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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순
         '''박상순'''([[1962년]] [[11월 25일]] ~ 현재)은 [[대한민국]]의 [[인]]이자, 문학출판 기획자이다.
         [[1962년]] [[서울특별]]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1991년]] 계간 <작가세계> 봄호에<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외 8편의 [[]]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민음사]]에 [[1989년]] 디자이너로 입사해 편집 주간 및 계간 《세계의 문학》 주간을 거쳐, 대표이사(편집인)를 지냈다.<ref>{{뉴스 인용
         }}</ref> 출판 기획자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과 《펭귄클래식》 리즈를 기획하여 출간했고, 도리스 레싱 등 다수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와의 계약을 통해 한국어 판을 출판하는 등 백여 권에 이르는 국내외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기획하고 편집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출판 디자인에도 관여하여 《보르헤스 전집》, 《미당 서정주 전집》 등 다수 출판물의 표지 디자인 작업을 함께 하기도 했다. 그의 는 전위적이고 따라서 낯선 느낌이 드는 이다.<ref>{{뉴스 인용
         * 《Love Adagio》<ref>{{뉴스 인용|url=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life/200505/h2005051018174867110.htm&ver=v002|제목=“인공화국 풍경들” <10> 朴賞淳의 'Love Adagio'|날짜=2005-05-10|출판사=한국일보|저자=고종석|확인날짜=2009-09-09}} ([[고종석]] 지음 <모국어의 속살> 2006년, 89 p.)
         * 《목화밭 지나서 소년은 가고》 (현대문학사, 2005) : 제51회 현대문학상 수상
         * 1996년 : 현대동인상
         * 2013년 : 제14회 [[현대작품상]]
         {{토막글|인}}
         [[분류:196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 출신]][[분류: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인]][[분류:20세기 인]][[분류:21세기 인]][[분류:현대문학상 수상자]][[분류:미당문학상 수상자]][[분류:대한민국의 출판인]][[분류:현대작품상 수상자]]
  • 박상순 (시인)
         '''박상순'''([[1962년]] [[11월 25일]] ~ 현재)은 [[대한민국]]의 [[인]]이자, 문학출판 기획자이다.
         [[1962년]] [[서울특별]]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1991년]] 계간 <작가세계> 봄호에<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외 8편의 [[]]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민음사]]에 [[1989년]] 디자이너로 입사해 편집 주간 및 계간 《세계의 문학》 주간을 거쳐, 대표이사(편집인)를 지냈다.<ref>{{뉴스 인용
         }}</ref> 출판 기획자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과 《펭귄클래식》 리즈를 기획하여 출간했고, 도리스 레싱 등 다수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와의 계약을 통해 한국어 판을 출판하는 등 백여 권에 이르는 국내외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기획하고 편집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출판 디자인에도 관여하여 《보르헤스 전집》, 《미당 서정주 전집》 등 다수 출판물의 표지 디자인 작업을 함께 하기도 했다. 그의 는 전위적이고 따라서 낯선 느낌이 드는 이다.<ref>{{뉴스 인용
         * 《Love Adagio》<ref>{{뉴스 인용|url=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life/200505/h2005051018174867110.htm&ver=v002|제목=“인공화국 풍경들” <10> 朴賞淳의 'Love Adagio'|날짜=2005-05-10|출판사=한국일보|저자=고종석|확인날짜=2009-09-09}} ([[고종석]] 지음 <모국어의 속살> 2006년, 89 p.)
         * 《목화밭 지나서 소년은 가고》 (현대문학사, 2005) : 제51회 현대문학상 수상
         * 1996년 : 현대동인상
         * 2013년 : 제14회 [[현대작품상]]
         {{토막글|인}}
         [[분류:196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 출신 인물]][[분류: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인]][[분류:20세기 인]][[분류:21세기 인]][[분류:현대문학상 수상자]][[분류:미당문학상 수상자]][[분류:대한민국의 출판인]][[분류:현대작품상 수상자]]
  • 송익필
          | 사망지= [[조선]] [[충청남도]] [[당진]]
          | 장르= [[한]], 저술
          | 필명= [[자 (이름)|자(字)]]는 운장 <br/> [[호 (이름)|호(號)]]는 구봉(龜峯) 또는 구봉(龜峰)· 현승(玄繩) <br/> 호(諡號)는 문경(文敬)
          | 직업 = 문신, 사상가, 작가, 인, 학자, 정치가
         '''송익필'''(宋翼弼, [[1534년]] [[2월 10일]] ∼ [[1599년]] [[8월 8일]])은 [[조선]] 중기의 서얼 출신 유학자, 정치인이다. 자(字)는 운장, 호는 구봉(龜峯) 또는 구봉(龜峰), 현승(玄繩), 본관은 [[여산 송씨|여산]](礪山)이다. 호는 문경(文敬)이다.
         서얼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출생 문제에 대한 비 및 아버지 송사련이 안당 일족과 사림 인사들을 역모로 몬 것에 관하여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 관직을 단념하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그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송강 정철]] 등의 절친한 벗이었으며, 서인의 이론가이자 [[예학]], [[성리학]], [[경학]]에 능하였다.
         사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가 [[1910년]](융희 4년) 때 다 [[홍문관]][[제학]]에 추증되었다.
         그의 선조는 [[고려]] 때 상장군을 지낸 정렬공(貞烈公) [[송송례]](宋松禮)이다. [[고려 원종]]조에 [[상장군]]을 지낸 인물로 [[무신정권]] 말에 국왕 원종의 편에 서서 무신정권 인사들을 타도하고 국권을 왕에게 환원키는데 노력하였다. 그후 송염은 낭산부원군이었고 송운은 개성원윤을 역임했고 송선은 여량군을 역임했다. 그는 송송례와 송운의 후손이었으나 그 뒤 그의 가문은 점차 몰락하여 평민 신분으로 떨어졌다. 증조부는 송자근쇠<ref>또는 송자근금으로 부른다.</ref> 이고 할아버지는 갑사(甲士) 출신으로 [[직장]](直長)을 지낸 송린(宋麟, 또는 宋璘)이다.
         신분과 도리를 중하는 유생들은 송사련에게 등을 돌리며 심히 비난하였다. 송사련은 80세로 죽을 때까지 양반으로 부귀를 누렸지만 선비들은 이를 무하였고, 사림파가 [[조선 명종|명종]]말엽에 집권하게 되면서 그 화(禍)는 송익필 형제들에게 대물림된다.
         아버지 송사련의 후광으로 다양한 이들과 교유하기 작했다.
         20대에 이미 문장력을 인정받아 문장가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을 만나 친분을 쌓았고 이들은 신분을 초월해 그를 친구로 예우하였다. [[이산해]], [[최경창]], [[윤탁연]], [[정철]], [[조헌]], [[윤두수]], [[윤근수]], 하응림 등도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찾아와 친구가 되었다. 토정 [[이지함]] 등도 그를 찾아보고는 그의 재능을 칭찬하여 구봉같은 이를 스승으로 삼으면 성현에 가까울 것이라고 높이면서 친히 를 써주기도 하였다.
         [[1558년]](명종 13년) 25세 때 아우 송학필과 같이 초(初試)에 합격하였다. 이후 그의 답안지가 과거 험 대과에 뽑혔으나 사관(史官) [[이해수]](李海壽)등은 상소를 올려 "[[송사련]]은 예의를 저버린 죄인이니 그 상직(賞職)을 없애야 한다"며 "그 자식들은 역 얼손(孼孫)들이니 법(法)을 어기고 과거에 나아감은 부당하다."고 규탄, 과거의 고관이던 동료들과 의논하여 그의 과거 응를 정지키고 벼슬길을 막아버렸다. 이때 [[이산해]] 등이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그의 금고를 풀어주려고 상소를 올리고 백방으로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아버지의 무고행위에 대한 비난과 출생신분의 문제 때문에 세간의 비난을 받았고, 결국 이후 벼슬에 진출하기를 단념하고 [[경기도]] [[교하군]] [[심학산]]으로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다.
         명종말엽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안당의 억울함을 풀어주자는 조정의 공론이 조성되었다. [[1566년]](명종 21) [[안당]]이 아무 잘못이 없음이 밝혀져 신원(伸寃), 복권되고 그 직첩이 환급되었으며, 안처근 형제의 거사를 폭로하고 무고까지 씌운 [[송사련]]에 대한 비난여론이 조성되었다. 사관 이해수는 서손의 과거 응는 부당하다며 다 들고 일어났다. 이후 그는 학문을 후진을 가르치는데 쏟을 것을 다짐하고 [[경기도]] [[고양군]]으로 물러나 고양 [[구봉산]](龜峰山) 아래 은거하여 학문에 몰두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쓴다. 그의 호인 구봉은 이 산의 이름을 딴 것이다.
         [[1560년]](명종 15년) 황강 [[김계휘]]가 자신의 아들 [[김장생]]을 보내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게 했다. 그는 27세를 전후한 기부터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은 [[경기도]] [[교하]]에 있는 [[심학산]]의 구봉 아래였다.<ref name="dangjs"/> 교하 [[심학산]]에 서당을 짓고 이후 유생들과 문인들에게 글과 학문을 가르쳤다.
         이이·성혼 등과 사귀어 성리학을 논하여 통하였고 예학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문장에 능해 [[이산해]], [[최경창]], [[백광훈]] 등과 함께 8문장가<ref>조선 중기 팔문장계: 이율곡, 송익필, 최립, 하응림, 최경창, 이달, 백광훈, 이산해</ref> 의 한 사람으로 와 글씨에도 탁월하였다. [[김장생]]·정엽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특히 김장생은 스승의 예학을 계승하여 조선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ref>그러나 송사련과 관련하여 김장생의 제자들은 김장생이 이이, 성혼의 학맥을 계승한 것처럼 하고, 그의 존재를 언급하기를 꺼려하였다.</ref> 특히 예학에 밝아 김장생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후대의 [[송열]], [[윤선거]], [[송준길]] 등에게로 학문이 계승되었다. 또한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이이와 성혼의 제자이자 비슷한 연배였던 [[조헌]] 역 그의 인품을 흠모하여 친구로 지내게 되었고, [[정철]], [[윤두수]], [[윤근수]] 역 그와 절친한 친구로 지내게 된다.
         [[1575년]](선조 8) 그의 나이 42세 때 아버지 송사련이 사망하였고 그 해에 [[신사무옥]]이 송사련이 안처겸·안처근 형제의 대화를 엿듣고 폭로한 것이 밝혀졌다. [[1586년]](선조 19) 사화 때 살아남아 그때까지 숨어살던 안당의 증손자인 안로(安璐)의 처 윤씨(尹氏)가 신원 상소를 올렸다. 죽은 안당과 세 아들, 손자들이 모두 복권되었고 안당에게는 '정민'(貞愍)이란 호가 내려졌다. 동에 자신과 아버지를 관직으로 추천한 안당 일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송사련에 대한 비난 여론이 조성되었다. 송씨 집안도 맞상소하여 싸웠으나 결국 패하여 관작이 삭탈되었다. [[이이]]와 [[성혼]]은 아버지의 잘못을 그에게까지 적용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라고 변호하였으나 동인에서는 계속 이를 문제삼았다.
         일설에는 [[안당]] 집안의 문적 중 안당이 송사련과 그의 어머니 감정, 조모 중금을 속량킨 문서로 4대에 걸쳐 내려온 송씨 집안의 양적(良籍, 양인임을 나타내는 문서)이 있었다는 설도 있는데, 이때 속량 문서까지 모두 없애 버리고, 송사련이 은혜를 저버리고 [[안처겸]] 형제의 거사를 폭로한 것을 물고늘어져, 2대 이상 양역(良役)하면 노비를 면할 수 있다는 법 규정을 적용받지 못하게 하여 [[1586년]](선조 19)에 송씨 집안을 완전히 환천(還賤)켜 버렸다.
         안당의 증손자며느리 윤씨는 소송을 걸었고, 노비로 환천됨과 동에 부친 송사련은 사후 관작이 추탈되고 안씨 집안 사람들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고 무덤과 신이 크게 훼손당하는 변을 당한다. 2대 이상 양역을 하면 면천하게 하는 규정까지 적용이 되지 않고 속량문서까지 사라지면서 안씨네 노비가 되어 버린 송익필의 4형제와 일가 70여 명은, 피맺힌 복수심에 온갖 핍박을 가하려는 그들을 피해 살길을 찾아 각지로 피신, 흩어졌다. 이때 송익필은 동인인 [[이산해]]로부터 율곡 이이를 비난해 보라는 권유를 받자 이를 완강히 거절하고, 오히려 그가 세에 결탁하며 음모를 꾸민다며 그를 풍자하는 를 지어줌으로써 [[이산해]]의 분노를 사게 된다.
         조헌이 이산해를 비열하다고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때 그가 조헌의 이산해 비난 상소의 배후 조종 인물 혐의를 받아 왕명으로 동생 송한필과 함께 구속되었다. [[1586년]](선조 19년) 그는 [[장예원]]에서 판결사 정윤희 등에 의해 다 천민의 신분으로 논정, 환천되었다. [[1589년]] [[정여립]]의 역모 고변으로 [[기축옥사]]가 벌어지면서 풀려나게 된다. 이 때문에 그는 기축옥사의 배후로도 지목하는 주장이 있어 그 사실여부를 두고 지금까지 논쟁이 되고 있다.
  • 윤정희(1944)
         ||<:> [[하지원]][br]([[내사랑 내곁에(영화)|내사랑 내곁에]]) ||<:> {{{+1 → }}} ||<:> [[수애]][br]([[심야의 FM]])[br]'''윤정희[br]([[(영화)|]])'''||<:> {{{+1 → }}} ||<:> [[김하늘]][br]([[블라인드(영화)|블라인드]]) ||
         ||<:> [[수애]][br]([[님은 먼 곳에(영화)|님은 먼 곳에]]) ||<:> {{{+1 → }}} ||<:> '''윤정희[br]([[(영화)|]])''' ||<:> {{{+1 → }}} ||<:> [[김하늘]][br]([[블라인드(영화)|블라인드]]) ||
         1967년, 영화 "[[청춘극장(1967)]]"의 오유경 역할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지금 이 영화는 원본이 소실되었으나 중국어 더빙이 남아 있다.] 이후 [[남정임]]·[[문희]]와 함께 [[1960년대]]와 [[1970년대]] 대한민국 여자 영화배우 트로이카로 큰 인기를 얻었다. 청춘극장은 1967년 팔도극장 다음의 관객을 동원했다. [[1968년]]에는 [[내]], [[천하장사 임꺽정]], [[일본인]] 등으로, 1969년에는 [[독짓는 늙은이]], [[팔도 사나이]]로 큰 인기를 끌었다. 물론 이는 일부분일 뿐 흥행한 영화는 이보다 많다.
         사실 그녀는 단순하게 인기가 많은 데에 그치지 않고 폭넓은 배역폭을 보여줌으로써 영화사에 굵직한 기여를 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cr333&logNo=120061757343&isFromSearchAddView=true|한 블로거의 말에 의하면]], 당 여배우의 맡는 통상적인 역할은 어머니상이나 요부상에 그쳤는데, 윤정희의 경우에는 이 두 역은 물론이고, 백치미까지 능숙하게 연기했다고. 단순히 트로이카들과 비교해도 이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하이틴 스타와 같은 통통 튀는 발랄한 역을 연기한 [[남정임]], 우수에 빠진 눈매로 비련의 여인을 연기했던 [[문희]]에 비해 폭넓은 역을 맡았다. 또 그녀의 이미지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지적인 세련미이다.
         그러나 [[문희]]가 [[미워도 다한번]]의 흥행 이후 1969년에는 [[벽속의 여자]], [[꼬마신랑]] 등을 대거 흥행키며 1970년대부터 윤정희를 능가하여 조금 위축된 감을 보여줬지만 1971년 문희, 남정임이 은퇴한 반면 윤정희는 결혼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1976년]]에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했지만, 이 결혼에는 윤정희를 탐낸 [[박정희]] 대통령의 바람기 덕에 [[육영수]] 여사가 개입되었다는 말도 있다. 어찌됐든 부부금슬은 굉장히 좋은 편이다. 1977년에는 야행이 그 해 흥행영화 5위권 안에 들어가며 저력을 보여줬다. 당에는 영화 말고 드라마가 크게 성장했는데 윤정희는 드라마에서도 활약을 한 적이 있다.
         만 66세인 2010년 영화 "[[(영화)|]]"로 청룡영화상과 대종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본인의 진가를 다 한번 입증했다.
         [[http://m.kin.naver.com/mobile/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51219865&qb=67aB7ZWcIOycpOygle2drCDrsJXsoJXtnaw=&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백건우와 결혼 과정에 육영수 여사가 개입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윤정희를 총애하자 이에 [[육영수]]가 백건우와 서둘러 결혼켜 프랑스로 쫓아냈다' 류의 소문이 떠돌았다. 위의 지식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한도 윤정희와 관련된 뜬소문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TV로 생중계 되었던 2006년 제 27회 [[청룡영화상]] 상식으로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등장과 동에 울먹거리더니 당 수감되어 있던 절친한 동료 배우 [[신성일]]을 선처해달라는 매우 적절치 못한 ~~망언~~발언으로 엄청나게 비난받았다.~~이를 본 청자들은 어리둥절~~
         또한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요즘 영화배우가 있느냐'면서 영화와 TV를 오가며 활동하는 배우들을 비판하였는데 정작 그 자신도 1972년 [[TBC]]드라마 [[사모곡]]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냥 가만히 계지~~
         중학교 동창인 어느 어르신의 회고에 따르면, ~~~마의 16세~~~ 소녀 절에도 복도에서 마주치면 뒤돌아서 다 볼 정도로 예뻤다고 한다.
         인기 절정이던 20대 절, 의외의 부업을 한 적이 있다. 다름아닌 [[통닭집]]. 워낙 바쁜 일정 탓에 경영은 어머니가 맡아서 하셨으나 엄연히 ‘사장’은 윤정희였다.가게의 주인이 톱스타 [[윤정희]]인데다 음식의 맛도 좋아서 한동안 성황리에 운영되었다고.
         국내외의 각종 영화상,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만 무려 24번이나 수상한 대배우이다.[* 최근 언론에 언급되는 원로배우 그 누구도 윤정희의 발끝에 못 미친다. 그도 그럴것이 윤정희는 젊은 절에 무명이었던 이들과 달리 젊은 절에도 연기력, 흥행력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사실 원로배우들 중에서는 단순히 상 몇번 타거나 광고 몇번 출연한 것 가지고 연기의 화신처럼 대접받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원로배우들 상당수가 젊은 절에 무명인 경우가 많다.][* 반대로 젊은 절에 정점을 찍은 배우들 상당수는 말년에 잘 활동을 하지 않거나 아예 은퇴를 해서 대중에 잊혀지는 경우가 많다. 이미 인기에서 정점을 찍어 더 이상 연예계에 미련이 없기 때문.]
         || [[내]] || 1968 || 320,400명 || 자옥 역 ||
         || [[]] || 2010 || 약 220,000명 || 양미자 역 ||
  • 윤휴
         |직업 = 문신, 사상가, 작가, 인, 학자, 정치인
         '''윤휴'''(尹鑴, [[1617년]] [[10월 14일]] ~ [[1680년]] [[5월 20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이다. [[남인]]의 거두이며, 청남의 중진이자 [[예송 논쟁]] 당 남인의 주요 논객이었다. 본관은 [[남원 윤씨|남원]](南原). 자(字)는 두괴(斗魁),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 야보(冶父)이다. 이름 휴(鑴)를 잘못 오기하여 윤준(尹鑴), 윤전(尹鐫)으로 읽기도 한다. 학자 간서재(澗西齋) [[김덕민]]의 외손으로, 김덕민, [[이민구 (1589년)|이민구]], [[이원익]]의 문인이다. 학행(學行)으로 [[강원]][[진선]]이 되었으며 이후 [[성균관]]사업,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의정부|의정부]][[좌찬성]] 등을 지냈다. [[윤선도]], [[허목]]과 함께 [[서인]] 공격의 선봉장이었다.
         어려서 외할아버지인 김덕민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남인 학자인 이원익, 이민구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이괄의 난]] 때에는 [[여주|여주]]에 피신하였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는 보은 삼산(三山)의 외가에 은신했으며, [[병자호란]], [[정묘호란]]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653년]]([[조선 효종|효종]] 3년) 우의정 [[심지원]], 병조판서 [[원두표]]의 천거로 발탁되어 관직에 나갔으나 사퇴와 복직을 반복했다. 그 뒤 [[민정중]], [[송열]], [[송준길]] 등의 요청으로 다 관직에 나갔다.
         [[1659년]] [[제1차 예송 논쟁]]에서는 허목, 윤선도 등과 함께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으로 봐야 된다며 3년설을 주장, 서인과 갈등하였다. 송열의 예론을 반박, 서인 정권의 전복을 꾀하자 송열과 원수가 되었고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1674년]] [[제2차 예송 논쟁]] 당 남인의 논객으로 [[인선왕후]]가 맏며느리의 예로써 1년복 설을 주장,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면서 요직에 발탁, [[사헌부]]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지냈다. 이때 호포법의 실, 전제의 개혁 등을 꾀했으나 제대로 행되지 못했고, [[사헌부]] [[대사헌]]으로 재직 중에는 [[청나라]]를 정벌할 것을 주장했으며, [[1679년]] [[의정부|의정부]][[우찬성]]에 이르렀다. [[1675년]](숙종 1년) [[홍수의 변]] 때 숙종에게 “대비를 조관하라”고 충고하여 임금의 미움을 샀다. 이 일로 평소 숙종의 눈 밖에 났던 관계로 [[1680년]](숙종 6년) [[허견의 옥사]]와 무관했으나 함께 엮여서 그해 [[5월]] 갑산에 유배가던 중 사형을 선고받고 법살당했다.
         사후 [[1689년]](숙종 15년) [[3월]] 신원되어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에 추증되었으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거세되면서 관작이 다 추탈되었고, 여러 번의 추탈과 복작을 반복하다가 [[1908년]](융희 2년) [[4월]] [[이완용]]의 상주로 최종 복권되고, 죄안에서 삭제되었다. 그의 학문은 [[이서우 (1633년)|이서우]]를 거쳐 [[이익 (1681년)|성호 이익]]과 [[안정복]], [[신후담]], [[정약용]] 등에게로 계승되었다.
         송열, 윤선거 등과는 [[남해군]] 절부터 오랜 친구였으나 그가 주자, [[성리학]]에 대한 의문, 의혹을 제기하면서 결별하였다. [[예송 논쟁]]의 과정에서 송열의 사형을 주장하는 윤선도, 허목 등을 옹호하고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송열과는 타협할 수 없는 원수가 된다.
         고조부인 [[윤자관]](尹子寬)은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했다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었다. 그 뒤 사림이 득세한 뒤 그의 가계는 당색으로는 [[북인]]이었다가 [[소북]](小北) 계열이 되었다. 증조부 윤호(尹虎)는 [[남원|남원]]으로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다 관직에 나가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윤희손]]은 유학자로 [[이황]]의 문인인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생이며, 할아버지 [[윤자관]]의 이종사촌이자 문인인 [[당문부수]](唐文副守) 이준(李準)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고, [[조광조]]를 흠모하여 스스로 호를 정제라 하였다. 할아버지 윤희손은 [[선무랑]]을 역임했으나 33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사후에 아들인 [[윤효전]]의 공훈과 현달로 [[의정부|의정부]]에 증직되고 대성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윤효전은 [[서경덕]](徐敬德)의 손제자로, [[서경덕]]의 제자인 문하인 [[민순]](閔純)에게 수학하였다.
         아버지 [[윤효전]]은 [[남해군]] 때에 [[영월군]]의 옥사를 주관했고, [[대사헌]], 지의금부사 등을 지냈으나 [[1617년]](남해군 9)에 [[사헌부]][[대사헌]]으로서 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경주|경주]][[부윤]]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당색이 [[북인]](北人)이었고, [[광해군]] 정권에 참여했으며 [[임해군의 옥사]]를 지지했던 탓에 후일 [[서인]]이 아들 윤휴의 가계전력을 문제삼는 원인이 되었다. 윤휴는 아버지 [[윤효전]]이 후처 김씨에게서 늦게 얻은 만득자로, 그에게는 6년 연상의 서형(庶兄) [[윤영]](尹鍈)이 있었다.
         아버지 [[윤효전]]은 관료이자 학자로 당색은 [[북인]] 소북(小北)이었다. 그가 태어날 무렵 [[경주|경주]]를 방문했던 아버지 [[윤효전]]의 스승 중 한사람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는 만득자인 그에게 특별히 두괴(斗魁)라는 아명을 지어주었다.
         그의 외할머니 신씨(申氏)은 [[임진왜란]] 당 [[충청남도]] [[대전광역|대전]]에 피난해 있다가 왜적(倭賊)을 만나 절의를 지켜 자결하였는데, 그 일이 조정에 아뢰어져 마을에 정문(旌門)을 내렸고 그 사실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증보판에 수록되었다.
         윤휴는 3세 때 [[경주|경주]][[부윤]]으로 있던 아버지 [[윤효전]]이 갑자기 별세하자 여주 선산에다가 장례를 치르고 잠 서울로 올라가 살았으나 [[1623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여주|여주]]로 피난, 은신하였다. 이후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는 외가가 있는 [[충청북도]] 보은군(報恩郡)의 삼산(三山)에 머무르면서 외조부 [[김덕민]]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무렵 그는 가솔들을 이끌고 외할아버지와 계외조모, 어머니와 함께 [[보은군]]에 머물렀다.
         [[이수광]]은 왕족 출신 실학자였고, [[이원익]] 역 왕족으로 [[남인]]의 거두이자 [[인조반정]] 이후 [[서인]] 내각에 의해 특별히 초빙된 [[남인]] 인사였다. [[이원익]]은 또한 그의 서형인 [[윤영]]의 장인으로, [[이원익]]의 첩이 낳은 서녀가 [[윤영]]의 아내였다. 서형수의 친정아버지인 덕에 그는 어린 나이에 [[의정부|의정부]]을 지낸 [[남인]] 거물 [[이원익]]의 문하에 찾아가 수학할 수 있었다. [[이원익]]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15년 연상인 그의 손녀사위 미수 [[허목]]을 만나 사귀었다.
         [[이원익]]은 [[서인]]조차 그 영향력을 무할 수 없어 [[인조반정]] 이후에 다른 당원임에도 특별히으로 천거되었다. 또한 스승 [[이민구]]는 [[지봉유설]]을 쓴 [[남인]]계 왕족 실학자 [[이수광]]의 아들이며, [[허목]]은 그들로부터 [[실학]]의 근간이 되는 사상을 접한다. [[이원익]]과 [[오윤겸]]은 곧 죽었지만 그는 [[이민구]], [[허목]] 등과 교류하며 사물과 국을 논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28세 때 다 [[경기도]] [[여주|여주군]] 백호에 정착하였고, 이후 그의 후손들은 그곳에 대대로 살게 되었다. 그의 호(號) 백호는 금사면 백호리에서 따서 호를 지었다.
         1635년(인조 13년) 19세 때, 당대의 석학으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작하던 [[송열]](宋時烈)을 찾아가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만나 3일간의 정치와 사물을 토론하였다. 그의 막힘없는 달변에 탄복한 [[송열]]은 “30년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송열]]의 주선으로 그는 [[송준길]](宋浚吉), [[허적]], [[윤선거]](尹宣擧), [[윤선도]] 등을 소개받았다.
         이어 [[허목]], [[권]](權諰), [[권준]](權儁), [[이유]](李木劉), [[장중함]](張沖涵), 이해(李澥), [[윤선도]], [[허적]] 등 남인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고, [[기해예송]](己亥禮訟) 문제가 비화되기 전까지는 [[송열]], [[송준길]](宋浚吉), [[이유태 (1607년)|이유태]](李惟泰), [[유계]](兪棨), [[윤선거]](尹宣擧) 등 [[서인]]계 인사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또한 [[송열]]은 윤휴의 이모의 아들들이던 [[송규정]], [[송규렴]] 형제의 스승이기도 했다. 윤휴의 명성은 입에서 입으로 널리 알려졌고, [[허적]]의 조카이자 송열의 문인이며 같은 [[여주]] 출신인 [[민정중]](閔鼎重), [[민유중]](閔維重) 형제는 그의 집을 자주 찾아왔다.
         [[송열]]은 그의 가계가 [[북인]] 계열이었다가, 전향 후 [[서인]]이 되지 않고 [[남인]]을 지원한 것을 상당히 안타까워하였다. 권(權諰)와 처남인 권준(權雋)그리고 이유(李𣞗)·장충함(張冲涵)·이해(李澥) 등 남인계 인사들과의 친분관계가 있었으며 [[서인]]측 인사들과도 [[1659년]](효종 10년)의 기해예송 이전까지는 친교가 잦았다. 유천 절부터 [[송열]], [[송준길]], [[이유태 (1607년)|이유태]](李惟泰), [[유계]](兪棨), [[심지원]], [[윤선도]], [[윤문거]](尹文擧), [[윤선거]] 등 서인 계열의 학자들과도 만나 세상과 사물을 담론하며 교분을 나누었으며, [[송열]]의 문인들인 [[민정중]](閔鼎重)·[[민유중]](閔維重) 형제는 특히 윤휴를 각별히 여겨 그가 살던 [[여주]]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노봉 [[민정중]]은 한때 그의 사심없는 삶을 로 표현해 안빈낙도의 전형으로 칭송하기도 하였다. 여양부원군 민유중은 “윤휴의 기모를 보면 좌상춘풍(左上春風)이요 그 언론을 들으면 경전에 출입하고 금고(今古)를 관천(貫穿)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여 귀 기울이게 하니 어찌 경도치 않으리오.” 라며 칭찬하였다. 그의 수려한 외모와 막힘없는 [[]] 재주, 글재주, 달변은 여러 선비들을 매료킨 하나의 매력이었다. 그러나 [[권대운]]은 그가 지나치게 자기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음을 단점으로 지적한다.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자 다 외가가 있던 [[보은군]]의 삼산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국가의 치욕에 한을 느껴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공주 유천(지금의 대전 [[유천동 (대전)|유천동]])으로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기도 했으나, 주로 여주에서 젊은 절을 보냈다. 이때 그는 [[송열]]과 두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복수설치를 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이때부터 10여 년간 그는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여 유교의 경전인 중용, 대학, 효경 등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할 수 있게 되었고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조선 인조|인조]] 즉위 초부터 종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 종사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다. 이때 남인 중에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 등이었다.<ref name="Leedeok211">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211 페이지</ref>
         율우의 문묘종사 논쟁이 벌어지자 허목은 이이를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 승려라고 비판했다. 윤휴도 허목과 같은 각에서 이이를 비판했다.
         윤휴에 의하면 [[이이]]의 사상은 [[불교]] 사상이지 [[유교]]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린 절 한때의 방황을 이들은 이해하지 않았다.<ref name="Leedeok211"/> [[이율곡]]은 [[서인]]의 종주이자 학문적, 정신적 지주로 그에 대한 비난은 [[서인]]의 맹공격을 초래하게 된다.
  • 이상화 (시인)
          | 출생지 = {{국기|대한제국}} [[대구광역|경상북도 대구부]]
          | 사망지 = {{국기|일제 강점기}} [[대구광역|경상북도 대구]]에서 위암으로 사망
          | 장르 = , 소설, 수필, 평론, 번역
          | 직업 = [[ (문학)|인]] <br /> [[소설|소설가]] <br /> [[수필|수필가]] <br /> 독립운동가 <br /> 교사 <br /> [[문학 평론|문학평론가]] <br /> [[번역]][[문학|문학가]]
          | 부모 = 이우(부), 김신자(모)
         '''이상화'''(李相和, [[1901년]] [[4월 5일]] ~ [[1943년]] [[4월 25일]])는 [[일제 강점기]]의 [[인]], 작가, 독립운동가, [[문학]][[평론가]], [[번역]][[문학가]]이며, 교육자, 권투 선수이기도 하다.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고, 호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1919년]] 대구에서 [[3·1 운동]] 거사를 모의하다가 모의가 발각되어 피신하였으며, [[1921년]] 잡지 [[백조]]의 동인이 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후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가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와 소설 등 작품 활동과 평론 활동, 《개벽》, 《문예운동》, 《여명》, 《신여성》, 《[[삼천리]]》, 《[[별건곤]]》, 《조선문단》, 《[[조선지광]]》 등에 동인 활동을 하였다. 아마추어 [[권투 선수]]로서 [[대륜고등학교|교남학교]] 교사로 재직 중 [[1938년]]에는 교남학교 권투부를 창설, 지도하였다.
         이상화는 [[1901년]](광무 4년) [[4월 5일]] [[경상북도]] [[대구광역|대구부]] 의 양옥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우(李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로 [[김해 김씨]]이다. 4형제 중 둘째이다. 형 이상정은 독립 운동가이며, 셋째 아우 [[이상백 (사학자)|이상백]]은 한국최초의 IOC위원이자 한국 사회학계의 선구자이고 넷째 아우 이상오는 정통 수렵가이자 [[바둑]] 유단자이다. 그의 집안은 [[대구]]의 명문가로 대 부잣집이었으나 아버지 이우는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자손들은 [[대구광역|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할아버지 이동진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대구광역|대구]]에 신식 학교인 우현서루를 열어 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남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나중에는 교사를 초빙, 수학, 역사, 국어, 영어, 일본어 등 신식 학문을 가르쳤다. 할아버지 이동진의 뒤를 이어 큰아버지 이일우가 우현학교의 일을 맡아보았다.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했는데, [[2000년]]대 초반 그의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학 학장 3명, 교수 10명, 의사 30명, 장군 2명, 언론·출판분야 11명을 배출하였다.<ref name="daemyonh">[http://www.lifemaeil.com/news_view.php?print_no=1540&seq=5570 특집- 상화의 큰 집 사람들] 주간매일 2002년 11월 27일자</ref> 또한 사촌 [[이상악]]은 작가이자 그의 친구인 육당 [[최남선]]과 사돈이 되었고, 다른 자손들 중에는 '박작대기' [[박중양]] 집안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ref name="daemyonh"/>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14세까지 큰아버지 이일우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큰아버지 이일우의 훈도를 받으며 우현학교(교남학교로 발전했다가 현재 [[대구광역|대구]] [[대륜중학교]], [[대륜고등학교]]가 되었다.)에서 수학하였다.
         사촌 매형인 윤홍열은 후일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위원과 [[대구보사]] 사장을 역임했는데, 사촌 매부 윤홍열의 소개로 바로 [[충청남도]] 공주 규수인 서순애 여사를 상화와 중매켰다.<ref name="daemyonh"/> 몇 차례 연락이 오고가다가 [[1919년]] [[12월]] [[충청남도]] [[공주|공주군]] 출신과 결혼하였다. 부인 서온순은 독립운동과 유학 등 경제적으로 불우한 환경에도 남편의 탓이나 원망을 하지 않았다 하며, 남편 사후에도 서온순은 재혼하지 않고 홀로 자녀를 키웠으며 [[1980년]]대에 사망하여 그의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1922년]] 이상화는 《[[백조 (잡지)|백조]]》1~2호에 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해 프랑스에 유학할 기회를 얻으려고 일본으로 갸루 짱 예쁘다 같이놀래 예쁜니가 좋아좋아
         1926년 《[[개벽 (잡지)|개벽(開闢)]]》에 발표되었다. 작자의 반일(反日) 민족의식을 표현한 작품으로 비탄과 허무, 저항과 애탄이 깔려 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겨 얼어붙어 있을 망정, 봄이 되면 민족혼이 담긴 국토, 즉 조국의 대자연은 우리를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국토는 일적으로 빼앗겼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 즉 피압박 민족의 비애와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람쥐
         [[1925년]]에 작품 활동을 활발히 했다. 뿐만 아니라 평론, 소설 번역에도 힘썼다. 8월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7년]] 대구로 돌아왔다. [[1927년]]에는 [[의열단|의열단원]] [[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1933년]] 교남학교(지금의 [[대륜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담당 과목은 조선어와 영어, 작문이었다. 이듬해 교남학교 교사직을 사직했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조선일보사]]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으나 이재와 상술에 눈이 어두워서 결국 1년 만에 실패하고 다 [[교남학교]]의 영어, 작문담당 교사로 복직하였다.
         [[1937년]] [[3월]] [[만주]]에 있던 큰형 [[이상정]]을 만나러 중국에 3개월간 다녀왔다. 그가 형을 만난 사실이 확인되면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으나 특별한 혐의점이 없어 그해 [[11월]] 말경 가석방되었다. 다 [[대구]]로 내려와 [[대륜고등학교|교남학교]]에 조선어, 영어, 작문담당 교사로 복직하여 [[교가]]를 작사했다. 또한 교남학교 권투부를 창설하여 지도하기도 했다. 그는 약소 민족은 주먹이라도 잘 써야 된다며 학교 체육대회 종목에도 권투를 넣었는데, 교남학교 권투부 출신들은, 졸업후 훗날 [[대구 권투 클럽]]을 결성하였다.
         1940년 대구부 계산 2동에 집을 마련하였다. 그가 새로 마련한 집 바로 앞에는 김광제와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했던 [[서상돈]] 고택이 있다.<ref name="gotack0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62516 헐릴 위기에서 우뚝선 이상화 고택] 오마이뉴스 2008.08.13</ref> [[1940년]]말 [[대륜중학교|교남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대구부 계산2동 84번지의 집에서 주로 생활하며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그해부터 [[춘향전]]을 [[영어]]로 번역하고, 이어 한국 [[국문학사]]와 [[프랑스|불란서]][[]]정석 등을 [[한글]]로 번역을 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만다.
         [[1943년]] 초 갑자기 쓰러졌다가 그해 [[3월]]에 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4월 25일]] 오전 8 45분 [[대구광역|경상북도 대구]] 자택에서 [[위암]]과 [[폐결핵]]과 [[장결핵]]의 합병증으로 인해 43세의 젊은 나이로 숨졌는데 이상화의 오랜 친구인 소설가 [[현진건]]도 같은 날 [[경성부]]에서 [[폐결핵]]과 [[장결핵]]의 [[합병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1948년]] [[3월 14일]] [[김소운]]이 발의하고 이윤수, [[구상 (인)|구상]] 등이 참여하고 죽순인구락부가 협찬하여 인을 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비를 [[달성공원]]에 털었다
         이상화의 고택은 대구광역 [[중구 (대구광역)|중구]] 에 있으며, 맞은편에 서상돈의 고택도 함께 위치해 있다. [[1999년]] 도개발로 한때 헐릴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민운동이 벌어졌고 [[2008년]] [[8월 13일]] 결실을 맺어 이상화 고택 개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ref name="gotack01"/> 이상화 인의 고택은 [[2008년]] [[8월 12일]] 새롭게 단장되어 일반인들에게 문을 열었다. 도개발로 헐릴 위기까지 맞았던 이상화 고택이 민들의 모금활동과 100만 서명운동 등으로 보존, 공개되었다.<ref name="gotack01"/><ref>{{뉴스 인용 |제목=[동호동락] 인 이상화 고택 근대골목 자전거 투어, 역사`문화예술 공부 기회|url=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6560&yy=2013|출판사=매일신문|저자=윤혜정|날짜=2013-11-14|확인날짜=}}</ref>
         [[2009년]] 초부터 [[대경대학교]] 뮤지컬학과 학생들은 이상화의 일대기를 뮤지컬로 제작하였다. 대본을 맡은 학생 허윤선은 이상화의 둘째 아들인 이충희를 수소문해 이상화 인의 삶에 대해 묻고 극을 구성했다.<ref name="mkros">[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9&no=609348 <nowiki>[</nowiki>민족인 이상화 일대기 창작뮤지컬로 그린다<nowiki>]</nowiki>] 매일경제 2009.11.25</ref> 이들은 지난 6개월간 인의 삶을 기록한 책자를 참고하면서 대구 중구 계산동 소재 이상화 고택을 수십차례 방문해 당 분위기를 몸에 익혔다. 대경대 뮤지컬과 1학년 학생 30여명은 1920년대 식민지 대를 살면서 저항인으로 뜻을 굽히지 않은 이상화 인의 삶과 비극적 역사상황을 담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만들었다.<ref name="mkros"/>
  • 이후 (소설가)
         | 출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
         | 직업 = [[소설가]] [[인]]
         | 장르 = [[소설]] [[]]
         | 자매 = 아버지 [[김경 (인)|김경]]
         '''이후'''(李後, [[1982년]]~)는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인]]이다. 인 [[김경 (인)|김경]]의 아들이다.
         [[서울특별]] 에서 태어나 [[산업공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할 예정이다.
         5살 때부터 [[태권도]], [[검도]], [[유도]], [[킥복싱]], [[권투]], [[레슬링]], [[주짓수]], 러아 [[삼보]], 경호무술, [[합기도]]를 수련한 이력을 바탕으로
         WTF 태권도 지도자, ITF 태권도 지도자, 러아 삼보 지도자, 종합격투기 지도자 교육을 수료했다.
         최근에 종합격투기 심판으로 활동하면서 문학인이자, 무도인으로의 삶을 동에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 2010년 러아 삼보 국가대표 선발전 심판
         * 2011년 러아 삼보 국가대표 선발전 심판
         * 2012년 러아 삼보 국가대표 선발전 심판
         * 2013년 러아 삼보 국가대표 선발전 심판
         * 2014년 러아 삼보 국가대표 선발전 심판
         * 2015년 러아 삼보 국가대표 선발전 심판
         * 집 '어느 날 문득'
         * 집 '환상'
         * 집 '별이 빛나는 밤에'
         * 집 '처음처럼'
         [[분류:198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서울특별 출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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