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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륵
         과거에 급제하고 바로 승문원 부정자가 되고 이어 승정원 가주서와 [[예문관]][[검열]]을 지낸 뒤 성균관 전적·[[예조]][[좌랑]]·[[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했다.
         그 뒤 이순신이 투옥됐을때는 [[유성룡]] 등과 함께 구명운동을 벌였다. [[정유재란]]이 종결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물러났다. 다시 관직에 올라 대사헌으로 시무16조를 올려 민심수습책을 제시한 뒤 1599년(선조 32)에는 형조 참판과 예조 참판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이순신의 공로를 조정에 아뢰며 그 집안의 조세 부담을 감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 김만기 (1633년)
         [[1671년]] [[예조]][[참판]]으로 승진한 뒤 [[승문원]] 제조, [[오위도총부]] 부총관, [[관상감]] 제조, [[병조]][[참판]] 등을 거쳐 1672년 [[성균관]][[대사성]]과 부제학으로 전보되었다가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을 겸직하고,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에 동지의금부사를 겸직했다. [[1673년]] [[병조]][[판서]], [[춘추관]]지사, [[예조판서]]로 옮겨 [[정헌대부]]로 승진하고, [[1674년]] 보국, [[돈령부]]영사가 되었으며 2차 예송 논쟁 때에는 3년복설을 주장하였다. [[오위도총부]] 도총관, [[호위대장]], [[전생서]] 제조를 역임했다. [[1680년]] [[김석주]], [[김익훈]] 등과 함께 [[남인]] 타도에 앞장섰다. [[1680년]] [[허영]], [[허새]]의 옥사를 다스린 공로로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 1등관에 책록되고 [[풍정도감]] 도제조를 역임했다. 사후 [[불천지위|부조지전]]을 받고 [[1719년]](숙종 45)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1653년 별시문과에 을과 3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그 뒤 장예원 주서, 승문원 주서, 시강원 설서 등을 역임하고 예조, [[병조]][[좌랑]]과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수찬,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657년]](효종 8) 교리(校理)로 재직 중 글을 올려 [[오례의]](五禮儀)』의 복상제(服喪制) 등 잘못된 것을 개정하기를 청하였다. 관료생활 초반 김만기는 문장력과 재주를 인정받아 [[조선 효종|효종]]은 "나와 더불어 일을 함께 할 자는 그 누구인가? 법도에 맞게 지적하여 인도해 줄 자는 경 등 약간의 사람뿐이다."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1659년 [[조선 효종|효종]]이 북벌을 준비하다가 그해 [[5월]] 갑자기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예송논쟁|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논란이 일자 송시열, [[송준길]] 등의 기년설을 지지하였다. 이후 [[서인]]으로 활동하며, 3년설을 주장하는 [[윤선도]](尹善道), [[윤휴]] 등 [[남인]]을 공격했다. 이후 흥문관 응교,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 등을 지냈다.
         1660년(현종 4) [[수찬]]이 되었다. 1661년 응교, 사복시정, [[성균관]] 사성, 의정부 사인, 통정대부로 승자하여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거쳐 1666년(현종 8) [[전라도]] 도사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특별히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으나 편모를 떠나 멀리 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사간원[[대사간]]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곧 승정원 [[좌승지]]로 옮겼다. [[1667년]] [[예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그 후 광주부윤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671년(현종 13) 딸이 세자빈이 되었고, 이후 가선대부 예조참판으로 승진, 승문원 제조, [[도총부]] 부총관, 관상감 제조를 겸했다가 병조참판으로 옮겼다. [[1672년]]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곧 [[부제학]]으로 전보되었다가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에 동지[[의금부]]사를 겸임했다. 1673년 영릉(寧陵)을 옮길 때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당상관이 되었으며<ref name="다음"/>, 다시 복상문제가 발생하자 1674년 7월에 병조판서(兵曹判書)로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에 대하여 상소(上疏)를 올려 3년상을 주장하였다. 그 해 [[병조]][[판서]]에 지[[춘추관]]사를 겸했다.
         1674년(현종 16) 예조판서로 옮겨 [[정헌대부]]로 승진되고 이듬해(숙종 1) [[조선 숙종|숙종]]이 즉위하자 국구로서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책봉되었고, [[오위도총부]] 도총관, 호위대장, 전생서 제조를 겸했다. 이후 총융사(摠戎使)를 겸하여 병권(兵權)을 장악하였으며, 이로 인해 척신이 군사력을 손에 넣었다며 [[남인]]들의 공격과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 후 [[김수항]](金壽恒) 등의 천거로 [[대제학]]을 지냈으며 1680년(숙종 7) [[경신환국|경신대출척]] 때 [[훈련대장]]으로 끝까지 남인과 맞섰으며, 이후 숙부 [[김익훈]], 숙종의 외당숙인 청성부원군 [[김석주]]와 공모하여 역모를 날조하였다.
  • 김상로
         [[1745년]] [[한성부]]우윤·[[사헌부]][[대사헌]]·[[승정원]][[도승지]], 병조판서 등을 거쳐 [[1746년]] 예조참판, [[예조]]판서가 되었다. 48년 공조판서가 되고, 병조판서가 된 뒤,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1749년 공조판서로 있으면서 [[탕평책]] 실시에 찬성했으며, [[1750년]] [[대사간]] 이존중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무마시켰다.
  • 김상로 (1702년)
         [[1745년]] [[한성부]]우윤·[[사헌부]][[대사헌]]·승정원, 도승지, 병조판서 등을 거쳐 [[1746년]] 예조참판, [[예조]]판서가 되었다. 48년 공조판서가 되고, 병조판서가 된 뒤,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1749년 공조판서로 있으면서 [[탕평책]] 실시에 찬성했으며, [[1750년]] [[대사간]] 이존중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무마시켰다.
  • 김온순 (1812년)
         [[1866년]] [[2월]] [[조선 고종|고종]]의 왕비 간택 때 그의 딸 중 한명도 간택대상자에 해당되었으나 그는 병을 이유로 [[예조]]를 통해 간택에 불참하였다. [[1866년]] [[6월]] 선정으로 별천되기도 했다. 그해 [[6월 18일]] 선치를 베푼 지방관들을 포상할 때 활과 화살과 통개(筒箇)를 [[조선 고종|고종]]에게 선물로 하사받았다.
  • 김종수 (1728년)
         그 뒤 [[예조]][[정랑]], [[홍문관]]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세손시강원]]필선(弼善)으로 다시 세손을 성실히 보좌하였다.<ref name="nate01">[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8604 김종수:네이트 한국학]{{깨진 링크|url=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8604 }}</ref> 이때 외척의 정치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뒷날 정치의 제1의리로 삼은 정조의 지극한 신임을 받았다.<ref name="nate01"/> 그해 [[4월]] [[사간원]]정언, [[5월]] [[홍문관]]부수찬을 지냈다. 그해 [[6월]] 필선, 겸 사서, [[12월]] 부교리를 지냈다.
  • 담양군 (왕족)
         이때 그가 [[남경우]]의 딸과 이미 약혼한 것을 두고, 상복을 입느냐 마느냐 논쟁이 벌어졌다. 담양군은 사망 직전 남경우의 딸과 약혼했고,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인을 청하는 납채(納采)를 하기 전에 신랑이 죽었기 때문에, 담양군의 약혼자가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예조]]에서 남경우의 딸은 이미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의 날까지 정하였으니, 성혼(成婚)의 예절과 같이 당연히 상복(喪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조 판서 [[정인지]](鄭麟趾)는 이존의 제도와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인용하여 상복을 입지 않아도 괜찮다고 주장하였다. [[조선 문종|문종]]은 남경우의 딸이 다른 사람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담양군]] 이거와 약혼했던 남경우의 딸은 뒤에 [[소헌왕후]]의 친정아버지 [[심온]](深溫)의 증손자 심미(深湄)와 혼인하였다.
  • 민겸호
         그 뒤 [[1865년]] [[2월]] [[음서 제도|음보]]로 동몽교관<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UM_6JOc_9999_007693&isEQ=true&kristalSearchArea=B</ref>에 올랐다가 [[1866년]]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867년]] [[4월]] [[조선 고종|고종]]에 의해 특별히 부수찬에 제수되었고, 이후 응교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872년]] [[이조]][[참의]]가 되고 그해 말 [[가선대부]]로 승진 [[예조]][[참판]]에 발탁되고 [[1873년]] [[형조]] [[참판]]이 되었다. 이때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을 권좌에서 축출하려 하자 그는 명성황후의 편에 서서 도왔다.
  • 박필균
         [[1725년]](영조 1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봉교]]가 되고 삼사의 여러 관직을 거쳐 [[1736년]] 이후 [[세자시강원]]사서, 시강원 문학, 보덕 등을 지내면서 어린 [[사도세자]]의 사부가 되어 보도하였다. [[1740년]] [[동부승지]], [[좌승지]], [[도승지]]가 되었다. 이후 [[의금부]][[동지사]], [[경기도]][[관찰사]], 사간원대사간, 춘천부사를 거쳐 [[1748년]] [[예조]][[참판]], [[1750년]] [[공조]][[참판]]이 되었다. 이후 [[호조]][[참판]], [[병조]][[참판]], [[대사간]], 돈령부동지사, 중추부동지사를 거쳐 1760년 돈령부지사 겸 의금부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승문원]]제조에 이르렀다.
         [[1748년]] [[예조]][[참판]], [[1750년]] [[공조]][[참판]]을 역임했다. 그뒤 호조·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1754년]] [[대사간]]으로 재직시 [[사도세자]]의 서연(書筵)을 중지한 잘못과 조정의 언로폐쇄, 과거제의 문란 및 백관들의 기강의 해이함을 진계(陳戒)하는 소를 올려 인정을 받았다. 한편 [[노론]]에서 당론으로 [[사도세자]]를 공격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세자의 사부였으므로 [[홍인한]], [[홍계희]]와는 달리 한발 물러서서 세자의 비행 지적을 회피하였다.
  • 신후담
         부원군 [[신승선]]과 신도공 [[신수근]]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감]]으로 [[증직|증]] [[예조]][[참판]] 겸 [[제학]]에 [[추증]]된 [[신구중]](愼龜重)이고, 어머니는 [[허목]]과 [[윤휴]]의 문인인 [[이서우]](李瑞雨)의 손녀이며 [[참봉]] [[이정관]](李正觀)의 딸 우계이씨(羽溪李氏)이다. 아버지 신구중은 통덕랑(通德郞)으로 [[1727년]]의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종묘서령, 현감을 거쳐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아버지 신구중은 [[신승선]]의 둘째 형인 신승복의 6대손 신지오의 아들이지만 아들이 없는 16촌 아저씨 신휘일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 심상학
         1863년(철종 13년)부터 [[조선 철종|철종]]이 친히 주관하는 응제에 2등으로 합격한 이후, 고종이 정기적으로 주관하는 각종 응제에 3등 이상의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음서 제도]]로 관직에 올라 잠시 [[의금부]]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초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직부전시 자격을 받고 [[과거 제도|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1873년(고종 10년) 문과에 급제, [[규장각]], [[승정원]], [[홍문관]] 등에서 근무하고 [[승지]], [[이조]][[참의]], [[예조]][[참의]], [[호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881년]](고종 18)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의 변화된 모습을 파악하라는 밀명을 받고 [[어윤중]] 등과 함께 [[신사유람단]](조사 시찰단)원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파견, 근대적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귀국했으며, 귀국 직후 [[동래부]]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감찰을 하고 귀경했다. 이후 [[예조]][[참판]], 동지성균관사 등을 거쳐 [[1886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의 부사로 다녀왔으며, 전라우도[[암행어사]]로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협판교섭통상사무와 [[호조]][[참판]](戶曹參判), 안악군수를 역임했다.
         [[1875년]] [[규장각]]에 들었고 바로 직각 권점(直閣圈點)을 받았지만 직각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듬해 본관록과 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이후 동벽(東壁)에 올라 [[홍문관]]과 [[승정원]] 승지 등을 거쳐 [[이조]][[참의]], [[예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또한 겸직으로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겸하여 [[대한제국 순종|세자 척]](후일의 순종)에게 [[성리학]] 학문을 보도하였다.
         [[1884년]](고종 21) 관제 개편 시 [[예조]][[참판]]에서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로 전직되었으며<ref>예조는 외무아문으로 개편되었다.</ref>, 같은 해 [[영국]], [[독일]], [[프랑스]], [[벨기에]], [[러시아]] 등 5개국의 주[[유럽]] 5개국 [[특파전권대신]](特派全權大臣)로 임명, 파견되었다가 병으로 사퇴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었으나, 재직 중 신병이 생겨서 사퇴하였다. 이 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7월]] 부호군, 첨지 등을 역임하고 다시 그해 [[8월]] 부호군에 임명되어 전라우도암행어사로 파견, [[1885년]] [[2월]]에 귀환했다. [[1886년]](고종 23) [[4월]] [[이조]][[참의]]를 거쳐 그해 [[7월]]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되었다. [[1886년]] [[10월]]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행에 선발되어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임명되어 [[청나라]]를 방문하고 그해 [[11월]] 귀국하였다. [[1887년]] 전라북도 [[암행어사]](全羅右道暗行御史)로 파견되었다가 그해 [[4월]] 귀경하였다. 귀경 직전인 [[1887년]] [[4월]] 동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가 며칠 뒤 동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병조]][[참판]]으로 임명, 도착하자마자 병조참판이 되었다.
  • 심통원
         두 번 과거에 급제하여 [[1537년]](중종 21년) 별시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1546년]](명종 1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했다. 관직은 승지, [[대사헌]], [[한성부 판윤]],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시|의정부]] [[우찬성]], [[좌찬성]],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을 거쳐 [[좌의정]], [[영중추부사]] 겸 약방 도제조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다. 자(字)는 사용(士容), 호는 욱재(勖齋), 만취당(晩翠堂)이고, 본관은 [[청송 심씨|청송]](靑松)이다. 별칭은 심상공(沈相公)이다.
         이후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합격하여, [[홍문관]] 부응교로 등용된 뒤 시강관(侍講官)으로 임금의 학문을 돕다가, 직제학이 되어 조정의 공문서를 도맡아 작성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a_A1499_1_0006706 |제목=심통원: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확인날짜=2011-05-15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16161828/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a_A1499_1_0006706 |보존날짜=2016-03-16 |깨진링크=예 }}</ref> [[1546년]](명종 1) [[사간원]] [[대사간]], [[1547년]] [[병조]]참지,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1548년]] 승정원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쳐 우승지가 되고, [[1549년]] 좌승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이어 [[예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바로 [[형조]]참판이 되었다. 이후 [[한성부 판윤]], [[1557년]] [[7월]] [[공조판서]]를 지냈다.
         [[1558년]] 초 풍기군수 장문보(張文輔)의 장계를 받고 안현(安玹) 등과 함께 훼손된 [[안향]]의 영정을 개수, 복원하는 것을 주선하였다. [[1558년]] [[8월]] [[예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명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冬至使)로 [[연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1558년]] [[12월]] 의정부 [[우찬성]]으로 승진했고, [[1559년]] 의정부 [[좌찬성]] 등을 지냈다.
  • 어유구
         이후 [[호조]][[참의]]와 [[예조]][[참의]]를 여러번 역임하고유수로 발령되었다. 유수 재직 중이던 [[1720년]] [[6월]] [[조선 숙종|숙종]]이 죽고 [[조선 경종|경종]]이 즉위하자 [[돈령부]]영사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에 봉해지고, [[1721년]](경종 1) 호위대장을 겸직하고, [[1721년]] 사직 [[김일경]](金一鏡) 등이 상소를 올려, [[노론]]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이 역모라고 규탄하여 4대신이 파직되자, 그는 오히려 노론 4대신을 옹호하며 김일경 등의 상소를 비판했다. 그 해 어영대장(御營大將) 겸 훈련대장, 22년 영돈령부사가 되었다. 이때 유생 황욱(黃昱), 김수구(金壽龜) 등이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 부자의 사면과 복권을 상소하자, 그는 [[윤증]]에 대해 스승을 배반한 죄를 지적하며 이들의 복권을 반대하였다.
  • 어진익
         이후 [[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동부승지로 재직 중, [[1682년]] [[1월]] [[서울특별시|서울시]]에서 [[박상충]](朴尙衷)의 사당을 짓자는 요청을 받고도 땅을 마련하지 못하여,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안진(安縝)의 보고를 받고, 민간의 땅을 조정에서 매입하여 사당을 짓도록 도울 것을 상소, 윤허받았다. 이후 ]][[호조]][[참의]], [[병조]][[참의]], [[예조]][[참의]], [[승정원]]좌승지를 거쳐 다시 승지가 되었다. [[1683년]](숙종 9년) [[1월 28일]]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한 장군인 부산 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의 후손(後孫)을 거두어 등용하도록 상소하였다. [[1683년]](숙종 9년) [[5월]]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했다가, 병이 중해져 사직하고 되돌아왔다. 이듬해 [[3월 10일]] [[승정원]]승지에 임명되었다.
  • 오원 (조선)
         '''오원'''(吳瑗, 1700년 ~ 1740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 오씨|해주]](海州). 자는 백옥(伯玉), 호는 월곡(月谷)이다.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오두인]](吳斗寅)이고, 아버지는 오진주(吳晋周)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의 딸이다. 백부인 [[오태주]](吳泰周)와 조선 제18대 왕 [[조선 현종|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의 양자가 되었다. 1728년(영조 4)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고 벼슬은 [[대제학]]에 이르렀다.<ref name="대제학">[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ua_11610010_001 《영조실록》 52권, 16년(1740 경신 / 청 건륭(乾隆) 5년) 10월 10일(정미) 1번째기사]</ref>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월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va_11712017_002 《정조실록》 38권, 17년(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년) 12월 17일(병자) 2번째기사]</ref>
         오원은 [[해주 오씨]] 시조 [[오인유]](吳仁裕)의 19세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오두인]](吳斗寅)이고, 아버지는 오진주(吳晋周)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의 딸이다. 백부인 [[오태주]](泰周)와 조선 제18대 왕 [[조선 현종|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의 양자가 되었다.
         *** 외조부 : [[김창협]](金昌協) - [[예조]][[판서]]
  • 윤선도
         유년기에 그는 후사가 없던 숙부지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602년]](선조 35년) [[6월 2일]] [[윤유심]](尹唯深)의 아들인 선도를 윤유심의 동인 유생唯幾)에게 양자로 입양할 것을 신고하여 [[예조]]에서 허가한 결재문서가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ref name="yang0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78243 19 종통 계승을 위한 안전장치 입양 - 오마이뉴스]</ref>
         윤선도의 입양 문적 (1595년, 예조 발행)
         [[1633년]](인조 11) 행[[세자시강원]]문학(行世子侍講院文學)이 되어 [[소현세자]]를 보도하였다. 그해 예조정랑, 사헌부지평 등을 지내고 7월 관서경시관(關西京試官), [[9월 19일]] [[통훈대부]] 행[[세자시강원]]문학 겸 [[춘추관]][[기주관]](行世子侍講院文學 兼 春秋館記注官)이 되어 [[소현세자]]를 보도하였다. 그해 10월 증광 향해 별시(增廣鄕解別試)에 급제하여<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633_005672&choiceGanada=%EC%95%84&choiceOrderNum=1601|1700&classCode=MN&isEQ=true&kristalSearchArea=B 윤선도-과거 및 취재] {{웨이백|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633_005672&choiceGanada=%EC%95%84&choiceOrderNum=1601%7C1700&classCode=MN&isEQ=true&kristalSearchArea=B |date=20160629120214 }}, 《한국 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ref> 예조정랑(禮曺正郞)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 [[강석기]](姜碩期)의 반대로 사직서를 내고 고향 해남으로 내려갔으나 왕의 부름을 받고 귀경, 바로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서인]] 측으로부터 너무 빨리 고위직으로 승진했다며 이의를 제기하여, [[1634년]] [[성주군|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나갔다.
         [[1652년]] [[8월]] [[예조]][[참의]](禮曺參議)가 되었으나 [[서인]]들의 공격으로 사퇴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 [[예조]][[참의]]가 되어 상경한 그는 시급히 처리해야 할 여덟 가지 현안시책을 건의한 '시무팔조 (時務八條)'를 지어 올렸다. [[시무팔조]]를 올린 뒤 사직하고 양주(楊州)의 고산촌(孤山村)에 잠시 체류하며 [[11월]]에 [[원두표]]의 권력이 강한 것을 비판한 <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렸다.
         원평 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는 재주는 많으나 덕이 적고, 이득을 좋아하고 의리가 없으며, 사납고 교활하며, 포학하게 화심(禍心)을 감추고 있으므로, 거리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장차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 하고, 원대한 안목이 있는 사람은 잘 죽기 어려울 것이라고 염려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 것은 옛날의 밝은 임금이 공신(功臣)을 보전한 덕이고, 이러한 사람을 먼 변방으로 내치는 것은 옛날 성인이 망설이지 않고 간사한 자를 물리친 도였습니다. 밝은 임금의 덕과 성인의 도가 어찌 성명께서 체득하여 행하셔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원두표를 먼 지방에서 한가히 살도록 명하여 연말까지 한가롭게 놀게 하다가 나라의 형세가 굳어지고 조정이 안정된 뒤에 그가 새로워지거든 다시 등용하소서. 그러면 종사에는 실로 억만년 끝없는 복이 되고 원두표에게도 억만년토록 얻기 어려운 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이 기우(杞憂)를 못 견디어 외람되게 하찮은 계책을 아뢰었습니다.<ref name="papa0">효종실록 9권, 효종 3년(1652 임진 / 청 순치(順治) 9년) 11월 7일(을해) 1번째기사 "예조 참의 윤선도가 원평 부원군 원두표를 외방에 보내라는 상소를 올리다"</ref>}}
         71세까지 활동하여 벼슬이 [[의금부|금부]] 도사, [[공조]][[좌랑]], [[예조]][[정랑]] 등을 거쳐 [[예조]][[참의]],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며, 남인의 거두로서 치열한 당쟁 속에 휘말려 일생을 거의 벽지 유배소에서 보냈다. [[1657년]](효종 8년) 가을, [[인선왕후|인선왕후 장씨]]의 병으로, 약제를 잘 짓는다는 추천에 따라 왕명으로 상경하여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 로 의약(議藥) 제조에도 참여하였다.
         * 《고산양자 예조입안 문서》
  • 윤휘
         [[1618년]](광해군 11년) [[5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동지 겸 진주사(冬至兼陳奏使)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여 체차되었으나 다시 성절사로 임명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 기간 중 [[누르하치]]와 [[여진족]]의 움직임을 수시로 장계를 올려 조선 조정에 보고하였고, 염초(焰硝)를 구해서 [[조선]]조정으로 보냈다. 그 뒤 [[공조]][[참판]]·[[예조]][[참판]]을 역임했다.
         [[1618년]] 궁궐 영건 도감 제조가 되고, [[1621년]] [[승문원]]제조의 한사람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공조 참판, [[1622년]] [[의금부]]당상, [[비변사]]의 유사당상, [[예조]][[참판]]이 되었다. [[1623년]] 초, 차언심(車彦諶) 등과 함께 역적으로 몰려 죽은 [[허균]]의 노비들을 차지하여 자신의 노비로 부리다가 [[박홍도]] 등의 공격을 받고 스스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광해군]]이 이를 듣지 않았다.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 때 [[환관]]과 결탁하여 인사권을 주무르고, [[요동]]을 정벌하려 할때 [[후금]]과의 화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서인]] 간관들의 탄핵을 받아 [[예조]][[참판]]에서 파면되고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다. 그해 [[4월]] 임피(臨陂)로 이배된 뒤 다시 [[아산]] 등지로 [[유배지]]가 이배되었다.
  • 윤흔
         당색은 [[서인]](西人)으로, [[광해군]] 때 [[승정원]][[우승지]] 등을 지냈으나 한때 첩의 남동생이 칠서지변의 서양갑이라서 [[계축옥사]]로 파직되었다가,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 뒤에 관작이 복구되어 [[예조]][[참판]]·[[중추부]][[지사]],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조선 인조|인조]]를 [[공주시|공주]]까지 호종하였고,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가의대부에 오르고 예조참판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에는 [[후금]]과의 협상을 강력 반대하였다. 그 뒤 [[예조]][[참판]]으로 재직 중에는 [[1632년]] [[인목대비]]와 [[1635년]] [[인열왕후]]의 [[국상]] 장례를 주관하였으며 [[정묘호란]] 때에도 임금을 호종하였으며, [[1636년]](인조 14년) [[정묘호란]] 때에도 [[남한산성]]으로 [[조선 인조|인조]]를 수행, [[김상헌]]과 함께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사후 [[병자]], [[정묘호란]] 때의 [[호종]] 공로로 [[증직|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윤웅렬]](尹雄烈), [[윤영렬]](尹英烈) 형제는 그의 7대손, [[윤치호]]는 그의 8대손이다. [[이이]]·[[성혼]]·[[정철]]의 문인이다.
         이후 형조좌랑, 예조좌랑, 호조좌랑 등 다시 3조의 좌랑을 거쳐 [[평안도]][[도사]]로 나갔다. 복귀하여 [[형조]][[정랑]](刑曹正郞), [[예조]][[정랑]], [[호조]][[정랑]]을 거쳐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나갔다. 그 뒤 내직으로 복귀하여 [[형조]][[정랑]]을 세 번 역임한 뒤 [[세자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으로 [[광해군]]을 보도하였다. 그 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올랐다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옮겼다. 그 뒤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홍문관]]수찬(修撰)이 되고, 교리(校理)를 거쳐 부응교(副應敎)에 올랐다. [[1601년]]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3년상을 치뤘다. [[1603년]](선조 36년)에 3년상을 마치고 복직, [[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 [[군자감|군자감정]](軍資監正), 통례원 좌통례(左通禮)를 역임하였다. 이후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승정원]][[우승지]]가 되었다.
         [[1630년]](인조 8년) 행[[용양위]][[부호군]]으로 전직되었다가 그해의 임오년(1582년) 사마시 합격자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임오년사마방회도에 기록되었다.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1632년]] [[예조]][[참판]]이 되고, 1632년에는 예조참판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국장]] 업무를 주관하였고, 다시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다시 예조참판이 되어 1635년에도 예조참판으로 재직하며 [[조선 인조|인조]]의 정비 [[인열왕후]](仁烈王后)의 국장업무를 주관하였다.
  • 은신군
         은신군 역시 아들이 없어 [[1815년]](순조 15) [[조선 순조|순조]]의 특명으로 [[돈녕부]]판사 [[이언식]](李彦植)과 왕실 각 왕자군파 문장들, [[예조]]의 회의 끝에 [[1815년]] [[12월 19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6대손인 이병원의 차남 이채중을 간택, 그의 사후 양자로 입양시켜 후사를 이었다.<ref>인평대군이 [[능창대군|능창군 이전]]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므로, 호적상으로는 [[능창대군|능창군 이전]]의 7대손이 된다.</ref> 이채중은 이름을 이구(李球)로 바꾸고 바로 [[남연군]](南延君)에 봉작되었다.
  • 은전군
         [[1772년]](영조 47) [[10월 19일]] 영조의 명으로 관례를 올리고 주관자로 종실 응선군 희(凝善君爔), 광릉부수 정(廣陵副守烻) 등이 정해져 [[10월 20일]] 관례를 올렸다. [[1773년]] [[3월 4일]] 영조의 특명으로 [[예조]]에서 은전군의 부인을 간택하였고, [[3월 5일]] 바로 영조의 명으로 조성(趙峸)의 딸을 낙점하여 [[6월 15일]] 길례날자를 정한 뒤, [[6월 28일]] 친영으로 [[결혼|혼례]]를 올렸다.
  • 탁신 (조선)
         '''탁신'''(卓愼, [[1367년]] ~ [[1426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이다. 본관은 [[광산 탁씨|광주]](光州). 자는 자기(子幾)·겸부(謙夫)·계위(係危), 호는 죽정(竹亭)이다. [[조선 태종]] 때 지신사(知申事), [[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내고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세종]] 때 [[예조]][[참판]], [[의정부시|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올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418년]]([[세종]] 즉위년) [[예조]][[참판]]·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올랐고, 1419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제수되었다.<ref>『세종실록』 3권, 1년(1419 기해 / 명 영락(永樂) 17년) 4월 8일(임오) 2번째기사</ref>
         하고, 불러서 경승부 윤(敬承府尹)에 임명하였다가 호조 참판으로 옮기고, 예조 참판과 예문관 제학을 거쳐서 신축년에 특진하여 의정부 참찬에 임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60세이다. 사림에서 모두 그를 애석히 여겼다. 부고가 들리니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내렸다. 문(文)은 학문에 부지런하며 묻기를 좋아한다 함이요, 정(貞)은 청백하게 절조를 지킨다는 뜻이다. 신은 의지가 강하고 바르며, 경학(經學)에 밝고, 음률(音律)과 무예(武藝)까지도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서 반드시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위주로 하였다. 그는 이르기를,
         [[1426년]] [[3월 2일]] 세종대왕이 예조의 관원에게 명하여, 죽은 참찬 탁신(卓愼)에게 치제(致祭)하였으니, 그 제문에 이를기를,
         {{인용문2|임금을 보좌하던 훌륭한 신하는 정치와 교화에 크게 도움을 주었으며, 슬픔과 기쁨에서 내리는 임금의 은총도 마땅히 살아서나 죽어서나 갖추어 융숭해야 할 것이로다. 생각건대 경(卿)은 강명(剛明)한 자질을 타고난 위에 학문의 연구를 깊이 쌓았도다. 청렴하여 지키는 바가 있었고, 진실하여 허식이 없었도다. 효도하며 공경하는 행실은 일찍부터 이루어졌으며, 충성하며 노력하는 마음은 더욱 철저하였도다. 대간을 여러 번 맡아서 명성을 매우 떨쳤도다. 선왕께서 정치를 맡으셨을 때에는 임금의 명령을 받들기를 진실히 하였고, 내가 왕위를 계승하는 날에는 많은 보좌를 받았었고, 여러 조(曹)에 있을 때에는 사무를 처리하기를 정밀하고 소상히 하였으며, 정부에 참여해서도 정직하며 미덥게 협찬하였도다. 빈객(賓客)인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 겸하여 역사를 편찬하는 사무를 맡았도다. 바야흐로 깊은 기대를 가지며 오래도록 건강할 것을 기대하였더니, 어쩌다가 한번 걸린 병으로 갑자기 딴 세상 사람이 된단 말인가. 온자했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니 애통한 마음을 견디기 어렵도다. 곧 예조의 관원에게 명하여 빈소에 나아가서 제사를 지내노라. 아아, 길고 짧은 생명은 기한이 있는지라, 갑자기 가버린 영혼을 슬퍼하며, 살 때나 죽은 뒤나 다름이 없으므로 여기에 애도하는 특전을 베푸노라.}}
  • 한호문
         [[1637년]]에는 도정(都正)으로 그 해에 열리는 무과 정시(武科 庭試)에 좌참찬(左參贊) 이덕형(李德泂), 지사(知事) 변흡(邊潝), 동지(同知) 한명욱(韓明勖) 등과 함께 무과 정시(武科 庭試)의 명관(命官)으로 선발되었다. [[10월 13일]] 그 해의 무과 정시 합격자가 5천 수백명이라서, 본업무와 함께 합격자를 정하느라 보고가 40일이 지체된 것을 대죄하였으나 인조가 이를 무마시켰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10월 13일(정미)자 16번째기사, "출방할 때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으므로 대죄한다는 무과 정시 명관인 좌참찬 이덕형 등의 계"</ref> 이후 부총관(副摠管)으로 전직되었다. [[10월 21일]] 전시의 시관으로 논박을 나갔는데, 즉시 왔어야 하는데 궐문이 닫힌뒤 천천히 왔다 하여 추고를 청하는 승지 김휼의 계에 의해, 추고받았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10월 21일(을묘)자 18번째기사, "전시의 시관인 부총관 한호문을 추고할 것을 청하는 김휼의 계</ref> 그해 [[12월]] [[도총부]] 부총관과 [[훈련원]]도정으로서 [[예조]]의 인사 포폄을 마감하는 좌기(坐起)에 참석하였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12월 14일(무신)자 2번째기사, "부호관 한호문이 예조의 포폄 좌기에 나아가므로 표신을 내줄 것을 청하는 도총부의 계"</ref> [[12월 16일]] 이를 두고 [[사헌부]]에서 그가 위인이 용렬하다며 반대했지만, [[인조]]가 그정도는 아니라고 하여 무마시켰다.<ref>승정원일기인조 16년 무인(1638) 12월 16일(갑진)자 6번째기사, "사헌부의 계에 대해, 정시웅은 체차하고 엄종남은 추고하라는 비답"</ref>
  • 홍인한
         '''홍인한'''(洪麟漢, [[1722년]] ~ [[1776년]] [[7월 5일]])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정여(定汝), 본관은 풍산(豊山). [[예조]][[판서]] [[홍현보]]의 아들이고 [[영의정]] [[홍봉한]]의 이복동생이다. 혜경궁 홍씨의 이복 삼촌이 된다. [[홍국영]]의 일족이기도 하다. 당색으로는 [[노론]]이며 노론내 외척당의 지도자였다.
         과거 급제 후 청요직을 거쳐 1757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했으며 전라도관찰사 재직 중 [[기생]]들의 춤과 노래실력을 트집잡아 [[곤장]]을 남발하고 즐겼다고 한다. 이는 중앙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성대중]]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승지, 사간, 대사헌, 호조와 예조참판, 도승지 등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이조, 병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두루 거쳐 1774년 의정부우의정, 1775년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선조의 6대손이자,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예조판서 [[홍현보]]이고 어머니는 성주이씨로 이세황의 딸이다. [[홍봉한]]의 이복동생이다. [[혜경궁 홍씨]]의 이복 작은 아버지(숙부)이며, 관찰사를 지낸 홍창한은 8촌 형이 된다. 친동생은 [[홍용한]], [[홍준한]] 등이 있다.
         그 후 승지, 한성부우윤, 대사헌 등을 지내고, 1762년 호남안집사(湖南安集使)로 순무하고 돌아왔다. 호조참판, 예조참판, 도승지 등을 거쳐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자헌대부로 승진, 공조판서와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 6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774년]] [[의정부]][[우의정]]으로 특진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 흥친왕
         그 뒤 당상관으로 승진 [[1865년]](고종 2년) [[1월]]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가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1월 15일 철종의 빈전의 향관(享官)으로 추가 선출되었다. 이후 다시 [[승정원]]동부승지가 됐다가 [[4월]] [[성균관]][[대사성]], [[이조]][[참의]], [[부제학]] 등을 거쳐 이후 [[성균관]][[대사성]]·[[승정원]][[도승지]]ㆍ이조참의ㆍ호조참의ㆍ예조참의, 부제학, 직제학 등을 역임했다.
         1866년 도승지, [[1867년]]에는 직제학이 됐다가 그해 3월 가선대부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승진하였고, 바로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후 동지경연사, 종정경에 제수되었고, 의정부 당상을 역임하였다. 그 뒤 [[병조]][[판서]], 금위대장,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1873년]] 종정경(宗正卿)이 되었으나 [[1874년]] [[11월]]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에 의해 섭정직에서 강제 축출당한 뒤에도 그는 유유하고 고분고분한 성격 덕에 계속 관직에 남아 있을수 있었다. 동생이 국왕이었고 아버지는 섭정인데도 자신에게는 낮은 직위가 부여되었던 것에 불만을 품기도 했다. 이때문에 그는 한때 [[명성황후]] 측에 가담하기도 했다. 외가인 민씨 척족에게 아부한 것 역시 관직을 계속 유지하는 비결이었다.
         [[1878년]](고종 16년) 자헌대부로 승진하여 지[[경연]]사(知經筵事)가 되었고, 종정부, 춘추관, 의금부사를 겸임하였으며, [[1879년]] [[형조]][[판서]](刑曹判書), 시강원 우부빈객(侍講院右副賓客), 시강원 좌빈객, 별입직(別入直)을 거쳐 종1품으로 특서되었다. 그해 숭정대부에 승진하여 행 병조판서가 되었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1880년]] [[병조]]판서, 1881년 [[1월]] 금위대장,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을 지냈다. 이어 1월 말 판돈녕부사로 통리기무아문당상, 사대교린당상(事大交隣堂上)에 올라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해 숭록대부로 승진하였다.
         [[1881년]] [[4월]] [[시강원]] 우빈객(侍講院右賓客)이 되고 이후 [[금위대장]]과, 지훈련원사를 거쳐 같은 해 [[8월]]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해 [[10월]] [[이재선]]의 옥사가 있자 상소를 올려 [[이재선]]의 적형임을 들어 스스로 죄를 청하였고, 곧 사직했다. 그 뒤 [[이재선의 옥사]] 관련자들에게 역적의 율로 다스려야 된다는 [[사헌부]]와 [[사간원]] 및 [[성균관]] 유생들의 비난을 받을 때 그는 역모 가담자의 가까운 친족이었음에도 특별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882년]] [[3월]] [[보국숭록대부]]로 승진, 행 예조판서가 되고, 호조판서를 겸하였다. 이어 훈련대장, [[선혜청]] 당상, 판삼군부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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