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예춘호"에 대한 역링크 찾기

예춘호의 역링크


역링크만 찾기
검색 결과 문맥 보기
대소문자 구별
  • 권오병(국회의원)
         1963년 [[변호사]] 개업을 하였으나, 곧바로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에 의해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 [[차관]]에 임명되어 1965년까지 부임하였다. 1965년 문교부(현 [[대한민국 교육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문교부 장관 재직 중이던 1965년 11월에는 당시 야당이던 [[민중당(1965년)|민중당]]으로부터 여야 만장일치로 건의된 [[6.3 항쟁]] 관련 구속학생 석방 및 해임교수 복직안을 묵살하였다는 이유로 해임건의안이 제출되었으나 여당인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 [[법무부 장관|장관]]으로 재임하였다. 1968년 다시 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국민교육헌장]] 제정, [[중학교]] [[입시]]제도 폐지 등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던 중 1969년 4월 8일 [[신민당(1967년)|신민당]]에 의해 [[대한민국 국회]]내 폭언 및 문교행정상의 문제를 이유로 해임건의안이 제축되었다. 민주공화당의 당명은 부결이었으나 [[예춘호]], [[양순직]], [[박종태]], [[김달수]], [[정태성]] 등 친 김종필계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이 당명을 어기고 동조하여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해임되었다.
  • 김성곤
         박정희의 친위대를 자처하면서 3선개헌에 회의적이던 김종필계와 대다수 공화당 인사들을 강하게 압박해서 [[3선 개헌]]을 성사시켰다.[* 3선개헌이 처음 불거졌을때 김종필을 선두로 해서 대다수 공화당 정치인들은 이를 반대했다. 장기집권한 이승만의 최후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9년부터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화당 국회의원들을 회유, 협박해서 결국 모두 찬성으로 돌려놨다. 당내에 막강한 독자계보를 가지고 있던 김종필을 압박하는데 선봉에 선게 김성곤,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4인방][* 한때 60명이 넘던 공화당내 개헌반대파 국회의원은 결국 3명 [[정구영]], [[예춘호]], [[이만섭]]만이 남았고, 결국 정구영-강제 정계은퇴, 예춘호-제명, 이만섭-낙선으로 모두 숙청되었다. 예춘호는 야당으로 넘어가서 1980년대 [[재야]]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고, 이만섭은 야인으로 지내다가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그리고 [[전두환]]의 집권 이후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 총재로 재기했다.] 이 과정에서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백남억]], [[길재호]]와 함께 소위 4인체제로 박정희를 대리해서 공화당을 관리하였다. 특히 [[재벌]]에게 해외차관과 정부발주공사의 10%를 무조건 자신을 통해서 상납하게 하면서 ~~[[뇌물]]의 제도화~~ 정권의 정치자금 창구를 단일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과 재벌,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그가 [[쌍용그룹]] 회장(재벌총수), 동양통신 사장(언론인)이면서 공화당 재정위원장(정치인)이자 박정희의 최측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신기석
         |후임자 = [[예춘호]]·[[김상진 (1933년)|김상진]]
11863의 페이지중에 3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을 눌러 제목 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9-04-28 10:17:54
Processing time 0.0097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