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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규 . . . . 33회 일치
김재규(金載圭, [[1926년]] [[3월 6일]] ~ [[1980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의 [[군인]]·[[정치가]]이다. 호는 덕산(德山)이고, 본관은 [[김녕 김씨]]. [[경상북도]] [[구미시]] 출신. [[유신정권]]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재임했으며, [[10.26 사건]] 당시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고, 사건 다음날 새벽 [[육군본부]]에서 검거되어 이후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언도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김재규의 육성이나 말투를 들어보고 싶으면 [[http://www.youtube.com/watch?v=5YItsPrAcq8|본 육성녹음을 참고]]. 이것은 1979년 12월 8일의 보통군법회의 최후진술 녹음 중 하나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우려해서 [[육군참모총장]],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장관에는 그저 그런 무난한 인물만 앉혔고, 정말 유능하고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육군 장군은 [[사단장]], [[군단장]] 수준에서 전역시켰다고 한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김종오]], [[박병권]], [[민기식]], [[김용배]], [[김계원]], [[이세호]], [[임충식]] 등은 '''그저 그런 무난한''' 인물들이 아니다. 다만, 12.12 군사반란 때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노재현]]이 보여준 추태가 워낙 커서 앞의 인물들까지 도매금으로 같이 까이는 경우가 많다.] 김재규도 이런 케이스로, 월남전의 영웅인 [[채명신]] 장군 또한 [[대장(계급)|대장]]을 못 달고 중장에서 전역해야 했다. 이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1976년 12월에 제8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73년 초 3군단장으로 전역 후 제9대 국회에서 [[유신정우회]] 1기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12월 [[이후락]]의 뒤를 이어 [[신직수]]가 중앙정보부장이 될 때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다. 이 때 김재규는 신직수를 매우 껄끄러워했는데 자신이 제5보병사단 참모장일 때 육군 [[군법무관|법무]][[소령]] 신직수가 그 밑에서 법무참모를 지냈기 때문이다.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부 장관 부임 당시 8000만 달러 밖에 안되던 해외건설 계약고를 30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는 공을 세워 근정훈장을 받았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나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그리 한 것이었다. 아무런 [[야망|야심]]도 어떠한 [[욕심]]도 없었다.'''
민주화 운동 층에서는 평이 서로 상반되게 갈라지는 편이다. 옹호하는 쪽에서는 ''''유신독재라는 암흑기 속에서 독재자를 몰아낸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대변하는 용어로 요즘 인터넷에 빈번히 보이는 단어가 '''김재규 의사'''.[* '''열사'''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만약 칭호를 붙인다면 무력을 사용했으므로 '''열사가 아닌 '의사(義士)'라고''' 해야 맞다. 열사는 보통 자신의 지조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을 의미하는 반면 의사는 무력을 통해 의거를 한 사람을 뜻하므로 '김재규 의사'가 의미에는 좀 더 부합한다. 김재규 묘비에도 의사(義士)로 적혀 있다.] 이렇게 영웅으로 치켜 세우진 않더라도 [[10.26 사건]]이 독재를 몰아내는데 [[결과는 좋았다|일정부분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경우도 많다.
유야무야 하면서 유신이 장기화 되었다면, '''최악의 경우 [[북한]]처럼 반대세력이 모두 숙청되거나 [[중국]], [[싱가포르]]처럼 정도는 덜해도 독재가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가 만약 이 상태로 정치에 참여하였다면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박씨 일가가 다스리는 독재국가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김재규를 긍정하는 사람들로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강신옥, 장호권, 이해학 등이 있다. 보면 알겠지만 주로 교계 사람들로, 민주혁신계 중에서도 약간 보수적인 사람들 쪽이다. [[http://www.nocutnews.co.kr/news/1153519|함세웅 신부는 "김재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79530|효림 스님은 "여러가지 정황 근거로 봤을때 재평가할 가치는 충분하며, 사회 분위기 때문에 좀더 시일을 요구할 뿐 명예 회복은 희망적"이라고 보고 김재규의 행적과 뜻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작업에 매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반면 상대적으로 비판[* 옹호든 비판이든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등은 김재규 부장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당시 유신정권에 대한 국민적 피로와 말년의 박정희는 대한민국은 자신이 없으면 안된다는 망상에 가까운 신념이 있었기에 김재규가 10. 26 사태를 단행하지 않았다면 박정희 역시도 여타 독재자처럼 말년이 비참했을 것이고 후세의 평가도 좋지 못했을 것이다.] 하는 쪽에서는, '''그 또한 과거 유신정권하에서 한자리를 해먹던 중앙정보부장이었으며, 박정희를 암살해 결과적으로는 박정희를 국민의 손으로 정당하게 심판할 기회를 빼앗았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그동안 갖은 압제와 고문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쟁취하려 노력해오던 자신들보다, 단순히 박정희 한 명 암살했다고 김재규가 포커스를 더 받는 건, 몇십 년을 민주화 투쟁한 사람들 입장에선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의해 투쟁해온 이들과 동일시 할 수 없는게 애초 김재규는 박정희와 친형제 같은 사이였고 중정부정이라는 대통령 다음가는 2인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10.26 단행 이전의 행보를 보더라도 정보수집과정에서 유신정권도 유한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박정희도 말년에는 20년 절대 권력에 취해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도 10.26 단행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최소한 그는 차지철, 이후락 같은 다른 유신인사들과는 달리 최소한의 국가에 대한 고민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근데 전두환 노태우꼴을 보면 심판도 안받았을 확률이 높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재규를 비판하는 재야/민주운동가들은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동기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의한 기여도 및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다. 대표적인 좌파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역시도 “박정희 정권은 당시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민중저항을 통해 어차피 붕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며 “김재규의 행위가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홍구는 하단의 긍정론에 서술되어 있듯 2013년을 기점으로 김재규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다.] 진보적 사회운동가 백기완도 “당시는 박정희 유신독재를 타파하기 위한 민중항쟁이 거셌고, 박정희 내부 권력의 모순이 더 격화되어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조그마한 사건일 뿐이며 민주화운동의 본체, 기본적인 흐름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라고 주장하였다.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11784.html|출처]]
김재규는 [[차지철]]과의 갈등 이전에도 유신의 방향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자주 내비쳤고, [[장준하]] 등의 민주화 운동 인물들을 비밀리에 도우면서 관련 가족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기도 했으며,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에게 박정희를 '환자'로 비유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고, 법정에서도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보이며 사형 선고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자세를 보았을 때 단순히 차지철과의 갈등으로 인한 우발적인 권력 싸움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결정적으로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결단했던 건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대응책 방향이었는데, 박정희와 차지철은 강압적인 진압을 요구했으나 김재규는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결국 이것이 10.26이라는 도화선으로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김재규의 거사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지만, 여성 연예인들이 저런 식으로 대통령의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큼은 확실히 차단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의 구명을 호소하면서 우리의 민주화가 김재규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민주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그 여성 연예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또다른 10·26 사건이 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70년을 두고 2개의 10·26 사건이 있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군사독재가 왔는데,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이토의 제삿날과 군사독재의 상징인 박정희의 제삿날이 같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중략)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졌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는 끝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김재규는 대가 끊겼던 한국 보수우익의 계보학에서 돌출한 마지막 대륙형 인간이었다.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김영삼]]의 측근으로 현재 민주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봉조(1939)|김봉조]] 전 의원도 처음에는 김재규를 유신정권의 사냥개쯤으로 여겼으나, 자신을 직접 찾아와 격려하며 김영삼에게도 격려와 덕담을 전해 달라는 김재규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인 이유는 사심이나 감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닌 역사 앞에 정의감 때문이었다며, 훗날 이런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 주장했다.[[http://m.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773|#]]
박정희의 금일봉 정치는 단순히 금전을 제공해 충성심을 유도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 만은 아니었다. [[전두환]]에게 고급 자동차를 선물한 것처럼, 박정희는 자신이 해당 군인에게 가지고 있는 '총애'의 표현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아무리 금일봉이라지만 '누구에게 얼마를 주었다더라.'는 여기저기 소문으로 퍼져나갔고, 이는 박정희가 그 '누구'에게 보이는 '[[전투력|총애의 정도]]'가 되었다. 돈 자체도 좋지만 금일봉의 액수는 박정희가 자신에게 보이는 총애와 관심이었고, 유신 정권 아래에서 이는 곧 '''자신의 발언권과 권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 수뇌부는 충성 박치기를 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사실상 박정희의 사병(私兵)이 되었다. 국토를 수호하고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이 마치 [[조선인민군]]마냥 독재자 개인의 친위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군사정권 전체적인 부분에서 보면, 박정희라는 머리가 따이면서 군사정권의 내실이 붕괴되었다. 박정희는 대통령 직선제에서 3선이나 한 인물이었다. 이후 10월 유신을 하면서 완전히 타락한 바람에 잊혀지곤 하지만, 3선을 한 자체로 어떻게든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제거당하고 전두환이 직선제는 경험도 못한 체육관 대통령이 되면서, 군사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따라서 군사정권의 공고함이 확실히 헐렁해졌으며, 독단적으로 전방병력과 특전사를 움직이고, 정치적 정당성도 없던 결과 전두환 정권은 미국에게 극도로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유신정권의 크게 3개의 권력 축인 대통령 경호실, 중앙정보부[* 강직한 군인 유능한 건설부장관 무능하고 유약한 중정부장을 보면 알듯이 폭주하던 중정을 제어한 것을 보면 이런 비난도 무색하다], 국군보안사령부를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차지철]], [[김재규]], [[전두환]]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서로 간에 치열하게 견제하고 있었다. [[http://www.usjournal.kr/News/6936|출처]] 바로 이러한 구도 속에서 파장이 일어난 것이 10.26이라는 것.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8150020921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08-15&officeId=00020&pageNo=11&printNo=21914&publishType=00020|출처]]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 등 공화국시리즈 등에서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 특히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대립과 반목은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시절에도 이들은 사이가 몹시 좋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무렵에 [[차지철]]계로 분류되고 있던 [[김치열]] 법무부장관이 차기 중앙정보부장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박정희]]가 야당문제와 [[부마항쟁]] 등에 대한 미흡한 대처에 대해서 김재규를 책망하는 일이 잦아지자 김재규 본인도 파워게임에서 밀릴 것이라는 직감을 하게 될 공산이 컸다는 주장이 있다. [[http://news.donga.com/3/all/20130906/57493166/1|출처]]
실제로 쿠데타 이후 김재규는 박정희를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장관들을 모아놓고 계엄령을 선포하라고 압박했는데, 이를 정권탈취시도로 보는 경우도 많다. 김재규 본인은 권력장악을 의도하지 않았고, 유신의 잔재를 청산한뒤 물러나 박정희 묘에 시묘살이나 할 생각이라고 했었지만 이런거야 자기만 아는 일이니까.
김재규는 [[10.26 사태]] 직후 유신의 잔재를 5개월 내로 설거지하겠다는 생각으로 전국으로 비상계엄령확대를 구상했는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475563|출처1]], [[http://www10.breaknews.com/sub_read.html?uid=64710|출처2]] 민주공화당은 이러한 구상안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낮다. 10.26 직후 [[김종필]]이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의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되었는데, [[김종필|JP]]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시절 청구동 가택수색과 협박까지 당한터라 김재규에게 호의적이기도 어려웠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80100209211001&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08-01&officeId=00020&pageNo=11&printNo=21900&publishType=00020|#]] 거기다 10.26 이후 [[김종필|JP]]는 [[김영삼|YS]], [[김대중|DJ]]과 함께 개헌과 민주회복 이행에 공감하고 협조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공화당 역시도 김재규의 구상에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22600329201017&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2-26&officeId=00032&pageNo=1&printNo=10586&publishType=00020|#1]],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22600099201012&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80-02-26&officeId=00009&pageNo=1&printNo=4299&publishType=00020|#2]]
김재규는 10.26이후 전국비상계엄령 확대 조치를 취하고, 군 지휘관들을 중심으로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자신이 위원장을 맡고 육군참모총장이 부위원장을 맡은 뒤 유신의 잔재를 제거하겠다는 방안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http://casenote.kr/%EB%8C%80%EB%B2%95%EC%9B%90/80%EB%8F%84306|출처1]],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122800209105001&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3-12-28&officeId=00020&pageNo=5&printNo=22384&publishType=00010|출처2]] 대법원 판결에서는 김재규가 계엄군을 장악하여 무력으로 사태를 제압하고,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장악한 이후 대통령 출마까지 계획했다고 판결하였는데, 김재규 본인은 대통령 출마 의사나 사리사욕은 없다고 부인하였다.[* 김재규 본인은 소위 설거지론을 얘기하며 5개월간 유신의 잔재를 처리하려 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이라는 직위를 자신이 담당하는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다만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권력을 인수하겠다는 정도를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영삼]]이나 [[김대중]] 등 야당이 과연 김재규의 계획에 동의하거나 협조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계획대로 이루어지기는 거의 어려웠을 것이다.
인터뷰에 응한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과거 발언내용인 2004년 8월 11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5863|한겨레21 기사]]와 최근 발언 내용을 비교하면 그의 김재규에 대한 평가가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몇 년 전까지는 김재규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나, 2013년 5월 17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7948.html|한겨레 기사]]를 통해 재평가 여지가 있음을 밝혔고 2016년 12월 17일 경향신문 기사에서도 마찬가지 입장임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 기사를 참고하면 한 교수는 지금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쳐내는 시기'''라고 규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과거 한 교수는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아래 기사 참고.
>김재규의 거사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엔 완전히 이르지 못했어도 여성연예인들이 대통령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은 확실히 차단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지고 말았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가 뒤를 이은 셈이다.
- 태종무열왕 . . . . 32회 일치
아버지는 [[진지왕]](眞智王)의 아들 [[김용춘]]<ref group="주">김용수(金龍樹)라고도 한다.</ref>,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이었던 [[천명부인]]이다. 그가 사료에 '진골'로 기재된 것에 대해서는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재위 4년 만에 국인에 의해 폐위당한 점이나 [[김춘추]] 자신이 진골이자 옛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인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희를 아내로 삼은 점 등이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ref>주보돈(2009), [http://www.riss.kr/link?id=A77046838 〈신라 骨品制 연구의 새로운 傾向과 課題〉] 《한국고대사연구》 54권 5-41쪽. 한국고대사학회</ref>
==== 김유신과의 혼인 동맹 ====
김춘추와 문희의 혼인에 대해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보희가 어느 날 서악(西岳)에 올라가 소변을 보았는데 [[서라벌]] 전역이 소변에 모두 잠겨버렸다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 이야기를 들은 문희는 비단치마를 주고 그 꿈을 샀다. 그 일이 있고 열흘 뒤인 정월 오기일에 김춘추는 김유신과 함께 김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蹴鞠)을 하게 되었고, 여기서 김유신은 일부러 김춘추의 옷깃을 밟아 끊은 뒤 자신의 집에서 옷을 수선할 것을 권하며 집안으로 들이고, 자신의 누이동생을 불러 옷을 꿰매게 했다. 보희는 "사소한 일로 귀한 분을 대할 수는 없다"며 사양했고, 문희가 대신 나서서 옷을 꿰매 주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가까워져서 김춘추는 김유신의 집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 좀처럼 김춘추가 문희와 정식으로 혼인하려 하지 않자 김유신은 "남편도 없는 것이 부모도 모르게 임신을 하였다"며 곧 문희를 자신이 불태워 죽일 것이라고 소문을 냈고,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남산(南山)에 오르는 날을 기다려서 뜰에 땔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질러 연기를 피웠다. 산 위에서 그 연기를 발견한 여왕이 "저것은 무슨 연기인가?" 하고 묻자 옆에서 "아마도 유신이 제 누이를 불태우려는 모양입니다."라고 대답했고, 까닭을 묻는 여왕에게 "남편도 없이 임신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여왕이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고 묻는 옆에서, 마침 여왕을 따라 나왔다가 안색이 질린 김춘추를 발견한 여왕은 "너의 짓이구나. 당장 가서 구하라." 하였다. 이후 김춘추는 문희와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ref group="주">이 사건이 구체적으로 언제 있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문희의 소생으로 무열왕의 장자인 [[문무왕]] 법민(法敏)이 태어난 것이 626년이라는 『문무대왕비』 기록에서 유추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아마 그 이전의 일로 보인다. 이 경우 《삼국유사》가 전하는 김춘추의 혼인 에피소드가 있었을 당시 선덕여왕은 아직 즉위하기 전이었음에도 '왕'으로 표기한 《삼국유사》 기록은 모순이 생기게 된다.</ref><ref name="유사-기이1">《삼국유사》 권제1 기이 태종춘추공</ref>
김유신의 주도와 김춘추의 동조로 이루어진 정략적인 측면이 강했던 이 혼인을 통해, 왕위 계승에서 배제된 진지왕계와 옛 금관가야계 귀족간에 정치 · 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진지왕계(김용춘 · 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을, 금관가야계([[김서현]] · 김유신)는 진지왕계의 정치적 위치를 각자의 목적 달성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었고, 이러한 상호 이익에 입각해 이루어진 정치적 결탁은 신라의 중고(中古) 왕실의 진골 귀족 내에서 하나의 신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성골]](聖骨)계로 대표되는 기존의 구 귀족집단의 견제와 반발을 받았다. 무열왕은 부계가 진지왕의 자손이고 모계가 진평왕의 자손으로 양쪽 모두가 왕족인 성골에 속했지만, 무열왕 이후 부계만이 왕족인 진골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그를 상징적인 진골 최초의 임금으로 평가한다.{{출처|날짜=2018-06-29}}
선덕여왕 11년([[642년]]) 8월, [[백제]](百濟)의 장군 윤충(允忠)이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경상남도]] [[합천군|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대야성의 성주였던 이찬 김품석은 김춘추의 딸 [[고타소]](古陀炤)의 남편으로 김춘추의 사위였는데, 앞서 그에게 아내를 빼앗긴 원한으로 백제군과 내통한 부하 검일(黔日)의 배반으로 궁지에 몰린 김품석은 처자를 죽인 뒤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삼국사기》는 당시 김춘추는 이찬의 관등에 올라 있었고, 대야성에서 딸과 사위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충격을 받은 나머지,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사람이 지나가는 것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대야성의 일을 계기로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다짐하였다는 것이다. 원병을 빌리기 위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갈 것을 왕에게 건의한 김춘추는 고구려의 국왕 [[보장왕]]과 실권자 [[연개소문]]을 만나 원병을 청했지만, 원병 파병 조건으로 과거 [[진흥왕]](眞興王) 때에 신라가 획득한 죽령(竹嶺) 이북 땅의 반환을 내세운 고구려에 의해 억류되었다가 김유신의 무력 시위,<ref name="선덕왕-11">《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선덕왕 11년(642)</ref> 그리고 고구려 대신 선도해의 도움으로 "돌아가는 대로 왕에게 아뢰어 땅을 돌려주게 하겠다"는 거짓 편지를 쓰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ref name="김유신-상">《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 상</ref>
고구려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에는 [[고토쿠 천황]](孝德天皇) [[다이카]](大化) 3년([[647년]])에 김춘추가 왜에 왔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김춘추의 관등은 상신(上臣) [[대아찬]](大阿湌)으로 표기되어 있다.<ref name="일본서기-647">《일본서기》 권25 天萬豐日天皇 孝德天皇 大化 3년(647)</ref> 한편 신라에서는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반란이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고, 선덕여왕의 사망으로 진덕여왕이 옹립되었다. 춘추와 유신은 진덕여왕을 보위하여 정권을 완벽하게 장악하였다.<ref name="신라-647">《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1년(647)</ref>
즉위 직후 무열왕은 아버지 [[김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공주]]를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봉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였으며, 5월에는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首) 등에게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하게 하였다.<ref name="신라-654"/> 무열왕 2년([[655년]])에는 문희 소생의 맏아들 법민(法敏)을 태자로 삼고, 나머지 문희 소생의 왕자들에게도 관등을 수여하였다. [[대각간|대각찬]](大角湌) 김유신에게는 딸 [[지소부인|지소공주]]를 시집보내 중첩된 혼인관계를 이루었다.<ref name="신라-655">《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2년(655)</ref>
당에도 즉위를 알리는 사신을 파견하여, 무열왕 즉위년에 [[당 고종|고종]](高宗)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신라왕의 책봉을 받았으며,<ref name="신라-654"/> 무열왕 2년(655년)에 당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의 33개 성을 탈취하였음을 전하면서 구원을 요청하였고, 당은 3월,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ref name="신라-655"/> 또한 무열왕 3년([[656년]])에는 {{출처|날짜=2018-06-30|1=신라의 개국 공신인 사로 6촌장을 왕으로 추존하였고,}} 당에서 귀국한 김인문을 [[군주]](軍主)로 삼았으며, 가을 7월에는 김문왕을 다시 당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ref name="신라-656">《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3년(656)</ref> 귀국한 뒤 문왕은 무열왕 5년([[658년]]) 정월에 부왕으로부터 집사부의 [[중시]](中侍)로 임명되고,<ref name="신라-658">《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5년(658)</ref> 김인문도 무열왕 6년([[659년]]) 여름 4월에 백제를 치기 위한 원병 파병을 요청하는 사신으로서 당에 파견되는 등,<ref name="신라-659">《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6년(659)</ref> 친족 중심의 내각을 구성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즉위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김유신에 대해서는 무열왕 7년([[660년]]) 정월에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해<ref name="신라-660">《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7년(660)</ref> 왕권을 보다 전제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무열왕 7년([[660년]]) 3월,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인 당은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 소정방과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이 인솔한 수륙 13만 군사를 파병하였다. 원병을 요청하러 보낸 김인문은 소정방이 이끄는 신구도행군의 부대총관(副大摠管) 자격으로 귀국하였고, 무열왕에게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이라는 지위가 더해졌다.<ref name="신라-660"/> 무열왕은 바다를 건너온 당군을 영접하기 위해 [[5월 26일]], 대장군 [[김유신]]과 [[김진주 (신라)|김진주]](金眞珠){{.cw}}김천존(金天存) 등과 함께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ref group="주">신라 10정(十停) 중 하나로, 현재 [[경기도]] [[이천시]]에 있던 부대</ref>에 이르렀고, 21일에 태자 김법민을 보내 병선(兵船) 1백 척을 거느리고 [[덕적도|덕물도]](德物島)에서 소정방을 맞아, [[7월 10일]]에 백제의 [[사비성]](泗沘城) 앞에서 합류하기로 약속을 정했다. 당군과 함께 백제를 공격할 5만 신라군의 지휘는 태자 김법민과 대장군 김유신, 장군 [[김품일|김품일]](金品日)과 [[김흠순|김흠춘]](金欽春) 등이 맡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서 머물렀다.<ref name="신라-660"/>
[[7월 9일]]에 김유신 등이 이끄는 신라군이 [[황산벌 전투|황산벌]]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도 백제군의 저지를 뚫고 [[기벌포 해전|기벌포]]로 상륙하여, [[7월 13일]]에 사비성이 함락되고, [[7월 18일]]에는 웅진성으로 도망쳤던 [[의자왕]]도 항복하여 백제는 멸망하였다.<ref name="신라-660"/> 사비성을 함락했을 때 [[김법민]]은 백제의 왕자 [[부여융]](扶餘隆)을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예전에 네놈의 아비가 내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었고 그 일 때문에 내가 20년 동안 마음 아프고 골치를 앓았었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 안에 있구나!”라고 꾸짖었다.<ref name="신라-660"/> 의자왕의 항복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에서 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온 무열왕은 제감(弟監) 천복(天福)을 당에 보내 승리한 사실을 고하였다. 8월 2일에는 앞서 대야성이 백제에 함락될 때 신라측에서 내응했던 모척(毛尺)과 검일(黔日)을 잡아 처형하고, 주연(酒宴)을 베풀어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이때 의자왕과 그 아들 융(隆)을 마룻바닥에 앉혀 놓고 때로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들 중 목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ref name="신라-660"/>
태종 무열왕에 대한 당대 신라인들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 이는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를 올린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는 신라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였다.<ref group="주">그러나 고구려의 [[태조왕]]의 경우에는 묘호로 봐야 되는가, 시호로 봐야 되는가에 대한 이견이 있다. 그 밖에 태조의 묘호를 받은 [[태조 성한왕]]이나, 국조의 묘호를 받은 [[박혁거세]]도 존재한다.</ref> 이에 대해 [[당 고종]]<ref group="주">《삼국사기》에는 [[당 중종]]이라 표기됨</ref>이 “당 태종이 위징(魏徵)·이순풍(李淳風) 등을 얻어 천하를 평정하는 대업을 이루었기에 태종이라 하였지만, 너희 신라는 바다 밖에 있는 조그만 나라임에도 태종의 호를 사용하여 천자의 칭호를 참칭하니 그 뜻이 불충하므로” 이를 고칠 것을 요구하자,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은 “(당 태종처럼) 무열왕도 김유신이라는 성신(聖臣)을 얻어서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다”며 완곡하게 거절하는 답서를 보냈다. 이 답서를 받은 고종은 그가 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이르기를 “33천(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내려가 유신이 되었다.”고 한 일이 있어서 이를 기록한 바가 있는데, 이 기록을 찾아 확인해보고서는 놀랍고 두려워서, 태종의 묘호를 허락했다고 한다.<ref name="유사-기이1"/> 훗날 [[조선]](朝鮮)의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고려]](高麗)의 [[왕건|태조]](太祖) 이래 역대 군주들의 묘호를 시호로 대체하고자 하는 [[조선 성종|성종]](成宗)에게 태종 무열왕의 선례를 들며 굳이 기록된 묘호를 뺄 필요는 없음을 주장하였다.<ref>《성종실록》 성종 18년 정미(1487년) 2월 경진(10일)조</ref>
[[신채호]]는 민족주의적 견지에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를 다 똑같이 '신성한 부여족', 즉 '조선 한민족의 형제'라 부르며, 당과 손을 잡고 고구려와 백제를 친 김춘추(태종 무열왕)의 행동을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인” 격으로, “다른 민족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 백제를 없앤 역사의 죄인”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특히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4천 년간의 민족사는 [[부여족]] 소장성쇠(消長盛衰)의 역사라 하여 [[부여족]]이 주족이라는 인식하에 긍정적으로 평가되던 ‘[[삼국통일]]’의 대업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비판해 [[김유신]](金庾信)·[[김춘추]](金春秋) 및 [[김부식]](金富軾)의 공죄(功罪)를 논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고대사를 반도 중심으로 보았던 종래의 [[역사]] 인식 체계를 [[만주]] 중심과 [[단군]], [[부여족]]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ref>신채호, [[:s:ko:독사신론#제9장 김춘추의 功罪|〈독사신론〉 제9장 김춘추의 功罪]] 《대한매일신보》</ref>
해방 후에도 이러한 인식은 고스란히 이어졌다. [[한국]] [[민속학]]의 원조이기도 한 [[손진태]]는 [[김유신]]이나 [[김춘추]]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족을 공격하기 위해서 이민족과 연맹하는 것은 민족적으로 최대의 죄악"이며, 신라가 당과 손잡은 것을 "귀족 국가의 비민족적 본질"이라 비난하였고,<ref>〈한국민족사개론〉, 1948년</ref> 한국역사연구회에서 편찬한 <한국역사>(1992)는 '통일'이라는 용어를 쓰면서도 그 통일의 '불완전함'과 '남북국 시대'라는 그 다음 시대의 성격을 강조했다.
* 제1왕후 : [[문명왕후|문명왕후 김문희]](文明王后) - [[김서현]]의 차녀,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 무열왕의 제2왕후인 [[영창부인|영창부인 김보희]]의 동생.
** 3녀 : [[지소공주]](智炤公主) - 김유신이 60살 되던 해에 외삼촌인 김유신과 결혼.
* 제2왕후 : [[김보희]] - [[김서현]]의 장녀, [[김유신]]의 첫째 여동생, 무열왕의 제1왕후인 [[문명왕후|문명왕후 김문희]]의 언니.
* 매형이자 사위 : [[김유신]]
** [[김유신]]
- 문무왕 . . . . 30회 일치
[[태종 무열왕|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문명왕후]]([[김유신]]의 둘째 누이)의 맏아들로, [[김 (성씨)|김]](金)이고, 이름은 '''법민'''(法敏)이다.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 지역을 차지하려 했던 [[당나라]]의 군대를 [[나당 전쟁]]에서 격퇴함으로써 [[676년]]에 [[삼국통일]]을 이룬 왕이다. 왕후는 파진찬 [[선품공|김선품]]의 딸 [[자의왕후]]이다.
{{Cquote|어느 날 김유신의 맏누이인 [[영창부인|보희]](寶姬)가 서형산(西兄山)<ref group="주">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의 [[선도산 (경북)|선도산]](仙桃山)</ref> 꼭대기에 올라 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온 나라 안에 흘러 펼쳐지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잠에서 깬 뒤에 동생인 문명왕후에세 꿈 이야기를 했다. 문명왕후는 자신이 언니의 꿈을 사고 싶다고 말하며 비단치마를 주었다. 며칠 뒤에 김유신이 뒷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金春秋)와 축국(蹴鞠)을 하다가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김유신은 자신의 집으로 김춘추를 데리고 와서는 주연을 베풀며 맏누이인 보희에게 옷고름을 달게 했다. 하지만 보희는 마침 일이 있어서 나오지 못하고 동생인 문명왕후가 대신 나와서 바느질을 하였다. 김춘추는 그녀의 어여쁜 모습에 반하여 곧 청혼을 하여 결혼하였고, 그녀는 곧바로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뒷날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金法敏)이다.|《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1년}}
[[진덕여왕]] 4년([[650년]])<ref group="주">[[진덕여왕]] 4년부터 [[신라]]의 독자 연호가 아닌 [[당나라|당]]의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ref>에 [[당나라|당]]에 사신으로 파견돼 [[당 고종|고종]]에게 〈[[한국의 삼국시대 시가#치당태평송|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을 바쳤다. 고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법민에게 태부경(太府卿)이라는 벼슬을 내렸다.<ref name="삼국사기-650">《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4년(650)</ref> [[654년]] 아버지 [[김춘추]]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파진찬]]으로써 [[병부령]]직에 임명되었다.<ref name="삼국사기-661">《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1년(661)</ref> [[655년]] 태자로 봉해졌다.<ref name="삼국사기-655>《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2년(655)</ref> [[태종무열왕]] 7년([[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김유신]]과 함께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멸망시켰다.<ref name="삼국사기-660">《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7년(660)</ref> 이어 [[태종무열왕]] 8년([[661년]]) 부왕이 승하하자 곧 즉위하였다.
원년([[661년]]) [[6월]] 상중(喪中)이던 문무왕에게 당은 [[고구려]]를 치는 당군과 [[웅진도독부]]에 고립된 당군에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신라]]가 [[백제]] 부흥군(復興軍)을 진압하는데 나서줄 것을 거듭 요청해왔다. 평양으로 먼저 군량을 보내면 웅진으로 통하는 물자 수송로가 끊어질 것이고, 그 수송로가 끊어지면 [[웅진도독부]]의 당군들은 [[백제]]군에게 궤멸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왕은 8월에 직접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정(始飴谷停)으로 향했다. 그 길목에 있는 [[대전 계족산성|옹산성]](甕山城)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 부흥군을 9월 25일부터 공격하기 시작해 27일에 함락시켰다.<ref name="삼국사기-661"/> 옹산성을 함락시키고 웅현성(熊峴城)을 쌓아 [[웅진도독부]]로 통하는 군량수송로를 다시 개통시킨 뒤, 상주(上州) 총관(摠管) 품일(品日)과 일모산군(一牟山郡) 태수 대당(大幢)·사시산군(沙尸山郡) 태수 철천(哲川) 등이 이끄는 군사들이 [[우술성]](雨述城)을 쳐서 또 함락시키고, [[10월 29일]]에 [[서라벌]]로 돌아와 당의 조문 사절을 맞이했다. 한편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이 보낸 함자도(含資道) 총관(摠管) 유덕민(劉德敏)<ref group="주">《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대감(大監) 문천(文泉)이라 표기됨</ref>이 와서 문무왕에게 당군에 대한 군량 지원을 요청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1"/> 왕은 이듬해 1월 [[김유신]]으로 하여금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섬과 조(租) 2만 2천여 섬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이들 군은 이듬해 2월에 무사히 군량을 전달하고 귀환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2">《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2년(662)</ref>
3년([[663년]]) 봄 정월에는 [[서라벌]] 근교의 [[경주 남산신성|남산신성]](南山新城)에 장창(長倉)을 지었다. 또한 [[경주 부산성|부산성]](富山城)을 쌓았다.<ref name="삼국사기-663"/> 이보다 앞서 [[백제]] 부흥군은 662년 12월에 험준한 주류성(周留城)에서 주변에 평야와 강이 많은 피성(避城)으로 수도를 옮겼는데,<ref name="일본서기-662">《일본서기》 권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원년(662)</ref> 663년 2월에 [[김흠순|흠순]]과 [[김천존|천존]]은 백제 [[거열성]]을 쳐서 빼앗고 거물성과 사평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으며, 덕안성을 쳐서 1,070명을 목베는 등 [[백제]] 부흥군을 더욱 압박해왔다.<ref name="삼국사기-663"/> 결국 부흥군은 피성을 떠나 주류성으로 돌아갔고,<ref name="일본서기-663">《일본서기》 권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2년(663)</ref>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다며 유사에 명해 큰 잔치를 베풀고 술과 음식을 내려 주게 한다.{{출처|날짜=2018-06-27}} 한편 여름 4월, 당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雞林大都督府)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雞林州大都督)으로 삼았다.<ref name="삼국사기-663">《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3년(663)</ref> 6월, [[백제]] 부흥군 내의 내분으로 [[복신]]이 [[풍왕]]에게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신라]]는 곧장 [[백제]] 부흥군을 쳐서 진압하려 했고,<ref name="일본서기-663"/> 당에서도 [[웅진도독부]]의 장군 유인궤(劉仁軌)의 요청에 따라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가 40만 군사를 보냈고, 유인궤와 별장(別將) 두상(杜爽), 새로 [[백제]]왕으로 임명된 [[부여융]] 등의 수군은 덕물도(德物島)를 경유해 수로로 곧장 웅진부성(熊津府城)으로 나아갔다.<ref name="삼국사기-663"/><ref name="의자왕-662">《삼국사기》 권제28 백제본기 제6 唐 高宗 龍朔二年(662)</ref> 문무왕 역시 [[김유신]]과 [[김인문]]·[[김천존]], [[화랑]] [[죽지랑]]을 위시한 28명(또는 30명)의 장군을 데리고 당의 손인사·유인원과 군사를 합쳐 [[8월 13일]]에 두솔성(豆率城)<ref group="주">문헌에 따라 두량이성(豆良伊城)·두릉윤성(豆陵尹城)·두곶성(豆串城)·윤성(尹城)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ref>을 함락했다. 문무왕은 [[왜인]]들에게 훈계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냈다.<ref name="김유신-중">《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 중</ref> 28일에는 백강 어귀에서 당의 수군과 [[백제]]·[[왜]]의 선단이 충돌한 네 번의 싸움 모두 [[백제]]·[[왜]] 선단의 궤멸로 끝났고, [[백제]]의 [[풍왕]]은 몇 사람과 함께 배 한 척에 의지해서 [[고구려]]로 망명해 버렸다([[백강구 전투]]). 요충지인 가림성을 제치고 먼저 주류성을 치기로 결정한 나·당 연합군 지휘부는 9월 7일<ref group="주">《[[자치통감]]》에는 8일로 표기됨</ref>에 마침내 주류성을 함락시켰다.<ref name="일본서기-663"/><ref name="자치통감-663">《자치통감》 권201 唐紀十七高宗天皇大聖大弘孝皇帝 龍朔 3년(663)</ref> [[웅진도독부]]의 당군에게 의복을 공급해주고 겨울 11월 20일에 [[서라벌]]로 돌아와, 문무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논공행상을 행했다. 앞서 당은 [[신라]]와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도독에 임명한 뒤, 임존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오려는 문무왕을 향해 "평정을 마친 뒤 함께 모여 맹약을 맺으라"던 고종의 칙령을 들며 두 나라 사이의 맹약을 제의했다. [[신라]]는 임존성이 함락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너무 이르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출처|날짜=2018-06-27}} 결국 문무왕 4년([[664년]]) 2월에 [[각간]] [[김인문]], [[이찬 (신라 관직)|이찬]] [[천존]](天存)을 보내어 당의 칙사 [[유인원 (당나라)|유인원]](劉仁願)과 새로 웅진도독이 된 옛 [[백제]]의 왕자 [[부여융]]과 웅진에서 동맹을 맺었다.<ref name="삼국사기-664">《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4년(664)</ref> [[백제]] 부흥군은 문무왕 4년([[664년]]) 3월에 [[사비산성]](泗沘山城)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가면서<ref name="삼국사기-664"/> [[백제 부흥운동|백제 부흥]]은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
6년([[666년]]) 4월에는 대신 김천존의 아들인 [[나마 (관직)|나마]] 한림과 김유신의 아들인 나마 [[김삼광|삼광]](三光)을 모두 당에 들어가 숙위하게 하였으며, 고구려를 없애고자 당에 군사를 요청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6">《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6년(666)</ref> 12월에부터 당은 [[이세적|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사열소상백(司列少常伯) 안륙현(安陸縣) 사람인 학처준(郝處俊)을 부장으로 삼아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는데,<ref name="삼국사기-666"/> 이때 고구려는 실권자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죽음에 이어 그의 아들들 사이에 형제 다툼이 벌어졌고, 이는 마침내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남생]]이 아우 [[연남건|남건]]과 [[연남산|남산]]에게 쫓겨 [[국내성]] 등의 성을 거느리고 당에 항복해버리면서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ref name="고구려-666">《삼국사기》 권제22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25년(666)</ref> 이 와중에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정토]]가 24명의 부하와 12성 763호 3,543명을 거느리고 항복해오자, 정토와 그의 부하들에게 옷과 양식, 집을 주어 서울 및 주·부에 안주시키고, 온전한 여덟 성에는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한다.<ref name="삼국사기-666"/>
7년([[667년]]) 7월에 3일 동안 큰 잔치를 베풀었고, 당에서는 신라의 장군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으로 발탁하고 대아찬 일원(日原)은 당의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임명되었는데, 문무왕은 지경과 개원에게 각각 파진찬과 [[대아찬]]의 관등을 주고, 일원을 운휘장군으로 명한다는 고종의 칙명은 왕궁 뜰에서 받도록 명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7">《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7년(667)</ref> 또한, 같은 달 고종은 유인원과 신라의 [[태종무열왕#가계|김인태]](金仁泰)에게 명하여 비열성(卑列城)<ref group="주">지금의 [[강원도]] [[안변군]]</ref>의 길을 따라, 신라 병사를 징발해 다곡(多谷)·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 평양으로 모이도록 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7"/> 가을 8월에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해 9월에는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해 이적(李勣)과 합류하기 위해 기다렸다.<ref name="삼국사기-667"/> 이때 신라군은 당군을 배제한 단독 작전수행 대신 정탐을 세 번이나 보내면서 배를 계속 띄워 당군의 동정을 살폈고, 당군이 아직 평양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알고 먼저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먼저 고구려로 갈 길을 뚫기로 했다.<ref name="삼국사기-671"/> 하지만 칠중성을 치기 전, 겨울 10월 2일에 평양성 북쪽 2백리 지점에 도착한 이적은 신라측 이동혜(尒同兮) 촌주(村主) 대나마 강심(江深)에게 부쳐,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에게 “칠중성을 공격할 필요없이 곧바로 평양으로 와서 당군에 군량을 공급하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에 신라군은 칠중성 공격을 포기하고 수곡성(水谷城)으로 향했지만,<ref name="삼국사기-671"/> [[11월 11일]]에 장새(獐塞)에 이르렀을 때 이적은 어느새 돌아가버렸고, 신라군도 그냥 돌아왔다.<ref name="삼국사기-667"/> 12월에 당은 다시 웅진도독부의 유진장군(留鎭將軍) 유인원을 보내어 고구려 정벌을 돕게 하면서 문무왕에게 대장군의 정절(旌節)을 주었다.<ref name="삼국사기-667"/>
|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 || 대각간 김유신
이때 대당대총관으로 임명된 대각간 김유신은 풍병(風病) 때문에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는 못하고 수도 서라벌에 남았고,<ref name="김유신-하">《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 하</ref> 일찍이 백제를 치는데 선두로 나섰던 여러 장수들이 모두 지도부의 요직을 맡아 고구려 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임명된 관직으로 추정한 진격루트는 한성주(한산주)와 비열주(비열홀주) 그리고 하서주(하슬라주) 세 곳으로, 수도 서라벌에서 조직된 군사들은 닷새 후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출처|날짜=2018-06-28}} [[6월 22일]]에 유인원이 신라의 귀간(貴干) 미힐(未肹)을 보내어 고구려의 대곡성(大谷城)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항복해왔음을 알렸고, 신라군 장수인 인문·천존·도유 등은 일선주 등 일곱 군과 한성주의 병마를 이끌고 당의 군영으로 나아갔다.<ref name="삼국사기-668"/> [[6월 27일]]에는 드디어 문무왕 자신이 서라벌을 출발했고, 이틀 뒤에는 여러 도의 총관들이 일제히 출발했다. 당군 총사령관 이적을 만난 신라의 김인문은 고구려의 평양 북쪽 20리 되는 지점인 영류산(嬰留山) 아래까지 진군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8"/>
남한주(南漢州)로 돌아온 문무왕은 [[10월 22일]]에 논공행상을 벌여 서라벌에 남아있던 김유신에게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의 직위와 식읍 500호, 궤장을 하사하고 그의 모든 보좌관들에게도 각각 위계 한 등급씩을 올려 주었다.<ref name="김유신-하"/> 또한 인문을 대각간, 다른 이찬과 장군들을 모두 각간으로 삼고 소판 이하에게는 모두 관위 1등급씩 더해주었다.<ref name="삼국사기-668"/> [[10월 25일]]에 왕은 욕돌역(褥突驛)에 이르러 국원사신(國原仕臣) 용장(龍長) 대아찬에게 사적으로 대접받았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고구려 사람 7천 명을 포로로 거느리고 [[11월 5일]]에 서라벌로 들어온 왕은 다음날 문무 관료들과 함께 선조묘에 전쟁이 끝났음을 고하고, [[11월 18일]]에는 전사자들의 신분에 맞춰 부의(賻儀)를 내렸다.<ref name="삼국사기-668"/>
같은 해 문무왕은 말을 기르는 목장 174곳을 소내(所內)에 22곳, 관청에 10곳을 속하게 하고 김유신을 비롯한 고위 진골 대신들과 여러 관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ref name="삼국사기-669"/> 또한 백제의 여자를 아내로 삼은 한성도독 박도유가 웅진도독부와 내통해 신라의 병기를 훔쳐다 한 주(州)의 땅을 습격하는 난을 일으키려다 계획이 발각되어, 도유는 처형당했다.<ref name="삼국사기-671"/>
12년([[672년]]) 당나라는 대군을 동원해 신라에 대한 침략을 개시했다. 이에 맞서 신라는 봄 정월에 백제 고성성(古省城)을 쳐서 이기고, 2월에는 다시 백제의 가림성 공격을 시도했다.<ref name="삼국사기-672">《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2년(672)</ref> 7월,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의 한병(漢兵) 1만, 말갈족 출신의 이근행이 거느린 말갈병 3만이 함께 평양에 이르러 여덟 곳에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머물렀다.<ref name="삼국사기-672"/> 이들은 8월부터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쳐서 이기고 백수성(白水城) 5백 보 거리까지 전진해 주둔하는 등 신라 땅을 침식해왔다.<ref name="삼국사기-672"/>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해 이들을 쳐서 이기고, 추격하는 당병을 석문(石門) 벌판까지 뒤쫓아가 싸웠지만, 군 내부에서의 논공행상 및 전략에 대한 견해차로 분열된 사이에<ref name="김원술">《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전 부록 원술(元述)</ref> 당병의 반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양신(良臣) 등이 죽었다.<ref name="삼국사기-672"/> 태대각간 김유신의 아들인 [[김원술|원술]]도 여기에 참전했다가 목숨을 건져 돌아왔는데, 아버지 유신은 자신의 아들을 군법으로 처형해야 한다며 왕에게 아뢰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ref name="김원술"/> 한편 각자 맡은 곳을 지키며 방어전으로 전략을 변경하자는 유신의 진언에 따라, 한산주에 둘레 4,360보 되는 주장성(晝長城)을 쌓는 등 방어진지를 구축했다.<ref name="삼국사기-672"/> 9월에는 앞서 신라 땅에 억류하고 있던 웅진도독부 소속의 백제인 관원들과 앞서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당으로 돌려보내면서 왕이 직접 표문과 많은 물품을 바치는 등 당에 대해 유화책을 폈다.<ref name="삼국사기-672"/>
13년([[673년]]) 2월부터 9월까지, 문무왕은 당의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서형산성(西兄山城)과 사열산성(沙熱山城)을 비롯해, 국원성(國原城)<ref group="주">옛 완장성(薍長城)</ref>,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ref group="주">질암성(迭巖城)이라고도 한다.</ref>, 달함군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歃良州)의 골쟁현성(骨爭峴城) 등 여러 성을 쌓게 하고, 대아찬(大阿飡) 철천(徹川) 등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73">《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3년(673)</ref> 한편 이 사이에 국가의 원로이자 재상이었던 태대각간 김유신이 죽고, 아찬 대토(大吐)가 모반하여 당에 붙으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는 등의 사건도 일어났다.<ref name="삼국사기-673"/> 거듭되는 전쟁에서 신라는 말갈·거란의 병사까지 끌어들인 당군과 맞서 아홉 번의 전투를 통해 2천 명을 죽이고, [[임진강|호로하]](瓠瀘河)와 왕봉하(王逢河)에서도 당군을 상대로 큰 전과를 올렸다.<ref name="삼국사기-673"/> 겨울에 당병은 고구려의 우잠성(牛岑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거란·말갈의 병사들은 대양성(大楊城)과 동자성(童子城)을 쳐서 멸했다.<ref name="삼국사기-673"/> 한편 신라는 주(州)와 군(郡)에 처음으로 외사정(外司正)을 두고, 백제 멸망 뒤 [[무열왕]]에 의해 폐지되었던 수병제(戍兵制)를 부활시키는 등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나갔다.<ref name="삼국사기-673"/>
* 모후 : [[문명왕후 김씨]](文明王后 金氏, 생몰년 미상) - [[김서현]]의 차녀, [[김유신]]의 누이동생
** 누이 : [[지소부인|지소공주]] (智炤公主,생몰년 미상) - 외숙부 [[김유신]]이 60살 때 하가
* 이모 : [[영창부인]] 김씨(永昌夫人 金氏, 생몰년 미상) - [[김서현]]의 장녀, [[태종무열왕]]의 셋째 부인. [[김유신]]의 누이.
* 외숙부 : [[김유신]](金庾信, [[595년]]~[[673년]]), [[김흠순]](金欽純, 생몰년 미상)
* 후궁 : [[신광부인]]([[김유신]]의 둘째딸, [[무열왕]]은 맏아들 [[김법민 (신라)|김법민]]([[김법민 (신라)|문무왕]]) 의 태자비로 세우려 했으나 이미 [[자의왕후 김씨]]와 혼인한 상태라 그녀를 [[김법민 (신라)|김법민]]([[김법민 (신라)|문무왕]])의 후실로 맞이 하였다고 하며 [[문명왕후 김씨]] 또한 그녀를 무척이나 아끼고 총애 하였다 한다.)
* [[김유신]]
- 박근혜 . . . . 27회 일치
[[1980년]] 구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인사들과 [[유신정우회]] 인사들이 [[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고, [[1987년]]에는 [[김종필]]을 중심으로 [[신민주공화당]]이 출범하였으나 박근혜는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 경선 8일 뒤인 [[2012년]] [[8월 28일]] 박근혜는 [[전태일]]재단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유족과 노동자들의 거부와 반대로 무산되었다. [[전태일]]의 여동생이자 구 [[민주통합당]]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인 [[전순옥]]은 진정으로 [[전태일]] 정신을 생각한다면 쌍용차나 용산참사 희생자 등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먼저 찾았어야 한다고 말하고, 이른바 국민대통합에 대해서도, 정책적으로 접근을 하거나 현안이 일어나는 현장을 먼저 찾아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며 희망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 의원은 현재의 진실은 미래에 대한 지향과 과거의 삶이 일치할 때 빛을 발하는 것이라며 5·16 쿠데타와 유신, 군사 독재에서 지금의 정수장학회까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다면 지금의 말과 행동은 그 진실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다.<ref name="전순옥 朴 고통당하는 사람 먼저 찾아야종합">[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08/28/0200000000AKR20120828048951001.HTML?did=1179m 전순옥 "朴 고통당하는 사람 먼저 찾아야"(종합)] 연합뉴스, 2012년 8월 28일</ref> 그러나 [[이상일]] 대변인은 "박 후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아무리 방해를 하고 장막을 친다 해도 국민을 통합하겠다는 박 후보의 행보를 막지 못할 것"이라며 "국민을 분열시켜 계층간, 세대간, 지역간 갈등을 조장하는 세력을 반드시 물리치고 국민대통합의 '100% 대한민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는 자신이 가진 독단적인 이미지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12년 7월 11일 [[김문수 (1951년)|김문수]] [[새누리당]] 대선 경선후보의 예방에 "박근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칠푼이다"라고 말했다.<ref>[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120711205713287], 황철환 기자, 김영삼 "박근혜 별것 아니다..칠푼이다" 혹평, 연합뉴스, 2012.7.11.</ref> 칠푼이는 지능이 조금 모자라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인데, 과거 이명박 대통령이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독재, 독단적인 면에 대해서도 칠푼이라 표현한 적이 있어 박근혜 의원과 친박계의 독선적인 당 운영에 대한 비판적 표현<ref>[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628] 정세운 기자, '칠푼이=독재자'를 왜곡하는 언론, 시사오늘, 2012.7.11.</ref> 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차남 [[김현철 (1959년)|김현철]]이 총선 때 [[새누리당]]의 공천을 못 받은 것에 대한 감정적 발언'<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717224011214], 오윤환, 박근혜가 유신 2인자? YS 부자의 '멘붕', 데일리안, 2012.7.17</ref> 으로 보기도 한다.
[[한나라당]] 친[[이명박]]계는 "박근혜는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폐쇄적 조직 문화가 팽배해 있다"며 "두 차례 대선에서 실패한 [[이회창]] 전 총재의 전철을 되풀이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친박계 의원은 "국민들은 박 전 대표를 더 이상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있는 정치인이 아니라 독립적인 지도자로 바라보고 있다"며 "박 전 대표를 흠집내기 위한 어떤 시도도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하였다.<ref>(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522573&sid=E&tid=1 {{웨이백|url=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522573&sid=E&tid=1# |date=20100203205709 }} 친이, 세종시 공방속 박정희 공격)</ref> 또한 친이계는 "지역주의에 기댄 정치인"이라며 비판하였다.<ref>(http://www.frontiertimes.co.kr/news/news/2009/11/09/43642.html 김용태 "박근혜, 지역주의에 기댄 사익 추구")</ref> 한나라당 [[강명순]] 의원은 "자신은 유신 시절 빈민 운동을 하느라 고생했는데 박근혜는 청와대에서 잘 먹고 잘 지낸 만큼 빚을 갚아야 한다"며 비판했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102/h2011021002332421000.htm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102/h2011021002332421000.htm# |date=20110216063347 }} 강명순 의원 '박근혜 호의호식' 논란)</ref>
*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5·16 군사 정변]]은 구국의 혁명이었다고 평가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朴 "5.16은 구국혁명..유신 역사판단 맡겨야"|url=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office_id=001&article_id=0001700646§ion_id=100§ion_id2=265&menu_id=100|출판사=연합뉴스|저자=심인성|날짜=2007-07-19|확인날짜=2007-07-19|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41012193019/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보존날짜=2004-10-12|깨진링크=예}}</ref>
[[전태일]]의 여동생이자 [[민주통합당]]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인 [[전순옥]]은 진정으로 [[전태일]] 정신을 생각한다면 쌍용차나 용산참사 희생자 등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먼저 찾았어야 한다고 말하고, 이른바 국민대통합에 대해서도, 정책적으로 접근을 하거나 현안이 일어나는 현장을 먼저 찾아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며 희망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 의원은 현재의 진실은 미래에 대한 지향과 과거의 삶이 일치할 때 빛을 발하는 것이라며 5·16 쿠데타와 유신, 군사 독재에서 지금의 정수장학회까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다면 지금의 말과 행동은 그 진실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다.<ref name="전순옥 朴 고통당하는 사람 먼저 찾아야종합"/>
<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09/10/0200000000AKR20120910029500001.HTML?did=1179m 박근혜 "유신·인혁당 역사판단에 맡겨야"(종합)] 연합뉴스, 2012년 9월 10일</ref>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언론과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로부터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박 후보의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는 발언은 헌정절차가 정지된 유신 때 이뤄진 유죄 판결과 민주화 이후 사법부가 무죄로 교정한 판결의 효력을 동일시한 것이며, 이미 역사적, 사법적 판단이 내려진 사안까지 수용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ref>[http://media.daum.net/issue/365/newsview?issueId=365&newsid=20120910220812478 박근혜 "인혁당 대법 판결은 2개" 헌정무시] 경향신문, 2012년 9월 11일</ref><ref name="박근혜 인혁당 판결 두개 논란···'통합' 걸림돌될까">[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091010501209509&outlink=1 박근혜 "인혁당 판결 두개" 논란···'통합' 걸림돌될까] 머니투데이, 2012년 9월 10일</ref><ref>[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580865 박근혜 "인혁당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두가지" 발언 논란] 매일경제, 2012년 9월 11일</ref>
[[경향신문]]과 [[한겨레]], [[한국일보]] 등의 언론들은 사설을 통하여 재심으로 유신 당시의 대법원 판결은 취소되었으며 "지금 이 순간 인혁당 사건이 무죄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법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102116085&code=990101 <사설>'인혁당 판결이 두 개'라는 박근혜 후보의 법치 인식]경향신문, 2012년 9월 11일</ref><ref>[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551011.html <사설> 박근혜, 인혁당 사건에 대한 분명한 입장 밝혀야]한겨레, 2012년 9월 11일</ref> 특히, 한국일보는 사설에서, "사실상의 헌법중단 상태인 유신 치하의 원판결과 민주화 이후의 재심 판결에 똑같이 '정치 상황'이란 잣대를 들이댄 결과라면 실로 심각하다"면서 그럴 경우 "대한민국의 사법절차, 나아가 헌정질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라고 비판했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9/h2012091121052376070.htm <사설/9월 12일> 박근혜 후보 언제까지 "역사 판단" 타령인가]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9/h2012091121052376070.htm# |date=20121116012015 }}한국일보, 2012년 9월 12일</ref>
하지만 이러한 발언에 대해서는 "사실관계마저 호도"한다거나 "현대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박근혜 후보가 말하는 증언들이란, 박범진과 안병직 등의 증언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의 증언은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증언들로, 손석희 교수가 방송에서 질문한 유신 시절의 이른바 2차 인혁당 사건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ref name="hani"/><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112210065&code=910402 박근혜가 주장하는 인혁당 '다른 증언'은 1차 사건과 혼동한 듯] 경향신문, 2012년 9월 11일</ref><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77478&CMPT_CD=P0001 박근혜, 인혁당 반론 펴다 현대사 무지 드러내] 오마이뉴스, 2012년 9월 11일</ref><ref>[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253348 박근혜, 1차 · 2차 인혁당 사건 구분 못 했나] 노컷뉴스, 2012년 9월 11일</ref>
한편, 보수언론인 [[조선일보]] 역시 사설을 통해, [[박정희]] 시대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지만, 2차 인혁당 사건의 경우 어떤 논리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어둠의 역사에 속한다는 것이 일반 국민의 공감대라면서, 반면 박 후보의 유신관은 박정희식 유신관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대통령 후보의 유신에 대한 입장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개인사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비판했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13/2012091301135.html <사설> '박근혜 시대' 열려면 '아버지와 딸' 個人史 넘어서야]조선일보, 2012년 9월 14일</ref>
박근혜 후보의 인혁당 사건에 대한 발언에 대해 각계 각층으로부터 비판이 잇따르자, 2012년 9월 24일, 박근혜 후보는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의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였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09/24/0200000000AKR20120924044400001.HTML?did=1179m 박근혜 "5.16·유신·인혁당 피해자 가족에 사과"(종합)] 연합뉴스, 2012년 9월 24일</ref> 이에 대하여 인혁당을 "민혁당"이라고 잘못 말한 것, 사과 후 기자들의 질문을 일절 받지 않은 것 등을 지적하며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반응들이 있었다.<ref>[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092410300683188&outlink=1 野, 박근혜 후보 사과 진정성에 의문 "질문 왜 안 받나?"] 머니투데이, 2012년 9월 24일</ref><ref>[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397496 민주 "박근혜 인혁당을 민혁당이라 읽어…진정성 의문"] 서울방송, 2012년 9월 24일</ref><ref>[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092411562505161&outlink=1 박근혜, 인혁당을 민혁당으로...조국 "그에게 같은 사건일 것"] 머니투데이, 2012년 9월 24일</ref><ref>[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209/h2012092502363721000.htm 박근혜 '민혁당'이라 발음한 까닭이…]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209/h2012092502363721000.htm# |date=20121216161351 }} 한국일보, 2012년 9월 25일</ref><ref>[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432 박근혜와 언론의 ‘역사 조롱’ <손석춘 칼럼>]미디어오늘, 2012년 10월 10일</ref> 유족들은 진정성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09/24/0200000000AKR20120924072251004.HTML?did=1179m 인혁당 유족 "박근혜, 마지못해 사과하나"(종합)] 연합뉴스, 2012년 9월 24일</ref> 민주당 정성호 대변인은 평가한다고 하면서도,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후속 조치를 요구하였으며, 안철수 후보 등은 필요한 일이었다고 평가하였다.<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20924105740 박근혜 과거사 사과에 문재인-안철수 반응 온도차] 프레시안, 2012년 9월 24일</ref>
한편 과거 동교동계와 상도동계에 속했던 일부 인사들이 2012년 10월 15일 새누리당사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자신들은 과거 유신 체제에 맞섰으나 국민대통합을 위해 박근혜 후보 지지를 결심했다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과거 전력을 보면, 사실은 당적을 매우 빈번하게 옮겼던 이른바 철새 정치인이거나 과거에 이미 한나라당에서 활동하였던 인사들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ref name="ohmy">[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1015150520572 '대표 철새' 집합시켜 '동교동계도 박근혜 지지'?] 오마이뉴스, 2012년 10월 15일</ref><ref>[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528 박근혜 지지 동교동-상도동계? "정치철새 인가"] 미디어오늘, 2012년 10월 15일</ref>
1990년 잡지 인터뷰에서 박근혜는 5·16과 4·19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박 전 대통령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역사 의식에 의문이<ref name="chung01"/> 제기되자 2007년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본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2007년 7월의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그는 '박 전 대통령 유지 계승' 역사의식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5·16은 구국(救國)의 혁명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때 상황이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남북대치 상황에서 잘못하면 북한에 흡수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혁명 공약에도 기아 선상에 헤매는 국민을 구제한다는 얘기가 나온다.<ref name="chung01"/>"는 것이다. 다만 [[10월 유신]]에 대해서는 판단유보를 내렸다. 5.16 뒤의 유신시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ref name="chung01"/> 는 질문에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다만 유신시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헌신하고 고통받은 분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항상 죄송하게 생각한다.<ref name="chung01"/>"고 답하였다. 이 때문에 야당 인사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한명숙]] 전 총리는 박근혜 전 대표가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5.16을 '구국의 혁명'이으로 규정한 데 대해 '망언'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한명숙은 [[2007년]] [[7월 19일]] "그가 5.16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고 미화한 것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국토방위에 전념하고 있는 69만 국군 장병들에 대한 모독이자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민주 영령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ref name="son">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569422</ref> [[한명숙]]은 이어 "아직도 박정희 쿠데타 정권에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분들의 유가족이 서러움과 한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며 "고(故) 장준하 선생의 부인을 만나 고개를 조아렸던 때가 언제라고 또다시 독재의 유전자를 드러내냐"고 비난하였다.<ref name="son"/> 한 전 총리는 자신은 총리 인사청문회에서 유신시절 자신을 고문하고 투옥했던 가해자들을 용서했다고 말했지만 "박 후보의 망언은 이처럼 유신독재의 피해자들이 내미는 용서와 화해의 손을 뿌리치고 피해자들의 가슴에 다시 한 번 못을 박는 잔인한 짓"이라고 언론에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ref name="son"/>
* [[2007년]] [[8월]]에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며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이명박 선대위의 [[장광근]] 대변인은 "영화 관람 한 번으로 '호남의 한' '역사 의식 부재'를 한 번에 뛰어넘겠다는 박근혜 후보. 그의 화려한 광주 1박 2일 외출은 80년 광주정신의 모독일 뿐"이라며 비판했다. 또 "왜 광주에서는 지난 번처럼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나"라며 "DJ를 들먹이며 지역감정을 부추기려는 그의 다급함이 안타깝기조차 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진수희]] 선대위 대변인은 "반역사, 반민주적 유신시대의 퍼스트 레이디 5년은 부끄러워할 일이지, 결코 자랑할 일은 아니다"라며 "유신시절 '퍼스트 레이디' 5년을 공으로 돌리고, 국정경험으로 포장하는 박 후보의 역사관과 정치철학은 무엇인가"라고 비난했다. 이에 박근혜 선대위의 [[김재원]] 대변인은 "'박근혜 대통령 정부'에서 이념, 지역, 세대 간의 갈등과 대립은 과거의 역사로 묻힐 것"이라며 "'박근혜 정부'는 고향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천하의 인재를 골고루 쓰는 '대탕평 인사'로 국민적 에너지를 하나로 뭉치는 '희망정부' '드림정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가지 특별히 주목할 점은, 박 후보에 대한 연설회장의 뜨거운 열기와 성원"이라며 "특정 후보가 압도적으로 앞서간다는 말이 얼마나 허풍이었는지 드러났다. 박풍이 호남에서도 일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황석근 선대위 공보특보도 "오직 박근혜만이 동서화합, 정권교체, 호남발전의 희망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다시 한번 공포된 날"이라며 "박근혜는 언제나 빛을 몰고 다니는 후보, 어디서나 빛을 발하는 후보, 어둠과 부패를 몰아내는 후보라는 것이 유감없이 드러났다"고 강조했다.<ref>[https://www.google.co.kr/search?hl=ko&newwindow=1&client=firefox-a&hs=At6&rls=org.mozilla%3Ako%3Aofficial&q=%EC%A7%80%EC%97%AD%EA%B0%90%EC%A0%95+%EB%B0%95%EA%B7%BC%ED%98%9C&aq=f&aqi=&aql=&oq=&gs_rfai=]</ref>
* [[2012년]] [[9월 10일]] "몇 십년 전 역사라 지금도 논란이 있고 다양한 생각이 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역사가 객관적인 판단을 해 나가지 않겠는가. 역사의 몫이고 국민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유신]]에 대해 당시 아버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렇게까지 하면서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다 함축돼 있다고 생각한다" <small>(MBC 라디오 < [[손석희의 시선집중]] > 에서 [[유신]]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small><ref name="경향신문 이임 기자" />
* [[2012년]] [[9월 24일]] "[[5·16]], [[유신]], '민혁당 사건'은 헌법 가치를 훼손되고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로 인해 상처와 피해 입은 분들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한다" <small>(과거사 사과 기자 회견 중 '[[인혁당]]'을 '민혁당'으로 잘못 말하며)</small><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924113111243] 이혜미기자,
- 토탈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요원 . . . . 7회 일치
외국인 베테랑에게 강하지만 시노비에게 약하다. 유신지사와 신선조를 상대로 매혹이 불가능한데 설정상 그 둘은 자신의 이념에 너무 충실해서 안 넘어온다고 한다.
== 유신지사(Ishin Shishi) ==
>유신지사는 오직 한 가지에만 헌신하는 "이상주의 남자"입니다. 그 한가지란 바로 덴노의 신성한 권위를 복권하는 것입니다. 덴노의 지지자인 이들은 경쟁 세력의 불안을 고조시키면서 충신을 결집하고 고무시킵니다. 하나만 바라보는 외골수이자 위험한 남자인 이들은 가고자 하는 길에 방해물이 있다면 그게 누구든지 죽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과격파, 선동자 스킬 요구. 암살 시 열의 +1, 반란 선동 시 열의 +1, 열정 주입 시 열의 +1, 이 요원의 성공확률 +5%, 모든 유신지사의 행동스킬 비용 -15%, 이 요원이 배속된 군대의 캠페인 이동력 +10%
* 유신파 거물(Arch-imperialist) - "일본에 포교해야 할 운명이 있다!"
번이 막부파를 지지할 때만 고용할 수 있다. 시노비와 유신지사에게 강하다.
원작의 닌자. 다른 가문에게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신선조와 유신지사에게 약하지만 게이샤에게 강하다.
- 이현우(배우) . . . . 6회 일치
선덕여왕의 어린 [[김유신(선덕여왕)|김유신]] 역 등장을 기점으로 [[유승호]]를 잇는 국민 남동생의 자리에 올랐다. 이 드라마에서 어린 김유신을 맡으면서 귀여움과 훈훈함을 동시에 안겨주어 2~30대 여성들을 설레게 했다. 나이에 비해 똑부러진 연기력을 선보였다. 심지어 성인 역인 [[엄태웅]]으로 교체되면서 유신랑의 인기는 급강하하고 만다. 물론 엄태웅의 어색한 사극 연기도 한 몫 했다. 그를 못 보게 되어 아쉬워하는 누나팬들이 적지 않았다. 선덕여왕에서 하차한 후에는 [[막장 드라마]] [[밥줘]]에서 차화진의 아들 토미 역을 맡기도 했다. 2010년 1월에 시작한 미니시리즈 [[공부의 신(드라마)|공부의 신]]에서 [[홍찬두]] 역을 맡아 유승호와 함께 국민 남동생 투톱이 나란히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었다. [[계백(드라마)|계백]]에서 주인공 계백의 아역으로 등장했다. [[브레인(드라마)|브레인]]에서 소년가장 박동화 역으로 나왔다.
|| [[선덕여왕(드라마)|선덕여왕]] || [[김유신(선덕여왕)|김유신]] || [[엄태웅]] 아역 ||
- 정재호 (1930년) . . . . 6회 일치
* 1973년 ~ 1979년 : 제9대 국회의원 ([[유신정우회]])
* 1979년 ~ 1980년 : 제10대 국회의원 (유신정우회)
* 유신정우회 원내부총무, 대변인, 홍보위원회 위원장
{{제9대 간선대표 제1기 유신정우회}}
{{제9대 간선대표 제2기 유신정우회}}
{{제10대 간선대표 제3기 유신정우회}}
- 황효진(기업인) . . . . 6회 일치
2007년 당시의 황효진(맨 왼쪽). 옆에 있는 사람은 노는대학TV를 합작한 [[유신(스트리머)|유신]]과 나우콤 김욱 상무이사이다.
이후 초창기 [[아프리카TV]]로 진출하는데 당시 [[고소미#s-2|고소미]]를 좋아하던 [[유신(스트리머)|유신]](BJ)과 합작으로 스타 중계방송인 '노는대학'을 개설, 인터넷방송 플랫폼에서의 스타중계의 초석을 놓았다.[* 그러나 이 둘은 2011년경 관계가 단절되었고 [[망치부인]] 다음으로 유신과 가장 대립각을 세운 인물중 하나였다. 유신의 여론이 예나 지금이나 워낙 나빠서 이때만해도 황효진이 차라리 낫다는게(물론 황효진도 까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절대적으로 까이는 수준은 아니었다) 여론의 대세였으나... 황효진이 지금처럼 추하게 몰락하리라고는 대부분이 생각치도 못했엇다.]
- 강영식 . . . . 4회 일치
[[김이슬(야구선수)|김이슬]], [[김유신(1986)|김유신]], [[하준호]] 등을 비상식적으로 투입--'''세 선수 합계 이닝이 30이닝 미만이라는건 함정'''--하여 계투진을 운용[* 로이스터는 좌완 원포인트로 써야할 선수인 김이슬을 좌타, 우타 가리지 않고 상대시켜서 --'''무려 13경기에 내보내서 8이닝씩이나 소화하게 하는 엄청난 혹사를 한 끝에'''-- --'''결코 80이닝이 아니다'''-- 망가뜨렸고 신인 하준호를 위급한 상황에 아무렇게나 투입하는 운용으로 난타당하게 만들었다.]하기보다는 [[이정훈(투수)|이정훈]] - [[이정민(야구선수)|이정민]] - [[김일엽(야구)|김일엽]] - [[임경완]] 등을 돌려가며 탄력적으로 필승계투조를 꾸려갔으면 훨씬 나았겠지만 [[로이스터]]의 투수 운용은 무조건 한놈만 팬다는 식으로 특정 투수 한명만 주구장창 기용한 다음 그 선수가 혹사로 나가 떨어지면 다시 다른 선수로 옮겨가는 식이라...[* 하지만 여기에는 당시 롯데의 좌완 불펜이 거의 전무했던 문제도 있다. 사실 [[로이스터]]의 불펜 운용방식은 로테이션을 돌리는 식으로 불펜투수들에게 여유를 주는 운용방식이었다. 다만 좌완투수의 경우 심각한 부족을 겪어서 이 방식이 지켜지지 않았는데 [[김이슬(야구선수)|김이슬]], [[김유신(1986)|김유신]], [[하준호]]는 좌완투수의 부재로 어거지로 1군에 올려서 기용하였을 뿐 수준미달의 투수들로 잠시 1군에 기용된 이후 대부분 2군에 머물러 있는 선수들이었다. 심지어 [[김이슬(야구선수)|김이슬]]은 구속이 130km대에서 상승하지 못해 결국 방출되기까지 하였다. 앞에서 이야기 한 [[이정훈(투수)|이정훈]], [[이정민(야구선수)|이정민]], [[김일엽(야구)|김일엽]], [[임경완]] 이 넷은 모두 우완투수로 당시 롯데 내에 쓸만한 좌완투수로는 사실상 강영식이 유일한 상황이었다.]
- 김봉환(1921) . . . . 4회 일치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신정우회]] 제1기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1976년까지 부임하였다. 같은 기간에 [[대한민국 국회]] 보건사회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76년에는 유신정우회 제2기 국회의원에서 탈락하였다.
|| 1973 ||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유신정우회) || [[유신정우회]] || - || - || ||
- 오정근 (1929년) . . . . 4회 일치
|기타 이력= [[대한민국 수산청|수산청장]]<br />[[대한민국의 국세청장|국세청장]]<br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유신정우회]])
* 1973년 ~ 1979년 : 제9대 국회의원 ([[유신정우회]])
{{제9대 간선대표 제1기 유신정우회}}
{{제9대 간선대표 제2기 유신정우회}}
- 이병욱(스트리머) . . . . 4회 일치
'''현재 [[트위치]] 최악의 스트리머들 중에 손꼽혔던 인물 중 하나.'''[* [[유신(스트리머)|유신]]과 더불어 '''트위치에서 논란을 수차례나 저질렀다!''' 정지나 경고를 당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따름.]
그 악명높은 '''느금마엔터 민폐 [[신태일(유튜버)|4]][[김윤태|대]][[푸워|천]][[남구(범죄자)|왕]]'''에 임팩트가 가려저서 그렇지, 사실상 현재 느금마엔터테인먼트에서 '''이미지가 상당히 나쁜 편에 속한다.''' 트위치에서 이미지가 나쁜 쪽으로 보면 '''[[유신(스트리머)|유신]]과 투탑'''이었다.
- 토탈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번 . . . . 4회 일치
유신지사를 고용할 수 있다.
* 열의: 유신지사의 행동스킬 비용 -10%
다이묘 모리 다카치카, 후계자 모리 모토노리, 장군 다카스키 시나사쿠. 게임 시작시 유신지사 한명이 기본적으로 주어진다.
스팀판에서는 초슈 번으로 플레이 하며 한 캠페인에서 유신지사로 반란 선동을 3회 하는 Agent Provocateur 도전과제가 있다.
- 김무력 . . . . 3회 일치
[[금관가야]]의 왕족, [[신라]]의 장군이다. [[김유신]]의 [[할아버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며, 그 손자는 그 유명한 '''[[김유신]]'''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80139 가야 마지막 왕자,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오마이뉴스]] 기사)
- 김민기(가수) . . . . 3회 일치
1974년 10월에는 [[카투사]]로 [[입대]]해 군 복무를 시작했으나 1975년 초 [[10월 유신|유신]] 반대 운동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불렸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보안사|보안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고, 아침 이슬이 금지곡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솔로 1집도 판매 금지 조치를 받았다. 이 결정은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지속되었고, 이후 [[전두환]] 집권기까지 공식적으로 발매된 김민기의 앨범은 전무했다.
대통령 박정희 맞다. 70년대 당시 김민기는 제법 유명해서, 유신 정권의 눈에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박정희의 긴급조치에 의하여 김민기의 앨범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는 악연의 시작이었을 뿐, 1975년, 김민기가 카투사로 군대에 입대했을 때, [[중앙정보부]] 요원이 접촉하여 그로 하여금 노래를 만들어달라고 '''반강제적'''으로 요청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노래를 만들어주었는데, 이 노래가 바로 '식구생각'.[* 노래를 만들어주긴 했는데, 노동으로 인하여 가족이 흩어진 내용의 노래를 만들어주니, 중정부 요원이 갸우뚱했다고 한다.] 결국 김민기는 영창에 끌려가게 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의 불온한 행각으로 인해 그는 수없이 취조실에 끌려가 고문당했는데, 사각형 각목으로 '아 내가 이제 죽는구나' 라는 생각이 날 때까지 맞았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말하길, '이 친구가 나 때문에 힘들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렇게나 탄압하던 김민기의 노래가 이후 민주화의 구심력이 된 것은 아이러니. 나중에 김민기는 운동권들에게 '너무 미워하지마라. 그러다 걔(박정희) 닮아간다' 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 김윤환 . . . . 3회 일치
[[경북고등학교]]와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지역 언론사인 [[영남일보]]와 [[대구일보]]를 거쳐 [[조선일보]]에 입사해 일본특파원 및 편집국장 대리를 거쳤다. 이 시절에 오랫동안 주일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일본]] [[자유민주당(일본)|자유민주당]]의 금권 정치, 계파-계보 정치, 막후 정치를 보고 배운다. 중간에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성주군]]-[[칠곡군]]-[[구미시|선산군]]-[[군위군]] 선거구에 출마([[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신현확]] 후보와 [[신민당(1967년)|신민당]] [[김창환(정치인)|김창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는 등 정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기사는 거의 쓰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1978년 [[유신정우회]]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다.
16대 총선 낙선 후 김윤환은 민국당의 대표를 맡아 당을 추스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이때부터 그의 몸에는 2년 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암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회창에게 토사구팽을 당한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아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쳤다. 당시 김윤환을 만났던 [[최병렬]]의 말에 따르면 함께 [[스테이크]]를 시켜놓고는 썰어놓지도 않은 채로 한 시간이 넘도록 이회창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고 한다. 암이 자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이후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약세와 [[자유민주연합]]의 패망으로 나름대로의 입지를 살려 3당 연합(혹은 DJP 재연합)에 낄 수 있었지만, 2001년 10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로 DJP 연합이 완전히 붕괴되자 유일한 지역구 의원 [[한승수]]도 탈당해버렸다.[* 한승수는 무소속 의원 신분으로 외교통상부 장관직을 유지하다가,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하자 7월 장관을 사퇴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이회창 후보의 외교담당 특별자문이 되었다.] '''이 시기 "호남이 밀어 주는 영남 대통령론"으로 [[이회창]]을 패망시키는 정치공학적 구도를 구상했고 [[듣보잡|이 때까지만 해도 인지도가 낮아 가능성이 없다]]이라고 여겨졌던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노무현과 김윤환이 협력하는 일은 없었고[* YS에게 팽당한 5공, 유신 세력을 포용한 김대중과는 달리, 노무현은 3당 합당 당시부터 보여주었던 자신의 원칙대로 옛 군부 정권 시절 인사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대신 자신과 뜻을 함께했던 주변 사람들을 세웠다. 5공 시절부터 킹메이커로 이름을 날린, 그것도 TK의 좌장이나 다름없던 김윤환이 노무현과 연합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던 셈.] 김윤환 본인은 대선 직후 [[신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2114|#]]
|| 1978 ||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 '''[[유신정우회]]''' || - || '''당선''' || ||
- 이기택 . . . . 3회 일치
=== [[10월 유신|유신]] 시대 ===
|| 1971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3선거구)[* 부산 동래구 을] || '''[[신민당(1967년)|신민당]]''' || '''34,471 (65.89%)''' || '''당선 (1위)''' || 1972.10.17 자격박탈[br]([[10월 유신]]) ||
- Victoria II . . . . 2회 일치
몇차례 개혁을 해서 서구화 진척도를 채운 다음 서구화를 하면 문명국이 된다. 일본의 경우에는 "초기 메이지 유신" 디시전과 "메이지 유신" 디시전의 효과로 빠르게 서구화를 달성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비문명국 입문자용 튜토리얼 국가로는 보통 일본이 추천되는 편이다.
- 여정남 . . . . 2회 일치
'''여정남'''(呂正男, [[1944년]] [[5월 7일]] ~ [[1975년]] [[4월 9일]])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이다. 유신정권 시기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민청학련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희생자이다.
* [[1972년]] [[11월 10일]] 유신반대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
- 영천시 . . . . 2회 일치
고대에는 [[골벌국]]이라는 [[소국]]이 있었다. 여담으로 고구려 사람인 백석이 김춘추와 김유신을 속여 고구려로 데려가고 있을 때 세 산신이 여인으로 나타나 백석의 의도를 알려줘 김춘추와 김유신이 위기를 모면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나오는데 이 이야기의 배경이 바로 영천(당시 이름 골화천)이다.
- 윤식 . . . . 2회 일치
| 경력 = [[국민대학교]] 교수 <br /> [[서울대학교]] 강사 <br /> [[인하대학교]] 강사 <br /> [[홍익대학교]] 강사 <br /> [[국방대학원]] 강사 <br /> [[경기대학교]] 강사 <br />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br /> 사단법인 4월회 회장
{{제10대 간선대표 제3기 유신정우회}}
- 장재훈 . . . . 2회 일치
* [[유신고등학교]]
[[분류:198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한화 이글스 선수]][[분류:신흥중학교 (인천) 동문]][[분류:인천서흥초등학교 동문]][[분류:유신고등학교 동문]][[분류:경희대학교 동문]]
- 장헌식 . . . . 2회 일치
[[1946년]] [[1월 3일]] 이왕직 재산 관련 공금횡령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이때까지도 출국하지 못한 [[일본]]인 이왕직 회계과장 사이토 치로(齋藤治郎)와 함께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ref name="jigga">"전 李王職 장관인 張憲植 수감명령", 자유신문 1946년 01월 03일자, 2면 10단</ref> 그는 반성의 기미가 없었고, 과거 일본 정치하에서 있었지만 그래도 고관대작으로 있었는데 어찌하겠느냐고 대응하였다. 검찰관들은 분노했고 방청석을 분노하게 했다.<ref name="jigga"/> [[1월 16일]] [[보석금]]을 내고 보석출감하였다.<ref>"張憲植 보석출감", 자유신문 1946년 01월 16일자, 2면 5단</ref>
- 궁가 . . . . 1회 일치
일본의 미야케는 [[메이지 유신]]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천황가의 정통과 너무 멀어진 가문은 궁가의 자격을 잃고 정리하게 되었다. 현재는 소수의 가문만 남아 있으며, 그나마 모두 천황가와 마찬가지로 남성 적손이 부족하여 단절될 위기에 있다.
- 김동준(제국의아이들) . . . . 1회 일치
* [[동네변호사 조들호(드라마)|동네변호사 조들호]](KBS, 2016) - 김유신 역
- 김성겸(탤런트) . . . . 1회 일치
* [[쓸쓸하고 찬란하神 - 도깨비]] - 유신우
- 김성곤 . . . . 1회 일치
그러나 자신의 영향력을 과신한 나머지 1971년 민주공화당의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등과 함께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가결시킨 '''[[10.2 항명 파동]]'''을 일으켰다. 박정희 분노를 산 김성곤 회장은 [[길재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랑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범죄)|고문]]을 당하고, 정계에서 쫓겨났다. 당시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이 뽑힐 정도로 수모를 당했고, 심지어 시중에는 개처럼 두들겨 맞아서 생으로 변을 지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오죽했으면 신민당에서 문제삼으며 정권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살해했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3선 개헌 이후에 소위 4인체제의 힘이 커지자 기회만 보고 있던 박정희가 항명파동을 계기로 싸그리 숙청해버린 것이다. 집권당 국회의원도 박정희한테 반대하면 잡혀가서 개처럼 두들겨 맞는다는 것을 본 이후에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과 정권내에는 박정희한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고 완벽한 1인 독주체제가 된다. 이 때문에 노골적인 종신집권 의욕을 보인 [[10월 유신]] 때는 집권세력 내에선 전혀 반대가 없었다.
- 김양 (1953년) . . . . 1회 일치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하였고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성장한 그는 [[백범 김구]]의 손자이며, [[대한민국의 공군참모총장|공군참모총장]]·[[대한민국 건설교통부|건설교통부]] 장관·[[유신정우회]] [[국회의원]]과 [[중화민국|중화민국 타이완]] 주재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대사]] 등을 지낸 [[김신 (1922년)|김신]]의 둘째 아들이고, [[김진 (1949년)|김진]]의 동생이기도 하다. 본관은 [[구 안동 김씨|안동]](安東)이다.
- 남기애 . . . . 1회 일치
| 유신영
- 남창희(연예인) . . . . 1회 일치
MBC 예능 마이리틀텔레비전에서 작명 가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이름을 '남유신'으로 바꿀 뻔했다.
- 돈가스 . . . . 1회 일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서양인의 체격을 따라잡기 위해 육식을 허용[* 일본은 675년부터 1872년까지 포유류 고기를 먹는걸 금지했다.]했다. 하지만 10세기 넘게 고기를 먹지 않았던 일본인들이 고기에 적응할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인들 입맛에 맞는 고기 요리가 만들어지는데 그 중 하나가 돈가스다.
- 마츠자카소 . . . . 1회 일치
본래 [[에도 시대]]까지 일본에서 소는 [[농업]]용으로만 길러졌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소고기를 먹게 되었고, 이때부터 마츠자카 지방은 육우의 산지로 유명해졌다. 1958년에 마츠자카 육우협회가 창설되었으며, 1974년 부터 소 한마리를 개체 단위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 무라하치부 . . . . 1회 일치
이러한 자검단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 농촌에서 보유하고 있던 대량의 무기이다. 에도 시대에는 신분지배의 상징적인 관점에서 무기를 몰수하는 조치가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거의 명분상의 것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무라에서 칼, 창, 총, 활 같은 무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신불에게 헌납한다는 목적, 혹은 맹수 피해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인정되었다. 심지어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상당한 양의 무기가 농촌에 보유되어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GHQ에 위한 무장 해제 정책, 극좌, 극우 혁명의 위험에 대비하여 경찰의 강력한 무장 해제 조치를 통하여 사라지게 된다.
- 박상돈(정치인) . . . . 1회 일치
이후 [[유신사무관]]으로 근무하면서 [[대한민국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지방행정국 지방기획과장,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충청남도 [[아산시|아산]][[군수]], 대천시장, [[서산시]]장, 충청남[[도청(행정)|도청]] 기획실장 등을 지냈다.
- 박정근 (법조인) . . . . 1회 일치
*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73년 4월 27일에 연인인 카바레 종업원에게서 사업자금 145만원을 빌렸다가 빚 독촉을 받게 되자 소요산으로 유인해 15미터 바위 아래로 떨어트려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심리 미진을 이유로 파기환송된 사건에서 "소요산으로 유인해 가는 것을 산 입구에서 보았다는 증인들의 진술만 가지고 강도살인했다는 것에는 잘못이 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3년 4월 27일자</ref> 8월 8일에 덕성여대 유신숙 살해한 이상균에 대해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무죄,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파기환송심에서 무죄, 대법원에서 다시 파기환송된 사건을 맡아 강간치사죄를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73년 8월 8일자</ref> 1974년 2월 22일에 고려대학교 NH회를 중심으로 민우지를 발간하여 내란음모를 했다는 사건 항소심에서 김낙중 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장 등 9명에게 항소를 기각하면서 징역7년 자격정지7년에서 징역1년 자격정지1년 집행유예3년을 선고하고 징역2년6월 자격정지2년6월을 선고받은 피고인 2명에게는 원심을 깨고 집행유예4년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4년 2월 22일자</ref>
- 박정수(정치인) . . . . 1회 일치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천시-금릉군-상주군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의 [[백남억]] 후보를 누르는 한편 무소속 [[정휘동]] 후보와 동반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참고로 부인 [[이범준(동명이인)|이범준]]은 1973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이 되어 남편 박정수보다 일찍 정계에 입문하였다. 1979년 6월 [[이후락]], [[최치환]],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변정일]], [[김수(정치인)|김수]], [[박용기]], [[함종빈]], [[윤재명]], [[정휘동]], [[임호(정치인)|임호]], [[임영득]], [[한갑수(정치인)|한갑수]], [[홍성우(1941)|홍성우]], [[권오태]] 등과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 백낙청 . . . . 1회 일치
1962년부터 [[서울대학교]] 영문과에 부임하였고, 1966년부터 계간지 《[[창작과비평]]》의 편집인을 맡아 진보적 평론활동으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74년 유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해직되었으나, 1980년 복직되었고, 2003년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이후에도 통일운동의 일선에서 일하며 2005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2007년 대통령 선거에는 범여권후보 단일화운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 산킨고타이 . . . . 1회 일치
이러한 인질 정책 때문에 오히려 다이묘의 가족(본처와 적자)들은 지방 영지에 내려가지는 것이 금기시 됐다. 그래서 다이묘들은 지방에 [[첩]]과 [[서자]]를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막부 말기에는 이 금제가 해제되었는데, 그 때문에 인질 걱정없이 반란을 일으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본래 영지가 지방에 있는 다이묘가 '상경'하는 현대의 관점에 맞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후기에는 오히려 본래 수도 출신이었던 다이묘가 지방으로 '하향'하는 이미지에 가깝게 된다. 다이묘들은 대부분 에도에서 태어나서, 유년기를 에도에서 지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적자가 대를 이을 수 없는 경우가 되서 지방에 있던 서자가 대를 이어받게 된 경우라면 '상경'하는 이미지가 될 것이다.
- 원피스/819화 . . . . 1회 일치
* 와노쿠니는 메이지 유신 직전의 일본을 모티브로 한 듯 하다.
- 유동근(배우) . . . . 1회 일치
* KBS <삼국기>(1990): 계백 역.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에 패배.
- 육홍균 . . . . 1회 일치
1972년 제헌동지회 소속 전직 국회의원들과 [[10월 유신]]을 지지하였다.
- 은혼/613화 . . . . 1회 일치
가츠라가 주장한 동맹론은 허무맹랑하게 들리지만 사실 현재 지구측에서는 달리 대안도 없다. 또 가츠라의 원본 카츠라 코타로는 일본의 개항과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인물로, 지구가 최초로 외계 행성과 동맹을 맺게 된다면 나름대로 역사재현이 되는 셈이다.
- 이갑성 . . . . 1회 일치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유신사, 1920)
- 이만섭 . . . . 1회 일치
[[1980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이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자 과거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출신과 [[유신정우회]] 출신 인사들을 주축으로 한 [[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의 창당에 참여하였다. 제11·12대 국회의원에 연속으로 당선되었고 [[1985년]]에 [[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의 총재를 지냈다.
- 이민우(배우) . . . . 1회 일치
* 연산군의 맏아들 세자 - [[설중매]]에서 연산군의 맏아들인 세자 역을 맡았다. 극 중에서 연산군의 큰어머니인 승평부부인 순천 박씨(엄유신 역) 집에서 양육된다. (84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 [[설중매]] 편)
- 이소선 . . . . 1회 일치
이소선은 노동운동을 시작한 후 노동교실을 열고 노동자를 교육하고 동시에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도 함께 하였다.
- 이진주 (1678년) . . . . 1회 일치
** 매부 : 유신석(柳申錫)
- 장남교 . . . . 1회 일치
메이지 유신 시기였던 1871년 제정된 호적법에서, 장남은 가독(家督, 호주의 권리와 가문의 재산)을 승계할 권리를 최우선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 전일수 . . . . 1회 일치
* [[유신고등학교]]
- 전재용 . . . . 1회 일치
*** 사촌동생: 전유신([[1970년]] ~)
- 정무식(정치인) . . . . 1회 일치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울릉군]]-[[영천시|영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여 [[무소속]] [[권오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8년 초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12240032920101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12-24&officeId=00032&pageNo=1&printNo=9921&publishType=00020|뇌물수수 혐의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지종걸]] [[유신정우회]]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국회]] 농수산위원회 위원장 직무대리에 임명되었다.
- 정승화(육군) . . . . 1회 일치
* 소설 [[리턴 1979]]에선 [[최규하]] 대통령의 둘도 없는 군부 파트너로, 군부 내 2인자 [[장태완]]과 함께 '유신 체제를 이용한 국정 개혁'의 한 축이 된다.
- 지증왕 . . . . 1회 일치
[[지증왕설화]]는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과 《[[삼국사기]]》 김유신조에 수록되어 있다.
- 진헌식 . . . . 1회 일치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 정권에 반발하여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서명하고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 활동하였다.
- 최재성(배우) . . . . 1회 일치
[[2012년]] [[대왕의 꿈]]에서 [[김유신]]으로 캐스팅 되었으나 무릎을 크게 다치는 바람에 그 배역을 [[동이(드라마)|동이]]에서 [[장희재]]로 악명을 떨쳤던 [[김유석]]에게 넘겨주고 부상이 회복되자 극 중반부터 등장하는 계백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 토탈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건물 . . . . 1회 일치
* 해당 지방에서 신선조/유신지사를 고용할 수 있게 됨
- 토탈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유닛 . . . . 1회 일치
초슈 번의 유신 지사 타카스키 신사쿠가 조직한 군사 조직. 한국에서는 기병대(奇兵隊)라고도 불린다.
- 토탈워: 쇼군 2/가문 . . . . 1회 일치
일본의 명문 가문 중 하나였던 미나모토 가문에 뿌리를 둔 가문. 미나모토 가문 만큼은 아니었지만 시마즈 가문 또한 이름있는 가문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센고쿠 시대에서 살아남아 임진왜란에도 참전하고, 메이지 유신이 벌어지기 전까지 본거지인 사츠마를 지배했다. 그러니까 사무라이의 몰락에 나오는 사츠마의 번주들이 얘네 후손들이다.
- 통일주체국민회의 . . . . 1회 일치
유신정권 시기에 만들어진 선거인단 비슷한 것. 대통령을 선출하는 역할을 했다.
- 한규복 (1881년) . . . . 1회 일치
}}</ref> 일설에는 [[1949년]] [[4월 23일]] 한규복이 검거되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으나<ref>"한규복 등 검거", 자유신문 1949년 04월 23일자 2면</ref>, 그는 [[8월 12일]] 자수하는 편지를 [[반민특위]] 앞으로 부친 뒤 [[서울역]] 광장에서 자수 소감을 발표하였다.
- 한승조 . . . . 1회 일치
[[고려대]] 정치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정치학 박사를 딴 후, 1967년부터 1995년까지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다. 재임 중 정경대학장을 지냈으며, 퇴임 후 명예교수로 있다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는 글을 쓴 것이 문제가 된 후 명예교수직에서 사퇴했다. 한국유신학술원 회원, [[한국정치학회]] 회장, 국민윤리학회 회장, 보수단체인 [[자유시민연대]] 공동대표도 역임했다. <!--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보충 필요 --> 정년 퇴임 후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명예 교수에 선임되었다.
- 허화평 . . . . 1회 일치
'''그렇다면 왜 최태민을 잡아넣거나 재산을 몰수하지 않았느냐'''는 사회자의 반문에, 허화평은 [[박정희]] 대통령과 [[10월 유신]]의 결과물인 산업화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발언했다. 제5공화국의 첫 번째 과업이 박근혜와 최태민을 청산하는 일이었다는 말이다.[[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cid=1051768&iid=1140067&oid=449&aid=0000114843&ptype=052|#]] 파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를 제대로 수사해서 청산하지 않고 놔둔 것이다. 이것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와 비리의 온상이 [[새마음봉사단]]이라고 보았으며, 그 결과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를 제대로 드러내서 수습하지 못하고,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개인적인 관계를 끊어 달라는 수준에서 처리하고 묻어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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