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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상하
         사망 직후 [[1721년]] [[노론]]의 영수로 지목되어 [[소론]] 신치운(申致雲)의 상소로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1724년]] [[영조]] 즉위 후 복관되고 치제(致祭)하도록 하였으며, 그해 시장(諡狀)을 심의하지 않고 바로 문순(文純)의 시호를 내렸다. [[1979년]] 그의 저서 《한수재집》이 양장으로 영인, 간행되었다.
  • 김상로
         '''김상로'''(金尙魯, [[1702년]] [[1월 3일]] ~ [[1766년]] [[12월 29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며 당색으로는 [[노론]] 벽파의 지도자였다. 자는 경일(景一). 호 하계(霞溪)·만하(晩霞). 시호는 익헌(翼獻). 본관은 [[청풍 김씨|청풍]]이다. 대제학 [[증직|증]] [[의정부]][[좌찬성]] [[김유 (1571년)|김유]]의 아들이며 [[좌의정]]을 지낸 [[김약로]](金若魯)의 동생이다. [[영의정]] [[김재로]]는 그의 사촌형제였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으며 [[노론]] 벽파의 지도자였다. 1748년(영조 24) 병조판서가 된 뒤, 이조·호조 판서를 거쳐 1752년에 우의정, 1754년 좌의정, 1759년 영의정을 지냈다.
         [[1721년]](경종 1)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734년(영조 1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예문관]]검열이 되고, 곧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바로 한림(翰林) 출신이라하여 6품직에 승진하였다. 응교를 거쳐 1736년 [[사간원]]정언, 교리를 역임하였으며, 그 후 사간원과 사헌부의 여러 벼슬을 지내고 [[암행어사]]로 다녀오기도 했다. [[1739년]] [[경기도]] 양정어사(良丁御史)를 다녀왔다가 돌아와 부교리가 되었다. 이어 [[사간원]]헌납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고, 1740년 도청부사과(都廳副司果)가 되었다가 당상관으로 승진, [[사간원]][[대사간]]·[[승정원]][[승지]] 등을 지냈다.
         [[1750년]]에 겸지경연 [[세자우빈객]]이 되었으나 [[사도세자]]와 의견이 달라서 마찰을 빚었다. 52년에 [[의정부]][[우의정]]에 발탁되었으나 [[1753년]] 파직되었다. 이후 곧 풀려나 [[1754년]] [[좌의정]]을 거쳐 59년 [[영의정]]에 올랐다. 이때 말과 행동이 맞지 않은 사헌부 관리들은 교체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탕평책]]이 나왔을때 최초에는 찬성하였으나, [[홍계희]]·[[김귀주]]·[[문성국]]·[[홍인한]]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공격하였고 [[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였다.
         [[1759년]] [[5월]] [[영의정]]에 올랐으나 사퇴, 그러나 [[8월]]에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1개월만인 [[9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洪鳳漢)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뒤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영조의 사도세자 처벌 논의에 가담했다. 이후 [[1762년]] [[홍계희]], [[홍인한]] 등과 함께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하여 영조의 동조를 얻었으나, 후에 왕이 이를 후회하자 세자를 보도하는 사부이자 정승으로서 역할을 게을리했다는 탄핵을 받고 [[청주시|청주]]에 부처되었다가 곧 특명으로 풀려났다. 이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멱우리(화성시 우정읍 멱우리)에 매장되었다. 죽은 후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영조와 사도세자를 이간질하여 세자를 죽이게 했다 하여 관작을 추탈당하고, 그의 네 아들과 형제의 아들들도 모두 파직 후 유배당했다. 그 후 [[조선]] [[대한제국 고종|고종]] 때 신원, 복권되었다.
         영조는 손자 정조에게 남긴 금등에서 '너의 아비를 죽이게 한 것은 아무래도 김상로다. 그자야 말로 바로 너의 원수다'라고 지목했다. [[1776년]] 정조 즉위 후 [[이병모]] 등으로부터 탄핵당하였고, 이후 탄핵상소가 빗발치자 김상로는 삭탈관직 되고 그의 아들 네 명과 조카들은 파직당하고 유배당했으며 금고령에 처해졌다. 고종 때에 가서 복권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 그의 묘는 [[경기도]] [[과천시|과천]]에 있었으나 뒤에 친형 [[김취로]]의 묘소 옆으로 이장한 것이라고 한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화성군 수원에 참배를 위해 능행 길을 나설 때 그의 묘 앞을 지나게 되는데, 생전에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처벌을 적극 주장해 결국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장본인인 김상로의 묘 앞을 지나는 것을 심히 불쾌하게 여긴 정조는 능행 길을 다른 길로 바꿨다는 것이다. 정조는 능행길 길목에 그의 형 [[김약로]]의 묘소가 있자 이를 불쾌하게 여겨 길을 바꿔서 간 일이 있다.
  • 김상로 (1702년)
         '''김상로'''(金尙魯, [[1702년]] [[1월 3일]] ~ [[1766년]] [[12월 29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며 당색으로는 [[노론]] 벽파의 지도자였다. 자는 경일(景一). 호 하계(霞溪)·만하(晩霞). 시호는 익헌(翼獻). 본관은이다. 대제학 [[증직|증]] [[의정부시]] 좌찬성의 아들이며 좌의정을 지낸 김약로(金若魯)의 동생이다. 영의정 김재로는 그의 사촌형제였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으며 [[노론]] 벽파의 지도자였다. 1748년(영조 24) 병조판서가 된 뒤, 이조·호조 판서를 거쳐 1752년에 우의정, 1754년 좌의정, 1759년 영의정을 지냈다.
         [[1721년]](경종 1)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734년(영조 1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예문관 검열이 되고, 곧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바로 한림(翰林) 출신이라하여 6품직에 승진하였다. 응교를 거쳐 1736년 [[사간원]]정언, 교리를 역임하였으며, 그 후 사간원과 사헌부의 여러 벼슬을 지내고 [[암행어사]]로 다녀오기도 했다. [[1739년]] [[경기도]] 양정어사(良丁御史)를 다녀왔다가 돌아와 부교리가 되었다. 이어 사간원 헌납을 거쳐 이조 좌랑이 되고, 1740년 도청부사과(都廳副司果)가 되었다가 당상관으로 승진, 사간원, 대사간, · 승정원, 승지, 등을 지냈다.
         [[1750년]]에 겸지경연 [[세자우빈객]]이 되었으나 [[사도세자]]와 의견이 달라서 마찰을 빚었다. 52년에 [[의정부시]]우의정에 발탁되었으나 [[1753년]] 파직되었다. 이후 곧 풀려나 [[1754년]] 좌의정을 거쳐 59년 영의정에 올랐다. 이때 말과 행동이 맞지 않은 사헌부 관리들은 교체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탕평책이 나왔을때 최초에는 찬성하였으나, 홍계희·김귀주·문성국·홍인한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공격하였고 [[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였다.
         [[1759년]] [[5월]] 영의정에 올랐으나 사퇴, 그러나 [[8월]]에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1개월만인 [[9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洪鳳漢)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뒤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영조의 사도세자 처벌 논의에 가담했다. 이후 [[1762년]] 홍계희, 홍인한 등과 함께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하여 영조의 동조를 얻었으나, 후에 왕이 이를 후회하자 세자를 보도하는 사부이자 정승으로서 역할을 게을리했다는 탄핵을 받고 [[청주시|청주]]에 부처되었다가 곧 특명으로 풀려났다. 이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멱우리(화성시 우정읍 멱우리)에 매장되었다. 죽은 후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영조와 사도세자를 이간질하여 세자를 죽이게 했다 하여 관작을 추탈당하고, 그의 네 아들과 형제의 아들들도 모두 파직 후 유배당했다. 그 후 [[조선]] [[대한제국 고종|고종]] 때 신원, 복권되었다.
         영조는 손자 정조에게 남긴 금등에서 '너의 아비를 죽이게 한 것은 아무래도 김상로다. 그자야 말로 바로 너의 원수다'라고 지목했다. [[1776년]] 정조 즉위 후 이병모 등으로부터 탄핵당하였고, 이후 탄핵상소가 빗발치자 김상로는 삭탈관직 되고 그의 아들 네 명과 조카들은 파직당하고 유배당했으며 금고령에 처해졌다. 고종 때에 가서 복권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 그의 묘는 [[경기도]] [[과천시|과천]]에 있었으나 뒤에 친형 김취로의 묘소 옆으로 이장한 것이라고 한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화성군 수원에 참배를 위해 능행 길을 나설 때 그의 묘 앞을 지나게 되는데, 생전에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처벌을 적극 주장해 결국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장본인인 김상로의 묘 앞을 지나는 것을 심히 불쾌하게 여긴 정조는 능행 길을 다른 길로 바꿨다는 것이다. 정조는 능행길 길목에 그의 형 김약로의 묘소가 있자 이를 불쾌하게 여겨 길을 바꿔서 간 일이 있다.
  • 김성겸(탤런트)
          * [[하늘아 하늘아]] - [[영조]]
  • 김종수 (1728년)
         김종수는 [[1728년]](영조 5년) [[의정부]][[우의정]]을 지낸 [[김구 (1649년)|김구]](金構)의 증손자이자 할아버지는 [[참판]] 김희로(金希魯)이고, 진위장군(振威將軍) 행[[세자익위사]]시직(侍稷)을 지낸 김치만(金致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풍산 홍씨는 [[홍석보]](洪錫輔)의 딸이다. 부인은 [[홍문관]]교리를 지낸 [[윤득경]](尹得敬)의 딸이다.
         [[1750년]]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생원과 진사가 되고 곧 음서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중 [[1766년]](영조 42) [[11월]] [[영조]]가 친히 낸 과차에 수석하여 바로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그해 [[음서 제도|음서]]로 출사하여 [[세손궁]]에 보직되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다.
         그 뒤 [[세손]]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거쳐 [[1768년]](영조 44년) [[군수]](郡守)로 재직 중 그 해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다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보직되었다. 이때 [[세손]]사부가 되어 [[세손]]이었던 [[조선 정조|정조]]를 가르치기도 했다.
         김종수는 [[정조]]가 왕세손일 때부터 정조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스승이었다. 그는 정조에게 2년 정도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의 본질을 가르쳤다.<ref name="parks191">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1) 191페이지</ref> 김종수는 군주가 학문을 이끌어 요순시대의 이상을 실현한 것처럼, 군주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며 군주 스스로 학문과 군사 다방면에서 뛰어난 존재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또한 세손에게 만인을 포용하는 어버이가 되어야 하며, 항상 높고 숭고한 뜻을 지니고 이것을 이룩하는데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김종수는 세손에게 임금이면서 스승이면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그는 또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견해는 잘못이고, 학자의 해석에 따라 뜻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허목]]과 [[윤휴]]를 비난하면서도, 원시유학의 가치를 설명하였다. 정조 역시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을 동시에 바른 학문인 정학으로 받아들였다.
         김종수는 노론 온건파였던 김재로나, 벽파였던 김상로 등 친척들과는 당론을 달리했다. 그의 종조부 김재로는 노론 온건파로서 영조 초반에 탕평당의 기둥으로 활약했다.<ref name="parks194">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1) 194페이지</ref> 역시 종조부인 김약로, 김상로는 왕실외척이 주도하는 탕평당의 맹장으로 활약했다.<ref name="parks194"/> 특히 종조부 김상로는 노론 홍계희, 소론 정우량과 함께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역적으로 단죄되었다.<ref name="parks195">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1) 195페이지</ref> 그러나 김종수는 외척의 정치 관여는 부패와 비리를 낳을 뿐이라며 이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
         [[임오화변]]을 계기로 [[노론]]은 [[사도세자]]의 후손을 인정할 수 없다는 당론을 세웠지만 김종수는 이를 거부하고 세손은 영조의 적손이니 정통 후계자라는 견해를 고수하였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유언호 등 노론 시파의 의견에도 동조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노론 벽파나 외척당, 시파와는 별개의 정파인 노론 청명파에 가담하였다.
         [[1769년]] [[3월]] [[홍문관]]부교리, [[세손시강원]]필선, [[6월]] [[홍문관]]교리(校理)를 거쳐 응교가 되었다. [[12월]] 장연 현감(長淵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왕의 특별 배려로 다시 [[홍문관]]수찬으로 직책이 바뀌었다. 이어 [[경연]]시강관을 겸하였으며 그 뒤 다시 [[홍문관]]교리로 임명되었으나 [[1772년]] 당폐(黨弊)를 일으킨 죄로 탄핵을 받고 [[조선 영조|영조]]의해에 유배되었다.
         1772년 청명(淸名, 청렴함과 명예)을 존중하고 공론을 회복해 사림 정치의 이상을 이루려는 [[노론]]내 청명류(淸名流)의 정치적 결사체가 드러날 때, 당파를 없애려는 영조는 이들이 오히려 당론을 조장한다고 보고 그 지도자인 조정(趙晸), 김치인(金致仁), 정존겸(鄭存謙), 이명식(李命植) 등을 유배보냈고, 이때 김종수 역시 청명류의 지도자로 지목되어의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방면되었다.
         [[1776년]], 유배된 지 4년 만에 영조의 죽음으로 [[행장]]찬집당상(行狀纂輯堂上)이 되었고, [[조선 정조|정조]]가 그를 특별히 요직에 발탁하였다. 조정에 돌아온 그는 [[세손]]의 즉위를 반대한 [[홍인한]], 음모를 꾸민 [[정후겸]], [[김귀주]] 등을 복주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는 [[노론]] 내에서도 [[노론]] [[벽파]] 인사들을 왕의 자리를 택군하려 한 대역죄인들이라 성토하고 이들을 처치할 것을 상주했다. 김종수는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도 [[홍인한]], [[정후겸]], [[문성국]]과 한패라며 법으로 처단할 것을 건의한다.
         이후 기용되어 승지에서부터 1년 사이에 우참찬(右參贊), [[병조판서]]로 승진되었다. [[노론]][[벽파]]의 강경파였던 선조들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당숙 [[김치인]]과 함께 [[노론]]온건파에 가담하여 숙청을 면하고 [[조선 정조|정조]]에 의해 등용되었던 것이다.<ref>또한 정조의 세손시절 사부로서 위기에 몰린 정조를 두둔한 것도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ref> [[사도세자]]와 그 후손은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노론]]의 당론을 어기고 일부 인사와 함께 세손은 영조의 적법한 계승자라 주장하였다. 그는 [[노론]] 내에서도 따돌림을 받게 되었고, 이후 정조 즉위 후 개혁작업을 하면서도 같은 노론 인사들의 처벌을 묵인, 동의하게 된다.
         김종수가 표방한 핵심 정치 원칙은 외척과 궁중세력을 멀리하여 그들의 정치 간여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ref name="parks191"/> 따라서 [[영조]] 말기에 [[소론]]과 손잡고 [[세손]]의 정통성을 인정하려는 [[홍인한]], [[홍봉한]] 계열을 공격하여 몰락시켰다. 그 뒤 [[조선 정조|정조]] 즉위 초에는 왕권에 위협이 되는 [[김귀주]], [[김관주]]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킨다. 그밖에 정조 암살을 시도한 [[홍계능]] 일파를 맹렬하게 성토하여 몰락시켰다.
         김종수는 정조가 즉위하기 전부터 노론 청명파의 실질적인 최고지도자였다. 특히 정조 즉위년은 노론당의 정치원칙이 승리했음을 의미하는 [[병신처분]]이 내려진지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 시기적 특성을 이용하여, 김종수는 정조 가 신임하는 [[홍국영]]과 손을 잡고 노론의 정치원칙을 다시 떨치는 작업을 적극 추진해 [[소론]]과 [[남인]]계 정파의 입지를 대폭 좁히려 하였다.<ref name="parks192">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1) 192페이지</ref>
         그래서 [[노론]] 붕당의 초대 당수 [[송시열]]의 위패를 [[조선 효종|효종]]의 위패 옆에 추가로 모신 반면, [[영조]]가 되돌려준 [[소론]] 붕당의 영수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 부자의 관작은 다시 박탈했다.<ref name="parks192"/>
         그리고 [[노론]]계 산림 [[송덕상]], [[송환억]], [[김종후]]를 불러 올려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시키는 한편, 영조가 혁파한 이조전랑의 권한을 다시 회복시켰다.<ref name="parks191"/> 이 때문에 그의 형 [[김종후]]는, 아우의 정치적 입지와 반대파의 몰락이 너무 확연하니, 부디 근신하고 신중하게 처신할 것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ref name="parks192"/> 그러나 그는 [[노론]]의 돌격장 역할을 버리지 않았다.
         정조의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그는 스스로 물러나 고향으로 되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채제공]] 등용 이후의 정국에서는, 정조의 뜻을 받들어 출사했는데, 그것은 [[남인]]을 강력하게 견제하기 위해서였다.<ref name="parks195"/> 김종수는 남인이 오랫동안 실권하였다가 정조의 각별한 배려로 등용되는 것이므로 원한에 사로잡혀 사형, 추탈, 부관참시 등의 일을 벌여 조정을 파란으로 몰고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남인이 사도세자 문제를 꺼낼 때나 영조의 처분을 뒤집으려 할 때 상소를 올려 [[채제공]] 등을 내치고 처단할 것을 주청하였다.
         그는 외척의 정치 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상소를 정조에게 올려 정조의 신임을 얻었다. 영조 후반과 정조 즉위 초 김종수는 [[홍국영]] 등과 손잡고 정조의 집권을 위협하는 [[홍봉한]]·[[홍인한]] 계열과 [[정후겸]] 계열, [[김귀주]] 계열 등의 외척 세력을 견제, 공격하였으며 외척 세력이 몰락한 뒤에는 [[홍국영]]의 권력남용과 월권행위를 집중 공격하였다. [[1780년]] 이조판서가 되어 [[홍국영]](洪國榮) 등의 제거에 앞장섰으며, 홍국영이 왕실 후사문제에 개입하자 그를 역적이라 성토,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다. [[홍국영]]의 정적이된 [[소론]] [[서명선]] 등과 손잡고 [[홍국영]]을 조정에서 몰아냈고, 그 뒤에는 다시 [[소론]]과 [[시파]], [[남인]]을 공격하였다.
         [[1793년]](정조 16년) 의 유생 1만 5천명이 [[영남만인소]]를 올렸다.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실이 없음을 상소한 것이었으나 [[사도세자]]의 억울함과 신원을 상언하는 내용이 있었다. 이 상소를 읽은 정조는 목을 매여 말을 잇지 못했다.{{출처|날짜=2013-10-13}} 그는 정조에게 개인적인 슬픔은 개인적인 슬픔으로 남기고 국정에는 반영하지 말 것을 상주했다. 당시 소론과 남인은 물론 왕실외척과 정조의 측근 신하들도 이른바 임오의리에 적극 동조했다.<ref name="parks192"/> 영남만인소 이후, 사도세자에게 씌워진 모함 때문에 잘못 내려진 영조의 처분을 뒤집어야 한다는 임오의리 문제가 정국의 현안으로 떠올랐다.<ref name="parks192"/>
         이때 김종수는 [[노론]] 강경파를 이끌고 [[임오의리]] 천양 분위기에 대항했다.<ref name="parks193">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1) 193페이지</ref> 그는 정조에게 "인륜이 무너지는 정도의 변고를 당하고도 올바름을 잃지 않아야, 순(舜) 임금이나 [[주공]](周公)과 같은 옛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개인적인 효도는 효도로서 하고 정치원칙(의리)는 정치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처리방식을 제기했다.<ref name="parks193"/> 그는 [[연산군]]이 사사로운 원한을 갚으려고 하다가 [[폐비 윤씨]]의 명예 회복은커녕 다시 몰락하게 했던 것을 예로 들었다.
         당시 정조는 영조가 남긴 친필문서 '금등(金騰)'을 공개했다.<ref name="parks193"/> 금등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처분을 후회하는 내용이다.<ref name="parks193"/> 사도세자가 군주인 영조를 위해서 스스로 죄를 입었다는 내용의 문서였으므로 금등이란 칭호를 얻은 것이다.<ref name="parks193"/> 이때 함께 입궐, 이로써 정조는 사도세자의 신원을 청하던 영남만인소와 채제공의 견해를 일단 수용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슬픔은 개인적인 슬픔으로 마무리지을 것이며 영조의 원칙을 뒤집지는 않겠다고 선언한다. 노론 벽파에서는 문서가 날조된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김종수는 이를 수용하였다.
         금등이 공개되면서 그는 정조가 마음이 흔들릴 것을 염려, 영조의 처분을 뒤집지 말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 김춘택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으로 쫓겨난 서인들은 [[숙빈 최씨]]가 낳은 왕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왕자는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ref name="inbeok01"/> 그러나 서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수문록』은 왕비 장씨가 후궁 최씨를 결박해 심하게 때린 후 거꾸로 세운 큰 독 안에 가둬 두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왕비 장씨의 핍박을 받는 최씨로서는 서인들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ref name="inbeok01"/> 김춘택은 [[인현왕후]]의 친정과도 친밀했는데, 이 때문에 후일 [[소론]]은 [[김일경의 옥사]] 당시 [[조선 영조|영조]]가 [[조선 숙종|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 하여 [[조선 영조|영조]]에게 충격을 주기도 한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충효의 대절을 지켰다 한다. 일설에는 [[숙빈 최씨]]와도 내연 관계였다는 설이 있다. 이 주장은 [[이인좌의 난]] 때 [[소론]]과 [[남인]] 인사들에게서 주로 채택되었다. 그에 의하면 [[조선 영조|영조]]는 그가 무수리인 [[숙빈 최씨]]와 사통한 뒤 [[조선 숙종|숙종]]에게 보내졌다는 것이다.
         [[조선 숙종|숙종]]때부터 [[조선 영조|영조]] 때까지도 그가 [[숙빈 최씨]]와 사통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악형을 금지한 [[영조]]였지만 [[영조]] 때 이를 언급하는 자에게는 예외로 심한 형문을 가하였다. 사생활과 과격했던 정치활동 등으로 정적은 물론 [[노론]]내부에서도 비난 받았지만 글씨를 잘 썼을 뿐만 아니라 시에 대한 재주와 문장이 뛰어나 명성이 높았다. 종조부 [[김만중]]의 언문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배포하였다. 저서로 <북헌집>과 글씨 <호판 김진귀 표>가 있다.
         == 영조 김춘택 아들설 음모론 ==
         일부 야사에서는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닐 것으로 추정한다. 가장 큰 근거는 영조의 외모가 숙종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ref>[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0554 <동이>는 진짜 숙종의 아이를 낳았을까?] 프레시안 2010.05.05</ref> 18세기 [[조선]]에서는 [[조선 영조|영조]]가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고, [[소론]]과 [[남인]] 강경파 중에는 [[조선 영조|영조]] 김춘택 아들설을 신봉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이인좌의 난]] 당시 형장에 끌려간 소론 인사들이 경종의 복수를 다짐하면서 영조의 면전에서 김춘택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영조가 소론계 인사들을 심문할 때의 내용을 그 내용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돼 돼 돼.
         숙빈 최씨와 사랑을 나누던 김춘택이 임금의 씨가 아닌 자기 씨앗을 숙빈 최씨에게 잉태시키고, 그래서 태어난 것이 영조라는 것은 당시 18세기를 살던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유포되었던 소문이었다.<ref name="pisiss">[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527 동이 비밀병기 심운택, 숙빈최씨의 애인?] 미디어스 2010.06.09</ref> 결국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다. 왕실의 씨가 바뀌었다" 라는 내용으로 영조 집권 4년만인 [[1728년]] [[3월 15일]]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다. [[이인좌의 난]]은 보름만에 진압이 되지만 영조는 집권 내내 190여차례 괘서사건을 접하게 된다. 그 내용 중의 하나가 바로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닌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내용이었다 한다.<ref name="pisiss"/>
  • 류형원
         [[1670년]](현종 12년)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완성하다. 그가 저작한 《반계수록(磻溪隧錄)》 스물여셧 권에는 그의 사상과 이념, 이상 국가 건설의 구성이 실려 있으며, [[1770년]](영조 46) 영조의 특명으로 간행되었다. 경제(經濟)의 실학(實學)에 연구가 깊어 당시 이름이 뛰어났다.
         생전 그의 학문에 관심을 준 인물은 절친한 친구였던 [[배상유]](裵尙瑜)와 스승 [[허목]], 선배였던 [[윤휴]], [[윤선도]]와 [[서인]]으로는 [[영의정]]을 지낸 잠곡 [[김육]]이 있었다. 그의 사상은 후에 [[서인]] [[이사명]]과 [[이이명]], [[소론]]의 [[윤증]]과 [[박세채]], [[노론]]의 [[홍계희]] 등 소수의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고 높이 샀고, [[조선 영조|영조]] 때에 이르러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상은 [[양득중]], [[이익 (1681년)|이익]], [[안정복]], [[신후담]], [[정약용]] 등을 통해 계승되었다.
         [[노론]]이던 [[홍계희]](洪啓禧)는 평소 그의 [[반계수록]]을 탐독하였는데, 그가 현직에 임용되지 못하고 그의 뜻이 널리 쓰이지 못한 것을 애석해하였다. [[1768년]] [[10월]] 판중추 [[홍계희]]가 직접 묘비문을 찬하여 죽산부사 [[유언지]](兪彦摯)를 통해 비석을 세웠다. [[1770년]](영조 48년) 다시 [[증직|증]](贈) [[통정대부]] [[호조]][[참의]](通政大夫戶曺參議) 겸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讚善)에 [[추증]]되었다. 또한 그의 증손자 유발(柳發)에게는 특별히 [[동지]]사와 오위장이 제수되기도 했다.
         그가 [[북인]] 당원의 후예인데다가 이후에도 [[남인]] 인사들과 가까이 지냈으므로 그의 학문은 관심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당색을 초월하여 [[서인]]인 [[이이명]], [[윤증]] 등은 그의 [[반계수록]]을 입수하여 탐독하고 이를 높이 사기도 했다. 그의 학문이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 영조|영조]] 때로, [[홍계희]]는 일찍이 그의 저서 [[반계수록]]을 읽고 감화되어 이를 실전에 적용하려 하였으며, [[조선 영조|영조]]는 직접 내탕금을 하사하여 [[반계수록]]의 간행을 명하였다. 이후 [[조선 정조|정조]] 때에 가서는 그의 학문과 사상에 폭넓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윤증]]에게서 책을 빌려 읽어본 제자 양득중은 더 감탄한 나머지 임금에게 상소하여 책의 간행을 권하였다.<ref name="bankye01"/> 1741년 영조17년의 일인데, “근세의 선비 유형원이 법제를 강구하여 찬연스럽게 갖추어놓았습니다. 전제(田制)로부터 시작하여 교육문제, 관리등용문제, 관직·봉급·군사제도에 이르기까지의 세세한 것을 모두 거론하여 털끝 하나인들 빠뜨리지 않았습니다”라고 책의 가치를 나열하여 나라를 건질 계책으로 활용하기를 주장하였다. 이래서 반계가 타계한 97년 뒤인 1770년에 책은 간행될 수 있었다.<ref name="bankye01"/>
         그는 불행하게 일찍 요절했지만 그의 후손들 중 증손 [[유발]]은 그의 저서와 학문이 [[영조]]때에 알려지게 되면서 특별한 은전과 지우를 받아 고위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 박근형
         * 1998년 [[MBC]] 수목드라마 《[[대왕의 길]]》 ... [[영조]] 역
  • 박근형(배우)
         대표적인 사극 출연은 [[1998년]] MBC [[대왕의 길]]에서 [[영조]] 역과 [[2002년]] [[KBS]]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역을 맡은 바 있다.
          * [[대왕의 길]] - [[영조]]
  • 박지원 (1737년)
         |섭정 =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대왕대비 경주 김씨]]
         박지원은 [[1737년]]([[조선 영조|영조]] 13) [[3월 5일]]([[음력 2월 5일]]) 축시에 [[한양]] 서부(西部) 반송반(盤松坊 : 야동(冶洞))에서 지돈녕부사를 지낸 [[노론]]중진 장간공 박필균(朴弼均)의 손자이며, 열상외사(洌上外史) [[박사유]](朴師愈)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이창원(李昌遠)의 딸이다. 그의 형제들 중에는 2남 2녀가 전하는데 위로 형 박희원과 누나 두 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였다.
         5대조 박미(朴瀰)의 동생 박의(朴漪)의 아들은 현석 [[박세채]]로 소론의 거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서인]] 당원이었으나 [[조선 숙종|숙종]] 때 [[노론]]과 [[소론]]이 갈리면서 그의 가문도 노론과 소론으로 당론이 나뉘었고, [[박세채]]는 소론을 선택하였다. 당대인 [[조선 영조|영조]] 때의 거유 성리학자인 여호 [[박필주]](黎湖朴弼周)는 그의 재종조부로, 증조할아버지 박태길의 형 박태두의 아들이자 할아버지인 박필균의 사촌이었다. 할아버지 박필주는 지중추부사와 지돈녕부사를 역임한 노론 거물이었지만 당쟁에 뜻을 두지 않고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할아버지 [[박필균]]은 당쟁에 초연했고 연암 역시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당쟁에서 거리를 두었다.
         [[1752년]](영조 28)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 (책)|맹자]]≫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는 ≪[[사기 (역사서)|사기]](史記)≫를 배워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의 문우(文友) 관계를 이어갔다.<ref name="지만지"/> 또한 [[영조]]의 부마이자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8촌 형 [[박명원]]의 영향을 받아 외부의 문물에도 관심을 두었다. 박명원은 자신 외에도 청나라를 견문하고 온 사실들에게서 접한 새로운 사실을 그에게 전해 주었다.
         [[1754년]](영조 30년) [[우울증]]과 [[불면증]]이 나타나 고생하였다. 처음에는 동정적으로 보던 이들은 나중에 그를 미쳤다고 하며 꺼리거나 피하였다. 그러나 박지원은 스스로 극복하려 했고, 사람들을 청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울증을 고쳐 보고자 했지만 실패한다. 이때 만난 말동무 [[민유신]]은 그의 오랜 지기가 되었는데, 자신의 소설 [[민옹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해, 거지 [[광문]]의 입을 빌려 사회를 풍자한 단편소설 [[광문자전]]을 썼다.
         그 뒤 [[1765년]] 집안의 염원을 받아들여 영조 46년 과거시험 1차에 장원 그러나 2차 시험에는 백지를 제출함. 그해 가을 친구 [[김이중]](金履中)이 나귀를 팔아 마련해준 돈으로 가을에 [[유언호]], [[신광온]] 등 친구들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삼일포, 사선정 등 금강산 일대를 두루 돌아보고, '총석정 해돋이(叢石亭觀日出)'를 썼다. 이 글은 후일 《열하일기》에도 수록되어 있다. [[병조]][[판서]]를 지낸 [[홍상한]]이 이 작품을 격찬했다고 한다. 되돌아와서 <김신선전>을 지었다. 이듬해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만 낙방했고, 여러 번 과거에서 낙방한 이후 [[과거 시험]]을 단념하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 삼종숙 : 박사정(朴師正), [[조선 영조|영조]]의 부마 [[박명원]]의 아버지
  • 박필균
         '''박필균'''(朴弼均, [[1685년]] [[1월 1일]] ∼ [[1760년]] [[8월 2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정치인으로 [[조선 영조|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여 [[노론]]의 맹작으로 활동하였다. 초명은 필현(弼賢), 자는 정보(正甫),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여호 [[박필주]]의 사촌형제이며, [[소론]]의 영수 [[박세채]]의 재종손이다.
         [[1725년]](영조 1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봉교]]가 되고 삼사의 여러 관직을 거쳐 [[1736년]] 이후 [[세자시강원]]사서, 시강원 문학, 보덕 등을 지내면서 어린 [[사도세자]]의 사부가 되어 보도하였다. [[1740년]] [[동부승지]], [[좌승지]], [[도승지]]가 되었다. 이후 [[의금부]][[동지사]], [[경기도]][[관찰사]], 사간원대사간, 춘천부사를 거쳐 [[1748년]] [[예조]][[참판]], [[1750년]] [[공조]][[참판]]이 되었다. 이후 [[호조]][[참판]], [[병조]][[참판]], [[대사간]], 돈령부동지사, 중추부동지사를 거쳐 1760년 돈령부지사 겸 의금부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승문원]]제조에 이르렀다.
         5세 때 아버지 박태길이 죽고, 숙부 박태만(朴泰萬)도 곧이어 졸하였으므로 그는 사촌형인 금녕군(錦寧君) 박필하(朴弼夏)에게 양육을 받았는데, 박필하의 아들이자 5촌 조카인 박사익(朴師益)과 박사정(朴師正) 형제가 그보다 나이가 많았다. 또한 후일의 영조의 부마 [[박명원]]은 박사정의 아들이었다.
         [[조선 경종|경종]]대에 득세한 [[소론]]을 피하여 관직의 뜻을 버리고 [[경기도]] [[통진]](通津)에 은거하다가 사촌형 [[박필주]]의 거듭된 권고로 [[1725년]](영조 1년) [[과거 제도|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 봉교가 되고 겸[[세자시강원]]설서(說書)에 제수되었다. 이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가 대교(待敎)가 되었다.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그의 친족인 박필현, 박필몽 등이 연루되었는데, 이때 그는 자기 이름을 필현에서 필균으로 고쳤다.
         그는 [[연잉군]] 시절 그를 추대하려다가 죽은 [[노론]] 4대신의 복권을 여러번 상주하여 [[영조]]의 진노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을 때 [[소론]]의 당원이 된 친척들도 많았기에 소론을 공격하는데는 주저하였다. 또한 그의 재종조부이자 그의 스승인 [[박세채]]는 [[소론]]의 당수를 지냈던 인물이었다.
         [[1740년]] [[8월]]에 [[영조]]에게 존호를 올릴 때 예방승지를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고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그해 [[9월]]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되고, 10월에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병조 참판으로 옮겼다. 이듬해 동지의금(同知義禁)을 거쳐 8월에는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사간원]][[대사간]]이 되었다. 이후 [[한성부]][[좌윤]]을 거쳐 [[호조]][[참판]]을 지냈다.
         그는 [[영조]] 연간에 정계에서 탕평책에 비판적인 [[노론]]의 맹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탕평파]]의 지도자인 [[조현명]]을 공격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 효종|효종]]의 부마인 [[박필성]](朴弼成)의 친척이며 [[영조]]의 서녀 [[화평옹주]](和平翁主)의 남편인 금양위 박명원(朴明源)의 종조(從祖)였으며, 그 자신도 [[영조]]의 깊은 신임을 받았지만 [[척신]]이 발호한다는 혐의를 피하고자 청요직이 부여되면 여러번 사양하였으며, 청렴한 생활을 하여 집안에 재물을 두지 않았다. 한편 왕가의 사위로 알려진 이들의 집에는 발길도 하지 않아 [[박명원]]은 '우리 선대(先代)에서도 왕가(王家)와 혼인이 있었는데, 지금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도 소원하게 대하여 마치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긴단 말인가. 유독 우리 선친께서 소싯적에 그 고아 신세를 비호해 준 일은 생각지도 않는가'하며 그를 원망했다고도 한다.
         [[1758년]]에 동지돈녕부사,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그해 다시 동지돈녕부사가 되어 [[조선 영조|영조]]의 특명으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지중추부사를 거쳐 [[1760년]](영조 36년) 지돈녕부사가 되고 지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도총관 [[승문원]]제조를 겸임하였다. 그해 [[8월 2일]] 지돈녕부사로 재직 중 타계하였다. 벼슬에 있을 때 청백리로 알려져 깨끗한 선비라는 평을 받았다. 그가 죽었을 때는 장례지낼 형편이 안되었다 한다.
         그는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한 [[노론]]의 맹장이었지만, 당론에 휩쓸리지 않았고 소론 공격에는 다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큰 치적을 세운 바는 없다고 평가되지만 그는 벼슬에 있을 때 청백리로 알려져 깨끗한 선비라는 평을 받았다.
         [[분류:1685년 태어남]][[분류:1760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성리학]][[분류:조선 영조]][[분류:조선 정조]][[분류:반남 박씨]][[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심대윤
         [[영조|영조]] 때을 지낸 준소(峻少)의 영수 [[심수현]](沈壽賢)의 고손자이고, [[강화학파]]의 중심 인물 [[소론]] [[산림 (정치)|산림]](少論 山林) 대사헌 [[심육]](沈錥)의 동생인 이조참판 심악(沈䥃)의 증손자이다.
         {{인용문|심대윤의 집안은 증조부 심악(沈䥃)이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에 이어 일어난 1755년(영조 31)의 [[을해옥사]](乙亥獄事)에 연루되면서 일거에 몰락하고 말았다.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그는 벼슬길이 막히고 겨우 양반의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처지는 그가 학문 연구에 몰두하게 된 원인이 된다. 그는 한양(漢陽)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와 혼인을 하였는데, 그의 처가에 대한 구체적인 사정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는 혼인 후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넷째 동생인 심의돈(沈宜敦)의 아들인 심명택(沈命澤)을 양자로 들였다. 그는 39세 때에 한양을 떠날 정도로 경제적 처지가 매우 곤란하여 노모와 두 동생과 함께 안성(安城)의 가곡(佳谷)으로 이주를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경제적인 곤궁을 해결하기 위해 목반(木槃)을 만드는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도 학문적인 노력에는 변함이 없었다. 심대윤은 저술에 몰두하다가 1872년(고종 9) 7월 25일 생을 마감하였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심대윤(沈大允)}}
  • 어유구
         [[서인]] 당원이었으나 서인의 분당 이후 [[노론]]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딸은 경종비가 된 이후 [[소론]]성향으로 돌아선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조선의 공신|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경종의 장인이면서 조카사위 홍상한을 통해 사도세자빈 [[혜경궁 홍씨]]와도 인척간이 된다.
         [[1724년]](영조 즉위) [[조선 영조|세제]]가 영조로 즉위하자 [[노론]] 일각에서 그가 [[신임사화]] 때 내통했다며 심문하자는 건의를 하였으나 영조가 이를 거절, 무마시켰다. [[영조]] 때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조선의 공신|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735년]] 훈련대장, [[1736년]] 수어사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다시 어영대장에 임명되어 세번을 어영대장을 역임했다. 문집에 《긍재편록 (兢齋編綠)》, 《농암사단칠정변 (農巖四端七情辨)》 등이 있다. [[1739년]] 가을에 병에 걸려 여러번 사직을 청하여 [[어영대장]]에서 물러났다. [[1740년]] [[1월]] [[감기]]에 걸렸다가, [[감기]]가 악화되어 그해 [[1월 16일]]에 사망했다.
         ****** 며느리 : [[청송 심씨]] - [[조선 영조|영조]]의 [[의빈부|부마]] 청성위 [[심능건]](靑城尉 沈能建, 1752년 ~ 1817년)의 고모, 삭녕군수 · 증 영의정 심정지(沈鼎之)의 여동생, 해주목사 · 증 좌찬성 심규(沈규)의 딸, 이조판서 · 좌참찬 · 판돈녕부사 청헌공 [[심택현 (조선문신)|심택현]](淸獻公 沈宅賢, 1674년 ~ 1736년)의 손녀
         [[분류:1675년 태어남]][[분류:1740년 죽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 숙종]][[분류:조선 영조]][[분류:조선 장조]][[분류:조선의 공신]][[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함종 어씨]][[분류:조선의 부원군]][[분류:감기로 죽은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유형원
         [[1670년]](현종 12년)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완성하다. 그가 저작한 《반계수록(磻溪隧錄)》 스물여셧 권에는 그의 사상과 이념, 이상 국가 건설의 구성이 실려 있으며, [[1770년]](영조 46) 영조의 특명으로 간행되었다. 경제(經濟)의 실학(實學)에 연구가 깊어 당시 이름이 뛰어났다.
         생전 그의 학문에 관심을 준 인물은 절친한 친구였던 [[배상유]](裵尙瑜)와 스승 [[허목]], 선배였던 [[윤휴]], [[윤선도]]와 [[서인]]으로는 [[영의정]]을 지낸 잠곡 [[김육]]이 있었다. 그의 사상은 후에 [[서인]] [[이사명]]과 [[이이명]], [[소론]]의 [[윤증]]과 [[박세채]], [[노론]]의 [[홍계희]] 등 소수의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고 높이 샀고, [[조선 영조|영조]] 때에 이르러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상은 [[양득중]], [[이익 (1681년)|이익]], [[안정복]], [[신후담]], [[정약용]] 등을 통해 계승되었다.
         [[노론]]이던 [[홍계희]](洪啓禧)는 평소 그의 [[반계수록]]을 탐독하였는데, 그가 현직에 임용되지 못하고 그의 뜻이 널리 쓰이지 못한 것을 애석해하였다. [[1768년]] [[10월]] 판중추 [[홍계희]]가 직접 묘비문을 찬하여 죽산부사 [[유언지]](兪彦摯)를 통해 비석을 세웠다. [[1770년]](영조 48년) 다시 [[증직|증]](贈) [[통정대부]] [[호조]][[참의]](通政大夫戶曺參議) 겸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讚善)에 [[추증]]되었다. 또한 그의 증손자 유발(柳發)에게는 특별히 [[동지]]사와 오위장이 제수되기도 했다.
         그가 [[북인]] 당원의 후예인데다가 이후에도 [[남인]] 인사들과 가까이 지냈으므로 그의 학문은 관심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당색을 초월하여 [[서인]]인 [[이이명]], [[윤증]] 등은 그의 [[반계수록]]을 입수하여 탐독하고 이를 높이 사기도 했다. 그의 학문이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 영조|영조]] 때로, [[홍계희]]는 일찍이 그의 저서 [[반계수록]]을 읽고 감화되어 이를 실전에 적용하려 하였으며, [[조선 영조|영조]]는 직접 내탕금을 하사하여 [[반계수록]]의 간행을 명하였다. 이후 [[조선 정조|정조]] 때에 가서는 그의 학문과 사상에 폭넓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윤증]]에게서 책을 빌려 읽어본 제자 양득중은 더 감탄한 나머지 임금에게 상소하여 책의 간행을 권하였다.<ref name="bankye01"/> 1741년 영조17년의 일인데, “근세의 선비 유형원이 법제를 강구하여 찬연스럽게 갖추어놓았습니다. 전제(田制)로부터 시작하여 교육문제, 관리등용문제, 관직·봉급·군사제도에 이르기까지의 세세한 것을 모두 거론하여 털끝 하나인들 빠뜨리지 않았습니다”라고 책의 가치를 나열하여 나라를 건질 계책으로 활용하기를 주장하였다. 이래서 반계가 타계한 97년 뒤인 1770년에 책은 간행될 수 있었다.<ref name="bankye01"/>
         그는 불행하게 일찍 요절했지만 그의 후손들 중 증손 [[유발]]은 그의 저서와 학문이 [[영조]]때에 알려지게 되면서 특별한 은전과 지우를 받아 고위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 은신군
         |친척 = [[연령군|연령군 이훤]](양조부) <br /> [[조선 영조|영조 이금]](친조부) <br /> [[달선군|달선군 이영]](양형) <br /> [[조선 정조|정조 이산]](이복 형) <br /> [[은언군|은언군 이인]](친형)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禛, [[1755년]] [[음력 1월 11일]] ~ [[1771년]] [[음력 3월 29일]])은 [[조선]]시대의 왕자, 왕족이다. [[조선 영조|영조]]의 손자로,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숙빈 임씨]] 소생으로는 둘째 아들이며, [[조선 정조|정조]]의 이복 동생이다. [[은언군]]의 친동생이며 [[은전군]]의 이복 형이기도 하다. 사후 정조에 의해 연령군의 양손자로 출계하여<ref>낙천군과의 관계를 놓고 한동안 이견이 벌어지기도 했다.</ref>, [[호적]]상 정조, 의소세손, 은언군, 은전군과는 6촌간이 되었다.
         이진은 [[1755년]](영조 31년) [[음력 1월 11일]]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양제 임씨(良娣 林氏)<ref>대한제국 광무(光武) 3년(1899년) 숙빈(肅嬪)으로 추봉(追封)</ref> 의 서(庶) 차자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친형 [[은언군]] 외에 이복형 [[의소세자]], [[조선 정조|정조]], 그리고 이복동생 [[은전군]] 찬이 있었다. 그는 보모 황덕혜(黃德惠)에 의해 양육되었다.
         [[1757년]](영조 33) [[1월 2일]] [[조선 영조|영조]]는 특별히 [[왕손]]교부에 [[홍계능]]을 임명하여 은신군, 은언군 형제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왕손의 나이 6세에 왕손사부를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영조는 1757년에 두 왕손을 가르칠 왕손교부를 초빙, 임명하였다.
         [[1760년]] 작위를 처음 받았으며 [[1765년]](영조 41년) 은신군에 봉군되었고, 같은 해 [[5월 25일]] 영조의 명으로 형 [[은언군]]과 함께 관례(冠禮)를 행하고 [[승헌대부]](承憲大夫) 은신군(恩信君)에 책봉 되었다. [[1767년]] [[7월]] 현감 [[홍대현]](洪大顯<ref>[[홍대현]]은 학자인 [[홍대용]]의 사촌이기도 했다.</ref>)의 딸인 남양 홍씨와 혼례를 치렀다. [[1768년]](영조 44) [[1월 1일]] [[승정원]]의 건의로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은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768년]]에는 [[종친부]]유사당상, 은신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임명되었다.
         [[사도세자]]의 사후 출궁되었으며, 이후 어렵게 살다가 [[홍봉한]]으로부터 약간의 금액을 지원받았다. [[홍봉한]]이 이들 형제를 왜 도와줬는지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홍봉한]]이 그의 형제를 후견한 일을 두고, 일각에서는 사도세자 제거에 가담한 것을 안 세손 이산이 자신들에게 반감을 가졌기 때문에 한 행동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1769년]](영조 45) [[김귀주]](金龜柱) 등이 이를 두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탄핵, [[1771년]] 외람되게 근수(跟隨)를 많이 거느리고 남여(藍輿)를 타고 다닌다 하여 이복 형 [[은언군]](恩彦君)과 함께 관직에 서용되지 못하는 처분을 받았다.
         곧이어 시전(市廛)상인들에게 수백 냥의 빚을 지고 갚지 않은 것이 조부 [[조선 영조|영조]]에게 알려져 양사의 탄핵을 받는다. 은신군의 보모 황덕혜의 남동생 황경룡(黃景龍)이 내시들과 결탁하여 시전 상인의 재물을 탈취한 죄목으로 고발당했다. 황경룡을 고발하는 과정에서 은언군, 은전군 형제가 시전 상인들에게 빚을 진 것이 영조의 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1771년]] [[2월 2일]] 할아버지 [[조선 영조|영조]]에 의해 삭직처분되고, [[2월 3일]] 호서의 연읍으로 유배의 명이 내려졌다.
         그는 [[조선 영조|영조]]의 명으로 형 은언군(恩彥君)과 함께 [[충청북도|충북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시|제주도]]으로 위리안치 되었다. 또한 그의 외조부 [[임지번]]은 [[제주시|제주도]]의 [[병역|군역]]에 충군(充軍)되었다. 그러나 은신군과 그의 형 [[은언군]]이 유배당한 뒤에도, 그는 분에 넘치는 가마를 탔다는 죄목이 더해져 계속 탄핵당하였다. 당시 [[노론]] [[벽파]] 일각에서는 [[조선 정조|세손]]을 사전에 제거하려 했고, [[조선 영조|영조]]는 이를 알아보고 [[홍봉한]]이 은신군과 [[은언군]] 형제의 빚을 갚아준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인용문2|아! 이번의 처분이 국가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마음에는 지금까지 차마 못할 일이라고 여겼었다. 본주(本州)의 계본이 어제 도착하였는데, 중관(中官)이 혹시 상심할 것을 염려하여 머뭇거리면서 머물러 두게 하였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알렸으니, 슬픈 마음을 어디다 비유하겠는가? 관재(棺材)는 본목(本牧)으로 하여금 가려서 지급하게 하고, 의금(衣衾)은 본현감(本縣監)으로 하여금 종신(宗臣)의 예(例)에 따라 살피고 단속하여 마음을 써서 거행하도록 하되, 우선 가시 울타리를 철거하게 하고 마음을 써서 운구(運柩)하도록 하라. 이인이 만약 함께 물고(物故)하였다면 나의 마음이 어떠하였겠는가? 특별히 석방하는 일을 당일 안에 배도(倍道)하여 분부하도록 하라. 그리고 진의 처에게는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휼전]]을 베풀도록 하라.|1771년 4월 12일 영조의 유지}}
         그의 시신은 도성으로 운구되었다가, 그해 [[6월]] 임시 장지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정조의 명에 의해 [[경기도]] [[양주시|양주군]](현 [[남양주시]]) 계암(鷄岩) 해질머루부락 서쪽 손좌(巽坐)에 어머니 [[숙빈 임씨|양제 임씨]]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1774년]](영조 50) [[5월 12일]] 특명으로 복직되었고, 형 [[은언군]] 인도 복권되었다. 그의 어머니 [[숙빈 임씨|양제 임씨]]는 정조 즉위 후 [[1776년]](정조 즉위) [[8월 3일]]에 [[양제]]로 복작되었다.
         [[1776년]] [[조선 정조|정조]] 즉위 직후 정조에 의해 [[1776년]](정조 1) [[4월 10일]] [[조선 영조|영조]]의 유지를 이유로 [[연령군]] 훤에게 사후 양손자로 적통(嫡統) 입적(入籍)되었다. 그러나 사후 양자라서 이미 [[연령군]]의 양자가 된 [[낙천군]]의 제사를 은신군의 후계자들이 모시느냐 여부를 놓고 논란이 되었으며, [[남연군]]의 후손들은 사도세자와의 관계를 더 강조하는 차원에서 사도세자, 장조를 유독 강조했다.<ref>연령군과 낙천군의 제사만 받들고, 사도세자를 강조하였다. 이는 선원속보 및 남연군 후손들의 묘비명, 신도비명에도 장조의 별자, 사도세자의 별자 은신군의 후손이라 명시하였다.</ref> 이 문제는 20세기에 가서야 남연군의 후손들이 연령군, 낙천군을 선조로 인정하고 연령군-낙천군-은신군으로 계통이 확정되었다.
         이복 형인 [[조선 정조|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1779년]](정조 3년) [[1월]] [[증직|증]]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추증되었다. [[1779년]] [[12월 12일]] 소민공(昭愍公)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가 고종 때 충헌으로 개정되었다. [[1786년]] 정조는 그의 [[신도비]]를 직접 쓰기도 했다.
         정조가 영조의 유지를 이유로, 은신군을 연령군의 후사로 정하면서 은신군 집안을 계승하는 사람이 연령군가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은신군의 양자인 남연군의 후손들은 연령군을 선조로 하지 않고, 사도세자를 강조했다. 1792년 편찬된 [[선원계보기략]]에도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되어 있었고, 고종이 즉위한 뒤에 편찬된 선원보들도 사도세자의 자녀 항목에 은신군을 넣었으며, 출계(出系)라는 단어를 넣지도 않고 사도세자의 아랫 부분에 은신군의 이력을 기록하였다. [[1892년]] 발행된 선원계보기략에도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등재되었다.
         * '''조부''' : 제21대 [[조선 영조|영조대왕]](英祖大王, 1694 ~ 1776, 재위 1724 ~ 1776)
         * 영조실록, 정조실록
         [[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왕족]][[분류:1755년 태어남]][[분류:1771년 죽음]][[분류:사사된 사람]][[분류:병사한 사람]][[분류:운현궁]][[분류:조선 영조]][[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장조]][[분류:조선 정조]][[분류:흥선대원군]]
  • 이순재(1935년 10월)
          * '''[[이산(드라마)|이산]](2007, MBC)'''/'''[[영조]]'''[* 참고로 이순재의 얼굴은 '''[[영조]]의 어진'''과 많이 닮았다. ~~고증류 [[甲]]~~]
  • 전국환(배우)
         ||<|2> SBS || [[무사 백동수]] || [[영조]] ||
  • 홍국영
         '''홍국영'''(洪國榮, [[1748년]] ~ [[1781년]] [[4월 28일]]([[음력 4월 5일]])<ref>정조실록 11권, 정조 5년 4월 5일 세 번째 기사</ref>)은 [[조선]] 영조,정조대의 [[세도]] 정치가.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豊山)이며, [[자 (이름)|자]]는 덕로(德老)이다. 세손궁의 궁료(宮僚) 시절 때부터 [[조선 정조|정조]](正祖)의 총애를 얻고, 정조 즉위 후 부홍파(扶洪派)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세간에는 흔히 권력을 잡은 후 세도를 부리다가 축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축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홍국영은 도성의 경화사족 집단의 일부로서 그의 고조 홍중해는 인현왕후의 고종사촌이었고, 당대에도 [[정순왕후 (영조)|정순왕후]] 김씨<ref>홍국영의 대고모가 정순왕후의 6촌 김면주의 생모(김한희 처)였다.</ref> 외 이익보, 이정보, 홍계능, 조중회, 김이도 등과도 인척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이 예쁘장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이며 시문을 잘 짓고 창을 부르기 좋아하였다 한다.
         [[1772년]] 9월 정시(庭試:별시의 일종) 문과에 병과 11위<ref>15명 중에 15위였다. 출처 조선문과방목 영조48년 정시</ref> 로 급제하였다. 대과에 급제하고도 6개월간 보직을 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2월부터 가주서(假注書)로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계속해서 이 해 [[4월]] [[정민시]]와 함께 한림소시에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영조]]를 보좌하는 사관으로 봉직하기 시작했다. [[한중록]]에서는 그가 사관으로 봉직할 당시 [[영조]]가 홍국영을 "내 손자"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쓰고 있다. 이듬해인 [[1774년]] 3월에는 동궁시강원 설서(說書)로 임명된다. 세간에 홍국영이 과거 급제와 동시에 설서에 임명되었다는 설이 많이 퍼져있는데<ref>박광용《영조와 정조의 나라》(푸른역사, 1998)와 이덕일《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1》(고즈윈, 2008)에서는 홍국영이 과거 급제한 달에 바로 세손의 시강원에 임명되었다고 적고 있다. </ref>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조선 정조|정조]]와는 동궁시강원 설서가 되면서부터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이 당시 궁료들이 서연에서 아뢴 말들을 모아 《현각법어》(賢閣法語) <ref>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규6836</ref> 라는 책을 펴냈는데, 실제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홍국영의 언행이라고 한다. 《명의록》 등은 이 시기 홍국영이 "세손의 오른날개(右翼)"라고 불렸다고 적고 있다.
  • 홍인한
         |학력= 1753년(영조 29년) 문과급제
         음서로 관직에 올라 [[통덕랑]]이 되었다. 통덕랑으로 재직 중 [[175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조선의 대표적 명문 가문인 [[풍산 홍씨]] 가문의 일원이며, 혜경궁 홍씨의 친정 숙부라는 점도 작용해 [[영조]]의 신임을 받으며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53년 가주서와 [[정언]]을 지내고 1754년 [[교리]]로 있을 때 [[조영순]](趙榮順)을 변호하려다 파직되었다.
         [[1774년]] [[우의정]]에, [[1775년]]에 [[좌의정]]에 각각 임명되었으며, 1775년 세손(훗날의 정조)이 대리청정을 맡게 되자 이를 반대해 [[영조]]가 세손의 대리청정을 명할 때 세손은 세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강변하며, 승지와 사관의 대필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대리청정 뜻이 확고해지자 [[혜경궁 홍씨]]는 사전에 삼촌에게 편지를 보내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한중록]]에 의하면 대조의 뜻이 그러함을 편지로 알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인한은 벽파의 당론에 따라 벽파, 외척당, [[정후겸]] 등과 함께 세손을 반대하였고, 홍인한은 영조의 면전에서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했다. 이후 [[정후겸]], [[심상운]] 등과 함께 [[홍국영]] 등을 모해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부사직 심상운을 시켜 세손의 대리청정 반대 여론을 조장했지만, [[홍국영]]의 부탁을 받은 부사직 서명선이 역탄핵상소를 올려 논박했고 오히려 심상운은 유배되었다.
         그러나 [[1776년]] [[음력]] [[3월]]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자, 숙청에 들어갔으며, 홍인한은 서명선 등의 탄핵을 받은 뒤 [[정후겸]], [[문성국]], [[김귀주]] 등과 함께 여러번 탄핵을 당한 뒤 [[충청도]] [[여산]](礪山)에 유배되었다가 배소가 옮겨져 [[고금도]]에 유배되었으며, 다시 거듭 탄핵을 받고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을 받았다가 그해 [[7월 5일]] 사사령을 받고 처형됐다.
  • 화완옹주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년]] [[3월 9일]] ([[음력 1월 19일]]) ~ [[1808년]] [[5월]])는 조선의 제 21대 왕 [[영조]]와 [[영빈 이씨]]의 딸이다. 이름은 용완(蓉婉)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친동생이자 조선의 제 22대 왕 [[정조]]의 고모이기도 하다. [[정후겸]]은 그녀의 양자이다.
         영조가 특히 총애하던 딸로, [[영조]]와 선희궁 [[영빈 이씨]]의 딸이다.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친여동생이다.
         [[1749년]](영조 25) [[7월 6일]] [[소론]]의 거두 [[정휘량]]의 조카이자 이조 판서와 [[의정부]][[우의정]]을 지낸 [[정우량]](鄭羽良)의 아들 [[정치달]]과 혼인하였다. 정우량은 [[우의정]]까지 지냈고,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정치달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남편을 일찍 여의자 시댁 일가의 아들인 [[정후겸]]을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다.
         친오빠 사도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화완옹주는 사도세자의 비행과 실수를 그대로 부왕 영조에게 고해바쳤다. 인원왕후의 상 때 인원왕후전 나인이었던 빙애를 후궁으로 취한 뒤, 영조의 추궁이 있자 사도세자는 빙애를 화완옹주의 처소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빙애의 존재가 영조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화완옹주는 영조의 여러 딸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 영조는 옹주가 시집간 후에도 자주 그의 집에 거둥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88권, 89권, 112권 등. 영조가 해산을 앞둔 화완옹주의 집을 방문하거나, 환궁 도중에 옹주의 집에 들렀다는 기록이 있다</ref> 또한 문과에서 장원을 차지한 정치달의 형 [[정원달]]에게도 많은 특혜를 하사하였으며<ref>《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88권, 1756년 10월 2일</ref>, [[1757년]](영조 33) 정치달이 세상을 떠나자 곡반을 하였고 이를 말리는 신하들을 파직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89권, 1757년 2월 15일</ref>
         ** '''아버지''' : 제21대 [[조선 영조|영조]](英祖大王, 1694~1776)
         ** '''어머니''' :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 (貞純王后 金氏, 1745년 - 1805년)
         ** 서어머니 : [[귀인 조씨 (영조)|귀인 조씨]](貴人 趙氏, 1707 10 16~1780 10 05)
         ** 서모 : [[숙의 문씨 (영조)|폐 숙의 문씨]](廢 淑儀 文氏, 생년미상~1776 08 10)
         [[분류:1737년 태어남]][[분류:1808년 죽음]][[분류:조선의 옹주]][[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가족 살해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 영조]][[분류:조선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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