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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반면 이러한 대결구도는 다른 지역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특히, 지난 63년 대선과 67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윤보선의 대결이었던 선거는 동여서야가 두드려졌지만, 71년 대선에서 충청도에서는 김대중보다 박정희가 20만표를 더 얻어 많은 지지를 보냈다.<ref>[http://www.nec.go.kr/necis/GAEPYODATA?value0=1&value1=019710427&value2=1&value9=3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 선거정보시스템, 제 7대 대통령선거 결과]</ref> 이것은 [[박정희]]의 영부인 [[육영수]]여사가 충청도출신이라는 점과 호남 출신인 김대중의 연고지 차이라는 분석이 있다.
         [[1974년]] [[8월 22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반독재 선명야당 체제'의 구축을 위해 김영삼 총재의 당선을 적극 지원하였고, [[11월 27일]]에 가택연금 속에서 재야 반유신 투쟁의 결집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하였다. [[1976년]] [[3월 1일]]에는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주도하여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고, 이듬해인 [[1977년]] [[3월 23일]]에는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형을 확정(긴급조치 9호 위반) 받은 후 옥고를 치렀다.
         [[1979년]] [[4월 4일]]에는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등과 함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주도하여 공동의장으로 반유신 운동에 참여, 3차례 연행당하였다.
  • 김두한
         |후임자 = (종로구 갑)[[윤보선]]<br /> (종로구 을)[[한근조]]
         |같은 지역구 의원 = (종로구 갑)[[윤보선]]
  • 김병관
         * [[윤보선]]
  • 김성수 (1891년)
         [[1935년]] 이후 김성수는 공직을 사퇴하고 고미술품과 예술품 수집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고미술품과 작품의 외국 반출을 막아야 된다며 거금을 치루고서라도 미술품, 서예 작품을 매입해들였고, [[전형필]],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장택상]] 등도 그의 견해애 동조하여 거액을 들여서라도 미술품 입찰에 가서 그림, 서화 등의 작품을 구매했다. [[1936년]] [[영국]] [[런던]]을 방문, [[장덕수]], [[윤보선]], [[신성모]], [[윤치왕]], [[이활]] 등을 만나 보고 귀국했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박헌영]] 진영의 추천으로 김성수는 [[조선인민공화국|인공 내각]]의 인민위원<ref name="해공주1"/> 겸 [[문교부|문교부장]]으로 선임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1 /><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년) 60쪽.</ref> 그러나, 김성수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함께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가 정통성이라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건준]]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을 모두 부정하였다.<ref name="동아일보"/> 김성수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백관수]], [[장덕수]], [[윤보선]] 등과 창당을 준비하였고, [[8월 16일]] 창당된 [[원세훈 (1887년)|원세훈]], [[김약수]]의 [[고려민주당]]을 통합하여 [[한국민주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회]]를 세우자,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과 함께 가입하였다.
         **** 아들: [[김남]](金楠), [[윤보선]] 대통령의 비서
         * [[윤보선]]
  • 김수선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울산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를 인접한 경상남도 울산군 갑 선거구로 옮겨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오위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는데 오위영 후보가 사퇴하면서 쉽게 당선되었다. 이후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였으나 1955년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이로 인하여 지역구에서 비난을 많이 받았다. 1957년 [[의원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다가 자유당에서 제명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를 옮겨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구(선거구)|갑]]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민주당(1955년)|민주당]] [[윤보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김재규
         >김재규의 거사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지만, 여성 연예인들이 저런 식으로 대통령의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큼은 확실히 차단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의 구명을 호소하면서 우리의 민주화가 김재규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민주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그 여성 연예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또다른 10·26 사건이 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70년을 두고 2개의 10·26 사건이 있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군사독재가 왔는데,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이토의 제삿날과 군사독재의 상징인 박정희의 제삿날이 같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중략)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졌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는 끝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김재규는 대가 끊겼던 한국 보수우익의 계보학에서 돌출한 마지막 대륙형 인간이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 장군은 이토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 의사와 마찬가지로 봐야 한다"고 평가하였다.[[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209783#cb|#]]
         심지어 일요신문 1996년 1월 21일자 2~3면 기사에서 윤보선 측근인 이한두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가 거사 21일 전에 이 사실을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알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 남궁연
         * 외조부 : [[윤완선]](尹浣善) - [[윤보선]] 前 대통령의 바로 아랫동생
         * [[윤보선]]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함열 남궁씨]][[분류:윤보선]][[분류:윤치영]][[분류: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동문]][[분류:1987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드럼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팝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재즈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영화 음악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강사]][[분류:대한민국의 연출가]]
  • 류영모
         * [[윤보선]]
  • 박기출 (국회의원)
         [[5·16군사정변]] 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부산시 동구에서 보수야당인 신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마침내 원내진출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국회의원 임기말에 이어진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원래 국민당을 창당하고 출마하기로 했던 윤보선이 승산이 없음을 자각하고 갑자기 불출마를 선언하자 국민당 관계자들로부터 대신 출마해줄것을 제의받고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다. 그후 잠시 정치활동을 쉬다가 유신선포후인 1973년 9대총선에서 양일동이 창당한 군소야당인 통일당 후보로 서울 동대문에서 출마하였다가 낙선했다. 그 후 다시 정치낭인으로 지내다가 유신정권이 자신을 체포하려한다는 제보를 받고 급히 일본으로 도피했다.
         * [[윤보선]]
         [[분류:1909년 태어남]][[분류:1977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사회민주주의자]][[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조봉암]][[분류:윤보선]][[분류:장준하]][[분류:진보당 (대한민국) 정치인]][[분류:호헌동지회]][[분류:국민당 (대한민국, 1971년) 당원]][[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규슈 대학 동문]][[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후보]]
  • 박서양 (1885년)
         * [[윤보선]]
  • 박순천
         이후 1955년 [[김성수 (1891년)|김성수]], [[신익희]], [[윤보선]], [[장면]], [[조병옥]] 등과 함께 [[민주당 (대한민국, 1955)|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56년 [[부산광역시|부산]]과 1960년 [[서울]]에서 거듭 당선되면서 4대, 5대, 6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민주당 (대한민국, 1955)|민주당]]의 신파 계열에서 여성 정치인의 대표격으로 활동했다.
         1961년 5.16으로 정치활동정화법으로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고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를 당했다가 63년 2월 해금되었다. [[5·16 군사 정변]] 직후 그는 5.16이 우발적인 정변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탐욕스러운 군인들의 쿠데타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윤보선]] 등 민주당 구파 출신이 군사 정변을 방조한 점 역시 비판하였다. 그러나 군정 측은 군인 세력이 타락한 한민당 계열과 동일한 세력일리 없다며 반박하였다.
         정치활동 금지에서 풀리면서 그는 1963년 초 민주당 재건위를 조직하여 [[장면]], [[오위영]], [[현석호]], [[조재천]], [[김도연 (1894년)|김도연]] 등과 함께 민주당 재건에 참여하였다. 이후 와병중인 [[장면]]을 대신하여 구 민주당 신파의 리더가 되어 재건된 민주당의 총재에 추대되었고,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민주당 (1963년)|민주당]]이 창당되자, 총재에 피선되었고, 초기에는 대통령 후보로 나설 의향을 보였으나 야당 후보단일화를 위해 대통령 후보자리는 [[윤보선]]에게 양보하였다.
         1963년 3월 22일 [[윤보선]]·[[변영태]]·박순천 등의 재야지도자들은 [[박정희]]의 3월 16일 군정연장 선언에 반발하여 '민주구국선언대회<ref>1974년의 민주회복국민선언과는 관련 없음</ref>'를 열어 군정연장봉쇄를 결의하고 가두데모에 나섰다.<ref>김용욱, 《한국정치론》 (오름, 2004) 346페이지</ref>
         1963년 10월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한 [[윤보선]]의 예방을 받았다. 1964년 민주당과 민정당이 통합되어 [[민중당 (1964)|민중당]]이 설립되자 민중당 대표최고위원, 1965년 다시 민주당을 재건하고 민주당 총재가 되었다가, 1967년 범야당 통합에 참여하고, 그해 [[신민당 (1967년)|신민당]] 고문 등 야당의 지도자를 역임했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을 강행하자 [[윤보선]], [[함석헌]], [[장택상]] 등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 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소극적으로 참여하여 [[윤보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72년 정계를 은퇴하였으며, 근명학교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였고 1965년 [[윤보선]]·[[장택상]]·[[장준하]] 등과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가하였으나 1970년대 이후 유신정권에서 국토통일원 고문, [[육영수]]여사 추모기념사업회 이사장, [[대통령]]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 [[윤보선]]
         |후임자 = (종로구 갑)[[윤보선]]<br/>(종로구 을)[[김두한]]
         |후임자 = [[윤보선]]
         |전임자 = [[윤보선]]
  • 박순천 (국회의원)
         이후 [[1955년]] [[김성수 (1891년)|김성수]], [[신익희]], [[윤보선]], [[장면]], [[조병옥]] 등과 함께 [[민주당 (대한민국, 1955)|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56년]] [[부산광역시|부산]]과 [[1960년]] [[서울특별시|서울]]에서 거듭 당선되면서 4대, 5대, 6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민주당 (대한민국, 1955)|민주당]]의 신파 계열에서 여성 정치인의 대표격으로 활동했다.
         1961년 5.16으로 정치활동정화법으로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고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를 당했다가 63년 2월 해금되었다. [[5·16 군사 정변]] 직후 그는 5.16이 우발적인 정변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탐욕스러운 군인들의 쿠데타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윤보선]] 등 민주당 구파 출신이 군사 정변을 방조한 점 역시 비판하였다. 그러나 군정 측은 군인 세력이 타락한 한민당 계열과 동일한 세력일리 없다며 반박하였다.
         정치활동 금지에서 풀리면서 그는 [[1963년]] 초 민주당 재건위를 조직하여 [[장면]], [[오위영]], [[현석호]], [[조재천]], [[김도연 (1894년)|김도연]] 등과 함께 민주당 재건에 참여하였다. 이후 와병중인 [[장면]]을 대신하여 구 민주당 신파의 리더가 되어 재건된 민주당의 총재에 추대되었고,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민주당 (1963년)|민주당]]이 창당되자, 총재에 피선되었고, 초기에는 대통령 후보로 나설 의향을 보였으나 야당 후보단일화를 위해 대통령 후보자리는 [[윤보선]]에게 양보하였다.
         [[1963년]] [[3월 22일]] [[윤보선]]·[[변영태]]·박순천 등의 재야지도자들은 [[박정희]]의 3월 16일 군정연장 선언에 반발하여 '민주구국선언대회<ref>1974년의 민주회복국민선언과는 관련 없음</ref>'를 열어 군정연장봉쇄를 결의하고 가두데모에 나섰다.<ref>김용욱, 《한국정치론》 (오름, 2004) 346페이지</ref>
         [[1963년]] [[10월]]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한 [[윤보선]]의 예방을 받았다. [[1964년]] 민주당과 민정당이 통합되어 [[민중당 (1964)|민중당]]이 설립되자 민중당 대표최고위원, [[1965년]] 다시 민주당을 재건하고 민주당 총재가 되었다가, [[1967년]] 범야당 통합에 참여하고, 그해 [[신민당 (1967년)|신민당]] 고문 등 야당의 지도자를 역임했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을 강행하자 [[윤보선]], [[함석헌]], [[장택상]] 등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 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소극적으로 참여하여 [[윤보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72년 정계를 은퇴하였으며, 근명학교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였고 [[1965년]] [[윤보선]]·[[장택상]]·[[장준하]] 등과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가하였으나 1970년대 이후 유신정권에서 국토통일원 고문, [[육영수]]여사 추모기념사업회 이사장, [[대통령]]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 서상일
         * [[윤보선]]
         [[분류:대한제국의 사회 운동가]][[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분류:호헌동지회]][[분류:윤보선]][[분류:윤치호]][[분류:조봉암]][[분류:장택상]][[분류:민주당 (대한민국)]][[분류:진보당 (대한민국) 정치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대구 서씨]][[분류:간 질환으로 죽은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서정각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있으면서 1976년 [[서울특별시|서울시]] [[명동성당]]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미사에서 "우리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다가 투옥된 민주 인사들과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한다."는 내용이 발표된 3·1 민주구국선언문이 낭독되자 "정부 전복 사건"이라고 밝히면서 다음날 [[문익환]] 목사,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문동환]], [[이문영]], [[정일형]] 등 11명을 구속하고, [[이태영]] 변호사 등 9명을 불구속 입건하였다. 당시 [[문정현]] 신부는 "검찰에서 닷새 동안 잠을 안 재우고 거짓 자백을 하게 했다."고 밝혔다.<ref>[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523]</ref>
  • 오세창
         임정 환국 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1891년)|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45</ref>
  • 유원식 (군인)
         그가 [[일본군]]에 입대하였다 하여 그의 아버지 [[유림 (1894년)|유림]]은 그와 의절하였다. [[5·16 군사정변]]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나 후에 스스로 공직을 사양하고 은퇴한다. 후에 그는 [[윤보선]]이 [[5·16 군사정변]]을 알고도 묵인했다 주장하여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1961년]] 육군 대령으로 복무 중 [[박정희]]의 권유를 받고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였고, 정변 직후 바로 청와대를 찾아갔다. 당시 대통령 [[윤보선]]은 [[박정희]]와 유원식을 보고 올 것이 왔다고 하여 사실상의 군사정변을 승인한 셈이 되었다.<ref name="신동아11">[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1/29/200401290500021/200401290500021_2.html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봇이 붙인 제목 -->]</ref> 이는 1년 뒤 유원식이 직접 증언한 바 있다.
         후에 유원식이 5·16 군사정변 직전에 대통령 [[윤보선]]과 만나 정변 계획에 대한 교감을 나누었으며 정변 소식을 들은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주장을 내놓아 논란이 일었다.<ref name="신동아516">{{저널 인용
         |저자=윤보선
         [[윤보선]]의 정변 방조 의혹은 [[1962년]] [[5월]] 유원식의 진술로 밝혀졌다. 유원식은 인터뷰에서 '윤보선이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고 이를 방조했다'고 주장하자, [[윤보선]]은 이를 부인하며 '혼란한 장면 정부하에서 무슨 사태가 터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기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반박하였다.<ref name="신동아11"/>
         국가원수 신분으로서 정치적 라이벌인 [[장면]]의 몰락을 바라며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붕괴를 방관했다는 이러한 주장은, 야당 지도자로 활동 중이었던 윤보선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윤보선 측은 5·16 군사정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이를 사실상 승인했다는 의혹을 전면 부인하여, 유원식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ref name="신동아516"/>
         * 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회고록 (동아일보사, 1990)
         * 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 (정경문화사, 1967)
  • 유진오
         [[1948년]] [[제헌 국회]]에 참여하여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제헌 헌법]]을 입안하였으며, 정치 활동으로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기간 중 [[민국당]]과 [[민주당]]에 참여하였으며, [[1959년]] [[장택상]] 등과 함께 재일동포 북송 반대운동에 동참했다. 그 뒤 [[윤보선]]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 계열의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언론, 법률 활동 외에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 기간 중 야당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활동했다. [[신민당]]총재를 지냈으며 1969년 [[3선개헌]]이 통과되자 충격을 받고 당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정계에서 물러났으며 [[박정희정부]]하에서는 줄곧 야당지도자로 정부 비판에 앞장섰다. 그러나 [[제5공화국]] 출범 이후 [[국정자문회의]]위원과 [[국토통일원]]고문을 지내면서 비판을 받았다.
         * [[윤보선]]
         |전임자 = [[윤보선]], [[박순천]]
  • 윤고려
         [[조선]]과 [[대한제국]]의 문신 [[김윤정 (1869년)|김윤정]](金潤晶)의 딸<ref>{{웹 인용 |url=http://leekcp.new21.org/zb41/zboard.php?id=rmswjs&no=267 |제목=이경찬의 국사교실 |확인날짜=2010년 10월 22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414022939/http://leekcp.new21.org/zb41/zboard.php?id=rmswjs&no=267 |보존날짜=2016년 4월 14일 |깨진링크=예 }}</ref>로, 윤고려는 본래 성이 김씨였으나 남편을 따라 성을 바꾸었다.<ref>다른 이름으로 윤고라(尹高羅), 김고라(金高羅)라는 이름도 있다.</ref><ref>《뉴스플러스》 (1999.4.1)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s_plus/news177/np177gg030.html 20세기 한국의 풍물 풍속사⑫ 옷 - '미니스커트 단속' 그 때를 아시나요]</ref> 결혼 후 김고라는 남편을 따라 성을 바꿔 ‘윤고라’로 불렸고, 여성교육운동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지만, 20대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ref name="근녀1">[http://newwoman.culturecontent.com/cp0423e/cp0423e0101.asp?pageNum=2&sub=2&depth=2&spageNum=1&ssub=1 근대여성<!--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newwoman.culturecontent.com/cp0423e/cp0423e0101.asp?pageNum=2&sub=2&depth=2&spageNum=1&ssub=1 }}</ref>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윤치호]]의 사촌이며 대한민국 4대 대통령 [[윤보선]]의 큰아버지인 [[윤치오]]의 둘째 부인이다. 의학자 [[윤일선]]의 계모이다. 본관은 [[청도 김씨|청도]]이다.
         [[분류:1891년 태어남]][[분류:1913년 죽음]][[분류:조선 사람]][[분류:대한제국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사]][[분류:윤치호]][[분류:윤보선]][[분류:청도 김씨]][[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윤기선
         구한 말의 독립운동가 겸 개화파 정치인 [[윤치호]](尹致昊)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남포 백씨 백매려이다. 제4대 [[대통령]] [[윤보선]]과는 재종간이다. 제3대 [[농림부]]장관을 지낸 교육자 [[윤영선 (농림부장관)|윤영선]](尹永善)의 이복 동생이며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을 지낸 [[윤장선]]의 동생이었다. 본관은 [[해평 윤씨|해평]]이다.
         * [[윤보선]]
         [[분류:192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피아노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클래식 음악가]][[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지휘자]][[분류:이화여자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피아노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미국의 클래식 음악가]][[분류:미국의 개신교도]][[분류:미국의 피아노 연주자]][[분류:미국의 지휘자]][[분류:미국의 대학 교수]][[분류:윤치호]][[분류:윤보선]][[분류:윤치영]][[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도쿄 예술대학 동문]][[분류:줄리아드 학교 동문]][[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해평 윤씨]]
  • 윤남경
         '''윤남경'''(尹男慶, [[1931년]] - [[2008년]] [[3월 19일]])은 [[대한민국]]의 소설가 겸 작가, 언론인, 칼럼니스트이다. [[서울특별시]] 출신.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을 지낸 해위 [[윤보선]]은 큰아버지이고, [[경기도지사]]를 지낸 활천 [[윤원선]]은 그의 삼촌이다.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기자, 동아방송 PD 등을 역임했으며 소설가로 활동하였다.
         [[1931년]] 중추원 의관 [[윤치소]]의 아들인 윤완선(尹浣善)과 이순정의 딸로 태어났다. 윤완선은 [[윤보선]]의 친동생이고, [[윤원선]]의 형이며 [[윤치호]]의 5촌 조카였다.
         * 윤보선 전대통령 약전
         * [[윤보선]]
  • 윤상구 (1949년)
         |부모= 아버지 [[윤보선]], 어머니 [[공덕귀]]
         '''윤상구'''(尹商求, [[1949년]] [[10월 29일]] ~ )는 [[대한민국]]의 기업인, 사회 사업가이다.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전 대통령인 [[윤보선]]과 신학자 겸 시민운동가 [[공덕귀]]의 장남이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위원장, 국제로터리 제3650지구 총재, 국제로타리 이사, 2016 국제로타리세계대회 호스트조직위원장, 국제로타리 재단이사 등을 역임했다. 호는 중정(中庭), 본관은 [[해평 윤씨|해평]](海平)이다. [[서울특별시|서울]] 출신.
         * [[윤보선]][[대통령]]기념사업회 이사
         * 아버지 : [[윤보선]](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 호는 해위(海葦),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제2대 [[서울특별시장|서울시장]], [[상공부|상공장관]], [[대한민국의 대통령|제4대 대통령]])
         * 어머니 : 여흥민씨(驪興 閔氏, [[1894년]] ~ [[1937년]]), 아버지 윤보선의 첫 부인
         * [[윤보선]]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3&aid=0000692987 명사사진전-윤상구의 '나의 아버지 윤보선 대통령']
         [[분류:194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분류:윤치호]][[분류:윤보선]][[분류:윤치영]][[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시러큐스 대학교 동문]][[분류:서강대학교 동문]]
  • 윤연선 (1936년)
         * [[윤보선]]
         * [[윤보선]]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36년 태어남]][[분류:대한민국의 공무원]][[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해평 윤씨]][[분류:윤보선]][[분류:윤치호]][[분류:대한민국 제4공화국]][[분류:고려대학교 동문]]
  • 윤영구 (1923년)
         '''윤영구'''(尹英求, [[1923년]] [[9월 17일]] [[경기도]] [[서울특별시|서울]] ~ [[1991년]] [[3월 8일]])는 [[대한민국]]의 기업인 겸 공무원이다. 메트로항공 대표이사 등을 지냈다. [[대한민국의 농림부|농림부 장관]]을 지낸 [[윤영선 (1896년)|윤영선]](尹永善) 의 아들이며, 전 [[대통령]] [[윤보선]]의 조카이다. [[조선일보]] 사주 [[방상훈]](方相勳)의 장인이기도 하다. 본관은 [[해평 윤씨|해평]]이다.
         * 당숙: [[윤보선]](尹潽善, [[1897년]] - [[1990년]])
         * [[윤보선]]
         [[분류:1923년 태어남]][[분류:1991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공무원]][[분류:대한민국 사람]][[분류:해평 윤씨]][[분류:윤치호]][[분류:윤보선]][[분류:윤치영]][[분류:조선일보]][[분류:중국계 한국인]][[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병사한 사람]]
  • 윤영구 (1928년)
         병리학자 겸 해부학자 [[윤일선]]의 딸이고, 제4대 대통령이자 2대 서울시장인 [[윤보선]]의 5촌 조카가 된다. 초대 내무부장관 [[윤치영]]은 작은할아버지이다. 다른 이름은 횡구(金+榮求), 앨리스 윤 최(Alice Yun Chai), 아호는 '''문경'''이다.
         [[1928년]] [[7월 10일]] [[경성부]]의 감리 교회에서 병리학자 겸 해부학자인 [[윤일선]]과 그의 부인 조마구례(다른 이름은 조영숙)의 딸로 태어났다. 집은 서부([[서울특별시|서울시]] [[서대문구]])에 있었다. 형제로는 윤석구, 윤탁구 등이 있다. [[대한민국]]의 제2대 서울시장과 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은 아버지 [[윤일선]]의 사촌 동생이었다.
  • 윤영선 (1896년)
         |친척= 할아버지 [[윤웅렬]], 이복 숙부 [[윤치왕]], [[윤치창]], 당숙 [[윤치소]], [[윤치오]], [[윤치영]], 6촌 조카 [[윤보선]], [[윤원선]]
         '''윤영선'''(尹永善, [[1896년]] [[12월 25일]] ~ [[1988년]] [[2월 6일]])은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 미국 유학 후 귀국하여 농업과 양잠업을 하였고 해방 후 제3대 [[농림부|농림부장관]]과 무임소 장관을 지냈다. [[1925년]]부터 [[1945년]]까지는 [[동아일보사]] 맡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의 [[친일지식인]]인 [[윤치호]]와 중국인 [[마애방]]의 아들이다.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 [[윤보선]], 경기도지사 [[윤원선]] 등과는 재종간이며, [[조선일보]] 사주를 역임한 [[방상훈]]의 처조부가 된다. 본관은 해평으로 호는 오당(梧堂), 초명은 용성(龍成), 자는 용성(龍成)이다.
         소년기에 그는 [[명성황후|민비]]의 친족인 [[민유식]](閔裕植)의 딸 [[민연희]](閔蓮禧 또는 閔連嬉)와 결혼한다. 민연희에게서는 아들 영구(英求), 승구(勝求), 용구(容求)가 태어난다. 영구는 교통부, 승구는 [[대통령]] [[윤보선]]의 비서, 용구는 [[서울특별시청]]의 공무원을 역임한다.
         숙모 이범숙의 회갑연(1936년), 다섯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윤영선, 넷째 줄 가운데, 색동옷을 입은 윤치소의 뒤측 오른편, 한진숙의 바로 뒷쪽열은 아버지 윤치호, 둘째 줄 왼쪽에서 일곱번째는 6촌 동생 윤보선, 셋째 줄 가운데는 당숙 윤치소, 그 옆은 종조모 한진숙, 넷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는 당숙모 이범숙, 다섯째 줄 오른쪽 끝은 당숙 윤치영
         6촌 동생 윤보선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을 지냈다.
         아들 윤영구는 행정이사관에 이르렀고, 메트로 항공사 사장과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윤승구]]를 졸업했으며, 당숙인 [[윤보선]] 대통령의 비서관을 지내다가 윤보선 퇴임 후 개인사업을 하기도 했다.
         * [[윤보선]]
         [[분류:1896년 태어남]][[분류:1988년 죽음]][[분류:조선 사람]][[분류:대한제국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농업인]][[분류:낙농업]][[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상인]][[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농림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무임소장관]][[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윤치호]][[분류:윤치영]][[분류:윤보선]][[분류:조봉암]][[분류:농업인]][[분류:한국 전쟁 관련자]][[분류:중국계 한국인]][[분류:오하이오 주립 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윤영선 (1922년)
         동호 [[윤일선]]과 [[윤승선]]의 이복 동생이고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윤보선]]의 사촌 동생이며, [[조선]]말의 민권운동가였던 좌옹 [[윤치호]]의 5촌 조카가 된다.
  • 윤인구 (아나운서)
         |친척 = 조부모 [[윤치영]], [[이은혜 (정치인)|이은혜]], 당숙 前 대통령 [[윤보선]]
         [[분류:197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동문]][[분류:한국방송공사의 아나운서]][[분류:윤보선]][[분류:윤치호]][[분류:윤치영]][[분류:부산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해평 윤씨]]
  • 윤인선 (1944년)
         '''윤인선'''(尹仁善, [[1944년]] [[1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공무원, 사회기관단체인이다. [[해평 윤씨|해평]](海平).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장관과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윤치영]]의 둘째 아들이자, 아나운서 [[윤인구 (1972년)|윤인구]]의 아버지이며 前 [[대통령]] 해위 [[윤보선]]의 사촌동생이다. 전 [[숙명여자대학교]] 문학 교수 [[윤성선]]의 남동생이기도 하다. 자는 사안(謝安), 아호는 동웅(東雄)이다.
         * [[윤보선]]
         [[분류:1944년 태어남]][[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해평 윤씨]][[분류:윤치영]][[분류:윤치호]][[분류:윤보선]][[분류: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중앙중학교 (서울) 동문]][[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장충초등학교 동문]]
  • 윤치영
         | 친인척 = 손자 [[윤인구]], 윤한구 <br/> 사촌형 [[윤치호]]<br/> 큰아버지 [[윤웅렬]]<br/> 형 [[윤치오]], [[윤치소]] <br/> 조카 [[윤영선 (1896년)|윤영선]], [[윤보선]]<br/> 사촌 형 [[윤치호]], [[윤치왕]] <br/> 처6촌 [[이병도]]
         '''윤치영'''(尹致暎, [[1898년]] [[2월 10일]] ~ [[1996년]] [[2월 9일]])은 [[대한민국]]의 사상가, [[정치인]], [[언론인]]이다. [[대한민국]]의 제2대 [[서울특별시]]장 겸 제4대 대통령, 상공부장관 [[윤보선]]의 숙부이지만, 그보다 나이는 한 살 어리다. [[이승만]]의 비서실장, [[대한민국]]의 초대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과 제2대 [[주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관|주프랑스 공사]]를 역임했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내내 한 살 연상의 조카 [[윤보선]]과 정치적 거취를 달리했다.<ref name="윤치호 일기 p.617"/> [[한민당]]으로 정계입문하였으나 입각 후 한민당을 탈당,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는 [[한민당]]과 [[민국당 (1949년)|민국당]]에 대항하여 친여 성향의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을 조직하여 야당을 견제하였다.
         윤치영의 조카이자 유년기 친구였던 윤보선
         이후 [[충청남도]] [[아산시|아산]] 고향으로 내려갔다. 아산에서 그는 조카인 [[윤보선]]과 함께 한문 서당을 다녔고, 정식으로 한학자의 문하생이 되기도 했다.
         [[아산시|아산]]에서 유년기를 보내다가 이후 [[안성시|안성]][[군수]]로 부임하는 아버지 [[윤영렬]]을 따라 부임지인 [[경기도]] [[안성시|안성]]에 있다가 다시 [[경성부]]로 올라와 [[서울교동초등학교|교동국민학교]]에 입학하였고 이후, 졸업하였다. 깐깐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었던 그의 유년기의 몇안되는 친구는 1년 연상의 조카인 [[윤보선]]이었다.
         [[1916년]] 조카인 [[윤보선]]이 [[민영철]]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그는 여자 친구가 없었다. 그는 집안의 주선으로 [[수군절도사]] [[이봉구]]의 딸이며 역사학자 [[이병도]]의 누이인 [[이병영]] 결혼하게 된다. [[이병도]]는 그의 둘째 누나의 남편 [[이병림]]의 일족이었다.
         [[1919년]] [[4월]] 경 재동경 YMCA 등을 방문하고 도쿄 시내의 번화가와 서양인 거주지 등을 방문하였다. 이때 재동경 중국 YMCA에 방문했다가 [[이승만]]의 밀명을 받고 파견된 조카 [[윤보선]]을 만났다. 재동경 중국 YMCA 사(謝) 총무로부터 좀 만나자고 하는 편지를 받았다. 그들은 [[동경]] 한복판 간다구(神田區)에 5층 건물 하나를 차지하고 위용도 당당하게 청년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가 총무실에 앉아 있던 중 방문한 인물은 그의 조카 [[윤보선]]이었다. [[윤보선]]은 당시 중국 남경 정부의 요인 서겸(徐謙)이라고 하는 당시 [[중화민국]] 사법부장의 조카를 위장하고 [[동경]]에 잠입한 것이었다.<ref name="윤치영 회고록 p.56"/> 그와 [[안재홍]], [[이광수]], [[윤일선]] 등은 놀랐지만 [[윤보선]]이 제출한 여권을 보고 안도하였다.
         윤보선의 동경 잠입을 계기로 그는 이른바 [[2월회]]를 비밀리에 조직하게 되었다. 이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한 비밀 결사로서 윤치영 등이 주동이 되어 [[김도연 (1894년)|김도연]](金度演), [[김준연]](金俊淵), [[유억겸]](兪億兼), [[백관수]](白寬洙), 박승철(朴勝喆), 최원순(崔元淳) 등이었다.<ref name="윤치영 회고록 p.56"/> [[1922년]] [[와세다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형수 이범숙의 회갑연(1936년), 다섯째 줄 오른쪽 끝이 윤치영, 넷째 줄 가운데, 색동옷을 입은 윤치소의 뒤측 오른편, 한진숙의 바로 뒷쪽열은 윤치호, 둘째 줄 왼쪽에서 일곱번째는 조카 윤보선, 셋째 줄 가운데는 형 윤치소, 그 옆은 어머니 한진숙, 넷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는 형수 이범숙, 다섯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는 윤치호의 장남 윤영선
         국민 방위군 사건(1951), 부산정치파동 등을 목격한 [[윤보선]]은 [[이승만]]에게 사태를 바로 볼 것을 촉구했고, 주변에서 아첨하는 측근들을 내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윤보선]]이 그의 숙부인 윤치영이 자신에게 총애를 잃은 것에 불만을 품고 사적으로 청탁하는 것으로 여겨 이를 멀리했다. 실망한 [[윤보선]]은 이때 이승만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윤보선이 [[이승만]]과의 결별을 계기로, [[1920년]]대부터 [[이승만]]의 열성적인 추종자였던 숙부 윤치영과 멀어지게 된다. 윤보선윤보선 대로 한민당을 탈당한 윤치영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윤치영은 윤치영 대로 그가 [[이승만]] 박사에게 대든다고 판단했다.
         제2공화국의 대통령인 윤보선(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총리 장면 (윤치영은 시종일관 제2공화국에 냉소적, 적대적이었다.)
         윤치영은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당시 [[장면]] 내각의 시위, 집회의 자유가 혼란을 가져온다고 주장하던 [[반공주의]] 우익단체의 주장에 동조하여 우익시위와 집회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조카인 [[윤보선]] [[대통령]]에게는 비판적이지는 않았으나, 딱히 협력하지는 않았다.
         남로당 전력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는 구 정치인들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의심받자 [[9월 30일]] 그는 "썩은 구정치인이 집권하면 또다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ref name="조선19960210"/><ref>이병주, 《그해 5월 3》(한길사, 2006) 123페이지</ref>"라고 주장하였다.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로 지목한 정치인들 중에는 그의 조카였던 [[윤보선]]도 있었다.
         윤치영이 [[박정희]]의 선거사무장으로 선거관리를 총괄하면서 야당인사인 [[허정]], [[김준연]]과 야당의 대선 주자인 [[윤보선]]과도 갈등하였다. 윤보선의 어머니이자 윤치영의 형수인 [[이범숙]]이 윤치영의 안국동 집에 찾아와 통곡하는 사태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윤치영과 윤보선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고, 화가 난 [[윤보선]]은 윤치영을 만났을 때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그의 악수를 거절한다.
         [[윤보선]]은 사석에서 그를 만났을 때도 수인사 조차 거절하였다.<ref name="역사비평:1992 여름호 p.168"/> [[윤보선]]과의 관계는 [[198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개선되었다.
         조카인 대통령 [[윤보선]]과는 달리 여당인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과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에 가입하여서 정치적으로 [[윤보선]]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이승만]]과의 관계는 [[윤보선]]이 한때 [[이승만]]의 측근에 있다가 떨어져 나감으로서 대립하게 되었으나, [[박정희]]의 경우는 윤보선의 정적임에도 그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윤보선]]과는 정치적으로 대립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계속된 여당 생활로 처세술에 능하다는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
         [[1995년]] [[3월 27일]] [[이승만]] [[박사]] 탄신 120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5032773803 이승만 박사 탄신 백20주년 예배/조선일보-선경에 감사패 전달도] 조선일보 1995년 03월 27일자</ref> 만년에 그는 자신이 20년대 미국 유학시절부터 수집해온 장서 3천118권과 [[제헌국회]] 개헌기념사진등 기념물 1백21점을 에 기증했다.<ref name="조선19960210"/> 만년에 그는 서울 충정로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에 이름을 쓴 문패를 달지 않고 윤저(尹邸)라는 문패를 달았다.<ref>〈인터뷰 전직 내무부장관을 찾아서 : 윤치영 전장관에게 듣는다〉《지방행정 1986년 6월호》 (대한지방행정공제회, 1986) pp.41</ref> [[1990년]] 조카인 [[윤보선]]이 [[서울대학교|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자 직접 찾아 병간호를 하였고, [[윤보선]]이 92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90대의 고령에도 윤보선의 아들, 며느리 등과 함께 문상객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 1988년 3월 12일 구순기념 논문을 세계 국제법협회 한국본부에 기증하는 봉정식을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조카이자 [[대통령]] [[윤보선]] 등이 참석하였다.
         한 살 연상의 조카 [[윤보선]]은 그의 둘째 형 [[윤치소]]의 장남이었다. [[김성수 (1891년)|인촌 김성수]]의 아들 김상석(金相晳)이 그의 사위이다. 역사학자 [[두계 이병도]]는 그의 본처의 처남인 동시에 사돈이기도 했다.
  • 윤치일
         '''윤치일'''(尹致日, [[1935년]] [[2월 10일]] [[경기도]] [[서울특별시|서울]] ~ [[1985년]] [[4월 8일]])은 [[대한민국]]의 농업인, 농학자로 [[조선]] 말기에 [[육군]][[참장]]을 지낸 [[윤영렬]]의 아들이었다. 대통령 [[윤보선]],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에게는 배다른 삼촌이 되지만 [[윤보선]], [[윤일선]]보다도 40년 연하였다. [[윤치호]], [[윤치왕]]은 사촌 형이 된다.
         *** 조카 : 前 대통령 [[해위 윤보선]](海葦 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
         [[분류:1935년 태어남]][[분류:1985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농업인]][[분류:대한민국의 농학자]][[분류:대한민국의 공학자]][[분류:윤보선]][[분류:윤치호]][[분류:윤치영]][[분류:해평 윤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윤탁구
         '''윤탁구'''(尹鐸求, [[1932년]] [[6월 15일]] - [[서울특별시]])는 [[대한민국]]의 의사이다. [[대한제국]] [[학부 (대한제국)|학부]] 학무국장과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의관을 지낸 [[윤치오]](尹致旿)의 손자이자 원자력병원장,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낸 [[윤일선]](尹日善)의 둘째 아들이다.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의 당조카이다. 본관은 [[해평]].
         * [[윤보선]]
         [[분류:193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학자]][[분류:윤치호]][[분류:윤보선]][[분류:윤치영]][[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해평 윤씨]]
  • 윤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조선 선조|선조]] 때의 [[윤두수]]의 아들이자, [[윤방]]의 동생이며, 선조의 부마 [[윤신지]]의 숙부이다. 구한 말의 정치인 좌옹 [[윤치호]]의 8대 방조이며, [[윤보선]]의 9대 방조가 된다. [[성혼]]의 문인이다.
  • 윤흔
         묘비는 [[1640년]](인조 18)에 세워졌으며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이 비문을 짓고, 전서(篆書)의 대가였던 [[신익성]](申翊聖)이 글씨를 썼다. 그의 7대손이 [[윤웅렬]], [[윤영렬]] 형제였고, 8대손은 독립운동가 겸 사상가 좌옹 [[윤치호]]였다. 9대손은 [[대한민국]]의 [[대한민국의 대통령|제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과 [[서울대학교]]의 부총장과 [[서울대학교의 총장|총장]]을 지낸 [[윤일선]]이었다.
         [[분류:윤치호]][[분류:윤치영]][[분류:윤보선]][[분류:임진왜란 관련자]][[분류:병자호란 관련자]][[분류:정묘호란 관련자]][[분류:해평 윤씨]][[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병사한 사람]]<!--감기와 폐병-->
  • 이순재(1935년 10월)
         자신의 긴 연기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배역으로 [[1982년]] KBS[[사극]] <풍운>에서 맡았던 [[흥선 대원군]]역을 꼽았다. 또한 다시 한번 더 연기하고 싶은 배역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현대사를 다룬 드라마에서는 [[윤보선]] 대통령 역을 자주 맡았다. [[제2공화국(드라마)|제2공화국]], [[제3공화국(드라마)|제3공화국]], [[코리아게이트]], [[삼김시대]]에서 4번.
          * [[제2공화국(드라마)|제2공화국]](1989, MBC)/[[윤보선]]
          * [[제3공화국(드라마)|제3공화국]](1993, MBC)/윤보선[* 92총선 당선 후 나온 드라마여서 문제가 많다.]
          * [[코리아게이트(드라마)|코리아게이트]](1995, SBS)/윤보선
          * [[삼김시대]](1998, SBS)/윤보선
  • 이종구 (성우)
         * [[2004년]] [[MBC]] 월화드라마 《[[영웅시대 (2004년 드라마)|영웅시대]]》 ... [[윤보선]] 역
         * [[2005년]] [[MBC]] 주말 특별기획 《[[제5공화국 (드라마)|제5공화국]]》 ... [[윤보선]] 대통령 역
  • 장발 (화가)
         * [[윤보선]]
         [[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예술원 회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장면]][[분류:윤보선]][[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분류:인동 장씨]][[분류:병사한 사람]][[분류:보스턴 대학교 교수]][[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일제 강점기의 미술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미술 평론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 당원]][[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인천박문초등학교 동문]][[분류:보성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컬럼비아 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평화민주당 (1987년)]][[분류:대한민국의 백세인]][[분류:유교 이탈자]][[분류:이탈리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미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정성태
         [[1964년]] [[박정희]], [[김종필]]의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다른 야당정치인들과 함께 동참했고, 한일협정 비준에 항의하여 [[윤보선]] 등의 국회의원과 함께 사직서를 내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1969년]]에는 [[박정희]]의 집권연장을 위한 삼선개헌에 반대하여 도보 행진을 하기도 했다. 민주당 구파 내에서도 강경파로 활동했으나 나중에는 [[유진오]] 당수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 [[윤보선]]
  • 현정건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 ~ [[1932년]] [[12월 3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ㆍ교육자이다. 본관은 [[연주 현씨|연주]]. 독립운동가로서의 다른 이름(아호)은 '''읍민'''(揖民)이며, 소설가 [[현진건|현진건(玄鎭健)]]의 형으로 현진건의 반일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혼인을 통해 [[박종화]](朴鍾和) 가문, [[윤치호]](尹致昊), [[윤치영]](尹致暎), [[윤보선]](尹潽善) 가문과도 겹사돈관계가 된다
         == 윤치호, 윤보선 가문과의 인척관계 ==
         현정건의 집안은 [[윤치호]], [[윤치영]], [[윤보선]] 가문과 겹사돈 관계였다. 현정건은 [[윤치호]], [[윤치영]]의 7촌 조카딸이 되는 윤덕경(尹德卿)과 결혼하였다.
         현정건의 숙부인 [[현영운]]과 [[배정자]]의 둘째딸은 [[현송자]]로, [[현송자]]는 [[윤치호]]의 사촌이자 [[윤치영]]의 형인 [[윤치오]]의 후처가 되었다. [[윤치오]]는 [[윤보선]]의 큰아버지가 된다.
         * [[윤보선]]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고려공산당]][[분류:윤치호]][[분류:한국독립당]][[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대한제국 순종]][[분류:이승만]][[분류:김구]][[분류:의친왕]][[분류:윤치영]][[분류:윤보선]][[분류:연주 현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현진건
         | 친척 = 재종조부 현학표(玄學杓)<ref>현학표는 혈연적으로는 현진건의 친할아버지에 해당하지만, 현진건이 현학표의 조카 현보운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법적으로는 현진건의 재종조부가 된다.</ref> <br /> 6촌 형 현홍건(玄鴻健) <br /> 6촌 형 현석건(玄奭健) <br /> 6촌 형 [[현정건]](玄鼎健)<ref>이들은 혈연적으로는 현진건의 친형제에 해당하지만, 현진건이 당숙 현보운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법적으로는 현진건의 6촌 형이 된다.</ref> <br /> 6촌 누나 [[현송자]](玄松子)<ref>[[현영운]](현진건의 5촌 숙부)과 그의 2번째 아내 [[배정자]] 사이에서 출생한 딸이다.</ref> <br />6촌 자형 [[이철 (1903년)|이철]](李哲)<ref>[[현송자]]의 2번째 남편이다.</ref> <br /> 6촌 아우 현성건(玄盛健) <ref>현성건 또한 혈연적으로는 현진건의 이복 동생에 해당하지만, 현진건이 당숙 현보운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법적으로는 현진건의 6촌 아우가 된다.</ref> <br /> 5촌 숙부 현철운(玄轍運) <br /> 5촌 숙부 [[현영운]](玄暎運)<br /> 5촌 숙부 현양운(玄暘運) <br /> 5촌 숙부 현붕운(玄鵬運)<ref>이들은 혈연적으로는 현진건의 친숙부에 해당하지만, 이들의 조카 현진건이 이들의 사촌 형제인 5촌 당숙 현보운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법적으로는 현진건의 5촌 당숙이 된다.</ref> <br /> 5촌 숙부 [[현철 (1891년)|현철]](玄哲)<ref>본명은 현희운(玄僖運).</ref> <br /> 5촌 숙모 [[배정자]](裵貞子)<ref>[[현영운]]의 2번째 아내이다.</ref> <br /> 장인 이길우(李吉雨) <br /> 사돈 [[박종화]](朴鍾和)<br />사돈 [[윤치호]](尹致昊)<ref>친형이자 호적상 6촌 형인 현정건의 처당숙</ref><br />사돈 [[윤치영]](尹致瑛)<ref>삼촌이자 호적상 5촌 숙부인 현영운의 사위 윤치오의 동생</ref><br />사돈 [[윤보선]](尹潽善)
         현진건의 할아버지 학표(學杓)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내장원경(內藏院卿)직을 지냈고, 다시 경운(炅運)·철운(轍運)·영운(映運)·양운(暘運)·붕운(鵬運)의 다섯 아들을 두었다. 그 중 경운이 바로 현진건의 아버지이며, 봉호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까지 올라 [[의정부]] [[외부]]의 [[통신원]] 국장과 [[전화국|전보사장]]을 지냈다. 그의 집안은 계몽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였으나 후에 [[친일파]]로 변절하게 되는 [[윤치호]],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으로 내무장관, [[서울특별시장|서울시장]]을 지낸 [[윤치영]], 4대 대통령 [[윤보선]] 집안과 이중으로 혼반관계를 형성하였다.
  • 흥친왕
         *** 서손녀 : [[이진완]] (李辰琬, [[1916년]] ~ [[1997년]], 전 대한민국 대통령 [[윤보선]]의 동생 [[윤원선]]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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