우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라 런닝맨을 보면 유재석이 이광수를 매우 아끼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특히나 2018년 쇠퇴기에 이른 무한도전은 여러모로 원초적인 웃음에 대한 슬럼프가 온 와중에 또 다른 주력 방송인 런닝맨에서는 이런 인재가 있으니 더욱 좋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이 괴롭힌다-- 런닝맨의 회차가 거듭될수록 방송 전체적인 흐름을 장악하고 있다. 대부분의 웃음이 다 이광수를 통해서 나오고 멤버들도 대부분 다 이광수를 공격하면서 웃음을 만들어낸다. 심지어 게스트들까지도...특히나 비슷한 캐릭터인 전소민이 투입된 이후로는 '광돌남매' 관계가 구축되며 서로간 시너지가 창출됐다.
         들어서는 개그맨보다도 웃긴 배우로 통하고 있다. 2016년에는 한국대중문화예술상에서 국무총리표창을 받았다.그리고 예능을 런닝맨 하나만 함에도 불구하고 예능인 브랜드 10위권안에 든 적이 여러번 있었다.2018년 9월에는 예능인 브랜드평판 4위에 들었다.런닝맨이 화제성이 좋은 프로그램이기도 하고 거기서 이광수의 존재감이 엄청나서 그런 것 같다.
         거기다가 예능 캐릭터가 독이 된 [[송지효]]와 달리 예능 이미지를 드라마의 배역과 통일시켜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다. 또한 예능 캐릭터를 일부분을 차용한다. 대표적으로 [[괜찮아, 사랑이야]]의 박수광[* 아예 이광수의 [[본명]]에서 따왔다.]이나 [[좋은 친구들]]의 민수.[* 극중에 민수가 [[실수]]한 장면이 있는데 감독이 맘에 들어서 본편에 넣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코믹 연기를 아예 버린 건 아니고 특유의 예능 캐릭터를 업그레이드한 연기로 [[탐정: 리턴즈]]에 주연을 맡았다. 그리고 영화가 박스오피스 1위를 하면서 이광수 덕이라는 평가를 받는 등 여태까지의 이광수 주연 영화 중 가장 성공작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본래는 딱히 스토리 라인이 강하지 않은 감초 역할만 활약했었으나 해외 인기 덕에 작품에서 주연을 맡았다. 거기다가 [[안투라지]]가 9개국 동시방영을 한다. 그것이 100% 이광수 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광수가 신라면세점 모델로써 싱가포르에 가서 안투라지 홍보하면서 싱가포르 신문에서까지 안투라지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마냥 한류스타라고 해서 좋은 것만은 있는게 아닌데 배우지만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예능으로 진출한 바람에 해외 팬들은 간혹 배우가 아닌 그저 웃긴 예능인으로 보는 우스운 상황이 있다. --심지어 국내 기자들도 개그맨으로 오류를..-- 그리고 아시아프린스가 예능에서 가볍게 불려서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사실 이광수는 한류스타 중에서도 유명한 한류스타라고 할 수 있다.네이버에 기사가 떴는데 이광수가 한류스타 중에서 수입이 6위라는 기사도 떴다.
         심지어 싱가포르에서 런닝맨 팬미팅이 아닌 이광수 개인 팬미팅도 했었다.관객수는 대략 2000명정도였다고 한다.개인 팬미팅까지 열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배우에선 동갑내기 배우인 [[왕지혜]], [[신다은]]하고도 절친한 사이이다.[* 공교롭게도 둘 다 런닝맨 출연할 당시 광수의 사생활을 폭로하였다.어떻게 보면 왕지혜의 폭로가 더 파격적인 폭로였다.신다은은 이광수가 자신한테 고백한 적이 있다가 전부였지만 왕지혜는 이광수이광수 동생역할이랑 사귀었다고 했고 그게 누구인지까지 파악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런닝맨에서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는 [[이국주]], [[홍진영]], [[박지성]], [[류현진]], [[박보영]][* 박보영과는 자주 밥을 먹는다고 한다.박보영이 바쁠때 이광수를 불러서 같이 밥을 먹는다고 직접 밝혔다.]과도 어느정도의 친분을 가지고 있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kwang&no=47972|#]] 인터넷에 [[http://cafe.daum.net/GunzOn/EJBl/86832?q=%C0%CC%B1%A4%BC%F6+%B8%C5%B3%CA|이광수 매너]]짤도 있다.
         >'''이광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춤'''
         그러나 후에 한류진출 한 이후에 이 춤이 덩달아 화제가 되었다. 외국에서 과거 이광수가 출연한 하이킥을 보면서 모기춤의 존재에 대해 알게된 것. 정작 당사자는 "몇 년간 이 춤을 안 췄는데 최근들어 갑자기 이 춤을 많이 추게 되어서 당황스럽다"고 밝혔다.
         이에 패러디가 등장하였다. 엑소의 [[디오(EXO)|디오]]도 콘서트에서 모기춤을 췄었고 [[조인성]]도 괜사 종영 때 이광수 가면을 쓰고 춤췄다. 또한 [[MINX]]의 [[유현]]이 아이돌 스쿨에서 모기춤을 추기도 했다.
  • 최남선 . . . . 15회 일치
         [[한성부]] 출생이고 한때 [[철원군 (남)|강원도 철원]]과 [[창원시|경상남도 창원]]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대한제국]]의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갔으나 중퇴와 복학을 반복하다가 1907년 [[와세다대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귀국했다. 1907년 [[이광수]]와 함께 [[소년]]지를 창간했으나 [[한일 합방]] 후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당했고, 1912년 [[이광수]]의 도움으로 《붉은 저고리》, 1913년《아이들 보이》,《새별》등의 잡지을 발간하였으나 [[조선 총독부]]의 '신문지법' 명령으로 모두 강제 폐간되었다. 1914년에는 잡지 《[[청춘 (잡지)|청춘]]》을 발간했으나 1918년 [[일본]]의 압력으로 폐간당했다.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49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 낭독하였다. [[3.1 운동]]을 사주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투옥, 1921년에 석방되었다.
         [[1957년]] [[10월 10일]] [[뇌일혈]]로 별세한 그는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에 [[이광수]],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다.
         1906년에 다시 일본 유학을 떠나 4월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학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지만, 역시 3개월간 다니다 동맹 휴학으로 제적당하다가 복학하였다. 이어 [[이광수]] 등 유학생과 사귀면서 러시아 문학 작품을 탐독하였다. 1906년 7월 유학생 회보인 《[[대한 흥학회보]] (大韓興學會報)》편찬회를 맡아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대한 흥학회보]] (大韓興學會報)》의 편집 활동을 하면서 그는 회보에다 새로운 형식의 시([[신체시]])와 [[시조]]를 발표하였다.
         1907년 모의국회 사건으로 반발하는 한국인 학생들의 총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와세다 대학]]에서 퇴학당하고 만다. 이후 [[이광수]]와 함께 [[소년회]]를 결성한다. 또한 [[유길준]]이 조직한 [[흥사단]]에도 가입하였다.
         1907년 5월, 귀국한 뒤 한민족의 시대적 각성을 위한 신문화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인쇄 시설을 구입하여 1907년 11월 [[이광수]] 등과 함께 잡지 [[소년]]지를 창간한다. 소년지에서 그는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였고, 이광수는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대중의 인기를 모았다. 최남선과 이광수가 발행한 잡지 《소년》지는 근대적 종합잡지의 대표적인 잡지이며 어린이, 소년을 대상으로 한 잡지 중 초기작의 하나이기도 하다. 후일 그가 소년 잡지를 창간한 11월 1일이 잡지의 날로 정해지기도 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잡지 창간을 계속해왔지만, 1911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소년》이 폐간되었다. 이듬해 1912년 [[이광수]]의 도움으로 《붉은 저고리》, 1913년 《아이들 보이》, 《새별》등의 잡지을 발간하였으나 [[조선 총독부]]의 '신문지법' 명령으로 모두 강제폐간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체포되어 2년 8개월형을 받아 복역한 뒤 1921년 10월 18일에 가출옥하였다. 그 뒤 변절하였다는 설이 있다. 가출옥 사유는 “청년들을 규합하는 데 대단히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었다. 총독부는 [[조선은행]] 총재 미노베(美濃部俊吉)에게 잡지 《[[동명]]》의 발행 자금을 지원토록 주선하였으며, 그 이유를 최남선의 출판물이 “조선의 사상계의 악화를 구하고, 또 [[진학문]](秦學文)·[[이광수]] 등의 생계비 출처로 삼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1927년 계명구락부의 기관지 《[[계명]]》 제18호에 [[일연]]의 《[[삼국유사]]》 전체를 게재하게 하였다.<ref>《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스토리텔링 삼국유사 1) (현암사, 2009) 24~25쪽. {{ISBN|978-89-323-1536-2}} “1927년, 계명구락부의 기관지 『계명』에다 일연(一然)의『삼국유사(三國遺事)』 를 실은 것이었다.” </ref> 같은 해 총독부가 집과 연구 비용을 지원한다고 회유하자 그해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다.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총독부의 조선사 편수회에 가담한 일로 [[이광수]]와 절교하고, [[한용운]]과 [[홍명희]] 등도 연이어 그와 결별 선언을 했다. [[한용운]]은 그의 나무 위패를 새기고 장례식을 거행하여 그를 조롱하려고 시도했다.
         1943년 귀국 직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가 강연활동을 한 후 그해 중순 귀국하였다. 1943년 11월 다시 [[이광수]]와 함께 학병 독려의 목적으로 출국했다.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는 1943년 11월 24일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전문·대학생들에게 학병에 지원하라는 강연을 했다.<ref name="daedams">[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3/03/2007030300046.html “화랑 사상 지금 부활해도 좋을듯…”] 조선일보 2007.03.03</ref> 당시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 ‘조선화보’(1944년 1월호)에서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사회로 진행된 육당과 춘원의 대담 내용이 기록되었다. 이 대담에서 춘원은 강연회에 대해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라며 “그때의 압권은 최(남선) 선생님의 강연이 아니었을까요”라고 말했다. 육당은 “적어도 천오백 명은 모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며 “일찍이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요”라고 화답했다.<ref name="daedams"/>
         최남선은 “어떤 학자는 ‘(일본)무사도의 연원은 신라의 화랑이 그 토대였다’라는 것을 생각할 정도”라며 한일 양국 공통의 상무(尙武) 정신을 역설했고, 이에 [[이광수]]는 “저 ‘화랑’의 사상이란 오늘날 막 바로 부활시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며 동조했다.<ref name="daedams"/>
         * [[이광수]]
  • 홍명희 . . . . 12회 일치
         [[한국]]의 [[소설가]],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 월북 [[북한]] 정치인. 호는 벽초(碧初)[* 뜻은 "[[에스페란토|푸른빛(碧)의 말]]을 처음으로(初) 배운 [[한국인]]". 에스페란토을 상징하는 색이 초록색이라 그렇다.]이다. 춘원 [[이광수(소설가)|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조선]] 3대 [[천재]]'''로 알려진[* 참고로 말하는데, 이 3대 천재라는 것은 대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홍명회, 이광수, 최남선은 같은 시기에 동경유학을 하였고, 양건식과 신형철들이 이들을 동경삼재라고 불렀다.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중에서 유능한 인재들이란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들이 귀국하면서, 잡지 소년에 함께 글을 기고하면서 동경삼재라는 이름은 (일제시대하) 조선삼재로 변했다. 이들은 모두 문인으로, 문학계에서 칭찬 삼아서 붙여준 별명이었던 것 같다. 다만 명칭이 이런 식이라서 그럼 왜 세종대왕이나 정약용 대신에 이런 인물들이 있느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여담]]으로 이 3대천재 드립은 전부 다 홍명희 관련으로 나왔다. 현대에 이 언급을 한 것도 홍명희 평전이었고, 조선삼재 이야기도 홍명희와 [[현상윤]]이 나눈 1940년대 인터뷰에서 나왔다.] 인물로 실제로 이 셋은 죽마고우였으나 앞의 둘은 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데 비해서 홍명희는 변절하지 않지만 월북하여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와 친교를 유지했고, 훗날 [[한국전쟁]] 당시 춘원이 납북되자 그의 신변을 보호했으며 그가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병원으로 이송까지 할 정도로 막역했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친한 만큼 매섭게 이광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야사에서는 이광수가 친일파로 변절하자 홍명희는 이광수의 집 대문 앞에 음식상을 차리곤 곡을 하기 시작했다. 놀란 이광수가 나와서 연유를 묻자 홍명희는 "내 친구 춘원(이광수의 호)이 그만 죽고 말아서 이렇게 곡을 하며 슬퍼하고 있소."라고 대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비슷한 이야기가 꽤 많다. [[최남선]]과 [[정인보]], 최남선과 정인보의 스승인 승려 석전 박한영 간에도 있다. 최남선이 변절한 뒤 정인보(또는 스승 박한영)를 만나자 "나에게 최남선은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오."하고 헤어졌다는 야사.]
         그리고 1919년 괴산에서 [[3.1 운동]]에 참가.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수립을 보고 왔으며[* 이 당시 이광수와 친해졌다. 이때 벽초는 이광수에게 톨스토이의 책을 권했다고 한다.] 1927년 [[신간회]] 창설에 참가하여 부회장직을 맡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한용운]]과도 사이가 돈독하여 이광수, 최린, 최남선 등의 창씨개명 소식을 듣자 한용운을 찾아가 "여보게, 만해. 이런 개같은 놈들을 봤는가?"하고 울분을 토했다. 이에 한용운은 "이보게, 벽초. 그놈들은 개같은 놈들이 아닐세."라고 대답했고 무슨 소리냐고 따져묻는 홍명희에게 "개는 절대 주인을 배신하지 않으니 '''저놈들은 개만도 못한 놈들이 아닌가? 개가 자네 말을 들었으면 무척이나 섭섭해했을 걸세."'''라고 했다. 이에 벽초도 수긍하고 '''개에게''' 사과를 읊조렸다고.
  • 전소민(배우) . . . . 10회 일치
         ||<#FFB1BC> '''{{{#white 별명}}}''' ||<#ffffff><(> [[개구리]], [[앵무새]][* 쉴 새 없이 수다를 떤다고 해서 부모님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한다.], 쏘미닝, 전소똥[* 초등학생 시절 별명이라고 한다. 원래 젖소똥이었는데 순화해서 전소똥이라고 한다.] '''돌소민[* 돌아이+전소민이라는 뜻으로, 주로 [[런닝맨]]에서 많이 쓰이는 별명이다.]''', [[불나방]][* [[런닝맨]]에서 물불 안 가리고 게임에 무작정 달려들거나, 더티 플레이를 즐기는 [[유재석]], [[이광수(배우)]], [[전소민]], [[양세찬]] 등을 일컫는 별명], 전어리[* [[런닝맨]] 372회 방영분에서 최약체 [[전소민]]과 [[지석진]]이 한 팀이 되자 [[유재석]]이 붙여준 별명. 전어리와 지석바리.], 쉽사빠, 여자[[이광수(배우)|광수]], 토크지옥[* [[유재석]], [[하하(가수)]]도 감당 못하는 엄청난 수다쟁이], 자석인간[* 숟가락, 국자, 동전 등이 이마에 자석처럼 탁 붙어서 생긴 별명. 심지어 동전을 붙이고, New Face까지 췄다.], 연애검찰, 돌블리, 전소바리, 두릅소녀, 콸라여신, 명랑소녀, 뻥개구리 ||
         2014년 SBS [[런닝맨]]에 출연하여 특유의 엉뚱한 매력과 몸을 사리지 않는 몸개그로 빵빵 터트리며 부정의 아이콘으로 등극. --절대 죽어도 안돼 무조건 빠질거야-- --유재석 曰"소민아, 너 때문에 광수가 웃길 틈이 없어 지금"-- --여자 이광수--
         2017년 4월 16일 [[런닝맨]]에 고정멤버로 합류했다. 런닝맨에 고정 합류 이후 반응이 상당히 좋다. 특히 전소민에게는 그동안 이광수가 가지고있었던 각종 롤이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야말로 청순한 이미지가 아닌 엉뚱한 매력에 19금 개그 등 --돌+아이--가 따로 없다는 평가.
         캐릭터 또한 특이한데 굳이 비슷한 연예인을 들자면 노홍철의 돌아이스런 면모와 이광수의 트롤링, 박나래식의 섹드립에 무맥락 드립과 애드립을 섞어놓은 듯한 캐릭터이다. 의외로 눈썰미가 좋아서 영화의 특징을 잘 잡아내고 상황극에 능하다. 인생술집에서는 김희철에게 [[박나래]]를 능가하는 강캐로 평가받았고 [[장도연]]이 인증했다.
         || 베스트 커플상 (with [[이광수(배우)|이광수]]) ||
          * 술에 취하면 [[이광수(배우)|불쌍한척 하거나 울거나]], [[송지효|때리고 발로 차거나]], [[하하(가수)|잠든 아내 깨워가며 떠들어대고]]하는 주변 사람들 비슷하게 술버릇이 제법 있는 모양.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같이 술을 마신 양세찬이나 이광수 입에서 뭘 자꾸 훔쳐가려고 한다거나, 개 될까봐 술을 물로 바꿔치기한다는 등의 증언이 나왔다. 처음 술자리를 가진 후 이광수 왈 "술버릇이 아주 안좋더라구요, 아주!"라고. 술도 좋아하지만 술자리 게임도 좋아하는지 런닝맨에서 술자리 게임을 매우 잘한다거나 하고싶다는 어필을 수차례 한 적이 있다.
  • 박정민(배우) . . . . 5회 일치
         || 2018년 || [[SBS]] || [[런닝맨]][* 2018년 4월 22일 방영분에서 [[양세찬]]과 [[이광수(배우)|이광수]]의 섭외로 등장. 성남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촬영장까지 직접 오는 비범함을 보여줬지만 그 후 분량은.... 이후 2018년 8월 5일 방영분에서 목소리만 등장. [[이광수(배우)|이광수]]와 [[전소민]]이 [[응답하라 1988|제목이 '8'이 들어간 작품]]을 찍은 연예인을 섭외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지만 '''또 다 편집할거잖아요 또....'''라는 말로 이광수와 전소민을 격침시켰다(...) ~~저 안나갈거에요~~] ||
  • 현진건 . . . . 5회 일치
         * [[이광수]] - 박종화의 일기에 보면, [[1922년]] 현진건이 홍사용 · 박종화 등의 문인들과 함께 동인으로 참여한 문예지 《백조》 창간호에 이광수의 시 「악부(樂府)」가 실리게 되었을 때, 상해에서 《백조》를 받아보고 현진건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한국의 꽃봉오리 같은 젊은 청년들이 발표하는 깨끗한 《백조》지에, '귀순장'을 쓰고 항복해 들어간 이광수가 동인이 되었다 하니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빨리 동인에서 제거하라"며 항의했고, 결국 《백조》 동인에서 이광수는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광수는 이미 당시 춘원은 허윤숙이라는 여인과 동거하면서 일제에 이른바 '귀순장'이라는 것을 써서 독립지사들의 정보를 넘겨주고 변절한 상태였던 것이다.<ref>윤병로 「박종화의 삶과 문학」1998, 신효정「문학산책」2000, 역사문제연구소 편찬「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2003.</ref>
  • 김상중(배우) . . . . 3회 일치
          * 2012년 8월 19일 런닝맨에 [[장신영]]과 함께 출연했다. 이 때 중고차 시장에서 [[이광수(배우)|이광수]]를 낚아채는데 이광수보다 작은 키임에도 몸을 날려 순식간에 멋지게 압도했다.
  • 현정건 . . . . 3회 일치
         [[1922년]] 동생 현진건이 [[홍사용]] · [[박종화]] 등의 문인들과 함께 동인으로 참여한 문예지 《[[백조 (잡지)|백조]]》 창간호에 [[이광수]]의 악부(樂府)가 실려 있는 것을 보고, 현진건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한국의 꽃봉오리 같은 젊은 청년들이 발표하는 깨끗한 《백조》지에, '귀순장'을 쓰고 항복해 들어간 이광수가 동인이 되었다 하니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빨리 동인에서 제거하라"며 항의했고, 결국 《백조》 동인에서 이광수는 빠지게 되었다.
  • 세정(구구단) . . . . 2회 일치
          * 2018년 4월 22일, [[프로듀스 48]] 녹화에 [[I.O.I]] 전 멤버와 [[워너원]] 전 멤버들이 소환되었으며 세정 역시 미나와 함께 촬영에 임했다. 4월 23일에는 세정과 나영이 JTBC [[냉장고를 부탁해]]를 촬영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워너원 [[강다니엘]], [[옹성우]]와 함께 출연하며 5월 중에 방송될 예정[* 4월 28일에는 구구단 미나와 위키미키 유정, [[Wanna One]] 박우진 박지훈이 출연하는 KBS 배틀트립이 방영]. 한편 유재석, 안재욱, 김종민, 이광수, 박민영, EXO 세훈과 함께 촬영했던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 [[범인은 바로 너!]] 방송 시작일이 5월 4일로 결정되었다. 5월 4일 넷플릭스 [[범인은 바로 너!]] 첫 방송, 5월 5일 MBC [[뜻밖의 Q]] 첫 방송, ~~5월 6일 구구단 대만 첫 단독 팬미팅,~~ 세정 나영이 함께 출연한 JTBC [[냉장고를 부탁해]] 5월 21일 방송으로 5월 활동이 이어진다.
          * 2018년 4월 30일 넷플릭스(Netflix) 예능 프로그램 [[범인은 바로 너!]] 레드카펫 행사와 제작 발표회에 조효진 PD, 김주형 PD, 유재석, 안재욱, 김종민, 이광수, 박민영, EXO 세훈과 힘께 참여했다. 제작발표회가 끝나갈 무렵 그때까지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못한 김종민과 세정을 챙기는 유재석의 배려 속에 [[김종민]]에 이어 마지막 질문을 받았다. [[범인은 바로 너!]]에 '사건을 풀어가는 출연자들을 관찰'하는, 관찰예능적인 요소도 있음을 설명하며 또 한 번 재치 넘치는 말솜씨를 선보였다.
  • 최동 . . . . 2회 일치
         최동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교분이 있던 [[개화파]]의 [[박영효]], [[서재필]], 계몽운동 계열의 [[안창호]]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성장해서는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특히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에 크게 영향 받아 본업인 의학 연구 외에 역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 [[이광수]]
  • 최홍만 . . . . 2회 일치
         2015년 7월 [[런닝맨]]에 특별 출연하여 [[이광수(배우)|이광수]]의 등짝을 내리치거나 [[수영(소녀시대)|수영]]의 설득에 넘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런닝맨 내에서 힘이 가장 센 [[김종국]]을 힘으로 가볍게 제압하여 이름표를 뗐다.[* 민호가 붙잡아서 제압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일대일로 붙었어도 100% 김종국이 제압당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김종국이 최홍만 앞에서는 초딩같이 작아 보이기까지 했다.[*참고 이때 자막에 '이름표 떼고도 이어지는 홍만 어른의 꾸중'이라 떠서 최홍만이 더 나이가 많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김종국이 1976년생, 최홍만이 1980년생으로 김종국보다 4살 아래다.]~~생각보다 힘이 별로라고 디스하는 건 덤~~ ~~최홍만이니까 가능한 말~~ 참고로 이날 최홍만이 뜯은 멤버는 김종국 한 명 뿐이고 대부분은 [[민호]]가 다 뗐다.
  • 김연경(배구선수) . . . . 1회 일치
          * 2015년 7월 26일 [[런닝맨]] [[런닝맨 최강자전#s-5|영웅전]]에 출연했다. 특수스킬로 이름복제를 [[조훈현]]에게 받아[* 바둑알 공기 5점잡기로 이겼다. ~~뭥미?~~] 하하와 이광수의 등을 쳐서 이름표를 복제해 아웃시키면서 우승. 그리고 관련기사는 모조리 [[콩드립]]... 워낙에 키가 크다보니 나이가 6살이나 많은 [[홍진호]]에게 '누나'라고 불리기도 했다.
  • 이상백 (1904년) . . . . 1회 일치
         * [[이광수]]
  • 정종원 . . . . 1회 일치
         정종원은 1914~1918년 일본 유학 시절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동아일보]] 3대 사장), [[최두선]] (8대 국무총리), [[장덕수]] ( 보성전문 교수, 동아일보 이사), [[신익희]](독립운동가), [[김연수 (1896년)|김연수]](경성방직 삼양사 사장), [[이광수]] (소설가) 등과 교류했다.<ref>윤재실, <<팔도명인전>>, ( 진명사, 1979) p.235</ref> 이 같은 인맥을 바탕으로 정종원은 동아일보 경상북도 지역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당시 그는 정충원이란 이름을 쓰고 있어 동아일보 1970년 4월1일 13면 창간특집기사 '동아일보 발기인 명단'에 대구지역 발기인 정충원으로 기록됐다.<ref>동아일보 1920년 4월1일 2면 하단 발기인 명부</ref><ref>동아일보 1977년 3월 14일 "본보 창간발기인 정종원 씨 별세 "</ref>
  • 정칠성 . . . . 1회 일치
         * [[이광수]]
  • 한규복 (1881년) . . . . 1회 일치
         [[1942년]]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고 [[조선인]] [[참정권]] 허용 문제가 [[일본]] 의회 [[중의원]]과 [[귀족원]]에 상정되자,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부단장 자격으로 일본 수상과 참모총장에게 감사 전보문을 타전하고, 그해 [[5월 15일]] [[경성부|경성]] YMCA에서 [[이광수]](李光洙) 등 명사들을 초청해 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42년]] [[9월]]에는 [[조선국자주식회사]] 회장에 취임하였으나 [[1943년]] [[6월]] 사퇴하였다. [[1943년]] [[국민총력연맹]] 징병기념사업실행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에 피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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