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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종실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자손. 왕실에 가까운 가족이었으나,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기에 강화종실이라고 부른다. 후에 이 계보에서 '[[조선 철종|철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음으로서 계보는 끊어진다.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숙빈임씨(肅嬪林氏)의 자식이다.
         [[정조]] 시기에 권세가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는데, 그녀를 원빈이라 하였다. 1980년 원빈이 사망하자, 홍국영은 은언군의 장남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서 장차 정조의 왕위를 이어받게 하려 했으나, 1786년(정조 10년) 담은 모반죄로 유폐당하였다. 이를 계기로 은언군은 강화도에 유배된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시기에, [[가톨릭]] 탄압인 신유교난(辛酉敎難)이 일어났는데, 은언군의 처 송씨(宋氏)와 며느리 신씨(申氏)가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드러나서, 1801년 은언군, 송씨, 신씨가 모두 사사되었다.(이들은 손자인 철종이 즉위한 뒤에 신원되었다.)
         [[조선 헌종|헌종]]이 자식이 없이 사망하자, 은언군의 아들 전계군(全溪君)의 아들 덕완군(德完君)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철종이다. 하지만 철종은 후사가 없이 죽었기 때문에 강화종실은 대가 끊어졌다.
  • 낙천군
         * [[은언군]]
  • 상계군
          | 아버지= [[조선 정조|정조]](양부) <br/> [[은언군]](생부)
         그는 [[조선 영조]]의 서증손자(庶曾孫子)이기도 하며 [[조선 영조|영조]]의 차남(次男)인 [[조선 장조|사도장헌세자]]의 서손자(庶孫子)이자 [[은언군]](恩彦君)의 장남(長男)이다. [[1779년]] [[원빈 홍씨]]의 상에 빈전 대전관과 수묘관으로 참여하고 소의대부 완풍군(完豊君)에 임명되었으며, [[홍국영]] 등에 의해 [[원빈 홍씨]]의 양자가 되었다. 한때 왕의 잠재적 후계자로 지명되어 가[[동궁]](假東宮)으로도 불렸다. [[1780년]] 다시 상계군으로 개봉되고 이름은 준에서 담으로 개명되었다.
         [[조선 정조|정조]]가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연령이었으나 원빈이 자녀 없이 사망하여 [[홍국영]], [[송덕상]] 등에 의해 이복 백부 [[조선]] [[조선 정조|정조]]의 양자로 내정되고, 이것이 결국 화근이 되어 역모로 몰리게 되었다. [[1786년]](정조 10) [[11월]] 신오의 딸 군부인 신씨와 혼례를 치른 뒤 의문의 음독 사망하는데, 자살설 외에도 [[은언군]]에 의한 독살설과 [[홍국영]] 일파에 의한 독살설이 존재한다. [[조선 철종]]의 이복 백부로,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1849년]](철종 즉위) [[6월 17일]] 복권되고, [[1858년]](철종 9) [[11월 9일]] [[증직|증]] [[현록대부]]에 추증되었다. 묘소의 위치는 실전되었다.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처음 봉작명은 '''완풍군'''(完豊君). [[조선 장조|사도장헌세자]]의 서손자로 아버지는 [[은언군]] 인이며, 어머니는 [[송낙휴]](宋樂休)의 딸로 상산군부인 진천 송씨(常山郡夫人 鎭川 宋氏)이다. [[조선 영조|영조]](英祖)의 서증손자(庶曾孫子)였는데 증조할아버지 [[조선 영조|영조]]의 살아 생전에 태어났다. 아래로 친동생으로 이창순, 이창덕, 이당, [[한각신]]에게 시집간 여동생 1명이 태어났다. 이 중 이당은 또 아버지 은언군의 다른 첩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그밖에 1821년에 사망한 이름 미상의 서모에게서 [[이성득 (조선왕족)|이성득]], [[이철득]]이 태어났고, 다른 서모 [[전산군부인]] 전주 이씨에게서 요절한 이복동생과 [[조선 철종|철종]]의 생부인 이복동생 [[전계대원군|이광]]이 태어났다.
         생부(生父) [[은언군]] 이인에게는 장남으로 증조부(曾祖父)인 [[조선 영조|영조]](英祖)의 생전인 [[1769년]](영조 45) [[1월 21일]]에 [[한성부|한성]] 태어났으며, 처음 이름은 준(濬)이다. 부인은 [[통덕랑]]을 지낸 [[신오]](申王+奧)의 딸로 군부인 [[평산 신씨]](郡夫人 平山 申氏)이다. 유년기와 소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미상이다.
         일설에는 그의 생모가 [[상산군부인 송씨]]가 아니라 [[은언군]] 인과 어느 [[궁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상계군 역시 궁녀에게서 자손을 보았으나, [[조선 철종|철종]] 때와 [[조선 고종|고종]] 때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의 은언군 가족, 상계군 관련 기록들을 대량으로 세초해버려서 확인되지 않고 있다.
         [[1779년]] 혹은 그 이전에 [[원빈 홍씨]]가 자녀를 낳지 못하자, [[홍국영]]에 의해 중부(仲父) [[조선 정조|정조]](正祖) 임금과 그의 후궁 [[원빈 홍씨]](元嬪 洪氏)의 양자로 입양, 출계되었다. 당초 은언군은 [[홍국영]]의 제의를 사양했지만, [[홍국영]]의 거듭된 부탁으로 이담을 일단 양자로 보냈다. 홍국영이 왜 은언군의 아들을 선택했는가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있다. [[1779년]](정조 3) [[5월 7일]] 수빈관(守殯官)에 임명되었다.
         [[1786년]](정조 10)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가 연달아 죽은 해에, 그는 혼례를 올린 직후 [[11월 20일]] [[독약]]을 마시고 음독사했는데, 자살설과 [[홍국영]]의 독살설, 생부 [[은언군|은언군 이인]]이 독살했다는 설 등이 있다. 외조부 [[송낙휴]]에 의하면 사망 직전에도 그는 건강했는데 갑자기 사망했다 한다. 최종 관직은 [[가덕대부]] 상계군이었다. 한편 그의 혼례를 주관하던 김우진(金宇鎭)은 상계군 사후, 상계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파직되고 유배되었다. 그밖에 영조, 정조 때 [[훈련대장]]을 지낸 [[구선복]](具善復<ref>그에게는 외외재종증조부가 된다.</ref>) 등도 평소 원한을 샀다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한다. [[예조판서]] [[서유린]]은 상계군이 죽었다는 보고를 꺼렸으나, 결국 상계군의 사망 소식이 궁궐에 알려지게 되었다. 장례식은 [[조선 정조|정조]]의 특명으로 친왕손의 예대로 예장(禮葬)하였다.<ref>예조에서는 그의 친왕손 장례를 반대하였으나 정조는 [[낙천군]](洛川君)의 전례를 들어 친왕손의 예로 장례를 치루도록 하였다.</ref>
         이어 [[12월 1일]] [[정순왕후 김씨|정순왕후]]가 [[언문]]교서를 직접 발표하여 상계군과 [[홍국영]]을 역적으로 지목하고, 처분을 요구하는 언문 하교문을 [[승정원]]에 내렸다. 정조 3년 당시 상계군이 [[홍국영]] 등에 의해 완풍군에 봉작된 일과 가동궁 또는 왕위 후계자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일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그의 작위는 즉시 폐작되어 그때부터 "역적 담"으로 불리게 된다.<ref>동시에 그의 아버지 은언군 인은 역적 인, 어머니 송씨는 송성(宋姓)으로 격하된다.</ref> 정순왕후가 역적의 가족들도 처분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은언군 일가는 [[강화도]]로 유배된다. 삼사는 합계하여 상계군의 일가를 공격했고, [[조선 정조|정조]]는 계속 거부하였으나 삼사의 합계에 밀려 은언군 인 일가의의 유배를 승인하였다. 이후 정조는 직접 상계군 사건에 대한 언급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상계군에 관련된 일을 언급하지 말도록 신하들에게 계속 부탁하였다.
         생모 [[상산군부인]] 진천송씨(鎭川宋氏)와 아내 평산군부인 신씨(申氏)는 양제궁 나인 서경의의 외할머니 조씨 노인의 권고로 [[주문모]] 신부의 입국 전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주문모]] 입국 후 세례를 받고 모두 마리아라는 교명을 받았다. 이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활동 중 [[1801년]](순조 1) [[2월]]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실이 적발되어 [[신유박해]] 때 처형되었고, 아버지 [[은언군]]도 그해 [[5월 29일]] 사사령을 받고 [[6월 30일]] [[강화군|강화]] 배소에서 사사되었다.
         [[1849년]](철종 즉위년) [[6월 17일]] 이복 조카인 [[조선 철종|원범]]이 [[조선 순조|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면서, 철종의 즉위를 주관했던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상계군(常溪君) 내외가 복작(復爵)되고, 이해 [[6월 23일]] 가덕대부(嘉德大夫)로 복작되었다. [[1858년]](철종 9) [[11월 9일]] 정1품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증작(贈爵)되었다. 이때 [[순원왕후]]의 명으로 과거 상계군 사건에 대한 기록이 대거 세초, 각자, 말소되었다. 이후 철종 때와 고종 때 상계군 일가 관련 기록 및 은언군 관련 기록이 대량으로 세초되어 유실되었다.
         한때 [[1801년]](순조 즉위년) [[5월]] [[은언군]]이 야밤에 함께 [[강화도]]를 탈출하려던 철득(鐵得)이 한때 그의 아명으로 여겨졌지만, 후일 [[1970년]]대 [[조선왕조실록]]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1801년에 은언군과 함께 [[강화도]]를 탈출하려다가 체포된 다른 인물로 확인되었다. 이는 상계군의 사후 15년 뒤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 생부 : [[은언군]](恩彦君, 1754 ~ 1801)
         * [[은언군]]
  • 은신군
         |친척 = [[연령군|연령군 이훤]](양조부) <br /> [[조선 영조|영조 이금]](친조부) <br /> [[달선군|달선군 이영]](양형) <br /> [[조선 정조|정조 이산]](이복 형) <br /> [[은언군|은언군 이인]](친형)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禛, [[1755년]] [[음력 1월 11일]] ~ [[1771년]] [[음력 3월 29일]])은 [[조선]]시대의 왕자, 왕족이다. [[조선 영조|영조]]의 손자로,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숙빈 임씨]] 소생으로는 둘째 아들이며, [[조선 정조|정조]]의 이복 동생이다. [[은언군]]의 친동생이며 [[은전군]]의 이복 형이기도 하다. 사후 정조에 의해 연령군의 양손자로 출계하여<ref>낙천군과의 관계를 놓고 한동안 이견이 벌어지기도 했다.</ref>, [[호적]]상 정조, 의소세손, 은언군, 은전군과는 6촌간이 되었다.
         이진은 [[1755년]](영조 31년) [[음력 1월 11일]]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양제 임씨(良娣 林氏)<ref>대한제국 광무(光武) 3년(1899년) 숙빈(肅嬪)으로 추봉(追封)</ref> 의 서(庶) 차자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친형 [[은언군]] 외에 이복형 [[의소세자]], [[조선 정조|정조]], 그리고 이복동생 [[은전군]] 찬이 있었다. 그는 보모 황덕혜(黃德惠)에 의해 양육되었다.
         [[1757년]](영조 33) [[1월 2일]] [[조선 영조|영조]]는 특별히 [[왕손]]교부에 [[홍계능]]을 임명하여 은신군, 은언군 형제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왕손의 나이 6세에 왕손사부를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영조는 1757년에 두 왕손을 가르칠 왕손교부를 초빙, 임명하였다.
         [[1760년]] 작위를 처음 받았으며 [[1765년]](영조 41년) 은신군에 봉군되었고, 같은 해 [[5월 25일]] 영조의 명으로 형 [[은언군]]과 함께 관례(冠禮)를 행하고 [[승헌대부]](承憲大夫) 은신군(恩信君)에 책봉 되었다. [[1767년]] [[7월]] 현감 [[홍대현]](洪大顯<ref>[[홍대현]]은 학자인 [[홍대용]]의 사촌이기도 했다.</ref>)의 딸인 남양 홍씨와 혼례를 치렀다. [[1768년]](영조 44) [[1월 1일]] [[승정원]]의 건의로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은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768년]]에는 [[종친부]]유사당상, 은신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임명되었다.
         [[사도세자]]의 사후 출궁되었으며, 이후 어렵게 살다가 [[홍봉한]]으로부터 약간의 금액을 지원받았다. [[홍봉한]]이 이들 형제를 왜 도와줬는지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홍봉한]]이 그의 형제를 후견한 일을 두고, 일각에서는 사도세자 제거에 가담한 것을 안 세손 이산이 자신들에게 반감을 가졌기 때문에 한 행동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1769년]](영조 45) [[김귀주]](金龜柱) 등이 이를 두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탄핵, [[1771년]] 외람되게 근수(跟隨)를 많이 거느리고 남여(藍輿)를 타고 다닌다 하여 이복 형 [[은언군]](恩彦君)과 함께 관직에 서용되지 못하는 처분을 받았다.
         곧이어 시전(市廛)상인들에게 수백 냥의 빚을 지고 갚지 않은 것이 조부 [[조선 영조|영조]]에게 알려져 양사의 탄핵을 받는다. 은신군의 보모 황덕혜의 남동생 황경룡(黃景龍)이 내시들과 결탁하여 시전 상인의 재물을 탈취한 죄목으로 고발당했다. 황경룡을 고발하는 과정에서 은언군, 은전군 형제가 시전 상인들에게 빚을 진 것이 영조의 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는 [[조선 영조|영조]]의 명으로 형 은언군(恩彥君)과 함께 [[충청북도|충북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시|제주도]]으로 위리안치 되었다. 또한 그의 외조부 [[임지번]]은 [[제주시|제주도]]의 [[병역|군역]]에 충군(充軍)되었다. 그러나 은신군과 그의 형 [[은언군]]이 유배당한 뒤에도, 그는 분에 넘치는 가마를 탔다는 죄목이 더해져 계속 탄핵당하였다. 당시 [[노론]] [[벽파]] 일각에서는 [[조선 정조|세손]]을 사전에 제거하려 했고, [[조선 영조|영조]]는 이를 알아보고 [[홍봉한]]이 은신군과 [[은언군]] 형제의 빚을 갚아준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형 [[은언군]]과 함께 [[제주시|제주도]]로 유배되었지만 그는에 걸렸고, 유배 2년만인 [[1771년]] [[음력 3월 29일]]에 병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그의 죽음으로 함께 유배생활 중이던 형 은언군은 풀려났다.
         그의 시신은 도성으로 운구되었다가, 그해 [[6월]] 임시 장지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정조의 명에 의해 [[경기도]] [[양주시|양주군]](현 [[남양주시]]) 계암(鷄岩) 해질머루부락 서쪽 손좌(巽坐)에 어머니 [[숙빈 임씨|양제 임씨]]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1774년]](영조 50) [[5월 12일]] 특명으로 복직되었고, 형 [[은언군]] 인도 복권되었다. 그의 어머니 [[숙빈 임씨|양제 임씨]]는 정조 즉위 후 [[1776년]](정조 즉위) [[8월 3일]]에 [[양제]]로 복작되었다.
         *** 형 :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䄄, 1754 ~ 1801)
         * [[은언군]]
  • 은언군
         |이름 = 은언군 이인
         |작위 = 은언군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䄄, [[1754년]] [[5월 29일]] ~ [[1801년]] [[6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조선]] [[조선 영조|영조]]의 손자이자 [[조선 장조|장조]]의 서장자이며 [[조선 정조|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조선 장조|장조]]의 아들 중 [[조선 정조|정조]], [[은전군]]과 함께 성년기까지 살아남았다. [[조선 철종|철종]]의 할아버지로, 25대 왕 [[조선 철종|철종]]은 그의 서자 [[전계대원군]]의 서자이자 셋째 아들이었다. 본관은 전주, 자는 명흥(明興),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771년]] 은언군과 은신군 형제의 빚을 [[홍봉한]] 등이 대신 갚아주자, [[노론]]이 세손을 제거하려는 것에 위협을 느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제주시|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776년 석방되어 돌아와 원릉 수릉관, 종부시제조, 가덕대부 수릉관, 수덕대부 등을 역임하였다. [[1778년]](정조 2) 그의 아들 [[상계군]]이 [[홍국영]]에 의해 [[원빈 홍씨]]의 양자로 내정되었으나 [[1786년]] 상계군을 추대하려던 구선복(具善復)의 계획이 발각되면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노론]][[벽파]]는 여러 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요구하였으나 [[조선 정조|정조]]는 상소를 물리치고 그를 보호하였다. [[조선 정조|정조]] 사후 그를 죽이라는 상소는 계속되었다. [[1801년]] 그의 정실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 상계군부인 신씨가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실을 알고 배소에서 탈출하려다가 붙잡혀 사사되었다.
         장조의 서장남으로 [[1754년]](영조 30) 탄생하였다.<ref>장조의 아들로는 셋째 아들이기도 했다.</ref> [[1763년]] 도정에 봉해진 뒤, [[1764년]](영조 40) 10세에 은언군(恩彦君)에 봉해지고, [[1765년]](영조 41) [[7월 11일]] 11세에 진천 송씨(鎭川宋氏) [[참봉]] [[송낙휴]](宋樂休)의 딸인 군부인 송씨와 관례를 행하였다.
         [[1757년]](영조 33) [[1월 2일]] [[조선 영조|영조]]는 특별히 [[왕손]]교부에 [[홍계능]]을 임명하여 은신군, 은언군 형제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왕손의 나이 6세에 왕손사부를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영조는 1757년에 두 왕손을 가르칠 왕손교부를 초빙, 임명하였다.
         [[1768년]](영조 44) [[1월 1일]] [[승정원]]의 건의로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은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768년]](영조 44) [[2월 3일]]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官)에 제수되고, 같은 해 [[4월 20일]] 숭헌대부(崇憲大夫)에 가자되었다. [[1769년]](영조 45) [[5월 5일]] 영조로부터 [[용동궁]](龍洞宮<ref>순회세자에게 주어진 집으로 순회세자 사후 왕비 소유였던 집</ref>)을 사저로 하사받았다.
         [[1771년]] 외람되게 근수(跟隨)를 많이 거느리고 남여(藍輿)를 타고다닌다 하여 친동생 [[은신군]](恩信君)과 함께 관직에 서용되지 못하는 처분을 받았다. 곧이어 시전(市廛) 상인들에게 수백 냥의 빚을 지고 갚지 않은 것이 조부 [[조선 영조|영조]]에게 알려져 [[조선 영조|친]]동생 은신군과 함께 [[충청북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안치되었다. 또한 그의 외조부는 [[대정현]]에 군역 충군되었다. 이 해 [[3월]] 친동생 [[은신군]]은 제주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했고, 그는 천극(栫棘)죄인 신분으로 혼자 버티다가 [[1771년]] [[4월 19일]] 영조의 석방 명령이 내려졌지만 [[1774년]](영조 50) [[5월]] 서용, 복직되었다.<ref>승정원일기에 의하면 5월 15일에 이미 숭헌대부의 직책에 있었는데 심상운이 은언군, 은전군의 직급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ref> [[1774년]] 가을, 안치된 지 3년 만에 [[조선 영조|영조]]의 특명으로 은언군은 석방되어 [[한성부|한성]]으로 돌아왔다.
         [[조인영]]이 지은 신도비에 의하면 그는 제주 유배에서 돌아와 공검근신(恭儉謹愼)하게 생활하며 학문에 주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노론]] 및 혜경궁 홍씨의 친정 일부는 세손이 자신들에게 원한을 품었을 것이라 단정하고, 은언군, [[은전군]] 등에게 수시로 접근하였다. 이후로도 그는 몇몇 사건에 연루되었다.
         [[1778년]](정조 2) [[12월]] 은언군 집에서 [[소]]를 밀도살하여 팔았다는 물의를 일으켰다. 이후 양사와 [[홍문관]], [[의금부]] 등로부터 여러 번 탄핵을 당했으나, 그때마다 정조가 무마시켰다. [[1779년]](정조 3) [[5월 7일]] [[수묘관]](守墓官)에 임명된 뒤, 같은 해 [[6월 28일]] 다시 [[서울특별시|서울]]제조(宗簿提調)을 거쳐 [[7월 23일]] 다시 서울시 유사당상을 겸임하고, [[1779년]](정조 3) [[12월]] [[교정청]]제조(校正廳提調)가 되었다.
         [[1778년]](정조 2) [[홍국영]](洪國榮)이 [[조선 정조|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후사가 없는 것을 기화로 누이동생을 [[원빈 홍씨]](元嬪 洪氏)를 들여 왕세자를 낳게 하려 하였으나 이듬 해인 [[1779년]](정조 3)에 죽자, 대신에 은언군의 맏아들인 담(湛)을 원빈의 장례 때에 대준관(代尊官)을 시켜 양자로 삼고,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은언군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홍국영]]의 거듭된 부탁으로 결국 아들을 원빈의 양자로 들이는 것을 수용하고 만다.
         하지만 그의 장인이자 상계군의 외조부 송낙휴는 상계군의 불평불만을 조정에 고해 바치면서, 상계군이 역심을 품었다는 이유로 사형시킬 것을 청하는 상소가 계속 올라왔다. 동시에 상계군의 생부인 은언군 역시 죽여야 된다는 상소가 연일 올라온다.
         [[1786년]] [[11월]] [[상계군]]이 자살 혹은 의문의 음독사망하자, 바로 금성위 [[박명원 (문신)|박명원]](錦城尉 朴明源), 창성위 황인점(昌城尉 黃仁點), 참봉 조관진(趙寬鎭), 도사(都事) 조응진(趙應鎭), [[돈녕부]][[영사]] [[홍낙성]](洪樂性), 전 승지 홍낙신(洪樂信)ㆍ[[홍낙임]](洪樂任), 유학 홍낙륜(洪樂倫), 전 주부 [[홍수영]](洪守榮), 유학 홍최영(洪最榮), 보덕 김치묵(金峙默), 전 목사 김지묵(金持默), [[사복시]] [[첨정]] 홍의영(洪義榮) 등과 함께 종척 집사로 [[상계군]]의 빈전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은언군도 이에 연루되어 죽을 뻔하였으나, 정조가 대신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유배형으로 낙착되었다. 그 해 은언군은 군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현록대부]] [[오위도총부]]도총관 직에서도 파면되고 [[강화군|강화도]]에 처자와 함께 유배되었다.
         [[정순왕후]]는 대신들을 시켜 은언군을 죽일 것을 청했으나 정조는 증거도 불충분하다, 하나뿐인 혈육이라 이제는 죽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은언군에 대한 탄핵상소는 [[1786년]](정조 10) [[11월]] 이후 매일 올라왔고, 상소가 계속되자 정조는 음식을 물리고 단식에 들어간다. 그러자 정순왕후도 단식을 하며 맞불을 놓게 된다. 그러나 [[송낙휴]]의 고변으로 [[훈련원|훈련대장]] [[구선복]](具善復) 등이 [[홍국영]]과 함께 모의를 했다가 [[김종수]]에게 발각되면서, 역모의 증거로 논정되었다. 그러나 은언군을 죽이라는 삼사와 금부의 요구는 계속되었다. [[구선복]]과 그의 조카 병마절도사 [[구명겸]], 병마절도사 [[구이겸]] 등이 처형당한 뒤 은언군을 사형시키라는 여론은 일시적으로 수그러들었다가 다시 은언군 사형 여론이 형성되었다. 정조는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라며 양보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남인]] 역시 은언군 처형을 상소하였다. 정조는 계속 도성 밖으로 나가거나, 단식으로 맞섰고, [[노론]] 대신들은 굴복하여 사형에서 한 등급 감하여 [[유배형]]으로 결정하고, 은언군을 죽이지 않는 대신 유배지는 [[제주시|제주도]]로 정했다. 그러자 정조는 반발했고, 대신들은 다시 은언군의 유배지를 [[전라남도]] [[진도군]]로 정했다. 그러나 정조는 진도는 너무 멀다며 유배지를 [[강화도]]로 바꾸도록 지시하였다. 여러 번의 조율 끝에 은언군의 유배지는 [[강화군|강화도]]로 결정되었다.
         강화도로 유배된 뒤에도 그가 [[홍국영]] 등과 한패거리이며, 상계군 추대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에서는 번갈아가며 은언군의 토죄, 처벌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은언군이 [[홍국영]]과 적극적으로 모의했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은언군과 그 일가의 [[강화군|강화도]] 유배생활은 기록이 대부분 전하지 않는다. 은언군과 그 일가들에 대한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은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대량으로 세초되었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재위기간에도 일부 남아있었으나 고종 대에 와서 먹줄로 긋거나, 해당 기사를 잘라버리는 식으로 기록을 대부분 말소시켰다.
         [[1786년]] [[5월]]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고, 이어 같은 해 [[9월]]에 [[의빈 성씨]](宜嬪成氏)가 출산 과정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러자 [[노론]]은 은언군과 [[홍국영]]을 의심하였다. [[노론]] 계열에서는 은언군에게도 흑심이 있었을 것이라며 노론계 언관들을 통해 그를 사형을 처해야 한다는 탄핵 상소를 거듭해서 올렸으나, [[조선 정조|정조]]는 이를 거부하였다. 계속해서 [[노론]]계 대신들의 탄핵이 폭주하자, [[1789년]](정조 13) [[9월 26일]] 정조는 비밀리에 변복하고 출궁하여 은언군에게 연락, 변복하고 썰매를 타고 [[강화군|강화도]] 입구로 나왔다. 정조는 은언군을 데리고 [[한성부|한성]]으로 도착했지만, 이 사실이 노론 벽파계 대신들에게 알려졌고, 이때 정순왕후의 명으로 [[의정부시|의정부]]김익(金熤)은 은언군을 배소에 도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이에 [[조선 정조|정조]]는 [[강화군|강화도]]로 가서 은언군의 유배지 근처에서 유숙하며 항의성 시위를 벌였다. [[정순왕후]]는 정조에게 당장 돌아오라며 연락을 보낸다. 정조의 은언군 구하기 항의성 시위는 그 해 [[9월 28일]] 일단 벽파대신(僻派大臣)들이 정조의 체신을 생각하여 수용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1789년]] [[10월]] 은언군은 다시 [[강화군|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그는 [[혜경궁 홍씨]]의 생일과 [[사도세자]]의 생일과 기일, [[정순왕후]] 김씨의 생일 등에만 일시 방면되어 왕궁에 초대되고는, 탄신행사가 끝나면 다시 강화도로 돌려보내졌다. 이때 은언군의 [[강화군|강화도]] 감시를 게을리했다는 이유로 당시의 [[강화군|강화]][[부사]] [[윤승렬]](尹承烈) 역시 계속 탄핵당하게 된다.
         [[1789년]](정조 13)부터 계속 은언군이 국법을 어기고 [[강화군|강화도]]를 빠져나왔다는 탄핵이 빗발쳤다. 그러자 정조는 자신의 허락도 없이 왕대비 말만 듣고 대신들이 [[포도청|포도대장]](捕盜大將)의 당상을 시켜 은언군을 [[강화군|강화도]]로 돌려보냈다며 탄핵상소를 물리쳤다. 한편 [[신기현]](申驥顯)이 [[포도대장]], 당상들이 임의대로 은언군을 강화도로 돌려보냈다며 탄핵상소를 올리자, [[의정부시|의정부]][[김종수]], [[형조판서]] [[심이지]]는 정조를 찾아가 신기현의 상소가 잘못되었다고 논정하였다. 그해 [[10월]] [[노론]]계 태학 유생들과 노론계 [[사부학당]] 유생들은 연명상소를 올려, 은언군을 역적의 괴수(賊魁)라며 토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정조는 이를 물리쳤다. [[10월]] [[수원시|수원성]] 축성을 맡았던 [[남인]] 판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 등도 역시 은언군을 역적이라 칭하며 토죄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선 정조|정조]]는 은언군이 유배지에서 고통받고 있다며 아우를 잃을까봐 걱정된다는 뜻을 자주 피력하였고, 은언군의 석방을 계획했으나 그때마다 삼사와 [[승정원]] 등에서 반대하며 은언군을 탄핵했고, 관학과 사부학당의 유생들도 들고 일어나 반발하여 은언군 석방은 번번히 무산되었다.
         [[1790년]](정조 14) [[11월 13일]] 정조는 사람을 강화도로 보내 은언군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정순왕후]]의 방해로 만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정조는 친히 용산(龍山) 별영(別營)에 나와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은언군을 기다렸다. 은언군은 비밀리에 강화부 유수의 묵인하에 강화도를 벗어났지만 [[한성부|한성]] [[용산구|용산]] 근처에서 사전에 발각되고, 다시 강화도로 압송되었다. [[1790년]] [[12월 13일]] [[강화군|강화부]] 유수 [[홍수보]](洪秀輔)가 이임하면서 후임자를 차출하여 은언군을 감시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절두산에 있는 은언군과 그의 부인 상산군부인 송씨의 묘비
  • 은전군
         |친척 = 이복 형 [[의소세자]], [[조선 정조|정조 이산]], <br /> [[은언군|은언군 이인]], [[은신군|은신군 이진]] <br />이복 누나 [[박예진]]
         1762년 1월 그의 생모 [[경빈 박씨 (장조)|경빈 박씨]]가 아버지 [[조선 장조|사도세자]]에게 살해당한 것을 두고,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서자]]들 중 그가 사도세자에게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 [[노론]][[벽파]]로부터 주목받아왔다. [[노론]]은 그를 추대할 음모를 꾸미기도 했고 [[1776년]] 정조 즉위 후 노론 벽파의 택군(擇君)의 대상이 되었다. [[1777년]] [[8월]]과 [[9월]] 자객이 담을 넘다가 발각되어 [[홍계능]], [[홍상범]] 등이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던 중 그를 추대하려 한 계획이 드러났다. 정조는 그에게 자결을 명했으나 그는 반항했고, 결국 사사되었다. 자녀가 없어 사후 이복 형 [[은언군]]의 아들 [[풍계군]]을 양자로 입양하였고, 풍계군 역시 일찍 죽어 양손자를 입양하였다. [[1850년]](철종 1년)에 가서야 [[서영순]]의 상소로 복작되고 [[1871년]](고종 8) [[3월 16일]] 효민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철종, 고종, [[흥선대원군]]과 관련하여 [[일제 강점기]] 당시 대중문화의 소재가 된 [[은언군]], [[은신군]]과는 달리 오랫동안 조명받지 못하다가, [[1970년]]대 이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 및 사도세자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면서 주목받게 되었다.
         이름은 찬(禶), 자(字)는 연재(憐哉), 시호는 효민(孝愍)이다. 아버지는 [[조선 장조|장조]]로 추존된 [[조선 장조|사도세자]]이며, 어머니는 [[경빈 박씨 (장조)|경빈 박씨]] 빙애이다.<ref>고종 때 [[조선 장조|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되면서 [[귀인]]으로 [[추증]]되었다가, 2년 후에 장조 황제로 추존되자, 다시 경빈으로 진봉되었다. 생전 작위는 수칙이었다.</ref> 어머니 빙애의 실명은 한중록에 기록되어 후대에 알려졌다. [[의소세손|의소세자]]와 [[조선 정조|정조]], [[은언군]], [[은신군]]의 이복 동생이다. 부인은 평양인(平壤人) [[조성]](趙峸)의 딸 군부인 조씨(郡夫人 趙氏)이다.
         [[1765년]](영조 41) [[6월 26일]] 그의 이름이 [[의소세자]]의 이름 정(琔)과 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할아버지 [[조선 영조|영조]]는 이름을 찬에서 명(䄙)으로 개정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개명되지 않았다. [[1767년]] [[11월]] 군호는 은전으로 정해지고, 곧 은전군에 책봉되었다. [[1768년]](영조 44) [[1월 1일]] [[승정원]]의 건의로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은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775년]](영조 51) [[4월 24일]] 영조의 특명으로 [[흥록대부]](興祿大夫)에 가자되고, 이해 [[12월 10일]] 다시 [[현록대부]](顯祿大夫)에 가자되었다. [[1776년]](영조 52) [[1월 17일]] [[종부시]]제조(宗簿侍提調)가 되어 《[[선원보략]] (璿源譜略)》의 발문을 썼다. 이해 [[2월 5일]] [[조선 정조|왕세손]] 및 이복형 [[은언군]](恩彦君)과 함께 [[수은묘]](垂恩墓)에 가서 봉심(奉審)과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한때 그는 전주이씨 문중의 문장(文長) 후보로 추천, 문장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아버지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노론]]에게 반감을 품던 [[조선 정조|정조]] 대신 [[노론]]은 그의 이복 동생인 [[은언군]]과 [[은신군]]을 임금으로 추대할 계획을 세웠으나 [[홍봉한]]이 이들의 시장에서 진 빚을 갚아준 것을 이상하게 본 [[조선 영조|영조]]에 의해 [[제주시|제주도]]에 유배, [[은신군]]은 그곳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한다. 그 뒤 [[노론]]은 그에게 주목하였다.
         [[1777년]](정조 1) 후사가 없어 후일 이복형 은언군(恩彦君)의 아들을 후사로 내정했고 후일 은언군의 사남 [[풍계군]](豊溪君) 이당(李瑭)을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풍계군]] 역시 후사가 없이 일찍 죽어 파양되었다. [[조선 순조|순조]] 때에 이르러 그에 대한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무산되었고, [[1819년]](순조 19) 그의 처 군부인 조씨가 그의 신원을 청하는 격쟁을 하여 [[형조]]는 승정원에 계를 올렸다. [[조선 철종|철종]]이 즉위한 [[1850년]](철종 1) [[11월 10일]]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유치선]](兪致善)에게 정조때 당시 부득이한 처분이므로 금일 가부를 논해야 하느냐며 일의 관계가 무거운바 시원임대신을 모아 상고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해 [[12월 22일]] [[비변사]] 시원임대신 회의에서 그의 일은 [[건릉]]의 구 지문을 근거로 논의하였다.
         철종, 고종, 흥선대원군의 직계이며, [[일제 강점기]] 당시 소설, 연극, 시 등 대중문화의 소재가 된 이복 형 [[은언군]], [[은신군]]과는 달리 오랫동안 조명받지 못하였고, [[1948년]] 이후 편찬된 한국의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았다. 1970년 이후 국사펀찬위 등에서 조선욍조실록,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등을 한글로번역하기 시작했고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관계, 사도세자 정신질환자설에 대한 이의제기, 사도세자가 노론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견해 등이 나오면서 조명받게 되었다.
         *** 이복 형 : [[은언군]](恩彦君, 1754 ~ 1801)
         ** 양자 : [[이당 (왕족)|풍계군 이당]](豊溪君 李瑭, 豐溪君 李瑭, [[1783년]] [[2월 1일]] - [[1826년]] [[5월 8일]])<ref>이복형 [[은언군]](恩彦君)의 넷째 아들.</ref>
         * [[은언군]]
  • 의소세자
         '''의소세자'''(懿昭世子, [[1750년]] [[9월 27일]]([[음력 8월 27일]]) ~ [[1752년]] [[4월 17일]]([[음력 3월 4일]])) 또는 '''의소세손'''(懿昭世孫)은 [[조선]]의 [[왕세손]]이자 추존 왕세자,대한제국의 추존 황태자로 [[조선]]의 21대 왕인 [[조선 영조|영조]](英祖)의 장손이자 [[조선 장조|장조]](莊祖)의 적장자로 [[헌경왕후]](獻敬王后) 소생이다. 이름은 정(琔)이고, 시호는 의소(懿昭)<ref>덕성(德性)이 순숙(純淑)한 것을 의(懿)라 하고 용의(容儀)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한다. 【영조실록 제76권, 영조 28년 음력 4월12일 1번째기사】</ref>이며, [[조선]] [[조선 정조|정조]]의 친형이자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의 이복 형이다.
         [[1750년]] [[9월 27일]](영조 26년 [[음력 8월 27일]]) [[조선 영조|영조]](英祖)의 장손인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홍봉한]]의 딸인 [[혜빈 홍씨]](惠嬪 洪氏)의 적장자로 [[한성부]] [[창경궁]] 내 경춘전(景春殿)에서 태어났다. [[조선 정조|정조]] 이산은 그의 동복 친동생이 되고, [[청연군주]], [[청선군주]]는 친 여동생이다.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은 이복 서제가 된다. 그는 영조의 후손 중 첫 정실소생 적장자였다.
         * [[은언군]]
  • 이성득
         * '''[[이성득 (조선 왕족)|이성득]]'''(李成得, 1775 ~ 1817)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은언군]]의 서자이며 [[조선 철종|철종]]의 이복 숙부였다. 생전에는 왕족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고문을 받던중 사망했다.
  • 이인 (동음이의)
         * '''[[은언군|이인]]'''(李裀, [[1755년]] ~ [[1801년]])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恩彦君)이다.
  • 홍국영
         원빈 사망 당일 정조는 자신의 서제 은언군 아들 완풍군을 원빈의 수원관으로 삼았다. 후일 홍국영이 이 완풍군을 "내 조카"라고 부르며 그를 통해 대계를 저지하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기록에 일관성이 없어 완전히 신뢰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 완풍군(完豊君) 준(濬)은 홍국영의 몰락 후, 상계군(常溪君) 담(湛)으로 개명(改名) 개봉(改封)되며 왕실 세력들의 견제를 받았으며, 결국 5년 후인 정조10년([[1786년]])에 생을 마감했다.
         * [[은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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