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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로피코 4/건물 . . . . 5회 일치
* 대졸 여성 2명을 언론인으로 고용 가능
* 대졸 여성 3명을 언론인으로 고용 가능
* 대졸 여성 2명을 언론인으로 고용 가능
* 대졸 여성 3명을 언론인으로 고용 가능
||몇몇 언론인들이 각하께서 무기를 비축하여 전쟁 준비를 한다며 모함하려고 했습니다. 이보다 더 허무맹랑한 소리가 어디 있을까요. 여긴 단지 파이프 공장일 뿐입니다. 근데 여기서 생산되는 파이프들은 워낙 정교해서 총알 비스므리한 물체를 장전하고 화약을 터트리면 그 물체가 총알 같은 속도로 발사될 수 있을 뿐이지요.
- 현소환 . . . . 5회 일치
'''현소환'''(玄昭煥, [[1937년]] [[8월 1일]] ~ [[2018년]] [[7월 28일]])은 [[연합뉴스|연합통신]] 사장을 역임한 언론인이다. 현재는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이다. 본관은 [[연주 현씨|연주]]이며,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
[[1995년 6월]]에서 같은 해 [[1995년 12월]]까지 [[자유민주연합]] 특임촉탁위원 직위를 지낸 그는 [[1996년]] [[국제언론인협회]](IPI) 종신회원이 됐고, [[2005년 5월]]에는 본부이사가 됐다.
[[2011년]] 현재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 뉴라이트 계열의 뉴스앤뉴스 대표이사, [[국제언론인협회]](IPI) 종신위원<ref>[http://www.freemedia.at/about-us/ipi-executive-board/ 각주 자료 리스트]</ref> 이다.
* [http://www.freemedia.at/about-us/ipi-executive-board/ 국제언론인협회]
[[분류:1937년 태어남]][[분류:2018년 죽음]][[분류:연주 현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대한민국 해병 중위]][[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김종필]][[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정주영]][[분류:백선엽]][[분류:심대평]][[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
- 박근혜 . . . . 4회 일치
[[연합뉴스]] 사장 출신의 언론인 [[김종철 (언론인)|김종철]]은 [[미디어오늘]] 칼럼을 통해 박근혜의 [[매카시즘]] 성향을 비판했다. 박근혜의 국가관 발언에 대해 김종철은 칼럼에서 "그들이 어떤 ‘종북행위’를 했는지에 관한 명확한 증거도 없이 ‘주사파’라고 보면서 국회에서 제명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매카시즘"이라고 주장했다.<ref>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015</ref>
한편, 보수언론인 [[조선일보]] 역시 사설을 통해, [[박정희]] 시대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지만, 2차 인혁당 사건의 경우 어떤 논리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어둠의 역사에 속한다는 것이 일반 국민의 공감대라면서, 반면 박 후보의 유신관은 박정희식 유신관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대통령 후보의 유신에 대한 입장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개인사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비판했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13/2012091301135.html <사설> '박근혜 시대' 열려면 '아버지와 딸' 個人史 넘어서야]조선일보, 2012년 9월 14일</ref>
* [[2011년]] [[1월 23일]] "한국말 못 알아들으세요?" <small>(국회 헌정기념관 바자회에서 "복지를 돈으로만 보지 말고, 사회적 관심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무슨 의미냐"는 기자의 질문에)</small><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20628193401] 김주언 언론인, 박근혜, '언론 사태' 대선까지 가길 바라나?, 프레시안, 2012.6.29.</ref>
- 오세창 . . . . 4회 일치
'''오세창'''(吳世昌, [[1864년]] [[8월 6일]] ~ [[1953년]] [[4월 16일]])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 정치인이자 계몽 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의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화가, [[대한민국]]의 정치인, 서화가이다. [[조선]] 말기에는 개화파 정치인이었고,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서화와 고미술품 감정 등의 활동도 하였다. [[한국]]의 역대 왕조의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1928년)의 저자이다. [[1918년]] 설립된 [[조선]]인 미술가, 서예가, 조각가 단체인 [[서화협회]] 창립 발기인이기도 하다.
[[1879년]] [[과거 제도|역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는데, [[1885년]] [[박문국]]에 발령받아 [[박문국]][[주사]]시보로 주간 관보인 《[[한성주보]]》 기자가 되면서 언론인으로 입문했다. [[1886년]](고종 23년)에는 [[박문국]][[주사]]가 되어 《[[한성순보]]》 기자를 겸했다. 이후 [[군국기무처]], [[농상공부]], [[우정국]] 등을 거쳤고, [[1894년]](고종 31년) [[군국기무처]] 낭청총재 비서관(軍國機務處郎廳總栽秘書官)이 되었다가 관제 개정 이후 [[농상공부]] [[참의]](農商工部參議), [[우정국]] 통신국장(郵政國通信局長) 등을 역임했다.
[[분류:1864년 태어남]][[분류:1953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역관]][[분류:급진개화파]][[분류:한국의 기자]] <!-- 조선의 기자-->[[분류:대한제국의 정치인]][[분류:대한제국의 작가]][[분류:대한제국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천도교 교역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서예가]]
[[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분류:독립협회]][[분류:민족대표 33인]][[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한국 전쟁 관련자]][[분류:한국독립당]][[분류:의친왕]][[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종교인]][[분류:대한민국의 미술가]][[분류:대한민국의 서예가]][[분류:김규식]][[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이승만]][[분류:이회영]][[분류:해주 오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홍세화 . . . . 4회 일치
|직업 = 작가, 사회운동가, 언론인, 정당인
'''홍세화'''(洪世和, [[1947년]] [[12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작가이자,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학사 학위 이후,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2002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언론인, 작가, 교육인 등으로 활동하였다. 프랑스 망명 생활 중에 쓴 책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로 유명하다.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등을 지냈으며 2013년 계간지 <[[말과활]]>을 창간했다. 2011년 [[진보신당 (대한민국)|진보신당]] ([[노동당 (대한민국)|노동당]]의 전신) 당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분류:194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철학자]][[분류:대한민국의 작가]]
- 김문순 (언론인) . . . . 3회 일치
}}</ref>~)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다. [[대구광역시]] 출신.
* 2008년 연세언론인상
[[분류:194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계성고등학교 (대구)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
- 박홍 (신부) . . . . 3회 일치
'''박홍'''(朴弘, [[1941년]] [[2월 27일]], [[대구광역시]])은 [[대한민국]]의 교육자이며 [[천주교]] [[예수회]] 소속 성직자이다. [[천주교]] 신부로서 정치 관여 발언을 많이 했고, 서강대 총장을 지냈으며 [[극우 반공주의|반공주의]], [[보수주의]] 성향의 언론인이기도 했다. [[1994년]] [[주사파]] 발언으로 화제가 되었다.
[[1997년]] [[5월]] 박홍이 제소되자 언론인 [[이도형 (1933년)|이도형]]은 [[노재봉]], 변호사 [[오제도]] 등 보수인사 70여명이 후원회를 꾸렸는데 이때 당시 후원인단 대표를 맡았던 그는 '대표적인 반좌익인사인 박 전 총장에 대한 탄압을 물리치기 위해 후원회를 만들었다'고 설명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 />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대학 총장]][[분류:가톨릭대학교 동문]][[분류:반공주의자]][[분류:서강대학교]][[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분류:예수회]]
- 배성룡 . . . . 3회 일치
'''배성룡'''('''裵成龍''',[[1896년]] [[10월 28일]] [[경상북도]] [[청도군]] ~ [[1964년]] [[12월 8일]])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언론인, 경제평론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성주 배씨|성주]](星州). 필명은 수성(秀星)·성산학인(星山學人)·성산생(星山生)·성산인(星山人)·별뫼이다.
[[분류:대한민국의 경제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
- 장강명 . . . . 3회 일치
| 직업 = 언론인, 소설가
'''장강명'''({{llang|en|Chang Kang-myoung}}, [[1975년]] ~ )은 [[대한민국]]의 [[언론인]], [[소설가]]이다.
* 씨티대한민국언론인상 대상
- 장대환 . . . . 3회 일치
'''장대환'''(張大煥, [[1952년]] [[3월 21일]] ~ )은 [[매일경제]]와 [[매경미디어그룹]]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는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다. 본관은 [[흥덕 장씨|흥덕]].
* 1988년 6월 : 한국신문협회 이사,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원회 감사, 아시아신문재단(PFA) 감사
[[분류:195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흥덕 장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매경 미디어 그룹]][[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로체스터 대학교 동문]][[분류:조지 워싱턴 대학교 동문]][[분류:뉴욕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김대중 정부]][[분류:대한민국 공군 대위]][[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 정재호 (1930년) . . . . 3회 일치
'''정재호'''(鄭在虎, [[1930년]] [[12월 18일]] [[대구광역시|대구]] ~ )는 [[대한민국]]의 언론인 겸 정치인이다. [[종교]]는 [[불교]]다. [[경향신문]] 정치부장 출신으로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에서 제9,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 대한언론인회 논설위원
[[분류:193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동래 정씨]][[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한승조 . . . . 3회 일치
'''한승조'''(韓昇助, [[1930년]] [[1월 13일]] ~ [[2017년]] [[7월 25일]])는 [[대한민국]]의 교육자, 정치학자, 철학자, 언론인, 보수주의 운동가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귀국 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등을 역임했다.
일본 보수언론인 [[산케이 신문]]의 자매지인 세이론(正論) [[2005년]] 4월호에 "공산주의·좌파사상에 기인한 친일파 단죄의 어리석음: [[한일 병합 조약|한일 병합]]을 재평가하자"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다. 글의 내용 중에 "[[식민지 근대화론|식민지 지배는 축복]]"이라는 구절 등이 문제되어 대한민국 내 여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ref>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503/h2005030411490221950.htm 한국일보 - 한승조 "일본 식민지 지배는 축복"]</ref>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친일파|신친일파]]<ref>[http://www.hani.co.kr/section-007100002/2005/03/007100002200503132126035.html 한겨레신문 - 한-일 우익 ‘역사왜곡’ 연대조짐] : 한승조 전 고려대 명예교수의 ‘식민지 지배는 축복’이라는 발언을 지지하는 국내 세력이 만만치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의 우익 잡지에 등장하는 한국 우익들의 입에서 한반도 강점이 부당하다는 논조가 사라진 지도 오래다. 이들의 반북 논리는 그동안 암약하던 한국 내 ‘신친일파’의 본격적인 커밍아웃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ref>라고 부르기도 한다.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30년 태어남]][[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정치학자]][[분류:대한민국의 철학자]][[분류:대한민국의 사회학자]][[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반공주의자]][[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정치학자]][[분류:식민지근대화론]][[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동문]][[분류:친일파]][[분류:대한민국의 뉴라이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한국학자]][[분류:청주 한씨]]
- 현진건 . . . . 3회 일치
| 직업 = 작가, [[소설|소설가]], [[수필|수필가]], [[문학 평론|문학평론가]], 독립운동가, [[언론|언론인]]
'''현진건'''(玄鎭健, [[1900년]] [[8월 9일]] ~ [[1943년]] [[4월 25일]])<ref>{{웹 인용|url=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25h0979b|제목=현진건|출판사=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확인날짜=2007-11-25}}</ref> 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조선(朝鮮)의 작가, [[소설|소설가]] 겸 [[언론|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분류:1900년 태어남]][[분류:1943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대한제국의 사회 운동가]][[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가]][[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연주 현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김윤환 . . . . 2회 일치
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정치인이다. 호는 허주(虛舟).
[[분류:동명이인/ㄱ]][[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분류:기자]][[분류:언론인]][[분류:시인]][[분류:구미시 출신 인물]][[분류:1932년 출생]][[분류:2003년 사망]]
- 김지수(배우) . . . . 2회 일치
[[2018년]] [[10월 17일]] 영화 완벽한 타인 언론인터뷰에 4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심지어 만취상태로 등장해 횡설수설했는데, 기자가 "술에 취하신 것 같다"고 묻자, "맞는데 기분 나쁘시냐? 대답할 수 있으니 질문하시라"고 답했다. 결국 소속사 측에서 인터뷰를 중단시켰고 취재진이 철수하며 언론인터뷰는 취소됐다. [[https://m.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681520&cluid=c_201810171120_00000007|#]]
- 오지철 . . . . 2회 일치
'''오지철'''(吳志哲, [[1949년]] [[12월 30일]] ~ , [[서울특별시|서울]])은 대한민국의 공무원, 언론인이다. 제9대 [[대한민국 문화관광부|문화관광부 차관]],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역임하고, 현재 [[TV조선]] 대표이사이다. 본관은 [[함양 오씨|함양]].
[[분류:194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대한민국의 문화관광부 차관]][[분류:서울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함양 오씨]]
- 이경희 (1880년) . . . . 2회 일치
광복 직후 초대 [[경상북도]] [[부지사]]와 초대 [[대구광역시장|대구부윤]], 미 군정 경상북도사령부 민정관 등을 역임했으나 [[미군정]]과의 갈등으로 사퇴했다. 이후 시민단체,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자는 군선(君善) 또는 군미(君美)이고, 호는 지오(池吾), 본관은 [[인천 이씨|인천]](仁川)이다. [[경상북도]] 출신.
[[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구광역시장]][[분류:의열단]][[분류:신간회의 인물]][[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윤치호]][[분류:안창호]][[분류:김구]][[분류:이회영]][[분류:김원봉]][[분류:허정숙]][[분류:조병옥]][[분류:이승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인천 이씨]]
- 이만섭 . . . . 2회 일치
|직업 = [[정치가]], [[언론|언론인]]
'''이만섭'''(李萬燮, [[1932년]] [[2월 25일]] ~ [[2015년]] [[12월 14일]])은 [[대한민국]]의 [[언론인]] 출신 [[정치가]]이다. 호(號)는 청강(靑江)이다.
- 이성구 (1942년) . . . . 2회 일치
'''이성구'''(李聲九, [[1942년]] [[3월 17일]], [[대구광역시]] ~ )는 [[대한민국]]의 기업인, 언론인이자 전직 서울특별시의원, 서울특별시의회 의장, 제17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분류:194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대구공산초등학교 동문]][[분류: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민주자유당의 정치인]][[분류:신한국당 당원]][[분류:자유한국당의 정치인]][[분류:영천 이씨]][[분류:대한민국의 지방의회의원]]
- 장호 (1920년) . . . . 2회 일치
}}</ref> ~ )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언론인이며 [[대한민국]]의 [[비전향 장기수]]이다.
[[분류:192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언론인]][[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작원]][[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정성주 . . . . 2회 일치
* 2001 자랑스러운 이화언론인상<ref>민태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052103 자랑스런 이화언론인상 임영숙·손지애·정성주씨]. 국민일보. 2001년 4월 24일.</ref>
- 정인숙 (1945년) . . . . 2회 일치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관이었던 [[선우련]]도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정일권씨가 [[1971년]] 봄, 형님인 [[선우휘]] 씨를 찾아와 '이동원 외무장관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정 여인을 알게 되었으며, 내 아들을 낳았으나 공개할 수가 없다'고 털어놓았다.<ref name="sung71">"정성일이는 내 아들, 정일권씨 71년 고백", 경향신문 1993년 2월 20일자, 23면</ref>"고 말했다.<ref name="kum109"/> 그러나 [[선우휘]]가 정일권을 만난 [[1971년]]과 같은 해에 정일권을 만난 재미언론인 문명자는 정일권에게 "문 기자, 나는 정인숙과 딱 한번 같이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 니가 없소. 나는 이미 불임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ref name="kum110">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10페이지</ref>
[[1971년]]과 같은 해에 정일권을 만난 재미언론인 문명자는 정일권에게 "문 기자, 나는 정인숙과 딱 한번 같이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 니가 없소. 나는 이미 불임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ref name="kum110"/> 그러나 정일권이 불임 수술을 한 상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977년]] 재혼한 부인 사이에 2남매가 출생했기 때문이다. [[문명자]]는 이 글에서 정일권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정일권이 먼저 불임수술을 풀었다고 말해 그만두었다고 밝히고 있다.<ref>문명자, 문명자 회고록: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2), 대한매일 1999년 10월 6일자</ref>
- 정칠성 . . . . 2회 일치
'''정칠성'''(丁七星, [[1897년]] ~ [[1958년]]?)은 [[대한제국]]의 기녀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한 항일 독립 운동가, [[페미니스트]], 언론인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페미니스트]]이다. 별칭은 '''금죽'''(錦竹 또는 琴竹)이다.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58년 죽음]][[분류:기녀]][[분류:여성 해방 운동가]][[분류:노예제 폐지론자]][[분류:한국의 자유주의자]][[분류:한국의 사회주의자]][[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가]][[분류:일제 강점기의 무용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여성주의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음악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철학자]][[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산주의자]][[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여성주의자]][[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철학자]][[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용가]][[분류:알렉산드라 콜론타이]][[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여성 해방 운동]][[분류:조선공산당의 정치인]][[분류:남조선로동당]][[분류:월북자]][[분류:조선여성동우회의 인물]][[분류:근우회의 인물]][[분류:신간회의 인물]][[분류:허정숙]][[분류:박헌영]][[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최남선 . . . . 2회 일치
[[분류:1890년 태어남]][[분류:1957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역사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출판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번역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공작원]][[분류: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만주국 관련자]][[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출판인]][[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대한민국의 한문학자]][[분류:민족대표 48인]][[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최두선 . . . . 2회 일치
|직업= [[철학자]] <br/> [[언론|언론인]] <br/> [[정치가]] <br/> [[기업가]] <br/> [[대학 교수]] <br/> [[작가|저술가]]
[[분류:1894년 태어남]][[분류:1974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대한민국의 철학자]][[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 최휘영 . . . . 2회 일치
'''최휘영'''(崔輝永, [[1964년]] [[4월 29일]] ~ )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전직 [[언론인]]이다. [[서울특별시|서울]] 태생으로 [[2012년]] 현재 NHN Business Platform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분류:196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서강대학교 동문]][[분류:경성고등학교 동문]]
- 한규복 (1881년) . . . . 2회 일치
해방 후에는 정계에 참여하지 않고 [[한국곡자]]의 대표이사 등으로 활동하였고, [[1949년]] [[반민특위]]에 자수한 뒤, 조사받고 풀려났다. 이후 기업 활동과 언론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조선인 도지사 경력자 42명 가운데 배경이 되는 엘리트 출신 고위관료 8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서예]]에 능했던 그는 [[1926년]]부터 [[1930년]]의 선전(鮮展)에서 4회나 수상하였다.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이고 자(字)는 덕중(德仲), 호는 온재(溫齋)이다.
[[분류:1881년 태어남]][[분류:1967년 죽음]][[분류:조선의 화가]][[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통역관]][[분류:조선의 번역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화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정치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철학자]][[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사상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화가]][[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철학자]][[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청주 한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와세다 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번역가]]
- 홍정욱 . . . . 2회 일치
'''홍정욱'''(洪政旭, [[1970년]] [[3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기업인]], [[언론인]]이다. 현재 [[헤럴드 (기업)|헤럴드]] 및 [[올가니카]]의 회장이며, 사단법인 올재의 이사장이다. 중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 로스쿨 졸업 후 미국에서 투자금융가로 일했고 [[2001년]] 귀국 후 헤럴드를 인수해 기업가로 활동했다. [[2008년]]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총선]]에 출마하여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 前 [[한국신문협회]] 이사, 국제언론인협회 한국위원회 이사, 한국신문윤리위원회 감사, 글로리아오페라단 이사
- 황선필(1939년) . . . . 2회 일치
| 직업 = 언론인, 공무원
'''황선필'''(黃善必,<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21500329202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2-15&officeId=00032&pageNo=2&printNo=12427&publishType=00020 文化放送 사장에 黃善必씨를 선임] - 경향신문, 1986년 2월 15일</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60400209201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6-04&officeId=00020&pageNo=1&printNo=18666&publishType=00020 靑瓦臺 대변인에 黃善必씨를 任命] - 동아일보, 1982년 6월 4일</ref> [[1939년]] ~ , [[경상북도]] [[김천시|김천]])은 [[문화방송]] 사장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공무원이다.
- 경산시 . . . . 1회 일치
* [[성유보]] - 언론인
- 경주시 . . . . 1회 일치
|align="center"|언론인
- 고경표(배우) . . . . 1회 일치
[[블랙넛]]이 여성혐오 논란으로 비판을 받고있을 때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블랙넛의 노래가 좋다는 글과 블랙넛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스트리밍 인증샷을 올려서 논란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인스타에 고경표와 고경표의 가족에게 [[모욕죄|모욕]]과 [[명예훼손죄|인신 공격성 테러]]를 가하였고, 설전이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사실 해당 노래는 여성 혐오에 대한 가사로 논란이 일었던 노래조차 아니였다. 이후 사과글을 게시한 것으로 마무리되었으나, 일부 네티즌들의 의도적 판 키우기와 언론인들의 가쉽성 보도 때문에 고경표 일베설이라던가, 여성혐오자라더라 같은 [[냄비근성|루머가 돌게 된 것이다.]]
- 곽성문 . . . . 1회 일치
'''곽성문'''(郭成文, [[1952년]] [[11월 24일]] ~ )은 [[대한민국]]의 제17대 [[국회의원]]이자 언론인이다. [[자유선진당]] 사무총장을 지냈고, 현재는 제2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이다. [[대구광역시]] 출신이며, 본관은 [[현풍 곽씨|현풍]]이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임마누엘이다.
- 구본홍 . . . . 1회 일치
'''구본홍'''(具本弘, [[1948년]] [[6월 5일]] ~ )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다. [[대구광역시|대구]]에서 출생하였다.
- 구성재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의 언론인 출신 [[정치인]]이다. 선친이 [[구자춘]] 전 [[행정안전부 장관|내무부 장관]]이다.
- 김문오 . . . . 1회 일치
'''김문오'''(金文澳, [[1949년]] [[5월 4일]] ~ )은 [[대한민국]]의 언론인 출신 정치인이다.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수이다.
- 김상기 . . . . 1회 일치
* [[김상기 (1918년)|김상기]](金相琪, [[1918년]] ~ [[2011년]])는 대한민국의 기업인, 언론인으로 [[김성수 (1891년)|김성수]]의 둘째 아들이다.
- 김성곤 . . . . 1회 일치
박정희의 친위대를 자처하면서 3선개헌에 회의적이던 김종필계와 대다수 공화당 인사들을 강하게 압박해서 [[3선 개헌]]을 성사시켰다.[* 3선개헌이 처음 불거졌을때 김종필을 선두로 해서 대다수 공화당 정치인들은 이를 반대했다. 장기집권한 이승만의 최후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9년부터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화당 국회의원들을 회유, 협박해서 결국 모두 찬성으로 돌려놨다. 당내에 막강한 독자계보를 가지고 있던 김종필을 압박하는데 선봉에 선게 김성곤,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4인방][* 한때 60명이 넘던 공화당내 개헌반대파 국회의원은 결국 3명 [[정구영]], [[예춘호]], [[이만섭]]만이 남았고, 결국 정구영-강제 정계은퇴, 예춘호-제명, 이만섭-낙선으로 모두 숙청되었다. 예춘호는 야당으로 넘어가서 1980년대 [[재야]]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고, 이만섭은 야인으로 지내다가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그리고 [[전두환]]의 집권 이후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 총재로 재기했다.] 이 과정에서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백남억]], [[길재호]]와 함께 소위 4인체제로 박정희를 대리해서 공화당을 관리하였다. 특히 [[재벌]]에게 해외차관과 정부발주공사의 10%를 무조건 자신을 통해서 상납하게 하면서 ~~[[뇌물]]의 제도화~~ 정권의 정치자금 창구를 단일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과 재벌,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그가 [[쌍용그룹]] 회장(재벌총수), 동양통신 사장(언론인)이면서 공화당 재정위원장(정치인)이자 박정희의 최측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김형태(정치인)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출신 [[정치인]]이다. [[종교]]는 [[개신교]]이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15화 . . . . 1회 일치
* 미디어에서는 연일 히어로 사회의 위기를 떠든다. 드물게 미야기 캐스터처럼 진지한 의견을 내놓는 언론인도 있다. 아저씨도 그만은 인정하는데, 한편으론 또 인정 못한다. 언론에서 말하는건 결국 "올마이트란 존재가 너무 큰 존재"였다는 것. 그의 존재로 인해 가려져 있던 것들이 은퇴와 함께 쏟아져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엔데버가 그렇다. 지금은 명실상부 No.1 히어로지만 적어도 일반시민들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시민들은 엔데버로 딱히 안 되는건 아니지만 올마이트와 비교된다고 말하한다. 아저씨가 보기엔 너무 거친 인물이며 범인이 초인인척 연기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를 초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는 불가항력으로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올랐다. 그건 그의 불행이다.
- 박경석(1937)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의 언론인, [[정치인]]이다. 호는 화담(和潭)이다. [[종교]]는 [[불교]]이다.
- 박진성(시인) . . . . 1회 일치
[[2018년]] 자신이 받은 성폭력, 성희롱 혐의를 키운 언론인 [[한국일보]]와 기사를 쓴 황수현 기자와의 재판에서 1심 승리.
- 백기만 . . . . 1회 일치
* [[소설|소설가]] [[현진건]](玄鎭健, [[1900년]] [[8월 9일]] 출생 ~ [[1943년]] [[4월 25일]] 사망. 아호는 빙허(憑虛). [[언론|언론인]]으로도 활동하였다.)
- 송남헌 . . . . 1회 일치
[[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역사가]][[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김규식]]
- 우현(배우) . . . . 1회 일치
물론 논란이 될 사항은 아니다. 민주화 운동가였던 故 [[문익환]] 목사의 아들인 배우 [[문성근]]도 [[1987(영화)|1987]]에서 [[전두환]]의 심복이자 [[안기부]]의 수장이었던 [[장세동]] 역으로 출연했는데(...) 정작 문성근 씨는 진보 성향인데다 과거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을 역임한 바 있으며, 또한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이라는 [[시민단체|시민운동단체]]를 조직하는데 앞장서서 진보시민운동을 주도하기도 했고, 현재도 [[진보]] 진영에서 여러 활동을 하지만 영화, 드라마 등 작품에서는 반대 성향의 역할을 맡아왔다([[군부]] 정권 시절의 친 정부 성향 경찰 간부나 [[정보기관]] 수장, 부패한 정치인, 언론인 등등). 본인 스스로도 [[한밤의 TV연예]] 인터뷰에서 “그 영화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했다.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크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 라고 밝혔다.
- 유승민(정치인) . . . . 1회 일치
이 원내대표 연설문은 당시 여의도에서 '다시보기'열풍까지 불러일으켰을 정도로 파격적이였고, 당시 유승민이라는 정치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2016년 국회의원 출마선언을 했던 민경욱 전 청와대 대변인이 이 연설문의 일부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언론인 출신인데 제정신이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하였다.
- 윤덕주 (농구인) . . . . 1회 일치
독립운동가 겸 언론인 [[윤홍열 (1893년)|윤홍열]]의 딸이자 민족운동가 겸 사학자 [[윤필오]]의 손녀로 태어났다. 어머니 이숙경은 민족운동가 이일우의 딸로, [[이상화 (시인)|이상화]], 독립운동가 [[이상정]], 체육인 겸 사학자 [[이상백 (사학자)|이상백]]의 사촌 누나가 된다.
- 이상백 (1904년) . . . . 1회 일치
'''이상백'''(李相佰, [[1904년]] [[8월 6일]] ~ [[1966년]] [[4월 14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학자, 체육인, 작가, 언론인으로, 호는 상백(想白), 백무일재(百無一齋)이다.
- 이승엽 . . . . 1회 일치
* 한국언론인연합회 선정 자랑스러운 한국인대상 (2003년)
- 이영희 (1936년) . . . . 1회 일치
* 자랑스런 한국인대상(언론인협회, 2008)
- 이장희 (시인) . . . . 1회 일치
* [[소설|소설가]] [[현진건]](玄鎭健, [[1900년]] [[8월 9일]] 출생 ~ [[1943년]] [[4월 25일]] 사망. 아호는 빙허(憑虛). [[저널리스트|언론인]]으로도 활동하였다.)
- 이철희(1964) . . . . 1회 일치
진보 성향의 인터넷 언론인 [[프레시안]]이 운영하는 시사 팟캐스트 방송 '이철희의 이쑤시개'를 진행했다. 그리고 종편인 [[채널A]]의 '아침 신문쇼 돌직구'에도 고정 출연 했었다. 2013년 10월부터 평일 오후 6시 16분부터[* 앞의 15분 동안은 6시 뉴스를 진행한다. 7시에도 뉴스가 진행되어 7시 6분에 시작한다.] 오후 8시까지 [[tbs 교통방송]] 생방송 '퇴근길 이철희입니다'를 진행하기도 했다. 2014년 2월 "뭐라도 합시다"와 "누가해도 당신들보다 낫겠다."(윤여준, 이상돈 공저)라는 서적도 냈다. 2015년에는 "이철희의 정치썰전: 보수와 진보를 향한 촌철살인 돌직구"와 "7인의 충고 : 이철희가 따져 본 진보 집권 전략"을 출간. 이 가운데 7인의 충고는 [[Daum]]과 [[미디어오늘]]에서 기획하여 이철희가 '논과 쟁'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전문가들과 인터뷰한 것들을 모아 낸 것인데, 정작 미디어오늘에서는 중간에 수록을 하다 말았고, 인터뷰 전문은 책이나 [[http://7author.tistory.com/m/post?categoryId=847004|여기에서 볼 수 있다]].
- 전인범 . . . . 1회 일치
2017년 2월 7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문재인을 지지하게 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혔다.<ref name="b"/> 왜 문재인을 돕기로 마음먹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문재인이) 저를 한번 보자고 그래서 궁금해서 만났다. 그 전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있었다. 만나보니까 좋은 분이고, 지적이더라. 공부하는 분이고. 근데 그날 제가 기분 나쁜 소리도 많이 했다. (- 안보관을 지적했나) 음…. 하여튼 그 기분 나쁜 소리를 다 받아주더라. 저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제가 설득하는 건 둘째고, 일단 잘 들어줬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편 전인범 중장의 전역식 때 전역사를 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 책임자인 정호용을 고마운 선배로 언급한 것에 관해서는 “저는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걸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분의 잘못된 부분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그분이 굉장히 인간적인 사람이다. 아랫사람들을 배려하는 사람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야기한 거지, 5·18과 관련해 그를 옹호하려는 건 아니다”라고 답했다. 뒤이어 5·18에 대해서는 “일선 군인들은 아무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호남 분하고 이야기를 하며 ‘저는 언젠가 광주 5·18묘역에 그때 죽은 군인들이 같이 묻혔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도 발포 명령을 누가 내렸는지 아무도 모르잖나. 지휘 체계가 문란했던 점이 당시 군의 잘못이지 하사들이 무슨 죄가 있나. 특전사가 살인마처럼 비춰지는 건 바뀌었으면 한다. 하여튼 저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발포를 지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이 감옥에도 가고 그런 것 아닌가. 정호용은 그런 책임이 있지만, 제가 이야기했던 건 그분이 인간적으로 부하를 대했다는 것이다. 그 부분을 본받고,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이와 같은 그의 5·18에 대한 견해에 우파 언론인임에도 5·18을 반공적 민주화 운동으로 높이 평가하는 [[조갑제]]는 “여러 번의 국가적 수사와 조사에서 광주 사태 초기엔 상급 지휘부의 발포 명령 자체가 없었으며 현장 상황이 워낙 급하여 자위적 차원의 대응발포로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확정되었다. 물론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발포 명령은 없었다”며 전인범의 발언을 옹호하였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35656 제목으로 드러나는 동아일보의 末期 증세], 《뉴데일리》, 2017년 2월 10일</ref>
- 정광용 . . . . 1회 일치
그에 대한 검찰의 3년 구형이 나왔고, 2017년 12월 1일, 1심에서 [[뉴스타운]]대표 [[손상대(언론인)]]과 함께 징역 2년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77&aid=0004131128|선고되었다]]. 이에 정광용은 항소하였으며 건강악화를 이후로 보석을 신청했으나 [[http://news.joins.com/article/22389647|기각되었다]].
- 주장환 . . . . 1회 일치
[[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57년 태어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주주장 . . . . 1회 일치
[[분류:196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언론인]][[분류:미국의 기자]][[분류:스탠퍼드 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에미상 수상자]][[분류:유대계 미국인]]
- 채현국 . . . . 1회 일치
실재 언론인 임재경은 2008년 한겨레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 청송군 . . . . 1회 일치
* [[조갑제]] : 언론인. 다만 출생지는 일본이며, [[부산광역시|부산]]에서 학교를 다녔다.
- 트로피코 4 . . . . 1회 일치
* 선전 전문가 캐릭터 특성 추가 - 언론인이 대통령 각하를 뽑도록 시민을 세뇌함, 충성파 진영의 존경심 증가
- 하이큐/248화 . . . . 1회 일치
* 똑같이 주어진 시간이지만 양팀이 그걸 쓰는 모습은 사뭇 다르다. 워밍업 생각만 하며 안절부절하는 카라스노와 달리, 이나리자키 측은 주장이 언론 인터뷰에 응하는 등 상당히 여유롭다. 주장 3학년 [[키타 신스케]]. 포지션은 Ws이고 키는 175cm로 배구선수 치고 크진 않다. 인터뷰하는 상대도 마치노 아나운서라는 유명한 언론인.
- 홍진기 . . . . 1회 일치
'''홍진기'''(洪璡基, [[1917년]] [[3월 13일]] ~ [[1986년]] [[7월 13일]])는 [[대한민국]]의 관료이자 언론인이다. 아호는 '''유민'''(維民)<ref>{{한국민족문화대백과|E0064442}}</ref> 배우자는 [[김윤남]](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김신석]]의 딸)이다. 당시 천재라 불리었으며 일제 강점기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문이 일본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조선인 차별정책에 의해 그의 꿈인 교수가 될 수 없게되었고 이후 법을 공부하여 전주에서 판사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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