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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 (시호)
         '''강'''은 [[시호]]에 쓰이는 글자로, 康, 剛, 糠, 荒이 있다. 康은 《일주서》 〈시법해〉에 연원유통(淵源流通), 풍년호락(豐年好樂), 안락무민(安樂撫民), 영민안락(令民安樂)을 일컫는다고 한다. 剛은 강의과감(彊毅果敢), 추보전과(追補前過)를 일컫는다고 한다. 荒과 糠은 '공허하다'의 의미로 槺과 통하여 같은 시호로 쓰이는데, 《일주서》 시법해에서 荒은 호락태정(好樂怠政)을, 糠은 흉년무곡(凶年無穀)을 일컫는다고 한다. 또 《[[한서]]》의 [[안사고]] 주석에 糠은 호락태정(好樂怠政)을 일컫는다고 한다.<ref>반고: 《[[한서]]》 권14 제후왕표제2</ref>
         * [[위 (춘추 전국)|위]] [[위 강숙|강숙]] (시호는 아니다)
         {{시호}}
         [[분류:시호]]
  • 같은 묘호와 시호 목록
         [[동아시아]]에서는 왕조 교체를 이유로 다른 인물이 더러 같은 [[묘호]]나 [[시호]]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전한]]의 제7대 황제 [[전한 무제|유철]]과 [[서진]]의 초대 황제 [[사마염]]은 모두 무제(武帝)라는 시호를 받았다. 한국어의 특성상 같은 단어로 표기하나 한자로는 다르게 쓰는 묘호도 있는데 예를 들어 성종은 한자로 成宗과 聖宗으로 다르게 표기한다.
         [[분류:묘호]][[분류:시호]]
  • 경 (시호)
         '''경'''은 [[시호]] 중의 하나다. 한자 표기가 다른 景, 敬, 頃 세 가지가 있다. 景은 《일주서》 〈시법해〉에서 유의이제(由義而濟), 포의행강(布義行剛), 기의대려(耆意大慮)를 일컫는다고 하고, 頃은 민이경순(敏以敬順), 지근추구(祗勤追懼), 자인화민(慈仁和民)을 일컫는다고 하고, 敬은 숙야경계(夙夜警戒), 숙야공사(夙夜恭事), 선합법전(善合法典)을 일컫는다고 한다.
         {{시호}}
         [[분류:시호]]
  • 고 (시호)
         '''고'''는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한국 한자음이 같은 考, 高 두 가지가 있으며, 考는 《일주서》 〈시법해〉에 병덕불회(秉德不回), 대려행절(大慮行節)을 일컫는다고 하며, 高는 시법해에 언급되지는 않으나 최상급의 의미로 쓰인다.
         {{시호}}
         [[분류:시호]]
  • 공 (시호)
         '''공'''(共, 恭)은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共과 恭은 서로 통용하여 쓰이며, 《일주서》 〈시법해〉에서 恭은 경사존상(敬事尊上), 존현귀의(尊賢貴義), 존현경양(尊賢敬讓), 기과능개(旣過能改), 집사견고(執事堅固), 애민장제(愛民長弟), 집례어빈(執禮御賓), 비친지궐(芘親之闕), 존현양선(尊賢讓善)을 일컫는다고 한다.
         {{시호}}
         [[분류:시호]]
  • 공제
         *'''공제'''(恭帝)는 [[공 (시호)|공]]을 쓴 중국 황제의 [[시호]]이다.
         [[분류:시호]]
  • 권상하
         어려서부터 [[송시열]],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계승자로 자칭타칭 [[송시열]]의 적통이라는 평을 들었다. 만년에는 관직을 사퇴하고 [[송시열]]의 저서를 보급하며 [[송시열]]의 가르침을 전파하려 노력하였다. 한편 [[회니시비]]의 주역이자 [[소론]]의 영수인 [[윤증]]과는 갈등하였다. [[이이]]-[[김장생]]-[[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정통 계승자이며, 인성과 물성의 동이에 대한 논쟁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의 문인 [[이간]]과 [[한원진]] 사이에 [[호락논쟁]]이 벌어졌을 때는 [[한원진]]의 설을 지지하여 호락분파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자는 치도(致道)이고 호는 수암(遂菴), 한수재(寒水齋),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유계]], [[송시열]], [[송준길]]의 문인이다.
         그는 [[조선 숙종|숙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일망타진된 뒤 숙종의 총애를 받아 [[의정부]][[우의정]], [[좌의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기호학파의 지도자로서 학문 연구와 제자를 양성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생애 후반 그는 [[송시열]]의 저서를 보급하며 [[윤증]]을 이단이라며 공격하여 [[소론]]의 심한 비판을 받았다. 시호는 문순이다.
         사망 직후 [[1721년]] [[노론]]의 영수로 지목되어 [[소론]] 신치운(申致雲)의 상소로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1724년]] [[영조]] 즉위 후 복관되고 치제(致祭)하도록 하였으며, 그해 시장(諡狀)을 심의하지 않고 바로 문순(文純)의 시호를 내렸다. [[1979년]] 그의 저서 《한수재집》이 양장으로 영인, 간행되었다.
  • 김륵
         '''김륵'''(金玏, [[1540년]] ~ [[1616년]])은 조선 [[조선 선조|선조]]·[[조선 광해군|광해군]] 때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예안 김씨|예안]],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巖)이다. 시호는 민절(敏節).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도 안집사와 체찰부사로 민심 수습에 기여하였으며, 진주에서 [[이순신]]을 만난 뒤 그가 백의 종군할 때 구명 운동을 벌였다. 광해군 때는 [[이황]], [[이언적]]의 문묘 종사 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의 추숭을 반대하기도 했다.
         정조 12년인 1788년에 '민절(敏節)'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경상북도 영주시의 [[구강서원]], 향현사(鄕賢祠) 등에 배향되었다.
  • 김숙자 (1389년)
         '''김숙자'''(金叔滋, [[1389년]] [[8월 24일]] ∼ [[1456년]] [[3월 2일]])는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江湖)·강호산인(江湖散人)으로 불렸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ref name="김숙자">《한국민족문화대백과》,김숙자(金叔滋),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선산 출신의 도학자이자 유학자이다. 야은 [[길재]](冶隱 吉再), [[윤상 (조선)|윤상]](別洞 尹祥)의 문인이다.
         [[증직|증]]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가, [[1845년]](헌종 11) [[의정부]][[영의정]] [[권돈인]]의 추증 및 시호 하사 건의로 [[증직|증]] [[이조판서]] 겸 좨주(吏曹判書兼祭酒)에 가증되었지만 시호는 내려지지 않았다. [[1871년]](고종 8) [[3월 16일]] 왕명으로 문강공(文康公)의 [[시호]](諡號)가 [[추증]]되었다.
  • 김장생
         |별명 = 자(字)는 희원(希元) <br/> 호(號)는 사계(沙溪) <br/> 시호(諡號)는 문원공(文元公)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 산림파(산당) 영수로 공신 세력에 대항하여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송익필]]과 [[이이]], [[성혼]] 등의 제자이자 계승자로 [[기호학파]]를 형성, 확장하는데 기여하였고, 예학에 정통하였다. [[김집 (1574년)|김집]], [[송시열]] 등을 길러냈다. 사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시|의정부]]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
         바로 [[증직|증]]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 吏曹判書)에 [[추증]]하였으며 그의 장례식에는 1천 명의 인파가 몰렸다. 뒤에 그의 제자이자 [[조선 효종|효종]]의 장인 [[장유]](張維)가 경연에서 그의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으나 [[조선 인조|인조]]는 반대하였다. 이후 [[장유]]가 경연에서 그의 [[시호]]를 내려줄 것을 여러번 간하였으나 조정 중신들은 같은 [[서인]]의 당원이면서도 거부하거나 회피하여 모두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정원군]] 추숭을 끝까지 반대한 것 때문이었다.
         [[1631년]] 11월에 진잠현 성북리 해좌(亥坐)의 언덕에 안장하였고 이 장례식에 문상하는 사람이 거의 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1641년]](인조 19) [[충청남도]] [[논산시|논산군]] 할머니 허씨 묘의 후편으로 이장 하였으니, 현재의 [[충청남도|충남]] [[논산시]] 이다. [[1657년]](효종 9)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시|의정부]] (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다. 문(文)은 도덕을 널리 안다(道德博聞曰文)이고 원(元)은 의를 중심으로 덕을 행했다(主義行德曰元)이라는 뜻이다. [[1688년]](숙종 14년)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1689년]] [[기사환국]]으로 문묘에서 출향되었다가 1717년(숙종 43) 문묘(文廟)에 다시 종향되었다.
  • 김정미 (1265년)
          | 별명 = 초명 '''김지정'''(金之琔) <br/> 개명 '''김이'''(金怡), '''김정미'''(金廷美) <br/> 자 열심(悅心), 은지(隱之)<br/> 호 산남(山南)<br/>시호 광정(匡定)
         초명은 '''김지정'''(金之琔)이며 [[고려 충선왕|충선왕]]으로부터 '''김이'''(金怡)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1325년]]에 '''김정미'''(金廷美)로 개명(改名)하였다. [[자 (이름)|자]](字)는 열심(悅心), 은지(隱之)이고 호(號)는 산남(山南)이며 [[시호]]는 광정(匡定)이다.
  • 김좌근
         '''김좌근'''(金左根, [[1797년]]~[[1869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외척으로 안동김씨 세도기 후반의 중심인물이었다. [[본관]]은 (신)[[신 안동 김씨|안동]](安東)이며 [[자 (이름)|자]](字)는 경은(景隱), [[호 (이름)|호]](號)는 하옥(荷屋),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의 아들이자 [[김유근]]의 동생이며, [[조선 순조|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남동생이다. [[조선 문조|익종]]의 외숙부였다. 순탄한 벼슬생활을 하면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1863년]],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영의정에서 물러났으나 원임대신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여 국정을 자문하였다. 아들 [[김병기 (1818년)|김병기]]와 함께 몰락왕족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흥선대원군을 도왔으며, 다른 안동김씨 일족이 숙청당했을 때도 몰락하지 않고 원로대우를 받았다. 1864년부터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실록총재관(實錄摠裁官)으로 《철종실록》 편찬을 주관, 지휘하였다. [[1868년]] 대원군에 의해 삼군부(三軍府)가 부활, 설치되자 삼군부영사(三軍府領事)가 되었다.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로 치사하였으며, [[1866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869년]]에 사망하였으며 사후 충익(忠翼)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 노숭
         '''노숭'''(盧嵩, [[1337년]] ~ [[1414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 노씨|광주]](光州). 자는 중보(中甫), 호는 상촌(桑村). 목은 [[이색]]의 문생이다. [[고려]]조에서 동지밀직(同知密直) 겸 [[대사헌]](大司憲), [[전라남도|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조선 개국 후 [[조선의 개국공신|개국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조선 태종]] 때 벼슬이 검교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평(敬平)이다.
         [[조선 태종|태종]]이 즉위하자 삼사좌사(三司左使)·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발탁되었고, 다음해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기복(起復)되었으며, 그 뒤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거쳐 1414년 검교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평(敬平)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ca_11408004_001 태종실록 28권, 14년(1414 갑오 / 명 영락(永樂) 12년) 8월 4일(갑진) 1번째기사]</ref>
  • 대 (시호)
         '''대'''(戴)는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일주서》 〈시법해〉에는 애민호치(愛民好治), 전례불색(典禮不塞)을 일컫는다 한다.
         {{시호}}
         [[분류:시호]]
  • 도 (시호)
         '''도'''(悼)는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일주서》 〈시법해〉에는 연중조요(年中早夭), 공구종처(恐懼從處)를 일컫는다 한다.
         {{시호}}
         [[분류:시호]]
  • 명 (시호)
         '''명'''(明)은 [[시호]]의 일종이다. 《일주서》 〈시법해〉에서는 조림사방(照臨四方), 참소불행(譖訴不行)을 일컫는 말이라 했다.
         {{시호}}
         [[분류:시호]]
  • 목 (시호)
         '''목'''(穆)은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일주서》 〈시법해〉에서는 포덕집의(布德執義), 중정견모(中情見貌)를 일컫는다 한다. 통가자로 목(繆)이 있는데, 이 글자는 하시인 유(謬)와도 통가 관계에 있으므로 시호 繆이/가 목인지 유인지 판단에 주의해야 한다.
         {{시호}}
         [[분류:시호]]
  • 무 (시호)
         '''무'''(武)는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상시며, 강강이직(剛彊理直), 위강예덕(威彊叡德), 극정화란(克定禍亂), 형민극복(刑民克服), 과지다궁(夸志多窮)을 일컫는다.<ref>《일주서》([[:s:zh:逸周書|逸周書]]) 〈[[:s:zh:逸周書/卷六|권6]]〉 시법(諡法)조(條) “剛彊理直曰武。威彊叡德曰武。克定禍亂曰武。刑民克服曰武。夸志多窮曰武。”</ref>
         {{시호}}
         [[분류:시호]]
  • 문 (시호)
         '''문'''(文)은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상시에 속하며, 《일주서》 〈시법해〉에서는 경위천지(經緯天地)文, 도덕박후(道德博厚), 근학호문(勤學好問), 자혜애민(慈惠愛民), 민민혜례(愍民惠禮), 석민작위(錫民爵位)를 일컫는다고 했다.
         {{시호}}
         [[분류:시호]]
  • 문성공
         '''문성공(文成公)'''은 [[시호]]의 하나이다.
         [[분류:시호]]
  • 문헌공
         문헌공(文憲公/文獻公)은 [[시호]]의 하나이다.
         * [[이행]](李荇, [[1478년]] ~ [[1534년]])<ref>원래 시호는 문정(文定), 문민(文愍)이었으나, [[1773년]](영조 49)에 고쳐졌다.</ref>
         [[분류:시호]]
  • 민 (시호)
         '''민'''(閔, 愍, 湣, 緡)은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네 글자가 같이 쓰이는데, 《일주서》 〈시법해〉에 愍은 재국봉난(在國逢難), 사민절상(使民折傷), 재국연우(在國連憂), 화란방작(禍亂方作)을 일컫는다 한다.
         {{시호}}
         [[분류:시호]]
  • 박고운
         * [[가면라이더 포제]] ([[챔프]]) - '''노자마 토모코/노유정''' ([[시호]])
  • 박고운 (성우)
         * [[가면라이더 포제]] ([[챔프]]) - '''노자마 토모코/노유정''' ([[시호]])
  • 박상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던 [[조선 중종]] 때의 관료로 사림 운동에 전력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훈구파|훈구 공신]]들의 전횡을 지속적으로 고발해 권신들의 미움을 사 관직 대부분을 외직으로 나가있었으며, 가는 곳마다 사림 후배들을 챙겼다. 특히 [[기묘사화]] 이후 살아남은 [[조광조]]의 문하생들을 거둬 사림 운동의 맥을 이어줬다. [[단경왕후]] 복위에 관한 상소로도 유명한데 이에 대해 생전의 [[조광조]]가 '강상의 법도를 세웠다'라고 칭찬한 바 있다. 평소 그의 학식과 인품에 대해 후배였던 [[이황|퇴계 이황]]이 원우의 완인(행동과 인품에 흠이 없는 사람)이라 평하기도 했다.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 박지원 (1737년)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潘南), [[자 (이름)|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 (이름)|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ref>[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79826&pTotalSearchCount=2&pPosition=0&pRecordId=PPL_6JOc_A1737_1_0004748&pName=박지원(朴趾源){1}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깨진 링크|url=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79826&pTotalSearchCount=2&pPosition=0&pRecordId=PPL_6JOc_A1737_1_0004748&pName=%EB%B0%95%EC%A7%80%EC%9B%90%28%E6%9C%B4%E8%B6%BE%E6%BA%90%29%7B1%7D }}</ref><ref name="브리태니커">{{웹 인용
         그의 문집 《[[연암집]](燕巖集)》은 [[1900년]]에 비로소 초록 형태로 처음 서울에서 공간될 만큼 간행이 늦었다. [[1910년]]에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의 시호를 받았다.<ref>{{웹 인용 |url=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inmul/johoo/5/2.html |제목= 박지원(朴趾源) |확인날짜= 2008-04-22 |웹사이트= 서울六百年史 |출판사= 서울특별시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070928061738/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inmul/johoo/5/2.html# |보존날짜= 2007-09-28 |깨진링크= 예 }}</ref> [[1900년]] 김만식(金晩植) 등 23인에 의하여 [[경성부]]에서 처음 그의 문집을 초록한 형태로 간행되었고,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 비로소 그의 저서와 학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 할아버지 : 박필균(朴弼均, ? - [[1760년]] [[8월]], [[돈령부]]지사 역임, 시호는 장간)
  • 사 (시호)
         '''사'''는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상통하지 않는 思, 使 두 글자가 있으며, 《일주서》 〈시법해〉에서는 思는 도덕순비(道德純備), 대성조민(大省兆民), 외내사색(外內思索), 추회전과(追悔前過)를 일컫는다고 하며, 使는 치민극진(治民克盡)을 일컫는다고 한다. 使는 쓰인 실례가 없다.
         {{시호}}
         [[분류:시호]]
  • 사시 (시호)
         '''사시'''(私諡)는 근대 이전 [[한국]], [[중국]]에서 개인에게 붙이는 이름으로, 시호를 받지 못한 개인에게 친구, 문인, 개인, 단체 등에서 붙이는 시호를 가리킨다.
         == 시호 제도 ==
         시호는 국가에서 시호를 정하는 것이 원칙으로, 시호를 붙이는 것은 개인의 이름이 함부로 불리는 것을 꺼려하던 유교적 관습([[피휘]](避諱) 또는 기휘(忌諱))에 의해 나타났다.
         이후 나라가 망하였거나 시대 상황이 맞지 않아 시호가 내려지지 않을 때는 저명한 학자나 공덕이 있는 문인, 무인, 친구 또는 개인, 단체 등이 죽은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시호를 붙여주게 되었다. [[1910년]] [[10월 1일]] 이후에도 순종은 일부 인사들에 대해 사시를 내린 바 있다.
         [[고려 창왕|창왕]]의 시호인 윤왕과 [[영친왕]]의 시호인 [[의민황태자]] 등이 사시에 해당된다.
         * [[대한제국 순종|순종]] 황후(계후) 윤씨 : [[순정효황후]] - 이는 사시이지만 생전 지위가 황후였던 점이 감안되어 [[대한민국]] 국사학계의 일부는 이 시호를 인정하고 있다.
         * 푸이 : [[선통제|공종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 중국의 사학자들 중 일부가 선통제라는 칭호 외에 이 시호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중국]] 정부는 공인하지 않고 '손제'만 인정한다.
         * [[시호]]
         [[분류:한국의 역사]][[분류:중국의 역사]][[분류:시호]]
  • 상 (시호)
         '''상'''은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상통하지 않는 殤, 商 두 글자가 있으며, 殤은 《일주서》 〈시법해〉에서 단절불성(短折不成), 미가단절(未家短折)을 일컫는다 하고 商은 소공영민(昭功寧民)을 일컫는다 한다. 商은 실제로 쓰인 예가 없다.
         {{시호}}
         [[분류:시호]]
  • 서거정
         '''서거정'''(徐居正, [[1420년]]~[[1488년]])은 [[조선 문종]], [[조선 세조|세조]], [[조선 성종|성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대구 서씨|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이며,<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a_A1420_1_0005362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ref>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선 세종|세종]], [[조선 문종|문종]], [[조선 단종|단종]], [[조선 세조|세조]], [[조선 예종|예종]], [[조선 성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섬겼다.
         사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경상도 대구의 [[구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사가정역]]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 서명선
          | 필명 = [[자 (이름)|자(字)]]는 계중(繼仲) <br /> [[호 (이름)|호(號)]]는 귀천(歸泉), 동원(桐源) <br /> [[시호|시호(諡號)]]는 충헌(忠憲), 충문(忠文)
         [[본관|본관(관향)]]은 대구(大丘)이며 [[자 (이름)|자(字)]]는 계중(繼仲)이고 [[호 (이름)|아호(雅號)]]는 귀천(歸泉)·동원(桐源)이며 [[시호|시호(諡號)]]는 충헌(忠憲)·충문(忠文)이다.
  • 선 (시호)
         '''선'''(宣)은 [[시호]]의 일종이다. 《일주서》 〈시법해〉에 선문주달(善聞周達)을 일컬어 선이라 한다 했다.
         {{시호}}
         [[분류:시호]]
  • 성 (시호)
         '''성'''은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상통하지 않는 다른 成, 聖, 聲 세 글자가 있으며, 聖은 《일주서》 〈시법해〉에서 칭선부간(稱善賦簡), 경빈후례(敬賓厚禮), 成은 안민입정(安民立政), 聲은 불생기국(不生其國)을 일컫는다 한다.
         {{시호}}
         [[분류:시호]]
  • 성승
         [[조선 세조|수양대군]]이 조카 [[조선 단종|단종]]을 축출하고 즉위하자 단종 복위를 거사하였으며, 공신 연회 때 [[조선 세조|세조]] 3부자를 타살하려다가 실패하고 아들 4형제와 손자 4명 등 [[사육신]] 및 관련자 500여 명이 사형당할 때 함께 사형당했다. 숙종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정조 때 좌찬성으로 다시 추증된 뒤 충숙의 시호를 받았다. 본관은 [[창녕 성씨|창녕]](昌寧). 호는 적곡(赤谷)이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그에 대한 상세한 행장이나 전기 등이 없음은 당시 그의 혈족이 몰살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 [[조선 숙종|숙종]] 때 [[사육신]]이 모두 복권되면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 뒤 정조 8년(1784년) [[판서]] [[엄숙]](嚴璹)의 상소에 의하여 신원되고, [[증직|증]] [[의정부]][[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조선 단종|단종]]의 묘소인 장릉(莊陵) 충신단에 배향되고, 홍주(洪州) 노운서원(魯雲書院), [[공주시|공주]]의 동학사 숙모전(肅慕殿) 등에 제향되었다. 충숙(忠肅)의 시호가 내려졌다.
  • 소 (시호)
         '''소'''는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보통의 시호 글자인 昭, 紹와 특별한 용례가 있는 少가 있다. 昭는 《일주서》 〈시법해〉에서 소덕유로(昭德有勞), 위의공명(威儀恭明), 성문주달(聖聞周達)을 일컫는다 하고, 紹는 소원계위(疏遠繼位)를 일컫는다 한다. 少는 미약하고 일찍 살해당해 정식으로 시호를 받지 못한 황제를 주로 일컫는다.
         {{시호}}
         [[분류:시호]]
  • 소벌도리
         한편 [[진주 소씨]] 족보는 소벌도리의 생애에 대해 다른 기록을 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소벌도리는 진한의 왕족으로 자(字)는 당운(當雲)이다. 진한의 초대 군주 소백손의 4대손이며 돌산고허촌의 촌장을 지냈다고 한다. 사후 [[신라]]의 개국공신에 녹훈되었고 사량부대인(沙梁部大人)이 되었다. [[516년]](법흥왕 3년) 충선(忠宣)의 [[시호]]가 추서되었는데, 뒷날 [[태종무열왕]]에 의해 왕으로 추존되어 문열왕(文烈王)이라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최씨와 소씨는 그를 시조로 하고, 각각 [[최치원]], [[최언위]], [[최준옹]], [[알천]](소경) 등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대 수를 기세(起世)하고 있다.

  •      '''숙'''(肅)은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일주서》 〈시법해〉에는 강덕극취(剛德克就), 집심결단(執心決斷)을 일컫는다 한다.
         [[분류:시호]]
  • 시호 (동음이의)
         '''시호'''는 다음 뜻으로 쓰인다.
         * [[시호]](諡號): 죽은 인물에게 국가에서 내려주는 특별한 이름
         * [[시호 (식물)]](柴胡, ''Bupleurum falcatum''): 미나리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
         * [[SHIHO (가수)|시호]](SHIHO) : 일본의 가수
         * [[야노 시호]](矢野 志保) : 일본의 모델이자 추성훈의 배우자다.
         * [[카와라기 시호]]: 일본의 여성 성우
         * [[와타나베 시호]]: 일본의 배우
         * [[키쿠치 시호]]: 일본의 여성 성우
         * [[사카이 시호]]: 배영을 주종목으로 하는 일본의 수영 선수
         * [[난바 시호]]: 후쿠오카 현 출신의 가수
         * [[하루미 시호]]: 일본의 배우
         * [[니시오카 시호]]: 일본의 플뢰레 펜싱 선수
  • 안 (시호)
         '''안'''(安)은 [[동아시아]] 군주의 [[시호]]로, '조화를 좋아하며 다투지 않는 것'(好和不爭)을 뜻한다.
         {{시호}}
         [[분류:시호]]
  • 안제
         '''안제'''(安帝)는 중국 황제의 [[시호]]의 하나이다.
         [[분류:시호]]
  • 애 (시호)
         '''애'''는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상통하지 않는 哀 · 愛 두 가지가 있으며, 哀는《일주서》 〈시법해〉에는 조고단절(蚤孤短折) · 공인단절(恭仁短折)을, 愛는 색우사여(嗇于賜予)를 일컫는다고 하였다.
         {{시호}}
         [[분류:시호]]
  • 양 (시호)
         '''양'''은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한국 한자음이 같은 '''煬''', '''襄'''이 있다.
         * [[금 해릉왕]] - 황제이나 폐위되어 시호는 왕의 시호를 받았다.
         * 장성양공(長城煬公) : [[남북조시대]] [[진 (남조)|진]]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의 시호다. 제후로 격하되고서 받았다.
         * [[수 양제]]는 수나라에서는 [[명 (시호)|명제]]란 시호를 받았다. 흔히 알려진 이 시호는 [[당나라]]에서 내린 것이다.
         ===기타 이 시호를 받은 인물===
         {{시호}}
         [[분류:시호]]
  • 여 (시호)
         '''여'''(厲)는 [[동아시아]] 군주의 [[시호]]다. 악시로, 《일주서》 〈시법해〉에 따르면 '사납고 교만하여 친한 이가 없음', '무고한 이를 죽임'의 뜻이라 한다. 다른 표기로 '''날'''(剌), '''이'''(利)가 있다.
         {{시호}}
         [[분류:시호]]
  • 열 (시호)
         '''열'''(烈)은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일주서》 〈시법해〉에는 유공안민(有功安民), 병덕준업(秉德遵業)을 일컫는다 했다.
         {{시호}}
         [[분류:시호]]
  • 영 (시호)
         '''영'''(靈)은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일주서》 〈시법해〉에서는 사이지성(死而志成), 난이불손(亂而不損), 극지귀신(極知鬼神), 불근성명(不勤成名), 사견신능(死見神能), 호제귀신(好祭鬼神)을 일컫는다 한다.
         {{시호}}
         [[분류:시호]]
  • 예안 김씨
         8세 김로(金輅)는 벼슬이 중랑장(中郎將)으로, 아버지는 밀직사사(密直司使) 김방식(金方軾)이며, 일파를 이루어 예안김씨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lst/lstView.aks?lstId=LST_039_421_0082 |제목=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확인날짜=2011-01-25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1222123415/http://people.aks.ac.kr/front/tabCon/lst/lstView.aks?lstId=LST_039_421_0082 |보존날짜=2015-12-22 |깨진링크=예 }}</ref> 손자 김담(金淡)은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였으며,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다. 서원에 배향되었다. 김담(金淡)의 현손 김륵(金劧)도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대사헌(大司憲),, 이조참판에 올랐으며 민절의 시호를 받고 서원에 배향되었다.
         * [[김담]](金淡, [[1416년]]~[[1464년]]) : 10세. [[자 (이름)|자]](字) 거원(巨源), [[호 (이름)|호]](號) 무송헌(撫松軒). [[조선]] [[세종]], [[조선 문종|문종]] 때의 명신. [[이조]] [[판서]] 역임. [[시호]]는 문절(文節). [[단계서원]](丹溪書院), [[구강서원]](龜江書院) 배향.
         * [[김륵]](金玏, [[1540년]]~[[1616년]]) : 14세. 자 희옥(希玉), 호 백암(栢巖). 퇴계 [[이황]] 문인. 조선 [[선조]] 때의 명신. 이조 판서 추증. 시호는 민절(敏節). [[구강서원]](龜江書院) 배향.
  • 오달제
         |별칭= 자(字)는 계휘(季輝)</br> 호(號)는 추담(秋潭)</br> [[시호|시호(諡號)]]는 충렬(忠烈)
         '''오달제'''(吳達濟, [[1609년]] ∼ [[1637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 오씨|해주]](海州),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경기도]]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충청도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烈書院), 경상도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 오원 (조선)
         |별명= 자 백옥(伯玉)</br> 호 월곡(月谷)</br>[[시호]] 문목(文穆)
         '''오원'''(吳瑗, 1700년 ~ 1740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 오씨|해주]](海州). 자는 백옥(伯玉), 호는 월곡(月谷)이다.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오두인]](吳斗寅)이고, 아버지는 오진주(吳晋周)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의 딸이다. 백부인 [[오태주]](吳泰周)와 조선 제18대 왕 [[조선 현종|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의 양자가 되었다. 1728년(영조 4)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고 벼슬은 [[대제학]]에 이르렀다.<ref name="대제학">[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ua_11610010_001 《영조실록》 52권, 16년(1740 경신 / 청 건륭(乾隆) 5년) 10월 10일(정미) 1번째기사]</ref>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월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va_11712017_002 《정조실록》 38권, 17년(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년) 12월 17일(병자) 2번째기사]</ref>
         1740년(영조 16년) [[공조]] [[판서]]로 재임 중 41세의 나이로 졸(卒)하였다. 성품은 정직하고 성실하였고, 온후(溫厚)하였으며 총명하였다. 왕이 나라를 위한 일편 단심이 있는데도 일찍 죽은 것을 애석히 여겨 차탄하고 애도하였으며, 시호를 내리라고 명하였다.<ref name="대제학"></ref>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 원 (시호)
         '''원'''(元)은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일주서》 시법해에는 능사변중(能思辨衆), 행의열민(行義說民), 시건국도(始建國都), 주의덕행(主義行德)을 일컫는다 한다.
         {{시호}}
         [[분류:시호]]
  • 위 (시호)
         '''위'''는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음이 같은 威, 魏 두 가지 글자가 있으며, 威는 《일주서》 〈시법해〉에서 맹이강과(猛以剛果), 맹이강과(猛以彊果), 강의신정(彊毅信正)을 일컫는다고 했고 魏는 극위첩행(克威捷行), 극위혜례(克威惠禮)를 일컫는다고 한다.
         {{시호}}
         [[분류:시호]]
  • 윤선도
         '''윤선도'''(尹善道, [[1587년]] [[7월 27일]]([[음력 6월 22일]]) ~ [[1671년]] [[7월 16일]]([[음력 6월 11일]]))는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시인·문신·작가·정치인이자 음악가이다. 본관은 [[해남 윤씨|해남]], 자는 약이(約而)<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front/dirservice/ppl/viewDocumentPpl.jsp?pLevel2Name=&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b_A1587_1_0008531&pPplCount=&pOrderByType=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깨진 링크|url=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2Ffront%2Fdirservice%2Fppl%2FviewDocumentPpl.jsp%3FpLevel2Name%3D&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b_A1587_1_0008531&pPplCount=&pOrderByType= }}</ref> 이고,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윤유심(尹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이다. 화가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5대조부이다.
         [[1678년]] [[9월]] [[허적]]과 [[허목]], [[윤휴]] 등이 그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상주하여 [[1679년]](숙종 5년) [[8월]] [[김덕원]](金德遠)의 상주로 충헌(忠憲)의 시호가 내려졌다.<ref>남파 홍우원이 지은 시장에 의하면 危身奉上曰忠 博文多能曰憲이라 하여 충헌이 되었다.</ref> 그러나 [[1680년]](숙종 6년) [[8월]]에 [[허견의 옥사]]로 [[남인]]들이 [[서인]]에 의해 대거 숙청, [[허적]](許積), [[윤휴]] 등이 처형당하고 [[허목]], [[홍우원]] 등은 파직당하여 [[문외출송]]당한 뒤, [[이사명]](李師命) 등의 상소로 그해 윤 [[8월 10일]] 윤선도에게 내려진 [[증직]]과 [[시호]]도 함께 추탈당하였다. 그 뒤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그해 [[2월]] 다시 복작되었다.
  • 의 (시호)
         '''의'''는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음이 같은 懿, 毅 두 다른 글자가 있다. 《일주서》 〈시법해〉에서 懿는 온유성선(溫柔聖善)을 일컫는다 한다.
         {{시호}}
         [[분류:시호]]
  • 이 (시호)
         '''이'''(夷)는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일주서》 시법해에는 극살병정(克殺秉政), 안민호정(安民好靜)을 일컫는다 했다. 시호에 쓰이는 글자 중 釐를 '''이'''로 읽기도 하나, 이 글자는 [[희 (시호)|희]]로 읽는 것이 옳다. 利는 [[여 (시호)|여]]를 참조하라.
         {{시호}}
         [[분류:시호]]
  • 이황
          | 필명 = 자 경호(景浩)<br />호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br />시호 문순(文純)
         '''이황'''(李滉, [[1502년]] [[1월 3일]]([[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1년]] [[1월 3일]]([[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진보 이씨|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이언적]], [[이이]], [[송시열]], [[박세채]], [[김집]]과 함께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 사람이다.
         퇴계 이황은 [[1501년]](연산군 7) 경북 안동부 (오늘날의 안동시) 에서 진사(進士)이식(李埴)<ref> [[좌찬성]]에 증직됨</ref>과 부인 [[의성 김씨|문소 김씨]](2남 1녀) [[춘천 박씨]](5남)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보 이씨|진보]](眞寶), [[자 (이름)|자]]는 경호(景浩), [[호 (이름)|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 <u>물러나 시내 위에 머무르다</u>는 뜻),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사후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동인]]과 [[남인]] 계열의 종주이며 일부 [[북인]]도 그의 문인들이었다.
         그 뒤 문순공의 시호를 내리고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홍문관]][[춘추관]]사를 [[추증]]하였으며, [[1610년]](광해군 2) 성균관 [[문묘]](文廟)에 종사되었다. 안동의 도산서원을 비롯한 전국 40여 개 서원에서 제사하고 있다.
  • 장 (시호)
         '''장'''은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章, 莊, 壯 세 글자가 있으며, 莊은 《일주서》 〈시법해〉에는 병갑극작(兵甲亟作), 예어극복(叡圉克服), 승적지강(勝敵志强), 사어원야(死於原野), 누정살벌(屢征殺伐), 무이불수(武而不遂)을 일컫는다고 한다. 章은 《후한서》 숙종효장황제기의 주석에서 시법을 인용하여 온극령의(溫克令儀)를 일컫는다고 하고, 《구당서》 숙종효경황후오씨전에서 시법을 인용하여 경신고명(敬愼高明), 법도명대(法度明大)를 일컫는다고 한다.
         {{시호}}
         [[분류:시호]]
  • 장순왕후
         |시호 = 장순(章順)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1445년]] [[2월 22일]]([[음력 1월 16일]]) ~ [[1462년]] [[1월 5일]]([[1461년]] [[음력 12월 5일]]))는 [[조선]] [[조선 예종|예종]](睿宗)의 정비이다. [[시호]]는 '''휘인소덕장순왕후'''(徽仁昭德章順王后)이며, 상당부원군 충성공 [[한명회]](上黨府院君 忠成公 韓明澮)와 황려부부인 민씨(黃驪府夫人 閔氏)의 셋째 딸로,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이다. 세자빈 시절 [[인성대군]]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요절하였다.
         [[조선 세조|세조]]는 총애하던 며느리의 죽음에 비통해하며, 온순하고 너그럽고 아름다운 것을 장(章), 유순하고 어질고 자혜로운 것을 순(順)이라 하여 세자빈 한씨에게 장순(章順)의 시호를 내리고 장순빈(章順嬪)으로 삼았다. 후일, 장순빈의 제부이자 시조카인 [[조선 성종|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를 장순왕후로 추존했다.
  • 정 (시호)
         이하의 칭호는 [[시호]]가 아니다.
         {{시호}}
         [[분류:시호]]
  • 정정공
         정정공(貞靖公/丁靖公)은 [[시호]]의 하나이다.
         [[분류:시호]]
  • 지증왕
         |시호 =
         제도와 체제를 개편, 정비하여 [[504년]] 상복법을 제정하였으며, [[505년]] 주, 군, 현을 정하고 각 주에 군주를 두었다. [[509년]] 서울에 동시(東市)를 두었고, 512년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하였다. 또한 [[한국]]의 [[고대 사회]]에서부터 전해지던 [[순장]] 풍습을 최초로 폐지한 군주이기도 하다. 시호는 지증인데, 신라 최초의 [[시호]]이기도 하다.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智度路)이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지증 마립간|본기 권4 지증 마립간]] |인용문= 智證麻立干立 姓金氏 諱智大路 或云智度路 又云智哲老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이 왕위에 올랐다. 성(姓)은 김씨이고 이름은 지대로(智大路)이다. <지도로(智度路) 혹은 지철로(智哲老)라고도 하였다.)}}</ref> 그는 6촌 형제간인 [[소지 마립간]]과 사돈이었고 즉위 전 [[갈문왕]]에 봉해진 것이 [[영일냉수리신라비]]를 통해 확인되었다.
         [[마립간]]의 칭호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임금이다.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지대로, 지도로, 혹은 지철로라고 한다. [[내물 마립간]]의 증손자이며 [[소지 마립간]]의 재종 아우이다. 부인은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이며, [[소지 마립간]]이 아들이 없이 죽어 64세에 왕위를 이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지증 마립간|본기 권4 지증 마립간]] |인용문= 智證麻立干立 姓金氏 諱智大路 或云智度路 又云智哲老 奈勿王之曾孫 習寶葛文王之子 炤知王之再從弟也 母金氏鳥生夫人 訥祇王之女 妃朴氏延帝夫人 登欣伊湌女 王體鴻大 膽力過人 前王薨 無子 故繼位 時年六十四歲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이 왕위에 올랐다. 성(姓)은 김씨이고 이름은 지대로(智大路)이다. <지도로(智度路) 혹은 지철로(智哲老)라고도 하였다. 나물왕의 증손으로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고 소지왕(炤知王)의 재종 동생이다. 어머니는 김씨 조생부인(鳥生夫人)으로 눌지왕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연제부인(延帝夫人)으로 이찬 등흔(登欣)의 딸이다. 왕은 체격이 매우 컸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전왕(前王)이 아들없이 죽었으므로 왕위를 이어 받았다. 당시 나이는 64세였다. )}}</ref>[[514년]] 죽은 뒤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는데, 이때 이후로 신라의 시호법이 시작되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지증 마립간|본기 권4 지증 마립간]] |인용문= 十五年 ... 王薨 諡曰智證 新羅諡法 始於此 (15년(514)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지증(智證)이라 하였는데, 신라에서 시호를 쓰는 법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ref> 지증왕은 [[사탁부]](沙啄部) 출신으로 왕위에 올랐다.
  • 질 (시호)
         '''질'''(質)은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일주서》 〈시법해〉에는 명실불상(名實不爽)을 일컫는다 하고, 《후한서》 효순효충효질제기의 주석에서는 《시법》을 인용하여 충정무사(忠正無邪)를 일컫는다 한다.
         {{시호}}
         [[분류:시호]]
  • 추 (시호)
         '''추'''(醜)는 [[동아시아]]의 [[시호]]이다. 악시로, '권세를 믿고 방자하게 구는 것'(怙威肆行)을 뜻한다.
         {{시호}}
         [[분류:시호]]
  • 평 (시호)
         '''평'''(平)은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일주서》 시법해에서는 치이무생(治而無眚), 집사유제(執事有制), 포강지기(布綱持紀)를 일컫는다고 한다.
         {{시호}}
         [[분류:시호]]
  • 헌경왕후
         |시호 = 헌경(獻敬)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 [[1735년]] [[8월 6일]]([[음력 6월 18일]]) ~ [[1816년]] [[1월 13일]]([[1815년]] [[음력 12월 15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왕세자빈, [[추존]]왕비로, [[대한제국]]의 추존황후이기도 하다. [[조선 영조|영조]]의 차남 [[조선 장조|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비이자, [[조선 정조|정조]]의 어머니이다. 원래 시호는 헌경혜빈(獻敬惠賓)이었으나,<ref>순조실록 19권, 순조 16년(1816 병자년 / 청 가경 21년) 1월 19일(기해) 1번째기사, "혜경궁 시책문"</ref> [[대한제국 고종|고종]]때 왕후로, 다시 황후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王后)로,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 또는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로도 알려져 있다.
         생전에 받은 존호로는 [[1778년]](정조 2년)에 효강(孝康), [[1783년]](정조 7년) 자희(慈禧), [[1784년]](정조 8년) 정선(貞宣), 1795년(정조 19)에는 그의 회갑을 기념하여 휘목(徽穆)이란 존호를 받고 효강자희정선휘목혜빈이 되었다. 정조 즉위 후에는 정조의 생모였으므로 법적으로는 혜빈이었지만 혜빈이라는 칭호 대신 혜경궁으로 불렸다. 흔히 경의왕후(敬懿王后)라 하지만 죽은 후 받은 시호가 헌경이었고 의(懿) 자는 황후로 추존된 후 받은 제호(帝號)로 이는 잘못된 표기이다. [[한중록]]의 저자이다.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이고 [[서울]] 출신.
         [[1762년]](영조 38년) [[7월 12일]](윤[[5월 21일]])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자는 뒤주에서 나오지 못하고 폭염 속에서 사경을 헤매었고 결국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아사(餓死)하였다. 영조가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홍씨에게는 '혜빈(惠嬪)'의 호를 내렸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ua_13805121_002&grp=&aid=&sid=0&pos=0|제목=영조실록 99권 38년(1762년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21일(을묘) 2번째 기사|확인날짜= |저자= 영조실록|날짜 =|출판사=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1762-5-21|인용=}}</ref>
         [[1776년]](정조 즉위년) 영조가 83세에 서거하고, 대리청정하던 세손 이산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등극하니, 곧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어머니 혜빈 홍씨 역시 '혜경궁(惠慶宮)'으로 궁호가 높아졌다. 당시 왕실에서 혜경궁 홍씨가 제일 연장자였으나, 서열상 10살 아래인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가 대비의 위치를 차지하여 왕실 서열상 제2위의 위치에 있었다.
         생전 그는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의 존호를 받았다. [[1805년]](순조 5년)부터는 담현증(痰昡症)을 앓아 오래 병석에 누웠다. [[1815년]](순조 15년) 창경궁 경춘전에서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며 헌경빈(獻敬嬪)의 시호를 받았다. 이는 총명하고 예지(睿知)함을 헌(獻)이라 하고 밤낮으로 경계함을 일러 경(敬)이라 하였다 한다.<ref>순조실록 18권, 순조 15년(1815 을해년 / 청 가경 20년) 12월 25일(을해) 2번째기사, "빈청에서 혜경궁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여 올리다"</ref> 순조 즉위 직후 혜경궁은 아들 [[조선 정조|정조]]의 약속을 이유로 친정에 대한 신원을 요구했고, [[1814년]](순조 14년) 그의 친정집은 신원, 복권된다. 또한 [[홍봉한]]의 죽음 직전에 그를 비난했던 정이환, 이심도 등의 처벌을 요구한다. 이심도는 사형에 처해진다.
  • 혜 (시호)
         '''혜'''는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음이 같은 惠와 慧가 있으며, 惠는 《일주서》 〈시법해〉에서 유질자민(柔質慈民), 애민호여(愛民好與)를 일컫는다 하고 慧는 유질수간(柔質受諫)을 일컫는다 한다.
         {{시호}}
         [[분류:시호]]
  • 환 (시호)
         '''환'''(桓)은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일주서》 〈시법해〉에서는 벽토복원(辟土服遠), 극경근민(克敬勤民), 벽토겸국(辟土兼國)을 일컫는다고 한다.
         {{시호}}
         [[분류:시호]]
  • 회 (시호)
         '''회'''(懷)는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일주서》 〈시법해〉에는 집의양선(執義揚善), 자인단절(慈仁短折)을 일컫는다 했다.
         {{시호}}
         [[분류:시호]]
  • 효 (시호)
         '''효'''(孝)는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일주서》 〈시법해〉에는 오종안지(五宗安之), 자혜애친(慈惠愛親), 협시조향(協時肇享)을 일컫는다고 한다.
         양한의 황제는 [[전한 고제]], [[후한 광무제]]를 제외한 모든 황제의 시호에 '효'가 들어가며, 통상적으로는 효를 빼고 일컫는다(예: [[전한 혜제|전한 효혜황제]] → 혜제, [[후한 장제|후한 효장황제]] → 장제). [[흉노]]는 한나라에 굴종한 후 한나라에서 황제의 시호에 항상 효를 넣는 법을 받아들여 [[선우]]의 칭호에 흉노 말로 효를 뜻하는 약제(若鞮)를 넣었다.
         {{시호}}
         [[분류:시호]]
  • 효령대군
         |별칭 = 자는 선숙(善叔) <br/> 호는 연강(蓮江)<ref>불교 법명이기도 하다.</ref> <br /> 시호는 정효(靖孝)
         [[조선]]의 제3대 국왕 [[조선 태종|태종]]의 둘째 아들이며, [[원경왕후]] 민씨의 소생이다. [[조선 세종|조선 세종대왕]]의 둘째 형으로 성씨는 '''[[전주 이씨]]'''(全州 李氏), 이름은 '''보'''(補)이다. 초명은 '''호'''(祜)였는데 19세에 '''보'''(補)로 [[개명]]하였다. [[자 (이름)|자]]는 '''선숙'''(善叔)이고, [[호 (이름)|호]]는 '''연강'''(蓮江)이며 [[불교]] [[법명]]도 '''연강'''(蓮江)이고,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 효순왕후
         |시호 = 효순(孝純)
         첫 시호는 효순현빈(孝純賢嬪)이었다가 세손 산이 남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양되면서 승통세자빈이 되었다. 정조 즉위 후 왕후로 추존되어 정식시호는 '''휘정현숙효순왕후'''(徽貞賢淑孝純王后)이고 [[대한제국]] 수립 이후 황후로 추존되어 '''효순소황후'''이다. 생전의 칭호는 현빈(賢嬪)이었다.
         [[시호]]는 효순(孝純)이며 [[1752년]]에 효장세자의 묘에 합장되었다.<ref>《조선왕조실록》 영조 75권, 28년(1752 임신 / 청 건륭(乾隆) 17년) 1월 22일(갑신) 1번째기사</ref>
  • 희 (시호)
         '''희'''(僖, 釐)는 [[시호]]에 쓰이는 글자다. 중시에 속하며, 《일주서》 〈시법해〉에는 유벌이환(有伐而還), 질연수간(質淵受諫), 소심외기(小心畏忌)를 일컫는다고 했다. 시호에서 僖와 釐는 같은 뜻으로 쓰이며, 따라서 釐는 대표음 '리'가 아닌 '희'가 옳은 발음이다.
         {{시호}}
         [[분류: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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