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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순왕
         그 후 원본은 사라졌지만 조선시대에 이모한 작품 5점이 전하고 있다. 5점은 [[1677년]](숙종 2년) 강원 원주의 고자암에서 제작한 것, [[1749년]] 경북 영천 은해사 상용암에서 그린 것, [[1794년]] 초상화가 이명기가 은해사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 [[1904년]](광무 8년) [[승려]] 출신 [[대한제국]]의 화가 이진춘이 이명기 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과, 이진춘 본의 초본 등이다.
  • 김경주 (승려)
         '''김경주'''(金敬注, <small>일본식 이름: </small>金山敬注, [[1896년]] ~ ?)는 [[일제 강점기]]의 [[불교]] [[승려]]이며, 친일 공산주의 운동가이다. 속성은 [[김해 김씨]]이며, 불교 법명은 '''영담'''(瑛潭)이다.
         [[부산광역시]] 출신으로 [[1908년]] 에서 출가하여 [[불교]] 승려가 되었다. 범어사 재적 중 [[경성부]]에 유학해 [[휘문의숙]]을 졸업한 뒤, 당시 범어사 주지인의 법맥을 상속받고 [[일본]] [[도쿄도|도쿄]]의 [[도요 대학]] 철학과에 진학했다.
         |제목=친일 승려 108인
         [[분류:1896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20세기 한국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승려]][[분류:일제 강점기의 공산주의자]]
  • 김길수 (1948년)
         '''김길수'''(金吉洙, [[1948년]] [[8월 8일]] ~ )는 [[대한민국]] 육군 군인 출신 [[불교]] [[승려]]로 [[법명]]은 '''법륜'''(法崙)이며 [[법륜사 (서울 봉천동)|법륜사]]의 주지이자 前 [[정치가]]이다. 세계불교법왕청(世界佛敎法王廳) 소속이며 前 [[국태민안호국당]] 총재였다.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이름이 알려졌다.
         [[분류:194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육군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김씨]][[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91년) 당원]][[분류:필리핀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역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경제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승려]][[분류:대한민국의 종교인]][[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
  • 대방부부인 송씨
         [[판중추부사]] [[송복원]]의 딸이며 [[지돈녕부사]] [[송현수]]의 누이이다. 몸이 병약하여 강제 이혼당하여 친정으로 돌아갔다.<ref>《조선왕조실록》, 세종 123권, 세종31(1449) 3월 18일 1번째기사</ref> 그 뒤 영응대군은 재혼했지만 아내를 잊지 못하여 송씨의 사가에 찾아갔고 두 사람 사이에 두 딸이 태어났다.<ref>《조선왕조실록》, 단종 9권, 단종 1(1453) 11월 28일 4번째기사</ref> 결국 [[조선 단종|단종]] 때 송씨는 영응대군과 재결합했다. 영응대군과의 사이에 아들을 여럿 낳았으나 모두 죽고 살아남은 것은 딸 길안현주 뿐이다.<ref>《조선왕조실록》, 성종 86권, 성종8(1477) 11월 10일 6번째기사</ref> [[1479년]] [[조선 성종|성종]] 대에 중전 [[폐비 윤씨|윤씨]]가 폐위되자 어린 [[연산군|원자]]는 잠시 송씨의 집에서 보살핌을 받았다.<ref name="kth">김태형,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심리학자가 만난 조선의 문제적 인물들)》, 역사의 아침, 2009, p.309, {{ISBN|9788993119084}}</ref><ref>[[영응대군]]은 이 때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ref> [[군장사]]란 절에 올라가 설법을 듣다가 계집종이 깊이 잠들면 [[승려]] [[학조]]와 사통을 했다.<ref name="park01">박홍갑,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가람기획, 1999) 114페이지</ref><ref name="deok312">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5) 312페이지</ref> [[무오사화]] 당시 이 사실도 사초에 들어 있었다.<ref name="park01"/>
         승려 [[학조]]와의 간통 사건은 후일 [[무오사화]]의 원인의 하나가 된다. 학조를 매우 혐오한 [[김종직]]은 이를 두고 경멸, 비판했는데, [[김종직]]의 제자들 중 누군가 실록을 편찬할 때 송씨와 학조의 불륜 사실을 기사로 넣어서 문제가 됐고, 이는 [[무오사화]]까지 이어진다.
  • 로힝야
         2011년 미얀마가 [[민주화]]되기 시작하였으나, 로힝야에 대한 박해는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미얀마의 다수 종교인 불교 승려들이 로힝야에 대해서 극단주의 주장을 펼치며 배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에는 라카인주에서 불교도인 라카인족과 로힝야족 사이에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2012년에는 라카인주에서 불교도 라카인족과 로힝야족이 충돌하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로힝야 남성이 라카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소문 탓에 촉발되어 200명 이상이 숨졌으며, 희생자는 대부분 로힝야였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라는 보고서를 출판하여 이 사건을 비판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미얀마 정부와 군부, 불교 승려들이 라카인족이 로힝야를 살해하도록 선동하고 방조하는 [[인종청소]]를 저질렀다.
         2013년 3월 20일, 미얀마 중부 메이크틸라 지역에서 무슬림 금은방 주인과 불교도 손님 사이에서 말다툼이 벌어져서, 폭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승려]]들이 선도하여 무기를 든 불교도들이 무슬림을 공격하였고, 무슬림을 산 채로 불길에 밀어넣기도 했다. 2007년에는 평화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한 바 있는 군경은 이번에는 사태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이 반 무슬림 폭동은 사흘 동안 이어졌다.
         미얀마 승려 위라투는 이 음모론에 대응하는 '969 운동'을 시작했는데, 9는 붓다, 6은 법륜, 9는 붓다의 제자, 승려를 뜻한다. 969 운동은 무슬림의 '786 음모'에 맞서는 운동임을 주장한다. 위라투는 2003년 버마 중부 만달레이주 카욱세의 반 무슬림 폭동에서 배후를 자처했다. 이 때 위라투를 비롯한 5명의 승려가 경찰에 '증오 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25년 형을 선고받았다. 2011년 그는 민간 정부 출범을 기념한 대사면으로 석방됐으며, 이후로 미얀마 전역의 불교 사원을 순례하며 반무슬림 정서를 자극하고 있다. 예를 들어, 무슬림이 운영하는 회사나 무슬림 상점에 보이콧을 선동하고, 신심있는 불교도라면 969 운동의 [[스티커]]가 붙은 가게에서만 물건을 사야 한다는 식이다.
         물론 모든 미얀마 승려들이 이런 움직임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화 운동에 참가해서 징역 68년을 선고받고, 역시 2011년 대사면에서 석방된 승려 우감비는 군인들이 권력을 놓치 않으려고 분쟁에 의존한다면서, 이러한 민족주의 선동은 군부 체제 유지에 이용될 뿐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어느 불교사원에서도 나를 받앋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승복을 벗고 말았다.
         불교 승려들로 이루어진 '마 바 타'(Ma Ba Tha, 민족종교 보호를 위한 애국연합)라는 단체가 로힝야 탄압에 앞장서고 있다. 이들은 로힝야 보트피플이 사망한 사고에 대해서 미국 대사관이 논평을 내며 '로힝야'라는 표현을 사용하자, 미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로힝야 같은 종족은 없고 그런 말을 할거면 이들을 다 데려가라고 주장했다.
  • 명성(승려)
         | 직업 = [[불교]] [[승려]], [[저술가]]
         '''명성'''([[1930년]] ~ )은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이다.
         [[1930년]]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상주시|상주]]에서 출생, [[1952년]] [[해인사]] 국일암에서 선행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58년]] [[선암사]]에서 [[성능 (승려)|성능]]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고, 선암사 강원 강사를 역임했다. 이후 서울 [[청룡사]] 강원 강사를 거쳐, 1970년 운문사 승가학원 강사로 취임했다. [[1977년]]부터 [[운문사]] 주지 겸 학장으로 주석하면서 1700여 명이 넘는 졸업생과 13명의 전강제자를 배출하는 등 [[비구니]]의 수행과 교육에 활동했다. 아울러 40여 동에 이르는 전각과 요사채를 신축, 증축, 보수하여 운문사를 전국 최대 규모의 비구니교육기관인 운문승가대학으로 발전시켰다.
         [[분류:193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승려]][[분류:상주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비구니]][[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동국대학교 동문]][[분류:강릉여자고등학교 동문]]
  • 박성하(국회의원)
          | 직업 = 불교 승려 겸 정치가
         '''박성하'''(朴性夏, [[법명]]은 '''성하'''(星河), [[1908년]] [[3월 27일]] ~ ?)는 일제 강점기의 [[승려]]이며, 대한민국의 정치가이다.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목록|제2대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분류:1908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칠곡군 출신 인물]][[분류:자유당]][[분류:일제 강점기의 승려]][[분류:대한민국의 승려]]
  • 백성욱
         '''백성욱'''(白性郁, [[1897년]] ~ [[1981년]] [[8월 16일]]<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091600209211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09-16&officeId=00020&pageNo=11&printNo=18446&publishType=00020 前內務장관 白性郁박사] [[동아일보]], 1981년 9월 16일 작성</ref>)은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 겸 [[정치가]] 및 [[시 (문학)|시인]]이자 [[불교|불교학자]] 겸 [[교수|대학 교수]]이며 前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이었고 [[법명]]은 '''일곤'''(壹壼)이다.
         [[1948년]]부터 이듬해 [[1949년]]까지 [[동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1950년]]에는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을 역임하였으며 [[1953년]]에서 [[1961년]]까지 제2대 [[동국대학교]] 총장을 지낸 그는 [[1930년대]]에 출가하여 [[불교]] [[승려]]가 되었으며, 한때 그의 처남을 통하여 귀국한 [[이승만]] 내외에게 [[이화장]] 부지를 제공하기도 했다. 출가 직전인 [[1928년]]에는 잠시 [[김일엽 (승려)|김일엽]]의 연인이기도 했다. 백성욱이 떠난 후에 김일엽도 출가를 하게된다
         * [[김일엽 (승려)|김일엽]]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81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불교학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승려]][[분류:대한민국의 승려]][[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불교학자]][[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대학 총장]][[분류:대한민국의 내무부 장관]][[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윤치영]][[분류:나혜석]][[분류:이춘성]][[분류:동국대학교]][[분류:자유당]][[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백씨]][[분류:수원 백씨]]
  • 삼일스님
         삼일(三日)은 사흘이라는 뜻, 보우즈(坊主)는 [[불교]]의 [[승려]]를 뜻한다. 삼일스님은 삼일 정도 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만 스님을 하고 그만뒀다는 뜻으로, 어떤 것에 쉽게 질리고 오래가지 못하는 성질이나 그런 사람을 뜻하는 말이 파생되었다.
         과거에 [[생활]]이 어려워지면 [[사찰]]에 도망쳐서 [[스님]]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사람들은 일단 [[스님]]이 되면 [[밥]]은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출가]]를 선택하지만, [[스님]]이 되려면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여러가지 [[계율]]을 지켜야 하여 사회에서 사는 것보다 무척 힘들다. 결국 [[출가]]를 했다가 승려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곧 도망치거나 [[환속]]하여 그만둬버리는 사람이 있어, 그런 사람을 놀리는 뜻에서 이러한 말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 신정아(큐레이터)
         신정아 문제가 학력위조 수준이 아닌 변양균과의 커넥션 문제로 확산되자 불교계에서는 언론에서 신정아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며 반발(a.k.a 물타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정아가 몰고다니던 BMW의 실제 주인이 조계종 승려라는 게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31739.html|확인]]되는 등 관련 의혹들의 문제를 언론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상황이다.
         타고 다니던 차는 E46 [[BMW 3시리즈]] 세단이다. 지금이야 수입차들의 가격대가 옛날에 비해 많이 내려갔고 [[리스]]나 [[할부]] 등으로 차를 사는 경우가 많고 3시리즈 정도의 수입차는 고소득층만 탈수있는 차는 아니지만, 당시 [[2000년대]] 중반에는 [[수입차]]의 가격대가 지금보다 훨씬 높아서 수입차 자체가 국내에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으며, 큐레이터가 고소득 직업도 아닌데, 큐레이터의 소득으로 타고 다니기는 당시에는 조금 벅찬 차종이었다. 그 승용차는 어머니가 사 준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명의는 [[조계종]] 소속 [[승려]] 심 모씨로 되어 있다.
         그 심 모씨는 신정아의 어머니가 소유한 [[절(불교)|절]]에 기거했다는 승려인데 제3자 명의를 빌려 자동차를 사 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상식과 상충한다. 승용차 소유에는 현금으로 구매해 사유하는 방법 이외에도 리스로써 법인이 소유하기도 하는데 위 예는 그 두 방법 중 어느 하나도 아닌 [[대포차]]라는 의미이며, 학위위조가 밝혀지기 전까지 신정아를 계속 옹호했던 대학 이사진도 모종의 연결이 있었으리라.
  • 윤치영
         [[대화숙]]에 입소하면서 그는 하루에 대여섯 시간을 묶인 뒤 세뇌교육을 당했다. 꿇어 앉혀놓고 [[일본]] [[승려]]가 나와 [[불경]]을 읽고 정신을 차리라고 냉수를 머리에 끼얹는 모욕을 당했다. [[일본]] [[군인]]을 데려다가 강연도 시켰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그 중에서도 제일 고약한 짓은 남산 꼭대기에 있는 [[조선신궁]] 광장으로 끌고 올라가 [[신사 참배]]를 시키는 일이다'라고 회상하였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7"/> 그는 자신이 [[기독교]] 신자임을 들어 [[신사 참배]] 거부 의사를 표현하였다가 온갖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 의상 (신라)
         {{승려 정보
         | 제자 ={{개행 금지 시작}}[[오진 (남북국 시대)|오진]](悟眞){{.w}}[[지통]](智通){{.w}}[[표훈]](表訓){{.w}}[[진정 (승려)|진정]](眞定){{.w}}[[진장 (승려)|진장]](眞藏){{.w}}[[도융 (승려)|도융]](道融){{.w}}[[양원 (승려)|양원]](良圓){{.w}}[[상원 (승려)|상원]](相源){{.w}}[[능인 (승려)|능인]](能仁){{.w}}[[의적 (승려)|의적]](義寂) 등{{개행 금지 끝}}
         '''의상'''(義湘, [[625년]] ~ [[702년]])은 고대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왕족 출신, [[승려|고승]]이다.<ref name="글로벌-의상">[[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통일신라와 발해/고대문화의 융성#의상|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통일신라와 발해 > 고대문화의 융성 > 의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br/>[[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귀족사회와 무인정권/귀족문화#의상|한국사 > 중세사회의 발전 > 귀족사회와 무인정권 > 귀족문화 > 의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또한,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작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엄]](至嚴)으로부터 [[화엄종]](華嚴宗)을 수학하고 법통을 받아 중국 화엄종의 제3 세조가 되었다.
         [[신라]]의 [[승려|고승]] [[원효]](元曉)를 사형(師兄)으로 섬겨 사형제지간(師兄弟之間)을 이루었다.
         의상은 많은 [[사찰]]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중 [[영주시|영주]]의 [[부석사 (영주시)|부석사]]가 유명하다. 토에 정통한 승려로서 [[신라]]와 [[고려]]에서는 국사로 추존되었으며<ref>일부 고려의 왕족과 귀족 중에는 고려는 도선의 풍수지리설 덕택에 건국, 후삼국을 재통일했다는 사고관이 있었다.</ref>, 민간 신앙에서도 무속의 신 중 한 사람으로 [[경상북도]]의 일부 무당들로부터 숭배되었다.
  • 이선희
         [[1964년]]<ref>[https://www.leesunhee.com/sunny/contents/contents.do?cmnx=16 데이터 관련 리스트]</ref> [[대구광역시]] 에서 [[울산광역시]] 출생의 [[불교]] [[승려]]였던 아버지와 [[부산광역시]] 출생의 [[불교]] 신도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대전광역시]] 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그 후 [[광주광역시]] 와 [[인천광역시]]에서 각기각기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녀는 [[1969년]] 이후 [[서울특별시]]에서 줄곧 자랐다.
  • 이선희 (1964년)
         그녀는 [[1964년]] [[12월 14일]](음력 1964년 [[음력 11월 11일|11월 11일]], [[경상북도]] [[대구시|대구]]에서 [[경상북도]] [[칠곡군|칠곡]] 출생의 [[불교]] [[승려]]였던 아버지와 [[경상북도]] [[김천시|김천]] 출생의 [[불교]] 신도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대구고등학교]]와 [[인천대학교|인천전문대학]] 환경관리학과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를 나왔다.
  • 이외수(소설가)
         ===== [[조계종]] [[승려]] 비난 오해 =====
         [[2015년]] 12월, [[민중총궐기]] 관련 한상균이 도피해있는 [[조계종]] 사찰의 승려를 비판하는 글이 이외수의 글로 둔갑해서 SNS상에 돌아다니는데,[[https://twitter.com/oisoo/status/671986711061139456|#]] 자세히 보면 어투도 이외수 평소의 글과 미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다. 결국 이외수 본인이 명의도용에 관해 고발도 불사할것이라는 트윗을 올려서 확인사살. [[https://twitter.com/oisoo/status/672261914756444160|#]]
  • 일연
         [[고려]]시대 [[승려]]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찬했다. 속명은 김견명(金見明). 자(字)는 회연(晦然), 일연(一然)인데, 이중 일연을 [[법명]]으로도 사용했다. 호는 목암(睦庵)이다.
         1214년 9세에 [[전라남도]] 해양(海陽)(현재 [[광주광역시]] 인근) 무량사(無量寺)에 대웅 밑에서 학문을 닦다가 1219년 승려가 되었다. 1227년 승과에 급제해서 이 후 22년 동안 [[비슬산]] [[대견사]]에서 초임주지를 지냈다. 1237년 삼중대사, 1246년 선사, 1259년 대선사가 되었다. 1261년 왕명으로 선월사 주지가 되어 목우의 법을 이었다.
         [[분류:승려]] [[분류:한국의 역사학자]] [[분류:경산시 출신 인물]]
  • 차상명 (1895년)
         '''차상명'''(車相明, [[1895년]] [[8월 2일]] [[부산광역시]] ~ [[1945년]] [[4월 7일]])은 [[일제 강점기]]의 [[승려]]이다. 법명은 운호(雲湖).
         [[부산광역시|부산]] 출신으로 부산의 소속 승려였다. [[경성부]]에서 [[3·1 운동]]이 계획되던 [[1919년]] 2월 하순 경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한용운]]이 범어사에 내려와 만세시위에 대해 의논하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3월 1일]]에 독립 선언과 [[탑골 공원]] 시위가 결행된 뒤, [[불교중앙학림]]의 학승 [[김상헌(1893년)|김상헌]]과 [[김법린]]이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범어사로 잠입하여 동래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종용했다.
         이때 범어사의 청년 승려였던 차상명은 동래읍 장날인 [[3월 18일]]을 거사일로 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시위를 준비했다. [[3월 13일]]에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나 분위기는 고양되었고, 차상명은 [[3월 17일]]에 열린 졸업생 송별회를 틈타 범어사 부속 학교의 학생들에게 이튿날로 계획된 시위에 참가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차상명은 약 4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새벽에 이동하던 중 밀고를 받고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제목=친일 승려 108인
         [[분류:1895년 태어남]][[분류:1945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승려]][[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
  • 한냐 가면
          * 한냐 스님(般若坊)이라는 [[승려]]가 창작하였기 때문에, 거기에서 이름을 따왔다.
  • 한명회
         [[오가작통법]]과 [[면리제]](面里制)를 창시한 인물이며, 그가 만든 행정제도인 [[면리제]]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한말의 [[불교]][[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은 그의 친아우인 [[한명진 (1426년)|한명진]]의 후손이었다.
         ** 동생: [[한명진 (1426년)|서원군 한명진]](西原君 韓明溍) - [[불교]]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의 선조
  • 허영호 (정치인)
          | 직업 = 불교 승려 겸 정치가
         '''허영호'''(許永鎬, 혹은 '''허경호'''(許鏡湖), <small>일본식 이름:</small> 德光允, 德光翼, [[1900년]] [[12월 21일]] [[부산광역시|부산]] ~ [[1952년]] [[1월 30일]]<ref>《민족21》 (2004.5.1) [http://www.minjog21.com/news/read.php?idxno=1539 평양룡성구역 '재북인사들의 묘' 를 가다 - 62기 중 안재홍 이광수 김효석 조헌영...등 좌우 인사 39명 묘소 최초 공개] {{웨이백|url=http://www.minjog21.com/news/read.php?idxno=1539# |date=20071006151502 }}</ref>)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이며 [[정치가]]이다. 다른 이름으로 '''허윤'''(許允)이 있으며 법명은 '''경호'''(鏡湖), 호는 현주(玄州)이다.
         |제목=친일 승려 108인
         [[분류:1900년 태어남]][[분류:1952년 죽음]][[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일제 강점기의 승려]][[분류:김해 허씨]][[분류:한국민주당 당원]][[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이춘성]][[분류:납북자]][[분류:대한민국의 승려]][[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동래고등학교 동문]][[분류:동국대학교 동문]][[분류:도요 대학 동문]][[분류:다이쇼 대학 동문]][[분류:동국대학교 교수]][[분류:동국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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