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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동우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 - [[단국대학교|단국대]]를 졸업하고 [[1998년]]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당시 삼성의 외야에는 [[최익성]], [[신동주(야구)|신동주]], [[양준혁]]이 주전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전년도 맹활약했던 최익성-신동주 우타 외야 라인에 부진 및 부상이 닥치자 데뷔 첫 해 주전 자리를 꿰차며 맹활약했다. 그 해 신인왕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고졸로 12승을 거둔데다 우승 프리미엄까지 누린 당시 [[현대 유니콘스]]의 고졸 신인 [[김수경(투수)|김수경]]에게 신인왕 자리를 내줬다. 또한 그 해 개최된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야구|방콕 아시안게임 대표팀]] 엔트리에 선발되어 있었다. 삼성의 연고지인 [[대구광역시]] 토박이인지라 프랜차이즈성도 탁월하여 향후 삼성의 주전 [[외야수]]가 될 것으로 기대받으며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 [[10월 16일]] 벌어진 사건으로 인하여 강동우의 지독한 불운이 시작되었다.'''
         피나는 노력으로 재활을 마치고 2000년 시즌 막판에 겨우 복귀해서 다시 삼성의 주전 [[외야수]]로 활약하지만, 신인 시절의 성적은 다시 나오지 않았고 평범한 선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류중일]] 코치가 선수 시절에 달던 1번을 달고 뛰며 타격에서는 나름대로 제몫을 하며 삼성의 주전 외야수로 활동했고, 2002년 [[김응용]] 감독 아래에서 타율 0.288, 9홈런으로 어느 정도 부활에 성공하였다. [[2002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2001년 데뷔하여 삼성의 붙박이 타자가 된 왕년의 좌타 [[라이벌]] [[박한이]]와 함께 [[테이블 세터]]를 이뤄 활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타율이 2할 중후반에 머무르는 바람에 '비운의 톱타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후 [[선동열]] 감독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외야진 보강 차원에서 2006년 3월 [[두산 베어스]]의 [[강봉규]], [[김창희(야구)|김창희]]를 상대로 [[트레이드]]되고 말았다. 당시 삼성 팬들은 격분하여 난리를 쳤다. 이는 훗날 [[양준혁]]의 등떠밀기식 은퇴, [[이승엽 와도 자리없다]]는 발언 등과 함께 [[선동열]]의 삼성 프랜차이즈 내치기 사건 중 하나다.
         O형 수염 자국이 선명한, 살짝 [[마초]]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상당한 [[미중년]]이다. 2014년 4월 19일까지 미혼(!!)이었다. 2011 시즌 중반부터 굉장한 활약을 펼치던 때의 스포츠신문 인터뷰 중 '체력 관리의 비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친구가 보내 주는 [[인삼]]을 꾸준히 먹고 있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팬들은 '저런 건 친구가 아니라 와이프가 챙겨줘야 되는데...'라며 심히 안타까워했다. 어느새 '동우햄 장가 보내기'는 새 시즌 한화팬들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 가고 있다. 실제로 2013년에는 [[류택현]] 바로 다음으로 나이 많은 미혼의 프로야구 현역 선수였다. 위의 사례에서 팬들이 안타까워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결국 2013 시즌 종료 후 은퇴하면서 이제는 노총각 코치(...). ~~삼성에서 뛰던 소싯적에 선배였던 [[양준혁]]을 그렇게 잘 따랐다더니 엉뚱하게 노총각 운명까지 따르는 걸까~~
  • 권혁
         '''[[선동열|삼성 팬덤의 주적]]이 만들어낸 최악의 희생양 [[권오준|4]][[배영수|인]][[양준혁|방]]중 하나'''
         이로써 한화는 20인 명단에서 빠져 [[KT 위즈]]로 이적한 [[윤근영]]이라는 좌완 불펜의 누수를 그 이상의 커리어를 자랑하는 선수로 대체하였다.[* 공교롭게도 두 선수의 등번호가 동일하기 때문에, 한화 관련 커뮤니티에선 [[한화 이글스|주황색]] [[잉어킹]]이 [[삼성 라이온즈|푸른색]] [[갸라도스]]로 진화했다(...)는 식의 [[http://gall.dcinside.com/hanwhaeagles/5325218|드립]]이 인기를 끌었다.] 좌완 불펜이 부족한 한화에서 매우 긴요하게 사용될 것으로 보이며, 출장 기회를 원했던 그의 바람은 충분히 충족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좌완 투수 조련에 매우 능하며 권혁과 같은 와일드 씽 유형의 불펜자원을 정말 잘 활용하는 [[김성근]] 감독과의 만남이어서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선수 본인도 계약을 체결하며 "김성근 감독님과 야구하고 싶었다"라며 기대감을 드러낸 바 있다.] 오랜 감독 생활 중 처음으로 외부 FA 선수를 선물받은[* FA제도가 시행된 후 [[LG 트윈스]]와 [[SK 와이번스]]의 감독을 맡았으나 두 구단 모두 김성근 감독에게 외부 FA를 잡아주지 않았고, 오히려 [[양준혁]](LG), [[이진영]](SK) 등 내부 FA를 타팀에 내주는 등 김성근 감독에게 FA는 연이 없었다.] 김성근 감독의 기쁨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 김보성(배우)
         그러나 광고모델로 활동하며 이름을 빌려준 안창살구이 제품의 질과 양이 흡사 [[양준혁]]의 갈비찜 같은 수준을 보여주며 네티즌들로부터 [[창렬|창려으리]]라는 조롱을 당한 적이 있다.
  • 김상진(1970)
         결국 1998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에 현금 '''6억 5,000만 원에 현금 [[트레이드]]됐다.'''[* 같은 시기에 삼성은 해태에 현금 18억원과 간판 타자 '''[[양준혁]]'''을 내주면서까지 [[임창용]]을 영입하였고, 곧이어 쌍방울에 현금 20억과 [[양용모]], [[이계성]]을 내주고 [[김기태(1969)|김기태]]와 [[김현욱(야구)|김현욱]]을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그 전해에 해태에서 4억 원에 [[조계현]]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한 것에 이은 현질이었다.] 2년 연속 두자릿수 승수를 올리며 그럭저럭 활약했다.
          * [[노안]]이다. 선수 시절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20대 중후반에도 금테 안경을 쓰고 수염이 덥수룩했던 선수였던지라 본의 아니게 [[양준혁]], [[이종범]],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 등 비슷한 나이대의 선수들의 얼굴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나이가 들어 보였던 편이었다. 은퇴 후 [[2017년]] 현재도 같은 팀의 감독인 [[김한수]]보다 한 살 많은데 비해 얼굴은 서로 상당히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것처럼 보인다.
  • 김승우
         | 다음명 = [[박은영 (아나운서)|박은영]], [[양준혁]]
  • 김재박
          * 1998년 8월 26일, [[이승엽]]과 [[타이론 우즈]]가 치열하게 홈런경쟁을 펼칠 때[* 8월 26일 당시에는 이승엽 36홈런, 우즈 29홈런이었다. 이후 우즈는 9월에만 11홈런을 치며 역전하게 된다.] 현대가 삼성에 크게 이기고 있음에도 이승엽 타석에서 [[고의사구]] 지시. 수많은 삼성 관중들이 크게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승엽의 홈런을 기대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보란 듯이 이승엽을 고의4구로 걸렀고 경기장에는 빈병이 날아들었다. 당시 상황을 보면 19대 4로 점수차가 크게 난 상황에서 [[안병원(야구선수)|안병원]]이 초구 스트라이크를 던질 때 1루주자였던 [[양준혁]]이 도루를 성공하자 보복성으로 고의사구를 던진 것이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82800329126008&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8-08-28&officeId=00032&pageNo=26&printNo=16524&publishType=00010|<스포츠 기자석> 팬들을 죽이는 프로야구]] [[http://sports.news.naver.com/kbo/news/read.nhn?oid=109&aid=0002580212|[한국프로야구 난투사](29) 대구 관중들, 현대의 ‘이승엽 고의 볼넷’에 분노 폭발]] 당시 [[허구연]]은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9020020912601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8-09-02&officeId=00020&pageNo=26&printNo=23976&publishType=00010|신문 기고]]를 통해 '우리 프로야구는 이승엽이란 슈퍼스타가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 경신이란 좋은 재료를 지니고 있음에도 상대 팀들의 지나친 견제로 축제에 찬물을 끼얹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 김재현 (1975년)
         [[2009년]] [[9월 8일]]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광주]]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상대 [[투수]] [[곽정철]]로부터 고의 4구를 얻어내며 개인 통산 1,000 사사구를 기록하였다.<ref>[http://www.gooddaysports.co.kr/news/?cset=sports&bset=view&tot_code=511&code=6206 김재현, 프로 통산 세 번째 1000 4사구 기록 달성] {{웨이백|url=http://www.gooddaysports.co.kr/news/?cset=sports&bset=view&tot_code=511&code=6206 |date=20160304205659 }} 《굿데이스포츠》 2009년 9월 9일 9:30</ref> 개인 통산 1,000 사사구는 [[양준혁]]과 [[박경완]]에 이은 역대 세 번째 기록이다. 다음 타석에서는 상대 투수 [[오준형]]으로부터 만루 홈런을 뽑아 내었는데, 이 만루 홈런으로 개인 통산 1,600 안타(역대 9번째)와 2,500 루타(역대 14번째) 기록을 동시에 세웠다.<ref>[http://spn.edaily.co.kr/sports/newsRead.asp?sub_cd=EB21&newsid=01449766589818152&DirCode=0020201 '만루 축포' 김재현 "젊은 선수들 투지 덕에 분위기 살아났다."]{{깨진 링크|url=http://spn.edaily.co.kr/sports/newsRead.asp?sub_cd=EB21&newsid=01449766589818152&DirCode=0020201 }} 《이데일리》 2009년 9월 8일 22:53 작성, 2009년 9월 9일 23:05 확인</ref>
  • 김준현(코미디언)
         '''[[유민상(개그맨)|유민상]], [[문세윤]] 등과 함께 먹방 대표 덩치 캐릭터 개그맨의 선두주자.'''[* 다만, 김준현의 경우 [[근육돼지|근육이 많으면서 체지방도 많은 케이스]]에 속하기 때문에 유민상 등 순수 비만인과는 엄연히 '''다르다'''. 오히려 [[강호동]], [[마동석]], [[양준혁]] 등 운동으로 다져진 몸을 가져 기본적으로 근육 덩어리인데 살이 붙은 경우들이 김준현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김준현 역시 중학교 재학시절까지 [[검도]]를 했는데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299058|검도 국가대표 경력도 있다]].]
  • 김창희(야구)
         트레이드로 특정 해당 선수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본의는 아니지만 2차례의 트레이드 당시 [[강봉규]]를 제외하면 살아남지 못했다.([[강동우]], [[손혁]], [[진필중]].) 사실 그전 기믹은 [[김종훈(1972)|김종훈]]이 가지고 있었다.[* 단 [[손혁]]은 김창희보다 그 전에 [[양준혁]]을 상대로 트레이드된 사건이 더 임팩트가 컸었다. 물론 [[강동우]]는 한화에서 다시 부활하긴 했지만.. 고로 직접적인 피해자는 [[손혁]]과 [[강동우]]보다는 [[진필중]]이 좀 더 가깝다.]
  • 김헌곤(야구선수)
         [[2014년]] 전까지는 2군에서 상급 외야수로 활약했었다. 1군에서는 선풍기 스윙을 하며 삼진을 많이 당했으나, 2014년부터는 재능을 맘껏 발휘하며 1군에서 백업 외야수 정도의 입지를 다졌다. 팀 레전드 [[양준혁]]처럼 1루까지 전력질주하는 모습[* 이 문서의 사진도 모두 전력질주하는 모습들이다.]이 인상적인 선수. 뭔가 약간씩 모자란 보급형 5툴 플레이어 정도이다. 포텐 폭발 전의 이택근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상무의 주전 중견수로 출장했는데, 여름 들어 부진하며 성적이 떨어졌지만 2015 시즌 초반에는 2군을 폭격했다. 2015 시즌 최종 성적은 2군 96경기 309타석 105안타(2루타 14개 3루타 3개 홈런 11개) 28삼진 8사구 48볼넷 .340 - .436 - .511 OPS .947. ~~저 아름다운 볼삼비를 봐라. 딱 [[양준혁]]이다.~~
         삼성 타자들 중 ~~드물게~~ 팬서비스가 좋은 선수로 꼽히는데, 마산에서 열린 [[올스타전]] 때[* [[2000년]] 올스타전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 김헌곤의 나이는 초등학교 6학년][* 이 때의 참가 선수는 강석천, 김대익, 김동주, 김재현, 김한수, 마해영, 박경완, 박재홍, 박정태, 박종호, 박진만, 브리또, 송지만, 심정수, 양준혁, 타이론 우즈, 유지현, 이병규, 이승엽, 이영우, 장성호, 장원진, 장종훈, 정수근, 조인성, 최기문, 홍성흔, 홍현우, 구대성, 김수경, 김용수, 김진웅, 손민한, 송진우, 오봉옥, 이승호, 임창용, 정민태, 진필중, 해리거이다.] 참가 선수에게 인사를 했는데 그냥 지나간 경험 때문에 자신이 야구선수가 되면 살갑게 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근데 [[https://www.youtube.com/watch?v=ZandpdAk2pk|싸인하다 화장실 급하다고 뛰쳐들어간 적도 있다...]][* 영상 보면 표정이 진짜 급한 표정이다.]
  • 대구광역시/인물
         * [[양준혁]] - 남구(대구)
  • 모상기
         * 첫 출장 : 2008년 5월 16일, 대 [[두산 베어스]] 4차전([[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야구장]]), 6회초에 [[양준혁]] 대타로서 출장
  • 박동희(기자)
          * [[양준혁]] 은퇴 당시 '''감독 이기는 선수는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하지만 박철순이 출동하면 어떨까?--[* 불사조 박철순은 선수 신분으로 감독을 이긴 적이 있다. [[박철순]] 참조. ~~구타를 명분으로 감독에 항명하던 박철순은 코치가 되어서 역시 선수를 때리는데...~~]
  • 박석민
         2008년 시즌 초반 [[선동열]] 감독이 구상했던 [[양준혁|양]][[심정수|심]][[제이콥 크루즈|크]] 트리오가 각각 부진, 시즌 아웃, 방출로 인해 중심 타선이 무주공산이 되었으나, 그 공백을 [[최형우]], [[채태인]]과 함께 잘 메워 냄으로써 본격적인 주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후 세 명 모두 신인 치고는 준수한 활약을 보여 2008년 삼성 타선의 세대교체가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때까지 거의 김인식 감독 수준으로 유망주들을 박대했던 [[선동열]] 감독이 직접 키운건 당연히 아니었고 [[김응용]] 前 감독이 진작부터 밀어주던 양아들이었다. 박석민은 물론 [[채태인]], [[최형우]]의 기용도 감독 외에 사장과 프런트의 입김이 들어가 있었다.]
         유난히 1루 악송구를 많이 범해 [[채태인]]의 가랑이를 찢어지게 했으며,(…) [[양준혁]]의 은퇴 선언 및 손가락 부상의 악화로 인해 7월 말부터는 [[지명타자]]로서만 출장하여 시즌 끝까지 수비보다는 타석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행히도 그가 지명타자로 출장하면서 생긴 [[3루수]]의 공백은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야구|면제로이드]]로 인해 각성한 [[조동찬]]이 잘 메워 주었다.
         팀이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앞선 11월 1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스코어 1:0으로 앞선 4회초 1사 1루에서 '''투런홈런'''을 날리며 부진에 마침표를 찍고 유종의 미를 거두며 여러모로 2002년의 [[이승엽]]과 비견되었다.[* 반면 이 해의 [[이승엽]]은 2002년의 [[마해영]]+[[양준혁]] 포지션.] 이 홈런은 근소하게 앞서던 삼성 분위기를 완전히 가져오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삼성은 여세를 몰아 '''볼넷 3개+ 적시타 2방 4타점'''을 묶어 '''시리즈 세 번째 1이닝 6득점'''으로 SK를 완전히 도륙내며 스코어 7:0으로 승리했다. 이날 박석민은 4타수 2안타 1홈런 2타점 1득점을 기록했다.
         타순은 2008~2009년까지는 주로 4번, 가끔 5, 6번에 기용되다 [[최형우]]의 포텐셜이 폭발한 후로는 3번이나 5번으로 나온다. 포지션은 데뷔 초기에는 [[2루수]][* '''2004년 한국시리즈 9차전 선발라인업 키스톤이 조동찬-박석민(!)이었다'''. (참고로 아래 움짤에서 18번 투수는 박석민이 아니라 [[박석진]].) 물론 이 키스톤이 선발출장한 이유는 수비보다도 당시 상대 선발이었던 [[오주원|오재영]]을 겨냥한 좌투수 저격 라인업의 의미가 더 컸었고 결과적으로 이날 삼성의 수비는......[[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br][[파일:external/lh3.googleusercontent.com/2004%252520KS.gif]]]였지만 현재는 주로 [[3루수]]이며 가끔 [[1루수]]. 막 제대했을 때는 타격면에선 합격점이었지만 같은 포지션의 [[조동찬]]에 비해 떨어지는 수비가 문제였다.[* 사실 3루수에서도 그의 천재성이 엿보이는게, 원래 2루나 유격수를 보았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그냥 '아 포지션변경하기 힘든 것을 천재성으로 극복했구나'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2루와 유격수 수비와 3루수비는 '''스텝부터가 다르다.''' 유격수나 2루수는 좌우 양 옆으로 움직여야 하지만--[[박기혁|좌우로 스텝을 밟는 게 아니라 전력질주로 뛰어가서 잡아야 하는 유격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3루수비는 앞뒤로 움직여야 한다. 당장에 [[알렉스 로드리게스|에이로드]]가 [[데릭 지터|절대 유격수만 고집하시는 분]]하고 양립이 안 되어서 3루로 전향했고, 그 때의 3루수비를 기억해보자. 멀리 갈 것도 없이 유격수에서 [[강정호|이 분]]을 제쳐내지 못하고 3루로 정착한 [[황재균|케이팝 모델 x스머신]]을 떠올리는 것도 있다. 황재균도 처음에 3루수비는 개판이었다. 다만 당시 수비코치이던 [[염경엽]]이 기초부터 다시 가르쳐 지금에 이르른 것.--물론 그 개판인 수비도 [[롯데 자이언츠|이 팀]] 팬들한테는 [[이대호|굉장히 예쁘게 보였을 거다]]-- 뭐 황재균을 사온 이유가 이대호의 수비를 감당못하고 1루로 보낸 거 였지만.]당시 수비력만으론 리그 하위권인데다 그전의 삼성 3루수는 역대 최강의 수비를 자랑하던 [[김한수]]였기 때문에 더욱 비교되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일취월장하여 3루 수비는 리그 최고 수준에 달하는 정도가 되었다.[* 3루수로서는 나무랄 데 없을 정도로 수비가 좋아졌지만, 1루수로서는 아직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특히 1루수로서 가장 중요한 포구에서 실수가 좀 잦은 편이다. 11년 [[채태인]], [[조영훈]], [[모상기]]가 부진할 당시에는 삼성의 차기 1루수 부분에 대한 우려가 크던 상황이었으나 12년은 국내복귀를 선언한 [[이승엽]]이, 13년과 14년은 각성한 [[채태인]]이 1루를 맡아 공수양면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15년 부터는 [[양준혁|어느 머리 큰 전설적인 신인왕의 컨택능력을 가진]] [[구자욱|중장거리 히터 스타일의 초대형 군필신인]]이 등장한 덕에 박석민이 억지로 1루를 맡을 필요가 없어졌다. 박석민의 아쉬운 수비와 원래 3루 대체제로 생각했던 [[조동찬]]이 시즌아웃 이후 경기를 전혀 뛰지 못하는 상황임을 생각할때 삼성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인 셈.]아이러니하게도 어려운 수비는 잘하는데 쉬운 수비는 잘 못한다. 가끔 글러브에 공이 낄 때도 있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때 수비시 [[투수]]용 글러브를 끼고 경기에 나섰다. [[투수]]용 글러브와 [[내야수]]용 글러브의 크기 차이를 생각하면 참 희한한 일. 2015년 현재 웹이 막힌 큰사이즈의 내야수 글러브를 사용중이다. 사실 막힌 웹은 무조건 투수용이라는건 우리나라 사회인야구에 주로 있는 편견이고 일본의 경우는 내야수들도 막힌웹의 글러브를 많이 사용한다.은퇴한 양키스의 유격수 데릭 지터또한 커리어 내내 소위 바둑판웹이라고 불리는 디자인의 글러브를 사용한것으로 유명하다.
         [[양준혁]], [[김동주]], [[김태균]], [[최형우]]만이 가지고 있는 통산 3-4-5(타율-출루율-장타율)를 노리는 타자로 4와 5는 달성했지만 타율이 0.296으로 조금 부족하다. 참고로 [[이대호]]도 박석민과 비슷한 3-4-5 직전의 성적을 가지고 있는데, 타율과 장타율은 되는데 통산출루율이 3할9푼대로 통산 4할을 노리고 있다.
         자칭 야구[[천재]]. 6살 때부터 동네 야구부 형들에게 야구를 배웠으며 자신은 '야구를 시작하기 전부터 야구를 잘했다'고 한다(…). 이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양준혁]]''' 앞에서 하고 있으니 역시 허콜돼. 하지만 천재인 것은 사실인 듯. [[이범호]]와는 [[대구고등학교 야구부]] 선후배인데 대구고 감독이 이범호가 노력형이라면 박석민은 천재형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4년 선후배라 같은 팀에서 뛴 적은 없다.] 2009년에 [[세상에 이런 일이]]에 방송된 45년간 야구를 본 할아버지에게 PD가 2회 WBC 때 맹활약하던 이범호 고교시절 이야기를 부탁했는데 이 할아버지께서 이범호도 잘 했지만 질문과 상관없는 박석민은 진짜 천재라고 수 차례 말했을 정도. 덕분에 허세에 관련된 이야기도 많은데 고졸 신인이던 2004년에 1군 무대에 올라가자마자 [[김응용]] 감독에게 코치도 거치지 않고 [[오주원|오재영]]에게 강하다면서 내보내달라고 졸라서 펜스 직격 2루타(!)를 꽂은 적이 있다. 그리고 덕아웃에 들어오자마자 잠실구장을 욕하면서 넘어갔어야 선발고정이라면서 김응용 감독이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는 전설이 있다.[[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kbotown2&mbsIdx=697613&cpage=1&mbsW=&select=&opt=&keyword |#]]~~쳤으니 망정이지 못 쳤으면 원산폭격행~~
         [[2009년]] [[12월 31일]]에 2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을 했다. ~~아 [[양준혁|양신]]~~ 사실 결혼 전에 이미 동거를 하고 있었고, 아들도 결혼 전에 낳았다. 아들 이름은 준현.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하라는 야구는 안 하고]]~~ 2013년 현재, 박석민은 예비 학부모이다. ~~설마 장어덮밥을 좋아하는 이유가....?~~
         홈런친 줄 알고 폼 잡다가 펜스 맞는 안타가 되자 똥줄나게 뛴 적이 있다. 그 덕에 1루타 기록(...) 이 때문에 경기가 끝나고 구단 자체 벌금을 냈다고 한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 게다가 이때는 아직 [[양준혁|1루까지 항상 전력질주하는 모습이었던 그분]]이 현역으로 뛰고 있던 2010년이었으니... ~~그리고 2012년에는 [[나지완]]이, 2013년에는 [[전준우]]가 홈런 설레발의 계보를 잇는다.~~
  • 박영태(야구코치)
         포지션은 [[2루수]] 겸 [[유격수]] 그리고 [[우익수]](?)[* 사실 박영태가 외야수로 활동했다는 기록은 없다. 1984, 1985년 연감을 참고해도 박영태는 외야수로 한 경기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마구마구]]에서는 한장의 카드를 제외하고는 모두 우익수로 나와 있다.~~ 마구마구 [[홍현우|초]][[양준혁|창]][[백인호|기]] [[이정훈|카]][[전준호|드]][[ETC|들]]은 포지션 오류가 많아서 믿을게 못된다. [[스탯티즈]]도 정확히 나와있지 않다.]
  • 박용택
         [[1998년]] 고졸 우선 지명을 받아 [[2002년]]에 입단하였다. 입단 당시부터 정교한 타격과 빠른 발로 팀 타선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그 해 [[KIA 타이거즈|KIA]]와의 플레이오프 5차전까지 타율 3할 5푼(20타수 7안타), 4타점, 3득점으로 맹활약해 플레이오프 MVP에 선정됐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635329 11년 기다린 박용택, “큰 무대, 더 집중할 것”] - OSEN</ref> [[2005년]]에는 도루왕을 수상했다. [[2008년]]에는 부상으로 부진했으나 [[2009년]] 시즌에 [[홍성흔]]을 제치고 타격왕에 올라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그는 타격 방법을 바꿔 엄청난 외야진의 포화 상태와, 오른쪽 어깨 부상, 팬들에 대한 극도의 심적인 부담으로 외야 수비에 어려움을 느껴 지명타자로 전향했지만<ref>{{뉴스 인용|제목=LG 박용택 지명타자 전환 “공포감 심어 주겠다”|url=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101091630303&sec_id=510101&pt=nv|출판사=스포츠경향|저자=안승호 기자|날짜=2011-01-09|확인날짜=2009-09-01}}</ref> 썩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 후, 다시 외야수로 출장하는 시간을 늘려 [[2012년]]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그 해에 득점권 타율 리그 1위를 차지했다. [[2013년]] 테이블 세터와 클린업 트리오를 오가며 리그 수위 타자 및 안타왕 경쟁을 했으며, 2시즌 연속 골든 글러브를 받았다. [[2016년]] [[5월 5일]] [[두산 베어스|두산]]전에서 역대 8번째 통산 1900안타를 달성했다.<ref>{{뉴스 인용|성1=윤|이름1=세호|제목=박용택, 어린이날 매치서 2안타...1900안타 달성|url=http://osen.mt.co.kr/article/G1110409038|날짜=2016-05-05}}</ref> [[2016년]] [[8월 11일]] [[NC 다이노스|NC]]전에서 2000안타를 달성했고, [[10월 3일]] [[홍성흔]]의 현역 최다 안타를 경신했다. 그리고 [[2018년]] [[6월 23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노경은]]을 상대로 [[양준혁]]의 최다 안타 기록을 경신했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180623053100007?input=1195m 박용택, 개인 통산 안타 신기록 달성…LG는 롯데에 역전승] - 연합뉴스</ref>
  • 박종윤
         특히 선구안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지목되며 15시즌까지 통산 출루율은 0.301, 통산 BB/KK가 0.270 이다. 15시즌은 출루율이 0.277, BB/KK가 0.180 로 더 낮아졌다. 이 수치가 어느 정도로 낮냐면, 선구안이 좋기로 유명했던 전설적인 타자인 [[양준혁]]의 통산 BB/KK 비율인 1.404와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를 보이며 [[송광민]][* 참고로 아놀드 레온, 에스밀 로저스 이전의 먹튀의 대명사이던 [[카리대]]에게 [[삼진(야구)|삼진]]을 허용한 전력이 있다. (...)]보다도 통산 BB/KK 수치가 낮은 지경이다.[* 일본프로야구에 박종윤이랑 비슷하게 선구안이 쓰레기고 수비력이 리그 톱 수준이라 주전 자리를 꿰차고 있는 선수가 있다. 이 선수의 통산 BB/KK는 '''0.212'''(...). 박종윤 선구안이 좋아 보이는 수준이다. 거기다가 타율 역시 '''박종윤보다 5푼 가까이 낮다.''' 그런데 국가대표까지 승선했다. 이런 선수가 어떻게 국가대표까지 승선했냐면 바로 '''[[포수]]'''라서...~~즉 박종윤도 [[포수]] 했으면 저런 타격 해도 살아남았다는 거다~~ 참고로 저 포수의 정체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주전포수 스미타니 긴지로.]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양준혁과 박종윤을 같은 조건에서 타석에 세워두면, 양준혁이 박종윤보다 5배 이상 삼진을 당하기보다는 볼넷을 얻을 확률이 높다는 얘기. 따라서 타율에 비해 OPS가 낮아서 생산적인 타자라고는 볼 수 없다.[* 2015년 9월 13일 현재 통산 OPS가 .697. '''2루수'''였던 조성환의 통산 OPS가 .733이다. 이 정도면 1루수로서는 낙제 수준. 참고로 출루율이 낮기 때문에 OPS에 비해서도 비생산적인 타자이다. 좀 더 진보된 [[세이버매트릭스]] 스탯으로 계산할 경우 똑같이 OPS가 낮더라도 출루율이 높은 리드오프형 타자들의 기여도가 높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2013시즌 박종윤보다 약간 높은 OPS를 기록한 NC의 톱타자 김종호가 있다.] 그렇다고 딱히 장타력이 좋은 편도 아니다. 단적으로 이를 보여주는 게 박종윤의 시즌 당 홈런 갯수로, 박종윤이 4시즌가량 주전으로 풀타임을 소화했으나, 홈런을 10개 이상 친 시즌이 '''1시즌도 없다'''. 주전이 아닌 백업이나 [[대타]]로서는 괜찮은 타격 능력을 갖고 있지만, 대타로 쓰는 대신 주전으로 쓰고 있는 셈. [[이대호]]가 떠난 이후 무너진 [[롯데 자이언츠]]의 [[1루수]] 뎁스를 상징하는 선수라고 볼 수 있다.
  • 박치왕
         [[상무 피닉스 (야구)|상무]] 시절에는 [[양준혁]]과 동기였다.
  • 박흥식(야구)
         다만 [[삼성 라이온즈]]에서 10년 가까이 타격코치를 맡은 까닭에 매너리즘이 온 탓인지 2000년대 중후반에는 그 공포의 삼성 핵타선이 물타선으로 전락하고 만다.[* 물론 삼성의 핵타선을 이끌던 [[이승엽]]이 [[일본]]으로 진출하고, [[마해영]]도 FA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 외국인 타자 [[틸슨 브리또]]가 부상으로 인해 퇴출된 탓이 있었겠지만, 적어도 까다롭던 삼성 타선은 [[양준혁]]과 [[박한이]]를 제외하면 2006년부터 완전히 물타선으로 바뀌어버렸다.] 특히 2006년에 정말 심각했다. 물론 2006년은 역대적인 투고타저 시즌이어서 어느 정도 실드는 쳐줄 만했지만, 결국 물타선으로 삼성이 한국시리즈 2연패를 겨우 거둔 직후에 [[선동열]] 감독에 의하여 2007년 2군 타격코치로 내쳐졌고,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하며 11년 만에 팀을 떠나게 된다.
  • 배영수
          이 사건으로 [[펠릭스 호세]]가 출장 정지를 먹자, [[우용득]] 당시 롯데 감독대행은 다음 날 호세를 1군에서 말소하고 [[이대호|이 선수]]를 1군에 처음으로 등록한다.[* 그리고 호세는 그해 KBO 역사에 남을 성적을 올리고도 '폭행사건으로 깎인 이미지'+'투표단의 용병 차별'로 여러모로 본인보다 성적이 떨어지는 타자들에게 밀려서 MVP와 골든글러브 수상에 실패했는데 공교롭게도 [[이승엽|두]] [[양준혁|선수]] 모두 배영수와 같은 삼성 소속이었다.(다만 양준혁은 2001 시즌 LG에서 뛰다가 골든글러브 수상즈음 삼성으로 복귀하게 된다.)]
  • 백정현
         4월 29일 LG전에서 중간계투로 등판해 2⅔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면서 팀이 역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런데 5선발 체제였다면 화요일 선발로 등판했던 백정현이 이날 선발 등판하는 게 맞지만 삼성 선발은 6선발 체제라서 뜬금 없는 등판이었는데, 당일 해설위원이었던 [[양준혁]]은 백정현이 계투로 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과 3일만에 김한수는 이를 뒤집어 [[김대우(1988)|김대우]]를 대신해 백정현이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144&aid=0000550269|선발진에 합류한다고 말했다.]]
         2017년의 활약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바로 디셉션 동작이다. 디셉션 동작은 이름 그대로 공을 던지기 전까지 머리 뒤에 숨겨 타자가 구질을 판단하기 어렵게 만드는 동작인데,차명석 해설위원이 백정현 특유의 유연한 투구폼은 이 디셉션을 잘 활용하는 폼으로 공을 끝까지 숨기기 때문에 체감속도가 빠르고 구위가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여담으로 2016년까지 같은 팀 소속이었던 좌완투수 차우찬의 투구폼도 공을 숨기는 디셉션 동작을 많이 활용하는 투구폼이다.]--그리고 여지없이 머리가 더 컸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드립을 시전했다-- --양준혁도 투타겸업 하지--
  • 손지환 (야구인)
         [[2007년]] [[6월 13일]] [[삼성 라이온즈|삼성]]전에서 [[KBO 리그]] 사상 최초의 진기록인 무보살 트리플 플레이를 기록하였다. 무보살 트리플 플레이란 다른 야수에게 볼을 던져 주자를 아웃시키는 것이 아닌 혼자서 타자 주자와 2명의 주자를 한꺼번에 아웃시키는 행위인데 무사 1·2루 상황에서 [[박진만]]의 직선타를 잡아 원 아웃시킨 다음 베이스를 찍어 2루 주자였던 [[양준혁]]을 아웃시키면서 2루로 가다 미처 1루로 되돌아가지 못한 [[심정수]]마저 아웃시켜 무보살 트리플 플레이를 성공시켰다.
  • 송제헌
         당분간 볼 수 없을 대구 시절. ~~묘하게 [[양준혁|이 분]] 닮았는데?~~ ~~신성모독이다!!!~~
  • 신동주(야구)
         [[삼성 라이온즈]]와 [[KIA 타이거즈]]에서 뛰었던 전 야구 선수. 등번호는 37번(삼성) - 25번(해태) - 37번(KIA) - 40번(삼성, 2004) - 24번(삼성, 2005, 트레이드 전) - 52번(KIA, 2005) - 37번(KIA, 2006). [[마해영]]이 삼성으로 오기 전 [[이승엽]]-[[양준혁]]과 클린업을 구축하여 상대의 투수에게 공포를 선사하던 장본인. 그래서 [[임창용]]도 신동주가 해태로 이적하고 나서야 원래 등번호인 37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삼성에서 상당한 활약을 하던 선수 치고는 항목이 엄청 짧다.~~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5번타자. ~~더불어 롯데 왕자의 난 덕에 기업인 동명이인에게 밀린 [[안습]]의 사나이~~
         1991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1992년에 데뷔했으며, [[백인천]] 감독의 휘하에 삼성의 중심 타선으로 자리잡았다. 롯데의 [[8888577]]의 암흑기였던 [[백인천]]이었으나 젊은 시절의 [[백인천]]은 1990년 LG의 우승을 이끌었는데다 삼성 감독으로서 [[최익성]], 신동주, [[이승엽]]의 타격 실력을 대폭 향상시킨 장본인이다. 1997년에는 도루 2개가 모자라 20-20을 달성하지 못했으나 21홈런에 .326에 .581의 장타율로 타율-장타율에서 [[이종범]]과 맞먹는 스탯을 자랑했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해였다. 이 해 외야 부문 [[KBO 골든글러브]]는 [[양준혁]], [[박재홍(야구)|박재홍]], [[이병규]]가 탔는데, [[양준혁]], 박재홍이야 압도적인 실력이니 그렇다 쳐도 [[이병규]]와 비교해서는 타율, 홈런 등에서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했음에도 골든글러브에서 떨어지며 결국 골든글러브는 인기투표임을 인증했다. ~~[[이병규]]도 2011년에 똑같이 당한 게 함정~~~~이병규는 그 해 신인왕인데 신인한테 인기에서 밀렸다고?~~] 게다가 그해 준플레이오프에서는 2개의 홈런을 쏘아올렸는데 1차전 전주경기에서는 결승홈런이었고 2차전 대구에서도 0:3에서 추격하는 홈런을 올렸다.[* 물론 그 준플레이오프는 선수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김상엽]]에게 mvp가 돌아갔다.] 1999년에는 .278 22홈런 26도루로 20-20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이 때 [[KBO 리그]] 역사상 전후무후한 기록을 세웠는데 이것은 1이닝 3도루이다.
  • 신명철(야구선수)
         2008년에는 시즌 도중에 [[박한이]]와 [[양준혁]], [[진갑용]]을 제외한 거의 모든 주전 타자들이 세대교체로 물갈이 되는 와중에, 또다시 SS201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놀라운(?) 성적을 올렸으며, 그 엄청난(?) 타율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타율의 [[허승민]]과 함께 선발 라인업에 끼는 매우 신기한(?) 일이 벌어지면서 삼성 팬들의 욕을 양분했다. 정규시즌 기록은 타율 0.184(...), 홈런 1개에 17타점, 9도루를 기록.
  • 안지만
         * 힙지만 - 그는 시합에 나갈 때마다 [[모자]] 챙을 세우면서 나가는데, 이로 인해 '힙지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모자 챙을 세우게 된 이유로는 예전 [[삼성 라이온즈]] 소속이었던 [[강영식 (야구 선수)|강영식]](현재 [[롯데 자이언츠]])과의 내기로 모자 챙을 세웠다고 한다. 모자를 삐딱하게 쓰는 이유는 예전에 같은 팀 선배였던 [[양준혁]]이 "너는 인상이 선해서, 모자로 포인트를 줘봐라" 라고 한 후 쭉 그렇게 쓰고 있다고 한다. 몇 번의 예외가 있었는데, [[대구상원고등학교|대구상업고등학교]] 선배이자 [[삼성 라이온즈]]의 2군 감독으로 활동하였던 [[장효조]]가 [[2011년]] 시즌 중 암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그 무렵에는 경기에 나갔을 때 추모를 위해 모자 챙을 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국제대회에서도 힙합모자를 쓰지 않았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142945 삼성 안지만, 힙합 스타일을 버린 까닭은?] - 스포츠조선</ref>
  • 양일환
         [[1983년]]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였다. 포지션은 당시에 드문 사이드암 [[투수]]였으며 [[1989년]]까지 현역 선수로 활동하였다. [[양준혁]] 선수의 사촌 형으로 알려져 있다.
         * [[양준혁]]
  • 이동수(야구선수)
         저니맨이긴 하지만 처음 입단한 삼성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 뛰었다. 신인왕을 차지한 이후부터가 문제. 위에 서술된 대로 수비와 선구안에서 약점을 드러내며 6년차였던 1997년 시즌 도중에 트레이드됐고 그 이후에는 여러 팀을 다녔기 때문에 외야수였던 [[최익성]]이나 [[동봉철]] 못지 않게 [[저니맨]]으로 살아야 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삼성의 미래를 짊어질 오른손 거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승엽]]이라는 역대급 슬러거가 등장하면서 묻혀 버린 감도 없지 않아 있다. 다만 입단 당시의 이동수는 1992년부터 1994년도까지의 경우 1군 전력감이 아니었고 1995년에 신인왕을 차지했으므로 어폐가 좀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사실 1996년 시즌에서의 부진은 자신의 은사인 김충 2군 감독의 해임도 있지만 심리적인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 크기 때문에 만약 그가 조금만 더 노력했었더라면 완벽한 선수가 되었을거고 팀을 이끌었을 선수 중 한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신인왕은 본인이 차지하고도 정작 프랜차이즈 스타로서의 영광은 다른 여러 선수들에게 돌아가 버렸다. [[김재걸]], [[김종훈(1972)|김종훈]], [[김한수]], [[박한이]], [[배영수]], [[양준혁]], [[이승엽]], [[임창용]], [[전병호]], [[진갑용]] 등등[* 다만 이들 중, [[양준혁]]의 경우 삼성에 오래 있긴 했지만 두번이나 이적한 적이 있고, [[임창용]]은 4년간이나 뛰던 해태와 트레이드로 들어왔고, [[진갑용]]은 두산에서 트레이드하여 영입하였다. [[박한이]]는 2001년에 데뷔했고, [[배영수]]는 2015년에 한화로 이적했기에 좀 애매하다.].
  • 이승학 (야구감독)
         [[1998년]] 연고 팀 [[롯데 자이언츠]]의 고졸 우선 지명을 받았으나 [[단국대학교]] 재학 중 [[2001년]]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팀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미국]] 무대에서는 싱글A, 더블A, 트리플A를 오갔지만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에는 오르지 못했다. [[2006년]]까지 [[미국]]에서 활동한 후, [[2007년]] 4월 [[해외진출선수 특별지명회의|해외파 특별 지명]]에서 [[두산 베어스]]의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다. [[2007년]] [[6월 9일]] [[삼성 라이온즈|삼성]]전에서 구원 등판하여, 9회 초 [[양준혁]]을 상대로 [[양준혁]]의 통산 2000번째 안타를 맞는 주인공이 되었다. 고질적인 허리 질환을 앓고 있어서 병역이 면제<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908290027 '허리 수술' 이승학, 몸 만들기 돌입…치료 병행]{{깨진 링크|url=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908290027 }} - OSEN</ref> 되었으며 국내 U턴 이후 중간계투진에서 준수한 성적을 보여 주었으나, 결국 허리가 발목을 잡으면서 [[2009년]]에는 허리 수술까지 했지만 단 1경기에 나서지 못한 채 [[두산 베어스]]에서 방출당했다.<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44&article_id=0000102762 이승학, 두산에서 방출] - 스포츠칸</ref>
  • 이종범
         [[1993년]]에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1993 시즌에 신인왕은 [[양준혁]]에게 내줬지만 공수주에서 화려한 플레이를 펼쳐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같은 해 한국시리즈에서 맹활약하며, 신인으로는 팀 선배인 김정수 이후 두번째로 시리즈 MVP에 올랐고 이후 1994 시즌에 84도루로 역대 시즌 최다 기록을 세우는 등 국내 프로야구를 호령했다.
  • 이휘재
         * 2014년 5월 4일 [[슈퍼맨이 돌아왔다]] 방송분에 친한 야구선수인 [[양준혁]]이 방문했었을때 그는 쌍둥이들 중에 서준이를 보고 개그맨 [[김준현 (희극인)|김준현]]을 닮았다고 그랬다. 같은 시각 아내의 남동생까지 방문했을때 이휘재는 양준혁이 서준이를 보고 아까와 같은말을 했는데 그도 전에도 말을 하려고 한것도 마찬가지였다. 같은해 6월 15일에는 [[김준현 (희극인)|김준현]]은 이휘재네 집을 찾아 서준이와 대면했다. 그는 리틀 김준현으로 불릴 만큼 서준이와 김준현의 닮은 외모로 화제가 된 상태가 되었다. 6월 22일에는 [[개그콘서트]]에 방영된 코너 '존경합니다'에서 일주일 전에 방송되었던 닮은 모습의 사진까지 나오게 되었다.
         * [[심재학]], [[이종범]], [[이숭용]], [[박진만]], [[양준혁]], [[조범현]], [[이병훈]], [[김성갑]] 외 많은 선수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 임지섭(야구선수)
          * 2013년 8월 26일 신인드래프트에서 모든 선수의 지명이 확정되고 나서 단체샷을 찍었는데, 본인보다 나이 많은 대졸 선수나 중고신인이라 할 수 있는 [[정영일(야구선수)|정영일]]보다도 나이들어 보이는 얼굴 때문에 입단 하기도 전부터 [[노안]]계의 신성으로 대두되었다. 그래서인지 [[엠엘비파크]]나 [[LG 트윈스 갤러리]]에서는 '''임찬규 왈 쟤가 절 형이라고 불렀어요!''' 드립이 성행했고 비교 사진도 나왔다. ~~확실히 생년월일만 모른다면 임지섭이 형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위에도 거론되었듯이 머리 크기가 상당히 큰 편으로, LG 팬들은 [[이진영|머리 큰]] [[양준혁|왼손]] [[최형우|야구]][[장효조|선수]]~~다 타자 잖아~~는 무조건 잘할 거라는 야구계의 법칙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키가 워낙 큰데다 어깨도 넓은 편이라 ~~큰 머리에도 불구하고~~ 비율은 제법 좋은 편이다.
  • 임창용
         1990년대 내내 강타선에 비해 약한 투수력으로 번번히 우승을 놓쳤던 [[삼성 라이온즈]]는 투수진 보강을 위해 팀의 간판 타자 [[양준혁]]을 트레이드 카드로 내걸 정도로 2년간 막 신예로 떠오른 그를 간절히 원했다. 거기에 IMF 이후 [[해태 타이거즈]]가 운영난에 시달린 것과 맞물려 1998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는 [[양준혁]], [[황두성]], [[곽채진]]에 현금 20억원을 더한 조건으로 [[해태 타이거즈]]와 3:1 현금 트레이드에 합의했다. 이는 [[KBO 리그]] 사상 최대 규모의 트레이드였다. 이 사건으로 [[양준혁]]이 트레이드를 거부했다가 당시 감독이었던 [[김응용]]의 만류로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 전준호(1969)
         그리고 [[한국프로야구/1993년|다음해]] '''[[이종범|전]][[양준혁|설]][[구대성|들]][[이상훈(좌완투수)|이]]''' 데뷔하는 시기엔 시즌 최다도루 기록을 경신했다. 이 시즌 기록한 '''75개'''의 도루는 역대 한 시즌 최다 외야수 기록이다. 두번째는 69개[* 이 기록도 95년도 전준호의 기록이다.]. 3번째는 이에 근접하는게 ~~하위버전~~ [[이대형]]의 60개. 물론 1위는 이종범의 '''84개'''다.[* 이 시절에는 [[유격수]]를 봤다. 외야로 나중에 전업해서 50개를 기록.]
         히어로즈 선수 전원[* 이택근만 불참. 당시 이택근은 LG에 ~~볼모로~~ 팔려간 상태. [[김시진]] 당시 감독도 불참했는데 본인 입장에서 창피해서였다. 김시진은 시즌 후 방출 대기령 선수에서 동명이인이던 베테랑 투수 [[투준호|전준호]], [[이상열(야구)|이상열]] 등이 대거 방출되는 것과 팀이 돈이 없어서 FA로 LG에 떠나보낸 [[정성훈]]과 간판 투수들 및 타자 주전 멤버 4명을 대거 트레이드로 보내는 등 어수선해지기 마련이었다. 김시진이 여기서 막고 싶어하였으나 방출 된 선수들에게 미안하고 지켜주지 못했다는 등 말을 제대로 전달을 못했다고 했다.], 성구회 회원 [[양준혁]]과 [[송진우]], 권시형 선수협회 사무총장도 참가했다.
         그리고 KBO 역사상 [[양준혁]]에 이어 2,000안타를 2번째로 달성한 선수이자, 2,000경기 출전 & 2,000안타를 최초로 달성하였으며, 단일 시즌 최다 도루 2위[* 1993년 75개, 1위는 1994년도 84개를 기록한 [[이종범]]], 그리고 3차례의 도루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1993년, 1995년, 2004년]. 통산 득점도 1,171점으로 양준혁, [[이승엽]]에 이어 3위에 랭크되어있다. 이쯤되면 [[양준혁]], [[송진우(야구)|송진우]] 등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릴만하다.
          * 2009년 초에 [[송진우(야구)|송진우]], [[양준혁]]과 함께 한국판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인 [[성구회]]를 창립하였다.
  • 정성룡(야구선수)
         || [[장효조]](1983~1988) || → || '''정성룡(1989~1992)''' || → || [[양준혁]](1993~1998) ||
         1992년 시즌 종료 뒤 ~~왼손 유망주라면 사족을 못쓰는 [[김응용|코감독]]에 의해~~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었는데, 그해 해태가 삼성에게 완봉을 당한 경기가 있었는데 그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쳤기 때문인 것이 유력하다. 즉 그 시즌 홈런 3개중 2개를 코감독 앞에서 그것도 연타석으로 쳤으니 [[인생경기]]를 한 셈.[* 다음 해에 김성래와 양준혁이 괴물활약을 한 것을 보면.. 프로생활을 3년이나 연장하고 한국시리즈 우승반지도 꼈으니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1993~1995년까지 해태의 몇 안되는 좌타자로 활약하다가 은퇴했다. 원조 10번이었던 [[장효조]]에 대한 올드 삼빠들의 대한 그리움과 그 이후 10번을 단 [[양준혁]]의 인기에 의해 지금은 거의 잊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해태에서 10번을 물려받은 선수는 당시 신인이였던 [[장성호]]였지만 1년만에 1번으로 갈아탔다. 공교롭게도 그 이후 10번을 단 선수가 [[최훈재]] 그리고 [[양준혁]].
         김응용 감독은 정성룡의 스윙을 보고 "저 스윙으로 3할을 못 치는 건 말이 안 된다."며 큰 기대를 했으며, 1993년 시즌에는 해태 타선의 몇 안 되는 좌타자로서 원포인트 대타나 지명타자로 쏠쏠한 활약을 하여 해태의 우승에 공헌했다. 이 해 타율은 0.246이고 홈런은 10개. 타율은 별로였지만 전반기에는 규정타석만 채우면 [[양준혁]]과 [[강기웅]] 등을 위협할정도로 3할1~2푼 수준을 유지했으나 후반기에서 까먹은 것. 홈런을 심심찮게 터뜨렸으며[* 1993년이 126경기 체제에서는 가장 적은 18명의 두자릿수 홈런 타자를 배출했다.]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한방이 많았다. 프로 데뷔 후 최다 출장인 107경기에 출장했다. 그리하여 당시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도 유력했으나 [[김기태(1969)|김기태]]의 지명도에 밀려[* 팀 성적은 물론이거니와 김기태 본인의 성적이 별로였던 점을 감안하면..] 타지 못했다.
  • 조정훈(야구선수)
         08시즌에는 맞춰잡기 위주의 투구 패턴을 보여줬지만, 09시즌에는 탈삼진 능력이 급격하게 향상되어서 최다 탈삼진왕을 두고 경쟁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 힘은 역시 포크볼. [[양준혁]]이 칭찬할 정도면 엄청난 수준이라 하겠다. 소위 알면서도 배트가 나가는 공.
  • 주상욱
         |이전명= [[박은영 (아나운서)|박은영]], [[양준혁]]
  • 한효주의 작품 목록
         | [[양준혁]], [[최효종]]
  • 황두성
         [[성균관대학교|성균관대]]를 중퇴하고 [[1997년]] [[포수]]로 [[삼성 라이온즈|삼성]]에 입단했다가 시력이 좋지 않아 당시 [[장호연]] 코치의 제안으로 [[투수]]로 전향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277&article_id=0002712347 황두성, "장례식장에서 받은 방출 통보 서러웠다"] - 아시아경제</ref> 그러나 눈에 띄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1999년]] [[KIA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에 3:1 현금 트레이드([[양준혁]]·[[곽채진]]·황두성↔[[임창용]])되었다.<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812300034 황두성-이재우, '늦깎이의 성공시대' 열 것인가] 《Osen》 2008년 12월 30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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