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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규수
         1850년(철종 1년) [[전라북도]] [[부안군|부안]][[현감]]으로 부임한 그는 [[실학|대실학자]] [[유형원|반계 유형원]]의 사적지를 찾아 [[반계수록]] 등 그의 저서들을 입수해 탐독한 후, 세상을 구할 학문이 쓰이지 못했다며 찬탄했다 한다. 그 해 [[사헌부]] [[지평]]으로 궁에 복귀한 뒤 [[홍문관]] [[수찬]]이 됐다.
         할아버지 [[박지원 (1737년)|박지원]]을 비롯하여, [[유형원]], [[박제가]], [[이익]], [[정약용]], [[서유구]], 김매순(金邁淳), 조종영, 홍석주(洪奭周), 윤정현(尹定鉉) 등을 선배로서 사숙했고, 문우로서 남병철, 김영작, 김상현(金尙鉉), 신응조(申應朝), 윤종의, 신석우(申錫愚) 등과 주로 교유했다.
         박지원의 손자로서 인맥으로도 북학파에 직결되는 그가 사숙한 선배 중에는 [[박지원]], [[박제가]] 등 [[노론]][[북학파]] 외에도 [[남인]]인 [[정약용]](丁若鏞), 서유구(徐有榘), [[북인]]인 [[유형원]], [[윤휴]] 등의 학문도 폭넓게 사숙했다. 다양한 선배 학자들의 학문을 사숙하였던 탓에 어떤 특정한 사상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또한 [[소론]]인 [[유수원]]의 학문에도 관심을 갖기도 했다.
  • 박지원 (1737년)
         * [[유형원]]
  • 신후담
         당색으로는 [[남인]]으로, 그의 집안은 [[권대운]] 가문과 교류가 잦은 청남파였다. 5세 때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6세 때부터 박세흥(朴世興)을 선생으로 모시고 수학하였다. 10세 때에는 《[[사략]]》과 통감(通鑑)을 다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였으며, 12세 때에는 [[불교]]의 《능엄경》을 읽고 잘 이해하였다고 한다. 뒤에 [[이익 (1681년)|이익]]의 문인이 되어 허목, [[유형원]], 이익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계승하였으며, 순암 [[안정복]]에게는 동문수학한 선배였다.
  • 심대윤
         * [[유형원]]
  • 윤휴
         [[1668년]](현종 9) [[허목]]이 [[조선 현종|현종]]에게 [[유형원]]이 국왕을 보좌할 재주(王佐之才)를 가진 인재라며 발탁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서인]]들은 그의 이론이 괴이하다며 반대하였다. 그해에 다시 윤휴가 [[유형원]]은 경세의 재능을 가진 식견있는 선비라며 추천하였으나 [[유형원]]은 결국 사양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성호 [[이익 (1681년)|이익]]의 아버지 [[이하진 (1628년)|이하진]]을 비롯한 선대 인사들은 대부분 윤휴와 가깝게 지냈다. [[이익]]의 6촌 형님뻘 되는 반계 [[유형원]]도 윤휴와 어느정도 거리를 두면서도 절친한 사이였다. 또한 [[성호 이익]]의 스승인 [[송곡 이서우]]는 윤휴와 [[허목]] 모두에게서 수학하였다. 이에 따라 성호 [[이익 (1681년)|이익]]의 문도들 중에는 윤휴와의 연관성을 주장하며 그의 학문을 계승했음을 강조하였다.
  • 이황
         후대의 실학자 [[이익 (1681년)|성호 이익]]은 자신의 학문적 뿌리를 이황에게서 찾으려 했다. [[이익 (1681년)|성호 이익]]의 아버지 [[이하진 (1628년)|이하진]]을 비롯한 선대 인사들은 대부분 [[윤휴]]와 가깝게 지냈다. [[이익]]의 6촌 형님뻘 되는 반계 [[유형원]]도 윤휴와 어느정도 거리를 두면서도 절친한 사이였다. 또한 성호 이익의 스승 중 한사람인 [[송곡 이서우]]는 윤휴와 [[허목]] 모두에게서 수학하였다. 이에 따라 성호 이익의 문도들 중에는 [[윤휴]]와의 연관성을 주장하며 그의 학문을 계승했음을 강조하였다. [[윤휴]]와의 관계를 다소 부담스럽게 여겼던 [[성호 이익]]은 자신의 학통을 퇴계 이황이 근원임을 여러번 강조하였다.
         [[이익 (1681년)|이익]] 가문의 학문은 17세기까지 북인 계열의 [[윤휴]]와 상당히 유사하였다. [[이하진 (1628년)|이하진]]이나 [[이잠]] 형제, 조하주 등은 [[윤휴]]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ref name="신항수1">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제12권》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08) 131페이지</ref> 이익의 6촌 형인 [[유형원]]은 [[윤휴]]와 자주 만나며 연락하던 사이였다.
         [[1699년]](숙종 25) 이잠은 정시한을 예방하여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는 퇴계학 수용의 증거로 지목된다.<ref name="신항수1"/> 정시한은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다. 이서우는 주희의 경전 해석을 따르면서 이황의 학문을 수용하였다. 이익 단계인 [[1710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이기심성론과 관련된 저술을 하면서 학파를 개창하기에 이르렀다. [[퇴계학]]을 수용하고 이기심성론과 관련된 성과를 낸 [[이익 (1681년)|성호 이익]]은 이제 이황과 자신을 연결하고자 하였다.<ref name="신항수1"/> 그러나 [[윤휴]]의 학문이 다소 과격하고 급진적이라는 비판적인 견해가 계속 제기되자 이를 부담스럽게 느꼈던 [[이익 (1681년)|성호 이익]]은 학문적 전통을 [[윤휴]]에게서 찾던 형 섬계 [[이잠]]이나 [[유형원]] 등과 달리 [[허목]]을 거쳐서 [[퇴계 이황]]으로 연결하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이익의 스승 중 한사람인 [[이서우 (1633년)|이서우]]가 [[허목]]과 윤휴 모두에게서 수학한 것에서 근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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