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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람
         * [[유성원]]
  • 김시습
         * [[유성원]]
  • 김질 (1422년)
         [[조선 단종|단종]] 폐위 이후 [[1456년]] [[성삼문]]·[[박팽년]]·[[하위지]]·[[유성원]] 등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하였으나 마음을 바꾸어, 이를 [[조선 세조|세조]]에게 알렸다. [[1456년]]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운동에 김질이 가담하자, 장인 [[정창손]]은 이를 설득하였다. 김질은 거사가 성공하지 못할 줄로 알고 장인인 정창손에게 달려가 수시로 상의하였다. 그해 [[6월]] [[운검]] 설치가 취소되면서 일이 여의치 않자 불안감을 느꼈던 김질은 전향, 이 사실을 [[정창손]]에게 알렸다.
         김질은 장인 [[정창손]]에게 일부 집현전 학자들의 단종 복위 계획을 알리고고, [[정창손]]은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조선 단종|단종]]의 외삼촌인 [[권자신]](權自愼), [[성승]] 등이 가담했음을 확인하였다. 정창손은 이를 바로 [[조선 세조|세조]]에게 알렸다.
         * [[유성원]]
  • 박팽년
         [[조선]] [[조선 세종|세종]] 때인 14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황보인]]·[[김종서 (1383년)|김종서]] 등과 함께 [[조선 문종|문종]]과 [[조선 단종|단종]]을 보필하였다. 세종 말년에 [[신숙주]], [[성삼문]], [[윤기견]], [[윤회]], 김종서 등과 [[고려사절요]], [[고려사]]의 편찬과 간행에 참여하였다.[[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전후해서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1454년]]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1455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조선 세조|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안평대군]]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후, 그를 [[형조]][[참판]]에 임명하였으나, 세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1456년, [[형조]][[참판]]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질 (1422년)|김질]]의 밀고로 6월 2일 잡혀 갔으며, 고문 받던 중 6월7일 사망하였다.
         * [[유성원]]
  • 성승
         사후 그의 아버지 [[성달생]]의 묘 역시 연좌되어 [[부관참시]]되었다. 그의 아들 [[성삼문]], [[성삼빙]], [[성삼고]], [[성삼성]]과 손자 네 명이 모두 처형당하여 그의 후사는 끊겼다. 가까운 친척으로는 그의 사촌 [[성희]]의 후손들이 살아남아 현존하고 있다. 외손으로는 문화류씨 [[사헌부]][[감찰]] 유자미(<ref>사육신 유성원의 친척이며 성삼문의 손녀를 양육하여 자신의 며느리로 삼았다.</ref>柳自湄)의 아들에게 출가한 증손녀의 후손과 박림경에게 출가한 손녀의 후손이 현존하고 있다.<ref>모두 성삼문의 손녀딸과 딸이다.</ref>
         * [[유성원]]
  • 한명회
         * [[유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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