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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빈 장씨 . . . . 144회 일치
|전임자2 = [[인현왕후]]
|후임자2 = [[인현왕후]]
산림숭용과 국혼물실을 당의 제1강령으로 추구했던 [[서인]], 특히 [[인현왕후]] 민씨의 배경 세력이었던 노론의 강력한 적으로 규정되었다. [[1701년]](숙종 36년) [[숙빈 최씨]]의 발고로 [[인현왕후]]의 죽음을 기원하는 저주굿을 한 혐의를 받고 [[조선 숙종|숙종]]에게 자진을 명받았다. 인현왕후전이나 수문록 등의 소설 야사에서는 사약을 마시고 사사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숙종실록 등 정사기록은 주례의 규정에 따라 사사할 수 없음을 언급하고 목을 메어 자결하였음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존재한다. 그녀의 아들인 [[조선 경종|경종]]이 사망하고 [[숙빈 최씨]]의 아들인 [[조선 영조|영조]]가 즉위하자 [[인현왕후]]의 오빠 [[민진원]]을 위시한 [[노론]] [[인현왕후|인현왕후]]의 폐위와 죽음의 범인이자 3대 환국([[기사환국]], [[갑술환국]], [[신임사화]])의 원흉으로 정의하여 비난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집필되어 민간으로 보급된 [[인현왕후전]], 수문록 등의 언문 소설과 야사집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역사 서적과 드라마 등에 중요 사료로 활용되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희빈 장씨가 아비의 사후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당백부 [[장현 (조선)|장현]]이 [[경신환국]]에 휘말린 후 가세가 기울자 서인들과 권력 투쟁을 벌이던 남인들의 입궁 제의를 받아 궁녀로 입궐하였다고 주장하여 현재까지 정설로 알려졌지만, [[경신환국]] 당시 그의 나이가 이미 22세였기에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ref group="주"> 궁녀의 통상 입궁 연령은 4세부터 16세이며, 조선시대 여성들의 법적 혼인 연령은 14세~20세이다. 부모가 50세를 넘긴 경우엔 관아의 특별 허가를 받고 12세 이상의 자녀를 혼인시킬 수 있는데 16세기 이후엔 수 차례에 거듭된 외란으로 남성의 숫자가 급감하였고 처녀를 차출하여 청으로 진상하거나 궁녀로 뽑는 분위기로 인해 법금을 어기고 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ref> 이러한 주장의 근원은 희빈 장씨가 [[경신환국]] 당시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궐하였다는 [[인현왕후]]의 주장으로 불거진 것인데, [[경신환국]]과 같은 해 말에 장씨가 강제 출궁이 되었다가 7년 후인 [[1686년]]에 다시 입궁했던 만큼 이미 궁녀인 신분으로 출궁을 당한 후에 [[남인]]과 연계하여 돌아왔다는 것이 오역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또한 [[조선 효종|효종]] 때 이미 막대한 부를 쌓은 [[장현 (조선)|장현]]도 딸을 궁녀로 입궁시켰으며, [[조선 현종|현종]] 5년에 대왕대비전의 궁녀로 뽑혔다가 이미 사주가 오간 상대가 있으니 정혼을 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유로 출궁된 역관 최우의 딸의 전례<ref>현종실록 5년(1664 갑진 / 청 강희(康熙) 3년) 12월 30일(정해) 2번째기사</ref> 도 있는 만큼 희빈 장씨의 가세가 빈궁하여 궁녀가 되었다는 가설은 억측에 불과하다.
조사석의 도움으로 대왕대비전의 궁녀였던 장씨는 [[조선 인조|인조]]의 [[계비]]이자 [[조선 숙종|숙종]]의 증조모 뻘인 [[장렬왕후|자의대비]] 조씨를 웃전으로 모셨다. 장씨가 출궁되었을 때 [[장렬왕후|자의대비]]가 친필로 서신을 써서 법적 며느리이자 친정 외질녀인 [[숭선군]]의 부인 신씨에게 장씨를 돌보게 한 것이나 장씨의 재입궁을 주선했던 것, 조씨가 내전([[인현왕후]])과 소원하고 장씨를 치우치게 사랑했다는 기록<ref>숙종실록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경신) 4번째기</ref> 의 존재 등으로 미루어 장씨가 [[장렬왕후|자의대비]]의 각별한 애정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680년 10월 26일, [[조선 숙종|숙종]]의 초비(初妃)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요절했다. 장씨가 숙종을 모시게 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숙종실록에 [[인경왕후]]가 죽고난 후에야 비로소 숙종을 모셨다는 기록이 여럿 존재하며, 11월 이후 혜성이 나타났는데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무렵이 이때라는 기록이 존재하니 그녀가 숙종의 승은을 입은 시기가 [[인경왕후]]의 죽음 후임을 부정할 수 없다.
같은 해, 숙종의 어머니였던 대비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에 의해 강제로 출궁되었다. 숙종실록이나 인현왕후전 등에는 숙종을 모시기에 장씨의 출신이 천하고 성품이 극악한 이유로 쫓아낸 것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경신환국]] 당시 [[장현 (조선)|장현]] 일가가 [[복평군]] 형제와 절친한 사이이니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해 몰락시킨 장본인이 바로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 오라비 [[김석주]]였던 것으로 비추어 장씨의 보복을 견제한 탓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녀가 출궁된 직후인 [[1681년]] 1월 3일에 계비 간택령이 내려졌고, 3월에 [[조선 숙종|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대비 김씨]]와 [[송시열]]의 추천으로 민씨([[인현왕후]])가 간택되어 [[1681년]] 5월 14일 [[조선 숙종|숙종]]과 민씨가 가례를 올렸는데 본래 [[명성왕후|대비 김씨]]의 친정 가문과 원한이 있던 [[송시열]]과 [[민유중]]<ref group="주">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우명]]은 당파로선 엄연한 서인이었지만 [[조선 현종|현종]]의 척신으로서 예송논쟁 당시 [[송시열]]과 [[송준길]]을 비판하고 [[남인]]의 손을 들어주어 [[서인]]의 공적이 되었다. [[민유중]]은 과거 [[김우명]]의 형인 [[김좌명]]과 심하게 다투어 벼슬을 버리고 지방에 은거하였던 경력이 있다.</ref> 의 혈육인 민씨가 [[조선 숙종|숙종]]의 계비가 된 것은 [[경신환국]] 당시 [[서인]]과 손을 잡았던 명성왕후의 정치적 계약임을 짐작할 수 있는 만큼 [[인경왕후]]의 죽음 직후 계비로 내정된 민씨를 위해 장씨를 [[조선 숙종|숙종]]의 곁에서 치운 것일 가능성도 존재한다.<ref group="주">본래 정처의 3년상이 마치기 전에 재혼하는 것은 경국대전과 의례의 조항으로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이는 왕 또한 마찬가지이다. [[조선 숙종|숙종]]이 [[인경왕후]] 김씨의 사후 3년상은 고사하고 불과 반 년도 되지 않아 [[인현왕후]] 민씨와 재혼을 한 것은 조선 왕실 역사 상 전례에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논란이 있어야 할 [[인현왕후]] 민씨와의 재혼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던 서인은 [[인현왕후]] 민씨의 사후 3년상이 마쳐지기 전에 [[조선 숙종|숙종]]이 계비 간택령을 내리라는 명을 내리자 반대를 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37권, 28년(1702 임오 / 청 강희(康熙) 41년) 8월 27일(병오) 2번째기사</ref>
1680년 겨울, 장씨가 출궁되자 [[장렬왕후|자의대비]]가 숭선군저에 친필서찰을 넣어 [[장렬왕후|자의대비]]의 친정 질녀이자 숭선군의 부인인 신씨의 보호를 받도록 하였다. 출궁된 장씨는 가장이 된 오라비 [[장희재 (조선)|장희재]] 부부의 집에서 어머니 윤씨와 함께 지냈다. 1701년 공초 당시 [[장희재 (조선)|장희재]]의 처 작은아기는 출궁된 당시에도 장씨가 무속에 기대었다는 사실을 발고한 바 있다.
흔히 장씨가 출궁된 당시에 궁핍한 삶을 살았고, 숭선군 부인 신씨와 [[장렬왕후|자의대비]]를 자주 방문하여 다시 입궁하길 간절히 소원하였다고 알려졌는데 이 해석에는 오차가 존재한다. 출궁된 궁녀는 왕궁 출입은 고사하고 엄중한 감시 아래 사가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장씨가 출궁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당숙부인 [[장현 (조선)|장현]]과 장찬 형제가 유배형에서 풀려났기 때문이다. 이는,
[[1683년]] 10월, [[조선 숙종|숙종]]이 두질(豆疾: 두창, 마마, [[천연두]])을 앓았다. [[조선 숙종|숙종]]의 모후 [[명성왕후|왕대비(王大妃)]] 김씨는 [[인현왕후|중전]] 민씨와 함께 [[조선 숙종|숙종]]의 쾌차를 기원하기 위해 무당의 권고대로 절식을 하고 매일 속옷 차림으로 냉수욕을 하며 치성을 올리다가 감질(感疾: 감기)에 걸렸는데 [[조선 숙종|숙종]]이 와병 중이라 쉬쉬하며 치유치 않다가 점점 위중해졌고, [[조선 숙종|숙종]]이 온전히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 12월 5일에 [[열병]]으로 사망하였다.<ref group="주">이 사실을 발고한 [[박세채]]의 상소에 대해 [[조선 숙종|숙종]]은 [[명성왕후|대행왕대비(사망한 왕과 왕후에겐 대행을 붙인다)]] 김씨가 무속을 싫어하였다며 강력히 부정했다. 『숙종실록 9년(1683 계해 / 청 강희(康熙) 22년) 12월 15일(임자) 2번째기사』 하지만 다음해 2월 박세채의 주장이 사실이었음이 증명되어 무녀 막례가 유배되었다. 『숙종 15권, 10년(1684 갑자 / 청 강희(康熙) 23년) 2월 21일(정사) 3번째기사』 실제로 [[명성왕후 김씨]]는 전속 무당을 두었을 만큼 무속을 신봉했고, [[조선 숙종|숙종]]도 무속에 대해 너그러운 편이었다.</ref>
[[1685년]] 대비 김씨의 3년상이 마쳐지자 [[자의대비|대왕대비]] 조씨는 [[조선 숙종|숙종]] 부부에게 과거 대비 김씨가 출궁시켰던 그녀의 궁녀 장씨를 재입궐시킬 것을 권고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그녀를 그리워하는 [[조선 숙종|숙종]]을 안타깝게 여긴 [[인현왕후]]가 숙종에게 간해 그녀의 재입궁을 주선했다고도 한다. 어쨌던 대비 김씨의 3년상이 [[1685년]] 12월 5일에 마쳐졌고, [[1686년]] 2월 27일에 후궁 간택령이 있었던만큼 장씨의 재입궁이 이 기간 사이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궁으로 돌아온 장씨를 향한 숙종의 총애가 지극하자 [[서인]]과 [[인현왕후]] 민씨의 반발이 격렬했다. [[인현왕후]]는 장씨를 견제하기 위해 서인과 합세해 1686년 3월, 서인 영수 [[김수항]]의 종손녀인 [[영빈 김씨]]를 간택후궁으로 입궐시켰다. 숙종 12년인 1686년 2월 27일 기사에 [[인현왕후]]가 여러차례 간택후궁을 들일 것을 종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장씨가 재입궁 한 것을 [[인현왕후]]가 후회하였거나 애초 원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앞서 1683년에는 [[인현왕후]]의 큰아버지인 좌의정 [[민정중]]이 장씨의 오라비 [[장희재 (조선)|장희재]]가 [[정명공주]]의 생일잔치에서 노래를 부른 첩 안숙정<ref group="주">안숙정은 숭선군저의 가비(歌婢)로서 노래 실력이 장안 최고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측실이지만 이미 출가를 한 지 4년이나 지난 그녀가 정명공주의 잔치에 노래를 부른 것은 그녀의 명성이나 주인이었던 [[숭선군]]의 주선 때문이었을 것이다.</ref> 을 취객의 희롱에서 도망치게 하였다고 호된 매질을 가한 바 있는데, 좌의정이 포도부장에게 직접 벌을 내린 것도 이치에 맞지 않으며 엄연한 무관의 아내를 희롱한 취객에게 죄를 묻지 않고 그녀를 도망치게 한 남편에게 벌을 내린 것은 사사로운 감정이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정이야 어찌됐던 [[민정중]]이 [[장희재 (조선)|장희재]]에게 매질을 한 것은 사실이니 [[인현왕후]]로선 장씨의 입궁이 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현왕후]]는 궁녀 장씨의 교만함을 훈계하겠다며 아랫사람에게 장씨를 매질토록 시키기도 하였다.<ref group="주">인현왕후전에는 [[인현왕후]]가 장씨를 교화하기 위해 직접 회초리질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ref>
서인 영수이자 [[송시열]]의 최측근인 [[김수항]], [[김수흥]]의 종손녀 김씨가 간택되어 3월 28일에 숙의로 봉해졌고 노비 150명이 하사되었다. 5월 27일에는 소의로 진봉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종1품 귀인으로 봉해졌는데 회임은 고사하고 [[조선 숙종|숙종]]의 사랑도 받지 못한 김씨에게 이러한 특별진봉이 거듭된 것은 서인 영수의 종손녀라는 신분과 장씨를 향한 [[서인]]과 [[인현왕후]]의 견제를 의식한 [[조선 숙종|숙종]]의 방어책이었다.<ref group="주">김씨가 [[조선 숙종|숙종]]의 총애를 받지 못한 것은 숙종 17권,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에 언급되어 있다.</ref>
==== 인현왕후, 서인과 대립 ====
김씨의 간택을 전후로 [[서인]]은 천재지변의 원인으로 장씨를 지목<ref group="주">[[인현왕후]]의 가례일에는 지진이 있었으며 [[인현왕후]]가 복위하자 초여름에 서리와 눈이 내린 것, 장씨에게 자진의 명이 내린 후부터 여러 달 심각한 천재지변이 계속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했던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ref> 하거나 제왕은 여색을 멀리해야 한다는 이유 등으로 장씨를 궁 밖으로 쫓아낼 것을 수차례 종용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김창협]]은 "후궁으로서 가까이 사랑할 사람이 간혹 있을 수도 있겠으나 진실로 관어(貫魚: 궁인들의 순서)를 순서대로 할 수 있게 하여 종사(螽斯)의 경사가 있게 하고 미색(美色)에 마음이 현혹될 근심과 치우치게 사랑에 빠져 은총을 열어 준다는 비난을 없게 한다. (중략)"<ref>숙종실록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9월 13일(갑오) 1번째 기사</ref> 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장씨의 미색에 현혹되지 말고 궁인의 지위 순서로 성총을 내려 후사를 보아야 한다는 뜻으로서 승은궁녀인 장씨보다 정궁인 [[인현왕후]]와 당시 유일하게 후궁의 지위를 갖고 있던 [[영빈 김씨|숙의 김씨]]([[김창협]]의 5촌 당질녀이다)에게 사랑을 주어 그들에게서 후사를 보아야 비난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다.<ref group="주">1689년 2월에 [[김창협]]의 아비 [[김수항]]이 [[송시열]]의 상소를 막지 못했다는 죄로 삭탈관직이 된 것에 대해 사관은 [[김창협]]이 장씨를 지목하여 간한 이 발언으로 [[조선 숙종|숙종]]의 노여움을 얻어 보복받은 것이라고 기록했다.</ref>
숙종은 [[인현왕후]]와 [[영빈 김씨|김씨]]에게서 장씨를 떨어뜨리기 위해 중궁전과 후궁의 처소가 있는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 비밀리에 인부를 불러 장씨의 처소를 새로 건축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숙종이 직접 장씨를 종4품 숙원으로 봉해 정식 후궁으로 만듦<ref group="주">승은궁녀에게 첩지를 내리는 것은 내명부 수장인 중전의 고유권한이었다.</ref> 으로서 인현왕후의 처지를 위해 장씨의 출궁을 종용하던 서인은 더이상 숙종에게 장씨를 출궁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장씨를 숙원으로 봉하며 하사하기로 한 노비 100명과 전답은 흉년을 이유로 무기한 연기하도록 하였다.<ref group="주">[[조선 숙종|숙종]]이 [[장희재 (조선)|장희재]]에게 최초로 관직을 내린 것은 원자 명호를 취소할 것을 주장한 [[송시열]]의 상소로 인해 [[남인]]이 정계로 돌아온 후이며, 승진이 아닌 부서 이동에 불과했던 것으로 미루어 장씨가 후궁이 되고도 친정이 혜택을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숙종 15년 2월 11일 (기유) 원본333책/탈초본17책 (5/26)』</ref>
[[인현왕후]]는 직접적으로 숙종에게 숙원 장씨를 쫓아낼 것을 종용하기도 하였는데, 숙종에게 [[명성왕후]] 김씨가 꿈에서 계시를 내리길 장씨가 원한을 품고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며 불순한 무리(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궁했으니 쫓아내야 한다고 발언했던 기록이 숙종실록에 실려 있다.<ref>숙종실록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5월 2일(정유) 2번째기사</ref> 또한, '장씨 팔자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노고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다'는 주장도 했는데 이는 모두 훗날 [[인현왕후]] 민씨가 폐서인이 되어 폐출되는 이유가 된다. [[조선 숙종|숙종]]은 원자([[조선 경종|경종]])가 탄생하자 [[인현왕후]]가 매우 노여워했으며, 급작스레 주가(主家: 공주의 처소. [[홍치상]]의 어미 [[숙안공주]] 혹은 [[명안공주]] 등을 의미한다)와 더욱 친밀해지고 [[1688년]] 2월, '[[조사석]]이 장씨 친정의 청촉으로 상신에 제배되었다'는 소문을 유포했던 것이 발각되어 유적에서 삭제되고 위리안치된 [[홍치상]]의 방면을 종용했던 것을 폭로하기도 했다.<ref group="주">[[1688년]] 4월에 발발한 [[기사환국]]의 여파로 [[노론]] 과격파였던 [[김만중]]이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문되었는데 소문의 근원지가 [[조선 숙종|숙종]]의 고모인 [[숙안공주]] 들에게서라는 자복이 있자 [[홍치상]]에게 교형이 내려졌다. [[갑술환국]]으로 [[홍치상]]은 다시 복관되었지만 [[조선 숙종|숙종]]은 '매우 가까운 친척이고 높은 연세인 공주가 집에 있으니, 내가 차라리 떳떳하지 않은 데에 빠지겠다. 특별히 복관(復官)하라'하며 불쾌함을 드러냈으며, 1702년 [[홍치상]]의 아들이 [[홍치상]]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격쟁하자 '[[홍치상]]의 지은 죄는 만번 통분할 일인데 아들이 감히 격고하였다'며 분노를 터트렸고 곧 '지은 죄가 낭자한데도 관작이 그대로인 탓이다'하여 복관한 관작을 다시 거두었다.</ref>
하지만 이 법은 여인은 얼굴을 공개하고 외출할 수 없다는 조선시대의 사정에 의해 오래전부터 지켜지지 않았고, 이에 서반(무관) 가문의 여인이나 당하관의 처첩은 물론 관직이 없는 양반가의 부녀자나 중인, 양인에 불과한 아속의 처는 물론 환관의 처부와 궁녀, 하물며 천민인 기녀와 침선비도 타고 다녔다. [[명성왕후]] 김씨의 친신 무당이었던 막례(莫禮)도 옥교를 타고 궁을 출입하며 굿을 했었던 만큼 사실은 아들을 생산한 소의 장씨에 대한 반감을 표면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옥교 사건은 그때까지 장씨에 대한 [[서인]]의 공격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조선 숙종|숙종]]을 강하게 자극하였다. [[조선 숙종|숙종]]은 같은 당하관의 아내인 귀인 김씨의 어미도 옥교를 타고 수시로 궁에 드나들지만 문제 삼아진 적이 없으며, 장씨의 생모는 후궁이 해산할 때 교자를 타고 입궁할 수 있다는 왕실 규례에 따라 [[조선 숙종|숙종]]의 어명을 받고 입궁한 것이며, 어명을 상징하는 선소동패(宣召銅牌)를 보였음에도 입궁치 못하고 내쫓긴 것은 왕을 능멸하는 행위임을 선포하며 [[이익수]] 및 사헌부 관원을 체포하여 엄형을 내리고 사형할 것을 명하였고 그들을 옹호하는 이들에게도 벌을 내릴 것을 선포했다. 하지만 [[조선 숙종|숙종]]의 척신이자 최측근이기도 했던 우의정 [[조사석]]마저 윤씨가 탄 가마가 8인교<ref group="주">옥교에는 2인교, 4인교, 6인교, 8인교 등이 있는데 이후 사치풍조가 만연해져서 12인교도 생겨났다. 임금과 왕후가 타는 가마는 연으로 20명이 들었고, 세자의 연은 16명으로 규정되어 있다. 공주와 옹주가 타는 덩은 8명이 든다. [[조사석]]은 윤씨가 공주와 옹주의 덩보다는 못하지만 8명이 드는 8인교를 탄 것은 부당하다고 고발한 것이다.</ref><ref>《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정연식 저</ref><ref group="주">사람이 드는 가마의 상급은 말이 끄는 가마인데 쌍교와 독교로 나뉜다. 말 두 마리가 앞뒤로 가마를 끄는 쌍교가 상급으로 2품 이상과 승지만이 탈 수 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영조시대엔 이미 예사로와진 일이 되어 여인들도 쌍교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이는 숙종시대에도 비슷한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신생왕자의 외조모이자 왕명을 받고 입궐하던 윤씨가 8인교를 탄 것은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스러운 행위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윤씨가 옥교를 탄 흔적은 존재하지 않는다.</ref> 였음을 강조하며 [[영빈 김씨|귀인 김씨]]의 어미는 비교 대상이 아님<ref group="주">귀인 김씨의 어미는 당상관의 아내는 아니지만 판서였던 [[이정영]]의 딸이다. 또한 귀인 김씨의 종조부인 [[김수항]], [[김수흥]]이 정승이었기에 [[조사석]]은 귀인 김씨의 어미는 역관 가문 출신인 윤씨에 비해 옥교를 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ref> 을 주장함으로써 숙종은 서인 대신은 물론 윤씨를 모욕한 하리에게 내린 벌조차도 취소하고 그들을 위로해야 했다.
- 헌경왕후 . . . . 43회 일치
|전임자 = [[효순왕후|현빈 조씨]](효순왕후)
|후임자 = [[효의왕후|빈궁 김씨]](효의왕후) - 세손빈
|이름 = 헌경왕후<br/>(헌경의황후)
|작위2 = [[조선의 역대 왕비|추존 왕후<br />추존 황후]]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 [[1735년]] [[8월 6일]]([[음력 6월 18일]]) ~ [[1816년]] [[1월 13일]]([[1815년]] [[음력 12월 15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왕세자빈, [[추존]]왕비로, [[대한제국]]의 추존황후이기도 하다. [[조선 영조|영조]]의 차남 [[조선 장조|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비이자, [[조선 정조|정조]]의 어머니이다. 원래 시호는 헌경혜빈(獻敬惠賓)이었으나,<ref>순조실록 19권, 순조 16년(1816 병자년 / 청 가경 21년) 1월 19일(기해) 1번째기사, "혜경궁 시책문"</ref> [[대한제국 고종|고종]]때 왕후로, 다시 황후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王后)로,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 또는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로도 알려져 있다.
생전에 받은 존호로는 [[1778년]](정조 2년)에 효강(孝康), [[1783년]](정조 7년) 자희(慈禧), [[1784년]](정조 8년) 정선(貞宣), 1795년(정조 19)에는 그의 회갑을 기념하여 휘목(徽穆)이란 존호를 받고 효강자희정선휘목혜빈이 되었다. 정조 즉위 후에는 정조의 생모였으므로 법적으로는 혜빈이었지만 혜빈이라는 칭호 대신 혜경궁으로 불렸다. 흔히 경의왕후(敬懿王后)라 하지만 죽은 후 받은 시호가 헌경이었고 의(懿) 자는 황후로 추존된 후 받은 제호(帝號)로 이는 잘못된 표기이다. [[한중록]]의 저자이다.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이고 [[서울]] 출신.
홍봉한은 [[1770년]](영조 46년)경 반대파 김귀주, 정후겸의 공격으로 정계에서 영원히 은퇴하고 봉조하의 직함으로 교외에 거주했으며 이후에도 이복동생이던 홍인한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형을 배신했다고 정조가 말한적이 있다. 사도세자 생전부터 있었던 정순왕후 외척가문과의 정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에도 김귀주 정파의 홍봉한 탄핵이 여러번 있었으며 정조 즉위초에도, 정조 사후에도 이들이 홍봉한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 사도세자의 추숭에 대해 당시 세손이던 정조와 사석에서 홍봉한이 나눈 이야기를 김귀주가 영조에게 고자질해서 홍봉한을 역적으로 몰기도 했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영조가 83세에 서거하고, 대리청정하던 세손 이산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등극하니, 곧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어머니 혜빈 홍씨 역시 '혜경궁(惠慶宮)'으로 궁호가 높아졌다. 당시 왕실에서 혜경궁 홍씨가 제일 연장자였으나, 서열상 10살 아래인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가 대비의 위치를 차지하여 왕실 서열상 제2위의 위치에 있었다.
[[1854년]](철종 5년) 유정(裕靖)의 존호가 추가되었다. [[1899년]](광무 3년) [[8월 3일]]에 경연특진관 서상조(徐相祖)의 상소로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할 것을 청하여 [[조선 고종|고종]]이 승인하여 장헌세자가 장종대왕으로 [[추존]]되자, 함께 헌경왕후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성립 이후인 [[1903년]](광무 7년) 장조가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격상되자 그녀 역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되었다.
능은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융릉]](隆陵)으로 남편인 장조와 함께 묻혀 있으며 인근에는 아들 정조와 며느리인 [[효의왕후]]의 능인 [[융건릉|건릉]](健陵)도 위치하여 있다.
***** 당숙 : 증 영의정 [[홍상한]](贈 領議政 洪象漢, 1701~1769) - [[어유구]]의 조카사위,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의 사촌제부
****** 오빠 : [[홍낙인]](洪樂仁, 1729~1777.06.19) - [[민진원]]([[인현왕후]]의 오빠)의 손녀사위
* 시고조모 :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1619~1674)
** 시증조모 :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 1642~1683)
*** 시조모 :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 1661~1680)
*** 시조모 :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1701)
*** 시조모 :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
**** 시백모 : [[단의왕후]] 심씨(端懿王后 沈氏, 1686~1718)
**** 시백모 :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 魚氏, 1705~1730)
**** 시어머니 :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1757)
- 정성왕후 . . . . 36회 일치
|전임자 = [[선의왕후 (조선)|빈궁 어씨]](선의왕후)
|후임자 = [[효순왕후|현빈 조씨]](효순왕후)
|이름 = 정성왕후
|능묘 = [[홍릉 (정성왕후)|홍릉]]
|전임자2 =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
|후임자2 =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3년]] [[1월 12일]] ([[1692년]] [[음력 12월 7일]]) ~ [[1757년]] [[4월 3일]] ([[음력 2월 15일]])는 조선의 제21대 왕 [[조선 영조|영조]]의 정비(正妃)이며 조선의 역대 왕비 중 왕비재임기간이 가장 긴 왕비이다.
정식시호는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원렬단목장화정성왕후'''(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元烈端穆章和貞聖王后)이다. 본관은 [[대구 서씨|달성]](達城).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와 잠성부부인(岑城府夫人)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757년]] 창덕궁(昌德宮)의 대조전'''(大造殿)'''에서 66세로 시어머니인 [[인원왕후]] 보다 먼저 세상에 떠났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 내에 위치한 '''[[홍릉 (정성왕후)|홍릉]]'''이다.
[[1757년]], 66살의 나이로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을 아버지인 [[조선 숙종|숙종]]의 명릉(明陵) 근처에 만들고 훗날 자신이 정성왕후의 옆에 묻히기 위해 옆자리를 비워놓았다. 그러나 [[1776년]], 영조가 승하한 뒤 손자인 [[조선 정조|정조]]는 당시 왕대비(王大妃)였던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영조)|정순왕후]]를 의식하여 현재의 [[동구릉]] 위치에 영조와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을 조성하였고 결국 정성왕후는 옆자리가 비워진채 홍릉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 시조모 :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1619~1674)
** 시어머니 :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 1661~1680)
** 시어머니 :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1701)
*** 윗동서 : [[단의왕후]] 심씨(端懿王后 沈氏, 1686~1718)
*** 윗동서 :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 魚氏, 1705~1730)
** '''시어머니''' :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
**** 며느리 : [[효순왕후|효순소황후]] 조씨(孝順昭皇后 趙氏, 1715~1751)
**** 며느리 : [[헌경왕후|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혜경궁, 1735~1815)
== 정성왕후가 등장하는 작품 ==
전임자=[[선의왕후]]|
- 한명회 . . . . 32회 일치
|자녀= 아들 한보, 딸 [[공혜왕후]], [[장순왕후]], 딸 [[장나라]] 한, 아들 한복(韓福), 한임(韓林), 한수(韓壽), 한목(韓睦), 한석(韓碩), 한서(韓恕), 한우(韓佑), 한온(韓瘟), 딸 한씨(韓氏), 한씨(韓氏), 한씨(韓氏)
|친척= [[한상질]](할아버지), [[한확]](친족), [[소혜왕후]](친족), [[조선 세조|세조]](사돈), [[조선 예종|예종]](사위), [[조선 성종|성종]](사위)
'''한명회'''(韓明澮, [[1415년]] [[11월 26일]] ([[음력 10월 25일]]) ~ [[1487년]] [[11월 28일]] ([[음력 11월 14일]]))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며 외척이다. 1475년에서 1476년까지 1년간 조선국 상급 국상 지위를 지낸 그의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 자(字)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압구(狎鷗)·사우당(四友堂)이며, 별칭은 칠삭동이<ref>7개월만에 출생하여 생애 초기에 칠삭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ref>,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일찍이 [[조선 태조]]때 학사로 [[명나라]]에서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온 [[개국공신]]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이자 [[증직|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의 아들이고, 이조참판과 직제학을 지낸 [[여주 이씨]] [[이척]]의 외손자이자 [[대제학]] 이행의 증외손이다. [[조선 예종|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조선 성종|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2300건이나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상환(韓尙桓), 류태재(柳泰齋)의 문인이다. [[한성부]] 출신.
[[개성]]에 유람차 놀러 갔을 때 [[영통사]](靈通寺)의 한 노승이 그를 보고 " 그대의 두상에 광채가 있으니 필연코 귀할 징조라" 하였다. 당시 그는 이 노승의 예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뒤 두 종조부가 별세하자 [[중추원|중추원사]](中樞院使) [[민대생]](閔大生)이 그를 거두어 사위로 삼았다. 부인 황려부부인에게서는 1남 4녀가 태어났는데, 이 중 셋째 딸이 [[조선 예종|예종]]비 [[장순왕후]]와 넷째 딸이 [[조선 성종|성종]]비 [[공혜왕후]]이다.
[[조선 세조|세조]]의 장자 [[조선 덕종|의경세자]]가 요절하고 그의 빈인 [[소혜왕후|수빈 한씨]]는 궁궐에 살아도 좋다는 시아버지 [[조선 세조|세조]]의 배려를 사양하고 사가로 물러나 있었다. 그는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친정과는 10촌도 더 차이가 나는 먼 친척이었으나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집에 자주 방문했는데, 그는 수빈 한씨에게 야심이 있음을 간파하였다. 한명회는 [[소혜왕후|인수대비]]에게 사돈을 맺는 조건으로, 그녀의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겠다고 제의를 한다.
그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나갔다.<ref name="park115"/> 그는 우선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장순왕후|예종비]]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다른 딸을 [[공예왕후|성종비]]로 만들어 딸들을 2대에 걸쳐<ref name="park116"/> 왕후로 삼게 했다. 또한 [[권람]]은 일찍 요절한 그의 동생 [[한명진]]의 처남이기도 했다. 한편 자신의 손자 [[한경침]]을 다시 사위이기도 한 [[조선 성종|성종]]의 후궁 소생 서녀 [[공신옹주]]와 혼인시켜 3대에 걸쳐 왕실과 겹사돈관계를 형성한다.
[[소혜왕후|인수대비]]의 둘째 아들인 [[조선 성종|자을산군 혈]]과 그의 넷째 딸을 혼인시키는데, 후에 [[조선 예종|예종]]이 일찍 죽자 한명회는 [[신숙주]], [[정창손]] 등과 함께 [[조선 성종|자을산군]]을 추대하여 성종으로 등극시키게 된다.
그는 평소 자신이 은퇴하여 갈매기를 벗삼겠노라며 [[한성부]] 한복판에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었으나 그 자신은 은퇴할 수 없었다. [[1471년]](성종 2년) 춘추관영사(春秋館嶺事)에 이르렀다. 평소 몸이 쇠약했던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한명회의 권세도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동년, 그는 대궐의 동, 서쪽에 군영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키고 자신이 직접 서영대장이 되어 서영(西營) 군사를 거느렸다.
[[1481년]](성종 11년)에 새 왕비가 된 [[정현왕후]]의 책봉 고명과 궁각(弓角)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책봉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가니 황제가 충직한 노한(老韓)이 다시 왔다며 충성정직(忠成正直)으로 표창받고 돌아왔다. [[1484년]](성종 15년) 봄에도 나이 70으로 벼슬을 사임함에 왕이 경은 나라의 으뜸 공로자이며 인간적으로는 덕있는 노인이며 사직(社稷, 나라를 지켜주는 신)에는 하늘의 기둥(천주, 天柱)과 같은 존재이다" 하며 사임을 물리쳤다.
야사에는 [[유자광]]의 사주를 받은 언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당했다 한다. [[유자광]]의 사주를 받은 언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되자 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도끼로 자신의 정강이 또는 자신의 집 대들보를 내리찍었다고 한다. 그는 왕실과 이중으로 인척관계를 형성했는데, 그의 큰딸은 세종의 서녀 [[정현옹주]]의 아들 윤반과 혼인을, 그의 작은딸은 [[신숙주]]의 맏아들 신주와 혼인하였고 셋째 딸은 [[조선 예종|예종]]의 정비([[장순왕후]])가, 막내딸은 [[조선 성종|성종]]의 정비([[공혜왕후]])가 되어 영화를 누렸으나, 이 딸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그의 처 황려부부인 민씨는 단종비 [[정순왕후]]의 외종이모뻘이었다. 장인 [[민대생]]은 단종비 [[정순왕후]]의 외조부인 [[민소생]]의 형이었고, [[정희왕후]]의 친척이자 [[정현왕후]]의 증조부인 [[윤곤]]이 그의 고모부였다.<ref>영원부원군 윤호가 내종조카였고, [[윤필상]] 역시 그의 인척이었다.</ref>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도 그의 당숙모의 조카였다.
* 정실: 황려부부인(黃驪府夫人) 여흥 [[신애라|황려부부인]] - [[증직|증]][[의정부]][[우의정]] 민대생(閔大生)의 딸. (? ~ [[1490년]]) [[조선 단종|단종]]비 [[정순왕후]]의 모친 여흥부부인과 친사촌지간이다. 민중립의 아들 민소생, 민대생
** 삼녀: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년 ~ 1461년) - [[조선 예종|조선 제8대 국왕 예종]]의 정비(正妃)
** 사녀: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년 ~ 1474년) - [[조선 성종|조선 제9대 국왕 성종]]의 정비(正妃)
** 구남: [[장성원(배우)]] 장순왕후의 아들
* 장인: [[민대생]](閔大生, 1372 ~ 1467) - 단종비 [[정순왕후]]의 외조부인 [[민소생]]의 형이다.
=== 장순왕후와 공혜왕후 ===
그는 [[조선 세조|세조]]와 그의 장남이자 자신의 사위인 [[조선 예종|예종]]의 형인 [[조선 덕종|의경세자]]와도 이중 사돈관계를 형성하였다. [[조선 예종|예종]]의 원비 [[장순왕후]](章順王后)는 그의 셋째 딸이고, [[조선 성종|성종]]의 원비 [[공혜왕후]](恭惠王后)는 넷째 딸로, 이들은 친정 자매간이면서 시가로는 시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관계가 된다.
- 장순왕후 . . . . 30회 일치
|전임자 = [[소혜왕후|수빈 한씨]](소혜왕후)
|이름 = 장순왕후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1445년]] [[2월 22일]]([[음력 1월 16일]]) ~ [[1462년]] [[1월 5일]]([[1461년]] [[음력 12월 5일]]))는 [[조선]] [[조선 예종|예종]](睿宗)의 정비이다. [[시호]]는 '''휘인소덕장순왕후'''(徽仁昭德章順王后)이며, 상당부원군 충성공 [[한명회]](上黨府院君 忠成公 韓明澮)와 황려부부인 민씨(黃驪府夫人 閔氏)의 셋째 딸로,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이다. 세자빈 시절 [[인성대군]]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요절하였다.
===현덕왕후의 저주===
{{본문|현덕왕후}}
야사에서는 장순왕후와 그의 동생 [[공혜왕후]], 형부 [[조선 덕종|덕종]](의경세자), 남편 [[조선 예종|예종]]과 아들 [[인성대군]] 등 [[조선 세조|세조]]의 자손들이 이른 나이에 요절한 것이 [[조선 단종|단종]]을 억울하게 죽인 [[조선 세조|세조]]에 대한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저주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저주의 첫 대상자로 알려진 [[조선 덕종|덕종]]의 경우 [[조선 단종|단종]]보다도 먼저 사망했으며, 따라서 [[조선 세조|세조]]가 [[조선 덕종|덕종]]의 죽음에 분노해 [[현덕왕후]]의 능묘를 파헤치고 폐서인했다는 설명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조선 세조|세조]]는 총애하던 며느리의 죽음에 비통해하며, 온순하고 너그럽고 아름다운 것을 장(章), 유순하고 어질고 자혜로운 것을 순(順)이라 하여 세자빈 한씨에게 장순(章順)의 시호를 내리고 장순빈(章順嬪)으로 삼았다. 후일, 장순빈의 제부이자 시조카인 [[조선 성종|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를 장순왕후로 추존했다.
능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파주삼릉]] 내에 위치한 [[공릉 (장순왕후)|공릉]](恭陵)이다. 장순왕후로 추숭되면서 왕후의 예에 걸맞은 제사를 지냈다고 하나, 애초에 세자빈의 묘로 지어졌기 때문에 다른 왕후들의 묘소보다 초라한 행색을 갖추었다.
***** 여동생이자 시질부 : [[공혜왕후|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1454~461)
* 시어머니 :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1418~14~1483)
** 윗동서 :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1437~1504) : 인수대비(仁粹大妃)
*** 시질부이자 여동생 :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1456~1474)
== 장순왕후가 등장한 작품 ==
* [[공릉 (장순왕후)|공릉]]
* [[공혜왕후]]
전임자=[[정희왕후]]<br/>([[소혜왕후]])|
후임자=[[안순왕후]]|
직책=[[조선의 역대 왕비|조선 역대 왕후]]|
{{조선의 왕후와 대한제국의 황후}}
- 정난정 . . . . 24회 일치
젊은 시절에는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눈에 들어 첩이 되었다. 훗날 김안로가 문정왕후를 폐위하려 한 음모가 발각되자 김안로가 사사되고 김안로의 질녀였던 윤원형의 부인 김씨를 윤원형과 문정왕후의 묵인하에 몰아내고 실질적인 안방 주인이 되었다. 그 후 명종8년 문정왕후는 정난정을 적처로 올리라는 전교를 내려,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이 되었다.
정난정은 윤원형과의 슬하에 4남 2녀를 남겼는데, 정난정이 정실부인이 됨에 따라 그 자녀들도 적자가 되었다. 양반가에서는 그녀의 권세에 힘입으려고 사돈이 되자 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다. 많은 재산을 모으며 부귀를 누렸고 문정왕후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였으며, [[1553년]](명종 8) 직첩(職帖)을 받아 마침내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이 되었다. 또한 [[윤원형]]이 상소하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로서는 신분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으며 신분제도 때문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았다. 승려 [[보우 (조선)|보우]]를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선종판사(禪宗判事)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선·교(禪敎) 양종이 부활되고 도첩제도(度牒制度)가 다시 실시되는 등 한때나마 [[불교]]가 융성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보우 (조선)|보우]]를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에게 적극 추천하여 그를 총애받게 한다.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병조판서직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불교가 융성하기도 했다.<ref name="park207">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07페이지</ref>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은 정난정에 대한 반감이 극심하여 그 후원자인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가 죽기만을 기다렸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승려 [[보우 (조선)|보우]]는 제주도로 귀양을 가 사망하고 정난정은 [[사림]]의 탄핵을 받아 본래 신분인 천민으로 강등되었다. 이후에도 사림의 계속적인 탄핵으로 남편 [[윤원형]]과 함께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유배되었다.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가 승하한 지 5개월 후인 1565년 9월 8일 [[윤원형]]의 본부인 연안 김씨의 계모 강씨는 정난정이 김씨를 독살했다며 [[의금부]]에 고발하였다. 이 사건으로 점차 사대부의 공격이 심해지자 [[1565년]] [[11월 13일]] 독술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윤원형]]도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사후 [[사림파]]에 의해 악녀의 대명사로 일컬어졌다. 조선의 사대부는 정난정을 조선의 질서를 어지럽힌 타락한 여성으로 묘사하였는데, 구전과 민담을 통해 작품과 희극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그는 자신이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의 측근인 점을 이용,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에게 서자 서녀도 능력이 되는 인물을 등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남편 윤원형이 상소하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하였다.<ref name="yunnaev"/> 이는 당시로서는 신분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으며 신분제도 때문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았다.<ref name="yunnaev"/>
*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
- 폐비 윤씨 . . . . 24회 일치
|전임자 = [[공혜왕후]]
|후임자 = [[정현왕후]]
|별칭 = 숙의 윤씨(淑儀 尹氏) <br /> 제헌왕후(齊獻王后) 추후 삭탈
[[1473년]] [[조선 성종|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의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王妃)로 책봉되었으나 남편 용안에 상처를 내어 폐비(廢妃)되어 사사되었다. 아들 [[연산군]] 즉위 후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삭탈되면서 죽을 당시의 폐서인 신분으로 돌아갔다.
남편 [[조선 성종|성종]]의 후궁들 문제로 시어머니인 [[소혜왕후|인수대비]]와 고부갈등으로 유명하며, [[조선 성종|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낸 일로 인해 폐비(廢妃)된 후 사사되었다. 사사 당시 윤씨는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세자가 자라서 왕이되거든 피를 토한 금삼을 넘겨줄 것을 유언했고, 이는 후일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도화선이 된다. [[조선 연산군|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가 되는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왕비(王妃)의 작호를 추숭시켰다. 그러나 [[중종 반정]]이 일어난 후 왕후(王后)의 호는 삭탈되었다.
일부 현대극이나 야사 등에서 그녀의 아버지 [[윤기견]]의 죽음으로 인해 집안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궁녀로 입궁했다고 하지만<ref>[[2011년]] 방영된 [[JTBC]]의 드라마 《[[인수대비 (드라마)|인수대비]]》 등에서는 폐비 윤씨가 궁녀로 입궁한 것으로 그렸다.</ref>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희왕후]](자성대왕대비)가 그녀를 훗날의 [[정현왕후]]가 되는 [[윤호]]의 딸과 함께 입궁시켜 숙의(淑儀)의 첩지를 내린 사실이 명백히 표기되어 있다.
[[성종]] 5년(1474년)에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성종]]은 2년 뒤 [[공혜왕후]]의 3년상을 마치고 [[1476년]] [[7월 31일]]([[음력 7월 11일]])에 숙의(淑儀)였던 윤씨를 왕비(王妃)로 삼을 것을 전교하였다.
[[인수대비]]는 원자가 더 자라서 자신의 어미얼굴을 기억할까봐 하루빨리 새 중전(中殿)을 세워야 한다는 명분으로 훗날의 [[정현왕후]]가 되는 [[정현왕후|숙의 윤씨]](淑儀 尹氏)를 왕비(王妃)로 책봉시켰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비(廢妃)가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반성하는 점,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 두고자 하였으나, [[귀인 엄씨|숙의 엄씨]]와 [[귀인 정씨 (성종)|귀인 정씨]]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인수대비]]와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였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의 [[조선 연산군|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조선 연산군|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齊獻王后)에 추숭되고, [[회묘]]는 회릉(懷陵)으로 격상되었다.
친정오빠 [[윤구]]의 손녀사위는 [[조선 명종|명종]]비 [[인순왕후]]의 외삼촌이자 권신인 [[이량 (조선)|이량]]이다.
* 시어머니 :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1437~1504)
* [[소혜왕후]](인수대비)
* [[단경왕후]]
전임자=[[공혜왕후]]|
후임자=[[정현왕후]]|
직책=[[조선의 역대 왕비|조선 역대 왕후]]|
{{조선의 왕후와 대한제국의 황후}}
- 신성왕후 . . . . 19회 일치
|이름 = 신성왕후
|전임자 = [[신정왕후 (고려)|신정왕후]]
|후임자 = [[정덕왕후]]
|시호 = 신성왕후
'''신성왕태후 김씨'''(神成王太后 金氏) 또는 '''신성왕후'''(神成王后)는 [[신라]]의 왕족 출신 [[고려]]의 왕후로 [[고려 태조]] 왕건의 제5왕후이다. [[신라]] [[신라 문성왕|문성왕]]의 후손으로 [[신라 경순왕]]은 그의 사촌 오라비였다. 그녀는 [[고려 안종|안종 왕욱]]의 생모이기도 하다. 본래는 왕후가 아니었으나, [[1010년]] [[고려 현종|현종]]에 의해 왕후로 추존되었다. 성은 김씨, 본관은 [[경주 김씨|경주]](慶州)이다.
신성왕후 김씨는 [[신라]] 왕족이며, [[신라 문성왕|문성왕]]의 5대손이며, [[신라 경순왕|경순왕]]의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이다. 그녀가 태조의 다섯 번째 왕후가 된 것은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935년 11월 직후부터 936년 초기가 될 것이다.
신성왕태후 김씨의 소생으로는 안종(安宗)으로 추존된 [[고려 안종|왕욱]](王郁)이 있는데, 그는 제5대 국왕 [[고려 경종|경종]]의 제4왕후 [[헌정왕후]] 황보씨와 정을 통해 제8대 국왕 [[고려 현종|현종]]을 낳았다.<ref>《고려사절요》</ref> [[1008년]] 현종(顯宗)이 즉위하고 [[1010년]] 왕후로 추존하여 시호를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라 하고 능호는 정릉(貞陵)이라고 하였다. 원당은 [[경기도]] [[장풍군]]에 있는 현화사이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rp0703&index_id=rp07031400&content_id=rp070314000001&print=Y 문화콘텐츠닷컴 〈현화사〉]</ref>.
**** 며느리 : [[헌정왕후|효숙왕태후]] 황보씨(孝肅王太后 皇甫氏, 965/966~992, [[고려 경종|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 [[헌정왕후]]
{{고려의 왕후와 왕비}}
- 태종무열왕 . . . . 18회 일치
|배우자 = [[문명왕후|문명왕후 문희]], [[영창부인|영창부인 보희]]
*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12대 풍월주 보리공(菩利公)의 딸 보룡(寶龍)과의 사이에서 아들 당원전군(幢元殿君)과 딸 여씨(呂氏)를 두었고, 문명왕후와의 사이에서도 선원전군(仙元殿君)이라는 아들이 더 있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무열왕은 문희와 혼인하기 이전에 이미 [[보종]]과 양명공주의 딸 [[보라궁주]](寶羅宮主) 설씨와 결혼했으며, 처음 문희는 측실로 혼인하였으나 보라궁주의 요절로 문희가 정실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문희의 언니인 보희와의 사이에도 지원(知元)이라는 왕자가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들 왕자의 실존은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 조모 : [[지도부인 박씨]](知道夫人 朴氏) - [[진지왕]]의 왕후
* 어머니 : [[천명공주]](天明公主) - 제26대 [[진평왕]]과 [[마야부인 (신라)|마야왕후]]의 딸로 무열왕 즉위 후 [[문정태후]]로 추존되었다.
* 이모 : [[선덕여왕]](신라 27대 임금. 덕만공주) - 제26대 [[진평왕]]과 [[마야왕후]]의 첫째 딸로 첨성대 등을 건립하였다.
* 제1왕후 : [[문명왕후|문명왕후 김문희]](文明王后) - [[김서현]]의 차녀,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 무열왕의 제2왕후인 [[영창부인|영창부인 김보희]]의 동생.
** 맏며느리 : [[자의왕후|자의왕후 김씨]] - 파진찬 [[김선품]]의 장녀
** 장녀 : [[고타소랑|고타소공주]](古陀炤公主) - [[대야성]] 성주 이찬 [[김품석]]에게 시집갔으며, 《[[삼국사기]]》에서는 [[문명왕후 김씨]]의 딸이라고 설명하고,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양명공주의 딸 보라궁주 설씨의 소생이라고 설명한다. [[대야성]] 전투에서 사망.
* 제2왕후 : [[김보희]] - [[김서현]]의 장녀, [[김유신]]의 첫째 여동생, 무열왕의 제1왕후인 [[문명왕후|문명왕후 김문희]]의 언니.
** 4남 : [[김개지문]](金皆知文) - 필사본 《화랑세기》에 김서현의 장녀로 문명왕후 김보희의 언니인 [[김보희]] 소생이라고 설명한다.
- 문무왕 . . . . 15회 일치
|모후=[[문명왕후]]
|왕후=[[자의왕후]]
[[태종 무열왕|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문명왕후]]([[김유신]]의 둘째 누이)의 맏아들로, [[김 (성씨)|김]](金)이고, 이름은 '''법민'''(法敏)이다.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 지역을 차지하려 했던 [[당나라]]의 군대를 [[나당 전쟁]]에서 격퇴함으로써 [[676년]]에 [[삼국통일]]을 이룬 왕이다. 왕후는 파진찬 [[선품공|김선품]]의 딸 [[자의왕후]]이다.
{{Cquote|어느 날 김유신의 맏누이인 [[영창부인|보희]](寶姬)가 서형산(西兄山)<ref group="주">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의 [[선도산 (경북)|선도산]](仙桃山)</ref> 꼭대기에 올라 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온 나라 안에 흘러 펼쳐지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잠에서 깬 뒤에 동생인 문명왕후에세 꿈 이야기를 했다. 문명왕후는 자신이 언니의 꿈을 사고 싶다고 말하며 비단치마를 주었다. 며칠 뒤에 김유신이 뒷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金春秋)와 축국(蹴鞠)을 하다가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김유신은 자신의 집으로 김춘추를 데리고 와서는 주연을 베풀며 맏누이인 보희에게 옷고름을 달게 했다. 하지만 보희는 마침 일이 있어서 나오지 못하고 동생인 문명왕후가 대신 나와서 바느질을 하였다. 김춘추는 그녀의 어여쁜 모습에 반하여 곧 청혼을 하여 결혼하였고, 그녀는 곧바로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뒷날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金法敏)이다.|《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1년}}
* 모후 : [[문명왕후 김씨]](文明王后 金氏, 생몰년 미상) - [[김서현]]의 차녀, [[김유신]]의 누이동생
* 왕후 : [[자의왕후]] 김씨(慈儀王后 金氏, 생몰년 미상) -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에 태어난 [[구륜공]](仇輪公)의 아들 [[선품공]]의 장녀(長女)이다. 진골정통계이다.
* 후궁 : [[신광부인]]([[김유신]]의 둘째딸, [[무열왕]]은 맏아들 [[김법민 (신라)|김법민]]([[김법민 (신라)|문무왕]]) 의 태자비로 세우려 했으나 이미 [[자의왕후 김씨]]와 혼인한 상태라 그녀를 [[김법민 (신라)|김법민]]([[김법민 (신라)|문무왕]])의 후실로 맞이 하였다고 하며 [[문명왕후 김씨]] 또한 그녀를 무척이나 아끼고 총애 하였다 한다.)
* 처제·후궁 : [[야명궁주]] 김씨(夜明宮主 金氏, 생몰년 미상) - [[선품공]]의 셋째 딸이자 [[자의왕후 김씨]]의 여동생이다.
- 하동부대부인 . . . . 9회 일치
[[조선 명종|명종]] 부부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으로 즉위한 [[조선 선조|선조]]는 [[조선 예종|예종]]부부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하였다가 즉위 직후 스스로를 파양하고 친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한 [[조선 성종|성종]]과는 달리 강력한 배경도 없었으며 생부 [[덕흥군]]이 후궁 소생 왕자에 불과하여 부모를 왕과 왕후로 격상할 수 없었다. 이에 절충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작위가 공신 정1품의 작위로 왕비의 아버지의 작위로도 쓰여진 부원군(府院君)의 부(府)를 대(大)로 교체한 대원군(大院君)이다. [[조선 선조|선조]]는 생부 덕흥군을 조선 최초의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으로 추증하였고, 생모 군부인(郡夫人) 정씨는 외명부 소속 왕실 여성의 최고 품작인 부부인으로 추증하였다.
이를 전례로 삼아 [[조선 인조|인조]] 역시 자신의 어머니 구씨를 부부인으로 책봉하여 연주부부인으로 삼았다가<ref>《승정원일기》[http://sjw.history.go.kr/inspection/search_result_list.jsp?oflag=0&M=0&query=%E9%80%A3%E7%8F%A0%E5%BA%9C%E5%A4%AB%E4%BA%BA&set_id=596444&selK=1&selT=1&query_im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9%80%A3%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7%8F%A0%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BA%9C%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A4%AB%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4%BA%BA%3C%2Fspan%3E&x=21&y=7 연주부부인]</ref>, 이후 [[인헌왕후]]로 추존하였다.
** 시어머니 : [[장경왕후 (조선)|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1491~1515)
** 시어머니 :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1565)
**** 며느리 :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1555~1600)
**** 며느리 :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1584~1632)
**** 며느리 : 폐 공성왕후 [[공빈 김씨]](廢 恭聖王后 恭嬪 金氏, 1553~1577)
- 한확 . . . . 9회 일치
|자녀= 정선군부인(딸) <br/> [[소혜왕후]](딸)
[[1435년]](세종 17년)에 자헌대부 행중추원부사,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37년]] 그의 딸 한씨가 계양군(桂陽君) 이증과 혼인하고 정선군 부인(旌善郡夫人)에 봉작되었다. 그의 또다른 딸은 [[수양대군]]의 아들 [[조선 덕종|도원군 숭]]과 결혼하는데 이 딸이 바로 후일의 [[소혜왕후|인수대비]]가 된다.
귀국길에 올라 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 돌아오던 중, 칠가령(七家嶺)에 이르러 병을 얻어, 귀환하는 도중에 [[음력 9월 11일]] 사하포(沙河浦)에서 갑작스럽게 객사하였다. 당시 향년 56세였다.<ref>1400년생 설을 따를 경우</ref> 사망 당시 가사에 대한 말은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둘째 딸은 [[세종]]의 서자 [[계양군]] 증에게 출가했고, 여섯째 딸은 [[소혜왕후|인수대비]]로 [[조선 덕종|덕종]]의 비이며 [[월산대군]]· [[조선 성종|성종]]의 어머니였다.
한확은 세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충신이었다. 그는 그의 누나가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이 되면서 명나라 황실의 벼슬을 받고 외교채널이 된다.<ref name="ky">[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96702 <nowiki>[</nowiki>王을 만나다·16<nowiki>]</nowiki>서오릉-경릉 ( 추존 덕종·소혜왕후) : 남존여비 '女訓'과 상반된 '여성상위능'] 경인일보 2010.01.14</ref> 그리고 누이동생 또한 명나라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간택돼 더욱 외교적 입지를 다지게 된다. 사실 한확의 두 누이이자 인수대비의 고모들은 명나라에 공녀로 바쳐진 가슴 아픈 사연을 지녔다. 한확은 계유정난 때 세조를 도와 정난공신 1등에도 올랐는데 세조의 왕위 찬탈을 승인하지 않던 명나라에 들어가 단종이 왕위를 물려준 양위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한확은 골치 아픈 외교 문제를 해결하였다.<ref name="ky"/>
** 육녀 : [[인수대비]](소혜왕후)
사치하지 않고 검소하였으며, 누나와 누이동생이 명나라 성조와 선종의 총애를 받음을 계기로 현달하여 [[명나라]] 후궁의 일족이라는 후광을 얻었으나 거만하지 않았다. 딸 [[소혜왕후]]에게는 일찍이 한학과 사서 삼경을 가르치고 부녀로서 지켜야 할 범절을 가르쳤으며, 세자빈이 된 뒤에도 검소하고 자신을 낮출 것을 권고하였다.
부인 홍씨의 신도비는 왕족, 후궁 여성 외의 여성의 신도비로서는 최초로 건립된 것이다. [[1497년]](연산군 3년) [[3월 16일]] [[소혜왕후]]의 명으로 [[임사홍]]에게 신도비문을 짓게 하여 수립하였다.
* [[소혜왕후|인수대비]]
* [[정희왕후]]
- 화완옹주 . . . . 9회 일치
친오빠 사도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화완옹주는 사도세자의 비행과 실수를 그대로 부왕 영조에게 고해바쳤다. 인원왕후의 상 때 인원왕후전 나인이었던 빙애를 후궁으로 취한 뒤, 영조의 추궁이 있자 사도세자는 빙애를 화완옹주의 처소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빙애의 존재가 영조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 조모 :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
** '''어머니''' :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1757)
** '''어머니''' :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 (貞純王后 金氏, 1745년 - 1805년)
*** <sup>이복</sup> 올케 : [[효순왕후|효순소황후 조씨]] (孝純王后 趙氏)
*** 올케 : [[헌경왕후|헌경의황후 홍씨]] (獻敬懿皇后 洪氏, 혜경궁 홍씨, 1735년~1815년)
**** 조카며느리 : [[효의왕후|효의선황후 김씨]](孝懿宣皇后 金氏, 1753년 12월 13일~1821년 3월 9일)
- 경순왕 . . . . 8회 일치
|배우자 = [[죽방부인]](정실 왕후) <br/> 낙랑공주 왕씨(제1후비) <br/> [[개성 왕씨|왕씨]] 부인(제2후비)
왕후(王后)는 [[죽방부인]](竹房夫人)으로 슬하에 두왕자를 두었다. 첫째가 [[마의태자|태자]](太子)이고, 둘째가 김황(굉,나주김씨)왕자이다.
왕후(王后)는 [[죽방부인]](竹房夫人)으로 슬하에 두아들을 두었다. 첫째가 [[마의태자|태자]](太子)이고, 둘째가 김황(굉,나주김씨)왕자이다.
[[고려 태조|태조 왕건]]도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녀가 제5왕후인 [[신성왕후]] 김씨이다. 슬하에 왕욱(王郁)을 두었으며, 왕욱(王郁)의 아들이 고려 제8대 왕 [[고려 현종]]이다.
이후 경순왕은 첫째딸을 [[고려 태조]]의 손자인 [[고려 경종|경종]]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고려 경종|경종]]은 그를 특별히 배려하여 상보령(尙父令)으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그는 [[고려 태조]]부터 [[고려 혜종]]·[[고려 정종|정종]]·[[고려 광종|광종]]·[[고려 경종|경종]]대까지 5대에 걸쳐 살았으며, [[고려 태조|태조 왕건]]이 죽은 후에도 왕 다음으로 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그 영향력이 컸다.
*** 1녀: [[고려 경종]] 왕주(王伷)에게 출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ref>일설에 [[죽방부인]] 소생이라 하나, 고려 경종(955~981)의 연대로 보아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소생이 타당함</ref>
고려에 항복 후 경순왕은 첫째딸을 [[고려 태조]]의 손자인 [[고려 경종|경종]]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정승공(正丞公) 상보령(尙父令)에 봉해지고 식읍과 녹봉을 더 받았다.
- 효령대군 . . . . 8회 일치
|부모 = [[조선 태종|태종]](부) ,[[원경왕후]] 민씨(모)
[[조선]]의 제3대 국왕 [[조선 태종|태종]]의 둘째 아들이며, [[원경왕후]] 민씨의 소생이다. [[조선 세종|조선 세종대왕]]의 둘째 형으로 성씨는 '''[[전주 이씨]]'''(全州 李氏), 이름은 '''보'''(補)이다. 초명은 '''호'''(祜)였는데 19세에 '''보'''(補)로 [[개명]]하였다. [[자 (이름)|자]]는 '''선숙'''(善叔)이고, [[호 (이름)|호]]는 '''연강'''(蓮江)이며 [[불교]] [[법명]]도 '''연강'''(蓮江)이고,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조선 세종|세종대왕]]의 형이자 [[조선 세조|세조]]의 백부로 실의 원로였으며, [[조선]]의 숭유 억불 정책으로부터 [[불교]]를 옹호,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 세종|세종대왕]] 즉위 후에도 [[조선 문종|문종]], [[조선 단종|단종]], [[조선 세조|세조]], [[조선 예종|예종]], [[조선 성종|성종]] 등 6대에 걸쳐서 장수를 누렸다. [[임사홍]]은 그의 손녀 사위였고, [[이량 (조선)|이량]]은 그의 5대손이며, [[조선 명종|명종]]<ref>그의 종6대손이기도 하다. 세종-세조-예종-성종-중종-명종</ref> 의 부인인 [[인순왕후]]와 [[심의겸]], [[심충겸]]은 그의 외6대손이다.
* 모후 : [[원경왕후|원경왕후 민씨]](1365~1420)
[[보성군]]의 증손 [[전성군 (1488년)|전성군 이대]]는 생전에 용강현령, 병마동첨절제사에 이르렀지만 다시 후손들의 출세로 [[증직|증]](贈) [[호조]][[참판]], [[호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영의정]]으로 여러 번 증직을 받았다. [[전성군 (1488년)|전성군 이대]]의 아들이 [[이량 (조선)|이량]]이고, 딸 부부인 이씨는 청송 심씨 [[심연원]]의 아들 [[심강]]과 혼인하여 자녀를 두었는데, 딸이 [[인순왕후]]로 [[조선 명종|명종]]의 비가 된다. 아들은 [[심의겸]]과 [[심충겸]]으로, [[심의겸]]은 [[서인]](西人)의 초대 당수가 된다.
* [[원경왕후]]
* [[인순왕후]]
- 홍국영 . . . . 7회 일치
홍국영은 도성의 경화사족 집단의 일부로서 그의 고조 홍중해는 인현왕후의 고종사촌이었고, 당대에도 [[정순왕후 (영조)|정순왕후]] 김씨<ref>홍국영의 대고모가 정순왕후의 6촌 김면주의 생모(김한희 처)였다.</ref> 외 이익보, 이정보, 홍계능, 조중회, 김이도 등과도 인척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이 예쁘장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이며 시문을 잘 짓고 창을 부르기 좋아하였다 한다.
1778년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가 정조의 후궁이 된다. 이때 원빈 홍씨의 지위는 유례 없는 것이었다. 후일 이 모든 이례적인 처사는 모두 홍국영의 세도로 인해 일어난 일이란 식으로 설명되게 된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홍국영이 자교(이 경우 후궁 간택령)를 내리게 했다"라고 쓰고 있다. 《한중록》에서는 이어 원빈의 입궁에 대해, 홍국영이 세도를 탐내어 제 누이를 들여보낸 것으로 자신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란 식으로 기록했다. 그런데 《(정조)어제인숙원빈행장》(정조가 원빈 사후 작성한 원빈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글)에서는 혜경궁 자신의 진술과는 반대로 혜경궁이 원빈에 대해 각별한 정의(情誼)를 나타냈다고 한다.<ref>[http://yoksa.aks.ac.kr/jsp/aa/HajeView.jsp?aa10up=kh2_je_a_vsu_20664_000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ref> 《순조실록 혜경궁 행장(김조순 저)》에서 혜경궁은 원빈에 대한 각별한 정의를 지녔던 혐의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라 강조한 대목이 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wa_11601021_002 순조실록 19권, 순조 16년 1월 21일 신축 2번째기사]</ref> 홍국영 일가의 인물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는 고전소설 《숙창궁입궐일기》는 원빈의 입궐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혜경궁은 효의왕후 쪽인 인상을 준다.<ref>{{웹 인용|url=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31844|제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숙창궁입궐일기|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元嬪 洪氏)는 가례를 올린 지 1년이 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한중록》에는 홍국영이 원빈의 죽음을 독살로 여기고 그 배후로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왕비의 나인들을 혹독하게 고문했다는 내용을 전하며 그 죄를 성토하는 대목이 있다<ref>순조실록에서 같은 건으로 탄핵당하는 대상자는 [[정민시]]이다.</ref>.
홍국영의 몰락에 대해서는 각종 설만 난무할 뿐,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탄핵의 포문을 연 김종수의 상소에서 언급된 공식적인 탄핵 사유는 '후궁 간택을 막았다'라는 것이었다. 또한 (원빈의 수원관)완풍군을 정조의 양자로 들여 동궁으로 삼으려 했다는 가동궁 사건설도 몇몇 군데에서 언급된다. 정조7년 문양해 반란사건 당시 '왕비의 목숨을 위협했다'라는 기록도 있고,《정종대왕묘지문》에는 홍국영이 [[은전군 이찬]]([[조선 정조|정조]]의 이복 아우)을 죽게해서 몰락했다고 정조가 원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속설 중에 홍국영이 완풍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거나, 효의왕후 김씨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던 것이 발각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는 19~20세기에나 등장한 야사로 짐작된다.
- 김충공 . . . . 6회 일치
[[헌덕왕]]과 [[흥덕왕]] 때의 실권자였고, [[823년]] [[김헌창의 난]] 진압에 참여하였다. [[흥덕왕]]의 아들이 [[당나라]]를 다녀오다가 사고로 죽자 그가 [[태자]]로 임명되었지만 그도 [[흥덕왕]]보다 앞서 사망하였다. 아들 [[김명]]은 [[838년]](희강왕 3) [[1월]] 정변을 일으켜 [[희강왕]]을 죽이고 자립하여 민애왕이 되었다. 딸 정교(貞矯)는 희강왕비 문목부인(文穆夫人)이 되었다. 아들인 민애왕이 즉위하면서 선강대왕(宣康大王) 또는 갈문왕(葛文王)으로 추봉되었다. 일설에는 [[흥덕왕]]의 비 정목왕후가 그의 딸과 동일인이라는 설도 있다.
그의 딸은 [[희강왕]]의 비인 [[문목왕후]](文穆王后)이고, 아들인 [[김명]](金明)은 [[희강왕]]을 추대했다가 나중에 희강왕을 자살하도록 위협하고 스스로 민애왕으로 즉위한 것이다. [[민애왕]]이 즉위한 뒤 아버지인 김충공은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추봉]]하고, 어머니인 [[귀보부인]](貴寶夫人)을 선의태후(宣懿太后)로 [[추봉]]하였다. 일설에는 [[갈문왕]]으로 추봉했다는 설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선강[[갈문왕]](宣康葛文王)이라는 칭호도 나타난다.
*** 딸 : [[문목왕후]](文穆王后), [[희강왕]]의 비
*** 딸 : [[정목왕후]](定穆王后)
일설에는 [[흥덕왕]]의 비 정목왕후가 그의 딸과 동일인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헌덕왕]]비 귀승부인이 그의 딸 정목왕후와 동일인이라는 설도 있고, 그의 숙부 [[김예영]]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 김효원 . . . . 6회 일치
김효원은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직에 천거되자 외척이 인사권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였다. [[심의겸]]과 [[심충겸]]은 [[조선 명종|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들로, [[선조]]가 [[조선 명종|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그의 주장이 인정되었다. 사후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교산 [[허균]]과 [[허난설헌]]의 인척으로, [[허균]]은 그의 사위이며 [[허균]]의 형 [[허봉]]의 딸이 그의 맏며느리였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지만, 생전에는 청렴한 선비로서 신진 인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친구 중 [[조선 명종|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尹元衡)의 사위로, 장인 [[윤원형]]의 집에 처가살이하던 [[이조민]](李肇敏)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일찍이 [[윤원형]]의 집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다. 그의 다른 친구들은 [[이조민]]을 멀리할 것을 권고했으나 그는 [[이조민]]의 사람됨됨이를 보고 [[윤원형]]의 집에 출입하였다. 그러나 [[인순왕후]]의 친정 남동생으로 역시 왕실의 인척이던 [[심의겸]]이 집안 어른들과 함께 [[윤원형]]의 집에 출입하다가 그를 보게 된다.
그 뒤 병조좌랑·[[정언]]·지평을 지냈으며 사헌부 지평으로 재직 중 김효원은 [[문정왕후 윤씨]]가 죽고 [[척신계]]가 정계에서 몰락하면서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신진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1574년]](선조 7년) 이조전랑으로 있던 오건(吳健)이 자리를 옮기면서 이조전랑으로 [[오건]]이 그를 추천하였으나<ref>1575년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이조 전랑의 임명은 전임자의 후임자 천거로 임명되었다.</ref> 과거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이 강하게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외척도 아니고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심의겸]]의 반대를 견뎌내고 [[이조]][[전랑]]이 되었다. 또한 그는 [[심의겸]]이 외척으로 그의 집안이 [[윤원형]]의 집안과 인척이고 가까이 왕래한 것과, [[심통원]]의 부패, 비리를 지적하며 공격하였다.
이후 그는 이일을 가슴에 담아두고 [[심의겸]]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뒤 김효원의 후임으로 [[이조]]에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전랑 후보로 천거되자, 그는 [[심충겸]]이 [[조선 명종|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남동생인 척신이라는 이유로 극력 반대하였으며 이조전랑직이 외척집안의 물건이냐며 [[심의겸]]과 [[심충겸]]을 공격하였다.
- 전성군 (1488년) . . . . 6회 일치
'''전성군'''(全城君) 이대(李對, [[1488년]] [[7월 21일]] ∼ [[1543년]] [[10월 29일]])는 [[조선]]시대 중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 자(字)는 성중(盛仲)이다. [[효령대군]] 이보의 고손으로 아버지는 여양군(呂陽君), 조부는 율원군(栗元君), 증조부는 보성군(寶城君). [[인순왕후|인순왕후 심씨]], [[심의겸]], [[심충겸]] 등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다른 이름은 이대(李薱)이다.
[[1542년]](중종 37) 자신의 외손녀딸 [[인순왕후]]가 삼간택을 거쳐서 [[조선 중종|중종]]의 명으로 [[경원대군]]의 부인으로 간택되는 것을 생전에 보았다. [[경원대군]]은 그가 처가의 가장(家長)이라는 이유로 건의하여 그는 곧 [[돈녕부]]주부에 제수되었다. 그는 곧 병이 들었고 중종은 특별히 [[내의원]]을 보내서 입진하게 했으나 효험이 없었다.<ref name="heomyong"/> [[1543년]](중종 38) [[10월 29일]]에 사망했다.
*** 외손녀 : [[인순왕후|인순왕후 심씨]], [[조선 명종|명종]]비
* [[인순왕후]]
- 광해군 . . . . 4회 일치
{{구별:[[김희정 (1992년)|왕후]]}}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리 순탄치는 못했는데[* 정확히는 임란 이전에도 그리 순탄한 입지는 아니었다. 선조는 임란 이전에는 다른 후궁 소생인 신성군 등을 총애했다.], 우선 명은 시시각각 광해군에 세자 책봉에 딴죽을 걸었으며[* 당시 명은 황제와 관료가 후계 문제로 한참 입씨름을 했던 시기였다. 당시 만력제도 선조와 비슷하게 나이 어린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려 하여 대신들이 반대하고 있었는데, 만약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허용할 경우 만력제가 이걸 빌미로 이용할 수 있어서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광해군 또한 형인 임해군이 아직 건재했기 때문.)], 선조는 이 틈을 노려 광해군보다 거의 10살 연하인(...) 인목왕후를 맞아들이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새어머니가 아들보다 10살 어리다는 거다. (선조 상도둑놈 인증...)~~ 거기다가 [[김희정 (1992년)|인목왕후]]왕후가 아들인 [[영창대군]]까지 낳자, 광해군의 입지는 더더욱 줄어들기까지 했으며, [[유영경]]등의 소북들(후대에 탁소북)은 대놓고 영창대군 편을 들기도... 그래도 ~~노년에 무리한~~ 선조가 영창대군이 3살일 때 죽어 결국 왕이 되는데 성공했으며 유영경과 그의 무리들은 사사된다.
- 이방원 . . . . 4회 일치
고려 시절에 과거에도 급제한 등 문재(文材)도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훗날 백전노장이던 부친의 군대를 친정하여 제압할 정도로 군사적 재능도 있던 나름 먼치킨으로, 정치적으로 노회한 운영을 보여준다. 원경왕후 민씨의 일족이나 세종의 왕후인 소헌왕후 심씨의 일족을 멸족시키는 등 왕권 강화를 위해 진력하였으나, 숙청 대상을 확실하게 선을 그어 지나친 옥사는 자제하였으며 또한 사관이나 대간의 역할을 긍정하여 균형추를 맞추는 부분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민생 안정에도 심혈을 기울여 개국 초부터 피바람 불었던 조선 왕조를 반석에 올려놓았다.
말년에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으나 그 후에도 중요한 분야는 여전히 직접 챙겼고[* 대마도 정벌 등을 진두 지휘하였고, 위에서 말한 심씨 일족을 멸문시킨 것도 상왕 시기의 일이었다. (여담으로, 이 때 ~~써킹한답시고~~ 소헌왕후도 폐출하자는 논의가 올라왔으나 태종은 이를 일축하여 이것이 사감이 전혀 없는 정치적 숙청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다가 4년 후 서거한다.
- 김미숙(1959) . . . . 3회 일치
이 때부터 주목할 것이 김미숙이 구축한 독특한 악역의 이미지이다. <[[로비스트]]>의 마담채, <[[황금의 제국]]>의 [[한정희]], <[[여왕의 꽃]]>의 [[마희라]], <[[부탁해요, 엄마]]>의 황영선 및 <[[옥중화]]>의 [[문정왕후]]까지 악역을 맡은 횟수는 그리 많지 않은데 워낙 임팩트가 커서 기억에 강하게 남는 편. 보통의 악역들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과한 액션을 취하지 않는, '''우아한 나쁜 X'''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녀의 연기는 큰 행동을 하지 않아도 그 캐릭터가 가진 양면성이 드러나는 악역이지만 끝내 이해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본래 김미숙의 자연스러운 연기 스타일에 역할에 대한 영리한 해석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셈. ~~예쁘고 우아하고 무서워요~~[* 부탁해요 엄마의 황영선 역할은 그렇게 악역 연기라고 하기에는 그렇다. 대부분 시어머니들이 솔직히 아들을 더 아끼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싶다. 차라리 악역이라면 이형규 역할을 맡은 오민석이 더 잘 어울린다.]
* [[2011년]] [[JTBC]] 《[[인수대비(드라마)|인수대비]]》 ... [[정희왕후]] 역
* [[2016년]] [[문화방송|MBC]] 《[[옥중화]]》... [[문정왕후]] 역
- 송지효 . . . . 3회 일치
| 자녀= 딸송씨 (인현왕후)생모
| rowspan=2 | [[왕후 예씨|예소야]]
| [[익비 한씨|왕후]]
- 유동근(배우) . . . . 3회 일치
이외에도 세간에 '''아내가 미인'''으로도 정평이 나 있는데, 바로 탤런트 [[김을동]]이다.[* 원래는 방송가 사람들 사이에서 돌던 말이었는데 여러 번 스포츠신문 연예란이나 예능 등에서 가볍게 언급되다 보니 어느 새 일반 대중들도 이 이미지를 받아들였다. 연예인 중에서는 [[남희석]]이 '자신의 이상형은 전인화'라며 이를 이용한 드립을 방송에서 많이 치고 다녔다. 심지어 결혼 이후에도 한동안...] 대표작으로는 '[[여인천하]]'를 들 수 있으며('''나 거성의 안주인이야'''라는 모습을 기억하는 시청자들이 많다), 여기서 [[문정왕후]] 역으로 출연했다.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왕조 500년'의 '인현왕후'에서 [[장희빈]] 역으로 출연했다.
유동근은 '용의 눈물'로 KBS 연기대상을, [[전인화]]는 '여인천하'로 SBS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남편은 왕으로, 아내는 왕비로 대상 차지한 부부.''' 그것도 '''[[태종(조선)|태종]]'''과 '''[[문정왕후]]'''라는, '''[[조선]] 역사상 최강의 권력을 누린 왕과 왕비''' 역할이다.
- 한보배 . . . . 3회 일치
* [[2009년]] [[KBS1]] 대하드라마 《[[천추태후 (드라마)|천추태후]]》 ... 어린 [[선정왕후 (목종)|선정왕후]] 유씨 역 ([[이인혜]] 아역)
* [[2012년]] [[JTBC]] 대하드라마 《[[인수대비 (드라마)|인수대비]]》 ... 어린 윤창년([[정현왕후]] 윤씨) 역 ([[고정민]] 아역)
- 고원희 . . . . 2회 일치
* 2013년 [[JTBC]] 주말연속극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 ... [[장렬왕후]] 역
* 2014년 [[KBS2]] 수목드라마 《[[왕의 얼굴]]》 ... [[인목왕후]] 역
- 김제남 . . . . 2회 일치
[[김희정 (1992년)|김희정 (1602년)]]왕후의 아버지, 선조의 장인,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딸을 선조에게 보내고 영창대군이 태어난 다음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해졌다.
여담으로 이 사람 인목왕후, 영창대군 등에게 동정적으로 서술된 광해군일기의 기록에서도, 억울하게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점 이외에는 별로 좋게 써주는 말이 없다.(…)
- 김혜옥 . . . . 2회 일치
* [[1988년]]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 [[한중록 (드라마)|한중록]]》 ...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 역
- 박승임 . . . . 2회 일치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 [[이량]] 등이 제거되자 다시 조정에 나아간 박승임은 이후 병조 참지와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진주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고을의 부로(父老)들을 모아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향약을 실시하며 백성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1568년(선조 1) 병으로 사직,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으나 1568년 특명으로 중국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절단의 동지부사(冬至副使)에 임명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 선조 . . . . 2회 일치
왜란 이후에도 그의 삽질은 계속되어, 당시 세자인 '''광해군보다 10살 가까이 어린''' 인목왕후를 들이지 않나[* 사실 이는 현대 관점에서 보면 충공깽이지만, 관례적으로 중전의 지위를 공석으로 놔둘 수 없었던 조선 시대에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크다. 중전은 궁녀들의 모임인 내명부를 통솔하는 안주인 역할을 맡고 있다. 중전은 단순히 사적인 '왕의 배우자'가 아니라, 업무를 통솔하는 직책이기도 하므로 중전이 부재하면 궁궐의 기능에 문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중전은 정치적으로 왕권과 후계의 안정에 큰 기여를 한다. 문종 때 새 중전을 들이지 않았던 탓에 단종이 '수렴청정'을 통한 왕권 수호를 받지 못한 것이 세조의 쿠데타를 쉽게 했다는 분석도 나올 정도.--인목왕후는 오히려 불안정만 불러왔지만--], 심지어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인 [[영창대군]]을 [[유영경]]등과 영합해 나중에 영창대군이 좀더 장성할 때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했다! 그것때문에 광해군은 비정상적으로 보일 정도로 왕위에 집착하게 되고, 영창대군의 최후와 [[인조반정]]의 원인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 신귀식 . . . . 2회 일치
* [[1988년]] [[문화방송|MBC]] 《[[인현왕후 (드라마)|조선왕조 500년 인현왕후]]》 ... [[김수항]] 역
- 신은정 . . . . 2회 일치
* [[2001년]] [[SBS]] 대하사극 《[[여인천하 (드라마)|여인천하]]》 ... [[인성왕후]] 박씨 역
* [[2015년]] [[MBC]] 월화드라마 《[[화정 (드라마)|화정]]》 ... [[인목왕후]] 역
- 예종 . . . . 2회 일치
세조가 싸지른 똥(권신들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음에도 이를 견제할 대책을 마련해놓지 않고 개인의 카리스마로만 억누른 점)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으나 그로 인해 심신을 혹사한 끝에 요절한 왕. 그가 죽은 뒤 왕위는 정희왕후(세조의 비)와 소혜왕후(훗날의 인수대비)의 뜻에 따라 형의 차남인 잘산군(또는 자을산군)이 이으니, 그가 바로 성종이다.
- 윤지숙(배우) . . . . 2회 일치
* [[1999년]] [[KBS1]] 대하드라마 《[[왕과 비]]》 ... [[정현왕후|정현왕후 윤씨]] 역
- 윤휘 . . . . 2회 일치
그해 [[동부승지]]를 거쳐 [[정유재란]] 종전 후에도 [[조선]]에 주둔하던 [[명나라]][[군대]]의 철군 문제를 교섭, 타결시켰다. 이어 [[의인왕후]]의 장지 문제 선정에 참여하고 [[명나라]]의 전몰 장병 위문을 주관하였으며, [[우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아버지 [[윤두수]]가 [[이홍로]]의 탄핵으로 [[홍원군]]으로 유배되자, 이홍로의 친지들과 친하게 지냈던 그는 이후 이홍로와 관련된 사람들과 절교하였다.
이후 [[조선]] 조정의 특명전권대사로 [[청나라]]군과 [[남한산성]]을 오가면서 화의 교섭을 노력, [[청나라]]군사들을 설득시키고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환도 후 [[도승지]]에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였고, 사신으로 [[청나라]]와 [[명나라]]를 여러 번 다녀왔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조선]]의 정벌 여론을 무마시키기도 했다. [[1638년]]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를 거쳐 [[조선 인조|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책봉[[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책봉 고명을 받아왔다. 그러나 귀국 도중 [[담배]](南草)를 [[가마]]속에 숨겨갖고 왔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사신직에서 파직당했다.
- 윤흔 . . . . 2회 일치
[[병자호란]] 때에는 [[후금]]과의 협상을 강력 반대하였다. 그 뒤 [[예조]][[참판]]으로 재직 중에는 [[1632년]] [[인목대비]]와 [[1635년]] [[인열왕후]]의 [[국상]] 장례를 주관하였으며 [[정묘호란]] 때에도 임금을 호종하였으며, [[1636년]](인조 14년) [[정묘호란]] 때에도 [[남한산성]]으로 [[조선 인조|인조]]를 수행, [[김상헌]]과 함께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사후 [[병자]], [[정묘호란]] 때의 [[호종]] 공로로 [[증직|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윤웅렬]](尹雄烈), [[윤영렬]](尹英烈) 형제는 그의 7대손, [[윤치호]]는 그의 8대손이다. [[이이]]·[[성혼]]·[[정철]]의 문인이다.
[[1630년]](인조 8년) 행[[용양위]][[부호군]]으로 전직되었다가 그해의 임오년(1582년) 사마시 합격자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임오년사마방회도에 기록되었다.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1632년]] [[예조]][[참판]]이 되고, 1632년에는 예조참판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국장]] 업무를 주관하였고, 다시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다시 예조참판이 되어 1635년에도 예조참판으로 재직하며 [[조선 인조|인조]]의 정비 [[인열왕후]](仁烈王后)의 국장업무를 주관하였다.
- 이보희(배우) . . . . 2회 일치
의외로 사극에 많이 출연하는 배우이다. '[[용의 눈물]]'에서도 [[태종(조선)|태종]] 이방원이 미모를 보고 마음에 들어 새로들인 이후 원경왕후([[최명길(배우)|최명길]] 역)와 갈등을 일으키는 후궁 선빈 안씨역을 맡기도 했다. '[[여인천하]]'에선 [[중종(조선)|중종]]의 모후 정현왕후([[자순대비]])역을 맡기도 했었다. '[[서궁]]'에선 주인공 격인 [[인목대비]] 역, KBS의 2002년작 '[[장희빈(2002년 드라마)|장희빈]]'에서는 장희빈의 어머니 윤씨 역도 맡은 바 있다. 시대극인 '[[서울 1945]]'에서도 아메 카오리 역을 맡았다.
- 한호문 . . . . 2회 일치
양절공 [[한확]](韓確)의 7대손으로 그의 아들 [[한치인]](韓致仁)의 6대손이며, [[소혜왕후]]의 종6대손이 된다. 또한 세종의 왕자 [[계양군]] 이증의 부인 정선군부인 청주한씨(旌善郡夫人 淸州韓氏) 역시 그의 6대 대고모가 된다.
* [[소혜왕후]]
- 강세정 . . . . 1회 일치
|2014||KBS1||[[정도전 (드라마)|정도전]]||[[원경왕후|민씨]]||
- 강화종실 . . . . 1회 일치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시기에, [[가톨릭]] 탄압인 신유교난(辛酉敎難)이 일어났는데, 은언군의 처 송씨(宋氏)와 며느리 신씨(申氏)가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드러나서, 1801년 은언군, 송씨, 신씨가 모두 사사되었다.(이들은 손자인 철종이 즉위한 뒤에 신원되었다.)
- 김륵 . . . . 1회 일치
그러나 그의 [[이황]], [[이언적]]의 문묘 종사는 [[북인]]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북인들은 자신들의 스승인 [[조식 (1501년)|조식]]이 제외된 것에 불만을 품고 그의 이황, 이언적 문묘 종사를 반대했는데, [[북인]]과 [[남인]]간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자신의 생모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그는 생모를 왕비로 [[추증]]하려는 [[광해군]]의 뜻을 비판,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받고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좌천되었다.
- 김보미(1958) . . . . 1회 일치
|align="center"|선평왕후 김씨
- 김청(1962년 6월) . . . . 1회 일치
* [[임꺽정(드라마)|임꺽정]] - [[문정왕후]]
- 김하은(1984) . . . . 1회 일치
* [[2013년]] [[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 [[인경왕후 김씨]] 역
- 남기애 . . . . 1회 일치
| [[인원왕후]]
- 문희(배우) . . . . 1회 일치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신라의 황후 문희, rd1=문명왕후)]
- 박술희 . . . . 1회 일치
혜성(현재의 [[당진시|당진]])의 호족 출신으로 18세 때 [[궁예]]의 호위병이 되고, 뒤에 ([[고려 태조|태조]])의 휘하로 들어와 그를 섬겨 많은 공을 세워 두터운 신임을 얻어 대광(大匡)이 되었다. [[고려 혜종|혜종]]을 정윤(왕태자)로 책봉할 때, [[장화왕후]]가 [[왕건]]의 의중을 박술희에게 전달하게 하여 [[왕무]]가 정윤이 되었으므로, 박술희가 [[왕무]]의 후견인이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935년]]에는 [[견훤]]을 탈출시키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보이는 나주 탈환 작전에 [[홍유]]와 더불어 지원하였으나 백성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는 것을 이유로 [[왕건]]은 그들 대신 [[유금필]]을 파견하였다. [[943년]] [[고려 태조|태조]]가 사망하기 직전에 [[고려 태조|태조]]로부터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부탁받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전수받았으며, 자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고려 혜종|혜종]]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 박정수(배우) . . . . 1회 일치
* [[동이]] - [[명성왕후]]
- 박하나(배우) . . . . 1회 일치
||<|2> 2015년 || KBS2 || [[드라마 스페셜]] - [[붉은 달(드라마)|붉은 달]] || [[헌경왕후|혜경궁 홍씨]] || 주연 ||
- 서수민 . . . . 1회 일치
|| '''가족''' ||<(> 조카: [[장순왕후]][* 드라마 제작국의 프로듀서로 [[넝쿨째 굴러온 당신]], [[전우치]] 등에서 활동했다.], 딸 2명 ||
- 오시만 . . . . 1회 일치
* [[인열왕후]]
- 운제부인 . . . . 1회 일치
** 장녀: [[아효부인]](阿孝夫人), 제4대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의 왕후<ref>신라박씨선원세계도(新羅朴氏璿源世界圖)</ref>
- 울진군 . . . . 1회 일치
이름의 유래가 된 불영사는 이 계곡 안쪽에 있다. 신라시대부터 있던 역사가 오래된 사찰로, 응진전과 대웅보전, 영산회상도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삼층석탑과 불패 등도 경상북도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등 사찰 자체가 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내 풍경도 좋은 편이다. 의상전의 경우는 그 유래가 불확실하다가 2010년 수리할 때 유래를 적은 상량문이 발견되었고, [[인현왕후]]가 환궁하면서 부처의 성은에 보답하기 위해 지은 곳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 윤주희(배우) . . . . 1회 일치
||<|3> 2012년 || [[SBS]] || [[대풍수]] || [[신덕왕후]] || ||
- 이순재(1935년 10월) . . . . 1회 일치
* 문정왕후(1967)
- 이영아(배우) . . . . 1회 일치
|| 2009년 || KBS2 || [[천추태후(드라마)|천추태후]] || 대목왕후 || 특별출연 ||
- 이인민 . . . . 1회 일치
도은 [[이숭인]]은 그의 사촌형제인 이원구(李元具)의 아들이다.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딸 [[경순공주]]의 부마인 [[이제]]는 그의 형 [[이인립]]의 아들이었다.
- 이휘향 . . . . 1회 일치
* 1989년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파문 (드라마)|파문]]》 ... [[효의왕후]] 역
- 장성원 (배우) . . . . 1회 일치
{{다른사람:[[장순왕후|어머니]]}}
- 전혜진(1970) . . . . 1회 일치
|| [[2002년]] ||<|3> KBS || [[제국의 아침]] || 대목왕후 황보씨 ||
- 정다혜(1987) . . . . 1회 일치
* 2012년 [[tvN]] 수목드라마 《[[인현왕후의 남자]]》
- 정종 . . . . 1회 일치
그나마 왕후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기에(후궁에게는 많은 자식을 보았다) 태종도 정치적인 이유로 견제해야 할 직계 혈통이 없어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 청송군 . . . . 1회 일치
고려 시대 청부현이었다. 그러다가 1419년(세종 1) [[소헌왕후]] 심씨의 고향이라 하여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하였다. 후에 진보와 분리되고 [[세조(조선)|세조]] 때 송생현(松生縣)과 합하여 청송군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안덕현(安德縣)을 병합하여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로 승격하고 9개 [[면(행정구역)|면]] 57개 [[리(행정구역)|리]]로 구분하였다. 한편 북쪽에는 진보현이 있었다.
- 최란(배우) . . . . 1회 일치
*파천무 (정희왕후 역)
- 한다민 . . . . 1회 일치
* [[2007년]] [[SBS]] 월화드라마 《[[왕과 나 (드라마)|왕과 나]]》 ... [[공혜왕후]] 역
- 한인수(탤런트) . . . . 1회 일치
* [[조선왕조 오백년]] 인현왕후 - [[남구만]]
- 홍인영 . . . . 1회 일치
|| 2011년 || KBS1 || [[근초고왕]] || 신공왕후 || ||
- 홍인한 . . . . 1회 일치
[[고구마]]를 처음 도입한 [[조엄 (조선)|조엄]]은 그의 매형이 되고, 누나는 [[조선 문조|익종]]비 [[신정왕후 (조선 후기)|조대비]]의 증조할머니가 된다.
- 흥친왕 . . . . 1회 일치
이는 [[조선 철종|철종]] 사망 당시 12세의 미성년자였던 [[대한제국 고종|이명복]]([[흥선대원군]]의 차남)이 성인인 흥친왕보다 조종하기 쉬울 것이라는 [[흥선대원군]]의 계략과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묵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일부를 포섭할 때, [[김병학]](金炳鶴)의 딸, 혹은 [[김병문 (조선후기)|김병문]]의 딸 중에서 둘째 아들인 [[대한제국 고종|명복]]의 배필로 맞이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 이것 역시 재면 보다는 명복을 선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한때 그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 큰아버지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로 보내지는 것이 고려되기도 했다. 그의 흥완군 양자 지정 논란은 [[1864년]] 고종에 의해 취소되어 최종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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