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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1967년]] 2월에 [[신민당 (1967년)|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신민당 정무위원 겸 대변인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7대 총선|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진도 출신의 전 체신부장관 [[김병삼]]의 지역구를 옮기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여는 등 대대적인 '김대중 낙선전략'에도 불구하고 당선된다. 그 뒤 [[1968년]] [[6월 3일]] 당수 [[유진오]]로부터 원내총무 후보자로 지명을 받았으나 의원총회에서 재석 41명 중 찬서 16명, 반대 23명으로 결국 원내총무 자리는 김영삼에게 돌아갔다.<ref name="손세일"/> 그해 신민당 정무위원에 선출되었다.
  • 김성수 (1891년)
         반면, 김성수는 [[이광수]]나 [[서정주]]와는 달리 총독부의 [[창씨개명|창씨개명(創氏改名)]] 요구에 대해서는 끝까지 거부했고, 일제로부터 훈장이나 작위를 받은 경력은 없다.<ref name=autogenerated2 />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에 김성수는 "警察(경찰)의 迫害(박해)를 면하고 身邊(신변)의 安全(안전) 또는 地位(지위), 事業(사업) 等(등)의 維持(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 다닌 者"로 [[유억겸]]과 함께 분류되었다.<ref>[http://db.history.go.kr/front2010/srchservice/srcFrameSet.jsp?pSearchWord=%EA%B9%80%EC%84%B1%EC%88%98&pSearchWordList=%EA%B9%80%EC%84%B1%EC%88%98&pSetID=-1&pTotalCount=0&pSearchType=1&pMainSearchType=2&pQuery=%28BI%3A%28%EA%B9%80%EC%84%B1%EC%88%98%29%29&pSearchClassName=&oid=&url=&method=&lang=&code=&searchword=&return= 한국사 데이터베이스]{{깨진 링크|url=http://db.history.go.kr/front2010/srchservice/srcFrameSet.jsp?pSearchWord=%EA%B9%80%EC%84%B1%EC%88%98&pSearchWordList=%EA%B9%80%EC%84%B1%EC%88%98&pSetID=-1&pTotalCount=0&pSearchType=1&pMainSearchType=2&pQuery=%28BI%3A%28%EA%B9%80%EC%84%B1%EC%88%98%29%29&pSearchClassName=&oid=&url=&method=&lang=&code=&searchword=&return= }}</ref> [[1937년]] 도산 [[안창호]]가 고문후유증과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중일 때 안창호의 가족들이 그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했을 때 김성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거절하였다가 뒤로 몰래 사람을 보내 거액의 자금을 도산 안창호에게 전달했다는 증언이 있다.<ref name=autogenerated2 /> [[유진오]]는 그의 회고록 《양호기》에서 김성수의 이름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학도병' 기사는 매일신보사 기자 김병규가 유진오와 상의한 뒤에 대필하여 승인을 받은 글이라 주장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137페이지</ref><ref>《양호기》,[[유진오]] 저. p90~p110 참조.</ref>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그 초안을 김성수에게 보여주어야 했는데, 제86조의 농지개혁 조항이 문제였다.<ref name="농개1"/> [[고려대학교]]의 교수이던 [[유진오]]가 그를 찾아 '농지 개혁이 공산당을 막는 길'이라고 설득하였다.<ref name="지위1"/> 주변에서는 반발이 있었으나 김성수는 쾌히 [[유진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학도병]] 참가를 권유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하여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ref name="han200503">《[[한겨레신문]]》 (2005.03.28)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1875.html 고대 총학 ‘친일행적’ 10명 발표]</ref> 국회의원과 시민단체 등이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발표했던 [[2002년]] 3월 신원미상의 한 사람이 인촌 동상에 빨간 페인트로 '김성수는 친일파'라고 써놓는 사건이 발생했다.<ref name="kochong050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5308 고려대 총학, 김성수 등 친일파 10명 명단 발표 - 오마이뉴스] 2005년 03월 28일자</ref> 2005년 [[고려대학교]]의 총학생회와 고려대학교 민주동호회 등으로 구성된 고려대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ref name="han200503"/><ref name="kochong0503"/> 그러나 명의 도용이라는 [[유진오]] 등의 증언과 반론이 있어 논쟁의 여지가 있다.<ref>현재, 이 부분은 [[대한민국]] 법정에 소송에 걸려 있는 상태에 있다.</ref> 2009년에는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 [[유진오]]
         * [[유진오]], 양호기 (고려대학교출판부, 1977)
  • 박동진 (1922년)
         * 아내: 유충숙(兪忠淑, 1933년 9월 25일 ~)[[유진오]]의 딸
  • 박순천
         |후임자 = [[유진오]]
  • 윤치영
         13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승리하여 [[5월 30일]] [[1948년 서울특별자유시 중구의 선거|국회의원에 당선]], [[6월]]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서상일]], [[유진오]], [[조봉암]] 등과 함께 [[헌법]] 제정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의 초안에는 [[국민]]을 '[[인민]]'으로 표현했다. 초안 작성자인 그가 [[국민]] 대신 [[인민]]이란<ref name="안녕 헌법">차병직, 《안녕 헌법》 (지안출판사, 2009) 40-41페이지</ref> 어휘를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의미가 강하여 국가우월적 느낌을 준다. 반면에 [[인민]]은 [[국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표현한다. 그러니 [[유진오]]에 의하면 국가를 구성하는 자유인으로서의 개인을 표시하는 데 인민이 적절하다는 것이었다.<ref name="안녕 헌법"/> 그러자 국회의원이던 윤치영은 [[대한민국 헌법]] 초안의 [[인민]]이라는 용어를 문제삼아 [[유진오]]를 통박하였다. 그는
         "[[인민]]이란 말은 [[공산당]]의 용어인데 그러한 말을 쓰려고 하느냐. 그런 말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유진오]])의 사상이 의심스럽다.<ref name="안녕 헌법"/>"
         고 흥분했다.<ref name="안녕 헌법"/> [[유진오]]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항의했고 윤치영은 틀린말 하지 않았다며 맞받아쳤다. [[대한민국 국회|국회]]는 논쟁이 벌어졌고, 윤치영은 인민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인민]]이라는 용어는 [[대한제국]]의 절대군주 시절에도 사용되던 용어였다.<ref name="안녕 헌법"/>
         [[1948년]] [[7월 1일]]부터 시작한 [[대한민국 국회|국회]] 본회의 헌법 초안 제2회독 때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진헌식]]이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ref name="안녕 헌법"/> 몇 개 조문을 제외하고 모두 [[인민]]으로 하자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역시 윤치영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ref name="안녕 헌법"/> [[인민]]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 좋은 말을 [[공산주의]]에 빼앗긴 셈 치고 포기하였다.<ref name="안녕 헌법"/> 그는 38선 이북 조선에 [[공산주의]] 집단이 존재하는데 [[대한민국 국회]]에서 북괴와 같은 단어를 쓰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유진오]]에게 따졌고, 유진오는 인민이라는 말은 People를 한글로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며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 그것도 모르느냐며 반박, 설전이 계속되었다.
  • 이기택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려대 은사인 [[유진오]]의 추천으로 [[신민당(1967년)|신민당]] [[전국구]]로 당선되어 정치를 시작하였다. 이후 신민당 소속으로 [[부산광역시|부산직할시]] [[동래구]]에서 제8대(1971년), 제9대(1973년), 제10대(1978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 정성태
         [[1964년]] [[박정희]], [[김종필]]의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다른 야당정치인들과 함께 동참했고, 한일협정 비준에 항의하여 [[윤보선]] 등의 국회의원과 함께 사직서를 내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1969년]]에는 [[박정희]]의 집권연장을 위한 삼선개헌에 반대하여 도보 행진을 하기도 했다. 민주당 구파 내에서도 강경파로 활동했으나 나중에는 [[유진오]] 당수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 [[유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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