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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흥부대부인
         [[1882년]] [[6월]]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하였다. 대원군의 측근인 '[[허욱 (1827년)|허욱]]은 [[임오군란]] 때 병사 복장을 하고 대궐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가리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ref name="oh1">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2쪽.</ref> 그러나 끝내 왕비를 찾아내지 못했다. [[허욱 (1827년)|허욱]] 등이 [[경복궁]]에 들이닥치기 전에 [[명성황후]]는 변복을 하고 [[홍계훈]]의 등에 업혀 궁궐을 벗어나 [[여주]]로 내려가 은신하였다. 이때 민비는 홍계훈의 누이 행세를 하여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 윤휴
         어려서 외할아버지인 김덕민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남인 학자인 이원익, 이민구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이괄의 난]] 때에는 [[여주시|여주]]에 피신하였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는 보은 삼산(三山)의 외가에 은신했으며, [[병자호란]], [[정묘호란]]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653년]]([[조선 효종|효종]] 3년) 우의정 [[심지원]], 병조판서 [[원두표]]의 천거로 발탁되어 관직에 나갔으나 사퇴와 복직을 반복했다. 그 뒤 [[민정중]], [[송시열]], [[송준길]] 등의 요청으로 다시 관직에 나갔다.
         윤휴는 3세 때 [[경주시|경주]][[부윤]]으로 있던 아버지 [[윤효전]]이 갑자기 별세하자 여주 선산에다가 장례를 치르고 잠시 서울로 올라가 살았으나 [[1623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여주시|여주]]로 피난, 은신하였다. 이후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는 외가가 있는 [[충청북도]] 보은군(報恩郡)의 삼산(三山)에 머무르면서 외조부 [[김덕민]]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무렵 그는 가솔들을 이끌고 외할아버지와 계외조모, 어머니와 함께 [[보은군]]에 머물렀다.
         [[이괄의 난]] 때에는 [[여주]]에 피신하였다가 한성으로 되돌아왔고 [[정묘호란]]이 터지자 보은 삼산(三山)의 외가로 가서 숨어 있다가 되돌아왔다. [[1633년]]에는 추탄 [[오윤겸]](楸灘 吳允謙)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이원익]]은 [[서인]]조차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어 [[인조반정]] 이후에 다른 당원임에도 특별히으로 천거되었다. 또한 스승 [[이민구]]는 [[지봉유설]]을 쓴 [[남인]]계 왕족 실학자 [[이수광]]의 아들이며, [[허목]]은 그들로부터 [[실학]]의 근간이 되는 사상을 접한다. [[이원익]]과 [[오윤겸]]은 곧 죽었지만 그는 [[이민구]], [[허목]] 등과 교류하며 사물과 시국을 논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28세 때 다시 [[경기도]] [[여주시|여주군]] 백호에 정착하였고, 이후 그의 후손들은 그곳에 대대로 살게 되었다. 그의 호(號) 백호는 금사면 백호리에서 따서 호를 지었다.
         이어 [[허목]], [[권시]](權諰), [[권준]](權儁), [[이유]](李木劉), [[장중함]](張沖涵), 이해(李澥), [[윤선도]], [[허적]] 등 남인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고, [[기해예송]](己亥禮訟) 문제가 비화되기 전까지는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이유태 (1607년)|이유태]](李惟泰), [[유계]](兪棨), [[윤선거]](尹宣擧) 등 [[서인]]계 인사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또한 [[송시열]]은 윤휴의 이모의 아들들이던 [[송규정]], [[송규렴]] 형제의 스승이기도 했다. 윤휴의 명성은 입에서 입으로 널리 알려졌고, [[허적]]의 조카이자 송시열의 문인이며 같은 [[여주]] 출신인 [[민정중]](閔鼎重), [[민유중]](閔維重) 형제는 그의 집을 자주 찾아왔다.
         [[송시열]]은 그의 가계가 [[북인]] 계열이었다가, 전향 후 [[서인]]이 되지 않고 [[남인]]을 지원한 것을 상당히 안타까워하였다. 권시(權諰)와 처남인 권준(權雋)그리고 이유(李𣞗)·장충함(張冲涵)·이해(李澥) 등 남인계 인사들과의 친분관계가 있었으며 [[서인]]측 인사들과도 [[1659년]](효종 10년)의 기해예송 이전까지는 친교가 잦았다. 유천 시절부터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1607년)|이유태]](李惟泰), [[유계]](兪棨), [[심지원]], [[윤선도]], [[윤문거]](尹文擧), [[윤선거]] 등 서인 계열의 학자들과도 만나 세상과 사물을 담론하며 교분을 나누었으며, [[송시열]]의 문인들인 [[민정중]](閔鼎重)·[[민유중]](閔維重) 형제는 특히 윤휴를 각별히 여겨 그가 살던 [[여주]]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노봉 [[민정중]]은 한때 그의 사심없는 삶을 시로 표현해 안빈낙도의 전형으로 칭송하기도 하였다. 여양부원군 민유중은 “윤휴의 기모를 보면 좌상춘풍(左上春風)이요 그 언론을 들으면 경전에 출입하고 금고(今古)를 관천(貫穿)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여 귀 기울이게 하니 어찌 경도치 않으리오.” 라며 칭찬하였다. 그의 수려한 외모와 막힘없는 [[시]] 재주, 글재주, 달변은 여러 선비들을 매료시킨 하나의 매력이었다. 그러나 [[권대운]]은 그가 지나치게 자기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음을 단점으로 지적한다.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자 다시 외가가 있던 [[보은군]]의 삼산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국가의 치욕에 한을 느껴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공주 유천(지금의 대전시 [[유천동 (대전)|유천동]])으로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기도 했으나, 주로 여주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때 그는 [[송시열]]과 두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복수설치를 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이때부터 10여 년간 그는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여 유교의 경전인 중용, 대학, 효경 등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할 수 있게 되었고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36년]] 벼슬에 나아갈 뜻으로 만언소(萬言疏)를 지었으나 바로 그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피난하였다. [[1637년]] [[정축하성]]으로 [[청나라]] 황제에게 인조가 삼두고배를 하고 군신의 의를 맺자 신하로서의 치욕과 부끄러움을 자책, 이후 치욕을 씻을 때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다. 그 뒤 10여 년간 그는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여 유교의 경전인 중용, 대학, 효경 등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할 수 있게 되었고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 연구에 그의 오랜 친구였던 [[송시열]]은 찬탄해 마지않았다. 그 뒤 [[한성부]] 쌍계동(雙溪洞)의 하헌에 거처를 잡고 여주를 자주 왕래하였다.
         당시 양반 사대부는 상아 호패, 평핀은 뿔 호패, 노비는 나무 호패를 찼는데, 이러한 호패 구분이 신분간에 위화감을 조장한다는 것이며, 이 위화감을 없애는 것이 전투에 유리하다는 견해를 폈다. 그리고 종이 호패를 소지하고 다니면서 포졸들의 검사가 있을 때만 종이 호패를 보여주는 식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사약을 받기 직전 그는 종이와 먹, 붓으로 마지막 유언을 남기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의금부|금부]]도사는 거절했다. 이때 함께 유배된 아들 [[윤의제]] 역시 얼마 뒤 배소에서 병사한다. [[서인]]계에서는 그가 죽은 뒤에도 그를 계속 탄핵, 비판하며 그에게 [[역률]]을 부과할 것을 계속 주청하였으나 [[조선 숙종|숙종]]이 듣지 않았다. 이때 그의 아들들도 모두 유배된 상태였으므로 서형 [[윤영 (1611년)|윤영]]과 사위들이 그의 시신을 염습하고 장례를 주관했고, 왕족 [[이희년]], [[남인]] 당원인 [[윤학관]](尹學官), 미수 [[허목]] 등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바로 [[여주군]] [[금사면]] 백호리 선영 근처에 안장되었다.
         [[1980년]]대까지도 언급이 기피되다가 [[1990년]]대 이후 재조명되어 각종 작품에도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시신은 당초 고향인 [[경기도]] [[여주시|여주군]] [[금사면]]에 안장되었다가, [[2000년]]대에 [[대전광역시|대전]] 선영으로 이장되었다.
         <!--본가가 경기도 여주에 있음-->
  • 윤흔
         이후 [[서인]]의 당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605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 [[여주목|여주]][[목사]](驪州牧使)로 부임하였고, [[여주]][[목사]]로 재직 중 [[여주]]의 향토지인 [[황려지]]를 썼다. [[1608년]](선조 41년) 겨울 [[명나라]]에 [[동지사]]가 파견될 때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임명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귀국 직후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임명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년) 행[[장례원]] [[판결사]](行掌隷院判決事)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승정원]][[우부승지]]와 [[좌부승지]]를 역임한 뒤, [[승정원]][[우승지]]가 되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되었다.
         저서로는 《계음만필 溪陰漫筆》, 《도재수필》, 《도재집》, 편저서에 《십묘한람도동편(十畝閒覽道東編)》 등이 있으며, [[여주시|여주]]의 향토지인 《황려지 (黃驪志)》를 편찬하였다. 그밖에 [[창랑정]](滄浪亭) 등 약간의 [[시조]] 몇 수가 전한다. [[1638년]](인조 16년) 초겨울에 가벼운 병을 앓다가 [[감기]]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고 그해 겨울 [[12월 17일]] [[감기]]와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그가 죽자 [[조선 인조|인조]]는 애도를 표하여 정사를 파하고 바로 좌의정에 증직하였다.
         *《황려지 (黃驪志)》 : 여주군 향토지
         * [http://history.yj21.net/Theme/Theme.asp?BC_ID=b1600 윤양: 여주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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