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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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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usader Kings 2/특성 . . . . 29회 일치
         === 외교력 ===
          * 외교력 +1
          * 외교력 + 3
          ''매력적인 협상가는 우아한 드레스와 설득력 있는 미사여구로 고위 관리를 감동 시킬 줄 아는 훌륭한 외교관입니다.''
          * 외교력 +6
          * 외교력 +9
          * 외교력 -1
          * 외교력 -1
          * 외교력 -1
          * 외교력 -1
          * 외교력 +1
          * 외교력 +1
          * 외교력 -2
          * 외교력 -1
          * 외교력 -2
          ''이 인물은 소심하고 숨어있길 좋아합니다. 외교적으로 불리합니다.''
          * 외교력 -2
          * 외교력 +2
          * 외교력 +1
          * 외교력 +2
  • 박근혜 . . . . 28회 일치
         === 외교 정책 ===
         2013년 4월 24일, 중국 외교부장이 윤병세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을 만났으며, "관련국들이 적극적인 조치를 내놓아 문제를 대화와 협상의 궤도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f name="news.sbs.co.kr">{{웹 인용 |url =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754349|제목 = 중국 외교부장, 대화 통한 한반도 문제 해결 강조|저자 = SBS뉴스|날짜 = 2013-04-25|확인날짜 = 2013-04-27}}</ref> 이어 중국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공정하고 책임있는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며,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안정,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의 원칙을 견지할 것이라고 밝혔다.<ref name="news.sbs.co.kr"/> 나아가 중국은 박근혜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혔고, 대한민국이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노력을 기울이길 바란다고 밝혔다.<ref name="news.sbs.co.kr"/>
         박근혜는 곧바로 조직 개편에 들어갔다. 우선 이명박 정부가 폐지했던 부총리직을 다시 만들었다. [[해양수산부]]를 신설하였고 교육과학기술부를 교육부와 [[미래창조과학부]]로 개편하고, 외교통상부를 외교부로 개편하였다. 또한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국토해양부를 국토교통부로 개편하였다. 그밖에 지식경제부를 산업통상자원부로, 농림수산식품부를 농림축산식품부로 개편하였다.
         |정상외교와 대북긴장 완화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 사건 여파, 한·아세안 6개국 정상회담의 외교 효과, 대한항공 ‘땅콩 회항’사건, 재미교포 신은미씨 ‘종북’ 순회 토크쇼 논란
         |경남도의 무상급식 중단,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 조문외교 효과, 부정부패 척결 의지, 호남 KTX 개통, 저소득층 금융지원 대책 마련
         |한일 정상회담 등 주초의 정상외교, 주후반 규제개혁 장관회의, 통일준비위원회
         |이란 경제 외교, 北 노동당 대회 관련 보도
         |‘전기요금 누진제,’ ‘3개 부처 개각’, ‘우 수석 논란,’ ‘사드 제3후보지’, ‘駐英 북한 고위외교관 한국 망명’
         |‘주영(駐英) 북한 고위외교관 한국 망명,’ 대통령의 ‘北 붕괴·테러 가능성’ 언급, 북한의 ‘핵 선제 타격 가능성’ 성명, ‘北 주민 서해 탈북’, ‘禹 수석 논란
         대통령 당선 후 경제 정책으로는 복지, 경제민주화, [[창조경제]]를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있으며, 장기침체된 경제에 대한 해법으로는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금융완화적 경기부양방안인 [[초이노믹스]]를 내세우고 있다.<ref>[국회 경제포럼] 근혜노믹스와 초이노믹스, 이혜훈 전 새누리당 의원, UCLA 경제학 박사, 이투데이 2014-09-03</ref> 대북정책으로는 원칙에 입각한 대응을 중시하며,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핵심 대북정책으로 하고 있으며, 북한의 비핵화를 기반으로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이룬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ref>‘신뢰’와 ‘비핵화’를 기반으로 ‘한반도 긴장 완화’ 이룬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외교안보정책 키워드는 ‘중용’, 피플투데이 2013년 05월 02일</ref>
         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은 임기 초반에는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ref>'진행형' 세월호참사 속 박근혜정부 1년6개월 맞아, 연합뉴스 2014.10.19</ref> 임기 중반으로 가면서도 일본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아 한미일과의 군사적 동맹에서 한국이 소외된다는 비판과 함께 외교정책이 중국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도 받아 왔다.<ref>美·中 갈등 심화… 박근혜 정부 '3대 외교 정책(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동북아 평화 협력 구상·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모두 꼬일 수도, 조선일보 2013.12.02</ref><ref>박 대통령 ‘친중 반일’ 이면엔 미·중 사이 줄타기, 경향신문 2013-10-09</ref> 여기에 중국 또한 일본과의 관계회복을 도모하는 쪽으로 외교정책을 선회하여, 박근혜 정부 들어 동북아에서 한국만이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다는 우려도 있다.<ref>[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945437 유연해지는 중국의 대일 외교, 우리는, SBS뉴스 2015.04.24]</ref><ref>[http://www.hankookilbo.com/v/374aee9c3ef94bacbe98e033f3245f76 말 한마디 못한 채… 한국 외교 속수무책, 한국일보 2015.04.27]</ref> 박근혜 정부의 대일 외교정책은 과거사 문제 해결 없이는 한일관계를 개선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으나, 일본의 아베 정권과 미국의 오바마 정부가 철저한 전략적 외교로 실속을 챙기는 가운데 한국만이 외교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ref>[http://news.jtbc.joins.com/html/407/NB10872407.html 고도의 외교술로 실속 챙긴 아베…한국외교는 수렁에, JTBC, 2015-04-30]</ref><ref>[http://kr.wsj.com/posts/2015/04/30/%EC%95%84%EB%B2%A0-%EC%B4%9D%EB%A6%AC%EC%9D%98-%EB%8A%A5%EC%88%98%EB%8A%A5%EB%9E%80%ED%95%9C-%EC%99%B8%EA%B5%90%EC%88%A0-%EB%B0%95%EA%B7%BC%ED%98%9C-%EB%8C%80%ED%86%B5%EB%A0%B9-%EC%95%95%EB%B0%95/ 아베 총리의 능수능란한 외교술, 박근혜 대통령 압박, 월스트리트저널, 30. April 2015]</ref><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5051959901 박근혜 정부, 미-중 사이 갈팡질팡…아베의 '친미 외교'에 완패] 한국경제 2015-05-19 </ref>
  • Victoria II . . . . 17회 일치
         POP들의 투쟁성이 높아지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반란의 원인은 다양하다. 특정 민족의 민족주의자들이 독립 전쟁을 벌인 걸수도 있고, 특정 사상의 지지자들이 정권 정복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걸수도 있다. [[태평천국 운동]]이나 [[붉은 셔츠단]] 처럼 이벤트로 발생하는 반란도 있다. 이념 반란의 경우에는 수도를 점령하면 정부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 이 경우 모든 외교관계가 초기화되니 주의. 당신 땅을 탐내고 있었지만 동맹국 때문에 침략하지 못하던 적국이 전쟁을 벌일 수 있다.
         === 외교 ===
         외교 행동을 하는데에는 외교 점수(Diplomatic Point)가 필요하다. 외교 점수는 기본적으로 0.3씩 들어오며, 특정 기술을 개발해서 수입을 늘릴 수 있다. 주요 열강은 외교 포인트를 두배로 더 받는다. 가능한 외교 행동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 동맹 형성(Form Alliance) : 1외교 점수를 소모해서 동맹을 제안한다.
          * 동맹 해체(Dissolve Alliance) : 1외교 점수를 소모해서 해당 국가와의 동맹을 파기한다.
          * 군사 통행권(Military Access) :1외교 점수를 소모해서 해당 국가의 영토를 자국 군대가 지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 군사 통행권 취소(Cancel Military Access) : 1외교 점수를 소모해서 해당 국가 영토 군사통행권을 반납한다.
          * 군사 통행권 주기(Give Military Access) :1외교 점수를 소모해서 자국의 영토를 해당 국가 군대가 지나갈 수 있게 할까 요청한다.
          * 관계도 증가(Increase Relations) : 2외교 점수를 소모해서 해당 국가와의 관계도를 살짝 올린다.
          * 관계도 감소(Decrease Relations) : 1외교 점수를 소모해서 해당 국가와의 관계도를 살짝 내린다.
          * 전쟁 지원금(War Subsidies) : 1외교 점수를 소모해서 전쟁중인 국가에게 지원금을 제공한다.
          * 선전포고(Declare War) : 1외교 점수를 소모해서 전쟁을 선포한다. 명분이 있어야만 할 수 있다. 전쟁 명분은 만들어진지 1년 내로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 전쟁 합리화(Justify War) : 전쟁을 벌일 명분이 없다면 만들면 된다. 1외교 점수를 소모해서 해당 국가와 전쟁을 벌일 명분을 주작해낸다. 전쟁 명분을 만드는 동안 다른 나라들에게 걸릴수도 있는데, 이 경우 취소되지는 않지만 악명이 증가한다. [[https://www.chapelcomic.com/52/|그런데 진짜 잘 들킨다.]]
  • 오준 . . . . 17회 일치
         {{다른 뜻|[[오준 (1587년)|대한민국의 외교관|조선의 문신 오준(吳竣)]]}}
         |출생일 = {{출생일과 만나이|1955|10|4}}<ref name="이력서">{{언어링크|ko}} {{인용|chapter-url=https://archive.is/7iEfk |chapter=1056 재외공관장 인사_첨부.hwp |title=재외공관장 인사 〔제10-56호 보도자료〕 |publisher=[[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인사운영팀 |date=2010-01-28 |url=http://archive.is/GjVKV |archiveurl=https://archive.is/7iEfk |archivedate=2018-09-16 |accessdate=2018-09-16}}</ref>
         아버지는 독립 유공자로서 외교부의 창설 멤버인 [[오우홍]] 미국 초대영사이며, 어머니는 건국대학교 학장을 역임한 [[진인숙]] 여사다. 어머니의 고향이 [[개성시|개성]]이고 장인도 함경도에서 월남한 실향민이라 평소 북한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고 한다.<ref>{{서적 인용|저자=정희순|제목=오준 유엔대사 특별 인터뷰|날짜=2015년 2월|출판사=우먼센스|url=http://navercast.naver.com/magazine_contents.nhn?rid=1089&contents_id=82676}}</ref>
         1978년 외교부에 입부하여 외교관 생활의 3분의2 이상을 [[UN]] 등 다자외교 분야에서 근무했다.
         * 1992년 7월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 외국어교육과 과장
         * 1999년 외교안보연구원 안보통일연구부 연구관, 부이사관
         * 1999년 7월 ~ 2001년 외교통상부 외교정책실 ASEM업무담당 심의관
         * 2001년 ~ 2003년 외교통상부 외교정책실 국제기구 제2심의관
         * 2003년 ~ 2005년 외교통상부 외교정책실 국제기구 정책관
         * 2007년 8월 외교통상부 장관 특별보좌관
         * 2008년 3월 외교통상부 다자외교조정관
  • 황준국 . . . . 12회 일치
         '''황준국'''(黃浚局), [[1960년]] [[12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외교관]]이다. <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01&aid=0008220815 |제목=<프로필> 황준국 주영국 대사|출판사=연합뉴스|날짜=2016년 2월 29일}}</ref>
         * 외교통상부 의전1담당관
         * 외교통상부 국제연합과 과장
         * 외교통상부 국제기구협력관
         * 외교부 북핵외교기획단장
         * 외교부 장관특별보좌관
         * 외교부 한미방위비분담협상 대사
         *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전임자 = [[임성남 (외교관)|임성남]]
         |전임자 = [[임성남 (외교관)|임성남]]
         |직책 = [[한영 관계#외교관 목록|주 영국 대사]]
  • 전인범 . . . . 11회 일치
         전인범은 [[1958년]] [[9월 6일]]에 [[서울특별시]]에서 [[한의사]]인 아버지 전주화와 [[외교관]]인 어머니 [[홍숙자]]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ref name="a">이혜민. 201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62&aid=0000009617 “부하들 적진 보내는 날 올까 두려웠다.”] 『新東亞』 통권 684호, 154-163.</ref> 유년 시절의 대부분은 서울에 살았으며, 1965년 부모의 이혼 후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인 모친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4년 동안 [[뉴욕]] [[맨해튼]]에서 생활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833122 [오래전 ‘이날’] 11월 20일 양파가 눈물 흘린 98 수능], 《경향신문》, 2017년 11월 20일</ref> 1969년 귀국한 뒤에도 그의 모친은 그가 영어를 잊지 않도록 [[AFN Korea|AFKN]]을 주로 시청하게 했으며 저녁식사 때만큼은 영어로 대화하게 했다. 그 또한 『[[:en:Reader's Digest|리더스 다이제스트]]』, 『[[:en:Newsweek|뉴스위크]]』, 『[[:en:Time (magazine)|타임]]』과 같은 시사 잡지를 빼놓지 않고 읽으며 어릴 때부터 국제관계에 대한 감각을 익혀나갔다.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미국 TV 프로그램 《[[:en:Combat!|Combat!]]》에 나오는 군인 샌더스 중사를 동경하던 그는 12살 때 외삼촌에게 “군인이 되려면 육군사관학교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육사 진학을 꿈꾸게 되었다. 그 뒤 [[리라초등학교|리라국민학교]]와 [[대경중학교 (서울)|대경중학교]]를 거쳐 1977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37기로 입교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0813572 [人脈] 경기고등학교 출신 군장성들‥ 문·무겸비 군실세… 뜨는 KY그룹], 《한국경제》, 2005년 6월 26일</ref> 육사 동기생 중 성적이 꼴찌에서 두 번째였으나 영어 시험은 만점을 받았던 그는 1981년 4월 3일 육군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한민국 육군|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1986년 30사단 90연대 2대대 중대장 시절에는 육군의 우수 전투중대장에게 주는 [[강재구|재구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초급 지휘관으로 중대원들의 사격 훈련 중 소총 사격 영점을 못 잡는 병사를 데려다가 실탄을 주고 자신은 표적지 앞에 서서 사격을 하게 해 영점을 잡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ref name="c">[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742447 ‘제설작업 하고, 전역사병에게 경례’ ‘괴짜장군’의 퇴임식], 《서울신문》, 2016년 7월 29일</ref> 군사정권 시절 그가 중대장을 역임한 부대는 대학생들의 데모가 일어나면 연세대학교를 점령하는 부대였는데, 그는 국민을 보호해야하는 군인이 대학생을 진압하라는 명령에 많은 갈등을 했다. 그래서 원래는 데모 때 중대장이 맨 뒤에 서서 진압을 지시하게 돼 있는데 그는 맨 앞으로 나가서 돌 맞더라도 제일 먼저 맞고 죽으려고 했다고 과거를 회고하였다.<ref name="b">[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2140702 [단독] 전인범 "내 문제, 문재인에게 부담 안 돼... 아내, 구시대 법에 걸려든 것"], 《오마이뉴스》, 2017년 2월 9일</ref> [[소령]]으로 진급한 뒤에는 육군참모총장실에서 정책장교 및 군사외교협력장교 보직을 받아 많은 통번역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2년 한미연합사령관 [[:en:Robert W. RisCassi|로버트 리즈카시]] 대장으로부터 [[:en:Commendation Medal#Army|육군표창훈장]](Army Commendation Medal)을 받았다. [[중령]] 때에는 한미연합사 작전참모부 연습처 을지포커스렌즈 연습장교를 맡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연합모의 연습을 기획하고 실행한 공로로 2002년 [[:en:Meritorious Service Medal (United States)|근무공로훈장]](Meritorious Service Medal)을 받았다.
         2015년 6월 뉴 웨스트민스터 대학(New Westminster College)의 특별연구원(Distinguished Fellow)으로 선정되었다.<ref>[http://newwestminstercollege.ca/lieutenant-general-in-bum-chun-phd-distinguished-fellow-of-new-westminster-college Lieutenant General In-Bum Chun, BA, MS, MA, PhD, MSM, BSM, LM, NSM], 《New Westminster College》, 2015년 6월 16일</ref> 뉴 웨스트민스터 대학 총장 로버트 굿윈 3세는 “그는 윤리적 리더십에서 괄목한 성과를 내었고 교육훈련에 평생 동안 헌신해왔다”며 “현 세계의 국가적 안보 위협에 대한 이해는 그가 정부의 국제적, 국가적, 지역 단위 이해관계자들의 민군 상호운용성과 방위협약에 대한 가치 있는 통찰력을 갖추게 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리더십, 외교와 사이버 보안에 관한 연구의 설계와 전달에 있어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것이다. 위원회와 나는 그가 우리 뉴 웨스트민스터 대학의 새로운 특별연구원이 된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인범 중장은 특별연구원으로서 학문적 수월성의 최고위 기준에 대한 지원에 공헌해왔고, 뉴 웨스트민스터 대학과 연구원들의 세계적인 조직망 발전에 헌신해왔다고 알려졌다. 이 대학의 특별연구원으로는 필리핀 대통령 [[피델 라모스]], 체코 대통령 [[바츨라프 클라우스]], 캐나다 국방참모총장 대장 [[:en:Ray Henault|레이 헤노]] 등이 있으며, 특별연구원으로 선정된 인물 125명 가운데 한국인은 그가 최초이다.
         이에 앞서 그는 2월 4일 문재인 후보가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자신의 저서인 《대한민국이 묻는다》를 주제로 연 북 콘서트에 국방·안보분야 패널로 참석<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9006981 문재인, 경희대서 '대한민국이 묻는다' 북 콘서트], 《연합뉴스》, 2017년 2월 4일</ref>, 문 후보를 가리키며 “이분하고 함께하면 우리나라 안보를 든든히 하고 한미 관계를 튼튼히 해 우리 국민들이 앞으로 걱정없이 살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있었다. 문 전 대표는 빨갱이가 아닌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하며 문재인 캠프 합류 선언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2352238 특전사령관 출신 전인범도… 문재인 캠프 ‘전방위 수혈’], 《한겨레》, 2017년 2월 5일</ref> 3성 장군 출신의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이 전례 없는 여론의 각광을 받자 조선일보는 “[[송영무]], [[박종헌]] 등 참모총장 출신 4성 장군 두 명을 포함, 장성 10명이 문재인 캠프에 참여했을 때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 그만큼 ‘의외’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고 평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3&aid=0003252738 [만물상] 야당으로 간 특전사령관], 《조선일보》, 2017년 2월 7일</ref> 후일 전인범 영입을 기획한 것은 전적으로 문재인 후보의 작품임이 밝혀지기도 하였다.<ref>박성현. 2017.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7089 “[집중분석] 파격인사! 문재인 대통령의 용인술(用人術).”] 『월간중앙』 201707호, 20-25.</ref> 당시 그를 영입하고자 다가온 많은 정치계 인사들에게 그는 군 개혁에 대하여 강하게 호소했으나 어느 누구도 그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이가 없었고, 그중 유일하게 진지하게 들어준 사람이 문재인 후보였기에 안보자문 합류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문재인 대선 경선 캠프에서 호감형은 아니었다는 그는 문재인 캠프 내의 안보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군 복무도 제대로 안 한 사람들이 무슨 안보자문이냐”고 일갈했다는 일화가 있다.<ref>[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8/02/02/2018020200018.html [컬럼] 특전사 다목적대검 사태를 바라보며... #2], 《뉴데일리》, 2018년 2월 13일</ref> 자문위원 직은 맡았으나 [[더불어민주당]]에는 입당하지 않음을 강조한 그는 외교·안보 문제에 대해 문재인 전 대표와 차이가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21&aid=0002546436 '文측' 전인범 "사드, 中 경제 압력 굴복 않아야"(종합)], 《뉴스1》, 2017년 2월 6일</ref> 이와 관련해 [[THAAD|사드]] 한반도 배치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의 경제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기존 한미 정부 간 합의는 존중한다는 두 가지를 선언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동안 한중관계를 고려해 사드 배치 재검토를 주장해온 야권과는 결이 다른 의견을 표명한 바 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144&aid=0000474843 문재인 캠프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사드 해법’ 제시], 《스포츠경향》, 2017년 2월 7일</ref> 이에 문재인 전 대표도 “사드 배치는 차기 정부로 넘겨 국회 비준 등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서도 “한미간 합의가 이뤄진 것이라 쉽게 취소하기 어렵다”며 유연한 입장을 취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69&aid=0000186840 “中 경제적 압력 굴복 말고, 美와 사드 합의 존중해야”], 《한국일보》, 2017년 2월 6일</ref> 그의 문재인 캠프 합류에 실망한 일부 보수세력의 거센 비난이 쏟아지자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충분히 분노하시는 마음을 이해합니다”라며 “제가 이번 결심의 결정적 이유는 지난번 특전사에 갔는데 그간 추진했던 많은 사업들이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특히, 7만원짜리 특수작전 칼([[:en:Survival knife|서바이벌 칼]])을 부결시켰다는 얘기를 듣고 조용히 살 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문재인 지지 선언의 이유를 설명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3&aid=0003252237 文 캠프 합류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페친 5000명 중 28명 이탈했다"], 《조선일보》, 2017년 2월 5일</ref> 친정인 군을 향한 비판에 육군은 공식 브리핑에서 “특전사 장병들이 생존용으로 사용하는 특수작전 칼을 당초 7만원씩에 구입하려고 했으나 더 나은 15만원짜리로 구입하기로 하고 2022년까지 모두 18억500만원을 예산에 편성했다”고 해명했으나, 2017년 예산에는 특수작전 칼 예산이 거의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5&aid=0002683233 전인범과 육군의 ‘칼 싸움’], 《중앙일보》, 2017년 2월 7일</ref> 육군 관계자는 시범사업으로 구입했다가 나중에 평가에서 합격해야 향후 5년간 18억원으로 칼을 구입하게 된다는 뜻에서 “올해는 시범사업으로 소량만 구입할 예정이며 예산은 5000만원”이라고 재차 해명했다.
         그러나 그의 5·18 발언을 문제 삼은 정치권에서 부인인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이 학교 공금 횡령 혐의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은 것까지 싸잡아 공격하며 논란이 불거지자<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3143692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 부인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 징역 1년 법정구속], 《세계일보》, 2017년 2월 8일</ref>, 그는 광주 항쟁에 대한 표현의 부족으로 심려를 끼쳐 사과드린다는 말과 함께 다시 미국 연수과정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5&aid=0002684649 文 영입 전인범 자진사퇴 "5·18 발언 백번천번 송구… 미국 돌아가겠다"], 《중앙일보》, 2017년 2월 10일</ref> 그는 “저는 다시 미국 연수과정으로 돌아가 북핵을 바라보는 엄중함과 심각함, 오랜 동안 지속돼온 혈맹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 이를 통한 더욱 굳건한 한미 동맹관계 발전이라는 문 전 대표의 안보관을 알리는 데에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멀리서나마 문 전 대표와 대한민국의 승리를 기원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문재인 후보 측 관계자는 “누를 끼친 데 대한 글을 올리시고 미국에서도 돕겠다고 한 것은 ‘자숙’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하며 “안보, 군사 분야에 대한 자문은 계속 하실 것”이라고 언급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7763546 文측, 전인범 미국行에 '선긋기'… "본인 판단"], 《뉴시스》, 2017년 2월 10일</ref>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틀 후 청와대 관계자는 “대선 과정에서 공을 들여 영입한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이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라인 구상의 한 축이었는데 그가 중도 하차하면서 인사가 꼬였다”고 발언함으로서 [[문재인 정부]]는 출범과 함께 그를 중용할 계획이었음을 나타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2&aid=0003172701 한반도 상황 긴박한데… 외교안보 라인 인선은 '설왕설래'], 《세계일보》, 2017년 5월 12일</ref>
         1년 간의 미국 연수 기간 동안 그는 케네소 주립 대학교, 템플 대학교, [[:en:Foreign Policy Research Institute|외교정책연구소]] 등 미국 전역의 대학과 연구소, 로펌을 찾아 한반도 갈등이 미국 국민들의 일상에 미칠 파급력에 대해 강연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9&aid=0004025928 한국전쟁 미국에도 도움안돼… 참화 막을 외교적 노력 필요], 《매일경제》, 2017년 10월 8일</ref> 2017년 10월 8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강연을 하기 전에 먹고 사는 문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그는 실용적인 문제부터 언급하는 것이 평범한 미국인들에게 한반도 갈등이 미국에 어떤 경제적 영향을 미칠지를 효과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세계를 상대하는 최강대국이자 선진국이나 미국인들 또한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며, 이렇게 경제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통해 한국의 입장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진솔하게 얘기하는 것이 나라를 지키고 애국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9&aid=0004025816 "북핵 위협 우려하는 미국인들, 코리아패싱 현상도 심각"], 《매일경제》, 2017년 10월 8일</ref> 한 달 후인 11월 13일 [[2017년 판문점 조선인민군 병사 귀순 총격 사건|판문점 조선인민군 병사 귀순 총격 사건]] 당시 귀순한 오청성 하사가 국군에 의해 구출될 때까지 생존해 있을 수 있던 것은 북한 신속대응군 추격조가 오 하사를 급히 쫓느라 호흡 조절에 실패해 급소를 가격하는 소위 ‘킬 샷(kill shot)’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1&aid=0002334661 <정충신의 밀리터리 카페> “뛰어온 北추격조 숨 헐떡여 급소 못 맞혀… 천운”], 《문화일보》, 2017년 11월 24일</ref> 전 전 사령관은 “CCTV 영상을 보면 전력 질주하는 오 하사를 쫓느라 AK 소총을 든 두 북한 경비병은 300m 이상, 권총을 든 두 경비병 추격조는 200m 이상 전력 질주했다”며 “추격조는 최정예 특수부대원으로 구성되지만 오래 뛰다 보니 총을 쏠 때 호흡이 안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오 하사가 추격조의 사격에 노출된 시간은 10초가 채 안 돼 정확한 조준 사격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그 덕에 심장, 대동맥, 정동맥 등 출혈을 많이 일으키는 곳이나 신경계인 머리 척추와 같은 급소를 맞지 않아 살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총탄은 몸에 박히면 여러 갈래로 쪼개지면서 간이나 비장, 폐 등 장기에 손상을 주도록 설계된다”며 “그런데 오 하사와 추격조 간 거리가 살상 효과가 높은 50m보다 짧아 관통한 총알이 많아서 살상 효과가 충분히 발휘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총탄이 몸을 관통할 경우 출혈을 빨리 멈추게 하고 패혈증만 막으면 살릴 확률이 높아진다”며 급소만 피하면 총알이 몸에 박히는 것보다 관통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 2010. 2. [[경남대학교|경남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 1993. 육본 참모총장실 군사외교협력장교
  • 트로피코 4/칙령 . . . . 11회 일치
         == 외교부 ==
         외교 정책은 25개월의 쿨타임이 있다. 연달아 여러 정책을 발표할 수는 없다.
          * 외교부 장관 필요
          * 외교부 장관 필요
          * 외교부 장관 필요
          * 외교부 장관 필요
          * 운영되는 공항, 외교부 장관 필요
          * 운영되는 공항, 외교부 장관 필요
          * 미국과 최고의 관계, 외교부 장관 필요
          * 소련과 최고의 관계, 외교부 장관 필요
          * 성당, 외교부 장관 필요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 . . . . 10회 일치
          공업력을 소비재에 할당해 생산하는 자원. 외교 활동비, 첩보 활동비, 연구진 임금, 디시전 비용 등으로 소모된다.
          강경파↔온건파. 강경파에 가까울수록 불만도 증가율, 생산 시간, 생산에 필요한 공업력이 감소한다. 하지만 외교활동에 소모되는 자금이 많아진다.
          간섭주의↔고립주의. 간섭주의에 가까울수록 외교활동과 첩보활동에 소모되는 자금이 감소하고, 여러 외교적 활동이 가능해진다. 또한 첩보 효율도 증가하며, 상대 국가에 선전포고를 하기 위한 명분(상대국가의 호전도)의 필요성도 감소한다. 또한 선전포고로 생기는 불만도 증가율도 감소한다. 하지만 평화시 상대 국가와의 우호도 회복률이 낮아진다.
         == 외교 ==
         호전도는 해당 국가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깡패인지를 의미한다. 호전도가 높다는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핍박하는 일을 많이 했다는 뜻이므로 외교에 불이익이 붙는다. 호전도는 국가를 해방시키거나 괴뢰국을 해방시키거면 내려간다.
         한 국가에 외교 활동을 하면 일정 시간동안 해당 국가에 외교 활동을 할 수 없다. 외교관이 대상 국가에 다녀오는 동안 기다려야하기 때문.
          자국의 외교에서 할 수 있는 행동. 자신의 점령지에 자신과 정치 슬라이더가 똑같은 괴뢰국을 세운다. 괴뢰국은 자체적으로 군대를 생산하고 주인에게 자원을 바치며, 다른 국가와 무역이나 협상을 맺을 수 없다. 호전도가 낮아진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장관 . . . . 10회 일치
          * 부정적인 효과: 자금 생산량 -50%, 인력 증가량 -5%, 외교 비용 +50%
          * 부정적인 효과: 외교 비용 +10%
          * 부정적인 효과: 외교 비용 +20%
          * 긍정적인 효과: 자금 생산량 +20%, 모든 병력 조직력 +5%, 보병 사단 생산 비용 및 시간 -5%, 기갑 & 화포 연구 시간 -5%, 보급품 소모량 -15%, 영향력 행사 성공률 +10%, 협상 성공률 +10%, 외교 비용 -10%
         주로 외교 비용에 영향을 주는 인물들. 변경시 불만도가 2% 상승한다.
          >참모는 전직 군인으로, 참모진에서 전략을 강의하던 사람일수도 있다. 이제 그는 언제나 "취미"였던 외교 분야에 자리를 잡았다. 참모는 그의 낡은 군사적 정치 관점을 따르는, 군사력으로 이루어지는 외교에 특화된 인물이다. 그 때문에 참모는 단세포적이고, 상상력이 부족하며 지루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위대한 타협가는 모두가 좋아하는 느긋하며 쾌활한 인물이다. 그는 현자같은 늙은이일수도 있고, 오랜 시간 일해온 요령 있고 경험 있는 전문 외교관일수도 있다. 그는 오래갈 우정을 만들 수 있으며, 공동의 목표를 위해 모두를 단합할 수도 있다.
          >베일에 싸인 책략가는 비밀스러운 인물이다. 이 인물은 특이한 방법을 선호하며, 굼뜬 먹잇감을 이용해먹기 위한 약점을 꾸준히 찾는다. 이 인물은 비밀 부서 출신일수도 있으며, 그 때의 경력으로 교활하고 정보가 적은 인물이 되었을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베일에 싸인 책략가는 위대한 외교관은 아니다.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원하는 것을 이뤄낼 수도 있다.
          >정치 전문가는 "전문적 외교관 직원"을 이용해 적을 상대로 방첩 작전을 펼친다.
  • 윤휘 . . . . 10회 일치
         '''윤휘'''(尹暉, [[1571년]] - [[1644년]])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조선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호종, [[조선 인조]]를 도와 적진인 [[청나라]] 진영을 왕래, 교섭하며 설득과 화의를 추진하였고, 환도 뒤 도승지가 되어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였다.
         과거 급제 후 삼사의 요직을 거쳐 1613년(광해군 5) 계축화옥에 관련, 삭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1618년 동지겸진주사(冬至兼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이 [[명나라]]에 구원군을 보낼 때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론을 지지했다가 [[인조반정]] 직후 파면되었다. [[1626년]] 복관되고, 성주목사, 청주목사 등을 지냈다. 그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어가를 [[남한산성]]까지 호종하였고, 주화론에 참여하여 [[조선]]측 대표로 [[청나라]]군과의 사이를 오가며 타협을 주관,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환도 뒤 도승지가 되어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였다.
         === 관료 생활과 외교 활동 ===
         ==== 외교 활동 ====
         한편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인 외교를 펼칠 때, [[강홍립]], 임연(任兗) 등과 함께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적극 지지하였다.
         ==== 외교 활동 ====
         이후 [[조선]] 조정의 특명전권대사로 [[청나라]]군과 [[남한산성]]을 오가면서 화의 교섭을 노력, [[청나라]]군사들을 설득시키고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환도 후 [[도승지]]에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였고, 사신으로 [[청나라]]와 [[명나라]]를 여러 번 다녀왔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조선]]의 정벌 여론을 무마시키기도 했다. [[1638년]]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를 거쳐 [[조선 인조|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책봉[[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책봉 고명을 받아왔다. 그러나 귀국 도중 [[담배]](南草)를 [[가마]]속에 숨겨갖고 왔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사신직에서 파직당했다.
         [[분류:1571년 태어남]][[분류:1544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서예가]][[분류:조선 광해군]][[분류:조선 인조]][[분류:병자호란 관련자]][[분류:정묘호란 관련자]][[분류:해평 윤씨]][[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병사한 사람]]
  • 한확 . . . . 10회 일치
         |직업= 문신, 정치인, 외교관, 작가
         '''한확'''(韓確, [[1400년]]<ref>1403년생 설도 있다.</ref> ~ [[1456년]] [[음력 9월 11일]])은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외척, 외교관이며 [[명나라]]의 문신이다.<ref>{{브리태니커|b24h3077a|한확}}</ref>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이며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조선 덕종|덕종]]의 비이자 [[월산대군]]· [[조선 성종|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와 [[조선 세종|세종]] 서자 [[계양군 (왕족)|계양군]]의 부인인 [[정선군부인]]의 친정아버지이다.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 [[여비 한씨]], [[선덕제|선종]]의 후궁 공신부인은 그의 넷째, 다섯째 누이이다. 검소하고 청렴하였으며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조선 세조|세조]]의 즉위를 도왔고, [[1418년]]의 [[세종]]의 책봉 고명과 [[1455년]] [[조선 세조|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왔다. 그는 누이들이 황제의 후궁인 점을 활용하여,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둘째 딸은 [[조선 세종|세종]]의 서자 [[계양군 (왕족)|계양군 증]]에게 출가하였고, 여섯째 딸은 [[조선 세조|세조]]의 장남 [[조선 덕종|의경세자]]의 비 [[인수대비]]로서 [[조선 세종|세종]], [[조선 세조|세조]] 2대에 걸쳐 사돈이 되었다. [[한명회]]의 일족이다.
         ==== 세종 책봉고명과 외교 활동 ====
         [[1453년]](단종 원년)에 [[계유정난]]이 성공하면서 [[정난공신]]으로 책록된 뒤 [[우의정|우의정부사]]로 발탁되어 서성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이어 [[계유정난]] 당시 [[명나라]]에서 외교적인 문제를 제기할 때 [[명나라]] 사신을 설득하여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정치적 입지를 탄탄히 하였다. [[계유정난]]의 성공 이후 수양대군을 도와 그해 11월 좌찬성이 되었다가 다시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의정부 우의정 서원 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작되었다.
         한확은 세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충신이었다. 그는 그의 누나가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이 되면서 명나라 황실의 벼슬을 받고 외교채널이 된다.<ref name="ky">[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96702 <nowiki>[</nowiki>王을 만나다·16<nowiki>]</nowiki>서오릉-경릉 ( 추존 덕종·소혜왕후) : 남존여비 '女訓'과 상반된 '여성상위능'] 경인일보 2010.01.14</ref> 그리고 누이동생 또한 명나라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간택돼 더욱 외교적 입지를 다지게 된다. 사실 한확의 두 누이이자 인수대비의 고모들은 명나라에 공녀로 바쳐진 가슴 아픈 사연을 지녔다. 한확은 계유정난 때 세조를 도와 정난공신 1등에도 올랐는데 세조의 왕위 찬탈을 승인하지 않던 명나라에 들어가 단종이 왕위를 물려준 양위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한확은 골치 아픈 외교 문제를 해결하였다.<ref name="ky"/>
         넓은 도량과 온간(溫簡)한 성품으로 상하의 신망이 있었으며, 명나라 황실과의 유대와 공정하고 결단성 있는 정사로 외교와 내치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아우 참의공 전이 일찍 죽자 아버지 없는 어린 조카들을 데려다가 내 자식과 같이 양육하였다.
         [[분류:1400년 태어남]][[분류:1456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왕족]]
  • 한승주 (공무원) . . . . 9회 일치
         |장르 = 국제정치외교행정교육학 저술
         '''한승주'''(韓昇洲, [[1940년]] [[9월 13일]] [[경기도|경기]] [[경성부|경성]] - )는 대한민국의 교육인, 외교학자, 외교관,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외무부]] 장관, 주미 대사를 지낸 대한민국의 외교관이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1978년]]부터 교수로 재직한 외교학자이다.
         [[1962년]]에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청와대는 2003년 4월 한승주를 주미대사로 서둘러 내정하였다. 여기에는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진용을 가급적 빨리 구축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당시, 북핵 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대두됐으나 양성철 당시 주미대사는 3년의 임기를 거의 마쳐가고 있는 상태였고 가능한 한 빨리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었다. 이런 상태에서 한승주가 국내 인사로는 드물게 미국내에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으며,1993년 북핵 위기 때는 외무부 장관으로서 평화적 해결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점도 고려돼 발탁된 것으로 알려졌다.<ref>{{뉴스 인용 |제목 =북핵해결 위한 美지명도·인맥 고려…한승주 주미대사 내정 배경 |url =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18951804&code=11121200 |뉴스 = 국민일보 |날짜 = 2003-03-27 }}</ref> 이리하여 [[2003년]] 4월부터 [[2005년]] 2월까지 제19대 주미대사를 지냈다.
  • 함병춘 . . . . 9회 일치
         '''함병춘'''(咸秉春, [[1932년]] [[2월 26일]] ~ [[1983년]] [[10월 9일]])은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이자 외교관, 법학자이다. 한국의 법사회학을 전문으로 연구하였다. 제3대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의 아들이고, 25년 연상으로 농림부장관, 강원대학 학장을 지낸 [[함인섭]]의 이복 삼촌이다.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순방길에 동행했다가,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피폭되어 사망하였다. 본관은 [[강릉 함씨|강릉]](江陵), 아호는 창은(滄隱) 또는 고송(苦松)이다.
         미국 유학 후 귀국, 1959년부터 70년, 1979년 10월부터 1983년 6월까지 [[연세대학교]] 법학 교수로 재직, 강의하였으며, 한국 사회의 법사회학, 한국인의 법에 대한 태도 등을 전문으로 연구하였다. [[1970년]] 대통령 [[박정희]]의 요청으로 대통령 정치담당 특보, 외무부 본부대사, 대통령 외교담당 특보를 역임했다. [[1973년]] [[12월]]부터 [[1977년]] [[6월]]까지는 [[주미한국대사]]로 부임하였다. 다시 교단에 섰다가 [[1983년]] 대통령 [[전두환]]의 부름을 받고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으며, 그 해 전두환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5개국 순방길에 동행했다가 [[10월 9일]] [[버마]] [[아웅산 국립 묘지]] 방문행사 예행연습 중 피폭되어 사망했다.
         [[1970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외교안보 담당 특별 보좌관 및 잇달아 정치담당 특별 보좌관이 되었다. 1973년 12월 31일 하오, 한국 정부는 함병춘 대통령 정치담당 특별 보좌관을 [[주미 한국 대사]]로 임명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1040032920102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1-04&officeId=00032&pageNo=1&printNo=8698&publishType=00020| 제목 = 駐美大使에 咸秉春씨 임명 | 날짜 = 1974-01-04| 출판사 =경향신문 }}</ref> [[1974년]]에 주미 대사로 부임하였다.
         [[1977년]] [[6월]] 임기를 마치고 귀국, [[외무부]] 본부대사로 전임되었다가 1979년 [[1월 12일]] 대통령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10·26 사태]] 이후 다시 연세대학교 법학 교수로 복직하여 법철학, 동양법제사, 법인류학 등을 강의하였으며 [[12월 17일]] 다시 [[최규하]]대통령에 의해 대통령 외교안보특보로 기용되었다. 1980년 8월 2일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에 위촉되었다. [[1981년]] [[8월]] 다시 연세대학교 법학 교수로 출강했다가 다시 [[1982년]] [[6월]]에 [[전두환]]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이 정치 전문가가 아니라 외교분야에서 활동한 것을 들어 거절했고 [[이순자]]가 공식 석상에서 활동하는 것을 전두환의 면전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이학봉]] 비서관을 보내 함병춘을 설득했다.
         독립 운동가이며 대한민국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의 막내 아들이며, 장남 [[함재봉]]은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미국 랜드연구소 한국정책석좌를 거쳐 현재 아산정책연구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며 차남 함재학은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이다.<ref>{{뉴스 인용|인용=실제로 우리 모두는 함대사의 장남인 함재봉 연세대 교수가 93년 10월 몇몇 학자들과 함께 부친 의 유고를 모아 책을 발간하자 매우 기뻐했다. 「한국의 법, 정치 그리고 문화」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의 영문 유고는 이미 86년 연세대 출판부에서 발간했었다. 이 책은 근대 한국을 이해하고자 하는 서구인들이 반드시 읽어볼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역저라고 생각한다. 둘째 아들 재학군도 부친의 위업을 따라 법률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외교부 안에서도 [[영어]]로 미국인, 영국인을 설득할 수 있었던 인물이라는 평가와 충분하지 못한 행정경험으로 다소 빛이 덜 났다는 평도 있다.
  • Europa Universalis 4/공략/유럽 . . . . 8회 일치
         시작지점부터 선제후기에 오스트리아와의 외교가 용이하며, 폴란드와도 가~끔씩 폴란드가 브란덴부르크에 라이벌을 거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폴란드가 친밀한 의사를 드러내기에 동맹이 어렵지 않다. 일단 추천되는 스타팅은 포메른 정복미션을 얻어낸 다음 폴란드-오스트리아 동맹을 한후에 튜튼기사단을 폴란드에게 땅을 빌미로 끌여들여 공격하거나, 폴란드가 공격할때 따라나서는 방향으로 가자.
         우선은 그러므로 오스만과 오스트리아로 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동맹부터 구해두는게 가장 중요한데, 프랑스와 폴란드, 아라곤등이 여기에들어가 있을 확률이 높다. [* 다만 최신패치부터 폴란드가 리투아니아와의 동군연합을 거절하는 경우가 생겼는데, 이럴경우 헝가리마냥 초반에 사기장수가 없는 폴란드는 박살날 가능성이 높다. 혹시나 이런 경우가 생기면 재시작하자(...)] 구호기사단에 걸어둔 독립보장은 괜히 오스만과의 1대1맞다이를 강요하게 하니 관두면서 본토와 달마티아 지방을 육로로 연결하는데 주력하자. 아, 그리고 상인공화정은 영토가 20개이상이 되면 부패도 (corruptions)가 오르기에 그거 줄인다고 수입이 줄어든다. 1.16이후로 외교력 100을 소모해서 상인공화정도 정부체제를 바꿀 수 있으니, 적당히 확장해뒀다 싶으면 바꿔두자.[* 부패도 감소비용을 없앨수도 있으나, 테크비용이 늘어나기에 최종적으로 국력이 약해진다.]
         초반에 저지대 국가 셋(플랜더스, 홀란드, 브라번트)을 동군연합휘하에 두고 있다. 그리고 느베르를 속국으로 가지고 있으며, 브로타뉴랑 동맹이다. 이것때문에 전통에 외교관계+1이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그나마 시작지점 군주인 선량공 필리프의 능력치가 555로 [* 이게임에서 군주의 최대 능력치는 666이다. 일단 여기에 시작지점에서 가장 근접한 군주는 [[세종]]과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 정도.] 좋다만 그다음 후계자인 샤를의 능력치가 204(...) 이것때문에 외교테크 올리기 꽤나 힘들다. 다만 그렇다고 못올리는 수준은 아니니 외교관계수에 주의하면서 적절한 동맹을 구하자. 일단 시작지점에서 좋은 동맹으로는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역사적 라이벌이기에 가끔 시작지점에서 라이벌로 찍지 않는 이상은 동맹하기 어렵지 않다.], 카스티야, 아라곤등이 있다. 그뒤 교황령이 제발 빨리 프로방스에 파문에 걸기를 기대하면서 기다리자. 아비뇽때문에 백프로 이둘은 사이가 좋지 않을것이고, 교황령은 프로방스에 파문을 걸것이다. [* 파문이 걸린 국가의 땅을 먹으면 AE가 50퍼센트 더 적게 늘어난다.] 교황령이 프로방스에 파문을 걸면 바로 프로방스에 그걸 명분으로 공세를 취해서 로레인에 속하는 지방[* 메프, 로트링겐, 바]를 모두 먹어두자.[* 시작지점에서 프로방스와 프랑스가 동맹상태일텐데, 어차피 프랑스 시작부터 프로방스에 왕위주장을 걸기때문에 동맹은 풀린다. 동맹 푼 틈타서 먹으면 됀다.]
         이게임의 또다른 주인공이자 [* 플레이어가 오스만이 아닐경우] '''중간보스''' 시작시부터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이게임 최고의 꿀땅인 콘스탄티노플을 먹을 수 있어서 상당히 강력하다. 또다른 특이점으론 콘스탄티노플노드를 사실상 장악하고 있어서 사실상 자금력에서도 최강급. 거기다가 콘스탄티노플이 자동적으로 터키 문화권+ 수니파로 개종하는 이벤트, 예니체리 이벤트 [* 타락 이벤트도 가지고 있다. ~~쓸데없이 고증에 충실.~~]등 자기만의 이벤트나 전용 미션도 더럽게 많이 들고 있다. 다만 그렇다고 좋다고 초반부터 헝가리같은 동유럽쪽으로 확장하려들다간 반국가연합걸려서 망할 수 있으니(...) 우선은 유럽쪽은 발칸반도정도만 먹어두고 맘루크와 카라 코윤루를 패면서 서아시아+ 이집트지방부터 먹는걸 추천. 아니면 정교회로 개종하는 방법도 있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를 먹어두면 발칸지방은 콘스탄티노플빼면 전부 정교회이므로 개종이야 어려운 편은 아니다. 이경우엔 동군연합을 노릴 수 있으며 결혼이 되어서 외교가 훨씬 편하단게 장점. 몇몇사람들은 라구사까지 먹어둬서 가톨릭 개종후 신롬황제를 노리기도 한다. ~~진정한 카이세리 룸!~~
         폴란드의 문제점은 외교다. 북쪽의 튜튼 기사단은 역사적 라이벌 보정이 있고 남쪽의 오스만도 자주 폴란드를 라이벌 지정하며 헝가리 역시 폴란드를 싫어하는 경우가 잦다. 동쪽의 모스크바 역시 폴란드의 숙명의 라이벌. 그러므로 확장방향을 잘잡아야 되는데, 우선은 보헤미아와 헝가리중 폴란드를 라이벌 지정하지 않은 국가들중 하나와 동맹하고 빠른 속도로 리투아니아와의 동군연합 이벤트를 띄운뒤 튜튼 기사단을 공격하자. 꾸물대다 튜튼 기사단이 보헤미아와 헝가리중 하나랑 만이라도 동맹하면 이기기 힘들다.[* 전에는 튜튼 기사단이 보헤미아와 헝가리 둘다 동맹해두지 않는 이상은 폴-리투 성립만 하면 무조건 이길 수 있었지만 리투아니아 개발도 너프부턴 그게 매우 힘들다.] 그 이후론 최대한 빠르게 모스크바를 패가며 동진하자. 조금이라도 꾸물대다간 국가이념으로 물량+50퍼로 미친듯한 물량을 보여주는 모스크바를 보게 될것이다(...) 모스크바를 패가며 루스문화권지방을 평정했으면 유럽에서 적수는 없을것이다. 폴란드도 우주에 갈 수 있다는걸 보여주자.
         우선 시작지점에서 공위상태인데, 헝가리의 왕이 오스만과의 바르나전투에서 패배해서 그렇다.[* 같은 이유로 폴란드와 보헤미아도 공위상태다.] 오스트리아와 시작하자마자 동맹을 해두고 약간만 기다리면[* 앞에 오스트리아와 동맹해두고를 적었지만 꼭 오스트리아와 동맹안해둬도 일어난다. 어차피 역사적 친구보정덕에 냅둬도 동맹을 걸고] 000섭정의회로 갈지, 야노슈 후냐디를 섭정으로 세우는지[* 능력치 455]가 갈릴텐데 능력치도 후자가 더좋고 역사적이기까지 하므로 얌전히 야노슈를 섭정으로 올리자.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도가 깎이겠지만 역사적친구보너스 덕에 이거 가지고 동맹이 풀리거나 동맹을 못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 이후 보헤미아와 튜튼기사단중 헝가리를 라이벌로 삼지않은 국가와 동맹하고 폴란드가 튜튼기사단을 치길 기대하자. 리투아니아 개발도 너프전엔 폴란드가 거의 프랑스급으로 쎘지만 너프이후론 야노슈가 이끄는 헝가리군정도에 기사단 둘정도면 해볼만해질정도다.[* 다만 한타한번 밀리면 끝장이긴하다(...)] [* 만약 튜튼이 헝가리를 라이벌로 삼았다면, 독립보장을 걸어두자. 방어전 한정으로 따라서 싸울수 있다.] 그리고 이걸 하기전에 가장 중요한건 일단 미리 외교탭으로 가서 폴란드가 들고 있는 지방중 일부를 관심지역으로 지정해두는것. 전쟁기여도가 높으면 관심지역중 일부를 주는(아니면 전부!) 경우가 있으므로 굉장히 유용하다. 이상태로 10년이 지나고 헝가리왕의 후계자가 없으면 [* 만약에 생겨버렸으면 1470년까지 어떻게든 후계자를 없애야 한다. 후계자가 좋을경우엔 그대로 합스부르크가로 유지하면 되지만.] 두가지 선택지가 생기는데, 첫번째는 야노슈의 아들인 마챠시 1세를 왕으로 세우는것이고, 두번째는 랜덤한 합스부르크국가에게 동군연합되는것이다.
  • 유승민(정치인) . . . . 8회 일치
         유승민은 [[경제학]] 박사 출신의 경제전문가로 알려져 있지만, 제18~19대 국회에서 8년 연속으로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했고, 특히 19대 국회 전반기에는 국방위원장으로도 재직했다. 당시 경선 상대였던 황진하 의원(육군 중장출신)과 맞붙을 당시 '''"병장이 장군을 이겼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국방위원회]]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위원회 같지만, 19대 국회에서 국방위원회 활동을 했던 김광진 의원에 따르면, 첫 번째로 지역구 예산을 챙겨주기 어려우며, 두 번째로 완전하지 못한 민군통제원칙에 인한 제약, 마지막으로 피감기관이 적고 언론 노출이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에 비인기 위원회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후반기에는 국회 정보위원도 겸임하였고 외교통상위원회에서도 활동하였다. 경제학자 출신답게 2013년에는 새누리당 사회적경제특위 위원장을 겸임하기도 했다.
         경제, 국방, 외교통상의 삼박자를 고루 거친 탓에 각 분야에서 웬만한 전문가급 식견을 가졌다고 평가받고, 그 때문인지 국방정책 관련으로도 주목할 만한 주장을 간간이 내놓기도 한다. 그리고 모 신문사에서 매년 평가하는 '국감 스코어보드'에서 유승민 의원은 항상 최상위권에 등재되어 유승민 의원의 국방관련 식견이 상당히 탄탄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국방위원장을 지낸 후 국회 운영위원장으로 옮기기 전 잠시 외교통일위원회에서 활동하였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청와대 얼라들' 발언으로 외교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을 질타하였다. 또한 "'왜 사드를 배치하는데 [[중국]]이 난리냐"'며 사드의 국내도입에대해 강경한 찬성 입장을 보였다. 또한 [[박근혜 정부]]의 한미 전작권 재협상을 대선공약 파기라고 인정하며 "박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고 비판하였다. 이 사건으로 [[친박]] 세력들로부터 비난을 들었다. 약 9개월 남짓한 외교통일위원회 활동이였지만 유승민 의원은 NGO 국감모니터단 선정 우수국감의원, 그리고 경실련에서 선정한 외통위 국감 우수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4101012503606329|유승민 의원 질의에 외교장관, 통일장관 진땀]]
         [[THAAD]] 배치가 결정되자 "[[칠곡군]]에 배치하면 수도권 방어가 어렵다"고 주장하며 사드 2~3포대 추가배치를 주장하였고, 후에 [[성주군]] 배치로 결정된 7월 12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 "TK에 배치돼도 감당해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8536495|유승민 "사드, TK에 배치돼도 감당해야"(연합뉴스)]] 또한 사드 문제로 인해 방중했던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에게는 매우 부적절한 처사이며 굴욕외교를 하고 있다고 이례적으로 매우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 2014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 우수의원
  • 태영호 . . . . 8회 일치
         [[북한]]의 [[외교관]].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의 공사로 활동했으며, 2016년 8월 [[탈북]]했다. 탈출 과정에서 '태용호'라는 가명을 썼다.
         === 외교관 ===
         20년간 중요 외교관으로 지내던 태영호는, 2016년 갑작스럽게 탈북하게 된다. 태영호는 2016년 여름 임기를 마치고 평양에 복귀할 예정이었다. 태영호와 친분이 있었던 [[BBC]]의 스티브 에번스 한반도 특파원은, 개인적으로 태영호와 만나면서 직전까지 탈북을 하려는 어떤 눈치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외교관으로서 태영호는 런던의 극좌단체 행사에 참가하여 북한을 옹호하는 연설을 했으며, 언론이 북한에 대하여 자극적인 보도만을 일삼는다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태영호는 영국 내의 탈북자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2016년 8월 17일, 갑자기 영국에서 고위급 북한 외교관이 탈북했다는 소식이 퍼졌으며 곧 그가 태영호 영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가족과 함께 탈북한 태영호는 한국 [[망명]]행을 택했는데, 1997년 이집트 주재 북한 대사 장승길이 망명한 이래 최고위급 외교관의 탈북이었다.
         외교부에 따르면 태영호의 탈북 요인은 "김정은 체제에 대한 염증, 그리고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동경, 그리고 자녀와 장래 문제 등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태 공사의 자녀 중 북한이나 영국 현지에 남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이러한 경력 때문에 태영호는 북한에서 중시하는 [[출신성분]]이 매우 좋은 인물로서, 이 때문에 북한의 외교관은 통상 3년간 근무하지만 주영 북한 대사관에서 10년 동안 근무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태영호의 형 태형철 역시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서, [[김일성종합대학]]의 총장이다.--물론 태영호가 탈북한 이상 형 역시...--
  • 김종훈 (1952년) . . . . 7회 일치
         '''김종훈'''(金宗壎, [[1952년]] [[5월 5일]] ~ , [[대구광역시|대구]])은 [[대한민국]]의 외교관이었고, 제19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제8회 [[외무고등고시]]에 합격하여 [[1974년]]에 [[외무부]]에 입부하였다. [[노무현 정부]]부터 [[자유무역협정|FTA]]를 담당하며, FTA 협상 업무를 수행하면서, [[2008년]] 한미 FTA협상을 체결해낸 주역이다. 이후 [[칠레]], [[유럽]] 등과도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했다. [[외교통상부]]의 [[통상교섭본부]] 본부장을 역임했다.
         * 2007년 8월 ~ 2011년 12월 :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 2000년 ~ 2002년 : 외교통상부 통삽교섭본부 지역통상국장
         * 2013년 4월 : 새누리당 외교역량강화특별위원회 부위원장
         * 2012년 10월 ~ 2012년 12월 :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직능총괄본부 외교통상본부장
         [[분류:195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외교관]][[분류:통상교섭본부장]][[분류:옛 새누리당의 정치인]][[분류:바른미래당의 정치인]]
  • 이희근 (1929년) . . . . 7회 일치
          | 기타 이력 = [[대한민국 국방부]] 촉탁위원 <br/> 한국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 <br/> [[신민주공화당]] 국방외교안보행정특임보위원 <br/> [[자유민주연합]] 국방외교안보행정특임고문
         * 1989년 [[신민주공화당]] 국방외교안보행정특보위원.
         * 1990년 신민주공화당 국방외교안보행정특보위원 직위 퇴임.
         * 1995년 [[자유민주연합]] 국방외교안보행정특임고문.
         * 1996년 자유민주연합 국방외교안보행정특임고문 직위 퇴임.
         * [http://www.doopedia.co.kr/ Daum 조인스 데이터 사전 - 예비역 대한민국 공군 대장 이희근 前 자유민주연합 국방외교안보행정특임고문]
  • 황용식 . . . . 7회 일치
         * 1998 : 외교통상부 정책기획관<ref name="사전"/>
         * 1999 : 외교통상부 조약국장<ref>{{서적 인용|title=대한민국외교연표 |publisher=[[대한민국 외교통상부]] |date=1999 |page=118, 124}}</ref>
         * 2000 : 제 13대 주 튀니지 대사<ref name="60년">{{인용|title=헌국외교 60년 |url=http://www.mofa.go.kr/state/publication/history60/20100201/11369_file_2009%20dip60_appendix.pdf |archiveurl=http://web.archive.org/web/20160304094536/http://www.mofa.go.kr/state/publication/history60/20100201/11369_file_2009%20dip60_appendix.pdf |archivedate=2016-03-04 |publisher=[[대한민국 외교통상부]] |editor=외교안보연구원 교학과 }}</ref>{{rp|515쪽}}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상업 . . . . 6회 일치
          * 외교 영향력 +10%
          * 외교 영향력 +10%
          * 외교 영향력 +20%
          * 외교 영향력 +20%
          * 외교 영향력 +20%
          * 외교 영향력 +20%
  • 백남순 (1929년) . . . . 6회 일치
         |직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치인, 외교
         '''백남순'''(白南淳, [[1929년]] [[3월 13일]] ~ [[2007년]] [[1월 3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정치가]]로 [[조선로동당]]원이다.
         [[2006년]]의 [[동남아시아 국가연합]] 지역포럼에서도 회의에 출석하면서 사적으로는 요양을 계속하고 있었다. [[2007년]] [[1월 3일]]에 사망하였으며, 사인은 만성 신부전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외상으로 재임하던 중에 사망하였으므로, 상사에 해당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헌화를 받았다. 사망 당시 실질적인 외교 책임자는 [[강석주]] 제1 외무차관이었으므로, 사망 후의 외교 정책에 영향은 주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 [[외교]]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2007년 죽음]][[분류:청도 백씨]][[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분류:20세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장관]][[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분류:사회주의자]][[분류:공산주의자]][[분류:수원시 출신]][[분류:김일성종합대학 동문]][[분류:병사한 사람]][[분류:폴란드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분류:월북자]][[분류: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오재희 . . . . 6회 일치
         |직업 = [[외교관]]
         '''오재희'''(吳在熙, 1932년 ~ )는 대한민국의 제25대 [[대한민국 외무부|외무부]] 차관을 역임한 외교관이다. 본관은 [[해주 오씨|해주]]이며,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외무고시에 합격한 뒤, 주미·주일 공사, 주 파키스탄 대사,<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110700099201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3-11-07&officeId=00009&pageNo=1&printNo=5439&publishType=00020 | 제목 = 韓國, 파키스탄과 修交 | 날짜 = 1983-11-07 | 출판사 = 매일경제신문 | 인용문 = 政府는 7일 파키스탄 정부와 공식외교관계를 수립했다고 외무부가 발표했다. 外務部는 이날 발표에서 韓․파키스탄 국교수립으로 양국 주재 총영사관이 각각 대사관으로 승격되고 양국 주재 대사 임명에 앞선 잠정조치로서 吳在熙 駐파키스탄총영사와 자베드․마수드 駐韓파키스탄 총영사가 각각 대사대리로 임명됐다고 밝혔다. "}}</ref> [[대한민국의 외교통상부 차관|외무부 차관]], 주일 대사를 역임하였다.
         1991년 2월 19일, [[노태우 정부]]에 의해 주일 대사에 임명되었다. 오재희 대사의 기용은 그의 직업외교관 경력으로 미루어 자연스런 인사로 볼 수도 있지만 그가 [[노태우]] 대통령과 [[경북고등학교]] 동기동창이고 [[노재봉]] 총리의 매형, [[이상옥]] [[대한민국의 외교통상부 장관|외무부 장관]]과는 대학 동기 사이라는 학연, 혈연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었다. 성격이 꼼꼼하고 일처리가 치밀하며 빈틈없어 부하 직원들로부터 오검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외무고시]] 출신으로 첫 주일 대사이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021900329201007&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91-02-19&officeId=00032&pageNo=1&printNo=13971&publishType=00020 | 제목 =大使7명 이동 | 날짜 = 1991-02-19 | 출판사 = 경향신문}}</ref>
  • 허종 (1939년) . . . . 6회 일치
         '''허종'''(許鐘, [[1939년]] [[4월 29일]] ~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 공무원, 정치인이다. 본명은 허종욱(許鐘旭)이다. 독립운동가 겸 변호사, 정치인 [[허헌]]의 아들이며, 독립운동가 겸 여성 해방 운동가 [[허정숙]]의 이복 동생이고, 소설가 겸 작가 [[허근욱]]의 남동생, 소설가 [[박노문]]의 처남이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이 되어 각국 순회대사, UN 주재 [[북조선]] 대표단 부대사, 외교부 대변인, 다시 [[1994년]] 북조선과 미국 간 북미회담 시 외교단 대표, 그해 UN 주재 [[북조선]] 대표단 부대사, 외교부 순회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분류:허정숙]][[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홍세화 . . . . 6회 일치
         |학력 =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학사
         '''홍세화'''(洪世和, [[1947년]] [[12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작가이자,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학사 학위 이후,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2002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언론인, 작가, 교육인 등으로 활동하였다. 프랑스 망명 생활 중에 쓴 책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로 유명하다.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등을 지냈으며 2013년 계간지 <[[말과활]]>을 창간했다. 2011년 [[진보신당 (대한민국)|진보신당]] ([[노동당 (대한민국)|노동당]]의 전신) 당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7년]] [[10월]] 자퇴하였다. 그 뒤, 다시 재수하여 [[196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문리대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였다. [[1972년]]에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되었다가, 다시 복학하였으며, [[1977년]]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ref>동숭동에서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사회과학대학 소속으로 변경</ref> 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외교학 학사
  • 김진향 . . . . 5회 일치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였고, '한반도 통일에 관한 담론의 분석'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된 연구분야로는 북한 체제, 남북관계, 평화통일 등이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에서 시간강사 생활을 하다가 [[세종연구소]]에 들어가 객원연구위원으로 일했다.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제32대 통일부 장관 [[이종석 (정치인)|이종석]]을 만났다.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참여했고, 인수위원회에서 [[국가 안전 보장 회의]](NSC) 설계 작업을 했다. [[노무현 정부|참여정부]]에서 NSC 한반도 평화체계담당관으로 국정운영에 참여하여 남북 평화체계를 다루다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에서 더 폭넓게 남북관계를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여러 번 교섭과 협상을 했다. 학자 입장에서 북한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개성공업지구]] 근무를 자원했고 [[2008년]] 2월부터 4년간 [[개성]]에서 근무했다. 이 때 개성에서 발생하는 신청·세무·회계·세금·임금협상 등 북한과의 모든 협상을 담당하면서 거의 매일 북한 사람들과 부대끼고 토론하고 협상하는 경험을 했다.<ref>원희복.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3&aid=0000032094 (원희복의 인물탐구)카이스트 김진향 교수…종북을 각오하고 ‘북한’을 말하다]. 주간경향. 2016년 1월 16일.</ref>
         * 2004년 2월 ~ [[2005년]] 5월:[[대한민국 대통령비서실|대통령비서실]] 통일외교안보정책실 행정관
         * 대통령비서실 통일외교안보정책실 전략기획실 국장
         * [http://www.infinitelooper.com/?v=4b2WOGPKezY&p=n 유치원외교 그리고 개성공단]. 김어준의 파파이스(Papa is). 2016년 2월 19일.
  • 박동진 (1922년) . . . . 5회 일치
         '''박동진'''(朴東鎭, [[1922년]] [[10월 11일]] ~ [[2013년]] [[11월 11일]])은 [[대한민국]]의 외교관, 국회의원이다.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11대와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51년 외무부에 들어와, 의전국장, 주 영국 참사관, 외무부차관, 주 월남 대사, 주 브라질 대사(1962년 10월~1968 2월)<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82100329201006&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62-08-21&officeId=00032&pageNo=1&printNo=5173&publishType=00020 브라질 大使에 朴東鎭氏] 《경향신문》1962년 8월 21일, 1면. <!--“最高會議 第63次 常任委員會는 21日 越南共和國駐箚大使 朴東鎭氏를 「브라질」合衆國特命全權大使로,...”--></ref><ref>{{서적 인용 |저자 = 외교통상부 |제목 = 한국 외교 60년 |url = http://www.mofat.go.kr/state/publication/history60/20100201/11369_file_2009%20dip60_appendix.pdf |장 = 부록 |확인날짜 = 2015년 2월 21일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3211841/http://www.mofat.go.kr/state/publication/history60/20100201/11369_file_2009%20dip60_appendix.pdf |보존날짜 = 2016년 3월 3일 |깨진링크 = 예 }}</ref>{{Rp|496}}, 페루 겸임대사<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42900209201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4-29&officeId=00020&pageNo=1&printNo=13079&publishType=00020 朴東鎭브라질大使 駐『페루』大使兼任]〉 《동아일보》(1964년 4월 29일) 1면 <!--“政府는 駐「브라질」大使朴東鎭씨를 駐「페루」大使도 겸임토록 28일하오 國務會議에서 議決했다.”--></ref>, 주 제네바 대사, 주 유엔 대사,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외무부 장관, 국회의원(11대.12대), [[대한민국 통일부|국토통일원]] 장관을 역임했다. 외무부장관으로서, 1976년 3월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여, 리타우딘 말레이시아 외무부 장관과 양국간의 경제무역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03190032920101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03-19&officeId=00032&pageNo=1&printNo=9377&publishType=00020 |제목= 貿易強化에 합의...韓․말聯 공동성명 |출판사 = 경향신문 | 날짜 = 1976-03-19 |인용문=<!--朴東鎭외무부장관과 리타우딘 말레이시아외상은 19일 공동성명을 발표, 평화․자유․번영이라는 공동목표를 추진하기 위해 아시아 제국간의 협력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양국간의 경제무역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朴장관은 지난 17일부터 3일간 말레이시아를 공식 방문한 후 발표한 이 성명에서...--> }}</ref> 1988년 4월 22일 한국 정부는 박동진을 주미대사에 임명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422002092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4-22&officeId=00020&pageNo=1&printNo=20477&publishType=00020| 제목 = 駐美大使 朴東鎭씨| 날짜 = 1988-04-22| 출판사 = 동아일보}}</ref> 박동진은 당시 민정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이었으나, 주미대사로 부임함에 따라 의원직을 사퇴하였고, 민정당 전국구 예비후보 11번인 김종열이 5월 13일자로 의원직을 승계하였다.
         <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51100329202010&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5-11&officeId=00032&pageNo=2&printNo=13112&publishType=00020| 제목 = 金鍾烈씨 議員職승계 朴東鎭 駐美대사 사퇴 | 날짜 = 1988-05-11| 출판사 = 경향신문 }}</ref>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주 미국 대사, 한국전력공사 이사장, 1996년부터 한국외교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 [http://www.mofat.go.kr/mofat/mk_a007/mk_b041/mk_c90/1172571_27881.html 외교통상부]{{깨진 링크|url=http://www.mofat.go.kr/mofat/mk_a007/mk_b041/mk_c90/1172571_27881.html }}
  • 박정수(정치인) . . . . 5회 일치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3478><#FFFFFF><-5><:> {{{#003478 ''' 대한민국 ''' }}} {{{#003478 ''' 외교통상부 ''' }}} {{{#003478 ''' 장관 ''' }}} ||
         1932년 2월 9일 [[경상북도]] [[김천시|김천군]]에서 태어났다.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3학년이던 195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1958년 [[조지타운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65년에는 부인 [[이범준(동명이인)|이범준]]과 함께 미국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1968년 무임소장관 보좌관을, 1973년 [[국민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국제의원연맹 집행위원에 임명된 이듬해인 1996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월드컵]] 유치에 전념하겠다는 이유로 [[신한국당]] 전국구 의원직을 요구했다가 신한국당 수뇌부에 의해 거절당하였다. 이 상황에서 외교전문가 영입에 몰두하던 [[새정치국민회의]]에 전국구 의원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입당해 제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 의원이 되고 부총재를 역임한다.[* 이 당시 새정치국민회의에서는 박정수를 포함한 보수적 인사들을 영입하려 노력하였고, 그 결과 [[오유방]], 정희경 등 민주정의당 출신 인사들이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다.]
         1998년 3월 [[김대중]] 정부의 초대 외교통상부(현 [[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해 5월의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문화 개방 및 '''천황'''의 방한을 원하신다"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그리고 그 해 7월에는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원의 강제추방 사건에 맞대응해 서울 주재 러시아대사관원인 올레그 아브람킨 참사관을 강제추방한 것이 화근이 되어 5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경질된다. 이후 1998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에 복귀했다.
  • 뱌체슬라브 몰로토프 . . . . 5회 일치
         [[소련]]의 정치가, 외교관. --[[바텐더]].-- 1890년 3월 9일 생, [[러시아]] 쿠카르카(지금의 소베츠크) 출생. 1886년 11월 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
         정치가로서 인민위원회 의장(총리), 외무인민위원(외교장관) 등을 지냈다. 소련의 대표적인 [[외교관]]으로서, 20세기 역사를 조사하다보면 여기저기서 이름을 내민다. --스탈린의 충실한 외교용 딸랑이--
         === 외교관으로서 ===
  • 최광수 (공무원) . . . . 5회 일치
         | 경력 = 국방부 차관 <br/> 대통령 비서실 실장 <br/> 체신부 장관 <br/> 유엔 주재 대한민국 대사 <br/> 외무부 장관 <br/> [[자유민주연합|자민련]] 국방외교안보행정특임고문
         | 학력 =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 대학원 외교학과 [[사회과학]] [[석사]]
         제7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여 [[1956년]] [[2월]]을 기하여 외무부에 입부되었다. 그는 [[경기고등학교|서울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5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 대학원 외교학과의 [[외교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주미 3등서기관, 주일 2등서기관, 동북아주과장, 주미 참사관, 통상진흥관, 아주국장, 국방부 차관, 대통령비서실장, 제1무임소장관, 체신부장관, [[주사우디아라비아 대한민국 대사관|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 주유엔 대사, 외무부장관, [[하버드 대학]] 아시아문제연구소 초빙연구원([[1992년]]-[[1993년]])을 역임하였다.
         * [http://www.mofat.go.kr/mofat/mk_a007/mk_b041/mk_c90/1172573_27881.html 외교통상부]
  • 추미애 . . . . 5회 일치
         ||<#1870B9> '''{{{#FFFFFF 소속 위원회}}}''' ||<(> [[외교통일위원회]] ||
          * [[현재]] 국회 의원외교협의회 부회장(미국), 의원외교친선협회 회장(체코), 부회장(터키)
          * [[2016년]] [[제20대 국회]] 전반기 법제사법위원회, 외교통일위원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이었으나 2016년 8월 당 대표에 선출됨에 따라 상임위 활동이 어려워져, 상대적으로 부담이 작은 외교통일위원회로 이동(사보임)했다.] 위원
  • 태종무열왕 . . . . 5회 일치
         [[선덕여왕|선덕]](善德) · [[진덕여왕|진덕]](眞德) 두 조정에 걸쳐 국정 전반, 특히 외교 문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특히 [[진덕여왕]] 때는 [[이찬 (신라 관직)|이찬]](伊飡)에 이르게 되고 [[진덕여왕]] 사후 [[대리청정]]으로써 국인의 추대를 받은 [[알천]]의 사양으로 진골 출신 최초의 신라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그렇게 신라 중대왕실(中代王室)의 첫 왕이 된 [[김춘추]]는 아들 [[김문왕|문왕]](文王),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 (신라 관직)|이찬]](伊湌)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자기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이후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 외교 활동 ====
         * 한국과 중국, 일본을 누빈 외교가로서, 《일본서기》에는 [[고토쿠 천황]] 3년인 다이카 3년(647년)에 사신으로 왔던 김춘추에 대해 “용모가 아름답고 쾌활하게 담소하였다(美姿顔善談笑)”<ref name="일본서기-647"/>고 평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삼국유사》에도 무열왕이 병사를 청하러 당에 들어갔을 때, 당의 황제(태종)가 무열왕의 풍채를 보고 칭찬하여 "신성한 사람(神聖之人)"이라 부르며 그를 붙잡아두어 시위(侍衛)로 삼으려 했지만 극구 청하여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ref name="유사-기이1"/>
         신라의 '삼한통일', 나아가 그것에 처음 불을 당긴 김춘추의 대당 사대 외교에 대한 비판에서 주된 쟁점이 되는 것은, 과연 김춘추가 활동할 당시 혹은 그 이전에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 사이에 서로를 '동족'으로 인식하는 관념이 존재했느냐 하는 것이다.
         * 박순교, 《김춘추 외교의 승부사》 (푸른역사, 2006)
  • 토탈워: 쇼군 2/가문 . . . . 5회 일치
         주변 가문에게 존경받지 못해 외교에 패널티가 있다.
         현대의 나고야 근처에 위치한 가문. 난이도 어려움. 본거지 오와리. 동남쪽에 있는 도쿠가와 가문, 그 동쪽에 있는 이마가와 가문, 오다 가문의 북쪽에 있는 사이토 가문과 죄다 전쟁중이다. 오다 모리타카의 반란군도 있다. 서쪽에 있는 기타바타케 가문과는 무역 관계. 주변 가문에게 존경받지 못해 외교에 패널티가 있다.
          * 외교 관계 보너스
         불교의 한 분파인 일향종을 기반으로 한 농민 반란 세력. 에치젠을 본거지를 두며 카가도 다스리고 있다. 난이도 보통. 잇코라는 별개의 불교를 믿기 때문에 종교 차이로 인한 외교 패널티를 기본적으로 퍼먹는다. 그럼에도 아네가코지와 무역 중.
         게임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가문. 가문을 선택하면 나오는 영상도 서양인과의 접촉과 그로인한 철포, 기독교의 전파를 다루고 있다. 다들 신토-불교를 믿는데 혼자 기독교를 믿기 때문에 외교에 패널티가 심하다.
  • 김정재 . . . . 4회 일치
         ||<bgcolor=pink> '''{{{#0C0C0C 학력}}}''' ||<(><bgcolor=#F6EDF8> [[포항여자고등학교]][br][[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br][[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 석사[br][[미국]] 프랭클린피어스대학교 법학 박사 ||
         1966년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포항중앙초등학교, 동지여자중학교, [[포항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동 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석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 이만섭 . . . . 4회 일치
         |학력 = [[연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이만섭은 [[1932년]] [[2월 25일]]에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태어났다. [[1951년]]에 [[연세대학교|연희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여 졸업한 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다. 이후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주일 특파원과 주미 특파원 등으로 활동한 뒤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난 직후 발탁되어 [[1963년]] 10월에 공화당에 입당, 대선 후보 [[박정희]]의 지지 유세와 찬조연설을 다녔다.<ref name="경향_6310">民主共和黨에入黨 東亞日報李萬燮씨, 《경향신문》, 1963.10.3</ref>
         * 《의회외교실록》
         * [[1955년]] [[연희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 전여옥 . . . . 4회 일치
         |경력 = [[한나라당]] 대변인<br/>[[외교통일위원회|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간사<br />[[한나라당]] 최고위원<br/>[[한나라당]] 국제위원장<br/>제2대 [[한국여자야구연맹]] 회장<br/>[[한나라당]] 전략기획본부장<br/>[[국민생각]] 대변인<br/>[[한국여자야구연맹]] 고문<br />[[서강대학교]] 겸임교수
         2004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04년 5월 제17대 국회의원에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2004년 7월 제17대 [[대한민국]]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김영주 등이 주장한 그의 위법사항은 학력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 선거공보물의 위법, 허위경력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 등이며 '학력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를 들었다.<ref name="허위"/><ref name="허2">[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32857 김영주 "전여옥 당선 무효다"] 뷰스앤뉴스 2008-04-11</ref> 이대 정치학과 박사과정은 5학기 이상을 등록하고 논문자격시험을 통과해야만 최소 수료가 되는 과정”이라며<ref name="허위"/><ref name="허2"/> “전 의원은 예비후보자 홍보물과 후보자 공보물을 비롯 홈페이지에 자신의 학력사항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박사과정 4학기 마침’으로 표기했다”며 “선관위의 유권해석, 법원 판례로 볼 때 이는 명백한 선거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ref name="허위"/><ref name="허2"/> 또한 인터넷 홈페이지와 예비후보자 홍보물, 후보자 공보물, 명함 등 홍보물에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일본특사’라고 표기한 것 역시 김영주는 허위사실이라 하며 외교통상부가 국회에 제출한 ‘대통령 당선인 특사관련 자료’ 문서에는 전 당선인은 분명히 이상득 일본 특사의 수행원으로 기재되어 있다며 허위사실 공표한 것으로 공직선거법 제250조 위반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ref name="허2"/>
  • 창작:티겔 왕국 . . . . 4회 일치
         동부대룩의 중남부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국가. 호랑이족 맹수인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남쪽엔 황소족 거수인들도 거주하고 있다. 그외에 무릉과 인접한 곳엔 맹호족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일부지만 라이거일족들도 살고있다. 북쪽으론 메말사막을 기점으로 서쪽부터 해서 라이겐프름 공국, 상인연합, 츄프 왕국과 접하며, [* 다만 앞에 두국가들은 일단은 티겔의 봉신이다. 사실상 독자적인 외교권과 주화를 가지고 있으므로 독립국 취급이지만.] 동쪽으론 아래드 산맥을 기점으로 무릉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낭마 연합과 접하고 있다. 제국을 칭하던 시기도 있었으나, '유일황제' 샤를 7세가 이끄는 레이먼 제국군한테 박살나고 잠깐 레이먼 제국의 봉신이 되었을때 왕국으로 격하되었다. 그뒤로는 레이먼 제국한테 괜히 트집잡히기 싫어서 일부러 왕국으로 유지중.
         그러나 상티겔 왕국은 달휴의 사후 점점 기울어져 갔는데, 우선 달휴가 죽고 그의 맏아들 '불운한' 달계가 즉위했으나, 그는 한달도 안되서 의문사하고(...) 그의 둘째 '천벌의' 달연이 왕위에 오른다.[* 호칭을 보면 알겠지만, 달계 암살의 유력 용의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왕위에 오르고 약 이틀도 안되어 그의 동생 달혜가 그를 암살하고(....) 또 왕위에 오르는데 그도 나흘이후 그의 제수의 명을 받은 암살자에게 죽을뻔 한다(...) 그에겐 다행히, 암기가 급소를 정말 아슬아슬하게 피하가서 살았고, 얼마 안돼 제수는 교수형, 그리고 그의 여동생은 가택연금을 시키는걸로 마무리시킨다. 달혜는 상티겔 왕국의 왕들중 최악의 왕중 하나로 평가받는데, 그전까지 충실한 우방이었던 하이엔 왕국을 괜히 외교적으로 도발해 적대관계로 가게 하고, 북쪽의 라이엘기스 대공국[* 레잉 왕국이 멸망하기전 마지막 왕의 동생(적자가 아닌 서자였다.)이 세운 국가.]에겐 지속적으로 병력을 갈리면서(...) 국력을 낭비했으며, 그나마 우방이었던 츄프왕국과는 지속적으로 국경 분쟁이 벌어지는 상태인 불안한 동맹관계였다.[* 상티겔 왕국이 메롱한대도 츄프왕국이 굳이 티겔과의 관계를 끊지않은 이유는 북쪽의 숙적 크누고 공국과 그들을 지원하던 하이엔왕국 때문이었다. 즉, 크누고 공국을 제압하면 얼마든지 티겔과의 관계도 끊을 수 있었다는 애기.] 이렇게 외교적으로 불한한 상태에서 내정을 잘한 편도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사자족 토벌이라면서 상당한 량의 세금을 걷어갔고, 이는 지속적인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 사서에만 기록된 반란의 횟수는 약 20여회정도이다... 사서가 훼손되어서 기록되지 못한 반란까지 포함하면 이횟수이상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달계의 아들이었던[* 달계가 죽었을당시 아직 태어나지 못해 계승받지 못했다.] 달유가 귀족들에 도움을 받아 왕위를 찬탈하고 왕위에 오른다.
         달유는 상티겔 왕국의 멸망을 30년은 늦춘 왕으로 평가 받는데, 하이엔왕국 계승전쟁에 개입해 적자인 선왕의 손자를 왕위에 올려서 하이엔왕국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신의 딸을 츄프왕에게 시집보내 동맹관계를 두텁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외교적 성과는 지속적으로 북쪽 국경을 위협하던 라이엘기스 대공국쪽으로 안심하고 전력을 집중할 수 있게하는데 도움을 줬고, 최종적으로 나트렘 평원에서 벌어진 회전에서 라이엘기스 대공과 대공의 세아들을 모두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둬, 라이엘기스대공국을 멸망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얻어냈으나..... 기세를 몰아 라이엘기스로 공성을 곧장가는 도중에 병으로 달유가 급사하면서 급히 병력을 돌릴수 밖에 없었고, 이는 티겔 왕국이 마지막으로 라이엘기스대공국과 후신 레이먼 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기회로 평가받는다.
  • 최호중 . . . . 4회 일치
         '''최호중'''(崔浩中<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42500099202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4-04-25&officeId=00009&pageNo=2&printNo=5582&publishType=00020 經濟에 밝은 직업外交官 崔浩中] - 매일경제, 1984년 4월 25일</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20500329204010&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12-05&officeId=00032&pageNo=4&printNo=13292&publishType=00020 崔浩中 외무장관 外務部서 잔뼈굵은 正統派] - 경향신문, 1988년 12월 5일</ref>, [[1930년]] [[9월 22일]] ~ [[2015년]] [[2월 19일]])은 [[대한민국]]의 전 외무공무원이다. [[노태우]] 정부 당시 [[북방 정책|북방외교]]의 한 주역이자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 시에도 역할을 했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한 뒤 [[1956년]] 외무부에 들어갔다. 국제경제국장, 통상국장, 주유엔 유럽사무소 및 [[주제네바 대한민국 대표부|제네바대표부]] 공사, 말레이시아·[[주 벨기에 대한민국 대사관|벨기에 대사]] 등을 역임했다. [[1984년]] 상공부 차관을 지낸 뒤 [[주사우디아라비아 대한민국 대사관|사우디아라비아 대사]] 등을 거쳐 [[1988년]] 12월부터 [[1990년]] 12월까지 외무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1989년]] 2월 [[헝가리]]와의 수교 합의 의정서에 서명, 북방외교의 첫 성과를 대외에 알렸다. [[1990년]] 9월 30일 유엔에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당시 소련 외무부 장관과 '한·소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했다. 재임 중 동구권 국가를 비롯해 18개국과 수교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469&aid=0000048101], [[한국일보]] 2015년 2월 20일, [부고]‘북방 장관’ 최호중 전 부총리 별세</ref> 1990년 12월부터 1992년 6월까지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을 지냈다. 당시 남북은 1991년 9월에 유엔에 동시 가입했고, 잇단 고위급 회담을 통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에 합의했다. 이후 통일원 통일고문,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한국외교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 노태우 정권 당시 북방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북방(北方) 장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469&aid=0000048101], [[한국일보]] 2015년 2월 20일, [부고]‘북방 장관’ 최호중 전 부총리 별세</ref>
  • 토탈워: 쇼군 2 . . . . 4회 일치
         ==== 외교 ====
         외교는 지금까지 발견한 가문들하고만 할 수 있다.
         외교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외교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 토탈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건물 . . . . 4회 일치
          * 외교 정세(Foreign Affairs) 기술 연구 필요
          * 외교 정세(Foreign Affairs) 기술 연구 필요
          * 외교 정세(Foreign Affairs) 기술 연구 필요
          * 외교 정세(Foreign Affairs) 기술 연구 필요
  • 트로피코 4 . . . . 4회 일치
         >Tropico 4는 새로운 정치 요소를 통해 전작에 비해 게임플레이 요소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외교를 진행할 새로운 초강대국이 등장할 뿐더러, 논란 많은 정책을 쉽게 통과시킬 수 있도록 도와줄 장관을 임명할 수도 있습니다. 친구는 가까이 두고 적은 더 가까이 두십시오! 모두의 의견을 신중히 파악하십시오! 자연이 가져오는 새로운 재해가 나라를 휩쓸고 지나가면 국민들은 사후복구를 위해 국고를 열 것을 소리높여 요청해올 것입니다. 바로 이런 순간, 당신의 정치적 결단력이 샅샅히 시험될 것입니다.
         == [[트로피코 4/외교|외교]] ==
         [[트로피코 4/외교]] 페이지 참고.
  • 홍순언 (1530년) . . . . 4회 일치
         '''홍순언'''(洪純彦, [[1530년]] ∼ [[1598년]])은 [[조선]] 중기의 한어 통역관, 외교관으로 본관은 [[남양군|남양]](南陽)이다. 종계변무(宗系辨誣)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구원군 파병에 공을 세웠으며, [[종계변무]]에 세운 공로로 [[광국공신]] 2등관(光國功臣二等管)에 책록되었다. 기방에 팔려온 [[남경]]의 [[호부]][[시랑]] 류모의 딸을 구해준 인연으로 그녀의 남편이자 당시 [[예부]][[시랑]] [[석성 (명나라)|석성]]의 전폭적인 신뢰로 종계변무와 임진왜란 시 [[명나라]] 군대의 파병을 이끌어냈다.
         [[허봉]]은 그가 말을 잘 한다고 평가하였다. '홍순언의 말은 조리가 있어서 기록할 만하고, 들어도 싫증나지 않으며 오래 들으면 피로도 잊었다<ref>허봉, 《조천기 》(상)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연행록선집 1》 (경인문화사, 1976) pp.86-169</ref>'고 높게 평가하였다.<ref>김영숙, 〈역관 홍순언과 조명외교〉,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제70집 (2011년 02월호)》 (중국사학회, 2011) pp 195</ref>
         * 김영숙, 〈역관 홍순언과 조명외교〉,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제70집 (2011년 02월호)》 (중국사학회, 2011) pp195~222
         [[분류:조선의 역관]][[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번역가]][[분류:임진왜란 관련자]]
  • Crusader Kings 2 . . . . 3회 일치
          * 외교력: 외교활동에 관한 능력치. 다른 캐릭터가 자신을 보는 의견에도 영향을 준다. 이 능력치가 높으면 몇몇 이벤트에서 혓바닥을 놀려 약을 파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다.
          * 외교 관계: 해당 인물과 특정한 관계를 맺은 작위들
  • Crusader Kings 2/궁정 . . . . 3회 일치
         외교를 담당하는 직책. 자신의 외교력을 국가 능력치에 보태준다.
          * 외교 관계 향상시키기
  • 김재규 . . . . 3회 일치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5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5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https://youtu.be/BSqOsrVdY3Y?t=12m31s|당시 실제 육성]]
         가정이긴 하지만, 박정희가 살아있었다면 3저 호황을 통한 경제발전, [[핵무기]] 개발 등을 통해 [[리콴유]] 처럼 박씨 일가의 세습독재 체제를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있다. 육사를 나와 장교가 된 박지만은 군부를 장악하여 [[리셴룽]]처럼 젊은 나이에 장성을 지내고 나서 정계로 들어와 후계자가 되었을 것이고 박근혜는 최씨 일가의 도움으로 문화, 여성, 종교계를 장악했을 것이다. 반면, 박정희의 무리한 국가주도식 경제정책과 국민들에 대한 과도한 통제, 오랜 독재정치로 인한 선진국들과의 외교갈등 등의 요소들을 고려해보면 과연 박정희가 80년대의 격변기를 유연히 대처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당시 한국은 이스라엘처럼 미국정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국가도 아니었으며 영국, 프랑스 같은 강대국도 아니었기에 무리하게 핵무기를 개발하였다고 하여 미국 등의 강대국들이 한국의 핵무기 보유를 용인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박정희의 오랜 독재체제를 못마땅해하던 카터 대통령의 입장을 고려해봤을때 무리하게 핵무기를 개발했을 경우 국제적인 경제제재가 가해져 외교뿐만아니라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 이인영(정치인) . . . . 3회 일치
         || '''소속 위원회''' ||[[외교통일위원회]][br][[정보위원회]][br]헌법개정및정치개혁특별위원회 ||
         제20대 국회 후반기 외교통일위원회 위원
         제20대 국회 전반기 외교통일위원회 위원
  • 임대윤 . . . . 3회 일치
         |학력 = [[영남대학교]] 법학 학사<br/>[[서울대학교]] 대학원 외교학 석사
         * 1984 ~ 1987 [[서울대학교]] 대학원 외교학과 석사과정 졸업, 외교학석사 (학위논문명 - 국제정치의 개입주의에 관한 일연구 :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정책을 중심으로)
  • 장발 (화가) . . . . 3회 일치
          | 직업 = [[서양화]][[화가|가]] <br/> [[미술평론가]] <br/> [[대학 교수]] <br/> [[외교관]]
          | 소속 = 前 이탈리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대사 <br/> 前 대한민국 [[평화민주당]] 외교안보행정특임고문
         '''장발'''(張勃, Thomas Chang, [[1901년]] [[4월 3일]] ~ [[2001년]] [[4월 8일]])은 [[대한민국]]의 [[미술가]]이며 [[서양화|서양화가]] 겸 [[외교관]]이다. 본관은 [[인동 장씨|인동]]이며, 초명(初名)은 '''장지완'''(張志完), [[호 (이름)|호]](號)는 우석(雨石), 우당(宇堂), 누수(樓樹)이다. 정치가 [[장면]]의 친동생이며, 대학 교수 [[장진 (1927년)|장진]], 가톨릭 주교 [[장익 (1933년)|장익]]의 숙부이다. [[한성부]] 출생이며 [[인천광역시|경기도 인천]]에서 성장하였다.
  •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제연합 가입 . . . . 3회 일치
         엄밀하게 해석하자면, [[국제연합]]의 결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국제연합]]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중화민국]]'의 지위를 [[중화민국|장개석 정권]]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에게 [[국가승계]]를 시킨다는 결의였다. 이에 따라 중화민국은 한큐에 가입국 지위까지 잃어버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은 반대로 가입은 물론이고 중국의 외교적 정통성, [[상임이사국]]까지 한꺼번에 따먹었다.
         이 사건을 반환점으로 하여, [[중화민국/외교|중화민국의 외교]]는 그야말로 [[안습]]의 절정에 달하게 된다. 그나마 이 당시는 아직 [[냉전]]과 중화민국의 경제력 덕분에 그럭저럭 많은 수교국을 가지고 있었지만, 개혁개방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력이 상승하면서 그마저도….
  • 창작:왕국 . . . . 3회 일치
         == 외교 ==
         전체적인 외교관계는 왕따. 한때 플라흐란트 왕국과 리자 연방이라는 동맹국이 있었지만 플라흐란트 왕국은 연합에게 합병당했고, 리자 연방과는 점점 서먹서먹해지는 중.
         남쪽에 있는 사발타와 친하긴 하지만 사발타는 시대를 역행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국가니 제외.
  • 토탈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번 . . . . 3회 일치
         >무역 관계는 수립되었지만, 화친조약은 서구열강들에게 유리한 협정이었습니다. 경제는 흔들거렸고, 백성들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1863년, 덴노는 쇼군의 결정을 뒤엎었습니다. 모든 서구 세력을 축출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10년간의 굴욕적인 외교, 그들은 이것을 바다로 내던졌습니다. 서구 세력들은 이러한 행태에 대한 답을 주었습니다. 덴노는 백성에게 죽음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 재치: 외교 관계 +10
          * 재치: 외교 관계 +10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디시전 . . . . 2회 일치
          * Diplomatic Campaign(외교 활동)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라인란트에 군부대를 주둔시킨다. 불만도가 2% 감소하며 자금이 500 증가한다. 동시에 외교 슬라이더도 강경파로 1 이동한다. 호전도가 10 오르며 프랑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와의 관계도가 5-15 하락한다. 평화시 공업력이 10% 증가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역시 "전쟁 준비" 이벤트로 평화시 공업력 패널티가 10% 감소한다. 이벤트로 벨기에가 연합국에서 탈퇴한다.
  • 거타지 . . . . 2회 일치
         '''거타지'''(居陀知)는 9세기 경 [[신라]]의 무신, 외교관, 궁사이다. [[진성 여왕]]의 왕자 [[양패]]의 수행원으로 [[당나라]]에 다녀왔다.
         [[분류:신라의 무신]][[분류:저격수]][[분류:한국의 신화]][[분류:신라 사람]][[분류:외교관]][[분류:한국의 전설]][[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
  • 고성국 . . . . 2회 일치
         '''고성국'''(高成國, [[1958년]]<ref>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sm=tab_txc&where=people_profile&ie=utf8&query=%EA%B3%A0%EC%84%B1%EA%B5%AD&os=517736</ref> ~ )은 [[대한민국]]의 정치평론가이다.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학위 후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추적 60분]] 진행 등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며, 여러 권의 정치서적을 펴냈다.
  • 김양 (1953년) . . . . 2회 일치
         * [[1975년]] :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 [[1980년]] :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외교|외무]][[행정학]] 전공)
  • 김윤환 . . . . 2회 일치
         16대 총선 낙선 후 김윤환은 민국당의 대표를 맡아 당을 추스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이때부터 그의 몸에는 2년 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암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회창에게 토사구팽을 당한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아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쳤다. 당시 김윤환을 만났던 [[최병렬]]의 말에 따르면 함께 [[스테이크]]를 시켜놓고는 썰어놓지도 않은 채로 한 시간이 넘도록 이회창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고 한다. 암이 자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이후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약세와 [[자유민주연합]]의 패망으로 나름대로의 입지를 살려 3당 연합(혹은 DJP 재연합)에 낄 수 있었지만, 2001년 10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로 DJP 연합이 완전히 붕괴되자 유일한 지역구 의원 [[한승수]]도 탈당해버렸다.[* 한승수는 무소속 의원 신분으로 외교통상부 장관직을 유지하다가,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하자 7월 장관을 사퇴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이회창 후보의 외교담당 특별자문이 되었다.] '''이 시기 "호남이 밀어 주는 영남 대통령론"으로 [[이회창]]을 패망시키는 정치공학적 구도를 구상했고 [[듣보잡|이 때까지만 해도 인지도가 낮아 가능성이 없다]]이라고 여겨졌던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노무현과 김윤환이 협력하는 일은 없었고[* YS에게 팽당한 5공, 유신 세력을 포용한 김대중과는 달리, 노무현은 3당 합당 당시부터 보여주었던 자신의 원칙대로 옛 군부 정권 시절 인사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대신 자신과 뜻을 함께했던 주변 사람들을 세웠다. 5공 시절부터 킹메이커로 이름을 날린, 그것도 TK의 좌장이나 다름없던 김윤환이 노무현과 연합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던 셈.] 김윤환 본인은 대선 직후 [[신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2114|#]]
  • 김형태(정치인) . . . . 2회 일치
         1952년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포항[[동지중학교]], 대구[[성광고등학교]], [[국민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외교안보 [[석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 로베르 기스카르 . . . . 2회 일치
         답은 바로 비잔티움 전통의 외교술이던 이이제이였다. 예전부터 비잔티움은 외국의 이민족들이 자국을 위협하면 천혜의 무역입지를 통해 쌓인 돈과 보물로 경쟁이민족을 끌어들여 견제하거나, 내분을 일으키는 외교술을 벌였는데 이번에도 그랬던 것이다. 우선 그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피신해있던 기스카르의 조카인 아벨라르를 끌어들여 그에게 막대한 자금을 쥐여 이탈리아로 비밀리에 보내 반란을 일으키게 했고, 한편으로는 하인리히 4세에게 사절을 보내 아풀리아 공국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장차 위험해질거라고 충고하면서 금괴 36만개와 진주가 박힌 황금 가슴장식, 그외 수많은 귀중한 보물들을 선물해 그를 움직이게 하는데 성공했다.
  • 백승주(정치인) . . . . 2회 일치
         ||<bgcolor=#C9151E> '''{{{#FFFFFF 학력}}}''' ||<(> [[심인고등학교]] {{{-1 ([[졸업]])}}}[* [[유시민]] 작가의 모교다.][br][[부산대학교]] {{{-1 (정치외교학 / [[학사]])}}}[br][[경북대학교]] {{{-1 (정치학 / [[석사]])}}}[br][[경북대학교]] {{{-1 (정치학 / [[박사]])}}} ||
         [[1961년]] [[3월 20일]] [[경상북도]] [[구미시|선산군]] 장천면에서 태어났다. 구미 오로초, 대구 성광중, 대구 [[심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다. 이후 [[경북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정치학회와 [[한국국방연구원]]에서 근무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국방연구원 산하의 [[북한]]연구실장과 안보전략연구센터장을 지냈다. [[2013년]] [[3월]]에 국방차관으로 선임되었다. 보통 국방차관은 예비역 [[중장]]이나 드물게 재정 전문가가 보임되는데 비해서 순수하게 안보 연구(북한군사 전문)를 해온 [[민간인]]이 선임된 사례는 처음이라 주목을 받았다.역대 최연소 차관이며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거의 독점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몇 안 되는 민간인[* 여기서 민간인은 비장성 출신.] 출신이다. 참고로 병역은 [[중위]]로 마쳤다.[* 아무래도 보직이 보직이다 보니 예비역 병장을 그 자리에 앉히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직업군인 출신이라는 점이 파격적이다.]
  • 오경훈 . . . . 2회 일치
         | 학력 = [[서울대학교]] 외교학 학사
         *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 이종화 (1949년) . . . . 2회 일치
         |학력 =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 1975. 03. 03~1982. 02. 25 :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 이철희(1964) . . . . 2회 일치
         || '''학력''' ||<(>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br][[고려대학교/대학원|고려대학교]] 비교정치 석사[br][[한신대학교]] 국가와시민사회 박사 ||
         1964년, 포항에서 3남 2녀 중 [[3남|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부산광역시]] [[동래구]]로 이주하여 부산 [[동인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석사가 되었다. 시대가 시대라 그런지 [[석사]] 논문 제목이 '민중통일론에 관한 일 연구 : 통일과 변혁이행의 상관성을 중심으로'인데, 별다른 건 아니고, 당대 운동권의 두 축이었던 [[NLPDR|NL]]과 [[민중민주주의|PD]]의 [[통일]]론을 비교 연구한 것이다.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다고 하는데, 석사 논문 주제도 그런 영향일 것이고, 군 [[입대]] 전후로도 관련 [[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있기도 했다. 그래도 감옥에 갇히는 신세는 면했다고 한다. 잡힌 후 감옥에 갇히는 쪽과 안 가는 쪽이 있었는데 안 가는 쪽에 포함되었다고. 그리고 감옥에 갇힌 쪽의 학생들은 모두 국회에 한 번씩은 발을 담갔다고 하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신도 감옥에 갈걸하고 후회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계파 문제였을 가능성이 있다. 김한길 의원 보좌관 출신에, 위 기사에서는 손학규 전 의원 계파로 분류했는데, 두 인사는 공통적으로 당시 공천을 주도한 친노계와 앙숙이었기 때문.]
  • 인조 . . . . 2회 일치
         인조는 [[조선]]의 16대 왕이다. [[인조반정]]을 통해 집권했으며,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표방한 [[광해군]]을 비판하면서 존명배금(명을 따르고 후금을 배척한다)를 내걸었다. 그러나 현실은 명이 후금보다 여러모로 딸리는 상황이었기에 애매한 외교정책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다.
  • 장우석 . . . . 2회 일치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95학번)
         [[1977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음력 [[1976년]] 11월 20일)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경북산업정보전문학교 웹멀티미디어과정 3기를 수료했다.
  • 조원진 . . . . 2회 일치
         || '''학력'''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br][[영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정책분석학 석사||
         [[1959년]] [[1월 7일]] [[대구광역시|대구]] 원대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종로초등학교, [[협성중학교]], [[인창고등학교(서울)]][* [[청구고등학교]]에서 전학],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영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정책분석학 석사과정을 졸업하였다.
  • 카치구미 . . . . 2회 일치
         1940년대 무렵 [[브라질]]에는 [[일본인]]이 약 30만 명 가량 거주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브라질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양국은 적대관계가 되었으므로, 브라질과 일본은 외교관계가 단절되었고 브라질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일본어로 출판이나 언론 활동을 할 수 없고, 일본인끼리 모이는 것도 금지되어 있고, 일본어 학교는 폐쇄되었다. 1942년에는 브라질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 외교관들도 [[포로 교환]]으로 일본으로 귀국하여, 완전히 본국과 연결이 단절되었다. 또 이 당시 [[포르투갈어]]를 읽을 수 있는 일본인은 숫자가 적었으며, 지식인과 브라질 사회에서 성공한 소수의 사람에 국한되었고 대부분은 오지에서 농장에 종사하고 있었다.
  • 토탈워: 쇼군 2/세력 기술 . . . . 2회 일치
          * 외교 관계 +10
          * 외교 관계 +20
  • 토탈워: 쇼군 2/요원 . . . . 2회 일치
          외교 관계 -20
          외교 관계 +10
  • 트로피코 4/건물 . . . . 2회 일치
          * 경제, 교육, 외교부, 행정부, 국방부 장관을 임명 가능
         === 외교부 ===
  • 한창수 . . . . 2회 일치
         [[1888년]] [[조선의 과거 제도|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에서 주로 벼슬을 하였으며, [[1895년]]에는 [[한성재판소]]의 판사를 맡기도 했다. 외국어에 능통하여 [[관립한성외국어학교]], [[한성사범학교]]의 교장직과 함께 [[유럽]] 지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바도 있었다.
         외교 관계 쪽 관직을 맡으며 [[일본]]에 드나들면서 친일 세력과 가까워진 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귀족|남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일제의 신임을 받아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대한제국 순종|순종]] 등 왕실을 전담하는 [[이왕직 장관]]도 역임했다.
  • 현정건 . . . . 2회 일치
          | 경력 = 前 고려공산당 상임위원 <br/> 前 대한국민대표회의 외교분과위원 <br/> 前 한국독립당 전임위원
         조선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 24년([[1887년]])에 [[대구광역시|대구(大邱)]]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 시|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의정원|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이규홍(李奎洪)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Verkhneudinsk) 회의<ref group="설명">이동휘의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김철훈ㆍ안병찬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경쟁을 완화하고 두 세력을 합치기 위해 코민테른에서 그들에게 베르프네우딘스크에서 연합대회를 갖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한인 공산주의 운동 계열의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하였는데, 국내에서는 정재달, [[조봉암]] 등도 여기에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대회는 대표의 자격 문제가 제기되면서 파탄나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철수, 코민테른 당국이 각파 지도자를 모스크바로 불러 조정하려 했으나 이마저 실패하자 결국 코민테른은 양파 모두 해산하고 단일당을 조선 안에 세울 것을 지시함으로써 상하이파도 이르쿠츠크파도 없어지게 된다. 김학준 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2005, 민음사.</ref>에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는 윤해(尹海)ㆍ신숙(申肅)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王三德)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員)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ref>「創造派의 회의 종료」 『동아일보(東亞日報)』 1923년 6월 25일자.</ref>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8월에 조선의 관서([[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ref>「同胞의 ㅁ愛! 해외각디동포의열렬한동정 가련한수재당한형뎨들에게」 『동아일보』1923년 10월 4일자 기사.</ref> 여기에 현정건의 이름이 실려 있다.
  • 호준석 . . . . 2회 일치
         |학력 =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 홍정욱 . . . . 2회 일치
         2008년 4월 9일 노원구 병 선거구의 [[한나라당]] 후보로 공천을 받아, 당시 [[진보신당 (대한민국)|진보신당]]의 후보였던 [[노회찬]]을 누르고 제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제18대 [[대한민국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 독도영토수호대책특별위원회 위원이며 국회 남북관계발전특별위원회 위원,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정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2009년 9월 24일 [[한나라당]] 국제위원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2010년 8월 17일에 [[한나라당]] 2030본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외에 [[한나라당]]에서 천안함대책위 위원, 북핵도발대책특위 위원, 서울시당공천심사위 위원, 지방선거기획위 위원, 2010 지방선거 중앙선대위 스마트유세지원부단장, 2010 지방선거 서울시장후보선대위 O2유세지원단장, 평창동계올림픽유치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 홍진기 . . . . 2회 일치
         해방 이후 홍진기는 미국과 일본의 주도로 진행되던 대일강화조약에서 조약이 한국에 불리하다고 파악하여 정부를 설득 '대일강화회의 준비위원회'가 구성되도록 하였다.<ref>{{서적 인용|url=|제목=한일회담-제1차 회담을 회고하면서|성=유진오|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이는 일본의 부당한 외교적 침탈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구보타 망언 사건에서도 한국 측 대표로 일본의 부당한 주장에 반박하여 미일조약에 한국 내에 있는 귀속재산의 처리와 일본에 있는 한국 국민에 대한 인권 등에 대해 명시될 수 있도록 하여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독도에 대한 소유권이 미일간 협약에서 일본측으로 귀속되는 상황이 오자 이에 대한 국제법 논리로 대처하였으며 이후 독도에 접안시설과 태극기 계양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 황두진 . . . . 2회 일치
         2016 환태평양 지역 4개 대학 순회강연(외교부 ‘국민 모두가 공공 외교관’ 프로그램): 싱가포르 국립대학(싱가포르), 말라야대학(쿠알라룸푸르), 출랄롱콘대학(방콕), 뉴사우스웨일즈대학(시드니)
  • Europa Universalis 4/공략/아시아 . . . . 1회 일치
         이게임시작지점에서 가장 많은 땅덩어리를 지니고 있으며, 가장 높은 총개발도(developement)를 지닌 국가. 상당히 많은 고유시스템을 들고있는데, 고유 팩션인 천조국 체제를 지니고 있는데 관료, 사원, 환관이 행정, 군사, 외교를 담당하고 있으며, 각 팩션의 영향력이 가장 높을경우 그 팩션이 보너스를 주는 형식이다. 그리고 고유 정부체제인 천조국(Celestial Empire)체제를 지니고 있는데, 기술비용과 안정도 비용을 10%줄여주며, 모든 땅의 수입이 반이된다. 천명이란 시스템으로 반란도를 5줄여준다. 만약에 정통성이 70이하이거나 안정도가 음수가 될경우엔, '천명을 잃음'이 뜨면서 천명의 보너스가 사라지고 반란도가 5상승해 최종적으로 반란도 10이 늘어난다(...) 거기다가 중국계 문화권이 엄청 세분화되어 천명한번 터질경우엔 오나라, 촉나라, 연나라, 제나라등 소국들이 죄다 반란일으키고 독립해 춘추전국시대를 만들기도 한다...~~안습~~ 내적 완결성등 명한테 들어있던 수많은 디버프들이 전부 사라져서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여전히 천명이란 고유시스템덕에 빵빵터지는 반군들을 맛볼 수 있다(...) 가능하면 최대한 빨리 서구화를 하도록 하자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문화 . . . . 1회 일치
          * 외교 점수 +25%
  • Victoria II/정당 . . . . 1회 일치
         == 외교 정책 ==
  • 강타 . . . . 1회 일치
         * 2006년 '제1회 동아시아 공연예술제' 홍보대사 - 외교통상부 감사패
  • 경제제재 . . . . 1회 일치
         [[분류:외교]][[분류:경제]][[분류:역사]]
  • 김근 (고려) . . . . 1회 일치
         [[분류:김부식]][[분류:고려 중기의 문신]][[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고려의 외교관]][[분류:고려의 시인]][[분류:경주 김씨]]
  • 김문순 (언론인) . . . . 1회 일치
         *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김선재 (아나운서) . . . . 1회 일치
         *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학사 (외교학·서어서문학)
  • 김승목 . . . . 1회 일치
         1929년 [[경상북도]] 선산군(현 [[구미시]])에서 태어났다. 부산상업고등학교(현 부산[[개성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 김운용 . . . . 1회 일치
         * 1956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 김태환(1943) . . . . 1회 일치
         1943년 [[경상북도]] 선산군(현 [[구미시]])에서 태어났다. [[경복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금호아시아나그룹|금호그룹]]에서 임원으로 근무하였다.
  • 나폴레옹: 토탈워 . . . . 1회 일치
         ==== 외교 ====
  • 대군 . . . . 1회 일치
         외교문서에서 '일본국 대군(日本國 大君)'이라는 칭호를 썼다. 이는 명목상의 왕인 '[[덴노]]'와 실권자인 '쇼군'이 따로 존재하는 일본 정치의 특수성을 외부에 얼버무리기 위해 사용한 정치적 술책이다. 어떻게보면 [[외왕내제]]의 일종.
  • 대한민국 망명정부 야마구치 현 설치계획 . . . . 1회 일치
         [[6.25 전쟁]] 초기에 [[이승만]] 정부 측에서 [[일본]] 정부에, 대한민국의 망명정부를 일본에 설치할 수 있도록 준비해달라고 제안하고 일본 정부가 [[야마구치 현]][* 혼슈의 서쪽 끝, 큐슈와 마주보고 있는 지역이다]에 설치하도록 추진했던 계획. 이 제안에 관한 기초적인 기록은 전 야마구치 현 지사, 전 통산성 장관인 다나카 다쓰오가 쓴 회고록과 미국 국무부가 발행한 <미국 외교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 로버트 켈리 . . . . 1회 일치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정치학 박사 출신, 2008년 9월부터 공개채용을 받아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서 근무하고 있다.
  • 로힝야 . . . . 1회 일치
         국제사회에서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며, 사실상 미얀마의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 국가자문 겸 외교장관에 대해서 비판이 쏟아졌다. 2016년 무장공격과 이에 대한 미얀마 정부의 보복에 대해서,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이던 그녀가 군사작전이 시작되고 6주가 지나도록 언론을 피하고 "법치에 근거하여 군사작전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원론적인 해명만 내놓았기 때문이다. 서방 언론에서 아웅산 수치는 집중 포화를 맞게 되었다. 수치는 로힝야를 '벵갈리'라고 부르며 이방인 취급을 했다는 뉴스도 있었다.
  • 마이클 페이 . . . . 1회 일치
         1994년 당시 18세였던 마이클 페이는 싱가포르에서 길가에 주차된 [[자동차]]에 [[페인트]]로 낙서를 하고 [[계란]]을 던지는 기행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싱가포르 법원은 마이클 페이에게 태형 6대와, 3500 싱가포르 달러의 [[벌금]]을 선고했다. 미국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 여론이 있었으며, 미 국무부는 "외교문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 [[빌 클링턴]] 대통령 까지 나서서 "태형을 면하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 막부 . . . . 1회 일치
         [[에도 막부]]는 1800년대 후기에 미국을 위시한 서양의 포함 외교에 굴복하게 된다. 이 때문에 반 막부 감정을 가졌던 번벌들의 반발에 직면한다. 결국 내전 끝에 '대정봉환'이라 하여 막부의 권한을 조정에 반납하면서 에도 막부는 사라지게 된다.
  • 문무왕 . . . . 1회 일치
         [[분류:신라의 왕|문무왕]][[분류:신라의 군인|문무왕]][[분류:육군 장군]][[분류:신라의 작가]][[분류:신라의 외교관|김법민]][[분류:626년 태어남]][[분류:681년 죽음]][[분류:경주 김씨]][[분류:무속의 신]][[분류:한국의 장군]][[분류:불교도 군주|김법민]][[분류:병사한 사람]][[분류:영웅]][[분류:무속]][[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여당전쟁 관련자]][[분류:태종무열왕]][[분류:문무왕]]
  • 배대윤 . . . . 1회 일치
         *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졸업
  • 블랙 클로버/105화 . . . . 1회 일치
          * 올해 공적 발표는 [[마법제]] 율리우스가 몸소 행차해 거행한다. 마법제는 시민들의 환호를 잠재우며 잠시 기념사를 한다. 올해는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던 만큼 공적발표는 마법제 자신이 직접 맡고 잠시 뒤에는 클로버 왕국의 국왕이 참석, 간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 뜨겁다. 하지만 이어지는 마법제의 발언들은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을씨년스럽다. 번영하는 듯 보이는 클로버 왕국은 내외 양면에서 많은 악재에 처해있다. 외교적으로는 다이아몬드 왕국과 스페이드 왕국의 침략을 받고 있고 내부에선 "백야의 마안"이란 테러조직의 횡행으로 조용할 날이 없다. 싸움이 계속되면서 국민들 중에서도 희생자가 생기는 등 민생과 치안, 안보가 악화일로. 이런 분위기 때문에 성과제를 개최하는게 바람직한가 하는 의견도 있었다.
  • 송종익 . . . . 1회 일치
         [[1905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며 [[1906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 한국인]]의 애국 계몽 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했다. [[1908년]] [[전명운]]과 [[장인환]]이 미국 외교관 [[더럼 스티븐스|D. W. 스티븐스]]를 암살한 사건이 일어난 이후부터 재판후원회 재무로 활동하였다. [[1913년]] [[흥사단]] 창단 때 경상도 대표를 지냈으며 [[1919년]]에는 흥사단 이사장과 [[대한인국민회]] 재무를 지냈다.
  • 신현준(군인) . . . . 1회 일치
         [[5.16 군사정변]] 후 해병 중장으로 예편했다. 미국 네바다주립대학에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여 초대 [[모로코]] 대사, 초대 [[바티칸]] 대사로 외교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 안병용(기초단체장) . . . . 1회 일치
         1956년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태어났다. 이후 [[서울특별시]]로 상경하여 서울수도중학교, [[배명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석사]], [[동국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 안효민 . . . . 1회 일치
         *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 어쌔신 크리드 III/임무일람/주요임무 . . . . 1회 일치
         코너는 남쪽 지역을 조사하던 중 한 교회에 들어선다. 그곳에는 헤이덤이 기다리고 있었다. 헤이덤은 코너를 덮쳐 쓰러뜨리고는 암살검을 들이대지만 코너는 헤이덤을 밀쳐내고서는 벤자민 처치가 영국인을 위해 일하는걸 감시하러 왔냐고 말한다. 그러자 헤이덤은 처치는 자신의 동료가 아니며, 템플기사단은 국왕을 위해 싸우는게 아니라 자유, 정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코너가 존슨, 핏케언, 히키를 언급하며 그들이 한 일은 뭐라고 묻자 헤이덤은 존슨은 땅을 지키기 위해 사들이려 한 것이었고, 핏케언은 외교적인 성과를 위해 행동했으며, 히키의 경우에는 워싱턴은 끔찍한 지도자였기에 없는게 나았다고 대답한다. 그러고는 코너는 처치가 훔쳐간 보급품이 필요하고, 자신은 처치에 대한 복수가 필요하다며 휴전을 제안한다.
  • 여정남 . . . . 1회 일치
         *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입학, 경북대 학생회장.
  • 외도 . . . . 1회 일치
          * 불교용어. 불교 이외의 가르침이나, 그러한 가르침을 믿는 사람. 반댓말은 내도(内道). 외교(外教), 외법(外法)이라고도 한다. 이학(異学), 이견(異見)으로도 번역된다. 산스크리트어 (anya‐)tīrthaka에서 나왔다.
  • 은혼/614화 . . . . 1회 일치
         실제 역사에서도 가츠라 고타로의 모델 가츠라 고고로는 외교관으로 활약한 부분이 있어 이런 동맹 성립에 기여한 점은 현실고증이다. 그런데... 이건 엘리자베스의 활약이 아닐지?
  • 이갑성 . . . . 1회 일치
         3·1 운동 당시 [[김창준 (1890년)|김창준]], [[박희도 (1889년)|박희도]]와 함께 30대 초반으로 가장 연소한 편이었으며, 93세까지 장수함으로써 33인 중 가장 늦게까지 생존했다. 광복 이후 [[독립유공자]] 대표로 매년 3·1절 행사와 광복절 행사에 초청되었다. [[국토통일원]] 장관을 지낸 정치외교학자 [[이용희 (1917년)|이용희]]가 이갑성의 아들이다.
  • 이강철 (1947년) . . . . 1회 일치
         *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 이민헌 . . . . 1회 일치
         *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이병석(정치인) . . . . 1회 일치
         1952년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에서 태어났다. 포항 동지상업고등학교(현 [[동지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과, 동 대학교 [[대학원]]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이후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및 [[고려대학교/학부/법과대학|법과대학]] [[강사]],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 객원[[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 이성계 . . . . 1회 일치
         한국사의 명장 반열에 반드시 낄 정도로 군사적인 역량과 개인의 무용이 후덜덜했던 인물로, 이러한 업적을 통해 정계의 거물로 성장하였고, 그 후 명과의 외교 마찰로 인해 우왕과 최영이 요동 정벌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하였으나 묵살당하자 최영이 우왕을 달래느라 정벌군을 직접 이끌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해 국경지대의 하중도(河中島)인 '위화도'에서 군대를 물려 쿠데타를 단행해 최고 권력을 거머쥐게 된다. 그 후 정몽주 등의 저항을 뿌리치고 마침내 조선을 건국한다.
  • 이숭인 . . . . 1회 일치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시문(詩文)에 이름이 높았다. 명과의 외교 문제를 맡아 썼으며, 그의 명문장은 명 태조를 탄복시켰다. 저서로는 《도은선생시집》(흔히 《도은집》)이 있다.
  • 이한응 (1849년) . . . . 1회 일치
         이한응(李漢應, [[1849년]] [[2월 24일]] ~ [[1905년]] [[4월 23일]])은 [[조선]] 후기의 무신, 군인이다. 자는 공모(公模),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다른 이름은 이한경(李漢景)이다. 비슷한 시기에 [[과거 제도|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나 그 해에 사망한 동명이인 이한응(李漢應), 외교관 [[이한응]](李漢應) 등의 동명이인이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였다.
  • 이홍기(군인) . . . . 1회 일치
         - [[대통령실]] 외교안보수석실 국방비서관: 소장
  • 이효상 . . . . 1회 일치
         * 삼남 [[이문조]] (전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코오롱 [[이동찬]] 명예회장의 사위)
  • 임관빈 . . . . 1회 일치
         준장시절 육군 제2군단 참모장, 육군본부 비서실장, 육군본부 정책실장, 육군 기획관리참모부 정책처장을 지냈다. 소장진급 후 제6보병사단장, 육군본부 정책홍보실장,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외교통일안보분과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냈다. 이후 중장으로 진급하여 수도군단장과 육군참모차장, 국방대학교 총장, 국방부 정책실장을 지냈다.
  • 전민희 . . . . 1회 일치
         휘경여고와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ref>{{웹 인용|웹사이트=http://fairytale.pe.kr/profile/profile.html}}</ref> 특유의 미려한 문체가 특징이다. [[세월의 돌]] 후속작인 [[태양의 탑]]을 연재하던 중, 표지를 만든 일러스터가 표절했음이 밝혀져 그 때문에 계약이 파기되어 한동안 [[태양의 탑]]은 집필을 중단하게 된다. 그 후 제우미디어 출판사와 계약한 후 소프트맥스와 함께 기획한 [[룬의 아이들]] 시리즈를 새로이 집필했고, 2015년 현재 1부 윈터러와 2부 데모닉까지 완간된 상태. 데모닉 집필 중간인 2004년부터 첫 작품 [[세월의 돌]]을 개정해서 출간하기도 했다.
  • 전예용 . . . . 1회 일치
         * 1948년 :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외무부]] 통상국장
  • 전재용 . . . . 1회 일치
         |기타 이력 = 비엘에셋 대표 <br /> [[연세대학교]] [[정치학|정치외교학]]과 [[학사]] 중퇴 <br />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석사]] 졸업 <br /> [[게이오기주쿠 대학교]] 대학원 경영회계학 석사 졸업 <br/> [[군인]], [[기업가]]
  • 정운용 . . . . 1회 일치
         [[정종원]] 제5대 조흥은행장은 그의 삼촌이고 한평생 외교관을 지낸 정운철, 기업가이자 하와이 오하나 퍼시픽 은행 초대 이사장을 역임한 정운익과 사촌이다.
  • 죽으면 부처님 . . . . 1회 일치
         == 일본의 정치, 외교문제 ==
  • 창작:IDF . . . . 1회 일치
          * 이사회 : IDF가맹국에서 파견된 외교관으로 구성된다.
  • 창작:트와일라이트 시티 마피아 . . . . 1회 일치
         = 외교 =
  • 창작:트와일라이트 시티/블랙리스트 . . . . 1회 일치
          남미계 마약 카르텔의 경호원 겸 킬러. 서글서글한 인상과 민머리가 인상적이며 고용주든 부하든 가리지 않고 즐겁게 해 주려고 노력하는 분위기메이커. 그래서 오히려 총잡이보다 외교관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도 나오는 모양. 실제로 운반책을 겸하고 있다.
  • 천해성 . . . . 1회 일치
         * 대통령실 외교안보수석실 통일비서관실 행정관
  • 최동희 . . . . 1회 일치
         아들인 최동희를 최제우의 후계자로 선포하고 전국적으로 잔치를 열었다 [[서울]] [[종로 (서울)|종로]] 출생이며 [[3.1 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 운동을 하다가 [[1922년]] 7월 [[천도교]] 중심인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해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김광희]], [[강도희]]와 함께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갔다.
  • 최두선 . . . . 1회 일치
         본래는 1963년 출범한 박정희 정권에 부정적이었으나 박정희의 포용정책으로 국무총리에 지명되어 박정희 정권의 첫 국무총리를 지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2938731& <박前대통령 서거 30주기> ③이만섭 前의장 인터뷰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이후 민정이양 후의 민심의 수습에 노력하다가 야당의 대일 굴욕외교 반대 등으로 6개월만에 사퇴했다. 그러나 야당 대열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교육, 집필, 강연활동에 전념하였다.
  • 최병일 . . . . 1회 일치
         * [[외교통상부]] 정책자문위원
  • 최영철 (기자) . . . . 1회 일치
         | - ||KBS 보도본부 보도국 정치외교부 기자
  • 최윤수(정무직공무원) . . . . 1회 일치
         부산고검 검사(법무연수원 대외교류협력단장) 2011.9.
  •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 . . . 1회 일치
         사절의 요구를 들은 메흐메트는 생각해보겠다며 차갑게 대꾸한 이후, 보소포로스 해협의 가장 협소한 지역에 요새를 짓기 시작한다. 이소식을 들은 황제는 경악하면서 사절을 보내 외교적으로 해결을 하려하지만, 술탄은 그들을 쫓아내는것으로 대답을 해줬다. 황제는 그 대응으로 도시내의 튀르크인들을 투옥하는걸로 맞대응했으나, 별 소용없는 행위였고, 결국 모두 풀어주었다. 그렇게 당대에 '보코하즈 케센', 그리고 현재는 '루멜리 히사르'라고 불리는 요새가 완공되었고, 이로인해 이곳을 왕래하는 모든 함선들은 요새의 검문을 받아야 했다. 이는 이곳을 통해 무역을 하는 이탈리아 상업국가들에게 큰 위협을 줬는데, 단적인 예로 베네치아인 안토니오 리초가 이끄는 함선이 요새의 검문요구를 무시했다가 포격을 받고 침몰했고, 살아남은 선원과 선장모두 사형을 당했다. [* 선장은 특별히 말뚝형에 처해졌다.] 더더욱 급해진 황제는 교회통합을 요청하며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돌아온건 겨우 200명정도의 병력뿐이었다.[* 별 수 없는게, 당시 교황령의 군사력은 제국보다 별볼일 없었다.(....) 차라리 모레아 전제국이 훨씬 더 국력이 탄탄했을거다.] 하기야 소피야 성당에선 교회통합을 선언하는 미사가 열렸지만, 해당 미사는 황제와 그 일부 측근들, 일부 통합파 사제들과 교황청에서 온 주교들 일부만 왔을뿐이었다.
  • 탈북자 망명정부 . . . . 1회 일치
          * 북한은 유엔회원국으로서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고 있어, 망명정부는 이해와 동정은 구할 수 있어도 정통성과 정당성을 인정받거나 실질적인 외교활동을 하기는 어렵다.
  • 트로피코 4/외교 . . . . 1회 일치
         게임 [[트로피코 4]]의 [[외교]]와 주변 국가를 설명하는 페이지.
  • 한승조 . . . . 1회 일치
         *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한창희(전공기업인) . . . . 1회 일치
         1954년 [[충청북도]] [[충주시|충주군]] 신니면에서 태어났다. 충주용원초등학교, 충주중학교, [[청주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고려대학교 재학 중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 함인섭 . . . . 1회 일치
         ** 이복 삼촌 : [[함병춘]] (咸秉春, [[1932년]] [[2월 26일]] ~ [[1983년]] [[10월 9일]]), 대통령 비서실장, 대통령 외교담당 특보
  • 핫라인 마이애미/등장인물 . . . . 1회 일치
         챕터 19에서 재등장. 가면쓴 사람들에게 지령을 내리고 있던건 이들이었다. 이들은 국수주의자로, 러시아[* 배경이 1989년 이므로 아직 소련일 때.]와 미국의 외교관계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러시아 마피아들을 습격하라는 지령을 내리고 있던 것. 이 사실은 퍼즐을 모으고 맞춰야만 드러나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들은 후 죽이거나 살릴 수 있다.
  • 허근욱 . . . . 1회 일치
         [[1930년]] [[3월 28일]]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에서 변호사 겸 독립운동가 [[허헌]]과 문화 유씨 유덕희(柳德禱, 또는 유문식(柳文植))의 딸로 태어났다. 위로는 이복 언니 2명이 있었고, 둘째 언니가 독립운동가 겸 여성운동가 허정자([[허정숙]]으로 개명)였다. 유덕희에게서는 첫 딸이었다. 그 아래로 음악가인 여동생 [[허선욱]]과 허기욱, 허영욱, 허선욱 그리고 [[북조선]]에서 외교관을 역임한 [[허종욱]] 등이 태어났다.
  • 허준영 . . . . 1회 일치
         [[분류:195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김해 허씨]][[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5급 국가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외교관]][[분류:건국대학교 교수]][[분류:경찰대학 교수]][[분류:홍익대학교 교수]][[분류:단국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경찰청장]][[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자유한국당 당원]][[분류:홍준표]][[분류:명지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
  • 현재현 . . . . 1회 일치
         * 1998년 외교통상부 정책자문위원
  • 홍기(영부인) . . . . 1회 일치
         [[최규하]] 대통령의 사저인 서교동 집은 홍기 여사가 “살 만하면 그만”이라며 못 고치게 해 남루한 편이라고 한다. 실제 홍 여사가 사망할 당시 홍 여사가 10년 이상 사용하던 그릇장, [[외교관]] 시절 사용하던 유리잔들, 생전에 사용하던 돌절구와 오이지 누르는 돌, 연탄보일러, 빨래 물을 긷는 펌프가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 홍명희 . . . . 1회 일치
         문제는 할아버지 홍승목으로 이 인간은 [[친일파]][* 사실 홍승목의 시절에 친일파라 함은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를 의미한다기 보단 외교적 파트너로써의 친러, 친청, 친일의 의미가 강하다고 보면 된다][* 사실 홍명희도 친일의혹이 없는것은 아니다. 일제 연간에 임전협의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는 의혹이 있다. 사실 이건 당시 지도층 인사들의 인칭 도용 때문인데 이런 사례는 조만식,안재홍이나 여운형 같은 사람들도 이같은 일을 당한 바 있다.]
  • 홍양호 (1955년) . . . . 1회 일치
         * [[단국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 화염병 . . . . 1회 일치
         2016년 1월 8일, 위안부 합의에 불만을 품은 승려가 외교부에 화염병을 던지려다 실패한 사건이 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1/08/0200000000AKR20160108105951004.HTML|연합뉴스 링크]].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3/10/0200000000AKR20160310133000004.HTML|이후 집행유예를 받았다.]]
  • 흥인군 . . . . 1회 일치
         그는 대미 개국 방침을 결정한 [[1880년]] [[10월]]의 중신회의에서 영의정으로서 회의를 주재했다.<ref name="sisi459">강재언,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한길사, 20003) 459페이지</ref> 그는 쇄국 정책에 비판적이었다.<ref name="sisi459"/> [[일본]]에 갔던 수신사 [[김홍집]] 일행이 귀국하면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와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연미론(聯美論)를 주장하자 그는 "[[미국]]은 본래 원수의 나라가 아니니 서계(書契)를 가져오면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여 [[1880년]] [[9월 8일]] 연미론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의 주장에 고종도 [[병인양요]], [[신미양요]]는 우리나라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하여 [[미국]]과의 조약체결을 결심하게 되었다. [[1881년]] [[1월]] 흥인군의 건의로 고종은 지난해 [[6월]] 자신이 미국사신을 거부한 것을 후회하는 문서를 톈진(天津)으로 가는 영선사, 유학생들을 보낼 때, 그들을 통해 [[청나라]]로 보냈다.
  • 흥친왕 . . . . 1회 일치
         [[분류:1845년 태어남]][[분류:1912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군인]][[분류:조선의 외교관|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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