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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독사
         인간관계가 고립된 사람이 [[의사]]나 [[가족]], 이웃 등 주변 사람들에게 간호를 받지 못하고 고독하게 사망하는 경우를 뜻한다. 주로 [[독거노인]]에 많으며, 지역사회에서도 고립된 경우가 일반적이다.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면 사망을 면할 수 있었을 사람도 많다.
  • 고민환
          | 기타 이력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br/> [[산부인과]] [[의사|전문의]], [[대학 교수]] <br/> [[산부인과|산부인과의과학교육학]] [[저술가]] <br/> [[영남대학교|영남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br/> [[영남대학교 의료원]] 산부인과 과장 <br/> [[인제대학교|인제대학교 의과대학]] 특임교수 <br/> [[을지대학교]] 초빙교수 <br/> [[서울대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객원교수 <br/> [[동국대학교|동국대학교 의과대학]] 초빙교수
         '''고민환'''(高敏煥, [[1952년]] [[3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산부인과]] [[의사]]이자 [[의학박사]]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소령]]이다. [[을지대학교]] 초빙교수 겸 서울 을지병원 산부인과 초빙교수이기도 하다.
         [[분류:195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횡성 고씨]][[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의 산부인과 의사]][[분류:영남대학교 교수]][[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인제대학교 교수]][[분류:을지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동국대학교 교수]][[분류:자유 연애]][[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 육군 소령]][[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고지용
         고지용은 2013년 12월 [[인제대학교]] [[가정의학과]] 교수이자 [[의사]]인 허양임씨와 비공개로 [[결혼식]]을 올렸으며 2014년 10월 득남했다.
  • 김동욱 (의학자)
          | 기타 이력 = [[가톨릭대학교|가톨릭의과대학원]] [[의학박사]] 출신 <br/> [[내과]] [[의사]], [[교수|대학 교수]] <br/> [[내과|내과의학교육 저술가]] <br/>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br/>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김동욱'''(金東煜, [[1961년]] [[1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내과]] [[의사|전문의]]이자 [[의학박사]]이며 현재 [[가톨릭대학교|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대학 교수|교수]]이고 국내 백혈병 내과의학의 최고 권위자라 일컬어지는 [[의학박사]]이다.
         [[분류:196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김해 김씨]][[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위]][[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서울가톨릭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
  • 김민기(가수)
         [[전라남도]] [[신안군|신안]] 태생으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6.25 전쟁]] 중 북으로 퇴각하던 [[조선인민군]]에 의해 살해당해 산파였던 어머니 혼자 자식들을 키워야 했다고 한다. 휴전 후 가족들과 [[대구광역시|대구]]로 이주했고, 흑산초등학교와 자은중학교, 도초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했다.
  • 김슬기 (1991년 10월)
         ||* 세상에 이런놈이 : AN SNL DIGITAL SHORT||* 김슬기(23) 정신과 [[의사|전문의]]
         ||* 외과의사 봉다리||* [[의사]] 봉다리
  • 김준현(코미디언)
         tvN의 [[예능 프로그램]] [[현장토크쇼 TAXI]]에 출연하여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당뇨병이 있는 것으로 진단되었다.[* 사실 정확히는 방송이라 그런지 당뇨병이라는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의사]] 및 당뇨병 환자들이 그 방송을 보고 알았을 뿐이다. 덕분에 몇몇 사람들은 김준현 정도의 수치가 나와도 정상인줄 알고 있는 케이스도 있었다. 당뇨를 한참 넘어선 김준현의 수치에 비해 자기가 낮으니 당뇨임에도 혹은 당뇨전단계임에도 자기 수치가 지극히 정상인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참고로 방송에 공개된 수치는 당화혈색소 8.2에 공복혈당 196이었는데.. 당화혈색소 6.5, 공복혈당 126이 당뇨 기준임을 생각해보면 아득히 높다.] 직계가족에 당뇨병 가족력이 있고 선천적으로 췌장이 약하게 태어났다고 하는데 선천적으로 췌장이 약하게 태어나는 경우는 없다. 그냥 가족력과 식습관 때문일뿐. 거기에 초고도 비만[* 다만 BMI 상으로만 초고도 비만이지 [[야구선수]]나 무제한급 [[역도]] 선수, 백두급 [[씨름]]선수 등처럼 체지방도 많으면서 근육량이 상당히 많은 [[케이스]]이기 때문에 같은 체중의 일반 비만인보다 관리가 좀 쉬울수는 있으나 이미 당뇨가 나이대 대비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었음으로 크게 의미 있는 사실은 아니다.]까지 있으니..... 김준현 본인도 그러한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듯 검사결과 내용을 듣는 내내 굉장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 하지만 이 검사에서 근육량이 높다고 나오기도 했지만 혈액검사 상에서는 확연한 당뇨[* 당화혈색소 8.2로 나왔는데 6.5이상이면 의학적으로 당뇨이고 7이상이면 어느정도 증상도 있는 당뇨이고 8이면 약을 먹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나 김준현이 1980년생임을 생각해본다면 꽤나 관리가 필요하다.]로 나왔다. 방송이라 그런지 의사가 관리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만 했지만 사실 김준현의 상태는 약을 먹지 않으면 안되는 수준이었다. 방송에서 오히려 의사가 적나라하게 진단하기 그래서 그런지 오해하고 있는 사람도 많고 저정도는 정상이구나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 김진왕
         '''김진왕'''(金珍汪, [[1962년]] [[1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성형외과]] [[의사|의사]] 겸 [[저술가]]이다.
         [[분류:1962년 태어남]][[분류:김녕 김씨]][[분류:대한민국의 외과 의사]][[분류:성형외과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한림대학교 교수]][[분류:아주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위]][[분류:서울덕수초등학교 동문]][[분류:경신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연세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
  • 김집 (1926년)
          | 지휘 = [[공중보건의사|공중보건의]]
          | 기타 이력 = [[요코하마 국립 대학|일본 요코하마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br /> 소아과 의사 겸 [[교수|의과대학 교수]] <br /> [[경북대학교|경북대 의과대학]] 교수 <br /> [[영남대학교|청구대 보건학과]] 외래교수 <br /> [[계명대학교|계명대 보건학과]] 강사 <br /> [[대구가톨릭대학교|효성여대 가정학과]] 강사 <br />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br /> [[대한민국 체육부|체육부 장관]] <br /> [[중앙대학교|중앙대 행정학과]] 초빙교수 <br /> [[한양대학교|한양대 행정학과]] 초빙교수 <br /> 민주정의당 상임위원 <br/> 민주정의당 전임위원 <br/> 신민주공화당 보건행정교육특보위원 <br/> 자유민주연합 특임고문 <br /> [[한국청소년연맹]] 명예총재
         '''김집'''(金潗, [[1926년]] [[12월 15일]] ~ [[2012년]] [[2월 4일]])은 [[대한민국]]의 [[소아과]] [[의사|전문의]] 및 [[의학박사]]이며 [[저술가]] 겸 국회의원이자 [[교수|대학 교수]] 겸 [[사회 운동|사회운동가]] 및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위]]였다.
         * 1976년 대구의사협회 회장(1979년 퇴임)
         [[분류:1926년 태어남]][[분류:2012년 죽음]][[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위]][[분류:함창 김씨]][[분류:상주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피츠버그 대학교 동문]][[분류:에모리 대학교 동문]][[분류:요코하마 국립 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의학자]][[분류:대한민국의 체육부 장관]][[분류: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
  • 김혜은(탤런트)
         여담으로 나름 [[신데렐라]] 인생을 살았다. 성악을 접고 방황하던 시절 [[의사]]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지만, 이 때부터 시가의 눈치를 보며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하필 이 때 [[유산]]해 버린 지라 바닥까지 갈 뻔했다. 물론 이후 연기자로서 재기하고, 딸 가은 양을 출산하며 극복해 냈다.
  • 남궁인
         | 직업 = 의사, 수필가<br/>前 [[충청남도 소방본부]] 공중보건의<br/>前 고려대학교 의료원 응급의학과 수련의<br/> 前 고려대학교 의료원 응급의학과 의사
         | 수상 = ‘한미수필문학상’ 대상 (죽음에 관하여)<br>‘보령의사수필문학상’ 금상
         '''남궁인'''([[1983년]] [[7월 12일]] ~ )은 [[대한민국]]의 [[의사]], [[수필|수필가]]이다.
         의대를 나온 후 에서 응급의학과 수련의로 근무했으며 2013년부터 응급실 환자들의 사연, 의료진들의 고뇌 등을 담은 글을 SNS을 통해 발표하여 큰 반향을 얻었다. 2016년 7월 《만약은 없다》를 출간했다.<ref>{{뉴스 인용|제목=의사가 체험한 대형병원 응급실...남궁인 닥터의 <만약은 없다>|url=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5&mcate=M1006&nNewsNumb=20160821313&nidx=21314|출판사=조선pub|날짜=|확인날짜 =2016년 9월 18일}}</ref><ref>{{뉴스 인용|제목=글쓰는 페이스북 스타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생사 오가는 응급 현장 냉철하게 기록"|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3626872|출판사=한국경제|날짜=|확인날짜 =2016년 9월 18일}}</ref><ref>{{뉴스 인용|제목='왜 사냐건 쓰지요' 응급의학과 의사 남궁인 인터뷰|url=http://m.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238754|출판사=위키트리|날짜=|확인날짜 =2016년 9월 18일}}</ref><ref>{{뉴스 인용|제목=에세이집 ‘만약은 없다’ 펴낸 응급의학 전문의 남궁인씨 “삶의 경계에 선 곳 …독백하듯 썼죠”|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7112033015&code=960205|출판사=경향신문|날짜=|확인날짜 =2016년 9월 18일}}</ref><ref>{{뉴스 인용|제목=“갑자기 ‘글쓰는 의사’로 소문나 상까지 받으니 신기해요”
         서울 강서구 PC방 사건의 피해자의 담당 의사로 조명을 받고 있다. 피해자의 담당의였던 그는 피해자의 얼굴에만 칼자국이 32개 있었고, 모든 자상은 칼을 끝까지 찔러 넣었다고 설명했다. 또 상처중에 평행으로 난 상처가 있었는데 이 상처는 매우 빠르게 칼을 뽑았다 다시 찔려야지 날수있는 상처라고 언급했다. 남궁씨는 가해자인 김씨에 대한 엄중한 처벌과 진상 조사를 요구했다.
         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url=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6459905|출판사=알라딘|날짜=|확인날짜 =2016년 9월 18일}}</ref>
         [[분류:198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함열 남궁씨]][[분류:대한민국의 소방공무원]][[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위]][[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
  • 남재현 (1963년)
         '''남재현'''(南在賢, {{출생일|1963|7|12}} ~ )은 [[대한민국]]의 [[내과]] [[의사|전문의]] 겸 [[의과대학]] [[대학 교수|교수]] 및 [[의학박사]]이며 CEO [[기업가]]이다.
         * 의사가 말해주는 내몸에 좋은 다이어트 나쁜 다이어트 (2002.7.5)
  • 박경철
         {{다른 뜻|[[박경철 (1956년)|의사이자 저술가|익산시의 정치인]]}}
         | 필명 = [[닉네임]]은 '''시골의사'''
         | 직업 = [[의사]](전문의)·저술가<br>방송인·주식 투자 전문가
         '''박경철'''(朴慶哲, [[1964년]] [[11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의사]]이자 칼럼니스트·주식 투자 전문가·방송인이다. 1990년대부터 '시골의사'라는 필명으로 [[주식]] 사이트에 글을 올려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한 주식 투자 전문가이며,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으로 인기를 얻은 작가이기도 하다.<ref name="신동아0711">[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7/11/12/200711120500015/200711120500015_4.html 〈의협 대변인 3개월 만에 사퇴한 ‘시골의사’ 박경철〉] 《신동아》, 2007년 11월 1일</ref> [[KBS 제2라디오]]의 《[[박경철의 경제포커스]]》를 진행하고 있으며, 매일 2시간의 라디오와, 200자 원고지 30장 분량의 글을 쓰고 주간지와 일간지 등 약 20건의 고정 칼럼, 월 평균 30건 이상의 경제학, 청소년 강연도 하고 있으며, [[2010년]] 이후로는 [[안철수]]와 함께 강연을 하고있다가 2012년 이후 그만두었다.<ref>[[weekly경향]]에서 '박경철의 눈' 칼럼을 기재하고 있다.</ref><ref> [[중앙일보]]에서 '시골의사 박경철의 직격인터뷰' 칼럼을 기재하고 있다. [[2014년]] 현재는 그리스 여행을 다니고 있다.</ref>
         경찰 공무원이었던 박경철의 아버지는 [[경상북도]] 내에 전근을 다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2&aid=0002128121 안철수 교수와 순회강연 ‘시골의사’ 박경철씨] 경향신문 2011년 5월</ref> 박경철은 아버지를 따라 예천, 경산 등으로 다니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대구에서도 부자동네인 곳으로 전학왔다. 박경철은 어느 날 친구집에 놀러갔는데 친구의 아버지가 정보기관의 높은 사람이었고 집안에 계단이 있을정도로 부자였다. 그 뒤로 친구의 가방이나 도시락 등을 비교하면서 빈부의 격차를 실감하게 됐다. 친구의 방에 동화책이 꽉 차있는것을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 이후로 책에 대한 갈망을 느끼면서 책을 좋아하게 됐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145&aid=0000007841 시골의사 박경철이 펼쳐든 아버지라는 이름의 인생 지도] 경향신문 2011년 7월</ref> 박경철은 책상을 들고 공사중이던 학교 건물 7층으로 올라가 책을 읽다가 선생님에게 적발이 되어 혼나기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81&aid=0002043047 무릎팍 출연 명사 박경철과 안철수의 ‘우정’] 서울신문 2009년 10월</ref> 박경철은 세상의 정의를 저울로 달 수 있는 법관이 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고, 글을 쓰는 일을 생각해보기도 했으나, 평소에 존경하던 아버지가 의대를 가라고 이야기를 하자 박경철은 두말없이 그에 따라 [[영남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박경철이 대학생 시절에 사망했다. 혼자서 가정을 힘들게 꾸려가던 어머니는 남에게 속아 큰 빚을 떠안으면서 집안이 휘청거리기도 했다.
         === 의사 생활 ===
         박경철이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공중보건의 중위 전역 이후 의사로 활동하던 시기에도 월급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빚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개원밖에 답이 없을거라 생각하여 계획을 잡았는데 고가의 의료장비와, 임대할 건물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ref>[http://www.mdtoday.co.kr/mdtoday/index.html?no=103165 시골의사' 박경철 무릎팍도사에 출연…가족사의 우여곡절 '고백'] 메디컬투데이 2009년 7월</ref> 하지만 절친한 친구가 5년 만기 적금의 만기 3개월 남은 상황에서 해지하고 박경철에게 도움을 준 친구도 있었고, 의사면허증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아서 도와준 친구도 있었다. 2001년 39세에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어렵사리 개원을 했으나 첫날 28명밖에 오지 않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77&aid=0002254378 시골의사' 박경철의 가족이야기 "그리운 사람이 되고파] 아시아경제 2011년 7월</ref> 적자를 면치 않으려면 80명이 와야 했는데 크게 못미쳤던 것이다. 이 사업이 잘못되면 의사 생활도 어렵게 되고 도와준 친구들에게도 피해가 가기 때문에 박경철은 추석과 설날에도 쉬지 않고 24시간 진료를 했으며<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08&aid=0002003858 박경철, '무릎팍도사'서 가족사·주식투자관 공개] 스타뉴스 2011년 7월</ref>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에는 방문진료까지 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하자 하루에 200명이 올 정도로 숨통이 트였다. 개업 6개월 후에는 하루 방문환자 400명을 기록해 당시 의사 개인 진료횟수 전국 3위를 기록했고 빚도 다 갚게됐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77&aid=0002254378 시골의사' 박경철의 가족이야기 "그리운 사람이 되고파] 아시아경제 2011년 7월</ref>
         2005년 박경철은 자신과 동료들이 의사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을 모은 에세이 《시골 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을 발간했다. 당시 박경철은 365일 병원에서 지냈는데 밤에 손님이 없는 틈을 타 경제공부를 하며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는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를 알리기 위해 집필한 것이었다. 이 책에는 모두 1인칭 시점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박경철이 모두 겪은게 아니라 가상의 인물인 나를 통해 모든 의사(박경철의 동료)를 대변하는 것이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2043973 시골의사' 박경철, "날, 슈바이처와 동급으로 생각] 마이데일리 2011년 7월</ref>《시골 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은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311&aid=0000012746 무릎팍 효과?,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베스트셀러 진입] 엑스포츠뉴스 2011년 7월</ref>
         박경철의 아들은 의료사고로 인해 뇌성마비에 걸렸다. 박경철은 의사로써 아이를 치료했고 아이의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됐다. 하지만 박경철은 자신이 의사였고,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박경철은 비슷한 증상을 겪었던 아이들은 자신의 아이보다 상태가 더 늦게 호전되는 경우도 있어 소득격차에 따른 벽이 있다고 이야기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13&aid=0000018891 무릎팍' 박경철 "내 아이가 뇌성마비" 감동 발언] TV리포트 2011년 7월</ref>
         [[2017년]]에는 13세 연하의 KBS 아나운서 [[정은승]]과 재혼한 사실이 알려졌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9341031 '시골의사' 박경철-정은승 아나운서 결혼 뒤늦게 알려져] - 연합뉴스</ref>
         의대 의학 영어 수업에서 미국의 '타임'지 의학 기사를 수업 교재로 사용하면서 해석하고 발표하는 과제가 주어졌는데 과제를 끝마치고 버리자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게 됐다. 당시 '미국 자산 시장이 불타오른다'는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당시 한국엔 '백할머니', '광화문곰' 등이 주식시장을 쥐락펴락하던 시기였다. 20~30년 후 미국을 따라잡는다고 생각하면 대한민국에도 쓸모가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제서적을 찾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첫 주식투자는 어머니에게 몇 십만원을 얻어 시작한 것이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77&aid=0002254375 시골의사' 박경철 "주식투자? 전문가에 맡겨라"] 아시아경제 2011년 7월</ref> 당시 샀던 주식은 20년 넘어 보유하고 있는데 가격이 현재와 비슷하다. 박경철은 이를 보며 "어떤 일이든지 잘 모르고 쉽게 뛰어들면 안된다"라는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박경철이 저술한 주식투자 서적들은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2006년 증권선물거래소와 증권사 사장단은 박경철에게 "증권투자의 올바른 인식과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며 외부인사로는 처음으로 '올해의 증권선물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11&aid=0001974403 시골 의사 박경철] 서울경제신문 2011년 7월</ref> 박경철은 한때 직접 주식투자를 하여 원금의 50배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박경철은 각종 강연에도 다니고 있는데 교육·공공기관을 우선순위에 두고있어 차비를 빼면 섭외료가 남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박경철은 1990년대부터 '시골의사'라는 필명으로 [[주식]] 사이트에 글을 올려 큰 호응을 얻었다. 1995년부터 IMF 사태까지 시장 전망을 내놓았다. 1999년 12월에는 '성장주와의 이별'이라는 글로벌 거품 붕괴를 예측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36&aid=0000015427 한 방 펀치를 조심하라] GKSRUFP21 2011년 7월</ref> 2000년 주식 폭락도 예언하면서 당시 족집게 예측으로 유명했다. 2001년 911테러 직후 "향후 10년 내에 이 가격에 삼성전자를 살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것"이라며 주가 상승을 주장했다. 2007년 9월 한국증시 고점론을 전망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1990543 시골의사 박경철의 ‘공부법’] 동아일보 2011년 7월</ref>
         박경철이 진료하던 어느 늦은 밤, 한 노모와 아들이 병원에 왔었다. 그런데 아들의 입술이 새파래진 것을 보고 [[농약]]을 마신거라 직감한 박경철은 이미 살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아차렸다. 노모가 박경철에게 아들을 살릴 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 박경철은 살릴 수 없다고 답하자 모자는 다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박경철은 치료를 시도해봐야 한다며 돌아가려는 모자를 막아서자 노모는 치료비가 없다고 말했다. 박경철은 [[위세척]]을 무료로 해주고 모자에게 택시비를 쥐어줬으나 모자는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를 타고 돌아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533979 탐욕과 공포 다스리기...시골의사의 동행] 머니투데이 2011년 7월</ref> 박경철은 이를 보며 "사람이 생존의 문제에 있어서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말했다.
         박경철은 [[대한의사협회]] 대변인 시절, 정부의 '빈곤층에 대한 진료제한 정책'에 18개 시민단체와 함께 반대투쟁을 벌였다. 이 시절에 박경철은 "병원을 팔아서라도 극빈자에게선 진료비를 받지 말자"는 주장을 하여 의사협회의 일부로부터 '좌파세력의 주구', '트로이의 목마'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성분명 처방에 대해서는 시민단체의 입장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이로 인해 시민단체들로부터 의사협회 대변인이 되니 변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성분명 처방을 하게 되면 복제 약을 쓸 우려가 있게 되는데, 이것의 안정성이 문제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대 성명은 본인의 소신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의사협회 내부 갈등으로 박경철은 [[2007년]] [[10월 1일]] 대변인 자리에서 3개월 만에 사퇴했다.<ref name="신동아0711" /> 박경철은 사퇴의 변으로 "즉흥적인 것이 아니며 그 동안 수 차례 고민했다"고 하며 "[[장동익]](제34대 대한의사협회장, [[국민건강수호연대]] 초대 위원장출신)집행부 이후 시민들로부터 소외되었던 의사사회를 연결하고자 했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말했다.<ref>http://www.medigatenews.com/Users/News/newsView.html?ID=43394&nSection=2&nStart=0&subMenu=news&subNum=2&searchKeyWord=%C0%E5%B5%BF%C0%CD</ref>
         한국 국민들이 주식을 잘 모르던 1990년대에 외국 자본이 들어와 한국 자본을 가져가고 개인 투자자들은 피해를 봤다. 이러한 외래 자본에서 국내 자본을 지키는 사람들이 기관투자자들이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 박경철은 개인투자자가 직접 [[주식투자]]를 하지 않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직접투자로 인해 손해가 발생했을 경우 개인 투자자는 스트레스를 받아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식 투자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77&aid=0002254375 시골의사' 박경철 "주식투자? 전문가에 맡겨라"] 아시아경제 2011년 7월</ref> 2008년 미국에서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때 전문 투자자들에게 맡겼음에도 큰 손해를 봤던 사람들은 전문가들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져 최근들어 개인 투자자가 늘어나고 있는데 박경철은 이러한 현실이 매우 우려된다고 말했다. 개인 투자자에게 경고를 자주 해왔던 박경철은 다른 주식 전문가들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받기도 한다. 박경철은 자신이 위험을 알리는 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위험을 알리는 역할을 사회 속에서 잘 한다면 살아가면서 덜 부끄럽겠다라고 말했다.
         박경철은 1990년대 후반에 주식 투자로 큰 수익을 거두었는데, 이는 주식 투자의 관점이 아니라 IT, 휴대전화 등이 일상화 될 것을 예상해서 주식투자를 했고 이것이 생각보다 성과가 좋았다고 말한다. 또한 현재도 주식 투자로 수익을 보았다라기보다는 어떤 산업의 미래를 보았다는 정도로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했다.<ref>[http://www.hk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35225 시골의사' 박경철, '무릎팍도사' 출연…"감동+재미" 두마리 토끼 잡았다] 껨뉴스 2011년 7월</ref> 박경철은 자신이 주식 투자로 큰 수익을 거둔 것에 대해서 한번쯤 특별히 운이 맞아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장된 영웅담이 주식 투자로 힘들어진 사람들에게 조롱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다고 말한다. 박경철은 주식 투자를 하는 것에 대해서 "대한민국이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이자 당위성을 가지고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식을 도박하듯이 하게 되면 좋은것도 나쁜것이 된다고 지적한다. 박경철은 자신의 주식 투자 비법은 없다고 말한다. 시장은 누구에게도 특별한 비법을 전해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름대로 경제를 배웠다고 생각한 박경철은 [[영남대학교]] 시절 주식에 대해 '책을 보면 간단한 이론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중 어느 날 친구 집에 놀러가 친구의 아버지에게 주식 관련 조언을 해줬다. 친구의 아버지는 영업정지, 부도발생 등으로 증권거래에서 상장폐지 사유에 해당되는 [[관리대상종목]]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박경철은 이에 대해 "관리대상종목은 언제 부도날지 모르는 위험한 종목"이라고 조언하자 친구 아버지는 다음날 주식을 정리했다. 그러나 해당 종목은 일주일 후에 11배가 오르면서 박경철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고 박경철은 '철없는 강아지는 위험하다'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77&aid=0002254375 시골의사' 박경철 "주식투자? 전문가에 맡겨라"] 아시아경제 2011년 7월</ref>
         *2008년 4월 대한의사협회 정책이사
         *2007년 5월 대한의사협회 공보이사
         *2007년 5월 대한의사협회 대변인
  • 박기출 (국회의원)
         '''박기출'''([[1909년]] ~ [[1977년]] [[8월 7일]], [[부산광역시]])은 [[대한민국]]의 [[의사]], [[정치인]]이다. [[본관]]은 [[밀양 박씨|밀양]].
         부산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의학전문학교를 거쳐 1942년 규슈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해방전까지 부산 초량역 앞에서 미쓰모토 외과의원을 개업하고 평범한 의사로 생활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박기출의 가족의 출국을 허가해주지 않아서 그는 일본 동경에서 가족도 없이 그 일본인 할머니의 도움만으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임종직전에야 미국에서 의사로 있던 둘째아들이 와서 함께 귀국했고 며칠후에 사망했다
         [[8.15 광복]] 평범한 의사로 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미군정청 부산지방 초대 후생국장으로 일하게 되었고 이 때 행정업무를 보면서 여러 이해당사자들을 찾아다니며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과정에서 정치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후 민족자주연맹과 민주독립당 경남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정치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당으로서는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왜냐하면 초대 주미대사 국무총리 등 화려한 경력을 가진 장면과 부산 변두리의 외과의사였던 박기출은 경력면에서도 비교가 되지않았고 설사 신익희가 이를 받아들인다 해도 당시 신구파의 연합체였던 민주당은 당내경선에서 구파의 영수였던 신익희와 신파의 영수였던 장면을 나란히 정부통령후보로 선출하였던 것인데 당내 신파를 납득시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망명 후 큐슈의 한 시골마을에서 병원의사로 취직해 살다가 갑자기 암에 걸려 투병중 임종을 앞두고 귀국했다가 곧바로 사망했다.
          그의 후배 김성호의 수기에 따르면 박기출은 큐슈에서 의사로 근무하는 틈틈이 이 책을 써서 주말을 이용하여 도쿄에 올 라와서 원고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여러 출판사들을 전전하며 출판을 교섭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경남체육회 회장, 대한의학협회 회장, 반독재 재야민주세력 단일화추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한국정치사》와 강연의 요지를 모아서 엮은 《내일을 찾는 마음》이 있다.
         [[분류:1909년 태어남]][[분류:1977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사회민주주의자]][[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조봉암]][[분류:윤보선]][[분류:장준하]][[분류:진보당 (대한민국) 정치인]][[분류:호헌동지회]][[분류:국민당 (대한민국, 1971년) 당원]][[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규슈 대학 동문]][[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후보]]
  • 박명수(MC)
         그리고 39세까지 쭈욱 미혼이었다가 [[2008년]] [[4월]] 39세의 나이에 드디어 [[결혼]]했다. 아내는 피부클리닉을 운영하는 8살 연하의 [[의사]] [[한수민]].[* 피부과 [[전문의]]도 아니면서 방송에서 맨날 피부과 얘기 한다고 까는 사람도 있는데, 피부미용은 피부과나 성형외과 전문의가 아니어도 할 수는 있다.] ~~오오 [[인생의 승리자]] 오오!~~ 키스를 하지 않겠다는 조건부 계약 결혼이라고 흔히들 얘기한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고 무한도전 육남매 특집에서 노홍철이 한 농담(악담)이 개그소재로 자주 쓰이게 된 것이다. [[2008년]] [[8월 10일]]에 득녀했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1972215|#]]
         그렇게 언급만 되고 지나가기만 했던 아내 한수민이 무한도전 방송 이래 12년 만에 처음으로 무한도전에 출연하였고 별과 함께 노래방에 와 있었다. 별이 자기가 밤늦게 놀면 보안관 드립 치며 체포하러 오는 하하에게 뿔나 있던차에 저번에 한번 무도 카메라까지 있는 상황에서 잡으러 온걸 기억하고 한수민을 물귀신 작전으로 함께 나오게 한것. 덕분에 박명수는 방송인 24년, 무도 12년 역사상 가장 크게 당황했다. 아내의 얼굴이 확인되자마자 이어폰을 집어던지고 전화하러 녹화장소를 이탈한다. 피부과 의사답게 피부관리를 아주 잘해서 상당히 동안이다.[* 박명수의 아내가 엄청난 미인이라는 복선이 이날 방송하기 이전에도 조금 있긴 하였다. 2012년 하하의 결혼 축의금 관련 특집을 할 당시 시민들한테 특정 멘트를 들으면 들은 횟수만큼 정해진 축의금에 변화를 주는 미션을 하는 중이었는데 이때 박명수가 들을 말은 '''"어려보여요"'''였고 그말을 듣기 위해 시민 한 명을 끌어들여 어때보이냐고 하자 부인 분이 아깝다는 소리를 들었다.~~해골 펑!~~] 이 때의 박명수의 모습은 영락없는 [[애처가]].~~박명수랑 같이 있으면 부부가 아니라 딱 삼촌과 조카 같다 하는 네티즌도 있다 카더라~~ 한수민 본인은 방송 출연에 대해서는 별 생각 없다고 하지만 출연한다면 CF를 하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일반인이라 섭외가 안되니 방송 데뷔를 해서 인지도를 쌓아 CF에 나오겠다고 한다. 찍고 싶은 CF는 마트 CF. 그리고 처음 방송 출연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정도로 털털하고 거침없는 멘트를 날려 웃음을 자아냈다. 심지어 남편보다 더 재미있다. 또한 웃는것도 매우 호탕하고 명랑하다. 직접해보니 녹화가 어렵고 힘든것임을 알았다고 하면서 그간 남편이 날로 먹는줄 알았다고 한다. 자막도 적절하게 '방송인의 나쁜 예 박명수' 라고 뜬다. 방송인 박명수와 남편 박명수의 차이에 대해 묻자 집에서는 재미 있는데 TV에선 재미가 없는걸 보니 방송 울렁증이 있는거 같단 발언으로 측근인 무도 멤버들 포함 좌중을 술렁이게 하고 --경력 24년차가 방송 울렁증?-- --명수 : 대상까지 탔는데 무슨 소리야!-- 박명수가 지방 재배치 한후 어떤거 같냐고 하자 크게 달라진건 없는데 자기가 정말 잘생겨졌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냥 그렇게 생각하게 냅두셨단다. 바로 날아오는 해골은 덤. 박명수 3행시를 지었는데 그 내용이...
          * [[한수민(의사)]]
  • 박문웅(1890)
         '''박문웅'''(朴文雄, 일본명:朴忠文雄 호추 후미오, [[1890년]] [[12월 7일]] ~ [[1959년]] [[8월 14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관료이다. [[일제 강점기]]의 [[일본]] 유학파 관료로 [[1916년]] 판임관 공개채용 시험에 합격, [[선산군]]속, [[김천군]]속, [[경상북도]] 학무과 주사, [[경주시]] 총무과 서무주임 등을 거쳐 [[경북]] 달성군수, 경북 청송군수(1934.9.14~1938.3.25), 청도군수(1938.3.25~1943.3.6), 상주군수(1943.3.6~1944.12.21) 등을 역임하였다.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친일파 관료 [[박중양]]의 아들로, [[치과]][[의사]]이자 대학 내 [[치의학]]과 설립 운동을 한 [[이열희 (1924년)|이열희]]는 그의 사위였다. 다른 이름은 영문(泳文) 또는 순성(淳聖)이다.
  • 박부남 (1931년)
         '''박부남'''(朴富南, [[1931년]] ?월 ?일 ~ [[2018년]] [[1월 11일]])은 [[대한민국]]의 [[소아과|소아]][[내과]] [[의사]], 대학 교수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와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구한 말의 관료 [[박중양]]의 손녀이며, [[청도군|청도]], [[상주군|상주]], [[청송군|청송]][[군수]]를 지낸 [[박문웅 (1890년)|박문웅]]의 딸이다. [[대구광역시]] [[북구 (대구광역시)|북구]] [[침산동]] 출신.
         * 남편 : [[이열희 (1924년)|이열희]](李烈熙, [[1924년]] [[12월 18일]] - [[2012년]] [[8월 9일]]), [[치과]]의사
         [[분류:1931년 태어남]][[분류:2018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의학자]][[분류:내과 의사]][[분류:소아청소년과 의사‎]][[분류:경북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박중양]]
  • 박상민 (1970년)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고 미술과 운동을 좋아했다.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교]]) 재학중이었던 [[1990년]] 영화 《[[장군의 아들]]》의 주연을 통하여 [[영화 배우|영화배우]] 첫 데뷔를 하였다. 영화 《장군의 아들》이 대히트를 하면서 [[김두한]]이라는 배역으로 강한 임팩트를 남겼지만 이후 다른 영화 작품들에서는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 [[연극]] 무대와 [[뮤지컬]] 무대를 거쳐 브라운관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고 [[텔레비전 드라마|TV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 (드라마)|젊은이의 양지]]》와 《[[태양은 가득히 (2000년 드라마)|태양은 가득히]]》 등의 작품을 통하여 꾸준한 연기 활동을 펼쳤다. 결혼 실패 등으로 한동안 슬럼프를 겪기도 하였지만 《[[내 사랑 못난이]]》로 성공적인 복귀를 하였고 《[[자이언트 (드라마)|자이언트]]》에서 이성모 역으로 연기 호평을 받았고 계속 활발히 활동 중이다.
         * 그의 아버지 박성태는 [[외과|일반외과]] [[의사|전문의]]·[[의학]][[석사]] 및 [[대한민국 육군|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위]] 출신이며 현재 방광암 완치후 [[강원도 (남)|강원도]] [[춘천시|춘천]] 지방 재활병원 원장으로 재직중이다.
  • 박상민(배우)
         [[대한민국]]의 [[배우]]. 어릴적 부유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고 한다. 그리고 공부에는 관심이 적었지만, 운동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고뭉치 기질이 있는 데다가 운동신경이 좋다 보니 학창시절에 싸움이나 기타 사고를 많이 쳤었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속상해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번은 학교 국어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좀 진도가 남는 경우에 항상 자기가 좋아하는 고전 명시를 소개하면서 교과서에 안 나오는 내용이지만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자주 있었는데 공부에 관심이 별로 없던 그였지만 지겹도록 그 시를 듣는 바람에, 이후에 아버지와 함께 작품 전시회에 갔다가 그 시가 걸려 있는 걸 보고 익숙함에 혼자 생각없이 줄줄 읽다가 이를 들은 전시 관계자가 "너 이 시를 아느냐"고 묻자 그가 안다며 작가 이름까지 말해버렸다고 한다. 이에 그가 크게 놀라며 박상민의 아버지에게 "얘는 천재다"라면서 훌륭한 될 수 있다며 전문 교육을 시키라고 하는 바람에 그의 아버지가 어이없어했다고 한다.
         5년만에 이혼소송이 마무리.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2D&sid1=106&sid2=224&oid=108&aid=0002314967|됐다]]. 이 때 정신적으로 크게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당시 정신과 의사가 이대로 계속 악화되면 [[자살]]하거나 아니면 [[살인]]을 저지를 성향이라 할 정도로 심각했단다.
  • 박석민
          * 허콜돼: 허세 쩌는 브콜돼. 스스로 말하기를 [[야구]]를 안 했으면 [[의사]]나 [[변호사]]가 되었을 거라고.
  • 박진식
         '''박진식'''(朴振植, 1970년 4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심장내과 [[의사]]이다.
         [[분류:197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위]][[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
  • 박진식 (1970년)
         '''박진식'''(朴振植, 1970년 4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심장내과 [[의사]]이다.
         [[분류:197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위]][[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
  • 선두훈
         |직업 = [[의사]], [[기업인]], [[대학 교수]]
         '''선두훈'''(宣斗勳, [[1957년]] ~ )은 [[대전선병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정형외과]] [[의사]]이자 [[코렌텍]] 대표이사이다. 부인 [[정성이]]는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회장의 장녀이다.<ref>{{뉴스 인용|제목=승계시대 뉴리더 정성이③ 의료벤처 사업하는 남편 선두훈 이사장|url=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6/09/2015060901603.html|날짜=2015-06-09|출판사=조선일보}}</ref>
         1957년 영훈의료재단의 설립자 [[선호영]] 박사와 동양화가 김인 여사의 차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가톨릭대학교]] 의대에서 정형외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아버지의 대를 이어 의사가 되었다.
         1985년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회장의 맏딸인 [[정성이]]와 결혼해 현대가(家)의 일원이 됐다. 부인인 [[정성이]]는 1962년생으로 [[이화여자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만 22살에 선두훈과 결혼한 뒤 1남 1녀를 두었으며, 현재 [[이노션]] 고문을 지내고 있다. 선두훈은 [[정몽구]] 회장의 둘째 사위인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 셋째 사위인 [[신성재]] [[현대하이스코]] 사장 등 현대차그룹 계열사들의 경영을 맡은 동서들과 달리 의사 일에만 전념한 채 조용한 행보를 이어갔다.
         [[분류:195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보성 선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가톨릭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현대가]]
  • 손석한
          | 직업 = [[의사]], 교육 평론가
         '''손석한'''(1968년 ~ )은 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 겸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이다.
         [[분류: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196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정신과 의사]][[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
  • 신상진
         |경력 = 성남 [[YMCA]] 이사<br />제32대 [[대한의사협회]] 회장<br />[[을지대학교]] 교수<br />사단법인 산성복지포럼 회장<br />[[새누리당]] 무상보육,무상급식 TF위원장<br />[[한나라당|한나라당 경기도당]] 정책본부장<br />[[한나라당]] 제5정책조정위원장<br />[[보건복지위원회]] 간사<br />국회 메르스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br/>[[대한민국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br/>[[대한민국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신상진'''(申相珍, [[1956년]] [[6월 28일]] ~ )은 [[대한민국]]의 [[의사]]이자 [[정치인]]이다.
         * 성남시 의사회 회장
         * 성남시 의사회 명예회장
         * 대한 의사협회장 역임 (제32대)
         * 대한 의사협회 의쟁투위원장 (2000년 의사 파업 당시)
         [[분류:195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학원 강사]][[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자유한국당의 정치인]][[분류:홍준표]][[분류:서울오류초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평산 신씨]]
  • 신의진
         |직업 = [[정치인]], 정신의학자, 의사
         정치인이 되기 전에는 정신과 [[의사]]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연구강사와 부교수였고, [[세브란스 병원]]의 정신과 의사를 겸했었다. 의사, 교육 활동 이외에도 방송, 저술 활동도 하였으며 [[조두순 사건]]의 피해 아동과 [[광주인화학교]] 성폭행 사건 피해자<ref>[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975731 신의진 "도가니 피해아동들, 의사로서 미안했다"]. 노컷뉴스. 2011년 11월 16일.</ref> 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2012년]] [[새누리당]]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7번으로 공천받아 정치를 시작하였고 [[대한민국 제19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20대 총선에는 양천갑 지역구에 출마하려 하였으나 이기재와의 경선에서 패배하여 공천을 받지 못하였다.
         [[분류:196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정신과 의사]][[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자유한국당 당원]][[분류:대한민국의 과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분류:정신의학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혜화여자고등학교 (부산)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홍준표]][[분류:연세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국회의원]][[분류:평산 신씨]]
  • 양승오
          | 기타 이력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출신 <br /> [[영상의학|영상의학과]] [[의사|전문의]] 겸 [[대학 교수|의과대학 교수]] <br/> [[서울대학교병원]] 전임의 </br>[[울산대학교병원]] 핵의학과 과장</br> [[을지대학교]] 영상의학부 교수</br> [[아시아근골격계학회]] 회장</br> [[동남권원자력의학원]] 암센터 병원장 <br /> [[동남권원자력의학원]] 암센터 영상의학 주임과장
         '''양승오'''(梁承午, 1956년 12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의사]], [[대학 교수]]이다. 현재 [[동남권원자력의학원]] 핵의학과장이다.<ref>{{뉴스 인용|제목 = 부산대, 양승오 동남권원자력의학원 핵의학과장 특강|URL =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72607|출판사 = 뉴데일리|날짜 = 2015-09-08 }}</ref>
         [[분류:195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위]][[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동아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울산대학교 교수]][[분류:을지대학교 교수]]
  • 여에스더
          | 직업 = [[예방의학|예방의학과]] [[의사]] <br /> 대학 교수 <br /> 저술가
         '''여에스더'''(呂에스더, [[1965년]] [[5월 11일]] ~ )는 [[대한민국]]의 [[예방의학|가정의학과]] [[의사|전문의]]이자 예방의학박사이다.
         [[분류:196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여성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의 배우자]][[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과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성산 여씨]][[분류:함양 여씨]]
  • 오기노 쿄우사쿠
         [[일본]]의 [[산부인과]] [[의사]]. 일본 산부인과회 명예회장과 세계불임학회 명예회장을 지냈다.
  • 오대규
         * [[2001년]] [[MBC]] 주간시트콤 《[[세 친구 (시트콤)|세 친구]]》 ... 31세의 [[정신과]] [[의사]] 연상녀 [[안문숙]]에게 사랑을 전한 28세의 [[자산관리 전문가|파이낸셜 펀드 매니저]] 연하남 오대규 역
  • 오병희
         |직업 = [[의사]], [[대학 교수]]
         '''오병희'''(吳秉熙, [[1953년]] [[2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의사이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이며, [[서울대학교병원|서울대학교병원장]]을 역임하였다.
         [[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의학자]][[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
  • 오은영 (의사)
          | 직업 = [[의사]], [[대학 교수]], [[저술가]]
         '''오은영'''(1966년 3월 12일 ~ )은 대한민국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이자 대학 교수 겸 저술가이다.
         [[분류: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196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연세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한민국의 정신과 의사]][[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분류:이화여자대학교 교수]][[분류:성균관대학교 교수]][[분류:아주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유튜버]]
  • 우츠미 사토루
         [[일본]]의 [[의사]]. 내과의사, 한방의사이며, [[음모론자]](…). 인터넷 상에서 쓰는 닉네임은 미치광이 의사(キチガイ医).
         [[분류:의사]] [[분류:일본 인물]]
  • 우현(배우)
         아버지가 [[의사]]면서 병원 원장님이어서 어릴 때부터 유복하게 자랐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용돈도 현금 300만 원을 가지고 있지만 다 쓰지를 못 했다. 어릴 때부터 쭉 소고기나 장어 등 당시엔 쉽게 먹기 힘든 음식들을 자주 먹었고, 막상 감자탕이나 순대, 삼겹살 같은 음식은 대학에 들어와서 친구나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처음 먹어봤다고 한다. 특히 삼겹살을 처음 먹었을 때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고기가 있다니"라고 생각했었다.[* 이러한 식습관 때문인지 [[편식]]이 굉장히 심하다. [[잘 먹는 소녀들]]에 의하면 [[닭발]], [[족발]], [[곱창]]을 못 먹는다고 한다. 후에 [[잘 먹겠습니다]]에서 자신이 먹지 못한 곱창 먹기를 시도하였고, 성공하였다.][* 그런데 자신의 [[편식]] 습관은 아들 준서에게도 고스란히 물려주고 있다. <유자식 상팔자>에서 보면 해산물이나 가지 등을 못 먹는다고 한다. 그래도 나름 먹기는 했다.]
  • 원용덕
         '''원용덕'''(元容德, [[1908년]] ~ [[1968년]] [[2월 4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군인]] 겸 [[내과|내과 의사]] 및 [[정치가]]로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본관은 [[원주 원씨|원주]](原州)이다.
         [[1908년]] [[한성부]]에서 출생하였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1932년]] 학사 학위 취득 후 [[강원도 (남)|강원도 강릉]]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의사]]로 일하다가 [[만주국]] [[군대]]의 [[군의관]]으로 [[군의관|입대]]했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군의관|교의]]를 지내기도 했으며,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 [[계급]]은 [[대한민국 국군]]의 [[중령]]에 해당하는 [[중령|중교]](中校)였다.
         [[분류:통위부 보병학교 동문]][[분류:조선경비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일제 강점기의 의사]][[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대한민국 국방부 특별보좌관]][[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의 참전유공자]][[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대한민국의 감리교도]][[분류:만주국의 군인]][[분류:원주 원씨]]
  • 윤기선
         *** 외조카: 정태진(鄭泰振, [[1935년]] - , [[내과]][[의사]])
         ** 사위: 노춘규(미국 거주, 의사, 의학, 철학박사, 대학교수), 의학박사 노병호의 아들
  • 윤대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나온 그는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전문의 과정을 마쳤다. 스트레스의학, 정신신체의학, 라이프스타일의학 등을 전공했다. [[2005년]] 이래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이자 교수로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한국자살예방협회 대외 협력위원장, 한국정신신체의학회 학술위원 등을 역임하고 여러 방송에 출연하여 패널로도 활동했으며 정신의학 관련 저술도 하였다.<ref>윤대현.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5762257&cloc=olink|article|default 뇌의 휴식이 최고의 바캉스]{{깨진 링크|url=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5762257&cloc=olink%7Carticle%7Cdefault }}. 중앙일보. 2011년 7월 9일.</ref><ref>이정진, 김동규, 임수정.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199716 우울증 편견 깨라]. 연합뉴스. 2010년 3월 31일.</ref><ref>고무성.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3797856 '우울한 캠퍼스'…대학생 잇단 자살 왜?]. 뉴시스. 2011년 4월 13일.</ref><ref>윤대현.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5201743455&code=900303 언론의 적극적 사회마케팅이 자살 줄인다 ]. 경향신문. 2010년 5월 21일.</ref>
         [[분류:196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언주초등학교 동문]][[분류:영동중학교 (서울)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파평 윤씨]][[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정신과 의사]][[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과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위]][[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
  • 윤장현
         |직업 = [[의사]]
         '''윤장현'''(尹壯鉉, [[1949년]] [[4월 26일]] ~ )은 [[대한민국]]의 의사이자 민선 6기 [[광주광역시장]]을 지낸 정치인이다.
         [[분류:194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파평 윤씨]][[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광주서석초등학교 동문]][[분류:광주서중학교 동문]][[분류:조선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조선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조선대학교 교수]][[분류:전남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인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위]][[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친문]][[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11년) 당원]][[분류:새정치연합]][[분류:더불어민주당 당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이시형 (1934년)
         '''이시형'''(李時炯, [[1934년]] [[4월 30일]] ~ )은 [[대한민국]]의 [[교수|의과대학 교수]]·정신건강의학과 [[의사]]·前 [[군의관]]이다. [[경북대학교]]·[[성균관대학교]] 교수와 [[서울대학교]] 외래교수를 역임하였으나 사실상 [[서울대학교]]와는 별 관계가 없는 인물이다.
         * [[고려병원]] 의사
         * 동남정신과병원 의사
         [[분류:193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심리학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신과 의사]][[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경북대학교 교수]][[분류:성균관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경북대학교 교수]][[분류:차의과학대학교 교수]][[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서울사이버대학교 교수]][[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원광디지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 공군 대위]][[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예일 대학교 동문]][[분류:경주 이씨]][[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
  • 이열희 (1924년)
          | 서훈 내역 = 대한치과의사협회 학술대상
          | 기타 이력 = [[경북대학교|경북대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출신 <br /> 치과 의사 · 외과 의사 <br /> 구강성형외과 의사 <br /> 의학 교육자 및 대학 교수 <br /> [[치의학|치의학교육 저술가]] <br /> [[성형외과|구강성형외과학교육 저술]][[저술가|가]] 겸 [[수필|수필가]] <br /> [[경북대학교|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br /> 대한악안면성형재건외과학회 이사장 <br /> 대한치과의학협회 경상북도 지회장 <br /> 대한악안면성형외과학회 명예회장 <br /> [[경북대학교|경북대학교 치의과대학]] 학장 <br /> [[경북대학교|경북대학교 치과대학]] 명예교수
         '''이열희'''(李烈熙, [[1924년]] [[12월 18일]] - [[2012년]] [[8월 9일]])는 [[대한민국]]의 의학 교육자, [[치과]] 의사, [[구강 성형외과]] 의사, 대학 교수 및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대위]]이자 [[경북대학교]] 치의과대학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이며, 치과, 악안면외과(악안면성형외과) 전문의였다. [[경북대학교]] 의과 대학의 치의학과 과장이자, 경북대학교 치의과대학 초대 학장이었다. [[1962년]] [[11월]] [[대한악안면성형재건외과학회]](大韓顎顔面成形再建外科學會)의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6.25 전쟁 당시에는 군의관으로 참전했고, [[1950년]]대부터 [[치과]]대학 부설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1979년]] [[경북대학교]]에 치의과대학을 별도로 설치하고, 이후 치과대학이 의과대학에서 분리, 단설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77년]] [[5월]] [[대한악안면성형외과학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고,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원, 대한치과의학협회 경상북도 지회장,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과 교수, [[경북대학교]] 치과대 학장, 경북치과의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시인 [[이상화 (시인)|이상화]], 독립운동가 [[이상정]], 역사학자 겸 스포츠인 [[이상백 (사학자)|이상백]]의 5촌 조카였다. 일제 강점기 당시 도지사를 지낸 [[박중양]]은 그의 처조부가 된다.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고 호는 백산(白山)이다. [[천주교]] 영세명은 '''토마'''이다. [[대구광역시]] 출신.
         [[1954년]] [[소아과]][[의사]]이자 [[내과]][[의사]]였던 [[박부남 (1931년)|박부남]]과 결혼했는데, 그는 구한 말, 일제 강점기에 [[도지사]]를 지낸 해악 [[박중양]]의 손녀이며, 상주,청도[[군수]] 등을 지낸 [[박문웅 (1890년)|박문웅]]의 차녀였다.
         [[1946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과를 졸업하고 모교인 [[서울대]] [[치과]]대학 조교가 되었으며, [[1947년]] 대구의학전문학교 치과학교실 조교가 되었다. 그해 [[3월]] 다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국군수도병원|육군병원]]의 외과, 치과 의사로 근무하였다. 육군병원에 근무할 당시 구강외과를 설립하고 60년대초 구강외과내에 악안면 성형외과를 신설하였다.<ref name="imails">[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5733&yy=1999 지방 국립대 7곳 치대 설립 '산파역'] 대구매일신문 1999년 06월 08일자</ref> [[구강외과]]를 전공한 그는 구강성형 분야의 완전한 의술확립을 위해 다시 경북대의대에 입학, 다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다녔다. 경북대 의대 재학 중에는 외과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하였다.<ref name="imails"/> 그 뒤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원에서 의학석사와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7년]] 경북대 의대에 발을 디딘 그는 당시 [[치과의사]] 부족으로 불법 치과의료 행위가 극성을 부리자 치과대 설립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는 인근 국가의 인구 대비 치과의사수를 파악, 직접 [[보건사회부]]와 [[문교부|교육부]] 등을 찾아 치과대 설립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ref name="imails"/> 그뒤 1973년 전국 7개 지방국립대에 치의예과 설립 허가를 얻어내고 79년에는 치과대로의 독립을 이뤄냈다.<ref name="imails"/>
         치과의사가 부족하여 무허가 불법 치과의료 시술이 나타나고 부작용이 증가하자 그는 각 의과대학 내 치과 설치 증설과 치과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외국의 인구 대비 치과의사 수를 확인하고 정부에 치과의사 양성이 필요함을 꾸준히 설득했다. [[1973년]] 전국 7개 지방 국립대에 치의학과, 치의예과 설립 허가를 얻어냈다.
         [[1972년]]부터 4년간 [[대한구강안면성형외과학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74년]] [[3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치의학부 교수가 되고 이후 대구시 치과의사회 회원이기도 했다. [[1974년]] [[3월]] 경북대 의대 치의학과장이 되었다. 1977년 5월 대한악안면성형외과학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고,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원, [[대한치과의학회]] 경상북도지회장 등을 역임했다.
         [[1979년]] [[3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치과가 단과 대학으로 승격, 치의과대학이 의과대학에서 분리 신설되자, 그는 경북대 치의과대학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81년]] [[3월]]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제2대 학장이 되었으나 그 해 9월을 기하여 물러났다. 이후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과 평교수로 재직하며 경북치과의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개인의로 개업하여 이열희 의원 원장을 맡기도 했다. [[1980년]] [[9월]] [[대한군진의학협회]] 명예회원에 위촉되고, [[1981년]] 정년 퇴임과 동시에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명예교수에 선임되었다. 1983년 3월 FICO학위를 취득하였다.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구강안면외과학 교실 명예교수로 활동했고, 그밖에 대한치과의사회 경북도회장, 대한악안면성형외과 부회장, 대한구강외과학회 부회장, 대한성형외과학회 이사, 무의촌대책위 치과회장, 대한악안면성형외과학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 대한치과의사협회 학술대상(1979년 11월)
         경북치대 초대 및 제2대 학장을 역임하며 경북치대 설립과 구강악안면외과학교실의 발전에 공헌하였다.<ref name="pisots"/> 치과의사들 사이에선 여전히 악안면 성형외과의 권위자로 불리고 있다<ref name="imails"/>는 평도 있다. '지방 국립대 7곳 치대 설립 '산파역<nowiki>'</nowiki>'이라는 평가도 있다.<ref name="imails"/>
         *** 사촌 : 이섭희, 이재우(의사, 부산 [[고신대학교]] 의대 교수, 고신대 내과과장)
         ** 형 : 이달희(소아과 의사)
         * 부인 : [[박부남 (1932년)|박부남]] (朴富南, [[1931년]] 8월 12일 ~ [[2018년]] [[1월 11일]]), 소아과 의사
         ** 아들 : 이재창(정형외과 의사)
         ** 사위 : 오재윤(안과 의사)
         * [[대한치과의사협회]]
         [[분류:1924년 태어남]][[분류:2012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참전유공자]][[분류:대한민국의 치과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외과 의사]] <!--[[구강 성형외과]] 의사-->[[분류:경북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의학자]][[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위]][[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계화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이씨]]
  • 이정재(영화배우)
         도회적으로 잘생긴 외모와 세련된 스타일 그리고 초중고 학력 때문에 어릴 때부터 강남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랐을 것 같지만 실은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SBS [[힐링캠프]]에 출연해 밝힌 바에 따르면 양친은 모두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외가쪽은 지방에서 양조장 몇 개를 경영했고 친가쪽은 [[의사]] 집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국민학교]] 재학 이후로는 유복했던 기억이 없다고 한다. 의사셨던 조부가 연달아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마한 것이 집안의 뿌리를 흔드는 원인이었다는 듯. 가압류를 당하기도 하고, 이사를 다니면서 화장실이 바깥에 딸려 있는 단칸방에서 식구가 함께 생활했고 때로는 가족이 서로 흩어져 살아야 할 때도 있었다고. 고등학교 재학 시절엔 등록금을 내지 못해서 반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매를 맞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어릴 때 상당히 왜소해서 "소소"라는 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soso--
  • 장가용
          | 기타 이력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출신 <br/> [[외과]] [[의사]], [[의학자]], [[교수|대학 교수]] <br/> [[종교|종교인]], 인도주의자, [[수필|수필가]] <br/>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br/>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br/> [[자유민주연합|자민련]] 보건행정교육특임위원(2002년)
         '''장가용'''(張家鏞, [[1935년]] [[9월 20일]] ~ [[2008년]] [[1월 19일]])은 [[대한민국]]의 [[외과]] [[의사]], [[의학자]], [[교수|대학 교수]], [[종교|종교인]], [[인도주의|인도주의자]]이자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소령]]이며 [[본관]]은 [[안동 장씨|안동]](安東)이다.
         [[외과|외과 의사]] [[장기려]](張起呂) [[의학박사]]의 둘째아들로 [[일제 강점기]] [[경성부]]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안북도]] [[룡천군|용천]]에서 성장하였다. [[한국 전쟁]] 때 아버지 [[장기려]]를 따라 남하하였고 그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한민국 육군|육군]] [[군의관|군의무관]] [[소령]]으로 예편하였고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학장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를 지냈다.
         그는 부인 윤순자 여사와의 사이에 슬하 1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장여구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육군]] [[군의관]] [[대위]]도 조부 [[장기려]]와 부친 장가용의 뒤를 이어 외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분류:1935년 태어남]][[분류:2008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안동 장씨]][[분류:대한민국 육군 소령]][[분류:대한민국의 외과 의사]][[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인도주의자]][[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제주대학교 교수]][[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
  • 전태일
         쓰러진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으며 이 소식을 듣고 병원에 온 어머니 이소선에게 전태일은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ref>〈이소선:아, 우리들의 어머니!〉, 《이야기 여성사 1》 163~4p, 여성신문사, 2000</ref> 쓰러졌다.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응급치료를 받은 전태일은 온몸이 굳어서 펴지지가 않았다. 전태일의 어머니는 추워서 떨고 있는 아들에게 앞치마를 벗어 덮어주고 의사에게 갔다. 1만 5천 원짜리 주사 두 대면 우선 화기는 가시게 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훗날 집을 팔아서라도 돈을 갚을 터이니 그 주사를 맞게 해달라고 애원하자 의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러면 근로감독관에게 가서 보증을 받아오라고 했다.<ref name="chock289">조영래, 《전태일 평전: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돌베개, 1991) 289페이지</ref> 이때 평화시장 담당 [[서울시청]] 근로감독관 한 사람이 전태일을 따라 병원에까지 와 있었다. 그러나 근로감독관은 "내가 무엇 때문에 보증을 서요?" 하고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어머니 이소선이 다시 의사에게로 가서 매달리자 의사는 고개를 흔들며, "그 약이 지금 여기에는 없으니 성모병원으로 옮기도록 하라"고 했다. 이때까지 전태일은 간단한 응급치료 외엔 서너 시간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ref name="chock289"/> 명동 성모병원으로 전태일을 옮기는 앰블런스가 오자, 이때 근로감독관이 다시 나타나 전태일 등과 함께 타고 병원을 떠났다. 차 안에서 전태일은 근로감독관이 어머니와 하는 소릴 듣고 나서, "사람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감사가 끝났다고 그렇게 배신할 수가 있소? 내가 죽어서라도 기준법이 준수되나 안되나 지켜볼 것이오" 라고 마음 속으로 분개하였다.<ref name="chock289"/>
         오후 4시경 그는 그는 구급차에 실려 [[서울]] [[성모병원]] 응급실로 다시 후송되었지만, [[11월 13일]] 오후 10시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사망하였다. 성모병원에서는 전태일을 응급실에 얼마간 두었다가 입원실로 옮겼는데, 이미 회생할 가망이 없다고 의사는 진단했다.<ref name="chock289"/> 그는 한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그날 저녁 눈을 떠서 힘없는 목소리로 "배고프다……" 라고 하였다.<ref name="chock289"/> [[11월 13일]] 혼수상태에 있었던 그는 그날 오후 10시 병원 응급실에서 사망하였다. 시신은 마석 [[모란공원]]([[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606-1 산)에 안장되었다.
         [[서울 성모병원]] 응급실에 후송되었으나, 그는 3~4시간 동안 방치되었다. 그는 치료다운 치료를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채 응급실 한 구석에 방치되었다.<ref>대구사학회 편,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 (푸른역사, 2005) 430페이지</ref> 그는 병원 도착 직전까지 사망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전태일은 구급차로 인근 병원에 후송되었다가 다시 서울 성모병원으로 후송된 뒤에도 3~4시간 정도 방치되었다고 한다. 성모병원에서는 전태일을 응급실에 얼마간 두었다가 입원실로 옮겼는데, 이미 회생할 가망이 없다고 의사는 진단했다.<ref name="chock289"/> 의사는 전태일에게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3~4시간 가량 그를 진료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환자를 살려야 되는 [[의사]]들이 책임을 방관했다는 비판이 있다. "그 당시 전태일의 담당 의사는 한 개인이 아니었다. [[1970년]] [[11월]]의 [[대한민국]] 의료계 전체가 전태일의 마지막 길을 동반한 주치의였다. 그 글(전태일의 입원 과정)을 읽었던 [[1987년]]의 의료계도 사회적 책무라는 면에서는 [[1970년]]의 의료계와 별반 달라질 게 없었던 듯 했다.<ref>김선, 《의사가 말하는 의사》 (도서출판 부키, 2004) 104페이지</ref>"는 비판이 있다.
         * 김선, 《의사가 말하는 의사》 (도서출판 부키, 2004)
  • 정명환
         * 2005년 MBC 《[[봄날의 미소]]》 ... [[의사]] 역
  • 정의화
          * 상위 문서: [[정치인/목록]], [[의사/목록]]
         [[대한민국]]의 [[의사]], [[정치인]]이다.
         대학 졸업 이후 [[의사]]로 근무하였으며 [[http://www.bongseng.co.kr/index.asp|'''김원묵기념 봉생병원''']]/[[http://www.bongseng.com/index.asp|'''동래봉생병원''']] 병원장을 역임하였다.
         결국 터질 게 터지고 말았다. 경제선진화법 입법 문제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14&aid=0000573100|'''박근혜 대통령이''']] 조속한 통과를 요구하며 사실상 정면충돌을 불사한 것. --본격 의전서열 1인자와 2인자의 정면충돌-- 이에 대해 정 의장은 '직권상정은 국가비상상태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며 '''"내가 성을 바꾸지 않는 이상 직권상정은 없다."'''라고 하며 완강한 거부의사를 밝혔다. 그동안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덜했던 입법부의 수장이라는 직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의장 임기 수행 후 새누리당으로 복당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스스로 자신의 당적과 관련해서 "현행법상 국회의장 임기가 끝나면 (별도 의사 표현이 없을 경우) 자동으로 입당이 된다"며 "새누리당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고 자동으로 가게 되는 것"이라고 했고, 다만 "탈당할지, 계속 있을지는 고민하겠다. 공천 때부터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20년 인생을 투자하고 지분 있는 곳이지만…"이라고 발언했다. [[http://m.chosun.com/svc/article.html?sname=news&contid=2016051901188#Redyho|#]],[[http://m.nocutnews.co.kr/news/4598851|#]],[[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60518150800054&mobile|#]] 그 말대로 자동 복당 되었고,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2430|#]] 이후 무소속으로 소개되는 것을 보면 어느 시점에 탈당계를 제출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의사]]라서 2000년 초 국회에서 뇌졸중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권익현]] 전 의원과 2004년 9월 본회의장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연설 도중 실신한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의 응급조치에 나서 국회 내에서는 '의원 119'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 외에도 중남미 순방 중 비행기 안에서 다친 여자 아이에게 응급처치를 해서 감사편지를 받기도 하였다. 특히 [[신경외과]] 전문의로서 두개골 외상에 정통한데, [[장준하]] 의문사 논란을 두고 유골을 본 순간 타살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밝히며 여권에 [[충공깽]]을 선사하기도 했다.
         [[분류:의사]][[분류:대한민국 국회의장]][[분류:진해구 출신 인물]][[분류:1948년 출생]]
  • 정태섭 (1954년)
          | 직업 = [[영상의학과]] [[의사]]<br/>[[문화]][[평론|평론가]] <br/>[[저술가]] <br/>[[엑스레이]] [[미술|미술가]]<br/>[[교수|대학 교수]] <br/> 사회기관단체인 <br/>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대위
         '''정태섭'''(鄭台燮, [[1954년]] [[6월 12일]] ~ )은 [[대한민국]]의 [[영상의학|영상의학과]] [[의사|전문의]] 겸 [[문화]][[평론|평론가]]이자 [[텔레비전 진행자]] 및 [[저술가]] 겸 [[엑스선|엑스레이]] [[미술|미술가]] 및 사회기관단체인이다.
         [[분류:195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해주 정씨]][[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
  • 진수일
          | 기타 이력 = [[서울대학교|서울대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출신 <br/> [[영상의학|영상의학과]] [[의사]] 겸 [[교수|대학 교수]] <br/> [[영상의학|방사선영상의과학교육]] [[저술가]] <br/> [[음악 평론|고전음악평론가]] 겸 [[과학]][[평론|평론가]] <br/> [[서울대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대학 교수|외래교수]] <br/> [[중앙대학교|중앙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br/> [[대한영상의학회]] 상무이사 <br/> [[서울의료원|서울특별시 시립 강남의료원]] 원장
         '''진수일'''(陳秀一, [[1943년]] [[6월 5일]] ~ [[2009년]] [[9월 17일]])은 [[대한민국]]의 [[의사]] 및 [[의학박사]]이자 평론가 겸 대학 교수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대위]]이다.
         [[분류:1943년 태어남]][[분류:2009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의학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위]][[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중앙대학교 교수]][[분류:경주 진씨]][[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상주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과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
  • 진창현(음악인)
          * 바이올린 도색에 필요한 염료를 구하기 위해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오징어]] 먹물이나 [[지렁이]]까지 쓰는 등 온갖 실험을 했다. 심지어 집에서 [[알코올]]로 염료를 추출하고 [[니스]]에 혼합하는 작업을 하다가 니스가 폭발하면서 [[화상(질병)|화상]]을 입기도 했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전학공투회의|전공투]]와 [[적군파]]를 비롯한 극좌 세력의 무장 투쟁이 강성하던 시기여서 [[의사]]가 그 쪽 사람이 사제 폭발물을 제조하다가 사고를 친 것으로 여기고는 치료를 거부하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다.
  • 차광렬
          | 기타 이력 = [[연세대학교|연세대 의과대학원]] [[의학]][[석사]] 출신 <br /> [[의사]] 겸 [[기업인]] <br /> 차병원그룹 [[차바이오컴플렉스]] 총괄 회장
         '''차광렬'''(車光烈, [[1952년]] [[12월 23일]] ~ )은 [[대한민국]]의 [[산부인과]] [[의사]]이자 [[차병원]]의 연구소장이다.
         *1984 차병원 여성의학연구소 부원장, 강남 차병원 산부인과 의사, 강남 차병원 부원장
         [[분류:195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연안 차씨]][[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연세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위]][[분류:대한민국의 산부인과 의사]][[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 차태현
         아역 출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데뷔 자체가 빠른 쪽이라 의외로 짬밥은 꽤 있는 편이다. 맡아온 배역들도 평범한 대학생이나 청년([[엽기적인 그녀]], 연애소설), 소꿉친구(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등이 많다. 하지만 의외로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배역도 많이 맡았다. "햇빛 속으로"와 "황태자의 첫사랑"에서는 재벌 2세, "[[과속스캔들]]"에서는 탤런트, "복면달호"에서는 인기 가수, "[[종합병원 2]]", "[[해바라기(드라마)|해바라기]]"에서는 [[의사]] 등등. ~~옆집 오빠 같은 재벌 2세, 무난한 탤런트, 웃기는 의사.~~ 찌질이로도 연기를 한 적이 있는데, "[[투 가이즈]]"에서 뼛속까지 찌질하다. ~~[[바보]] 연기도 했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청년보다는 [[강남길]]처럼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서민 캐릭터에 특화된 배우가 되어가고 있다.
  • 최준용(배우)
          [[굿 닥터]]에서 [[정호근]]이 연기한 [[박춘성]]처럼 [[막장]] 아버지이다. 게다가 두 [[드라마]] 모두 남주인공이 [[의사]]이고, 그 남주인공을 연기한 [[배우]]가 모두 [[주원]]이라는 공통점들이 있다.
  • 콘도 마코토
         [[일본]]의 [[의사]]. [[게이오 대학]] 전임강사, 콘도 마코토 암연구소 소장.
         1973년 게이오 대학 의학부 졸업. 의사국가시험합격, 연수의가 되어, 방사선과 시험을 받고, 미국 의사자격을 취득.
         1979년 미국 로스알라모스 파이중간자 시설(パイ中間子施設)에서 의사로서 채용.
         2000년 『의원병(医原病)』, 『좋지 않은 치료 안된 의사(よくない治療ダメな医者)』 출판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47가지 방법(医者に殺されない47の心得)』출판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47가지 방법(医者に殺されない47の心得)』100만부에 도달
         TBS 금요일 스마SP(スマSP)「2명의 이단 의사를 말한다. 콘도 마코토 우에하라 아츠시가 등장(2人の異端の医師に迫る・近藤誠、上原淳が登場)」10월 3일 방송
         『빅 코믹(ビッグコミック)』2014년 22호 에서 연재가 시작된 만화 『의사를 만나면 사신이라고 생각해라(医者を見たら死神と思え)』의 감수를 맡다.
         의료 만화 『의사를 만나면 사신이라고 생각해라(医者を見たら死神と思え)』 감수
         자신의 주장을 여러 책으로 저술하였는데, 그 가운데 『환자여, 암과 싸우지마라(患者よ、がんと闘うな)』『항암제는 효과없다(抗がん剤は効かない)』가 [[베스트 셀러]]가 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47가지 방법(医者に殺されない47の心得)』은 [[밀리언 셀러]]가 되었다.
          * 의사를 신뢰하지 마라, 의사가 환자를 죽인다 등의 자극적인 주장을 하여, 환자와 의사의 신뢰관계를 파괴하였다.
         [[분류:의사]] [[분류:일본 인물]]
  • 타쿠마 마모루
         1990년 6월에 [[의사]]라고 거짓말을 하여, 18세 연상의 여성과 결혼했으나, 거짓말이 들켜서 3개월 만에 이혼했다. 그 다음에는 초등학교 시절 은사였던 19세 연상의 여성(오사카 교육대학 출신)과 결혼했다. 1993년에 이타미시 교통국에 노선 버스 운전사로 취직했다. 하지만 주차장에서 동료와 싸움을 벌이거나, 버스에서 운전석 뒤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향수 냄새가 나니까 뒷자리로 가달라"고 말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다. 1994년 9월 21일에 아내와 이혼한다.
  • 피수영
         | 기타 이력 = [[서울대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졸업]] <br /> [[소아과]] [[의사]] 겸 [[대학 교수|의과대학 교수]] <br /> [[소아과|소아내과의학교육 저술가]] <br /> [[미네소타 대학교|미국 미네소타 주립 대학교]] [[대학 교수|객원교수]] <br /> [[서울아산병원|서울아산병원 예하 소아신생아병원]] 원장 <br /> [[울산대학교|울산대학교 의과대학]] [[대학 교수|명예교수]]
         '''피수영'''(皮守英, [[1943년]] [[2월 28일]] ~ )은 [[대한민국]]의 [[의과대학]] [[대학 교수|교수]] 및 [[소아과]] [[의사|전문의]]이다.
         피수영은 인터뷰를 통해 "미국을 떠나 10년 후에 내가 살던 동네 서점에 갔는데 어떤 남자가 오더니 ‘당신 피 박사 아니냐’고 그래서 ‘날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까, 12살 먹은 아이를 불러와서 ‘당신이 살려준 애다’하였다. 그때 의사 하길 잘 했다, 보람이 있다, 싶었다."라고 말했다.
         피수영은 1995년 [[미국]]을 떠나 한국으로 오면서 국내의 수많은 미숙아들을 살리기 위해 서울아산병원으로 향했다. 2000년엔 국내 의료진과 함께 468g 체중으로 태어난 아이를 성공적으로 살려냈다. 서울아산병원의 의료진은 미국 의사들이 "너희들은 이런 아이들까지 살리느냐"고 할 만치 위험한 상태의 미숙아를 살려내기도 했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의 치료를 거부하는 부모가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나도 백내장에 걸려 치료도 못 받는데 아기를 살려서 뭐하냐"는 아기 할아버지의 항의도 있었다고 한다. 그 땐 피 교수가 "미숙아도 생명이다"라며 자기 돈을 들여 아이를 살려냈다고 한다. 피수영 교수는 '더 이상 경제적 이유로 미숙아가 죽어서는 안된다'는 바람으로 유명 탤런트 등 몇몇 지인들과 몇백 만원씩 모아서 1억5000만원을 아산사회복지재단에 기부했다.<ref>[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08071222083196938 피수영 교수가 말하는 '나의 아버지, 피천득'], 《머니투데이》, 2008년 7월 25일</ref>
         * [[피천득]](皮千得)의 1965년 수필 〈피가지변(皮哥之辯)〉에서 "… 피(皮)씨의 직업은 대개가 의원이요, 그 중에는 시의(侍醫, 임금·왕족의 진료를 맡은 의사)도 있었다는 것이다. … 의학을 공부하는 우리 아이는 옥관자는 못달더라도 우간다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올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수필에 나오는 아이가 바로 당시 23세로 [[서울대학교]] 의대에서 의학 공부를 하던 [[피천득]]의 차남 피수영이다.
         [[분류:1943년 태어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의학자]][[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순천향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 육군 소령]][[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울산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분류:홍천 피씨]][[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허만하
         '''허만하'''(1932년 3월 29일~ )는 [[대한민국]]의 [[시 (문학)|시인]]이자 [[의사]]이다.
         [[분류:193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1957년 데뷔]][[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박용래 문학상 수상자]]
  • 홍지호
          | 직업 = [[치과의|치과 의사]], 치의학교육 저술가 <br /> [[대학 교수]], [[방송인]]
         '''홍지호'''(洪志鎬, [[1962년]] ~ )는 [[대한민국]]의 [[치과의|치과 의사]] 및 [[저술가]] 겸 [[방송인]]이다.
         1990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했으며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외래교수와 [[삼성의료원|삼성의료원 서울 강북삼성병원]] 치과 과장을 역임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0&aid=0000190605 <nowiki>[인물 포커스]</nowiki> 연예스타 꿈꾸는 치과의사 3인방] 2003년 6월 3일 동아일보</ref>
         옛 교제녀와 1999년 동거하였다가 2001년에 결별한 전력이 있는 그는 이후 2005년 2월 배우 [[이윤성 (배우)|이윤성]]과 결혼하였다. 그의 첫째형 [[홍명호 (1939년)|홍명호]]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는 가정의학과 의사이며 둘째형인 홍성호 원장은 성형외과 의사이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겸임교수 겸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임강사를 지낸 경력이 있[[문화방송|MBC]]《[[타임머신 (MBC)|신]]》 [[한국방송공사|KBS]] 《야! 한밤에》, 《[[스펀지 (텔레비전 프로그램)|스펀지]] [[서울방송|SBS]] 프로그램 《[[솔로몬의 선택]]결혼 을 제
         * 형: 홍명호 (洪命鎬, 1939년 6월 15일 ~ ) - [[가정의학과]] [[의사]] 및 [[의학박사]]
         * 형: 홍성호<ref>홍성호(洪聖鎬) 의학박사의 [[본관|본관(관향)]]은 [[남양 홍씨|남양(南陽)]]이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학위를 거쳐 [[고려대학교|고려대학교 의과대학원]]을 의학석사·의학박사 학위하였고 한때 [[영화 배우|영화여배우]] [[이미숙]]과 결혼하였다가 이혼하였으며 이후 전진숙이라는 일반 여성과 재혼한 그는 한때 [[연세대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대학 교수|겸임교수]] 겸 [[고려대학교|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대학 교수|전임강사]]를 역임 이후 현재 경기도 용인 홍성호 성형외과 원장을 지내고 있다.</ref> (洪聖鎬, 1947년 ~ ) - [[성형외과]] [[의사]] 및 의학박사
         [[분류:196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치과 의사]][[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경희대학교 교수]][[분류:성균관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자유 연애]][[분류:남양 홍씨]][[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위]][[분류: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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