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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대운
         * [[윤선도]]
  • 권상하
         * [[윤선도]]
  • 김만기 (1633년)
         1653년 별시문과에 을과 3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그 뒤 장예원 주서, 승문원 주서, 시강원 설서 등을 역임하고 예조, [[병조]][[좌랑]]과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수찬,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657년]](효종 8) 교리(校理)로 재직 중 글을 올려 [[오례의]](五禮儀)』의 복상제(服喪制) 등 잘못된 것을 개정하기를 청하였다. 관료생활 초반 김만기는 문장력과 재주를 인정받아 [[조선 효종|효종]]은 "나와 더불어 일을 함께 할 자는 그 누구인가? 법도에 맞게 지적하여 인도해 줄 자는 경 등 약간의 사람뿐이다."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1659년 [[조선 효종|효종]]이 북벌을 준비하다가 그해 [[5월]] 갑자기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예송논쟁|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논란이 일자 송시열, [[송준길]] 등의 기년설을 지지하였다. 이후 [[서인]]으로 활동하며, 3년설을 주장하는 [[윤선도]](尹善道), [[윤휴]] 등 [[남인]]을 공격했다. 이후 흥문관 응교,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 등을 지냈다.
  • 류형원
         생전 그의 학문에 관심을 준 인물은 절친한 친구였던 [[배상유]](裵尙瑜)와 스승 [[허목]], 선배였던 [[윤휴]], [[윤선도]]와 [[서인]]으로는 [[영의정]]을 지낸 잠곡 [[김육]]이 있었다. 그의 사상은 후에 [[서인]] [[이사명]]과 [[이이명]], [[소론]]의 [[윤증]]과 [[박세채]], [[노론]]의 [[홍계희]] 등 소수의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고 높이 샀고, [[조선 영조|영조]] 때에 이르러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상은 [[양득중]], [[이익 (1681년)|이익]], [[안정복]], [[신후담]], [[정약용]] 등을 통해 계승되었다.
         * [[윤선도]]
  • 박세채
         [[1659년]] [[조선 효종|효종]]이 죽고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놓고 1차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기년복설을 주장한 [[서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는 당초 [[허목]]과 [[윤휴]]의 견해도 일단 수용하자는 입장이었으나 [[윤선도]]의 상소 이후 [[송시열]], [[송준길]]의 예론을 무조건 지지하였다. [[1674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파직당하고 [[양근]]으로 유배되었다.
  • 성혼
         후일 미수 [[허목]],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가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면서 내세웠던 논리는 바로 [[이홍로]]가 그를 공격한 것, 일부러 어가를 보고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 송준길
         일찍부터 [[김장생]]과 그 아들 [[김집 (1574년)|김집]]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24년(인조 3) 진사로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조선 인조|인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보고 그들을 동정하였고, 소현세자 사후에게는 세자의 아들에게 계승권이 돌아가야 된다고 주장하다가 인조의 눈밖에 났다. 그 뒤 학문 연구에 정진하다 [[1649년]] [[조선 효종|효종]] 즉위 직후 스승 김집의 천거로 발탁되어 청요직을 역임했다. 그 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 [[김수항]]과 함께 [[서인]]논객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때 서인 온건파를 이끌며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윤선도]]의 상소 이후 한때 윤선도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송시열과 함께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 [[김집 (1574년)|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윤선거]] 등을 만났으며, [[남인]]계 선비들과도 두루 사귀어 [[윤휴]], [[윤선도]] 등과 만나 토론, 담론하며 교분을 쌓게 되었다.
         그 뒤 [[자헌대부]]로 승진 발탁되어 [[사헌부]][[대사헌]]겸 [[성균관]]제주가 된 뒤 이조판서로 있던 [[송시열]]과 함께 조정의 공론을 장악하였다. 그 뒤 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쳐 [[1659년]](효종 10년) [[병조판서]]로 특별 발탁되었다. 이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우참찬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던 중 [[조선 효종|효종]]이 죽고 [[조선 현종|현종]]이 즉위, 효종상에 대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이른바 1차 [[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이 기년제(朞年祭, 만 1년)를 주장할 때, [[김수항]], [[원두표]] 등과 함께 송시열의 참최복 설을 지지하여 [[남인]]의 [[윤휴]]·[[허목]]·[[윤선도]] 등의 3년설과 논란을 거듭한 끝에 일단 참최복을 관철시켰다.
         [[1661년]](현종 2년) [[윤선도]]가 유배된 [[삼수]]는 흉년과 기근이 심하여 그의 유배지를 북청으로 옮기는 논의가 있었다. [[허목]] 등은 윤선도의 유배지를 옮겨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윤선도의 유배지를 옮기는 것을 반대하여 허목 등과 언쟁이 벌어졌고, 남인들은 송시열과 송준길이 잔인하다며 성토했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의 뜻이 관철되어 윤선도의 유배지는 옮겨지지 못했다.
         예론에서 승리한 이후 서인 당내의 남인을 처형하자는 주장에 그는 반대했다. 생각이 다르면 다른 것이지 죽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송시열과 [[김수항]]을 찾아가 사형 반대의견을 개진했고, [[조선 숙종|숙종]]에게도 윤선도의 감형을 적극 주청하기도 했다. 그는 적극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에 반대하고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고 만다.
         [[윤선도]]와 등은 [[예송 논쟁]] 때 [[송시열]]과 송준길이 [[조선 효종|효종]]에게 소현세자빈의 명예회복과 복권을 강력하게 주청했다는 점을 걸고 넘어지며, 그들이 [[소현세자]]를 정통으로 생각했다고 공격하고, [[윤휴]] 등도 이에 동조했다.
         소현세자와 소현세자빈은 [[조선 인조|인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어 죽었고, 세자빈을 구명했다가 희생된 [[김홍욱]]을 의를 위해 희생된 선비라고 확신하던 송시열과 송준길은 윤선도, 윤휴와 남인들의 정치공세에 크게 분노했다.
         * [[윤선도]]
  • 어진익
         [[1665년]] 봄에 [[사헌부]]지평 재직 중, [[남인]]탁남 [[허적]](許積)에 발탁되자, 사사로운 혜택을 준다고 [[현종]]을 비판했다가 파직된 이무(李堥)를 그는 송시철(宋時喆), 권격(權格), 박세성(朴世城) 등과 함께 변호하다가 [[현종]]의 분노를 사 파직되고, 원찬(遠竄)시키라는 명을 받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서인]] 대신과 동료들의 거듭된 구원 상소로 곧 서용(敍用)의 명을 받고, 복직되었다. 이때 [[의정부]][[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홍명하]](洪命夏) 등의 대신과 간관들의 변호로 [[사간원]] 정언(正言)에 발탁되었다. 정언 재직 중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고 비판한 [[남인]] [[윤선도]](尹善道)를 비판하고, [[윤선도]]를 감형시키고 이배시키려는 왕명의 취소를 요청하였다. 이후로도 누차 [[윤선도]]의 감형을 반대, 여러번 취소를 청하였다.
  • 오시만
         * [[윤선도]]
  • 유형원
         생전 그의 학문에 관심을 준 인물은 절친한 친구였던 [[배상유]](裵尙瑜)와 스승 [[허목]], 선배였던 [[윤휴]], [[윤선도]]와 [[서인]]으로는 [[영의정]]을 지낸 잠곡 [[김육]]이 있었다. 그의 사상은 후에 [[서인]] [[이사명]]과 [[이이명]], [[소론]]의 [[윤증]]과 [[박세채]], [[노론]]의 [[홍계희]] 등 소수의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고 높이 샀고, [[조선 영조|영조]] 때에 이르러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상은 [[양득중]], [[이익 (1681년)|이익]], [[안정복]], [[신후담]], [[정약용]] 등을 통해 계승되었다.
         * [[윤선도]]
  • 윤휴
         '''윤휴'''(尹鑴, [[1617년]] [[10월 14일]] ~ [[1680년]] [[5월 20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이다. [[남인]]의 거두이며, 청남의 중진이자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었다. 본관은 [[남원 윤씨|남원]](南原). 자(字)는 두괴(斗魁),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 야보(冶父)이다. 이름 휴(鑴)를 잘못 오기하여 윤준(尹鑴), 윤전(尹鐫)으로 읽기도 한다. 학자 간서재(澗西齋) [[김덕민]]의 외손으로, 김덕민, [[이민구 (1589년)|이민구]], [[이원익]]의 문인이다. 학행(學行)으로 [[시강원]][[진선]]이 되었으며 이후 [[성균관]]사업,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의정부시|의정부]][[좌찬성]] 등을 지냈다. [[윤선도]], [[허목]]과 함께 [[서인]] 공격의 선봉장이었다.
         [[1659년]] [[제1차 예송 논쟁]]에서는 허목, 윤선도 등과 함께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으로 봐야 된다며 3년설을 주장, 서인과 갈등하였다. 송시열의 예론을 반박, 서인 정권의 전복을 꾀하자 송시열과 원수가 되었고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1674년]] [[제2차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논객으로 [[인선왕후]]가 맏며느리의 예로써 1년복 설을 주장,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면서 요직에 발탁, [[사헌부]]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지냈다. 이때 호포법의 실시, 전제의 개혁 등을 꾀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사헌부]] [[대사헌]]으로 재직 중에는 [[청나라]]를 정벌할 것을 주장했으며, [[1679년]] [[의정부시|의정부]][[우찬성]]에 이르렀다. [[1675년]](숙종 1년) [[홍수의 변]] 때 숙종에게 “대비를 조관하라”고 충고하여 임금의 미움을 샀다. 이 일로 평소 숙종의 눈 밖에 났던 관계로 [[1680년]](숙종 6년) [[허견의 옥사]]와 무관했으나 함께 엮여서 그해 [[5월]] 갑산에 유배가던 중 사형을 선고받고 법살당했다.
         송시열, 윤선거 등과는 [[남해군]] 시절부터 오랜 친구였으나 그가 주자, [[성리학]]에 대한 의문, 의혹을 제기하면서 결별하였다. [[예송 논쟁]]의 과정에서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하는 윤선도, 허목 등을 옹호하고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송시열과는 타협할 수 없는 원수가 된다.
         1635년(인조 13년) 19세 때, 당대의 석학으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던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만나 3일간의 정치와 사물을 토론하였다. 그의 막힘없는 달변에 탄복한 [[송시열]]은 “30년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송시열]]의 주선으로 그는 [[송준길]](宋浚吉), [[허적]], [[윤선거]](尹宣擧), [[윤선도]] 등을 소개받았다.
         이어 [[허목]], [[권시]](權諰), [[권준]](權儁), [[이유]](李木劉), [[장중함]](張沖涵), 이해(李澥), [[윤선도]], [[허적]] 등 남인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고, [[기해예송]](己亥禮訟) 문제가 비화되기 전까지는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이유태 (1607년)|이유태]](李惟泰), [[유계]](兪棨), [[윤선거]](尹宣擧) 등 [[서인]]계 인사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또한 [[송시열]]은 윤휴의 이모의 아들들이던 [[송규정]], [[송규렴]] 형제의 스승이기도 했다. 윤휴의 명성은 입에서 입으로 널리 알려졌고, [[허적]]의 조카이자 송시열의 문인이며 같은 [[여주]] 출신인 [[민정중]](閔鼎重), [[민유중]](閔維重) 형제는 그의 집을 자주 찾아왔다.
         [[송시열]]은 그의 가계가 [[북인]] 계열이었다가, 전향 후 [[서인]]이 되지 않고 [[남인]]을 지원한 것을 상당히 안타까워하였다. 권시(權諰)와 처남인 권준(權雋)그리고 이유(李𣞗)·장충함(張冲涵)·이해(李澥) 등 남인계 인사들과의 친분관계가 있었으며 [[서인]]측 인사들과도 [[1659년]](효종 10년)의 기해예송 이전까지는 친교가 잦았다. 유천 시절부터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1607년)|이유태]](李惟泰), [[유계]](兪棨), [[심지원]], [[윤선도]], [[윤문거]](尹文擧), [[윤선거]] 등 서인 계열의 학자들과도 만나 세상과 사물을 담론하며 교분을 나누었으며, [[송시열]]의 문인들인 [[민정중]](閔鼎重)·[[민유중]](閔維重) 형제는 특히 윤휴를 각별히 여겨 그가 살던 [[여주]]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노봉 [[민정중]]은 한때 그의 사심없는 삶을 시로 표현해 안빈낙도의 전형으로 칭송하기도 하였다. 여양부원군 민유중은 “윤휴의 기모를 보면 좌상춘풍(左上春風)이요 그 언론을 들으면 경전에 출입하고 금고(今古)를 관천(貫穿)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여 귀 기울이게 하니 어찌 경도치 않으리오.” 라며 칭찬하였다. 그의 수려한 외모와 막힘없는 [[시]] 재주, 글재주, 달변은 여러 선비들을 매료시킨 하나의 매력이었다. 그러나 [[권대운]]은 그가 지나치게 자기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음을 단점으로 지적한다.
         [[조선 인조|인조]] 즉위 초부터 시종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 종사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다. 이때 남인 중에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 등이었다.<ref name="Leedeok211">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211 페이지</ref>
         고산 윤선도 (윤휴, 허목과 함께 남인 강경파 인사였다.)
         앞서 [[1660년]]([[조선 현종|현종]] 11년)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와 함께 [[송시열]], [[송준길]] 등의 예론(禮論)을 통박하다가 사문난적으로 낙인이 찍혔다. 논쟁 초기에 [[송시열]]은 윤휴의 주장을 접수하였으나, [[남인]]이 [[복상 문제]]로 [[송시열]]을 제거하려 하자 [[송시열]]은 그를 공격하였다.
         미수 허목 (윤휴, 윤선도와 함께 예송논쟁 당시 3년복 설을 주장했다.)
         이때 [[윤선도]] 등은 [[예송 논쟁]] 때 [[송시열]]과 [[송준길]]이 [[조선 효종|효종]]에게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명예회복과 복권을 강력하게 주청했다는 점을 걸고 넘어지며, 그들이 [[조선 효종|효종]] 대신 [[소현세자]]를 정통으로 생각했다고 공격했고, 윤휴 역시 이에 동의, 묵인하였다. 그가 이를 묵인하거나 동조하는 태도를 취한 것에 분개한 [[송시열]]은 그에 대한 신뢰를 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송시열과 교류했는데, 그의 이모의 아들인 송규정, 송규렴 형제가 송시열의 제자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송시열과 대립하면서 송규정, 송규렴과의 관계도 소원해진다.
         [[남인]]들이 송시열 등이 소현세자를 정통으로 봤다는 상소를 계속 올릴 때 윤휴는 묵인하거나 수수방관하였다. [[소현세자]]와 소현세자빈, [[김홍욱]] 복권의 당론 외에도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소현세자빈]]은 [[조선 인조|인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어 죽었고, 세자빈을 구명했다가 희생된 [[김홍욱]]을 의를 위해 희생된 선비라고 확신하던 [[송시열]]과 [[송준길]]은 윤선도, 윤휴와 남인들의 정치공세에 크게 분노했다.
         1차 예송 당시 송시열의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였고, 이후 서인과는 틈이 생겼다. 그러나 [[송시열]], [[송준길]]은 처음에는 학문상의 견해차이로 보고 수용하였다. 그러나 학문 논쟁에서 출발한 [[예송 논쟁]]을 [[남인]]이 정치공세로 비화, 이 과정에서 남인 당원들이 송시열을 사형시키라고 주장하자 송시열의 남인에 대한 반감과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공격하면서, 윤휴 역시 [[송시열]]을 죽여야 된다는 [[윤선도]], [[허목]] 등의 강경파의 입장에 동조하게 된다. 송시열은 윤휴를 참적(讒賊), 적휴(賊鑴), 흑수(黑水)라 불렀고, 소년기의 우정은 증오와 경멸로 변하였다.
         [[1675년]] [[1월 2일]] [[조선 숙종|숙종]]이 그를 경연관에 임명하자 처음에는 고사하였으나 계속 출사하라 권고하여 다시 [[경연]]장에 출사하게 되었다. [[1월]] [[성균관]][[사업]](司業)이 되었다. 이때 [[예송 논쟁]]으로 유벌을 받은 [[윤선도]](尹善道)와 그밖에 유직(柳稷) 및 홍유부(洪有阜) 등의 유벌(儒罰)을 풀어달라고 청하여 관철시켰으며, 그해 [[2월]] [[홍우원]]의 복직을 청하여 성사시켰다. 그해 2월초 승지가 되었다. 2월 다시 [[승정원]][[우부승지]]로 개차되었다. 그해 왕에게 건의를 올려 백성들에게 뽕을 심고 수리를 일으키게 할 것을 주청하였다. 또한 그는 강력한 왕권을 위해 [[간관 제도]]를 폐지하고, 특정 문벌에 의해 독식되다 시피하는 [[과거제도]]의 폐지, 그리고 비상설기구인 [[비변사]]를 원래의 목적대로 되돌리거나 아니면 [[비변사]]를 혁파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또한 그는 [[주례]](周禮)를 참고로 하여 〈공고직장도설 公孤職掌圖說〉을 숙종에게 올려 개혁을 촉구하기도 했다. [[조선 숙종|숙종]] 초에 [[남인]]이 득세하자 [[사헌부]][[대사헌]]·이조판서·[[의정부]][[좌찬성]]의 요직을 역임했다.
         ===== 윤선도 추증 문제 =====
         [[남인]]이 집권하면서 윤휴와 허목은 [[윤선도]]가 바른 말을 하다가 희생당했으므로 의당직을 증직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허적]]이 계속 반대하여 [[윤선도]]의 증직은 판서급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송시열]]의 제자였던 이종 사촌동생들인 송규창(宋奎昌), 송규정(宋奎楨) 형제와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1660년]] 윤휴는 [[윤선도]]의 상소가 문제가 될 때 이종 사촌동생인 송규정(宋奎楨)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중에 '윤선도가 흉패(兇悖)하다.' 라는 구절이 있었다. 송규창은 윤휴가 친형 송규정에게 보냈던 이 편지를 가져와 유생들에게 폭로하며 윤휴가 [[윤선도]]에게 의정직을 추증해야 된다는 주장을 반박하였다. 이런 저런 논란 끝에 [[윤선도]]의 증직은 [[이조판서]]로 최종 결정되었다. 한편 친족인 윤이건(尹以健) 등도 등용하려 하였으나 역시 [[송시열]]의 문인이었으므로 그의 청을 거절하고 그를 멀리했다.
         * [[윤선도]]
         * [[윤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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